1~100/(1~25)2017. 3. 3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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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014)—76년 2월 관음재일 법문 (54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2분.


(1/3)----------------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을 다 같이 들었습니다.


다달이 관음재(觀音齋)를 기해서 이렇게 신남신녀 여러분께서 이렇게 참집(參集)을 하셔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사부대중이 다 같이 이렇게 경청을 해서 우리의 신심을 돋구고 그래서 정진하는데 이익을 얻어서 우리의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이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원래 불법(佛法)은 무슨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연구해서 지식을 많이 얻어 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보거나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거기에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을 일으켜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 도달하기 위해서 경을 보고 법문을 듣는 것이지, 경을 보고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의 지식을 넓혀 가지고 아는 것이 많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경을 많이 보고, 법문을 많이 들어서 아주 아는 것이 풍부해지면은 그 사람이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참 많이 했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랑을 삼고, 남들도 그러한 이를 부럽게 생각하신 분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마는, 이 불법은 무엇을 많이 보고 듣고 해서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해서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알고, 많이 듣고 해서 잔뜩 속에 쌓아두고 있는 것보다는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는 것을 될 수 있으면 하나라도 더 많이 잊어버리고, 버리는 데에서 오히려 불법에 공부가 더 많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병에다가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병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자꾸 쏟아서 버려서 깨끗한 빈 병으로 만드는 거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학문, 학설, 일체 이론은 다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해야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 법보선원에 오신지가 20년, 10년, 5년, 3년 또는 몇 달 아니 되시거나, 오늘 처음으로 나오신 분도 계시겠지마는, 많이 법문을 들을수록에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비울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길러져야 그분이 그동안 법문을 참 옳게 들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내가 나를 깨닫는 이 활구참선은 오늘 처음 오셨다고 해서 하나도 공부가 되어 있지 않고 초학자(初學者)요, 오래 전부터서 여기 많이 오셔서 구참(久參)이 되었다고 해서 그분이 공부가 많이 되어 있다고만은 꼭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그 들으신 것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랑조랑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서 그분이 오늘 법문을 잘 들으신 것이라고는 꼭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 시간 동안에 걸쳐서 그 여러 가지 법문을 들었지마는 한 말씀도 옮길 말씀이 없고, 다못 알 수 없는 ‘이뭣고?’한 생각만 속에서 간절히 일어나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오늘 법문을 누구보다도 잘 들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무슨 경을 많이 봐 가지고 누구한테라도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무슨 불교에 대한 교리를 알고 싶어서 밤낮 책을 뒤적거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어쨌든지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이 간단한 이 한 말씀만에 의지해서 걸어가실 때나, 앉아 계실 때나, 무슨 일을 하실 때나, 또는 식사를 하실 때나, 변소에 가실 그런 때까지라도 생각 생각이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話頭)가 들어지고, 화두를 들을라고 노력할 때에 우리는 참 부처님 제자가 되는 길이 바로 거기 있는 것이고,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할 그 생사고(生死苦)를 여의는 길이 바로 그 한 생각 단속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대단히 경을 떠들어 봐도 알기가 어렵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고, 암만 읽어봐도 읽어볼수록 점점 더 어렵고 그래서 이 불교의 현대화가 필요하다. 어쨌든지 경전을 쉽게 번역을 해서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재 오늘날에 불교의 나아갈 길이다’한 것을 종종 뜻있는 분들이 말씀하신 것을 듣습니다마는.


아무리 경전을 쉬운 말로 번역을 해서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자꾸 간행을 한다고 해서 그래가지고 불법이 성황을 이루고 많은 중생이 제도를 받느냐 하면은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경을 많이 읽어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육두백판으로 다 잘 안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이 아니요, 그런다고 해서 생사해탈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쨌든지 간단한 말 한마디지마는 ‘이뭣고?’ ‘이-하는 놈이 무엇인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하지마는 생각 생각이 ‘이뭣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시간 시간이, 일 분 일 분마다, 일 초 일 초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이 잡념이 되었건, 번뇌 망상이 되었건, 성을 내건 또는 슬프건, 무슨 생각이 일어났거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게 되어 있으니만큼,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그것들이 전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제8 뢰야식(賴耶識) 속에 고대로 다 녹음이 되어서 간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틈만 있으면 움이 터 나오고 있습니다.


무를 겨울에 땅속에다가 묻어놓으면 계속 거기서 움이 자라가지고 그 이듬해 무를 파 보면은 노랗게 싹이 터 나오고 있듯이,

우리 제팔식(第八識) 아뢰야식 속에, 잠재의식 속에, 무량겁으로 생활해 내려오면서 그 속에 녹음되어 감춰져 갖고 있는, 쌓여져 갖고 있는 그 선(善)과 악(惡), 무기(無記)의 한없는 많은 그 종자(種子)들이 저장이 되어 있는데, 그 종자가 무슨 기회만 있으면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움이 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움이 터 나오면서 그놈이 또 씨를 결실을 해 가지고 또다시 거기에 또 저장이 되고, 저장된 씨에서는 계속 움이 터 나오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생각 아니면 악한 생각,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터무니없는 생각, 10년 전, 20년 전에 있었던 일 또는 전혀 보고 듣지도 못한 뿌리도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잠시도 쉴 사이 없이 퍼일어났다 꺼졌다, 퍼일어났다 꺼졌다.


그 가운데에 울다가 웃다가 몸부림치다가 그래가지고 성내다가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러는 가운데에 그것이 바로 업(業)입니다.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고, 무기업도 있고 해서 그렇게 해서 우리의 생각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 그것이 근원이 되어서 우리는 육도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도윤회를 하게 된 원인이 선업, 악업, 무기업,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것이 행동화 되고, 그 행동으로 인해서 또 종자가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이 되고, 그래가지고 조금 착한 일을 하면은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짐승이 되기도 하고, 해 가지고 무량겁을 두고 쉬지 않고 윤회를 하게 됩니다.


지금 금생에 우리가 이렇게 태어나서 다행히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 불법을 만나서 이 법보선원에 이렇게 모이셨습니다마는, 이만큼 되실 때까지는 여러분들은 과거에 한없는 정법(正法)에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다행히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기왕 오셨을 바에는 활구참선법을 올바르게 배워서, 지도 받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시면은 금생에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하실 것이고,

설사 인연이 무르익지 못해서 금생에 도업을 성취 못하신다 하더라고 올바르게만 공부하신다면은 내생에 다시 몸 바꿔 나서 또 공부를 하시게 되어서 결정코 내생에는 대도사(大道士)가 되어가지고 당신 자신도 생사해탈을 하실 뿐만 아니라, 또 많은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게 됩니다.


오직 이 길만이 자신도 해탈(解脫)하고, 남도 생사윤회(生死輪廻)에서 건져낼 수가 있어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뿐이지, 다른 어떠한 착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생사해탈도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행복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찬 칠보(七寶)로써 모든 중생에게 보시를 한다 해도 그 복이 한량이 없어서 천당에 태어나고, 인도(人道)에 태어난다 해도 오복(五福)을 다 누릴 수는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그러한 상(相)으로, 물질적으로 이룬 그러한 복은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어서 타락이 있게 됩니다.


타락한 날에는 백 년 동안 복을 누리다 타락하거나, 억겁(億劫)을 누리다가 타락하거나 그 타락한 그 마당에 비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본래부터 가난했던 사람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으면 별일이 없지마는, 한 삼사십 년 호강하고 잘살다가 하루아침에 가난해졌을 때의 그 비참한 것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有漏福)을 짓는 것은 삼생(三生)의 웬수(怨讐)’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세속에서 말한 부귀공명(富貴功名)이 바로 유루복인데, 유루복은 그 유루복을 닦느라고 죄를 짓게 됩니다.

죄 안 짓고 돈 벌 수 있습니까? 죄 안 짓고 높은 자리 올라갈 수 있습니까? 높은 자리 올라가고, 높은 큰 부자를 누릴려고 할 때에 죄 짓지 않고는 도저히 그런 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을 획득하느라고 죄를 짓고, 또 그 복을 획득한 다음에 그 복 수용 하느라고 죄를 짓게 됩니다. 재산이 많고, 벼슬이 높고 하다 보니 권리도 부려야 하고, 호강도 해야 하고, 없는 사람 업신여기며 없는 사람을 개돼지처럼 종으로 부리면서 그 복 누리느라고 죄를 짓게 되고.

마지막에 그 복을 다 받아서 망(亡)해 갈 때에 될 수 있으면 그 복이 달아나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복과 귀(貴)와 권리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갖은 안간힘을 쓰다 보니 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서 이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얻기 위해서 죄를 짓고, 얻어 가지고 누리느라고 죄를 짓고, 나중에 망해 갈 때 그놈을 안 없어지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짓게 되어서 ‘삼생(三生) 웬수(怨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세상에 살아가는 데는 돈도 필요하고, 지위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지마는, 그것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며, 차라리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만큼 '웬수거리'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은 돈도 웬수고 명예와 권리도 웬수면 다 소용없고, 그러면 뭘 흙 파먹고 살아란 말이냐?’ 혹 이러한 의아심(疑訝心)을 가지실런지 모르지마는.

그것이 다 필요합니다. 필요하지마는 그것만을 위해서 우리가 생명 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을 하시게 되면은, 하시면서 그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노력도 하시고, 그런 얻어진 것을 필요하게 적절히 사용도 하시고 또 그것들이 인연이 다해서 가게 되더라도 우리는 조금도 불행해지거나 죄를 짓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다.


이 활구참선을 하게 되면은 하는 가운데에 돈도 벌고, 명예도 누리고, 권리도 잡고 하신다면은 그것이 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죄 짓지 않고 얼마든지 유효적절하게 얻을 수도 있고, 사용할 수도 있고, 마지막 그것이 나한테 떠난다 해도 모든 것을 인연에 돌리고.

그것이 떠남으로써 일반 사람은 아주 비참한 불행한 맛을 보게 되지만, 이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떠날 때에도 오히려 좋은 발심(發心)의 계기가 되어질 수가 있고, 참으로 발심할 수 있는 법문이 되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좋은 법이기 때문에 최상승 활구참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 활구참선은 지극히 쉬운 것이요, 하기 쉬운 것이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최상승 활구법문’이라 하니까는 대단히 어려워서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사람, 더구나 여자로 태어난 사람, 더구나 나이 먹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혹 자포자기 하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식해도 할 수 있고, 나이가 많아도 할 수 있고, 죄 많은 중생일수록에 오히려 더 하기가 좋습니다. 왜 그러냐?

경(經)을 공부한다든지 무슨 어려운 경책(經冊)을 학문을 한다고 하면은 젊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또 돈도 있어야 하고, 시간도 있어야 되겠지마는 이 활구참선은 맨주먹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앓아누워 있는 사람은 앓아누워서도 할 수가 있고, 바쁜 사람은 바쁜 가운데도 할 수가 있고, 일자무식(一字無識)한 사람도 참선(參禪)하는 간단한 법만 지도 받으면은 어디서 언제라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 법이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것이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고 불러서 대답할 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꼬집어서 아픈 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배고파서 밥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꼬집어 뜯어서 아픈 줄 알고 “아무개야!”하고 불러서 “예”하고 대답할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만 안 사람이면은 이 참선은 능히 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딱! 꼬집었을 때 “아야!”할 줄만 알면 ‘그 아픈 줄 아는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란 말이에요.(처음~20분26초)



(2/3)----------------


접때 어떤 보살님은 이렇게 조실 스님이 고구정녕(苦口叮嚀)히 말씀하시고,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조실 스님의 그 말씀을 더 알기 쉽도록 이렇게 말씀을 드리기를 벌써 일 년 남짓을 해왔는데,

‘이러한 말씀들이 전부 스님네나 또는 선방에 앉아서, 그 큰방에 앉아 계신 보살님만 하는 것이지 그밖에 집에서 왔다갔다 하신 신도 여러분에게는 해당된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서 전혀 이런 말씀을 들어도 ‘이 말씀은 당신한테는 해당된 법문이 아니라’ 이리 생각하고 여태까지 5년 동안을 다니셨다 그럽니다.

그분은 대단히 진실하고, 아주 신심이 돈독한 분으로서 대단히 좋은 진실한 신도님인데, 어떻게 이 법문을 어디로 들으셨는가? 그것이 당신한테 해당된 말이 아니라 ‘다른 분들한테만 해당된 말이요, 나한테는 해당된 말이 아니다’해 가지고 ‘나도 언제나 저런 공부를 해 볼꼬?’ 이리 생각하셨다 그럽니다.


혹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그러한 착각을 하신 분이 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마는,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말씀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해당된 말씀입니다.

누구라도 고대로만 하시면 되는 것이지, 별도로 따로 지도를 받아야 하거나, 지금 자기에게는 해당된 말이 아니어서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누구라도, 지금 저기 어린아이가 있습니다마는, 그 어린아이라도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이 말씀만 조용히 들어서 귀담아듣고 고대로만 하면은 오히려 나이 많이 먹어서 학교도 많이 다니고, 지식도 많은 사람보단 아주 철이 하나도 안 든 다섯, 여섯 살 먹은 애라도 고대로만 한다면 오히려 그 어린애가 훨씬 더 빨리 도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어느 신도분의 아들이 자꾸 자기 어머니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 것을 보고서 절에 따라와서 구경하고 또 자기 집에서도 어머니가 조석으로 관세음보살 부른 것을 보고는, 그 어린애가 열이 40도가 넘어 가지고 영 몸부림을 치고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대단히 곤경에 빠져 가지고 못 견디게 되니까,

그 어린애가 서서 벽에 붙여 놓은 관세음보살 사진 앞에 서 가지고는, 아 다섯 살 먹은 어린애가 합장을 하고 서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해 가지고 한 몇 분 동안을 그렇게 하더니 아! 팍 쓰러져 가지고는 쿨쿨 잠을 한숨 자고 나더니 아! 그 40도나 되던 열이 쏴악 식어 가지고.


아! 병원에서도 얘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고 빨리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해서 데리고 온 어린애가 그렇게 관세음보살을 한 십 분 남짓을 그렇게 부르더니 아! 그 감쪽같이 그 병이 낫은 것을 제가 그 어린애를 봤습니다.


순수무구(純粹無垢)한 마음, 천진한 마음으로 할 때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경을 많이 안 보았다’고, ‘나는 아직 불교에 들어온 지가 얼마 안 되고 경도 한 번도 못 봤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참선해 봤자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시지 말고, 금방 오셨더라도 조금도 상관이 없으니까 ‘이뭣고?’


성이 날 때나 또는 슬픈 생각이 들 때나 또는 어떤 외로움을 느낄 때나, 가정 문제로 사회 문제로 자손 문제로 또는 내외간 문제로 해서, 어떠한 속이 상하고 슬프고 외롭고 또는 기쁘고 간에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 지금 당장 ‘이-하는 놈이 뭣고?’ 자꾸 생각 생각이 돌이켜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들고 또 들고, 이 생각이 생활 속에 저절로 ‘이뭣고?’하는 생각이 저절로 되어지도록까지 열심히 하십시요.


밥을 먹을 때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잠을 잘 때도 ‘이뭣고?’하면서 언제 잠이 든 줄 모르게 공부를 하시도록, 이렇게 하시면은 무식할수록 더 좋고, 철이 안 들을수록 더 좋고, 연세가 많을수록 더 좋고.


연세 많은 분은 ‘내가 인자 이 세상을, 이승을 하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항시 간절하게 자기에 부딪치기 때문에 무슨 미련이 있고, 못 잊을 것이 있어서 딴 생각할 겨를이 있느냐 그말이야. 그 죽음이 코앞에 닥쳐있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이뭣고?’를 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노인은 노인대로 더 공부하기 더 좋습니다. 젊었을 때는 미련도 있고 생각도 많아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그러지마는, 벌써 육십 칠십 넘으신 할머니는 더 좋습니다. 인제 자식 걱정할 것도 없고, 자기들 지 복(福)대로 살도록 놔두고, 나는 ‘이뭣고?’ 더 좋아요.


마지막 숨질 때, 그때 참으로 마지막 5분, 3분, 2분, 1분, 1초 그때까지도 ‘이뭣고?’하는 생각으로 눈을 딱 감을 수 있다면은 그분이야말로 바로 도인(道人)입니다. 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분이 도인이여.

마지막 숨 거둘 때에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이뭣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생존시에 무슨 일에 애착이 있어 공부를 못하겠습니까. 마지막 숨질 때, 참으로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이뭣고?’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도인입니다.


마지막 숨질 때, 그 사람이 병을 이길 수만 있다면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그 병한테 지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힘을 총동원해도 그놈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마지막 죽게되는 것이니 만큼, 그 죽는 순간에 화두가 들려지고,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공부는 어지간한 공부입니다.


평상시에 열심히 해 놓지 아니하면 마지막 죽을 때 정신 하나 못 차린 것입니다. 손발을 뻐르적거리고, 눈을 뒤집어쓰고 어느 귀신이 어떻게 잡아가는 줄 모르게 뻐르적거리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갈 때에 새 배때기, 개 배때기, 뱀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여.

마지막 죽을 때 정신 바싹 차려 가지고 ‘이뭣고?’ 할 수 있을 만큼 하려면은 평상시에 공부가 습관화가 되어야 하고, 생활화가 되어서 단단히 단속을 해놔야 그때 가서 써먹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그것이 그때그때 화두가 들어질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이 몸뚱이 숨 거둘 때 되어지는 것입니다.


생사(生死)가 꼭 칠팔십 년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살아 있을 때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요, 한 생각 꺼지면 그것 사(死)입니다. 생멸심(生滅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생사를 해탈하고자 할진대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사심(生死心) 단속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하는 방대한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한 말씀으로 줄여서 말하면 일념단속(一念團束)하는 것, 생사심 단속해서—거기에서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사심 단속해서 생사 없는 이치를 내 몸에 체달(體達)할 때 영원한 생사윤회는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이 많은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 가지고 그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여기서 들으신 그 말씀을 인(因)해서 ‘이뭣고?’ 간절히 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뭣고?’가 간절히 들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생사심이 끊어지고, 생사심 끊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생사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살아가기는 너무나도 험준하고, 복잡하고, 어려워서 그 세상 살아가는 속에 정신차려 ‘이뭣고?’ 든다고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하면 누가 나를 위해서닦아줍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 어린 서너 살 먹은 손자를 데리고 심심하고 그러니까, 저 마을 어구에 큰 정자가 있는데 그 정자 밑에는 한 열댓 길 되는 절벽이 있습니다.

그 절벽 밑에는 새파란 강이 흐르고 있어서 대단히 경치가 좋기 때문에 그 절벽 위에다가 정자를 지어놓고 마을 사람들이 여름에는 거기 가서 놀고, 춘하추동 그 정자에 가서 모여서 놀고 시간을 지내고 그러는데, 그 할아버지도 그 어린 손자를 데리고 그 정자에 가서 놀고 있는데.


그 손자는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뛰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깡충깡충 뛰다가 심심하면 할아버지한테 가서 안겼다가, 그러다 그냥 그놈이 너무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니까 할아버지 수염을 쏙 뽑고, 쏙 뽑고 그러는데 “야! 이놈아 수염 뽑지 마라. 아프다”

또 한바탕 가서 깡충깡충 뛰다가 놀다가 와서 또 쏙 뽑으니까는 “아! 이놈아. 아퍼” 그러고 툭 밀어버린 것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가지고 그 어린 손자가 십여 길 되는 절벽 밑에 떨어져 가지고 즉사(卽死)를 했습니다.


이것은 떨어지라고 민 것도 아니고 수염을 뽑으니까 엉겁결에 무의식 중에 아파서 이리 떠민 것이 어린애가 나동그라져 가지고 절벽으로 떨어져서 죽었는데.

그래서 세상에 그 할아버지가 그 귀여운 손자를 절벽에서 떨어져서 죽게 했으니, 그걸 할아버지가 북북 기어 내려가 가지고 그 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 어린애를 간신히 건져내 가지고 보니 박살이 났다 이 말씀이여.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거 어린애를 끌어안고 울고불고하다가 해가 넘어갔습니다.


그래 집에서 할아버지가 안 오시니까, 그 애기 엄마가 그 할아버지가 흔히 낮에는 꼭 손자를 데리고 정자에 가신 것을 알기 때문에 거기 가서 보니까 절벽 밑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서,

“아, 할아버지 거기서 뭣 하십니까?” 죽은 손자를 안고 울면서 “나를 죽여 달라”고, 자부(子婦)한테 나를 죽여 달라고 막... , “아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 사실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어린애를 “할아버지, 제 명이 짧아서 이렇게 죽게 된 것이니 상심 마십시오.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를 잘 위로를 해서 그 어린애를 양지바른 데다 묻어 주었습니다.


제가 그전에는 나귀에 관한 얘기를 해 드렸고, 소에 대한 얘기를 해 드렸고, 오늘은 개에 대한 얘기를 간단히 해 드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 집에서는 그 어린애를 갖다가 양지바른 데다 묻어주고는 계속 그 할아버지는 계속 상심해서 참 진지도 잘 못 잡숫고, 잠도 못 주무시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시는데, 그 아들이나 며느리나 집안 식구들은 할아버지를 갖은 방법으로 위로를 해드리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런데, 그러는 가운데에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아, 그런데 밤에면.. 집에 개를 한 마리 기르는데 개란 놈이 그 할아버지 자는 문 앞에 와 가지고, 막 할아버지가 간신히 어떻게 해서 밤늦게 잠이 한숨들라고 하면은 개란 놈이 와서 문 앞에 와서 짖고, 문을 긁고 야단이라 그말이여.

도저히, 그래서 잠 좀 막 잘라다가 못 자고, 그 이튿날 저녁에도 또 12시 자정이 넘어서 간신히 잠 좀 막 잘라고 하면 또 개가 와서 짖고 문을 긁고 해서 또 그냥 또 잠을 못 자고 해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날을 했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개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고 참으로 큰일났다’해서 가족들이 의논을 해 가지고 그 개를 잡아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고 있는 차인데 ‘내일이면은 저 개를 죽여 없애자’ 그렇게 의논을 했는데.

‘집구석이 좋지 못하려니까 손자가 그렇게 비명(非命)에 죽더니 개마저 그런다’고. ‘저 개 때문에 재수때갱이가 없어서 이렇게 그런가 보다’고, 그 개를 죽여 없애기로 했는데.


그래서 그 개를 밤에 죽여 가지고 그것을 잡어서 삶았습니다. 삶았는데 개 속에 가서 새끼가 여러 마리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 한 마리 죽인 바람에 새끼까지 모다 죽게 되어서, 개를 가마솥에다 넣어서 푹푹 고고 있는데, 아! 그 할아버지의 딸이 머지않는 곳으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는데, 그 딸이 새벽같이 쫓아왔습니다.


“아니! 아버지 여기 개 죽였습니까?”

“오냐. 개를 죽여서 지금 고고 있다”


“아휴, 그런데 그 개 뱃속에 새끼가 들었던가요? 새끼가 세 마리 들었던가요?”

“오냐. 새끼가 세 마리 들었더라. 그런데 니가 어떻게 알고 왔냐?”


“아휴! 그 개를 왜 죽였습니까? 아니, 그 개를 죽일 개가 아닌데 왜 죽였습니까?”

“거 약하약하 해서 죽였는데 니가 그것을 대관절 어떻게 알고 왔냐? 어제 밤에 그냥 죽였는데 어떻게 알았냐?”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어젯밤 꿈을 꾸니까 우리집에서 키운 개가 나한테 와 가지고 하는 말이,

‘그 몇 달 전에 죽은 그 손자가 구랭이가 되어가지고, 그 할아버지한테 복수를 하기 위해서 할아버지가 잠만 들막 하면은 와가지고 문구녁으로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해꼬자 하기 위해서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이 집의 온가족의 사랑을 받고 크는 개로써 그 구렁이가 집에 못 들어가게 갖은 방법으로 막고, 물고, 뜯고 해서 쫒으면은 그 구랭이가 도망갔다가, 또 그 다음날 저녁에 할아버지가 잠이 들만 하면 그 구렁이가 또 나와 가지고 또 들어갈라고 하면 내가 짖고, 물고, 뜯고, 그냥 막고, 그냥 발로 방해를 하고 이렇게 해서 간신히 해서 쫓고, 쫓고 해서 며칠을 두고 지금 그 구렁이하고 실갱이를 하고 지금 싸움을 하고 있는데,


이 집의 식구는 그것을 모르고 내가 집구석 망할라고 짖는다고 해 가지고 나를, 내가 새끼를 세 마리나 배 가지고 얼마 안 있으면 곧 낳게 되었는데 나를 죽일라고 하니 나를 좀 살려주시오’

아! 그 현몽(現夢)을 대서 그래서 밤중에 갈 수가 없어서 날이 새자마자 이렇게 왔는데, 세상에 그 개를 죽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러한 실화가 있습니다.


그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도 아니요, 귀여워하다가 무의식 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로 그렇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할아버지한테 그 복수심을 가지고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오거든,

하물며 우리가 내가 나 잘살고, 나가 돈 벌고 나를 위해서 나 잘살기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했을 때에 돌아올 과보(果報)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본래 사흘만 길러도 삼 년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고양이는 삼 년을 길러도 사흘 은공을 모른다’하는 그런 속담도 있습니다마는, 종종 이 개라고 하는 짐승이 그렇게 주인의 은혜를 자기의 생명으로써 갚은 경우가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일본 등속에 많이 있고, 서양에도 그런 일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개를 많이 기르시는 분들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밥도 잘 주고, 항시 그 개 듣는데 화두(話頭)도 일러주시고, ‘관세음보살’도 그 개 귀에다 대고 많이 해주시고, 어쨌든지 그 개가 잘 살다가 내생에는 몸을 바꿔서 참선(參禪)을 할 수 있도록 항시 축원(祝願)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개를 볼 때마다 항시 ‘이뭣고?’를 간절히 들어야 합니다.(20분27초~41분20초)



(3/3)----------------


중국에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한테 “저런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조주 스님이 “무(無)”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스님이 생각하기를—부처님 경전에 보면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일체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일체 꿈적꿈적한 그런 벌레까지라도 다 불성이 있다’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그런데 어째서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는고?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그것이 조주 스님으로 말하면은 ‘옛날 불보살(佛菩薩)이 화현(化現)했다’고 하는, ‘중생 교화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할만큼 존경을 받을 만한 큰 도인(道人)이십니다. 그 조주 스님은 벌써 십 세 미만의 소년 때에 견성(見性)을 하신 도인이고, 일백이십 세까지 사신 그러한 대도사(大道士)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거짓말하실 리도 없고, 조주 스님이 더군다나 그런 대도사가 거짓말하실 까닭이 없거늘, ‘어째서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하셨는고?’ 자나깨나 그 스님은 의심을 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앉아서나, 누워서나, 밥 먹을 때나, 옷 입을 때나, 똥 눌 때나, 걸어갈 때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고?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서 꿈속에서까지 그 의심이 일어날 정도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늘을 봐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땅을 봐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반가운 친구가 와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어떤 속상한 일이 닥쳐와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슬픈 일이 닥쳐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그저 날아가는 새를 봐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먼 데서 짖는 개소리를 들어도 ‘어째서 없다고 했는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 ‘어째서 무(無)라고 했나?’ 그 생각 하나로 이 몸과 우주법계가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그 의심이 터지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가지고 참선을 하려고 할 때에, 과거에 많은 도인들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이 화두로써 많은 도인들이 여기서 나왔던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 그 조주 스님이 무(無)라고 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그 화두를 드시는 분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이 ‘조주 무자(無字)’도 역시 개로 인해서 나온 공안입니다.


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껍데기만 개지 그것이 개가 아닙니다. 우리도 한 생각에 개의 껍데기를 뒤집어 몇천만 번을 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나왔을른지도 모르고, 앞으로 또 언제 얼마나 많이 개의 껍데기를 뒤집어 쓸 날이 올는지 모릅니다.

한번 개가 되면은 참 그 껍데기 벗기 어렵고, 그러니만큼 어쨌든지 우리는 이 사람 몸 받았을 때에 기어코....(녹음끊김)



몇 가지 광고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음력 3월 16일이, 매년 3월 16일은 법보재(法寶齋)로써 우리 용화사의 아주 큰 대법회가 있습니다.

그날은 여기 법당에 모셔진 법보재에 드신 법보제자 영가(靈駕)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과거에 모든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전부 이 자리에 초청해 모시고, 원근친척과 나라를 위해서 돌아가신 장병과 충신은 말할 것도 없고, 주인도 없는 수많은 법계(法界)의 고혼(孤魂)들을 다 이 자리에 청혼(請魂)을 해 가지고 천도(薦度)를 해 모시는 날입니다.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은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다 참여하실 것은 물론이고, 설사 이 법보재에 드시지 아니하신 분이라도 다 그날만큼은 이웃 어른이라도 다 권고해서 한 분이라도 더 많이 참석하시도록 그렇게 해주시기 바라고.

시간은 오늘과 같이 사시(巳時)에, 그러니까 아마 11시부터 12시 그 사이에부터서 시작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될 수 있으면 일찍들 오시도록 하시고, 3월 16일이에요.


그리고 3월 10일 날이 무슨 날인고 하니, 전강 조실 스님과 인연이 깊은 무주 포교당 대웅전 낙성식을 봉행하는 날입니다. 아마 이 가운데 계신 여러분께서는 그 대웅전을 창건하는 데에 성심을 다해서 시주하신 분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런 분들 빠지시지 말고,

또 아직 그 시주를 안 하셨더라도 그날 거기에서 낙성식을 봉행하는 자리에 법회가 있으니 만큼, 될 수 있으면 한 분이라도 많이 참석을 하셔서 그 자리를 빛내주시고 그 공덕으로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기 지금 그 포교당 주지스님이 와 계시니만큼 자세한 것은 그 스님이나 또는 우리 절 보경심 신도회장님과 연락을 해서 가실 때 모다 같이 가시는 것도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달 24일, 그리고 그 밖에 법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 많이 오시는데, 이 법당에 한번 들어오시면은 부처님께 참배를 하시거나 또는 참배가 끝난 다음에 자리에 한번 딱 앉으시면은 입선(入禪)을 하셔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쨌든지 참선(參禪) 때문에 오셨고, 참선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실라고 오신 것이지, 여기에 오신 마당에 무슨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당에 들어오셨거나, 이 도량(道場)에 들어섰거나 또는 집에서 이 법회에 오시려고 하실 때부터 마음가짐이 조용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면서 오셔야 하고, 더군다나 이 법당에 딱 들어서셨다 하면은 딱! 방석을 갖다놓고 앉어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집에서는 시끄럽고 복잡하고 해서 잘 안되더라도 이 자리에 오신 이 마당에서는 열 명이 앉아 계시거나, 오십 명이 앉아 계시거나, 삼백 명이 앉아 계시거나, 밖에서는 한 분도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딱! 화두를 들고 입정(入定)을 하셔야 합니다.


들어오셔서 들어오신 대로, 하기는 오랜만에 만나셨으니까 모두 인사도 해야 하고, 정담도 있게 마련이고 해서 얘기하신 것이 그렇게 이해는 갈 수 있습니다마는.

다른 회의 장소도 아니고 순 참선 법회인 만큼 딱 들어오셨다 하면은 말없이 단정히 앉아서 입선을 하시도록. 대단히 그렇게 하심으로써 이 법회장이 엄숙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 자신들에게 많은 이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은 이 24일 관음재(觀音齋) 법회만큼은 11시 반에 딱 시작할 수 있도록 각별히 유의하셔서... 10시 , 실례했습니다. 10시 반에 딱 시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금 생각을 준비하시면은 능히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법회를 거듭할 때마다 많은 신도분들이 오시면서 자꾸 친구나 친척 되시는 이웃 어른들을 모다 인도를 해서 오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기 한 몸만 이 법을 알고 공부하고 말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친구, 자기가 좋아하는 언니, 동생, 조카, 딸 이러한 분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권고해서 같이 오셔서 같이 이 공부를 해 가지고 같이 행복하게 살고, 같이 생사해탈을 해야지, 자기만 좋고 말아버린다고 하면은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사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만히 보니 오실 때마다 새로운 분을 한 분씩, 두 분씩 자꾸자꾸 이렇게 인도해서 오시는 분들이 차츰차츰 늘어나서, 그분들의 공덕(功德)은 절에다가 돈이나, 쌀이나, 무슨 그런 물질적인 보시를 하는 몇천만 배의 공덕이 그분에게는 있을 것이고, 소원을 성취하실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돈이나 물질을 희사(喜捨)한 것은 그것이 아까 말씀한 대로 한(限)이 있어서 그 복[有漏福] 받을 만큼 다 받아 버리면 그것으로써 끄터리는 비참하기가 마찬가지라고 말씀했죠.

그러나 한 사람 내지 두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 내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이 정법(正法)으로 인도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성취할 수 있도록 인도한 그 공덕이, 그것은 다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남도 공부하고, 나도 공부하고, 나 공부하면서 남도 공부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해서 우리의 도반(道伴)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불어나도록 그렇게 모다 노력을 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은 이만 이야기하겠습니다.(41분21초~53분21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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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 조실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참집(參集 참여할 참/모일 집) ; 어떤 자리에 참가하기 위해 모임.

*돋구다 ; 돋우다(감정이나 기운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다. 정도를 더 높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구참(久參 오랠 구/참구할·참여할 참)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것. 오랫동안 선(禪)을 닦은 것.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에 귀의한지 오래 되는 것. 초학(初學)의 상대어.

*조랑조랑 ; (어린 사람이) 계속하여 똑똑하게 글을 외거나 말을 하는 소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고(生死苦) ; 생사(生死)라는 고통[苦]. 가장 근원적인 고통이며, 이것에서 벗어나야 해탈을 얻는다.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뢰야식(賴耶識) ; 아뢰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참고]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말.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칠보(七寶) : [범] Sapta - ranta 일곱 가지의 보배。즉 금(金), 은(銀), 유리(琉璃), 파려(玻瓈), 또는 매괴(玫瑰), 차거(硨磲), 산호(珊瑚), 마노(瑪瑙) 등을 말한다.

*인도(人道) ; 인취(人趣). 인간계(人間界). 인간이 사는 세계. 수미산의 사방에 있다는 동승신주(東勝身洲) · 남섬부주(南膽部洲) · 서우화주(西牛貨洲) · 북구로주(北俱盧洲)의 네 대륙을 말함.

동쪽에 있는 승신주의 인간들은 신장이 뛰어나다 하고, 남쪽에 있는 섬부주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함. 서쪽에 있는 우화주에서는 소를 화폐로 사용한다 하고, 북쪽에 있는 구로주는 네 대륙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함.

*상(相)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오복(五福) ; 인생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

유학(儒學) 오경(五經)의 하나인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편에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 건강), 유호덕(攸好德 :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하는 일), 고종명(考終命 : 사람이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음)을 말하는데, 청나라 때 적호(翟灝)의 『통속편(通俗編)』에는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貴)함과 자손이 중다(衆多)함을 꼽기도 한다.

*억겁(億劫) ; 무한이 길고 오랜 세월.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삼생(三生) ;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來生)을 아울러 이르는 말.

*웬수 ; ‘원수(怨讐)’의 사투리.

*부귀공명(富貴功名) ;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침.

*웬수거리 ; 원수(怨讐)가 될 만한 재료. 웬수는 ‘원수(怨讐)’의 사투리. 위 법문에서는 돈, 지위, 명예, 권리 따위를 '원수거리'라고 말씀하셨다.

*의아심(疑訝心 의심할 의/의심할 아/마음 심) ; 의심스럽고 이상하게 여기는 마음.

*최상승(最上乘)=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경책(經冊 불경 경/책 책) ; 부처님 말씀(經)의 책(冊).

*일자무식(一字無識) ;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는 것이 없음. 또는 그런 사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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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때 ; (명사)오래지 아니한 과거의 어느 때를 이르는 말. (부사)오래 지나지 않은 과거의 어느 때에.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순수무구(純粹無垢) ; 순수하여 몸과 마음이 때묻지 않고 깨끗함.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일사불란(一絲不亂) ; 한 오리 실도 엉키지 아니함이란 뜻으로, 질서가 정연하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

*어지간하다 ; ①(무엇이) 수준이나 정도가 보통이거나 그보다 약간 더한 상태이다. ②(무엇이) 수준이나 정도가 꽤 상당하다.

*배때기 ; ‘배’를 속되게 이르는 말.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일념단속(一念團束)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보리도(菩提道) ; 범어(梵語) bodhi 음역(音譯)인 보리(菩提)와 그 한역(漢譯)인 도(道)의 복합어. 보리와 같은 말이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비명(非命) ; 제 목숨대로 다 살지 못함.

*약허이약허이 ; 약하(若何)하다—여하(如何)하다의 높임 말. *여하(如何)하다 : 어떠하다(어떻다, 의견·성질·형편·상태 따위가 어찌 되어 있다).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현몽(現夢) ; ①죽은 사람이나 신령 따위가 꿈에 나타남. 또는 그 꿈. ②꿈에 나타난 것을 이르는 말.

*과보(果報)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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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趙州)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무자(無字) 화두 ;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 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무자(無字)화두 드는 법, 단제(單提) 전제(全提) 근제(勤提)http://emokko.tistory.com/364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근본 성품, 각성(覺性), 자성(自性).

*준동함령(蠢動含靈 꿈틀거릴 준/움직일 동/머금을·품을 함/신령·신령할 령) ; 꿈지럭거리며 움직이는 함령(含靈, 심령心靈을 가지고 있는 것). 모든 생물. 중생(衆生).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견성(見性) : ‘성품(性)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〇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법계(法界) : [범] dharmadhatu  dharma 곧 법은 온갖 유형 무형의 물질과 모든 일과 어떤 이치이거나를 다 들어 말하고  dhatu는 경계(境界) 또는 범위(範圍)란 말이다。그러므로 온갖 것(萬有)을 총괄하여 하는 말이니, 우주의 전체와 진리의 전체, 법 성품(法性)의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고혼(孤魂) ; 문상(問喪)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

*청혼(請魂) ; 설법할 때에,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영혼)를 그 자리에 모시는 일. (같은 말)거량(擧揚).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입정(入定) ; ①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 마음을 한곳에 정하고 몸·입·뜻(身口意)의 삼업(三業)을 갈무리는 것. ②수행하기 위하여 방 안에 들어앉는 일. 입선(入禪). ③입적(入寂, 수도승이 죽음).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희사(喜捨 기쁠 희/버릴·베풀 사) ; ①보상을 구하지 않고, 기쁘게 재보(財寶)를 베푸는 것. 정사(淨捨 : 깨끗하게 내놓는 것), 정시(淨施 : 깨끗하게 베푸는 것)라고도 함. ②기껍게 자기의 의견, 생각을 버리는 일.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는 일.

*끄터리 ; ‘끄트머리(맨 끝 부분)’의 사투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해탈도(解脫道) ;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주요 내용]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학문, 이론을 다 잊어버릴수록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 / 영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할 그 생사고(生死苦)를 여의는 길이 바로 그 한 생각 단속하는데 있다 /제팔식(第八識)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으로 녹음되어 있는 그 선(善)과 악(惡), 무기(無記)의 한없는 많은 그 종자(種子) / 유루복(有漏福)을 짓는 것은 삼생(三生)의 원수(怨讐)


최상승 활구참선은 지극히 쉽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법 / 마지막 숨질 때, 젖 먹던 힘을 다해서 ‘이뭣고?’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도인입니다 / 생사를 해탈하고자 할진대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사심(生死心) 단속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한 말씀으로 줄여서 말하면 일념단속(一念團束)하는 것,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사심 단속해서 생사 없는 이치를 내 몸에 체달(體達)할 때 영원한 생사윤회는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 ‘이뭣고?’가 간절히 들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생사심이 끊어지고, 생사심 끊어짐으로 해서 생사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


세상 살아가는 속에 정신 차려 ‘이뭣고?’ 든다고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니하면 누가 나를 위해서 닦아줍니까? / 할아버지와 구렁이가 된 손자의 복수심, 개의 은혜갚기 / 조주 무자(無字) 공안 / 법당에서는 항상 입선(入禪)하시도록 / 새로운 분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하는 공덕이 매우 크다.



[주요 문구]


어떤 병에다가 물건을 잔뜩 집어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병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을 자꾸 쏟아서 버려서 깨끗한 빈 병으로 만드는 거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학문, 학설, 일체 이론은 다 잊어버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해야 오히려 깨달음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한 시간 동안에 걸쳐서 그 여러 가지 법문을 들었지마는 한 말씀도 옮길 말씀이 없고, 다못 알 수 없는 ‘이뭣고?’한 생각만 속에서 간절히 일어나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오늘 법문을 누구보다도 잘 들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육도윤회를 하게 된 원인이 선업, 악업, 무기업, 그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것이 행동화 되고, 그 행동으로 인해서 또 종자가 우리의 마음속에 저장이 되고, 그래가지고 조금 착한 일을 하면은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짐승이 되기도 하고, 해 가지고 무량겁을 두고 쉬지 않고 윤회를 하게 됩니다.


생사(生死)가 꼭 칠팔십 년 살다가 마지막 죽을 때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살아 있을 때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요, 한 생각 꺼지면 그것 사(死)입니다. 생멸심(生滅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생사를 해탈하고자 할진대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사심(生死心) 단속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최상승 활구참선은 지극히 쉬운 것이요, 하기 쉬운 것이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최상승 활구법문’이라 하니까는 대단히 어려워서 우리 말세(末世)에 태어난 사람, 더구나 여자로 태어난 사람, 더구나 나이 먹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혹 자포자기 하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이뭣고?’ 열심히 해 놓지 아니하면 마지막 죽을 때 정신 하나 못 차린 것입니다. 손발을 뻐르적거리고, 눈을 뒤집어쓰고 어느 귀신이 어떻게 잡아가는 줄 모르게 뻐르적거리다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갈 때에 새 배때기, 개 배때기, 뱀 뱃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여.

마지막 죽을 때 정신 바싹 차려 가지고 ‘이뭣고?’ 할 수 있을 만큼 하려면은 평상시에 공부가 습관화가 되어야 하고, 생활화가 되어서 단단히 단속을 해놔야 그때 가서 써먹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여러분이 많은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 가지고 그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여기서 들으신 그 말씀을 인(因)해서 ‘이뭣고?’ 간절히 들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뭣고?’가 간절히 들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생사심이 끊어지고, 생사심 끊어짐으로 해서 우리는 생사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의로 손자를 죽인 것도 아니요, 귀여워하다가 무의식 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고로 그렇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할아버지한테 그 복수심을 가지고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오거든,

하물며 우리가 내가 나 잘살고, 나가 돈 벌고 나를 위해서 나 잘살기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했을 때에 돌아올 과보는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개를 많이 기르시는 분들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밥도 잘 주고, 항시 그 개 듣는데 화두(話頭)도 일러주시고, ‘관세음보살’도 그 개 귀에다 대고 많이 해주시고, 어쨌든지 그 개가 잘 살다가 내생에는 몸을 바꿔서 참선(參禪)을 할 수 있도록 항시 축원(祝願)을 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개를 볼 때마다 항시 ‘이뭣고?’를 간절히 들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어쨌든지 참선(參禪) 때문에 오셨고, 참선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실라고 오신 것이지, 여기에 오신 마당에 무슨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당에 들어오셨거나, 이 도량(道場)에 들어섰거나 또는 집에서 이 법회에 오시려고 하실 때부터 마음가짐이 조용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면서 오셔야 하고, 더군다나 이 법당에 딱 들어서셨다 하면은 딱! 방석을 갖다놓고 앉어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한 사람 내지 두 사람 열 사람, 스무 사람, 내가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을 이 정법(正法)으로 인도해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성취할 수 있도록 인도한 그 공덕은 다할 날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