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26~550)2017. 4. 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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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38)—94년 11월 첫째일요법회 (75분)

(1/4) 약 21분. (2/4) 약 19분. (3/4) 약 19분. (4/4) 약 16분.

(1/4)----------------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하고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미긍현애친살수(未肯懸崖親撒手)하면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리요

나무~아미타불~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여, 지은 업에 따라서, 선업(善業)을 지으면 좋은 곳으로 올라가고 악업(惡業)을 지으면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거여. 올라갔다 잠겼다 끝없는 승침(昇沈), 윤회를 하는 것이 개미가 마치 쳇바퀴를 돌듯이 끝없이 돌고 돌되 그칠 날이 없는 거여.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다. 미워해. 자기 뜻에 맞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자기 뜻에 맞으면 사랑하고 좋아하고. 미워했다 좋아했다 하는 것이, 그러한 정이 얽히고설켜서 심하면 보복도 하고 보복을 당하면 그다음에 당한 사람이 또 보복을 하고,

그런 증애(憎愛)가 얽히고설킨 것이 큰 육중한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가지고 간신히 한 발을 들면은 다른 한 발이 진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또 빠졌던 다리를 다시 들면 다른 다리가 또 빠지고, 도저히 진흙 수렁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거와 같다 이거거든.


무량겁 이래로 우리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거듭하면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받는 것이 마치 개미 수레바퀴 도는 거와 같고 쳇바퀴 도는 거와 같고,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거와 같더라.


어떻게 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미워했다 사랑했다 하는 것이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헤어나지를 못하냐?

그 원인은, 마치 절벽에서 매달려 가지고 손을 놓으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아주 즉사(卽死)할 것 같은 그러한 상황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팔은 빠질려고 하고 도저히 놓기만 놓으면은 죽을것 같고, 그렇게 바둥바둥하는 그런 상황이여.


재(財), 색(色), 식(食), 명(名), 수(睡)—재산, 이성, 명예 권리, 맛있는 거 먹는 거, 또 편안하게 안락을 취하는 거 그런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 재산이 없어도 못살 것 같고, 이성이 없어도 못살 것 같고, 명예나 권리가 없어도 못살 것 같고, 편안하게 안락하게 잠자고 그렇게 지내는 것도 없어서는 못살 것 같으니까,

그 오욕락이 없어서는 그것을 놔 버리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 오욕락에 매달려 가지고 그것을 획득을 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갖은 발버둥을 치는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 매달려서 손 놓으면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그러한 상황이다 그말이여.


그 낭떠러지에서 직접 큰 용기를 내 가지고 손을 놔버려야지, 그 손을 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시 살아날 기약은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냐? 쓰고 단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이냐?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그 생각을 버리고 용감하게 그 손을 탁 놔버려야 하거든.


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이런 것들이 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마치 코끼리에 쫓겨가지고 간신히 그 구렁에 피해다가 칡덩굴을 붙잡고 꿀을 받아먹고 있는 사람이 손을 놓으면은 독룡 독사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고, 흰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그 칡덩굴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거기서 살아날 수가 있느냐?


이러한 긴박하고도 절박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항상 헛헛증을 면치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의 생활이다.


용감하게,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내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내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탐심과 자기 마음껏 그걸 누릴려고 하는 탐욕심(貪欲心)과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은 진심(瞋心)을 내고, 또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그것을 수없이 되풀이해 나가고, 용감하게 놔 버릴 줄 모르는 것이 그것이 어리석음이거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으로 인해서 끝없는 삼악도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갑술년 11월 첫째 일요법회날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법문은 너무 조실 스님의 그 우렁차고 감동적인 법문을 해주셔서 산승(山僧)이 오늘 거기에 덧붙여서 더 여러분께 할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학 입학 시험을 앞둔 여러 신도님들 가정. 이것은 우리나라의 부모님 또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할 그러한 과제인데, 아직까지는 범연(泛然)하게 무심하게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입시를 앞두고 많은 기도를 하시고 학생들은 밤잠을 안 자고 애를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들어가야 할 학교나 자리는 적고, 들어갈라고 하는 학생은 몇 배가 이렇게 많으니 일부는 합격을 하지마는 많은 수의 학생은 또 떨어지게 됩니다.

기왕 시험을 보면 자기가 목적하는 학교에 들어가야 좋겠지마는 어피차 다 들어가지 못하고 일부만 들어갈텐데 못 들어간 사람은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낙망을 하고 때로는 아주 생을 포기하는 그런 학생도 있고, 떨어지면 온통 집안이 초상이 난 것처럼 그러한 큰 충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꼭 목적하는 대학에만 들어가야만 그 사람이 꼭 좋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왕 시험을 보니 합격이 되도록 노력도 하고 기도도 하고 최선을 다할지언정 여의치 못해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을 해서 잘 새로운 용기와 침착성을 가지고 다시 또 도전을 해야지 거기서 우리가 생을 포기하거나 낙담을 해서 주저앉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 자신보다도 그 학부모가 대단히 책임이 무거운 것입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이제 떨어지면 너는 영 그만이다’ 계속 압박을 하고 해서 계속 ‘공부 공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라’해 가지고 학생들은 거의 긴장과 초조와 불안으로 공부가 잘되지 않고.


공부라 하는 것이 터억 마음을 안정을 하고 제정신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계속 몰아붙이고 채찍질한다고 해서만 꼭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도 적당히 해야 하고, 영양도 적당히 섭취해야 하고, 잠도 최소한도(最小限度)로 자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리해야만 공부하는 시간이 효율적으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서 같이 어머니와 학생이 날을 새면서 그래가지고 벌써 정신도 피로하고 육체도 피로하고 그래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할라고 해도 머리속에 들어가지를 않거든.

그것은 그 간곡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합격하도록 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하는 것을 아시고, 너무 그렇게 지나치게 몰아붙이고 해 가지고 역효과가 나지 않도록 그렇게 부탁을 하고.


또 만일의 경우 떨어진다 하더라도 “또 다음으로 가는 길이 있다”

금년에 못되면 또 내년에 갈 길도 있고 대학에 정 못 들어가면은 전문대학도 가고, 전문대학에 안되면은 기술이라도 배워서 니가 너의 소질과 능력 따라서 가도록 느긋하게 이렇게 여유있는 말로 학생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여 가지고 그 합격이 안 되었을 때 자살하는 그런 학생이 해마다 보도가 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교육 제도가 잘못되어 가지고 결국은 그런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완전히 그 입학, 대학 입학만을 위해서 소년 시절의 공부를 즐겁게 보람있게 지내지를 못하고 지옥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반드시 그런 교육 제도가 잘 고쳐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기 전에 학생들은 지쳐 쓰러져서 대학에 들어가도 폐인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와서도 제대로 사회생활을 못하게 되는 그런 경우도 허다한 것입니다.



다음은 요새 여기서 저기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모다 자꾸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러는데 그래서 한강에 16개인가 있는 다리를 지나다닐라면은 만일 그 다리가 꺼졌을 때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바람이 들어있는 구명조끼를 입고 건너가야 한다고 그런 말도 들었습니다마는.

그 다리 지나간다고 해서 다 죽을 수도 없는 거고, 비행기가 몇 대 떨어졌다고 해서 비행기 탄 사람마다 다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차 타고 가면 교통사고로 사람이 참 많이 죽지만 차 탄 사람마다 다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안 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다리 지나가다가 죽고, 배 타다가 죽고, 기차 타다가 죽고, 비행기 타다 죽고 그렇게 죽는 수는 사실은 그 사고로 죽은 사람, 병으로 죽은 사람, 죽은 사람 가운데 불과 몇 0.01 프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사고로 안 죽더라도, 언제 죽더라도 우리는 한번 태어난 사람은 죽음을 면치를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죽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면은 기차 타다, 배 타다, 다리 건너다 죽을 것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의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이 내생(來生)이다고 그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리 안 지나가고, 기차 안 타고, 자동차 안 타고, 비행기 안 타면은 천세 만세 살겠습니까? 그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말하고 듣고 밥 먹고 잠자고 해도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게 내생이여. 그래서 오늘 한 시간 이내에, 오늘 하루 내에, 오늘밤에, 내일에 언제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올란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한 생(生)이요 한 죽음이 생멸(生滅)인 것입니다.


생사가 꼭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을 생(生)이라고 그러고, 이 몸이 숨을 거두고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참선하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그것이 사(死)입니다.


일(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구백 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구백 번을 생사 생사 생사가 있는 것입니다. 구백 생멸이 끝없이 계속해서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마치 전기불이 우리 눈에는 환히 계속해서 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사실은 수없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이 너무 빨리 연속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처음~20분40초)



(2/4)----------------


일(一) 찰나간(刹那間)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사를, 생사 문제를 긴박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줄 알면 이 몸뚱이 살다가 육칠십 년, 칠팔십 년 살다가 죽은 것은 하나도 겁낼 것이 없고, 다리 건너다 꺼지고 비행기 타다 떨어져 죽은 것을 그 까짓 것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이 불법(佛法)은 애당초에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서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불법을 믿고 불법을 닦고 그것을 통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딴 생각[別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새 그린스카우트니, 무슨 자연보호니 전국적으로 바람이 일어서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모다 쓰레기를, 학생으로부터서 관공리(官公吏)와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모두 동원이 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만시지탄(晚時之歎)이 있지마는 대단히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연이 오염이 되고, 강물이 오염이 되고, 산이나 바다가 오염이 되면은 그 손해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은 인간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구잽이 지각(知覺)없이 버린 쓰레기로 인해서 해(害)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 인간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심코 버리는데, 해(害)는 무심코 지나가지를 않고 인간의 생명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큰 모다 공장에서 나오는 산업 쓰레기며 공장 폐수(廢水)도 중대하지마는 각 가정에서 나가는 쓰레기와 생활 폐수 그런 것들이 마구 살기 위해서 무심코 버리고 하수구로 나가는 폐수들이 강물로 들어가 가지고 강의 고기들이 다 죽고.

그 강이 결국은 그 강물을 수도(水道)로 또 해서 가정으로 공급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남은 물은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의 조개와 바다의 모든 미역 김, 모두 바다에 사는 고기들이 모두 죽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고기를 사람이 먹고 사람이 또 암이 걸리고 온갖 무서운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동안에는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비교적 엄하게 단속을 안 하는 사이에 이미 이렇게 모두가 병이 들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많이 살 만큼 살게 되었으니,

법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면 몇만 원, 쓰레기를 버리면 몇만 원 벌금으로, 물론 법을 엄격히 해서 그걸 단속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우리가 어찌 벌금 물기 싫어서, 벌금 무는 것이 아까우니까 담배꽁초를 버릴라다가 관두고 쓰레기를 버릴라다가 안 버리고 이쯤되면 그건 하등 인간이여.


벌금이야 물건, 안 물건 ‘내가 버린 이 쓰레기가 결국은 자연을 손괴(損壞)하고 우리가 사는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쓰레기장으로 만든다’ 그런 지각이 있다면 어찌 산에 놀러 가고 바다에 놀러 가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릴 수가 있냐 그말이여. 숟갈로 밥 먹는 인간이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느냐.


우리는 스스로 자각(自覺)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삼천년 이래로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면은 자기 먹을 만큼 딱 이렇게 덜어서 먹고, 그것을 숭늉으로 또 깨끗이 가셔 먹고 또 그래가지고 천수(千手)물로 깨끗이 헹궈서 그 바리때 네 개를 씻고 나오는 천수물이 말갛다 말이여. 조금도 탁하거나 찌끄러기가 안 섞여 있다 그말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선원(禪院)에서 그런 발우공양을 하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발우공양을 그렇게 한번 누구든지 다 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삼천년 전부터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산에서, 그 산중에 천 명 천오백 명 이천 명 이렇게 많은 대중스님네가 수도(修道) 생활을 하시고 해도 그 흘러가는 물이 강물이 조금도 오염이 안된다 그말이여. 저 밑에서도 얼마든지 그 물을 떠먹어도 괜찮을 만큼 깨끗했다 그말이여.


이것은 뭐 설거지, 발우 씻은 물을 우리 선망부모(先亡父母)인 아귀(餓鬼)가 그 물을 먹고서 갈증을 가시니까 그 발우 씻은 물속에 찌끄러기가 없도록 하라. 이렇게 법문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귀는 어떠한 물도 어떠한 맛있는 것도 먹을 수가 없어. 먹으면 그것이 바로 불이 되어가지고 타 죽으니까 못 먹고, 그 발우공양 하고서 나오는 그 천수물만이 목으로 넘어가거던. 그런데 거기에 찌끄러기가 있으면 목이 맥혀서 또 불이 나기 때문에 우리 선망부모를 위해서 발우 씻은 물이 깨끗하도록 해라.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데.


오늘날 그것을 잘 해석을 하면 음식을 깨끗이 먹어야 한다고 하는 ‘음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도 거기에 들어 있고, 더러운 설거지 물이 더럽게 나가면은 강물이 오염이 되니까 ‘자연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러한 뜻도 거기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아귀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뜻이 깊지마는 현실적으로는 ‘자연을 손괴해서는 안된다’ ‘음식물을 아껴야 한다’고 하는 뜻으로 오늘날은 해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상에다 이렇게 차려놓고 마구잽이 먹고, 먹고 남은 것은 쓰레기통에다 막 버리고 하수구에다 막 버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큰 그릇에다가 반찬이고 무얼 딱 떠다 놓고 각기 빈 그릇을 자기 앞에 밥그릇, 국그릇, 또는 찬그릇 이렇게 빈 그릇을 갖다 놓고 자기가 먹을 만큼 밥도 덜고, 찬도 먹을 만큼 고루고루 조금씩 덜어서 일단 덜어 온 것은 깨끗이 먹고, 먹은 그릇을 숭늉으로 잘 이렇게 헹궈서 깨끗이 먹고, 설거지 해 봤자 별로 찌끄러기가 나오지 않도록 각 가정에서도 요새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남은 음식이 먹고 남은 찌끄러기가 아니고 덜어서 먹었기 때문에 그 음식을 냉장고에나 잘 요렇게 간수했다 그다음 끼니에 먹더라도 변질이 안 되고 또 얼마든지 깨끗하게 기분 좋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식구가 숟갈이 입으로 들어갔다 반찬으로 들어갔다 또 저분이 입으로 들어갔다 들랑날랑하는 가운데에 입에 침이 음식으로 섞여져 가지고 금방 그 음식이 변질이 되고, 두었다가 다음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상 가족들이 동시에 같이 식사하기가 어렵고 바쁜 사람은 먼저 먹고 가더라도 깨끗이 덜어 먹고 갔으니까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먹어도 하나도 기분 나쁠 것이 없고 이렇게 해서 가정에서도 발우공양, 현대식으로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참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음식 반찬이나 밥이나 쓰레기로 마구잽이 들어가는 일이 없어서 강물도 오염이 안 되고 또 음식물도 아껴서 먹게 되고 위생적으로도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 가운데 혹 모르는 사이에 간염이 걸려 있거나 또는 감기 독감 같은 것이 걸리거나 전염성 질환이 혹 모르는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가족에 옮겨지지 않아서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그 발우공양을 절에서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고, 부페식으로 그렇게 하시면은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권고를 하는 바입니다.


내가 지금 강과 산과 바다와 이 자연을 오염하지 않는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사실상은 꼭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도 대단히 지금 중대한 국가적인 문제, 세계적인 문제로 지금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우리의 건강과 생명이 직결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연이 오염이 되면 이 세계는 하늘과 땅이 다 병들어서 식물, 동물, 인간도 살 수 없는 세계가 머지않아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손자, 증손자 저 후손들에게 우리 보다도 훨씬 더 살 수 없는 이 지구를 만들어서 남겨놓고 우리는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방 산승(山僧)이 말씀한 대로 그렇게 명심을 하고 음식도 아끼고 자연도 더럽히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산이나 들에 가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거기 가서 남은 쓰레기는 집으로 가지고 와 가지고 분류해서 이렇게 처리하도록 한다면 산도 깨끗하고 강물도 깨끗하고 바다도 깨끗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도 살기 좋으려니와 우리의 후손도 살기 좋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명도 유지하고 자기의 후손도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행위는 자기도 죽고, 후손도 죽게 만드는 그러한 몰지각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지혜를 부처님이나 스님한테 여태까지도 배우지를 못했던가?


눈에 보이는 쓰레기보다도 더 무서운 쓰레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경계(境界)를 당하면은—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슨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접촉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그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이렇게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육식(六識)이 발동을 해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말로도 표현이 되고, 얼굴에도 표현이 되고, 나중에는 행동으로도 마침내는 표현이 됩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좋게 표현하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나쁘게 표현이 되는데, 그 표현된 것이 자기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해를 끼치고, 이웃에게도 해를 끼치고, 직장이나 관공서 회사에 가서도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무슨 생각이 불쑥 나거든. 나면은 공연히 기분 나쁘면은 가족들에게 그것을 쏴붙이고 아내한테도 쏴붙이고, 남편한테도 쏴붙이고, 자녀한테도 쏴붙이고 직장에서 표현을 하게 된다.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따악 자기로 돌아오는 수행을 쌓아 나가거든.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계속해서 올바르게 이렇게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자기의 본성(本性)을 이렇게 참구(參究)하면, 그 생각이 정당한 생각이면은 말로 표현을 하고, 정당치 못하면 즉각 거기서 되돌려 버리니까 쓰레기가 밖으로 함부로 버려지지를 않아.


진짜,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말이여.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오늘날 이 쓰레기니, 무슨 폐수니 그런 것을 단속을 법적으로도 단속을 해야겠지마는 정말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은 저절로 자연을 아름답게 자연을 청정하게 가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0분41초~39분26초)



(3/4)----------------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하고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한데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이요, 돌에 걸터앉으면은 그 돌한테 견고한 것을 배우고, 우리가 물을 보거나 물속에 들어가고 물을 사용할 때에는 청정한 것을 배워야 해.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다. 소나무를 떠억 보면은 소나무의 그 곧은 절개를 거기서 배우고, 환하게 밝은 달을 보면은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는 그 밝음을 배워야 한다 그거여.


우리는 보고 듣고 일상 생활에 대하는 자연이라든지 상대가 참 많은데 그런 것을 대할 때 바로 그것을 배울 바가 있어야 한다 그말이여.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는 정부를 탓하고 업자를 탓하고 그 탓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 무엇인가 거기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해.

하물며 정부나 관공서에서는 업자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업자를 몰아대고, 업자는 자기가 잘못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이고 무슨 설계가 잘못이고, 서로 미룰 일이 아니거든.


각자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을 하고, 자기가 잘못에 대한 것은 참회(懺悔)를 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하려니와 우리 일반 시민들은 그것을 몰아댄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여.

우리 시민은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해. 그리고서 자기가 당하는 일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실수가 없도록 거기서 깨달아야 한다 그말이여.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다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불과 이 돌과 물과 소나무와 달, 네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어찌 그러한 좋은 것만 보고 깨달을 것인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소와 말이 쏟아 놓는 오물을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도둑질 하는 범죄인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모든 개나 소나 짐승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연전(年前)에 종정(宗正)을 지내시고 열반하신 고암 큰스님과 한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쯤 된가? 또 여기 전강 조실 스님 두 큰스님을 모시고 여기 어디 도살장(屠殺場)을 한번 견학을 갔습니다.


죽기 위해서 끌려가는 그 소도 자기 죽을 것을 슬퍼하는지 눈물이 글썽한 것처럼 보이는 그 끌려가는 소와 거기서 죽어 가지고 그 고기 한 짐씩 되도록 고기를 잘라서 운반을 하고 그것을 걸어 놓는 그런 모습.

그런 도저히 볼 수 없는 참혹한 그런 광경을 보고 정말 그때 평생에 잊지 못할 마음의 발심(發心)을 했다고 할까.


부처님 말씀에 “저 소를 봐라. 저 소는 전생(前生)에 중이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아니해서 그 시주(施主)의 은혜를 그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소로 태어났다. 저 소는 전생에 중이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과연 그 소를 잡는 도살장에 가서 보고 ‘정말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독사도 아니고 참, 이 시주것 함부로 먹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죽어가는 도살장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것을 배우고,

부정부패해서 세무서 직원, 구청 직원 모다 부정하다가 뇌물 받고 하다가 쇠고랑 차는 그런 사람 또 살인 강도 하다가 잡혀가는 범죄인, 다 그것도 우리에게 충격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고 대발심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는 보살 화현(化現) 일런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반성하고 깨닫고 분심(憤心)을 내서 발심을 한다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보살 화현이 되는 것이고, 그걸 보고 강건너 불 보듯이 ‘죽일 놈들! 저런 놈들은 당장 저놈 찢어 죽여야한다. 사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말아 버린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 사람도 본래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탐진치(貪瞋癡)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들도 한 생각 잘못 먹고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은 언제 그런 실수를 할는지도 모르는 것이여. 또 우리의 자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고, 저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거든.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여, 말없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우리의 스승이고 도반(道伴)이더라 그말이거든.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여, 비록 산속에 홀로 지내더라도 그 산에 있는 모든 나무며 바위며 풀이며 구름이며 비며 개천이며 모든 것이 다, 이 스승이요 벗이더라 그거거든.


우리가 금방 읊어 드리는 그 게송(偈頌)을 정말 깊이 음미하고 그 뜻을 우리가 명심한다면 남의 허물을 볼 겨를도 없고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갈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상대하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다 존경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될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은 설사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잠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안에서 얻어지는 것은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산이니 명예니 권리니, 다 그 지식이니, 공부해 가지고 돈 들여서 대학 갈려고 한 것이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자들은 좋은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또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남자들도 대학을 가야 좋은 색시를 얻을 수 있고 좋은 데에 취직을 해야 월급도 많이 받는다. 그리고 대학 교수도 되고 박사도 되고 사업가도 될라면은 대학 안 나오고는 어디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잘살라면은 대학을 가야 한다.


그래서 대학을 갈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대학에 간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여. 마음먹은 대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데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행복하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


진짜 행복이라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야. 자기의 안에서 구해야 하는 거야.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많으면 행복한 것 같이 느껴지는데, 돈 많은 사람은 하나도 행복 안 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그런 명예나 권리나 재산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고, 재산이 없고 별로 권리도 없고 해도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고 막일을 하고 살아도 ‘참, 나는 행복하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행복한 거여.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 권리가 많고 그래도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행해.


그래서 진짜 행복하고 싶으면 ‘나는 행복하다’하는 글자를 떠억 방에다 도처에다 써 놓고 하루에 몇백 번씩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하고 자꾸 생각해 보시라 말이여. 이거 장난말 같지마는 절대로 장난말이 아니거든.


‘나는 행복하다. 왜 행복하냐?’ 가끔 한 번씩은 ‘왜 행복하냐?’하는 것을 생각해 봐.


‘이만큼 살고 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이만큼 그래도 괜찮은 남편을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 무던한 아내를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자식도 이만하면 괜찮으니 그래서 행복하다’ ‘이만큼 먹고 살면 그만이지 그렇게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다’

좋은 점만을 생각하고 자꾸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루에 천 번씩만 해 보라 그말이야. 나중에는 진짜 얼굴이 입이 옆으로 쫘악 찢어지면서 뭐 하는 일이 잘되고 짜증낼 것도 없고 그런대로 괜찮다 그말이여. 그러다보니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다.


제법 먹고살고 좋은 차도 있고 돈도 있고 괜찮은 사람이 ‘나는 불행해’

자꾸 다른 사람 좋은 사람만 건너다 보고서 ‘왜 나는 왜 저렇게 이쁜 마누라를 못 얻었을까’ 괜히 저 길가에서 ‘나는 왜 저런 남편을 못 얻었을까’ 자꾸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왜 나는 우리 남편 돈 좀 더 잘 버는 남편을 못 얻었을까’


그래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나는 불행해. 참, 나는 불행해. 우리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을 신랑감을 만나게 해 줬을까’ 부모 원망 심지어는 중매쟁이 원망 그래가지고 생각해 볼수록 속에서 부글부글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남편이 와도 본체만체하고. 조금만 늦게 오면 ‘뭣하고 인제 왔냐?’고. 그러니 남편이 좋아라 할 거냐 그말이여.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가시면 흰 종이에다 ‘나는 행복하다’

처음에는 좀 챙피하면 안 보이는 데다 딱 써 붙여.(웃음) 그러다가 조금 잘 보면 보이고 그런 데다가 써 붙이다가 나중에 그 괜찮은 성 싶으면 버젓하게 크게 써 붙여.


그래서 식구대로 하루에 몇 번씩 ‘나는 행복하다’ 따악 하고서 밥을 먹고. 밥을 먹고도 ‘나는 행복하다’—기독교 믿는 분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앉으면은 하느님께 기도 올리고 밥을 먹고 ‘오늘 이와 같이 좋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참 좋은 일이고.


또 불교 믿는 이들도 합장을 하고 이 밥을 저 농사지어서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또 남편이 돈을 벌어다 줘서 이 먹게 해 줘서 남편을 고맙다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가 또 이렇게 해서 잘 차려 줘서 고맙다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그렇게 낱낱이 따져서 말은 않지마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밥상을 대하면은 이렇게 합장을 하고 먹는 것이 참 좋은 일인데, 해필 꼭 밥먹을 때만 그럴 거냐 그말이여.


똥 눌 때도 이렇게 똥을 누게 해 줘서...(웃음) 먹는 것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두 끼니 굶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배설하는 구녁이 맥혀 놓으면... 그건 참말로 대단히 중요한 거다 그말이여.


먹는 음식을 장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남은 그것을 잘 쓰레기를 처리하고, 하수구가 맥혀서는 안 되거든.

그 하수구에는 항상 설거지 하는 물도 찌끄러기는 탁 받아서 찌그러기가 나온 것은 화단에다가 화분에다가 살며시 묻어 놓으면 그놈이 썩어서 꽃이 아름답게 피는 거고.


그 찌그러기를 막 하수구에다가 막—그 하수구에 걸르는 얼개미가 있는데 그것에 걸려서 잘 안 내려가니까 차라리 빼 버리고 막 집어 넣어. 그래서야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 조그만한 마음씨가 결국은 그 사람이 돈 좀 벌어서 큰 공장을 하면은 공장 폐수(廢水)가 막 나와 가지고 한강 낙동강이 막 썩어 문드러져서 고기가 다 죽고, 그 물이 바다로 내려가면은 바다의 모든 고기와 김과 조개와 모다 그런 것들이 다 폐사(斃死)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정말 우리는 한 생각 돌이키는 최상법을 믿음으로 해서 나중에는 자연을 아름답게 (이게 그만하라 그러는데) 자연을 아름답게 해서 이 세계가 정말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되도록 하고.

그러한 마음씨 갖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번지면 모두가 다 좋은 도반(道伴)이요, 좋은 스승이요, 모두가 다 불보살(佛菩薩)로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상대가 되도록.(39분32초~58분33초)



(4/4)---------------- 


이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나무가 설한 법문을 바위가 듣고, 바위가 설하는 법문은 나무가 듣고, 큰 나무가 설한 법문은 작은 나무가 듣고, 작은 나무 조그만한 풀포기 하나도 다 법을 설하고 있는 거여. 조그만한 벌레도 다 그 나름대로 무상설법(無上說法)을 하고 있는 거여.

그래서 법을 설하고 또 설한 법을 듣고, 피차(彼此) 설하고 피차 듣는 거여. 그 법신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 진짜 법문을 듣는 거여.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까 바위에 앉아서는 굳은 것을 배우고, 물을 상대하게 되면은 맑은 것을 배우니 그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나는 법(法)을 설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일요일 날 놀러갈 때도 많고 하실 일도 많고 그런데 이 복잡한 교통 속에서 아침부터 와 가지고 오셨으니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대사자후(大獅子吼) 법문은 들었지만, 입가심으로—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입가심 하잖아요.

입가심으로 내가 한마디 해 드린 것이니까 이것도 잘만 들으면 ‘그 속에 그 말은 괜찮하다’ 그런 말도 한마디쯤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은 차츰차츰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서 가시는 걸음걸음 법문을 또 진짜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이 법상(法床)에서 들은 것은, 이 조실 스님 법문은 굉장히 고준(高峻)해서 한두 번 들어 갖고는 잘 모르실 것이고 녹음 테이프(tape)를 사무실에서 구해가지고 가서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을 들으시면은, 들으시면서 참선을 하시면은 참선을 옳게 하시게 되고, 옳게 하시게 되면은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 조실 스님 법문을 옳게 들으시는 방법을 일러드리기 위해서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고 있다’고 그렇게 핀잔하시지 말고 잘 들으신다면은, 음식이라는 게 꼭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먹어서는 못쓰는 거고 밥상에 놓여진 음식은 짠 것도 있고 싱거운 것도 있고, 신 것도 있고 떱떨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다 말이여.


파란 것도 있고 노른 것도 있고 흰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는데 고루고루 덜어다가 부페식으로 빈 접시에다 고루고루 덜어서 놓고 먹을 만큼 덜어다가,

밥 한 숟갈 떠 넣고 맨입으로 한 오십 번 씹은 다음에 그 다음에 반찬을 입에다 넣고 한 오십 번 씹어서 그 먹은 음식이 곱게 갈리고 저작(咀嚼)이 되어서 그놈이 속에 들어가면 위장이 큰 부담이 없이 소화가 잘되도록. 그러고 나서 또 국물 한번 떠먹고. 그렇게 해서 씹으면서 ‘이뭣고?’하면서 공양을 해보시라 그말이여.


처음에는 씹다 보면은 고소한 것을 느끼게 되고, 고소해도 계속 씹다 보면은 달콤해지게 될 거다 그말이여.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뭣고?’를 하니 세상에 이런 좋은 수행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렇게 식사를 하시면 위장병, 소화제 안 먹어도 위장병도 다 낫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이 소화도 잘되고 흡수도 완전히 다 흡수가 돼. 그러니 얼굴도 고와지고.


얼굴 여기 째서 잡아당겨 봤자 그거 주름살, 나중에 늘그막에는 아주 추하게 늙게 되는 것입니다. 이뻐질라고 뭐 요리 째고 잡아당길라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음식을 잘 씹어서 잡수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들어가면서 소화가 잘 되니까 뱃속에 나쁜 가스가 채이지를 않아. 나쁜 가스가 채어 가지고 그놈이 돌고 돌아서 삭신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얼굴에 두들두들한 것도 나고 그래가지고 영 아무리 칠하고 바르고 토닥거려 봤자 별로 안 이뻐지거든.


내가 내 얘기를 해서 안 되었지마는 난 별로 얼굴에 바르는 걸  좋아하지 않고 그래도 어디가서 얼굴 추접하게 생겼다는 말은 안 들었어. 그것이 음식을 잘 씹어 먹고, 많이 먹지는 않되 잘 씹어 먹는 거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음식도 피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

항상 감사한 마음,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생각을 항상 가지면은 자연히 얼굴은 이뻐집니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다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 정말 이뻐질라면은 마음보를 고쳐. 마음보를 고치고 음식을 잘 씹어서 먹고. 그러면은 나이들어 가면 늙어지기 마련이지 어쩔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내가 칠십 살 먹었다면 별로 사람들이 곧이 잘 안 듣고 한 십 년쯤은 젊게 보이는데, 젊어져 봤자지 뭐 별것은 없으나 마음보를 바르게 쓰고 맑게 쓰고 자비롭게 쓰면은 확실히 얼굴도 고와지고.


또 몸에 병도 심장병, 간장병이 속이 바글바글 끓고 속상하고 성내는 데에서 온갖 병이 자꾸 악화가 되는 것은 여러분도 충분히 인식하고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면 마음도 고와지고, 자연히 식사도 천천히 잘 저작을 해서 잘 잡수게 되고 모든 음식도 애껴 먹게 되고, 모든 쓰레기도 적절히 잘 처리해서 분류해서 쓰레기가 적게 나가도록 하시고.

그렇게 하면은 우리 개인도 이뻐지고 젊어지고, 가정도 편안하고 행복해지고, 이웃도 서로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는 마음으로 상대하게 되니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 것은 아주 걱정을 놓으시라고요.


이렇게 해서 오늘, 머지않아서 수일이 지나면 입동(入冬)이 돌아옵니다. 겨울철이 또 다가오니 겨울 준비를 하셔야 할 것이고.

지금 두서없는 얘기를 했지마는 결국은 이것이 참선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이 많으신데 스님네나 또 신도님네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화두, 천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화두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화두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화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무엇을 생각할 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그럴 줄 아는 놈이 이 안에 있다 그말이여.

눈으로는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는 잡을래야 잡히지도 않지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우리를 이렇게 운전하고 있어.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이 그 알 수 없는 그 한 물건으로부터 나오는데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를 줄여서 말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숨이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거든.


이것은 지식이나 이론적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그놈을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無條件)하고 ‘이뭣고?’ 그렇게만 의심을 하는 거여.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처음에는 숨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하지마는 ‘이뭣고?’한 뒤 끝에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다시 거기다 ‘이뭣고?’ 안 해도 돼.

알 수 없는 의심을 타악~ 관조(觀照)하거든. 숨을 두 번 쉬어도 고대로 있으면 고대로 관(觀)하고, 숨을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들어마셨다 내쉬어도 그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고대로 ‘이뭣고?’ 다시 안 해도 있는 그 의심을 관하는 거여.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거나 또 그 의심이 없어지면 그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다시 ‘이뭣고?’ 다시 또 챙기는 거여.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져 있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일을 할 때도 고대로 있고, 걸어갈 때도 고대로 있고, 화장실에 가서도 고대로 있고, 잘라고 누워서도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어. 있는 그대로, 그 빨리 잘라고 생각할 것도 없어.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화두만 들고 잠이 언제 온 줄 모르게 오면은 그대로...  꿈에서도 하게 되고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뜨면은 어제 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때 새로 화두 들 것도 없이 그 들어 있는 그 화두, 들려 있는 화두 고대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또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이런 상태로 일주일이 못 가서 툭 터지게 된다 그말이여. 툭 터지게 되면은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빨리 깨달을라고 그 벼락 신심을 내 가지고 어거지로 막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법 그리고 화두를 드는 법도—화두도 눈탱이를 찡그리고서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면 그러면 골치만 아프고 머리만 뽀개질라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여.


다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잘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잘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해.


듣다 보면, 한 번 들어 갖고는 별로 어려운 말이 있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라면은 여러 번 들으면서 떠억 자세도 가다듬고 호흡법도 가다듬고 화두 드는 법도 떠억 해서 자연히 공부하는 법을 옳게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은 잘 모르고 그래가지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막 좁은 구녁에다가 송아지 몰아 넣듯이 그러면 안되거든.


모든 것은 바른 방법이 있는 것이고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지, 바른 방법을 모르고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그렇게 아시고.


화두는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58분34초~74분4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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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승침상속의선마~’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二十九'에서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안수정등(岸樹井藤) ;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다가 성난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이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안으로 뻗어 내려간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네 마리의 뱀들이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는 칡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칡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코앞의 칡넝쿨에 벌집이 있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 입에 들어왔다. 순간 그는 모든 위험을 잊고 그 꿀을 맛있게 핥아 먹었다.


여기서 사람은 범부를,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사람의 몸을, 칡넝쿨은 생명줄을, 뱀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四大) 요소(地水火風)를, 흰 쥐는 낮, 검은 쥐는 밤, 즉 흘러가는 세월을 뜻하고, 독사는 악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를, 꿀은 사람을 현혹하는 욕망을 뜻한다.<잡보장경>

*헛헛증 ; ①뱃속이 몹시 빈 듯한 느낌. ②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증세.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하는 미래의 삶.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구백생멸(九百生滅) ;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剎那爲一念 一念中一剎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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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관공리(官公吏 벼슬·관청 관/공적 공/관리 리) ; 관리(官吏 : 봉급을 받고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의 사무를 보는 사람)와 공리(公吏 : 관리가 아니면서 공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아울러 이르는 말.

*만시지탄(晚時之歎 늦을·저물 만/때 시/어조사 지/탄식할 탄) ; 어떤 일에 알맞은 때[時]가 늦었음[晚]을 안타까워하는 탄식(歎息).

*지각(知覺)없다 ; 사물의 이치나 도리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다.

*무심코(無心-) ; 아무런 뜻이나 생각이 없이.

*폐수(廢水 폐할·버릴 폐/ 물 수) ; 불순물이나 화학 물질 따위로 더럽혀져 버리는[廢] 물[水].

*손괴하다(損壞-- 덜·해칠·상하게 할 손/무너질·무너뜨릴 괴) ; (사람이 물건을)상하거나 부서지게 하다.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 금/수놓을 수/강 강/뫼 산) ; 비단(緋緞)에 수(繡)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삼천 리(三千里)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성인 아래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의식이다.

*천수물(千手물) ; 청수(淸水)물.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한 후, 발우(鉢盂)를 씻는(씻은) 물. 이 물을 모은 천수통(千手桶, 청수통, 퇴수통)을 공양방 가운데 두고 절수게(節水偈)를 외우는데, 공양방 가운데 천장에 붙여 놓은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깨끗하므로 천수물이라 한다.

절수게(節水偈)는 ‘내 이 발우 씻은 물은(我此洗鉢水) 하늘나라 감로수의 맛과 같다(如天甘露味) 아귀들에게 베푸니(施與餓鬼衆) 받아 마셔 모두 배불러지이다(皆令得飽滿)’

이 천수물을 굶주림과 기갈에 고통 받는 아귀들에게 베푸는데, 찌꺼기가 있으면 아귀의 바늘구멍만한 목구멍에 걸려 고통을 일으키므로, 천수통에 부을 때 맑은 물만 붓고, 혹 남은 찌꺼기는 자신이 마신다.

*천수통(千手桶) ;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을 한 후, 발우(鉢盂)를 씻은 물을 거두는 동이. 청수통, 퇴수통이라고도 한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과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부페 ; 뷔페(buffet). 여러 가지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고 손님이 스스로 골라 덜어 먹도록 한 식당.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쏴붙이다 ; 쏘아붙이다(감정이 상할 정도로 매섭고 날카롭게 말을 내뱉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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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좌석학견수학청~’ ; 『환성시집(喚惺詩集)』 (門人 聖訥編錄) ‘시학도(示學徒)’ 참고.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70)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改過自新),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罪隨心滅).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心本空寂),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罪業無寄).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종정(宗正 마루·우두머리 종/바를·우두머리 정) ; ①불교 각 종단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받들어 모시는 스님. ②한 문중의 가장 높은 어른.

*도살장(屠殺場 잡을·가축을 잡거나 사람을 죽임·가를·칼로 베어 끊음 도/죽일·벨 살/마당·곳 장) ; 고기를 얻기 위해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도살(짐승을 잡아 죽임)하는 곳.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 · 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 · 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얼개미 ; ‘어레미(밑바닥의 구멍이 굵고 큰 체)’의 사투리.

*폐사(斃死) ;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음.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원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른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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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신설법(法身說法) ; 법신(法身)이 설법(說法)한다는 말. 진리로서의 법 그 자체가 설법하고 있는 것. 육신(肉身)의 부처님은 때 · 장소 · 사람에 의해 가르침의 일부를 설했으나, 법신불은 그와 같은 것에 상관없이 삼세에 걸쳐 영원히 항상 모든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깨달은 것을 설하지만 미혹된 범부는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무상설법(無上說法) ; 진리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가르침.

*전강선사 ;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고준하다(高峻-- 높을 고/높을·험할 준) ; 높고 험준하다.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벼락 신심 ; 빨리 깨달음을 구하고자 벼락치듯이 몹시 빠르고 세차게 일으키는 신심. 그런데 수행 정진은 올바른 방법을 모르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하다 보면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 ;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 스님께서 하신 모든 법문은 참선법을 핵심으로 설하신 법문입니다. 그 가운데 ‘참선법 A~E’라고 하여 처음 참선하는 분을 위해 5개를 선정하여 놓은 법문.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우격다짐 ; 억지로 우겨 내몰거나 강요함.



[주요 내용]


(게송)승침상속의선마~ / 오욕락(五欲樂), 삼독심(三毒心)을 용감하게 놔 버려야 / 한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일(一) 찰나간(刹那間)에 구백생멸이 있는 그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발심(發心)해야.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음식(물질) 존중, 생명(자연) 존중의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수행 의식 / 물질의 쓰레기 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쓰레기.

(게송)좌석학견수학청~ / 항상 모든 생활에서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 고암 큰스님, 전강 조실 스님과 도살장 견학 / 시주것 무서운줄 알아야 /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다 / 법신설법(法身說法) / 마음보를 바르게, 맑게, 자비롭게.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 수행 정진은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주요 문구]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내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내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생사가 꼭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을 생(生)이라고 그러고, 이 몸이 숨을 거두고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참선하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그것이 사(死)입니다.


정말 이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딴 생각[別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다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부처님 말씀에 “저 소를 봐라. 저 소는 전생(前生)에 중이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아니해서 그 시주(施主)의 은혜를 그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소로 태어났다. 저 소는 전생에 중이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과연 그 소를 잡는 도살장에 가서 보고 ‘정말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독사도 아니고 참, 이 시주것 함부로 먹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잘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잘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해.


화두는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직업,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