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700/(626~650)2020. 12. 6. 18:46

 

 

(No.636)—2000년(경진년) 설날 통알 및 설날차례(2000.2.2)(21분)

약 22분.

[설날 새벽 예불 때]

 

매년 정월 초하루날 새벽에는 통알(通謁)이라고 하는 의식을 거행해 오고 있습니다.

결제(結制) 중이고 그래서 낱낱이 모든 존경하는 어른들께 세배(歲拜)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수도(修道)하고 있는 도량(道場)에서 합동으로 세배 올리고자 하는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전통으로 그렇게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도 옛날부터서 그렇게 해 오고 있는데, 따라서 여기에 있는 모든 스님네나, 보살님네들, 거사님네들도 그렇게 아시고 개별적인 세배를 생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지금부터서 거행하는 통알에 진심으로 정성스러운 세배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설날차례 법요식 때]

 

오늘 새해 설날을 맞이해서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 법보가족 여러분들이 이 법당에 모이셨습니다.

오늘 오신 뜻은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모신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먼저 가신 가족 · 친지의 영가(靈駕)께 영단(靈壇)에 차례(茶禮)를 젓수기 위해서 모다 참례를 하셨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옛날부터 조상의 신주(神主), 위패(位牌)를 모시고 차례를 젓수고, 그런데 우리는 이 법보전에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들의 영가를 모셨기 때문에 여기서 차례를 올리기 위해서 모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生死) 없는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영가께 들려 드리고 또 우리도 그 법문을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영단에 정성으로 올린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올려서 앞으로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겠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차례(茶禮)는 조실 스님의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 드리므로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께 참으로 소중한 정성이 담긴 차례를 올린 것이다고 산승(山僧)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갖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놓은들 영가가 얼마나 그것을 잡숫고 생사해탈을 하시게 될는지, 다맛 우리의 정성으로 올린 것뿐이지 그것은 아무도 보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영가께 들려 드리므로 해서, 영가가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생사 없는 해탈도(解脫道)로 가신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차례는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조상들에 대한 차례는 원만히 다 마쳤습니다. 다만 앞으로 요식 행위만이 남아 있습니다.

 

산승이 여기에서 올라와서 앞에 나와서 여러분께 나온 기념으로 게송(偈頌)을 하나 읊고자 합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한데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하니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요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한데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찰나 찰나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그 구백생멸의 단위가 일찰나(一刹那)여.

구백 찰나가 모여서 한 생각인데, 1초의 몇천 분의 일이 될는지, 그 시계가 똑딱똑딱똑딱 지내가는 그 사이에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모든 중생의 생명도 그렇고, 산천초목도 다 죽음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한 가족으로 한 부부로 만났다가 생이별 사이별하고, 부모자식 간의 인연으로 태어났다가도 부모가 먼저 죽고, 자식이 먼저 죽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또 내생(來生)에는 인연 따라서 또 인간 세상에서 만날 수도 있고, 천상에 가서 만날 수도 있고, 축생계에서 만날 수도 있고, 지옥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나되—인연 따라서 만나기는 하지마는, 한 생(生)을 바꿀 때 깨끗하게 전생사(前生事)를 망각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무슨 인연으로 만난지도 모르고 또 만나서 가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이요, 무상법(無常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정들었던 부모를 여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들었던 아들과 딸을 여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 인연 따라서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또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생멸(生滅)하고, 취산순환(聚散循環)하는 것이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고 또 달이 떴다가 또 달이 지고 하는 이런 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북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북을 치면서 계속 가 가지고 마지막에 사형을 당한 거와 같은 그러한 상황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고, 현실적으로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동시에 판결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못 어느 날 어느 시에 집행이 되느냐? 그것만 모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죽음을, 딱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월 초하룻날 왜 이런 생사 문제를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은 사실은 생사 속에 살고 있지마는 ‘생사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생사 없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라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생사의 근본이 무엇이냐?

그 근본을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확실히 믿고, 그 생사 없는 도리를 바른 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고 보면, 분명히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병을 낫을려면은 그 병의 근원을 알아야 거기에 따라서 침을 맞고, 쑥을 뜨고,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을 모르고서는 병을 낫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요. 저 달이 하늘에서 돌고 돌다 보면은 초승달이 차츰차츰 커져 가지고 보름날이 되면은 완전히 둥그런 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둥근 달이, 환하게 쟁반 같은 달이 떠 가지고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다 비춘 것입니다.

 

그런데 잔나비는 어느 날 숲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다가 숲속에 있는 샘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둥근달이 비추거든. 그러니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물에 빠졌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저 달을 건져서 다시 허공으로 돌려보내야지, 저 물속에 잠겨버리면 온 세계가 어두워지니 어떻게 할 거냐?' 잔나비의 우두머리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팔에 팔을 연결을 해 가지고 저 물속에 빠져있는 달을 건지자'

 

이래 가지고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수십 마리가, 한 놈은 나무를 붙잡고 팔을 늘이면은 그다음에는 그 팔을 잡고 또 팔을 늘이고 해 가지고, 간신히 수십 마리가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에 달락말락 하니까, 그 여러 마리가 매달리니까 그 중에 팔 약한 놈이 손을 갖다가 놔가지고 수십 마리가 물속에 다 빠졌습니다.

그것이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입니다. 산산이가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하나 그것이 건져지겠습니까?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원래 그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달빛이 물에 비춘 것뿐이라고 이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은 어찌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할 것이냐.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인데.

 

이건 무엇을 비유해서 한 말이냐 하면은, 우리는 분명히 이 법당 안에 수만의 영가가 봉안(奉安)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우리 눈으로 분명히—이승을 하직(下直)한, 이승에 처자 권속과 부모형제를 놔둔 채 저승으로 떠나신 그런 영가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걸 ‘돌아가셨다’ 그러고, ‘죽었다’하고, 교통사고나 뭐 병고로 모다 그렇게 모다 사실 돌아가셨다고 다 말들을 하는데.

 

아까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도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죽었다, 태어났다' 그런 것이지, 생사(生死)로 인증(引證)을 하는 것이지,

마치 허공의 달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달빛만 물에 비춘 거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이나 산승(山僧)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말씀이지만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고, 이 공부를 열심히 함으로써 진실한 법보제자(法寶弟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천도(薦度) 차례 법요식이 끝나면은 떡국을 맛있게 잘 끓여 놨습니다. 법요식(法要式)이 끝나면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맛있는 떡국을 잘 잡숫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처음~21분2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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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알(通謁) ; 불교의 신년하례식(新年賀禮式)으로 세알(歲謁)이라고도 한다. 새해 첫날 삼세(三世)의 모든 삼보(三寶 불보살·법보·승가)와 호법신중(護法神衆), 대중에게 세배를 드리는 의식이다.

우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보와 승보에게도 삼배를 올린다. 또 현재 살아계신 · 돌아가신 모든 부모, 원근친척 그리고 온 법계의 모든 도반들 또한 함께 참석한 대중들에게 세배를 올리는 것.

 

결재중이고 그래서 낱낱이 모든 존경하는 어른들께 세배(歲拜)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수도(修道)하고 있는 도량(道場)에서 합동으로,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우리가 세배(歲拜)를 올려야 할 존경할 만한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어른과 모든 선지식과 모든 도반들에게 이 자리에 서서 세배를 드리는 의식.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세배(歲拜) ; ①섣달그믐이나 설 무렵에 웃어른을 찾아뵙고 절을 함. 또는 그 절. ②세배(歲拜)는 '지난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모든 좋은 인연과 또 나쁜 언짢았던 인연까지라도 깨끗이 다 청소를 하고 다 풀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시작합시다'라는 뜻.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수행(修行 닦을 수/행할 행) ; ①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②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신주(神主) ; 죽은 사람의 위패.

*위패(位牌 지위·높여서 어떤 사람 위/명찰·위패 패) ; 죽은 사람의 위(位 이름 · 지위. 높여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를 모시는 나무패.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게송) ‘월마은한전성원~’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舒 펼(서).

*(게송) ‘찰나생멸무상법~’ ; 『관음예문(觀音禮文)』의 무상게(無常偈)에 나오는 게송. 促 재촉할·빠를(촉), 催 재촉할·독촉할(최), 金烏(금오) - '해'를 가리키는 말, 玉兎(옥토) - '달'을 가리키는 말.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언도(言渡) ; 선고(宣告).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의 결과를 알리는 일. 이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김.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약칭.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정중로월(井中撈月 우물 정/가운데·속 중/잡을·건질 로/달 월) ; ‘우물 속에 있는 달을 건진다’
[참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제7권 (東晉天竺三藏佛陀跋陀羅共法顯譯) ‘明僧殘戒之餘’
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時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 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時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連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가시(伽尸)라는 나라에 파라나(波羅奈)라는 성이 있었다. 한적한 곳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었는데 숲속을 유행 중에 한 니구율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나무 밑에 있는 우물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이때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우물 속 달 그림자를 보고 무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달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게 꺼내줘야 하겠다” 함께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내가 꺼내는 방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고 너는 내 꼬리를 잡고 그렇게 서로 이어서 늘어뜨리면 꺼낼 수 있다” 원숭이 무리가 우두머리의 말에 따라 서로의 꼬리를 잡고 늘어뜨렸는데 물에 이르기 전에 이어진 원숭이들이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부려져 모두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잔나비 ; ‘원숭이’의 사투리.

*산산(山山)이 ; 원숭이.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봉안(奉安) ;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 화상(畵像)이나 시신 따위를 모시어 둠.

*이승 ;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

*하직(下直) ; ①먼길을 떠날 때 웃어른에게 작별을 아룀. ②'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저승 ;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법문 내용]

 

설날 통알 / 설날차례 / 참다운 차례는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生死) 없는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영가께 들려 드린 것 / (게송)월마은한전성원~.

물에 비춘 달빛과 달을 건지려는 잔나비들, 정중로월(井中撈月) /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

 

 

영단에 정성으로 올린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올려서 앞으로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겠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차례(茶禮)는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 드리므로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께 참으로 소중한 정성이 담긴 차례를 올린 것이다고 산승(山僧)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갖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놓은들 영가가 얼마나 그것을 잡숫고 생사해탈을 하시게 될는지, 다맛 우리의 정성으로 올린 것뿐이지 그것은 아무도 보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영가께 들려 드리므로 해서, 영가가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생사 없는 해탈도(解脫道)로 가신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동시에 판결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못 어느 날 어느 시에 집행이 되느냐? 그것만 모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죽음을, 딱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정월 초하룻날 왜 이런 생사 문제를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은 사실은 생사 속에 살고 있지마는 ‘생사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생사 없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라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생사의 근본이 무엇이냐? 그 근본을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확실히 믿고, 그 생사 없는 도리를 바른 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고 보면, 분명히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죽었다, 태어났다' 그런 것이지, 생사(生死)로 인증(引證)을 하는 것이지, 마치 허공의 달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달빛만 물에 비춘 거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이나 산승(山僧)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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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01~425)2020. 12. 4. 08:46

((No.405))—1989년(기사년) 성도재 법회(90.01.04) (51분)

(1/3) 약 22분. (2/3) 약 20분. (3/3) 약 9분.

(1/3)----------------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한데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서풍동임야(何事西風動林野)한데  일성한안여장천(一聲寒雁唳長天)고

나무~아미타불~


산당정야좌무언(山堂靜夜坐無言)한데, 산당(山堂) 고요한 밤에 말없이 앉았는데,

적적요요본자연(寂寂寥寥本自然)이로구나.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 적적하고 고요한 본자연이로구나.


하사서풍동임야(何事西風動林野)한데, 무슨 일로 서풍이 임야를 흔드는데,

일성한안여장천(一聲寒雁唳長天)고, 한 소리 차운 기러기는 긴 하늘에 우는고.



오늘 기사년 납월팔일(臘月八日) 성도재(成道齋)를 맞이했습니다. 방금 17년 전, 임자년 납월팔일에 전강 대선사(田岡大禪師)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납월팔일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삼천년 전 우리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유성출가(踰城出家)해서, 설산에 들어가셔서 6년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그 고행은 일찍이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그렇게 무서운 고행을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러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서—하루에 삼씨 한 알, 좁쌀 한 알 그런 정도로 곡식 알갱이 하나씩 이렇게 잡숫고 6년을 지내셨으니 완전히 고목사회(枯木死灰)처럼 되었어. 완전히 해골(骸骨)만 남았어.


그러시다가 ‘이렇게 고행을 위한 고행만이 참다운 정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가로 내려가셔서 맑은 물에 목욕을 하셨습니다. 목욕을 하고 나오시니까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청신녀가 유미죽(乳糜粥)을 쒀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부처님께 바치니까 부처님께서 그것을 받아 잡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을 보호하면서 같이 정진하던 정반왕(淨飯王)이 보낸 다른 다섯 사람들, 실달 태자(悉達太子)와 같이 서로 약속을 하기를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단코 고행을 쉬지 않고 용맹정진을 하자'고 약속을 해 가지고 6년을 고행을 하셨는데, 실달 태자가 수자타가 바친 죽을 받아 잡수신 것을 보고 “아하! 고행을 견디지를 못하고 너무 배가 고프니까 저렇게 죽을 받아 자시니 저런 의지가 박약하고 약속을 깨트리는 사람과 우리가 같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말을 하고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은 녹야원(鹿野苑)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우리 부처님께서는 자리를 옮겨서 깨끗하고 쇄락(灑落)한 그리고 참 오랜만에 유미죽을 공양을 하시니 한결 기운이 좋다 그말이여. 맑고 깨끗하고 생기가 도는 그러한 몸과 마음으로 정진을 하셨어. 그러시다가 납월팔일 새벽에 별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밤마다 별은 반짝거립니다. 구름이 꽉 낀 날은 안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밤이면 언제나 별은 반짝거립니다. 삼천년이 지난 오늘도 역시 밤에는 별이 빛납니다. 빛나는 번쩍거리는 그 별을 보고, 삼천년 동안에 아니 수억만 년을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별을 봅니다. 번쩍이는 별을 보지마는 별을 보았다고 해서 다 확철대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별빛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어.


해마다 제방(諸方)에서는 섣달 초하루부터 납월팔일 새벽까지 만 7일간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 부처님께서 납월팔일에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기 때문에 그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뜻깊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또 그 뜻깊은 날을 우리가 그냥 범연(泛然)히 지낼 수가 없어. 그래서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해. 7일 동안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완전히 앉은 채 그렇게 용맹정진을 합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납월팔일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왜 우리는 납월팔일 새벽 하늘에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밤마다 번쩍거리는 수없는 별을 보고도 왜 깨닫지를 못할까요?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별을 보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을 보고 깨달아?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

“바로 그 별을 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 말씀 속에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바로 그 도리를 단적(端的)으로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한데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천 자나 되는 긴 낚싯줄을 똑바로 드리우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여, 그 낚시가 물에 떨어지자마자 한 물결이 일어나니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더라.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와서 고기가 그 낚시를 물지를 않아.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가득한 배에는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우리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어. 무량 중생을 제도하셨다.

부처님께서 확철대오 하신 그 법을 가섭 존자에 전하시고, 가섭 존자는 아란 존자, 아란 존자는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28대를 달마 조사까지 전하고, 달마 조사가 중국으로 오셔서 6조 스님까지, 6조 스님 이후로 5종 가풍이 벌어져서 전강 조실 스님까지 77대를 전해 내려왔습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고, 설할라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이 도리를 깨닫고 또 그것을 전하고 받아서 오늘에 이르렀다' 꼭 깨달을 것이 있고, 꼭 전할 것이 있고 또 전해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 됩니다.


‘깨달을 것이 있고, 전할 것이 있고, 받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그 말을 따라서 그렇게 인식하고, 또 자기도 깨달으려고 생각을 하고. 이러한 말에 떨어져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은—마치 배를 타고 가다가 그 갑판 위에서 칼을 가지고 무엇을 하다가 그 칼을 잘못 놓쳐 가지고 바닷물에 빠트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 뱃전에서 칼을 잃어 버렸다’해 가지고, 나중에 그 잃어버린 칼을 찾기 위해서 그 장소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 뱃전을 쪼아 가지고 그 표(標)를 해 놨습니다. 언제라도 그 뱃전 그 자리에서 떨구었으니까, 그 뱃전에다가 표를 해 놔야 그 뱃전 밑으로 내려가면은 그 밑바닥에 칼이 있을 것이다 이거거든.


또 어떤 사람은 산에서 어느 나무 등걸 밑에서 토끼를 한 마리 보았는데, 그 토끼를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나무 등걸에서 토끼를 발견했다가 놓쳤으니까, 항상 그 나무 등걸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끼가 달아났으니까 여기 가 있으면 그 토끼가 오려니.


그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칼을 잃어버리고 뱃전에다가 표를 한 사람이나, 토끼를 놓치고서 나무 등걸 옆에서 토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퍽 어리석고 바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셨으니까 행여나 나도 납월팔일 날 새벽에 하늘에 뜬 그 별을 보면 혹 깨달을란가?’ 이리 생각하고 추운데 새벽에 나가 가지고 그 동쪽에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을 새벽부터 쳐다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별을 보는 것이니라. 보는 놈이니라”(처음~21분43초)





(2/3)----------------


깨달음이 별로부터 오겠습니까?


저 먼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보면 ‘거기에 불이 났구나’ 뻘건 불은 보이지 않지만 하얀 연기만 일어난 것만 보고도 ‘아! 저기에 벌써 불이 났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담 밖에 담 너머로 뿔만 지나간 것을 보아도 ‘아! 저 담 밖에 소가 지나갔구나’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 몸뚱이는 담에 가리어서 보이지 않고 뿔 끄터리만 보여도 담 밖에 소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말이여.


영리한 사람은 척! 연기만 보고 불인 줄 알고, 뿔만 보고도 소인 줄 알아.


어리석은 사람은 연기를 보고 불인 줄을 모르고, 그놈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저것이 무엇인가? 뿔 끄터리를 보고 벌써 소인 줄 알아야 할 텐데, 저것이 뾰족한 것이 무엇인가? 저것이 말인가? 개인가? 사람인가? 지게인가? 이러쿵저러쿵 따진다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여.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용화선원에서는 납월팔일 용맹정진을 그렇게 행사로써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 개인이 각자 자기의 신심과 분 따라서 7일 동안을 다른 때보다는 좀더 마음과 몸을 가다듬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기는 어찌하여 반드시 납월팔일뿐이리오? 결제(結制)한 날부터서 오늘날까지 하루 하루를 바로 용맹정진 가행정진으로 그렇게 정진을 해 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용맹정진이요, 날마다 가행정진인데, 특별히 의식적으로 납월팔일을 기해서 그런 의식적인 행사로써 안 했을 뿐인 것입니다.


정진을 열심히 하다 보면 앉아서나 서서나, 밥을 먹을 때나, 화장실을 갈 때나, 세면장에를 가거나, 소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 하게 되어.

그러면 걸어가되 가는 중도 모르고, 앉았으되 내가 앉았다는 생각도 없고, 밥을 먹되 밥맛도 모르고, 반찬을 먹되 짠지 싱거운 줄도 모르고,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갔는지 반 시간이 지나갔는지, 오늘이 몇월 며칠인지 시간 날짜 가는 줄도 모르고, 마침내는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몰라. 다맛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 해.


정진을 애써서 한 사람이면 다 그러한 고비에 이르른 것입니다. 그러한 고비에 이르렀을 때에 항상 육근문두(六根門頭)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가 떠억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엿보고 있다가 한 생각만 삐끗 '딴생각[別念]'을 일으켰다 하면 바로 그 즈음을 타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침입(侵入)해 들어와!

마치 호위병이, 간수나 수위가 성문을 지키고 있는데 잠깐 한눈을 팔거나, 그 자리를 잠깐 비우면 그 틈을 타서 도둑이나 적이 들어온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순일무잡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러한 경지에서 무슨 마음을 일으키던지 그 일으키는 마음에 따라서, 그 어떠한 마음을 내는가에 따라서 마구니가, 팔만사천 마구니 가운데에 어느 마구니가 침범해 들어와.


어떤 수좌는 저 남해에서 참! 정진을 애써서 하는데, 어떤 거룩하게 생긴 모습을 한 사람이 나와 가지고 설법을 하는데 장경(藏經), 경전에 있는 말씀과 똑같고, 경전에 있는 말씀보다도 더 한 걸음 나아간 그러한 심오한 그런 설법을 막 설한다 그말이여.

그리고 나서 ‘네가 정말 견성성불 하려면은 네 이마를 이 기둥에다가 부딪쳐라’ 막! 그냥 그 법문 끝에 막 그렇게 강요를 하니까 거기에 따르지 아니할 수가 없어서 막 기둥에다가 머리빡을 들이받아 가지고 유혈이 낭자해.


그러다가 또 어느 날에는 ‘네가 참으로 견성성불 하려면은 네 고추를 끊어 버려라. 그놈 때문에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고 도를 이루지 못했는데 금생이라도 네가 결정코 도업을 성취하려면 고추를 잘라 버려라’

그 법문을 설하고 나서 막 그것을 짜르라고 하니까 그 말을 안 들을 수가 없어. 그 법문에 감동이 되어 가지고 있고, 도업 성취할 그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안 끊을 수가 없어서 고추를 잘라 버렸어. 유혈이 낭자해 가지고 참 어렵게 수습을 했다 그말이여.


이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특히 혼자 저 섬이나, 깊은 산중이나, 토굴에 들어가서 혼자 공부하다가 흔히 이런 경계(境界)가 나타나는 거여.

그래서 옛날부터 이 공부는 선지식(善知識) 밑에서 좋은 도반(道伴)들과 같이 정진을 해야지, 선지식이 없는 곳에 또 좋은 도반이 없는 곳에 혼자 가서, 아직 득력(得力)을 하지 못한 분상(分上)에 혼자 가서 한다는 것은 항상 이런 위험성이 수반(隨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모다 경계(警戒)를 했습니다.


대중처소(大衆處所)에 살면 모두 대중(大衆)의 규칙을 따라야 하고 또 여러 다른 대중을 위해서 항상 조심해야 하고 신경을 써야 하고, 그러니 자기의 성질에는 안 맞아도 대중의 뜻을 따라야 하고, 대중을 조심해야 하니까—자기 혼자 있으면 그러한 공연히 신경 쓰고 그럴 것이 없이 마음껏 잠도 안 자고 공부하려면 공부하고, 밥도 그저 먹고 싶으면 먹고 안 먹고 싶으면 안 먹고, 그저 뭐 정진도 4시간이고 5시간이고 꼼짝 않고 하려면 하고, 잠도 안 자고 하려면 하고, 마음껏 할 수가 있겠다.

그러니 대중처소에서 하니까 그런 것을 마음대로 못하고, 더 좀 공부하고 싶어도 시간되면 자야 하고 또 조금 늦게 일어나고 싶어도 시간 되면 일어나야 하고, 밥도 먹기 싫어도 대중과 같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해야 하고, 그러한 폐단을 피해서 토굴(土窟)에 들어가서 실컷 좀 공부하기 위해서 토굴을 찾고 토굴을 마련하고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공부에 득력을 하지 아니한 사람이 토굴에 들어가서 하다 보면 까딱하면은—참 그 정진을 애써서 계행을 철저히 지키면서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삐끗하면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기도 하고, 뭐 부처님이라 해 가지고 나타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아까 저 남해에 가서 공부하던 그 수좌처럼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능엄경(楞嚴經)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있는 그러한 경계가 나타날 수도 있다 그말이여.

이러할 때 좋은 도반이 옆에 있거나 선지식이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백이면 백 다 그러한 마(魔)에 섭(攝)하게 되고, 사견(邪見)에 떨어지게 되고, 까딱하면 정신이상(精神異常)에까지 걸려서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를 수가 있는 것이여.


그런데 그 순일무잡한 경계에서 행여나 빨리 깨닫기를 바란다든지, 누가 와서 자기를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란다든지 또는 어떠한 조사의 공안을 가지고 이리저리 분별하고, 분석하고, 따져서 복탁(卜度)을 한다든지 또는 무슨 신통이 나기를 바란다던지, 그러한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 이외의 어떠한 생각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 마구니를 불러들일 틈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고, 또 어떤 도인은 복숭화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비로 땅을 쓸다가 돌이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도인은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시장에서 장꾼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했다 그말이여.

어찌 하필 부처님처럼 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부는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개 짖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일체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설법(說法)이여.


그러니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다 우리가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때요, 곳이다 그말이여.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다가, 무엇을 듣다가 깨달을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어떠한 중대한 뉴스를 방송을 한다 할 때, 시간을 잘 모를 때에는 항상 다이얼을 맞춰서 딱 놔두고 기다리듯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달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화두를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한다 그말이여.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경지로 나아가야 그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사량분별에 떨어진다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는 데에 끄달린다든지, 귀로 무엇을 듣는데 끄달리고 있는 한은 그러한 경지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여.

그래서 항상 화두를 잡드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정진이여. 경전도 볼 것이 아니고, 어록도 볼 것이 아니고, 일체처 일체시가 행주좌와 어묵동정 사위의(四威儀)에서 화두만 성성적적(惺惺寂寂) 하게 잡드리해 갈 뿐이여. 밥을 먹을 때도 그렇고, 똥을 눌 때도 그렇고, 오줌을 눌 때도 그러고, 앉아서도 그러고, 서서도 그러고.


이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되는 법이 없어.

고조사(古祖師)들이 ‘그렇게 잡드리해 가지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아주...


부처님께서는 ‘무엇 무엇이 안 하면 내가 어쩌리라’고 함부로 그러한 막담을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인(古人)네는 우리 후인(後人)들을 위해서, 그렇게도 무서운 그러한 맹세를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21분46초~41분48초)





(3/3)----------------


외외낙락적나라(巍巍落落赤裸裸)한데  독보건곤수반아(獨步乾坤誰伴我)오

나무~아미타불~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데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오

나무~아미타불~


외외낙락적나라(巍巍落落赤裸裸)한, 높고 높고, 높고 높아서 깨끗하고 깨끗해.

독보건곤수반아(獨步乾坤誰伴我), 건곤(乾坤)에, 천지에 홀로 가니 누가 나와 더불어 짝을 할 것인가.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데,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던들,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오, 어찌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갔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마음을 가지시고 일생을 살으셨을까?

부처님께서 항상 부르시는 노래가 있었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슨 노래를 부르셨을까?


부처님께서는 항상 다른 사람을 보되 ‘제도(濟度)할 중생(衆生)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여. 보통 우리 상식으로는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을 죄가 많고, 생각하는 것이 순 망상(妄想)만 들끓고 망령(妄靈)된 경계에 빠져 있는 그러한 불쌍한 중생들이라’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은데, 실지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들에게 망(妄)이 있다고 그렇게 보시지를 않혀.

그러면 부처님 자신은 어떻다고 생각하신가? ‘부처님은 깨달아서 진리와 하나가 된 그러한 경지’라고 우리 생각에는 그럴 것 같은데,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그래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을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부처님 자신은 '남이 없다' 무생(無生), 남이 없어!


부처님 자신이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일체에는 망(妄)이 없고, 당신은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 제도할 중생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 하면은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셨을 것이다.


사람 사람이 다 본래부터 태평해. 깨달을 바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빠져야 할 지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요, 제도 받을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여.

얼굴이야 잘생겼거나 못생겼거나, 귀족이거나 천민이거나, 부자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해서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덜어낼 것도 없어. 원만구족한 본래 태평한 존재들이다 그말이여.


납월팔일(臘月八日)을 맞이해서 우리는 본래 조금도 부처님과 조금도 모자랄 것도 없이 원만구족한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긍지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까요? 오장육부와 사지백체(四肢百體)는 성한 데가 없이 항상 아프고 괴롭고, 이 세상에 나서 늙어서 병들어 가지고 결국은 희로애락과 흥망성쇠(興亡盛衰)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그리고 버티다 버티다 못해서 왜 죽어갈까요?

죽으면 과연 어느 곳으로 갈까요? 천당에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이다.


이러한 고달픈 생(生)이, 유랑(流浪)이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무량겁으로 이어진다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는 지옥도 천당도 있다면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있는 것이여. 없다면 없는 것이지만 있다면 일념지간에 있어.

무량겁도 일념 속에 들어 있고, 그 일념간에 있는 천당, 일념 속에 있는 지옥, 그것만 해결해 버리면 무량겁의 생사고(生死苦)도 바로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 그래서 일념 단속(一念團束)을 해야 해.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일념 속에서 천당 · 지옥을 타파해 버려. 일념 속에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것이여.


기사년 납월팔일을 기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山僧)이 여러 사부대중, 여러 도반들을 향해서 간곡히 정진하실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42분3초~51분9초)(끝)





[법문 내용]


(게송)산당정야좌무언~ / 부처님께서 새벽에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 히셨다 / 전강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 (게송)천척사륜직하수~ /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어리석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 하루 하루를 바로 용맹정진 가행정진으로 정진해야.


육근문두(六根門頭)에는 팔만사천 마구니가 엿보고 있다. 딴생각[別念]을 일으켰다 하면 바로 침범해 들어온다 / 한 수좌의 잘못된 경계로 스스로 자해. 이 공부는 선지식 밑에서 좋은 도반들과 같이 대중처소에서 정진을 해야 /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 이외의 어떠한 생각도 다 마구니를 불러들일 틈이 되는 것.


모든 것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모든 소리가 다 비로자나 법신불의 설법(說法) / 화두 의단이 독로해서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어 깨닫는 것이다.


(게송)외외낙락적나라~ / 부처님께서 항상 부르시는 노래,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사람 사람이 원만구족한 본래 태평한 존재들이다 / ‘이뭣고?’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일념 속에서 천당 · 지옥을 타파해, 일념 속에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납월팔일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왜 우리는 납월팔일 새벽 하늘에 별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밤마다 번쩍거리는 수없는 별을 보고도 왜 깨닫지를 못할까요? ‘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별을 보고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별을 보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별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별을 보고 깨달아?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아?

“바로 그 별을 보는 것이다” 이 간단한 한 말씀 속에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고 깨달으신 바로 그 도리를 단적(端的)으로 설파(說破)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여. 척! 보는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옛날부터 이 공부는 선지식(善知識) 밑에서 좋은 도반(道伴)들과 같이 정진을 해야지, 선지식이 없는 곳에 또 좋은 도반이 없는 곳에 혼자 가서, 아직 득력(得力)을 하지 못한 분상(分上)에 혼자 가서 한다는 것은 항상 이런 위험성이 수반(隨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모다 경계(警戒)를 했습니다.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 이외의 어떠한 생각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 마구니를 불러들일 틈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고 확철대오를 하셨고, 또 어떤 도인은 복숭화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비로 땅을 쓸다가 돌이 와서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도인은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시장에서 장꾼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했다 그말이여.

어찌 하필 부처님처럼 별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비로자나 법신(法身)의 체(體)고, 부는 바람 소리, 흐르는 물소리, 개 짖는 소리, 차 지나가는 소리, 일체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설법(說法)이여.


그러니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 두두물물 삼라만상이 다 우리가 자아를 깨달을 수 있는 때요, 곳이다.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한 경지로 나아가야 그 언젠가 탁!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사량분별에 떨어진다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는 데에 끄달린다든지, 귀로 무엇을 듣는데 끄달리고 있는 한은 그러한 경지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여. 그래서 항상 화두를 잡드리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정진이여.


부처님 자신은 '남이 없다' 무생(無生), 남이 없어! 부처님은 일체 중생에는 망(妄)이 없다 보시고, 당신은 남[生]이 없는데 무엇을 제도할 중생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무슨 노래를 부르시냐 하면은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로구나. 사람 사람이 본래 태평(太平)하다’


사람 사람이 다 본래부터 태평해. 깨달을 바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빠져야 할 지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도할 부처님이 있는 것도 아니요, 제도 받을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여. 얼굴이야 잘생겼거나 못생겼거나, 귀족이거나 천민이거나, 부자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머리가 좋거나 나쁘거나,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해서 더 보탤 것도 없고 더 덜어낼 것도 없어. 원만구족한 본래 태평한 존재들이다 그말이여.

납월팔일(臘月八日)을 맞이해서 우리는 본래 조금도 부처님과 조금도 모자랄 것도 없이 원만구족한 그러한 존재라고 하는 긍지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데 중생의 생로병사 · 희로애락 · 흥망성쇠의 고달픈 생(生)이, 유랑(流浪)이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무량겁으로 이어진다고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는 지옥도 천당도 있다면 일념지간(一念之間)에 있는 것이여. 없다면 없는 것이지만 있다면 일념지간에 있어. 무량겁도 일념 속에 들어 있고, 그 일념간에 있는 천당, 일념 속에 있는 지옥, 그것만 해결해 버리면 무량겁의 생사고(生死苦)도 바로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 그래서 일념 단속(一念團束)을 해야 해. 일념 단속함으로 해서 일념 속에서 천당 · 지옥을 타파해 버려. 일념 속에서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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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51~575)2020. 12. 3. 10:14

((No.575))—1996년 9월 첫째일요법회(96.09.01) (80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0분. (4/4) 약 18분.

(1/4)----------------


파납몽두올연좌(破衲蒙頭兀然坐)하니  부귀영예운외몽(富貴榮譽雲外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병옹수무일립미(甁甕雖無一粒米)나  만고광명조대천(萬古光明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두생두영수형(種豆生豆影隨形)한데  삼시업과여경조(三時業果如鏡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자작자수무회피(自作自受無廻避)라  나득원천갱우인(那得怨天更尤人)이리오

나무~아미타불~


파납몽두올연좌(破衲蒙頭兀然坐)하니, 떨어진 누데기로 머리를 무릅쓰고 올연히 앉았으니, 부귀와 영예가 구름 밖에 꿈이로구나.

병옹수무일립미(甁甕雖無一粒米)나, 쌀 도가지에 비록 한 알갱이 쌀도 없지마는,

만고광명조대천(萬古光明照大千)이로구나. 만고(萬古)에 광명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비추는구나.


이것은 누데기를 입고 가난한 수행하는 수행자의 생애를 읊은 게송입니다.


종두생두영수형(種豆生豆影隨形)이요.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그 형체 따르듯 한다 그말이거든.

삼시업과(三時業果)가 여경조(如鏡照)요.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해서 업보(業報)가 거울에 비추듯이 환하다 이거거든.


자작자수무회피(自作自受無廻避)여. 자기가 지어 가지고 자기가 받는 것이라 피할 곳이 없어.

나득원천갱우인(那得怨天更尤人)이리요. 어찌 하늘을 원망하고, 다시 다른 사람을 허물할까 보냐.

그게 다 인과법(因果法)이 역연(歷然)해서 모든 과보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지, 하늘이 억지로 죄를 주며, 자기가 죄 받는 것을 남을 원망할 것이 없다. 이것도 역시 고인(古人)의 시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제방(諸方)에서 또는 용화선원에서 여름 삼하결제(三夏結制), 삼하안거를 마치고 다시 이 자리에 모인 여러 선배 · 후배 · 형제자매 · 도반들을 위해서 정진하는 데 아주 요긴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산승(山僧)이 더이상 무슨 말을 첨가해서 말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유마거사(維摩居士)가 병을 앓았습니다. 병을 앓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가서 문병을 하도록 지시를 하셨습니다.

인도에 유마거사나, 중국에 방거사(龐居士)나, 우리나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는, 그밖에도 많은 훌륭한 거사님네들이 참 출가해서 도 닦은 스님네와 맞먹거나, 못지않는 훌륭한 거사님네들도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언필칭(言必稱) '인도에 유마거사, 중국에 방거사, 한국에 부설거사' 이렇게들 말합니다. 물론 현대에도 깨달은 그런 거사님들도 여기저기 모다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유마거사가 병이 나서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을 문병(問病)을 가도록 지시를 했는데,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다 '과거에 어디서, 언제, 어떻게 하다가 유마거사한테 방(棒)을 맞고, 그래서 차마 얼굴을 들고 문병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전부가 한결같이 다 사절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처님께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문병을 가도록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여러 보살들 가운데에도 으뜸가는 보살이라, 부처님께서 지시를 하시니까 가시기로 했습니다.

문수보살이 간다 하니까 여태 사절하고 못 간다고 한 부처님 제자들이 '아, 그렇다면 우리도 문수보살을 따라서 가겠습니다' 와! 하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래가지고 유마거사가 앓고 있는 집으로 문병을 갔습니다.


가서 문수보살이 문병을 하기를, "어쩌다가 이렇게 병환이 나셨습니까?"

"중생이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나도 앓고 있습니다"


"언제나 병이 나으시겠습니까?"

"중생이 병이 다 나으면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병문안(病問安)을 마치고.


유마거사는 "기왕 이렇게 모였으니 우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서 각기 자기의 깨달은 바를 얘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차례차례 자기가 깨달은 바를, 불이법문에 대해서 깨달은 바를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문수보살이 불이법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을 했냐 하면은 "불이법은 말로써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인 모든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가 다 참, 불이법에 대해서 가장 잘 말을 했다고, 대답을 했다고 모두 감탄을 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면 맨 마지막에 유마거사께서 불이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시오" 이렇게 되었습니다.

유마거사는 아무 말도 않고 묵언(默言)을 했습니다. 입을 딱! 다물고 말을 안 해.


그것을 선가(禪家)의 문구로 '양구(良口)'라고 하는데—유마경에는 '막을 두(杜)'자, '두구(杜口)'라고 쓰여 있는데—양구(良口), '어질 양(良)'자, '입 구(口)'자, 양구라 그러는데.

양구라 하는 것은 무슨 법을 묻는데 대해서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한참 있는 거동인데, 양구를 하니까 거기에 모인 모든 대중들이 정말 유마거사야말로 불이법에 대해서 가장 훌륭하게 일렀다고 모다 찬성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마(維摩)의 두구(杜口)’라고, 그런 문자로 지금까지도 참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는데.


나는 학생 때 그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그 유마거사가 양구를 한 그 뜻을, 그 참다운 그 진리를 어찌 내가 알았으리요. 진짜 깨달은 것은 아니고, 속담에 「웅변은 은(銀)이라면 무어(침묵)는 금(金)」이라든가 그런 속담도 있듯이 '정말 그 말을 안 함으로써 최고의 진리를 여지없이 표현한 도리가 있구나' 껍데기로, 겉으로 그러한 느낌을 가졌어.

'내가 만약에 출가해서 중이 되면 일생 동안을 말을 하지 않고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서 수행을 하고, 벙어리로서 일생을 마치리라'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중이 되어 가지고 전강 조실 스님의 지시에 따라서 '아무리 참선을 하더라도 기초 염불은 해야 되는 것이다. 천수(千手)와 쇳송[鍾頌]과 예불 젓숩고, 상단(上壇) · 중단(中壇) · 각단예불(各壇禮佛)은 할 줄 알아야 하고, 사시(巳時)에 마지(摩旨)는 올리고, 그놈을 또 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한 일주일 걸려서 주야불철하고 그것을 읽고 외우고 해 가지고 조실 스님께 바치고.

그 목탁(木鐸) 치는 법, 모다 요령(鐃鈴) 흔드는 법도 전부 조실 스님한테 직접 배우고. 배우기는 배워 놓고는 한 번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바로 묵언에 들어갔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군대 안 갈라고 내가 묵언을 했다'고, 그런 사실과 다른 얘기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때는 한국에 병역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없어 가지고, 군대고 무엇이고 그런 것도 없고.

다못 내가 일생을 이 세상에 안 태어난 셈 치고, 벙어리로서 이 세상을 아주 오직 하나만을 심중(心中)에 세우고, 그렇게 병신 노릇을 할라고 한 사람이지, 무슨 그때는 군대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10년을 묵언을 하다가 조실 스님께서 '이제 그만해라. 수행 방법으로써 묵언이지, 묵언을 하기 위한 묵언이라는 것은 그것이 썩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명령을 하셔서 묵언을 텄습니다마는, 지금도 역시 그때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입은 열기는 열었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차라리 묵언을 한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는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가끔 해 봅니다.


사실 이렇게 법상에 올라와서 두서없는 말을 하고 있지마는,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차라리 유마거사의 흉내를 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퍽 마음으로 좋아합니다.

유행가에 뭐 '마음 약해서 잡지 못했네. 돌아서는 그 사람~' 뭐 그런 말이 있는데, 마음이 약해서 이렇게 참—여러분 앞에 내가 제일 좋아하고, 여러분 앞에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여러분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이렇게 또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널리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요새 여러분들은 뉴스를 통해서 전직 대통령이 모다 그 사형언도를 받고, 징역을 받고, 모다 그런 것을 잘 알고 계실 텐데, 우리에게는 그 각기 나름대로 그런 것에 대한 충격도 받고 모다 여러 가지 감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기에는 그 형량이 많고 적고 그런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해 봤자 한이 없는 것이고, 미래에 있어서 동서양 대소 국가 모든 대통령을 비롯한 고관대작을 맡고 있는 각부 장관이나, 대소 관료들이 이 재판을 통해서 정말 거울삼아서 일대 각성(覺醒)을 해서, 자기의 직분을 정말 깨끗하게 사심(私心) 없이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멋지게 자기의 직분을 다할 수 있다면 참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 슬프고도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그러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난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 뭐라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처음~20분49초)





(2/4)----------------


일체 허영도 없고, 시새우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법률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럴 두려워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도반들은 머리를 깎은 스님네거나, 머리를 깎지 않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노소남녀 여러분들이 다 그러한 분들이 이 자리에 모다 모이셨다고 산승은 생각합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거고, 떨어지고 만다고 하는 인과법을 깊이 믿게 된다면 이러한 부끄럽고 창피한 전철을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밟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권리나 명예 · 재산 · 부귀영화라 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고 믿지 못할 것인가, 그런 것을 뼈아프게 느끼셨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특히 부도덕한 방법으로 얻어진 부귀공명이라 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큰 권리도, 큰 명예도, 큰 재산도 없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고상하고, 떳떳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인과(因果)의 법칙을 피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서 추진되고, 운영되고, 생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조국, 가비라(迦毘羅) 왕국은 고살라국 혹 사위국(舍衛國)이라고도 하는데, 고살라국의 유리왕에 의해서 멸종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난 원인은 이유는 부처님의 나라, 가비라 왕국은 비록 나라는 작지마는 양반의 나라이고, 고살라국은 엄청나게 나라도 크고 부강하고 그렇지만 상놈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살라국의 왕, 파사익왕이 가비라 왕국에 혼인을 청했습니다. '자기(의 유리 태자)하고 가비라 왕국에 공주하고 결혼을 하자' 이렇게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가비라 왕국에서는 '도저히 그런 상놈의 나라에게 공주를 줄 수가 없다' 그런데 안 주면은 금방 무력으로 침공을 해 들어올 것이고. 그래서 극비리에 의논을 하기를, 공주는 직접 줄 수가 없고 궁녀 가운데, 종 가운데에 가장 공주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결혼을 해서 시집을 보냈는데, 그 유리 태자가 아직 어리니까 그 파사익왕은 외갓집으로 보내서, 외갓집 가비라 왕국으로 보내서 거기 가서 문무(文武)에 관한 여러 가지를 잘 배우도록 외갓집으로 보냈습니다. 가비라 왕국에서는 그 유리 태자를 맞이해 가지고 혼자만을 가리키기보다는 궁중이나 모다 고관대작의 아들, 모다 소년들을 오백 명을 모아가지고 큰 회관에서 유리 태자와 같이 모든 교육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 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 오백 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여서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 교육이 실시가 되니까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안하무인이 되어가지고 막 언행을 함부로 하고 막 그러니까, 그 고관대작의 아들들도 나름대로 다 긍지가 있는데 고살라국 유리 태자가 건방지게 느껴져 가지고 '종놈의 자식이 까불고 자빠졌다'고, 이렇게 뒤에서 욕을 했습니다.


유리 태자가 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내용을 잘 알아본 결과 자기가 맞이한 아내가 가비라 왕국에 궁녀였다고 하는 것을, 정식 공주가 아니고 궁녀였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내가 만약에 왕이 되면 기어코 이 나라를 갖다가 멸종을 시키리라'하고 마음으로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나이가 차츰 먹어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부왕이 없는 틈을 타서 자기가 왕위를 찬탈을 해가지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무력 준비를 해가지고 가비라 왕궁을 침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서 두 나라 국경 지대에 큰 고목나무 밑에 가서 떠억 앉아서 계셨습니다. 유리왕이 국경을 넘어가다가 부처님이 고목나무 밑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 "웬일이십니까? 세존이시여. 해필 이 많은 나무가 있는데, 해필 죽은 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계십니까?"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유리왕은 그길로 회군을 해서, 침공을 중단을 하고 회군을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침공을 하기로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아봤자 안 되겠다 하는 것을 알고 그냥 막지를 않으셨는데, 유리 태자는 이제는 부처님이 거기 가서 계시더라도, 돌아서라도 가서 기어코 끝장을 내려고 마음을 먹었었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가비라 왕국에 들어가서 막 지딱지딱 때려 부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데,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그때 그러니까 유리왕에 외할아버지 격이죠, 실제는 아니지마는 "잠깐 중지를 해라. 내가 이 마당에 연못 속에 들어가서 있다가 나올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다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유리왕이 생각하기에 '물속에 들어가서 있어 봤자 불과 1, 2분이면 나오겠지' "뭐 그렇게 하라"고 그래가지고 물속에 마하남 왕이 들어갔는데, 1분이 지나도 안 나오고, 5분이 지나도 안 나오고, 10분이 지나도 안 나와서 나중에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살펴보라고 하니까, 물속에 있는 나무뿌리에다가 머리를 풀어서 거기다 칭칭 동여매고 죽어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동서남북 문으로 모다 빠져나갔는데, 동쪽으로 나간 사람이 서쪽으로 다시 들어오기도 하고, 서쪽으로 나간 사람이 남쪽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해가지고, 들랑달랑하기만 하지 별로 많이 도망해 간 사람이 없었다고 그럽니다.


그때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가비라 왕국에 5천 명의 젊은이들을 뽑아가지고 저 하늘나라에 어디다가 피신을 시켰습니다. 난리가 어떻게 무참하게 사람들을 많이 죽였는지 피가 아주 도성에 가득차고 냇물 흐르듯이 흘렀다고 그럽니다.

난리가 다 가라앉고 유리왕과 그 군인들이 다 돌아간 뒤에 목련존자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5천 명의 청년을 보니까 다 죽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난리가 다 가라앉은 다음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비라 왕국 도성에, 현지에 와 보셨습니다.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그 피비린내를 맡을 수도 없고, 그 비참한 부처님에 가족들, 일가친척, 사촌, 6촌들, 모든 도성 안 백성들이 다 무참하게도 살해를 당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전에는 내가 여기서 많은 사람들을 모여 놓고 설법을 했건마는, 그러시고서 "여래는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부처님의 경지에서는 생사가 없으시고, 너와 내가 없으시고, 멀고 가까운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에 계신 부처님이시지만, 부처님께도 그런 것을 보시고 참 얼마나 속이 언짢으셨으면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들이지 아니하리라' 그러셨겠습니까. 그러시고 "7일 후에 고살라국은 불 세례를 받을 것이다. 불에 의해서 화재가 나서 다 타 죽을 것이다" 그렇게 예언을 하셨습니다.


고살라국에서는 그런 말을 전해 듣고, 불에 안 타 죽기 위해서는 물가로 가는 것이 좋다 해가지고, 그 왕족과 대신과 모든 사람들이 전부 바닷가로 갔습니다. 가 가지고 큰 강가로 가 가지고 큰 배를 타고, 물에서 일주일을 노래를 부르고 그러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느닷없이 먹구름이 하늘에서 일어나 가지고 뇌성벽력을 해가지고 왕궁에도 벼락을 때려서 왕궁이 다 불에 타고, 타고 있는 배에도 불이 나 가지고 다 타 죽었습니다.

잘못 생각하면, 부처님께서 당신의 조국을 그렇게 사람을 많이 살육을 하고 했으니까, 감정적으로 신통력으로써 아주 벼락을 쳐서 죽게 했다고 혹 그렇게 오해를 하실 분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부처님이 절대로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고살라국 유리왕을 비롯한, 고살라국 사람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사람을 죽이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죽였냐 하면은 칼로 쳐 죽이고,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큰 전차를 가지고 와서 막 깔아뭉개고, 수백 마리 코끼리 떼를 몰고 와 가지고 직신직신 밟아서 창자가 터지고 가슴팍이 부서지고, 뼈다구가 부러지고 대가리가 깨지고 해가지고 수백 명, 수천 명을 일시에 개떡처럼 만들었으니, 동서고금에 그러한 역사는 보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람을 죽여도 그렇게 죽이는 법이 없고, 설사 공주로 속여 가지고 궁녀를 보냈기로서니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거든. 그러한 과보로써 그렇게 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한 제자가 부처님께 여쭙기를 "과거에 무슨 인연으로 이와 같은 무서운 과보를 가비라 왕국 사람들은 받게 되었을까요?"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한참 계시다가 말씀을 하시기를, "과거 무량겁 전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다 떨어졌어. 그래서 큰 호수를 막고 물을 품어 가지고 그 호수 속에 있는 고기를 잡아 가지고 그 굶주림을 면했느니라. 그때  한 고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때 앙심을 품고 죽은 고기가 바로 저 유리왕이고 저 신하들이다"


그 고기를 잡아서 그물로 잡아 가지고 육지로 던져놓으면 고기가 팔딱팔딱팔딱 뛰니까, 한 소년이 그 고기의 대가리를 작대기로 가지고 다니면서 딱 때리고, 딱 때리고 하면서 그렇게 재미있게 뛰고 놀던 소년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소년이 누구냐 하면은 부처님의 전생(前生)이었다 그말이여.

그 고기를 잡아서 먹은 모든 사람들은 가비라 왕국에 왕을 비롯한 왕족과 모든 백성들이고, 그 고기의 대가리를 막대기로 때리고 다니면서 놀던 소년은 부처님이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리가 수미산으로 눌러 놓은 것처럼 뻑적지근이 항시 머리가 아프셨다 그거거든.


무량겁이 지났고,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신 성현 가운데 대성현이신 부처님께서도 그때 그 고기들의 대가리를 때린 그 과보로 머리 골이 아프셨어. 인과라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여.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고 하는 조항이 바로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마는.(20분52초~41분47초)





(3/4)----------------


연전(年前)에 KAL기(대한항공 비행기)를 소련에서 미사일로 쏴 가지고 120여 명인가 그 비행기 탄 사람들이 참 영문도 모르고 폭파해서 다 죽었습니다. 내가 육신통, 숙명통이 안 나서 왜 그러한 과보를 KAL기가 받게 되었는가 그것은 내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번에 러시아 비행기가 141명을 태우고 북극을 지나다가 떨어져서 몰살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비행기를 쏘더니, 그놈 잘 떨어져서 뒤졌다' 내가 그런 생각으로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러시아 비행기가 떨어졌는가 그것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또 과거에 무슨 과보로 그랬는가도 확실히 알 수가  없고, 우리나라 비행기를 그렇게 떨구더니 그 과보로 떨어졌는가 그것도 내가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소련에 적성국가(敵性國家)도 아니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군용 비행기도 아니고 민간 항공기를 무엇이 잘못되어서 국경을 조금 본의 아니게 침범을 했다 하더라도 좋게 나가라고 하고 인도를 해서 정식 궤도로 가도록 하면 그만이고, 또 나중에 국제법으로 그것을 따질지언정 거기다 대고, 그 비행기에 탄 사람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한 짓을 하는 법이 아니거든. 국가적으로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고,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일을 처리해서는 아니 되거든.


우리나라는 오천 년을 두고 일본에 크고 작은 침범과 약탈을 당해 왔습니다. 동해, 남해, 서해로 수없는 일본 왜놈에 해적들이 와 가지고 여자도 강간하고, 재산도 납치하고, 갖은 못된 짓을 다 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신라 문무왕, 불국사 석굴암도 동쪽을 향해서 짓고 또 동해에다가 대왕암을, 자기의 시체를 동해에다가 묻어서 용이 되어 가지고 일본 해적을 막으려고 그렇게 원력을 세운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지고 우리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경술년 합방(合邦, 경술국치庚戌國恥)으로 해서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에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에 없는 식민지 정책, 교활하고 악랄한 정책을 써서 우리나라를 피를 빨아먹고 짓이겼습니다. 우리나라 백성이라면 세세생생에 용서할 수 없는 그러한 고약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래 나도 애국자도 아니고, 일개 평범한 중이지만 그 생각을 하면은 이가 부득부득 갈리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런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왜 잊게 되었느냐 하면은 어째서 일본이라는 나라는 본래 아이누족이 그 본토에서 사는 소수 족속이고, 대부분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사람들—가야가 망해가지고 그리 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뿌리박고 살고,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특히 백제 사람들이 많이 가서 거기 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라에다가 백제 사람들이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현재 나라[奈良]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가서 모다 했다는 것을 고분을 발굴해도 그 증거가 나오고 모든 역사의, 일본에 만요우스[萬葉]니, 고사기니 그런 책을 봐도 하나하나가 다 증거가 드러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일본에 국조신(國祖神)인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御神]니, 아마데라스 오오미카미의 동생인 스사노오노 미코도가 바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인데도 자기네들은 그것을 숨기고 말을 안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 교육도 시키고, 글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다리 놓고 집 짓는 법도 가르키고, 도자기 굽는 법도 가르키고, 모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가르켰는데, 왜 세계에서 제일 미워하고, 제일 못살게 한국을 못살게 구냐?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이놈들을 언제라도 이 버릇대기를 고쳐줘야, 한 생(生)을 성불을 늦게 하더라도 이놈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먹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본 것이 아니고 가만히 이치를 미루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야가 망하니까 나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신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고구려 · 고려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가서 살고, 백제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갔다 그말이여.


여기서 망한 사람들이 거기를 갔으니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그말이여. '언젠가는 힘을 길러 가지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해야겠다. 다시 한국을 뺏어서 다시 한국을 차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말이여.

그래놓으니 처음에 1대, 2대, 3대에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 내려오지만, 5대, 10대 지나가서 부터서는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고 몰라.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그게 다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 국민학교 · 유치원 애들한테도 물어보면 '세계에서 제일 싫은 나라, 미운 나라가 어디냐?'하면 한국이라고 한다는 여론조사를 해 보면.

그러니 이것이 한국에서 망한 나라가 가 가지고 종자가 퍼진 것이 일본 사람들이라고 보면,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리여! 그렇겠지'하고 내가 지금은 미운 생각을 안 갖고.


그 사람들도 그러한 이웃지간에 가까운 나라를 역사를 잘 연구해 보면 미워해서는 안 될 형님의 나라요, 자기의 조상에 나라인데, 한국을 그렇게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을 존경하고, 숭배하고, 가장 한국을 아끼고, 물심양면으로 한국을 도우려고 하는 그러한 나라가 되어서 정말—알고 보면 같은 단군(檀君)의 후예거든. 비록 나라가 망해 가지고 갔을망정 한 핏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워해서도 안 되고, 일본 사람들도 한국을 미워해서는 안 될 가장 가까운 단군의 후손들이여.


그래 지금은 미운 생각이 없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니까 그러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주었으면 참 좋겠는데, 전혀 그런 징조가 보이지를 않고 경제적으로 지금은 우리나라를 침범을 하고 들어오고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일본 물건'하면 다 선호를 하고, '일본 문화'하면은 다 무슨 향수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앞으로 그 사람들이 정말 불법(佛法)을 옳게 믿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일본은 언제라도 화산이 터질 것이고, 지진이 일어나서 고베와 대판에 일어나는 그런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앞으로 몇천 년 뒤에나 몇억 년 뒤에는 결국은 바다 밑에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지금도 매년 조금씩은 가라앉는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돌연히 뭐 쇳덩어리 가라앉듯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지만, 많은 시간과 여유가 있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마음보를 고쳐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 6.25동란이 왜 일어났을까? 공산주의 때문에 그렇다고 지금 우리는 생각하고 있지마는, 저 몇백 년,  몇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치 가비라 왕국이 고살라국에 의해서 그렇게 멸망된 것처럼 반드시 이것도 까닭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을 시킨 그 과보로 6.25동란이 또 일어나 가지고 남한 일대를 피바다를 만들었을란가도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정말 보복하는 그런 마음을 아니 가져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보복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그러한 일은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아니해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을 해치면서까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 반드시 그 과보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그것이 나로 부터서 떠나게 되고, 떠날 때는 거저 떠난 것이 아니라 나를 갈기갈기 몸과 마음을, 가정을 찢어 좃아 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는 '새 한국 건설'이라고 하는 그러한 슬로건으로 새 정치를 하려고 모다 노력을 하고 있고, 부정을 척결한다 그래서 전직 대통령도 모다 갇히고 사형언도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 생각하면 받는 편은 깊은 참회(懺悔)가 있어야 할 것이고, 정말 그분들은 자기의 잘못을 정말 참회를 하고, 법의 공정한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고.

생각 생각이 참회하는 염불, 금강경이라든지 반야심경이든지, 고왕경 같은 경을 주야불철하고 읽어서 자기의 몸이 이 세상에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시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형을 당하느니, 무기징역을 당하느니 그런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고, 어떤 심판이 내리더라도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보통 고기들은 잡기 위해서 도마 위에다 올려놓으면 펄떡펄떡 뛰어서 도망가는데, 잉어는 큰 잉어도 도마 위에다 딱 올려놓으면 절대로 뛰지 않고 가만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 실제로 잉어를 잡어 보지 않아서 모르는데, 그런다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들었습니다.

일국에 대통령을 살고 참 고관대작을 지냈으면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을 하고 참회를 하고, 국가와 민족과 인류 앞에 참회를 하고, 조용하니 공정한 심판을 기다릴 줄 안다면 그것도 또한 멋진 죽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법에 있어서는 공정한 법에 의해서 처결을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우리 국민들은 소련 비행기가 떨어져서 141명이 죽은 것을 좋아할 필요가 없듯이, 그것을 보고 형이 약하느니, 가볍느니, 잘 죽었느니, 마땅히 죽어야 하느니, 이런 생각 우리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과연 나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는가? 우리 부모나 우리 형제나, 우리의 형제간에는 그런 잘못이 없는가?


죄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잘못은 우리 중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요, 치심(癡心)입니다. 탐심이 과(過)하고 진심이 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과하면, 그 시대 그 환경에 놓여지면 능히 그러헐 죄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없고 그런 기회를 타지 못하니까 그런 죄를 안 범한 것이지, 기회가 주어지면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어도 양심을 가지고 정심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계와 이백오십 계, 오백 계, 그런 계율이 불가(佛家)에는 엄정한 계율이 있는데,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율사(律師)와 청정한 스님네들은 모두가 다 그런 계율을 잘 지키려고 하시고 또 잘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마는 엄격히 말하면 소승계(小乘戒), 대승계(大乘戒)를 총망라해서 완전무결하게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아직까지는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대승계 단계에까지 가서 본다면 우리도 많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바로 범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용화사 이 경내에서는 '우리는 신문도 보지 말자. 라디오나 텔레비젼도 보지 말자. 온갖 잡지도 보지 말고 여기에 지내는 이 석 달 안거 동안에는 일체 그런 매스컴에 접하지 말고 오직 정진만 하자'고 우리가 결의를 해 가지고 그렇게 살고 있어서, 여기서 참선하고 있는 총무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네, 선방 스님네, 전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계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41분48초~61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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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이고, 부처님도 이미 그 나라를 떠나서 다른 나라에 가서 제자들과 모다 지내고 계신 그러한 처지에 계시면서도 당신의 조국이 고살라국에 의해서 침공을 당하게 될 때, 떠억 가서 고목나무 밑에 가서 앉아서 그것을 막으려고 하신 그 마음을 생각하면 우리도 우리의 조국에 대해서, 우리의 민족에 대해서 출가한 몸이지만 항상 부처님 앞에 이 나라가 편안하고 잘되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침 뱉고 욕하고 돌팔매질을 할 것이 아니라, 20세기 말기에 보살 화현이, 역행보살(逆行菩薩)이 이 나라에 화현(化現)으로 온 분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함직 하다고 나는 생각을 한겁니다.

그러면 역행보살로 태어나신 분이니까 거기다 대고 절을 하고 그러라는 것이 아니고, '그걸 보고 나를 반성하고, 세세생생에 내가 만약 그런 기회와 입장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에 대해서 부도덕한 방법으로 그것을 취하려고 하지 말아야겠다. 오욕락 · 명예 · 권리 · 지위 · 부귀영화라는 것이 정말 허망한 것이고,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고, 그런 것을 취득하기 위해서 법을 어기고 남을 해꼬자하지 말아야겠다' 이렇게 마음먹는다면은 우리는 그 역행보살들의 몸으로 보여준 역사적인 법문을 우리는 잘 뼛속 깊이 간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마음을 먹을 때 앞으로 우리들은 세세생생에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러한 짓을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죄가 크고 작은 차별은 있고, 종류는 다를지언정 한 생각 잘못 먹으면 그렇게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언제나 말씀드리듯이 '이뭣고?'인 것입니다.


같이 "이뭣고?"

(신도) "이뭣고?"


"이뭣고?"

(신도) "이뭣고?"


글자 석 자고 아무 맛도 없는 말이지만,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석 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요약해서 추출해서 낸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정말 옳게 읽고 그 뜻을 안 사람이면 '이뭣고?'밖에 할 것이 없거든.

그대신 '이뭣고?'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간곡히 말씀을 하셨지만,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로 따지는 것은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을 막힘이 없이 다 따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염기염멸(念起念滅)을 위지생사(謂之生死)니', 생각이 일어났다 그 생각이 꺼지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는 것이여.

생사가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생사라 하는 것은 그것은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범부(凡夫)들의 눈에서 볼 때 그러는 거고, 정법을 믿고 참선하는 분상에는 생각 일어나는—좋은 생각을 일으키거나, 나쁜 생각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이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꺼지면 죽은 거여.


그래서 일생 동안에 몇천만억의 생사를 되풀이하면서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 그 생사 속에서 끝없는 생사를 또 짓거든. 탐진치 삼독으로 또 무서운 미래의 과보를 위해서 또 생사업(生死業)을 짓는 거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할 바로 그때에 '이뭣고?'거든. 두 번째 생(生)을 받기 전에 바로 지금 당(當)한, 이 지금의 이 생애에서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이뭣고?'

몸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화두를 드는 거여.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가야지, 거기서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안 되는 거여.


열심히 하다 보면 많은 기복을 거쳐서 많은 망상과 번뇌와 싸우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삼년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 망상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순일하게 탁 들어진 때가 오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야! 인자 공부가 좀 잘되는구나'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내서도 안 돼.


화두가 독로해서 망상이 다 끊어져. 그것을 '적적(寂寂)하다' 그래서 적(寂)이라고 그러는데, 적적한 가운데에서도 너무 순일(純一)하고 깨끗하고 망상이 없으니까, 그 맑고 깨끗한 경계를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다보니까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잊어버린다 그말이여. 화두 들 생각마저도 없어져 버리는 거여. 너무 깨끗해.

화두를 오히려 생각을 일으켜서 '이뭣고?'하다 보면 그 깨끗하고 순일한 것이 깨질까 아까우니까, 화두도 놔 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이렇게 맛보고 있다 그말이여, 그 속에 들어앉아서. 그러면 그것은 적적한 가운데 화두에 대한 의단이 없으면 그것을 무기(無記)라고 그런 것이거든.


무기의 상태에서는 이 몸뚱이가, 이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는 거여.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을 해도 다리도 절이는 법도 없고, 허리도 아프지도 않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는 거여.

옆에서 흔들어야 간신히 알 정도로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가 오지마는 그 화두를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거거든.


적적한 가운데에도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성성(惺惺)하게 현전을 하도록 해 나가야 하는 것이거든. 그것을 영지(靈知)라 그래. 신령스럽게 안다, 영지라 그러는데.

적적한 가운데에도 화두가 성성하게 떠억 현전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지어나가면 불일성지(不日成之)다. 머지않아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고 자기의 면목(面目)을 보게 된다. 이것은 고조사(古祖師)들이 한결같이 말씀한 바입니다.


그런데 정진을 하다 보면 공안에 대해서 그전에는 전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전혀 짐작도 안 가고 아지를 못했는데, 어떠한 찰나에 '아!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 도리를 이른 것이로구나!' 이렇게 지견(知見)이 생겨 가지고 무슨 공안이든지 보면 막힘이 없어. '정전백수자'도, '부모미생전본래면목'도, '마삼근'도 하나도 막힌 일이 없다 그말이여. 자기 나름대로.

'아, 이것이 견성이로구나!' 그래가지고 이분 저분 찾아가 보면 더러 인가 받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고 또 부정을 받기도 하고 그러는데, 정말 그러한 경계에 이르러서 명안종사(明眼宗師)를 찾아가서 분명하게 간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진하다가 그런 소견이 난 것은 참, 도반의 입장에서 참 대단히 반갑고도 조심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반갑다'하는 것은 '얼마나 열심히 정진을 했으면 순일무잡한 그런 경지를 거쳐서 그런 경계가 났을까?' 그 점까지는 대단히 반가운데, 염려가 되는 것은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그러한 정각(正覺)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일과성으로 일어나는 잠깐 스쳐가는 그런 경계를 본인이 그것을 잘못 착인(錯認)을 해 가지고 거기서 공부가 중단이 되면 어쩔까?' 그것이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법은 만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렵고, 그것을 직접 몸을 던져서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몸을 던져서 여러 해를 정진하다가 어떤 경계가 났는데, 그 경계가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그것을 여지없이 내던져 버리고 정말 초학자(初學者)의 입장, 완전히 초학자의 입장에 돌아가서 다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감으로 해서 20세기 말기에 정말 정법을 일으킬 대도인(大道人)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황벽선사(黃檗禪師)라고 하는 임제종(臨濟宗)의 대법통(大法統)을 이으신 선지식의 게송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생사(生死)의 진로(塵勞)를 해탈(解脫)하는 것이 일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말이거든.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緊)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을 지을지니라. 승두는 정진할 때에 화두, 화두를 정말 여법하게 잘 들으라 그거거든.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한번 뒤쳐서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피는 매화라야 그 매화의 향기가 코를 치는 것이지,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뜨뜻한 겨울 끝에 매화꽃이 피면 향취(香臭)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왕 정진을 할 것이면, 정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의리(義理)로 따져서 의리로 알아 가지고 체중현(體中玄), 그러한 경계에 머물러서야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나 가지고 너무너무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황벽선사에 게송으로써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61분49초~1시간19분15초) (끝)





[법문 내용]


(게송)파납몽두올연좌~, (게송)종두생두영수형~ / 유마거사 불이법문(不二法門), 유마(維摩)의 두구(杜口) / 송담스님의 출가 묵언, 10년 묵언 후 전강 조실스님의 '이제 묵언 트라'는 명령.


인과(因果)의 법칙을 피하고는 살 수가 없다 / 고살라국 유리왕에 멸종된 부처님의 조국 가비라국, 두 나라의 과거 인연 / 부처님의 두통 인과 /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 하나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인연 / 우리나라에 6.25동란이 왜 일어났을까? / 보복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하지 말라. 반드시 안좋은 과보가 있다 / 중생이면 누구나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입니다.


역행보살(逆行菩薩) /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이뭣고?'를 해야 한다 / 팔만대장경을 요약해서 추출한 것이 바로 '이뭣고?' / 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生死) /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03-104. (가로판 p101~103)



나는 학생 때 그 유마경(維摩經)을 읽고서 그 유마거사가 양구를 한 그 뜻을, 그 참다운 그 진리를 어찌 내가 알았으리요. 진짜 깨달은 것은 아니고, 속담에 「웅변은 은(銀)이라면 무어(침묵)는 금(金)」이라든가 그런 속담도 있듯이 '정말 그 말을 안 함으로써 최고의 진리를 여지없이 표현한 도리가 있구나' 껍데기로, 겉으로 그러한 느낌을 가졌어.

'내가 만약에 출가해서 중이 되면 일생 동안을 말을 하지 않고 완전히 벙어리가 되어서 수행을 하고, 벙어리로서 일생을 마치리라' 이러한 건방진 생각을 했었습니다.


일체 허영도 없고, 시새우고 부러워할 것도 없고, 법률이나 역사에 대해서도 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심판을 받고 그럴 두려워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큰 권리도, 큰 명예도, 큰 재산도 없는 그냥 평범한 인생을 살면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고, 여법(如法)하게 하루하루를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은 얼마나 고상하고, 떳떳하고, 멋진 삶을 살고 있는 여러분인 것입니다.


무량겁이 지났고,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신 성현 가운데 대성현이신 부처님께서도 그때 그 고기들의 대가리를 때린 그 과보로 머리 골이 아프셨어. 인과라 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여. 부처님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정업(定業)은 면치 못한다'고 하는 조항이 바로 거기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 교육도 시키고, 글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다리 놓고 집 짓는 법도 가르키고, 도자기 굽는 법도 가르키고, 모든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서 가르켰는데, 왜 세계에서 제일 미워하고, 제일 못살게 한국을 못살게 구냐?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이놈들을 언제라도 이 버릇대기를 고쳐줘야, 한 생(生)을 성불을 늦게 하더라도 이놈들을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그런 생각을 먹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신통력으로 본 것이 아니고 가만히 이치를 미루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야가 망하니까 나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신라가 망하니까 거리 도망가서 살고, 고구려 · 고려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가서 살고, 백제가 망하니까 거기 들어갔다 그말이여.


여기서 망한 사람들이 거기를 갔으니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언젠가는 힘을 길러 가지고 권토중래(捲土重來)를 해야겠다. 다시 한국을 뺏어서 다시 한국을 차지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놓으니 처음에 1대, 2대, 3대에 올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해 내려오지만, 5대, 10대 지나가서 부터서는 그런 생각 다 잊어버리고 몰라. 모르지만, 잠재의식 속에는 그게 다 있다 그말이여.


죄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잘못은 우리 중생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누구에게나 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요, 치심(癡心)입니다. 탐심이 과(過)하고 진심이 과하고 어리석은 생각이 과하면, 그 시대 그 환경에 놓여지면 능히 그러헐 죄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없고 그런 기회를 타지 못하니까 그런 죄를 안 범한 것이지, 기회가 주어지면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있어도 양심을 가지고 정심을 가진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계와 이백오십 계, 오백 계, 그런 계율이 불가(佛家)에는 엄정한 계율이 있는데,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율사(律師)와 청정한 스님네들은 모두가 다 그런 계율을 잘 지키려고 하시고 또 잘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마는 엄격히 말하면 소승계(小乘戒), 대승계(大乘戒)를 총망라해서 완전무결하게 지킬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 한 분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아직까지는 큰 죄를 범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대승계 단계에까지 가서 본다면 우리도 많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바로 범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가 크고 작은 차별은 있고, 종류는 다를지언정 '한 생각' 잘못 먹으면 그렇게 죄과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언제나 말씀드리듯이 '이뭣고?'인 것입니다.

글자 석 자고 아무 맛도 없는 말이지만, 무서운 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현명한 길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석 자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요약해서 추출해서 낸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을 정말 옳게 읽고 그 뜻을 안 사람이면 '이뭣고?'밖에 할 것이 없거든.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一 起滅卽盡 起滅卽盡處 謂之寂 寂中 無話頭 謂之無記 寂中 不昧話頭 謂之靈 卽此空寂 靈知 無壞無雜 如是用功 不日成之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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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