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20. 11. 15. 11:14

(세등선원No.31)—경신년 동안거 반결제 법어(80.11.22) (44분)

(1) 약 22분. (2) 약 22분.

(1)------------------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

청산불어춘천모(靑山不語春天暮)  두우일성래묘망(杜宇一聲來杳茫)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偈頌)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고향에 돌아가셔서, 고향에 가셔서 읊으신 게송입니다. 출가하셔 가지고 도를 닦아서 견성(見性)하신 뒤에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서 느끼신 바를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런데 그 고향이 당신이 태어난, 육신이 태어난 그 고향에 돌아가서 그래 가지고 읊었다고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그 깨달음의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셔서 읊었다. 이렇게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십년래반고향(三十年來返故鄕)하니,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니,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이라, 사람도 죽고 집도 다 허물어지고 마을도 또한 다 황폐해 버렸더라.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푸른 산은 말이 없고 봄 산은 저물었는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이라. 두견새, 두견이 한 소리가 아득히 오는구나.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이 게송, 도인(道人)이 읊으신 게송(偈頌)이라 하는 것은 중생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 가지고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깨달은 참 경계는 설명해 줄 수도 없고 또 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글의 그 뜻은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인망택폐우촌황(人亡宅廢又村荒)은, 중생의 온갖 분별심, 사량심 그런 것, 번뇌 망상 이런 것들이 다 끊어져 버린 경계를 읊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고.

청산(靑山)은 불어춘천모(不語春天暮)헌데  두우일성내묘망(杜宇一聲來杳茫)은, 바로 그 깨달은 경지를 읊으신 것이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얘기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언제나 말을 한 바와 같이,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도 누누이 말씀을 하신 바와 같이—아난존자(阿難尊者)가 30년을 부처님 시자(侍者)를 했는데,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한마디, 한 글귀도 놓치지 아니하고 다 그것을 듣고 다 외우고 있었다 그말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깨닫지를 못했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30년 동안을 시봉(侍奉)을 하면서 다 법문 한마디를 놓치지 아니하고 주르르허니 녹음해 놓은 것처럼 그렇게 다 외와 알고 있는데, 지금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은 어느 강원을 가거나, 어느 선방을 가거나 다 칭찬을 할 것이여. 그런데 왜 부처님은 꾸짖으셨습니까?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도(道)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여.


요새 참선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참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고 있는데, 특히 거사들, 청년들, 학생들, 굉장히 그 참선에 대한 열의가 있어서 모다 이 공부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또 비구니 스님들이 그렇게 여기저기 선방이 꽉꽉 차 가지고 모다 정진을 할려고 애를 쓰고 있고,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모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나, 참선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제각기 바르게 한다고 생각하고 애를 쓰고 있지만, 공부하고 있는 내용을 잘 알아보면 썩 그렇게 올바르게 하고 있는 사람이 적더라. 어째서 그러냐?


'그 스승이 어떻게 참선을 지도를 하고 있느냐? 어떻게 지도하는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느냐? 어떠한 방법으로 참선을 하느냐?' 그것이 대단히 중대한 문제가 되아 가지고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법은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 이외의—화두에 대해서 사량심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더듬어서 그렇게 짐작해 가고 그러한 참선은 올바른 참선이 아니다.

그런데 간혹 들으면, 와서 자기 공부해 나가는 경계, 소증처(所證處)를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떠한 선지식(善知識)은 화두(話頭)를, 자기 본참화두를 놔두고 이 공안 저 공안을 힌트를 줘 가면서 설파(說破)를 해서 학자로 하여금 무슨 화두에 대한 알음알이로 해석을 하도록 은근히 그렇게 이끌어 가는 그러한 큰스님이 계시지 않은가?


내가 직접 그 선지식을 만나서 듣지는 안 했지만, 그 선지식 밑에서 공부를 해 가지고 거기서 '어떠한 공안을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어떻게 어떻게 보았다' 그래 가지고 나한테 와서 그것을 점검을 받으러 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그렇게 와서 얘기한 것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는 생각을 하나,

그 와서 말한 사람한테는 '니가 잘못 알아들었지 그 스님이 그렇게 지도를 할 까닭이 없다'고 그렇게 말을 막아 버리기는 했지만, 혹 여러분 가운데에도 그러한 식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정코 그것이 바른 참선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분별심, 설파를 해 가지고 그 학자로 하여금 가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앙화(殃禍)를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화두를 들고 숨을 거두어야만,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금방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또 공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내생에는 젊어서, 이 금생에 공부한 그 뒤를 이어서 하게 되기 때문에, 바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지만,

금생에 마지막 죽을 때까지라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내생에 다시 정법(正法)을 만나게 될는지 기약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삿된 스승 밑에 가서 외도(外道)의 제자가 되기가 십상팔구(十常八九)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삿된 도를 만나서 삿되게 닦으면 결국은 무엇이 되는 것이냐 그말이여.



오늘이 동짓달 그믐날 가져야 할 법회를 땡겨서 오늘 스무 이튿날 반살림 법회를 갖게 되는데, 벌써 경신년 삼동안거(三冬安居)가 벌써 절반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그 1분 1분이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해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한 달이 지내고, 그렇게 해서 석 달 90일 동안이라고 하는 기간이 길다고 하면 길지만, 잠깐 새다 그말이여.


벌써 절반이 지내갔는데 과연 지나간 반살림 동안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을 했는가? 오늘 한번 각자 반성을 해 볼 것이며, 과연 지난 반살림 동안을 알뜰하게 철저하게 정진을 했나 못했나?

철저하게 정진을 한 사람은 앞으로 남은 반살림을 더욱 철저하게 정진을 할 것이고, 반성을 해 본 결과 '아무래도 내가 실다웁게 정진을 못했다, 알차게 공부를 못했다'고 반성이 된 사람은 그 부족한 점을 돌이켜서 정말 철저히 공부를 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을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듣자하니 이 세등선원은 한철 한철, 철을 거듭할수록 좋은 수좌(首座) 스님네들이 모다 모여서 그 정진을 애써서 정진을 한단 말을 항시 듣고 흐뭇하게 생각한 바지만, 과연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알뜰하게 공부를 하는 것인가?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나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 가행정진 하는 때가 오는데, 원래 인천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생존 시부터 납월팔일 용맹정진을 하지를 못하게 하시고, 평상시와 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정진을 하되 방선(放禪) 시간이라 하더라도 잡담을 하지 말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일여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권장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도 용화사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마는, 여기 세등선원은 그전에부터 11시나 12시, 평상시보단 두서너 시간 늦게 자고 또 3시에 일어나고, 일어나서 정진을 하되 입방선(入放禪) 없이 죽 묵언하고 정진을 하도록 이렇게 죽 해왔는데,(처음~21분39초)





(2)------------------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그리고 앉아서만 배기는 것이 과연 그것이 가행정진이며, 용맹정진이냐? 또는 아주 무언(無言)을 하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일종(一種)을 하고 때로는 단식을 하고 그러한 것이 과연 용맹정진이냐?


잠을 안 자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불면증(不眠症)이 걸린 사람은 참으로 용맹정진을 잘할 것이고, 옆구리를 땅에다 대지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서 용맹정진을 할 것이 아니냐?

말을 아니한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벙어리는 참으로 공부를 잘할 것이고, 밥을 한 끼니나 두 끼니를 굶는다든지 안 먹는 것이 용맹정진이라면 소화가 안되어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참으로 공부를 잘하게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대관절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눈으로 온갖 것을 색상을 보고, 귀로 온갖 소리를 듣고, 코로 온갖 냄새를 맡고, 혀로 온갖 맛을 보고, 몸으로 온갖 촉감을 느끼는,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10년 전, 20년 전, 백 년 전도 왔다갔다하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는 놈, 이 소소영령한 놈!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여.


여기 앉아서 저 십 리 밖이나 백 리 밖에 서울이나 인천을 생각하면 환허는—그 인천 생각한다고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고, 서울 일을 생각한다고 해서 골치 아퍼지는 사람이 어디가 있어.

서울도 생각하면 환한 그러한 정도의 생각으로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것이 벌써 화두를 들고 있는 거여. '이뭣고?'

알 수 없으면 그게 화두를 들고 있다고 하는 사실. '이뭣고?' 「이-하는 이놈이 뭣고?」

먹으면서도 '이뭣고?' 옷을 입으면서도 '이뭣고?' 세수를 하면서도 '이뭣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현전(現前)하도록.


누워 있다고 화두가 안 들려?

포행(布行)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면 그 성성(惺惺)한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어!

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고, 마루에서 밖으로 나가서 신을 신을 때, 왜 화두가 없어?


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서 문을 닫고 정진을 하니 방안 공기가 탁해지면 자연히 혼침(昏沈)이 오기가 쉬운 것이니, 가끔가끔 문을 열어서 방안 공기를 산산하게 하고. 불을 너무 뜨시게 때 가지고 방안 공기가 더웠다 하면 전체가 꾸벅꾸벅 졸으니까 방안 공기가 18도, 19도, 20도 이상 넘어서는 아니 되고.

불을 때는 사람은 그 불 조정을 잘 하고, 방안 공기가 항시 시원하고 산산하도록 그렇게 맑아야 이 혼침에 빠지지 아니하고 정진이 깨끗하게 잘되는 것이니, 그런 것도 지혜롭게 잘 조정을 하고.


앉어서 너무 혼침이 오면 조용히 나가서 밖에 가서 한 5분간 잠깐 포행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해 가지고 그래 또 들어와서 정진하고 하면 참 좋은데, 여럿이 이렇게 대중이 지내는 데에는 자기 혼자 자꾸 들랑달랑해 쌓아도 그것이 또 번폐스러운 것이니까, 그런 것도 잘 대중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잠 깨우러 나간다 해 가지고 어문간 다른 방에 들어가서 잡담을 한다든지, 또는 시내에 개별적으로 자꾸 무슨 이유를 붙여 가지고 시내를 출입을 자주 한다든지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고.


정진을 해 보면 성성하게 화두가 잘 들릴 때는 시간이 한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중을 모르게 휙 가는데, 영 화두가 잘 들리지 아니하고 혼침에 빠져 가지고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바로 또 혼침에 빠지고 빠지고 할 때는 영 시간이 지루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무릇 몸이 아주 이 개운치를 못하고 그러는데.

그러할 때에 참으로 알뜰하게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서 가다듬어서 화두를 잘 들어 가야 하는 것이여. 그렇게 공부를 지혜롭게 용심을 해서 지어 가다 보면, 또 화두가 순일하게 또 잘 들리는 때가 또 오는 거여.


앉아서나 서서나 행동을 할 때나 누웠을 때나, 화두가 순일하게 지내서 입선 시간이나 방선 시간이 관계가 없이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나타나는데, 마치 가을 하늘처럼 깨끗한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이 경계가 된다.

애써서 정진을 하면 누구에게나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하게 들리면서 그렇게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가 오기 마련인 것이여.


그러한 경지가 오거든, 그러한 경지를 잘 유지를 해 가면서 조금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이러한 경계가 오래오래 계속이 되기를 바래는 그러한 마음도 내지 말고 한결같이 정진을 해 가면, 적적성성(寂寂惺惺)하고 성성적적해서 이 생각이 왔다가 저 생각이 일어나고, 저 생각이 일면 저 생각이 나고 이러한 심로(心路)가, 마음길이 끊어지게 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이 몸뚱이가 이 인간 세상에 있다고 하는 사실까지도 느끼지를 못해. 그래 가지고 화두가 면면밀밀(綿綿密密)해서 끊어지지 않고.


그러한 때에 지각심(知覺心)을 내서는 안 돼. '이럴 때 툭! 깨달랐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나로 하여금 툭!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거여. 그러한 생각을 내면 그런 생각을 낼 때 벌써 화두 순일(純一)함을 상실하게 되는 거여.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잘 들려도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이럴 때 빨리 깨닫기를 바래는 생각도 내지를 말고, 깨닫기를 기달지를 아니하면서 한결같이 공부를 잘 지어 나가면, 앉아서도 화두가 순일하고, 서서 거닐 때도 화두가 순일하고,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순일하게, 똥을 눌 때도 순일하고, 일을 하고 소지를 하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화두가 순일하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도 고대로 화두를 든 고대로 잠이 들고,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리고, 그 이튿날 아침에 눈을 딱! 뜨면 엊저녁에 들고 자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말이여. 새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고 잠이 들었는데 그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가 있다.


마치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 밝은 하늘에 달이 맑은 물에 비추듯이, 물결이 쳐도 그 밝은 달빛이 그 활활발발(活活潑潑)하게 그 물결 속에—물결은 겉으로 물결은 쳐도 그 물을 뚫어서 저 밑바닥에 비친 그 달빛은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아무리 흔들어도 그 없어지지 아니한,

가운데도 적적(寂寂)해서 흔들림이 없고, 외부로부터 아무리 충격을 가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이렇게 되어 가면 머지않아서 의단(疑團)을 파(破)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는 거여.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이 화두를 본참화두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야만! 이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그래서 가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들어보면, 오늘도 그 소당파(燒堂婆) 법문도 조실 스님이 해 주셨고, 여러 가지 공안에 대해서 그 말씀하셨지만, 절대로 이 공안이라는 것은 깨달라야만 바로 볼 수 있게 되는 거여. 깨닫지 못하고서는 아무리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 수 없는 것이고, 알아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여.

설사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공안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본참, 본참화두(本參話頭)에 충실해야 해. '어째서 무라 했는고?' 무(無)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요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생사해탈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라. 긴밀히 이 화두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한 뒤에 매화가 피어야 그 매화꽃 향기가 천하를 진동을 하는 것처럼, 정진을 참으로 알뜰히 가행정진, 용맹정진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확철대오를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반살림 동안 정말 정진을 잘해서 확철대오 하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21분40초~43분37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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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십년래반고향~' ; 『청허당집(淸虛堂集)』 3권. '환향(還鄕)'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 : 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난존자(阿難尊者) : [범] Ananda 음을 따라 아난타(阿難陀)로 쓰고, 줄여서 아난(阿難) 또는 아란이라 하며, 뜻으로 번역하여 환희(歡喜) 또는 경희(慶喜)라고 하니, 「기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사촌이며 조달(調達)의 친 동생이다。부처님 성도하시던 날 밤에 났고,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25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侍者)로 있었으며 십대제자 가운데서도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그 총명이 놀라웠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가섭존자의 주관으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畢鉢羅窟 Vaibhara)에서 오백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데 아난존자는 그 때까지 아직 성과(聖果)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가, 가섭존자에게 묻기를 『부처님께서 사형(師兄)에게 법을 전하실 때에 금란가사(金襴袈裟) 말고 따로 무엇을 전하신 것이 있읍니까?』


『아난아』

『예?』


『문 밖에 찰간(刹竿)대를 꺾어 버려라! 』하였다。그러나 아난은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용맹정진 사흘 만에야 비로소 크게 깨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다 외니 하나도 틀림없음을 대중이 증명하여 경의 결집이 완성된 것이다。그 후 가섭존자로부터 법통(法統)을 받았다가 상나화수(商那和修)에게 법을 전하였다.

*시자(侍者) ; ①시중(侍從)을 드는 사람. ②스승, 장로를 따라서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승(高僧)의 가까이서 시중을 들고 명령에 따르며, 항상 용무를 다하는 제자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시기를 「니가 천일 동안을, 여천일학혜(汝千日學慧)가 불여일일학도(不如一日學道)니라. 천일 동안 혜(慧)를 배운 것이 하루 도(道)를 배운 것만 못한 것이다. 약불학도(若不學道)면, 만약 도를 배우지 아니하면, 적수(滴水)도 난소(難消)니라. 한 방울 물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난존자를 부처님께서 꾸짖으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설파(說破) ;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71. (가로판 p179)

本分宗師의  全提此句는  如木人唱拍하며  紅爐點雪이요  亦如石火電光이니 學者實不可擬議也니라  故로  古人이  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이요 只重先師不爲我說破라 하시니라


본분 종사가 이 구를 온전히 들어 보이심이 마치 장승이 노래하고 불 붙는 화로에 눈 떨어지듯 하며, 또한 번갯불이 번쩍이듯 하니 배우는 자가 참으로 어떻다고 헤아리거나 더듬을 수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어른이 그 스승의 은혜를 알고 말씀하기를 「스님의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스님이 나에게 설파하여 주지 않은 것을 중하게 생각한다」고 하시니라.


[참고 ②]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80-181) (가로판 p171~172)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참고 ③] 송담스님(No.122)—1980년 5월 첫째일요법회 (80.05.04)에서.

학자(學者)에게, 참선(參禪)을 하려는 사람에게 이 공안을 설파해 주면 이 세상에 제일 큰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은 자기 힘으로 자기의 힘으로 타파(打破)를 해야지, 이론을 통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타파를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지, 이 공안을 갖다가 요리조리 힌트를 줘가지고 알것께 맨든 것은 이것이 바로 사구선(死句禪)이 되아서 그것은 그럴싸하니 답을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깨달을 분(分)을 없게 맨들아 주는 것이 되는 것이여.


참선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중생(衆生)이라고 하는 병을 앓고 신음을 하던 사람이 겨우 인자 그 병을, 병근(病根)을 끊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공안을 갖다가 설파를 해주면 겨우 일어설라고 몸부림친 놈을 여지없이 몽둥이로 쳐서 꺼구러뜨려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어가지고 일어설라 말라 하는데 몽둥이로 쳐서 꺼꾸러뜨려 버리니 인자는 그 사람은 일어나기가 틀린 것입니다. 공안을 설파해 준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57분59초~59분25초)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천 인, 만 인이 공부를 해도, 이 문중에 들어와서 공부를 해도 겨우 세 개, 너댓 개, 3,4명—천 명 가운데에, 천만 명 가운데에 다못 세 사람이나 댓 사람 정도 밖에는 도를 얻은 사람이 없는 까닭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지 못하고,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고 앉았기 때문에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결국은 재앙(災殃)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금생에 올바르게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그 재앙이 누겁(累劫)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벽 선사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 『전심법요(傳心法要)』 황벽선사(黃檗禪師) 「此門中千人萬人 只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인(千人)·만인(萬人)이 있지만 겨우 서너, 너댓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이 도 닦는 일을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금생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오랜 세월(累劫) 남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누겁(累劫 묶을·포갤·쌓을 누/겁·오랜 세월 겁) ; 여러 겁이 쌓여서 이루어진 기간. 곧 한없이 길고 오랜 시간.

*황벽(黃檗) : (? – 850) 법명은 희운(希運),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민현(閩縣)에서 났다。어려서 신동이라고 불리더니, 강서성 서주부 황벽산에 가서 출가하였다가, 백장에게서 마조의 할에 백장이 깨치던 사연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크게 깨치고 나서 백장의 법을 이었다。그 뒤에 배휴(裵休)의 청을 받아 여러 곳에서 교화하였으나, 가는 곳마다 그 산 이름을 처음 출가하던 산 이름 그대로 황벽산이라 하였다.

그가 염관사(鹽官寺)에 있어 예불하는 자리에서 뒷날의 선종(宣宗)이 그에게 법문을 묻는데, 그가 세 번이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뒤에 선종이 즉위하여 그에게 「추행사문(麤行沙門)」 곧 행실이 거친 중이란 법호를 주려고 하자, 배휴가 간하기를 『황벽선사가 폐하에게 세 번 손질한 것은, 폐하의 삼제(三際 곧 三世) 윤회를 끊는 뜻입니다』하여 단제선사(斷際禪師)의 호를 내리게 되었다.

*정법(正法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정법시대(正法時代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십상팔구(十常八九) ; 열[十]에 여덟이나 아홉 정도로 거의 예외가 없음.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사분정진(四分精進) ; 참선이나 기도를 하루 네 번(새벽, 오전, 오후, 저녁)씩 시간을 정해 정진하는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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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오전에만 걸식(乞食)으로 공양하도록 하고, 오후에는 씹을 수 있는 음식은 먹지 않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염념불망(念念不忘) ; 생각 생각에 잊지 않음.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한 물건 ; 일물(一物). 일상(一相). ‘한 물건’ ‘한 모양’이란 불교에서 진여(眞如)의 본체를 들어 일컫는 말이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3. (가로판 p12~14)

有一物於此호대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하여, 일찌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음이로다.


註解(주해) 一物者는  何物고  〇 古人이  頌云, 古佛未生前에  凝然 一相圓이라 釋迦도  猶未會어니 *迦葉이  豈能傳가 하니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이라  名不得狀不得也라


한 물건이란 무엇인가?  〇 옛 사람이 송하기를 「옛 부처 나기 전에 한 상이 두렷이 밝았도다. 석가도 몰랐거니 가섭이 전할손가」하니, 이것이 한 물건의 나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니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까닭이다.


六祖가  告衆云하사대 吾有一物하니  無名無字라  諸人은  還識否아 하시니 神會禪師가 卽出曰, 諸佛之本源이요  神會之佛性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孽子也라

懷讓禪師가  自嵩山來어늘  六祖問曰, 什麼物이  伊麼來오 師가 罔措라가 至八年에사  方自肯曰, 説似一物이라도  卽不中이니다 하니 此所以爲六祖之嫡子也라


육조스님이 대중에게 이르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너희들은 알겠는가?”하시니 신회선사가 곧 나와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요, 신회의 불성입니다”하니, 이것이 육조의 서자가 된 까닭이다.

회양선사가 숭산에서 와뵈니 육조스님이 물으시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시니 회양은 어쩔줄을 모르다가 팔 년 만에야 깨치고 나서 말하기를 “설사 한 물건이라 하여도 맞지 않습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육조의 적자가 된 소이이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육단심(肉團心) : [범] Hrdaya  4심의 하나。 심장을 말함。 8판(瓣)의 육엽(肉葉)으로 되었다 한다。 의근(意根)이 의탁한 곳.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어문간 ; '애먼'의 사투리.

*애먼 ; ①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억울하게 느껴지는. ②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게 느껴지는.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면밀(綿密)이란 말을 거듭하여 뜻을 강조한 것으로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빈틈없이 빽빽하게 죽 잇따라 들어차 있다'는 말. 끊이지 않고 빈틈없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면면(綿綿 솜·이어질·연속할 면) ;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계속 이어지는 것.

*밀밀(密密 빽빽할·촘촘할 밀) ; 빈틈없이 빽빽히 들어찬 것.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이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활발발(活潑潑)하다 ; 더없이 활발하다(생기 있고 힘차며 시원스럽다).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의단(疑團)을 파(破)해 ; 화두(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를 타파(打破).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이러한 세 가지 단계를, 정진을 애써서 하다 보면 그러한 경지를 만나게 될 것이여. 이 공부는 결정코 정진을 알뜰히 하는 데에서 이러한 경지를 만나게 되는 거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세 개[三箇]의 정절(程節). 세 가지 단계.

*정절(程節) : ①길목. 길가는 데 종요로운 어귀. ②공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고비.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p60~64. (가로판 p60~63)

趁逐工夫하야 始終에 不離靜淨二字호리니 靜極하얀 便覺하고 淨極엔 光이 通達하나니라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 정(靜)과 조촐할 정(淨) 두 자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靜]이 지극하면 곧 깨칠 것이요 조촐함[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나니라.


氣肅風淸하야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가 是第一箇程節이니 便宜乘時進步이니라


기운(氣韻)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을 때, 이것이 첫번째 정절(程節)이니, 곧 마땅히 그 때를 타서 나아갈지니라.


如澄秋野水하며 如古廟裏香爐相似하야 寂寂惺惺하야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고 但見箇話頭綿綿不絕하리니 到這裏하얀 塵將息而光將發하리니 是第二箇程節이니라 於斯에 若生*知覺心하면 則斷純一之妙하리니 大害也이니라


마치 맑은 가을 들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야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인간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못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리니, 이 속에 이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니라.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우니라.


無此過者는 動靜에 一如하고 寤寐에 惺惺하야 話頭가 現前호대 如透水月華하야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하야도 不散하며 蕩하야도 不失時에 中寂不搖하며 外撼不動矣리니 是第三箇程節이니 疑團이 破하야 正眼開가 近矣리라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자나깨나 성성하야 화두가 앞에 나타나되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 여울물결 가운데 있어 활발발(活潑潑)하야, 대질러도 흩어지지 않으며 헤쳐도 잃지 아니한 때, 중심이 고요하야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니 의단이 파하야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리라.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조사공안(祖師公案) ; 조사가 시설(施說)한 선(禪)의 관문으로서의 공안.

*소당파(燒堂婆) 법문 ;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제30권 1463칙 ‘고목(枯木)’ 『선문염송 · 염송설화(禪門拈頌拈頌說話) 10』 (혜심·각운 지음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428~429.

昔有婆子 供養一庵主 經二十年 常令女子 送飯給侍 一日令女子抱定云 正伊麽如何 庵主云 枯木倚寒嵓 三冬無暖氣 女子歸擧似婆 婆云我二十年 只供養得箇俗漢 遂發起燒却庵


옛날에 어떤 노파가 한 암주(庵主)를 20년 동안 공양하였는데, 항상 딸에게 밥을 보내 시봉(侍奉)을 하곤 했다. 어느 날 딸로 하여금 꼭 껴안고 물어 보게 하였다. “이럴 때, 어떠하십니까?”

암주가 말하였다.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댔으니, 삼동에 따사로운 기운이 없도다”

딸이 돌아와서 노파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노파가 말하였다. “내가 20년 동안 겨우 속한(俗漢)을 공양했구나”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서 암자를 불질러 버렸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45~47.

만공 스님 당시 각 회상(會上)에서 논란된 바 있는 ‘소당파(燒堂婆)’라고 하는 공안이 있는데, 어떤 암주(庵主)가 공부를 하는데 시주 노파 한 분이 그 스님을 20년간 양식을 정성껏 대어드렸다.

20년이 다된 어느 날, 그 노파는 암주 스님의 공부가 얼마나 되었는지 시험해 보려고 자기의 예쁜 딸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네가 가서 그 스님을 꼭 껴안고, <스님!  이러한 때 어떻습니까?>라고 물어보아라” 하였다.


딸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하였더니 그 암주가 답하기를, “고목이 찬바위에 의지하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다.(枯木倚寒岩 三冬無暖氣)”라고 하였다.

딸은 그대로 어머니께 전했다.  노파는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암주의 패궐(敗闕)을 알아차리고 토굴로 가서 “내가 저런 속한(俗漢)이한테 20년간 양식을 대었구나!” 하고는 암주를 쫓아내고 암자를 태워버렸다.


어째서 그 노파는 그렇게 청정하게 지내온 암주를 속한이라고 했을까?  암주는 어째서 속한이를 면치 못하고 쫓겨나야만 했겠는가, 이 무슨 연고인가?  이것이 공안인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그 당시 큰스님들께서 모두 한마디씩 하셨지만 일일이 다 적을 수는 없고 몇 개만 적어보면, “원앙이 녹수(綠水)를 만났다.” “직접 경계를 쓰겠다.” “배필이 되어 살겠다.” “할을 하겠다.” “방을 쓰겠다.” 등의 답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공안에는 ‘할’도 ‘방’도 소용없는 것이다. ‘방’ 내릴 때 벌써 속인이 되어버린 것이고, ‘할(喝)’ 할 때 계행은 파한 것이다.  위에 적은 어떤 답도 속한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대승계는 부처님께서도 범하지 않고서는 설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공안이 대승계를 판단하는 공안인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답을 조금이라도 지체하며 찾다가는 벌써 파계승이 되어 버리는 것이니, 함부로 여기에 대해서 입을 열 수가 있을까?  이러한 공안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야 어찌 중생에게 대승계를 함부로 설하겠는가?


큰스님네께서 이르신 답이 많이 있었지만 나로서는 “아닙니다.” 라고만 하여 왔다.  여러 번 답을 이르라는 요청도 받았지만 답할 것이 따로 있지, 이와 같은 공안에 함부로 답을 할 것인가.  미래 학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오늘날까지도 끝내 답을 이르지 않았다.

금봉 스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번 일러 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일러 드리지 않았다.  지금은 금봉 스님마저 돌아가셨으니 누구에게 일러 볼 것인가, 죽어 황천에 가서 염라대왕에게나 일러볼까?

공부하는 학자들이여!  확연(廓然)한 뒤에 한 번 찾아오면 그때는 산승이 더불어 탁마하리라.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긴밀히(緊密- 긴하다·꼭 필요하다·팽팽하다·급박하다 긴/빽빽하다·빈틈없다·자세하다·가깝다 밀) ; 서로의 관계가 틈이 없을 정도로 매우 가깝게.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법문 내용]


(게송)삼십년래반고향~ / 황벽선사 『전심법요』 「被佛訶云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 도(道)는 교리적으로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가리킬 수 없고, 따져서 배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얼마만큼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했는가? /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신심 · 분심 · 의단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 삼개정절(三箇程節) / 조사공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 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공안을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고 또 설파를 해 그 학자로 하여금 가늠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하는 이러한 참선은 백년을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해서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걸림이 없이 환히 다 안다 하드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요, 마침내 분별심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생사해탈을 못하는 것이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하고 앉았어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일 동안을 지혜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도 배운 것만 같지 못하다. 참으로 올바르게 도를 닦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한 방울의 물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이렇게 부처님께서 아난존자를 꾸짖으신 바가 바로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여.


삿된 방법으로 그릇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금생에 도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앙을 누겁을 두고, 여러 겁을 두고 받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공부를 하기는 올바른 방법으로 받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善知識)들이 참 일생 동안을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 애써서 정진한 스님네도 마지막 열반(涅槃)하실 때에는 한결같이 '내가 일생 동안 실컷 정진을 못하고 가는 것이 참 한스럽다'고 이러한 말씀을 남기시고 열반에 드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잠을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밥을 안 먹고, 말을 안 한 것이 절대로 그것이 그것만으로 용맹정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여.

먹을 때 먹고 잠을 잘 때는 자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시 간절한 마음으로 일여(一如)하게 본참화두를 들고 거각(擧却)을 하고, 염념불망(念念不忘), 생각 생각이 잊지 않고 간절하게 화두를 거각하면서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독로(獨露)해야 이것이 바로 용맹정진이다.


'암만 해도 화두가 의심(疑心)이 안 난다' 이런 말들을 가끔 듣지만, 어째서 의심이 안 나? 그러면 다 깨달라서 의심할 것이 없단 말인가? 깨닫지 못한 사람이면 어째서 의심이 없을 것이냐 그말이여.


일체 것은 다 눈을 통해서 보되 그 「한 물건」은 아무리 볼려고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일체 것을 다 만져 보고 잡을 수가 있으되 이 소소영령한 이놈은 잡을 수가 없는 거여. 어떻게 그렇게 소소영령하면서도 찾어보면 자취가 없는데, 왜 의심이 안 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볼래야 볼 수 없고,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이 「한 물건」

불법(佛法)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서 이 공안(公案)은 주어져 있다 그말이여. 이 과제는 주어져 있어! 그런데 의심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어?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앉고 서고 세수를 하고, 소제(掃除)를 하고 거닐면서도 '이뭣고?'

의심이 안 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여. 의심 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여.


여기 앉아서 서울을 생각하면 환해. 여기 앉아서 부산을 생각하면 환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0살이나 15살 때 일을 생각하면 환해. 그러한 정도로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화두를 들으라 하니까는 잔뜩 육단심(肉團心)을 내 가지고 억지로 이마에다 '적을 소(小)'자나, '내 천(川)'자를 쓰고 억지로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화두를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해야만 참으로 이 조사공안(祖師公案)이라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여.

'막연하게 이 의심을 내 가지고 망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아무리 해 봤자 답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답이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주어 가지고 결국은 정신통일을 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이 화두법을 내놓지 않느냐?' 이러한 생각도 해 봤다 그말이여, 옛날에.


절대로 그것이 아니여! 반드시 이 화두를 타파(打破)하면은 이 공안법의 묘(妙)한—반드시 확철대오를 해봐야만 이 공안의 묘한 법을 알게 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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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51~275)2020. 11. 10. 18:32

 

 

(No.269)—1985년(을축년) 하안거결제 법회(85.06.03)(46분)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11분.

(1/3)----------------

 

광음승불계(光陰繩不繫)하고   쇠병약난의(衰病藥難醫)니라

나무~아미타불~

생사중대사(生死重大事)니   광음양가석(光陰良可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광음(光陰)은 승불계(繩不繫)요   쇠병(衰病)은 약난의(藥難醫)라.

흐르는 세월은 노끈으로 묶어 매 둘 수가 없고, 늙어서 노쇠해서 병나는 것은 약으로도 낫을 수가 없다.

 

생사중대사(生死重大事)니, 이 세상에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그것이 이 한평생만 끝난 것이 아니고 무량겁을 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이 생사의 이 중대사(重大事).

이 세상에 무엇이 중대하고, 무엇이 중대하고 중대하다고 하지마는 각자 당인(當人)의 생사 문제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을 진실로 아껴야 하느니라.(光陰良可惜)

 

 

오늘 을축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산승(山僧)이 더 말씀드릴 것이 없지마는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가다듬고 이 석 달 동안을 정말 알차고 짬지게 지내기 위해서, 서로서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옛날에 큰 병(甁) 가운데에 새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 그 새가 꾸벅꾸벅 졸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 그 새가 사람이 되었어요.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좋은 집안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잘 자라서, 그랬는데 기가 맥히게 참 예쁜 여자로 태어났는데, 절세미인(絶世美人)으로 태어나 가지고 벌써 나이가 15,6세 되니까 멀고 가까운 데에 널리 소문이 나서 그래서 여러 군데서 '며느리를 삼겠다, 아내를 삼겠다'해 가지고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가문도 생각하고 또 여러 가지 형편도 두루두루 다 살펴서 참 일등 신랑감을 골라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했는데 그 신랑도 또한 훌륭한 대장부라, 높은 벼슬을 해 가지고 참 이 세상에 아무도 부러울 것이 없이 영화와 부귀를 한 몸에 다 안고 모든 사람에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들도 낳고 딸도 낳고 이 세상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잘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신랑이, 그래 인물도 잘나고 머리도 좋고 또 능력도 있고 그래가지고 승승장구 자꾸 높은 자리에 올라가 가지고 나중에 정승까지 되었습니다.

정승이 되었는데 너무 임금님의 신임을 받고 사랑을 받고 그러니까, 그 정승의 말이라 하면 임금님이 하나에서 백까지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 옳은 말로 적절하게 말씀을 여쭈니까 임금님이 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신임을 독차지하게 되고 그러니까 간신(奸臣)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가지고 결국은 역적(逆賊)으로 몰려서 귀양살이를 가 가지고 약그릇을 받게 되고 집안은 아주 몰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도 너무너무 억울하고 가슴이 미어지는 그러한 괴로움을 받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남편이 억울하게 죽고 나니 자기도 병을 앓게 되고, 자식들도 모다 역적의 자식으로 몰려가지고 전부 멸종을 당하고 마침내는 자기도 어느 관가에 종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밤낮 남편 생각만 하고 자식 생각만 하고 그 원한에 사무쳐서 그래 가지고는 결국은 큰 병(病)이 나가지고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죽을 때에 숨이 딱! 끊어지자 다시 눈을 떠 보니까 병 속에 들어 있는 새로 돌아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사람이 되어서 결혼을 해서 신랑이 그렇게 정승이 되고 그랬던 것은 병 속에서 한 마리의 새가 꾼 하나의 꿈에 지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병 속에서 새 한 마리가 꾼 꿈이—인간 세상에 그 결혼을 해서 남편이 잘되고 자식을 낳고 모든 사람에 선망의 대상이 되고, 그러다가 역적으로 몰려서 남편 죽고 자식들도 역적으로 몰려서 다 멸종을 당하고 자기도 마침내 병들어 죽었는데, 지금 내가 이 이야기를 간단히 줄여서 이렇게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을 낱낱이 자상하게 모든 것을 늘여 놓자면 큰 소설책이 될 것입니다.

 

한 마리의 새가 병 속에서 꾼 꿈이 이러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한 병 속에 들어있는 새가 꿈속에 지금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남자로도 태어나고 여자로도 태어나고 또 김씨도 되고 박씨도 되고 또 그 가운데는 출가해서 비구승도 되고 비구니도 되고 그렇게 지내지만, 숨 한번 딱! 거두어 가지고 생각해 보면 병 속에 들어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될 것입니다.

이 육도법계(六道法界)를 ‘하나의 병(甁)’이라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육도법계 전체를 하나의 병(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한 마리의 새가 천당에도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고, 또 인간에 태어나기도 하고, 축생이 되기도 하고, 아귀(餓鬼)나 수라(修羅)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육도에 좋은 곳에 태어나서 낙(樂)을 받고 나쁜 데에 태어나 가지고 고통을 받고, 아무리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독차지를 하고, 천상에 태어나서 한량없는 낙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생사윤회하는 한 마리의 새에 지내지 못하고 '업의 불[業火]'에다가 섶을 집어넣는 그러한 결과 밖에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각자 우리 자신들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깊이 이해를 한다면, 정말 인간으로 태어나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새가 잠깐 꾸는 꿈으로 태어난 이 몸이, ‘한다면, 정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눈뜨게 되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부귀영화(富貴榮華)에 눈을 떠야 할 것인가? 남을 미워하고 남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가 집착을 해야 할 것인가? 사소한 일로 '니가 옳다, 내가 옳다' 시비에 말려들 필요가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자기가 잘나고 똑똑하고 모든 사람을 다 디디고 올라서 봤댔자, 정신 차려 보면 병 속에 든 한 마리의 새에 지내지 못한 것을.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다 괴로우니라.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이 없느니라. 몸뚱이를 받아서 태어나는 것도 고(苦)요, 늙어가는 것도 고(苦)요, 병드는 것도 고(苦)요, 죽어가는 것도 고(苦)니라.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은 없느니라』

이 중생들은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것이 그나마 고통의 뭉탱이에 지내지 못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속 업(業)에 업을 거듭 지어가고 있으니,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허망하고 무상하며 전체가 괴로운 것뿐이라고 하는 것을 맨 먼저 우리에게 설해 주신 것입니다.

 

왜 괴로우냐?

모든 것에 대한—자기 육체에 대해서, 자기의 재산에 대해서, 명예와 권리에 대해서, 그런 것에 대한 애착(愛着)과 집착심(執着心)을 갖기 때문에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 괴로움을 없애야 한다. 괴로움을 없애야만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며,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이 바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는 데 있는 것이다.

그 괴로움의 원인은 어떻게 없애느냐? 도(道)를 닦아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 도에는 여러 가지 방편(方便)이 있겠지만, 그 도 가운데에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빠른 요긴한 길인 것입니다.(처음~17분57초)

 

 

 

 

(2/3)----------------

 

시비일침몽(是非一枕夢)이요   취산일시정(聚散一時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안분심휴헐(安分心休歇)하면   인간대장부(人間大丈夫)니라

나무~아미타불~

 

시비일침몽(是非一枕夢)이요. 옳고 그른 것, 니가 옳고 내가 그르고, 개인적으로나 또는 단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옳고 그른 모든 시비는 다 한 벼개의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무궁한 옛날부터서 영원한 미래까지 흘러가고 있는 길고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잠깐 꾸는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취산(聚散)은 일시정(一時情)이다. 만났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만난 것. 만난 것은 부모와 자식 간으로도 만나고, 아내와 남편으로도 만나고, 형과 동생으로도 만나고, 친구 간으로도 만나고 한, 이 인간이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이 인연(因緣)이라 하는 것은 일시(一時)의 정(情)에 지내지 못해.

금생에 부모자식 간에 인연이라 하면 가장 지중(至重)하고, 부부 인연이라 하면은 참 지중하다고 생각이 되지만 일시(一時)의 정(情)인 것입니다.

 

물론 전생에 다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어서 만나긴 하지만, 전생에 부모 · 전생에 할아버지가 금생에 자기 자식이 되기도 하고, 전생에 친구가 아내가 되기도 하고, 금생에 아내가 내생에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이리저리 만나고 만나졌다 헤어지고 하지만 우리는 전생사(前生事)는 다 잊어버리고 모르는 것이고.

물론 숙명통(宿命通)이 열리면 다 알게 되겠지만, 숙명통이 열리기 전에는 '혹 저 사람이 전생에 나의 남편이 아니었나?' 혹 이런 추측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은 확실한 것이 아니고, 전생일은 다 잊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전생, 저 전생, 수억만 생이 있어 왔기에 금생에 또 부모 자식으로도 만나고, 처자 권속으로도 만나고 그러기는 하지만 전생일은 이미 잊어버려서 알 수가 없고, 다못 금생에 이렇게 만났다가 잠시 5,60년 내지 6,70년 산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해서 잠깐입니다.

그리고 또 헤어지게 되는데, 내생에 또 인연에 따라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이 되지만 또 확실히 만날지 어쩔지도 알지도 못하고, 또 만난다 해봤자 또 전생일은 또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났다 흩어졌다 하는 아무리 깊은 지중한 인연이라 하더라도 일시(一時)의 정(情)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是非)와 서로 만났다 흩어졌다 하는 것, 그러한 것들에 너무 집착을 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 · 애정 · 인정, ‘참 저 사람이 정답다, 정이 있다’, ‘그 사람은 무정하다, 매정하다’, 정이 있는 것을 참 좋아하고 다정한 것을 좋아하고 그렇지만, 자식을 기를 때에 있어서도 정에 너무 빠져서 정(情)으로 자식을 가르키면 사실은 업(業)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업을 점점 두텁게 맨든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어찌 부모가 자식이 사랑스럽지 아니하리요마는 그 정은 속에다가 담박(澹泊)허니 놔두고, 항시 바른 마음과 지혜로써 그리고 정(情)보다는 자비(慈悲)로써 자식을 잘 길러 나간다면 그 자식은 참으로 올바르게 잘 자라 나갈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하고 자비가 없이 인간에, 그 중생에 애정적으로만 가르켜 놓으면, 자식이 자식이 아니라 업의 뿌리 밖에는 아니되는 것이고 '애물'에 지내지 못해서 피차 서로 얽혀 가지고 후생(後生)의 업을 장만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안분심휴헐(安分心休歇),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마음을 쉬어 버려.

그 정 때문에 본의 아닌 죄를 짓게 되고, 정 때문에 자기의 바른 길을 찾지를 못하는데, 그 정을 돌이켜서 지혜와 자비로 승화(昇華)시켜 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의 분을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분(分)을 알아서 마음을 푹 쉬어 버리면 이것이야말로 인간(人間)에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이다.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법요식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용화사 법보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스님네도 있고 또 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또 경기 일원에 다른 선원에서 정진하시는 비구니 스님네들도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고, 가정에서 공부를 하시는 신도님네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남자(男子), 고추만 달고 나와야 대장부가 아니라, 시비(是非)와 취산(聚散)의 애착심을 돌려 버리고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마음을 쉬어버리고서, 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아 나가면 이것이야말로 장부(丈夫) 가운데에도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우리가 정진해 나가는 데에 아주 요긴한 법문을 하셔서 더 말씀할 것이 없지만,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사심(生死心)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데, 그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을 생사심이라 그럽니다.

번뇌(煩惱)니 망상(妄想)이니 이렇게도 말을 하지만 ‘생사심’이라고 표현한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왜 생사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냐 하면, 이 생사심 때문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이리저리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해 가지고는 한참 뻗어나가다가 그것이 또 언제 또 사그라져 버립니다. 사그라지자마자 또 '한 생각'이 또 일어납니다.

'한 생각' 일어나가지고 또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이리저리 이리저리 발전을 해 나가다가, 혹 좋은 쪽으로 발전해 나가면 기분이 좋고, 혹 나쁜 쪽으로 발전해 나가면 공연히 속이 상하기도 하고 괜히 그냥 누가 얄미워지고도 하고, 그러다가 또 그 생각이 또 언제 꺼진 중 모르게 또 꺼져 버리면, 또 다시 또 '한 생각'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기를 하루에도 몇만 건인 것입니다.

 

어려서 철모를 때는 모르지마는 철알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 생사심의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기멸(起滅)이 끊임없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이 그러고 말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 우리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미래의 생사윤회를 위한 씨가 심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현생에 우리가 일어난 '한 생각'이 금방 우리의 8식(八識)에 종자(種子)로써 심어지는데, 그 종자가 이 시간 이후에 적당한 인(因)과 연(緣)을 만나면 거기서 새로운 생사윤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 3가지 불능[三不能]이 있어서 그 중에 하나가 ‘중생계가 다할 날이 없다’ 이리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니 밤낮 태어났다 죽고 태어났다 죽고 육도(六途)에서 천문학적 숫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무수한 중생의 생사윤회의 현장이 바로 이 육도법계인 것입니다.

물론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 낱낱이 모두가 불보살(佛菩薩)의 출현이요, 그 불보살의 설법이요, 모든 것이 한량없는 부처님의 경전이요, 바로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의 모습이 되겠지만, 그러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우리의 중생에게는 전부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가 생사윤회의 현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윤회는 우리를 괴롭혀 주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이것이 바로 생사심인데, ‘이 생사심을 어떻게 하면 이것을 깨트려서 생사 없는 근본으로 돌아갈 수가 있느냐?’ 이것이 우리 불자(佛子)에 나아갈 길이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이 생사심을 깨트리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면 이 생사심은 영원히 끝날 기약이 없습니다.

이 생사심을 깨트리지 못하면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일분일초도 쉴 사이가 없이 우리를 핍박하고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에서 온갖 방편과 수단으로써 그 무상살귀는 우리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생각', 이 '한 생각'을 가지고 도(道)에 나아가는 첫걸음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가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생각은 잠시도 놓쳐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마치 훨훨 불이 타고 있는 그러한 함정 가운데 우리가 빠졌을 때 ‘어떻게 하면 이 불이 타고 있는 이 함정에서 살아날 수가 있을까?’

공연히 이리저리 함부로 나부대봤자 불에 타서 죽을 것이고, 우두커니 서 있어 봤자 뜨거워서 결국은 자기한테 불이 달라들어서 죽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도 없을 것이고, 또 누가 와서 나를 살려 주었으면 그런 생각까지도 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다못 이러할 때에 ‘어떻게 해야 이 불구덩이에서 살아날 수가 있을 것인가?’

살아나가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도 돌아보지 말 것이며, 나의 몸과 목숨도 돌아보지 말 것이며, 누가 와서 나를 구해주기도 바래지 말 것이며, 딴생각—집안 생각, 무슨 자식 생각 뭐 그런 생각할 것도 없을 것이여. 잠시도 우두커니 있지도 말 것이며, 다맛 무조건 하고 밖을 향해서 내닫는 것입니다.

 

사방이 전부가 빼어난 틈이 없이 불이지만, 타 죽을 셈 치고 불도 보지 말고 막 밖을 향해서 나간다면 잠시 불에 몸이 닿을 동안에는 뜨거울는지 모르지마는, 번개같이 뛰어나가면 결국은 그 사람이 살아나올 것입니다.

참선해 나간 사람은 이만한,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18분3초~35분47초)

 

 

 

 

(3/3)----------------

 

종조난설인장단(終朝亂說人長短)타가   경야혼침요수면(竟夜昏沈樂睡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차출가도수시(如此出家徒受施)인댄   필어삼계출두난(必於三界出頭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조난설인장단(終朝亂說人長短)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이 잘하고 못한 것만을 어지러이 말을 하다가—누가 잘하니 못하니, 누가 옳고 그르니, 맨 남의 얘기.

선방에 와 가지고 방부를 들이고 참선을 하면서 맨 집안 얘기 아니면, 남의 집 며느리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시어머니가 어떻고, 맨 남의 잘하고 못한 이야기만 죽비(竹篦) 쳐서 방선(放禪)하자마자 시작을 해.

 

하도 말을 해 쌓어 지대방을 저 별채에다 해서 따로 딱! 띄어 놓고, 인자 큰방에서는 일절 잡담을 하지 말라고 이렇게 해놨는데, 아마 큰방에서는 일체 잡담을 안 하시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워낙 참지 못한 분은 큰방에서도 간혹 혹 하시지 않는가? 내가 항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가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또 저 별채에서 혹 연세가 많으신 분이나, 인자 그런 분을 위해서 잠시 거기서 좀 허리도 좀 펴고 그러라고 별채를 한 것이지, 거기 가서 맘대로 잡담을 하시라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 별채에다 뚝 큰방에서 떨어지게 해놨으니까 실컷 좀 얘기 좀 해보자' 그리고 아주 마음먹고 아주 잡담을 시작을...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별채도 널찍허니 해놨으니 아! 거기서도 얼마든지 참선 하실 수도 있고 또 허리가 아프면 허리도 쭈욱 펴고 눕되 누워서도 ‘이뭣고?’ 이렇게 하셔야지,

거기서 얘기를 하면—아! 허리 좀 펴고 좀 그럴라고 가신 분들도 있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잡담을 안 해야 하는데, 이 별채라고 해서 잡담을 하시면 언제 정진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지금 뭐 별채라고 해서 생사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는 없는 것도 아니고, 거기도 역시 사면(四面)에서 타 오는 불구덩이 함정이 아닌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경야혼침요수면(竟夜昏沈樂睡眠)이여. 밤이 되면은 아주 세상 모르고 잠을 자는데.

낮에 눈 떠 갖고 있을 때는 시비와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밤이 되면은 온통 내 세상이다 해 가지고 다리를 뻗고 코를 골면서 이 꿈속에서는 온갖 잡스러운 꿈을 꾸면서 그렇게 하다가, 낮에 되면은 또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입방선(入放禪)은 형식적으로 하고.

 

여차출가도수시(如此出家徒受施)여, 이렇게 출가해 가지고 도를 닦는다고 해봤자,

필어삼계출두난(必於三界出頭難)이여. 욕계 · 색계 · 무색계, 이 삼계(三界)에서 뛰어나기는 영판 어려울 것이다, 이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스님네나 금년에 모다 방부를 들이고 또 이 결제에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결코 그러한 분은 한 분도 없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공연히 내가 노바심(老婆心)으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래도 우리가 결제를 맞이해서 도반(道伴)들에게 해 드릴 말씀은 우리가 서로서로 채찍질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이번 결제는 정말 알차고 짬지게 정진을 해 보자고 이렇게 말씀을 드린 것은 도반으로서에 참 좋은 것이지 이것을 나쁘게 들으실 분은 안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달리는 말에는 채찍질을 할 필요가 없지만 더 잘 달리라고 채찍을 흔드는 것입니다.

 

앞으로 오뉴월 또 삼복더위가 돌아올 것입니다마는 아직은 그렇게 덥지를 아니합니다.

어쨌든지 시간을 아끼고 거의 묵언을 하시면서, 묵언(默言)은 벙어리처럼 말을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은 간단히 한마디로 끝내버리고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이것입니다.

 

그리고서 항시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포행(布行)을 할 때나, 또는 화장실에 갈 때나, 세수를 하거나 공양을 하거나, 무엇을 빨래를 하거나, 도량 소지(掃地)를 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꼭 입선 시간에 큰방에 앉아서 정진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묵묵히 그러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서 한 시간 한 시간을 지내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신다면 반드시 이번 한철 동안에 공부에 힘을 얻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좋은 여건하에서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어느 세상에 우리가 생사심(生死心)을 돌이켜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결제 때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의 면면을 내가 살펴보니 전부가 다 숙연한 마음으로, 『정말 이번 한철은 알차게 지내야겠다. 정말 내가 쓸데없는 시비와 잡담으로 단 일분일초라도 지내지 않겠다』고 하는 그러한 각오가 역력히 눈에 얼굴에 나타나 보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석 달 동안 계속해서 흐트러지지 않도록 그렇게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아름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35분49초~46분3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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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광음승불계~’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18 ‘잡흥(雜興)’ 게송 참고. *繩(승)노끈. *繫(계)매다. 묶다. *惜(석)아끼다. 소중히 여기다.

*생사윤회(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에 의한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당인(當人 맡다·주관하다 당/사람 인) ;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그 사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절세미인(絶世美人 끊다·끝나다·뛰어나다·비할 데 없다 절/세상 세/아름다울 미/사람 인) ; 이 세상(世上)에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絶] 아름다운[美] 여자[人].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지옥(地獄) : 중생들이 자기가 지은 죄업으로 말미암아 그 과보로 사후(死後)에 가서 나게 되는, 고통이 극한 지하의 감옥을 말한다。 그러나 육신의 사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우리의 마음속에 천당과 지옥이 있는 것이다.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수라(修羅) ;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늘 싸움만을 일삼는 귀신들의 무리.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업의 불(業火) ; ①악업의 힘이 맹렬하게 중생을 태우므로 업(業)을 '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불같이 이는 노여움. ③악업(惡業)의 갚음으로 받는 지옥의 맹렬한 불.

*; 잎이 붙어 있는 땔나무나 잡목의 잔가지, 잡풀 따위를 말린 땔나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고(苦) ; [산스크리트어] duḥkha [팔리어] dukkha 마음이나 몸이 괴로워 편하지 않음.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어지럽고 불안함. 어지러운 생각에 부대끼고 시달려서 마음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상태. 미혹으로 일어나는 마음 작용.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불교에서는 이를 4고 · 8고(四苦八苦) 등으로 분류한다. 사고(四苦)는 생(生)·노(老)·병(病)·사(死)의 네 가지를 말한다.

여기에 다시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 원망스럽고 미운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음이 성하는 고통(五陰盛苦)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사제(四諦) ; 사성제(四聖諦). 제(諦)는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고(苦, 괴로움)를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함.

①고제(苦諦, 苦聖諦) : ‘고(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 集聖諦) :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고(苦)가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 滅聖諦) :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고(苦, 괴로움)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 道聖諦) :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 바른 이해) ·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 정어(正語, 바른 말) · 정업(正業, 바른 행위) · 정명(正命, 바른 생계) · 정정진(正精進, 바른 노력) · 정념(正念, 바른 마음챙김) · 정정(正定, 바른 집중)—는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애착(愛着) ; 사랑하여 집착함. 애집(愛執).

*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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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시비일침몽~’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48 ‘준선자(俊禪子)에게’, p47 ‘감흥(感興)’ 게송 참고. *枕(침)베개. 말뚝. *歇(헐)쉬다. 그치다.

*벼개 ; ‘베개’의 사투리.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정(情) ; ①오랫동안 지내 오면서 생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나 친근한 마음. ②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③[불교] 혼탁한 망념(妄念).

*지중(至重)하다 ; ①더할 수 없이 귀중하다. ②더할 수 없이 무겁다.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시비(是非) ; ①옳음과 그름. ②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 또는 옳고 그름을 따지며 하는 말다툼.

*담박(澹泊)하다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자비(慈悲) : [범] maitri  자비는 사랑하는 것과 불쌍히 여기는 것인데, 네 가지 끝없는 마음(四無量心) 가운데 두 가지이다。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라 하고(慈能與樂), 중생의 고통을 실제로 덜어 주며 근본적으로 그 근심 걱정과 슬픔의 뿌리를 뽑아 내어 주는 것을 '비(悲)'라고 한다(悲能拔苦)。

*애물 ; 애를 태우거나 성가시게 하는 물건이나 사람.

*후생(後生) ; 죽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삶.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승화(昇華) ; 어떤 현상이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으로 발전함.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생사심(生死心).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사심(生死心)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데, 그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을 생사심이라 그럽니다.

번뇌(煩惱)니 망상(妄想)이니 이렇게도 말을 하지만 ‘생사심’이라고 표현한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왜 생사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냐 하면, 이 생사심 때문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 p103~105. (가로판 p101~103)

*普濟尊者示覺悟禪人(보제존자시각오선인)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念起念滅을  謂之生死니  當生死之際하야  須盡力提起*話頭호리니  話頭가  純一하면  起滅이  卽盡하리라 起滅卽盡處를  謂之寂이라하니  寂中에  無話頭하면  謂之*無記요  寂中에  不昧話頭하면  謂之靈이라하나니  卽此空寂과  靈知가  無壞無雜하야  如是用功하면  不日成之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화두(話頭) ;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3성의 하나。 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제8아뢰야식(第八 阿賴耶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가 말한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해서 만법을 아는 지혜를 이루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알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막힘이 없이 다 아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무량겁으로부터서 지은 정업(定業)은 멸하지 못함. ②인연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무량중생을 제도하실 수는 있으나 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청정법신불(淸淨法身佛) ;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곧 비로자나불을 말함.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45~147. (가로판 p139~141)

做工夫호대  最初에  要箇破生死心堅硬하고  看破世界身心이  悉是假緣이라  無實主宰호리라. 若不發明本具底大理則生死心이 不破오  生死心이  旣不破인댄  無常殺鬼가  念念不停하나니  卻如何排遣고

 

공부를 짓되 최초에 생사(生死)를 파하려는 마음이 굳세고, 세계와 몸과 마음이 모두 이 거짓 인연[假緣]이라 실다운 주재(主宰)가 없는 줄로 간파(看破)할지니라.

만약 '본래 갖추어진 큰 이치[本具底大理]'를 밝히지 못하면, 곧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리지 못하고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했을진댄 무상살귀(無常殺鬼)가 생각생각 멈추지 않으리니, 도리어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將此一念하야  作個*敲門瓦子호대  如坐在烈火焰中求出相似하야  亂行一步不得하며  停止一步不得하며  別生一念不得하며  望別人救不得이니 當恁麼時하야는  只須不顧猛火하며  不顧身命하며  不望人救하며  不生別念하며  不肯暫止하고  往前直奔호대  奔得出하야사  是好手이니라.

 

이 일념(一念)을 가져 문 두드리는 기와쪽[敲門瓦子]을 삼되, 마치 훨훨 타는 불꽃 가운데 앉아서 나오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함부로 한 걸음 걸을 수도 없고, 한 걸음도 멈출 수도 없으며, 한 생각이라도 딴 생각을 낼 수 없으며, 남더러 구원해 주기를 바랄 수도 없나니,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다못 사나운 불길도 돌아보지 않으며, 신명(身命)을 돌보지 말며, 다른 사람이 구해 주기를 바라지 말며, 딴 생각 낼 것도 없으며, 잠시도 멈추지 말며 앞으로 곧장 나아가되 내달아서 벗어나야만 이 좋은 수단이니라.

 

*고문와자(敲門瓦子) : 기왓장을 문에다 걸어 놓고 손님이 와서 그 기왓장으로 문을 두드리면 주인이 문을 열어 주는 현대의 초인종과 같은 역할을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나부대다 ; 얌전히 있지 못하고 철없이 촐랑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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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종조난설인장단~’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지대방 ; 절의 큰방 머리에 있는 작은 방. 이부자리, 옷 등의 물건을 넣어 두는 곳이며, 스님들이 잠깐 휴식을 하기도 하는 곳이다.

*큰방 ; 스님들의 본업인 수행을 행하는 장소. 예불과 공양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참선만을 행하는 선원(禪院)에서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참선수행하는 방(房)을 '큰방'이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노바심(老婆心) ; 노파(老婆)가 자식·손자를 애지중지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 친절심(親切心). 파심(婆心)이라고도 함.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짬지다 ; 일하는 솜씨가 여물고 깐깐하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소지(掃地) ; ①마당(땅)을 쓸다. ②청소.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생사심(生死心) ;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게송)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법문 내용]

 

(게송)광음승불계~ / 이 세상에 각자의 생사문제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다 / 병(甁)속의 새의 꿈, 이것은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 /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이 없는데, 참선법(參禪法)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빠른 요긴한 길.

 

(게송)시비일침몽~ / 일장춘몽 / 아무리 깊은 지중한 인연이라 하드라도 일시(一時)의 정(情)에 지내지 못한 것. 그래서 시비(是非)와 서로 만났다 흩어졌다 하는 것들에 너무 집착을 할 것이 아니다 /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사심(生死心)을 깨트리는 것 / 불이 훨훨 타고 있는 불구덩이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은 아무것도 구하거나 바라거나 생각지 말고, 무조건 하고 번개같이 뛰어나가는 것과 같이 참선 수행도 이만한 정신으로 해야 한다.

 

(게송)종조난설인장단~ / 남의 얘기, 일체 잡담을 하지 말라 / 입방선(入放禪)을 형식적으로 하지 말라 / 이러한 공부하기 좋은 여건이 다시 어느 곳에 있겠는가? / (게송)일파유조수부득~.

 

 

이 세상에 무엇이 중대하고 무엇이 중대하고 중대하다고 하지마는 각자 당인(當人)의 생사 문제보다 더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시간을 진실로 아껴야 하느니라.(光陰良可惜)

 

이 세상에 고(苦) 아닌 것이 없는데, 참선법(參禪法)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을 없애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는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빠른 요긴한 길인 것입니다.

 

전생, 저 전생, 수억만 생이 있어 왔기에 금생에 또 부모 자식으로도 만나고, 처자 권속으로도 만나고 그러기는 하지만 전생일은 이미 잊어버려서 알 수가 없고, 다못 금생에 이렇게 만났다가 잠시 5,60년 내지 6,70년 산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해서 잠깐입니다.

그리고 또 헤어지게 되는데, 내생에 또 인연에 따라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곤 생각이 되지만 또 확실히 만날지 어쩔지도 알지도 못하고, 또 만난다 해봤자 또 전생일은 또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났다 흩어졌다 하는 아무리 깊은 지중한 인연이라 하드라도 일시(一時)의 정(情)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비(是非)와 서로 만났다 흩어졌다 하는 것, 그러한 것들에 너무 집착을 할 것이 아닙니다.

 

남자(男子), 고추만 달고 나와야 대장부가 아니라, 시비(是非)와 취산(聚散)의 애착심을 돌려 버리고 자기의 분(分)을 알아서 마음을 쉬어버리고서, 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아나가면 이것이야말로 장부(丈夫) 가운데에도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사심(生死心)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하는데, 그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을 생사심이라 그럽니다. 번뇌(煩惱)니 망상(妄想)이니 이렇게도 말을 하지만 ‘생사심’이라고 표현한 것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왜 생사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냐 하면, 이 생사심 때문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어난 '한 생각'이 금방 우리의 8식(八識)에 종자(種子)로써 심어지는데, 그 종자가 이 시간 이후에 적당한 인(因)과 연(緣)을 만나면 거기서 새로운 생사윤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생각'을 가지고 도(道)에 나아가는 첫걸음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우리가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생각은 잠시도 놓쳐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불이 훨훨 타고 있는 불구덩이에서 살아나가는 방법은 아무것도 구하거나 바라거나 생각지 말고, 무조건 하고 번개같이 뛰어나가는 것과 같이 참선 수행도 이만한 정신으로 해야 한다.

 

어쨌든지 시간을 아끼고 거의 묵언을 하시면서, 묵언(默言)은 벙어리처럼 말을 일체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은 간단히 한마디로 끝내버리고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 이것입니다.

그리고서 항시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포행(布行)을 할 때나, 또는 화장실에 갈 때나, 세수를 하거나 공양을 하거나, 무엇을 빨래를 하거나, 도량 소지(掃地)를 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꼭 입선 시간에 큰방에 앉아서 정진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묵묵히 그러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고서 한 시간 한 시간을 지내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신다면 반드시 이번 한철 동안에 공부에 힘을 얻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좋은 여건 하에서 공부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어느 세상에 우리가 생사심(生死心)을 돌이켜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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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1. 9. 07:01

(세등선원No.39)—1982(임술)년 하안거 결제 법어(82.04.17) (61분)

(1/3) 약 22분. (2/3) 약 21분. (3/3) 약 18분.

(1/3)----------------

 

황앵상수일지화(黃鶯上樹一枝花)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래풍우(夜來風雨)를 객문선(客聞先)헌데  춘산의구초당전(春山依舊草堂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들에 내리니 천 점에 눈이더라.

 

야래풍우(夜來風雨)를 객문선(客聞先)인데, 밤새 오는 비바람 소리를 객(客)이 먼저 들었는데,

춘산의구초당전(春山依舊草堂前)이로구나. 봄 산은 옛을 의지해서 초당 앞에 서 있구나.

 

 

임술년 하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벌써 4월 17일 입하(入夏)가 지나서 뜰 앞, 뜰 뒤 산과 들은 바야흐로 연록(軟綠)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그 아름다운 꽃들도 지고 지금 모란꽃이 한창 피어 있습니다.

 

노란 꾀꼬리가 가지에 오르니 한 송이의 꽃이요, 흰 해오라기가 들에 내리니 천 점에 눈이다.

한 송이의 꽃,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떠억 나뭇가지에 오르니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다.

꾀꼬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오를 때 한 가지의 아름다운 꽃이요. 산과 들과 방방곡곡 금수강산(錦繡江山)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비단에 수(繡)놓은 것처럼 이렇게 싱그럽고 아름답게 장엄(莊嚴)을 하고 있습니다.

 

범연(泛然)히 보면, 예사로 보면, 봄이 오니까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돌아오니까 이렇게 무성하게 잎이 모다 피어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평범한 일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 평범한 현실이 입으로 설할 수 없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에 진리를 남음이 없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눈을 통해서 보는 모든 색상, 귀를 통해서 듣는 모든 소리, 코를 통해서 맡는 모든 냄새, 혀를 통해서 맛보는 모든 맛, 몸을 통해서 느끼는 모든 감각, 뜻을 통해서 받아 들여지는 모든 의식이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무상설법(無上說法)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납월팔일(臘月八日) 새벽 동천(東天)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시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셨고, 어떠한 도인(道人)은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달으시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물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기도 하고, 어떠한 도인은 시장에서 장사꾼들이 멱살을 거머쥐고 서로 다투고 욕을 하는 그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우리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확철대오를 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을 때에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 가지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경계에 들어가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만 나가고 있으면 언제 어느 찰나에 의단이 타파(打破)될런지를 알 수가 없어.

 

예를 들자면, 어느날 중대한 뉴스가 발표가 된다. 확실한 시간은 모르지만 오늘 중으로 무슨 중대한 발표가 있다.

이럴 때에 아침부터 라디오나 TV 다이알을 딱 맞춰 놓고, 언제 중대한 발표가 돌연히 발표가 될는지 모를 때에 딱 다이알을 맞춰 놓고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벌써 다이알을 맞춰 놓지 아니한 채 있다가 지나가 버리면 중대한 발표를 듣지 못하는 거여.

 

언제 발표될지를 모를 때처럼 딱 다이알을 맞춰 놓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언제 어느 찰나에 깨달을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떠억 거각(擧却)하고 성성적적한 상태로 정진을 해 가야 하는 것이여.

 

번갯불 번쩍할 때에 그 번쩍 하는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뀌듯이, 깨달음의 눈을 뜨는 그 장면은 마치 그와 같은 것이여.

점진적(漸進的)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기 때문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공부는 일분일초라도 등한히 놓아 지낼 수가 없는 것이여.

 

다른 공부는 시간을 맞춰서도 하고, 또 공부 아니할 때에는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즐겁게 놀기도 하고, 먹고 잠도 자기도 하고, 사업이나 무슨 사무나 모든 것을 다 놔 버리고 훌쩍 떠나서 저 산이나 바다로 쉬러 가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의 공부는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밥을 먹을 때에도 화두를 들고 먹어야 하고, 세수를 할 때에도 화두를 들고 세수를 해야 하고, 똥을 눌 때에도 화두를 들고 똥을 눠야 하고, 몸이 아플 때에도 화두를 들고 꿍꿍 앓아야 하고, 속이 상할 때에도 화두를 들고 속을 상해야 하고.

다정한 사람이 죽어서 슬플 때에도 화두를 들고 슬퍼해야 하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속이 상할 때나 괴로울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단 1초 동안이라도, 찰나 동안이라도 화두를 놔 버리면 그 사람은 진실한 수행인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마냥 한결같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에는 순풍에 돛 달듯이 화두가 저절로 들리면서 성성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어떤 때에는 뚝 변해 가지고 영 답답하고 머리가 개운치를 못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어찌해 볼 수 없이 그렇게 애를 먹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끌고 깊은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는 것처럼, 되게 고삐를 땡겨서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면 할수록 나귀는 뒤로 버티고 안 들어올라고, 이렇게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이 든 때도 있습니다.

 

수월하게 잘될 때 보다도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힘이 들고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질 때, 그때가 훨씬 중대한 중요한 고비라 하는 것을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장(書狀)』에도 대혜(大慧) 스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이 말씀이여.

공부가 한 걸음 나아갈라면은 그러한 그와 같은 경계를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得力]' 이것입니다.

 

흔히 화두가 성성하게 잘 들리면은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고, 그러다가 보면 또 공부가 영 답답하고 잘 안되면 그 안되어서 성화를 내고 거기에서 번뇌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내고, 어쩔 줄을 몰라. '기도를 해 볼까? 주력을 해 볼까?'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허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수궁의무로(山盡水窮疑無路)터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허면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이라.

꽃다운 풀 우거진 길을 지나가지 아니하면,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기 어렵다. 향기 나는 풀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가야 꽃이 활짝 피고 지고 한 아름다운 고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해서 이제 맥혀 가지고 인자 길이 없지 않나? 이렇게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버들은 그윽히 드리워져 있고,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또 한 마을이 있더라.(처음~21분37초)

 

 

 

 

(2/3)----------------

 

아무리 화두를 들고 정진할라고 애를 써도 가도가도 답답하기만 하고, 한 걸음도 공부가 더 나아가는 늘어나는 수가 없어. 작년에 마냥해도 그 택이요, 금년에도 마냥해도 그 택이요. 그것 또 몇 해냐?

몇 해를 자기 딴에는 밤잠을 안 자고, 남 구경하고 놀러가도 자기는 구경하고 놀 것을 그만두고 자나깨나 화두를 들고 애를 써서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만(萬)날 해도 죽 떠먹은 자리여. 누구한테 내놓을래야 내놓을 것이 있나, 무슨 콱! 맥혀서 답답하기만 하고.

 

‘참으로 확철대오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공연히 이렇게 화두만—꽉 아무 생각 못하게 하고 잡념 못하게 하기 위해서, 풀라야 풀 수도 없고 아무 답도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공안(公案)이라 하는 문제를 주어 가지고 이 사람 골때리는 지서리가 아닌가?’

‘무슨 이거 방편(方便)으로 이 화두를 참구(參究)하게 만들어 가지고 마침내 번뇌 망상 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사(祖師)가 방편으로 화두니, 공안이니 하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도 들드라 이 말씀이여.

 

3년, 5년, 10년 해봤자 무슨 소식이 있어야지?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혼침(昏沈)만 오고, 아무리 화두를 들라고 몸부림을 쳐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망상(妄想)뿐이고, 망상이 조금 잠잠해질라 하면 그때는 또 혼침이 와 가지고.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지루하고 얼마나 못 견뎠으면 웃옷을 벗어서 방바닥을 치면서 ‘이 조주(趙州)가 뭣 때문에 무자(無字) 화두를 내 가지고 이 사람을 이렇게 골탕을 먹이냐’고 다리를 뻗고 우는 스님도 있었고, 머리를 갖다가 벼람박에나 기둥에다 갖다가 이마를 수없이 들이받으면서 피가 나오도록 받으면서 죽어버리고 싶은 이러한 충동을 느끼는 수도 있고.

 

그러나 역대조사(歷代祖師)에 남기신 법어(法語)를 보면 결정코 우리를 속이지 않는 사실을 우리는 인증할 수가 있습니다.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안 되지만, 선지식(善知識)의 바른 지도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그래 가지고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고,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봐도 산의 빛깔과 모냥에 대해서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줄을 모르고, 앉았으되 앉아있는 줄을 모르고, 천 명 만 명 사람이 있는 데에 서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오직 화두의 의단 하나만이 성성적적하게 독로하고.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서도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누가 나로 하여금 이럴 때에 툭!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야 일주일이 가지 아니해서 반드시 의단이 타파가 되어서 확철대오를 할 것이다.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여. 역대조사가 다 그러한 과정을 다 겪으셨어.

 

‘이것이 만약에 거짓이라면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도 맹세를 하셨고,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를 하셨고, 산승(山僧)도 이 도리를 믿고 여러분 앞에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에게 선언을 합니다.

 

출가한 목적은 오직 이 한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해결하는 이 밖에는 다시 무엇이 있습니까?

부모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인생의 모든 낙(樂)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출가한 우리들입니다. 정말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 칠십이라 하지만 누구나 칠십까지 다 사는 것도 아니고, 하루도 장담을 못하는 것이고, 한 시간도 믿을 수가 없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셔서 1초 1초를 금쪽같이 아껴서 공부하고,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화두를 거각해서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진심(精進心)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오늘부터서는 내가 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리라. 내일부터서는 묵언을 하고 공부를 하리라. 내일부터서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리라. 그래 가지고 말을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리라’

그렇게 마음을 먹고 정진을 애써서 할려고 하는 그러한 기특하고 갸륵한 수행인이 있습니다.

 

대단히 기특하고 갸륵하고 매일 같이 자기를 ‘오늘 하루는 어떻게 공부를 했는가’ 반성을 해 보고 ‘내일은 어제보다 더 알뜰히 공부를 하리라’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단속을 하고 또 단속을 하는 것, 참 좋습니다. 단 하루도 등한히 지낸 날이 없고, 하루하루 갈수록 더 알차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 대단히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일으키는 그 생각마저도 화두를 간절히 든다면 어느 것이 더 낫겠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그랬습니다.

 

진실한 수행인은 ‘앞으로 잘하리라’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당장 지금 이 찰나에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간절히 드는 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학자의 수행 자세인 것입니다.

이렇게 1초 1초를 다져 나간다면 그 사람은 그날 하루도 알차게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물어볼 것도 없이 내일 하루도 충실하게 정진이 되어질 것입니다.

 

1초 1초가 모여서 1분이 되고, 1분 1분이 모여서 한 시간이 되고,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하루가 되고, 하루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 한 달이 모여서 1년이 되기 때문에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단속하는 사람이야말로 일생을 충실하게 정진할 사람이고, 나아가서는 억겁(億劫)의 생사 문제도 ‘한 생각’에서 해결이 나는 것입니다.

 

‘일념(一念)이 바로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하는 법성게(法性偈)에 법문을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념 일념, 1초 1초를 등한히 한 사람은 무량겁 생사윤회가 끊어지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허고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태양을 금까마귀[金烏]라 그래. 금까마귀가 나왔다 졌다, 아침에는 동천에서 솟아올랐다가 저녁때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이렇게 하면서 세월을 재촉을 한다. 금까마귀는 솟았다 졌다 하면서 세월을 재촉을 하고.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라. 옥토끼[玉兎]는—달을 보고 옥토끼라 하는데, 옥토끼는 떴다 졌다 하면서 늙은 모양을 재촉한다.

하루해가 떴다 졌다, 내일도 또 하루해가 떴다 졌다 하면서 1년이 지내가고, 달이 떴다 졌다, 달이 또 떴다 졌다 하면서 우리를 늙게 만든다 이것이여.

 

하루해가 떴다 지고서 거울을 쳐다본다고 해서 별로 늙은 줄을 모릅니다마는, 그 하루 하루가 1년이 지나면 1년 동안에 벌써 흰머리가 많이 불어나고 주름살이 지나가고, 1년 사이에 많이 늙어 버리게 된다. 젊을 때에는 1년, 이태 지내도 잘 모르지만, 사십 오십이 넘어가면 1년이 무섭다 그말이여.

젊다고 해서 어찌 늙지 아니하리요마는 눈에 잘 띄지 아니한 것뿐이지 자라고 있는 것 자체가 늙어 가는 것이고, 늙어 가는 것이 바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인데, 어찌 등한히 할 수가 있나.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여,

우리의 인생살이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은 물웅덩이에 물이 그 삼복더위에 가뭄이 계속이 될 때에 물웅덩이에 물이 매일같이 바짝바짝 바짝바짝 밭아 들어가는데, 그 적은 물속에 송사리떼, 크고 작은 그 고기떼들이 펄떡펄떡 펄떡펄떡펄떡펄떡 뛰면서 물은 거의 다 잦아지고 곧 말라 오늘내일 사이에 완전히 말라버리게 생길 때,

송사리란 놈이 그 웅덩이 속에서 팔딱팔딱팔딱팔딱 정식으로 고기가 서지를 못하고 옆으로 이렇게 드러누워서 팔딱팔딱 뛰고 있다가 벌써 한쪽에서는 맥을 못추리고 늘핀하니 죽어가고 있는 그러한 상황이 바로 우리 인생살이다 이것이여.

 

세계 도처(到處)가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고, 우리도 38선을 놔두고 호시탐탐 남침(南侵)을 노리고 있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고 있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것이여.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여.

황야(荒野)를 여행을 하다가 성난 코끼리란 놈이 쫓아옴을 만났다. 도망을 치다가 마치 깊은 샘을 하나 만나. 그래서 그 샘으로 피신을 하는데, 저 깊이 들어가자니 저 밑에는 독룡(毒龍)과 독사(毒蛇)가 우글거리고 있고, 그래 마치 언덕에서 등넝쿨이 떠억 뿌리를 박고 거기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등넝쿨을 휘어잡고 매달려 갖고 있다 그말이여.

 

코끼리란 놈은 그 샘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서 밖에서 코를 내두르면서 위협을 하고 있고, 저 밑으로 들어가자니 독룡 독사가 있고, 그런데 팔은 아파 죽겠지만—그러자 그 칡덩쿨 뿌럭지 있는 데다가 벌이 벌집을 지어 놓고, 그런데 그 날씨가 더우니까 그 벌집에서 꿀이 넘쳐 가지고 꿀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처음에는 무엇이 입술에 톡 떨어져서 무의식 중에 혀로 입술을 핥으니까, 아! 다디달다 그말이여.

 

조금 있으니까 또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해서 그 꿀방울을 입을 벌리고 인자 정식으로 똑 똑 떨어지는 것을 받아 먹고 있는 것이 너무 달고 좋은 바람에 코끼리가 바로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독룡 독사가 저 밑에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마저도 망각을 하고.(21분40초~42분49초)

 

 

 

 

(3/3)----------------

 

그런데 흰쥐와 검은쥐 두 마리가 나와 가지고, 칡넝쿨(등넝쿨)을 검은쥐가 한번 갉고 나면 흰쥐가 한번 또 갉고, 흰쥐가 한번 갉아먹고 나면 검은쥐가 한번 갉고.

 

쥐란 놈은 시간만 있으면 무엇을 긁어야 돼. 긁어서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 긁고 가만히 놔두면 송곳니가 길어나 가지고, 웃송곳니는 길어서 아랫턱을 뚫고 내려가고, 아랫 송곳니는 길어나 가지고 웃입바탕을 뚫고 나가가지고 자동으로 죽게 되기 때문에 시간만 있으면 딱딱딱딱 이를 갖다가 갈아야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집에서 보면 창고에 공연히 뭘 갉아 가지고 못쓰게 맨든 걸 보는데 그건 쥐의 자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또 이가 날카로워야 뭘 또 먹을 수도 있고, 그 본능적으로 그런 건데.

 

해필 그 칡넝쿨 하나에 매달려 가지고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그 칡넝쿨을 와서 긁고 있는 그런 못된 쥐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얼마 안 가면 뚝 떨어지면 죽게 되어 있는데 꿀 받아 먹는 재미로 그것마저도 모르고 있다 그말이여.

 

고대로 가만히 있자니 칡넝쿨이 뚝 떨어지면 죽고, 올라가자니 코끼리란 놈이 기다리고 있고, 내려가자니 독룡 독사가 혀를 널름거리고 있어. 어떻게 하면은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것이 ‘안수정등(岸樹井藤) 기능장구(豈能長久)냐. 언덕 나무에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 있는, 이 등넝쿨이 얼마나 오래 가겠느냐?’

‘안수정등(岸樹井藤)’이라고 하는 공안(公案)입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건 불가(佛家)에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도 이러한 문제가 있고, 동양뿐만이 아니라 서양에도 이러한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와 같은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이 우물의 칡덩쿨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여러분도 심심하면 한번 이 수수께끼를 풀어 보시고, 가정에 돌아가시면 학교에 다니는 아들이나 손자 딸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건 공안이라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너무 이 공안이 재미가 있는, 우리 인생을 고대로 표현한 공안이기 때문에 세속에서 수수께끼로 풀어 봐도 재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를—자꾸 이 죽음을 향해서 짧아져 가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독룡 독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숨이 끊어지자마자 염라대왕이, 저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축생 아니면 지옥, 육도(六途) 생사윤회(生死輪廻)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달콤한 꿀이 똑 똑 떨어진 것은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욕락은 재산에 대한 욕심, 그 다음에 이성 간에 색욕에 대한 욕심, 본능, 그 다음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식욕에 대한 즐거움, 그 다음에 명예와 권리에 대한 욕심, 다음에는 즐겁고 편안하게 놀고 쉬는 그러한 즐거움, 이것을 인생의 오욕락이라 하는데.

재(財) · 색(色) · 식(食) · 명(名) · 수(睡),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세월이 지내가는 것을 망각(忘却)하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실도 망각하고, 무상살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하는 것도 망각하고, 이러다가 뚝 떨어지면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삼악도(三惡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그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우리가 망각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흰쥐 검은쥐는 계속해서 칡넝쿨을 쏠고 있기 때문에 칡넝쿨은 결정코 마침내 끊어져 버리고야만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여기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느냐?

 

 

앞으로 석달 동안 정진할라면, 삼복성념(三伏盛炎)에 앉았을라면 그 땀이 흐르고 흘러서 오금쟁이가 짓무르고 궁뎅이에 땀띠가 나서 피부병이 생기고, 앉았으면은 더워서 땀은 등허리에서 줄줄 흘르고,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차릴라고 해도 혼침(昏沈)이 오고, 그러한 어려운 정진 기간입니다마는, 어렵다고 아니하면 누가 내 대신 공부를 해 줄 것이냐?

아무리 더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추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피로해도 공부는 해야 하고, 아무리 아파도 공부는 해야 하고.

 

어리석게 하지 말고 지혜롭게 공부를 해 가야 한다. 가행정진, 용맹정진 대단히 좋지만, 어리석게 하면 퇴태(退怠)의 인연이 된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마장(魔障)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살님들도 가정에서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마는, 여기 백일기도에 동참(同參)을 하시면 여러 보살님들도 이 안거(安居)에 방부(房付)를 들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백일기도에 한 분도 빠지지 말고 동참을 하시고 법회가 있을 때엔 꼭 참석을 하시고.

집에서 가정일 돌보시면서 아들딸 가르키면서 살림하시면서 앉았을 때나, 섰을 때에나, 일을 하실 때에나, 공양을 하실 때에나, 또는 어디를 가실 때 차를 타실 때에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시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다그쳐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 제자에는 머리 깎은 스님네만이 제자가 아니라, 재가제자(在家弟子) 우바새 · 우바이, 비구 · 비구니가 이것이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별을 지어 놓으셨지만 도업(道業)을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여.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마을에 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더 간절히 알뜰히 공부를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스님네보다도 몇 배, 몇십 배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업(業)의 구렁텅이에서 해탈(解脫)하시게 되고, 생사윤회의 구렁텅이에서 해탈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스님네는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가 정성스럽게 바친 보시와 공양에 의해서 이 도(道)를 닦아가야 할 이 소중한 육체를 보전해 나가고, 그러한 여러분의 신심과 공양하는 공덕으로 도업을 잘 닦아서 스스로 깨닫고 나아가서는 많은 중생을 제도해야 할 중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질적으로 정성으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네를 잘 공양하고 보호하고 받듬으로써 스님으로부터서는 법(法)의 보시(布施)를 받는 것입니다.

재물을 물질을 여러분은 스님네에게 보시하고, 스님네는 수행으로써 여러분에게 법보시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밤낮 보시만 하고, 스님네는 우리한테 무엇을 보시를 해 주느냐?'

법을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을 얻지를 못해서 전생사(前生事)를 잊어버려서 잘 모릅니다마는, 전생에 여러분이 스님이었었고 우리가 신도였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전생에) 우리가 신도가 되어서, 스님으로 공부하시는 여러분에게 보시를 해서 그 인연으로 금생에는 우리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여러분은 세속에서 신도가 되어 가지고 교대해서 여러분이 우리를 또 이렇게 보시를 하고 우리를 잘 공양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혹 숙명통이 열린 분이 보면 틀림없이 그러한 인연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金剛經)』에 말씀하시기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야말로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이 크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주상으로 보시를 하고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해서 스님네가 어쨌든지 영양보충을 충분히 해서 건강한 육체로 건전한 정신으로 정진을 잘해서 결정코 금생에 대도를 성취하도록 잘해 주시고.

그 공덕으로 여러분 가정에는 항시 신심과 기쁨이 넘쳐 흘러서 모든 재앙은 다 물러나가 버리고, 크고 작은 소원이 차례로 다 성취가 되어서 부처님 제자로서 만복(萬福)을 성취하고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을 갖추어 구족(具足)해서, 위로는 보리(菩提)를 구하고 아래로는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모든 사람이 자기로 인해서 부처님께 귀의(歸依)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인연이 되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도 강영선 보살이라고 하는 신심 있는 보살이 대중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기쁜 마음으로 받으시고 그 인연으로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기쁨’, 법희선열(法喜禪悅)을 얻으셔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그 강영선 보살님과 함께—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다시 만나서 대도를 성취할 인연이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절히 일러드리는 말씀을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생에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가서 ‘아! 내가 그때 송담 스님이 그렇게 목이 쇠도록 일러준 그 말할 때 공연히 아들 핑계, 딸 핑계, 살림 핑계, 무슨 핑계,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내가지고 내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어째서 내가 그때 열심히 공부를 안 했던가!’

염라대왕 앞에 가서, 저승에 가서 아무리 후회하고 한탄을 해봤자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참선해 나가는 구체적인 법문에 대해서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을 통해서 너무너무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해 주셨기 때문에 생략을 하고 하좌하겠습니다.(42분50초~60분3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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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黃鶯上樹一枝花 白鷺下野千點雪’ ; 『오등회원(五燈會元)』 제15권 「奉先深禪師」 참고.

師曰 ‘古人道白鷺下田千點雪,黃鶯上樹一枝花’ 維那作麼生商量?

*(게송) ‘夜來風雨客聞先 春山依舊草堂前’ ; 『매천집』 (제3권) (매천 황현의 시문집) ‘復至文星齋’ 참고.

[참고] 『매천집(梅泉集)』 (제3권) - 시(詩) : 신축고(辛丑稿)

다시 문성재에 이르러〔復至文星齋〕 (한국고전번역원, 박헌순 역)

夜來風雨客聞先 隔嶺思家轉杳然 已過頭番摘茶候 將蕪一畝種蔘田 老懷慣與同庚話 詩訣勤從後輩傳 世事十年驚百變 春山依舊草堂前

 

밤에 부는 비바람 소리 나그네가 먼저 듣고, 고개 너머 고향 집이 더욱 아득히 생각나네. 첫 찻잎 딸 시기는 이미 제철 지나갔고, 한 뙈기 인삼 밭은 장차 묵밭이 되어 가리.

늙은이 회포를 익숙하게 동갑 벗과 주고받고, 시 짓는 비결은 부지런히 후배에게 전해 주네. 세상일은 십 년 동안 백번이나 변했지만, 봄 산은 예전처럼 초당 앞에 우뚝하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 전남 광양 출생. 한말의 시인, 문장가, 우국지사.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의 치욕을 당하자,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10일 음독 자결하였다.

*연록(軟綠 연할 연/초록빛 록) ; 연한 녹색. 연녹색. 연한 초록색(草綠色).

*금수강산(錦繡江山) ;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3,000리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장엄(莊嚴 엄숙할•삼가할•꾸밀 장/엄할•공경할•꾸밈 엄) ; ①좋고 아름다운 것으로 국토를 꾸미고, 훌륭한 공덕을 쌓아 몸을 장식하고,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님께 올려 장식하는 일.

②건립하는 것. 건립. 훌륭히 배치, 배열되어 있는 것. ③장식. 물건을 장식하는 것. 아름답게 장식함. 훌륭한 것. 엄숙하게 장식된 모양, 모습. 장식물.

*범연(泛然)히 ; ①두드러진 데가 없이 평범하게. ②특별한 관심이 없어 데면데면하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무상설법(無上說法) ; 진리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가르침.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어떠한 도인(道人)은 복숭아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달으시기도 하고' ;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전등록 1,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730.

福州靈雲志勤禪師本州長溪人也 初在潙山因桃華悟道 有偈曰 三十來年尋劍客 幾逢落葉幾抽枝 自從一見桃華後 直至如今更不疑 祐師覽偈詰其所悟與之符契 祐曰 從緣悟達永無退失 善自護持

 

복주(福州)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 그는 본주(本州 : 福州)의 장계(長溪) 사람이니, 처음에 위산에 있다가 복사꽃을 보고서는 도를 깨닫고 게송을 지었다.

 

30년 동안 검(劍)을 찾던 나그네여. 몇 차례나 잎이 지고 가지가 돋았나.

스스로 복사꽃을 한 차례 본 뒤로는 지금에 이르도록 다시는 의심치 않네.

 

영우(靈祐)가 이 게송을 보고 그 깨달은 바를 따져서 서로 계합하였다. 영우가 말했다.

"인연 따라 깨달아 도달했으니, 영원히 물러나지 않으리니 잘 보호하여 간직하라"

 

*'어떠한 도인은 물 흘러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

[참고]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이두촉주(以頭觸柱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다)’에서.

中峰本禪師 侍高峰死關 晝夜精勤 困則以頭觸柱 一日 誦金剛經 至荷擔如來處 恍然開解 自謂所證未極 彌益勤苦 咨決無怠 及觀流水 乃大悟

評曰 自謂所證未極 故終至極處 今之以途路 爲到家者 衆矣 嗟夫

 

중봉본(中峰本) 선사는 사관(死關)에서 고봉(高峰) 화상을 모시고 주야로 정진하며 지내는데, 곤(困)하면 머리를 기둥에 부딪치곤 했다. 하루는 금강경을 외우다가 '하담여래처(荷擔如來處)'라는 대목에 이르러 환하게 개해(開解)하더니 스스로 말하기를 "증한 바가 아직 구경(究竟)이 아니다"하고 더욱 힘써 정진하여 부지런히 법을 묻고 결택하더니, 어느 날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대오(大悟)하였다.

(평) 중봉선사는 스스로 '증한 바가 구경이 아니다'라 했으니, 그런 까닭으로 마침내 지극한 곳에 이르렀거늘 지금에 길위에 있으면서도 집에 이른 것으로 아는 자가 많으니 딱한 일이다.

 

*'어떠한 도인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기도 하고' ;

[참고]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 : 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 · 지리산 · 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祖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청허집(淸虛集)·운수단(雲水壇).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뀌다 ; ‘꿰다’의 사투리.

*점진적(漸進的 점점 점/나아갈 진/조사 적) ; ①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②점차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

*비약적(飛躍的 날 비/뛸 약/조사 적) ; ①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②단계를 껑충 뛰어 아주 빠르고 눈부시게 발전, 향상하는 것. 정상적인 단계를 차례로 밟지 않는 것.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如來)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ā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그런데 이 공부가 마냥 한결같이 잘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에는 순풍에 돛 달듯이 화두가 저절로 들리면서 성성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어떤 때에는 뚝 변해 가지고 영 답답하고 머리가 개운치를 못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어찌해 볼 수 없이 그렇게 애를 먹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끌고 깊은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는 것처럼, 되게 고삐를 땡겨서 우물로 들어갈라고 하면 할수록 나귀는 뒤로 버티고 안 들어올라고, 이렇게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이 든 때도 있습니다.

 

수월하게 잘될 때 보다도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힘이 들고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질 때, 그때가 훨씬 중대한 중요한 고비라 하는 것을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서장(書狀)』에도 대혜(大慧) 스님께서 그 점에 대해서 누누히 강조하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  '공부가 안될 때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고비’ 법문을 들으시려면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그렇게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이 말씀이여.공부가 한 걸음 나아갈라면은 그러한 그와 같은 경계를 만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고비를 잘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서는 한결 공부가 수월하고 '힘을 얻게 된다[得力]' 이것입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게송) '불행방초로(不行芳草路) 난지낙화촌(難至落花村)' ; ‘우거진 풀밭길 걷지 않으면 꽃이 지는 마을에 가긴 어려워.’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66 (가로판 p174)

*(게송)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 중국 남송 세대의 시인, 육유(陸遊)의 시 《遊山西村》 참고.

莫笑農家臘酒渾,豊年留客足鷄豚。山重水復疑無路,柳暗花明又一村。 簫鼓追隨春社近,衣冠簡樸古風存。從今若許閑乘月,拄杖無時夜叩門。

 

[참고] 송담스님(No.523)—93년(계유년)성도재 법회(93.12.08.음)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해. 목적지를 찾아서 깊은 산중에 들어가는데 이제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니 물도 다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인자 더이상 갈 곳이 없구나. 내가 갈 곳은 어디냐? 이렇게 물도 끊어지고 산도 콱 막혀서 이제 길이 콱 끊어졌으니 ‘이제는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그러나 거기서 쉬지 않고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겨서 한 고개를 넘어가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파란 버들은 그윽히 휘늘어지고 밝은 꽃은 환하니 핀 또 한 마을이 거기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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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정도. 그 만큼. 그 수준.

*만날(萬-) ; ①어떤 경우든 한결같이. ②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어느 때든. ③때를 가리지 않을 만큼 매우 자주.

*골때리다 ; 어이없고 터무니없다.

*지서리 ; ‘짓거리('짓'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사투리. *짓 : 몸이나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602 ~ 675)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1045)’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1231 ~ 1298 또는 1308)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④]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1238 ~ 1295)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몽산 스님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등한(等閒)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일찰나(一刹那) ; 극히 짧은 순간.

*억겁(億劫)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법성게(法性偈) ;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義湘 625 ~702) 스님이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지은 7언 30구(210자)의 게송. 210자를 54개의 각(角 굴절)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게송을 말한다.

*(게송) ‘금오출몰촉년광~’ ; 『관음예문(觀音禮文)』 (용화선원刊)에 있는 ‘무상게(無常偈)’ p35, p64 참고.

刹那生滅無常法 聚散循環有漏因 金烏出沒促年光 玉兎昇沈催老像

忍受井枯魚少水 寧容象逼鼠侵藤 覩玆脆境早修行 勤念彌陀生極樂

 

한 찰나에 생하고 멸하는 것이 무상한 법이며,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것은 번뇌[有漏]의 원인이네. 해[金烏]는 떳다 지면서 세월을 재촉하고, 달[玉兎]은 떳다 지면서 내 늙음 재촉하네.

우물이 말라 물이 적은 것 물고기는 어찌 참으며,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고 쥐는 등넝쿨을 갉나니, 이같이 위급함을 절실히 알아 속히 수행을 하고, 부지런히 아미타 부처님 염(念)하여 극락왕생하세.

*밭다 ; (무엇이) 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잦다 ; (액체가)졸아들어 밑바닥에 깔리다.

*늘핀하다 ; ‘늘펀하다(여기저기 널려있는 모양)’의 사투리.

*도처(到處 이를 도/곳 처) ; 여러 곳. 이르는 곳.

*38선(三八線) ;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1945년 8월15일 맥아더가 발표한 ‘일반명령 제1호’에 의해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이,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은 미국이 접수한, 미·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점령 군사분계선.

38선은 1953년 6 · 25 전쟁이 끝나고 정전협정에 따라 설정된 현재의 군사분계선과 다르지만, 현재까지도 흔히 군사분계선을 삼팔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호시탐탐(虎視眈眈 범 호/볼 시/노려볼 탐) ;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형세를 살피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황야(荒野 거칠 황/들 야) ; 버려진 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거칠게 된 들판.

*뿌럭지 ; ‘뿌리’의 사투리.

*다디달다 ; 매우 달다.

 

 

 

 

----------------(3/3)

 

*해필(奚必 어찌 해/반드시 필) ; ‘다른 경우도 있을 텐데 어찌하여 꼭’이라는 뜻으로 마음에 맞지 않거나 서운할 때 쓰는 말.

*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焂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의 더러움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한 노병(老病)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며,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위산(潙山) : (771 – 853) 법명은 영우(靈祐), 속성은 조(趙)씨。당나라(唐) 대종(代宗) 때에 복건성(福建省) 복주부(福州府) 장계(長鷄)에서 났다。열 다섯 살에 출가하고, 스물 셋에 백장선사(百丈禪師)의 법회에 가서 공부하였다.

추운 겨울에 밤늦도록 방장실(方丈室)에 올라가서 문법(問法)하는데, 화상이 『화로에 불이 있느냐?』고 묻기에, 대강 뒤져보다가 불이 없다고 대답하였다。화상은 친히 화로 속을 깊게 뒤져서 작은 불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하는 데서 크게 깨쳤다.

 

그 뒤에 호남성(湖南省) 담주(潭州) 장사부(長沙府)에 있는 위산에 새로 절을 짓게 되자, 그곳에 가서 사십여 년 교화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회중이 항상 일천 오백 명을 넘었고, 입실(入室)하여 법을 이은 제자가 사십 일 명이었다。당나라 선종(宣宗) 7년에 입적하니 나이 83세, 법랍이 64세。그의 제자 중에서 앙산(仰山) • 향엄(香嚴) • 영운(靈雲) 등이 뛰어났다。저술로는 「위산경책(潙山警策)」 그 밖에 「어록(語錄)」등이 많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육도 생사윤회(六途生死輪廻) ;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염(盛炎 성할 성/불꽃·더울 염)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 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 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 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재가제자(在家弟子) ; 집에 있으면서 스님처럼 도를 닦는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善業)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구렁텅이 ; ①깊고 험하게 땅이 움푹 팬 곳. ②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

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법보시(法布施) ; 남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불서(佛書)를 베풂.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보시(布施) : [범] dana 음을 따라 단나(檀那)라고도 쓴다。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

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05~106에서.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 - 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만복(萬福) ; 온갖 복.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4분 42초)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 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 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빠짐없이 두루 갖춤.

*보리(菩提) ; ‘bodhi’의 음사(音寫). 각(覺)•지(智)•도(道)라고 번역. 모든 집착을 끊은 깨달음의 지혜.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법문 내용]

 

(게송)황앵상수일지화~ / 육근을 통해 받아 들여지는 육식이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하는 무상설법(無上說法) / 부처님과 조사들의 오도 기연 / 깨달음은 비약적인 것, 일초직입여래지, 그러므로 이 공부는 일분일초도 등한히 할 수 없다 / 공부가 안될 때 선용기심(善用其心)하라 / (게송)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山盡水窮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참으로 확철대오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 오조(五祖) 홍인대사의 맹세,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 화두 의단타파 확철대오하는 이 도리를 산승(山僧)도 부처님을 모시고 증명합니다 /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게송)금오출몰촉년광~ / 우리의 인생살이가 바짝 마른 물웅덩이 안에 있는 물고기 신세 / 안수정등(岸樹井藤) /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 생사해탈하는데 있어 신도는 스님네보다 몇십 배 간절히 정진을 해야 / 스님과 신도가 여러 생을 지내는 동안 서로 교대로, 공부하고 또 공부하게끔 공양을 해 주고 있다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핑계 안돼!

 

 

범연(泛然)히 보면, 예사로 보면, 봄이 오니까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돌아오니까 이렇게 무성하게 잎이 모다 피어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너무나 평범한 일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 평범한 현실이 입으로 설할 수 없고,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에 진리를 남음이 없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찰나에 깨달을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거각(擧却)하고 성성적적한 상태로 정진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애를 먹을 때 그때, 선용기심(善用其心), 잘 그 마음을 잡드리해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지어 나가면 그 고비가 바로 깨달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고비다.

 

수궁산진의무로(水窮山盡疑無路)터니,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해서 이게 맥혀 가지고 인자 길이 없지 않나? 이렇게 의심했더니,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이다. 버들은 그윽히 드리워져 있고,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또 한 마을이 있더라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을 하셔서 1초 1초를 금쪽같이 아껴서 공부하고,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화두를 거각해서 등한(等閒)히 지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바른 지도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그래 가지고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라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고,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봐도 산의 빛깔과 모냥에 대해서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걸어가되 걸어가는 줄을 모르고, 앉았으되 앉아있는 줄을 모르고, 천 명 만 명 사람이 있는 데에 서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르고.

이러한 경지에—오직 화두의 의단 하나만이 성성적적하게 독로하고.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서도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누가 나로 하여금 이럴 때에 툭!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가야 일주일이 가지 아니해서 반드시 의단이 타파가 되어서 확철대오를 할 것이다. 이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여. 역대조사가 다 그러한 과정을 다 겪으셨어.

 

‘이것이 만약에 거짓이라면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고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도 맹세를 하셨고, 몽산(蒙山) 스님도 맹세를 하셨고, 산승(山僧)도 이 도리를 믿고 여러분 앞에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에게 선언을 합니다.

출가한 목적은 오직 이 한 문제! 이 일대사(一大事) 해결하는 이 밖에는 다시 무엇이 있습니까?

 

‘게으른 사람은 항상 뒤를 바라보고, 지금의 일찰나(一刹那)를 등한히 한다’ 그랬습니다.진실한 수행인은 ‘앞으로 잘하리라’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고, 당장 지금 이 찰나에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간절히 드는 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승 학자의 수행 자세인 것입니다.

 

오욕락은 재산에 대한 욕심, 이성 간에 색욕에 대한 욕심, 본능,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식욕에 대한 즐거움, 명예와 권리에 대한 욕심, 즐겁고 편안하게 놀고 쉬는 그러한 즐거움, 이것을 인생의 오욕락이라 하는데. 재(財) · 색(色) · 식(食) · 명(名) · 수(睡),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살기 때문에 하루하루 세월이 지내가는 것을 망각(忘却)하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실도 망각하고, 무상살귀가 끊임없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하는 것도 망각하고, 이러다가 뚝 떨어지면은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삼악도(三惡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그 오욕락에 맛을 붙여서 우리가 망각을 하고 있다 하드라도, 흰쥐 검은쥐는 계속해서 칡넝쿨을 쏠고 있기 때문에 칡넝쿨은 결정코 마침내 끊어져 버리고야만 말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여기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느냐?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공부를 지어 나가야 마장(魔障)이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에는 머리 깎은 스님네만이 제자가 아니라,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가 이것이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별을 지어 놓으셨지만 도업(道業)을 닦아 가는데 있어서는 마찬가지여.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마을에 계신 여러분들이야말로 더 간절히 알뜰히 공부를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스님네보다도 몇 배, 몇십 배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야 업(業)의 구렁텅이에서 해탈(解脫)하시게 되고, 생사윤회의 구렁텅이에서 해탈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숙명통(宿命通)을 얻지를 못해서 전생사(前生事)를 잊어버려서 잘 모릅니다마는, 전생에 여러분이 스님이었었고 우리가 신도였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전생에) 우리가 신도가 되어서, 스님으로 공부하시는 여러분에게 보시를 해서 그 인연으로 금생에는 우리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고, 여러분은 세속에서 신도가 되어 가지고 교대해서 여러분이 우리를 또 이렇게 보시를 하고 우리를 잘 공양을 해서 우리를 이렇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가운데 혹 숙명통이 열린 분이 보면 틀림없이 그러한 인연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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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