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26~550)2017. 4. 2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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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538)—94년 11월 첫째일요법회 (75분)

(1/4) 약 21분. (2/4) 약 19분. (3/4) 약 19분. (4/4) 약 16분.

(1/4)----------------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하고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미긍현애친살수(未肯懸崖親撒手)하면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리요

나무~아미타불~


승침상속의선마(昇沈相續蟻旋磨)여, 지은 업에 따라서, 선업(善業)을 지으면 좋은 곳으로 올라가고 악업(惡業)을 지으면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 거여. 올라갔다 잠겼다 끝없는 승침(昇沈), 윤회를 하는 것이 개미가 마치 쳇바퀴를 돌듯이 끝없이 돌고 돌되 그칠 날이 없는 거여.


증애교전상익니(憎愛交纏象溺泥)다. 미워해. 자기 뜻에 맞지 아니하면 미워하고, 자기 뜻에 맞으면 사랑하고 좋아하고. 미워했다 좋아했다 하는 것이, 그러한 정이 얽히고설켜서 심하면 보복도 하고 보복을 당하면 그다음에 당한 사람이 또 보복을 하고,

그런 증애(憎愛)가 얽히고설킨 것이 큰 육중한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가지고 간신히 한 발을 들면은 다른 한 발이 진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또 빠졌던 다리를 다시 들면 다른 다리가 또 빠지고, 도저히 진흙 수렁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는 거와 같다 이거거든.


무량겁 이래로 우리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거듭하면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받는 것이 마치 개미 수레바퀴 도는 거와 같고 쳇바퀴 도는 거와 같고,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거와 같더라.


어떻게 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미워했다 사랑했다 하는 것이 그렇게 얽히고설켜서 헤어나지를 못하냐?

그 원인은, 마치 절벽에서 매달려 가지고 손을 놓으면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아주 즉사(卽死)할 것 같은 그러한 상황에서 손을 놓지 못하고 팔은 빠질려고 하고 도저히 놓기만 놓으면은 죽을것 같고, 그렇게 바둥바둥하는 그런 상황이여.


재(財), 색(色), 식(食), 명(名), 수(睡)—재산, 이성, 명예 권리, 맛있는 거 먹는 거, 또 편안하게 안락을 취하는 거 그런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 재산이 없어도 못살 것 같고, 이성이 없어도 못살 것 같고, 명예나 권리가 없어도 못살 것 같고, 편안하게 안락하게 잠자고 그렇게 지내는 것도 없어서는 못살 것 같으니까,

그 오욕락이 없어서는 그것을 놔 버리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그 오욕락에 매달려 가지고 그것을 획득을 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갖은 발버둥을 치는 것이 마치 낭떠러지에 매달려서 손 놓으면 떨어져 죽을 것 같은 그러한 상황이다 그말이여.


그 낭떠러지에서 직접 큰 용기를 내 가지고 손을 놔버려야지, 그 손을 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시 살아날 기약은 없는 것이다 그거거든.


부지신고대하시(不知辛苦待何時)냐? 쓰고 단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어느 때를 기다릴 것이냐?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 그 생각을 버리고 용감하게 그 손을 탁 놔버려야 하거든.


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이런 것들이 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마치 코끼리에 쫓겨가지고 간신히 그 구렁에 피해다가 칡덩굴을 붙잡고 꿀을 받아먹고 있는 사람이 손을 놓으면은 독룡 독사가 굴속에서 기다리고 있고, 흰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그 칡덩굴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했으면 거기서 살아날 수가 있느냐?


이러한 긴박하고도 절박한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항상 헛헛증을 면치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의 생활이다.


용감하게,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내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내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탐심과 자기 마음껏 그걸 누릴려고 하는 탐욕심(貪欲心)과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은 진심(瞋心)을 내고, 또 탐심을 내고 진심을 내고 그것을 수없이 되풀이해 나가고, 용감하게 놔 버릴 줄 모르는 것이 그것이 어리석음이거든.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독한 마음으로 인해서 끝없는 삼악도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갑술년 11월 첫째 일요법회날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법문은 너무 조실 스님의 그 우렁차고 감동적인 법문을 해주셔서 산승(山僧)이 오늘 거기에 덧붙여서 더 여러분께 할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대학 입학 시험을 앞둔 여러 신도님들 가정. 이것은 우리나라의 부모님 또 학생들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할 그러한 과제인데, 아직까지는 범연(泛然)하게 무심하게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입시를 앞두고 많은 기도를 하시고 학생들은 밤잠을 안 자고 애를 쓰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들어가야 할 학교나 자리는 적고, 들어갈라고 하는 학생은 몇 배가 이렇게 많으니 일부는 합격을 하지마는 많은 수의 학생은 또 떨어지게 됩니다.

기왕 시험을 보면 자기가 목적하는 학교에 들어가야 좋겠지마는 어피차 다 들어가지 못하고 일부만 들어갈텐데 못 들어간 사람은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낙망을 하고 때로는 아주 생을 포기하는 그런 학생도 있고, 떨어지면 온통 집안이 초상이 난 것처럼 그러한 큰 충격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꼭 목적하는 대학에만 들어가야만 그 사람이 꼭 좋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왕 시험을 보니 합격이 되도록 노력도 하고 기도도 하고 최선을 다할지언정 여의치 못해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을 해서 잘 새로운 용기와 침착성을 가지고 다시 또 도전을 해야지 거기서 우리가 생을 포기하거나 낙담을 해서 주저앉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 자신보다도 그 학부모가 대단히 책임이 무거운 것입니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이제 떨어지면 너는 영 그만이다’ 계속 압박을 하고 해서 계속 ‘공부 공부’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라’해 가지고 학생들은 거의 긴장과 초조와 불안으로 공부가 잘되지 않고.


공부라 하는 것이 터억 마음을 안정을 하고 제정신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공부가 되는 것이지 계속 몰아붙이고 채찍질한다고 해서만 꼭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도 적당히 해야 하고, 영양도 적당히 섭취해야 하고, 잠도 최소한도(最小限度)로 자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리해야만 공부하는 시간이 효율적으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서 같이 어머니와 학생이 날을 새면서 그래가지고 벌써 정신도 피로하고 육체도 피로하고 그래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할라고 해도 머리속에 들어가지를 않거든.

그것은 그 간곡히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합격하도록 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고 하는 것을 아시고, 너무 그렇게 지나치게 몰아붙이고 해 가지고 역효과가 나지 않도록 그렇게 부탁을 하고.


또 만일의 경우 떨어진다 하더라도 “또 다음으로 가는 길이 있다”

금년에 못되면 또 내년에 갈 길도 있고 대학에 정 못 들어가면은 전문대학도 가고, 전문대학에 안되면은 기술이라도 배워서 니가 너의 소질과 능력 따라서 가도록 느긋하게 이렇게 여유있는 말로 학생을 잘 다스려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몰아붙여 가지고 그 합격이 안 되었을 때 자살하는 그런 학생이 해마다 보도가 되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교육 제도가 잘못되어 가지고 결국은 그런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완전히 그 입학, 대학 입학만을 위해서 소년 시절의 공부를 즐겁게 보람있게 지내지를 못하고 지옥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앞으로 반드시 그런 교육 제도가 잘 고쳐져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기 전에 학생들은 지쳐 쓰러져서 대학에 들어가도 폐인이 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와서도 제대로 사회생활을 못하게 되는 그런 경우도 허다한 것입니다.



다음은 요새 여기서 저기서, 하늘에서 바다에서 모다 자꾸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러는데 그래서 한강에 16개인가 있는 다리를 지나다닐라면은 만일 그 다리가 꺼졌을 때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바람이 들어있는 구명조끼를 입고 건너가야 한다고 그런 말도 들었습니다마는.

그 다리 지나간다고 해서 다 죽을 수도 없는 거고, 비행기가 몇 대 떨어졌다고 해서 비행기 탄 사람마다 다 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차 타고 가면 교통사고로 사람이 참 많이 죽지만 차 탄 사람마다 다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안 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데 다리 지나가다가 죽고, 배 타다가 죽고, 기차 타다가 죽고, 비행기 타다 죽고 그렇게 죽는 수는 사실은 그 사고로 죽은 사람, 병으로 죽은 사람, 죽은 사람 가운데 불과 몇 0.01 프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사고로 안 죽더라도, 언제 죽더라도 우리는 한번 태어난 사람은 죽음을 면치를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죽는 것이 무섭고 두렵다면은 기차 타다, 배 타다, 다리 건너다 죽을 것을 걱정하지 말고 우리의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거기에 그것이 내생(來生)이다고 그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리 안 지나가고, 기차 안 타고, 자동차 안 타고, 비행기 안 타면은 천세 만세 살겠습니까? 그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말하고 듣고 밥 먹고 잠자고 해도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게 내생이여. 그래서 오늘 한 시간 이내에, 오늘 하루 내에, 오늘밤에, 내일에 언제 죽음이 우리에게 닥쳐올란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한 생(生)이요 한 죽음이 생멸(生滅)인 것입니다.


생사가 꼭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을 생(生)이라고 그러고, 이 몸이 숨을 거두고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참선하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그것이 사(死)입니다.


일(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구백 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구백 번을 생사 생사 생사가 있는 것입니다. 구백 생멸이 끝없이 계속해서 한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것입니다.

마치 전기불이 우리 눈에는 환히 계속해서 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마는 사실은 수없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이 너무 빨리 연속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계속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처음~20분40초)



(2/4)----------------


일(一) 찰나간(刹那間)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사를, 생사 문제를 긴박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할 줄 알면 이 몸뚱이 살다가 육칠십 년, 칠팔십 년 살다가 죽은 것은 하나도 겁낼 것이 없고, 다리 건너다 꺼지고 비행기 타다 떨어져 죽은 것을 그 까짓 것 걱정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이 불법(佛法)은 애당초에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서 해탈(解脫)하기 위해서 불법을 믿고 불법을 닦고 그것을 통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딴 생각[別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요새 그린스카우트니, 무슨 자연보호니 전국적으로 바람이 일어서 산에서 들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모다 쓰레기를, 학생으로부터서 관공리(官公吏)와 일반 사람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모두 동원이 되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만시지탄(晚時之歎)이 있지마는 대단히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연이 오염이 되고, 강물이 오염이 되고, 산이나 바다가 오염이 되면은 그 손해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은 인간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마구잽이 지각(知覺)없이 버린 쓰레기로 인해서 해(害)를 누가 봐야 하냐 하면 인간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버리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심코 버리는데, 해(害)는 무심코 지나가지를 않고 인간의 생명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큰 모다 공장에서 나오는 산업 쓰레기며 공장 폐수(廢水)도 중대하지마는 각 가정에서 나가는 쓰레기와 생활 폐수 그런 것들이 마구 살기 위해서 무심코 버리고 하수구로 나가는 폐수들이 강물로 들어가 가지고 강의 고기들이 다 죽고.

그 강이 결국은 그 강물을 수도(水道)로 또 해서 가정으로 공급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남은 물은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의 조개와 바다의 모든 미역 김, 모두 바다에 사는 고기들이 모두 죽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병든 고기를 사람이 먹고 사람이 또 암이 걸리고 온갖 무서운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동안에는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비교적 엄하게 단속을 안 하는 사이에 이미 이렇게 모두가 병이 들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많이 살 만큼 살게 되었으니,

법으로 담배꽁초를 버리면 몇만 원, 쓰레기를 버리면 몇만 원 벌금으로, 물론 법을 엄격히 해서 그걸 단속을 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우리가 어찌 벌금 물기 싫어서, 벌금 무는 것이 아까우니까 담배꽁초를 버릴라다가 관두고 쓰레기를 버릴라다가 안 버리고 이쯤되면 그건 하등 인간이여.


벌금이야 물건, 안 물건 ‘내가 버린 이 쓰레기가 결국은 자연을 손괴(損壞)하고 우리가 사는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쓰레기장으로 만든다’ 그런 지각이 있다면 어찌 산에 놀러 가고 바다에 놀러 가서 함부로 쓰레기를 버릴 수가 있냐 그말이여. 숟갈로 밥 먹는 인간이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느냐.


우리는 스스로 자각(自覺)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삼천년 이래로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면은 자기 먹을 만큼 딱 이렇게 덜어서 먹고, 그것을 숭늉으로 또 깨끗이 가셔 먹고 또 그래가지고 천수(千手)물로 깨끗이 헹궈서 그 바리때 네 개를 씻고 나오는 천수물이 말갛다 말이여. 조금도 탁하거나 찌끄러기가 안 섞여 있다 그말이여.


여러분 가운데에는 선원(禪院)에서 그런 발우공양을 하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발우공양을 그렇게 한번 누구든지 다 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삼천년 전부터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일이 없도록 산에서, 그 산중에 천 명 천오백 명 이천 명 이렇게 많은 대중스님네가 수도(修道) 생활을 하시고 해도 그 흘러가는 물이 강물이 조금도 오염이 안된다 그말이여. 저 밑에서도 얼마든지 그 물을 떠먹어도 괜찮을 만큼 깨끗했다 그말이여.


이것은 뭐 설거지, 발우 씻은 물을 우리 선망부모(先亡父母)인 아귀(餓鬼)가 그 물을 먹고서 갈증을 가시니까 그 발우 씻은 물속에 찌끄러기가 없도록 하라. 이렇게 법문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귀는 어떠한 물도 어떠한 맛있는 것도 먹을 수가 없어. 먹으면 그것이 바로 불이 되어가지고 타 죽으니까 못 먹고, 그 발우공양 하고서 나오는 그 천수물만이 목으로 넘어가거던. 그런데 거기에 찌끄러기가 있으면 목이 맥혀서 또 불이 나기 때문에 우리 선망부모를 위해서 발우 씻은 물이 깨끗하도록 해라.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데.


오늘날 그것을 잘 해석을 하면 음식을 깨끗이 먹어야 한다고 하는 ‘음식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도 거기에 들어 있고, 더러운 설거지 물이 더럽게 나가면은 강물이 오염이 되니까 ‘자연을 오염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러한 뜻도 거기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아귀를 위해서 한다’고 하는 것도 대단히 뜻이 깊지마는 현실적으로는 ‘자연을 손괴해서는 안된다’ ‘음식물을 아껴야 한다’고 하는 뜻으로 오늘날은 해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상에다 이렇게 차려놓고 마구잽이 먹고, 먹고 남은 것은 쓰레기통에다 막 버리고 하수구에다 막 버리고 그러실 것이 아니라,

큰 그릇에다가 반찬이고 무얼 딱 떠다 놓고 각기 빈 그릇을 자기 앞에 밥그릇, 국그릇, 또는 찬그릇 이렇게 빈 그릇을 갖다 놓고 자기가 먹을 만큼 밥도 덜고, 찬도 먹을 만큼 고루고루 조금씩 덜어서 일단 덜어 온 것은 깨끗이 먹고, 먹은 그릇을 숭늉으로 잘 이렇게 헹궈서 깨끗이 먹고, 설거지 해 봤자 별로 찌끄러기가 나오지 않도록 각 가정에서도 요새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남은 음식이 먹고 남은 찌끄러기가 아니고 덜어서 먹었기 때문에 그 음식을 냉장고에나 잘 요렇게 간수했다 그다음 끼니에 먹더라도 변질이 안 되고 또 얼마든지 깨끗하게 기분 좋게 먹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 식구가 숟갈이 입으로 들어갔다 반찬으로 들어갔다 또 저분이 입으로 들어갔다 들랑날랑하는 가운데에 입에 침이 음식으로 섞여져 가지고 금방 그 음식이 변질이 되고, 두었다가 다음에 먹을 수가 없습니다.


시간상 가족들이 동시에 같이 식사하기가 어렵고 바쁜 사람은 먼저 먹고 가더라도 깨끗이 덜어 먹고 갔으니까 다음 사람이 또 와서 먹어도 하나도 기분 나쁠 것이 없고 이렇게 해서 가정에서도 발우공양, 현대식으로 말하면 부페식으로 식사를 하시면은 참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음식 반찬이나 밥이나 쓰레기로 마구잽이 들어가는 일이 없어서 강물도 오염이 안 되고 또 음식물도 아껴서 먹게 되고 위생적으로도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족 가운데 혹 모르는 사이에 간염이 걸려 있거나 또는 감기 독감 같은 것이 걸리거나 전염성 질환이 혹 모르는 사이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가족에 옮겨지지 않아서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에게 그 발우공양을 절에서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기는 어렵고, 부페식으로 그렇게 하시면은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해서 이 자리를 빌려서 권고를 하는 바입니다.


내가 지금 강과 산과 바다와 이 자연을 오염하지 않는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사실상은 꼭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도 대단히 지금 중대한 국가적인 문제, 세계적인 문제로 지금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우리의 건강과 생명이 직결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렇게 자연이 오염이 되면 이 세계는 하늘과 땅이 다 병들어서 식물, 동물, 인간도 살 수 없는 세계가 머지않아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손자, 증손자 저 후손들에게 우리 보다도 훨씬 더 살 수 없는 이 지구를 만들어서 남겨놓고 우리는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방 산승(山僧)이 말씀한 대로 그렇게 명심을 하고 음식도 아끼고 자연도 더럽히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산이나 들에 가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거기 가서 남은 쓰레기는 집으로 가지고 와 가지고 분류해서 이렇게 처리하도록 한다면 산도 깨끗하고 강물도 깨끗하고 바다도 깨끗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도 살기 좋으려니와 우리의 후손도 살기 좋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의 생명도 유지하고 자기의 후손도 끊어지지 않게 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는 행위는 자기도 죽고, 후손도 죽게 만드는 그러한 몰지각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러한 지혜를 부처님이나 스님한테 여태까지도 배우지를 못했던가?


눈에 보이는 쓰레기보다도 더 무서운 쓰레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경계(境界)를 당하면은—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슨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접촉을 하면 반드시 거기에 그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이렇게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육식(六識)이 발동을 해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말로도 표현이 되고, 얼굴에도 표현이 되고, 나중에는 행동으로도 마침내는 표현이 됩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면 좋게 표현하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나쁘게 표현이 되는데, 그 표현된 것이 자기도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해를 끼치고, 이웃에게도 해를 끼치고, 직장이나 관공서 회사에 가서도 해를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무슨 생각이 불쑥 나거든. 나면은 공연히 기분 나쁘면은 가족들에게 그것을 쏴붙이고 아내한테도 쏴붙이고, 남편한테도 쏴붙이고, 자녀한테도 쏴붙이고 직장에서 표현을 하게 된다.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즉각 ‘이뭣고?’ 따악 자기로 돌아오는 수행을 쌓아 나가거든.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계속해서 올바르게 이렇게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자기의 본성(本性)을 이렇게 참구(參究)하면, 그 생각이 정당한 생각이면은 말로 표현을 하고, 정당치 못하면 즉각 거기서 되돌려 버리니까 쓰레기가 밖으로 함부로 버려지지를 않아.


진짜,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말이여.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오늘날 이 쓰레기니, 무슨 폐수니 그런 것을 단속을 법적으로도 단속을 해야겠지마는 정말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그런 사람은 저절로 자연을 아름답게 자연을 청정하게 가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0분41초~39분26초)



(3/4)----------------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하고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한데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좌석학견수학청(坐石學堅水學淸)이요, 돌에 걸터앉으면은 그 돌한테 견고한 것을 배우고, 우리가 물을 보거나 물속에 들어가고 물을 사용할 때에는 청정한 것을 배워야 해. 

대송사직월사명(對松思直月思明)이다. 소나무를 떠억 보면은 소나무의 그 곧은 절개를 거기서 배우고, 환하게 밝은 달을 보면은 우리의 마음을 밝게 하는 그 밝음을 배워야 한다 그거여.


우리는 보고 듣고 일상 생활에 대하는 자연이라든지 상대가 참 많은데 그런 것을 대할 때 바로 그것을 배울 바가 있어야 한다 그말이여.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는 정부를 탓하고 업자를 탓하고 그 탓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 다리가 무너진 것을 보고 무엇인가 거기서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해.

하물며 정부나 관공서에서는 업자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업자를 몰아대고, 업자는 자기가 잘못이 아니라 정부가 잘못이고 무슨 설계가 잘못이고, 서로 미룰 일이 아니거든.


각자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을 하고, 자기가 잘못에 대한 것은 참회(懺悔)를 하고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노력을 하려니와 우리 일반 시민들은 그것을 몰아댄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여.

우리 시민은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해. 그리고서 자기가 당하는 일에 대해서 그와 같은 실수가 없도록 거기서 깨달아야 한다 그말이여.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다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불과 이 돌과 물과 소나무와 달, 네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어찌 그러한 좋은 것만 보고 깨달을 것인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소와 말이 쏟아 놓는 오물을 보고도 우리는 깨닫고, 도둑질 하는 범죄인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모든 개나 소나 짐승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고.


연전(年前)에 종정(宗正)을 지내시고 열반하신 고암 큰스님과 한 지금으로부터 사십 년쯤 된가? 또 여기 전강 조실 스님 두 큰스님을 모시고 여기 어디 도살장(屠殺場)을 한번 견학을 갔습니다.


죽기 위해서 끌려가는 그 소도 자기 죽을 것을 슬퍼하는지 눈물이 글썽한 것처럼 보이는 그 끌려가는 소와 거기서 죽어 가지고 그 고기 한 짐씩 되도록 고기를 잘라서 운반을 하고 그것을 걸어 놓는 그런 모습.

그런 도저히 볼 수 없는 참혹한 그런 광경을 보고 정말 그때 평생에 잊지 못할 마음의 발심(發心)을 했다고 할까.


부처님 말씀에 “저 소를 봐라. 저 소는 전생(前生)에 중이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아니해서 그 시주(施主)의 은혜를 그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소로 태어났다. 저 소는 전생에 중이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과연 그 소를 잡는 도살장에 가서 보고 ‘정말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독사도 아니고 참, 이 시주것 함부로 먹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죽어가는 도살장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하는 행위가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것을 배우고,

부정부패해서 세무서 직원, 구청 직원 모다 부정하다가 뇌물 받고 하다가 쇠고랑 차는 그런 사람 또 살인 강도 하다가 잡혀가는 범죄인, 다 그것도 우리에게 충격만 주고 마는 것이 아니고 대발심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는 보살 화현(化現) 일런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고 반성하고 깨닫고 분심(憤心)을 내서 발심을 한다면 그러한 모든 것들이 보살 화현이 되는 것이고, 그걸 보고 강건너 불 보듯이 ‘죽일 놈들! 저런 놈들은 당장 저놈 찢어 죽여야한다. 사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말아 버린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 사람도 본래는 그런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탐진치(貪瞋癡)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말이여.


우리들도 한 생각 잘못 먹고 감정에 휩싸이다 보면은 언제 그런 실수를 할는지도 모르는 것이여. 또 우리의 자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고, 저런 것을 보고도 우리는 깨달라야 하거든.


무언만상개사우(無言萬像皆師友)여, 말없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우리의 스승이고 도반(道伴)이더라 그말이거든.

수독산림주반성(雖獨山林主伴成)이여, 비록 산속에 홀로 지내더라도 그 산에 있는 모든 나무며 바위며 풀이며 구름이며 비며 개천이며 모든 것이 다, 이 스승이요 벗이더라 그거거든.


우리가 금방 읊어 드리는 그 게송(偈頌)을 정말 깊이 음미하고 그 뜻을 우리가 명심한다면 남의 허물을 볼 겨를도 없고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갈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기보다는 자비심(慈悲心)으로 상대하게 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다 존경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될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지는 모든 것은 설사 그것이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잠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안에서 얻어지는 것은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재산이니 명예니 권리니, 다 그 지식이니, 공부해 가지고 돈 들여서 대학 갈려고 한 것이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은 여자들은 좋은 신랑감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또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간다.

남자들도 대학을 가야 좋은 색시를 얻을 수 있고 좋은 데에 취직을 해야 월급도 많이 받는다. 그리고 대학 교수도 되고 박사도 되고 사업가도 될라면은 대학 안 나오고는 어디다 명함도 못 내놓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잘살라면은 대학을 가야 한다.


그래서 대학을 갈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데, 대학에 간다고 해서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다 잘사는 것도 아니여. 마음먹은 대로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데에 취직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행복하냐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


진짜 행복이라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야. 자기의 안에서 구해야 하는 거야.

돈이 없는 사람은 돈만 많으면 행복한 것 같이 느껴지는데, 돈 많은 사람은 하나도 행복 안 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그런 명예나 권리나 재산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고, 재산이 없고 별로 권리도 없고 해도 그날그날 벌어먹고 살고 막일을 하고 살아도 ‘참, 나는 행복하다’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행복한 거여.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 권리가 많고 그래도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행해.


그래서 진짜 행복하고 싶으면 ‘나는 행복하다’하는 글자를 떠억 방에다 도처에다 써 놓고 하루에 몇백 번씩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하고 자꾸 생각해 보시라 말이여. 이거 장난말 같지마는 절대로 장난말이 아니거든.


‘나는 행복하다. 왜 행복하냐?’ 가끔 한 번씩은 ‘왜 행복하냐?’하는 것을 생각해 봐.


‘이만큼 살고 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이만큼 그래도 괜찮은 남편을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 무던한 아내를 얻었으니까 행복하다’ ‘자식도 이만하면 괜찮으니 그래서 행복하다’ ‘이만큼 먹고 살면 그만이지 그렇게 그러니까 나는 행복하다’

좋은 점만을 생각하고 자꾸 ‘나는 행복하다. 행복하다’ 하루에 천 번씩만 해 보라 그말이야. 나중에는 진짜 얼굴이 입이 옆으로 쫘악 찢어지면서 뭐 하는 일이 잘되고 짜증낼 것도 없고 그런대로 괜찮다 그말이여. 그러다보니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다.


제법 먹고살고 좋은 차도 있고 돈도 있고 괜찮은 사람이 ‘나는 불행해’

자꾸 다른 사람 좋은 사람만 건너다 보고서 ‘왜 나는 왜 저렇게 이쁜 마누라를 못 얻었을까’ 괜히 저 길가에서 ‘나는 왜 저런 남편을 못 얻었을까’ 자꾸 자기 남편,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왜 나는 우리 남편 돈 좀 더 잘 버는 남편을 못 얻었을까’


그래가지고 집에 들어와서 ’나는 불행해. 참, 나는 불행해. 우리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을 신랑감을 만나게 해 줬을까’ 부모 원망 심지어는 중매쟁이 원망 그래가지고 생각해 볼수록 속에서 부글부글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남편이 와도 본체만체하고. 조금만 늦게 오면 ‘뭣하고 인제 왔냐?’고. 그러니 남편이 좋아라 할 거냐 그말이여.


그래서 당장 오늘부터 가시면 흰 종이에다 ‘나는 행복하다’

처음에는 좀 챙피하면 안 보이는 데다 딱 써 붙여.(웃음) 그러다가 조금 잘 보면 보이고 그런 데다가 써 붙이다가 나중에 그 괜찮은 성 싶으면 버젓하게 크게 써 붙여.


그래서 식구대로 하루에 몇 번씩 ‘나는 행복하다’ 따악 하고서 밥을 먹고. 밥을 먹고도 ‘나는 행복하다’—기독교 믿는 분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앉으면은 하느님께 기도 올리고 밥을 먹고 ‘오늘 이와 같이 좋은 음식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참 좋은 일이고.


또 불교 믿는 이들도 합장을 하고 이 밥을 저 농사지어서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또 남편이 돈을 벌어다 줘서 이 먹게 해 줘서 남편을 고맙다 생각하고, 남편은 아내가 또 이렇게 해서 잘 차려 줘서 고맙다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그렇게 낱낱이 따져서 말은 않지마는 불교 믿는 사람들도 밥상을 대하면은 이렇게 합장을 하고 먹는 것이 참 좋은 일인데, 해필 꼭 밥먹을 때만 그럴 거냐 그말이여.


똥 눌 때도 이렇게 똥을 누게 해 줘서...(웃음) 먹는 것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한두 끼니 굶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배설하는 구녁이 맥혀 놓으면... 그건 참말로 대단히 중요한 거다 그말이여.


먹는 음식을 장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먹고 남은 그것을 잘 쓰레기를 처리하고, 하수구가 맥혀서는 안 되거든.

그 하수구에는 항상 설거지 하는 물도 찌끄러기는 탁 받아서 찌그러기가 나온 것은 화단에다가 화분에다가 살며시 묻어 놓으면 그놈이 썩어서 꽃이 아름답게 피는 거고.


그 찌그러기를 막 하수구에다가 막—그 하수구에 걸르는 얼개미가 있는데 그것에 걸려서 잘 안 내려가니까 차라리 빼 버리고 막 집어 넣어. 그래서야 될 것이냐 그말이여.

그 조그만한 마음씨가 결국은 그 사람이 돈 좀 벌어서 큰 공장을 하면은 공장 폐수(廢水)가 막 나와 가지고 한강 낙동강이 막 썩어 문드러져서 고기가 다 죽고, 그 물이 바다로 내려가면은 바다의 모든 고기와 김과 조개와 모다 그런 것들이 다 폐사(斃死)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정말 우리는 한 생각 돌이키는 최상법을 믿음으로 해서 나중에는 자연을 아름답게 (이게 그만하라 그러는데) 자연을 아름답게 해서 이 세계가 정말 금수강산(錦繡江山)이 되도록 하고.

그러한 마음씨 갖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번지면 모두가 다 좋은 도반(道伴)이요, 좋은 스승이요, 모두가 다 불보살(佛菩薩)로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상대가 되도록.(39분32초~58분33초)



(4/4)---------------- 


이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나무가 설한 법문을 바위가 듣고, 바위가 설하는 법문은 나무가 듣고, 큰 나무가 설한 법문은 작은 나무가 듣고, 작은 나무 조그만한 풀포기 하나도 다 법을 설하고 있는 거여. 조그만한 벌레도 다 그 나름대로 무상설법(無上說法)을 하고 있는 거여.

그래서 법을 설하고 또 설한 법을 듣고, 피차(彼此) 설하고 피차 듣는 거여. 그 법신설법을 들을 줄 알아야 진짜 법문을 듣는 거여.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까 바위에 앉아서는 굳은 것을 배우고, 물을 상대하게 되면은 맑은 것을 배우니 그 법문을 들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나는 법(法)을 설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일요일 날 놀러갈 때도 많고 하실 일도 많고 그런데 이 복잡한 교통 속에서 아침부터 와 가지고 오셨으니 전강 조실 스님의 그 대사자후(大獅子吼) 법문은 들었지만, 입가심으로—그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입가심 하잖아요.

입가심으로 내가 한마디 해 드린 것이니까 이것도 잘만 들으면 ‘그 속에 그 말은 괜찮하다’ 그런 말도 한마디쯤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최상승법을 참으로 잘 듣는 사람은 차츰차츰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서 가시는 걸음걸음 법문을 또 진짜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이 법상(法床)에서 들은 것은, 이 조실 스님 법문은 굉장히 고준(高峻)해서 한두 번 들어 갖고는 잘 모르실 것이고 녹음 테이프(tape)를 사무실에서 구해가지고 가서 열 번 스무 번 백 번 천 번을 들으시면은, 들으시면서 참선을 하시면은 참선을 옳게 하시게 되고, 옳게 하시게 되면은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시게 될 것입니다.


그 조실 스님 법문을 옳게 들으시는 방법을 일러드리기 위해서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올라가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고 있다’고 그렇게 핀잔하시지 말고 잘 들으신다면은, 음식이라는 게 꼭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먹어서는 못쓰는 거고 밥상에 놓여진 음식은 짠 것도 있고 싱거운 것도 있고, 신 것도 있고 떱떨한 것도 있고 쓴 것도 있다 말이여.


파란 것도 있고 노른 것도 있고 흰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는데 고루고루 덜어다가 부페식으로 빈 접시에다 고루고루 덜어서 놓고 먹을 만큼 덜어다가,

밥 한 숟갈 떠 넣고 맨입으로 한 오십 번 씹은 다음에 그 다음에 반찬을 입에다 넣고 한 오십 번 씹어서 그 먹은 음식이 곱게 갈리고 저작(咀嚼)이 되어서 그놈이 속에 들어가면 위장이 큰 부담이 없이 소화가 잘되도록. 그러고 나서 또 국물 한번 떠먹고. 그렇게 해서 씹으면서 ‘이뭣고?’하면서 공양을 해보시라 그말이여.


처음에는 씹다 보면은 고소한 것을 느끼게 되고, 고소해도 계속 씹다 보면은 달콤해지게 될 거다 그말이여. 그러면서 그 속에서 ‘이뭣고?’를 하니 세상에 이런 좋은 수행법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이렇게 식사를 하시면 위장병, 소화제 안 먹어도 위장병도 다 낫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이 소화도 잘되고 흡수도 완전히 다 흡수가 돼. 그러니 얼굴도 고와지고.


얼굴 여기 째서 잡아당겨 봤자 그거 주름살, 나중에 늘그막에는 아주 추하게 늙게 되는 것입니다. 이뻐질라고 뭐 요리 째고 잡아당길라고 그러는데, 그러지 말고 음식을 잘 씹어서 잡수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들어가면서 소화가 잘 되니까 뱃속에 나쁜 가스가 채이지를 않아. 나쁜 가스가 채어 가지고 그놈이 돌고 돌아서 삭신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얼굴에 두들두들한 것도 나고 그래가지고 영 아무리 칠하고 바르고 토닥거려 봤자 별로 안 이뻐지거든.


내가 내 얘기를 해서 안 되었지마는 난 별로 얼굴에 바르는 걸  좋아하지 않고 그래도 어디가서 얼굴 추접하게 생겼다는 말은 안 들었어. 그것이 음식을 잘 씹어 먹고, 많이 먹지는 않되 잘 씹어 먹는 거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음식도 피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마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생각을 어떻게 먹느냐?

항상 감사한 마음, 항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지혜로운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생각을 항상 가지면은 자연히 얼굴은 이뻐집니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적으로도 다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 정말 이뻐질라면은 마음보를 고쳐. 마음보를 고치고 음식을 잘 씹어서 먹고. 그러면은 나이들어 가면 늙어지기 마련이지 어쩔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내가 칠십 살 먹었다면 별로 사람들이 곧이 잘 안 듣고 한 십 년쯤은 젊게 보이는데, 젊어져 봤자지 뭐 별것은 없으나 마음보를 바르게 쓰고 맑게 쓰고 자비롭게 쓰면은 확실히 얼굴도 고와지고.


또 몸에 병도 심장병, 간장병이 속이 바글바글 끓고 속상하고 성내는 데에서 온갖 병이 자꾸 악화가 되는 것은 여러분도 충분히 인식하고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면 마음도 고와지고, 자연히 식사도 천천히 잘 저작을 해서 잘 잡수게 되고 모든 음식도 애껴 먹게 되고, 모든 쓰레기도 적절히 잘 처리해서 분류해서 쓰레기가 적게 나가도록 하시고.

그렇게 하면은 우리 개인도 이뻐지고 젊어지고, 가정도 편안하고 행복해지고, 이웃도 서로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서로 아끼는 마음으로 상대하게 되니 지상천국(地上天國)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 것은 아주 걱정을 놓으시라고요.


이렇게 해서 오늘, 머지않아서 수일이 지나면 입동(入冬)이 돌아옵니다. 겨울철이 또 다가오니 겨울 준비를 하셔야 할 것이고.

지금 두서없는 얘기를 했지마는 결국은 이것이 참선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이 많으신데 스님네나 또 신도님네들은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화두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화두, 천칠백 공안이 있습니다.

화두라고도 하고,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그 화두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화두,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눈으로 볼 줄 알고 귀로 들을 줄 알고 무엇을 생각할 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그럴 줄 아는 놈이 이 안에 있다 그말이여.

눈으로는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는 잡을래야 잡히지도 않지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우리를 이렇게 운전하고 있어.


육체적인 모든 동작, 정신적인 모든 작용이 그 알 수 없는 그 한 물건으로부터 나오는데 ‘대관절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인고?’를 줄여서 말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다 숨이 나갔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거든.


이것은 지식이나 이론적으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그놈을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無條件)하고 ‘이뭣고?’ 그렇게만 의심을 하는 거여.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처음에는 숨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이뭣고?’하지마는 ‘이뭣고?’한 뒤 끝에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그 다음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 다시 거기다 ‘이뭣고?’ 안 해도 돼.

알 수 없는 의심을 타악~ 관조(觀照)하거든. 숨을 두 번 쉬어도 고대로 있으면 고대로 관(觀)하고, 숨을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들어마셨다 내쉬어도 그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고대로 ‘이뭣고?’ 다시 안 해도 있는 그 의심을 관하는 거여.


그러다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거나 또 그 의심이 없어지면 그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면서 다시 ‘이뭣고?’ 다시 또 챙기는 거여.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져 있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일을 할 때도 고대로 있고, 걸어갈 때도 고대로 있고, 화장실에 가서도 고대로 있고, 잘라고 누워서도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있어. 있는 그대로, 그 빨리 잘라고 생각할 것도 없어.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 화두만 들고 잠이 언제 온 줄 모르게 오면은 그대로...  꿈에서도 하게 되고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뜨면은 어제 저녁에 들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 그말이여.

그러면 그때 새로 화두 들 것도 없이 그 들어 있는 그 화두, 들려 있는 화두 고대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또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이런 상태로 일주일이 못 가서 툭 터지게 된다 그말이여. 툭 터지게 되면은 그때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데.


빨리 깨달을라고 그 벼락 신심을 내 가지고 어거지로 막 이를 악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여.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법 그리고 화두를 드는 법도—화두도 눈탱이를 찡그리고서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하면 그러면 골치만 아프고 머리만 뽀개질라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여.


다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잘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잘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해.


듣다 보면, 한 번 들어 갖고는 별로 어려운 말이 있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앉는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 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라면은 여러 번 들으면서 떠억 자세도 가다듬고 호흡법도 가다듬고 화두 드는 법도 떠억 해서 자연히 공부하는 법을 옳게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은 잘 모르고 그래가지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막 좁은 구녁에다가 송아지 몰아 넣듯이 그러면 안되거든.


모든 것은 바른 방법이 있는 것이고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지, 바른 방법을 모르고 열심히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그렇게 아시고.


화두는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58분34초~74분4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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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승침상속의선마~’ ; 중봉명본 스님의 '天目中峯和尙廣錄卷第二十九'에서 '寄同參十首' 게송 참고.

*업(業) ; 업(業)은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을 말한다. 그리고 이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그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〇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口)을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이 3가지 업(業)을 신·구·의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은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를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생)에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이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에 따라 ①선심(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과, ②악심(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과,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의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그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고(苦)의 과보를 받는다.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안수정등(岸樹井藤) ;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다가 성난 코끼리 한 마리를 만났다. 크게 놀라 달아나다가 다행이 우물을 발견하고, 우물 안으로 뻗어 내려간 칡넝쿨을 붙잡고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네 마리의 뱀들이 사방에서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고, 또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그는 칡넝쿨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서 칡넝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였다.  코앞의 칡넝쿨에 벌집이 있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떨어져 입에 들어왔다. 순간 그는 모든 위험을 잊고 그 꿀을 맛있게 핥아 먹었다.


여기서 사람은 범부를,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우물은 사람의 몸을, 칡넝쿨은 생명줄을, 뱀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사대(四大) 요소(地水火風)를, 흰 쥐는 낮, 검은 쥐는 밤, 즉 흘러가는 세월을 뜻하고, 독사는 악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고통의 세계를, 꿀은 사람을 현혹하는 욕망을 뜻한다.<잡보장경>

*헛헛증 ; ①뱃속이 몹시 빈 듯한 느낌. ②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증세.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내생(來生) ; 죽은 후에 다시 맞이하는 미래의 삶.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구백생멸(九百生滅) ; 《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剎那爲一念 一念中一剎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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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해탈(解脫) : [범] Vimoks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관공리(官公吏 벼슬·관청 관/공적 공/관리 리) ; 관리(官吏 : 봉급을 받고 국가나 지방 자치 단체의 사무를 보는 사람)와 공리(公吏 : 관리가 아니면서 공무를 맡아보는 사람)를 아울러 이르는 말.

*만시지탄(晚時之歎 늦을·저물 만/때 시/어조사 지/탄식할 탄) ; 어떤 일에 알맞은 때[時]가 늦었음[晚]을 안타까워하는 탄식(歎息).

*지각(知覺)없다 ; 사물의 이치나 도리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 있다.

*무심코(無心-) ; 아무런 뜻이나 생각이 없이.

*폐수(廢水 폐할·버릴 폐/ 물 수) ; 불순물이나 화학 물질 따위로 더럽혀져 버리는[廢] 물[水].

*손괴하다(損壞-- 덜·해칠·상하게 할 손/무너질·무너뜨릴 괴) ; (사람이 물건을)상하거나 부서지게 하다.

*금수강산(錦繡江山 비단 금/수놓을 수/강 강/뫼 산) ; 비단(緋緞)에 수(繡)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제주도 남쪽 끝까지 삼천 리(三千里)가 되는 우리나라의 자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성인 아래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의식이다.

*천수물(千手물) ; 청수(淸水)물.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한 후, 발우(鉢盂)를 씻는(씻은) 물. 이 물을 모은 천수통(千手桶, 청수통, 퇴수통)을 공양방 가운데 두고 절수게(節水偈)를 외우는데, 공양방 가운데 천장에 붙여 놓은 천수다라니(千手陀羅尼,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선명하게 비칠 정도로 깨끗하므로 천수물이라 한다.

절수게(節水偈)는 ‘내 이 발우 씻은 물은(我此洗鉢水) 하늘나라 감로수의 맛과 같다(如天甘露味) 아귀들에게 베푸니(施與餓鬼衆) 받아 마셔 모두 배불러지이다(皆令得飽滿)’

이 천수물을 굶주림과 기갈에 고통 받는 아귀들에게 베푸는데, 찌꺼기가 있으면 아귀의 바늘구멍만한 목구멍에 걸려 고통을 일으키므로, 천수통에 부을 때 맑은 물만 붓고, 혹 남은 찌꺼기는 자신이 마신다.

*천수통(千手桶) ; 절에서 스님들이 식사(발우공양)을 한 후, 발우(鉢盂)를 씻은 물을 거두는 동이. 청수통, 퇴수통이라고도 한다.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과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부페 ; 뷔페(buffet). 여러 가지 음식을 식탁에 차려놓고 손님이 스스로 골라 덜어 먹도록 한 식당.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 영역.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귀(耳根)·코(鼻根)·혀(舌根)·몸(身根)·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쏴붙이다 ; 쏘아붙이다(감정이 상할 정도로 매섭고 날카롭게 말을 내뱉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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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좌석학견수학청~’ ; 『환성시집(喚惺詩集)』 (門人 聖訥編錄) ‘시학도(示學徒)’ 참고.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70)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改過自新),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罪隨心滅).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心本空寂),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罪業無寄).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종정(宗正 마루·우두머리 종/바를·우두머리 정) ; ①불교 각 종단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받들어 모시는 스님. ②한 문중의 가장 높은 어른.

*도살장(屠殺場 잡을·가축을 잡거나 사람을 죽임·가를·칼로 베어 끊음 도/죽일·벨 살/마당·곳 장) ; 고기를 얻기 위해 소나 돼지 따위의 가축을 도살(짐승을 잡아 죽임)하는 곳.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bodhi는 깨달음, sattva는 살아 있는 존재, 곧 중생을 뜻하므로-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뜻.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② 보살승(菩薩乘)의 준말. ③수행자. ④ 고승(高僧)에 대한 존칭. ⑤ 여자 신도를 일컫는 말.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 · 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 · 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佛菩薩)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얼개미 ; ‘어레미(밑바닥의 구멍이 굵고 큰 체)’의 사투리.

*폐사(斃死) ; 주로 짐승이나 어패류가 갑자기 죽음. 급격한 기온 변화나 병원 감염으로 소, 오리, 물고기, 조개 따위가 죽는 것을 이른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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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신설법(法身說法) ; 법신(法身)이 설법(說法)한다는 말. 진리로서의 법 그 자체가 설법하고 있는 것. 육신(肉身)의 부처님은 때 · 장소 · 사람에 의해 가르침의 일부를 설했으나, 법신불은 그와 같은 것에 상관없이 삼세에 걸쳐 영원히 항상 모든 곳에서 자신의 마음속에서 깨달은 것을 설하지만 미혹된 범부는 이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무상설법(無上說法) ; 진리를 깨닫게 하는 최고의 가르침.

*전강선사 ;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고준하다(高峻-- 높을 고/높을·험할 준) ; 높고 험준하다.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삭신 ; 몸의 근육과 뼈마디.

*마음보 ; 마음을 쓰는 속 바탕.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벼락 신심 ; 빨리 깨달음을 구하고자 벼락치듯이 몹시 빠르고 세차게 일으키는 신심. 그런데 수행 정진은 올바른 방법을 모르고 욕심만 앞질러 가지고 우격다짐으로 하다 보면 부작용이 일어나서 고생을 하게 되니까 반드시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한다.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 ;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 스님께서 하신 모든 법문은 참선법을 핵심으로 설하신 법문입니다. 그 가운데 ‘참선법 A~E’라고 하여 처음 참선하는 분을 위해 5개를 선정하여 놓은 법문.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우격다짐 ; 억지로 우겨 내몰거나 강요함.



[주요 내용]


(게송)승침상속의선마~ / 오욕락(五欲樂), 삼독심(三毒心)을 용감하게 놔 버려야 / 한생각 일어났다 꺼지는 것이 생사 / 일(一) 찰나간(刹那間)에 구백생멸이 있는 그 생사를 정말 두려워할 줄 알아발심(發心)해야.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음식(물질) 존중, 생명(자연) 존중의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수행 의식 / 물질의 쓰레기 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쓰레기.

(게송)좌석학견수학청~ / 항상 모든 생활에서 배움의 자세로 살아야 / 고암 큰스님, 전강 조실 스님과 도살장 견학 / 시주것 무서운줄 알아야 /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다 / 법신설법(法身說法) / 마음보를 바르게, 맑게, 자비롭게.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최초의 화두고, 가장 궁극적인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麽), 우리말로는 ‘이뭣고?’입니다 / 수행 정진은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주요 문구]


오욕락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추구해 봤자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내 뜻대로 얻어지기도 어렵고 설사 얻어졌다 해도 오랫동안 내 욕심껏 누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그러한 것을 얻고 유지하고 누리다가는 결국은 지옥의 삼악도 밖에는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인식을 하고 용감하게 그것을 놔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생사가 꼭 이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것을 생(生)이라고 그러고, 이 몸이 숨을 거두고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참선하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이 생(生)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그것이 사(死)입니다.


정말 이 일(一) 찰나간에 구백 생멸이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할려고 거기에 발심(發心)을 하게 되면은 어느 겨를에 탐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진심을 내며, 어느 겨를에 딴 생각[別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마구잽이 밖으로 쏟아내지는 법이 없어.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돌이켜서 ‘이뭣고?’ 자기의 그 생각 일어나는 뿌리로 그 생각을 회귀(回歸)를 하는 거여.


물질도 소중한 것이지마는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정신 작용이야말로 물질 보다도 몇천 배 몇만 배 소중한 것이다.

그 한 생각을 잘쓰면 자기도 좋고 남도 이롭게 하고 천당에도 갈 수가 있고 극락에도 갈 수가 있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단속을 못하고 잘못하면 저도 손해를 보고 남도 손해를 끼치고 급기야는 지옥에 가 질밖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배울 것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만 배우고 절에 오면 스님네한테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사물, 모든 자연 현상에서 잠시 동안도 배우지 아니하고선 안돼. 다 배울 것이 너무너무 많아. 그래서 돌을 보면 견고한 것을 배우고, 물을 보면은 맑음을 배우고, 소나무나 대나무를 보면은 곧은 절개를 배우고, 달을 보면 밝음을 배운다.


부처님 말씀에 “저 소를 봐라. 저 소는 전생(前生)에 중이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닦지 아니해서 그 시주(施主)의 은혜를 그 빚을 보상하기 위해서 소로 태어났다. 저 소는 전생에 중이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과연 그 소를 잡는 도살장에 가서 보고 ‘정말 무서운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독사도 아니고 참, 이 시주것 함부로 먹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로구나’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남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의 그림자요. 또 남의 모든 허물이 나의 스승이요 도반이요, 보살 화현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반성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보살 화현이 저렇게 나타나신 것이다.


산승(山僧)이 여기에 올라와서 두서없이 되지 않는 소리로—나는 이것을 법문(法門)이라고 생각해 본 일도 없고, 법문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법문은 ‘법신설법(法身說法)’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진짜 법문이거든. 이 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다 그것이 비로자나법신(毘盧遮那法身) 체(體)고, 낱낱이 다 설법을 하고 있거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참선(參禪)을 하게 되면 그 법신설법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잘 알려면 사무실에서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물론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도 가서 잘 듣다 보면은 그 속에 좋은 법문이 많이 나오지만 우선 초학자(初學者)는 「참선법」이라고 하는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수없이 들어야 해.


화두는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이 세상에 사람이 나와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는 것이여. 정말 목숨 바쳐서 할 것은 이것밖에 없어.

다른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 직업, 위치에서 모든 것을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진짜 목숨 바칠 것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뭣고?’보다는 더 좋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17. 4. 18. 22:48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086)—78년 7월 관음재일 법회(78.08.27) (59분)

(1/3) 약 20분. (2/3) 약 17분. (3/3) 약 22분.

(1/3)----------------


입추(入秋)가 지나고 처서(處暑)가 지났는데 아직도 잔서(殘暑)가 혹심(酷甚)해서 대단히 더웁고 훈증(薰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오늘 7월 관음재(觀音齋)에 여기 사부대중께서 많이 법회에 참석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모다 제방(諸方)에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석 달 동안 그 더위를 이겨내면서 용맹, 가(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고 해제를 마치고 오신 모다 납자(衲子) 스님네 그동안 정진하시느라고 대단히 노고가 많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의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 받으신 내용에 대해서 법문이 계셨습니다.

 

원래 참선(參禪)은 처음 시작할 때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가지신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참선을 시작해야 하고 또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정진을 해야 하고 정진을 한 끝에 무슨 소견이 나거나 얻은 바가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갖으신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摩)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가다가 두 갈래 세 갈래 길이 나오면은 반드시 그 길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만 자기의 목적지에 어김없이 도착할 수가 있거든,


하물며 눈으로 보이지 아니한 마음으로 가는 이 도(道), 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한 선각자(先覺者)의 바른 지시 없이 자기 마음대로 공부를 지어간다든지,

바른 안목을 갖추지 못한 그러한 분에게 지도를 받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백 명이면 백 명, 만 명이면 만 명, 중간에 가다가 주저앉거나 또는 곁길에 빠져서 헤매거나, 삿된 길에 떨어져서 영원히 자기 신세를 망치고 남을 망치고 그리고 불법(佛法)을 망하게 할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전생에 얼마나 도를 많이 닦으셨는지, 아마도 전생에 불보살(佛菩薩)이나 위대한 조사(祖師) 스님네가 말세(末世)의 정법을 선양하기 위해서 화현(化現)으로 나타나신 그러한 성현이신, 필시 그러한 어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23살의 젊은 연세로 견성(見性)을 하셔서 한국의 여섯 분의 큰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인가를 다 맡으시고,

거의 지리산, 태백산을 위시(爲始)한 명산대찰에 선지식들을 차례차례 다 만나시고 강사가 되었건, 선사가 되었건 조실로 계신 분은 닥치는 대로 법(法)을 거량(擧揚)을 해서 거의, 확철대오 하지 못하고 선지식 노릇하고 계신 그러한 분들 모조리 다 색출을 해서 소탕을 해버리셨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 태백산에 8대 도인(道人)이라 해가지고 태백산 골짝 골짜구니마다 도인이라 해가지고 도인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가짜 도인들을 전부 다 이 법문답(法問答)을 통해서 다 스스로 도인의 감투를 벗어버리고 조실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는 없도록 그렇게 하셔서 노상 박 금봉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지식 정화(淨化)를 전강 스님이 하셨다”고 이렇게 노상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금봉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스님은, 전강 스님은 일생동안을 차라리 조실 자리에 앉지 말고 납자의 위치에서 일생을 지내셨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랬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이 납니다.

“왜 그렇습니까?”하고 여쭤 봤더니 “납자의 위치에 있으면 얼마든지 어떠한 선지식이라도 가서 법거량(法擧揚)을 해가지고 정화를 할 수가 있는데, 스스로 조실(祖室)의 위치에 앉게 된 뒤에는 조실의 체모(體貌)가 있어서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 선지식의 인가도 없이 절절이 많은 조실들이 지금 한국에 수십 명의 조실 스님이 계십니다. 이럴 때에 정말 확철대오 했고 또 선지식으로부터 분명히 인가를 받은 그러한 조실이라야 정말 학자(學者)를 바로 제접(提接)해서 정법을 유통해 나갈 것이어늘, 자기도 분명히 깨닫지 못하고 선지식의 분명한 인가도 없이 조실의 책임을 띄고서 많은 후배들을 그르치고 있지 않느냐.


이럴 때에 전강 스님이 그러한 정화를 다시 한번 해주어야만 말세의 정법이, 불법이 바른 것과 삿된 것이 깨끗이 가려질텐데 전강 스님이 조실의 명예를 띄고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제 선지식 정화를 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참 안타깝다” 이러한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6대 선지식으로부터 차례차례 다 인가를 받고서 마지막 판에 만공(滿空) 스님 회상(會上)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가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십마물(什麽物)고?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와서 절을 허는고?” 다시 한번 일어서서 떠억 절을 하시니까 “무슨 물건이여?” 또 물으신다 말씀이여.

그래 조실 스님께서는 주먹을 들어서 만공 스님 앞에 턱 이렇게 들었습니다. “어허! 습기를 버리지를 못했구나” 만공 스님께서 그렇게 점검을 하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자신(自信)이 만만(滿滿)해서 쪼끔도 막힐 바가 없고, 의심이 없으셨건마는 그날 이후로 계속 만공 스님 회상에 머물러 계시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전강 조실 스님의 하시는 말씀, 하시는 거동에 대해서 만공 스님께서는 인증을 하시지 아니하고, 사사건건이 전강 조실 스님을 비웃고, 놀려 대고 이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뭐라고 입만 벌리시면 “자네보다는 나어” 도대체 입을 벌리지도 못하게 하시고 비웃고, 조롱하고 해서 그러니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일주일, 열흘을 지내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절대로 선지식이 학자를 조롱하실 리도 없고, 속일 리도 없고, 아니기 때문에 아니라고 하시겠지’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정신을 재차 가다듬어서 철봉대(鐵棒臺)를 붙잡고 서서 밤을 지새기를 몇날 며칠, 한 달, 두 달, 이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결단코 선지식이 나를 조롱할 까닭도 없고 속이실 리가 없다. 반드시 까닭이 있기 때문에 그러신 것이다’ 이리 생각하시고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하는 화두를 들고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공 스님을 최후로 만나지 못하셨던들, 만공 스님의 법 쓰시는 것을 정말 깊이 믿지 아니 하셨던들, 조실 스님께서는 꼭지가 덜 떨어진 채로 선지식 노릇을 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식은 정말 학자로 하여금 정말 조끔도 의심 없는 경지에까지 들어가도록 이렇게 대자비를 가지시고 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참선을 올바르게 하고자 할 때에는 그러한 만공 스님과 같은 그러한 훌륭한 선지식의 지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재삼(再三) 느끼게 됩니다.


만공 스님 말고 용성 스님이라든지, 한암 스님이라든지 혜월 스님이라든지 혜봉 스님이라든지, 그러한 선지식들도 다 만공 스님 만큼 그렇게 훌륭한 선지식이셨고, 각기 그 선지식마다 특이한 좋은 점을 장점을 가지고 계셔서 그러한 선지식들도 다 학자로서는 두루 다 찾아뵈어야 하고 지도도 받아야 하지마는,

그 여러 선지식 가운데에도 특별히 만공 스님은 그러한 점에 있어서 학자의 마지막 중요한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그러한 밝고도 밝은 그러한 안목을 갖으셨던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혜봉 스님께서 “거년 가난은 비가난이요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러니, 금년 가난이 시가난이라 추야무(錐也無)로다. 그 공안에 있어서 어떻게 일러야 조사선(祖師禪)을 보았다고 하겠느냐?” 조실 스님께서는 거침없이 “능각이 뾰족하고 뽀족해서 저와 같지 않습니다[稜角尖尖不似他]” 이렇게 대답하심으로써 쪼끔도 의심이 없으셨지마는,

후일에 그때 혜봉 스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은 것을 인가해 주신 걸로 알았었던 것을 후에사 그것이 아니라, ‘분명히 내가 그것을 잘못 일른 것이고 혜봉 스님께서 인가해 주신 것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깨달으시고 이 용화사에서 연전(年前)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雲集)한 가운데에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은 우리의 정진도 일기지사(一期之事)로 느낀 바가 있다든지, 얻은 바가 있다든지, 어떠한 한 분의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고 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조그만한 것을 얻은 것으로써 만족을 삼을 일이 결단코 아니라고 한 것을 다시 또 뼈아프게 느끼게 됩니다.

 

진리는 한(限)이 없이 높고 크고 깊은 것이어서 우리가 정진하는 가운데에 조그마한 쪼끔 느낀 바가 있고, 어떤 공안에 맥힌 바가 한두 공안에 통과한 바가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족(足)함을 삼고 살림을 삼고 주저앉아서는 아니될 줄 생각합니다.


‘옳다! 인자 되었다!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그 사람은 기껏 옳게 공부를 해 가다가 거기서부터 비뚤어 가는 것이 되는 것이고, 계속 정진을 해 나가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되는 것이고,

좋은 제호(醍醐), 우유로 만들어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바로 제호라고 하는 음식인데, ‘그 좋은 맛있는 제호상미(醍醐上味)를 변질케 해서 독약으로 만드는 격이 된다’고 고인이 말씀하신 뜻이 얼마나 뼈아프고 소중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가운데에 스님이 되었건 또는 거사가 되었건 또는 청신녀가 되었건 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잇고자 하신다면 바른 선지식을 찾아서 올바른 지도하에 공부를 하실 것이고,

공부하시다가 어떠한 종류의 얻은 바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눈밝은 선지식의 점검을 통해서 씻어버릴 것은 씻어버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다시 올라서야 할 사람은 다시 올라서도록 간곡히부탁을 드리는 바입니다.(처음~20분6초)



(2/3)----------------


6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받으실 때에는 전부 다 공안을 통해서, 공안 문답을 통해서 점검을 받게 됩니다. 이 공안, 화두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통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파고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결국은 밝혀내야 할 것이겠지마는, 이것은 보통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리의 수수께끼다’


진리는 이론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실다웁게 닦고, 참다웁게 깨달라서, 깨달라서 내 몸에 체달(體達)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갈 수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가르쳐서 알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이 참선 공부는 어떠한 학자라도, 어떠한 강사라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걸림이 없이 다 해명을 하고, 다 해설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으로 공안을 타파(打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한 지식이 오히려 참선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간다’고 하는 고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 모든 이론을 깨끗이 버려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선지식의 지시에 따라야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빨리 도를얻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많은 고인들이 그러한 교, 이론, 지식 이러한 것들이 속에 가뜩 차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를 얻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던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보고 듣고 생각해서 얻은 바는 빨리 버릴수록 도(道)에는 유익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헌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허니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견성(見性)을 하시고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으신 게송(偈頌)입니다.

 

작야삼경월만루(昨夜三更月滿樓), 어젯밤 삼경에 달이 다락에 가득했는데, 누각에 달빛이 가득히 비추었는데,

고가창외노화추(古家窓外蘆花秋)라. 옛집 창밖에는 갈대꽃이 허옇게 핀 가을이로구나.

불조도차상신명(佛祖到此喪身命)헌데, 부처와 조사가 여기에 이르러서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암하유수과교래(岩下流水過橋來)라. 바위 밑에 흐르는 물은 다리로 지나오는구나.

 

이 게송은 조실 스님께서 깨달으신 경계를 고대로 읊으신 것입니다.


조실 스님은 글을 많이 배우신 문장가도 아니시고, 그러시면서 23살의 젊은 어리신 몸으로 경을 쪼끔 배우시다가 너무너무 사랑한 정든 친구가 비명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현상을 보시고 너무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달으신 나머지 책을 던져버리고 선방(禪房)으로 가셔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시다가 23살의 어린나이로 대도를 깨치셨던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읊으신 게송이 바로 이 게송입니다.

 

이 게송은 어떠한 시인 문장가도 이 게송의 뜻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각자 깨달은 분은 깨달은 분만이 이 게송이 내포하고 있는 참뜻을 속으로 느낄 뿐이고 또 깨닫지 못했을망정 참선 공부를 하시는 분은 이 게송을 접하므로 해서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정진함으로 해서 이 게송의 참뜻을 직접적으로 깊이 계합(契合)이 될 날이 오기를 바라고, 우리 자신도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이러한 진리의 게송을 읊음으로 해서 많은 후인들에게 감명을 줄 수 있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자리에는 처음 오신 거사님도 계시고, 보살님도 계신만큼 참선을 해 가는 데에 구체적인 그리고 기초적인 것을 지도해 달라고 말씀을 하신 분이 여러분이 계셔서 한 분, 한 분에게 그러한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법회를 통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선은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것은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이고.

첫째는 몸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둘째는 호흡을, 단전호흡(丹田呼吸)을 바르게 해야 한다. 셋째는 화두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가지고 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야 한다.



첫째,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해라. 오른발목을 왼다리 무릎에다가 구부려 올려놓고, 왼발목은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가 올려놓아라.

그리고 허리는 쭉 펴고 그리고 그 발 위에다가 오른손을 얹어놓고 그 위에다 왼손을 포개서 올려놓은 다음, 엄지손은 서로 배끼리 이렇게 딱 맞대서 세워라. 그래가지고 그 손을 배꼽 밑 앞에다가 갖다가 딱 대라. 배꼽 앞에 발 위에다 얹어 놔라.


그리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갖다 대라.

두 귀는 두 어깨 위에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하고, 코끝은 배꼽 밑에 단전과 수직상에 놓이도록 해라. 이렇게 하면 몸이 단정하게 됩니다. 이렇게 몸을 단정하게 한 다음에는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한가운데에다가 딱 안정을 시켜라.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서 앉은 자리에서 3미터 지점에다 떨구어라. 3미터 지점에다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떠한 한 점을 응시(凝視)해서는 아니되고, 의식적으론 아무것도 본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만 떠라. 이렇게 자세를 갖는 것이 몸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그다음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보통 사람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아랫배로 호흡을 해라.

숨을 들어마실 때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앞으로 불룩하니 나오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 홀쪽하게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그리고 길게 내쉬어라.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코로 들어마시고 코로 내쉬되 ‘코로 들어마신다 코로 내쉰다’는 생각은 전혀 갖지를 말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저 궁뎅이 뒤에서, 저 뒤에서 쑤욱 궁뎅이를 통해서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로 가득히 들어오도록 이러한 기분으로 들어마시고, 들어마신 호흡은 약 3초 동안 정지 상태로 머물렀다가 내쉴 때는 또 뒤로, 쑤욱 저 뒤로 내보내는 기분으로 내쉬어라.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저 궁뎅이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들어마신 시간은 약 3초 동안에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 약 3초 동안, 내쉴 때는 한 4 ,5초 걸려서 내쉬도록. 이렇게 해서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기를 약 10초 내지 11초 이러한 정도로시간을 잡어서 하되 절대로 무리하게 억지로 시간을 오래 머무르려 하지 말고, 너무 호흡을 배가 가뜩 들어마시지 말어라.

들어마실 때는 약 8부(八部) 정도만 들어마셔.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마는 8부쯤 해서 숨을 멈추고 3초 동안 머물렀다 조용하니 내쉬는 이것이 바로 단전호흡입니다.


이 단전호흡을 하면은 혈액 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머물러 있는 많은 노폐물, 피로의 원인이 되는 독소를 이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통해서 코로 그리고 혈액 순환을 통해서 밖으로 전부 다배설하게 됩니다.

그래서 피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져서 오장육부 기능이 활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맑아져서 그러한 상태에서 참선을 해 나가게 되면은 공부가 잘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이 단전호흡법입니다.


이러한 호흡법을 모르고서 무턱대고 화두만을 파고들게 되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위로 올라가서 골이 아프고 상기병(上氣病)에 걸려서 도저히 참선을 더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소화불량 내지 온갖 오장육부에 부작용이 생겨나서 도업은 성취하기도 전에 병 먼저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옛날부터 수식관(數息觀), 부처님 당시부터 수식관을 권장을 하셨고, 대대로 조사(祖師)들이 내려오시면서 다 단전호흡을 통해서 더위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추위도 이 단전호흡으로 이겨내고 나아가서는 잠 오는 것, 혼침(昏沈)도 그놈으로 이겨내고, 산란심(散亂心)도 이 단전호흡으로써 다 제어를 해가지고 나아가서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기에 가장 편리하도록 그렇게 지도를 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단전호흡에 대해서도 직접 하시면서 한 열흘, 한 달, 두 달, 직접 해보시면 다시 또 문의해 보고 싶을 때에 다시 또 와서 물어보시면 되는 것입니다.


 몸을 바르게 하고 그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한 다음에는 화두(話頭)를 참구를 해야 합니다.(20분10초~37분15초)



(3/3)----------------


화두 가운데는 천칠백(千七百) 화두가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문헌에 오른 것만이고,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공안, 이 우주세계에 가득찬 것이 바로 공안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선지식으로부터 주어진 화두 단 하나만을 철저히 참구를 해서 그 화두를 여지없이 통과를 해서 타파(打破)를 하게 되면은 천칠백 공안도 동시에 다 통과를 하게 되는 것이고, 천칠백 공안이 통과가 되면은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공안을 현성(現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지식으로부터 단 하나의 화두만을 받아가지고 철저하게 참구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어떤 화두 하나를 잡아가지고 이리저리 해본다든지 이 화두 좀 해봤다, 저 화두 좀 해봤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사람은 도저히 바르게 깨달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허송(虛送) 생활을 하게 되고, 참 안타까운 신세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는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그 ‘이뭣고?’에 대한—「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무엇이냐?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부처님 출현하시기 이전에부터 이 ‘시심마’ 화두는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출현하시기 이전 몇억만 년 이전부터서 이 우주가 생겨날 때부터서 우주 자체가 바로 이 「이뭣고?」의 뭉텡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참선이 무엇인 줄도 모르는 그러한 사람 가운데에 ‘대관절 이 인생이라는 게 무엇이냐? 이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철학을 통해서 자기 나름대로 시나 소설이나 또는 예술, 과학 모든 자기의 분야에 있어서 결국은 그러한 분야를 통해서 「이뭣고?」라고 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지 않나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빨리 인생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이요,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철저하게 참선을 해 나가는 길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오직 이 문제 하나만을 위해서 정든 고향과 부모 형제와 가족을 버리고 청춘과 인생을 다 버리고서 오직 이 한 문제만을 전문적으로 참구해 왔었던 것입니다.

목숨 바쳐 참구를 해서 이 일대사(一大事)를 통달하셔 가지고 그것을 또 제자에게 전하시고, 그 제자는 또 그 제자를 전해서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77대 조사(祖師)가 바로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이십니다.

 

이러한 분명한 법통(法統)을 이어받으신 그런 어른으로부터 참선 지도를 받고 화두를 타고 공부를 해야만 나 자신도 올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바른 안목을 갖지 못하고서 남을 바르게 가르킬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 그 목적지에까지 가보지도 않고서 남을 그 목적지에까지 올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도 아니하고 그러한 안내자 없이 올바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적을 바래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실(實)다웁게 닦아서, 실다웁게 깨달아야지, 요행(僥行)을 바랜다든지 기적을 바래고서야 대도를 성취할 가망성은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

대관절 지금 여러분들이 이 더위를 무릅쓰고 수백 리 밖에서, 수십 리 밖에서 이렇게 참석을 하셨는데 “무엇이 왔느냐?”

“내가 왔다”


“내가 누구냐?”

“김 아무개다”


“김 아무개가 누구요?”

“나여”


“내가 누구여?”

“김 아무개여”

이러한 대답은 바른 대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금생에 ‘김 아무개’지, 전생에는 ‘박 아무개’었을런지 모르고. 금생에 ‘김팔봉’이 이름을 칠봉이라고 지으면 칠봉이고, 삼봉이라고 지으면 삼봉이지, 이름이야 수천 개, 수만 개라도 새로 갈아붙일 수가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이지 그것은 ‘나’가 아니여.


“이 몸뚱이가 ‘나’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4대(四大)가 뭉쳐져서 임시로 건립되어 있는, 이 ‘나’가 살고 있는 임시 주택이요, 한 벌의 옷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이것은 ‘나’가 아니다.


이 ‘나’는 이 몸뚱이를 운전하고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주인공(主人公), 그것은 수십 수백 가지의 이름이 있지마는 그 이름 붙이기 이전에 그 참모습이 무엇이냐? 참면목(面目)이 무엇이냐?

이것은 우리의 희고, 검고 하는 것을 보는 눈으로는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새소리, 닭소리를 듣는 그 귀로서는 아무리 들을라고 해도 들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칠백 공안은 우리가 나를 깨닫기 위한 나침판이요, 지팡이요, 등불이며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도 화두를 떠나서는 우리의 공부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화두는 우리의 앞에 역력(歷歷)하고 또록또록하게 나타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하 싱겁고 맛없는 한마디 말이지마는 계속 들고 또 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생각한다’고 하면은 조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어 나가는 데에는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맥힌 상태에서 ‘이뭣고?’ 이것을 생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라 하면 이리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인데 이 화두를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더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하는 그런 이론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관(觀)’이라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볼 관(觀)’자.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볼 관(觀)’자. “관(觀)하라” 이렇게 ‘본다’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없는 것이고, 재미없는 말이지마는 자꾸 하고 또 하고 하는 가운....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가면...(녹음 끊김)

큰방살이가 작은방살이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 언제가 수백억만 년 옛날에는 ‘참나’가 나의 주인공이였었고, 번뇌 망상은 그때 작은방살이였었습니다.

 

그것이 아는 동안에 차츰...(녹음 끊김) 조국을 찾자는 그 한 생각뿐이었던 것입니다. 조국에 모여가지고 모래 위에 흙을 퍼다가 붓고 모래 속에다가 수도 시설을 해가지고 모래땅을 옥토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유학을 가 있는 학생들도 조국에 싸움이 일어났다 큰일이 일어났다 하면은 조국에서 부르기 전에 서로 앞을 다투어 조국으로 모여든다고 합니다. 조국을 잃어 본 사람이 아니면 조국이 얼마나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36년간이라고... (녹음 끊김) 근자에 와서 세계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놀랄 만큼 오히려 선진국들이 우리를 경계하지 아니하고서는 안될 만큼 그러한 수준에 지금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 경제면에서 세계 사람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녹음 끊김) 그러한 내가 참나를 찾는 진리를 탐구하는 그러한 (녹음 끊김) 자칫하면 비참한 구렁텅이에 빠지지 아니한다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나라들이 한때 물질면에서 경제면에서 그렇게 (녹음 끊김 ) 지금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해서 조끔도 안일에 빠질 수도 없고, 허리띠를 늦출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검박하게 살면서 우리는 그 물질 이상으로 그 정신면에 있어서 우리 정신력을 강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정신력 강화가 바로 참선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참나를 찾는 이 수행이야말로 부처님을 믿는 신도에 국한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도 이 참선은 해야만 되고 불교를 안 믿는 사람도 참선법만은 바로 배워 가지고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참나를 찾는...(녹음 끊김) 

 

누차 말씀을 드리는 바이지만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다. 경전에 씌어진 어떠한 경전의 말씀도 ‘이뭣고?’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다 이것입니다. 다못 바보가 되어서 ‘이뭣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는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면 호흡과 화두가 함께 잘되어 가는 단계에 도달할 것입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그것에도 구애받을 것이 없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워서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 먹을 때나 그러한 것에도 조끔도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더라도 ‘아! 인자 되었다. 참! 잘되었다’ 이러한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아니 되고,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가더라도 계속 화두만을 더욱 간절하게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썩 잘 순일하게 잘되어 가다가 어찌된 영문인지 뚝 변해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졸음이 퍼오거나 망상심이 퍼 일어나거나 화두가 도저히 잘 안 들리는 경우가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조끔도 번뇌심이나 짜증을 내지 마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계속 들어나간다면 얼마 안 가서 어려운 고비를 넘게 됩니다. 그 고비를 지혜스럽게 참을성 있게 잘 넘기고 나면 그때 가서는 또 한결 공부가 수월한 단계에 이르른 것입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이 「서장(書狀)」에 말씀하시기를 ‘그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이러한 경지가 절대로 나쁜, 공부가 잘 안되는 마장(魔障)의 경지가 아니라 참으로 한 걸음 올라설 수 있는 좋은 중요한 계기니까 그것을 놓치지 말고 더 정신을 차려서 지혜롭게 그 고비를 잘 넘기도록’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부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해야만 할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을 위해서는 내 몸을 버려야 하고 내 몸을 잊어야 하고, 마을을 위해서는 집안을 잊어야 하고,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는 마을을 잊어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도를 위해서는 몸과 집안과 마을과 나라까지도 버려야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참선하는 사람은 집안이고 뭐 국가도 다 버려 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참선이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나라 삼천오백만 민족이 전부 참선을 하게 되면 나라는 누가 지킬 것이냐?’ 혹 이러한 생각을 하실 분이 계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이뭣고?’하는 동안에는 정말 나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목숨 없는 곳에 나라 생각, 민족 생각이 거기에 떠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때에 도(道)의 문(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냐?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국가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중생을 위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그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팔만대장경을 통해서 우리는 다 읽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의 참뜻을 옳게 이해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한문(漢文)에 통달한 사람은 무슨 경전이든지 맥힐 것이 없다’ 이렇게 보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참선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야만 어떠한 경전의 쉬운 한 글귀라도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디 덥다 핑계대지 말고, 춥다 핑계대지 말고 ‘아직도 나는 할 일이 많다. 아들을 위해서 딸을 위해서 할 일이 많다. 집안을 위해서 할 일이 많다’ 그러한 핑계대지 말고,

1분 1초라도 그 생각을 돌려서 화두를 참구하심으로 해서 이 몸 이만큼 건강할 때 반드시 참나를 깨닫도록 이 자리를 통해서 다짐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37분16초~58분5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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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 ; 일 년 중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때. 이십사절기의 하나. 양력으로 8 23경이며,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벼가 익는 시기이다.

*잔서(殘暑 남을 잔/더울·더위 서) ; 늦여름의 한풀 꺾인 마지막 남은[殘] 더위[暑].

*혹심(酷甚 독할·심할 혹/심할 심) ; ①정도가 가혹(苛酷)하고 심(甚)함. ②매우 지나침.

*훈증(薰蒸 불피움·태울 훈/찔 증) ; ①불피워 태우고[薰] 찜[蒸]. ②찌는 듯이 무더움.

*관음재(觀音齋) ; 관음재일(觀音齋日).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제방(諸方) ; ①모든 지방 ②모든 종파의 스님.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정법안장(正法眼藏) ; 부처님의 바른 교법이라는 뜻.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모든 것을 간직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깨달음을 뜻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 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조사(祖師) : ①1종1파의 선덕(先德)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귀의 존경을 받는 스님。 보통은 1종1파를 세운 스님을 부르는 말。 ②선가에서는 달마스님을 말한다。 ③불심종(佛心宗)을 깨달아서 이를 전하는 행(行)과 해(解)가 상응(相應)하는 도인.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법거량(法擧揚 법 법/들 거/나타낼·밝힐 량) ;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법문답(法問答)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객(禪客)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정화(淨化) ;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체모(體貌 몸 체/얼굴 모) ; 체면(體面). 남을 대하기에 번듯하고 떳떳한 입장이나 면모.

*학자(學者) ; 학인(學人). 도학자(道學者).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참고] 우바새—upasa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남자.(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수행자를 모시고, 신세를 지므로 이렇게 말한다.

우바이—upasika의 음역. 속세에 있으면서 불교를 믿는 여자. (같은 말=靑信女,近事女,近善女,近宿女)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기지사(一期之事) ; ①한 때의 일. 일시적인 일. ②당장의 일.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제호(醍醐) : 옛날 인도에서 우유로써 만드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품질이 좋은 것으로 맛이 제일 좋고, 열병(熱病)에 귀중한 약품도 되는 것이 제호다。이것은 히말라야 산에 있는 「비니」라는 풀만을 먹은 소의 젖으로 만든 것이 더욱 좋다고 한다.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74~75.

然(연)이나  一念子(일념자)를  爆地一破然後(폭지일파연후)에  須訪明師(수방명사)하야  *決擇正眼(결택정안)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는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이 바른가를 결택 받아야 하느니라。

    

註解(주해)  此事(차사)는  極不容易(극불용이)하니  須生慚愧(수생참괴)하야사  始得(시득)다  道如大海(도여대해)하야  轉入轉深(전입전심)하니  愼勿得小爲足(신물득소위족)하라  悟後(오후)에  若不見人則(약불견인즉)  *醍醐上味(제호상미)가  翻成毒藥(번성독약)하리라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으니 모름지기 부끄러운 생각을 내야 한다。도(道)란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더 깊어 가는 것이니,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 하지 말라。깨친 뒤에 만약 밝은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제호(醍醐)와 같은 좋은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리라.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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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게송) ‘작야삼경월만루~’ ; 전강 선사 오도송(悟道頌). 원래는 이렇게 7언이었으나 후에 5언으로 만드심.

〇작야월만루(昨夜月滿樓)  창외노화추(窓外蘆花秋)  불조상신명(佛祖喪身命)  유수과교래(流水過橋來)

*오도송(悟道頌) ; 불도(佛道)의 진리를 깨닫고 그 경지 또는 그 기쁨을 나타낸 게송.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 :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응시(凝視 엉길 응/보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팔부(八部)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복식 호흡(腹式呼吸) ; 숨을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해서 가로막의 신축에 의하여 하는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수식관(數息觀) ; 출입하는 숨을 세어서 마음을 통일하는 것. 그것에 의해 마음의 산란을 막음. 호흡을 세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법.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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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 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법통(法統 부처님의 가르침 법/거느릴·벼리·혈통) ; 불법(佛法)을 물려받음. 또는 대대로 불법을 계승하는 계통. 법맥(法脈)과 같은 말.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사대(四大) ; ①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을 말함. 대(大)란 원소란 뜻.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네(四) 가지 원소(大).

(1)지대(地大) : 굳고 단단한(堅) 것을 성(性)으로 하고, 만물을 실을 수(負載) 있고, 또 질애(質礙)하는 바탕. 질애(質礙)란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다른 존재와 서로 융화하지 못한다는 뜻. (2)수대(水大) : 습윤(濕潤)을 성으로 하고, 모든 물(物)을 포용(包容)하는 바탕. (3)화대(火大) : 난(煖)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숙(成熟)시키는 바탕. (4)풍대(風大) : 동(動)을 성으로 하고 물(物)을 성장케 하는 바탕.

②신체를 말함. 원래, 신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함.

*주인공(主人公)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부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 주인옹(主人翁).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분별식(分別識) ; 팔식(八識) 가운데 제6 의식(意識)을 말한다. 이 의식은 차별하여 사유하고 판단하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역력(歷歷 겪을·지낼·수를 셀·가릴 력) ; ①뚜렷한 모양. 분명한 모양. 똑똑한 모양. ②사물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모양.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대혜종고(大慧宗杲)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79)’ 참고.

*서장(書狀) ; 원래 이름은 『대혜보각선사서(大慧普覺禪師書)』이며 『서장(書狀)』 · 『대혜서(大慧書)』 · 『대혜서문(大慧書門)』 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송나라 때의 대혜종고(大慧宗杲)선사가 당대의 사대부 관료 40명과 2명의 스님에게 보낸 총 62장(狀)의 서간문(書簡文 편지 형식의 글).

이 책은 일상생활에서 불교 수행을 할 때 생기는 의문과 올바른 수행 등에 대하여 주고받은 문답이 주 내용으로,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나가는 묵조선(默照禪)을 배격하고 일상생활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看話禪)을 역설하였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주요 내용]


전강 스님의 선지식 정화 / 전강 스님에게 마지막 관문을 통과시키게 하는 법을 쓰신 만공 스님의 지도 / 제호상미(醍醐上味) 번성독약(翻成毒藥) /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 / 사교입선(捨敎入禪).

(게송)작야삼경월만루~ / 참선은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야 / 자세, 단전호흡 / 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이뭣고?’ 화두 / ‘화두를 관조(觀照)하라’ ‘관(觀)하라’ ‘본다’



[주요 문구]


원래 참선(參禪)은 처음 시작할 때에도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가지신 선지식으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서 참선을 시작해야 하고 또 그러한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정진을 해야 하고 정진을 한 끝에 무슨 소견이 나거나 얻은 바가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런 바른 정법(正法)을 갖으신 선지식의 인가를 받아야만 되는 것입니다.


공안, 화두라고 하기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은 이론으로 풀 수 없는 진리의 수수께끼’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수께끼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을 통해서 갖은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파고 분석하고 연구를 해서 결국은 밝혀내야 할 것이겠지마는, 이것은 보통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리의 수수께끼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간다’고 하는 고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모든 지식, 모든 이론을 깨끗이 버려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서 완전히 바보가 되어서 선지식의 지시에 따라야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철저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빨리 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숨은 코로 들어갔다 코로 나오겠지마는, 우리 의식으로는 코로 들어마신다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궁뎅이 뒤에서 쑤욱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에 머물렀다가 다시 나갈 때에는 저 궁뎅이 뒤로 쑤욱 나가는 그러한 기분으로 숨을 쉬어라.


몸도 건강해지고 정신도 건전해져서 참선하는 데에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 이 단전호흡법입니다.


〇천칠백 화두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화두, 가장 기본적인 화두가 바로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인 것입니다. ‘이뭣고?’는 바로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목적이 어릴 때부터서 그 ‘이뭣고?’에 대한—「대관절 이 인생이란 게 무엇이냐? ‘내’라는 게 무엇이냐?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냐?」 이것을 바로 구체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시심마(是甚麽)’ 화두인 것입니다.


오직 ‘이뭣고?’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疑心)으로 ‘이뭣고?’를 생각하고 관조(觀照)해 나갈 때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분별식(分別識)이 다하고, 번뇌와 망상이 다해서 생각 없는 데에 도달하고, 생각 없는 데에서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이 화두를 타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큰 장독에다가 간장을 가뜩 부어놓은 것을 큰 메겡이로 메쳐서 그 간장독이 쩍! 벌어져서 간장이 와르르르 쏟아지듯이 우리 본참화두(本參話頭)를 타파함으로써 무량겁의 칠통(漆桶)이 동시에 타파가 되고, 바로 나의 본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고, 불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고, 우주의 근본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해야만 할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집안을 위해서는 내 몸을 버려야 하고 내 몸을 잊어야 하고, 마을을 위해서는 집안을 잊어야 하고, 국가나 민족을 위해서는 마을을 잊어야 한다. 진리를 위해서 도를 위해서는 몸과 집안과 마을과 나라까지도 버려야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뭣고?’하는 동안에는 정말 나의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거늘 목숨 없는 곳에 나라 생각, 민족 생각이 거기에 떠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릴 때에 도(道)의 문(門)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고.


그렇게 해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존재냐?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을과 국가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가득찬 모든 중생을 위해서그 사람의 모든 것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을과 국가와 민족을 잊어야 하고 그렇게 잊음으로써 진리를 체달(體達)하게 되고, 진리를 체달한 사람은 인류와 국가와 민족과 모든 것을 위해서 그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51~475)2017. 4. 14. 11:21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473)—92년 부처님 오신날(92.05.10) (58분)

(1/3) 약 20분. (2/3) 약 20분. (3/3) 약 19분.

(1/3)----------------


심춘막수향동거(尋春莫須向東去)하라  서원한매이파설(西園寒梅已破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이라  절기구구향외구(切忌區區向外求)니라

나무~아미타불~


심춘막수향동거(尋春莫須向東去)하라. 봄을 찾아서 모름지기 동쪽을 향해 가지 말아라.

서원한매이파설(西園寒梅已破雪)이니라. 서쪽 뜨락에 차운 매화가 이미 눈 속에 피어 있느니라.


봄을 찾아서 동쪽을 향해 가지 말아라. 겨울에는 북풍(北風)이 불다가 봄이 돌아오면 동풍(東風)이 불거든. 동풍이 불면 봄이 오니까, 그 봄을 빨리 찾기 위해서 저 동쪽으로 찾아 나서지 말아라.


너희 집 서쪽 뜨락에 매화가 이미 눈 속에서 피어 있느니라. 자기집 뜨락에 이미 매화가 피어 있으면 거기에 이미 봄이 와 있거늘, 자기집 뜰에 온 봄을 놔두고 어찌 저 문밖으로 나가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멀리 봄을 찾아 나서지 말아라 이거거든.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이여. 자기집 안에 천진불(天眞佛)이 계셔.

본래부터서 있는 자기 부처님을 놔두고 어찌 저 밖으로 부처를 찾느냐 이거거든.(切忌區區向外求)



오늘은 임신년 「부처님 오신날」입니다. 불기 2536년 그러는데,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신 해를 원년으로 해서 금년이 2536년이니까, 거기에다가 팔십 세에 열반하셨으니까 칠십구 년을 보태면은 2615년 전에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연조(年條)에 대해서는 경전에 따라 차등이 있어서 불교 학자들이 많은 학자들이 한데 모여서 여러 가지로 연구한 결과 2615년 전에 탄생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팔십 세를 사시다가 열반하셨으니까 금년 열반하신 해를 원년으로 해서 금년이 2536년이다. 이렇게 하기로 합의를 봐서 세계 공통 불기(佛紀)는 현재 열반하신 해를 원년으로 해서 2536년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2615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을 하셨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 그렇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의 정반왕(淨飯王)과 마야부인(摩耶夫人) 사이에서 실달(悉達) 태자로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16세에 결혼을 하시고 라훌라 왕자를 낳으시고 그리고 29세에 출가하셔서 35세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셔가지고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35세에 성도(成道)하셔서 45년간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시고도 마지막에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부처님의 진설(眞說)입니다.


왜 팔만사천의 그 엄청난 법문을 설하시고서도 ‘한마디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바로 그것이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에게 정말 하시고자 하신 요점인 것입니다.

그 부처님께서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을 올바르게 알아들어야 부처님의 법문을 바로 이해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 요점에 의해서 우리가 수행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이뭣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걸 인연 닿는 대로 읽고 또 읽어도, 그것은 부처님께서 근기(根機) 따라서 방편설(方便說)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어. 평생 동안을 경(經)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어보았자 우리가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여.


‘이뭣고?’를 하면 정말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게 되고, 내가 부처님의 참뜻을 이해하고 그 참뜻에 따라서 수행을 함으로 해서 우리도 참다운 불자(佛子)가 되는 것이고 마침내는 나도 부처님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는 해마다 돌아오는 음력 4월 초파일을 기억을 하고 그날을 그렇게 융숭하게 최선을 다해서 이렇게 절절이 방방곡곡(坊坊曲曲)에 큰 절, 작은 절 할 것 없이 그날을 이렇게 축하를 하느냐?

천 등(燈), 만 등을 켜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이렇게 정성을 다해서 그날을 이렇게 축하를 하느냐? 또 우리나라에서는 그날을 공휴일로 제정을 해서 범국가적으로 이렇게 축하를 하느냐?


대관절 부처님은 어떠한 어른이시기에—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신, 온 중생들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신 성현(聖賢)이기에 우리는 그토록 정성을 다해서 탄생하신 날을 축하를 하느냐?


정말 똑바로 ‘부처님이 어떻게 위대하고 거룩하신 성현이냐’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들어서 말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별로 큰 은혜(恩惠)도 주신 것이 없고 이익도 주신 것이 없다면 이렇게 3천년이 되도록 그 「부처님 오신날」을 우리가 기억하기도 어렵고, 설사 몇 사람이 그것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세계 각국의 만인(萬人)이 그날을 이렇게 기억을 하고 축복을 하고 축하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치신 은혜는 바닷물을 벼룻물로 해서 먹을 갈아가지고 그걸 다 기록한다 해도 다 기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대충 열 가지를—큰 것, 대표적인 것 열 가지만을 들어서 말씀을 한다면은,


(첫째는) 발심(發心)해서 출가 해가지고—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해서 법계(法界)의 모든 중생들에게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발심 출가하는 모습을 보여주신 그 은혜.

부처님께서 태자로 태어나 잘 왕자로서 자라가지고 정반왕의 대를 이어서 임금노릇을 하다가 그냥 그것으로서 마치셨다면은 오늘날 우리가 불법(佛法)이 무엇인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심해서 모든 중생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


둘째는 그 태자의 고귀한 몸으로 설산에 들어가서 그 어려운 고행을 하셨는데 금생뿐만이 아니라 과거 인행(因行) 때에 수없는 고행을 쌓으셨어. 그 얼마나 많은 목숨을 버렸고, 배고픈 호랑이에게는 몸을 던지고, 처자 권속을 버리시고 다 버렸다 말이여. 그러한 난행고행(難行苦行)을 우리 중생을 위해서 하신 것이다.


셋째는 일향(一向)으로 다른 사람, 다른 것을 위해서 사셨어. 예를 들자면은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데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신 것이여. 한 생각도 자기를 생각하지를 않았어. 이것이 일향(一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은혜.


다른 종교에서는 한 생 동안 중생의 원죄를 벗겨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것 그것 하나만을 가지고서도 온통 그 은혜가 고마워서 야단들이여.

부처님은 무량겁을 두고 손바닥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느 땅,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인도뿐만이 아니라 세계 방방곡곡, 우주법계 이 태양계와 같은 세계가 무수로 있는데, 그 많은 땅들이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서 몸을 다 희사(喜捨)하신 곳이다 그거거든.


넷째는 육도(六道)에 그 몸을 나투신 거여. 하늘나라에도 나타나시고, 인간 세상에, 수라도(修羅道), 축생계, 아귀도, 지옥도(地獄道) 할 것 없이 육도법계에 중생을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안락을 얻게 하기 위해서 몸을 나투신 거여.


다섯째는 중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라도 중생을 따라서 나타나셔. 왜 그러냐 하면은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를 벗어나서 이고득락하기 위해서 중생을 따라서 몸을 나투신 거여. 그래 가지고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그거거든.


여섯째 ‘대비심중은(大悲深重恩)’ 중생이 죄를 짓고 그 고통을 받는 그것을 보시고서는 차마 보실 수가 없어. 중생이 고(苦)를 받는 것을 마치 당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 아프게 생각하셨다. 그래 가지고 중생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잠을 자실 수가 없고, 밥을 편안하게 자실 수가 없고 편안하지를 않아.

그래서 중생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고를 받는 그것을 보고서, 너무너무 괴로워서 견디실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아낌없이 다 버리신 것이다. 부처님의 대비심(大悲心)이 그렇게 중한 그 은혜.


일곱째는 대승, 소승의 기틀에 따라서 큰 근기(根機)를 위해서는 큰 응화신(應化身)을 나투시고, 중생의 하열(下劣)한 소승 근기를 위해서는 소승에 적합한 응화신을 나투셨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큰 그릇은 큰 그릇대로 제도하시고, 작은 그릇은 작은 그릇대로 제도를 하셨어.


그 여덟째는 ‘은실시권은(隱實施權恩)’ 근기가 하열한 중생을 위해서는 실교(實敎)는 잠시 덮어 놔두고 그 작은 그릇에 따라서 권법(權法)을, 방편법을 설하셨어.

만약에 부처님께서 방편법, 권법을 설하시지 않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진리대로만 가지고 모든 중생을 상대하셨다면, 큰 그릇은 제도를 받았겠지마는 근기가 약한 우리 중생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근기 따라서 자유자재로 좋은 방편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어떠한 하열한 중생도 빠짐없이 다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할 수가 있게 되고, 우리와 같은 하근기(下根機)의 극하근기도 마침내는 정법(正法)을 믿고 이렇게 부처님의 진리에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이여.(처음~19분59초)



(2/3)----------------


아홉째는 부처님께서는 생사(生死)가 없으신 분이여.

영원히 진리의 몸이신데 일부러 화신불(化身佛)로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사람으로—부처님 당시에는 백 세까지 사실 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세(末世)에 박복(薄福)한 중생, 박복한 제자들을 위해서 20년간 당신이 누릴 수 있는 복(福)을 말세의 제자들에게 물려주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어.


그래서 ‘말세의 우리 제자들이 아무리 먹고 잘 먹는다 해도, 부처님의 백호상(白毫相)의 억만 분의 일도 다 먹을 수가 없다’ 이런 말씀이 경(經)에 있습니다.


그런데 열반을 안 하시고 영원한 진리의 몸으로 계실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드셔서 이 박덕(薄德)한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아, 부처님 살아계실 때 왜 우리가 좀 더 발심을 하지 못했던가?’ 그렇게 반성하고 참회하고 발심을 하게 했다 그말이여.


또 부처님을 살아 생존 시에 뵙지 못한 말세의 중생들도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부처님에 감사한 마음으로 발심하고 또 발심을 해서, ‘부처님 생존 시에 부처님을 친견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을 깊이깊이 명심을 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님 생존 시에 만나게 되기를 그렇게 발원(發願)을 하도록.


지금 우리가 ‘이뭣고?’를 하고 참선을 한 것은 삼천년 전에 열반하신 그 부처님이 비록 그 육신의 부처님은 친견을 못하더라도, 그 법신불(法身佛)이 우리 자신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부모의 은혜를 잘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는 으레이 자식을 당신이 낳았으니까 입혀주고 먹여주고 키워주고 가르쳐주고 부모는 으레이 그런 것이 부모의 책임 아니어?’ 조금도 부모 은혜를 모릅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사 정말 우리 부모님의 은혜를 그때서 깨닫게 되고, 자기도 자식을 낳아서 키워 봐야 정말 부모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중(至重)한가를 그때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열째는 ‘비념무진은(悲念無盡恩)’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자비심으로 호념(護念)해 주신 그 은혜.

아까 말씀드린 너무 중생을—마치 부모님이 그 피땀 흘려서 번 돈,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안 먹고, 입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입지 않고 그렇게 모은 돈을 자식들 잘살게 하려고 그것을 유산으로 남겨주신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20년을 앞당겨 열반에 드셔가지고 그 여복(餘福)을 우리 말법 제자와 중생들에게 남겨 주셨고. 또 삼장(三藏)의 교법(敎法)을—그것이 법재(法財)죠, 법의 재산이죠. 법의 재산을 또 유산(遺産)으로 남겨 주셔서,

중생들로 하여금 20년 여복과 삼장(三藏)의 법재를 유산으로 물려주셔서, 부처님만 믿은 사람이면 다 법의 재산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가 있고, 부처님만 모시고 살면 불상(佛像)만 모시고 살면 어느 큰 절이고 작은 절이고 산간벽지라도 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이 돼.


하물며 그 법에 의지해서 계율을 지키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 정진(精進)을 하면 영원한 참 부처님을 자기 속에서 깨달을 수가 있게 돼.


이러한 대충 부처님의 열 가지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그러한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시고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3천년이 되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삼만 년이 되고 삼백만 년, 무량겁을 두고 그 은혜에 보답한다 해도 그 억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부처님께서 일체법, 팔만대장경, 팔만사천의 묘법을 설하신 뜻은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심(一切心)을 제도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팔만사천의 번뇌(煩惱) · 망상(妄想), 모든 그 중생심(衆生心)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을 설하신 것이다 그말이여.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내게 일체의 마음이 없거니, 팔만사천의 번뇌 · 망상이 없다면 팔만사천 법이 어디에 쓸 것이냐.

끊임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놈을 제도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셨는데 그 중생심이 없다면 무슨 일체법이 필요하겠느냐.


약국의 수없는 약이 약국마다 가득차 있고, 수없는 제약회사에서 수없는 약을 세계 각국에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병이 싹 없어진다면 그 약을 어디에 쓸 것이냐? 그런데 병도 가지가지이기 때문에 약도 가지가지거든.


그러나 ‘모든 병이 나오는 것이 어디냐?’하면은, 종합병원에 가면 내과 · 외과 · 소아과 · 부인과 · 노인과 · 정신신경과, 수없는 과(科)가 있고 그 과에 해당되는 병도 수없이 많고.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거든. 부처님 말씀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


마음이 없으면 몸뚱이가 존재할 수가 없어. 이 몸뚱이는 마음의 그림자거든. 마음의 그림자여.


우리의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타고났고 그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아무리 잘 먹고 잘 입어도 마음하나가 탁! 큰 충격을 받으면 엊그제까지 황소같이 센 장부도 하룻밤 새 맥을 못 추리는 거여.


수없이 많은 병이 좋은 의원을 만나서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마음이 안정이 되고 그 의원을 믿고 그 약을 믿고 그리고서 그 약을 먹어야 효험이 있지,

아무리 좋은 약을 갖다 줘도 그 의원을 믿지 않고 그리고 마음이 화가 펄펄 나고, 원한심이 펄펄 나고, 증오심이 펄펄 나고, 한심(恨心)이 가득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봤자 약 효험이 발휘하지를 못하는 거여.


그래서 첫째, 마음이거든. 모든 병이 마음에서부터 났기 때문에 그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의사라야 정말 명의(名醫)인 거여.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하룻밤도 자지 못하는 환자가 매일 의사한테 수면제를 타다가 먹었다 그말이여. 근데 수면제란 약은 너무 장기간 많이 복용을 하면 몸을 정말 해치게 돼.

그래서 그 의원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무해무득(無害無得)한, 예를 들자면은 밀가루 같은 그것을 수면제라고 싸서 주었다. 수면제와 똑같이 생긴 약인데 그걸 주었는데, 그 환자가 밀가루를 먹고도 그날 저녁에 잠을 잘 잤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의원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거여.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거여. 대인 관계에 있어도 서로 믿어야 되는 거고. 믿는 사이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거고.

가족끼리도 서로 믿는 마음이 있어야 가족이 화목을 하게 되는 거고, 회사나 관공서나 어떠한 단체에서도 상하 좌우가 서로 믿는 마음으로 모든 인간 관계가 이루어져야 모든 일이 다 성취가 되는 거여.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고. 지금 남북 고위층 회의가 열리고 있지만, 서로 믿고 믿게 해야 일이 이루어지지, 서로 믿지 않고 믿음을 받지 못하도록 피차 한다면 성사가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신앙 · 종교 · 불법도 신심으로 해야, 신심이 바르고 철저해야 기도도 성취가 될 것이고 도업(道業)도 성취가 될 것입니다.


‘신위공덕모(信爲功德母)’라. ‘신(信)이 공덕(功德)의 어머니다’ 경전에.

신심(信心) 하나가 바르고 철저하면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고 이루지 못할 도(道)가 없는 것이여.


「‘이뭣고?’ 한마디 한 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보다 낫다」  「‘이뭣고?’ 한마디는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철저하게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도업을 성취할 것이다.


이 말씀은 팔만대장경을 다 통달하고 대도(大道) 견성(見性)한 선지식(善知識)이 정말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이뭣고?’가 그렇게 좋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있게 우리에게 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대로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갈팡질팡하는 법이 없을 것이다.


길을 가되 요쪽으로 쪼끔 몇십 리 가다가 ‘아, 이 길이 아니다’ 동쪽으로 또 한 30리 가다가, 가다보고 의심을 하고 ‘에이! 요 길이 잘못된가 보다’ 이리갔다 저리갔다 갈팡질팡 언제 그 사람이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냐 그거거든.


여행을 떠날 때에는 확실히 여행 목적지를 설정을 하고 방향을 바로 잡아서 바른 안내자의 지시에 따라서 그 길을 가야지, 제멋대로 이리도 가봤다 저리도 가봤다...

눈으로 보고 가는 길도 그렇거든,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길’을 가는 도(道)를 닦아 가는데, 제멋대로 이 책 뒤적뒤적 좀 보고 고대로 좀 해 봤다가, 또 저 화두 가지고 조금 해봤다... 왔다갔다 갈팡질팡하고 10년 30년 내지 일생을 한다 해도 그렇게 공부를 해 가지고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다’


바른 신심을 가지고 한 길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해 갈수록 어려워도 믿는 마음 하나만 있다면 한결같이 그 길로 나아가라 이거거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해 가면 안 되는 법이 없어.


우물을 파되 처음에 자리를 잘 잡아가지고 파 들어가. 한 질을 파고 석 질을 파도 물이 안 나오고, 열 질을 파도 물이 안 나오고, 스무 질을 파도...  끝까지 파고 나면 암벽이 나오고 암벽이 나와도 계속 뚫고 들어가면,

암벽 속에서 한번 물이 솟았다 하면은 가뭄에도 변함이 없고 장마에도 변함이 없는 한량없는 좋은 물을 얻을 것이여.(20분~40분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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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부환수중구(百年浮幻水中漚)한데  부지종일위수망(不知終日爲誰忙)고

나무~아미타불~

약지망리진소식(若知忙裏眞消息)하면  일타연화생불탕(一朶蓮花生沸湯)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부환수중구(百年浮幻水中漚)여. 백 년 동안 오욕락(五欲樂)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은 물속에서 물거품 하나 나온 거여.

이 세상에 아무 몽사(夢死)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그저 오욕락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사는 꼴이 물속에서 물거품 하나 폭 일어났다가 그냥 꺼져버리는 거와 같다 그말이여.


명예가 하늘에 닿고, 권리가 하늘을 찌르고, 부귀영화가 온 세상을 뒤흔든다 해도 그렇게 해서 7, 80살다가 죽어봐라. 죽은 것이 물거품 하나 포르르 떠올랐다가 사그라져 버리는 거와 같다 그말이여.


그러한 삶을, 부지종일위수망(不知終日爲誰忙)이여. 누구를 위해서 종일토록 그렇게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허둥대고 있느냐 그거거든. 지내 놓고 보면 무엇이냐 그말이여.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피땀 흘려서 버는 것인가? 나라를 위해서 그런 것인가? 다른 직원들을 위해서 그런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했는가? 지내 놓고 보면 참 한탄하고 참 보잘것없는데,


약지망리진소식(若知忙裏眞消息)하면, 만약 그렇게 바쁜 속에서 ‘참 소식[眞消息]’을 안다면, 바쁜 속에도 정말 ‘참나’를 찾는 공부를 꾸준히 해서 바쁜 가운데 정말 바쁘지 않는 소식을 안다면,

일타연화(一朶蓮花)가 생불탕(生沸湯)하리라.  한 송이 연꽃이 펄펄 끓는 속에서 터억 피어날 것이다.


사업하는 사람이 그렇다고 사업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학문하는 사람이 학문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 안 지어서 되겠습니까.

무엇인가 우리는 자기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게 그러다보니 밤낮 바쁘지. 바쁜 가운데서도 항상 ‘이뭣고?’를 챙겨라 이거거든.


바쁜 것에만 빠져가지고 그러지 말고 바쁜 속에서도 자꾸 ‘이뭣고?’를 챙겨. 챙기고 또 챙기고 슬플 때에도 챙기고, 속상할 때에도 챙기고, 괴로울 때도 챙기고, 답답할 때도 챙기고 자꾸 ‘이뭣고?’ 챙기면은 그 펄펄 끓는 물속에서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이 피듯이 그 속에서 ‘참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그 고행을 하셔. 또 인행(因行) 때에 수없는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셔가지고 금생에는 또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해서 고행을 하셔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근본 뜻이 바로 우리에게 이 한마디를 일러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각자 너 자신을 깨달으라’  ‘이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한 참 부처가 있으니 그것을 깨달아라. 그것을 깨달아야 참사람이 되고, 고해(苦海) 속에서 오욕락 속에서 윤회(輪廻) 속에서 영원을 살게 되느니라’

너 자신만 하지 말고 많은 사람에게도 이 길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라 이거거든.



초파일에 이렇게 금년에는 만 등을 이렇게 달았는데, 이 등(燈)을 켜는 뜻이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속에 등불을 켜 주셨으니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켜 주신 이 등(燈)을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렇게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이 등불을 켜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환히 밝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도 ‘법(法)의 등불’을 켜고, 온 누리에 이 등불을 켜서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그래가지고 말세의 이 암흑세계가 영원한 지혜광명의 등불로 밝혀지도록 그러한 뜻으로 이렇게 초파일이면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 공덕(功德)으로 업장(業障)도 소멸되고, 소원도 성취되고 그렇게 될 것은 묻지 않아도 다 아실 것입니다.


등불만 켜고 업장소멸하기를 빌고, 수명장수하기를 빌고, 재수대통하기를 빌고, 또 소원성취하기를 그 소박한 신앙심, 참 좋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고 참 좋은 일이나, 거기에서 머꾸지 않고 ‘이뭣고?’를 열심히 해서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데에까지 나아간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불자(佛子)라 할 것입니다.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하사  금일의구득거력(今日依舊得渠力)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불이불천만불(一佛二佛千萬佛)이, 한 부처님, 두 부처님, 삼세(三世)의 모든 천만 부처님이,

각각안횡겸비직(各各眼橫兼鼻直)이여. 다 눈은 옆으로 이렇게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 그말이여.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눈은 옆으로 이렇게 박혀 있고 코는 요렇게 되고.


석년친종선근래(昔年親種善根來), 그런데 다 눈은 가로 박혔고 코는 길이로 이렇게 했는데,

왜 그런 모든 부처님들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명육통(三明六通)과 삼신사지(三身四智)를 갖춰서 그렇게 거룩하신데, 우리도 똑같이 이렇게 다 붙을 것 다 붙었는데, 우리는 왜 중생의 몸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이렇게 하고 있느냐 이거거든.


모든 부처님은 무량겁을 두고—아까 ‘열 가지 여래의 은혜[如來十種恩]’를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행을 닦아 오셨다 그말이여.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이렇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십분 활용을 못하고 발휘를 못하냐 하면, 우리가 노력이 부족하다 그거거든.

우리도 부처님께서 인행(因行) 때 행하신 그것을 우리도 실천에 옮겨야 하거든. 그 실천 덕목(德目)이 그것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이거든.


보시(布施), 꼭 보시는 부자만 하는 것이 아니어. 덜 부자라도 할 수가 있고 가난한 사람도 할 수가 있는 거여. 가난하다고 보시를 못하는 거 아니어.

가난해도 할 마음만 있으면 보시를 하는 것이고, 아무리 부자라도 인색해 가지고 안 하면은 안 할 수도 있는 것이거든. ‘돈 많이 벌어갖고 하리라’ 그러지 말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조금이라도 해야 하거든.


어떤 사람이 일주일 뒤에 생일날이 돌아오니까 그때 잔치에 쓸라고 우유를 짜지 않고 ‘일주일 동안을 안 짜고 놔두면, 그때 가서 손님이 많이 올 때 한목 많이 짜야겠다’ 그래가지고 일주일 후에 젖을 짜려고 하니까 젖이 별로 안 나와. 밭아 가지고 안 나와.


부자 많이 되거든 그때 보시할려고 딱! 한번 들어가면 오그려 쥐고 안 썼는데, 부자 안 되거든. 자꾸 부자가 될라면 보시를 해야 부자가 되는 거고, 또 장수(長壽)를 할라면 살생(殺生)을 안 해야 장수하게 되는 거고.

그거 다 인과경(因果經)에 보면은 부자 될라면은 부자 될 짓을 해야 하고 또 자기가 심는 대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요새 지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L.A에 흑인 파동으로 우리나라 교포들이 많은 참 겪지 못할 피나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런데도 인연 따라서 다 하고.

우리나라 안에도 우리가 보시를 해야 할 그런 곳이 많으니 그런 것도 인연 따라서 분 따라서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많이 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하고. 그렇게 해서 보시행을 닦고.


지계(持戒). 불제자(佛弟子)는 5계(五戒)와 십계(十戒)를 다 가져야 하니 그런 계를 가져서 계를 잘 지키고.


인욕(忍辱). 다 참기 어려운 것을 다 참음으로써, 참는 공덕으로 모든 재앙을 사전에 막고 업장을 갖다가 소멸하는 것이고.


정진(精進). 정진 열심히 해야지, 하다말다 그렇게 해가지고...  무엇이고 할 때 열심히 해야 하거든. 하다말다 해태굴(懈怠窟)에 빠져가지고는 백사불성(百事不成)이거든.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참선(參禪)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나 ‘이뭣고?’를 해야 하지만, 가능하면 어디든지 앉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이거든.


아침에 일찍 출근하고 밤에 늦게 들어오니 언제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참선을 하냐? 그런 사람도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서 ‘이뭣고?’ 하고, 밤에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다만 30분이라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정진을 하려면은 밤에 좀 일찍 자야 하거든.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되어가지고 와서 어떻게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가 있느냐 이거거든.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아무리 늦게 자더라도 11시에는 자 주어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떠억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좌선을 하도록. 출퇴근 하는 학생이나 회사나 관공서에 다니는 사람도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참선을 할 수가 있을 것이여.


정진. 선정(禪定). 그렇게 해서 선정이 바로 참선(參禪)이거든. 그래가지고 지혜의 눈을 뜨는 거다 그말이여.


그러한 덕목을 참 행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시간표를 정해 놓고 그리고 자꾸 다지면서 법문을 듣고 그렇게 해서 애를 써야 되는 것이지, 애쓰지 않고 그럭저럭 해 갖고는 안 되거든.


오늘 임신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쳐 주신 10가지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연등(燃燈)을 켜는 뜻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등불을 켜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이렇게 등(燈)을 만들어서 등불을 켜는 것이니, 등불을 켜서 소원도 성취하려니와 어쨌든지 참선을 열심히 해서 부처님의 참뜻을 우리가 구현(具現)하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아무리 좋은 일은 작은 일이라도 버리지 말고, 나쁜 일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즉각 끊어서, 불제자(佛弟子)답게 우리가 살아가자. 그런 요지의 말씀을 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께 공양(供養)하는 의식이 있고, 의식이 끝나면은 여러분 약소하나마 모다 검박하게 준비했지마는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모다 공양을 드시기를 바랍니다.(40분7초~58분2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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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자가옥리천진불(自家屋裏天眞佛) 절기구구향외구(切忌區區向外求) ; [자수회심선사광록(慈受懷深禪師廣錄)] 권3. 자수 선사 게송.

*裏(리) 속. 내부. *切(절) 끊다. *忌(기) 꺼리다. 경계하다. *區(구) 구분하다. 구차스럽다.

*북풍(北風) ;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동풍(東風) ; ①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②봄철에 부는 따뜻한 바람.

*뜨락 ; 뜰(집안에 있는 평평한 빈터. 주로 화초나 나무 등을 가꾼다.)

*천진불(天眞佛) ;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 ‘법신불(法身佛)’을 달리 이르는 말.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연조(年條) ; ①어떤 일을 해 온 햇수. ②사물의 역사나 유래.

*불기(佛紀) ; 불가(佛家)에서 쓰는 연기(年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해를 기준으로 한다.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마야 부인(摩耶夫人) ; māyā.  석가모니의 어머니. 인도 콜리야족(koliya族) 선각왕(善覺王)의 딸로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의 슈도다나(Śuddhodana, 정반왕淨飯王)과 결혼하였으나, 석가모니를 낳고 7일 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당시의 풍속으로 정반왕은 마야의 여동생 마하프라자파티(mahāprajāpatī)과 재혼함.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의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성도(成道) ; 깨달음.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됨.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진설(眞說) ; 참된 가르침. 또는 진실한 설법.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절절이 ; 하나하나의 절마다.

*방방곡곡(坊坊曲曲 동네 방/동네 곡) ; 한 군데도 빠짐이 없는 모든 곳.

*만인(萬人) ; 매우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

*벼룻물 ; 먹을 갈기 위하여 벼루에 붓는 물.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한다.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난행고행(難行苦行) ;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일향(一向) ; 언제나 한결같이.

*신명(身命) ; 몸과 목숨을 아울러 이르는 말.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의 고해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 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희사(喜捨 기쁠 희/버릴·베풀 사) ; ①보상을 구하지 않고, 기쁘게 재보(財寶)를 베푸는 것. 정사(淨捨 : 깨끗하게 내놓는 것), 정시(淨施 : 깨끗하게 베푸는 것)라고도 함. ②기껍게 자기의 의견, 생각을 버리는 일.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버리는 일.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수라(修羅) ; 아수라(阿修羅)의 준말. 늘 싸움만을 일삼는 귀신들의 무리.

*이고득락(離苦得樂) ; 괴로움을 벗어나서 즐거움을 누림.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응화신(應化身) ;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화신(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실교(實敎) ; 진실의 가르침. 권교(權敎 : 진실의 가르침에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치된 임시의 가르침)에 대(對)해서 말함. 궁극의 취지에서는 ‘권실불이(權實不二)’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는 하나라고 본다.

*권법(權法) ; 권교(權敎). 임시로 대승의 가르침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임시 가르침. 사람의 근기와 소질에 맞게 임시로 설하신 가르침. 임시 가르침. 실교(實敎)의반대. 진실의 가르침에 이르면 버려야 함.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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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化身) ;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백호상(白毫相) ; 부처님의 32상(相) 중 하나. 부처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오른쪽으로 말려 있고 여기에서 광명을 발한다고 한다.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 백모상(白毛相)이라고도 하며, 부처님 뿐만 아니라 보살상에도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의 길상(吉相) 중에서 가장 공덕이 크며, 어떠한 상(相)의 공덕도 이 백호상이 지닌 공덕의 아주 작은 부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발원(發願) ; 원하는 마음을 냄. 원을 세움.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으레이 ; ①거의 틀림없이 언제나. ②두말할 것 없이 마땅히.

*지중하다(至重하다) ; ①(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②(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무겁다.

*호념(護念) ; 불보살이 선행을 닦는 중생을 늘 잊지 않고 보살펴 주는 일.

*삼장(三藏) ;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세 가지 불서(佛書)를 통틀어 이르는 말.

*법재(法財) ; 불법(佛法)의 가르침. 세재(世財 : 세간의 금은·비단 등의 재보)의 대응어.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여래십종은(如來十種恩) ; 《華嚴經疏鈔》 중국 당나라 청량 징관(清凉澄觀, ?-839) 스님의 말씀.

①발심보피은(發心普被恩) ; 발심(發心)해서 출가해 수행을 성취하여 모든 중생에게 이익과 안락(安樂)을 베푸신 은혜.

②난행고행은(難行苦行恩) ; 우리 중생을 위해서 과거부터 수없는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신 은혜.

③일향위타은(一向爲他恩) ; 일향(一向)으로 부처님께서 한 생각도 자기를 위한 일이 없이, 무량겁을 두고 신명(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것을 일체 중생을 위해서 다 희사(喜捨)하신 은혜.

④수형육도은(垂形六道恩) ; 중생으로 하여금 이고득락(離苦得樂)하도록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화신(化身)으로 육도(六道)에 그 몸을 나투신 은혜.

⑤수축중생은(隨逐衆生恩) ; 중생의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게 하려고, 중생의 뒤를 쫓아 중생을 따라서 몸은 나투셔서 자비를 베푸신 은혜.

⑥대비심중은(大悲深重恩) ; 중생이 죄를 짓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져서 고(苦)를 받는 것을 보고서, 마치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끼시고, 그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신을 수없이 아낌없이 다 버리셨다. 그 부처님의 대비심(大悲心)이 깊고도 중한 은혜.

⑦은승창렬은(隱勝彰劣恩) ; 여래께서 대승과 소승의 그 근기(根機)에 따라 응화신(應化身)을 나투시어 제도하신 은혜.

⑧은실시권은(隱實施權恩) ;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생을 위해서 실교(實敎)는 잠시 덮어 놔두고, 하근기에 맞게 좋은 권법(權法) - 방편법을 설하셔서 우리도 마침내 부처님의 진리에 나아갈 수 있게 하신 은혜.

⑨시멸영모은(示滅令慕恩) ; 부처님께서는 생사(生死) 없는 영원한 진리의 몸이시지만, 일부러 화신불(化身佛)로 이 세상에 사람으로 나타나셔서 백 세까지 사실 수가 있음에도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신 것은,

말세(末世)에 박복한 제자들을 위해서 20년간 당신이 누릴 수 있는 복(福)을 말세의 제자들에게 물려주시고, 또한 박덕(薄德)한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내어 참회하고 발심하고 부처님 생존 시에 친견하기를 발원(發願)하도록 하며,

지금 비록 육신의 부처님은 친견을 못하더라도, 그 법신불(法身佛)이 우리 자신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도록 정진하게 하는 선근(善根)을 심게 하신 은혜.

(10)비념무진은(悲念無盡恩) ;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자비심으로 호념(護念)해 주신 그 은혜.

부처님께서는 20년을 앞당겨 열반에 드셔서 그 여복(餘福)을 우리 말법 제자와 중생들에게 남겨 주셨고, 또 삼장(三藏)의 가르침—법재(法財, 법의 재산)를 유산(遺産)으로 남겨 주셔서,

그 법에 의지해서 계율을 지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하면, 영원한 참 부처님을 자기 속에서 깨달을 수가 있게 하여 영원한 해탈을 얻어 열반의 복락을 누리게 하신 은혜.

*교주(教主) ; 석가세존(釋迦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높여 이르는 말.

*(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마음이 시달려서(煩) 괴로워함(惱). 나쁜 마음의 작용. 번요뇌란(煩擾惱亂)의 뜻.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한심(恨心) ; 마음이 슬프고 괴로움.

*무해무득(無害無得) ; 해로울 것도 없고, 이로울 것도 없음.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불도의 수행. 진리의 실천.

*신위공덕모(信爲功德母) ; [화엄경(華嚴經)] (권14) 현수품(賢首品) 第十二之一. 현수보살 게송.

〇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  장양일체제선법(長養一切諸善法),  단제의망출애류(斷除疑綱出愛流),  개시열반무상도(開示涅槃無上道).

‘믿음은 도의 근원이며 공덕의 어머니라, 일체의 모든 선법을 길러낸다. 의심의 그물을 끊어 제거하고 애착의 흐름에서 벗어나, 위없는 열반의 도(道)를 열어 보인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벗.

*불급심사 공과일생(不急尋師空過一生) ;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는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에 있는 말씀.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 ; ‘길(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이다)’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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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부환수중구~ ; [자수회심선사광록(慈受懷深禪師廣錄)] 권3. 자수 선사 게송.

*漚(구) 거품. *誰(수) 누구. *忙(망) 바쁘다. *裏(리) 속. *朶(타) 꽃송이. *沸(불) 샘솟는 모양. 끓는 물. *湯(탕) 끓인 물.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몽사(夢死) ; 헛되이 살다 죽음.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윤회(輪廻) ;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말, 마음(신구의, 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게송) 일불이불천만불~ ; [금강경오가해] 正信希有分 야부 게송 참고.

*삼세(三世) : [범] trayo - dhvanah 과거 • 현재 • 미래, 또는 전생 • 금생 • 내생을 말한다。그 시간의 길고 짧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32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80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수행을 통(通)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神) 능력.

*육신통(六神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⑥누진통(漏盡通)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삼신(三身) ; 삼신(三身)은 깨달은 존재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로,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3가지 몸 또는 3가지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개념.

(1) ①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②보신(報身).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③응신(應身). 때와 장소와,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나타나 그들을 구제하는 부처.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과거불과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함. 응화신(應化身)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2) ①자성신(自性身). 저절로 존재하는 진리 그 자체, 또는 그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②수용신(受用身). 깨달음의 경지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즐기고, 또 그 경지를 중생들에게 설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는 불신(佛身).

③변화신(變化身).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나는 불신(佛身).

☆ 이 삼신(三身)의 명칭과 분류, 각각의 해석에 대해서는 경론(經論)에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몸, 삼신(三身)을 서로 다른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불신(佛身)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사지(四智) ;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 : 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

①대원경지(大圓鏡智).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함.

②평등성지(平等性智).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함.

④성소작지(成所作智). 눈·귀·코·혀·피부 등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함.

*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덕목(德目) ; 타고난 천성으로 간주하여 추구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 항목.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여섯 가지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보시(布施) ; 자비심으로 남에게 재물이나 불법(佛法)을 베풂.

*밭다 ; (무엇이)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지계(持戒) ; 계율(戒律)을 어기지 않고 잘 지킴.

*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십계(十戒) ; 십선계(十善戒).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10가지 죄—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瞋恚), 사견(邪見)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인욕(忍辱) ; 모든 모욕과 박해를 받고도 참고 견디며 화를 내거나 한탄하지 않는 것.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②잡념을 버리고 불법(佛法)을 깨우치기 위해 수행에 힘씀.

*해태굴(懈怠窟)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의 굴(窟).

*백사불성(百事不成) ; 모든 일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음.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연등(燃燈) ; ①등을 달고 불을 켜는 명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오신 날’을 이르는 말. ②석가모니의 탄생일에 불을 켜고 복을 비는 의식. ③연등놀이를 할 때 밝히는 등불.

*구현(具現 갖출 구/나타날 현) ; 어떤 사실이나 현상 따위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뚜렷이 나타남.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주요 내용]


(게송)심춘막수향동거~ /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 부처님의 열 가지 은혜—여래십종은(如來十種恩) / (게송)불설일체법~ / ‘신위공덕모(信爲功德母), 신(信)이 공덕(功德)의 어머니다.’ /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게송)백년부환수중구~ / 부처님께서 오신 뜻 ‘각자 너 자신을 깨달으라’ / (게송)일불이불천만불~ / 연등을 켜는 뜻은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등불을 켜는 것’이 목적.



[주요 문구]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시고도 마지막에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부처님의 진설(眞說)입니다.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 요점에 의해서 우리가 수행해 나가는 것이 그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친 은혜는 바닷물을 벼룻물로 해서 먹을 갈아가지고 그걸 다 기록한다 하더라도 다 기록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대충 ‘부처님의 열 가지 은혜[如來十種恩]’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그러한 위대한 우리의 스승이시고 우리의 교주(敎主)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3천년이 되는 오늘날뿐만 아니라 삼만 년이 되고 삼백만 년, 무량겁을 두고 그 은혜에 보답한다 해도 그 억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거든. 부처님 말씀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나’ 마음이 없으면 몸뚱이가 존재할 수가 없어. 이 몸뚱이는 마음의 그림자거든. 마음의 그림자여.


신심(信心) 하나가 바르고 철저하면 이루지 못할 소원이 없고 이루지 못할 도(道)가 없는 것이여.

「‘이뭣고?’ 한마디 한 것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보다 낫다」  「‘이뭣고?’ 한마디는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철저하게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도업을 성취할 것이다.


바른 신심을 가지고 한 길을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해 갈수록 어려워도 믿는 마음 하나만 있다면 한결같이 그 길로 나아가라 이거거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해 가면 안 되는 법이 없어.


초파일에 이렇게 금년에는 많은 등을 이렇게 달았는데, 이 등(燈) 켜는 뜻이 무엇인가?

이 등불을 켜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환히 밝히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도 ‘법(法)의 등불’을 켜고, 온 누리에 이 등불을 켜서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그래가지고 말세의 이 암흑세계가 영원한 지혜광명의 등불로 밝혀지도록 그러한 뜻으로 이렇게 초파일이면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이렇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것을 십분 활용을 못하고 발휘를 못하냐 하면, 우리가 노력이 부족하다 그거거든. 우리도 부처님께서 인행(因行) 때 행하신 그것을 우리도 실천에 옮겨야 하거든. 그 실천 덕목(德目)이 그것이 육바라밀(六波羅蜜)이거든.


정진(精進), 무엇이고 할 때 열심히 해야 하거든. 하다말다 해태굴(懈怠窟)에 빠져가지고는 백사불성(百事不成)이거든. 참선(參禪)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나 ‘이뭣고?’를 해야 하지만, 가능하면 어디든지 앉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데 대단히 효과적이거든.


정진. 선정(禪定). 선정이 바로 참선(參禪)이거든. 그래가지고 지혜의 눈을 뜨는 거다. 그러한 덕목을 참 행하기 어렵고 실천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시간표를 정해 놓고 그리고 자꾸 다지면서 법문을 듣고 그렇게 해서 애를 써야 되는 것이지, 애쓰지 않고 그럭저럭 해 갖고는 안 되거든.


Posted by 닥공닥정
601~700/(651~675)2017. 4. 12. 16:14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675)—2003년 부처님오신날(03.05.08) (21분)

약 21분.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다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다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부처님과 같은 분이  계시다.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다. 시방세계에 부처님께 견줄 만한 분이 없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되. 내가  세간(世間)  보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과 같은 분은  계시다. 


 게송(偈頌) 무량억겁 전에 백겁(百劫) 수행을 부처님께서 하실 , 미륵 보살(彌勒菩薩) 석가모니 부처님이그때는 보살로 수행하실 때인데, 그때 저사불(底沙佛)이라고 하는 부처님 밑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석가 보살(釋迦菩薩)께서 저사불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노래로 인해서, 칠일칠야(七日七夜) 동안을  발을 들은   저사불의 거룩하고 위대하신 모습을 찬양하야,  공덕으로 구겁(九劫) 초월해 가지고 미륵 보살보다도 먼저 성불(成佛) 하신 인연이 있는 게송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할 때마다, 부처님께 공양(供養) 올릴 때마다  게송으로써 부처님의 모든 위대함을 찬양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째서 부처님은 이렇게 거룩하시고, 우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부처님의 거룩함을 이렇게 찬양을 하느냐 하면은, 부처님께서 왕궁에 태어나셔서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셨습니다.


견성성불을 하신다 말은 대관절 무엇을 깨달아서고,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팔만사천의 한량없는 법문(法門) 들어있습니다마는, 오늘 산승(山僧)  가장 요점만을 간략히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과연 일생 동안을 무슨 마음으로 사셨으며, 무슨 설법을 초점을 두고 하셨으며, 평생 동안 무슨 노래를 부르셨을까?


관타야불망(觀他也不妄)이요. 모든 것을 보실 , 모든 중생과 모든 것을  보실 때에는 망령(妄靈)되지 않다.[不妄]’

관타야불망(觀他也不妄)이요. 관자역무생(觀自亦無生)이다. 당신 스스로는 어떻게 당신을 보셨을까? ‘남이 없다.[無生]’ 그렇게 보셨어.


망령되지 아니하다[不妄]’ 하는 것은 모두가  진실이요, 모두가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모두가 진리다  말씀이고, 스스로를 보실  무생(無生)으로 보셨다 그말이거든.


보통 우리 중생으로  때는 「부처님께서 왕궁에 태어나셔가지고 그래가지고 출가하셔서 고행을 하셔가지고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중생의 눈으로 그렇게 보지마는, 부처님 자신은 남이 없다[無生]’ 그렇게 스스로를 보신 것입니다,


일생 동안 우리 중생들도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서 기쁠 때도 노래를 부르고, 슬플 때도 노래를 부르고, 혼자도 부르고 여러 사람이 모이면  같이 노래를 부릅니다. 어떤 의식이 있을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대관절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나오셔서 무슨 노래를 항상 부르셨을까?(出世謌何事)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로부터 태평하다.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 사람마다 태평하다’ ‘태평(太平)하다 하는 것은, 모든 고통이 없으며 슬픔이 없으며 아무 근심 걱정   없고, 항상 행복하고 항상 넉넉하고 항상 즐겁기 때문에 그것을 태평하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는 생로병사가 있고 흥망성쇠가 있고 희로애락이 있어서 정말로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고, 본래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똑같은 존재임을 알지를 못하고, ‘자기는 중생이고, 중생은 생로병사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어 있다 그렇게 착각을 하고 살기 때문에, 본래 부족함이 없고 본래 생사가 없는 존재이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말씀을 하셨지마는 중생이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원래 우리는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을 없애야 우리가 열반에 드는데 괴로움의 원인이 뭣이냐?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 때문에 생사가 있는 것이고, 고통이 있는 것이고, 진리 속에서 있으면서 진리를 모른 것이다. 이렇게 차츰차츰 단계적으로 말씀을 하시게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생활 속에서 수행을 쌓아나가면, 「원래 내가 생사(生死) 없는 존재이고 진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법문을 설하시다가, 나중에 법화경(法華經) 설하실  부처님은 무슨 게송을 읊으셨냐 하면은,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법종본래(諸法從本來) 상자적멸상(常自寂滅相)이다.

제법(諸法)이라 하는 것은, 우주법계 삼라만상을 모두 제법(諸法)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종본래(從本來) 본래부터 상자적멸상이다. 항상 그대로 적멸상(寂滅相)이다. 열반상이다. 열반상(涅槃相)이라 하는 것은 생사가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불자행도이(佛子行道已)하면, 불자가  도리를 깨달으면,

내세득작불(來世得作佛)이다,  도리를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다.


내세(來世)라고 하니까  몸뚱이 80, 90 살다 죽은 뒤에 성불한다고 그렇게 해설한 것은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본래로 생사가 없는 진리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는데, 반야심경에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말이 있고, 경전마다 생사는 본래 없다 하는 많은 법문이 나와 있는데.


어째서 우리는 생사가 있고 고통이 있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느냐 하면은, 비유를 들어서 물이라 하는 것은 섭씨 영도 이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됩니다. 고체가 됩니다. 그것을 끓여서 100도가 되면 증기가 나와 가지고 기체가 됩니다.

물로 되었을 때나 얼음으로 되었을 때나 증기로 있을 때나 물의 본성(本性), 습성(濕性)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상황 따라서 모양만 다르지 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물의 본성, 습성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하거나  자체는 언제나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중생으로 있을 때나, 부자로 있으나, 가난뱅이로 있으나, 죄를 지어서 형무소에 가서 있거나 또는  무서운 죄를 지어가지고 지옥에 가서 있거나 또는 업에 따라서 축생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본성(本性) 부처님으로 있을 때나, 조사(祖師) 있을 때나, 빈부귀천 어떤 모습으로 있을 때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를 못해서 각각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가지고 잘난 사람은 잘난 , 못난 사람은 기가 죽고, 부자는 부자라 해가지고 목에다 힘을 주고, 권리가 있으면 권리가 있다고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의 권리를 휘두르고, 그러다가 부정(不正) 하다가 잘못되면  다시 감옥에도 가고 그러한 흥망성쇠와 생사윤회와 희로애락 속에서 우리는 무량겁(無量劫) 오늘날까지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속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다하더라도 우리 속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 비로자나법신불이 우리 속에는 살아계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목적은 너희들 모두가  원래로 부처님이다. 진여(眞如)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어가지고 그것을 깨달아서 영원한 생사를 해탈하게 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믿고 그것을 우리가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참선을 하며 근기(根機) 따라서 () 공부를 하거나, 주력(呪力) 하거나, 염불(念佛) 하거나,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유식(有識) · 무식(無識) 막론하고 누구라도 가장 있는  자리에서  도를 닦을  있는 방법이 이뭣고?’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종파(宗派) 따라서 각기 자기가 믿는 경전에 의거해서 여러 가지로 설법을 하고 교화를 하고 있지마는, 우리 용화사에서는,

일어나는 생각,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서는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슬픈 생각도 일어나고 고통스러운 생각도 일어나지마는, 일어나는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하면   생각 자기의 본마음을 찾는 공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때가 따로 필요가 없고, 장소가 따로 필요가 없고, 언제 어디서라도 나를 찾는 나의 부처님을 찾는 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부처를 찾는 것」이 바로 그것이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그것이 참선(參禪)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기해서 많은 말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사람은 감옥에서도 이뭣고?’ 하고, 부자도 이뭣고?’ 하고  높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뭣고?’ 하고, 자기가 자신을 찾다 보면 자기의 참마음을 깨달아서 진리와 자기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자꾸하다 보면 자꾸 잊어버리고, ‘이뭣고?’ 하지마는 망상(妄想) 일어날 것입니다마는  망상이 어디서 일어났냐 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여불성에서 그런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래 물은 깨끗하고 조용하지마는 바람이 불므로 해서 물결이 일어나듯 물결이 일어났어도 내나  물결이 물인 것이고,

 물은 원래 본성인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파도를 없애고 물을 찾지 말고, 파도에 즉해서 이뭣고?’ 찾으면 진여불성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망상과 번뇌를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이뭣고?’ 들어가면 가장 빨리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만, 우리가  법에 의해서 이뭣고?’ 통해서 자성(自性) 찾는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에 많은 신도분들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이 모이셨고  정성을 표하고 소원을 빌기 위해서 많은 등불을 켰습니다마는, 등불을 켜면서도 이뭣고?’ 하시고, 돌아가신 길에도 이뭣고?’ 하시고,

돌아가시면 가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모든 문제를 이뭣고?’ 자기가 자기의 진성(眞性) 찾는 거기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신다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것이고, 가정에 분위기도 좋아질 것이고, 사회도 그것으로 인해서 좋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 사람이 이렇게 한다면 부정부패도 없어질 것이고, 대한민국이 정말 살기 좋은 행복한 나라가  것이고,  세계에도 극락세계(極樂世界) 변하는 길은 오직 여기에 있다고 산승은 생각합니다.(처음~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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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천상천하무여불~ ;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찬불게(讚佛偈) 한다.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거룩한 모습에 어찌   없어 -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 낮과 7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아니네.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찬불게(讚佛偈) 하는데,

7 7 동안 세존(世尊)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九劫) 뛰어넘어 91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얻으셨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세간(世間) ; (산스크리트어 loka) () 파괴·변화, () 가운데·간격을 뜻함.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생물들의 세계.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산하대지.  세상.  세상. 세속.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게송(偈頌) ; (), () ()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

*공양(供養) ; ①불()•()•() 삼보(三寶) 음식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 달리 이르는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

*(게송) 관타야불망~’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朴敬勛 , 동국대학교 역경원) p99 ‘찬불(讚佛)’ 게송 참고. *() 노래. 歌와 동자.

*무생(無生) ; ①생멸(生滅) 벗어난 절대의 진리. 생멸(生滅) 없는 도리.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 알고 거기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함. 무생법인(無生法忍). ②아라한(阿羅漢) 또는 열반(涅槃) 번역어. 번뇌를 없앤 경지를 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자체. 깨달음  자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 遍一切處, ) .

①진리  자체인 법신(法身) 형상화한 .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음.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도리(道理) ; 이치(理致).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 꿰뚫고 있는 법칙.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진리. 진리와 결합된 이론이나 증명. 타당한 이치.

*법화경(法華經) ; 본이름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 28. 구마라집(鳩摩羅什) 번역.  전체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회삼귀일(會三歸一), 후반부에서는 세존의 수명이 무량함을 설함.

회삼귀일(會三歸一)이란 세존이  세상에 출현하여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삼승(三乘) 대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일승(一乘,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부처의 가르침)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후반부에서는 세존을 법신(法身) 동일시함으로써 영원한 존재로 상정하여 신앙의 대상을 확립함.

*(게송) 제법종본래~ ;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 사구게.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동자(同字).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주력(呪力) ;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 하는 기도. 진언(眞言) · 다라니(陀羅尼) 효과.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선법(參禪法) ; ①선() 수행을 하는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종파(宗派) ;  종교에서 교리나 의식의 차이로 나뉜  갈래.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 ( 무엇고 是甚 시심마, 시삼마) : ‘ 무엇고? 화두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무엇고?(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망상(妄想 망녕될 /생각 ) ; 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 생각() , 또는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



[주요 내용]


(게송) 천상천하무여불~ /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로부터 태평하다 / (게송) 제법종본래~ / ‘모든 것이 본래로 생사가 없는 진리다



[주요 내용]


대관절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나오셔서 무슨 노래를 항상 부르셨을까? 인인본태평(人人本太平)이다, 사람 사람이 본래로부터 태평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생활 속에서 수행을 쌓아나가면, 「원래 내가 생사가 없는 존재이고 진리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탄생하신 목적은 너희들 모두가  원래로 부처님이다. 진여(眞如) 것을 우리에게 가르켜 주어서 그것을 깨달아서 생사를 해탈하게 해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의 부처를 찾는 것」이 바로 그것이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고, 그것이 참선(參禪)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  전에 열반(涅槃)하셨지만, 우리가  법에 의해서 이뭣고?’ 통해서 자성(自性) 찾는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17. 4. 11. 07:43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297)—86년 법보재 법회(86.03.16.) (57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6분.

(1/3)----------------


유연막축환성이(有緣莫逐還成易)로되  공인교타물주난(空忍敎他勿住難)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난이양두구참단(難易兩頭俱斬斷)인데  조정의구불상간(祖庭依舊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유연막축환성이(有緣莫逐還成易)로되, 인연(因緣) 있어. 있는 인연을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도리어 쉬워. 인연을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도리어 쉽거니와.

공인교타물주난(空忍敎他勿住難)이다. () 이치, () 도리에 머물르지 않기가 오히려  어렵더라.


수행(修行)  나가는데 있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할 때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거니와, 마음이 () 경지에 집착하지 않기는 오히려 어렵더라.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  가면서 망상(妄想)  쉬어지고, 일체 경계(境界)  자취가 없어서  몸뚱이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까지도  망각을  버려.

 바로 경계와 나의 생각이  () 경계인데, 경지(境地)인데,  ()했을 때에  () 경지에 머무르지 않기가 참으로  어렵더라.


() 가지고 ! 내가 편안하다, 너무너무 고요하구나, 너무너무 깨끗하구나,  비어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런 () 경지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서 지각심(知覺心) 내고, 그래가지고 공부가 지지리 애써서 고비를 넘을라고  때에 찰나간에 천길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는데.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있는 인연을 따라가지도 말고,  () 경지에도 집착을 하지 아니해. 따라가지 아니한 것은 쉬웁고, () 경지에 머무르지 않기는 어려운데, 이 어렵고 쉬운,   가지를  끊어버리면(難易兩頭俱斬斷),

조정의구불상간(祖庭依舊不相干)이여.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 조사문중(祖師門中) 있어서 예나 다름없이 상관을 하지 않더라, 상관을 하지 않는다. 쉬운 데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어려운 데에도 떨어지지 아니한데,   쉬웁고 어려운 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정진(精進)  들어가야 한다 그말이여.



오늘 병인년 3 16 법보재(法寶齋) 맞이해서 원근 각지 방방곡곡에서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이셨습니다.

여러분께서 보신 바와 같이 부처님을 모시고, 좌우에 전강 조실 스님 영정과 오른쪽에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그리고  좌우에 9천이나 되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위패(位牌) 차게 모셔져 있습니다.  위패에   내지  분씩 모신 데도 있고 보면 수만의 영가(靈駕)가 여기에 모셔져 있습니다.


 위패는 선망부모(先亡父母),  말로 말하면은 다생겁래(多生劫來) 선망부모지만 자상하게 말하면 부모님 · 조부모 · 증조부 · 고조부 그리고 남편 · 아내  먼저 간 아들딸 · 숙부 · 숙모 · 원근 친척,

심지어는 집안에서 기르던 개가 죽어서  개의 영혼을 천도(薦度)하기 위해서 모신 이도 있고, 이웃집 아이가 내 집에 놀러왔다가 비명에 다쳐서 죽은 그런 영가도 모셔져 있고, 그래서 모두 합해서  숙세(宿世)의 우리의 부모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비명에  사고로 죽은 , 물에 빠져 죽은 ,  자살을  , 병고에 죽은 , 여러 가지 한을  풀지 못하고 원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한 수많은 영가들이  법보단(法寶壇) 모셔져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지 않고 천년만년(千年萬年)  사람은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약을 먹고 몸을  봉양을 한다 해도 불과 백세 미만에 늙어서 병들어 죽게 됩니다. 조금 앞서가고 뒤서가고  차등만 있지,  한번 태어난 사람은  마침내는 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것을, 한을  풀지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것을 무엇 때문에  세상에  우리는 태어났겠습니까?

차라리 그럴 바에는 태어나지 아니했으면은 나을 것을 무엇하러 태어나 가지고  하루도 사는가 싶이, 산다 싶이 살아 보지도 못하고 몸부림치다가 마침내는 떠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고 싶어서 마음대로 오고, 가고 싶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와지기 때문에  것이고,  가지기 때문에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서 생사해탈(生死解脫)  부처님이나 보살들 그러한 성현은 중생 교화를 하기 위해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왔다갔다 하지만, 깨닫지 못한 생사에 자유하지 못한 우리 중생은 세상없이도 마음대로  수도 없고, 마음대로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기는 마음대로  와도 가기는 마음대로 하지 않는냐.  자살을  버리면 가는 것이지, 지가 안 가고 배기느냐하지만,  자살을 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껍데기만 벗었지, 껍데기만 벗었지 어디로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거나, 지옥에 가거나, 마냥 헌옷 벗어버리고  다른  입고—노랑  입었다가, 파랑  입었다가, 검은 입었다, 흰옷 입었다, 옷만 갈아입었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괴롭다고 해서 자살을 하고 그런다고 해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생에 () 받을 () 지어 가지고 () 받는데, 차라리 깨끗이  () 받고 (), 빚을 갚아 버려야 다음 생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지,   갚고 억지로 자살했다고 해서 지어놓은 빚이 삭감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남의  쓰고 도망친다고 해서  빚이 갚아지겠습니까? 점점 이자와 죄까지  가산이 되어서  많은 빚을 갚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짓고 받은 마당에는 철저하게 갚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괴로운 생로병사(生老病死) 면할 것이냐?

 우리는 생로병사의 구렁텅이를 면하지를 못하고 무량겁(無量劫)을 거치고 돌고 해서 오늘  자리까지 왔느냐? 순전히 우리 자신이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짓느냐? 우리의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   생각으로 인해서 무량겁을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 일어나는 그것을  잡드리를 못하고,   생각으로 온갖 () 지어 가지고, 받기는 무량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성냥  개비를 ! 해서  불을 조심을 아니해 가지고 집을  태우고, 이웃집을  태우고,  도시도  태우고,  들판에 곡식을  태우고, 산에 붙으면은   숲을  태우듯이.

 무서운 불이 최초에는 성냥불이나 담뱃불,  아주  조그마한 불로 인해서 그렇게 무서운 재난(災難)으로 번져 가는데, 우리 육도윤회(六途輪廻) 원인은 우리의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을,  생각 ! 일어났을  그것을 ! 돌이켜서 잡드리를  버리면  업을 짓지 않고 생사윤회도 벌어지지 아니할 텐데,   생각을 잡드리를 아니해 가지고   생각이 차츰차츰 번지고 발전을 해서, 그것이 육체로 행동으로 옮겨져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쉬운 이치입니다.  생각을 잘못 먹어 가지고  무서운 () 받는 사실에 우리가 눈을 뜬다면, 우리는 여태까지는 비록 무량겁을 생사윤회 속에서 왔지만 오늘 시간부터서는 자기의 무량겁  여행, 고해(苦海)  여행을 갖다가 반대 방향으로, 해탈의 방향으로 돌이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佛法) 것입니다.


오늘  법보재(法寶齋)! 법보단에 모셔진  만년위패(萬年位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원한에 사무치는 영가들로 하여금 해탈도로 가게 하고, 동시에 살아있는우리들!

우리 살아있는 법보제자(法寶弟子)들로 하여금 영가가 되어서  위패단에 모셔지기 전에 살아 있을 때에 법(法)을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에  만년위패 법보단의 설립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열반하신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시고,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결제(結制) 해서 참선을 하고  법문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서 생사해탈하게 하고,

우리의 선망부모는 위패단에 이렇게 모시고 조석으로 축원해 드리고 명절에는 차례를 젓숩고,  이렇게 3 16일이나 4 15 그 밖에 법회  천도를  드리고, 법회 때마다 돌아가신 분이나  사람이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듣고서 바르게 실천을 해서 생사해탈하게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산 사람은 귀가 있어 법문을 듣지마는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들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지만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다맛  사람은 『몸뚱이가 있는 영가』고, 돌아가신 분은 『몸뚱이가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생각  생각, 귀로 생각이 헷갈리고, 코로 생각이 헷갈리고, 입으로 헷갈리고, 몸뚱이로 헷갈리고, 이리저리 헷갈려서 말을 일심으로 듣기가 어렵지만, 돌아가신 영가는  몸뚱이가 없기 때문에 정신이 헷갈리지 아니해서 오히려 살아 계신 분보다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처음~2023)



(2/3)----------------


영가가 생존 시에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을 하신 그러한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시에 불법을 믿지 아니하고, 불법이 무엇인 중도 모른다 할지라도  위패단에 모셔 놓으면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어.


언제든지 법회에 법문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우리의 선망부모,  위패단에 모신 여러 영가들로 하여금 법문을 들으실  있도록 정식으로 초청을 해서 법문을 들으시도록 이렇게 법으로 그렇게 거량(擧揚)을 해서 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수없는 법문을 법회 때마다 듣고  듣고 하기 때문에  위패단에 모셔진 영가는 인자 법문 귀’가 열려서 아무리 어려운 법문, 최상승 법문을 듣는다 해도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생존 시에 가졌던 모든  원한심, 생존 시에 풀지 못한 어떠한 업연(業緣)의 원한이라 할지라도  봄눈 녹듯이  녹아져서, 업이 녹기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시는데 아무 장애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곳으로 떠나지 못한 것은  업의 쇠사슬에 걸려서 그래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뚱이나 발목을 갖다가 쇠줄로 묶어 놓으면 가고 싶은  가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이나, 죽은 사람도 업(業)의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업의 쇠사슬이라는  원한심, 미워하는 마음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 재산에 대해 집착심, 사람에 대한 집착심, 무엇이든지 집착하고 탐착하고 애착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쇠사슬입니다.


차라리 쇠로 만든 쇠사슬은 강한  자르는 기계로 자르면은 뚝딱 잘라지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애착심 · 집착심 · 탐착심 이러한 쇠사슬은 자를라야 자를 길이 없어. 본인 스스로 업이 녹아져야만 거기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법문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감동이 되고 계합이 되어서 업이 스르르 녹아져 버리면은 거기서 집착이 툭툭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지고 원한심이 끊어지고.

동시에 돌아가신 분도 그런 생전에 얽히고설킨 그런 탐착 · 애착 · 집착 그런 것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녹아져 버린다면  영가가 천상이면 천상, 극락이면 극락,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으면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 하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용화사 법보전에 모셔진  수만의 영가들은 다행히 신심 있는  효심 있는 자손과 유족들을 가지셨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도량에 봉안이 되어서 이렇게 법문을 듣고 업을 소멸해서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영가를 여기에다 모신  인연으로   유족들이 불법을 믿게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원한에 사무쳐서 돌아가시고, 비명(非命)에 가신  영가가 있으신 분은 집안에 우환이 끓고, 되는 일이 없고 자꾸 그러니까 용화사 법보전에 모시면은 좋다  말을 듣고 불교도 믿지 않고 심지어는 다른 종교를 믿는 분까지도 여기다가 위패를 모시고서,  위패를 모신  인연으로 차츰차츰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승(殊勝) 인연이라 하는 것이여.


세속의 인연은 좋은 인연이나, 악한 인연이나 모두가 마침내는 생사의 쇠사슬 밖에는  되는 것인데 이 법으로 맺어진 인연!  법의 인연은 이것이 수승한 인연이라,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피차가 업이 소멸이 되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날  있는 그러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세속의 인연은 좋은 인연으로 얽혀져도 마침내는 그것이 원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악한 인연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고  좋은 것인데  좋은 인연이 결국은 악연으로 변하고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의 게송에도 막약다생(莫若多生) 불식인(不識人)이다. 다생원채(多生怨債) 기어친(起於親)인데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이다


다겁생래(多劫生來)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느니. 절대로 친하지 아니한 데에서는 원수가 생길 까닭이 없어. 아지 못하는데 무슨 원수가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반드시 서로 알고 지내고 친하게 지내다가 결국은 거기에서 원수가 되는 것인데,

막약다생(莫若多生) 불식인(不識人)이여 그렇고 보면 차라리 사람을 아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는 데에서 원수가 생기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데  불법은,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선인(善因), 친한 인연도 해탈로 가는 도반이고, 설사 본의 아니게 맺어졌던 악한 인연도 결국은  정법문중에 들어오면 해탈 인연으로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최상승 법문을 듣고, 자꾸 수행을  나가면 무엇을 미워하고 무엇을 이뻐하고 무엇을 친하고 무엇을 원수처럼 상대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도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나를 욕하고 비방하고 미워하는 그러한 사람,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미워한 그러한 거기에서 ! 생각을 돌이켜서 인연의  뿌리를 관찰을 하고서 화두를 들고 참나 돌아오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착한 사람을 보고도 나는 배워 나가고, 악한 사람을 보고도 나는 거기서 법의 이익을 얻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그렇게 상대하고, 모든 일을 그렇게 상대해 나갈 때에 우리는 일취월장, 날로 달로 자꾸 승화되고 향상되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하니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요. ()으로 인해서 () 생겨나고, () 인해서 () 생겨난다. ()이라 하는 것은 주체, 주관이고, ()라고 하는 것은 객체, 객관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내’라고   (), 주체심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모든 바깥 경계가 인식되어 지는 것이고,  객관 세계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그것으로 인해서 주체심(主體心) ()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육근(六根) 육진(六塵) 만나면, 경계를 만나면 육식(六識) 생기거든.

 () 없다면 경계를 봐도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안 해. () 없으면 경계가 있다 해도 일어날 것이 없고, 경계(境界) 없다면은 식() 있어도 발생할 계기를 갖지를 못해. 그래서 육식(六識) 육진(六塵) 표리(表裏) 관계에 있어서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것이여.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여. 그래서 () () 함께 없어져 버리면, 주체와 객체가 동시에 () 버리면 ()하되 () 것이 없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여. 뻑뻑이 머무른바 없이  마음을 낸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항상  주관과 객체가 서로 어울리고 서로 얽히고 서로 뒤범벅이 되어서, 이놈이 어린애들 싸우는데  놈이 위에서 누르고 밑에 눌렸던 놈이  위로 뒤집어지고 그래가지고 위에서 누르다가  밑으로 깔리고 하듯이, 그 작업으로 인해서 무량겁(無量劫)토록 생사고해(生死苦海) 세계가 벌어지는 것인데.


노방흡건경해수(老蚌吸乾鯨海水).  조개! 조개가 있어서  바닷물을  입에  들어마셔 버려. 그래가지고 바닷물이 바짝 마르도록 바닷물을  들어마셔 버리면.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여. 바다 밑에  아름답고 찬란한 산호 가지가 삼경(三更) 달에 빛이 나더라.


여기서  노방(老蚌)이라고 하는 , 늙은 조개가 얼마나 크면  한없이 깊은  넓고 깊은  바닷물을 쫘악  들어마셔 버릴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는  크고도  늙은 조개, 인자 조개 새끼 쬐그만 것이 아니라 몇억 겁을 갖다가 커서  가지고 한번  들어마셔 버리면 바닷물이  조개 속으로 쏴악  들어가 버릴 만큼 그러한 늙은 조개가 어디에 있느냐?


비단 여기서는 바닷물을 둘러 마신다고 했지만 바닷물뿐만이 아니라  시방(十方)에 가득차 있는 무한대(無限大)한  허공, 해와 달과  끝없는 하늘나라에 있는 수많은 별까지라도 한목 다 둘러 삼킬  있는 그러한 무서운 조개, 고조 할아버지보다도   무서운 조개가 우리  몸뚱이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조개는 눈으로 볼라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히지도 않고,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으면서 우리의 콧구녁으로도 들락거리고, 우리의 눈으로도 드나들고, 우리의 귀로도 드나들고, 팔만사천 모공으로 드나들고 항상 우리의 눈앞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라 그말이여.

그놈이 형투리가 있는  같으면, 모양과 빛깔이 있는  같으면  아무리 큰들 한도가 있는 것이지만, 이놈은 빛깔과 모양이 없는 것이라 이것이 크다’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


크고 작은 것을 떠나. 크기로 말하면은 우주를  둘러 삼키고도 한이 없고, 작기로 말하면은 바늘 꽂을 땅도 없는 것이니 그래서 이것이 신기하고도 묘하고 소소영령해.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무량겁 이전에 생겨난 때가 없이, 무량겁 미래에도 없어질 때가 없어. 그러한 물건을 우리는  똥주머니 속에,  가죽푸대 속에 항상 그놈이 살아 있다 그말이여.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날 때에 그놈도 같이 왔고,  몸뚱이가 죽어도 그놈은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시   옷을 갈아입어. 생사(生死)에 걸림이 없어, 그놈은.

밤낮 옷을 갈아입지마는 그놈은 생할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것이니 그놈을 깨달아야지, 그놈을 깨닫는 것이 불법(佛法)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이요,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거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생사윤회를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위패에다가 이름을 써서 벽에다 거는 것이야 어디다  걸겠습니까? 한국에 수천  사찰이 있으니 사찰에 법당에 아무데라도  수가 있고, 새로 절을 지어서  수도 있고, 여러분 가정에다도  얼마든지  수가 있어.

이름을 써서 거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나 또는 그렇게 위패로 모셔진 영가나 법문을 듣고,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우리의  늙은 조개를 갖다가 바로 깨달아야되거든. 바로 깨닫는 참선 법문을 듣고, 참선 수행을 해야만  생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202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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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법보단을 창설을 하시고, 조실 스님 자신께서 먼저 부모님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습니다.

1, 만년위패  1번이 조실 스님의 어머님, 아버님의 위패고, 조실 스님 아버님의 제삿날이 바로 3 16일인데 그날로 법보재일을 삼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으로 인해서 조실 스님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셨고,  부모님이  몸뚱이를 낳아주셨기에 출가를 하셔서 정법을 만나서 참선을  가지고 견성을 하시게 되었어.

그러니 깨닫고 보니 부처님과 불보살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은혜도 한이 없지만  이치를 깨닫도록  주신  몸뚱이를 낳아주신  부모님이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부모님을 여기 만년위패 1번에 모시고 부모님의 돌아가신 날짜로 법보재일을 지정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주신 인연으로,  조실 스님의 부모님의  인연으로 해서 산승(山僧)도 작고하신 부모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고,  여러분들께서도 부모님과 조상과 자매질손, 제형숙백, 원근친척의 인연 있는 모든 영가를 여기다가 모셔서  정법문중에 있어서, 법의 집안에 있어서  가족의 인연을 이렇게 맺게 되었습니다.

 인연으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의 문중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것이고, 세세생생에 다시는 우리는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도 낙오자가 없이, 한 사람도 떨어진 일이 없이 부처님 회상(會上)에 다시 만나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일체 중생을  제도해 마칠 때까지 우리는 항상 형제자매요, 도반이요,  가족으로서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가고, 다달이 도업(道業) 나아가서 결정코 생사해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이요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하면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빛과 그림자는 등불로 인해서 나타나.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등불이 켜짐으로써  등불로 인해서 빛이 나고,  빛으로 인해서 모든 그림자가 생기는 것이여.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다. 파도는 어디서 일어났냐 하면은 물로 인해서 일어났다. 물이 없으면은 파도가 어떻게 일어날 것이여. 물결은 반드시  때문에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났다  것을 삼척동자도   것입니다.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이여. 등불만 꺼져버리면 그림자도 동시에 없어질 것이고, 물만 없애 버리면 파도는 동시에 없어질 것이다 그말이여.

아까 주관이 () 버리면은 외부 경계, 객체도 따라서 없어지고. 그래서 객체니 주관이니  그러한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늙은 조개가  바닷물을 둘러 마시듯이 볼라야   없고, 알라야   없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마음자리 그놈 하나를 바로 깨달아 버림으로써 능소(能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가 거기에서 끊어져 버려.

바다 밑에  곱고 아름다운 산호가 달빛에 찬란히 빛나듯이, 생사가 변해서 바로 열반이요, 생사고해가 바로 극락정토로 변하는 것입니다.


등불이 꺼지고 물이 없어져 버리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파도도 없어져서, 그렇게 되어야  밖의 오등(烏藤)채를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등(烏藤)이라 하는 것은 , 나물인데, 한약으로도 쓰이는 나물인데 맛이 쓰고 독은 없지만 기운이 허약하고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것을 소화를  시키지를 못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맛이  좋고 향그러운 나물이지만 그것을 능히 먹을라면은  맛이 있는 쌉쓰름 하면서도 맛이 있는  오등채를 능히 먹고 소화를 시킬라면 첫째, 기력이 허약하지 아니하고 비위가 튼튼해야  오등나물을 먹을 수가 있다.


 

오늘 법보재를 맞이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모든 인연 있는 영가를 여기에 모시게  법보단의 설립 의의와  법보단을 모신 우리의 법보제자들이 어떻게 닦아가야 하느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법보제자가 전국에 수만 명인데 오늘  자리에 참석하신 분이 수천 명인  같습니다마는 전부 모이신다면은  도량에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컨대 법보단에 모신 영가들이 떠억  신령스러운 눈으로  법당 안과 밖을 관찰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당신의 유족들이 오늘 왔나  왔나? 아들과  · 손주 · 손녀 · 며느리 · 아내와 남편  유족들이 오늘  법보재에 참석하시면  영가들도 얼마나 흐뭇하고 ,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다른 영가들의 유족들은 모두가 참석을 해서 경건하게 동참을 하고 향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는데, 자기의 유족은 아무리 찾아봐도 오지를 않으면  영가가 얼마나 섭섭하시겠느냐 그말이여.

 영가를 어쨌든지 마음을 편안하게 즐겁게  드릴라면 이런 법보재라든지,  백중이라든지 그러한 ()천도재가 있을 때에는  참석을 하셔야  것이고.


 참석을 하시나  하시나  영가가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당신이 살아있을  못다한 참선 공부, 불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하는  공부, 그것을 당신의 유족들이 열심히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유족들이 법회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을 해서 법문을  듣고,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하고,  법문에 의지해서 온갖 잘못된 고집과 잘못된 성격과 잘못된 행실을 고쳐서 자꾸 향상되어 가면서... 따라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함으로써 자꾸 향상되어 가고 승화되어 .


그렇게 해서  가정이 화평하고 모든 사람이 화목하고, 이렇게 해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면서 이미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사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되어 진다면 그것이 영가로서 가장 바랜 바고 기뻐하는 바고, 영가가 마음 놓고 해탈길로 떠날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자리에 참석하신 법보재자 여러분, 앞으로 법회   빠지지 말고 나오시고, 다음해에 법보재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도량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약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  일체법(一切法) 설하신 것은 나의 모든 마음을 제도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다.  마음을 제도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모든 법을 설하셨는데.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커니, 내게 모든 마음이 없는데,  마음이 ()해서 무심(無心) 버렸는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一切法) 어디에  것이냐.(413~5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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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유연막축환성이~’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莫逐有緣 勿住空忍’ p6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 수행하는 집안.

*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 법보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〇선망부모는  사람의 선망부모가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 수천만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부모가 바로  사람의 부모고,  사람의 부모가   부모여서,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하는 것입니다.

*위패(位牌) ; 죽은 사람의 () 모시는 나무패.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 ()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 법당(法堂) 법보전(法寶殿) 안에 위패를 모신 ().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 . ②가르침의 . 불법의 공덕. 보살의 위신력(威神力)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

*() ; () 행위(行爲)이다. 우리의 행위, 행동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세력(勢力) 또는 형성력(形成力) 말한다. 그리고  세력에 의해 하나의 행위는 반드시  때가 이르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업의 종류 ; (1)중생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3가지로 나누어, ①몸으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신업(身業) ②입() 통해 말로 하는 행위를 구업(口業) ③생각으로 짓는 모든 것을 의업(意業)이라 한다.

 3가지 () ·· 삼업(三業)이라 하는데, 삼업(三業) 결국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2)업에 의하여 과보(果報) 받는 시기에 따라 ①금생(今生:지금 살고 있는 ) 업을 지어 금생에 과보를 받는 순현업(順現業) ②금생에 업을 지어 다음 생에 받는 순생업(順生業) ③금생에 업을 지어 삼생(三生) 후에 받는 순후업(順後業) 있다. 위의 삼시업(三時)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업(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不定業)이라 한다.

(3)업의 성질(性質) 따라 ①선심(善心) 의해서 일어나는 선업(善業), ②악심(惡心) 의해서 일어나는 불선업(不善業, 악업(惡業)), ③선악(善惡) 어떤 것도 아닌 무기심(無記心)의해서 일어나는 무기업(無記業) 셋을 삼성업(三性業)이라고 한다.  과보도 선업은 좋은 과보를 받고, 악업은 () 과보를 받는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〇여기 (용화선원 법보전)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수가 있습니다.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법당(법보전) 모셨으니 우리가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 의지해서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면서   가족인 것입니다.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결제(結制 맺을 /만들·법도 )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 15일에 결제한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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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 ②화두, 공안(公案)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 말하는 .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

*업연(業緣) ; 업보(業報)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 행위[]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 화두(話頭) 준말이다. 간화(看話) 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을 본다[]’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화두를 ()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수승(殊勝 특히·유달리 /뛰어날·훌륭할 ) ; ①가장 뛰어난 . [불교] 세상에 희유하리만큼 아주 뛰어남.

*(게송) 多生怨債起於親  莫若多生不識人’ ;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大愚集述) 13 소청명부편(召請冥府篇) 게송 참고(한국불교전서 11).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참선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게송) 인능생소구생능~’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境由能境 能由境能’ p110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 경계(六境) 인식하는 경우  소의(所依)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意根)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 (), (), (), (), () 육경(六境) 같음.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이라 .

*육식(六識) ; (((((() 육근(六根)으로 각각 (((((() 육경(六境)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가리킴. 생사와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억겁다생(億劫多生) ; 무한히 길고 오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태어난 헤아릴  없이 많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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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장소. 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게송) 공지광영인등현~’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能隨境滅 境逐能沈’ p107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모두 사바세계이다.

*(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주요 내용]


(게송)유연막축환성이~ / 만년위패 법보단은 영가와 살아있는 우리들의 생사해탈을 위해 설립 / 집착, 탐착, 애착하는 마음으로 무서운 업(業)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 / (게송)다생원채기어친~ / (게송)인능생소소생능~ / 참선법문을 듣고 수행해야 생사문제를 해결.

전강선사와 산승의 부모님도 만년위패에 모셨다. 우리는 법의 집안에 있어서  가족 / (게송)공지광영인등현~ / (게송)불설일체법~.



[주요 문구]


열반하신 전강 선사(田岡禪師)께서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시고,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결제(結制) 해서 참선을 하고  법문을 듣고 부지런히 닦아서 생사해탈하게 하고,

우리의 선망부모는 위패단에 이렇게 모시고 조석으로 축원해 드리고 명절에는 차례를 젓숩고,  이렇게 3 16일이나 4 15 그 밖에 법회  천도를  드리고, 법회 때마다 돌아가신 분이나  사람이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듣고서 바르게 실천을 해서 생사해탈하게 하는 바로 이것입니다.


몸뚱이를 부모한테 받아날 때에 그놈도 같이 왔고,  몸뚱이가 죽어도 그놈은 없어지는 법이 없이 다시   옷을 갈아입어. 생사(生死)에 걸림이 없어, 그놈은.

밤낮 옷을 갈아입지마는 그놈은 생할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는 것이니 그놈을 깨달아야지, 그놈을 깨닫는 것이 불법(佛法)인데 그놈을 찾는 것이 참선(參禪)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도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생사해탈이요, 그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거든.  문제를 해결해야만 우리는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생사윤회를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법문을 듣고 스스로 마음에 감동이 되고 계합이 되어서 업이 스르르 녹아져 버리면은 거기서 집착이 툭툭 끊어지고 애착이 끊어지고 원한심이 끊어지고.

동시에 돌아가신 분도 그런 생전에 얽히고설킨 그런 탐착 · 애착 · 집착 그런 것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녹아져 버린다면  영가가 천상이면 천상, 극락이면 극락,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으면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 하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부모님을 법보단 만년위패에 모신  인연으로 해서 산승(山僧)도 작고하신 부모의 위패를 여기다 모셨고,  여러분들께서도 부모님과 조상과 자매질손, 제형숙백, 원근친척의 인연 있는 모든 영가를 여기다가 모셔서  정법문중에 있어서, 법의 집안에 있어서  가족의 인연을 이렇게 맺게 되었습니다.

 인연으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의 문중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것이고, 세세생생에 다시는 우리는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도 낙오자가 없이, 한 사람도 떨어진 일이 없이 부처님 회상(會上)에 다시 만나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중생도 남음이 없이 일체 중생을  제도해 마칠 때까지 우리는 항상 형제자매요, 도반이요,  가족으로서 우리는 나날이 향상되어 가고, 다달이 도업(道業) 나아가서 결정코 생사해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26~50)2017. 4. 8. 06:2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031)—76년 12월 관음재일 법문(76.12.24.음) (58분)

(1/3) 약 18분. (2/3) 약 21분. (3/3) 약 20분.

(1/3)----------------


병진년도 오늘 섣달 관음재(觀音齋)를 마지막으로 해서 법회는 끝나는 거 같습니다. 금년도 마지막 법회를 기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신해년에 설하신 참선법(參禪法)에 대한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법문은 매우 깊고 고준해서 처음 오신 분이나, 여기에 나오신 지 오래 되시지 아니하신 분은 조금 이해하시기 어려운 대목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조실 스님 설하신 내용을 잠깐 말씀을 드리면은 맨 처음에 임진왜란 때 승병대장으로 왜적(倭敵)을 물리쳐서 선조 대왕이 의주까지 피난을 가셨던 것을 다시 서울로 환도해 모신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참선(參禪)을 하시다가 깨달으시고 그리고서 읊으신 게송(偈頌)을 맨 처음에 읊으셨습니다.

서산대사께서는 ‘내가 이제 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 장부(丈夫)의 큰 일을 마쳤노라’ 이러한 내용의 시(詩)를 읊으셨던 것입니다. 서산대사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 견성(見性)을 하셨습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견성을 하실 때에 서산대사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으셨지마는 어떠한 도인은 발갛게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자 그 찰나에 깨달으신 도인도 있고, 또 여름에 발을 쳐 놨는데 그 발을 거두면서 홀연히 깨달으신 분도 계시고,

대빗자리로 마당을 쓸다가 거기에서 튀는 돌멩이가 부딪쳐서 나는 소리를 듣고 깨달으신 분도 계시고, 시가(市街)를 지나다가 장꾼들이 멕사리를 잡고 ‘이놈 저놈’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주먹질을 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듣고 깨달으신 분도 계십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개천에서 발을 씻으면서 서로 선객(禪客) 스님네들이 이야기하다가 ‘무무(無無)도 역무(亦無)다’하는 그러한 말이 조실 스님 귀에 들어오자마자 대오(大悟)를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과거 도인이 여러 가지 경우에 깨달으셨느냐. 깨달으신 경우를 여러 가지로 이렇게 말씀을 해드렸냐 하면은 우리도 언제 어디에서 깨달을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깨달을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도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놓쳐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밥을 먹다가 깨달을는지, 똥을 누다가 깨달을는지, 걸어가다가 깨달을는지, 누워서 깨달을는지, 일을 하다가 깨달을는지, 어디에서 깨달을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 어데서라도 자기의 본참화두를 정신을 바짝 차려서 염념(念念)이 놓치지 아니하고 본참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을 놓쳐서는 아니 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날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량겁(無量劫)을 통해서 단 한번 깨달을 수 있는 그 인연이 잠깐 한눈파는 바람에 지나간다면 다시 언제 그러한 기회가 자기에게 돌아올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 몸이 이 세상에, 이 자리에 존재하게 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의지해서 이 몸을 이 자리에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부모가 계시지 아니하면 이 몸이 받어 나지를 못했을 것이요.

(둘째)받어 났다 해도 국왕, 대신, 국가와 민족이 없으면은 우리는 세계 어디도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셋째)그리고 스승이 계시지 안 했다면 우리는 까막눈으로서 사람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넷째)그리고 농사짓는 사람, 옷을 만드는 사람, 모든 기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없으면은 우리는 우리 입에 밥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리 몸에 옷도 입혀지지를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 이러한 모든 사람을 부처님 제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시주(施主)’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섯째)그리고 우리는 벗, 붕우(朋友)! 붕우가 아니면은, 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없다면은 우리는 자기 혼자서만 공부는 할 수 없습니다. 무슨 공부를 하던지 같이 하는 친구가 있어야만 서로 밀고 서로 끌면서 충고하고 탁마해 가면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은혜 속에서 다섯 가지 은혜를 대표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를 우리는 받고서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만 받고서 갚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내생에 저 내생에 무량겁을 두고 그 빚을 갚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 빚을 곱게 잘 갚을 수가 있느냐? 우리는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 가지고 내가 내 마음을 깨달어야만 그 빚은 한푼도 남기지 아니하고 잘 갚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조실 스님 법문에는 ‘참선을 할라고 하면은 많은 마장(魔障)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할라고 할수록 마장은 점점 강하게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차라리 공부를 할라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게 된다면 아무 마장도 우리는 만나지 않아도 됩니다. 보다 더 공부를 열심히 할라고 그러고, 보다 더 신심을 내서 애를 쓸수록에 점점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마장은 강하게 부딪쳐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무로 만들어진 공을 벽에다가 던졌을 때에 가만히 던지면은 가만히 튀겨져 오고, 세게 던지면은 강하게 나한테 되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산에다 대고 고함을 치면은 그 메아리가 소리를 크게 지르면은 크게 돌아오고, 작게 지르면 작게 돌아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참선 공부도 열심히 크게 발심(發心)을 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라고 할수록에 점점 우리에게 부딪쳐 오는 많은 강한 마장을 만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10생(十生)을 두고 도를 닦아 오실 적에 조달(調達)이라고 하는 마군이 10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음으로 양으로 직접 간접으로 갖은 수단을 써서 부처님 도 닦으신 것을 방해를 했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실달(悉達) 태자로 태어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일생동안 교화를 하실 그때까지도 사촌동생으로 태어나 가지고 일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해롭게 하고 심지어는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어려서 클 때부터서 같이 왕가(王家)에 태어나 가지고 갖은 사사건건이 부처님과 겨루고 시합을 하고 싸우면서 그러다가 결혼할 때에도 야수다라(耶輸陀羅)라고 하는 미인을 두고 서로 자기가 아내를 삼겠다고 갖은 무술로 겨루다가 마침내 부처님에게 야수다라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가하시자 조달이도 또 출가해 가지고 중이 되어가지고 처음에는 부처님 제자로 있다가 차츰차츰 말년에 가서는 부처님 제자들을 자기에게 통솔권을 달라고 부처님한테 요구를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거절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마침내는 대중을 선동을 하고 현혹을 시켜 가지고 부처님 제자들을 많은 사람을 유인을 해 가지고 다른 처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마침내 그 제자들도 정신을 차려 가지고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마는.


그래 가지고 뜻대로 안되니까 부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 것을 미리 알고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려 가지고 부처님을 치어 돌아가시게 할려다가 두 번 세 번 할려다가 실패를 하고, 또 고약한 성난 코끼리를 시켜 가지고 부처님을 또 돌아가시게 하려고 하다가 그것도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조달이가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한 죄로써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란존자(阿難尊者)를 시켜서 “너, 조달이가 지금 지옥에 떨어져 가지고 그 갖은 고통을 받고 있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가서 물어봐라. ‘지옥고 맛이 어떠냐?’ 그렇게 물어봐라”


아란존자가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 해서 지옥에 가 가지고 “조달이야, 지옥고(地獄苦) 맛이 어떠냐?”

“천상낙(天上樂)보다도 더 좋다” 조달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언제 그러면 지옥에서 나오겠느냐?”

“석가여래가 지옥에 들어오면 내가 나가겠다”


“석가여래 부처님은 삼계(三界)에 대성현이신데 지옥에 들어오실 리가 있느냐?”

“석가가 지옥에 들어올 분(分)이 없거늘 내가 어찌 지옥에 나가겠느냐?” 이렇게 문답을 한 것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조달이는 원시경전(原始經典)에는 그러한 마왕(魔王)으로서, 마왕의 권속으로서 부처님께서 도(道)를 성취하면은 자연히 마왕은 굴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성불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마왕의 국토가 침범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기 때문에 마왕들은 누구라도 도업 성취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도를 이룰려고 애를 쓴 사람이 있다고 하면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것을 방해를 한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조사문중(祖師門中)에서는 이 조달이야말로 부처님보다도 훨씬 먼저 도를 통달하신 위대한 부처님으로서, 부처님으로 하여금 보다 더 용기와 인내로써 수행을 성취해 가지고 대도를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성취하시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마구니의 탈을 쓰고 나와 가지고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께 충격을 주고 격려를 하는 그러한 역경(逆境)적인, 역술(逆術)적인 그러한 특수 수단으로 부처님을 격려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가 스님네나, 신남신녀를 막론하고 도를 닦고자 할 때에 그 나를 방해하는 사람을 일향(一向)으로 미워하고 나쁘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소승(小乘)적인 입장, 관점으로 본다면 ‘분명히 도인이 하나가 나오고 부처님이 한 분이 출세하시게 되면은 그만큼 마구니의 국토가 멸망을 하게 되니까 무서워서 나온 그러한 삿되고 못된 아귀다’고만 보지 마시고,

‘이미 대도를 성취하신 불보살(佛菩薩)이 나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으로 용맹스럽게 도를 닦아서 하루빨리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출현해 주신 보살의 화현(化現)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신다면 미운 생각보다는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오히려 거기에서 큰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날 줄로 생각합니다.


비단 도를 닦을려고 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겠습니다.

일체 선행을 할려고 하는 데에도, 나는 바르게 살라고 하는데 모든 주변과 사회는 나를 용납을 하지 아니하고 사사건건이 장애가 되고 나의 길을 막는 그러한 경우를 만났을 때에도,

역시 대승(大乘)적인, 최상승적인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상대한다고 하면은 나에게는 나를 잘 따뜻이 이끌어 준 사람만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방해하고 나를 해꼬자 한 사람까지도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되어주고 좋은 나의 불보살이 되어 줄 것입니다.(처음~17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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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에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큰스님으로서, 조실 스님으로서 도(道)를 지도하는 지도 노선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기에는 큰스님이라 하면은 그 마음가짐이나 그 말씨나 그 행동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수긍이 가고 존경할 만한 그러한 그렇게 하시리라고 생각하시고, 그렇게 하신 분이 있다면은 그 앞에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그렇게 하신 분의 말씀이라고 하면은 고대로 부처님 말씀처럼 믿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큰 도인(道人)들은 일향(一向)으로 여러분의 비위에만 잘 맞는 그러한 그렇게 나투시기만은 한 것은 아닙니다.

화엄경을 보시는 분은 잘 아시겠지마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 성(一百十城)을 넘어가면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한량없는 법문을 듣고서 마침내 대도를 성취했습니다.


그 오십삼 선지식이 우리가 생각한 거와 같은 전부가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하고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될,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만 보인 도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창녀도 있었고, 미치광이도 있었고, 도저히 우리가 납득할 수 없을 만한 그러한 기행(奇行)을 하는 분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재동자는 한 분도 불신(不信)을 하거나 의심을 하는 일이 없이 차례차례로 몸과 목숨을 바쳐서 그 설해주신 법문을 귀담아 듣고 뼛속에 새겨서 그것으로 해서 차츰차츰 마지막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선지식이 학자(學者)를 제접(提接)할 때에 자세가 그렇거든, 배우는 사람의 입장은 모양으로 선지식을 믿지를 말아라.

부처님께서도 분명히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한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색(色)으로써 나를 본다’고 하는 것은 내가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갖추어서 그렇게 거룩하고 위대하게 생겼기 때문에 참 부처님이시다. 그러니까 나는 부처님으로 존경을 한다’ 이렇게 보거나.


부처님께서는 원음(原音)이시라 한 가지로 말씀을 하셔도 모든 십육군생(十六群生)이 각기 자기대로 다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법문을 잘하시고 변재(辯才)가 거리낌이 없으시고 법을 잘 설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음성이 그렇게 곱고 원만하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을 나는 믿는다’ 이렇게 나를 생각하고 구하고 믿는다면은 벌써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겉으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리고서 ‘아하! 그러니까 훌륭하다. 그러니까 나는 믿어야겠다’ 이러한 식으로 부처님을 믿는다든지 선지식을 믿는다든지 하는 것은 이미 마음 자체가 바르지를 못하다 이것입니다.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삿되었다 이것입니다. 삿된 마음으로 닦는 수행이 바른 수행이 되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법(法)에 의지 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아라’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법, 선지식 설하신 법, 그 법이 옳으면은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도를 닦을지언정, 겉으로 보고 뜬소문으로 돌아다니는 말을 듣고 ‘아유! 나는 큰스님인줄 알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래 가지고 스스로 물러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정법(正法)의 제자가 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마음가짐이 되어가지고 있다고 하면은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라도 선지식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도 우리는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삿된 생각으로 보면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지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될 때도 있고, 사마외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지는 훌륭한 보살의 화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으로 되어져 있어야 정법을 만나고 바른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도를 깨닫고 나서는 우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도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깨닫고 난 뒷이야기는 아직 우리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겠습니다마는 어째서 깨닫고 난 다음에 우느냐?

하근기(下根機)는 깨닫고 난 다음에 울고, 중근기(中根機)는 깨닫고서 춤을 추고 웃고, 상근기(上根機)는 깨닫고 나서도 담담하다고 그렇게 이야기가 됩니다.


내가 무량겁을 두고 어째서 여태까지 깨닫지 못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그 뼈아픈 고통을 받어 왔던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요, 바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아는 바로 여기에 있거든, 어째서 그렇게 바짝 자기와 같이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했던가? 무엇 하느라고 그것을 보지 못했던가?


구할 것도 없이 있는 것을 무엇 때문에 구하느라고 십 년 이십 년 내지 일생을 고생을 했던가? 너무나도 지나간 과거가 뼈아프게 사무쳐지기 때문에 하근기로서는 울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중근기는 이미 그동안에 닦아온 것이 하근기만큼 그렇게 뼈아픈 수행을 가까이하지 안 했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천하 허망한 것이로구나!’ 그래서 기쁘다기보다는 기가 맥혀서 춤을 추고 웃게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상근기야 울 것도 없고 웃을 것도 없겠지요?



우리는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을 통해서 여러 가지에 대해서 고루고루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제나 조실 스님께서 십여 년을 두고 내지 일생을 설하신 법문이 참선법 그거 하나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어디를 가나, 어느 법회를 가나 참선을 많이 듣습니다. 요새는 서양까지도 참선 붐이 일어나 가지고 모다 참선한다고 야단들입니다. 어느 법회든지 설교했다 하면은 참선 얘기가 안 나오고는 법회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선! 글자는 똑같지마는 참선처럼 쉬웁고도 어렵고, 어디를 가나 들을 수 있지마는 참으로 바르게 가리키는 참선은 그렇게 썩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듣거나 보거나 하면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저울로 일단은 달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유식한 사람은 유식한 대로, 무식한 사람은 무식한 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대로, 무엇이든지 썩 자기에게 어떠한 문제가 제출이 되면은 일단은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몇 근이나 되는가?’ ‘어떠한 것인가?’ 일단은 저울로 달아보고 자기에게 합당해야 ‘아하! 그렇구나. 참 좋은 것이로구나’ 이렇게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참선은 그렇게 해서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無條件)입니다. 무조건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다못 알 수 없어야만 되는 것이고 꽉 맥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에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무조건 하고 ‘이뭣고?’하라니까 ‘이뭣고?~’ 이렇게 들어갈 수 있는 그러한 바보 같은 사람이라야 헛시간을 낭비하지 아니하고 바로 정도(正道)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과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있습니다.

이론으로 더듬어서 차례차례 알아 들어가고,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참선은 사구참선입니다. 죽은 참선.


활구참선은 무조건하고, 거두절미하고 알 수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꽉 맥혀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 다못 기둥에 이마를 뜻밖에 부딪친 것처럼 알 수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재미가 없고 일년 이태 해봤자 아무 것도 누구 앞에 내놓을 것도 없지마는 이렇게 가는 사람은 깨달음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고.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간 것이 있고, 이 책 저 책을 읽어서 많은 교리에 대해서 속에 쌓아둔 것이 있고, 누구를 만나서 얘기를 하되 여러 가지로 각 경(經)에 나오는 말을 비교하고 종합하고 분석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얘기할 거리가 속에 많이 들어있는 사람,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참선도 그런 식으로 해 가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참선을 해도 남 앞에는 유식한 것 같고 불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같이 보이지마는, 실지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점점 멀어지고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그 사람은 깨달음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그 생각 버리고 바보 천치가 되어서 백지가 되어 가지고 꽉 맥혀서 들어와야만 그 사람은 바른 길에 척 들어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어를 한 마리 잡고, 또 여우를 한 마리 잡고, 또 개를 한 마리 잡고, 또 큰 구렁이도 한 마리 잡고, 또 새도 한 마리 잡고, 원숭이도 한 마리 잡고, 이래 가지고 이 여섯 마리 짐승을 끈을 낱낱이 매 가지고, 그 끈을 같이 여섯 마리를 함께 또 딱 묶어 놓았습니다.


그래 노니까 악어는 죽자사자 끌고 저 놀던 물가로 갈라고 하고, 새는 죽자사자 하늘로만 날아갈라고 그러고, 개는 죽자사자 마을로 들어갈라고 그러고, 뱀이란 놈은 죽자사자 다른 놈이야 어디로 가던지 제 힘을 다해서 구멍으로 들어갈라고 그러고, 또 원숭이란 놈은 죽자사자 숲속으로 들어갈라 하고,

이렇게 해서 이 여섯 마리의 짐승이 이놈이 기운이 좀 나면은 그리 끌려갔다가, 또 그놈이 끌고 가다가다 힘이 방기면은 또 쭈욱 늘어지면은 어믄 놈이 또 인자 기운을 타 가지고 또 그쪽으로 끌고 갔다.


이래 가지고 여섯 놈이 이리 동서남북 사방으로 끌려갔다가 끌려왔다가, 공중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숲으로 갔다 들로 갔다, 물가로 갔다가 구녁으로 들어갔다, 이래 가지고 그런데, 그래가지고 끝장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그 여섯 마리 묶은 그놈을 튼튼한 기둥에다 딱 짬매 놨습니다. 큰 고목나무에다 딱 여섯 마리를 짬매 놨습니다.


그러니까 이놈이 동서남북으로 이리 끌려갔다 저리 끌려갔다 하던 것이 인자 고목나무에다 콱 짬매 놨으니 가도 못하고, 힘써 봤자 헛심만 쓰다 말고 해 가지고는 ‘아하! 이거 가봤자 소용이 없구나. 내 헛심 써봤자 소용도 없고, 천상 이 고목나무 밑에서 가만히 있어야겠다. 그것이 차라리 유리하겠다’ 하는 것을 깨닫고서 여섯 마리 짐승이 서로 눈을 흘기면서 처음에는 아니꼽게 쳐다보다가 나중에는 모다 스르르르 모다 피곤해 가지고 눈을 감고서 그래서 씨근덕거리다가 가만히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혹 그 여섯 마리의 짐승을 함께 짬매 논 것과 같은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눈은 이쁘게 생긴 사람을 보면 눈이 번쩍 거기를 쳐다보고, 어디서 좋은 음악이 들려오면 그 귀가 솔깃하고, 어디서 맛있는 갈비 굽는 냄새가 나면 코가 벌씬거리고, 뭔 부드럽고 좋은 것을 만지면 하! 그거 당장 사서 입고 싶고, 누가 나한테 아주 부드러운 자비로운 말을 하면 ‘아이구!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가 보다’해 가지고 그날 저녁부터서 눈에 삼삼하고.


이리해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적(六賊)! 여섯 가지 문을 통해서 일생을 이리 끌려갔다 저리 끌려갔다, 천당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가, 짐승도 되았다가 아귀(餓鬼)도 되았다가 이러면서 무량겁을 거치고 거쳐서 오늘날까지 와 오고 있습니다.

이승이 다하고 내생에는 또 어떻게 되느냐? 그동안에 육적(六賊)을 통해서 쌓아 모은 죄의 종자(種子)에 의해서 내생에는 다 또 육도윤회(六道輪廻)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금생에 다행이 그 여섯 놈을 ‘이뭣고?’에다가 묶어 놓을려고 하니, 말을 순수하게 잘 듣고 빨리 그 고목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기운이 남아 있어 가지고 어디서 뭣이 눈에 번쩍하면 그리, 귀에 뭔 소리가 들어오면 그리, 또 어디서 좋은 냄새가 나면 그리,

남편이다, 자식이다, 돈이다, 명예다, 권리다 해 가지고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에 끌려서 참선이 좋다고 한 것은 믿었지마는 껍데기로만 조금 믿을라고 할까 말까.


이러다가 채 아직도 그 객기(客氣)가 쉬지를 못해 가지고, 완전히 체념을 하고 딱 고목나무 밑에서 완전히 쉬어야 할텐데, 그래야 그 여섯 마리 짐승을 길을 잘 들여 가지고 여섯 마리가 한 식구가 되어가지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그런 곳으로 사람이 인도해 줄텐데,

아직도 끈만 풀어놨다 하면은 악어는 바다로 쫓아갈라 그러고, 새는 하늘로 날아갈라 그러고, 원숭이는 숲으로 도망갈라 그러고, 여우는 들로 싸댈라고 그러고, 새는 하늘로 날아갈라고 할 것이 아니냐.


여러분들은 가슴에다 손을 얹고서 냉정히 자기가 지금 어느 만큼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시는 것도 대단히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17분58초~38분25초)



(3/3)----------------


이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염불을 하기를 주장을 하고, 주문을 외우기를 주장을 하고, 경을 읽기를 주장을 하고, 기도를 하기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참선을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참선이 좋기는 참 좋지마는 그것은 상근기(上根機)라야 할 수 있는 것이지 하근기(下根機), 이 말세(末世)에 태어난 하근기는 죄가 많고 업이 두터워서 해봤자 되지도 않는다. 그러니 자기가 자기 분수를 알아서 염불을 하는 것이 좋다, 경을 읽는 것이 좋다, 죄가 많으니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참선을 해봐라 어디 되더냐? 잠이 퍼오고 글안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고민이 일어나고 해서 안 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그것을 해봤자 시간 낭비고 까딱하면 미친다. 그러니 참선을 하지 말고 기도를 하면 당장 해보면 알텐데’


그래서 이리저리 꾀수아 가지고 저 어디 성지(聖地)로 끌고가서 기도를 시키는데, 세 시간 네 시간을 목탁을 치면서 막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고 나니까,

앞에 있던 촛불이 둘로 보였다, 셋으로 보였다 또는 하나로 보였다, 커 가지고 나한테 다가왔다, 그러면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부처님이 떠억 손을 내밀면서 이마를 만져준 것을 느끼기도 하고, 또 그냥 금방 꺼졌다.


이래 가지고는 하! 그러한 것을 몇 번을 맛보고서는 ‘과연 기도가 좋다. 하고 나니까 밥맛도 좋고 잠이 잘 오고’ 아! 그것 몇 시간씩 큰소리를 치고 났으니 밥맛 있고 잠 올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기도해야지 참선은 안되겄다. 기도가 해보니까 정말 기분이 좋고 신심이 나고 좋더라. 참선은 암만 해봐도 이것이 골치만 아프고, 답답하기만 하고, 양다리는 저리고 쑤시고, 어깻죽지는 아프고 도저히 그것은 할 짓이 아니다. 이래 가지고 미끄러져 버린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


참선은 아무리 그것이 쉬웁고 좋다고 해도, 쉽고 좋다고 해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열심히 할라고 하면 할라고 할 만큼 그것을 가로막는 많은 마장(魔障)을 당하게 됩니다.

그 마장은 나를, 겉으로는 나를 해롭게 한 것 같지마는 내가 바른 신심(信心)과 용맹심(勇猛心)으로 열심히 정진으로 밀고 나가면은 그러한 장애들은 오히려 나를 해롭게 하기보다는 나로 하여금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대도(大道)를 성취허겄게 해주는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참선 하는 것을 막는 남편이나 시부모나 가족이나 그러한 분들은 나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면 칠수록 속으로는 백 배 천 배 그분을 향해서 절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고마운 은혜로써 남편에게는 자기의 모든 성의를 다해서 잘 받들어야 하고, 자식에게는 훌륭한 부모로서 잘 사랑을 해주어야 하고, 가정을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주부로서 가장으로서 성의를 다하는 가운데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뭣고?’

어디를 가나 괴롭고 외롭거나 ‘이뭣고?’  ‘이뭣고?’ 그놈을 앞세워서 나간다고 하면은 캄캄한 칠야삼경(漆夜三更)에 등불을 가지고 길을 걷는 거와 같을 것이고, 동서남북을 분간 못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로 항해를 하는데 나침반을 얻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이 ‘이뭣고?’ 화두를 가지고 일생을 노력을 한다고 하면은 나를 깨닫는 문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수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참선이나 또는 마음이다, 불성이다, 불교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알고는 있지마는,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훌륭한 것을 알았다 하드라도, 아무리 깊은 진리를 알았다 해도 ‘알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을 통해서 알아진 것이요, 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아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을 알았다 해도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의 결과요, 중생심의 결과는 계속 중생의 업(業)만을 더욱 조장한 것에 지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정도(正道)에 들어서서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단축할려면은 알라고 하는 생각을 돌이켜서 꽉 맥히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고 하면은 깨달음은 바로 ‘이뭣고?’ 한 그 순간에도 있는 것입니다.


백 번 천 번을 말씀을 드려도 꽉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것, 처음에는 재미도 없고 별로 그렇게 의심(疑心)이 깊이 백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계속 생각 생각이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의 의심을 관조(觀照)를 하게 되면은 그 의심이 차츰차츰 의심이 돈독(敦篤)해지고 깊어지고 또 커져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되어서 자기의 마음속에도 의심으로 가득 차고, 생활 주변에 모든 것에서도 그 의심뿐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나무를 보나 물을 보나 일체 사물을 대할 때 다못 그 한 의심으로 가득차게 될 때,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그 의심은 타파(打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극(極)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에, 그때부터서 이미 조실 스님께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참선하신 분은 더욱 신심이 돈독해지시고, 그 뒤로 많은 신도분들이 여기서 저기서 새로 많이 오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듣지를 못하고 돌아가신 뒤에 녹음 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나마 듣고서 신심을 내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좋은 도반 좋은 형제자매를 만난 기쁨을 뭐라고 표현할 도리가 없습니다.


원래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백 년, 이백 년 살아 계실 줄 알고 효도 한번 못했다가,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부모가 그리웁고 간절한 것을 흔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도 우리가 조실 스님의 은혜를 갚을 길은 얼마든지 있고, 효도를 할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조실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그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때 우리는 조실 스님과 두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두 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이 무량겁을 두고 얼마나 이 정법의 인연을, 좋은 인연을 맺었기에 금생에 이 한 법당에서 이렇게 최상승(最上乘) 활구법문(活句法門)을 같이 듣고 같이 공부할 수 있게 되었겠습니까.

이런 좋은 인연을 절대로 헛되이 놓치지 마시고 금생에 이 몸 받았을 때에 백만사를 다 발판으로 하고 그놈을 밑거름으로 해서 열심히 도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해마지 않습니다.



이 다음에 법회는 앞으로 한 일주일 뒤에는 정월 초사흗날부터서 초아흐레까지 일주일 동안 신수기도를 봉행하게 되겠습니다.

원래 이 법보선원에서는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기도니 불공이니 온갖 의식이 다못 조실 스님 법문 듣고 참선하는 것 속에 전부를 망라(網羅)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가정이 있고 사회가 있고 국가가 있고 하기 때문에 참선은 그 본마음으로는 참선을 하지마는, 집안일도 잘되어야겠고 남편도 잘되어야겠고 아들딸들도 잘되어야겠고 온집안이 화목하게 잘 살아야겠고 국가도 잘되어야겠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원만히 잘되는 것을 바래는 뜻으로, 또 그러한 것들이 잘되어야 우리가 마음놓고 공부도 할 수 있기 때문에, 1년에 한번 정초에 신수기도를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봉행을 해왔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사부대중께서도 이 기도에 성의를 다해서 동참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 용화사에서 거행되는, 1년 동안에 거행되는 법회 종류와 또 그 법회 일자 그리고 음력과 양력 그리고 그 법회가 열리는 요일과 시간에 대해서 일 년 동안에 열리는 약 30회에 걸친 법회를 낱낱이 인쇄를 했습니다.

그날을 혹 망각하고 못 오신 분, 또 그날이 법회인줄 모르고 다른 부득이한 약속을 하신 그런 일들이 있어서 법회에 참석을 못하신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 종이에다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다른 약속을 하실 때라도 언제라도 이 용화사 법회 날짜를 감안해서 하루 밀리기도 하고 댕기기도 하고 해서, 될 수 있으면 이 법회에 빠지시지 말고 다같이 모여서 다시 조실스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한번 우리 수행해 나가는 데에 채찍을 가하고 그동안에 닦아온 것을 반성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어 나가는 좋은 기회를 갖도록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을 드릴 것은 이렇게 법당이 점점 점점 이 법회에 참석하신 도반(道伴)들이 이렇게 많아지셔서 법당이 비좁습니다. 그러나 비좁은 대로 우리는 당분간 이렇게 법회를 진행할 수밖에는 없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비좁은 만큼 될 수 있으면은 질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맨 처음에 오신 분은 될 수 있으면 이 앞으로 앞줄에서부터 차례차례차례 요렇게 차 나가도록.

그동안에 보니까 먼저 오신 분은 한사코 꽁무니를 뒤로 빼고 저리 뒤로만 자꾸 앉으실랴고 그러고, 나중에 오신 분은 앉을 데가 없으니까 부득이해서 차례차례차례 해서 맨 나중에 오신 분이이 복잡한 사이를 뚫고 나가서 앞에 가 앉으시게 된다 그말이여.


이것은 최상승 활구참선을 하는,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최고의 법을 수행하는 우리 법보선원의 법보제자(法寶弟子)의 청법(聽法) 질서라고는 할 수가 없겠습니다.

처음에 오신 분은 차례차례 앞에서부터서 질서 있게 딱 딱 채워서 줄을 잡어서 앉으시면은 나중에 오신 분은 오시는 대로 차츰 차츰 차츰 뒤로 이렇게 앉으시도록. 다음에 오실 분 앉으실 곳을 뒤에다 남겨놓고 앞으로 앉으신 그 마음가짐이라야 참선을 옳게 하실 수가 있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뒤에만 앉을려고 그러고 앞에를 앉기를 싫어하시느냐? 아마 앞은 이쁘게 생겼어도 뒤에가 조끔 안 이쁘게 생겨서 뒤통수를 안 보일라고 뒤로 빠지신가 어쩐가 모르겠으나, 이 참선을 하시는 분은 앞보다도 뒤가 더 이쁜 법입니다.


그리고 이 법회에 오시면은 혹 30분 일찍 오셨거나, 한 시간 일찍 오셨거나 들어오시면은 방석을 깔고 떠억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이뭣고?’를 하고 조용히 법회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셔야 되겠습니다.

물론 한 달 만에 만났으니까 무슨 문안도 해야 되겠고, 또 오신데 대해서 반가워서 여러 말씀도 하시고 싶고 하실 말씀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각기 그렇게 해서 쑤군덕쑤군덕하게 되면은 이 법회장의 엄숙한 분위기가 깨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이 법당에 들어오시면은 떠억 부처님께 절하고 향 꽂고 절하시고서 딱 자리에 가서 앉으시되 맨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앉으시고, 한번 딱 자리잡고 앉으셨다 하면은 가부좌를 하고 떠억 손을 이렇게 하고서 30분도 좋고 20분도 좋고 1시간도 좋고 정말 조용하니 엄숙히 정진을 하시는,

그렇게 해서 뒤에 오신 분도 자연히 척 들어오자마자 엄숙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절하고 딱 앉을 수 있도록, 이만한 질서는 우리 법보제자는 갖추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은 제가 이런 말씀을 삼 년 동안 별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언제라도 법문을 듣고 또 듣고 하면은 그러한 조그마한 일은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지리라 하고 그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참 모다 엄숙하니 잘하시고 뒤에 오신 분을 서로서로 자리를 비키면서 앉으라고 권고하고 그러한 많은 정겨운 상황을 봐 왔습니다.


뭐 구태여 조그만한 얘기로 말씀하신 것까지 막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 장소가 벌써 집에서 나오실 때부터서 여기에 오시고, 오셔 가지고 법문 시작할 때까지, 또 법문 듣고 공양하시고, 공양하시고 집에 돌아가실 때까지 고대로 그날 하루는 특별 수행일로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잘 차타고 오실 때도 염염(念念)으로 화두를 들고 오시고, 걸어서 오시는 길에도 그러시고, 공양 잡수면서도 그렇게 하시고 해서,


처음 오신 분들이 용화사에 오시면 ‘아하! 참 여기 용화사 신도들은 참 이상한 분들이로구나’ 척 보기만 하고서 대번에 자기도 엄숙해져서 ‘여기가 바로 내가 도 닦을 곳이로구나’ 이렇게 신심이 나도록 그렇게들 주의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 종이는 지금 노나 드리기보다는 앞으로 이 법요식이 끝나고 나가실 때에 양쪽 문에서 한 장씩을 노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38분27초~57분4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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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전강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emokko.tistory.com/231)’ 참고.

*참선법(參禪法)①선(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고준하다(高峻-- 높을 고/높을·험할 준) ; 높고 험준하다.

*서산대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장부(丈夫 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견성(見性) : 성품을 본다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 성불이라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조달(調達) ; 제바달다(提婆達多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devadatta의 음사).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됨. 부처님에게 승단을 물려줄 것을 청하여 거절당하자 오백여 명의 비구를 규합하여 승단을 이탈함. 여러 번 부처님을 살해하려다 그 과보로 살아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실달(悉達) ; 싯다르타(siddhartha)의 음역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실다(悉多)’, ‘실달다(悉達多)’이라고도 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생함지옥(生陷地獄) ; 살아서[生] 지옥(地獄)에 떨어짐[陷].

*위신력(威神力) ; 부처님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묘하고도 불가사의한 힘.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 · 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釋迦)에 대한 존칭. 여래(如來)는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로 범어 Tathagata(다타가타)의 역(譯)이다.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삼계(三界) : [범]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원시경전(原始經典) ; 원시불교(Early Buddhism, 原始佛敎)시대에 결집된 불경. 그것은 한역(漢譯) 아함경(阿含經) 및 팔리 삼장(三藏) 등이다.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역경(逆境) ; 역경계(逆境界).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일향(一向) ; 언제나 한결같이.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〇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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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善財童子) ; 화엄경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자(求道者). 문수보살의 법문을 듣고 발심(發心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하여 그 보살의 가르침대로 오십삼 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로 만나 보살도(菩薩道)를 배우고, 보현보살의 행원(行願 서원을 세우고 수행함)을 실천하여 진리의 세계로 들어감.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선지식.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학자(學者) ; 학인(學人).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먹음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군생(群生 무리 군, 날 생) ; 살아 있는 많은 존재, 곧 중생을 말함.

*변재(辨才 말 잘할 변/재주 재) ; 말을 잘하는[辨] 능력과 재주(才操).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사마외도(邪魔外道) ; 불법(佛法)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외도. ‘사마’란 삿된 마구니라는 뜻으로 불도(佛道)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을 장애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인데, 외도 중 삿된 견해로써 불도 수행자를 어지럽히는 자를 사마외도라 한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전강선사 법어집] (용화선원) p53.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육적(六賊) ;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을 도둑에 비유한 말.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객기(客氣) ; 공연히 부리는 꺼드럭거리는 쓸데없고 싱거운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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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성지(聖地 성스러울 성/땅 지) ; ①성(聖)스럽게 여기는 땅[地]. ②성인(聖人)이나 신(神)들과 관련된 신성한 지역. ③성인의 지위. 불보살(佛菩薩)의 신성한 경지. 범부지(凡夫地)의 상대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 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칠야삼경(漆夜三更 옻·검다 칠/한밤중 야/석 삼/밤 시각 경) ; 캄캄하게 어두운 한밤중.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열한 시에서 새벽   사이이다.

*일엽편주(一葉片舟 한 일/잎 엽/얇은 조각 편/배 주) ; 한[一] 잎[葉] 크기의 얇은 조각[片] 배[舟]라는 뜻으로 자그마한 한 척의 배.

*중생심(衆生心) ; 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돈독하다(敦篤-- 도타울 돈/도타울 독) ; (인정이나 마음이)매우 도탑고 믿음성이 있고 진실하다. *도탑다 ; (정이나 사귐이)깊고 많다.

*염념상속(念念相續) ; 생각 생각이 잊지 아니하고 계속 이어 나가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망라(網羅 그물 망/그물 라) ; 물고기나 새를 잡는 그물이라는 뜻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 널려 있는 것들을 모두 모아서 포함시킴을 이르는 말.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청법(聽法) ; 불보살(佛菩薩)이나 스승이 설법하는 것을 경건하게 경청함.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주요 내용]


깨닫는 인연—잠시도 본참화두를 놓쳐서는 안된다 / 5가지의 큰 은혜 / 아난과 조달의 지옥에서의 대화 / 마구니는 보살의 화현(化現)이라고 생각하는 대승의 관점 / 사구참선과 활구참선 / 여섯 마리의 짐승, 육적.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 바른 신심이어야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 / 도를 깨닫고 하근기는 울고, 중근기는 춤추고 웃고, 상근기는 담담하다.

이 참선법(參禪法)은 절대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 아는 것은 깨달은 것과는 다른 것 / 무엇이든지 극(極)하면 터지는 것 / 법회 때의 청법 질서.



[주요 문구]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개천에서 발을 씻으면서 서로 선객(禪客) 스님네들이 이야기하다가 ‘무무(無無)도 역무(亦無)다’하는 그러한 말이 조실 스님 귀에 들어오자마자 대오(大悟)를 하셨습니다.


밥을 먹다가 깨달을는지, 똥을 누다가 깨달을는지, 걸어가다가 깨달을는지, 누워서 깨달을는지, 일을 하다가 깨달을는지, 어디에서 깨달을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 어데서라도 자기의 본참화두를 정신을 바짝 차려서 염념(念念)이 놓치지 아니하고 본참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을 놓쳐서는 안된다.


다섯 가지의 큰 은혜를 우리는 받고서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만 받고서 갚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내생에 저 내생에 무량겁을 두고 그 빚을 갚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그 빚을 곱게 잘 갚을 수가 있느냐?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 가지고 내가 내 마음을 깨달어야만 그 빚은 한푼도 남기지 아니하고 잘 갚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적인, 최상승적인 그러한 마음가짐은 나에게는 나를 잘 따뜻이 이끌어 준 사람만이 고마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방해하고 나를 해꼬자 한 사람까지도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되어주고 좋은 나의 불보살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 참선은 차츰차츰 알아 들어가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조건(無條件)입니다. 무조건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다못 알수 없어야만 되는 것이고 꽉 맥혀야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분명히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한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법(法)에만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철저한 마음가짐이 되어있다고 하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라도 선지식과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을 우리는 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삿된 생각으로 보면은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실지는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될 때도 있고, 사마외도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지는 훌륭한 보살의 화현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른 마음으로 바른 신심으로 되어져 있어야 정법을 만나고 바른 선지식과 불보살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깨달을 수 있는 요소는 잠시도 자기를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밖에 있는 진리,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뭣고?’하는 그놈을 자기가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 더이상 커지지 못하고 더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을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그 의심은 타파(打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극(極)하면 터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전강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전강 스님은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 용화선원에 상주해 계시는 것이고, 언제나 여러분이 ‘이뭣고?’ 드는 그 찰나에 여러분의 가슴속에 전강 조실 스님은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를 깨달을 때 우리는 전강 스님과 두 몸이 아니요,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과 두 몸이 아닌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