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26~50)2023. 8. 5. 13:43

(No.038)—1977년 2월 관음재일 법어(음 77.2.24) (53분)

 

(1) 약 28분.

 

(2) 약 25분.

 

(1)------------------

정사년(丁巳年) 2월 24일 관음재(觀音齋) 법요식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은 처음 들으신 분은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도저히 이해가 잘 가지 아니하고, 한 시간 가까이 들었지만 한 말씀도 머리에 남지 아니하고 알 수 없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어려운 법문인 거 같습니다.

원래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가히 설(說)할 수 없는 것이고, 말로써 뭐라고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가히 귀로써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큰스님네는 말로써 설할 수 없는 것을 능히 설하시고, 귀 밝은 사람은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것을 능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서 ‘아하! 이러한 줄거리로 말씀을 하셨구나. 이러한 말씀이로구나. 과연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르르 하니 그 말씀의 줄거리를 이해를 하고, 그 법문을 듣고 난 뒤에도 환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그 들은 바 법문 내용을 질서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법문을 잘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잘 듣고, 그 들은 법문을 다른 사람에게 고대로 옮길 수 있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법문을 잘 알아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하면은 그 법문을 한 말씀도 옮길 수는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들으면서 또 듣고 나서 알 수 없는 생각에 부딪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그 의심 하나만이 나타나 가지고 일체 번뇌 망상과 잡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다맛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법문을 듣고 공양을 잡수시되 공양을 들은 그 순간 순간에도 밥이 맛이 있는지, 밥이 된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고, 다못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이 한 생각만이 현전(現前)해 가지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법문을 참으로 잘 들으신 분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하시는 최초에 ‘유정(有情) 무정(無情)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운하(云何)로 홀생(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냐’ 이 법문은 『능엄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정은 꿈적꿈적할 줄 아는 놈, 일체 동물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파리 · 모기 · 빈대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동물은 그것이 유정이고, 무정은 나무 · 돌 이러한 것들이 식물이나 광물이나 이러한 것들은 전부 무정인 것입니다.
그러한 유정이나 무정이나 삼라만상(森羅萬象), 삼라만상이라고 하면은 해 ・ 달 ・ 별 ・ 지구, 지구 안에 있는 모든 거,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들어서 삼라만상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도 역시 삼라만상 속에 갈라진 것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다, 청정본연(淸淨本然)하다. 본래성불이라 생사(生死)가 없는 것이다. 청정본연해서 본래성불이어서 그래서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어째서 문득 산(山)과 강(江)과 이러한 땅이 생겼느냐 이 말이여.
본래성불인데 어째서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짐승으로도 태어나고 일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겨나 가지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찰나찰나에 변해 가지고 결국은 파괴되고 죽어 없어지는 것이냐 그 말이여. 본래성불인데 어째서 생사가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말로는—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법문을 들어서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이다, 본래성불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듣고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지거나, 자기의 재산을 누구에게 빼앗기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 ・ 아내 ・ 자식 ・ 친구가 죽게 되거나,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면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면은 자기가 자기를 수습하지 못할 만큼 가슴이 아프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본래 생사가 없는데 왜 자기 것,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로부터 떠나면은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이 말씀이여.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본래성불이다’ 하고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좋은 비니루 주머니에다가, 가죽 주머니 속에다가 똥과 피와 고름과 송장 뼉다귀 이런 것들을 한 가죽 주머니 속에다가 가뜩 넣어서 그래 가지고 그 자루 아가리를 피와 똥과 고름과 송장 뼉다귀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도록 꽉 쨈매 놔. 그러한 가죽 푸대가 있습니다.
그 가죽 푸대에다가 울긋불긋하게—속에는 그러한 더럽고 징그러운 것이 들었을망정 겉은 깨끗이 씻어 가지고 향수도 바르고, 거기다가 울긋불긋하니 단장을 하고 그래 가지고 비싸게 돈을 많이 주어서 좋은 천으로 그 가죽 푸대를 단장을 잘 해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보물처럼 애끼고, 누가 보고 ‘이쁘게 생겼다, 참 좋은 비단이다, 참 냄새가 좋은 향내가 난다’ 그러면 좋아서 못 견디고, 자기 나름,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새벽부터서 단장을 해서 그 가죽 푸대를 잘 단장을 해서 내놨는데, 남이 보고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거나, 보기 싫게 생겼다고 하거나, 무슨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고 하면은 기분이 팩! 상해 가지고 울고불고 그날은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러다가 어떠한 기회에 그 가죽 주머니에 구녕이 뚫어져 가지고—구녁이 뚫어지기 전에는 그 가죽 주머니를 잘 단장을 해 가지고 자기도 그것을 좋아하고 또 그 가죽 주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와 가지고 그 만져 보고 뺨을 비비고 끌어안고 좋아서 못 견디다가, 그러다가 어떻게 잘못해 가지고 가죽 주머니에 구녁이 퐁 뚫려 가지고, 피고름이 뻐걱뻐걱 기어나오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그 속에서 똥 썩은 뼉다구가 툭 불거져 나오면은 코를 막고 눈을 가리고 혼비백산해 가지고 뒤로 벌떡 나자빠진다 그 말이여.
어째서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지기 전에는 그렇게 좋아서 못 견디다가,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더러운 것이 나오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뒤로 나자빠지냐 그 말이여.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피고름이 나오면은 벌떡 나자빠질 줄 알면서, 어떠한 사람은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완전히 속에서 피와 똥과 고름과 뼉다구가 터져 나와 가지고 코를 들을 수가 없고 눈으로 볼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지기 이전에 잘 단장을 해서 향수 발라서 비단으로 칭칭 틀어 감아 놨을 때 그때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가죽 주머니를 보고 싶어하고, 그것을 다시 한 번 또 끌어안아 보고 싶고 그것을 못 잊어서 날마다 안타까워하고 울고 있다고 하면은 여러분들은 아마 그 사람을 보고 정신이 돈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 가죽 주머니는 내가 이야기로 꾸며 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몸뚱아리가 바로 그 똥과 오줌과 피 고름 송장 뼉다구가 속에 들어 있는 가죽 푸대입니다.
그 가죽 푸대가 이상하게도 말도 할 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고, 손으로 만질 줄도 알고, 발로 걸어다닐 줄도 알고 그뿐이 아니라 그 가죽 주머니는 신기한 것이, 가죽 주머니 고대로 앉어서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부산도 왔다갔다하고, 미국도 왔다갔다하고, 10년 20년 어릴 적 시대로 시간을 거리낌없이 시간도 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앞으로 자유자재로 왕래를 한다 그 말이여.

가죽 주머니가 보통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신기하고도 묘(妙)하고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한 그러한 보물의 가죽 머니다 그 말이여. 그 가죽 주머니 속에, 그 가죽 주머니를 째고 그 속을 들여다봐도 그 속에는 피와 오줌과 똥과 뼉다구 밖에 안 들었는데, 그 가죽 주머니가 이상하게도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가죽 주머니여.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을 아지 못하고, 냄새나고 피와 오줌과 똥이 가뜩 들어 있는 그 고약한 가죽 주머니만을 좋아하고 애끼고 그리워할 중 밖에는 모르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한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 보물만 발견을 해서 그 보물만 획득을 한다면은 그까짓 냄새나고 얼마 안 가면 언젠가는 터져서 썩어 없어질 고약한 가죽 주머니는 우리는 그것은 두 번 다시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광산(鑛山)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광산을 구녕을 뚫고 파 들어가서 광맥(鑛脈)을 찾아 가지고, 광맥 속에 들어 있는 광석(鑛石)을 캐내 가지고 그것을 방아를 찧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을 추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광(金鑛)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나 보통 다른 산(山)과 마찬가지지마는 그 잘 아는 사람이 보면은 ‘이 산은 반드시 이 속에 금이 들어있겠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갖은 기계를 동원을 하고 인력을 동원을 해 가지고, 그 광산에 구멍을 뚫고 굴을 뚫고 들어가서 열 질 스무 질 지하로 몇백 메타를 파고 들어가면은 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광맥을 찾아 가지고 광석을 캐내서 그래 가지고 방아를 찧으면은, 방아를 찧어서 물로 이루면은 한량없는 많은 금가루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 몸뚱이는 산(山)입니다, 광산(鑛山). 광산이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혀로 맛볼 줄 알고, 손으로 만질 줄 알고,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분별을 할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걸림 없이 왔다갔다하고, 그러한 여섯 가지 육식(六識), 육근(六根)이 있습니다.
그 육식을 통해서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울다가 웃다가 성내다가, 일평생을 그러한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중생심(衆生心)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중생심이 무엇이냐? 번뇌 망상이 무엇이냐 하면은 그것이 광맥(鑛脈)입니다, 광맥. 광맥, 광석, 그 광석(鑛石)을 캐내 가지고 그 광석을 방아를 찧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을 추려내.

번뇌 망상! 우리는 그 번뇌 망상 때문에 결국은 자기 뜻대로 뭣이 되어 가면 ‘행복하다’ 그러는 것이고, 자기 뜻대로 뭣이 안 되었다 하면 그것을 갖다가 ‘불행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은 자기 뜻에 맞느냐, 안 맞느냐 그 차이뿐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한 것이 어떠한 외부적인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내심(內心), 내심으로 그것을 자기 뜻에 맞다고 생각하느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여.

그래서 번뇌 망상 속에 들어 있는 ‘참나’가 있습니다. 그 참나라고 하는 것이 광석 속에 들어 있는 금(金)입니다. 광석 속에는 반드시 금이 들어 있듯이, 번뇌 망상 속에는 ‘참나’, ‘부처’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광산(鑛山) 속에 굴을 뚫어 가지고 광맥(鑛脈)을 찾아 들어가서 광석(鑛石)을 파내 가지고 방아를 찧어서 금(金)을 추려낼 줄을 알면서, 어째서 우리 몸뚱이에 광산, 번뇌 망상의 광석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여. 법문(法門)을 그렇게 듣고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아니하냐 이 말이여.

산속에 들어 있는 금(金)은 설사 아무리 많은 금을 추려내 봤자 그것은 물질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자타가 야단이지마는 그 재산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내면은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납니다. 떠날 때 곱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과 칼로 수천수만 번을 찌르고 째서 소금을 뿌리다시피 그러한 상처를 안겨 주고서 나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서운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그러한 이름에 보물을 얻었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몇 번을 살림을 다 떨어바치고 친구의 재산, 일가친척의 재산을 다 끌어모아다가 그러한 사업을 하다가 다행히 잘되면 좋고, 안 되면은 일조일석에 처참한 거라지가 되고 말고 그러다가 결국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서운 것을 위해서는 생명과 재산을 다 바치면서 그것을 캐낼라고 애를 쓰면서,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보물! 열심히 찾기만 하면 반드시 찾고야만 마는 그러한 보물! 한 번 찾기만 한다면 영원히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나로부터 떠날 수가 없는, 버릴라야 버릴 수 없는, 그리고 영원히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보물은 찾는 데에 그렇게 인색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법문을 절에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절에 다니시면서 법문을 듣고 환히 다 알고, 천수(千手)를 두르르 외우고 온갖 경전을 다 외우고, 금강경을 다 외우고, 무슨 경전하면 출출출출 아! 그렇게 육두백판으로 다 안다 하더라도 내가 참나를 찾는, 나를 찾는, 나를 찾아서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은 그러한 믿음, 그러한 신도는 참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은 거두절미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과 그 사람의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나!—설사 이 똥 주머니와 같은 이 허망하고 징그러운 이 몸뚱이는 얼마 안 가서 터져 가지고 한 줌의 흙, 냄새나는 추악한 한 줌의 흙이 될지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 참나를 찾아서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행복의 길을 여러분에게 직접적이고 그리고도 간단하고도 쉬웁게 여러분에게 안내해 드리고 있는 수도원(修道院)입니다.
여기에 나오신 분 가운데에는 오래전부터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많이 듣고 잘 알고 열심히 공부하시고 계신 그러한 분도 계시지마는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허망한 몸뚱이 머지않아서, 여기에 앉으신 분은 머지않아서 차츰차츰 한 걸음 앞서가고 한 걸음 뒷서 가서 언젠가는 이 허망한 몸뚱이가 결국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날이 10년 후이냐, 20년 후이냐, 30년 후이냐? 또는 불행하게도 일 년 후이냐, 한 달 후이냐, 하루 후이냐? 오늘밤 일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오래 30년 내지 50년 뒤까지 살아계시면 그러고 몸이 건강해서 오래오래 사시면 참 그 이상 다행할 수가 없지마는,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권리와 지위와 명예가 높다 하더라도, 또 평소에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날짜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기생 절개(節介) 있는 것 못 믿고, 겨울 날씨 좋은 것 못 믿고, 노인 정정한 것 못 믿는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비단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들 생사(生死)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사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한마디씩 말을 해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 동안에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공부하기가 어렵겠구나”

또 그다음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사는 한나절을 두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너도 공부하기가 틀렸구나”

또 한 제자가 말하기를 “밥 한 끼니, 밥 한 그릇 먹는 동안에도 죽을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하기가 틀렸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이라 하는 것은 숨 한 번 속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숨 한 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옳다. 너는 공부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8분16초)





(2)------------------

‘아직은 나이 젊으니까 아들딸 다 여워 놓고 그래도 집이라도 하나 다 사 놓고 그런 다음에 내가 참선을 해야지 지금은 아들도 아직 못 여웠고, 딸도 아직 시집을 못 보냈고, 아직 집도 제대로 장만을 못했으니 이래 가지고 내가 절에 가서 언제 참선을 해야? 우린 아직은 그럴 겨를이 없어 못한다’ 이러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아들딸을 여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집을 얼마든지 돈을 잘 벌어서 집을 장만해야지 장만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해 놓고 나서 참선을 하리라’ 하고 기다리다가는 죽음이 기다려 주지를 않기 때문에 다 하도록까지 기다려 주고, 그리고도 건강해서 백 년, 이백 년만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장된다면은 우선 급한 일부터 해 놓고 나중에 느긋한 마음으로 차분히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무상(無常)이 원수라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아들을 여의고, 딸을 여의고, 살림을 하면서 내가 나를 찾는 공부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고 그럭저럭 살림에만 골몰하고 아들딸에만 얽매여 가지고 발버둥만 치다가 죽어가게 될 때에 아들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딸이 나를 위해서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손자 때문에 집을 못 비우고 나온다’ 그 손자를 금이야 옥이야 하고 귀여워하고 그것을 똥, 오줌을 잘 닦아서 키워 주고, 그놈이 아프면은 같이 잠을 못 자고 밤을 지새우고, 당연히 그리해야 하고 인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마는, 그 짓만 하고 나를 찾는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나중에 내가 이 몸뚱이 찰나간에 그 가죽 주머니가 툭 터져 가지고 피와 똥 고름이 터져 나올 때에 그렇게 귀엽게 키워 주던 손자, 아들이 그 똥 주머니를 터지지 않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의를 다해서 병원에도 모시고 가고, 치료도 해 드리고, 병구완을 성의껏 하기는 하겠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일조(一朝)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찌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몸뚱이 살았을 때, 이만큼 건강할 때에 옳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른 방법을 알아 가지고 생활하는 가운데에 열심히 열심히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나를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녹음 끊김)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 가지고 그때는 아들딸도 귀엽지도 않습니다. ‘저놈들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해 가지고 이런 삼악도에 떨어져서 이 무서운 괴로운 고(苦)를 받는다’고 할 때에 그때에 가서 아들딸, 손자는 원수밖에는 아니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귀여운 자식, 귀여운 딸, 귀여운 손자를 원수로 만들 작정입니까?

펄펄 뛰는 귀여운 아들이 얼마든지 눈앞에 죽어가는 그러한 일을 나는 요 며칠 새에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 절 신도, 대전 신도, 광주 신도 그렇게 부처님께 빌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부자로 되고 모든 소원이 되기를 부모님도 빌고, 스님네도 빌고 그랬지마는 자기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지어 논 그 업(業)은 면할 길이 없어. 언제 가던지 한번은 가는데, 그 가는 아들을 위해서 가슴 아픈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울고불고 피를 토하면서 잠을 안 자고 밥을 굶고 슬퍼한다고 해서 그 아들이 다시 살아 오지도 않고,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기왕 가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게 가는 것이여. 누구 아무 탓도 아닌 것입니다.

설사 그 자식이 어떠한 강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 강도를 원망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생(前生)에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살생(殺生)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인연(因緣)으로 쫓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인연으로 쫓아서 살다가, 인연으로 쫓아서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라 누구의 탓도 아니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기를, 오래 살다가 편하게 잘 가면은 천 번 만 번 다행하지마는 그러한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만큼 건강했을 때에 나를 찾는, 이 생사(生死) 속에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기 위해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고, 죽은 아들과 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또 해야 할 일은 피를 토하면서 울 일이 아니라 나를 찾는 길입니다.
나 한 사람이 마음을 수습해 가지고 이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서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참나를 찾을 때, 화두 한 번씩을 들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나를 찾을 때에 나만 생사 없는 대도(大道)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죽은 아들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시방국토(十方國土)가 청정하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그렇게 가슴 아프고 슬퍼할 줄 아는 놈, 대관절 아무리 만져 보고 찾아보아도 얇은 가죽 속에는 피에 범벅이 된 고기 덩어리요, 그 속에를 생각해 보면은 창자와 오장육부, 그리고 그 가죽 주머니를 지탱하기 위해서 뼉다구가 이리저리 얽켜 있는 것 뿐입니다.
그 속에서 그놈을 끌고 다니고, 그놈을 이리저리 명령하는 그 주인, 참나, 그놈이 무엇이냐 그 말씀이여. ‘이뭣고?’
‘이뭣고?’ 슬퍼할 때도 ‘이뭣고?’ 기쁜 일이 있어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이렇게 성을 낼 줄 알어? 무엇이 이렇게 가슴 아퍼할 줄 알며, 무엇이 이렇게 기뻐할 줄 아느냐 그 말이여.

이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쁜 일을 당하면은 기쁜 데에 빨려 들어가서 나를 잃어버리고, 속상한 일을 당하면 속상한 일에 빠져들어 가 가지고 허우적거리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속에 빠져들어 가서 슬픔에 노예가 되어 가지고 나 자신을 망각하고, 그렇게 몸부림치고 그렇게 발버둥치다가 자기 자신도 눈을 감게 되는 것이 우리 무상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이러한 허망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왕궁(王宮)의 태자로,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 그러한 영화(榮華)와 공명(功名)을 한 몸에 타고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안 계셨던들, 부처님이 그러한 지혜로운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 놓지 않으셨던들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서 이 생사 없는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는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고, 영원히 육도윤회(六途輪廻) 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몸부림치다가 그렇게 여기에서 죽었다 저기 태어나고, 저기서 죽었다 여기서 태어나고 하기를 한량없이 되풀이하면서 서로 죽이고 서로 죽음을 당하고 하면서 원수의 원수를 맺으면서 삼악도(三惡途) 속에서 몸부림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여읜 분들, 이것은 그분들에 국한된 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나 자신의 일입니다.
부디 주책없이 일어나는 잡념, 번뇌 망상 그 일어나는 생각, 아무리 안 할라고 해도 한도 끝도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왜 그러한 그 속에는 영원히 써도 다할 날이 없는 무진(無盡) 보물이 그 속에 들어 있거늘 어찌 그 보배가 담겨 있는 광석을 내버릴라고 하십니까?
한 생각 한 생각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이, 일어나는 고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물은 바로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참선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어나는 그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지마는, 이 참선법을 아는 최상승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아는 여러분은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한 생각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다못 돌이켜서 나를 찾으십시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앉었을 때나 누었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것은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알 수 없는 한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그렇게 외골수로 고대로 이렇게 지어 나간 사람, 그 사람은 깨달음을 단축을 시킵니다.

만일에 머리가 영리하고 지혜가 있어서 책 보기를 좋아해서 많은 경전 속에서 행여나 좋은 말이 없을까, 행여나 공부에 도움이 될 말씀이 없을까 해서 밤낮 경전을 뒤져거리고, 공부를 하면 답답하고 알 수 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못인 줄 알고, 그 답답하고 알 수 없는 그것을 그것이 참으로 공부가 잘되어 간 것이건만 그것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지루하고 답답한 것을 못 이겨 가지고 금방 책을 떠들고, 경(經)을 죽죽죽 읽어 보면은 좀 가슴이 시원하니까 그 맛으로 밤낮 경책(經冊)만 떠들어 보는 그러한 습관이 든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말씀도 부처님 말씀이라 다 주옥(珠玉)같은 말씀이지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는, 한번 활구참선을 시작한 이상에는 그러한 경전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물론 경전도 바르게 보면은 다 공부에 조도(助道)가 되는 것이지마는, 참선하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다고 해서 노상 경전을 뒤져거린 것은 그것은 옳은 참선 태도가 아닙니다. 답답하고 알 수 없을수록에 ‘이뭣고?~~’ 간절히 그리고 외골수로 거두절미하고 미련스럽게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참선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몸을 바르게 단정히 가지고 처음에 오른팔을 꼬부리고 그 위에, 아니 오른발을 다리를 꼬부리고 그다음에 왼다리를 그 위에다 올려놓고, 그 책상다리지요. 그리고서 오른손을 펴서 위로 요렇게 올려놓고 그 위에다 왼손을 포개서 올려논 다음, 엄지손 배를 이렇게 맞대 가지고 배꼽 있는 데 아랫배 앞에다 갖다가 딱 놓습니다.
그리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가운데다 딱 안정을 시킨 다음, 그러면은 몸뚱이는 앞이나 뒤나 좌우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정(端正)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서 아무 긴장이 없이 긴장을 다 풀고서 단정히 가진 다음, 이를 따악 물고 혀는 위로 꼬불여서 입천장에다 혀끝을 딱 대고서, 눈은 약 3m 전방에다 눈을 떨구면 됩니다.
눈을 떨군다고 하는 것은 3m 전방에 어느 지점을 의식적으로 응시(凝視)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맛 떴을 뿐이지 아무것도 보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몸을 단정히 갖는 것이 됩니다.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는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보통 호흡을 허파로 하지마는 수행하는 사람은 배로 합니다.
숨을 들어마셔서 허파를 경유해서 그 호흡이 숨이, 들어마신 공기가 배꼽 밑에 아랫배까지 주욱 들어가서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들어마십시오. 손가락으로 눌러 보면 빵빵하도록.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터지도록 들어마셔서는 아니됩니다. 약 80%만 들어마셔서 눌러 보면은 마치 빵빵할 정도로 들어마신 다음, 2~3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그 뒤로 배를 홀쪽이 잡아댕기십시오. 그러면은 아랫배 빵빵했던 바람이 서서히 나가게 됩니다.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그냥 보통 숨이 들어간 게 아니라 이 허공계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정기, 우주의 바른 기운이 그 호흡...(녹음이 끊김) 내 몸에 완전히 흡수가 되고, 그리고서 조용히 배를 홀쪽이 하면서 내보낼 때에는 그 찌꺼기, 찌꺼기와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나쁜 찌꺼기가 그 나가는 숨을 따라서 밖으로 배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방안에 여러 사람이 문을 꼭 닫고 여러 사람이 앉어 보십시오. 30분이 못 가서 그 방안에 공기는 아주 탁해집니다. 방안에 앉어 있는 사람은 잘 모르지마는, 신선한 바깥 공기 속에 있던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매캐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 안에 있는 나쁜 공기가 밖으로 배설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허파로만 그렇게 얕으게 호흡을 쉬면은 밖에서 빨아드린 바른 생기가 몸안에 완전히 배들지 못하고, 또 몸안에 있는 구석구석이 찡겨 있는 나쁜 찌꺼기가 불순물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밤낮 허파 안에서만 가볍게 들랑들랑하는 호흡은 그것은 좋은 호흡이 아닙니다.
호흡을 어쨌든지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조용히 내쉼으로써 우주의 생기(生氣)는 몸안에 잘 배어들고, 몸안에 있는 불순물은 깨끗이 깨끗이 밖으로 배설이 되어서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육부가 맑아지고 따라서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참선하신다고 하면은 참선해 나가는 도중에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빠른 시일 안에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보약을 잡숫고 병을 치료하고 하지마는, 그러한 방법에 우선해서 먼저 근본적인 묘방은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통해서 복식 심호흡을 열심히 함으로써 이 몸을 맑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한 후에 약도 병용한다고 하면은 몸에 병도 훨씬 빨리 치유가 될 것이고, 더군다나 참선하는 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을 바르게 단정히 갖은 다음 복식 심호흡을 잘하고, 그 복식 심호흡을 잘한 위에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 이것이 진짜 참선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무슨 생각이든지 우리는 생각이 부단히 일어났다가[生] 그 생각이 얼마동안 머물러 있다가[住]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異] 결국은 그 생각은 꺼지고[滅], 꺼지자마자 또 딴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그 일어나는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딴생각으로 갈라져서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또 꺼지고, 그 생각이 꺼지자마자 또 다음 생각이 일어나고 하기를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잠이 꼬빡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쉴 새 없이 그러한 정신 작용이 계속되고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잠이 꼬빡 들었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놈이 놀지 않고 계속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무슨 생각이 되었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몸을, 그다음에 호흡을, 마지막에 생각을 그렇게 바르게 잘 단속해 나간다고 하면은 이 생사(生死)가 무상한 허망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대로 삼세(三世)의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상주(常住)해 계시는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극락세계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가 그 극락 생활을 영위하느냐, 또는 이 세계를 그 무섭고 괴로운 삼악도(三惡途)를 만들어 가지고 그 삼악도 속에 괴로움을 못 이기고 울부짖는 삼악도의 지옥 찌꺼기가 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뼛속 깊이 명심해 들으셔 가지고, 되건 안 되건 그것은 따질 것도 없습니다. 되거나 안 되거나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 나가심으로써 어느 지옥을 만드냐, 극락을 만드냐 하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28분17초~53분2초) (끝)





[법문 내용]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 ‘유정(有情) 무정(無情)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운하(云何)로 홀생(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냐’ 『능엄경』 /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본래성불이다’ 하고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도리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 모두의 몸뚱이는 바로 똥과 오줌과 피, 고름, 송장 뼉다구가 속에 들어 있는 가죽 푸대 /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푸대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 / 광산(鑛山) - 우리 몸뚱이, 광석(鑛石) - 번뇌망상, 금(金) - 진여불성 /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원히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보물을 찾아라.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다 /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 / 부처님께서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다.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 답답하고 알 수 없을수록에 ‘이뭣고?~~’ 간절히 그리고 외골수로 거두절미하고 미련스럽게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 참선의 자세. 복식 심호흡 /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무슨 생각이 되었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 지옥을 만드냐, 극락을 만드냐 하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하면은 그 법문을 한 말씀도 옮길 수는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들으면서 또 듣고 나서 알 수 없는 생각에 부딪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그 의심 하나만이 나타나 가지고 일체 번뇌 망상과 잡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다맛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법문을 듣고 공양을 잡수시되 공양을 들은 그 순간 순간에도 밥이 맛이 있는지, 밥이 된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고, 다못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이 한 생각만이 현전(現前)해 가지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법문을 참으로 잘 들으신 분인 것입니다.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번뇌 망상 속에 들어 있는 ‘참나’가 있습니다. 그 참나라고 하는 것이 광석 속에 들어 있는 금(金)입니다. 광석 속에는 반드시 금이 들어 있듯이, 번뇌 망상 속에는 ‘참나’, ‘부처’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광산(鑛山) 속에 굴을 뚫어 가지고 광맥(鑛脈)을 찾아 들어가서 광석(鑛石)을 파내 가지고 방아를 찧어서 금(金)을 추려낼 줄을 알면서, 어째서 우리 몸뚱이에 광산, 번뇌 망상의 광석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여. 법문(法門)을 그렇게 듣고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아니하냐 이 말이여.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은 거두절미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과 그 사람의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나!—설사 이 똥 주머니와 같은 이 허망하고 징그러운 이 몸뚱이는 얼마 안 가서 터져 가지고 한 줌의 흙, 냄새나는 추악한 한 줌의 흙이 될지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 참나를 찾아서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행복의 길을 여러분에게 직접적이고 그리고도 간단하고도 쉬웁게 여러분에게 안내해 드리고 있는 수도원(修道院)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조(一朝)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찌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몸뚱이 살았을 때, 이만큼 건강할 때에 옳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른 방법을 알아 가지고 생활하는 가운데에 열심히 열심히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나를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자식이 어떠한 강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 강도를 원망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생(前生)에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살생(殺生)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인연(因緣)으로 쫓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인연으로 쫓아서 살다가, 인연으로 쫓아서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라 누구의 탓도 아니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시방국토(十方國土)가 청정하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왕궁(王宮)의 태자로,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 그러한 영화(榮華)와 공명(功名)을 한 몸에 타고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한 생각 한 생각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이, 일어나는 고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물은 바로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21. 11. 29. 17:53

 

(No.099)—1979년(기미년) 신수기도회향(79.1.9.음) (77분)

 

 

(1/4) 약 21분.

 

(2/4) 약 20분.

 

(3/4) 약 18분.

 

(4/4) 약 18분.

 


(1/4)----------------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춘풍유가석(春風惟可惜)이라  취락만정화(吹落滿庭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라.
사람이 나서 행락하는 곳에, 오욕락을 즐기면서 웃고 좋아하는 곳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라, 아까운 광음(光陰)만 속절없이 흘러가는구나.

춘풍유가석(春風惟可惜)이라  취락만정화(吹落滿庭花)로다.
봄바람이 오직 아깝구나. 봄바람이 불면 산들산들 기분이 좋고 거기에 콧노래가 나오고, 춤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그러지만, 그 봄바람이 불어 결국은 뜰에 가득한 꽃이 지고 마는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가득한 뜰에 오색이 영롱한 아름다운 꽃이 만발해 가지고, 그 아름다운 꽃이 그것이 사람이 보고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취해 있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덧 그 꽃은 지고 마는구나.

인생(人生) 일생(一生)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그럭저럭하다 보면은 십여 세가 되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 공부하다 보면 그럭저럭 대학을 가게 되고, 그럭저럭하다 보면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둘 낳다 보면은 벌써 주름살이 생기고, 인생 일생 칠십, 많이 살아봐야 7~80인데, 그 일생이 지내놓고 보면 따뜻한 봄날에 잠깐 낮잠 한번 자고 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지금 이 자리에는 7~80 연세 많으신 노인으로부터 젊은 분이 계십니다마는, 연세가 많으신 분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시면 잘 아실 줄 생각합니다. 엊그제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일이 금방 얼마 전 일로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그동안 세월이 어떻게 무엇을 하는 가운데 지내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오십 고개를 넘었지마는 17~8세, 20세 미만의 어릴 적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이지마는 꼭 엊그제 같습니다. 30여 년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을 타고 차를 타고 잠깐 어디 시내 한 바퀴 돌아온 그런 기분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재송도인(栽松道人)의 법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조실 스님, 그 아주 재미있게 해 주신 법문이라 잘 들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을 해서 생사(生死) 없는 이치를 깨닫고 그리고 보림(保任)을 잘하면, 생사에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고 하는 것은,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오늘 가고 싶으면 오늘 가고, 며칠 더 있다 갈라면 가고.
옛날 도인(道人)들은 떠억 편안히 앉아서 가신 분, 또 걸망을 떠억 지고 지팽이를 짚고 어디 행각(行脚)을 떠나는 그런 행색(行色)을 해 가지고, 마당에 나가서 못가에 서서 선 채 딱 열반(涅槃)하신 그런 분도 계시고.

또 등은(鄧隱) 조사 같은 이는 열반하실 때 옆에 시자(侍者) 보고, “제방(諸方)에 앉아서 돌아가신 분이 계시냐?”
“그런 분은 많이 계십니다”

“서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냐?”
“그런 분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까꾸로 서서 돌아가신 분도 있느냐?”
“그런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당신은 따악 까꾸로 서서, 선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까꾸로 선 채 열반에 드셨는데 옷자락, 옷고름, 옷소매까지도 밑으로 처지지 아니하고, 몸 따라서 딱 붙은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옆에 대중들이 전부 그분을, 열반하신 뒤에 편안하게 뉘어 드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까딱을 안 했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우뚝 선 것처럼 아무리 밀어도 넘어지지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애를 먹고 있던 차에, 마치 등은 조사의 누이동생이 여승(女僧)인데, 여승이 그 오빠이신 등은 조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와서는 “이 노장(老長)이 평생에 추한 짓을 하더니 죽을 때에도 이런 추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손가락으로 툭! 미클어 버리니까 툭 쓰러졌습니다.

과거 인도나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일본에 이 동양에 걸쳐서 많은 도인들이 이렇게 생사에 자유자재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참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분이 올바르게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그 구분을—돌아가실 때 서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앉아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누워서 돌아가셨느냐, 돌아가신 뒤에 방광(放光)을 했냐 안 했느냐 이러한 것으로써 그분의 도(道)가 높고, 높지 아니한 것을 분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공 스님, 전강 조실 스님의 법사(法師) 스님이신 만공 스님에 맨 처음에 법(法)을 전해 받으신 보월 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에 오색(五色)이 찬란한 방광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만공 스님께서 그 보월 스님의 열반에, 그 상서(祥瑞)에 대한 점검을 하시기를 “추한 이 더러운 놈이 죽을 때 추한 짓을 면하덜 못하는구나”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다, 아까 등은 조사의 까꾸로 서서 움직이지 아니한 것에 누이동생이 와 가지고 그 점검을 하는 말씀이나, 만공 큰스님께서 당신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신 보월 스님의 열반서상(涅槃瑞相)을 점검하신 말씀이 다 척사현정(斥邪顯正)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상(相)에 집착해서 바른 법을 보지를 못하고 삿된 소견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셔서 추상(秋霜)같은 점검을 내리신 것입니다.

근자(近者)에 스님네나 또는 보살님네들이 돌아가셨을 때, 화장(火葬)을 한 결과 많은 사리(舍利)들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불교신문에 자주자주 보도가 됩니다마는, 물론 계행을 잘 지키고 수행을 착실히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먹고 일생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온다면 사리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또는 나오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나온 것을 꼭 나쁘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사리 나온 것을 가지고 ‘사리가 나왔기 때문에 그분이 도인(道人)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는 잘 알고 계서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리가 나오고 방광을 하고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착각을 해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참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법(正法)을 배우는 불제자(佛弟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송도인(栽松道人)이 팔십 노인의 몸으로 인가(印可)를 받으러 갔다가 법담(法談)을 해서, 법담은 훌륭하게 해서 분명 견성(見性)한 것을 인증을 받았지마는 늙은 탓으로 해서, 늙은 사람에게 법(法)을 전해봤자 법을 전하신 스승보다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그다음에 누가 있어서 대(代)를 이을 것인가? 그래서 몸을 바꿔 오도록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몸을 바꾸는데, 처녀의 뱃속에 들어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몸을 새로 바꿔 나와서, 그래 가지고 어려서 출가를 해 가지고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가하신 재송도인을 떠나보내고 그 어머니—처녀로 애기를 난, 그 재송도인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찾고 찾아서, 늙발에 아들 있는 곳을 알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얼마 동안 별당에서 밥을 얻어 자시면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실 때에, 별당에다가 가둬서 계시게 하고 밥을 갖다 드리지 아니해서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때 수백 명의 제자들이 ‘어째서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고생 끝에 낳아 가지고 길러서 출가를 시켜준 그 어머니를 굶겨서 돌아가시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결단코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불효한 사람이 이러한 도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한테 도를 배우느니 차라리 여기를 떠나자’ 이리 해 가지고 대중이 전부 걸망을 싸 짊어지고 그 절을 떠날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그 돌아가신, 재송도인의 어머니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여러 대중스님네, 제 말씀을 들으시오. 나는 아들 하나를 잘 둔 공덕으로 지금 나는 천상으로 올라가는 길이오. 그러니 내 아들이야말로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도인이고, 나에게 가장 효도를 해준 아들이니, 내 아들을 그릇 오해하지 말고 어서 걸망 짐을 풀어놓고 열심히 도를 배우시오” 이렇게 소리가 울려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대중들은 스님네들은 다시 걸망을 풀고 그전에보다도 훨씬 더 목숨 바쳐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시겠지마는, 이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人情)을 써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인정(人情)과 자비(慈悲)는 그 질(質)에 있어서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인정은 우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좋지마는 결국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자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정과 너무나도 흡사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정이라 하는 것은, 주는 것이 있고 또 받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주면서 또 받을 것을 또 기약을 헙니다.
그러나 불보살의 무연자비(無緣慈悲), 정말 참된 자비라고 하는 것은 주되 주는 바가 없고, 따라서 상(相)이 없는 것이며, 받을 것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주면서 그 보답을 받기를 바래면서 주는 것은 ‘참보시’가 아니고 ‘참자비’가 아니고, 은혜를 베풀어서 덕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원망과 웬수 빚으로 돌아오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마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자’에게, 은혜로 보답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갖다 안겨준 그러한 사례가 방방곡곡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언제라도 은혜를 베푸는 것에 덕(德)이 돌아오지를 못하고 그러한 웬수 빚으로써 보답 받은 예는 너무나 흔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뭣이냐 하면, 그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그 사람을 다 나쁘다고 합니다마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되 상(相)이 없이 주라’ 주되 보답을 바래지 말고 주어야지, 보답을 바래고 주면은 결과적으로는 좋지를 못한 것입니다.(처음~20분29초)





(2/4)----------------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가르키고, 자식을 키우고, 자식을 결혼을 시켜서 살겄게 해준 그 일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 아들과 딸을 고생고생하면서 포태(胞胎)를 해 가지고 낳아서 길러 가지고 맛있는 것은 아이의 입에 넣고, 따뜻하고 마른자리는 아이에게 주고 춥고 젖은 자리는 엄마가 눕고, 이러하면서 키운 그 자식, 못 먹고 못 입으면서 키운 그 자식이 커서 장가가서 자식 낳고 살면은 부모의 은혜를 거의 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너무나도 지나친 불효자식이 되고, 나중에는 지집 말만 듣고 부모를 웬수같이 생각하고 부모를 내쫓고 부모를 죽게까지 하는 예는 신문에 가끔 보도됩니다.

이건 특수한 예라고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마는, 자식은 과거에 업(業)으로 인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혹 은혜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그런 효자도 더러는 있지만, 대다수의 자식이 웬수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을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수에 자식이 태어날수록에 부모는 더욱 그 자식이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피라도 빼서 그놈을 살릴라고 하고 잘살게 할려고 하지마는, 그 자식은 점점 부모의 속에다가 불을 묻고 송곳으로 찌르고 고춧가루를 뿌리는 그러한 짓을 가려가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웬수가 태어나서 자식노릇을 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은 태어나지 아니한만 못하건마는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이라 그것을 달게 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세계에 42억이라고 하는 동서(東西)에 인구가 있지마는, 그 많은 인구가 부모의 몸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많은 수가 얼마만큼 그 부모의 은혜를 알고 부모에 효도를 하는 사람이 있는지, 여러분 자신부터 우리 자신부터 우리들의 주변 사람 가까운 데부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웬수를 맺지 말아야 할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웬수를 맺지 아니하려면 남에게 악(惡)하게 하지 아니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착하게 하되 보답을 바래지 아니하고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재산을 베풀고서, “내가 너를 살려주느니, 너는 일생 동안 백골(白骨)이 되도록 잊지를 말아라. 그리고 목숨 바쳐서 그 은혜를 나한테 갚아야 하느니라” 그러한 말을 입으로도 할 필요도 없고, 그러한 생각을 마음으로도 가져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받은 사람이 당장 부담을 느끼게 되고,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주는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잘 들지를 못하고 항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생각이 속에서 쌓이고 쌓여 가지고 준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꺼리게 되고, 언젠가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어라. 은혜 베풀어 가지고 좋은 꼴 보지 못한다’ 막말로 말하면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뼈저린 가슴 아픈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힘닿는 데까지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됩니다. 단,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고 베풀고, 베풀되 상(相)이 없이 베풀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배은망덕한 꼴을 보고, ‘나는 다시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나는 밥 한술 못 주겠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까지 내놓으라’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까봐서, 물에 빠져서 곧 죽게 되는데 그것을 건져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져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건 말이 되질 않습니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몇 번을 배은망덕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른 일, 착한 일을 내놓고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답을 바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상(相)이 없이 착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뭣고~?’ ‘이 뭣고?’ 하면서, ‘이 뭣고?‘ 허는 마음으로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뭣고?’를 놓치면 중생심(衆生心)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하는 일은 모두가 다 인연(因緣)의 인과(因果)의 올개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우리는 본참화두(本參話頭)인 ‘이 뭣고?’, 본참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히 상(相)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웬수가 나를 해코지하러 오드라도 ‘이 뭣고?’로써 상대를 하게 되면은 웬수도 굴복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을 살아가다 보면, 참 나에게 자비롭게 해 주고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도 많이 만납니다마는, 까닭 없이 나에게 해롭게 하고 까닭 없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그런 일을 더러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내리고 미워하고, 그놈을 언젠가는 혼을 내줄려고 이를 갈아붙입니다마는, 사실은 까닭 없이 나를 해롭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준 것도, 그것도 언젠가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 준 일이 있어서 (내게) 잘해 주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 해(害)를 끼치는 사람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도록 자기가 그 원인을 진즉, 진즉 다 원인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허물은 바로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큰 거울이 있습니다. 이 허공은 동서남북에 한량(限量)이 없고, 모난 것도 아니요, 둥근 것도 아니요, 무한대로 멀고 먼 높고 높은 이것입니다마는, 그것을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큰 거울, 야외음악당과 같이 생긴 둥그런 거울 속에 자기가 살고 있는데, 자기의 모습이 그 큰 허공에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 것이—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모든 것이고,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이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모든 것이고,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고 입으로 들어오고 몸에 부딪치고, 우리의 생각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바로 자기로부터 나가 가지고 큰 거울에 비추어서 다시 자기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부처님의 말씀에 추호(秋毫)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큰 거울에 비추어서 되돌아온 것을 보고, 그것을 보고 성을 내고 웬수를 갚을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당나라에서 선물로 거울을 하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 갖다가 아내를 주었습니다. 아내를 주니까, 아내가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중국 갔다 오더니 어디서 이쁜 계집년을 하나 데리고 왔다’고 앙탈을 부리고 강짜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시어머니한테 쫓아가서 호소를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어디 좀 데리고 와봐라” 시어머니한테 거울을 갖다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거울을 갖다 보더니, “새파란 젊은 년을 데리고 왔다드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구나!”
그 거울을 또 영감을 보였습니다. 영감이 그걸 보더니, “늙은 년이 아니라 어디서 늙은 놈을 하나 데리고 왔다” 이래 가지고 서이 각각 자기의 얼굴이 그 거울에 비추는 것을 알지를 못하고, 세 사람이 각각 달리 얘기한 그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까닭 없이, 또는 어떤 이유가 있건 없건,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해줄 때 또는 자기의 재산상 해를 끼쳤을 때 또는 자기의 아들을 남의 집 애기가 해롭게 했을 때, 많은 그런 피해를 입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즉각 그 사람한테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웬수를 갚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 자기의 허물이, 자기가 과거에 저질렀건 또는 현재 자기의 마음속에 그러한 요인이 될 만한 씨앗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이, 그것이 그 사람 밖에 있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하시게 되면, 우리는 어떠한 섭섭한 일을 당하드라도 어떠한 언짢은 일을 당하드라도 금방 마음을 돌려서 평온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인과법(因果法), 이 도리(道理)를 인식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밤낮 웬수 속에 휩싸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웬수가 되고, 부모도 웬수가 되고, 자식도 웬수가 되고, 친구도 웬수가 되고, 이웃도 웬수가 되고 해 가지고, 조그마한 일로 인해서 점점 웬수가 커져서 무량겁을 두고 서로 싸우고 찢고 찢기고 하면서 점점 죄를 더 퍼지어 가지고, 갈 곳은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밖에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 하나, ‘저 사람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이요. 나의 허물이, 그림자가 거울에 비추어서, 저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고 하는 이 간단한 인과(因果)의 원리를 잘 음미를 하시고 터득을 하시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면서 완전히 이 사바세계에서 초월한 불보살(佛菩薩)과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에 우리는 나날이 사람이 달라지게 됩니다. 엊그제까지 심술(心術) 사납고 고약한 사람으로 낙인(烙印)을 찍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 동안에 또는 한 달 동안에 눈에 띄게 딴 사람으로 승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7일 기도 회향 날에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7일 기도를 정말 여러분들께서는 있는 정성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셨고, 직접 시간을 맞추어서, 날씨가 그동안 대단히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 속에 얼음 빙판 속에 새벽부터서 나오셔 가지고 기도를 정말 성심껏 봉행을 했고, 또 기도 법사스님도 정말 열심히 기도를 봉행을 했습니다. 경건하고 환희 속에 7일 기도가 한 사흘도 이삼 일도 못된 것처럼 휘딱 그렇게 지내갔습니다.
기도는 정성이 제일이고, 정성스럽게 한 기도는 반드시 성취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크고 작은 소원이 반드시 성취되실 줄 나는 믿는 것입니다.

기도 성취는 성현(聖賢)이 가피(加被)를 내려주셔서, 부처님과 성현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우리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도 좋은 것이고 그렇게 표현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입장에서 관찰을 한다면, 그 성현이 자기 몸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속에 한 생각 일어나면 밖으로 표현하기 전에 불보살은 먼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럽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하셨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감응(感應)을 하시게 됩니다.
여러분이 힘을 얼마만큼 들여서 고함을 질렀느냐 하는 것은, 목구녁에 얼마만큼 강하게 흔들어 주었느냐, 이것에 달려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지르면 그 소리는 멀리 갈 것이고, 가만히 지르면은 자기 가까운 데 한해서 들릴 것입니다.

정성과 바른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를 봉행할 때에 반드시 소원을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산골짜구니에서 소리를 지름에 메아리가 울리고, 물체가 있을 때에 그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신비한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한 과학적 사실에 지내지 않습니다.(20분30초~40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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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기도를 통해서 지금 마음에 잡숫고 있었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 1년 동안 또는 금생 일생 동안, 나아가서는 무량겁을 두고 온갖 재앙을 소멸하고 그 재앙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도리가 금년 신수기도 7일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도록 저는 삼고자 해서 지금 이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말아 버리면 조그만한 소원만 이뤄 버리고 다시 또 재앙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우리가 원해야 할 조그마썩한 소원을 위해서 계속 또 신수기도를 해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향(廻向)일을 맞이해서 제가 말씀드린 ‘다른 사람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의 그림자다, 자기 허물이 바로 되돌아온 것이다’고 하는 이 간단한 이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신다면, 금년 1년 동안 어떠한 재앙도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모든 웬수가 바로 나를 도와주는 그러한 불보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가운데는 이러한 도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철저히 수행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 줄 나는 알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에 있어서 수행에 있어서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한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선행(善行)이라도 해 갈수록 더 크게 더 깊게 더 멀리 넓게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로부터서 먼 데까지, 작은 데로부터서 큰 데에까지, 우리의 행(行)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도(大道)를 성취하시고 육신통을 구족(具足)하셔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신 그리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신 그러한 대성인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계셔도 다 된다. 더 닦을 것도 없으시겠다’ 이리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보다 몇천 배 몇만 배의 정진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가끔 한눈을 팔 수도 있고, 해태를 게으름을 부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부처님은 단 1초 동안의 한 눈 파시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 1분 동안의 게으름도 부리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언제나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시거든 하물며 우리의 범부 중생들은 이를 갈아붙이고 이를 악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닦아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해서 재송도인(栽松道人)과 같이 그렇게 생사(生死)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실 수도 있는 그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일, 어려운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성취가 될 것인가? 죄 많은 중생이,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가 어찌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다못 인연이나 맺게 그저 법문 듣고 기도나 해보자' 이러한 생각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이미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에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회의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어서 기초부터 차츰차츰 배워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요, 외우는 공부요, 속에다 쌓아 올리는 공부는 그것은 점진적인 공부라 하는 것인데, 그러한 공부는 물론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참선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속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 뛰어서 곧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간다’ ‘한번 뛰어 가지고 성불(成佛)을 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콱! 맥혔던 중생이 찰나간에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차츰차츰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해서 따져 가지고 ‘오,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이 뭣고?’, ‘이 뭣고~~?’

아침부터 낮에까지 낮부터 저녁까지, 밥을 먹을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소제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이야기를 할 때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겉으로 하는 일은 다 하면서도 생각은 ‘이 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그 일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밥을 먹을 때는 밥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말을 할 때는 말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그래야지, 일할 때 일에는 정신을 쏟지 않고 ‘이뭣고?’를 한다면 그 일이 어떻게 되며, 반찬을 만들 때 그 반찬에 여러 가지 재료의 분량과 양념의 종류 이런 것을 고루고루 모두 따지고 영양가도 따지면서 조리를 해야지, ‘이뭣고?’만 하면서 이것저것 함부로 집어넣으면, 간장을 잔뜩 붓거나 고추장을 듬뿍 집어넣거나 하면 반찬이 다 못쓰게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걱정을 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적은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한 경우는 너무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면, 채소밭에 잡초를 매면서 잡초는 놔두고, 아껴서 세워두어야 할 채소를 다 호미로 매 버리는 경우가 과거에 고인네들에 있어서 가끔 있었다고 전해옵니다.
그런 경우가 더러는 있지마는 그건 특수한 경우고, 화두를 들고서 모든 일을 해 나가면은 처음에는 화두 들라고 하면은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일에 정신을 쏟으면은 화두가 잘 안 들리고 해서,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 잘 안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자꾸 익히는 것입니다.

자꾸, 세수하면서 ‘이뭣고?’ 한 그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세수를 한번 해보세요. 세수를 하러 세숫대야 있는 데까지는 갔고,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붓을 때까지도 화두가 있었고, 그런데 손으로 물을 움켜서 얼굴에다 대고 문지를 때 깜박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그럴 때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화두를 단속(團束)을 해 보십시오. 그럴 때 한번 단속을 해봐서 세수를 끝내고 다시 수건으로 닦을 때에도 화두가 들어져 있도록, 그렇게 그때그때 잠깐잠깐의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진을 빨리 이러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몰아가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것입니다.

발우(鉢盂)를 떠억 필 때까지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밥을 다 놓으려고 진지를 할 때도 있고 한데, 죽비를 딱딱 세 번 딱! 치고 숟가락을 들어서 입에다 넣고 씹으면서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그래 가지고 옆의 사람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행여나 나보다 먼저 먹을까 싶어서 막 잘 씹지도 아니하고, 침도 바른 둥 만 둥 하고 막 삼켜가지고 그런 동안에 단 한 번도 화두를 들어보지 못하고 공양(供養)이 끝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방에 계신 스님네나 보살님네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계실 때에도 공양은 언제나 천천히 잡숫고 잘 씹어서 잡숫도록. 그럴려면은 화두를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서 그 드는 상태에서 공양을 잡숫도록 하시면, 저절로 잘 씹게 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공양을 하시게 되기 때문에 소화도 잘되고 영양흡수도 잘되고 따라서 가장 맛있게 공양을 잡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양 잡술 때에 한해서 만이 아니라, 모든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들고 모든 일을 해야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만 제대로 될 뿐만 아니라, 피로를 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종일 일을 하되 일하는 데에 나의 정신을 빼앗기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명심을 하시고, 생활 속에 이 참선을 잘 단속을 해 나가시도록 정성들여서 단속을 해 나가시면은 차츰차츰 이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게 되면은 거기에서 습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계속 그것이 습관화가 되면은 나중에 체질화가 되는 것입니다.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단계에 도달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과 몸은 혼연(渾然)히 일체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바로 나의 살림살이가 되는 것이고, 나의 수중(手中)으로 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요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확철대오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공부만이 생사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도 좋고,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밖의 어떠한 주문(呪文) 진언(眞言)도 좋습니다마는, 또는 기도도 좋고 경(經)을 독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이나 경을 독송하는 일은 자칫하면 외우면 외우는 데 빠지고, 기도를 하면은 기도하는 데에 빠져서 '참나'를 찾는 데에 있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염불을 열심히 한 사람 또는 목적을 향해서 주문을 열심히 외운 사람은 그 구(求)하는 그것 때문에 상당히 높은 깊은 경지에까지 들어가서 정신 착란(精神錯亂)을 가져오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나 주력이나 구(求)하는 바 있이 했다 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것입니다. 구(求)하는 바 그것 때문에 그 구(求)하는 그 생각이 자기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조(李朝) 말에 월초 스님이라고 하는 분은 대단히 큰스님이었습니다마는, 그 스님은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아 간 것이 분이 나서 '어떻게 해야 이 왜놈을 다 항복을 받고 쫓아낼까?' 오직 이 한마음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먹고 입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온몸 온 정성을 다해서 진언을 외웠습니다. 한 결과 거의 미친 사람 미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일체 외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그 하나에만 종사(從事)를 했습니다.

하루에는 하늘에서 불보살들이, 수없이 많은 불보살들이 하늘에서 허공에 나타나 가지고 설법을 하셨습니다. "허! 저 부처님 봐라. 저 부처님 보라"고 좋아서 춤을 추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결국은 그 스님은 주력(呪力)을 진언(眞言)을 해 가지고 육신통(六神通)을 얻을려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신통술로써 왜놈을 다 쫓아낼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통술 또 누구를 없애고 죽이기 위해서 그러한 주력을 한다든지 기도를 해봤자 결국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40분28초~57분4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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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허면 그러한 부작용이 없이 곱게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이 뭣고~?’

‘이 뭣고?’를 해서 자기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순화가 됐다고 하는 것은 안정이 되고 맑아진 것을 '순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꾸 심호흡 ·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1초 1초 1분 1분을 알뜰하게 정진을 다져 나가면 반드시 안정이 됩니다. 안정이 되고 동시에 또 맑아집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지면은 자기의 소원은 바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필요하다’ 하면은 그것이 묘(妙)하게 자기에게 이르러 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정진하시고 열심히 수행을 하신 분은 다 그런 것을 경험을 해 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예수교 성경에도 ‘두들겨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구하여라, 그러면 얻어질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완전히 자기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다든지 부처님께 완전히 바쳐 버리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살고, 부처님의 진리에 의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잠깐 마음에 일으켰다하면 그것이 바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하고 바래고 그것을 얻을려고 얼마를 몸부림을 쳤던 것이, 그래도 얻어지지 못했던 것이 참선을 해서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이 맑아진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그림자를 깨끗이 씻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바로 우리의 업장(業障)이 씨앗이기 때문에 업(業)의 씨앗,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원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가,
참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짐으로 해서 그러한 업(業)의 씨앗이 변해 가지고 보리(菩提)의 종자(種子)로 변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과 같은, 부처님 마음과 같이 맑아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깨끗이 닦아 놓으면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이 조금도 속임 없이 제대로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흙탕물이라도 그릇에다 떠다가 가만히 놔두면은 더러운 것은 밑으로 가라앉고 말간 물만—그 뻘건 흙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가만 놔두면 반드시 그 찌끄래기는 밑으로 가라앉고 말간 물만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참선(參禪)은 마음을 고요히 해 가지고 안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본래 맑고 더러운 것이 없다’고 믿어야 됩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못 ‘이뭣고?’를 할뿐입니다마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닦아 가노라면, 아무리 정신이 혼탁하고 성질이 괴팍하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맑아지고 안정이 되고 어질어진다고 하는 것을 저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내 마음이 깨끗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나를 따르고 나를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내 마음속에 악(惡)의 씨앗이 깃들고 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고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나를 헐뜯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요, 상식이요, 보편적인 이론입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왕왕 등한(等閒)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평범한 속에 위대한 진리는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로 넘어가고,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져서 잎이 지는 이 평범(平凡)한 사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진리보다 더 수승한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열심히 참선(參禪)함으로써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길이요,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이 인도말입니다. 인도에 ‘붓다(Buddha)’라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했습니다. 인도말 ‘붓다(Buddha)’란 말은 뜻으로 번역을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사람’ 또는 ‘깨달은 길’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배고프면 밥 먹고, 곤(困)하면 잠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러한 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깊디깊고 높디높은 어떠한 이상한 그러한 무슨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가 예사(例事)로 생각하고 노상 방치하고 있는 그러한 사실들 그 속에, 이 세상에 이 법계(法界)에 위대한 진리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日常生活),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는 홀연히 눈을 뜨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많은 천 사량(千思量), 만 사상(萬思想), 번뇌 망상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찰나 찰나가 바로 ‘참나’에 눈뜰 그 찰나입니다. 그것 내놓고 나를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났을 때 바로 그때 ‘이뭣고?’를 들을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근심 걱정이 있을때 그때를 놓치지 말고 ‘이뭣고?’를 들어 보십시오.

슬플 때, 저는 작년에 사람으로서 인생으로서 느낄 수 있는 큰 슬픔 가운데 한 슬픔을 만났습니다마는, 옆의 사람들이 모다 슬피 울었습니다. 나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눈물이 나왔을 때 나도 몰래 화두를 떠억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하염없이 속에서 우러나왔던 슬픔이 가라앉았습니다. 간장이 미어질 것 같은 슬픔이 화두를 들므로써 슬픔인지 가슴 아픈 것이 없어졌습니다. 화두를 놓치자마자 또 슬픔은 계속 우러나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자신있게 여러분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뼈아픈 그러한 상황 속에서 거기에서 휘말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살아나갈 길은 오직 ‘이뭣고?’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많은 슬픔과 많은 억울함과 많은 괴로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한 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뒤에 면할려고 해봤자 이미 늦습니다. 그때사 당황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와서 면하게 해 달라, 기도를 해 달라...
이미 딱! 다가와져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가오기 전에—이 사바세계에 산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사바(sahā)’라 하는 말은 인도말로써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인(堪忍)의 세계’, ‘인내(忍耐)의 세계’, ‘참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 많기 때문에 ‘참아야만 할 세상’이라 이런 말입니다.
억지로 참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내 마음을 닦아서 마음속에 그러한 재앙의 원인을 제거해 놓는다면 그러한 일은 미연(未然)에 막을 수가 있고, 닥쳐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꺼꾸러지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들로 해서 내가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는 좋은 밑거름으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집안에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을 놔두면 인근에 많이 파리들이 모여듭니다. 시골에서 사신 분은 그 파리 구경을 참 많이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밥상이나 어디나 할 것 없이 수없는 새카만 파리 떼가 모여듭니다.
모여든 파리를 그것을 때려서 잡는다든지 약을 쳐서 잡는다든지, 잡아서 죽여 봤자 그다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파리들이 모여듭니다. 나중에는 아주 면역이 되어서, 밥상에 새카맣게 들어 앵겨도 조금씩만 이리 내키고 밥을 떠먹고 또 와서 앉아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모이는 파리를 죽일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 집안에 더러운 것을 없애고, 변소를 깨끗이 하고 변소의 뚜껑을 잘 덮고 또는 약을 쳐서 집집마다 변소 관리를 잘하고, 집을 깨끗이 하고 더러운 것을 태우거나 묻어 없앤다고 하면은 집집마다 더러운 파리가 모여들지 아니할 것입니다. 파리는 그 발에 많은 병균을 갖다 전염병을 옮기고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재앙을 맞이할 만한 요인을 제거해야지, 그것을 둠으로 해서 재앙을 부르게 됩니다. 재앙은 하나만 오는 게 아니라 한 재앙이 일어나면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한 재앙이 일어나면 두 가지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연거푸 다가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은 몹시 고달프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는 분, 인간관계라 하면 부부 문제, 부모 자식 간의 문제, 며느리와 시부모와의 문제, 형제간의 문제, 이런 것들이 모다 인간관계입니다마는, 인간의 괴로움 속에서 가장 괴로운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 밖에 재산 문제라든지 또는 직장 문제라든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항 속에 놓여있습니다. 크게는 국가적으로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탕(火湯), 불이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은 그러한 지옥(地獄)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지옥이 바로 이 사바세계에도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몸담아 있는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도 그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그 지옥, 그놈을 극락(極樂)으로 만드는 법이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 열심히 함으로써 가슴속의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고, 그럴 때에 이 사바세계에 있는 지옥도 변해서 극락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짜 십팔(十八) 지옥이니 팔만사천(八萬四千) 지옥이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불세계(佛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단속함으로 해서 그 무서운 팔만사천의 지옥이 극락세계로 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신비스러운 것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거꾸로 서서 죽는 거, 비행기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거, 이거 별로 그렇게 신통할 것이 못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한 생각’ 단속을 해 가지고 이 법계를 극락세계를 만들며, 일체 웬수를 불보살로 변하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멀고 먼 길 같지마는 언제나 한 걸음에 있습니다. 한 생각에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닦아도 성취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이 되지만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이건 성현이 벌써 다 갈파(喝破)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해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저는—이미 기도를 하셔서 크고 작은 재앙은 다 소멸이 되셨을 것이고, 동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여러분은 기필코 성취를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서 여러분의 허물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빌려서 여러분의 허물을 볼 수 있는 거울 하나를, 어제는 부작을 선사를 해 드리고 오늘은 거울 한 개를 선사를 해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57분43초~1시간15분47초)





[법문 내용]

(게송)인생행락처~ / 인생 일생이 지내놓고 보면 따뜻한 봄날에 잠깐 낮잠 한번 자고 난 것에 지내지 못한 것 / 참선을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自由自在) / 척사현정(斥邪顯正) / 재송도인(栽松道人)과 어머니 일화 / 인정(人情)과 자비(慈悲) / 불보살의 무연자비(無緣慈悲). 주되 상(相)이 없이 주라, 베풀되 보답을 바래지 말고 베풀어라.

본참화두를 들고 행동하면, 자연히 상(相)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 ‘저 사람의 허물은 바로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큰 거울. 자기의 모습이 그 큰 허공에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 것 /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부인의 선물로 사온 거울 이야기 / 인과법(因果法). 저 사람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이요. 나의 허물이, 그림자가 거울에 비추어서, 저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 / 성현이 자기 몸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신다 / 부처님은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기도를 하셨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감응(感應)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에 있어서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한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참선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닌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콱! 맥혔던 중생이 찰나간에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이 깨달음은 차츰차츰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해서 따져 가지고 ‘오,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이 뭣고?’ / 생활 속에 참선을 잘 단속을 해 나가시도록 정성들여라. 습관화가 되면은 나중에 체질화가 되는 것.

 


참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짐으로 해서 그러한 업(業)의 씨앗이 변해 가지고 보리(菩提)의 종자(種子)로 변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과 같은, 부처님 마음과 같이 맑아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참선(參禪)은 마음을 고요히 해 가지고 안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본래 맑고 더러운 것이 없다’고 믿어야 됩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못 ‘이뭣고?’를 할뿐입니다마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닦아 가노라면, 아무리 정신이 혼탁하고 성질이 괴팍하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맑아지고 안정이 되고 어질어진다고 하는 것을 저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길이요,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이 인도말입니다. 인도에 ‘붓다(Buddha)’라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했습니다. 인도말 ‘붓다(Buddha)’란 말은 뜻으로 번역을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사람’ 또는 ‘깨달은 길’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배고프면 밥 먹고, 곤(困)하면 잠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러한 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깊디깊고 높디높은 어떠한 이상한 그러한 무슨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가 예사(例事)로 생각하고 노상 방치하고 있는 그러한 사실들 그 속에, 이 세상에 이 법계(法界)에 위대한 진리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日常生活),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는 홀연히 눈을 뜨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많은 천 사량(千思量), 만 사상(萬思想), 번뇌 망상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찰나 찰나가 바로 ‘참나’에 눈뜰 그 찰나입니다. 그것 내놓고 나를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났을 때 바로 그때 ‘이뭣고?’를 들을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근심 걱정이 있을때 그때를 놓치지 말고 ‘이뭣고?’를 들어 보십시오.

사바세계(娑婆世界), ‘사바(sahā)’라 하는 말은 인도말로써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인(堪忍)의 세계’, ‘인내(忍耐)의 세계’, ‘참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 많기 때문에 ‘참아야만 할 세상’이라 이런 말입니다.
억지로 참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내 마음을 닦아서 마음속에 그러한 재앙의 원인을 제거해 놓는다면 그러한 일은 미연(未然)에 막을 수가 있고, 닥쳐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꺼꾸러지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들로 해서 내가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는 좋은 밑거름으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화탕(火湯), 불이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은 그러한 지옥(地獄)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지옥이 바로 이 사바세계에도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몸담아 있는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도 그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그 지옥, 그놈을 극락(極樂)으로 만드는 법이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 열심히 함으로써 가슴속의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고, 그럴 때에 이 사바세계에 있는 지옥도 변해서 극락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짜 십팔(十八) 지옥이니 팔만사천(八萬四千) 지옥이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불세계(佛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단속함으로 해서 그 무서운 팔만사천의 지옥이 극락세계로 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신비스러운 것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거꾸로 서서 죽는 거, 비행기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거, 이거 별로 그렇게 신통할 것이 못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한 생각’ 단속을 해 가지고 이 법계를 극락세계를 만들며, 일체 웬수를 불보살로 변하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멀고 먼 길 같지마는 언제나 한 걸음에 있습니다. 한 생각에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닦아도 성취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이 되지만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이건 성현이 벌써 다 갈파(喝破)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1. 5. 18. 05:44

 

 

(No.055)—1977년 동안거 결제 법문(77.11.25) (56분)

 

 

(1/3) 약 20분.

 

(2/3) 약 19분.

 

(3/3) 약 16분.

 


(1/3)------------------

오늘은 정사년(丁巳年) 겨울 결제날입니다. 음력 10월 15일부터 내년 정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 겨울 안거인데 그 처음 시작하는 결제(結制)날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입재(入齋)하는 날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참선, 특별 참선수행이 시작되는 날로써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법문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 혁명(精神革命)」 사업입니다.

한 나라가 부정과 부패로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서 정부나 국민이나 온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나라를 자기네들이 지켜나갈 수 없게끔 혼란하게 되면은 반드시 외부로부터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할 때에 그 나라에 정신을 바로 가진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분연히 일어서서 썩은 나무둥치를 베어 내고 새순을 가꾸어 가지고 다시 그 나무에서 뿌리에서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거와 같이, 그 나라 그 백성을 다 없애버리고 새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 국토 그 국민으로 하여금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썩은 마음가짐을 버리고, 새로운 정신으로 내 나라 내 민족을 우리 모두가 마음을 합해 가지고 다시 일으키자고 하는 그러한 혁명과 같이,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낱낱이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 가지고, 내가 무량겁, 구원겁 이전부터서 낱낱이 가지고 있는 자성(自性)의, 자기의 청정한 부처를 개발을 하지 못한 채 죄업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썩어 문드러져 가지고 하는 일마다 앞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셔 가지고 일대 혁명(一大革命)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을 한 다음 그 혁명하는 방법을 우리 모든 중생에게 가르켜 주셨습니다.
그 방법을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불보살이 화현(化現)을 해 가지고 삽삼조사(卅三祖師) 이래 많은 도인들이 계속해서 출현하셔 가지고 그 방법을 한 등(燈)에서 또 다른 등으로 불을 옮기듯이 등등상속(燈燈相續) 해 가지고, 오늘날에 이르도록 부처님의 그 정법(正法)의 등불이—바꾸어 말하면 자기의 정신혁명을 완수하는 가장 바르고, 빠르고 훌륭한 방법을 오늘에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은 어떠한 특수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썩어 문드러진 국가일수록 혁명이 요구되듯이, 번뇌와 망상과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걷잡지 못한 죄 많은 중생일수록에 정신혁명은 더욱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낱낱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나의 부처, 자기의 부처는 조금도 때묻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한 채 고대로 다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 나라가 아무리 어지럽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해서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온 국민이 어떠한 영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단합을 한다고 하면은 삽시간에 그 나라는 새 나라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조국에 있어서 근래에 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눈을 부릅뜨고 눈여겨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나라들은 부러워하고 어떠한 나라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두려워하고 우리나라를 배울려고 하고 그러한 나라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이 어디서 새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 삼천 오백만 국민이 옛날에 있던 그 국민이 아니고 없어지고 새로 어디서 생겨난 국민이 아니라, 내나 본래부터 단군 이전에부터서 있었던 그 나라고, 해방 전부터서 있었던 그 국민들입니다.
그 국민들이 정신을 바로 차리지 못할 때에는 자기를 멸망하고 국가를 멸망하고 그러한 보잘것없는 그러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서 새마을사업, 새마음사업으로 해서 모두가 나와 가정과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단합을 함으로 해서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을 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 것입니다.


참선은 내가 이 몸 이대로 가지고 정신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 해서 영원히 생사(生死)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성현(聖賢)이 되는 그러한 길인 것입니다.
나 한 사람부터 먼저 이 사업에 착수를 하고 열심히 함으로 해서 이웃 · 가족 · 이웃친지들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사업에 나서도록 손을 이끌어주면서 자기가 앞장서서 나갈 때에 우리 모두는 다함께 불도(佛道)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하신 법문은 이 자기 정신혁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느냐? 그 실지적인 실천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 나가야 한 것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선을 하려고 앉았으면은 누구를 막론하고 온갖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마련인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이 한바탕 일어났다가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그런 것이 계속하다가 조금 조용해질만하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참 졸다가 눈을 뚝 뜨고 좌우를 둘러본 다음에 스스로 챙피해서 정신을 차려 가지고 허리를 쭉 펴고 화두를 한번 들어봅니다. 들기가 무섭게 또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혼침(昏沈), 졸음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것을 단속을 해 나가며,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어떻게 그것을 단속해 나가야 하느냐?’ 한 문제에 관해서 조실 스님께서 30분여에 걸쳐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졸음이 일어날 때에는 허리를 쭈욱 펴고, 언제든지 졸음이 일어날 때는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허리가 쭉 폈던 허리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허리가 꾸부러지면서 앞으로 몸이 수그러지는 것입니다. 설사 윗몸은 수그러지지 아니하고 쭉 폈다 하더라도 허리가 딱 꼬부라지자마자 그때부터서 잠이 오는 것입니다. 잠이 올 때에는 언제든지 허리가 꼬부라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리를 쭉 펴고 참선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쭉 폄으로 해서 정신이 단정해지고, 정신이 깨어나면서 혼침이 침노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침이 올 때는 먼저 허리부터 쭉 펴야 하는 것입니다.

펴고서 자기 혼자 할 때에는 자기가 들고 있는 화두를 소리를 내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두 번을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는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한 두어 번 화두를 소리를 내 가지고 들어라. 그러면은 졸음이 확 달아날 것이다. 이러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모여서 입선(入禪)을 하고 있는 데에서 졸음이 온다고 해서 (소리를 내서) 「이뭣고?」「이뭣고?」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혹 이 말씀을 듣고서 죽비를 치고 여러분이 입선 중에 그렇게 하신다고 하면은 그것이 잘못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혼자 댁에서 할 때나 또는 산이나 숲 밑에서 혼자 하실 때에 그렇게 졸음이 오면 소리를 내서 한 두어번 그렇게 화두를 들면은 (졸음이) 달아난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도 졸음이 달아나지 아니할 때에는 가만히 조용히 일어나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일직선으로 왔다갔다하는 길을 정해 놓고서 한 30미터나 40미터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그 직선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자연히 졸음은 도망가고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 동안 왔다갔다하게 되면은 졸음이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자기 자리에 돌아와서 허리를 쭈욱 펴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졸음이 깨고 난 뒤에 화두를 떠억 들면은 온갖 생각이 또 일어나죠. 집안 생각, 남편 생각, 아들 생각, 아들 학교 문제, 학교 입학 문제, 딸 시집가는 문제, 외손자 생각, 온갖 생각이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데, ‘그러한 생각 때문에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호소해 온 분이 가끔 계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 생각 때문에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그 생각 때문에 참선이 안 됩니다’ 하고 생각한 분은 생각을 고쳐 잡숴야 합니다. ‘그 생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할 자격이 있다. 그 생각, 그러한 번뇌와 망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통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왜 그러냐?
‘그 번뇌와 망상 때문에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해 가지고 생사고(生死苦)를 받는데, 왜 그 번뇌 망상 때문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시겠지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고 번뇌와 망상 때문에, 그놈 때문에 우리는 견성성불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번뇌도 일어나지 아니하고, 망상도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혼침도 일어나지도 아니한다면은 그런 사람이 어디가 있다면 그것은 나무나 돌로 깎아서 만들어 논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나 돌로 깎아서 만들어 논 사람은 정말 석달 열흘을 잠을 안 자도 잠이 오지 아니할 것이며, 석달 열흘을 앉혀놔도 번뇌 망상 한번도 일어날 리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고단하면 잠이 오기 마련이고, 며칠을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기 마련이고, 때리면 아프기 마련이고, 앉았다 보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혼침(昏沈) 산란(散亂)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이고, 살아 있는 사람이면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도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시거나 짜증을 내시지 말고, '이놈 때문에 내가 참선을 못한다'고 미워하시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 방법만을 잘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일어나는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옮아가기 이전에 퍼뜩 「이뭣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기 시작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호흡과 화두를 함께 합쳐서 들어나간다고 하면은 백만 번 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백만 번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그렇게 들어나가면, 일어났던 망상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게 하는 그러한 고약한 원인이 아니라, 그 망상은 바로 나로 하여금 견성성불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좋은 발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이 뛴다든지 멀리 뛸려면은 좋은 발판이 있어야 합니다. 발판이 짱짱해야 그 발판을 의지해서 높이 뛸 수가 있고 멀리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뛰는 그 순간에 마지막 그 발 디딘 곳이 미끄러지거나 또는 질펑거리거나 그래서는 높이 그리고 멀리 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발판이 좋아야 멀리 뛸 수도 있고 높이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발판이 없으면 우리는 화두를 들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발판이냐?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느끼던지 간에 그것들이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좋은 발판이 지옥으로 가는 육도윤회하는 발판으로 사용이 되는 것이고,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 발판이 바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발판으로 잘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1분15초)


 

 


(2/3)------------------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정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생사고(生死苦)의 원인이 되는 그러한 악세지만, 악하고 고약한 오탁악세(五濁惡世)가 되지마는, 정법을 믿는 우리 부처님 제자들에게는 이 시방세계의 어떤 나라보다도 제일 훌륭한 좋은 수도장(修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도인들은 천상(天上)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안했습니다. 천상에 태어나면 아무 괴로움은 없다고 하지마는 너무 편안하고 즐겁기만 하기 때문에 그러한 즐거움과 편안함 속에 빠져서 도를 닦을 수가 없습니다. 혹 그 천상의 즐거움이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괜찮지만, 자기가 복을 지은 만큼 다 받고 난 다음에는 다시 인간 세상이나 축생이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에 태어나면 그만큼 도 닦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기보다는 인간으로 태어나서—인간 세계에는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어져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운 것을 만나고 시련을 받음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에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우리는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많은 과거의 도인(道人)들이 사바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정법을 만나 가지고,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성현(聖賢)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좋은 인연으로 해서, 훌륭한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사람으로 태어났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또 불법을 만났고, 불법을 만난 후에도 이 정법을 만나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매일 무엇인가 보고, 무엇인가 듣고,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으면서 성도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당하고 있는 그러한 외부로부터 충격,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어떠한 느낌, 그 한 가지 한 가지를 결단코 소홀히 지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그러한 것들이 한 생각 우리가 돌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수도 도장이요, 깨달을 수 있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발판이기 때문에, ‘참선을 잘한다, 잘 못한다’ 또는 ‘그분은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한다, 못한다’고 하는 판가름 길이 바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빨리 돌려서 단속(團束)하느냐, 오직 거기에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일들은 나로 하여금 자칫 게으름 속에 무단(無斷)히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렇게 나를 몰아넣기가 쉬웁고, 나의 육체와 정신을 괴롭게 할 수 있는 그러한 역경계(逆境界)는 나로 하여금 신심을 돈독히 하고 분심을 일으켜서 맹렬히 화두를 단속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좋은 그러한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경계(順境界)를 많은 사람들은 좋아하고 역경계(逆境界)를 멀리하고 싫어하지마는 정법을 만난 정법학자들은 순경계에 빠져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견뎌내기 어려운 역경계라 할지라도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돌이켜 단속하기만 한다면, 그 역경계가 우리에게는 순경계 몇십 배, 몇백 배 좋은 밑거름이요, 발판이요, 불보살의 설법이 되어 주는 것이며, 불보살을 모시고 수행해 나가는 좋은 선방이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결제에 들어갑니다마는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여서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이나 또는 어떠한 형편에 의해서 또는 후배들을 위해서 자진해서 댁에서 공부를 하시는 그러한 노보살님이나 누구를 막론하시고, 오늘 아까 조실 스님께 들은 말씀 또 제가 부연해서 해 드리는 말씀을 명심을 하시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입으로 무엇을 말하시거나,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간에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알뜰히 단속을 해 나가심으로 해서 1초 1초가 합해서 1분, 1분이 합해서 한 시간, 한 시간 한 시간이 합해서 하루, 하루 하루가 모여서 석 달이 되는 것입니다.

석 달을 훌륭하게 공부를 하실 분은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고, ‘이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금생에 결정코 도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요긴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뒤로 미룬다” 고인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나는 아직 할 일이 많고, 나이가 젊기 때문에 아들딸들을 키워서 가리켜서 다 결혼을 시켜야 나는 그때사 비로소 참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신 분들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한 분들은 그래서 ‘나중에 좀 더 일 다하고 늙은 다음에 참선하리라' 이렇게 뒤로 참선하는 기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어리석냐?
그러한 일들을 다 마쳐 놓고 늙은 다음에 할려고 하는 생각은 결정코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편 · 아내 · 아들딸 · 부모 · 일가친척 · 사회 · 국가, 이러한 상황 속에 나도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특수한 사람, 그런 것을 다 청산해 버리고 출가하는 스님네 그런 특수한 스님네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없는 그러한 인연 속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갚지 않고서는 아니 될 그러한 빚을 지어 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어 논 빚은 갚아야 합니다. 갚지 않고 아무리 피할려고 해도 자기가 지어 놓은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일단 자기가 지어 놓은 빚은 어떠한 노력, 어떠한 괴로움을 무릅쓰고라도 기어코 갚아야만 됩니다.

그러면 일생 동안 그것만 갚다가 말면 언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
빚만 갚고 말면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 빚 갚으면서 계속해서 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무량겁을 두고 빚만 갚다가 맙니다.

거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빚 갚으면서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법인 것입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열심히 완수해 나가는 그 가운데에 「이뭣고?」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면서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성이 날 때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할 수 없을 만큼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럴 때에도 그 찰나를 놓쳐선 안 됩니다.
심호흡을 ‘후~’ 심호흡을 터억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갈 때에 먼저 자기의 그 거센 파도가 일어나는 자기의 마음을 안정을 하면서 며느리 노릇, 아내 노릇, 엄마 노릇을 충실히 해 나가야 됩니다.만약에 잠깐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할 때에 사태는 더욱 고약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점점 자기만 자기의 디딜 땅이 좁아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발 디딜 땅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호흡을 하므로 해서 혈액순환을 촉진을 시키고, 나아가서 피를 맑게 하므로 해서 정신이 맑아지고 안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 또는 주위 환경에 견디기 어려운 그러한 역경계를 만났다 하더라도, 잘 지혜스럽게 그러한 고비 고비를 잘 요리하고 극복해 나가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러면서 나의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업장소멸한다’고 하는 것은 ‘빚을 갚는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갚으면서 앞으로 새롭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저축을 해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천하 간단한 한마디요, 한 말씀에 지내지 못하지만, 이 말씀을 깊이 믿고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한 달, 두 달, 석 달 가지 못해서 과연 이 법이야말로 내가 무량겁을 두고 만나야 했었던 가장 훌륭한 위대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철 한철을 착실히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선방에서 제가 오늘 말씀해 드린 이 말씀을 잘 명심해서 들으신다면 비단 이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시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시는 그 곳이 고대로 훌륭한 선방이 되어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사람에 따라서는 선방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시는 가운데에 참선하신 분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실적을 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나라에 부설거사(浮雪居士)라고 하는 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 분의 스님 가운데에 한 사람입니다. 세 참선하는 스님이 태백산으로 참선을 하러 가시는 도중 김제 만경뜰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지나다가 어느 집에 들어가서 탁발(托鉢)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탁발하러 들어갔는데 어떤 예쁜 처녀가 탁발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처녀가 그 한 스님을 보자마자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말문이 툭 터졌습니다. 본래 그 처녀는 나면서부터서 말을 할 줄 모르는 벙어리였습니다.

그 벙어리 처녀가 그 탁발하러 온 스님 얼굴을 보고서 어떻게 큰 충격을 받아 가지고 말문이 툭 터져 가지고는, ‘이 스님하고 기어코 결혼을 시켜달라’고 그 스님을 붙잡고 사정을 하고, 부모가 나와서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열여덟이 되도록 말도 못한 벙어리가 말문이 터지면서 스님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기가 맥힌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설거사는 그 두 도반(道伴)이 극구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 처녀하고 결혼할 것을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두 도반은 참 한 도반을 속가에다가 빼앗기고 둘이만 아픈 가슴을 안고서 태백산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떠날 때 부설거사가 그 도반에게 하는 말이 "나는 부득이한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이 처녀가 내가 결혼을 안 해 주면 혀를 깨물고 자살을 하겠다고 하니, 내가 부득불 이 처녀 한 사람을 살릴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자네들과 같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속가에서나마 열심히 정진할 테니 부디 둘이만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해 가지고 10년 뒤에 다시 만나서 내가 더 공부를 많이 했으면 그대들이 나한테 배우고, 그대들이 더 공부가 나으면 내가 배우기로 하세" 그렇게 언약을 하고서 이별을 했던 것입니다.

그 처녀와 결혼한 분이 바로 오늘날 전해지는 부설거사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처녀의 이름은 묘화(妙花) 부인이고, 묘화라고 하는 처녀가 부설이라고 하는 분과 결혼을 해서 사는 가운데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 묘화라고 하는 부인도 스님을 갖다가 자기로 인해서 퇴속(退俗)을 시켰으니 만큼 그 부설거사를 정말 마음으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받들면서 그 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열심히 참선을 했던 것입니다.

참선을 하면서 10년 세월을 지내는 동안, 등운(登雲)이라고 하는 아들 하나와 월명(月明)이라고 하는 예쁜 딸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부설거사와 묘화 부인과 등운—등운조사는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고 또 월명이라고 하는 분도 참선을 해 가지고 네 가족이 전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도를 닦아서 다 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도를 닦던 장소가 어디냐 하면은 변산(邊山)에 가면은 변산에 월명암이라고 하는 절이 있고, 그 근처에 모다 등운암이라든지 모다 같이 (공부)하던 절터가 지금도 남아 있고, 월명암은 현재에 사찰로서 남아 있습니다.
대둔산 태고사, 장성 백양사의 운문암 또 변산의 월명암, 이 남한의 세 절이 수행하기 가장 좋은 옛날부터 이름나 있는 암자인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월명암인데, 그 월명암이 부설거사의 딸이 수행을 해서 도업을 성취한 그 도량인 것입니다.(21분16초~40분11초)





(3/3)----------------

세속(世俗)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못 닦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속이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 있고, 더욱 분심(憤心)을 낼 수 있고,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행도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십 년 후에 그 부설거사와 태백산에 들어갔던 두 도반, 세 분이 모여서 법담(法談)을 했고, 오늘날까지 법담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마는 전설로써 전해 내려오는 법의 도력의 시합이 있습니다.
병에다가 물을 담아 가지고 저 서까래 끄터리에다 매달아 놓고, 병 3개를 떠억 매달아 놓고서 태백산에 들어갔던 두 도반이 차례차례로 몽둥이로 그 물병을 뚜드려 부쉈습니다. 뚜드려 부수니까 그 물병이 깨져 가지고 물이 땅에 쏟아졌습니다.

그런데 부설거사가 몽둥이로 병을 깨니까, 병만 깨지고 물은 병 모양 고대로 뭉쳐 가지고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고 하는 그러한 도력 시합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선을 해서 견성(見性)했다고 해서 물병만 깨지고 물은 허공에 매달려 있다고 하는 그렇게 되야 도인(道人)이다. 이렇게 생각하셔서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똥을 누면은 그 똥에서 구린내가 나지 아니하고 향내가 나고, 두 눈에서는 캄캄한 밤에도 자동차 불처럼 훤하게 불을 내뿜고,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이 육신으로 서울로 날아갔다 부산으로 날아갔다 미국으로 날아갔다 이러한 신통(神通)을 부려야만 그것이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은 정법을 잘못 인식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신통술이라 하는 것은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견성을 해 가지고 오래오래 보림(保任)을 하면은 구하지 아니해도 자연히 그러한 신통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마는, 견성했다고 해서 조만(早晩) 그러한 능력이 누구라도 다 얻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견성을 전혀 하지 아니한 사람도 어떠한 그 신통술 얻는 그러한 비법을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면은 그러한 신통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사람이 그러한 신통술 갖춘 사람은 외도(外道)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그러한 신통 부리는 것을 보면 혹(惑)하고 반해 가지고 그 사람이 큰 도인인줄 알고 미쳐서 무엇이라도 재산이고, 명예고, 권리고, 이 몸과 목숨 모든 것을 그 사람한테 다 바치려고 그럽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사람이 견성을 한 진짜 도인으로서 그러한 신통술을 갖춘 분이라면 절대로 중생을 해롭게 할 리가 없고, 중생을 그릇 인도할 리가 없겠지마는, 견성을 못한 사람이 어떠한 특수한 비방을 알아 가지고 용케 그러한 신통술만을 얻은 사람이라 하면 반드시 중생을 그릇 인도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정법을 믿는 신도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이고, 어떠한 것이 삿된 법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정법은 깨달은 진짜 도인은 설사 그러한 신통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가지고 있다 해도 중생 앞에 그러한 것을 함부로 남용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함으로 해서 석 달 동안 안거가 정말 알찬 안거 기간이 되도록 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결제인 동시에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입재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참선을 해서 나를 깨달라야 하는 동시에 내가 몸담아 있는 나의 가정, 나의 남편, 나의 부모, 나의 아들딸, 사회 국가, 인류가 괴로움 속에서 괴로움을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의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으로는 언제나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기도하고 축원하는 마음을 동시에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뜻에서 우리 용화선원에는 삼동결제(三冬結制)와 아울러서 언제나 백일기도를 또 봉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이 한 분도 빠짐없이 성의껏 기도에 동참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여기에 참여하신 신도 분 가운데 한 분이 우리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로 지정된 박초선 여사께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이 보살님은 예술에 있어서 참 뛰어난 분이심과 동시에 이렇게 불법에 참 철저한 돈독한 신심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기념으로—이 '판소리'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우리 대한민국만이 가지고 있는 희유한 불가사의한 음악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동안 우리나라에 이러한 훌륭한 음악이 있다고 하는 것을 40, 50세 이상 된 분들은 인식한 분들이 많았었지마는 40 미만의 젊은 분들은 그것을 깊이 인식한 분들이 대단히 적었었습니다.

그러자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그 판소리 국악을 듣고서, '세상에 이러한 훌륭한 음악이 대한민국에 있었단 말이냐?' 이래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보다도 훨씬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찬양을 하고 그러므로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녹음 끊김) ...하고 잘하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악은 그 음악을 들음으로 해서 들뜬 마음이 순화가 되고, 나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게끔 하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음악은 산 사람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영혼들에게는 직접적으로 감동을 주고 정신을 순화시키는 그러한 불가사의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재(齋)를 지낼 때에는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고 하는 그러한 음악을 다 연주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박초선 여사께서 올리시는 이 음악은 우리 부처님께 올리는 음성 공양(音聲供養)이 되고, 우리 스님네와 우리 법보 신도 여러분들에게도 공양이 되고, 또 돌아가신 영가를 위해서도 훌륭한 공양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부탁을 합니다.

 


< 박초선 명창 음성공양 >

좋은 인연으로 좋은 법문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찬불송(讚佛頌)으로 부처님께 올리겠습니다.

찬불송으로,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야, 온 우주세계에 모든 마음을 다 알고,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가, 큰 바닷물을 한입으로 다 마시고,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허공을 헤아려서 바람을 잡아매더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 부처님의 공덕은 다 말하지 못한다. 다하지 못한다.

이 찬불송입니다.(‘찬불송’을 노래함)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허고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허면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

'조금 더 할까요, 그만 할까요?' 네, 이 찬불송입니다.

다음은 제가 말만 우리의 전통 음악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제부터는 용기를 내서 다행한 줄로 압니다. 우리나라 말, 우리나라 글, 우리나라 노래하는 박초선으로서 앞으로 부처님 심부름을 제가 성의껏 힘자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협조해서 좋은 음악을 많이 해서 여러 보살님들에게 참 많은 노래를 전하도록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박수)

 


말만 길게 하면 노래가 됩니다. 판소리 5바탕을 제가 독창회를 여러 번 가졌습니다마는 몇 시간을 제 시간을 다 해도 저는 얼마나 좋은지 기쁜지요.
이 기회를 제 노래로 다 메꿀 수 없고, 그저 말만 길게 하면 노래가 됩니다마는 간단한 노래로, 평생의 교육자로서 저에게 가사를 주시고 가시는 선생님이 계십니다.

제목은 「그것도 멍텅구리」입니다. 이 4절만 먼저,
‘온 곳도 모르는 이 인간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가, 갈 곳도 모르고 사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올 적에 빈 손에 온 인간이 갈 적에 무엇을 갖고 갈까, 공연한 욕심만 부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백 년도 다 못 산 이 인간이 영원히 죽지를 않을 처럼, 천만 년 준비를 허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세계적 학자라 하는 이들 무어나 모두 다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네, 진리에서 하는 말입니다.
아뭏튼 제가 전공이 판소리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전통 음악의 얼과 모든 우리 민족의 혼과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5바탕 중의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하는 것보다, 이 진리에서 나오는 이 가사를 보살님께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요. 간단히 마치겠습니다.

하기도 쉽습니다. 곡도 아주 쉽게 붙였습니다. 그러니 자꾸 알고,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알고 자꾸 행하시고 그러면 좋습니다.


(‘멍텅구리’ 노래)
온 곳도 모르는 이 인간이 갈 곳을 어떻게 안단 말가, 갈 곳도 모르고 사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올 적에 빈 손에 온 인간이 갈 적에 무엇을 갖고 갈까, 공연한 욕심만 부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백 년도 다 못 산 이 인간이 영원히 죽지를 않을 처럼, 천만 년 준비를 허누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세계적 학자라 하는 이들 무어나 모두 다 안다 해도, 자기가 자기를 모르노나. 그것도 멍텅구리.

감사합니다.(끝)(40분13초~55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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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입재(入齋) ; 재(齋)를 시작하는 일. 또는 그 의식.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태의연(舊態依然)하다 ; (생각이나 태도, 방법 따위가)발전하거나 진보되지 않고 예전의 묵은 모습 그대로이다.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 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6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하열(下劣 아래 하/못할·낮을 렬) ; (행동이나 생각이) 남보다 뒤떨어짐. 수준이 낮음.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15권 '大智度論釋初品中毘梨耶波羅蜜義第二十六(초품 중 비리야[精進]바라밀을 풀이함)' (용수 지음 | 구마라집 한역 |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 동국역경원)
欲成佛道凡有二門 一者福德 二者智慧 行施戒忍是爲福德門 知一切諸法實相摩訶般若波羅蜜 是爲智慧門 菩薩入福德門 除一切罪所願皆得 若不得願者 以罪垢遮故 入智慧門則不厭生死 不樂涅槃 二事一故

불도(佛道)를 이루고자 하는 데 무릇 두 문이 있으니, 하나는 복덕(福德)이요 둘은 지혜(智慧)의 문이다. 보시(施)와 지계(戒)와 인욕(忍)을 행하는 것은 복덕의 문이요, 모든 법의 실상인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을 아는 것은 지혜의 문이다.
보살은 복덕문에 들어가서 일체의 죄업을 제거하고 원하는 바를 모두 얻는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죄업의 때[罪垢]에 차단 당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문에 들어가더라도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열반도 즐기지 않게 된다. 두 일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今欲出生摩訶般若波羅蜜 般若波羅蜜 要因禪定門 禪定門必須大精進力 何以故散亂心 不能得見諸法實相 譬如風中然燈不能照物 燈在密屋明必能照

이제 마하반야바라밀을 출생시키고자 하는데, 반야바라밀은 반드시 선정문(禪定門)을 인하며, 선정문은 반드시 대정진(大精進)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산란한 마음[散亂心]으로는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바람 속에서 등불을 켜면 물건을 비출 수 없지만 밀실(密室)에다 등을 켜면 밝게 타올라 반드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2/3)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성현(聖賢) ;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무단(無斷)히 ; 사전에 허락이 없이. 또는 아무 사유가 없이.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 ; ①‘들(평평하고 넓게 트인 땅, 논이나 밭으로 되어 있는 넓은 땅)’의 사투리. ②전북 김제 지역에서 하천이 실어온 토사가 쌓인 충적평야를 일컫는 말.
*탁발(托鉢 맡길 탁/바리때 발) ; 도를 닦는 스님이 경문(經文)을 외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보시를 받음. 수행자의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없애고, 동시에 보시하는 이의 복덕을 길러 주는 공덕이 있다고 하여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행하였다.

 

 

 



----------------(3/3)

*세속(世俗) ; 속세(俗世).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법담(法談) ; 선사(禪師)들이 서로 법문을 묻고 대답하는 것.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신/통할 통)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①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②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③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④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⑤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⑥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여기서는 누진통을 제외한 오통을 가리킨다.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 ; 신통(神通, 누진통을 제외한 5신통)은 ‘성인(聖人)의 분상에는 보잘것없는[末] 가장자리[邊]의 일이다.’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조만(早晩) ; 조만간(早晩間).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혹(惑)하다 ; (사람이 어떤 대상에)홀딱 반하거나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다.
*재(齋 재계할 재) ; ‘재(齋)’란 본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 악업(惡業)을 짓지 않아 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방식을 의미하였다가, 점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며 그 공덕을 함께하기를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또한 법회 때 스님이나 속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근래에는 특히 돌아가신 영가를 위한 천도재(薦度齋)가 널리 행해짐에 따라 보통 ‘재=천도재’로 여긴다.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영산회상(靈山會相) ;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는 속악(俗樂)의 하나로서,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의 불보살(佛菩薩)을 노래한 악곡.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
*박초선(朴招宣) ; (1931~2014) 전남 화순군 향천리 출생. 공대일 · 박록주 · 김소희 · 김여란 등을 사사했다.
1963년부터 12년간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깔끔하고 정교한 소리로 한때 소리판을 주름잡았다. 70년 여성 최초로 박록주제 〈흥보가〉를, 75년 정정열제 〈춘향가〉 완창을 발표했다.
1975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한 박초선 명창은 1993년 미국 스토니부룩 대학교 한국학과 판소리 강의 및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시식(施食) ; ①죽은 이의 명복을 빌거나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음식을 베풀고 기원이나 독경 등을 하는의식. ②불사(佛事)나 법회 때 음식을 공양함.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문 내용]

참선(參禪)은 일종의 「정신 혁명(精神革命)」 사업 / 등등상속(燈燈相續) 한 참선법(參禪法) / 참선은 내가 이 몸 이대로 정신혁명을 성공해서 영원히 생사(生死)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서 성현(聖賢)이 되는 길 / 혼침(昏沈), 졸음이 일어날 때 단속하는 방법 / 번뇌와 망상 때문에 나는 참선을 통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라 /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

사바세계는 제일 좋은 수도장(修道場) /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 /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내가 금생에 결정코 도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요긴한 문제가 되는 것 /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뒤로 미룬다 /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열심히 완수해 나가는 그 가운데에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기의 한 생각을 단속하면서 화두를 들어라 / 부설거사(浮雪居士) 일화. 묘화(妙花) 부인.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신통술은 성말변지사(聖末邊之事) /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 박초선 명창의 음성공양. 찬불송과 「그것도 멍텅구리」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부처님과 똑같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낱낱이 우리 모두가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오욕락(五欲樂)에 빠져 가지고, 내가 무량겁, 구원겁 이전부터서 낱낱이 가지고 있는 자성(自性)의, 자기의 청정한 부처를 개발을 하지 못한 채 죄업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썩어 문드러져 가지고 하는 일마다 앞으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면서 갖은 괴로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일만을 되풀이하고 있을 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셔 가지고 일대 혁명(一大革命)을 일으켰습니다.
먼저 자신의 마음에 혁명을 일으켜서 성공을 한 다음 그 혁명하는 방법을 우리 모든 중생에게 가르켜 주셨습니다.

조금도 번뇌와 망상 일어나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시거나 짜증을 내시지 말고, '이놈 때문에 내가 참선을 못한다'고 미워하시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 방법만을 잘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없애거나 누를려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바로 발판으로 해서 그 생각하던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지, 그 일어나는 생각이 다음 생각으로 옮아가기 이전에 퍼뜩 「이뭣고?」 심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기 시작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호흡과 화두를 함께 합쳐서 들어나간다고 하면은 백만 번 망상이 일어난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백만 번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그렇게 들어나가면, 일어났던 망상이 나로 하여금 육도윤회를 하게 하는 그러한 고약한 원인이 아니라, 그 망상은 바로 나로 하여금 견성성불할 수 있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좋은 발판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부설거사(浮雪居士) 일화. 묘화(妙花) 부인.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세속(世俗)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못 닦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마음가짐 하나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속이 더욱 발심(發心)을 할 수 있고, 더욱 분심(憤心)을 낼 수 있고, 더욱 용맹정진(勇猛精進)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행도량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 5호 박초선 명창의 음성공양. 찬불송과 「그것도 멍텅구리」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21. 1. 23. 12:13

((No.084))—1978(무오)년 칠석 법회(78.08.10) (44분)

 

 

 

 

 

(1/3) 약 15분. (2/3) 약 18분. (3/3) 약 11분.

(1/3)----------------

 

오늘은 무오년(戊午年) 7월 7일, 칠석(七夕)날입니다. 고래(古來)로 칠석날에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서로 만나는 날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묻기를, "칠석 행사는 불교와 관계가 없는 날이 아닙니까?" 그렇게 묻는 분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서 절에서 칠석(七夕)날에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칠석에 모다 불공(佛供)을 드리고 그래 왔는가? 그것은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마는, 오래전부터서 우리 불교(佛敎)에서 절에다가 칠성(七星)님,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칠성님 모시고, 특히 일반 그 신앙이 칠성님께 공(功)을 들이면은 수명장수(壽命長壽)하고 모다 그렇다고 해서 참 칠성(七星)에 대한 신앙이 돈독(敦篤)했습니다.

 

그 칠성에 대한 신심(信心)이 바로 이 칠월 칠석날, 유독 칠성불공(七星佛供)을 많이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서 그 살아 있는 사람의 수명장수를 위해서 지금 칠성법회(七星法會)를 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칠석(七夕)날은 어떠한 의의(意義)가 있느냐?

정월(正月)에 그 한 해 동안 무장무애(無障無礙)해서 모든 소원을 성취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정월에 신수기도를 열고, 그리고 난 다음에 2월 3월 4월 5월 6월까지 6개월이 지나고, 그리고서 7월부터서 섣달까지 앞으로 또 6개월이 남았습니다.

반년(半年)이 지내갔으니까 다시 남은 반년을 무장무애(無障無礙)하게 우리가 마음먹은 멀고 가까운 모든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칠석날 각 사원(寺院)에서 모여서 법회(法會)를 열고 동참공양(同參供養)을 올리고 돌아가신 선망부모(先亡父母)에 천도(薦度)를 올리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이 깊은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절에서는 어떠한 의미에서 했건 간에, 우리 법보선원에서는 그러한 옛날부터서 내려오는 전통적인 의미를 부정하지 아니하면서 우리 법보선원 나름대로 깊은 의의(意義)를 거기에다 부여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지나간 모든 우리의 업장(業障)을 참회(懺悔)하고 앞으로 새로 악업(惡業)을 짓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정월(正月)이나 또는 초파일(初八日)이나 칠석(七夕)이나 백중이나 어떠한 날짜에 열리는 행사건 간에 그 날짜의 명목은 다를망정 그 법회(法會)의 목적은 언제나 한 가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내간 그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우리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나아가서 앞날에 있어서 새로 업을 짓지 아니한 가운데 나 자성(自性), 참나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달라서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가. 오직 그 목적 하나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앞으로도 몇억만 겁을 육도(六道)를 윤회하면서 생사고통(生死苦痛) 속에서 흘러갈 것인가.

그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참선을 하기 위해서는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조사선(祖師禪)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자주자주 들어야 하고, 그런 법회를 열기 위해서는 법당(法堂)을 넓혀야겠고, 법당을 넓히는 말씀을 하시는 가운데에 전라북도 남원 대복사(大福寺) 중창(重創)에 대한 유래(由來)에 설화를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정말 우리는 과거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우리가 지은 그 업(業)의 원인으로 인해서 이렇게 여기서 죽어서 저가 태어나고, 저기서 죽어서 여기 태어나기를 몇천만 번을 거듭하면서 천당(天堂)에 올라갔다, 사람이 되었다, 지옥(地獄)으로 떨어졌다, 축생(畜生)이 되었다, 귀신(鬼神)이 되었다, 수라(修羅)가 되었다, 이렇게 육도(六道)를 돌고 돌면서 금생(今生)에 다행히 인도(人道)에 태어나 가지고 법보선원 이 법당(法堂)에 모여서 오늘 이 같은 자리에, 같은 시간에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인 그 원인이 아무 까닭 없이 우연히 이렇게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 꼭 이 자리에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원인을 우리 스스로가 심어 놓아 가지고 그 종자(種子)로부터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결과를 우리는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단 일분일초 동안도 아무 생각 없이 고냥 고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생각이던지 일어나면 그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또 그 생각이 꺼지면 꺼지자마자 또 딴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일어났다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없어지면 또 생겨나고, 이래서 생각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생각이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 행동으로 인해서 업(業)을 짓고, 업을 지음으로 해서 또 다음 업을 또 맞이하게 되게,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참선법(參禪法)을 통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 해서 그 생사심(生死心),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지 아니한 이상은 우리는 그러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앞으로 한량없는 세월 동안 또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남원 읍내 대복이와 같이, 관리(官吏)로서 그러한 착취(搾取)를 하고, 대복이의 증조, 대복이의 부친, 대대(代代)로 내려가면서 못된 짓을 하게 되면 구렁이 되기 십상팔구(十常八九)입니다. 구랭이가 안 되면은 지옥(地獄)에 갈 것이고, 지옥에 안 가면은 소나 말이 되어 가지고 그 빚을 갚아야 되는 것이여.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罪)를 갚으려고 든다면 과거로부터 금생에까지 온 세월, 몇백만 배의 세월을 거쳐도 갚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아무리 갚는다 해도 갚으면서 또 업을 짓게 되기 때문에 생사윤회는 끊일 날이 없는 것이여.

 

다행히 우리는 삼천년 전에 왕궁의 부귀를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12년간의 고행(苦行) 끝에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부처님의 은혜로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 생사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할 수 있는 위없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활구참선법에 의해서만이 그 무량겁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아니하면서 참나를 깨달라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그러한 법(法)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도량(道場)에 발을 들여놨습니다.

 

그러한 도량에 발을 들여놓았건만, 바른 법에 의지해서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용화선원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아니하고 여기서 먹고 자고 똥을 싸면서 죽을 때까지 있어 봤자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른 약(藥)을 알고, 바른 약을 얻었으면 그 약을 여법(如法)히 잘 복용(服用)을 함으로써 병(病)을 낫을 수가 있는 것이지, 약을 알았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도 아니고 그 약을 구해서 호주머니에 넣어 놓고 있다고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닌 것처럼, 법문(法門)을 들었다고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화사에서 기거를 하고 있다고 해서 또 공부가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법(法)을 들었걸랑 한시 일분일초를 아껴서 잠시도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날 그 찰나(刹那)를 바로 되잡아 돌려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할 때에 우리의 한량없는 업장(業障)은 봄눈 녹듯이 그 자리에서 녹아지는 것입니다.

 

원래 죄(罪)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종자(種子)가 따로 있어서 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 그것만을 올바르게 찾아서 깨달을 때에, 올바르게 찾고 있을 때, 죄는 이미 우리로부터 녹아지는 것이고 새로운 죄도 우리에게는 발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처음~15분2초)

 

 

 

 

(2/3)----------------

 

전빙시수수성빙(全氷是水水成氷)이요  고경불마원유광(古鏡不磨原有光)이로다

나무~아미타불~

풍자동혜진자기(風自動兮塵自起)라  본래면목노당당(本來面目露堂堂)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얼음이 온전히 이 물이여. 그리고 물이 곧 얼음이 된 것이다(全氷是水水成氷).

얼음을 내놓고 물을 찾아서는 아니 됩니다. 얼음이 바로 그것이 물인 것이고, 그 물이 영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되는 것입니다.

 

중생에게는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또 그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생주이멸(生住異滅)입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의 공덕으로 태어나 가지고, 얼마 동안 자라다가, 자라는 것이 바로 늙어가는 과정이죠. 이 세상에 태어나 가지고 늙어서, 그래가지고 병들어 가지고 죽어갑니다. 그래서 이 우리의 몸뚱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世界)에는, 우리 몸밖에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습니다. 무슨 물건이던지 이루어졌다가, 얼마 동안 그 상태를 유지해 가다가, 그 모냥이 파괴가 되어 가지고, 마침내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고,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 모든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습니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허망한 것이다.

일체(一切)의 유위법(有爲法)은 꿈[夢]과 같고, 꼭두각시[幻]와 같고, 물거품[泡]과 같고, 그림자[影]와 같고, 풀끝에 이슬[露]과 같고, 또 번갯불[電]과 같다.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허망하지 아니하고 참되고 영원(永遠)한 것이냐?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진리(眞理)가 바로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를 우리는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허망한 모든 것들을 여의고, 그밖에 참된 것을 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영원히 참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 번뇌망상심(煩惱妄想心) 속에서 나를 찾아야 됩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보리열반(菩提涅槃)을 찾아야 합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삼라만상 그 허망한 것들 속에서, 그 놈을 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참된 것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보는 방법이 바로 '이 뭣고?'입니다. '이 뭣고?'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볼 줄 아는 놈, 귀를 가지고 들을 줄 아는 놈, 코로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놈, 입으로 말하고 혀로 맛볼 줄 아는, '아! 이것은 쓰다 달다', '더웁다 차다' 느낄 줄 아는 이 몸뚱이.

여기에 앉아서도 서울도 순식간에 왔다갔다하고, 10년 20년 전 옛날 어릴 적에도 순식간에 왔다갔다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대관절 무엇이냐?'

아무리 그놈을 볼려고 해도 볼 수가 없고, 아무리 들으려고 해도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건만, 분명히 들을 줄 알고, 분명히 볼 줄 알고, 성내고 울고 웃을 줄 아는 이놈!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뭣고?' 이 글자 석 자가 무량겁 생사(生死)로부터 해탈(解脫)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해탈길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 칠석 법요식(法要式)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야 되겠습니다.

 

얼음이 곧 이것이 물이여. 번뇌(煩惱) 망상(妄想)—성내고 슬퍼하고 웃고, 오고 가고 이것이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번뇌 망상이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모습이요, 생사윤회의 원인이 되겠지마는, 그놈을 여의고 '생사 없는 도리'가 없는 것이올시다. 그 속에서 바로 '이뭣고?'

성낼 때 그 성내는 놈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썽이 폭! 한 생각이 속에서 뒤집어질 때, 뒤집어지려고 할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이 속 뒤집어지는 놈, 이놈이 무엇인고?' '썽내는 놈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것이 바로 점철성금(點鐵成金)입니다.

 

무쇠 덩어리를 딱! 갖다가 '금(金)이다!' 하고 탁! 점(點)을 치면 무쇠 덩어리가 찰나간에 황금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점철성금(點鐵成金)!

번뇌 망상 '한 생각' 폭! 일어나는 그 진심(瞋心)이 참선(參禪)을 안 하는 사람에게는 금방 독사(毒蛇)의 몸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원인이지마는, 참선을 하는 사람은 폭! 썽이 날 때 바로 '이 뭣고?' 이것이 바로 독사의 몸을 받기 전에 깨달음에 한 걸음 다가서는 도리(道理)올시다.

 

불법(佛法)은 우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가장 최상승(最上乘) 불법(佛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칠석날에 공(功)을 들이고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축원(祝願)을 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축원을 해 봤자—물론 그러한 유루(有漏)의, 유상(有相)의 공양(供養)도 복(福)이 아닌 것은 아니나—상(相)이 있는 공양, 유루복(有漏福)은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을, 아무리 힘센 사람이 화살을 공중에다 대서 쏘아 올렸다 하더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가 힘이 떨어지면 다시 땅에 떨어지듯이, 우리가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머무른 바 있는 마음으로 지은 복은 언젠가는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공덕(功德)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상(相)이 있는 것을 여의고 무상(無相)을 찾지 못한다'고 한 말씀이 생사심(生死心)을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몸이 있는 동안에는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움직여야 하고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하고,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에 거기에만 꽉 착(着)해 가지고 그것이 다 인 줄 알지 말고, 정말 그 가운데 참나를 찾는 공부를 해야 그러한 모냥 있는 것들도 바로 참 진리에 계합(契合)하는 불사(佛事)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한다고 해서 복(福) 짓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공부한 사람일수록에 더욱 상(相)이 없는 깨끗한, 영원히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복을 지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선을 열심히 해야—여기에 모이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남편이 수명장수하고, 사업이 잘되기를 바래고, 아들과 딸이 공부 잘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갖고 좋은 짝을 만나서 행복(幸福)하게 살기를 바래고, 돌아가신 선망부모(先亡父母), 돌아가신 어른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그러한 여러 가지 뜻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도 상당수 계실 줄 생각합니다. 다 좋은 생각이고 참 훌륭한 생각입니다.

 

참으로 돌아가신 선망부모, 돌아가신 남편, 비명(非命)에 간 아들과 딸의 명복(冥福)을 빌고, 살아계신 부모와 아들과 딸, 남편, 온 가족이 정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면 물질적인 공양에만 머무르시지 말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내가 나를 찾는 참선법(參禪法)을 잘 귀담아들으시고 마음에 명심(銘心)을 하셔서 댁에 가시는 걸음걸음이, 차 속에서, 댁에 가셔서 살림을 하면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신경질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거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이 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참나를 찾는 데에 돌리면서 살아가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정말 눈앞에서 너무나도 신기하게도 성취되실 것을 나는 보장합니다.

 

모든 업(業)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업을 소멸(消滅)하는 것은 그 업의 근원(根源)인 우리의 마음을 맑게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흘러간 물을 깨끗이 하려면 그 위에 가서 꾸정커리지를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밑에 아래에 물을 맑게 할려고 애를 써봤자 저 상류(上流)에서 흙탕물을 계속 일구고 있다면 아래에 물이 맑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랫물을 맑게 하기를 바랜다면 저 위에서, 근원에서 흙탕물 일구는 일을 그만두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업을 소멸하고자 하면,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하고자 하면 우리의 업(業)을 소멸(消滅)해야 하고, 우리의 업을 소멸하고자 할진댄 바로 그 업(業)의 근원(根源)인 나의 마음, 나의 마음자리로 부터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흙탕물을 바로 되돌려서 참나 찾는 최상법 '이뭣고?'로 돌릴 때에 구정물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간 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옛 거울은 닦지 아니해도 원래로 빛이 있는 것이여(古鏡不磨原有光).

우리의 마음자리는 언제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는 그 본래(本來)의 우리 마음자리는 부처님이나, 우리나, 어떠한 죄 많은 중생이라도 그 근본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이 빛이 환희 밝게 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거기에 먼지가 끼여서 그 빛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렇게 빛이 나고 영롱하고 밝고 깨끗한 거울 위에 끼여 있는 띠끌만 닦아 버린다면은 새로 빛을 내게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빛이 날 것입니다.

 

바람이 스스로 움직이기 때문에 띠끌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여(風自動兮塵自起).

그렇게 해서 거울 위에 있는 때[塵]만 '이 뭣고?'를 통해서 닦고 또 닦아 가고 열심히 닦는다면, 우리의 자성(自性), 우리의 참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눈 한번 감았다 뜨는 사이에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이 날 것입니다(本來面目露堂堂). (15분3초~32분55초)

 

 

 

 

(3/3)----------------

 

오늘 날씨가 삼복중(三伏中)에 있습니다. 엊그제 입추(立秋)가 지내가서 아침저녁으로는 조끔 산들바람이 불고 있고, 또 오늘은 다행히 제법 가을 날씨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주고 있어서 대단히 우리 법회 열리고 있는 이 법당에서 이렇게 참 다행일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여름 석 달 안거(安居)에 해제(解制)를 맞이하게 되고, 백일 동안 거행하던 백일기도도 7월 15일 날, 7월 15일에 그 백일기도 회향(回向)이 동시에 열리게 되고.

 

또 7월 15일 그날은 백종(百種)이라 해서 우리의 무량겁 과거에 선망부모(先亡父母)들이 불행하게도 지옥에 계신 분—지옥(地獄)에 계신 모든 분들이 우리의 선망부모 아닌 분이 없는 것입니다.

무량겁을 두고 여기서 나서 저기에 죽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는 동안에 수없는 생사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소 뱃속에도 들어가고, 말 뱃속에도 들어가고, 뱀 뱃속에도 들어가고, 개 뱃속에도 들어가고, 사람 뱃속에도 들어가고, 천상(天上) · 인간(人間) ·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수라(修羅), 육도(六道)를 돌아치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그 뱃속에 들어가 보지 아니한 그러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地獄)에 있는 모든 중생(衆生)이 바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

 

7월 15일 백중날은 지옥에 문이 잠시 동안 열렸다가 닫히는 날입니다. 그날 지옥문(地獄門)이 열리자마자 그 지옥 속에서, 화탕지옥 · 빙설지옥 · 차압지옥...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는 그 참혹한 지옥 속에서 고(苦)를 받던 우리의 선망부모가, 지옥문이 열리자마자 팔당 댐에 수문(水門)을 열어 놓았을 때 그 무서운 폭류(暴流)가 쏟아져 나오듯이 지옥에 선망부모들이 앞을 다투어 나올 것입니다.

 

그 선망부모가 나와서 어디로 가냐?

방방곡곡(坊坊曲曲)에 부처님 모신 도량(道場)에서 백종날은 선망부모에 천도재(薦度齋)를 올립니다. 인도에서, 중국에서, 우리나라에서, 일본에서.

특히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는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수천 위(位)의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를 모셔놨습니다.

여기서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說)하고, 법회(法會)가 열릴 때마다 천도(薦度)를 올리고, 특히 백중날은 융숭하게 천도재(薦度齋)를 올린 만큼 아마 지옥문이 열리자마자 용화사 법보선원을 어떻게 알던지 알아 가지고 거의 그 많은 선망부모가 우리 용화사에 다 몰려오실 런지도 모릅니다.

 

왔다가 거기 법문(法門)도 잘 들으실 것이고, 또 재단(齋壇)에 올린 음식도 잘 공양(供養)을 하시겠지마는 첫째, 내 딸이 안 왔나, 내 아내가 안 왔나, 내 손녀가 안 왔나, 그것부텀 찾아보실 것입니다.

왔다가, 와야 할 딸을 못 만나고 가시거나, 아들이나 손녀나 며느리를 만나지 못하고 가실 때에 얼마나 허통하실 것을 생각하신다면은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백중날에는 정성스럽게 선망부모를 위해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목욕재계(沐浴齋戒)하시고 그날 법회에 빠짐없이 참여(參與)해 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구명소일모공성(求名少日慕孔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다

나무~아미타불~

 

명예를 구하고, '좀 더 잘살아 보겠다' 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겠다' 그러한 명예와 권리와 재산, 그러한 것을 구하던 젊은 때에는 공자님을 숭배하다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라, 죽음이 두려운 늙으막에는,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잡혀서 얼마 안 가서 죽게 된 이 늙으막에사 겨우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하니  절심거화구두연(切心擧話救頭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젊었을 때에는 돈 벌고 재산 모이고, 명예와 권리와 좀 더 잘살아보겠다고 허둥대다가 늙으막에사 겨우 부처님 법을 알고 말았는데, 머리 위에 광음(光陰)은, 세월은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다 그 말이여.

퍼뜩허면 하루해가 저물고,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하루해가 저물고, 이럭저럭 그럭저럭하다가 하루해가 저물고, 썽 한 번 냈다 웃었다 하다가 하루해가 저물고.

 

그러니 간절한 마음으로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하기를 수염에, 불붙은 수염에 불 끄듯 해라. 수염이 없는 보살님네들은 머리털에 불이 붙었을 때에 무슨 아들 걱정, 남편 걱정, 무슨 다른 것 곗돈 걱정, 무슨 가게 걱정할 겨를이 있어요?

머리에 불붙었을 때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그저 손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후닥닥닥 머리를 끄듯이, 화두(話頭)를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흘러가는 세월 무상(無常)한 것을 한탄(恨歎)하지 말고, 흘러가는 그 세월 그 세월 마디마디가 나 찾는 공부가 되도록 그렇게 지혜스럽게 시간을 관리를 한다면, 지혜스럽게 나의 생각을 잘 돌려서 관리를 한다면, 시간 흘러간 것을 두려워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고 또 축원(祝願)을 하고, 그리고 선망부모의 영가에 천도재(薦度齋)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 장성불궁 보살의 친정아버지, 장양석 영가에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아울러서 봉행(奉行)을 하게 되겄습니다.

우리 모두 여러 법보제자는 돌아가신 장양석 거사가 장성불궁 한 사람에 아버지에 끊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무량겁 윤회(輪廻)하는 동안에 지옥에 있는 모든 중생이 우리의 선망부모라고 한다면, 살아계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모든 사람도 우리의 선망부모 아닌 사람이 없는 것이고, 오늘 사십구재(四十九齋)를 맞이한 장양석 영가도 우리와 결단코 멀지 아니한 지극히 가까운 인연(因緣)에 의해서 맺어졌기 때문에 우리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그 사십구재 우리가 같이 참석을 해서 명복(冥福)을 빌게 되는 것입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한 생각 간절한 마음으로 명복을 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32분59초~44분23초) (끝)

 

 

 

 

[법문 내용]

 

칠석(七夕)날의 의의(意義), 모든 소원성취 / 용화사 모든 법회의 목적은 업장소멸하고, 참나의 주인공을 깨달라 영원한 생사해탈 / 참선을 함으로 해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야 / 법(法)을 들었걸랑 일분일초를 아껴서 열심히 수행해야 / 죄의 종자(種子)가 따로 있어서 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게송)전빙시수수성빙~ /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의 몸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 세계에 모든 것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다.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진리(眞理)가 바로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 / 생사심(生死心), 번뇌망상심 속에서 나를 찾아야 됩니다. 그것 보는 방법이 바로 '이뭣고?' / '이뭣고?' 이 글자 석 자가 무량겁 생사(生死)로부터 해탈(解脫)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해탈길 / 점철성금(點鐵成金). 우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가장 최상승(最上乘) 불법(佛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하고자 하면 참나 찾는 '이뭣고?'를 해야 / 부처님이나, 우리나, 어떠한 죄 많은 중생이라도 그 근본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이 빛이 환희 밝게 나고 있다 / 지옥(地獄)에 있는 모든 중생이 바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 7월 15일 백중날은 지옥에 문이 잠시 동안 열렸다가 닫히는 날 / 간절한 마음으로 '이 뭣고?' 화두 들기를 머리에 불붙었을 때 후닥닥닥 머리를 끄듯이. 여구두연(如救頭燃).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정월(正月)이나 또는 초파일(初八日)이나 칠석(七夕)이나 백중이나 어떠한 날짜에 열리는 행사건 간에 그 날짜의 명목은 다를망정 그 법회(法會)의 목적은 언제나 한 가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내간 그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우리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나아가서 앞날에 있어서 새로 업을 짓지 아니한 가운데 나 자성(自性), 참나의 주인공(主人公)을 깨달라서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 있는가. 오직 그 목적 하나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법(法)을 들었걸랑 한시 일분일초를 아껴서 잠시도 끊일 사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건 일어날 그 찰나(刹那)를 바로 되잡아 돌려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회광반조(回光返照)를 할 때에 우리의 한량없는 업장(業障)은 봄눈 녹듯이 그 자리에서 녹아지는 것입니다.

 

원래 죄(罪)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의 종자(種子)가 따로 있어서 죄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우리의 마음자리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이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 그것만을 올바르게 찾아서 깨달을 때에, 올바르게 찾고 있을 때, 죄는 이미 우리로부터 녹아지는 것이고 새로운 죄도 우리에게는 발붙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우리가 깨닫고자 하는 진리(眞理)가 바로 '영원히 생사가 없는 참 이치'를 우리는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허망한 모든 것들을 여의고, 그밖에 참된 것을 구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영원히 참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 번뇌망상심(煩惱妄想心) 속에서 나를 찾아야 됩니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보리열반(菩提涅槃)을 찾아야 합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이 삼라만상 그 허망한 것들 속에서, 그 놈을 버리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참된 것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 보는 방법이 바로 '이 뭣고?'입니다.

 

무쇠 덩어리를 딱! 갖다가 '금(金)이다!' 하고 탁! 점(點)을 치면 무쇠 덩어리가 찰나간에 황금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점철성금(點鐵成金)!

번뇌 망상 '한 생각' 폭! 일어나는 그 진심(瞋心)이 참선(參禪)을 안 하는 사람에게는 금방 독사(毒蛇)의 몸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서운 원인이지마는, 참선을 하는 사람은 폭! 썽이 날 때 바로 '이 뭣고?' 이것이 바로 독사의 몸을 받기 전에 깨달음에 한 걸음 다가서는 도리(道理)올시다. 불법(佛法)은 우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에 가장 최상승(最上乘) 불법(佛法)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所願)을 성취하고자 하면 우리의 업(業)을 소멸(消滅)해야 하고, 우리의 업을 소멸하고자 할진댄 바로 그 업(業)의 근원(根源)인 나의 마음, 나의 마음자리로 부터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흙탕물을 바로 되돌려서 참나 찾는 최상법 '이뭣고?'로 돌릴 때에 구정물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간 물이 흘러내릴 것입니다.

 

옛 거울은 닦지 아니해도 원래로 빛이 있는 것이여(古鏡不磨原有光). 우리의 마음자리는 언제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는 그 본래(本來)의 우리 마음자리는 부처님이나, 우리나, 어떠한 죄 많은 중생이라도 그 근본 마음자리에 있어서는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이 빛이 환희 밝게 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거기에 먼지가 끼여서 그 빛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렇게 빛이 나고 영롱하고 밝고 깨끗한 거울 위에 끼여 있는 띠끌만 닦아 버린다면은 새로 빛을 내게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빛이 날 것입니다.

 

무량겁을 두고 여기서 나서 저기에 죽고, 저기서 나서 여기서 죽는 동안에 수없는 생사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소 뱃속에도 들어가고, 말 뱃속에도 들어가고, 뱀 뱃속에도 들어가고, 개 뱃속에도 들어가고, 사람 뱃속에도 들어가고, 천상(天上) · 인간(人間) ·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 · 수라(修羅), 육도(六道)를 돌아치면서 어느 것 하나라도 그 뱃속에 들어가 보지 아니한 그러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地獄)에 있는 모든 중생(衆生)이 바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 7월 15일 백중날은 지옥에 문이 잠시 동안 열렸다가 닫히는 날입니다.

 

보살님네들은 머리털에 불이 붙었을 때에 무슨 아들 걱정, 남편 걱정, 무슨 다른 것 곗돈 걱정, 무슨 가게 걱정할 겨를이 있어요?

머리에 불붙었을 때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그저 손이 머리로 올라가 가지고 후닥닥닥 머리를 끄듯이, 화두(話頭)를 들고 들고 또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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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21. 1. 10. 20:13

((No.100))—1979년 동안거 해제(79.02.11) (71분)



(1/4) 약 20분. (2/4) 약 18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상월만공산(霜月滿空山)헌디  고안여천비(孤雁唳天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왕비력(何事枉費力)고  월하대강류(月下大江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서리 친 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디, 고안(孤雁)이 여천비(唳天飛)라. 외로운 기러기가 하늘에 울며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공연히 힘을 허비했던가, 달 아래 큰 강이 흐르는구나.


오늘은 무오년 삼동결제(三冬結制)에 구순안거(九旬安居) 끝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오늘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결제 대중스님네와 또 결제에 입방(入房)한 보살님네들이 여러 가지 불편한 가운데에도 불구하시고 그런 어려운 부족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오늘 해제를 맞이했고 백일기도를 원만하게 회향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하고, 이 백일기도에 입재(入齋)하신 법보제자 여러분은 석 달 동안 결제한 스님네와 보살님네가 사고 없이 정진 잘 마치시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백일기도 기도가 원만히 성취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백일기도를 목탁을 치면서 사분정근(四分精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목탁을 몇 개를 부서지도록 때리면서 염불을 한 것과 목탁을 치지 아니하지만, 죽비(竹篦)를 치고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시는 것과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정진을 잘하시면서 아침 예불(禮佛)할 때에 백일기도 동참재자(同參齋者)의 축원(祝願)을 엄숙히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축원 한마디가 목탁을 수만 번 뚜드리면서 염불한 공덕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의 기도 성취는 훌륭하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은 견성(見性)하는, 진리를 깨닫는 데에 들어가서 대단히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경전에는 씌여 있지 아니한 오직 깨달으신 분만이 말 아닌 말로써 이를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극진지경(極盡之境)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한 법문을 한 시간여에 걸쳐서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수승한 근기(根機)를 갖으신 분은 충분히 이해하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오늘 설법하신 조실 스님 법문은 그 가운데에 공안(公案)에 관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이 공견이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나 그 밖에 유교에서도 이 공리(空理), 공에 대한 이치는 다 설하고 있고, 그 공 공리에 도달한 것으로써 도에 이른 것처럼 그렇게 모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문(禪門)에도 체중현(體中玄) 도리라든지, 이 여래선(如來禪) 도리라든지, 공견이라든지, 이것이 모다 말의 표현은 다르지마는, 그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참 견성(見性)하는데 일단은 그러한 경지(境地)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흔히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그러한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르면 '옳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깨달랐구나. 이 경계가 바로 거기로구나!' 이리 생각하고 그러한 공견(空見), 체중현(體中玄) 도리에 멈추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그 조그마한 조끔 얻은 것을 갖다가 만족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제불(諸佛)이 출세(出世)하셔도 그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견(空見)에 처해 가지고 그러한 공견으로 일체 공안을 보면은 그 나름대로 공안이 다 막힘이 없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가 정말 믿을 수 있는 훌륭한 선지식(善知識)이 없을 때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못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공부하다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정말 자기가 목숨 바쳐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선지식이 계실 때에는 그 선지식에 가서 탁마(琢磨)를 해 가지고 한마디에 그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바로 그 선지식의 말을 믿을 수가 있지마는, 그런 믿는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차라리 참선을 아니하고 경을 읽는다든지, 염불을 하면서 일생을 마친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그러한 공리(空理)에 체(滯)해 가지고 그것이 자기가 구경(究竟)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일체 경이라든지 공안을 그 경지로써 보고 그러한 입장에서 법을 설하고, 그런 입장에서 후래(後來) 후인(後人)을 지도하기 때문에 자기와 소견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다 인가(印可)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예를 들자면은 저 호남 지방에서 서울을 올 때에 수원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천안이나 그런 데에 와 가지고 서울에 다 온 것처럼 생각하고 말키 사람들에게 '여기가 서울이라고, 더이상 갈 필요가 없다'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서울'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물이 좋고, 구변(口辯)이 좋고, 학식이 많고, 그럴 때에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몰려들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삿된 사람으로 인해서 수천만 명의 삿된 종자를 낳게 되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어째서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그 간곡(懇曲)하고 고준(高峻)한 법문을 우리는 듣게 되었느냐?


해제(解制)라고 하는 것은 석 달 동안 특별 수련 기간이 끝나는 날이지마는, 원래 결제(結制) 해제(解制)는 인도에서 우기(雨期), 비가 많이 쏟아져서 장마가 계속될 때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큰 정사(精舍), 선원(禪院)에 모여 가지고 그 비를 피하면서 단체적으로 수행을 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그 장마철이 끝나고 그래서 그 수련 안거(安居) 기간이 끝나면 그때부터서 각 지방으로 모다 흩어져서 인연 따라서 모다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아세아(亞細亞) 동북 지방은 겨울이 추워서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씩을 그 결제를 해 오고 있는데, 이제는 그 무섭던 추위도 다 가고 입춘이 지나서 이제 완연히 봄기운이 맴돌아 왔습니다.

해제를 하고는 모다 다시 걸망을 지고 다시 선지식을 찾기도 하고, 도반을 찾기도 해서 모다 흩어지는 것이 준례로 되어있습니다마는, 해제했다고 해서 행여나 결제 동안에 그 단속을 하던 그 마음이 풀어질까 봐 일부러 이런 고준한 중요한 법문을 우리는 추려서 듣게 된 것입니다.


그 법문 가운데에 모다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니 모다 그런 어려운 말씀들이 나와서 잘 이해가 안 되실 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쥐가 괴밥을 먹었다. 또 밥그릇이 이미 깨졌다' 이런 것도 전부 이 공안에 해당된 말씀입니다.

여러 신도님들 가운데에 설사 이러한 뜻이 무슨 뜻인가 아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또는 뿐만 아니라 억지로 그것을 무슨 뜻인가 알려고 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해서 열심히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할 따름인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그러한 공안 · 화두에 대해서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보려고 하고 이런 것은 우리의 공부를 지연시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실 스님께서는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까? 이것은 이러한 공안을 우리 앞에 제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내서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공안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있습니다. 문헌에 오른 것만 하더라도. 그 많은 공안에 대해서 우리는 어록(語錄)을 본다든지 어떤 큰스님네 법문을 들을 때에 가끔 그런 공안을 대중을 향해서 물으신 경우를 만납니다.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투철히 타파(打破)하지 못한 경우에는 결정코 다른 공안에 대해서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닫지 못한 분상에 이론적으로 그 공안을 이리 뛰적거리고, 저리 더듬어서 그럴싸한 답을 내려고 해 본댔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일호(一毫) 이익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어떤 공안에 대해서 그 대중을 향해서 '한마디 일르라'고 그렇게 그 고함을 치신다 하더라도 그러실수록에 우리는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으로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2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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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상태에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다못 그것뿐인 것입니다. 앞도 없고, 뒷도 없고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읽었다던지, 법문을 들었다던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라도 여기에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다른 화두와 비교하려 하지도 말고, 다른 데서 들은 말씀을 여기다 끌어대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려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다못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홑으로 홑으로 간절히 해 나감으로써만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홀연히 통 밑구녁 빠진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간장독에다가 간장을 담아논 것을 그걸 갖다가 매갱이, 쇠 매갱이로 쳐서 그 항아리가 쩍 갈라지면서 항아리 속에 있는 장(醬)이 우르르르 한목 쏟아지듯이,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쌓였던 그 의심이 점점 커져 가지고, 그 의심덩어리가 우리의 가슴속과 이 허공계에 가뜩차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풍선이 터지듯이 대의단(大疑團)이 타파(打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본참화두 하나에 충실함으로써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천칠백 공안은 따져서 알려고 하지 안 해도 한눈에 환해져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만 더욱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 봤자 중생심을 조장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슬픈 생각도 중생(衆生)의 하나의 감정이요, 기쁜 생각도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요, 괴로운 생각도 역시 하나의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한 슬프고 · 괴롭고 · 외롭고 · 쓸쓸하고 · 썽내고 하는 그러한 모든 중생심이 전부가 다 '한 생각'도 등한히 방치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중요한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슬프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몸이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화두를 들 때가 과연 언제인 것입니까?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수없는 생각들 그것이 바로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중생(衆生)이 무변(無邊)이요,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그러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중생이 다할 날이 없는데, 중생계를 다할려면은 번뇌가 다해야 합니다. 그 번뇌는 다할 길이 없습니다.


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煩惱)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보리과(菩提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또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행여나 그럭저럭 지내실까 봐 아주 고준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아울러서 당부에 말씀을 전해 드린 것입니다.



앞으로 춥도 더웁지도 않는 아주 화창한 봄 날씨가 돌아옵니다. 묵었던 모든 업장(業障)과 재앙(災殃)은 백일기도 회향, 오늘 해제일을 기해서 봄눈 녹듯이—골짝에 모다 쌓였던 봄눈이 다 녹아가고 있습니다. 봄눈이 녹음과 따라서 우리의 업장(業障)도 따라서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새봄을 맞이해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의 모든 소망(所望)이 그렇게 돋아나고 그 새싹에서 또 꽃과 잎이 피고, 거기에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을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축원(祝願)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서 죽음을, 죽는 날을 이미 받아 가지고 나온다' 이러한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는 물질,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쓰다가 보면은 고장이 나게 됩니다.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고,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다가 쓰다가 아주 고장이 나버리면 고칠 수가 없게 될 때 그 기계는 완전히 폐물이 되는 것입니다마는.

사람의 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쓰면은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도 쉽게 고장이 나듯이, 사람의 몸도 지혜롭게 관리를 하지 아니하면 고장이 자주 나게 되고, 자주 고장이 나게 되면 그 몸은 결국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몸을 어리석게 관리해. 어리석은 사람은 관리는 어리석게 하면서, 애착은 매우 애착은 가지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한두 번, '첫째, 몸을 잘 관리를 하려면 음식물을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음식에 있어서는 요새 그 흰쌀밥 먹고 또 고기를 많이 먹고 또 백설탕을 많이 먹고 또 화학조미료 같은 걸 많이 먹고 이래서 또 우유나 계란 같은 걸 많이 먹고 해서, 옛날에는 없었던 당뇨병이나 또는 고혈압 · 중풍 · 동맥경화증 또 간경화증 또 각종 암, 모다 이런 병들이 점점 수효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어째서 이 근자에 그러한 환자들이 불어나냐 하면은 다른 게 아니라 옛날에 우리는 현미(玄米)밥을 먹었습니다. 50년 내지 백 년 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현미밥에다 잡곡밥을 주로 많이 먹었어요. 그때는 이러한 무서운 병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한 30년 전만 해도 암이란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근자에는 아는 사람, 이웃 사람, 신문, 많은 사람들이 이 암으로 인해서 많이 죽어가고 있고, 동맥경화증 그래서 고혈압, 중풍 또 당뇨병, 당뇨병이 어린애까지라도 이 당뇨병에 걸린 환자가 날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흰쌀밥—잡곡밥을 싫어하고 흰쌀밥만을 먹고 또 현미밥, 쌀이 6분도 · 7분도 · 9분도 이리 있는데, 9분도는 여러 분이 잡숫고 있는 하얀 쌀이 그것이 9분도로써 아주 몸에 해로운 것입니다. 최소한도 7분도, 쌀이 좀 누루스름한 그러한 쌀. 아조 그 등겨 껍데기만 베껴 버린 그 현미가 제일 좋지마는 시중에서 사기가 어렵고, 그러나 그것도 여러분이 구할려고만 하시면 구할 수가 있습니다.

현미밥을 잡숫고, 될 수 있으면 고기를 적게 잡숫고 채식을 많이 하시고 잡곡, 보리쌀이나 율무쌀이나 또는 좁쌀 · 수수 이런 잡곡을 넣어서 또 콩 넣어서 잡숫도록 하시고.


참선 법문을 들으러 왔는데 먹는 얘기만 한다고 혹 그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이 자연식(自然食)에 대해서 말씀을 하냐 하면은 우리 참선이 우리의 본래,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정신적인 수행이라면은 자연식은 우리가 본래 우리 조상들이 먹어 내려온 우리의 본래의 식, 자연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점점 사람들이 각박해지고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자연 보호를 해서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자연식을 해서 우리의 육체를 현대 문명병으로부터서 보호를 하고, 참선을 해서 우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비록 형태는 다르지마는 근본이념은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참선을 잘하려면은 자연식을 해야 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20분24초~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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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속을 되게 상하고 화를 끓이면 반드시 음식이 소화가 안되게 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온갖 병이 육체로 표현이 됩니다. 심장병이 생긴다던지, 위장병이 생긴다던지, 간장병이 생긴다던지, 신경성 두통이 생긴다던지, 갖은 병이 꼭 우리의 마음에서 원인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법문을 열심히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해야만 앞으로 우리의 육체에 건강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이 이제부터 그러한 점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병은 육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육체에 치료만 해 가지고 병을 근치(根治)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지끔 수준 높은 의사들은 눈뜨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약(藥)을 하나 선사하고자 합니다. 접때는 부작(符作)을 선사하고 또 했지마는 오늘은 또 약을 하나 선사하는데 '무슨 약을 줄라나?' 이리 생각하시겠지마는 이것은 돈을 받지 않고 드립니다.

돈을 받지 않고 드리는 만큼 또 이것은 여러분의 귀로만 들으시면 되어요. 손으로 받으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무슨 약을 드리냐 하면은 이건 아주 그 우리 돈 안 들이고 우리의 무서운 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폐결핵이라든지, 자궁암이라든지, 이 근자에 부인들이 참 자궁암 또 자궁 내에 근종 모다 그러한 병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우리 신도 가운데에도 그렇게 참 이쁘고 훌륭한 젊은 분이 그런 자궁암으로 몇 달 전에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다마는, 이 무서운 자궁암 그 밖에 간경화증이라든지 또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프고, 삭신 아프고 또 관절염 류마치스 또 피부병 모다 이러한 병, 그 밖에도 수없는 많은 병들을 약을 쓰지 아니하고 낫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혹 알고 계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입니다. 강변이나 바닷가에 모래 속에 몸을 묻는 것입니다.

6, 7월 더울 때, 5월이나 6월이나 7월 더운 날, 더운 계절에 가서 자기 키보단 좀 길게 파고, 광(廣)은 한 7~80㎝ 파고, 깊이는 한 50㎝ 삽 반 자루 가량 파고서 그 속에 가서 모가지만 내놓고 모래를 덮는데, 아주 두텁게 덮은 것이 아니라 한 6㎝ 내지 9㎝ 정도, 요 하나 덮을 만큼만 덮는 것입니다.


덮고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데, 그때 날씨가 더웁고 모다 그래서 텐트를 치고 텐트 밑에서 하거나, 우산으로 가리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몸이 약한 사람은 구름 낀 날을 택해서, 구름이 끼었다 해가 비추었다 한 별로 햇빛이 세지 아니한 그런 날을 택해서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보통 모래찜질하면은 '삭신이 아픈 데 좋다' 그런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모래가 뜨끈뜨끈한 그런 모래 속에서 해야 한다고 알고 계시지요? 그게 아닙니다. 모래는 우리가 그렇게 무섭게 뜨겁지 아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잠깐 하고 나오고, 또 잠깐 하고 나오고 이렇게 해 오고 있지만, 참으로 그 병을 철저히 낫으려면은 오전 8시부터서 시작해 가지고 점심을 완전히 굶고 오후 4시까지 8시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더위에 8시간을 갖다가 뜨거운 모래로 덮어놓으면 그것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텐트를 가리우고 혹 우산을 가리우고 하고 그동안에 탈탈 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냉수를 떠다 놓고 자꾸 목을 한 모금씩 물을 계속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장 · 소장 · 대장이 항시 물로 촉촉이 축여주기 때문에 설사 점심을 굶는다 해도 그렇게 탈기(奪氣)가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점심을 굶고 공복에 물만 먹고 해야 독기(毒氣)가 완전히 빠집니다.


이 방법은 이 모래찜질로 평생을 4~50년을 전문으로 이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많은 사람의 병을 낫운 거여. 그 사람의 실지 경험을 써 논 책을 보고 제가 잘 알았고 또 의학박사가 그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스스로 많은 효과를 보고, 그래 가지고 그 모래찜질을 현대 의학적인 면에서 과학적으로 이것을 풀이를 한 것을 내가 봤기 때문에 올여름에 삭신 아픈 분, 허리 아픈 분, 어깨 아픈 분, 오장육부 어디가 나쁘건 이 모래찜질하시면 독기가 완전히 빠져 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도 마찬가집니다. 복어를 먹어서 중독이 되어 가지고 뻐드러진 사람도 모래에다 묻거나, 흙에다가 흙 찜질을 하면은 살아납니다. 또 산에서 그 독버섯을 먹고 죽은 사람도 흙에다 묻거나 모래에다 묻어 놓으면 살아납니다.

저 아프리카 지방에 토인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병을 앓아 가지고 죽게 되면—혹 모기한테 물렸다든지, 독사한테 물렸다든지, 무슨 그래서 죽을병이 걸리면은 그 사람을 떼메다가 저 모래사장에다 묻어 놓고, 얼굴만 내 놓고 묻고서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면서 한바탕 굿을 하고는 집으로 그 환자만 놔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고 합니다. 몇 시간 뒤에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나 가지고 병이 나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혹 연탄깨스 중독되었을 때 빨리 흙냄새를 맡게 하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먹이면은 정신을 채리는 경우를 왕왕이 보셨을 것입니다. 흙냄새라고 하는 것은 냄새만 맡아도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물며 흙을 파고 그 속에다가 몸을 흙속에다가 덮어놓고 놨을 때에는 몸에서 완전히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이 그 과일나무 밑에다가 그 구뎅이를 파고 그 속에서 흙 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흙 찜질을 하는데 그 밭 가양에다 했는데, 거기는 숲 옆이 되어서 모기가 굉장히 흔한 곳이어서 풀모기가 많아서 한 번씩 쏘면은 툭툭 부르트는 모기가 드글드글하는데, 그날 아침 8시부터서 저녁 4시까지 8시간을 하게 되기 때문에 얼굴은 완전히 모기한테 맽기기로 작정을 하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모기가 한 마리도 자기 근처에 오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흙 찜질을 잘 마치고 2~3일 후에 가 보니까 그 흙 찜질하던 구뎅이 옆에 맛있는 그 뽀뽀나무라고 하는 과일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수백 개의 그 뽀뽀가 열려 갖고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과일이 몇십 개가 떨어졌다고 그럽니다. 그러더니 5일 후에는 그 많은 과일이 수백 개 과일이 모조리 다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을 뽀개 보니까 속이 완전히 먹물 칠해 논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들어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이 이태 후에도 안 열고, 5년 후에도 안 열고, 아주 그 과일나무는 완전히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면은 모기가 달라들지 아니한 것은 흙 찜질을 하고 있는 동안에 몸에 독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그 독 냄새가 지독해서 모기가 달라들지 못했다. 이것을 알 수가 있고.

왜 과일나무가 죽었느냐? 흙 찜질을 통해서 사람의 독이 흙속으로 다 흡수가 되었는데 그 흙속에 흡수된 독을 그 뽀뽀나무 뿌럭지가 빨아 먹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나무가 아주 골병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께서 흙 찜질이나 모래찜질하실 때에 주의할 것은, 반드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구뎅이를 파 주고 모래를 묻어 주고 또 우산이나 텐트를 쳐 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잠깐 하는 것은 모르지만 여덟 시간 하니까 햇빛, 태양 방향이 바꿔지기 때문에 이리저리 우산을 잘 돌려 쳐 줘서 그늘을 막아주어 가지고 직사광선을 피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물을 가끔가끔 떠다가 축여 줘야 하고, 모래가 지나치게 뜨겁고 더울 때에는 조로에다가 찬물을 떠다가 위에서 화초에다 물 주듯이 적당히 줘 주어야 그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꼭 필요한데, 이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은 환자 자신에게는 백에 하나도 부작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중들어 준 사람이 까딱하면은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그 사람이 까딱하면 눈이 안 보이게 되거나 꺼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아까 조실 스님 법문하실 때는 모두 꾸벅꾸벅 졸더니 이런 얘기를 하니까 한 분도 졸지를 않으시구만요.


시중을 드는 사람이 왜 눈이 어두워지고 까딱하면은 비실비실 쓰러지느냐? 환자한테서 발산하는 독기(毒氣)를 들어마시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흙 찜질, 모래찜질을 해서 얼마만큼 무서운 독이 그 환자로부터 빠져나간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도 아니고 내가 여러분한테 약을 팔아먹으려고 선전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여름에 혹 피서를 가신다던지 그러한 기회가 있을 때는 강변이나 해변에 가셔서 가족 단위로 가셔서 공연히 벗고 춤추고 그러시지를 말고, 찜질을 하시도록 내가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서운 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는 치료 방법이고, 여비만 가지고 가시면 모래 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그것을 하시고.


모래찜질하게 되면은 8시간이란 시간을 모래 속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모래가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백히게 됩니다. 그런데 등어리를 보면은 등어리가 모래가 백히게 되는데, 묘하게도 등어리 위나 또는 등어리 가운데나 허리 대목이나 모래가 붙지 않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대목이 콩팥이 있는 곳이면은 '콩팥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그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간장 있는 대목에 모래가 안 붙었으면 '아하! 간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이걸 알 수가 있습니다. 땀이 빠져나오면서 독기도 같이 빠져나오는데 그놈이 줄줄줄줄줄줄 물 흘러가듯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모래가 거기에는 붙지를 못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찜질을 하고 등어리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이 찜질을 하고 댁에 돌아가셔서 피부병이 일어난 것처럼, 땀띠가 난 것처럼 혹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독기가 8시간 동안에도 덜 빠지고 남은 놈이 집이 가서 빠지느라고 뚫고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증상이 일어나니 그런 사람은 다시 모래찜질을 한 번이나 두 번, 더 해 버리면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모래찜질을 통해서 병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 없는 사람도 하면 좋다 그럽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그 독기가 없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이고, 피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접때 김강남, 김성남 선수에게 부항기를 그 선사를 했는데 이 부항(附缸)도 몸안에 그러한 독기를 뽑아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게 그 모래찜이나 흙 찜은 삼복더위에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부항은 엄동설한에도 따뜻한 방에서 그 몸에 독기를 뽑아낼 수가 있는 그러한 잇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찜질은 모래 속에다가 8시간만 묻고 있으면 거의 독기를 전신에서 뽑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계절을 이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부항기는 전천후 전 계절을 통해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건 간에 계속해서 뜨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그동안에 우리들은 입으로 먹고 주사침으로 꽂아 넣고 해서, 많은 약을 우리 몸안에다 집어넣어줌으로 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했고,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듣고 해 가지고 지식을 속에다 넣을려고 해왔습니다.

무량겁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마는 이제부터서는 공부는 참선 공부, 비우는 공부 또 치료법은 부항법이나 찜질을 해서 우리 몸에서 뽑아내는 치료법을 쓰신다고 하면은 우리는 물심양면으로 해탈도에 도달하는 시기를 단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을 믿는 분은 자연식 또 부항법 또 모래찜질, 흙 찜질 이런 것을 해 보실 것이고, 믿지 않는 분은 '그까짓 것 뭐, 이뭣고? 좋다고 해도 해 봤자 별수없더라. 자연식이 좋다고 해서 채소 좀 먹어 봤자 별수없더라. 부항이 좋다고 해서 몇 번 떠 봤지만, 멍만 들지 소용이 없더라. 모래찜해 봤자 진기만 빠지고 소용이 없더라' 이렇게만 생각하실 분이 혹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제 말을 믿는 분은 정말 한 번 해서 안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되면 세 번, 이렇게 하시다 보면은 '과연 그 중이 나를 속이지 아니했구나' 이렇게 고맙게 생각할 날이 있어서 여러분은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해탈경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게 될 것을 저는 믿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도) "한 말씀만 여쭤보겄습니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거름을 안 한 쌩흙이 좋습니다.

예, 파내 버리고, 겉거름 흙은 파내 버리고 그렇게 파서 흙을 부드럽게 해서 덮고, 돌이 섞여 있는 것은 돌을 잘 추려내 버리고 하면 됩니다.


한번 한 구뎅이에 다시 들어가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들어가고 나온 구뎅이에 아들이 들어가….

그 구뎅이는 아무리 아버지가 들어갔던 구뎅이라도 지독한 구뎅이기 때문에 새로 새 구뎅이를 파서 해야 합니다. 옷은 빤스를 입고, 가리울 데를 가리고 하시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 이것이 보통, 사람 몸에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걸쳐서 자세히 말씀드렸고, 여러분의 그 귀, 눈, 코, 입, 마음에 문을 이렇게 해서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에 아까 조실 스님께서 하시던 법문이 이제사 여러분 속에 쏙 들어갔을 줄 생각합니다. 열심히 해제 동안에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기시를 당부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38분2초~59분36초)





(4/4)----------------


그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첨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겨울철에 약 70명 가량의 보살님네가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한목 70명이 다 계시지는 않고 노상 20명 내지 3, 40명 이렇게 계셔서 방안이 그뜩해 가지고 탁한 공기 속에서 대단히 참 고생들 많이 하시고,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이중 삼중으로 그렇게 앉아서 하시면서도 서로서로 양보를 하시고 이해를 하셔서 참 잘 정진이 되셨고, 강원도나 경상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모다 새로 오셔서 여러 분들이 오셔서 석 달을 그렇게 참 알뜰히 정진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에는 일주일 하실 분이나, 한 달 하실 분이나, 석 달 하실 분이나, 그저 단 하루도 좋으니까 오셔서 하루라도 하십소사 하고 이렇게 권고를 했고, 그러한 탓으로 해서 많은 분들이 잠깐만 시간이 있어도 오셔서 정진하시고 그래서 마음으로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노인도 70 노인이 되셨건, 80 노인이 되셨건, 90 노인까지라도 오셔서 하실 수만 있으면 오시기를 마음으로 고대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많이 오시고 나니까 새로운 문제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연세가 너무 많으신 분은 까딱하면 낙상(落傷)하실 우려도 있고, 음식 같은 것에 혹 체하실 염려도 있고 그래서 다른 병환이 나실 수도 있고 또 연세가 많으면 아무래도 마음은 다 고대로지마는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해서 젊은 사람들과 같이 단체 공동생활을 하기에 대단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한 70세 이상 넘으신 분은 '방부를 안 받는다'가 아니라 자진해서 '나는 아무래도 내가 늙은 사람이 가서 다른 사람 폐를 끼치느니보다는 집에서 분(分) 따라서 하고, 내가 법회 때나 참석을 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조끔 양보를 해 주십소사 하는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노상 약을 잡순다던지, 노상 들랑달랑 하신다던지 해 가지고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끼칠 만한 그만큼 건강이 안 좋으신 분도 마음으로야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프니 아플지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아프고, 죽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죽어야겄다. 똥을 싸서 뭉개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내가 뭉개야겠다' 이런 정도의 신심을 내시는 것은 참 훌륭한 생각이지마는,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큼이라도 피해가 가서는 안 되겠다 하는 이러한 숙녀(淑女)다웁게 해 주셔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제 생각 같애서는, 저 개인의 생각 같애서는 '연세가 많은 분도 여기서 돌아가시면 여기서 초상을 치러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게 될수록에 오셔서 좀 참선해 주십소사' 이런 생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왜 그러냐?

나 자신도 지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지끔 50여 세지마는 머지않아서 곧 60이 되고, 머지 않아서 70이 되고, 그때까지 살게 될랑가 또 모릅니다마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어서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는 아니 되고, 노인이라고 해서 푸대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끔 제가 말씀드린 것은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노인의 대접을 해 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좋게 제 말씀을 이해를 하시고, 여름 결제 방부할 때에는 자진해서 잘 대중을 위하고, 용화선원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뜻으로 저의 말씀을 깊이 참작을 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하실 수 있는 분, 그분만 또 방부(房付)를 들여 주셨으면 그런 생각입니다. 한 달도 그전에는 한 달도 좋고, 일주일도 좋다고 이렇게 말씀드렸지마는 수효가 70명 정도 이렇게 방부를 들여 놓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래 선방(禪房)은 한 번 방부 들이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가들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하 없이도 죽비, 입선(入禪) 죽비(竹篦)를 치면은 방선(放禪) 죽비 칠 때까지는 방안에 사람이 나가지를 못하고, 한 번 죽비를 입선 쳐 버리면 밖에 사람이 방안에를 들어가지를 못하고, 방선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격한 제도가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 할머니들 공부 좀 해 보시다가 그 인연(因緣)이라도 맺고 정법(正法)에 씨를 심게 해 드리기 위해서 조끔 문을 널찌막하니 열어 놨었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너무 규칙이 문란해.

죽비를 치거나 말거나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옷을 벗어서 걸고 싶으면 걸고, 다락에도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이렇게 해서 전혀 규칙이 없고, 심지어는 입선 중에도 떠억 드러누워서 코를 골고 조신 90 먹은 할머니도 계신 걸로 압니다마는 나는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맙고 감사하고 기특하고 이쁘고 그런 생각마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방은 선방인 만큼 최소한에 규칙이 있어야겠고, 제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내가 늙었다고 나를 괄세하는구나. 나는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나는 여기 본토백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내가 누군데, 종 불사할 때 내가 돈을 얼마를 시주를 하고, 이 법당 지을 때 내가 얼마를 시주한 사람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조실 스님 돌아가신께 인자 다 소용이 없구나' 혹 이렇게 노엽게 생각하실 분이 혹 계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그렇게 노엽게 생각하시지 말고,

그동안 5년 동안,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 5년 동안 내가 어떻게 해 왔는가를 보시면은 그 저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신다면은 그렇게 노엽게는 아니 생각하실 줄 믿고.


이 선방을 운영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충이 있어서 이 선방을 위하는 뜻에서—또 와서 정진한답시고 다른 사람 정진하는 데 방해를 치게 되면은 자기 공부는 10원어치나 하고, 죄는 만 원어치나 짓게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깊이 참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올 여름철에는 결제날은 5월 15일에 합니다. 방부를 들이실 분은 미리 방부를 들이시고, 결제날은 방부를 받지를 아니하고 결제 이후에도 방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착순으로 할 수밖에는 없지 않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렇다면은 오늘부로 방부가 다 들어와 버리고 한 20명 가량, 많해 봤자 스물다섯 이상이 넘어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넘게 되면 어떻게 하냐? 제비를 뽑자고 그런 말까지도 나왔습니다. 많이 오셔서 반갑고 좋지마는 방이 좁은 것이 한이올시다.


그래서 구참 보살님네들은 조실 스님 법문도 들을 만큼 들었고, 참선도 그만큼 하셨으니까 기초가 다 잡혀서 집에서 가만히 시원한 데서 누웠다 앉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정진하실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법회 때 나오셔서 법문 듣고 정 또 돌아가시기, 바로 그날 가시기가 안 되었으면 며칠 쉬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구참 보살님다웁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이 말씀을 듣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시면, 내생에 지옥에 또는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아무리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9분36초~1시간11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상월만공산~ / 용홧에서의 기도는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 / 기도는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 /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공리(空理),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된다 / 부처님, 조사들의 경지에 도달해야 /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다못 화두 거각해서 의단독로하여 통 밑구녁 빠진듯이 의단타파 /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 자연식(自然食) 권장.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공부 / 연세가 많은 분들은 대중생활이 어렵고 또 보살선방의 방이 좁으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끔 양보하시길.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몸뚱이를 매우 애착하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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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2. 22. 13:09

((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58분)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9분.

(1/3)----------------

 

지난 음력 8월 24일에 뵙고, 한 달 만에 참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됩니다. 다른 달에는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법회가 열리지마는 8월과 9월은 한 달에 한 번씩, 한 번 밖에는 법회가 들지 안 했습니다. 오랜만에 뵈니까 좀 반가운 거 같습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정법(正法), 여러분들이 잘 들으신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 정법이냐?

언필칭 말하기를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다. 어느 절에 간들 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부처님은 한 부처님인데' 이런 말씀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지마는, 그 부처님의 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한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한 법이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고, 삿된 외도법(外道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은지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믿어도 스승을 잘 못 만나고, 믿기를 잘못 믿고, 행하기를 잘못 행하면 일생을 믿은 불법(佛法)이 정법을 믿지 못하고 사법(邪法)이 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정말 일생을 그렇게 돈독하게 불법을 믿고, 그렇게 간절히 불법을 믿었지마는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 행하므로 해서 일생을 삿된 불법을 믿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믿고 불법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는, 신앙을 하는 우리 불제자(佛弟子)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은 그 많은 시간을 그 많은 정성을 바쳐서 '부처님 신도다, 불교의 신도다' 하면서 일생을 헛되게 보내고. 삿된—'불법을 믿는다'고, 이름은 불법이지마는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삿된 외도법을 믿고 행하므로 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영혼이 과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고 가련하기 이루 다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우리 절에 구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여름 한 철을 참선을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을 그 부처님을 믿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 불교 신자 노릇을 했습니다.

 

허나 '참선(參禪)이 좋다, 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을 하면 그렇게 좋다' 이런 말씀을 어디서 듣고, 참선을 한 데를 한번 가서 같이 앉아서 참선을 해 보니까 아무 재미도 없고 졸음만 와 쌓어 그래서 '아! 이것 참선이라는 게 졸음이 와서 아무 맛이 없고, 그 할 것이 아니로구나. 참선이라는 게 천하 못쓸 것이로구나' 이리 생각하고서 다시는 참선을 할 생각을 아니하고, 그저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천수경을 읽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만 일생을 사시다가,

어떻게 해서 그 다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다. 참선을 잘 가르켜 주신 스님이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이 용화사에 와서 한 번 '구십이 넘었지마는 한 철을, 한 철만이라도 그 참선을 한번 해 보고 죽는 것이 한이 없겠다' 이렇게 해서 신청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그 처지와 그 말씀이 하도 참 고맙고, 기특하고 또 한편 우습고 그래서 "그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십 노인이 어떻게 이 대중선방(大衆禪房)에 와 가지고 석 달 동안을 새벽 세 시에서부터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마는 그 마음만큼은 참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은 좋으시다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다른 할머니들도 모다 하시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방부(房付)를 받아 가지고 한 철을 나셨습니다.

 

절에 다니셨다 해도 대처승 절에 그 불공이나 드리러 다니셨기 때문에 전연 선방에 규칙이나, 선방 생활에 대해서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착하고, 어질고, 점잖하고 그리고서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신 할머니였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방에 처음 나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무리가 없이 여러 수십 명 대중 보살님네들이 친어머니 받들듯이 그렇게 모다 친절한 마음으로 돌봐주시고 해서 한 철을 아무 무리가 없이 한 철을 지내시고서 참 기쁜 마음으로 환희심으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가 한 일주일 전에 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무 병환도 없이 앉아서 떠억 참선을 하시다가 고대로 허리를 구부린 채 임종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생에 신심이 돈독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그러셨기 때문에 이렇게 열반(涅槃)을, 정말 보통 말하기를, 병 없이 이렇게 앉아서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을 하신 것을 '조사(祖師) 열반이다'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마는,

어찌 조사라고 해서 꼭 병환이 없이 돌아가시란 법도 없는 것이고, 또 조사가 아닌 일반 세속 사람도 돌아가실 때 참 병환 없이 아주 임종을 잘하신 분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어서 돌아가실 때 꼭 병환이 있고 없는 것 가지고, 그분이 도(道)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마는, 그렇지마는 기왕이면은 임종할 때에 그렇게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병환을 겪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고 하는 것은 인생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할머니께서 일생을 착하고 정직하고, 남 적악(積惡)한 일 없이 어떻게 믿었던지 간에 부처님을 돈독히 믿으셨고, 마지막 판에 가서 이 용화사 선방에 와 가지고 한 철을—화두를 새로 타고, 앉는 법을 새로 배우고, 발우(鉢盂) 펴는 법을 새로 배우고 이렇게 해서 한 철을 잘 지내신 그 공덕으로 해서 이 할머니는 결정코 내생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해 가지고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귀의하셔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셔 가지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과연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정법에 귀의(歸依)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구십 평생을 불법을 믿고 사셨지마는 일생 동안을 그 무당과 비슷한 대처승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이나 드리고 복이나 빌고, 그렇게 일생을 지내시다가 구십 평생의 마지막 해에 가서 참선법을 믿고 몸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시다가 끝을 마치신, 그렇게 정법 만나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문중에 귀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한 과거에 숙연(宿緣)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정법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일러주어도 좀해 그것이 좋다고 하는 생각까지는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편설(方便說) · 외도(外道) · 사법(邪法)에는 그 귀가 솔깃하고 그래 가지고 거기에는 물심양면으로 거기서 시키는 대로 아주 죽은 형용까지도 하면서 미쳐서 혹(惑)해 반해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정법문중에 들어와서는 한 번 두 번 들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는 안 와 버리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볼 때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고 누렇게 꽃이 핀 그리에만 눈을 주기가 쉽고, 땅속에 묻혀 있는 나무에 뿌리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몸뚱이나, 가지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전부 그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데에는 도저히 가지가 뻗을 수가 없고, 잎도 필 수가 없고,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사법에 의지한 사람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얻어진 것 같고, 재미가 있고 곧 크게 소원을 성취할 것 같지마는 해가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허망한 삿된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법에 빠진 사람은 곧, 당장 무슨 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혹해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웃 · 친구 · 일가친척을 전부 끌어들여 가지고, 거기 장에 사람이 모이듯 사람을 끌고 들어가서 미쳐서 어쩔 줄 모르지마는 머지아니해서 거기에는 실망과 낙망과 후회의 눈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법문중, 불법문중에 있어서 선방편(善方便)과 그러한 외도에 사법(邪法)과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점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서 전연 방편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고 대뜸 첫걸음부터서 정법문중에 귀의한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있을 정도고, 대부분은 방편문에 의지해서 걸려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4년 절에 다니고 법문을 듣고 하다가 차츰차츰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편에 의지해서 일단 불법문중에 들어왔다가 그래 가지고 차츰 좋은 도반(道伴), 좋은 스승을 의지해서 정법으로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서 49년 동안을 꼭! 이 정법만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법문이 방편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방편이 아니면은 중생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에 의해서 전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46초)

 

 

 

 

(2/3)----------------

 

방편 자체가 악(惡)하고 선(善)하다고 하기보다는 그 방편을 쓰는 법사, 스승, 선배에 첫째 문제가 있고, 둘째에 가서는 그 방편에 걸려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성이 삿되고 바르지를 못해 가지고 그러한 악방편만 솔깃하게 생겨 가지고 혹해서 미쳐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방편을 쓰는 편에서 그 법사나, 승려나, 선배가 일시적으로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되, 적당한 기회에 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어떠한 이권에 욕심을 가지고 그 방편을 계속 사용해 가지고 신도를 꼼짝 못하게 방편으로 얽어매 두는 그러한 스승을 만나 가지고 일생을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런 방편법, 악방편에 얽매여 가지고 불교 신도 노릇을 하다가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동안에 어떻게 불법을 믿었던지 간에 또는 과거에 어떠한 숙연이 있던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이 법보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정법에 관한 법문을 설하신 것을 녹음을 통해서 듣고, 그 설법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다행할 길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 그리고서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좋은, 아주 좋은 약을 만병통치(萬病通治)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좋은 약을 만나 가지고서도 그 약을 먹지 아니하고 팽가친 채 병고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겨서 열심히 시간을 아끼고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일초일초, 일분일분을 철저히 실천 수행하므로 해서 우리의 무량겁으로부터서 걸려 가지고 신음해 오던 그 중생의 고질병을 금생에 뿌럭지를 뽑아서 근치(根治)를 해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살 활(活)' 자, 활구참선. '죽을 사(死)' 자, 죽은 사구참선, 활구참선은—이론과 어떠한 이로(理路), 어로(語路),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러한 참선은 이것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한다 해도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이 아니고 사구참선입니다.

사구참선은 죽을 때까지 무량겁을 해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단 일 분을 하고,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참선을 할 바에는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아무리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모든 경전을 종횡으로 육두 백판으로 외우고 교리적으로 환히 안다 해도 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그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상식 그러한 것을 이 참선에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이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 화두를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래가지고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러한 뜻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 이론 따지는 그것을 놔 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화두 '이뭣고?'

'이뭣고?'면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 화두, 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화두로 타신 분은 그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무슨 화두가 되었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화두 하나만을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비단 앉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걸어 다닐 때, 밥 먹을 때, 똥 눌 때, 소지할 때, 빨래할 때, 또는 차를 탈 때,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기쁜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불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어떤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또는 사람이 지나간 것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구름을 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또는 귀를 통해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듣거나, 어떠한 것을 보건 듣던 간에 그때 그때마다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참선 수행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당장 그 보는 데에 따라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뭣을 들으면은 그 듣는 일로 해서 바로 나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듣는 그 건으로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10년 전으로 올라갔다가, 5년 전으로 내려왔다가 그러다가 공연히 속이 활딱 뒤집어졌다가, 혼자 웃었다가, 썽났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그러한 식으로 망상(妄想) 위에다가 또 망상의 가지를 피우고 그 망상 위에 또 망상의 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골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가 그 지나간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생각 한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도 딴 데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차곡차곡 우리의 마음자리, 제팔식(第八識) 속에 고대로 녹음(錄音)이 되는 것입니다.

 

녹음이 되고, 그 저장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종자(種子)가 되고 원인(原因)이 되어서 앞으로 무량겁 윤회가 그 종자로부터서 그 원인으로부터서 윤회(輪廻)가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한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한 행동으로 해서 다시 또 생각이 거기에 이어지고, 생각과 행동이 서로—새끼가 왼손에 쥐었던 짚이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오른손에 잡았던 짚이 왼손으로 건너가고 그래서 이렇게 그 손이 움직여짐에 따라서 새끼가 꽈지듯이,

한 생각이 행동으로,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참선을 하지 아니한 범부 중생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 봐야 하고,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듣기 마련이고, 보고 들음으로 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사람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이 법을 충실히 이 법을 본업(本業)으로 해서 열심히 살아간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일, 또는 염불을 하는 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기도를 하건, 어떤 경전을 반야심경을 외우건 또는 천수를 하건, 그 밖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건, 또는 오후불식이나 일종을 하건, 또는 방생을 하건, 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공덕을 하건, 또는 노인이나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가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좋은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닦는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정법을 닦지 아니하고 계행(戒行)만을 위주해서 닦음으로써 일생 수행을 삼는다던지, 염불을 해 가지고 극락 가기만을 바래 가지고 일생을 염불만을 한다던지, 또는 어떤 주문을 외워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기 위해서, 주문에 의지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전전긍긍을 한다던지, 기도를 해 가지고 아들딸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래고 그러한 물질적인 것, 모냥이 있는 것에 얽매어 가지고 계속 기도에 미쳐 가지고 돌아댕기는 그런 분.

 

절을 많이 하면은 업장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 해 가지고 삼천배, 사천배 절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하루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면은 세세생생에 부자로 살고, 업장이 소멸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니까 평생에 오후불식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일종(一種)을 하면 좋다니까 일종을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냥이 있는 착상구불(着相求佛), 착상 수행, 상(相)에 착(着)해 가지고, 모냥에 착해 가지고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그러한 불법을 믿는 사람, 이것은 모두가 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방편의 올개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에 의지한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똑같이 계율을 지키고, 똑같이 염불을 하고, 똑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보시 공덕을 쌓고 방생을 한다 하더라도 정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불을 하지 말아라. 천수를 외우지 말아라. 『반야심경』을 외우지 말아라. 『금강경』을 독송하지 말아라. 방생을 하지 말아라.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하지 말아라. 또는 노인에 보시 공덕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형편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시라는 겁니다.

하되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그 마음으로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뻑뻑이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일체 보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하는 그 자체는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마는, 그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20분47초~38분35초)

 

 

 

 

(3/3)----------------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활구참선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론적으로 따지고, 경전에 있는 교리를 등용을 해서 따지고, 자기가 어떤 스님한테 들은 법문을 듣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따져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구나! 아!'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마침내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이기 때문에 영원히 해 봤자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가운데 '화두(話頭)는 어떠한 책이나 잡지나 신문, 그러한 데에서 보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화두를 선택하지 말고 반드시 선지식에게 딱! 하나를 받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어디서 지내가는 말로 듣거나, 책에서 봐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한 화두는 해 나가다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 화두가 좋은가, 나쁜가?' 자꾸 스스로 그것을 혐의를 하고 의심을 해 가지고 중간에 갈팡질팡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가 크게 장애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화두를 딱! 지정을 받아 가지고 한 번 받았으면은 다시는 그것을 변경을 하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때까지 일여(一如)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떠한 화두라도 처음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곧 잘될 것 같다가 얼마 동안 해 가면 영 답답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점점 화두가 들리지 아니하면서 그 애를 먹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딴생각을 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써서 한 생각 한 생각, 일 분 일 분을 법(法)답게 간절히 공부를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반드시 그렇게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치도록 애를 먹혔던 그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정말 제절로 화두가 들리면서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되어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간다 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생각 '아! 인자 되었다. 참! 좋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되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마는 그 생각이 고약한 망상 중에는 최고 가는 고약한 망상인 것입니다.

 

보통 때,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른 것은 뿌리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절로 없어지지마는, 공부가 한참 잘되어 갈 고비에 이르러서 '아! 참 좋다. 아! 이렇게 계속 잘되었으면' 아, 이러한 생각을 낸 것은 고비를 넘을려고 한 판에 뒷걸음질을 쳐서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것과 같애서 그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갈 때에 그러한 생각 내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 같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최고로 고약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도 짜증을 내지 말고, 공부가 잘되어 가도 좋아하는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한결같이 이 화두를 들고 나가되, 잘 안되어갈 때—가슴이 답답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몸이 뒤틀리도록 괴롭고 지루하고 이럴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그 길을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하는 가운데에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면 다시 또 방석에 가서 또 정진을 하시는데.

 

이 화두를,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그 환성지안 도사 당시에 월봉 스님이라고 하는 대강사인데 그분이 『원각경』에 있는 말씀 한마디를 법문하신 가운데 잘못 설(說)해 가지고 그 과보로 해서 환성지안 선사에 그 한마디 고함 소리에 금강역사(金剛力士)에, 금강신장(金剛神將)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철퇴를 맞고, 피를 토하고 꺼꾸러진 내용에 법문을 들으셨습니다.

법문(法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설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그 법문 한 시간 동안에 걸친 가운데에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충 그 말씀 가운데에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내 노릇 하시면서, 남편 노릇 하시면서, 엄마 노릇 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질 것이 없습니다. 되건 안 되건 따질 것 없이 자꾸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일상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화두를 들 줄 알고 여법(如法)하게 공부를 지어 나가면서 하시면은 사회생활도 썩! 괴롭지마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도 한량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아니한 사람에게는 기쁜 것도 그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六途輪廻)에 윤회의 원인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더군다나 괴로운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면서 하는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그 자체가.... (녹음 끊김)

 

 

돌아오는 10월 보름날이, 음력 10월 보름날이 백일기도 입재 날이면서 동시에 용화사 법보선원 결제 날입니다. 그날도 법회가 있으니 만큼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서로 권고해서 그날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결제에도 동참을 하시고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2시에 인천시민회관에서 불교도들의 새마을운동에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스님네와 많은 신도님네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래고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도 몇 분의 스님이 참석을 하실 것이고 또 여러 신도님 가운데에도 될 수 있는 한 여기서 멀지 아니한 곳에 있으니깐 거기에 잠깐 참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독교 단체나, 천주교 단체에서는 그러한 모임에 많이 성의를 가지고 참여를 하시는데 불교 단체 특히 우리 용화사에서는 한 분도 참석을 아니하신다고 이러한 그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마는 될 수 있으면 참여를 하셔서, 지끔 우리나라가 선진 대열에 서기 위한 비약을 하기 위해서 온갖 면에 있어서 그 활발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의 하나가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입니다.

특히 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선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교 대한불교 조계종의 한 방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래고.

 

그다음에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 그 조경—조경(造景)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문화 주택을 가서 보시면은 마당에 돌과 모다 나무, 그런 것을 잘 심어서 보기 좋게 만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고궁 같은 데나 그런 데를 가서도 보시겠고 그런데 그것을 조경이라고 그럽니다.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 마당에다가 돈 들여서 좋은 돌이나 나무를 심어 놓고 사치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조경의 근원이 그러한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화엄경』 도리가—불경(佛經) 중에 최고의 경전이 바로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은 일월성진(日月星辰), 해와 달 · 별 · 산천초목, 이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몸뚱이요, 바람 불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하는 이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의 설법이라고 하는 내용의 진리가 바로 『화엄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경』의 진리, 진리인 우주 자연을 그것을 내 조그마한 뜨락에 구현을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뜰에다가 바위 뾰족하고 둥글고 모나고 삐뜰어지고 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바위를 적재적소에다가 갖다가 배치를 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조화가 되게 나무를 적당히 심음으로 해서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내 뜰안에서 우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주 자연에 신비스러운 진리를 그 하나의 돌을 보고 하나의 나무를 봄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조경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 아무나 시켜 가지고 정원사들을 시켜서 이러쿵저러쿵 묘하게 정원을 꾸민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볼 때에, 아는 사람이 볼 때는 퍽 가소롭기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조경 학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에 권위자이신 90세가 넘으신 운정 한도 박사께서 그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실 때부터서 여기를 여러 차례 왕래하셨고, 조실 스님도 그 한도 선생, 한도 박사가 계신 그 토굴에 왕림을 하셔서 서로 친한 교분이 계시고 또 조실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도 저도 그 한도 선생 계신 데를 여러 차례 갔고 또 그 한도 선생도 우리 법보선원에 여러 차례를 오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유교 · 불교 · 도교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조경을 그러한 불교에 『화엄경』의 진리를 그러한 조경을 통해서 표현을 하자. 사찰에 조경도 그렇고, 일반 불교 신도에 가정도 역시 그렇게 하고, 고궁도 그렇게 표현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그 조그마한 뜰안에서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봄으로 해서 거기에서 진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참, 오늘날에 불교의 진리를 펴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항시 역설을 해 오셨습니다.

 

그 선생님 밑에는 각 대학교수, 사회에 저명인사들이 모다 그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서 제자의 입장에서 그 자연취미회라고 하는 것을 조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취지로 해서 자연취미회에 여러분들도 가입을 하셔서 좋은 조경을 구경도 하시고 또 여러분 가정에 그러한 조경을 하시게 될 경우 이러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하시게 되면은 같은 힘을 들여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리에 부합이 되도록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이 자연취미회에 가입을 하셔서 그러한 선생님 높은 선생님들의 좋은 강의도 들으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을 순화하고 그러한 조경 자연취미를 통해서 천진무구한 비로자나 법신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자연취미회에 발기회에 그 회원께서 여러분에게 가입하시도록 말씀을 하시면은 될 수 있으면은 그런 데에 가입을 하시도록 권고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계속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 (38분37초~57분13초) (끝)

 

 

 

 

[법문 내용]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 90 넘은 노보살님의 한 철 참선수행.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 / 조사(祖師) 열반 / 정법은 근본적인 것, 나무뿌리, 실다운 것. 사법은 지엽적인 것, 끝 가지, 허망한 것.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 모두가 다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 선방편(善方便)과 악방편(惡方便).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선방편. 방편에 얽어매 두면 악방편 /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 수행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정법(正法),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사법(邪法).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 / 착상구불(着相求佛),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상(相)에 착(着)한 수행은 방편에 얽매인 것 /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공부해야지, 늙어서 기운 없을 때는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다 / 조경(造景)은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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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51~75)2020. 12. 20. 18:41

((No.066))—1978년(무오년) 신수기도 회향(78.01.09.음) (52분)

(1/3) 약 19분. (2/3) 약 17분. (3/3) 약 16분.

(1/3)----------------


무오년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사대부중(四部大衆),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 더욱 몸 건강하시고, 모든 크고 작은 소원 차례로 성취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견고(信心堅固)하셔서 참선 공부 잘해 가지고 결정코 이 몸으로 견성해탈(見性解脫)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러한 뜻으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초삼일부터 초아흐레 날까지 7일 동안을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연례행사로 신수(身數)기도를 봉행해 내려왔습니다. 금년도 역시 날씨가 그렇게 강추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께서 이 7일 기도에 참여하셔서 정말 성심성의껏 기도를 봉행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을 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라든지, 염불이라든지 또는 경을 읽는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이 전부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正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의 하나입니다.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정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정법에 들어가서 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법(法)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중생이 각기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지 걸려들기만 하면은 드디어 정법 문안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차례차례 층계를 놔 놓으셨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문에 들어오셔 가지고 들어오시자마자 금방 정법에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듣고 참선을 하실 수 있는 그러한 선택된 부처님 제자가 되신 것을 나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그 방편문에만 걸려 가지고 3년, 5년, 10년 내지 일생을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그 방편의 단계에서 머물러서 계속 눈앞에 조그마한 복(福), 오욕(五慾)을 충족시키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데에 머물러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가엾은 그러한 신도들이 아직도 한량없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설한 이 법은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떼배와 같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떼배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는 데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소중한 기구입니다. 그 배가 없으면은 그 넓은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필요한 것이지마는 일단 그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배를 계속 버리지를 못하고, '그 배로 인해서 내가 이 강물을 건넜으니까 얼마나 고마웁고 소중한 것이냐, 그러니 나는...' 이 배를 버리지를 못하고 계속 육지를 다니면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돌아댕기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은 우습고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어느 불자(佛子)라도 전부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는 그러한 작은 배, 조끔 더 큰 배, 한량없이 여러 개의 배를 타고 또 물을 건너고 또 타고 물을 건너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오셨습니다. 이 자리는 배를 짊어지고 걸어 다니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라, 그 많은 배들을 깨끗이 그 강가에다가 버리고서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이 맨몸으로 이 자리에 나오셔야 됩니다.


그릇 속에 물건을 담을 때, 그 그릇 속에 어떠한 물건이라도 그릇 속에 채워져 있으면 그 그릇은 다른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담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필요할 때 담고 또 그것을 바로 비워 놓아야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을 또 담을 수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참선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살림살이 모든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바른 참선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수십 권, 수백 권의 경(經)을 다 읽어서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을, 그러한 능력을 속에다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은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육두 백판으로 다 외우고 다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심(衆生心)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나의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금가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 금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었을 때에는 그 눈은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밥이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있을 자리 가 있어야지, 밥이 기도(氣道)로 콧구먹으로 들어간다든지 눈 속에다 집어넣어 가지고서는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순치황제가 중국에 천자(天子)로 19년 동안이라고 하는 세월을 참 훌륭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한 천자가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순치황제의 출가하셔가지고 읊으신 시(詩)를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일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순치황제는 전생에 인도(印度)에서 도를 닦던 한 참선하는 스님이 어쩌다가 '한 생각' 잘못 먹어가지고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습니다.


도를 닦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생각 자칫 잘못 먹어가지고 일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 생각 잘 먹어가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한 한 생각을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 그렇게 해서 일생을 지내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중생의 생애이지마는 제일 소중하고 무서운 것은 이 '한 생각'인 것입니다.


금은보화,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출을 했다가 여러 날 만에 집에를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등잔불이 어슴프레 켜진 가운데에 자기 아내가 어떤 스님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대번에 분이 나가지고 부엌에 쫓아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을 칼로 요절을 내려고 하다가 잠깐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생각을 했습니다.


오다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보따리를 피어 놓고 떠억 사주(四柱) 관상(觀相)을 보고 있는데, 자꾸 그 사람이 “여보시오, 여 사주 하나 보고 가시오”

“아, 나, 사주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한 번만 보고 가시오”

“에! 안 본다”고.


“거저 봐줄 테니 한 번만 보고 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면 좀 봐주시오”


"당신..."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별말 안 하고 ‘참을 인(忍)’ 자, 하나를 손바닥에다가 떠억 먹으로 써줬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물로 씻지 말고 닦이지 않도록 가서, 어떠한 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이 손바닥을 반드시 펴 보시오"


아, 그런 일이 문득 생각이 나가지고 ‘우선 칼로 목을 먼저 찌를 것이 아니라, 대관절 어떠한 사연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번 알아보고 죽여야지, 자고 있는 놈을 다짜고짜로 목을 찌를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칼을 한 손에다 쥐고서 이불을 걷어 제끼니까, 깜짝 놀래 가지고 두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라, 너는 이놈 어떤 놈이냐?”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남자 스님이 아니라, 친정 사촌동생이 과부가 되어가지고 출가를 해서 중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여기를 지내다가 내 집에 들려서 이야기하다 오늘 하루저녁 자게 되었다”고.


아! 그래서 그 손에다가 써진 ‘참을 인(忍)’ 자를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그걸 보고, 평생토록 그 ‘참을 인(忍)’ 자를 손바닥에 써진 그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다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경솔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그렇게 신경질을 잘 내고 그렇게 경거망동을 하던 그 사람이 일생 동안을 참 신중하고 아량이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은 아내 죽이고, 그 스님을 죽이고, 자기도 사형을 당해가지고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될 그러한 중대한 문제, 그것이 바로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 그 사주는 보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생각을 잘못 생각하신 것이고.


신수기도를 일주일 동안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습니다마는 이 신수기도를 우리 절에서 안 하면은 이 가운데에 계신 대부분 보살님네들은 모다 무당절, 또 가서 법문도 듣지도 못할 그러한 절에 가서 별별 이상스런 그 부작(符作) 같은 것을 많은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리고 겁나는 협박적인 그러한 말을 한마디씩 듣고서 돈은 빼앗기면서 일 년 동안을 전전긍긍 불안에 떨면서 살지 아니하면 안 될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질까 두려워서, 신수기도를 우리 법보선원에서도 봉행을 하고 그리고서 입재(入齋) 때와 회향(廻向) 때에 정말 부처님의 정법을 여러분들에게 설(說)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빠질 것을 미리 방비하고, 나아가서 일 년 동안을 정말 바른 신심으로 안심하고, 장애 없이 잘 사시는 길을 여러분들에게 열어드리기 위해서 신수기도를 봉행한 것입니다.(처음~18분30초)





(2/3)----------------


'선방에서 무슨 기도를 한가? 기도는 참선하면은 그만이지 무슨 기도를 한가?'

여러분 가운데는 오래전부터서 참선을 하셔서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떠한 것은 정법(正法)인가를 잘 아시는 분들은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어떠한 방편이라도 바른 법을 가지신 분이 쓰면은 그 방편이 바로 정법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 하더라도 삿된 사람이 쓰면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이라도 정의를 가진 사람이 들면은 사람을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살리고 할 수 있지마는, 도적이 삿된 도적이 그 칼을 가지면은 선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큰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법(法)도 또한 그러해서 바르게 쓰면은 좋은 법이 되지만, 악한 사람이 잘못 쓰면은 많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7일 동안 정성스럽게 잘 마쳐서 과거에 여러분들께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또는 많은 허물이라도 있으신 분은 이 기도를 통해서 깨끗하게 소멸(消滅)이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기도를 하시고 다시 일 년 동안을 정법에 의해서 수행을 잘하실 것을 다짐하셨기 때문에 새로 죄를 짓지 않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동안 십악참회(十惡懺悔)도 아울러서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저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트인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청정하고 깨끗한 그러한 마음자리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자리가 앞으로 흐려지지 않도록,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단속만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인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대승(大乘)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이 대승보살의 과제입니다마는 그 육바라밀이 첫째, 보시(布施)를 할 것, 둘째, 계율(戒律)을 지킬 것, 셋째에 인욕(忍辱)을 할 것, 넷째에 정진(精進)을 할 것, 다섯째에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할 것, 여섯째, 지혜(智慧)를 닦을 것. 이렇게 육바라밀, 여섯 가지 저 언덕에 건너가는 좋은 법입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를 했댔자 그것은 유루복(有漏福)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계율을 지켜도 지혜가 없이 지킨 계율은 천상에는 태어날 수 있지마는 금방 복(福) 다 받으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욕도 지혜 있는 인욕이라야지, 어리석게 억지로 참기만 위주로 해서 한다면 단박 가슴이 아프고 목이 아프고, 골치가 아프고, 가슴앓이 속병이 생겨가지고 결국은 병만 쳐주고, 그 억지로 참은 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일생 동안을 억지로 참다 보면 나중에 여러 번 참다가 그놈이 축적이 되어가지고 터질 때는 무서운 위력을 내가지고 자기 신세 망치고, 집안을 쑥대밭을 맨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환자가 되어가지고 늙발에 한숨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면은 '꼭 절에 와서 그래가지고 조용하니 죽비(竹篦)를 치고 앉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일이 많아서 참선은 못 합니다' 이렇게 노상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참선은 일이 많고 적고 그것도 상관이 없고, 차 속이나 또는 시장 바닥이나 가정이나 또는 절이나 어디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참선은 앉고 눕고 또는 서서 걸어 다니고 그러한 위의(威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웠어도 생각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앉었을 때에도 생각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번갈아 드나들고, 걸어 갈 때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만큼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악한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무슨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무슨 생각 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 그놈을,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운 생각, 억울한 생각, 슬픈 생각 그러한 생각이 속에 꽉 차 가지고 그 생각을 없애야만 참선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못한다' 이리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아직 참선하는 법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슬픈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무엇이 들어서 그 슬픈 생각을 하는가? 「이뭣고?」

몸이 아파도—'몸이 아파서 공부를 못합니다'—몸이 아픈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무엇이 그렇게 아픈 줄을 아는가? 그 아픈 줄 아는 생각만 있으면은 그 사람은 참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노여움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참선을 잘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을 합니다.

슬픈 생각도 없고, 괴로운 생각도 없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없는 목석(木石)처럼 그러한 사람은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가지고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이나 갖다 놓을까, 아무 쓸데가 없죠?


그러나 욕하면 썽낼 줄 알고, 신경질도 잘 내고, 슬픔에 가슴이 꽉 차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행복이 무엇인 중을 모르고, 육체적으로 온갖 병이 들어 있고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아가지고 정말 정신과 육체가 한목 병들어서 죽을 길밖에는 없다고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일수록에 이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바른 스승을 만나가지고 죽을 셈 치고 대들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훨씬 더 도(道)를 깨닫기가 쉬웁고 좋은 것입니다.

그만한 인생을 전부를 아주 포기할 그러한 막바지에 도달한 그 사람은 한번 이 문에 들어와서 정법을 만났다 하면 다시는 다른 데에 정신을 빼앗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누구라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마는 정말 이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다시는 딴 데 한눈을 팔지 아니할 만큼 그만큼 절실한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 점이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내가 지금 울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바로 이놈이 나의 불성(佛性)이요, 나의 마음자리다. 이것은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조끔도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날까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법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열심히 도를 닦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생사(生死)에 윤회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다행히 이 법을 알았으니 이제 어디에 이 몸과 목숨을 바칠 곳이 있는가? 오직 나는 이 한 법을 위해서 이 목숨과 이 몸을 다 바칠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도 그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분은 이 자리를 기해서 철석(鐵石)같이 그 신념을 가지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신념을 가지시기를 저는 간곡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 신념이 있은 위에라야 우리의 공부는 바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둘째로 필요한 것은 분심(憤心)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 과거에 부처님과 많은 성현들은 진즉 이 법에 의지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하셔가지고 중생 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그러한 불보살과 성현들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맴돌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심을 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도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은 분이 나서 집에 와가지고 울면서 숙제를 하고 그래가지고 밤잠을 안 자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다음에 시험 볼 때는 더 잘할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벌써 아들과 딸을 둘씩, 셋씩, 다섯씩, 여섯씩 나서 키워 가지고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내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만나가지고 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돈, 이웃집은 돈을 잘 벌고 자기는 잘 못 버는 그런 것을 보고는 입을 삐쭉빼쭉하고 시기를 낼 줄 알면서 내가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이 참선에 대해서 그러한 분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이것은 가엾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 참선은 언제나 저는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보살님네들, 한 분이 잠을 조끔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려고 애를 쓴 분이 있으면 자기도 따라서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데에서 반드시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여러분들도 자기의 친구, 이웃, 아는 분들이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쪼개서 정진하려고 애쓰는 분이 있으면 그이를 헐고 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샘을 좀 내서 '나도 그 사람에게 지지 않고 더 공부를 잘하리라' 하는 이러한 선의의 경쟁심을 내고, 서로 충고하면서 보다 더 공부에 유익하도록 충고하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8분31초~35분40초)





(3/3)----------------


첫째, 신념. 둘째, 분심. 그리고 셋째에 가서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話頭), 화두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간절하고 철저한 의심 덩이[疑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두 가지로 노나서 가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보고, 설교를 많이 듣고 하는 또 다른 또 학식이 있고 그런 사람은 노상 어떠한 문제를 당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 가지고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따져서 결론을 내려야만 결론을 얻어야만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활구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참선을 다른, 사회의 어떤 수수께끼나 어떠한 문제들과 같이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지을려고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참선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활구참선이 아니라 사구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훌륭한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의 알음알이는 아무리 좋은 그럴싸한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금가루도 눈에 집어넣으면 안질(眼疾) 병이 생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속에다 넣고 이리저리 중생심으로 그것을 따둑거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중생의 경지, 중생심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를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그러한 사람은 두고두고 육도윤회를 할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빨리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解脫)하고자 하시는 분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버릇을 놔야 합니다.


다못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몸이 아플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슬픈 그 마음도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이고, 썽내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바로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갈 때 불같이 일어났던 그 썽내는 그 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해탈도로 들어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차츰차츰 마음이 착해지고 마음이 비워져서, 바로 속에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이 가뜩 들어있는 채, 불보살의 경지에 가까와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꾸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을 보통 내게 있는 돈과 물질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보시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참보시'가 아닙니다. 참보시에 들어가는 껍데기 보시, 초보적인 보시에 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참보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말을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편안함을 얻게 하고,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아는 대로 일러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할 수 있는 동기가 되도록 해주는 그런 것도 역시 보시가 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보시는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일체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 또한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는 물결을 고요하게 만들려면 그 일어나는 물결을 없애려고 손을 대서는 아니 됩니다. 손대면은 다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모든 물결을 빨리 없애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성현들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에 의지해서 닦고 닦아서 오늘에 전해진 가장 훌륭한 법인 것입니다.

이 법(法), 한 법에 충실히 철저히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 간다면 육바라밀도 그 속에 갖추어 있는 것이고,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읽고 또 읽고 한 그 공덕도 그 속에 바로 갖추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가지고서도 믿지 아니하고 계속 여러 가지 방편, 크고 작은 낡아빠진 배들을 짊어지고 팔도를 돌아다니고 60, 70년 동안을 그 썩어 낡아진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분이 계시다면은 당장 이 자리에서 그 배를,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놓으십시오. 벗어 놓고 간단한 「이뭣고?」 하나를 터억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 보십시오.

이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마는 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긴 기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기다릴 때 30분 내지 10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지루한가를 느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일 년, 이태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또 느끼게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는 것입니다.


7일 동안을 하루같이 성심으로 기도를 잘해서 마쳤습니다. 기도 법사스님께서도 정말 일심으로 기도를 봉행을 하셨고 여기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도 정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기도를 잘 봉행을 해서 오늘 회향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소원을 마음속에 간직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건 간에 그 일들이 가장 긴박한 것부터서 차례차례 다 성취되실 것을 저는 다시 한번 빌고 또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이 초아흐레니까 앞으로 6일 후에는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그날도 사시(巳時)에 법회가 열리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날은 작년 10월 15일부터서 시작한 겨울철 결제가 그날 정월 보름날, 90일 마지막 해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또 정월 15일에 또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또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나라 저 신라 때부터서 대보름날에는 그 찰밥, 오곡밥을 해서 천지신명과 조상과 모다 선영들에 다례를 올리는 날이고, 일체 재앙을 그래서 일체 재앙을 소멸을 하고, 소원을 또 성취하기 위한 발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 권고해서 법회에 참여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친 그러한 골에 들어가서 영원히 생사 없는 대해탈도를 증득하는 참선을 하고자 하노라. 이러한 내용에 게송(偈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게송을 들으시고 '아하! 참선을 하려면은 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그런 데에 들어가야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은 이 게송의 뜻을 정말 똑바로 아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시장바닥에서라도, 아들과 손자가 울고 똥을 싸서 뭉게는 그 속에서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 되는 것입니다.


심산유곡이라야만 된다면 산중에서 사는 화전민(火田民)들은 다 도인(道人)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살아도 신념이 없고, 분심이 없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백 년을 두고 산중에서 산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시장바닥에서, 사회 가정에서, 자기 있는 일터에서, 어데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35분43초~51분56초) (끝)





[법문 내용]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정법(正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 / 강을 건넜으면 배[방편]는 버려라 / 사교입선(捨敎入禪) / '한 생각' 단속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 / ‘참을 인(忍)’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 /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 그 지혜를 바탕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 /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한다 / 삼요(三要), 신념, 분심, 의심 /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 빨리 버리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 /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만든다 /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합니다.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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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1~25)2020. 12. 14. 11:24

((No.004))—1975년 동안거 결제 (75.11.17) (31분)

(1) 약 16분. (2) 약 15분.

(1)------------------


을묘년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법문(法門)은 무슨 이론을 배우기 위하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 공부 잘하기 위해서 듣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편(方便)이 있겠지마는,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 가장 요긴하고 가깝고 빠르고 한 그러한 최고의 방편이 활구참선법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조실 스님께 지도 받은 그 화두(話頭)를 큰 신심과 분심으로 바탕해서 의심을 일으키는 그 일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는 것을 훨씬 더 좋게 생각합니다.

그만큼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오늘 한 시간에 걸쳐서 들으셨으면은 불같은 신심(信心)과, 불같은 분심(憤心)과, 불과 같은 그런 의심(疑心)이 마음속으로부터 솟구쳐 오르고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목탁을 세 번 칠 테니까 금방 조실 스님으로부터 들은 그 법문으로 인해서 큰 의심을 간절히 일으켜서 화두를 한번 들어 보십시다.

"목탁 세 번 치세요"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 다시 그 법문을 듣고 다시 말씀할 바는 없지마는, 이 가운데에는 여태까지 다른 절에 다니시면서 이런 큰스님 법문도 많이 들어 보시지 못하고 이번에 처음으로 오신 그러한 신참보살님네들도 계시고 해서 그러한 분을 위해서 조실 스님의 법문이, 깊은 법문이 다문 조끔이라도 이해가 되시게 하기 위해서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까 환성지안(喚醒志安) 선사라고 한 큰 도인과 월봉 외도(外道)라고 하는, 월봉 스님이라고 하는 큰 강사 스님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월봉 스님이 처음부터 외도가 아니라 대강사 스님이요. 아주 훌륭한 국사(國師)가 될 만큼 그러한 존경을 받는, 많은 제자를 가지고 계신 그리고 설교를 그렇게 잘하실 수가 없는 그러한 고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글을 잘하고, 얼굴이 잘생기고,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마는 바로 부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원각경』에 있는 말씀 한마디를 올바르게 새기지 못해서, 환성지안 선사로부터 할(喝)을 입고, 금강신장의 철퇴를 맞고 피를 쏟고 꺼꾸러졌던 것입니다.


외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척하면은 그것이 바로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을 망해 먹는 외도가 되는 것입니다.


인도에 부처님께서 『백유경(百喩經)』이라고 하는 경전에 말씀하신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마음을 닦고, 부처님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참으로 바른 선지식을 만나서 바로 지도를 받아야만 옳게 깨달을 수가 있지. 바른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그릇 공부를 하게 되면은 아무리 열심히 하고, 밤잠을 자지 않고,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생명을 바쳐서 고행을 한다 하더라도 결단코 나를 깨달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허송세월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까지 모다 그르치고 결국은 불법을 망하게까지 된다고 하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백유경에 말씀하시기를, '나귀 젖을 먹으면은 대단히 맛이 좋고, 몸에 보약이 될 뿐만 아니라 수명장수하고, 온갖 병이 다 낫는다' 이러한 말이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 마을에 동장(洞長)이 멀리 여행을 갔다가 마침 어느 집에 나귀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가지고 바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가지고, 그 마을 사람들에게 "그 나귀의 젖을 먹으면 그렇게 좋다는데 내가 그 나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 나귀값이 어떻게 비싸든지 내 혼자는 살 수가 없고, 온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다 모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나귀를 사다가 그 젖을 짜 먹으면은 우리가 모다 병 있는 사람은 병도 낫고, 수명장수하고 참 몸이 건강해져서 일생을 참 행복하게 살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 동장이 똑똑하고 인격자고 그러기 때문에 온 마을 사람들이 그 돈을 백 냥씩, 이백 냥씩 모다 돈을 내가지고 그 나귀를, 그 동장을 시켜서 나귀를 사 오게 했습니다.

동장이 나귀를 떠억 사 왔는데, 무슨 나귀를 사 왔냐 하면은 숫나귀를 사 왔어요. 숫나귀를 뜨윽 사다가 며칠을 잘 멕여 가지고, 보리와 콩을 잘 삶아 멕인 다음에 마을 가운데 공회당 앞에다가 뜨윽 멍석을 깔고, 그 앞에다 나귀를 모셔 놨습니다. 모셔 놓고는 동장으로부터 온 마을 대표들이 나와서 생전 그 나귀는 처음 본 것이라 말만, 좋단 말만 들었지 그 나귀는 정말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그 대표자가 대여섯 분 나와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고, 대표자가 나와 가지고 구녁 있는 대로 주물러서 그 젖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주무르다가 무슨 액체가 나오면 그것이 좋은 줄 알고 입을 대고 막 빨아먹고 그랬습니다. 뒤에 가서 빨아먹다가 나귀란 놈이 처음에는 가만히 있더니 발길로 차서 동장이 대골통이 터져서 꺼꾸러졌습니다. 그래 어디 한 군데를 만지니까, 차츰차츰 늘어나더니 거기서 물이 막 나왔습니다.


하! 그러니까 나귀에 젖이 나온다고 그놈을 갖다가 바께스를 갖다 대고 그놈을 받았습니다. 받아 가지고 그놈을 서로 먼저 많이 먹으려고 달려든 것을 간신히 제지를 해 가지고 조끄만한 잔으로 조끔씩 조끔씩, 돈 많이 낸 사람은 조끔 더 멕이고, 적게 낸 사람은 조끔 멕이고 해서 그놈을 고루고루 노놔 먹었습니다.

먹으니까 쯥쯜한 것이 대관절 처음 맛본 것이라 '그래서 이것이 몸에 그렇게 좋구나'하고, 그걸 먹고서 온 마을 사람들이 '인자 나는 가슴앓이도 낫고, 이질 배아피 곱똥 설사도 낫고, 허리 아프고 엉뎅이 쑤신 디도 다 낫겠다' 해서 대단히 기분이 좋게 잠을 잤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그 마을을 지내갔습니다. 그러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또 나귀가 왔다 해 가지고는 그 나귀 젖을 좀 또 돈을 내고라도 좀 짜 먹자고 달라들었습니다.

"이것은 암놈이 아니라 숫놈이라 이것은 젖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 곧이를 안 들었습니다.

"접때 나귀를 돈을 많이 주고 사다 우리 짜서 온 마을 사람들이 노나 먹었는데, 내나 이 나귀도 그 나귀와 똑같은 것이 붙었는데 왜 젖이 안 나온다고 하느냐?" 절대로 곧이 안 듣고, 그 사람한테 사정을 해 가지고 나귀값 몇십 배를 주고 강제로 사다시피 해 가지고 또 그 말(나귀) 오줌을 빨아먹었습니다.


'경(經)에 무슨 그런 말이 있을까?' 하고 혹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마는 이것은 분명히 『백유경(百喩經)』이라, '일백 백(百)'자, '비유할 유(喩)'자, 백유경(百喩經)이라는 경전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왜 내가 해필 이 말씀을 여러분께 하냐 하면은, '불법이 좋다. 불법 중에서도 참선이 참 좋다'—한국에 태어난, 한국에 지금 불교 신도가 천만 명이 된다 합니다마는 그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선 좋다'고 한 말은 다 들었을 것입니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양 사람들도 지금 한참 참선에 열이 오르고 있습니다.


제가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참, 불법 중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참선을 하려고 신심이 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다가 생각해도 고맙고 감사하고 기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행여나 이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참선을 한답시고, 나귀 오줌을 빨아먹는 그러한 식의 참선을 한다고 하면은 이건 큰일이다 이겁니다.

동장이 그 먼 데까지 가 가지고 나귀를 사 온 것까지도 대단히 고마운 일이고, 자기만 수명장수할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을 다 같이 무병장수하고 수명장수하게 해야겠다'한 그러한 참 신심과 온 동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참 부지런히 성의껏 한 것까지는 좋으나, 아! 자기가 숫놈인지, 암놈인지를 알고 암놈을 사와야 할 텐데 숫놈을 사다가 그 오줌을 노놔 멕였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불법을 포교를 하고, 또 참선법을 포교를 하고, 참! 그런 분들이야말로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런 좋은 법을 가르켜 줘야겠다' 해 가지고 포교를 하고, 설교를 하고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참선법을 가르킨다든지, 불교의 진리를 설할 때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이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절이라고 다 절이 아니고, 절은 다 한 부처님이다. 이 절이나, 저 절이나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다. 어느 절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런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마는, 정말 우리는 우리를 바로 가르켜주시고, 우리를 눈뜨게 해 주시는 선지식(善知識)을 반드시 옳게 가려야만 되겠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서는 그러한 훌륭하신 선지식을 만나 뵈옵고 법문도 많이 듣고, 설사 열반은 하셨다고 하지마는 우리는 오늘 생생하게 그 생존 시의 법문을 조금도 다름없이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법문을 듣고, 우리가 실참실수(實參實修), 실다웁게 닦고, 실다웁게 깨닫지 아니한다면은 아무리 그런 좋은 법문이라 한들 백 번을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처음~15분23초)





(2)------------------


참선이라 하면 덮어놓고 '어렵다. 속가에 살면서는 도저히 하기가—좋은 줄은 알지마는 하기가 어렵다' 이리 생각하시지마는.

'그리고 하려고 하면은 졸음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도저히 근기(根機)가 약하고, 아무래도 정법에 인연이 희박하고 업장(業障)이 두터워서 우리는 참선은 못합니다' 아마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혹 계실는지 모르지마는, 이 참선법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중생심을, 한도 끝도 없이 퍼일어나는 그 중생심을 다 띠어 버리고, 그리고 난 다음에 참선을 해야 된다고 한다면은 그것은 어렵습니다.

중생심을 버리고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중생심 속에서 일어나는 중생심으로, 중생심 일어나는 곳을 찾기 때문에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루에면 열두 때 24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성내고, 웃고 하는 그 물 끓듯, 불타듯 일어나는 중생심 속에서, 그 중생심으로 찾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남녀노소와 유식 무식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낼 중도 모르고, 웃을 중도 모르고, 좋아할 중도 모르고, 골낼 중도 모른, 또 아무 욕심도 없고 그러한 사람은 차라리 이 공부에도 역시 박력이 없기 때문에 공부에 진취가 별로 보이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욕심 많고, 심술궂고, 신경질 잘 내고, 불칼 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다른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사람 못되었다'고 그러한 핀잔을 받을 만한 성격의 소유자일수록에 그 생각만 바로 돌이켜서 화두를 열심히만 거각(擧却)한다고 하면은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보다도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번뇌가, 망상이 많이 일어난다고 해서 짜증을 낼 게 아니라,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이 집에 쥐가 너무나도 쥐가 번식을 해 가지고, 쥐 때문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딜 갔더니 어떠한 사람이 그 쥐 잡는 법을 가르켜 주었습니다.


어떻게 하냐 하면은 쥐 한 마리를 다치지 않게 잡아 가지고, 그 쥐를 항아리에다 담은 다음에 한 2~3일 굶겨라. 굶긴 다음에 다른 쥐를 쥐덫으로 잡어가지고 쥐 살을 조끔씩 띠어 가지고 그 항아리 속에 있는 쥐를 멕여라 그랬습니다.

그 쥐가 배고프니까—처음에는 쥐고기 넣어 줘도 잘 안 먹더니, 배고프니까 그놈을 먹기 시작했다. 날마다 쥐고기를 넣어 주고, 넣어 주고 하다가 나중에는 쥐 통채로 새끼 한 마리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쥐새끼 한 마리를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산 쥐새끼를 넣어 주었습니다. 산 쥐새끼도 처음에는 이리저리 놀리다 결국은 다 잡아먹었습니다. 나중에는 큰 쥐도 넣어 주니까 다 잡아먹었습니다.

이제 아주 쥐고기 잡아먹는데 대단히 아주 숙달이 되어서 아주 주식(主食)이 쥐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항아리에서 내 주었습니다. 당장 그전에 자기가 다니던 쥐구녁으로 들어가서, 쥐 앵긴 대로 그놈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가 아무리 쥐를 참 잘 잡는다 하지마는, 구멍에서 나온 놈밖에는 잡을 수가 없고 또 고양이 소리만 나면은 쥐는 미리 도망가기 때문에 고양이로서는 도저히 쥐를 다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쥐를 훈련을 시켜 가지고, 쥐를 놓아서 쥐로 하여금 쥐를 잡게 하니까 못 갈 데가 없단 말이여. 구녁, 구녁이 다니면서 늙은 쥐고, 젊은 쥐고, 새끼 쥐고, 에미 쥐고, 닥치는 대로 다 잡어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주인은 마지막에 그 쥐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집에 쥐를 다 멸종을 했다고 하는 우화가 있습니다.


참선법이란 게 바로 쥐 한 마리 길러 가지고, 그 쥐로 하여금 모든 쥐를 다 잡어먹는 이치와 비교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화두(話頭)는, 그 화두가 내나 우리 중생심으로 들기 때문에 중생심 가운데에 한 생각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그 중생심은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중생심이 화두여. 마치 훈련을 잘 시켜 놓은 쥐와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이 화두 하나만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일어나는 생각—성이 나거나 웃음이 나오거나, 기쁘거나 외롭거나, 천하 없는 번뇌와 망상이 퍼일어난다 하더라도 화두로써,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일어났던 그 중생심은 자취 없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온 세상이 화두에 대한 의심 덩어리로 꽉! 찼을 때, 항아리에다가 간장을 가뜩 넣어 놓고, 메갱이로 그 항아리를 팡! 쳤을 때 그 항아리는 쩍! 갈라지면서 간장이 와그르르 쏟아질 겁니다.

이 온 내 마음속, 가슴속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 모든 것, 일체시 일체처에 이 세계에 화두가 가뜩찼을 때, 그때에 그 화두 한 뭉텡이가 툭 터진 날에는 무량겁으로 오면서 지어온 우리의 한없는 다생(多生) 업(業)이 거기에서 찰나간에 녹아 없어질 것이며,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대한 수행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렵다고 미리 겁을 집어먹고 열심히 아니하고, 또 하려고 해도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지 못하고 잘못하기 때문에 그렇고, 또 지도는 옳게 받아도 정말 골똘히 하지 아니한 데에서 공부가 늦어지는 것이지,


첫째,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나도 꼭! 깨달을 수 있다고 철저히 믿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진리를 깨달라서 생사해탈, 생사에 자재한 그러한 성현이 되었는데, 나는 무엇 하느라고 오늘날까지 중생으로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는가? 생사에 자재 못하고 있는가? 그것을 이를 악물고 분한 마음을 내며, 그래가지고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고 간절하게 거각해 나가진다고 하면은 그 사람 공부는 빠르면 사흘이요, 글안으면 일주일이요, 늦어도 삼 년.

'삼 년을 여법(如法)하게 그렇게 생명 바쳐 알뜰히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혀를 빼서 쟁기질하는 지옥에 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렇게 간절히 일러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공부를 열심히 아니한다면은 너는 세세생생에 호랭이 밥이 될 것이다' 4조 도신 스님은 이렇게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문을, 고려 시대 보조국사는 이 법문을 듣고 너무나도 감개무량해서 가슴이 벅차서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꼭!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나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 뭣 하느라고 이 문제를 해결 못했던가? 하는 이를 악물고 분을 내는 그 마음으로 화두를 들어 가십시오.


화두는 '이뭣고?'

대관절 지금 제가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걸 듣고 계신 여러분은 귀가 듣는 게 아닙니다. 귀를 통해서 우리는 들을 뿐입니다. 대관절 무엇이 듣느냔 말이여.

들을 줄 알고, 눈으로 보면 희다 검다 알고, 꼬집어 뜯으면 아픈 줄 알고, 듣기 싫은 욕하면은 썽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그놈이 대관절 무엇인가? '이놈이 무엇인고?' '이놈이 무엇인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앉았을 때나 누웠을 때나, 집에서 빨래를 하거나 소지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놈이 무엇인고?' '이-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하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 이렇게. 경상도 사투리지마는 간단하고 뜻은 그 가운데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 공부를 할 때는 '이뭣고?' '이뭣고?'

나중에 썽도 안 나고 무슨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현재 이 '이뭣고?'할 때 '이- 하는 놈이 무엇인고?'하는 뜻으로 '이- 뭣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하시면은—처음에는 잘 안되고 '이뭣고?'하면서도 번갯불 치듯 지내간 일들이 스쳐가고, 얼투당투않는 일이 생각이 떠오르지마는, 버쩍! 깜짝 놀래서 다시 '이뭣고?'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지마는 자꾸 하고 또 하다 보면은 그 가운데 신심이 나고, 분심이 나고, 의심이 더욱 간절해져서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 나가다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아! 공부가 잘되는구나. 참 좋다' 이러한 생각 갖지 말 것.

또 아무리 하려고 해도 화두가 들리지는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몸은 괴롭고 영 화두가 잘 들리지는 않고, 그러한 때가 옵니다. 그러더라도 조끔도 번민심을 내지 말고, 썽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돌이켜서 심호흡하고 또 산책도 하고 좀 거닐어서 정신이 개운해지면 다시 와서 또 '이뭣고?' 이렇게 해서 마음을 그렇게 잘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썽낼 때에도 그놈을 돌이켜서 '대관절 무엇이 이렇게 썽낼 줄 아나?' 썽내는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시지 말고, 썽내는 마음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한번 떡 들고서 그 썽내는 일을 처리를 하시게 되면은 일이 감정적으로 처리가 되는 게 아니라, 아주 냉정한 이성으로 일을 처리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이 참선을 하게 되면은 대단히 유익한 것입니다.


하물며 열심히 하면 영원히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바쳐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은 이것 하나 하자고 있는 것이지, 그 밖에 것은 이것을 하기 위한 방편(方便)들입니다. 배라고 하는 것은 물을 건너가기 위해서 배가 필요한 것이여.

불법에 팔만사천 가지 모든 방편은 내가 '나' 깨닫기 위한 방편들입니다. 그 방편 중에서도 이 화두참선,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야말로 최고의 방법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정법, 활구참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이렇게 어떠한 큰스님네나 다 화두를 다 그렇게 일러 주십니다. 그러나 똑같은 화두를 지도 받아서 하면서도 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바르게 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바르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느냐?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못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만 들어 가는 사람, 그것이 활구참선(活句參禪)입니다.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은 어떻게 하느냐? 또 삿된 참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삿된 참선이요, 죽은 참선이냐 하면은 이론으로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한—경전을 보았던지, 선지식의 또는 어록을 보았던지, 어떤 큰스님네 법문을 들었던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한 불교에 대한 지식, 상식, 교리 이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 보고 연구해 보고 비교해 보고 또 분석… (15분24초~30분47초) (끝)





[법문 내용]


법문은 내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 듣는 것 / 최고의 방편이 활구참선법 / 환성지안 선사와 월봉 스님 / 『백유경(百喩經)』 '나귀 젖' 이야기. 올바른 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은 어렵지 않다. 일어나는 중생심으로, 중생심 일어나는 곳을 찾기 때문에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그만 / 쥐로 모든 쥐를 잡는 법 / 화두도 중생심이지만,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일어났던 그 중생심은 자취 없이 없어지는 것.


'이뭣고?' 화두 드는 법 / 우리는 생명 바쳐 할 일은 참선밖에는 없다 /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다못 무조건하고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법문(法門)은 무슨 이론을 배우기 위하거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 공부 잘하기 위해서 듣는 것입니다. 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편(方便)이 있겠지마는,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 가장 요긴하고 가깝고 빠르고 한 그러한 최고의 방편이 활구참선법입니다.


외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척하면은 그것이 바로 저 죽고, 남 죽이고 불법을 망해 먹는 외도가 되는 것입니다.


불법을 포교를 하고, 또 참선법을 포교를 하고, 참! 그런 분들이야말로 자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런 좋은 법을 가르켜 줘야겠다' 해 가지고 포교를 하고, 설교를 하고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참선법을 가르킨다든지, 불교의 진리를 설할 때에는 절대로 자기 자신이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선법이란 게 바로 쥐 한 마리 길러 가지고, 그 쥐로 하여금 모든 쥐를 다 잡어먹는 이치와 비교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화두(話頭)는, 그 화두가 내나 우리 중생심으로 들기 때문에 중생심 가운데에 한 생각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마는, 그 중생심은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중생심이 화두여. 마치 훈련을 잘 시켜 놓은 쥐와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이 화두 하나만 가지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일어나는 생각—성이 나거나 웃음이 나오거나, 기쁘거나 외롭거나, 천하 없는 번뇌와 망상이 퍼일어난다 하더라도 화두로써,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일어났던 그 중생심은 자취 없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이 온 세상이 화두에 대한 의심 덩어리로 꽉! 찼을 때, 항아리에다가 간장을 가뜩 넣어 놓고, 메갱이로 그 항아리를 팡! 쳤을 때 그 항아리는 쩍! 갈라지면서 간장이 와그르르 쏟아질 겁니다.

이 온 내 마음속, 가슴속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 모든 것, 일체시 일체처에 이 세계에 화두가 가뜩찼을 때, 그때에 그 화두 한 뭉텡이가 툭 터진 날에는 무량겁으로 오면서 지어온 우리의 한없는 다생(多生) 업(業)이 거기에서 찰나간에 녹아 없어질 것이며,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 화두를 바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느냐?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못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만 들어 가는 사람, 그것이 활구참선(活句參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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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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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독경>


30분55초~38분35초

금강경 독경 <지경공덕분 제 15> <능정업장분 제 16> <구경무아분 제 17> <일체동관분 제 18>


38분50초~42분6초

고왕경 독경


42분14초~45분29초

고왕경 독경

Posted by 닥공닥정
1~100/(26~50)2020. 12. 11. 19:21

((No.047))—1977년 하안거 결제법문(77.04.15.음) (48분)

(1/3) 약 18분. (2/3) 약 17분. (3/3) 약 13분.

(1/3)----------------


전강 조실 스님 법문 들으신 동안 조우신 분도 이제는 눈을 번쩍 뜨시고 여기를 쳐다보십시오.

조실 스님 법문은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서 한 말씀 한 구절 놓치지 않고 다 알아들었다 해도 정말 바로 듣기가 어려운 법문이어서 꾸벅꾸벅 처음부터서 끝가지 졸면서 들은 그 법문이 얼마만큼 조실 스님의 법문을 소화를 하셨는가? 댁에 가셔서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정사년 하안거 결제일입니다. 대관절 결제(結制)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며, 안거(安居)라고 하는 것은 또 무엇이냐? 이러한 말씀을 처음 들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 같아서 대충 결제와 안거에 대해서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인도에는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 있습니다. 이 여름 석 달 동안은 어떻게 비가 많이 오던지 도저히 산에서 숲에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더운 지방이라 비가 아니 올 때에는 전부 다 흩어져서 나무 밑에 숲속에 들어가서 참선을 모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숲속에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군데 모여서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절, 선방(禪房)에 모여서 같이 참선을 했던 것입니다. 그 장마철에 왕래를 끊고 한 선방에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기간을 하안거(夏安居), 여름 안거라 이렇게 말하고, 그 안거가 시작하는 날을 결제(結制)라 그럽니다. 결제 동안에는 일절 자기 마음대로 멀고 가까운 데를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서 참선에 몰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여름 석 달 동안 공부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선원에서도 결제와 또 이 결제 참선에 참예 못한 법보제자 여러분을 위해서 또 백일기도도 아울러서 봉행을 하는 그 백일기도 시작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을 맞이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맨 처음에 출가(出家)하실 때로부터서 견성(見性)하신 내용에 대한 조실 스님의 법문을 정말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조우신 분은 들은 바 없이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 말씀도 빼놓지 않고 다 들으셨다고 이렇게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조실 스님께서 세속에 계실 때에 친어머니 밑에서는 그렇게 호강을 하고 귀여움을 받고 자라시다가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서모를 맞이한 날로부터서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지고 정말 견디지 못할 그러한 나날을 보내시다가 결국은 출가하셔서—유기그릇을 만드는 유기 공장에 불무질을 하는 그러한 일자리도 가져 보셨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방황을 하시다가 해인사로 출가를 하셔 가지고 인공 스님을 만나 뵈옵고 김응해 스님 밑에서 사미(沙彌) 과정을 마치시다가 그 응해 스님의 그 법문을 듣고 또 그 친한 친구가 뜻밖에 죽게 되는 바람에 무상을 철저히 느끼시고서 선방으로 나오셔서 직지사 제산 스님 밑에서 참선을, 첫 철 참선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결제일이라 참선을 어떻게 해야 옳게 하고, 어떻게 하면은 잘못되는 것인가?

처음 나오신 보살님들을 위해서도 오늘 이 조실 스님의 법문은 대단히 중요한 법문이었고 또 오래 전부터서 참선을 해 오신 분들을 위해서도 대단히 요긴한 법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산 스님께 화두를 탈 때에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관(觀)해라' 이렇게 화두(話頭)를 일러주셨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서장(書狀)』을 배우시고 『선요(禪要)』를 배우심으로 해서 이해하고 있는 그러한 참선, 그러한 바른 참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어리신 몸에 그것을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참선은 다맛 알 수 없는 의관(疑觀)이라야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을 관한다든지 그밖에 어떠한 묘한 것이라도 보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들여다보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념미생전,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觀)하라' 제산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나, 대관절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어떻게 관(觀)하냐 그말이여. 이것은 아무리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을 관하려고 한들 되지도 아니한 것이며, 해 봤자 이것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이 세상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많고 아지 못한 것도 많지마는 깊이 따져 들어가자면 실상은 너무나도 아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훌륭한 대학자라 하더라도 깊이깊이 자세히 따져 들어간다 하면은 얼마 안 가서 막히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 하는 사람이 아무것이나 대고 의심을 하면 되겠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선각자(先覺者)로부터 화두를 지정을 받아 가지고, 그 스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도하에 간절히 골똘히 한 화두만을 의심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화두 조끔 해 보다가 의심이 잘 안 나고 여의(如意)하게 들리지 아니하면 저 화두 좀 들어보고, 이 스님 밑에서 조끔 해 보다가 잘 안되면 저 스님 밑에 가서 다시 또 화두를 타서 해 보고, 3년 5년 10년을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갈팡질팡하다가 아까운 세월만 보내고 공부는 아무 얻은 바가 없는 체 방황만 하다가 마는 그러한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 흡족하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 익혀 오기를 번뇌와 망상, 육식(六識)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살림을 해 온 우리입니다. 금생에 정법(正法)을 만나서 참선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갑자기 처음부터서 잘되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익히고 익히고 해서 그것이 습관이 된 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잘되는 것이고, 안 해 보던 것은 처음에 하려고 하면은 잘 안되는 것이 정칙입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해 보니 오히려 더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정신집중이 더 잘 안되더라. 그러니 참선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냐? 오히려 참선하므로써 정신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산란하고 한 것이니 참선은 정신집중에 해로운 것이 아니냐?'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는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건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저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면 이 생각, 해서 하루에도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마는 하루종일 다 마치고 나서 '내가 오늘 무슨 생각들을 했는가?'하고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도 별로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떠오른 것이 없으면 '오늘 하루 무엇을 생각했느냐?'하고 물어보면 '별 생각 안 했다'고 하지마는 사실은 아무 뿌리도 없고 주책없는 생각들을 정(情)껏 하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졸다가 잠에 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를 무량겁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익힌 것을 금방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이뭣고?'한다고 해서 '이뭣고?'가 순일무잡하게 잘 되겠습니까? 안되지마는 그래도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하는 동안에 차츰차츰 그전에 익숙했던 것은 차츰차츰 설어지고, 설었던 것은 차츰차츰 습관이 되어가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글씨를 써도 처음에는 서툴지마는 얼마 동안 노력을 하면 잘 써지게 됩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하면 점점 잘 써서 명필이 되겠지마는 어느 정도 가다가 붓을 놔 버리고 몇 해씩 놀아버리면 다시 글씨가 서툴어지는 것입니다.


참선과 번뇌 망상과의 관계도 그러한 예에다가 비교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한번 시작한 사람은 결단코 쉬어서는 아니된 것이고 중도에서 폐지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아서 대도를 성취할 때까지는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산다 해도 내가 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석 달 결제를 시작하는 마당에 제방에서 정진 잘하신 좋은 스님네도 오셨고, 보살님네도 여러 해 동안 이 용화선원에서 참선하신 분도 여러분이 계시지마는 처음으로 생전 처음으로 참선을 하려고 오신 노보살님도 계시고 젊은 보살님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비약적이기 때문에 늦게 왔다고 해서 자기 자신은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고, 도저히 바랄 수 없고, 그저 참선하면 혈압도 내려가고, 머리 아픈 것도 낫고, 정신쇠약도 낫는다고 하니까 그걸 조끔 해 보리라' 이러한 얍삭한 마음으로 참선을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다 여래(如來)와,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 자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참선을 하면 다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거사(居士)님이나 처음 나와서 참선을 해 보려고 하는 보살(菩薩)님네들도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부처님의 말씀, 역대조사(歷代祖師) 스님네의 말씀을 깊이 믿고서 공부를 계속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처음~18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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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직지사(直指寺)에 처음 들어가셔서 제산 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아 가지고 생각해 보니 '절대로 그 화두는 옳은 참선법이 아니다'한 것을 스스로 아시고서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서 계속 공부를 해 나가시는데,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깔고 방석을 하나 딱 갖다 놓고서 대중스님네야 방선(放禪)을 하거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상관이 없이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규칙을 세워 가지고 법당 뒤에서 정진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목탁을 치면 가셔서 공양을 잡숫고는 바로 법당 뒤로 앉아서 거가 앉어서 정진을 하시는데, 졸음이 와서 꺼뻑 하면은 두 번도 하기 전에 일어나셔서 왔다갔다 거니시다가 정신이 또 깨끗해지면은 다시 또 그 자리에 가서 또 앉아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해 나가시는데, 너무너무 골똘한 마음으로 너무 힘을 써서 이마빡에 '적을 소(小)'자를 쓰면서 계속 파고 들으셨던 것입니다.


이 참선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고서 떠억 관(觀)해 나가야지, 머리로 화두를 들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 가는 것은 좋지마는—힘을 쓸 곳이 있지, 머리에다가 화두를 두고 머리에다 힘을 쓴다고 하면은 전신(全身)에 피와 전신에 기운이 머리로 모이게 되어서 머리가 멍해지고 나중에는 골치가 아퍼지고 그래도 끊임없이 밀고 나가면 눈이 피가 벌겋게 상충이 되어 가지고 눈알이 둘러 빠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골치는 벌어지려고 그러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쉬지 않고 밀고 나가셨기 때문에 조실 스님은 코로 입으로 뻘건 피를 막 쏟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골똘히 그리고 간절히 용맹스럽게 하셨으면은 그러한 지경에까지 도달하셨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은 제산 스님으로부터서 '니가 내 시킨 대로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니 멋대로 하다가 벌건 선지피가 코로 입으로 쏟아지는 그런 무서운 병이 발생을 했으니 너는 이 절로부터서 떠나라' 이렇게 해서 거기서 쫓겨나셨던 것입니다.


되던 안되던 기왕 할 바에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그러한 정도로 정진을 해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도의 간절한 신심(信心) · 분심(憤心) · 의심(疑心)이 없고서는 만날 참선한다고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써 세월을 삼고, 조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고, 방선을 하면은 잡담으로써 세월을 보내고, 입선을 하면은 졸고 번뇌와 망상으로써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한 철 한 철을 그렇게 지낸다고 하면, 10년 내지 30년 일생을 선방에서 선방으로 다닌다 하더라도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보장할 수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을 부딪쳐야 할 곳은 그만한 정도에 간절한 신심과 용맹심과 의심을 가져야 하기는 하지마는, 어떻게 힘을 써야 하느냐? 어떻게 의심을 해야 하느냐? 여기에 분명한 길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힘을 안 쓸 디다 씀으로 해서 그러한 무서운 병을 얻으셨다' 이리 말씀하시고 '묘(妙)하게 닦아 가는 길이 있었는디 내가 그것을 모르고서 그런 무서운 병에 걸렸다'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묘(妙)하게 닦아 가는 것이냐?'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을 위해서, 여기엔 법회에 참여하신 지 아직 몇 번이 되지 아니하신 초발(初發) 신도 여러분을 위해서 불가불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말씀을 드려야 되겠습니다.


참선은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 몸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내 몸 밖에 어떠한 환경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책이나, 내 몸 밖에 있는 어떠한 이론으로 이것을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의 안에서 찾는 것입니다.


내 몸 안에서 어떻게 찾냐?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 우리는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생각도 일어나고 나쁜 생각도 일어나고 별별 생각이 다 일어나는데, 그 일어나는 생각은 분명 우리는 깨닫지 못한 중생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시 무명심(無明心)이요, 번뇌 망상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그것은 망상(妄想)인 것입니다.


그 일어나는 망상은 중생의 전 살림살이지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거기에 가서 공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망상을 여의고는 공부 길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망상을…. 대관절 그 망상 일어나는 곳을 우리는 깨달으면은 그것이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로부터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망상을 버리고 찾어서는 아니됩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되잡아서 되돌려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어떠한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심술을 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번뇌 망상이 전혀 일어나지 아니한 목석과 같은 그런 사람은 정신병자가 아니면 넋이 나간 사람입니다. 번뇌 망상이 있어야 그것이 살아 있는 증거고, 살아 있고 정신이 분명해야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 쌓어 참선을 못합니다' 그 사람은 참선이 아직 무엇인 줄 잘 모르고, 옳게 닦아 가는 방법을 몰라서 하는 말씀입니다. 일어날수록 좋습니다. 일어나는 생각으로 바로 '이뭣고?'하면은 일어나는 망상은 나를 찾는 참선으로 들어가는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기 전에 기초 공부가 있습니다.

첫째, 몸을 바르게 갖고 가부좌(跏趺坐), 지끔 이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이 앉어 계신 발의 자세, 다리를 어떻게—오른다리를 꼬부리고 그 위에다가 왼다리를 올려놓거나, 왼다리를 꼬부리고서 그 위에다가 오른다리를 꼬부려서 올려놓으면 이것이 반가부좌(半跏趺坐)가 됩니다.

반가부좌를 하고서 허리를 쭈욱 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뒤로 자지바지해서 너무 힘을 써서 긴장을 하면은 아니됩니다. 몸은 단정히 갖되 머리 · 목 · 어깨의 모든 긴장을 풀고서 앉으셔야 됩니다.


이렇게 앉으신 다음에는 이를 물고서, 아금니를 꽉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혀끝을 입천장에다 갖다 댑니다. 그리고서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야 합니다. 흔히 보살님네들은 참선을 하실 때 보면은 눈을 너무 감거나 코끝을 바라본답시고 너무 가늘게 뜨기 때문에 까딱하면은 꾸뻑꾸뻑 졸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감지 말고 눈을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자리로부터서 3m 지점에 눈을 떨구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3m 떨어진 어떤 한 점을 의식적으로 응시(凝視)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맛 평상으로 뜨되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손은 오른손을 먼저 놓고 손바닥이 위로 올라가게 놓고, 그 위에다 왼손을 갖다가 포개서 놓고 엄지손 배를 딱 맞대서 이렇게 손을 만든 다음, 그 손을 아랫배 배꼽 앞에다 갖다가 딱 대면 됩니다. 이것이 반가부좌입니다.


이렇게 몸을 반가부좌로 단정히 가진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호흡을 바르게 하지 아니하고 다못 생각만 골똘히 해서 화두만을 파고들면은 아까 조실 스님처럼 기운이 위로 올라가 가지고 골치가 아프거나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그보다도 더 심하게 공부를 밀고 나가면은 코피가 쏟아지고 이러한 무서운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병에 걸리지 아니 하고서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복식(腹式) 심호흡,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배꼽 밑에 한 치 서푼 되는 곳을 단전(丹田)이라 합니다. 하복부 단전에 우리의 생각을 단전에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단전에 생각이 모여져서 기운이 위로 안 올라가냐? 호흡을 배로 해요. 보통 사람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지마는 이 참선을 할 사람은 호흡을 배로 해야 합니다.


숨을 들어마시면은 깊이 들어마셔서 배꼽 밑에 단전까지 호흡이 들어가도록 들어마셔요. 호흡을 단전까지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 것입니다. 아랫배가 빵빵해져요. 빵빵해지거든 삼 초 동안 머물렀다가 다시 조용하니 숨을 코로 내쉬되 배가 차츰차츰 아주 조용하게 홀쪽해지도록 하면서 숨을 내쉽니다. 다 숨을 내쉬어버리면은 뱃속에 들어갔던 바람이 다 나가버리고 배 가죽이 등어리에 딱 붙게 됩니다.

다 내쉰 다음에 더이상 내쉴 것이 없을 때 다시 또 들어마십니다. 수르르르 자연스럽게 들어마시면은 바람이 아랫배에 들어간 족족 배가 차츰차츰 살아나서 또 빵빵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복식 심호흡인데, 단전호흡이라 하는 것인데, 단전호흡은 절대로 억지로 무리하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얼굴이 벌거지도록 그렇게 들어마셔서는 아니됩니다.

들어마실 때는 팔부 쯤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다 내쉬고, 무리하게 하지 아니하면 5분 10분 20분 30분을 계속해도 조끔도 아무 지장이 없지마는, 무리하게 호흡을 하면은 3분이나 5분도 못 가서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더이상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더이상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을 느끼는 분은 호흡을 잘 못한 원인입니다.

어떻게 잘 못하냐 하면은 너무 시간을 오래 걸려서 하려고 한다든지, 너무 호흡을 잔뜩 들어마신다든지, 너무 호흡을 천천히 내쉬려고 하면은 그런 것입니다. 보통 호흡보단 조끔 더 천천히, 조끔 더 느리게, 조끔 더 조용하게 한 정도로 시작을 해서 차츰차츰 시간을 연기해 나가도록 한다면은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호흡도 좋다고 하지마는 잘못하면은 이것도 역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호흡에 대해서 잘 듣고서 조심스럽게 공부를 이 호흡을 지어나가야 되고 해 나가다가 이상이 있으면 언제라도 오셔서 그 문의를 하셔야 합니다.(18분16초~34분4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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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몸을 바르게 반가부좌를 하고,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혀를 위로 꼬불려서 혀끄터리가 입천장에 가서 딱 닿도록 하고서, 몸을 그렇게 바르게 가진 다음 복식 심호흡을 열심히 연습을 해서 그 복식 심호흡이 잘된 뒤에 화두를 의심을 해야 합니다.


화두는 이론으로, 알음알이로, 지해 사량심으로 따져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수수꺼끼와 같은 것입니다. 수수꺼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해서 결국은 알아맞히는 것이지마는, 이 화두 공안은 그러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을 가지고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어떠한 경전을 읽고 해서 얻어진 모든 지식과 상식을 여기에 사용해서는 아니됩니다. 일체 그런 것을 동원하지 말고 다못 거두절미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이 뭣고?'


'이뭣고?' 화두는, 오늘 여기에 처음 나오신 분은 '이뭣고?' 화두를 하십시오. '이뭣고?'화두는 무엇이냐?


분명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원소로 해서 뭉쳐져 가지고 이 육체가 성립이 되었습니다. 앞에 계신 분들은 눈을 뚝 뜨고 제 얼굴을 보시면서 말을 들으세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여기 앉아서도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집에 일을 생각하면 집에 일이 환하고, 아들 얼굴을 생각하면 아들이 환하고, 딸 얼굴을 생각하면 딸 얼굴이 환하고, 미국에 가 있는 손자를 생각하면 손자 얼굴이 환하고, 어릴 적 일을 생각하면 어릴 적 일이 환하고,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서울도 눈 한번 깜작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금방 썽내다 또 웃을 수도 있고, 웃다가 썽낼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고, 눈을 통해서 볼 수도 있고, 귀를 통해서 들을 수도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고, 욕하면 썽내고, 무엇이 들어서 그렇게 신출귀몰한 그러한 재주를 부리고 있느냐?


분명 여기에 오셨지마는 친구가 가자고 하니까 오셨고, 여기 오면 좋다고 하니까 오셨지마는, '여기를 가자. 친구가 가자' 그래서 온 것이 아닙니다. 동기는 친구가 가자고 해서 왔지마는 정말 직접 오는 것은 이 몸뚱이 속에 「내」라 하는 놈이 '가자'하고 그놈이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친구가 가자고 끌어도 속에 놈이 탁! 코를 숙여 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대관절 눈으로 볼 줄을 알면서도, 눈으로 그놈을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다 그말이여.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는 다 듣지마는, 대관절 그놈에서 무슨 소리가 나온가 귀를 기울여봤자 아무 소리도 없습니다. 손을 통해서 모든 것은 잡지마는, 그놈을 한번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를 않습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 몸뚱이를 운전하는 놈, 이 몸뚱이에 주인인 그놈, 대관절 그것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조화가 무궁무진하냐 그말이여.

그놈이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다가 이 몸뚱이 오장육부에 어딘가 큰 고장이 나게 되면은 이 몸뚱이로부터서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이 몸뚱이는 그 순간 송장이 되아 가지고 3분 후부터서는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관절 그놈이 어떻게 생겼으며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사람이 되었다, 짐승이 되었다, 천당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이런 몸뚱이로 태어나고, 저런 몸뚱이로 태어나고, 지금 세계 40억이라고 하는 인구가 있지마는 낱낱이 다 생긴 것이 다 다르다.

어째서 다르냐?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이 무량겁을 두고 금생에 이르도록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몸을 타고나되 각기 다르게 태어난다 그말이여. 형제간은, 쌍둥이는 많이 닮았지마는 성격까지 다 닮을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닦았느냐에 따라서 금생에 어떠한 몸을 받느냐 하는 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에, 금생에 자기 받아 난 것, 자기의 성격, 자기의 지능, 모든 것을 잘 검토해 보면 내가 전생(前生)에 어떠한 짓을 하고, 어떻게 닦았겠다 하는 것을 추측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몸을 받아나고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 그것을 알려면은 금생에 내가 어떻게 닦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행동과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내생(來生)에 내가 받어날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생에 인물도 잘 타고나고, 정신도 정말 훌륭하고 지혜롭게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큼 잘 타고나려면은 금생에 행동과 마음가짐을 잘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갖는 것이 잘 갖는 것이냐? 참선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그 나쁜 생각으로 해서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생각을 내면 그 좋은 생각으로 해서 착한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일체 행동을 바르게 하려면은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려면은 참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49년 설법에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마는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 이 말씀이여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개발되고 세련된 방법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용화선원에서 이렇게 다달이 두 차례 이상 법회를 열고 있는 것은 마음 닦는 법을 서로 연구하고 공부하자. 이러한 목적하에 이 용화선원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 창설하셨고, 삼천년 동안 전해 내려온 불법의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굉장히 불법은 어려워서 세속 사람으로서는 공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줄 알면서도 안 한다' 이렇게 많은 거사님들이 말씀하시지마는 알고 보면 참선처럼 더 쉬운 것이 없습니다.


일체 것은 나로부터서 먼 데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이고 그것을 얻는 것이지마는, 참선은 나로부터서 가장 가까운 것을 찾는 것이고, 찾는 바로 그놈이기 때문에 쉽기로 말하면 그 이상 쉬운 것이 없고 가깝기로 말하면 부모 애인보다도 더 가까운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시면 그만인 것입니다. 많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많은 것을 알아서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 아까 화두를 배우고 싶다고 하신 분은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 나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 많은 법문을 듣고 여러 해 동안 참선을 하신 분도 바보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많이 알고 많이 듣고 오랫동안 참선방에 다녔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삼아서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깨닫기까장은 어떠한 것도 우리는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깨달랐다 해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중생심이 일어나는 것이라 보살이 아니다. 참 깨달음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물며 깨닫지 못한 사람이 글을 좀 많이 안다고 해서 또는 경을 좀 많이 읽었다고 해서 또는 오랫동안 여러 해 선방에 다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도 자랑하고 코에다 걸고 으시댈 것이 못 됩니다.


우리는 참선을 해서 어떠한 공안 하나 둘 내지 셋 넷 공안의 이치를 본 바가 있다 해도 구경(究竟)에 큰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소견은 전연 아무 소견이 없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해로울지언정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조그마한 얻은 바로 해서 우리의 큰 깨달음을 막고 있는, 막혀서 나가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조그마한 얻은 바를 얻었다고 자족해서는 아니 되겄습니다. 차라리 꽉 맥혀서 깨닫지 못한 캄캄한 중생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 하나만을 들고 나갈지언정, 설사 그러한 상태로 죽음에 도달할지언정 큰 깨달음이 아닌 조그만한 얻은 바로써 살림을 삼아 나가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오늘 결제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제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결제일을 맞이해서, 백일기도 입재일을 맞이해서 이렇게 참예해 주신 보살님네 여러분들의 신심에 깊….(녹음 끊김) (34분50초~47분54초) (끝)





[법문 내용]


결제(結制), 안거(安居)란? /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 /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되는 사람은 없다. 무량겁 익혀 온 번뇌 망상 때문 /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


전강 조실 스님의 직지사에서의 목숨 바친 정진. 상기병 / 묘(妙)하게 닦아 가는 방법은 일어나는 망상을 되돌려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든다 / 올바른 자세, 올바른 단전호흡 / 화두는 일체 무조건하고 본참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는 말씀.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개발되고 세련된 방법이 참선법(參禪法) / '이뭣고?' 화두, 무슨 생각이 일어나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시면 그만인 것 / 부처님처럼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해야.



깨달음에 도달하려면은 알 수 없는 큰 의심(疑心),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관(觀)해 가야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큰 의심 뭉텡이가 되어서, 더이상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간절할 수 없는 경지에서 그 대의단(疑團)이 터지면서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동시에 참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대오(大悟)라, 큰 의심 밑에 큰 깨달음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한 것이 큰 병이라」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의심하느냐? 참선 하는 사람이 아무것이나 대고 의심을 하면 되겠느냐? 하면 그것이 아니고 선각자(先覺者)로부터 화두를 지정을 받아 가지고, 그 스님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지도하에 간절히 골똘히 한 화두만을 의심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처음부터서 잘 흡족하게 되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무량겁으로 익혀 오기를 번뇌와 망상, 육식(六識)의 망령된 알음알이로 살림을 해 온 우리입니다. 금생에 정법(正法)을 만나서 참선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갑자기 처음부터서 잘되리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은 한번 시작한 사람은 결단코 쉬어서는 아니된 것이고 중도에서 폐지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아서 대도를 성취할 때까지는 잠시도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산다 해도 내가 안 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으로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꼭 여러 해 했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금방 금년부터 시작했다고 해서 그분은 공부가 잘되려면은 멀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에 모든 공부는 점점 닦아서 쌓아 올라가는 공부지마는, 점진적이지마는 이 참선은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오늘 아침 금방 1초 전까지 콱! 맥혀서, 시커먼 먹통처럼 꽉 맥혀서 깜깜했다 하더라도 1분 후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일체중생이 다 여래(如來)와,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 자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구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참선을 하면 다 깨달라서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거사(居士)님이나 처음 나와서 참선을 해 보려고 하는 보살(菩薩)님네들도 자신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부처님의 말씀, 역대조사(歷代祖師) 스님네의 말씀을 깊이 믿고서 공부를 계속해서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는 망상은 중생의 전 살림살이지마는 그 일어나는 망상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거기에 가서 공부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망상을 여의고는 공부 길이 없습니다. 대관절 그 망상 일어나는 곳을 우리는 깨달으면은 그것이 바로 진여자성(眞如自性) 자리로부터 번뇌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망상을 버리고 찾어서는 아니됩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되잡아서 되돌려서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어떠한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도 조끔도 한탄할 것도 없고 심술을 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으로 바로 '이뭣고?'하면은 일어나는 망상은 나를 찾는 참선으로 들어가는 좋은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서 표현이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한 생각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그 나쁜 생각으로 해서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고, 좋은 생각을 내면 그 좋은 생각으로 해서 착한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일체 행동을 바르게 하려면은 당장 한 생각 일어나는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려면은 참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 49년 설법에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마는 그 모든 말씀이 오직 「니가 니 마음 깨달으라」 이 말씀이여요.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개발되고 세련된 방법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처럼 역대조사처럼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전까지는 조그마한 얻은 바를 얻었다고 자족해서는 아니 되겄습니다. 차라리 꽉 맥혀서 깨닫지 못한 캄캄한 중생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 하나만을 들고 나갈지언정, 설사 그러한 상태로 죽음에 도달할지언정 큰 깨달음이 아닌 조그만한 얻은 바로써 살림을 삼아 나가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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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100/(76~100)2020. 11. 21. 23:22

(No.098)—1979년 입춘 법회(79.02.04) (49분)

(1/3) 약 20분. (2/3) 약 17분. (3/3) 약 13분.

(1/3)----------------


약야산중봉자기(若也山中逢子期)인대는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냐

나무~아미타불~


만약 산중에서 자기(子期)를 만났다면 기장황엽하산하(豈將黃葉下山下)리요. 어찌 누런 이파리를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자기(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성(姓)은 ‘쇠북 종(鍾) 자 종씨인데,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은 저 중국 고대에 요임금 당시 거문고의 이치, 음악의 이치에 달통한 사람입니다.


그때 백아(伯牙)라고 하는 사람이 대단히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아주 거문고를 타기로 아주 통달한 사람인데,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거문고를 떠억 뜯으면 너무 거문고를 잘 뜯고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보통 사람은 그 백아의 거문고 타는 것을 능히 감상을 할 줄 모릅니다.

오직 종자기(鍾子期)라고 하는 사람만이 그 백아(伯牙)의 거문고 타는 것을 듣고서, '아! 지금 백아라고 하는 사람이 유유히 흐르는 큰 강물을 생각하면서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또 어쩐 때는 '아! 지금 저 백아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들어보매, 높고 높은 태산준령을 생각하면서 저 거문고를 뜯고 있구나'


그렇게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은 백아의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백아의 마음 소리를 능히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종자기라고 하는 사람이 천명(天命)을 다하여 죽게 되자 백아라고 하는 사람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아니했다고 그럽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대도를 성취하신 다음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묘법(妙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일찍이 종자기와 같은 그러한 사람을 만났다면 어찌 49년 동안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동안 그러한 많은 방편설(方便說)을 설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자기(子期)와 같은 사람을 산중에서 만약 만났다면 어찌 누른 이파리을 가지고 산아래로 내려갈 것이냐?


누른 잎[黃葉]이라 하는 것은 은행잎이나 단풍잎 같은 그런 아주 예쁘고 고운 그러한 단풍잎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애들을 달랠 때에 노란 또는 빨간 단풍잎을 주면서 ‘여기 있다. 돈, 여기 있다. 돈’ 이렇게 우리는 어린애들을 곧잘 달래는 것입니다.


방편설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不可缺)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린애를 달랠 때에 사탕 같은 것이 있으면 다디단 사탕을 입에다 넣어 줘서 달래기도 하고, 사탕이 없으면 무슨 노란 이파리나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조그만한 돌멩이라도 집어 줘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장난감 같은 것도 집어 줘서 잠시라도 어린애의 울음을 달래는 경우를 엄마들은 얼마든지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 또 동지 법회, 입춘 법회, 칠성 법회, 사월 초파일 관등(觀燈) 법회, 이런 법회가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애 울음을 달래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설, 이것이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달래 봤자 어린애는 잠깐 울음을 그쳤을 뿐, 배가 고픈 허기(虛飢)는 완전히 가시질 않은 것입니다. 다시 또 울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일양(一樣)으로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여러분의 울음을 달래는데에 그치지를 아니하고, 정말 입에 넣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는 영양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 각 사암에서는 입춘 불공이라 해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특히 입춘이 들은 시간을 기해서 불공(佛供)을 드리고 굉장히 복잡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입춘에 이렇게 최상승 활구법문(活句法門)을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새벽부터 저녁까지 목탁을 치면서 여러분이 일 년 동안 무장무애하시고 복을 많이 받도록 그렇게 간곡히 불공을 드린 것과 이렇게 경건한 자세로 활구참선법을 들은 것과 비교를 해보시면, 조금이라도 뜻이 있으신 분은 능히 어느 것이 정말 올바른 불법(佛法)이고, 어느 것이 정말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가 있는 것인가를 충분히 이해하시고 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최초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에 대해서 말씀이 계셨고, 그다음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에 법문을 하셨습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중국에 출현하신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고향이 어딘지 그것도 알 수 없는 그러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다못 큰 포대(布袋), 자루를 항시 어깨에다가 메고 다니시면서 사람만 만나면 손을 내밀면서 무엇이고 달라고 그랬습니다.


누가 무엇을 먹고 있으면 ‘나 좀 달라’고 해 가지고, 주면은 한입 뚝 비어 먹고 나무지기는 자루 속에다가 퐁 집어넣고, 그저 고기가 되었건, 과일이 되었건, 떡이 되었건, 닥치는 대로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얻어서 먹고 집어넣고, 자루 속에서 배고프면 꺼내 먹고, 썩거나 말거나. 누구든지 만나면 ‘나 돈 한푼 달라’고, 돈 한푼 주면 자루 속에다 탕 집어넣고.

‘너! 모레 물가에 가지 말아라’ ‘너! 이달 보름께는 차를 타지 말아라’ ‘너 내일 저녁에 니 마누라하고 싸우지 말아라’ 무엇이고 한마디 딱! 일러줍니다. 그러면 그 점이 백발백중 맞았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려고 하면은 나막신을 신고 줄달음질을 치고, 날씨가 좋은 날은 짚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그래서 포대화상이 무슨 신을 신었는가 볼라면 일기(日氣)를 미리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과학 기구를 사용해서 기상대(氣象臺)에서 일기 예보를 해도 혹 맞기고 하고, 안 맞기도 하고 합니다마는 포대화상 발만 보면 백발백중이었습니다.


포대화상이 생존 시에는 아무도 그이가 도인(道人)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만, 돌아가신 뒤에사 비로소 그분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염부제(閻浮提)에 미륵불(彌勒佛)로 출현하실 부처님의 권화신(權化身)이라고 하는 것을 선지식(善知識)들은 짐작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미륵불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미륵보살(彌勒菩薩)로서 지금 머물러 계십니다. 56억 7천만 년 후에 미륵불로 출현하시지마는 그때까지는 너무너무 세월이 많기 때문에 우두커니 거기에 계시지를 아니하고 가끔가끔 보살로서, 보살의 몸으로 화현(化現)해 가지고 인연 따라 중생을 교화하시게 되는데, 그 경우에 한 경우가 바로 포대화상으로 출현하신 것이 되겠습니다.


어째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화현으로 나투시려면 누가 보든지 존경할 수 있고 거룩하고 위대한 그러한 몸가짐과 행실로써 출현을 하시지 아니하고, 몸뚱이는 비대해 가지고 배가 소 배만큼 불러 가지고, 여러분이 사진을 통해서 포대화상의 모습을 짐작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배는 장구통 배아지에다가, 항시 배는 떠억 배꼽까지 다 내놓고 남자이지만 유방이 여자 유방처럼 그렇게 양쪽에 드리워진 채,

자루를 하나 짊어지고 슬슬 거리로 다니면서 걸식을 하시면서 그러니까 어린이들이 항시 뒤를 따라 다니면서 올라타고 옷을 잡아당기고 같이 친구가 되었다가 유시에는 놀려댔다가, 이렇게 하면서 포대화상은 어린애로 더불어 벗 삼아서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세월을 보내시되, 인연 따라서 점도 쳐주고 때로는 역행(逆行)과 순행(順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시면서 중생 교화를 하셨습니다.


그때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아까 조실 스님께서 읊으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또한 같이 일어난다[朝朝還共起]. 밤에 잘 때에는 부처님을 떠억 끌어안고 자다가 아침에는 그 부처님하고 같이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네가 지금 그 어젯밤에 끌어안고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던 그 부처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지금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이 게송(偈頌)은 지극히 쉬운 글이지마는 이 쉬운 한마디의 게송을 똑바로 마음에 얻는다면 바로 자기의 부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견성성불’ 누구나 입에 거는 말이지만.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을 한다'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는 성품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중생심을 떠나서는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없이도 희노애락(喜怒哀樂) · 탐진치(貪瞋癡) 이것이 모다 오욕락(五欲樂), 전판 다 중생심으로 이루어진 중생심의 표현이지마는 그 중생심 여의고는 견성(見性)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성불(成佛)할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말하고, 손으로 글씨 쓰고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성냈다, 웃었다, 울었다 하는 이것이 전부 중생심의 발로(發露)인데 그 중생심 떠나서 ‘참나’ 찾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생심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심에서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그 가장 단적이고 가까운 것이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바로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어찌 하필 말하는 놈일 뿐이겠습니까. 귀로 듣는 놈, 눈으로 보는 놈, 손으로 만지는 놈, 발로 차고 걷는 놈, 성내고 웃고 우는 놈,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이요,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곳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물러가는 곳이요, 소멸하는 곳이요, 일체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이 소멸되는 때인 것입니다.(처음~19분46초)





(2/3)----------------


입춘에 무당 절은 말할 것도 없고, 전국 조그마한 썩한 사찰 또는 절에서 신도들의 요청에 의해서 부작(符作)을 노나 드리는 절이 적지 않습니다.

부작을 빨강 물로 찍어 가지고 여러분에게 손바닥만씩 한 것을 노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노나 드리는 절이 많습니다. 그 종이를 한 장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해서 몇천 장, 몇만 장이라도 찍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갖다 붙여서 액난(厄難)을 면한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습니다. 온 집안에 도배를, 안팎으로 부작으로 도배를 하고, 온 몸뚱이에 옷을 부작으로 찍어서 옷을 해 입고 다니는 사람은 일평생 동안 감기 한번 안 들고 교통사고도 없고, 욕 한마디도 무슨 못된 짓을 하고 다녀도 감옥에도 안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일체 업(業)은 우리가 지어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러한 악업(惡業)을 지어 가지고 그러한 죄를 받는 마당에 부작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이 된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의 액난을 멀리하고 죄를 닦고자 하면, 첫째 자기의 잘못을 참회(懺悔)하고 앞으로 그러한 죄업을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상책이 될 것입니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어서 이치로 참회하고 또 사(事) 면, 실천 면으로 참회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참(理懺)이라 하는 것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죄라고 하는 것은 원래 자성(自性)이 없어서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죄가, 성불할 수 있는 그 자성, 견성성불하는 그 자성과 달리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불성 말고, 죄의 성품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체 죄는 우리가 바로 견성성불하는 그 성품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그래서 마음이 비어버리면, 마음 일어나는 생각이 가라앉으면 바로 죄도 또한 없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게 무념(無念)으로 돌아가고 죄가 없어지면, 이 두 가지가 한목 없어져 버리면 깨끗해지면[罪滅心亡兩俱空]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고 하느니라.[是卽名爲眞懺悔]


이렇게 죄의 성품이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 한 마음 돌이켜서 비우게 하면 이것이 참으로 죄를 닦아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관해서 마음을 빨리 깨끗하게 만드는 법, 이것이 바로 '이뭣고?'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죄를 소멸을 하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아니함으로 해서 빨리 인격을 완성하는 견성성불하는 가장 요긴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참(事懺)은 자기가 이미 저지른 죄과(罪過), 죄과에 대해서 몸으로써 선행(善行)을 해 가지고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 절을 백팔배 내지 삼천배 절을 하는 가운데에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것, 이것도 사참의 하나가 되겠고 또 적극적으로 자기가 잘못한 이상으로 남에게 봉사하고, 자비행을 함으로 해서 자기의 죄를 참회하는 거, 이것도 사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참과 사참을 참선, '이뭣고?'를 함으로 해서 마음을 비우게 해 가지고 참회하고, 몸으로 실천을 해서 사참을 함으로써 이참 사참을 겸해서 닦으므로 해서 우리의 업장(業障)을 빨리 소멸하고 빨리 견성성불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입춘날에 다른 절에서도 모다 부작을 노나 드리니까, 종이로 만들은 부작을 만들어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다른 절에서.

우리 절에서는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다 넣어도 망가지지 않는 정말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재난을 멀리 할 수 있는 진짜 부작(符作), 영원히 유효한—종이로 만든 것은 내년 입춘 때까지 겨우 일 년 동안 효력이 유지된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우리 용화사에서 지금 노나 드리고자 하는 부작은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않습니다.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해를 거듭해 갈수록 그 영험이 더 뚜렷해지는 그리고 영원히 타지 아니하고 망가지지 아니한 그러한 부작을 노나 드립니다.


작년에 그렇게 노나 드린다고 하고서 부작을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여러분에게 부작을 노나 드렸습니다. 작년 입춘에 이 법회에 참석하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손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그 부작을 받어 가셨습니다.

'부작을 노나 주었다'하는 말이 그 녹음을 통해서 여러 신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입춘이 훨씬 지난 뒤에 "저도 부작을 좀 주십시오" 그래가지고 "아, 그 그때 제가 바뻐서 딸이 해산하는 관계로 거기를 가서 제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은 모다 부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만 못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웃음 한번 웃었습니다마는, 정말 올 입춘에 여러분은 좋은 부적을 받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이 부적을 주고받는 데는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손으로 주고 손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지은 대로 받게 됩니다. 받게 되지마는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 받는 자세가 다릅니다.

자기가 지은 것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부처님 같은 그러한 대성현도 자기가 지은 것을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세 가지 불능(不能)이 계시는데, 자기가 지은 인(因)을 면할 수가 없는 거, 또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없는 거. 아무리 육신통(六神通)이 구족하신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인연 없는 사람은 제도할 수가 없다. 또 이 육도법계(六途法界)에 한 사람도 남음이 없이 중생을 다 없애게 하는 그것도 불가능하다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연이 다 있다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제도해 마칠 수가 있지만 인연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또한 중생계(衆生界)가 끝날 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가운데에 '내가 지은 업(業)을 면할 것이 없다' 그러는데, 하물며 우리 중생이야 자기가 무량겁 이래로 지어 온,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을 금생에 부작 한두 장 가지고 면하리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치원 학생에게 물어봐도 알 수가 있는 일입니다.

온갖 못된 짓 다하고 부작만 무당한테 가서 사 가지고 다닌다면 강도, 살인강도나 사기꾼들은 이 세상을 횡행천하(橫行天下)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혹 여러분 가운데에는 '아! 빨리 법회가 끝나서 점심을 먹고 그 무당집에 가서 신수를 보고 그 부작을 타 와야 할 텐데, 용화사에서는 부작을 입으로만 주고 진짜 부작은 주지도 않는다'고 지금 조바심을 내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말 무당집 출입하는 것은 오늘 금년 입춘을 기해서 아주 발을 씻으셔야 합니다. 무당집은 드나들 곳이 못됩니다.


답답하면—약을 써도 안 듣고, 별짓을 해도, 불공을 해도 별수가 없고, 그러니 그 영(靈)하다니까 족집게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해 보자 그래 가지고.

그 물에 빠진 사람 아쉬울 때는 지푸락도 잡는다는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무당집에 한번 발 딛어 놨다 하면은 그 사람의 갖은 협박과 공갈 위협을 주어가지고 '당신 남편 금년에 큰 굿 한번 안 하면 직장에서도 떨어지고, 독자 있는 거 그거 키우기 어려울 것이다' 아! 이런 못된 소리를 하면 그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그 무당 말을 순종 아니하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두 번 다니다 보면 무당이 진짜 자기의 귀의(歸依) 사찰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절은 다 한 부처님이고, 다 같은 절이라' 이런 말들 하시지마는, 그 옳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 두 번 가 버릇하면 아주 거기에 꽉 매여 가지고 다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나를 등지고 나를 배신하면은 안 된다'고 몇 번을 갈 때마다 다짐을 하고 족치는 통에 무서워서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당집에는, 그동안에 다니셨던 분, 안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의 도력(道力) 법력(法力)과 무당의 삿된 힘과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한테 다니다가 무당한테 가면 벌을 받게 됩니다. 삿된 데에 빠졌으니 재앙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겠죠? 부처님이 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들어간 자체가 이미 벌을 받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당 절에 다니다가 절에 오신 것은 벌을 받지 않습니다. 혹 무당이 부리는 잡귀가 쫓아온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지키고 있는 신장(神將)은 잡귀 만 명도 당해내기 때문에 염려 말고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금년 새해부터서는 어쨌든지 법문 잘 들으시고 '이뭣고?' 참선 공부 열심히 하시므로 해서 금년 내내 무장무애하시고, 묵은 온갖 재앙과 원한도 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더군다나 금년 입춘은 초여드레가 되어서, 초삼일부터 구일까지 우리 절에서 신수기도를 지금 봉행 중에 있는데 그 가운데 입춘이 들어서 더 입춘 법회에 참석하신 분은 다른 해에 입춘보다도 훨씬 더 복을 많이 받으시고 소원을 성취하실 줄 믿습니다.(19분47초~36분22초)





(3/3)----------------


아까 그 포대화상이 거룩한 도인, 거룩하게 나오시질 않고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기괴한 그러한 모습으로 출현을 하셨느냐? 그것은 상견(相見)과 사견(邪見)을 때려 부시기 위해서 그러셨다.


상견(相見)은 무엇이냐?

'저분은 도인이다, 부처님이다'하면 32상(三十二相)을 갖추어서 얼굴도 거룩하고 법문도 잘하고 이 말소리도 웅장하고, 행실도 깨끗하고, 저러니까 저분은 진짜 도인이다. 진짜 부처님이다.

이렇게 모냥 상(相)으로 법을 구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견이라 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그 상견이 바로 사견(邪見)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들이나 딸을 여읠 때는 반드시 그 모습을 보고, 사주와 관상을 보고 아들과 딸을 보내기 마련입니다마는, 법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상(相)으로 구하면, 구할 때 이미 사견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참 선지식이나 부처님을 뵈올 가망성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금강경』에 사구게(四句偈)로써, 게송(偈頌)으로써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만약 색으로써 나를 보거나,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하면,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라,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한지라,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색(色)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모냥입니다. '얼굴이 저렇게 거룩하시고, 고상하시고, 32가지 거룩한 상(相)과 여든 가지의 훌륭한 상호(相好)를 갖으셨으니 그러니까 부처님이다. 확실히 범부(凡夫)와 다르고 저러니까 부처님이다' 이렇게 모냥으로 부처님을 찾는다든지.

'부처님은 음성이 거룩하시고 원음(圓音)이시라, 무슨 법문을 하시든지 한 가지의 말씀으로 법문을 하시되, 육도법계의 중생이 다 각기 들을 수가 있다. 이해할 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음성이 저렇게 거룩하시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이렇게 해서 나를 보려고 그러고, 나를 찾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자세가 삿되어 갖고 있어, 결단코 참 여래는 보지 못할 것이다. 참 부처님은 보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상견, 모냥으로 부처님을 구하려고 하는 그러한 잘못된 소견(所見)을 때려 부시기 위해서 그러한 미치광이 같은 기괴한 몸차림과 행동을 가지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신 것입니다.


아까 그 아들과 딸을 여읠 때는 사주 관상을 본다,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아무리 사주를 가지고 궁합을 맞춰 보고, 아무리 관상 잘 본다는 사람을 비밀리 보내 가지고 이리 갸웃, 저리 갸웃 해 봤자 자기 아들, 자기 딸이 얼마만큼 과거에 복업(福業)을 잘 지었으며 금생에 얼마만큼 정법(正法)을 믿고 올바르게 참되게 살아가려고 하느냐, 노력을 하느냐, 이 두 가지에 따라서 앞으로 자기의 운명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주만 봐 가지고 좋다고 해서 앞으로 참으로 그 두 내외가 잘산다고 하면 사주쟁이의 아들딸은 이 세상에 잘 못사는 사람이 없지 않겠습니까? 절대로 사주쟁이, 관상쟁이 아들딸 그렇게 별로 잘사는 거 못 봤습니다.

자기네 아들딸도 제대로 운명을 개척을 못한 사람이 남의 자식, 남의 딸, 이리저리 사주 봐 가지고 잘살게 할 수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아들딸 여의는 데에는 사주 관상으로 결정을 하시려고 하시지 말고, 가끔 저한테도 사주를 써 가지고 와서 궁합을 봐달라고 합니다마는 제가 사주를 공부를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주를 봐 갖고 과거에 짓지 못한 사람이 금생에 잘못된 마음가짐과 잘못된 행실과 노력이 부족한 사람이 사주 하나만 가지고 잘살게 된다고 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궁합 보는 법을 참고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그 규수(閨秀)와 신랑 될 사람을 대면을 시켜서 둘이 서로 좋아하는 눈치가 있으면 궁합이 어지간히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볼 것은 가문도 조금 참작을 하셔야 하고, 또 학벌도 조금은 참작을 하셔야 하고, 그리저리 조금씩 보고서 그냥 성혼(成婚)을 시키면, 그리고서 단단히 단속할 것은 정법(正法)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어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마음 자세를 갖는다면 설사 과거에 그렇게 많이 복을 지어 놓지 못했다 하더라도 금생에 어떠한 난관이라도 다 극복을 하면서 결국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부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 계제에 한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입춘 법회, "부작은 이미 받으셨죠?" (예! 받았습니다) 잘 간직을 하십시오.


내일은 칠일 기도 회향이 됩니다. 아까 어떤 보살님이 오셔서 "칠일 신수(身數)기도에 들었으니까 입춘 동참금은 안 내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 그 안 내도 됩니다" 그랬더니 사무실 측에서 스님이 와 가지고 "입춘 성금은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문의를 해왔습니다.


"'신수기도에 들었으니까, 신수기도 중간에 입춘이 들었으니 입춘은 성금을 별도로 안 내도 제물에 입춘 성금은 내지게 돼' 아,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 안 내도 되지요" 이렇게 말씀을 제가 했습니다, 그리 생각을 해서.

그러나 염불도 각각이요, 뭐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신수기도에 냈고 또 입춘이니까 입춘도 내고 싶으면 내도 조금도 죄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내시고 싶으면 내시고, 안 내셔도 하등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내일 또 기도 회향이 있습니다. 내일 기도 회향에 좋은 말씀을 듣기로 하고 계속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비치는 달.

그런 달이 비치는 그러한 고요하고 신성한 곳에 들어가서,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길이 샘[漏]이 없는, 타락이 없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기가 원이다, 이러한 게송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참선을 하려면 꼭 그러한 달이, 솔바람 부는데 그 달이 비친 그러한 고요 적적한 깊은 산중으로만 들어가서 참선을 해야 잘되나 보다'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도회지(都會地)가 되었건, 장바닥이 되었건, 한 생각 간절해져 화두를 떡! 들면 바로 그 자리가 솔바람 부는 곳이요,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그 고요한 밝은 달이 비치는 깊은 산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중에 갖다 놓아도 아들 걱정, 딸 걱정, 집안 걱정, 곗돈 걱정, 이런다면 그것은 깊은 산중이 도저히 고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36분25초~48분54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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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若也山中逢子期  豈將黃葉下山下’ ; 『태고집(太古集)』 (雪栖 편, 김달진 역주 | 세계사) '석가 출산상(釋迦出山相)' p229 참고.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천명(天命) ; ①타고난 수명. ②타고난 운명. ③하늘의 명령.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불가결(不可缺) ; 없어서는 안 됨.

*관등(觀燈 볼 관/등 등) ; 등(燈)을 밝히고 봉축(奉祝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하는 행사. 연등(燃燈)과 같은 말. 주로 음력 사월 초파일에 행하였으며, 이 날을 관등절, 그 놀이를 관등놀이라고 하였다. 집집마다 등을 달고, 관청, 시장 거리의 가게, 절 등에서 등대를 세워 등을 달아 부처님의 탄생을 봉축하였다.


오늘날에는 이 날을 '부처님 오신날'이라 하여 국가공휴일로 정하고 밤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등을 들고 거리를 돌면서 제등행렬(提燈行列)을 한다.

요즈음에는 특별한 사찰의 행사 때에도 때때로 관등을 하며, 천등불사 · 만등불사 등 관등 위주의 행사를 한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 때 행해졌던 팔관회(八關會)이다.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일/줄기·맥 맥/서로 상/통할 통) ; 사고방식이나 성질 등이 두 대상 간에 어느 면에서 한 가지[一脈]로 서로[相] 통(通)하거나 비슷해짐.

*허기(虛飢 빌 허/주릴·굶주림 기) ; 굶어서[飢] 속이 비어[虛] 몹시 배가 고픔.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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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포대화상(布袋和尙) ; 중국 후량(後梁) 때의 스님. 절강성(浙江省)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출신. 자기가 자칭하는 이름은 계차(契此)였다. 체구가 비대하고, 이마에 주름이 잡히고, 배가 불룩하고, 말이 일정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자고 누웠다.

항상 지팡이에 베자루 하나를 걸어 메고, 소용되는 물건은 모두 그 속에다 넣었다. 저자나 마을에 들어갔다가 물건을 보면 달라고 하여, 먹을 것은 무엇이나 주기만 하면 받아 먹으면서 조금씩 나누어 그 자루에 넣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별호를 지어 장정자(長汀子) 또는 포대화상(布袋和尙)이라고 불렀다. 혹 사람들에게 무엇을 달라 했다가 돈을 주면 돌려 주었고, 남에게 길흉을 예언해 주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916년 3월에 명주 악림사(嶽林寺) 동쪽 행랑 밑의 반석 위에 단정히 앉아서 게송을 읊었다.


미륵진미륵(彌勒眞彌勒)  분신천백억(分身千百億) 시시시시인(時時示時人)  시인자불식(時人自不識)

미륵 부처님, 참 미륵 부처님이 분신(分身)해서 천백억 부처님이 되었다. 때때로 당시 사람들에게 보이되,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아지를 못하는구나.


게송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떠났는데, 그 뒤에 다른 고을 사람들은 여전히 대사가 포대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사람들은 포대화상을 미륵 보살의 화현(化現)이라 하여, 그 모양을 그려서 존경하여 받드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참고] [전등록 3] (제27권) (동국역경원 | 김월운 옮김) p459-463 참고.

*비다 ; '베다(사람이 과일을 입으로 끊거나 자르다)'의 사투리.

*나무지기 ; ‘나머지’의 사투리.

*기상대(氣象臺) ; 기상(氣象 바람, 구름, 비 등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측, 통보하거나 또는 조사, 연구하기 위한 시설. 또는 그 기관.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염부(閻浮) ; 염부제(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권화신(權化身) ;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변하여 나타난 몸.

*권화(權化) ; 산스크리트어  avatāra ①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몸이나 모양으로 변하여 나타나는 것. 권현(權現) · 화현(化現) · 응현(應現)이라고도 한다. ②화신(化身)과 같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호명(護明) 보살의 이름으로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전판(全판) ; 하나도 남김이 없는 전부.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발로(發露 드러내다·밝히다 발/드러내다 로) ;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 또는 그런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재앙(災殃 재앙 재/재앙 앙) ;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變故). 또는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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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이참(理懺) ; 진리의 참모습을 관찰하여 참회를 얻는 것. 관찰실상참회(觀察實相懺悔)라고도 한다.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罪)라고 하는 것은 자성(自性)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어서,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한 것임을 알게 되면 죄도 또한 없어진다(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이 도리를 철저히 믿고 참선을 하면 거기에서 죄가 소멸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업의 실상을 관찰하여 죄를 멸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 한다.

*사참(事懺) ; 지은 바 행위를 분별하여 그 행위에 대해서 참회하는 것으로서,

몸(身)으로는 부처님께 무수배례(無數拜禮) 절을 하고, 입(口)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偈頌)을 외우며, 마음(意)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죄업을 참회한다.

법계(法界)의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중생이 부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참회하는 것. 일반적으로 ‘참회한다’하면 이 사참을 뜻한다. ‘수사분별참회(隨事分別懺悔)’라고도 한다.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何名無念 若見一切法 心不染着 是爲無念 用卽徧一切處 亦不著一切處 但淨本心 使六識 出六門 於六塵中 無染無雜 來去自由 通用無滯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若百物 不思 當令念絶 卽是法縛 卽名邊見 善知識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法者 至佛地位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죄과(罪過 허물 죄/허물 과) ; 죄가 될 만한 과실이나 허물.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삼불능(三不能) ; 당나라 숭악(崇嶽)의 원규(元珪 : 644 ~716) 선사가 말씀하신 부처님의 3능(三能)과 3불능(三不能).

(1) 3능(三能) - 부처님의 3가지 능한 것.

①일체 상(相)이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시는 것. ②모든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겁(億劫)의 모든 일을 다 아시는 것. ③한량없는 중생(무량중생)을 제도하시는 것.


(2) 3불능(三不能) - 부처님의 3가지 능치 못한 것.

①결정된 업[定業]은 즉시 멸하지 못함. ②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 못함. ③중생계를 다 제도하지 못함.


[참고] 『전등록(傳燈錄)』 제4권. '숭악 원규 선사'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283~284.

佛能空一切相 成萬法智 而不能卽滅定業 佛能知群有性 窮億劫事 而不能化導無緣 佛能度無量有情 而不能盡衆生界 是謂三不能也


부처님께서는 온갖 형상의 공(空)함을 깨달아서 만법의 지혜를 이루셨으나 결정된 업[定業]을 즉시 없애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의 성품을 다 아시고 억만 겁의 일을 기억하시나 인연 없는 중생을 제도하지는 못하고,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유정(有情)을 제도하시나 중생 세계를 다하게 하지는 못하나니, 이것을 세 가지 능하지 못함[三不能]이라고 말한다.


定業亦不牢久 無緣亦謂一期 衆生界本無增減 更無一人能主有法 有法無主是謂無法 無法無主是謂無心 如我解佛亦無神通也 但能以無心通達一切法爾


결정된 업[定業]이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고, 인연이 없다 함도 일기(一期)를 말한 것이고, 중생 세계도 본래 증감(增減)이 없는 것이라서 한 사람도 유법(有法)을 능히 주재하는 자가 없다. 유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법(無法)이라 하고, 무법에 주재자가 없는 것을 무심(無心)이라 한다. 가령 내가 이해하기로는 부처님은 본래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무심으로써 온갖 법을 통달했을 뿐이다.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횡행천하(橫行天下)하다 ; 거리낌없이 제멋대로 세상을 나돌아다니다.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도력(道力) ; ①도의 근본에서 생기는 힘. 도를 얻음에 의하여 나타남. ②지혜의 힘.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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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견(相見) ; 상(相)이 있다는 견해.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신수(身數)기도 ; 지난 1년 동안의 죄업을 참회하고, 새해를 맞아 정초에 1년 동안의 안녕과 소원을 기원하는 기도.

*신수(身數 몸·나·자신 신/운수 수) ; 사람의 운수(運數). 사람의 운명(運命)이나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제물에 ; 지물에. 제바람에. 제풀에. 저 혼자 스스로의 바람에.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기운으로 말미암아.

[참고] 제물에(지물에) 지치다 : 무슨 일을 하다가 스스로 혹은 자기 힘에 지쳐서 시들해지는 것.

*(게송)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무루(無漏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 ; 유루(有漏)의 대칭어.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번뇌가 사라진 경지.

누(漏 산스크리트어 āsrava)는 번뇌(煩惱 산스크리트어 kleśa)의 동의어로 누주(漏注) · 누설(漏泄, 漏洩 흘러나온다) · 누실(漏失) 등으로도 한역한다. 곧 육근(六根)과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항상 과실(過失 결점. 과오. 허물)과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므로 누(漏)라 한다. 혹은 누란 누락(漏落)의 뜻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누(漏)를 동반한 법을 유루, 그렇지 않은 법을 무루라 한다.

*'도회지(都會地)가 되었건, 장바닥이 되었건, 한 생각 간절해져 화두를 떡! 들면 바로 그 자리가 솔바람 부는 곳이요,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그 고요한 밝은 달이 비치는 깊은 산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중에 갖다 놓아도 아들 걱정, 딸 걱정, 집안 걱정, 곗돈 걱정, 이런다면 그것은 깊은 산중이 도저히 고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 일념단속(一念團束).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법문 내용]


(게송)약야산중봉자기~ /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방편설에 그치지 않고 활구참선법을 들려 드린다 / 포대화상, 미륵불의 화현 /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이 견성 /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참회, 이참(理懺)과 사참(事懺) / 업장소멸하고 재난을 멀리 할 수 있는 진짜 부작(符作), 영원히 효력이 상실되지 않는 부작, ‘이뭣고?’ / 부처님 삼불능(三不能) / 무당집에 다니신 발은 깨끗이 씻어라.


포대화상이 왜 기괴한 모습으로 출현을 하셨느냐? 그것은 상견(相見)과 사견(邪見)을 때려 부시기 위해서 /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게송)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 또 동지 법회, 입춘 법회, 칠성 법회, 사월 초파일 관등(觀燈) 법회, 이런 법회가 노란 이파리를 가지고 어린애 울음을 달래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방편설, 이것이 모두 일맥상통(一脈相通)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달래 봤자 어린애는 잠깐 울음을 그쳤을 뿐, 배가 고픈 허기(虛飢)는 완전히 가시질 않은 것입니다. 다시 또 울음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일양(一樣)으로 노란 이파리만 가지고 여러분의 울음을 달래는데에 그치지를 아니하고, 정말 입에 넣어서 먹으면 배가 부를 수 있는 활구참선법 영양제를 여러분에게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 견성성불’ 누구나 입에 거는 말이지만. '성품(性品)을 보고 성불(成佛)을 한다'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는 성품을 볼 수가 없는 것이고, 중생심을 떠나서는 성불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없이도 희노애락(喜怒哀樂) · 탐진치(貪瞋癡) · 오욕락(五欲樂), 전판 다 중생심으로 이루어진 중생심의 표현이지마는 그 중생심 여의고는 견성(見性)할 도리도 없는 것이고, 성불(成佛)할 기약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중생심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말하고, 손으로 글씨 쓰고 일하고, 발로 걸어 다니고, 성냈다, 웃었다, 울었다 하는 이것이 전부 중생심의 발로(發露)인데 그 중생심 떠나서 ‘참나’ 찾을 길은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중생심 버리지 아니하고, 중생심에서 중생심으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見性)입니다.


그 가장 단적이고 가까운 것이 '부처 간 곳을 알고자 할진대는 바로 이 말하는 이놈이니라' 어찌 하필 말하는 놈일 뿐이겠습니까. 귀로 듣는 놈, 눈으로 보는 놈, 손으로 만지는 놈, 발로 차고 걷는 놈, 성내고 웃고 우는 놈,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부처님 계신 곳이요, 바로 그 도리 보는 가장 가까운 방법이 ‘이뭣고?’

‘이뭣고?’ 한번 드는 곳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물러가는 것이요, 소멸하는 곳이요, 일체 재앙(災殃)과 액난(厄難)이 소멸되는 때인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일체 업(業)은 우리가 지어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러한 악업(惡業)을 지어 가지고 그러한 죄를 받는 마당에 부작을 차고 다닌다고 해서 그 업이 소멸이 된다고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참과 사참을—참선, '이뭣고?'를 함으로 해서 마음을 비우게 해 가지고 참회하고, 몸으로 실천을 해서 사참을 함으로써 이참 사참을 겸해서 닦으므로 해서 우리의 업장(業障)을 빨리 소멸하고 빨리 견성성불할 수 있는 그러한 수행을 쌓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해부터서는 어쨌든지 법문 잘 들으시고 '이뭣고?' 참선 공부 열심히 하시므로 해서 금년 내내 무장무애하시고, 묵은 온갖 재앙과 원한도 다 깨끗이 씻어 버리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포대화상이 거룩한 도인, 거룩하게 나오시질 않고 왜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기괴한 그러한 모습으로 출현을 하셨느냐? 그것은 상견(相見)과 사견(邪見)을 때려 부시기 위해서 그러셨다. 상견(相見)은 무엇이냐?


'저분은 도인이다, 부처님이다'하면 32상(三十二相)을 갖추어서 얼굴도 거룩하고 법문도 잘하고 이 말소리도 웅장하고, 행실도 깨끗하고, 저러니까 저분은 진짜 도인이다. 진짜 부처님이다.

이렇게 모냥 상(相)으로 법을 구하는 거, 이것이 바로 상견이라 하는 것이고. 바로 그 상견이 바로 사견(邪見)이 되는 것입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비치는 달, 그런 달이 비치는 그러한 고요하고 신성한 곳에 들어가서,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길이 샘[漏]이 없는, 타락이 없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기가 원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참선을 하려면 꼭 그러한 솔바람 부는데 그 달이 비친 그러한 고요 적적한 깊은 산중으로만 들어가서 참선을 해야 잘되나 보다'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도회지(都會地)가 되었건, 장바닥이 되었건, 한 생각 간절해져 화두를 떡! 들면 바로 그 자리가 솔바람 부는 곳이요,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그 고요한 밝은 달이 비치는 깊은 산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중에 갖다 놓아도 아들 걱정, 딸 걱정, 집안 걱정, 곗돈 걱정, 이런다면 그것은 깊은 산중이 도저히 고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어떻게 단속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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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