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01~225)2023. 7. 28. 17:37

(No.215)—1983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64분)

 

(1) 약 34분.

 

(2) 약 30분.



(1)------------------

신세등공화(身世等空華)하고   이명여분토(利名如糞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자합여사(道者合如斯)하면  기시과능소(豈是誇能所)리요
나무~아미타불~

신세(身世)는 등공화(等空華)요, 이 몸뚱이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공의 꽃과 같고,
이명(利名)은 여분토(如糞土)로구나. 이끗, 재산과 명예 이러한 것은 똥 묻은 똥 덩어리와 같다.

공화(空華)라 하는 것은, 허공의 꽃이라 하는 것은 실지로는 없는 것인데, 안질병(眼疾病)이 눈병이 난 사람이 허공을 보면 그 허공 속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실지는 없는 것인데 눈병이 걸린 사람에게는 꼭 무엇이 실지로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허공 속에 보이는 거 그것이 공화(空華)인데, 이 몸뚱이와 이 세계도 역시 공화(空華)다 그 말이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가합(假合)해서 임시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의 깨닫지 못한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볼 때에는 이 몸뚱이가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 세계도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실상(實相)이 아니라 허공 속에 피어 있는 꽃처럼, 안질병(眼疾病) 환자가 볼 때에 허공 속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무명(無明)으로 보니까 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가 참자기, 참자기라고 느껴지고 이 세계도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뿐이지 실지는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도자(道者)가 합여사(合如斯)하면, 도 닦는 사람이, 정법을 믿고 도를 닦는 사람이 합당(合當)이 이와 같이 볼 것 같으면, 자기의 몸뚱이와 이 세계 그리고 명예와 재산 이런 것들을 공화(空華)와 같이 보고 흙덩어리나 똥 무더기처럼 본다면,
기시과능소(豈是誇能所)리요. 어찌 능소(能所)를 자랑하리요. 능소(能所)라 하는 것은, 능(能)이라 하는 것은 주관을 말하는 것이요, 소(所)라 하는 것은 객관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모다 능소라 하는 것은 인아상(人我相)이거든.

‘내’라 하는 생각, ‘이것은 나다’ 하는 생각, ‘내 것이다’ 하는 생각, ‘나는 잘한다’ 하는 이러한 주관적인 생각, 그리고 ‘남이다, 내가 아니고 저것은 남이다’ 하는 그런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것은 내 것은 소중하고 내가 옳고’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헐뜯고, 내가 남을 디디고 올라서서 나만 잘살려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내 가지고 남과 다투고 이러한 생각을 어찌 가질 것이냐.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로 얽혀진 허망한 것이라 하지만 먹여 주어야 하고, 입혀 주어야 하고, 춥고 더운 곳에서 이 몸을 잘 보호를 해야 하고, 병이 나면 치료를 해 줘야 하고, 또 내가 사는 집도 비가 새지 않고 차운 바람을 막아 주고 이렇게 집도 단속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명예나 재산 같은 것도 그것이 똥 덩어리와 같고, 흙덩어리와 같이 허망한 것이요 영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지마는 당장 명예가 없으면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고, 재산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말이여. 먹고 입고 거주하는 것이 온통 다 재산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서 가리키는 데에도 재산이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허공의 꽃처럼 보고, 똥 덩어리나 흙덩어리처럼 그렇게 달관을 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 몸뚱이도 허망한 것이니 병이 들어도 내싸두어 버리고, 춥거나 덥거나 얼어 죽거나 더위를 먹어서 쓰러지거나 방치를 해 버리고, 집이 쓰러져서 무너져도 내비두어 버리고, 재산을 갖다가 남이 다 가져가 버리거나 재산이 다 없어져도 관리를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 법문을 잘못 이해하면 그러한 단상견(斷常見)에 떨어져서 중도(中道)의 뜻을 이해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도 단견(斷見)에 떨어지지 아니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상견에 떨어지지 말도록 법문을 하면 당장 찰나간에 단견에 떨어지고, 이래 가지고 단견 아니면 상견, 상견 아니면 단견, 양두(兩頭)에 걸려 가지고 중도의 뜻을 알지를 못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중생견(衆生見)이라 하는 것입니다.

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 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부처님 법문에 깊은 산중에 다섯 신선(神仙)이 도(道)를 닦고 있었는데, 각기 책임이 있어서 그 다섯 신선 가운데 한 신선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밥을 짓는 부목과 공양주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있었는데,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너무 피곤해 가지고 뜨뜻한 양지 바른 언덕에 잠깐 쉰다고 하는 것이 깊은 잠이 들어 가지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식사 시간이 다 지나 버리고 늦게 늦게사 돌아오니까 그 다른 네 분의 신선들한테 호되게 걱정을 들었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을 지키지를 못하고 자기 멋대로 실컷 자고 때가 지내서사 이렇게 돌아오면 그러한 게으른 생각을 가지고 무슨 도를 이룰 것이냐?’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니까 거기에서 참 미안한 생각과 자책감이 나서 강으로 가 가지고는 한 발을 딛고, 몇 시간을 한 발로 딛고 손을 들고서 발을 들고서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벌을 주기로 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이렇게 한 발만 딛고 발을 들고 그렇게 벌을 서고 있는데, 그러다가 너무 지쳐 가지고 신발, 발에 신었던 칠보로 잘 만들어진 신이 강물에 떨어져서 흘러 내려가고 또 그러다가 몸이 쓰러져 가지고 결국은 그 사람은 물에 떠내려 가지고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헤엄쳐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길로 물에 빠져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 신선이 그렇게 해서 죽은 뒤에 오랜 세월이 걸려 가지고 다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한 여나므 살 이렇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그 소년이 신선이 죽어 가지고 태어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마을 아이들과 같이 어울려서 놀고 장난하고 그렇게 하면서—별로 부잣집이나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지를 못하고, 가난하고 천한 그런 집에 태어나 가지고 마을 아이들하고 섞여서 놀고 있는데, 어느 도사(道士)가 그 마을을 지나다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이렇게 주욱 살펴보더니, 그 신선이 (다시) 태어난 그 아이를 보고서 찬찬히 그 아이를 보니 설사 옷은 남루하게 입었지만, 그 얼굴 생김새라든지 눈매라든지 모든 것이 여러 아이들에게 비교해서 특출하게 준수하게 생겼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아이를 “너 이리 좀 오너라” 하고 부르니까 다른 애들도 ‘와~’ 하니 삥 둘러섰다.

“너는 지금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너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나라 왕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천한 집 아이가 무슨 왕이 된다고 그러십니까? 점잖은 어른이 왜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러한 장난 말을 하십니까?”

“아니다, 후일에 반드시 네가 왕이 될 터이니 그때 왕이 되거든 나를 잊어버리지 말아라” 그랬습니다.
“만일 제가 왕이 된다면 내가 도사님을 어찌 잊어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왕이 될 까닭도 없지만, 만일에 된다 하더라도 제가 도사님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잊겠습니까?”

그래서 마을 애들도 ‘미친 영감이, 미친 사람이 저런 소리를 한다’ 해 가지고 모두 곧이듣지 않고 웃어 버리고 말았는데, 몇 해 안 가서 그 나라 임금님이 병을 앓다가 승하(昇遐)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밑에, 왕 밑에 왕자가 없어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를 왕으로 모시느냐?’ 대신(大臣)들이 모여서 여러 날을 두고 토의를 한 결과, ‘이 나라 방방곡곡을 뒤져서 임금님으로 모실 만한 그런 어진 분을 우리가 찾기로 하자’ 그래 가지고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 가지고 임금님이 될 만한 그런 어진 현자(賢者)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치 그 신선이 죽어서 태어난 그 애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 가지고 추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서는 칠보로 장엄한 가마를 보내 가지고 그 청년을 모셔 갔습니다. 가서 보니 만조백관이 전부 다 ‘과연 이만하면 우리가 임금님으로 모실 만하다’ 해 가지고 임금님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딱 되던 날, 몇 해 전에 자기가 임금이 되리라고 수기를 준 그 도사가 찾아왔습니다.
“상감이 저 얼굴을 기억을 하시겠습니까?”
“아! 제가 기억을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도사님 말대로 임금이 되었으니 내가 도사님의 은혜를 갚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던지 다 원(願)대로 해 드리려니와 우선 당장 이 나라를 절반으로 갈라서 드릴 테니까 그 나라 임금이 되십시오” 그러니까.

“저는 그런 것도 다 싫습니다. 싫고, 임금님이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모든 것은 내가 임금님으로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둘째는 모든 크고 작은 정사(政事)를 하는데 있어서 나의 자문(諮問)을 받아서 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 두 가지만 해 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 그것이야 내가 어찌 못하겠습니까”

이래 가지고 왕궁에 특실을 만들어서 임금님과 똑같이 먹고, 똑같이 입고, 똑같이 잘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시설을 다 마련을 하고, 크고 작은 모든 정사에 전부 다 문의를 해서 자문을 받아 가지고 하게 되었습니다.
몇 해 안 가서 어떻게 정치를 잘하고 잘 다스리던지 온 나라가 온통 질서가 잘 잡히고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사가 차츰차츰 교만(驕慢)이 생겨 가지고 모든 대신들을 너무 짓밟고,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래 가지고 그 나라 모든 정치는 그 도사의 한 주먹 속에 다 들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대신이 수십 명 있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마니까 대신들이 여기서저기서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을 해도 임금님은 다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 도사(道士) 말에만 전적으로 의존을 하게 되어서 모든 대신들은 ‘저 요망한 저 도사를, 거라지놈 같은 정체를 모르는 저 도사놈을 갖다가 내쫓아야 한다’고 모다 주장을 했습니다.
임금님은 여러 차례 그것을 거절을 하고 물리치고 그랬지만, 하도 대신들이 물러가지 아니하고 연일 연좌데모(連坐demo)를 하고 그러니까 하다하다 못해서 임금님도 ’그 도사를 한번 시험해 볼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그 도사가 외출을 하게 되었는데, 그전 같으면 도사가 돌아올 때까지 상감이 식사를 아니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도사가 오거든 항시 같이 했었는데, 그날은 도사가 오기 전에 더 이상 기다리지를 아니하고 임금님이 먼저 식사를 해 버렸습니다. 도사가 돌아와 보니 벌써 먼저 임금이 수라(水剌)를 다 들어 버렸다 그 말이여.

“왜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아니하고 임금만 먼저 식사를 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내가 먼저 했습니다”

“벌써 상감은 나와 최초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언제나 함께 하고, 똑같이 하기로 그렇게 철통같은 약속을 해놓고 조끔 배고프다고 해서 그것을 참지 못하고 나 먼저 먹다니, 당신은 의리를 배반한 사람이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 개새끼같은 놈이다” 이렇게 상감을 향해서 입에 못 담을 욕설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신들이 ‘와~’ 일어나 가지고 ‘상감님을 향해서 저러한 무례한 소리를 할 수가 있느냐? 저러한 불경스런 놈을 가만히 둘 수가 없다’ 해 가지고 ‘저놈은 귀도 짜르고, 코도 짜르고, 혀도 짜르고 해 가지고 그리고 팔다리를 다 짤라서 항아리 속에 담아 가지고 태워 죽여야 옳다’ 이래 가지고 대신들이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임금님은 (도사의) 소퉁이를 생각하면 마땅히 그렇게 엄벌에 처할 일이로되, 자기와의 오랜 의리가 있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 이 사람을 먹고 입고 살만한 돈과 곡식을 주어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해라” 이래 가지고 대신들의 연좌 항의를 갖다가 물리치고 귀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도사(道士)는 할 수 없이 왕실에서 쫓겨나 가지고 저 먼 지방으로 추방을 당했는데, 할 수 없이 자기 받았던 돈과 곡식이 다 떨어지니까 옛날에 자기 다정한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들은 그 사람을 갖다가 농토를 주어 가지고, 소와 농토를 주어 가지고 농사를 짓도록 상당한 많은 토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여러 종들을, 일꾼과 머슴을 들여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는데, 어떻게 머슴과 종들을 갖다가 혹독하게 부리던지 그 일꾼들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갖다가 소 돼지처럼 그렇게 혹독하게 부리던지 살 수가 없어서 그 머슴 가운데 한 사람이 거기서 도망쳐 가지고 ‘물에 빠져서 차라리 자살을 해 버려야겠다’ 이래 가지고 강가로 가서, 자살하려고 강가로 갔더니 거기에 이상하게 번쩍거리는 것이 있어서 가까이 가 보니까 칠보로 장엄한 신짝 한 개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래서 그것을 주워 가지고 이모저모로 보니까 기가 막힌 보물이여.
그래서 ‘이것을 갖다가 우리 주인한테 갖다 바치면 나와 우리 모다 동료들을 혹독하게 부리지 아니하고 잘 따뜻하게 해 줄 거다’ 해 가지고 그 신을 갖다가 바치니까, 그 도사가 대단히 기뻐하면서 ‘이 신을 갖다가 상감한테 바치면은 상감이 나의 잘못을 용서하고 귀양을 풀어주지 않을까?’ 이래 가지고 그 신발을 갖다 상감한테 바쳤습니다.

상감이 대단히 기뻐서 귀양을 풀어줄려고 했는데 대신들이 ‘와~’ 하니 일어나 가지고 모두가 반대를 했습니다. ‘그까짓 신발 한 짝을 가져왔다고 해서 그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 차라리 신발 두 짝, 한 켤레를 다 가져온다면은 혹 몰라도 한 짝 가지고 어떻게 용서를 해 줄 수가 있느냐?’
그래서 상감은 ‘그러면 가서 어떻게 찾던지 마지막 한 짝을 더 찾아서 한 켤레를 채운다면 용서를 해 주겠다’ 이리해서 그 도사는 다시 추방을 당해 가지고 자기 농토가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 일꾼과 종을 거느리고 그 강가를 샅샅이 뒤졌으나 그 신발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그 강을 거슬러서 거슬러서 저 산중 깊이 들어가니까, 아! 신선들 네 분이 바둑을 두면서 그렇게 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신선들한테 인사를 하면서 “내가 신발 한 짝만 더 주운다면 내가 모든 이런 고생으로부터 풀려나고, 다시 임금님의 스승이 되어 가지고 호강을 할 수가 있겠는데, 이 신발 한 짝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것을 어떻게 찾게 좀 해 주십시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신선이 “너의 상감은 옛날에 우리와 같이 도를 닦던 우리의 친구다. 친구가 조그만한 실수가 있어 가지고 스스로 그 조그만한 실수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하다가 마침내 몸까지 버리게 되었어. 조그마한 허물을 깊이 뉘우친 그 공덕으로 다음 생에 상감의 복록을 누리게 되었는데, 너는 큰 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을 모르니 너 같은 사람을 어디다 쓸 것이냐?” 이렇게 꾸짖으니까,
“과연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 임금님이 나하고 약속을 잘 지켜서 나를 그렇게 임금님과 똑같이 그렇게 명예와 권리와 모든 복록을 그렇게 잘 해 주었는데, 내가 그것에 너무 놀아나 가지고 교만심을 내 가지고 그렇게 함부로 하다가 이러한 벌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무런 참회를 할 줄 모르고 오히려 대신들과 임금님을 원망했으니 참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깊이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선이 ‘그러면 그 신발 한 짝은 저리 아무 데를 가면은 거기에 신발이 한 짝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일러주어 가지고 그 도사가 거기를 찾아 가지고 신발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짝을 채워서 한 켤레를 상감한테 바치니까 상감이 그렇게 좋아하고, 대신들도 차츰 미워하는 생각이 없어져서 다시 상감의 자문에 응하면서 아주 바르게 그리고 겸허하게 그렇게 위로는 상감을 받들고, 아래로는 만조백관의 의사를 들어서 아주 정치를 잘해 가지고 그 나라가 번창을 했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이 있습니다.(처음~33분38초)





(2)------------------

사람은 명예와 재산과 권리를 누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벼슬이 높을수록에 그 뜻을 겸허하게 갖고, 도가 높을수록에 하심(下心)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 원효 스님의 법문도 있습니다.
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조그만한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뉘우치는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용서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큰 공(功)이 있어도 그것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교만심이 나지 아니하면, 그럴수록에 자기의 공이 더욱 빛날 것이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큰 지탄을 받게 되고, 아무리 큰 공이 있어도 교만심을 낼 때에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사람의 인격이 인증을 받게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그 공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는 큰 재앙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장양(張良)이는 한(漢)나라를 세우는데 그 큰 공이 있었지만 스스로 자기가 세운 그 공로에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았기 때문에 재앙을 면했고, 한신(韓信)이도 역시 그러한 큰 공을 세웠지만 천자(天子)로부터 자기의 공로에 대한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포상을 받지 못한 데 대해 항시 불만을 품었기 때문에 참형(慘刑)을, 참혹한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또는 회사에서나 또는 국가에서나 또는 이런 도문(道門)에서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러한 작은 허물이 있으면 크게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새로운 발전을 해 나가도록 마음을 쓸 것이고, 설사 어떠한 공(功), 작은 공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큰 공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공로에 대해서 자만심을 갖지 아니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나 직장, 어디서라도 존경을 받게 되고 자기에게 모든 재앙이 닥쳐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흔히 가정에서 싸움도 자기의 잘못은 너그럽게 용서를 하고, 상대방의 잘못은 추상(秋霜)같이 다루려고 하는 데에서 큰소리가 나고 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고,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간, 형과 아우와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자기의 잘못은 뉘우칠 줄 모르고 상대의 잘못은 조그만한 것도 용서를 아니하고 크게 문제를 삼으려고 하는 데에서 시비가 일어나고 큰소리가 나고 마침내는 불화(不和)가 이루어지게 되고, 부부간에도 그러한 조그만한 문제가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이혼을 하게 되고, 불행한 때에는 한쪽에서 가출을 하고 자살을 하고 이러한 참 참담한 사건이 일어나는 예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뉘우치고 반성을 하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한다면 우리의 가정, 우리가 몸담아 있는 회사, 우리가 몸담아 있는 고장과 나라,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네는 그 사찰이 모든 재앙은 눈 녹듯이 다 녹아 버리고, 정말 부처님께서 그 육화(六和), 여섯 가지의 육화의 법이 실천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정법문중(正法門中)은 영원히 꽃이 피고 열매가 맺어지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햇볕이 문틈이나 그런 틈으로 햇볕이 스며들 때 방안에 있는 그 수많은 먼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햇볕이 스며들지 아니할 때, 문을 닫고 방안에 있으면 그 방안에 먼지 있는 것이 보이질 않습니다마는, 햇볕이 문틈으로 스며들 때에 보면 그 방안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먼지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환하니 보입니다. 그리고 못에, 맑은 못 그리고 조용한 못가에 섰으면, 그 못 속에 자기의 모습과 근처 산과 나무나 하늘에 떠 있는 달에 모든 것들이 그 물속에 소소(昭昭)하게 다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 우리 자신의 모든 크고 작은 모습이 우리의 몸가짐에 있어서나, 말씨에 있어서나, 마음가짐에 있어서 모든 것이 소상하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햇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스러운 마음으로 비추어 본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고요한 연못」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화두를 들고 정진(精進)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이 다 가라앉아서 맑고 고요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하는 데에다가 비유를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 도(道)를 닦지 아니하면, 호수의 물이 흙탕물이 그나마 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상태와 같고, 방안에 있으되 햇볕이 들어오지를 않는 껌껌한 방에 있는 거와 같아서 그런 상태에서는 먼지도 보이지 아니하고 모든 영상(映像)도 보이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그런 껌껌한 방이나 물결치는 흙탕물 속과 같은 그러한 마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자기의 허물은 보지 아니하고 밤낮 남의 잘못한 것만 살펴 가지고 그것을 피차 서로 시비(是非)를 하다가 결국은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옷을 찢고 저 사람은 내 옷을 찢으며, 나는 저 사람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고 상대방은 내 얼굴을 갖다가 할켜 가지고, 결국은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그래 가지고 자기의 이끗만을 생각하고, 자기의 명예와 권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남을 거리낌없이 짓밟고 해롭게 하는 그러한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다 그 말이여. 지옥(地獄) 세계다 그 말이여.


어느 이상한 곳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 들어가 가지고 보니까, 원숭이를 몇십 마리를 잡아넣어 논 것처럼 뭔 사람 소리도 같고 이상한 소리가 나서 괴이한 소리가 나서 이리 가 봤더니 사람들이 꼬치꼬치 말라서 뼈만 남은 앙상한 그런 꼭 귀신같은, 아직 죽지 아니한 해골같은 그러한 무리들이 그 안에 버글버글버글 하고 있다 그 말이여.
또 한쪽을 저리 갔더니 희망에 찬 노래소리가 나고,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얼굴이 포동포동하니 모다 살이 찌고 얼굴이 환히 아주 신선도골(神仙道骨)이 되어 가지고 모다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다가 조금 있으니까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식사가 주욱 가운데 식탁이 있고 그런데 그 식탁에 바짝 가서 먹게 되어 있지를 않고 멀찌감치 앉아서, 숟가락이 기다란 해 가지고 국자같이 만들어져 가지고 먼 데서 음식을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러고 가운데다가 밥통을 주욱 갖다 놨기 때문에 같이 이쪽에서도 떠먹고 또 저쪽에서도 마주 앉아서 이렇게 떠먹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렇게 뜰라고 하면 저쪽에 앉은 사람이 긴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 못 퍼가게 하고, 자기가 퍼 먹으려고 하면 또 이쪽에 앉은 사람이 또 그 숟가락을 탁! 때려 버리고는 못 떠먹게 하고 그래 가지고 또 저만 떠먹으려고 하고, 그러다가 피차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음식물은 밖으로 다 쏟아지고.
그리 못 먹고 상대방이 못 떠먹게 하니까, 그 숟갈로 상대방의 얼굴이고 머리빡이고 사정없이 때리고 후려갈겨 가지고 모다 상처가 나고, 그래서 상처가 난 데다가 못 먹고 하니까 뼈만 앙상하니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 또 한쪽에를 갔더니 아까 그 살이 찌고 신선도골과 같이 생긴 데에 식사가 나왔는데, 그 긴 숟갈로 밥을 떠 가지고 제 입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입에다가 따악 떠 넣어 주더라 그 말이여. 또 상대방에 앉은 사람은 또 긴 숟갈로 음식을 떠 가지고 또 자기 앞에 있는 상대방 입에 다 떠 주고 해서 피차(彼此) 떠먹여 주니까, 그렇게 밥은 음식물은 엎지러지지 아니하고 다 같이 살이 포동포동하니 쪘어. 얼굴도 하나도 상처가 나지 아니하고 그렇게 살이 쪄서 그렇게 참 화목한 가운데에 살고 있더라 그 말이여.

이 세계도 서로 도우면서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에 해(害)가 가지 않도록 항시 자기의 어떤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하면 상대방에 어떠한 해(害)가 있을 것인가? 이 일을 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에는 어떠한 해가 있을 것인가?’ 항시 남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살 길을 찾아나가고, 자기의 사업을 해 나가는 그러한 세계가 된다면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정말 살지고 살기 좋은 그러한 세계가 될 것이고.
자기만 잘살고 자기만 배불리 먹고 또 상대방을 못 먹게 훼방을 놓고, 그것도 상대방을 갖다가 숟갈로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하면 상대방도 역시 가만히 안 있고 나로 하여금 못 먹게 할 것이고,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겨서 상처를 내게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어리석은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실지로 그러한 일을 당하면—지금 법당에서 이렇게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아! 과연 그렇구나. 그래야 하겠구나’ 그렇게 생각을 다 하시겠지만, 가정으로 돌아가고 사회에 나가면서 어떠한 명예나 권리나 이끗을 만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졌던 그러한 생각은 간 곳이 없고 확! 눈이 뒤집혀 가지고 다시 그 숟갈로 상대방 얼굴을 후려갈기게 되지 않을란가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한 분도 그런 분이 계시지 않으리라고 생각이 되고, 그러한 참 신심(信心)을 갖으신 분이기 때문에 참 여기에 이렇게—연휴가 있어서 모두 여기저기 명승고지(名勝故址)로 모다 유쾌한 여행을 떠나실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그러한 것을 다 그만두고 이렇게 이 법회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정말 갸륵하고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들이야 여러분 입에 넣기 위해서 상대방을 숟갈로 후려갈기거나 그런 일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이 세상은 너무너무 살기가 어렵습니다. ‘밤낮 남의 입에만 떠 넣고 누가 내 입에 떠 넣어 주기를 기다려봤자 동서남북을 다녀봤자 아무도 내 입에다가 떠 넣어 줄 사람을 만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이 세상은 나쁜 사람도 많이 있지만, 내 마음이 착하고 보면 참 좋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질고 착하고 항시 남을 사랑하고 애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멀고 가까운 데에서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누가 나쁘다, 저 사람이 나쁘다’ 하지만, 내가 나쁘면 좋은 사람도 다 나쁜 사람으로 변하고, 내가 어질고 착하고 좋으면 모두가 ‘나쁘다’고 지탄을 받는 그 사람도 나한테는 참 좋게 상대해 주는 경우를 많이 겪게 됩니다. 좋고 나쁜 것은 객관적이기보다는 나한테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하면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하면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하면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이다.
한 생각 근본을 미(迷)해 버리면, 만 가지 생사(生死) 문제, 생사가 항상 뒷을 따르더라. 한 생각 삐끗 잘못 먹은 데에서 온갖 재앙이 따르고 생사의 윤회(輪廻)가 끊임없이 쫓아오더라.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하면, 진뇌(塵牢), 생사 진뇌의 감옥을 때려 부셔 버리면,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이라. 함께, 우리 모두가 함께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는 노래를 합창하게 될 것이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이렇게 서늘한 가을철이 돌아왔습니다. 머지않아서 또 엄동(嚴冬)이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세월은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서 우리의 생사를 재촉을 합니다. 시간을 아껴서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59분5초)


입선(入禪). (입선 죽비 3타)

<약 4분 동안 정진>

죽비 쳐. (방선 죽비 3타)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라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촬토시황금(撮土是黃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33분39초~63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신세등공화(身世等空華)~ /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어야 한다 / 전생에 신선인 왕과 교만한 도사의 이야기 /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이라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驕慢)한 생각을 갖지 아니해야.

육화(六和) / 도 닦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곳은 바로 그 세계가 부처님 세계가 되는 것이고, 도 닦는 마음이 없는 세계는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세계, 지옥(地獄) 세계 / 긴 식탁의 가운데에 음식을 두고 양쪽에 긴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려는 사람들, ①서로 못 먹게 하려고 음식을 뜬 상대방의 숟가락을 치는 경우, ②음식을 떠서 상대방에게 떠 먹여 주는 경우. ‘똑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모두가 좋겠는가?’의 비유 설화 /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게송) 일념근본미(一念根本迷) 만사상상축(萬死常相逐) 타파진로옥(打破塵勞獄) 공창환향곡(共唱還鄕曲) / 대중 정진 / (게송) 참선무고금(參禪無古今)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 촬토시황금(撮土是黃金) /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방에서 파리를 날리면,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천장에 가서 붙고, 천장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은 동쪽 벽에 가서 붙고, 동쪽 벽에 앉은 파리를 날리면 서쪽에 가 붙고, 그 파리를 종일토록 날려도 동서남북 벽 아니면 천장에나 방바닥 어딘가는 기어코 붙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무명업식(無明業識)을 여의지 못한 중생은 아무리 좋은 법문을 설해 주어도 유무(有無) 아니면 중간에 떨어져서 중도의 뜻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올바르게 법문을 들으면, ‘몸과 이 세계가 허공꽃과 같다’ 해도 그 말에서 깨달아 얻을 것이요, ‘명예와 재산이 똥무더기요, 흙덩어리와 같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듣고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뉘우치고, 자기의 그릇된 애착과 집착과 소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허물이 큰 재앙을 불러오게 되는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큰 저수지의 둑도 모래 구녁 하나로 인해서 물이 졸졸졸졸 그리 새 가지고 차츰차츰 구멍이 커져 가지고 열 길, 스무 길 되는 무서운 저수지 댐이 무너져 가지고 큰 물난리가 나듯이, 우리가 세속(世俗)에 살건 또는 도를 닦는 도문(道門)에서 건 자기의 조그만한 허물을 크게 뉘우칠 줄 알고, 설사 자기에게 큰 공(功)이 있다 하더라도 교만한 생각을 갖지 아니할 때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바로잡고, 내 마음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가지면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마음 하나가 잘못되어 가지고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한 집안 내에도 모두가 미운 사람뿐이고, 이웃간에도 전부가 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나의 허물을 바로잡는 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무고금(無古今)이요. ‘옛날에는 참선을 하면 모다 깨칠 수가 있고, 지금은 말세가 되어서 참선해 봤자 근기(根機)가 얕아서 깨칠 수가 없다’ 이러한 말들을 하는 사람이 있고 또 그러한 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나, 참선에는 예[古]와 이제[今]가 없어.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라도 나도 하면 된다’고 믿고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든지 다 깨칠 수가 있다.
단물외변심(但勿外邊尋)이니라. 다못 밖을 향해서 찾지를 말어라. 참선을 하는데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일어나는,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觀照)할 뿐이지 문자상에서 책에서 찾는다든지, 귀로 듣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눈으로 보는 데에서 찾는다든지 밖에서 찾지를 말어라.

타개무진장(打開無盡藏)하면, 다함이 없는 보배를 자기 속에서 타개(打開)를 하면 개발을 하면,
촬토(撮土)가 시황금(是黃金)이니라. 흙을 움켜쥐어도 그것이 곧 황금이 되어 버릴 것이다.
눈으로 보는데, 화두를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만 봐 버리면 눈으로 보는 것이 전판 다 진리(眞理)가 아닌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손으로 잡는 것이 흙덩이 건 돌덩어리 건 손에 쥐었다 하면 전부가 그것이 다 진리 아닌 것이 없더라.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23. 4. 16. 21:06

(No.286)—1985년(을축년) 성도재법회(85.12.08.음) (43분)

 

약 43분.


약문여래본기인(若問如來本起因)인댄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약 여래(如來)가 본래 일어나는 인연을 물을 거 같으면, ‘부처님이 본래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여래가 본래 일어나는 것, 여래(如來)는 부처님인데 화신(化身)으로 나타난 부처님이 아니라, 본래 오시되 오신 바가 없고 가시되 가신 바가 없는 그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여.
그 '본래 법신으로서의 그 부처님이 어떻게 해서 나오셨느냐?' 그 도리를 물을 거 같으면, 애상수처상천진(擬相酬處喪天眞)이여. 그 뭐라고 대답을 하려고 하면 벌써 천진(天眞)을 상실(喪失)한다.

표원이함무명정(標圓已陷無明穽)이요. 원상이다. 원래 둥그런 것이다. 불불불상견(佛佛不相見)이요, 모든 부처도 서로 보지를 못하고 가섭도 전할 수가 없다.
원상(圓相)이니 비원상(非圓相)이니 벌써 그것을 표하면, 그렇게 해서 표적을 하면 벌써 무명(無明)의 함정에 떨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위각난도유루진(謂覺難逃有漏塵)이여. 벌써 그것을 깨달랐느니 못 깨달랐느니, 무엇을 일러서 깨달랐다. 깨달라서 부처가 되고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나왔다느니 벌써 깨달랐다고 이르면 벌써 누진(漏塵)에 떨어진 것을 면치를 못할 것이다.


오늘은 을축년(乙丑年)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입니다.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어떻게 하면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느냐?' 그 생사해탈하는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훌륭하다는 여러 스승을 찾았습니다.
찾아가서 그 스승 밑에 수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단 더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의 인가를 받고 그 스승이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의 법을 이어받을 것을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것으로써 만족하시지 않고 그것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더 훌륭한 스승을 찾아서 또 그 스승 밑에 가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또 도를 수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없이 많은 스승을 찾았고 수없이 많은 스승을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히말라야 산속에 찾어볼 만한 모든 스승을 다 찾어보고 다 해봤지만 그것으로써 마침내 만족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나무 밑에 앉아서 「내가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는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한 그런 서약을 하고서, 결심을 하고서 스스로 도(道) 닦는 데 들어가신 것입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욕개지식문전로(欲開只識門前路)인대는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인디  고금의쇄기다인(古今疑殺幾多人)고
나무~아미타불~

문 앞에 길, 문 앞에 길. 집집마다 자기 집 문 앞에서 시작한 길이 모두가 다 장안(長安)으로 통하는 것이여. 서울로 다 통해.
어느 깊은 산골짜구, 어느 촌에 있는 조그만한 오두막살이라 하더라도 문밖에 나가면 그 길이 결국은 상감마마가 계신 서울로 통하는 길인데, 그 길이 결국은 어디로 가던지 통하지만 가장 바로 가는 길,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른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돌아서 가기로 하면 북쪽에 있는 서울을 가는데 남쪽으로 가더라도 저리 저리 돌고 돌아서 간다면 못 갈 배는 아니지만,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좋은 길은 그 많은 길 가운데에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통신시병통신약(通身是病通身藥)이여. 온 몸뚱이가 전신이 다 이 병(病)이요, 전체가 다 이 약(藥)이다 그 말이여.

변계전진변계진(徧界全眞徧界塵)이여. 온 세계가 전부가 참[眞]이요, 온 세계가 바로 띠끌[塵]이더라.
길, 길이 다—서울을 바로 안다면 어디를 어느 곳을 향해서 가거나 서울로 통하는 것이고, 잘못 가면 어디를 가나 그 길이 전부가 다 잘못된 길이여.

이 바른길을 알기 위해서 깨달음을 향해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이 깨달음을 향해서 길을 찾고 있는데, 그 자기 나름대로 온갖 노력을 하고 고생을 하고—말을 아니한다든지, 밥을 굶는다던지, 잠을 안 잔다던지,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한다던지, 참 그 애쓰는 모습도 가지가지고 방법도 천 가지 만 가지지만, 이것이 모다 그 바른길을 찾기 위한 한 몸부림이고 애쓰는 것이지만,
옛날부터 지금까지 또는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 때문에 깨달음을 찾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걸 의심하다가 죽었느냐?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이렇게 하면 더 나을까? 저렇게 하면 더 좋을까?' 이래 가지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한량없는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불(佛), 부처님과 조사의 편안한 집이요, 모든 성현에 걸어가는 길이요, 한량없는 중생이 떠받드는 바고, 만세(萬世)에 향해 나갈 길이고, 삼계(三界)에 근본이여.
근본이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 모두의—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그것 때문에 출세(出世)하셨고, 그것 때문에 법(法)을 전하고 받고, 그것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그 한 일을 위해서 출가도 했고, 그 한 일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 추위에도 불구하시고 이렇게 또 법회에 참석을 하시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그랬어. 꼭두각시의 근원이다.
어째서 ‘참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꼭둑각시, 몽환(夢幻)의 근원이냐 하면 그 여읠 것을 여의어 버리면, 그 환상이라 하는 것을 여의어 버리면, 참으로 바로 여의어 버리면 환(幻) 위에다가 무슨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세울 것이냐? 또 그 보내 버릴 것을 보내 버리면 공(空) 가운데에 다시 공(空)을 용납할 것이 있겠느냐?

우리가 번뇌와 망상, 모든 그런 환(幻)이라고 하는 것을 버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그 버릴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새로운 번뇌가 일어나고 새로운 몽환 속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여. 또 우리의 마음속에 모든 그런 번뇌와 망상을 보내 버리고 우리의 생각을 진공(眞空)으로 맨들려고 비울려고 하기 때문에 그 비울려고 하는 그 한 생각 때문에 오히려 비지를 못해.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망상을 버릴려고 하다가 새로운 망상을 일으키게 되고, 우리의 마음을 비게 할라다가 오히려 공(空) 가운데에 새로운 공(空)이라고 하는 소견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은 애써서 도를 닦고 애써서 정진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 바른길을 모르기 때문에 번뇌를 버릴려고 애쓰다가 새로운 번뇌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마음을 비울려고 하다가 오히려 마음은 비기 커녕은 점점 무서운 망상을 생각 속에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깨끗이 할려고 하다가 깨끗이 할려고 하면서 그 흙탕물이 빨리 말가지게 하기를 바랜 사람이 자꾸 진흙을 타면서 내휘저은 거와 같애. 차라리 가만 놔두면 그 제절로 말개질 텐데 빨리 말개지기를 바래 가지고 자꾸 손을 넣어서 휘저으면 점점 흙탕물만 더 일어나고 마는 것이여.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그러다 보면 온갖 망상도 일어나고 혼침도 오고 그러지만, 그 망상이니 혼침이니 그런 것을 애써서 없앨려고 하지 말고 자꾸 화두(話頭)만을 들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자꾸 화두만을 들어.

앉아서도 화두(話頭)를 들고 서서도 화두를 들고, 포행(布行)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일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앉아서 하다가 혼침이 오면 포행을 하면서 하고, 포행을 해서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자리에 와서 앉아서 하고.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들 줄 알면 무슨 깨달음을 빨리 얻기를 바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성화댈 필요도 없고, 망상을 버릴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하는 것이여.

번뇌가 일어나도 그 번뇌를 '일어난다'고 짜증을 낸다든지, '이 망상 번뇌 때문에 이거 공부를 못한다' 그런 생각을 추호도 낼 필요가 없어. 그냥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처꺽 거각(擧却)하면 일어났던 망상이 뿌리가 없는 것이라 찰나간에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거여.
없앨려고 하면은 무장 일어나고, 없앨라고 하는 생각 없이 화두(話頭)만을 들면 망상은 제절로 자취가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온갖 방편을 가지고 몸부림을 치면 오히려 몸만 쇠약하게 맨들고, 정신만 무장 이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점점 조급해지고, 조급해질수록 마음은 더 안정이 안 되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한 철, 두 철, 세 철, 네 철 하다 보면 아무 까닭도 없이 몸이 차츰차츰 쇠약해지고 그래 가지고 정진을 하는 데에 지장을 가져오는 것이여. 이것이 정진을 바로 해 나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래.

모든 방편, 또 모든 망상 이런 것들을 그 처리할 줄만 안다면 그 일어나거나 말거나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런 망상이 일어나고 주변에서 어떤 사건이 발생을 한다 하더라도, 크고 작은 시비(是非)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내가 그것을 잘 처리만 할 수 있다면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여.
바람 부는 소리, 새 우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나, 나의 주변에 시비가 일어난 것이나 조끔도 차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바람 부는 소리에 퍼뜩 깨달라 화두를 들고, 새 우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들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퍼뜩 화두를 챙긴다면 그런 바람 불고 새 울고 물 흘러가고, 주변에서 '잘했네 못했네' 시비가 일어난 것이 안 일어난 것보단 오히려 더 무방하다 그 말이여.
혼침에 빠져서 그렇게 지낼 것을, 그런 시비(是非)와 사건이 좀 일어남으로 해서 거기서 정신을 가다듬고 또 정진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다.

이렇게 해서 밝은 일을 당하면은 바로 밝은 놈으로 돌이키고, 어두운 일을 당하면 어두운 놈에서 바로 돌이키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마침내는 모든 번뇌와 망상, 일체 시비 사건이 제절로 다 자취가 없어.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하셨는데,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돌을 가리켜서 이것이 옥이다 하면 바로 그것이 옥이 되는 것[指石爲玉]‘이고, '쇠를 점쳐서 금을 이룬다[點鐵成金]', 무쇠 덩어리를 보고 이것이 금이다 하면 그것이 황금덩어리가 되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계제(階梯)가 없어. 차례차례 일 계단, 이 계단 올라가는 그 계제가 없는 가운데에 계제가 있고, 점차(漸次)가 없는 가운데에 점차가 있는 것입니다.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정말 간절히 알뜰하게 닦아 가는 것입니다.

닦을 것이 있고,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킬 수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지만, 부처님과 조사들은 그렇게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 모든 중생(衆生)을 가리키셨고, 모든 우리의 선배들은 배울 수도 없고 배울 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습니다.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을축년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맞이해서 우리 사부대중은 다시 새로운 분심(憤心)과 발심(發心)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갈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돌아오는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우리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법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동안에 어린이 법회를 해서 처음에 삼사십 명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칠팔십 명, 백 명, 백오십 명 이렇게 해서 나날이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불어나서 참 그 어린이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고,
어린이 법회를 갖기 전에는 '부모님이 절에 그렇게 다니시는데 뭣 하러 다니는가? 왜 가는가?' 아무 뜻도 모르고 '불교라 하면은 미신'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종교를 믿는 학생들이 '불교는 미신이다, 사탄이다' 이렇게 해서 놀려대니까 거기에 말 한마디 대답을 못하고 어디 가서 '부처님 믿는다' 소리 하는 것을 매우 챙피하게 그렇게 생각을 해 왔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린이 법회를 시작해서 일 년, 이태 이렇게 되니까 어린이들이 우리 부모님이 불교를 믿고 자기도 불교를 믿게 된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차츰차츰 학년이 높아져 가지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또 이렇게 올라가게 됩니다.
중학생이 되어 가지고 또 어린이 법회에 나와서 그 어린이들하고 같이 그 참석하기가 좀 계면쩍고,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데 적당한 데가 없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여러 신도님으로부터서 말씀을 듣고 진즉부터 생각해 오다가 금년 새해부터서는 그래서 그 중고등학생 법회를 용화사에서도 갖기로 그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의논을 해 가지고 다음 달 2월부터서는 중고등학생 법회를 창설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러니 그동안에 그 어린이 법회에 나오다가 이제 중학생으로 올라간 사람, 또 진즉부터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러한 자녀분을 가지신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께서는 법회에 그 자녀들로 하여금 참석을 해서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왜 훌륭한 종교며, 불교를 믿으면 결국 어떠한 목적에 이를 수가 있는가?' 이런 것을 알고, 어릴 때부터서 알면서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 정말 훌륭한 청신사(淸信士)가 청신녀(淸信女)가 되도록 한다면—그 자녀들에게 재산이나 모다 그런 것을 많이 물려준 것으로써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재산은 별로 물려준 것이 없지만 「바로 사는 길」을 가리켜 주고,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준다면 돈 몇 억, 뭐 재산 준 것에다 대겠습니까? 재산이라 한 것은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시일 내에 그걸 참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재산이 많다고만 해서 꼭 행복하다고는 보장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재산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을 많이 주었기 때문에 자식이 불행해진 예도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게 할려면 입으로 "불교 믿으라, 불교 믿으라. 불교를 믿어야 한다" 자꾸 입으로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써 다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불교를 바로 믿고 바로 실천해서 '하!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불교를 믿으시더니 저렇게 참 행복해지시고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이 세상에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께서 불교를 믿으시더니 어느 누구의 부모보다도 더 훌륭하시고 참 좋으시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우리 아버지처럼 불교를 믿고 나도 바른길을 알아서 정말 행복한 삶을 영위해야겠다' 그러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그렇게 해 주시라 이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금생에, 금생—‘금생’이라 하니까 '앞으로 20년 30년 내지 50년 60년 살다가 죽은, 죽은 그때까지를 금생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당일념(當一念)을 단속하지 아니하면은 바로 그 당념(當念) 일초 후에는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지금 일념을 단속하지 아니하면 다음 일념이 무엇이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어.
이 몸뚱이 죽은 뒤에 지옥에 간 것은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여. 그건 내생 일이니까 지금 알 수가 없고, 당장 지금 이 한 생각 단속하지 아니하면 일 초 훗일이 참 삼악도(三惡途) 갈 것밖에는 더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4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약문여래본기인~ /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신 날,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신, 도(道)를 통(通)하신 날입니다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게송) 욕개지식문전로~ / 부처님으로부터 저 중생에 이르기까지 깨달음 때문에 출세(出世)하셨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각(眞覺)은 유시환원(猶是幻源)이다. ‘참 깨달음’은 오히려 이 환상의 근원이다』 / 정진(精進)은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다 / 망상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놔둬 버리고 화두만을 척! 거각(擧却)을 해야.

「방편을 버리고 증(證)해 닦을 것에 맽기지 아니한다[捨方便不滯證修]」 / 단진범정(但盡凡情)이요 별무성해(別無聖解)다. 다못 범정(凡情) 다할 뿐이지 다시 무슨 성해(聖解)가 있을 것이냐? /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2월 첫째 일요일부터 용화사에 중고등학생 법회 창설 / 자녀들을 참으로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할라면 불법(佛法)을 믿고 인격을 완성하도록 그렇게 길을 인도하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야 /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별을 보시고 확철대오를 하셨는데. 언필칭 '별을 보고 깨달랐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러? 그 별이 하필 부처님 당시에만 그 별이 뜨느냐 이 말이여.
부처님 깨달으신 뒤에도 오늘날까지 삼천년을 두고 밤마다 새벽마다 별이 반짝거리지만 어찌 해필 부처님만 그 별을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느냐 그 말이여.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기를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닫느냐? 별을 보고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별을 보셨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 별(別) 이상한 말도 아닙니다.
'다맛 부처님께서는 별을 보셨을 뿐이요,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신 것이 아니다. 별을 보고 무엇을 깨달랐다 하면 어찌 그것을 참 깨달음이라 할 것이여? 다맛 별을 보았느니라'

정진(精進)은 밥을 굶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것에 있는 것도 아니요,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 받은 그 본참공안(本參公案) 하나만을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參究)를 할 따름이여.

가리킬 것이 있고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가리킬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고 해서 가리키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참법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지만, 치연(熾然)히 가리키고 온 정성을 다해서 배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존(世尊)이신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처럼 평소 평범한 별을 보고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단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복사꽃 피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대나무에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주름 발을 걷어 올리다가 깨닫기도 하고, 시장에서 장꾼들이 욕지거리를 하면서 싸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기도 하고, 수없는 팔만사천 가지의 모든—눈으로 본다던지 귀로 듣는다던지 하는 그 찰나에 진리의 눈을 떠 왔습니다.
아무 멍청하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깨달으신 것이 아닙니다.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아 가지고 결국은 그러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금생(今生)이라 하는 것은 이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금생(今生)이요, 그 한 생각 꺼지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한평생이 아니라, 그것도 크게 본 것이고 진짜 미세하게 보자면 한 생각, 일념(一念)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들어 있어.

저 원자현미경 같은 걸로 보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바이라스(virus) 같은 균이 굉장히 크게 보이는데, 우리의 생멸심(生滅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 번쩍 일어났다 꺼지는, 번갯불 치듯이 일어났다가 꺼지는 그 일념 속에도 구백(九百)의 생(生)과 멸(滅)이 있다 그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꺼지기 전에 바로 이 당일념(當一念), 이 일념이 일어났을 때 타악! 화두를 들고 번갯불 번쩍한 그 사이에 바늘귀 뀌듯이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일생(一生)이 되고, 일 초 일 초가 합해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데 그 일 초,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른다면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생각 단속만 할 줄 안다면 그 속에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속해 나갈 때에 별을 보면 별 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요, 새소리를 들으면 새소리들은 그 자체가 깨달음이여.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 욕하는 소리 그 자체가 바로 화엄경(華嚴經) 법문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3. 4. 1. 11:32

(No.249)—1984년 추계 산철해제 법회(84.10.23) (38분)

 

약 38분.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광음양가석(光陰良可惜)하고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지옥 · 아귀 · 축생,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할진대는,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모름지기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할지니라.

광음(光陰)이 양가석(良可惜)하니, 세월이 시간이 참으로 아까우니,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삼가 등한히, 잠자는 것을 등한(等閑)히 하지 말지어다.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설하시고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란존자(阿難尊者)에게 전하시고, 아란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에, 이렇게 해서 인도에서 28대 달마조사(達摩祖師)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달마조사는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로부터 이 법등(法燈)을 전해 받았는데, 보리달마(菩提達摩)존자,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출가를 했는데, 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를 뵈옵고서 법(法)에 등(燈)을 전해 받아 가지고, "제가 이미 이 법을 얻었는데, 장차 어느 나라에 가서 불사(佛事)를 지어야 하겠나이까?" 하고 여쭈어봤습니다.
반야다라존자가 "니가 비록 법은 얻었으나 아직은 저 멀리 가서는 아니되느니라. 아직은 이 남천축(南天竺)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열반에 든 뒤 67년이 되거든, 진나라 진단(震旦), 저 중국으로 건너가거라. 건너가서, 거기에 가서 대법약(大法藥)을 가지고 상근대지(上根大智)를 제접(提接)을 할지니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달마존자는 반야다라존자를 가까이 모시고 시봉을 하면서 착실히 보림(保任)을 하시기를 40년 동안을 잠깐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문자 그대로 위법망구(爲法忘軀)요, 여법(如法)하게 시봉(侍奉)을 하면서 보림행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 스승이신 27조 반야다라존자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일절 입을 딱 다물고, 오직 시봉하면서 자기 수행만을 하다가, 반야다라존자가 열반하신 뒤에사 반야다라존자의 뒤를 이어서 인도—남인도 · 북인도 ·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다니시면서 중생교화를 하셨습니다. 몇 살까지 하셨냐 하면은 140세까지 하셨다.

140세의 고령이 되어 가지고사 비로소 부왕(父王), 그 향지국(香至國)에 왕이 준비해 준 배를 타고서 3년간이라고 하는 긴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양(梁)나라 보통(普通) 8년입니다.
그때 광주자사(廣州刺史)가 인도에서 생불(生佛)과 같은 도인(道人)이 오셨단 말을 듣고 융숭하게 영접을 하고, 양무제(梁武帝)에게 그러한 달마존자가 도착했다고 하는 말씀을 주달(奏達)을 하니까, 양무제가 또 사신을 보내서 그때 서울인 금릉(金陵)에까지 모셔 갔습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자마자, "짐(朕)이 즉위(卽位) 이래에 많은 절을 짓고, 경(經)을 인포(印布)하고, 많은 스님네를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에 공덕(功德)이 얼마나 되오니까?"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고 또 경과도 보고할 겸, 아울러서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응당 그랬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달마대사 대답이 "공덕이 없습니다" 뜻밖에 이러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양무제는 깜짝 놀래 가지고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그러한 공덕이 공덕이 아닌 것은 아니여.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다운 공덕이 되지 못하고 인천(人天)에 조그마한 유루(有漏) 공덕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그러면 참다운 공덕입니까?"
달마대사가 이르시기를, "지혜가 원명(圓明)하고 공적(空寂), 스스로 공적의 진리를 깨달라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성스러운 제일가는 뜻이오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무제는 마침내 달마대사에 상근(上根)을 접(接)하는 그 자비한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달마대사는 그길로 양자강을 건너서 위(魏)나라 숭산(崇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소림사(小林寺) 소림굴 속에 들어가서 9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면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참! 큰 공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한 공덕은 무엇에다 비교할 수가 없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라면, 양무제가 대환희심을 내 가지고, 생불(生佛)과 같이 받들어 모시면서 계속해서 큰 불사(佛事)를 하고 그랬을 텐데,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은 그러한 대화로 인해서 양무제는 그 달마대사의 참 말씀을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소림굴로 들어가서 9년 동안을 계시는 동안에, 신광(神光)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은 속가에 유교나 도교에 모든 경전을 다 통달을 하고, 출가를 해서도 모든 십이부장경(十二部藏經)을 다 통달을 하고 그랬지만, 큰 깨달음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머리가 빠개질듯 아프면서 도저히 그 아픔을 참지를 못하고 몸부림을 치다가 머리를 만져 보니까, 머리에 다섯 봉우리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이거 인자 죽을려고 큰 병이 났다 싶었는데 공중에서 청하기를, "이것은 병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환골탈태(換骨奪胎) 하느라고 그런 것이니 걱정을 말아라. 저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가면 참법을 깨달은 스승이 거기에 계시니 그리를 가서 법을 받으라" 한 그러한 공청이 있어서 달마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어가서 며칠을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도, 달마대사는 벽을 향해서 묵묵히 앉아 계실 뿐, 돌아다보시지도 안 혀. 하루 종일 서 있어도 소용이 없고, 밤이 되어 가지고 눈이 폭설이 쏟아지는데, 밤중에는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다 그 말이여.
발부터서 얼어 올라오는데, 다리가 얼고 배가 서늘해 가지고,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사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완전히 꽁꽁 얼어서 마비가 되다시피 했어도 꼼짝을 않고 고대로 아주 서 있다 그 말이여.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惻隱)해서 "뭣 때문에 거기 그렇게 오래 서 있느냐?"
"법(法)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너 같은 박덕(薄德)하고 조그만한 재주밖에 없는 그러한 박덕한 사람이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그 말을 듣고서 허리에서 칼을 빼 가지고 자기 팔을 탁! 꺾어서 달마대사 앞에 바쳤습니다.
달마대사가 그제사 "그만하면 법을 배울만한 신심(信心)이 있다" 이렇게 인증을 하시고서 "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한마디를 일러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법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편안치를 않습니다"
"그러면 니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리라"

신광(神光)이 아무리 그 마음을 찾어서, 마음을 달마대사에게 드릴려고 아무리 찾어봐도 찾을 수가 없어.
"아무리 찾을라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 말씀이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해 마쳤느니라" 여기에서 신광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신광(神光)은 혜가(慧可)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혜가대사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었습니다. 달마대사는 150세의 고령으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달마대사가 반야다라존자로부터 확철대오를 해서 법을 이어 가지고서도 40년이라고 한 세월을 반야다라존자, 그 스승을 시봉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 이만한 끈기와 신심과 참을성이 있어야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능히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받아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사(佛事)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릇이 작고 참을성이 없고 끈기가 약해서 조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이리 휙 날아가고, 저리 휙 궁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신심과 끈기가 아니고서는 정말 이 공부는 완성하기가 어려웁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처님과 역대조사에 행적을 살펴보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근기와 인내와 정성 신심 이런 것과 비교를 해 보면, 우리 자신들의 박약함에 부끄러운 한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무량겁을 목숨 바쳐서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으면서 수없는 고비를 넘기면서 그러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정진(精進)함으로써 그러한 도(道)의 결과를 얻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서 법회가 여러 시간 지연이 되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도 법회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법회를 천천히 시작한다 하더라도, 법당에 앉었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앉자마자 입선(入禪)인 것입니다.
우리 수행하는 사람은 차를 타던지 자동차를 타던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정거정 대합실에 차를 기다리거나, 어디서 오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기다린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지루하기가 짝이 없지만, 왜 기다린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냐 그 말이여.
기다릴 것이 아니라, 딱! 앉었다 하면은 화두를 떠억 들고, 딱! 섰다 하면 척! 화두를 추켜들고, 그러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 되고 수선 도량(修禪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한두 시간 그렇게 지루해서 못 견디게 기다리신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조용한 시간을 갖지 못해서 한탄한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지금, 겨울처럼 그렇게 춥지도 않고, 여름처럼 그렇게 더웁지도 아니한 이 도량에 떠억 두 시간 정진을 했으니 얼마나 그동안에 법문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보람을 느끼셨을 줄 생각합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계란이 깨어날 때, 병아리로 깨어날 때, 암탉이 스무하루 동안을 알을 품고 있으면, 결국은 그 알 속에 병아리가 거의 다 되어 가면, 밖에서 어미닭이 그 때를 잘 알아 가지고 그 계란 껍데기 속에 병아리가 다 되어 갖고 있는 그 병아리와 품고 있던 어미닭과 서로 상합(相合)이, 의기가 상합이 되어 가지고,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아서 그래 가지고 딱! 쫒을 때, 줄탁동시(啐啄同時)다 그 말이여.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은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 가지고 병아리가 튀겨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위법망구에 마음을 갖는 것이 도업(道業)을 성취한 가장 중요한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30분33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서 색(色)과 공(空)이 다 끊어져 버렸어.
색(色)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여. 사대(四大),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뭉쳐진 이 육체와 이 기세간(器世間), 온 태양과 달과 별과 지구 산천초목 그런 것들이 모두 색(色)이고.
공(空)은 이 색이라고 하는 것이 본바탕은 그것이 공이다 그말이여. 중생의 눈에는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는 공한 것이거든.

해가 '내가 해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달이, 달 자신이 내가 달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책상이 '내 자신이 책상이다'는 생각이 없어. 그래서 책상이 고대로, 책상 있는 고대로 그것이 공(空)한 것이여.
그 책상이 불에 넣으면 타버리니까 공(空)이 되고, 또 오래되면은 썩어서 없어지니까 공(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책상으로 존재한 모습 그대로 그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인 내가 들어서 '저것은 책상이다. 책상이 네모졌다. 저것은 나무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름을 붙이고, 모냥을 명상(名相)을 붙이니까 그것이 책상이지, 책상 자체는 책상이라고 하는 상(相)이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공(空)이라 그러는 것이여.

비단 책상뿐만이 아니라, 태양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산천초목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자체가 다 공(空)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도 바로 공(空)한 것이요, 희로애락과 탐진 번뇌 그 자체도 낱낱이 그 자체에 들어가서는 공(空)한 것이여.

'공한 것이다 또는 색상이 있다' 그러한 생각까지도 다 끊어져 버리고,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여. 빈주(賓主)도 여의어 버렸고, 색공(色空)도 다 끊어진 자리에서 목전(目前)에 분명(分明)히 취(取)하라. 형단(形段)이 없고, 형단이 없건마는 우리의 목전에 분명한 놈을 취하라 그 말이여.
그 목전에 분명한 놈, 그놈을 바로 요달(了達)을 해 버리면,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푸른 산은 흰구름 가운데 우뚝 서 있느니라. 오늘 갑자년 추계산철 해제법어를 일로써 마칩니다. (처음~37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요면삼도해~ /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려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 /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

양무제(梁武帝)와 달마대사의 대화 / 달마대사와 신광(神光), 즉 혜가(慧可)대사의 만남 / 난행(難行)을 능행(能行) /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신심(信心) / 줄탁동시(啐啄同時) / (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51~275)2023. 4. 1. 10:06

(No.268)—1985년 6월 첫째일요법회 (45분)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소리가 튀거나 끊김이 자주 있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3분.

 

(2) 약 22분.

 

(1)------------------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허고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참선을 함에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뚧어야 하고,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心路] 끊어짐을 요하느니라. 참선은 조사관을,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그 조사관을 갖다가 뚧어버려야 하고, 묘한 깨달음을 얻을려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덩쿨 우거진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곳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하노라.


여러분은 을축년(乙丑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한 시간 동안에 걸쳐서 전강선사(田岡禪師),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법문의 내용에 아마 72세 때, 77세에 열반하셨는데 72세 때 설하신 법문인 거 같습니다.폭포수가 쏟아지듯 하고, 저 태평양 바다에 그 산더미 같은 파도가 파도치듯 하며, 때로는 수십 질, 깊은 저 바다 밑까지 환히 들이비치듯 그렇게 또 잔잔한 가운데에 우리에게 너무나 감명을 주는 감동을 주는 그러한 법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왕궁에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히말라야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목숨을 바쳐서 수행을 하셔서 대도를 성취를 하셨고, 또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중국에 순치황제(順治皇帝)도 19년간 천자(天子) 노릇을 하다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느 산중에 들어가서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도를 닦으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출가(出家)를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출가하면 문자상으로는 '집[家]을 떠난다[出], 집을 나온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무조건 우리가 살고 있는 부모형제 가정을 버리고 저 산중으로 들어가는 것을 일반적으로는 출가라고 말을 합니다마는, 진실한 의미에 있어서는 출가에 네 가지로, 네 가지 가운데에 참으로 어떻게 출가한 것이 바른 출가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몸은 출가했으되 마음은 출가하지 못한 그러한 출가가 있고, (둘째) 몸은 비록 속가(俗家)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한 그러한 출가가 있고, 또 (셋째)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그러한 출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 몸도 마음도 다 같이 출가를 못 한 사람, 이렇게 해서 출가(出家) · 재가(在家)에 네 가지로 노나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심으로 도를 잘 닦는 것은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것이 되겠고.
속가(俗家)에 비록 몸은 담겨 있지마는 그 마음은 속가 탐진치(貪瞋痴)와 오욕락(五慾樂)에 염착(染着)됨이 없이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해 나가는, 세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세속에 염착하지 아니하면서 도를, 수행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출가하지 못한 것은 설명하지 아니해도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를 닦으려면 몸도 마음도 출가를 하던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만이라도 출가를 하던지, 어느 길이 되었건 일단은 출가를 해야 도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하는 그러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인도에 유마거사(維摩居士)나, 중국에 방거사(龐居士), 우리나라 부설거사(浮雪居士) 같은 그러한 대거사(大居士)는 몸은 비록 세속에 담아 있으되, 그 마음은 출가한 스님네와 조끔도 다름없이 출가한 그러한 모범을 보여주신 그러한 성현들인 것입니다.
세속에 몸이 담겨 있건, 그 몸이 세속을 벗어나서 스님이 되었건 그 마음이 출가하면 하등(何等)에 차이가 없는 것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그 궁극에 이르러서는 더군다나 추호도 차등(差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은 조사관(祖師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깨달음의 문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우리 중생의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일체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복탁(卜度), 이리 따지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하는 그러한 우리의 사량분별로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러한 마음, 마음이 끊어지... (녹음 끊김)

게송(偈頌)에 '솔바람 불고 칡덩쿨 우거진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그러한 산중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그랬는데, 비록 차 소리가 나고, 기계 소리가 나고 모든 소음이,
(녹음 상태가 좋지 않음) <그치지 않는 세속에 살되 거기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집착하지 아니하면 벌써 그러한 분이 계신 곳 바로 그곳은 송풍나월하(松風蘿月下), 송풍나월하인 것입니다. 아무리 솔바람 부는...>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탔으면 그 화두가 바로 본참공안(本參公案)이라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있지마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라 그렇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에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한 화두를 본참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 가지고 공부를 해봐서 조끔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쪼끔 해보고, 그것 가지고도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이것 쫌 해보다 저 화두 가지고 좀 해보다 이렇게 하면 공부는 올바르게 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했습니다. 잘되건 못 되건 무조건하고 그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하나만을 향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데 눈을 부릅뜨고 눈에다가 잔뜩 독기를 품고서 눈을 부릅뜨고, 몸과 마음을 갖다가 잔뜩 무슨 이 용을 쓰듯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 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무엇인가 공부가 좀 된 것 같다’ 그럽니다.

'눈에 힘도 주지 아니하고, 목에 힘도 주지 아니하고, 또 몸에 힘을 주지 아니하고 그래가지고 맹하니 우두커니 앉었으면 도무지 공부한 것 같지도 않고 화두도 잘 들리지도 아니하니까, 몸에도 힘을 주고, 목에도 힘을 주고, 눈에도 힘을 주어 가지고 잔뜩 용(을 쓰고) 해 나가야 공부 좀 된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으나, 힘을 너무 힘을 주면 반드시 상기병(上氣病)이라든지, 또는 혈액이 고르지 못한 그러한 병을 유발할 우려성이 있는 것입니다.

몸은 어디까지나 단정하게 앉되, 목이나 등에다가 너무 지나치게 힘을 주어서는 아니되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너무 뚝! 부릅떠서도 아니될 뿐만 아니라 또 눈을 너무 작게 뜨면 스르르르—처음에는 눈을 감고 하거나, 눈을 조끔만 뜨고 하면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한 것같이 느껴지지만, 눈을 감고 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침(昏沈)에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몸은 단정히 하되, 목과 몸에 힘을 다 빼고, 눈을 뜨되 눈에다 독기를 품지 말 것이며 평상으로 뜨되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2~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되 어떠한 특별한 점을 정해 놓고 그 점을 들여다볼 그럴 필요는 없고 눈은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응시(凝視)하거나 주시(注視)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따악 정해지면 안정이 되면 마음도 또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몸도 따악 자리가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눈을 깜박거리고 눈동자가 왔다갔다하고 이러면은 벌써 마음이 안정이 안된 증거고, 마음이 안정이 안되면 몸을 갖다가 몸이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부시럭대 쌓고, 꺼떡거려 쌓고 이래서...

그러나 처음에 처음으로 한 분은 다리가 저리는 수가 있습니다. 다리가 저릴 때에는 위에로 올렸던 다리를 밑에로 내리고, 밑에 있던 다리를 위로 교대해 교환을 하는 것은 그것은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 동안을 지내면 다리가 저린 것도 차츰 없어지게 되고, 한 시간가량 고대로 앉았어도 아무렇지 않게 됩니다.

내일부터 석 달 동안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마는, 한 시간마다 일어나서 포행(布行)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더 앉고 싶은 생각이 있다 하더라도 포행 시간에는 다 같이 일어나서 포행을 하고,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으로 와서 앉는 것은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고—눈이 안정이 되면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되면 몸이 안정이 되는데, 눈과 마음과 몸이 다 안정이 될 때에 그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삼지 말아라. '아 인자 되었다, 인자 공부가 잘되는구나!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그것에 만족한 마음을 갖지 말아라.
그 몸과 눈과 마음과 몸이 다 안정이 되어서 너무너무 고요하고 편안하고 그러니까 '아 인자 이거 되았다' 하고, 그러한 그 조용하고 깨끗한 마음에 빠져 가지고 화두(話頭)를 잊어버리면, 화두를 잊어버리면은 공(空)에 떨어져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과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된다 하드라도 그 고요하고 편안한 데에 집착을 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그 본참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이, 그 의심(疑心)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경계가 조용하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것은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도 안정이 되고, 몸도 편안하고, 너무너무 조용하고 깨끗하다가도 화두도 곧장 잘 들려 가다가도 뚝 변해 가지고—공부가 잘되는 것도 같고, 때로는 먹먹해서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마음도 산란하고 몸도 그렇게 괴롭고, 다른 때는 1시간이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갔는데, 5분 10분이 1시간보다도 더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면서 매우 괴로웁게 느껴지는 그러한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그러니 그럴 때에는 아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가 그 대단히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흔히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조용하고, 화두가 순일(純一)해서 잘되어 가면 '아, 참 내가 공부가 잘되어 간다' 하고 좋아하고.
조끔 잘된 듯하다 화두도 잘 안 들리고, 정신도 좀 맑지를 못하고, 몸도 편안하질 못하고 하면 '아이고 이 공부가 잘 안된다'고 굉장히 그 번뇌심을 내고 걱정을 하고, '이게 공부에 내가 인연이 없어서 그런가? 공부를 잘못해서 이런가?' 해 가지고 이 대단히 번민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걸 걱정할 만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고비야말로 앞으로 새로 발전을 하기 위한 좋은 계기가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재미없는 그러한 경계(境界)가 온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잘 용심(用心)을 해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잘 잡드리를 해서 화두를 들고 나가면 또 얼마 지나가면 또 그러한 그 재미없는 경계가 차츰차츰 안정이 되고 고요해져서 화두가 잘 들리게 된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이르르면 그 정(定)에 들게 되는데, 그 정(定)이라고 하는 데에도 삿된 정과 바른 정이 있는 것입니다.
눈도 고대로 아주 못박힌 듯 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눈까풀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생각도 전혀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몸도 아주 바윗덩어리처럼 고대로 까딱도 아니하면서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데 그런 경계에 들어가면 정에 들게 되는데 그 정에 사(邪)와 정(正)이 있다.
그러한 정(定)의 경지에 들어가서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 그 정은 삿된 정이 되는 게고, 그러한 정(定) 속에서도 화두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면은 그것은 바른 정(定)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에 들게 되면, 들었다가도 또 포행을 한다든지 방선(放禪)을 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한 정에 들으면은 그 정이 행여나 흩어질까봐 일어서기를 싫어하고 그러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일어...(녹음 끊김) (처음~22분51초)





(2)------------------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서 일체처에—걸어가거나, 똥을 누거나, 세수를 하거나, 무슨 소지를 하거나, 뭐 설거지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무엇을 하거나 조끔도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그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드러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일여(一如)하게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이런 때 마음 씀[用心]을 매우 자세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마음 씀[用心]을 자세히 하느냐?
앉아 있을 때나, 섰을 때나, 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할 정(靜)' 자와, '깨끗할 정(淨)' 자, 고요하고 맑은 그 두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는 고요하고 맑은데, 서 버리면 간 곳이 없고 흔들리고 화두도 잘 안 들리고 경계(境界)에 팔린다면 그 공부는 올바른 궤도에 들어선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앉아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서서 포행을 하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또 무슨 운력(運力)을 하거나 하는 가운데에서도 화두가 떠억 들린 상태가 되어야 그래야 그 공부가 올바르게 되어간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상이, 자기 기분이 엄숙하고 그 풍모가 청정해서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동정경계(動靜境界)에 마치 가을 하늘처럼 탁! 트여서 맑은 그렇게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이것을 첫째 정절(程節)이라, 첫째 과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참선을 시작해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려면은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 단계 중에 지금 말씀한 이것이 바로 첫째 단계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둘째 단계는, 그 첫째 단계—움직일 때나 고요히 앉어 있을 때나 조끔도 상관없이 그 마음 경계가 가을 하늘처럼 맑고 높이 툭 트여서 그러한 상태에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러한 경계에서 그 때 놓치지 말고 그 때를 타서 공부를 지어나가되 마치 맑은 가을 들물처럼, 여름에는 농사짓느라고 모다 들물이 흙탕물이 모다 내려가고 모다 그러는데, 농사 다 짓고 나면은 가을에 들에 나가면은 말간 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을 들물처럼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출출출출출출 끊임없이 흘러가되 계속 맑은 물이 흘러가고, 옛 사당(祠堂) 향로(香爐)처럼, 옛 사당에 들어가 보면 그 적적한 가운데에 향로가 떠억 놓여 있는데, 그 향로처럼 그렇게 지극한 정(靜)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해. '적적(寂寂)하다' 하는 것은 일체 번뇌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한 거고,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졸음이라든지 흐리멍덩하지를 않고 깨끗한 정신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적적하면서도 성성해야 하고,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그래 가지고 마음 길이 다 끊어졌을 때에 이럴 때에 이 몸뚱이가, 이 우리의 육체가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세상에 있는 것도 느끼지를 못하게 됩니다.
다맛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는데, 그럴 때에 모든 번뇌 망상은 제절로 쉬어 버리고 그 경계는, 그 성성하고 적적한 그 경계는 환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빛이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녹음 끊김) ...가라앉어 버리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바로 이 단계가 두 번째 단계인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 자칫 잘못하면 지각심(知覺心)을 내게 됩니다. 지각심.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와서 나를 탁 깨치게 해줬으면' 이러한 지각심을 내거나, 생각을 일으켜서 빨리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이러한 생각을 내면 순일지묘(純一之妙)를 끊어버려. 머지않아서 깨닫게 될 텐데, 그러한 부질없는 생각을 냄으로 해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대해(大害)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각심을 내는 이러한 허물이 없이, 앉았거나 섰거나 일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동정(動靜)이 한결같애. 앉았다고 해서 공부가 더 잘되고, 일어서서 움직인다고 해서 뭐 화두가 달아나고 그러지를 않고,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같이 되고, 오매(寤寐)가 성성(惺惺)해서, 잠을 잘 때나 잠을 깰 때도 한결같이 성성해서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떠억 현전하면,
그때의 경계가 어떠냐 하면은 맑은 물에 달이 비추듯이, 아무리 그 물이 파도가 치고 물결이 인다 하드라도 그 물에 비친 달은 활발(活潑)해서—가만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파도도 치고, 물결도 치고, 이리저리 하지마는 거기에 부딪치는 달빛은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모아지되 종내 그 밝은 빛이 없어지지 않듯이,
아무리 대질러 밖에서 어떠한 충격이 들어와도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경계가 흩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그 경계를 흩어 버릴려고 해도 그 독로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그 의단이 독로한 상태가 없어지지 아니할 때에 그 마음 경계 고요한 것, 경계는 고요하고 밖으로 아무리 그 사람을 흔들어도 화두 의단은 흩어지지 아니해. 그런 경계가 흩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셋째 번 단계인 것입니다.

아무리 충격을 주고, 아무리 옆에서 떠들고 그래도 조끔도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아니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이러한 경계가 바로 이 셋째 번 경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셋째 번 경계에 이르르면 의단이 파(破)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가 머지않다 이것입니다.

이 공부는 이것은 부처님 이후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많이 닦은 분은 이 세 가지 단계가 일시에 지나는 수도 있고, 차례차례 오는 수도 있고, 이것이 언하(言下)에 있기도 하고, 석 달 만에 있기도 하고 또는 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십 년 만에 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인(當人)의 숙세로 닦은 업적과 금생에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간은 결정이 날 것입니다마는,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형태로던지 거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도 언제나 이러한 말씀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말씀을 해 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망상이 일어나서 공부가 잘 안된다. 혼침이 와서 공부가 안된다. 주변이 시끄럽고 복잡해서 공부가 안된다' 이러한 말씀을 종종 호소해 오십니다마는, 참으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서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나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하신다면 누구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서시고 입증을 하신 겁니다.


내일부터 석 달 동안 하안거(夏安居) 여름 결제가 시작이 됩니다.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 선원(禪院)에 오셔서 공부를 하시는 분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백일기도 동참을 하신 분도 내나 이 결제에 입방(入房)을 하신 것과 같다고 생각을 하시고, 여러분 가정에서 항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으로라도 들으시면서 열심히 정진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있으면 될 수 있으면 앉아서 하시고, 앉을 시간이 없으면은 행동하면서 생활하시면서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를 의심을 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 회광자간(廻光自看)을 하시면 오히려 고요한 데에만 탐착한 그러한 공부보단 오히려 시끄럽고 복잡한 속에서 시시때때로 챙기고 돌이키고 잡드리를 하는 가운데 정말 살아 있는 정진을 하실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동참하시고, 또 석 달 결제에 입방을 하신 모든 신도 여러분, 인간은 정말 무상한 것입니다.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고, 평소에 건강이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라도 무상한 무상살귀(無常殺鬼)는 우리의 앞뒤에서 우리를 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무상을 느끼지 않고서는 이 공부는 할 수가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형언도는 받았으되, 그 집행일이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사람도 빼놓지 아니하고 언젠가는 우리는 목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 날짜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그것이 언제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반드시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끔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시간을 그 일 초 일 초를 범연히 넘기지 말고 앉어 있으면 앉어 있는 대로, 서 있을 때는 서 있는 대로,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대로, 일할 때는 일하는 바로 그 자세에서 화두(話頭)를 돌이켜 관조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언제 어느 때 올런지를 모르기 때문에 천재일우(千載一遇)로 그 깨달음이 올 그 찰나를 놓쳐 버리고 지나치면 또 (녹음 끊김) 몇 겁(劫)이 올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깨달음이 올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화두에 의심을 놓쳐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마치 나라에 중대한 어떤 발표가 있되, 시간이 정확하지 아니할 때는 언제나 다이알을 딱 맞추어 놓고 그 중대한 발표를 기다리듯이 우리의 깨달음도 또 우리의 죽음이 언제 올런지를... (녹음 끊김) 언제나 그 다이알을 맞추듯이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모든 재앙을 방어하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효과가 있어서 언제나 화두를 가다듬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다잡이해 나가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마귀도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해 나가면 앞에 말한 세 단계를 거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 생사진로(生死塵勞)를 멀리 벗어버리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녀.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꽉! 그 승두(繩頭)를 잡어서, 화두를 잡어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뼛골에 사무치는 추위를 만나지 아니하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피는 매화라야 그 향취가 진동한 법이지, 겨울에 강추위를 하지 못하고 이상 난동(異常暖冬) 끝에 매화꽃이 피면 별로 코를 치는 그런 향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정진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도 정말 특달(特達)한 회포(懷抱)와 신심(信心)과 결단심으로 여법(如法)하게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야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내일 결제 법요식에 모두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모다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고 또 여기 와서 직접 참선을 못하신 분도 가정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절에 나오신 분보다 못지않게 알뜰히 정진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22분52초~44분4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출가(出家). 어떻게 출가한 것이 바른 출가인가? /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우리 중생의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법문 / 본참공안(本參公案) / 참선 자세는 단정하면서 몸에 힘을 주어서는 안된다 / 공부가 안된 그러한 고비야말로 앞으로 새로 발전을 하기 위한 좋은 계기가 돌아온 것 / 삿된 정(定)과 바른 정(定) / 공부를 해 나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할 정(靜)' 자와, '깨끗할 정(淨)' 자, 고요하고 맑은 그 두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 삼개정절(三箇程節).

살아 있는 정진을 하라 / 우리는 이미 사형언도는 받았으되, 그 집행일이 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 /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참선은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그 조사관을 갖다가 뚧어버려야 하고, 묘한 깨달음을 얻을려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심으로 도를 잘 닦는 것은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것이 되겠고. 속가(俗家)에 비록 몸은 담겨 있지마는 그 마음은 속가 탐진치(貪瞋痴)와 오욕락(五慾樂)에 염착(染着)됨이 없이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해 나가는, 세속을 버리지 아니하고 세속에 염착하지 아니하면서 도를, 수행을 여법(如法)하게 하는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으되, 마음은 출가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속에 몸이 담겨 있건, 그 몸이 세속을 벗어나서 스님이 되었건 그 마음이 출가하면 하등(何等)에 차이가 없는 것이고 또 깨달음을 얻은 그 궁극에 이르러서는 더군다나 추호도 차등(差等)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話頭)에는 천칠백 화두(千七百話頭)가 있지마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라 그렇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에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 받은 그 한 화두를 본참공안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 가지고 공부를 해봐서 조끔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쪼끔 해보고, 그것 가지고도 잘 안되면 또 다른 화두를 가지고, 이것 쫌 해보다 저 화두 가지고 좀 해보다 이렇게 하면 공부는 올바르게 되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도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라’ 했습니다. 잘되건 못 되건 무조건하고 그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하나만을 향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눈과 마음과 몸이 안정이 된다 하드라도 그 고요하고 편안한 데에 집착을 하지 말고, 그 가운데에서도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그 본참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그 의단(疑團)이, 그 의심(疑心)이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과 몸이 편안하고 경계가 조용하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것은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삼개정절(三箇程節) ; 세 개[三箇]의 정절(程節). 세 가지 단계.
정절(程節) : ①길목. 길가는 데 종요로운 어귀. ②공부해 나가는 데 중요한 고비.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 용화선원 刊) 「몽산화상시총상인(蒙山和尙示聰上人 몽산화상이 총상인에게 보이심)」 p60~64. (가로판 p60~63)
趁逐工夫하야 始終에 不離靜淨二字호리니 靜極하얀 便覺하고 淨極엔 光이 通達하나니라

공부를 해나감에 처음부터 끝까지 고요 정(靜)과 조촐할 정(淨) 두 자를 여의지 말지니, 고요함[靜]이 지극하면 곧 깨칠 것이요 조촐함[淨]이 지극하면 광명이 통달하나니라.

氣肅風淸하야 動靜境界 如秋天相似時가 是第一箇程節이니 便宜乘時進步이니라

기운(氣韻)이 엄숙하고 바람이 맑아서 동정(動靜) 경계가 마치 가을 하늘 같을 때, 이것이 첫번째 정절(程節)이니, 곧 마땅히 그 때를 타서 나아갈지니라.

如澄秋野水하며 如古廟裏香爐相似하야 寂寂惺惺하야 心路不行時에 亦不知有幻身이 在人間하고 但見箇話頭綿綿不絕하리니 到這裏하얀 塵將息而光將發하리니 是第二箇程節이니라 於斯에 若生知覺心하면 則斷純一之妙하리니 大害也이니라

마치 맑은 가을 들물 같으며, 옛 사당 안의 향로 같아, 적적(寂寂)하고 성성(惺惺)하야 마음길이 끊어졌을 때, 또한 이 육신이 인간에 있는 것도 모르고 다못 화두만 면면(綿綿)히 끊어지지 않음을 보리니, 이 속에 이르르면 티끌은 장차 쉬고 광명은 장차 발하리니, 이것이 두 번째 정절이니라. 여기에서 만약 지각심(知覺心)을 내면 순일(純一)한 묘(妙)가 끊어지리니 크게 해로우니라.

無此過者는 動靜에 一如하고 寤寐에 惺惺하야 話頭가 現前호대 如透水月華하야 在灘浪中하야 活潑潑하야 觸하야도 不散하며 蕩하야도 不失時에 中寂不搖하며 外撼不動矣리니 是第三箇程節이니 疑團이 破하야 正眼開가 近矣리라

이러한 허물이 없는 사람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하고, 자나깨나 성성하야 화두가 앞에 나타나되 마치 물에 비친 달빛과 같아 여울물결 가운데 있어 활발발(活潑潑)하야, 대질러도 흩어지지 않으며 헤쳐도 잃지 아니한 때, 중심이 고요하야 흔들리지 아니하며 밖으로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이것이 세 번째 정절이니 의단이 파하야 정안(正眼)이 열림이 가까우리라.

이 공부는 이것은 부처님 이후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 이러한 삼개정절(三箇程節)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많이 닦은 분은 이 세 가지 단계가 일시에 지나는 수도 있고, 차례차례 오는 수도 있고, 이것이 언하(言下)에 있기도 하고, 석 달 만에 있기도 하고 또는 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삼 년 만에 있기도 하고, 십 년 만에 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인(當人)의 숙세로 닦은 업적과 금생에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기간은 결정이 날 것입니다마는,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어떠한 형태로던지 거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歸依)해서 여법(如法)하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나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노력을 하신다면 누구라도 한 분도 빠짐없이 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서시고 입증을 하신 겁니다.

이것은 모든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모든 재앙을 방어하는 데에도 대단히 좋은 효과가 있어서 언제나 화두를 가다듬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다잡이해 나가면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어떠한 마귀도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해 나가면 앞에 말한 세 단계를 거쳐서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3. 3. 16. 14:49

(No.236)—1984년 춘계 산철 해제 법회(81.04.30) (40분)

 

약 40분.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몰형단(沒形段)헌데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몰형단(沒形段)이여. 위(位)가 없는 참사람, 위(位)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우리가 보는 사람은 다 육체가 있고, 눈 · 코 · 귀가 있고 손발이 다 있어서 이런 형단(形段)이 있는데, 위(位)가 없는, 지위(地位) 위(位)가 없는 참사람은 형단이 없어. 형단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어.

형단(形段)이 없건마는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다. 항상 면문(面門) 가운데—이 낯, 얼굴, 낯반대기, 이 얼굴, 면문 가운데로 항시 들어갔다 나왔다 출입을 한다 그 말이여. 면문(面門),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 마치면—그 들어갔다 나왔다 항상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거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면문중(面門中)을 통해서 들랑달랑하는데 한 생각 탁! 돌이켜 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라. 번갯불이나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으리라.
번갯불을 무슨 수로 밟으며, 흐르는 물소리를 어떻게 탁! 밟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런데 항상 우리 면문을 통해서 들락날락하는 바로 그놈을 한 생각 돌이켜 요달(了達)해 버리면은 바로 번갯불, 번쩍 하는 번갯불도 탁! 밟을 수가 있고, 흐르는 물소리도 탁!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갑자년 봄철 산(散)철, 두 달 동안 산철 결제(結制)를 했는데, 그 산철 결제의 해제(解制)날입니다.
본래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이렇게 여름과 겨울만을 90일씩 이렇게 안거(安居)를 해 왔었는데, 중국에서부터 저 인도에서부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라고 해서 그 장마가 계속되는 때에 모다 숲속에나 산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으니까, 모다 임금님이나 또는 장자(長者)나 또 신심 있는 신도가 지어 드린 그 기원정사(祇園精舍)라든지 죽림정사(竹林精舍)라든지 그런 정사에서 부처님을 비롯해서 여러 부처님 제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그렇게 그 장마철을 지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거(安居)라 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인도와 또 달라서 여름 더웁고 비 올 때 뿐만이 아니라,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도 산중에서 숲속에서 그런 데서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왕래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겨울에도 석 달 동안을 안거, 결제(結制)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렇게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씩 이렇게 안거를 하고 또 해제를 했습니다마는, 근자에 와서는 정월 보름에 겨울 해제(解制)를 하고 4월 15일까지 산철 동안이 석 달인데, 그 산철 동안 석 달 동안을 걸망을 지고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또 이 도반(道伴)도 찾어가서 서로 도담(道談)도 하고 대단히 그 뜻깊은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석 달 동안을 짊어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다 보니 산만해서, 마땅히 그 걸망을 석 달 동안을 부려 놓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 용화선원에서는 산철에도 잠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잠깐 가서 일을 보고 들어와서, 산철 동안에도 계속해서 정진을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
수년 전부터서는 산철에도—그때는 인자 산철 결제(結制)라 한 것도 없었고, 또 산철 뭐 해제(解制)라 한 것도 없이 그저 그냥 계속해서 정진만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기왕이면 산철도 결제를 하고, 산철도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가져서 좀 더 법도(法度) 있게 그렇게 좀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이 있어서, 수년 전부터서 이 산철, 2월 초하루에 결제 법요식을 갖고 이렇게 또 3월 말일 날 이렇게 또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어떻게 하면은 좀 더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신심(信心)의 발로(發露)로써 이렇게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라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일대사를 우리가 해결을 하느냐 하면, 큰 말 앞에 탁! 부딪쳐.
우리가 말이 있는데, 말 앞에 갑자기 말 앞에 갖다가, 탁! 달려오는 말에 내가 부딪쳤을 때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는가?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그 찰나간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또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듯 하라. 촛불이나 전깃불을 켜 놓고 그 밝은 데에서 바늘에 실을 뀐다면 뭐 천천히 이렇게 뀔 수가 있겠지만, 번갯불이 번쩍 한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뀔 때 그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해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애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이러한 것이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영산회상에 백만억 대중이 운집(雲集)을 해서 부처님 설법을 들을려고 떠억 운집해 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어.
그 부처님의, 그 부처님 세존의 거룩하신 세존을 찬양하기 위해서 찬탄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석천왕이 꽃비를 내루왔는데, 그 꽃 한 송이를 부처님이 떠억 들어서 대중 앞에 보이셨어. 백만억 대중이 보고 있는데 아무도 그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는 뜻을 아지를 못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한 분이 비긋이 미소를 했습니다.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일상,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통해서 드나드는 형단(形段)이 없는 그놈을 바로 보는 일이 지극히 가깝고 쉬웁다고 하지마는, 참으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만억 대중이 모인 가운데에 오직 가섭(迦葉) 한 사람이 이것을 승당(昇堂)을 했다. 이것을 깨달랐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고, 그렇게 수월하고, 그런 작은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지 않는 일을 우리 말세 중생,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 중생(衆生)으로서 그 참선(參禪)을 한다고 해서 그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런 짓을, 그런 어려운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가고, 무슨 옴마니반메훔을 불러서 부자가 되고 잘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법문(法門)의 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일이 그렇게 적은 일이 아니요, 간단한 일이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우니까 하지 말라. 미리서부터 일찌감치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목숨 바쳐서 해야만 된다'고 이렇게 말을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그러한 것을, 평소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한 모든 그 법문이나 이론 철학적인 것 다 속에다 꽈악 담어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밑천을 삼고 살림살이를 삼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참선을 한다면, 그 참선은 도저히 옳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거든.

마치 병에, 옛날에 참기름도 담고 들기름도 담고 간장도 담고 한 그러한 병이 있는데, 그 병의 바닥에 찌께기가 남아 있고 병 속 몸뚱이 면에 그러한 아무리 좋은 기름을 담아서 기름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다른 음식을 담을 때에는 그 다른 아무리 좋고 좋은 음식을 담아도 먼저 담았던 기름 냄새나 간장 냄새가 완전히 가시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뒤에 담은 음식은 결국은 변질이 되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금방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이 한 말씀이라도 나쁜 말씀일 수가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이 한 귀절이라도 그것이 나쁜 귀절일 수는 없어.
그러나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러한 조사어록이나, 기언묘구(奇言妙句)나, 경전에 있는 좋은 부처님의 말씀 같은 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고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그것에서 계속 그것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면, 마치 병 안에 참기름 냄새나 들기름 찌깽이 같은 것이 눌어붙어 있고, 또 간장 같은 것을 담아서 간장 냄새가 나는 거기에다가 아무리 좋은 깨끗한 물이나 또는 술을 담는다고 할 때에 그 물과 술은 금방 변질(變質)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參禪)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거—불문(佛門)에 귀의해 가지고 참 많은 선지식(善知識)도 친견하고, 또 많은 법문도 듣고, 또 많은 경전도 읽고 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잘 알고, 죽죽죽죽죽 다 외우고 쓰고, 뭐 말을 하라고 하면 법사 스님 이상으로 말을, 불교에 대한 말을 잘하고 교리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참선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냐 하면, 그러한 찌께기가 남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돼.

화두(話頭)만 들면 그 경전에 있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조사어록에 있는 말이 생각이 나고, 어떤 공안(公案)을 갖다가 물으면은 그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그 살림을 갖다가 그 살림으로 그 공안을 따져서 분별을 하고 대답을 하고, 이렇게 하는 한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을,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가되, 밥을 먹어도 밥 먹으면서 그 생각, 옷을 입으면서도 오직 그 생각, 걸어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세수를 할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차를 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그래 가지고 마침내 밥을 먹으면서도 밥맛을 모르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을 모르고,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줄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할 지경으로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오직 화두에 의단(疑團) 하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정진을 잡드려 가면,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 · 교리적인 것 · 철학적인 것, 모다 그런 것을 동원해 가지고 공안을 이리저리 분별해서 따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 이것이다' 하고 어떤 결론을 하나 얻고, 그다음에 또 다른 공안을 하나를 또 추켜들고 해 가지고, 한 3일이나 내지 일주일 동안 그 이리저리 수수께끼 풀듯이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져서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해 가지고 그런 식으로 참선을 하면, 이런 따위를 갖다가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건데, 이런 사구선이라는 것은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여.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해서 낱낱이 따져서 알아맞춰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거여.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이 끊어져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조사관을 타파해야 그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지,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없이도 조사관을 뚫을 수가 없고, 조사관을 뚫지 않고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산철 해제에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활구선에 대한 말씀, 또 산승(山僧)의 말도 이 활구선에 관한 심심(甚深)한 당부를 해 드렸는데, 우리가 보다 더 수행해 나가는 데에 법도(法度)를 세워서 좀 더 알뜰히 공부하자고 결제와 해제를 이렇게 가진 것뿐이지,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 공부하는 마음이 조끔도 해이해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초파일이 돌아오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갑자년 하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까지 보름 동안 계속해서 좀 더 알뜰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다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니라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得之在心)이요 응재수(應在手)라. 마음에 얻어.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하게 돼.
제절로 손으로 잡으나 놓으나, 글씨를 쓰나, 밥을 먹으나—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손으로 무슨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몸으로 뭣을 일을 하나, 전부가 그게 다 업(業)을 짓는 것이요, 생사윤회를 하는 것인데, 마음에 탁! 근원을 얻어버리면 손으로 잡으나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앉고 서고 누우나 그 다 딴 일이 아닌 거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여. 눈 내린 밤에 달이 비추고, 봄바람 부는 데에 꽃이 피는 것이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요,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을 향해서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면 들과 산에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피는 것이다. (처음~39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안거(安居)의 유래. 동안거, 하안거 / 산(散)철 결제를 하는 이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 법문(法門)은 오직 중생들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 위해 남기신 것 / 일대사(一大事)라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 / 달려오는 말에 부딪쳤을 때처럼,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는 것처럼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정진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

(게송)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 / (게송)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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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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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22. 11. 10. 16:17

 

 

((No.280))—19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51분)

 

(1) 약 28분.

 

(2) 약 23분.



(1)------------------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고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인간의 분별 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녹수(綠水)와 청산(靑山)에 어찌 구애(拘礙)를 받을 것인가.

중생은 자기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이 넓고 넓은 산하대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온통 다 자기의 집이요 한마당이건만, 자기의 본 마당, 본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의 분별 경계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 취사(取捨)와 집착(執着)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어디를 가나 편안치를 못하고, 어디를 가나 걸리고 몸 둘 곳이 없어.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연히 깨달아버리면 천당과 지옥도 걸릴 것이 없고,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시시비비(是是非非)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을축년(乙丑年) 시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청풍납자(淸風衲子)가 사방에서 모여서 한철을 한 지붕 밑에서, 한 도량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고 또 보살선원에도 경향 각지에서 백 명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고락(苦樂)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을 해 가면 공기가 탁하고, 공장과 자동차에 모든 소음이 이렇게 심하고, 또 수용이 박(薄)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할지라도 ‘한 생각’ 철저해 버리면 그런 것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돈독(敦篤)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거, 귀로 듣는 거, 사사건건 걸리게 되고 내가 거기에 끌려 나가고,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게 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마음이 동요가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떴으되 달 자체가 ‘내가 달이다’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물며 ‘나는 밝다. 밝지 못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달 자체는 때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캄캄하게 안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전혀 그런 상(相)이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온갖 분별심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대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백 명 대중이 한 방에 모여서 석 달 동안을 지낼 때에 한 생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철저히 단속하지 못한다면 그 백 명 대중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마음이 동요가 되고, 한 사람 동요됨으로 해서 그 방에 여러 사람이 속이 불편해질 것이고 이리해서 바람 잘 날이 없어.

그래서 몽산(蒙山) 스님께서 결제 법문에 말씀을 하시기를,[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만약 이 도량에 와 가지고 함께 이 고요함을 함께 하고자 할진댄, 참선 정진을 하고자 할진대는 세상에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집착과 거꾸러진 그런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선원에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거, 인사로 왕래하는 그 인사를 끊어 버리고 모든 수용은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짜면 짠 대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아홉 시부터서 세 시까지 삼경(三更) 동안을 제외하고는 수면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밖에 거리에 나가지를 말 것이며, 밖에서 어떤 신도가 공양을 청(請)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말 것이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전에는 경(經)도 보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도 보지를 말아라. 이와 같이 여법(如法)하게 3년을 정진을 하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여러 대중을 대신해서 지옥을 가겠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3년, 10년 내지 30년을 정진을 하되 확철대오를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정말 생사대사를 위해서 잠깐 동안도 한눈 팔 겨를이 없고, 잠깐 동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그렇게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한 말씀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보증하신 그러한 표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디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路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7분47초)


『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배운 들은 깨달은 법문을 조옥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고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 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 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써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攝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문수보살(선재동자)은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 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古人)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처음~27분48초)





(2)------------------

『열반경(涅槃經)』에 나온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共同墓地), 묘지 곁에다가 집을 짓고 사는 데 밤에 어디서 소리가 들리기를 자꾸 자기 이름을 불러 싸.
‘어디서 들리는고?’ 하고 가만히 귀를 종그리고 그 소리 나는 쪽을 가 보니까 무덤, 묘지 속에서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공포심이 발칵 나면서 그냥 거기서 물러나왔어. 그 다음날 저녁에도 밤만 깊어지면 무덤 속에서 또 자기를 불러. 그래서 또 겁이 잔뜩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날이 새 가지고 그 마을에 담력(膽力)이 센 사람, 용기가 있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아! 밤만 되면 무덤 속에서 소리가 나고 나를 불러 싸니 이것 참 무서워서 혼이 났다” 그러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한번 오늘 저녁에는 가봐야겠다” 그 무덤 옆에 집에 가 가지고 그날 저녁에 가만히 그 무덤 옆에 가까이 가서 있으니까, 아!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소리 나는 무덤 있는 데로 가니까 그 속에서 말을 하기를 “나는 이 땅속에 묻혀 있는 황금 덩어리다. 그러니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너에게 주고자 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집안 소지(掃地)를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그리고서 그 방에다가 맑은 물을 여덟 그릇을 떠다 놓고 또 죽을 잘 쒀서 여덟 그릇을 따악 갖다가 놓고서 기다려라. 그러면 먹물 옷 입은 스님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 스님을 네 방으로 모셔 들여 가지고 그 물과 죽을 대접을 해라. 공양을 해라.
그러면 그 스님들이 그 물과 죽을 맛있게 잡술 테니 그러고 난 다음에 방을 여덟 개 칸으로 막아 가지고 한 칸 한 칸에다가 그 스님을 딱 모셔라. 모시고서 문을 딱 잠가 놓으면 그 스님들이 바로 황금으로 변해 가지고, 항아리 속에 황금이 가뜩 담아진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인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 이튿날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악 했습니다.

사시(巳時)가 되니까 스님네들이 주욱 여덟 분이 오는데 준비해 놓은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죽 공양을 다 잡숫고 물을 잡숫고 난 다음에 여덟 칸 방에다가 한 칸, 한 칸 안내를 해서 모셔 놓고 문을 딱 잠갔는데,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스님은 간 곳이 없고 칸칸이 항아리 속에 황금이 담뿍담뿍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마치 흥부가 제비 다리를 짬매서 날려보내 가지고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놀부가 성한 제비를 뚜드려 잡아 가지고 그 부자가 되려고 하듯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집에다가 죽을 쒀서 여덟 그릇을 해 놓고 물을 뜨고 해 놓고는 며칠을 기다리니까, 마치 탁발(托鉢)하는 스님이 여덟 분이 오니까 그분을 초청을 해서 그 죽과 물을 공양(供養)을 올리고는 다짜고짜로 여덟 칸에다 갖다가 넣고 문을 잠가 놓으니까,
그 스님은 뭣도 모르고 죽을 먹고서 강제로 구금(拘禁)을 당해서 아무리 문을 따 달라고 해도 문을 따 주지 않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박차고 나오고 하는 바람에 그래 가지고는 관가에까지 알려져 가지고, 그 사람이 성스러운 스님을 갖다가 이유 없이 감금을 시켰다 하는 죄목으로 엄하게 취조를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던 그 사람도 ‘그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또 그렇게 해서 스님을 여덟 분을 초청을 해다가 또 죽을 공양을 올리고 또 칸칸이 여덟 분을 따악 닫어 놓고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아! 항아리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요리 내다보니까, 아! 혀를 널름널름 하는 큰 구렁이가 항아리마다 들어있어 가지고 노려보면서 물라고 달라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이러한 소식이 그 나라 임금님한테 들려 가지고, 임금님이 불법(佛法)을 믿는 그러한 훌륭한 임금이었던지 거기서 죄인들을 불러다 놓고 또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다 불러다 놓고 그리고서 훈계(訓戒)를 했습니다.

“목욕재계를 하고 죽과 물을 떠다가 스님네를 갖다가 공양을 올리고 또 별실에다가 모신 외면상의 행동은 세 사람이 다 똑같았지만, 맨 처음에 그 사람은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없고 겁약한 사람이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 황금을 얻지를 못했고. 다음에사 욕심만 치성해 가지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남의 본(本)을 따 가지고 황금만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렁이한테 물리게 되고,
중간 사람은 분(分)에 없는—용기 있는 사람이 그 황금을 얻은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지고 멀쩡한 스님을 갖다가 죽 한 그릇 먹여서 때려 가둬 가지고 황금을 얻으려고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벌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다. 용기를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저렇게 황금을 얻었다.
도를 닦는 데에 있어서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은 어느 사람이 그것이 없겠느냐. 첫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생사 문제,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낱낱이 다 ‘불법을 믿고 참선 수행을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리라’ 그러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법망구적인 그런 대용맹지(大勇猛志)가 없어 가지고서는 이 일은 성취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한 생각 진실하다면 성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팔도에서 운집(雲集)한 선객(禪客) 스님네나 보살선방의 여러 보살님네들은 하등에 걸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성격을 가진 분하고도 아무 장애가 없이, 간격이 없이 화합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적응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 발심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분심을 낼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철저한 간절한 의단이 독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큰 사업을 이룬 사업가들도 그러한 수많은 역경계를 굴복함으로써 그러한 대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간 날씨는 엄동설한 움츠려들고, 그 추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禮佛)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하고 그리고 입선(入禪)을 하고 또 각기 소임에 따라서 소임을 맡아서 행할 때에 문자 그대로 고행(苦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는 허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원의 규칙에 따라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앞으로 석 달간 아무 장애 없이 하루같이 알뜰하게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댁에 계실지언정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활 그것이 선방(禪房)이요, 가족이 도반(道伴)이요, 이웃이 도반이라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부처님이요,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요, 선지식의 법문이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장소는 선방이요 그 시간은 입선(入禪) 시간이다’ 이리 생각하고, 선방에 방부 들인 여러 대중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신다면 오히려 가정에 계시고, 밖에 속세에 계신 분이 더 힘있고 철저한 정진을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하라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다. 시비(是非)—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그러한 온갖 시비의 바다 속에, 전체가 중생 사는 데는 시비 아닌 것이 없고 전체가 다 시비요 차별이기 때문에 ‘바다’라 하는 거요.
그 시비(是非)의 바다 속에 몸을 비켜서 들어가. 사람이 많이 꽉 들어찰 때에는 이렇게 정면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몸을 이렇게 비끼고, 이렇게 삐지고 들어가듯이 시비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삐지고 들어가며,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여. 표범과 범이 떼를 이루고 있는 그 속을 갖다가 그 가운데를 자재(自在)하게 나아간다 그 말이여.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하고 내가 못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곳은 밝고 저곳은 어둡다, 이것은 짜고 저것은 싱겁다’ 전부가 다 중생의 인아(人我)로 인한, 인아—‘너[人]와 나[我]’라고 하는 그런 시비의 바다 속에, 그 시비가 바로 그것이 호랑이요 표범인 것입니다. 그 속에 그것을 피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몸을 삐지고 막 적극적으로 그 속을 향해서 간다 그 말이여.

시비를 잡아서 나에게 와서 가리지를 말아라.(莫把是非來辨我) 나한테는 그까짓 시비를, 이러쿵저러쿵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이여. 나는 그까짓 시비를 평생 천착(穿鑿)을 하지 않노라.(平生穿鑿不相關) 그건 내가 따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시비 속에 마구 들어가서 시비를 막 잡아서 내가 막 요리를 해버리고, 시비를 여의지 않고 시비 속에서 바로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가지고 막 삐지고 들어가는데 시비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러한 기개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셔서 일생 동안 여태까지 정진한 가운데, ‘금년 삼동(三冬)이 가장 뜻있는 가장 보람 있는 한철이 되고, 금년 삼동에 정말 일대사(一大事)를 갖다가 해결하고야만 말리라’ 한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27분53초~50분40초)(끝)





[법문 내용]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하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용화선원(龍華禪院) 가풍(家風)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선재동자가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철저한 신근(信根),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이다 / (게송)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 대의지하 필유대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 '용기'에 대한 비유 설화.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게송)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2. 3. 7. 11:13

 

 

(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51분)

 

(1) 약 27분.

 

(2) 약 25분.


(1)------------------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한데  천년도핵장청매(千年桃核長靑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하니, 한 번 밝은 별을 보고 꿈이 문득 돌아오니,
천년도핵(千年桃核)이 장청매(長靑梅)로구나. 천 년 묵은 복숭아씨에서 푸른 매화가 자랐구나.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비록 이 매화가 국의 맛을 고르지는 못하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일찍이 장군(將軍)에게 주어서 목마름을 그치게 했느니라.


오늘은 계해년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입니다.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사월 초파일(四月初八日), 그리고 부처님께서 왕궁을 버리시고 출가하신 2월 17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통(道通)하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오늘 섣달 초여드레, 그리고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신 2월 15일, 이렇게 해서 사대명절이라 하는데,
사월 초파일은 남녀노소와 승속과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사월 초파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부처님께서 도(道)를 통해 가지고 성불(成佛)을 하신 납월팔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또 출가를 하셨다 하더라도 납월팔일 이 성불을 하시지 못했다면, 성불하신 날이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불(成佛)을 하셨기에 부처님의 탄생이 참으로 뜻이 있는 것이며, 출가하신 것도 뜻이 있는 것이며, 열반하신 것도 또한 뜻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셔 가지고 ‘19세에 출가를 하셨다’ 어떤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고, 또 경전에 따라서는 ‘29세에 출가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12년 동안을 고행(苦行) 정진을 하신 끝에 30세에 성도(成道)를 하셔서 80세에 열반하셨다’ 『반니원경(般泥洹經)』 이런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고, 팔리어 『열반경(涅槃經)』이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나 『유부잡사(有部雜事)』 같은 경전에는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을 고행하시다가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북전(北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계통에서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고행하셔 가지고 30세에 성도하셨다’고 이렇게 옛날 우리나라 옛날 스님네는 죽 그렇게 믿고 내려왔는데,
근세에 와서 많은 불교학자들이 여러 경전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이렇게 해서 연구한 결과, ‘29세에 출가해 가지고 6년 동안 고행을 하셔서,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했다’고 하는 그 경전의 말씀이 여러 가지 경전과 여러 가지 점으로 비추어 볼 때에 더 타당성이 있다고 그렇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을 고행을 하셨건,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을 고행하셨건, 35세에 성도(成道)를 하셨느냐 30세에 성도하셨느냐, 그것은 경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어느 것이 옳다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논란을 하고 시비를 할 것이 못됩니다.
이것은 불교학자나 사학가들이 연구할 문제고, 우리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 35세 설(說)이나 30세 설에 너무 지나치게 시비를 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그때 당시 널리 알려진 선인(仙人)을 찾아갔습니다. 지금 말이면 큰 도사(道士)를 찾아갔는데, '알라말라'라고 하는 도인을 찾아가서, 그 도인 밑에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알라말라 도사의 지시에 따라서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수행을 해서 그 도인이 이르른 무소유(無所有)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도인은 쾌히 인가를 하고 길이 자기의 제자가 되어 주기를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스승보다도 더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마음에 만족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 스승은 '우타카'라고 하는 도사인데 그이를 찾아가니까 그 도인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서 수행을 쌓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 우타카 도사 밑에서 위법망구적으로 도를 닦아서 그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은 매우 훌륭한 제자를 만났다고 흡족하게 생각했고, 또 자기 밑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지만 부처님은 거기에서도 당신의 마음에 흡족함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 두 선인(仙人), 두 스승이 당신의 궁극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판단을 내렸냐 하면, 그 두 신선이 참으로 종교적 진리,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체득치 못했다’고 부처님께서는 판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무소유(無所有)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지 않고 무심(無心)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게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것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가 가지고, 그것도 역시 자기의 모든 생각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의식을 완전히 초월해 버리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무심한 경계에 들어가서 그러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이것을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판정이 되셨기 때문에 또 그 우타카라고 하는 두 번째 스승도 버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지금의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서 가장 도 닦기에 알맞는 장소를 선택해 가지고 한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서, 떠억 동쪽을 향해서 자리를 잡고서,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 도를 닦기 시작하는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악마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을 써 가지고 부처님의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쳤습니다.

처음에는 무력으로써 그것을 방해를 치고, 차크라라고 하는 그 뿔이 돋친 쇠뭉텅이 그런 것을 던져 가지고 그놈에 맞으면 아주 박살이 나는 그러한 것을 모다 부처님한테 던지기도 하고, 큰 바위산을 무너뜨려 가지고는 그냥 바위산을 부처님한테로 미틀어 버리기도 하고, 온갖 미친 코끼리를 몰아 가지고는 부처님을 갖다가 막 해꼬자할려고 하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했지만,
차크라는 부처님 머리 위에 와서는 꽃송이가 되어 가지고, 꽃송이로 얽어진 일산(日傘)대가 되어 가지고 부처님을 받들어 드리게 되고, 큰 바위산을 갖다가 미틀어서 부처님한테 미틀은 것이 그것이 또 꽃이 되어 가지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서 떨어지고, 도저히 완력(腕力)으로서는 어찌 해 볼 수가 없게 되자, 그 자기의 아름다운 딸 셋을 갖다가 이쁘게 단장을 해 가지고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부처님을 현혹(眩惑)할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부처님을 갖다가 방해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세 딸이 가서 갖은 아양을 떨고 유혹을 했지만, 그러한 짓은 마침내 연꽃 줄기로 산을 부술려고 한 거와 같았으며, 손톱으로 바위산을 파내려고 하는 거와 같았으며, 이빨로 쇠를 씹어서 가루를 만들려고 한 거와 같아서, 자기의 힘만 소모가 되었을 뿐 조금도 부처님을 해롭게 하고 방해를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왕 파순이의 무력과 완력으로 당신을 온갖 방법으로 해롭게 해 왔지만, 내가 이러한 마구니와의 싸움에서 져 가지고 사는 것 보단 차라리 이 마구니와 싸워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러한 무력의 침범과 그러한 미녀들의 유혹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것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비단 삼천년 전의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출가해서 도(道)를 닦으려는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속가에서 도를 닦으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발심을 해서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날부터 직접 간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도(道)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와 투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사람이 도(道)를 닦아서 도를 이루게 되면 마구니의 무리가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들썩들썩해서 넘어질려고 하기 때문에 마왕(魔王)들은 자기의 영토가 무너지고, 자기의 궁전이 무너지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들까지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도 이루는 것을 방해 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20분15초)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구니와 싸워서, 그 마구니는 무력(武力)으로 오는 마구니와 그 미인(美人)이 되어 가지고, 미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순경계(順境界), 부드러운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갖다가 현혹해 오는 그러한 마구니, 실지는 무력으로 닥쳐오는 마구니보다도 이러한 부드러운 방법을 써서 나를 가장 위하고 나를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마구니는 참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이지(理智)가 둘이 아닌 세계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생각할 뿐이다. 또는 자수용(自受用)하는 스스로 당신만이 맛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법락(法樂)이다. 또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다, 여여실실(如如實實)이다' 그 깨달음의 경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마는.

'무진평등(無盡平等)한 그 진리가 자기 육신에 가득차 가지고 가없는 다함이 없는 적멸(寂滅)의 선(禪)의 낙(樂)이 넘쳐흐른다. 그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가 다 그 적멸한 경계 속에 다 돌아가는 것이며, 그 침묵한 채 더할 나위 없는 그 훌륭한 정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입을 벌려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그 적멸의 법락 속에 있는 바로 그 침묵의 그 상태에서 최고의 법(法)이 여지없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적적(寂寂)한 그 침묵 속에서 대웅변이며, 대설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6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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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그러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최고의 진리, 영원한 진리, 영원히 생사 없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사유(思惟)를 하실 때에 마왕(魔王)들이 나와서 "당신이 혼자 깨달랐으면 그만이지, 그것은 누구에게 말해봤자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입을 벌려서 그 법을 설해봤자 입만 아프고 피로할 뿐이지 아무 성과를 거둘 수가 없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구니들이 부처님을 갖다가 행여나 법을 설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은 사람이 나올까봐 그렇게 방해를 쳤습니다.

그때 천상에서 또 부처님께 여쭙기를, "이 많은 중생 가운데에는 정법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방편(方便) 따라서 법을 설하시면 차츰 근기(根機)가 수승해지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중생의 근기 따라서 방편을 설하셔서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소승법으로부터 중승법, 대승법, 그래 가지고 최상승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설해 가지고 마침내는 위없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 가지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마자 침묵한 가운데에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시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根機) 맞춰서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自內證)의 경전, 당신이 깨달은 바를 고대로 침묵 속에서 설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숙세에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기에, 깊은 숙연을 맺었기에 이 무상(無常)한 오탁악세(五濁惡世)요, 생사의 윤회의 바다 속에서 최고의 위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견성성불하신, 불교 4대명절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해서 재발심(再發心)하고 새로운 각오로써 자기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자기의 신앙과 자기의 신심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해서 진정한 신심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할 줄 생각을 합니다.(39분19초)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끝없이 방황을 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게 닦아 놓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경계가 여지없이 그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빨간 것이 오면 빨간 상(像)이 거울 속에 비추고, 노란 것이 나타나면 노란 것이 그 거울 속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지없이 청황적백(靑黃赤白)이 나타나건만 거울 자체가 빨개지는 것도 아니고, 한번 노란 것이 거기에 비추어졌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노란 거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어느 전법게(傳法偈)에도, 『경계 따라서 마음이 전(轉)하지만[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그 굴르는 곳에 실로 그윽하다. 일체 경계를 만나되, 바로 거기에서 성품을 인득(認得)한다면[隨流認得性], 기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無喜亦無憂]』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소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인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현실적으로 볼 때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 생사 없는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우리는 올바른 수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성도재(成道齋)를 맞이해서 이러한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날을 기해서 다시 한번 자기를 재검토하고, 이 시간 이후로 진정으로 명실공히 참된 수행인이 되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사 없는 진리의 세계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약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천상천하(天上天下),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분이 없어.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시방세계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과 견줄 사람이 없더라.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바를 내가 다 보아도,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은 분이 없더라.(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저 창공에 수천만 개의 별 속에 휘황찬(輝煌燦) 밝은 달과 같은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달은 어떠한 별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크고 뚜렷하고 밝듯이, 부처님의 존재는 하늘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하늘이며, 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며, 왕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들은 그 다행하고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26분46초~51분2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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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견명성몽변회~’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권 3칙 '오도(悟道)' 취암종(翠嵓宗) 게송 참고.
[참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있는 내용으로,
조조(曺操)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이때 조조가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다 한다.

육조 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있는 내용으로,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 길을 잘못 들어 헤매어 식수가 바닥이 났고,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 이상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염은 문득 꾀를 내어 말하기를 “여러분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너머에 매화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반니원경(般泥洹經) ; 2권. 역자 미상.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과 같은 것으로 다른 번역본.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은 서진의 백법조(白法祖) 번역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일을 기록한 것. 『장아함유행경(長阿含遊行經)』과 같다.
*설(說) ; 견해나 주의, 학설 따위를 이르는 말.
*선인(仙人) ; 도를 닦는 사람.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선정(禪定) ;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āna), 팔리어 자나(jhāna)의 음역(音譯)인 선(禪)과 그 의역(意譯)인 정(定)이 합하여 생긴 말. 선(禪)은 정(定) · 정려(靜慮) · 기악(棄惡) · 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한다.
6바라밀의 하나. 마음 고요한 내관(內觀). 마음의 번뇌를 가라 앉히는 것. 정신 집중의 수련. 좌선에 의해 몸과 마음이 깊게 통일 된 상태.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붓다가야(buddhagayā) ;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네란자라(nerañjarā) 강변에 있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니련선하(尼連禪河) ; 네란자라(nerañjarā) 강.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한 지류. 석가모니께서 6년 고행하던 끝에, 이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Sujata)가 바치는 유미죽(乳糜粥)을 드시고 붓다가야(Buddha-Gayā)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동안을 정진을 하셔 성도하였다.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미틀다 ; ‘밀뜨리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갑자기 세차고 힘있게 밀어 버리다)’의 사투리.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현혹(眩惑 아찔할·어두울 현/미혹할·어두워질 혹) ; 마음이 흐려지도록 무엇에 홀림. 또는 그렇게 되게 함.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출세간(出世間) ; 세속의 번뇌를 떠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심리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일전(一轉) ; 마음이나 사태가 아주 달라지거나 바뀜.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식(唯識) ; 모든 차별 현상은 오직 인식하는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일체는 오직 마음 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지(智) ; ①산스크리트어 jñāna 팔리어 ñāṇa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료하게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이해. 지식. ②산스크리트어 jñāna 깨달음. 깨달은 부분의 지혜. 완전히 아는 것. ③팔리어 paññā 지혜. 혜(慧).
*자수용(自受用) ; 깨달음의 경지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즐김.
*법락(法樂) ; 불법(佛法)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 법열(法悅),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알아감으로써,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 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즐거움[樂].
*해인삼매(海印三昧) ;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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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참고]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자내증(自內證) ;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 자신이 직접 체득한 깨달음.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 자내소증(自內所證), 자심내증(自心內證).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 : 寂)과 동(動 : 光)의 본래(本來 : 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絶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경(危境 위태하다·위태롭다·불안하다·두려워하다 위/지경·경계·경우·처지 경) ; 위태로운 처지(虛地)나 지경(地境).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전법게(傳法偈) ;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傳)하는 내용의 시[偈].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게송) ‘천상천하무여불~’ ; 찬불게(讚佛偈).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두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두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에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그 거룩한 모습에 어찌 할 수 없어,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또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한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 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일 낮과 7일 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그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이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이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그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바 아니네.

이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讚佛偈)라 하는데, 7일 7야 동안 세존(世尊)을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겁(九劫)을 뛰어넘어 91겁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으셨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법문 내용]

(게송)일견명성몽변회~ /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 / '알라말라', '우타카' 부처님 깨닫기 전의 두 스승 /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서 수행 /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 /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다 / 불법(佛法)의 위대성 /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

①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 / ②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 ③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다.

(게송)천상천하무여불~ /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부처님 같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51~275)2022. 2. 26. 23:03

 

 

(No.257)—1985년 입춘법회(85.02.04) (63분)

 

(1) 약 33분.

 

(2) 약 31분.


(1)------------------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배반한 뒤로 몇 번이나 삼도(三途)에 들어갔으며 사생(四生)을 겪었던가. 본 마음자리, 본심왕을 등진 이래로, 등지고서 몇 번이나 지옥 · 아귀 · 축생 삼도에 들어가서 갖은 고통을 받았으며,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의 몸뚱이를 몇 번이나 겪었더냐.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 번뇌의 때를 깨끗이 씻어 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고향에 돌아가리라. 본심왕의 고향에, 심왕의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더라.

오늘은 을축년 입춘날입니다. 이 자리에는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스님들, 그리고 보살선방 청신녀 여러분과 용화사 법보제자 여러 신남신녀가 모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마는 우리의 역대 선망부모(先亡父母), 형제자매, 원근친척과 법계에 가득찬 유주무주(有主無主) 애혼(哀魂), 고혼(孤魂) 불자들도 이 법회에 초대를 받아서 왕림을 하셨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점지로 잠시 양씨 가(家)에 태어났다가 24세를 일기로 홀연히 온 곳으로 돌아가 버린 월송거사 양준호 영가(靈駕)의 초재를 맞이해서 함께 그 영가도 이 법문을 법상 앞에서 듣고 있습니다.

인생은 한번 왔다가 잠시 꿈꾸듯, 술 취한 듯 방황하다가 속절없이 몸을 버리고 홀연히 떠나가고야만 말 그러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물론 본성(本性)을 깨달아서 진리와 계합(契合)이 된 사람은 본래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지마는, 나의 본성을 망각하고 등져 버린 입장에서는 분명히 생(生)도 있고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입춘날은, 새해가 이 입춘날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입춘날에는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부처님 앞에 모여서 법문을 듣고 공양을 올리고 또 기도를 하는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도 특히 삼재(三災), 뱀띠와 닭띠와 소띠 이 사 · 유 · 축(巳酉丑)생은 금년이 날삼재[出三災]라 해서 부처님 앞에 동참(同參)을 하고, 그래서 이 1년 동안 무장무애하게 지내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하려는 그러한 간절한 생각을 가지시고 이 자리에 오신 분이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삼재는 꼭 사 · 유 · 축(巳酉丑)생, 뱀띠와 닭띠와 소띠에만이 한정해서 닥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 · 유 · 축(巳酉丑)생이라고 해서 꼭 모든 재앙을 받으라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부터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이 삼재를 대단히 두려워하고 삼가하고 조심해 왔습니다. 많이 경험을 통해서도 이 삼재가 참으로 두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왜 인간에게는 모든 일이 내 마음에 맞고, 내 뜻대로 되는 그런 좋은 일만 있으면 좋으련마는, 왜 우리의 뜻에 어긋나고 바라지도 아니했던 어려운 일이 닥쳐오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야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자기가 짓고, 자기가 씨를 뿌려 놓았던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도론(智度論)』에 보면 옛날 부처님 인행(因行) 때에, 몸뚱이 한번 내휘저어 버리면 산과 바다도 다 넘어져 버리고 뒤엎어져 버릴 만큼 그러한 위력을 가진 독룡(毒龍)의 몸을 받으셨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독룡은 어떻게 무섭고 위력이 있던지 어떤 사람이 그 독룡 앞에 나타나면, 힘이 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卽死)를 해 버리고, 배짱이 세고 담력이 있고 힘이 강하다는 사람도 가서 기운이 빠져 가지고 죽어버리는 그런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독룡이 하루에는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부처님께 계(戒)를 받게 되었습니다. 계를 받은 뒤로 고요한 숲속에 들어가서 정(定)에 들어서 좌선(坐禪)을 했던 것입니다. 좌선을 하다가 피로해서 게으른 생각이 나 가지고 잠에 들었던 것입니다. 정진을 되게 하다가 깊은 잠에 들어 버렸어.

마치 그때에 사냥을 하는 포수(砲手)가 그 독룡이 잠들어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독룡이 깊은 잠에 들을 때에는 흡사 큰 구렁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렁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독룡을 발견한 포수가 깜짝 놀랬습니다. 왜 놀랬느냐 하면은 그 독룡의 몸뚱이가 너무 찬란했던 것입니다.
몸뚱이가 울긋불긋 오색이 찬란하고 칠보로 장엄한 것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이 용의 가죽을 벗겨서 상감께 바쳐서 옷을 해 입도록 하면 큰 벼슬을 받고 상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작대기로 그 용의 머리를 누르고 그리고서 다른 사람들은 칼로써 그 독룡의 가죽을 서서히 벗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용이 놀래서 눈을 떠 보니 아! 어떤 포수가 작대기로 자기 머리빡을 누르고 조그만한 칼로 껍데기를 벗기는데, 그 용이 얼마만큼 크냐 하면 태산도 꼬리로 냅다 때려버리면 태산도 와그르르 무너져 버리고, 바다도 한번 쳐 버리면 바닷물이 바짝 다 말랐다가 다시 오므라질 정도로, 그 나라, 그까짓 것도 없애 버리려면 없애 버리고, 그 달라들어서 모가지를 누르고 가죽을 벗기는 사람들도 슬쩍 쳐 버려도 가루가 되어버릴 그러한 정도로 몸뚱이도 크려니와 기운이 센데,
‘부처님께 계를 받고 도를 닦는 그런 까닭으로 내가 차마 이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서 그것을 꽉 참고서 껍데기를 다 벗기도록 놓아두었던 것입니다.

머리빡부터서 껍데기를 벗기는데 눈도 빠지고 차츰차츰 숨도 막히게 됐습니다. 껍데기를 벗기는데 몹시 아팠지만 차마 그 조그만한 사람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껍데기가 다 벗겨지도록 아픈 것을 참으면서도 조금도 뉘우친 바가 없었습니다.
껍데기를 다 벗겨 버리고 완전히 벌건 살 덤뱅이만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그날 구름 한 점 없는 태양이 쨍쨍 쬐어 가지고 껍데기를 활랑 벗겨 버린 독룡의 몸뚱이는 따갑고, 시시각각으로 말라비틀어지고 목이 말랐습니다.

몸뚱이를 굴려서 큰 물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그때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수천 마리 수만 마리의 조그마한 벌레며 개미떼들이 달라들어서 그 고기를 새카맣게 눌어붙어서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몸뚱이를 움직이면 그 살을 뜯어먹고 있는 개미떼들이 다 죽을 것이고, 그래서 몸을 까딱도 하지 아니한 채 참고 참다가 마침내 몸뚱이는, 차츰차츰 살 덤뱅이는 개미떼들이 다 뜯어가고 바짝 말라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그 독룡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금생에는 내가 이 몸뚱이로써 너희들에게 보시(布施)를 해 가지고 너희들을 배부르게 하려니와, 내가 성불한 날에는 법(法)으로써 너희들에게 보시해서 너희들의 마음을 깨닫게 해 주리라’ 한 이러한 맹서(盟誓)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자마자 그 독룡은 바로 제이 도리천(第二 忉利天)에, 도리천상에 태어나게 됐습니다.(20분1초)

이 설화는 부처님 인행(因行) 때의 설화인데, 그 독룡은 나중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시고, 그 독룡의 머리를 누르고 가죽을 벗기던 사람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태어나서 부처님을 괴롭히던 조달(調達)이었던 것입니다.
조달이는 10생(十生)을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온갖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히고 해꼬자하고 때로는 목숨을 앗을려고 그러고 때로는 모함을 하고, 견디기 어려울 만한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죽 벗겨진 독룡의 몸뚱이를 뜯어먹던 개미떼들은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고 최초로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을 하실 때에 그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팔만의 하늘나라, 팔만의 제천(諸天)들이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날 그 독룡이 부처님의 계(戒)를 무시해 버리고, 자기의 목을 누르고 가죽을 벗기던 사냥꾼을 때려죽였던지, 그 개미떼들을 죽거나 말거나 몸을 움직여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던지, 이렇게 했더라면 부처님은 성불(成佛)을 하시지 못했을 것이며, 그 사냥꾼도 또 그 개미떼들도 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세세생생에 원수로서 만나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남을 좋게 해 주고 또 내가 남에게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이러한 것들이 다음 순간에는 은인으로 나타나고, 다시 원수로 나타나고, 원수가 은인이 되고 은인이 원수가 되고, 이리해서 세세생생을 거듭하면서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이나 육도법계의 수없는 모든 중생들도 선(善)이 아니면 악(惡), 악이 아니면 선으로 지어서 받고, 뿌려서 거두는 그러한 유위(有爲), 유루(有漏)의 인과 관계에서 찰나간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삼재(三災)는, 재앙(災殃)은 바로 그런 원인으로 해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것입니다. 이왕 과거에 지어서 금생에 돌아오는 삼재를 억지로 모면할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악(惡)의 씨를 뿌리고 선(善)의 과(果)를 거두려는 생각은,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잘못은 부처님께 진심으로 참회(懺悔)를 하고, 이미 자기에게 돌아오는 재앙은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말고, 곱게 깨끗하게 달게 그것을 받아넘기고, 그것을 달게 받아넘기면서 거기서 새로운 발심(發心)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야말로 인과법(因果法)을 믿는, 불법을 믿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수행자의 마음 자세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일가친척이나 이웃간에도 우리가 아무리 그 사람이 나한테 야속하게 하고, 나를 직접 간접으로 또는 물심양면으로 해를 끼친 때가 있다하더라도 독심(毒心)을 품고 복수를 하려는 마음은 일어나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싸움은 싸움으로써 끝나지 아니하고, 원수는 복수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삼재, 금년 을축년 날삼재를 안고 있는 뱀띠나 닭띠나 소띠의 가족을 가지신 분 또 직접 그 사 · 유 · 축(巳酉丑)생에 해당하신 분은 오늘 이후로 누가 나를 해롭게 하고, 나를 험담을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그러한 사람과 일을 만났을 때에 진심(瞋心)을 내지 말고, 바로 거기서 마음을 돌이켜서 인과법(因果法)을 관찰을 하고, 성내는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도록 노력을 하신다면 어떠한 무서운 삼재도 그분 앞에는 악한 결과를 끼쳐주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으로 모든 재앙을 상대(相對)를 하고 모든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상대하신다면,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나의 스승이 되고, 나의 은인이 되고, 나의 도반으로서 나를 도와주고 나로 하여금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佛菩薩)로 변할 것입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서 나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면서, 아무리 재앙을 면하려고 하고 큰 복을 받으려고 한다고 해도 이것은 소금을 많이 먹고 목마름을 낫으려고 하는 거와 같을 것이며, 나무 위에 올라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그렇게 해서 권리를 획득하고 재산을 많이 모였다 하더라도 그러한 권리와 그러한 재산은 끝내 나를 배반하고 독사처럼 나를 물어서 나의 목숨과, 나의 명예와, 나의 모든 공덕을 하루아침에 다 빼앗아 가고 말 것입니다.(처음~31분29초)





(2)------------------

아육왕(阿育王)은 부처님 당시에 어린아이로서 길에서 소꼽장난을 하다가 모래와 흙으로 성(城)을 쌓고 길을 닦고 그러다가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부처님께 그 길을 터드리면서 ‘어서 이리 지나가십시오’ 하고 길을 내드렸습니다.
소꼽장난을 하면서 부처님께 길을 닦아 드리는 그 공덕으로, 부처님께서는 ‘앞으로 백년 후에 너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다’ 하고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전륜성왕은 무력으로써 천하를 통일한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으로써 천하를 통일하는 위대한 왕을 갖다가 천자를 전륜성왕이라 하는데, 전륜성왕도 부처님과 똑같이 32상(三十二相)을 갖추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 아육왕이 과연 부처님 열반하신 뒤, 백년 만에 인도에 태어나서 전 인도를 갖다가 통일을 하고 불법으로써 인도 천지를 다스린 그러한 성군(聖君)이었던 것입니다.
그 아육왕이 국토를 순례하며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네팔(Nepal)에 들렸을 때에 부처님의 탄생지인 그 룸비니(Lumbini) 동산에 높은 돌기둥 탑을 세우고 거기에다가, 「여기는 부처님께서 탄생한 곳이니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어라」하는 그러한 칙어(勅語)를 돌에 새겨 놨습니다. 그 돌기둥 탑과 그러한 그 돌에 기록한 비문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성지 순례로 가셨던 분들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 아육왕(阿育王)은 일생 동안 그렇게 많은 보시를 행하고, 불법을 옹호하고, 불법으로써 부처님 진리로써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아육왕은 마침내 병을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병을 앓고 눕게 되자 보시하려는 마음이 더욱 높아져 가지고 밤으로 낮으로 황금 뭉탱이를 계원사(鷄園寺)라 하는 절로 갖다가 바쳤습니다. 절을 고치시도록 보내고, 대중공양을 하시라고 보내고, 그저 계속 날이면 날마다 황금을 보내기를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때에 불법을 잘 믿지 아니한 한 대신이 태자에게 권해 가지고, 그때 태자(太子)는 삼파지(三波地)라고 하는 태자인데, 그 태자에게 권해서 그 황금을 쌓아 둔 창고 문을 굳게 닫고 그 황금을 내가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그 창고 문을 갖다가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아육왕은 계속해서 그 황금을 갖다 바치라고 했지만, 그 무서운 위력을 가졌던 전륜성왕도 병이 들어 앓아눕게 되자 그 왕의 명령은 시행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그때에 왕은 점점 기력은 쇠해져 갔습니다.

왕은 게송을 읊기를,

금아아육왕(今我阿育王)이  무부자재력(無復自在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반암마륵(唯半菴摩勒)이  어아득자재(於我得自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금아아육왕(今我阿育王)이  무부자재력(無復自在力)이다. 이제 나 아육왕이 아무런 자재력이 없구나. 아무 힘이 없구나.
오직 암마륵 반 조각에, 암마륵 과실만이 나에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손에—암마륵이라고 하는 인도에서 나는 과일인데, 그 암마륵 과일 반 조각 밖에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구나.

이러한 처량한 게송을 읊고서, (아육왕을) 모시고 있는 신하를 시켜서 그 반 조각 암마륵 과일을 계원사로 보내드렸던 것입니다. 계원사 원주 스님은 그 반 조각의 조그마한 암마륵 과일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가지고, 죽을 쑤는데 그것을 섞어 가지고 여러 대중이 고루고루 그것을 공양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인도를 통일해 가지고 날으는 새도 떨어뜨리는 그러한 위대했던 아육왕도 늙어서 병이 드니까 그리고 그 권한이 태자에게로 돌아가니까 아무 힘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창고에는 산더미 같은 황금이 쌓여 있고, 칠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곡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하더라도 늙고 병들면 이미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布施)라 하는 것은 언제나 바로 그때그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시, 고아원이나 양로원에 행하는 보시, 돈이 없어 병을 치료 못하는 그러한 사람에게 보시, 수행하는 스님네에게 보시, 그러한 보시는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자면 부자 대로 언제나 그때그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많이 돈을 벌어서 하리라’ 하면 그때는 자기의 뜻대로 되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왜 그때그때 하지를 못하고 ‘나중에 많이 벌어서 하리라’ 하는 생각을 내느냐 하면,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의 욕심인 것입니다. (녹음 끊김) ...하기보다는 이 작은 돈을 잘 굴려서 큰돈을 만들어 가지고 나도 잘살고, 그때 여유가 있으면 마음껏 보시를 하리라. 이것은 어리석고 탐심에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것을 해 버리면 뭘 먹고 살며, 장사는 무엇으로 하며, 사업은 무엇으로 하느냐? 그러니 이때에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선 먹어야 하고, 장사를 해야 하고, 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어 가지고 그때 해도 늦지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기 때문에 그때그때 분(分) 따라서 할 수 있는 보시를 뒤로 미루고 못하게 되어서, 씨를 뿌리는 계절을 놓치기 때문에 정당(正當) 수확을 해야 할 가을철에 가서는 거둘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잔치 때 쓰기 위해서 우유를 짜지 아니하고 한 달 내 두었다가 잔칫날 짜려고 보니까 젖이 말라서 별로 많이 나오지 못했다'고 하는 『비유경(譬喩經)』의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젖은 매일매일 짜야 젖이 더욱 더 잘 나오는 것입니다. 짜지 않고 한 달 내 놔두면 젖이 밭아 버리고, 한 달 동안 모인 젖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욕심과 탐심 그리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할 줄을 모르고 자꾸 쌓아 모으려고만 할 때에 인정사정없이 남을 해롭게 하게 되고, 남에게 원한을 사게 하는 결과로, 돌아오는 것은 원수와 원수의 결과 재앙을 끌어드리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첫째에 보시라고 하는 항목이 있는 것은 도(道)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거든. 보시는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모든 재앙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보시는 재보시(財布施)가 있고, 법보시(法布施)가 있습니다. 재물, 자기에게 있는 금은전보(金銀錢寶)와 의복과 먹을 음식, 그러한 물질로 보시하는 법이 있고, 법을 설해서 법으로 보시하는 법이 있습니다. 또 물질로도 하고 마음으로 보시할 수도 있습니다.
보시의 형태는 크고 작은 것과 유형무형의 여러 가지 의미의 보시가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보시도 보시는 자기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업(業)의 종자(種子)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모든 재앙을 미리 막는 가장 좋은 슬기로운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보시를 통해서 자기를 비우게 하는 그러한 항목이 바로 보살도(菩薩道)의 육바라밀의 첫째 항목에 넣어 놓은 것은 너무너무 부처님께서 설정을 잘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지혜가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그러한 조항이지만 보시(布施)를 첫 꼭대기에다 넣은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은 무엇이던지 탐심과 욕심으로써 자꾸 쌓아 모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깨뜨려 버리고 비움으로써 지혜(智慧)로 나아가는 첫 단계가 되기 때문에 보시는...

부처님이 아무리 안 잡수어도 법당의 부처님이 배고프다고 하신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떡을 갖다놔도 한 덩어리도 잡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지(摩旨)를 짓고, 공양을 올려도 잡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의 공덕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탐심과 욕심을 비우고, 모든 재앙을 소멸케 하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방편(方便)인 것입니다.(49분51초)

보시를 행하면 죽을 운수(運數)도 때우는 것이고, 어려운 재앙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아니하고 욕심껏 쌓아 모으다가 그 돈을 한푼도 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 사람도 적지 않는 것입니다.

늙어서 쓰기 위해서—젊어서는 쓰더라도 또 벌게 되니까 또 쓰고 벌고 그러다가도,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으면 '이제는 내가 돈도 벌 수 없고 이 돈 떨어지면 어디서 돈이 있어서 쓸 것인가, 돈이 떨어지면 이제는 나는 물이 말라버리는 고기와 같아서 꼼짝을 못할 것이다' 이래 가지고 쌓으고 또 쌓고 해 가지고 영판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모르고 쓰지를 않고 있다가, 죽은 뒤에 보면 돈 뭉텅이가 10번, 20번 쌓고 쌓은 뭉텅이가 나오거든.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들장을 파고 구들장 밑에다가 항아리를 묻고 돈을 갖다가 몇백만 원을 묻어 놓고서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죽었는데, 그 구들장 위에 방석을 놔 놨는데 방석이 뜰썩뜰썩해서 보니까 큰 구렁이가—그 죽은 사람이 업이 되어 가지고, 그 업으로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자기가 묻어놨던 그 돈 항아리에 애착을 끊지를 못해 가지고, 그 방석 밑에 또아리를 틀고 혀를 널름널름, 이것은 몇십여 년 전에 어떤 절에서 있었던 실화인 것입니다.
죽은 뒤에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그 영단(靈壇), 영위(靈位) 그 위패 모신 상(床)에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며, 그 구렁이를 집어 버리니까 그 구렁이를 따라가니까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그런 설화도 있습니다마는.

삼재(三災)를 면하려면 부작(符作)을 갖다가 붙이고, 무슨 액막이를 하고 그러기보다는 삼재를 든 분은 보시를 행하는 것, 그리고 방생(放生)을 하고 보시를 하는 것, 이런 것이 차라리 훌륭한 지혜로운 방편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방편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근원에서 해결 짓는 방법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며, 복과 죄가 없는 것이다’ 하는 정법의 말씀을 믿고서 한 생각 돌이켜서 좋은 일을 당해도 화두(話頭)를 들고, 궂은일을 당해도 화두를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話頭)를 들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것이야말로 삼재를 소멸하고 예방하는 가장 근원적인 길이라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입춘 법회가 끝나면 점심공양도 하시지 않고 어디를 가시는지 급히 문밖으로 도망치듯이 빠져나갈 분들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틀림없이 한 장에 5만 원, 10만 원, 20만 원하는 부작을 사러 점쟁이나 무당집으로 쫓아가실 것입니다.
부작 한 장으로 재앙을 막고, 자기가 지은 업장(業障)을 소멸할 수 있다면 우리 용화사에서도 부작은 몇만 장이라도 찍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을 위안하는데는 도움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것으로써 삼재가 면해질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받게 됩니다. 기왕 받을 바에는 우리는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맺을 것이 아니라, 받으면서 오히려 자기의 과거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고, 받으면서 오히려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불보살을 만난 그러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서 소화를 시킨다면, 깨끗이 받아서 해결 짓고서 새로운 광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또 이중 삼중으로 맺어 나가는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이 너무너무 다행한 인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인생백년정하허(人生百年情何許)인고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에  원산점점천창창(遠山點點天蒼蒼)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생 백년이 그 정(情)이 얼마나 되는가?
영별유유갱대상(永別悠悠更對床)이다. 영원히 이별한—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을 하는 이 광경, 다시 또 이렇게 서로 상(床)을 앞에 대하게 된다.

요지백운귀거로(遙指白雲歸去路)에, 저 아스라니 가리키는 흰구름 돌아가는 길에, 먼산은 점점(點點)하고 하늘은 푸르르구나.

월송거사 양준호 영가. 잠시 인간 세상에 태어났다가 24세를 일기로 홀연히 떠나갔는데, 잠시 와서 그 부모와 가족들에게 무상(無常)의 도리를 일깨워 주고, 일가친척과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몸뚱이는 허망한 것이고, 인생은 허망한 것이고, 부귀와 공명도 한낱 뜬구름과 같다고 하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고,
그리고 다시 인연 따라서 극락세계나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다행히 이 사바세계에 인연이 있어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한다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다 같이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 되어줄 것을 기약하고 다짐하노라.


오늘 입춘일을 맞이해서 이 법회에 참석하신 신남신녀 여러분, 함께 이 법석(法席)을 같이 하는 인연으로 과거 무량세에 지었던 모든 죄업은 봄눈 녹듯이 소멸하시고, 앞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간절히 부처님께 축원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점심공양은 월송거사 양준호 영가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해서 공양(供養)을 올리게 됩니다. 영가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맛있게 공양을 해 주시고, 일 년 내내 건강하시고, 삼재가 드신 분도 아무 탈이 없이, 오히려 모든 일이 더욱 뜻대로 이루어지시기를 축원(祝願)합니다.(31분31초~62분2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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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도(三途, 三塗)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 지옥 · 아귀 · 축생의 생존. 삼악도(三惡途),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愚癡 어리석음)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의구(依舊) ;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고향(故鄕) ; 본래 살던 곳. 본고향(本故鄕). 본향(本鄕).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입춘(入春) ;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하나.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들며, 이때부터 봄이 시작된다고 한다.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애혼(哀魂) ; 애처로운, 한이 맺혀 돌아가신 영가.
*고혼(孤魂) ; 문상(問喪)할 사람이 없는 외로운 넋.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계합(契合 맺을 계/합할 합) ; ①(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 ②진리나 본심을 깨달아 그것과 일체가 되는 것.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음양오행(陰陽五行) ; 음·양의 2기(氣)와 수(水)·화(火)·목(木)·금(金)·토(土)의 5행으로 자연현상이나 인간·사회의 현상을 설명하는 사상.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지도론(智度論) : 혹은 <대지도경론(大智度經論)> <대지석론(大智釋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대지론(大智論)> 또는 <대론(大論)> <석론(䆁論)>이라고도 한다.
용수(龍樹)보살이 지은 것으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해석한 것인데, 후진(後秦)때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하면서 제일 서품(序品)만은 원문대로 번역하여 34권을 만들고, 그 나머지 제구십 촉루품(囑累品)까지를 간단하게 추려서 전부 100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온전히 번역한다면 천여 권이 되었으리라고, 구마라습의 제자인 승예(僧叡)는 말하였다.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맹서(盟誓 맹세 맹/맹세할 서) ; '맹세(盟誓 임무나 약속을 꼭 실행하거나 목표를 꼭 이루겠다고 굳게 다짐함. 또는 그 다짐)'의 원래 말.
*도리천(忉利天) ; 욕계(欲界) 6천(六天)의 제2천. ‘도리’는 33의 음사(音寫)이며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의역.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Sumeru)의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제석천(帝釋天:Indra)의 천궁(天宮)이 있다. 사방에 봉우리가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에 8천이 있기 때문에 제석천과 합하여 33천이 된다.
*조달(調達) ; 제바달다(提婆達多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devadatta의 음사).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출가하여 그의 제자가 됨. 부처님에게 승단을 물려줄 것을 청하여 거절당하자 500여 명의 비구를 규합하여 승단을 이탈함. 여러 번 부처님을 살해하려다 그 과보로 살아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녹야원(鹿野苑) ; 석가(釋迦)가 35세에 성도(成道)한 후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등 5명의 비구(比丘)를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강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의 유적이 곧 녹야원의 터. 사슴동산(녹야원), 즉 사르나트(Sarnath)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약 200㎞됨.
탄생(誕生:룸비니) · 성도(成道:붓다가야) · 입멸(入滅:쿠시나가라)의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대 성지의 하나.
*제천(諸天) ; ①모든 하늘. 욕계의 육욕천, 색계의 십팔천, 무색계의 사천(四天)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 마음을 수양하는 경계를 따라 나뉜다. ②천상계의 모든 천신(天神).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유위(有爲) ;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구차(苟且 구차할 구/구차할 차) ; ①살림이 몹시 가난함. ②말이나 행동이 떳떳하거나 버젓하지 못함.
*모면(謀免) ; 어떤 일이나 책임을 꾀를 써서 벗어남.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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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육왕(阿育王) ; 산스크리트어 aśoka 팔리어 asoka의 음사. 무우(無憂)라고 번역.
찬드라굽타(candragupta)가 마가다국(magadha國) 난다(nanda)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재위 기원전 270년경-230년경.

즉위 8년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 - 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 - 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비폭력과 정의에 기초한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였다.

아육왕의 주선으로 도읍지인 화씨성(華氏城)의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1,000여 명의 비구들이 제3차 결집(結集)을 행하여,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정리함.
불교에 귀의하여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절들을 인도 전역에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함. 특히,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밋타(saṅghamittā)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전함. 왕은 자신의 뜻과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왕이 죽은 후, 마우리야 왕조는 서서히 분열되어 기원전 180년경에 멸망함.
*전륜성왕(轉輪聖王) ; 산스크리트어 cakravarti-rāja 인도 신화에서, 칠보(七寶)를 갖추고 정법(正法)으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있는 대륙을 다스리는 왕.
32상(相:신체의 특징) · 7보(寶)를 갖추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 지배한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윤보(輪寶)를 굴려 모든 장애를 물리친다고 함. 윤보에는 금·은·동·철의 네 가지가 있는데, 금륜보(金輪寶)를 지닌 금륜왕(金輪王)은 네 대륙을 다스리고, 은륜보(銀輪寶)를 지닌 은륜왕(銀輪王)은 세 대륙을, 동륜보(銅輪寶)를 지닌 동륜왕(銅輪王)은 두 대륙을, 철륜보(鐵輪寶)를 지닌 철륜왕(鐵輪王)은 한 대륙을 다스린다고 함.
전통적으로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阿育王](BC 3세기)을 세속의 전륜성왕이라고도 말한다.
*수기(授記) ; 부처님이 불법에 귀의한 중생에게 어느 시기, 어느 국토에서 어떤 이름의 부처로 태어날 것이며, 그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이라는 것 등을 낱낱이 제시하면서, 미래세의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또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기별(記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룸비니(Lumbinī) ;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탄생한 곳으로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지방, 바이라와(Bhairawa)의 서방에 있다. 석가족(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19세게 말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앨로이스 휘러(Alois Anton Führer)가 오늘날의 네팔 테라이 지역에 있는 옛 사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에 버려져 있는 아쇼카왕 석주(石柱)를 발견했다.
석주에 새겨진 내용은,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Buddha)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石柱)을 세우게 했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8분의 1만 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 아쇼카왕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약 2백년 후,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기원전 269년 경에 즉위하여 36년간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치하였는데, 즉위 8년(B.C. 262)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 - 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 - 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그가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는 이정표가 된다.


[아쇼카의 '다르마(法)' 개념은 직접적인 불교의 특징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핵심은 윤리적인 바른 삶 - ①바른 인간관계 : 웃어른 • 이웃에 대한 존경, 수행자에 관대함, 노예나 종의 바른 처우, 모든 교단의 화합과 비난 금지.
②계행과 바른 삶:살생금지, 동물 희생제 금지, 적게 소비.
③다르마의 수행과 백성의 복지: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7가지의 경전을 듣고 명상하도록 함, 보시와 복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결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이익과 행복을 얻기 바라는 부처님의 ‘다르마(法)’를 근본으로 한다.]
이 다르마의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쇼카 왕이 즉위 20년이 되던 해, B.C. 250년 무렵에 룸비니를 방문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룸비니 석주(石柱)이다.

*칙어(勅語) ; 임금이 몸소 타이르는 말씀. 또는 그것을 공표한 글.
*(게송) ‘금아아육왕~’ ; 『아육왕경(阿育王經)』 제5권, 반암마륵시승인연품(半菴摩勒施僧因緣品) 참고.
*분(分) : 분수(分數 -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정당(正當) ; ‘정당하다(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의 어근.
*밭다 ; (무엇이) 바싹 졸아서 물기가 거의 없어지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여섯 가지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법보시(法布施) ; 다른 사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이나 불서(佛書)를 베풂. 타인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법을 보시한 공덕은 매우 뛰어나 한량이 없다고 하셨다.

[참고] 『제경요집(諸經要集)』 10권. 18. 육도부(六度部) [육도부에는 여섯 가지 편(篇)이 있음]
제1 보시편(布施篇第一)[보시에 따로 일곱 가지 연(緣)이 있음] (4)법시연(法施緣).
故智度論云 佛說 施中法施第一 何以故 財施有量 法施無量 財施欲界報 法施出三界報 財施不能斷漏 法施淸升彼岸 財施但感人天報 法施通感三乘果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시 중에는 법시(法施)가 제일이다. 왜냐 하면 재물의 보시는 한량이 있지만 법(法)의 보시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욕계(欲界)의 과보를 얻지만 법(法)의 보시는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과보를 얻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번뇌[漏]를 끊을 수 없으나 법(法)의 보시는 저 언덕[彼岸]에 청정하게 오르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다만 인간 세계와 천상의 과보를 감득(感得)하지만 법(法)의 보시는 삼승(三乘)의 과보를 감통(感通)하기 때문이다.

財施愚智俱閑 法施唯局智人 財施唯能施者得福 法施通益能所 財施愚畜能受 法施唯局聰人 財施但益色身 法施能利心神 財施能增貪病 法施能除三毒

재물의 보시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다 할 수 있지만 법(法)의 보시는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게 국한되었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오직 보시한 사람만이 복을 얻을 수 있으나 법(法)의 보시는 보시한 사람과 보시를 받은 사람이 통틀어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어리석은 짐승도 받을 수 있지만 법(法)의 보시는 오직 총명한 사람에 국한될 뿐이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다만 색신(色身)만을 이롭게 할 뿐이지만 법(法)의 보시는 능히 마음과 정신까지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탐욕과 질병을 증장시킬 수 있으나 법(法)의 보시는 삼독(三毒)을 다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니라'

제6 지혜편(智慧篇第六)[여기에는 두 가지 연(緣)이 있음] (2)구법연(求法緣第二)
布施飮食 濟一日之命 施珍寶者 濟一世之厄 增益生死 說法敎化者 能令衆生 出世間道 得三乘果 免三惡道 受人天樂 是故佛說 以法布施 功德無量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하루 동안의 목숨만을 구제해 주는 것이요, 진귀한 보배로 보시하는 것은 한 세대의 재액을 구제해 주고 생사에 이익을 더하는 것에 그치지만,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을 벗어나게 하는 도(道)로써 삼승(三乘)의 과(果)를 얻고 세 갈래 악한 세계[三惡道]를 면하게 하여 인간이나 하늘의 즐거움[人天樂]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법(法)을 보시(布施)하는 것은 그 공덕이 한량없다」고 하셨습니다.
*금은전보(金銀錢寶) ; 금은(金銀)이나 돈[錢] 패물[寶].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보살도(菩薩道) ; ①보살의 수행. 보살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갖추어 깨달음에 이르는 도. ②대승불교.
*마지(摩旨) ; 부처님께 올리는 밥.
부처님께 올리는 밥은 대부분 사시(巳時), 즉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린다. 이것은 생전에 부처님이 하루에 한 번 그 시간에 밥을 먹은 데서 유래한다.
사시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마지 올린다’고 하는데, 한자를 풀이하면 (摩指, 摩旨, 磨旨) ‘손으로 만들어 올린다 혹은 정성스럽게 만든 공양을 올리오니 제 뜻을 감읍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운수(運數) ;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 하늘이 정한 운수)과 기수(氣數 저절로 오가고 한다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운수).
* ; 업은 한 집안의 재물 신격으로서 흔히 구렁이, 족제비 등으로 상징된다. 집안에 이런 동물이 어느 곳이든 머물러 있어야 가업이 번창한다고 믿고 있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영위(靈位 신령 령/자리 위) ; ①혼백[靈]의 자리[位]. ②신위(神位). 또는 위패(位牌).
*부작(符作) ; ‘부적(符籍)’의 변한 말.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부적(符籍 부적 부/문서 적) ; 잡귀를 쫓고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몸에 지니거나 집에 붙이는 종이.
*방생(放生) ; 사람에게 잡힌 물고기나 새, 짐승 따위를 산이나 물에 놓아서 살려 주는 일. 불교도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첫째 계(戒)인 불살생계(不殺生戒)보다 적극적인 선을 실천하는 선행(善行)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단언(斷言) ; 머뭇거리지 않고 딱 잘라서 말함.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게송) ‘인생백년정하허~’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휴정 著, 朴敬勛 역, 동국대학교 역경원) p181 ‘원상인(圓上人)을 이별하며 드림’ 게송 참고.
*아스랗다 ; (보이는 것이)까마득하게 멀거나 아슬아슬하게 높다.
*점점(點點)하다 ; (사물이 어떤 곳에)여기저기 점을 찍은 듯이 흩어져 있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한낱 ;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고]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65. 4권.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波斯匿王於閑靜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極有義利 能得現報 無有熱惱 不待時節 能將於人到于善處 語諸人言 <汝等來 善示汝妙法> 夫爲智者 自身取證 深得解達 須善友 須善同伴 恒應親友如是善友 不向惡友幷惡知識 遠離惡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바사닉왕이 조용한 곳에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지극한 뜻[義]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고,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서 좋은 곳에 이르게 하시며, 여러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오너라. 너희들에게 미묘한 법을 보여 주겠다〉고 하시니, 슬기로운 이는 몸소 증득해서 깊이 이해하고 통달한다. 그리고 착한 법과 착한 동반자를 구해서 그와 같은 착한 벗을 항상 친근케 하며, 악한 벗과 악한 지식(知識)에게 향하지 않게 하고 나쁜 도반을 멀리하게 하시는구나'

思惟是已 從坐處起 往詣佛所 在一面坐 白佛言 "世尊 我於閑處 作是思惟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無諸熱惱 不待時節 乃至不與惡友交遊'" 佛告王曰 實爾 實爾 佛所敎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伴交遊"

이렇게 생각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한쪽에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조용한 곳에서 이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심한 번뇌를 없애고, 때에 구애받지 않게 하고, 나아가 나쁜 벗과 사귀지 못하게 하신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실로 그렇고 그렇소이다. 부처가 가르치는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게 하며, 나아가 나쁜 벗과 사귀지 못하게 하오"

我於往時 在王舍城耆梨跋提林 爾時 阿難比丘獨在靜處 作是思惟 善知識者 梵行半體 阿難起已 來至我所 頂禮我已 而作是言 善知識者 梵行半體 非惡知識 惡伴 惡友

내가 옛날 왕사성 기리발제(耆梨跋提) 숲 속에 있었을 때, 아난(阿難) 비구가 혼자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였소. '선지식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겠다'
그러고 나서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처소로 와서 나에게 예배하고 이러한 말을 하였소. '선지식(善知識)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절반의 힘은 되오니 그는 나쁜 지식, 나쁜 도반, 나쁜 벗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我告阿難 '止 止 莫作是語 所以者何 夫善知識 善友 善伴 乃是梵行全體 又善友伴者 不與惡知識 惡友 惡伴而爲徒黨 何以故 我以善知識故 脫於生死 是故當知 善知識者 梵行全體 如是之事 應分別知 佛所說法 有大義利 能招現報 乃至不與惡友惡伴惡知識等而爲伴黨'

나는 아난에게 이렇게 말했소.
"그만 그만,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 왜냐 하면 선지식과 착한 벗 착한 도반은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또 착한 벗과 착한 도반은 나쁜 지식과 나쁜 벗 나쁜 도반과 무리를 짓지 않으니 왜냐 하면 나 역시 선지식 때문에 생사를 해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식이란 존재는 청정한 행을 닦는 데 전체적인 힘이 된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러한 일을 잘 분별해서 알아야 한다. 부처가 말한 법은 큰 뜻과 이익이 있어서 현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나쁜 벗과 나쁜 도반 나쁜 지식들과 무리를 짓지 않게 하오"

爾時 世尊卽說偈言 '於諸善法中 不放逸最勝 若當放逸者 賢聖所譏嫌 若不放逸者 獲於天帝位 於諸天中勝 於作無作中 不放逸最勝 若不放逸者 坐禪盡諸漏 逮得於勝果 佛說是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그러고 나서 세존께서는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착한 법 중에서 '방일하지 않는 것[不放逸]이 으뜸이니 만약 방일한 짓을 하면 성현들이 싫어하시네. 만일 방일한 짓 아니하면 천제(天帝)의 지위를 얻으며 모든 천(天) 중에서도 뛰어나리라.
짓고 짓지 않는 일 중에서 방일하지 않음이 가장 훌륭하나니, 만약 방일하지 않는 자라면 좌선할 때 모든 번뇌 없애서 수승한 과위를 얻게 되리라.
부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법석(法席) ; 대중이 둘러앉아서 설법, 독경, 강경,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명복(冥福 저승 명/복 복) ; ①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 ②(불교)죽은 뒤에 받는 복덕.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법문 내용]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자기가 씨를 뿌려 놓았던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자기에게 다시 돌아온다 / 『지도론(智度論)』 부처님 인행(因行) 때, 독룡의 몸을 받으셨던 때의 설화 / 과거에 지은 잘못은 참회(懺悔)하고, 인과는 달게 받고, 거기서 새로운 발심(發心)의 계기로 삼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수행자의 마음 자세를 가져야.

(게송)금아아육왕~, 『아육왕경(阿育王經)』 제5권, 반암마륵시승인연품(半菴摩勒施僧因緣品) / 부처님 열반하신 뒤, 백년 뒤에 인도에 태어나서 전 인도를 통일을 하고 불법으로써 인도를 다스린 아육왕(阿育王)이 늙어서 병들어 아무 힘이 없게 되었을 때 한 마지막 '암마륵 과일 반 조각' 보시 / 보시(布施)는 언제나 바로 그때그때에 해야 / 보시는 도(道)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욕심을 버리는 것, 보시는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 모든 재앙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 / 보시를 행하면 죽을 운수(運數)도 때우는 것이고, 어려운 재앙도 막을 수가 있다 / (게송)인생백년정하허~.


인생은 한번 왔다가 잠시 꿈꾸듯, 술 취한 듯 방황하다가 속절없이 몸을 버리고 홀연히 떠나가고야만 말 그러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물론 본성(本性)을 깨달아서 진리와 계합(契合)이 된 사람은 본래 올 것도 없고 갈 것도 없지마는, 나의 본성을 망각하고 등져 버린 입장에서는 분명히 생(生)도 있고 죽음도 있는 것입니다.

왜 인간에게는 모든 일이 내 마음에 맞고, 내 뜻대로 되는 그런 좋은 일만 있으면 좋으련마는, 왜 우리의 뜻에 어긋나고 바라지도 아니했던 어려운 일이 닥쳐오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야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다른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자기가 짓고, 자기가 씨를 뿌려 놓았던 것이 인연(因緣) 따라서 자기에게 다시 돌아오는 까닭인 것입니다.

과거에 지은 잘못은 부처님께 진심으로 참회(懺悔)를 하고, 이미 자기에게 돌아오는 재앙은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말고, 곱게 깨끗하게 달게 그것을 받아넘기고, 그것을 달게 받아넘기면서 거기서 새로운 발심(發心)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야말로 인과법(因果法)을 믿는, 불법을 믿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수행자의 마음 자세라고 생각이 됩니다.

금년 삼재에 해당하신 분은 오늘 이후로 누가 나를 해롭게 하고, 나를 험담을 하고,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그러한 사람과 일을 만났을 때에 진심(瞋心)을 내지 말고, 바로 거기서 마음을 돌이켜서 인과법(因果法)을 관찰을 하고, 성내는 마음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도록 노력을 하신다면 어떠한 무서운 삼재도 그분 앞에는 악한 결과를 끼쳐주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마음으로 모든 재앙을 상대(相對)를 하고 모든 미운 사람, 악한 사람을 상대하신다면,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나의 스승이 되고, 나의 은인이 되고, 나의 도반으로서 나를 도와주고 나로 하여금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佛菩薩)로 변할 것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에 첫째에 보시라고 하는 항목이 있는 것은 도(道)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욕심을 버리는 것이거든. 보시는 자기 마음을 비우게 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모든 재앙을 소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보시의 형태는 크고 작은 것과 유형무형의 여러 가지 의미의 보시가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보시도 보시는 자기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업(業)의 종자(種子)를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다가올 모든 재앙을 미리 막는 가장 좋은 슬기로운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아무리 안 잡수어도 법당의 부처님이 배고프다고 하신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떡을 갖다놔도 한 덩어리도 잡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마지(摩旨)를 짓고, 공양을 올려도 잡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보시의 공덕으로써 마음을 비우고, 탐심과 욕심을 비우고, 모든 재앙을 소멸케 하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방편(方便)인 것입니다.
보시를 행하면 죽을 운수(運數)도 때우는 것이고, 어려운 재앙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를 하지 아니하고 욕심껏 쌓아 모으다가 그 돈을 한푼도 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된 사람도 적지 않는 것입니다.

삼재(三災)를 면하려면 부작(符作)을 갖다가 붙이고, 무슨 액막이를 하고 그러기보다는 삼재를 든 분은 보시를 행하는 것, 그리고 방생(放生)을 하고 보시를 하는 것, 이런 것이 차라리 훌륭한 지혜로운 방편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방편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근원에서 해결 짓는 방법은 ‘본래 생사(生死)가 없으며, 복과 죄가 없는 것이다’ 하는 정법의 말씀을 믿고서 한 생각 돌이켜서 좋은 일을 당해도 화두(話頭)를 들고, 궂은일을 당해도 화두를 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話頭)를 들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것이야말로 삼재를 소멸하고 예방하는 가장 근원적인 길이라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받게 됩니다. 기왕 받을 바에는 우리는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맺을 것이 아니라, 받으면서 오히려 자기의 과거 죄를 진정으로 참회하고, 받으면서 오히려 위대한 스승을 만나고 불보살을 만난 그러한 기분으로 그것을 받아서 소화를 시킨다면, 깨끗이 받아서 해결 짓고서 새로운 광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받으면서 새로운 원수를 또 이중 삼중으로 맺어 나가는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것이 너무너무 다행한 인연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01~225)2022. 2. 19. 11:35

 

(No.210)—1983년 칠석법회(83.08.15) (66분)

 

(1) 약 40분.

(2) 약 26분.

 

(1)------------------

가련억만인천중(可憐億萬人天衆)이여  부지황엽경비전(不知黃葉竟非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사인천지본심(若使人天知本心)하면  하용애애측이청(何用獃獃側耳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가련억만인천중(可憐億萬人天衆)이여  부지황엽경비전(不知黃葉竟非錢)이로구나.
가련(可憐)하다, 인천(人天)의 억만 대중이여. 하늘나라나 이 인간 세상에 백만억 대중이여, 가련하구나! 노란 이파리가 마침내 돈이 아닌 줄을 아지 못하는구나.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시다가 대도(大道)를 깨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涅槃)에 드실 때까지 49년간을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그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법문이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노란 단풍잎을 어린아이에게 쥐어주면서 “이것이 돈이다. 여기 있다 돈, 여기 돈 많이 있다” 이러면서 어린아이에게 준 것이다 그 말이여.

약사인천(若使人天)으로 지본심(知本心)하면, 인천(人天), 하늘나라나 인간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의 마음, 근본 본성(本性)을 깨닫게 해 버린다면, 하용애애측이청(何用獃獃側耳聽)이냐. 어찌 바보같이 귀를 기울이고 듣게 할 필요가 있느냐.
자기 본성만 탁! 깨달아 버린다면 구태여 어린아이의 울음을 달래기 위해서 준 노란 이파리 같은 것에 왜 속을까보냐 그 말이여.


오늘은 계해년 7월 칠석날입니다. 칠석(七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칠성님, 칠성(七星)을 숭배하는 토속 신앙인데, 원래 도교(道敎)에서 칠성을 섬기고 또 칠성님께 치성(致誠)을 드리면 수명을 연장하고, 인간의 오복(五福)을 모다 성취하고 그런다 해서, 『삼국지(三國志)』에도 보면 제갈공명이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칠성단(七星壇)을 모아 놓고 기도를 하다가 잘못해 가지고 기도를 성취 못하는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마는.

그러한 토속 신앙이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고 우리나라로 오면서 그런 도교에서 들어온 그런 토속 신앙을 불교에서 흡수를 해서 사찰 내에서도 다 큰 절, 작은 절에 가면 모두 칠성각, 산신각이 다 있고 그럽니다마는.
불교는 너무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교법(敎法)이 넓고 크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아서 동서 사방에서 흘러들어 오는 어떠한 종류의 강물이라도 일단 바다에 들어오고 보면 전부 짠맛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떠한 종교도 불교가 들어가면 다 흡수해 버려. 불교 내에는 어떠한 종교의 교리도 원래 그 안에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불교는 어떠한 종교라도 다 흡수해서 녹여서 ‘한맛’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종교가 좁고, 교리가 옅고 그러면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 가지고 싸우고 비방을 하고 피를 흘리고 그러는데, 불교는 너무 높고 넓고 깊고 커서,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어떠한 종교를 만나더라도 싸울 것이 없어요. 다 받아들여 가지고 그냥 다 소화를 시켜 버려. 그래 이 칠성을 믿는 사상도 그렇게 해서 흡수를 하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원래 원시 종교(原始宗敎)는 태양이라든지, 달이라든지, 별이라든지, 바다라든지, 이런 우주 천체와 대자연을 두려워하고, 두려운 나머지 공경하고 이래 가지고 하나의 원시 종교의 발상이 자연을 숭배하는 데서부터서 시작한 것입니다.
저 북두칠성(北斗七星), 북극성(北極星)은 그래서 다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모다 이렇게 해서 해는 일광보살(日光菩薩)이라 그러고, 달은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 해서, 불보살의 명호(名號)를 붙여 가지고 그래서 숭배하게 되고 오늘날까지도 칠성을 숭배하는 사상은 거의 모든 불자(佛子)들 속에 깊이 뿌리가 박혀서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산신단(山神壇)이나 칠성단(七星壇)은 비불교적이다’ 해 가지고 절에서 그러한 신앙은 없애고 철저하게 이 정법만을 믿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넓은 눈으로 보면 해도, 달도, 별도, 우주세계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표현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신불을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을 대일여래라고도 부릅니다마는 대일여래가 바로 태양이다. 태양과 같이 온 세계를 비추고 그 태양으로 인해서 모든 동물과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삼라만상이 태양의 힘을 가자(假藉)하지 않고서는 생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그러한 칠성을 믿는 신앙을 불교에 받아들였냐 하면 바로 그러한 이치로 해서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가지고 완전히 불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칠성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그러한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입니다.

민간에서는 오늘 칠석날은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은하수(銀河水)를 통해서 1년에 오늘 저녁 한번 만난다고 그러한 설화가 있습니다.
1년 동안 서로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이 떨어져서 만나지 못하다가, 오늘 하루 까막까치가 놓아준 오작교(烏鵲橋)를 통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고 하는 설화는 대단히 재미있는 설화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은 모든 사랑하는 사람과는 이별하는 고통이 있고, 미워하는 사람과는 자주 만나게 되는 고통이 있고, 구하고 원하는 것은 얻어지지 않는 그래서 그러한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나아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그러한 고통이 있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러한 작용이 지나치게 성(盛)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것이 다시 자기에게 괴로움을 갖다 주는 오음성고(五陰盛苦), 이리해서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의 고통[八苦]’이 있는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여덟 가지의 고통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고 밤낮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가, 단 한번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아준 오작교를 통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어떠한 숙세의 인연 있는 사람의 도움으로 자기의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또 칠석날을 맞이해서 여러분 자신들은 그동안 이루지 못한 뜻을 오늘 법문을 듣고 마음속에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구했던 소원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그러한 원(願)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란 존자를 데리고 무능적국(無能敵國)에 들어가셔서 항하사(恒河沙) 강변을 지나고 계실 때에, 마치 한 수행승이 부처님 곁으로 다가와서 법문을 청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그 수행승에게 무슨 법문을 해 주셨냐 하면은 마치 그때에 갠지스 강 가운데에 큰 나무 기둥 하나가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기둥을 부처님께서 가리키시면서, “저 기둥을 봐라! 저 나무 기둥이 이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저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또 강 중간에도 걸리지 아니하며, 또 강물의 소용돌이 속에도 들어가서 뱅뱅 맴돌지 아니하면, 결국은 저 나무 기둥은 흐르고 흘러서 마침내는 저 바다로 도달하고 말 것이니라”

그러면 ‘이쪽 언덕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감각하고, 생각으로 알고 하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에 걸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는 게고.
‘저쪽 언덕에도 걸리지 아니한다’는 말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상대가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바깥 경계에도 집착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
‘중간에 걸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눈으로 어떠한 색(色)을 보면 속에 안식(眼識)이라 하는 것이 생기고, 귀로 바깥 경계 소리를 들으면 속에 이식(耳識)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식(六識)이 생기기 때문에 '그 육식에도 걸리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의 소용돌이 속에 걸리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학문이나 경전이나 그러한 것을 보다가 알음알이에 집착을 한다고 하는 데에 비유를 한 것입니다.
요새 불자 가운데에 지성인 측에서 교리적으로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그러는데, 무슨 경전이나 다 부처님의 소중한 진리가 담겨 있는 법문이기는 사실이나, 그러한 경을 올바르게 보지를 못하고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들어가는 데에 맛을 붙여 가지고 그렇게 해서 거기에 집착을 하면, 그 나무토막이 강물에 떠내려가다가 뱅뱅뱅뱅 도는 그 소용돌이 속에 한번 들어가면 밤낮 그 자리에서 돌기만 하고 거기서 빠져나오지를 못하기 때문에 바다에는 도달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도 이쪽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저쪽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중간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소용돌이에도 머꾸지를 않는다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법문을 그 수행승에게 해 주셨습니다. 그 법문을 듣고 그 수행승은 깨달음을 얻고 떠났습니다.(20분52초)


그 법문을 설하실 때에 그 곁에서 소를 치는 목동(牧童)이 어떻게 열심히 그 법문을 들었던지, 거기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목동을 그만두고 당장 그 자리에서 출가할 결심을 하고 부처님께 허락을 해 주시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지금 목동의 책임을 맡아 가지고 남의 소를 기르고 있으니 그 소를 갖다가 주인한테 갖다가 인계를 하고 주인한테 인사를 하고 그리고서 오너라”
목동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소들은 전부 송아지들이기 때문에 소 어미는 주인한테 있으므로 그냥 놔두어도 송아지들은 제 어미를 찾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럴 필요도 없이 당장 이 자리에서 계를 설해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저 송아지를 주인한테 정식으로 인계를 하고, 너도 네 몸도 그 주인한테 고용이 되어 있으므로 정식으로 하직(下直) 인사를 하고 와야지 그럴 수가 있느냐”

그래서 그 목동은 그 송아지 떼를 몰고 그 주인한테로 달려갔습니다. 송아지는 자기의 목동이 달려가니까 덩달아서 달려가는데, 목동은 달려가면서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 계속 달려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목동들도 "무엇이 무서우냐?"고 하면서 달려갔습니다.

‘무엇이 무서우냐? 하면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무섭고, 늙은 것이 무섭고, 병든 것이 무섭고, 죽는 것이 무섭다’
이런 뜻으로써 계속 “무섭다. 무섭다” 하면서 주인한테 쫓아가 가지고 송아지를 인계하고 그리고 하직 인사를 하고 되돌아오면서 계속 “무섭다”고 또 오니까, 5백 명의 다른 목동들도 그 목동을 따라서 같이 부처님 처소로 와 가지고, 그 목동과 다른 5백 명의 목동이 일시에 출가를 해 가지고 부처님 제자가 되어서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證得)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동이 법문을 들을 때에 가지고 있던 지팽이가 있었는데, 그 지팽이 끝에 꽂혀서 죽은 두꺼비가 한 마리 있었던 것입니다.
목동은 부처님 법문 듣는 데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기 작대기가 두꺼비의 등어리에 놓아져 있는 것도 모르고 계속 열심히 듣다 보니까 힘을 계속 그 작대기에다 힘을 주어 가지고, 작대기가 두꺼비 등어리를 뚫고 창자를 꿰뚫어서 맞창이 났던 것입니다.

그 두꺼비는 작대기가 자기 등어리에 닿을 때에 비명을 질렀으면 그 목동이 깜짝 놀라서 그 작대기를 치웠을 텐데, 그 두꺼비라는 놈은 ‘자기가 만약에 빽빽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 목동이 깜짝 놀라 가지고 부처님 법문 듣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차라리 내가 이대로 죽을지언정 어찌 부처님 법문 듣는 그것을 방해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 가지고 그 두꺼비도 보통 두꺼비가 아니라 이상한 두꺼비가 되어 가지고 두꺼비 저도 법문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그 자리에서 목동의 작대기에 찔려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두꺼비는 죽어서 바로 사천왕(四天王)에 태어나 가지고 천자(天子)가 되었던 것입니다.
천자가 되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하니 너무너무 부처님 은혜가 지중하고 감사하기 때문에 '천자의 옷차림을 떠억 하고서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을 뵈옵고, 전생(前生)에는 두꺼비의 몸으로 법문을 들었지만, 금생에는 내가 천자의 옷을 입고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리라. 그리고 감사한 예배를 올리리라’

이래 가지고 달밤에 달은 휘황창 밝은데 하늘나라에서 꽃비를 내리면서 찬란한 모습으로 천상에서 부처님 처소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올리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서 다시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천상에를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들은 꽃비가 내리고 장엄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린 것만 보았지,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내려온 것은 보지를 못해서 그 이튿날 부처님께 “어젯밤에 부처님께 무슨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까?”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어떻게 해서 그 목동이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이렇게 자기뿐만이 아니라 5백 명의 목동을 데리고 이렇게 와서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 여쭈니까 부처님께서 그 목동의 전생과 두꺼비의 전생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전생에 가섭파여래(迦攝波如來)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에 목동이 그 부처님을 뵈옵고 발심을 해 가지고 출가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 목동이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절에서 다른 경(經) 공부를 하는 스님과 같이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목동으로 있다 출가를 한 그 수행인은 참선이 좋아서 계속 참선만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함께 그 절에서 머무른 여러 스님들은 모두 경(經) 공부를 해서 밤새도록 경을 큰 소리로 읽고 외우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해서 마음을 고요히 집중을 해 가지고 정(定)에 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너무너무 경 읽는 소리가 크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참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너무너무 부애가 나니까, 욕을 하기를 “밤새 두꺼비 우는 소리를 하는 통에 참선을 못했다”고 이렇게 욕설을 한 그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몸을 받으면서 내려오다가, 금생에 이렇게 참 자기 몸뚱이에 그 작대기가 꽂혀서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법문, 법(法)을 존중하고 아끼는 그러한 신심과 보살심을 냄으로 해서 두꺼비의 몸을 벗고 천상에 태어나서 사왕천(四王天) 궁의 천자가 되었다고 하는 원인을 말씀을 하시고.


또 이 목동이 이렇게 도를 얻은 인연은, 전생에 한 수행인이 있었는데 너무너무 수행을 잘하고 덕(德)이 있어서 대중 가운데 누가 싸움을 하기만 하면 이 스님이 말을 몇 마디 하면 금방 싸움이 가라앉고 화해를 잘 시켰던 것입니다.

마치 그 가섭파여래 회상에서 있을 때인데, 두 사람이 싸움을 해 가지고 며칠째 서로 말을 안 하고 지냈습니다.
지금 이 보살선방에도 가끔 옛날에는 사소한 일에 타시락거리면 며칠씩 속으로 꽁해 가지고 말도 안 하고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마는, 요새는 그런 일이 거의 없고 모두가 다 화합하고 합심해서 석 달 동안을 하루같이 그렇게 엄숙하고 거룩하게 그렇게 정진들을 잘해 오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그렇게 싸움을 해 가지고 말을 안 하는데, 그 스님한테 화해를 시켜 달라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스님이 당장 그 자리에서 화해를 붙여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금 바쁜 일이 있으니까 다른 스님한테 요청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안 되거든 나한테 오너라’ 이렇게 미뤘습니다.
그렇게 미룬 것은 ‘다른 사람한테 가서 해도 안 되어 가지고, 그때 자기한테 와 가지고 화해가 되어야 자기의 권위가 설 것이다’ 해 가지고 다른 사람한테 미루고 자기는 외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까 벌써 다른 스님한테 말을 해 가지고 화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 화해가 되었느냐?”고 내막을 물으니까 “약허이약허이 해서 화해가 되었다. 그 스님이 이러 이러한 말씀을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 오해를 풀고 화해를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양치기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화해를 붙이지, 어찌 수행승이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욕설을 했습니다. 그 ‘양치기 같은 짓을 했다’ 하는 그러한 속으로 신경질을 내면서 그러한 퉁명스런 말 한마디를 뱉은 그 인연으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아까 두꺼비는, 경 읽는 소리를 갖다가 “두꺼비 우는 소리를 하는 통에 시끄러워서 참선을 못했다’고 한마디 욕을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과보를 받았고, 이번에는 “양치기 같은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식으로 화해를 붙이지 어찌 수행승이 그럴 수가 있느냐” 그렇게 신경질을 내면서 욕설을 한 그 과보로 양치기를 5백 생 동안을 양치기를 했다 이것입니다.

‘한 생각’ 불쑥 신경질을 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도 하고, 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노릇을 하게 된 그 인과(因果)를 우리가 살펴본다면 한 생각,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부모자식 간에 또는 친구간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씩 툭툭 내뱉은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우리는 오늘 이 부처님의 설화를 통해서 한 생각 움직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롭게 하고,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상처내고 남을 죽인다고 할 때에 그 과보는 비단 5백 생이 문제가 아니라, 무량 아승지겁(阿僧祇劫)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고 영원히 벗어날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들이 이렇게 많이 정성스러운 공양구(供養具)를 가지고 법보선원에, 불전(佛前)에 이렇게 동참(同參)을 하셨습니다.

과거 한량없는 생(生) 동안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모다 한자리에 모이셨습니다마는, 앞으로 다시는 퇴전(退轉)하지 아니하고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려면, 우리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뼈아프게 단속해 나가서 다시는 일어나는 한 생각을 섣불리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눈으로 한 가지 일을 보거나, 귀로 어떤 한 소리를 듣거나,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 육식(六識)을 물샐틈없이 단속을 해 가지고 화두(話頭)를 들고 나가야만 할 것입니다.(처음~39분43초)


 

 


(2)------------------

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로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추월춘화무한의(秋月春花無限意)여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나, 되게 강추위 할 때는 물 한 방울 톡! 떨어지면은 그 물 한 방울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얼음이 딱 되어버립니다.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쩍 쩍 들어 앵깁니다. 수도꼭지에서 계속해서 물이 똑똑 떨어져도 떨어진 쪽쪽 땅바닥에서는 계속 얼음산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말로써 그 진리를 표현할 수가 없고, 귀로써 들어서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설할 것도 없이 이미 사람마다 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완전무결하게 성불(成佛)해 마쳐져 갖고 있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지금 인류가 45억을 추산하고 있습니다마는, 45억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소나 돼지나 말이나 벌레나 모기나, 꿈적꿈적한 것은 전부가 다 이미 다 있어. 원만하게 다 성불을 해 마쳐 가지고 있는 것이고. 태양이나 달이나 별이나, 나무나 산이나 바윗돌이나, 길바닥에 흐트러져 있는 모래알,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성불(成佛)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몸뚱이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는, ‘그렇다면은 왜 나도 부처라면은 왜 내가 지금 이렇게 범부(凡夫)로서 깜깜한 상태에서 이렇게 중생으로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가?’ 모두가 다 의심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마는.
틀림없이 부처님은 부처님이나, 부처님이 잠시 졸고 있다가—졸고 있는 상태에서는 분명히 졸고 있다고 해서 죽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 꼬박 들어서 잠 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해서 죽은 것도 아니요,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님니다. 분명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지만, 잠깐 잠이 들어가지고 꿈을 꾸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꿈만 깨 버리면 생시(生時)가 된 것처럼, 우리 그 중생의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참선(參禪)만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각(正覺)이다, 대각(大覺)이다, 본각(本覺)이다’ ‘깨달을 각(覺)’ 자를—‘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선문(禪門)에서는 ‘견성(見性)’이라 그러거든. ‘성품(性品)을 본다[見]’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어디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탁! 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녹양방초(綠楊芳草)가 색의의(色依依)여. 녹양(綠楊), 푸른 버드나무 휘영청 늘어지고 산과 들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달은 가을달대로 운치가 있고, 봄의 꽃은 꽃대로 아름다워서, 가을꽃도 깨달음의 경지요, 봄꽃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깊은 뜻을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입니다.(秋月春花無限意) 그러기 때문에 깨달은 눈으로 보면 가을꽃도 설법(說法)이요, 가을달도 부처님의 얼굴이요, 봄에 핀 꽃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고새가 우는 소리를 한가히 듣는 것도 또한 방해롭지 않다(不妨閑聽鷓鴣啼)’ 한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낱낱이 그것들이 다 ‘참나’로 돌아오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고, 파란 것이나 붉은 것, 풀에서는 풀 냄새, 아카시아꽃에서는 아카시아꽃 냄새, 장미꽃에서는 장미꽃 냄새, 그 꽃마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내가 다 다르지만, 코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칠석날을 맞이해서 우리집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고, 우리 남편이 승진하기를 바라고, 우리 아들과 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혼기를 맞이한 우리 딸이 좋은 신랑감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 간절하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러한 소원은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너무너무 작은 일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의 세상은, 사람이 사람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그것도 또한 중대한 일일시 분명합니다.

그러한 원(願)을 성취하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콩을 많이 수확한 사람이 바늘에다 그 콩을 꿰어가지고 등잔불에 구워 먹고, 계란을 많이 구해 가지고 계란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그 계란 속에다가 쌀 한 숟갈을 씻어서 넣고, 그래 가지고 그 계란을 젖은 종이로 싸 가지고 부엌 불속에다 넣어서 계란밥을 해 먹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릴 적을 추억을 하실 것입니다마는, 농사지어 가지고 바늘에다 콩을 구워 먹고, 양계(養鷄)를 해 가지고 알맹이는 쏟아 버리고 거기다 계란밥을 해 먹기 위해서, 그래 양계를 하고 콩 농사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은 우스운 일일 것입니다.

불법을 믿으면서, 정말 불법(佛法)의 근본 목표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수행을 해 나가면 높은 벼슬을 하고, 재수(財數) 대통(大通)하고,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러한 일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저절로 이루어지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칠성불공을 하고 산신기도를 하고, 좋다는 데는 강화 보문으로, 양양 낙산사로, 남해 보리암으로 발이 닳아지도록 쫓아다녀도 여간 소원이 잘 성취가 안 되는 것은 왜 그러냐 하면, 과거에 지은 업(業)이 꽉 쩔어 가지고 그놈이 장애가 되어가지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원(願)을 성취하려면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그보다도 더 빠르고 더 요긴한 방법은 강화까지 안 가고 자기 있는 가정에서 일하면서, 밥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차를 타면서, 절에 오면서, 절에 가면서, 법회날은 절에 오면서, 절에 와서 또 법문을 다 듣고 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빨래하면서 ‘이뭣고?’
속상하면서 ‘이뭣고?’
슬퍼하면서 ‘이뭣고?’
기뻐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 계신 법당(法堂)이요, 강화 보문이요, 양양 낙산사요, 오대산 적멸궁이요, 남해 보리암이다 이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만약에 오대산 적멸궁에만 계시고, 양양 낙산사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남해 보리암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시고,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불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성지(聖地)를 마련한 것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감으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신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절이 필요한 것이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슨 파란 나무나 빨간 꽃 한 송이를 볼 때 거기에서 바로 법신불을 친견할 줄을 알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러한 최상승법을 듣고 한 생각도 옮기지 아니하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불법을 깨닫고 부처님을 친견할 길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나는 자신 있게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대도(大道)도 틀림없이 성취하시고, 인간 세상의 크고 작은 소원도 반드시 성취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보증을 하는 바입니다.


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많이 알아서 속에다 따 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의 속에 있는 것을 비우는 것이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닦아가는 것이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속으로 그것을 따 담고, 귀로 뭔 소리를 들으면은 그 소리를 속에다 따 담고 해 가지고, 속에는 일생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한 것들이—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좋은 일, 악한 일, 좋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는 그러한 무기(無記)의 일들, 수수(數數) 백억만 가지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차곡차곡 쟁여져 갖고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은혜스러운 일과 원망(怨望)한 웬수스러운 일들이 비빔밥이 되어가지고 얽히고설켜서, 그것들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돌아오면 거기서 다 싹이 나가지고 또다시 새로운 은혜를 맺고, 또다시 새로운 웬수를 맺으면서 무량겁을 두고 윤회를 거듭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두렵고 지겹기 한이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한 일들이 되풀이되어서 무량겁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할 것을 생각해 보면 몸서리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난 이 기회를 결단코 놓치지 말고 철저하게 최상승법을 믿어서 열심히 닦아 간다면 반드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입니다.(59분22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절히 말씀드리는 바를 명심을 하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내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음력 7월 보름날 백종날이 돌아옵니다. 그날은 백일기도 회향날이며, 여름 하안거 해제일입니다. 그날을 기해서 지옥문이 열려 가지고 우리의 다생(多生)에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리와 인연 있는 모든 영가(靈駕)들이 하루 동안 특별휴가를 맡아 가지고 오시는 날입니다. 그날에는 우리 법보전에서도 선망부모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이 거행이 됩니다.

그날은 여러분께서도 잘아신 바와 같이 목련(目連) 존자가 그 죄를 짓고 지옥에 빠진 어머니를 천도하는 그러한 유래가 있는 날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 어머니를 천도했느냐 하면,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제자들 스님네께 만 가지 온갖 맛있는 음식과 맛있는 과일 공양(供養)을 올려서, 그 석 달 동안 청정한 마음으로 도를 닦으신 스님네께 공양을 올린 그 공덕으로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청제부인, 목련 존자의 어머니를 천상(天上)에 태어나시게 한 그러한 날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또 가족이라든지 친척이라든지 이웃 친구들 모다 권고해서 오셔서 동참을 하시고,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만년위패에 모시지 아니한 분도 임시위패라도 모셔서 선망부모를 천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날 모다 지옥문이 열려서 오셨다가 내 아들, 내 며느리, 내 딸이 안 왔나 하고 두루 찾아보아도 다른 사람은 다 왔는데 자기의 아들딸들이 안 왔으면 얼마나 섭섭하고 서운하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영가(靈駕)의 세계나, 우리 이 살아 있는 우리 인간 세계나 그 정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등이 없는 것입니다.
요새 그러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뭐 영가고 뭐 그런 게 소용 있느냐?’ 이러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영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이 세계나 쪼끔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더 정확하고 더 영특하고 그런 것입니다.

오늘은 칠석날에 한 생각 일으키고, 말 한마디 하는 그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화를 말씀을 드리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한 생각, 한마디를 조심할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 나가면은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하고 우리의 모든 소원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이어서 칠석의 법요식이 진행이 되겠습니다.(39분45초~65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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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가련억만인천중~’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21, 함허득통 설의(說誼) 게송 참고.
*가련하다(可憐-- 가히 가/불쌍히여길 련) ; 가엾고 불쌍하다.
*노란 이파리[黃葉] ; 황엽(黃葉). 어린 아기가 울 때에, 버드나무의 누런 잎[黃葉]을 돈[金]이라 하여 어린 아기에게 주어서 울음을 그치게 한 것.
부처님이 33천이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나[我]이고 깨끗함[淨]과, 단정하고 자재하여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받는 일과, 육근(六根)으로 상대하는 것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 말하여 중생이 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33천에 태어날 선업을 짓게 하는 것에 비유한 것.
그러나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며 무상(無常)하고 낙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건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常樂我淨]’고 방편(方便)으로 말[說]하는 것이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 25품』 (宋代沙門慧嚴等依泥洹經加之) 제18권. 제21 영아행품(嬰兒行品).

[참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 25품』 (宋代沙門慧嚴等依泥洹經加之) 제18권. 제21 영아행품(嬰兒行品), 『열반경(1)』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453~454.
又嬰兒行者 如彼嬰兒啼哭之時 父母卽以楊樹黃葉而語之言 莫啼莫啼我與汝金 嬰兒見已生眞金想便止不啼 然此楊葉實非金也 木牛木馬木男木女嬰兒見已 亦復生於男女等想卽止不啼 實非男女以作如是男女想故 名曰嬰兒

또 어린 아기의 행[嬰兒行]이라 함은 어린 아기가 울 때에는, 그 부모가 누른 버들잎[楊樹黃葉]을 주면서 달래기를 “너에게 돈[金]을 줄 터이니 울지 말라”하는데, 아기가 보고는 참말 돈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으니 그것은 버들잎이지 참말 돈이 아니니라.
나무로 만든 소와 나무 말과 나무 남자와 나무 여자를 어린 아기가 보고는 참으로 남자나 여자인 줄 생각하고 울지 않는데, 참으로 남자와 여자가 아닌 것을 남자와 여자인 줄 생각하므로 어린 아기라 이름하느니라.

如來亦爾 若有衆生欲造衆惡 如來爲說三十三天常樂我淨端正自恣 於妙宮殿受五欲樂 六根所對無非是樂 衆生聞有如是樂故 心生貪樂止不爲惡 勤作三十三天善業 實是生死無常無樂無我無淨 爲度衆生方便說言常樂我淨

여래도 그와 같아서 만일 중생들이 나쁜 업을 지으려 하면,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33천이 항상[常]하고 즐겁고[樂] 나[我]이고 깨끗함[淨]과, 단정하고 자재하여 훌륭한 궁전에서 오욕락(五欲樂)을 받는 일과, 육근(六根)으로 상대하는 것이 모두 즐거운 일이라 말하는데, 중생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들은 까닭으로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쁜 업을 짓지 아니하고 33천에 태어날 선한 업을 짓거니와,
실제로는 나고 죽는 것이며 무상(無常)하고 낙이 없고 내가 없고 깨끗하지 않건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하다[常樂我淨]’고 방편(方便)으로 말[說]하는 것이니라.

又嬰兒者 若有衆生厭生死時 如來則爲說於二乘 然實無有二乘之實 以二乘故知生死過見涅槃樂 以是見故 則能自知有斷不斷有眞不眞有修不修有得不得

또 어린 아기라 함은 어떤 중생이 나고 죽음을 싫어할 때에는 여래가 2승(二乘)의 도를 말하거니와, 실제로는 2승의 실상이 없는 것이며, 2승의 법으로 인하여서 나고 죽는 허물을 알고 열반의 낙을 보는 것이며, 이런 소견으로 말미암아 끊을 것과 끊지 못할 것이 있으며. 참된 것과 참되지 않은 것이 있으며 닦을 것과 닦지 않을 것이 있으며, 얻을 것과 얻지 못할 것이 있음을 아느니라.

善男子 如彼嬰兒於非金中而生金想 如來亦爾 於不淨中而說爲淨 如來已得第一義故則無虛妄
如彼嬰兒於非牛馬作牛馬想 若有衆生於非道中作眞道想 如來亦說非道爲道非道之中實無有道 以能生道微因緣故 說非道爲道

선남자야, 저 어린 아기가 돈이 아닌데 돈이란 생각을 내듯이, 여래도 그러하여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 말하거니와, 여래는 제일의(第一義)를 얻었으므로 허망함이 없느니라. 어린 아기가 소와 말이 아닌데 소와 말이라 생각하듯이 어떤 중생이 도(道)가 아닌데 도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래도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말하나니 도가 아닌 데에 실로 도가 없지만 능히 도를 내는 작은 인연이 되는 것이므로, 도가 아닌 것을 말하여 도라고 하느니라.

如彼嬰兒於木男女生男女想 如來亦爾 知非衆生說衆生相 而實無有衆生相也 若佛如來說無衆生 一切衆生則墮邪見 是故如來說有衆生 於衆生中作衆生相者 則不能破衆生相也 若於衆生破衆生相者 是則能得大般涅槃 以得如是大涅槃故止不啼哭 是名嬰兒行

어린 아기가 나무로 된 남자와 여자에게 참말 남자와 여자인 생각을 내듯이 여래(如來)도 그와 같아서 중생이 아닌 줄을 알면서도 중생이라 말하지만 실로는 중생이란 모양이 없느니라. 만일 부처님 여래가 ‘중생이 없다’고 말하면 모든 중생이 잘못된 소견에 떨어질 것이므로 여래가 ‘중생이 있다’고 말하느니라. 중생에 대하여 중생이란 모양을 지으면 곧 중생의 모양을 깨뜨리지 못하나니 중생에 대하여 중생의 모양을 깨뜨리는 이라야 능히 대반열반(大般涅槃)을 얻을 수 있느니라. 이렇게 대반열반을 얻으므로 울음을 그치는 것을 어린 아기의 행[嬰兒行]이라 이름하느니라.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칠성(七星)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것으로 칠성에 대한 신앙은 특히 중국의 도교에서 발달하여 이후 ①불교에서 칠성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의 하나로 수용되었고 ②민간에서는 특히 수명과 재복을 관장하는 신으로 믿어졌다.
*칠성단(七星壇)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신격화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모신 단.
*교법(敎法) ; ①가르치는 방법. ②부처님이 설법한 가르침.
*한맛 ; 부처님의 설법은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는 이의 자질)에 따라 다르지만, 그 본뜻은 꼭 같다는 말.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북극성을 부처로 바꾸어 부르는 이름. 북극성은 그 빛이 밤하늘의 별 중 가장 밝아 치성광(熾盛光)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견보살(妙見菩薩)이라고도 한다.
*칠원성군(七元星君) ; 북두(北斗)의 일곱 성군(星君). 북두칠성을 말한다.
*명호(名號) ; 명자(名字), 명(名)이라고도 함. 이름. 주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기에 존호(尊號), 가호(嘉號)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명호(名號)를 듣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는 것에 커다란 작용이 있다고 여기고, 여기에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등의 행(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 ;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법신,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은하수(銀河水) ; ‘은하(銀河 천구상에 남북으로 길게 보이는 수억 개의 항성 무리)’를 강물에 비유하여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오작교(烏鵲橋 까마귀 오/까치 작/다리 교) ; 음력 칠월 칠석에 견우와 직녀를 서로 만나게 하기 위하여, 까마귀와 까치가 은하수에 모여서 자기들의 몸을 잇대어 만든다는 다리.
*팔고(八苦) ;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여덟 가지의 괴로움.
생(生)·노(老)·병(病)·사(死)를 사고(四苦)라 하고, 여기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 원망스럽고 미운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苦),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오음이 성하는 고통(五陰盛苦)의 넷을 더하여 8고라고 한다.
*부처님의 ‘큰 나무 기둥[大方梁]’ 비유 설법, 목동·두꺼비 인과 설화 ; 대정신수대장경 제24책 No. 1448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제11 참고.
*항하(恒河) ; 갠지스 강(Ganges江, 히말라야 산맥에서 시작하여 인도 북부를 가로질러 벵골 만(灣)으로 흘러들어 가는 인도 최대의 강. 길이는 2,510킬로미터)
*머꾸다 ; ‘멈추다’ ‘막히다’의 사투리.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하직(下直) ; ①먼길을 떠날 때 웃어른에게 작별을 아룀. ②'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증득(證得) ; 수행으로 진리를 체득함.
*지팽이 ; ‘지팡이’의 사투리.
*맞창 ; [주로 ‘나다’, ‘뚫다’ 따위의 말과 함께 쓰여] 마주 뚫린 구멍.
*무수배례(無數拜禮)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절을 하여 예를 표함.
*제석천(帝釋天) ; 제(帝)는 산스크리트어 indra의 번역, 석(釋)은 산스크리트어 śakra의 음사. 신(神)들의 제왕인 샤크라〔釋〕라는 뜻. 천(天)은 신(神)을 뜻함.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고 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고 함.
*유숙(留宿 머무를 류/묵을 숙) ; (사람이 어디에)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을 풀고 묵음.
*정(定) : ①계(戒)•정(定)•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부애 ; 부아. 분하고 노여운 마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아승지겁(阿僧祇劫) ; 아승지(阿僧祇)는 산수로 나타낼 수 없는 가장 큰 수 중의 하나이고, 겁(劫)은 연•월•일로써는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말함.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공양구(供養具)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향·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퇴전(退轉) ; 불교를 믿는 마음을 다른 데로 옮겨 처음보다 더 밑으로 전락(轉落)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육적(六賊)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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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적수성빙신유지~’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2, 야부도천 게송 참고.
*진묵겁(塵墨劫) ; 티끌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윤회(輪廻) ; ①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업(業)에 의하여 삼계 육도(三界六道)의 생사(生死) 세계를 그치지 아니하고 돌고 도는 일. ②어떤 사물이 일련의 변화 과정을 단계에 따라 차례로 밟아 가거나 되풀이함.
*생시(生時) ; ①자지 않고 깨어 있을 때. ②태어난 시간. ③살아 있는 동안.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선문(禪門) ; 선종(禪宗). 문자를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선(禪)을 닦아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체득하는 깨달음에 이르려는 종파.
*설법(說法) ; 불교의 이치나 가르침[法]을 풀어 밝힘[說].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日)는 뜻.
①진리 그 자체인 법신(法身)을 형상화한 것.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양계(養鷄) ; 닭을 먹여 기름. 또는 그 닭.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소멸(消滅) ; 사라져 없어짐.
*천자(天子)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법당(法堂) ; ① 불상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 ② 설법하거나 각종 의식을 행하는 사찰의 건물. ③ 사찰에 있는 전각(殿閣)을 통틀어 일컬음.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ā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 靑信男, 信男, 信士, 居士, 近事男, 近善男, 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āsikā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 信女, 近事女, 近善女, 善宿女)
*수수(數數) ; 아주 여러.
*시절인연(時節因緣) ; 시절이 도래(到來)하고 인연이 합쳐지는 기회. [참고]시절(時節)—어떤 시기나 때. 도래(到來)—어떤 기회나 시기가 닥쳐옴. 기회(機會)—어떠한 일•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
*(게송)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망자의 넋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목련 (目犍連, 目連) ; 산스크리트어 maudgalyāyana의 음사. 대(大)목건련 또는 마하(摩訶)목건련이라고도 한다. 원명 꼴리따.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의 한 사람.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인근 마을의 사리불(舍利弗)와 친하여 어느 날 바라문교의 축제를 구경하다가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나서 라자가하(王舍城)의 유명한 회의론자 산자야 문하로 들어갔으나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하던 중에,

사리불이 라자가하의 거리에서 탁발을 하던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馬勝)를 만나 들은 “일체는 원인이 있어 생기는 것 /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시네 / 그리고 또 그 소멸까지도 / 위대한 사문은 이와 같이 가르치네”라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을 사리불한테 듣고는, 사리불과 산자야의 제자 250명과 함께 죽림정사를 방문해 부처님께 귀의했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사리불과 함께 불교교단의 중심인물이었다.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고, 탁발하는 도중에 외도(外道)들이 던진 돌과 기왓장에 맞아 고통을 겪는 중에, 사리불이 열반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붓다에게 나아가 열반에 들겠다고 말씀 드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수촌에서 열반에 들었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과 색계•무색계의 여러 천(天)을 통틀어 일컬음. 신(神)들이 사는 곳. 신(神)의 세계.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법문 내용]

 

(게송)가련억만인천중~ / 우주세계에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표현 /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 / 부처님의 ‘큰 나무 기둥[大方梁]’ 비유 설법, 목동·두꺼비 인과 설화 ; 대정신수대장경 제24책 No. 1448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제11 참고 / 한 생각 한마디의 결과가 무섭고 소중하다 /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 화두를 들고 나가라.

 

(게송)적수성빙신유지~ / 모든 동물 벌레, 모래알,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성불(成佛)해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몸뚱이 /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올바른 방법으로 참선(參禪)만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본성(本性)을 보게 된다 /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고,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원(願)을 성취하는 빠르고 요긴한 방법은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 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불교는 너무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교법(敎法)이 넓고 크고 깊어서, 마치 바다와 같아서 동서 사방에서 흘러들어 오는 어떠한 종류의 강물이라도 일단 바다에 들어오고 보면 전부 짠맛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어떠한 종교도 불교가 들어가면 다 흡수해 버려. 불교 내에는 어떠한 종교의 교리도 원래 그 안에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불교는 어떠한 종교라도 다 흡수해서 녹여서 ‘한맛’을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어째서 과거에 도인(道人)들이 그러한 칠성을 믿는 신앙을 불교에 받아들였냐 하면 바로 그러한 이치로 해서 칠성 신앙을 받아들여 가지고 완전히 불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칠성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차츰차츰 정법을 믿는 그러한 불자로 승화(昇華)시켜 온 것입니다.

 

‘한 생각’ 불쑥 신경질을 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과보로 5백 생 동안을 양치기 노릇도 하고, 또 5백 생 동안을 두꺼비 노릇을 하게 된 그 인과(因果)를 우리가 살펴본다면 한 생각,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통해서 부모자식 간에 또는 친구간에,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씩 툭툭 내뱉은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우리는 오늘 이 부처님의 설화를 통해서 한 생각 움직이고, 한마디 내뱉은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섭고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각(正覺)이다, 대각(大覺)이다, 본각(本覺)이다’ ‘깨달을 각(覺)’ 자를—‘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 선문(禪門)에서는 ‘견성(見性)’이라 그러거든. ‘성품(性品)을 본다[見]’ 그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성품을 보면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것이다’ ‘성품을 본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을 어디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탁! 봐 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낱낱이 그것들이 다 ‘참나’로 돌아오는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고, 파란 것이나 붉은 것, 풀에서는 풀 냄새, 아카시아꽃에서는 아카시아꽃 냄새, 장미꽃에서는 장미꽃 냄새, 그 꽃마다 그 꽃에서 풍기는 향내가 다 다르지만, 코로 냄새를 맡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이 낱낱이 다 나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좋은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의 설법(說法)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불법을 믿으면서, 정말 불법(佛法)의 근본 목표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수행을 해 나가면 높은 벼슬을 하고, 재수(財數) 대통(大通)하고, 아들딸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러한 일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저절로 이루어지냐 하면 참선을 열심히 하면 저절로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던 모든 업(業)이 소멸(消滅)이 되기 때문에 업이 소멸이 되어서 청정한 마음으로 한 생각 원하면, 인간 세상에 제일 큰 원(願)이 천자(天子)가 되는 원이라면 천자도 가능하거든 그밖에 조그마한 원(願)이야 물어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원(願)을 성취하려면 그러한 성지(聖地)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나, 그보다도 더 빠르고 더 요긴한 방법은 강화까지 안 가고 자기 있는 가정에서 일하면서, 밥 지으면서, 빨래하면서, 차를 타면서, 절에 오면서, 절에 가면서, 법회날은 절에 오면서, 절에 와서 또 법문을 다 듣고 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돌이켜, 무엇을 볼 때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도 ‘이뭣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이뭣고?’

빨래하면서 ‘이뭣고?’ 속상하면서 ‘이뭣고?’ 슬퍼하면서 ‘이뭣고?’ 기뻐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면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이 계신 법당(法堂)이요, 강화 보문이요, 양양 낙산사요, 오대산 적멸궁이요, 남해 보리암이다 이 말씀입니다.

 

성지(聖地)를 마련한 것은 거기에 정성스럽게 감으로써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신심을 내게 되기 때문에 그러한 절이 필요한 것이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날 때 바로 거기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무슨 파란 나무나 빨간 꽃 한 송이를 볼 때 거기에서 바로 법신불을 친견할 줄을 알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용화사는 여러분에게 그러한 부처님을 깨닫게 하는 길을 가르켜 드리는 도량(道場)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많이 알아서 속에다 따 담는 것이 아니라, 자꾸 자기의 속에 있는 것을 비우는 것이 불법(佛法)을 올바르게 닦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칠석날에 한 생각 일으키고, 말 한마디 하는 그 과보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화를 말씀을 드리고, 그러기 때문에 그 한 생각, 한마디를 조심할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해 나가면은 생사해탈(生死解脫)도 하고 우리의 모든 소원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01~225)2021. 8. 7. 15:0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212))—1983년 9월 첫째 일요법회(83.09.04) (60분)

 

 

(1/3) 약 19분.

 

 

(2/3) 약 22분.

 

 

(3/3) 약 22분.

 

 


(1/3)----------------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허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운아향만리표(白雲兒向萬里飄)한데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로구나.
백운(白雲)이라고 하는 자식이 만리의 바람에 나부끼는데, 원래 백운은 청산에 의지해서 뭉쳐서 있다가 바람이 부니까 그 바람에 실려서 저 만리 하늘에 나부껴 날아갔다 그 말이여.
종래불망청산부(從來不忘靑山父)여. 그렇게 바람에 불려서 만리 하늘을 떠내려갔지만 그 백운은 항시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본래 놀며 의지하며 살고 있던 그 푸른 산을 마음속에는 잊지를 않고 있더라 그 말이지.

내하유자부지환(乃何遊子不知還)인데, 어째서 무슨 일로 이 백운은 청산으로 다시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로구나. 길이길이 자기 본래 살던 그 청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타향으로 저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이리저리 바람 따라서 물결 따라서 떠돌이 신세가 되어 있구나.

우리는 본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처럼 본래는 똑같은 본각(本覺)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새로 닦지 아니하고, 닦을 것도 없이 본래 깨달아져 있는 그러한 본각성(本覺性)이었건마는 한 생각 잘못 일어나는 것이 동기가 되어서 풍파에 나부껴 가지고 무량겁을 동서사방 육도(六途)를 돌고 돌면서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래 그 부처님과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집에서 한 자리에서 기거를 같이 하고 생활을 같이 했건마는 그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이렇게 그 본 자리로 돌아갈 줄을 모르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이렇게 돌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바람이 그칠런지, 바람이 부는 한에 있어서는 동풍이 불면 서쪽으로 날아가고,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날아가고, 북풍이 불면 남쪽으로 몰려가고, 남풍이 불면 북쪽으로 나부껴서 동서사방 정처가 없습니다.
조끔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축생도 되었다 인간도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나되 좀 잘살기도 하고 못살기도 하고,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악한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마치 우리의 이 존재가 청산을 떠난 흰구름과 같이 그렇게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태어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설산에 들어가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삼처전심(三處傳心)을 해서 현재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면면(綿綿)히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삼천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 동안에 부처님께서 전하신 그 정법(正法)은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썩은 사내끼에 매달려 있는 바윗돌과 같이 언제 그 썩은 새끼가 뚝 끊어져 가지고 그 바윗돌이 땅에 뚝 떨어질런지 모른 그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 불법이라고 하는 그 맥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그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또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그 불법에 등등상속해서 내려오는 그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육조(六祖) 스님으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마는 육조 스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물으시기를,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위로는 하늘을 떠받고 아래로는 땅을 기둥하며,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가 없다. 항상 이 동용(動用)하는 가운데에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에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제불지근원(諸佛之根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고 이 하택 저 자신의 불성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제불의 근원이니, 하택의 불성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네가 앞으로 커서 공부를 열심히 해 가지고 설사 네가 큰 스님이 된다 하더라도 너는 마침내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 되것다”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법을 공부하는 학자나 강사 그러한 알음알이로 불법을 해석하고 강론하고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 되것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 선사가 떠억 육조 스님 앞에 와서 절을 했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물으니까, 남악회양 선사는 망지소조(罔知所措)여. 꽉 맥혀 가지고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완전히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래가지고 물러 나와서 8년 간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가슴속에 북받치는데 콱 맥혀서 ‘대관절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무슨 물건인가?’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1년 이태 3년을 그렇게 되아 8년 만에사 탁! 깨쳤는데, 육조 스님 앞에를 갔습니다. “제가 깨달랐습니다”

“깨달랐으면 어디 일러봐라”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할 것은 없지 아니하나 더럽히고 물들인 것은 없습니다. 오렴은 곧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러니라’ 이렇게 해서 쾌히 인가(印可)를 하시고 법(法)을 남악회양 선사에 전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제불의 근원’이니, 무슨 ‘나의 불성’이니 그렇게 이론으로 따지고 말 길이 있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있고,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음알이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떠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콱 맥혀서 답답해 알 수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 가로막고 있고,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절벽이라,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고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어.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이렇게 해서 일체처 일체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남악회양 선사 같은 도인(道人)은 다 숙세에 선근종자(善根種子)로 다 전생에부터서 많이 닦으신 그러한 도인이 태어나셨겠지만 그래도 8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이 걸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 근기(根機)가 박약(薄弱)한 우리 말세(末世) 중생들은 8년 아니라 80년이라도 지루한 생각을 갖지 말고 목숨을 바쳐서 한 화두(話頭)에 대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만한 공력과 그만한 끈기와 그만한 노력이 없이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어떻게 기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해서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깨 한 말을 갖다가—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저 열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서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뚝 떨어지면 다시 뿌리에서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깨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겠다고 출발을 했지만 중도에서 물러서거나 중도에서 쉬어버리거나 또는 딴 길로 빠지거나 이러기가 십상(十常) 쉽고, 끝까지 나아가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그렇게 흔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까딱하면 중간에 어떠한 유혹에 빠지기도 하고, 해태심(懈怠心)을 내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한결같이 쉬지 않고 나아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항시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 모시고 법문(法門)을 들어야 하고, 또 좋은 도반들과 항시 같이 수행을 해 나가야, 내가 혹시 해태심이 나거나 딴생각을 내더라도 도반(道伴)으로부터 경책(警策)을 받고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들어서 그러한 위기를 면하면서 끊임없이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9분2초)





(2/3)----------------

옛날에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 한 거사(居士)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 거사는 네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네 사람을—그때 당시는 일부다처제로 아마 부인을 첫째 부인, 둘째, 셋째, 넷째 그 사람 능력 따라서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살 수가 있었던지 네 사람의 아내를 데리고 살았었는데,

그 사람은 첫째 부인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앉을 때나 섰을 때나, 잠을 잘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어디 외출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라도 잠시도 그 첫째 부인과 같이 붙어서 살았습니다. 그만큼 그 첫째 부인을 사랑하고 애끼고 좋아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잘 먹이고, 이 세상에서 없는 제일 좋은 것은 다 먹이고 다 입히고, 누가 조금이나 해꼬자 할까 항시 자기 몸 가까이에 놓고 그렇게 사랑하고 이뻐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사랑하기는 어려웠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또 둘째 부인도 첫째 부인만큼은 못해도 너무너무 사랑해서 도대체 다른 사람이 그 자기 아내를 볼까 두려워서 항시 가둬 놓고 그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행여나 남이 눈독을 들일까 혹 남이 아내를 훔쳐갈까 이래 가지고 아내는 도저히 어디 밖에 내보내지도 않고, 마당에도 잘 내보내지도 않고, 항시 자기 방이나 특실에다가 딱 넣어 놓고 쇠통을 채워 놓고 그렇게 아내를 사랑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애끼고 사랑을 하고 심지어는 의처증(疑妻症)이라고 할 만큼 그 아내를 밖으로 내놓지를 않고 남이 보는 것을 그렇게 꺼려했습니다.

셋째 부인은—셋째 부인도 애끼는 생각도 있고 사랑하는 생각도 있고 그랬지만, 마음대로 밖으로도 외출하고 싶으면 하게 하고, 그렇게 날마다 보지는 아니하고 가끔 한번씩 보기만 하고 그저 수수허니 그렇게 살았습니다.

넷째 부인이 있었는데, 그 넷째 부인은 항시—자기(거사)는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지마는, 넷째 부인은 그렇게 남편을 하녀가 상전 모시듯이 그렇게 잘 따르고 또 명령을 복종을 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마는, 남편은 여간해서 옷 한 벌 명절이 되어도 해주도 않고, 그냥 영 그저 종 비슷하니 그렇게 취급만 했지 별로 그렇게 아끼지도 않고 따뜻하게 봐 주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 네 아내를 그렇게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그 장자(長者)는 하룻날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저 먼 데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기가 어려울 그러한 참 급박한 상황에서 먼 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부인을 보고 "내가 이렇게 인자 가는데 다시 돌아올런지 못 돌아올런지 알 수가 없고, 나는 당신을 여의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러니 나를 따라서 가자"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니 큰 마누라는 "내가 평생 동안 당신을 모시고 살았고, 당신도 나를 끔찍이 애끼고 사랑한 것은 사실이나 나는 못 따라가겠다"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지만 "더이상은 죽었으면 죽었지 못 따라가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 할 수 없이 "이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여자가 있단 말이냐"고 호통을 치고, 그래도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데야 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둘째 부인한테 또 말을 했습니다.
둘째 부인도 "당신이 나를 너무 지극히 사랑해서 평생을 참 문밖을 마음대로 못 나가고 가둬 놓고 키우고 그랬지만 나는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다" 둘째 부인도 거절을 했습니다.

그래 셋째 부인한테 또 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그동안에 살면서 첫째와 둘째한테만 내가 주로 사랑을 쏟고 당신한테는 그렇게 내가 사랑을 못 해주고 해서, 내가 이 마지막 가게 될런지도 모른 이 먼 나라를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기가 미안하나, 어디 그래도 첫째 둘째가 저렇게 배은망덕을 해서 안 가니 당신이라도 좀 같이 갈 수가 없겠느냐?" 사정을 하니까,
"평생 동안 괄세를 하고 첫째 둘째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그 돌아본 채도 안 해 놓고서 어째 오늘은 나보고 아주 가자고 하냐"고, "그런 철면피(鐵面皮) 같은 소리를 할 수가 있단 말이냐"고, "나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고 딱 잡아뗐습니다.

그래 마지막에 참, 넷째 부인한테 또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하녀처럼 생각하고 옷 한 벌 변변히 해 준 것도 없고, 손 한번 내가 따뜻하게 만져주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세 여자들이 저렇게 배은망덕을 하고 안 따라가니 도저히 나 혼자 가기는 도저히 갈 수가 없고 천상 당신이 나를 좀 따라가 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넷째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피차 나는 일생 동안 당신의 종노릇을 하면서 푸대접을 받아도 그것이 나의 팔자거니 하고 참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당신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내가 기꺼이 내가 따라 모시겠다" 그래 가지고 승낙을 했던 것입니다.

첫째 부인은 '국경까지는 바라다 주겠다', 둘째 부인은 '이 문 방안까지 밖에는 못 가겠다', 또 셋째 부인은 '저 마을 밖에까지 밖에는 못 가겠다'. 이렇게 모다 해서 거절을 당하고 그렇게 인자 마지막 넷째 부인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 첫째 부인은 무엇이냐 하면은 우리의 육신(肉身)이라 이것입니다. 사람이 그 영혼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육신을 받아서 태어나게 되고 또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그 육신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이 떠나는데 육신이 따라갈 수가 없고, 육신은 결국은 영혼이 떠날 때 육신은 떨어져서 쓰러지면 땅에다 묻거나 불에 태우거나 하지, 육신이 절대로 영혼을 따라갈 수가 없는 데다 비교를 한 것이고.

둘째 부인은 재산(財産)에다가 비교를 한 것입니다. 육신이라 하는 것은 자나깨나 항시 같이 살고 있는 것이지만 재산은 누가 보면 훔쳐갈까, 달라고 할까 두려워서 항시 창고나 궤 속에다 가둬 놓고 쓰기 때문에 둘째 부인은 재산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고.

셋째 부인은 부모나 형제나 처자권속에다가 비교를 한 것이어서 가끔 만나면 좋고 그저 든든한 맛으로 그저 형제간은 그렇게 살되, 그 영혼이 죽은다 해서 형제간이 같이 죽어갈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런데 마지막 넷째 부인은 우리의 마음에다가 비교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살면서 그 마음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라든지, 재산이라던지,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온갖 인정을 쏟고 애지중지하고, 그 어쩔 줄을 모르고 심지어는 그 육신을 위해서는 온갖 음식이다 보약이다 또 좋은 옷이다 화장품이다 해 가지고, 그렇게 온 정성을 쏟아서 그 육체 하나를 갖다가 잘 가꾸기 위해서 평생 동안 보호를 하고 애지중지하지만 먼 데로 떠나는 날에는 완전히 언제 봤던가 완전히 배신을 해 버리고 따라가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둘째, 재산도 그 재산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참 피땀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고생을 하고, 그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알고 모르고 지은 죄가 얼마인 줄을 알 수가 없고 그렇지마는 죽어 가는 마당에는 재산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부모라던지 형제간이라던지 처자권속도 내가 희생을 해 가면서 봉사를 하고 그걸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쏟고 하지만,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부모도 어찌하지 못하고 형제간도 어찌하지 못하고 심지어 처자와 아내와 자식들도 내가 죽어 갈 때에는 나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내가 죽을 때에 따라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에 평생에 괄세하고 소박을 했던 넷째 마누라는 바로 우리의 마음자리에다 비교한 것인데, 그 마음자리 마음은 제일 소중하고 애끼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넷째 마누라인데, 그것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그것을 등한히 하고 첫째 마누라, 둘째 마누라, 셋째 마누라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괄세를 했기 때문에, 그 셋째까지 먹여 살리느라고 죄만 퍼지었지 마지막 가는 마당에는 그 죄만 짊어지고 가게 되고 아무도 따라와 주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本性)을 갈고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業)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말아야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거나 또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되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와 또 정법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게 태어나서 공부도 걸림이 없이 하고 또 이 최상승법과도 인연이 있어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것을 괄세를 하고, 불고(不顧)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를 괄세를 하고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그동안에 애끼고 가꾸고 한 육신이나 재산이나 부모 처자권속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특히 우리나라는 지금 부인을 하나밖에는 갖지를 못하게 법률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이 네 명의 부인을 갖는다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와 재산과 부모와 형제 처자권속과 또 우리의 본래부터 타고난 그 마음자리와 이 네 가지를 비유를 했을 뿐,
사실 우리는 아직도—불법을 믿고, 도를 닦고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지만—첫째 둘째 셋째만 이뻐하고, 넷째 부인은 영 겨우 시간이 조끔 있으면 형식상으로 조끔 들여다본 척하고 실재 마음을 딴 데에가 있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분이 많이 계시다면 이것은 불법(佛法)의—위태로운 그 썩은 새끼에 매달린 불법이 위태로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불법을 그렇게 위태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첫째 둘째 셋째, 마지막 가는 길에는 여지없이 배신해 버리고 말아버릴 그러한 (첫째) 둘째 셋째 부인한테만 퐁 빠져 가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진짜 나를 따라가 줄 넷째 부인한테는 그렇게 등한히 하기 때문에 마지막 떠나는 길이 그렇게 처량할 수 밖에는 없는 것처럼.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하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터인데 그것을 괄세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장래, 우리 자신들의 금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 처량한 신세로 객지로 육도윤회를 떠돌이 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법의 명(命)을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종단은, 여러분 앞에 종단 이야기를 하기가 대단히 죄송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마는, 우리 종단의 일은 스님네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사부대중 전체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우리 종단이 하루속히 바로잡아지고 안정이 되어서 불법이 나날이 융성해 가고 많은 사람들이 불법에 귀의해서 바른 길을 찾아서, 실오래기 같은 그 불법의 맥이 동아줄보다도 더 크고 아름드리 고목(古木)나무나 강철로 된 밧줄과 같이 아무리 끊어도 끊어질 수 없는 그런 튼튼한 맥이 되도록 우리는 진심으로 기원을 하고 협조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19분3초~39분33초)





(3/3)----------------

불법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아 가느냐?' 거기에서 불법이 융성해지는 것이지 어떠한 사회적인 조직으로 인해서 불법의 명이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한 종단 체제가 바로 잡아져서 안정이 되어야 그 종단 산하에 귀의한 신도들도 마음이 잡혀서 가정이라던지 사회에 옳게 생활을 해 나가시고 일을 해 나가실 것이고, 우리 출가한 스님네들도 마음이 놓여서 정진을 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종단 문제는 여러분들이 신문을 통해서 알고 계신 분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이 됩니다마는 뭐라고 여러분 앞에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 종단의 이러한 가끔 일어나는 여러 사태에 관해서 염려를 하는 신도분이 계셔서, “대관절 출가한 스님네들이 어째서 도만을 열심히 닦고 청정한 마음으로 해 나가면 종단도 그러한 스님네들이 나와서 잘해 나가면 종단도 잘되고 참 다른 많은 사람들도 불법에 대해서 신심을 내서 많이 귀의를 하게 되고 그럴 텐데, 꺼떡허면 종단이 시끄럽고 모다 그래 가지고 어디다가 내가 불교신자라고 얼굴을 내놓기가 참 창피한 때가 많다. 대관절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리 신도들은 처자권속이 있고 모다 가정이 있고 해서 돈이나 권리가 없으면 도저히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번연히 이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악착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돈을 벌라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부정도 하고 자칫 잘못하다가 들키면은 징역도 살 만한 그러한 일도 가정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스님네야 살아서 무슨 상투가 있나, 죽으니 뭐 자식이 있나, 아내가 있나, 무엇이 걱정이 있어서, 그저 한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두 숟갈 먹으면 ‘이뭣고?’ 하고 그뿐인데 왜 그렇게 시끄럽게 그래 쌓습니까?”
아주 내 앞에 와서 탁! 까놓고 공격을 하는데 내가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참 나도 승려의 한 사람으로서 그 공격을 나도 받어야 하고, 참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으나 내가 가만히 그 문제를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나대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뭡니까?"

그래서 "나는 그 종단에 나와서 일하는 모다 스님네들은 어느 모로 보던지 다 똑똑하고 다 훌륭한 스님네들인데, 그렇게 서로 싸움을 하고 물의를 일으키고 하면 모든 불자와 모든 국민으로부터 참 많은 욕을 얻어먹을 줄 빤히 알면서 그렇게 분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마 그분네들이 그 불보살 화현(化現)이 나타나 가지고 일부러 그러시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든 종교가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처음 천 년간은 계속해서 발전을 해 나가고 번영을 해 나가다가 그다음 천 년간은 평행을 이루고, 그다음 천 년간은 차츰차츰 쇠퇴해 가는 기간이다. 그런데 특히 불교는 지금 3천 년이 되었으니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는 벌써 2천 년 지내면서부터 차츰차츰 쇠(衰)해 가지고 벌써 3천 년이 되었으니, 고목나무 가운데에도 아주 속이 참 완전히 썩어서 꽃도 잘 피지 못하고 열매도 맺기 어려운 그러한 아주 극도로 썩은 그런 고목나무와 같은 그러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고대로 놔두고는 새싹이 돋아날래야 돋아날 수가 없어. 그러니 그 고목나무를 빨리 쓰러뜨려 버려야 그 밑에서 새싹이 나 가지고 그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 가지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열매가 맺을 게 아니냐. 그래서 지금 종단에 나와서 일을 보시는 스님네들이 참 욕 얻어먹을 것을 각오하고 또 심지어는 지옥에 들어갈 것도 각오를 하고, 그 고목나무를 비어서 쓰러뜨려 버리고 새싹을 기르기 위해서 나오신 불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한다.

"그분네들도 참 피땀을 흘려서 고생을 하고 밤잠을 못 자고 고생을 하고, 심지어는 때로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참 저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생각이 아마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분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과연 그 말을 들으니까 그럴싸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마는, 내일이면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가지고 새로운 길을 모색을 한다고 승려대회에 참석을 하라고 통지가 왔습니다.

우리 사부대중은 하루빨리 종단이 바로잡아지고, 정말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목숨바치는 그러한 실답고 참다운 수행자, 출가승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하신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그러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종단은 반드시 또 바로잡아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일신(一身)에 관해서도 첫째나 둘째, 셋째 부인보단 넷째 부인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쏟아야겠고 또 우리 국가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인류를 위해서도 그렇고 또 우리 종단을 위해서도 그러한 마음가짐과 그러한 풍토가 이루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그 뉴스를 통해서 잘 아신 바와 같이 칼(KAL)기가 그렇게 참 소련의 그런 무도한 폭격으로 인해서 269명이라고 하는 아까운 생명이 죽어갔고, 또 이러한 분개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하느냐? 우리는 나라를 튼튼하게 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슬픔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조 때부터 내려오면서 계속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궁중에서 왕가에서는 서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형제와 숙질 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밑에 모다 벼슬아치나 선배들은 모다 노론, 소론이다 해 가지고 당파 싸움으로 일관을 하고 그래 가지고 불교는 갖다가 탄압을 하고, 이리 내려오다가 결국은 경술년에 왜놈한테 나라를 빼앗기고 그래 가지고 왜정 36년간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는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마는 38선이 갈라져 가지고 계속 오늘날까지 참 내려오면서, 많이 우리나라가 좋아졌습니다.
옛날에는 보릿고개라 해서 참 수없이 많은 사람이 굶주림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그러다가 차츰차츰 우리나라는 다 먹고살 만하게 되었고 또 국위도 많이 선양이 되었고, 참 옛날에다 비교하면 참 말로 할 수 없이 참 잘살게 되었으나, 그래도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힘이 약해서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참 분통 터질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니 만큼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온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일치단결해서 각기 자기 맡은 바 소임을 완수를 하고 더욱 나라를 갖다가 부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일에 충실을 하고 그것을 뿌리로 해 가지고 모든 사업도 해야 하고 각기 학생은 학생대로, 또 학자는 학자대로, 실업가는 실업가대로 또 각기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실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퍽 살기는 편리하게 되었지마는 이렇게 살벌(殺伐)해 가고, 나라와 나라끼리 이렇게 참 못 할 짓을 하고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성현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뿌리를 북돋은 일에 대해서 등한히 해 온 까닭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신 바와 같이 대학, 세계 각국의 모든 교육이 오직 그 잎이나 가지를 갖다가 충실히 하는 그런 지엽적인 과학기술 교육에 치중을 해 왔을뿐 뿌리를 북돋은, 우리의 자성을 깨닫는 그러한 교육은 거의 무시를 해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첫째 둘째 셋째 부인만 애끼고, 그리고 제일 그 배신(背信)을 해 버리고 말 첫째나 둘째한테만 빠져 가지고 넷째 부인—진정 애끼고 사랑해야 할 넷째 부인에 대해서 괄세를 하고 냉대를 한 그 죄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까딱 잘못해서 미국이나 소련 같은 데서 핵무기라던지 레이저 광선과 같은 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참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이 세계 인류는 다 같은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시체로 변해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하면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가
나무~아미타불~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데,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에 의지해서 싸늘한데, 하늘에 금강 보검이 번쩍거리면서 서 있다 그 말이여.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한 번 번쩍 하는 바람에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가 두 동강이가 났구나.

변계마군종차락(遍界魔軍從此落)한데, 온 세계에 두루 펴져 있는 마군(魔軍)이가 일로 좇아서 전부 함락이 되었는데,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도깨비가 있어서 그 속을 엿볼 것인가.

여러분에게 있는 보배 칼을 항시 갈고 닦아서 손에서 놓지 아니한다면 어떠한 마군(魔軍)이도 여러분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우리 종단과 우리나라를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매월 일요법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열리는데, 어린이 법회도 이 지하 아래층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일요일이니까 국민학교 학생들 또 유치원 학생들 그런 자녀분이 있으시면 같이 데리고 오셔서 그 일요법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불교의 좋은 노래도 배우고 또 재미있는 불교의 설화도 듣고 이렇게 해서 어릴 때부터서 불교의 씨를 심어주면 차츰 커가면서 훌륭한 불자가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39분36초~60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백운아향만리표~ / 육조 스님과 남악회양 선사, 하택신회 선사 / 활구참선. 은산철벽(銀山鐵壁) / 참선은 쉽다(세수하다가 코 만지기), 어렵다(깨 한 말을, 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리에서 굴려서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 올릴 만큼)

 

네 아내(육신, 재산, 부모형제 처자권속, 마음)의 비유 /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자기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되, 그 가운데 내가 나 찾는 이 공부를 밑바탕으로 해야만 그 모든 일이 정말 올바른 일이 되는 것.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게송)금강보검의천한~.

 

 

오늘날까지 그 불교가 동양에 여러 나라에 전해 내려오고 그 경전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또 번역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고 있지마는, 참으로 그 불법에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법맥(法脈)이라고 하는 것은 실오라기만큼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 만진 것보다도 더 쉽다’ 이렇게도 쉬웁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웁다고 표현을 하셨지만, 어렵기로 말하면은 깨 한 말을 갖다가—깨 한 알씩을 큰 나무 뿌럭지 있는 데서부터서 굴려서 저 열 길이나 되는 나무 꼭대기까지 굴려서, 그 나무의 몸뚱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씩 하나씩을 굴려서 나무 꼭대기에다 올려다 놓고, 다시 또 내려와서 깨 한 알을 갖다가 뿌리에서부터서 굴려서 올려 가지고 저 꼭대기에 갖다 놓다가, 중간에 잘못해서 뚝 떨어지면 다시 뿌리에서부터서 굴려 올리고 그래서 깨 한 말을 굴려 올릴 만큼.

그것이 얼마나 공력을 드려야—그 하나를 평면으로 굴려 올린다면 모르지만, 서 있는 나무에 굴려서 올린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그만큼 공력과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本性)을 갈고 닦아서 과거에 지은 업(業)도 소멸하고, 새로 업을 짓지 말아야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거나 또는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되 좋은 가문과 좋은 부모와 또 정법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에 태어나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고 인품도 좋게 태어나서 공부도 걸림이 없이 하고 또 이 최상승법과도 인연이 있어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만, 그것을 괄세를 하고, 불고(不顧)를 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를 괄세를 하고 닦지를 않았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그동안에 애끼고 가꾸고 한 육신이나 재산이나 부모 처자권속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성(自性) 본성(本性) 바로 그놈을 제일 애끼고 사랑하고 돌봐줘야 하고 잘 먹이고 잘 입혀야 할 터인데 그것을 괄세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의 장래, 우리 자신들의 금생은 말할 것도 없고, 저 내생 무량겁을 두고 처량한 신세로 객지로 육도윤회를 떠돌이 할 수 밖에는 없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법의 명(命)을 실오라기처럼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몰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이 공부야말로 뿌리가 되는 것이고 그 밖에 일은 아무리 그것이 소중하다 해도 줄기요, 가지요, 잎이기 때문에 그 잎과 가지와 줄기가 올바르게 자라게 하려면은 뿌리가 제대로 박혀야 하고, 뿌리가 충분한 영양과 수분과 좋은 토양 속에 묻혀야만 거기에서 좋은 줄기와 가지와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행복하고, 한 가정이 평화롭고, 한 나라가 부강하고 나아가서 인류의 평화를 유지할라면 그 뿌리인, 근본인 각자의 자성(自性)을 바로잡아 깨달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참 한결같이 다 말씀한 바지만, 특히 부처님께서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팔만사천(八萬四千) 묘법(妙法)을 설하시고 그래 가지고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온 법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생사 없는 도리'가 내게 있으므로 내게 있는 그 생사 없는 도리만 본다면 백 번 죽어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종단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이 최상승법에 목숨 바쳐서 철저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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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