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26~250)2023. 4. 1. 11:32

(No.249)—1984년 추계 산철해제 법회(84.10.23) (38분)

 

약 38분.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광음양가석(光陰良可惜)하고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요면삼도해(要免三途海)인댄, 지옥 · 아귀 · 축생,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할진대는,
수참활구선(須參活句禪)이니라. 모름지기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할지니라.

광음(光陰)이 양가석(良可惜)하니, 세월이 시간이 참으로 아까우니,
신물등한면(愼勿等閑眠)이어다. 삼가 등한히, 잠자는 것을 등한(等閑)히 하지 말지어다.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도리를 설하시고 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존자(迦葉尊者)에게 전하시고, 가섭존자는 아란존자(阿難尊者)에게 전하시고, 아란존자는 상나화수(商那和修)에, 이렇게 해서 인도에서 28대 달마조사(達摩祖師)까지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 달마조사는 27대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로부터 이 법등(法燈)을 전해 받았는데, 보리달마(菩提達摩)존자,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해서 출가를 했는데, 그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를 뵈옵고서 법(法)에 등(燈)을 전해 받아 가지고, "제가 이미 이 법을 얻었는데, 장차 어느 나라에 가서 불사(佛事)를 지어야 하겠나이까?" 하고 여쭈어봤습니다.
반야다라존자가 "니가 비록 법은 얻었으나 아직은 저 멀리 가서는 아니되느니라. 아직은 이 남천축(南天竺)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열반에 든 뒤 67년이 되거든, 진나라 진단(震旦), 저 중국으로 건너가거라. 건너가서, 거기에 가서 대법약(大法藥)을 가지고 상근대지(上根大智)를 제접(提接)을 할지니라"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 달마존자는 반야다라존자를 가까이 모시고 시봉을 하면서 착실히 보림(保任)을 하시기를 40년 동안을 잠깐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문자 그대로 위법망구(爲法忘軀)요, 여법(如法)하게 시봉(侍奉)을 하면서 보림행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 스승이신 27조 반야다라존자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일절 입을 딱 다물고, 오직 시봉하면서 자기 수행만을 하다가, 반야다라존자가 열반하신 뒤에사 반야다라존자의 뒤를 이어서 인도—남인도 · 북인도 ·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다니시면서 중생교화를 하셨습니다. 몇 살까지 하셨냐 하면은 140세까지 하셨다.

140세의 고령이 되어 가지고사 비로소 부왕(父王), 그 향지국(香至國)에 왕이 준비해 준 배를 타고서 3년간이라고 하는 긴 항해 끝에 중국 남해안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양(梁)나라 보통(普通) 8년입니다.
그때 광주자사(廣州刺史)가 인도에서 생불(生佛)과 같은 도인(道人)이 오셨단 말을 듣고 융숭하게 영접을 하고, 양무제(梁武帝)에게 그러한 달마존자가 도착했다고 하는 말씀을 주달(奏達)을 하니까, 양무제가 또 사신을 보내서 그때 서울인 금릉(金陵)에까지 모셔 갔습니다.

양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자마자, "짐(朕)이 즉위(卽位) 이래에 많은 절을 짓고, 경(經)을 인포(印布)하고, 많은 스님네를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에 공덕(功德)이 얼마나 되오니까?" 자기의 공덕을 자랑하고 또 경과도 보고할 겸, 아울러서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응당 그랬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달마대사 대답이 "공덕이 없습니다" 뜻밖에 이러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양무제는 깜짝 놀래 가지고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그러한 공덕이 공덕이 아닌 것은 아니여.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다운 공덕이 되지 못하고 인천(人天)에 조그마한 유루(有漏) 공덕밖에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다시 묻기를 "어떤 것이 그러면 참다운 공덕입니까?"
달마대사가 이르시기를, "지혜가 원명(圓明)하고 공적(空寂), 스스로 공적의 진리를 깨달라야 하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성스러운 제일가는 뜻이오니까?"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확연(廓然)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양무제가 "그러면 짐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대사가 대답하기를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무제는 마침내 달마대사에 상근(上根)을 접(接)하는 그 자비한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달마대사는 그길로 양자강을 건너서 위(魏)나라 숭산(崇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소림사(小林寺) 소림굴 속에 들어가서 9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면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참! 큰 공덕을 지으셨습니다. 그러한 공덕은 무엇에다 비교할 수가 없다"고 칭찬을 해주었더라면, 양무제가 대환희심을 내 가지고, 생불(生佛)과 같이 받들어 모시면서 계속해서 큰 불사(佛事)를 하고 그랬을 텐데, 아까 말씀한 바와 같은 그러한 대화로 인해서 양무제는 그 달마대사의 참 말씀을 이해를 못했던 것입니다.

달마대사는 소림굴로 들어가서 9년 동안을 계시는 동안에, 신광(神光)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은 속가에 유교나 도교에 모든 경전을 다 통달을 하고, 출가를 해서도 모든 십이부장경(十二部藏經)을 다 통달을 하고 그랬지만, 큰 깨달음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머리가 빠개질듯 아프면서 도저히 그 아픔을 참지를 못하고 몸부림을 치다가 머리를 만져 보니까, 머리에 다섯 봉우리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이거 인자 죽을려고 큰 병이 났다 싶었는데 공중에서 청하기를, "이것은 병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환골탈태(換骨奪胎) 하느라고 그런 것이니 걱정을 말아라. 저 위나라 숭산 소림굴에 가면 참법을 깨달은 스승이 거기에 계시니 그리를 가서 법을 받으라" 한 그러한 공청이 있어서 달마대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어가서 며칠을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도, 달마대사는 벽을 향해서 묵묵히 앉아 계실 뿐, 돌아다보시지도 안 혀. 하루 종일 서 있어도 소용이 없고, 밤이 되어 가지고 눈이 폭설이 쏟아지는데, 밤중에는 허리까지 눈이 차올랐다 그 말이여.
발부터서 얼어 올라오는데, 다리가 얼고 배가 서늘해 가지고,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사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완전히 꽁꽁 얼어서 마비가 되다시피 했어도 꼼짝을 않고 고대로 아주 서 있다 그 말이여.

달마대사가 너무 측은(惻隱)해서 "뭣 때문에 거기 그렇게 오래 서 있느냐?"
"법(法)을 구하기 위해서 이렇게 서 있습니다"

"너 같은 박덕(薄德)하고 조그만한 재주밖에 없는 그러한 박덕한 사람이 무슨 법을 구한단 말이냐?"
그 말을 듣고서 허리에서 칼을 빼 가지고 자기 팔을 탁! 꺾어서 달마대사 앞에 바쳤습니다.
달마대사가 그제사 "그만하면 법을 배울만한 신심(信心)이 있다" 이렇게 인증을 하시고서 "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니라" 한마디를 일러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법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 마음이 편안치를 않습니다"
"그러면 니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리라"

신광(神光)이 아무리 그 마음을 찾어서, 마음을 달마대사에게 드릴려고 아무리 찾어봐도 찾을 수가 없어.
"아무리 찾을라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달마대사 말씀이 "내가 니 마음을 편안해 마쳤느니라" 여기에서 신광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신광(神光)은 혜가(慧可)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혜가대사는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전해 받었습니다. 달마대사는 150세의 고령으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달마대사가 반야다라존자로부터 확철대오를 해서 법을 이어 가지고서도 40년이라고 한 세월을 반야다라존자, 그 스승을 시봉을 하면서 수행을 하는 이만한 끈기와 신심과 참을성이 있어야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능히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받아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불사(佛事)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릇이 작고 참을성이 없고 끈기가 약해서 조그마한 바람만 불어도 이리 휙 날아가고, 저리 휙 궁글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신심과 끈기가 아니고서는 정말 이 공부는 완성하기가 어려웁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처님과 역대조사에 행적을 살펴보면,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근기와 인내와 정성 신심 이런 것과 비교를 해 보면, 우리 자신들의 박약함에 부끄러운 한탄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무량겁을 목숨 바쳐서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으면서 수없는 고비를 넘기면서 그러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아니하고 중단하지 아니하고 정진(精進)함으로써 그러한 도(道)의 결과를 얻으신 것입니다.

오늘은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서 법회가 여러 시간 지연이 되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아니해도 법회를 진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법회를 천천히 시작한다 하더라도, 법당에 앉었으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앉자마자 입선(入禪)인 것입니다.
우리 수행하는 사람은 차를 타던지 자동차를 타던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정거정 대합실에 차를 기다리거나, 어디서 오는 사람을 기다리거나, 기다린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면 지루하기가 짝이 없지만, 왜 기다린다는 생각을 가질 것이냐 그 말이여.
기다릴 것이 아니라, 딱! 앉었다 하면은 화두를 떠억 들고, 딱! 섰다 하면 척! 화두를 추켜들고, 그러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 되고 수선 도량(修禪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한두 시간 그렇게 지루해서 못 견디게 기다리신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이러한 조용한 시간을 갖지 못해서 한탄한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지금, 겨울처럼 그렇게 춥지도 않고, 여름처럼 그렇게 더웁지도 아니한 이 도량에 떠억 두 시간 정진을 했으니 얼마나 그동안에 법문 들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보람을 느끼셨을 줄 생각합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계란이 깨어날 때, 병아리로 깨어날 때, 암탉이 스무하루 동안을 알을 품고 있으면, 결국은 그 알 속에 병아리가 거의 다 되어 가면, 밖에서 어미닭이 그 때를 잘 알아 가지고 그 계란 껍데기 속에 병아리가 다 되어 갖고 있는 그 병아리와 품고 있던 어미닭과 서로 상합(相合)이, 의기가 상합이 되어 가지고,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아서 그래 가지고 딱! 쫒을 때, 줄탁동시(啐啄同時)다 그 말이여. 안에서 쫒고 밖에서 쫒은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 가지고 병아리가 튀겨져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위법망구에 마음을 갖는 것이 도업(道業)을 성취한 가장 중요한 근본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30분33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서 색(色)과 공(空)이 다 끊어져 버렸어.
색(色)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여. 사대(四大),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뭉쳐진 이 육체와 이 기세간(器世間), 온 태양과 달과 별과 지구 산천초목 그런 것들이 모두 색(色)이고.
공(空)은 이 색이라고 하는 것이 본바탕은 그것이 공이다 그말이여. 중생의 눈에는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는 공한 것이거든.

해가 '내가 해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달이, 달 자신이 내가 달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책상이 '내 자신이 책상이다'는 생각이 없어. 그래서 책상이 고대로, 책상 있는 고대로 그것이 공(空)한 것이여.
그 책상이 불에 넣으면 타버리니까 공(空)이 되고, 또 오래되면은 썩어서 없어지니까 공(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책상으로 존재한 모습 그대로 그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말이여.
사람인 내가 들어서 '저것은 책상이다. 책상이 네모졌다. 저것은 나무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름을 붙이고, 모냥을 명상(名相)을 붙이니까 그것이 책상이지, 책상 자체는 책상이라고 하는 상(相)이 없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공(空)이라 그러는 것이여.

비단 책상뿐만이 아니라, 태양도 그렇고, 달도 그렇고, 별도 그렇고, 산천초목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자체가 다 공(空)해 있는 것이고, 우리의 육체도 바로 공(空)한 것이요, 희로애락과 탐진 번뇌 그 자체도 낱낱이 그 자체에 들어가서는 공(空)한 것이여.

'공한 것이다 또는 색상이 있다' 그러한 생각까지도 다 끊어져 버리고,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여. 빈주(賓主)도 여의어 버렸고, 색공(色空)도 다 끊어진 자리에서 목전(目前)에 분명(分明)히 취(取)하라. 형단(形段)이 없고, 형단이 없건마는 우리의 목전에 분명한 놈을 취하라 그 말이여.
그 목전에 분명한 놈, 그놈을 바로 요달(了達)을 해 버리면,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푸른 산은 흰구름 가운데 우뚝 서 있느니라. 오늘 갑자년 추계산철 해제법어를 일로써 마칩니다. (처음~37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요면삼도해~ /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려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 / 28대 보리달마존자는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에 셋째 왕자.

양무제(梁武帝)와 달마대사의 대화 / 달마대사와 신광(神光), 즉 혜가(慧可)대사의 만남 / 난행(難行)을 능행(能行) /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신심(信心) / 줄탁동시(啐啄同時) / (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우리 몸 안에 맥박이 발딱발딱 뛰고 있는 그 맥박 뛰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生死)를 재촉하는 것이고,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 것이 우리의 생사를 재촉하는 것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육도(六途)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삼도(三途) 고해(苦海)를 면하고자 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함으로써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면 '일념(一念) 속에 있는 그 육도(六途), 일념 속에 있는 삼악도(三惡途)와 육도를 해탈(解脫)하라'는 말씀입니다.
해탈(解脫)이라 하니까 무슨 강물 속에, 더러운 강물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 낸 것처럼 우리는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원래 그러한 것이 없어. 그런 것이 없건마는, 미(迷)한 중생에게는 분명히 지옥(地獄)이 있고 축생(畜生)이 있고 아귀도(餓鬼道)가 있고 인간(人間)과 아수라(阿修羅)와 천당(天堂)이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의 눈에 없으니까 미(迷)한 중생에게도 실지에는 없지마는, 있는 것으로 느껴져서 괴롭고 즐겁고 하니, 실지로 아무리 없다 하더라도 있는 것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러한 것이 없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가 계합(契合)을 하면 그것이 바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혜가대사가 그 한마디 법문을 듣기 위해서 눈이 쌓여서 가슴까지 차오르고, 전신이 얼어서 마비가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마침내는 그 자기의 팔을 자기의 손으로 짤라서 달마대사에 스승 앞에 바치는 그러한 신심(信心),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내 몸을 버릴 줄 아는, 잊어버릴 줄 아는 그러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말은 우리는 얼마던지 책에서도 볼 수 있고, 누구한테도 들을 수 있지만 위법망구에 그러한 신심으로 들어야 그 말이 자기에게 와서 꽂히고, 그 말로 인해서 자기의 칠통(漆桶)이 타파(打破)가 되는 것이지, 그 말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 신심도 없고, 그 숭산(崇山)에 놀러갔다가 그 이상한 중이 굴속에 앉었으니까 구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달마대사가 그런 말을 해 봤자, 그 사람이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신심으로써 타오르고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그러한 상태에 놓여지면, 그 말 아니고 욕하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새 우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고, 개 짖는 소리에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역력해서, 역력(歷歷)한 것은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아주 성성(惺惺)하고 또록또록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고, 화두를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어서,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계속 참구(參究)해 나가면,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그래서 성성하고 역력해서 들려고 하는 나도 없고, 들리는 화두도 없고, 지금 내가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이 내가 앉어 있는 데가 여기가 선방이요 절이다' 그런 생각도 없고, 객관과 주관이 완전히 둘 다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오직 화두에 의단만이 독로해.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3. 3. 16. 14:49

(No.236)—1984년 춘계 산철 해제 법회(81.04.30) (40분)

 

약 40분.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몰형단(沒形段)헌데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몰형단(沒形段)이여. 위(位)가 없는 참사람, 위(位)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우리가 보는 사람은 다 육체가 있고, 눈 · 코 · 귀가 있고 손발이 다 있어서 이런 형단(形段)이 있는데, 위(位)가 없는, 지위(地位) 위(位)가 없는 참사람은 형단이 없어. 형단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어.

형단(形段)이 없건마는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다. 항상 면문(面門) 가운데—이 낯, 얼굴, 낯반대기, 이 얼굴, 면문 가운데로 항시 들어갔다 나왔다 출입을 한다 그 말이여. 면문(面門),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 마치면—그 들어갔다 나왔다 항상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거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면문중(面門中)을 통해서 들랑달랑하는데 한 생각 탁! 돌이켜 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라. 번갯불이나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으리라.
번갯불을 무슨 수로 밟으며, 흐르는 물소리를 어떻게 탁! 밟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런데 항상 우리 면문을 통해서 들락날락하는 바로 그놈을 한 생각 돌이켜 요달(了達)해 버리면은 바로 번갯불, 번쩍 하는 번갯불도 탁! 밟을 수가 있고, 흐르는 물소리도 탁!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갑자년 봄철 산(散)철, 두 달 동안 산철 결제(結制)를 했는데, 그 산철 결제의 해제(解制)날입니다.
본래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이렇게 여름과 겨울만을 90일씩 이렇게 안거(安居)를 해 왔었는데, 중국에서부터 저 인도에서부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라고 해서 그 장마가 계속되는 때에 모다 숲속에나 산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으니까, 모다 임금님이나 또는 장자(長者)나 또 신심 있는 신도가 지어 드린 그 기원정사(祇園精舍)라든지 죽림정사(竹林精舍)라든지 그런 정사에서 부처님을 비롯해서 여러 부처님 제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그렇게 그 장마철을 지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거(安居)라 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인도와 또 달라서 여름 더웁고 비 올 때 뿐만이 아니라,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도 산중에서 숲속에서 그런 데서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왕래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겨울에도 석 달 동안을 안거, 결제(結制)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렇게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씩 이렇게 안거를 하고 또 해제를 했습니다마는, 근자에 와서는 정월 보름에 겨울 해제(解制)를 하고 4월 15일까지 산철 동안이 석 달인데, 그 산철 동안 석 달 동안을 걸망을 지고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또 이 도반(道伴)도 찾어가서 서로 도담(道談)도 하고 대단히 그 뜻깊은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석 달 동안을 짊어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다 보니 산만해서, 마땅히 그 걸망을 석 달 동안을 부려 놓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 용화선원에서는 산철에도 잠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잠깐 가서 일을 보고 들어와서, 산철 동안에도 계속해서 정진을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
수년 전부터서는 산철에도—그때는 인자 산철 결제(結制)라 한 것도 없었고, 또 산철 뭐 해제(解制)라 한 것도 없이 그저 그냥 계속해서 정진만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기왕이면 산철도 결제를 하고, 산철도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가져서 좀 더 법도(法度) 있게 그렇게 좀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이 있어서, 수년 전부터서 이 산철, 2월 초하루에 결제 법요식을 갖고 이렇게 또 3월 말일 날 이렇게 또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어떻게 하면은 좀 더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신심(信心)의 발로(發露)로써 이렇게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라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일대사를 우리가 해결을 하느냐 하면, 큰 말 앞에 탁! 부딪쳐.
우리가 말이 있는데, 말 앞에 갑자기 말 앞에 갖다가, 탁! 달려오는 말에 내가 부딪쳤을 때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는가?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그 찰나간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또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듯 하라. 촛불이나 전깃불을 켜 놓고 그 밝은 데에서 바늘에 실을 뀐다면 뭐 천천히 이렇게 뀔 수가 있겠지만, 번갯불이 번쩍 한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뀔 때 그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해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애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이러한 것이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영산회상에 백만억 대중이 운집(雲集)을 해서 부처님 설법을 들을려고 떠억 운집해 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어.
그 부처님의, 그 부처님 세존의 거룩하신 세존을 찬양하기 위해서 찬탄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석천왕이 꽃비를 내루왔는데, 그 꽃 한 송이를 부처님이 떠억 들어서 대중 앞에 보이셨어. 백만억 대중이 보고 있는데 아무도 그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는 뜻을 아지를 못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한 분이 비긋이 미소를 했습니다.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일상,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통해서 드나드는 형단(形段)이 없는 그놈을 바로 보는 일이 지극히 가깝고 쉬웁다고 하지마는, 참으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만억 대중이 모인 가운데에 오직 가섭(迦葉) 한 사람이 이것을 승당(昇堂)을 했다. 이것을 깨달랐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고, 그렇게 수월하고, 그런 작은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지 않는 일을 우리 말세 중생,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 중생(衆生)으로서 그 참선(參禪)을 한다고 해서 그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런 짓을, 그런 어려운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가고, 무슨 옴마니반메훔을 불러서 부자가 되고 잘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법문(法門)의 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일이 그렇게 적은 일이 아니요, 간단한 일이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우니까 하지 말라. 미리서부터 일찌감치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목숨 바쳐서 해야만 된다'고 이렇게 말을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그러한 것을, 평소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한 모든 그 법문이나 이론 철학적인 것 다 속에다 꽈악 담어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밑천을 삼고 살림살이를 삼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참선을 한다면, 그 참선은 도저히 옳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거든.

마치 병에, 옛날에 참기름도 담고 들기름도 담고 간장도 담고 한 그러한 병이 있는데, 그 병의 바닥에 찌께기가 남아 있고 병 속 몸뚱이 면에 그러한 아무리 좋은 기름을 담아서 기름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다른 음식을 담을 때에는 그 다른 아무리 좋고 좋은 음식을 담아도 먼저 담았던 기름 냄새나 간장 냄새가 완전히 가시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뒤에 담은 음식은 결국은 변질이 되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금방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이 한 말씀이라도 나쁜 말씀일 수가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이 한 귀절이라도 그것이 나쁜 귀절일 수는 없어.
그러나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러한 조사어록이나, 기언묘구(奇言妙句)나, 경전에 있는 좋은 부처님의 말씀 같은 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고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그것에서 계속 그것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면, 마치 병 안에 참기름 냄새나 들기름 찌깽이 같은 것이 눌어붙어 있고, 또 간장 같은 것을 담아서 간장 냄새가 나는 거기에다가 아무리 좋은 깨끗한 물이나 또는 술을 담는다고 할 때에 그 물과 술은 금방 변질(變質)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參禪)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거—불문(佛門)에 귀의해 가지고 참 많은 선지식(善知識)도 친견하고, 또 많은 법문도 듣고, 또 많은 경전도 읽고 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잘 알고, 죽죽죽죽죽 다 외우고 쓰고, 뭐 말을 하라고 하면 법사 스님 이상으로 말을, 불교에 대한 말을 잘하고 교리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참선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냐 하면, 그러한 찌께기가 남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돼.

화두(話頭)만 들면 그 경전에 있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조사어록에 있는 말이 생각이 나고, 어떤 공안(公案)을 갖다가 물으면은 그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그 살림을 갖다가 그 살림으로 그 공안을 따져서 분별을 하고 대답을 하고, 이렇게 하는 한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을,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가되, 밥을 먹어도 밥 먹으면서 그 생각, 옷을 입으면서도 오직 그 생각, 걸어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세수를 할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차를 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그래 가지고 마침내 밥을 먹으면서도 밥맛을 모르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을 모르고,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줄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할 지경으로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오직 화두에 의단(疑團) 하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정진을 잡드려 가면,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 · 교리적인 것 · 철학적인 것, 모다 그런 것을 동원해 가지고 공안을 이리저리 분별해서 따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 이것이다' 하고 어떤 결론을 하나 얻고, 그다음에 또 다른 공안을 하나를 또 추켜들고 해 가지고, 한 3일이나 내지 일주일 동안 그 이리저리 수수께끼 풀듯이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져서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해 가지고 그런 식으로 참선을 하면, 이런 따위를 갖다가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건데, 이런 사구선이라는 것은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여.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해서 낱낱이 따져서 알아맞춰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거여.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이 끊어져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조사관을 타파해야 그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지,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없이도 조사관을 뚫을 수가 없고, 조사관을 뚫지 않고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산철 해제에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활구선에 대한 말씀, 또 산승(山僧)의 말도 이 활구선에 관한 심심(甚深)한 당부를 해 드렸는데, 우리가 보다 더 수행해 나가는 데에 법도(法度)를 세워서 좀 더 알뜰히 공부하자고 결제와 해제를 이렇게 가진 것뿐이지,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 공부하는 마음이 조끔도 해이해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초파일이 돌아오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갑자년 하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까지 보름 동안 계속해서 좀 더 알뜰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다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니라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得之在心)이요 응재수(應在手)라. 마음에 얻어.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하게 돼.
제절로 손으로 잡으나 놓으나, 글씨를 쓰나, 밥을 먹으나—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손으로 무슨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몸으로 뭣을 일을 하나, 전부가 그게 다 업(業)을 짓는 것이요, 생사윤회를 하는 것인데, 마음에 탁! 근원을 얻어버리면 손으로 잡으나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앉고 서고 누우나 그 다 딴 일이 아닌 거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여. 눈 내린 밤에 달이 비추고, 봄바람 부는 데에 꽃이 피는 것이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요,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을 향해서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면 들과 산에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피는 것이다. (처음~39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안거(安居)의 유래. 동안거, 하안거 / 산(散)철 결제를 하는 이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 법문(法門)은 오직 중생들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 위해 남기신 것 / 일대사(一大事)라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 / 달려오는 말에 부딪쳤을 때처럼,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는 것처럼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정진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

(게송)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 / (게송)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2. 3. 7. 11:13

 

 

(No.227)—1983년(계해년) 성도재 법회(82.12.08.음) (51분)

 

(1) 약 27분.

 

(2) 약 25분.


(1)------------------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한데  천년도핵장청매(千年桃核長靑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견명성몽변회(一見明星夢便廻)하니, 한 번 밝은 별을 보고 꿈이 문득 돌아오니,
천년도핵(千年桃核)이 장청매(長靑梅)로구나. 천 년 묵은 복숭아씨에서 푸른 매화가 자랐구나.

수연불시조갱미(雖然不是調羹味)나, 비록 이 매화가 국의 맛을 고르지는 못하나,
증여장군지갈래(曾與將軍止渴來)로구나. 일찍이 장군(將軍)에게 주어서 목마름을 그치게 했느니라.


오늘은 계해년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입니다.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사월 초파일(四月初八日), 그리고 부처님께서 왕궁을 버리시고 출가하신 2월 17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도통(道通)하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신 오늘 섣달 초여드레, 그리고 부처님께서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신 2월 15일, 이렇게 해서 사대명절이라 하는데,
사월 초파일은 남녀노소와 승속과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사월 초파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정작 부처님께서 도(道)를 통해 가지고 성불(成佛)을 하신 납월팔일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또 출가를 하셨다 하더라도 납월팔일 이 성불을 하시지 못했다면, 성불하신 날이 없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성불(成佛)을 하셨기에 부처님의 탄생이 참으로 뜻이 있는 것이며, 출가하신 것도 뜻이 있는 것이며, 열반하신 것도 또한 뜻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셔 가지고 ‘19세에 출가를 하셨다’ 어떤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고, 또 경전에 따라서는 ‘29세에 출가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12년 동안을 고행(苦行) 정진을 하신 끝에 30세에 성도(成道)를 하셔서 80세에 열반하셨다’ 『반니원경(般泥洹經)』 이런 경전에는 그렇게 되어 있고, 팔리어 『열반경(涅槃經)』이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이나 『유부잡사(有部雜事)』 같은 경전에는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을 고행하시다가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에 드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북전(北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계통에서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고행하셔 가지고 30세에 성도하셨다’고 이렇게 옛날 우리나라 옛날 스님네는 죽 그렇게 믿고 내려왔는데,
근세에 와서 많은 불교학자들이 여러 경전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이렇게 해서 연구한 결과, ‘29세에 출가해 가지고 6년 동안 고행을 하셔서, 35세에 성도하셔 가지고 80세에 열반했다’고 하는 그 경전의 말씀이 여러 가지 경전과 여러 가지 점으로 비추어 볼 때에 더 타당성이 있다고 그렇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을 고행을 하셨건,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을 고행하셨건, 35세에 성도(成道)를 하셨느냐 30세에 성도하셨느냐, 그것은 경전에 따라서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어느 것이 옳다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논란을 하고 시비를 할 것이 못됩니다.
이것은 불교학자나 사학가들이 연구할 문제고, 우리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그 35세 설(說)이나 30세 설에 너무 지나치게 시비를 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그때 당시 널리 알려진 선인(仙人)을 찾아갔습니다. 지금 말이면 큰 도사(道士)를 찾아갔는데, '알라말라'라고 하는 도인을 찾아가서, 그 도인 밑에 제자가 되어 가지고 그 알라말라 도사의 지시에 따라서 정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수행을 해서 그 도인이 이르른 무소유(無所有)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도인은 쾌히 인가를 하고 길이 자기의 제자가 되어 주기를 바랬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스승보다도 더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마음에 만족을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른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그 스승은 '우타카'라고 하는 도사인데 그이를 찾아가니까 그 도인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서 수행을 쌓고 있었습니다.
역시 그 우타카 도사 밑에서 위법망구적으로 도를 닦아서 그 스승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서 스승은 매우 훌륭한 제자를 만났다고 흡족하게 생각했고, 또 자기 밑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지만 부처님은 거기에서도 당신의 마음에 흡족함을 얻지를 못했습니다.

‘어째서 그 두 선인(仙人), 두 스승이 당신의 궁극의 목적이 아니냐’ 하고 판단을 내렸냐 하면, 그 두 신선이 참으로 종교적 진리,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체득치 못했다’고 부처님께서는 판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무소유(無所有)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지 않고 무심(無心)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게고,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는 것은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가 가지고, 그것도 역시 자기의 모든 생각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이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의식을 완전히 초월해 버리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무심한 경계에 들어가서 그러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그것 자체만으로서는 이것을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판정이 되셨기 때문에 또 그 우타카라고 하는 두 번째 스승도 버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지금의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 들어가서 가장 도 닦기에 알맞는 장소를 선택해 가지고 한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서, 떠억 동쪽을 향해서 자리를 잡고서,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결정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 도를 닦기 시작하는데 마왕(魔王) 파순(波旬)이, 악마의 무리들이 갖은 방법을 써 가지고 부처님의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쳤습니다.

처음에는 무력으로써 그것을 방해를 치고, 차크라라고 하는 그 뿔이 돋친 쇠뭉텅이 그런 것을 던져 가지고 그놈에 맞으면 아주 박살이 나는 그러한 것을 모다 부처님한테 던지기도 하고, 큰 바위산을 무너뜨려 가지고는 그냥 바위산을 부처님한테로 미틀어 버리기도 하고, 온갖 미친 코끼리를 몰아 가지고는 부처님을 갖다가 막 해꼬자할려고 하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했지만,
차크라는 부처님 머리 위에 와서는 꽃송이가 되어 가지고, 꽃송이로 얽어진 일산(日傘)대가 되어 가지고 부처님을 받들어 드리게 되고, 큰 바위산을 갖다가 미틀어서 부처님한테 미틀은 것이 그것이 또 꽃이 되어 가지고 아름다운 꽃이 되어서 떨어지고, 도저히 완력(腕力)으로서는 어찌 해 볼 수가 없게 되자, 그 자기의 아름다운 딸 셋을 갖다가 이쁘게 단장을 해 가지고 미인계(美人計)를 써서 부처님을 현혹(眩惑)할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부처님을 갖다가 방해 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세 딸이 가서 갖은 아양을 떨고 유혹을 했지만, 그러한 짓은 마침내 연꽃 줄기로 산을 부술려고 한 거와 같았으며, 손톱으로 바위산을 파내려고 하는 거와 같았으며, 이빨로 쇠를 씹어서 가루를 만들려고 한 거와 같아서, 자기의 힘만 소모가 되었을 뿐 조금도 부처님을 해롭게 하고 방해를 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왕 파순이의 무력과 완력으로 당신을 온갖 방법으로 해롭게 해 왔지만, 내가 이러한 마구니와의 싸움에서 져 가지고 사는 것 보단 차라리 이 마구니와 싸워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러한 무력의 침범과 그러한 미녀들의 유혹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그러한 것을 다 이겨내셨습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비단 삼천년 전의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 출가해서 도(道)를 닦으려는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속가에서 도를 닦으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발심을 해서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날부터 직접 간접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나의 도(道)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와 투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사람이 도(道)를 닦아서 도를 이루게 되면 마구니의 무리가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구니의 궁전이 들썩들썩해서 넘어질려고 하기 때문에 마왕(魔王)들은 자기의 영토가 무너지고, 자기의 궁전이 무너지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들까지 설 땅이 없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 도 이루는 것을 방해 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20분15초)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은 그 마구니와 싸워서, 그 마구니는 무력(武力)으로 오는 마구니와 그 미인(美人)이 되어 가지고, 미인이라고 하는 표현은 순경계(順境界), 부드러운 그러한 방법으로 나를 갖다가 현혹해 오는 그러한 마구니, 실지는 무력으로 닥쳐오는 마구니보다도 이러한 부드러운 방법을 써서 나를 가장 위하고 나를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다가오는 마구니는 참으로 이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치(理致)와 지혜(智慧), 이지(理智)가 둘이 아닌 세계다. 또는 부처님과 부처님이 서로 생각할 뿐이다. 또는 자수용(自受用)하는 스스로 당신만이 맛볼 수 있는, 누릴 수 있는 법락(法樂)이다. 또는 해인삼매(海印三昧)다, 여여실실(如如實實)이다' 그 깨달음의 경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합니다마는.

'무진평등(無盡平等)한 그 진리가 자기 육신에 가득차 가지고 가없는 다함이 없는 적멸(寂滅)의 선(禪)의 낙(樂)이 넘쳐흐른다. 그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가 다 그 적멸한 경계 속에 다 돌아가는 것이며, 그 침묵한 채 더할 나위 없는 그 훌륭한 정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입을 벌려서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 그 적멸의 법락 속에 있는 바로 그 침묵의 그 상태에서 최고의 법(法)이 여지없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적적(寂寂)한 그 침묵 속에서 대웅변이며, 대설법이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6분45초)





(2)------------------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그러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신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최고의 진리, 영원한 진리, 영원히 생사 없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사유(思惟)를 하실 때에 마왕(魔王)들이 나와서 "당신이 혼자 깨달랐으면 그만이지, 그것은 누구에게 말해봤자 아무도 알아들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연히 입을 벌려서 그 법을 설해봤자 입만 아프고 피로할 뿐이지 아무 성과를 거둘 수가 없을 것이니 법을 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마구니들이 부처님을 갖다가 행여나 법을 설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은 사람이 나올까봐 그렇게 방해를 쳤습니다.

그때 천상에서 또 부처님께 여쭙기를, "이 많은 중생 가운데에는 정법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방편(方便) 따라서 법을 설하시면 차츰 근기(根機)가 수승해지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다 중생의 근기 따라서 방편을 설하셔서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소승법으로부터 중승법, 대승법, 그래 가지고 최상승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차츰차츰 근기 따라서 설해 가지고 마침내는 위없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해 가지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마자 침묵한 가운데에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시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根機) 맞춰서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自內證)의 경전, 당신이 깨달은 바를 고대로 침묵 속에서 설해졌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숙세에 얼마나 복을 많이 지었기에, 깊은 숙연을 맺었기에 이 무상(無常)한 오탁악세(五濁惡世)요, 생사의 윤회의 바다 속에서 최고의 위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견성성불하신, 불교 4대명절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맞이해서 재발심(再發心)하고 새로운 각오로써 자기의 오늘날까지의 모든 것을 재검토하고, 자기의 신앙과 자기의 신심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해서 진정한 신심으로 새 출발을 해야 할 줄 생각을 합니다.(39분19초)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끝없이 방황을 하고, 깨달은 사람은 맑게 닦아 놓은 거울과 같아서 일체 경계가 여지없이 그 거울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빨간 것이 오면 빨간 상(像)이 거울 속에 비추고, 노란 것이 나타나면 노란 것이 그 거울 속에 비추되 거울 자체는 아무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여지없이 청황적백(靑黃赤白)이 나타나건만 거울 자체가 빨개지는 것도 아니고, 한번 노란 것이 거기에 비추어졌다고 해서 거울 자체가 노란 거울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어느 전법게(傳法偈)에도, 『경계 따라서 마음이 전(轉)하지만[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다. 그 굴르는 곳에 실로 그윽하다. 일체 경계를 만나되, 바로 거기에서 성품을 인득(認得)한다면[隨流認得性], 기쁠 것도 없고 근심할 것도 없는 것이다[無喜亦無憂]』 하신 말씀이 바로 이러한 소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인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현실적으로 볼 때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지로 괴롭습니다. 그러나 이 속에 생사 없는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어야 우리는 올바른 수행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 성도재(成道齋)를 맞이해서 이러한 말세(末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날을 기해서 다시 한번 자기를 재검토하고, 이 시간 이후로 진정으로 명실공히 참된 수행인이 되어서 금생에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생사 없는 진리의 세계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약을 하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니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천상천하(天上天下),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 같은 분이 없어.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라. 시방세계를 두루 보아도 부처님과 견줄 사람이 없더라.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간에 있는 바를 내가 다 보아도, 모든 것이 부처님과 같은 분이 없더라.(一切無有如佛者)

부처님은 저 창공에 수천만 개의 별 속에 휘황찬(輝煌燦) 밝은 달과 같은 존재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 달은 어떠한 별과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크고 뚜렷하고 밝듯이, 부처님의 존재는 하늘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하늘이며, 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신이며, 왕 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왕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신 우리들은 그 다행하고 고마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26분46초~51분23초)(끝)





------------------(1)

*(게송) ‘일견명성몽변회~’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1권 3칙 '오도(悟道)' 취암종(翠嵓宗) 게송 참고.
[참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있는 내용으로,
조조(曺操)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이때 조조가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말하기를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다 한다.

육조 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있는 내용으로,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 길을 잘못 들어 헤매어 식수가 바닥이 났고,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 이상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때 사마염은 문득 꾀를 내어 말하기를 “여러분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너머에 매화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납월팔일(臘月八日) ; 납월(臘月)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맨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 음력 12월 8일.
석가모니가 35세의 12월 8일 중인도 마갈타국 니련선하(尼連禪河)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서 샛별[明星]이 뜰 무렵 별을 보고 불도(佛道)를 이루던 날. 부처님의 성도일(成道日). 납팔(臘八)이라고 줄여 쓰기도 하고, 성도회(成道會) · 성도절(成道節) · 성도재일(成道齋日) 등이라고도 한다.
이 석가모니의 성도를 기념하기 위해 선원에서는 초하루부터 팔일 새벽까지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견성의 성(性)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반니원경(般泥洹經) ; 2권. 역자 미상.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과 같은 것으로 다른 번역본.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은 서진의 백법조(白法祖) 번역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일을 기록한 것. 『장아함유행경(長阿含遊行經)』과 같다.
*설(說) ; 견해나 주의, 학설 따위를 이르는 말.
*선인(仙人) ; 도를 닦는 사람.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나 망상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구체적인 대상 속에 있으면서 그 대상에 대한 어떤 망상 분별도 없으므로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없다거나 사물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며, 대상을 지향하되 그 대상에 대한 망상 분별과 집착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한 일정하게 정해진 마음의 양태가 없이 대상에 응하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선정(禪定) ; 산스크리트의 디야나(dhyāna), 팔리어 자나(jhāna)의 음역(音譯)인 선(禪)과 그 의역(意譯)인 정(定)이 합하여 생긴 말. 선(禪)은 정(定) · 정려(靜慮) · 기악(棄惡) · 사유수(思惟修) 등으로 의역한다.
6바라밀의 하나. 마음 고요한 내관(內觀). 마음의 번뇌를 가라 앉히는 것. 정신 집중의 수련. 좌선에 의해 몸과 마음이 깊게 통일 된 상태.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붓다가야(buddhagayā) ;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네란자라(nerañjarā) 강변에 있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니련선하(尼連禪河) ; 네란자라(nerañjarā) 강.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항하(恒河, 갠지스 강)의 한 지류. 석가모니께서 6년 고행하던 끝에, 이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Sujata)가 바치는 유미죽(乳糜粥)을 드시고 붓다가야(Buddha-Gayā)로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49일 동안을 정진을 하셔 성도하였다.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미틀다 ; ‘밀뜨리다(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갑자기 세차고 힘있게 밀어 버리다)’의 사투리.
*해꼬자 ; 해꼬지. 해코지(害코지)—남을 해치고자 하는 짓.
*현혹(眩惑 아찔할·어두울 현/미혹할·어두워질 혹) ; 마음이 흐려지도록 무엇에 홀림. 또는 그렇게 되게 함.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출세간(出世間) ; 세속의 번뇌를 떠나 깨달음의 경지에 이름.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시킨 깨달음의 심리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일전(一轉) ; 마음이나 사태가 아주 달라지거나 바뀜.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식(唯識) ; 모든 차별 현상은 오직 인식하는 마음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일체는 오직 마음 작용에 의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뜻.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19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지(智) ; ①산스크리트어 jñāna 팔리어 ñāṇa 모든 현상의 이치를 명료하게 판단하는 마음 작용. 이해. 지식. ②산스크리트어 jñāna 깨달음. 깨달은 부분의 지혜. 완전히 아는 것. ③팔리어 paññā 지혜. 혜(慧).
*자수용(自受用) ; 깨달음의 경지를 되새기면서 스스로 즐김.
*법락(法樂) ; 불법(佛法)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 법열(法悅),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알아감으로써,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 진리[法]를 깨달음으로써 얻는 즐거움[樂].
*해인삼매(海印三昧) ;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의 마음 속에는 과거와 현재·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2)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큰 깨달음.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화엄경(華嚴經) ; 본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이 경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표명한 경전이다.
3가지 번역이 있는데, 60권은 동진(東晋)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 번역이고, 80권은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 번역, 40권은 당(唐)의 반야(般若) 번역임. 이 가운데 40권은 60권과 80권의 마지막에 있는 입법계품(入法界品)에 해당하며, 십지품(十地品)과 입법계품(入法界品)만 산스크리트 원전이 남아 있다.

[참고] 법장현수(法藏賢首) 스님의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보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용궁(龍宮)에 가서 대부사의경(大不思議經=화엄경)을 보았는데, 상본·중본·하본 3가지 본(本)이 있었다. 그 중에 상본(上本)이 십삼천대천세계미진수(十三千大千世界微塵數)게송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이었다 한다. 중본(中本)은 49만 8800게송 1200품(品)이고, 하본(下本)은 10만 게송 38품이었다 한다.

용수보살이 상본과 중본은 사바세계 사람들 마음의 힘으로서 능히 가질 수 없으므로 전하지 않고, 하본(下本)을 외어 세상에 전하였고 또 그것을 간략히 한 약본(略本)이 80권 본, 60권 본이 되었다 한다.
일사천하미진수품(一四天下微塵數品)은 ‘미진수(微塵數 셀 수 없는 무한수)’의 품(品)으로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모든 현상—삼라만상(森羅萬象) 전부가 그 화엄경을 이루고 있으며, 곧 비로자나(毘盧遮那) 전신체(全身體)로 우리 개개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말한다.(전강선사 법문 275번 참고)
*자내증(自內證) ; 자신의 마음을 깨달음. 자신이 직접 체득한 깨달음. 스스로 체득한 내면의 깨달음. 자내소증(自內所證), 자심내증(自心內證).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 ; 십이부경(十二部經)은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서술 형식 또는 내용을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십이부경전(十二部經典)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팔만사천법문.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 : 寂)과 동(動 : 光)의 본래(本來 : 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絶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경(危境 위태하다·위태롭다·불안하다·두려워하다 위/지경·경계·경우·처지 경) ; 위태로운 처지(虛地)나 지경(地境).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전법게(傳法偈) ; 선가(禪家)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법(法)을 전(傳)하는 내용의 시[偈].
*(게송) ‘심수만경전~’ ; 『직지(直指)』 (白雲和尙 抄錄, 조계종출판사) 63쪽 마나라(摩拏羅) 존자 게송 참고.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게송) ‘천상천하무여불~’ ; 찬불게(讚佛偈).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
『본생경(本生經)』에서 말하기를, 아주 먼 과거에 저사(底沙)라는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때 두 사람의 보살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석가(釋迦) 보살이라 했고 또한 한 사람은 미륵(彌勒) 보살이라 했다.

어느날 저사불께서 두 보살을 관찰해 보시니,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 보살이 앞서 있으나 중생 교화의 면에서는 석가 보살이 앞서 있어서, 저사불은 석가 보살로 하여금 속히 부처를 이루게[成佛] 하기 위하여 설산에 올라가 보굴(寶窟) 속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 火定)에 드셨다.

이때 석가 보살이 산에 올라가 약을 캐고 있었는데, 저사불께서 보굴 속에 앉아 화광삼매에 들어 밝은 광명을 내뿜는 것을 보자, 그 거룩한 모습에 어찌 할 수 없어,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또 다른 발을 들어서 걸어가지를 못하고 한 발을 들은 채로 합장하고, 환희하며 믿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향하여 일심으로 우러러 뵙되 잠시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7일 낮과 7일 밤을 있었다.
여기에서 그 칠일칠야(七日七夜) 시일이 지나가면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님 같으신 이 없으시고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에서도 견줄 이 없도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존재하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그 어느 것도 부처님에 비할 바 아니네.

이 게송을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讚佛偈)라 하는데, 7일 7야 동안 세존(世尊)을 자세히 관하되[諦觀] 조금도 눈을 깜박이지 않으시니, 이로 인해 아홉 겁(九劫)을 뛰어넘어 91겁 만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를 얻으셨다.
[참고] 『대지도론(大智度論)』 (4권) '初品中菩薩釋論第八' 참고. 『전등록 2』 (동국역경원) p133 참고.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법문 내용]

(게송)일견명성몽변회~ / 섣달 초여드레,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도를 통하셔서 성도(成道)를 하신 날. 불교의 사대명절(四大名節) 가운데에 제일 의(義) 깊은 날 / '알라말라', '우타카' 부처님 깨닫기 전의 두 스승 / 붓다가야(buddhagayā) 근처에 니련선하(尼連禪河) 가까이에 있는 숲속에서 수행 /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 /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華嚴經)』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 12년과 방등경 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그렇게 해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다 / 불법(佛法)의 위대성 /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

①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있으면서 생사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이 처음으로 정법을 믿는 단계 / ②올바르게 수행을 함으로써 그 생사 없는 진리를,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됩니다 / ③생사 없는 이치를 일단은 보아야 마침내는 그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때에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할 수가 있게 되는 것.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다.

(게송)천상천하무여불~ /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어떻게 해서 수행을 하셨으며, 무엇을 깨달으셨으며, 깨달으신 결과 우리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셨느냐?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불법을 믿고, 어떻게 닦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 점이 우리에게는 보다 더 소중한 일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실로 수도(修道)의 마음을, 도를 닦을려고 마음을 내면 누구나 여러 가지 형태의 악마(惡魔)와 투쟁을 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무력의 마구니나, 부드러운 마구니와 싸워서 지면 그대로 그 마구니의 노예가 되는 것이며, 그 마구니와 끝끝내 싸워 가지고 내가 이기면 출세간(出世間)의 새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마구니가 도리어 귀화해 가지고 나의 수호신이 되는 것이며, 나를 방해 치던 모든 마구니의 권속들은 나를 도와주고 아껴주는 나의 동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나를 방해 치고 못살게 굴고 잠시도 나의 마음 편안해질 기회를 주지 않던 그런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는 일전(一轉)해 가지고 나의 보리(菩提)로 깨달음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유식(唯識)에서는, 범부(凡夫)에 있어서의 식(識)은 전5식(前五識)—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전5식이나, 의식(意識)—제6식(第六識)이나, 7식(七識)이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 이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그 식(識)이 변해서 지(智)로 변한다」 이것입니다.

평등성지(平等性智)나 묘관찰지(妙觀察智)나 대원경지(大圓鏡智), 성소작지(成所作智)와 같은 이런 지(智)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닫기 전의 마구니들이, 깨달으면 그것이 나의 수호신이 되며, 나의 권속이 되며, 나의 위없는 깨달음으로 변한다는 말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으면 대관절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라 가지고 도를 깨달으신 날인데,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대단히 이 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대관절 무엇을 깨달랐을까? 깨닫고 나면 그 경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생사해탈한다. 생사 속에서 생사가 없는 영원한 진리의 세계에 들어간다’ 막연하게 이렇게들 말을 하고 그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무엇을 깨달으며, 깨달은 경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그 경계는 알 수가 없다고 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 12부경전(十二部經典)을 설하셔 가지고 80세를 일기로 해서 열반에 드셨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 따라서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으되, 실지에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그 적멸하신 채 그 침묵 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일부분(極一部分)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根機) 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 따라서 조금 열어 보여주신 것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시고자 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내증(自內證)의 최고의 법문은 입을 통해서는 다 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타난 것은 그 일부 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그 위대한 법(法)은 온 법계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 · 달 ·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이며,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고 열매를 맺고, 겨울이 돌아오면 다시 뿌리로 다 돌아가는 이러한 자연 현상(自然現象)과, 물이 흐르고 새가 날으고 구름이 모았다가 흩어지는 모든 현상, 또 이 사람과 동물들이 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는 이런 현상 모든 것이, 모든 이 천상계가 이루어졌다 잠시 머물렀다가 또 변질이 되어 가지고 무너져버리는 모든 현상이, 있는 고대로 이것이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로병사요, 성주괴공이요, 무상하고 의지할 것 없는 꿈이요, 그것을 따라서 몸부림치고 헤매는 중생은 바로 그것들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현장이지만, 자성(自性)을 깨닫고 보면 진리를 깨닫고 보면 1초 전의 생사요, 지옥이요, 고해(苦海)가 바로 적광토(寂光土)요, 극락세계(極樂世界)요, 부처님의 끝없는 진리의 세계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성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정말 이 세계는 사방에서 불이 훨훨 타고 있고, 지금 타 들어오고 있고, 우리도 그 불에 의해서 오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러한 위경(危境)에 놓여 있지만,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한 사람에게는 훨훨 타는 불은 나로 하여금 해태(懈怠)를 부릴 수 없게 해주는 스승의 불보살(佛菩薩)의 채찍이요, 인간적으로 또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핍박해 오는 모든 괴로운 조건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해태를 부릴 수 없고, 한 눈을 팔 수 없게 하는 그러한 불보살의 거룩한 채찍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발심(發心)을 한 사람과 발심을 못한 사람에 따라서는 모든 것들이—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그렇게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하물며 깨달음을 얻은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찰나간(刹那間)에 어제의 마구니는 정법을 수호하는,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변하고,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던 원수는 나의 도반(道伴)이요, 나의 스승이요, 나의 영원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해서 팔만사천의 번뇌(煩惱)의 마구니가 일전(一轉)해서 무상대각(無上大覺)으로 변함에 있어서이겠습니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모든 현상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경계(境界)를 쫓아서 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발심(發心)을 해서 진정한 수행에 들어간 사람은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그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함으로써 ‘참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믿기도 대단히 어려웁고, 또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는 또 어렵고, 또 그 이치를 깨달라 가지고서도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까지 되기에는 정말 어려운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놓고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곳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 우리는 생사 없는 영원한 안락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부처님 같은 그러한 위대한 성현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우리 자신도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실다웁게 믿고, 실다웁게 닦아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리도 부처님과 똑같은 성현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佛法)의 위대성, 불법의 세계성, 불법의 우주성은 우리 중생, 죄 많은 중생, 업(業)이 두터운 중생도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하면 우리도 영원한 진리의 참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7. 2. 17:41

 

 

((No.245))—1984년(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회(84.08.11) (83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0분.

 

 

(4/4) 약 21분.

 

 


(1/4)----------------

다생원채기어친(多生怨債起於親)한데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증위낭자편련객(曾爲浪子偏憐客)이요  관애탐배석취인(慣愛貪盃惜醉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여. 다생(多生), 무량겁(無量劫) 원수가 친한 데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 말이여.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이라. 그러기 때문에 다생에 사람 아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고 지내면 친해지고, 친해지면 웬수가 되기 때문에 웬수를 맺고 싶지 않거든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아니한 것이 제일이다 그 말이여.

증위낭자(曾爲浪子)라 편련객(偏憐客)이여. 일찍이 방랑 생활을 해 보았기 때문에 치우쳐 객(客)을 불쌍히 여긴다 그 말이여. 자기가 직접 고향을 떠나서 타향살이, 방랑자 노릇을 많이 해 봤기 때문에 객을 보면 지나치게 그 사람에게 동정심이 가고, 그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다.
관애탐배석취인(慣愛貪盃惜醉人)이라. 내가 참!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많이 먹고 과거에 그랬기 때문에 어디에서 술취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사정을 내가 충분히 이해가 되고 동정이 가더라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무량겁(無量劫)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갖은 고행(苦行)을 겪으면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으시고, 손바닥만한 땅도 중생을 위해서 내 몸을 희사(喜捨)하지 아니한 곳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수없이 많은 몸을 중생을 위해서 부처님 목숨을 보시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백 겁 동안을,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동안을 그렇게 많은 고행난행(苦行難行)을 겪으면서 성불하실 때까지 그러한 경험을 가지셨기 때문에 중생을 보면 무량겁으로부터서 오면서 부처님 자신이 겪었던 일이 있기 때문에 중생의 그 윤회(輪廻)하는 모습을 보면, 고해(苦海)에 빠져서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치우치게 지나칠 정도로 불쌍하게 여기시더라 그 말이여.


오늘은 갑자년 7월 15일 우란분재(盂蘭盆齋) 날입니다. ‘우란분’이라 하는 말은 ‘구도현(救倒懸),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 꺼꾸로 매달렸느냐?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에서 꺼꾸로 매달린 채 갖은 고문을 당하고, 하룻밤 하루낮에 만 번을 죽고 만 번을 살아나는 그러한 고통을 받고 계시는데 ’그 선망부모를 구제해 드리는 날이다’ 그래서 우란분이라 그래. '우란분'이란 말은 인도말로써 우리말로는 꺼꾸로 매달리는 것을 해방시켜 주는 날이다.

왜 오늘 그 꺼꾸로 매달린 선망부모를 해방을 시켜 드리는 날이냐 하면,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 십대제자(十大弟子)가 계시는데, 그 십대제자 가운데에 신통이 제일가는 목건련(目犍連)이라 하는 존자가 계셨는데, 그 목련존자의 속가의 어머니는 이름을 청제부인이라 했는데, 그 어머니가 행실이 좋지 못하고 또 심성이 옳지 못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여러분께서 「지옥문」이라 하는 영화를 보셨으면 잘 아시겠지만, 그리고 또 『목련경(目連經)』을 보시면은 잘 아시겠지마는 그 청제부인이 행실이 좋지 못하고 심성이 옳지 못하고 살생을 많이 하고 그래 가지고 결국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청제부인의 아들 목련존자가 출가해 가지고 신통(神通)을 얻어 가지고 그 ‘어머니가 어디서 무슨 고통을 받고 계신가‘ 하고 떠억 관(觀)을 해 보니까, 지옥에 떨어져서 차마 볼 수 없는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받고 계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신통력으로 지옥에를 가 가지고 그 어머니를 만나서, 목이 마르고 배고픈데 물을 주면 그 물이 피가 되고, 밥을 주면 거기서 불이 되어 가지고 목이 훨훨훨훨 타. 아무것을 주어도 아무 효과가 없고 오히려 더 고통만을 주게 됐더라 그 말이여.

그래서 다시 부처님 계신 데로 와 가지고 부처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저의 모친이 생존 시에 많은 죄업을 짓고, 현재 저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계시니 저를 생각해서라도 그 모친을 구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간청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사랑하는 제자 목련의 청을 듣고서 “네가 그 모친을 구제하고저 하거든 칠월 백종날—여름 해제하는 날, 모든 선원에서 해제를 하고 대중들이 한군데 모여서 자자(自恣)회를 할 때에 그날을 기해서 백 가지 맛있는 음식과 과일을 부처님과 그 부처님 제자들에게 공양을 해라. 그러면 부처님과 청정한 부처님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그 공양을 받아 잡숫고, 그리고 그 청정한 마음으로 축원을 해 주시면 그 공덕으로 지옥의 무서운 고통으로부터 구제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그 방법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목련존자는 그길로 나가서 탁발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해제날을 기해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에게 백 가지 과일과 음식을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 공덕으로 지옥의 문이 열려서 목련존자의 어머니 청제부인은 지옥고를 벗어나 가지고 천상에 태어나시게 되었다. 여러분이 『목련경』을 읽으시면 좀 더 소상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그날 목련존자가 어머니 청제부인을 천도(薦度)해 드리는 그것이 시초가 되어 가지고, 해마다 칠월 백중(백종)이 되면은 모든 불자(佛子)들이—동남아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불교를 믿는 나라에서들은 백종날을 기해서 백 가지 음식을 공양을 올린다 해서 백종(百種)이라 그러거든. 백종날 이렇게 우란분 천도재를 삼천년을 두고 오늘날까지 그것을 봉행(奉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천도된 그날을 기해서 일제히 지옥문을 열고서 목에 팔목에 발목에 모다 채워 놓았던 쇠사슬을 다 풀어주기 때문에, 오늘도 지금 이 용화사 법보선원 법보전 안에도 우리의 무량겁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이 법당에 가득히 와서 계십니다. 더군다나 이 법회가 시작하기 전에 그러한 우리의 선망부모 또 우주법계에 가득하신 모든 영가(靈駕)들을 다 이 자리에 법으로써 청해 모셨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은 그러한 여러분의 선망부모를 위해서 모두가 다 동참을 하셨고 또 지극정성으로 천도를 해 드리려는 그 정성이 넘쳐흐르고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그러한 영가들은 다 천도가 되실 것입니다.

‘다생에 웬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니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않는 것이 제일 좋다’ 이 게송을 여러분들이 들으시고 ‘과연 그렇기는 그렇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아니할 수가 있을까?’
알고 지내면 친해지기 마련이고 친해지면 나중에 언젠가는 웬수가 된다니—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을 친(親)이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며, 알고 지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이여.
여기서 말하는 ‘친하다’고 하는 것은 중생의 오욕락(五欲樂)을 위한 정으로 얼크러진 친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정법을 뿌리로 해서 서로 맺어진 그 친한 것이야 친하면 친할수록 모든 업을 소멸을 하고, 마침내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고(生死苦)를 해탈할 수 있는 중요한 인연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중생의 사욕(私慾)을 충당하기 위해서, 오욕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알고 지내고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그 뒤끝은 물어볼 것도 없이 웬수로 맺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맺은 그 인연으로 금생에 부모 자식 간이 되고, 형제자매가 되고, 또 부부간이 되고, 친구 간이 되고 이렇게 해서 일가친척이 되고, 그러한 관계가 전부 과거로부터 짓고 심고 맺어온 그 원인으로 해서 금생에 만나지게 됩니다마는, 과연 그 맺은 인연이 오욕락, 중생의 정으로 얼크러진 것이냐, 또는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데에 있어서 그런 청정한 인연으로 맺어졌느냐는 여러분이 잘 관찰을 해 보면 짐작이 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양친(兩親), 부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참!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부모도 그 자식 밖에는 모르고, 그렇게 해서 살다가 그 자식을 결혼을 시켰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며느리를 맞이했는데, 결혼을 해 가지고도—과거에 두 부모가 자식을 갖다가 너무 귀여워하고 사랑하고, 자식도 다 커 가지고서도 항시 어머니 품에서 자고 그러다가 결혼을 하니까, 결혼을 해 가지고도 자기 아내한테는 잠시 형식적으로 조금 자는 척하고는 금방 또 어머니한테 뽀르르 가 가지고 어머니 품안에서 자고 그러니까, 어머니는 ‘참 결혼을 해 가지고도 이놈이 마음이 변하지 않고 엄마를 그렇게 사랑하는구나’ 참 흐뭇하게 생각을 했지만,
아! 신부 입장에서는 결혼을 했는데 자기하고 같이 하룻밤을 정답게 지내지 아니하고, 시간만 있으면 시어머니 방으로 가버리고 가버리고 하니까 혼자 본의 아니게 독수공방(獨守空房)을 하게 되니, 이런 참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살다가, 참다 참다 못해 나중에는 정신병이 걸릴 정도로 정신 쇠약(精神衰弱)이 걸려 가지고, 그렇게 거의 미친 사람처럼 막 울고불고 떠들고 바가지를 긁고 그랬다.

만나기만 하면 부부간에 싸우고 그러니까, 그 신랑도 마지못해서 달래기 위해서 어머니 방에는 차츰 덜 가고 자기 아내를 위안을 해 주고 그러는데, 그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놈이 결혼을 하더니 처음에는 잘 오더니 차츰차츰 계집한테 빠져 갖고 오지도 않는다’ 해 가지고는 영 이 속에 섭섭하고, ‘그놈이 에미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에미 애비의 사랑을 배반을 한다’ 해 가지고 굉장히 노엽게 생각을 해.
너무너무 노엽게 생각하고 밤잠을 못 자고, 그 아들이 자기 방에만 오면 가슴이 조금 후련하고, 며느리 방에만 가면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면서 잠도 안 오고 부애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다가 어머니가 병이 나고, 도대체 이리 가자니 어머니가 안되었고, 저리 가자니 아내가 안되었고 중간에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이 되었지마는, 그래도 우선 '자기 부모는 부모고, 아내는 아내다' 해 가지고 주로 아내와 생활을 같이 하고 그러는데, 그 어머니가 병이 나 가지고 공양도 못 자시고 그러다가 너무 속을 썩어 가지고 중풍이 걸려 가지고는 대소변을 받어 내게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도 또 병이 나 가지고, 두 분이 나란히 누워서 그러니 누가 그 병수발을 하게 되냐 그 말이여.

결국은 그 아들과 며느리가 병수발을 하게 되었는데, 아들은 자기 부모니까 성의를 다해서 할려고 그러고, 며느리는 은근히 속으로 감정이 좋지 못해 가지고, 처음에는 좀 하는 척하더니, 그 방만 들어가면 너무 대소변을 막 이부자리에다가 싸고 그래서 도대체 그 방만 들어가면 창자가 뒤틀려서 들어갈 수가 없고, 처음에는 억지로 참고 좀 했는데 나중에는 창자가 뒤틀리는 통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고. (처음~21분30초)





(2/4)----------------

‘차츰차츰 오래 앓게 되면 효자가 없다’고 옛날부터서 그런 말이 있는데, 한 달, 두 달, 반 년, 1년, 이태, 3년 하는 동안에 병 증세는 점점 악화가 되어서 꼼짝을 못하면서 먹기는 영판 많이 먹고 싸기도 많이 싸고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니 자연히 그렇지 않아도 별로 효심이 없었던 며느리라 ‘빨리 어떻게 그냥 죽어 버렸으면, 제발 좀 빨리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항시 가지고, 시부모 안 듣는 데서 신랑한테도 부애만 나면 ‘왜 죽지도 않고 똥만 퍼싸고 자빠졌다’고 그리하는데, 그것을 어찌 시부모가 병환이 나서 누워 있다고 해서 왜 그 눈치를 모를 것이냐 그 말이여.

어떻게 속이 상하지만 억지로 죽지는 못하는 것이고, 그렇게 아프면서도 암만 먹어도 배는 찰 줄을 모르고 밤낮 배가 고프다 그 말이여. 갖다 주면 그저 쏵쏵 쓸어 먹고 돌아서서 똥을 퍼내고 그러는데, 참 환자도 여름에 더울 때에 견디기 어렵고, 겨울에는 추워서 견디기 어렵고, 방에다가 그저 영감님과 할멈이 번갈아가면서 똥을 싸니 참 본인들도 못 견딜 일이고, 자식과 며느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 나중에는 하도 똥을 치기가 귀찮으니까 밥을 조끔씩 줄여 가 조끔씩 주는데, 인자는 배가 고파서 못살겠어. 너무너무—한 달, 두 달을 조끔씩 먹으니까 자기가 눈 똥이라도 먹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배가 고프다 그 말이여.
그래서 "밥 가져오라"고 "이년이 나를 굶어 죽일라고 그런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나중에 북북 기어 나오니까 밖으로 문을 처닫고 철창(鐵窓)질을 해서 나오지 못하게 가둬 놓고서, 똥을 싸서 뭉게거나 말거나 내비두고, 구녁으로 밥만 조금씩 넣어주고 아! 이렇게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다가 밥도 형식적으로 조금씩 넣어 주니까 배가 고파서 기진맥진하다가 소리소리 지르다가 또 쓰러지고, 그리돼 가지고 결국은 처음에 영감님이 먼저 돌아가고, 그다음에 할머니가 죽었습니다.

죽은 뒤에는 장사(葬事)는 아주 거판스럽게 마을 사람 체모(體貌)도 있고 그러니까 잘 지내서 장례를 치뤘는데, 머지않아서 그 며느리는 태기(胎氣)가 있어서 쌍둥이를 낳는데, 처음에 날 때 울음소리가 없어. 그래서 '이것이 벙어리라냐 무엇이다냐?' 의심을 했는데, 울음소리는 없었지만 이것이 차츰차츰 젖도 먹고 그래서 쌍둥이를 아주 예쁘게 낳았다 그 말이여.

예쁘게 낳아서 참! ‘금이야 옥이야’ 하고, ‘이것 두 번 낳는 수고하지 아니하고 한번에 나 버렸으니 잘 키워야겠다’ 하고, 엄마 아빠가 둘이 서로 하나씩 안고서 너무너무 귀여워서 못 견디고, ‘이런 고생 안 하고 진즉 났으면 좋았을 텐데 인제사 났다’고, 그렇게 부모가 오래오래 고생을 하다 돌아간 것을 아주 ‘그나마도 돌아가셔서 잘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애들을 기르는데,
아! 이 애가 돌이 지내가도 일어나지를 못하고, 두 살이 되어도 일어나지를 못하고 마냥 엎드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누워서 버르적거리기만 하지 일어나지를 못하고, 억지로 일으켜서 앉어도 비그르르 쓰러져 버린다 그 말이여.

척추가 어떻게 연골동물처럼, 빳빳이 서지를 못하고 마냥 누워서 비글비글 한다. ‘그것 참 이상하다’ 하고 아무리 허리를 문질러 봐도 소용없고, 일으켜 세워 봐도 소용없고, 3살, 4살, 다섯, 여섯, 일곱, 열이 되도록 종래 일어나지를 못하고, 밤낮 1년 열두 달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비글비글비글 한다 그 말이여. 그러니 사람이라면은 돌이 지내가기 전에 다 일어나 앉기도 하고, 또 돌이 지나가면서 일어서서 걷기도 하고 그러는 건데, 밤낮 누워서 빈들빈들 꼭 뱀처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것을 어떻게 하냐 그 말이여.
엄마 아빠가 그나마 항시 들여다보고만 있어야지, 조금 딴 데로 가서 일을 보거나 한눈만 팔면 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울고, 도대체 밖에 나가서 일도 못하고, 어디 더군다나 갈 데가 있어도 가도 못하고 참! 고약하게 되었어.

그래도 그것이 불쌍하기가 그지없지마는 자식이라 어떻게 하는 것이냐 그 말이여. 죽일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참! 자식만 쳐다보면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이 불쌍하고 가슴이 아프지만 그 어떻게 하느냐 그 말이여.
그놈이 차츰차츰 커 가지고 10살 20살 되는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질까지 고약해져 가지고 조금만 비위가 틀렸다 하면은 누워서 온갖 것을 다 때려 부수고 심술을 부리는데 걷잡을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어디서 손님이 와도 챙피하니 저 뒷방에다 갖다 가둬 놓고 못 나오게 하고, 그렇게 하면서 또 자식을 났는데 그땐 아주 예쁘고 좋은 딸도 낳고 자식도 낳고 했는데, 그 애들도 나이가 차츰차츰 들어서 혼사 문제도 있고 그러니, 그 처음에 낳은 쌍둥이 자식 때문에 그 애들 혼사 관계도 지장이 있을 것 같고 하니까, 영판 뒷방을 하나 치워 가지고는 그 속에다가 무슨 원숭이나 짐승 키우듯이 뒷방에다 가둬 놓고 그것을 키우는데, 참!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그것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필시 그 누워서 여러 해를 병고(病苦) 생활을 하면서 사랑하는 자식과 며느리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효도를 받지 못한 채 고생을 하고 똥오줌을 싸다가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품은 채 숨을 거둔 그 부모가 죽어 가지고 바로 자기집 자식으로 태어났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원래 고조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제일 인연 깊은 집이 바로 자기집이니까, 자기집에 저 밑에 손자로 태어나고 또는 손녀로도 태어나고, 또 때로는 다른 집에 태어나 가지고 며느리나 손주며느리로 또 그 집에 와서 살게도 되고 그러기 마련인 것입니다.


노년(老年)에 사랑하는 자식과 며느리로부터서 참 형용할 수 없는 불효를 받고 고통을 받고, 죽을 때 어떻게 해서 죽었냐 하면 앓다가 그냥 죽은 게 아니라, 너무 음식을 많이 먹을려 그러고 똥오줌을 한없이 싸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도대체 아들 며느리가 살라야 살 수가 없어. 밤잠도 못 자고 그러니까, 너무너무 귀찮고 그러니까 밥을 쪼금씩 주어 가지고 결국은 굶겨서 죽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에 편안한 마음으로 숨을 거두어야지, 너무 깊은 애착에 빠져서 죽거나 원한에 사무쳐서 죽으면 반드시 좋은 곳에 가서 태어나기가 어렵고,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원한 때문에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 원수 복수를 갚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 가지고 상대방을 갖다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갖은 복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친한 데에서 원수가 생긴다' 그랬는데, 원한이 깊으면 그 깊은 원한은 반드시 친한 데에서 생겨.

부모가 어찌 자식을 미워하고 복수할 생각이 있을까마는, 지나치게 배신을 당하고 너무너무 불효를 당하고 너무너무 억울하면, 그 억울한 마음으로 ‘이놈! 이년!’ 하고 생각 생각이 속으로 그 원한을 갖다가 다지고 또 다져서 그래 가지고 눈을 거두어 보시라 그 말이여. 갈 곳 없이 그 집에 자식으로 태어나서 그 집 살림을 망해 먹거나, 부모의 속을 갈기갈기 찢어서 고춧가루와 소금을 흩여 놓은 것처럼 그렇게 부모 속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안이 복을 받고 또 좋은 아들과 딸을 낳고 싶으면, 또 좋은 며느리를 맞이하고 싶거든 반드시 조상과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그래야 그 선망부모가 그 집으로 고마워서 태어날 때에는 효자와 효부로서 그 집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아주 컴퓨터에 넣어도 일호(一毫) 어김이 없을 만큼, 이것은 정확한 인과(因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기도 하고, 금생에 지어서 이 다음 생에 받기도 하고, 금생에 지어서 저 몇 생 뒤에 가서 받기도 할지언정, 한번 지어 놓은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기어코 받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도 세 가지 능(能)치 못한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지은 업(業)을 면(免)하지를 못한다’ 이것입니다. ‘정업(定業)을 난면(難免)이라’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 삼불능(三不能)의 하나입니다마는, 하물며 우리 중생이 지은 업을 어떻게 그것을 면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지어 놓은 죄를 면할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미리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선업(善業)을 짓고, 선업보다도 지은 바 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닦아 간다면,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지체 부자유한 어린이와 어른들이 있습니다. 손과 발이 자유롭지 못하거나 척추가 온전하지 못하거나 하고, 또 언어가 분명틀 못한 그런 사람도 있고, 참! 많습니다. 그런 수가 옛날에 비교해서 더 자꾸 나날이 불어가지 않는가 이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국가에서도 그러한 지체가 부자유하거나 또 척추가 부자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신경을 쓰고는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신경을 써 본들 한번 그렇게 태어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 말이여.
부모에게 불효하고 남에게 억울하게 손해를 끼치고 원한을 심어 놓으면, 어느 집안이고 그런 것이 생겨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생겨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고 불쌍하고 참 그러기는 그지없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추호(秋毫)도 미워하는 생각을 갖지 말 것이며, 원수 같이 생각하지 말 것이며, 남 보기에 챙피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챙피하게 생각을 할수록에 더욱 좋지 못한 결과가 오는 것이고, 그것을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더군다나 '제발 좀 빨리 죽어져 없어졌으면' 그러한 생각을 꿈에도 갖지 말어라 이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면 그 아이는 먼저 알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구나. 나를 죽기를 바래는구나. 내가 이 집에 있는 것을 챙피하게 생각하는구나’ 그 눈치가 빠르기는 육신통 난 사람보다도 더 눈치가 빠른 것입니다. 환히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 한에는 그 사람은 점점 더 고약하게 굴게 되는 것이고, 점점 더 안 죽고 오래 사는 것입니다. ‘한 10년간만 애를 먹이고 가리라’ 이렇게 마음먹었다가도, 자기를 미워하고 죽기를 바래고 챙피하게 생각하면 20년, 30년으로 막 나이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빚을 받으러 왔는데 빚을 기분좋게 갚어 줘야지, 그렇게 기분을 상하게 해 주면서—내가 어거지로 돈을 뜯으러 온 것처럼, 내가 당연히 받을만 해서 받으러 온 빚을 갖다가 생판 억지 빚을 주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빚을 받어가도 시원치 않다 그 말이여.
그래서 참으로 그 빚을 온전히 갚을라면 그러한 지체가 부자유한 불구(不具)한 가족이 있으신 분은 있는 정성을 다 거기다 쏟아야 하고, 조금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어야 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마다 있는 정성을 다 쏟고, 항시 감사한 마음을 갖도록까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 지체가 자유롭지 못한 불구한 그 사람을 대할 때마다 자기의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행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한 일은 없나? 행여나 내가 사람을 차별 대우를 한 일은 없나? 부모에게 잘못한 점은 없나? 형제 간이나 이웃에게 잘못한 것은 없나?’
항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꾸짖고 또 채찍질을 해서 자기를 갖다가 인격을 향상시켜 나가는 데에 좋은 스승으로 삼고,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누워서 신경질을 내고 그것을 보고서 귀찮고 괴롭고 그런 마음을 내지 말고, 오히려 거기서 인내심을 배우고 자비심을 배우고 봉사하는 마음을 배우고, 거기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을 배울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한 스승은 있어서 좋은 것이지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 식구 모두가 저 애를 보고서 배우고 느끼고 서로 화합하고 그렇게 해서 나날이 향상되어 가고 그런다면 자연히 모든 식구가 그 애를 보고서 항시 흐뭇한 눈초리로 그 애를 지켜봐 주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애의 시중을 들어준다면, 그 애는 신경질도 안 부리게 될 것이고, 아주 온 집안 식구들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면서 인연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있다가, 과히 오랫동안 그 집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원한을 다 풀어 버리고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지은 죄가 얼마 만큼 많은가에 따라서 시일은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설사 과거에 지은 업이 많고 빚이 많으면 좀더 오래 머물러 있는다 하더라도, 집안 식구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하게 된다면 구태여 빨리 죽기를 바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21분31초~42분52초)





(3/4)----------------

이건 내가 그러한 사람을 도처에서 그런 것을 봐 왔기 때문에 이러한 오늘 이 우란분재를 맞이해서—가족 인연 관계, 형제간 인연 관계, 부모 자식 간의 인연 관계, 이웃과의 인연 관계가 전부 다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또 그렇게 만나지기 때문에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인과법(因果法)을 깨닫고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해서 자비로써 상대하게 된다면, 웬(怨讐)가 다시 또 은인(恩人)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과거의 업으로 웬수로 만났다 하더라도 그 웬수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도반(道伴)으로서 만나지게 되고, 스승으로서 만나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 간다면, 이것이 바로 온 국민이 화합을 하게 되고, 서로 도웁고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한겨레가 될 것이고, 이러한 정신을 확대해 나간다면 온 세계도 한 가정이 되고 한 가족이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7월 15일 여름 안거(安居)의 해제날입니다. 이 해제날에는 석 달 동안 참선 수행하던 모다 스님네들이 해제를 하고, 또 걸망을 지고서 스승을 찾아가기도 하고 도반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러는 날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출입 왕래를 금하고 다 한군데 모여서 규칙을 지키면서 겨울 석 달, 여름 석 달을 발을 묶어 놓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하면 걸망을 지고 팔방 사방으로 나가는데, 원래 이 결제법(結制法)이라 하는 것은, 안거법(安居法)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는 우기(雨期), 비가 많이 오늘 계절이 있어서 그 비를 피하기 위해서 부득불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절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서 절에서 모두 모여 가지고 정진하다가, 우기(雨期)가 지나면 다시 그 절에서 떠나 가지고 숲속에 들어가서 숲속에서 자고 또 탁발해서 공양을 하고 숲속에서 밤새 정진을 하고, 그렇게 수도 생활을 하기 때문에 결제 · 해제라고 하는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참선(參禪)을 해서 빠른 시일 내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고자 할진대는—오늘 해제를 하고서 걸망을 지고 어디를 가시건 간에 가시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그게 바로 선방(禪房)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하고, 해제 하면 여기저기 걸망을 지고 다니니까 참선을 등한히 해도 되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 왕래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활 속에서 가다듬고 정진하는 그 참선이야말로 힘이 있고 살아 있는 공부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할진대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마치 저 깊은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가지고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우물에다가 눈을 한 짐 져다가 붓고 또 한 짐 져다가 붓고, 수십 짐을 져다 부어도 물에 들어가면 눈이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해 가지고, 암만 수백 짐을 져다 부어도 우물이 차오르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눈을 긁어서 뭉쳐서 져다가 붓고 또 져다가 붓고 그러기를 몇백 짐을 하는데, 그러다 보니 땀이 나고 그렇지만 춥고 더웁고 한 것도 상관없이 계속해서 져다 부어.
하루 종일 져다 붓고, 해가 져도 져다 붓고, 밤새도록 밤잠을 안 자고 져다 붓고, 그저 동쪽에서 져다 붓고 서쪽에서 져다 붓고, 그저 이리 져다 붓고 저리 져다 붓고, 속이 상해도 져다 붓고, 기분이 좋아도 져다 붓고, 그저 배가 불러도 져다 붓고, 배가 고파도 져다 붓고. 이리 해 가지고 1년이 넘어가, 이태가 넘어가, 백 세, 천 세가 되어 가지고 몸을 바꾸어 가면서 져다 부어.

마지막까지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단 한 시간도 등한히 지낸 일이 없이, 자나깨나 그저 눈을 어쨌든지 많이 져다가 부어서, 기어코 그 우물을 갖다가 눈으로써 가득 메울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져다 붓다가 보면, 어느 땐가는 자기가 눈을 퍼다 붓는다고 하는 생각도 없고, 우물 속에 눈이 올라왔나 안 올라왔나 한 것에도 그런 생각도 없고, 인제 지쳤다는 생각도 없고, 그만할려는 생각도 없고, 그저 인자 완전히 거의 아주 열중(熱中)을 하다 하다 못해 가지고 무심(無心)에 들어가 버린다 그 말이여.

조끔 몇 짐 져다 붓고 ‘인제 좀 찼나?’ 또 들여다 보고, 조끔 져다 붓고 ‘인제는 조금 더 올라왔나?’ 이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올라오고 안 오고가 문제가 없어.
그저 죽을 둥 살 둥 눈이 무겁고 가벼운 것도 따지지 말고, 차고 안 찬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져다 부은다 그 말이여. 이러한 정도에 열성(熱誠)을 가지고 참선을 해야만 된다 그 말이여.

겨우 첫 철에 와서 남 흉내 좀 내고 앉아서 해 보면 처음에는 망상이 들입대 일어나더니, 나중에 망상이 조금 잠잠하니까 또 잠이 퍼 오고, 잠이 좀 깰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고, 그렇게 조금 해 보고서 ‘아이고, 암만 참선을 해도 안 됩니다. 저는 인연이 없는 갑습니다. 옛날에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부를 때는 잠도 잘 안 오고 참 좋더니, 참선이 좋다고 해서 해 보니까 맨 잠만 퍼오고 망상만 더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이러거든.

그렇게 한 철 두 철 그나마도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순일무잡하게’—한두 철 해 보고서 ‘그렇게 안된다’고 피렴심(疲厭心)을 내고, 자기는 인연이 없느니, 근기가 약하느니,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할 마음을 낸다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도업을 성취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 깊은 우물에다가 눈 몇 짐 퍼다 붓고서 ‘눈이 차오르지 않는다’고, 그 허부렁한 눈 퍼다 부어 봤자 물에 닿자마자 금방 녹아 버리고 녹아 버리고 하니, 그것이 무슨 놈의 차오를 것이냐 그 말이여.

깊은 우물에 눈 퍼다 붓듯이, 해가 넘고 백천만 겁이 지내도 차고 안 차고 하는 것도 따지지 말고 계속 퍼다 부을만한 그러한 끈기를 가지고 해 나간다면 어찌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마침내는 져다 붓는 놈이나, 우물이나, 눈이나가 전부가 다 하나가 되어서 홀연(忽然)히 어떠한 계제(階梯)를 만나면은 툭! 터져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이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설두세작연하미(舌頭細嚼烟霞味)하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남북동서무정착(南北東西無定着)이요  생애지재일지공(生涯只在一枝筇)이라.
동서남북에 정착한 곳이 없어. 동쪽으로도 가서 공부하고 서쪽으로 가서도 공부하고, 동서남북 아무데라도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일정한 데에 정착이 없기 때문에 ‘생애(生涯)가 지재일지공(只在一枝筇)이여’ 생애가 다못 이 주장자 · 육환장(六環杖)—다 옛날에는 스님네들이 어디 행각을 할 때에는 육환장을 짚고 댕겼던 것입니다. 다못 이 지팡이 하나에 달려 있다 그 말이여.

설두(舌頭)에 세작연하미(細嚼烟霞味)여. 혀끝으로는 무엇을 먹고 사냐 하면은 구름과 안개 연기를 먹고 살아. 산중으로 들로 다니니 자연히 좋은 공기에다가 안개 연기를 마시고 살 수밖에는 없고,
직입천봉갱만봉(直入千峰更萬峰)이다. 바로 천(千) 봉우리, 다시 만(萬) 봉우리를 향해서 들어가더라.

수행하는 것이 한때는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잘되어 가다가 성성(惺惺)하게 잘되어 가다가, 또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이 뒤틀리고 이런다 그 말이여.
그놈을 포행도 하고 단전호흡도 하고 찬물로 세수도 하고 하면서 그 고비를 어렵게 넘기고 나면 한결 정진하기가 수월해지는데, 수월해져 가지고 떠억 화두를 들면 화두가 성성하게 순일하게 잘 들리고, ‘이만했으면 참, 공부 이대로 주욱 되어 가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먹자마자 또 뚝! 변해 가지고 영 또 공부가 안되고.

때로는 잘되다가 때로는 안되다가, 또 안되다가 또 괜찮게 되다가, 괜찮게 되다가 또 잘 안되고, 이러기를 한 봉우리 넘으면은 또 내리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을 다 가서 보면 또 오르막길이 있고, 오르막길을 다 오르면 또 내리막길이, 이것이 마치 천 봉우리를 넘어가면 다시 또 만 봉우리가 있듯이, 이 모양이 마치 길을 가는 데에 봉우리 밖에 또 봉우리가 있고, 또 봉우리 밖에 또 봉우리가 있는 것이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 부은 것처럼 그렇다 그 말이여.

만날 해도 무엇이 얻어지거나 나타나거나 보이는 것이 없이, 만날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할 뿐이다 그 말이여. 이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것이 공부가 잘못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그렇게 콱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하고 그러니까, 인연이 없어서 공부가 잘 못된 줄 알고 걱정들을 하시고, 와서 호소를 하시는데 사실은 꽉! 맥혀서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그 경계가 공부 옳게 되어 가는 그 상태인 것입니다.

무엇이 환하고,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알아진 것이 있고 그러면은 그것이 참 좋을 것 같은데 그건 공부가 잘못 비뚤어져 들어가는 것이고, 어문간 데에 처박혀서—멧돼지 쫓아가다가 한눈 파는 거와 마찬가지여서 멧돼지를 잡으러 쫓아가면 한눈을 팔지 않고 계속 그 멧돼지 뒤를 따라서 잠깐도 한눈 팔지 않고 쫓아가야지, 멧돼지 잡으러 쫓아가다가 골마리를 까고 이를 잡고 있어야 되겠느냐 그 말이여. 그러다 보면 멧돼지는 순식간에 저 몇백 미터 도망가 버리면 멧돼지는 영영 놓쳐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잘된다고 좋아하지 말 것이며, 잘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 잘되어도 지혜롭게 잘 단속해 나가야 하고, 답답하고 그러더라도 조금도 짜증을 내지 말고 지혜롭게 그 고비를 심호흡, 단전호흡을 하면서 잘 넘기면 그게 공부가 한 걸음 또 수월하게 되어가는 것이니까.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이 누누이 말씀을 하시기를 '그 꽉! 맥혀서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한 그러한 경지야말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공부가 진취할 징조이다. 그러니까 그런 경계를 당하거든 짜증을 내고, 이 공부가 안될라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하지 말고, 그러한 고비를 어쨌든지 지혜롭게 잘 공부를 뽑아 나가도록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42분53초~62분44초)





(4/4)----------------

해제를 하시고 어느 선방에를 가시던지, 다시 또 우리 용화선원에 산(散)철 결제에 들어오시던지, 또 신도 여러분들께서도 지난 석 달 동안 그 무더위 속에서 별 탈 없이 잘 정진들을 하셨습니다 오늘 해제를 하시고 댁에 가시더라도 여기서 석 달 동안 지내시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세수하시고 떠억 한 시간 두 시간씩 정진을 하시고, 낮에도 그저 손자 보면서, 가정 일 도우면서, 집에 계시거나 어디 외출을 하시거나,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라고, 또 다시 금년 겨울 결제 때가 오면은 또 와서 방부를 들이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 겨울 결제는 금년에 10월 달에 가서 윤달이 들어서 10월이 첫째 10월이 있고, 그 다음에 윤10월이 있습니다. 윤10월에 결제를 할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넉 달이라고 하는 세월이 있습니다. 춥지도 덥지도 않는 그러한 계절인 만큼 어쨌든지—석 달 동안 애써서 여름 석 달 동안 하시다가 그냥 팽개쳐 버리고 그럭저럭 지내면 애써서 쌓아올린 탑이 다 와그르르 하니 무너져 버리거든.
10월에 가서 다시 밑에부터서 다시 쌓을라면 또 큰 힘이 들 것입니다. 그 탑을 갖다가 잘 허물어지지 않도록 간수를 하시고, 댁에 가서도 계속해서 그 탑을 쌓아올려 놓으시면 10월에 가서 그 뒷을 이어서 하신다면 훌륭한 탑을 쌓으시게 될 것입니다.

결제 때 모여서 정진하신 것은 해제 때 생활 속에서 시끄러운 속에서 잘하기 위해서 결제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도(道)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는 것입니다. 스님네라고 해서 꼭 도를 닦아야 하고, 세속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안 닦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에 계신 분일수록에 도를 더 열심히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세속에 사시면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얽혀서 업을 많이 짓게 되고 도 닦을 기회는 점점 희박하기 때문에, 그럴수록에 몇 배를 더 노력을 하고 애를 써야만 다소 공부가 되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내생(來生) 일을 생각하고, 장차 일을 생각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지난 일요법회 때 이 용화선원에서 간행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을 그때 참석한 사부대중 여러분께 노나 드렸는데, 그때는 발견을 못해서 그냥 드렸는데, 노나 드리고 나중에 살펴보니까 176 페이지 다섯째 줄의 꼭대기에 ‘충언(忠彥)’이라 한 한문 글자 ‘충(忠)’ 자가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글로 되어 있고 그 밑에 한문이 있으니까, 여러분이 간단히 잘 살펴보면 아실 수 있으니까 별 문제가 아닌데, 206 페이지 여덟째 줄에 가서 글자 석 자가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글자 석 자가 ‘전(剪)’ 자—‘앞 전(前)’ 자 밑에 ‘칼 도(刀)’ 한—‘깎을 전(剪)’ 자 하고, ‘물리칠 각(却)’ 자 하고, ‘떳떳할 상(常)’ 자, 이 한문 글자 석 자가 완전히 빠졌어요.

그래서 그 석 자와 ‘충언’이라고 하는 두 글자를 인쇄를 해서 갖다 놓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글자를 얻어 가지고 가서 댁에 가셔서 그걸 붙이셔도 좋고, 이 다음 법회 때 언제라도 그 책을 가지고 오시면 사중(寺中)에서 그걸 정확하게 붙여 드릴 수가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그 책을 가지고 오시면 여기서 정확하게 그 자리를 붙여 드리고자 하니까, 이 다음에 오실 때 그 책을 가지고 오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맨 끝에 ‘찾아보기’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찾아보기에 페이지 수가 2페이지가 틀려 있습니다. 지난 번에 책을 노나 드릴 때 그것은 말씀을 드려서 잘 아실 줄 압니다. 그러니 책을 한번만 절에를 가지고 오시면, 이 세 군데 문제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도록 교정을 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때 일요법회 때 참석 못하신 분은 사무실에 오시면 책을 한 권씩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노나 드릴 책은 일부 교정을 봐 놨습니다마는 아직도 다 볼라면 한번에 다 볼 수가 없어서 우선 급한 대로 봐 놨으니까, 지난 일요일 때 못 가져 가신 분에 한해서 사무실에 오시면은 한 권씩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백종날, 우란분(盂蘭盆)을 맞이해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그러한 날입니다. 이 법문이 끝나면 우리의 선망부모와 인연 있는 모든 영가(靈駕)들을 천도하는 법요식이 시작이 되겠습니다.

우리의 선망부모가 지옥문이 열리고, 아귀도의 문이 열려서 모다 이 도량에 오셨는데, 여기에 동참을 하시지 아니하면 영가들이 왔다가 내 아들, 내 며느리, 내 가족이 안 왔을 때에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다행히 이 더움을 물리치시고 원근에서, 저 강원도 · 전라도 · 경상도 먼 데에 계신 분들이, 여기에 만년위패(萬年位牌)를 모신 만년위패 법보재자들이 이렇게 참 많이 운집을 하셔서 우리의 조상과 선망부모는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하시고 여기서 법문도 잘 들으시고 또 공양도 배불리 맛있게 공양을 드시고, 그리고서 좋은 곳으로 이고득락(離苦得樂)하시고 다시 또 인도(人道)에 환생(還生)을 하실 때에는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다시 돌아오시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한 선망부모를 생각할수록에 우리는 살아계신 부모님, 시부모님께 효도를 하시고, 또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은 ‘나한테, 인제 봐라. 법문을 들어 봐라. 너희들이 당연히 효도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 가지고 목에다 힘을 주고서, 인자 아주 큰 효도를 받을 폭을 대고 뒤로 자지바지하실 것이 아니라 ‘부모가 반효자 노릇을 해야 한다’ 하는 그러한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효도를 안 할라야 안 할 수 없도록 어른들이 그렇게 성격을 쓰시고 행동을 하신다면, 어떠한 아들이나 어떠한 며느리라도 그 어른한테는 효도를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할 것도 없이 첫째, 좀 어른들이 마음을 아랫사람들이 받들기에 편하도록 성격을 쓰셔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성격을 까다롭게 쓴다든지, 괴팍하게 쓴다든지, 사사건건이 간섭을 해 가지고 신경을 돋군다든지 그러지를 말고, 항시 그저 해다 주는 대로 잘 잡숫고, 해다 드린 대로 잘 입고 그러면서 생각 생각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시고, 아들이나 손자나 손녀나 한결같이 인자한 마음으로 상대를 하신다면, 아무리 신경질이 있는 며느리라 하더라도 그 시어머니 시아버지한테 효도를 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외손자나 외손녀를 보면 속속들이 싸 두었던 돈도 주고 맛있는 과자도 주고 하면서, 자기 친손자한테는 인색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그리고 무엇만 잘못한다고 사사건건이 간섭을 하고 그렇다면 어느 며느리가 그 시어머니가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며, 우리 시어머니가 좋다고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첫째,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실 것이며, 마음을 선량하고 부드럽게 가지실 것이며, 같은 말이라도 듣기 좋게 하실 것이며, 사소한 잔소리는 어지간하면 삼가해 버리고, 항시 화두를 들고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지내신다면, ‘우리 어머니 오래오래 사셔요’ 그 며느리마다 다 효부(孝婦)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효부 효자가 되도록 해 주시면 당신 지내기도 좋고, 구태여 며느리를 갖다가—처음에는 양과 같은 며느리를 데려다가 찌럭찌럭 해 가지고 독사 며느리를 만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고부간(姑婦間)에 좋느니 나쁘니 할 것이 아닙니다.
꼭 원인은 며느리한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시어머니한테도 반(半)은 원인이 있는 것이니 만큼 시어머니도 참 이 정법을 믿고 그 정신혁명을 일으켜서 스스로 마음을 편안히 가지신다면 며느리도 효부가 되어서 잘 받들어 모실 것입니다.

언제나 법회 때마다 ‘며느리 보고만 효도를 해라, 자식 보고만 효도를 하라’고 계속 강조를 해 왔는데, 오늘은 어찌 늙은이가 듣기에 큰 숙제를 준 것 같아서, '괜히 오늘 왔다' 하고 혹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노인들도 마지막 가실 길을—앞으로 사시면 10년을 사실런지, 20년을 사실런지 또는 5년 밖에 못 사실런지, 또는 금년에 해를 못 넘기고 가실런지 그건 생사는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가실 때까지 어쨌든지 자기가 평생에 써 오던 못된 성격이 있다면, 그것을 갖다가 탁! 고쳐서 '야! 참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실란가? 영판 마음이 변했다. 아이고, 어째서 돌아가실라나? 저렇게만 성질이 좋으시다면 돌아가시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주셔야 할텐데'
이렇게 마음을 갖다가 탁! 돌이켜서 혁명을 일으키셔서 여생(餘生)을 정말 성스럽고 고상한 품위를 가지시고 여생을 사시도록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듣기 좋은 말은 도적놈이요, 내 귀에 듣기 싫은 거스른 말은 나의 스승이요, 은인이다’ 하는 성현의 말씀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마음씨를 바로 먹고 정법 믿는 불자(佛子)로서 올바르게 살아가고, 연세가 많으신 분은 많으신 대로 ‘내가 인제 팔십이나 됐는데 내 버릇을 네 년이 고칠 줄 아느냐’ 이러한 생각을 가질 것이 아니라, 팔십 아니라 백 살이라도 고칠 것은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금생에 고쳐 놓지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인간으로 태어날 거여. 고약한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면 누가 대우를 해 주며, 누가 받들어 주며, 누가 그 사람을 좋다고 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러니 하루 있다가 돌아가시더라도 못된 성격은 참회(懺悔)하고 고쳐야 하고, 한 시간 후에 돌아가시더라도 못된 성격은 고쳐 놓고 숨을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취면성와불귀가(醉眠醒臥不歸家)하고  일신유락재천애(一身流落在天涯)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조위중유부주(佛祖位中留不住)하고  야래의구숙노화(夜來依舊宿蘆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취면성화불귀가(醉眠醒臥不歸家)하고, 잔뜩 술에 취해서 잠을 자고 또 겨우 잠에서 깨 가지고는 또 누워서 잔다 말이여. 그러면서 집에를 돌아가지를 안 해.
일신유락재천애(一身流落在天涯)여. 한 몸이 동서 사방으로 유랑(流浪)을 하면서 저 하늘갓—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저 하늘갓에 유랑을 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우리가 본래는 부처님인데, 한 생각 잘못 먹은 탓으로 해서 우리의 본고향에서부터서 떨어져 나와 가지고 정처없이 타향살이 신세를 면치를 못하고 있는 것을 비유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부모가 있고, 내 집이 있고 하니까 ‘내 고향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성불(成佛)을 하기 전에는 어디가 있던지 간에 타향살이여. 자기의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고 중생의 오욕락(五欲樂)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방황을 하고 있는 신세다 그 말이여.

불조위중유부주(佛祖位中留不住)하고, 부처와 조사(祖師)의 번듯한 그 자리는 마다하고 나와서,
야래의구숙노화(夜來依舊宿蘆花)여. 오늘 밤에도 또 갈대꽃 밭에서 또 밤을 지새게 되었어.

언제까지 이 타향살이 신세! 우리의 조상이 사시고 부모가 사시고, 그런 우리의 마음의 본고향으로 돌아가게 될런지. 계속 업(業)만 퍼짓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끝없이 하는 동안에 고향 땅은 잡초에 우거지고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와 조상을 위해서, 또 우리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의 자손들을 위해서, 우리는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가서 잡초에 우거진 밭과 논을 갈아 가꾸어서 영원히 쓰고도 남고, 쓰고 남아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농사(農事)』를 부지런히 가꾸고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62분45초~1시간23분37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다생원채기어친~ /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치우치게 지나칠 정도로 불쌍하게 여기시더라 / 우란분=구도현(救倒懸),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한다. 목련존자와 청제부인 / 백종의 유래 / 인과 - 불효한 아들과 며느리, 시부모가 지체 부자유 쌍둥이로 태어남.

'친한 데에서 원수가 생긴다' /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는, 정확한 인과(因果) / 지체부자유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정성과 감사한 마음으로.

해제 후에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한 걸음, 한 걸음이 선방이다 / 공부는 '깊은 우물 속에 눈을 져다가 부어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 참선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는 확신을 가져야 / 주머니 속 물건, 항아리 속에 자라,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다 / (게송)남북동서무정착~ /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이 누누이 말씀을 하시기를 '그 꽉! 맥혀서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한 그러한 경지야말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

도(道)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다 / '부모가 반효자 노릇을 해야 한다' / 효도를 받으려면 어른들이 마음을, 아랫사람들이 받들기에 편하도록 성격을 쓰셔야 한다 / (게송)취면성와불귀가~ / 마음의 농사(農事).


최상승법(最上乘法), 정법을 뿌리로 해서 서로 맺어진 그 친한 것이야 친하면 친할수록 모든 업을 소멸을 하고, 마침내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고(生死苦)를 해탈할 수 있는 중요한 인연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중생의 사욕(私慾)을 충당하기 위해서, 오욕락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알고 지내고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내면, 그 뒤끝은 물어볼 것도 없이 웬수로 맺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도 세 가지 능(能)치 못한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가 ‘지은 업(業)을 면(免)하지를 못한다’ 이것입니다. ‘정업(定業)을 난면(難免)이라’ 하는데, 이것이 부처님 삼불능(三不能)의 하나입니다마는, 하물며 우리 중생이 지은 업을 어떻게 그것을 면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지어 놓은 죄를 면할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미리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고 선업(善業)을 짓고, 선업보다도 지은 바 없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닦아 간다면,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체가 부자유한 불구(不具)한 가족이 있으신 분은 있는 정성을 다 거기다 쏟아야 하고, 조금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어야 하고, 오히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마다 있는 정성을 다 쏟고, 항시 감사한 마음을 갖도록까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 지체가 자유롭지 못한 불구한 그 사람을 대할 때마다 자기의 과거에 지은 죄를 참회하고, ‘행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억울하게 한 일은 없나? 행여나 내가 사람을 차별 대우를 한 일은 없나? 부모에게 잘못한 점은 없나? 형제 간이나 이웃에게 잘못한 것은 없나?’
항시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꾸짖고 또 채찍질을 해서 자기를 갖다가 인격을 향상시켜 나가는 데에 좋은 스승으로 삼고,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누워서 신경질을 내고 그것을 보고서 귀찮고 괴롭고 그런 마음을 내지 말고, 오히려 거기서 인내심을 배우고 자비심을 배우고 봉사하는 마음을 배우고, 거기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마음을 배울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그러한 스승은 있어서 좋은 것이지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내가 그러한 사람을 도처에서 그런 것을 봐 왔기 때문에 이러한 오늘 이 우란분재를 맞이해서—가족 인연 관계, 형제간 인연 관계, 부모 자식 간의 인연 관계, 이웃과의 인연 관계가 전부 다 그러한 원인으로 해서 또 그렇게 만나지기 때문에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복수를 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인과법(因果法)을 깨닫고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해서 자비로써 상대하게 된다면, 웬(怨讐)가 다시 또 은인(恩人)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과거의 업으로 웬수로 만났다 하더라도 그 웬수가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도반(道伴)으로서 만나지게 되고, 스승으로서 만나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참선(參禪)을 해서 빠른 시일 내에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고자 할진대는—오늘 해제를 하고서 걸망을 지고 어디를 가시건 간에 가시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이 그게 바로 선방(禪房)입니다.
결제 동안에는 죽비를 치고 정진을 하고, 해제 하면 여기저기 걸망을 지고 다니니까 참선을 등한히 해도 되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공부! 왕래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활 속에서 가다듬고 정진하는 그 참선이야말로 힘이 있고 살아 있는 공부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할진대는 어떻게 해야 하냐 하면 「마치 저 깊은 우물 속에다가 눈을 져다가 자꾸 부어 가지고 그 우물을 메울려고 하듯 해라」

이 공부는 '자기가 자기를 찾아서 자기를 깨닫는 법'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문제지, '기어코 되고야만 만다'고 하는 것을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보증(保證)을 서셨고, 다 맹세를 하셨습니다. 기어코 되는 것이라고 보증을 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인데, 그것이 안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은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고, 항아리 속에 자라를 넣어 놓은 거와 같아서, 그 자라란 놈이 아무리 버르적거려 봤자, 밤에 가봐도 그 항아리 속에 들어 있고, 낮에 가 봐도 항아리 속에 들어 있듯이, 내게 있는 것을 나를 찾는 것이여. 오히려 보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일지언정, 찾을려고 하면 바로 언제나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이 누누이 말씀을 하시기를 '그 꽉! 맥혀서 답답하고 몸부림쳐지고 한 그러한 경지야말로 견성성불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거기에서 공부가 진취할 징조이다. 그러니까 그런 경계를 당하거든 짜증을 내고, 이 공부가 안될라나 보다 하고 자포자기하고 하지 말고, 그러한 고비를 어쨌든지 지혜롭게 잘 공부를 뽑아 나가도록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제 때 모여서 정진하신 것은 해제 때 생활 속에서 시끄러운 속에서 잘하기 위해서 결제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도(道)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이 없는 것입니다. 스님네라고 해서 꼭 도를 닦아야 하고, 세속에 계신다고 해서 도를 안 닦아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에 계신 분일수록에 도를 더 열심히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세속에 사시면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이리저리 얽혀서 업을 많이 짓게 되고 도 닦을 기회는 점점 희박하기 때문에, 그럴수록에 몇 배를 더 노력을 하고 애를 써야만 다소 공부가 되어갈 수 있기 때문에 내생(來生) 일을 생각하고, 장차 일을 생각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부모가 있고, 내 집이 있고 하니까 ‘내 고향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성불(成佛)을 하기 전에는 어디가 있던지 간에 타향살이여. 자기의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고 중생의 오욕락(五欲樂)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세계에서 계속해서 방황을 하고 있는 신세다 그 말이여.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와 조상을 위해서, 또 우리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의 자손들을 위해서, 우리는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가서 잡초에 우거진 밭과 논을 갈아 가꾸어서 영원히 쓰고도 남고, 쓰고 남아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농사(農事)』를 부지런히 가꾸고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7. 2. 06:16

 

 

((No.243))—1984(갑자)년 칠석차례(84.07.07.음) (67분)

 

 

(1/4) 약 16분.

 

 

(2/4) 약 14분.

 

 

(3/4) 약 19분.

 

 

(4/4) 약 18분.

 

 


(1/4)----------------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편백운횡곡구(一片白雲橫谷口)헌데  기다귀조진미소(幾多歸鳥盡迷巢)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설운산천만사(雖說雲山千萬事)라도, 비록 구름산 천만 일을 설한다 할지라도,
해천명월본무언(海天明月本無言)이로구나. 저 바다 하늘에 밝은 달은 본래 말이 없느니라.
구름산이, 저 하늘에 구름이 뭉게뭉게 천 봉우리, 만 봉오리 구름 봉우리가 퍼일어나듯이 그렇게 많은 일을 많은 법문을 설한다 할지라도 저 바다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달은 본래 말이 없더라.

일편백운횡곡구(一片白雲橫谷口)헌데, 한 조각 흰구름이 골짜기에 가로 놓이니, 얼마나 많은 돌아가는 새가 그 집을 미(迷)했던가(幾多歸鳥盡迷巢).
산중에 사는 새가 저 들녘으로 나갔다가 다시 산중으로 돌아올려고 하는데 마침 한 조각 흰구름이 그 골짜구니에 떠억 가로막고 있으니까 그 많은 새들이 자기 둥궐로 돌아오는데 그 길을 잊어버렸더라 그 말이여. 얼마나 많은 돌아가는 새가 돌아가는 그 길을 잊어버렸던가.


오늘은 갑자년 칠석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너무너무 감격스러운 법음(法音)에 감동이 되어서, 그 너무나 힘차고 너무나 간절한 법문을 마치 현재 우리의 이 법당에 살아계셔서 설하신 법문과 같이 그렇게 우리 사부대중이 다 같이 들었습니다.
열반(涅槃)하신 지 10년 세월이 지났건만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이렇게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어서 그 다행하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숙세(宿世)에 얼마나 많은 복을 지었기에 금생에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정법(正法)을 만나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었습니다. 숙세에 아무리 깊은 정법에 인연을 심었다 하더라도 금생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지 못했다면 정법을 이렇게 만날 수도 없고, 법문을 들을 수도 없고, 또 도를 닦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 몸뚱이를 이 세상에 받아 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이 몸뚱이를 금생에 받아 났겠는가? 어머니와 아버지, 부모님이 아니 계셨다면 우리는 아무리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도 태어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에 중국에 순치황제(順治皇帝)라고 하는 천자(天子)가 19년 동안 천자 노릇을 하다가, 참 천자 노릇을 잘해서 그렇게 참 백성을 잘살게 잘 다스리다가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역사에는 그것이 19년 동안 임금 노릇을 했다고만 적혀 있지만, 나중에사 절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순치황제라고 하는 신분을 밝히지 아니하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부목 노릇을 했습니다. 부목(負木)이라 하는 것은 절에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대는 나무꾼을 부목이라 하는데 나무를 해다가 불을 때고 그러니 아무도 몰랐습니다마는, 그 절에 주지 스님이 그 부목을 유심히 살펴보니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그런 고귀한 품위가 있어서 잘 살펴보니까 분명히 그 나라의 천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는 소문이 있어서 '그분이 바로 순치황제로구나' 하는 것을 알고 법복(法服)을 입혀서 계(戒)를 설해 가지고 참 수행을 잘한 그 순치황제가 출가해서 그 출가시(出家詩)를 읊은 것이 방금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세 구(句)의 게송을 읊으셨는데, 그 게송이 바로 순치황제가 읊은 게송입니다.

그러한 순치황제도 전생에는 인도의 한 스님으로 수행을 하다가 어떻게 한 생각을 잘못 먹어 가지고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 전생에 인도에 스님으로 참선 수행을 하는 납자(衲子)로 있다가, 한 생각 어긋진 탓으로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도 순치황제의 출가시 가운데에 나와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전생에 수행하던 도인이 한 생각 임금님의 행차하는 것을 보고 ‘하! 나도 임금이 한번 되어봤으면..’ 이런 생각을 먹었다던지, 그 나라가 워낙 임금이 정치를 잘못하니까 ‘내생(來生)에는 내가 한번 임금이 되어 가지고 정치를 한번 잘해 보리라’ 이러한 마음을 먹었다던지, 수행하는 마음으로 한 생각 먹으면 그것이 바로 어김없이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에는 임금으로 태어나거나 또는 부처님으로 태어나거나, 도인으로 태어나거나, 장군으로 태어나거나, 태어날 때에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태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피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이 합해 가지고 그래서 포태(胞胎)가 되어 가지고 10개월 간을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 가지고 열 달 만에 탄생을 하게 되는데, 그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있을 때에 그 어머니가 느끼는 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말로써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불편하고 괴롭지만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그 애기가 소중해서 괴로운 줄 모르고 그 풍선만한 배를 참 보물단지처럼 모시고 다시면서 열 달을 고생을 하다가 해산(解産)을 하게 되는데, 그 해산할 때의 고통이라는 것은 겪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어 놓고 방에 들어갈 때에 ‘내가 다시 이 신을 신을 수 있을 것인가’ 참 그럴 정도로 무서운 고통과 공포를 가지고 해산하게 되는데, 그 해산을 해 가지고도 자기의 그 괴로움은 아랑곳없이 ‘아들인가? 딸인가?’ 아들 낳았다 하면 좋아하고, 딸만 많이 낳은 사람은 또 딸 낳았다 하면은 그 또 딸 낳은 것에 대한 걱정만을 하게 되고, 딸이건 아들이건 낳은 다음에는 마른자리 진자리를 갈아 누이면서 그 애기를 위해서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이 몸을 태어났습니다. 또 여기에 계신 여러 보살님네들도 자라서는 또 어머니가 겪으신 그 고통을 스스로 한 번 내지 두 번 · 세 번 · 네 번, 많은 분은 열 번까지도 겪으면서 그 자녀를 낳아서 길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 그러한 어려움을 부모에게 끼치면서 우리가 태어났고 또 이만큼 자랐습니다.

그런데 정말 부모에 감사한 마음, 효도한 마음을 얼마만큼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자기가 자식을 낳아서 길러 봐야 부모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마는, 자식을 낳아서 길러 보면 자식 귀여운 중만 알지 부모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또 잊어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정말 지혜 있는 사람, 효심이 있는 사람이라야 자식을 낳아봄으로써 부모에 고마운 마음을 느끼게 되지, 보통 사람은 자식 귀여운 중만 알지 그 자식을 가져봄으로 해서 부모에 대한 효심이 일어나는 사람도 또한 그렇게 흔치 않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처음~16분22초)






(2/4)----------------

물론 이 가운데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항간에 듣기에는 자기를 혼자,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서 온갖 고통을 하면서 도부(到付) 장시를 하면서 또는 바느질 품팔이를 하면서,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그 자식을 갖다가 참 피눈물을 흘리면서 자식을 기르고 가르켜서 도지사가 되게 하고 장관이 되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늙으신 어머니를 산직(山直) 집이나 또는 양로원에다 갖다가 버리고.
또는 양로원 앞에다가 갖다가 버리거나, 공원에다 갖다가 버리고서—늙어서 망령(妄靈)이 들어서 똥오줌을 싸고 그러니까 아내도 싫어하고 손자손녀도 싫어하고 그러니까는 공원으로 모시고 가 가지고는 ‘여기 좀 계시라’고, ‘저 가서 뭘 먹을 것을 사 올 테니까 여기 좀 계시라’ 해 놓고는 안 와버리니 그 노망(老妄)해 가지고 갈 곳을 모르고 방황하다가 죽기도 하고, 또 양로원에 가서도 그 노인은 아들의 체모(體貌)를 생각해서 자기의 아들이 누구라고 하는 것을 밝히지 아니하면서 눈물로써 여생을 마치는 그러한 이야기도 나는 듣고 있습니다.

자기도 얼마 안 가면 그렇게 늙을 신세가 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부모, 친정 부모 또는 시부모가 다 똑같이 부모입니다.
요즈음은 친정 부모만을 참 자기 부모로 생각하고, 시부모는 자기 부모로 생각하지 않는 그러한 풍토가 있습니다. 시부모가 아니면 자기 남편이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 시부모가 아니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은 어디서 태어났겠습니까.

친정 부모는 자기를 낳아주셨고 시부모는 자기 남편을 낳아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남편과 자기가 결합이 되어 가지고 사랑하는 자기의 아들과 딸이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자기의 아들과 딸이 사랑스러우면 남편이 소중하고, 남편이 소중하면 시부모가 소중할 것입니다.
시부모에게 불효를 하면 자기가 머지않아서 며느리를 얻게 되었을 때에 그 며느리로부터 자기가 자기 시부모에게 불효한 몇 배의 불효를 그 며느리로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부모나 시조부모가 돌아가셔서 어디로 가냐’ 하면 효도를 한 집안에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불효를 한 집안에도 다시 태어나게도 됩니다.
자기가 효도를 받다가 죽으면 그 집안에 다시 손자 · 증손주 또는 현손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 집안에 효도하는 자식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는 저 남의 집에 태어나서 그 집의 손주며느리나 증손주 며느리로 이렇게 다시 그 집안에 들어와서 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부모에게 불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노인이 여생을 마치고 눈을 감게 되고, 참 효자 아들 · 손자 · 며느리가 효도를 해서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게 되면 그다음 생에 태어나서 좋은 손자 · 좋은 손부(孫婦)로 태어나서 효도를 하게 되고, 불효를 받다가 한을 품고 괘씸한 마음을 가지고 눈을 감게 되면 그다음에 그 집에 불효자식이나 불효 손자나 불효 손부로 태어나 가지고 불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나 부모가 돌아가 가지고 저 먼 데로 가서 다시는 그 집에 안 온다면 혹 모르지만, 내나 자기집에 도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가지고 또 죽으면 또 가장 자기와 인연 깊은 데로 태어나기 때문에 고마운 생각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원한을 품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집안이 잘되고, 자기 자손이 잘되기를 바래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잡보장경(雜寶藏經)』이라고 하는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많은 국왕 · 대신과 신심 있는 장자(長者)와 신도들의 아주 맛있는 공양, 정성에 넘치는 공양을 받으시고 존경을 받고 계셨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대관절 저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어떠한 인연을 지으셨기에 저렇게 거룩한 모습을,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의 저런 거룩한 모습을 받아 태어나셨으며, 얼마나 많은 지혜와 복을 닦았기에 저렇게 국왕 · 대신과 장자와 저런 신도들이 저렇게 융숭한 신심으로써 저렇게 떠받들고 공양을 올릴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궁금한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난존자(阿難尊者)가 그 여러 대중들이 그러한 궁금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대관절 부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공덕을 지으셨기에 금생에 이렇게 거룩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으며 왕궁에 태어나셔서 이렇게 출가하셔 가지고 이렇게 성불(成佛)을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전생에 지극한 효도를 해서 부모 공양을 잘한 탓으로 해서 이렇게 왕궁에 태자로 태어났으며, 출가해서는 이렇게 성불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많은 중생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천신으로부터 이렇게 존경을 받느니라.
내가 과거 전생 얘기를 할테니 내 말을 잘 들을지니라. 옛날에 '바라나시’라고 하는 나라에 아주 가난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은 아들 하나를 낳았어. 그런데 그 아들 하나가—아들딸을 수없이 낳아 가지고, 가난한 집에 그 손자만 갖다가 우루루허니 마치 흥보집처럼 그렇게 애를 많이 낳았는데, 도저히 끼니를 이을 수가 없어.

더군다나 가난한 데다가 흉년이 연거퍼 들어가지고 도저히 살 수가 없는데, 그 노인은 할 일 없고 그러니 밥을 애들보다도 더 많이 먹을려고 그러고 배고파서 못 견디고, 노인은 밥심으로 사는 것인데 옛날부터, 가난한 데다 흉년이 들었으니 애들은 우루루루 밥을 조금 해도 애들이 먼저 달려들어서 다 먹어버리고 노인 차지는 안 가는데, 노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밥을 달라고 그러니 너무너무 귀찮으니까 노인을 갖다가 산으로 끌고가 가지고 땅속에다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서는 노인이 먹을 몫은 애들한테 노나 먹이고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어느 마을에 갔는데 ‘자네 춘부장(椿府丈)은 요새 어떻게 잘 계신가’ 문안(問安)을 하니까, ‘돌아가실 날도 멀지 않고 흉년은 들어서 양식은 없고 그래서, 공연히 가난하고 고통스러운데 오래 사시게 할 것 없이 한걸음 빨리 가시게 했네’

‘어떻게 했어?’
‘산에 가서 굴을 파고 묻어드렸어’

'아, 그래. 나도 노모가 있어 가지고 노망(老妄)해서 많이만 먹으려고 그러고 똥만 퍼싸고 그러니 나도 묻어버려야겠네' 그래 가지고 그 사람도 산에다 갖다 묻었습니다. 그 소문이 차참차츰 퍼져 가지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그 참, 무방한 방법이다’ 해 가지고, 산에 갖다 모다 묻어서 이곳저곳에서 모다 노인을 산에다 묻는 일이 점점점점 퍼져 갔습니다.

마치 요새 핵가족 풍조가 들어와 가지고 너 나 할 것 없이 시부모를 잘 안 모실려고 그러고, 서로 형제간에 ‘자네가 모시게, 내가 모시게’ 하고 시부모를 떠 방천하고 노인이 영판 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마는.
그때 그 바라나국에도 그러한 못된 풍조가 퍼져 가지고 집집마다 노인을 갖다가 땅에다가 묻는, 우리나라에도 고려장이라 해 가지고 노인을 그렇게 묻었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되어 가지고 일부에서는 ‘그래서 되냐, 도리가 그럴 수가 없다’ 반대하고, 일부에서는 '노인 두어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곡식이나 축내고 노망이나 부리고 하니 그거 없애야 한다'

그래 가지고는 다수가결(多數可決)로 땅에다 묻는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 가지고, 그 나라에서는 법을 노인은 몇 살 이상 넘으면 땅에다 묻도록 법을 제정을 했습니다.
요새도 민주주의가 되어 가지고 좋건 나쁘건 투표를 해서 수가 많은 쪽으로 모든 법이 결정이 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폐단이 있는 것입니다마는 지혜로운 사람은 한두 사람밖에 안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수효가 많으면 아무리 그 법이 나쁘다 하더라도 다수가결로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16분23초~30분38초)





(3/4)----------------

그러자 그 나라에 ‘부모를 갖다가 묻는 법은 옳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고 하는 효심을 가진 한 아들이 있어 가지고 ‘자기는 부모를 차마 땅에다 묻을 수가 없다’ 해 가지고 집에 지하실을 만들어 가지고, 겉으로는 산에다가 묻은 것처럼, 안 묻으면은 벌을 받게 되니까, 집에 지하실에다가 은밀히 부모를 모시고 삼시(三時) 때 음식을 잘해서 남몰래 공양을 해서 감쪽같이 그 늙으신 아버지를 갖다가 땅속에 지하실에다가 그렇게 모시고 지내는데,
‘이 세상에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이 나라에 저런 악법을 어떻게든지 다시 고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생각을 항시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지만, 그런 말을 감히 했다가는 땅속에 늙으신 부모를 감춰 놓은 사실이 밝혀지면 자기도 큰 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함부로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치 제석천왕이 그 아들의 지극한 효심에 감동이 되어 가지고 그 집에 나타나서, ‘나는 하늘나라의 제석천왕인데 그대의 그 지극한 효심에 내가 감동이 되었어. 그러니 나와 그대가 합해 가지고 어쨌든지 이 악법을 고치도록 하자’ 이렇게 해 가지고 그 천신이 방(榜)을 써서, 문제를 그 궁전 앞에다가 써 붙혔습니다.

네 가지 문제를 냈는데, 그 첫째 문제는 이 세상에 가장 으뜸가는 것, 가장 근원적인 것이 무엇이냐? 가장 으뜸가는 일이 무엇인가?
둘째, 이 세상에 가장 즐거운 일이 무엇인가?
셋째는 이 세상에 제일 맛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
넷째에는 가장 오래가는 것, 가장 영원한 것이 무엇인가?

'이 네 가지의 문제를 하나도 어김없이 다 맞추어야지, 이것을 맞추지 못하면 7일 후에는 이 나라를 갖다가 임금을 비롯해서 이 나라를 아주 멸망을 시키겠다' 그러한 방을 써서 붙였습니다.

임금님이 그 보고를 받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나라에다가 광고를 내기를, ‘가장 으뜸가는 것, 가장 즐거운 것, 가장 맛있는 것, 그리고 가장 오래가는 것, 이 네 가지 문제를 다 맞춘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소원을 이루게 하리라’ 전국에 방방곡곡에 방을 써 붙혔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그 말을 듣고 지하실에 모셔 논 아버지한테 가서 그 문제를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런 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에 외국에 유학까지 가서 널리 학문을 닦은 선비였으므로 ‘그것은 이렇게 대답을 해라’ 하고 일러주었습니다.

가장 으뜸가는 것은 ‘믿음’이다.
진리를 믿는 마음, 정법을 믿는 마음, 선지식을 믿는 마음, 그 믿는 마음, 믿음이 이 세상에 모든 것에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장 즐거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정법(正法)을 믿는 것’이 가장 즐거움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즐겁고, 무엇이 좋고 해도 해보면 다 허망하기 그지없고,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그것을 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뜻을 이루고 보면 재산이 되었건, 색이 되었건, 명예 권리가 되었건, 무엇이고 실컷 해 보고 나면 허망하고 별것이 아닌 것입니다. 정법이야말로 믿으면 믿을수록, 그 정법에 의지해서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점점 그 즐거움이 더 깊어지고 한(限)이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이 세상에 제일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진실한 말'이다. 진실한 말이라는 게 무엇이냐 하면은 법문(法門)이다 그 말이여. 진리를 설한 법문, 그 법문이야말로 가장 맛이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있는 것이다.
음식이 아무리 맛있다 해도 두 끼 · 세 끼 먹으면 벌써 보기가 싫어지는 것이고, 아무리 소설이 재미 있다 하더라도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재미가 없고, 아무리 영화가 재미가 있다 해도 두 번 세 번 보면 벌써 보기가 싫어지는 거여. 그래서 이 세상에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있고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맛이 있는 것은 ‘법문’이다 이거거든. 진실한 말이다 이것입니다.

넷째에 이 세상에 가장 오래가는 것은 무엇이냐?
강철이 굳다 해도 강철로 만들어 놓은 것도 오래가면 녹이 슬어서 없어지고, 아무리 철근콘크리트가 굳세다 해도 백년을 넘으면 부슬부슬 부스러지고, 이 세상에 어떠한 견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하드라도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세월이 흘러가면 파괴가 되고 말아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오래가고 영원한 것은 ‘지혜(智慧)’다 이것입니다. 지혜, 지혜의 눈을 뜨는 거, 지혜의 눈을 떠야 영원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를 임금님 앞에 나가서 이 4가지 답을 말했던 것입니다.

임금이 들어보니 과연 그렇거든. "이 네 가지 답을 너 자신의 힘으로 알았느냐? 누구 다른 사람한테 배웠느냐?"
"어찌 저와 같은 사람이 네 가지 답을 다 알아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저의 늙은 부친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부친이 어디에 있느냐?"
"말씀 여쭙기 황송하오나 저희 집 지하실에 계십니다. 국법으로 산에다 갖다가 묻으라 하셨지만 부모가 아니면 이 몸뚱이가 태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부모의 은덕을 생각한들 어찌 늙었다고 해서 땅속에다 묻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발각이 되어서 사형언도를 받을 한이 있더라도 저는 차마 늙으신 부모를 산에다 묻을 수가 없어서 집의 지하실에다 모셔 놓고 참 성의를 다해서 봉양을 하고 있습니다"

"아하, 그러냐. 그러면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저의 소원은 노인을 산에다가 묻으라고 하는 그 악법을 고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오냐, 알았다" 그래 가지고 그날부로 법을 고쳐서 노인을 땅에다 묻지를 말고 효도를 하도록 국법을 선포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그 젊은 사람이 누군줄 아느냐? 그 젊은 사람이 바로 오늘의 '나'이니라. 바로 그 젊은 사람이 그 효도한 공덕으로 성불을 해서 오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느니라.

그러시고서 법문을 설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집에 범천, 하늘나라의 선신이 자기집에 머물러주기를 원한다면 부모를 잘 받들고 효도를 할지니라. 하늘나라에 모든 신 가운데에 최고신인 옥황상제, 제석천왕(帝釋天王)을 자기집에 머물러 계시게 하고자 한다면 바로 너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효도를 할지니라.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를 것이다"

제석천왕의 권능(權能)은 모든 사주(四洲) 세계에 복을 주기도 하고, 죄를 줄 수도 있는 그러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지(無所不至)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권능을 가진 분이 제석천왕입니다.

"그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너를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그러면 바로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른다면 너희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무엇이고 마음 먹은대로 그 제석천왕이 너의 뜻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
모든 성현과 여래 · 부처님이 너희 집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너희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너희 효행에 감동이 되어서 모든 성현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너희 집에 머무를 것이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법문은 『잡보장경』에 있는 부처님에 법문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이와 같이 이 몸을 받아서 이 법당에 모여서 같이 이 법문을 듣게 된 인연도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며, 여러분이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낳아서 기를 수 있는 것도 일단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아니셨으면 이 몸뚱이를 받아나지 못했을 것이며, 이 몸뚱이가 없었다면 남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자녀를 낳아서 기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도 산천초목과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천자(天子)가 이 세상에 가장 고귀한 몸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일국(一國)에 대통령도 부모가 아니였으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를 못했어. 모든 장군과 대신 · 장관들도 부모가 아니였으면은 몸을 받아나지 못했을 것이며 그러한 높은 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이 효도(孝道)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 첫째도 부자유친(父子有親)을 말씀을 하셨고 오륜에 있어서도 역시 효도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왕궁의 부귀를 버리고—자기가 태자로 태어나셨으니까 당연히 부모의 뜻을 따라서 장성을 해 가지고 그 왕위를 계승을 해야 할 텐데 부처님은 그 부모의 뜻을 어기고 출가를 하셔서 도를 닦으셨습니다. 세속적인 정의로 본다면 '부모가 그렇게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왕궁을 버리고서 출가했으니까 그건 불효를 했다' 유가(儒家)의 선비들은 그렇게 불법을 비방을 합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버리고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자기 한 몸만을 생각해서 자기 한 몸만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산중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인간 최고의 불효다' 이렇게 불법을 비방을 하고 유교의 정신에 철처한 사람들은 출가해서 스님이 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십니다마는 그것은 효(孝)의 개념이 뚜렷하지를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인정에 얽혀서 부모를 잘 봉양을 하고 부모를 잘 받들고 하는 것은 조그마한 효에 지나지 못하고, 출가를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부모를 천도(薦度)를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이것은 대효(大孝)에 속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그 소효(小孝) 가운데에도 또 대소가 있는데, 잡술 것을 맛있는 것을 많이 해 드리고 좋은 옷을 많이 해 드리고 편안하게 계시게 물질적인 효도를 하는 것은 그것은 소효(小孝)에 들어가고, 부모의 그 뜻을 잘 받들어 봉양(奉養)하는 것은 그것은 대효(大孝)라, 그렇게 공자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불가(佛家)에 있어서는 인정(人情)에 얽힌—물질적인 효 또 부모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효 그것도 물론 효(孝)지만 그것마저도 소효에 속하는 것이고, 참다운 대효라 하는 것은 발심(發心)을 해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효(孝)요, 참으로 대효(大孝)라고 하는 것입니다.(30분40초~49분8초)





(4/4)----------------

아무리 부모의 뜻을 받들어서 장가가서 아들딸을 낳는다든지, 시집을 가서 아들딸을 낳고 참 부귀영화를 누려서 부모를 잘 받든다 하드라도 이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여. 잠깐 꿈속에서 한바탕 그리한 것이지, 꿈 깨고 나면 참 허망하기가 그지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여.
그러나 출가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는 응당 그것이 소효가 되었건, 소효에 또 소효가 되었건 일단은 물질적인 효도로부터 정신적인 효에 이르기까지, 있는 정성을 다해서 부모를 받들어 모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 부모에게 효도를 다한다 하드라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거든.
‘양쪽 어깨에다가 어머니는 왼쪽, 아버지는 오른쪽 어깨에다가 부모를 메고서 저 높고 높은 수미산을 돌고 돌아서 저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하더라도 부모에 효를 다했다고 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칠월 백중날이 돌아옵니다. 그때는 백일기도 회향과 또 갑자년 여름안거 해제를 맞이하고 아울러서 선망부모(先亡父母)를 공양하고 천도하는 뜻깊은 날이 돌아옵니다.
그날은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져서 고통을 받고 있는 어머니 청제부인을 이고득락(離苦得樂)케 해드리는 그날이라, 그날은 지옥문이 열려서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든 지옥 중생들, 바로 그분들이 우리의 선망부모입니다마는, 그 지옥에서 고통받는 또 아귀도에서 고통받는 모든 선망부모가 잠시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날입니다.

그날을 기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도에서나 동남아나 중국 · 한국 · 일본을 막론하고 모든 불교국가에서는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그러한 엄숙한 법요식이 거행이 됩니다.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서도 그날 우리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대천도재(大薦度齋)를 봉행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우리 법보전(法寶殿)에는 우리의 수많은 선망부모의 위패가 봉안이 되어있습니다.

위패를 봉안하신 법보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여기에 위패를 봉안하시지 아니한 분이라 할지라도 그날 오셔서 임시위패를 할 수도 있고 또 그냥 참석을 하셔도 우리의 과거의 모든 선망부모를 다 이 자리에 청혼(請魂)을 해 가지고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주인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영가를 청해서 정법을 설해서 또 엄숙하게 법요식을 거행을 합니다.
물론 그날 모다 금강경을 독송하게 될 것입니다마는 금강경도 가지고 계시면 가지고 오셔서 다같이 이 금강경을 독송을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를 천도를 하는 데에 동참(同參)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인유밀불수저(利刃有蜜不須舐)허고  고독지가수막상(蠱毒之家水莫嘗)이어다
나무~아미타불~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어라
나무~아미타불~

이인유밀불수저(利刃有蜜不須舐), 날카로운 칼날에 꿀이 발라 있는데, 그 칼날에 발려 있는 그 꿀을 핥아먹지 말어라. 칼날에 묻은 꿀을 핥아먹다가 그 칼날에 혀를 상하기 때문에 그 칼날의 꿀을 아무리 달다 해서 빨아먹지를 말어라.
고독지가(蠱毒之家)에 수막상(水莫嘗)이니라. 고독지가(蠱毒之家)라고 하는 것은 그 고독지가(蠱毒之家)라는 집에 우물이 있는데, 그 우물에는 독약이 있어. 독약이 있는 그 우물의 물을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독이 들어 있는 그 우물의 물을 떠 마시지를 말어라. 목이 마르다고 해서 독이 들어 있는 그 우물의 물을 퍼마시게 되면은 죽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재산 · 색 · 명예 · 권리 · 맛있는 음식 그리고 안락한 것, 이 다섯가지 욕망을 얻기 위해서 온갖 행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피땀을 흘리면서 몸부림을 치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는 국법을 어기면서 애를 쓰고, 심지어는 본의 아니게 남을 해롭게 하면서, 심지어 남의 목숨을 해치면서까지 그 다섯가지 욕망을 취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들은 칼날에 묻은 꿀물과 같고 독약이 들어 있는 우물물과 같아서, 그 달콤한 맛에 취해서 자칫 잘못하다가 혀를 짤리고 그 한 모금 물을 잘못 마시면은 그 독이 몸에 번져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아무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재산도 필요하고, 색도 필요하고, 명예와 권리도 필요하고, 음식도 필요하고, 안락도 필요하지만, 칼날에 묻어 있느냐, 독약이 타 있는 우물인가를 분간을 해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게 잘못하면 꿀 먹다 혀를 짤리고, 물 한 모금 먹다가 독이 몸에 번져서 생명을 잃게 되느니.


여러분이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이렇게 여기 많이 오셨는데 다 소원(所願)이 있으실 것입니다.
재산에 대한 소원, 남편과 자녀에 대한 소원, 명예와 권리에 대한 소원, 보다 더 잘살아보겠다고 하는, 보다 더 편하게 즐겁게 살겠다고 하는 그러한 소원, 다 소중하고 꼭 이루어져야만 할 소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무작정하고 그것만을 바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에게 이르러 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욕초호조다종수(欲招好鳥多種樹)하고  원간산색단축장(願看山色短築牆)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그것이 내게 이르르게 하는 방법, 아름답고 좋은 새를 초대하고자 하거든 나무를 자기 뜰에 많이 심을 것이고, 나무를 많이 심어서 숲이 우거지면 오라고 아니해도 팔방에서 울긋불긋 아름다운 새, 그 아름답게 우는 좋은 새들이 떼로 몰려올 것입니다.
저 먼산, 아름다운 산 경치를 보고자 하거든, 너희 집 담장을 나즈막하게 쌓으라 이것입니다. 담장을 높이 쌓아 놓으면—요새 자꾸 담장이 높아져서 도둑놈이 못 들어오게 담장을 높이 쌓는데, 담장을 높이 쌓이 놓으면 저 앞산이 보이지를 않거든. 앞산 먼산 경치를 보고자 하면은 너희 집 담장을 낮게 쌓아라 이것입니다.

복(福)과 지혜가 굴러들어 오게 하려면 바른 믿음을 가지고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너의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라.
정법을 믿고 마음을 청정하게 가지면 지혜의 눈을 뜰 것이니, 니가 지혜의 눈을 뜬다면은 제석천왕(帝釋天王)과 모든 성현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너희 집에 머무르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은 무슨 소원을 이루지를 못할 것인가.

정법을 믿고 마음을 청정하게 갖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속상하는 일을 당하거나,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이뭣고?’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든다면,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지 안 해도 마음은 저절로 안정이 되고, 마음을 맑게 하고자 아니해도 저절로 마음이 맑고 청정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복과 지혜가 저절로 떼를 지어서 모여들 것입니다.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앞으로 법요식이 진행이 되겠습니다마는, 이 법문을 듣고 ‘과연 그렇구나!’ 정법을 믿고 열심히 참선(參禪) 정진을 한 것이 나의 모든 소원을 성취하고 나의 모든 업(業)을 소멸을 하고, 그러므로써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건전해서 벌써 마음의 부자가 되고 마음의 행복을 얻는다면, 실질적인 물질적인 외면적인 그러한 것도 저절로 다 갖추어질 것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여러분께서는 오늘 칠석날을 맞이해서 반드시 그 소원이 원만하게 성취되실 것을 저는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은 백종날을 앞두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가장 첩경(捷徑)」이라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오늘 전 고경월 보살이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하는 소원으로 천도재(薦度齋)를 올리고 또 대중공양(大衆供養)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또 다른 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 자비스러우면 모든 사람에게 다 자비로와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팔만사천 번뇌가 바로 팔만사천 지혜로 변하는 것입니다.(49분10초~67분5초) (끝)





[법문 내용]

(게송)수설운산천만사~ / 그 누구라도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태어날 길이 없다. 정말 부모에 감사한 마음, 효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순치황제(順治皇帝)의 절에서 부목(負木) 노릇. 순치황제 출가시(出家詩).

친정 부모, 시부모가 다 똑같이 부모입니다 / 시부모나 시조부모, 부모나 조부모가 돌아가시면, 내나 가장 자기와 인연 깊은 자기집에 도로 태어납니다 / 『잡보장경(雜寶藏經)』 "나는 전생에 지극한 효도를 한 공덕으로 이렇게 출가해서 성불(成佛)을 한 것이다"

부처님 과거 전생에 효도 이야기(제석천왕의 4가지 문제) /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를 것이다" / 여러분들의 부모님이 아니셨으면 이 몸뚱이를 받아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성현이 효도(孝道)를 말씀을 하셨다 / 불가(佛家)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효 또 부모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그것은 소효(小孝)이고,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효(孝)요, 참으로 대효(大孝)이다.

(게송)이인유밀불수저~ /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오욕락도 필요하지만, 그러한 욕망들은 칼날에 묻은 꿀물과 같아서 지혜롭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정법을 믿고 열심히 참선(參禪) 정진을 한 것이 나의 모든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 /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가장 첩경(捷徑)」이라고 하는 법문을 해 드렸습니다 /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노인이 여생을 마치고 눈을 감게 되고, 참 효자 아들 · 손자 · 며느리가 효도를 해서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게 되면 그다음 생에 태어나서 좋은 손자 · 좋은 손부(孫婦)로 태어나서 효도를 하게 되고, 불효를 받다가 한을 품고 괘씸한 마음을 가지고 눈을 감게 되면 그다음에 그 집에 불효자식이나 불효 손자나 불효 손부로 태어나 가지고 불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머니나 부모가 돌아가 가지고 저 먼 데로 가서 다시는 그 집에 안 온다면 혹 모르지만, 내나 자기집에 도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가지고 또 죽으면 또 가장 자기와 인연 깊은 데로 태어나기 때문에 고마운 생각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원한을 품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집안이 잘되고, 자기 자손이 잘되기를 바래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에 모든 성현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❶이 세상에 가장 으뜸가는 것은 ‘믿음’이다. ❷이 세상에 가장 즐거운 일은 ‘정법(正法)을 믿는 것’이 가장 즐거움이다. ❸이 세상에 제일 맛있는 것은 '진실한 말' 즉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있는 법문(法門)이다. ❹이 세상에 가장 오래가고 영원한 것은 ‘지혜(智慧)’다. 지혜의 눈을 떠야 영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법문을 설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집에 범천, 하늘나라의 선신이 자기집에 머물러주기를 원한다면 부모를 잘 받들고 효도를 할지니라. 하늘나라에 모든 신 가운데에 최고신인 옥황상제, 제석천왕(帝釋天王)을 자기집에 머물러 계시게 하고자 한다면 바로 너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효도를 할지니라.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를 것이다"

제석천왕의 권능(權能)은 모든 사주(四洲) 세계에 복을 주기도 하고, 죄를 줄 수도 있는 그러한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소불능(無所不能)하고 무소부지(無所不至)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권능을 가진 분이 제석천왕입니다.

"그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너를 낳아준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그러면 바로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제석천왕이 너희 집에 머무른다면 너희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무엇이고 마음 먹은대로 그 제석천왕이 너의 뜻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
모든 성현과 여래 · 부처님이 너희 집에,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너희 집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라. 너희 부모에게 효도를 하면 너희 효행에 감동이 되어서 모든 성현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너희 집에 머무를 것이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 법문은 『잡보장경』에 있는 부처님에 법문입니다.

정법을 믿고 마음을 청정하게 갖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속상하는 일을 당하거나,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이뭣고?’ ‘이뭣고?’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든다면, 마음을 안정시키고자 하지 안 해도 마음은 저절로 안정이 되고, 마음을 맑게 하고자 아니해도 저절로 마음이 맑고 청정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복과 지혜가 저절로 떼를 지어서 모여들 것입니다.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또 다른 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 자비스러우면 모든 사람에게 다 자비로와지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팔만사천 번뇌가 바로 팔만사천 지혜로 변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5. 21. 05:13

 

 

((No.242))—1984년 7월 첫째일요법회(84.07.01) (84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1분.

 

(4/4) 약 21분.

 


(1/4)------------------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지번로배(誰知番虜輩)가  개개착피구(箇箇着皮裘)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놓아 보냄에 꽃이 다투어 피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르는구나.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땅에는 산과 강이 있으며, 숲과 바위와 인간과 동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잡화점을 벌려 놓은 것처럼, 하늘과 땅에 큰 백화점을 벌려 놓은 것처럼 온갖 것이 진열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이, 그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온갖 상품을 온 우주법계를 가게 삼아서 이렇게 벌려 놓았습니다.

그것이 해가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뜨고 낮에는 해가 빛나.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온갖 초목이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며, 이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순회하는 것, 이것도 다 낱낱이 비로자나 법신불의 살림살이를 갖다가 놓아 내보낸 소식이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라.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른다. 그 물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흐르고 흘러서 전부 바다로 돌아가는데, 거두어들이는 소식은 무엇이냐 하면은 그 물을 꺼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최초에 물이 흘러 내려오는 그 수원지(水源地)에 도달할 것이다.
저 신의주 있는 데서 압록강을 거슬러서 계속 올라가면 백두산 천지(天池)로 도달하듯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바로 물을 거슬러서 꺼꾸로 올라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산천, 하늘과 땅에 온통 벌어져 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그놈을 거두어들이면 어디로 돌아가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여(眞如)의 세계로 돌아간다.


오늘 갑자년 7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했는데, 본격적으로 여름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등어리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너무 더워서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에 숨이 막힐듯 이 더위에도 불구하시고 사부대중이 이렇게 법당을 가득 메우셨는데, 지금 이렇게 더운 것을 참고 견디면서 여기에서 참 마음자리를 찾는 법문을 듣고 마음을 닦지 아니하면, 참으로 그 펄펄 끓는 화탕 노탕(火湯爐湯)지옥, 무간 아비(無間阿鼻)지옥에 들어가서 고(苦)를 받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편하기를 바라고 시원하게 지내는 재미로 이 더위를 꺼려서 법회에 참석도 하지 아니하고, 더웁다고 선방에 방부도 들이지 아니하고, 서늘한 것만 찾고 냉동이 갖추어진 그런 데서 밤낮 얼음물이나 마시면서 시원하게 낮잠이나 자고 그렇게 지내다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어느 곳으로 끌려갈 것이냐 이 말씀이여.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다가 아무도 나를 위해서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계(三界)에 대성인이시고 사생(四生)에 자부(慈父)이시지만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깨닫는 방법, 길은 일러주실 수 있지마는 내 대신 깨달라 주실 수도 없고,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선성(善星) 비구는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수십 년을 모시고 살았지만,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했습니다. 바른 사상으로 바르게 불법을 믿고 바르게 닦지 아니하면, 설사 부처님을 평생을 모시고 산다 해도 삿된 소견을 가지고 바르게 닦지 아니했기 때문에 생함지옥을 한 것입니다.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부처님께는 나후라(羅睺羅)라고 하는 아드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 나후라존자가—'나후라(Rāhula 라훌라)' 라는 말은 ‘속박이다’ 그 말이여. 구속 · 속박 · 얽매임 이런 뜻인데,
나후라가 탄생을 하니까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 백성들이 축하 경축을 하고 야단이었었는데, 부처님 그 실달 태자(悉達太子)는 “아! 나후라가 태어났구나. 나를 출가하는 것을 구속하는, 막는 그러한 존재가 태어났구나” 이런 뜻에서 '나후라' 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경전에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뒤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그 나후라가 야수다라(耶輸陀羅)—부처님 실달 태자의 태자비(太子妃) 야수다라가 그 나후라를 배 가지고 6년 동안을 해산(解産)을 못하고 6년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 저녁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어째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 뱃속에 포태(胞胎)가 되면 열 달 만에 태어나는데, 왜 나후라존자는 6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었냐?
여러분이 들을 때에는 신화처럼 전설처럼 그렇게 들리시겠지만, 그렇게 전해 내려오니까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이여.
옛날에 그 나후라존자가 저 전생에 어느 나라 국왕으로 있을 때에 벽지불(辟支佛), 독각(獨覺)이 있었는데, 그 독각이 성중(城中)으로 들어와서 걸식(乞食)을 할려고 그러는데, 그것을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막으니까, 7일 동안을 들어오지를 못하고 산중에 딱 갇혀서 7일 동안을 굶게 했던 것입니다.
그 7일 동안을 독각 수행자로 하여금 산중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굶게 한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그 남은 과보(果報)로 해서 7년 동안을 태중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인과론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7일 동안을 걸식을 못하게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가지고, 7일 동안을 그 독각으로 하여금 굶게 한 그 인연으로 7년 간을 모태 중에 있어서 나오지 못했다 이것입니다.
이조 때에도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탄압한 나머지 승려들로 하여금 서울 장안에는 사대문(四大門) 안에는 들어오지를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조 말엽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 가지고, 겨우 승려들도 어렵게—몇백 년 간을 서울 장안을 못 들어오다가—겨우 장안에 들어갔던 그러한 참 비참한 역사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

그 나후라존자가 15세에 출가를 했는데, 이 세상에 7년 만에 태어날 때에는 그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고 또 출가하기는 15살 때 출가를 했다.
어떻게 출가를 했냐 하면 부처님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셔 가지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셨는데, 고향으로 가시니까 그 부처님의 부인이셨던 야수다라 부인이 누각에서 떠억 보니까, ‘부처님이 성불을 해 가지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왕궁에 돌아오신다’는 기별을 듣고서 다락에 올라가서 이렇게 보니까, 참 거룩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떠억 성중으로 들어오신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나후라로 하여금 “저기, 저 맨 앞에 오시는 저 거룩한 어른이 너의 아버님이시다. 가서 인사를 여쭙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遺産)을 주십시오’ 하고 가서 인사를 해라” 하고 시켰습니다.
나후라존자는 그때 15살인데, 어머니 말 대로 내려가서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 이랬겠다.
“오냐, 내가 유산을 줄테니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 가지고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머리를 착 깎아서 중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들어서 부처님의 왼팔인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 사리불에게 맡겨서 사리불을 스승, 은사를 삼고 사리불의 상좌(上佐)를 삼아 가지고 사리불로 하여금 교육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이지만 아무 철이 안 들고, 왕궁에서 참 귀여움만 받고 그래 가지고 도무지 버릇이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모든 스님들의 스승이시고 모든 중생들의 존경 받는 그런 위대한 존재라 하는 것을 떠억 코에다 걸고서 말을 도무지 듣지를 않고, 무엇이던지 제멋대로—스승 말도 잘 안 듣고 남 말도 안 듣고,
누가 찾아와서 “부처님 어디 계시냐?” 하고 여쭤보면은 지금 계셔도, “어디 먼 데 가시고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고, 또 안 계셔도 “저 어디 가보라고, 지금 저기 계신다”고 해 가지고 늘상 사람들을 거짓말을 해 가지고 골탕을 먹이는 것을 아주 일쑤로 하고 그래서 대단히 말썽을 부리고 그랬었는데.

부처님께서 같이 데리고 있기보단 저 다른 산중으로 떼어 보내 가지고 거기서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그리 보냈는데, 별로 큰 효과가 없고 들려오는 소문에는 대단히 염려가 되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하루는 그 나후라존자가 있는 데를 찾아가셨어.
찾아가니까 나후라존자가 아버지가 오셨다고 반겨 하면서 의자를 내놓으면서 앉으시라고. 앉으신 다음에 부처님께서 “대야에다가 발을 씻게 물을 좀 떠 오너라”
물을 떠 오니까 “네가 내 발을 좀 씻겨라” 그러니까 나후라존자가 아주 신나게 발을 다 씻겨 드렸습니다.

다 씻고 난 다음에 “너 그 물을 먹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더러운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물이 아니면 살 수가 없지마는,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은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출가해서 사문(沙門)이 되었지마는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을 함부로 하고,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하면, 그리고 입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청정한 행을 가지지 아니하면, 마치 이 발 씻은 물과 같이 더러운 것이니라. 그래서 그 물은 버릴 수밖에 없어. 이 물을 갖다 버려라” 하니까 갖다 버리고서 대야를 갖다가 놓으니까, 부처님께서 그 대야를 갖다가 발로 차버렸습니다.(처음~21분18초)




(2/4)------------------

“왜 대야를 발로 차십니까?” 하니까.
“내가 대야를 발로 차니까, 행여나 그 대야가 깨질까봐 염려가 되느냐?” 부처님이 물어보시니까,
“그까짓 뭐 발 씻은 대야 헐하디 헐하고 비싸지도 않은 거, 그거 깨질까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거 봐라. 네가 정반왕(淨飯王)의 손자요,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그렇지만 네가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을 진실하게 쓰지 아니하고 그러면, 저 발 씻는 대야처럼 너를 갖다가 사람들이 발길로 차고 내쫓친다 하더라도 아무도 너를 소중히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네가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출가 사문(沙門)이고 한데, 얼마나 네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냐. 그러나 네가 마음으로, 입으로, 말로 출가인답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청정하지 못하면, 아무도 네가 죽는다 해도 너를 애석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는 것이니라” 이렇게 아주 준열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때부터 나후라존자는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뼛속 깊이 알아듣고서 그 뒤부터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도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래로 어떻게 묵묵히 말없이 수행을 열심히 했던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고, 마침내는 대성현이 되어서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에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손꼽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필 왜 오늘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의 얘기를 하느냐 하면, 요새 날이 갈수록 청소년의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범죄 사실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고, 그 범죄가 나날이 심해 가고 있고, 때로는 강도도 하고 때로는 사람도 죽이기도 하고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또 횟수가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네들은 학교를 보내나, 항시 그 자녀들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 성현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도 그러한 문제점이 있는 문제아동이었었지만, 부처님 그 지혜롭고 자비롭고 엄숙한 교훈으로써 그 나후라존자를 갖다가 잘 훈도(薰陶)해서 성현이 되도록 한 것을 우리는 거울삼아서 여러분들의 자녀의 교육에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해 나가신다면 자녀 교육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녀 교육.

옛날부터 성현(聖賢)도 자식은 바꾸어서 가르켜야 한다.
공자님도 그 아드님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직접 당신이 가르키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교육을 하셨고, 부처님도 당신이 직접 가르키시지 아니하고 사리불에게 맡겨서 그 아드님을 교육을 했습니다.

'왜 아무리 그 부모가 훌륭해도 직접 그 자식을 가르킬 수가 없느냐?' 하면, 자식은 정(情)으로 서로 인연이 맺어져서 부모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항시 정이 앞서게 됩니다.
정이 앞서게 되면은 교육은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스승과 제자 간에도 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이라 하는 것은 물러서, 무르면은 법도(法度)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은 화가 먼저 치밀으고, 그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너무 기대하는 그 마음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삽시간에 미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말이 법도에 벗어난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심하게 매질을 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부모 자식 간에 정의를 손상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때로는 위험한 지경에까지도 이를 수가 있어서, 자식은 스승에게 맡겨서 가르키는 것을 옛날부터서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시험—고등학교나 대학 입학시험, 그런 문제로 해서 행여나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해 가지고 그저 국민학교 때부터서 공부를 시키고 과외를 시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는데, 그 자식이 부모가 요구한 만큼 그렇게 성적이 올라가지를 못한 경우가 많아서, 그러면 그럴수록에 그 자식의 교육에 더욱 부모는 신경을 쓰게 되고, 신경을 써서 계속 강압적으로 나가면, 점점점점 정신적인 압박을 느껴 가지고 아주 '공부' 소리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지고 '어떻게 하면 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시험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래 견디다 못하면은 나가서 나쁜 친구와 사귀기도 하고, 좋지 않은 놀이터에 나가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자칫 잘못되는 수도 있고 그래서 대단히 모다 어려운 문제점이 있읍니다마는.

세상이 온통 서양 풍속이 물밀듯이 들어와 가지고 옛날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그러한 윤리관으로서는 요새 자녀들을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진즉부터 그러한 윤리관으로써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되어가지만, 우리나라는 옛날 전통은 무너져 버렸고, 새로운 윤리관이 정립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래 가지고 그냥 고대로 놔둘 수도 없고, 너무 심하게 단속을 하면 참으로 비뚤어져 버리고 이래서.

더군다나 학교 교육은 우리 한국적인 그런 교육제도가 정립이 되지 못해 있기 때문에, 옛날 왜정(倭政) 때 시키던 그런 교육 방법으로써 계속 시험점수만 따서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국민학교 때부터서 그런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에 애들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도 참다운, 자립해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 나갈 만큼 훌륭한 교육을 받지를 못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모든 것이 또한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녀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애들은 옛날의 윤리 그런 것에는 벗어나기를 바래고, 부모는 그대로 놔둘 수는 없고,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 갈등과 애로가 생기는데, 이럴 때에 부모가 감정에 흘른다든지 그것을 수습을 못하면 완전히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자녀들을 입으로 가르키려고 하지 말고, 우선 내 마음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걱정을 하고 때로는 종아리를 치고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가 화나는 것을 부애풀이하기 위해서 종아리를 때리고 큰소리를 치고 하는 것을 우리는 왕왕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의 부애풀이를 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욕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종아리를 때리고 하는 한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역시 스승이 제자를 가르키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룰 때에도 학생이 공부를 안 한다든지, 숙제를 안 해온다든지, 선생님 앞에 불순(不順)한 언동을 한다든지 하면 ‘그 애를 어떻게 지도해야 이 학생을 바로 지도할 것인가? 그 학생을 지도하는 데에 어떠한 지혜가 필요하며 어떠한 방법이 필요한가?’ 여기에 생각이 집중되지를 아니하고,
“감히 저놈이 선생님 앞에, 저런 고얀 놈이 있나?” 당장 흥분을 해 가지고, 자기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귀쌈을 올려대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이래 가지고 그 학생으로 하여금 상처를 입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하는 그러한 예도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서는 세상없어도 그 스승 밑에 훌륭한 학생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갖다가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혹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든지,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나쁜 친구하고 어울린다든지, 학교의 성적이 나쁘다든지, 학교에 간다고 해 놓고 사실은 다른 나쁜 친구와 놀다가 들어온다든지 반드시 그러한 경우를 만나게 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첫째의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해서, 정말 부처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써 우선 자기 자신을 수습을 하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저 애를 바로 잡을 수가 있을 것인가? 저 애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그 나후라를 훈도하듯이 그러한 지혜로운 방편을 쓰실 만한 여유를 가진다면 그 아들을 교육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다짜고짜로 뚜들어 패고 책을 찢고 욕지거리를 해서 푹 가출을 해 가지고 소식이 없어진다던지, 나가서 어떤 경우는 물에 빠져 죽어 버린다던지 자살을 해 버린다던지, 이러한 결과를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이것은 다시는 그 천추(千秋)의 한(恨)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키는 것은 말로써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로 가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가르킬 수 있는 것은 짐승은 몽둥이로 가르키고 또 먹을 것으로써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을 것과 몽둥이만 갖고는 절대로 교육을 원만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그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믿을 수 있게 해야 하고, 부모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어떠한 애로 사항이라도 부모님 앞에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평소에 지혜와 자비로써 자녀를 상대를 해 나와야, 그 자녀가 사춘기를 맞이해서 또 어떤 중대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털어놓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님 앞에 의논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어려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는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외래 종교가 나날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이때에 불교(佛敎)도 포교(布敎) 사업을 잘해야 한다. 포교당을 많이 짓고 어쨌던지 스님들이 산중에만 들어가지 말고 이 도회지로 나와서 발벗고 나서서 포교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고 숭배하도록 해야지, 이대로 나가다간 전부 다 예수교나 기타 종교를 다 믿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까지도 다른 종교에서 악착같이 끌어갈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도 다 개종을 해버리지 않겠느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해서, 모다 젊은 스님네들이 너도나도 모다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다 대학도 가고 공부를 하고 있읍니다마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나.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21분19초~42분44초)





(3/4)------------------

자녀 교육도 덮어놓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밥이 없냐, 옷이 없냐, 돈이 없냐. 왜 공부를 하지 아니하느냐! 다른 집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러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계속 족치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그래 봤자, 점점 나빠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부모는 가장 근심과 걱정과 슬픔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식은 부모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하고 밤잠을 못 자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보고 '공부하라'고 하는 그 소리만 죽도록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놀고 싶을 때 놀고, 친구하고도 어울리고 싶을 때 어울리고, 어디 또 가고 싶을 때 가도록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부모는 꼼짝 못하게 하고 ‘공부,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라’ ‘네가 공부만 잘하면 내가 왜 너 보고 공부를 하라고 하겠느냐. 공부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나가서 놀으라고 하지,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그러지 않느냐’
이렇게 입씨름을 하고, 그렇지마는 자식의 귀에는 그런 말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저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점수를 백점을 맞고 싶지만, 해도 머리에 안 들어가고 잘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지만, 어쩐지 공부가 영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고, 마음이 집중이 되지를 않고, 공부만 할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가 빙~하고 하나도 정신 집중력이 생기지를 않고, 공부는 하라고 해싸니, 뭐 환장을 할 지경이다 그 말이여.
좀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운동도 좀 하고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공부 못한다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니 점점 나쁘게 하고 나중에는 거짓말을 하고 나가게 되고 이래서 점점점점 못쓰게 되니, 그럴 때에 부모는 억지로 ‘공부! 공부!’ 하지 말고 좀 나가서 놀게도 하고, 학교 점수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좀 느긋하게 스스로 공부할 마음이 나도록 해야지, 공부하라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것을 막연하게 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잠자기 시작해 가지고 약 2시간 가까이 되면 대체적으로 잠이 깊이 드는데, 그 잠이 깊이 들었을 때를 그 시간을 타서 간절히 그 아들에게 되풀이해서 간절한 말과 간절한 음성으로 조용하게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말을 타이르십시오.

(눈이) 떠 갖고 있을 때에 ‘공부 공부’ 하면 당장 귀를 막고 싶고 속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마는, 잠이 깊이 들은 그 찰나에는 육식(六識)이 다 쉬어 버리고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는 무슨 말을 해도, 저에게 유익한 말을 아주 간절한 음성으로 잘 타이르면 거부 없이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 이튿날 전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할 마음을 내게 되고, 또 나쁜 버릇이 있는 학생은 또 그런 나쁜 버릇을 스스로 고치게 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특히 유치원이나 국민학교에 다니는 그러한 어린 아동들에게 이런 방법을 시험 삼아서 한번 사용을 해 보시면 반드시 큰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어째서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 타이르면 효과가 있느냐 하면, 눈이 떠 있을 때에는 제 생각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릇에 무엇이 잔뜩 담어 있는 거와 같아서, 그릇에 무엇이 담아 있는 데다가는 아무리 무엇을 집어넣어도 들어가지를 않는데, 잠이 꼬빡 들어서 자기 의식이 완전히 비어 버리면, 가뜩 들었던 그릇을 다 쏟아 버리고 빈 그릇의 상태로 돌아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릇이 비은다면 거기에 물을 담으면 물이 들어갈 것이요, 사과를 담으면 사과가 들어갈 것이요, 대추를 담으면 대추가 들어갈 것입니다.

어떤 어린 학생이 영 구구단을 외우지를 못해서, 그래서 그 구구단 하루 종일 외워도 잘 외우지를 못 했는데, 그 학생이 잠이 든 뒤에 1시간 50분쯤 되어서 잠이 깊이 들은 때를 타서 귀에다 거기다 대고 계속 구구단을 몇 번을 읽어 주었습니다.
읽어 주고서 “네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한번만 이 구구단을 주욱 읽고 나면 너는 이 구구단을 주루루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서, 그 이튿날 아침에 “너 구구단 한번 읽어 봐라. 읽어 보면 네가 주욱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한번 해 봐라” 그랬는데 한번 주욱 읽어 보고서 구구단을 줄줄 줄줄 외우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이여. 이것은 자녀 교육에 대단히 필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서 항시 부모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고, 옛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그 가문의 훌륭한 어른의 일화도 많이 들려주고, “너의 혈통이 이러이러한 참 좋은 혈통에 태어났기 때문에 너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을 이렇게 가져야 하느니라. 너의 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고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느니라” 이런 말을 자꾸 타일러 주고 또 행동으로써 부모가 다 보여주고.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그 애가 차츰차츰 자라면서 그 가훈(家訓)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또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고 훌륭한 인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불교를 믿되 무당집에 다니면서 밤낮 무당 하는 소리나 듣고 또 직접 무당은 아니라도 무당에 가까운 그러한 절에 다니면서 밤낮 그러한 소리나 듣고 점이나 치고 사주나 보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방 거기 가서 물어보고,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으면 종래 그러한 20년 30년을 믿어 봤자 잘되어 봤자 그 무당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법(法)을 터득하면 일체법(一切法)이 다 한 법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한 법을 옳게 믿고 터득을 하면 교육 문제나 또는 가정 문제나, 회사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나, 세계 인류 문제나 모든 것이 다 한 통속(統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이뭣고?’

이 가운데에는 너무너무 잘 아시고, 참선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시고 또 올바르게 실천을 하시는 분도 많으시지만, 절에 법회를 몇 해를 댕겼는데, “대관절 ‘이뭐꼬’라는 것이 무엇인고? 이모의 코? 이모 코가 어쨌다는 거여? 밤낮 가면 ‘이모꼬’하라고 그러는데, 이모 코가 뭣이 어쨌다는 거여. 이모 코는 어떻고 고모의 코는 어떠냐. ‘이모 코’가 좋다는데 어째서 ‘이모 코’가 도대체 무어냐?” 하고 이렇게 몇 해를 다녀도 그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건 웃을 일이 아니고, 그동안에 처음 듣는 소리거든.
용화사 가면 좋다니까 오기는 왔는데 갈 때마다 ‘이모 코’만 찾으라고 하니까, 그거 참 '이모 코'가 별난 놈의 ‘이모 코’가 다 있다.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아하! '이모의 코'가 아니라 ‘이뭣고?’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게 무엇을 가르키는 말이냐 하면,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 말이여.
‘귀가 듣지 무엇이 들어? 귀가 없으면 못 듣고, 귀를 콱 먹어 버리면 못 들으니까 귀가 듣지, 듣기는 무엇이 들어?’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여.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속에 있어. ‘귀가 듣는다’ 하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 말이여.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저 밖에를 보면 창문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이여. 이러한 비유도 엄격히 따지면은 폐단이 있는 말이지만, 편의상 이러한 비근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들어.

‘귀를 통해서 무엇이 들어?’
‘마음이 듣지’

'마음이 듣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들은 풍월(風月)로 ‘마음, 마음’ 하지, 실지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다그쳐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은 풍월로 그저 어릴 때부터 ‘마음, 마음’ 그저 속상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그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속상할 줄도 알고 하는 그게 마음의 작용인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이것』은 그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일으키는 그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마음」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작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무엇이 그리 슬퍼할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기쁠 때도, ‘그 기뻐할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뭣고?’를 찾어도 도무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면 환히 배꼽 밑에 불이 켜지고, 따악 눈을 감고 ‘이뭣고?’를 하면 온갖 것이 환히 천상도 나타나고 지옥도 나타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환히 다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는 도통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그러한 노보살님이 그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용화사에서 하도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그러한 것을 자랑하는 분은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도 감히 챙피해서, 그런 소리만 하면은 ‘마섭(魔攝)이 되었다. 마구니에 빠졌다’고 호통을 맞을 테니까 은근히 함부로 말은 안 하고, 비밀 은근히 뒷구녘에서 그런 것을 자랑을 해 가지고 자기를 도통한 것처럼 믿게 할려고 공작을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참 가슴 아픈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찾아갈수록—‘이뭣고?’를 할수록 알 수가 없을 뿐이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거나, 무엇이 나타나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이러면은 그건 공부가 잘못되어 간 것입니다.
어쩌다가 혹 그런 것이 슬쩍 스쳐가거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幻相)이지, 그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을 해 버려야 해.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도 말고,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그걸 다시 나타나기를 바랄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그것은 귀 끝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해 버리고 다시는 관심을 거기다가 붙이지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냥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이뭣고?’ 소리를 아니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하면,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덮치기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 가서 ‘이뭣고?~’ 한번 이렇게 챙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42분44초~63분17초)





(4/4)----------------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5만 독(讀)을 한다 또는 10만 독을 한다' 해 가지고, 염주가 닳아지도록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타불 타불 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끄터리만 따서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어쨌던지 오늘 내가 10만 독씩을 매일 채워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아미타불을 봐야겠다’해 가지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는데, 또 염불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는 염불문(念佛門)도 있습니다.
염불이 나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염불을 해야겠다는 철저한 신심이 있고 또 염불을 통해서 극락세계에 갈 그러한 원력(願力)을 가지신 분, 그런 신심을 가지신 분은 또 염불도 좋은 것이지, ‘에이, 참선이 제일이고 그까짓 염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염불하는 사람을 우습게보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염불도 정말 올바르게 지극정성으로 하면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화사는 주로 참선법을 주로 해서 법(法)을 설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염불에 대한 말씀을 아니합니다마는, 여러분은 참선을 지극정성으로 할지언정 염불에 대해서 비방을 하거나 그것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에 여기에 계신 분 가운데에는 과거에 염불도 많이 하시고, 또 관세음보살도 많이 하시고, 또는 ‘옴마니반메훔’ 같은 그런 주력(呪力)을 지극정성으로 많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어서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염불을 하시는 것이 좋을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하시는 것이 또 근기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그래서 참선법에 한번 마음을 붙이고 여기에 발을 디딘 분은 다른 데에 ‘무엇이 좋다’ 하면 그리 그냥 귀가 솔깃, ‘무엇이 좋다’ 하면 그것에 솔깃, 그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한번 믿은 마음이 철석같아야 하거든. 태산과 같이 부동하고 바다와 같이 깊어야지,
여기서 뭐라고 하면은 그 말에 솔깃, 저기 가서 뭔 말을 들으면 그것에 솔깃, 이거 좋다 하면 이것 솔깃, 저것 좋다 하면 저것 좀 해볼까... 밤낮 갈팡질팡, 갈팡질팡,
‘법화경을 읽으면 좋다’ 그러면 그때부터서는 인제 법화경, ‘에이, 법화경보다도 금강경이 더 좋다’ 하면 금강경, ‘화엄경이 진짜 좋다’ 하면 화엄경, ‘참선이 좋다’ 하면 참선.

참선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해 보니까 잠만 퍼오고 망상만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어. ‘에이, 법화경 다시 해야겠다’
‘에이, 법화경 해 보았자 별 수 없고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치니까 환히 내 마음이 시원하게 다 가르쳐 주더라’ 이래 가지고 겉으로는 참선하는 척, 속으로는 무당을 조실스님으로 생각하고, 도대체 20년, 30년 불법을 믿으면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어.

보통 좋을 때는 부처님 믿고, 무슨 일만 났다 하면은 부리나케 무당 점쟁이한테 쫓아간다.
만약에 무당한테 가고 점쟁이가 그렇게 사람을 잘 모든 일을 다 뜻을 성취하게 하고 생사해탈하게 한다면, 우리 절에도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족집게 점쟁이를 얼마든지 갖다가 고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일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지내간 이야기는 썩 잘 맞춥니다. 금방 터진 명도점쟁이라던지 그게 다 지내간 얘기를 그렇게 뭐 같이 산 사람보다도 더 잘 알아맞히고 그러는데, 그 사람 말 듣고 뭔 일이 다 해결이 된다면, 그 점쟁이는 대대손손이 대통령만 해먹고 장관만 해먹고 다 박사가 되겠지만, 점쟁이 뒤끝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잡신(雜神)만 그 집구석에 드글드글 끓지, 한 자식 옳게 기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잡신을 숭상하기 때문에 팔도의 잡신은 그 집안으로 다 모여들어서, 잡신은 굿을 하면은 그때는 조금 헤헤 하다가 며칠 지내면 도로 또 행패를 부립니다. 깡패 불러다가 이용해 먹으면, 나중에 그 깡패 등쌀에 그 집단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손해가는 것 같지만 정법(正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념(正念)으로 다스리고, 모든 일은 정법으로써 지혜로써 잘 수습해 나가면 결과적으로 거기에서 바른 길이 열리고 올바르게 해결이 되는 것이지, 밤낮 그런 잡신을 숭상하고 그런 잡된 삿된 길에 드나들고 추종을 하면 점점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물이 들고 나중에는 그 점쟁이 집에 들끓던 잡신이 자기집에까지 따라옵니다.

자기집에도 물을 떠놓고 빌고 대감단지를 해놓고 남편 몰래 뭐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러면 그 애가 머리가 따끔 따끔 아프던 것이 신기하게 나은 것 같고, 그러면 계속 그 짓을 해 가지고 나중에는 며느리한테 그걸 물려주고 딸 시집가는 데도 물려주고 이래 가지고는, 나중에는 딸이 느닷없이 싱숭생숭 해 가지고 곧 그냥 미칠락 말락 하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가지고 점쟁이가 될라다가 말라다가 곧 발광을 하거든.
그래 가지고 참 계속해서 처음에는 몇 해거리 한번씩 굿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래 갖고 안되니까 1년에 한 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다달이 하다가 그래 가지고 집안 살림은 탕진이 되고, 그래 가지고 집안에 계속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화재가 일어난다, 약 먹고 죽는다 그래 가지고는 사람이 연거퍼 둘씩, 셋씩 막 죽는 거거든.

그러고 평생을 경험을 해 본 뒤에사 ‘아하! 이것이 나쁘구나’ 그것을 알고서 그것을 끊을려고 하면은 정말 그 '씨앗이'에다가 손가락을 넣고 견딘 것처럼 그렇게 아픈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라고 하는 것을 혹 시골에 사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 목화씨를 빼는 좋은 기계가 많지마는, 옛날에는 수동식입니다.
수동식으로 되어 가지고 꽈배기 과자 같이 나무를 만들어 가지고 두 개를 합해서 돌리면, 그래 가지고 목화(木花)를 집어넣어서 돌리면은 씨가 거기서 뚝뚝뚝 떨어지면서 솜만 저쪽으로 나오는데, 그 꽈배기같이 생긴 두 나무 돌아가는 사이에다가 목화를 넣다가 잘못해 가지고 손가락을 넣게 되면 손가락이 아주 파싹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놈을 참고 계속 손가락을 처음부터서 집어넣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당을 숭배하다가 그것을 그만둘라고 할 때에 그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할 만큼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당이나 무당 숭배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것을 할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한 번 두 번 답답하면 가서 물어보고 또 물어봐서 해 보니까—밥을 해 놓고 손을 비비고 갖다 찌트러 버리고, 칼로 이리저리 해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면 좀 효험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 번 두 번 하다가 그렇게 되는 거여.
마치 아편을 한 번 두 번, 정 그렇게 아플 때에 한번 맞으면 시원하니 낫고 하니까 또 맞고, 한 너댓 번만 맞으면 아편 중독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은 믿고 해 갈수록 담담하고, 그런 삿된 길은 한두 번 해 보면 그렇게 쌈박하고 좋거든.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 끌려 들어가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심하다고 별맛이 없다고 버리고, 입맛을 취해서 삿된 데에 빠지고, 입맛을 취해서 음식을 취하고 그러면은 사도(邪道)에 빠지고 결국은 건강을 해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삼복이 가까워서 몹시 더운데, 이렇게 한 분도 졸으시는 분이 없이 이렇게 참 잘 듣고 계셔서 대단히 감사한데, 정말 참선 얘기를 할 때에는 이렇게까지 눈이 초롱초롱 안 하고, 무당 얘기를 하니까 그렇게 눈이 반짝거린다 그 말이예요.


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앞으로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돌아옵니다. 선방에 계신 비구 스님네 그리고 비구니 스님들, 더울 때 아무리 더위도 그 더울 때에 즉(卽)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이 선방에 계신 보살님네들이나, 또 가정에서 공부하시는 보살님네 · 청신사 여러분, 더울 때는 그 더울 때를 향해서 더운 곳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도록 노력을 하신다면 더운 줄을 모르고 한 해 여름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서늘 바람이 날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식어 버리고 청량한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여름에 되게 더워야 그래야 논밭에 모든 곡식이 잘 자라고, 겨울에 되게 추워야 모든 잡충들이 다 잘 죽고 그 이듬해 또 풍년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울 때는 더워서 못한다고 한 사람은 추울 때는 또 추워서 못하고, 젊어서 바뻐서 못한다는 사람은 늙어서 몸이 아파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울 때는 더웁기 때문에 더움을 향해서 공부를 가다듬고, 추울 때는 그 추운 곳에 즉(卽)해서 생각을 돌이킨다면 춥고 더운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공부를 이루게 하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비단 더웁고 추운 것 뿐이겠습니까? 속상할 때에는 그 속상한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슬플 때는 바로 그 슬픈 곳을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기쁠 때 괴로울 때는 바로 기쁘고 괴로울 때를 즉(卽)해서 화두를 든다면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마음 찾는 도량이요, 바로 법신불(法身佛)과 바로 무릎을 맞대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할 것입니다.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타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다.
천 개나 되는 강에 강물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것은 한 달이더라 그 말이여. 하늘에 한 달이—달은 하나인데 그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추어 있더라 그 말이여. 천 개의 강에 다 강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 달은 바로 하늘에 있는 한 달이더라 그 말이죠.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집집마다 뜨락마다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백목련도 피고 집집마다 피는데, 그것이 각각 다른 봄이 아니라 한 봄이더라 그 말이죠.

하늘에는 한 달이건만 우리는 어찌 이렇게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상황 속에 태어났고,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동서남북 가가호호에 태어나서 김 서방, 이 서방, 박 서방 이렇게 태어났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팔도에 태어나서 각각 피도 다르고, 성도 다르고 이렇게 태어났는데, 오늘 이 시간은 사부대중이 온통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한마음이 된 이 공덕으로 우리는 세세생생에 한 불회상(佛會上)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종일토록 이 홍진(紅塵) 속에 줄달음질을 치면서(終日走紅塵), 자기집 보배를 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失却自家珍)

오늘부로는 바로 이 법당에서 나가는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이뭣고?’ 하고 자기의 자성(自性) 부처를 찾으신다면 세세생생에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결정코 자기집에 있는 세세생생에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아서 일체 중생에게 노나 줄만큼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시간 3분20초~1시간24분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放去花爭發 收來水逆流 誰知番虜輩 箇箇着皮裘 /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 한다 /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 / 나후라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에 밀행제일(密行第一) / 자녀 교육, 지혜로운 방편 / 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의 목적은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 잠 들었을 때, 무의식 속의 교육.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 마음을 관(觀)한다’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 /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 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 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 (게송) 千江同一月 萬戶盡逢春 終日走紅塵 失却自家珍.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다가 아무도 나를 위해서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계(三界)에 대성인이시고 사생(四生)에 자부(慈父)이시지만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깨닫는 방법, 길은 일러주실 수 있지마는 내 대신 깨달라 주실 수도 없고,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나.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수행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울 때는 더워서 못한다고 한 사람은 추울 때는 또 추워서 못하고, 젊어서 바뻐서 못한다는 사람은 늙어서 몸이 아파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울 때는 더웁기 때문에 더움을 향해서 공부를 가다듬고, 추울 때는 그 추운 곳에 즉(卽)해서 생각을 돌이킨다면 춥고 더운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공부를 이루게 하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비단 더웁고 추운 것 뿐이겠습니까? 속상할 때에는 그 속상한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슬플 때는 바로 그 슬픈 곳을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기쁠 때 괴로울 때는 바로 기쁘고 괴로울 때를 즉(卽)해서 화두를 든다면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마음 찾는 도량이요, 바로 법신불(法身佛)과 바로 무릎을 맞대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부로는 바로 이 법당에서 나가는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이뭣고?’ 하고 자기의 자성(自性) 부처를 찾으신다면 세세생생에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결정코 자기집에 있는 세세생생에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아서 일체 중생에게 노나 줄만큼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3. 9. 09:47

 

 

((No.244))—1984년 8월 첫째 일요법회(84.08.05) (80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19분.

 

(4/4) 약 19분.

 

 

(1/4)----------------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헌디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구명구리여조로(求名求利如朝露)허고  혹고혹영사석연(或苦或榮似夕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한데, 달을 옥토(玉兎)라고 그러고, 해를 금오(金烏), 금까마귀라 그러거든. 달을 옥(玉)으로 만든 토끼, 옥토라 그러고, 해를 갖다가 금까마귀라고 그렇게 별명을 부르는데.
옥토는 올라 떴다 잠겼다, 달이 떴다 졌다 하는 가운데에 사람을 늙게, 빨리빨리 사람의 늙은 모냥을 재촉을 하고, 금까마귀가 떴다 잠겼다 하면서 연광(年光)을 재촉을 해. 나이를 재촉을 한다 그 말이여.
달이 떴다 졌다 하면서 한 달 두 달 세월이 지내감으로 해서 사람이 그만큼 늙어가고, 날마다 해가 동쪽에서 떴다 서쪽으로 지고, 동쪽으로 떴다 서쪽으로 지고 하면서 세월이 흘러간다 그 말이여.

그 가운데에, 구명구리여조로(求名求利如朝露)요  혹고혹영사석연(或苦或榮似夕烟)이라.
명예(名譽)를 구하고 재산을, 재리(財利)를 구하고, 날마다 주름살 하나씩 불어가고 흰 머리카락이 하나씩 불어가면서 하루하루 늙어 가는 줄 모르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명예와 권리와 재산과 향락을 즐기는데, 그 피땀 흘려서 인정사정없이 욕심을 부려서 구해 봤자 아침 이슬과 같더라. 아침 이슬이 풀 끝에 맺혀 있으면 햇볕이 비칠 때에는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지마는, 바람 한번 지내가 버리면 우수시 떨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인생을 살다 보면 혹 괴로운 일도 당하고, 혹 영화(榮華)스러운 일도 당하고 그러지마는 그것이 모두 저녁노을과 같다 말이여. 해가 질 무렵에 하늘에 있는 노을이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답게 빛나지만 해 져 버리면 껌껌한 구름이 되고 말아버리듯이, 세속(世俗)에 명예와 권리 재산과 혹 영화스럽고 혹 고통스러운 것이 모두가 다 아침 이슬과 같고 저녁노을과 같은 것이더라 그 말이여.


오늘은 8월 첫째 일요법회 날이고, 지금 시절이 중복(中伏) 그 기가 맥히게 무덥고 찌는 날씨인데, 모두 산으로 들로 놀이를 나가고 피서를 나가고 그러는데, 이리 이 법당을 가뜩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어찌 여기 모이신 분인들 바다에 가고 싶지 않고 또 산에 가고 싶지 아니하신 분이 있으리오마는, 법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모든 계획을 다 미루거나 취소하거나 포기를 하고서 이렇게 모다 모이셨습니다. 또 바다에 가서 며칠 놀기 위해서 갔다가도 중도 폐지(廢止)를 하고 이렇게 법회에 참석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은 과연 얼마만큼 정법(正法)을 신(信)하는 그 신심(信心)이 투철(透徹)한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통해서 중국에 고봉(高峰) 스님이 '3년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만일에 깨닫지를 못하면 죽음으로써 끝을 맺으리라' 이러한 지독한 결심을 하고 정진(精進)을 시작을 했는데, 3년 기한이 얼마 남지를 안 했건마는 도무지 공부가 조끔도 되어 가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방석에 앉기만 하면 졸음이 퍼오고, 졸음이 좀 깨면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퍼일어나고, 번뇌와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은 또 졸음이 퍼오고. 이 혼침과 산란, 이 두 마구니가 번갈아가면서 방해를 친 통에 방석에는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방석에서 일어나와서 밖에 나와 가지고 동(東)으로 서(西)로 포행(布行)을 하면서, 하다가 조끔 잠이 깨면은 또 자리 가서 막 앉으면, 앉을라 하면 또 잠이 퍼오면 또 일어서서 포행을 하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지독하게 애를 썼건마는 3년이 다 되어도 조끔도 공부가 되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그래서 착잡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인자 죽을 날이 며칠 안 남았다 이 말이여. 그러자 꿈속에서 단교(斷橋) 스님이란 스님으로부터서 화두(話頭)를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일만 법(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하는 그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떠억 받았는데, 그리고서 잠을 깼는데 너무 역력(歷歷)하고 성성(惺惺)하다 그 말이여.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는데 기가 맥혀. 그 전에는 화두를 들라고 하면은 들을 때뿐이고 의심(疑心)이 걸리지를 않고 잠깐 들었을 뿐이지 일 분도 못 가서 딴생각이 침범을 해 버리고 화두는 간 곳이 없고. 이렇게 3년을 애썼는데, 꿈속에 화두를 떠억 타고 난 뒤부터서는 화두를 들 것이 없어.

확~! 눈을 감으나 뜨나, 밥을 먹으나 옷을 입으나, 똥을 누나 오줌을 누나, 뭐 걸어댕기나 앉으나 서나 뭐 그냥 고대로 의단이 떠억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의단이 독로하는데, 참 그 경계(境界)는 겪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알 수가 없더라 그 말이여. 일부러 딴생각을 좀 낼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대중(大衆) 가운데 있으나, 혼자 있으나 뭐 마냥 똑같고, 옆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이 없더라 그 말이여.

공부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하지를 못하니까 옆에서 조끔 뽀스락거리면은 그놈에 신경질을 포르르르 내고, 옆에서 뭔 잡담 조끔 하면은 포르르 하니 신경질을 내고.
참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의단이 독로해 봐. 옆에서 떠든 것이 무슨 상관 있으며, 문을 처닫으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옆에서 좀 부스럭거리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자기의 신심이 돈독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공부가 간절(懇切)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문 닫는 소리, 옆에서 좀 뿌스럭거리는 소리, 옆에서 뭔 말 좀 하는 것이 전부 문제가 되고, 공부가 되느니 안 되니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고봉 스님이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순일무잡하기를 6일, 7일이 되었는데 밤낮이 없이 그렇게 되다가 7일 만에 그때 달마 스님 제삿날을 맞이해서 달마 스님 모셔 있는 그 영각(影閣)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진영(眞影)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다'

백년이면 삼만육천 일인데, '백년, 삼만육천 일에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이놈이 바로 이놈이다' 한 그 게송 써진 것을 보고서 화두(話頭)가 타파(打破)가 되는데, 그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만 타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조주(趙州) 무자(無字)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며, 마삼근(麻三斤)이며, '청주(靑州)에서 적삼 하나를 얻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 한 공안(公案)이 있는데 그 공안이며, 천칠백 공안이 하나도 맥힘이 없이 다 확확 다 터져 버렸다 그 말이여.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이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입니다.
다른 세속 공부처럼 날마다 하면은 조끔씩 조끔씩 뭣이 되어 가고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하루를 하나, 석 달을 하나, 일 년을 하나, 삼 년을 하나, 마냥 옳게 할수록 꽉 맥히고 답답할 뿐이지, 뭐 한 달 했으니까 조끔 되고, 두 달 하면 조끔 그만큼 더 되고, 석 달 하니까 더 잘되고 이렇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마지막 터질 때 탁! 되는 것이지, 조끔씩 조끔씩 뭐 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짜증을 낼 일이 아닙니다. 일 년이 되었건... 고봉 스님 같은 그런 대근기(大根機)로도 3년이라고 하는,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용맹정진을 해서 3년 만에사 그러한 경계가 이르렀거든.
하물며 근기가 약한 우리 하근(下根) 중생이야 3년 아니라 7년 아니라 10년, 30년이라도 고봉 스님과 같은 그러한 맹렬하고 간절한 결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밀고 나간다면 그것이 어찌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온전히 신심(信心)이 그렇게 간절하지를 못하고,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끈기가 없어서 그럴 따름인 것입니다.


날이 이렇게 덥지마는 이렇게 또 며칠이 안 지내면 또 말복(末伏)이 지내고 또 입추(立秋)가 돌아오면 또 서늘바람이 돌아올 것입니다. 덥다고 핑계대고 공부를 안 하고, 덥다고 피서를 간다고 법문을 들으러 안 오고, 그러면 또 서늘하면 서늘하다고 또 설악산으로 어디로 놀러 댕기고, 겨울에 추우면 춥다고 방안에 들어앉고.
핑계 대고 법문을 안 듣고, 핑계 대고 공부를 안 하면은 눈 한번 감으면 내생(來生)인데 내생에 그 하룻밤 하룻낮에 만 번 죽고 만 번 살리는 그런 지옥고(地獄苦)를 누가 내 대신 받아줄 것입니까?


『현우경(賢愚經)』에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사위국(舍衛國) 이웃나라에 비뉴건특(毘紐乾特)이라고 한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는 온통 사견(邪見),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이 정법(正法)을,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믿는 사람이 극히 귀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우파사나(優波斯那)라고 하는 여자 신도, 청신녀(淸信女)가 있었는데 그이가 우연히 그 이웃나라 사위국에 놀러갔다가 거기서 어떤 거사(居士)를 만났습니다.

거사한테, "참!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라 한 분이 출세(出世)를 하셨는데, 그분은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셨으며, 왕궁에 부귀를 버리고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12년 만에 대도(大道)를 성취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지금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설법을 하시는데, 그 부처님을 친견하고 법문을 들으면은 무량억겁(無量億劫) 죄가 소멸이 되고, 그래 가지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면은 생사고(生死苦)를 면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그런 부처님의 그 공덕(功德)을 그 거사로부터 듣고서는 '아! 나도 한번 그 부처님을 친견하리라'

그래 가지고 마음을 먹고 부처님이 계시는 기원정사(祇園精舍)로 친견을 하러 갔습니다. 갔는데 먼빛으로 봐도 마치 저 하늘에 수천 개 수만 개의 번쩍거린 그 뭇별 속에 둥근달처럼, 먼 데서 봐도 대번에 알아차릴 만큼 그렇게 거룩하신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서 사부대중에게 설법을 하시는데 그 낭랑(朗朗)한 음성이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감히 황송해서 가까이 가지를 못하고 저 뒤 한쪽 구석에 앉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법문을 듣는데, 부처님이 그때 마침 무슨 법문을 설하셨냐 하면은 '다섯 가지 지켜야 할 성(聖)스러운 행실(行實)'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첫째는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면은 자비심(慈悲心)을 손상을 하고, 그래 가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되 내생(來生)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되 단명보(短命報)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살생(殺生)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을 목숨을 살려주고 이렇게 해서 그런 그렇게 행(行)을 가지면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건강하게 그리고 수명(壽命)이 장수(長壽)할 것이다.

둘째에는 도둑질을 하지를 말 것이니, 도둑질을 하면은 그 도둑질을 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빈천고(貧賤苦)를 받어. 가난뱅이 보(報)를 받고 사업(事業)이라고 했다 하면은 재수가 없어서 손재(損財)를 하고 평생에 빈궁보(貧窮報)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布施)를 하고 이리 하면은 그 사람이 세세생생에 거부장자(巨富長者)가 되어서 자기도 쓰고, 쓰고 남아서 모든 사람에게 베풀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에는 사음(邪淫)을 하지 말지니, 자기 남편, 자기 아내가 아닌 사람하고는 관계를 갖지 말 것이니, 만약에 그러한 사음을 하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나중에 다행히 사람의 몸을 받는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추(醜)한 인간이 될 것이니라.
다행히 사음을 하지 아니하고 청정(淸淨)한 행실을 가지면 세세생생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넷째는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니, 거짓말을 하면은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 되다가, 다행히 그 고를 다 받고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를 아니할 것이다. 아무리 옳은 말을 나는 힘을 들여서 열심히 말을 한다 해도 내 말은 도무지 남이 신용(信用)을 안 해 주어.
그러나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고 항시 진실한 마음과 말과 행실을 가지면은 어디를 가나 세세생생에 모든 사람으로부터서 신용을 얻게 될 것이다.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말 것이니, 술을 마시면은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바보, 천치로 태어나서 아무짝에도 못쓸 멍청이가 될 것이다.
다행히 술을 마시지 아니하고 계율(戒律)을 지키면은 머리가 총명(聰明)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20분53초)




(2/4)----------------

이러한 오계(五戒)를 설하시는 것을 듣고서 이 우파사나 여인은 마음이 황홀해서 너무 신심(信心)이 복받쳐서 부처님 앞—법회가, 법문이 끝나자마자 부처님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가 가지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저에게, 그 저도 오계를 설해 주십시오" 해 가지고,
"참 기특하다" 그러고서 오계를 설해 받았습니다.

오계를 받고서, "제가 여기까지 와서 부처님께 오계를 받았습니다마는, 제가 살고 있는 나라는 모다 우매(愚昧)하고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그런 사람들에게도 무슨 이익을 줄 수 있는 무슨 선물을 하나 주십시오"
그래 부처님이 "그렇다. 참 기특하구나" 그리고서 『법구경(法句經)』이라고 하는 경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걸 주시면서 "이것을 항시 몸에 지니고 항시 큰 소리와 작은 소리와 또 마음속으로 이 경(經)을 외우고 가져서 모든 사람의 귀와 마음에 이 소리가 울려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고(苦)를 면하고 진리의 눈을 뜨게 할지니라"
이런 수기(授記)를 받고서 가지고 오는데 너무너무 신심이 나고 환희심(歡喜心)이 나서 참!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밤이나 낮이나 이 경을 외웠습니다. 큰 소리로 낭랑하게 외우기도 하고, 자기 귀에 들릴 만큼 가만가만 외우기도 하고 그랬는데.

밤에 참 고요한 틈을 타서 낭랑하게 경을 외우는데, 마치 그 지붕 위를 날아가던 바이슈라마나(비사문毘沙門)라고 하는 하늘나라 신(神)이 모든 권속(眷屬)들을 데리고 그 공중을 날아가다가 그 낭랑한 경 읽는 소리가 들리니까, 날아가다 공중에 딱 정지를 해 가지고 한참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너무너무 하늘나라 그 선신(善神)들도 환희심이 났습니다.

그래 가지고 참, "선재(善哉) 선재로구나, 참 좋고 좋구나! 이 누이여. 참, 그 너무너무 설법을 잘하는구나" 이렇게 칭송(稱頌)을 하고.
"천상(天上)에 제일가는 보배를 내가 선물로 주고 싶지마는 누이는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아니할 것이니, 내가 좋은 희소식(喜消息)을 하나 전해드리겠다. 무슨 희소식이냐 하면은 여기서 멀지 않은 숲속에 사리불존자(舍利弗尊者)와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오백 명의 스님들과 같이 머물러 계시면서 정진을 하고 계시니, 그 두 성인(聖人)과 오백 명의 스님네들을 초청을 해서 공양을 올려서 무량공덕(無量功德)을 짓도록 하라" 이렇게 하늘에서 큰 소리로 우파사나 여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우파사나는 깜짝 놀래가지고 하늘을 두리번거리고 봤지마는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관절 당신이 누구이기에 내 이름을 알며 나보고 '누이'라고 하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나는 하늘나라에 사는 바이슈라마나라고 하는 천신(天神)인데, 그대가 너무너무 낭랑하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경을 읽고 설법을 하기에 내가 그것을 좋아서 듣고 환희심이 나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그대보고 누이라고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처님께서는 모든 성현(聖賢) 가운데에 최고의 법왕(法王)이신데 나와 그대는 그 법왕의 제자(弟子)이므로 그대와 나는 법형제간(法兄弟間)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대보고 누이라고 한 것이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 저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와 그리고 오백 명의 스님네들을 초청하고 공양을 하면은 그 존자들이 공양을 잡숫고서는 반드시 축원(祝願)을 해 주실 테니 축원을 할 때에 내 축원도 같이 해 달라고 부탁을 해 주오" 이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그 말을 듣고 환희심이 나서 밤이 늦게까지 잠이 안 왔습니다. 너무너무 기쁘면은 잠이 안 오는 것이죠. 그래서 새벽녘에사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날이 동이 튼 중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는데, 마치 그 집 하인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습니다.
껌껌할 때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나무를 하기 위해서 저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서 도끼로 가지를 찍다가 저 밑에를 내다보니까, 아! 거기에 오백여 명 스님들이 앉아서 고요히 앉아서 참선(參禪)하고 있는데, 그중에 보니까 옛날에 한 번 친견했던 일이 있는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가 떠억 계시거든.

'야, 참 기가 맥히구나. 우리 주인 마나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는데, 내가 가서 친견을 하고 인사를 여쭤야겠다' 해 가지고,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가지고는 사리불과 목련존자 계신 데로 쫓아가서 오체투지로 절을 터억 삼배(三拜)를 하고서는, "우리 주인 우파사나 여인께서 두 존자와 오백 스님네께 문안을 드립니다"
주인 말도 안 듣고, 지가 떠억 지 자작(自作)으로 인사를 하면서 주인의 이름으로 인사를 떠억 올렸다. 올리고서, "오늘 점심 공양에 청(請)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떠억 하니까.

그 사리불존자가 "참 기특하구나. 니가 때를 맞추어서 공양 준비를 해 놓고 청을 한다면은 기꺼이 가서 공양을 받겠노라. 니가 가거든 너희 주인께 내 말을 전해라.
공양(供養)을 올리면 어떠한 공덕(功德)이 있다고 하는 것을 전하는데,
첫째는 공양을 어떠한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좋으냐 하면, 첫째는 앞으로 먼 데로 떠나려고 하는 그런 스님네와 그런 사람에게 공양을, 보시를 하면은 좋고.
또 (둘째) 먼 여행을 하다가 돌아온 그러한 사람은 얼마나 지쳐 있겠습니까? 그런 스님네와 그런 사람에게, 그러한 길손에게 보시를 하면은 좋고.
그다음에는 (셋째) 병 들어서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거나 그러한 참 고통 속에 있는 그런 병자(病者)에게 보시를 하면은 좋고.
또 (넷째) 가난하거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파 굶주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보시를 하면 좋고.
또 하나(다섯째)는 법(法)을 알아서, 법을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선지식(善知識)이나 수행인(修行人)에게 보시를 하면은, 이 다섯 가지의 보시를 하면은 현세에 당장 복(福)을 받는다고 그 말을 너의 주인에게 가서 말을 해라"

그래서 그 하인은 너무너무 기뻐서 나무도 그저 한 둥 만 둥 해놓은 놈만 싸서 짊어지고, 묶어서 짊어지고 집으로 쫓아왔습니다.
쫓아와서 그 하녀보고 "지금 주인마님이 어디 계시냐?" 한게.
"지금 밤 늦게사 잠이 들어서 아직까지 자리에서 안 일어나시니 떠들지를 말아라"
"아니 내가 긴히 여쭐 말이 있으니까 좀 깨와야겠다"

"나는 못 깨운다"
"그럼 내가 가서 직접 깨와야겠다" 다짜고짜로 쫓아가서 주인마님 문을 톡톡 뚜드렸습니다.

주인이 깜짝 놀래서 "게 누군고?" 한게,
"예, 저 아무개입니다"

"무슨 일이냐?"
"지금 그러니까 긴히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마님이 떠억 일어나 가지고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어디 말을 해 봐라. 무슨 일이 있기에 새벽같이 나를 깨우는고?"
"예, 다름이 아니라 제가 새벽같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그 숲속에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와 그리고 오백 명의 스님네들이 떠억 머물러 계십디다"

"아 그래! 그 참 반가운 소리로구나" 그리고서 아주 보석으로 만든 귀고리를 떠억, 두 귀에 걸려 있는 귀고리를 떠억 빼서, 그 기쁨을 표할 길이 없으니까 귀고리를 뽑아서 주고. "참 고맙구나. 그런 반가운 소식을 나한테 알려주어서 고맙구나" 하고 귀고리를 빼 줬습니다.
"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리불존자, 목련존자께서 다섯 가지 보시 공덕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셔서 이러 약허약허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고 여쭈니까,

"아 그래! 니가 그러한 좋은 법문을 듣고 와서 나한테 전해 주다니 그러한 고마울 도리가 없구나" 칠보(七寶)로 만든 목걸이를 떠억 빼서 주면서 "너무너무 고마워서 내가 그 보답으로 내가 이 목걸이를 너에게 하사(下賜)하노라"
그래서 목걸이를 떠억 받아서 목에 걸고서 "또 한 말씀, 내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오늘 점심에 내가 주인마님 말씀도 듣지 않고 공양을 청(請)해 버렸습니다" 한게.

'너 이놈! 어른 말도 듣지 못하고 감히 니 멋대로 공양을 청해?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보통 사람 같으면은 천 명이면 천 명 그렇게 말할 텐데.
이 우파사나는 그렇지를 않고, "야, 과연 그렇지 않아도 내가 청할라고 했는데 어떻게 니가 내 뜻을 알고 그렇게 가서 내 대신 청을 했단 말이냐? 너무너무 고맙구나. 내가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줘야 옳단 말이냐? 오늘부터 노예를, 내가 종의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너를 해방을 시켜줄 테니, 니 멋대로 인자 자유인이 되어서 어디를 가서 살던지 니 멋대로 살아라" 종의 문서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너는 집에 있거나 출가(出家)를 하거나, 산에서 살거나 들에서 살거나, 도시를 가거나 어디를 가거나, 너는 하늘에 별처럼 하늘에 달처럼 모든 어두운 세계를 비출 수 있는 그러한 공덕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축원을 하면서 종으로부터 해방(解放)을 시켜줬습니다.

그리고서 손을 씻고 공양 준비를 하고, 손이 모자라서 이웃사람을 초청을 해다가 가지가지 음식을 맛있게 만들고, 그래 가지고는 그 종을 시켜서, 하인을 시켜서 때맞춰서 사리불존자와 목련존자 공양청(供養請)을 했습니다. 공양청을 해서 공양을 맛있게 잡숫게 했는데.
그 공양이 눈으로 보기만 해도 그 빛깔이 아름다와서 먹음직스럽고, 그 음식에서는 너무너무 구수하고 맛있는 향내가 나서 참 식욕을 돋구고, 먹어 보니 산해(山海)의 진미(珍味)가 그렇게 다 갖추어져서 참 맛있게 공양을 드셨습니다.

드시고서 법문을 해 주시는데, "음식에 빛이 좋으면 세세생생에 얼굴빛이 아름답고 곱게 받아 날 것이며, 그 음식에 향그러운 맛이 있으면 세세생생에 그 사람 이름이 명예가 널리널리 퍼져서 그 사람 성명(姓名)만 들어도 모든 사람이 환희심을 내고 존경심을 낼 것이다.
또 음식이 맛이 있으면—음식이 맛있는 음식, 기왕 공양을 올리되 빛깔이 좋고 또 향내가 좋고 또 맛이 좋으면 세세생생에 무엇이고 마음먹은 대로 자기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공양도, 보시도 좋지만 특히 먹는 음식 공양을 잘 올리면은 세세생생에 큰 힘을, 좋은 힘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느니라" 그렇게 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그때 우파사나는 "제가 한 말씀 다시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저는 이상해서—항시 그 어떠한 스님네나 성인(聖人)에게 공양을 올릴라고 마음을 먹으면 눈에는 안 보이는데 귓전에 와서 일러주는데, '이분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성인이니라, 이분은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얻은 성인이다, 이분은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얻은 성인이다, 또는 이분은 계행(戒行)이 청정한 스님이다, 또는 이분은 계행이 청정하지 못한 스님이다, 또는 이분은 참 지혜가 있는 스님이다, 또는 이분은 아주 어리석은 분이다' 아! 이렇게 귀에다 대고 일러주는 어떤 신(神)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그렇게 하지마는, 나는 모든 스님을 다 같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그러한 훌륭한 성인으로 알고 다 공양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다. 공양은 니가 그렇게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수행인과 스님들을 갖다가 그렇게 공양을 하니 참 기특하고 기특하구나. 차별심(差別心)을 가지고 공양을 하지 아니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존경을 하니, 너의 공양을 받은 사람은 모두가 다 반드시 그러한 큰 성과(聖果)를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기(授記)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 우파사나는 그 뒤에 어떠한 공양을 올렸느냐 하면은, 어떤 병든 스님이 병에 걸려 가지고 영양실조가 되어 가지고 도저히 차도(差度)가 없이 신음을 하고 있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을 보고 "내가 내일 오정육(五淨肉), 오정육을 구해서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오정육(五淨肉)'이라 하는 것은 그 짐승, 소나 돼지나 그 짐승이 죽을 때 죽는 그 현상을 내가 직접 보지 아니한 고기, 또 죽을 때 그 짐승이 죽기 싫어서 비명을 지르는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한 고기, 그리고 나를 위해서 일부러 죽이지 아니한 고기, 그리고 세 사람 손 이상을 건너간 고기, 또는 독수리나 범이나 그러한 짐승이 먹다가 버린 고기, 이러한 다섯 가지 종류에 고기를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다' 해서, 이것을 '오정육'이라 하는데.
"제가 이 오정육을 구해 가지고 공양을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했는데 그 이튿날 고기를 사러 나가니까, 그날은 국법(國法)으로 일체 살생(殺生)을 못하고 팔지 못하게 제정(制定)이 되어 있는 날이라 어느 푸줏간을 가도 고기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곱으로, 삼 곱, 십 곱을 줄테니까 고기를 구해 달라고 이리저리 다 손을 썼지마는 종내(終乃) 그 고기를 구하지를 못했습니다.
근데 '그 병든, 그 앓고 계신 스님께는 꼭 갖다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내가 이 약속을 어길 수가 있을까?'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안 식구 아무도 몰래 자기 허벅지 살을 도려내 가지고 그것으로 잘 요리를 해서 그 스님께 갖다 바쳤습니다.

그 스님은 그것이 그 우파사나의 허벅지 살인 중도 모르고 그것을 잡숫고서 병이 쾌차가 되어서 참 도(道)를 잘 닦으셨으나, 우파사나는 그 살점뱅이를 그걸 오리기를 뭐 한 점을 오리겠습니까, 두 점을 오리겠습니까? 기왕 공양을 올리기로 하면은 적어도 한 근 이상 해야 약으로 사용할 만하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살점뱅이를 뜯었으니 그것이 몇 달 동안 고생을 하셨겠느냐 그 말이여.
그래도 그것을 아무한테도 말을 안 하고 혼자 옷 속에서 치료를 했는데, 그러한 그만큼 그 우파사나는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에게 그 수행하는 스님네를 공양을 하기를 이렇게 참 돈독한 신심(信心)으로 공양을 올렸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분이야 보살화현(菩薩化現)이지, 우리 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릅니다마는.
부처님도 과거세(過去世)에 자기의 눈도 빼 주고 살도 도려 주고, 자식도 다 호랭이에게 보시를 하고, 자기 몸을 짓쳐서 자기 몸뚱이를 주린 범에게 보시를 하고, 이러한 참 수없는 생(生)을 그렇게 행(行)하기 어려운 것을 행해 가지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갖춘 그런 덕(德)과 지혜(智慧)가 원만히 갖추어진 성현으로서 출세를 하셔서 이렇게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하시고 계신 것입니다.(20분54초~41분47초)




(3/4)----------------

경(經)을 외운 공덕으로도 이만큼 큰 공덕을 쌓아서 대도(大道)를 성취하게 하고 또 대도를 성취할 수기(受記)를 받거든, 하물며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참선 공부를 하면 어찌 이 경을 외운 그러한 공덕에다가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이뭣고?' 화두 한 번 드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아미타불' 같은 이러한 염불이나 주력(呪力) 육백만 번 한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러고.
「팔천세(八千世)를 경을 외우고 삼천겁(三千劫) 동안을 청정한 계율을 지킨 공덕보다도 잠깐 동안 '이뭣고?' 하고 참선(參禪)하는 공덕이 더 수승하다」 했습니다.

여러분은 참선은 해 보면 별 재미도 없고, 만날 해 봤자 죽 떠먹은 자리요. 무엇이 눈에 보인 것이 있고 나타난 것이 있고, 1년 이태 3년 내지 10년을 해도 누구한테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거 해 봤자 별 볼 일 없고, 어쨌든지 관세음보살을 부른다던지 또는 허공산제(虛空山祭)를 지내서라도 무슨 소원을 성취한 것이 있어야지, '이뭣고?' 해 봤자 잠만 퍼오고 망상(妄想)만 일어나고 재미는 없고 이거, '에이, 그거 조끔 좋다고 해 보니 별 볼 일 없다' 이래 가지고 버렸다가, 또 법문(法門) 들어보면 '그래도 좋다니까 해 보자' 해 보면 안 되니 또 그만두었다가.

이것 좀 했다 저것 좀 했다, 『천수(千手)』 좀 외웠다, 『금강경』이 좋다 하면 금강경 좀 읽어 보고, '옴마니반메훔'을 읽으면 '옴마니반메훔' 해 보고, 또 기도를 가면 좋다니 기도를 좀 해 보고.
단양(丹陽)으로 갔다가, 동해로 갔다 서해로 갔다, 좋다고만 하면 발이 닳아지게 쫓아다니는데,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 이것이여.

좋은 우물은 조끔 파 가지고 물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조끔 깔짝깔짝해서 물이 나온 것은 그건 대개가 다 건수(乾水)로, 장마철에는 풍풍 나오다가 며칠 지내면은 바짝 말라서 가뭄에는 물 한 방울 안 나오는 것입니다.
한 질 파서 안 나오면 두 질 파고, 두 질 파서 안 나오면 석 질, 석 질 파서 안 나오면 열 질, 열 질 파서 안 나오면 스무 질, 계속 파 들어가면 나중에는 암반(巖盤)이 나올 것이다 그 말이여.
암반이 나오면 거기서 그만둘 것이 아니라 그 암반까지, 무슨 수를 쓰던지 그 암반까지 뚫어 버리면 거기서 물이 펑펑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장마 진다고 해서 물이 더 불지도 않고, 몇 해를 가문다 하더라도 그 암반 밑에 있는 지하수(地下水)는 가뭄을 타는 법이 아닙니다. 그 물이야말로 시원하고 달고 겨울에는 뜨끈뜨끈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이런 것입니다.

도(道)를 닦으면 세세생생에 쓰고 쓰고 남을 공덕이 그 속에 있고, 세세생생에 누리고 누려도 다함이 없는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재산이 거기에 있는데, 어찌 조끔 깔짝깔짝해 가지고 얻기를 바랜다면 그것은 욕심이 태과(太過)한 사람인 것입니다.
안 된다고 그만두어 가지고서는 세세생생에 무엇을 해먹고 살겠습니까? 세속에 조그만한 사업 하나도 몇 번을 실패하고 '죽을까, 말까?' 참 이러한 피나는 고통을 겪으면서 되풀이하면서 해 가지고 마침내 성공하는 법인데.
이 최상법(最上法) 무상대도(無上大道)가 어찌 그렇게 간단하게 쉬웁게 될 것을 바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될 때에 오히려 더 용기와 지혜와 끈기로써 밀고 나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대도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도(道)가 어려운 것만을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라, 이 도라고 하는 것은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지, 저 먼 데에 가 있고, 저 깊은 무슨 바닷속에 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말하고 있는 놈, 이 말을 듣고 있는 놈, 밥을 먹을 때, 똥을 눌 때, 성을 낼 때, 슬퍼할 때 바로 거기에 내가 찾아야 할 본바탕 마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앉었을 때나, 섰을 때나, 일할 때나, 속이 상할 때나,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그때그때가 바로 내 본마음 찾는 수도장(修道場)인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말고, 일 초도 옮기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뭣고?'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話頭)를 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이틀을 그렇게 지내고, 사흘을, 한 달을, 일 년을, 이태를, 삼 년을 이렇게 한결같이 밀고 나가면 할라고 안 해도 어떠한 찰나(刹那)에 터억 화두가 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사부대중 가운데에는 이러한 경험을 다 해 보신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건 결정코 있는 것이고, 오는 것이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신념(信念)을 가지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것이 되느냐 하면, 우리는 본래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敎), 경(經)에는 '우리도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했지만,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하니까 불성이란게 뭐냐? 무슨 보물 덩어리냐? 무엇을 가지고 불성이라고 하냐?
근데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표현을 달리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도 낱낱이 다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보석에다가 비교하면 '보석이 먼지에 덮여 있는 상태다' 먼지에 덮여 있어서 그 보석의 빛이 밖으로 나타나지 아니할 뿐이지, 아무리 먼지가 끼어 있다고 해서 그 보석이 보석 아닌 것이 아니거든. 그 먼지만 닦아 버리면 찬란한,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빛이 나올 것이고, 닦지 아니하고 놔두면 계속 먼지에 파묻혀 있을 뿐이지 보석임에는 다름이 없다 그 말이여.
우리도 분명히 부처님인데, 다못 '번뇌(煩惱) 속에 가리워져 있는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보석에 묻어 있는 먼지만 닦아 버리면 바로 찬란한 보석이 되듯이, '이뭣고?' 번뇌 망상 일어날 때마다 자꾸 '이뭣고?'를 한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본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든.
본래 부처인데 새로 부처가 될 것이 없건마는 그래도 닦아야지. 먼지를 닦아내야 찬란한 빛이 나듯이 닦지 아니하고 놔두면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먼지에 쌓여 있는 보석과 같애서 빛을 발휘할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열심히만 닦으면 반드시 되게 되어 있는 거다 그 말이여. 어느 보석에 먼지 닦아서 번쩍거리지 아니할 보석이 어디가 있겠느냐.

그러한 신념을 가지고 '여자다 또는 나는 무식하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배운 것이 없다, 나는 이미 늙었다, 나는 힘이 없다' 그건 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것이여.
도 닦는데 가장 큰 옳지 못한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은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고, '하면 된다'고 믿고, '나도 부처다'고 일단 믿고 대든 사람은 아무리 어리석건 바보건 천치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은 기어코 되고만 마는 것입니다.

저 밑에 낭떠러지에 떨어진 사람을 저 위로 끌어올릴라고 할 때에 본인이 기어나올라고 한 사람은 손을 뻗쳐 주어도 올라올 것이요, 장대나 어떤 노끈을 던져 주어도 그 사람을 끌어올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본인이 올라올라고 하지 아니한 사람은 위에서 아무리 어떻게 해 줄라고 해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인이 안 올라오고 뒤로 자빠지면서 올라올려고 노력을 안 한 사람을 어떻게 끌어올려 주겠습니까?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出現)을 하신다 해도 본인이 이를 갈아붙이고 발버둥을 치면서 할라고 대든 사람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계신 모든 청신사 청신녀 사부대중은 우파사나와 같은 그러한 신심을 가지고 보시 공덕을 쌓고, 경을 외우고,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신다면은 한 사람도 낙오자가 없이 다 같이 불도(佛道)를 이룰 날이 머지않은 장래에 올 것을 저는 믿고 기대를 하는 바입니다.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고, 나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공덕을 쌓고, 비록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여. 선이 아닌 것은 아니나 이게 다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근본밖에는 안 된 것이다.

아까 다섯 가지 보시(布施) 공덕(功德)을 말해 놓고,
'보시를 하고 착한 일을 하고 한 것이 또 생사윤회의 원인 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러면 말이 '좋은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 말라고 했다 종잡을 수가 없네'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어떠한 것을 보시를 하거나, 어떠한 좋은 일을 해도 이것이 다 무루복(無漏福)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유주상(有住相), '내가 이러한 좋은 일을 했다'고 상(相)을 내고 아주 공투세를 하고 자랑을 하고 이것은 상(相)이 있는, 상에 집착(執着)하는 선행(善行)이기 때문에 이것은 유루복(有漏福)이 되어서 그 공덕 지은 만큼 반드시 천상(天上)에 태어나거나 또는 인간에 태어나되 최고에 복을 받고 하겠지만, 유루복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언젠가는 다할 날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하늘에다 대고 화살을 쏘면 아무리 기운이 센 장사가 활을 쏜다 하더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다시 떨어졌지, 지가 계속 무한대(無限大)로 저 하늘나라로 계속 올라가는 법은 없거든.
그래서 큰 복을 짓건, 작은 공덕을 쌓건 항시 무주상(無住相)으로 해라 이것입니다. 무주상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을 지어야지, '에이, 그까짓 거 생사윤회 밖에 안된다니 인자 콧물도 없다. 인자는 남에게 좋은 일 할 것도 없고 나만 배불리 먹고 살자'
법문을 마음으로 듣지 아니하고, 어디 어믄 구녁으로 법문을 잘못 들으면 이상한 데에 처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을 짓되 집착심(執着心)이 없는, 상(相)에 떨어지지 않는 무주상(無住相)의 복을 지을 것이요, 그래야 그것이 영원한 것이다 그 말이지.

복(福)도 인연 따라서 부지런히 지으려니와 또 복 짓는 데만 떨어지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또 무엇을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지혜 닦는 길이 바로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힌 사이로 달빛이 비치는 그러한 데에 들어가서 길이길이 샘[漏]이 없는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리라.

'솔바람이 불고 칡넝쿨이 얽힌 산중에 들어가서 참선을 해야겠다' 한게,
'그러면 어떻게 해여? 집안 다 살림 다 그만두고 나도 참선(參禪)을 할라면은 저 산중(山中)으로만 들어가야 겠냐? 그러면 산중에 안 들어가면 참선을 못하냐?' 하면 그게 아니라.

인연 따라서 산중에 들어가서 할 만하면 백번이라도 들어가서 하면 좋고, 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들어가지 못할...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그 우글거리는 속에서 장사하면서 '이뭣고?'
가정에서 살림을 하는 사람은 가정에서 살림하면서 앉으며 '이뭣고?' 서면서 '이뭣고?' 손님 접대하며 '이뭣고?' 살림하면서 '이뭣고?'
회사에나 관공서에 나가서 사무 본 사람은 사무 보면서 의자에 걸터앉아서 '이뭣고?' 걸어가면서 '이뭣고?' 출퇴근하면서 '이뭣고?' 속이 상할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인생에 누가 괴롭지 아니하며 근심 걱정 없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바로 그때가 화두(話頭)를 챙기는 좋은 시절이다.
그렇게 나가면 바로 그 자리가 어찌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어지는 그런 산중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꼭 솔바람 불고 칡넝쿨 얽어진 산중만 된다면 그럼 산중에만 들어가서 있으면 다 성불(成佛)하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거든.

발심(發心)을 하지 못하고 산중에 들어가 봤자 오히려 솔바람 소리가 듣기 싫고, 그 깊은 산중이 쓸쓸해서 살맛이 없고,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듣기 싫고, '에이!' 열흘도 못 가서 다시 집으로 와 버린다.
'저 외로운 섬으로 가면은 사람도 안 만나고 정말 공부가 잘 되겠다'
파도 소리가 듣기 싫어서 못 하고, 정말 고향이 그리워서 외로운 섬에 일주일도 못 있어.

당인(當人)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소나무와 칡덩쿨에만 달려 있을 것입니까?
참으로 소나무와 칡덩쿨 밑에서만 해야 한다면은 집안에다 큰 소나무 하나 심고, 거기다 칡덩쿨을 갖다가 심어서 뱅뱅 돌려 놓고 그 밑에 앉어서 한다면 다 성불을 하겠네요?

시장 바닥도 좋고, 산중(山中)도 좋고 그것은 인연 따라서 맽기고, 문제는 한 생각 단속(團束)하는 데에 천당과 지옥이 판가름이 나고 산중과 속세(俗世)가 갈라질 것입니다.(41분48초~60분50초)




(4/4)----------------

오늘은 이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법공양(法供養)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선가귀감』을 법공양했습니다마는 그때는 시일이 촉박해서 교정을, 원고(原稿)를 잘 다듬지를 못하고, 이미 그 발간(發刊)되어 있는 그 책을 고대로 좀 확대만 해서 발간을 했고, 교정도 또 제대로 볼 시간이 없어서 여러 가지가 섭섭한 대목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마치 다시 또 원력(願力)을 발(發)하고 또 다른 분들도 그 돌아가신 분의 회갑(回甲)이 돌아와서 뭐 음식을 많이 장만해 갖고 음식 잔치를 붙이기보단 이런 좋은 경전(經典)을 보시하는 것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도 좋겠다 해서 또 보시를, 법보시(法布施)를 하시고.
또 당신의 생일과 아들의 생일을 맞이해서 이거 뭐 음식 공양하는 것도 좋지마는, 공부할라고 하는 스님네와 또 이 참선하실라고 하는 여러 사부대중에게 법공양을 하는 것이 그것이 더욱 뜻이 깊다 해서 또 이 공양을 하시고.
그래 가지고 이번에 또 7천 권을 이렇게 법공양을 하게 되어서 우선 오늘은 한 2천 권 밖에 아직 안 나와서 오늘 되는대로 오늘 이 법회(法會)에 참석하신 분에 우선적으로 이 법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기서 법회가 끝나고 또 일주문(一柱門)에 나가실 때에 그저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다 노나 드리게 됩니다. 여기 나가는 문이 일주문 밖에 없어서 담을 넘어서 가시는 분은 못 받으시게 되겠지마는 일주문으로만 나가시면은 꼭 드리게 됩니다.
가지고 가셔서 보시면은, 먼저 받으신 분도 또 받으시면 더욱 좋습니다. 이번에 받으신 것은 정말 정성(精誠)을 다해서 교정을 봤고 또 그 원고를 참 정리를 해서 성의(誠意)를 다해서 했습니다. 혹 잘못된 점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잘 다 접어보시고요.

그런데 뒤에 이 색인(索引)이 붙어 있는데, 이 색인을 보면은 이 경 속에 있는 모다 그것을 알고 싶으면 가나다순으로 되어 있는데, 그걸 보면은 페이지 수가 있어서 그 페이지를 떠들면 딱 나오게 되어 있는데.
출판소에서 조끔 페이지를 잘못 매겼습니다. 이 서산대사(西山大師) 사진을 여그다 처음에는 안 넣기로 했다가, 서산대사, 참! 거룩한 큰스님, 이 책의 저자(著者)이신데 그 모습을 한 번 보는 것도 참 신심이 나고 공덕이 있으니 그 사진을 넣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 그 여러 스님네들이 청(請)을 해서 늦게사 이 사진을 넣게 되니까 페이지가 한 장이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페이지를 한 장을 하니까 2페이지씩이 불어났는데, 그래서 그 2페이지씩을 불어서 다시 페이지를 매기고서, 이 색인에 페이지를 깜박하고 이걸 고치지 않고 그냥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38페이지 찾으면은 뭣이 나온다' 한데, 38페이지 떠들어 보면 그 말이 안 나오고, 한 장을 더 넘겨야 그게 나옵니다.
참, 출판사에서 너무너무 미안하게 생각하고, 이걸 불에다 다 싸질르고 새로 해 주시겠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 좀 알고 이해를 하고 보시면 될 것을 어찌 이 아까운 소중한 것을 갖다가 불에다 싸지를 것이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책임상 그럴 수가 없으니 그러면 우선 아쉬운 대로 이것을 돌리시고, 5천 권을 다시 거저 더 좋게 찍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7천 권 하기로 한 것이 만이천 권을 이번에 하게 되었습니다.

조그만한 실수로 인해서 큰 공덕을 짓게 된 것으로 생각이 되고 참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여기 조끔 페이지 수가 안 맞더라도 이것을 불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이해를 하시고 참 축원을, 이 출판사가 잘 되도록 축원(祝願)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이 뒤에는 이 법보시(法布施)를 한 분의 이름도 썼습니다. 본인은 여기에다 써 주지 말아달라고, 무주상(無住相)으로 해 달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우리가 어디 가서 맛있는 공양 잔치를 받으면 대관절 누가 이것을 내서 먹은 것인가 알고 먹어야지, 그것도 모르고 먹어봤자 참 먹고 나서도 참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내가 '무주상을 하라'고 하면서, 본인은 참 무주상으로 해서 여기다 이름을 도저히 밝혀주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럴 수가 없다 해서 여기다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 경(經)을 떠들어 보실 때마다 여기에 써 있는 그 보시자(布施者)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을 해 주신다면 그 축원해 주신 공덕으로 맨 먼저 여러분 자신이 그 공덕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근데 앞으로 여러 권이 나오는데 여러분이, 댓 분이 모다 하셔서 각기 천 권씩을 하겠다 해서 5천 권을 부탁을 했는데, 출판사에서 '우리도 그냥 있을 수가 있습니까? 법보시로 우리도 2천 권을 더하겠습니다' 해서 7천 권인데, 이 잘못해 가지고 5천 권을 새로 더하게 되었으니 참 이 출판사에서는 7천 권이라고 하는 책을 환희심(歡喜心)이 나서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출판사는 이 공덕으로 참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실 것이고, 또 이 공덕으로 이 책을 손에 만져 보기만 해도 그 공덕으로 세세생생에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물론이요, 정법문중(正法門中)에 태어나셔서 다 같이 최상승법을 닦아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읽지 아니해도 좋습니다. 이 손 한번만 만져 봐도 그렇게 되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놈을 딱 떠들고 서산대사의 원만(圓滿)한 도인의 상호(相好)를 한 번 친견(親見)을 하시고. 또 넘기고, 서산대사가 쓰신 요 서문(序文)도 읽어 보시고.
거기에 나가면 차례차례 이 역주(譯註)라 한 대목이 있는데 역주를 보면은 역대 도인(道人)의 역사가 다 들어 있고, 또 이 경전에 있는 어려운 낱말이 낱낱이 다 풀이가 다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읽어 보시면 알겠지마는, 다른 책과 달라서 이 『선가귀감』은 책은 조그만한 책이지만 이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습니다.
왜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 있느냐 하면,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팔만대장경을 틈틈이 시간 있는 대로 읽으시다가 좋은 대목만 있으면 구절구절이 이렇게 써서 모아 가지고 그것을 정리를 했습니다.
정리를 해 가지고 조~옥 연관(聯關)이 되도록 구슬을 꿰어 맞추듯이 해 가지고 이 『선가귀감』을 엮으시고, 거기에 또 어려운 말씀에 대해서는 또 거기에 자세히 풀어서 또 주해(註解)를 다셨습니다. 그리고 끄터리에는 그 법문에 대해서 착어(着語)를 떠억 붙였습니다. 그러니 이 한 권의 책 속에 팔만대장경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한 구절 간단한 한마디지만, 그 한 간단한 한마디 속에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골수와 안목(眼目)이 이 속에 들어 있고, 더군다나 한글로 번역을 해 놨으니 한문(漢文)을 아는 분은 원문도 보시고 번역문도 보시면 더욱 좋고, 혹 한문을 잘 모르시는 분은 한글만 읽어도 읽으실 수 있도록 잘 했습니다.
요 얼마 전에는 이 역주(譯註)를 갖다가 한문을 섞어서 해 놔서 한문을 모르시는 분은 읽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마는, 이번에는 역주를 완전히 한글로 다 하고 중요한 대목에 대해서는 한문으로 괄호를 하고 넣어놨기 때문에 한문을 아신 분이나, 모르신 분이 모두가 다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문은 알기는 조끔 알아도 어려운 글자는 모른 분 그런 분, 그런 분은 옥편(玉篇)을 찾으시면서도 이것을 번역문과 대조(對照)하면서 공부를 하신다면은 한문(漢文)도 통달(通達)하게 되어서 어떠한 경전도, 한문 경전도 다 읽으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깊이깊이 두루 생각해서 이 한 권의 책을 참 정성스럽게 이렇게 정성을 쏟아서 이렇게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이 얼마만큼 참 훌륭한 책이냐 하면, 이조(李朝) 오백년 동안에 그렇게 불교를 탄압하고 한 그러한 시대였건마는, 이 『선가귀감』을 송광사(松廣寺), 뭐 어디 원적사(圓寂寺), 여기저기 각 사찰에서 목판(木版)으로 칠팔 번 간행(刊行)을 했습니다. 이 목판으로 낱낱이 새겨서 이 경을 간행한다는 것은 큰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책이 모든 스님네와 모든 신도에게 이조 때에 그렇게 많이 읽힌 소중한 불교의 교과서(敎科書)와 같은 그러한 책이고, 한국에서보다도 오히려 일본에서 이 책이 그렇게 높이 평가를 받고 일본에서도 수없이 많이 이 책이 번역이 되고 간행이 되었고 중국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한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게 되는데, '참선을 한 사람은 경을 볼 필요가 없고 오직 '이뭣고?'만 열심히 해야지, 이 책 저 책을 많이 볼라고 하지 말아라' 이러한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마는, 이 책에 한(限)해서는 무슨 우리가 지식을 쌓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기는 아무데라도 딱! 떠들고 한 구절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날 새기로 해서 소설 읽듯이 쭈욱-쭉 읽어대는 책이 아니여, 이건. 아무데도 좋습니다. 여기 번호가 칠십일이삼사, 칠십이여 헌게, 73도 좋고, 54도 좋고 아무데라도 딱 떠들고 한 구절 따악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거여. 딱 보고 글 속에 있는—글을 읽지 말고, 그 글 속에 뜻을 읽어야 하거든.

탁~! 보면은 화두(話頭)가 저절로,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일어나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거든 딱 (책을) 닫고서 참선을 하지, '아따 좋은 말씀이 있구나. 더 읽어 보자, 더 읽어 보자. 자꾸자꾸 문자(文字)만 탐(貪)해 가지고 다 읽어 보고, 에이 읽어 보니까 별거 없구나' 이거 안 되거든. 한 구절을 읽어도 마음으로 읽어서 그 뜻을 취(取)해 가지고 나의 도(道)에 양식(糧食)을 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받아 가시고 또 앞으로 또 나오면, 다음에 백중(百中)날에 나올는지 또 다음 법회에 나올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때 나오면 내가 또 노놔 드릴라고 그래요.
'책이 좋으니까 몇십 권이라도 받아서 처쟁여 놓으리라' 그러시지 말고. 한 권 가지시고 남은 책 또 다음에 받으시거든 또 다른 분에게—참! 내가 마음속에 있는 숫사돈도 좋고 암사돈도 좋고, 또 사돈한테 내가 선사(膳賜)를 해도 좋고, 이렇게 참 동창생한테 선사를 해도 좋고.
이렇게 이 한 권을 선사한 것이 영원히 쓰고도 쓰고 남을 그런 보물을 갖다가 선사한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 접때 받았어도 좋으니까 오늘 또 받아서 소중하게 가지고 가서 당장 가서 딱 떠들어 보시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잘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주지경행수선우(住止經行須善友)하고  신심결택거형진(身心決擇去荊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형진소진통전로(荊塵掃盡通前路)하면  촌보불리투조관(寸步不離透祖關)하리라
나무~아미타불~

주지경행수선우(住止經行須善友)라. 머물러 있거나 또는 거닐으거나, 오고 가거나 행주좌와(行住坐臥) 간에 항상 선우(善友), 착한 벗, 좋은 벗을 항시 가까이 해라 그 말이여.
가까이 해 가지고, 신심결택거형진(身心決擇去荊塵)이니라. 몸과 마음에 가시와 가시덤불과 띠끌을 갖다가 깨끗이 씻어 버려라 그 말이여.

형진소진통전로(荊塵掃盡通前路)하면, 가시덤불과 띠끌을 다 쓸어 버리면은 앞길이 툭 트여. 도 닦아갈 앞길이 저절로 환히 열려서,
촌보불리투조관(寸步不離透祖關)하리라.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바로 조사관(祖師關)을 뚫어버릴 것이다.

가시덤불과 띠끌이 무엇이던고?
버릴라고 하는 생각, 취(取)할려고 하는 생각이 바로 가시덤불이요 띠끌이다 그 말이여.

어떤 것이 착한 벗이던가?
광범위하게 말하면 부처님도 우리의 착한 벗이요, 역대조사와 삼세제불과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착한 벗이요, 청정한 계율(戒律)을 지키고 수행하는 스님네들도 착한 벗이요, 다 같이 세속에 살면서도 불법을 믿고 훌륭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착한 벗이다.

어찌 그것만 착한 벗이겠는가?
나를 해꼬자 하는 웬수도 착한 벗이요, 이 세상에 모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저버리는 나쁜 사람도 착한 벗이라. 왜 그것을 착한 벗이라고 하냐?
나쁜 짓 하고 나를 해꼬자한 사람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배우는 것이요, 그것을 보고서 무상(無常)을 깨달아도 착한 벗이요, 그러한 것을 보자마자 화두(話頭)를 떠억 든다면은 어찌 그것들이 모두 착한 벗이 아니겠느냐?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그래서 일체(一切)가—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냄새 맡는 것,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뜻으로 아는 것, 일체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 아닌 것이 없고, 불보살(佛菩薩)이 아닌 것이 없어.
그래서 버리고 취(取)할 것 없는 것이 바로 띠끌과 가시덤불을 쓸어버리는 도리(道理)여. 거기에 조사관(祖師關)이 어찌 안 열릴 것인가.


환갑 기념, 생일 기념, 모다 그런 기념으로 공양(供養)을 올리니,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마음에 양식을 취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기를 다시 한번 축원하고. 보시자(布施者)의 모든 소원이 성취하시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앞으로 이 경전을 손에 드는 모든 사람의 소원도 다 함께 이루어지기를 축원하고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못다 한 말을 주장자에게 맽기고 내려갑니다.(60분51초~1시간19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옥토승침최로상~ / 중국고봉(高峰) 스님의 3년 사한(死限) 용맹정진(勇猛精進) / 고봉 스님과 같은 맹렬하고 간절한 결심으로 한결같이 밀고 나가야 /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 / 『현우경(賢愚經)』 '우파사나(優波斯那) 여인의 공양(供養)'

모든 수행인과 스님들을 차별심(差別心)을 가지고 공양을 하지 아니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존경을 하니, 너의 공양을 받은 사람은 모두가 반드시 큰 성과(聖果)를 성취할 것이다 / 우파사나 여인이 병든 스님께 자신의 허벅지를 도려내 공양 올린 일화.

'이뭣고?' 하고 참선(參禪)하는 공덕이 매우 수승하다 / 한 우물을 파라 / 일상생활이 바로 내 본마음 찾는 수도장(修道場) / 바로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일 초도 옮기지 말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이뭣고?' / 우리도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 우리도 낱낱이 다 부처님이다 / 우리도 분명히 부처님인데, 다못 '번뇌(煩惱) 속에 가리워져 있는 부처님' / 하면 된다고 믿고 대든 사람은 기어코 되고만 마는 것 / (게송)위타위기수미선~ /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과보(果報)를 받는다 / 수행은 '있는 그 자리에서' 해야 / 수행은 당인(當人)의 마음에 달려 있다.

『선가귀감(禪家龜鑑)』 법공양(法供養) / 『선가귀감(禪家龜鑑)』은 팔만대장경의 골수(骨髓)가 다 들어 있다 / 글을 읽지 말고, 그 글 속에 뜻을 읽어서 그 뜻을 취(取)해 가지고 나의 도(道)에 양식(糧食)을 삼어야 / (게송)주지경행수선우~ / 어떤 것이 착한 벗이던가? /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일체(一切)가, 일체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선지식 아닌 것이 없고, 불보살(佛菩薩)이 아닌 것이 없어.


인생을 살다 보면 혹 괴로운 일도 당하고, 혹 영화(榮華)스러운 일도 당하고 그러지마는 그것이 모두 저녁노을과 같다 말이여. 해가 질 무렵에 하늘에 있는 노을이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답게 빛나지만 해 져 버리면 껌껌한 구름이 되고 말아버리듯이, 세속(世俗)에 명예와 권리 재산과 혹 영화스럽고 혹 고통스러운 것이 모두가 다 아침 이슬과 같고 저녁노을과 같은 것이더라.

그래서 '안 된다'고 짜증을 낼 일이 아닙니다. 일 년이 되었건... 고봉 스님 같은 그런 대근기(大根機)로도 3년이라고 하는,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용맹정진을 해서 3년 만에사 그러한 경계가 이르렀거든. 하물며 근기가 약한 우리 하근(下根) 중생이야 3년 아니라 7년 아니라 10년, 30년이라도 고봉 스님과 같은 그러한 맹렬하고 간절한 결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밀고 나간다면 그것이 어찌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어째서 그것이 안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온전히 신심(信心)이 그렇게 간절하지를 못하고,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끈기가 없어서 그럴 따름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과거세(過去世)에 자기의 눈도 빼 주고 살도 도려 주고, 자식도 다 호랭이에게 보시를 하고, 자기 몸을 짓쳐서 자기 몸뚱이를 주린 범에게 보시를 하고, 이러한 참 수없는 생(生)을 그렇게 행(行)하기 어려운 것을 행해 가지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갖춘 그런 덕(德)과 지혜(智慧)가 원만히 갖추어진 성현으로서 출세를 하셔서 이렇게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 한 번 드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이나 또는 '아미타불' 같은 이러한 염불이나 주력(呪力) 육백만 번 한 공덕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다」 이러고.
「팔천세(八千世)를 경을 외우고 삼천겁(三千劫) 동안을 청정한 계율을 지킨 공덕보다도 잠깐 동안 '이뭣고?' 하고 참선(參禪)하는 공덕이 더 수승하다」 했습니다.

도(道)를 닦으면 세세생생에 쓰고 쓰고 남을 공덕이 그 속에 있고, 세세생생에 누리고 누려도 다함이 없는 영원한 행복, 영원한 재산이 거기에 있는데, 어찌 조끔 깔짝깔짝해 가지고 얻기를 바랜다면 그것은 욕심이 태과(太過)한 사람인 것입니다.

교(敎), 경(經)에는 '우리도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했지만,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하니까 불성이란게 뭐냐? 무슨 보물 덩어리냐? 무엇을 가지고 불성이라고 하냐?
근데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 표현을 달리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도 낱낱이 다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보석에다가 비교하면 '보석이 먼지에 덮여 있는 상태다' 먼지에 덮여 있어서 그 보석의 빛이 밖으로 나타나지 아니할 뿐이지, 아무리 먼지가 끼어 있다고 해서 그 보석이 보석 아닌 것이 아니거든. 그 먼지만 닦아 버리면 찬란한, 오색(五色)이 찬란(燦爛)한 빛이 나올 것이고, 닦지 아니하고 놔두면 계속 먼지에 파묻혀 있을 뿐이지 보석임에는 다름이 없다 그 말이여. 우리도 분명히 부처님인데, 다못 '번뇌(煩惱) 속에 가리워져 있는 부처님'이다 그 말이여.
우리가 보석에 묻어 있는 먼지만 닦아 버리면 바로 찬란한 보석이 되듯이, '이뭣고?' 번뇌 망상 일어날 때마다 자꾸 '이뭣고?'를 한 것은 바로 그것이 내 본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든.

'여자다 또는 나는 무식하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다, 배운 것이 없다, 나는 이미 늙었다, 나는 힘이 없다' 그건 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것이여. 도 닦는데 가장 큰 옳지 못한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은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것입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고, '하면 된다'고 믿고, '나도 부처다'고 일단 믿고 대든 사람은 아무리 어리석건 바보건 천치건, 여자건, 나이가 많건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은 기어코 되고만 마는 것입니다.

큰 복을 짓건, 작은 공덕을 쌓건 항시 무주상(無住相)으로 해라 이것입니다. 무주상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영원한 무루복(無漏福)의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장 바닥도 좋고, 산중(山中)도 좋고 그것은 인연 따라서 맽기고, 문제는 한 생각 단속(團束)하는 데에 천당과 지옥이 판가름이 나고 산중과 속세(俗世)가 갈라질 것입니다.

어떤 것이 착한 벗이던가?
광범히 하게 말하면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착한 벗이요, 계율(戒律)을 지키고 수행하는 스님네들도 착한 벗이요, 다 같이 세속에 살면서도 불법을 믿고 훌륭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착한 벗이다.

어찌 그것만 착한 벗이겠는가?
나를 해치는 원수도 착한 벗이요, 이 세상에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져버리는 사람도 착한 벗이더라. 그러한 것을 보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배우는 것이요, 그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달아도 착한 벗이요, 그러한 것을 보자마자 화두(話頭)를 든다면 어찌 그것들이 모두 착한 벗이 아니겠느냐?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2. 25. 12:53

 

 

((No.235))—1984년(갑자년) 법보재 법회(84.04.16) (79분)

 

(1/4) 약 21분.

 

(2/4) 약 20분.

 

(3/4) 약 20분.

 

(4/4) 약 18분.


(1/4)----------------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허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내 본마음의 왕을 배반(背叛)한 이래(以來)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악도(三惡道)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에 들었는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 그 무량겁(無量劫)으로 지어서 쌓인 번뇌(煩惱)의 그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각자 인연(因緣) 따라서 자기의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게 되느니라.

원래 생사(生死)가 없는데, 한 생각 미(迷)함을 말미암아서 자기 본심(本心)의 고향을 등지고 지옥과 아귀와 축생의 이 삼악도(三惡道)와, 천당으로 아수라로 인간으로 이렇게 육도(六道)를 돌고 돌면서, 때로는 태중(胎中)에 들기도 하고, 때로는 알 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습(濕)으로 인해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화생(化生)으로 이렇게 해서 사생(四生)의 형태로써 육도(六道)를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 자리는 위로는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모든 보살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를 청(請)해 모시고,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안과 밖에 수천 명이 모였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부대중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마는 광겁부모(曠劫父母), 우리의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고조부모 · 6대 · 7대 · 8대 · 10세... 몇십 대 할아버지 할머니와 우리와 인연(因緣)이 있었던 모든 영가(靈駕)들이 시방세계(十方世界)로부터 이 법보전을 향해서 구름과 같이 왕림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법석(法席)에, 법보전 법보재(法寶齋)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오늘 이 법요식(法要式)에 목적은 그 한량없는 우리의 과거 선망부모(先亡父母)와 모든 인연 있는 영가들이 이 허공계(虛空界)에 갈 바를 모르고 방황을 하고 있고, 온갖 고통을 받으면서 외로운 혼(魂)으로 정처(定處) 없이 떠돌고 있는 그러한 영가들, 그리고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수천의 법보영가(法寶靈駕)들을 천도(薦度)하는 날입니다.

이 많은 영가 가운데에는 훌륭한 왕의 국왕대신 · 대학자 · 대장군 · 대교육가 · 대운동가 · 모든 기술자 · 예술가, 남 · 녀 · 노 · 소, 선(善) · 악(惡) · 무기(無記)에 모든 각양각색(各樣各色)에 영가(靈駕)들입니다.
그러한 영가들을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 놓고 아침마다 축원(祝願)을 해 드리고, 명절 때마다 차례(茶禮)를 젓숩고, 결제(結制) 해제(解制) 그밖에 모든 법회(法會) 때마다 천도(薦度)를 해 드리고, 그뿐만 아니라 일 년에 수십 회씩 법회가 열릴 때마다 그 영가들을 정식으로 초청을 해서 그 법문(法門)을 잘 들으실 수 있도록 해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업(業)이 두터워서 원한(怨恨)에 사무치고 원결(怨結)이 맺혀서 갈 곳을 가지 못한 그러한 영혼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받들고 천도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說)해서 듣고서야 업장(業障)이 녹지 아니할라야 아니할 수가 없어.
다 봄눈 녹듯이 다 녹아지고, 모든 원결이 다 풀어져서 가볍고 맑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리고 환희(歡喜)에 넘치는 그러한 불심(佛心)으로 이 법보전(현 대웅전)에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또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서, 그 많은 영가가 각기 그 차서(次序) 따라서 안주(安住)해 계시다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到來)하면 극락(極樂)으로도 가시고, 천당(天堂)으로도 가시고,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국이 말세(末世)에 이름에 따라서 전쟁이 자주 일어나고 난리가 일어나고 온갖 사고가 일어나서 뜻밖에 제 명(命)대로 살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게 되고, 세상살이가 너무 괴롭고 답답하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이렇게 됨으로 해서 영가들은 자연히 갈 바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그러한 경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병(病)은 의사가 고치려니와 몸뚱이를 버려 버린 영가(靈駕),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외롭고 괴로운 그 영가들을 누가 안내(案內)할 수가 있느냐 말이여. 그러한 원한(怨恨)에 사무친 영가가 집안에 있으면 집안이 편틀 못하고, 그러한 영가가 이 사회에 허공계에 많이 있으면 사회가 불안하고, 국가가 불안하고, 세계가 불안한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눈에, 부처님의 눈에는 살아 있는 중생(衆生)도 불쌍하거니와, 눈에 보이지 아니한 그 살아 있는 사람보다도 몇백만 배, 몇억만 배 많은 수효에 그 영가들에 대한 가엾고 불쌍한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보선원(法寶禪院)을 창설하신 전강(田岡) 대종사(大宗師)께서는 「법보단(法寶壇)」이라 하는—영가, 우리의 선망부모를 비롯한 모든 영가를, 원한에 사무치는 영가를 편안하게 안주(安住)시키고 정법(正法)을 설(說)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해서, 영가도 해탈을 하고 그 가정도 평화롭고, 사회 국가도 평화를 찾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한 것입니다.

이 법보단을 창설을 해서 이렇게 영가를 모시면, 영가는 그 법문(法門)을 듣고 축원(祝願)을 해 드리고 그럼으로써 업(業)이 소멸(消滅)이 돼서 좋은 곳에 태어나고, 또 그러한 원한에 사무친 영가가 가정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가정이 평화롭고.

어째서 그 영가가 좋은 곳으로 가게 되느냐? 여그 이 법보전 안에 이렇게 모시면, 다른 절도 많이 있는데 왜 여기다 모시면은 좋은 곳으로 가느냐?
선지식(善知識)께서 작관(作觀)을 해 가지고, 이 선방, 선방(禪房)을 경영을 해서 이 도량(道場)에서는 항상 청정한 수행인이, 비구(比丘) 스님이 항상 최상승법인 참선(參禪)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도량 내외는 언제나 선신(善神)이 옹호를 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항시 이 도량을 굽어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영가를 이 법보단에 모실 때에 성금(誠金)으로 백미(白米) 한 가마니씩을 이렇게 바치기 때문에 그 공양미(供養米)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 공양미로 참선하시는 스님네와 대중께 공양을 해서 이중 삼중으로 공덕(功德)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가(靈駕)는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그 영가를 여기다 모신 그 유족(遺族) 가족과 또는 친지들은 그 공덕으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한 분, 두 분, 세 분 이렇게 등록이 되었었는데, 해를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가속화 되어 가지고 이제는 한국 팔도(八道)는 말할 것이 없고, 일본이나 대만이나 미국 구라파(歐羅巴) 저 외국으로 모다 이민(移民)을 가시고 그러한 분들까지도 전부 다 이 법보전에 영가를 모시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앞에 보신 바와 같이 앞 벽이 새카맣게 꽉 찼습니다. 앞으로는 이 옆으로, 또 저 여러분이 앉아 계신 뒤쪽 벽, 동서남북 사방(四方) 벽에도 다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시면 어떠한 원한에 사무친 악(惡)한 마음을 가진 그러한 영가(靈駕)라 하더라도 자연히 선신(善神)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아주 착한 영가가 되어 버려.
그래 가지고 우리 절을, 이 법보선원을 보호하는, 수호하는 수호신(守護神)이 되고, 나아가서는 여러분 가정도 능력껏 또 보살펴주고 지켜주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 나서서 선신이 되어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지키게 되고, 그리다가 인연(因緣)이 도래(到來)하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거나, 극락세계(極樂世界)나 천당(天堂)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새 혹 젊은 분들은 이 불교(佛敎)에 인과(因果), 윤회(輪廻)의 이치를 잘 모르는 분은 그런 것을 잘 모르니까, '그런 소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이 아니냐?' 이렇게 잘 믿을려고 하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요새는 심령과학(心靈科學)이 상당히 발달이 되어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 영혼까지도 흩어져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설사 몸은 죽어서 땅에다 묻고 화장(火葬)을 해서 한줌의 재가 되어서 물이나 산에 흩어 버리고 그래서 없어졌다 하더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그 영혼은 원래 태어난 때가 없고 또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업(業)에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받아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또 지은 업에 따라서 천당이나, 지옥이나, 인간이나, 축생에 또 태어나는 노릇입니다.(처음~21분18초)




(2/4)----------------

1938년에 경상북도 울산군(蔚山郡) 원남면(苑南面) 상서리(上西里)에 이규진(李圭鎭)씨라 하는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이근홍(李根洪)이라고 하는 외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근홍 군이 갑자기 병(病)을 앓다가 손쓸 겨를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너무너무 애통(哀痛)하다가 두 눈이 짓물러서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 이근홍이라는 사람이 죽은 뒤에 한 4년쯤 되어 가지고 거기서 한 20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 청년도 우연히 병을 앓다가 그냥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근데 그 청년이 죽어 가지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저승을 갔는데, 저승에 가니까 어떤 청년이 옷을 깨끗이 입고서 의자에 앉었는데 아, 자기를 보고 대단히 반겨하면서,

"당신이 저 울산 원남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 아니냐?"
"아, 내가 그렇다"고.

당신은 지금 아직 이 저승에 올 때가 아닌데, 그 잘못해 가지고 다른 사람이 잡혀올 텐데 당신이 잘못 잡혀왔어. 그래서 당신은 곧 당신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조끔 있으면 염라대왕이 당신을 부르면 나가게 될 텐데, 그 염라대왕이 당신한테 다시 당신 고향으로 가라고 명령을 할 것이다.

조끔 있으니까 자기 이름을 불러서 염라대왕 앞에 떠억 끌려갔다 그 말이여. 그 청년을 잡아오는 그 지옥 저승에 사자(使者)를, "어찌 그런 것을 정확하게 자상하게 살펴서 잡아오지를 못하고 어믄 사람을 잡아왔다"고 그 되게 혼구녁을 내서 꾸짖고서, "기왕 이 오기 어려운 곳을 왔으니 이 저승을 구경이나 하고 가라"

그래 가지고 그 이근홍이라는 사람은 4년 전에 와서 그 저승의 모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근홍이가 안내를 해 가지고 그 십대왕(十大王) 궁(宮)을 다 구경을 하고 또 그 죄(罪) 진 사람 죄 받는 모습도 다 구경을 하고, 그리고서 이제 지옥(地獄)에서 떠나오게 되었는데, 그 이근홍이라는 사람이 "내가 당신한테 부탁할 말이 있으니, 내 고향에 가거든 꼭 내 말을 좀 우리 집에다 전해 달라"고. "무슨 말이냐" 한께,

"내가 우리 숙부한테 돈 백 원을 빌려 쓰고서 미처 갚지를 못하고 내가 죽었는데, 내가 죽은 뒤에 우리 숙부께서, 내가 죽은 뒤 2년 만에 우리 숙부가 돌아가셔 가지고 지금 나 있는데 와서 계시는데, 내가 갚지 못한 그 백 원, 그 백 원을 저승에까지 따라와 가지고 갚으라고, 근데 내가 이 저승에 무슨 돈이 있어서 갚겠느냐고.
안 갚으니까 그 숙부가 염라대왕한테 고소(告訴)를 해서 지금 재판이 걸렸는데 아무 때라도 그 돈이 해결이 되어야 우리 숙부도 좋은 곳, 어디로 딴 데로 가시게 되고, 나도 다른 데에 가서 태어날 텐데 아직 그 재판이 계류 중이라 가지를 못하고 이 저승에서 이렇게 4년이나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고향에 돌아가거든, 울산군 원남면 상서리라고 하는 곳에 가서 우리 아버지 이규진 씨를 찾어 가지고, 저승에 와서 이근홍이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약허약허(若何若何) 허더란 말을 소상하니 얘기를 하고, 돈 백 원을 그 우리 숙부님, 숙부 댁에다가 갖다 갚고, 그리고서 나를 천도(薦度)를 좀 잘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나를 천도를 하되 울산에 가면 문수암(文殊庵)이라고 하는 절이 있으니까, 그 문수암에 가서 돈과 쌀과 그 정성껏 모든 것을 마련을 해 가지고 가서 하되, 불국사(佛國寺)에 가서 큰스님네를 초청을 해다가 영가에게 법문(法門)도 들려주고, 그 여러 스님네를 많이 초청해서 스님네 공양(供養)도 올리고 그렇게 조끔 말을 해 달라"고.

그리고서 인자 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빨리 가라고 그래서, 그래서 인자 조루루 하니 그 지옥에 열두 대문을 전부 구경을 하고 거쳐서 오니까 무슨 강이 있는데, 다리를 건너오는데 중간에 다리가 뚝! 부러져 가지고 깜짝 놀랜 바람에 깨어났다 그 말이여.
눈을 떠 보니까 집에서는 그 초상(初喪)이 났다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죽은 지가 사흘이 되어 사흘 만에 다시 깨어났어. 그래 가지고 깨어나고 보니까 자기는 꿈꾼 거다. 꿈을 꾸었어. 꼭 꿈속에서 만난 것처럼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기억을 해 가지고 꿈 얘기를 하는데, 집안에서는 모다 초상이 나가지고 울고불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눈을 떠 가지고 인자 정신을 차려서—그 이근홍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지옥을 안내 받고, 이근홍이가 자기한테 부탁한 말을 전부 다 얘기를 하니까 '하, 그 참 이상하다' 그래 가지고 그 원남면 상서리로 사람을 보내 가지고 그 이규진씨란 사람을 만나서 보니까, 2년 전에 그 이규진씨 동생이 죽었고 또 그보다 2년 전에, 더 2년 전에는 이규진씨 아들 이근홍이라는 사람이 분명히 죽었다 이거거든.
그러니 거짓말이 아니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확인이 되어서, 그래서 그 돈 백 원을 갖다가 그 숙부집에 갚고, 바로 날을 받아 가지고 문수암(文殊庵)에 가서 큰 재(齋)를 지냈어.

칠일 기도를, 지장기도를 해 가지고 떠억 천도재(薦度齋)를 지냈는데, 마지막 천도한 날 저녁에 이근홍이하고, 이근홍이 숙부하고 떠억 그 청년 꿈에 나타나 가지고,
"내가 그 영 이 저승에서 풀려날 길이 없었는데 당신이 내 약속을, 부탁을 잘 들어주고 우리 부모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참 천도재를 융숭(隆崇)하게 해 준 그 공덕으로 다 지옥에 재판이 다 끝나고, 우리 숙부와 나와 함께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게 되었다" 심심한 사과를 하고 마지막 작별을 하는데,
"당신은 앞으로 15년 뒤에는 나한테로, 내가 있는 도리천으로 오게 될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하고서 이근홍이란 사람 숙질간이 뚝 떠나서 하직(下直)을 했는데, 깨고 보니 그 분명히 꿈이다 그 말이여. 참... 그래서 그럭저럭하다가 15년이 되었는데 과연 그 청년이 15년 만에 죽었습니다.

이것은 1938년이니까, 지금부터 한 50년 전에 울산에 그 원남면 상서리에 있었던 한 실화(實話)입니다마는, 사람을 떡 보면 '저 사람이 전생(前生)에 뭣이었었고 또 내생(來生)에는 어떻게 되겄다' 이런 것을 숙명통(宿命通)이 열리면 알 수가 있고, 또 우리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 허공계에 있는 모든 귀신(鬼神), 선신(善神) 악신(惡神) 이런 귀신을 다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된 농짝 같은 거, 오래된 무슨 골동품 같은 거, 그런 걸 보면 거기에 그 골동품에 탁! 애착(愛著)이 붙어 있는, 전생에 그 사연이 있는 그러한 영가(靈駕)가 거기에 딱! 붙어서 그것을 의지해 가지고 있는 것이 환히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님 가운데도 있고, 보살 가운데도 있고, 또 불교를 안 믿어도 또 그런 것이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이건 전생에 식(識)이 맑어서, 태어나면서부터 식(識)이 맑은 사람, 또 입태(入胎) 출태(出胎)에—사람은 태중(胎中)에 환히 모든 것을 이렇게 알고 있다가, 일생 동안 자기가 한 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가 딱! 새로운 태(胎) 속으로 들어가는 찰나(刹那)에 콱 매(昧)해 버리기도 하고, 그 태(胎) 속에 들어 있을 때까지도 알고 있다가 그 태에서 나오면서 잊어버리기도 하고, 태에서 나와 가지고도 환히 알고 있다가 차츰 그 어릴 때는 환히 알고 있다가 차츰차츰 밥을 먹고 말을 할 만큼 되면 영 꽉 맥혀 버리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특수한 사람은 태(胎)에 들어갈 때도 안 매(昧)하고, 나올 때도 안 매(昧)하고, 또 잠깐 매(昧)했다가도 커서 염불(念佛)만 조끔 하던지, 주력(呪力)을 조끔 하던지, 기도만 조끔 해도 금방 그 맥혔던 것이 벗거져 가지고 이리 보면은 귀신도 보이고 모다 그러는 수가 있습니다. 귀신 붙은 것도 보이기도 하고 그러는데.
뭐 귀신 붙은 것이 보이고, 귀신이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확철대오한, 그 도통(道通)을 한 것은 아니에요. 그것을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설사 그런 영가가 보이고, 귀신이 보이고, 뭐 전생 일을 환히 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 도(道)를 깨닫는 것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데, 식(識)이 맑으면 그런 것이 보이게 되어요.

혹 이 사부대중 가운데에도 그런 것이 보이기도 하고, 알기도 하는 분이 상당수 있지 않은가, 나는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요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것도 아니요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고 집착을 해서 아는 소리를 하고, 자기가 무슨 도(道)나 트인 것처럼 그런 그 고런 것 좀 아는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뽐내고 으시대고 도인 행세를 하고 이렇게 되면 그건 물어볼 것도 없이 사도(邪道)고, 외도(外道)고,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혹 공부를 하다가 그러한 능력(能力)이 얻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도(道)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잘 인식을 하고, 전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고,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하고 또 그러한 힘을 능력을 써먹고, 남 앞에 과시를 하고 그래서는 아니 되는 거여. 아주 깨끗이 본인도 그건 없었던 것으로 취급을 하고, 오직 정법(正法)을 향해서 닦아 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실화와 또 이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 또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보면, 사람이 죽어서 자기의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당과 아수라와 인간과 축생과 아귀와 지옥, 이 육도(六道)를 인연 따라서, 업 따라서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과학적 사실이요, 틀림없는 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인과(因果)에 법칙(法則)은 그러한 추호(秋毫)도 어김이 없는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미신(迷信)이라고 믿지를 아니한 사람은 업이 두터운 사람이요, 눈이 극도(極度)에 근시안(近視眼)은 한 5m만 떨어지면—다른 사람은 저 10m, 100m, 저 10리, 20리 떨어진 먼 산도 다 보이는데—극도에 근시안은 안경만 벗으면 코앞에 사람도 잘 못 알아봅니다.
또 육체적으로는 눈이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백지 한 장만 가리워 놓면 그밖이 안 보입니다. 벽 밖에도 우리는 볼 수가 없고, 더군다나 산이 가려 막혀 있으면 산 넘에는 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을 비롯한 여러 성과(聖果)를 얻은 성인들은, 육신통(六神通)을 얻은 성인들은 공간적(空間的)으로 아무리 멀고 아무리 산과 벽이 막혀 있어도 바로 이 허공(虛空)을 보듯이 환히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성현이 아니라도, 외도(外道)라도 이렇게 천안통(天眼通)을 얻으면 공간에 걸림 없이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극도에 근시안이요, 그런 천안통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을, 자기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에이, 그런 것은 거짓말이요 미신이다' 이렇게 그러한 인과(因果) 윤회(輪廻)와 윤회의 법칙을 그렇게 간단하게 부정을 해 버린 사람은 무식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사람이여.

자기 눈으로 못 봤다고 해서 부정을 한다면 우리가 증조할아버지, 아 고조할아버지나 7대 할아버지, 10대 할아버지 본 사람이 어디가 있어?
아무리 할아버지 많이 봐도 증조할아버지까지는 혹 보는 수가 있어도 고조(高祖)나 육 대조(六代祖), 칠 대조(七代祖) 이상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러면은 자기 눈으로 못 봤다 해서 자기에게는 육 대조나 칠 대조, 십 대조 할아버지가 안 계셨단 말입니까?
'내 눈으로 안 보면 믿을 수가 없다' 한 그건 참, 코 없으면 똥을 집어먹을 사람이거든.(21분19초~40분46초)




(3/4)----------------

그 말이 바른 말이고, 이치에 합당한 말이고, 성현의 말씀이면 믿을 줄을 알아야지, 자기 눈으로 극도의 근시안이 되어 가지고 5m만 떨어져도 못 보고 더듬더듬한 사람이 저 앞에 산이 있다고 해도 믿지 않고, 차가 온다고 해도 믿지 아니하고 막 함부로 마구잽이 막 쫓아나가면, 그 사람은 자동차에 치이고 허방에 빠지는 길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인과에 법칙을 안 믿는 사람은, 그건 불법을 믿는다고 할 수가 없어요. 정말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인과(因果)의 법칙(法則)만 철저히 믿게 되면 그 사람은 죄를 지을라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인과의 법칙을 모든 사람이 믿으면 이 세상에 법이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형법이나 무슨 민법이고 뭐 아무 법률(法律)이 필요가 없어요. 경찰도 필요 없고, 법원도 필요 없고, 형무소 교도소도 필요 없이 되는 것입니다.

참, 이 불법(佛法)을 철저히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수행을 하면, 내가 저지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으로 한 생각 잠깐 일어났다 꺼지는 그 찰나간의 생각마저도 한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과보(果報)를 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뜨겁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남을 뚜드러 패고 남을 죽이고 그런 것은 뭐 말할 것도 없고, 또 입으로 무슨 거짓말을 하고 그런 것도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속으로 잠깐 한 생각 내는 것도 그렇게 무섭게 다시 돌아온다고 하는 사실을 정말 느끼게 되고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철저하게 뜨겁게 와서 느끼고 와서 닿는데, 어떻게 입으로 거짓말을 하며, 남의 재산을 사기를 치며, 나 이롭기 위해서 남을 갖다가 죽이고 패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카가 삼촌의 돈 백 원을 빌려다 쓰고—삼촌이라 하면은 바로 자기 아버지의 동생인데, 아버지의 동생의 돈 백 원 빌려다 쓰고 못 갚었는데—다른 사람이 아닌데, 조카에게 돈 백 원 빌려준 것을 저승에 까지 가 가지고 그놈을 안 냈다고 해서 염라대왕에 재판을 해 가지고 둘 다 그 재판에 걸려 가지고 가덜 못하게 되니, 중생의 그 탐심과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 김천에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딸에게, 며느리와 아들 몰래 딸이 오면은 양석[糧食]도—옛날에 참 왜정(倭政) 때는 그렇게 쌀이 귀했거든. 그러니 딸이 오면은 그 며느리 눈치봐 가면서 몇 되씩 퍼 주면은 치마 속에다가 그저 감춰 가지고 가 가지고는 가고, 그저 팥 농사면 팥도 퍼 주고 깨도 퍼 주고 이래가지고 헌데, 그 친정어머니의 마음이지요.
그 시집가 논 딸을 항시 불쌍하고 못 잊고 그러니까, 가서 잘살면 오히려 친정에 모다 갖다 드리겠지만, 시집간 것이 가난한 데로 갔던지 친정에만 오면 어머니가 그렇게 가슴이 아파해서 그렇게 며느리 몰래 퍼 주고 퍼 주고 그랬었는데.

그 며느리가 얌전하고 효심(孝心) 있으면 그 시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서 며느리가 자진해서 '이거 시누가 왔으니 이거 쌀도 좀 주십시다. 깨도 좀 줍시다' 하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면 그것이 참 효도가 되고, 얼마나 시어머니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드릴 텐데 그 며느리가 마음이 거기까지 가지 못했던지, 그 시어머니가 며느리 몰래 그 할 때 얼마나 그 참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아 그랬는데, 그 부인이 죽어 가지고 그 집에 개가 되었습니다. 그 개가 된 것을 어떻게 알겄습니까마는, 그 아들 꿈에 떠억 그 개가... 어찌 개가 떠억 자기 어머니로 보이면서,
"내가 니 애미다. 니 애미인데 내가 죽어 가지고 내가 개가 되었어. 내가 왜 개가 되었냐 하면, 너와 며느리 몰래 그 시집간 니 누이동생에 곡식을 퍼 주고 모다 그랬는데, 그 죄로 그것을 갚기 위해서 내가 개가 되어 가지고 느그 집 집을 내가 지키고 있다. 아, 그런데 며느리가 꺼떡하면 나를 발길로 찬다"

시골에 가면 부엌에서, 아주 개가 부엌에서 살면서 밥만 펐다 하면은 그저 밥 냄새 맡고 그저 달라들거든. 발길로 탁! 차기도 하고, 그저 주걱으로 대골통을 때리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는 밥은 즈그들이 다 밥 먹고 솥단지 씻은 거, 뭐 밥 먹고 남은 거, 누룽지 식은 밥, 모다 그런 걸 찌클어 주니 겨울에는 차와서 먹을 수가 없고, 여름에는 또 그 또 변질된 것 고런 것이나 주고.

그래 가지고는 "그러니 내가 밥도 먹을 수가 없고, 그 발길로 며느리... 다른 사람한테 채여도 분할 텐데 며느리한테 채여서 내가 분하고 살 수가 없다. 그러니 니 처(妻)한테 '개, 집에서 키우는 개를 그렇게 차는 법이 아니라'고 일러주어라. 그러고 밥도 좀 따뜻하게 주고, 때맞춰서 주고. 이렇게 하고 내가 겨울에는 추워서 잘 데가 없으니 짚으로 개집을 잘 만들어 가지고 좀 잘 수 있겄게 해다오"

그래서 참, 꿈을 깨 놓고 보니까 묘하다 그 말이여. 그 꿈을 깨 가지고 개 있는 데서, 개를 가서 보니 머끔하니 자기를 쳐다본 것이 꼭 자기 어머니 같다 그 말이여. 아, 그래도 이것이 그 꿈이라 놔서 차마 개 보고 '어머니, 어머니' 할 수도 없고.
그래서 차마 그 처한테 그 얘기를 '어머니가 세상에 개가 되었다'는 말을 챙피하기도 하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말을 안 하고는 며칠을 지냈는데, 아, 또 꿈에 그 나타나 가지고 "채여 가지고 눈팅이가 부었다"고, "왜 말을 하라니까 안 한다"고 재차 그런다 그 말이여.

그래서 할 수 없이 인자, "개를 발길로 차지 말라"고, "그렇게 내 집을 지켜주는 개를 그렇게 차지 말라"고, 그 부탁을 하고 "밥도 좀 따뜻이 주라"고 그러는데,
"남자가 조잡하게 무슨 개 밥 주고 말고 한 것을 간섭을 한다"고. "밖에 일이나 허제 개 갖고 그런다"고, 툭! 받어 버린다 그 말이여.

또 며칠 있다가 또 꿈에 또 그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세 번째는 할 수 없이, "내가 지금 세 번째 꿈을 꾸는데, 저 개가 어머니가 돌아가셔 가지고 개가 되었다고 그런다. 그 어머니가 그 개가 되었다고 그러니, 이것이 한 번이라면 모르는데 세 번째 똑같은 꿈을 꾸니 이것이 아무래도 이상해. 그러니 제발 개를 발길로 차지 말고 하라"고, 아주 따끔하니 아주 타일러서, 그때부터서 인자 개집을 맨들어서 따뜻이 해 드리고, 또 밥도 따뜻하게 해서 잘 때맞춰서 개밥을 주고, 절대로 발길질하지 아니하고 잘 해드렸는데.

아, 그날 저녁에 떠억 어머니가 나와 가지고, "이제는 인자 내가 살겄다. 잠자리도 편하고, 밥도 배불리 먹고, 발길질을 안 하고 그래 인자 살겄는데, 내가 원(願)이 하나가 있다. 저 합천 해인사(海印寺) 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내가 구경을 해야 내가 좋은 곳으로 인제 개 탈을 벗어나서 태어나게 된다고 그러니 나를 그 해인사 가서 절 구경을 시키고, 특히 그 팔만대장경 모셔진 그 대장각(大藏閣)을 나를 좀 데리꼬 다오" 부탁을 해서,
'이제는 틀림없다' 생각을 해 가지고, 그 개를 모시고 직지사(直指寺) 역(驛)을 가서 기차를 탈라고 하니까, 그 역원(驛員)이 "개는 차 못 탄다"고 딱! 가로막는다 그 말이여. 그 참 난감하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냥 우물우물하고 있는데, 아! 개가 어떻게 잽싸게 이리저리 피해 가지고는 그냥 저리 뒤로 해 가지고는 지가 홀랑 뛰어올라 가 가지고는 그 의자 밑에로 쏘옥 들어가 버려.

그래 가지고는 인자 이 대구역(大邱驛)에 내려 가지고, 인자 내리니까 또 지가 먼저 탁! 내려 가지고는 그래 가지고는 역원에 눈을 피해 가지고는 인자 그 합천 해인사를 가는데,
절을 이리저리 인자 구경을 하고 다니는데, 아! 그 스님이 '개를 절 법당(法堂)에까지 데리고 왔다'고 막 호통을 치니깐, 개라는 놈이 이리 흘깃흘깃 쳐다보면서 그냥 저리저리 멀리 돌아가 가지고는 저 혼자 이리저리 막 싸다니면서 구경을 하다가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각(藏經閣)을 가게 되는데,
아! 거기 또 스님이, 안내하는 그 스님이 못 들어가게 하니까 그놈이 잽싸게 저리 해가지고는 지가 먼저 들어가 가지고는 뚤래뚤래뚤래 돌아다니면서, 칸칸이 돌아다니면서 다 구경을 하고는 나왔다고. 그 주지 스님, 안내한 스님과 주지 스님한테 그 혼이 났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꿈꾸는 얘기 하며 그 소상하니 얘기를 했더니—그 주지 스님이 누구냐 하면 그때 이고경(李古鏡) 스님이라는 주지 스님이 그때 주지(住持)를 했어요.
그 이고경 스님한테 그러한 얘기를 했더니, "그 틀림없이 있을 만한 얘기"라고, "아무리 내 재산이지만, 이미 아들 며느리한테 재산을 갖다가 물려주었으면 당연히 딸한테 줄라면은 다 말을 하고 주어야지 그 며느리와 아들 몰래 재산을 빼돌렸으니까 그 개 과보를 받을 만하다"고.

그래 가지고 그 자기가 그 살림을 빼돌린 그 값을 치루기 위해서 개가 되어 가지고 그 살림을 지키는 거여. 그래 인자 살림을 다 자기 빚을 갚을 만큼 되니까, 인자 그 합천 해인사 절 구경을 하고 팔만장경을 구경을 하고 그러니까 그 인연으로 개 탈을 벗게 되었어.
그래 가지고 집에 왔는데 꿈에, "내가 니 덕으로 참 좋은 구경을 하고 그 공덕으로 내가 개 탈을 벗었어. 내가 인자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었는데 참 고맙다. 기왕이면은 더 좋은 곳으로 가게 해인사에 가서 나를 갖다가 사십구재(四十九齋)를 한 번 해다오. 그렇다면은 내가 원(願)이 없겄다" 그래 가지고는 가서 인자... 그런데 그 이튿날 꿈을 깨고 보니까 개집에 개가 딱 죽어 갖고 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개를 갖다가 저 산에다가 묻어서 개 무덤을 딱 해 주고는 해인사에 가서 사십구재를 떠억 지냈는데, 사십구재 지낸 날 저녁에 꿈에 그 개 탈을 벗어버리고, 이 좋은 옷을 한 벌을 (불에) 사롸 달라고 그래서 사롸 드렸는데, 그 옷을 입고 그렇게 얼굴이 환해 가지고 참 선녀(仙女)처럼 그렇게 되어 가지고 이 천상(天上)으로 태어났다 이거여.
이건 내가 그 아들의 이름도 다 알고 있었는데 내가 오래되어서 그 이름을 기억을 못하지만, 이것도 다 실지로 있었던 실화(實話)다 이것입니다.

아까 이근홍이라는 사람의 얘기와, 이 자기 어머니가 개가 된 이러한 하나에 실화이면서 인과설화(因果說話)인데, 이러한 얘기는, 이러한 실화는 우리 도처에 있는 일이고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심지어는 저 인도나 미국 같은 데도 이러한 얘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최면학이, 최면술 하는 그 최면학이 발달이 되어 가지고 최면(催眠)을 걸어서 연령 소급(年齡遡及), 퇴행법(退行法)을 쓰면, 그 사람이 전생(前生)에 무엇이었으며 그런 것을 환히 다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아주 죽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하고, 미국에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한국에 태어나기도 하고 그런다고 하는 사실을 다 과학적(科學的)으로 증명(證明)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한다, 또는 그림을 잘 그린다, 또는 음악을 잘한다, 모다 수학을 잘한다' 이것이, '바둑을 잘 둔다' 이런 게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천재적인, 천부적(天賦的)인 소질(素質)이 있다' 그러는데, 이건 전생에 그렇게 익힌 것이 금생에 그렇게 나면서부터 천부적인 소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질 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마음씨가 착하고 포악한 것 하며,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고 또는 천하게 살고 하는 것 하며, 백만 가지가 다 전생에 자기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금생에 우리가 전생(前生)에 지은 그러한 인연(因緣)으로 해서 금생(今生)에 이렇게 받어 난 것을 본다면, '우리가 금생(今生)에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내생(來生)에 어떻게 받느냐?' 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금생에 함부로 마음을 쓸 수 있으며, 함부로 말을 할 수 있으며, 함부로 행동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조심(말操心), 행동 조심(操心), 마음씨 바르게 쓰고, 착하게 쓰고, 지혜롭게 해서 과거에 업(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지끔 이 시각(時刻) 이후가 바로 내생(來生)이니까—이 몸뚱이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 몸뚱이 죽은 뒤가 내생이지만 그것은 옅은 인과법이고, 내생(來生)은 한 생각 뒤가 바로 내생이여. 일 초 뒤가 바로 내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하느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이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이 구체화되기 전에, 얼굴에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을 탁! 돌이켜 가지고 화두(話頭)를 들어.
그 생각을 돌이키지 아니하면 큰 죄를 범(犯)하게 되는데, 그 죄(罪)로 형성화(形成化)되기 이전에 그 생각을 딱! 돌이켜서 '이 뭣고?' 이렇게 하면, 죄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오히려 생사해탈(生死解脫) 길로 나아간 것이 된다 그 말이여.(40분47초~60분40초)




(4/4)----------------

여기에 우리의 남편과 아내와 아들과 부모와 조부모와 인연 있는 영가를 모신 공덕으로 이러한 법문을 듣게 되고, 이 법문을 듣고서 '이 뭣고?'를 하니 우리 자신도 전생에 죄가 없어지고, 내생에 죄를 짓지 아니하고 생사해탈을 하게 되니 영가(靈駕)가 어찌 해탈(解脫)이 안 되겠냐 그 말이여.
그래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께서는 여기다 이러한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을 짓고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이렇게 모셔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우리 모두가 다 해탈도를 증득하고, 온 민족과 세계 인류가 다 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도록 제도(濟度)할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길르는 도장(道場)이 이렇게 되었다 그 말이여.

이 도장이 어떻게 해서 운영이 되어가냐 하면은 우리의 선망부모를 모실 때에 여러분이 바친 그 성금(誠金), 성금으로 이 법보선원이 운영이 되어가고 이렇게 법당(法堂)을 짓고, 선방(禪房)을 짓고, 법회(法會)를 이렇게 거행(擧行)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러니 영가를 모셔서 영가에 좋고, 집안에 우환(憂患)이 없어져서 좋고, 이렇게 해서 여기서 많은 도인(道人)들이 나오게 되어서 좋고, 여러분들도 법문(法門)을 듣고 여러분 아는 모다 일가친척 ‧ 친구 ‧ 사돈네 ‧ 팔촌까지라도 자꾸 이렇게 안내를 해서 와서 법문을 듣도록 하고, 모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 집안에는 영가(靈駕)가 있는, 영가는 자꾸 이렇게 모시게 하면, 이렇게 해서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되고, 넷이 열여섯이 되고, 열여섯이 예순넷이 되고 이렇게 해서 기하급수로 이렇게 불어 나가면 금방 정법(正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가 나라에 가득차게 될 것이고.

로마법왕이, 교황(敎皇)이 머지않아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천주교(天主敎) 우리나라에 들어온 200주년을 기(期)해서 오는데, 그런 귀빈(貴賓)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참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참 천주교에 있어서는 참 큰 경사(慶事)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600년 이래로 불교(佛敎)를 국교(國敎)로 숭상(崇尙)해 온 나라입니다. 귀빈으로서 우리가 문화민족(文化民族)답게 점잖하게 맞이한 것까지는 좋으나, 거기에 미쳐 가지고 정신을 못 채리고 와- 와- 떠들어 쌓고 한 것은 국가적으로 큰 수치스러운 일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조상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그 주체성(主體性)을 잊어버리고 와- 와- 바람부는 대로 쏠려 가지고 정신(精神)을 잃고 미쳐서 떠들고 야단인 것은 참...

수천 년간 중국(中國)에 참 속국노릇을 하고 또 참 36년간 왜(倭)놈에 식민지(植民地) 생활을 해서 그런지, 좀 문화민족(文化民族)이면 민족답게 주체성이 있어서 좀 의젓한 면이 있어야지, 교황이 언제 봤다고 그... 앞으로 신문에 라디오에서 야단들이겠지만 해필 우리 초파일을 앞두고 이러한 참 창피스럽고 뇌꼴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황이 수년 전에 일본에 왔을 때는 일본 사람들 아무나 거들떠보지도 안 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하나의 기사로써 쬐끄맣게 사실만 보도했지 아무 별 말이 없었습니다. 섬나라인 일본 사람들도 그만한 지조(志操)가 있고 주체성(主體性)이 있는데, 왜 이 오천년의 역사(歷史)를 가진 문화민족이 그 쓸개 빠진 그러한 짓들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내가 불교를 믿는 승려이기 때문에 공연히 심술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여. 주체성을 가져야 하고 의젓할 줄을 알고 그래야.
요새 교회가 두 집 걸러 교회가 서고 나날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불어나는데, 이것 참 선영(先塋)의 제사지내기 싫으면 전부 예수교를 믿는다 그 말이여. 지가 어디서 태어났는데, 우리의 선조(先祖), 조(祖)요, 부모(父母)를 갖다가 허수히 너길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모가 안 계시고, 조부모가 안 계시고, 증조부가 안 계시고, 저 칠 대, 십 대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 계시면 제가 어디서 태어났어? 개 뱃속에서 나왔어? 소 뱃속에서 나왔어? 땅속에서 나왔어?

부모(父母)를 받들 줄 모르고,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선조(先祖)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니여. 그래 가지고 절대로 복(福)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에 그 뿌리를 잘 북돋으고, 뿌리에 적당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고, 뿌리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좋은 흙으로 잘 북돋아야 그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고, 가지가 번성을 하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열매를 맺은 거와 같애서, 우리의 나라에는 나라에 뿌리가 있고, 민족에는 민족에 뿌리가 있고, 우리의 사람에게는 사람에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뿌리를 잊어버리고 등한(等閑)히 한 사람은 참다운 인간(人間)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나라에 뿌리와 민족에 뿌리를 망각(忘却)한 민족(民族)은 결정코 멸망(滅亡)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뿌리 찾는 운동이 먼저 나 자신의 뿌리, 내의 본심(本心), 나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여.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孝道)를 하는 것이며, 나라에는 애국자가 되는 것이며, 민족을 사랑할 줄 알고, 그 민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인류를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갑자년(甲子年) 법보재(法寶齋)를 맞이해서 여러분의 가슴속에 깊이 명심(銘心)하시도록 제가 간절히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고혼내입법왕성(孤魂來入法王城)헌디  원각서서차제행(願各徐徐次第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차불회삼계보(從此不會三界報)하야  직등엄역증원명(直登嚴域證圓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고혼내입법왕성(孤魂來入法王城)한디  원각서서차제행(願各徐徐次第行)이로구나
우주법계에 정처 없이 허메던 고혼(孤魂)들이 이 도량에 운집(雲集)해서 법보(法寶), 이 법왕성(法王城)에 들어왔어. 원컨댄 각 영가(靈駕)들은 차례(次例) 따라서 행(行)해 가지고,

이후(以後)부터서는 다시는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三界)에 돌고 도는 것을 끝마치고,
직등엄역증원명(直登嚴域證圓明)이다. 바로 이 보리도(菩提道)에 들어가서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모든 보살(菩薩)님이 장엄(莊嚴)하신 적광토(寂光土)에, 밝고 밝은 적광(寂光)의 세계(世界)에 나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우주법계에서 모이신 모든 영가들은 오늘 이 법보재를 기해서 과거에 모든 원한(怨恨)과 원결(怨結)을 다 풀어버리시고 기쁜 마음으로, 가볍고 맑고 밝은 마음으로 대해탈도(大解脫道)를 증득(證得)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법보제자 여러분께서도 오늘을 기해서 가족과 가족 · 일가친척 · 이웃과 크고 작은 모든 원결을 다 풀어버리시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 용서하고 내가 자진해서 먼저 다 풀어버리시고, 서로 화목하고 화평하게 좋은 반려자로서, 도반(道伴)으로서, 스승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다 같이 손에 손을 맞잡고 대해탈도 최상승법을 향해서 나아가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지난달 여러분께 『선가귀감(禪家龜鑑)』을 보시(布施)를 해 드리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 그 책이 다 되었습니다. 그 책을 지금 저 여러분들이 들어오시는 그 일주문(一柱門) 앞에 책이 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나면 나가실 때 차례차례 나가시면 다 한 권씩 노나 드립니다.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다 한 권씩을 받아 가셔서 그걸 첫 장부터서 시간이 있는 대로 그걸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잘 모르는 대문(大文)이 있으면 표를 해 놨다가 다음에 또 읽고 또 읽고 하면은, 처음에 한 번 읽어서 몰랐던 것이 두 번째 알고, 두 번 읽어서 몰랐던 것이 세 번째 읽고, 세 번째 읽어도 모르시면 저한테 와서 물으시면 성의(誠意)껏 일러드리겠습니다.

이 『선가구감』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저술하신 책인데, 팔만대장경 속에서, 서산대사께서 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서 그 골수(骨髓)만을 뽑아서 모아 가지고 한 권의 책을 맨드신 것입니다. 아주, 큰 책은 아니고 아주 간단한 책인데도 그 속에는 팔만대장경의 그 깊고 깊은 진리(眞理)가 고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가야 하느냐?' 하는 그 실천 상황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은 여러분에 가보(家寶)가 될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데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최무정 거사님의 환갑(還甲) 기념으로 출간된 법보시(法布施)입니다. 이 책을 보시고 여법(如法)하게 수행(修行)을 해 나가시면 살아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나오실 것이고, 살아 있는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나오실 것이고, 살아 있는 중생의 탈을 쓴 살아 있는 미륵(彌勒) 부처님이 도처(到處)에서 탄생(誕生)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죽어서 내생(來生)에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서 한 생각 돌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이 도리(道理)야말로 세계에 어느 종교에도 없는, 불법 가운데에서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만 있는 이러한 법입니다.
이러한 법을 만나게 된 이 인연(因緣)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릅니다. 이러한 인연이 인연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기약(期約)을 하면서 오늘 이 법보재(法寶齋) 법어(法語)를 마칩니다. (60분41초~1시간18분53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법보재(法寶齋) 법요식은 영가 천도(薦度)하는 날 / 전강(田岡) 대종사께서 영가들을 모셔 놓는 「법보단(法寶壇)」을 창설하신 뜻은 영가를 편안하게 안주(安住)시키고 정법(正法)을 설(說)해서 영가도 해탈을 하고 그래서 가정도 평화롭고, 사회 국가도 평화를 찾게 하기 위해서.
영가를 법보단에 모실 때에 내신 성금(誠金)으로 부처님과 최상승법인 참선을 하시는 스님들께 공양을 해서 이중 삼중으로 공덕(功德)을 쌓게 되는 것 / 여기에 모시면 어떠한 원한에 사무친 악(惡)한 마음을 가진 영가(靈駕)라도 법문(法門)을 듣고 축원(祝願)을 해 드림으로 해서 자연히 선신(善神)이 된다

울산군(蔚山郡) 원남면 상서리에 살았던 이규진(李圭鎭)씨의 아들 이근홍(李根洪)의 인과설화(因果說話)에 대한 말씀 / 식(識)이 맑으면 영가가 보이고, 전생 일을 알 수가 있는데, 도(道)를 깨닫는 것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그것은 없었던 것으로 취급을 하고, 오직 정법(正法)을 향해서 닦아 가면 아무 상관이 없다.
사람이 죽어서 자기의 지은 업(業)에 따라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과학적 사실이요, 틀림없는 법칙 / 인과(因果)와 윤회(輪廻)의 법칙을 그렇게 간단하게 부정을 해 버린 사람은 무식하기가 말로 할 수 없는 사람.

인과의 법칙을 모든 사람이 믿으면 이 세상에 법이 필요 없게 되는 것 / 김천(金泉)에서 어느 부인이 시집간 딸에게, 자기 아들과 며느리 몰래 양식을 준 과보로 아들 집 개로 태어난 인과설화(因果說話)에 대한 말씀 / 금생(今生)에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내생(來生)에 어떻게 받느냐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내생(來生)은 한 생각 뒤가 바로 내생.
말조심(말操心), 행동 조심(操心), 마음씨 바르게 쓰고, 착하게 쓰고, 지혜롭게 해서 과거에 업(業)을 소멸(消滅) /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을 탁! 돌이켜 가지고 '이 뭣고?' 화두(話頭)를 하면 죄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고 오히려 생사해탈(生死解脫) 길로 나아간 것이 된다.

전강 조실(祖室) 스님께서는 여기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을 짓고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모셔서 해탈도를 증득(證得)하고, 우리 모두가 다 해탈도를 증득하고, 온 인류가 다 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도록 제도(濟度)할 수 있는 힘을 우리가 길르는 도장(道場)이 되었다.
로마 교황(敎皇)의 한국 방문에 대한 말씀. 주체성을 가지고 의젓하게 맞이해야 / 우리의 뿌리인 선조(先祖)를 소중히 여겨야 복 받는다 / 민족에 뿌리를 망각(忘却)한 민족(民族)은 결정코 멸망(滅亡)하고 마는 것 / 나 자신의 뿌리, 내의 본심(本心), 나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게송)고혼내입법왕성~ / 『선가귀감(禪家龜鑑)』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서 그 골수(骨髓)만을 뽑아서 모은 책.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데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 / 한 생각 돌이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이 도리(道理)야말로 세계에 어느 종교에도 없는, 불법 가운데에서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만 있는 이러한 법입니다.


이 법보전 안에 영가를 모시면 왜 영가가 좋은 곳으로 가느냐?
선지식(善知識)께서 작관(作觀)으로 이 선방(禪房)을 경영을 하시고, 도량(道場)에서는 항상 청정히 수행하는 비구(比丘)스님이 항상 최상승법인 참선(參禪)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 도량 내외(內外)는 언제나 선신(善神)이 옹호(擁護)를 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항시 이 도량을 굽어 살펴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가를 이 법보단에 모실 때에 성금(誠金)으로 부처님께 공양미(供養米)로 올리고, 그 공양미로 참선(參禪)하시는 스님네와 대중께 공양을 해서 이중 삼중으로 공덕(功德)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靈駕)는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그 영가를 여기다 모신 그 유족(遺族)과 또는 친지(親知)들은 그 공덕으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모든 소원(所願)을 성취허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젊은 분들은 이 불교(佛敎)의 인과(因果) 윤회(輪廻)의 이치를 잘 몰라서, ‘그런 소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이 아니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몸은 죽어서 땅에다 묻고 화장(火葬)을 해서 한줌의 재가 되어서 물이나 산에 흩어버리고 그래서 없어졌다 하더라도, 이 몸을 끌고 다니는 그 영혼(靈魂)은 원래 태어난 때가 없고 또한 영원히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업(業)에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받아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또 지은 업에 따라서 천당이나 지옥이나 인간이나 축생에 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울산군(蔚山郡) 상서리(上西里)에 살았던 이규진(李圭鎭)씨의 아들 이근홍(李根洪)의 인과설화(因果說話)에 대한 말씀.

김천(金泉)에서 어느 부인이 자기 며느리와 아들 몰래 딸에게 양식을 몰래 준 그 과보로 그 집 개로 태어난 인과설화(因果說話)에 대한 말씀.

이 몸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이 몸이 죽은 뒤가 내생이지만 그것은 옅은 인과법이고, 지금 이 시각 이후가 바로 내생(來生)이요, 한 생각 뒤가 바로 내생이요, 일초 뒤가 바로 내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그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하느냐’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무서운 것이다 이것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이 구체화되기 전에, 얼굴에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기 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생각을 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 교황(敎皇)의 한국 방문에 대한 말씀. 주체성을 가지고 의젓하게 맞이해야.

우리의 부모를 받들 줄 모르고,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선조(先祖)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한 나무를 가꿀 때에 그 뿌리를 북돋우고 뿌리에 적당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고 뿌리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좋은 흙으로 잘 북돋아야 그 줄기가 무성하게 자라고 가지가 번성(蕃盛)을 하고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훌륭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아서, 나라와 민족과 사람에게는 각각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뿌리를 잊어버리고 등한(等閑)히 하는 사람은 참다운 인간(人間)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나라에 뿌리와 민족에 뿌리를 망각(忘却)한 민족(民族)은 결정코 멸망(滅亡)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 뿌리 찾는 운동이, 먼저 나 자신의 뿌리, 나의 본심(本心), 나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선가귀감(禪家龜鑑)』 보시(布施)에 대한 말씀.
이 『선가귀감』은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저술(著述)하신 책으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속에서 골수(骨髓)만을 뽑아 모아가지고 한 권의 책을 만드신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책인데도 그 속에는 팔만대장경의 그 깊고 깊은 진리(眞理)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은 여러분에 가보(家寶)가 될 것이요,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데 있어서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2. 23. 16:29

((No.233))—1984년 3월 첫째일요법회 (84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1분.

 

(4/4) 약 21분.

 


(1/4)---------------

어느 수좌가 법상 앞에 다가와서 서서 여쭙기를
수좌 : "물 없는 바다에 파도가 출렁거린다"
스님 : "시즉고시(是則固是)나 갱대(更待) 30년 하야사 시즉(是則)다. 말이 끝났으면 자리로 돌아가서 앉아"

수좌 : "원오극근이 대혜종고에게 '상수내야(相隨來也)니라, 서로 따라온다'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 : "무엇을 묻는고?"

수좌 : "상수내야니라"
스님 : "다시 한번 일러봐"

수좌 : "상수내야니라"
스님 : "일렀으면 자리로 돌아가"

수좌 : "내가 한번 일러 보겠습니다.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이라. 하하하"
스님 : "자리로 돌아가"


오늘 연전(年前)에 한번 여기 찾아온 일이 있는 수좌 스님이 와서, 이렇게 사부대중이 모인 가운데에서 그동안 수행한 힘을 여지없이 발휘를 했습니다.
'이 스님이 바로 깨닫고 바로 일렀느냐, 못 일렀느냐?' 한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 보면 알 것입니다.


추창사하십리춘(惆悵沙河十里春)인데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소루의구사양리(小樓依舊斜陽裏)헌데  불견당시수수인(不見當時垂手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추창사하십리춘(惆悵沙河十里春)에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다.
쓸쓸한 바닷가 모래사장에 십리에 봄이 왔는데,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여. 꽃이 한 번 늙으면, 늙어서 시들면 또 다시 봄이 오면은 다시 또 꽃이 새로워진다 그말이여.

소루의구사양리(小樓依舊斜陽裏)에, 다락집, 적은 다락은 예나 다름없이 저문 석양, 해 저문 석양 속에 서 있는데,
불견당시수수인(不見當時垂手人)이로구나. 옛날 그 당시에 손을 드리워 주던 그분은 볼 수가 없구나.


세월이 흘르고 흘러서 다시 또 갑자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봄이 왔건만, 입춘 우수가 지냈건만 또 이렇게 엊그제 봄눈이 나렸습니다.
아무리 눈이 내려도 봄눈이라 순식간에 다 녹아져 버리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물이 오르고 여기저기 산에는 진달래와 개나리의 꽃몽우리가 피기 위해서 잎을, 몽우리 몽우리를 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봄이 갔다가 다시 오고 꽃이 졌다가 다시 피고 하건마는, 옛날에 우리를 위해서 자비를 드리워 주시던, 손을 드리워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던 스승님은 뵈올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56억 7천만 년뒤에 미륵불(彌勒佛)이 염부제(閻浮提)에 하강(下降)하셔서 출세(出世)해 가지고 무량 중생을 제도하시게 되는데, 그 56억 7천만 년 되기 이전에 간간이 화현 보살이 출현(出現)을 하셔서 불법을 펴시고, 또 중생을 제도하시고 그러시면서 불법의 혜명(慧命)을 이어 가게 됩니다.
그 보살 화현으로 나타나신 그러한 성현들은 '내가 보살(菩薩) 화현이다' 하고 써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요, 우리가 그 색상을 보아 가지고는 분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살 화현이 수십 가지, 백억 화신(化身)으로 출현을 하셔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시게 됩니다. 돈독한 신심을 가진 이는 천백억 화신으로 나타난 그 보살 화현을 언제 어데서 어떻게 만날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반사지(蟠蛇地: 갈반지葛蟠地)라고 하는 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게 될 때에, 그 전에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할 때, "이 다음에 어디에서 보살님을 만나 뵙게 될까요?" 하고 여쭈어보니까, "반사지(蟠蛇地)에서 만나게 될 거다"
그래서 반사지에다가 토굴을 짓고 거기서 그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귀빈(貴賓)들이 와서 친견을 하고 가고 또 큰스님네도 와서 친견하고 가고 모다 그러는데, 그 자장 스님은 국사(國師)로서 일국(一國)에 융숭한 존경과 예우(禮遇)를 받고 계셨는데,
하루는 어떤 덥수룩한 거지같이 생긴 영감이 칡넝쿨로 엮은 광주리에다가 죽은 강아지 새끼를 담어 가지고 어깨에다가 메고 와서, "내가 자장을 좀 만나러 왔다" 그러니까,

그 시자(侍者)가, 우리 큰스님을 그동안에 친견하러 온 분들이 수없이 많지만, 다 '자장 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다 이렇게 말하지 '나, 자장을 보러 왔다, 자장 집에 있느냐?' 이렇게 큰스님을 '스님' 소리도 넣지도 아니하고 막 마구잽이로 그러니까,
그 시자가 '참 고약한 사람이 왔구나' 그래 가지고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친견을 시켜야 할 것인가, 안 해야 할 것인가?' 망설이니까, "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되물으니까,

"너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여. 니 스승 자장을 만나러 왔으니까 빨리 자장보고 나 왔다고 해라" 막 그 위엄(威嚴)을 가지고 하니까, 그 위엄에 눌려서 그 시자가 들어가서 큰스님한테 가서, "밖에 이러이러한 사람이 와 가지고 막 큰스님을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만나고 싶다고 그럽니다"

"그래 어떻게 생겼더냐?"
"약허(若何) 약허(若何)하게 생겼고, 미친 사람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그 미친 놈이 왔는가보다. 그 보내 버려라" 아, 이랬단 말이여.
그러니까 시자가 나가서, "큰스님 지금 바뻐서 못 만나니까 가라"고 그러니까,

"니가 가라고 안 해도 내가 갈 거다. 지 놈이 그렇게 아만(我慢)이 탱천(撑天)해 가지고 보살(菩薩)을 친견을 해?"
그러면서 그 가지고 있는 광주리를 거꾸로 이렇게 쏟으니까 죽은 강아지가 툭 땅에 떨어지자마자 사자(獅子)로 변한단 말이여. 그래서 그 사자를, 청사자(靑獅子)를 타고 저 하늘 높이 휙- 하니 날아가는데, 아 시자가 그 광경을 보고서 급히 쫓아 들어가서 그 광경을 얘기하니까,

그 자장 스님이 깜짝 놀래 가지고 하! 나와서 보니까, 저 하늘갓으로 그 사자를 탄 그분은 날아가 버리고는 그 뒤 끝에 그 비행기 날아간 뒤에 하얀 흰구름이 꼬리가 길게 나부끼듯이 그런 자죽만 남기고서 이상한 향내가 진동을 한 것을 보고,
"하! 이거, 이 반사지(蟠蛇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親見)하기로 했는데, 내가 문수보살을 못 알아봤구나" 그렇게 후회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 자장율사가 문수보살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널리 전해지는 일화(逸話)입니다마는, 꼭 이러한 특이한 양상(樣相)으로 보살이 출현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냄새가 없이, 완전히 거지면 거지, 미친 사람이면 미친 사람, 또 오늘 이 법회가 시작하자마자 나와서 한바탕 이 법거량(法擧揚)을 시도한 이러한 분도 문수보살(文殊菩薩)일런지, 보현보살(普賢菩薩)일런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세(末世)라고 해서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한다든지, 또는 여자라고 해서 자포자기를 한다든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자포자기를 한다든지, 또는 무식하다고 해서 자포자기를 한다든지—이 도(道)에 있어서는, 법(法)에 있어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초월(超越)한 것인 만큼, 스스로 자기와 도와는 인연이 먼 것처럼 포기하는 것은 제일 큰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세에 태어났을수록에 백 배 더 노력을 할지언정, 또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하게 태어났을수록에 백 배 더 노력할지언정, 여건(與件)이 안 좋다고 해서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영영 공부와는 멀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서도 어려운 여러 가지 역경(逆境) 속에서 거기서 좌절하지 아니하고 두 번 실패하면 세 번, 세 번 실패하면 네 번, 이렇게 해서 끈질기게 계속 노력하고 극복해 나가면 마침내는 큰 성공을 하는 예가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흔히 좋은 여건하에서 모든 사업을 하게 되고 모든 학문을 하게 되고 하면 참 좋은 것 같지만, 좋은 여건하에서 성공한 사람보단 오히려 대단히 불리한 역경 속에서 참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고, 그러한 사람이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얻고 나아가서는 그 기쁨과 행복을 모든 사람에게 또 회향(廻向)을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선지식(善知識)이 열반(涅槃)하시고 안 계시지만, 우리는 그 우리를 위해서 남겨주신 그 법어(法語)를 통해서 생존시(生存時)나 다름없이 그 법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법(法)에 의해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法門) 속에 '우리 인간은 전부가 이별(離別)뿐이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처음에 그 자식을 낳아 가지고서는 그 자식을 위해서 그 부모는 몸과 목숨과 모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자식을 위해서 다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다 바치고서도 자식만 잘된다면 한이 없이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길렀지만, 그 자식이 차츰 커가면 결국은 부모의 품안에서 떨어져나가서 독립을 하게 되고, 또 자식으로서는 부모가 평생도록 살아계시기를 바래지만 세월이 지내면은 그 부모도 결국은 저승으로 떠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 사랑하는 부부간에도 역시 마찬가지고, 형제간이나 친구 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이별(離別)을 전제(前提)로 하고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이고, 벼슬이나 명예나 또는 재산이나 모든 그런 인간에 오욕(五欲)도 역시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이 무상(無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상 속에 몸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 무상 속에 몸을 받아나서 무상 속에서 무상을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일평생을 살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갈 때까지 온전히 무상 속에서 일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40초)




(2/4)---------------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 참나를 찾는 법, 이 진리법을 설(說)해 주시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상(無常) 속에서 무상을 살다가 무상(無常)하게 이승을 하직을 하고 또다시 새로운 몸을 어느 땅 어느 때에 받어나서 또 무상하게 일생을 살다가 끝을 또 마치고,
이러한 되풀이를 하면서 수없이 고의적으로, 또는 본의(本意) 아니게 업(業)을 지어서 그 업으로 인해서 육도(六道)를 끊임없이 돌고 돌다가 축생(畜生)이나 아귀도(餓鬼道)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地獄) 같은 데에 한번 떨어지고 나면 영겁(永劫)을 두고 나올 기약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불법을 만난 그 인연으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남전(南泉) 스님과 또 근처에 있는 어느 토굴에 스님과의 관련으로 이루어진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우리는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기도 하고 선지식이 또 학자(學者)를 찾기도 하고 해서, 서로의 안목(眼目)을 점검을 하고 탁마(琢磨)를 해서 어쨌든지 바른 스승을 찾고 바른 도반(道伴)을 찾어서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않고 또 중간에 멈추는 일이 없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가 끝나면 여러분에게 『관음예문(觀音禮文)』이라고 하는 책을 보시(布施)하게 됩니다. 작년에 「보덕각시 연기(普德閣氏緣起)」라고 한 책을 노나 드렸는데, 그 「보덕각시 연기」도 지금 이 『관음예문』 뒤에 붙어 있습니다마는,
그때 관음예문을 한문과 또 한글로만 되어 있고, 그 관음예문이 번역(飜譯)이 되어 있지 아니해서, 이 관음예문은 대단히 글도 좋고 뜻도 좋고 해서 우리의 십악(十惡), 열 가지—몸으로 세 가지 짓는 죄, 또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 또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죄, 이렇게 해서 합해서 열 가지의 죄(罪)를 참회(懺悔)하는 십악참회문(十惡懺悔文)입니다.

전(傳)하는 바에 의하면, 중국(中國)에 당송(唐宋) 팔대문장(八大文章) 가운데에 이 소동파(蘇東坡)라 한 큰 거사가 있었는데, 그분은 대학자(大學者)요, 또 학자이면서 또 불문(佛門)에 귀의(歸依)를 해서 거사로서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전등록(傳燈錄)』에까지 오른 그러한 참 훌륭한 분입니다. 그분과 또 그분의 누이동생 이 두 남매(男妹)가 이 『관음예문(觀音禮文)』을 지었다고 하는, 그렇게 전해 내려오기도 합니다.

이 『관음예문』은 삼세(三世)에 부처님과 또 모든 보살(菩薩)님들 모다, 그리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런 성현들을 증명(證明)으로 모시고 우리의 그 열 가지의 죄를 참회하는 그런 참회(懺悔)하는 예경문(禮敬文)입니다.
그런데 이 글이 참 내용이 좋고 좋은데, 글이 대단히 어려웠는데 그것을 번역을 해서 이번에 간행(刊行)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어 가지고 댁에 가셔서 읽어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마는, 번역을 박경훈 거사라고 하는 그 역경원(譯經院)에 참 훌륭한 거사님이 있어서 그분의 손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 번역이 대단히 잘되어서 소리를 내서 이 관음예문을 읽으면서 그 참회를 하시면, 뜻을 모르고 한문(漢文)으로만 예경을 한 것 보단 그 뜻을 알고서 하기 때문에 훨씬 더 감동적으로 참회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번역을 해 놓지 안 해도 한문으로만 읽어도 뜻을 알 수 있는 분은 한문으로 하셔도 좋고, 또 뜻을 잘 모르시는 분은 번역한 그 관음예문을 통해서 참회를 하시면 더욱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보덕각시 연기」도 그 『관음예문』 뒤에다가 붙여서 함께 발간(發刊)하게 됩니다마는, 이 『관음예문』은 그전에 작년에 여러분 가운데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어느 그 신도님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공덕(功德)으로, 가피(加被)로 참 귀여운 옥동자를 낳아서 그 아기의 돌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번에 이렇게 법보시(法布施)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한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할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具足)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 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理)와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理致)만 맞고 사(事)를 무시하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事)라고 하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밝은 것과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한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事)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3년 알뜰히 정진(精進)하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하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隱密)히 할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顯] 할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하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에 최고에 맛이 변해 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어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하는 짓은 미친 짓 밖에는 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하다 한 소식해 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어 가지고, 불조(佛祖)도 막 매도(罵倒)해 버리고 쳐부셔 버리고 욕을 퍼붓어 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 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 받는 일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깐 지나가야 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20분41초~41분36초)




(3/4)---------------

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참선을 한 분이 몇 분이 찾아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 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할려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스님께서 열반(涅槃)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四大)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本來) 적적(寂寂)한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이러한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하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를 방장(方丈) 스님한테 무자(無字)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았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뚱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한 경지에서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이 나지를 않으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한 그러한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한 말을 듣고 그러한 말의 뜻을 알아 가지고 그러한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한 경계를 지켜 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하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처럼 포악하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하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了了常知)한 그놈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이 켜진 것을 들여다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한 그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 그 해,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해가)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하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 그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하고, 이러한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한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指導下)에 하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데에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법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하니 생각하고 그 수행하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하는데, 이것도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 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한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끊어져 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렇게 해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 가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 스님이 천하 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法擧揚)을 해 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맡었지만, 원오극근 선사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하시지 안 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 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 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데에 묘(妙)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한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갖다가 막 강짜로 압력을 가해 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라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한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어갈 때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데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생각을 내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먹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데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하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한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經)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도 대단히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뭣고?' 한 것만 못하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뭣고?'를 하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 과정 밖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41분39초~63분8초)




(4/4)---------------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가려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간다' 그런 것이 씌어 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하지 아니한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 버릴 수 밖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으려고 해도 눈뚜껑이 천 근이나 만 근이나 되어 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꾸벅꾸벅 해 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고개를 흔들흔들 하면서 허리를 펴는데, 3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하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 산봉우리에서 저 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하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깐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둥글둥글하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 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써 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으려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고 왔다갔다하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한 분도 있고 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하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산길에 사람이 없는데 새는 돌아오지를 안 해.
온 산중에 눈이 적설(積雪)이 와 가지고 허옇게 눈이 내렸는데, 그러니 산에 아무도 오고가는 사람이 없어. 그러고 새도 눈이 워낙 많이 쌓여 놓으니까 어디에 가부렀는지 돌아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외로운 마을에 눈이 내리니까 껌껌하고 암담한데 차운 구름만 쌓여. 앞으로 얼마나 더 눈이 쏟아질런지 하늘과 땅이 온통 껌껌해 가지고 차운 구름만 쌓인다 그 말이여.
이 세계가 새해를 맞이했건마는, 평화(平和)가 돌아올 조짐은 보이지를 않고,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서운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러한 경계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헌디, 그 산중에 눈이 내려 가지고 사람 왕래도 없고 새도 돌아오지도 않고, 온 골짜기 골짜구니마다 눈이 쌓이고 찬 구름이 쌓이는데, 그 절간에 스님이, 참선(參禪)하는 스님은 그 허연 눈 덮인 산길을, 유리세계(琉璃世界)와 같은 그런 허연 세계를 터벅 터벅 터벅 걸어가지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저 강(江) 위로 가 가지고 그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어 가지고, 얼음을 쳐서 구녁을 뚫어 가지고 거기서 물을 길러 오더라 그 말이여.

깊은 산중에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을 홈대를 놔 가지고 연결을 해서 물을 받아서 그렇게 먹고 살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이 되니까 골짜구니에 물이 다 얼어 버리고 홈대마저도 다 얼음으로 가뜩차서 물을 먹을 수가 없어. 계곡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으니까 저 넓은 강 있는 데로 가면, 가서 그 얼음을 깨 가지고 구녕을 뚫어서 물을 길러 온다 그 말이여.

온 세계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자기가 잘살기 위해서, 자기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 서로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고, 무서운 무기를 발명을 해서 무력으로써 싸움을 해 가지고 자기 나라에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래 하는데 결국은—물론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軍隊)도 양성(養成)해야 하고, 무기도 많이 맨들어야 하고, 비행기나 군함도 많이 있어서 그걸 잘해야만 외적(外敵)이 침범(侵犯)해 들어오지를 못하니까 부득이해서 이것을 하기는 해야 합니다. 절대로 등한(等閑)히 할 수는 없고 잘해야 하는데, 참 성현(聖賢)의 눈으로 본다면 이 중생세계(衆生世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될 일이거든.

어떻게든지 온 세계 사람들이, 온 나라가 이 성현의 뜻을 깨달라 가지고 싸움으로써 자기의 나라를 지키려고 하지 말고 서로 돕는 자비(慈悲)로써 나아간다면, 무기를 맨드는 대신 서로 인류복지(人類福祉)를 위해서 그걸 쓰게 된다면 세계에 굶어 죽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요, 병들어 죽은 사람도 다 구제할 수가 있을 것이요, 이웃지간에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이러한 평화(平和)를 가져오도록 해야 하는데, 온 산천(山川)이 꽁꽁 얼어서 사람 길이 다 끊어졌다 말이여.

그런데 그 수행하는, 그 산중(山中)에 그 절에서 수행하는 그 수좌(首座)가 눈길을 밟아서 저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고 거기서 물을 길어온 것은, 온 세계가 이렇게 싸움을 하고 있는 이 속에서도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온 중생(衆生)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 이 세계(世界)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차게 하려는 그러한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신심(信心)을 가지고 이렇게 모여서 공부를 하려고 한 이것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를 해서 게송(偈頌)을 읊어 봤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려울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을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자(佛子)가 하는 길인 것입니다. 앞으로 이 다음 법회가 열릴 때까지 정말 착실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나가실 때 이 법당 앞의 층계(層階)에서 『관음예문』 그 책을 노나 드릴 테니까, 충분히 많이 준비가 되었으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서히 내려가십시오. 일시에 와- 몰리게 되면은 모다 다치게도 되고 그러니까, 조끔 기다리셨다가 저 앞에서부터 차츰차츰차츰 조용하게 질서 있게 나가시면서 책을 받아 가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이 도(道)를 닦고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첫째, 스스로 조용할 줄을 알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차를 탈 때나 어디를 가던지 한 생각 딱! 단속(團束)하면 어디를 가나 자중(自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할 때 다르고, 금방 또 법당(法堂) 밖에 나가면 또 다르고, 또 저 후원(後院)에 가서 공양(供養)을 할 때 다르고 하면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양을 하실 때나, 또 이 법당 안에 계실 때나, 또 법당 밖에 나가서 책을 받으실 때나, 또 정거장에 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나, 또 가정에 돌아가셔서 모다 가족 모다 생활을 하실 때나, 어디를 가나 한 생각을 탁! 단속(團束)을 하신다면 참 그 마음가짐이나 또 말씨나 그 행동에 있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해지는 청정한 사람은 어디에서 어떻게 보나, 위에서 보나, 밑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언제나 훌륭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63분8초~1시간24분12초) (끝)




[법문 내용]

어느 수좌(首座) 스님의 법거량(法擧揚) / (게송)추창사하십리춘~ / 백억 화신(化身)으로 출현을 하시는 보살 화현을 언제 어데서 어떻게 만날는지 알 수가 없는 것 / 자장율사(慈藏律師)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일화. 삼국유사 / 공부에 자포자기는 없다 / 무상(無常).

불법을 만난 그 인연으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을 수가 있다 / 『관음예문(觀音禮文)』 소개, 법보시(法布施)에 대한 말씀 / 참회(懺悔)로 업장소멸 / 도를 닦는데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 가야 / 공안(公案)을 이르되, 이(理)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고,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인가(印可) /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 /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 이 도(道)에 사람 만나기 어렵다.

어느 외국인 수행자의 물음 / '이뭣고?'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 /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 말세 중생들에게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 /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警戒) /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

경(經)은 노정기(路程記) /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 교외별전(敎外別傳) /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 다생(多生)에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더 큰 것이 없다 / 생력(省力), 힘을 덜은 것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 (게송)산경무인조불회~ /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려울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을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자(佛子)가 하는 길.


자장율사(慈藏律師)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일화. 삼국유사.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가 많고, 도(道)를 닦는 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한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함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한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 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도 맞고 사(事)에도 맞게 일러야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玄中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하셨습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事)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하게 되고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하게 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하게 되어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또 좋은 재목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하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하고 그래서 그러한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 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워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해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한 식으로 수행을 하게 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默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 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 가지고 임제 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 선사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원래 이 화두(話頭)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것이, '이뭣고?'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인데, '대관절 이놈이 무슨 물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한 근기(根機)의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한 근기라도 고대로만 하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한 보살(菩薩) 화현(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하셔서 우리 말세(末世) 중생(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 방법을 개발을 하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공부해 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하는 정도는, 너무 긴(緊)하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 가지고 매카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할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때에 그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하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 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할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의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의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 나면 결국은 '내가 나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숟갈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하려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 층 이십 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한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 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하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省力)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21. 2. 13. 21:07

 

 

((No.229))—1984년(갑자년) 신수기도 입재(84.02.04) (69분)

 

(1/4) 약 18분.

 

(2/4) 약 18분.

 

(3/4) 약 19분.

 

(4/4) 약 14분.


(1/4)----------------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일륜명월영청휘(一輪明月映淸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리장공우제시(萬里長空雨霽時)에, 만리나 되는 넓고 넓은 허공(虛空)에 비가 갰는데, 계속 작달비가 쏟아지다가 그 비가 활짝 갰어. 개니,
일륜명월(一輪明月)이 영청휘(映淸輝)로구나. 한 바퀴 밝은 달이 밝고 맑게 온 천지(天地)를 환히 비추는구나.

부운엄단천인목(浮雲掩斷千人目)하야, 그런데 뜬구름 한 점이 그 달을 가리워 가지고 천 사람의 눈을 그 달을 보지 못하게 했더라 말이여. 한 점에 뜬구름이 천 사람의 눈을 가리워 버려.
득견항아면자희(得見姮娥面者稀)로구나. 항아(姮娥)의 얼굴을 본 자가 드물구나.

이 '항아(姮娥)'는 옛날에 중국에 그 '예(羿)'라고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예'라고 한 사람이 서왕모(西王母)한테 빌어 가지고 불사약(不死藥)을 얻었는데, 불사약은 그 약을 먹으면 죽지 않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약을 얻었다 말이여.
그런데 그 예(羿)라고 한 사람에 부인, 항아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는데 그 부인이 그 불사약을 훔쳐 가지고 저 달 속으로 도망을 쳐 버렸어. 그래서 그 달을 갖다가 '항아(姮娥)'라고 한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아무리 새카만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다 하더라도 그 구름 위로 올라가서 보면 달은 휘황창 밝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름이 꽉 하늘에 끼어 있으면은 전혀 달도 보지 못하고 달빛도 보지 못하는데, 그 구름이 활짝 개 버리면, 비가 개고 구름이 벗거지면 그 밝은 달이 온 세계를 낮과 같이 그렇게 환히 그렇게 비추는데.
구름 한 점이 떠와 가지고 딱 중간을 가로막아 버리면 모든 사람이 그 달을 볼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그 구름 한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 달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하는 게송(偈頌)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平生)을 두고, 또는 일평생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데 한 덩어리 구름으로 인해서 달을 보지 못하듯이,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한 생각을 미(迷)해 가지고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쓰고도 쓰고 남아서 남을 주고 또 주어도 무진장(無盡藏)으로 풍족한 그런 재산을 가지고서도 일생 동안을 가난뱅이 신세를 면(免)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불법(佛法)을 비유해서 보아도 맞는 말이고, 세속(世俗)에 빈부귀천(貧富貴賤)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다가 비유를 하더라도 맞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入齋) 날인데, 해마다 연례행사로 정월 초삼일에 입재(入齋)를 해 가지고 초아흐렛날 회향(廻向)을 합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도량(法寶道場)에서 무슨 신수기도를 하는가?'
신심(信心)이 철저한,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철저히 믿는 입장에서 보면, '신수기도를 한다. 뭐 입춘기도를 한다’ 하는 것이 다 우습게 보여지는 그러한 분도 있겠습니다마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을 감안하셔서 정월에는 이렇게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백천방편(百千方便)이 개위차야(皆爲此也)여. 천 가지 만 가지 방편(方便)이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그거거든.

정초(正初)에 신수기도를 한 것이나, 입춘에 입춘기도를 하는 것이나, 칠석에 칠석기도를 하고, 백중에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고, 동지에 팥죽차례를 올리고, 일체 법요식(法要式)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根本)을 살펴볼 것 같으면은 모두가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방편(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자유자재로 통달하신 그러한 세존(世尊)께서도 방편(方便)을 쓰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신수기도는 정초(正初)에 3일이나 또는 일주일, 이렇게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기도를 올림으로 해서 금년 일 년 동안 무장무애(無障無礙)하고 모든 소원을 뜻과 같이 이루기를 비는 그러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저 천당(天堂)과도 다르고 지옥(地獄)이나 축생계(畜生界)와도 달라서, 천당은 뭣이던지 내가 생각만 먹었다 하면은 생각 먹은 찰나(刹那)에 이미 내 원하는 바가 눈앞에 현실적으로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밥이 먹고 싶다' 하면 금방 배가 불러지고, '뭘 보고 싶다' 하면 보고 싶은 그것이 찰나간(刹那間)에 눈앞에 나타나 있고, 내가 '어디를 가고 싶다' 하면 가고 싶다는 생각을 먹자마자 내 몸뚱이가 그 목적지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도 괴로운 것이 없어. 내 뜻에 어긋난 일이 없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고 원(願)대로 되고 그래서 하나에서 백까지 기쁘고 편안하고 좋은 일만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축생계(畜生界)나 저 지옥(地獄)은 백만사(百萬事)가 내 뜻대로 안 되아. 배고파서 물을 먹으면, 물이나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에서 불이 되어 가지고 불이 훨훨 타고, 도대체가 내 뜻대로 된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이 사바세계는 괴로운 일과 즐거운 일이 섞여 있고, 내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도 있다 그 말이여.
어떠한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많은 사람도 더러는 있고, 내 뜻대로, 사사건건(事事件件)이 내 뜻대로 안되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얼마 동안은 내 뜻대로 안되다가 또 세월이 지내가면 또 내 뜻대로 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내 뜻대로 무엇이던지 잘되다가 중간에 가서 내 뜻대로 안되기도 하고, 일생 동안 모든 일이 내 뜻대로만 잘되는 사람도 몇백만 명 속에는 혹 한 사람이나 있을란가, 거의 내 뜻대로 백만사(百萬事)가 다 된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은 내 뜻대로 되는 일은 40프로나 3-40프로, 그리고 내 뜻대로 안되는 것이 6-70프로,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바세계보다도 저 천당(天堂)에 가면, 하늘나라에 가면 참 좋겠다' 다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만, 이 불법(佛法)에서는 천당을 그렇게 좋게 생각을 아니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천당에 가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다 내 뜻대로 되니까 참 좋을 것 같지만, 거기서는 참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길이 없습니다. 너무 편안하고 좋고 내 맘대로만 되니까 그 편안한 것을 즐기느라 나 자신을 깨달을 필요도 없고 깨달라야 할 생각도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천당에서 살아 버리면 구태어 생사해탈(生死解脫)할 것도 없겠지만, 자기가 지은 복(福), 자기가 지은 복을 받을 만큼 다 받어 버리면 다시 축생에도 떨어지고 또 인간 세상에도 떨어지고 또 과거에 지어 놓은 죄가 많으면 지옥에도 떨어진다 그 말이여.
은행에다 예금을 아무리 많이 해 놔도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곶감 빼 먹듯이 자꾸 빼 먹으면, 그 쓰기에 따라서는 일 년 동안에 통장이 다 바닥이 날 수도 있고, 아무리 많아도 한 10여 년간 계속 내다 쓰다보면 결국은 바닥이 나는 것처럼, 과거에 복(福)을 많이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행히 천당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받어 버리면 다시 또 떨어지기 때문에 천당에 간 것이 그렇게 영원한 것이 못되고, 올라가 봤자 복 받느라고 이 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이 불법을 믿는, 특히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천당을 그렇게 좋게 안 생각하고, 제일 좋은 세계가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苦)와 낙(樂)이 섞여 있어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해서 거기에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좋은 동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때 잘살다가 사업이 여의치 못해서 그 사업이 망하고 집안이 기울어지면 거기에서도 발심을 할 수가 있고, 또 가난에 쪼들려서 너무너무 고통이 심해도 그 고통 속에서 자기를 반성하고 거기서 용기와 지혜(智慧)를 얻어서 향상(向上)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처음~17분42초)




(2/4)----------------

'변화(變化)'라고 하는 것은 참 무상(無常)한 것이요 대단히 안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변화야말로 참으로 그 소중한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중생(衆生)은 영원히 중생이지 성불(成佛)할 기약(期約)이 없는 것입니다.
밤이 되었다 낮이 되었다, 또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고,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또 그 지난 겨울 동안 대단히 강추위를 했지만, 내일이면 또 입춘이 되어서 다시 또 새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가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는 좋고, 이 사바세계 가운데에도 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이야말로 춘하추동(春夏秋冬)이 사시(四時)가 분명해서 이 세계에서는 제일 좋은 나라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서도 제일 좋은 사바세계에 태어났고,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도 제일 좋은 이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을 퍽 다행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도 일 년 내 겨울만 있는 데도 있고, 일 년 내 여름만 되는 데도 있고, 또 밤이 대단히 긴 곳이 있는가 하면은 계속 밤이 없고 낮만 있는 데도 있고, 참 그 변화가 없어서 그런 데는 박복중생(薄福衆生)들이 떨어져서 사는 곳입니다.
이 대한민국은 봄은 봄대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은 삼복(三伏)더위가 있어서 그렇게 뜨겁고 하나, 그 가운데에 봄에 심어 놨던 모든 곡식이 그 뜨거운 계절을 만나서 무성(茂盛)하게 자라 가지고, 가을이 되면 서늘바람이 부는데 그 서늘바람 속에서 그 여름에 자랐던 모든 곡식이 누렇게 결실(結實)을 해서 익게 됩니다. 겨울이 되면은 눈이 내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얼음이 어는데, 그때 모든 산천초목(山川草木)은 낙엽이 져서 엉성하게 나무가지가 되지만 그 나무의 모든 기운은 열매를 맺어서 씨로 갈무리고 또 뿌리로 기운을 보내서 월동(越冬)을 하게 됩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이용해서 모든 이 더러운 것이 다 살균(殺菌)이 되고, 그래 가지고 입춘(立春)이 돌아오면 다시 새싹이 나게 됩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난 우리는 참 숙세(宿世)의 많은 복(福)을 심고 닦았기 때문에 이러한 좋은 나라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으로 참 5천년의 역사를, 문화(文化)와 역사(歷史)를 가진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민족입니다.
워낙 나라가 좀 좁고, 워낙 민심(民心)이 모다 선량(善良)하고, 또 그러지만 모든 풍토(風土)가 너무 좋다 보니 이웃나라에 욕심 많은 사람들이 항시 우리를 욕심을 내고 짓밟고 노략질을 하고 그러한 못된 나라들이 있어서 5천년을 두고 많은 괴로움과 시련을 받아왔지만, 우리는 그러한 시련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민족성(民族性)을 잃지 아니하고 결국은 오늘날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런 좋은 나라가 아니면 6 ‧ 25 동란(動亂)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세계에 16개국의 나라 병정(兵丁)들이 와 가지고 그 우리나라의 난리(亂離)를 평정(平定)을 시키고 우리를 다시 이렇게 잘살 수 있겄게 해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와 우리 민족은 정말 이 불법(佛法)에, 불법 가운데에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깊은 인연을 심은 그러한 나라요 민족이기 때문에 참, 불보살(佛菩薩)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이 항시 가호(加護)를 해 주셔서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말세(末世)가 차츰차츰 깊어지면, 동해(東海)는 차츰차츰 물에 잠기고 이 서해 쪽으로는 육지가 차츰차츰 바다가 육지로 변하게 되고, 또 앞으로 이 세계의 예언가들이나 점성가들이나 역술가들의 말에 의하면, 앞으로 2천년 초에 가면 세계 인류의 70프로가 다 이 몰살을 당할런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현재 모든 이 사람들이 세계에 모든 나라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러한 재난을 당할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모든 재난(災難)과 업(業)은 다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입니다. 자기가 지어 가지고 자기가 받는 것이여. 인류의 멸망(滅亡)도 인류 자신들이 망할 짓을 해 가지고 그러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할 수 없는, 어길 수 없는 이것은 천리(天理)인 것입니다.
스스로 복을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게 되고, 재앙을 받을 짓을 하면 재앙을 받는 것은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서로 제 나라 욕심만 챙겨 가지고 이웃나라를 침공(侵攻)을 하고, 다른 사람은 다 죽게 되더라도 자기만 살려고 그러고, 다른 업체는 다 망해도 자기 업체만 살려고 그러고, 나라는 망해도 자기는 자기만 살려고 그러고, 모든 다른 사람들은 다 망해도 자기 한 사람만 잘 살려고 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은 다 망하고 자기만 살기커녕은 자기까지 합해서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 일 뿐만이 아니라 나라와 나라의 사이도 그렇고, 온 이 세계가 다 마찬가지고, 이 지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우주(宇宙)에는 태양계(太陽系)와 같은 그러한 세계가 동서남북 시방세계(十方世界)로 무한대(無限大)로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지구와 같은, 지구보다도 더 발달된 세계가 이 하늘 우주세계에는 몇천만 개가 있을런지도 알 수가 없고, 지구와 비슷한 세계, 지구보단 못한 덜 발달된 세계, 모두 다 해서 백억만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많이 발달이 되어서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하신 말씀이 과연 틀림이 없다고 인증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마는, 이 우주에 지구와 같은 많은 세계들이 있을 때에, 각기 그 세계는 그 세계대로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세계도 역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끔 우주과학이 발달이 되어서 계속 달나라도 갔다 오고, 다른 별나라를 끊임없이 연구를 하고, 우주 정거장을 맨들어 가지고 우주여행을 머지않아서 모다 인류가 하게 되는데,
지구상에 살면서 지구에 사람들이 서로 이 진리(眞理)에 귀의(歸依)해서, 진리에 의해서 참나를 찾고 진리에 의지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애끼고, 그렇게 해서 서로 화합(和合)하고 그렇게 해야만 이 지구는 멸망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도 함께 다 멸망하게 되고, 동물만 멸망한 게 아니라 모든 식물도 다 타 죽고, 그런 이 방사낙진(放射落塵)으로 인해서 다 병(病)들어서 오랫동안 이 땅에서는 식물과 모든 동물, 생물이 서식하기가 어려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수기도를 하되 자기의 욕심(欲心)만을 충족(充足)하기 위한 그러한 원(願)을 가질 것이 아니라, 불같은 욕심으로 부자만 될려고 그러고 자기의 이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하기 위한 그러한 졸렬(拙劣)한 원을 세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기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 진정한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있고 그러한 원을 세워야 원을 성취를 하게 되고 그래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현제국(賢提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 아주 그 노스님, 아주 장로(長老) 비구(比丘)인데, 연세는 많고 그런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대단히 중병(重病)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여러 달을 씻지도 않고 옷도 빨아 입지도 않고 그래 가지고는 이 노스님이 앓고 있는 그 방에는 그 근처에도 사람이 지내갈 수가 없습니다. 똥 냄새에다, 오줌 냄새에다가, 피고름이 썩어 문드러진 냄새에다, 땀에다 모다 섞어져 가지고 도대체 그 근처만 가도 창자가 거꾸로 뒤집어질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나서 아무도 그 간호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 부처님께서 떠억 정중(定中)에 관(觀)을 해 보시고 그 늙으신 비구가 그런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아시고서 제자(弟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제국에 있는 그 노비구(老比丘) 있는 곳을 가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命)해서 차례차례로 그 간병(看病)을 하도록 명을 했습니다.
근데 이 부처님께서 명을 하시니까 마지못해서 간호를 한 척하고, 뭐 왔다갔다하고 어쩌고 그러지만, 그 가기만 가면 비위가 상하고 창자가 뒤집어질라 그러고, 한번만 갔다 오면은 도대체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그래서 형식적으로 거짓으로 그저 간호를 한 척하고 그랬는데, 부처님이 왜 그것을 모르시겠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그것을 아시고서 당신이 손수 더운물을 데워 가지고 가서 그 환자를 옷을 다 벗겨서 다 빨고 몸을 다 깨끗이 씻겨서 씻고, 그 방에 깔아져 있는 마른 풀은—돼지 그 우리 안에 돼지 똥과 오줌이 범벅이 쳐진 것 같이 그 풀이 썩어서 마치 퇴비처럼 되어 있는 것을 쏵 다 손수 다 그것을 걷어내고서 풀을 비어다가 말려서 마른 풀을 깨끗이 다 깔아 놓고, 옷을 빨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이렇게 해서 딱 해 놓으니까 그 다른 제자들이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어.

그리고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을 향해서 법(法)을 설하시기를, "여래(如來)가 이 땅에 온 것은 병(病)들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고 한 외롭고 약한 노인(老人)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여래는 이 땅에 왔느니라.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이러한 외롭고 병들고 가난한 노인이나 또는 수행자, 수행하시는 스님들을 잘 약(藥)을 공양(供養)을 하고 의복을 공양을 하고 이 병든 스님을 잘 공양을 올려서 간호를 해드리고 하면은, 그 복은 여래(如來)를 공양하는 복(福)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느니라. 그래서 그 복이 무량(無量)해서 자기 원하는 바를 성취치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법문을 설하셨습니다.(17분43초~35분49초)




(3/4)----------------

신수기도, 일주일간 인자 신수기도를 열심히 하셔야지요. 정성(精誠)껏 일주일 동안을 기도를 하셔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만 정성껏 기도하고, 그리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마음속이 그뜩해 가지고 생각마다 고약한 생각, 말마다 고약한 소리, 행동을 고약한 행동을 하면, 일주일 기도를 아무리 정성껏 했기로서니 어떻게 그 사람에게 한량없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해마다 정월(正月)에는 그 해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좋다' 하는, 어떠한 해는 「마음보를 고치자」 그러한 말씀도 내가 했고, 작년에는 「썽을 내지 말자」 이런 말씀을 했는데, 금년에도 「썽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내게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속을 이리저리 속상하게 만들어 놓고 "너 금년에는 썽을 안 내는 해여" 이래 해 가지고 약을 올리고, 「자기도 썽을 안 내야 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게 하자」 금년에는 이렇게 나는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썽 안 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을 짓는 것은 남에게 모든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베푸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남의 마음을 어떠한 내가 충격을 가해 가지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썽을 내게 하는 거, 속상하게 하는 거—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짓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그것이 복을 짓는 데에 보다 더 중대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 열 가지 한 것 보단 남 못할 일 한 가지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하는 그러한 옛날의 말씀도 있습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하면서 가끔 말을 갖다가 박(薄)하게 해 가지고 남의 오장(五臟)을 활딱 뒤집어놓는 성미(性味)가 있단 말이여.
하는 일마다 본받을 일이 많고 아흔아홉 가지를 다 잘하는데, 가끔 그 말 한마디를 잘못해 가지고 남을 갖다가 오장을 쑤시는 그러한 묘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것 참 아흔아홉 가지 공을 공(功)들여서 탑을 99층 탑을 쌓아 가지고, 한마디 그 독(毒)한 말로써 그 99층 탑을 때려부시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고 가난하고 외로운 그러한 분들을 잘 보살펴드리고 또 그러한 스님네를 잘 공양을 하는 것 대단히 좋고 그건 반드시 실천을 하되, 돈 안 들고 힘 안 들이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길.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같은 말이라도 남의 마음을 편안케 해 줘.
그래서 부처님은 '망어(妄語)나 기어(綺語)나 양설(兩舌) 악구(惡口)를 하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따듯한 말, 부드러운 말, 자비(慈悲)스러운 말, 사랑하는 말로써 모든 어른과 친구와 아랫사람 이웃 사람에게 대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참 큰 복(福)을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라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고, 말 한마디로 내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기도 하고, 말 한마디 비끗 잘못해 가지고 내가 죽을 고비에 들어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행동의 중간에 있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이것이 삼업(三業)인데, 마음에 뭔 생각[意]이 나면 결국은 말[口]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고, 마침내는 행동[身]으로써 그것이 실천이 되는데.
마음에서 한 생각이 탁! 일어난 것은 아직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을 통해서 일차적으로 밖으로 표현이 되고, 그다음에는 행동으로써 그것이 구체화(具體化)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떠오르기만 하고 밖으로 표현이 안 되면 자기의 문제로서 끝나지만, 말로써 이미 표현이 되어 버리면 긁어 담지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행동으로 실천을 해 버린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이 말, 불쑥 말이 나오기가 쉬운데, 한번 나가 버리면 그때 입을 탁! 막아 봤자 이미 소용이 없어요. 돈 안 들이고, 힘 안 들이고 사람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그러한 좋은 길.

그 말 한마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야만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불쑥 잘못해 가지고 참 집안에 모든 시비(是非)도 일어나고, 친구 간에 의(義)도 상하게 되고, 그 대중(大衆)도 소란하게 맨들고,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제일조(第一條)에 그 '말을 적게 하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전해온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부처님께서 그 대중을 향해서 병(病)든 그 비구, 병들고 늙고 약하고 한 그러한 노인을 갖다가 간호를 잘하면 그 복이 한량이 없고, 무슨 원(願)이고 마음먹은 대로 성취가 되는데,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인도(印度)에 있는 다섯 개의 큰 강(江)이 흘르고 흘러서 다 바다에 들어가듯이, 모든 복(福)은 그 사람한테로 다 모여든다' 이것이거든. 그래 가지고 '그 공덕(功德)이 점점점점 원만(圓滿)해 가지고 마침내는 성불(成佛)까지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는데.

그때 그 현생국에 왕(王)이 "부처님, 저 노비구는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금생에 저렇게 병고(病苦)에 시달리되 아무도 간병(看病)하는 사람이 없다가, 세상에 부처님 세존(世尊)께서 손수 더운물을 데워서 목욕을 해 주시고 빨래를 해서 갈아입히시고 풀을 뜯어다가 말려서 자리를 깔아 주시고, 어떻게 해서 저 노비구는 어찌 보면은 이 세상에서 제일 박복(薄福)한 사람 같았는데, 오늘 보니까 이 세상에서는 제일 복을 많이 지은 사람 같습니다. 과거(過去)에 무슨 업(業)으로 그렇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 과거에 인연(因緣)을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악행왕(惡行王)이라 한 임금이 있었는데, 그 임금은 어떻게 포악(暴惡)하고, 우리나라에 연산군(燕山君)이나 모다 그러한 고약한 왕보다도 더 고약했던지 말로 할 수가 없어. 어떻게 법(法)을 갖다가 일 년이면 몇 번씩 뜯어고쳐 가지고 어떻게 하면 백성을 갖다가 피를 빨아먹으며 어떻게 하면 백성을 괴롭힐까? 오직 자나깨나 그것만 연구하는 임금이여.
그래 가지고 법을 어떻게 자주 뜯어고쳐 가지고 백성을 못살게 굴고 그러니 백성이 아무리 그 법을 따르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 자꾸 법을 고쳐 가지고는 도저히 실천할라야 할 수 없도록 그렇게 고약한 짓만 하면서,
또 그 천하에 장사(壯士)는 전부 뽑아다가 놓고, 임금에 명(命)에 조끔이라도 어겼다 하면은 쇠심줄로 맨든 그 채찍을 가지고 무섭게 매질을 하고 때리는데, 그 매질하는 장사도 아주 물리가 나 가지고 자기한테 은근히 뇌물을 갖다 바치면 아프게 때린 척하면서 안 아프게 때리고, 자기한테 뇌물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주 살이 쭉쭉 째져서 피가 쏟아지도록 그렇게 무섭게 후려치고 그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아주 백성들이 살라야 살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래서 세상이 그렇게 되면 무고(誣告)로 모략중상(謀略中傷)을 하는 풍조가 천하에 아주 유행이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서로 믿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법(法)은 차츰차츰 간단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 성현이 나라를 다스리면 약법삼장이라 해 가지고 법을 간략히 해 가지고 삼장(三章)으로 된다 그 말이여. 법이 아주 간단해. 그래 가지고는 그렇게 법을 미세하게 엄하게 맨들 필요가 없다 그 말이여.

백성들이 모다 자연히 봄이 돌아오면은 날이 따뜻해지면은 얼음이 다 녹고, 땅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면서 여기저기서 온갖 산천초목(山川草木)에서는 새싹이 돋으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기저기에 모든 산새들은 즐겁게 노래하고 시냇물은 하- 노래를 부르면서 졸졸 흘러내리고, 강산(江山)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어서 사람들은 그 겨울에는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밖에를 나오지를 못하다가 봄이 오면은 문을 다 열어제끼고 모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논으로 모다 나와서 활동을 하게 되는 거와 같애.
성현이 이 나라를 다스리면은 자연히 인심(人心)이 순화(純化)가 되어 가지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모략하고 무고로 하고 그러한 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 이 남을 조끔 수만 틀렸다면 터무니없는 이 모략(謀略)을 해 가지고는 사람을 갖다가 잡혀가서 죽도록 두들겨 맞도록 맨들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아주 그 정법(正法)을 믿는 그러한 아주 선량(善良)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갖다가 오해를 해 가지고 모략을 무고를 해 가지고 그 사람이 잡혀갔습니다. 잡혀가서 참 죽도록 뚜르러 맞을 판인데, 그 사람이 그 장사(壯士)한테 빌기를 "참, 나는 참 정법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절대로 그러한 악한 일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건 어떤 사람이 오해를 해 가지고 이렇게 이 무고로 이렇게 한 것이니 나를 용서를 해 달라"고, "나를 용서를 해 주고 조사를 해 보면 알지 않겠느냐"고.
이렇게 아주 정법을 믿는 선량한 사람이 간곡히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 포악한 장사도 한 점 눈물이 있었던지, 그 '정법을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아프게 때리지를 않고, 그 채찍이 그 사람 몸에 닿지 않도록 엄포만 놓고서 안 아프게 때려 줬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행히 죽지를 않고, 혹독하게 매를 맞지 않고 잘 풀려났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매질을 혹독히 한 그 장사(壯士)가 죽어 가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습니다. 지옥(地獄)에 들어가서 그 무서운 고(苦)를 다 받고, 몇백 생(生)을 받았는지 몇 겁(劫)을 받았는지 받고서 겨우 풀려났는데, 뭣이 되었냐 하면은 축생(畜生)이 되었습니다.
축생이 되어 가지고 참 수없이 육백 생(生) 동안을 축생이 되어 가지고 매를 맞았습니다. 이 소 쟁기질을 못한다고 밤낮 후려치고, 또는 말이 되어 가지고 빨리 안 달린다고 뚜드러 패고, 그래 가지고 수없는 참 육백 생 동안을 축생이 되어 가지고 그 혹독한 매질을 당하다가, 겨우 그 자기가 매질한 만큼 몇백 배를 이자까지 쳐서 그 보(報)를 다 받고 난 다음에사 겨우 사람이 되었는데, 평생 동안을 병고(病苦)를 앓게 되었다.

"그때 그 전생에 그 매질을 한 장사(壯士)가 금생(今生)에 태어나 가지고 저 늙은 비구(比丘)가 되었느니라. 그리고 그때 선량(善良)한 백성이, 무고로 잡혀 들어가 가지고 그때 그 장사(壯士)한테 풀려난 사람이 바로 오늘 나다. 그때 그 장사가 내가 '정법(正法)을 믿는다'고 애원(哀願)을 한 그 한마디로 어떻게 마음을 돌이켜 가지고 나를 매질을 아니하고 잘 풀어준 그 공덕(功德)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오늘날 내가 손수 저 늙은, 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저 늙은 비구를 내가 오늘 손수 더운물을 데어서 간호(看護)를 하고 이 빨래를 해 주고 하게 되었느니라. 한번 지은 죄(罪)는 생을 바꾸더라도 면(免)하지를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대중을 위해서 전생(前生)의 인과(因果)를 설하셨습니다.(35분52초~54분20초)




(4/4)----------------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생사(生死)를 초월(超越)을 하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이 천칠백 공안(公案), 공안 법문이나 필요하지 인과설(因果說)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거 뭐 인과설, 잔소리만 많이 하고 무슨 그런 소리가 필요하냐?'

'어떠한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하니,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한데,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 의지(意旨)를 일러봐라!'

'이러한 등등(等等)의 법문, 간단한 법문(法門) 한마디면 족하지, 무슨 그런 너저분한 인과설(因果說)을 하느냐?'

이렇게 이 공격을 하고 나를 갖다가 비난을 하는, 나에게 충고(忠告)를 하는 그러한 분이 계셔서, 내 마음으로 "참 옳은 말씀이요. 나한테 직접 그런 말을 해 주어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서, "참 그 좋은 말씀을 내가 깊이 참작(參酌)을 하겠습니다" 했는데, 하고서도 나는 또 오늘 올라와서 또 이런 인과설을 말하게 됩니다.
나한테 충고를 해 준 그분한테는 내가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방편(方便)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바른 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울을 보지 아니하면 내가 내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내 눈은 청황적백(靑黃赤白) 온갖 것을 다 보지만, 눈 자체(自體)는 눈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볼 수가 없어. 거울이나 거울의 대용품을 가자(假藉)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심(發心)을 해서 수행을 하고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보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나오는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그 방편설(方便說)을 가끔 하나씩을 들어서 그것을 살펴봄으로써 자기의 마음가짐과 자기의 말씨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인간성과 자기의 행동거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집 며느리는 이웃집, 담 너머 이웃집 며느리 하는 것을 보고 거기서 자기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경전(經典)에 있는 이런 방편설을 하나씩을 보면은 참, 자기를 반성(反省)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성현도 자기 허물을 보기가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聖賢)이라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평생 남의 허물만 보고 자기 허물을 못 보는 것이고, 성현(聖賢)이라야 남의 허물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거여. 남의 허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허물을 보게 되고, 남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인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하시되, '참 기도(祈禱)'는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어. 성현의 마음은 언제나 허공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면 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면 바로 성현(聖賢)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여.
3일 기도나 일주일 기도 또는 백일 기도를 그렇게 그 열심히 하는 거, 오대산(五臺山)이나 강화(江華) 보문이나 저 홍련암이나 남해 보리암, 그런 성지(聖地)에 가서 그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은 '내 마음을 허공(虛空)과 같이 하기 위해서 그렇게 기도를 하는 거다' 그 말이여. 허공과 같이 하면은 바로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성현의 마음이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그저 속으로는 이 고약한 마음을 가뜩 품고,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가뜩차 가지고 잘되게만 해 달라고 막 빌어 대는데, 빌어 대다 보면은 천번 만번 백만번 천만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나 또는 그런 성현의 명호(名號)를 부르는데, 부르다 보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마음이 깨끗해져 가지고 성현의 마음과 같이 되니까 거기에서 원을 성취하게 되는 거여.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설사 성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마음이 청정해지니까 그 청정(淸淨)한 마음으로 잠깐 한마디 원(願)을, 크고 작은 원을 세워도 바로 그 원이 성취가 잘되는 도리(道理)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기도가 끝난 뒤에 항시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실 것, 평상시(平常時)에 열심히 하실 것이며, 아까 말한 늙고 병들고 약하고 외로운 노인, 저 백리 밖에 사는 남의 노인도 그런 노인이 있으면 잘 돌봐주어야 할 텐데,
하물며 자기 집안에 계신 시어머니 시아버지, 아무리 말이 많고 성질이 괴팍하고 며느리를 별로 이뻐하지 않는 그러한 시어머니 시아버지라 할지라도, 정말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참다운 마음으로 부처님 받들듯이 잘 받들어 모시면 그러한 아주 고약한 성미를 가지신 어른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그 감동이 되어 가지고,
'정말 내 며느리가 이 세상에서는 제일 착하고 이쁘고 좋은 며느리로구나. 아, 내가 저런 좋은 며느리를 너무 내가 볶아 대고 고약하게 굴었구나' 눈물을 흘리면서 반성을 하고, 자기 마음을 그 며느리로 인해서 마음보를 고치고, 그래 가지고 정말 착하고 고운 마음씨가 된 그러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 여생(餘生)을 마치게 되고, 그래야만 그 할아버지 할머니도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성미가 괴팍하고 아주 인정머리 없고, 일평생 동안 며느리를 이뻐하지 아니하고 볶아 댔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가 빨리 죽을 것인가?' '어떻게 해야 저 늙은이를 어디로 내보내 버릴 것인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미워하고 원망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점점 더 미워하게 되고 나중에는 노망하게 되면 며느리가 잘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저년이 내 집구석 망해 먹을라고 들어온 년이다' 그래 가지고 이를 갈아붙이고 '이년, 이년' 하고 계속 저주를 하다가 눈을 감게 되면, 그 노인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못하고 계속 그 집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며느리와 그 며느리 뱃속에서 나온 아들딸들을, 이놈에가 붙었다 저놈에 가 붙었다 하면서 계속 못살게 굴어 가지고 결국은 그 집안은 재앙(災殃)이 끊일 날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데부터서 잘해야 혀.
그러면 누가 제일 가까우냐? 내가, 나 자신이 제일 가깝거든.

그래서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고, 내 자신이 바르고, 내 자신이 어질고 착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서 그렇게 하면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에게, 이렇게 해서 그것이 차츰차츰 멀리 멀리 뻗쳐 나가면 이웃과 모든 이 우리의 동포와 인류에게까지 그 성스러운 마음씨가 번져 나가도록. 이것이야말로 인류의 멸망을 평화(平和)로 향하게 하고 이 지구의 멸망을 막아서 극락정토(極樂淨土)를 만드는 그러한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


송백천년취(松栢千年翠)하고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모란일일홍(牧丹一日紅)허되  만성공자취(滿城公子醉)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송백(松栢)은 천년취(千年翠)허되  불입시인의(不入時人意)라.
소나무와 잣나무는 천년 동안을 푸르르되 세상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를 안 해요. 그냥 소나무 푸르거니 하고 별로 소나무를 그렇게 이뻐할 줄을 모른다 그 말이여.

그런데 목단(牧丹)은 하룻동안 빨갛게 이쁘게 피었다가 져 버리는데, 모든 사람들은 그 목단 아름답다고 야단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무량(無量)의 복락(福樂)을 얻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법은 세상 사람들이 시드르르 하게 생각하고,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은 내 뜻대로 되어 봤자 잠깐 쌈빡하다 말아버린 것이고, 그 뒤끝은 천하 허망(虛妄)하고 한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은 재산과 색과 명예와 권리에는 모두가 거기에는 빠져 가지고 헤어날 줄을 모르는구나.(54분25초~68분4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만리장공우제시~ / 용화사에서 신수기도를 하는 이유?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 일체 법요식은 일대사를 위한 중요한 방편 / 세존(世尊)께서도 방편(方便)을 쓰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가 없다 / 사바세계가 모든 것이 무상해서 도 닦기에 제일 좋은 세계.

'변화(變化)'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것 / 모든 재난(災難)과 업(業)은 다 자작자수(自作自受) / 신수기도를 자기의 욕심(欲心)만을 충족하기 위한 원(願)이 아니라, 진정으로 모두가 잘살 수 있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기도를 하셔야 / 중병(重病)을 앓는 장로(長老) 비구의 과거 인연(因緣)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18. 도장품(刀仗品).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자' / 말 조심 /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방편(方便)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면 바른 법을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 / 인과 방편설로써 자기의 마음가짐 · 말씨 · 인간성 · 행동거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를 갖어야 /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聖賢)이라 하는 것 / 기도는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어 성현(聖賢)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 기도가 끝난 뒤에 항시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실 것 / 집안 어른을 정말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 받들듯이 잘 받들어 모셔라 / 가장 가까운 내 자신을 먼저 바로잡아라 / (게송)송백천년취~. 송백과 목단.


모든 사람이 평생(平生)을 두고, 또는 일평생 동안 잘 먹고 잘 입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재산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데 한 덩어리 구름으로 인해서 달을 보지 못하듯이,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한 생각을 미(迷)해 가지고 평생 동안, 아니 영원토록 쓰고도 쓰고 남아서 남을 주고 또 주어도 무진장(無盡藏)으로 풍족한 그런 재산을 가지고서도 일생 동안을 가난뱅이 신세를 면(免)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인 것을 감안하셔서 정월에는 이렇게 일주일간 신수기도를 봉행하도록 하셨습니다.
백천방편(百千方便)이 개위차야(皆爲此也)여. 천 가지 만 가지 방편(方便)이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한 것이다 그거거든.

정초(正初)에 신수기도를 한 것이나, 입춘에 입춘기도를 하는 것이나, 칠석에 칠석기도를 하고, 백중에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하고, 동지에 팥죽차례를 올리고, 일체 법요식(法要式)이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 근본(根本)을 살펴볼 것 같으면은 모두가 다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방편(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같은 삼계(三界)에 대도사(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육신통(六神通)을 다 자유자재로 통달하신 그러한 세존(世尊)께서도 방편(方便)을 쓰지 않고서는 중생을 교화(敎化)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 복(福)을 많이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다행히 천당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받어 버리면 다시 또 떨어지기 때문에 천당에 간 것이 그렇게 영원한 것이 못되고, 올라가 봤자 복 받느라고 이 나를 깨달라서 견성성불한 법이 없기 때문에 이 불법을 믿는, 특히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천당을 그렇게 좋게 안 생각하고, 제일 좋은 세계가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苦)와 낙(樂)이 섞여 있어서 모든 것이 무상(無常)해서 거기에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좋은 동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變化)'라고 하는 것은 참 무상(無常)한 것이요 대단히 안 좋은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변화야말로 참으로 그 소중한 것입니다. 변화가 없다면 중생(衆生)은 영원히 중생이지 성불(成佛)할 기약(期約)이 없는 것입니다.

신수기도를 하되 자기의 욕심(欲心)만을 충족(充足)하기 위한 그러한 원(願)을 가질 것이 아니라, 불같은 욕심으로 부자만 될려고 그러고 자기의 이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하기 위한 그러한 졸렬(拙劣)한 원을 세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잘살 수 있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기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 진정한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있고 그러한 원을 세워야 원을 성취를 하게 되고 그래야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중병(重病)을 앓는 장로(長老) 비구의 과거 인연(因緣)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 18. 도장품(刀仗品).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을 향해서 법(法)을 설하시기를, "여래(如來)가 이 땅에 온 것은 병(病)들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고 한 외롭고 약한 노인(老人)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그 사람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여래는 이 땅에 왔느니라.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이러한 외롭고 병들고 가난한 노인이나 또는 수행자, 수행하시는 스님들을 잘 약(藥)을 공양(供養)을 하고 의복을 공양을 하고 이 병든 스님을 잘 공양을 올려서 간호를 해드리고 하면은, 그 복은 여래(如來)를 공양하는 복(福)보다도 더 수승(殊勝)하느니라. 그래서 그 복이 무량(無量)해서 자기 원하는 바를 성취치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인도(印度)에 있는 다섯 개의 큰 강(江)이 흘르고 흘러서 다 바다에 들어가듯이, 모든 복(福)은 그 사람한테로 다 모여든다. 그래 가지고 그 공덕(功德)이 점점점점 원만(圓滿)해 가지고 마침내는 성불(成佛)까지도 할 수가 있다"

그 말 한마디,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야만 사람이 다치는 것이 아니라, 말 한마디 불쑥 잘못해 가지고 참 집안에 모든 시비(是非)도 일어나고, 친구 간에 의(義)도 상하게 되고, 그 대중(大衆)도 소란하게 맨들고, 이 말 한마디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말을 적게 하라' 제일조(第一條)에 그 '말을 적게 하라'고 하는 그러한 말씀이 전해온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거울을 보지 아니하면 내가 내 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여. 내 눈은 청황적백(靑黃赤白) 온갖 것을 다 보지만, 눈 자체(自體)는 눈이 자기가 자기 눈을 볼 수가 없어. 거울이나 거울의 대용품을 가자(假藉)하지 않고서는 자기의 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심(發心)을 해서 수행을 하고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모습을 보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 부처님 경전(經典)에 나오는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그 방편설(方便說)을 가끔 하나씩을 들어서 그것을 살펴봄으로써 자기의 마음가짐과 자기의 말씨와 자기의 행동과 자기의 인간성과 자기의 행동거지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機會)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허물을 볼 줄 알아야 그것을 성현(聖賢)이라 하는 것입니다. 범부(凡夫)는 평생 남의 허물만 보고 자기 허물을 못 보는 것이고, 성현(聖賢)이라야 남의 허물을 통해서 자기를 보는 거여. 남의 허물 보기 전에 먼저 자기 허물을 보게 되고, 남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인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이 바로 성현이라 하는 것입니다.

금년에는 스스로 성을 내지 말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성을 내게 하지 말자.

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하시되, '참 기도(祈禱)'는 내 마음이 허공(虛空)과 같이 되어. 성현의 마음은 언제나 허공과 같은 마음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면 내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면 바로 성현(聖賢)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이여.
허공과 같이 하면은 바로 내 마음이 성현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성현의 마음이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무량(無量)의 복락(福樂)을 얻고,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정법은 세상 사람들이 시드르르 하게 생각하고,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欲樂)은 내 뜻대로 되어 봤자 잠깐 쌈빡하다 말아버린 것이고, 그 뒤끝은 천하 허망(虛妄)하고 한 것인데, 온 세상 사람들은 재산과 색과 명예와 권리에는 모두가 거기에는 빠져 가지고 헤어날 줄을 모르는구나.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