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76~400)2023. 8. 17. 16:55

(No.387)—1989년 법보재(89.4.21) (65분)

 

(1) 약 33분.

 

(2) 약 32분.



(1)------------------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야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堂堂)한 대도(大道)가 밝고 밝아서 분명해. 사람사람마다 본래 갖추어서 낱낱이 뚜렷하게 다 이루었더라.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다.
그렇게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대도를 낱낱이 가지고 있건마는 다못 한 생각 어긋지는 바람에 이렇게 영겁(永劫)토록 만 가지 얼굴을 나투더라.

본래는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이나 우리 모두가 똑같은 존재였어. 그런데 비로자나 법신불은 한 생각을 어긋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영원히 법신불로서 온 우주 법계에 두루하고 계신 겁니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바로 그 도리를 깨달아서 비로자나 법신과 한마음, 한 몸이 되셨건만 우리 중생은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업상(業相) ・ 전상(轉相) ・ 현상(現相), 삼세(三細)의 세 가지 그 미세한 망념이 동(動)해 가지고 여섯 가지 머트러운 생각[六麤]을 일으켜서 육도 법계(六道法界)를 이렇게 생사(生死) 속에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이여.


오늘 기사년(己巳年) 3월 16일(음력) 용화선원의 법보단(法寶壇) 만년위패(萬年位牌) 각 열위 영가(各列位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보재(法寶齋) 대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이 법보단에 봉안되어 있는 만년위패 각 열위 영가는 숙세(宿世)로부터 많은 인연을 맺어서 그래서 이렇게 법보단에 만년위패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그 영가(靈駕)가 몇 백억만의 영가, 천문학적 숫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 많은 영가 가운데에,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만년위패에 현재 모셔 있는 위패(位牌)가 대략 1만6천 이상 올라가고, 그 한 위패에 두 분 내지 세 분씩 모신 위패도 있어서 2만2천여의 영가가 지금 모셔져 있습니다.
그 우주 법계에 빼어 난 틈없이 가득차 있는 영가 가운데에 어떻게 해서 이 법보단의 만년위패에 모시게 되었는가? 이것은 결단코 우연한 인연(因緣)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의 인연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맺어 왔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영가로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모시게 된 그 인연은 효심(孝心)이 있는 아들이나 딸이나 며느리가 있었고, 또 인연 깊은 아내가 있고, 또는 인연이 있는 자비(慈悲)한 일가친척이 있어서 그러한 연분(緣分)으로 해서 여기에 모셔지게 되었고, 또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모시고 간 분도 계시지만, 그거야 어떻게 되었든 여기 만년위패에 모시게 된 것은 그러한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어. 그래서 여기에 모시게 된 것이여.
한 생각 어긋짐으로 해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결국은 영가로서 여기에 따악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그 ‘한 생각 어긋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목련존자(目連尊者)라고 하는 신통제일(神通第一)인 대성현이 계시는데, 부처님의 왼팔이요, 사리불존자(舍利弗尊者)는 부처님의 오른팔이라고 할 만큼 그러한 부처님의 아주 대제자인데, (목련존자) 그분이 5백 생 동안을 그렇게 물매를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저 5백 생 이전에, 몇 겁 이전에—결혼을 해 가지고 아내와 너무 가깝게 지내고,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한테 썩 효심이 있고 그랬었는데 결혼한 뒤로는 아내한테 빠져 가지고 부모한테 등한히 하니까 그 어머니가 ‘그놈이 계집을 얻더니 미쳐 가지고 에미를 본체만체한다’고 밤낮 그런 꾸지람을 하시니까, 처음에는 한두 번 그냥 들었었는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말씀을 하니까 그냥 신경질을 내면서 ‘어떤 기운 센 놈이 그냥 저 늙은이 좀 뚜드려 팼으면 좋겠다’고 이런 입에 못 담을, 부애 김에 푹 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 과보(果報)로 5백 생 동안을 죽을 때는 맞어 죽었어.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부처님의 십대제자의 한 분이 되어 가지고도 마침내 돌아갈 때에는 맞어 죽어. 외도에, 집장 외도(執杖外道)한테 맞어서 돌아갔어.
물론 뭔 잘못이 있어서 맞어서 돌아가신 게 아니라, 그 외도들이 그전에는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모두 부처님한테 다 개종을 하고 귀의를 하니까, 그 신도를 다 빼앗기게 되니까 ‘어떻게 하면은 이걸 막을 수가 있을까?’ 그래서 가장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 훌륭한 제자를, 왼팔 오른팔을 꺾어 버리면 되겄다 싶어서 목련존자를 그렇게 죽였는데, 그래도 그 과보(果報)는 전생에 그런 한 생각 푹 신경질을 내 가지고 어머니한테 욕을 퍼부은 그 관계로 5백 생을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다 그 말이여.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로  황포환각자가사(黃袍換却紫袈裟)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아본서방일납자(我本西方一衲子)로  연하유락제왕가(緣何流落帝王家)ㄴ고
나무~아미타불~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로  황포환각자가사(黃袍換却紫袈裟)다.
참! 한탄스럽고 한탄스럽구나, 당초에 한 생각을 어긴 탓으로 가사(袈裟)를 황포(黃袍), 곤룡포(衮龍袍)로 바꾸어 입었구나.

아본서방일납자(我本西方一衲子)로  연하유락제왕가(緣何流落帝王家)냐.
내가 본래 저 서방(西方), 인도 천축(天竺)의 한 수행 납자(衲子)로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제왕가(帝王家)에 떨어졌던가.

이건 중국 청나라 순치황제(順治皇帝)가 18년 동안을 황제로 잘 나라를 다스리다가 18년만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온 나라를 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순치황제는 황제의 지위를 헌신짝같이 버려 버리고 어느 절로 들어가서 부목 노릇을 했습니다. 부목 노릇을 하면서 이 시를 읊은 것입니다.
수행승으로 도를 닦다가 어느 제왕의 행차를 보고 ‘하! 나도 한번 저렇게 황제가 되어 가지고 한번 정치를 잘해 볼까’ 그러한 잠깐 한 생각 낸 그 과보로 제왕가에 태어나서 천자가 되어 가지고 18년 동안을 그렇게 황제 노릇을 하다가 이렇게 출가를 한 거여.


또 운문(雲門) 선사라고 대도사가 계셨는데 그분은 두 분의 다른 도반(道伴)과 서이 도반이 되어 가지고 도를 닦는데, 그때 마치 임금님 행차하는 것을 보고 또 잠깐 한 생각을 냈어. ‘아, 나도 임금 노릇이나 한번 해 볼까’ 그런 생각을 잠깐 낸 그 과보로 3생 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습니다.
다른 도반은 목주(睦州)와 영수(靈樹) 선사, 이 두 분은 진즉 3생 동안에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대도인이 되어서 조실(祖室)로서 천 명, 천오백 명 모다 제자를 거느리고 선지식이 되어 가지고 있는데, 이 운문 선사는 한 생각 잘못 먹은 관계로 임금 노릇을 한 생하고, 또 그다음 생에 다시 또 임금 노릇을 하고 그래서 3생 동안을 임금 노릇을 했어. 그리고서 겨우 출가를 했어.

홍도 비구란 스님은 다겁 동안을 수행을 잘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정진 중에 병이 나서 문을 열어 놓고 문턱에 손을 놓고서 떠억 앞산을 바라보면서 정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닫혀졌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문이 닫혀지면서 손가락이 깨졌어. 그 바람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폴쏙 진심(瞋心)을 냈다 그 말이여.
‘아, 못된 바람이 이렇게 불었다’고 하고, 아픈 손을 움켜잡으면서 가벼운 진심을 냈는데, 아! 그 과보로 뱀의 몸을 받아 뱀이 되어 가지고, 그 절에 나타나 가지고 그 모래를 요렇게 꼬리로 골라 가지고 꼬리로써 글씨를 썼어.

아석비구주차암(我昔比丘住此庵), 내가 옛날에 비구로서 이 암자에 머물러서, 다겁근수근성불(多劫勤修近成佛)터니, 다겁 동안을 부지런히 수행을 해서 성불이 가까왔었는데,
송풍취타병중좌(松風吹打病中座)요, 솔바람이 불어 쳐 가지고 병중에 자리에 냅다 쳤다. 일기진심수사신(一起嗔心受蛇身)이다. 한번 진심을 낸 바람에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그 꼬리로써 글씨를 써. 이러한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건 전부 역사적인 실화입니다.

한 생각 망령된 생각을 낸다던지, 탐심 진심을 낸다던지, 어리석은 생각을 내면 그 한 생각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과보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누구를 꼭 죽여야만 그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누구 죽일 생각을 낸다던지 미워하는 생각하면 그것도 한데에 떨어지지 않어. 결국은 한 생각, 번갯불 치듯한 그 사이에 일어나는 한 생각이 결국은 그러한 무량겁으로 끼치는 윤회(輪廻)의 과보(果報)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해야 하느냐?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열반경』에 말씀이 25리, 25리면 우리나라 이수(里數)로는 250리여. 250리 동안 그 넓은 광장에 수십만 명이 거기에 꽉 차 있게 해 놓고, 마치 여의도광장보다도 그 몇십 배 되는 그 광장에 몇 수십만 명이 꽉 찼다 그 말이여.
그런데 왕이 한 신하에게 특명을 내려 가지고, 바리때에다가 기름을 가득 넘실넘실하니 부은 바리때를 들고 그 250 리 동안을 그 바리때를 들고 그 사이사이를 조심스럽게 지나서 갔다오도록. ‘바리때를 엎질러서 기름을 엎지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삐끗 기울어져 가지고 기름이 한 방울이라도 한데에 떨어지면 안 된다’
그래 가지고 또 한 장군에게 명령을 해서 잘 든 큰 칼을 빼서 떠억 들고서 그 뒤을 따라. 따라가면서 기름만 엎지르기만 하면 한 칼로 목을 치도록 그렇게 딱 명령을 내렸어.

그 신하는 왕명을 받고, 있는 정성을 다해서 넘실넘실 넘치는 바리때를 들고서 250리를 가는데, 가는 도중에 별별 일을 다 당해. 사람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그 가운데는 모다 금은 목걸이 장식을 하고 참 양귀비와 같이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도 있고 별별 참 유혹 당할만한 그런 일들이 있지만 그런 데에 한눈도 팔 겨를이 없어. 어떻게 전신(全身)이 긴장을 했던지 땀이 비오듯 하는데 그 바리때를 들고 그걸 갔다가 돌아온다 그 말이여.
얼마나 조심을 하면은 한 방울도 엎지르지 않고 250리를 갔다올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더군다나 삐긋해서 한 방울만 엎질러도 장군의 잘 드는 칼로써 모가지가 달아날 텐데.

이 말씀은 무엇에다가 비유한 말씀이냐 하면은 수행자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기를 가득 든 기름이 넘실거리는 바리때를 들고 250리를 갔다올 때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해라 이거거든.
오욕(五欲), 재산 ・ 보물 ・ 명예 ・ 권리 ・ 색, 일체 오욕락이 전후좌우에 꽉 차 있다 하더라도 기름이 가득찬 바리때를 들고 250리를 갔다올 때 그런 것이 눈에 띨 리도 없고, 한 생각도 생각이 거기에 흩어질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불보살, 조사(祖師)들은 한 생각 방일(放逸)하지 않기를 마치 그와 같이 하셨다 이거거든.

오욕락(五欲樂)은 막 이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마지막 숨질 때까지 우리의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특히 그저 바르게 살려고 할수록에 그런 유혹은 더 심하고, 특히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열심히 닦을라고 할수록에 그러한 유혹은 더 끈질기게 우리를 유혹의 손길이 뻗쳐 오는 것입니다.

또 『열반경』에 한 말씀이 있는데 그 잔나비, 원숭이를 잡아서 파는 엽사(獵師)가 무슨 방법으로 원숭이를 잡느냐 하면은 끈끈이, 딱 들어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끈끈이를 떠억 넙덕한 상(床) 위에다가 떠억 발라 논다 말이여.
원숭이란 놈이 보고 먹음직스럽게 이렇게 꾸며 가지고 따악 이렇게 해 놓으면 원숭이란 놈이 그놈을 보고 쫓아와서 그놈을 손으로 턱 움켜잡어. 손이 거기에 닿자마자 두 손이 딱 들어붙어 버려. 두 손이 딱 들어붙으니까 암만 띨라고 해도 안 떨어지니까 그걸 띠기 위해서 두 발을 거기다가 버티고서 막 띨라고 하니까 두 발까지 거기에 딱 들어붙어 버려.
두 손이 들어붙고 두 발이 들어붙으니까 이제는 최후 수단으로 입으로 막 그놈을 물어뜯어서 띨라고 하니까 주둥이까지 거기에 딱 들어붙어 버렸다. 그러니 옴싹달싹도 하도 못하고 딱 들어붙어 버리니까 엽사가 와 가지고 그놈을 작대기로 떠억 뀌어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어.

우리가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도(道)를 닦을라고 마음을 먹으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오욕락으로써 떠억 우리 기회를 봐 가지고 낚시밥을 던진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잠깐 눈을 거기다가 한눈을 팔던지 거기에 집착심을 내면 간단하게 마왕 파순이의 낚시밥에 걸려 가지고 마구니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구니는 무슨 원수가 져서 발심한 수행인을 그렇게 끌어가는가? 발심을 해서 도를 닦아 가지고 도를 통한 도인(道人)이 생겨나고 부처님이 생겨나면, 마구니 궁전이 흔들리고 마구니 설 땅이 없어져 버려.
마치 경찰이 타락하고 무능하면 그 틈을 타서 온갖 범죄가 날뛰듯이, 경찰이 애국심을 가지고 자기의 임무를 철저히 하고 그러면 치안이 잘 유지가 되고 하면 크고 작은 범인이 날뛰지를 못하는데, 경찰이 타락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부정과 야합을 하거나 하면 날뛰는 것은 온갖 강도 절도 사기가 범람을 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그러한 범죄자들은 어쨌든지 나라의 법이 확립 질서가 잡히는 것을 싫어하는 법이여.
그래서 마왕 파순이는 갖은 수단을 써 가지고 어쨌든지 발심한 수행자를 현혹시키고 발심한 신도, 불제자(佛弟子)를 갖다가 갖은 수단으로 현혹하고 유혹을 하고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오욕락(五欲樂)은 마치 원숭이 잡는 끈끈이와 같은 것이고, 그래 끈끈이는 탐진치(貪瞋癡) 오욕이고, 엽사 사냥꾼은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에다 비교하고, 모든 수행하는 사람은 잔나비에다가 비유한 말씀인데, 우리가 바르게 살고 발심을 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에 귀의해 가지고 도를 닦을라고 하면 크고 작은 많은 그런 마왕 파순이의 유혹이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데에 빠지지 아니하고 그리고 그럴라면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서 살아 나가기를 기름이 가득찬 바리때를 들고 가는 그러한 경건하고 엄숙한 그런 마음가짐으로 도를 닦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하기를 그렇게 무섭게 단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처음~33분27초)





(2)------------------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한데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빙거요득인간환(憑渠料得人間幻)하니  만사도망일소중(萬事都忘一笑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한데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로구나.
강호에 강산에 봄이 다하니 꽃 떨어진 바람이야. 봄바람이 부니 활짝 만발했던 꽃이 바람에 휘날리는구나.
일모한운과벽공(日暮閑雲過碧空)이여. 해가 저무니 한가한 구름이 푸른 하늘을 지나는구나. 바람이 부니 곱게 피었던 꽃도 떨어지고 푸른 하늘에 뭉게뭉게 피어 있던 그 구름도 모양이 변하면서 저리 휘날려 없어지는구나.

빙거요득인간환(憑渠料得人間幻), 그것을 보고 인간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게 되는구나. 그 청황적백으로 오색이 찬란하게 그렇게 아름답게 피었던 꽃이 부는 바람에 허망하게 져 버리고, 새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보기 좋게 피어 있던 그 구름도 금방 모양새가 바뀌면서 저리 흩어져 없어지는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인간의 오욕, 명예 ・ 권리 ・ 재산 ・ 권리 이런 것들이 정말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정말 분명히 알 수 있구나.
만사도망일소중(萬事都忘一笑中)이여. 정말 비긋이 웃는 웃음 속에 인간 만사(萬事)를 다 잊어버리게 되는구나.

인간의 무상(無常)한 것을 정말 확실히 깨달아 버린다면 어찌 그까짓 재산이라든지, 명예라든지, 권리라든지, 색이라든지 그까짓 것 때문에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그것을 위해서 싸울 수가 있겠는가.
그것을 좀 많이 차지할라고 국법을 어기고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망하도록 인류가 망하는 데도 그것을 불구하고 자기만 부자가 될라고, 자기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 공장 폐수를 막 강물에 흘려보내 가지고 강에 있는 고기들이 다 죽고, 거기에 날아오는 모든 학과 철새들이 다 죽고, 그 물을 마시고 사람들이 다 병들어 죽게 만드는 그러한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자기가 정권을 잡고, 자기가 권리를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백성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한 짓을 해 가지고 동서고금의 모든 권리 좋아하는 사람들 다 쓸쓸하게 죽어가고, 우리 눈으로 지옥에 간 곳은 우리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마는 그 사람들의 말로(末路)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현실적으로 보면서 그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막 자기가 나라야 망하거나 말거나, 회사야 망하거나 말거나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법을 믿은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오욕(五欲)이 정말 무상(無常)하고 허망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은 우리 불법을 믿는, 정법을 믿는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정말 숙세(宿世)에 얼마나 선근(善根)을 심어 왔으면 우리는 그런 데에 얽혀 들어가지 아니하고 이렇게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향해서 이렇게 정진(精進)을 하고 한 회상(會上)에서 법문을 듣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 법보단에 모셔 있는 2만 수천의 영가들도 참 숙세에 깊은 선근을 심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시면 과연 어떠한 공덕(功德)이 있을 것인가?

첫째, (영가가) 마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편안한 거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조상을 정성스럽게 받드는 우리나라의 미풍양속이 점점 흔들리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시대의 흐름이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돌아가신 영가(靈駕) 조상을 잘 받드는, 집집마다 옛날에는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이제 사당 있는 집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가가 계실 곳이 없어져 버렸어. 그런데 이렇게 편안하게 이렇게 만년위패로 모시게 되었으니 영가가 얼마나 흐뭇하고 편안하시겠느냐 이거거든.

더군다나 그냥 막연하게 모셔 놓은 데에 그치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을 올리고, 법회가 있을 때마다 축원을 해 드리고 이렇게 좋은 법문을 들을 수가 있으니 무량겁으로부터 오는 모든 업장(業障)이 봄눈처럼 소멸이 되고, 설사 과거에 그 얽히고설킨 원한(怨恨) 관계가 있다손 치더라고 자꾸 법문을 듣고 듣다 보면 스르르르 하니 다 풀어져 버려. 그러니 마음속에 맺히고 맺힌 원한과 미움이 풀어져 버리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구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서 풀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망(怨望)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먼저 풀어 버려야 해. 부부간에, 형제간에, 일가친척간에 어쨌든지 원망 원한이 있으면 내가 자진해서 풀어 버려야 하는 거여. 그것을 어찌 오래오래 끌고가고 내생에까지 끌고간다면 그것은 큰 일인 것입니다.

네 번째는 좋은 도반(道伴)들을 만나. 이 만년위패에 2만 수천의 영가들이 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해서 좋은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영가의 세계는 항상 배고프고 목마르며 그렇게 외롭고 괴로운 것인데, 이 법보단에 모심으로 해서 많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서, 많은 영가들과 한 도반이 됐고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외롭지를 안 해.

다섯 번째는 항상 이렇게 어떠한 크고 작은 재사(祭祀)나 천도재(薦度齋)가 있어도 이 법보단에 모신 모든 영가들이 정식으로 초빙이 되어 가지고 같이 운감(殞感)을 하시고, 그렇게 천도를 받을 수가 있게 되기 때문에 배고프고 굶주린 것이 없어져.

여섯째는 자손과 그 가족들이 모두가 다 편안하고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가 있게 되어.
그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나, 그 영가가 원한을 품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영가가 갈 곳이 없고 거리 중천(重泉)을 헤매다가 항상 그 집안을 맴돌면서 하소연을 하기 때문에 집안이 편틀 못하고 자꾸 마장과 장애가 일어나고 자꾸 비명(非命)에 횡사(橫死)하는 그런 사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수가 있는데, 그 영가를 편안히 이렇게 모셔 드리니 집안에 그런 우환(憂患)이 끊어지고, 또 그 영가를 여기다 모셨으니 자연히 여기 신도가 되어서 와서 법문을 듣고 그러니 발심을 해서 그러니 또 그러한 좋은 공덕(功德)을 얻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여덟 번째는 이 영가와 우리 모두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천상 극락(極樂)에 왕생(往生)을 하고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않게 되어. 이렇게 보리심을 발해 가지고 정법에 귀의해 가지고 참선 수행을 하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삼악도에 떨어질 수가 있느냐 이거거든.
그래서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렇게 법보단을 창설을 하셔서 우리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하여금 이렇게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인연 있는 영가를 모심으로 해서 이런 여덟 가지 공덕을 얻도록 자비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겨우 열 분, 스무 분, 일 년 내 들어온 분이 겨우 이렇게 몇십 분밖에 안되었는데, 해마다 가속도가 붙어서 이제는 이 법당이 거의 얼마 안 가서 위패가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득차기 전에 어쩔 수 없이 이 법보전을 증축을 할 수밖에는 없어서 금년에 양쪽으로 세 칸을 밑으로부터 위에까지 3층으로 이렇게 증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도분들도 법회 때마다 이 법당에 다 들어오시지를 못하고 저 앞뜰에 잔디밭에, 여름에 그 뙤약볕에도 그 밖에서 들으시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미안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양쪽으로 법당을 늘키면은 신도님네들도 와서 법회에 참석하시기 좋고, 영가들도 몇 해 동안 잊어버리고 이렇게 또 모실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어올 뿐만 아니라 외국에 가 계신 모든 교포들도 서로 다투어서 여기 위패를 모시는 바람에 이렇게 많은 법보가족(法寶家族)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는 모두가 남녀노소와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한 형제간이 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세세생생에 여읠 수 없는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나서 기어코 우리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다 제도(濟度)할 때까지 우리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한 목적지를 향해서 우리는 가야 할 그러한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세속에 인연은 혈통으로 맺고, 무슨 은혜로 맺고 원수로 맺고 이래 가지고 설사 어떤 좋은 인연으로 선연(善緣)으로 은혜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거든. 끝없이 얽히고설켜서 삼악도(三惡途)로 가는 인연인데,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인 것입니다.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한번 자신의 본마음 왕, 본심왕(本心王)을 위배(違背)하고 나와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삼악도에 빠졌다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거쳐 왔던가.

태(胎)로 들어갔다가, 알[卵]로 들어갔다가, 습(濕)으로 들어갔다가, 화(化)로 들어갔다가, 태란습화 사생의 몸뚱이를 받아 나면서 삼악도를 돌고 돌아 오늘 여기에까지 와서, 법보제자로서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을 듣고 무량겁으로부터 쌓아 온 그 번뇌를 깨끗이 씻어 버리게 되었습니다.(今日滌除煩惱染)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받았지마는, 거꾸로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영원한 해탈도로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하고 죄를 많이 지었으니, 어떻게 우리 같은 죄 많은 중생이 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을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한 생각 삐끗 어겨 가지고 지옥에도 갈 수 있지만, 한 생각 자성(自性)으로 탁! 돌이킴으로 해서 해탈도로 들어갈 수가 있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부처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여. 거기에 이 최상승법의 고마움이 있고, 최상승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에 한 생각 돌이키면은 더 빨리 천상(天上)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 한마디 바로 알아듣고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바로 마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심왕(本心王), 우리의 자성(自性)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기사년(己巳年) 법보재 법요식을 맞이해서 경향(京鄕) 각지에서 저 일본과 미국에서 사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법보가족이 이렇게 모이셨습니다.
부디 금년에 동참하신 이 인연 공덕으로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消滅)이 되고, 가정도 태평하고 여러분이 경영하는 모든 일이 장애 없이 잘 풀려서 뜻과 같이 성취되시기를 바라고, 거기에서 더 정법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주인공 이놈이 무엇인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키는 방법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시심마(是甚麼), ‘이뭣고?’라고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다 그 나름대로 참 공덕이 많지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여.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져 버려. 지옥고를 받다가도 ‘이뭣고?’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은 찰나간에 거기서 벗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뭣고?’ 한마디는 정말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서 다 같이 ‘이뭣고?’를 한번 하십시오.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뭣고?’
(대중) ‘이뭣고?’

이제 소리를 내지 말고 속으로 ‘이뭣고?’

‘이뭣고’가 좋다니까 남 자고 있는데 ‘이뭣고? 이뭣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것도 안 되고, 기차간에서나 어디서나 속으로 해야지 거기 앉아서 ‘이뭣고? 이뭣고?’ 해싸면 그거 안 된다 그 말이여.
때와 장소를 가려서, 가끔 혼자 있을 때에는 잠이 오고 망상이 일어나면 소리를 한번씩 내서 ‘이뭣고?’ 해도 좋습니다마는 여러 인원이 있는 데서는 속으로 하셔야 되어.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분통이 나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억울하고 속이 상할 때 그렇게 한 여나무 번 속으로 하시라 말이여. 사람이 없는 데에 가서 소리를 내서 “이뭣고?~~~~” 아주 속에 아주 이런 놈이 다 녹아 빠지도록 “이뭣고?~~~~” 이렇게 몇 번만 하면 그렇게 가슴이 미어질라고 한 것이 스르르르 하니 다 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그리고 일요법회, 매달 첫째 일요법회 오후 2시 꼭 빠지지 말고 오시고 또 부득이해서 못 오실 때라도 못 오신 분은 녹음 법문 테이프(錄音法門tape)를 구해 가지고 가셔서 항상 녹음 법문이라도 자주 들으시고.
결제 ・ 해제 ・ 초파일 ・ 칠석 그런 때도 꼭 참석을 하셔서 법문을 듣고 그렇게 해서 자꾸, 까딱하면 풀리기가 쉬운 것, 아무리 가다듬고 할려고 해도 사흘 못 가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또 푸르르 스르르르 풀어지거든. 그래서 또 법문을 듣고 가면 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고 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한마디 읊고 법보재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하니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하고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를
나무~아미타불~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모두가 다 축복을 하고 모두가 기뻐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면은 모두가 다 슬퍼한다 그 말이여.
공재인간주일회(空在人間走一回)라. 공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가지고 쓸데없이 한바탕 울고 웃다가 그렇게 한바탕 돌아치고 가는구나.

불여불래역불거(不如不來亦不去)요  야무환희야무비(也無歡喜也無悲)다.
차라리 오지를 말고 또 이렇게 가지를 말 것을, 공연히 오고 공연히 가 가지고 기뻐할 필요도 없고 또 슬퍼할 것을 없을 것을.

이것은 순치 황제가 출가해 가지고 읊은 시인데, 산승(山僧)의 생각은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것을 저는 괜히 왔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생(來生)에도 천당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냐?
인간으로 태어나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다시 이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다시 여러분과 또 만나게 되어서 같은 불회상(佛會上)에서 이 최상승법을 닦게 되기 때문에 저는 다시 인간으로 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그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슬픈 일을 많이 만나게 되지마는 그 슬픈 일로 인해서 우리는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어찌 일양(一樣)으로 나쁘다고만 하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발심을 하고 정법을 믿고 해탈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된다면 괴로운 일, 슬픈 일 모든 원한 관계가 다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화신(化身)이요, 법문(法門)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좋은 일을 만나면은 그런 대로, 나쁜 일을 만나더라도 그 나쁜 일로 인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슬픈 데에 빠지지 말고 철저하게 무상을 느끼면서 발심을 해서 다 같이 최상승법을 향해서 박차를 가합시다. (33분33초~65분1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 / 용화선원의 법보단(法寶壇)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시게 된 것은 깊은 불법의 인연이 있기 때문 / 목련존자가 5백 생 동안을 죽을 때는 맞어 죽었다 / (게송) 회한당초일념차(悔恨當初一念差)~ / 한 생각 낸 과보—순치황제의 출가, 운문(雲門) 선사의 3생 동안의 임금 노릇, 홍도 비구가 뱀의 몸을 받은 것.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 / 『열반경』의 비유. 수행자가 그 한 생각을 단속하기를, 기름이 가득한 바리때를 들고, 한 방울 기름도 떨어지지 않게 250리를 갔다오라. 한 방울만 엎질러도 모가지가 달아난다. 한 생각 방일(放逸)하지 않기를 마치 그와 같이 해야 / 『열반경』의 비유. 엽사(獵師)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놓고 끈끈이로 원숭이를 잡는다.

(게송) 강호춘진낙화풍(江湖春盡落花風)~ / 불법을 믿은 사람은 정말 철저하게 오욕(五欲)이 정말 무상(無常)하고 허망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신 공덕(功德) /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을 맺었다.

(게송)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 한 생각 어긋남으로 해서 무량겁 생사윤회를 받았지마는, 거꾸로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영원한 해탈도로 갈 수도 있다. 거기에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가 있는 것 /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 /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진다 / (게송) 내시환희거시비(來時歡喜去時悲)~ /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다.


우주 법계에 빼어 난 틈없이 가득차 있는 영가 가운데에 어떻게 해서 이 법보단의 만년위패에 모시게 되었는가? 이것은 결단코 우연한 인연(因緣)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불법(佛法), 정법(正法)의 인연을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맺어 왔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영가로서 이렇게 모시게 된 것입니다.

한 생각 망령된 생각을 낸다던지, 탐심 진심을 낸다던지, 어리석은 생각을 내면 그 한 생각이 한데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것이 과보로써 나타나는 것입니다.
몸뚱이로 누구를 꼭 죽여야만 그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누구 죽일 생각을 낸다던지 미워하는 생각하면 그것도 한데에 떨어지지 않어. 결국은 한 생각, 번갯불 치듯한 그 사이에 일어나는 한 생각이 결국은 그러한 무량겁으로 끼치는 윤회(輪廻)의 과보(果報)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을 해야 하느냐? 한 생각을 단속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로소 공부를 할 줄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렇게 용화선원에 법보단을 창설을 하셔서 우리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으로 하여금 이렇게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인연 있는 영가를 모심으로 해서 이런 여덟 가지 공덕을 얻도록 자비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법보단에 위패(位牌)를 모신 분, 또 생축(生祝)으로 올리신 분, 우리는 모두가 남녀노소와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한 형제간이 된 것입니다.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세세생생에 여읠 수 없는 부처님 회상(會上)에서 또 만나고 또 만나서 기어코 우리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다 제도(濟度)할 때까지 우리는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한 목적지를 향해서 우리는 가야 할 그러한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세속에 인연은 혈통으로 맺고, 무슨 은혜로 맺고 원수로 맺고 이래 가지고 설사 어떤 좋은 인연으로 선연(善緣)으로 은혜 관계를 맺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원수가 되고 마는 것이거든. 끝없이 얽히고설켜서 삼악도(三惡途)로 가는 인연인데, 우리 법보가족은 영원히 삼악도를 여의고 영원한 해탈도(解脫道)를 향해서 가는 그러한 청정한 인연인 것입니다.

한 생각 삐끗 어겨 가지고 지옥에도 갈 수 있지만, 한 생각 자성(自性)으로 탁! 돌이킴으로 해서 해탈도로 들어갈 수가 있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부처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여. 거기에 이 최상승법의 고마움이 있고, 최상승법의 묘(妙)가 있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에 한 생각 돌이키면은 더 빨리 천상(天上)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 한마디 바로 알아듣고 한 생각 돌이켜 버리면 바로 마음의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심왕(本心王), 우리의 자성(自性)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법화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도 좋고 다 그 나름대로 참 공덕이 많지만,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고 온갖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다 닦고 그러한 공덕 다 합친 만큼 좋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여.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프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이 팍팍 녹아져 버려. 지옥고를 받다가도 ‘이뭣고?’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은 찰나간에 거기서 벗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뭣고?’ 한마디는 정말 우리가 목숨 바쳐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山僧)의 생각은 이 세상에 이렇게 태어난 것을 저는 괜히 왔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생(來生)에도 천당에 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왜 그러냐?
인간으로 태어나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다시 이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이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다시 여러분과 또 만나게 되어서 같은 불회상(佛會上)에서 이 최상승법을 닦게 되기 때문에 저는 다시 인간으로 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 괴로운 일이 많지만 그 괴로운 일로 인해서 우리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있고, 슬픈 일을 많이 만나게 되지마는 그 슬픈 일로 인해서 우리는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괴로운 일, 슬픈 일을 어찌 일양(一樣)으로 나쁘다고만 하겠습니까.
그러한 것을 계기로 해서 우리가 발심을 하고 정법을 믿고 해탈도를 닦을 수가 있게 된다면 괴로운 일, 슬픈 일 모든 원한 관계가 다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화신(化身)이요, 법문(法門)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좋은 일을 만나면은 그런 대로, 나쁜 일을 만나더라도 그 나쁜 일로 인해서 진심(瞋心)을 내고 슬픈 데에 빠지지 말고 철저하게 무상을 느끼면서 발심을 해서 다 같이 최상승법을 향해서 박차를 가합시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2. 3. 3. 12:24

 

 

(No.377)—1989년 2월 첫째일요법회(89.2.5) (66분)

 

(1) 약 35분.

 

(2) 약 31분.


(1)-------------------

삼라만상동귀환(森羅萬像同歸幻)한디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불시장신처(虛空不是藏身處)라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라만상(森羅萬像)이 동귀환(同歸幻)이다.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환(幻)으로, 모두 다 똑같이 환(幻)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도 결국은 한줌의 흙이 되고 나중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은 어디로 갔는지 볼 수가 없고.

집도 오래되면 허물어져 버리고, 나무도 오래되면은 죽어서 없어져 버리고, 저 태양도 오래오래 저렇게 발광을 하고 있을 것 같지마는 일 초 일 초 열이 식어가고 있고 모양이 변해가서 언젠가는 저 태양과 달과 모든 별들도 결국은 다 부서져서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거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일 초 일 초 쉼 없이 모양이 변해 가지고 결국은 언젠가는 이것이 없어져 버릴 때가 오는 것이여.

조과장공멱몰종(鳥過長空覓沒蹤)이다. 저 새가 저 긴 하늘을 날아가매 날아간 자취가 없어. 그 자취를 찾을 수가 없듯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겨났다 없어진 자취도 또한 찾을 길이 없더라.

그러면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없어져 버리면 결국은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고, 자취가 없으니까 허공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그러면 그 허공이라는 것이 과연 이 몸뚱이, 나 자신을 거기다가 감출만 하냐?(虛空不是藏身處)
그 허공이라는 곳에 이 몸뚱이와 우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거기다가 떠억 안신(安身)할 만한 곳이 못 되더라 그 말이여.

그러면 어디다가 우리의 이 몸뚱이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을 어디다가 갖다가 붙일 것인가?
간취풍전대우송(看取風前帶雨松)이다. 저 바람 앞에 비에 흔들리는 저 소나무, 그놈을 똑바로 들어라. 바람이 불며 비가 그 소나무에 뿌릴 때, 비 뿌리는 가운데에 바람이 소나무에 지나갈 때, 그 소나무에 그 솔바람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솔바람 부는 거기를 똑바로 보고 알아차려라 이거거든.


오늘, 무진년(戊辰年)이 마지막 끝나는 섣달 스무아흐레 그믐날입니다. 그리고 양력으로는 2월 5일 첫째 일요법회 날인데, 어제는 입춘법회가 있었습니다마는, 오늘 또 이 무진년 마지막 끝나는 날이 하필 또 일요법회와 이렇게 맞섰습니다.

지난 1년 동안 국내외적으로 퍽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그러한 해였습니다. 세계가 그렇고 나라가 그렇고, 그러한 커다란 대해(大海)에 파도가 치는 속에 우리는 낱낱이 조그마한 조각배를 그 파도 속에 띄우면서 용케도 엎어지지 아니하고 이 해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 드시고 억센 파도 속에 그놈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 파도에 덮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어 버리는 그러한 나라도 있고, 그러한 회사도 있고, 또 그러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용케도 그 억센 파도를 잘 견디고 극복해서 다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우리는 부처님의 따스한 자비의 가피(加被)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무한히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해서 한 해가 저물었으니, 지난 1년 동안에 있었던 모든 몸 아프고 마음 아팠던 그리고 괴롭고 쓰리던 모든 일들, 원망스럽고 미웠던 일들, 다 깨끗이 자취없이 사라져 가는 한 해와 더불어 그런 언짢은 생각, 언짢은 일들도 함께 다 흘려보내 버리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릇 속에 담겨 있었던 좋지 못한 음식, 변질된 음식, 독한 음식, 먹을 수 없는 음식들, 그런 것은 깨끗이 비워 버리고 깨끗이 씻어서 아주 더운물에 끓여서, 그래서 그릇을 비워 놔야 거기에 다른 음식을 담을 수가 있듯이, 지난 1년 동안에 우리의 주변에 일어났던 일, 또 우리 일신상에 일어났던 일, 우리의 마음속에 스쳐간 모든 일들을 깨끗이 다 버려 버리고, 허공과 같이 맑고 깨끗하게 떠억 하고서 새해 첫날을 맞이해야 또 새해는 싱그럽고 희망찬 한 해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났지마는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금생에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야 하느니라’ 이러한 고구정녕(苦口丁寧)하시고 절절한 그런 법문을 다 같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올 때 새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분 1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초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축복받을 만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최웅식 동자(童子)가 오늘 백일(百日)을 맞이하는 날로, 그 백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고 하는 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골수가 똘똘 뭉쳐서 수록되어 있는,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저술하시고, 우리 용화사에서 84년도에 번역을 해서 간행한 이래로 이번까지 16판을 간행을 했습니다.
이 한 권의 책은 바로 팔만대장경이 바로 이 한 권 속에 축약(縮約)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한 경을 여러분께 법공양(法供養)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동자가 새로 태어난, 정말 어느 집에 어느 아들이라도 새로 태어났을 때에는 집안 식구뿐만이 아니라, 온 이웃사람 일가친척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들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宇宙法界)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생(生)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바꾸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낱낱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의 진리 체(體)인 진여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써 새로운 생을 받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은 바로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生)은 바로 고통이다,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 이외에 뭣이 있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진리를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도 진리요, 늙음도 진리요, 앓는 것도 진리요, 이승을 하직하는 죽음도 진리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있듯이, 인생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이런 것이 전부가 다 진리 체(體)의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갓난애기가 태어나는 것은 온 우주법계로부터서 축복을 받고, 저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저 하늘나라의 선신(善神)들도 축복을 하고, 저 축생이나 미물(微物)까지라도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개나 호랭이 같은 그러한 축생도 갓난애기는 절대로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 어른은 보고 왕왕 짓고 물려고 하면서도 갓난애기는 보고 그렇게 저런 개들도 사랑을 하고, 사람이나 돼지를 막 잡아먹는 호랭이도 갓난애기는 그렇게 애끼고 사랑하는 뜻을 표하는 것입니다.

갓난애기는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해서 조끔도 물들지를 안 해서, 그래서 그 갓난애기의 마음가짐은 바로 도인(道人)의 경지와 거의 흡사하는 것입니다.
도인의 여러 가지 그 도인의 행에, 도행(道行)에 있어서 81행(八十一行)이 있는데,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의 좋고 궂은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습니다. 광행(狂行) 미친 행도 있고, 승행(僧行)도 있고, 속행(俗行)도 있고, 남자행, 여자행, 뭐 심지어 화엄경에는 창녀, 53선지식 속에는 창녀도 있습니다. 마을의 장자(長者)도 있고.
그 창녀(娼女)라 하면은 세속에 빈축을 받는 상대지마는 53선지식 속에 창녀가 있다 그 말이여. 그 창녀는, 사람이 그 창녀 얼굴만 봐도 마음이 맑아지고, 그 창녀의 손만 한번 잡아도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그 창녀하고 한번 잠만 자도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는 그러한 창녀도 있다 그 말이여.

그런 81행 가운데에 어떠한 행(行)을 최고로 치느냐 하면,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치거든.

갓난애기,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갓난애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다못 배고프면 울 줄만 알고, 뜨거워도 울 줄 알고, 너무 추워도 울고, 또 목이 말라도 울고, 다쳐서 아퍼도 울고. 어린 아기의 언어(言語)는 우는 것이 언어여. 어린 아기 우는 것은 그것이 바로 언어이면서 그것이 바로 설법이요,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어린 아이에는 아무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없거든. 완전히 깨끗하고 순수무잡해서 거의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는 도인(道人)의 심경(心境)과 같더라.
그래서 그 어린 아이는 우리집 애기가 아니고, 남의 집 애기라도 애기가 났다고 하면 모두가 다 축복을 하거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야 천국에도 간다’고 하는 그런 말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까닭이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동자의 백일을 맞이해서 오늘 이 『선가귀감』을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이 책을 받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선가귀감』 속에서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데 대단히 요긴한 점 몇 군데를 설해 드리겠습니다.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추어야 할 것이니, 첫째는 대신근(大信根)이요, 둘째는 대분지(大憤志)요, 셋째는 대의정(大疑情)이니라. 만약 그 한 가지만 궐(闕)하드라도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마침내 폐기(癈器)를 이룰 것이다.(20분34초)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대신근(大信根), 큰 신심이 있어야 돼. 무슨 신심(信心)이냐?
‘나도 바로 부처다. 중생이 바로 부처고,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부처다. 나라고 하는 놈을 내놓고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다. 부처는 반드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그놈을 갖다가 철견(徹見)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경전 속에 문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 하나 밥을 먹으나,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나, 진심(瞋心)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몸뚱이의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 그 신념이 여지없이 꽉 박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분심(大憤心).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성현과 모든 도인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중생의 탈을 쓰고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어찌 이래 가지고 잠을 편안히 자며, 편안히 밥을 먹으며, 무슨 한담(閑談)으로써 세월을 보내며,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그럭저럭 이 아까운 목숨을 보낼 것인가?'
아! 속에서부터 넘쳐흐르는 그 대분심(大憤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좋은 줄 알면서도 분심(憤心)이 없으면, 일체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이 몸과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가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셋째, 대의정(大疑情)이 있어야 하느니라. 무슨 의정(疑情)인고?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어떤 분은 진즉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고 어떤 중생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느냐?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기에.. 이 무엇이여?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지어서 ‘이뭣고, 이뭣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심이 나와서 항상 눈을 뜨나 감으나 눈앞에 환히 현전(現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 이것은 셋이 동시에, 세 가지의 이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야 해.
신심만 있고 분심이 없다든지, 분심만 있고 의심이 없다든지 그런 게 아니라, 의심과 분심과 신심이 이 세 가지가 항상 함께 일어나면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잘 안 들립니다” “자꾸 들면 그냥 이뭣고 뿐이지 정말 간절(懇切)한 의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한 의심이 나겠습니까?” 이러한 하소연을 하신 분을 간혹 만납니다.
그건 다름이 아닙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주작(做作)이 되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아야지, 그냥 의식적으로 일부러 들면 그때 잠깐 있다가, 들지 아니하면 그냥 달아나 버리고, 이것은 삼요(三要)를 동시에 갖추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일용응연처(日用應緣處). 일용(日用)에 인연을 응(應)하는 곳.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하고, 냄새 맡고, 맛보고,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이러한 일상생활 하는 곳에서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신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앞도 생각하지 말고, 뒤도 생각하지 말고, 잘되고 못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다못 그렇게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고 그렇게 화두를 들어오고 들어가란 말이여.
그렇게 애써서 들다 보면, 이치 길[理路]이 딱! 끊어져 버려. 뜻 길[義路]이 딱! 끊어져 버려. 그래 가지고 아무 자미(滋味)가 없어져 버려.

그래 가지고 심두(心頭)가 열민(熱悶)해. 마음이 열민해. 다맛 가슴이 답답할 뿐이라 그 말이여. 이것을 공부가 잘된다고 할 수도 없고, 못된다고 할 수도 없고, 도대체가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리면서 가슴이 답답하기만하다 그 말이여. 바로 그때가, 당인(當人)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내던질 곳이여.

가슴이 답답허면 그 답답한 것을 이기지 못해 가지고 ‘아이구, 이거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이런 것인가? 이러다가 이거 내가 상기증(上氣症)이 생길라고 이런 것인가? 이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이것이 무슨 공부를 잘못해 가지고 잘못될라고 이런 것이 아니여. 그런 의심을 하지 말어.

알 수가 없어.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지고, 일체 그동안에 보고 듣고 배운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재미도 없어. 그러는 가운데 가슴만 답답… 바로 그 경지가 몸과 마음을 갖다 놔버릴 곳이여. 이것이 바로 성불(成佛)하고 조사(祖師)가 될 수 있는 기본이여! 그것이.

이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이 일은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쇠로 지어 붓어서 만든 소, 소 등어리를 향해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불문(不問)하고 몸뚱이 채, 입부리를 갖다가 소 등어리를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소 등어리에 앉어 가지고, 입부리를 거기다가 들어간가 안 들어간가 이렇게 박어 보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채 압량해서 아주 그냥 그 소 등어리로 아주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데에서 물을 향해서 다이빙을 하듯이 그렇게 소 등어리... ‘쇠로 맨들었나 말았나, 쇠로 되았으니 안 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몸뚱이 채 뚫고 들어가. 그래 가지고 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탁! 거기다 갖다 내던지면서 뚫고 들어갈 때, 바로 그 몸뚱이 압량해서 소 속으로 풍 들어가는 거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중으로 검술을 배우러 들어갔어. 그 산중에 정말 아주 검술을 통달한 큰 도사가 있단 말을 듣고,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서 간신히 그 분을 만났어. 만났는데,
“검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니까짓 놈이 무슨 검술을 배워?”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 정말 검술에 통달한 도사란 것을 나는 알고 왔습니다. 절대로 선생님이 아무리 가라고 해도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안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은 장작이나 패라”

날마다 나무를 비어다가 하루에 아주 수십 짐씩 장작을 팼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열흘, 한 달, 두 달… 한 삼 년을 두고 장작을 팼어.
처음에는 헛 찍기도 하고 잘 못했지마는, 한 3년을 하니까 아무리 큰 나무도 한번 탁! 치면 쩍쩍 갈라졌습니다. 아무리 질긴 뿌럭지 끌통도 그 어디를 찍으면은 이 장작이 쩍 갈라진다고 하는 것을 다 터득을 했습니다. 소나무가 되었건, 참나무가 되었건, 귀목나무가 되었건, 아주 장작 패는데 아주 도가 텄습니다.

하루는 장작을 패기 위해서 저 도끼를 쳐들고 탁! 찍을라고 할 때에, 그 선생이 살짝 뒤에서 숨어 서 있다가 냉큼 그 장작 위에다가 크막한 돌멩이를 갖다가 척! 놨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일심(一心)으로 그 도끼를 갖다가 내리쳤는데, 탁! 깨진 데 보니까 장작이 아니라 차돌멩이가 쩍 갈라졌다 그 말이여. 깜짝 놀래 가지고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서로 눈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돌멩이를 하나 놓고 다시 쪼개봤습니다. 도끼날만 뭉그러졌지 돌멩이가 쪼개지질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해봐도 돌멩이가 쪼개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왜 선생님이 턱! 갖다 놓은 돌멩이는 쩍 갈라졌는데, 자기가 그 돌멩이를 쪼갤라고 하니까 안 쪼개졌겠습니까? 처음에 내리칠 때에는 그것이 돌멩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못, ‘안 뽀개질 것이다. 쪼개질 것이다’, ‘쪼개진가, 안 뽀개진가 한번 해보자’ 그러한 망상(妄想), 그러한 사량심(思量心)이 전혀 붙어 있질 않았습니다.

다맛 내리치는 자신이나, 내리치는 도끼나, 거기에 놓여진 돌이나, 그 삼자(三者)가 하나가 되었어. 그것을 무심(無心)이라 그래. 무심 속에서 갖다 내려치니까 돌멩이 아니라 쇳덩어리를 놨어도 쩍! 갈라졌을 것이다 그 말이여.
두 번째, 세 번째 시험 삼아서 할 때에는 벌써 이것이 돌멩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마음속에 먹고 있었고, ‘돌멩인데 또 한번 쪼개진가 한번 해보자’ 하는 그런 번뇌심(煩惱心)이 발동을 했기 때문에 몇 번을 찍어도 쪼개지질 않했습니다.(처음~35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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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사람은 활을 가지고 사냥을 나갔는데, 그 사람도 활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사냥을 나갔는데, 저만큼 큰 호랭이란 놈이 떡! 버티고 섰다 그 말이여. 그래서 “너 이놈, 저리 비키지 못할까” 몇 번 소리를 쳤지마는 그 누런 얼룩얼룩한 호랭이가 꿈쩍도 안 해.

그래서 활을 댕겨 가지고는, 저놈을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게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가 죽느냐 니가 죽느냐' 아주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활을 땡겨 가지고 팍! 쐈는데 화살이 쏙 들어갔다 그 말이여. 그런데도 그 호랭이가 넘어지질 않고 턱 있다 그 말이여.
살살 가까이... '지가 심장에 아주 정통으로 맞아서 화살이 갖다가 쏙 들어갔으니 지가 안 죽고 베길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서 가 봤더니 호랭이가 아니라 바윗돌이였었다.

‘참, 이상하다. 뭔 놈의 바윗돌 속에 화살이 들어갈까?’ 다시 그 자리에 되돌아와 가지고 몇 번 활을 쏴 봤지마는, 탁탁 되받아 버리고 화살이 그 바위 속에 백히질 안 했다 그 말이여. 이것도 역시 도끼로 차돌을 깬 것과 마찬가지 이치여.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이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작용,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동하면 그것이 바로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심이요, 아주 그건 그런 것인데,
앞뒤가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끊어지고, 무모색(無摸索)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다맛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들어갈 때에는 바위가 되었건, 쇳덩어리가 되었건, 호랭이가 되었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속가(俗家)의 문구에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을 때에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 그거여.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이뭣고?’

‘내가 중생이다,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내가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인자 해봤자 안될 것이다’ ‘그동안에 내가 참선을 안 해보고 염불만 했기 때문에 갑자기 참선을 한들 언제 될까?’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여.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이뭣고?’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지지 말어.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거든.

요새 일본서 나오는 모다 이 참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번역해 나옵니다. 모다 지식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참선이 좋다'고 말은 듣고 또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우리 한국에 모다 큰스님네들이 그 참선에 대한 내논 책은 그렇게 구해 보기가 어렵고, 그러니 일본 책을 많이 사다 보고.
그래 가지고 '뭣인가 도대체 참선에 대해서 알아야 또 할 맛이 날 것이다' 그래서 일본 책을 많이 보면, 그 공안(公案)에 대해서 『무문관(無門關)』이라든지 뭐 『벽암록(碧巖錄)』이라든지 모다 참선에 대한 많은 책들이 일본에서는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선을 갖다가 널리 보급을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참선을 하도록 권장하기 위해서 하는 그 뜻은 좋았지마는,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공안을 풀이를 하고 그래 가지고 그렇게 많이 『염송(拈頌)』이나 또는 『벽암록』이나 『무문관』이나 이러한 책을 갖다가 많이 읽고 풀어서 재미있게 얘기처럼 모다 풀어서 해석을 해놨는데, 그걸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참선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을 닥치는 대로 다 읽어서 다 해석할 줄 안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하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한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하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42분10초)


그런데 '이 모기가 쇠로 맨든 소 등어리에 몸뚱이 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하라, 그렇게 간절히 허라' 하니까, ‘그렇다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봐야겠다. 이거 과거에 모든 불조(佛祖)가 다 하고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이 하는데 어찌 나라고 못할 것인가?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을 한목 발(發)해 가지고 이것을 나도 한번 해볼 수 밖에 없다’
그래 가지고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고, 그래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아주 탁! 써 가지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내가 금생에 결정코 이놈을 기어코 아주 해결하고야만 말겠다’ ‘이뭣고?’를 막 해 가지고는, ‘까짓거 뭐 난들 왜 못하냐?’
참 그런 용기와 신심을 내는 거, 그런 분심을 내는 건 대단히 좋은데, 이것이 문제가 있다 그 말이여.

'이 공부를 하는 데에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거문고 줄을, 기타 줄도 마찬가지죠. 거문고 줄을 너무 팽팽하게 되게 갖다가 졸라매면, 까딱하면 그 줄이 끊어져 버리거나 또 타다가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더라도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팅팅해 가지고.
또 '너무 되게 매면은 또 끊어진다' 해 가지고 겁을 먹고 또 너무 느슨하게 매면, 둥둥둥 해 가지고 또 제 음가가 안 난다 그 말이여. 너무 세게 매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하게 매도 안 되고, 반드시 그 음가에 맞춰서 적당하니 그놈을 맞춰야 훌륭한 곡을 갖다가 연주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바른 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를 떠억 하고 허리를 쭉 펴고 턱을 갖다가 이렇게 잡아당기고 그래서 머리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앞으로 숙어도 안 되고 또 옆으로 이렇게 기울어지지도 않게, 단정하니 하면서도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또 눈에 힘도 빼고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고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 말이여.

아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저 안에다 갖다가 혀를 꼬부려 오그린다.
눈은 편안하게 평상으로 뜨되, 이 평지에서 약 2m 지점에 눈을 떨구라. 2m 지점에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凝視)해서는 안 돼.

어떤 사람은 2m 지점에다 눈을 떨구라 하니까, 2m 지점에다가 까만 콩을 하나 갖다 놓고 참선할 땐 그놈을 갖다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그런 것이 아니여요.
눈을 평상으로 뜨되, 2m 지점에 떨구되, 의식적으로 본 바는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평상으로 뜨되 아무것도 보는 바는 없어. 다맛 이 코 끄터리와 단전(丹田)이 일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따악 그렇게 하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 부위가 약간 볼록하게 느끼고 또 숨을 내쉴 때에는 배가 약간 홀쪽하게 해서, 숨을 내쉬고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해졌다가 홀쪽해졌다 그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여.
그래서 숨을 들어마실 때는 수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약간 볼록함을 느끼고, 또 그렇게 들어마셨으면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쉴 때에는 조용하게 길게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게 하되, 너무 홀쪽히 해 가지고 뱃가죽이 등어리에 가서 딱 붙으도록 얼굴이 벌게져서 숨이 가쁠 때까지 그렇게 하는 게 아녀요. 7부나 8부 쯤만 내쉬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그렇게 쉬는….

이 호흡,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고, 건강에도 좋고 피로회복도 되고 또 피도 맑아지고 혈압도 내려가고 또 정신도 안정이 되고 여러 가지가 좋습니다.
그렇게 좋은데, 이것도 무리하게 억지로 잔뜩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셔 가지고, '참으라' 하니까는 아주 얼굴이 벌게지도록 맹꽁이 배처럼 해 가지고 억지로 그냥 참고, 또 '천천히 길게 내쉬라' 하니까 30초, 1분, 2분이 되도록 막 그냥 눈알이 튀겨져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했다 하면은 참으로 큰일나는 것입니다. 병이 생겨도 큰 병이 생기고, 계속해서 그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 단전호흡이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을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첫째, 무리가 없이 해야 돼요. 30분, 1시간을 해도 숨이 가쁘거나 그러한 일이 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또 다 내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셔 가지고 또 내쉬면서 ‘이뭣고~?’

숨을 내쉬면서 ‘이뭣고?’ 하라 하니까, 계속해서 숨 내쉴 때마다 ‘이뭣고?, 이뭣고?’ 하는데, 처음 시작하신 분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지만, 한 달 · 두 달 · 석 달 또는 1년 이렇게 하다 보면 ‘이뭣고?’ 한번만 들고서 숨을 몇 번을 쉬어도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있으면, 그 고대로 있는 그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떠억 그 의심만을 이렇게 관조할지언정 자꾸 거기다, 있는 의심(疑心)에다가 ‘이뭣고?’를 덮쳐서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거든.
심지에다 불을 댕겨서 불이 딱 붙어 있으면 그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보호하면 그만이지, 심지에 불이 붙었는데도 자꾸 성냥불을 켜서 자꾸 거기다 불을 붙일라고 할 필요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여.

불이 꺼져 버리면 다시 또 불을 켜듯이, 화두(話頭)가 없어졌거나 딴 망상(妄想)이 들어오면 그때 다시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이뭣고?’가 고대로 있으면, 그 있는 그 ‘이뭣고?’를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그것을 갖다가 잘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돼.

덮어놓고 ‘이뭣고?’ 하라니까는, 관세음보살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해 가지고 ‘오늘 내가 5만 번을 이뭣고를 했다’ 이 참선은 그런 것이 아니여.
염불(念佛)은 하루에 5만 독(讀) 내지 10만 독씩 이렇게 정해 놓고 그렇게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백일기도를 한다든지 천일기도를 한다든지 또 그런 분이 있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염불도 사실은 횟수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거든. 염도염궁무념처.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이 어느 곳에 계신고?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이다. 마음을 부딪쳐 가지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아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생각이 이르러, 생각이 생각 없는데 이르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문(六門)에 항상 자금광(紫金光)을 놓으리라.

부처님한테서 자금광이 나오거든. 부처님 몸뚱이는 자금색(紫金色) 색상이기 때문에 부처님 몸뚱이, 아미타불한테서는 항상 자금광이 빛나는데, 바로 우리가 염불을 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에 이르면은 바로 눈 ‧ 코 ‧ 입 ‧ 귀... 육문(六門)에 자금광(紫金光)이 나오리라.
염불(念佛)도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가 되도록 하는 것이지, 온갖 망상 잡담하면서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아미타불…’ 어쨌든지 십만 독만 채울려고 작정을 하거든.

또 부처님께 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천 배를 했다’, ‘나는 일주일 동안에 삼천 배.. 구천 배를 하리라’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한 자리, 두 자리, 석 자리, 넉 자리 해 가지고 그냥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앉었다 일어섰다 해 가지고, 1초 동안에 한 자리씩 해서, 1초에 한 자리면은 1분이면 육십 자리요, 한 시간이면 뭐 삼천육백 자리... 횟수로—물론 초학자는 횟수로라도 그렇게 많이 하다보면 차츰차츰 참다운 예배(禮拜)의 뜻을 터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횟수 위주로의 예배보단 그 예배(禮拜)의 참뜻을 알고 해야 해. 예배의 뜻은 굴복무명(屈伏無明)하고 공경진성(恭敬眞性)이거든. 무명을 굴복 받어. 무명을 굴복하고 참된 성품을 공경하는 것이 그것이 예배의 참다운 뜻인 것입니다.

황벽 선사(黃蘗禪師)라고, 육조 스님 밑에 남악회양 선사,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 밑에 마조도일(馬祖道一), 마조도일 밑에 백장회해(百丈懷海), 백장회해 밑에 황벽선사(黃蘗禪師), 아주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아주 정통 법맥(法脈)을 이어받은 대도인이신데, 그 황벽 선사는 평생을 시간만 있으면 법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했습니다.
뭐 그분은 천 배가 되었건 삼천 배가 되었건 그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깨달음의 경지여 그것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예배를 하고, 예배가 곧 참선이요, 참선이 곧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한 그 경지, 바로 그냥 그것이 보림(保任)이고, 바로 그것이 설법이고, 그것이 중생교화여. 어떻게 평생 동안을 예배를 했던지 황벽 스님의 이마에는 주먹탱이만 혹이 붙었습니다. 여기 아주 혹이 생겼어.

그래서 예배에도 그러한 황벽 선사가 하신 바와 같은 바로 그러한 예배를 해야 할 것이고, 염불을 하시는 분도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해서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해서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하는 그러한 염불을 하셔야 해.

참선을 하는 사람도 정말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간택 받아 가지고,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독로해서, 의심을 해 가고 의심을 해 와서, 들어가고 들어와.
처음에는 자꾸 반복을 해서 되풀이해서 하다 보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돼. 습관이 되면 그것이 체질화가 되어 가지고, 그냥 산을 봐도 ‘이뭣고?’요, 해를 봐도 ‘이뭣고?’요, 물을 봐도 ‘이뭣고?’요, 나무를 봐도 ‘이뭣고?’요, 사람을 봐도 ‘이뭣고?’요, 앉아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를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항상 화두(話頭)가 독로(獨露)해서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는 거여. 그래 가지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가지고 성성적적한 가운데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줄 몰라. 시간 가는 줄도 몰라. 그러면서도 성성적적해서 의단(疑團)이 터억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 그 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疑團)이 고대로 독로(獨露)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 · 이틀 · 사흘 · 닷새 · 엿새 · 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마는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그래서 모든 공안에 다 맥힘이 없고 그러면, 깨달은 뒤에 보림(保任)하는 법을 다시 지시를 받어 가지고 그때에 비로서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토굴 살림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서 이 장양성태(長養聖胎) 해 가지고, 고인(古人)의 모든 어록(語錄)도 한번 보고, 또 나아가서는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서적도 한번 보고,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도 한번 훑어보고, 그래서 안팎으로 힘을 충족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밑 없는 배’를 타고 나가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법(正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참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오늘 무진년 마지막 날이요, 또 새해를 맞이하는 이 즈음에, 그동안에 누누이 이런 말씀을 일러드렸지마는 오늘 좀더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은 정말 이번에 백일을 맞이한 최웅식 동자와 같이 우리도 그런 순일무잡하고 청정무구한 그런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새해에는 초하루날부터서 365일을 하루와 같이 오늘 지금 이 법문을 듣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말 간절히 그리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61분40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이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인데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은  도아일체심(度我一切心)이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것을 대장경을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합니다.
그 일체경을 설하신 것을 무슨 목적으로 설하셨느냐? 일체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나의 이 모든 마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일체법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濟度)한다니까, 이 사람 저 사람 전부 물에 빠진 거 건져내듯이 막 건져내고, 부자되게 해 달라니까 다 부자로 만들어 주고 그런 것이 아니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정말 참다운 뜻은 우리 중생 낱낱이, 우리 자신의 일체 마음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일체 마음이 없으면, 아무일체심(我無一切心)이면, 내게 모든 마음이 없으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공(空)해 버리면, 하용일체법(何用一切法)이리요. 일체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냐?
내 마음이 온갖 생각이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와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와 팔만사천 번뇌 망상이 들끓으니까 그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제도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문(法門)을 설하셨는데, 내가 그런 마음이 딱! 끊어져 버려. 공(空)해 버렸다면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필요한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병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 약이 필요한 것인데, 내가 모든 병이 다 나아버렸다면은 뭐하러 그렇게 쓰고 고약한 약을 계속 먹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참다운 불법(佛法)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고 끝을 맺고자 합니다.(35분30초~65분5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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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라만상동귀환~’ ; 『소요당집 外』 (한글대장경 169, 동국대학교 역경원) p71 소요 스님 게송 ‘賽義玄法師(의현법사에게 답함)’ 참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환(幻) : 또는 눈꽃(空眼花 • 空華)。근본 무명(根本無明)이 언제 일어났는지 그 시초를 알 길 없으므로 「본래부터(從本已來)」라기도 하고, 「시작도 없음(無始)」이라고도 한다。무명이 일어나는 곳도 없고, 또한 그 실상 자체(實相自體)도 없는 것이므로 곡두(환상)같다고도 하고, 눈이 어리어서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눈꽃 같다고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허환된 무명에서 나온 바 온갖 것이 또한 모두 환상이며 공화(空華)인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다사다난(多事多難) ; 여러 가지로 일이나 어려움이 많음.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苦]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절절한 --> 절절(切切)하다 ; 매우 간절하다.
*선가귀감(禪家龜鑑) ; 조선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경전과 어록 중에서 수행의 지침이 될—선종(禪宗)을 중심으로—가장 요긴하고도 절실한 부분을 가려 뽑은 불교 개론서.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선가귀감』이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공양(法供養)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베풂. ②불서(佛書)를 사람들에게 베풂.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미물(微物) ; 벌레 따위의 하찮은 동물.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청정무구(淸淨無垢 맑다·깨끗하다·탐욕이 없다 청/깨끗하다·맑다·사념이 없다 정/없을 무/때·티끌·수치·부끄러움 구) ;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음.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도인(道人)의 81행(行) ;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 ;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 동자(善財童子)가 복성의 동쪽 장엄당사라림에서, 최초로 문수 보살의 법문을 듣고 남방으로 향하여 차례차례 찾아가서 법문을 들은 53위의 선지식(스승).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 · 말 · 생각(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영아행(嬰兒行) ;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 도인(道人)의 81행(行)이 있는데, 81행 가운데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체모(體貌 몸 체/얼굴 모) ; 체면(體面). 남을 대하기에 번듯하고 떳떳한 입장이나 면모.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삼계(三界) : [범] trayo-dhā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궐(闕) ; ①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림. ②여러 자리 가운데 일부 자리가 비거나 차례가 빠짐.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열반(涅槃) : [범] nirvana [파] nibbana 음을 따라 니반나(泥畔那) • 니원(泥洹) • 열반나(涅槃那)라 쓰고, 뜻으로 번역하여 멸(滅) • 적멸(寂滅) • 멸도(滅度) • 원적(圓寂) • 안락(安樂) • 해탈(解脫) 등이라 한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를 말함이니,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자성불(自性佛)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불교]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한담(閑談) ; 심심풀이로 이야기를 나눔. 또는 그러한 이야기.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 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주작(做作 지을 주/지을 작)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화두를 들 때 무상(無常)을 느껴 발심(發心)을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이뭣고(시심마)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화두(공안)’ 참고.
*당인(當人) ;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는 그 사람.
*상기증(上氣症 오를 상/기운 기/증세 증)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증세.
상기증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증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여하약하(如何若何) ; 이러쿵저러쿵.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자꾸 말을 늘어놓는 모양.
*입부리 ; 새의 부리나 동물의 입을 말하는 ‘주둥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
*압량해서 ; ‘합(合)해서’의 사투리.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①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②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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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의단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한목 ; 한 번에 모두. 한꺼번에 몰아서 함.
*발하다(發-- 일어날 발) ; 생기게 하거나 일어나게 하다. 생기거나 일어나다.
*음가(音價 소리 음/값 가) ; 낱자가 지니고 있는 본바탕 소리의 측정치.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응시(凝視 엉기다·집중하다·머무르다 응/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의심을 관(觀)할지언정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5분59초)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12. (가로판) p117.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니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이익이 없으리라.

(註解) 阿彌陀佛六字法門이  定出輪㢠之捷徑也라. 心則緣佛境界하야  憶持不忘하고,  口則稱佛名號하야  分明不亂이니,  如是心口相應이  名曰念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 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난(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
*(게송) ‘아미타불재하방~’ ; 『한가로운 도인의 길 - 나옹화상법어집』 (김달진역주, 세계사刊).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보임(示諸念佛人/8首) 게송 참고. p166.
*육문(六門) ; 육근(六根,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을 말한다. 육식(六識,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육경(六境,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인식하는 경우, 그 입구가 되므로 문(門) 또는 뿌리(根)라 하는 것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범] Amitabha Buddha : Amitayus Buddha 대승불교의 중요한 부처님。 줄여서 미타。범본경전(梵本經典)에는 아미타바불타 • 아미타유사불타의 두 이름이 있다. 한역(漢譯)한 여러 경전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거니와 보통으로는 아미타불 무량수불이라 한다.
정토삼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은 법장(法藏)이 2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 또 48원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장구한 수행을 하여 성불하였으니 이가 아미타불이다. 구원한 옛적에 성불한 아미타불[本佛]에 대하여 이 부처님을 10겁 전에 성불한 아미타불[迹佛]이라 한다.
*육조 스님, 남악회양, 마조도일, 백장회해, 황벽희운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예배(禮拜) ; 거룩하고 성스러운 대상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절을 함.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11. (가로판 p116)
禮拜者는 敬也며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라 하는 것은 '공경하는 것'이며 '굴복하는 것'이니,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니라.

(註解) 身口意가 淸淨하면 則佛出世니라
몸과 입과 뜻이 청정하면 그것이 곧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것이니라.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 ; 원각(圓覺)의 대지(大智)가 밝게 홀로 드러나다. 원각(圓覺) - 석가여래의 원만(圓滿)한 깨달음. 진여(眞如)의 체득. 부처님의 지혜.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若微細流注永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憂 名之爲大覺世尊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도 영원히 끊어져서 원만히 깨달은 큰 지혜가 홀로 밝게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어, 시방세계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감응하게 되니, 그것은 마치 하늘에 높이 뜬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응용이 무궁하고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여, 쾌락하고 근심이 없으니 ‘크게 깨친 세존(大覺世尊)’이라 한다.
---『마음 닦는 길(수심결 강의)』 (지눌 저,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214.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보조국사어록』 (김달진 옮김 | 동화출판사) p87, 102 참고.
*보림(保任) ; 오후보림(悟後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장양성태(長養聖胎) ; 성인의 태(胎)를 길러 양성함.
[참고]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眞]부처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比喩)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 썩은 나무둥치. 산에 버글버글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수행인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거짓 바보가 되어야만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어서 가장 도를 닦는데 효과적이다.

 


[참고] **송담스님(No.214)—1983년 추계산철 결제법회(계해년 음 8.1) (용214)
오조 홍인대사(五祖弘忍大師)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法)을 설하셨는데 그 최상승론에 보면, ‘중생이 만약 정성(情誠)을 안으로부터 발(發)하지 아니하면 삼세(三世)에 비록 모든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부처님을 만난다 할지라도 무소능(無所能)이니라. 능히 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삼세의 부처님을 친견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부터 안으로부터 진정한 발심(發心)을 하지 못한다면은 도(道)는 이루지를 못할 것이다 이말이여.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정(大疑情)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참선의 삼요(三要)인데 세 가지 요긴한 것인데, 신심과 분심과 대의정이 한목 속에서부터서 자발적으로 폭발을 하지 아니하면, 억지로 신심을 내고 억지로 분심을 내고 억지로 의심을 낸다 하더라도 잠시 뿐이고 금방 비그르르 하니 식어 버리고, 아무리 의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려고 해도 들 때 뿐이지 1분도 못 가서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러한 것은 그 정성이 안으로부터 발하지 아니하고, 지어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정말 안으로부터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돈발(頓發)을 해야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도(道)를 이룰 수가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말씀을 하시기를 ‘다만 능히 떨어진 옷과 거치른 밥을 먹으면서’, 이것은 떨어진 옷과 거치른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검박한 생활을, 잘 먹을라고 하지도 아니하고 잘 입을라 하지도 아니하고, '다못 근본 참마음을 지켜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거짓 바보가 되라' 바보는 뭔 말을 일러줘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만공 스님께서도 학자들에게 항시 말씀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썩은 나무둥치’는 왜 그러냐 하면, 산에 좋은 나무가 있으면 목수가 비어 가고 또 나쁜 나무도 다 쓸데가 있어서 비어 가는데 그리고 나무 비어 간 나뭇등걸도 썩지 않은 나무는 그걸 패다가 짜개서 화목(火木)으로 쓰기 위해서 그것도 파 가지만, 그 썩어서 버글버글버글한 아주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할 것이며 또 땔나무로 연료를 할 것도 못 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은 캐 가는 사람이 없어.
이것이 바로 말귀도 못 알아들은 그런 바보 천치(天癡)와 같이—진짜 속속들이 바보 천치가 아니라, 사리(事理)가 분명한 다 발심한 수행인(修行人)이니 그렇게 바보가 분명 아니지만 정말 그런 말귀도 못 알아들은 바보 천치가 되어라 이거거든.

거짓 바보 천치가 되어 가지고, 남이 보면은 진짜 바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그러한 바보가 되어야만 가장 도를 닦는데 효과적이다.
쓸모가 있고 똑똑하고 그러면은 자기 공부해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시간적으로 이리저리 불림을 받게 되고 이용을 당하게 되고 그러니까, 썩어빠진 나뭇등걸이나, 완전히 바보 천치가 되어 버려야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비(是非)를 걸어올 까닭도 없고, 그 사람보고 이 일을 해라 저 일을 해라 할 까닭도 없고, 그렇게 되어 버려야만 정말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도 딴 데에 정신을 쓰지 아니하고 오직 정진만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능히 이렇게 공부를 해 가야만 비로소 '대정진인(大精進人), 대정진, 크게 정진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오늘부터 두 달간 용화선원이나 또는 원효사나 회룡사 봉래사 선원에서 정진하는 납자(衲子)들은 이 두 달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철저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한 신도 여러분들도 각기 가정에서—그 바보가 되어 가지고 계속 그렇게 해서는 집안 살림이 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할 일은 하고 처리할 것은 처리하면서, 꼭 필요한 데에는 모두 여법(如法)하게 일을 처리해야겠지만, 그밖에 쓸데없는 잡담, 친구끼리 만나서 남의 흉이나 보고, 시부모 흉이나 보고, 남편 흉이나 보고, 이러한 쓸데없는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정말 이 선방에서 정진하는 스님을 항시 생각하면서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11분2초~19분58초)

*(게송) '불설일체법~' ; 『완릉록(宛陵錄)』 황벽(黃檗) 선사 말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일체경(一切經) ; 대장경(大藏經)과 같음.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법문 내용]

(게송)삼라만상동귀환~ /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마다 1분마다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 『선가귀감(禪家龜鑑)』은 팔만대장경의 골수 /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 / 갓난애기는 순수무잡하고 청정무구해서 바로 도인(道人)의 경지와 거의 흡사 / 도인(道人)의 81행(八十一行) 중에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 / 검술 배우는 사람의 비유.

바윗돌을 뚫는 화살. 정신작용, 정신력 / 화두를 들을 때에,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다 / 공부를 하는 데에는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라 / 참선 자세, 호흡법 / 참다운 염불(念佛), 참다운 예배(禮拜)의 뜻 / 황벽 선사의 예배 / 화두순숙 의단독로 타성일편 의단타파 오후보림 중생제도 / (게송)불설일체법~.


우리는 언제나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돌아올 때 새로 태어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분 1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하고, 1초 1초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참 축복받을 만한 일인 것입니다.

‘왜 새로 태어난 동자와 어린 애기를 축복하느냐’ 하면은 원래 생(生)과 사(死)가 없는 것이고 또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지만, 생(生)하고 또 한평생을 살다가 인연 따라서 다시 또 몸을 바꾸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낱낱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우주의 진리 체(體)인 진여불성이 있기 때문에 그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는 증거로써 새로운 생을 받아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애기가 태어난 것은 바로 한 부처님이 태어난 것입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은 바로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생(生)은 바로 고통이다, 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 것 이외에 뭣이 있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진리를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생(生)도 진리요, 늙음도 진리요, 앓는 것도 진리요, 이승을 하직하는 죽음도 진리의 한 모습인 것입니다.
마치 봄에 잎이 피고 꽃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눈 내리는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있듯이, 인생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고, 이런 것이 전부가 다 진리 체(體)의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인 것입니다.

『선가귀감』을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이 책을 받어 가시기 바랍니다. 이 책을 손에 드신 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삼계(三界)에 떨어지지 아니하실 것이고 언제나 부처님 불법 문중에 태어나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 한 권 속에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대장경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깨달은 경지에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法門)의 골수(骨髓)가 이 속에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대신근(大信根), 큰 신심이 있어야 돼. 무슨 신심(信心)이냐?
‘나도 바로 부처다. 중생이 바로 부처고, 번뇌(煩惱)가 바로 보리(菩提)요, 생사(生死)가 바로 열반(涅槃)이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고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바로 부처다. 나라고 하는 놈을 내놓고는 부처를 찾을 수가 없다. 부처는 반드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 그놈을 갖다가 철견(徹見)함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무슨 경전 속에 문자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여.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을 하나 밥을 먹으나,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나, 진심(瞋心)을 내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몸뚱이의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卽)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 그 신념이 여지없이 꽉 박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하는 이 일은 마치 모기가 쇠로 지어 붓어서 만든 소 등어리를 향해서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불문(不問)하고 몸뚱이 채, 입부리를 갖다가 소 등어리를 향해서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소 등어리에 앉어 가지고, 입부리를 거기다가 들어간가 안 들어간가 이렇게 박어 보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채 압량해서 아주 그냥 그 소 등어리로 아주 처박고 들어가는 거여.
마치 수영선수가 높은 데에서 물을 향해서 다이빙을 하듯이 그렇게 소 등어리... ‘쇠로 맨들었나 말았나, 쇠로 되았으니 안 들어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야.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몸뚱이 채 뚫고 들어가. 그래 가지고 이 몸과 목숨을 갖다가 탁! 거기다 갖다 내던지면서 뚫고 들어갈 때, 바로 그 몸뚱이 압량해서 소 속으로 풍 들어가는 거라.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이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정신작용, 정신력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동하면 그것이 바로 번뇌요, 망상이요, 생사심이요, 아주 그건 그런 것인데,
앞뒤가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뜻 길이 끊어지고, 무모색(無摸索)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다맛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들어갈 때에는 바위가 되었건, 쇳덩어리가 되었건, 호랭이가 되었건 무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속가(俗家)의 문구에 ‘정신일도(精神一到)면 하사불성(何事不成)이냐’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화두를 들을 때에 바로! 이렇게 해야 된다 그거여.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이뭣고?’
‘내가 중생이다, 내가 여자다, 남자다’ ‘내가 나이가 먹어서 늙어서 인자 해봤자 안될 것이다’ ‘그동안에 내가 참선을 안 해보고 염불만 했기 때문에 갑자기 참선을 한들 언제 될까?’ 그러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여.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이뭣고?’ 화두를 탔으면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지지 말어. 다못 무조건하고 ‘이뭣고?’ 뿐이거든.

참선이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끊어져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徹見)하는 것이 참선이지, 그러한 그 선(禪)에 대한 책을 많이 읽어서 해석하고 잘 안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점점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가귀감』이라는 이 책은 그러한 책과는 다릅니다. 어쨌든지 바르게 공부해 나가도록, 이 책을 보는 사람에게는 신심이 일어나고 분심이 일어나고 의단이 독로하도록 도와주는 책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용화사에서는 16판토록 이렇게 간행을 해서 법공양(法供養)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밥을 먹을 때나, 옷을 입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잠을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고대로, 의단(疑團)이 고대로 독로(獨露)해.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은 새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어제 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세수를 해도 고대로 있고, 양치질을 해도 그대로 있고, 목욕을 해도 그대로 있어.
그러다가 하루 · 이틀 · 사흘 · 닷새 · 엿새 · 이레 일주일을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떠한 찰나에 문을 텅! 닫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누가 무슨 물건을 턱 내부치는 소리를 듣는다던지, 자기가 걸어가다가 발을 턱! 무슨 돌뿌리에 채였다든지, 어떠한 그러한 특별한 기연(機緣)에 통 밑구녁 빠지듯이 툭! 터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바로 타파(打破) 공안(公案)이여. 의단(疑團)을 타파하는 거여. 그렇게 깜깜하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던 화두가 환해. 이럴 때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야 하는 거여. 자기 나름대로 환하지마는 그것이 바른 것인가 옳지 못한 것인가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바른 선지식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그러한 경지가 나타날 때에 선지식한테 가서 그것을 간택을 받아야 하는 거여.

아무렇게나 참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어려운 것 같지마는 천하에 쉬운 것입니다. 바보, 썩은 나무둥치처럼 되어 가지고 ‘이뭣고?’ 하라고 하면 그냥 ‘이뭣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어요.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1. 2. 6. 10:33

((No.379))—1989년(기사년) 신수기도 입재(89.02.08) (15분)

 

 

약 15분.

 


기사년(己巳年) 정월 초삼일, 신수기도(身數祈禱) 입재일(入齋日)을 맞이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우리 불자(佛子)의 궁극(窮極)의 목적(目的)은 어서 속히 내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가 어떻게 해서 금생(今生)에 이렇게 태어났는가? 금생에 이렇게 태어나 가지고 또 가정을 갖고, 또 아들과 딸을 낳고, 또 그 밑에 손자와 손녀를 낳고 외손자 외손녀를 낳고, 이러한 원인을 생각해 보면, 저 무량겁(無量劫) 이전으로부터 수많은 생(生)을 받아 오면서 얽히고설킨 인연(因緣)이 콤퓨타(computer)로도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얽혀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법문을 들으면,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한 것이요, 온 세계(世界)도 허망한 인연(因緣)들이 이루어진 것이요, 가정도 다 숙세(宿世)의 업연(業緣)으로 뭉쳐서 얽혀서 이루어졌지, 하나도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 몸뚱이 생로병사(生老病死),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져 가는 우리 생각의 생주이멸(生住異滅), 온 우주 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면(免)틀 못한 그런 허망(虛妄)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너무너무 많이 듣고 잘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무리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런 것을 버리려고 그러고, 생각을 안 쓰려고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아주 끊어서 버리지를 못한 형편입니다.

발심(發心)을 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석 달 동안을 열심히 정진을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죽비(竹篦)를 치고 떠억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화두(話頭)를 들고 있으면 어느새 집안 생각이 나고, 아들 생각이 나고, 손자 생각이 나고, 생각을 안 하면 안 하려고 할수록 점점 더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께서는,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중생들의 어찌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을 잘 아시기 때문에, 자비(慈悲)의 방편문(方便門)을 열어서 이렇게 기도! 기도(祈禱)를 함으로 해서 그 기도하는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이,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하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힘에 미쳐 가지고 그래서 부처님의 자비의 힘으로서 중생(衆生)의 그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도록 하는 그러한 특별한 은전(恩典)을 우리는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감응(感應).

'기도를 하면은 부처님의 감응(感應)을 받아서, 그 가피(加被)를 입어서 소원을 성취한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대관절 그 감응(感應)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은, 불보살(佛菩薩)과 기도하는 사람과의 마음이 서로 교류(交流)해 가지고 하나가 되는 그 현상을 감응(感應)이라 그럽니다.
중생(衆生)의 신심(信心), 선근(善根)이 불보살(佛菩薩)에 통(通)해 가지고 그 힘이 나타나는 현상.

감응(感應), 감응의 '감(感)' 자는 우리 기도하는 중생(衆生) 쪽에서 하는 것을 '감(感)'이라고 그러고, '응(應)'이라고 하는 말은 불보살(佛菩薩) 쪽에서 보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보면, 중생(衆生)에 기연(機緣)이 있으면 부처님의 힘이 자연히 이에 응(應)하여 중생의 감(感)과 부처님의 응(應)이 서로 교융(交融)하는 거여.
그래 응(應)해 가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치면은 소리가 나고, 산중(山中)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골짜구니를 향해서 고함을 지르면은 그 산꼴짜구에 그 소리가 울려 가지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응(感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감응(感應)의 현상(現象)은, 모르는 사람은 '그 다 미신(迷信)이다', 뭐 '기복불교(祈福佛敎)다' 해 가지고 이것을 아주 무시하거나 이것을 하차잖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절대로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고 헛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 본 분이면 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 현상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불보살의 자비(慈悲)의 힘이, 대자대비(大慈大悲)한 힘이 중생에게 가(加)해져서, 또 중생의 그 신심(信心)에 부처님이 응(應)해 가지고 서로 그 신심과 부처님의 자비의 그 힘이 서로 이렇게 교류(交流)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나타난 그 현상은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중국(中國)이나 한국(韓國) 일본(日本), 그밖에 동남아(東南亞), 다 이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 가지고, 그 기도 성취를 해 가지고 중생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러한 기도 성취를 한 그런 예는, 참 그 영험(靈驗) 기록은 한량없이 많습니다.

주력(呪力), 천수(千手) 주력이라던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이러한 염불(念佛)이라던지 또는 다라니(陀羅尼)를 외어 가지고 하는 주력(呪力)이나, 성지(聖地)에 가서 기도를 한다던지, 가정생활 속에서 아침에 눈뜰 때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염불(念佛)하거나 경(經)을 외우거나 하는 그러한 정성(精誠)으로 해서, 꼭 죽어갈 목숨이 살아나기도 하고 여지없이 법에 끌려 들어가서 감옥살이를 하고 큰 벌을 받을 만한 그런 경우에도 지극정성으로 기도해 가지고 참 기적적으로 일이 잘 풀려서 면(免)하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처님의 '참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이 넓고도 툭 트여서 한량없이 청정(淸淨)합니다마는, 모든 사물에 응(應)해서 형상(形象)이 나타납니다.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마는, 마치 허공에 달이 뜨면 고요한 호수에 그 달빛 그림자가 비추고, 새가 날아가면은 새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고, 구름이 날아가면은 구름의 모습이 그 호수에 비치듯이,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지마는, 중생들의 지극정성한 그 신심(信心)으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허공과 같은 불보살의 마음에 그 신심의 그 힘이, 정성(精誠)이 부처님께 이렇게 전달이 되어 가지고, 부처님으로부터 그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자비의 부사의력(不思議力)이 중생에게 다시 이렇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는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해야 합니다. 앞으로 새벽에, 또 예불 끝나고 하고, 또 오전에 2시간, 오후에 2시간, 또 저녁에 2시간 이렇게 해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게 됩니다마는, 염불을 하거나 경을 독송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주력을 하거나 지극정성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면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가면 무일법가혐(無一法可嫌)이여, 한 법도 싫어할 것이 없고,무변(無邊)의 이 선정(禪定), 정문(定門)에 들어가면은, 정문(定門)을 증득(證得)하면은 무일법가기(無一法可棄)여,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어. [入法性三昧 無一法可嫌 證無邊定門 無一法可棄]

세속 일이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높은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자손이 아무리 많고 잘되고 인간의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다 해도, 엄격히 보자면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않습니다.
일장춘몽에 지내지 않고 잠깐이면 다 꿈결같이 다 지나가 버릴 허망(虛妄)한 일들이지만, 우리가 과거에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해서 이루어진 가정이고, 이루어진 남편이요 아들이요 딸이요 손자들인 것입니다. 분명히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이지마는, 허망한 가운데에도 또 어쩔 수가 없는 인연(因緣)이 얽혀 있습니다.

이 몸뚱이, 자기 몸뚱이도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虛妄)한 것이지만, 그렇지마는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먹여줘야 하고 입혀줘야 하고 병나면 고쳐줘야 하고,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하는 가운데에도 자식 생각이 나고 집안 생각이 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일 년 내내 가족 생각만 하고 참선을 등한(等閑)히 철저히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 새해 초사흘부터 9일까지 7일 간을 신수기도(身數祈禱) 기간으로 정해 가지고, 이 7일 동안 만큼은 정말 철저하게 정성(精誠)스럽게 칠일기도를 봉행(奉行)을 하도록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7일 동안은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해서 아주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서 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소원한 바가,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다 성취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를 잘해 주시길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이어서 법요식(法要式)이 진행이 되겠습니다.(처음~15분3초) (끝)




[법문 내용]

불자(佛子)의 궁극(窮極)의 목적은 어서 속히 견성성불(見性成佛)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부처님의 자비(慈悲)의 방편문(方便門), 기도!

감응(感應).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현상 /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기도해야.
세속 일은 다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지만, 또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어쩔 수가 없는 인연(因緣)이 얽혀 있습니다.


감응(感應), 감응의 '감(感)' 자는 우리 기도하는 중생(衆生) 쪽에서 하는 것을 '감(感)'이라고 그러고, '응(應)'이라고 하는 말은 불보살(佛菩薩) 쪽에서 보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하는 것이 감(感)이고, 부처님께서 그 감(感)에 응해서 부처님의 힘이 우리한테 이렇게 미쳐 오는 것을 ‘응(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보면, 중생(衆生)에 기연(機緣)이 있으면 부처님의 힘이 자연히 이에 응(應)하여 중생의 감(感)과 부처님의 응(應)이 서로 교융(交融)하는 거여.
그래 응(應)해 가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치면은 소리가 나고, 산중(山中)에 들어가서 큰 소리로 골짜구니를 향해서 고함을 지르면은 그 산꼴짜구에 그 소리가 울려 가지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응(感應)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참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이 넓고도 툭 트여서 한량없이 청정(淸淨)합니다마는, 모든 사물에 응(應)해서 형상(形象)이 나타납니다.
허공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마는, 마치 허공에 달이 뜨면 고요한 호수에 그 달빛 그림자가 비추고, 새가 날아가면은 새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고, 구름이 날아가면은 구름의 모습이 그 호수에 비치듯이,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허공(虛空)과 같지마는, 중생들의 지극정성한 그 신심(信心)으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그 허공과 같은 불보살의 마음에 그 신심의 그 힘이, 정성(精誠)이 부처님께 이렇게 전달이 되어 가지고, 부처님으로부터 그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자비의 부사의력(不思議力)이 중생에게 다시 이렇게 미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는 지극정성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면은 삼매경(三昧境)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가면 무일법가혐(無一法可嫌)이여, 한 법도 싫어할 것이 없고,무변(無邊)의 이 선정(禪定), 정문(定門)에 들어가면은, 정문(定門)을 증득(證得)하면은 무일법가기(無一法可棄)여, 한 법도 버릴 것이 없어. [入法性三昧 無一法可嫌 證無邊定門 無一法可棄]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일 년 내내 가족 생각만 하고 참선을 등한(等閑)히 철저히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특별히 이 새해 초사흘부터 9일까지 7일 간을 신수기도(身數祈禱) 기간으로 정해 가지고, 이 7일 동안 만큼은 정말 철저하게 정성(精誠)스럽게 칠일기도를 봉행(奉行)을 하도록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7일 동안은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해서 아주 법성삼매(法性三昧)에 들어서 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이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서 소원한 바가,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이 다 성취가 되도록 그렇게 기도를 잘해 주시길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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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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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20. 3. 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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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88)—1989년 5월 첫째일요법회(89.05.07) (용388) (69분)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8분. (4/4) 약 13분.

(1/4)----------------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디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뻑뻑이 손에 응하게 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에는 눈이 휘날리는 날 밤, 달이 휘황찬 밝고, 봄에면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이전부터서 무량억겁 미래를 향해서 생겨난 때가 없고 없어진 때가 없을 것이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아침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다.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활구참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고 40여 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들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존자(阿難尊者), 그 아난존자는 조달(調達)이의 동생이며 또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 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을 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시봉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조옥 고대로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결집(結集)을 할 때에 아난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외워서 오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 버린 데다가 비교를 할까—보통 세속에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이렇게 슬픔을 표현을 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히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앉었다 섰다, 이마를 땅에다 부딪쳤다, 고대로 놔뒀다가는 아주 그냥 죽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몹시도 슬퍼했습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한 구참(久參) 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아주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 해서 되겠느냐? 곧 아주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 여쭈어 봐라"

첫째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겠습니까?"


차익(車匿 Chandaka 찬다카)이란 사람은 부처님 처음에 출가하실 때에 마부(馬夫)였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던 마부여.

상전(上典)이 출가를 하시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할 원을 세워서 출가를 했는데, '부처님 최초에 출가하실 때 자기가 말고삐를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아주 코에다 걸고서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의 법규도 지키지 않고, 겨우 부처님만 조금 무서워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하지를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대단히 처치 곤란한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그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걸 여쭈어봤어.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묵빈대처(默擯對處)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거여. 잘하거나 못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일체 상관하지 않는 거여. 대중 전체가 그 사람하고는 첫째,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고, 일체 잘잘못을 얘기하지 않고, 없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상관 말고 내버려둬 버리는 거여.

그것이 묵빈대처(默擯對處)라고 해서 대중생활 속에서는 대단히 엄중한 대치법(對治法)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 번에는 무슨 말씀을 여쭈어봤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그래서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戒)—5계,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오백계, 또 보살십중대계, 48경계, 이러한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저희들의 마음을 어디에다가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념주,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이 주로 어떠한 장소에 대해서—형식적으로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어느 제자에게 의지할까요?' 이렇게 아난존자가 형식상으로는 그렇게 질문한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제자를 지칭하시지 않고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어디에 머무를까요?" 어떠한 특수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여쭈어본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장소를 지적을 하시지 않고 "사념처관(四念處觀), 사념주관(四念住觀)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러면 사념주(四念住),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네 가지 마음이 무엇이냐? '네 가지 곳이라는 생각을 머무르는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여.


(첫 번째) 이 몸뚱이에 관한 것.

그다음에 우리가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쳤을 때에 최초에 탁! 감수작용, 그 감수(感受)하는 작용.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그 생각이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없어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이 생주이멸(生住異滅), 끊임없는 이 정신의 그 생주이멸, 이 마음.


네 번째는 법(法), 일체법.

삼라만상 두두물물—앞에 말한 몸뚱이에 관한 거, 그다음에 감수작용에 관한 거, 우리의 마음에 관한 거, 그 세 가지를 제외한 이 세상에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요, 불교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그러는 거여. 그 일체법에 관한 거.



그러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하면은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그것은 부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멍에서는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씻어도 계속 기어나와.

그러니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 들었으니 구녁구녁이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밖에 더 나올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 이거거든.


두 번째 수(受), 감수작용(感受作用). '감수작용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척 듣고 받아들인다든지,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느끼고, 생각으로 어떤 것을 탁! 받아들이는 그것 자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벌어지기 때문에 '감수작용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이여.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는 거여.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또 없어지고.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마지막에 그 법,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그래 부처님 생존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이 사념주관에 의해서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처음~18분57초)




(2/4)----------------


물론 이것은 삼현위(三賢位)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根機)와 현재 공부해 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관하게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55위(位) 점차(漸次)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관해 나가는 관법이 다 단계적으로 차제(次第)가 있지마는 그래도 그 많은 여러 가지 관(觀) 가운데 이 사념주관은 관(觀)의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이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신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이 관법(觀法)에 관한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전부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있고, 또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圓覺三觀)이 있고, 또 유식삼관(唯識三觀)이 있습니다.


그래 옛 조사의 말씀에도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다'

마음을 반조(返照)해서 관(觀)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종으로 횡으로 육두로 외우고 해석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觀)도 이렇게 여러 가지 관(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어떠한 관법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념주관(四念住觀) '아!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은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일체 삼라만상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계속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이렇게 더러운 거를 가지고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 것을 가지고 괴로운데 살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바른 정관(正觀)을 버리고서 점점 삿된 데로 치우쳐 생각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집장범지(執杖梵志)라고—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그 집장범지, 그 외도(外道)가 있었는데—이 사념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그 범지 외도를 찾아가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리때와 모다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그 범지 외도한테다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었습니다.


"제발 바라문이시여. 위대한 바라문이시여.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총재산을 다 드릴 테니까 자비로써 나를 때려 죽여주시오" 막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가—집장외도는 작대기, 주장자 가지고 다닌다 해서 집장외도인데—그 몽둥이로써 여지없이 쳐 죽이고 쳐 죽이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한 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 이렇게 어찌 대중이 이렇게 많이 비었느냐?” 물어보시니까 “집장외도한테 가서 모다 맞아 죽었습니다"

한 해 여름에 60명이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다가 집장범지한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잠시 그러한 아직 사념주관에 대한 바른 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키셨던 것이여.


그러면 이 사념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념주(四念住)에 머물러라.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이런 성스러운 수행 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그런 사견(邪見)에 얽매여서 사견에 빠져서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祖師)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관법이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든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이든지, 남산 율종에 삼관이든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이나, 유식삼관(唯識三觀), 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觀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그것을 합해서 한 가마솥에다 넣어 가지고 푹 고아 가지고 탁! 그 골수를 추출해 놓은 것, 추출해 가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관법(觀法)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 가지 관법(觀法)보다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념주관이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이 전부 이로(理路) 말길이 있고, 이치길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지금 내가 여기서 그러한 여러 가지 경에 나타난 관법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관법이여.

어떠한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통해서 견성성불한 대도사가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한 번 해 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한 해 여름에 60명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 엄청난 본의 아닌 길에 빠졌거든,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관법 한답시고 이런 관법도 해 보고, 저런 관법 해 보고,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왜 오늘 일요법회에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냐 하면은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한테 와서 그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라든지, 버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유학을 온 스님네에 의해서 이 관법이 사람들에게 그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이 법보재자는 그러한 관법보단, 그러한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라야 알 수도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 줄도 알 수 없는 이러한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어서 참구(參究)하되, 말길 이치길 어떠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거기에서 말길이 끊어져 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져 버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져 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이 거기서 다 끊어져 버리는 거여.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하는 것도 다 거기서 다 끊어져 버려.


'이뭣고?'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徑截門)이라,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 스님, 육조 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고,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是甚麽) 화두거든.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안했지만 제자들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수(신회)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이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 해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그런 불교학자밖에는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이마래(伊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남악회양 선사는 콱!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랐어. 그길로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 스님을 찾아가 가지고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은 없지는 않지마는 오염(汚染)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아역여시(我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 와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 확철대오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이여.(18분58초~37분40초)




(3/4)----------------


그뒤로 육조 스님 밑에 5대 법손(法孫)—육조 스님 밑에가 남악회양 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그 밑에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그 밑에가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고, 그 황벽희운 선사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인데.


육조 스님은 서기 63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러니까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 스님은 태어나신 연조는 잘 모르고 열반하신 해는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그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이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송(唐宋)시대에 이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 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산종고(徑山宗杲) 선사—임제 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서기 1087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12세기 경에 이 경산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활구참선이 완성을 보았습니다.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어.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이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에 묵조선과 임제종에 이 간화선이 그 종사끼리 대단히 서로 공박을 하고, 힐난한 비평을 하고 그랬었습니다마는.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그것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삿된 참선이다'하고 조동종에서는 이 간화선을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흑산 밑에 귀신 굴속에서 작활계(作活計)라. 거기서 살림살이를 하는. 캄캄한 데 앉아 가지고 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 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법은 우리 말세 우리 중생들에게 상근기(上根機)는 말할 것도 없고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도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에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르키는데,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어떻게 생각한 것이 그런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초학자가 어떻게 거기다가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인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자꾸 하다보면 그 속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 팔만대장경에 있는 모든 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거거든. 일체 관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팔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거기에 그 속에 쓰여 있는 요점을 추려서 그것을 실천할려고 해 보십시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여.

불보살 화현(化現)이신 육조 스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 다 그러한 조사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 갈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觀)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觀)이라는 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거든. 관조(觀照)하는 것이거든.


중생 생각, 중생이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은 그것은 망념(妄念)이여. 그 망념 일어나는 그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폭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여.

천하 없이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은 망념이여. 부처님 경전 속에 쓰여 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중생의 생각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망념인 거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 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관(觀)'이라 이거거든.

'관심(觀心)'이라고도 하고 '관법(觀法)'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관(觀)한다' 그러는데 마음이 무엇인 줄을 알아야지, 우리가.


'마음, 마음' 그렇게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념은 우리가 알 수가 있지만,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마음, 망념의 그 본체는 우리 생각으로 알 수가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한 망념 자꾸 일어나 가지고 우리 모든 생사(生死)도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죄도 거기서 일어나고 그런데,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것이냐 그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마는 그 변하지 않는 그 본체는, 본성은 무엇이냐 하면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여.

그것 습성(濕性), 얼음으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김 기체로 있을 때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액체인 물로 있을 때에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눈으로 되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폭포수로 되었거나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물의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거여.


그런데 그 습성(濕性)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집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얼음을 아무리 가루로 부숴도 그 물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은 볼 수가 없는 거여.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거기에 있으며 변함이 없지마는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여.


그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는 의심, 의단(疑團)뿐이어야 해. 그래야 그것이 옳게 되어 가는 거여.


처음에는 자꾸 하면 잊어버리고 '이뭣고?'해도 망상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망상이 일어나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만인 거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따라 주지를 말어'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그놈을 따라가지 말어. 따라가다 보면은 안 되는 거여.

따라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좋은 생각이 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뿐인 거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이 그 속에 다 들어있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화두 한 번 들은 속에 다 들어 있다.



활구참선법, 활구참선법은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용궁에 다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용궁에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한 것은 없다. 고조사(古祖師)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것이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곽시쌍부(槨示雙趺)와 다자탑전에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게 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이거거든.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뭔 말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저가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염불 아미타불을 불러야 극락세계에 가지, 말세 중생은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해서 참선 화두 해봤자 되지도 않어. 관법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해야 한다. 법화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려서 이것 조금 해보다 그것도 또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저것 좀 해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뭣고~?'(37분41초~55분39초)




(4/4)----------------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우리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는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사람사람이 다리 아래는 청풍이 불더라. 지금 봄이 되어서 밤이 되면 환히 달이 밝고, 우리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분다 이거거든.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 앞에만 달빛이 비치고, 특별한 사람 앞에만 청풍이 불어주는 것이 아니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빛은 한결같이 비치고, 맑은 바람은 한결같이 불어오더라 이거거든.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거울,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그 거울은 무슨 거울이냐?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나타나고, 짐승이 오면 짐승이 나타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거울 앞에 오면은 다 조금도 숨김없이 있는 고대로 그 거울 앞에 나타난다 그말이여.


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중생은 '희다, 검다, 누르다'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분별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서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마음이 동요되어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 망상이 벌어져 가지고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비추는 그 거울을 갖다가 때려 부셔 버려.

그래 가지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그 거울 자체도 자취가 없도록 다 없애버리면, 일성제조(一聲啼鳥)가 상화지(上花枝)더라.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가더라.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어떤 분이 산승(山僧)에게 "『선가귀감』이나 그밖에 어떤 그 어록(語錄)이나 경서(經書)를 의지해서 차례차례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정한 그 경책이나 어록이나 그런 거를 의지하지 않고 올라와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니까 밤낮 한 얘기 도로 하고, 도로 하고 해서 그러니 그거 보단 어느 한 경책에 의지해서 주욱 하면 중복되지 않고 좋지 않겠느냐?" 그러한 충고를 간접적으로 해 왔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설해야 할 어떠한 법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법(法)은 우리 법보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신 전강(田岡) 대선사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 이상 더 법문 들을 것이 없고, 그 이상 더 설할 법이 없습니다.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간혹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 있는 어떤 설화나 그런 것을 가끔 인용하기는 하지만, 듣고 보면 내나 '이뭣고? 열심히 하라' 그 말이거든.


'에이, 그 백번 가야 그 소리할 바에는 가지 말자' 그래 갖고 오지 않고 여행 가고, 골프 치러 가고, 수영장에 가고, 등산에 가고, 철철이 기후 따라서 해수욕 가고, 그런 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산승은 다 알고 있습니다.

'가봤자 밤낮 한 생각 단속하고 밤낮 이뭣고? 하라는 거, 그 소리는 용화사까지 이 교통지옥 속에 어렵게 갈 것이 없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으면 되는 거, 뭐하러 또 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또 안 오셔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추우나 더우나 그 어려운 교통 혼잡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서 쉬지 않고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시고, 이 서울 인천뿐만이 아니라 저 지방에서도 이렇게 오시고.

그 괴로운 것을 무릅쓰고 오시는 그 신심, 그 신심 속에 그분은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할 아주 그 씨를 심었다고 할까, 아주 그 표(票)를 이미 끊어 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아니할 수가 없고, 그래도 와서 조실 스님 법문 듣고 또 산승의 말도 들어보면 그래도 한마디쯤은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리해서 또 한 달 동안을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또 법문을 듣고 또 산승의 경책해 드리는 말씀을 듣고, 같이 부처님께 삼정례(三頂禮)를 올리고 또 발원을 하고, 이리함으로써 자칫하면 풀어지고 해태하려다가도 그놈을 채찍을 가하는 좋은 계기를 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인들 어찌 산이나 바다나 그밖에 재미있게 놀고, 푹 일요일을 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오시는 그 뜻은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고행하신 뜻, 삼세제불과 팔만사천의 모든 보살과 역대조사들이 인생에 오욕락(五慾樂)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가하신 거룩한 뜻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일 전에 입하(入夏)가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더워지겠습니다.

몸조심하시면서 그 더위와 이 나의 신심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나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55분47초~69분12초)(끝)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여쭈어본 것, ①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②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해야 할까요?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③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까요?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수식관(數息觀) / 천태삼관(天台三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 남산 율종에 삼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 유식삼관(唯識三觀) 등의 관법(觀法)의 골수가 다 들어 있고 한 걸음 더 발전시킨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가장 수승한 관법, 그래서 경절문(徑截門),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한다.


육조 스님(638~713)에서 내려와 임제 스님(?~867)을 거쳐서 대혜종고 선사(1087~1163)에 의해서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는 간화선(看話禪),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간화선은 모든 근기의 중생이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 그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다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분은 그러한 여러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19. 6. 3. 21:23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94)—89년 7월 첫째일요법회 (56분)

(1/3) 약 22분. (2/3) 약 19분. (3/3) 약 16분.

(1/3)----------------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나무~아미타불~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어제 가지 끝에 그렇게도 곱게 피어 있던 꽃이 오늘 아침에는 벌써 땅바닥에 송이송이 떨어져 있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떨어진 꽃을 아까워하다가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을 나게 하는구나.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흥망성쇠에 무심(無心)하지 못해. 흥망성쇠에, 그 화려하게 피었다가 떨어져 버려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는 것이 어찌 그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누가 그대와 같이 무심할 수가 있겠는가.


꽃은 그렇게 화려하게 아름답게 향그럽게 곱게 피어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곱게 화려하게 피어 있다’하고 조금도 자랑하는 마음도 없고,

그렇게 화려한 꽃이 하룻밤 새에 그렇게도 떨어져 버려도 조금도 꽃 그 자신은 꽃이 떨어졌다고 해서 조금도 가슴 아파하거나 아까워하는 생각이 없어. 피어 있을 때도 무심하고, 꽃이 진 뒤에도 무심하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꽃을 감상하는 사람은 피어 있을 때는 '곱다'고 '아름답다'고 야단하다가, 그 꽃이 져 버리면 그렇게도 애석하게 생각해.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돈이 잘 벌리거나 높은 자리에 영전을 하거나 하면 온통 집안에 경사가 났다고 좋아하고 참 야단이다가, 재수가 없어서 살림이 망하거나 높은 자리에서 떨어져서 파면을 당하거나 하면 그냥 밥을 못 먹고 잠을 못 자고 그렇게 속을 상한다.

그러니 사람이 만물 가운데 영장(靈長)이라고 하지마는 식물인 저 꽃만도 못하구나. 이러한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



방금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통해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법에 대한 간곡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 그 한 대목만 들으면 다시 오늘 무슨 더한 법문을 들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그말이여.


활구참선을 해 나가는 데는 화두(話頭),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 가지고 공안을 타파(打破)해 버려. 의단(疑團)을 타파함으로써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달라 버리는 것인데.

화두 하나만을 제대로 참구할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참선을 바르게 하는 길이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화두를 참구하는 법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는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론이나 지식이나 분별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여.

그러기 때문에 화두를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슨 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또는 경전에 있는 부처님의 교리로 온갖 지식과 상식을 동원을 해서 이렇게도 따져 보고 저렇게 따져 보고 그래 가지고서는 깨달음, 참다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을 타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사용하지 않고 그 공안을 참구해.

그것이 참 아까 조실 스님 말씀과 같이 천하에 간단하고도 쉬운데, 실지로 해 나가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을 하고 있고 따지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무슨 그럴싸한 해답을 얻으면 '이것이 바로 깨달은 것이 아닌가' 스스로 착각을 하고 그러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 공부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죽비(竹篦)를 치고서 입선(入禪)을 들이고 떠억 결제 때에는 선방에서 그렇게 정진을 하지만, 참선이 꼭 죽비 치고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여.


물론 그것은 기본자세라 시간이 있을 때마다 따악 가부좌를 하고, 반가부좌를 하고 하는 것이 참 좋기는 좋지만,

꼭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의자에 걸터앉아서도 하고, 걸어가면서도 하고, 일하면서도 하고, 차 타고 가면서도 하고, 심지어는 진심(瞋心), 속이 상할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기쁠 때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하고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고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비간색(見色非干色)이요. 온갖 울긋불긋한 온갖 색상을 보되 그 색(色)에 간여하지 아니해. 간섭하지 아니하고. 그 색에 집착하거나 그 색상으로 인해서 분별심을 내지 않는다.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다. 온갖 소리를 듣되—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이웃에서 모다 떠들고 잡담하는 소리, 어린아이들이 소리소리 지르는 소리, 음악 소리, 새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온갖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그 소리에도 끄달리지 않는다 그말이여.


색성불의처(色聲不疑處)에, 온갖 색성(色聲), 색상과 온갖 소리에 의심 없는 곳이면 바로 그것이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다. 법왕(法王)이 계신 궁성에 도달한 것이다.


우리 중생은 눈으로 온갖 색상을 보면 거기에 끄달려 끌려가서 온갖 분별심이 거기서 일어나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든.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로 인해서—칭찬하는 소리, 욕하는 소리, 새소리, 음악 소리, 차 소리, 시끄러운 소리, 그 소리로 인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고 짜증을 내고, 때로는 기쁜 마음을 내고 슬픈 마음을 낸다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온갖 소리를 듣되 거기에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뭣고?’ 화두를 거각(擧却)한다.



황벽(黃檗) 스님께 여쭙기를 “어떤 것이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입니까?”


계급. 그 계급이라 하는 것은 소리를 귀로 듣거나, 온갖 색상을 눈으로 보거나,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을 상대할 때에 좋은 소리, 나쁜 소리, 고운 빛깔, 보기 싫은 빛깔, 온갖 그 차별 경계 그것을 여기서는 계급이라 그러는 거여.


“일체 차별 경계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거기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여쭈니까,

황벽 스님께서 이르시기를 “다맛 종일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고, 종일 행하되 종일 걸어가되 한 조각 땅도 밟은 바가 없어”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지 않는다’ 그 말은, 밥을 먹되 '맛이 있다 없다, 밥이 질다 되다’ 이러한 그런 생각이 벌써 일어나면 벌써 쌀을 씹고 있는 거여.

그런데 밥을 먹되 '질다 되다' 그런 생각도 없고, 맛이 있고 없는 분별심도 생기지 아니하고 다못 이 깨닫지 못한 경지에서는 화두의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종일 걸어가되 한 쪽, 조그만 한 쪽의 땅도 밟지를 안 해.

어떻게 걸어가는데 땅을 밟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땅을 밟고 걸어가되 ‘땅이 평편하다 울퉁불퉁하다’ 그러한 일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러면 그것이 '종일 걸어가되 한 조각 땅도 밟지 않는다' 그말이여.


이러할 때에 무인아상(無人我相)이여.

‘내’라 하는 생각, '내가 지금 걸어간다'는 생각도 없고,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다'는 생각도 없어. 이것이 인아상(人我相)이 없어.


종일불리일체사(終日不離一切事)하되  불피재경혹(不被諸境惑)이여.

종일토록 일체 사물을 여의지 아니해. 일체사를 여의지 안 하되 일체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해서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한다 그말이여.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귀를 막고, 모든 모양이 뵈기 싫다 해서 눈을 막고 그런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다 보고 귀를 막지 않고 귀를 열어 놓되, 보되 본 바가 없고 듣되 들은 바가 없어. 다맛 화두에 대한 의단만이 독로하도록 자꾸 잡드리를 해 나가는 거여.

종일토록 일체 일을 여의지 아니하되 일체 경계에 현혹된 바가 없어. 이렇게 되어야 이것을 바로 「자재인(自在人)」이라고 한다 그말이여.


우리는 완전한 자재인이 될 수는 없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완전한 자재인은 될 수 없지만 자꾸 화두를 거각하고 또 화두를 거각하고, 깜박 잊어 버리면 또 챙기고, 놓쳐 버리면 또 챙기고, 자꾸 챙기고 챙겨서 챙기다 보면 나중에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독로하게 된다 그말이여.


이렇게 하면 이것이 바로 일체, 밥을 먹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똥을 누게 되면 똥을 누고, 어디를 가야할 일이 있으면은 걸어가기도 하고 차를 타고, 일이 있으면 밭도 매고 빨래도 하고 이러되, 그러한 가운데에도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면 경계에 흔들림을 받지 않게 된다.


시시때때로 생각 생각이 일체상(一切相)을 보지 마라. 일체상을 보지 말고 과거 · 현재 · 미래, 이 삼제(三際)를 인증하지 말아라.

앞으로 지나간 과거도 가는 것이 없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현재에 대해서도 주착(住着)함이 없고, 미래에 대해서도 오는 것을 생각하지 마.


뭐하러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고, 또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당겨서 생각하고, 현재 닥쳐 있는 일에 무엇을 거기에다가 집착을 해서 생각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지나간 일도 생각할 것 없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현재 닥쳐 있는 모든, 닥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기에 생각을 두지 말고, 오직 화두만을 거각해라 이거여.


그래 가지고 안연단좌(安然端坐), 편안히 단정하니 앉아서 임운불구(任運不拘)여. 일체 것을 터억 다 놔 버려. 긴장도 다 풀어.

마음의 긴장도 다 풀어 버리고, 몸뚱이의 긴장—어깨의 긴장도 다 풀어 버리고, 목에도 힘을 주지 말고, 눈에도 힘을 주지 말고, 다못 지긋이 어금니를 물고 입을 ‘한 일(一)’자로 따악 다물고, 눈은 평상으로 뜨고. 그리고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생각 생각이 단속을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걸어갈 때나, 머물러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어묵동정(語默動靜), 무슨 필요가 있어서 말을 할 때나, 또 말을 안 할 때나, 몸뚱이를 움직일 때나, 또는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있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간절히 간절히 단속을 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1분 1분을 그렇게 단속을 하고 노력을 해 갈 것이다.(처음~21분22초)




(2/3)----------------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그 천 명, 만 명 가운데 겨우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서너 사람, 그런 정도 밖에는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 왜 그러냐?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노력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조금 하다가 말다가 그렇기 때문에 한다고 해도 정말 도를 이룬 사람은 그렇게 극소수에 지내지 못한다 이거여.


이 공부가 어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공부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니여. 또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여.

다못 그 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말이여.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다가 말다가, 조금 할라고 마음먹었다가도 금방 딴 생각[別念]이 나면 그리 끄달려 가 버리고, 조금 무슨 일이 있으면 그리 끄달려 버리고,

앉어서 ‘이뭣고?’하다가 서면서 잊어 버리고, 금방 화두를 들고 있다 무슨 소리 들으면 거기에서 화두가 놓쳐 버리고.

놓치자마자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해야 할 텐데 놓치면은 놓친 데에서 그냥 그리 끌려가 버리고, 경계에 끄달려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말이여.


황벽 스님은 정말 이 공부를 할려고 마음을 먹으면 정말 여기에다가 몸과 목숨을 바치고 정말 간절하게 그렇게 해야지, 공부한답시고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없이 그렁저렁하면은 수앙(受殃)이 유일재(有日在)다. 재앙이, 곧 재앙이 닥쳐온다.


어떻게 닥쳐오냐?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이만할 때 철저히 해 놓지 아니하면 금방 늙어서 병들어서 곧 죽게 된다 그말이여.


죽게 되었을 때, 그때 그 생사(生死)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여?

눈 한번 감으면 내생(來生)인데,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인데, 그때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서 ‘내가 참선을 했습니다’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선을 그렇게 했으면은 그 깨달은 도리를 일러 봐라. 생사 없는 도리를 한번 일러 봐라’할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이냐?

그러기 때문에 금생에 이 생사 문제를 결정코 요달(了達)을 할 것이니라.


금생에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누가 대신해서 그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고통을 대신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은 진즉 이 문제를, 이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시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한결같이 하신 말씀이 '생사, 생사, 생사는 무상(無常)한 것이다'

어쨌든지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시간을 아껴서 정진을 하도록 간곡히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생사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면 우리의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데에서 우리의 생사윤회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견색시증시(見色時證時)요  문성시증처(聞聲時證處)니라

나무~아미타불~

염념석가출세시(念念釋迦出世時)요  보보미륵하생처(步步彌勒下生處)니라

나무~아미타불~


견색시증시(見色時證時)요. 모든 색상을 보는 그때가 그것이 바로 생사 없는 참나를 증득하는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時證處)다. 무슨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를 듣는 그 찰나가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을 곳이다.


그래서 눈으로 무슨 색상을 볼 때 그 찰나가 바로 생사 없는 진리를 증득하는 때이기 때문에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이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참선(參禪) 안 한 사람은 그 무슨 색상을 보는 그 찰나가 벌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에게 딱! 쇠고랑에 채여서 끌려가는 그 찰나고,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은 바로 무슨 색상이 눈에 띄자마자 ‘이뭣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바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바로 그 시간이다 그말이여.


일체 소리가 귀에 들릴 때에도, 귀를 통해서 일체 소리를 듣더라도 바로 그 듣는 그 찰나에 거기에 그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로 인해서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말고 그 소리가 귀에 이르자마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다그쳐 가면 생각 생각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곳이고, 걸음걸음이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신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탄생하셨지만 이와 같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 생각 생각 그 찰나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고,

비록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출생하신다고 경전에는 쓰여 있지마는, 진짜 살아 있는 미륵 부처님은 우리가 걸음걸음이 ‘이뭣고?’ 딱! 챙기는 그 찰나에 바로 미륵불이 탄생하신 곳이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실천해 나간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목전(目前)에 모든 경계 속에,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계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쳐다볼 때에 자기의 얼굴이 보이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 분명한 그 얼굴이 다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얼굴에 화장을 하면은 거울 속에 얼굴도 화장을 했고, 얼굴을 찌뿌리면은 거울 속에 얼굴도 찌뿌리고, 얼굴을 슬프게 우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 있는 얼굴도 슬피 울고 있을 것입니다. 웃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면은 거울 속에 영상도 웃고 있을 것입니다.


거울만 거울이 아니라, 이 허공계, 동서남북 사방 사유 상하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끝없이 펼쳐 있는 이 허공이 하나의 커다란 거울인 것입니다. 이 거울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거울인 것입니다.

그 거울 속에는 태양도 있고 달도 있고 별도 있고 지구도 있고, 사람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가지가지 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비춰져 있습니다.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돌도 있고 짐승도 있습니다.


그러한 모양들이 실지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지만 그것은 실(實)다운 상(相)이 아니고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추어져 있는 허망한 영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영상을 실지로 있는 실(實)다운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거울을 하나 사다가 부인에게 선사를 했습니다. 그 부인이 좋은 것을 가지고 왔으니까, “정말 당신을 위해서 비싼 돈을 주고 아주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그러면서 주길래 그걸 쳐다봤더니 아! 그 속에서는 그 거울 속에 아주 예쁜 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남편한테 “좋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더니 중국에 가서 무슨 여자를 하나 꿰차고 왔다”고 막 신경질을 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시어머니가 하도 시끄러워서 “아니 왜 그러냐? 만리 타국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왜 오자마자 싸움질을 하냐?” 며느리를 대단히 꾸짖었습니다.

그 며느리가 울면서 “아니에요, 어머니. 중국에 갔더니 어디서 계집년을 뀌어차고 왔지 않습니까?”


“기집이 어디가 있냐?”

“여기 있습니다” 거울을 주니까 시어머니가 그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아, '젊은 년을 뀌어찼다'고 하더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구나”


시아버지가 “아니, 뭘 그렇게 시끄럽게 하는고?”

“아, 중국에 갔다 왔더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시아버지한테 보이니까 “아! 뭔 늙은 년을 데리고 와. 늙은 영감탱이를 데리고 왔구만”


거울이란 것을 한 번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은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기의 얼굴이 비친 줄을 모르고,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왔다니, 늙은 망탕구를 데리고 왔다니, 또는 영감을 데리고 왔다니, 이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깨면 깨뜨릴 수 있는 그 거울만 거울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마는, 그까짓 거울은 별로고 진짜 우리가 눈 여겨서 잘 알아야 할 거울은 무변(無邊) 허공계(虛空界), 이 허공계가 하나의 큰 거울인 것입니다.

그 거울을 바로 볼 줄 알고, 바로 사용할 줄 알아야 정말 이 우주법계에 펼쳐 있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을 바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 거울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자기의 참나, 참나의 참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게에서 사 오는 그런 거울은 우리 이 껍데기밖에는 보이질 안해.

그러나 이 허공계, 무변 허공계를 체(體)로 하는 그 거울을 바로 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거울을 어떻게 보느냐?

참으로 옳게 보는 법은 가르켜 줄 수가 없지만 우선 여러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을 가르켜 드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이 큰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춘 달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그 달도 바로 자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허공 속에 비춰 있는 꽃도 하나의 식물로써 존재하는 꽃이 아니라 그 꽃도 자기의 모습이 그 거울 속에 비춰져 자기에게 반사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면 달이나 해나 별 저런 꽃 나무 그런 것만이 꼭 그 허공계에는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도 거기에는 비춰. 아내의 얼굴도 거기에 비추고, 남편의 얼굴도 거기에 비추고, 애인의 얼굴도 비추고, 미운 사람의 얼굴도 비추고, 친구의 얼굴도 비춰.

그런데 그 아내의 얼굴이나 남편의 얼굴이 남편의 얼굴이요 아내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얼굴이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아내의 얼굴로 이렇게 비추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 달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어. 그 자체가 밝되 밝다는 생각도 없고, 그 달이 가리워지되 가리워져서 안 좋다고 하는 생각도 그 달 자체는 없는 거여.

그런데 그 달을 보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차 있을 때에는 그 달을 보면은 기쁘고 저절로 노래가 나와. 내 마음이 슬프면, 그 슬픈 눈으로 보면, 슬픈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이 그렇게도 하염없이 슬퍼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말이여.


그러니 기쁜 사람의 눈에는 그 달이 밝고 좋은 달로 비출 것이고, 슬픈 처지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 달을 보면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러니 그 달이 어찌 나의 마음이 아니고 나의 모습이 아니겠느냐.(21분23초~40분2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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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떤 내 집에 손님이 오셨을 때도 내 집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오시는 손님 반갑고 그냥 잘 대접을 하고 싶은데, 내 집에 걱정스러운 일이 있거나 언짢은 일이 있어서 속이 상할 때에는 좀 반가운 손님이 와도 별로 반갑지 않다 그말이여.

그러니 어찌 그 손님에게 반갑고 반갑지 않는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내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볼 때에도 아내의 마음이 기쁘고 흐뭇할 때에는 남편을 보면은 그냥 반갑고 음식도 맛있게 해 드리고 싶다 그말이여.

그런데 속에 짜증이 나고 부화가 날 때에는 남편이 와도 반갑지도 않고 맛있는 음식도 잘 채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안 난다 그말이여.


그러면 남편은 아무 속도 모르고 하루종일 직장에서 종일토록 일하고 아주 피로해 가지고 돌아오는데 아무 까닭 없이 아내가 반가워하지도 않고 저녁도 그냥 그럭저럭 있는 반찬 갖다가, 먹거나 말거나 갖다가 놔두고 만다 그말이여. 남편은 까닭을 몰라.


그런데 지혜 있는 남편 같으면 ‘아하! 아내가 무슨 속상한 일이 있구나’ 이리 생각하고 우선 밥부터 먹고 그리고 아내에게 ‘무엇이 속상한 일이 있었소?’ 그렇게 묻고서 좀 잘 그 원인을 알아서 말을 듣고서 잘 위안을 하고, ‘아! 그러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종일 일하고 온 사람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또 그냥 막 욕을 퍼붓고 싸움을 걸면 그냥 큰 싸움이 될 거다 그말이여.


친구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 남매간에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래.

요새는 집안 각 가정마다 아들딸들의 교육 문제, 공부 문제, 대학 고등학교 모다 입학 문제로 해서 모두 신경을 쓰고 걱정이 태산 같지만,


이러한 문제도 허공에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비춘 도리를 알고서 지혜롭게 처리하고 딸과도 터놓고 얘기를 하고, 아들과도 터놓고 대화를 해서 그 아들딸 마음속에 있는 문제점을 부모가 관심 깊게 파고들어서 그것을 정말 지혜롭게 처리를 해 나가면 문제아도 발생을 아니할 것이고,

또 아들딸 보고 '공부해라, 해라' 안 해도 차츰차츰 공부를 잘하게 될 거고, 나쁜 친구들하고 사귀지도 아니할 것이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찍 돌아와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다.


공부를, 보살님네나 거사님네나 모다 이 참선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가정 문제가 복잡하고 걱정 근심이 많으면 아무래도 이 공부에 지장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이렇게 볼 줄 알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고 풀라야 풀 수 없는 대단히 언짢은 관계도 아주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해결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불법의 인과(因果)의 법칙을 잘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그 사람의 허물로써 미워하고 원망하고 몰아대지 아니하고,

모든 다른 사람의 허물이 바로 그 허물이, '나의 허물이 그 아내를 통해서 나에게 되돌아온 영상이다. 나의 모습이다'고 하는 도리를 믿고 그렇게 해결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과법만을 철저히 믿기만 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퍽 수월할 것입니다.

인과법만 철저히 믿으면 법률도 필요 없게 됩니다. 경찰 형사도 필요 없게 되고, 모든 사람이 다 이 인과의 법칙만을 믿게 되면 재판도 필요 없고 형무소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은 먼저 인과의 법칙 먼저 철저히 믿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게 되면 참 우리의 남을 원망할 일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일도 없고, 부모를 원망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은 바로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상대방과 원결(怨結)을 맺게 되고 자기 자신을 점점 괴롭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옥, 다 사람들은 지옥을 꺼려 하지만 자기 마음이 편안칠 못하면 이 몸뚱이 살아 있으면서 이미 지옥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지옥을 없애야 앞으로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승에 가더라도 지옥에 안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자꾸 지옥에 들어가서 사는 연습을 많이 해 논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익힌 데로 가거든. 우리 육도윤회(六道輪廻)는 익힌 데로 가는 것입니다.


술이 잔뜩 취해 가지고도, 정신없는 가운데에도 자기집은 어지간하면 다 찾아옵니다. 왜 그러냐?

날이면 날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집에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지옥 연습을 많이 해 논 사람은 지옥에 가기가 아주 수월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천당이나 극락에 생활을 익힌 사람은 숨이 떨어지자마자 극락세계나 천국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인 것입니다.


앞으로 날씨가 삼복에 접어들면서 장마철을 맞이하게 됩니다. 더웁고 무덥고 불쾌지수가 높아가겠지만 그러한 불쾌지수로 인해서 언짢은 생활을 하시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더욱 ‘이뭣고?’를 열심히 하십시오.

몸을 단정하니 척추를 펴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속이 상하고 답답하고 그럴 때일수록 오히려 이것을 더 열심히 박차를 가해서 더 하시라 그말이여.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이 공부를 하십시오. 그러면 그 어려운 일로 인해서 더 신심이 돈독해지고 더 불법을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는 훈련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에는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고 괴로움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로 오셨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이 불법에 인연을 심어서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아 났습니다. 이 사바세계는 도(道)를 성취하기 좋은 곳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은 하나의 지혜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쇠가 불 속에 들어가고 물 속에 들어가서 쇠망치를 얻어맞지를 않으면 그 쇠는 훌륭한 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원망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포기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신심을 가다듬고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내세당연한만단(來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今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간곡히 일러드린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내세(來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내생에 그 펄펄 끓는 지옥에 빠져서 ‘하! 내가 그때, 용화사에서 송담 스님 법문을 들을 때, 그때 왜 열심히 참선을 안 했던가?’ 그때 가서 후회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가지 광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7월 25일부터서 28일까지 3박4일 동안 중고등부 학생들, 김제 금산사로 수련대회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8월 7일부터 8월 9일까지 2박3일간 어린이 학생부는 여주 신륵사로 수련대회를 떠납니다. 회비는 중고등부나 어린이부나 칠천 원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학생들이 그 수련대회 참석을 하도록 주선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가서 3박4일 또는 2박3일간 스님네와 같이 그 청정도량에 가서 예불도 하고, 법문도 듣고, 참선도 하고 또 서로서로 반 활동도 하고, 그런 물 좋고 산 좋고 또 경치 좋은, 좋은 공기 청정도량에 가서 잠시 동안 생활을 하고 오면 그동안에 쌓였던 알고 모르는 사이에 쌓였던 온갖 스트레스도 다 풀어 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집에서 공부하라고 억지로 붙잡기보단 한 번씩 그렇게 보내 놓으면 좋은 친구도 사귀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공부를 해야 공부도 잘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광고 말씀 드릴 것은 여기 일주문 밖에 큰길이 있는데, 그 길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데 중간에 산이 있어서 경사가 져 가지고 저쪽에서 요쪽이 안 보이고 이쪽에서 저쪽이 안 보입니다. 그래 가지고 차 사고도 여러 번 있고 또 사람도 다쳐서 교통사고가 일 년에 여러 건이 발생을 합니다.

그래서 그걸 시(市)에다가 그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달라고 진정서를 넣을려고 그럽니다. 그 진정서를 넣어야 시에서도 그것을 알고 조만간 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 신도님네들이 절에 왔다갔다 하시는 길에도 교통의 위험성이 없고, 또 우리 신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시민들과 다니는 차량들도 절 앞에서 그런 사고가 나니까 참 가슴 아픈 일이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정서를 내는데 여러 신남신녀, 여러 거사님네들 보살님네들 서명 날인이 필요합니다. 성함과 주소를 적고 거기에 도장이나 지장을 찍어주시면 그것이 이 도로를 평탄하게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양식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서류에 서명 날인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40분25초~55분5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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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작일지두개난만~' ;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진각혜심) '낙화(落花)' 참고.

*무심(無心)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모든 분별이 끊어져 집착하지 않는 마음 상태. 모든 번뇌와 망상이 소멸된 상태.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게송) '견색비간색~' ; 『금강경오가해』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야부 게송 참고.

*법왕(法王) : [범] dharmarāja  부처님은 진리, 곧 법을 가장 밝게 깨치시고, 법을 걸림 없이 쓰시고 법을 널리 가르쳐서 법에 있어 제일 높은 어른이므로, 「법의 임금」이라고 존칭한 말이다。또한 모든 세속 임금들에게도 큰 스승이 되고, 온갖 성인들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므로 법왕이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배휴와 황벽 스님의 문답 ; 『전심법요(傳心法要)』 (당唐의 배휴가 황벽 스님의 법문을 편집한 책)

問, 如何得不落階級.

師云, 但終日喫飯, 未曾咬著一粒米. 終日行, 未曾踏著一片地. 與麼時, 無人我等相, 終日不離一切事, 不被諸境惑, 方名自在人.


“어떻게 하여야 계급(階級 : 차별 경계)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다맛 하루 종일 밥을 먹되 한 톨의 쌀알도 씹은 바가 없고, 하루 종일 걷되 한 조각의 땅도 밟은 바가 없다. 이러한 때에 아상(我相)·인상(人相)등의 견해(相)는 없고, 하루 종일 모든 일을 하면서도 그 경계에 현혹(眩惑)되지 않아야 비로소 ‘자재한 사람(自在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更時時念念不見一切相, 莫認前後三際. 前際無去, 今際無住, 後際無來. 安然端坐, 任運不拘, 方名解脫. 努力努力.


다시는 때마다 생각 생각에 일체상(一切相)을 보지 말고, 앞뒤의 삼제(三際 과거·현재·미래)를 인정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는 머물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편안하고 단정하게 앉아 주어진 상황에 되는 대로 맡겨 얽매이지 않아야 비로소 ‘해탈(解脫)’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하라.


此門中千人萬人, 祇得三箇五箇. 若不將爲事, 受殃有日在. 故云, 著力今生須了却, 誰能累劫受餘殃.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인(千人)·만인(萬人)이 있지만 겨우 서너, 너댓 사람만이 깨달음을 얻는다. 만약 이 도 닦는 일을 않는다면, 재앙을 받을 날이 있으리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금생에 반드시 끝내야 한다. 그러면 누가 오랜 세월(累劫) 남은 재앙을 받겠는가?’라고 하였다”

*계급(階級) ; ①사물을 대립적으로 분별하는 망상. 인·아(人我), 유·무(有無), 선·악(善惡) 등으로 분별하는 의식을 말한다. ②수행의 점차적 단계. 선종에서는 점수(漸修)를 뜻하며, 반대로 계급이 없음은 돈오(頓悟)를 말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인아상(人我相) ; 나와 남을 갈라놓고,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남을 경시하는 마음.

*자재인(自在人) ; ①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은 8대자재(八大自在 : 8종의 부처님의 신비한 힘)의 덕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 이름이 붙었다. ②아미타불.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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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요달(了達 마칠·완전히·밝을 료/통달할·이룰 달) ; ①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밝게 통달함. ②깨달음에 도달하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분별(分別) ; ①대상을 차별하여 거기에 이름이나 의미를 부여함. 대상을 차별하여 허망한 인식을 일으키는 인식 주관의 작용. ②구별함. ③그릇된 생각.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허공계(虛空界) ; ①진여(眞如)를 말함. 무색무형이고 일체 만유를 포괄하는 것이 허공같기 때문. ②허공의 영역[界]이라는 의미.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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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원결(怨結 원망할 원/맺을·번뇌 결) ; 원망(怨望)의 마음이 얽혀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함.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법문 내용]


(게송)작일지두개난만~ /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 (게송)견색비간색~ / 황벽스님의 법문. '어떤 것이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는 도리입니까?'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시간을 아껴서 정진하라 /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


(게송)견색시증시~ /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모든 경계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얼굴 / 허공이라고 하는 거울 속에 비추어져 있는 허망한 영상 / 무변 허공계를 체(體)로 하는 그 거울을 바로 보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참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 천당이나 극락이나 지옥이나 살아 있는 동안에 익힌 데로 태어난다.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 수승한 법이고, 참선 가운데에도 활구참선이야말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 가장 지름길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수행하는 사람은 색상을 보되 거기에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온갖 소리를 듣되 거기에 분별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고 바로 그 소리를 듣자마자 ‘이뭣고?’ 화두를 거각(擧却)한다.


불법 문중(佛法門中)에서 천 사람 만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겨우 세 사람이나 다섯 사람, 서너 사람, 그런 정도 밖에는 도(道)를 깨달은 사람이 없다. 왜 그러냐?

안 한 것이 아니라 하기는 하되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노력을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조금 하다가 말다가, 그렇기 때문에 한다고 해도 정말 도를 이룬 사람은 그렇게 극소수에 지내지 못한다.


이 공부가 어려워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 공부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니여. 또 공부할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여. 다못 그 한 생각이 간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의 생각,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데에서 우리의 생사윤회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우리의 생사윤회를 해결 짓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일체 소리가 귀에 들릴 때에도, 귀를 통해서 일체 소리를 듣더라도 바로 그 듣는 그 찰나에 거기에 그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로 인해서 분별심(分別心)을 내지 말고 그 소리가 귀에 이르자마자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다그쳐 가면 생각 생각이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곳이고, 걸음걸음이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신 곳이다.


'정말 모든 것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바로 내 마음이 비추어서 내게 돌아온 것이다. 특히 상대방에 모든 허물이 나의 허물의 그림자다' 이렇게 볼 줄 알면 많은 어려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고 풀라야 풀 수 없는 대단히 언짢은 관계도 아주 수월하게 풀어 버리고 해결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18. 9. 18. 07:18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85)—1989년 3월 첫째 일요법회 (화두 불명 십선계 법회) (64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20분.

(1/3)----------------


백천경권송여사(百千經卷誦如沙)하되  심지허로풍리사(心地虛勞風裡沙)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조주공안상(何似趙州公案上)에  번신일척파사진(飜身一擲破沙塵)고

나무~아미타불~


백천경권송여사(百千經卷誦如沙)하고, 백천경권(百千經卷), 팔만대장경. 백 개, 천 개의 경권을 외우기를 모래수와 같이 그 많은 경전을 외운다 하더라도.

심지허로풍리사(心地虛勞風裡沙)다, 마음속이 공연히 복잡하고 수고로워서 마치 바람 속에 모래 먼지가 휘날리는 거와 같다.


하사조주공안상(何似趙州公案上)에, 어찌 조주 공안—조주 무자(無字)나 판치생모(板齒生毛)나 조주 공안상에,

번신일척파사진(飜身一擲破沙塵)이다, 몸을 뒤쳐서 한번 던져 가지고 그 모래알과 같은 티끌을 한바탕 타파해 버릴지니다. 어찌 타파해 버린 것만 같을까 보냐.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정법(正法)은 숙세에 깊은 인연을 심지 아니한 사람은 참 믿기가 어렵고, 겨우 믿어도 참 이것을 철저하게 실천하기가 어려워.

뭘 좀 많이 배우고 지식이 있는 사람은 자꾸 경전이나 무슨 어려운 경전 같은 것을 해설하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교리적으로 따지고. 그렇게 해서 속으로 알아진 것이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자랑할 것이 있어야 무슨 불교를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생각이 들고.


탁! 경을 갖다가 때려 덮어버리고 오직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 화두 한마디, 이 의단(疑團) 하나에 몸과 목숨을 거기다 내동댕이 쳐 봐.

모기란 놈이 쇠로 된 황소 등어리에 몸뚱이 채 처박고 들어가듯이 이 무자(無字), ‘이뭣고?’나 시삼마(是甚麽)나 이 화두 의단, 이 뭉텅이 하나 속에 나의 모든 것을 거기다 갖다 탁! 뭉쳐서 던지고 들어가는 이러한 최상승법.

이거라야 화두(話頭) 한번 드는 가운데에 백천 가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거기에서 떨어져 나가고 천 가지 만 가지 업(業)과 마구니가 한마디 의심 앞에 어리대지를 못하고 물러서게 되는데.


참! 이 참선법(參禪法)이 믿어지기만 해도 숙세의 인연이요, 그놈을 믿고 거기 철저하게 대드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보통 정법에 인연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선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방금 기사년 3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활구참선에 대한 법문을 참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알기 쉽게 그렇게 간곡히 설해 주시는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불명(佛名)을 신청하신 분이 불명을 타고, 또 화두를 신청하신 분이 화두를 타고, 또 이 불명을 신청하신 분에게 오계, 십선법을 설해 드리는 날입니다.


계(戒)에는 오계가 있고, 처사 오계, 사미 오계가 있고 또 비구 이백오십계, 비구니 오백계 그리고 보살계에는 십중대계와 48경계가 있고. 이렇게 많은 여러 가지 종류의 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선문중(禪門中)에서는 십선법, 십선계(十善戒)를 닦아가지고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도솔천 내원궁에는 앞으로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 부처님으로 이 염부제(閻浮提)에 출생하실 미륵(彌勒) 부처님이 현재 보살의 지위로 도솔천 내원궁에 지금 대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지 이 십선계를 잘 닦으면서 활구참선, 이 활구참선 최상승법을 열심히 닦어.

이게 닦아가지고 도솔천 내원궁에 탄생하기를 항상 기도를 하고 축원(祝願)을 하고 발심(發心)을 하면 우리 숨이 뚝 떨어지자마자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탄생을 해 가지고 미륵 보살님을 친견하고.

그 미륵 보살님 회상(會上)에서 계속해서 법문을 들으면서 참선을 하다가, 거기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서 미륵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실 때, 미륵 부처님을 모시고서 이 땅에 같이 하생(下生)을 해 가지고 미륵 부처님의 제자로서 미륵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거기에 미륵 부처님을 도와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그러한 원(願)을 세워 왔습니다.


우리 선종(禪宗)에서는 그래서 옛날부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않고 십선계를 잘 지키면서 참선을 해 가지고 도솔천 내원궁에 탄생하기를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선계가 무엇이냐?

몸으로 세 가지, 또 입으로 짓는 죄 네 가지, 또 뜻으로 짓는 죄가 세 가지, 이렇게 해서 합해서 열 가지인데 이것을 십악(十惡)이라 그러는데.


그러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죄악은 무엇이냐?

산목숨을 죽이는 거, 둘째 도둑질하는 거, 셋째 사음을 하는 거. 이것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죄악이다.


그다음에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는 무엇인고?

망어(妄語), 거짓말하는 거. 기어(綺語), 이리저리 진실치 못하게 꾸며 대는 거. 셋째, 두 가지 말로 사람을 이간(離間)을 붙여. 이간을 붙여 가지고 간에 가 붙었다 쓸개에 가 붙었다 그러면서 남을 속이고 그래가지고 아첨을 하고 해가지고 그런 것이 '두 가지 말[兩舌]'이다.

넷째에 가서 악구(惡口), 욕하는 거여. ‘호랭이 물어 갈 놈’ ‘벼락 맞을 놈’ 온갖 입에 못 담을 고약한 욕을 아주 남에게 부해가 나서 남에게도 하지만 자기 집안에 애들한테도 꺼떡하면 입에 습관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막 욕을 퍼붓는다 그말이여. 그 욕이 입으로 짓는 네 가지와.


그다음에 뜻으로 짓는 세 가지는 탐, 탐심(貪心), 욕심내는 거. 또 진심(瞋心), 골내는 성내는 거. 셋째에 가서 어리석은 마음[癡心]을 내는 거.

그래서 몸으로 세 가지, 입으로 네 가지, 뜻으로 세 가지, 합해서 이것이 열 가지인데 이것을 십악이라 그러는 것이고.


그 십악을—살생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죽어 가는 목숨을 살려 주면 요것이 '착할 선(善)'자 선이 되고, 도둑질을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물건을 남에게 보시를 하면 이것이 또 선(善)이 되는 것이고.

또 음행을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항상 청정하게 갖는다 말이여. 그러면 몸으로 짓는 삼악이 삼선으로 변하는 거고.


또 거짓말하고 꾸며 대고, 또 두 가지 말로 이간질하고 또 욕하는 대신 항상 진실한 말을 하고 또 꾸며 대지 않고 항상 말을 했다 하면은 실다운 말을 하고 또 두 가지 말로 이간질을 하지 아니하고 항상 진실한 말, 믿을 수 있는 말을 해서 모든 사람을 서로 화합을 시키고.

또 욕을 퍼붓는 게 아니라 항상 부드럽고 자비스러운 말을 써 버릇하면, 곱고 아름답고 자비스럽고 그런 말을 쓰면은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가 아니라 네 가지 선이 되는 것이고.


탐심을 내거나 진심을 내거나 치심을 내지 않고서, 탐심 대신 항상 분(分)에 지나친 욕심을 내지 아니하고.

이 탐심은 물질적인 것만 탐심이 아니라—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주관적으로 이기적으로 독선적이고 그러지를 않고, 항상 내 고집을 버리고서 항상 빈 마음으로 남의 의견을 존중히 여기고, 남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래야 하는데, 자기 뜻대로 안되고 제 고집 세우다가 뜻대로 안되면 성을 내거든. 그래서 자기 뜻대로 할라고 한 것이 벌써 그것이 탐심이여.


자기 뜻대로 고집을 내세우다가 상대방이 들어주지 않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은 범부(凡夫)는 전부 다 진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심을 내가지고 입으로 퍼붓고 속으로 성내고 뾰루퉁하고, 그리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부부간에도 그렇고,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고, 형제간에도 그렇고, 고부간도 그렇고, 친구 간도 자기 의견을 따라 주지 아니하면 그냥 성을 내고 상대방을 원수로 여긴다 그말이여.


내가 내 고집을 세우고 내만 옳다고 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만 할라고 그러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여. 상대방은 또 상대방대로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라고 고집을 세우면 백사불성(百事不成)이여. 화합이 되지를 않은 거여.

그래가지고 싸워가지고 나중에는 저도 망하고 나도 망하고, 되는 일이 없고, 집안도 파괴가 되고, 당도 파괴가 되고, 사회 국가도 파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말이여.


나의 의견이 소중하면 상대방의 의견도 소중한 것이고, 나의 생명이 소중하면 상대방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고, 나의 재산이 소중하면 상대방의 재산도 소중한 것이지, 제 것만을 위주(爲主)하고 제 것만을 내세우고 남을 갖다가 짓밟고 억누를라고 하면 가만히 있나요.

처음에는 조금 당하지마는 두 번 세 번 당하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상대방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모아가지고 대들면 결국은 사이가 벙그러져 버리고, 아무리 다정한 친구도 원수가 되고 말아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탐심을 내지 아니하고 오히려 양보하고, 물질도 양보하고, 모든 주장도 한 걸음씩 양보를 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서로 내 의견보다 상대방 의견이 좋으면 상대방을 또 따라줄 줄을 아는, 이렇게 되면 은 진심을 내지 않고, 진심을 내지 아니하면 서로 화합이 될 것이다 그말이여.


중생은 한 번 해 봐 갖고 안되고, 두 번 해 가지고 안되면 세 번쯤에 가서는 ‘아하! 내 주장만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렇게 깨달으면 될 텐데, 그걸 깨닫지를 못해.

평생을 제 주견(主見)만을 내세우고 자기 의견만을 존중하는 그 버릇을 평생을 그 고집을 가지고 산다 그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다.


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것 때문에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의 삼악도(三惡途)가 벌어진 것이여. 그 탐진치 삼독심을 휘두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위해서 준비된 세계가 축생이요, 아귀요, 지옥 세계여.

그래서 탐진치를 평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옥에 갈 차표를 딱 끊어 놓은 거와 같다 이거거든.


이렇게 해서 십악을 범하지 아니하고 그놈을 돌리면은 그것이 십선법이 되는 거여. 십선법을 행하면은 그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에 갈 표를 끊어 논 것이다 이거거든.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실 때 아주 그 제자 가운데에 나이는 많으면서 아주 바보 천치(天癡) 같은 제자가 한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經)이라든지 또는 게송(偈頌)이라든지 그런 것을 서로서로 외워 가지고 아침 저녁으로 그것을 모다 합해서 같이 외우기도 하고 그러는데.

다른 사람은 수백 마디씩 법구경이라든지 그 게송을 모다 외우는데 그 늙고 우둔한 비구는 그 게송을 한마디도 못 외와. 그래가지고 아주 바보 천치로 부처님 제자끼리도 널리 알려졌지만, 부처님 제자끼리만 알려질 뿐만 아니라 온 사위성 전체와 사위국 전 나라에 널리 소문이 났어.


아주 바보 천치 백치로 아주 소문이 났는데, 생긴 것도 농판 바보 같이 생겨 가지고.

그런데 모다 정말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사부대중(四部大衆)과 심지어는 어떻게 참 유명해졌던지 국왕 대신과 일반 시민까지도 그 바보라고 하는 것은 널리 알려졌더라.


그런데 그 형도 같이 출가를 했는데 형은 머리가 좋은데 동생이 그렇게 바보라. 그러니까 형이 너무 창피하고 그러니까 ‘이 바보 같은 것. 괜히 따라와서 출가한다고 해 가지고 나까지 망신을 시킨다’고 ‘너 집으로 가거라. 가서 빌어를 먹던지 말던지 집으로 가라’고 하니까, 참! 너무 자기 신세를 생각해 보니 기가 맥히다 그말이여.

그래서 참, 보따리를 싸 가지고 ‘천상 내가 여기는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형이 나를 저렇게 가라고 하니 오죽 했으면 나를 가라고 할까. 괜히 나 때문에 형까지 망신을 하고 그러니 차라리 집으로 가서 뭐 장사를 하던지 농사를 짓던지 집으로 가야겠다’ 하고는.(처음~21분2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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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참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고 슬퍼서 일주문(一柱門) 근처에 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떠억 정(定)에 들어서 관(觀)으로 살펴보시니까 아! 제자 하나가 나갈라고 그런단 말이여.

그래서 그걸 불러오게 해 가지고는 물어보니까 과연 “제가 바보라고 모다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또 형도 가라고 그러고, 내가 생각해도 3년이나 되었는데도 아무 게송 하나를 못 읊으니 저 같은 것은 여기 있어 봤자 공연히 부처님과 승단만 갖다가 망신을 주고 그러니 차라리 집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래. 그렇다면은 내가 일러줄 테니 내 시키는 대로 해라”


부처님께서는 너무너무 참 불쌍하고 가련해서, 그 울고 있는 모습이 너무너무 참 가련해서,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입을 꼭 다물고, 뜻을 딱! 결심을 세우고서 모든 그릇된 일을 행하지를 말면서 열심히 수행을 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느니라. 이 말을 계속해서 날마다 고것만 해라”해 가지고, 그 앉혀 놓고서 수십 번을 일러주었어.


“입을 다물고”

“입을 다물고”


“뜻을 세우고”

“뜻을 세우고”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며”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며”


“능히 이렇게 잘 수행한 자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다”


그 말을 수십 번, 수백 번 해 가지고 그걸 외웠다 그말이여. 그거를 외운 다음에 십선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금방 설한 십선계를. 그것을 떠억 설해 주었어.


그러니까 이 사람이 날마다 그 게송을 외웠어. ‘입을 다물고 뜻을 세워서 그릇된 행동을 범하지 아니하고, 능히 이렇게 수행을 잘 닦아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리’

그렇게 그 게송을 외우면서 십선계를 잘 지키다 어느날 툭! 터져 버렸다 그말이여. 툭 터져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부처님께 인가(印可)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부처님 계신 데로부터서 얼마 떨어진 데에 오백 명의 비구니(比丘尼), 여자 스님들이 모여서 수행을 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부처님께서 지정한 비구(比丘) 스님이 한 분씩 가서 그 비구니 여자 스님들한테 가서 설법을 하게 되어 있었어요. 마침 이번 차례가 그 바보 스님이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외우는 게송이라고는 게송 한 구절밖에는 모르는데 부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거기를 가게 되었는데, 그 소문이 비구니 처소에 소문이 건너갔어. 그래가지고 그 오백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아주 그냥 확 뒤집어졌습니다.

‘그 바보 같은 스님이 우리한테 와서 설법을 해? 게송 겨우 한 구절을 외워 갖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한테 설법을 해? 요놈의 작자(作者)가 오기만 하면 그냥 아주 개망신을 시켜 가지고 아주 보내리라’해 가지고.

특히 젊은 비구니 스님네들이 그냥 모여 가지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그 바보 스님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


떡! 바보 스님이 뚜벅뚜벅 걸어서 비구니 처소에 갔어. 가서 다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다 청법(請法)을 해서 법상(法床)에 떠억 뚜께비 같이 뜨윽 올라가서 눈을 꺼먹꺼먹하고 앉았는데.

오백 명의 비구니들은 응당 조용하게 법상에 법사가 올라가면 기침 소리도 하지 않는 법이거든.


가만히 숨을 죽이고 참, 경청을 해야 할 텐데, 킥킥킥킥킥 이쪽 구석에서 킥킥킥킥 웃음을 참을수록에 더 나온다 그말이여. 아! 킥킥킥킥 웃어 가지고는 '무슨 게송, 자기가 읊어 봤자 겨우 부처님한테 배운 게송 그놈 한 구절 외울 것이다'해 가지고는.

그것 좀 당돌하고 장난 좋아하는 비구니가 자기가 그 게송을 한번 떠억 읊을라고 입을 벌리는데 소리가 안 나와. 하! 그것 참, 암만 소리를 내 가지고 ‘입을 다물고’ 할라고 해도 ‘이이...’ 입만 떨썩거리지 소리가 안 나온다 그말이여. 그것 참 이상하다 말이여.


그래 인자 모다 다 그 하기로 짜 놨는데, 빨리 그 비구니가 게송을 읊어야 하는데 안 읊으니까 전부 그 사람 보고 ‘뭣 하고 있냐? 빨리 안 읊으고 그러고 있느냐?’하고 쳐다보는데, 그럴수록에 읊을라고 입을 떨썩떨썩해도 안 된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는 또 다른 사람이 할라고 해도 안 되고.


그래 가지고는 그러고 있는 차에 그 바보 스님이 “입을 다물고...” 턱! 읊은데, 그 오백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바늘을 떨구어도 귀에 들릴 만큼 그렇게 조용해져 버렸어.

그래가지고 게송을 떠억 읊고서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나는 천하에 바보올시다. 출가한지 여러 해가 되었고 나이도 많이 먹었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여러분 앞에 설법할 것이 없습니다. 다맛 이 게송 한 구절밖에 모르나 그 게송을 읊으면서 내가 능히 행해야 할 바를 나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십선계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이 십선계—살생을 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지 말아라. 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꾸며 대는 말을 하지 말아라. 두 가지 말을 하지 말아라. 욕을 하지 마라. 탐심을 내지 마라. 진심을 내지 마라.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마라.

이 십선계의 계목(戒目)은 사미승(沙彌僧)도 다 알고, 뭐 절에 와서 법문 몇번 들으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아는 게송인데.


그래도 그 바보 스님이 뚜벅뚜벅 말하는데 그 오백 명의 비구니 스님네들은 그까짓 것은 천 번 만 번도 다 알고 조르르 다 외우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확 그냥 경건한 마음으로 그 무식한 투로 하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진지한 데에서 나와.


그래가지고 조용하게 그 말씀을 듣고서 너무너무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가지고는 다시는 그 비구니들이 바보 스님을 업신여길 수가 없게 되어 버렸어.

‘확실히 부처님께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인가를 받았다더니 정말 바보, 바보, 바보라고 우리가 함부로 놀려 대고 욕하고 무시하고 그러다가는 큰일나겠다. 아! 세상에 좀 놀려먹고 망신을 줄려고 하니 입이 딱 붙어 갖고 안 떨어지는 걸 보면 분명히 참 저런 바보라도 깨닫기만 하면 그냥 그 법력(法力)이 있는 것이로구나’이리 생각하고는.



그런데 법회를 마치고 떠억 돌아왔는데, 어느 날 그 나라 왕이 공양(供養)을 청했어. 왕궁에다가 음식을 잘 차려 가지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을 다 청해서 그래서 인자 부처님이 가시게 되었는데.

그때 그 국왕의 이름이 하시노프왕이여. 하시노프왕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청하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시는데, 그 바보 스님을 부처님 바리때를 들려서 데리고 가셨어.


데리고 가는데 쭈욱 부처님과 그 밑에 모다 사리불, 목련존자, 가섭, 아란 할 것 없이 전부 고제자(高弟子)들이 전부 다 쭈욱 들어가고 맨끝에 인자 바보 스님이 바리때를 들고 따라 들어갈라고 하니까 문지기가, 그 성문 문지기가 탁 앞을 가로막으면서,


“못 들어가요. 당신은 스님이라고는 출가한 수행인이라고는 하지마는 당신 같은 바보 스님은 게송 하나도 제대로 못 외우면서. 우리 같은 무식한 사람도 부처님의 게송 하나둘쯤은 다 외우는데 게송 겨우 하나 외울둥 말둥 그까짓 것 해 갖고 어떻게 상감마마가 드리는 공양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고.

"당신 같은 사람이 들어가면 국왕을 갖다가 모독하는 것이라 안 된다"고 못 들어가게 해. 아, 그냥 참 난처하게 되었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냥 못 들어가게 하니까 우두커니 거기 인자 서 있는데.


우리 생각 같으면 그까짓 것 또 좀 신통력을 써서 주둥이가 딱 붙어버리게 하겠지마는 그런 도인들은 그런다고 해서 그런 어리석은 중생 앞에 신통술을 함부로 쓰는 법이 아니거든.

가만히 서서 인자 정진을 하고 있는데. '지금쯤은 부처님께서 다 발을 씻으시고 손을 씻으시고 인자 딱 자리에 앉으셨겠다. 인자 발우(鉢盂)를 펴실 시간이 되었다'하는 것을 딱 앉아서 짐작을 해 가지고는 그 바리때를 문밖에서 떠억 들어서 요렇게, 이렇게 부처님한테 드렸어.


아, 그러니까 궁중에 임금님 왕비 고관대신들이 쭈욱 있고, 스님네들이 차례차례 차례차례 발우를 탁 인자 앞에다 놓고 앉아 계시는데.

모두 발우를 펴시고 공양을 잡숫는 그 거동을 전 국왕 대신들이 전부 지켜보고 있는데, 어디서 부처님 앞에 기다란 팔이 쑤욱 나와 가지고 부처님 앞에 바리때를 갖다가 드리니까 부처님이 그 바리때를 딱 받아서 있는데.


아, 그냥 왕과 왕비와 고관대신들이 깜짝 놀랬어. 그래가지고 부처님께 여쭈었단 말이여.

“세상에 그 누구의 팔인데 그렇게 긴 팔이 이렇게 쑥 들어옵니까?”

“이건 다름이 아니라 나의 제자 아무개의 팔입니다”


“아, 그 팔이 왜 이렇게 여기 들어옵니까?”

“당신의 신하 문지기가 바보라고 못 들어오게 해서 그래서 성문 밖에서 할 수 없이 들어오지는 못하고 바리때를 나한테 이렇게 바치는 것이오”


“아, 세상에 그 사람이라면은 천하 바보인데 어떻게 팔이 이렇게 길게 궁중에까지 들어올 수가 있습니까?”

“바보라고 남을 업신여기는 법이 아닙니다. 머리가 영리해서 천 가지 만 가지 경전을 외워도 바로 그 뜻을 알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설사 한 구절의 게송을 외웠다 하더라도 그 게송의 참뜻을 알고 그것을 실천을 한다면 거기에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한량없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국왕 대신과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고 해서 업신여기는 법이 없고, 또 자기 생각에도 바보라고 해서 ‘나는 참선 해 봤자 소용이 없다’ ‘도를 닦아 봤자 소용이 없다’ 그러한 자포자기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거거든.


도(道)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억력이 좋고 지능지수가 높고 머리가 좋다고 해서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니여. 머리야 좋건 나쁘건 또 지식이야 학식이야 많건 적건, 전혀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어.


설사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탁 그렇게만 하면은 반드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다고 하는 굳센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면 반드시 도업(道業)은 얻을 수가 있는 거여.


요새 지성인들은 이러한 손가락으로 바윗돌을 뚫을 그러한 끈기가 부족해.

뭘 많이 알고, 이론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을 위주로 하고 교리적으로 무슨 많이 알고, 화엄경이 어떻고, 법화경이 어떻고, 금강경이 무엇이 어떻고 그런 것을 이론적으로 따져서 쫙 외우고 해설할 수 있다한들 그것이 도(道)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여.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는 바보, 무식하고 바보라고 해서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았고, 또 무식하고 바보라 하더라도 끈기를 가지고, 신심을 가지고, 대의단을 가지고 철저히 정진을 해 가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명을 타실 분은 이렇게 해서 십선법, 십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십선을 잘 닦아가.

십선을 잘 닦아가는 것이, 그러면 열 가지를 낱낱이 몸으로 지키는 세 가지, 입으로 지키는 네 가지, 뜻으로 지키는 세 가지, 그 계목을 그렇게 잘 외우는 것보다는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슨 경계(境界)를 당하던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괴롭고 외로울 때도 ‘이뭣고?’ 몸이 아플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이뭣고?’로 자기의 모든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로 돌리면은 살생하는 미운 생각도 거기에서 없어지고, 도둑질할 마음도 없어지고, 음행할 마음도 없어지고, 거짓말하고 비단 꾸며대는 일도 없어지는 거고, 욕하고 두 가지 말할 필요도 없어지는 거고, 탐심 내고 진심 내고 어리석은 마음 낼 겨를이 없어.


그러니 마음 닦는 최상승법을 닦지 아니하면서 그러한 계(戒)만을 위주로 해서 계만을 철저히 지킬라고 전전긍긍(戰戰兢兢)한다 하더라고 그것이 잘 안되는 것이여.

그런데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 ‘이뭣고?’를 간절히 간절히 해 가면 제절로 십선계가 지켜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이여.



오늘 불명을 타고 계를 받을 분은 무릎을 꿇고 호궤합장(互跪合掌)을 하세요.

옳지, 그렇게 쭉 궁뎅이를 들으셔요. 합장을 딱 하고. (이렇게 몸을 세워서 꿇어 앉으십시오, 이렇게) 꿇어 앉고 몸을 세우세요. 꿇어서 무릎을 땅에다 대고 꿇고 쭈욱 서면 되아.


“이상 설한 열 가지 성스러운 십선계를 잘 지키겠는가?”

“능지(能持)”


“이상 설한 열 가지 십선계를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


“이상 설한 성스러운 십선계를 불자(佛子)로서 능히 잘 지키겠는가?”

“능지”


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21분21초~42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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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진언(懺悔眞言)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안하게 앉으세요.

이렇게 해서 십선계를 받았고 또 화두 드는 법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간곡히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설해셨지만, 십선계 설하는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법문도 겸해서 설해 드렸습니다.


화두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지만, 나중에는 앞에 부분은 할 필요가 없고 안 해도 알고 있는 것이니까 그냥 ‘이뭣고?’ 이렇게만 하시면 되아. ‘이뭣고?’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지요. 그런 뜻으로 ‘이뭣고?’

다맛 ‘이뭣고?’ 뿐이거던. ‘이뭣고?’


‘이뭣고?’을 열심히 할라면 첫째, 신심이 철저해야 하고. 둘째, 분심이 철저해야 해.


신심(信心)은 무슨 신심이냐?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열심히 수행하면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다’고 하는. 다만 내가 매(昧)했을 뿐이지 나도 부처님이라고 하는 신심! 그 신심이 바로 최상승법에 있어서의 신심이여.


분심(憤心)은 무엇인가?

'과거에 불보살(佛菩薩)과 모든 선지식(善知識)들은 전부 진즉 이 문제를, 이 생사대사(生死大事) 일대사(一大事)를 해결을 했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그 문제를 해결을 못했던가' 그것에 대한 분심이 있어야 해. 그 분심이 있어야 신심이 더 나고 혼침(昏沈) 산란(散亂)도 거기에는 붙지를 못하는 거여.


그렇게 신심과 분심이 있는 위에 화두에 대한 의심! 알 수 없는 의심!

이 화두는 그 핵심이 의심(疑心)이여.


그냥 ‘이뭣고’하는 어구(語句)가 아니여. 그냥 건성으로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 하면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염불 육백만 번 한 공덕보다 더 낫다 하니까,

‘그래, 이뭣고? 한번 한 것이 육백만 번이면 열 번 하면은 육천만 번이요, 백 번을 하면은 육억만 번이다. 그러면 하루에 백 번 아니라 천 번 만 번이라도 할 수 있다’ 이래 가지고 염주를 들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참선은 그런 것이 아니여.


간절하게 알 수 없는 의심이 핵심이 되어 있어야 하거든. ‘이뭣고?’

‘이뭣고?’한 말, 글자 석 자가 아니고 ‘이뭣고?’하고 나서 그 뒤에 남은 그 의심의 여운.


‘이뭣고?’ 말은 끝났지마는 그 뒤에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어야 하거든.

그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되어요.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는 거여. 관조하는 거여.


그러다가 그 의심이 없어지거나 또는 딴 생각[別念]이 일어나면 그때 다시 또 ‘이뭣고?’ 챙기는 거여.

한 번 챙겨 가지고 일 분이고 이 분이고 삼 분 지나가도록 그 의심이 없어지지 않고 고대로 있으면은 고대로 그 의심을 관하는 거여. 그러다가 또 딴 생각이 일어나고 의심이 달아나 버리면 또 그때 가서 ‘이뭣고?’


‘이뭣고?’ 화두를 참구(參究)하라 하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 모다 그런 이론적으로 이것을 따지는 게 아니여.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렇게 저렇게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앞뒤도 따지지 말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그뿐인 거여.

‘이뭣고?’하는 데에서 탁! 모든 생각이 거기서 끊어져 버려야 하는 거여. 그래가지고 알 수 없는 의단만 있어야 되는 거여.


말길로 따지고 이치길로 따지고 이렇게 이리저리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뭘 듣고 알고 생각하는 그러한 것이 여기에는 있어서는 안 되어.

아무리 화엄경을 외우고, 법화경을 해석할 줄 알아도 또는 무슨 경책이고 어록이고 다 알아도 거기에 있는 것을 끌어다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이런 것일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알아 들어가는 게 아니예요.


일단 ‘이뭣고?’를 드는 데는 거기에는 화엄경도 생각할 필요가 없고 법화경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금강경도 생각할 필요가 없어. 다맛 ‘이뭣고?’뿐인 거여.



숨을 깊이 들어마셔. 7부(七部)나 8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셔.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지게. 한 8부쯤만 들어마셨다가 딱 정지를 했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이뭣고?’ 아무 힘을 들이지 말게 해.

무리하게 힘을 들이고 용을 쓰고, 자세도 바르게 하라니까 너무 파악 목에다 힘을 주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여. 단정하면서도 힘을 빼야 하는 거여. 어깨에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모든 힘을 다 빼버려.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야 하거든.


그리고 숨도 스르르르 들어마시는데, 8부쯤만 들어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렀다가 너무 오랫동안 20초 30초 40초 이렇게 그냥 얼굴이 벌건 채로 억지로 참으면 못쓰는 거여. 한 2~3초, 3~4초 이렇게 자기에 가장 편안 만큼 잠깐 참았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들어마시는 시간이 3초, 머무르는 시간이 3초, 내쉬는 시간이 3~4초 이렇게 해서 자연히 세월이 지나가면은 시간이 조금씩 길어져도,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편안하면 길어져도 괜찮은데.


한 몇 번 안 해서 헛숨이 쉬어지고 숨이 가쁘고 이렇게 무리를 하면 그것은 단전호흡 좋다는 말을 듣고 하다가 오히려 큰 병이 생기는 거여.

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이거 참 부작용이 생기면 큰일나는 것이니까 어쨌든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셔.


그러면서 화두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핵심이거든.


그 의심이 처음에는 그렇게 간절(懇切)하게 되기가 어렵고 그냥 약간 염화두(念話頭)로,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러는데.

그 간절한 의단이 독로하는 그 뜻을 처음에는 잘 몰라. 모르지만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자연히 그 ‘의단이 독로(獨露)한다, 또는 의단이 현전(現前)한다, 또 그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다’하는 그러한 뜻을 스스로 다 터득하게 되는 거여.


그렇게 정진이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돼. ‘아, 참 정진이 잘된다. 너무너무 좋다’ 그런 생각을 내면 벌써 아니거든, 그건. 정진이 잘되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그렇게 얼마동안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갖고 영 정신도 맑지 못하고 가슴도 답답하고 화두도 잘 들리지도 안 해. 의심도 잘 간절하지를 못하고, 그래가지고는 영판 상태가 안 좋다 그말이여. 그래도 번뇌심을 내지 말아라.

그런 때는 포행(布行)도 좀 하고 잘 선용기심(善用其心), 그 마음을 잘 써서 달래 가지고 그래도 공부는 중단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 잘 또 그 고비를 지혜롭게 넘기면, 끈기와 지혜로써 고비를 넘기면 또 그전에보단 훨씬 더 한결 공부가 더 수월하게 잘되는 거여.


이게 하다가 잘 안되다가, 안되어도 중단하지 않고 번뇌심을 내지 않고 그래도 또 계속하면 또 잘되고. 또 잘 얼마동안 잘되어 가다 안되고.

그런 고비고비를 지낸 다음에 일구월심(日久月深)하면 결국은 순일무잡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오고만 마는 거여.


그렇게 해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에 잠들 때까지도 고대로 화두가 독로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곧 들리고, 또 새벽에 눈을 딱 뜨는데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엊저녁에 들고 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잠을 잘 때나, 꿈을 꿀 때나 또는 잠을 깨 갖고 있을 때나 몽교(夢覺)가 일여(一如)하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오는 거여.


그래가지고 그런 상태에서, 그런 상태가 돌아오면 고요하고 편안하고 맑고 깨끗하기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그러한 지경에서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것이며, '누가 이럴 때 좀 툭 터지게 해줬으면' 그런 생각도 내지 말 것이며, 빨리 깨달았으면 그런 생각도 내서는 안 돼.


그런 때에 화두를 놔 버려서는 안되는 거여.

화두를 놓지 말아야 한다니까 그런 때에 좀 피치를, 뭐 박차를 가한다 해 가지고 ‘이뭣고!’ 막 용을 더 써 갖고, 그거 안되는 거여. 그럴 때는 그런 용을 쓰지 않고 터억 풍유한 의단만을 잘 관(觀)해 나가는 것 뿐인 거여.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니까 화두까지 드는 것이 귀찮고, 화두 들다가 그 고요한 것이 깨질까봐서 화두도 안 든 채 그 고요한 것을 맛보면서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참 못쓰는 거여. 그 애써서 그런 지경에까지 올라가 가지고 진짜 마지막 판에 가서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리는 거여.


그럴 때에 화두를 잘 들고 놓지지 말 것이며, 그럴 때에 지각심(知覺心)을 내지 말어. 그럴 때에 어떤 경계가 나타나도 그런 경계에 떨어지지 말어.

부처님이 나타나도 그런 데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그럴 때에 잘 정진을 밀고 나가야 하는 거여. 그러면 반드시, 오히려 바보일수록 그런 고비를 잘 넘겨서 크게 깨닫는 수가 있는 것이여.


바보도 자포자기하지 말 것이며, 무식해도 자포자기하지 말 것이며, 몸이 건강이 좀 좋지 안 해도 이건 완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앉아서 하고 앉아서 하다가 정 아프면 누워서도 하고, 몸이 안 좋으면 포행을 하면서도 하고.


어쨌든지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신심과 분심과 의심으로 일 초 일 초를 그렇게 해 나가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공부를 지어 나가고 그래서 일구월심하면 반드시 의단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한결같이 아주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한데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제득혈루무용처(啼得血淚無用處)라  불여함구과잔춘(不如緘口過殘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파사노년(怕死老年)에 친석가(親釋迦)여.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석가모니 부처님, 이 불법을 친하게 되었는데.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로구나. 저 머리 위에 시간은 번갯불처럼,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구나.


무량겁을 오늘날까지 살아왔어. 이제 우리는 말세(末世)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만났다 이거거든.

그런데 왠 시간은 이렇게 휘딱 하루가 지나가고 휘딱 하루가 지나가고, 그럭저럭하다 보면 일 년이 지나가고 그럭저럭하면 일 년이 지나가다가 벌써 주름살이 생기고 흰머리가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게 되었다 이거거든.


지금 이만큼 젊었을 때, 이만큼 늙었을 때, 그래도 이만할 때 어쨌든지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삼요(三要), 삼요를 몰록 돈발(頓發)해서 이 생사대사를 해결지어야 할 것입니다.


제득혈루무용처(啼得血淚無用處)여. 피눈물이 나오도록 울고 울어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보낸 것만 같지 못하구나.[不如緘口過殘春]


어느 고인(古人)이 중생들을 위해서 목이 쇠도록 그렇게 참 생사 문제를 해결하라고 그렇게 간곡히 고구정녕하게 그렇게 일러주어도 중생은 들을 때 뿐이고 돌아서면 탐심이요, 진심이요, 치심이요.

그러니 차라리 입을 꼭 다물고 여생(餘生)을, 남은 봄을 지낸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한탄하는 그러한 고인의 시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이 고인의 게송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각부터 정말 철저한 신심과 분심과 대의심이 독로하도록 잡드리를 해 가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본래 산중(山中)에 사는 사람이기에 항상 산중 얘기를 하기를 좋아하더라.(44분53초~64분26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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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백천경권송여사~'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태능) '贈性源禪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의단(疑團 의심할 의, 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苦]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염부제(閻浮提) ; 염부(閻浮).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佛典)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벙그러지다 ; 벌어지다.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천치(天癡, 天痴) ; ①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선천적으로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하여 어리석고 못난 사람.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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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一柱門) ;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으로, 한 줄로 세운 기둥 위에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음.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붓다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으로 붓다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定) : ①계(戒)•정(定)•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작자(作者) ; ①지은이. ②남을 업신여기어 얕잡아 이르는 말. ③물건을 살 사람.

*삼귀의(三歸依) ;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몸과 마음을 바쳐 믿고 의지함. 귀의불(歸依佛)•귀의법(歸依法)•귀의승(歸依僧)을 말함.

*청법(請法 청할 청/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법(法)을 설해 줄 것을 청(請)함.

*계목(戒目) ; 삼귀의계(三歸依戒) · 오계(五戒) · 십중대계(十重大戒) 등의 계(戒)의 제목(題目). 조목(條目), 중요(重要) 항목(項目).

*사미(沙彌) ; 산스크리트어 śrāmaṇera 팔리어 sāmaṇera의 음사. 근책(勤策)·구적(求寂)이라 번역.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비구(比丘)가 되기 전의 남자 수행자.

십계는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음주뿐만 아니라, 때가 아닌 때에 식사하는 것, 춤과 노래를 보고 듣는 것, 향수를 바르고 몸을 단장하는 것, 높고 큰 평상에 앉는 것, 금은 보물을 지니는 것 등을 금지하는 10가지이다.

*삼척동자(三尺童子) ; 키가 석[三] 자[尺]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童子]. 철없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 한 자[尺]는 약 30.3 cm에 해당한다.

*법력(法力) ; ①체득한 달마(法)의 힘. ②가르침의 힘. 불법의 공덕.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중생에게 떨쳐 이익을 주는 것. 불법수행의 결과 얻은 힘.

*공양(供養)을 청(請)하다 ; 재가신도가 스님들께 공양(식사)을 드리기 위하여 초청하는 것.

*바리때 ; 절에서 쓰는 스님의 공양(식사)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드는데, 나무에는 안팎에 칠(漆)을 한다. 발우(鉢盂)ㆍ발우대ㆍ응기(應器)ㆍ응량기(應量器)라고도 한다.

응량기(應量器)란 법에 응하는 또는 1명의 식량에 마땅한 그릇이니 먹을 만큼의 분량을 담는 그릇이고, 또 남의 공양을 받기에 마땅한 수행과 덕을 갖춘 성현(聖賢)이 사용하는 그릇이란 뜻이다.

*삼명육통(三明六通)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와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삼명(三明) ;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추고 있는 3가지 자유 자재한 지혜.

①숙명지증명(宿命智證明) 나와 남의 전생을 환히 아는 지혜.

②생사지증명(生死智證明) 중생의 미래의 생사와 과보를 환히 아는 지혜.

③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지혜.

*육신통(六神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⑥누진통(漏盡通)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전전긍긍하다(戰戰兢兢-- 두려워할 전/무서워 떨다 긍) ; 몹시 두려워하며 무서워 떨다.

*호궤합장(互跪合掌) ; 두 무릎을 꿇고 앉되, 무릎 위 허벅지와 상체가 수직이 되게 곧게 일으켜 세우고, 발가락은 세운 채 손은 합장을 취한 자세.

*능지(能持 능할 능/가질·지킬 지) ; ①법을 마음에 머물게 하여 잊지 않는 능력. ②계단(戒壇 : 계를 주는 의식이 이루어지는 단壇)에서 계법(戒法 : 불제자가 받는 계)을 받을 때 전계화상(傳戒和尙 : 계를 내려주는 스승)이 수계자(受戒者)에게 그 계의 조목을 하나 하나 설명한 뒤 “그대는 능히 이 계를 받아 굳게 지키겠느냐”라고 물을 때 수계자가 “능지(能持 : ‘능히 받들어 지키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참회진언(懺悔眞言) ; 죄업(罪業)을 참회하는 진언. '옴 살바 못자모지 사다야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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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데[無自性] 마음으로 좇아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마음이 소멸되면 죄 또한 없어진다.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마음도 없어지고 죄도 없어져서 그 두가지가 함께 공(空)해져서 없어져 버릴 때,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회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매(昧)하다 ; (지혜가)어두워지다.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다. 잊어버리다. 모른다. 어둡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5분 59초)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5분 57초)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딴 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7부(七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70% 정도 만큼.

*간절(懇切 간절할·정성스런 간/정성스런·절박할 절) ; ①지성(至誠)스럽고 절실(切實)함. ②정성이나 마음 씀씀이가 더없이 정성스럽고 지극함. ③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바라는 정도가 매우 절실함.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몽교(夢覺 꿈 몽/깰 교) ; 꿈[夢]과 잠을 깸[覺].

*일여(一如) ;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지각심(知覺心) : ①바로 이 경계로구나 알았다 깨달았다 하는, 그런 마음。 ②빨리 깨달으려는 마음。누가 깨닫게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일심불란(一心不亂) : ①두 생각이 없이, 딴 생각이 없이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 ②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함.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게송) ‘怕死老年親釋迦 頭上光陰轉頭飛’ ;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61~162.

〇怕死老年에  親釋迦로다. 好向此時明自己어다  百年光影이  轉頭非로다.

죽음이 두려운 늙으막에야 부처님을 가까이 함이로다. 당장 이 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파사노년(怕死老年)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글에 「이름 구할 젊을 적 공자님만 따랐고, 죽기 싫은 늙으막 부처님께 나가네(求名少日慕宣聖 怕死老年親釋迦)」라고 하였다.

*(게송) ‘啼得血淚無用處 不如緘口過殘年’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 1권 1칙 도솔(兜率)’ 취암열상당거차화운(翠嵓悅上堂擧此話云) 참고.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주요 내용]


화두, 불명, 십선계 법회 / (게송) '백천경권송여사~' / 선종(禪宗)에서는 참선을 해서 도솔천 내원궁에 탄생하기를 발원 / 자기 뜻대로 할라고 한 것이 벌써 그것이 탐심 /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 / 바보 스님의 깨달음 / 참선을 해 가면 저절로 십선계가 지켜진다. 이것이 최상승법 / 삼요.




[주요 문구]


참선법(參禪法)이 믿어지기만 해도 숙세의 인연이요, 그놈을 믿고 거기 철저하게 대드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보통 정법에 인연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선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우리 선종(禪宗)에서는 그래서 옛날부터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않고 십선계를 잘 지키면서 참선을 해 가지고 도솔천 내원궁에 탄생하기를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를 평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지옥에 갈 차표를 딱 끊어 놓은 거와 같다.

십악을 범하지 아니하고 그놈을 돌리면은 그것이 십선법이 되는 거여. 십선법을 행하면은 그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에 갈 표를 끊어 논 것이다.


이 바보 스님은 날마다 게송을 외웠어. ‘입을 다물고 뜻을 세워서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아니하며, 능히 이렇게 수행을 잘 닦아가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으리’

그렇게 그 게송을 외우면서 십선계를 잘 지키다 어느날 툭! 터져 버렸다. 툭 터져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부처님께 인가(印可)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나는 천하에 바보올시다. 출가한지 여러 해가 되었고 나이도 많이 먹었지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여러분 앞에 설법할 것이 없습니다. 다맛 이 게송 한 구절밖에 모르나 그 게송을 읊으면서 내가 능히 행해야 할 바를 나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십선계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바보라고 남을 업신여기는 법이 아닙니다. 머리가 영리해서 천 가지 만 가지 경전을 외워도 바로 그 뜻을 알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설사 한 구절의 게송을 외웠다 하더라도 그 게송의 참뜻을 알고 그것을 실천을 한다면 거기에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한량없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억력이 좋고 지능지수가 높고 머리가 좋다고 해서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니여. 머리야 좋건 나쁘건 또 지식이야 학식이야 많건 적건, 전혀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어.


설사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탁 그렇게만 하면은 반드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다고 하는 굳센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여법(如法)하게 수행을 하면 반드시 도업(道業)은 얻을 수가 있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이 핵심이거든.


그 의심이 처음에는 그렇게 간절(懇切)하게 되기가 어렵고 그냥 약간 염화두(念話頭)로,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또 챙기고 그러는데.

그 간절한 의단이 독로하는 그 뜻을 처음에는 잘 몰라. 모르지만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자꾸 하다 보면 자연히 그 ‘의단이 독로(獨露)한다, 또는 의단이 현전(現前)한다, 또 그 의단이 순일무잡(純一無雜)하다’하는 그러한 뜻을 스스로 다 터득하게 되는 거여.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16. 2. 12. 11:25


(No.389) - 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59)


(1/3) 약 18분.  (2/3) 약 21분.  (3/3) 약 21분.


(1/3)----------------


묘체유래무처소(妙體由來無處所)한데  관음기재해동문(觀音豈在海東門)

나무~아미타불~

하처청산부도량(何處靑山不道場)인데  하수특례낙가산(何須特禮洛迦山)

나무~아미타불~


묘체유래무처소(妙體由來無處所)한데, 묘한 진리의 () 원래로 처소(處所) 없어. 어디에는 진리가 있고, 어디에는 진리가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의 진리는 천상천하(天上天下) 두두물물(頭頭物物) 묘체(妙體) 아님이 없어.


전부가  어느 , 어느 때를 막론하고 진리의 ()  허공 법계에 없는 데가  없는데, 관음기재해동문(觀音豈在海東門)이리요. 어찌 관세음보살이  동쪽 바닷가에만 계시겠는가?


하처청산부도량(何處靑山不道場)인데, 어느  청산(青山) 관세음보살 계시지 아니한 도량(道場) 있으리요.

그렇거늘 어찌 모름지기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에만 관세음보살이 계신  알고 거기만 찾아갈 것이 무엇이 있는가?(何須特禮洛迦山)



오늘은 불기 2533 기사년 사월초파일, 부처님오신날입니다.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해를 1년으로  가지고 금년이 2533년이니까, 부처님께서는 80세에 열반 하셨으니 거기에 80 더하면 2613 됩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지는 2613년이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의 생애>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지금의 네팔입니다마는,  가비라 왕궁의 정반왕을 아버님으로 마야 왕비를 어머님으로 해서 태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름이 싯다르타(siddhartha)입니다, 실달(悉達)태자.


우리 중생의 눈에는 인간 실달태자 밖에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성문(聲聞), 연각(緣覺)이냐? 또는 보살(菩薩)이냐? 또는 부처님이냐? 자기의 깨달은 경지에 따라서, 태어나신 실달태자를 인간 실달태자로 보기도 하고, 화신불(化身佛) 보기도 하고, 보신불(報身佛) 보기도 하고,  법신불(法身佛)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단 우리 중생의 눈에 역사적으로   있는 인간 실달태자의 역사를 말씀을 잠깐 드리고자 합니다. 


16세에 결혼을 하셨습니다. 야수다라라고 하는 아주 예쁜, 덕을 갖춘 미인과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 라후라라고 하는 아들을 탄생을 하셨습니다. 경전에 따라서는 출가하신  탄생하셨다고 이렇게 적혀있는 경전도 있습니다마는 그래가지고 29세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히말라야 설산에 들어가셔서 6 간을 하루에 삼씨  개와 곡식  알씩만을 잡숫고서 무서운 고행(苦行) 하셨어. 그래가지고 피골(皮骨) 상접(相接)했습니다. 그토록 무섭게 용맹정진을, 고행을 하셨지마는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셨어.


그래서  몸뚱이만을 괴롭히는 고행을 위한 고행을 가지고서는 깨달음에 이를 수가 없구나.’ 그것을 알으시고서, 니련선하(尼連禪河) 내려가셔서 목욕을 하시고, 그때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 처녀가 바치는 유미(乳米)죽을 받어 잡숫고,

깨끗한 몸뚱이와 쇄락(灑落) 정신으로써 갠지스강 중류 남쪽에 있는 우루벨라촌나중에는 거기를 붓다가야(buddhagayā)라고 지금은 부릅니다마는 우루벨라촌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정진을 하셨습니다. 보리수 나무 밑에서 명상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셨어.


12 초팔일(初八日) 동천(東天) 떠 있는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하셨습니다.


소승(小乘) 경전에는 그때 무슨 진리를 깨달으셨느냐? ‘초저녁에는 사제법(四諦法) 깨달으시고, 중야(中夜)에는 12인연법을 깨달으셨다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마는, 한마디로 말해서 아까 조실 스님 법문에도 설하신 바와 같이 생사 없는 도리 깨달으셨어.


그래가지고 진리를 깨달으시고서, 베나레스 교외에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셔서 교진여(憍陳如)  다섯 비구를 교화하셨습니다.  오비구(五比丘)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사제법(四諦法) 깨달랐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四諦) 성제(聖諦) 깨달랐어.

그래가지고  제자들로 하여금  길을 둘이 가지 말고 따로따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가서  불법(佛法) 펴도록,  뒤로 많은 제자들이 불어났습니다. 항상 천이백오십의 상수제자가 부처님을 따랐습니다.


열반하실 때까지 84 법문(八萬四千法門) 설하셨어.

주로 부처님께서는 여름  우기(雨期)에는 다니실 수가 없으니까 정사(精舍) 모여서  우기를 피하시고, 우기가 지난 다음에는   내내 계속 유행(遊行) 하시면서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셨는데,

주로 교화 중심지는 마갈타국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있는 죽림정사(竹林精舍)  부처님 고향에 가까운 사위성(舍衛城) 기원정사(祇園精舍) 근본 교화 중심지로 해서 84 법문을 설하셨어.


최초에 12 간은 아함경을 설하시고, 그다음 8 간은 방등경을 설하시고, 그다음 21 동안에 걸쳐서 반야경지금 우리가 독송을 하는 금강경도  반야경에 소속된 경전입니다마는  반야경은 진공의 진리를 설하신거고, 그리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열반경을 설하셨어. 그래서 84 법문을 49 동안에 설하셨다.


그래가지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  파바 마을에 사는 금속공인 춘다가 올린  공양을 잡숫고 중병을 얻으셔서 마침내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잡숫고 도를 깨달으시고, 춘다가 바친 공양을 잡숫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먹고 깨달음을 얻은  공덕이나, 춘다가 바친  공양을 잡숫고 열반에 드셨으나  춘다의 공양의 공덕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무량 중생의 공양을 받으셨고, 그리고 무량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등 공양의 공덕 -  몸뚱이 있는 채로, 진리를 향해 새로 태어남.’>


오늘도 이렇게 부처님 오신날 기해서 우리 수천 명의 불제자(佛弟子)들이 이렇게 오색이 찬란한 정성어린 등불로써 부처님께 공양(供養) 올렸습니다. 


우리 정성어린   개의 () 부처님께 올린  공덕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의 공덕이나, 춘다가 바친  버섯국의 공덕이나, 금일 우리 신남신녀(信男信女) 바친   개의  공양은  공덕에 있어서 추호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사부대중 신남신녀가 바친  하나의  공양의  공덕(功德)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2613 전에 부처님이 탄생하신 그날을 봉축(奉祝) 그러한 뜻으로 등을 올렸습니다.  공덕으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듯이 우리도 오늘 새로 태어나야  것입니다.


등을 올리고 부자가 되게  주십시오.’ ‘업장이 소멸되게 하십시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게 하십시오.’ ‘우리 회사가 잘되게  주십시오.’ 그러한 일도 물론 인간 세상에 있어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새로 태어나는 법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우리나라는 조국통일을 부르짖고, 세계평화를 구호로 부르짖고 있습니다마는, 어떠한 민주주의도 조국통일도 세계평화도 개개인의 자각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자각(自覺)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죽어야 새로 태어날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 태어난 것은  몸뚱이 고대로 두고뱃속에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 고대로    우리의 가슴에 심장의 맥박은 발딱발딱 뛰고 있는 고대로 놔둔,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처음~1716)



(2/3)----------------


부처님 당시에, 제석천왕(帝釋天王) 터억 자기 자신을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죽어서 반드시 당나귀 뱃속에 태어날 것을 알았어.

제석천왕도  32(三十二相) 갖춘  복많은 그러한 하늘나라  가운데 최고로 높고 거룩한 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통(神通) 자재해. 그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까 자기가 죽어서 과거에 지은 ()으로 인해서 당나귀 새끼로 태어날 것을 알았다 그말이여.


일개 제석천왕으로서 사주(四洲) 세계의 복과 죄를  몸에 권한을 쥐고 있는 그러한 천왕(天王)으로서 당나귀 뱃속으로 들어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맥히다 그말이여. 그래서 날이면 날마다 근심 속에 사로잡혀 있어.


그러다가 퍼뜩 생각이 떠오르기를 『이 문제는 오직 부처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가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 가서 여쭈어 봐야만  해결책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삼계(三界) 대도사(大導師), 사생(四生) 자부(慈父)이신진리를 깨달으신 성인 가운데 성인이신 부처님만이  문제를 열어주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부처님 앞에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 절을 했어.

있는 정성을 다해서 오체투지로 부처님  아래 엎드렸다 그말이여.


아직 일어나기 전에 엎드린  상태에서  몸뚱이를 떠났습니다.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제석천왕의 영혼이  몸뚱이를 떠났어. 떠나 가지고  사바세계(娑婆世界) 어느 그릇을 굽는 도공(陶工) 집에 당나귀 뱃속에 들어갔어.

그런데  당나귀가 굴레가 벗겨져 가지고, 굴레와 고삐로 묶여있던 당나귀가  어떻게 해서  굴레가 벗어지니까 그놈이 너무 좋아서 그랬던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지고 정성들여서 맨들어 놓은 많은 그릇을 갖다가 산발산발  발길질을 해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굽는 도공이  정성들여서 맨들어 놓은 그릇을  깼으니 얼마나 화가 났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몽둥이로 사정없이 당나귀를 뚜드려 팼습니다. 당나귀는  주인의 몽둥이를 맞고  새끼를 낙태를 했습니다.

낙태를 하자마자 당나귀 뱃속에 태어났던  제석천왕의 영혼은 다시 부처님 앞에 엎드려 있는  몸뚱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부처님께서 엎드려있는  제석천왕에게 말씀을 하시기를, “그대가 운명하기 직전에 여래(如來) 앞에 오체투지로 절을 함으로써, 있는 정성을 다해서 귀의(歸依)  공덕으로 그대의 전생의 죄업은  소멸이 되었느니라.

제석천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서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가지고 수다원과(須陀洹果) 증득을  것입니다.


 설화(說話) 통해서 우리가 죽어서 새로 태어난 것이 60년이나 70년을 살고 병들어 몸부림치다가 죽은 뒤에사 비로소 새로 태어나지 않고,  몸뚱이 있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새로 태어날  있다고 하는 사실을우리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불법(佛法) 만나기 전에는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속에서 날마다 번뇌와 근심 속에 몸부림치고, 차라리 자살을 할려고  마음까지도 냈던 사람, 그런 분이 불법을 만나고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 태어난 분도  가운데는 많이 계실 것입니다.

불법을 믿은  수십 년이 됐으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정법(正法)의 법문을 듣고  새로 태어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생각 일어날  새로 태어나고원래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 생각 일어날  새로 태어난 거고,  번뇌가 꺼질   죽는 거고, ‘우리의 생각의 일어났다 없어졌다 것이 바로 생(生), ()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은 인과법칙으로 그건 틀림이 없는 것이고,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 것이여. 이렇게  때에 번뇌심(煩惱心)으로 태어나가지고 번뇌심으로 죽고,  번뇌심으로태어나서 번뇌심으로 죽어가면 이것은 영원한 생사윤회.


새로 태어나되 삼악도(三惡道) 태어나면 새로 태어난 보람이 무엇이 있습니까?

중생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 속에서 끝없는 생사윤회는하나도  보잘  없는, 거듭거듭 할수록에 고통만 더하는 그러한 생사윤회.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 믿는 사람은, 최상승 법문을 믿는 우리 불제자(佛弟子), 새로 태어날 때보다  나은 곳에 태어나야 하고, 새로 태어날 때마다 진리의 눈을   있는 그러한 새로 태어남이어야  것입니다. 제석천왕이 나귀 뱃속에 태어났다가, 다시 태어날 때에 수다원과를 증득하듯이.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 더하고, 점점 깊은 고통이 심한 그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날  이뭣고?’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업장(業障) 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걸음 나아가게 되니  활구참선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새로 태어나는 사람 지나간 과거에 얽매일 것이 없고, 앞으로 다가오지도 않는 미래에 대해서 치달을 필요도 없고, 현재 우리가 닥쳐있는 현실 경계에도 집착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기쁜 일을 당해도 이뭣고?’, 사업이 흥해도 이뭣고?’, 사업이 침체해도 이뭣고?’,


팔풍(八風) 경계와 오욕(五欲) 경계에 부닥칠 , ‘우리의 마음은 항상 해와 같고 달과 같이 가져라. 그러면 천당지옥에 끌려가지 아니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팔풍 경계와 오욕 경계를 당해서 마음을 해와 같이 찬란히 빛나는 태양과 같이, 휘황찬 밝은 달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인가?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한마디에 흥망성쇠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희로애락의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에 천당지옥에 포섭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뭣고?’  마음속 진리의 등불 켜는 것이고,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는 >


우리는 오늘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서 () 하나를 켭니다마는, 우리 눈으로   있는  하나지만  속에는 우리의 정성이 담겨있습니다.

 등을 켜는 그러한 준례가 생겨났을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부처님의 진리의  켜도록 하기 위해서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등불을 켜면 어두운 밤이 밝아지듯이 마음속의 등을 켜라.’


마음속의 () 무엇으로 ?’ ‘이뭣고?’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화두를 거각(擧却) ,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물리치고 오욕 경계를 물리치는 등불을 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언필칭(言必稱) ‘부처님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한량없는 중생(衆生)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세상에 부처님이 나오셨다  그렇게 말합니다.

중생 제도를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물에 빠져 있는 사람 건져내듯이 중생을 그렇게 건질 수가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하시되, 실지  중생도 제도를 받은 사람이 없다.

 까닭이 무엇입니까? 불보살은 생각 생각으로써 중생을 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온갖 생각이  일어나는데  한량없는 생각을 바로 중생을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 () 거여.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의 본체는 무엇이냐?’하면은 ()이거든. 확실히  생각의 본체가 진공(眞空)이라고 하는 사실을 요달(了達) 것이 그것이 바로 한량없는 중생을제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적(空寂) 이치를 이미 깨달라 버리면 실로  중생도 제도받은 자가 없다. 이것이 바로 불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성중생(自性衆生)이거든.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우리는 최상승법을 믿는 불제자이기 때문에 모두가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는 도리를 터득을 해야 하는 것이여.


불법(佛法)의 근본 뿌리는 중생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여. 그래서 중생심, 거기서 무량 부처님도 출세(出世)하셨고, 팔만사천 보살도 거기서 출세하셨어.


우리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일념(一念),   생각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하나의 버큼이요 하나의 물결인데,

 일어나는 최초의   생각 ! 돌이켜서 이뭣고?’ 때에 팔만사천의 묘행(妙行)  속에  갖추어져 있는 거여. 팔만사천 경(經)에 쓰여 있는 법문의 뜻도  속에 들어있는 거여.

그래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관법(觀法) 있고, 많은 부처님의 법문이 있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최고의 높고 거룩한 법문이요, 거룩한 관법은  활구참선법이라.



<신심(信心)으로 보면은 우리 집안에서, 모든 중생들 속에서 불보살의 화현신을 친견할  있어>


중생은 무량 억겁의 무명(無明) 번뇌로 말미암아서 원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의 눈이 가리워져 있어.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선지식(善知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지혜의 눈을 바로   있는 길을 스스로 터득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친근선우(親近善友), 선우(善友) 착한 , 모든 불조(佛祖) 모든 선지식이 모두  선우(善友) 해당이 됩니다, 널리 보면.  선지식과 선우를 공경하고 섬기기를 부처님과 같이 하라.’ 그러셨어.


삼천년 전에 탄생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은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시고, 다음 미륵불(彌勒佛) 출생하실 때까지는 567천만 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한량없는 보살들이 보살로써 우리 앞에 화현신(化現身)으로 출현을 하신 것입니다.


 보살 화현신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시냐?’하면은 시부모로도 나타나고, 남편으로도 나타나고, 아내로도 나타나고, 효자로도 나타나고 불효자로도 나타납니다. 친구로도 나타나고, 도둑놈으로도 나타나고, 거지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떠한 () 별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는, 한량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심(信心)으로서 보면은 날마다 불보살의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탐진치 삼독이 가득찬  눈으로는 날마다 불보살을 친견하면서도  불보살인  모르고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법문(法門) 듣고 참으로 발심(發心)  때에 우리 집안에 보살 화현이 함께 사신 줄을  것이고, 우리가 날마다 만나고 스쳐가는 모든 중생들 속에 불보살의 화현신이 계시는 것을 알게  것입니다.(1717~389)



(3/3)----------------


<이뭣고?’ - ‘ 생각 돌리는 것이 소신연비(燒身燃臂), 위법망구(爲法忘軀) 신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 선지식의 법문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발심하기도 어렵고 진리의 눈을 뜨기도 어렵기 때문에, 옛날에 부처님이 인행(因行) 때에, 설산에서  고행을 하고 계실 때에,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고 하는  구절 게송을 듣기 위해서, 설산동자(雪山童子) 나찰귀신(羅刹鬼神) 향해서  소중한 몸뚱이를 던지셨던 것이며,


부처님께서 향성(香城)에서 반야경을 설하실  상제보살(常啼菩薩)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고서, 너무도 부처님의 법문이 감사하고 고마워서 무엇으로 공양(供養) 올리고 싶은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그래서  공양을 올리지 못한  한이 사무쳐 있을 때에 마치 성안에 어떤 부자가 병을 얻었는데 ‘산 사람의 뼈골 속에서 뽑은  골수(骨髓) 넣어서 만든 약을 지어 먹어야만  병을 낫을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골수를 가져  사람에게는 많은 돈을 주겠다’ 이런 광고를 했어.


마침 상제보살이  광고를 보고서 자기의 () 빼 가지고  골을 두들겨서 골 속에 들어있는 골수를 팔았습니다.  장자한테 팔아가지고 돈을 구해서 꽃과 향을 사가지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분골쇄신(粉骨碎身)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잃어버리는 위법망구(爲法忘軀) 신심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가운데에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해가지고 부처님과 절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서 행여나 골을 빼가지고 골수를 빼려고 하시지는 마십시오.

비록 설산동자는 몸뚱이를 나찰귀신에게 던지셨고, 상제보살은 골수를 빼서 장자에게 팔았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  법문이 과연  법문의 요지(要旨),  진의(眞意) 무엇인가 우리는 바로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신연비(燒身燃臂), ‘소신연비를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뭣한 사람은 손가락을 둘씩 셋씩 넷씩 태워서 연비(燃臂)  그러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수행자를 요새도 가끔  수가 있습니다.

 연전에는 장작불을  놓고  자기의 몸뚱이를 사룬 등신불(等身佛)’이라고 하는 그러한 드라마도 있습니다마는 그런 분이 실지로 과거에 있습니다.  몸뚱이를 잃어버리는 손가락 하나를 태우고 팔을 하나 태우고몸뚱이를 태우는 것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인가는  압니다.


 뜨거운 신심은 백만금(百萬金) 주고라도 우리는 사야  것입니다마는, 소신연비분골쇄신의 참뜻은우리가 여기 있는 대중들이 날마다 손가락을 태우고 몸뚱이를 태우라고 나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지고 정말 탐진치 삼독심을 찰나 간에 돌이켜서 이뭣고?’ 들으시라 이것입니다.

이뭣고?’  생각 돌리는 것』이 손가락    태우는 것에다가 비교할  있겠습니까?

슬플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즐거울 때도 이뭣고?’ 것입니다.


 생각 돌이킨 것』이 바로  생(生) 돌이키고  목숨 돌이킨 것』과 맞먹는 것입니다.


몸뚱이의 생사(生死)’만을 생사(生死) 아는 사람은 범부(凡夫) 중생(衆生)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 믿는 사람은  몸뚱이는 본래 () 것이여. 본래 공한 것이여.

 생각 돌이킬   때에, 비로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이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운변천첩장(雲邊千疊)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운변천첩장(雲邊千疊)이요  난외일성천(欄外一聲川)이다.

 구름 가에 천첩이나 쌓인 산이 있고, 울담 밖에  소리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있더라.


약불연순우(若不連旬雨)하면, 만약 열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내리는  비가 없었다면,

나지제후천(那知霽後天)이냐. 어찌   뒤에  새파란 하늘 있음을  수가 있었겠는가.

앞으로 장마 계절이 옵니다마는, 장마에 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기를 열흘 스무날 계속한 뒤에 햇빛이 쨍쨍 하고 나야, 비로소 햇빛 고마운 줄도 알고 파란 하늘도 비로소 새롭게 느껴진다 이거거든.


 사바세계(娑婆世界) 생로병사희로애락흥망성쇠가 이렇게 뒤범벅이 되어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바세계에서 발심(發心)하기가 좋고, 분심(憤心)내기가 좋고, 그래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이 갖추어진 세계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병고에 시달리는 , 사업에 여의치 못해서 고통 속에 빠지신 , 아들을  낳아서 고통에 빠진 며느님들, 또는 아들딸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들어갈까  걱정이신 ,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합(義合) 좋지 못해서 고통 받는 , 그런 고통을 어떻게 해서 이겨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발심할  있는 좋은 계기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심히 법회에 나오셔서 듣는 법문  듣는 법문이라도 열심히 법문을 듣다 보면, 어느 땐가는 ! 지혜의 눈이 열릴 때가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당하면은 성을 내고, 우리 마음에 합당(合當) 그러한 일을 당하면 우리는 기뻐합니다.

천하 사람이 전부 역경계(逆境界) 아니면 순경계(順境界) 속에 걸려서, 노예가 되어가지고 울다 웃다 하면서 아까운 생명을 헛되이 보내면서 삼악도(三惡道) 향해서 굴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에 맞는 순경계가 머지않아서 뒤집어져 가지고 역경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역경계를 만나서 있다 하더라도  고비를  참고 견디면서 노력을 하다보면 전화위복(轉禍爲福) 되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경계순경계에 놀아나지 말고, 어떠한 경계(境界) 닥치든지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닌 ' 깊이 인식하고 항상 어느  어느 곳에서도 이뭣고?’

역경계순경계에 끄달려서 울다 웃다한 사람은 항상 경계에 속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경계는  ()으로, 우리의 중생 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衆生) 곳곳마다 일어나는  () () 끄달려 가는 거고, 성문(聲聞)•연각(緣覺)  () 경계가 무서워서 어쨌든지 그놈을 없앨라고 그러면서  본심(本心) () 버리는 것입니다.

 생각만 없앨려고, 번뇌 망상만 끊을려고 노력을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관법(觀法) 닦아 멸진정(滅盡定) 들어가는 것이 궁극의 목적이여. 그래야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지 아니해야 죽음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훌륭한 법이 아닌 것입니다.


보살(菩薩)  () 경계라고 하는 것을 꿰뚫어  버리기 때문에 그러한 희로애락성주괴공흥망성쇠 그러한 명사(名詞) 얽매이지를 아니 . 그래가지고 어떠한 경계를 닥치든지 본래 남이 없는 무생(無生) 진리에  마음을 계합시켜 버리는 거여. 그것이 바로 이뭣고?’거든.


이뭣고?’ 자꾸 하다보면, 무슨 생각이  생각 일어나자마자 이뭣고?’하면  생각이 둘째 번 셋째 번 생각으로 번질 겨를이 없어.

그것이 번져 가지고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는데, ‘ 생각 일어나자마자 이뭣고?’했을  바로 거기서 생사 없는 무생(無生) 경지(境地) 들어가는 법이다 그말이여.


우리 중생의 모든 () 몽환(夢幻) 경계인데, ‘()  ()이라 하냐?’하면은 마치 어떤 사람이 꿈속에, 몸뚱이에 아주 종기(腫氣) 일어나 가지고 차츰차츰 번져서 아주 만신창이(滿身瘡痍) 되었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야  무서운 창병(瘡病) 고칠까?’ 그래가지고 너무너무 비탄에 빠지고 고통에 빠졌다가, 누가 ! 하는 바람에 눈을   보니까 ! 꿈이었다 그말이여.


그렇게  전신이 쑤시고 애리고 가렵고 그러던 것이 눈을 ! 뜨자마자 몸뚱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구녁구녁이 고름이 터져 나오던 것이  곳이 없다 그말이여.

우리 중생의 모든 ()으로 나타나는 모든 경계는 꿈속에 앓는 만신창병(滿身瘡病) 같은 것입니다.


 생각 터억 돌이켜 버리면, ‘ 생각 돌이켜서 깨달아버리면 방편(方便) 필요가 없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법문(法門)  꿈에 앓는 만신창이, 꿈을 깨면서 낫는다 하는  말씀 한마디 속에  포함이 되어있는 것이여.


여러분이 앞으로 어떠한 고통을 받더라도 이뭣고?’ 한마디로써 모든 고통을  치료해 나가셔. 미운 사람을 만나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나, 좋은 경계를 만나나, 괴로운 경계를 만났을 , ()  깨닫는 법이 바로 이뭣고?’니까 이뭣고?’ 드시어. 그것이 바로 새로 태어나는 길인 것입니다. 


() 하나를 올리고 우리는 무량억겁(無量億劫)으로 윤회 할, 윤회(輪廻) 벗어나는 도리를 우리는 알았습니다.


앞으로  몸뚱이가 20, 30 얼마를 유지할란가 모릅니다마는 그까짓 것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10년을 살다가 가든지, 30년을 살다 가든지  몸뚱이는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건  걱정할  없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생각 무섭게 단속(團束)  나가면,  속에 우리는 해탈도(解脫道)로 가는 길이 거기에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2533 기사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해서 부처님께서 태어나시듯이 우리도 오늘  자리에서 새로 태어났습니다. 새로 태어났으니 과거의 모든 일은 완전히  잊어버려.

우리가 갓난 애기 새로 태어나면서 전생일  잊어버리고, 우리 지금 전생에 무엇이 어쨌다  것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숙명통(宿命通) 열리면은 전생 과거사도  안다고 그럽니다마는, 우리는 새로 태어날  과거 일을 잊어버린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오늘 이전의 모든 원한(怨恨) 관계도  잊어버리고, 근심고통도  잊어버리고,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1분 1분, 1초 1초를 살아갈 것을 기약하면서,

자, 손을 드시고 이뭣고?’(이뭣고?)  이뭣고?’(이뭣고?)  이뭣고?’(이뭣고?)

간단한 한마디지만 팔만대장경이  속에  들었고, 온갖 부처님의 성스러운 관법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어서 여러분들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의식과 축원이 있고, 그리고서 지하실로 내려가셔서 간략한 점심 공양을 드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7 지나서 우리의 정성스러운 () 등불이 켜지게  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 수부득(收不得)하여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 수부득(收不得)하여,  움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다 걸어 두노라.(3810~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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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묘체유래무처소~ ;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 백운경한(白雲景閑) 送人洛迦山(낙가산으로 사람을 보내면서)’ 게송 참고.

*천상천하(天上天下)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 번역,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 준말.

세간(世間)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 그의 이름을 부르면  음성(音聲) 듣고()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준다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 왼쪽 보처(補處).

 자재롭게 보는 (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라 한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 ; 관세음보살이 거주하는 . 寶陀洛迦山, 普陀落伽山, 洛迦山, 洛山.

' 꽃이 피어 있는 작은 ' 또는 '꽃과 나무로 가득한 작은 '이라는 뜻을 가진 범어 '포타라카(potalaka)' 음역이다. 보타낙가산을 소화수산(小花樹山), 소백화산(小白華山), 해도산(海島山), 광명산(光明山)이라 부른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 음사. (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상태라는 .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평온하게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실달다(悉達多) 태자(太子)  석존(釋尊) 태어난 .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 출가하기  태자(太子) 때의 이름. 음역어는 실다(悉多)’, ‘실달(悉達)’, ‘실달다(悉達多)’이다.

*성문(聲聞) ; 부처님의 음성() 들은() 사람이라는 . 산스크리트어 śrāvaka, 팔리어 sāvaka.

①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사제(四諦)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阿羅漢)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 ②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

*연각(緣覺) ; 산스크리트어 pratyeka-buddha  팔리어 pacce ka-buddha

홀로 연기(緣起) 이치를 관찰하여 깨달은 .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깨달은 .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홀로 수행하는 . 독각(獨覺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

*보살(菩薩) ;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 준말.

bodhi 깨달음, sattva 살아 있는 존재,  중생을 뜻하므로-보살은 깨달을 중생,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구도자(求道者)라는 .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각유정(覺有情) 등으로도 불린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 .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 이타(利他) 행하는 .

 보살승(菩薩乘) 준말.  수행자.  고승(高僧) 대한 존칭.  여자 신도를 일컫는 .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진리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

*보신불(報身佛) ;부처가 전생에 보살로 있을  세운 서원(誓願) 수행의 과보(果報)로서 받은 . 
모든 부처가 법신·보신·화신을 동시에 갖추고 있지만 대표적인 보신불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 등이 있다.

*화신불(化身佛) ;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고행(苦行) ; 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니련선하(尼連禪河) ; 네란자라(nerañjarā) . 중인도 마갈타국 가야성의 동쪽에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항하(恒河, 갠지스 )  지류. 석가모니께서 6 고행하던 끝에,  강에서 목욕하고 수자타(Sujata) 바치는유미죽(糜粥) 드시고 붓다가야(Buddha-Gayā) 가서 보리수 아래에서 49 동안을 정진을 하셔 성도하였다.

*쇄락(灑落 물뿌릴 /떨어질 ) ; 기분이나 몸이 상쾌하고 깨끗함.

*붓다가야(buddhagayā) ;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네란자라(nerañjarā 尼連禪河) 강변에 있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부파 불교(部派佛敎)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승()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사제(四諦) ; () ‘sacca’ 번역으로 진리를 뜻함. (-괴로움)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도 .

①고제(苦諦,苦聖諦). ‘(-괴로움)’라는 성스러운 진리.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 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 고다”(상응부)

②집제(集諦,集聖諦). ‘고의 원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몹시 탐내어 집착하는 갈애(渴愛) () 일어나는 원인이라는 진리.

③멸제(滅諦,㓕聖諦). ‘고의 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됨으로써 (-괴로움) 소멸되어 고의 끝남, 열반에 이른다는 진리.

④도제(道諦,道聖諦). ‘고의 멸에 이르는 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팔정도(八正道)-정견(正見,바른 이해)•정사유(正思惟,바른 생각)•정어(正語,바른 )•정업(正業,바른 행위)•정명(正命,바른 생계)•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정념(正念,바른 마음챙김)•정정(正定,바른 집중)- 갈애를 소멸시켜,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다.

*십이인연(十二因緣) ; 십이연기(十二緣起).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 무명(無明) 근본 원인으로 하여 중생으로서의 인간의 괴로운 생존이 12가지 요소의 순차적인 상관관계에 의한 것임을 설명한 .

무명(無明)---> ()---> ()---> 명색(名色)---> 육입(六入)---> ()---> ()---> ()---> ()---> ()---> ()---> 노사(老死).

 무명(無明) 조건으로, 의도적인 행위와 업을 구성하는 형성() 생겨난다.

 형성() 조건으로, 의식() 생겨난다.

 의식() 조건으로, 정신물리적인 현상인 명색(名色) 생겨난다.

 명색(名色) 조건으로,  6가지 감역(六入) 생겨난다.

 감역(六入) 조건으로, 감각적, 정신적 접촉() 이루어진다.

 접촉() 조건으로, 감수() 생겨난다.

 감수() 조건으로, 갈애() 일어난다.

 갈애() 조건으로, 집착() 일어난다.

 집착() 조건으로, 존재() 생겨난다.

 존재() 조건으로, 태어남() 생겨난다.

 태어남() 조건으로, 늙고 죽음(老死) 생겨난다.

 무명(無明) 사라지면 의도적인 행위와 업을 구성하는 형성() 사라지고, 형성() 사라지면 의식() 사라지고........마침내 태어남() 없으면 늙고 죽음(老死) 사라진다.

*연기(緣起)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 조건() 상호 관계를 통하여 일어남을 이르는 .

만약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若有此則有彼), 만약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若生此則生彼).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어지고(若無此則無彼), 만약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若滅此則滅彼).” (중아함경)

*녹야원(鹿野苑) ; 석가(釋迦) 35세에 성도(成道)  최초로 설법을 개시한 곳이며, 이때 교진여(僑陳如)  5명의 비구(比丘) 제도(濟度)하였다.

갠지스  중류, 지금의 바라나시(Varanasi, 베나레스 Benares)에서 북동쪽  7 지점에 있는 사르나트(Sarnath) 유적이  녹야원의 . 사슴동산(녹야원),  사르나트(Sarnath)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natha)’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우루벨라(uruvelā) 마을의 붓다가야(buddhagayā)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 거리로  200㎞됨. 탄생(誕生:룸비니) ·성도(成道:붓다가야) ·입멸(入滅:쿠시나가라) 땅과 더불어 불교(佛敎) 4 성지의 하나.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우기(雨期) ; 비가 계속해서 많이 내리므로 안거(安居) 행하는 음력 4 16일부터 7 15일까지, 또는 음력 5 16일부터 8 15일까지 3개월 동안.  기간에 고대 인도의 수행자들은 동굴이나 사원에서 수행에만전념하였는데, 이를 우안거(雨安居)라고 .

*정사(精舍) ; vihara. 수행승들이 머물면서 불도(佛道) 닦는 . 사원. .

*유행(遊行) ;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수행함. 행각(行脚).

*죽림정사(竹林精舍) ;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원.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 칼란다(kalanda) 장자(長者)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

*기원정사(祇園精舍)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정사의 약어(略語). 중인도 코살라국() 수도 사위성(舍衛城:슈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에 지은 .

이는 기타태자의 동산에 수달(須達 : 給孤獨長者) 지은 승원이라는 뜻인데,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 고독한 이들에게 보시를 많이  부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 ; 산스크리트어 쿠시나가라(kuśinagara). 지금의 네팔 남쪽에 인접해 있던 말라족(malla) 말라국 도읍지로, 붓다가 입멸한 . 붓다는  나라의 북방의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겨드랑이를 밑으로 해서 입멸하셨다.

*공양(供養) ; ①불()•()•() 삼보(三寶) 음식 등을 바침. ②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 ③봉사함. ④절에서 음식을 먹는 .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좋은 과보를 받을 선행(善行).

*봉축(奉祝) ;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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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천왕(帝釋天王) ; ‘()들의 제왕[] 샤크라〔釋〕라는 . '제석(帝釋),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 산스크리트어 indra 번역, () 산스크리트어 śakra 음역. 석제환인다라(釋帝桓因陀羅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제석천이라 한다.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 32() 통솔하면서 불법(佛法)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석천이 부처님 설법회상을 항상 떠나지 않는 것은 일찍이 부처님이 도리천(忉利天) 올라가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할  제석천이 사자좌(獅子座) 설치하고 정성으로 장엄하여 부처님을 영접한 데서 비롯된다. 밀교에서는 호세팔방천(護世八方天)  십이천(十二天) 하나로서 동방을 수호하는 신이다.

한국에서는 천제석(天帝釋천주(天主)라고도 부른다. 《법화경》 서품에 나오는 '제석은 환인이며, 도리천주이고 옥황상제로서 제석이라 일컫는다' 말에 따른 것이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  손에 금강저(金剛杵)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눈썹 사이에  털이 있다, 발바닥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신통(神通 불가사의할 /통할 ) : 수행을 ()하여 도달하는 걸림없는 초인간적인() 능력.

*사주(四洲) ;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 사방에 있다는  대륙.

①남섬부주(南贍部洲) ; 남쪽의 섬부주(贍部洲). 섬부(贍部) 산스크리트어 jambu 음사. 잠부(jambu) 나무가 많으며,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 여러 부처가 나타나는 곳은  대륙 가운데 이곳뿐이라 .

②동승신주(東勝身洲) ; 동쪽의 승신주(勝神洲). 이곳에 있는 인간들은 신장이 뛰어나다고 하여 승신(勝身)이라 .

③서우화주(西牛貨洲) ; 서쪽의 우화주(牛貨洲). 여기에서는 소를 화폐로 사용한다고 하여 우화(牛貨)라고 .

④북구로주(北俱盧洲) ; 북쪽의 구로주(俱盧洲). 구로(俱盧) 산스크리트어 kuru 음사로, 종족 이름.  대륙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 .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단계로 나눈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이른다.

*삼계도사(三界導師) : 삼계(三界) 중생을 열반(涅槃) 인도(引導)하는 위대한 사람. 부처님을 말함.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가지 (),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이른다.

*오체투지(五體投地) ;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 먼저  무릎을 꿇고  팔을 땅에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여래(如來) ; 여래 십호(如來十號) 하나. ‘진여(眞如) 세계,  열반에 다다른[]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 달리 이르는 말이다. 다타가타(tathāgata) 번역어이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 음사(音寫). 예류(預流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색계·무색계의 견혹(見惑) 끊은 성자. 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입류하고 .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예류과(預流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예류향(預流向)이라 .

소승불교에서성문(聲聞)으로서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사다함(斯陀含아나함(阿那含아라한(阿羅漢)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참고] 견혹(見惑) ; ①사제(四諦)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取見계급취견(戒禁取見((((() 있음.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분별기(分別起) 말함.

*번뇌(煩惱 번거러울 /괴로워할 ) ; ①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 나쁜 마음의 작용. 번요뇌란(煩擾惱亂) .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는 정신작용.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성냄()•어리석음()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앞의 () () ()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우리의 생각의 일어났다 없어졌다 것이 바로 생사(生死) 것입니다. ;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p103~105.

*普濟尊者示覺悟禪人(보제존자시각오선인)—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念起念滅을  謂之生死니  當生死之際하야  須盡力提起*話頭호리니  話頭가  純一하면  起滅이  卽盡하리라

起滅卽盡處를  謂之寂이라하니  寂中에  無話頭하면  謂之*無記요  寂中에  不昧話頭하면  謂之靈이라하나니  卽此空寂과  靈知가  無壞無雜하야  如是用功하면  不日成之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 이르나니, 생사(生死)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이르나니,

 공적(空寂) 영지(靈知)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가서 성취하리라


(역주)

*보제존자(普濟尊者) :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화두(話頭) ; 화두에 참구(叅句) 참의(叅意)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기(無記) : [] Avyaksita ()•()•무기(無記) 3성의 하나。 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 말한다。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 죽어서 간다는  가지 괴로운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公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공안)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공안 또는 화두(話頭)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 ; (산스크리트어: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이뭣고? ; 분류 이뭣고 화두 참고.

*이뭣고? ( 무엇고 是甚 시심마,시삼마) : ‘ 무엇고? 화두  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무엇고?(이뭣고?)하고  생각일어나는 당처(當處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 행동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장애() 생기는 .

*팔풍(八風) :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는 여덟 가지 현상을 말한다.

 뜻에 맞고(),  뜻에 어기는 (),   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   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 면전에서 찬미하는 (), 면전에서 비방하는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 몸과 마음을 즐겁게  주는 () 등이다. 팔풍은 간단히 나누면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이다.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소리,향기,,감촉(色聲香味觸)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이른다.

*경계(境界) ; ①어떤 영역끼리의 한계. 또는 영역끼리의 사이, 접점. ②인식 또는 어떤 세력이 미치는 범위.

*거각(擧却  ,어조사 ) 화두를 든다(들다).

*언필칭(言必稱) ; 말을  때면 항상 일컫기를.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 목숨이 있는 . 산것. 살아있는 .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있는 요소. 본질.

*제도(濟度 건널 /건널 ) ; 중생을 미혹의  바다(생사의 고해苦海)로부터 구하여() 생사 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 이르게 하는() . () 구제(救濟). ()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건널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 도탈(度脫 건널 ,벗을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통달할 )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②태어나는 .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③세간을 초월하는 . 출세간(出世間) 준말. 삼계(三界) 나오는 .

*버큼 ; '거품'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무명(無明) : []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 이름.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기신론(起信論)>  이것을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  이치에 어둡게   처음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선우(善友).

*미륵불(彌勒佛) ; Maitreya. 번역하여 자씨(慈氏).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 천인(天人) 위해 설법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  56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사바세계에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세존의 교화에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석가모니세존의 업적을 돕는다는 뜻으로 보처(補悽) 미륵이라 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발심(發心) ;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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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행(因行) ; 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 되는 ().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제행무상게(諸行無常偈), 설산게(雪山偈)라고 한다. 번역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니, 이것이 나고 죽는 법이로다. 생과 멸이 다하면은(생멸심이 끊어지면), 적멸이 낙이 되느니라.’

열반경에 부처님 과거 인행(因行) 때에 설산에서 설산동자로 고행을 하고 계실 , 앞의  구절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을 들은 후에, 나머지 게송을 듣기 위해 나찰귀신으로 변한 제석천왕(帝釋天王)에게몸을 바친 전생담에서 나온 게송.

*나찰(羅刹) : 신속하게 땅이나 공중으로 다니면서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무서운 악귀(惡鬼). 나중에 불교의 수호신(守護神) 되었다.

*상제보살(常啼菩薩) ; 중생을 근심하고 염려하여  울고 있는 보살이다. 산스크리트로는 사다프라루디타(Sadaprarudita) 음역하여 살타파륜(薩陀波倫)이라 하고, 의역하여 상제보살(常啼菩薩)이라 한다.

보자보살(普慈菩薩상비보살(常悲菩薩)이라고도 한다. 부처가 없는 세계,  말법(末法) 세상에 태어나 중생에 이익을 주기 위해 불도를 추구하고   숲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운다.

《대지도론》에는 살타 ()’, ‘파륜' '()’ 뜻한다고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울기를 좋아하여 상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중생이 나쁜 길에 빠지거나, 가난하여 굶주리고, 늙고 병들거나, 근심하고 염려하는모습을 보면 이를 가여워하여 슬피 운다. 《지도론》에는  보살을 《반야경》의 수호자로 등장하고, 《반야바라밀다경》에는 반야바라밀다를 들으면  생각으로 환희에 가득  엉엉 소리를 내어 운다 나와 있다.

*분골쇄신(粉骨碎身) ; 뼈를 빻고 몸을 부순다는 뜻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있는 힘을 다한다는 .

*위법망구(爲法忘軀) ; (진리) 구하기 위해 () 돌보는 것을 잊는다().

*요지(要旨) ; 말이나  따위에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

*진의(眞意) ; 참된 의도나 마음. 또는 진짜 의도.

*연비(燃臂) ; 불교에서 수행자가 () 받을 , 팔뚝에 향이나 심지로 불을 놓아 뜨는 의식 또는  자국.

*소신연비(燒身燃臂) ; 소신공양(燒身供養). 자기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침. 또는 그런 .

*범부(凡夫 무릇·보통 /남편·사내 ) ; 번뇌(煩惱) 얽매여 생사(生死)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게송) 운변천첩장~ ; [편양당집(鞭羊堂集)] 卷一 偶吟一絶’, 편양언기(鞭羊彦機) 게송 참고.

*()겹치다. 포갬. *()산봉우리. *()난간. *()열흘. 열흘 동안. *() (반어)어찌  있겠는가. *() 개다.  그치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세계. 현실의 세계.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교화하는 세계.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한역.

*발심(發心) ;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發起菩提心발기보리심, 發菩提心발보리심.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

*합당하다(合當--) ; (…/에게) 어떤 기준, 조건, 용도, 도리 따위에  알맞다.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 죽어서 간다는  가지 괴로운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전화위복(轉禍爲福) ; ‘재앙[]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 뜻으로, 좋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좋은 일이 생김을 이르는 .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 이치(理致)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라고   일체의 (). ③시비(是非)•선악(善惡)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 순경(順境), 내경(內境) 외경(外境) 있다.

*() ; ①허깨비.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因緣) 모여서 생긴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에 비유함. ()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생의 미혹한 생각임. ()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승(二乘-聲聞,緣覺) () 얽매인 견해, 단공(但空-단지 空만을 집착하는 ).

()  () 거의 같은 뜻이므로 환화(幻化), 꿈과 비슷하므로 환몽(幻夢)•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②신기루, 아지랑이 같은 .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 목숨이 있는 . 산것. 살아있는 .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③부처가   있는 요소. 본질.

*관법(觀法) ; 마음으로 진리를 ()하고 ()하는 수행. 마음의 산동(散動) 멈추어,  결과 생기는 지혜[明知] 모든 대상[諸法]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는 수행.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 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생각만 주시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는 수행.

*멸진정(滅盡定) ;  모든 마음 작용이 소멸된 선정(禪定).  무소유처(無所有處) 경지에 이른 성자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무생(無生) ; ①생멸(生滅) 벗어난 절대의 진리. 생멸(生滅) 없는 도리.  불생불멸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 알고 거기 안주하여 움직이지 아니함. 무생법인(無生法忍). ②아라한(阿羅漢) 또는 열반(涅槃) 번역어. 번뇌를 없앤 경지를 말함.

*종기(腫氣 부스럼 ,기운 ) ; 사람이나 동물의 피부가 곪아 고름이 차는 질환.

*만신창이(滿身瘡痍  , ,부스럼 ,상처 ) ; 온몸이 제대로 성한 데가 없을 만큼 상처투성이가 .

*창병(瘡病) ; 피부나 살에 발생하는 질병을 통틀어 이르는 .

*() ; (산스크리트어 : karma카르마)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방편(方便 방법·수단 /편할 )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 달리 이르는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단속(團束) ; ①주의를 기울여 다그쳐 보살핌. ②규칙, 법령, 명령 등을 어기지 않게 통제함.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게송) 一把柳條收不得  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23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주요 내용]


(게송) 묘체유래무처소~ / 천상천하(天上天下) 두두물물(頭頭物物) 묘체(妙體) 아님이 없어부처님의 생애 / ()공양의 공덕 / 제석천왕의 설화 / ‘이뭣고?’ 진리의 등불 켜는 ,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는 / 선지식(善知識), 불보살의 화현 / (게송) 운변천첩장~ / 사바세계는 성불(成佛) 있는 가장 좋은 여건이 갖추어진 세계다 / '이뭣고?'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 온갖 부처님의 성스러운 관법이 들어있다.



[주요 문구]


공양의 공덕 - 몸뚱이 있는 채로, 진리를 향해 우리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시듯이 우리도 오늘 새로 태어나야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화두를 거각(擧却) , 마음속진리의 등불 켜는 것이고, 자성중생(自性衆生) 제도하는 .


우리가 신심(信心)으로서 보면은 날마다 불보살의 화현을 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탐진치 삼독이 가득찬 눈으로는 날마다 불보살을 친견하면서도 불보살인 모르고 지나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뭣고?’ - ‘ 생각돌리는 것이 소신연비(燒身燃臂), 위법망구(爲法忘軀) 신심인 것입니다.


모든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경계는 ()으로, 우리의 중생 ()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모든 () 몽환(夢幻) 경계인데, 중생의 ()으로 나타나는 모든 경계는 꿈속에 앓는 만신창병(滿身瘡病) 같은 것입니다.


꿈속에 앓는 만신창이, 꿈을 깨면서 낫는다


모든 경계가 () 깨닫는 법이 바로이뭣고?’ 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해탈도로 가는 길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76~400)2016. 2. 8. 15:00



(No.378)—89 설날차례(89.02.06)(20)


약 20분.


기사(己巳) 새해를 맞이해서 차례(茶禮)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대사자후(大獅子吼) 오늘 차례를 모시게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원근 친척과  법보단(法寶壇) 모신 만년위패(萬年位牌) 여러 영가(靈駕)분과  도량 내외 우주법계의 무량 법계 영가들이 일시에 도탈(度脫)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  신라 이전부터서 내려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설날이 양력(陽曆) 쓰게 됨으로 해서  전통이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가정에 따라서 차례를 젓수기도 하고 양력설을 쇠기도 하고,

근자에는 민속의 날이니 뭐니 해 가지고 갈팡질팡하다가 금년부터 정식으로 설날’로서 국가적으로 공인하는 우리의 명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부터 내려오는 우리 한국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으로부터  5대조 부모까지 집안에 사당(祠堂) 모시고 거기에 위패내지 신주(神主) 가묘를 모시고서 명절에는 차례를 올리고, 제사 때에는  가묘와 신주를 모셔다가 제사를 올리고 그래 내려왔었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거의 집안에 사당을 모시는 집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시골에나 가면  있을란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졌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용화사 법보전에 만년위패 제도를 개설을 하셔서, 법보단이라고 합니다마는,

법보단을 개설을 하셔서 우리의 선망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조석으로 축원해 드리고 명절 때면 차례를 올리고, 모든 법요식 때마다  영가들을 초혼(招魂)을 해서  천도(薦度) 법요식에 떳떳하게 초대받아서 감응(感應)을하시게 해드렸고,

법회 때마다  영가들은 우리의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영가의 자리에서 법문(法門) 듣고 업장(業障) 소멸(消滅)해서 인연 따라서 좋은 곳으로 환생(還生)하시도록 이러한  고마운 그런 제도를 마련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영가들이, 발붙일  없는  영가들이 편안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렇게 법문을 듣고서 해탈(解脫)해 간 그러한 영가들이 많이 계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가정도 편안하고, 물론  영가도 해탈해 가니 좋지마는 그 유족 가정도 편안해지고, 사회도 편안해지고,  법계도 편안해질 것입니다.


영가는 우리 눈으로는   없지마는 살아있는 사람의  소소영령한 마음자리,  영혼이  몸뚱이를 벗어버리면 영가가 되는 것입니다.


 영가가 지은 업과 인연에 따라서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는 다시 인도(人途)에 환생하기도 하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축생이나 아귀나 지옥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탈을 쓰느냐? 뒤집어쓰는 탈만 달랐지,  탈 속에 들어 있는 소소영령한  영가는 산 사람이나 돌아가신 분이나 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에 옛날부터서 내려오는 선현(先賢)들의 옛법에, 돌아가신 조상을  살아계실 때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사당을 모시고  받들고  산소에도  년에  번씩 성묘(省墓)를 들이고  산소가 허물어지면은 벌초(伐草)도 하고 사초(莎草)도 해서 그렇게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 깊은  명절을 금년부터 되찾게  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돌아가신 영가를  받드는 데에는 그와 같은 뜻도 있지마는 돌아가신 조상을  받드는 그러한 옛법이 살아계신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나아가서는 이웃 어른, 다른  집안의 어른, 모든 어른들을 존경할  있는 마음을 거기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받들  모르는 사람은  살아계신 부모와 조부모를  받들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은  부모에 대한 효사상은 거의 없고 연세가   이상 넘으면은 의례히 양로원으로 갖다가 계시게 하는 제도가 발달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근자에 와서 차츰차츰 우리의 전통 의식은 잃어가고 서양풍속이 들어와 가지고 그것도 정립을 하지 못한  돌아가신 영가도 발붙일 곳을 잃고, 살아계신 노인들도 발붙일 곳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앞으로는 돌아가신 영가도  받들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도 효성스럽게  받들  있는 그러한 우리 한국의 전통 예법 사상이 다시  회복을 해서 젊은 사람이나 나이 잡순 분이나 모두가  가족으로서 행복한 삶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수가 있습니다.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법당에 모셨으니 우리가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면서   가족인 것입니다.


이 설날은 어렸을  그렇게  손꼽아서 기다리고 그랬던 기억납니다마는, 무엇이 그렇게 설날을 그렇게 기다렸던가?  그렇게 가슴 설레이는 나날을 보내면서  그믐날 저녁은 잠을 자지 아니하고 그랬던 것을 우리는 기억을  수가 있습니다.


조부모님  부모님께 세배(歲拜) 드리고, 이웃 모다 대소가(大小家) 어른들께 세배 드리고,  마을에 어른들을 집집마다  옷을 입고 다니면서 세배를 드렸고,

그리고 그날 하루는 널도 뛰고 윷도 놀고 연날리기도 하고 그리고서  마을이 패를 갈라서 줄다리기를 하고  부인들은 상육도 치고 이러면서 정초를 그렇게  즐겁게 지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동안 쌓인 모든 가슴속에 섭섭한 , 원한 관계 모든 감정을  풀어버리고 서로 용서하면은 그래 가지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가족이 단합을 하고 대소가 끼리 화목을 하고, 이웃과 화목을 하면서   년을 새롭게 출발을 하고 설계를 하고 그렇게 향상해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배할 때에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면서  많이 받으십시오  결혼을 아직 못한 사람은 좋은 베필을 만나도록  축복을 해 주고,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 성취하라 그러고, 아들을 못 난 사람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으라고  이렇게 덕담을 해 주고,

그래서 온통 그날은 남 잘되기를, 자기 잘되는 거 보다도 만나는 족족  사람 잘되라고 그렇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들이 결국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그러한 찰나 찰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과 개인, 가정과 가정   사회, 국가 이렇게 해서 서로의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그러한 기회로 승화시키는 그런 효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가정도 화합이 깨지면은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이고, 어떠한 사회, 어떠한  회사라도  회사 내에 화합이 깨져서 서로 미워하고 모략하고 하면은  회사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나라도 모든 국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서로 단합하고 그런 데에서  나라의 힘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라를 멸망을 할라면은 간첩을 보내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나라 민족의 민심을 갖다가 분열을 시키고, 이것은  전쟁을 이기는 데 절대적인 병법(兵法)인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올바르게 발전을 하고 훌륭한 나라가 될려면 어쨌든지 우리의 민족정기를 앙양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서로서로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합을 해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부처님의 정법을 선양하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사람 마음과  마음이 화합이 되고 하나가 되느냐?’하는 것은 상대방을 힘으로 누르고 꾀로써 정복을 해 가지고는 하나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첫째,  마음을 비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움으로써 내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고 착해지면 자연히 상대방이 나를 좋게 보고, 좋은 마음으로 또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마음의 거울이고,  얼굴은상대방의 마음의 거울인 것입니다.

피차(彼此)가  거울에 나타난 자기의 모습을 깨끗이 거울을 보고 자기의 얼굴에 묻은 때는 닦을  알면서, 진짜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보고는 자기의 마음의 때를 닦을 줄을 모르는것입니다.


얼굴에 묻은 때는 닦을  알면서  자기의 마음의 때를 닦을 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집안에 미운사람, 이웃의 미운 사람  사람 얼굴은 바로 자기 마음의 거울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을 보고 자기도 성을 내면, 성을 낼수록  사람 상대방 얼굴은 점점  고약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로서 자기 마음의 때를 닦고서 고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상대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굳었던 얼굴이 풀어질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인상이 고약하게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고약한 사람을 보고 나도 위아래 훑어보면서 아니꼬운 표정을 지면서 같잖은 아주 그런 얼굴을 지어 보십시오. 상대방은 점점 험악해질 것입니다.

내가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부드러운 말로 , 어디가  좋으십니까?” 이렇게 부드럽게 달라들면,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비우면 상대방의 마음도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공(我空), 인공(人空) 그래가지고 구공(俱空)이 되는 것입니다.  아공(인공), 법공(法空), 구공 이것을 3공(三空)이라 그러는데, 이것은 교리적으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그렇습니다마는 이뭣고?’ 한마디에 아공(인공) 법공과 구공이 바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가 되고 이러한 운동이 가정에서 가정으로 해서  세계에 퍼져 나간다면 이것이 국가도 하나가 되고, 세계도 하나가 되어서 세계가 뿌리가  뿌리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꽃이 되도록 세계일화(世界一花)가 되도록,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거룩한 법(法)인 것입니다.


오늘 기사년 새해를 만나서 이러한 각오를 가지고  출발을 해서 모두모두 유루(有漏) 무루(無漏)의 모든 복(福)을 원만성취하시기를 바라면서 새해 인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예불(禮佛) 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 하고 그리고서  도량에 유숙(留宿)한 우리 사부대중 모두가  세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새벽에 여기 계시지 못한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우리가 법보가족이기 때문에 오늘 일제히 지금 일어서서 서로 이렇게 맞보고 세배를목탁에 맞춰서 선 채로 세배를 함으로써 새해를  출발을 하면 좋을 같습니다.


일어서십시오. 가운데를 향해서(중앙을 향해서 마주 서주십시오. 목탁에 맞춰서 반배를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새해  많이 받으십시오.(처음~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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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사람의 선망부모가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 수천만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부모가 바로  사람의 부모고,  사람의 부모가   부모여서,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고,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 하는 것입니다.”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 법당(法堂) 법보전(法寶殿) 안에 위패를 모신 ().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법보전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법보전에서 좋은 도반들과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 ()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도탈(度脫) ; ①생사의 고해를 건너 깨달음의 언덕에 이름. ②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남.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남.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 이르던 . 잡수다-->‘먹다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 (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사당(祠堂) ; 조상의 신주(神主) 모셔 놓은 . 또는 신주를 모셔 놓기 위해 조그맣게 집처럼 만들어  .

*초혼(招魂) ; 죽은 사람의 혼을 부름.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

*감응(感應) ; 감응도교(感應道交). 부처님과 수행자의 마음이 교류하는 . 중생의 신심, 선근(善根) 모든 부처님보살에게 통해서  힘이 나타나는 . 중생의 신심이 진실하게 느껴져, 부처님과 보살이 답하는 .

중생 기감(機感,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중생의 소질이나 능력) 뜨거우면 부처님의 ()하는 마음도 또한 깊다. 그쪽과 이쪽이 사이를 두지 않음을 도교(道交) 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 영령(靈靈) 함께 밝은 .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 의미하는 .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 )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 진리에 이르는 .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 행동··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생긴 장애() 사라져 없어짐.

*환생(還生) ; 생명체가 윤회하여 다시 태어남.

*해탈(解脫)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내나 ; 결국에 가서는.

*선현(先賢) ; 옛날의 현인(賢人 어질고 지혜롭기가 성인에 견줄 만큼 뛰어난 사람).

*옛법 ; 옛 규칙이나 법도.

*사초(莎草) ; 무덤에 떼를 입혀 잘 다듬는 일. 또는 무덤에 입힌 떼.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 수행하는 . 불법(佛法) 닦으면서 사귄 .

*대소가(大小家) ; 한집안의 큰집과 작은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상육 ; 정초나 겨울철에 많이 놀았던 주사위 놀이.

*같잖다 ; ①하는 짓이나 꼴이 제격에 맞지 않고 눈꼴사납다. ②말하거나 생각할 거리도  되다.

*달라들다 ; ‘달려들다(어떤 일에 열의를 가지고 끼어들다)’ 사투리.

*아공(我空) ; 인공(人空). 인무아(人無我).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아집(我執) 대해,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고 보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 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아집(我執)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하는데, 번뇌장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의미이다.—위키백과 '()' 항목 참고.

*법공(法空) ; 법무아(法無我). 존재하는 만물 각각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보는 법집(法執)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 혹은 이치, 또는 이러한 깨우침을증득한 상태 또는 경지이다.

법집(法執) 소지장(所知障)이라고도 하는데, 소지장은 참된 지혜,  보리(菩提)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라는 의미이다.—위키백과 '()' 항목 참고.

*구공(俱空: 아공(我空) 법공(法空) 경지에 차례로 도달한 , 다시  아공(我空) 법공(法空)까지도 버려 비로소 제법(諸法) 본성에 계합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수행에 의해 이러한 경지를 증득한 것을 뜻한다.위키백과 '()' 항목 참고.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 복이어서 한도(限度)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받아버리면 다시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얻었던 것을 결국은  없애면서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죄를 짓지 않게 하고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 같은  좋은 방향으로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송담스님(No.565) - 1996 설날통알  설날차례(1996.02.19)에서.


(4분 50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 원수다.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 가게 되니까 그래서  유루복은 원수이고,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원수고, 마지막에는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수도 없고, 생활도  수도없고, 자식교육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좋은 방향으로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과보(果報) 바래.

공투세를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무루복을 참으로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밖에 없는 그러한복을 심고 종자(種子)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무루복(無漏福) ; 번뇌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 의해서 내가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무루복(無漏福) 유루복(有漏福)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차례에 걸쳐 ·보살(·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십악참회(十惡懺悔) ; () () 마음()으로 짓는 10가지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 사견(邪見)- 지은 자기의 잘못에 대하여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유숙(留宿 머무를 /묵을 ) ; (사람이 어디에) 여장(旅裝, 여행할 때의 차림) 풀고 묵음.



[주요 내용]


설날 국가공휴일 지정 / 만년위패 제도, 법보가족 / 상대방은 곧 내 마음의 거울 /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 3공(三空) / 세계일화(世界一花).



[주요 문구]


여기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수가 있습니다.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법당에 모셨으니 우리가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도반(道伴)이면서   가족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은  사람 마음과  마음이 화합이 되고 하나가 되느냐?’하는 것은 상대방을 힘으로 누르고 꾀로써 정복을 해 가지고는 하나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첫째,  마음을 비워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움으로써 내 마음이 맑아지고 깨끗해지고 착해지면 자연히 상대방이 나를 좋게 보고, 좋은 마음으로 또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마음의 거울이고,  얼굴은상대방의 마음의 거울인 것입니다.

피차(彼此)가  거울에 나타난 자기의 모습을 거울을 보고 깨끗이 자기의 얼굴에 묻은 때는 닦을  알면서, 진짜 자기의 마음의 모습이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것인데 그것을 보고는 자기의 마음의 때를 닦을 줄을 모르는것입니다.

얼굴에 묻은 때는 닦을  알면서  자기의 마음의 때를 닦을 줄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집안에 미운사람, 이웃의 미운 사람  사람 얼굴은 바로 자기 마음의 거울인 것입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을 보고 자기도 성을 내면, 성을 낼수록  사람 상대방 얼굴은 점점  고약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로서 자기 마음의 때를 닦고서 고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상대하면 상대방의 마음도 굳었던 얼굴이 풀어질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