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700/(626~650)2021. 7. 3. 17:01

 

 

((No.645))—2000년 하안거 해제, 백일기도 회향, 백종법회 (45분)

 

 

(1/3) 약 14분.

 

(2/3) 약 17분.

 

(3/3) 약 14분.

 


(1/3)-----------------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하야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간시비도불관(世間是非都不管)하고  일여청류소명월(日與淸流掃明月)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하니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이로다.
올올히 일 없이 청산을 대하고, 올올히 일 없이 청산을 대한단 말은 일체를 도막사량(都莫思量) 하고 세상의 흥망성쇠와 생노병사까지라도 다 놓아 버렸으니 이것이 일 없는 무사(無事) 한도인(閑道人)이거든. 그리고서 청산을 떠억 대하고 앉아서 정진하는 거동(擧動)을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석 달 동안을 더위도 잊어버리고, 일체 시비(是非)도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석 달 해제를 맞이했어.
그러니 그 기상이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이여. 그 청정하고 의연한 자세가 하늘에 뻗찌르는, 그러고 사해(四海)를 덮고도 남을 만한 그런 기상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천마(天魔), 하늘의 마왕 파순(波旬)이의 권속들이 그런 것들이 다 그 앞에 고개를 들지를 못하고 머리를 숙인다 그 말이거든.

세간시비(世間是非)를 도막관(都莫管)하고, 세간에 옳고 그른 것을 다 놔 버리고,
일여청류(日與淸流)로 소명월(掃明月)이다. 날마다 흐르는 물이 마치 명월(明月)을 씻은 거와 같이 그렇게 모다—‘어떻게 흐르는 물이 명월(明月)을 씻느냐’ 하면은 하늘에 밝은 달이 물에 비추는데, 그 맑은 물이 계속 흘러가니까 흘러가는 물에 의해서 물에 뜬 달이 씻겨진 것에다가 비유해서, 우리가 정진하고 있는 경지가 마치 흐르는 물에 밝은 달이 씻겨가는 것에다가 비유한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석 달 동안을 정진을 하셔서 그리고 해제 법요식에 이렇게 여러 곳 선방에서 운집을 했는데 오늘은 7월 15일 백중날이거든.
‘백중(百中)날’ 이라는 것은 옛날부터 ‘부모의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이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란분(盂蘭盆)이라고도 하는데, 인도말로 '우란분'이라고 하는데 '우란분'이란 말을 번역을 하면 구도현(救倒懸)이여. ‘거꾸로 매달린 것을 구제(救濟)한다’

선망부모(先亡父母)가 지옥에서 꺼꾸로 매달려 가지고, 갖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영가를 구제하는 그래서 ‘구도현(救倒懸)’인데, 그것은 『목련경(目連經)』에 나오는 설화가—여기서 불가불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데.

목련존자(目連尊者)는 세속에 있을 때부터 효심이 지극했어. 출가하기 전에는 큰 장사를 하고, 그런데 (큰 장사를) 나갈 때 홀로 계신 어머니께 ‘어떻게 어떻게 하고 어떻게 어떻게 하시고 잘 계시라’고 했는데, 그 뜻을 전부 어기고 날마다 정법에도 어긋나고 도덕에도 어긋나는 그러한 언행으로써 갖은 악한 짓을 하다가 결국은 지옥에 떨어졌어.

지옥에 떨어져 가지고 갖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 목련존자가 출가를 해 가지고 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신통제일(神通第一)인 그런 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도인이 되었는데, ‘그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어떻게 구제를 할 것인가?’ 갖은 방법으로 다 구제하려고 해도 이루어지지를 못해서, 그래서 부처님께 "지옥고를 받고 있는 어머니를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니까,
"칠월 해제 때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하면 석 달 동안 열심히 도를 닦은 그 수행자들에게 공양을 올린 그 공덕과 그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그 정신으로 작관(作觀)을 하고 그래서 너의 어머니를 구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셔서 목련존자는 탁발(托鉢)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려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 어머니를 구제했다고 하는 목련경에 설화가 있습니다마는.

그래서 오늘도 이 해제 법요식에 많은 수행자들이 모다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고 또 많은 청신사(靑信士) 청신녀(靑信女)들도 이 자리에 많이 모이셨습니다.
물론 이 용화사 법당 안에 모셔진 만년위패 법보영가들의 백중 천도 법요식도 아울러서 행해지겠습니다마는,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는 물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고 그러시겠지만, 살아계신 부모님께도 효도를 하고,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 선망부모에게도 이러한 때에 동참(同參)을 하셔서 돌아가신 분들이 만에 하나라도 그런 삼악도(三惡道)에서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해서 이런 법요식에 참례를 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천상 사람이 무량겁을 두고 오면서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윤회를 하다가 금생에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또 이렇게 불자(佛子)로서 도반(道伴)으로서 이렇게 만나게 된 그 인연을 생각해 보면 참 깊고 깊은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부모와 선망부모의 천도 문제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신들도 과연 그런 삼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사의 윤회(輪廻) 속에 빠지지 않고 해탈(解脫)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런 때에 냉정히 스스로를 반성을 하고,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도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 그리고 청신사 · 청신녀 그리고 비구 · 비구니 여러 도반들께서는, 세상이 물질 문명은 점점 발달을 해서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할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발달이 되어서 살기는 퍽 편리하게는 되었으나, ‘진정으로 우리가 과거보다 훨씬 더 행복하게 되었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물질 문명이 발달한 만큼 더 행복해진 것은 별로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세속의 발달에 우리도 발을 안 맞출 수도 없고, 다 버리고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었다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오직 인연 따라서 열심히 도만 닦으면 별것이 아니겠지만, 세속에서는 세속의 모든 흘러감을 외면하고 자기만 혼자 옛날처럼 살기는 퍽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을 전적으로 무시는 하지 아니하면서도 항상 불자(佛子)로서의 자기 마음 닦는 일에는 절대로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처음~13분36초)





(2/3)-----------------

농계유식탕와근(籠鷄有食湯鍋近)이요  야학무량천지관(野鶴無糧天地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농계(籠鷄)는 유식탕와근(有食湯鍋近)이요. 닭장 속에 있는 닭은 먹을 것이 있지만, 시간 맞춰서 먹이를 후하니 주어서 배불리 먹고 있지만 머지않아서 펄펄 끓는 전골냄비가 기다리고 있고,
야학(野鶴)은 무량천지관(無糧天地寬)이다. 들에 훨훨 날아다니는 학은 특별히 누가 양식을 주거나, 양식을 쌓아 놓은 것은 없지마는 천지에 자유자재로 왔다갔다 자유롭게 살고 있구나.

이것은 세속에서 부(富), 재산을 모이고 명예와 권리를 모여서 남 보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을 모이느라고 죄를 짓고, 그것을 관리하느라고 죄를 짓고, 그것을 쓰느라고 본의 아니게 죄를 지어서 자칫 잘못하면은 그러한 업(業)으로 인해서 삼악도에 떨어질 우려가 다분히 있고,
그런 것을 다 무상(無常)한 것인 줄 철저히 깨닫고 그런 것을 다 버리고서 발심(發心)해서 도를 닦으면, 그건 마치 들 학과 같이 내 소유라고 하는 것은 땅 한 뙈기도 없고 아무것도 소유물도 없고 명예와 지위 부귀영화도 없지마는, 들 학처럼 걸망 하나 짊어지고 바리때, 장삼(長衫)만 하나 있으면 어느 선방에로 다니면서 도를 닦을 수가 있다. 그래 가지고 생사 요달(了達)을 해서 일체중생을 제도(濟度) 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도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원컨댄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을 보면서,
그 밑에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길이 무루(無漏)의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기를 원하노라. 이런 고인(古人)의 시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비구 · 비구니, 도반 여러분은 이러한 게송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추위나 더위나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모든 그런 것을 신심과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써 그런 것을 극복하면서 열심히 도를 닦어야 할 것이고, 머리는 깎지 않고 비록 세속에 몸을 담아 계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몸은 세속에 있지마는 그 정신 만큼은 이런 출가한 스님네 못지않게 생사 속에서, 부귀영화 속에서,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을 찾는 정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해서 스님네 못지않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각오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이 생사 문제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계시지만, ‘삼세제불이 우리를 제도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얘기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정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아니하면 삼세제불의 그런 힘으로도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를 닦을 때 삼세제불의 제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서 삼세제불이 억만 번을 출세(出世)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사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왕림하셔 가지고 왕궁의 부귀도 버리시고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그 법문이 문자화 된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에도 팔만대장경 장경각에 목각(木刻)을 해서 잘 봉안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팔만대장경의 법문이 그걸 다 읽기도 어려운 일이고, 다 해석해서 다 알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고인네들은, 조사스님네들은 그 안에 있는 요점만을 뽑고 또 뽑아서 어떠한 근기(根機)의 중생이라도 그렇게만 해 나가면 팔만대장경에 있는 진리를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그 길을 개척을 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지마는, 그 중에 최고의 훌륭한 법—간단하면서도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은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그것이 별 재미도 없고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데, 정말 무상(無常)함을 철저히 깨닫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다 보면 해 갈수록 뭣이 알아지는 것은 없어. 알아지는 것은 없지마는 해 갈수록 신심이 더욱 나오고, 더 무상을 철저히 느끼게 되고, 일분일초 시간을 아껴서 이 한 일에 철저하게 정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정진을 하다 보면은 '사람의 근기와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느냐'의 그런 차이로 해서 능엄경(楞嚴經) 50상(相) 변마장(辨魔障)에 나오는 거와 같은 그러한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꼭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정진을 하면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나 그런 가지가지의 형상이 나타날 수가 있는데, 나타난다고 해서 꼭 좋을 것도 없고. 그러나 그런 것이 나타나는 수가 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경지가 나타나면 그것을 ‘아, 내가 이것이 견성(見性)한 것인가 보다’ ‘이것이 바로 도통(道通)한 것인가 보다’ ‘이것이 앞으로 좋은 징조인가 보다’ 이렇게 착각을 하고 거기에 집착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른 경지냐, 올바르지 못한 경지냐' 그것은 본인이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을 많이 들어본 사람이면 스스로도 그것을 점검을 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법문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여태까지 보이지 않는, 느껴보지 못한 현상이 일어나니까 신기하고 묘해서 그것을 무슨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하고 좋아하고 집착을 할 수가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런 경지를 여기서 50여 가지의 경계(境界)를 낱낱이 얘기할 시간은 없고 대별(大別)을 하면,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서 업장(業障)이 소멸되어서 그래 가지고 식(識)이 맑아졌다 하면은 그것을 꼭 나쁜 쪽으로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업장소멸(業障消滅)하고 공부가 앞으로 잘 되어가기 위해서 일어나는 경우라면 거기에 집착을 아니하고 그런 것을 좋아할 겨를도 없고, 깨끗이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다시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것에 집착을 하고 좋다는 생각을 하고, 이것이 뭣이 알아진 것이 있고—무슨 조사의 어구(語句)나 『전등(傳燈)』 · 『염송(拈頌)』이나 경전을 보면 옛날에는 잘 몰랐었는데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고 그런 수도 있으니까 그걸 보고 ‘아, 내가 한소식 했다’ 이렇게 착각을 하고 한다면 그 공부는 거기서 중단이 되고 말 것이고,
조금 더 보태서 시(詩)를 짓는다던지, 게송(偈頌)을 짓는다던지, 함부로 ‘자기가 한소식 했다’고 떠벌리고 과시를 한다던지, 또 막행막식을 하고 횡설수설해 가지고 많은 사람한테 자기가 도를 통한 것처럼 선전을 하고 과시를 하고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도 망하는 거고, 불법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망하게 되는 거고, 많은 신도들도 그런 것을 보고 마음에 혼란심을 일으켜서 잘못된 데로 빠지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이라 하는 것이 꼭 해야 하는 것이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소견(所見)이 나거나 경계가 일어났을 때, 철저하게 선지식을 믿거나 선지식의 법문을 의지하지 아니한 사람은 까딱하면 잘못된 지경에 말려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런 점에 대해서 각별히 주의를 하시고,
자기가 조금 평소에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어떤 지견이 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이냐 아니냐'—정말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다 얻어서 부처님과 조사와 같은 그런 경지에서 오무생사(悟無生死)하고 증무생사(證無生死)해서 용무생사(用無生死)할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으면,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금 무슨 지견 난 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속에 품고 있다면은 불조(佛祖)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반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신도 단월(檀越)네에게도 부끄러운 일일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무엇을 해먹을 짓이 없어서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고 미득(未得)을 위득(謂得)해 가지고 대접을 받을라고 하는 그러한 짓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반성해서 자기의 잘못된 점을 반성을 하고 참괴심(慙愧心)을 가지고,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러한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여법하게 수행해 나가는 그러한 수행자가 되야 한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 여러분들은 전부 그러한 도반들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13분37초~30분20초)





(3/3)-----------------

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하고  상왕행처절호종(象王行處絶狐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자굴중(獅子窟中)에 무이수(無異獸)다. 사자굴 가운데에는 다른 짐승이 있을 수가 없어. 사자굴에는 오직 사자끼리만 사는 것이지, 사자굴 속에 어떻게 다른 짐승들이 사자하고 같이 살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상왕행처(象王行處)에 절호종(絶狐蹤)이다. 코끼리의 왕, 상왕(象王)이 터억 떼를 지어서 걸어가는 데에는 여우같은 그러한 간특한 짐승들이 그 사이에 끼여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철저하게 정법을 믿고 정법에 의해서 발심한 여러 도반들, 바로 사자요 코끼리의 무리와 비교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도반들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기왕 우리가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서 선방에 나와서 도를 닦는 최상승 학자일진대는 사자와 같이 상왕과 같이 그렇게 수행을 해 가야 할 것이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들도 기왕 불법을 믿고 참선을 하실라면 사자와 같은, 코끼리의 왕과 같은 그러한 마음과 그러한 행동으로 수행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에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다. 정말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혀라’ ‘이때[此時]’ 라는 게 ‘바로 지금’ 입니다.
이 가운데는 팔십 노령의 연세 높으신 그런 분도 계시고 아주 아직 젊으신 분도 많지마는 바로 우리가 이만큼 건강할 때에, 나이야 조금 많거나 적거나, 생활이 조금 어렵거나 풍부하거나, 그것도 따질 것도 없고 아직은 우리가 이만큼 이만큼 살 때 철저하게 도를 닦자 이거거든.

백년광영(百年光影)이 전두비(轉頭非)다. 많이 살아봤자 백 살 사는데, 백년(百年)이라고 하는 세월도 잠깐 동안에 지나가는 것이니 뒤로 미룰 일이 아니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를 말고.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이렇게 간절히 드리는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지 아니하면, 후생(後生)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아! 그때 좀더 열심히 정진할 것을...’
더 늙어 가지고 육체가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고, 대소변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행보도 자유롭지 못하고, 음식도 맘대로 먹지 못하고, 말도 자유롭게 못하게 될 그때에 가서 ‘그때 힘 좀 있을 때 정진을 열심히 할 것을...’ 그렇게 후회해 봤자 한(恨)만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오늘 여러 도반과 청신사 여러분께 여쭐 말씀을 대충 말씀을 했고, 몇 가지 광고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다른 게 아니고 평시나 또는 사십구재나 오늘 이렇게 백중 천도재 지낼 때 이 영단 앞에다가 여러 가지 정성이 담긴 과일과 갖가지 음식물을 갖다가 올렸습니다.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참 그 정성스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겠지마는 또 여러분들이 망인(亡人)이 평소에 좋아하신 음식을 여러 가지로 갖다 놓으신 그 뜻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마는, 우리 용화사 법당에서는 술이라든지 고기라든지, 그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는 여러 가지 적(炙)이라든지 포(脯)라든지 그러한 것을 올리지 않기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제사(祭祀)를 올리실 때에는 모다 그런 음식도 여러 가지를 다 장만해서 올리시고 또 그것을 모다 식구들이 잘 맛있게 잡숫고 음복(飮福)을 하시고 그런 것이 준례가 되어 있겠습니다마는, 절에서는 그런 것을 올리지 않기로 했으니 절에 와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시고 할 때에는 절의 법도(法度)를 따라 주신 것이 참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러한 절에서 금지하는 그런 음식물을 올리지 않기를 바래고 심지어는 그런 것을 올리고 그런 것을 법당에서 막 음복하신다 해 가지고 막 잡숫기도 하고 그런 예가 더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또 한가지는 영단(靈壇)이나 불단(佛壇)에 촛불도 켜서 올리고 향불도 올리고 또 청수(淸水)도 어쩌다 올린 것이 그런 것이 옛날부터서 내려오는 준례입니다마는, 워낙 법당에 그 모시는 영가(靈駕)도 많고 신도도 많다 보니 너도나도 각기 자기가 정성을 다해서 다기(茶器)를 올린다, 촛불을 켠다, 향을 핀다, 그것 자체도 하나하나를 생각해 보면 모처럼 오셨으니 그 정성의 표시로 여러 가지 과일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또 여러 가지 떡도 올리고, 향도 올리고, 촛불도 켜고 한 것 다 정성의 표현이라, 그동안에는 여러 가지로 법당이 다 연기가 너무 나고 열기가 나 가지고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천장이 시커멓게 끄슬리고 단청이 오색단청(五色丹靑)을 한 것이 꺼멓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정성을 차마 막을 수가 없어서 어지간히 그동안에 몇번인가 말씀을 드릴려고 했지마는 우리가 참고 참고 참았습니다. 이대로 계속 참다보면은 법당은 완전히 새까맣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하신 여러 신도들은 방독면을 쓰고 참석을 해야 할 정도로 공기가 그렇게 혼탁하게 됩니다.

그러니 정성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물질로 표현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용화사 법당에 오셔서는 누군가 먼저 촛불을 켰으면 그 촛불은 그대로 놔두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참배도 하시고 또 불전(佛錢)도 놓으시고. 불전은 많이 놔도 우리는 그건 막지는 않습니다, 이건 농담이고요.
불전을 자기 정성껏 놓으시고 그리고 정성스럽게 참배를 하시고 하지, 촛불이 켜져 있는데 그놈을 끄고 또 가져온 걸 또 하고, 자꾸 그런 것이 되풀이된 것도 좋지 못하고, 또 향로가 불이 켜졌는데 계속 그놈을 끄고 끄고 한 쪽에서는 또 그놈을 너무 많이 켜서 굴뚝의 연기처럼 나오니까, 그 법당 책임자가 그걸 끄니까 '금방 올렸는데 그걸 뽑았다'고 또 시비가 일어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니 촛불도 켜져 있으면 그 촛불을 놓고 정성스럽게 참배하시고, 향이 켜져 있으면 그 향이 다 탈 때까지는 정성스럽게 참배를 하시고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한 사람은 자기가 올린 촛불이라야 되고, 자기가 새로 켠 향이라야 자기의 정성이 전달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근기가 아주 저 유치원 학생들은 혹 그런 생각을 가질수가 있겠습니다마는, 용화사에 다니는 최상승법을 믿는 상근(上根) 불자라면 능히 그런 것도 능히 이해를 하시고 소화를 하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다음에 남의 촛불은 소용이 없고 내가 올린 촛불이라야 되고, 남이 올린 향은 소용이 없고 내가 직접 켜는 향불이라야 된다고 생각하신다면은 법당에 손님이 없을 때 조용한 때 오셔 하신다면 그것은 혹 모르거니와, 이렇게 손님이 몇천 명이 오셔서 향불도 많고 촛불도 많은데 기어이 자기도 한다면은 그분과 시비를 하지를 마시고, ‘저분은 아주 유치원 학생이로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서로 그런 일로 싸운 일이 없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벌써 여기에 일 년 · 이태 · 삼 년 벌써 여러 해를 다니신 분은 고학년다웁게 상근(上根) 최상승법을 믿는 학자다웁게 솔선수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계속해서 백중 천도법요식이 있겠습니다. 정성스럽게 동참을 하시고 법회가 끝난 다음에는 한 분도 빠지시지 마시고 여기에서 준비된 점심공양을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선망부모 천도와 여러분 자신이 금생에 결정코 스스로 자기를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생사해탈할 수 있도록 그런 다짐을 하시면서 앞으로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30분21초~44분45초)(끝)





[법문 내용]

(게송)올올무사대청산~ / ‘백중(百中)날’은 옛날부터 ‘부모의 영가(靈駕)를 천도(薦度)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 / 『목련경(目連經)』 목련존자와 어머니 청제부인 / 칠월 해제 때 대중 스님께 공양(供養) 올린 공덕으로 삼악도에서 고통 받는 조상 선망부모를 구제한다.

(게송)농계유식탕와근~ / 조사스님네들이 팔만대장경에 있는 진리를 어떠한 근기(根機)의 중생이라도 깨달을 수 있도록 개척해서 남겨주신 최고의 훌륭한 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 뭣고?' / 공부하다 어떤 소견(所見)이나 경계가 일어났을 때 집착하지 말고 깨끗이 없었던 걸로 해 버리고 다시 본참공안을 들고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면 된다 /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러한 겸허한 마음으로 여법하게 수행해 나가야.

(게송)사자굴중무이수~ / 기왕 불법을 믿고 최상승 참선을 하실라면 사자와 같은, 코끼리의 왕과 같은 그러한 마음과 행동으로 수행을 하시기를 / (게송)금생약불종사어~ / 법당에서의 예절 법도 안내 말씀.


생사 문제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계시지만, ‘삼세제불이 우리를 제도하신다’ 우리는 그렇게 얘기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정법을 믿고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아니하면 삼세제불의 그런 힘으로도 어찌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를 닦을 때 삼세제불의 제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이 열심히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서 삼세제불이 억만 번을 출세(出世)하신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사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조사스님네들은 팔만대장경에 안에 있는 요점만을 뽑고 또 뽑아서 어떠한 근기(根機)의 중생이라도 그렇게만 해 나가면 팔만대장경에 있는 진리를 내가 깨달을 수 있도록 그 길을 개척을 해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것이 몇 가지가 있지마는, 그 중에 최고의 훌륭한 법—간단하면서도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은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 가운데에도 ‘이 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수행이라 하는 것이 꼭 해야 하는 것이고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나, 자기가 조금 평소에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어떤 지견이 났다 하더라도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이냐 아니냐'—정말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다 얻어서 부처님과 조사와 같은 그런 경지에서 오무생사(悟無生死)하고 증무생사(證無生死)해서 용무생사(用無生死)할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으면,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금 무슨 지견 난 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속에 품고 있다면은 불조(佛祖)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반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신도 단월(檀越)네에게도 부끄러운 일일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무엇을 해먹을 짓이 없어서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고 미득(未得)을 위득(謂得)해 가지고 대접을 받을라고 하는 그러한 짓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를 반성해서 자기의 잘못된 점을 반성을 하고 참괴심(慙愧心)을 가지고, 구경각(究竟覺)을 얻을 때까지는 항상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그러한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여법하게 수행해 나가는 그러한 수행자가 되야 한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고인(古人)의 게송(偈頌)에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다. 정말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혀라’ ‘이때[此時]’ 라는 게 ‘바로 지금’ 입니다.
이 가운데는 팔십 노령의 연세 높으신 그런 분도 계시고 아주 아직 젊으신 분도 많지마는 바로 우리가 이만큼 건강할 때에, 나이야 조금 많거나 적거나, 생활이 조금 어렵거나 풍부하거나, 그것도 따질 것도 없고 아직은 우리가 이만큼 이만큼 살 때 철저하게 도를 닦자 이거거든.
백년광영(百年光影)이 전두비(轉頭非)다. 많이 살아봤자 백 살 사는데, 백년(百年)이라고 하는 세월도 잠깐 동안에 지나가는 것이니 뒤로 미룰 일이 아니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를 말고.

Posted by 닥공닥정
601~700/(626~650)2020. 12. 6. 18:46

 

 

(No.636)—2000년(경진년) 설날 통알 및 설날차례(2000.2.2)(21분)

약 22분.

[설날 새벽 예불 때]

 

매년 정월 초하루날 새벽에는 통알(通謁)이라고 하는 의식을 거행해 오고 있습니다.

결제(結制) 중이고 그래서 낱낱이 모든 존경하는 어른들께 세배(歲拜)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수도(修道)하고 있는 도량(道場)에서 합동으로 세배 올리고자 하는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랜 전통으로 그렇게 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도 옛날부터서 그렇게 해 오고 있는데, 따라서 여기에 있는 모든 스님네나, 보살님네들, 거사님네들도 그렇게 아시고 개별적인 세배를 생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고 지금부터서 거행하는 통알에 진심으로 정성스러운 세배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설날차례 법요식 때]

 

오늘 새해 설날을 맞이해서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 법보가족 여러분들이 이 법당에 모이셨습니다.

오늘 오신 뜻은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모신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먼저 가신 가족 · 친지의 영가(靈駕)께 영단(靈壇)에 차례(茶禮)를 젓수기 위해서 모다 참례를 하셨습니다.

 

일반 가정에서는 옛날부터 조상의 신주(神主), 위패(位牌)를 모시고 차례를 젓수고, 그런데 우리는 이 법보전에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들의 영가를 모셨기 때문에 여기서 차례를 올리기 위해서 모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生死) 없는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영가께 들려 드리고 또 우리도 그 법문을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영단에 정성으로 올린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올려서 앞으로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겠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차례(茶禮)는 조실 스님의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 드리므로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께 참으로 소중한 정성이 담긴 차례를 올린 것이다고 산승(山僧)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갖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놓은들 영가가 얼마나 그것을 잡숫고 생사해탈을 하시게 될는지, 다맛 우리의 정성으로 올린 것뿐이지 그것은 아무도 보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영가께 들려 드리므로 해서, 영가가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생사 없는 해탈도(解脫道)로 가신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차례는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조상들에 대한 차례는 원만히 다 마쳤습니다. 다만 앞으로 요식 행위만이 남아 있습니다.

 

산승이 여기에서 올라와서 앞에 나와서 여러분께 나온 기념으로 게송(偈頌)을 하나 읊고자 합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한데  소면서광조대천(素面舒光照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하니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요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한데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찰나 찰나는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데, 그 구백생멸의 단위가 일찰나(一刹那)여.

구백 찰나가 모여서 한 생각인데, 1초의 몇천 분의 일이 될는지, 그 시계가 똑딱똑딱똑딱 지내가는 그 사이에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모든 중생의 생명도 그렇고, 산천초목도 다 죽음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한 가족으로 한 부부로 만났다가 생이별 사이별하고, 부모자식 간의 인연으로 태어났다가도 부모가 먼저 죽고, 자식이 먼저 죽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헤어졌다가 다시 또 내생(來生)에는 인연 따라서 또 인간 세상에서 만날 수도 있고, 천상에 가서 만날 수도 있고, 축생계에서 만날 수도 있고, 지옥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나되—인연 따라서 만나기는 하지마는, 한 생(生)을 바꿀 때 깨끗하게 전생사(前生事)를 망각을 해 버리기 때문에 무슨 인연으로 만난지도 모르고 또 만나서 가족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이요, 무상법(無常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정들었던 부모를 여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들었던 아들과 딸을 여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 인연 따라서 만나고 인연이 다하면 또 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 가운데에서 생멸(生滅)하고, 취산순환(聚散循環)하는 것이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해가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지고 또 달이 떴다가 또 달이 지고 하는 이런 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북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미 사형(死刑) 언도(言渡)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북을 치면서 계속 가 가지고 마지막에 사형을 당한 거와 같은 그러한 상황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고, 현실적으로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동시에 판결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못 어느 날 어느 시에 집행이 되느냐? 그것만 모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죽음을, 딱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월 초하룻날 왜 이런 생사 문제를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은 사실은 생사 속에 살고 있지마는 ‘생사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생사 없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라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생사의 근본이 무엇이냐?

그 근본을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확실히 믿고, 그 생사 없는 도리를 바른 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고 보면, 분명히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병을 낫을려면은 그 병의 근원을 알아야 거기에 따라서 침을 맞고, 쑥을 뜨고,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을 모르고서는 병을 낫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월마은한전성원(月磨銀漢轉成圓)이요. 저 달이 하늘에서 돌고 돌다 보면은 초승달이 차츰차츰 커져 가지고 보름날이 되면은 완전히 둥그런 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둥근 달이, 환하게 쟁반 같은 달이 떠 가지고 온 세계를 다 비춥니다.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다 비춘 것입니다.

 

그런데 잔나비는 어느 날 숲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다가 숲속에 있는 샘을 들여다보니까 그 속에 둥근달이 비추거든. 그러니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물에 빠졌다고 야단법석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저 달을 건져서 다시 허공으로 돌려보내야지, 저 물속에 잠겨버리면 온 세계가 어두워지니 어떻게 할 거냐?' 잔나비의 우두머리가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가 팔에 팔을 연결을 해 가지고 저 물속에 빠져있는 달을 건지자'

 

이래 가지고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수십 마리가, 한 놈은 나무를 붙잡고 팔을 늘이면은 그다음에는 그 팔을 잡고 또 팔을 늘이고 해 가지고, 간신히 수십 마리가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에 달락말락 하니까, 그 여러 마리가 매달리니까 그 중에 팔 약한 놈이 손을 갖다가 놔가지고 수십 마리가 물속에 다 빠졌습니다.

그것이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입니다. 산산이가 팔을 연결해 가지고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하나 그것이 건져지겠습니까?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원래 그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달빛이 물에 비춘 것뿐이라고 이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면은 어찌 물속에 있는 달을 건지려고 할 것이냐. 이런 고인(古人)의 게송인데.

 

이건 무엇을 비유해서 한 말이냐 하면은, 우리는 분명히 이 법당 안에 수만의 영가가 봉안(奉安)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우리 눈으로 분명히—이승을 하직(下直)한, 이승에 처자 권속과 부모형제를 놔둔 채 저승으로 떠나신 그런 영가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걸 ‘돌아가셨다’ 그러고, ‘죽었다’하고, 교통사고나 뭐 병고로 모다 그렇게 모다 사실 돌아가셨다고 다 말들을 하는데.

 

아까 조실 스님의 법문 가운데도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죽었다, 태어났다' 그런 것이지, 생사(生死)로 인증(引證)을 하는 것이지,

마치 허공의 달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달빛만 물에 비춘 거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이나 산승(山僧)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말씀이지만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이고, 이 공부를 열심히 함으로써 진실한 법보제자(法寶弟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천도(薦度) 차례 법요식이 끝나면은 떡국을 맛있게 잘 끓여 놨습니다. 법요식(法要式)이 끝나면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맛있는 떡국을 잘 잡숫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처음~21분2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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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알(通謁) ; 불교의 신년하례식(新年賀禮式)으로 세알(歲謁)이라고도 한다. 새해 첫날 삼세(三世)의 모든 삼보(三寶 불보살·법보·승가)와 호법신중(護法神衆), 대중에게 세배를 드리는 의식이다.

우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법보와 승보에게도 삼배를 올린다. 또 현재 살아계신 · 돌아가신 모든 부모, 원근친척 그리고 온 법계의 모든 도반들 또한 함께 참석한 대중들에게 세배를 올리는 것.

 

결재중이고 그래서 낱낱이 모든 존경하는 어른들께 세배(歲拜)를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수도(修道)하고 있는 도량(道場)에서 합동으로,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우리가 세배(歲拜)를 올려야 할 존경할 만한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어른과 모든 선지식과 모든 도반들에게 이 자리에 서서 세배를 드리는 의식.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세배(歲拜) ; ①섣달그믐이나 설 무렵에 웃어른을 찾아뵙고 절을 함. 또는 그 절. ②세배(歲拜)는 '지난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모든 좋은 인연과 또 나쁜 언짢았던 인연까지라도 깨끗이 다 청소를 하고 다 풀어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또 한 해를 시작합시다'라는 뜻.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수행(修行 닦을 수/행할 행) ; ①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②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 ; 망자의 넋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영단(靈壇) ; 영가의 위패를 두는 단(壇).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젓수다 ; ①궁중에서 ‘잡수다’를 이르던 말. 잡수다-->‘먹다’의 높임말. ②신과 부처님께 소원같은 것을 비는 것. ③(사람이 제사를)차려 올리다.

*신주(神主) ; 죽은 사람의 위패.

*위패(位牌 지위·높여서 어떤 사람 위/명찰·위패 패) ; 죽은 사람의 위(位 이름 · 지위. 높여서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를 모시는 나무패.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게송(偈頌)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gāthā. 부처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노래 글귀로 찬미한 것.

게(偈)는 게타(偈陀 gāthā 가타伽陀)의 줄임말, 송(頌)은 그 뜻을 한역(漢譯)한 것으로 게송(偈頌)은 범어와 한어를 병칭(倂稱)한 것이다.

*(게송) ‘월마은한전성원~’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舒 펼(서).

*(게송) ‘찰나생멸무상법~’ ; 『관음예문(觀音禮文)』의 무상게(無常偈)에 나오는 게송. 促 재촉할·빠를(촉), 催 재촉할·독촉할(최), 金烏(금오) - '해'를 가리키는 말, 玉兎(옥토) - '달'을 가리키는 말.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약 0.013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전생사(前生事) ; ①'전생(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살았던 삶)'에 있었던 일. ②'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이미 지나간 일'을 일컫는 말.

*유루(有漏) ; ①샘[漏]이 있는[有].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는. ②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③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언도(言渡) ; 선고(宣告).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의 결과를 알리는 일. 이로써 재판의 효력이 생김.

*대천세계(大千世界) ;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약칭.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정중로월(井中撈月 우물 정/가운데·속 중/잡을·건질 로/달 월) ; ‘우물 속에 있는 달을 건진다’
[참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제7권 (東晉天竺三藏佛陀跋陀羅共法顯譯) ‘明僧殘戒之餘’
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時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 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時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連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가시(伽尸)라는 나라에 파라나(波羅奈)라는 성이 있었다. 한적한 곳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었는데 숲속을 유행 중에 한 니구율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나무 밑에 있는 우물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이때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우물 속 달 그림자를 보고 무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달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게 꺼내줘야 하겠다” 함께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내가 꺼내는 방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고 너는 내 꼬리를 잡고 그렇게 서로 이어서 늘어뜨리면 꺼낼 수 있다” 원숭이 무리가 우두머리의 말에 따라 서로의 꼬리를 잡고 늘어뜨렸는데 물에 이르기 전에 이어진 원숭이들이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부려져 모두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잔나비 ; ‘원숭이’의 사투리.

*산산(山山)이 ; 원숭이.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봉안(奉安) ;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 화상(畵像)이나 시신 따위를 모시어 둠.

*이승 ;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세계나 일생 동안을 이르는 말.

*하직(下直) ; ①먼길을 떠날 때 웃어른에게 작별을 아룀. ②'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저승 ;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이 가서 산다는 세상.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법성(法性)•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52분33초~54분46초) [ 참선법 A, 송담스님(No.088) ]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법보제자(法寶弟子) ; [참고] 89년 설날차례(89.02.06) 법요식에서.

여기 (용화선원 대웅전 법보단) 만년위패에 우리의 조상 여러 영가와 원근 친척의 인연 있는 영가들을 모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여러분은 법보가족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족입니다.

조상의 영가를 한 법당(대웅전 법보단, 舊 법보전)에 모셨으니 우리가 한 가족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 또 이 도반(道伴)이면서 또 한 가족인 것입니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법문 내용]

 

설날 통알 / 설날차례 / 참다운 차례는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生死) 없는 최상승(最上乘) 법문(法門)’을 영가께 들려 드린 것 / (게송)월마은한전성원~.

물에 비춘 달빛과 달을 건지려는 잔나비들, 정중로월(井中撈月) /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 / 생사(生死)는 본래 없다 /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

 

 

영단에 정성으로 올린 여러 가지 음식과 과일을 올려서 앞으로 법요식을 거행하게 되겠습니다마는, 정말 참다운 차례(茶禮)는 전강 조실 스님의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 드리므로 해서 우리의 선망부모와 조상께 참으로 소중한 정성이 담긴 차례를 올린 것이다고 산승(山僧)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갖가지 음식을 많이 차려놓은들 영가가 얼마나 그것을 잡숫고 생사해탈을 하시게 될는지, 다맛 우리의 정성으로 올린 것뿐이지 그것은 아무도 보증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마는, 생사 없는 진리의 말씀을 영가께 들려 드리므로 해서, 영가가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생사 없는 해탈도(解脫道)로 가신다고 하는 것은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이 동시에 판결이 나 있는 것입니다. 다못 어느 날 어느 시에 집행이 되느냐? 그것만 모를 뿐이지 이미 우리는 죽음을, 딱 사형 언도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정월 초하룻날 왜 이런 생사 문제를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은 사실은 생사 속에 살고 있지마는 ‘생사 없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생사 없는 진리를 확실히 깨달을라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 대관절 무엇이냐? 생사의 근본이 무엇이냐? 그 근본을 확실히 우리가 이해하고 확실히 믿고, 그 생사 없는 도리를 바른 공부를 통해서 수행을 통해서 확실히 깨닫고 보면, 분명히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해탈도를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죽었다, 태어났다' 그런 것이지, 생사(生死)로 인증(引證)을 하는 것이지, 마치 허공의 달이 허공에 떠 있으면서 달빛만 물에 비춘 거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생사가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이나 산승(山僧)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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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601~700/(626~650)2017. 6. 9. 08:12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627)—99년 6월 첫째 일요법회(99.06.06) (61분)

(1/3) 약 22분. (2/3) 약 22분. (3/3) 약 17분.

(1/3)----------------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한 번 본심왕(本心王)을 어기고 등지고 떠난 뒤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으며 몇 번이나 사생(四生)을 겪어 왔던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을 겪어 왔던가.


삼도(三途)를 수천만 번, 태란습화 사생의 몸을 수억만 번을 거쳐서 이렇게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말이여.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 번뇌(煩惱)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하고 보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방금 우리는 임자년에, 임자년이라고 하면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 섣달 초이튿날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임자년은 갑인년보다 3년 전입니다. 임자, 계축, 갑인, 열반하시기 3년 전에 설하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비록 녹음 테이프(tape)를 통해서 들었지만, 금방 이 법상에 올라오셔서 그 열렬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우리는 실지로 설하신 것처럼 우리는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오늘 일요법회 법문은 조실 스님 법문 한 편 턱 들으면 그것으로서 족하겠지마는, 산승(山僧)이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일요일이라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실 수도 있고 쉬실 수도 있건마는, 날씨도 더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법회에 나오셨으니 원장으로서 인사 말씀 한마디 하고 우리가 다 같이 정진을 잘하자고 하는 다짐하고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이 자리에 올라왔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 법문에 ‘내가 나 찾는 공부, 철저한 신심으로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요지, 그 공부해 나가는 구체적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에 대해서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원래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 부처님이나 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다 같이 저 근본에 올라가서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몸이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무명(無明)이 동(動)함으로 해서, 이것이 ‘본심왕을 어겼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본심왕을 어기고 떠났다고 하는 것은, 한 생각 무명심이 발동함으로 해서 아직까지도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고 삼도와 사생을 돌고 돌면서 갖은 크고 작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할 일은 우리가 본래 법신불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그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안에 있는 법신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불이나 똑같은 그 법신불이 우리 안에 역력히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은 업연(業緣)에 따라서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고, 아귀도에도 태어나고 그러고 있지마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이 법신불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상됨이 없이 고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철저히 믿는 것이 정법(正法)을 믿는 것이고 그것이 불법(佛法)을 믿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월초파일에 이천육백 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신 뜻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탄생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제도합니까?

‘모든 중생들에게 다 같이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거,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중생, 너희들이 부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공경을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그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시기를 ‘중생이 곧 부처니, 바로 내가 나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하시는 거고.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니,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봤다 하면 거기서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었다 하면은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없는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거기에 보리가 있다는—보리(菩提)는 깨달음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보리라고 하는데—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깨달음이 거기에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붙어 있다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바로 그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것이 바로 대승법(大乘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 파도는 물이 곧 인연 따라서 움직거리면 그것이 파도인데, 파도는 물을 여의고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파도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물이 있는 거고, 물이 있으면은 물결이 파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한에는 물속에 들어앉어서도 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을 여의고 부처를 찾을 수가 없는 거고,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는 한에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한 것은 깨닫기 위해서 한다’하지만 깨달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선 해 본 사람이면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마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몸뚱이가 바로 부처님 몸뚱이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수없는 번뇌가 바로 그것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에서는 아까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인도에서 28대,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오셔서 육조 혜능 스님까지 6대,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해서 33대를 삽삼이라고 합니다마는 삽삼조사(卅三祖師).

그 삽삼조사로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금방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이 오늘날까지 조사들에 의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오늘날까지 최상승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최상승법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도 내 몸 밖에서 찾지 말 것, 참선도 번뇌를 여의고 찾지 말 것,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여.


탐심이 일어날 때도 그 탐심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딱! 즉해 가지고 ‘이뭣고?’여. 미운 생각이 일어나거나 원망하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을 버리고 따로 참선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놈에 즉해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참선을 해 버릇하면 번뇌가 일어날수록 더 좋은 것이고, 탐진치 삼독심이 치열하게 일어날수록에 바로 거기에다 발판을 두고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를 한다면 혼침(昏沈)이 일어날 수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그래서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入禪), 방선(放禪)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이고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꼭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권도나 검도나 유도나 기본자세를 철저히 익힘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기본의 살아 있는 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을 철저히 익힌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기는 하나, 언제나 기본에만 입각해서 딱 틀어박힌 참선이 그것은 진짜 살아 있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업(業)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를 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싸우고 부부간에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 바로 그곳이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무척 살기가 교통이라든지 모든 생활이 편리하게는 되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해졌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점점 사는 것이 더 복잡하고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일체가 간 곳마다 더 복잡해지고 다단해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때일수록 이 살아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이것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인생을 바로 살기가 어렵고, 이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 오늘 이 번뇌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한다고 하는 것은 활구참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르게 활구참선하는 그 근본을 딱! 알고 보면 삼도고(三途苦)니,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이니 그것 버릴 것이 못됩니다.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지옥은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형무소 교도소가 꼭 지옥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바로 우리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육도(六途)가 들어있다고 봐야 정말 육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생각 뒤집어지면 지옥도 되고, 독사도 되고,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탁! 바로 잡으면 아까까지 지옥에 있었던 사람이 한 생각으로 인해서 천당에도 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죽은 뒤에, 금생에 살아서 악업(惡業)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 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마는, 살아서 우리가 들어가는 지옥도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우리가 인식을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내나 살아서 지옥 가는 연습을 한 사람이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살아서부터서 지옥에 안 가는 행위를 한다면 지옥 그렇게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살아서 지옥 갈 짓을 안 하게 되고, 살아서부터 지옥 가는 연습을 안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술을 많이 먹고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술을 안 먹을 때는 성현 군자고 그렇게 착한 사람이 술만 들어갔다 하면은 자기 자신을 자제를 못하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케도 자기집은 찾아갑니다. 가서 꺼꾸러져도 자기집 문 앞에 가서 꺼꾸러져 가지고 거기서 쓰러져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꺼꾸러져서 잡니다.

왜 그러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항상 자기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가지고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자기집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것도 살아서 지옥 가는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틀림없이 이 몸뚱이를 버리고 영혼이 갈 때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서 지옥에 안 가는, 천당에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천당에 가는 거고, 살아서 극락(極樂)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극락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극락에 가는 연습,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라 이것입니다.


탐심이 나도 바로 거기서 ‘이뭣고?’ 해 버리면, 탐심의 한 생각 일어날 때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 탁! ‘이뭣고?’를 해 버리면 영락없이 지옥으로 갈 차를 타려다가 안 타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차에 올라탄다면 물어 볼 것도 없이 극락에 간 거여.(처음~21분39초)



(2/3)----------------


그래서 ‘이뭣고?’는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가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라고 하는 것을 믿고 고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혼탁하고 그래도 한탄할 거 없습니다.

어려운 고비고비 만날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거기서부터서 이 지상에 극락이 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소한, 대한 때는 이대로 가다가는 다 얼어죽을 것 같지만 그 시간에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고 잘 하다보면 금방 또 입춘, 우수가 돌아와서 봄이 온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그래도 탁! 정신만 차리고 ‘이뭣고?’만 열심히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다보면 머지않아서 우리도 또 잘살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으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드라도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또 살아 갈 길이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노력할 때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 죽을 것 같지마는 또 살길이 열리고 좋은 세상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 내나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좋은 역사도 만들고, 어려운 시대를 좋은 시대로 맨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각자 주인이 자기 살림을 잘 돌보고 자기 일을 잘할 때 그 집안도 잘되고 회사도 잘되고 사회도 올바르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주가 이렇게 광활하고 넓고, 그 넓은 속에 지구라고 하는 것이 조그만한 존재에 지내지 못하지만, 그 지구에 60억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각 여러 가지 인종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욕락(五慾樂)이 인간의 행복의 조건인 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재산이나 부귀영화나 명예 권리라 하는 것은 잠시 꿈꾸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편시친(眷屬片時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한산(寒山)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현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산시(寒山詩)」를 여러분이 보시면은 그 안에는 마음에 참 새겨둬야 할 만한 아주 핍절하고 요긴한 법문이 들어있습니다. 그 속에 방금 읊은 게송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榮華)가 그 부귀영화(富貴榮華), 왕이나 대신이나 대통령이나 천자나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영화죠. 영화라고 하는 것이 능히 며칠이나 갈 것이냐 그말이여.

일평생을 산다 해도 오육십 년 전이요 오육십 년 간에 불과하고, 천자가 되어 갖고도 얼마 안 되어서 맞아죽기도 하고, 왕이 되어 갖고도 얼마 안 있다 죽기고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렀습니다. 잠깐 꿈 한 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해방 전 이조 때 그 역대 임금들을 보십시오. 고려 때나 신라 때를 보십시오. 중국 역사를 보십시오. 세계 모든 역사를 보십시오. 그 영화라 하는 것이 잠깐 꿈 한 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다 그말이죠.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그 권속이, 부모가 훌륭하고 자식이 훌륭하고 형제간이 훌륭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배경 삼아서 목에다 힘주고 모다 그렇지마는 잠시 잠깐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그런 인연으로 태어난 것일 뿐이지 그것도 잠깐 지나가 버리면 별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자기 형이 청와대에 가 있고, 뭐 자기 처남에 외삼촌에 동생의 친구가 청와대에 있다고 해가지고 그런 것을 해 가지고 사기(詐欺)를 치고 모다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마는 그다, 그 자기 친형이 있다 해도 별것이 아닌데 처남에 외삼촌에 친구에 뭣이 뭡니까 그게.

그게 다 권속이 편시친이라는 거, 잠깐 동안에 친한 것에 불과하시니, 그러한 것을 가지고 큰소리 칠 것도 없는 거고.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비록 천근이나 되는 금덩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 석숭(石崇)이와 같은 그런 큰 부자라 하더라도, 한무옥당(漢武玉堂)과 같은 그러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 별것이 아니고.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다. 그런 큰 부귀영화를 가졌다 하더라도 수풀 속에 임하(林下), 수풀 아래에 가난한 것만 같지 못하다.

수풀 아래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산중에 숲속에 들어가서 풀뿌리를 캐 먹고, 약 뿌리를 캐 먹고, 더덕을 캐 먹고 또 없으면 또 걸식을 하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그렇게 가난하고 가난하게 사는 그 속에 그 가난한 맛보다 못하다 그거죠.


나물을 뜯어서 삶아 먹고, 풀뿌리를 캐 먹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흘러가는 물을 마시고 그리고 졸리면은 팔을 베고 자도 낙(樂)이 그 속에 있다 이거거든.

도 닦는 낙(樂)이라 하는 것은 팔풍경계(八風境界)가 오지를 않거든. 세속에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그렇게 굉장한 것 같지마는 하루도 다리를 뻗고 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를 지키고, 명예를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나가야 하고, 누가 그것을 침범할까 봐서 미연에 그것을 차단해야 하고, 누가 자기 것을 빼앗아 가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저지를 시켜야 하고 악랄한 방법을 써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고 그래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간들 그것이 지옥에 갈 일을 남겨 놓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내동댕이쳐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이 말씀을 하면 여러분이 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사업도 버리고, 너도 나도 숲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세속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지은 인연으로 가족도 맺어지고, 어떤 직장도 갖게 되고, 나라에 나가서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지은 인연입니다.

빚이요, 인연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왕궁에 부귀도 버리고 출가하신다면 그거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일이나, 그렇게 철저히 발심(發心)도 못하면서 도피처로 알고 느닷없이 다 버려버리고 어디로 산중에 들어가, 그건 별로 권장할 말한 일은 못됩니다.


발심을 하려면 진실하게 발심을 해야 하고, 버리려면은 깨끗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지, 섣불리 임시 잠시 괴로움을 책임 회피로 버릴 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임하(林下)에 숲 아래 가난한’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에 살면서도 그런 것에 너무 지나친 집착을 갖지 말 것이며, 그 속에서도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숲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에다가 많이 비유를 합니다마는, 연꽃은 저 깊은 산중에 맑은 석간수(石間水) 속에는 연꽃이 되질 않습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흙탕물 속에다 뿌리를 박고 거기서 연꽃이 필 때 연꽃도 잘 자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세속에, 부모형제 오욕락이 있는 그 세속에서도 거기서 바로 ‘이뭣고?’를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어려운...


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도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유마거사(維摩居士)와 같은 그런 부처님과 맞먹는 대도사(大道士)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방거사(龐居士)와 같은 그러한 거사로서 대도인(大道人)이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도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그런 대도인도 있는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최고로 훌륭한 분을 세 사람을 말한 것뿐이지, 지금도 역시 속가에 계신 거사님으로서 속가에 계신 보살님으로서 스님네 못지않게 열심히 도 닦는 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도 다 그런 훌륭한 스님네보다도 더 훌륭한 수행자가 있을 줄 믿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이 꼭 산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머리를 깎은 스님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나 들이나 섬이나 육지나 어디서도 도는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옷을 먹물 옷을 입었건 어떠한 빛깔의 옷을 입었어도 그것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하고, 최상승(最上乘)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육도(六途)가 우리의 한 생각 속에 있는 것처럼 도(道)도 역시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어서, 오죽하면 보현보살이 돼지가 되어 가지고 부잣집 돼지우리 속에 가서 꿀꿀하고 있었습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항상 부처님의 왼팔이요 부처님의 오른팔이 되어가지고 조불양화(助佛揚化)를 하시지만, 두 분은 형제간이요 바로 도반인 것입니다. 문수보살 있는 곳에 보현보살이 계시고, 보현보살 있는 곳에 항상 문수보살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그 보현보살이 장자(長者) 집에 돼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 장자 집에 가니까 꿀꿀 돼지가 되어가지고 누워있거든.

‘구재진로중(久在塵勞中)이면, 너무 오랫동안 진로(塵勞) 가운데 있으면은 혹망본래사(惑忘本來事)니, 혹 본래사(本來事)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속히 행장을 거두어가지고 이 산중으로 돌아오라[收拾行裝裡 速還靑山來].


게송 금방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런 뜻의 게송을 글씨에다 써 가지고 돼지우리에다 던져 줬습니다.

보현보살이 눈을 꺼먹꺼먹 뜯어보니까 ‘너무 오랫동안 진로 가운데 있으면 혹 본래사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속환청산래(速還靑山來)하라. 속히 청산으로돌아오라’ 게송이 써졌거든. 요리 쳐다보니까 문수보살이거든.


비록 돼지 탈을 쓰고 ‘꿀꿀‘하고 있어도 다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것이라. 알아보고는 그 게송 써진 그 쪽지를 덥석덥석 씹어서 꿀떡 삼켰다 그말이여. 그랬는데 그 돼지가 죽었어.

죽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쪽지를 던져 주니까 그 쪽지에 독약이 묻었던지 돼지가 죽었다‘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관가에다 고발해 가지고 잡혀 갔어.


“나, 독약 한 일 없고 게송만 하나 써줬다”

“무슨 게송이냐?”

“죽었으니까 배를 갈라보면 알 것 아니냐”


배를 갈라보니까 아직도 그 종이에 글씨가 써졌는데 그 게송이 쓰여 있다 그말이여. 뭐 조사해 봤자 아무 독도 안 묻어 있고. 그러니 그냥 ‘이상한 일도 있다’해 가지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비단 돼지로만 나오겠습니까? 때로는 소 탈을 뒤집어 쓸 수도 있고.


뭐 부처님 말씀에는 ‘저 소가 누군 줄 아느냐? 왕년에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안 닦은 것이 시주 은혜 갚으려고 해서 소가 된 것이다. 저 소들은 모다 전생에 다 중이다’

이런 말씀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그 말은 ‘시주것을 먹고 열심히 도 닦으라’고 하는 그런 간곡한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표현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오직 시주것만 먹고 오직 도 하나만을 위해서 목숨 바쳐서 일심(一心)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도만 닦으라고 해서 ‘장사도 하지 말아라, 농사도 짓지 말아라. 일체 오직 걸식(乞食)을 해가지고 한 끼씩만 먹고 도를 닦으라’고 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형편은 걸식할 형편이 잘 못되고, 한 끼만 먹고는 도저히 도를 닦을 수 없을 만큼 지금 우리 근기(根機)가 약해서 세 때도 먹고 또 이 신도님네들이 갖다 주는 걸로 밥을 해 먹고 요렇게 참선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딴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과연 그만 하면 되겠다’고 하실는지 어쩔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부모형제 다 고향을 다 버리고, 일체 세속의 오욕락을 다 버리고 일생을 수절(守節)을 하면서 먹물 옷을 참 입고, 못난 척 바보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의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를 일찍이 부러워해 본 적도 없고, 다 그런 것이 다 허망한 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해서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바치고 시주(施主)를 하시고 그래서 이 절도 짓고 선방도 짓고 이렇게 했습니다.(21분40초~42분58초)



(3/3)----------------


우리 승려로서 여러분께 부탁할 것은, 물론 여러분이 갖다 줘서 감사합니다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 안합니다. 왜 그러냐? ‘감사합니다’하면은 여러분의 공덕(功德)이 그만큼 소실이 되어 버려.

‘감사하다’는 말로써 그것이 여러분 공덕이 이렇게 때워져 버리기 때문에 여간해서 ‘감사하다’고 안 합니다. ‘잘 수용하겠습니다’ 그뿐인 것입니다.


‘시주를 했는데 왜 스님네가 우리한테 굽신굽신을 안 혀? 중들이, 왜 용화사를 가면은 스님네들이 왜 데데해. 불친절해’ 그런 말을 한 분이 있다고 그럼니다.


용화사 스님네는 별로 스님네가 오시면 그저 수수하니,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업신여기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불친절이 한다고 해서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화두 드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맞이할 뿐이지 그렇게 굽신굽신 안 한 것을 데데하고 건방지고 아만통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오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주를 하고 보시를 하더라도 무주상(無住相)으로 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런 것을 했다. 했으니까 나를 알아 줘야 하고, 나한테 굽신거려야 하고, 우리를 최고로 대우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안 하시겠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을 것이고. 오셔서 열심히 와서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여러분을 공부 잘 하시라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뼈아프게 듣고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에서 유마거사와 같은 그리고 방거사와 같은 그리고 소동파... 보살님 가운데에도 훌륭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보현보살이 돼지가 되어가지고 장자 집에 가서 돼지우리에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다 도반이고, 서로가 다 부처님의 제자고 부처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신도면 신도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거고, 스님이면 스님의 도리를 다해서 열심히 도 닦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이 세계를 부처님 세계로 만들고, 우리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는 최후의 목적까지 우리는 그렇게 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연이요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하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하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이여. 만 가지 의심을 모두 다 한 의심 덩어리로 다 그리 몰아붙이라 이거여.

우리는 살다 보면은 여러 가지 의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 대한 의심, 공안에 대한 의심, 세속의 모든 일에 대한 의심, 정치 경제 모든 의심, 학교의 과학 학문에 대한 의심, 모든 의심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 모든 의심을 전부 다 ‘이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그 하나의 의단(疑團)에다 다 몰아붙이라 이거거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여.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며, ‘이뭣고?’한 의심을 스스로 또 다시 되돌이켜 관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가 자기의 본참화두인데, ‘이뭣고?’

‘이뭣고?’할 때 ‘이-’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의자간(疑自看)이여.


의심나는 것을 물어서, 다른 사람한테 물어 가지고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슨 의심이 나던지 바로 그 의심을 즉(卽)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화두 ‘이뭣고?’로 돌아오라 이거거든.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 모름지기 용을 때려잡고 봉(鳳)을 잡는 그러한 용기와 수단을 가진 사람이라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다. 한주먹으로 철성관을 쳐서 꺼꾸러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쇠[鐵]로 만든 성(城)에 관문(關門)’이라 한 것은 조사관(祖師關)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이 조사관을 깨뜨려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이 의심관, 조사관, 이놈을 팍!...


‘이뭣고?’를 자꾸 하다 보면 처음에는 잊어버리고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고 하지만 잊어버리면 또 ‘이뭣고?’

딴 생각이 들어오면 딴 생각 버리고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꾸자꾸 하다보면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가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거든.


그래가지고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까지, 저녁에 누워서 ‘이뭣고?’하면서 들고 있는 화두가 아침에 일어나면 고대로 들어져 갔고 있거든. 이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거든.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머지않아서 툭!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여.


열심히 열심히 하고, 자기 근기(根機)도 따지지 말고 아무것도 따질 것이 없어.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해 나가면 반드시 되는 것이 바로 이거여.

세속의 사업은 열심히 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여. 되기도 하고 실패하기.. 실패율이 더 많고. 이것은 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어도 꼭 되고만 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여. 왜?


자기가 원래 부처였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하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우리가 모든 인연에 따라서, 아까 조실 스님 말씀에 ‘빠르면은 7일이요, 늦으면은 3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그 기한은 전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어.

빨리 되어도, 빨리 공안을 타파해도 그것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디 되어도 더디 되었다고 해서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어.


여법하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빨리 공안을 타파할 수도 그리고 또 할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부처님과 같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圓滿具足)하려면은 깨달은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닦아 가야 하는, 닦을 것 없이 닦아 가야 하는 길이 있는 것이여.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하고 더러운 이 몸뚱이지만 이 속에 법신불(法身佛)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이 몸뚱이를 지혜롭게 관리해야 하는 거고. 이 몸뚱이를 소중히 여기고.

애착심을 가지고 집착(執着)하라는 게 아니고, 지혜롭게 잘 관리를 해야 공부도 할 수가 있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비록 검소하게 먹고 할지언정, 꼭 고기만 많이 먹고 그 영양가 있는 것만 많이 먹는다고 해서 꼭 건강이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물에 검소하게 이렇게 먹어도, 보리밥에 잡곡밥에 이렇게 먹어도 잘 씹어서 먹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저작(咀嚼)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하면서 먹으면 고기에다가 진수성찬에 잘 안 먹더라도 건강은 유지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신 황룡탕(黃龍湯)을 꼭 잡순 것을 내가 권고를 하고.


황룡탕은 내 몸에서 나온 것을 내가 다시 섭취하는데, 그것이 전혀 더러운 노폐물이 아니고 우리 몸안에 있는 피와 거의 같을 정도로 여러 가지 영양이 그 속에 다 들어있고.

의사들이 다 조사를 해보면 전혀 균이 없는 무독지제(無毒之劑)라고 하는 것이 다 밝혀지고 있습니다. 동양의학대사전에도 보면 ‘무독(無毒)’이라고 딱 나와 있고 여러 가지 병에 좋다고 하는 것도 옛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고.


오죽하면 부처님께서도 걸식(乞食)을 할 것이며, 분소의(糞掃衣)를 입을 것이며, 수하(樹下) 나무 밑에서 잘 것이며, 그리고 약은 예약(穢藥)을 써라. 예약이라 하는 것은 대변이나 소변으로 만들어진 약, 병이 나면 소변을 먹으라고 하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혈압이 높으신 분도 좋고, 각종 암도 좋고, 요새 모다 발표한 것을 보면 에이즈와 같은 무서운 병도 소변을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면 낫을 수 있다고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마는.


‘이뭣고?’를 하면서 황룡탕을 먹으면서 잡곡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산다면,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한다면 이 세상이 비록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세(末世)라고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여법하게 정법을 믿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말세를 다시 정법시대(正法時代)로 다시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정법이다, 말세다’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이고, 지옥 천당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은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도 닦고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모든 생활을 해 나간다면은 우리는 이 21세기를 진짜 정법시대로 돌릴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우리 앞마당에는 대장경 전산화 불사(佛事)를 하기 위해서 동참불자(同參佛子)를 받는 대장경연구소 분들이 책상을 놓고 계십니다. 신청하신 분들은 지로를 통해서 다 성의껏 다하고 계신다는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에서 그 불사에 좋은 촉매가 되고, 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모다 감사한 인사를 듣고 있습니다마는, 드신 분은 열심히 다달이 보내시고 안 들으신 분은 인연 따라서, 분 따라서 모다 동참을 하신다면, 그리고 요새 그 나오는 책을 보니까 전국 모두 여러 사찰들에서도 모다 다 동참하자고 하는 그런 법회를 모다 여기서 저기서 가지신 걸로 봤습니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고, 이러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어려울 때 이러한 불사를 우리 불교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가지고 이 대장경 불사를 한다면 틀림없이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우리나라도 잘되고 세계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좋은 공덕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오늘이 입하 · 소만 · 망종일이고, 얼마 안 있으면 또 하지에다 소서 · 대서 하면은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또 돌아옵니다. 날씨가 더워질 때 모다 몸조심 하시고 건강한 몸과 건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를 다시 부탁 말씀을 드리면서 말을 맺고자 합니다.(42분59초~60분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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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참고]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에서.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여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니라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배반(背反)한 이래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몇 번이나 겪어왔더냐 그말이여.

몇수십만 번을 짐승이 되었다가 날짐승이 되었다가, 긴짐승이 되었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이러면서 돌고 돌아서 금일에까지 왔더냐.


원래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똑같은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는 본심왕이었다 그말이여. 그 본심의 왕을 배반한 탓으로 해서 우리는 삼악도와 사생을 돌고 돌아서 몇억만 겁을 겪어 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더라.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오늘 번뇌에 물든 그 번뇌염을 깨끗이 다 씻어 버리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써 참 거러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고향 갈 길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느냐.


남북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가족 상봉, 그것참 그러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정든 사람과 이별하고, 고향과 가족 친지를 이별하고, 한 나라에 손바닥만한 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그런 것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원래 본심왕이였었는데 그 왕이 그 본심왕을 갖다가 등져 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가지고 삼악도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돌고 돌면서 가진 고초를 당하고 금생에까지 무량겁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또 그런 것이 거듭될 그런 신세가,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서 우리가 본심왕의 본위치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면 이건 참 50억 인구 가운데 가장 행운아라고 할까, 가장 행복한 삶을 받아났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법,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잘 거각하고 단속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함으로써 우리의 본고향(本故鄕)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고향을 모를 때에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별 목적이 없어.

그러니 ‘우선 잘 먹고 보자, 우선 잘 입고 보자,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더라도 우선 부자로 살아 보자, 좋은 차도 가져 보자, 좋은 집도 가져 보자’하지만, 고향이 있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았다면 한시바삐 고향길을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하거든.


입는 것도 얼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먹는 것도 굶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어쨌든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서 게으르지 않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어디에다가 시간과 힘을 허비할 것이냐 그거거든.(21분20초~27분13초)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 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본고향(本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녹음 테이프(tape) ;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사나불(盧舍那佛) ;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장엄된 몸을 가지고 보토(報土 : 부처님께서 과거 인위因位에서 행한 서원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정토)에 계시면서 설법하는 부처님.

삼신불(三身佛)은 (1)영원불변의 진리[法]를 몸[身]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2)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과보(果報)로써 온갖 덕이 원만구족한 불신(佛身)인 보신불(報身佛), (3)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身]으로 변하는[化] 화신불(化身佛, 應身)을 이르는 말인데, 노사나불은 이 중 보신불이다.


이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보리(菩提) : [범]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 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육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 ;

[참고] 송담스님(No.264)—1985년 4월 첫째 일요법회에서.

흔히 화두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教)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겠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하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한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하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하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하니,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이 없지를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61분31초~67분22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선(禪).

[참고]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선(禪)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분19초~31분2초)


[참고] 송담스님(No.152)—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를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라.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를 증득(證得)할 바로 그 곳이드라.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엇을 볼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분22초~44분9초) -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부처님을 만들어 내는 장소라는 뜻.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승당(僧堂). 선방(禪房).

[참고]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도고(三途苦, 三塗苦)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지옥•아귀•축생)에서의 고통.

*고주망태 ; 술을 많이 마셔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 인/일 사/아니·못할 불/살필 성) ; 사람[人]으로서 지켜야 할 일[事]을 살피지[省] 못함[不].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극락(極樂) ;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정토(極樂淨土).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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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오욕락(五欲樂,五慾,五欲)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게송) ‘영화능기일~’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한산(寒山)의 시.

〇我見世間人  茫茫走路塵  不知此中事  將何爲去津  榮華能幾日  眷屬片時親  縱有千斤金  不如林下貧

*한산(寒山) ;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성명은 알 수 없고, 천태(天台) 당흥현(唐興縣)의 서쪽 70리에 한암(寒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대개 그 바위굴 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하고, 때로는 국청사(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몸은 바싹 마르고, 꼴은 거지와 같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국청사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습득(拾得)에게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서 댓통에 넣어가지고 한산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시를 잘하였다.

어느날 태주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사람을 보내 한암(寒巖)에 찾아가서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하면서 바위굴로 물러났고 “너희들에게 말한다, 각각 노력해라!”하면서 바위굴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세상에서 한산, 습득, 풍간(豊干)을 3성(聖)이라 부르며, 또 한산을 문수보살, 습득을 보현보살 화현이라 한다. 『한산시』 3권이 있다.

—[참고] 여구윤(閭丘胤)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습득(拾得) ;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사 국청사에 있던 이. 천태산 국청사 풍간(豊干) 선사가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곁에서 주어 온 작은 아이라 이렇게 이름. 한산(寒山)과 친히 사귀었고 풍간선사가 산에서 나온 뒤에 한산이 바위굴로 들어가 소식을 알 수 없는 뒤로 습득도 어디론가 사라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표기. 보현(普賢),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한산시(寒山詩) ; 『한산자시(寒山子詩)』. 중국 당나라 때의 한산자라는 전설적인 은자(隱者)가 천태산의 나무, 바위 그리고 촌가의 벽에 써놓은 시를 국청사(國淸寺)의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시집. 또 한산의 시 3백여 수(首)외에 습득(拾得)의 시 50여 수, 풍간(豊干) 선사의 시 2수가 실려 있으므로 『삼은시집(三隱詩集)』이라고도 불린다.

『한산시(寒山詩)』의 내용은 꽤 다양하여 여러 가지이나 전형적인 부분인 자연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 외에 허망한 삶을 깨치고 진정한 도를 구하라는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숭(石崇) ; 중국 서진(西晉)의 부호(富豪)(二四九~三OO). 항해와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

*한무옥당(漢武玉堂) ;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머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玉堂]을 이르는 말.

*팔풍경계(八風境界) ; 팔풍(八風). 팔경(八境). 팔풍은 세상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바로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므로 팔풍(八風)이라 함<몽산법어 p155, 용화선원刊>

—이쇠(利衰 이로울 리/약할 쇠) : 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예훼(譽毀 기릴 예/비방할 훼) : 나 안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칭기(稱譏 일컬을 칭/나무랄 기) :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고락(苦樂 괴로울 고/즐거울 락)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樂).

[참고] 팔풍, 팔세법(八世法, attha lokadhamma) : 세간(世間, 중생의 세계) 특유의 여덟가지 어려움. 이득과 손실(利衰),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譽毀), 칭찬과 비난(稱譏), 고통과 행복(苦樂)<칠각지 p57, 고요한소리刊>  팔풍경계를 요약하면 결국 역순경계(逆順境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유마힐(維摩詰) : [범] Vimalakirti  음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이라 하고, 줄여서 유마힐 또는 유마(維摩)라고만 한다。뜻으로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 되는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인도 비사리(毘舍利  Vaisali)성에서 거사(居士)로 지내면서 보살행업을 닦아 크게 교화하였다。그 수행이 갸륵하여 부처님의 제자들도 미칠 수 없었다。그가 병들어 누우매 부처님 제자들이 모두 가서 문병하는데, 둘 아닌 이치(不二法)에 대하여 여럿이 돌려 가면서 말하게 되었다。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은 ‘말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유마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였다。그리하여 모두 ‘유마거사가 가장 둘 아닌 법을 잘 연설한다’고 칭찬하였다。이것은 <유마경>의 주요한 내용이다.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방거사(龐居士) ;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사람. 자는 도현(道玄)이다. 성은 방씨고, 이름은 온(蘊)이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석두(石頭)에게 선지(禪旨)를 짐작(斟酌)함. 탐욕스럽고 속된 것을 싫어해 재산을 모두 동정호(洞庭湖)에 던져 버리고 죽기(竹器)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뒤에 마조(馬祖)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마조는 “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린 뒤면 일러주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2년 동안 정진하여 깨달음.


죽으려 할 때 딸 영조를 시켜 그늘을 보아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했다.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日蝕)이 일어납니다.”하자, 그는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서 보는 동안, 영조가 그의 평상으로 올라가 죽어버렸다. 이를 본 그는 웃으면서 “내 딸의 솜씨가 나보다 빠르구나!”하고는 7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부설거사(浮雪居士) ;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서울(王都, 慶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광세(陳光世). 법명(法名)은 부설(浮雪). 자(字)는 천상(天祥).

어려서 불국사에 출가하였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에서 10년간 정진한 뒤, 오대산 문수보살의 도량을 참배하러 북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두릉(杜陵 :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신도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구무원에게 딸 묘화(妙花)가 있었는데, 부설을 흠모하여 부설과 부부가 되길 원하고, 만일 버림을 당하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니, 묘화의 부모도 부설에게 딸을 버리지 말고 제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부설은 출가의 뜻이 견고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또 돌이켜 보살의 자비로운 뜻을 생각하여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록 재가(在家)에 있었으나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정진을 계속하여 도를 이루었다. 등운과 월명도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부인은 백 십세를  살았는데, 말년에 집을 내놓아 사원으로 삼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조불양화(助佛揚化 도울 조/부처 불/날릴·나타낼 양/가르칠 화) ; 부처님[佛]을 도와[助] 교화(敎化)를 드날리다[揚].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본래사(本來事) ; 본래의 일. 본분사(本分事).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행장(行裝 갈 행/꾸밀·행장 장) ; 길을 떠나거나 여행(旅行)할 때에 사용하는 물건과 차림[裝].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일심불란(一心不亂) : ①두 생각이 없이, 딴 생각이 없이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 ②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함.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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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05~106에서.

 (46)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한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게송) ‘만의도취일의단~’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5) '贈蘭法師' 게송 참고.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별념(別念) ; ‘딴 생각’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깰 오/잠잘 매/하나 일/같을 여)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 


[참고]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삼천위의(三千威儀) ; 비구(출가한 남자 스님)의 일상 행동에서 지켜야 할 계율이 250종이어서 이를 ‘비구 250계’라고 한다. 일상생활은 크게 행(行)·주(住)·좌(坐)·와(臥)로 나누기 때문에 이 네 가지에 250을 곱하면 천이 된다. 이를 다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곱하면 3천이 된다.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집착(執着)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황룡탕(黃龍湯) ; 황탕(黃湯), 용탕(龍湯)이라고도 한다. 약용으로서 저장한 인간과 가축의 대변과 소변을 말한다.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써 이용하는 오줌을 말함. 요료법(尿療法).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분소의(糞掃衣 똥 분/버릴 소/옷 의) ; 똥이나 먼지구덩이 속에 쓰레기로 버려진 낡은 옷과 찢어진 헝겊 조각을 깨끗이 씻은 다음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가사(袈裟). 납의(衲衣), 백납의(百衲衣) 등이라고도 한다.

*예약(穢藥) ; 부란약(腐爛藥). 대변, 소변등의 배설물로 만든 약.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이 버려서 아무도 쓰지 않는 재료로 만든 약도 포함한다.

악취가 나고 부패한 것이라는 뜻에서 부란약이라 하고, 버려진 것이라는 뜻에서 진기약(陳棄藥), 잔기약(殘棄藥) 등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행법[사의법 四依法 : 乞食, 糞掃衣, 樹下住, 陳棄藥] 중 하나와 관련된 것으로, 수행자는 병이 들었을 때 부란약을 제조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염(盛炎 성할 성/불꽃·더울 염)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주요 내용]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중생이 곧 부처니, 바로 나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 번뇌가 곧 보리(菩提)이니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 극락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

(게송)영화능기일~ /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도 닦을 수 있다 / 보현보살의 돼지 화현, (게송)久在塵勞中~ / 스님의 인사 ‘잘 수용하겠습니다’ /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 시주·보시는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게송)만의도취일의단~ / 모든 의심을 전부 자기 본참공안에 대한 하나의 의단에다 몰아붙이라 /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될수 있다 / 황룡탕 / 여법하게 열심히 도 닦으면 정법시대.



[주요 문구]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그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 방선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다 같이 죽비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꼭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를 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싸우고,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뭣고?’는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가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


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도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자기가 원래 부처였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하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정법이다, 말세다’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이고, 지옥 천당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은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도 닦고 모든 생활을 해 나간다면은 우리는 이 21세기를 진짜 정법시대로 돌릴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601~700/(626~650)2017. 5. 22. 10:07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650)—2001년 동안거해제 및 백일기도 회향(01.02.07) (32분)

(1) 약 18분. (2) 약 15분.

(1)------------------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하니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척사륜직하수(千尺絲綸直下垂)  일파자동만파수(一波纔動萬波隨)다.

천 척(千尺)이나 되는 낚싯줄을 똑바로 내리어서, 낚시질하기 위해서 낚싯줄을 내리는데, 한 물결이 일어나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는구나.


야정수한어불식(夜靜水寒魚不食)하야,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워서 고기가 물지를 안 해.

만선공재월명귀(滿船空載月明歸)다. 가득한 배에는 밝은 달만 싣고 돌아온다.


천 척(千尺)이나 된 긴 낚싯줄을 드리우는데 고요한 물에 낚싯줄을 드리워 내리니까, 한 물결이 일어나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나는데, 밤은 고요하고 물이 차와서 고기가 낚시를 물지를 안 해.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를 못해가지고, 가득한 배에는 공연히 밝은 달만 가득 싣고 돌아온다. 이 게송(偈頌)은 고인(古人)의 게송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게송을 다 외우고 알고 계시겠지만 이 전경(全景)을, 이 게송의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부처님께서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기 위해서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계시다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셔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팔십 세를 일기로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설하셨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중생을 제도(濟度)하셨느냐? 정말 그 부처님의 그 많은 법문을 듣고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제도를 받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했느냐?

한 중생도 제도 받은 사람이 있었더냐? 원래 제도할 부처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는 것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냐?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제도할 중생도 없고, 제도할 부처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고.

또한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부처님의 그 지혜와 자비로써 한량없는 중생이 제도 받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겨울 안거(安居)를 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들이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그 정진하는 모습이 마치 고요한 바다에 천 길이나 되는 낚싯줄을 드리워서, 고기를 잡으려고 드리우는데 한 물결이 일어나자마자 일만 물결이 따라서 일어난 거와 같다.

고요한 밤에 물이 차와서 고기가 물지 안 해가지고 가득한 배에는 공연히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그런 광경에다가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지난 삼동, 석 달 동안에 밤잠을 안 자고, 그저 가행정진을 했는데 과연 얻은 바가 무엇이냐? 그 동안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느냐?


‘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얻었다, 이런 것을 깨달았다, 이런 것이 보였다’ 여러 사람 가운데에는 나름대로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고, 본 바가 있고, 깨달은 바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었다. 보이는 것도 없었다. 얻은 바가 없고 보인 바가 없고, 석 달 동안이 언제 어떻게 지내간 줄을 모르고 오늘 해제를 맞이했다’ 산승(山僧)은 그분이야말로 석 달 동안을 정말 올바르게 수행을 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뭣이 보였다든지 뭣이 나타났다든지 뭣을 얻었다든지 했다 하면은 그 정진(精進)은 마장(魔障)이 일어난 것이고. 그런 것을 얻었고 보였고 나타났다고 해서 좋아한 생각을 냈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은 참다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분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혹 그런 것이 나타나고 보였다 하더라도 없었던 걸로 하고 전혀 그런데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만을 턱 거각(擧却)을 해서 알 수 없는 의심만을 가지고 잡드리하고 싸웠다면은 그분이야말로 정진을 올바르게 하려고 노력을 한 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공부는 다른 세속의 공부, 학문 그런 거와 달라서 얼마만큼 하면 뭣이 나타나고, 뭣이 얻어지고 그럴 수 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보인 것이 없고, 아무것도 나타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어야 참으로 이 활구참선을 올바르게 해 가는 수행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지나가는 과거를 붙잡지도 말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꿈도 꾸지 말아라. 그리고 오직 현재 이 순간에 너의 마음을 집중하라’ 하셨습니다.

순간에 무엇에다 집중을 하느냐? 알 수 없는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그 의심에 자기의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한다’는 말은 부득이해서 하는 말이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거각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얻어질 것도 없고, 보일 것도 없고, 나타날 것도 없습니다. 무슨 재미로 그런 짓을 하고 있느냐?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것을 하고 있단 말이냐?

한 달을 하고, 두 달을 하고, 석 달을 하고, 일 년을 하고, 삼 년을 해도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고 나타난 것이 없는데 뭣 때문에 그런 짓을 하고 있느냐?


이 공부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하고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하게 몰입을 해서, 다맛 그렇게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다못 그렇게 실참(實參)해 갈 따름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한 나무가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그 나무는 언제 넘어져도 넘어질 때에는 동쪽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그 믿음 속에서 한결같이 정진을 해 나가면 그 사람은 언제 죽어도 부처님의 청정국토(淸淨國土)에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청정국토라 하는 것은 우리의 청정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나의 마음자리일 것입니다. 다맛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한 것만이 우리가 닦아갈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는 사람은 설사 일 년 내지 삼 년 내지 십 년, 삼십 년이 걸려서도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설사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마지막 죽음에 다다랐서도 알 수 없는 본참공안에 대한 의단이 독로(獨露)한 그 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하더라도 후회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허덕이는 마음이 없고, 구하는 것이 없고 다맛 철저하게 최상승법을 믿고 자기의 본참공안이 그 의단이 독로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한다면 바로 그 경계는 깨달음의 바로 이웃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생각이 없지만 본참공안에 의단이 독로해서 조급한 생각도 없고 깨달으려고 하는 생각도 없고, 후회도 없고 순수무잡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 도달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것이 우리 수행자가 목숨 바쳐 나아갈 길이요,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파수공행(把手共行)한 자리일 것입니다. 파수공행(把手共行)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과 손을 맞잡고 함께 걸어간다는 말입니다.(처음~17분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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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의 초롱초롱한 그 눈망울을 보니 과연 그렇게 지난 한철을 잘 정진하신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중국의 천목산 고봉(高峰) 스님의 「선요(禪要)」에 있는 법문에 잠깐 언급을 하셨습니다마는,


죽비(竹篦)를 치면 형식적으로 입선(入禪)을 하고, 입선 중에는 혼침(昏沈)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란심(散亂心)에 그렇게 지내다가, 방선(放禪) 죽비를 치면 금방 머리를 모아서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하고, 온갖 시비를 하고 그러다가 또 입선 시간이 되면 입선을 하고, 또 죽비 치면 방선하고.

혼침과 산란과 잡담과 시비로써 그럭저럭 그렇게 지낸다면 만만천천(萬萬千千)을 타살(打殺)을 한들 무슨 죄가 있겠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혼침, 산란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한화잡담과 시비쟁론을 하지 아니하고, 일 초 일 분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본참공안 하나만을 거각하면서 한결같이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열흘을 그렇게 지내고, 한 달을 그렇게 지내고, 석 달, 백일을 그렇게 지내면서 일념(一念)이 만년(萬年)토록 그렇게 지낸 분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가?


그럭저럭 한화잡담으로 형식적으로 정진하고 지낸다면 그건 참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원주(院主)와 별좌(別座) 스님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시주 단월(檀越)들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스승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도량 신장(神將)에게도 부끄러울 일이고, 삼세제불께도 부끄러울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자가 먹고 입고 살고 있는 모든 시설과 재산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사십 년 동안 수용하실 그 유산을 우리 말세(末世)의 제자들에게 남겨 놓으신 그 덕으로 우리는 걱정없이 먹고 입고 이렇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재산은 목숨 바쳐서 정진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남겨주신 재산이지, 그럭저럭 한가하게 그럭저럭 먹고 편안히 놀고 한화잡담하고 지내면서 살으라고 남겨주신 유산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소떼가 지내가니까 ‘저 소떼들을 아느냐? 당면에 철저하게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도를 닦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지낸 그러한 중들이 저 소가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국수면 국수, 찰밥이면 찰밥, 그날 그때 나온 대로 경건한 마음으로 공양을 하고 공양을 하면서도 화두를 들고,

입선 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방선 중에도 또 운력(運力)을 할 때에도, 소지(掃地)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포행(布行)을 할 때도 한결같이 화두를 거각하고 한 생각을 단속해서 정진한 사람은 설사 금생에 확철대오을 못하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렇게 지낸 사람은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언제 넘어져도 동쪽으로 넘어질 것이고, 불법을 믿고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은 언제 깨달아도 확철대오를 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에 닦아온 것과 금생에 닦은 그러한 것이 복합적으로 해서 칠 일만에 깨닫기도 하고, 석 달만에 깨닫기도 하고, 삼십 년만에 깨닫기도 하고 또 그렇게 애써서 정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생에 확철대오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바르게 그리고 얼마나 열심히 도(道)를 닦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누가 먼저 깨달았느냐 그것은 크게 문제 삼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닦았으면 우리는 후회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수원 용주사 중앙선원 선객(禪客)들, 그리고 대전 세등선원, 전주 위봉사 비구니 스님들 또 남원 승련사 또 의정부 회룡사, 각처에서 공부하다가 토굴(土窟)에서 공부하던 그런 납자(衲子)들도 오셨습니다. 그리고 용화사 법보선원, 인제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하신 도반(道伴)들도 이 자리에 다 모이셨습니다. 그리고 각 선원에서 공부한 청신사(清信士) ・ 청신녀(清信女)들도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열심히 정진하다가 오신 그 증거가 여기 둘러보니, 그 역력히 가행정진 용맹정진 알뜰하게 정진하신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리고 더 정확한 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석 달 동안을 과연 내가 어떻게 정진을 해 왔는가 잘 검토를 해보면 더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공연히 육체만을 들볶는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은 올바른 정진이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도 지혜롭게 관리하고, 정진도 지혜롭게 정진을 해야 중간에 퇴타(退墮) 인연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 진로(塵勞)를 멀리 벗어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어.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정진을 해야 한다.


한번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않는다면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피어야 그 매화꽃 향기가 유난히 진동을 한다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겨울에 이상 난동으로 날이 뜨뜻한 뒤끝에 매화꽃이 피면 별로 향기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일은 오직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알뜰히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산과 들에는 허옇게 눈이 남아 있습니다. 입춘이 지나고 또 우수가 돌아오는데 여기서 저기서 매화꽃이 필 때가 왔습니다. 다니시다가 매화꽃을 보시거든 그 향내가 얼마나 좋은가 한번 맡아보시고, 과연 자신도 향내 나는 매화꽃처럼 열심히 정진을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석 달 동안 정진하시느라고 애쓰고 또 그 외호(外護)하느라고 원주, 별좌, 공양주, 채공 그러신 분들 모두 그런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께 원장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다시 또 이다음 철에 건강한 모습으로 또 만나서 정진하기를 기약을 하고, 이 법당에서 일어나시더라고 항상 결제(結制) · 해제(解制) 상관 말고, 입선 · 방선 상관 말고 알뜰히 정진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17분40초~32분20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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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천척사륜직하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교화(敎化) ; 가르쳐 이끌다. 사람을 일깨워 고통받는 자를 편안히 하고, 의심하는 자를 믿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함. 설교. 교도감화(敎導感化)의 준말.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 15일부터 7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 15부터 다음해 1 15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정진(精進) : [범]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참(實參) ; 실참실수(實參實修). 실답게 참구(參究)하고 실답게 수행하는 것. 공안(화두)을 이론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선지식의 지도 아래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청정(清淨 맑을 청/깨끗할 정) ;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

*청정불국토(淸淨佛國土) ; 청정불토(淸淨佛土). 청정토(淸淨土). ①청정한 행위에 의해 느끼는 정토. 불지(佛智)에 의해 깨끗해진 국토(國土). ②진여불성(眞如佛性). 나의 마음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파수공행(把手共行 잡을 파/손 수/함께 공/갈 행) ; ‘손[手]을 맞잡고[把] 함께[共] 간다[行]’는 말. ‘같은 경지에 들어가다’는 뜻. ‘같은 자리에 서다’ ‘같은 입장이 되다’


[참고 ①] 『수심결(修心訣)』 (보조지눌 普照知訥 一一五八 ~ 一二一O)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은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 주고자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다”

“화상의 성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어떻게 보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 꽃[空花]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곧 깨달은 것이다.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위에 든 옛 성인들의 도에 드신 인연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어 아는 곳[信解處]이 있으면 바로 옛 성인들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참고 ②]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 (무문혜개 無門慧開, 一一八三 ~ 一二六O) 제 1칙 ‘조주구자(趙州狗字)’

趙州和尙因僧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조주 스님께 한 스님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 없느니라)” 하였다.


無門曰  參禪須透祖師關  妙悟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把手共行  眉毛廝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무문이 평한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꿰뚫어야 하는 것이요, 묘하게 깨치는 것은 마음길이 끊어져야 하나니,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길이 끊어지지 못하면 모두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도깨비일 따름이리라. 일러 봐라,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다못 이 한 개 무자(無字)는 종문(宗門) 중의 한 관문이다. 이를 일러 선종무문관이라 한다. 이 관문을 뚫고 지나간 자는 친히 조주를 볼 뿐만 아니라, 곧 역대조사와 손을 잡고 같이 가고[把手共行] 눈썹을 함께 하여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을 것이니 이 어찌 경쾌하지 아니하겠는가.



------------------(2)


*선요(禪要) ; 『선요』는 중국 송대 말기에서 원대 초기의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의 법어집으로 대중과 개인을 위한 법문과 편지글 및 스님 자신의 수행과정을 직접 말씀한 편지글을 포함해 29단락의 법어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참선 수행인이 생사 일대사(生死 一大事)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하게 화두 참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한화잡담(閑話雜談) ; 심심풀이로 한가롭게 얘기를 나누거나[閑話],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雜談].

*‘타살만만천천(打殺萬萬千千)인들  유십마죄과(有甚麽罪過)리오 ; ‘천이면 , 만이면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참고] 『고봉선요(高峰禪要) 시중(示衆 其二)’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52, 58 참고.

若是此念이  輕微하야  志不猛利하야  [-+][-+][-+][-+]하며  魍魍魎魎하야  今日也恁하고  明日也恁인댄  說使三十年二十年用功이라도  一如水浸石頭相似하야  看看逗到臘月三十日하면  十箇有五雙이  懡㦬而去하야  致令晚學初機  不生敬慕하리니  似者般底漢이  到高峰門下인댄  打殺萬萬千千인들  有甚麽罪過리오


만일  생각(참선하려는 뜻과 소원) 흐지부지하여 시원찮고, 뜻이 맹렬하고 날카롭지 못하여 조는 개처럼 멍하거나 도깨비처럼 산란하여 오늘도 그럭저럭 내일 그럭저럭 지낸다면 설령 20 30년을 공부하더라도 마치 물이 돌의 표면만 적시는  같아서,

어느덧 섣달 그믐이 되면 열에 다섯 쌍이 모두 창피한 꼴이 되어 늦게 배우는 이와 처음 출가한 이들에게 존경심을 내지 않게  것이다. 이와 같은 놈이 고봉의 문하에 온다면 천이면, 만이면  모두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랴.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채공(菜供) ;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원주(院主) ; 후원(後院, 절에서 부엌을 일컫는 말)을 책임지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별좌(別座) ; 절에서 식사·의복·방석·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단월(檀越) ; 시주(施主). dana-pati 의 음역.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석가모니(釋迦牟尼) : [범] Sakyamuni 한문으로는 음대로 써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또는 석가문(釋迦文)이라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능유(能儒)라 한다。Sakya는 종족(種族)의 이름이고, muni는 존칭이니, 곧 「석가 종족에서 나신 거룩한 어른」이란 뜻이다.


서력 기원전 565년(<중성점기衆聖點記>를 표준한 연대)에 중인도 가비라(迦毘羅 Kapila-vastu) 성주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 나시었다。난 지 칠 일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摩耶夫人)을 잃고 이모인 파사파제(波闍波提)에게 자랐다。어릴 때 이름은 교답마(喬答摩 Gautama;Gotama) 혹은 실달다(悉達多 Siddhartha)라 하였다.

어려서 온갖 학문과 무예를 고루 배워서 정통하고, 열 일곱 살에 선각왕(善覺王)의 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결혼하여 한 아들을 두었다. 그 나라의 제도에 종교와 학문을 차지한 바라문족과, 정치와 군사를 차지한 왕족과, 그 다음으로 평민과 노예족의 네 가지 계급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개혁할 뜻을 늘 품고 있었다.


하루는 농부들이 밭 가는 것을 보고, 똑 같은 사람으로 어떤 이는 불볕에 죽도록 일하고, 어떤 이는 놀기만 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과,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참혹한 일을 아프게 생각하여, 모든 것이 평등하고 싸움과 슬픔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국가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번민하였다

다시 인간에는 살아가고 늙고 병들고 죽는 큰 고통이 있음을 느껴, 누구나 다같이 참다운 행복을 누리게 할 도리를 찾고 있었다。그리고 우주의 온갖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갈수록 의문 아님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드디어 열 아홉에 왕궁을 뛰쳐나와 산중으로 갔다。처음 육 년 동안은 바라문 교도들이 하는 대로 심한 고행(苦行)을 하다가, 육체를 괴롭히는 것만이 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몸을 보살펴 가면서 마음을 닦아 설흔 살에 비로소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쳐서 마침내 부처님이 되었다.

그 뒤 사십 구 년 동안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면서 묘한 법을 가르쳐 한량없는 중생을 건지시고, 여든 살(기원전 486년)에 그의 육신은 세상을 떠났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운력(運力) ;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울력'과 같다. 의미와 관계없이 운력(運力)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토굴(土窟) ; 사전적인 원래의 뜻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 따위를 얹고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이나, 근래에 절에서 쓰이는 의미는 대중이 함께 거주하는 ‘사찰(절)’과 대비되는 의미로, 어떤 집 형태와는 관계없이 스님의 ‘개인의 수행 거처’를 말함.

*납자(衲子) : ‘납(衲)’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청신사(清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清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고행(苦行) ; 어떤 경지에 이르거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퇴타(退墮 물러날 퇴/떨어질·게으를 타)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 오는 것.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번뇌(煩惱). 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주요 내용]


(게송)천척사륜직하수~ / 이 공부는 자기 본참공안에 대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거각해 나갈 따름 / 파수공행(把手共行) / 한화잡담으로 형식적인 정진은 부끄러운 일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닦았으면 부끄러울 것이 없다 /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언제 넘어져도 동쪽으로 넘어진다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주요 문구]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제도할 중생도 없고, 제도할 부처도 없고, 제도 받을 중생도 없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고. 또한 시각을 달리해서 보면 ‘부처님의 그 지혜와 자비로써 한량없는 중생이 제도 받았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다른 세속의 공부, 학문 그런 거와 달라서 얼마만큼 하면 뭣이 나타나고, 뭣이 얻어지고 그럴 수 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아무것도 보인 것이 없고, 아무것도 나타난 것도 없고,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어야 참으로 이 활구참선을 올바르게 해 가는 수행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지나가는 과거를 붙잡지도 말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꿈도 꾸지 말아라. 그리고 오직 현재 이 순간에 너의 마음을 집중하라’ 하셨습니다.

순간에 무엇에다 집중을 하느냐? 알 수 없는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 그 의심에 자기의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집중한다’는 말은 부득이해서 하는 말이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거각해 나갈 따름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소떼가 지내가니까 ‘저 소떼들을 아느냐? 당면에 철저하게 수행을 하지 아니하고, 철저하게 도를 닦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지낸 그러한 중들이 저 소가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동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언제 넘어져도 동쪽으로 넘어질 것이고, 불법을 믿고 올바르게 정진을 한 사람은 언제 깨달아도 확철대오를 할 수밖에는 없다.


이 공부는 공연히 육체만을 들볶는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은 올바른 정진이 아니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건강도 지혜롭게 관리하고, 정진도 지혜롭게 정진을 해야 중간에 퇴타(退墮) 인연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법당에서 일어나시더라고 항상 결제(結制) · 해제(解制) 상관 말고, 입선 · 방선 상관 말고 알뜰히 정진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601~700/(626~650)2016. 10. 26. 16:3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630)—99년 10 첫째일요법회(99.10.03) (66)


(1/4) 약 17분. (2/4) 약 21분. (3/4) 약 19분. (4/4) 약 9분.


(1/4)----------------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한 대도(大道)가 밝고 분명한데, 사람 사람마다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고, 본래부터 원만히 성취 이루어져 있다.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 다맛   생각 어긋진 탓으로,  생각 그르친 탓으로 영겁 동안을  가지 형태를 현출(現出)하는구나. 나타내는구나.


우리는 원래 부모님께  몸을 받아나기 전부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똑같은 본성(本性)자리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인데,  생각 어긋진 탓으로 해서 우리는  가지 형태를 받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앞으로도 영겁을 두고 가지가지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육체를 받아나고 그래 가지고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듭하면서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게 되는, 그리고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갖은 고통을 받는 원인이  생각 어긋진 탓으로 그랬다.


생사윤회를 끊는 것도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생각을 그냥 방치하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끝없이  생각이  생각,  생각으로 번져 나가고 그것이 얼굴에 말로 육체로 표현이 되어가지고 무서운 업(業)을 지어 가지고 점점 생사의 함정에 빠지고, 만사만생(萬死萬生)하는 지옥에도 들어가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에 간단한 것이다. 쉬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법문에 들었습니다.

 쉽고 간단하느냐 하면은  생각’을 단속하면 윤회를 끊는 길도 거기서 열리는 거고, 끊지 못하고 계속 생사고해로 얽혀 들어가는 것도   생각’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말이죠.


오십오위(五十五位) 점차(漸次)를 거쳐서 그래 가지고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닦아서 성불(成佛)에 들어간다던지, 십만팔천 국토를 서방으로 가서 극락세계를 간다든지, 부처님의 여러 가지 법문 가운데에는 경(經)마다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로서는 성불은 가망 없는 일이고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말세에 태어나서  육체를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수가 있냐? 그것은 하나의 이상론에 지내지 못하지 감히 어떻게 우리  많은 중생이 더군다나 말세에 태어나서 어떻게 견성(見性)을 하며 어떻게 성불을 하느냐?


만나기 어려운 상(想), 현애상(懸崖想)을 지어 가지고 자기를 하대(下待)하고 포기하고 차라리 염불하거나 경을 읽어서 불교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입어 가지고 내생에는 최소한도로 악도(惡道)는 떨어지지 말아야겠다 처음부터서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법을 믿고 신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은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 그것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근기(根機)가 상근대지(上根大智)냐, 중근(中根)이냐, 하근(下根)이냐 그것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남녀와 노소도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원래 우리가 본래 원만구족해 갖추어 있는 우리의 본성자리는 부처님과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어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닦으면 누구라도 자기의 본성을 깨달을 있는 것이고, ‘깨달을  있다’고 하는 것을 불보살(佛菩薩)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스님네들이 감동의 눈물 없이는 들을  없는, 그렇게 보증을  주신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은 정말 그게 어렵습니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낱낱이 의리로 따져 가지고  공안은 어떻게 되는 공안이다’ 공안을 분류를 하고 그렇게 해서 공안을 하나씩 하나씩을 통과해 나가는 그런 참선이야말로 머리가 나쁜 사람은 도저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참선은 해 봤자, 천칠백 공안을 하나도 남김없이  통과되어 봤자 그것 가지고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것은 그것은 깨달음이아닌 것입니다.


설사 일생 동안에 이뭣고?’ 하나를 통과를 못했다 하더라도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 채로   없는 의단(疑團)으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갈지언정, 깨달음이 아닌 의리로 따져서 천칠백 공안을 알면 그것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조실 스님의 법문을 열심히 듣고 들으신 분은 구구하게 이런 말씀을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활구참선이라야 진짜 참선인 것입니다.


용화사에서 설한 법문만이 진짜 불법이고, 다른 절에서 설한 법문은 법문이 아니다. 이러한 뜻이 아닙니다.

어느 절에 가서 법문 듣던지,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던지, 활구참선이라야 올바른 참선이고, 활구참선을 통해서 바로 자기 본성을 봐야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바꾸지 못할 진리인 것입니다.


따져서 알아 들어갈  있는 거라면 공안도 해설해서 가르켜 주면  성불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우리의 몸과 목숨을 바쳐서 공부를  필요가 있으며, 부모 형제와 고향과 처자 권속과 인생과 청춘을 버리고 도를 닦을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머리 좋은 사람은 일찌감치  해설을  주고, 듣고 외우고 배우면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설명을   수도 없고 설명을  주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바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법은 닦음이 없이 닦아야 하고, 행함이 없이 행해야 하고, 말없이 말을 해야 하며, 증(證)함이 없이 증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참선의 소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부 말고는 닦으면 닦을 것이 있고, 말하면 말하는 것이 있고, 행하면 행한 것이 있고, 증하면 증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없는 의단으로,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데에서, 행하되 행한 바가 없고, 말하되 말한 바가 없고, 밥을 먹되  톨의 쌀도 씹은 바가 없고, 걸어가되  조각 땅도 밟은 바가 없고, 해 갈수록 의단만 독로하지 보이는 것이 없고, 알아지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갈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하게 되면 의단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성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예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요,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하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있고 3일이나 7일에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빨리 깨달으면 좋고, 5년이나 10년 해서 깨달으면 별것이 아니냐? 그것이 아닙니다.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은 각자(各自)어떻게 공부를 하느냐? 언제부터 전생에부터서  공부를  뒤끝이냐? 보리심(菩提心)을 발해 가지고 공부 시작한 지가얼마 안된 사람이냐? 얼마만큼 철저하게 공부하느냐? 근기에 따라서 인연 따라서 그것은 다를 수가 있겠으나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필요가 없습니다.


닦음이 없이 닦고, 증한  없이 증해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차지호리(差之毫釐)요 실지수유(失之須臾)니라. 털끝에서 그르치고 찰나 동안에 잃어버린다’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달았으면 그만이지 어찌 털끝에 어긋진다, 털끝 사이에서 그르치고 수류(須臾) 동안, 수류(須臾)라고 하는 것은 찰나란 말과 같은데, 찰나 동안에 잃어버린다고하셨겠습니까?


이것은 얻은 바가 있고, 보는 바가 있는 공부가 아닙니다. 벌써 보는 바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아는 바가 있으면 그것이 바른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처음~177)



(2/4)----------------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더이상 법문을 들을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연전(年前)에는 일본에서 오사카나 고베에서 7.5부인가, 8도인가? 그런  지진이 일어나 가지고 많은 사람이 죽고 많은 재산 손실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가지고 엄청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근자(近者)에도 터키니 그리스니 한 데서도 지진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대만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 가지고 사람이 죽고 많은 재산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멕시코에서도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도 신라 때부터서 삼척이니 울산이니 울진이니 그런 지방에 자주 지진이 일어났었고 지질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십 수년 후에는 울산 지방에도  지진이일어나리라고 모다 예언을 했습니다.

중국, 미국, 일본, 인도 모다 전부 태풍이 일어나고 홍수가 일어나서, 우리나라도  여름에 유난히 태풍과 홍수가 일어나 가지고 아직 복구도  되지 않았는데 이차, 삼차로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러시아는 아파트가 연속해서 폭파가 되고, 우리나라  얼마 전에는 화성에 어린이 수련원에 화재가 일어나 가지고  천사와 같은 어린이들이 화재로 인해서 목숨을잃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통사고니, 사고로 인해서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여기서 저기서 각종 암으로 인해서 병고에 시달리다가  속절없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엠에프(IMF) 인해서, 구조 조정으로 인해서 많은 회사들이 모다 도산을 하고 부도가 났습니다. 그리고 실직을 하고 자살을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조금 위기는 넘겼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모든 사람들이 잘살고 모든 기업체가 활발하게 잘되어 가기에는 아직도 많은 시기와 고통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구구하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공포심을 갖도록 하는 데에 뜻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는 천재지변(天災地變)과 인재(人災)가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만큼  세상은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죽음이 언제 있느냐?”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죽음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공부하기 어렵겠다

일향간(一餉間),  끼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하기가 어렵겠다

 호흡지간(呼吸之間)에도 죽음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하니까 너는 공부할 만하다


이런 말씀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있습니다. ‘ 호흡지간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인식을 해야  사람이야말로 바르게 수행할  있는 그릇이다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지진이다, 태풍이다, 홍수다 그리고  인위적인 폭파 사건, 교통사고, 각종 병고 그리고 흉악범들의 살해사건, 이러한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보면 정말 뜻있는 사람이면 발심(發心)할 수밖에 없도록 모든 상황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불안에 떨고 그럴 일이 아니라 정말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발심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면 이런 모든 상황이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설해 주시는 법문이 되는 거고, 우주 법계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모든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발심해서  닦도록 해 주는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천재지변과 모든 속에서 공포에만 떨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한테나 있을 일이지 나한테는 아직  왔으니깐  걱정할 거 없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말 딱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피차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부터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태중에서도 얼마든지 죽게 되고,   있다가 그냥 사산하기도 하고, 태어나면서 죽기도 하고, 한두  안에 죽기도 하고, 십세 미만에 죽기도 하고, 삼사십 이내에도 죽기도 하고, 환갑 이내에도 죽고, 많이 살아 봤자 백세 넘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빨리 죽으나, 조금 살다 죽으나,  늙어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빨리 죽었으니까 엄청나게 슬프고, 오래 살다 죽으니까 죽는 것이  좋고,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죽을 때는 늙어서 죽어도 괴로운 것이요 슬픈 것이요. 사람들은 젊어서 죽으면 애석하게 생각하고 늙어서 죽으면 호상(好喪)이다,  죽었다, 오래 살면  하느냐?’ 남의 일은 그렇게 말합니다마는 자기 본인은 늙어서 죽어도 죽는, 오죽 답답하고 숨이 막히고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신심이 있고 평소에 보시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참선도 많이 하고  분은 죽을  편안하니 웃으면서 숨을 거둔 분도 더러는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과거에 수천만 번 죽어봤겠지만 과거지사(過去之事)는 전부 건망증 때문에 잊어버려서 모르겠고, 금생에는 아직 죽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들어 보면 죽을  가래춤이 입으로 코로 부글부글 북적북적 하면서 숨이 맥혀 가지고 그래 가지고 껄떡껄떡 하다가 결국은 숨을 거두는 것을 나도 한두 번은 봤습니다.


오죽 견디지 못하면 숨을 거두겠습니까. 견딜 수만 있다면    텐데 견딜 수가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간에 암이 걸려서 죽거나, 폐암으로 죽거나, 위암으로 죽거나, 별의별 병이  많고.

남의 염통 곪는 병이  감기만 못하다’던가? 손톱 밑에 가시 하나  것도 대단히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지금도 수천 명이  세계에서 수천 , 수만 명이 죽어가고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도 어딘가는 일초 일초   없이 사람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간 때의 교통사고, 병고, 온갖 방법이 양상이 달라서 그렇지, 죽음은  견디기가 어려운 것인데 그런 죽음이 우리 앞에도 언제 올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에는 삭비지조(數飛之鳥)는 홀유나망지앙(忽有羅網之殃)이요, 경보지수(輕步之獸)는 비무상전지화(非無傷箭之禍)라’

자주 자주 날으는 새는 그물에 걸릴 재앙이 있고, 새가   있으면 이리저리 날아다니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물에 걸려 죽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먹이를 찾아서 이리날아갔다 저리 날아갔다 하다 보면은 그물에 걸려 죽기가 쉽고.


짐승도 가만히 어디 굴속에 있으면 화살이나 총에 맞아서 죽지 않을 텐데, 저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먹이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댕길 수 밖에 없어서 댕기지마는너무 경솔하게 자주 돌아다니다 보면은 화살이나 총알에 맞아 죽을 재앙이 없지 못하다 이거거든.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리거리마다 차가 수천 , 수만 , 수십만 대가 차 가지고 출근 퇴근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러 그렇게 사람들이 차를 몰고 댕기는지, 어지간하면 전차나 버스, 기차 그런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 훨씬 교통사고도 줄어지고  복잡할 텐데,

 한 집에 차가  대씩,  대씩 있어 가지고 제각기 손수 운전을 해서 밖으로 나댕기니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겠습니다마는 뭣인가 일이 있어 나가리라고는생각하지만, 그렇게 댕겨 가지고는 교통사고가 끊임없을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기름  방울 나오지 않는데, 외국에서 비싼 돈을 주고 기름을 사다가 하는데 그것도   문제고, 다른 사람 보고는 에이!  놈의 차를 그렇게 끌고나오느냐?’고 하면서 자기도 몰고 나가거든요.


그래서  사고를 적게 하려면   있으면 적게 돌아댕기고  ,   나갈 일을  택일(擇一)을 해 가지고  번에 나가서 여러 가지 일을 보도록 하고, 형제간에누가 나가면 나간 김에 일을 보도록 서로 서로 가족끼리 그렇게 한다면 경제적으로도 좋고 사고도 적게 나고 여러 가지가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집에 있으면서 참선(參禪)을 하신다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라 일거삼득(一擧三得)이야.

휘발유 적게 들어서 좋고, 행여나 일어날지도 모를 교통사고도 줄여서 좋고, 집에 있으니 이뭣고?’를 한다면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만났고, 만나기 어려운  몸을 받은 김에 공부를 실컷한다면 생사해탈을 해서 좋을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이런 말을 산승(山僧)이 하는 까닭은 이렇게  세계가 살기가 힘들고, 복잡하고 이럴 때에 세상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누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럴 내가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열심히 참선을 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훨씬 살기가 좋아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원망을 한다고 하는 것은, 나라를 원망한다고 해서 나라가 좋아질 리도 없고, 남편이 돈을   번다고 남편을 무시하고 원망한다고 해서 집안 형편이 좋아질 리도 없습니다.

비록 돈을   벌고 형편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검박하게 살면 되요. 돈을   때는   먹고,  입고, 차도 굴리고,  대씩 굴리고 살았겠지만, 직장에서 떨어졌다든지 사업이 여의치 못하면 그것에 맞춰서 검소하게 살면 됩니다. 차도   굴리던   대만 굴리고,   굴린 것도 어려우면  없이 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살면 사는 것이지,  없다고  못사는 것이 아닙니다. 버스도 있고 택시도 있습니다. 전철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외제로 고급 옷으로 쪽쪽  입지만 자기는 국산 옷으로 검소하게 입어도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  가지고 창피하게 생각한다면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마음)속이 무상을 깨닫고 발심을 해서 생사 없는 활구참선을 한다면 가난해도 창피할 것도 없고, 차가 없다고 해서 창피할 것도 없고, 고급차가 아니고, 티코를 몬다고해서 조금도 부끄럽고 창피할 일이 없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와도 자기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조금도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속이  비어 가지고 허세를 부린 것이 그것이 인격적으로 창피한 것이지, 어려운 대로 검소하게 살면 하늘에 향해서도 무엇이 부끄러우며 천지신명(天地神明)에 무엇이 부끄러우며,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서 무엇 부끄러울 것이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왕궁의 부귀도 버리고 일생을 걸식(乞食)을 하면서 사셨습니다. 밥이 없고 옷이 없고 집이 없어 그랬겠습니까?

부처님 뒤에 많은 제자들도, 달마 스님 같은 분도 향지국(香至國)의 왕자였습니다. 그래도 그걸  버리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대각국사니 모다그런 국사들도  왕손이지만 버리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출가해서 도를 닦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밖으로 좋은 차를 굴리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을 살아서  앞에 그런 것을 과시한다고 해서 아무도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검소하게 살고, 겸양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수행을 한다면 첫째, 불보살들이 항상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실 것이고, 모든 선신(善神)들이 항상 옹호(擁護)를  주실 것이고, 모든 도반들이 오히려 마음으로 그분을 존경하게  것입니다.(1711~3755)



(3/4)----------------


아마 제일 무섭고 걱정이  것은 자식들이 창피해서남의 집은 자녀들한테 차를 사 주고, 좋은 옷을 사 주고, 좋은 신발을 사 주고, 좋은 학용품을 사 주고 그러는데자기는 그러지 못하니까, 철이 없는 어린 국민학교 유치원 중학교 모다 학생들이 학교 가서 얼마나 애들한테 천대를 받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 아버지는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실 것입니다마는.


 타일러서 그런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옷이라 하는 것은 깨끗이 빨아 입으면 되고. 고급 옷이 아니라도 깨끗이 빨아 입고 그리고서 말과 행동을 바르게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어려서부터서 친구 간에 신의를 지키고, 선생님을 존경하고, 서로 화목하면서 그래야 그것이 훌륭한 학생이고 그런 사람이 나중에 훌륭한 나라에 일꾼도 되고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좋은  입고서 거짓말이나 풀풀하고 자기만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따돌리고 그런 것이 창피한 일이지


그런 것을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기회 있을 때마다 항상 타일러 주면  부모님의 가정교육이 평생토록 어린이의 잠재의식 속에 녹음 녹화가 되어가지고 일생을 검소하게 그리고 바르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하고  하유양풍동유설(夏有凉風冬有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춘유백화추유월(春有百花秋有月)이요. 봄에는 백 가지 꽃이 아름다웁게 피고, 가을에는 환히 밝은 달이 있어.

하유양풍동유설(夏有凉風冬有雪)이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하얀 눈이 내려서  세계가 은빛 세계가 된다.


약무한사괘심두(若無閑事掛心頭)하면, 만약 쓸데없는 , 쓸데없는 생각, 쓸데없는 일이 마음에 걸리지 아니한다면필요 없는 자존심, 허세, 질투, 아만, 교만, 남을 하대하는 , 그런 쓰잘데없는 생각이 마음에 걸려 있지 않는다면,

변시인간호시절(便是人間好時節)이다. 문득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시절이다. 가장 멋지게 보람 있게   있는 인생이다 이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이 있어서 계절에 따라서 자연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어서 마음껏 금수강산을 이렇게 장엄을 해 주고 있습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봄이 오면 봄에 따라서, 여름이 오면 여름에 맞춰서, 가을이 오면 가을의 계절에 따라서  겨울이 오면 겨울에 맞춰서 우리는 먹는 것과 의복과모든 생활을 거기에 맞춰서 살아간다면 형편이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형편이 조금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살아가도 훨씬 좋지만 거기에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의지해서 열심히 참선을 하고 도를 닦는다면 그야말로 무엇이 부럽겠습니까?

임금이 부럽겠습니까? 대통령이 부럽고, 장관, 국회의원이 부럽겠습니까? 천하에 세세생생에   아닌 것이 임금이고,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국회의원입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불보살(佛菩薩)이 원력(願力)을 가지고 화현신(化現身)으로 나타난 그런 때에 한해서, 그러한 분이 임금도 하고 대통령도 하고, 장관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대기업도 하고 그래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바로  살기 좋은 세계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사람이 대통령을 하면 무엇이 되며, 왕이 되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나라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서 정말 자기가 불보살 화현인가 아닌가?  생각해 봐가지고 내가 확실히 불보살 화현이다’ 자신이 있고 자타가 인정할만한 분은 대통령도 나가고, 국회의원도 나가고, 나서서 한바탕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은.

그렇지 못하면 그거  못살게 하고, 자기 죄 짓고 온통 세상이 시끄러워서  수가 없어. 그러니  생각해서 앞으로   안 가면  선거가 일어나겠습니다마는.


춘하추동이 있듯이 세계에는 성주괴공이 있습니다.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성주괴공과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 흥망성쇠가 없는 극락세계에서사는 방법이  생각 단속하는 데 있습니다.


언제 어떠한 형식으로 찾아올는지도 모를 죽음을 우리는 확실히 날짜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분명히  것입니다.

 뒤에 혼비백산(魂飛魄散) 가지고 아우성이 되어 가지고 몸부림칠 것이 아니라 언제와도 좋도록 항상 활구참선을  놓으시면, 지진이 일어나 가지고 땅이 쩍쩍 갈라지고 고층 건물이  흔들려 가지고 무너지더라도  속에서 이뭣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어도 좋다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뭣고?’ 해야 살길이 있습니다.


이뭣고?’  사람은수십 명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청평 호숫가를 가다가 버스가 뒤집어져서 물에 빠졌는데도 화두를  사람은  화두가, 물속에 떨어져 가지고물이 버스 속에   있어서 사람들은 거기서 버르적거리고 아우성을 쳐도 화두를 들고 정진한 비구니 스님 하나는  속에서 환히 길이 있어서 걸어 나왔습니다.

나오다가 어린애가 방실 방실 물위에서  있어서 애기까지 건져 갖고 나왔습니다. 이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고 사실인 실화입니다.


화두를 들고 가면 버스가 뒤집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어린애기는 13층에서 떨어져도 어린애기는  죽습니다. 상처 하나도  입고 살아난 얘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냐? 갓난애기는 화두를 들고 의단이 독로한 사람과 같은 상황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떨어져도  다치고   죽습니다.


우리는 화두를 들고 항상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단도리를 하면은 틀림없이 의단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그것 밖에는 우리의 몸과 목숨을 보존할 길이 없습니다.

사업을  사람도 믿지 못합니다. 언제 부도가 날는지도 모르는 거고, 언제 직장에서 떨어질는지도 모릅니다.


이럴  화두를 ! 들고 정진 한다면 가능한 하면은  떨어질거고, 떨어지더라도 의젓한 마음으로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나와서 무엇인가   있는 일을  찾으면되는 것입니다.


집안 식구한테 속일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내가 직장을 내놓고 나왔다. 뭣인가  살길을 우리가 찾아보자 그리고 찾으면 되지, 그것을 속이고 며칠을 빙빙 돌아다니면서 직장에 나간 것처럼 그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산에 올라가서 자살하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아니어.

굶어서 죽는 법은 없습니다, 잔뜩 먹고 위가 터져 갖고 죽은 사람은 있어도 며칠 굶는다고  죽습니다.


언제도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용화사 시민선원(市民禪院)에 와서 참선하시면 우리 먹는 대로 공양을 해 드립니다. 참선 안 하는 사람까지  드릴 형편은 못됩니다.

와서 ! 방부(房付)를 들이고 참선하시는 분은 열심히 하고, 모르는 분은 참선을 배워서라도 와서  참선하시면 공양해 드립니다.


무엇 때문에 자살합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에 떨어져서 참선을 하시게 된다면직장 오십, 쉰다섯,  살까지 직장 다닌다 해봤자 언젠가는 정년퇴직하는 거고, 퇴직해 놓고 보면 막막합니다. 그래 갖고 시늠시늠 앓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선한 사람은 직장에 다니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고, 내놓게 되면 의젓하게 떳떳하게 ! 내놓고 뭣인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매, 내가 어찌 과장 국장 하던 사람이 그런 일을 내가 하냐. 그게 아닙니다.

우리 용화선원에 신도로서 농림부 장관까지  분이 장관을 내놓고, 보통 아주  얕은 그런 직장을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창피해서 그런  안 합니다.

내가 장관까지  사람이 내가 어찌 .... 시장, 농어촌의 물건을 사 가지고 농부도 받을 만큼 받고,  소비자도 비싸지 않게   있도록 하는 그런 기관이 있습니다. 내가 이름을 지금 생각이  나는데, 참선을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윌슨 수상은 수상을 하다가도  이튿날 !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서, 길을 터주기 위해서 사표를 내놓고 나와서  이튿날 택시 운전사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이 그렇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못합니까? 우리나라에 불법(佛法)이 들어온  천육백 년이 되었고, 그런 불교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의 사람이  그럴만한 여유가 없느냐 그말이여. 그럴만한 인격이  없느냐 그말이여.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것입니다. 장관을 하다가 운전수를 하면 무엇이 창피합니까? 그것이.

그래서 부자가 평생 부자 되라는 법도 없고,  부불십년(富不十年)이요 교불삼년(驕不三年)이라. 부자가 10년 이상 부자 노릇하기 어렵고, 교만 빼봤자 3년 동안 넘기지 못한다 그런 속담도 있습니다마는.


부자일 때는 부자대로  돈을  관리하고  뜻있는 데에 보시도 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검소하게 살고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해지기도 하고, 가난하게 살다보면  부자가 되는 것이 춘하추동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정법(正法)을 믿고 참선하면서 살면  세상 살기가 훨씬 살기가 좋습니다. 보람을 느끼고 떳떳하고.

허세 부린 통에 살기가 힘듭니다. 없는 사람이 있는  하자니 빚내서 차 사고, 빚내서   입고 그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의젓하고 떳떳하고, 어피차 언젠가는 죽을 것인데 죽기 전에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깊이 관심을 가지고, 길이 없어야 못 가는 것이지 언제라도 길을 찾으면 있는 것이고, 배고프면  먹을  알고 피곤하면 잠잘  아는 사람이면 참선은  수가 있는 것입니다.(3756~5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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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비대역비소(此珠非大亦非小)하고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멱시무물우무종(覓是無物又無)하되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니라

나무~아미타불~


 구슬이 크지도 않고 또한 작지도 않다. 나의 본성(本性) 자성(自性)자리, 나의 주인공을 구슬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고인(古人)의 시(詩)입니다.

 구슬은 크지도 않고 또한 작지도 않다.  때에는 우주 법계를  싸고도 남을 만큼 크고, 작기로 말하면은 인허(隣虛) 보다도 더 작다. 겨자씨 보다도 더 작다.


그런데 주야광명개실조(晝夜光明皆悉照)다. 낮이나 밤이나 항상  구슬에서는 광명이 나와서  우주 법계를 환히 비추고 있다 이거거든.


멱시무물우무종(覓是無物又無蹤)이요, 그런데 그런  구슬 찾아보면  수도 없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어. 자취가 없다 그말이여. 찾아보면 자취가 없어,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따라댕겨. 그림자 따르듯이 항상 따라다니는데 항상 요요명명(了了明明)하다 그말이여.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참선(參禪)은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기 위해서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기 위해서 한다니까 어서 빨리 내가 견성을 해야 것다  참선을 바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깨달으려고 조급한 마음  것이 아니라,   없는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를  사람은 이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사람은 판치생모’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없는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 해야지, 빨리 깨달으려고 생각한다던지 내가 이래 갖고  되겠다. 언제 죽을는지 모르니까 이를 악물고 내가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야겠다 그래가지고 이를 악물고 용을 쓰고 하는  아닙니다 이것은.


단정히 앉되 어깨나 목이나 힘을  빼고,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단전호흡이라 하니까 어거지로 무리하게  가지고는 가슴이 답답하고 그런  아닙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단전호흡하는 법을 자세하게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무리가 없이 해야 하고, 자연스럽게 보통 호흡하듯이 하되, 들어마실 때는 하복부가 약간 볼록함을 느끼면서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조용하니 내쉬되 볼록해졌던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쭉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호흡을  것뿐이지 배가 터지도록 잔뜩 하는 아니에요.


무리하게 오래 시간을 걸려서 한번 쉬는데 1분씩을 내가 참아야겠다 그런  아닙니다. 자세한 것은 참선법(參禪法)’이라고 하는  (법문)테이프를 자꾸 들어보시면아실 것입니다.


  없는 의단만 독로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눈팅이를 찡그리면서 용을 쓰면서 하는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하되, 눈은 평상으로 뜨고   없는의심만 독로하도록 잡드리하라.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가끔 이렇게도  다잽이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기좌상수상요요(起坐相隨常了了). 일어났다 앉았다 행주좌와 간에 항상 요요명명(了了明明)하도록, 의단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성성적적(惺惺寂寂)하도록의단만 잡드리해 나가면 지가 언제 터지던지 터지지,  터지는 법이 없습니다.

빨리 터지기를 기다릴수록에 무장  터지는 거고, 빨리 깨닫기를 바랄수록에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서 닦음이 없이 닦아야 하고, 행함이 없이 행해야만 한다’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부처님도 이런 말씀하시고, 조사 스님네도 말씀하셨는데, 화두를 들되 용을 쓰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흐리터분하니 앉아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해야 하고,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잡드리해 나가는데, 그래서 이것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항상 가정에서 틀어 놓고 공부를 하시면공부해 나가는  묘한 관(觀)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고, 올바르게만  나가면  참선이라 하는 것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이라고 해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묘한 길이다’이것입니다.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많이 벌어나 봤자 자식들 재판하고 서로 차지할라고...  못쓰는 것입니다.  많이 벌려고, 자식들한테 많이 물려주려고 하실 것이 없습니다. 부귀영화 그게 별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만큼 살면 되는 것이고,  것은 이뭣고?’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한다면 무엇이 부러울 것이 있고,  세상에 원수도  없어지는 거고, 밉고 고운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이  고마운 존재고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고마운마음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고.

재산에 조금 여유가 있으면 나만 못한 사람한테 보시도 하면서 그렇게 복과 지혜를 항상 겸해서 닦아 나간다면 우리는   요대로 바로 도인(道人)이고 바로 부처님이되는 것입니다.(5635~6517)(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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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②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음.

*노사나불(盧舍那佛) ; ①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의 준말. 또는 보리심(菩提心)의 당체(當體)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비롯한 부처님과 보살들의 심지(心地)를 가리킨다. ②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장엄된 몸을 가지고 보토(報土 : 부처님께서 과거 인위因位에서 행한 서원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정토)에 계시면서 설법하는 부처님.

삼신불(三身佛)은 (1)영원불변의 진리[法]를 몸[身]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2)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과보(果報)로써 온갖 덕이 원만구족한 불신(佛身)인 보신불(報身佛), (3)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身]으로 변하는[化] 화신불(化身佛, 應身)을 이르는 말인데, 노사나불은 이 중 보신불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 [] Sakyamuni 석가문(釋迦文)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능유(能儒)한다。Sakya 종족(種族) 이름이고, muni 존칭이니,  석가 종족에서 나신 거룩한 어른’이란 뜻이다.

서력 기원전 565(<중성점기衆聖點記> 표준한 연대) 중인도 가비라(迦毘羅 Kapila-vastu) 성주 정반왕(淨飯王) 태자로 나시었다。난    만에 어머니 마야 부인(摩耶夫人) 잃고 이모인 파사파제(闍波提)에게 자랐다。어릴  이름은 교답마(喬答摩 Gautama;Gotama) 혹은 실달다(悉達多 Siddhartha) 하였다。어려서 온갖 학문과 무예를 고루 배워서 정통하고,  일곱 살에 선각왕(善覺王)  야수다라(耶輸陀羅)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나라의 제도에 종교와 학문을 차지한 바라문족과, 정치와 군사를 차지한 왕족과,  다음으로 평민과 노예족의  가지 계급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개혁할 뜻을  품고 있었다。하루는 농부들이  가는 것을 보고,  같은 사람으로 어떤 이는 불볕에 죽도록 일하고, 어떤 이는 놀기만 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과,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참혹한 일을 아프게 생각하여, 모든 것이 평등하고 싸움과 슬픔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국가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번민하였다.

다시 인간에는 살아가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음을 느껴, 누구나 다같이 참다운 행복을 누리게  도리를 찾고 있었다。그리고 우주의 온갖 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갈수록 의문 아님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드디어  아홉에 왕궁을 뛰쳐나와 산중으로 갔다。처음   동안은 바라문 교도들이 하는 대로 심한 고행(苦行) 하다가, 육체를 괴롭히는 것만이 바른 길이 아님을 깨닫고, 몸을 보살펴 가면서 마음을 닦아 설흔 살에 비로소 우주의 진리를 크게 깨쳐서 마침내 부처님이 되었다。그  49 동안   없이 돌아다니면서 묘한 법을 가르쳐 한량없는 중생을 건지시고, 여든 (기원전 486) 그의 육신은 세상을 떠났다.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원만구족(圓滿具足)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 : [] karma []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 업이라 한다。개인은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 윤회(輪廻)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생사윤회(生死輪廻).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끝없이 되풀이하는 .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가리킴. 생사와  괴로움이 무한한것을 바다에 비유함.

*만사만생(萬死萬生) ;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 萬死萬生) 하루 밤과 낮에 만번 죽고 만번 다시 태어난다’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죽었다가 바로 살아나고 또 고통으로 죽었다가 바로 살아나기를... 하루 밤낮에 만번이나 겪는다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표현한 말.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있습니다.

*오십오위(五十五位) : 경전마다 조금씩 달리 말하였는데, <능엄경(楞嚴經)> 있는 대로 하면, 처음 간혜지(乾慧地) 지나서  가지 믿음 자리(十信),  가지 머무는자리(十住),  가지 나아가는 자리(十行),  가지 돌이키는 자리(㢠向),  가지  힘쓰는 자리(四加行),  가지 (十地) 낱낱이  지나 올라가야 성불하게 되는것이라고 하였다.

*점차(漸次) ; 시간이나 차례에 따라 조금씩.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도저히 헤아릴  없는  시간을 말한다. 아승지겁(阿僧祇劫) 보살이 발심한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아주  시간.  수행의기간을  부분으로 나누어서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라 한다.

*성불(成佛 이룰 /부처 )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 얻음.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 깨달음.

*견성(見性) : ‘성품() 본다()’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 일치하는 정각(正覺)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이라 한다.

*현애상(懸崖想) ; 깎아지른 듯 가파른 언덕[懸崖]을 마주해 스스로 포기하여 ‘나는 도저히 어려워 오를 수 없겠다’는 생각[想]을 하듯이, 자신을 하대(下待)하고 포기하여 ‘불법(佛法)은 어렵고 성불은 아득하게 멀다’고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

*가피(加被 더할·베풀 /입을·두를 )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 받는 .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 가호(加護) 같음.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중생이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말법(末法  /부처님의 가르침 ) ; 말법시대(末法時代).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교법(敎法)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정법이 쇠퇴한 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 얻게 되지마는,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다음 말법시대는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 사염주(四念住)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소멸하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우리는 사학(邪學) 외도(外道) 번성한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 아니라 정법은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근기(根機 뿌리 /베틀 )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있는 사람이면,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사람이면,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차등(差等 어긋날·다를 /등급·같을 ) ; 고르거나 가지런하지 않고 차별이 있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 이런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 푸른 ,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 참의(叅意)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활구(活句) 참선이다.

*이뭣고(是甚 시심마) : ‘이뭣고? 화두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 일곱 ()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 ,   ()이다. ‘이뭣고?(이뭐꼬)'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뜻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왔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 함께 한역.

(),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덩어리 /홀로·오로지 /드러날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홀로() 드러나다().

*잡드리 ; ‘잡도리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대책.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화두(話頭) 대한 의심(疑心) 관조(觀照) 나가는 ,   없는 그리고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이상 의심이 커질  없고,  이상 깊을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가슴속이 가득 차고,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때에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때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항아리를  돌로 내려치면은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 삶과 죽음,  생사(生死)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이다.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또는 말을 하는  즉시.

*보리심(菩提心) ;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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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年前) ; 여러  .

*근자(近者) ; 요 얼마 되는 동안.

*아이엠에프(IMF) ; ‘IMF 경제 위기’ ‘IMF 외환 위기’ ‘IMF 관리체제’ ‘IMF 시대 한국에서 기업부도와 금융위기가 확산되어 1997 12 정부가 IMF(국제 통화 기금; International Monetary Fund)로부터 구제금융을 신청함으로써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게  사건.

한국은 외환 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 금융기관의 부실과 방만한 기업경영으로 인한 대기업의 연쇄 부도, 대외 신뢰도 하락, 단기 외국 채무의 급증 등으로 외환위기를겪게 되어 한국 정부는 모라토리움(채무지불유예) 선언을  사태에 이르자, 1997 12월에 IMF 구제금융을 실천하여 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으로부터 지원받아 외환위기의 고비를 넘겼으나, IMF 구제금융 조건은 엄격한 재정 긴축과 가혹한 구조 개혁, 시장 개방 등을 요구하기 때문에 구제를 받는 나라는 금리가 상승되고 실업률이 상승되는 등의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한국은 각종 경제 개혁과 전국민적 노력 덕분에 2001 8월에 IMF 관리체제가 종료되었다.

*일향간(一餉間  /식경食頃·   먹을 정도의 짧은 시간 /사이 ) ; ‘  먹을 사이, ‘짧은 시간 동안 뜻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 조건()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 다하면 소멸되어항상함[] 없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 하는데,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과거지사(過去之事) ; 이미 지나간 시기의 일.

*택일(擇一 가릴 택/하나 일) ; 둘 또는 여럿 가운데서 하나를 고름.

*참선(參禪) ; ①선() 수행을 하는 .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

*천지신명(天地神明) ; 하늘과 땅의 조화를 주재하는 온갖 신령.

*걸식(乞食 ·구할·청할 /·음식 )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

*마정수기(摩頂授記 문지를·쓰다듬을 마/정수리·이마 정/줄 수/기록함·기억함 기) ; 마정기(摩頂記), 마정수기별(摩頂授記莂)이라고도 한다. 손으로 정수리(이마)를 만져주면서 기별을 주는 것.

어떤 사람이 수행을 철저히 하거나, 염불 또는 기도를 정성스럽게 봉행하거나, 남들이 도저히   없는 인간 세상에 모범이  만한 훌륭한 일을 하였을 , 불보살(佛菩薩) 또는 천지신명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정수리(이마) 만져 주면서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대는  공덕으로 성불을 성취하리니, 그때 얻은 결과는 이러이러 하리라 예언해 주는 것을 말한다.

*선신(善神) ; 불법(佛法)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

*옹호(擁護 안을 /보호할 )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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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춘유백화추유월~’ ; [무문관(無門關)]  19 '평상시도(平常是道)' 무문혜개(無門慧開) 게송 참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 화두(話頭) 준말이다. 간화(看話) 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을 본다[]’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화두를 ()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원력(願力) : ()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숙원력(宿願力)•대원업력(大願業力)•서원(誓願)•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 해치는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덩어리 ) ; 공안·화두에 대한   없는 의심(疑心) 덩어리().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드러날 ) ; 홀로() 드러나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시민선원(市民禪院) ; 직장인, 학생, 주부 등과 같은 하루 종일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이 언제든지 시간 나는 대로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선원.

*방부(房付)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 참가하다.

*시늠시늠 ; 시름시름(병세가  나빠지지도 않고 좋아지지도 않으며 오래 계속되는 모양을 나타내는 ).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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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차주비대역비소~’ ; [전등록(傳燈錄)] (제30권) 단하화상(丹霞和尙)의 ‘완주음(翫珠吟)’ 참고.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자성(自性) ; ①사물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인허(隣虛) ; 인허진(隣虛塵). 허공(虛空)에 가깝다[隣]는 뜻. 신역(新譯)으로는 극미(極微). 색법(色法 : 물질적 존재)의 가장 작은 물질. 허공에 이웃한 색법의 근본.

*요요(了了 마칠·깨달을·분명할 ) ; 뚜렷하고 분명한 모양. 명확한 모양. 슬기로운 모양. 현명한 모양.

*명명(明明) ; 환히 드러난 모양. 분명한 모양.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꿰뚫어 보아[] 깨달아 부처가 [成佛].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 분류 화두(공안)’ 참고.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된다.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3, 들어마셨다가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3, 내쉬는 시간은 4~5,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숨을 들어마실  코로 들어마신다 생각을 하지 말고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지고 거기서 !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 생각하지 말고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다잽이 ; 다잡이. 늦추었던 것을 바싹 잡아 .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화두를 들려고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惺惺] 상태.

*무장 ; ‘더욱, 한사코 사투리.

*닦음이 없이 닦아야 하고, 행함이 없이 행해야만 한다’ ;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18장(第十八章)

佛言  吾法  念無念念  行無行行  言無言言  修無修修  會者近爾  迷者遠乎  言語道斷  非物所拘  差之毫釐  失之須臾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법은 생각하되 생각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며, 말하되 말함이 없이 말하고, 닦되 닦음이 없이 닦나니,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진리와 가깝지만 모르는 사람은 더욱 멀어지리라.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니 털끝 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잠깐 사이에 잃어버리리라.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진다

[참고] [신심명(信心銘)] - 삼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毫釐有差  天地懸隔  欲得現前  莫存順逆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혐의(嫌疑)하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없으면 툭 트이어 명백하리라.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의 차이로 벌어지니 () 현전하기를 바라거든 따름[] 거슬림[] 두지 말라.

*면면밀밀(綿綿密密) ; 면면(綿綿)하고 밀밀(密密)하게. 끊어지지 않고 아주 빽빽하게  잇따라 있는.

*묘한 () ; 묘관(妙觀). () 의심(疑心) (). 화두를 거각하여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 하는 .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모르는 사람은 힘을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밖에는 없지만,

 ,  ,   이렇게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해도 화두가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대고 자꾸 화두를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 독로(獨露)하걸랑,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 하는거여.   없는 의심의 ()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일은   없는 의단(疑團)만을  잡드리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 () 긴완(緊緩) 득기중(得其中) 해야 . 그것이 묘한 ()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아는 사람은 바로 ()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 의심(疑心) ()’으로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관해 나가면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의심의 ()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 막론하고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나갈 줄만 알면어디를 가거나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 2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  ,  , 3, 5, 10년을 해도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하고, 고대로 하면서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묘한 의관(疑觀)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조정을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의심관, ()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활구참선(活句參禪) 의심(疑心) 이라야 .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 서산에 지려고  ,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때에,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빨갛고 아름다운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수가 없는데, 해가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해를  수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떨어져서  보일 때까지  시간 내지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때까지 관찰하고서,  다음에는 밤새  눈을 감으나 뜨나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수행법이여.


밤새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다시   관을 해서,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밤새 관하고, 이튿날 관하고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일관이라든지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 있는데,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의단(疑團)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해도   없는 의심이해가   봐두었던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 .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역대조사(歷代祖師)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 따라 수행하는 사람.



[주요 내용]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육도윤회의 원인은 '한 생각' 어긋진 탓 / 활구참선은 천하에 쉬운 것이다 / 활구참선이라야 올바른 참선 /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 /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 정진하라 / (게송)춘유백화추유월~ / 정진 밖에는 우리 몸과 목숨을 보존하는 길이 없다 / (게송)차주비대역비소~ / 참선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묘한 길 / 할 것은 이뭣고?’ 밖에 없습니다.



[주요 문구]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하는 것은 천하에 간단한 것이다. 쉬운 것이다  쉽고 간단하느냐 하면은  생각’을 단속하면 윤회를 끊는 길도 거기서 열리는 거고, 끊지 못하고 계속 생사고해로 얽혀 들어가는 것도   생각’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원래 우리가 본래 원만구족해 갖추어 있는 우리의 본성자리는 부처님과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어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닦으면 누구라도 자기의 본성을 깨달을 있는 것이고, ‘깨달을  있다’고 하는 것을 불보살(佛菩薩)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스님네들이 감동의 눈물 없이는 들을  없는, 그렇게 보증을  주신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설명을   수도 없고 설명을  주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바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명예를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요,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하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도 있고 3일이나 7일에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발심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한다면 모든 상황이 불보살(佛菩薩)이 우리에게 설해 주시는 법문이 되는 거고, 우주 법계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는 모든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발심해서  닦도록 해 주는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검소하게 살고, 겸양한 마음으로 철저하게 무상을 깨닫고 수행을 한다면 첫째, 불보살들이 항상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실 것이고, 모든 선신(善神)들이 항상 옹호(擁護)를  주실 것이고, 모든 도반들이 오히려 마음으로 그분을 존경하게  것입니다.


성주괴공과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 흥망성쇠가 없는 극락세계에서 사는 방법이  생각 단속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그렇게 단도리를 하면은 틀림없이 의단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그것 밖에는 우리의 몸과 목숨을 보존할 길이 없습니다.


일어났다 앉았다 행주좌와 간에 항상 요요명명(了了明明)하도록, 의단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성성적적(惺惺寂寂)하도록 의단만 잡드리해 나가면 지가 언제 터지던지 터지지,  터지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이고, 올바르게만  나가면  참선이라 하는 것은 안락지묘문(安樂之妙門)이라고 해서 가장 편안하고 즐거운 묘한 길이다’이것입니다.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