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600/(576~600)2016. 12. 2. 07:22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582)—1997 성도재 법회(96.12.08)(65)


(1/3) 약22분. (2/3) 약 22분. (3/3) 약 22분.


(1/3)----------------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로다

나무~아미타불~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허되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로다

나무~아미타불~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이요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하늘 위, 하늘 아래 부처님과 같은 분이 없고, 시방세계에도  부처님께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하되,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보았지마는,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일체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거룩한 대성현(大聖賢) 없더라. 


 게송은  무량겁 전에 저사불(底沙佛)이라고 하는 부처님 밑에 미륵보살과 석가보살석가모니 부처님이 부처님이 되시기 이전 수행 과정에 계실  분의 제자가 저사불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가,


어느  저사불께서  제자 가운데에 누구를 먼저 출세(出世) 시켜야  것인가?’

 제자를 가만히 관찰을  보니까 깨달은 지혜의 면에서는 미륵보살이  앞서있고, 중생을 교화하는 그러한 면에 있어서는 석가보살이  앞서 있다 그거거든.


 그러냐 하면은 미륵보살은 석가보살보다도 9겁을  먼저 수행해  선배였었어. 그렇기 때문에 미륵보살이 지혜의 면에서는 앞서 있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나 저사불이라는 부처님께서 생각하실  삼도(三途) 고해(苦海)에서, 생사윤회 속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위해서  중생들을 자비원력(慈悲願力)으로 제도하는  일이 급하기 때문에 석가보살 제자를 먼저 출세를 시키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내가 등산을  테니 나와 같이 가지 않겠느냐?”

,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방석을 가지고 따라갔다.


따라갔는데 어떻게 저사 부처님 걸음이 빠르시던지 앞으로 훨훨 가셨어. 부지런히 따라간다고 따라갔는데 중간에서 놓쳤다 그말이여. 그래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산으로 올라갔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여기 계신가? 이리 찾아보고  골짜기도 찾아보고  봉우리도 찾아보고, 찾아보니까 어느 굴이 있는데 속을 이리 가니까 속에서 환히 광명이 비춘다 그말이여. 그래서 아하! 여기 계신가 보다


속으로 이렇게  발을 디뎌 놓는데 거기에 저사불이 터억 가부좌를 하고 앉아 계시는데 화광삼매(火光三昧) 들어 가지고 온통  몸에서 환히 햇빛보다도  밝은 광명을 놓으시면서 앉아 계시는데 그 거룩한 모습이 뭐라고 형언할 수가 없어.


그래 가지고 들었던 발을 내려놓고  이쪽 발을 들어서 그래서 걸어서 들어가야  판인데,   들은 채 칠일칠야(七日七夜)라고 하는 시일이 지나갔다 말이야.

 칠일칠야의 시일이 지나가면서 읊은 노래가 바로  천상천하무여불(天上天下無如佛) 시방세계역무비(十方世界亦無比) 세간소유아진견(世間所有我盡見) 일체무유여불자(一切無有如佛者)  게송을 찬불게(讚佛偈),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이다'해서 찬불게라 그러는데,


일주일 동안을  게송을 합장을 하고서 한 발을 들은 채 일주일이 지내도, 일주일을 지낸 시간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에서  저사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완전히 황홀한 지경에 빠진 거여.

그래 가지고 미륵보살보다 9겁을 뒤져 갖고 있는 처지였었는데,  게송을 칠일칠야를 이렇게 읊은 칠일칠야가 1시간이 지냈는지, 30분이 지냈는지 전혀 시간이 지나간 거를 모른 상태에서  게송을 읊어 가지고 9겁을 뛰어넘어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셨다.


오늘 병자년 납월팔일(臘月八日) 석가모니 부처님 성도(成道)하신 법요일을 맞이해서 찬불게를 읊었습니다. 납월팔일 법문은 여러분과 같이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녹음법문을 통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납월 팔일 성도재(成道齋), 부처님의 사대(四大) 성스러운 재일(齋日)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사월초파일,  다음에 출가하신 부처님 출가하신 ,  납월팔일에 성도하신 ,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열반재(涅槃齋), 이렇게 해서 사대 성스러운 날로 우리가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어느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실 때는 여덟 가지의 , 팔상(八相)으로 그래서 팔상성도(八相成道). 여덟 가지의 ()으로써 일생 동안에 부처님의 일대기를 특별히 여덟 가지 상으로 표현을 하는데  여덟 가지 가운데,


첫째는 도솔천(兜率天), 모든 부처님이 출세하실 때에는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 계시다가 거기서 사천 세가 되면은 시절이 인연이 인자 돌아와서 사바세계(娑婆世界) 내려오시는데,

내려오실  내가 어느 나라에사바세계도 서양, 동양 세계 각국이 있는데 어느 나라에 탄생하는 것이 가장 좋겠는가? 그걸  살펴보시고  어느 집에 어떻게 탄생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관찰해 가지고,

결국은 가비라(迦毘羅)왕국, 지금은 네팔이라고 그럽니다마는 가비라왕궁에 태자로 탄생을 하셨습니다. 탄생하실 때  코끼리를 타고서 내려오셨어.


둘째는 입태(入胎)인데, 마야부인(摩耶夫人) 왼쪽 옆구리를 통해서  코끼리를 타고 들어가셨다. 그것이 둘째  입태고.


셋째에 주태(住胎), 태에 머무르신 것인데. 모태(母胎) 계시면서 행주좌와 하루에 여섯 번을  하늘나라에 천신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다 이거거든.

태중(胎中) 계시면서 어떻게 하늘나라의 모든 신들을 위해서 설법을 하셨는가? 그것은 오늘날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번째는 출태(出胎)인데, 탄생하신 것입니다. 사월초파일, 갑인년 사월초팔일에 룸비니 동산에서 오른쪽 옆구리를 통해서 탄생을 하셨다. 들어가실 때에는 왼쪽 옆구리로 들어가셨는데, 나오실 때에는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을 하셨다.


탄생을 하시자마자 눈으로는 사방을 둘러보고, 일곱 걸음을 걸으시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하는  사자후를 하셨다고 경전에 전해 내려옵니다.

어떻게 금방 탄생한 어린 애기가 그렇게 거닐 수가 있었으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사자후를 하실 수가 있었을 것인가? 이것도 역시 오늘날의 상식으로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삼천년을 통해서 부처님을 믿고 불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진묵겁 전에 확철대오해서 성불하신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능히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고 삼명육통(三明六通)과 팔해탈(八解脫)을  갖추신 대성현이 방편으로 태어나셨다고 본다면 우리 불자(佛子)로서는 고대로 믿어질  밖에는 없는 일입니다.


다섯 번째는 19 또는 경전에 따라서는 25세에 () 넘어서 출가를 하셨다. 그래 가지고 사문유관(四門遊觀)을 하시고 무상(無常)함을 깨달으시고서 왕궁을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셨다.


여섯 번째는 성도(成道)인데, 6 또는 12년의 낙행(樂行)과 고행(苦行)을 하신 끝에 보리수 하에서 12 초팔일, 납월 팔일 새벽에 뜨는  밝은 별을 보시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이미  깨달으신 부처님이 우리에게 사람이 바른 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으면 확철대오   있다 하는 그것을 시범으로 보여주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확철대오하신 뒤로 녹야원에서 교진녀(憍陳如)  5비구(五比丘)를 향해서 사제법(四諦法) 설하시고, 그것을 필두로 해서 80세에 열반하실 때까지 49 동안을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일제담반야(二十一載談般若), 종담법화우팔년(終談法華又八年)해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사라쌍수 하에서 열반상(涅槃相) 보이신 것입니다.


  여덟 가지 () 부처님의 팔상이라, 팔상성도(八相成道) 그러는데, 어째서 성도(成道) 여섯 번째 가서 성도인데, 여덟 가지 상에다가 성도를 붙였느냐?


여덟 가지 () 바로  성도(成道)  팔상(八相) 중에 핵심이요 중심이기 때문에, 탄생하셔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일생 모든 것이 성도(成道)  과정이 그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여덟 가지 , 전부 합해서 팔상성도라고 그렇게 말을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범어(梵語) 붓다(Buddha)인데, ‘붓다라고 하는 뜻이 깨달음 또는 깨달은 사람’을 갖다가 붓다’라고 그런 거다 말이여.


그래서 탄생하셔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모든 것이 깨달음이 핵심이요, 전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위한 것이고, 깨달음에 의한 것이고, 바로 깨달음에 의해서 일생을 사신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불교학자들은 '과연 갑인년 납월팔일(臘月八日) 밝은 별을 보시고 무엇을 깨달으셨느냐?'

학자들은  많은 경전을 샅샅이 뒤져서 대관절  깨달으신 내용이 무엇이냐? 무슨 도리(道理) 깨달으셨느냐? 학자마다 거기에다 초점을 맞추고 많이 연구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현대 학자들은 '십이인연(十二因緣) 법을 깨달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중심 사상이고, 그래서 십이인연의 진리를 연기법(緣起法) 깨달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논문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산승(山僧) 그렇게 보는 것은 학자로서의 소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의 아무리 그이가 머리가 좋은 세계적인 석학이라 하더라도 중생 소견으로 깨달음의 내용의 대해서 '이것이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으셨다면은 이러한 것을 깨달으셨다고 말할  있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코끼리를 장님이 배를 만져보고는 '벼람박 같다' 그러고, 코를 만져보고는 '구렁이 같다' 그러고, 코끼리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코끼리라는  기둥과 같이 생긴 거다' 이렇게 말한 거와 같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처음~2133)



(2/3)----------------


어떠한 것을 깨달은가에 대해서는 산승도 역시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셨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각자(各自)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해서, 조사(祖師)들이 개발해 내놓은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수행을  가지고 스스로 깨달아 보기 전에는  수도 없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이라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 불을 밝히면은 그  등의 심지로 인해서  ,  ,  등의 수없는 등에 그 등불을 붙여서, 수천만 등의 불을 붙여서  세상을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여.   ()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인데,  부처님이 깨달음으로 해서 많은 제자들, 많은 중생들에  깨달음에 이르는 법문(法門) 설해 가지고  법문에 의해서 수행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 깨달음의 등불을 밝힌 것에다가 빗대서 읊은 게송인데,


 마음에 심인(心印) 등불이 환히 한 사람 사람마다  밝혀서  세상에 밝혀진다면 불법(佛法) 법령(法令)  세상에 가득할 것이다 그말이여.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여. 그래 가지고  등불이  세상에, 등불에  등불에 의해서 다른 등불에 밝히고,  등불이 수천 수만 등에 밝히니  수천 수만 등이 다시  수천 수만 등에 밝혀가지고  세계가 삼계(三界) 깨달음의 등불로 가득 차게 된다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다.

 깨달은 진리는 아무리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을 어떤 등불에 등불을 붙이듯이 각자 이렇게 붙여 주기는 어려운 거고, 깨달음에 나아가도록 법을 설하셔.


진짜 깨닫기는 자기가 깨달아야 하는 것인데, 그래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전할 수가 없는 것이여. 천성(千聖) 전할  없는  진리의 등불은 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영원히 꺼지지 아니할 것이다.


 깨달음의 진리를 전할 수가 없다고, 전할  있고 말로   있다면은   진리 아니고   아니라고 하면서도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역대조사도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가르켜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켜 가지고 되는 것이라면 진즉 우리가  성불(成佛)했을 것이고,  사바세계에 깨닫지 못한 사람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마는, 가르킨다고 되는 것은 아냐.


가르킨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부처님께서는 49 동안을 인도 천지를 다니시면서 제자들과 같이 걸식(乞食) 하시면서  많은 설법을 하셨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안,  염전 갯벌 가에다가 용화선원을 창설을 해 가지고 77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늘 아침에 법문 가운데에도  공양을   잡수셔서 새벽에 허기가  상태에서도 그런 사자후 법문을 하셨습니다.

법문 가운데도 먹은 것이 없어 기운이 없어서 말을 못하겠어 그만 마친다 이런 가슴 아픈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말을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고 가르켜야 합니다.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여!


강사는 강사대로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일생 동안 공부한 부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켜야 하고, 불교학자는 학자대로 일생 동안 공부한 것을 학생들에게 교리를 강좌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상 이 내가 나를 깨닫는다 하는 것은 가르킬 수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직접 깨달으시고  깨달으신 경험에 의해서 지도하시는  방법에 의지해서 우리도 열심히 해야만 되고,   밖에는 없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 것입니다.


무엇이 최상승법이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화엄경, 법화경, 금강경, 원각경 그런 많은 대승 경전이 있고, 소승 경전이 있습니다마는 학자들이 이것은 대승(大乘) 불교다, 이것은 소승(小乘) 불교다 학자들이 연구상 편의상 그렇게 갈라놓은 것이지 부처님의 설법에 어찌 분명하게 콩과 팥을 가르듯이 소승, 대승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학자들이 말하는 소승법을 설한다 해도 소승 속에 바로 최상승법이 들어 있는 거고, 대승을 설하시되 대승 경전 속에서도 얼마든지 소승 불교 교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집착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마는.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언어, 문자로 연구해서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이여.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따져서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그래서 이것을 불립문자라 그러는데, 내가 나를 찾는 것이여.


라는  무엇이냐?


사람들은 라,  하면은  사지백체에 안이비설신의 이목구비를 갖춘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나’다 그러고.

호적도 역시 아무  아무 시에 아무 아버지와 아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  사람을 기준으로 해서 거기다가 이름과 생년월일을 해서 호적에 올리고,  사람 하면 바로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말하는 것이나, 어찌 그것이 일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  육체 속에 들어있는 나의 주인공이 있어. 이런 말도 분명히 말하면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지만, 우리는 부득이해서 이러한 방편으로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육체는  주인공이 입고 있는  벌의 옷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주인공이  속에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육체다. 우리는  육체 위에 다시  여러 가지 옷을 입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참나, 우리의 주인공이  몸뚱이 속에 들어 있어.  옷을 벗으면 우리 육체가 있듯이 육체 속에는 우리의 주인공이 들어 있는데 해부를  봤자 오장육부를 샅샅이 뒤져도 그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는 않으지만 분명히  주인공이 들어 있기 때문에 부르면 대답할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배고프면  먹을 줄도 알고, 가만히 앉어서도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왔다갔다 .


10 , 20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어릴  일도 생각하면 환하거든. 몸은 여기 있으면서도 '서울역'하면 서울역이 환하고, 여러분의 집안을 생각하면 집에도 왔다갔다  수가 있다 그말이여. 천만리 멀고 가까운 곳이 상관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과거 미래 맘대로 왔다갔다 .


그러한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이, 우리 모두 낱낱이  주인공이 있다 그말이여.


그걸 마음이라 하기도 하고, 성품이라 하기도 하고, 진여라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경전마다 법계니 진여니 불성이니 여여니.... 여러 가지 경전에도 경전마다 이름이  다르고 세계 각국에  나라마다 말이  다르지만, 이름이야 일법천명(一法千名)이여,  법에  가지 이름이 있어서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볼래야  수도 없고, 아무리 알려고 해도   없지마는 분명히  소소영령한 놈이 있다 그말이여.  육안(肉眼)으로  수는 없어.


그것을 방법에 의해서 활구참선법에 의해서 그것을 찾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떻게 찾느냐?

종파(宗派)에 따라서 찾는 방법이  조사들의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이 있지만,   가운데에 우리 한국에서는 한국의 선지식들은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 방법,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화두를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참나,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도록 하셨다 그말이여.


여러 종파가 자기 종파의 방법이 좋다고 다른 종파의 방법을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과거의 역사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런 것에 관여할 필요가 없고.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자기가 믿는 선지식으로부터 지정을 받아 가지고화두가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화두가 있고, 문헌상에 오르지 아니한 화두는  우주법계에 가득찬 것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화두 아닌 것이 없고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멋대로 아무거나 하나 선택해 가지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래서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화두를 선택하면 하다가   안되면 언제라도 자기 멋대로 버리게 되고  다른 화두를 가지고 하고 이러한 폐단이 있습니다.


우물을   조금 파봐서  나온다고  장소를 옮겨서  파고  파고 몇십 군데를 파봤자 금방 나서 나온 물은 그건 건수지 참으로 좋은 물이 아닙니다. 장마 때는 꿀꿀 나오다가 가물 때는 끊어져버리는 그러헌 물을 찾아서는  됩니다.

열 길, 스물 , 서른 ,  미터, 이백 미터를 파고 들어가서 암반이 나오면  암반을 뚫고  암반 밑에서 나온 물이라야 사시절 가뭄과 장마에 상관없이 변함없이 좋은 물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뜨신 물이 꿀꿀 솟아나올 것입니다.


화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믿는 선지식한테 화두를 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멋대로 자꾸 화두를 바꿔 싸면  사람은 정말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화두를 하나 가장,  선지식이 보아 가지고  사람에게는 이런 화두가 적당하겠다.  화두를  지정을 해주면 잘되거나  되거나 정말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을 바칠 생각을  가지고,

잘된다고 해서 잘된 데에 빠지지도 말고,  안된다고 해서 번민하고  화두가  좋아서 그러나? 화두가 나한테  맞아서 그러나?’ 가지고 화두를 제멋대로 바꿔 가지고  화두로  껄적껄적 해 보다  되면  화두를  보고, 평생을  봤자 진정  깨달음에는 이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누구고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는데 처음부터서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숙세에 선근(善根) 있어서 일언지하(一言之下)  터지는 그런 사람일 경우는 몰라도 대부분이 우리가  중근기· 하근기인데,


처음에는  어렵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참선법을 믿기 때문에, 최상승법을 믿기 때문에,  정법을 믿기 때문에,  선지식을 믿기 때문에  화두를 가지고 주삼야삼(晝三夜三)   화두를 가지고 목숨을 거기다가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없는 의심.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심마(是甚)인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그러는데, 경상도 말로는 이뭣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그러한 작용을 일으킬  있는 .

볼래야  수도 없고 알래야   없지만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이거여.


 갈수록  맥혀서  수가 없어야지, 해 가다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교리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동서의 철학적으로 따져서, 따져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종합해 가지고 적용을 해보고야 아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아니야.

그것은 그럴싸한 결론을 자기 나름대로 얻었다 해도 그것은  것이지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말이여.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내려서 이런 것이다하고   있는 거라면 그거야 가르킬 수가 있는 것이고 배울 수가 있는 것이지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2134~439)



(3/3)----------------


부처님도 가르켜  수가 없거든.

가르켜서 되는 거라면 무엇이 어려우며 문제가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가르켜서 되는  아니야.


이건 깨달라야지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갈수록 맥혀야지,  막혀서  수가 없어야 그런 상태로 밀고 나가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는  시간에도 별별 생각이 오락가락하지만, 오락가락하는 망상은 그냥 고대로 나둬.  쫓아내려 하지도 말고 막으려 하지도 말고 그냥 놔둔  숨을 들여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없는 의심이 있으면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거기다  필요는 없어.

  없는 의심이 있으면    없는 의심을 ~ ()하거든. 2분도 그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2, 5 동안도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 5, 1시간 해도  의심이  없어지면은 알  없는 그 의심을 ()하는 거여 이뭣고?’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하게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그러면서    없는 의심은 아랫배에다 따악 거기다 두고 관한다  말도 알아듣기가  어렵지만, 단전호흡을 하면서 배가 불렀다 줄었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하면은 화두가 바로 아래 가서 자연히 거기 있게 되는 거여.


  없는 의심이 나중에는 의단(疑團) 되어.

1시간을 해도  의단이 흩어지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화두가 아침 먹을 때까지 있고, 아침 먹을   화두가 점심때까지 있고, 점심 먹을   화두가 저녁까지 있고, 저녁에   들은 화두가 속에서도 고대로 화두가 있다면 이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요, 오매(寤寐) 일여(一如) 건데,


그렇게 타성일편이 되어서 순수무잡해 가지고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어느  어느   밑구녁 빠지듯이 ! 터진다 말이여.  터져서,   없던 공안(公案) 타파해 가지고 자기의 면목(面目) 깨닫게 되는 거여.

이론적으로 따져서 이것이로구나! 그게 아니여. 그런 것은   그런 식으로 알아봤자 소용이 없는 거고.


바르게 확철대오(廓徹大悟) 해놓고 보면 기네, 아니네 소용이 없는 거여.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하고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라도

나무~아미타불~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지계삼천겁(持戒三千劫)  송경팔만세(誦經八萬歲).

()—오계 · 십계 · 이백오십계 · 오백계 그런 계를,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누구를 스승으로 하느냐?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 이렇게까지 유언을 하셨습니다.


 소중한 계를 삼천  동안을 청정하게  지키고, 부처님께서 49 동안 설하신 대장경(大藏經)을 팔만  동안을 외운다 하더라도  공덕을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지만, 삼천겁 계를 지키고 팔만 동안을 경을 외운다 하더라도,


불여반식경(不如半食頃)  단좌염실상(端坐念實相)이다.   그릇 먹은 동안 단정히 앉아서 실상을 생각한  같지 못하다.

반식경 동안 단정히 앉아서 실상을 염한다는 것은 바로  활구참선 하는 거여. 잠깐 동안 활구참선  것만 못하다 그말이여.


그러니 계를 삼천 겁 지키는 목적이 무엇이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거고.

장경을 팔만  동안 열심히 읽고 외우는 목적이 무엇이던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 경을 읽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없어.


그러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간단하고도 누구라도 행할  있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다 이거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머리도 좋고 나쁜 것이 전혀 상관이 없고,   없는 의심으로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갈수록   없는 의심으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그것이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래서  자리에 모이신 분은 여러 선지식들한테 여러 가지 화두를 타셨겠으나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여.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아니거든.


여러분!  오늘 한번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소리로 한번 불러보셔.

정은아!” 부르듯이 여러분도 여러분 이름을 부르셔,  시작! (신도분들이 각자 자기 이름을 부른다)


!”하고. (신도분들 !”)

무슨 물건인고?’


공부가   안되면 조용한 데 가서 자기 이름을 한번 불러보셔. 그리고 자기 목청이 터지도록 한번 불러보고 자기가 '' 하고 대답하고 무슨 물건이냐?’ 그렇게 한번 물어보시라.


무슨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하시던지, ‘이뭣고?’ 하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공안을 가지고 공부하신 분도 그렇게 한번  보시라 그말이여.


그러면은  화두는 항상 가깝게 들어야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 ‘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처음에는 어쩔  없이 그렇게 일러주지만 자꾸 하다보면,


이뭣고?’  - 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렇게 가깝게 다그쳐서 들어야 되는 거야.

이- 뭣고?’ ‘지금 이뭣고?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거거든.


 보다도  가깝게 - 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그런 뜻으로 - 뭣고?’

나중에는 이뭣고?’ 소리도  것도 없이 대번에 정신만 차리면 의단(疑團) ! 나타나게 되는 거여.


여러분이 얼마만큼 대신심(大信心) 대의단(大疑團)으로 알차게 다그쳐 나가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게  것입니다.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때는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없이 언제나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


우리가 가장 주의할 것은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 아무리 신심이 있고 정진을 하려고 해도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정진하는 마음이 흐트러지기 마련이고,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밀밀면면(密密綿綿)해서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그런 경지에서 무슨 말이 잡담이 나오며, 잡담하면서 타성일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수행자라면 수행자답게 말을 많이 해서는  됩니다.

뿐만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보다 앞서가는 선배도 있을 것이고, 자기보다 뒤따라오는 후배도 있을 것이니,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하고 선배에 대한 도리를 생각해서도 그렇고, 후배를 위해서라도 말을 많이 해서는  됩니다.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우리 선방에서는 교리를 가지고 따지는 곳이 아니고, 무슨 조사어록을 가지고 따지는 곳이 아니고, 하물며 인도 불교가 어떻고, 티베트 불교가 어떻고, 무슨 불교  그런 것을 이론적으로 토론하는 세미나가 열리는 그런 곳도 아닌 것이여.

따라서 자기가 불교경전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건 조사어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건, 무슨 인도 불교나 티베트 불교에 대해서, 일본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 해도 그러한 것을 여기서 말하는 단계가 아니여.


자기가 포교사가 되어 가지고 어느 절에 가서 신도들을 모여 놓고 설교를 하는 마당에서는 그런 세계 각국의 불교에 대해서 또는  종파에 대해서 얼마든지 웅변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용화선원에 와서는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니라.  문중에 들어와서는 지해(知解) 두지 말아라


일단 들어왔으면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듣고  법문에 의지해서 묵묵히 바보가 되어서, 몸은 냄새가 안 날 만큼 씻고, 옷도 냄새가 안 날 만큼 깨끗이 씻어서 입고 그리고서는 공양은 인연 따라서 공양을 들고, 그리고는 그분 속에는 바보인지, 천치인지, 농판인지 아무도  수가 없게.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하려면 세속에 나가서 국회의원도 나가고, 도의원도 나가고, 도지사도 하고, 장관도 하지,

 문중에 들어와 가지고 부모와 형제와 고향과 가정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 문중에 들어와 가지고, 어디 가서 잘난 체하고 똑똑한 체할 데 없어서 여기에 들어와서 입을 벌려 함부로 그러냐 그말이여.


그래서 어느 선방에 가면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도를 얻은 자는 나갈지니라하고 !  붙여진 데도 있어.

깨달았으면 나가서 중생 교화하러 나가지, 뭐하러 남의 선방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 공부하는데 방해를 치느냐 이거거든.


절에 들어와서 선방에 들어와서 똑똑한 체하고 잘난 체한 사람은 그게 진짜 똑똑한 것이 아니어.

똑똑할  가서 똑똑한 체해야 남이 알아주고 얻어먹을 것도 생기는 것이지, 선방에 와서 똑똑한 체해 가지고 무슨 이익이 있으며, 누구를 위해서 똑똑한 체하느냐 그거거든.



종조난설인장단(終朝亂說人長短)타가  경야혼침낙수면(竟夜昏沈樂睡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여차출가도수시(如此出家徒受施)하면  필어삼계출두난(必於三界出頭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조난설인장단(終朝亂說人長短)타가  경야혼침낙수면(竟夜昏沈樂睡眠)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쓸데없는 누가 잘하고 못하고, 무엇이 옳고 그르고 그런 잡담을 하다가 밤이 되면은 잠에 떨어져.


이렇게 출가해 가지고 공연히 시주것만 소모하면(如此出家徒受施),

필어삼계출두난(必於三界出頭難)이다. 반드시 삼도 고해에서 해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선방, 비구선방이나 보살선방이나 시민선방에 그러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이런 말을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열심히 정진하신 그런  좋은 도반들이 이렇게 모여서 지내기 때문에 원장(院長)으로서는 항상 기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행여나 보통 어느 선방이든지 납월 팔일 용맹정진 기간이 지내면 벌써 한 철이  지나간 것처럼 생각이 해이해져 가지고 해제가 빨리 돌아왔으면.

해제가 돌아오면 어디를 가야겠다. 어디 절에를 가야겠다. 제주도를 갈까, 설악산을 갈까, 오대산을 갈까, 그러한 생각으로 걸망 귀신이 들썩들썩 한다고 그런 말이 옛날부터서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해제까지의 기간을 지내 온 기간보다도 훨씬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가지고 거의 묵언을 하면서 가행정진으로써 이 삼동 안거를 알뜰하게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린  뿐입니다.


이것으로써 납월 팔일에 원장으로서 여러 도반들에게, 형제 자매 도반들에게 노바심(老婆心)에서 우러나와서 간곡한 말씀을 드리고 내려갑니다.(4310~6436)()



[주요 내용]


찬불게 / 팔상성도(八相成道) / 부처님께서 무엇을 깨달으셨느냐? / ‘내가 나를 깨닫는다’ / 간화선(看話禪) / 가르켜서 되는 게 아니야깨달아야지 /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찾는 이뭣고’ /  화두는 항상 가깝게 들어야  / 수행자라면 말을 많이 해서는  됩니다 /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 (게송) ‘종조난설인장단~’




[주요 문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범어(梵語) 붓다(Buddha)인데, ‘붓다라고 하는 뜻이 깨달음 또는 깨달은 사람’을 갖다가 붓다’라고 그런 거다.

그래서 탄생하셔서 열반하실 때까지의 모든 것이 깨달음이 핵심이요, 전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위한 것이고, 깨달음에 의한 것이고, 바로 깨달음에 의해서 일생을 사신 것이다.


어떠한 것을 깨달은가에 대해서는 이것은 오직 각자(各自)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해서, 조사(祖師)들이 개발해 내놓은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수행을  가지고 스스로 깨달아 보기 전에는  수도 없고 말하기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천상 이 내가 나를 깨닫는다 하는 것은 가르킬 수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직접 깨달으시고  깨달으신 경험에 의해서 지도하시는  방법에 의지해서 우리도 열심히 해야만 되고,   밖에는 없는 것이여.

그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活句參禪) 것입니다. 무엇이 최상승법이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가 나를 어떻게 찾느냐?

종파(宗派)에 따라서 찾는 방법이  조사들의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이 있지만,   가운데에 우리 한국의 선지식들은 임제종(臨濟宗)의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하는 방법,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함으로써 화두를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참나,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도록 하셨다.


계를 삼천 겁 지키는 목적이 무엇이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계를 지키는 거고. 장경을 팔만  동안 열심히 읽고 외우는 목적이 무엇이던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 경을 읽는 것이지, 다른 목적이 없어.

그러면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쉽고도 간단하고도 누구라도 행할  있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다 이거여.


 자리에 모이신 분은 여러 선지식들한테 여러 가지 화두를 타셨겠으나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여.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아니거든.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차를 타고  때는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없이 언제나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


우리가 가장 주의할 것은 말을 많이 하지 말아야 . 아무리 신심이 있고 정진을 하려고 해도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정진하는 마음이 흐트러지기 마련이고,

화두가 성성적적(惺惺寂寂)하고 밀밀면면(密密綿綿)해서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그런 경지에서 무슨 말이 잡담이 나오며, 잡담하면서 타성일편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은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