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26~350)2023. 7. 14. 15:56

(No.341)—1987년 11월 첫째일요법회(87.11.01) (74분)

 

(1) 약 41분.

 

(2) 약 33분.



(1)------------------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여  나유미후도육창(那有獼猴跳六窓)고
나무~아미타불~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시여. 높고 높은 동(動)함이 없는 법(法) 가운데 왕(王)이시여.
나유미후조육창(那有獼猴跳六窓)이리요. 어찌 잔나비, 원숭이 같은 건데, 원숭이 떼들이 어찌 육창(六窓)으로 드나들면서 놀아나리오.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웃고 진공(眞空)을 가리키되 면목(面目)이 없어. 웃고서, “허허” 하고 웃고서 진공을 가리키는 데 면목이 없더라.
면목이 없는데,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구름이 꽉 연(連)해 있는데 달을 밀추어서 천 강(千江)에 내리게 하더라. 구름이 꽉! 찌어서 달이 안 보이다가 그 구름 사이로 달을 밀추어 가지고 일천 강에 그 달빛이 찬란히 빛나게 되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통해서 감명 깊게 우리 사부대중이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한 5, 6년 전부터서 『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를 비롯해 『몽산법어』, 그밖에 『초발심자경』 그밖에 불교의 여러 조사(祖師) 스님네의 기연(機緣)과 불조의 기연,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을 녹음을 해 놓은 것이 큰 릴(reel)로 100개, 또 작은 릴로 50개 이렇게 해서 150개나 되는 릴에다가 몇백 시간을 연거푸 틀어도 다 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방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해서 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한 편씩을 듣고, 또 대중들도 결제(結制) 중에 그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전국 모다 여러 선방에서도 이 법문을 듣고, 또 여러 사부대중도 그 테이프(tape)를 구득해서 다 듣고, 외국에 가 계신 분들도 테이프를 구해서 모다 듣고, 이렇게 해서 천하에 이 최상승 법문을 두루두루 듣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정법(正法)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차츰 신심(信心)을 내서 참선(參禪)을 할려고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에 어느 법문이 더욱 좋고, 좋지 못하고 한 것이 있으리오마는 언제나 들을 때마다 법문마다 새롭고 참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도 더욱이 오늘 들은 법문은 참 감명 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 누누이 말씀이 계셨지마는 이 사바세계에 오욕락(五欲樂)—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색(色)이다, 안락이다, 이러한 오욕락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목숨까지라도 거기에 바치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말세 중생(末世衆生)들이 어떻게 해서 최상승법, 이 생사(生死)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최상승법을 믿게 되며 또 그걸 믿고 실천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온 세상은 온통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 모다 색(色), 모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갖다가 보다 더 많이 획득을 하고, 그것을 수용을 하기 위해서 참 부자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모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있는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러한 것을 비유해서 「화리생련(火裏生蓮)이다. 불 속에서 연꽃이 났다」
그 연꽃이라 하는 것은 진흙과 물속에서 뿌리를 박고 피는 것인데, 훨훨 타고 있는 불 속에서 연꽃이 어떻게 필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필 수 없는, 도저히 상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에다가 그렇게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달마대사(達摩大師)께서도 150세의 고령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가지고—양무제가 중국 천자(天子) 중에서는 제일 불법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천자인데, 그분은 천자이면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정사(政事)를 볼 만큼 그렇게 신심이 돈독을 했습니다.
절을 짓는다든지, 경을 판각을 해서 모다 편다든지, 스님네를 모다 도 잘 닦아가도록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한다든지, 탑을 세운다든지,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그러한 상(相)이 있는 그러한 불사(佛事)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불법(佛法)을 여의고는 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사 밖에는 모르고.

그러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칙사(勅使)를 보내서, 저 남해로 보내 가지고 달마 스님을 영접을 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짐(朕)이 이렇게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많은 스님네를 이렇게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이렇게 달마 스님께 자기가 그동안에 한 불사에 대한 공덕도 자랑 겸해서 또 달마 스님한테 칭찬도 받기 아울러서 그렇게 해서 떠억 물으니까, 달마 스님이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달마 스님이 ‘아! 참 장하시다’고, ‘천자로서 그렇게 불법을 숭앙하고, 이렇게 불사를 많이 하니 그 공덕이 참 한량이 없어서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터억 찬양을 해 주었으면 양무제가 신심을 더욱 발해 가지고 온통 중국 천지를 아주 불법으로 장엄을 하고 그럴 텐데, 아 그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그렇게 물어보니까,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니까,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양무제와 달마 대사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을 푸대접을 해서 달마 스님은 그길로 돌아서서 양자강을 건너 가지고, 위나라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묵언을 하면서 면벽(面壁)을 하고 계시다가, 혜가 대사(慧可大師)가 나타나 가지고 팔을 끊어서 올리고 신심을 보여 가지고, 드디어 달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마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달마 스님이 그때,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를 찬양을 해서 그렇게 해서 양무제의 절대적인 외호(外護)를 받으면서 법을 설하고 참선법을 선양을 할려고 했다면은 중국 천지에 최상승법을 그렇게 널리 펼 수도 없고, 융숭하게 선양할 수도 없었고, 오늘날까지 참선법이 전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무성(廓然無聖)입니다”

“짐을 대한 그대는 누구냐?”
“모르겠소”

탁! 이렇게 함으로써 여지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그 면목을 바로 거기서 드러내 버린 것입니다.


양무제는 본래 옹주, 중국에 옹주(雍州)라는 데가 있는데, 천자가 되기 전에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습니다. 옹주자사로 있었는데, 치(郗)씨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황후(皇后)가 아니고 치씨 부인인데, 참 얼굴이 예쁘고 그런데 성질이 어떻게 표독하고 질투심이 강했어.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 꼴을 보지를 못하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오직 자기만을 위해 주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고, 자기만을 갖다가 알아주기를 그렇게 바랬어. 조금만 한눈을 팔거나 그러면은 어떻게 강짜가 심하고 투기가 심하던지 도저히 용납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때 당시 임금이라든지 또는 원님이라든지... 옹주자사라 하면은 아마 원님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고관을 지내면은 다 첩실(妾室)도 있고 다 기생과 놀기도 하고 술도 먹고 그러기 마련인데, 치씨 부인은 그러한 꼴을 못 봐 가지고 나중에는 어떻게 독기(毒氣)를 피우다가 자기가 자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가지고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가지고 자살을, 투신(投身)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쫓아와 가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가지고 간신히 건지려고 가니까 어느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큰 무서운 독사, 아주 오색이 찬란한 금색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혀를 널름널름. 그래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사람들이 접근을 못했어.
눈은 번쩍거리면서 오색이 찬란한 비늘이 번쩍거리면서 그냥 무서운 독사의 어금니를 갖다가 벌리고서 혀를 널름거리는 통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구제하지를 못하고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우물에서 다 기어나와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런데 꿈에면 그 무제(武帝) 자고 있는 후궁(後宮)으로 무서운 독룡이 기어 들어와 가지고는—본래 처음에 들어올 때에는 구렁이로 들어와 가지고는 스르르르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그 치씨 부인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아양을 떨면서 품안으로 파고들어. 깜짝 놀래 가지고 양무제가 눈을 떠 보면은 간 곳이 없다 그 말이여.
아, 후궁에만 들어가면 그놈이 나타나 가지고 독사가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그런 통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꼬치꼬치 말라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그 연못에서 그냥 꼬리를 치면서 물을 치면은 거기서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할 수 없이 그 우물 위에다가 치씨 부인의 사당(祠堂)을 짓고, 인자 초상화를 그려서 딱 모시고.
그래 가지고 『자비도량참(慈悲道場懺)』이라 하는 십 권에 달한 참회하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십 권의 책을 저술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도량참법에 의해서 치씨 부인을 갖다가 원한을 풀고 그래 가지고 천도(薦度)하는 의식을 거행을 했는데.

그 치씨 부인이 결국은 그 공덕으로 그러한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면서 공중에서 소리를 치기를 “양무제한테 내가 그동안에 옹졸한 생각으로 그런 독을 품다가 결국은 투신 자살해서 이런 흉악한 몸을 받아 가지고, 결국은 아주 복수를 해서 당신도 죽이고, 당신을 가까이 한 모든 여자를 갖다가 다 말려서 죽이려고 내가 작정을 했는데, 『도량참법』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서 나를 고승을 청해다가 이렇게 천도를 해 주니, 내가 모든 원한을 풀고서 내가 천상에 올라가니 참 감사하다”고.
이렇게 올라간 뒤로는 다시는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는 일도 없고, 그 우물에서 갖다가 꼬리를 치고 모다 그런 일도 없고 조용해 졌는데, 그 뒤로 양무제가 지은 『도량참법』이라고 하는 참회법이 널리 세상에 행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무슨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색(色)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명예 ・ 권리에 대한 그런 일어나는 욕심을 이기는 것도 그것도 모두가 어려운 일이고 중대하지만, 그 여러 가지 가운데에 가장 수행하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고,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쌓아 온 모든 공덕을 한 생각에 멸진(滅盡)을 시켜 버리는 그 무서운 것이 바로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고 하는 것은—우리가 사바세계에 살아가는 데에 정말 진심을 내지 않고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진심, 아마 이 세상에 사람이 지금 현재 40억이니 50억이니 하고 또 세계 역사가 생긴 이래로 몇 천만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심(瞋心)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왕으로 계실 때에 어떤 문둥병보다도 더 무서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무서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무서운 창병(瘡病)이 걸린 거지를 나수기 위해서, 결국은 환자를 갖다가 치료해 주기 위해서 어명(御命)으로 치료하게 되는데 도저히 그 병이 하도 무서운 병이라 치료할 수가 없어.
그래서 “오직 이 사람의 병은 한 번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한 사람의 피를 뽑아 가지고 약을 제조해야만 이 병을 낫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임금님께 그 의사가 “그러니 이 세상에 성 안 낸 사람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약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한 번도 진심을 낸 기억이 안 나. 그러나 철이 들기 전 어렸을 때는 혹 몰라서 유모한테 가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혹 철난 뒤에는 진심을 낸 기억이 없지만,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혹 진심을 냈느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갓난아기 때부터서 진심을 내신 일도 없고, 철이 난 뒤로도 오늘날까지 진심 내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
그래서 임금님은 의원에게 “내 피를 뽑아서 만들어라” 하니까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의 옥체에서 피를 뽑을 수가 있습니까?” “괜찮다. 어명이니까 피를 뽑아서 해라” 그래 가지고 피를 뽑아 가지고 무서운 그 병을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환자가 병을 낫고서 그래 가지고는 10생(十生)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갖다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힌 바로 조달(調達)이의 전신(前身)이고, 그 어진 상감마마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것입니다.

어째서 상감마마로서 자기의 피를 뽑아서 무서운 병을 고쳐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부처님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이생에는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로 태어나시니까 저도 사촌으로 태어나 가지고 가지가지 못된 방법으로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은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마는.

참, 소승불교에서는 ‘그런 죄를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로 생함지옥을 했다’ 이렇게 보지마는,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정말 조달이야말로 10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께 그렇게 큰 은혜를 갚았다. 조달이의 공덕이 아니면 어떻게 부처님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크게 대도를 성취를 하셨겠느냐. 조달이야말로 정말 부처님보다 먼저 깨달으신 선불(先佛)이시고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마는.
순행(順行)으로 항상 뜻을 맞추어 주고, 따라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그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역행(逆行)으로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충격을 주면서 고통을 주면서 그래야만 보다 더 큰 발심(發心)과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도문(道門)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좋은 얘기만 해 주고 그러한 친구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로 삼지 말아라.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충고해 주고 그러한 친구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조달(調達)이가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갖은 악한 행동으로써 고통을 주었을 때, 그것을 갖다가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하고 진심을 내고 복수를 하셨다면 부처님은 마침내 성불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고통을 주어 왔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진심을 내거나 원한심을 내서 복수할 마음을 내지 않고, 보다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래 가지고 더욱 정진(精進)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방금 양무제, 그 치씨 부인이 그러한 악독을 품고서 투신 자살을 해 가지고 독사가 되어서 그렇게 했지만, 양무제는 그것을 독한 마음으로 구렁이를 잡아 가지고 태워서 죽일 수도 있고 그러겠지마는, 그것을 자비심으로써 사당을 짓고 또 『도량참법』을 지어서 큰스님네를 청해 가지고 천도를 잘 해주었으므로 해서 그 악독한 치씨 부인을 천상에 태어나게 했어.
비록 양무제가 그 당시 최상승법을 믿지를 못하고 달마 스님을 알아보지를 못했다고는 하지만, 양무제는 역사적으로 길이 잊지 못할 신심이 돈독한 천자였습니다.

이 진심(瞋心)!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여러 경전에 진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련존자(目連尊者)도 오백 생을 두고 타살(他殺)을 당하고, 금생에 와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부처님의 오른팔과 같은 그러한 성현이 되어 가지고도 그렇게 결국은 외도(外道)한테 타살을 당했습니다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백 생을 두고 그러한 성현이, 거룩한 수행자가 그렇게 아무 허물도 없이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느냐? 저 전생에 진심(瞋心)을 냈어.
자기 어머니가 자식 내외의 정분 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좋게 보지를 않고, 자식 며느리를 미워하고 못살게 구니까, ‘어떤 기운 센 장사가 나와 가지고 저 늙은이 때려죽일 사람이 없겠느냐?’고 이렇게 진심을 내고, 참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러한 욕설을 퍼부은 그 과보(果報)로 오백 생을 두고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神通)이 제일인데, 과거에 지은 업으로 금생에 맞아 죽기 때문에 그렇게 참혹하게 외도한테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면서도 신통을 부릴 여유가 없었어.
그 도반인 사리불존자가 “자네가 신통이 제일인데 신통술로 피하던지, 외도를 갖다가 방어를 하던지 그러지, 어찌 자네가 신통을 어디다 두고 쓸라고 그렇게 참혹하게 맞았나?” 하니까, “내가 과거에 지은 업(業)이기 때문에 신통이란 ‘신’ 자도 생각이 안 났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진심(瞋心)!

그리고 또 홍도 비구(弘道比丘)라고 하는 스님은 다겁(多劫)으로 수행을 잘 쌓아 가지고 머지않아서 곧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단계에까지 왔는데, 문턱에다가 손을 거기다 걸치고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삼매(三昧)에 들었어. 그래 가지고 시간이 흐르는 중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탁! 닫혀지는 바람에 손가락이 깨져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닭없이 진심을 폭! 냈다 그 말이여.
그 바람을 보고 성을 냈는지, 문짝을 보고 성을 냈는지 갑자기—삼매에 들었다가 그 삼매를 깨게 하고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이 폭! 났는데, 그 진심(瞋心) 한 번 낸 그 과보로 바로 뱀이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독사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다겁을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견성성불할 단계에까지 왔기 때문에 독사는 되었지마는 환하니 다 의식을 매(昧)하지를 안 해 가지고, 재를 갖다가 꼬리로 잘 요렇게 골라 놓고서 꼬리로써 글을 지었어.
‘다생에 내가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다. 한 번 진심을 낸 그 과보로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한 그런 게송(偈頌)을 써서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은 이 게송을 벽에다 붙여 놓고, 크고 작은 모든 진심을 내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뜻의 게송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홍도 비구나, 목련존자나, 치씨 부인이나 그밖에도 경전에 나타난 진심(瞋心)의 무서운 것에 대한 말씀이 참 많지마는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고.(처음~4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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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바세계는 진심(瞋心)을 참! 안 내고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상(天上)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여. ‘무엇이 먹고 싶다’ 하면은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어디 가고 싶다’ 하면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고, 무엇이고 내 마음먹은 대로 다 되고, 내게 조금도 해로울 일이라고는 일어나지를 않고 나타나지를 않어. 다 내 마음에 편안하고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곳이 천상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에서는 진심(瞋心)을 낼 필요가 없죠.
지옥(地獄)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없어. 사사건건이 나를 괴롭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만이 있어.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즐거움도 있는가 하면은 괴로움도 있고, 슬픔도 있는가 하면은 기쁨도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섞여 있어서 다행히 내 뜻대로 뭔 일이 잘 되는가 싶으면은 금방 꼬리를 이어서 속상한 일이 또 일어나고, 금방 이만하면 참 좋다 싶으면 뜻밖에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슬픔이 닥쳐오고.
형제간에도 정이 서로 의합(意合)이 되는가 하면은 서로 싸우고, 부자간에도 싸우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싸우고, 회사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정치도 싸우고, 맨 싸움,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투쟁이 치성하는 시대, 무엇이든지 그저.

서로 대화로써 해결하고, 타협으로써 해결하고, 양보로써 한다면 피차가 다 좋고 모든 일이 순리로 잘 풀려 갈 텐데, 사사건건이 한마디 두 마디 간 뒤로는 벌써 말이 거칠어지고, 제 욕심 챙기느라고 싸움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나라도 시끄럽고, 회사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가정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부부간에도 그걸로 인해서 원수가 되어서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비교적 수행에 열중을 하다 보니 언제 성낼 겨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철을 지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크고 작은 속상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거거든.

밖으로 확! 진심(瞋心)을 내서 표현을 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 진심을 내는 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꽉 참고—겉으로 목구멍까지 욕설이 나오고, 주먹이 쥐어지고, 곧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격분을 해도 꽉 참을성 있는 사람은 그놈을 참고서 속으로—표현을 하지 아니한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다 참 그만큼 참을성 있는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밖으로 표현한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만 일어나도 이미 범(犯)한 것이 돼. 그래서 속으로 일어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어. 오히려 밖으로 표현해 버리고 그냥 바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편이 속으로 참고 은근히 오랫동안 간직을 하고 속상한 것이 더욱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표현을 해 버리면 사람들은 보고 ‘저 사람 진심(瞋心)을 잘 내는 사람이다. 저 사람 수양이 덜 된 사람이다’ 할는지 모르지만, 한마디 욕설 퍼부어 버리고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오히려 육체적으로도 좋고, 정신 위생상으로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 안 하고, 속으로 참고 참고 억지로 눌러 놓은 것은 나중에 위장병도 생기고, 신장병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천식도 생기고, 기관지도 나빠지고 해 가지고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오목가슴 밑에 주먹같은 적(積)이 생겨 가지고 일생 동안 그놈이 풀리지를 않고 화병(火病)이 나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되고 그러는데, 그 속으로 참는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참는 것이 그렇게 썩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진심(瞋心),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릴 수가 있느냐?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다든지 모다 그러한 것, 평상시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 이러한 육바라밀을 항상 평상시에 닦아 가면 차츰차츰 자비심(慈悲心)이 충만하고, 또 모든 마음이 안정이 되고 또 남을 잘 용서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수행을 쌓아 나가면 그런 속상한 일이 당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잘 이해를 해 주고서 바로 용서를 하고 풀어 버리고 이렇게 되어 갑니다마는, 이런 것도 하나의 좋은 방편(方便)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 진심을 갖다가 진화(瞋火), ‘성낼 진(瞋)’ 자, ‘불 화(火)’ 자, 진화(瞋火)라고 이렇게 표현도 하셨습니다.
왜 진화(瞋火)라고 하냐 하면은, 그 성내는 열뇌(熱惱)가 마치 불과 같다. 왜 불과 같으냐 하면은 그 성을 내면은 무량겁에 지은 모든 공덕(功德)을 일시에 다 태워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진화(瞋火)라 그러고.
성을 내면은 벌써 눈도 붉어지고, 얼굴도 붉어지고, 몸뚱이도 뜨거워지고 그러고 마음도 갖다가 뜨거워져 가지고는 혈압도 오르고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기 때문에 진화(瞋火)라 그러거든.

진심을 많이 낸 사람은 열(熱)이 항상 위로 쳐 올라가 가지고 그래서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눈이 붉어지고, 눈이 빨리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은 진화(瞋火)가 일어나지 않게 하느냐?
항상 자비심(慈悲心), 자비심으로써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부드럽고 서늘하고 윤택하게 만들면 자연히 진심의 불이 자취 없이 식어 버리고 사그라져 버린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탐심(貪心)도 나쁜 것이고 치심(癡心)도 나쁜 것이지마는, 차라리 백천만 번을 탐심을 낼지언정 한 번의 진심(瞋心)을 내지 말어라. 한 번 진심을 냄으로써 무량겁 쌓은 공덕이 일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탐심을 내면은 그걸 안 내면 그만이고, 욕심을 냈다가도 다시 버려 버리면 그만이지만, 진심을 한번 내면은 저 지은 몸과 마음, 저 죽이고 남을 죽여. 한 사람이 집안에서 진심(瞋心)을 내 갖고 있으면 전 집안 식구가 그 독(毒)으로 인해서 모두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진심을 내서 누구를 뚜드려 패고 욕설을 안 해도, 혼자 진심을 내 가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을 내고 있으면은 공연히 옆에 있는 사람도 모두가 다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더군다나 집안 어른일 때에는 더 그렇고, 회사에 사장이나 과장이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은 더 한 사람이 그렇게 공연히 진심을 내면 전 부하 직원들이 모두 기분이 나뻐. 그래서 모다 의욕을 상실을 하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나라에서도 웃어른이 진심을 내고 그러면은 전 밑에 각료, 백성들이 모다 다 그 해독(害毒)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하고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ㄴ고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이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원래 조금도 맥히지 않는다, 간격이 없더라. 눈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보는 것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이 원래 간격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장자(柱杖子)를 터억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고, 그리고서 그 주장자로써 법상(法床)을 탕! 한번 치시고서,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송이다.

이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눈으로 주장자 들은 것을 보건, 눈으로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청황적백의 모든 것을 보건, 또 귀로 주장자 치는 소리를 듣거나, 자동차 소리나 개 짓는 소리를 듣거나 원래로 조금도 막힌 것이 아니다,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다.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 상량(商量)을 끊어 버려라. 일체 분별 ・ 시비 ・ 비교 ・ 사량 그런 걸 끊어 버려라 그 말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듣고, 그 듣는 그 소리에 대해서 그리 쫓아가 가지고 온갖 분별 사량심을 내고, 눈으로 무슨 사람을 보거나 모든 사물을 보고서 거기에 대한 온갖 사량분별을 내고 시비심을 내. 그것이 바로 경계(境界)에 속는 것이여.

이쁜 사람을 보면은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 사람을 보면은 미운 생각을 내고,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은 좋아서 환영을 하고, 자기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진심을 내고 미워하고.
그 한마디 자기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서 속에 ‘요놈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갖은 악한 방법으로써 끝내 그 사람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모가지를 띠어 버리고 그러한 일이 동서고금의 역사에 참 많습니다마는.

우리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칭찬한다고 해서 또 내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기에 빠져서 집착할 것도 없고, 나를 좀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나를 좀 해롭게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확! 진심을 내 가지고 보복을 하고 미워하고 끝끝내 그 사람을 못살게 하고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거기에 떨어지지 않고 화두를 들고,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더라도 거기에 동요가 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냐, 본래, 본래 다 이뤄져. 우리가 본래, 새로 도(道)를 닦아서 성불(成佛)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맛 깨닫지 못할 뿐이지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부처님이거든,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그걸 저 부처님이나 닦고, 최상근기나 닦고 그러지 우리는 참선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바쁘고 일이 복잡한데 무슨 참선을 하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보지도 아니하고 미리서부터서 자포자기하고 그러지를 말라 그 말이여.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여. 모든 기틀을 당해서,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천 가지 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있지만 그러한 방편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되는 거여. 방편은 잠깐 거기 디디고서 저 건너로 건너가야지,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부처님의 참다운 뜻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면은 통살을 버려 버려야 하고, 물을 건너가면 배는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야지, 육지에 가서도 배를 짊어지고 다니고 끌고 다니려고 한다든지, 고기를 잡은 뒤에도 계속 통살을 메고 다닌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이 정법을 믿지 않고 최상승법을 믿지 않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말 이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법시대(末法時代)인 것입니다. 투쟁으로 자기도 멸망하고 남도 멸망하는 이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악독한 세계를 불법이 아니고서는 막을 길이 없고 제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온통 투쟁의 세계가 되었고, 우리나라도 지금 민주화(民主化)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믿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입으로 민주화를 떠들어 봤자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민주화는 모두가 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과 명리(名利)를 떠나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인류 평화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민주화는 오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정치가(政治家)와 정객(政客),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말 민족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생각해서 경륜을 가지고 정치를 한 사람은 정치가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라 그러는 거고.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불타고, 자기의 한 당략(黨略)에 빠져 가지고 설쳐대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꾼인 것입니다. 그런 정치꾼들이 날뛰어 가지고서는 이 나라에 민주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인류의 평화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참 노력을 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사리사욕과 당략에 떨어져서 날뛴다 하더라도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로써 속살림을 해 나가고, 자비와 지혜로써 갑옷을 삼고 등불을 삼고,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 돼. 그 수십 층 건물도 벽돌 한 장 한 장이 바로 놓임으로써 건물이 준공이 되는 것입니다.
천하없이 많은 벽돌을 갖다 놨어도 바로 쌓지 아니하면 그것이 집이 되지를 않고, 설사 쌓는다 하더라도 이리 삐딱 저리 삐딱 해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100층을 쌓은들 그것은 그 건물은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100층을 쌓은들 기초가 튼튼히 되지 아니하면 그 건물은 언젠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탁! 마음을 가다듬고서 보면 어느 사람이 정치꾼인가, 어느 사람이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하면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니라
나무~아미타불~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삼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 사룁나니,
광음(光陰)을 막허도(莫虛度)어다. 광음(光陰), 시간, 세월을 헛되어 보내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미명심(未明心)하면, 금생에 이 마음을 깨닫지를 못하면,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니다.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려우니라. (40분31초~1시간13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 / 법문을 듣고서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법문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 화리생련(火裏生蓮).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만남과 대화 / 양무제가 옹주자사로 있을 때 치(郗) 부인의 진심(瞋心) / 치씨 부인의 천도를 위해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저술 /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 부처님과 조달과의 인연.
진심(瞋心), 목련존자의 전생, 홍도 비구 이야기 /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다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가운데에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 /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

(게송)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모든 경계에,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이뭣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다.

천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된다 /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 (게송)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일어나는 진심(瞋心)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8)—1983(계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4.01.17) (31분)

 

약 31분.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리오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광겁무명구탕진(曠劫無明俱蕩盡)헌디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며, 악한 인연을 누가 지어서 그 죄과(罪果)를 또 누가 받느냐 그 말이여. 죄를 지은 것은 무엇이 죄를 지었으며, 죄를 받는 자는 또 누가 죄를 받는 것이냐?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애서 동요가 없더라.

광겁무명(曠劫無明)을 구탕진(俱蕩盡)하면, 광겁(曠劫)의 무명(無明)을 함께 다 탕진해 버리면,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니라. 선천(先天), 하늘이 생겨나기 이전, 이 땅이 또 없어진 뒤에—하늘이 생겨나기 저 무량겁 이전 무량억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이후, 한량없이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이 세계가 없어진 뒤까지 본래부터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더라.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정월 17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이 자리에는 세등선원 안거 대중(安居大衆)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 안거 대중과 그밖에 윤필암,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한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이 자리에 운집(雲集)을 했고, 또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에 한량없이 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와 은진 송씨 진영 영가와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이 자리에 이 법요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도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그 공부해 나가는 방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그보다 더 자상하고 뼈에 사무치는 법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生死) 없는 그 본성(本性)에 입각해서 보면 닦을 것이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버려야 할 악(惡)도 없고 지어야 할 선(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본래(本來) 없건마는 무슨 까닭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면서 갖은 고락(苦樂)을 겪으면서 금생에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왜 생사가 본래 없는데 이렇게 생사를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왜 본래 생사가 없는데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 수도(苦行修道)를 해야 하는 것이냐?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고행을 하셨어.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미묘법(微妙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무슨 목적으로 하셨느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하느냐?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거여.

우리가 당장에라도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고 하는 도리에 계합(契合)해 버리면 장부(丈夫) 일대사를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겁무명(曠劫無明)을 탕진(蕩盡)을 해 버리고 선천후지(先天後地)에 적요요(寂寥寥)한 도리인 것입니다.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면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라  자유영광요고금(自由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단전(單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깊은 밀의(密意)를 바로 봐 버리면,
본래비불(本來非佛)이요 역비심(亦非心)이니라.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니라.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 모든 대중과 육도 법계(六途法界)의 모든 중생도, 금일 은진 송씨 진영 영가(靈駕)도,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스스로 신령스러운 광명, 스스로 갖춘 신령한 광명이 예[古]와 이제[今]에 빛날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일러라!” 했습니다. 한 스님이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떠억 앉았어.

마조 스님이 주장자(柱杖子)로 여지없이 한 방맹이를 쳤습니다. 치니까 그 원상 안에 떠억 들어가서 앉은 스님이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입을 딱 다물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지난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행을 한 대중이 지혜의 눈을 뜬 자가 있거든, 이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 승(僧)이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여지없이 방(棒)을 내리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왜 쳤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다’고 한 도리가 무엇이여? 눈을 갖춘 자가 있으면 한마디 일러.

이 많은 대중이 용맹정진을 그렇게 했으니 어찌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 둘 뿐이리요마는 체면을 너무 지키느라고 묵언(默言)으로써 이른 것을 나는 알겠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심)


오늘 해제(解制)를 하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산철인데,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제(結制) 중이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해제라고 해서 어찌 산만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석 달 동안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런 좋은 정진하기 좋은 계절에 어쨌던지 시간을 아껴서 더욱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오늘 백일기도 회향(廻向)이며 또 이 세등선원에 천일기도가 오늘로써 회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행도 해제를 했다고 해서 공부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듯이, 해제를 하고서 더욱 정진을 알뜰히 해야 함과 마찬가지로 다시 오늘부터 또 천일기도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는 또 이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셔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소원이 낱낱이 다 성취가 되시고, 무량겁 업(業)이 다 소멸이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가정에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고,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날 이 자리에 만날 때까지 알뜰히 정진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한디  수봉창취접천하(數峰蒼翠接天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중무한청의미(箇中無限淸意味)를  강상일구도설파(江上一鷗都說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해제를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으며 행각(行脚)을 하다 보면, 비를 만나서 비가 지난 뒤에는 구름이 걷히고 강상(江上)에는 해가 넘어가고, 몇 봉우리 푸른 산봉우리는 안개가 끼어서 하늘에 접(接)한데, 그 가운데에 한없는 맑은 맛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가?
이 그림과 같은, 비가 갠 뒤에 구름이 걷히고 강 위에는 석양이 되어서, 그 푸른 봉우리는 안개에 끼어 가지고 하늘에 접했는데, 그 아름다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강상(江上)에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는 흰 백구(白鷗)의 울음소리가 그 아름다운 경계를 여지없이 일렀드라. (처음~30분49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 /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것.

(게송)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마조(馬祖) 원상(圓相) 공안 /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 (게송)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5)—계해년 하안거 반산림 법어(83.06.02) (50분)

<녹음 가운데에 주변 소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6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하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허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하라
나무~아미타불~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이나, 천억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 복(福)이 갓이 없을 것이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리되, 한 부처님에게만 올리는 게 아니라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 그 복이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항상 옛 가르침,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자체로써 말을 한다면은 ‘옛 부처에 능히 가르친 바 가르침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고, 이치로써 말을 한다면은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經)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권의 경(經)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서로 전한 그 법인(法印), 법의 도장을 갖다가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를 고교(古敎)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그 일착자(一著子)는 그 비롯함이 없어. 언제부터서 있었던지 그 시작이 없어. 언제 그 가르침, 그 일착자를 언제부터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가 그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고교(古敎)라 그래. ‘옛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그래. 이 중생에게는—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고교(古敎)라 그래.

그러면 어째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복보다도 그 공덕(功德)보다도,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經)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냐?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그 공덕보다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대중이 계해년(癸亥年) 삼하 결제(三夏結制)를 해 가지고 이렇게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전심전력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항상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금년 여름철에는 유독 좋은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한다는 말을 와서 들으니, 그리고 이 여러 대중의 얼굴들을 보니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하는 모습이 그 살아 있는 눈동자 속에 내가 역력히 볼 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대견스럽고, 너무너무 참 그 기쁜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를,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댄 그대들은 눈을 떠서 눈앞에를 관(觀)하라.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위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쓴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經),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에는 경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문채(文彩)가 있는데,
그 ‘흰 종이라 하는 ‘흰 백(白)’ 자, 흰 종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성(自性)에는 불변 수연(不變隨緣), 이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자성이 가지고 있는 불변 수연에 두 가지 용(用)을 갖다가 ‘흰 빛’에다가 표현을 한 것이고. ‘검은 글자를 썼다’ 하는 그 ‘검을 흑(黑)’ 자는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그 적멸(寂滅)의 체(體)를 갖다가 가르치는 것이거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대 눈을 떠 가지고 그대의 눈앞을 봐라. 모든 납자(衲子)로 하여금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한 권의 경을 읽어라 그 말이여.
눈앞에 일용(日用), 날[日]로 쓰는 일용 생활—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모든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일용인데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한 권의 경(經)을 읽는다’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이 오직 이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 한 권의 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法)을 설하시고, 팔만사천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과 팔만사천 법(法)이 한 글자 한마디도 오직 이 한 권의 경(經)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 없어. 팔만대장경을 보고 배우되 옳게만 본다면, 마침내 이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본래 가지고 나온 이 한 권 경을 읽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고 5년, 6년, 경을 배우고 평생 동안을 경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고 배우되, 본래 가지고 난 이 한 권의 경을 읽게 되어야지 그 경을 옳게 보고 옳게 배운 것이지, 이 본래 가지고 난 한 글자도 없는 이 경(經)을 볼려고 하는 신심(信心)을 내지 아니하고 이 경을 보게 까지 되지 아니한다면,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육두백판으로 다 외우고 쓴다고 한들 그 사람은 경을 바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을, 강원(講院)에서 이력(履歷)을 마치면 그 경을 놔 버리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진짜 경을, 이 마음의 경을 읽는 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래. 우리 대중이 과연 그 한 권의 경, 아무리 열어 봐도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여,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을 똑바로 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입선(入禪)하는 시간만 떠억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한 그 찰나부터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시비에 얽혀서 말려들어 가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하고 내가 옳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 입선(入禪)을 하면 또 앉어서 정진하다가 방선(放禪)을 하면 그럭저럭 일용(日用)에 끄달려서 화두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진을 해 가지고서는 10년, 20년 내지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걸망을 지고 다니면서 정진을 한들 확철대오가 어디에 있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정진을 한들 무슨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금년 여름에 이 세등선원에 모인 대중은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한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금년 여름에 기어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을 하고, 불조(佛祖)의 면목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납자가 많이 배출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를 합니다.


‘참선이 참 쉽기로 말하면 세수할 때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없다’고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다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 없고, 쉽다고 섣불리 해서도 아니될 것이여.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앉어서 정진을 하다가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 포행(布行)을 하면서 ‘이뭣고?’. 그러다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조급한 생각을 조끔도 낼 것이 없어. 그러면서도 또 등한(等閑), 더군다나 등한히 할 생각을 왜 낼 것이냐 그 말이여.
일부러 묵언(默言)을 하지 아니해도 제절로 묵언이여, 전체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데 무슨 딴소리할 겨를이 있을까 보냐? 밥을 입에다 떠 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 저작을 하면서 그 속에 화두가 역력(歷歷)하고, 반찬을 집어 먹고 또 저작을 하면서 바로 거기에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전 대중이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하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소제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운력을 할 때도 고대로 하고, 큰방에 있으나, 지대방에나, 마당에 나가나,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하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미 부모형제와 정든 가정을 버리고 출가해서 모든 인생 청춘을 다 포기하고, 그리고서도 이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한 이상, 기왕 하는 마당에 그렇게 철저히 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금생도 길고 결정코 이 철에 확철대오를 해야 할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달리고 있는 말에다가 채찍을 가한다’
채찍을 가하지 아니해도 그 말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채찍을 가한다 그 말이여. 마치 우리 대중이 각자 자발적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가 지금 법상에 올라와서 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던 사람이 이제는 인자 한 시간밖에 안 자고 정진을 하고 그렇게 까지는 할 것이 없어. 우리 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도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물질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라 최소한도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멕여 줘야 하고 또 입혀 줘야 할 것입니다.(처음~26분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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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거의 잠을 안 주무시고, 거의 먹지 아니하시고 그 피나는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설산에 들어가셔서 여러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통달을 해서, 오히려 그 스승보다도 더 앞서갔다 말이여. 그러나 그 스승이 그렇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다음 스승의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또 정진을 고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다도 더 낫게 해. 그 스승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그렇게 해서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훌륭한 스승은 다 찾아서 배우고 차례차례로 그 스승을 버리고 그렇게 해 가지고 더 이상 스승을 찾을 것이 없을 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혼자 정진을 했습니다.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을 받아 잡숫고 정신을 차리시고 흐르는 강물에 목욕을 하고 쇄락(灑落)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했는데,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맨 먼저 법(法)을 설하실 것인가?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정진을 하는데—처음에 그 오비구는 정반왕(淨飯王)이 태자(太子)를 보호하라고 보내 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태자의 고행하는 것을 보고 발심을 해 가지고 같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고행으로부터서 물러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맹세를 하고 고행을 하다가, 태자는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잡수는 것을 보고, 그 다섯 비구들이 ‘고타마(Gotama)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가지고 고행을 포기를 했다, 타락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런 타락한 고타마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녹야원으로 가자’ 그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 녹야원으로 간 그 다섯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교진여들은 먼빛으로 고타마 태자가 오신 것을 보고, ‘아 저기 타락한 태자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찾아오는가 모르겠다. 우리, 오드라도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주지 말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꽉 짜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가까이 오니까 그 얼굴은 훤히 빛이 나는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짰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어서서 영접(迎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태자가 뭐라고 여기를 왔소?” 물으니까,
태자가 “나를 이제는 태자라고 부르지를 말아라. 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으니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라”

“타락한 고타마가 어떻게 성불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나를 타락을 했다고 하느냐? 나를 봐라.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눈빛을 봐라. 나는 확철대오해서 성불을 한 성자가 됐느니라”
과연 우러러보니까 얼굴에는 빛이 나고 눈에서는 광명이 나는데, 옛날에 자기들이 보았던 그러한 구담 사문(瞿曇沙門)이 아니었더라 그 말이여.

거기에서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그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그 다섯 비구뿐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인도(印度)에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게 몸을 불로 지지고, 가시덤불에 딩굴고,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하는 고행 위주(爲主)의 고행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몸뚱이를 굴복을 받고 마침내 해탈도를 얻는다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진여를 위해서 최초에 설하신 법이 바로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러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최초에 설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오비구(五比丘)로 하여금 바른 수행법을 갖도록 하고, 그다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섯 비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보내서 탁발을 해 오게 맨들고, 나머지 네 사람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사람이 또 밥을 얻어 오고 나머지기 네 사람이 또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철에 이 다섯 사람이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다섯 사람이 각기 딴 길로 딴 방향으로 가서 이 법을 설해라’ 이렇게 해서 인도 각 지방에 보내 가지고 법을 설하게 했고, 그 철에 당장 1250인(人)이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셔서 삽시간에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불법(佛法)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대중은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잘 입고 지나치게 많이 잘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될 수 있으면은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그렇게 공부를 할려고 애쓴 사람들만 모였어. 너무 그렇게 할까 걱정이,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최소한도로 필요한 잠, 아무리 적게 자도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자 주어야 그래야 그 이튿날 정신이 맑은 법이여. 그 저녁에 잠을 안 자고 설쳐대 놓으면 안 자고 해 놓으면 그 이튿날 낮에 맑은 정신이 없어. 낮에 입선(入禪) 중에도 졸고 그저 그렇게 해서 맑은 정신이 없으니까, 차라리 그러기보다는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 푸욱 자 주고.
일반적으로 선방(禪房)에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여섯 시간을 설정한 것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근기가 조끔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어떠한 사람도 다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시간을 자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나이가 젊고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다섯 시간만 자도 좋고, 또 특수하게 또 좋은 사람은 네 시간 정도만 자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자 주면 그 이튿날 정신이 깨끗해서 3시에 일어나서 그날 저녁 9시에 잘 때까지 정말 짬지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 옆에서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이 올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잠을 안 자고 하다 보면 그 이튿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입선(入禪) 중에 꾸벅꾸벅 조니,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까, 자기의 체질과 건강과 뭐 그런 것을 잘 참작해서 대중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기에게 알맞는 정진법을 스스로 개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가 벌써 이 반 철이 지내갔는데, 앞으로 반 철은 초복 · 중복 · 말복, 이 삼복(三伏)이 들어서—지나간 반 철은 그럭저럭 과히 덥지 않고 지내갔지만 앞으로 참 더운 반 철이 남아 있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실속 있는 정진을 해서 득력(得力)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알뜰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에 최초에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법문(法門)의 요지를 말을 했습니다.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헌디  갱무남북여서동(更無南北與西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차양화력(雖然不借陽和力)이라도  쟁내도화일양홍(爭奈桃花一樣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이다. 홀로 앉었어, 올연히 앉었는데 한 집이 공(空)했더라.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참 애를 써서 몸부림을 치면서 부셔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정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 경계가 꼭 오는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처억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기쁘다고 할 것인가, 슬프다고 할 것인가?

하늘을 봐도 화두(話頭)요, 땅을 봐도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차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무슨 옆에서 누가 잡담을 해도 그 소리는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비행기 소리가 들려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그러니 방안에 대중이 가득 있어도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문 밖을 보면은 산천초목이 울긋불긋해도 그것은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뿐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무슨 망상이 혹 무슨 딴생각이 일어나도 그냥 스쳐간 것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한 집이 공했다. 일실(一室)이 공(空)했다’ 하는 거여.

이 조그마한 큰방 하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공한 거여.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까지도 느낄 수가 없어. 몸뚱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 몸뚱이도 공(空)해 버렸고 이 방도 집도 공(空)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공(空)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거기에 무슨 동서남북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 몸이 공하고, 이 방이 공하고, 이 우주법계가 다 공했으니, 그 공한 곳에도 처백히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공한 그 경계에 따악 빠져 가지고 그놈을 집을 짓고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것은 그러한 경계에 빠져 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거여. 절대로 그 사람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되거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또 하나 조심할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빨리 그냥 어서 터졌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한 생각을... (녹음 끊김) 조급한 생각도 갖지 말고 또 늘어지는 해태심(懈怠心)도 갖지를 말고 여법하게 정진을 해 가면 아무 장애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코 깨닫고야만 말게 되는 거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에 맛있는 음식인데,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맨들어 갖고도 그 관리를 잘못하면 그것이 변했다 하면은 무서운 독약으로 변하는 것이여.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변하면 고약한 독약으로 변하는 법이라, 맛있는 음식이 변했다고 해서 아깝다고 그놈을 먹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그 무량겁을 두고 어렵게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저 죽고 남 죽이는 외도(外道)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말이 한량이 없지만...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26분5초~49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經)을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한다 /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라 /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하신 최초의 설법, 중도법(中道法) /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실속 있게 정진을 하라 / (게송)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 /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