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3)—1982(임술)년 동안거 해제 법어(83.01.17) (43분)

 

약 43분.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종일토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바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을 하고, 입으로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눕고 걸어 다니고, 잠시 잠깐도 쉴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 말여. 그렇게 바쁘건만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다. 해탈도 구하지 아니하고, 천당에 태어나는 것도 좋아하덜 않는다 그 말이여.

세상에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발동을 해 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쳐대고 있지만,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바쁘다 그 말이여. 그 바쁘지만 그 바쁜 것이 조끔도 방해로울 것이 없어.
정진(精進)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뻐서 참선(參禪)을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 참선을 못한다.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그 묘한 관(觀)을 얻은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건 망상이 일어나건,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밥을 먹고 걸어가거나 앉거나 서거나 하나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경계는 갈 곳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복잡한 경계 속에 있으면서 그 복잡한 경계가 자기에게는 아무 방해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못 이렇게 정진을 지어가는 마당에 무슨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있으며, 무슨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못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무렴(無念)이라 하니까, 이 ‘생각 없는 데 돌아간다’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 없는 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벌써 틀려 버린 것이고, 스스로 ‘내가 무렴(無念)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가져도 이미 무렴이 아녀.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毘盧)의 이마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갈 뿐 그밖에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정월 17일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이고, 또 천일기도 가운데에 백일기도의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에는 5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모여서 참 알뜰하게 짬지게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석 달 동안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잘 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감이 들어서 거의 몇 분을 빼놓고는 전부 독감이 들어서 고생들을 했지만, 그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몸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한 분도 도중하차를 하지 아니하고, 이 좁은 방에서 기침을 하면서 그 병을 정진력으로 이겨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마침내 병을 이겨내 가지고 날이 지내갈수록 점점 정진을 모다 열심히 하고 여법하게 해서 끝을 그렇게 잘 마쳤어. 이렇게 알뜰하게 여법하게 정진(精進)해 간다면 무슨 도(道)를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3년을 이렇게 해서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러한 뼛속에 사무치는 가슴이 뭉클한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누구를 위하는 정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해결하기 위한 정진이여. 남을 보이기 위해서, 정진 잘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크게는 진리를 깨달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에 목적으로 삼지만, 도를 이룰 때까지는 일체중생이 어디에 있어? 깨달라야 할 진리가 어디가 있어?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가 코앞에 붙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그 생사(生死) 문제가 딱! 눈앞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마음을 지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여. 제절로 무상(無常)과 생사에 대한 무상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오른다면 지켜야 할 계행(戒行)이 어디가 있으며, ‘화두를 들어야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어디가 있으며, 남을 보이기 위한 정진이 어디가 있으며, 대중규칙도 일부러 지킬려고 할 것이 어디가 있으며, 밥이 맛이 있고 없고, 수용(受用)이 좋고 나쁘고, 그러한 것에 관심 쓸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누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낱낱이 자기 자신이 저절로 규칙이 지켜져 버릴 것이며, 입승(立繩)이나 찰중(察衆)이나 주의나 간섭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어? 저절로 50명이 되었건 백 명이 되었건, 옛날에 중국 총림에는 5백 명, 7백 명, 천 명, 천오백 명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지만 모두가 다 생사 문제에 분심(憤心) 발심(發心)되어 가지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간다면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무엇이 있어?

지난 삼동(三冬) 동안에 대중이 그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만 한 사람도 별 탈이 없이 그렇게 온전하게 여법하게 알차게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제를 맞이한 것은 전원이 그야말로 이와 같이 정진을 해 왔고, 이와 같이 발심을 한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 철만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여름 결제가 있을 때까지 또 산철이 또 석 달이 있습니다마는, 산철 동안에 걸망을 지고 어느 산(山), 어느 도량(道場)에 가고, 어느 지방에 가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여름 석 달 동안에 결제(結制)에 안거에도 그와 같이 정진을 해서,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그 간절한 마음이 지속이 되어야지 상속이 되어야지,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해제가 되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이리저리 설치다가, 또 다음 결제가 되면 조금 할 듯 할려고 하다가 또 해제가 되면 또 그 분위기가 깨져 버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3년을 한들 어찌 정진이 궤도(軌道)에 들어가며, 10년을 한들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제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할 때에는 전원이 묵언(默言)을 하면서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하면 잡담을 하고, 이렇게 지내는 그런 것이 습관이 배이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정진이라 할 수가 없고. 이 결제 동안에는 정진을 열심히 하다가 해제가 되면 이리저리 산만하게 다니는 것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하겠느냐.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고 한 말씀이 근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하야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허면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라.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하면, 선근(善根), 좋은 근기(根機)다 그 말이여. 좋은 근기는 처음부터 선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하근(下根)이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마침내 선근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여. 그렇게 알뜰히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선근으로 성숙이 되어 가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처음부터 ‘나는 하근기(下根機)라, 나는 참선을 못해. 참선을 해봤자 나같은 사람은 도를 이룰 수가 없어’ 자포자기를 해 가지고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선근(善根)이 될 기약이 없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서 하근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럴수록에 바른 스승을 찾아서 목숨 바쳐서 다른 사람 정진하는 것보단 3배 내지 10배 100배를 정진을 해 간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선근으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다. 모냥을 취(取)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용맹정진 가행정진을 해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다’ 그랬지만, 취상구현(取相求玄)을 하라는 것이 아니여.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상(精進相)을 갖고, ‘나는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하는 상(相)을 내고, ‘나는 정진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상(相)에 떨어지고, 취상구현(取相求玄)은 진실한 정진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거든.

스승을 구(求)하되 모냥을 보고 구하고, 정진을 하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정진상을 내고, 계율을 갖되 ‘나는 청정한 계율을 갖는다’ 하는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 계행(戒行) 안 지킨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은 전판 이 취상구현(取相求玄)이 되어서, 모냥을 취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참다운 수행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율사(律師)가 견성(見性)을 못한다. 율사가 견성한 사람은 없다’
과거에 모다 문헌을 보면 율사가 견성한 도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율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견성을 못했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율사를 하되, 율사라고 하는 상(相)이 떨어졌을 때 견성을 하지, ‘나는 율을 지킨다. 계행이 청정하다’ 그래 가지고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있는 동안에는 세상없이도 도(道)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이 물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음식도 조심하고, 잠도 좀 적게 자면서 그 정진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이루겠습니까마는 그러한 상(相)에 떨어져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알뜰히 정진을 하되 그러한 상(相)에 떨어지지 않고 정진한 사람과 그런 상(相)에 떨어져서 정진한 사람은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되 정말 철저하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되, 계를 지키는 상(相)이 없는 분은 남이 보면 알어. 남이 보면 아는 것이고. 계를 지키되 ‘내가 계율을 지킨다’는 계상(戒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또 남이 보면 알어.
기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라면 계(戒)를 청정히 지키되 계상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하면, 한 생각을 몰록, 한 생각 몰록 공겁(空劫) 밖에 뛰어나면,
원래(元來)로 불허노호지(不許老胡知)니라. 원래로 노호(老胡) 아는 것을, 노호 아는 것을 허락지 않을지라. 한 생각 공겁 밖에 뛰어난 소식(消息)은 노호도 이 도리를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호(老胡)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해서 부처님도 이 도리는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그 도리를 향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새로 출가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결제(結制)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죽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는 그 순간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인 것이며, ‘해제(解制)다’ 이제 공부가 공부 기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바로 동시에 새 결제가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참수행인이라 할 것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그것이 죽을 사(死) 자, 죽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 끊어진 그것이 죽음인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찰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生)이요 죽음[死]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느낀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오느냐?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시일을 시간을 각기 말해 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한 시간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부를 못하겠다

그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그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죽음이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그리셨습니다.

지끔 40살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20년간은 정진을 할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고, 한 50을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내가 빨리 죽는다 해도 환갑까지는 정진을 할 수 있겠다
30세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30년은 정진할 수 있겄다 20세 먹은 사람은 ‘30세까지는 경(經)을 보고, 30세부터서 참선을 해도 몇십 년간을 정진할 수 있으니까 충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모두가 다 정진을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규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철저하다면 입선(入禪) 방선(放禪) 시간이 어디에 있으며,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파해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정진을 해야 할 정진이 어디가 따로 있으며, 벌써 마음을 지어서 지키고, 마음을 지어서 정진을 하고, 마음을 지어서 잠을 안 자고 다 그르쳐 버린 것이고, 다 김이 벌써 다 새 버린 것입니다.
김새 가지고 정진을 하니 번뇌 때문에 정진을 못한다. 망상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혼침이 오기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수용(受用)이 박(薄)해서 정진을 못한다. 시끄러워서 정진을 못한다 이게 다 김이 벌써 다 빠져 버리고, 껍데기 송장이 송장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정진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누천기(漏天機)요. 꽃이 웃는 산 앞에는 천기를 누설(漏泄)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가 노래하는 수풀 밖에는 남[生]이 없는 말을 하고 있더라. 무생(無生)의 도리를 말하고 있더라. 산 앞에 빨갛게 피고 있는 그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을 하고 있고, 숲 밖에서 새가 노래하는 것은 무생(無生), 무생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더라 그 말이여.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로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은 제각기 스스로 영원무궁(永遠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더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라.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일체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전부 천기를 누설한 것이요, 남[生]이 없는 진리의 표현일진대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구름을 보면 구름이요, 새를 보면 새요,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낱낱이 그대로 그놈을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고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진여(眞如)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더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입을 벽에다 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무슨 (기계음)... 기계가 녹음기가, 마이크가 산승(山僧)을 대신을 해서 끝을 맺어 주었습니다. (처음~42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 /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려라 /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달라야 한다.

생사에 대한 무상(無常)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 /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

(게송)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 /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 /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無念)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3. 6. 7. 10:07

 

 

(복전암No.21)—1990년 관음칠성회 기도 입재 법문(1990.10.01) (58분)

 

(1) 약 31분.

 

(2) 약 27분.

 

(1)------------------

편안하게 앉아서 법상을 향해서 눈을 딱 뜨고 그리고 법문을 들으십시요.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하면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각소거진불염진(却笑居塵不染塵)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연생식득본래신(緣生識得本來身)이다.
마음자리, 마음에 근원을 몰록 깨달라서 자기 몸안에 있는 무궁무진한 보배를 개발을 하면 모든 중생들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사대 오온(五蘊)으로 이룩된 이 무상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한 본래신(本來身)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연화근발유니리(蓮花根發游泥裏)하면, 저 연꽃이, 그 깨끗하고 향그럽고 아름다운 그 연꽃이 그 뿌리는 더러운 흙탕물 속에 박고 핀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청정법신(淸淨法身) 자성불(自性佛), 자성불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 이 더러운 몸뚱이 속에 이 청정법신이 들어 있는 것과 연꽃이 그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 속에 뿌리를 박고 그렇게 아름답게 핀 도리와 똑같은 것을 알고 보면 정말 비긋이 웃음이 나올 것이다.


오늘은 경오년(庚午年) 음력 시월 초하루 관음칠성회 법요식입니다. 관음칠성회가 6 · 25 동란 직후에 발족이 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40년의 역사가 쌓였습니다. 주지 스님의 원력으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청신남 청신녀가 해마다 수효가 불고 불어서, 처음에는 불과 몇십 명에 지내지 못하고 회원이 오늘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사정이 있어서 다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칠성회 축원 명단을 보면 수천 명에 이릅니다.
관음회도 있고 칠성회도 있고 절절이 다 회원이 있지마는, 이 복전암은 관음칠성회라 그래. 시월 초하루부터 7일간 기도를 봉행하고 그리고서 동짓달, 섣달 또 내년 정월, 2월해서 내년 시월까지 열두 달 동안 다달이 초이렛날 법회가 있습니다. 기도법회가 있어. 기도도 하고 법회도 열고.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첫째는 이 험난한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어떻게 하면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살아가며, 가정의 평온을 유지하며, 나아가서는 사회 국가를 위해서 항상 불자(佛子)로서의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가기가 어려워.

그리고 둘째는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이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한 것이다. 해마다 저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고봉 큰스님 생존 시에는 고봉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고봉 큰스님 열반하신 뒤에는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를 초빙을 해서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40년의 한 해도 궐(闕)한 바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 칠성회에 가입한 분은 신심(信心)이 안 날라야 안 날 수가 없고 또 정법(正法)을 안 믿을라야 안 믿을 수가 없어. 무엇이 정법이던가?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이요, 둘째는 법보(法寶)요, 셋째는 승보(僧寶)인데, 불보(佛寶)는 이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불상. 더 들어가서는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실달 태자(悉達太子)로 탄생하셔 가지고 출가하셔서 성불(成佛)하신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 더 확대해서 보자면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차 계시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여.
거기서 우리에서 가깝게 부처님을 찾자면 이 사대(四大) 오온(五蘊)으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자성불(自性佛), 이것이 바로 불보(佛寶)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목적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셔 가지고 중생 한 사람 한 사람 중생의 몸뚱이 속에, 각자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자기의 부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신 것이다.
49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하셨는데 그 대장경의 뜻이 ’너의 자성(自性)을 깨달라라. 너의 자성을 어떻게 공부를 해 가지고 어떻게 수행을 해서 어떻게 깨달러라‘ 이것을 고구정녕(苦口叮寜)하게 중생의 천차만별의 근기(根機)에 따라서 설해 놓으신 것이 바로 법보(法寶)다.

승보(僧寶)는 무엇이냐?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法)에 의지해서 법답게 수행을 해 가지고 그 부처님의 법을 끊이지 않도록 영원히 유통해 가는 그런 부처님의 제자를 승보(僧寶)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어떻게 하면은 부처님의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어떻게 하면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언제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언제나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질라야 떨어질 수가 없고, 해태(懈怠)할라야 해태할 수가 없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빠질라야 빠질 수가 없어.

오늘 이 법요식에 참석한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를 뵈니 전부가 다 경건하고 엄숙하고, 이 법희선열(法喜禪悅)이 그 얼굴에 넘쳐흐르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가 바로 여러분의 눈동자를 통해서 역력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단 법회가 끝나서 댁으로 돌아가셔서 세속생활에 시비와 흥망성쇠 속에 휩쓸려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瞋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탐심(貪心)을 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절에 오실 때 뿐만 아니라 댁에 가셔도 또는 어느 직장에서도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부처님이 바로 자기 눈앞에 계시고, 자기의 몸속에 계신 것을 역력히 깨닫고 친견한다면 어느 겨를에 감히 부처님 앞에서 진심을 내며 탐심을 내며 어리석은 마음을 내겠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부처님의 법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지만 가장 우리가 알기 쉽고, 실천하기 좋고, 어디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여.

한문(漢文)을 몰라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설사 대학을 나오지 안 해도 참선은 할 수가 있고, 이 참선법은 남녀노소가 상관이 없고,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고, 아픈 사람은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성질이 고약해서 노상 진심을 낸 사람도 이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시작하면 차츰차츰 그러한 나쁜 성격도 순화가 되어 간다.
연꽃은 절대로 저 고산(高山)에 석간수, 그 맑고 깨끗한 석간수에서는 연꽃이 피지를 못합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더러운 흙탕물 속에서 만이 연꽃은 뿌리를 박고 그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요  만로피대긱신산(謾勞皮袋喫辛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하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여. ‘부처다, 마음이다, 또는 한 물건이다’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부처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여. 그러한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불생불멸(不生不滅)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신령스러운 물건을 우리가 다 낱낱이 다 가지고 있어.
무량억겁(無量億劫)부터서 그놈이 천 가지 만 가지 탈을 쓰고 여기에 났다가 저기에서 죽고, 저기에서 났다 여기 와서 죽고. 그래 가지고 지은 업(業)에 따라서 천상에도 태어났다, 인간으로 태어났다, 축생에도 태어났다, 지옥에도 갔다, 그래 가지고 무수억겁(無數億劫)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해 왔더라.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며, 가을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흰 눈이 펄펄 나려서 온 세계가 은색(銀色) 세계로 된다.
이러한 사계절을 따라서 나타나는 모든 경색이 경치가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여. 낱낱이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서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중생들에게 설해 주신 고구정녕(苦口叮嚀)한 설법이요 경전이더라.

세종대왕이 한문(漢文)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한글을 창제를 하셨다고 우리는 굉장히 그 세종대왕을 숭배하고 찬양을 하는데, 한글을 통해서 우리가 다 우리의 의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고, 남이 써 논 것을 읽을 수가 있고, 어린아이들도 금방 배우기가 쉽고 참 편리한 글자요, 세계에서도 으뜸가는 참 좋은 글이라고 찬양을 받고 있지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사계절을 통해서 오색찬란한 꽃을 피워 주시고 나무, 풀, 가지가지 모냥으로 잎을 피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가을에는 온갖 곡식 과일을 여물게 하고, 그 설악산이나 내장산에 가 보면 그 단풍이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 그 말이여.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곱다고 야단들이지만 고와 봤자 서리 한 번 오고, 두 번 오면 참 볼상 사납게 시들어서 떨어져버린다. 고운 것에 탐착해 가지고 그것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단풍이 노랗고 빨갛고 한 그 단풍이 법신불(法身佛)이 설하신 경전이요, 법문(法門)이라고 한 것을 바로 봐 버린다면 빨간 단풍은 빨가서 좋고, 노란 단풍은 노래서 좋고, 서리가 와서 시들으면 시들어서 좋다 그 말이여.
단풍이 지나간 뒤에는 겨울이 다가와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아무 뜻도 모르고 눈이 오면 모다 좋다고 그런다 그 말이여. 눈이 와서 좋다고 한 사람은 좋지마는, 운전하는 사람은 영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미끄러지면 사고 나고 사람 죽고 차가 뿌서지고 하니까 안 좋아한다 그 말이여.

좋아할 것도 없고 싫어할 것도 없어야, 눈을 통해서 법신불(法身佛)의 법문을 듣는다면 무엇이 그렇게 좋을 것은 또 무엇이며, 무엇이 그렇게 싫을 것이 또 무엇인가?

세계에 60억 인구가 있지마는 전부 다 자기의 지은 업(業)이 다른 만큼 생긴 모습이 다 다르다 그 말이여. 비슷한 사람은 있지마는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쌍둥이가 많이 닮았지마는 똑같지는 안 해. 왜 그렇게 다르냐 하면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달라. 한 부모 뱃속에서 나왔지마는 달라.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빈부귀천도 다르고 일생 동안 흥망성쇠도 다르다 그 말이여. 잘나 봤자 거기서 거기고 권리가 높아 봤자 거기서 거기여. 좋아할 것도 없어.
그 자기가 왕이 될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권리를 쥐었으며, 자기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세계 각국이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갖은 모략과 중상과 수단을 부려 가지고 그것을 서로 할라고 그러냐 그 말이여. 그래 봤자 평생하는 것도 못 되고, 하다가 잘못되면 쫓겨나고 죽고.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그 말이여. 명예냐, 권리냐, 재산이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자인들 하루에 밥 세 그릇 이상 못 먹고, 죽어 봤자 한 평 이상 차지를 못해. 그런데 그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이 그놈을 자기 것을 만들려고 야단이다. 형제간에 싸우고 부자간에 싸우고 재판하고 죽이고 이것이 무슨 짓이냐 그 말이여.

불법(佛法)을 믿은 사람은, 정법(正法)을 믿은 사람은 오욕락(五欲樂)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하게 알게 될 것이다.(처음~31분25초)





(2)------------------

앞으로 10월 7일 날에는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원하는 사람에게 설해지게 되는데, 그 십선계는 재가 신도들이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계(戒)—계는 오계가 있고, 십계가 있고, 또 250계 또 500계 또 보살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가 있지마는 그 여러 가지 종류의 계 가운데에 지금 7일 날 설해지게 되는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그러니 작년에 받으신 분은 금년에 또 안 받으셔도 좋고, 아직 받지 못하신 분은 사무실에 성명을 등록 신청을 해서 7일에는 꼭 참석을 해서 십선대계(十善大戒)를 받고 그 계첩(戒牒)을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매월 7일에는 처음에 한 50명, 80명, 100명 하다가 지금은 한 3백여 명씩 이렇게 참석을 하신다고 하는데, 칠성회 회원이 수천 명인데 겨우 3~4백 명 정도 오신다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적어도 천 명은 오셔야 하거든.
스님네가 모다 준비를 해서 공양을 해 드리고 할라면 힘이 드시겠지만, 스님네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으로 하여금 모든 죄업(罪業)을 소멸(消滅)을 하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해탈도를 증득하도록 해 드릴까 하는 그 불보살(佛菩薩)의 뜨거운 자비심(慈悲心)으로써 아주 이 주지 스님을 비롯한 삼직(三職) 스님과 전 대중스님네가 발을 벗고, 선방에 가는 것도 뒤로 미루고 원력을 세워서 하시는데 스님네 준비하실 것 걱정해서 안 오실 것은 없습니다. 칠성회날 오시면은 그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을 해서 공양을 준비를 하니까 마음놓고 오셔서 법요식에는 꼭 참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교 믿는 사람들은 일요일에는 가게문을 다 닫고 전부 다 교회마다 새벽부터서 하루에 몇 축씩을 교회를 가뜩가뜩 채우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는 ‘집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가게 볼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겨우 특수한 신심 있는 분만이 몇 분만 참석을 하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 돈 조끔 더 벌어 봤자 백 석(百石) 밖에 못할 복(福)밖에 안 타고난 사람이 천석(千石)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라는 것도 한도가 있어. 아무리 안 입고 아주 피가 나오게 애껴도 다 천석군이 만석(萬石)군이 되는 거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 함부로 그렇다고 해서 낭비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애낀다고 큰 부자 되는 것이 아니여.

큰 부자는 전생에 큰 복을 지은 사람이 큰 부자 되는 것이지, 애껴 가지고 보시도 안 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지도 않고, 쓸 데가 있어도 쓰지 않고 아주 구두쇠가 되어 가지고 아조 딱! 한번 그 손에 돈 들어가면은 곰팡이가 슬도록 애낀다고 해서 부자 되는 거 아녀. 버는 것은 쓸 데 쓰자고 버는 것이지, 애껴서 항아리에다 담어 가지고 땅속에 묻어놓고 굶어서 죽으면 뭣이 되냐 그 말이여. 죽었다 하면은 구랭이가 되어 가지고 그 항아리 옆에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시골집 뜯으면은 ‘업’이라고 해서 구렁이가 대들보 있는 데서 나오는 예가 흔히 있는데. 쌀 곳간에도 있고, 장작 쌓아 논 데 속에서도 있고. 그게 ‘업’이라고 야단들입니다마는, 그 업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전생(前生)에 자기가 못 먹고 안 쓰고 모아 논 재산, 그 재산에 탐착심(貪着心)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지 못하고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 그걸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긍께 그것이 ‘업’이거든.
그것이 ‘업’이란 말을 좋게 해석해 가지고 ‘그 구랭이 쫓아내면 가난해진다’고 해 가지고 구랭이를 갖다가 못 나가게 살살 다시... 그런 사람이 있는데, 그거 잘 몰라서 그러거든. 그래서 검박하게 잘 소중하게 재산을 아껴 쓰는 것은 좋으나 덮어놓고 탐착심을 가져서는 안 돼.

이 칠성 이 법요식을 맞이해서 기도를 성취하는데—부자 되기 위한 원(願)을, 무슨 장사 사업이 잘되기를 비는 그러한 분도 계실 것이고, 아들딸 대학에 꼭 합격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원을 가지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아들을 못 나신 분은 아들 낳기를 소원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병고에 시달린 분은 병고를 빨리 쾌차해서 건강한 사람 되기를 빌 것이고, 또 바람난 사람이 있는 사람은 바람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또 그런 원이 있을 것이고. 천 가지 만 가지 소원이 있으시겠으나, 그런 크고 작은 모든 소원도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시면 반드시 성현(聖賢)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그 소원성취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그러한 중생의 탐심(貪心)을 충족시키는 데 그친다면 그 사람은 그 불법에 조끄마한 방편(方便)으로 설하신 그것밖에는 모르는 것이고, 정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뭣고?’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여. 선방에 들어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하실 분은 모든 여건이 허락이 되신다면 아 그 이상 더 좋을 수가 없으나, 여러 가지 형편이 그러지 못한 분은 그냥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앉아서 ‘이뭣고?’
서서 ‘이뭣고?’ 걸어가면서 ‘이뭣고?’ 일하면서 ‘이뭣고?’
속상할 때 ‘이뭣고?’ 괴로울 때 ‘이뭣고?’ 슬플 때 ‘이뭣고?’ 기쁠 때 ‘이뭣고?’
자꾸 챙겨. 깜빡 잊어버리면 턱! 챙겨서 ‘이뭣고?’

자꾸... (녹음 끊김) 여러 가지 춤도 추게 맨들고 여러 가지 재주를 부리게 맨드는데, 곰이 귀는 물론 뚫려 있기 때문에 똑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그대로 하면은, 먹을 것을 주고 하면은 곰도 몇 가지 말은 알아듣고 북을 ‘둥둥 둥둥 두둥 둥둥’ 치면은 곰도 그 장단에 맞춰서 영락없이 춤을 춥니다. 코끼리도 추고, 곰도 추고 하는데.

그 미련한 곰을 어떻게 길을 들이냐 하면은 큰 깡통에다 따악 곰을 태워서 매달아 놓고 깡통 밑에다가 불을 핍니다. 처음에는 불을 약하게 피어. 약하게 피면서 북을 천천히 치거든. ‘둥~닥 둥~닥 둥닥쿵 쿵닥쿵’ 천천히 하다가, 그러면은 곰이 발이 뜨거우니까 이쪽 발을 들었다 저쪽 발을 들었다 그러거던.
그러면 불을, 화력을 돋구면은 이놈이 뜨거우니까 빨리빨리 들었다 놨다, 그놈에 따라서 북을 그때는 빨리빨리 쳐 주거던. 그래서 불을 아주 세게 피면서 북을 빨리빨리 치면 이놈이 ‘뚱딱뚱딱뚝딱뚝딱’ 이러다가, 또 화력을 차츰차츰 줄이면서 북을 천천히 치면 그때는 또 천천히 하다가, 아주 화력을 줄이면 그때는 아주 천천히 이러거던.
그렇게 해서 몇 번을 훈련을 시킨 다음에는 불을 피지 않고 그냥 북만 천천히 치면 천천히 하다가, 빨리빨리 치면은 빨리빨리 발을 옮기고, 인자 북만 치면 아무 때라도 북만 치면 북 맞춰서 그 장단에 맞춰서 춤을 영락없이 춘다 그 말이여. 이렇게 해서 곰을 가리킵니다.

그 미련한 곰도 그러한 북과 도라무통[drum桶]과 그 화력(火力)으로 해서 그런 방편(方便)을 써 가지고 영락없이 장단 맞춰서 멋지게 춤을 춰 가지고 써커스단에서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할 수가 있거든, 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사람이 어찌 ‘이뭣고?’를 못할 리가 있느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안 돼. 그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그 말이여. 개도 산수를 가르키면은 산수를 하고, 짐승도 영락없이 다 가리키면 다 하는데 사람이 못할 리가 없거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재미가 없어. 인과설(因果說)을 얘기하면 재미가 나서 눈이 초롱초롱하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설하면은 처음에는 떠억 눈 감고 잘 들은 척하다가 꾸벅꾸벅 하거든.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왜 잠이 오냐?
최상승법을 설하면은, 만약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그 최상승법을 잘 듣고 너 나 할 것 없이 열심히 참선(參禪)을 해서 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하면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궁전이 흔들려 가지고 팍싹 주저앉어 가지고 마왕 파순이가 발 디딜 곳이 없어져. 그러니까 어쨌든지 마왕 파순이란 놈이 눈뚜껑을 막 처누르는 거여. 그러니깐 눈뚜껑이 천근만근(千斤萬斤)이 되어 가지고 아무리 눈을 뜰라고 해도 눈이 안 떠져. 자꾸 눈이 갬겨 가지고는 꾸벅꾸벅 졸고. 그 못 듣게 하는 거여.

‘졸음이 오는 것은 내가 어제 저녁,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더니 법문 듣느라고 잠이 왔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에 올라타 가지고 막 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 마구니에게 지느냐, 마구니에게 지지 않느냐는 그 사람의 신심(信心)에 달려 있어.

내일 법문을 들으러 올라면은 저녁에 좀 일찍 자서 잠을 푹 자 놓고 오면은 괜찮은데, 밤에 그럭저럭 늦잠을 자 갖고 그 이튿날 와 가지고는 처음부터서 법문만 시작했다 하면 처음부터서 꾸벅꾸벅.
마구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그래서 선방에도 죽비만 치면 5분도 못 되어서 꾸벅꾸벅 졸거든. 마구니란 놈이 눈뚜겅이에 올라타 가지고 쪄누르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중을 모르고.
그래서 그 마구니는 다 마구니지만 오신통(五神通)을 다 갖추어져 갖고 있거든. 수단과 방법—부처님께서 성불(成佛)하실라고 할 때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를 한 것을 『팔상록(八相錄)』을 보면은 그 항마상(降魔相), 『팔상록』에 항마상을 보시면은 가지가지 마구니의 그 하는 수단을 아실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여. 법문 들을 이 법요식에 참석할라면 뭔 일이 그렇게 요리 ‘여기서 오라, 저기서 오라, 누구누구 결혼식한다, 누가 돌아가셨다, 누구 환갑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거든. 그것이 다 마구니가 들어서 어쨌든지 법회에 참석 못하게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진실로 이 신심이 있고 마구니를 이겨 낼 용기가 있는 분은 어지간한 것은 다 뒤로 미뤄 버리고 법회에 참석하셔야 하고, 될 수 있으면 미리미리 약속을 그 법회날을 피해서 약속을 하시고 이렇게 하신다면은 법요식에 아주 이 마당이 가뜩차고, 저 일주문 밖에 마당에까지 가뜩차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마지막으로 게송(偈頌) 하나를 읊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이 법요식에 참석하신 분은 모두가 다 기도성취하시고 업장소멸(業障消滅)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헌디  법성해중친인득(法性海中親認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하야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직장이 발 디디고 발을 들고 내리는 그 찰나찰나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순간순간이,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소원을 성취하지 못하며, 무슨 업장이 소멸하지 못하며, 무슨 웬수가 용서하지 못할 웬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대승법(大乘法)이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위대한 불사(佛事)가 될 것입니다.(31분26초~58분2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돈오심원개보장(頓悟心源開寶藏)~ / 무슨 목적으로 관음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기도법회를 열어 오고 있느냐? 이 험난한 세상을 무사히 지내고, 이 말세(未世)에 한 사람이라도 더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불법(佛法)을 믿고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

불교에는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 세 가지 보물이 있다 / 어떻게 하면은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법신불(法身佛)을 친견하며, 잠시도 끊이지 않고 설하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까? 자기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法), 바로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깨달라야만 된다. 참선법은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

(게송)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 /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께서 설해 주신 법문 / 우리가 정말 목숨 바칠 곳이 어디냐? / 대승 십선대계(大乘 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 법회(法會)에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

‘이뭣고?’는 꼭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 곰을 춤추게 길을 들이는 법 / ‘이뭣고?’도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되게 되어 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데 왜 못할 것이냐? / 마왕(魔王) 파순(波旬)이가 우리 도(道) 성취한 것을 방해. 신심(信心)으로 이겨 낼 용기가 있어야.

(게송)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 /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은 그 일부가 나무에 조각을 해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이 되어 있지마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요 우주법계에 가뜩 차 있어. 나무에 조각해 놓은 것은 그 일부에 지내지 못한다.
낮에면 빛나는 저 태양, 밤에는 빛나는 달, 그 높은 하늘에 무수히 반짝거리고 있는 별들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상주설법(常住說法)이요, 봄에는 꽃이 피고 잎이 피며,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이것들이 다 부처님의 상주설법에 하나다. 그러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이 볼 때에는 하나도 부처님의 설법이 아닌 것이 없고 그 조그마한 모래알 하나며, 푸른 풀 잎사귀 하나도 부처님의 몸뚱이가 아닌 것이 없어. 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체(體)여. 그러건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그저 평범한 해요, 달이요,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그 말이여.

부처님은 청정하시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만덕(萬德)을 다 갖추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이시지만 그 부처님도 원래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가 법(法)에 의지해서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니 부처님이 되신 것이다.
우리도 탐심(貪心)이 많고, 진심(瞋心)이 많고, 어리석은 마음이 가득차 있다 하더라도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법의 배에만 타게 되면 부처님이 운전하시는 그 배에 의해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도 가고 극락세계(極樂世界)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승(大乘)이다, 소승(小乘)이다’ 승(乘) 자가 ‘탈 승(乘)’ 자입니다. 탈 것. 수레. 그 수레에만 타면 그 수레의 운전은 부처님이 하시니까 부처님 나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대승법이다 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하는 것이여.

십선대계(十善大戒)는 참 꼭! 받어 지녀야 하고 꼭!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그걸 받아서 잘 지킴으로 해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최고로 잘 지키면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서 미륵보살(彌勒菩薩)과 같이 거기서 법문을 듣고 수행을 하다가 미륵불이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실 때 같이 이곳에 하강(下降)을 해서 중생교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간쯤, 썩 그렇게 잘 닦지 못하고 중간쯤만 지키고 실천을 해도 어디에 태어나되 어느 세계에 태어나되 항상 훌륭한 가문에 좋은 몸뚱이에 왕(王)으로 태어나거나, 어디에 태어나더라도 모든 중생의 지도자가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정법(正法)으로 인도할 수 있는 그런 훌륭한 성현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제일 하급으로 닦는다 하더라도 축생이 된다 하더라도 축생 중에 왕이 되어 가고, 그러다가 큰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옥에 왕(王)이다. 혹 귀신의 세계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귀신의 왕(王)이 되는 거여. 왕이 되어 가지고 있다가 머지않아서 다시 이 불법을 만나게 되어 가지고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해서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이 이것이 불법(佛法)의 궁극에 목적이고 최고에 정법(正法)이지만, 우리가 설사 법문을 듣고 정법을 믿는다 해도 우리의 수행력이 알차지 못해서 생각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하리라’ 해도 실지 생활 속에서는 많이 일에 끄달리고 파묻혀서 그렇게 철저히 못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다달이 7일 동안에 법회(法會)를 열어서 부처님께 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또 법문을 듣고, 마치 차(車)가 가끔 보링(boring)을 한 것처럼 이렇게 최소한도로 한 달에 한 번씩은 이 법회에 꼭 나와서 참회하고 기도하고 축원하고 법문 듣고 이렇게 해서 또 한 달을 지내고 지내고 하다가 시월이 돌아오면 한 분도 빠지지 말고 이 법요식(法要式)에 참석을 해서 아주 대법요식을 통해서 일 년 동안에 쌓인 죄를 다 참회(懺悔)하고 새로 태어나서 새로 일 년 동안을 기약을 하고 또 하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영주묘난측(般若靈珠妙難測)이다. 지혜 반야, 반야(般若)의 그 신령스러운 구슬이 그 조화가 무궁무진하다.
법성해중(法性海中)에 친인득(親認得)이다. 법성(法性)의 바다 가운데, 법성은 우리의 몸뚱이와 우주법계가 다 법성해(法性海), 법성의 바다여. 법성해 가운데에서 그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반야의 영주(珠妙)를 우리는 캐야 할 것이다.

은현상유오온중(隱顯常遊五蘊中)이요. 그 반야의 신령스러운 보배 구슬, 용지불갈(用之不竭)이요 취지무궁(取之無窮)이다. 취해도 취해도 다함이 없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그 반야의 영주가 우리의 오온색신(五蘊色身) 가운데에 그 보배 구슬이 있다 그 말이여.
내외광명대신력(內外光明大神力)이여. 안으로 밖으로, 낮이나 밤이나 그 광명이 그 신기하고 묘한 힘이 반짝거리고 있다. 어떻게 반짝거리느냐? 눈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볼 때가 바로 그 반야영주(般若靈珠)의 빛나는, 눈을 통해서 빛나는 모습이요.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는 바로 그때가 반야영주의 작용이 귀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탐심(貪心)을 낼 때도 그 탐심이 어디서부터서 나왔는가? 반야영주로부터서 나오는 한 모습이여. 그러기 때문에 탐심이 나자마자 탁!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렇게 한다면은 찰나간에 났던 그 탐심도 정말 반야영주의 신령스러운 작용이요, 법신불(法身佛)의 한 법문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복전암(1~73)/(1~25)2023. 6. 6. 22:28

 

 

(복전암No.17)—1988년 관음칠성회 기도 입재(1988.10.01) (68분)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소음이 다소 많고 끊김이 있으니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36분.

 

(2) 약 33분.



(1)-------------------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개개(個個)이, 낱낱이 모든 사람의 얼굴 앞에 밝은 달이 희고, 사람 사람이 다리 밑에, 다리 아래에 맑은 바람이 불어. 하늘에 뜬 휘황찬 밝은 달이 누구 앞이라고 해서 특별히 밝게 비춰 주고, 어떤 사람 앞에는 비춰 주지 않고 한 그런 법이 없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누구 앞에나 똑같이 다 환히 밝혀 주고 있더라.
봄이나 가을에 맑은 바람이 불 때에는 누구 앞 다리 밑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 불어 주지, 이쁘다고 해서 더 시원한 바람을 불어 주고, 나쁜 사람이라 해서 바람이 불어오지 않고 그렇지를 않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 맑은 바람이 불고 있더라.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니,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그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지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아름답게 핀 꽃가지에 새가 올라가 울더라.

무슨 거울을 타파(打破)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졌냐?
그 거울이라 하는 것은 모든 반연(攀緣)을 따라서, 반연 따라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가지고 육식(六識)의 무명(無明) 망상(妄想)이 동요하는데, 그 경계(境界) 따라서 경계를 반연해 가지고 육식이 발동하는 것이 마치 거울 앞에 나타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과 같다 그 말이여.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비추이는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거울도 없어져 버리고 또 거기에 비추던 청황적백(靑黃赤白) 삼라만상 모든 밖에 경계도 다 없어져 버리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이 말이여.

저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보살(菩薩)과 일체중생(一切衆生) 내지는 짐승과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 본 성품은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어. 다 똑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성(佛性)이여. 그러건만 경계에 반연해서 번뇌망상으로 인해서 그 원만구족한 불성이 가리워져 가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오늘 무진년(戊辰年) 시월 초하루, 이 복전암에 매년 거행하는 행사로 칠성회 관음기도가 봉행되는 그 입재날입니다. 40년, 40년 전부터서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오늘날까지 거행한 법요식입니다. 그전에는 고봉 스님께서 설법을 해 주시고, 그다음에는 전강 선사께서 설법을 해 주시고, 전강선사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는 부득이 산승(山僧)이 와서 해마다 이 법상에 올라왔습니다.
해마다 거행하게 되면 사람들은 만성(慢性)이 되어 가지고 ‘으레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아무런 마음에 감동도 없고, 마음을 가다듬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예사로 그날그날을 지내게 됩니다.

사람의 목숨은 이 세상에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 나 가지고 오래 살면 칠팔십 년, 그렇지 않으면 육칠십 년, 빨리 죽으면 삼사십 내지 열살 미만에도 죽고, 나와서 어려서도 죽고, 천하에 믿지 못하고 무상(無常)한 것이 이 사람의 목숨입니다. 이 무상한 세계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숙세(宿世)의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은 이 허망한 목숨이 영원한 줄 알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무상하고도 짧은 인생에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으면서도 그 불법의 위대함과 감사함을 아지를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참나를 깨닫지 못한 채 그럭저럭 이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근기(根機) 따라서 이 세간(世間)을 보게 되는데, 이 세상은 똑같이 하늘에는 해와 달과 별이 있고, 아침에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지고, 춘하추동 사시절 따라서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오곡백과가 결실을 합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립니다. 이 똑같은 세계를 보고서 근기에 따라서 그 관점이 다릅니다.

마치 물은 한 물인데, 고기는 그 물을 보고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사는 집. 조끔도 그 물속에 헤엄을 치고 오르락내리락 다니면서 숨이 맥힌 줄을 모르고 아주 편안합니다. 자기 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 다음에 아귀(餓鬼)는 물을 보고서 불인 줄 알고 겁을 냅니다. 아귀는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기 때문에 처음에는 물로 알고 그놈을 먹는데, 물을 먹기만 하면 목구녁에서 불이 훨훨훨훨 타 가지고 몸뚱이가 타 죽어 갑니다. 그래 몇 번이고 그렇게 해보다가 확실히 ‘아하, 저것은 불이로구나’ 이렇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돼. 그래서 아귀는 물을 보고 불인 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 하늘나라에서는, 하늘나라에 모다 신(神)들은 지상(地上)의 물을 보고서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리(琉璃)라고 생각을 해. 번쩍번쩍 훤히 그러니까 하늘나라 있는 사람들은 물을 보고서 유리로 생각을 한다 그 말이여.

사람은 물을 보고서 물이라고 생각하는데, 아귀는 아귀대로 달리 보고,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은 하늘나라 사람대로 달리 보고, 고기는 고기대로 달리 보듯이, 이 세계에 삼라만상 두두물물 이 온 세계를 갖다, 세간(世間)을 갖다가 범부(凡夫)는 세간낙(世間樂)을 보고 그것을 낙(樂)이라고 생각한다.
오욕락(五欲樂)을 보고서 참 기쁘게 생각하고, 그 오욕락이 참 좋은 것인 줄 알고 그 오욕락에 젖어서 거기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하고 거기서 유희(遊戲)를 하면서, 오욕락이 진짜 괴로움에 원인인 줄 깨닫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재산에 대한 거, 명예 권리에 대해서,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편안한 그 안락에 대해서 그리고 잠자는 거, 재색식명수(財色食名壽) 이 다섯 가지의 오욕락을 그것이 인간으로서 최고에 목적이라 생각을 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쇠고랑 찰 줄도 모르고, 감옥에 갈 줄도 모르고, 그것을 마음껏 무제한으로 즐기다가 지옥에 갈 줄을 몰라.

불법(佛法)을 믿고, 인과법(因果法)을 믿고, 나아가서 확실히 도(道)를 닦아서 깨달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과법만 믿어도 그런 짓을 아니할 텐데, ‘아 그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재산, 명예, 권리, 먹을 거, 잠자는 거, 그러고 이런 것들이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이리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만 누리고 욕심을 안 내도 될 텐데, 무제한으로 욕심을 내 가지고, 장관한 사람은 장관한 대로, 대통령한 사람은 대통령한 사람, 무제한으로 욕심을 내 가지고 온 세계를 자기 혼자 다 차지하고, 다 누리기 위해서 법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백성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막 그냥 긁어 담다가 쇠고랑을 찬 사람이 지금 우리 이 현재에 얼마나 많냐 그 말이여.


소승(小乘), 이승(二乘)들은,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 이승들은 ‘이 삼계(三界)를 고(苦)라’ 이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여. 정말 이 삼계는 괴로운 것이다그러기 때문에 ‘이 삼계는 불집이다(三界火宅)’ 이렇게 생각을 해. 소승에 있어서 성문과 연각들은 불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은 이 삼계에서 벗어날까?’

삼계(三界)라 하면은 생사인데, 생로병사(生老病死)인데,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 전체가 이 생로병사요, 이 모든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요, 우리의 육체는 생로병사요, 우리의 마음 생각은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낳다 하면은 늙고, 늙었다 하면 병들고, 병들었다 하면 죽게 되니까 그러니까 전부가 고통이여.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 말이여. 이 세상에 생겨난 물건치고 결국은 부서져서 없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으니 이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니, 어떻게 하면은 늙어서 병들어 죽지 않느냐? 따져보면은 태어나지 아니해야만—태어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아니하면 늙을 것도 없고, 병들 것도 없고, 죽을 것도 없다. 그래서 소승들은 태어나지 않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어. 그래서 생각도 일어나면 없애 버리고, 일어나면 없애 버리고 해 가지고 생각도 안 일어나게 맨들고, 몸뚱이도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적공(積功)을 들여서 이룬 것이 소승사과(小乘四果)다 그 말이여.

그러면 보살(菩薩), 모든 보살들은 이 삼계(三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삼계는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모든 반연(攀緣)해서 일어나는 생각도 그것도 본래 공(空)한 것이요, 우리가 보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도 전부가 다 공(空)한 것이다.
공(空)한 것이 본래는 공한 것인데, 중생이 망령된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될 뿐이지 그 자체는 공(空)한 것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눈병 난 사람이 이 허공에 아무것도 없건마는, 마치 무슨 허공에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 난 사람이 볼 때는.
눈병이 없는 사람이 보면 말간히 깨끗하니 아무것도 없는데, 허공에. 눈병 난 사람이 보면은 침침해 가지고 무슨 꽃이 피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눈병 든 사람의 눈으로 보듯이, 망령된 중생(衆生)의 무명심(無明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계가 모두 실지로 있는 것처럼 보여. ‘생로병사(生老病死)도 본래 없건마는, 본래 공한 것이지만 중생의 망령된 무명 번뇌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생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지는 모두가 다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보살들은 보는 거여.

그러면 모든 부처님은 이 삼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우리 중생들은 ‘마음’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뭘 보면 눈을 통해서 뭣을 볼 줄도 알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도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도 맡을 줄도 알고, 혀를 통해서 모든 맛을 볼 줄도 알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느낄 줄을 알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것, 이놈이 마음인 줄 안다 그 말이여.
그러나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그놈 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도 마음이요, 이 하늘도 마음이요, 태양도, 별도, 달도,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전부가 오직 한마음 뿐이다 이것이여.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부처님은 보시는 것이여.

그러니 우리 범부(凡夫)가 보는 것과 소승, 성문(聲聞) 연각(緣覺)이 보는 것과 또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 그런 보살들이 보는 것과 모든 부처님이 보는 바가 그렇게 다 다르다 그 말이여. 똑같은 삼계를 두고서 보는 바가 달러. 그렇게 달러.

그런데 부처님은 왜 때로는 ‘삼계(三界)가 화택(火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삼계(三界)가 다 공(空)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삼계가 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도 말씀하셨냐 그 말이여.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부처님은 중생에게는 중생이 알아들을 말로써 설하셨고, 소승에게는 소승이 알아들을 말로써 설법을 하셨고, 보살에게는 보살이 알아듣는—보살도 대승보살, 또 중승보살, 그 보살도 여러 계층이 있어서 그 각기 그 계층의 보살에 맞춰서 설법을 하셨고,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설법을 하셨어. 그래 놓은 것이 49년 동안 설하신 12부 경전이요, 팔만사천 경전이다 그 말이여. 그것이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說)이여.

아무리 훌륭한 법(法)을 설한다 하드라도 자기 근기(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소용이 없어. 그 근기에 맞춰서 법을 설해 주어야 일단 알아듣고, 그놈을 알아들은 다음에는 또 조끔 더 깊은 법문을 하고, 또 그 법문을 알아들으면 또 저 더 높은 법문을 설해서 차츰차츰 그 근기에 맞춰서 법을 설하시다 보니 팔만사천(八萬四千)의 그 많은 법을 설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에 가서는 부처님은 무슨 법을 설하셨냐 하면은 「나는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어.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시고서도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그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신 분이 아니고, 헛된 말씀을 하신 분이 아니고, 실답지 않은 바를 설하신 바가 없는데,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시고서도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신 이게 무슨 말씀일까?
중생의 생각으로는 많은 법을 설한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부처님 분상(分上)에는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면 우리 중생들은 어떻게 부처님의 법문을 알아듣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 가서 우리도 해탈도(解脫道)를 증득을 해야 할 것인가?


부용산(芙蓉山), 중국에 부용산에 영훈(靈訓) 선사가 처음으로 귀종(歸宗) 선사라고 하는 큰 도인을 가서 친견을 했습니다.
그 귀종 스님께 묻기를 “어떤 것이 이 부처입니까?”
귀종 선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너에게 부처님을 말해 주기는 어렵지 않지마는, 니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할까 두렵다”

그러니까 그 영훈 선사가 “큰스님은 가장 진실한 말, 실다운 말을 하시는 도인으로 내가 믿고 있는데, 감히 어찌 제가 큰스님의 법문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귀종 스님이 “곧 니가 바로 부처님이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영훈 선사가 “그러면 어떻게 보림(保任)을 해 가겠습니까?”
귀종 스님 대답하기를 “일예(一翳)가 재안(在眼)에 공화(空花)가 난타(亂墮)니라. 한 티가 눈에 있으니 공화(空花)가 어지러히 떨어지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영훈 선사는 그 ‘니가 바로 부처라’ 한 귀종 스님의 한마디 말씀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렸고, 확철대오한 뒤에 ‘일예재안(一翳在眼)에 공화난타(空花亂墮)라’ 한 그 말 한마디에 깨달은 뒤에 보림(保任)을 하는 법을 여지없이 알아 버렸습니다. 터득을 해 버렸습니다.

지금 이 복전선원 법당 안과 마당에 천 명에 가까운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였습니다. 영훈 선사는 ‘니가 바로 이 부처다’ 한 귀종 선사의 한마디에 확철대오를 했거니와 금일 이 자리에 모인 사부대중은 과연 이 법문을 듣고서 과연 확철대오를 했겠느냐, 말았느냐?
이 가운데에는 반드시 ‘니가 바로 이 부처라’ 한 이 한마디에 여지없이 바로 봐 버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법문을 여지없이 바로 봐 버린 사람이 있건마는, 어째서 이 가운데에는 아직도 그 말은 알아들으면서도 왜 바로 그 말을 바로 깨닫지를 못했을까?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영훈 선사는 여지없이 귀종 스님의 그 말을 조끔도 의심 없이 바로 믿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바로 자기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버렸어. 조끔도 의심이 없기 때문에 ‘바로 자기 자신이 부처다’
믿음 하나가 철저해 버리면 긴 법문이 필요 없고, 많은 경전이 필요가 없어. ‘네가 바로 부처다’ 하고 그 말 한마디면 무슨 더 구구한 법문이 필요할까?

「삼계가 곧 한마음이다.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화엄경』에 첫머리에 있는 게송(偈頌)인데, 입으로는 우리는 수없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날마다 외우고, 귀에 따껭이가 앉도록 떠껭이가 앉도록 읽고 외우고 들었지만 우리는 신심(信心)이 부족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아집(我執)이 있고,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에 그 말을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들으면서도 그 말이 마음에 와서 계합(契合)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는 중생의 살림살이여. ‘내 것이다, 나다, 내 몸뚱이다, 내 재산이다, 내 남편이다, 내 자식이다’ 무엇이든지 보면은 자기와 관련을 시켜. 그래 가지고 내 것을 삼을려고 그러고, 내 것이다하고 그놈을 붙잡고, 그놈을 붙들고 늘어져. ‘내 몸뚱이, 내 재산, 내 집’

어찌 그것이 내 몸뚱이여?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서 잠시 이 몸뚱이를 이루고 있는데, 어찌 그것이 내 것이냐 그 말이여. 재산도 잠시 자기가 관리만 하고 있는 거여. 자기 집도 자기가 잠시 관리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가 죽을 때 그것을 짊어지고 가겠습니까? 수백억 되는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재산이겠습니까? 잠시 자기가 관리만 하고 있는 거여.
자기가 그것 다 먹지도 못하고, 먹어 봤자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등기를 자기 앞으로 해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여. 잠시 자기가 관리하고 있다가 이 몸뚱이에서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영혼은 떠나 버리는데 재산을 어디로 가지고 가겠습니까? 등기 문서 관 속에다 넣어 가지고 간다고 해서 그것이 저승에 가서 그것이 자기 재산 되겄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신라 · 고려 · 백제 · 이조에 이르기까지 많은 임금님이 계셨습니다마는, 그 시대 그 나라에 임금 노릇만 했지 그 재산 하나도 못 가지고 가고, 산이나 들이나 논, 고대로 있습니다. 그 임금이 죽을 때 못 가지고 갔습니다.
해방 후로 여러 대통령이 있었습니다마는, 제1 · 제2 · 제3 · 제5 · 지금 6공화국까지 왔습니다마는 대통령 자기 앞으로 해 놔 봤자 못 가지고 갑니다. 가지고 가지도 못할 것을 뭐하러 그렇게 욕심을 부려 가지고 그 백성들한테 지탄을 받고 쫓겨가냐 그 말이여. 발 디딜 곳이 없어져 버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밤잠 못 자고, 먹을 것 못 먹고, 입고 싶은 것 못 입고, 아끼고 아껴서 재산을 모아 놔 봤자 못 가지고 갑니다. 못 가지고 갈 것을 자기 먹을 만큼 그날그날 먹으면 족하지, 뭣하러 그렇게 잔뜩 해 놓고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벌벌 떨다가 죽어가.
그래 가지고 자식들이 그놈을 서로 먹을려고 웬수가 돼 가지고, 재판하고 싸우네. 차라리 없었으면 형제간이 화목하게 살 것을, 재산 많이 냉겨 놨기 때문에 그놈 서로 차지할려고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싸워.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정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달라야 되겄습니다. 그것 하나만 깨달라서 불같은 욕심만 버려 버리면, 그날로 다리 뻗고 잘 수가 있습니다.(처음~35분42초)





(2)------------------

산 목구녁에 거미줄 치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자기 평생 먹을 것은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터무니없이 많은 욕심을 내 가지고 산데미처럼 쌓아 올릴려고 하니까 서로 웬수가 되고 싸움이 되지, 적당한 방, 좋은 방, 바른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먹을 만큼 살면, 그래도 전생(前生)에 복(福)을 짓는 사람은 큰 부자가 됩니다.
부자가 되면은 자기 먹을 만큼 내놓고는 자꾸 보시(布施)를 해야 됩니다. 절에도 보시하고, 사회에도 보시를 하고, 없는 사람에게 장학금도 주고, 병든 사람 병도 낫궈 주고 해서 자꾸 쓰면 쓴 만큼 또 생깁니다. 그래 가지고 금생에도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에 쓰고 남은 것입니다.
금생에 다 재수(財數)가 있어서 사업이 잘된 사람은 전생에 다 그만큼 복(福)을 지어서, 복(福)에 종자(種子)를 심어 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내생(來生)에도 잘될라면 금생에 많은 보시를 하고 복에 씨를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이것을 갖다가 버려 버리면 거기서 비로소 도(道)의 제일 계단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아상! 아상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상(我相)이 있어 가지고서는 세상없는 짓을 해도 도(道)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놈을 없애 버려야 ‘니가 바로 부처다’ 해도 그 말이 탁! 와서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어 버려. 아는 것이 아녀.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인 것입니다.
‘꿀을 먹으면 달다’ 하고 아는 것과 꿀을 직접 입에다가 한 숟갈 탁! 넣어 놓고 먹은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좋다하고 아는 것과 실지로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아는 것과 실지로 아상(我相)이 무너져 가지고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 뜻을 확실히 그 뜻을 깨달라서 계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我相)을 없앨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안 없어져. 어떻게 해야 그것이 아상이 없어지냐 그 말이여.
그 아상 없애는 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수백만 번을 불러. 부르다 보면은 제절로 번뇌 망상이 끊어지면서 아상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어진다 그 말이여. 그런 염불(念佛)하는 방법도 있고, 그보다 더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썽이 날 때 ‘이 썽내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고 있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해서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썽날 때도 이뭣고?
속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천하 맛없는 소리지만 콱! 믿고 부처님이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 왜 우리를 속일 리가 있겠는가, 송담(松潭) 스님이 왜 우리에게 거짓말할 것인가 확실히 믿고서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이뭣고?

밤낮 이뭣고?, 법문 인자 그 소리 벌써 수백 번 들었으니까 그만하고 법상에서 내려가 주었으면, 빨리 가서 밥을 먹어야 할 텐데그런 생각을 하지를 말고, 지금 이 법문을 들으면서도 ‘이뭣고?’ 이렇게 하시라 그 말이여.
아들딸 모다 대학 졸업시키고 장가보내 논 다음에 그다음에 참선을 하리라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끔 이 자리에서부터 이뭣고?~ 이뭣고?~’ 하면서 법문을 들으시라 이 말이여.

그러면 법문이 끝난 다음에 또 밥상을 향해서 가면서도 ‘이뭣고?’를 하라 그 말이여. 또 밥상을 따악 만나서 한 숟갈 떠먹으면서도 ‘이뭣고?하라 그 말이여.
법문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저 뒤안에 가서 밥을 먹고 있는 사람이 지끔 있다 그 말이여. 지끔 이 자리에 따악 앉어서 법문 듣고 계신 것만 해도 지금 저 뒷채에 가서 법문이고 뭣이고 밥부텀 먹고 보자 틀림없이 지금 뒤안에 가면 몇 명인가는 지금 밥을 먹고 계신다 그 말이여. 나 여기서도 환히 다 보여.

그러면 이 자리에 계신 분은 그분보다는 조끔 나은데, 법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똥이 빠지게 지금 뒤로 쫓아갈 판인데, 그냥 그 밥상을 보고서 이뭣고?가 어디 벌써 도망가 버리고, 그저 그냥 밥이 그냥 숟가락 잡기가 무섭게 밥을 입에다 떠놓고 씹기도 전에 반찬 막 집어넣고 꿀떡꿀떡 샘킨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가슴이 체해 가지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어째서 그렇게 서둘지 안 하고 ‘이뭣고?’를 하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떠먹어도 다 그 밥 다 먹을 수가 있고, 그렇게 부리나케 쫓아가지 안 해도 다 넉넉히 밥을 다 지어 놨습니다.

밥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나, 집에 가서 옷을 벗을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뭣고?’를 챙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어려울 일이 아닙니다. 그게 뭐 머리가 좋다고만 해서 할 수가 있고, 지식이 있다고만 할 수가 있고, 뭐 젊다고만 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바보처럼 ‘이뭣고?’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 어렵습니까?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 그러지만, 망상 일어난 거 겁낼 거 없습니다. 망상이라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그 망상이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그 우리 그 마음자리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자리로부터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망상이 일어난 것은 천만다행인 것입니다. 그놈이 안 일어나면 도(道)를 못 닦습니다.
그러니 그 일어나는 놈을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냥 그 일어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합니다. 그 망상 일어나는 그 근본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일어나는 망상을 가지고 그 망상 일어나는 그 뿌리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뭣고?이 망상 일어나는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일어나는 거 갖고 일어나는 놈을 생각하는 거여. 그러니까 그 뭐 못할 거 없어요. 바보도 망상은 일어나고, 천재도 망상은 일어나.(녹음 끊김)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이뭣고?인지 망상인지 뒤범벅이 되어 가지고, 되다가 말다가, 엎어졌다가 뒤집어졌다 야단이지만, 그까짓 거 상관없어요. 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아!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될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말이여.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3년, 지극히 하다 보면 할려고 안 해도 떠억 되어져 버려. 그냥 제절로 되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할려고 안 해도 제절로 되어질 때는 기가 맥히거든. 아! 그때는 누가 뭐 욕 좀 해도 썽도 안 나게 되어 버리고, 뭐 누가 좀 내 것 좀 가져갔다 해도 뭐 그렇게 그냥 억울할 것도 없고. 그냥 옛날에 자기와는 영 딴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 별로 썽도 안 내고, 별로 그렇게 내 것에 대해서 그렇게 애착심도 없고, 그전에는 자식이라 하면은 벌벌 떠는데 자식에 대해서도 담담해져. ‘저는 지 복(福) 있으면 잘살겠지, 부모니까 부모 도리로써 가리킬 만큼, 키울 만큼 키워서 가리킬 만큼 가리켜 놓으면 지가 지 복 있으면 잘살지, 뭐 내가 저를 위해서 내가 구태여 종노릇 할 것 없어’ 아주 자식이지만 담담해. 그렇다고 해서 자식이 사랑스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식을 사랑할 줄을 알아야 혀.

지금 여러분들은 ‘내 자식, 내 새끼’ 하면 벌벌 떨지마는, 실지는 자식을 참되게 사랑할 줄 모릅니다. 중생심으로 잔뜩 애착심만 갖고 벌벌 떨지, 참으로 자식을 옳게 기를 줄도 모르고, 자식을 옳게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식을 옳게 사랑하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자식 밖에는 모르고, 키워 놓으면 그 자식이 웬수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놈이 커서 장가들면 지 지집밖에 모르고, 저도 자식새끼 낳아 놓으면 지 자식새끼만 이뻐한 줄 알지, 부모는 뭐 행랑(行廊) 할머니 정도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늙으면 공원으로 가서 갖다 버려 버리고, 양로원 앞에다 데리고 가서 내버리고 오는 자식이 지금 수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은 옳게 가르킬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거든요.
그거 뭐 이뻐서 맛있는 것은 자식 멕일라 그러고, 좋은 것은 자식 입힐라 그러고, 논밭 팔아서 자식만 가리키면 되는 줄 알지만, 어리석은 마음으로 자식을 키워 놓으면 그 자식은 웬수를 길러 논 것이거든.

여러분이 참으로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법문을 옳게 들어야 자식도 옳게 기를 줄을 압니다. 옳게 길러 놔야 저도 옳은 사람이 되고, 지가 장가를 가던가 자식을 낳고 나중에 크게 훌륭하게 될수록에 부모에게 효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태까지 자식을 옳게 기를 줄을 모르고 오늘날까지 살아오신 것입니다. 다 그것 탁! 털어서 없애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 자식,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애착심(愛着心) 그것 털어 없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자식을 옳게 기를라면 ‘이뭣고?’를 하셔야 합니다.
‘이뭣고?’를—진짜 자식은 인자 저만큼 놔두고, ‘이뭣고?’를 지극정성으로 하시면 자식을 옳게 사랑할 줄도 알고, 옳게 기를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재산도 옳게 벌 줄도 알고, 옳게 관리할 줄을 압니다. 장관이 되고 대통령이 되어도 이 ‘이뭣고?’를 해야 옳은 장관 노릇도 하고, 옳은 대통령을 합니다. ‘이뭣고?’를 하는 대통령, ‘이뭣고?’를 하는 장관 같으면 저렇게 하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참 옳은 대통령을 했다면 대통령하고 내놓으면 국부(國父)가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하고 난 뒤에도 호위병도 필요 없고, 경비병도 필요가 없습니다. 맨 손으로 맨 몸뚱이로 팔도강산을 돌아다녀도 간 곳마다 ‘우리 국부님 오셨다’고 남녀노소가 모다 떠받들고 받들 것입니다. 서로서로 이리 오셔서 하룻밤 쉬고 가라고 할 것입니다.
왜 대통령을 하면 그렇게 못합니까? 그런 대통령을 해버려야 바로 그 대통령이 세계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것입니다. 아쇼카(aśoka)왕, 아육왕(阿育王) 같은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아육왕도 처음에는 백 명이나 되는 그 태자(太子)를 죽이고 자기가 왕자가 되었고, 그 궁중에 있는 모든 왕족들 백 명을 다 때려죽였습니다. 그리고서 이웃나라 수십만 명을 다 때려죽이고 이웃나라를 모다 뺏으고 그렇게 무서운 왕이었었지마는, 불법(佛法),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서 깊이 참회(懺悔)하고부터서 그리고 믿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어 가지고, 팔만사천 탑(塔)을 세우고 불법(佛法)으로써 정치를 해 가지고 전륜성왕이 되었습니다.

아사세(阿闍世)왕도 자기 아버지 빈바사라(頻婆娑羅)왕을 굶겨 죽여 가지고 자기가 왕이 되었지마는 그래 가지고 왕이 된 뒤에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 가지고 잠도 못 자고 밥을 못 먹었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께 참회하고서 그 병이 낫고, 그래 가지고 전륜성왕이 되어 가지고 평생토록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받들고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는 칠엽굴(七葉窟)에서 제1회 결집(結集)을 할 때에 모든 잡술 것, 입을 것, 약(藥)과 모든 것을 그 오백성승(五百聖僧)에 모든 것을 시봉(侍奉)을 해 가지고 제1회 결집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평생토록 전륜성왕으로서 정치를 잘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인도를 싸움을 하지 아니하고 인도를 통일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왕과 이러한 대통령이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 이 대한민국에서 반드시 태어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우리 대한민국에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에는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전륜성왕과 같은 그러한 훌륭한 대통령이 태어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반드시 세계를 통일하게 될 것입니다. 원자탄, 수소탄, 그러한 무서운 무기로써 세계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으로써 평화로써 진리로써 세계를 통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이 서해(西海)가 육지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일본은 바닷속에 잠겨 버리고 이 서해가 육지가 되어 가지고 그때 거기에는 전륜성왕이 왕이 되어 가지고 세계평화를 이룩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나는 그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지끔 우리 대한민국에 태어난 우리 모든 백성들이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너도나도 ‘이뭣고?’를 해서 확철대오한 불보살(佛菩薩)들이, 살아 있는 불보살이 태어날 때에 우리의 후손들에 그러한 평화로 전륜성왕이 될 그러한 자손들이 대대손손(代代孫孫)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뭣고?를 아니하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재산을 모이고, 명예와 권리를 위해서 악법을 맨들아 가지고 남을 죽이고 그래 가지고 될 것입니까?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하고  천지인정몰양반(天地人情沒兩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하고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이다. 내 마음에 거슬리면 썽을 내고, 내 마음에 순(順)하면 기뻐한다 그 말이여.
천하인정(天下人情)이 몰양반(沒兩般)이여. 온 천하 사람이 다 이 두 가지에 다 빠져 있드라 그 말이여.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고 사는 사람은 제 마음에 안 들면 썽내고, 제 마음에 합당하고 자기를 칭찬해 주고 자기의 모든 좋은 것을 주면 좋아한다 그 말이여.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가 있냐 그 말이여.

그러나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여, 정말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 있다 그 말이여. 내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순(順)한다고 해도 결국은 그것이 머지않아서 다시 그것이 내 마음에 거슬러진 것으로 변해 버리고 말더라 그 말이여.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명예나 권리나 할 것 없이, 인간적으로나, 내 마음에 들었고 내 마음에 합당하고 좋다 하더라도 몇 조금 못 가서 다시 변해 버려. 확실히 영원성이 없고, 허망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믿어 버려라.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이여, 똑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눈을 바로 뜨고서 스스로 자기의 마음, 자기 스스로 속고 있고, 속이고 있는 것을 분명히 깨달라 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만 깨달라 버리면 우리는 그날부터 마음이 편안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이 과연 무엇 밖에는 없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7일간 정성스럽게 7일 기도를 봉행하게 되는데, 여기에 날마다 절에 오셔서 하실 분은 하시고 일이 바뻐서 사정상 못 나오시는 분은 댁에서 일을 하시면서 열심히 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다 자기 정성들인 만큼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크고 작은 소원, 멀고 가까운 소원, 반드시 소원은 정성들인 만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일 날에는 불명(佛名)을 아직 타시지 아니하신 분은 불명을 타시고, 5계(五戒)를 받게 되십니다. 불명을 이미 조실 스님께 탔거나, 산승한테 타신 분은 다시 또 타실 필요가 없습니다. 해마다 보면 불명을 드리면 거저 준다 해 가지고는 불명 타신 분이 너도나도 해 가지고 봉투를 둘, 셋, 넷씩 받어 가지고 자기 불명이 뭣인 중도 모르고 농 속에다 넣어 놓고. “불명이 뭣입니까?” 하면 “모릅니다”

“아! 왜 안 탔습니까?”
“예, 그것 다섯 장이나 있어요”

“다섯 장이나 있으면서 불명을 모릅니까?”
“그것이 뭣이던가? 문수심이던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미 타신 분은 오늘 가셔서 댁에 가서 봉투를 꺼내 보시고 ‘아하 이것이로구나’ 그것을 염불하듯이 오늘 수백 번 해 갖고 확실히 자기 불명(佛名)을 알고, 그래 가지고 도반(道伴)들이나 친구들이나 딸이나 며느리한테,

“내 불명은 약허약허한데 앞으로 나를 부를 때는 ‘아무개할머니’ 부르지 말고 불명을 불러라. 불명을 불러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니 불명을 불러라. 너도 좋고 나도 좋은데 불명을 부르지 왜 ‘아무개 엄마 그것은 세속의 이름이니 세속적인 것은 불러 봤자 업(業)밖에는 안 되는 거고, 불명을 불러야 업장이 소멸이 되고 공덕이 된다고 하니, 우리야 그 말을 믿고 그렇게 부르자이렇게 하시라 그 말씀이여.

그래서 불명이 없는 분에 한해서 불명을 타시고자 하는 분은 오늘 이 주소, 성명(姓名)을 적어서 사무실에다가 내놓고 가십시요.
그렇게 신청도 안 하고 막 하니까 공것은 양잿물도 먹는다고, 막 그러니까는 두서(頭緖)가 없고 이 존엄성이 없어. 그래서 반드시 신청을 한 분에 한해서 계첩(戒牒)을 노나드릴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돈 받을라고 저런가보다?
돈은 안 내도 좋습니다. 돈 안 내도 좋으니까 분명히 신청을 하고 소중하게 받아 가셔서, 그리고 불명을 타신 분은 또 5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타시고 그렇게 해서 화두(話頭)까지 타서 이제 금년부터서는 정말 이 복전암 칠성회원 여러분들은 불명도 타고, 5계도 받고, 또 화두도 탄 최상승 보살(最上乘菩薩)이 된다 그 말이여.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참석하신 분은 7일간을 열심히 정진, 정근을 해서 기도를 해서 반드시 소원성취하시게 될 것을 저는 부처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제가 보증을 서겠습니다.
그 대신 열심히 하십시요.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하십시요. 7일간 오대산이나, 저 설악산이나, 저 남해 보리암, 그런 데 간 것처럼 이 복전암도 그렇게 아시고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을 읊고 내려가겠습니다.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하고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하고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이요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한 등불이 능히 백천 등(燈)에다가 불을 댕겨서,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한 등불만 있으면 다른 등에도 계속 그 등불을 댕기고 또 댕기고 하면 백천 등이 다 환히 밝을 수가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이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탄생하셔 가지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더니, 그 부처님이 출세하셔 가지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출현하시고, 이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그 불법(佛法)의 등이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와 그 등(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환히 밝게 된다 그 말이여.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일구(一句)가 결국 오늘 이 복전선원 7일 기도 입재일에 낱낱이 여러분께 이 법을 설해 드리게 된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한 등불을 여러분의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는 소식이드라.

한번 깊이 바로 믿어버리고 믿어버리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여, 모든 성현도 전할 수 없는 그 등(燈)—우리가 초파일에 켜는 등은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 있고, 전깃불이 나가버리면 꺼져버릴 수 있는데, 모든 성현이 전할 수 없는 등(燈)이 있어.
폭풍우가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그 등이 그 불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놈을 봐 버리면 그 불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환하니 비춰. 그 불은 저 태양보다도 더 밝은 등불인 것입니다. 그 등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등불 바로 밝은 도리를 ‘이뭣고?’를 하면 그것을 바로 봐 버리게 되는 것이여. 바로 그 등불에 그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여.

이 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이렇게 7일 기도를 해마다 하는 것은 형식 껍데기로는, 가장 가까웁게 쉽게 우리의 눈에 보이기에는 우리의 중생으로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이 기도를 한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 뜻은 여러분의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허망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기 위해서 칠성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35분43초~1시간8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 / 이 무상한 세계에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나서 숙세(宿世)의 수승한 인연으로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습니다 / 똑같은 세계를 보고서 근기에 따라서 그 관점이 다르다 / ‘물’을 보고 고기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아귀(餓鬼)는 물을 보고 불인 줄 알고 겁을 냅니다. 하늘나라에 신(神)들은 지상(地上)의 물을 보고 유리(琉璃)라고 생각을 해.

범부(凡夫)는 오욕락(五欲樂)을 보고 좋은 것인 줄 알고, 오욕락이 진짜 괴로움에 원인인 줄 깨닫지를 못합니다 / 성문(聲聞) 연각(緣覺), 이승(二乘)들은 ‘이 삼계는 괴로운 것이다 ‘이 삼계는 불집이다(三界火宅)’ 이렇게 생각을 해 / 보살(菩薩)은 이 삼계(三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삼계는 공(空)한 것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도 본래 없건마는, 본래 공한 것이지만 중생의 망령된 무명 번뇌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생사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지는 모두가 다 공(空)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보는 거여.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하신 12부 경전, 팔만사천 경전이 모두가 다 방편설(方便說)이다 / 궁극에 가서는 부처님은 무슨 법을 설하셨냐 하면은 「나는 한 법(法)도 설한 바가 없다」 이렇게 법을 설하셨어.
귀종(歸宗) 선사와 영훈(靈訓) 선사의 법담 / 믿음 하나가 철저해 버리면 긴 법문이 필요 없고, 많은 경전이 필요가 없어.

재산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니다 /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정말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깨달라야 되겄습니다 / 아상(我相)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

아상(我相)을 없애는 가장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 밥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집을 향해서 걸어갈 때나, 집에 가서 옷을 벗을 때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이뭣고?’를 챙기는 것입니다 / 망상이 일어나면 그 일어나는 놈을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냥 그 일어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불법(佛法)을 믿고 부처님의 말씀을, 법문을 옳게 들어야 자식도 옳게 기를 줄을 압니다. 진짜 자식을 옳게 기를라면 ‘이뭣고?’를 하셔야 합니다 / 아쇼카(aśoka)왕, 아육왕(阿育王)과 아사세(阿闍世)왕 이야기.

(게송)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 / 서로서로 불명(佛名)을 불러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공덕이 된다 / (게송)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니,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그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지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아름답게 핀 꽃가지에 새가 올라가 울더라.

무슨 거울을 타파(打破)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어졌냐? 그 거울이라 하는 것은 모든 반연(攀緣)을 따라서, 반연 따라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가지고 육식(六識)의 무명(無明) 망상(妄想)이 동요하는데, 그 경계(境界) 따라서 경계를 반연해 가지고 육식이 발동하는 것이 마치 거울 앞에 나타난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과 같다 그 말이여.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비추이는 그 거울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거울도 없어져 버리고 또 거기에 비추던 청황적백(靑黃赤白) 삼라만상 모든 밖에 경계도 다 없어져 버리면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이 말이여.

저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보살(菩薩)과 일체중생(一切衆生) 내지는 짐승과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그 본 성품은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어. 다 똑같이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불성(佛性)이여. 그러건만 경계에 반연해서 번뇌망상으로 인해서 그 원만구족한 불성이 가리워져 가지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이여.

모든 부처님은 이 삼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이 삼계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묘(妙)한 것이다. 다 묘하게 밝은 마음이다. 오직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묘(妙)하게 밝은 한마음이다’ 이렇게 보는 거여.

우리 중생들은 ‘마음’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뭘 보면 눈을 통해서 뭣을 볼 줄도 알고, 귀를 통해서 무슨 소리도 들을 줄 알고, 코를 통해서 냄새도 맡을 줄도 알고, 혀를 통해서 모든 맛을 볼 줄도 알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것을 알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느낄 줄을 알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것, 이놈이 마음인 줄 안다 그 말이여.
그러나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댕기는 그놈 뿐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도 마음이요, 이 하늘도 마음이요, 태양도, 별도, 달도, 산천초목, 두두물물이 전부가 오직 한마음 뿐이다 이것이여.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따로 없다’ 이렇게 부처님은 보시는 것이여.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이것을 갖다가 버려 버리면 거기서 비로소 도(道)의 제일 계단에 올라서는 것입니다. 아상! 아상이 무너져 버려야 도(道)의 제일 관문(關門)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상(我相)이 있어 가지고서는 세상없는 짓을 해도 도(道)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놈을 없애 버려야 ‘니가 바로 부처다’ 해도 그 말이 탁! 와서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어 버려. 아는 것이 아녀. 아는 것과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깨닫는 것과는 천양지판(天壤之判)인 것입니다.
‘꿀을 먹으면 달다’ 하고 아는 것과 꿀을 직접 입에다가 한 숟갈 탁! 넣어 놓고 먹은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좋다하고 아는 것과 실지로 밥 한 그릇을 먹고 나는 것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아는 것과 실지로 아상(我相)이 무너져 가지고 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 뜻을 확실히 그 뜻을 깨달라서 계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我相)을 없앨려고 아무리 해도 그것이 안 없어져. 어떻게 해야 그것이 아상이 없어지냐 그 말이여. 그 아상 없애는 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수백만 번을 불러. 부르다 보면은 제절로 번뇌 망상이 끊어지면서 아상이 무너지면서 마음이 허공과 같이 비어진다 그 말이여. 그런 염불(念佛)하는 방법도 있고, 그보다 더 수승한 방법이 ‘이뭣고?’다 그 말이여.

한번 깊이 바로 믿어버리고 믿어버리면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이여, 모든 성현도 전할 수 없는 그 등(燈)—우리가 초파일에 켜는 등은 바람이 불면 꺼져버릴 수 있고, 전깃불이 나가버리면 꺼져버릴 수 있는데, 모든 성현이 전할 수 없는 등(燈)이 있어.
폭풍우가 불어도 꺼지지 않는 그 등이 그 불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놈을 봐 버리면 그 불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환하니 비춰. 그 불은 저 태양보다도 더 밝은 등불인 것입니다. 그 등불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등불 바로 밝은 도리를 ‘이뭣고?’를 하면 그것을 바로 봐 버리게 되는 것이여. 바로 그 등불에 그 심지에 불을 댕기는 것이여.

이 칠성회를 조직을 해서 이렇게 7일 기도를 해마다 하는 것은 형식 껍데기로는, 가장 가까웁게 쉽게 우리의 눈에 보이기에는 우리의 중생으로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는 목적으로 이 기도를 한 것처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 근본 뜻은 여러분의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우리 허망한 몸뚱이 속에 영원불멸(永遠不滅)한 마음의 등불에 불을 댕겨 드리기 위해서 칠성회 법요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