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26~450)2018. 10. 22.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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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427)—90년 10월 첫째일요법회(90.10.07) (53분)

(1/3) 약 21분. (2/3) 약 20분. (3/3) 약 12분.

(1/3)----------------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인댄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한데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인댄, 무간업(無間業),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죄업을 부르고자 하지 않거든,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이다. 정법륜(正法輪)을 비방하지 말아라.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한데, 고요한 밤 긴 하늘에 한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로구나. 지음(知音)은 스스로 솔바람이 있어 화답하는구나.



요새 송광사, 전라도 순천 송광사에서 동양 서양의 세계적인 불교 석학들이, 교수 · 박사 그런 분들이 모여서 돈오(頓悟) · 점수(漸修)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며 '돈오 · 점수의 바른 뜻이 무엇이냐?' 이런 것에 대해서 상당히 열기를 가지고 논란을 하고 있다고 하는 소식을 불교신문을 통해서 봤습니다.


불교의 목적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것이 목적이니—돈오(頓悟)란 말은 확철대오란 말인데, 확철대오와 또 확철대오한 뒤에 점수(漸修)해 나가는, 오후보림(悟後保任) 한다고 보통 말들 합니다마는.


'확철대오 했으면 그것으로써 더이상 닦을 것이 없어야지, 확철대오한 뒤에 점점(漸漸)이 닦아 갈 것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참다운 확철대오라 할 수가 있겠느냐. 닦아 갈 것이 있다면 확철대오가 아니다'

이런 것에 대해서 논란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참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참선을 해 가지고 그 애를 쓰는데 결국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해서 고행 정진을 한다면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야지 바르지 못한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착각을 해서야 되겠느냐?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이 모여서 세계 국제학술대회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참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어느 큰스님이 이 돈오점수에 대한 책을 내 가지고 그 책을 낸 뒤로 참 십여 년이 흘렀는데, 그 뒤로 많은 그것에 대한 불교계에서 논란이 있어 와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학자들도 또 그 문제에 관해서 이렇게 학술회의까지 갖게 되니 참 좋은 뜻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 전강 조실 스님께서 제창하시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는 우리 법보제자는 과연 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으로 이것을 해석을 하며 또 바르게 해석을 해야 또 우리도 갈팡질팡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도를 닦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인년에 마치 조실 스님께서 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설하신 바가 있어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다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선은 '무엇이 돈오(頓悟)고, 무엇이 점수(漸修)다' 이것을 실지로 참선도 하지도 아니하면서 입으로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을 해 봤자 이것은 참,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바르게 닦아 갈라면 어떻게 닦은 것이 돈수, 바른 닦음이고, 어떻게 깨달아야 바른 깨달음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나름대로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에 의지하지 말고 다맛 알 수 없는 활구선(活句禪)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아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신념에 의지해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에 그런 것이, 그런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릴 까닭은 없겠습니다.



중봉, 중국의 천목산 고봉 선사(高峰禪師)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신 중봉 선사(中峰禪師)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것이 있어서 몇 말씀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어.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정습(情習), 과거로부터 쌓은 정습이 다하지 못했다면,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면 곧 이것은 깨달음이 원만치 못해서 그런 것이다. 혹 그 마음 깨달음이 원만치 못하다면 모름지기 이 원만치 못한 자취를 쓸어버리고 별립생애(別立生涯)여. 특별히 따로 생애를 세워서」


이 별립생애라고 하는 것은—'자기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이제 보림(保任)만 하면 자기도 부처님처럼 될 수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습이 다하지 못하고 또 공안에 막힌 바가 있으면 이것은 자기의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의 이치, 그런 것을 그런 이치를 좀 보고서 그런 이치에 입각해서 모든 공안을 보면 막힌 바가 없고 다 알 것 같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이고 다 읽어 보면 환히 자기 나름대로 다 알고. 그러니까 자기도 깨달았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고서 '이제 나는 보림만 하면 된다'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참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안에 막히거나 정습이 다하지 못했으면 자기의 깨달음이 원만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그렇게 딱! 결판을 내고 별립생애, 다시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거기다가 생명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기어코 확철대오를 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봉 스님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뒤에는 닦을 것이 없느냐? 닦을 것이 없단 말입니까?' 이렇게 또 자문을 하고서 답을 하시기를,

「미리 깨달아 보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통 밑구녁이 풍 빠지는, 통 밑구녁이 풍 둘러빠진 거와 같은 그러한 경지가 올 때까지, 다시 말하자면 확철대오 할 때까지 가행정진 용맹정진하면 닦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아직 깨닫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돈오(頓悟)하고 점수(漸修)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이러한 것 가지고 논란을 하는 것은 정법륜(正法輪)을 비방해 가지고 무간업을 자초하는 것 밖에는 아니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올 때마다 항상 말씀을 하기를, 정말 조사의 깨달음과 같이 확철대오를 못했으면—조금 자기 나름대로 공(空)의 이치, 체중현(體中玄) 도리 이런 걸 조금 한 소견이 나면 그걸 가지고 자기도 깨달았다 하는 그러한 견해에 집착을 해 가지고 막행막식하고,

그래 가지고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면 쉽게 '옳다'고 인가를 해 주고, 이래 가지고 자기도 망하고 많은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 망하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오(頓悟), 기왕 깨달으면은 돈오에 돈수, 돈수(頓修)라 하는 것은 '닦을 것이 없다'는 얘기죠. 몰록 다 닦아 버렸어. 확철대오 함과 동시에 다 닦아 버려, 닦아 마쳐 버렸어.

그러니까 그것이 돈수(頓修)인데, 돈수란 말은 '닦을 것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인데. 그건 부처님이라든지 조사(祖師) 가운데에는 돈오돈수(頓悟頓修)한 그러한 조사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은 다 전생에 무량겁을 다 닦아서 금생에 잠시 몸만 바꿔 났을 뿐이지, 이미 닦고 깨닫고 한 것은 전생에 무량겁을 두고 다 이미 원만성취한 분들은 몸만 바꿔 났으니까 더 간단하게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해 버리고 닦을 것조차 없이 다 돈오돈수가 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견성을 할 때까지, 참선을 시작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때까지 많은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 걸려 가지고 깨달은 분, 또 출가해 가지고 얼마 안 가서 그냥 언하에 확철대오한 분,

이러한 것은 마치 저 어느 산골짜구니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물이 있는데,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까지 도달하는데, 바닷가 바짝 가까이에서 솟은 물이면 금방 솟아나 가지고 몇 분 안 가서 바다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몇백 리, 몇천 리, 몇만 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서 나온 물은 그 물이 흐르고 흘러서 바다에까지 도달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도 닦는 사람은 자기가 언제부터서 전생, 저 전생, 십 생, 백 생 언제부터서 도를 닦았는가 우리는 숙명통(宿命通)을 얻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건 알 수가 없으나 다행히 금생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으면 그 바른 법에 의해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을지언정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할 것을 미리서부터서 따질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바른 법에 의지할 것이고, 다음에는 있는 정신을, 정력을 다해서 전력투구를 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일 년 만에 깨닫든지, 삼 년 만에 깨닫게 되든지, 삼십 년 후에 깨닫든지,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든지, 그래도 전력투구를 한 사람은 바른 법에 의지해서 생명 바쳐서 닦은 사람은 아무 후회가 있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도 다맛 '이뭣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상태에서 숨을 딱 거둔다면 그 사람은 다음 생에 금방 몸을 바꿔 나가지고 또 불법을 일찍 만나서 또 정법을 만나 가지고 또 닦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생에 얼마만큼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공부를 잡드리했느냐에 따라서 그다음 생에 좀 일찍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의 「혈맥론(血脈論)」이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오직 깨닫는 것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닫고 나야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자연히 닦을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54초)




(2/3)----------------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이요  학도요궁심로단(學道要窮心路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로단시전체현(心路斷時全體現)하니  여인음수지냉난(如人飮水知冷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한다 그말이여. 조사관.

학도요궁심로절(學道要窮心路絶)이여. 도를 닦아. 도를 닦는 것이 내나 참선인데, 도를 닦아 가는 데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해.

밤낮 사량분별로 '이렇다. 돈오가 어떻고 점수가 어떻고, 이것이 어떻고 저것이 어떻고' 밤낮 교리를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또 공안을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따지고 따져 봤자 깨달음에서는 점점 멀어져 버리는 거다 그말이여.


정말! 바른 참선을 하고 바르게 도를 닦고자 하면 공안을 타파(打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 가지고 그 공안의 의단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마음길이 끊어져야 해.

'이뭣고?' 알 수 없는 화두 의심을 거각(擧却)할 때에 앞뒤 생각이 탁탁 끊어져 나가야 돼.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금강경을 읽거나, 화엄경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마음길이 탁탁 끊어져 나가야지,

마음속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 사량복탁(思量卜度), 공안에 대해서, 교리에 대해서, 누가 뭔 말을 하면은 그놈을 가지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이러는 동안에는 깨달음을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여.


심로단시전체현(心路斷時全體現)이여.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마음길이 끊어져 버리면은 전체가 드러나. 이러쿵저러쿵 따지기 전에 전체가 드러나는 거다 그말이여.

여인(如人)이 음수(飮水)에 지냉난(知冷暖)이여. 사람이 물을 마시매 차웁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알아.


'물이 얼마나 차운가? 얼마나 더운가?' 먹어 보지도 않고 남 보고 물어봤자 어떻게 그것을 가르키며, 먹어 보기도 전에 '이 물이 따신가? 차운가?' 이리저리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그말이여. 떠억 꿀떡꿀떡 마셔 보면 얼마나 뜨시고 얼마나 차운 것을 알 수가 있어.


깨달은, 돈오가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거여.


깨달아 보지도 않고 깨달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아직 깨닫기도 전에 '닦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라야지 돈오점수는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니다'

백만 년을 두고 패를 갈라서 토론을 하고 따져 본들 그것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져 갈 뿐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아니어.


물론 불교 학자들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으로 경전을 연구하고 또 조사의 어록도 학자로서 연구하고 그런 입장에서 그런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나아가는 것이다' 학자로서 따져 가는 것을 나는 나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학자는 그렇게 따지는 것이 그것이 학자의 본업이고, 그거 학자의 그 나아갈 길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불교를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러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 전강 조실 스님이나 산승이 항상 마음으로 원하고 또 이렇게 바라는 것은 학자로서의 나아가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정말 활구 선객(禪客)으로서,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론적인 연구나 추구보다는 바로 화두 공안에 입각해서 활구참선을 해 가야만 하루 하면 하루,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일 분 하면 일 분,

한 번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이 일 분 동안 끊어진다면 그만큼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그것이 바른 수행이고, 마음길이 끊어짐으로써 조사관을 타파해 가지고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생사(生死)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해서 온갖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업(業)을 지어 가지고 거기서 생사윤회를 하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으려면은 우리 마음으로부터서 일어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을 해야 한다.


단속은 덮어 놓고 그놈을 끊으려고 그러고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든지—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에 즉(卽)할 때마다 화두를 들고 자꾸 화두를 들어 나가면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은 저절로 거기서 끊어져 들어간다 그말이여.

마음길 끊어짐으로써 의단이 독로하게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확철대오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돈수돈오냐, 돈수점오냐, 보조 스님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권군수립장부지(勸君須立丈夫志)하고  안리막착황금설(眼裏莫着黃金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생수시구장생(人生誰是久長生)고  가련부명재호흡(可憐浮命在呼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권군수립장부지(勸君須立丈夫志), 여러분께 권고하느니 모름지기 장부(丈夫)의 뜻을 세워.


장부(丈夫)의 뜻이 무엇인가?

「나도 부처님처럼 역대조사(歷代祖師)처럼 결정코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가 있다. 원래 우리 자신도 부처님이었고, 현재도 우리 안에는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이 우리 몸을 주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닦으면 반드시 자성불(自性佛)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빈부귀천도 따질 것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따질 것이 없고, 나도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바른 법에 의해서 도를 닦아 가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장부여.


그러니 그 장부의, 대장부의 뜻을 확고하게 세워서 안리막착황금설(眼裏莫着黃金屑)이다. 눈 속에 황금 가루를 넣지 말아라.


무엇이 황금 가루인가?

황금이라 하면은 이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이고, 황금만 많이 있으면은 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 것이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모다 생각을 합니다마는, 그렇게 황금 가루가 다 보물에 칠보(七寶)에 하나에 들어가고 황금 덩어리를 벌기 위해 온갖 참 아주 이 일평생을 바치고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모다 이 고생들을 하는데,

아무리 황금 가루가 칠보라 하지만 그 황금 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그말이여.


우리 도학자(道學者)에 있어서 황금 가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말씀,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 자기 나름대로 3년, 5년, 10년 닦아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반딧불만한 소견(所見) 난 것, 그런 것들이 아무리 애를 써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한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조(佛祖)의 경지가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얻었다는 생각을 딱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황금 가루를 눈에다 집어넣고 있는 거여.


여지없이 버려 버려야지 그걸 짊어지고 자기 살림을 챙기고 있으면 더이상 공부가 나아가지를 않거든. 그러니 깨끗이 놓아버리고 항상 백지 상태로 돌아가야 해.


인생수시구장생(人生誰是久長生)인고,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누가 죽지 않고 천년만년 사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말이여.

가련부명재호흡(可憐浮命在呼吸)이다. 참 가련하구나! 이 뜬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구나.


뉴스에, 날이면 날마다 뉴스에 이래 죽고 저리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갑니까. 60년, 70년 내지 8, 90세 살다가 가도 죽을 때는 마찬가진데, 한참 피어나는 고등학생, 대학생 그 어렵게 공부하고 세속에 나가서 겨우 어떻게 좀 살아 볼라고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이리 죽고 저리 죽고.

지금 우리 이렇게 살아있지마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강도 절도, 유괴범 요새는 아주 학생들이 또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청소년 학생 불량배들, 거침없이 사람 목숨을 죽여 가는데, 전화 걸다가 죽고, 전화 기다리다가 죽고.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써 붙이고 참선을 하라고 이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는데, 일부러 써서 붙일 것도 없고, 아주 관을 짜서 짊어지고 댕겨야 할 판이여.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까 관을 짜 가지고 댕겨야 거기다 담아야 하게 생겼으니, 이 세상이 얼마나 참 그렇지 않아도 허망한 것인데 나날이 이렇게 사람의 목숨이 하루살이만도 못하게 되어간 것이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정말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을 보고, '생사가 어디에 있느냐? 각기 자기 나름대로 일러 보라'하니까,

한 제자는 '생사는 하루 동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너는 공부하기 어렵겠구나'


또 그다음 한 제자는 '생사는 일향간(一餉間)에 있습니다. 밥 한 끼 먹는 사이에도 있습니다'

'너도 공부하기 틀렸다'


또 다른 제자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생입니다'

그러니까 '되었다. 너는 공부하겠다'

이러한 부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정말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면 관을 짜 가지고 댕긴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고, 자가용 승용차에다가 관을 넣고 관속에 누워서 차를 타고 댕긴다 하더라도 그런다고 해서 생사 문제가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야 하는 거여. '이뭣고?'

화두만 챙기고 또 챙기고 해서, 들지 안 해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래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잡드리를 한다면, 생사 속에서 생사에 즉(卽)해서 의단이 독로하다면 죽은들—사고가 나서 죽건, 병이 나서 죽건, 명이 다해서 죽건, 그까짓 거 죽음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말이여.

정거장에서 죽거나, 차를 타고 가다 죽거나, 뭐 길에서 죽거나, 자기집에서 죽거나, 어디서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어. 그까짓 놈의 것, 언젠가는 죽을 건데.


그러기 때문에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 입각해서 항상 의단이 독로하도록 잡드리를 해 간다면 당장 지금부터 죽음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20분56초~40분50초)




(3/3)----------------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 정진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리 보약을 먹고, 영양 있는 것을 먹고, 관을 짜 가지고 짊어지고 댕겨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보약 먹는다고 안 죽습니까? 교통사고 난다고 그렇다고 해서 차 안 타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거고, 뭐 집에 있는다고 또 안 죽습니까? 평지낙상도 하는 거고, 밥 한 숟갈 잘못 먹고, 떡 한 조각 잘못 먹으면 체해서 저녁 잘 먹고 그러고 죽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그 죽는다 해봤자 몸뚱이,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몸뚱이 가는 것이니까 신심(信心),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다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고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확철대오 할 수밖에는 없는 거고.

확철대오 한다면은, 원래 생사는 없는 것으로 믿고 우리는 살고 있는데 뭐.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요새 더위도 갔고 아직 추위도 오지 안 했으니, 옛날에 학문을 하는 사람은 등화가친(燈火可親), 등불을 가까이 할 때다, 독서를 하기 좋은 때다 했습니다마는 우리는 펴 봤자 한 글자도 없는 경을 읽는 거여.


알 수가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드리한다면,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세수하고 양치질 하면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해 갈수록 뭣이 환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드리해.


인간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세상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이 지구도 앞으로 백만 년 후에는 뭐 없어진다던가? 지구도 틀림없이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은 결국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우주 이 세계나 우리의 몸뚱이나 결국 없어지는 것인데, 그 없어진 것 가지고 그놈에 붙잡고 늘어져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고.


언젠가는 없어질 줄 알았다면 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을 우리는 발견을 했으니 그 길에 벗어부치고 대든다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금생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뭣한 사람은 그것이 궁금해서 나한테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내가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깨달을 수 없다면 공연히 이 아까운 인생을 거기다 바치면 허송세월 할 것이고, 그러니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마음놓고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 거 대단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하냐 하면은 '깨달을 수는 틀림없이 있는데, 앞으로 3년 후에 깨달을지, 10년 후에 깨달을지, 30년 후에 깨달을지, 마지막 숨 딱 질 때 깨달을지, 금생에는 못 깨닫고 내생에 깨달을지, 그것은 내가 알 수가 없으나,

그 언제 깨달을 것이냐 하는 것은 본인이 첫째, 과거에 어떻게 닦아 왔느냐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고 또 금생에 얼마 만큼 바른 법에 의해서 전력투구를 하느냐, 금생에 얼마만큼 여법(如法)하게 닦느냐 그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제 깨달을 것인가?' 자꾸 미리부터 그것에 신경쓰실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 따질 시간이라도 화두를 들어야 그만큼 시간은 단축 된다 이것입니다.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하니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세간시비도불관(世間是非都不管)하고  일여청류소명월(日與淸流掃明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 오똑이 일 없이 청산을 대(對)하니,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이다. 우리의 눈은 사해에 높아서, 사해(四海)는 천상천하(天上天下)거든. 사해에 높아서 천마(天魔), 하늘나라의 온 마구니가 다 팔짱을 끼고 물러서.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해 나가. 그걸 갖다가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이라. 그러니 이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으며, 뭣이 부러울 것이 있으며, 무슨 미련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러니 그러한 장부의 기개를 가지고 나아가는데 정법을 닦아 가는 사람에게는 모든 천마(天魔) 외도(外道)가 손을 비비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는 없다.


세간시비(世間是非)를 도막관(都莫管)하고, 세간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 흥망성쇠와 시비곡절, 다 불관(不管)해 버려. 불관(不管)해 버리고,

일여청류소명월(日與淸流掃明月)이다. 날마다 청정한 도반들과 더불어—우리는 모두가 다 부처님도 선배 도반이고, 조사도 우리의 선배 도반이고, 모든 불과(佛果) 성인들도 과거는 깨닫기 전에는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어. 그러니 우리보다 먼저 깨달은 도반(道伴)들이여. 그런 청류(淸流)와 더불어 명월(明月)을 쓸자. 밝은 달을 쓸어.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밝은 달이여. 구름이 끼어서 어둡게 보일지언정 그 달 자체는 구름이 낄 때나 안 낄 때나 똑같은 거여.

우리의 자성불 진여불성은 미(迷)했을 때나, 우리가 범부로 있을 때나, 축생으로 있을 때나, 언제나 부처님의 경계인 거여, 그것은. 우리가 잠시 깜빡 미(迷)했을 뿐이니까.

그 밝은 달을 우리가 쓸어 봤자 무엇이 더 밝아질 것도 없고, 안 쓴다고 해서 더 어두울 것도 없는 거여 그 달 자체는.


그래서 우리는 불조(佛祖)와 우리의 모두가 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의 도반이여. 선후배 도반들이여, 다 동창생이다 그말이여.


그러니 바른 도반을 의지해야 우리는 게으름을 부릴라야 부릴 수가 없고, 사견(邪見)에 떨어질라야 떨어질 수가 없어.

이 법당(法堂)에 이렇게 불상(佛像)을 모신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불상을 모신 거여. 또 결제(結制)를 해서 우리가 모여서 이렇게 정진을 한 것도 그런 도반을 가까이 해서 도반과 더불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말이여.


또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일생동안에 만났다 헤어졌다 내 마음에 든 사람, 마음에 안 든 사람, 미운 사람 예쁜 사람이 전부가 다 도반이여. 전부가 다 도반이요 전부가 다 불보살 화현(化現)이거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자기 눈에 비추어진다면 그야말로 정말 발심(發心)을 한 사람이고, 그렇게 발심을 해야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정말 사바세계가 우리가 가장 빨리 가장 훌륭하게 도(道)를 닦고 도를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40분51초~52분4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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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욕득불초무간업(欲得不招無間業) 막방여래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 ; '무간업(無間業)을 부르지 않고자 할진댄,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비방하지 말지어다’ 『증도가(證道歌)』에 나오는 구절.

*(게송) '정야장천일월고(靜夜長天一月孤) 지음자유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무간업(無間業) ; 무간악업(無間惡業). 무간죄(無間罪).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하는 업(業)으로 오역죄(五逆罪)를 가리키는 말.

오역죄, 곧 다섯 가지 무간업은 ①아버지를 시해하는 것[殺父]. ②어머니를 시해하는 것[殺母]. ③아라한을 죽이는 것[殺阿羅漢]. ④승단의 화합을 파괴하는 것[破僧]. ⑤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것[出佛身血].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고통이 끊임없으므로 무간(無間)이라 함.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부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정법륜(正法輪) ; 부처님이 설하신 올바른 가르침[正法]을 바퀴[輪]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법륜(法輪 부처님의 가르침 법/바퀴 륜) ; 불법(佛法)을 수레바퀴[輪]에 비유한 것.

①불법으로 인해 중생의 죄악이 무너지는 것이, 전륜성왕의 윤보(輪寶)가 산악과 암석을 두드려 부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윤보에 비유하였다.

②부처님의 설법이 한 사람,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두루 퍼지는 것이. 마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구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③부처님께서 설한 가르침이 원만하여 결함이 없는 것이, 수레바퀴가 둥글어 모난 것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법을 수레바퀴에 비유하였다.

*지음(知音) ; ①음악의 곡조를 잘 앎. ②새나 짐승의 소리를 가려 잘 알아들음. ③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잘 이해해 준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여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말.

*돈오 점수(頓悟漸修) : 불도를 닦아 나아가는 데 그 사람의 바탕(기질)을 따라, 차츰차츰 여러 계단을 밟아 올라가서 나중에 대각(大覺)을 이루는 것을 「오래 닦음」 곧 점수(漸修)라 하고, 어떤 이는 단번에 크게 깨쳐서 한 뜀에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단박(몰록) 깨침」 곧 돈오(頓悟)라고 한다.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쳤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익혀 온 버릇, 곧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는 한때에 완전히 끊어 버릴 수가 없고, 현실의 사물 처리에 자유자재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래오래 닦아 나아가야 한다。그러므로 결국은 누구나 「점수」가 된다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깨치지 않고는 옳게 닦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조사스님들은 닦는 것보다 깨치는 것을 중요하게 말하는 바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구두선(口頭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의리선(義理禪).

이런 구두선(口頭禪) ·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수법제자(受法弟子) ; 스승으로부터 법(法)을 인가(印可) 받은 제자.

*중봉(中峰) 선사 ; (一二六三 ~ 一三二三) 중국 원나라 스님. 불명은 명본(明本). 항주 전당 사람. 보응(普應), 환주도인(幻住道人), 환주노인(幻住老人), 중봉보응국사(中峰普應國師)라고도 한다.

15세에 출가하여 금강경, 원각경, 법화경, 전등록 등을 보고, 후에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사관(死關)을 찾아 심요(心要)를 묻고, 금강경을 읽다 뒤에 샘물이 흘러 나오는 것을 보고 활연히 깨쳤다.

고봉의 법을 받고는 일정하게 있는 곳 없이 배(船)에서 있기도 하고 암자에서 거주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북정자적(北庭慈寂) 스님이 편집한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30권이 있다. 『광록』안에는 「산방야화(山房夜話)」  「동어서화(東語西話)」  「신심명벽의해(信心銘闢義解)」가 포함되어 있다.

*'중봉 선사(中峰禪師)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것' ;

[참고] 『산방야화(山房夜話)』 (중봉명본 선사) *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一之中 山房夜話中.

〇幻曰 心外無法 法外無心 若見有纖毫情習未盡 卽是悟心不圓而然也 或心悟不圓 須是掃其未圓之跡 別立生涯以期大徹可也

〇曰若然 則無履踐之說乎 答曰 茲不必預以有無履踐 自惑于心 請勤加鞭策 到桶底子一回脫落 其履踐之有無 當有以默契于中矣

*정습(情習) ; 망정(妄情)으로 생긴 번뇌의 습기(習氣).

*망정(妄情) ; 허망한 정식(情識). 진실한 인식과 견해를 벗어난 망령된 분별 · 생각.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〇[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〇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 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 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러빠지다 ; 빙 둘려서 우묵하게 쑥 꺼지다.

*막행막식(막行막食) ; 수행자의 분에 맞지 않게, 행동이나 음식을 막 행(行)하고 가리지 않고 막 먹는 것.

*숙명통(宿命通) :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인 육신통(六神通)의 하나로,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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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참선수투조사관~'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示安山郡夫人妙幢(안산군 묘당부인에게 보임)'

〇參禪須透祖師關 學道要窮心路斷 心路斷時全體現 如人飮水知冷暖 到此田地莫問人 須參本色呈機看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사량계교(思量計較)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삼업(三業) :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동 전체를 말한다。몸으로 짓는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와,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네 가지와, 뜻으로 짓는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痴心)의 세 가지가 있다。이것이 삼업이다.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의 소의(所依)가 되어 육식을 일으켜 대상을 인식케 하는 근원이다。곧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의 여섯 가지 기관(器官)을 말한다.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산스크리트어 ṣaḍ-vijñāna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게송) '권군수립장부지(勸君須立丈夫志) 안리막착황금설(眼裏莫着黃金屑)'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上) '示可禪人(가선인에게 보임)'

勸君須立丈夫志 此生了報大師恩 如今正法將欲墜 早續明燈度迷津 踏碎天下群邪綱 切須要見明眼人 眼裏莫着黃金屑 心田頓拔煩惱根 苦海常泛般若艇 二利功業日日新 丈夫功業只如是 如是之義誓不容易


그대는 모름지기 장부의 뜻을 세워 이 생에서 부처님[大師]의 은혜를 갚으시오. 지금에 바른 법이 끊어지려 하나니 빨리 등불[明燈 지혜]을 이어 미혹의 나루[迷津 삼계三界·육도六途]를 건너시오. 천하의 삿된 그물을 모두 찢어 버리고 부디 눈 밝은 사람[明眼人 明眼宗師, 선지식]을 찾아 보시오.

눈 속에는 황금 가루를 넣지 말고 마음밭[心田]의 번뇌의 뿌리를 다 뽑아서 고해(苦海)에 항상 반야의 배를 띄우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공업(功業 功德業 선근공덕을 쌓는 일)이 날로 새로워질 것이오. 장부의 공업은 다만 이러하지만, 이 도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오.


*(게송) '인생수시구장생(人生誰是久長生) 가련부명재호흡(可憐浮命在呼吸)'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上) '示祥禪人(상선인에게 보임)'

汝初依吾落髮時 雙親感歎便垂泣 父母恩愛重如山 放汝出家情何及 汝知如是父母恩 勤修精進如火急 汝求名利踈道行 便是無間黑業習

人生誰是久長生 可憐浮命在呼吸 是以於我本師尊 捨其王位出城邑 入山苦行示六年 蛛網於眉雀巢肩 蘆芽穿膝任從容 有甚毫氂利名顚 汝今依師學此行 雙親九族必生天 汝違師敎還作無髮俗 自累師親同墮無間獄


그대가 내게서 머리를 깎을 때에 양친은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었소. 부모의 은애(恩愛)는 산처럼 중하거니 그대를 놓아 보낼 때에 그 심정이 어떠했겠소. 그대는 이와 같은 부모의 은혜를 알았거든 부지런히 정진하고 닦되 불난 것처럼 급히 하시오. 그대가 명리(名利)를 구해 도를 소홀히 하면 그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질 악업(惡業)을 짓는 것이오.


인간으로서 그 누가 오래 천년만년 살 것인가. 가련하구나, 뜬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소. 그러므로 우리 본사 세존께서는 왕의 지위를 버리시고 왕궁을 떠나 산에 들어가 6년을 고행할 때에 거미는 눈썹에 거미줄을 쳤고 새는 어깨에 둥지를 틀었소. 갈대 싹이 무릎을 뚫었으나 조용했으니 털끝만큼인들 명리에 엎어졌으랴.

그대 지금 스승께 의지해 그런 행을 배우면 양친과 구족(九族)이 천상에 날 것이나, 그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어 머리털 없는 속인[無髮俗]이 되면 스스로 스승과 부모를 안고 무간지옥에 함께 떨어질 것이오.

*장부(丈夫 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칠보(七寶) : [범] Sapta - ranta 일곱 가지의 보배。즉 금(金), 은(銀), 유리(琉璃), 파려(玻瓈), 또는 매괴(玫瑰), 차거(硨磲), 산호(珊瑚), 마노(瑪瑙) 등을 말한다.

*폐침망찬(廢寢忘餐 폐할 폐/잘 침/잊을 망/밥 찬) : 자는[寢] 것을 폐(廢)하고 밥 먹는[餐] 것을 잊으며[忘] 일에 심혈을 기울임.

*도학자(道學者) ; 도(道)를 닦는 사람. 수행자(修行者).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조사어록(祖師語錄) ;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몽산법어(蒙山法語) ; 원(元)나라 「몽산 스님의 법어」로 참선 수행의 구체적인 길을 자상하게 제시한 법어집. 용화선원에서 번역 간행한 『몽산법어』가 있다.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일향간(一餉間 한 일/식경食頃·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짧은 시간 향/사이 간) ; ‘한 밥 먹을 사이’로, ‘짧은 시간 동안’을 뜻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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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우리는 펴 봤자 한 글자도 없는 경을 읽는 거여' ; '我有一卷經 不因紙墨成 展開無一字 常放大光明' '내게 한 권의 경(經)이 있으니 종이나 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펴보면 한 글자도 없건만 항상 큰 광명을 놓는구나' 서산대사의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 [부록(附錄)] '거량(擧揚)'에 있는 게송.

*뭣한 ; 뭣하다(무엇하다). 형용하기 어렵거나 그것을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 암시적으로 둘러서 쓰는 말. 주로 '거북하다' '곤란하다' '난처하다' '딱하다' '미안하다' '쑥쓰럽다' 따위의 느낌을 나타낼 때 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게송) '올올무사대청산(兀兀無事對靑山) 안고사해천마공(眼高四海天魔拱)'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下) '무외(無畏)'

*(게송) '세간시비도불관(世間是非都不管) 일여청류소명월(日與淸流掃明月)' ;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下) '은계(隱溪)'

*천마(天魔) :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불과(佛果) ; 불인(佛因, 부처님이 되기 위한 인因. 즉 모든 선근공덕善根功德)의 대응어. 불도수행의 결과. 불위(佛位). 부처라고 하는 궁극의 결과. 결과로서 부처로 된 상태. 깨달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주요 내용]


(게송)욕득불초무간업~ / 다맛 알 수 없는 활구선(活句禪)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아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 중봉선사의 돈오점수에 대한 말씀. 별립생애 /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열심히 도를 닦을지언정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할 것을 미리서부터서 따질 것이 없다 / 깨달음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보다는 바로 활구참선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라.

(게송)권군수립장부지~ / 황금 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 생사가 호흡지간에 있다 / 내가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 '언제 깨달을 것인가?' 미리부터 신경쓰지 말고 그것 따질 시간이라도 화두를 들어야 / (게송)올올무사대청산~ / 우리는 불조(佛祖)와 도반, 동창생 / 만나는 모든 사람들 전부가 다 도반이요 전부가 다 불보살 화현(化現).



[주요 문구]


참선은 '무엇이 돈오(頓悟)고, 무엇이 점수(漸修)다' 이것을 실지로 참선도 하지도 아니하면서 입으로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을 해 봤자 이것은 참,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바르게 닦아 갈라면 어떻게 닦은 것이 돈수, 바른 닦음이고, 어떻게 깨달아야 바른 깨달음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나름대로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에 의지하지 말고 다맛 알 수 없는 활구선(活句禪)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아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신념에 의지해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에 그런 것이, 그런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릴 까닭은 없겠습니다.


「공안에 막히거나 정습이 다하지 못했으면 자기의 깨달음이 원만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그렇게 딱! 결판을 내고 별립생애, 다시 초학자(初學者)와 같은 다시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거기다가 생명을 걸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기어코 확철대오를 하도록 그렇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봉 스님은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뒤에는 닦을 것이 없느냐? 닦을 것이 없단 말입니까?'

답을 하시기를, 「미리 깨달아 보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느니 미리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통 밑구녁이 풍 빠지는, 통 밑구녁이 풍 둘러빠진 거와 같은 그러한 경지가 올 때까지, 다시 말하자면 확철대오 할 때까지 가행정진 용맹정진하면 닦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일 년 만에 깨닫든지, 삼 년 만에 깨닫게 되든지, 삼십 년 후에 깨닫든지, 마지막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든지, 그래도 전력투구를 한 사람은 바른 법에 의지해서 생명 바쳐서 닦은 사람은 아무 후회가 있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도 다맛 '이뭣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상태에서 숨을 딱 거둔다면 그 사람은 다음 생에 금방 몸을 바꿔 나가지고 또 불법을 일찍 만나서 또 정법을 만나 가지고 또 닦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생에 얼마만큼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 공부를 잡드리했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생에 좀 일찍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의 「혈맥론(血脈論)」이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오직 깨닫는 것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깨닫고 나야 바른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는 자연히 닦을 것이 있고 없는 것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차운가? 얼마나 더운가?' 먹어 보지도 않고 남 보고 물어봤자 어떻게 그것을 가르키며, 먹어 보기도 전에 '이 물이 따신가? 차운가?' 이리저리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 있냐 그말이여. 떠억 꿀떡꿀떡 마셔 보면 얼마나 뜨시고 얼마나 차운 것을 알 수가 있어. 깨달아 보지 않고서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거여.


생사(生死)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삼세육추(三細六麤)의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해서 온갖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업(業)을 지어 가지고 거기서 생사윤회를 하기 때문에 생사윤회를 끊으려면은 우리 마음으로부터서 일어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단속을 해야 한다.


단속은 덮어 놓고 그놈을 끊으려고 그러고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境界)를 당하든지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우리의 육근(六根)을 통해서, 육식(六識)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에 즉(卽)할 때마다 화두를 들고 자꾸 화두를 들어 나가면 화두를 듦으로써 마음길은 저절로 거기서 끊어져 들어간다. 마음길 끊어짐으로써 의단이 독로하게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확철대오가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 도학자(道學者)에 있어서 황금 가루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말씀,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 자기 나름대로 3년, 5년, 10년 닦아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반딧불만한 소견(所見) 난 것, 그런 것들이 아무리 애를 써서 자기 나름대로 어떤 한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조(佛祖)의 경지가 아니면 그것을 가지고 얻었다는 생각을 딱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황금 가루를 눈에다 집어넣고 있는 거여.


그 죽는다 해봤자 몸뚱이,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몸뚱이 가는 것이니까 정법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도를 닦는다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고 그렇게 닦아 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확철대오 할 수밖에는 없는 거고. 확철대오 한다면은, 원래 생사는 없는 것으로 믿고 우리는 살고 있는데 뭐.


'내가 금생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뭣한 사람은 그것이 궁금해서 나한테 '확실히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내가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까? 깨달을 수 없다면 공연히 이 아까운 인생을 거기다 바치면 허송세월 할 것이고, 그러니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마음놓고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 거 대단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하냐 하면은 '깨달을 수는 틀림없이 있는데, 앞으로 3년 후에 깨달을지, 10년 후에 깨달을지, 30년 후에 깨달을지, 마지막 숨 딱 질 때 깨달을지, 금생에는 못 깨닫고 내생에 깨달을지 그것은 내가 알 수가 없으나, 그 언제 깨달을 것이냐 하는 것은 본인이 첫째, 과거에 어떻게 닦아 왔느냐 그것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고 또 금생에 얼마 만큼 바른 법에 의해서 전력투구를 하느냐, 금생에 얼마만큼 여법(如法)하게 닦느냐 그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언제 깨달을 것인가?' 자꾸 미리부터 그것에 신경쓰실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 따질 시간이라도 화두를 들어야 그만큼 시간은 단축 된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불조(佛祖)와 우리의 모두가 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우리의 도반이여. 선후배 도반들이여, 다 동창생이다. 그러니 바른 도반을 의지해야 우리는 게으름을 부릴라야 부릴 수가 없고, 사견(邪見)에 떨어질라야 떨어질 수가 없어.

이 법당(法堂)에 이렇게 불상(佛像)을 모신 것도 그러한 의미에서 불상을 모신 거여. 또 결제(結制)를 해서 우리가 모여서 이렇게 정진을 한 것도 그런 도반을 가까이 해서 도반과 더불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또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일생동안에 만났다 헤어졌다 내 마음에 든 사람, 마음에 안 든 사람, 미운 사람 예쁜 사람이 전부가 다 도반이여. 전부가 다 도반이요 전부가 다 불보살 화현(化現)이거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자기 눈에 비추어진다면 그야말로 정말 발심(發心)을 한 사람이고, 그렇게 발심을 해야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정말 사바세계가 우리가 가장 빨리 가장 훌륭하게 도(道)를 닦고 도를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26~450)2018. 10. 10. 17:47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434)—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74분)

(1/4) 약 19분. (2/4) 약 21분. (3/4) 약 21분. (4/4) 약 13분.

(1/4)----------------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라.

삼계(三界)가, 삼계 가운데가, 온 세계가 분요요(紛擾擾)여. 그 도처(到處)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폭격을 하고, 사람이 죽고 불이 나고 집이 파괴가 되고 피비린내 나는 참, 그런 세상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시끄럽고 복잡하냐?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해 끊지를 못해서 그런 것이다.[只爲無明不了絶]


무명(無明).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이 무명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 무명을 요달해 끊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 탐진치 삼독이 벌어지고, 그래 가지고 작은 싸움 큰 싸움, 온 나라와 나라의 싸움, 세계 전쟁이 순전히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명(無明)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한 생각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불생(不生), 나지 아니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면,[一念不生心澄然]

무거무래(無去無來)요, 갈 것도 없고 올 것도 없으며 생멸(生滅)이 없을 것이다.[無去無來不生滅]


그 한 생각 일어남으로 해서 이 몸뚱이도 이 세상에 받아서 태어났고, 무명(無明)의 업으로 인해서 이 몸뚱이를 받아 태어났고,

따라서 끝없이 끝없이 일어나는 탐진치 삼독 때문에 수없는 새로운 업(業)을 지으면서 바짝 마른 나무 섶에 기름을 부어서—불이 붙은 풀 섶, 나무 섶에 계속해서 기름을 부어서 잘 타게 만들어.


그래 가지고 나무만 타는 게 아니라 나무 주변에 있는 집도 타고 다른 사람도 타고, 마침내는 자기도 자기집도 타고, 자기 몸뚱이도 타고, 자기 생명도 잃게 된다 그거거든.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그러한 훨훨 타고 있는 그 화택(火宅) 속에서 어떻게 하면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뚱이 있을 때 해탈도(解脫道)를 증득하느냐?

오직 발심(發心)! 발심 하나를 철저히 함으로 해서 이 무상한 생로병사 속에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법을 간곡히 설해 주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셔서 그 무서운 6년 고행을 하시고, 달마 스님도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묵무언(默無言)하시고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시고.

또 고인(古人)도 7개 포단(蒲團), 어떻게 좌선을 열심히 했던지 방석이 7개가 구녁이 맞구녁이 뚫어지도록 그렇게 정진을 한 예도 있고.


고인(古人)들, 다 근기(根機)가 수승한 고인네들도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해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했으니, 하물며 말세에 태어난 우리 하근기들은 그 몇 배를 더 노력을 하고 애를 쓰지 않겠느냐.

이런 요지에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말 말로만 '말세(末世)다, 말세!' 밤낮 그 말세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들어오고 있습니다마는.

말세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다. 투쟁, 싸움만이 치성하게 일어나는.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온통 싸움으로써 직업을 삼어. 싸움으로써 일을 삼는 그런 시대다.


과연 가정도 부모자식간에, 부부간에, 고부간에, 형제간에 사소한 일로 말다툼, 재산 갖고 싸우고. 사회에서도 당파가 있어 가지고 서로 싸우고, 업체들도 서로 자기 회사가 잘되기 위해서 싸우고. 한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싸우고, 이웃 나라와 이웃 나라가 싸우고, 경제적으로 싸우고, 종교적으로 싸우고, 이러한 투쟁견고의 시대에 말세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이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고 똑바로 자기 정신을 차리고, 우선 내가 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찾고, 내 집안이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며, 이웃과 어떻게 살아가며 온 나라가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아가는가? 그렇게 해서 온 세계가 어떻게 하면 평화적으로 살 수 있는가?


오직 여기에는 부처님의 법(法)에 따르는 것이 최선의 방책(方策)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여러 가지 경전에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매우 자상하게 모다 설하셨지만 여기에서 그걸 낱낱이 다 설명할 수가 없고. 그러한 모든 크고 작은 싸움, 갈등 알륵 속에서 간단하게 해결해 나가는 방법은 「나 자신을 다스리는 일」인 것입니다.


모든 싸움은 자기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지 않고, 밤낮 모든 싸움 모든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다른 사람에게 몰아붙이고 다른 사람을 책망하는 데에서 크고 작은 싸움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싸움은 싸움으로써 그치지 아니하고, 원망은 원망으로써 그치지 않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은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싸움은 그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를 반성함으로 해서 싸움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입춘날입니다. 입춘이 오므로 해서 새해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양력으로는 오늘이 2월 4일이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섣달이지만 입춘이 드는 그날 그 시간으로부터 새해 신미년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일 입춘기도 법요식이 있습니다마는,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이 경오년의 마지막 날을 기해서 우리는 정말 묵은해의 모든 것을 깨끗이 다 털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물론 집안에 모든 먼지를 털고 소제(掃除)를 하고 모다 그런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또 몸도 깨끗이 씻고 그런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마음! 마음을 새로 갖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발심(發心) 하나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 발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공부가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암만 정신을 좀 차려서 정진을 좀 착실히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안되고,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의단(疑團)이 간절하지 못하고 자꾸 혼침이 오고 망상이 일어나고 영 공부가 제대로 안된다'고 많은 수좌(首座) 스님네나 또 보살님네들이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이 호소를 하십니다마는 문제는 '발심을 철저히 못한 데에서 그런 것이다'


발심! 발심이 스스로 마음속에서 탁! 아주 일어나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발심의 동기는 친한 분이 참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든지, 친구가 비참하게 죽었다든지, 어떤 그러한 것을 계기로 해서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닫고 발심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그 친한 친구가 그렇게 정신착란이 일어나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쳐서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을 보고 그렇게 무상을 철저히 깨닫고, 그래 가지고 어린 나이로 발심을 해서 17세 그 어린 나이로 선방에 나와 가지고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셔 가지고, 23세 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그때 뿐만이 아니라 지금은 정말 아는 사람 가운데, 이웃에서 또는 한국 팔도 방방곡곡에서 온통 사람이 강도에게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비행기에서 떨어져서 죽고, 불타서 죽고 이렇게 해서 사람 죽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사람 죽는 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 또 사람 죽었구나’ 그 보통 느껴지겠지만.


그것이 자기 가족이요, 일가친척이요, 그러한 사람이 죽어도 ‘참 안되었다, 불쌍하다’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그것이 어찌 남의 일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에게도 언제, 어떻게 그러한 사항이 일어날른지 모르는 것입니다.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을 보고도 무상을 깨달을 수도 있고,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무상을 깨달을 수가 있고, 해가 서산에 지는 것을 보고도 깨달을 수가 있고.

우리는 똑바로 정신만 차리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발심할 수 있는 계기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처음~18분56초)




(2/4)----------------


내일 입춘을 기해서 이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사진과 이거는 또 달마(達摩) 스님이 그려져 있고, 또 이 속에는 금강경 사구게(四句偈)가 있는 이것을 오늘 나가실 때 전부 한 장씩 다 노놔 드리고, 또 내일 또 입춘 법요식에 참여하시면은 그때도 또 한 장씩 노놔 드릴려고 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이게 넣어서 가지시던지 그것을 각자 알아서 하시기를 바라고. 이것은 왜 노놔 드리느냐 하면은.


여기에는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런 사구게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일체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인연(因緣)으로 생긴 모든 사물을 유위법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어떠한 것들이냐? 우리의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밖에 어떤 색상을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 안식(眼識)이 생기고, 우리의 귀가 밖에서 들리는 어떤 소리를 만나면은 우리의 마음속에는 이식(耳識)이 생기고, 코도 그렇고, 혀도 그렇고, 몸뚱이도 그렇고, 우리의 의식(意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래서 이 마음에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해서 나 가지고,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른 생각으로 요렇게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없어져. 그래서 생주이멸(生住異滅)이여. 이런 것들이 마음의 유위법(有爲法)이여.


그다음에 우리의 몸뚱이는 과거에 지은 업으로 부모를 만나면 거기서 이 몸뚱이를 받아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태어나면 얼마 안 있으면 나이를 먹고 늙고, 늙으면 병들고 마침내는 언제 죽던지 죽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뚱이에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습니다. 이것도 다 유위법이여.

그런 원인이 있어 가지고 그런 인연으로 태어나서 없어지니까 이것도 유위법(有爲法)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몸을 담고 있는 집이라든지, 우리 나라라든지, 온 세계, 또 해나 달이나 별들 산천초목 두두물물도 다 성주괴공(成住壞空),

어떤 인연으로 이루어졌다가 그것이 잠시 그 상태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마는 사실은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동안 그런 형태를 유지하다가 결국은 무너져서 없어져. 그래서 성주괴공이 있거든. 이것도 유위법이여.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 우리의 몸뚱이나, 우리의 생각이나, 온 세계 삼라만상이 전부 유위법 아닌 것이 없는데, 이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허깨비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다. 이슬, 풀끝에 이슬과 같고, 또 번갯불, 번쩍하는 번갯불과 같다.

풀끝에 이슬이 아침에 나가면 이슬이 맺혀서 햇빛에 빛날 때에는 영락없이 그 반짝이는 것이 보석과 같은데, 조끔 바람이 불거나 건드리면 툭 떨어져 버린다 그말이여.


우리의 몸뚱이도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지만 하루 후에 어떻게 될른지,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될른지, 일 분 후에 어떻게 될른지, 그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지 못할 것이 풀끝에 이슬보다도 더하다 그말이여.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라. 뻑뻑이 이와 같이 관(觀)을 할지니라.


이 금강경의 이 게송은, 금강경에 칠사구게(七四句偈)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게송입니다.


금강경에 '이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몸에 지니거나, 수지독송(受持讀誦)하거나, 남을 위해서 설해 주거나 하면은 그 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다 칠보탑을 조성해 모신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경전이나 사구게가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탑이 거기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탑이 모셔져 있으면 거기에는 항상 제석천왕(帝釋天王)을 비롯한 모든 선신(善神)과 25신장(神將)이 그걸 잘 외호(外護)를 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것을 손수 잘 써서 그것을 베겨 가지고 이렇게 노놔 드리게 되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이걸, 여기에 관세음보살과 또 이 사구게와 달마 스님까지,

그러면 관세음보살은 불보살이니까 「부처님」[佛]이시고, 또 이 사구게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法)」이고, 또 달마 스님은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28대 조사」[僧]여. 그래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이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것을 몸에 잘 지니시면 항상 불법승 삼보를 몸에 지니시기 때문에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게송의 뜻을 한 번씩 읽기만 해도 업장이 소멸이 되고, 일체 잡귀가 범접을 못하고 항상 선신이 여러분을 옹호를 해 줄 것입니다.


특히 '새해로 삼재(三災)를 만나게 된 분은 이것을 특별히 잘 간직을 하시라'하는 뜻에서 내일 입춘날 노놔 드리기로 한 것인데, 또 직장에 나가신 분, 모다 여러 가지...

그래서 내일 참석 못하실 분도 계실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일차적으로 다 노놔 드리고 그리고 내일 오신 분에게도 또 노놔 드립니다.


가족이 많으신 분은 5장, 10장도 필요하실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노놔 드리기로 하면은 굉장히 많이 준비를 해야 하고 그래서 일단은 여기에 오신 분에게, 오신 인연을 지으신 분들에게 먼저 오늘 노놔 드리고, 또 내일 오시면 내일 또 노놔 드리고 그럴 테니 그렇게 아시길 바랍니다.


그동안에 새로 이사를 가신다던지, 집을 수리를 하신다든지, 집안에 어떤 우환이 있다든지, 꿈에 가위를 눌린다든지, 집안에 어떤 분이 돌아가셨는데 항상 무서운 생각이 든다든지, 집안에 과거에 돌아가신 분이 있는데 그렇게 집안이 액난(厄難)이 끊이질 않는다든지, 이런 말씀들 하신 분에게는 내가 이 금강경 사구게를 이렇게 써서 드리면서 집에 이렇게 모시라고 참 꽤 많은 분에게 이렇게 해 드린 일이 있는데,


아!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아 그걸 갖다가 딱 액자에다 넣어서 이렇게 딱 모시거나 또 몸에 이렇게 지니면은 그런 무서운 것도 없어지고, 액난도 없어지고, 또 꿈에 가위 눌린 것도 없어지고,

이런 말씀들을 들어왔기에 금년에는 이렇게 모든 우리 법보제자(法寶弟子) 여러분들께 이것을 노놔 드리기로 이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어떤 분이 이것을 무주상(無住相)으로 이것을 이렇게 베겨서 이렇게 법보시(法布施)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금강경 사구게는 철저하게 이 뜻을 이해를 하시고, 턱! 고대로 믿기만 해도 마음속에 온갖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실다운 것으로 믿고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나 그런 오욕락(五慾樂)들이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이 있어야만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오욕락에 집착을 하는 것이고, 또 이 몸뚱이가 ‘참나’라고 착각을 하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천세 만세 살 것처럼 이 몸뚱이만을 집착을 하고 애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허망한 것들, 그런 유위법이 지극히 무상하고 허망하고 의지할 것 없는 것인데, 그것을 실다운 상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집착하고 애착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온갖 시비가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우리의 마음에 미움이 일어나고 사랑이 일어나고, 고통과 갈등과 슬픔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모르신 분은 거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이것을 그냥 글로만 해석을 하고 그렇게 지나쳐 버리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그 약을 믿고 그것을 정성껏 법답게 복용을 함으로써 그 약이 효험이 나는 것이지, '그 약이 좋다더라' 그런 정도만 알고 실지로 복용을 하지 않고, 그냥 책상 위나 방바닥에 굴리고 만다면 그것이 신기하고도 좋은 약인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와 같이 이 게송이 그렇게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런 공덕이 있다 하더라도 철저히 믿고 그것을 완전히 그 뜻을 마음속에 새기고 달관(達觀)을 해서, 이 게송이 바로 자기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자기의 영혼 속에 녹아 들어가 버려야 이 게송 효능이 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여러분들께서 몸에 다 간직하고, 어디를 가셔도 그것이 자기에서 떠나지 않도록 뜻으로도 마음속에 새기고, 실지로 이것을 몸에 잘 지니고 그리고 행동으로 이것을 잘 실천을 해 나간다면 여러분은 새해는 모든 근심과 고통이 봄눈 녹듯이 다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삼재를 당하고, 삼재가 들었다 하더라도 조끔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여기 용화사 신도 한 분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돈을 벌기 위해서 갔었는데 비행기가 떨어져서 백여 명이 그때 다 죽었습니다. 그이도 그 떨어지는 비행기 속에 타고 있었는데 별로 다친 데가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이가 가지고 갔던 가방이고 신발까지 다 벗어져서 없어졌는데 이거 하나만 몸에 지니고 있었어.

그런데 비행기가 떨어져서 한쪽에서 막 타들어 오는데 구멍이, 나갈 구멍이 있는데 자기가 먼저 나가지 않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나가도록 뒤에서 밀어주고 거들어 주고 다 나갈라고 하다 마지막 자기가 나갈라고 하는데 문이 딱 닫쳐졌습니다. 영락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걸 몸에 딱 지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조끔도 당황하지 않고 '이거, 송담 스님이 준 것이다' 해 가지고는 이것을 탁 가슴에 안고 기적적으로 다시 구녁이 뚫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나오다가 그때는 벌써 불이 많이 타 가지고 비행기가 뜨거워져서 나오면서 살짝 화상은 입기는 했지마는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살아와 가지고 이것을 나한테 보이면서 "참말 이 덕을 봤다"고 나한테 눈물을 글썽이면서 "감사하다"고 사례를 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이것 때문에 뭐 도둑을 면했다. 뭣을 차를 잃어버렸는데 찾았다' 무슨 별별 그런 애기들 많이 들었습니다마는.

이런 말을 왜 내가 하냐 하면 이 금강경 사구게의 위신력(威神力)이 금강경 속에 참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이 공덕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듣고 모다 미쳐버릴까봐 전부를 얘기를 못한다」고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다 금강경을 읽으신 분은 다 그 대목을 다 보셨겠는데, 얼마만큼 그 말씀을 믿나?

'아, 그 공덕이 장하니까 많이 읽으라는 뜻으로 하셨겠지' 이런 정도로 대부분 아마 생각하실 겁니다.


근데 나는 그것을 곧이곧대로 나는 백 프로, 이백 프로 그것을 믿었습니다. 믿고서 이것을 고대로 써 가지고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러한 불가사의한 효과가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조그만한 관세음보살 사진이요, 사구게요, 달마 스님이지만 정말 그렇게 믿고 잘 간직을 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탐진치(貪嗔癡) 삼독심(三毒心)을 버리지 못한 것은 이 게송의 뜻을 철저하게 믿고 깨닫지를 못한 데에서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것이고,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는 것이고, 오늘날 모든 싸움도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 게송 하나만 철저하다면 어찌 발심(發心)을 못하겠습니까!


다 핑계—집안 살림 핑계, 아들딸 핑계, 무슨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그것이 끝나야 공부를 하리라' 그렇게 모두 핑계를 대고 공부를 뒤로 미루고.


공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공부뿐인데, 그런 일 핑계를 앞세우고 가장 급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뒤로 미루고 공부를 이렇게 철저히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19분2초~39분33초)




(3/4)----------------


기래사반갈사음(飢來思飯渴思飮)하고  좌와동정상상수(坐臥動靜常相隨)니라

나무~아미타불~

경노음건창해수(鯨怒飮乾滄海水)하면  월명노출산호지(月明露出珊瑚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기래사반갈사음(飢來思飯渴思飮), 배고프면 밥을 생각하고 목마르면 물 먹기를 생각을 해.

좌와동정(坐臥動靜)에 상상수(常相隨)다. 앉고 눕고 움직이고 조용하고 고요하고 하는 가운데,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상상수(常相隨)여. 항상 따라댕겨.


배고프면 밥 먹고 싶어 하는 놈. 목마르면 물 생각할 줄 아는 놈.

앉고 싶고 눕고 싶고, 어디 가야 할 때 있으면 걸어가고, 자동차를 타고, 기차를 타고, 전차를 타고, 비행기도 타고, 달음박질을 하거나 천천히 가거나 일을 하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잠시도 여의고 산 적이 없어. 항상 그놈과 더불어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말이여. 우리 가는 곳에 그놈도 항상 따라댕겨.


우리 눈으로는 볼 수가 없어. 손으로도 잡을 수도 없고, 아무리 생각으로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으나 그놈이 항상 이 몸뚱이를 주재를 해. '가거라'하면 이 발이 걸어가고, '가지 말라'하면 그놈이 안 가고, '앉으라'하면 앉고, '서라'고 하고 서고, '밥 먹어라'하면 밥 먹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밥 먹어라 먹어라'해도 그놈이 속에서 '먹지 마라' 딱! 명령하면 안 먹거든. 입이 안 먹는 게 아니에요. 속에서 명령을 해서 안 먹는 것이지 입이 제멋대로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입은 먹고 싶어도 속에서 그놈이 '먹지 마라'하면 안 먹어.

속상할 일이 있어서 부애가 나면 그놈이 속에서 '밥 먹지 말라'하면은 먹기 싫거든, 안 먹거든.


아무리 '어디를 가라, 심부름을 하러 가라'해도 그놈이 속에서 딱! 틀고서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거든. 그놈이 속에, 눈에도 보이지 않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가 없는데 이 몸뚱이를 완전히 좌우를 하거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



삼간모옥종래주(三間茅屋從來住)하니  일도신광만경한(一道神光萬境閑)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하라  부생천착불상관(浮生穿鑿不相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간모옥종래주(三間茅屋從來住), 삼간(三間), 삼 칸 조그마한 삼 칸에 뗏집에 종래로 머물러 왔는데. 삼간모옥(三間茅屋)이라는 것은 저 산중에 뗏집, 떼를 비어다가 조그만하게 토굴을 지은 형상입니다. 그 조그만한 토굴에 주욱 살아왔다 그말이여.


이건 우리의 육체도 조그만한 방가루(bungalow)거든. 우리의 영식(靈識)이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그 어머니 그 아버지에 의탁을 해 가지고, 요 조그만한 이 육체라고 하는 방가루를 하나 지었어.

이것이 바로 삼간모옥이거든, 뗏집 토굴이거든 이게. 얼마 동안 살다가 못 살 만큼 집이 낡아 버리면 이거 훌렁 벗어버리고 또 새집을 짓게 되겠죠.


일도신광만경한(一道神光萬境閑)이로구나, 한 길 싱그러운 빛에 일만 경계가 한가하구나.

일도신광(一道神光)이라 하는 것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신 가운데에 본구재대지(本具在大智), 본래 갖추어져 있는 큰 지혜 빛이거든. 해탈 광명이거든.


떡! 화두를 들고,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 한마디에 나의 몸과 목숨과 모든 신심을 거기다 다 탁! 바쳐 버리거든. ‘이뭣고?’


이 ‘이뭣고?’로써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다 이겨 나가고, 흥망성쇠도 다 이 ‘이뭣고?’ 하나로써 다 극복해 나가고, 생로병사와 성주괴공도 다 ‘이뭣고?’ 하나로써 다 물리치고 극복을 해 나가거든.

그러한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지고 나갈 때 25신장이 항상 옹호를 하고,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다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하시면서 이렇게 보살펴 주시니 어찌 그 몸에서 싱그러운 빛이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겉으로 보면은 보잘것없는 떼 풀로 이은 보잘것없는 토굴이지만, 그런 수행을 하는 스님이 계시면 그 집은 바로 삼매(三昧)의 빛으로 장엄을 하게 되고, 그러한 수행자가 그 산중에 있으면 그 산중은 바로 명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도량(道場)에도 그러한 수행자가 있으므로 해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이 이렇게 청정도량으로써 많은 법보 가족들이 모여서 법문을 듣고 또 정진을 하고. 이 도량에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또 이 도량에 와서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하고 하면은 다 소원을 성취하고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을 하고 한 것이 다 헛된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삼간모옥종래주(三間茅屋從來住)  일도신광만경한(一道神光萬境閑)이다.

막파시비(莫把是非)를 내변아(來辨我)하라. 세상에 누가 잘하고 못하고, 누가 옳고 그르고, 누가 잘되고 못되고, 흥망성쇠와 성주괴공 생로병사 그런 시비를 나한테 와서 따지지 말라 이거거든.


부생천착(浮生穿鑿)이 불상관(不相關)이다. 이 사바세계의 모든 것은 부생(浮生)이거든.

유의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이, 유의법 속에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거, 모든 것은 뜬 생이거든. 뜬세상!


뜬세상에 있어서의 온갖 잘하고 못하고, 잘되고 못되고 하는 그러한 시비 천착은 나는 그까짓 것 상관하지 않겠다 이거거든.

거기에 깊이 빠져서 골몰을 해봤자 자기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뜻대로 일부가 된들 그것 가지고 무슨 영원한 행복이 오며 그것 가지고 무슨 생사가 해탈이 되는, 생사 문제가 해결이 되느냐 그말이여. 또 일시 잘되어 봤자 또 얼마 안 가면 금방 또 틀어져 버리는 거다 그말이여.


또 우선 잘못된 거 같아도 또 지내다 보면 또 잘되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너무 지나치게 이 허망한 유위법(有爲法)에 깊이 빠져서 몸부림치고 너무 깊이 탐착해 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웬수 짓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39분37초~60분5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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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정에는 가정의 길이 있고, 사회에는 사회의 법이 있고, 나라에는 나라의 다 법도가 있으니, 그런 것은 당연히 순응을 하면서 법에 어기지 말고 또 남에게 피해는 끼치지 아니하면서 자기는 자기의 생애가 탁! 있어야 혀.


자기의 가장 중요한 생사 문제를 향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이 공부는 선방(禪房)에 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철저히 하시면 백 번 천 번 좋고.

혹 가정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는 형편이면 가정에서 살림하면서 그저 하면서 그 속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화두를 들고, 시간이 있는 대로 앉아서 좌선도 하고 그렇게 해 보시라 그말이여.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다 모든 것은 형편 닿는 대로, 형편이 넉넉하면 잘 먹고 잘 입고 또 쓰고 남으면 보시도 하고, 또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또 검박하게 살면서 그런 것이지, 다른 사람 잘먹고 잘사는 사람 좋은 차 굴린 걸 보고 자기도 그렇지 못한 걸 보고 부끄럽게 생각할 건 전혀 없습니다. 조금도 부끄럽고 창피할 것도 없는 거고.

자가용이 없으면 전철 타고 버스 타면 떳떳하고 좋고 그런 것이지, 꼭 자가용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어.


그래서 어린 자녀들을 둔 분들은 어려서부터 공연히 허영심(虛榮心)을 길러주지 말도록. 모든 것은 형편 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직접 몸소 실천을 함으로써 잘 가르켜 주어야 합니다.

과거에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금생에 부자도 되고, 복을 많이 짓지 못하면 또 형편이 부자가 안 되는 수도 있으나 부지런히만 하면 목구멍에 거미줄은 안 친 것으로 다 옛날부터서 다 그렇게 되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허영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되고, 허영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쓸데없이 고민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허영심만 없다면 그리고 허영심 없이 정법(正法)을 믿고 공부를 해 나간다면 이 세상 사는 것이 그렇게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허영심으로 많은 돈을 가지고 호의호식하고 그렇게 산 사람이 훨씬 더 고통이 많고 편할 날이 없고 더 복잡한 것입니다. 차라리 좀 가난한듯 해 가지고 검소하게 살면 당장 근심 걱정이 없는 거고.


더군다나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면 왕후장상(王侯將相)도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정법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자꾸 저변 확대가 됨으로 해서 우리나라가 정말 물질적으로 선진국 따라갈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으로, 이 정신적으로 정말 세계의 선진국이 되어야 세계 평화에 참다운 이바지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든 과학 문명을 자꾸 이렇게 발달시켜 가지고 좋은 제품을 많이 만들어서 외국에다 팔아서 부자가 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필요하나, 그것만 갖고는 까딱하면 오히려 미래의 장래에 불행의 결과를 초래할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항상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정신적인 면에서 이 진리를 닦고 참나를 닦는 이것이 뒷받침이 되지 아니한 물질 문명은 결국은 불행과 멸망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계에 정말 내놓을만 한 것은 저 부처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등등상속(燈燈相續) 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 활구참선법, 이 정법, 불법 이것이 우리의 정말 세계에 내놓을만 한 문화유산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숙세의 쌓은 공덕으로 그냥 이것을 쉽게 정법을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철저히 공부를 해서 금생에 결정코 이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이 불법이 온 세계에 가득차도록 그렇게 해서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의 해탈도에 배부르도록 그럴 날이 오기를 항상 부처님께 발원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백천경권송여사(百千經卷誦如沙)하되  심지허로풍리사(心地虛勞風裡沙)니라

나무~아미타불~

하사조사공안상(何似祖師公案上)에  번신일척파진사(飜身一擲破塵沙)리요

나무~아미타불~


백천경권(百千經卷)을 외우기를 저 모래수와 같은 많은 경전을 다 외운 것은,

심지허로풍리사(心地虛勞風裡沙)다. 마음만 공연히 수고로운 것이 마치 바람 속에 먼지가 날으는 거와 같더라.

봄이 되면 저 중국 고비 사막에서 바람이 일어 가지고 우리나라에까지 흙비가 내리는데,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그 경전이지만 그 경전을 많이 외우고 읽는 것으로써 그것을 공부를 삼는다면 마치 마음속에 그 흙비가 내린 것처럼 공연히 마음만 수고로울 것이다 그거거든.


하사조사공안상(何似祖師公案上)에, 조사공안(祖師公案), ‘이뭣고?’ 또는 ‘판치생모’ ‘무자(無字)’ 이런 조사공안상(祖師公案上)에 한번 몸을 던져서 그 수없는 모래 먼지를 갖다가 깨쳐 버리라 이거거든.


자꾸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들고 또 들고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그 의심이 순수무잡해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면 더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어.

산을 봐도 의심이요, 물을 봐도 의심이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이 독로해서 순수무잡해서 하루를 그렇게 해, 이틀을 그렇게 해, 사흘 나흘 일주일 이렇게 가다 보면 발을 삐끗하거나 무슨 그럴 때에 그 화두를 타파(打破)하게 돼. 툭! 터져 버리는 것이여.


그럴 때에는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받아야 한다.


삼재팔난, 모든 업장이 '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한 생각을 이 최상승법으로 단속해 나가는데 삼재팔난이 그 사람에게는 붙지를 못하는 것이죠.

설사 가까이 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정진을 더 잘할 수 있는 발심을 하게 되게 때문에, 일어나지 않지만 설사 그놈이 나한테 가까이 왔어도 별로 문제가 없다.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다 이것이거든.


이걸 노놔 드리는데 차례차례 한 장씩만 받아 가시고, 또 내일 또 받아 가시고, 또 없으신 분은 다음에 또 와서 받아 가시지, 한 분이 여러 장씩 이렇게 가져 가시지 말도록.

왜 그러냐? 직접 본인이 와서 가져가야 더 훨씬 효험이 있거든.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가다 '진' 다 마셔 버리면 안 되거든.(60분57초~1시간14분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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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삼계지중분요요~'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습득(拾得)의 시.

*삼계(三界) : [범] trayo-dhatavah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세 가지로 나누는데,

①욕계(欲界 Kamadha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upadha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arupadha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일념불생(一念不生) ;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 불생(不生).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84, p103 참고.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註解) 斷者는 能所也요 不生者는 無能所也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二乘)이요, 번뇌가 나지 않는 것이 대열반(大涅槃)이니라. (주해) 끊는 것은 주체와 객체가 벌어짐이요, ‘나지 않는(不生) 것’은 주체도 객체도 없느니라.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註解) 戒也定也慧也가 擧一具三이요 不是單相이니라.


경계를 당하여 마음이 일지 않은 것을 ‘나지 않는다(不生)’고 이름하고, ‘나지 않는 것(不生)’을 무념(無念)이라 하며, 무념을 해탈(解脫)이라 하느니라. (주해) 계율이나 선정이나 지혜가, 하나를 들면 셋이 갖추어 있는 것이요, 홑으로 된 것이 아니니라.


[참고] 송담스님(No.410)—90년 2월 첫째일요법회, 신수기도회향, 입춘법회(90.02.04)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등지고 난 이후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도와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에 들어가서 사생을 지냈던가. 삼도(三途)는 지옥·아귀·축생 삼도요. 사생(四生)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이요.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에사 모든 번뇌의 생각을 씻어 버리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스스로 본고향(本故鄕)에 돌아가게 되었구나.


우리 모든 중생들이 원래는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한 몸뚱이, 한 마음이여. 그런데 그 본심왕을 위배(違背)하고 거기서 배반을 하고 물러나왔다.

'한 생각' 동(動)하지 않았다면 영원토록 법왕(法王)과 같이 살 수가 있을 텐데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한 생각 삐끗 어긋져 가지고 거기서 떨어져 나와 가지고 육도윤회(六途輪廻)—지옥, 아귀, 삼악도(三惡途)를 몇 번이나 들어갔으며 태란습화 사생을 몇 번이나 겪었든가.


경오년 초삼일부터 오늘까지 칠일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입춘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2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으셨습니다. 이 세 가지의 법회가 오늘 겹쳤습니다.

그동안 칠 일 동안 정성을 다해서 기도(祈禱)를 봉행하는 가운데 우리 사부대중의 마음은 참회(懺悔)를 하고, 기도를 하고, 발원(發願)을 하고 그래 가지고 모든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번뇌의 생각—그 훨훨 타오르던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염(煩惱染)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번뇌(煩惱)가 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념(無念)이고, 무념이면 그것이 불생(不生)이여.

불생이면, 일념불생(一念不生) '한 생각 남이 없는 도리'를 봐 버리면 그것이 바로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소식이더라.(처음~6분27초)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면벽관심(面壁觀心) ; 벽(壁)을 향하여[面] 앉아 자신의 마음[心]을 관[觀]하여 그 본성을 밝히는 것.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면벽(面壁) ;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면벽은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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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 관세음(觀世音)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의 번역, 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bodhi-sattva의 음사인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

세간(世間)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받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音聲)을 듣고(觀) 대자비와 지혜로써 자유 자재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왼쪽 보처(補處).

또 자재롭게 보는 이(觀自在者), 자재로운 관찰 등의 뜻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한다. 또 광세음(光世音) · 관세음(觀世音) · 관세자재(觀世自在) ·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쓰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의 주처는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다. 한국에서는 동해에 있는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가 관음 도량으로 유명하다.

*금강경(金剛經) ;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金剛)은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뜻하는 다이아몬드를 가리키며, 반야(般若)는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는 것, 즉 열반에 이른다는 바라밀다(波羅蜜多)의 줄임말이다. 풀이하면 ‘금강석처럼 견고한 지혜를 얻어 열반에 이르라는 부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다.

이 금강경은 대 반야경 육백부(六百部) 중에서 五七七권에 해당되고, 그 내용이 약 3백송(三百頌) 정도의 분량이기 때문에 ‘삼백송 반야경’이라고도 하며, 대략 서기 백오십~이백 년경의 대승경전 최초기에 만들어진 경전이라 할 수 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이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 「금강경」은 부처님과 수보리의 문답으로 전개되어, 공(空)사상에 입각하여 집착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는 일을 중심 내용으로 대승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위법(有爲法) ; ①여러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현상.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변하는 모든 현상.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환(幻) ; ①허깨비.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因緣)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실체가 없는 것에 비유함. 환(幻)을 실(實)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생의 미혹한 생각임. 환(幻)을 무(無)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승(二乘 : 聲聞, 緣覺)의 공(空)에 얽매인 견해, 단공(但空 : 단지 空만을 집착하는 것)임.

환(幻)은 또 화(化)와 거의 같은 뜻이므로 환화(幻化), 꿈과 비슷하므로 환몽(幻夢) • 몽환(夢幻)이라고도 한다.

②신기루, 아지랑이 같은 것.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근(根)은 기관·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경(六境) ;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경(境)은 대상을 뜻함.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육식(六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으로 각각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경(六境)을 식별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6가지 마음 작용.

①안식(眼識). 시각 기관〔眼〕으로 시각 대상〔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②이식(耳識). 청각 기관〔耳〕으로 청각 대상〔聲〕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③비식(鼻識). 후각 기관〔鼻〕으로 후각 대상〔香〕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④설식(舌識). 미각 기관〔舌〕으로 미각 대상〔味〕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⑤신식(身識). 촉각 기관〔身〕으로 촉각 대상〔觸〕을 식별하는 마음 작용.

⑥의식(意識). 의식 기능〔意〕으로 의식 내용〔法〕을 식별·인식하는 마음 작용.

*제석천왕(帝釋天王) ; 불법(佛法)을 지키는 수호신. 신[天神]들의 제왕[帝]인 샤크라〔釋〕라는 뜻. 제석(帝釋), 석제(釋帝), 제석천(帝釋天), 제석왕(帝釋王), 제석태자(帝釋太子), 천주(天主)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샤크라 데바남 인드라(Śakra-devānām Indra).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陀羅) ·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 · 석가제바인다라(釋迦提婆因陀羅) ·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 등으로 음역하고 줄여서 석제환인(釋提桓因, 釋帝桓因) · 제석천(帝釋天)이라 한다.

『법화현찬(法華玄贊)』에서는 “범어 석가제바인달라(釋迦提婆因達羅)에서 ‘석가’는 성(姓)씨이며 ‘능(能)이라 한역하고, ‘제바’는 ‘천(天)’이라 한역하며, ‘인달라’는 ‘제(帝)’라 한역하니 곧 ‘능천제(能天帝)’라 한다” 뜻으로 보면 ‘석가(능히) 제바(하늘의) 인달라(제왕)’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이 있는데 그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왕으로, 사천왕(四天王)과 32신(神)을 통솔하면서 불법(佛法)과 불제자를 보호한다. 도리천에는 33신이 있는데, 제석은 그 중앙에 있는 선견성(善見城) 안의 수승전(殊勝殿)이라는 궁전에 살고, 나머지 32신은 그 성(城) 밖의 궁전에서 각각 산다.

제석천은 본래 인도 성전 《리그베다》에 등장하는 천신 중 벼락을 신격화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었으나 불교에 수용되어서는 범천(梵天)과 함께 호법선신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부처님의 설법 자리에 나타나 법회를 수호하고 사바세계 인간의 번뇌와 죄를 다스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한국에서는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여 하늘의 주인과 제석천을 동일시하여 숭배하였다.

<잡아함경>에는 제석천이 본래 사람이었으나 수행자에게 음식과 재물, 향과 와구(臥具)·등불을 베푼 인연으로 제석천이 되었다고 한다. 제석천왕은 신중탱화(神衆幀畵)에 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는 모습으로 많이 등장한다.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의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말.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삼재(三災 석 삼/재앙 재)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 나쁜 운수를 의미한다.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 : 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 : 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 : 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④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인한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재난.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전부터 삼재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삼재라는 개념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 송담스님(No.258)—1985년(을축년) 신수기도입재(1985.02.22) 법문에서.

삼재가 들으신 분뿐만이 아니라, 삼재가 안 들으신 모든 사부대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앙(災殃)은 언제나 우리에게 닥아 올 수가 있고 우리에게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삼재는 바로 우리의 마음에서 그 근본이 일어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삼재가 붙을 수가 없고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마는, 우리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으로 부터 끊임없는 파도가 파도치고 있기 때문에 삼재가 일어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삼재라고 하는 것이 왜 그것이 어떠한 이유로 해서 있는 것이냐?

태어난 해에 따라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삼재가 오느냐 하는 것은, 이것은 음양오행의 술가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하여간 옛날부터서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삼재가 든 사람은 항시 불보살과 성현께 기도를 하고, 또 항시 3년 동안 근신을 하고,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각별히 조심을 해서, 대인 관계에 있어서나 모든 면에 있어서 근신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있게 그렇게 조심을 해 나가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생활은 여전히 해 가되 ‘어떻게 근신을 하고 어떻게 조심을 하느냐’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법을 믿고 항시 염불을 하는 이는 염불을 열심히 하고, 경을 독송하는 이는 경을 열심히 독송하고, 또 참선법을 믿고 실천하는 분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화두를 들며 참구를 한다면 어느 틈에 있어서 삼재가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삼재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우리의 마음의 틈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지, 마음에 틈이 없다면 들어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삼재가 우리의 마음의 틈을 타서 들어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을 하고 삼재에 걸린 분. 또 앞으로 삼재를 맞이할 분들은 각별히 마음의 문—마음의 문은 눈이 바로 마음의 문이요. 귀가 마음의 문이요. 코와 입이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몸뚱이가 마음의 문이요. 우리의 생각이 마음의 문인 것입니다.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 육문(六門)이 바로 삼재가 들어오는 문이 것입니다.


그 문단속을 잘 하는 것으로 모든 도적을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삼재를 막아내는, 비단 삼재라고 했습니다마는 더 널리 말을 한다면 육적(六賊)이 될 것이고, 더 방대하게 말한다면 팔만사천 마군(八萬四千魔軍)이 될 것입니다.


그 팔만사천 마군이를 ‘한 생각’에 막을 수도 있고, 도적을 불러 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비끗 잘못하면 바로 삼재와 육적과 팔만사천 도적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도 역시 그 ‘한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해서 끊임없이 생사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그 ‘한 생각’만 잘 단속해 나간다면 신수기도는 정말 옳게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법보시(法布施) ; 남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불서(佛書)를 베풂.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오욕락(五欲樂,五欲,五慾)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달관(達觀 통달할 달/볼 관) ; 인생의 진리를 꿰뚫어 보아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넓고 멀리 바라봄. 또는 그러한 경지.

*위신력(威神力) ; 부처님이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영묘하고도 불가사의한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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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기래사반갈사음~'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卷之七 '잡체시(雜體詩)[爲因普濟生靈 承命渡海時所記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왕명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갈 때에 기록]'에서 '贈松源宗長老僧(송원종 장로 스님에게 드림)' 참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소승(小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대승(大乘)이라 하고, 전통의 보수파들을 낮추어 일컬은 말. ②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사이에 분열된 불교 교단의 여러 부파, 곧 부파 불교(部派佛敎)를 말함. ③자신의 깨달음만을 구하는 수행자, 성문(聲聞)•연각(緣覺) 또는 그들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 ④열등한 능력이나 소질을 갖춘 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멸진정(滅盡定) ; ①마음[心]과 마음작용[心所]을 소멸[滅盡]시켜 무심(無心)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선정.

②무소유처(無所有處)의 경지에 이른 성자(聖者)가 모든 마음 작용을 소멸시켜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닦는 선정(禪定).

멸진정은 무색계의 4천 중 제3천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번뇌를 이미 떠난 상태에서 닦는 선정이기 때문에, 그 경지가 거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적정(寂靜)에 비견된다.

멸정(滅定)·멸진등지(滅盡等至)·멸진삼매(滅盡三昧)·상수멸정(想受滅定)·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 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고(膏 기름 고) ; ①식물이나 과실 따위를 끓이고 졸여서 곤 즙. ②동물에서 짜낸 기름.

*묘법(妙法) ; ①심원미묘(深遠微妙)한 도리. 특별한 진리. ②바른 이법(理法). ③뛰어난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고귀한 가르침.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게송) '삼간모옥종래주~' ; 『전등록(傳燈錄)』 제8권 '담주 용산(潭州龍山) 화상' 게송 참고.

- 삼간모옥종래주(三間茅屋從來住) 일도신광만경한(一道神光萬境閑)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 부생천착불상관(浮生穿鑿不相關)

*방가루(bungalow 방갈로, 방가로) ; ①산이나 바닷가 같은 곳에 지어 여름철에 캠프용, 피서용으로 쓰는 작은 집. ②정면에 베란다가 있고 처마가 깊숙한 풀이나 기와 따위로 지붕을 한 작은 단층 집. 본래 인도 벵골 지방의 특유한 목조 주택 양식이다.

*삼재팔난(三災八難) ; 사람의 태어난 해(十二支)에 따라 9년 주기로 돌아온다는 3가지 재난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청정한 수행에 방해가 되는 여덟 가지 난관.

〇삼재(三災) : ①대삼재(大三災)라 하여 물(水災), 불(火災), 바람(風災)에 의한 재난을 의미하기도 하고,

②도병(刀兵-서로 흉기를 갖고 살해함), 기근(饑饉-기근이 일어남), 질역(疾疫-큰병이 유행함)을 뜻하기도 하며,

③자연 현상으로 입은 세 가지 재해(災害) 즉 곡식이 익지 않는 기(飢), 채소가 익지 않는 근(饉), 과일이 익지 않는 황(荒)을 가리키기도 한다.

삼재의 첫해를 입삼재(入三災, 들삼재)이라고 하며 두 번째 해는 침삼재(枕三災, 눌삼재·앉은삼재)를, 마지막 해를 출삼재(出三災, 날삼재)라고 한다.


〇팔난(八難) : 깨달음으로 향하는 청정한 수행에 방해가 되는 여덟 가지 난관.

①지옥(地獄). ②아귀(餓鬼). ③축생(畜生). ④장수천(長壽天). ⑤변지(邊地). ⑥맹롱음아(盲聾瘖瘂). ⑦세지변총(世智辯聰). ⑧불전불후(佛前佛後).

①,②,③은 고통에 시달려 수행할 수 없기 때문,

④는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여러 천(天)으로, 수명이 길고 편안하여 불법(佛法)을 구하지 않기 때문,

⑤는 북구로주(北俱盧洲)로서, 사주(四洲)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

⑥은 눈이 멀고 귀먹고 말 못하기 때문,

⑦은 세속의 지혜는 있어도 그릇된 견해에 빠져 바른 가르침을 구하지 않기 때문,

⑧은 가르침을 설할 부처님이 안 계시기 때문임.

*마정수기(摩頂授記 문지를·쓰다듬을 마/정수리·이마 정/줄 수/기록함·기억함 기) ; 마정기(摩頂記), 마정수기별(摩頂授記莂)이라고도 한다. 손으로 정수리(이마)를 만져주면서 기별을 주는 것.

어떤 사람이 수행을 철저히 하거나, 염불 또는 기도를 정성스럽게 봉행하거나, 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인간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훌륭한 일을 하였을 때, 불보살(佛菩薩) 또는 천지신명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정수리(이마)를 만져 주면서 ‘훌륭한 일을 하였다. 그대는 이 공덕으로 성불을 성취하리니, 그때 얻은 결과는 이러이러 하리라’고 예언해 주는 것을 말한다.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부생(浮生 뜨다·덧없다·정함이 없다 부/살다·삶 생) ;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

*유위법(有爲法) ; ①여러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현상.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변하는 모든 현상.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뜬세상[浮世] ; 헛되고 덧없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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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송) '백천경권송여사~' ; 『소요당집(逍遙堂集)』 (소요태능) '贈性源禪子'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발을 삐끗하거나 무슨 그럴 때에 그 화두를 타파(打破)하게 돼' ; 각차수질(脚蹉手跌 다리 각/미끄러질·넘어질 차/손 수/거꾸러질·넘어질 질). (몸이 균형을 잃고) 손과 발이 미끄러지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50~52, 『선요』 (원순 역해 | 도서출판 법공양) p40~42 참고.

若要的實明證인댄  須開特達懷하며  發丈夫志하야

將從前惡知惡解와  奇言妙句와  禪道佛法과  盡平生眼裏所見底와  耳裏所聞底하야  莫顧危亡得失과  人我是非와  到與不到와  徹與不徹하고


發大忿怒하며  奮金剛利刃하야  如斬一握絲에  一斬에  一切斷이라  一斷之後에  更不相續하야  直得胸次中이  空勞勞地와  虛豁豁地가  蕩蕩然 無絲毫許滯碍하야  更無一法可當情이  與初生으로  無異니라


喫茶不知茶하고  喫飯不知飯하며  行不知行하고  坐不知坐하야  情識이  頓淨하고  計較都忘이  恰如箇有氣底死人相似하며  又如泥塑木雕底相似리라

到者裏하야  驀然脚蹉手跌하면  心華頓發하야  洞照十方이  如杲日麗天하고  又如明鏡當臺하야  不越一念하고  頓成正覺이라


非惟明此一大事라  從上若佛若祖의  一切差別因緣을  悉皆透頂透底하며  佛法世法을  打成一片하야  騰騰任運하고  任運騰騰하며  灑灑落落하고  乾乾淨淨하야  做一箇無爲無事出格眞道人也라

恁麼出世一番하야사  方曰  不負平生參學之志願耳니라


만일 이 일을 적실하고 분명하게 증득하려면 특별한 포부를 품고 대장부의 뜻을 내어,

종전의 나쁜 알음알이와 기묘한 언구(言句)와 선도(禪道)와 불법(佛法)과 평생동안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들에서 위태로움과 죽음, 얻음과 잃음, 남과 나, 옳음과 그름, 도달함과 도달치 못함, 사무침과 사무치지 못함 따위를 돌아보지 말고,


크게 분발심을 내어 마치 금강 같은 날카로운 칼로 한줌의 실을 벨 때, 한 번 베면 모두 다 끊어져서 그 후에는 다시 이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하면, 당장 가슴속이 텅 비어 호호탕탕(浩浩蕩蕩)해서 실끝만치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며 다시 한 법도 정식(情識)에 매이지 않음이 마치 갓난아기와 같을 것이다.


차를 마셔도 차 마시는 줄 모르고,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줄 모르고, 다녀도 다니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몰라 정식(情識)이 단박 깨끗해지고 계교(計較)가 모두 없어지는 것이 흡사 숨만 남은 시체와 같으며 또는 진흙으로 만든 인형이나,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 같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갑자기 손과 발이 미끄러져서 마음꽃이 단박에 피어 시방세계를 훤히 비춤이 마치 밝은 해가 하늘에 뜬 것 같으며, 맑은 거울이 경대에 놓인 것 같아서 찰나에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다.


이 일대사만을 밝힐 뿐 아니라, 위로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온갖 차별된 인연(因緣)을 몽땅 아래 위로 꿰뚫어 알며 불법과 세간법을 한 조각으로 만들어 무심하여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물 뿌린 듯 쇄락하고, 씻어 말린 듯 정결하여 하나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없는 참 도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세상을 뛰어나와야 비로서 ‘평생동안 참선하려는 뜻과 원력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리라.

—원문에 있는 '驀然 脚蹉手跌'은 몸의 균형을 잃고 자기도 모르게 문득 발이 미끄러지고 손이 미끄러지는 것이니, 아차! 하는 순간을 말한다. 轉身移步 懸崖撒手. (원순 스님 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주요 내용]


(게송)'삼계지중분요요~' / 일념불생(一念不生) / 온 세계가 평화적으로 사는 방법은 「나 자신을 다스리는 일」 / 똑바로 무상을 깨달아 발심(發心) 하나를 철저히 해야 한다.

관음사진, 사구게, 달마대사 /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의 공덕 / 유위법(有爲法) / 참선 공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 핑계를 대고 공부를 뒤로 미루지 마라.

(게송)'기래사반갈사음~' / 팔만대장경의 엑기스는 '이뭣고?' /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 다 진여불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된다 / (게송)삼간모옥종래주~ / 부생(浮生) / 허영심을 내지 마라 / 활구참선법, 불법이 세계에 내놓을만 한 문화유산 / (게송)백천경권송여사~.




[주요 문구]


탐진치(貪嗔癡) 삼독(三毒)이 무명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그 무명을 요달해 끊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걸로 인해서 탐진치 삼독이 벌어지고, 그래 가지고 작은 싸움 큰 싸움, 온 나라와 나라의 싸움, 세계 전쟁이 순전히 한 사람 한 사람의 무명(無明)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싸움은 싸움으로써 그치지 아니하고, 원망은 원망으로써 그치지 않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은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싸움은 그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서 찾고 자기를 반성함으로 해서 싸움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발심(發心) 하나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 발심에 대해서 매우 강조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공부가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암만 정신을 좀 차려서 정진을 좀 착실히 하려고 마음을 먹어도 안되고,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의단(疑團)이 간절하지 못하고 자꾸 혼침이 오고 망상이 일어나고 영 공부가 제대로 안된다'고 많은 수좌(首座) 스님네나 또 보살님네들이 그런 것에 대해서 많이 호소를 하십니다마는 문제는 '발심을 철저히 못한 데에서 그런 것이다'


금강경에 '이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몸에 지니거나, 수지독송(受持讀誦)하거나, 남을 위해서 설해 주거나 하면은 그 공덕은 삼천대천세계에다 칠보탑을 조성해 모신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금강경전이나 사구게가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며, 부처님의 탑이 거기에 봉안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의 탑이 모셔져 있으면 거기에는 항상 제석천왕(帝釋天王)을 비롯한 모든 선신(善神)과 25신장(神將)이 그걸 잘 외호(外護)를 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 금강경 사구게는 철저하게 이 뜻을 이해를 하시고, 턱! 고대로 믿기만 해도 마음속에 온갖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는 것입니다.


집안 살림 핑계, 아들딸 핑계, 무슨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그것이 끝나야 공부를 하리라' 그렇게 모두 핑계를 대고 공부를 뒤로 미루고. 공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이 공부뿐인데, 그런 일 핑계를 앞세우고 가장 급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로 뒤로 미루고 공부를 이렇게 철저히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들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


우리가 세계에 정말 내놓을만 한 것은 저 부처님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등등상속(燈燈相續) 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 활구참선법, 이 정법, 불법 이것이 우리의 정말 세계에 내놓을만 한 문화유산인 것입니다.


삼재팔난, 모든 업장이 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한 생각을 이 최상승법으로 단속해 나가는데 삼재팔난이 그 사람에게는 붙지를 못하는 것이죠.

설사 가까이 왔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오히려 정진을 더 잘할 수 있는 발심을 하게 되게 때문에, 일어나지 않지만 설사 그놈이 나한테 가까이 왔어도 별로 문제가 없다. 두려워 할 것이 전혀 없다 이것이거든.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26~250)2018. 10. 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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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46)—84년(갑자년) 추계산철결제 법문(84.08.27) (65분)

(1/3) 약 21분. (2/3) 약 22분. (3/3) 약 21분.

(1/3)----------------


산중하사기(山中何事奇)요  석상송백다(石上松柏多)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산중(山中)에 하사기(何事奇)요  석상(石上)에 송백다(松柏多)로구나.

산중(山中)에 무슨 일이 기특한고? 돌 위에는 송백(松柏)이 많구나.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여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로구나.

젓대를 불며 소를 타고 가는 자여, 동쪽 서쪽으로 임의(任意)대로 자유자재(自由自在)한다.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을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산중(山中)입니다.


시장 바닥이 되었건, 종로 사거리가 되었건, 농촌이 되었건, 주택지가 되었건, 절 마당이 되었건, 버스 안이 되었건, 전철 안이 되었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화두를 떠억 들고 참구(參究)를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禪房)이요, 그 자리가 바로 산중인 것입니다.


첩첩산중 깊은 고을에 있으되 화두를 놓쳐 버리면은 그곳은 시장 바닥이요, 삼도(三途)—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의 삼도의 구렁텅이요.

설사 지옥 속에서라도 화두를 매각(昧却)하지 아니하고 의단이 독로하고 성성(惺惺)하면 바로 지옥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요, 선방(禪房)이요,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되는 것이여.


젓대를 불며 소를 타고서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젓대는 무슨 젓대냐? ‘구멍이 없는 젓대’여. 구멍이 없는 젓대를 불면 동서남북 어디로 가나 맥힐 것이 없고 걸릴 것이 없어.



오늘은 갑자(甲子)년 가을 산철 결제날입니다. 산(散)철 결제(結制)라는 말이 최근에 생긴 말이어서 매우 생소하게 들리는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원래 결제(結制)라 하면,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서 석 달 뒤인 7월 15일에 해제(解制)를 해. 이것을 하안거(夏安居)라 그리고. 겨울은 음력 10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이듬해 정월 15일에 해제를 하는데, 그 겨울 석 달 동안을 동안거(冬安居)라 그럽니다.


원래 안거(安居)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부터 생겨난 것인데, 인도는 일 년 중 비가 많이 와서 장마가 계속되기 때문에, 스님들이 숲속의 나무 밑에서 모두 그런 데서 정진을 하시는데,

장마철에는 그런 숲속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어서 기원정사(祇園精舍)나 죽림정사(竹林精舍)나, 이런 장자(長者)나 또는 신도들이 지어서 바친 그런 수도원에 모여서 그 비 오는 계절을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것을 안거라 그러는데.


중국 · 한국 · 일본은 여름에 비 오고 더울 때 석 달과 겨울에 눈이 오고 매우 추울 때 석 달, 1년에 두 번씩을 안거를 하는데, 근자에는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봄 산철 두 달, 가을 산철 두 달,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이 생겼다.


왜 생겼냐 하면, 7월 15일에 여름 해제를 하고 10월 15일 겨울 결제 할 때까지 석 달 동안 마땅히 머물러 있을 만한 곳이 없어. 정진은 계속해서 하고 싶은데, 일정한 데에 자리를 잡고 정진을 할 만한 데가 마땅치를 못해서 그 석 달 동안을 이리 가도 편틀 못하고 저리 가도 편틀 못하고.

그러한 그 정진은 하고 싶으나 자리가 마땅치 않은 그 산철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산철 결제'라 하는 것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산철 결제를 하고 보니, 그 석 달 동안을 장소가 마땅치 안 해서 그 방황을 하던 선객(禪客) 스님들이 그 두 달 동안을 착실히 정진을 하니까 매우 정진에 유익하더라 그말이여.

그래서 용화사 선원이나 봉암사 선원이나 기타 다른 선원에서도 이렇게 산철 결제를 몇 군데 하게 되았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정진을 간단없이 한결같이 할 수 있을까?

이 정진이라 하는 것은 꼭 여름 결제 동안만 하고 또 겨울 결제 동안만 하고, 그 나머지는 안 해도 괜찮은 것임사 구태여 산철 결제를 할 것이 없지만, 결제 · 해제에 상관이 없이 정진은 한결같이 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산철 결제를 하는 것이 퍽 효과적인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이 결제 법어를 다 들어 마쳤습니다. 더이상 할 말씀이 없지만, 이 자리에는 처음으로 참선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용화사를 찾아온 청신녀(淸信女)도 계시고,

또 강원에 다니다가 강원을 졸업하고 또 이제부터 참선을 하고자 하는 그러한 수좌(首座)도 있고, 처음으로 선방에 나와서 아직은 참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아지 못해서 안타까와하는 그러한 스님도 있고 해서, 오늘은 이 참선을 해 나가는 아주 요긴한 요점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사람 사람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 있는, 조금도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에 손색이 없이 완전무결하게 갖추어져 있는 그 도리(道理).


그것이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손을 가지고 오그리면 주먹이 되고 펴면 손바닥이 되는 거와 같애. 쥐고 싶으면 쥐고, 손을 펴고 싶으며 펴고, 누가 그것이 어려웁다고 할 것이냐 그말이여. 조금도 힘들일 것이 없어.


이와 같애서 참선도 원래 내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어서 새로 찾을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는 것이지만, 무량겁래(無量劫來)로 '한 생각' 미(迷)한 탓으로 해서 심(心) · 의(意) · 식(識), 마음과 뜻과 식이 제멋대로 놀아나 가지고 그 심의식의 제멋대로 놀아난 그놈의 장난으로 해서 나의 본분을 망각(忘却)해 버렸다 그말이여.


부처님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러한 도리를 갖추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그 망각한 그 탓으로 해서 육도(六道)를 본의 아니게 돌고 돌면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지음으로 해서 더욱 치성하게 고초를 받게 되고, 이렇게 하기를 무량겁 동안을 지내오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 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한 생각 돌이켜서 본래 갖추어져 있는 도리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는 환하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내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라 하나도 힘들 것이 없지마는, 무량겁으로 윤회를 하면서 지은 악업이 솜털 얽히듯이 얽혀 가지고 내가 내 마음이면서 내 마음대로 못하고, 내가 내 뜻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내가 내 알음알이를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겨울에 얼음에다 물을 찌트르면 찌클수록 그 얼음 덩어리가 불어나듯이, 우리의 심(心) · 의(意) · 식(識)은 무량겁 우리의 지은 업에 의해서 얽힌 데 또 얽히고, 얽힌 데 또 얽히고 해 가지고, 헤치고 들어갈수록 점점 더 복잡하고 어찌 해 볼 수 없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라면 정말 쇠로 지어 붓은 쇠뭉텡이와 같이 이를 악물고 죽기로 각오를 하고 대들지 아니하면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내가 말세(末世)에 태어난 업보(業報) 중생으로서 감히 그런 참선을 해서 될 것인가?’

‘여자로 태어나 가지고 어떻게 그러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견성성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건강이 좋지 못하니 어떻게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나이가 이렇게 늙었으니 어떻게 내가 공부를 한다고 해봤자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경(經)도 보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확철대오를 해서 무량 중생(無量衆生)을 제도(濟度)할 것인가?’


이러한 등으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자포자기하는 그러한 자신 없는 마음으로 대들어 봤자, 물어볼 것도 없이 조금 해 보다가 무엇이 잘 안되면 스스로 물러서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한 것을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본래 내가 부처인데 그것 찾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인가?’

‘과거에 모든 부처와 조사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다. 똑같은 범부였었지만,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견성성불을 했다’

표현이 ‘성품을 보았다’ 또는 ‘부처를 이루었다’ 하지만, 본래 내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확인한 것뿐인 것입니다.


'견성(見性) 했다'고 하니까, 미간(眉間) 백호(白毫)가 튀겨져 나오고, 몸에서는 방광(放光)을 하고, 육신통(六神通)을 자유자재로 행사하고 이렇게 굉장히 불가사의하고 신비한 존재로 생각하기가 쉽지마는,

말할 줄 아는 놈, 들을 줄 아는 놈, 성낼 줄 아는 놈,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도 왔다갔다하고, 천 년 이천 년 과거로도 갈 수도 있고, 미래로도 갔다왔다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한 놈,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인 것입니다.


그런데 착각해서는 아니될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그 본래면목에서 나오는 그림자를 붙잡고 자기라고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성내고 욕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것은 그 나의 본래 갖추어져 있는 ‘한 물건’의 한 작용이 될지언정, 그놈을 바로 나의 본래면목이라고 우리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인식을 하는 것은 ‘도적을 나의 자식으로 착각을 하고,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는 거와 같다’ 이렇게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처음~21분32초)




(2/3)----------------


번뇌 망상(煩惱妄想),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혀를 통해서 맛보는 놈. 그놈을 여의고 찾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 알면 ‘아! 바로 이놈이 이놈이로구나. 이놈이 그놈인데, 찾을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속단(速斷)을 하게 되면, 이것은 이 최상승법을 잘못 인식을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한 공안(公案)을—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화두(話頭)라고도 합니다마는,

이 공안 하나를 가지고 거기에다가 일심 정력을 쏟아서 밤낮도 가리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도 가리지 아니하고 어묵동정(語默動靜)도 가리지 아니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건 간에 이 한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을 참구(參究)했습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한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기를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인도에서 오신 뜻입니까?’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데 대해서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달마 스님이 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느냐?’하고 묻는 데에 대해서, ‘참선법을 설하기 위해서 오셨다’ ‘내가 내 마음을 깨달라서 견성성불을 하는 법을 가르키기 위해서 왔다’ 우리의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렇게 대답험즉 한데.


또 ‘달마 스님은 부처님으로부터 가섭존자, 가섭존자로부터 아난존자, 아난존자로부터 상나화수, 이렇게 해서 달마 스님까지 28대를 법(法)을 전해 왔는데, 그 28대 조사인 달마 대사가 그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내려오는 그 최상승법, 정법을 중국에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대답험즉 한데.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아! 이렇게 대답을 해.


‘대관절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꼬~?’

이것이 바로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에는, 그동안에 자기가 배우고 알고 한 모든 지식이 여기에 동원되야서는 아니 되고, 모든 이론이 여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앉아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걸어가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밥을 먹으면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억울한 소리를 듣고 울화통이 치밀어서 속이 상할 때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 계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 사부대중이 ‘이뭣고?’,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생각을 합니다마는,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시는 분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똥을 누면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다못 앞도 없고 뒤도 없고 무조건하고 그렇게만 참구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다가 그걸로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분석해 보고, 그런 것이 아니여.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그래서 옛날에 이 공부는 ‘무얼 많이 알고 배우고 하면은 오히려 이 공부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도 있다’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경을 알고, 학교를 많이 다니고 해서 지식이 풍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들여서 그것을 동원하지만 아니하면, 뭐 하등(何等)에 해로울 것도 없지만,


중생의 습기(習氣)라 하는 것이 그렇기가 어려워서 뭘 많이 알면 아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놈을 갖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그놈으로 이리저리 분석도 하고, 적용도 해 보고, 종합도 해 보고, 그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결론을 내려 보고도 싶고 이럴 수가 있어서 하는 말이지, 꼭 많이 알면 못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첫째는 큰 신심(信心).

‘내가 본래 부처다. 나도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찌 내라고 해서 이 공부를 못할 것이 있는가? 나도 열심히 하면 결정코 성불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태산(泰山)을 끼고 바다를 건너뛸려고 하는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여.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하면 바로 거기에 나의 본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라, 올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만 하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큰 분심(憤心)을 가져야 하는데, 무슨 분심이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선지식들은 진즉 이 문제를 결판을 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 받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육도 속에서 이렇게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가.


그 점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을 가져야 해. 분심을 가져야 용맹심이 나고, 용맹심을 내야 퇴태(退怠)를 안 하게 되는 것이여.

분심이 없고 용맹심이 없으면 공부에 아무 매카리가 없어 가지고, 어제도 그럭저럭 오늘도 그럭저럭, 공부를 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여간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자기의 본래면목을 요달(了達)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손수 머리를 깎어 버리고 6년, 어떤 경전에는 12년이라고 되어있는 데도 있습니다마는, 그 무서운 고행을 하셨고.

달마대사도 소림굴에 들어가서 9년을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하셨고, 장경(長慶) 스님이라 하는 분은 포단(蒲團)을, 방석을 7개를 뚫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좌선을 지극정성으로 했으면, 궁뎅이로 방석이 뚫어져서 못 쓰게 되면은 또 다른 방석을 가지고 또 정진을 하고, 1년 이태 이렇게 한 방석을 가지고 한결같이 앉아서 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다 보니까 멀쩡한 방석이 닳고 닳아서 구녁이 뚫어져. 이렇게 하기를 7개 포단을 뚫었다 이거여.


향림(香林)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어.

타성일편이라 하는 것은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 그 40년에사 타성일편(打成一片)했다.


조주(趙州) 스님은 소년 시절에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견성(見性)을 한 그러한 고불화현(古佛化現)이라고 할 만큼 그런 큰스님인데, 3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을 했어. 잡되게 마음을 쓰지를 안 했다.


이 공부는 이만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지만 이만한 끈기와 정성과 용기가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조금 해 보고 ‘아이고, 그놈의 것 못 해 먹을 지서리다’, ‘인연이 없나 보다’, ‘내가 근기가 약한가 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고인(古人)은 하루해가 넘으면 ‘오늘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하루해가 넘어갔구나’ 이래가지고 발을 뻗고 통곡을 한 스님도 있다고 합니다.

밤에 잘 때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졸음을 깨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저녁에 잠을 자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돌덩어리를 지고서 지리산을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밤새 다니면서 정진을 한 그런 스님도 있습니다. 그 돌이 지금 지리산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앞에 그 돌이 지금도 놓여 있습니다마는.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성을 들이지 않고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우리는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면 일찌감치 그만두고 아미타불(阿彌陀佛) 10번만 불러도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는데, 우리 같은 여자가, 더군다나 속가에 있으면서 그 참선은 감히 생각지도 못헐 일이다. 그저 염불(念佛)이나 해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가야겠다'

혹 그렇게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는 분이 있으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면으로 보자면 그렇고.


쉬운 면으로 보자면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다' 그랬습니다. 세수를 하다 보면 코를 만지지 않을라고 해도 저절로 코가 만져지는 것이여. 내가 나를 찾는 공부가 쉽기로 말하면 그렇게 쉬운 것이다 그말이여.


밥 먹을 때, 옷 입을 때, 걸어갈 때, 말할 때, 눈으로 무엇을 볼 때, 귀로 무엇을 들을 때, 바로 거기에 있거든.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찾을라고 함으로 해서 달아나버리고 놓쳐버리는 것이지, 찾을라고 하지 아니하면 언제나 거기에 있거든. 그러니 그것이 쉽다고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찾을라고 하면, 이렇게 시청언동(示聽言動),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보고 듣고 맛보고 말하고, 바로 거기에 있건마는 과연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가? 그놈이 무엇인가?’하고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이렇게 눈을 통해서 온갖 것을 보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듣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다 가려내고, 몸뚱이를 통해서 차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그렇게 판별할 줄 아는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잠시도 나와 더불어 일분일초(一分一秒)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건마는, 그렇게 소소영령하고 분명한데 아! 찾어보면 간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찾어도 볼 수가 없고, 일분일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이 노상 같이 있고,

가깝기로 말하면 한 걸음도 여의지 않고 1초도 여의지 않는 것이고, 멀기로 말하면은 삼천대천세계를 찾어도 없으니 이 기기(奇奇)하고 묘묘(妙妙)한 이 도리를 어떻게 말로 가르켜 주고 생각으로 알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화두(話頭).

‘이뭣고~?’


말을 할 때에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에도 ‘이뭣고?’

배가 고플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 해 갈수록 꽉 막혔어. 앞도 없고 뒤도 없어.


‘이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처음에는 입으로 ‘이뭣고?’해도 속으로는 금방 딴 생각이 일어나고, 앉았을 때 ‘이뭣고?’했는데 일어서다가 잊어버리고, 금방 ‘이뭣고?’하다가 무슨 소리가 나면은 그 소리 듣는 바람에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린 때가 많다 그말이여.


보다가 잊어버리고, 듣다가 잊어버리고, 냄새 맡다가 잊어버리고, 먹다가 잊어버리고, 생각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렇게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린 것 걱정하지 말고, 딴 번뇌 망상 일어나는 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부지런히 챙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 ‘이뭣고~?’


경(經) 공부를 한다든지 다른 무슨 공부를 하면 무엇이 알아진 것도 있고,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바가 있고, 이틀 하면 이틀 한 만큼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진 바가 있는데,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하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 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되어 간 거여.

스승 없이 자기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 백이면 백, 다 잘못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21분33초~43분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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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 무엇이고 일심(一心)으로 하면 안정이 되고, 안정이 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거기에는 온갖 마장(魔障)이 거기에 붙게 되는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 보면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색음(色陰)이 스러져서 없어지면—색(色)이라 하는 것은 육체(肉體)를 말하는 것인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체(肉體)의 모든 기관이 안정이 되고, 안정이 되면 조용해지고, 조용하면 맑아지는 것인데, 그 색음이 맑아지면은 여러 가지 신기한 경계가 나타나는 수가 있습니다.


또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정신 작용인데 그 정신 작용이 안정이 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은 거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신기하고도 묘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맑아지면은 그러한 마장(魔障)이 일어나냐’하면, 이 우주법계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신기한 능력을 갖춘 마귀(魔鬼)가 있습니다.

그런 마귀는 다 전생에 도를 닦다가 공부가 잘못되어 가지고, 공부는 지극정성으로 해서 거의 깨달음에 가까울 지경에 이르도록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도를 닦다가, '한 생각' 잘못한 탓으로 삿된 경계에 떨어져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러한 중생, 그런 것이 귀신의 몸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갖 신통이, 오신통(五神通)이 다 나 가지고, 참 그러한 귀신이 많이 있는데, 누구라도 도를 닦은 사람이 있으면 그 귀신이 시기(猜忌)가 나 가지고 그것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 가지고 방해를 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누가 도만 열심히 닦을라고만 하면, 그것을 시기 · 질투가 나 가지고 그걸 방해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방해를 치기 위해서 항시 주변을 맴돌고 있어. 육근문두(六根門頭)에 그것을 엿보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그 틈을 타서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도고마성(道高魔盛)이다. 도가 높으면 높아질수록 마구니는 무장 더 성해진다’하는 말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까닭인 것입니다.


그래서 도 닦은 사람은 '한 생각' 단속하기를 무섭게 단속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계중자일념(眞淨界中纔一念)이, 진정계(眞淨界) 가운데에 겨우 이 '한 생각'이 염부조이팔천세(閻浮早已八千歲)다. 염부(閻浮)에 있어서는 벌써 팔천 세(八千歲)가 된다 그말이여.


정진을 해서 오음(五陰)이 맑아지면 맑아질수록 눈 한번 깜박하는 그 찰나간의 '한 생각'이 이런 무서운 마귀를 자기 마음속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 삐끗한 그 '한 생각' 단속을, 마치 화약고를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이 불조심 하듯이,

잠깐 실수로 담뱃불 하나 실수하면 그 어마어마한 화약이 터져서 그 많은 화약을 다 손실하고 거기에 있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고 동시에 자기의 목숨까지 잃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야 해.

성이 날 때, 슬플 때, 억울할 때, 근심 걱정이 있을 때, 기쁠 때, 좋을 때, 모든 순경계(順境界), 모든 역경계(逆境界), 일체 팔풍(八風)계를 당해서 그 '한 생각' 미끄러지는 것을 무섭게 단속을 해야만 그런 마구니의 권속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숙세(宿世)에 이 정법(正法)에 인연이 있어서 우리가 이런 최상승법을 만나서 듣고 이것을 실천을 하게 된 것까지는 매우 다행한 일이나, 그 의지력이 견고하지 못해 가지고 반신반의(半信半疑)를 해서 조금 해 보다가 말다가, 조금 이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할라고 하면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 또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이렇게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말다가, 이 핑계 저 핑계 이렇게 해 가면 도(道)의 마음은 점점 생소해지고, 세속적인 그런 생각은 날이 갈수록 얽히고설켜서 그럭저럭 안 한 것도 아니요, 한 것도 아니요, 이렇게 해 가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도를 이룰 기약은 막연할 수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산철 결제일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우리가 다짐을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시간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이 동안에도 계속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1초 1초가 이렇게 지내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의 수명은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우리는 한 생각 단속하는 일 이외의 다른 일에는 단 일분일초도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은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써 붙이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송곳을 턱 밑에다가 받쳐 놓고 공부를 하기도 하고, 잠을 잘 때에는 둥글둥글하게 목침을 깎아 가지고 그래 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하면 퉁! 머리가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일어나서 정진을 하고,

또 말을 하다 보면 한마디가 두 마디 되고, 두 마디가 열 마디 되아서 그렇게 말하다 보면 생각을 놓치고 화두를 놓칠까 그래서 말을 아니 하면서 정진을 하고, 또 밥을 많이 먹다 보면은 또 식곤증(食困症)이 나서 졸음이 올까 봐 그래 밥을 한 끼씩만 먹고 하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방법을 다 써 가면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 스님네께 ‘밥을 한 끼만 먹어라’, ‘말을 하지 말고 묵언(默言)을 하라’ 또 ‘송곳을 깎아서 턱 밑에다 괴아라’ 이런 것을 내가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만한 의지력과 각오를 가지고 정진을 해 나간다면, 말을 일부러 묵언을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하루에 한마디 하거나 말거나, 이틀에 한마디 하거나 말거나 하면, 일부러 묵언을 안 해도 저절로 묵언이 되아져야 그 묵언이 진짜 묵언이 될 것이고.


하루에 세 때를 먹더라도 한 알갱이도 씹은 바가 없다면 세 그릇 먹는다고 해서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는가. 다만 과식만 하지 않도록 잘 저작(咀嚼)을 해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세 그릇 먹어도 한 알갱이도 씹지 않는 도리가 그 속에 있으니 무엇을 걱정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면 6시간인데, 그동안에 한 시간쯤 더 안 자고 5시간만 자고 정진을 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6시간을 자되, 잘 때에 든 화두가 꿈속에서도 화두가 들린다면 6시간을 잔다고 해서 무엇이 또 방해로울 것이 있습니까.


산철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그러니 그 기간을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다른 사람의 타율적인 그런 견제로 인해서 규칙을 지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정진을 하다 보니 저절로 모든 것이 법도에 맞고 규칙에 맞아서 한 달이 하루와 같이, 두 달이 하루와 같이 이렇게 정진을 해 가신다면 반드시 이 산철 동안에 공안을 타파해서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실 것이 의심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출가수도배(出家修道輩)여  재색최선금(財色最先禁)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군거수구신(群居須口愼)하고  독거요방심(獨居要防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출가(出家) 수도(修道)한 선객(禪客)들이여, 재색(財色)이 최선금(最先禁)이니라. 재물과 색이 가장 먼저 금(禁)할 것이니라.


출가(出家) 수도인(修道人)이라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집을 나와서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은 스님네를 말하는 바지마는, 출가(出家)라고 하는 뜻이 넓게 본다면, 넓은 의미에서 출가를 해석을 한다면,

몸뚱이에 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마음에다 기준을 두어야 더 옳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안 깎고, 먹물옷을 입고 안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도심을 발(發)하면, 도 닦을 마음을 내면 머리가 있고 속복을 입어도 그게 출가인(出家人)이고,

설사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다 해도 도심(道心)이 없이 속심(俗心)이 가득차 있다면 그건 출가인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도 출가하고 마음도 출가한 출가인도 있고, 몸도 마음도 속가에 있는 사람도 있고, 몸은 속가에 있으면서 마음은 출가한 사람도 있고, 이 네 가지로 출가 · 재가를 이렇게 설명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몸이야 속가에 있건 산중에 가 있건, 도심(道心)을 내서 도를 닦아 가면 모두가 다 출가 수도인인데, 출가 수도인이 가장 주의할 것은 재물(財物)과 색(色)이다.

재물(財物)은 모든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나,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이런 것들이 모두 재산에 해당이 되고, 색(色)이라 하는 것은 비단 남녀 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일체 색상(色相)을 통해서 마음에 욕심을 내면 그것이 다 색에 해당이 되는 것이다.


도 닦는데 그것을 금(禁)해야 한다 그랬는데, 그것을 멀리하고 금(禁)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통해서 익히고 익힌 바라, 유심 · 무심을 통해서 항시 그것이 본의 아니게 우리의 눈에도 그것이 걸리고, 귀에도 걸리고, 코에도 걸리고, 입에도 걸리고, 몸에도 걸리고, 생각에도 그것이 걸려든다 그말이여.

걸려드는 그 찰나에 바로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하지 말고, 그 생각에 즉(卽)해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의 수행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군거수구신(群居須口愼)이요, 여럿이 살 때에는 입을 조심을 해라.


혼자는 말을 못하는 것이고, 두 사람 세 사람 이상 열 사람, 스무 사람, 그게 인자 군거(群居)인데,

여러 사람이 모이면은 자연히 입이 벌어져서 말이 나오는데, 입을 벌려서 말을 하다 보면은 좋은 말보다도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쓸데없는 말을 하면은 시비(是非)가 일어나서 내 속상하고 남의 속상하고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그래 가지고 싸움이 일어나기 마련이니 그래서 입을 조심을 해라.


그 다음에는 혼자 있을 때에는 방심(放心)을 조심을 해라[獨居要防心]. 방심(放心)은 마음을 놓아 버리는 거여. 마음을 단속하는 것을 조심을 해라.


마음은 고삐 없는 소와 같애서 잠깐! 방심을 해버리면 이놈이 밭으로도 들어가고, 논으로도 들어가고, 곡식 밭에도 가고, 채소 밭에도 들어가서 다 그저 짓밟고 쥐어 뜯어먹고 해서 망가트려 버리는 거여.

우리의 마음, 고삐가 없는 소와 같아서 항시 단속을 하지 아니하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를 왔다갔다하고, 그저 갈 데 못 갈 데, 생각할 거 안 할 거, 볼 거 안 볼 거, 참 그것을 기록을 할 수가,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여.


그러다 보면은 1시간 2시간이 속절없이 지내가고 하루 이틀이 속절없이 지내가니 혼자 있을 때에는,

이 ‘혼자’라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자기 혼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르는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그것을 여기서 ‘홀로 독(獨)’자 ‘혼자’라 이렇게 보면은 참선하는 사람은 그것이 더 해당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생각이 얼굴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면은 이것이 인자 모든 사람이 보게 되니까 모든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고, 아직 그 생각이 말이나 얼굴이나 행동으로 표현이 되기 이전에 자기 혼자만 알 수 있는 그 겨우 가는 생각이 탁! 일어날 그 순간, 이것을 ‘혼자 있는 때’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혼자 있는 바로 그때를 탁! 돌이켜서 그 생각이 얼굴로 표현되기 전에, 말로 나타나기 전에,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그때의 생각을 잘 단속을 해 버려. 그때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버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해 가시기를 거듭 당부를 하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반산림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43분11초~64분2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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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산중하사기(山中何事奇) 석상송백다(石上松柏多) 취적기우자(吹笛騎牛子) 동서임자재(東西任自在)’ ; 『청허당집(淸虛堂集)』 (卷之二, 五言絶句) 1,2구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의 글자를 모아서 시를 짓다[集孤雲字]’ 3,4구 ‘목암에 제하다[題牧庵]’ 게송 참고.

*젓대 ; ‘저(가로로 불게 되어 있는 관악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 적(笛).

*임의(任意 맡길·마음대로 할 임/뜻 의) ; ①어떤 일정한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 ②얽매이는 것이 없어 자유롭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정진(精進) ; ①정성을 다하여 노력해 나아감. 부지런히 힘씀. ②불법(佛法)을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씀.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〇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〇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삼도(三途, 三塗)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 지옥 · 아귀 · 축생의 생존. 삼악도(三惡途),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愚癡 어리석음)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매각(昧却) ; 잊어버리다. (지혜가)어두워지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구멍이 없는 젓대' ; 무공적(無孔笛 없을 무/구멍 공/피리 적) ; 구멍 없는 피리.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저선(無底船 밑바닥이 없는 배)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기원정사(祇園精舍) ;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정사의 약어(略語). 중인도 코살라국(國)의 수도 사위성(舍衛城:슈라바스티) 남쪽 1.6 km 지점에 있던 기타태자(祇陀太子) 소유의 동산에 지은 절.

이는 ‘기타태자의 동산에 수달(須達:給孤獨長者)이 지은 승원’이라는 뜻인데, 급고독장자(給孤獨長者)란 ‘고독한 이들에게 보시를 많이 한 부자’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 ; 마가다국(magadha國)의 왕사성(王舍城) 부근에 있던 불교 최초의 사원.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찾았을 때, 칼란다(kalanda) 장자(長者)가 붓다에게 기증한 죽림 동산에 빔비사라(bimbisāra) 왕이 지어 붓다에게 바친 정사.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청신녀(清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도리(道理) ; 이치(理致). 생기고 없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만유(萬有)를 꿰뚫고 있는 법칙. 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진리. 진리와 결합된 이론이나 증명. 타당한 이치.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심의식(心意識) ; 심(心 citta) · 의(意 manas) · 식(識 vijñāna)의 세 낱말을 합친 복합어.

①초기 불교에서는심(心)과 의(意)와 식(識)은 동의어로서 인식 주관 또는 인식 작용을 뜻함.

②유식설에서는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 의(意)는 말나식(末那識), 식(識)은 육식(六識)을 뜻함.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악업(惡業) ; 나쁜 결과의 원인이 되는 나쁜 행위. 또는 전생(前生)의 나쁜 행위.

*무량겁(無量劫) ;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알음알이 ; ①어떤 인식대상에 대해 마음 또는 마음작용이 가지는, 그 인식대상에 대한 형상 즉 이미지를 아는 것을 말한다.

②마음이 번뇌에 덮여있는 상태, 말하자면 거울에 때가 낀 상태에서 가지는 이러한 앎을 깨달음[무루혜 無漏慧 - 모든 번뇌를 해탈(解脫)한 성자(聖者)의 지혜]과 구분하여 알음알이라 한다.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백호상(白毫相) ; 부처님의 32상(相) 중 하나. 부처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오른쪽으로 말려 있고 여기에서 광명을 발한다고 한다.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6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②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④타심통(他心通) ⑤숙명통(宿命通) ⑥누진통(漏盡通).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야광주(夜光珠) ; 어두운 데서 빛을 내는 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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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단(速斷) ;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서둘러 판단을 내림.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조주스님, 달마스님, 가섭존자, 아난존자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하등(何等) ; 주로 ‘하등의’의 꼴로 부정어와 함께 쓰여, ‘아무런’의 뜻을 나타내는 말.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자래 ; '자라'의 사투리.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매카리 ; 매가리. '매가리'는 '맥(脈, 기운이나 힘)'을 속되게 이르는 말.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요달(了達 마칠·완전히 료/통달할 달) ; 통달해 마침. 완전히 통달함.

*설산(雪山) ; 인도 북부에 솟아 있는 히말라야 산맥을 가리키는 말. 눈[雪]을 품은 곳이란 뜻. 설령(雪嶺) · 동왕산(冬王山) · 대설산(大雪山)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탄생지인 카필라바스투 역시 설산의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수도한 산.

*면벽관심(面壁觀心) ; 벽(壁)을 향하여[面] 앉아 자신의 마음[心]을 관[觀]하여 그 본성을 밝히는 것.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면벽(面壁) ; 좌선(坐禪)의 다른 이름. 벽을 향하여 좌선하는 것.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양 무제(武帝)를 만나 문답하였으나 무제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여 마침내 물러나 양자강을 건너 위(魏)나라의 낙양으로 가서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강설하지도 않고, 불상에 절을 하지도 않으며 종일토록 말하지 않고 벽을 향하여 좌선하기 9년을 지냈다. 이를 '면벽구년(面壁九年)'이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뒤부터 선승(禪僧)들이 선원에서 벽을 향하여 좌선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면벽은 단순히 좌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론 등 문자에 의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관하여 깨달음을 얻는 선종의 수행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장경(長慶) 스님 ; (八五六 - 九三二) 설봉의존(雪峰義存)의 제자. 속성은 손(孫)씨, 법명은 혜릉(慧陵) 법호는 장경, 시호는 초각(超覺)대사.

*포단(蒲團) : 좌선할 때 까는 방석.

*향림(香林) 스님 ; (八七O - 九四九) 청원(靑原)하 제6세인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속성은 상관(上官), 법명은 징원(澄遠), 법호는 향림.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지서리 ; '짓거리(‘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의 사투리.

*쌍계사 육조 스님 정골탑 ; 경남 하동군 쌍계사에 있는, 신라 성덕왕때 삼법 스님이 중국 선종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두개골)을 모셔와 안치한 석감(石龕) 위에 세운 탑을 말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안락국(安樂國)•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무량청정토(無量清淨土)라고도 함.

*염불(念佛) ; 부처님의 모습과 공덕을 생각하면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불•보살님의 이름을 외움. 흔히 어떤 일을 기원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을 소리 내어 외우는 일을 말한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참고] 『임제록(臨濟錄)』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이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함.

*기기묘묘하다(奇奇妙妙--) ; 몹시 기이(奇異)하고 묘(妙)하다(일이나 이야기의 내용 따위가 기이하여 표현하거나 규정하기 어렵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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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귀신의 장난이라는 뜻으로,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뜻밖의 방해나 헤살을 이르는 말. [참고] 헤살 ; 남의 일이 잘 안 되도록 짓궂게 방해함.

*능엄경(楞嚴經) ; 본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료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10권. 당(唐)의 반자밀제(般刺蜜帝) 번역.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세존과 아난(阿難)의 문답으로 시작하여 깨달음의 본성과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하고 여래장(如來藏)이 무엇인가를 밝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관음신앙이라 하고 능엄다라니(楞嚴陀羅尼)를 설한 다음, 보살의 수행 단계, 중생이 수행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번뇌에 대해 그 원인과 종류를 밝힘.

*색음(色陰) ; 색온(色蘊)의 구역(舊譯). 오음(五陰)의 하나.

*색온(色蘊) ; 오온(五蘊)의 하나. '물질'이라는 집합. 색(色)은 스스로 생멸변화하고, 또 다른 것을 장애한다. 온(蘊)은 모여서 뭉친 것으로 화합하여 한덩어리가 된 것.

*마(魔) :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선가귀감 十九, p64에서)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육근문두(六根門頭) ; 육근(六根 - 眼耳鼻舌身意)의 문 앞. 육근과의 경계.

*진정계중자일념(眞淨界中纔一念) 염부조이팔천세(閻浮早已八千歲) ; 중국 당나라 동안상찰(同安常察) 스님(872-961)이 마음의 현묘한 이치를 10가지 대목으로 말씀한 게송 [십현담(十玄談)]의 5번째 '연교(演敎)'의 끝 구절.

*진정계(眞淨界) ; 참되고 깨끗한 세계.

*염부(閻浮) ; 염부제(閻浮提).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오음(五陰) ; 오온(五蘊)의 구역(舊譯).

*오온(五蘊) : 온(蘊)은 무더기•모임•집합•더미를 뜻함.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의 요소의 무더기 - 물질적 요소인 색온(色蘊)과 정신요소인 4온(수·상·행·식)을 합쳐 부르는 말.

①색온(色蘊) : 몸이라는 무더기. 몸의 감각 무더기.

②수온(受蘊) : 괴로움이나 즐거움등, 느낌의 무더기.

③상온(想蘊) :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다양한 개념을 지어내는 생각•관념의 무더기.

④행온(行蘊)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지•충동•의욕의 무더기.

⑤식온(識蘊) : 식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의 무더기.

*파수병(把守兵) ; 주변을 경계하여 지키는 병사.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팔풍(八風) : 팔경(八境). 팔풍경계(八風境界). 팔풍은 세상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바로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므로 팔풍(八風)이라 함<몽산법어 p155, 용화선원刊>

—이쇠(利衰 이로울 리/약할 쇠) : 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예훼(譽毀 기릴 예/비방할 훼) : 나 안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칭기(稱譏 일컬을 칭/나무랄 기) :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고락(苦樂 괴로울 고/즐거울 락)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樂).

[참고] 팔풍, 팔세법(八世法, attha lokadhamma) : 세간(世間, 중생의 세계) 특유의 여덟가지 어려움. 이득과 손실(利衰),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譽毀), 칭찬과 비난(稱譏), 고통과 행복(苦樂) <칠각지 p57, 고요한소리刊> 팔풍경계를 요약하면 결국 역순경계(逆順境界).

*반신반의(半信半疑) ; 한편으로는 믿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워함.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없이 지켜나감을 이르는 말.

*(게송) ‘출가수도배~’ ; 『청허당집(清虛堂集)』 ‘명감(明鑑)·상주(尙珠)·언화(彥和) 등 여러 문도(門徒)에게 보이다[示明鑑尙珠彥和諸門輩]’ 게송 참고.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32~133.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수도(修道) ; 불도(佛道)를 수행(修行)함.

*불도(佛道) ; ①불과(佛果).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말한다. ②불과(佛果)에 이르는 방법. 불과를 성취하여 성불하기 위한 인행(因行, 깨달음의 원인이 되는 행)을 말한다. ③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가르침.

*수행(修行 닦을 수/행할 행) ; ①궁극적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실천하는 것. 행하는 것. ②오로지 한 생각에만 집중하여, 한결같이 그것을 잊지 않고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마음[心]에 도심을 발(發)하면' ; 발심(發心).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심(道心) ; 불도(佛道)를 행하고 믿는 마음.

*속심(俗心) ; 세상의 명예나 이익을 구하고자 하는 속된 마음.

*색상(色相) ;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물질의 형상.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주요 내용]


(게송)산중하사기~ / 이 공부는 되고 안 되고 헌 것을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면 안된다.

공안(화두) -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 신심 · 분심 · 용맹심 / 향림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 조주스님은 30년 부잡용심(不雜用心)의 끈기와 정성 / 세수하다 코 만지기.

도고마성(道高魔盛) / 참선하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야 / 자가철주(自家鐵柱) / (게송) 출가수도배~ / 도(道) 닦으면 다 출가(出家) 수도인.




[주요 문구]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화두를 들고 참구를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산중(山中)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에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으로 태어나고, 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한 생각 돌이켜서 본래 갖추어져 있는 도리를 깨달아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길이 우리 앞에는 환하게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한 것을 전혀 따질 것이 없습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다’고 하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고, ‘본래 내가 부처인데 그것 찾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인가?’

‘과거에 모든 부처와 조사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다. 똑같은 범부였었지만, 한 생각 돌이킴으로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다’


그런데 착각해서는 아니 될 것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서 나오는 그림자를 붙잡고 자기라고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도적을 나의 자식으로 착각을 하고, 고기 눈깔을 가지고 야광주(夜光珠)로 착각하는 거와 같다’ 이렇게 고인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참선 공부에는 일체 철학이나 일체 과학이나 모든 이론이 여기에는 인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여기에 그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서도 아니 되고. 이 공부는 그래서 지식이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상관이 없고, 남자거나 여자거나 그것도 상관이 없고,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내게 본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물건을 찾는 거와 같고, 항아리 속에 넣어 놓은 자래를 잡은 거와 같아서, 손만 넣으면 잡히게 되어 있는 것이여.


그래서 지혜와 자비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부처님과 역대조사는 어떠한 중생이라도 아무리 근기가 하열(下劣)한 중생이라도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어서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개발을 해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화두(話頭)라 하는 것이여.


이 공부는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꽉 맥히고 답답허기만 하다 그말이여. 그러나 이 알 수가 없고 답답한 거, 이것이 정말 견성성불(見性成佛)헐 수 있는 아주 귀중한 대목이다 그말이여. 무엇이 환하니 보이고, 무엇이 알아지고 얻어지고 보여진 것이 있으면 그건 공부가 잘못 되어간 거여.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야 해.

모든 순경계(順境界), 모든 역경계(逆境界), 일체 팔풍(八風)계를 당해서 그 '한 생각' 미끄러지는 것을 무섭게 단속을 해야만 그런 마군이의 권속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몸이야 속가에 있건 산중에 가 있건, 도심(道心)을 내서 도를 닦아 가면 모두가 다 출가 수도인인데, 출가 수도인이 가장 주의할 것은 재물(財物)과 색(色)이다.


마음은 고삐 없는 소와 같애서 잠깐! 방심을 해버리면 이놈이 밭으로도 들어가고, 논으로도 들어가고, 곡식 밭에도 가고, 채소 밭에도 들어가서, 다 그저 짓밟고 쥐어 뜯어먹고 해서 망가트려 버리는 거여.

우리의 마음, 고삐가 없는 소와 같아서 항시 단속을 하지 아니하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를 왔다갔다하고, 갈 데 못 갈 데, 생각할 거 안 할 거, 볼 거 안 볼 거, 참 그것을 표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여.


Posted by 닥공닥정
301~400/(301~325)2018. 10. 1. 06:56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311)—1986년 10월 첫째일요법회86.10.05) (70분)

(1/4) 약 20분. (2/4) 약 21분. (3/4) 약 19분. (4/4) 약 10분.

(1/4)----------------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요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전근기취(目前勤其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요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역력해서 빈(賓)과 주(主)를 여의었고. ‘역력(歷歷)하다’는 말은 명백(明白)하다 말이여.

요요명명(了了明明)하고 소소영령(昭昭靈靈)해 가지고, 명백해서 주객을 여의었어. '주관이다 객관이다'하는 주객을 여의어 버렸어.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다.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색(色)과 공(空)이 끊어져 버렸다.


목전근기취(目前勤記取)하라. 목전(目前)에 부지런히 기취(記取), 정신을 차려서 그놈을 똑바로 봐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이 백운(白雲) 가운데 서 있느니라.


중생은 무엇을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거기에 분별심을 일으켜.

‘좋다 나쁘다, 이것은 니 것이다 내 것이다, 푸르다 누르다' 그러한 분별심을 일으키고. '이것은 색이다 공이다' 그러한 차별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벌써 분별심을 내고 차별심을 내면 그것이 바로 주객에 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공(空) 아니면 색(色)이요, 색(色) 아니면 공(空)에 걸린 것이다 그말이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눈으로 무엇을 보던지,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무슨 한 생각이 일어나던지 다못 목전에 알 수 없는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이여.



금방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활구참선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이 바쁜 세상에 일주일 동안을 부지런히 일하고 생활을 하다가 일요일이 되면 산이나 들이나 강이나 어디 그런 데 가서 피로를 풀고 하루 동안을 재미있게 부담없이 잘 지내야 피로가 해소가 되고 그래서 또 월요일이 되면은 가뿐한 마음으로 직장에 모두 나가시고 생업에 종사를 하셔야 할 텐데 왜 그러한 재미있는 곳을 버리고 여기를 이렇게 많이 오셨느냐?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라고 오신 것도 아니요, 무슨 어려운 교리를 설명을 듣자고 오신 것이 아니여.


재미있기로 말하면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던지, 영화를 보던지 얼마든지 재미있는 곳이 있을 것이고, 어려운 교리 모다 경에 대한 해설을 듣고 싶으면은 여러 군데 다른 절에서도 경에 대한 해설을 하는 곳이 많이 있으니 거기를 가시면 될 것인데, 왜 하필 이 주안(朱安) 염전 가에 이런 절에까지 이렇게 오셨느냐?


그것은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그거 하나를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다.

마침 오늘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의 활구참선에 관한 법문을 오늘 듣게 되었습니다.


활구참선.

요새 참선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지마는, 정말 이 활구참선을 지도하고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는 것입니다. 참선이면 다 같은 것 같지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활구참선은 숙세에 정법(正法)의 씨를 심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들어도 믿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권고해도 마음이 쏠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은 재미가 없거든.


이론적으로 분별해서 일러주고 또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들을 것이 있고 이리해야 가리키기도 좋고 배우기도 좋고 또 고대로 따라서 하면은 할 맛도 나고 그러니 재미도 있고 그럴 텐데,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여기에 재미를 붙일 수가 있느냐 그거거든.


그래서 숙세의 종자(種子), 바른 종자가 아니면 이것은 발을 붙이지를 못합니다.

전부 다 비방하고 돌아서 버리고, 자기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남도 못하게 하는 것이여. '그게 무슨 재미가 있어서 하느냐? 그거 해서 뭐하느냐?'


활구선(活句禪)의 상대되는 말이 사구선(死句禪)인데, 이 활구선(活句禪)은 참구(參句)여, 참구. 그리고 사구선(死句禪)은 참의구(參意句)고.


참구(參句)라 하는 것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져서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가 무엇입니까?'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셨는데, 인도는 서쪽에 있고 중국은 남쪽에 있으니까, “달마 조사가 서쪽에 있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조주 스님이 답을 하시기를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오신 뜻이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대해서 여러 가지로 대답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참선법을 펴시기 위해서 왔다든지, 부처님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심전심(以心傳心)한 그 진리법을 전하기 위해서 왔다든지, 여러 가지 그리고 누구든지 알아들을 만한 대답이 있을 텐데, 밑도 끝도 없이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이렇게 대답을 하셨어.


또 다른 학자가 또 조주 스님에게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으니까 ‘하파부주(下坡不走)니라. 언덕에 내려서 달아나지 않느니라’ 이렇게 대답하기도 하고.

그 묻는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대답을 하셨는데, 도무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어떻게 따져 볼 수 없고, 따져 봐야 알 수 없는 그러한 대답을 하셨다 그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복탁(卜度)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하! 이런 뜻이로구나’ 이렇게 따져 들어가면서 그래 가지고 그것을 참선을 한 걸로 착각을 하고. 또 그렇게 따져서 그럴싸한 어떤 결론을 얻으면 자기가 그 공안을 깨달았다고 이렇게 착각을 하고 그런데.


그러한 식의 참선을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의리선(義理禪)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참의구(參意句)다, 그 뜻을 참상(參詳)한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모다 '죽을 사(死)'자 사구선, 죽은 참선이여. 영원히 따지고 별별스런 결론을 얻어 봤자 참다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참선이여.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죽은 참선이라 해서 이것을 사구참선이라, 사구선(死句禪)이라 이러고.


무조건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판치생모'란 뜻이 무슨 뜻인지 그것도 알 필요도 없고, 다못 ‘어째서 조주 스님이 판치생모라 했나?’ 그렇게만 자꾸 해 나가는 거여.


이것은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무슨 지식의 유무도 상관이 없고, 또 무슨 경전 금강경이나 뭐 법화경이나 반야심경이나 또는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그런 경전에 대한 풀이라든지 해석 그런 것을 알고 모른 거도 전혀 상관이 없어.

다못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어로(無語路)하고 말 길도 없고,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모색(無摸索)이다. 더듬어 찾을 것도 없어. 거두절미(去頭截尾)여. 머리도 꼬랑지도 없이,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뿐이여.


이렇게 해 나가면 아무 재미도 없지만, 한 생각이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퍼뜩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눈으로 하늘에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퍼뜩 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귀에 들리면 그 자동차가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탁! 생각을 돌이켜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보거나 좋은 소리를 듣거나 좋은 생각이 나거나 화두를 들고, 슬픈 것을 보아도 나는 화두를 들고, 기쁜 것을 보아도 화두를 들고, 불교의 교리에 관한 어떤 의심이 나거나 세속사에 관한 어떤 의심나는 점이 있어도 나는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단속을 해 가고, 하루하루를 이렇게 공부를 해 가면, 처음에는 화두를 챙기려고 해도 잊어버리고 챙겨도 금방 잊어버리고 자꾸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런데.


일구월심(日久月深) 이렇게 애를 써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져.

앉아서도 화두요, 서서도 의심이요, 걸어가도 의심이요. 이것이 바로 힘을 더는 것이여. 애써서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니까 그 힘을 더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 가면 자기가 가만히 자기를 가끔 반성을 해 보고 자기를 돌아보거든.

'내 공부가 과연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나의 신심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가? 내가 불자(佛子)로서 지금 불교를 믿고 참선을 시작한지가 1년이 되었다든지 또는 3년이 되었다든지 이렇게 되었으니 과연 내가 불자로서 얼마만큼 되어 가고 있는가?' 자기를 한 번씩 반성을 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여.


참선을 놓아 버리고 세속 일에 얽매여서 그럭저럭 지낸 뒤끝에 생각해 보고.

또 세속 생활, 그 복잡한 생활 희로애락 속에 살면서도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 내지 30분이라도 한결같이 새벽 정진을 하고, 낮에도 생각 생각에 돌이켜서 애를 쓰고 그럴 때 반성을 해 보고.


애써서 한 뒤끝에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고, 공부를 놓아 버리고 그럭저럭 지낸 뒤끝에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죄송하고 또 공연히 불안하고 초조함을 느낄 것입니다.(처음~20분28초)




(2/4)----------------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대오요궁심로절(大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전강 조실 스님께서 언제나 읊으시던 게송입니다.

참선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여.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것이여.


우리 본참공안(本參公案), 내가 믿는 스승으로부터 받은 화두, 「이뭣고?」면 「이뭣고?」, 무자(無字)면 무자, 판치생모(板齒生毛)면 판치생모,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면 정전백수자,

어느 화두건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어 가고, 잘 못되고 한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잘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공부가 꼭 잘된다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공부가 잘 안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그 공부가 잘 못된다고 단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안정이 잘 안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지를 안 되고 화두가 여일(如一)하지를 않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힘이 들고 그런다 해서 그것이 공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또 뭣한 분은 '화두를 들면 잘되고, 화두를 하면 편안하고 좋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느껴진다고 해서 참으로 그분이 참선이 잘되어 가고 있다고 보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스스로 잘되어 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벌써 그게 잘 못되고 있는 것이고, 해 갈수록 답답하고 알 수가 없고 공부가 잘되는지 못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으나 다못 할려고 애쓰고 있으면 본인은 답답하고 된 것 같지 않지마는 실지는 그 사람이 공부가 옳게 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되네, 못되네' 그런 생각은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잘된다고 해서 '잘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게 잘된 것이겠습니까? 벌써 '잘된다'고 하는 망상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지.


'잘 못된다'고 고민할 것이 없어요. 잘 못된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속에서 윤회를 해 왔으니 그놈을 갖다가 정법(正法)을 믿고 이 활구선(活句禪)을 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금방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에 그것이 금방 무엇이 잘될 수가 있겠습니까? 잘 안될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요.


그러나 잘 안된 그때에 잘 안된다고 느껴진다고 해서 고민할 것이 없어요.

안되면 또 화두를 들고, 안되면 또 화두를 들고, 화두가 달아나 버리면 또 추켜들고 또 거각(擧却)하고, 그렇게 해 나가면—그렇게 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게 애써서 해 나가다 보면 결국은 되는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화두를 신청하신 분, 또 불명(佛名)을 신청하신 분, 또 오계(五戒)를 신청하신 분이 다 함께 다시 법요식(法要式)이 있겠습니다마는.


이 참선을 한번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그 마음 내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 마음 한번 내서 발심(發心)을 하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습니다. 처음 마음 발(發)할 때가 문득 정각(正覺)이다. 발심 탁! 할 때가 벌써 바른 깨달음을 얻은 때다 그거거든.


우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모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과 같은 그런 모든 대승보살(大乘菩薩), 역대조사(歷代祖師) 참 수많은 이 깨달음을 얻은 성현들이 계시지마는, 그 성현들이 원래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습니다. 또 우리도 과거 무량겁 전에는 부처님과 똑같은 본래 우리도 부처님이였었어.


그래서 한 생각, 처음 한 생각 탓으로 해서 불보살이 되고 성현이 되신 분도 있고, 한 생각 미끄러져 가지고 무량겁을 윤회하는 중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한 생각 바로 잡으면 우리도 성현의 지위에 들어가게 되고.


'이 활구참선이 재미가 없다. 어렵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는 늙었다, 나는 여자다, 나는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하다, 나는 몸이 약하다' 또는 '세속 생활이 바쁘다,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이리저리 각각 자기 나름대로 그러한 이유를 붙여 가지고 자포자기를 해.

'나는 참선은 못하고, 기도나 하고 염불이나 하고 경이나 읽어서 업장(業障)이나 소멸(消滅)을 해 가지고. 아미타불이 나를, 내가 숨 끊어질 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나를 데리러 오실 것이다. 그때 그 배를 타고 극락(極樂)에 가야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하랴' 이렇게 자포자기를 하면 영겁을 두고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 방편설(方便說)을 설하셨습니다마는 구경(究竟)에 가서는 그러한 당신께서 설하신 방편법에 떨어지지 말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에 부탁하신 말씀은 그 정말 그 한마디가 우리 중생을 위해서 눈물겹도록 뼈에 사무치는 그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은 귀담아듣지 아니하고 부득이해서 설하신 방편법에만 떨어져 가지고 스스로 이 최상승법에 들어오기를 두려워하고, 저 문전에서 서성대고 맴돌다가 담 밖에서 그리고 기웃기웃하다가 그리고 겁이 나서 돌아가 버리고.

남 따라서 한번 들어와서 요 들어보고는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 그만 두고, 여기저기 다른 데로 방황을 하면서 부처님의 참 부득이해서 설하신 방편법에 빠져 가지고 최상승법에 들어오지 못한 그런 안타까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음을 생각할 때 참 가슴 아프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최상승법, 일승법, 대승법,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디에다 근본을 두었냐 하면은 중생심에다가 근본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심(衆生心),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심(妄想心).

눈을 떠 있을 때에는 눈을 통해서, 귀를 통해서, 코를 통해서, 입을 통해서, 몸뚱이를 통해서 또는 생각을 통해서 일분일초도 쉴 사이 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리고 잠잘 때는 몸뚱이는 가만히 누워 있는데 꿈을 통해서 그 잠재의식이 끊임없이 활동을 합니다.


그리하면서 한평생을 살다가 또 몸을 바꾸어서 어디엔가 또 태어나 가지고 또 한평생을 살고 이리 지내는데, 그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것이 바로 우리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근원입니다. 그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입니다. 깨달음의 종자(種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제8식(第八識)을 여래장(如來藏)이라 그러거든. 여래(如來), 여래가 그 속에 소장이 되어 있다. 여래가 그 속에 갈무려 있다. 그래서 여래장이라고 그러거든.


중생심, 그것이 바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식(識)이거든. 전5식(前五識), 제6식, 제7식, 제8식, 이거 식(識)이지만,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식(識)을 여의고 부처님의 지(智)가,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식(識)이 깨달라 버리면, 중생의 식(識)이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을 하느님을 믿고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교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유일신이고 절대자이기 때문이고, 우리 중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여.

하나님이 이렇게 진흙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렇게 해서 아담과 헤와를 만들어 가지고 거기다 생명력을 불어 넣어가지고 에덴동산에 놔뒀는데, 금단의 과일을 먹은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세계로 쫓겨나 가지고 그래서 이 자손이 번식한 것이 우리 인간이다.


그 예수교에서는 그렇게 말하는데, 그래서 우리 죄 많은 중생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직접 하나님이 될 수는 없고, 천당에는 갈 수가 있다 그러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원래 부처님이었었고, 한 생각 미(迷)해서 우리가 생사윤회는 하고 있지만 탁! 깨달라 버리면 본래 우리가 부처님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고해(苦海)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에게는 분명 이 세계는 고해입니다. 생노병사가 전부 고해(苦海)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본래 부처였다고 하는 사실, 우리의 본성(本性)을 깨닫고 보면 고해가 아닙니다. 이 세계가 바로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적광토(寂光土)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내가 다른 종교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교의 진리가 얼마나 높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내가 말하고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佛子)가 우리 불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확실히 알지 못하면 우리가 불법을 참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법의 위대함을 잘 모르고 그 방편에 빠져서 기복(祈福)이나 하고, 중생의 욕구를 충족하는 방편으로 불법을 믿고 이리 하다가 무엇이 뜻대로 잘 안되고 장사가 잘 안되고 하면 그냥 다른 종교로 개종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불법이 참으로 위대하고, 그 위대한 불법이 어째서 위대한 것인가를 우리는 잘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안다면 올바르게 믿고 실천하게 되고 퇴태(退怠)할라야 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 무슨 개종을 하다니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른 종교를 믿다가 불교로 돌아오는 것은 그것은 당연한 것이여. 다른 종교는 우리 부처님의 법에 비추어서 보면 천만분의 일도 못되는 그런 아주 옅은 방편법 한두 가지를 교리로 삼고 거기에 의지해서 모다 종교 생활을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 내에는 세계에 모든 종교의 교리가 불교 안에는 다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우리의 이 높고 넓고 깊은 이 불교를 표용할 수가 없습니다. 끝없이 넓고, 밑 없이 깊고, 한량없이 높기 때문에 다른 종교는 우리 불교를 표용할 수가 없습니다.


산간의 계곡에서 이쪽 계곡에서 저쪽 계곡으로 날아가고, 저쪽 언덕에서 요쪽으로 날아다니는, 산에는 그 시내를 중심으로 해서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이리 파르르르 날으고, 저기서 요리 파르르 날으고 하는 그런 산새들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모다 밤톨만한 산새들이 있는데, 그런 산새는 압록강이나 또는 양자강 또는 황하 같은 그런 큰 강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저런 큰 강에 사는 큰 새들이 있습니다. 오리라든지 두루미라든지 그런 새들이 있는데, 그 뱁새와 두루미나 갈매기 같은 그런 새들이 만나 가지고 뱁새한테 그런 압록강이나 황하나 양자강 같은 그런 넓은 강이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해 주어도 뱁새는 믿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고 '미친놈, 다리만 기다란한 것이 소가지 없이 그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도대체 그런 키 크고 속없다드니, 어디가 그런 것이 있느냐? 지금 내가 여기 살고 있는 그 시내 계곡보다 더 큰 계곡이 어디가 있느냐?' 도저히 믿지를 않습니다.(20분33초~41분2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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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이 넓고 황하가 넓다 하지마는 정말 태평양 같은 바다, 이러한 바다가 있는 것을 또 알지를 못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그런 이 새, 바다를 지나보는 새 앞에는 바다 얘기를 해 봤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 바닷가를 가보지 아니한 사람은 바다가 정말 끝없이 넓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불법을, 이 대승법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한 사람이 아니면 불법의 위대성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이 좋다하니까 경을 부지런히 독송을 하고, 염불이 좋다니까 염불을 열심히 하고, 주문이 좋다니까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또 '무슨 기도를 열심히 하니까 소원을 성취했다, 병이 나았다, 재수가 대통했다'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활구참선, 앞도 뒤도 없고 머리도 꼬리도 없고 도대체 어디다 어떻게 손을 내려야 할지 분간할 수 없는 이 활구참선은 그 믿어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말 믿어지기가 어려운 것이여. 들어도 믿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정말 이 활구참선법이 철저하게 믿어지고 그곳을 향해서 목숨을 바쳐.

내가 금생에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마지막 죽는 그 찰나, 숨 딱! 끊어질 그때까지도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하면서 숨이 딱! 끊어지도록. 이렇게 되어버려야 하거든.


'아! 내가 3년을 해도 이렇게 깨닫지를 못하고 아마 내가 이 참선을 잘못한 게 아니냐? 이거 내가 참선에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나 같은 죄 많은 것이 공연히 진즉부터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부를 것을 괜히 이거 참선 한 것 아니냐? 지금이라도 이것 그만두고 아미타불을 할까? 내가 죽을 날이 멀지 아니한데 아미타불을 불러놔야 숨 끊어지자마자 아미타불이 반야용선(般若龍船)을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오실 텐데' 이렇게 생각이 흔들려.

이거 신심(信心)이 철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투철해 버리면 어디에 가서 마음이 흔들릴 것입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중생이다 부처다' 이게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여. 중생이니 부처니 한 것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본래는 똑같은 한 덩어리여.

손바닥과 주먹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여. 폈다고 해서 그것이 손이 아니고 무엇이며,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별것이냐? 주먹을 쥐었으나 폈을 때나 본래 손인 것이여.


또 물이 백 도가 되면은 수증기가 되고, 섭씨 영 도가 되면은 고체가 되는데, 고체가 되어서 얼음이 되었을 때나 그놈이 녹아서 물이 되었거나, 또는 그놈이 수증기가 되었거나, 그 물이 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그 습성(濕性)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거여.

다만 그때 상황 되어서 기체가 되기도 하고 또 액체가 되기도 하고, 고체가 되기도 한 것뿐이지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여.


이 참선을 한 것은 그 중생이거나 부처거나 성현이거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거나 천상(天上)에 가 있거나 어디가 있거나 간에 변함없는 자리, 우리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닫는 것이 우리 활구참선의 목적이여.

그런데 도(道)를 닦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기 가장 좋은 곳이 이 사바세계다.


천당, 참 좋지요.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다 되고, 일체의 괴로움이 없어. '먹고 싶다'하면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보고 싶다'하면 그것이 눈앞에 와 있고, '가고 싶다'하면 벌써 그 현장에 가서 있는 것입니다.

일부러 걸어가고, 일부러 무엇을 입을 통해 먹고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에서부터 백 가지가 한 생각 딱! 내면 벌써 그것이 이루어져 갖고 있는 것이여. 전부가 다 내 마음대로여.


그렇게 편하고 좋고 그러나 그 낙(樂) 받느라고 도 닦을 필요도 느끼지도 않고 도도 닦을 수가 없어. 그러니 거기에 있으면 참 기가 막히게 좋은 건 사실이나, 영원히 그곳에 있게 된다면 또 별문제인데.

거기는 이 지구보다 대단히 그 시간이 깁니다. 지구의 몇백 년이 거기에 하루 낮이 되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서 낙(樂)을 받게는 되겠지만 그것도 끝이 있어서, 한도가 있어서 자기가 지은 복만큼 그 낙을 받아 버리면 또 다시 뚝 떨어져서 인도(人道)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아수라나 아귀나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정법을 믿는 사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천당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가 봤자 영원성이 없고, 그까짓 좀 편하고 좋으면 뭐하는 거여 그게. 여러분도 편한 생활을 지내보신 분은 알겠지만 별로 재미가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옥이나 축생은 너무 고(苦)가 많아요. 지옥은 너무 고가 많아서 거기서는 또 도를 닦을 수가 없고.

축생은 배불리 먹으면 좋고, 또 다 인간과 같이 이성 간에 새끼도 낳고 모다 그럭저럭 그렇게 사는데, 그건 귀가 뚫리지를 못해 가지고 법문을 들을 수가 없어. 축생계는 항상 공포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은 것이요.


인간세계는 고(苦)도 있고 낙(樂)도 있고 그래도 이 귀가 있어서 정법을 들을 수도 있고, 법문을 들어서 우리도 확철대오를 해서 견성성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불리 먹은 것으로써 행복의 구경(究竟)을 삼고, 좋은 옷 입은 것으로써 낙(樂)을 삼고, 명예나 권리 누린 것으로써 출세를 삼고서 그런 정도의 인간밖에는 안되고,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 도리를 믿고 실천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뽐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짐승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옷 입고, 호강하고 부귀공명 그런 것이 인생의 전부인줄 믿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일생을 그렇게 살다 말아 버린다면—개도 주인 잘 만나고, 서양 같은 데 태어나면은 개도 참 호강하고 산다고 그럼니다. 다 주인과 같이 한 침대에서 자고, 다 끼니 찾아서 고급으로 먹고, 미장원에도 다니면서 개도 화장 다 합니다. 그러면 그 개가 사람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배부르고, 등 뜨시고, 옷 잘 입고 큰소리치고 사는 것이 인간의 구경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지 말고 미국의 개로 태어난다면 그 뭐 천당에 따로 갈 것이 없습니다. 다 차도 맘대로 타고 다니고 비행기도 타고 다니고.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냐?

우리는 진리와 하나가 될 수가 있어. 진리를 깨달아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 그래서 그것을 사람이라 그러고, 그것이 그래서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시고서 내쉬면서 '이뭣고?' 한마디에 생사해탈이 거기에 있고 확철대오 하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어렵게 생각하시지 말고, 그저 그렇게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 법회가 끝나고 화두 수여식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해 나가시면 스스로 「아! 과연 이 법이 정법이고, 이 법이 활구 최상승법이로구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지만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지만 이 우주법계가 전부 내 콧구멍으로 다 드나들게 되고, 전부 내 주먹 안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것이여. 이 우주법계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여  거수명월거(去隨明月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래일주인(去來一主人)이  필경재하처(畢竟在何處)오

나무~아미타불~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여. 백운(白雲), 흰구름과 더불어, 올 때에는 흰구름과 더불어 오고,

거수명월거(去隨明月去)다. 갈 때에는 밝은 달을 따라서 가더라.


거래일주인(去來一主人)이, 이 오고가고 한, 구름 따라서 오고 명월 따라서 간 이 거래(去來)한 이 한 주인이 필경(畢竟)에 재하처(在何處)냐? 필경에 어느 곳에 있는고?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백운처럼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온 곳은 알 수가 없으나 마치 흰구름이 어디서 일어났는지 일어난 곳도 모르지마는 하늘에 한 덩어리 흰구름이 떠오듯이 이 세상에 우리는 왔습니다.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평생 살다가 결국은 저 밝은 달이 산너머로 넘어가듯이 우리는 이승을 떠나서 갈 것입니다. 어디로 갈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온 사람은 반드시 또 가고야만 마는데, 구름처럼 왔다가 달처럼 가는 이 한 물건이 필경에 어느 곳에 있느냐?


'인간의 생명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믿지 못할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인 것입니다. 어제 건강했던 사람이 밤새 고인(故人)이 되기도 하고, 오늘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고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어쨌든지 열심히, 이유를 붙이지 말고 뒤로 미루지 말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41분33초~60분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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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 광고 드리고자 합니다.

돌아오는 음력 9월 5일, 양력으로는 10월 8일에 수원 용주사에서 은중경(恩重經) 정대불사(頂載佛事)가 있습니다.


수원 용주사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중앙선원(中央禪院)을 창설한 곳입니다.

그 용주사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정조대왕,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드님이신 정조대왕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 사도세자를 위해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고 천도(薦度)하기 위해서 용주사를 중창(重創)을 했습니다.


저 신라 때 갈양사라는 절, 조그만한 절이 있었는데 그 갈양사를 궁궐과 같이 크게 확장을 해서 용주사라 한 큰 절로 중창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도세자 내외분의 능(陵)을 갖다가 용주사 근처에다가 모시고, 그리고 서울도 수원으로 옮기고 그래 가지고 그 사도세자를 갖다가 천도하기 위해서 그러한 큰 효성을 발(發)한 곳입니다. 그러나 서울을 옮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어서 옮기지는 못하고 말았지만 그때 쌓은 모다 문이 있고 성터가 있고 모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용주사에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모은중경을 돌로 새겨 놓고, 나무로 새겨 놓고 또 부모은중경의 그 경에 있는 중요한 내용을 그 단원 김홍도를 시켜서 그림으로 표현을 해 가지고 동판에다 새겼습니다.

그래서 자꾸 그 은중경을 또 한문으로 새기고, 한글로 새기고, 또 번역을 해서 새기고 이래 가지고 그것을 많이 인쇄를 해서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펴서 백성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효를 하도록 그렇게 권장을 한 도량입니다. 그 돌, 석경(石經)과 나무로 새긴 경전, 모다 그 동판(銅版) 그것이 지금도 문화재로 잘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서양의 풍속이 들어와 가지고 부모에게 대한 효도사상이 점점 이렇게 쇠퇴해 가고 있는 때에 용주사 주지 스님이 원력을 세워 가지고 온 불자들에게 또 온 국민들에게 효도사상을 앙양을 해서 우리의 한국의 민족 고유의 효도사상을 앙양을 하고.

또 효자 집안에 충신이 난다고 그랬습니다. 그럼으로써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동량을 양성을 하는데 이바지하기 위해서 은중경 정대불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불사에 동참을 하시면 동참금은 만오천 원이라고 그러는데, 만오천 원을 내고 동참을 하시면 그리고 가서 부모은중경을 머리에 이고, 그리고 거기에 법요식에 참석을 하신 분에게는 그 부모은중경의 그 그림과 또 그 부모은중경의 중요한 골자를 또 새긴 그것을 찍어가지고 병풍을 하나를 꾸밀 수 있도록 한 것을 선사를 한다고 그럽니다.

내가 보니 대단히 그걸로 병풍을 딱 꾸며서 방에다 쳐 놓으면 아들이나 손자나 딸이나 전부 그것을 보고 읽으면 저절로 효심이 일어나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또 손녀를 시집보낼 때에는 그런 병풍을 하나씩 꾸며서 딱 보내면 무슨 자개장이나 무슨 몇백만 원, 몇천만 원하는 그런 거 사서 준 것에다 비하겠습니까? 그까짓 것은 또 시대가 지내버리면 묵은 것이 되어 가지고 처치 곤란해서 고물상으로 다 내보내야 하고.

이러한 좋은 병풍을 하나 해주면 혼사 때에도 쓰고, 또 선영의 제사를 모실 때에도 쓰고, 무슨 환갑잔치나 생일잔치할 때도 쓰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방 아랫목에다 쳐 놓으면은 보고 참 읽으면은 저절로 효심이 일어나고 신심이 우러나게 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모다 참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산승(山僧)도 그때 와서 설법을 해 달라고 초청을 받아서 산승도 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모다 사부대중이 또 같이 가서 그 뜻있는 불사에 참석을 하신다면 이것이 바로 세세생생에 우리가 또 정법문중에서 또 다시 만나서 이 최상승법을 닦아가는 좋은 인연이 맺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은 이것으로써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만약 이렇게 일러드리는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생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되리라.


후생에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아! 그때 내가 왜 참선을 안 했던가? 그때 왜 최상승법을 열심히 닦지를 않았던가? 그때 왜 이 일 저 일 핑계대고 미루다가 왜 공부를 못했던가?' 천번 만번 한 이 후회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60분6초~69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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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도능선자(道能禪子)에게’ 참고.

*요요명명(了了明明) ; 요요(了了)하고 명명(明明)하다.

*요요(了了 마칠·깨달을·분명할 요) ; 뚜렷하고 분명한 모양. 명확한 모양. 슬기로운 모양. 현명한 모양. 분명하게 알고 있거나 뚜렷이 드러나는 경계를 수식하는 말이다.

*명명(明明) ; 환히 드러난 모양. 분명한 모양.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진여(眞如), 법성(法性), 불심(佛心)을 의미하는 말.

*적적(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요요하다(寥寥-- 쓸쓸할·텅 빌 료) ; ①(장소가)고요하고 쓸쓸하다. ②매우 적고 드물다.

*색(色) ; ①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존재의 총칭. ②육체. ③집착 또는 색욕.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기취(記取) ; 명심하다. 기억하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참구(參句) ; 언구(言句 화두)를 참상(參祥)하는 것.

화두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參意)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參句)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참상(參祥) ; 참구(參究).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 ; 진리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

*복탁(卜度 점칠 복/헤아릴·추측할 탁) ; 점치고 헤아림.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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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참선을 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참고] 『무문관(無門關)』 (무문 혜개 스님)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61. *絶=絕(끊을 절).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선지식(善知識) ; ①정직하고 덕(德)이 있는 벗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이. ②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연(佛緣)을 맺게 하는 사람. ③지식(知識)•선우(善友)•친우(親友)•선친우(善親友)•승우(勝友)라고도 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초발심(初發心) ;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정각(正覺) ; (산스크리트어)sambodhi. 삼보리(三菩提)라 음역. ①깨달음. 부처님의 깨달음. 바른 깨달음. 진리를 깨닫는 것. ②부처님. 여래(如來). 진리를 깨달은 사람. 정등각(正等覺). 등정각(等正覺). 정등보리(正等菩提).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제팔식(第八識) ; 팔식(八識) 가운데 여덟 번째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참고] 〇아뢰야식(阿賴耶識) ; 과거의 인식, 경험, 행위, 학습 등에 의해 형성된 인상(印象)이나 잠재력, 곧 종자(種子)를 저장하고, 육근(六根)의 지각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음사로, 거주지·저장·집착을 뜻함.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아뢰야(阿賴耶)를 진제(眞諦)는 a(無)+laya(沒)로 보아 무몰식(無沒識), 현장(玄奘)은 ālaya로 보아 장식(藏識)이라 번역.

〇팔식(八識) ; 유식설(唯識說)에서 분류한 8가지 마음 작용.

인간의 모든 마음 활동을 8가지로 분류한 것이 8식(八識)이다.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

8식(八識) 가운데 앞의 5가지 식(識), 곧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 하고, 그리고 第六 意識(제6의식), 第七 末那識(제7말나식), 第八 阿賴耶識(제8아뢰야식)이라 한다.

*여래장(如來藏) ; 산스크리트어 tathāgata-garbha 본래부터 중생의 마음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여래가 될 가능성. 중생의 마음 속에 저절로 갈무리되어 있는 여래의 청정한 씨앗. 중생이 모두 갖추고 있으나 번뇌에 가려져 있는 여래의 성품. 모태(母胎)의 태아(胎兒)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는 부처의 성품.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뜻[意] 등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이, 물질[色] · 소리[聲] · 향기[香] · 맛[味] · 감촉[觸] · 법(法)의 6가지 외부적인 대상인 6경(六境)을 대할 때 생겨나는 6가지 인식작용이 6식(六識)이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 ; 전식득지(轉識得智). 수행자가 수행이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자신의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로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식성지(轉識成智)라고도 한다.

식(識)이 지(智)로 변화되는 것을 전의(轉依)라고 하는데, 전의(轉依)의 뜻은 ‘소의(依, basis) 즉 발동근거를 바꾼다(轉)’로 성도(聖道) 즉 수행을 통해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지혜(智)로 변형시키는 것, 즉 질적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전(轉)은 전변(轉變) 또는 능변현(能變現)의 뜻으로 능동적으로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고, 득(得)은 획득(獲得)과 성취(成就)를 말한다.


번뇌에 오염된 중생의 유루(有漏:세속)의 마음인 ‘8식’(八識-전오식, 제6의식,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을 질적으로 변혁하여[轉識得智] 얻은 4가지 무루(無漏:열반)의 청정한 지혜—사지(四智)는 다음과 같다.


①대원경지(大圓鏡智) ;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제8아뢰야식에서 무명(無明)의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므로 ‘크고 둥근 거울과 같은 지혜[大圓鏡智]’라고 말한다.

②평등성지(平等性智) ; 인간의 자의식(自意識)에 해당하는 오염된 제7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제7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생기는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平等性智]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③묘관찰지(妙觀察智) ; 오염된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모든 법(法)의 실상을 묘하게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④성소작지(成所作智) ; 눈·귀·코·혀·몸의 5관으로 느끼는, 오염된 전5식(前五識)을 질적으로 변혁하여 얻은 청정한 지혜. 이 지혜는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여, 중생을 이익과 구제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모두 성취하는 지혜[成所作智]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어(88.08.18)에서.

우리 중생은 그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전5식(前五識)과 6식(六識, 意識)과 7식(말나식), 8식(아뢰야식), 이런 식(識)으로 해서 일생을 살아가고, 식(識)으로 해서 업을 짓고, 식(識)으로 해서 일체 생사윤회를 하는데,

그 일어나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 이 십팔경계에 있어서 염념불망(念念不忘)으로 화두를 단속해 나가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고, 그 의단이 독로해 가지고 그것이 툭! 터져 버리면 자성을 깨닫게 되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데,


그 자기 본래면목을 바로 깨닫자마자, 그 깨닫기 전의 중생의 그 육근, 육경, 육식 그 식(識)이 부처님의 지(智)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지(智)가 딴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찰나 간에 변해 가지고 지(智)로 변하는 것이여. 식(識)이 지(智)로 변하는 것이지, 식(識)이 없어지고 지(智)가 어디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잘 인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서 부처님이 없어. 우리의 중생의 마음을 버리고서 그 부처님이 어디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여. 중생의 마음, 그것이 바로 일념무생(一念無生)하는 도리를 요달해 버리면 거기에서 바로 성불을 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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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게송) '내여백운래(來與白雲來)~'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곡망승(哭亡僧 스님의 죽음에 슬퍼하며 소리 내어 울다)’ 참고.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고인(故人 옛 고/사람 인) ; 죽은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




[주요 내용]


(게송)'역력이빈주~' /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법, 활구참선법 그거 하나를 위해서 여러분은 여기에 오신 것 / 활구참선과 사구참선.

(게송)'참선수투조사관~' /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마음 발(發)할 때가 문득 정각(正覺)이다 /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 깨달음의 종자(種子) /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 / 불법의 위대성 / 우주법계의 주인 / (게송) '내여백운래~'




[주요 문구]


요새 참선에 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지마는, 정말 이 활구참선을 지도하고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는 것입니다. 참선이면 다 같은 것 같지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활구참선은 숙세에 정법(正法)의 씨를 심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들어도 믿어지지 아니하고, 아무리 권고해도 마음이 쏠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조건하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판치생모'란 뜻이 무슨 뜻인지 그것도 알 필요도 없고, 다못 ‘어째서 조주 스님이 판치생모라 했나?’ 그렇게만 자꾸 해 나가는 거여.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번뇌 망상심 그것이 바로 우리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근원입니다. 그것이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수 있는 깨달음의 밭입니다. 깨달음의 종자(種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 제8식(第八識)을 여래장(如來藏)이라 그러거든. 여래(如來), 여래가 그 속에 소장이 되어 있다. 여래가 그 속에 갈무려 있다. 그래서 여래장이라고 그러거든.


중생심, 그것이 바로 깨닫지 못할 때에는 그것이 식(識)이거든. 전5식(前五識), 제6식, 제7식, 제8식, 이거 식(識)이지만,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은 그 식(識)이 바로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식(識)을 여의고 부처님의 지(智)가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식(識)이 깨달으면 바로 부처님의 지(智)로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우리 자신이 원래 부처님이었었고, 한 생각 미(迷)해서 우리가 생사윤회는 하고 있지만 탁! 깨달라 버리면 본래 우리가 부처님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고해(苦海)라고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에게는 분명 이 세계는 고해입니다. 생노병사가 전부 고해(苦海)입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본래 부처였다고 하는 사실, 우리의 본성(本性)을 깨닫고 보면 고해가 아닙니다. 이 세계가 바로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가 되고, 적광토(寂光土) 불세계(佛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고, '중생이다 부처다' 이게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여. 중생이니 부처니 한 것은 이름만 있는 것이지 본래는 똑같은 한 덩어리여.

손바닥과 주먹과의 관계와 마찬가지여. 폈다고 해서 그것이 손이 아니고 무엇이며,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별것이냐? 주먹을 쥐었으나 폈을 때나 본래 손인 것이여.


참선을 한 것은 그 중생이거나 부처거나 성현이거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거나 천상(天上)에 가 있거나 어디가 있거나 간에 변함없는 자리, 우리의 본성(本性) 자리를 깨닫는 것이 우리 활구참선의 목적이여. 그런데 도(道)를 닦고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기 가장 좋은 곳이 이 사바세계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냐? 우리는 진리와 하나가 될 수가 있어. 진리를 깨달아서 생사윤회로부터 해탈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 그래서 그것을 사람이라 그러고, 그것이 그래서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믿지 못할 것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인 것입니다. 어제 건강했던 사람이 밤새 고인(故人)이 되기도 하고, 오늘 건강했던 사람이 하루 사이에 고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어쨌든지 열심히, 이유를 붙이지 말고 뒤로 미루지 말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