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19. 3. 2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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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등선원No.41)—임술년 동안거 결제 법어(82.10.17)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21분.

(1/3)----------------


무한심중사(無限心中事)를  평생설향수(平生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양춘탄일곡(陽春彈一曲)한디  송월만창시(松月滿窓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한심중사(無限心中事)를  평생설향수(平生說向誰)오. 한없는 마음 가운데 일을 평생에 누구를 향해 설할꼬?

양춘(陽春)에 탄일곡(彈一曲)하니, 양춘(陽春)에 한 곡조를 타는데,

송월(松月)이 만창시(滿窓時)로구나.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이 창에 가득한 때로구나.



오늘은 임술년 10월 17일 세등선원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입니다. 세등선원 삼동 결제뿐만이 아니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 동안거 결제도 이 자리에서 동시에 갖게 되었습니다. 그 먼 데에서 대중과 신도님네들이 이 법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 고(故)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혜가(慧可) 대사가 달마(達摩) 스님을 찾아가서 눈 속에, 눈이 허리까지 찰 때까지 달마 스님 계신 굴 앞에서 달마 스님의 법(法)을 듣기 위해서 서 있다가 마침내는 신(信)을 보이기 위해서 팔을, 자기 손으로 자기의 팔을 잘라서 바쳤습니다.


그래 가지고 달마 스님의 법(法)을 이은 법문과 또 우리나라 이조 때 서산(西山) 큰스님 밑에 소요(逍遙) 스님이 대강사로 삼 년 동안을 능엄경 한 토씩을 배우면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서산 스님 밑에 수행을 하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서산 스님을 하직하고 떠날 때에 서산 스님이 주신 때묻은 공책 하나를 가지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대관절 그 공책에 무슨 글이 쓰여 있기에 이것을 주셨나?'


3년을 위법망구적으로 서산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참선(參禪)은 가리켜 주지도 않고, 화두(話頭) 한마디도 일러주지 아니하고, 다 알고 있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능엄경을 하루에 글자 넉 자씩만 배우라 하니 삼 년이란 세월이 너무 지루하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법(法)인가 보다. 이렇게 하다 보면은, 내가 이렇게 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나에게 화두도 일러주실 것이고, 참선하는 법을 가리켜 주실 것이다' 이리 생각을 하고, 다 알고 있는 거지만 참고 참으면서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지냈습니다.

3년이 지낸 뒤에는 도저히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래서 퇴태심(退怠心)이 나 가지고, 말하자면 반감이라고 할까, 배신이라고 할까, 퇴태심이 나 가지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공책을 열어 보니, 아까 조실 스님께서는 그 게송을 읊으시기만 하고 그 게송의 뜻은 해설을 해 주시지 아니했기 때문에 간단히 그 게송의 뜻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 우습구나, 소를 탄 자여.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로구나. 소를 타고서 소를 찾고 있구나.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야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니라.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버큼을 녹일지니라.


허허 참 우습구나.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고 있구나.

'내 소가 어디가 있는가?' 소를 타고 있으면서 소를 찾고 있구나.

그것은 여러분들도 '아! 그 무슨 뜻이로구나' 상식적으로 가남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아는 것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년 동안을 위법망구적으로, 저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그러한 신심으로 3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서산 스님 밑에서 능엄경 넉 자씩을 배우면서 그 일심으로 지낸 그러한 신심 끝에 그 글을 보니까 소요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맨 처음부터 그 글을 봤다고 해서 터질 리가 없습니다.


소요 스님은 그 글을 보고 천칠백 공안을 타파(打破)해 버리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골수를 깨달라 버렸지만, 우리가 그 글을 아무리 해석할 줄을 알고 상식적으로 무슨 뜻이다 하고 아는 것 가지고는 깨닫게 되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구(句)에 가서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하야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니라. 그림자 없는 나무를 찍어다가, 베어다가 물 가운데 버큼을 다할지니라. 물 가운데 버큼을 녹여 다할지니라' 그 무슨 말씀이여?

이것은 사량심(思量心)으로, 상식적으로, 분별심으로도 따져서 알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만이 이 글의 뜻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세등선원 삼동안거(三冬安居) 대중이 오십여 명이나 됩니다. 또 흥천사 반야선원 대중도 십여 명이고, 그리고 여기 각처에서 오신 여러 스님네와 신남신녀도 몇백 명이 오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법문을 들어서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자」 그 목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가운데에는 10년 20년 내지, 30년 40년을 참선을 하신 분도 있을 것이고, 금년에 처음으로 선방에 나온 그러한 수좌(首座)도 있을 것입니다.

소요 스님은 3년 만에 글 한 수(首)를 보고서 확철대오를 했는데, 오늘 이 대중 가운데에는 이 서산 스님이 주신 이 게송, 「가소기우자(可笑騎牛者)  기우갱멱우(騎牛更覓牛)  작래무영수(斫來無影樹)  소진수중구(銷盡水中漚)」라. 이 게송을 듣고서 과연 확철대오한 사람이 있느냐 말이여.


왜 고인(古人)은 이 한 수의 게송을 보고 확철대오를 했는데, 어째서 나는 그 게송을 듣고도 확철대오를 못하는가? 과연 법을 위해서 내 몸과 목숨을 바쳤는가?


법을 위해서 참으로 내 몸과 목숨을 바쳐 버린 사람은 이것이 바로 진발심(眞發心)인데,

진발심을 한 사람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이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는 것이고,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고, 땅을 봐도 땅이 보이지를 아니하는 것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단(疑團)뿐인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의단이 돈발해서 번뇌 망상이 저절로 일어나지 아니하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오직 알 수 없는 의단만이 현전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양치질을 할 때나, 방선(放禪)을 하거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화두 하나만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일부러 화두를 들 것이 없어. 저절로 화두가 독로(獨露)해.


이렇게 해서 이러한 경계, 심지어는 꿈속에서까지 화두가 현전(現前)을 하게 되는 거여. 이렇게 나가면 일주일이 못 가서 확철대오를 하는 것이여. 이것은 과거에 여러 도인(道人)들이 다 증험을 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여.


'혼침이 와서 못한다. 잡념이 일어나서 못한다. 상기(上氣)가 되어서 못한다. 소화가 안되어서 못한다' 이건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 이 삼요(三要)가 갖추지를 못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인 것이여.


오늘은 결제날이라, 삼동에 지내 가는데 있어서 대중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갈 것인가?

삼요(三要)!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단이 몰록 발(發)하면 여러 가지 잔소리가 필요가 없습니다. 규칙에 대한 말도 필요가 없고, '이렇게 공부를 하고 저렇게 공부를 해라' 그런 말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처음~17분44초)




(2/3)----------------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노소가, 신참(新參) 구참(久參)과 나이가 많은 분과 나이가 적은 분, 한자리에 이렇게 50여 명 이렇게 모여서 정진하는데 나아가서는, 첫째, 세속의 인연을 다 끊어 버려.


누구 환갑이다, 누구 사십구재다, 누가 돌아가셨다, 일체 없어.

심지어는 자기의 부모가 돌아가시고 자기의 스승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결제 중에 왕래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옛날부터서 선방에 내려오는 철저한 규칙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서 전보가 오거나 편지가 와도 결제 중에는 본인에게 전달을 하지 아니하고, 사무실에서 보관을 해 두었다가 해제한 날 그 전보와 편지를 전해 주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중간에 편지나 전보 같은 것을 전해 주면 자연히 마음이 동요가 되어 가지고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고 그것 때문에 정진에 지장이 있기 때문에, 정진을 알뜰히 잘하면 이 한 철에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할는지도 모르는데, 그 편지나 전보 한 통으로 인해서 한 철이 그럭저럭 지내가 버리면 앞으로 몇억만 겁이 지내 갈는지도 알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그래서 모든 인사(人事)를 끊어 버려라.

그리고 집착(執着)과 전도(顚倒)를 제거해.


과거에 자기가 알았던 것, 과거에 자기가 들었던 것, 과거에 자기가 배웠던 것, 느꼈던 것, 모든 것. 옳은 것이나 그른 것이나 일체 것을 다 제거를 해 버려야 돼.

완전히 초학자(初學者)가 되고,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 가지고 한 철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다 담아야 하는 것이고, 그림이나 글씨는 깨끗한 흰 종이에다 그려야지, 얼룩덜룩 다른 글씨나 다른 그림이 그려진 데다가 아무리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댔자 좋은 작품이 나오지를 아니하는 것이여.

언제든지 우리는 정진을 할 때 완전히 백지와 같은 마음, 완전히 아주 유치원 학생과 같은, 아주 초심자와 같은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래야 공부가 진취가 있고 올바르게 되어가는 법이여.


진실(眞實)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라. 생사대사를 위하는 그 한 마음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지내갈 것이다 그말이여.


음식에 대한 문제, 자리에 대한 문제, 일체 것에 대해서는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찰밥이면 찰밥, 밥이 되면 되고 질면 질고, 싱거우면 간장을 더 치고, 짜면 물을 좀 더 치고, 밥이 되면 물을 말아서 먹고 꼭꼭 씹어서 먹고.

어쨌든지 모든 것은 그때그때의 수용한 인연 따라서 맡겨 버리고, 나는 일단 정성이 오직 이 생사대사 이 한 문제만을 위해서 하루하루를 지내 가지고 석 달 동안이 하루처럼 그렇게 지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국에 선방이 여러 군데가 있지마는 각기 그 선방마다 규칙이 다르고, 가풍이 다르고, 법도가 달라서, 여러 선지식(禪知識)마다 지도하는 방법이 차이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등선원은 또 세등선원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고, 가풍이 있고, 법도가 있습니다. 일단 이 선원에 들어오면 백지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등선원에서 지내는 동안은 세등선원의 모든 규칙과 법도와 가풍에 적응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올바른 수행의 자세인 것입니다.


백지 상태가 되어서 여기의 법도(法度)에 순응한다고 하는 것은 왜 그것이 소중한 것이냐 하면,

자기 마음을 비울 줄을 알기 때문에, 또 하심(下心)을 할 줄 알기 때문에, 또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을 한 생각으로 스스로 꺾어 버릴 줄 알기 때문에, 당장 그때부터서 제일보(第一步)가 올바르게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것이 아집(我執)을 비우는 것, 아집을 꺾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번뇌라든지, 팔만사천 마구니가 한마디로 말해서 아상(我相) 아(我)를, 아공(我空) 아(我)를 비워 버리는 데에서부터서 도문(道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와 팔만사천 번뇌도 나를 비우게 하는 데에서 다 조복(調伏)이 되고 항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선방에 오면 이 선방의 법도에 깨끗하게 순응하고 적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훌륭한 수행인인 것입니다.

또 다른 선방에 가면 또 그 선방의 법도에 깨끗하게 순응을 할 줄 아는 사람, 정말 진실한 수행인인 것입니다. 그렇게 순응을 하는 진실한 수행인이라야 그 한 철 공부가 짬지고도 알뜰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경(三更)을 제외하고는 수면(睡眠)을 허락지 말 것이며, 시내 외출을 삼가할 것이다.


그전에는 너무 이 규칙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지 말아라. 지나치게 사소한 일까지 너무 엄격하게 하면은 그것이 공연히 시비가 일어나고, 그러니 일체 규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지키도록 하고, 오직 근본 문제, 정진만을 알뜰히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했더니, 자기 멋대로 온천을 가네, 또 무슨 어디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병원에를 가네.


물론 중대한 병이 일어나면 병원에 가서 치료도 받아야 할 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인은 병을 다스리되 「모든 병은 나의 업(業)의 원인으로 병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정진을 해서 이 업을 소멸을 해서 그래서 병이 저절로 낫도록 해야겠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병을 대치해 나가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칠라고 하지 말고, 의사나 약을 통해서 병을 고칠라고 하지를 말고, 병을 도반으로 알고 선지식으로 알고 공부를 해라」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병이, 그 아프고 괴로운 그때마다 무상(無常)을 느끼고 참회(懺悔)를 하고 신심을 내서 공부를 해 나간다면, 그 병이 나를 죽일려고 오는 병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발심하고 분심을 내게 하기 위한 선지식이요, 도반이요, 채찍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병을 대치하면서 정진을 한 사람은 병 때문에 더 공부를 잘하게 되고 마침내는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선방에서 뭣한 사람은 가끔 책을 꺼내서 읽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로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여.

확철대오를 하기 전에는 경(經)을 보지 말아라. 대중적으로 어떤 특별한 경우가 있어서 심경(心經)을 읽는다든지, 금강경을 읽는다든지, 이러한 때를 제외하고는 경을 보지를 말아라.


「이렇게 여법(如法)하게, 여법하게 이렇게 삼 년을 알뜰히 공부를 해서 확철대오를 못하면 내가 너희를 대신해서 지옥에를 가겠다」 몽산화상(蒙山和尙)께서 이렇게 맹세를 하셨습니다.


어째서 이 몽산 큰스님께서 이렇게 무서운 맹세를 하셨느냐?

정말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이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서 삼 년을 하면 깨닫지 못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참선은 첫째, 신심(信心)이요.


무슨 신심? 무엇이 신심이냐?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대중 외호(外護)를 잘하고, 불사를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고,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고, 이런 것도 신심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신심이지만 이 종문(宗門) 중에 있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있어서의 참다운 신심이라 하는 것은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정진만 하면 나도 결정코 확철대오 할 수가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대신심인 것입니다.


「나는 말세에 태어났으니까, 나는 여자니까, 나는 무식하니까, 나는 병이 들었으니까, 참선한들 무슨 확철대오가 있을 것인가? 그저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생각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여.


남녀노소도 불구하고, 말세도 불구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나도 결정코 견성성불 할 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이것이 진정한 신심인 것입니다. 참선은 그러한 마음 없이 참선해 가지고는 되덜 않습니다. 그 생각이 아주 철저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양보할 수가 없다. 나도 기어코 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바쳐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해.


그 다음에는 대분심(大憤心).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확철대오를 못하고 생사해탈을 못했던가」 그것이 분해 가지고 그 분심(憤心)이 솟구쳐 올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 분심이 있어야 혼침(昏沈)도 물러가고, 산란심(散亂心)도 물러가고, 저절로 신심이 일어나는 법이고, 사소한 시비에 내가 걸려들 까닭도 없고, 사소한 불평불만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 신심과 분심이 약하기 때문에 혼침이 일어나고, 산란심이 일어나고, 사소한 시비에 걸려들고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시비가 일어나는 법이지,

밥이 맛이 있니, 지니 되니, 짜니 싱거우니 일어나고, 누가 뭔 말을 하면은 사소한 일에 진심(瞋心)이 일어나고 그러지, 참으로 신심과 분심이 돈발했다면 무슨 시비가 그 앞에 있어?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시간이 가는지를 모르고, 칭찬했다고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누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성이 날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서는 대의심(大疑心)이여.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뭣고?' 조주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無字)'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앉아서도 화두, 서서도 화두, 밥을 먹으면서 한 숟갈 한 숟갈 밥을 떠 넣으면서도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그 생각뿐이여.

세수를 하면서, 양치질을 하면서, 똥을 누면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이 있느냐 이 말이여.(17분47초~35분4초)




(3/3)----------------


선방(禪房)에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면, 선방이나 강원이나 발우공양만 하면 쫓기는 사람처럼 막 국에다 반찬에다 밥에다가서 비벼 가지고 그냥, 당장 난리라도 몰아온 것처럼 그냥 후닥닥 긁어 넣는데, 그래 가지고 먹고 나면 가슴이 쓰리고, 트림이 나오고, 소화가 안되고.


금년에 반야선원이나 이 세등선원 대중은 특별히 주의할 것이 공양을 잘 씹어서, 한 숟가락을 입에다 떠 넣으면, 밥만 떠 넣고 반찬은 아직은 넣지 아니한 채 50번을 씹어.

50번을 씹은 다음에 그때사 반찬을 집어 넣고 한 20번을 씹어. 그래 가지고 최소한도로 7~80번을 씹어 가지고 따악 삼키라 그말이여. 그렇게 삼키고 또 국을 한 숟갈 떠먹어.


또 맨밥을 떠 넣고 한 50번을 씹다가, 완전히 입안에서 밥이 미음(米飮)이 되도록 씹어 가지고 거기다 또 반찬을 또 집어 넣고 한 2~30번을 씹어. 그리고는 그놈을 삼키고 또 국 한 번을 떠먹어.

이렇게 해서 최소한도로 30분간에 걸쳐서 공양을 하라. 먹는 시간만 한 30분을 잡으라.


밥 먹는 것도 정진인데, 빨리 밥 먹고 참선 할라고?

그것은 벌써 정신이 틀려 버린 거여. 밥 먹은 것은 정진이 아닌 걸로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빨리 밥을 먹고 소화가 안되고, 그런데다 또 무슨 간식을 하고 무슨... 일평생을 끌끌.


그 사람은 정진을 바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여. 선방을 몇십 년을 당겨도 그 사람은 벌써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밥도 제대로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참선을 하냐 그말이여.


밥이 그것이 이 몸뚱이, 법당을 잘 간수하는 그 불사(佛事)인데,

첫째, 그 법당을 잘 간수해야 부처님을 잘 모시게 되는 것인데, 법당 하나를 잘 간수를 못한 사람이 무슨 부처님을 옳게 모실 수가 있겠느냐.


입승(立繩) 스님이 단단히 알아서 죽비(竹篦)를 천천히 치고.

첫째, 어간(御間)에 앉은 구참 스님들이 느긋하게 공양을 들어야 돼. 그래야 저 탁자(卓子) 밑에서 그 진지를 하는 대중, 진지하고 들어가서 밥을 먹고 또 숭늉을 돌려야 하고 그러니 시간이 없다 그말이여.


어간에서 일찌감치 먹고 쳐다보고 있으니 밥을 빨리 먹을 수밖에 없고, 그 빨리 먹어놓으니 소화가 안되고, 그리고 또 넉넉히 먹을 수도 없고 그러니 첫째, 어간에서 천천히 먹어줘야 그래야 그것이 자비고.


우리가 무슨 영양을 취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밥이라도 잘 소화를 시켜야 하거든. 또 넉넉히 먹어줘야 하고. 그리고 간식을 안 하는 것이 좋아요.

밥을 넉넉히 잘 먹고, 그놈을 흡족하게 완전히 흡수를 해서 뱃속이 편안해야 화두가 잘 들리지, 소화가 안되면은 영 호흡도 잘 안되고 화두도 잘 안 들립니다. 소화가 안되면은 또 영양을 흡수를 못하기 때문에 건강도 좋지를 못하는 것이고.


그러한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일이 전국 남녀를 막론하고 선방에서 제대로 그것이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30여 년을 겪어봐서 너무나도 이 평범한 일이, 가장 기본적인 일이 잘못되어 가지고 선객(禪客)들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깊이 명심을 해서 이것을 실천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공양을 그렇게 50번을 씹는 동안에 무엇을 생각할거냐 그말이여. 그때 화두를 들어 보라 그말이여. 혼침은, 누가 밥 먹다 조는 사람은 없거든. 그러니 혼침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그 딱딱딱딱 씹으면서 화두를 떠억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화두를 그놈을 관조를 하면서 공양을 들어 보라 말이여. 어떻게 신심이 저절로 나거든.


밥을 먹고 나면은 그 밥 먹는 시간이 정말 정진이 옳게 되어 가는 시간이여. 그 시간이 정진이 잘되고, 그때 먹은 그 밥이 소화가 잘되고 흡수가 잘되고 그래.


밥 먹을 때 제대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또 세수할 때도 해야 하거든. 여러분이 세수할 때 화두를 들어 봐. 양치질 할 때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 있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들어 있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말이여.

변소에 가서 똥을 눌 때에도 화두가 터억 들어져 있고, 똥을 누고 나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또 들어 있어야 될 것이다 그말이여.


잠을 잘 때 자리에 들어서도 화두가 터억 들어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말이여. 그래야 잠을 자면서 꿈에서도 화두가 들어질 것이 아니냐 그말이여.

설사 꿈에는 안 들어지더라도, 마지막 잠이 딱 들 때까지도 화두가 떠억 들어 있는 상태에서 잠이 들면, 그 이튿날 아침에 딱 눈을 떴을 때 화두를 새로 들지 안 해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저절로 딱 들어 있어야 된다 그말이여.


이렇게 석 달을 지내 봐요. 정말 수행이란 것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할 것이고.


누구를 위한 참선이여? 누구한테 자랑을 하기 위해서 참선을 한 거여?


애들은, 유치원에 댕기는 애는 짜증이 나면, '나, 밥 안 먹는다'고. 밥을 안 먹으면 엄마가 제일 걱정을 하거든. 그러니까 엄마 애 태우고 엄마를 이기기 위해서 뭔 데모할 일이 있으면, '나, 밥 안 먹는다'고 떼를 쓰거든.

그건 어릴 때는 그것이 통해서 밥을 안 먹으면 '아나, 돈 줄께 밥 먹어라' '아, 너 뭐 좋은 것 공책 사 줄께 밥 먹어라' 이렇게 달래겠지만, 우리 수좌(首座)는 정진 안 한다고 떼장 놔봤자 저만 불쌍하고 생사윤회 하지, 별 수가 없어.


어린아이는 우는 것이 자기 힘을 과시하고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여자는 남편 앞에 골을 부리는 것이 자기 어떤 요구사항을 관철하는 방법이여. 돈을 울궈낼라면 골낸 척 해 가지고 신경질을 내면 남편이 돈을 줘. 이건 경전에 있는 말이여.


『치문(緇門)』을 보니까 '치문사기(緇門私記)'에 그런 말이 쓰여 있더라 그말이여.

어린애는 우는 것으로써 힘을 과시하고, 여자는 성내는 것으로써 남편 앞에 힘을 과시하고, 임금은 교만을 부리는 것으로써 신하들 백성들 앞에 힘을 과시하고, 수행인은 정진을 잘하는 것으로써 힘을 과시해라 그랬단 말이여.


속가에서 '머슴, 일꾼을 부리는 주인이 일꾼을 잡을라면은 잘 먹이는 것으로써 일꾼을 휘어잡고, 머슴은 일을 잘하는 것으로써 주인을 휘어잡으라' 이런 속담이 있는데, 우리 수좌는 정진 잘하는 것으로써 나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진을 잘하는 거여?

잠을 안 자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는 것이냐? 묵언을 하고 말을 안 하는 것이 정진을 잘하는 것이냐?


물론 묵언을 하면서 정진을 애를 쓰는 것도 정진 잘하는 하나 방법이 될 것이고.

또 단식을 한다든지 일종(一種)을 한다든지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다든지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공부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이 되게 하자. 이러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그것도 정진의 한 방편(方便)이 될 것이고.


'내가 대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장좌불와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리라' 또는 '내가 세 시간 이상은 잠을 안 자고 정진하리라' 이러한 것도 또한 수행을 애써서 하는 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묵언을 해서 내가 견성성불 하기 전에는 내가 말을 아니하리라' 또는 '내가 한 소식 하기 전에는 내가 말을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묵언을 하는 것도 발심한 사람의 수행하는 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 안 한 것이 정진에 전부가 아닐 것이요,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한 것이 정진에 전부가 아닐 것이요, 밥을 안 먹는 것이 정진에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말 안 한 것이 정진에 제일가는 수단이라면 어릴 때부터 벙어리는 뱃속에서부터 도통(道通)해 나와야 할 것이고, 장좌불와 한 것만이 정진에 전부라면은 앉은뱅이는 참선 안 하고도 도통을 할 것이고, 밥을 안 먹는 것이 정진에 전부라면은 목구녕에 병이 있거나 위장병이 걸려서 밥을 못 먹는 사람은 공부가 아주 잘될 것 같지만 그렇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한 방편 하나는 될지라도 그것만이 정진에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말이여.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단이 독로해서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져.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성성해. 일념만년(一念萬年) 회광반조(廻光返照) 하는 이렇게 정진이 되어 가야 해.


그렇다면은 앉아서도 정진이요, 서서도 정진이요, 누워서도 정진이요, 밥을 먹을 때도 정진이요.

하루 세 때 먹어. 잠도 5시간 내지 6시간 자. 자되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자라 그말이여. 대신심과 대의단과 대분심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잔다면 잠도 정진이요. 삼시 세 때를 먹되 먹는 것도 정진이요.


아까 그대로 먹어봐. 그것이 그대로 정진이여.

꼭 두 끼만 먹을라고 할 것이 없어. 아까 내가 말한 대로 밥을 먹으면 세끼를 먹으되 소화가 잘돼. 그리고 속도 편안하고. 먹은 밥이 그대로 흡수가 잘돼.


그러니 한 숟갈 떠먹는 그 자체가 정진이요,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정진이요,

구태여 자리에 눕자마자 잘라고 할 것이 없거든. 잠이 올 때까지는 떠억 화두를 들어.

자리에 누워서도 10분 20분 30분 1시간 내에 잠이 안 들어도 상관이 없는 거여. 안 들면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면서 누웠어. 그러다 언제 든 줄 모르게 들으면 그때부터 잠을 자겠지.


잠을 자되 아침에 눈을 딱 뜨면, 내가 한 십분도 안 잔 것 같은데 시계를 보면은 한 너댓 시간이 잘 자졌다 그말이여. 하! 그런데 화두는 엊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거든. 그렇게 정신이 맑고 몸이 가벼워.


이렇게 정진을 해 가면 구태여 옆구리를 땅에 안 댈 것도 없다 그말이여. 구태여 밥을 억지로 안 먹을라고 할 것도 없다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하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도 잘되고 어느 사람이 도(道)를 못 통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이번 석 달 동안을 그렇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종전공주부지명(從前共住不知名)이요  금일상봉차비이(今日相逢且非爾)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월연만수이물침(月娟萬水而勿沈)이요  풍랭육창이자계(風冷六窓而自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전공주부지명(從前共住不知名)이요. 앞을 좇아 이전부터 함께 살아왔건만 그 이름을 아지 못하고,

금일상봉차비이(今日相逢且非爾)로구나. 오늘 서로 만났으되 또한 그가 아니더라 그말이여.


무량겁 이전부터서 언제나 같이 살아왔어. 단 일분일초도 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건마는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어. 오늘 이 자리에서 방금 이 찰나에 서로 상봉을 했건만 그 사람이 아니더라 이 말이여.


달은 연연히 일만 물에 비추건만, 그 달이 물에 빠지지를 아니해.

바람은 냉랭해서 육창(六窓)에 부는데, 창이 저절로 열리더라.



오늘은 삼동결제와 아울러서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 선방에 들어오셔서 공부는 직접 스님네와 같이 정진은 못하시지만, 여러 신남신녀께서는 각자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하는 것, 일하는 그 자체가 스님네가 선방에서 죽비를 치고 정진한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


아까 산승(山僧)이 말씀한 대로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 먹을 때나, 일할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이요, 그것이 바로 백일기도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승속(僧俗)이 차별이 없는 것이며, 선방과 속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고, 이 백일기도에 한 분도 빠짐이 없이 모두 동참을 하셔서 여러분도 같이 이 삼동결제에 방부(房付)를 들인 것으로 그렇게 믿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35분5초~55분1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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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무한심중사~'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著) '사김신사래방(謝金信士來訪 김신사의 내방을 감사함)' 참고.

*양춘(陽春 볕·따뜻하다 양/봄 춘) ; 따뜻한 봄.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무영수(無影樹 없을 무/그림자 영/나무 수) ; 그림자 없는 나무.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저선(無底船 밑바닥이 없는 배)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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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삼경(三更) : 二경~四경 (밤 9시~새벽 3시)으로 불가(佛家)의 지정된 취침시간.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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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우공양(鉢盂供養) ; 스님들이 쓰는 밥그릇을 발우(鉢盂)라고 하여, 발우공양은 ‘스님들이 하는 식사’를 말한다. 발우공양을 할 때 《소심경(小心經)》이라는 경전을 외운다.

이 공양은 단순히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깨달아 신과 인간의 공양 받기를 원하는 ‘하발게(下鉢偈)’, 부처님 일생의 중요한 4대 성지를 생각하는 ‘회발게(回鉢偈), 보시하는 사람, 보시받는 사람, 보시하는 물건, 삼륜(三輪)이 공적함을 생각하는 ‘전발게(展鉢偈)’

그리고 위로는 부처님, 성인 아래로는 일체 중생 모두에게 공양을 올린다는 ‘봉반게(奉飯偈)’ 음식이 우리 앞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이 음식을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하는 ‘오관게(五觀偈)’

그리고 생반게(生飯偈), 정식게(淨食偈), 삼시게(三匙偈), 절수게(絶水偈), 해탈주(解脫呪)를 하면서 모든 중생과 함께 고통을 벗어나 무상도(無上道)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다짐하며 공양하는 수행 의식이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어간(御間 거느릴·다스릴 어/사이 간) ; 절의 법당이나 큰방 한복판에 있는 칸.

*탁자(卓子) ; ①물건을 올려놓기 위하여 책상 모양으로 만든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②불상(佛像) 앞에 붙박이로 만들어 두고, 공양물(供養物) · 다기(茶器) 따위를 차려 놓는 상.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 ; 비위에 거슬리거나 언짢은 일을 당하여 벌컥 내는 화.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치문(緇門 검다·검은 옷·스님 치/문·집안·문벌 문) ; 치문경훈(緇門警訓). 불문(佛門)에 처음 든 어린 사미(沙彌)가 공부하는 데 경책(警策)과 교훈(敎訓)으로 삼을 만한 중국 역대 고승(高僧)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

치문(緇門)은 치의(緇衣 : 스님이 입는, 회색에 가까운 괴색의 색깔로 물들인 옷)를 입은 스님의 일문(一門)이라는 뜻으로 불문(佛門)을 말한다.

*치문사기(緇門私記) ; 조선 후기의 태선(太先) 스님이 『치문경훈(緇門警訓)』을 주석한 책.

사기(私記)란 경론이나 어록 또는 중요 저술 등의 깊은 뜻을 개인 견해로 풀이하여 기록한 것. 사집(私集)이라고도 한다. 사사로운 견해를 덧붙인다는 뜻이 있지만, 구절이나 대의를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놓은 주석서 혹은 참고서로서 조선 시대 이후에 많이 썼다.

*장좌불와(長坐不臥) ; 밤이 되어도 눕지 않고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것.

*일종(一種) ; 일종식(一種食).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

*오후불식(午後不食) ; 정오(正午), 낮 열두 시가 지나면 먹지 않는 것.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일념만년(一念萬年) : ‘한 생각이 만년(萬年) 가도록’의 뜻으로 ‘한결같은 마음’을 나타낸 말.

*회광반조(廻光返照) :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연연히(娟娟- 예쁘다·아름답다·맑고 밝은 모양) ; ①빛이 엷고 산뜻하며 곱게. ②아름답고 어여쁘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삼동결제(三冬結制)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결제,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법문 내용]


(게송)무한심중사~ / 서산 대사에 대한 소요 스님의 위법망구 / 진발심(眞發心),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을 일시에 돈발(頓發)하라.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각 선방의 법도에 순응하는 것이 훌륭한 수행인의 자세 / 공양하는 법, 밥 먹는 것도 정진, 화두를 들고 천천히 먹어라 / 삼요를 갖추어 정진하라.

(게송)종전공주부지명~ /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용맹정진, 백일기도.



법을 위해서 참으로 내 몸과 목숨을 바쳐 버린 사람은 이것이 바로 진발심(眞發心)인데,

진발심을 한 사람은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화두에 대한 대의심(大疑心)이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모르는 것이고, 하늘을 봐도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고, 땅을 봐도 땅이 보이지를 아니하는 것이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오직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단(疑團)뿐인 것입니다.


밥이 그것이 이 몸뚱이, 법당을 잘 간수하는 그 불사(佛事)인데, 그 법당을 잘 간수해야 부처님을 잘 모시게 되는 것이라, 밥을 화두를 들고 천천히 먹어야 한다.

밥 먹을 때 제대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또 세수할 때도 해야 하거든. 여러분이 세수할 때도, 양치질 할 때도,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면서도 화두가 들어져 있고, 변소에 가서 똥을 눌 때에도 화두가 터억 들어져 있고, 똥을 누고 나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오면서도 화두가 고대로 또 들어 있어야 될 것이다.


속가에서 '머슴, 일꾼을 부리는 주인이 일꾼을 잡을라면은 잘 먹이는 것으로써 일꾼을 휘어잡고, 머슴은 일을 잘하는 것으로써 주인을 휘어잡으라' 이런 속담이 있는데, 우리 수좌는 정진 잘하는 것으로써 나의 힘을 과시해야 한다.


아까 산승(山僧)이 말씀한 대로 앉아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 먹을 때나, 일할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관조해 나가면 그것이 바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이요, 그것이 바로 백일기도입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승속(僧俗)이 차별이 없는 것이며, 선방과 속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501~600/(526~550)2019. 3. 24. 10:47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531)—94년 5월 첫째일요법회 (49분)

(1/3) 약 19분. (2/3) 약 16분. (3/3) 약 15분.

(1/3)----------------


본참공안몰심사(本參公案沒心思)하면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하면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니라.

나무~아미타불~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몰심사(沒心思)하면,

무(無)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판치생모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두철미 의심(疑心)을, 의관(疑觀)을 해서 완전히 온갖 마음 생각하는 바가 아주 끊어져.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여.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타성(打成)이 일편(一片) 되어가는 것이 일체 사량(思量)과 복탁(卜度), 따지고 분석하고 적용하고 더듬고 하는 그런 것이 없는 그 상태가 은산철벽(銀山鐵壁)이여.

깨뜨리고 나갈래야 나갈수록 콱! 맥히기를 은산철벽처럼 되어 가지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뿐이다 그말이거든.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이여.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오직 자기의 본참공안에 대한 의심으로 가고 의심해 와. 그래 가지고 의심이 끊어짐이 없어.

더이상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가 없어. 그렇게 해서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느 찰나에 어떠한 경우에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돼.


의단을 타파하면 마치 고목나무가, 봄이 돌아오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나무에 꽃이 만발해서 가지마다 그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듯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된다 이거거든.



오늘은 갑술년 5월 1일 첫째 일요일날인데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스님께서 계축년에 설하신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법문 내용이 순전히 활구참선을 해 가는데 우리의 마음가짐,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을 설해 주셨습니다.

요새 참선을 할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열심히 할려고 하는 분도 많지마는 그 방법이 바르지 못하면 애만 썼을 뿐이지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본참화두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아는 것도 아니여. 다맛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관(疑觀)으로 참구(參究)를 하는 것이여.

'참구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불교의 교리라든지 이론이라든지 철학적으로 이것을 분석하고 따지고 더듬어 들어가서 '아! 이것이로구나'하고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데에 의심의 초점을 거기다가 두어야 해.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해 가면서 차츰차츰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고, 알아 들어가는 것이 있고,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온갖 경전을 다 해석할 줄 알고, 다 외우고 안다하더라도 참선해 나가는 데에는 그런 것이 도무지 소용이 없어. 그런 것을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여.

다 놔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콱!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라 만로피대긱신산(謾勞皮袋喫辛酸)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하야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비불비심비시물(非佛非心非是物)이여. 이것이 부처라고 해도 아니요, 마음이라 해도 아니요, 어떤 물건이라 해도 아니다 그말이여.

만로피대긱신산(謾勞皮袋喫辛酸)이여. 쓸데없이 이 가죽푸대, 육체를 괴롭혀. 그래 가지고 그 쓰라린 고생만을 한다 그말이여.


참선을 하기 위해서 단식을 한다, 생식을 한다, 묵언을 한다,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다,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일종(一種)을 한다, 산중에 들어가서 벽곡(辟穀)을 한다. 심지어는 저 인도나 네팔이나 태국 같은 데 그런 데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정진을 할려고 애쓰는 분도 있다 그말이여.


어떻게 했으면 부처님 6년 고행(苦行)해서 피골이 상접하시듯이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갖은 고통을 사서 하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을까?

물론 목숨을 거기다 바치고 청춘을 바치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락을 다 바치고서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사서 하는 그 신심은 충분히 훌륭한 것이고 찬양을 할만 하지만, 육체를 괴롭히고 갖은 그 육체를 괴롭히고 자기의 모든 자유로운 것을 제한을 하면서 그렇게 한다고 해서 깨달음을 빨리 얻은 것은 아니여.


정진을 하되, 어쨌든지 몸에 긴장을 풀고 단정하게 앉되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 힘을 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의심관(疑心觀)을 해 나가야지,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데에다가 주력을 해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현전경색(現前境色)이 청여세(淸如洗)여. 우리 눈앞에 나타나 있는 모든 경색(境色)—산, 물, 나무, 돌, 바람,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씻은 듯이 깨끗하다 청청하다 그말이여.


요새 자연이 모다 오염이 되어서 공기 자체가 더럽고 물이 더러워지고 그래 가지고 옛날과 같지는 않지만 그 자체는 낱낱이 다 청정한 거여. 그 자체가 '더럽다, 깨끗하다' 그런 생각이 없는 거여.

우리가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더럽느니 더럽지 않느니 하고 거기다가 분별심을 내는 것이지, 그 자체는 더럽느니 깨끗하느니 그런 생각이 없어. 그래서 있는 그대로 그 자체는 깨끗한 거다 그말이여.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여. 산이면 산, 물이면 물, 바위면 바위, 나무면 나무, 그 자체가 낱낱이 우리를 위해서 자상하게 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댄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편하니 해 줄려고 그러고, 너무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편안하게 해 줄라고 할 것도 없고, 너무 지나치게 육체를 달달 볶고 고통을 주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인연 따라서 수용하고, 잘 시간이 되면 너무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도 안되지만 최소한도로 잘 만큼은 자 주어. 먹는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입는 것도 그렇다 그말이여.

지나치게 호의호식(好衣好食), 호강하는 것도 수행자로서 맞지 않는 거고, 지나치게 너무 가혹하게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데 지장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그 선방, 그 사찰의 형편 따라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한 생각 일어날 때, 눈으로 어떠한 색상이 눈에 들어올 때, 귀에 어떠한 음성이 들어올 때, 코로 어떠한 향내가 들어올 때, 몸에 무엇이 부딪힐 때, 바람이 불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자동차 소리가 나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릴 때,

나를 누가 칭찬하거나 나를 누가 비방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바로 그 크고 작은 모든 사건들과 내가 부딪쳤을 때, 바로 거기에서 두 번째 생각으로 옮겨 가지 말라 이거거든.


바로 그 찰나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라 이말이여. 「이뭣고?」

일체 시비 선악과 흥망성쇠에 내가 왜 거기에 말려 들어갈까 보냐. 「이뭣고?」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돼.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하게 될 때가 온다 그말이여.(처음~18분25초)




(2/3)----------------


처음에는 암만 망상을 안 할려고 해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무리 화두를 간단없이 들려고 해도 1분도 안 가서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고 끊어지고, 그러지만 끊어지면 또 들고, 끊어지면 또 들고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둬 버려. 내버려 두는 것이 망상을 다스리는 법이여.

지나간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냥 일어난 그 찰나에 그냥 고대로 놔두어 버리고 자기 본참공안을 터억 거각을 해 나가.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을 숟가락으로 떠 넣으면서도 「이뭣고?」 씹으면서 「이뭣고?」 삼키면서 「이뭣고?」

그렇다고 해서 「이뭣고, 이뭣고」 자꾸 횟수를 따질 것이 없어.


한번 「이뭣고?」 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을 필요가 없어. 들어있는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해 나가는 거여. 의심, 의심으로 관해. 그 의심이 끊어지면 그때 다시 「이뭣고?」


밥을 계속 먹으면서도 그 의심이 항상 현전(現前)하도록 밥이 맛이 있건 없건, 국이 짜건 싱겁건, 반찬이 싱겁거나 짜거나 맵거나, 밥 넣고 저분으로 반찬을 입에 넣고 씹으면서 「이뭣고?」뿐인 거여, 그저.

그래서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온갖 경계에 부딪치되 눈으로는 본 바가 없고, 귀로는 들은 바가 없어.


그래서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 먹을 때까지, 점심 먹을 때 들었던 화두가 저녁 먹을 때까지, 저녁에 잘려고 누워서 떠억 들었던 화두가 새벽에 눈뜨자마자 고대로 들어 있어. 이 타성일편(打成一片).

하루를 그렇게,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가다보면 의단이 툭 터지게 되는 거여.


빨리 깨닫기를 바라지도 말고, 그래서 이 활구참선 최상승법을 여지없이 믿고 정진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산도 법문이요, 흐르는 물도 법문이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법문이요, 부는 바람도 다 법문이요, 개 짖는 소리도 법문이요, 애들이 떠드는 소리도 다 법문(法門)인 거여.

일체 경계에 부딪혔을 때 바로 내가 화두를 드니까, 나로 하여금 본참화두를 들게 해 주니 그것이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여.


이렇게 한철을 공부하고 두 철을 공부하고, 일 년을 공부하고 이태 삼년을 그렇게 하면 반드시 깨닫게 된다고 모든 선지식이 다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백세광음여과극(百歲光陰如過隙)이라 하능구주재인간(何能久住在人間)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의수강건수근주(宜隨强健須勤做)하라 생사임시부자한(生死臨時不自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세광음(百歲光陰)이 여과극(如過隙)이여. 인간이 오래 살아봤자 백년 미만인데, 그 백년 미만의 한평생이라는 것이 조그마한 틈 사이로 말 지나간 것을 보는 거와 같애. 창문 틈으로 말이 달려가는 것을 보면, 잠깐 지나간다 그말이여.

하능구주재인간(何能久住在人間)이요. 어찌 능히 인간에 오래오래 머물 수가 있느냐?

정말 젊었을 때 어렸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벌써 육십이요 벌써 칠십이다 그말이여.


의수강건수근주(宜隨强健須勤做)하라. 마땅히 이만큼 건강할 때 모름지기 부지런히 정진을 해라 그거거든.

생사임시부자한(生死臨時不自閑)이라. 아직도 살 날이 넉넉하다고 믿고 그럭저럭 지내다가는 금방 죽음이 닥쳐오면은 그때 가서 늙고, 병들고, 죽음이 가까 오면 '아! 내가 젊었을 때 왜 그렇게 정진을 좀 열심히 안 했던고?'


그때 가서사 애써서 할려고 하면 여기저기 아프고, 머리 아프고, 소화가 안되고, 가슴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마음대로 안 돼. 그래서 지금 이만큼 건강할 때 정말 열심히 정진을 하시라 이거거든.

이게 다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이 다 겪어 본 나머지 우리에게 게송으로써 설해 주신 법문이다 이겁니다.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보살들이 우리를 위해서 그 자신들은 뼈아픈 육체적, 정신적 고통 고행을 극복하면서 터득한 길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그말이여. 우리는 남겨 주신 그 법(法)에 의해서 그 법을 진실로 믿고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거성시요(去聖時遙)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지가 벌써 삼천 년이 되어서 성현이 가신 때가 멀다 그말이여. 그러니 지금은 언필칭 '말세(末世)'라, 말세가 되어서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가 되었다.

정법시대(正法時代)는 모두가 다 언하(言下)에 모다 대오(大悟)를 한 도인들이 많이 나오고, 상법시대(像法時代)에는 절을 짓는다, 탑을 세운다, 그러한 것으로써 불사(佛事)를 삼았고, 말세에는 투쟁 싸움으로써 일을 삼는다. 그런 말도 있지만.


그런 시간에 관계해서 정법 · 상법 · 말법이 있다고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佛法流行不關時] 그말이여.

즉심변시기성쇠(卽心便是豈盛衰)리요. 곧 마음이 바로 이놈이라. 어찌 성쇠(盛衰)가 있을까 보냐.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삼천 년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낱낱이 사대오온(四大五蘊),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이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할 때에는 거기에 무슨 정법 상법 말법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 자리는 생사가 없는 곳이요, 흥망성쇠가 없는 곳이요.


한 생각 돌이켜서 우리 본참공안을 드는 곳에는 말법이 아니여.

한 생각 돌이켜서 본참공안을 거각(擧却)을 해서 그렇게 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곳에는 말세 따질 것이 없다 그말이여.


아무리 총무원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세계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정법을 믿고 한 생각 단속하는 곳에는 말세가 없어. 언제나 정법시대여.

조제화락진소식(鳥啼花落眞消息), 새가 울고 꽃이 피었다 지는 바로 거기에 참소식이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정법을 믿고 정진한 사람에게만 생사 속에 생사가 없는 도리가 있는 것을 믿을뿐이여.


지자희이(只自熙怡)언정 설향수(說向誰)오. 다못 스스로 기뻐하고 즐길지언정 누구를 향해서 이 소식을 설할까 보냐.

우리는 이 시대에 태어난 업(業)을 같이한 도반(道伴)들입니다.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일을 거듭거듭 만나고 세계 도처에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온갖 시비와 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실천해 나간다면 생사 속에 영원을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똥 주머니요, 오줌 주머니요, 피 주머니요, 고름 주머니여. 해부를 해서 보면 피와 오줌과 고름과 똥으로 가득차 있어.

그러나 그 속에 불생불멸한 영원한 보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우리는 죽으면 땅에 묻으면 흙이 되어 버리고, 화장을 하면 재가 되고 그렇지만 그 몸뚱이 속에 불에 넣어도 타지 않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않고 하는 그러한 값없는 보배가 있다 이거거든.(18분26초~34분2초)




(3/3)----------------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한디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산(寒山) 꼭대기에 밝은 달이 휘영청 외로이 떠 있는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라. 그 맑은 갠 하늘을 비추어 보니 한 물건도 없어.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여, 정말 귀하고 귀하구나, 이 천연의 값없는 보배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으로 뭉쳐진 이 몸뚱이 속에 묻혀 있구나.


한산시(寒山詩)에 나오는 게송(偈頌)입니다.


'인간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이 몸뚱이 속에 있는 값없는 보배가 있어서 그것을 개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을 개발을 함으로써 생사 속에 생사를 해탈하는 거여.

그것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수행자고, 그러기 때문에 수행자는 오욕락(五欲樂), 온통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오욕락이 인간의 목표이고 목적인 것처럼 그놈을 서로 더 많이 누릴려고 싸우고 일생 동안을 그 오욕락을 쟁취하는데 다 바친다 그말이여.


다행히 우리 불자(佛子)는, 법보가족은 숙세(宿世)에 깊은 법에 인연이 있어서 이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하게 되었다.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영원히 쓰고도 남고 할 그러한 값없는 보배가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도 불행하지 않고, 부자로 살다가 사업이 여의치 못하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불행해질 수도 없고, 벼슬이나 관작(官爵) 하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그만두고 나온다 하더라도 그까짓 것 아무 미련이 없어.


인간의 흥망성쇠는 춘하추동과 같아서 봄이 오면 봄에 맞도록, 여름이 오면 여름에 맞도록, 가을이 오면 가을에 맞도록 살아가는 거여. 겨울이 와서 눈이 내리고 산천이 다 꽁꽁 어는 시기가 오면 또 겨울에 맞춰서 살아가는 거여.

부귀영화도 마찬가지여. 자기가 주어진 인연대로 부자는 부자에 맞춰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데에 맞춰서 살고.


흥망성쇠와 춘하추동이라는 게 면할 수가 없어. 그러한 상황에 내가 적응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되, 자기의 본참공안을 철저히 단속해 나가면 어떠한 고통이라도 그런대로 다 이겨 나갈 수가 있어.

그래서 그 사람은 보통 다른 사람과 같이 생겼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내용이 다른 거여. 남처럼 그렇게 고급스러운 옷을 안 입고 수수하게 입었어도 하나도 창피할 것도 없고, 형편이 넉넉해서 잘산다 해서 남을 업신여기는 법도 없어.


부자굴부자고(不自屈不自高)야.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에다 힘을 주고 아만(我慢)을 부리고 남을 업신여기고 그런 법도 없고, 자기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비굴하게 굴(屈)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형편 따라서 살아가는 거여.



『기세경(起世經)』에 '세 사람의 천사가 이 세간(世間)에 와 있다. 집집마다 그 천사가 와서 계시다'

이른바 세 천사라 하는 것은 노(老), 병(病), 사(死), 병들어서 늙어서 죽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와 있는 천사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악업(惡業)을 지으면 죽은 뒤에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는데,

염라왕(閻羅王)이 그것을 보고 불쌍해서 가책(苛責)을, 꾸짖으시기를 '네가 옛날에 인간 세상에 있을 때 세 천사를 보았을 텐데 어찌 그 천사를 푸대접을 했느냐? 천사가 너희 집에 그렇게 갔는데도 그 천사를 못 본 체했느냐? 그 천사라 하는 것이 바로 네가 늙었고, 병들고, 죽었을 때, 그 노(老) · 병(病) · 사(死)의 현상이 바로 너에게 가신 천사니라'


그 천사가 일부러 찾아갔거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럭저럭 지냈어. 다른 사람 집에 다른 사람한테 천사가 가서 늙어서 병들어 죽은 것만 그렇지, 자기에게 천사가 올 줄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 가지고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모든 오욕락 속에 빠져가지고 그것을 즐기느라고 천사가 일부러 와 주신 뜻을 망각해 버렸다.


여러분 가정에, 또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도 이 천사가 이미 와 계실 것이고,

'아직은 나는 병도 없고 건강하니까 천사가 아직 안 왔다. 그러니까 마음껏 즐기고 마음껏 먹고, 하고 싶은 것 좀 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천사는 미리 전화나 통고를 하지 않고 돌연히 찾아오는 것입니다. 찾아왔으되 왔다는 말도 안 하고 가만히 계시거든.


천사가 간으로 오기도 하고, 콩팥으로 오기도 하고, 신장으로 오기도 하고, 머리로 오기도 하고, 배로 오기도 하고, 팔다리에 오기도 한다.

와서는 가만히 있어. 나중에 조금씩 조금씩 나타나는데, '내가 천사'라는 말은 안 하거든.


속이 엷은 사람이 조금 재산이 생기면은 그것을 남에게 보이고 싶어하고, 조금 무슨 힘이 있으면 남 앞에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조금 무슨 권리가 있으면 그것을 목에다 힘을 주고 그러지, 진짜 큰 재산, 큰 권리, 큰 학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 구태여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밖에다 과시할려고 하는 법이 아니여.


그러니 여러분은 기세경에 있는 이 세 천사는 정말 나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해 주기 위해서—이 육체는 무상한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어쨌든지 천사가 이미 왔더라도 그 천사를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서 지혜의 눈을 뜨고 무상(無常)을 깨닫고 「이뭣고?」를 더 열심히 해서 생사해탈을 하도록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참선을 하신 분에게 부탁을 드릴 것은 열심히 정진을 하다 보면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소견(所見)이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언제라도 그러한 소견을 버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조사(祖師)와 같은, 부처님과 같은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면 정진을 하다 조그만한 지견(知見)이 나고 소견이 났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면 스스로 그것을 뿌리쳐 버려 버리고 꽉 본참공안을 잡드리해 나가는 그러한 정진을 해야 해.


하다가 누구라도 무엇이 알아지기도 하고, 능엄경 53변마장(辨魔障)에 보면 온갖 경계가 나타날 수가 있어.

설사 그런 경계가 아니라도 그건 다 마경(魔境)이지만, 그런 경계가 아니라도 무슨 경을 보면 옛날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었는데 환히 짐작이 가고 또 공안을 보면 옛날에는 잘 몰랐었는데 자기 나름대로 수긍이 가고, 가슴이 답답했었는데 후련하니 자기 나름대로 깨달은 것같이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말이여.


그러나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정진을 해서 실다운 깨달음을 얻어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가 아니면 어떠한 소견 지견이라도 스스로 부인을 해 버리고 구경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야 할 그러한 지조가 수행자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이여.(34분3초~49분18초)(끝)




[법문 내용]


(게송)본참공안몰심사~ / 다맛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관(疑觀)으로 참구(參究) / (게송)비불비심비시물~ / 망상을 내버려 두는 것이 망상을 다스리는 법 / 일체 경계가 법문

(게송)백세광음여과극~ / 정법을 믿고 한 생각 단속하는 곳에는 말세가 없어. 언제나 정법시대 / (게송)한산정상월륜고~ / 부자굴부자고(不自屈不自高) / 『기세경(起世經)』에 나오는 세 천사, 노(老), 병(病), 사(死), 병들어서 늙어서 죽는 것 / 실참실오(實參實悟)는 수행자의 지조.



온갖 경전을 다 해석할 줄 알고, 다 외우고 안다하더라도 참선해 나가는 데에는 그런 것이 도무지 소용이 없어. 그런 것을 가지고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여.

다 놔 버리고 오직 알 수 없는, 콱!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정진을 하되, 어쨌든지 몸에 긴장을 풀고 단정하게 앉되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 힘을 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알 수 없는 의심관(疑心觀)을 해 나가야지,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데에다가 주력을 해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처음에는 암만 망상을 안 할려고 해도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아무리 화두를 간단없이 들려고 해도 1분도 안 가서 딴 생각[別念]이 들어오고 끊어지고, 그러지만 끊어지면 또 들고, 끊어지면 또 들고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내버려 둬 버려. 내버려 두는 것이 망상을 다스리는 법이여.

지나간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냥 일어난 그 찰나에 그냥 고대로 놔두어 버리고 자기 본참공안을 터억 거각을 해 나가. 「이뭣고?」


활구참선 최상승법을 여지없이 믿고 정진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산도 법문이요, 흐르는 물도 법문이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법문이요, 부는 바람도 다 법문이요, 개 짖는 소리도 법문이요, 애들이 떠드는 소리도 다 법문(法門)인 거여.

일체 경계에 부딪혔을 때 바로 내가 화두를 드니까, 나로 하여금 본참화두를 들게 해 주니 그것이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여.


불법(佛法)이라 하는 것이 부처님과 조사와 모든 보살들이 우리를 위해서 그 자신들은 뼈아픈 육체적, 정신적 고통 고행을 극복하면서 터득한 길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그말이여. 우리는 남겨 주신 그 법(法)에 의해서 그 법을 진실로 믿고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똥 주머니요, 오줌 주머니요, 피 주머니요, 고름 주머니여. 해부를 해서 보면 피와 오줌과 고름과 똥으로 가득차 있어. 그러나 그 속에 불생불멸한 영원한 보배가 들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기세경(起世經)』에 '세 천사가 이 세간(世間)에 와 있다. 집집마다 그 천사가 와서 계시다' 이른바 세 천사라 하는 것은 노(老), 병(病), 사(死), 병들어서 늙어서 죽는 것이 그것이 우리에게 와 있는 천사다.


정말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정진을 해서 실다운 깨달음을 얻어 불조(佛祖)와 같은 경지가 아니면 어떠한 소견 지견이라도 스스로 부인을 해 버리고 구경의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는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야 할 그러한 지조가 수행자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701~800/(776~800)2019. 3. 23. 11:20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796)—2019(기해)년 동안거 해제(19.2.19) (32분)

(1) 약 19분. (2) 약 13분.

(1)------------------


서왕한래춘부추(暑往寒來春復秋)하고  석양서거수동류(夕陽西去水東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나개친증도지두(那箇親曾到地頭)오

나무~아미타불~


서왕한래춘부추(暑往寒來春復秋)하고  석양서거수동류(夕陽西去水東流)로구나.

더위가 가고 추위가 오니 봄이 다시 또 가을이 되는구나. 석양은 서쪽으로 가는데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구나.


망망 우주(茫茫宇宙)에 사람이 수없이 많은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 이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오늘은 을해년 정월 15일 해제날입니다.

이렇게 날씨는 춥고 눈비가 내리는데, 그 속에 신심과 원력으로 이 해제 법요식에 참례해 주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의 신심과 원력(願力)에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주괴공(成住壞空)과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서 수없는 사람이 태어났다가 늙어서 죽어가고, 또 태어났다가 늙어서 병들어 죽어가고 하는 것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이 세계가 운영이 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그 무상(無常)한 속에서 무상함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그 무상한 우주법계의 흐름 속에서 끌려가지 아니하고 불법(佛法)을 믿고, 이렇게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정법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무상한 속에서 그 무상한 속에 끌려가고 만다고 하는 것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그것을 면할 수는 없는데, 그 속에 끄달려가지 아니하고 무상함을 철저히 느끼고 깨달아 가지고 불법을 믿고 또 정법을 믿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은 정말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진리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이 세계는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사람은 생로병사를 못 면하지마는 그 무상한 속에서 참나를 깨닫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 도반 여러분은 정말 선택된 그런 존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무상 속에서 무상 속에 끄달려 가지고 칠팔십, 팔구십 되면은 다 죽음을 면틀 못하고 관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무상 속에서 생사를 해탈하는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고자 모이신 여러분은 정말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그 자비와 광명을 우리는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참선(參禪)을 통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더라도 그 경계(境界)에 끄달리지 말고 바로 그 경계를 발판으로 해서 참나를 깨닫는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신다면,

아무리 세계가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모든 인간이 생로병사를 못 면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참나를 깨닫는 ‘이뭣고?’를 한 사람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갈 줄 아는 선택된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고,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고 그런 대단히 고마운 존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눈이 펄펄 옴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보통 사람이면 '눈도 오고 그러니까 집안에 따뜻하니 그냥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눈을 맞으면서도 이렇게 이 법당에 가득 모이셨으니 여러분이야말로 정말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서 마땅하고, 무상 속에서 영원을 찾아가는 수행자로서 대단히 이 산승(山僧)으로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박수)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한 살 두 살 먹다가 보면 열 살, 스무 살, 오십 육십 칠십 되다 보면은 다 늙어가고, 늙으면 병이 나서 결국은 백 살을 넘기기가 어렵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하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이 육체는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 오십 육십 칠십 팔십이 되고 대부분 백 살을 넘기기가 어려우나,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비록 이 육체가 늙어서 죽는 것을 그렇게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뭣고?’만,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기분 나쁜 데로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이뭣고?’로써 나의 자성(自性) 부처님을 찾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해 간다면 그것이 바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이 먹어간다고 꼭 안타깝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항상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비록 얼굴에 주름살은 하나둘 불어간다 하더라도 하나도 원망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도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활구참선을 하게 되면 거기에 늙음을 꼭 슬퍼할 것만도 아니고.


세상에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결국은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승에 가게 되는데, ‘이뭣고?’을 항상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한 사람은 숨 꼴딱 넘어갈 때도 ‘이뭣고?’를 하면은 그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죽음을 꼭 슬퍼할 것도 없고, 꼭 무서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인 활구참선법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활구참선에 의해서 항상 슬플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이뭣고?’로써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거기에 생로병사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은 늙어가는 것을 그렇게 꼭 슬퍼만 할 것도 없습니다.


어피차 우주법계는 성주괴공이 그것이 우주법계의 흐름이고, 모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나 축생도 태어나면은 늙고, 늙으면 이 몸을 버리고 또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축생은 ‘이뭣고?’를 못합니다.

사람이라야 ‘이뭣고?’를 할 수가 있고, 정법을 믿는 사람이라야 ‘이뭣고?’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통해서 슬플 때도 ‘이뭣고?’로써 이겨 나가고, 속이 상할 때도 속상한 일만 생각하면 점점 속이 상하는데 바로 그럴 때 ‘이뭣고?’를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로병사가 면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하지마는,

생로병사 속에서 항상 ‘이뭣고?’ 정법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이 생로병사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은, 바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찾고 생로병사 속에서 참나를 찾는 바로 나의 자성불을 찾는 활구참선법을 하는 사람은 이 몸이 늙어가는 것을 꼭 안타깝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태어난 사람은 결국 늙어가고, 늙어가면 병이 나고, 병이 나면 결국은 이 몸을 버리고 또 몸을 바꾸게 되는데 평생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그 사람은 설사 살 만큼 살고 이 몸을 버리게 되면은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게 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생로병사를 두려워할 것도 없고, 뭐 세계 성주괴공을 한탄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주법계에 현재 오십억 육십억 인구가 있다고 하지마는 그 많은 인구가 이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고, 몇분의 일이나 됩니까?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법보제자(法寶弟子) 도반 여러분들은 오십억 육십억 인구 가운데에 선택된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항상 슬플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어피차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생로병사를 면틀 못하지마는 그 속에서 항상 ‘이뭣고?’를 하고, 참나를 찾고,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이 세계가 무상하고, 이 몸뚱이가 무상하다고 하지마는 열심히 최상승법을 믿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몸이 아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나, 나의 자성불을 찾는 수도장(修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우주법계가 성주괴공이 있는 것을 근심할 것도 없고, 이 몸뚱이에 생로병사가 있는 것도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고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그 속에서 항상 나의 자성불을 찾는 최상승법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계는 바로 그대로 선방(禪房)이 되는 것이고, 이 육체는 참나를 찾는, 자성 부처님을 찾는 부처님이 되어 가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명심하고 잠시도 그럭저럭 지내서는 안 되고, 항상 ‘이뭣고?’를 챙기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 그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처음~19분13초)




(2)------------------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한데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堂堂大道)는 혁분명(赫分明)이요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한 대도(大道)는 밝고 밝아서 분명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십억 육십억 인구가 사는데 이 정법을 믿고 ‘이뭣고?’를 한 사람은 이 사람사람마다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 부처님을 우리가 이 몸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믿고 ‘이뭣고?’을 열심히 하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으므로 그러한 우리가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정법을 철저히 믿지 않고 ‘이뭣고?’를 열심히 안 한 사람은 한 생각 단속을 하지 아니하므로 해서 무량겁을 두고 사람으로 태어났다, 축생으로 태어났다, 천당에도 갔다, 지옥에도 갔다 이렇게 하면서 만 가지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비록 말세(末世)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인 활구참선을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기 때문에 무상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고.


비록 육체는 칠팔십, 팔구십 살면은 또 몸을 바꾸게 되나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활구참선을 열심히 하면 우리는 결정코 이 몸이 팔구십, 많이 산 사람은 백세 넘어서도 살지마는 반드시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서 미륵(彌勒)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심과 원력으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이뭣고?’를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늙어가는 것을 원망하고 한탄할 것도 없습니다.


어피차 한번 태어난 사람은 결국은 늙고, 늙으면 이 몸뚱이는 바꾸게 되는데 활구참선을 하고 정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법계에 성주괴공이 있고, 계절에는 춘하추동이 있듯이 비록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도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이 늙어가는 것을 그렇게 슬퍼할 것도 없고.

설사 살 만큼 살다가 이 육체를 바꾼다 하더라도 몸을 바꿔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난다고 하는 신념만 철저히 한다면 죽음을 하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육체를 하라는 것은 아니고, 지혜롭게 건강 관리를 잘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이뭣고?’를 하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에 대한 철저한 정진만 한다면, 거기에 밤낮 봄이 좋다고 해서 봄만 있으라는 법도 없고, 가을이 좋다고 해서 밤낮 가을만 있기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주름살 생기고, 또 병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병이 나면은 결국 몸을 바꾸게 되는데, 불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한 사람은 살 만큼 살다가 몸을 바꾸어도 틀림없이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고, 또 그 사람의 원에 따라서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는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이 활구참선이요, 최상승법에 의해서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비록 이 세계가 무상하고 생로병사가 무상하다 하더라도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정법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을 하나도 무서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앉아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이뭣고?’ 이렇게 해서 나에 있는 나의 자성 부처님을 찾는 최상승법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으므로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이 바로 이 산승의 말이 아니고, 부처님의 말씀이고 역대조사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산승의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리는 말을 철저히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내 말이 옳다고 믿고, 그렇게 실천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박수)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최상승법을 믿는 자성 부처님을 찾는 최상승 불법 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을해년 정월 15일 해제일을 맞이했으나, 해제(解制)일이 뭔 날이냐 하면은 석 달 동안 결제(結制)했으므로 해제를 할 수밖에 없고, 해제를 했다고 해서 우리가 공부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하루하루 다음 4월 15일 결제 때까지 해제라고 하는 기간을 통해서 우리는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정진을 게을리 아니하시기를 부탁을 드리고.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도반들은 산승의 이 말을 철저히 믿고 그렇게 실천해 주신다고 박수를 치신 걸로 믿고.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하면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고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소  백년광음전두비(百年光陰轉頭飛)니라

나무~아미타불~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하면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고.

비록 말세라고 하더라도 이 육체를, 이 몸뚱이를 받아났습니다.

이 몸뚱이를 받았을 때, 이 활구참선을 만났을 때, 금생에 이때에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지 말고, 이 몸뚱이 이만큼 건강할 때 열심히 ‘이뭣고?’를 해서 제도하지 아니하면 다시 어느 생을 만나서 이 몸뚱이를 제도할 것인가.


이 몸뚱이 이만큼 건강하고 이럴 때 정법을 만났을 때 열심히 자기 자성불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년 세월이라고 하는 것이 금방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활구참선법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기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법상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19분14초~31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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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서왕한래춘부추~’ ; 卍新纂續藏經 제65책 <禪宗頌古聯珠通集 36권> 설암조흠(雪巖祖欽) 스님 게송.

*망망하다(茫茫-- 아득할 망) ; 넓고 멀어 아득하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숙원력(宿願力)•대원업력(大願業力)•서원(誓願)•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성주괴공(成住壞空) : 세상의 모든 것은 크나 작으나 다 변화의 과정을 밟게 된다。곧 성립되어 가는 과정, 안정(安定)하여 진행하는 과정, 쇠퇴하여 가는 과정, 멸망하여 없어지는 과정이 반드시 있게 된다。모든 물질도, 우리 몸도 사회도, 국가도, 세계 전체도 다 그렇게 된다.

이것을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니,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 생로병사(生老病死)니 하는데, 그 원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생각이 쉴 새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자성불(自性佛) ; 자성(自性)이 즉 부처라는 뜻.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임.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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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당당하다(堂堂-- 집·당당할 당) ; ①(모습이나 태도가)남 앞에서 내세울 만큼 떳떳하다. ②(형세가) 위엄 있고 훌륭하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게송)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하겠느냐!'

[참고] 『선관책진(禪關策進)』 제1 제조법어절요(諸祖法語節要) '황룡사심신선사소참(黃龍死心新禪師小參)' 참고.

諸上座 人身難得 佛法難聞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참고] 『서장(書狀)』 '답탕승상(答湯丞相)' 참고.

人身難得 佛法難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음전두비(百年光陰轉頭非)' ; ‘당장 이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 (가로판 p169) 게송 참고.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법문 내용]


(게송)서왕한래춘부추~ /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인 참선(參禪) /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여러분은 정말 최상승법을 믿는 자성 부처님을 찾는 최상승 불법 제자 / (게송)차신불향금생도~ / 백년 세월이라고 하는 것이 금방 가는 것 /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활구참선법 ‘이뭣고?’를 열심히 하라.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그 무상(無常)한 속에서 무상함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그 무상한 우주법계의 흐름 속에서 끌려가지 아니하고 불법(佛法)을 믿고, 이렇게 정법(正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정법을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비록 이 육체는 한 살 두 살 먹다 보면 오십 육십 칠십 팔십이 되고 대부분 백 살을 넘기기가 어려우나,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면 무상한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비록 이 육체가 늙어서 죽는 것을 그렇게 크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뭣고?’만,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기분이 나쁠 때도 기분 나쁜 데로 끌려가지 말고 ‘이뭣고?’ ‘이뭣고?’로써 나의 자성(自性) 부처님을 찾는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해 간다면 그것이 바로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결국은 이 몸뚱이를 버리고 저승에 가게 되는데, ‘이뭣고?’을 항상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한 사람은 숨 꼴딱 넘어갈 때도 ‘이뭣고?’를 하면은 그 사람은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죽음을 꼭 슬퍼할 것도 없고, 꼭 무서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어피차 성주괴공을 면틀 못하고 생로병사를 면틀 못하지마는 그 속에서 항상 ‘이뭣고?’를 하고, 참나를 찾고, 나의 자성불(自性佛)을 찾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이 세계가 무상하고, 이 몸뚱이가 무상하다고 하지마는 열심히 최상승법을 믿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몸이 아파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나, 나의 자성불을 찾는 수도장(修道場)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항상 나의 자성불을 찾는 최상승법에 의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이 세계는 바로 그대로 선방(禪房)이 되는 것이고, 이 육체는 참나를 찾는, 자성 부처님을 찾는 부처님이 되어 가는 그런 과정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명심하고 잠시도 그럭저럭 지내서는 안 되고, 항상 ‘이뭣고?’를 챙기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것, 그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701~800/(776~800)2019. 3. 23.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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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794)—전강선사 44주기 추모재(2019.1.7) (10분)

약 10분.

오늘은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 44주기 추모재일입니다.


전강 대종사께서는 16세에 출가하셔서 23세에 견성(見性)하셨습니다. 당시 6대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으셨고.


인가를 받으신 것은 당대 선지식으로부터 ‘옳다. 니가 바로 보았다’하고 이렇게 인가를 해서 받으신 것이 아니고, 천칠백 공안(公案) 문답을 거량(擧揚)함에 전강 조실스님의 그 번갯불처럼 빠르고 밝은 혜(慧)에 꼼짝 못해서 자동으로 인증 안 할 수 없어서 저절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33세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祖室)로 추대되셨는데, 당대 대선지식이신 경봉 스님께서 이 송담의 손을 꼭 잡으시면서 “자네 스님은 전생에 이미 깨달아서 몸만 바꾸어서 이생에 태어난 분이다”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7세 열반에 드시니, 후학을 위해 7백여 개의 녹음 육성 활구참선(活句參禪) 법문을 남기셨으니, 비록 육신은 열반하셨지마는 후학들은 그 낭랑한 전강 조실스님의 법문을 들으면서 열심히 정진하면 사견(邪見)에 떨어지거나 득소위족(得少爲足)하지 않고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44주기 추모재를 맞이해서 이렇게 신심과 정성으로 참례해 주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송담(松潭)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과거에 6대 선지식이 계셨고, 많은 도인들이 계셨지만 문자로 법어집이 나오신 분도 많지마는 과거에는 녹음 시설이 없어서 육성 법문은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선사(先師) 전강 조실스님은 녹음 시설로 상법 수좌(首座)가 정성껏 녹음을 해 가지고 오늘 지금도 조실스님의 육성 법문을 들을 수가 있고, 그 법문에 의해서 사견(邪見)에 떨어지거나 쪼금 한 소식 했다고 해서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많은 선지식이 계셨지마는 과거에는 녹음 시설이 없어서 법문을 육성으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방금도 조실스님의 육성 법문을 낭랑하게 들었습니다마는 우리가 바르게 정진을 할라면은 선지식의 바른 법문에 의해서 정진해야 하고, 정진을 해서 소증처(所證處)가 있다 하더라도 바른 선지식의 인증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오늘 추모재에 참석해 주신 사부대중 여러분!

어쨌든지 녹음 법문이나마 조실스님의 육성 법문을 잘 들으시면서 정진을 하셔서 기어코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시면 산승(山僧)이 보증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러분과 이 자리에서, 이 추모재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그 점에 대해서 깊이 당부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한번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사람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정말 무상(無常)을 깨닫고 정법(正法)을 믿고 열심히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한 호흡 한 호흡 할 때마다 열심히 ‘이뭣고?’ 화두를 들면서 정진을 하면 그것이 바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44주기 전강 대종사 추모재에 참례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열심히 조실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다 같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기를 바라면서 인사 말씀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성불하십시오.(처음~9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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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거량(擧揚 들 거/나타낼·밝힐 량) ; 법거량(法擧揚). ①스승이 제자의 수행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주고받는 문답 ②선(禪) 수행자들 사이에 주고받는 선(禪)에 대한 문답.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 수가 없는 것.

*득소위족(得少爲足) ; 작은 것을 얻어 가지고 만족을 삼는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선사(先師) ; 돌아가신 스승.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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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800/(776~800)2019. 3. 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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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2018. 11.22) (40분)

(1) 약 20분. (2) 약 20분.

(1)------------------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당당대도혁분명(堂堂大道赫分明)하고 인인본구개원성(人人本具箇圓成)이다.

당당(堂堂)한 대도는 밝고 분명한데, 사람사람이 본래부터 원만히 성취됨을 갖추고 있구나.


지시연유일념차(只是緣由一念差)로, 다못 한 생각 어긋짐으로 말미암아서,

영겁현출만반형(永劫現出萬般形)이로다. 무량겁을 두고 만 가지 형태로 현출(現出), 나타나면서 윤회를 해 가지고 오늘날까지 왔구나.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선지식(善知識)들은 본래 당당하게 갖추고 있는 자기 자성 부처를 깨달아 가지고 대도를 성취해서 생사해탈을 하셨는데,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영겁을 두고 돌고 돌아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왔구나.



평범하게 생각하면 부모로부터서 이 몸체를 받아나 가지고 한 살 두 살,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이렇게 살다가 그 가운데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어. 사람 죽는 것도 보고, 나도 일념 일념, 일 초 일 초 숨을 쉬면서 죽음을 향해서 살고 있는데.


평범하게 생각하면 '뭐, 우주 법계도 이루어졌다가 차츰차츰 변해 가지고 결국은 무너져서 없어지는데 사람인들 어떻게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안 죽고 살 수가 있겠는가' 아무렇지도 않고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우리는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수없이 많은 불보살과 선지식과 모든 분들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셨다가 다 또 열반(涅槃)에 드셨고, 지금 우리 눈으로 그 과거의 모든 선지식들의 육체를 볼 수는 없지마는,

그 선지식과 도인들의 법문에 의지해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도리가 있음을 우리는 믿고, 오늘 이 자리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것을 듣고, 자기 마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생사라 하는 것은 우주 법계도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에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마음에도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습니다.


생주이멸이라는 게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가 또 금방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꺼지면 꺼지자마자 또 무슨 생각이 일어납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생각이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생각이 일어나고, 일 초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무슨 생각인가 일어났다가 또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그러기를 과거에도 그렇게 해서 지내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구구히 설명한다고 될 것이 아니고,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경허 스님, 만공 스님, 전강 스님을 통해서 전수해 온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에 의지해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수행해 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간단한 법에 의해서 수행을 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고, 귀를 통해서 무엇을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도 맡고 호흡도 하고, 입을 통해서 밥도 먹고 말도 하고, 육체를 통해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고, 좋은 일을 보면 기뻐하고 언짢은 일을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데.

그렇게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그렇게 살아가면 뭐 살아지는 것이나, 그렇게 산다면 그것이 축생이 사는 것과 인간이 사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축생도 밥도 먹고 똥도 누고, 축생도 그렇게 살아가는 거고. 사람도 축생처럼 살면 뭐 살아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람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고, 특히 우리 불법을 믿는 사람은 이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그 육체를 통해서 살아가면서 축생처럼 살라면은 얼마든지 살 수 있으나, 우리가 축생처럼 살다가 말아서는 너무나 허무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서 '빨갛다, 노랗다, 파랗다' 이렇게 보기만 지나가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나, 불법을 믿고 이 최상승법인 참선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축생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삶을 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하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생과 다른 점이고 일반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슬플 때 슬픈 데에 빠져서 슬퍼만 하고 말 것이 아니라, 슬플 때 ‘이뭣고? 대관절 무엇이 내 몸에 있길래 이렇게 슬퍼할 줄 아는가?’

기쁠 때도 기뻐하고만 말 것이 아니라, 기쁠 때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 기뻐하는, 그 기뻐할 줄 아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그러는데.

눈으로 볼 때 ‘이뭣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이뭣고?’ 코로 냄새 맡을 때 ‘이뭣고?’ 혀로 음식을 먹을 때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가 내가 나를 찾는, 나의 참나를 찾는 수행 도량(道場)으로 살아가야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고, 인간이 인간다웁게 사는 값있는 삶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은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이 육체가 있어서 일반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나, 이렇게 일반 사람과 우리가 무엇이 다르냐 하면은—우리는 평범한 중생으로서 인생을 마쳐 가지고 업(業)에 따라서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만 만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이렇게 참나를 찾는 이 수행을 하는 사람은 이 무상한 속에서 살면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별로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거나 지식이 없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인생으로써 최고의 삶을 살아가는 길이 있어도 믿지 않고 실천을 안 하면 우리도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이 사람의 몸으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것이 평범하게 생각하면 뭐, 으레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람 몸으로 태어난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개가 되기도 하고, 소가 되기도 하고 업을 지어 가지고 지옥에도 가고, 육도윤회를 무량겁을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다행히 금생에 우리는 사람 몸으로 태어났고, 불법을 믿고 이렇게 생사 속에서 살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참선을 얘기하고 참선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한 생사 속에 살면서 생사를 해탈하는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 생각을 잘못 먹어 가지고 육도윤회를 할 수도 있고, 한 생각을 잘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하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가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처음~20분56초)




(2)------------------


우리는 세계에 지금 60억 인구가 있다고 하지마는 나름대로 다 종교가 있고 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의 주인공인 자기의 부처님을 찾는 공부를 하는 사람은 60억 가운데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여기에 있는 것을 믿고 ‘이뭣고?’를 하는 사람은 대단히 희귀하고도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 참선법을 믿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금방 10년 20년이 지나고, 언제 숨 한번 따깍 그치면은 내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상한 속에서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한 사람은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역대 부처님과 삼세제불(三世諸佛), 역대조사가 사바세계에 나오셔서 이 법을 설해 놓으신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고 또 다행히, 많은 종교가 있지마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법인 활구참선을 우리가 말씀을 드리고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다.

기왕 이 법을 듣고 믿을 바에는 올바르게 열심히 하면은 우리도 이 무상한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많아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꼭 남자라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야만 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면 누구라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물건을 내패다치고 신경질을 내고 그렇게 살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생각 한 생각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과 희로애락 속에 노예가 되어 가지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금방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어서 언제 숨 한번 딸깍 멈추면 금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상하고 허망한 세계에 우리는 태어났으나 우리는 불법을 만났고 최상승법을 우리는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항상 ‘이뭣고?’를 챙기고 챙기면 거기에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입니다.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상찰나실난측(無常刹那實難測)이라  호불맹성급회두(胡不猛省急回頭)오

나무~아미타불~


탐착몽중일립미(貪着夢中一粒米)타가, 꿈속에 한 알갱이 쌀에 탐착하다가,

실각금대만겁량(失却金臺萬劫糧)이다. 금선대에 만겁 동안 먹고도 남을 양식을 잃어버리는구나.


무상찰나(無常刹那)라 실난측(實難測)이여, 시간은 잠시도 머꾸지 않고 똑딱똑딱 시계가 가는 쪽쪽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상 속에서 한 알갱이 쌀에 탐착(貪着)해.

명예와 지위와 부귀와 권리는 다 인생 살아가는데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것 때문에 울고 웃고 재판도 하고 그러다가 한 생각이 뚝 그치면 벌써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 무상하고 허망한 세상에 우리는 비록 태어났지마는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인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 염라대왕 앞에 가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뭣고?’ 열심히 하다 보면 그것이 바로 이 중생의 몸으로써 부처님 되는 길이 거기에 있으니.


염라대왕 앞에 언젠가는 우리는 가게 되는데, “네가 뭣을 하다가 왔느냐?”

“‘이뭣고?’를 하다 왔습니다”


“‘이뭣고?’가 무엇이냐?”

“‘이뭣고?’는 이 육체 속에 영원한 부처님이 살아 계시는데, 그 자성 부처님을 찾는 공부가 바로 ‘이뭣고?’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해서 네가 무엇을 얻었느냐?”

“얻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고 생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너는 죽어서 내 앞에 왔지 않느냐?”

“내가 죄를 지었으면은 지옥에 보낼 것이고, 좋은 일을 했으면 천당에 보내주시던지 알아서 하십시오”


염라대왕이 껄껄 웃으면서 “너는 어디를 가고 싶으냐?”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고 싶습니다”


“도솔천 내원궁은 왜 갈려고 그러냐?”

“거기에는 미륵(彌勒) 부처님이라고 하는 위대한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부처님 계신 세계로 가고 싶습니다”


“그래, 너는 지옥은 안 가겠다”

염라대왕이 껄껄 웃으면서 “여봐라! 이 사람을 도솔천 내원궁으로 안내를 해라”


이것은 우스개 소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송담(松潭)이 여러분께 꼭 해 드리고 싶어서 이 말씀을 해 드린 것입니다.(박수)


왜 이 말씀을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을 드리냐 하면은 이것이 바로 불법이요, 최상승법이요,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누가 나를 험담을 하고 욕을 할 때에도 속상할 것이 아니라 ‘이뭣고?’

이렇게 살아가면 이 사바세계는 무상하고 허망하고 나쁜 곳이 아니라 참나를 찾는 좋은 수행 도량인 것입니다. 천당보다도 더 좋은 곳인 것입니다.


천당에는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다 되고 좋을 것 같지마는 거기에 별로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슬플 때 슬프기도 하고, 기쁠 때 기쁘기도 하고, 속상할 때 속을 상해도 그냥 그러고 말면 별로 뜻이 없으나, 그 속에서 ‘이뭣고?’해서 내가 부처님 되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는 내가 성불하는 수도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법을 믿고, 이 용화선원에 와서 생사 없는 활구참선법을 듣게 되었으니 저와 여러분과는 금생에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서, 저 전생부터서 이렇게 최상승법을 믿고 같이 수행해 온 도반(道伴)들이기 때문에 금생에 이렇게 만나서 내가 이렇게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 말씀을 웃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나를 찾는 수행 도량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면 이 사바세계는 그렇게 나쁜 곳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살맛이 있는 곳이고, 바로 여기가 내가 성불(成佛)할 수 있는 수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사람은 이 생사 속에, 이 무상한 생사 속에서 사는 존재이기는 하나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인 참선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하다 보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거기에 있고.


비록 우리가 밥 먹고 똥 누고 울고 웃고 이렇게 살아가는 하찮은 중생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최상승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해서 참나를 찾는 정말 귀한 수행자인 것입니다.

자기를 귀한 수행자로서 살아가느냐, 하찮은 중생으로서 탐진치 삼독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절대로 여러분의 권한인 것이고.


여러분이 활구참선을 믿고 수행하면 소중한 수행자가 되는 거고, 참선법을 믿지 않고 그럭저럭 살다 보면 생사윤회 속에서 울다 웃다가 내생에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염라대왕 앞에 가서 "사바세계에서 무엇을 하고 왔느냐?"

"별로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 무엇인가 했지 않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재산을 모아나 봤자, 관 속에다가 돈을 가뜩 담아 가지고 가 봤자 염라대왕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가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해 놓으면 마지막 숨 거둘 때도 ‘이뭣고?’하면서 숨을 거두고, 관 속에 들어가서도 ‘이뭣고?’를 하고. 염라대왕 앞에 가도 “저는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이뭣고?’만 하고 왔습니다”


“‘이뭣고?’를 해서 무엇을 얻었느냐?”

“얻은 것은 없으나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너는 어디를 가고 싶으냐?”

“도솔천 내원궁이 좋다고 하지마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뭣고?’를 하고 싶습니다”


염라대왕이 껄껄 웃으면서 “그러면 사람 몸으로 가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라” 염라대왕이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내가 이 말씀을 여러분께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믿으면 다행이고, 믿지 않으면 어찌해 볼 수가 없으나 내 생각에는 여러분은 반드시 믿고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뭣고?’를 열심히 하실 각오를 하신 분은 손을 한번 들어보세요.(박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뭣고?’를 열심히 하면은 이 세상에 원망이라는 것이 없어지고 남을 미워할 사람도 없고,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나를 찾는 내가 성불할 수 있는 수도장이 되는 것이니 이런 좋은 법이 다시 또 어디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시계가 똑딱똑딱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인데 시간이 흘러가면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되면 또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면 끝이 아니라 또 새봄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상하다고 하면 무상하나 얼마나 여름만 있고 가을이 없고, 가을만 있고 겨울이 없고, 겨울만 있고 봄이 없다면은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웃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이 사바세계는 그런 것인데 그러한 속에서 최상승법인 참나를 찾는 ‘이뭣고?’를 하는 사람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그런 길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슬프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하면 이 사바세계야말로 정말 살맛 있는 좋은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까 손을 들고 전부 다 이 산승이 하는 말을 믿어 주신다고 생각이 됩니다.

사바세계는 정말 영원한 세계가 아니고 무상한 세계지마는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한 사람은 사바세계야말로 정말 살맛 있는 좋은 수도장이요, 모든 사람은 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좋은 생사해탈하는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말이 한이 없습니다. 더 말을 많이 하고 싶습니다마는 말을 너무하면은 귀가 입맛이 없다고 할 것 같아서 말을 줄이고자 합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말로다 다 할 수가 없고, 내가 말로써 할 수 없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이 주장자로 하여금 주장자한테 맡기고 내려가고자 합니다.(20분57초~40분3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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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당당대도혁분명~’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야부도천 게송 참고.

*당당하다(堂堂-- 집·당당할 당) ; ①(모습이나 태도가)남 앞에서 내세울 만큼 떳떳하다. ②(형세가) 위엄 있고 훌륭하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 ; 분류 '역대 스님 약력(https://emokko.tistory.com/231)' 참고.

*영장(靈長) ; 영묘(靈妙)한 능력을 가진 우두머리[長]. 인간을 다른 생물과 대비하여 이른다.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체달(體達) ;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람의 몸으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것이 평범하게 생각하면 뭐, 으레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람 몸으로 태어난 것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06.』 (제15권) ‘맹구경(盲龜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獼猴池側重閣講堂 爾時世尊告諸比丘 譬如大地悉成大海 有一盲龜 壽無量劫 百年一出其頭 海中有浮木 止有一孔 漂流海浪 隨風東西 盲龜百年 一出其頭 當得遇此孔不 阿難白佛 不能世尊 所以者何 此盲龜 若至海東 浮木隨風 或至海西 南北四維圍遶亦爾 不必相得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佛告阿難 盲龜浮木 雖復差違 或復相得 愚癡凡夫 漂流五趣 暫復人身 甚難於彼 所以者何 彼諸衆生 不行其義 不行法 不行善 不行眞實 展轉殺害 強者陵弱 造無量惡故 是故比丘 於四聖諦 當未無間等者 當勤方便起增上欲 學無間等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참고] 『잡아함경(雜阿含經) 442.』 (제16권) ‘조갑경(爪甲經)‘ (동국역경원)

如是我聞 一時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世尊以爪甲擎土已 告諸比丘 於意云何 我爪甲上土爲多 此大地土多 諸比丘白佛言 世尊甲上土甚少少耳 此大地土甚多無量 乃至算數譬類不可爲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佛告比丘 如甲上土者 若諸衆生 形可見者 亦復如是 其形微細 不可見者 如大地土 是故比丘 於四聖諦未無間等者 當勤方便 學無間等 佛說是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如陸地 如是水性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 人道者 亦復如是 如大地土 如是非人亦爾 ......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人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如是衆生從地獄命終還生地獄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육지처럼 물의 성질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이렇게 사람 세계[人道]의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그렇게 사람이 아닌[非人] 중생도 또한 그러하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으로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을 설명한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天上)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지옥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지옥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甲上土 如是衆生人道中沒還生人道中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從人道中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如是畜生 餓鬼亦爾

如甲上土 其諸衆生從天命終還生天上者亦如是 如大地土 其諸衆生天上沒生地獄中者亦如是 如地獄 畜生 餓鬼亦如是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으레히 ; 으레(①거의 틀림없이 언제나 ②두말할 것 없이 마땅히)의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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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게송) ‘탐착몽중일립미~’ ; 성철스님 ‘납자십게(衲子十偈)’에서 ‘회두(回頭)’ 게송 참고.

*염라대왕(閻羅大王) : 염마왕(閻魔王). 염라왕(閻羅王). 명후(冥侯). 사후세계의 지배자로, 망자(亡者 죽은 사람)를 재판하는 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 오직 한 번만 생사(生死)에 관련되고, 일생을 마치면 다음에는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보살.

*일생보처(一生補處) :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 다른 지위에 난 뒤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보처(補處)는 후보(候補)의 자리[處]라는 뜻.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 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로 다시 태어남.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법문 내용]


(게송)당당대도혁분명~ /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참선 / 참선은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 / 「내가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하는 것」이 우리가 모든 축생과 다른 점이고 일반 보통 사람과 다른 점.

(게송)탐착몽중일립미~ / 사바세계는 무상하고 허망한 곳이 아니라, 참나를 찾는 좋은 수행 도량 / 염라대왕과의 대화 / 저(송담스님)와 여러분과는 저 전생부터서 도반.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는 정말 영원한 세계가 아니고 무상한 세계지마는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한 사람은 사바세계야말로 정말 살맛 있는 좋은 수도장이요, 모든 사람은 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좋은 생사해탈하는 도반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19. 3. 13. 16:32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287)—1986년 2월 첫째일요법회(86.02.02)(63분)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22분.

(1/3)----------------


대지촬래여립미(大地撮來如粒米)하야  당양타고대가간(當陽打鼓大家看)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안중약미제금설(眼中若未除金屑)인댄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2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사부대중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법.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조실 스님 생존시, 조실 스님께서 15년간을 이곳에 머무르시면서 많은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시면서 항상 활구참선법, 최상승법을 선양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성불(成佛)을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는데, 그 팔만사천 법문을 교(敎)라 한다면 그 교(敎) 밖에 따로 마음을 전하신 것이 그것이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 교외별전 선지가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입니다.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잠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육조(六祖) 스님 이전에는 ‘화두(話頭)’라 하는 말이 없었습니다마는.

물론 그러한 체계화된 간화선(看話禪)은 없었지만, 부처님 때부터서 그 부처님의 설법과 중생을 교화하는 그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는 가운데에 그 법(法)이 자유자재로 구사되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세상이 흐름에 따라서 중생의 근기(根機)가 차츰 약해지고 또 사량분별심이 점점 영리한 마음은 점점 늘어나 가지고 순박성을 잃어가고, 그러기 때문에 차츰차츰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방편을 중생 근기 따라서 마련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하택신회 선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저 하택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뭐라고 이름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라야 그릴 수도 없는데 어찌 네가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신회의 불성이니, 그것이 벌써 이름이 아니냐? 이름이 없다고 그랬는데 왜 이름을 붙이느냐?’ 이렇게 꾸짖으시고서,

‘네가 나중에 열심히 공부를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하더라도 너는 지해종도(知解宗徒) 밖에는 되지 못하겠구나. 사량(思量)으로 따지고 이론적으로 따지는 강사와 같은 그러한 무리 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렇게 점검을 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육조 스님을 뵈러 와서는 절을 하니까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물으셨는데, 남악회양 선사는 그 물음에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뭐라고 대답을 할 수도 없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고, 꽉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물러 나와서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이냐?’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 눌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하는 그 의심이 꽉~ 찼던 것입니다.


일부러 ‘이뭣고?’ ‘이뭣고?’ 형식적으로 하고, 또 할 때는 잠시 알 수 없는 생각이 있다가 금방 돌아서면 의심이 없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육조 스님의 그 물음 뒤끝에 꽉 막힌 그 의심이 잊어버릴라야 잊어버릴 수 없고, 안 할라야 안 할 수 없고, 저절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꽉 막힌 그 의심이 차오르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한목 퍼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8년 동안을 그러한 상태에서 하루하루가 지나갔던 것입니다.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던 것입니다.


이 활구참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뭘 이리저리 좀 하다가 무슨 어떠구라한 무슨 경계가 나타난다고 ‘아! 알았다. 내가 알았다’ 이런 생각을 내고서 무슨 공안을 갖다가 자기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뭐라고 이를라고 하고. 그러헌....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누구나 애써서 한 철 두 철 하면 ‘일체가 곧 하나요, 하나가 일체다. 전체가 바로 나요, 나 밖에 이 세계가 어디가 있느냐.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산을 보나 들을 보나 돌을 보나 그것이 모두가 딴것이 아니고 바로 이것이 내 면목(面目)이다’

이러한 체중현(體中玄)의 그런 공견(空見)이라 하는 것은 한 철 아니면 두 철이면 누구나 그러한 경계는 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깨달랐다고 하는 소견(所見)을 내고,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살림을 떠억 지어간다면 그 사람은 조그만한 그릇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자기 그릇으로 평생을 수용하다 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그분은 우리나라 6.25동란 때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양자를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해 가지고 그 사진을 연구를 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는데, 그이가 한번 어느 분의 소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참선에 대해서 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참선이란 게 대관절 어떠한 것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며, 참선을 해 가지고 구경(究竟)으로 도달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러한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전혀 하지를 못하고 겨우 자기 이름만을 한글로 서투르게 쓸 정도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갔기 때문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말도 잘 못 알아듣는 사람에게 통역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참선에 대한 설명을 해 주기도 어렵고 그래서 풍선을 하나의 예로써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이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꼭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선지식(善知識)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지마는 그 사진을 찍고, 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사람은 글씨를 쓰고, 또 쇠를 만드는 그러한 그 제철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그 쇠를 녹여서 좋은 쇠를 만드는 그 가운데, 또 백정이 소를 잡는 데에는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얘기를 하고.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하나의 풍선을 불고 있다.


누가 가장 큰 풍선을 불며, 금방 그 풍선을 잘못 불면 처음에 조금 훅 불다가 어문 가운데에서 툭 터져 가지고 실패해 버린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상당히 클 때까지 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러나 개중에는 이 우주의 법계에 가득찰 만큼 그러한 큰 풍선을 불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 가지고 터트릴 수 있는, 그렇게 풍선을 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우주, 동서고금에 가장 크고도 좋은 풍선을 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지금 우리는 승려로서 우리 나름대로에 가장 좋은 풍선을 불려고 목숨을 바쳐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사진작가로서 당신의 풍선을 잘 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이, 예술가도 상당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이런 도(道)나 법(法)에 관해서 얘기를 하면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이해를 잘 하는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몇달 후에 그이가 인편에 쪽지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풍선을 열심히 불고 있다고 하는 그러한 그 전단을 보내왔었습니다.


'참선을 꼭 가부좌를 하고 단전호흡을 하고 화두를 타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 고정된, 참선에 관한 고정된 관념을 가져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그런 고정된 생각을 가지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지루한 것이다. 장소가 없으면 못하고 시간이 없으면 못하고 어떠한 특별히 혜택 받은 사람이 아니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참선 자체를 경원시(敬遠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려고 하니까 지루하고, 발이 다리가 저리고 허리가 아프고 나중에는 졸음이 오고 아무리 해도 재미가 없으니까, ‘하! 이거 화두가 나한테 맞지 않는 것이냐?’ 또는 '내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는 '나는 이 참선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냐? 내 근기가 참선을 할 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차라리 이렇게 아무리 해 봤자 재미도 없고 별 성과도 없는 참선을 이렇게 한다고 해 봤자 허송세월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경을 읽어 볼까? 염불을 할까? 주력을 할까?'


그래 가지고 경을 읽다가 염불을 하다, 주력을 하다, 그러다가 보면 또 다시 참선을 하고 싶어서 또 참선을 하다가 말다가, 참 이러한 분을 상당히 많이 겪어 봤습니다.


이 참선은, 초학자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그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못한다'고 하는데,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한 것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또 망상이 일어남으로써 오히려 참선을 잘할 수도 있는 그러한 면도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8초)




(2/3)----------------


어떤 사람이 그 집안에 어떻게 쥐가 많이 들끓든지, 그 쥐를 갖다가 없애기 위해서 별별 약을 다 놓기도 하고, 고양이를 다 갖다 놓기도 하고 그러되,

오히려 더 약을 놓아 가지고 몇십 마리 잡아봤자 며칠 안 있으면은 더 쥐가 성해 가지고 더 야단을 치고 더 번성을 하고 하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를 갖다 놔봤자 몇 마리 잡아서 찢어발겨 놓기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쥐가 없어지지를 않고.


오히려 더 부엌이나 창고나 다락이나 천정이나 수채구녁 할 것 없이 뭐 집안에 있는 걸 잡아도 이웃집에서 오고 또 산중에서 내려오고 들에서 오고 이렇게 해서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연구한 끝에.


쥐를 갖다가 잡아서, 새끼 때 그 쥐구녁을 파 가지고 그 새끼를 잡아 가지고는 살살 그 쥐를 꽁댕이를 잘라버리고서 그 쥐를 갖다가 키웠는데.

주로 무엇을 먹여서 키우냐 하면은 쥐를 덫을 놓아서 잡아 가지고, 쥐 고기를 썰어 가지고 새끼 때부터 먹였던 것입니다.

쥐의 고기를 먹여서 차츰차츰 크면서, 쥐를 잡아서 큰 쥐도 넣어주면 배가 고프니까 그 쥐를 막 깨물라 먹고 해서, 인자 그 육식을 하니까 쥐가 굉장히 빨리 잘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쥐가 쥐 고기를 참 잘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 쥐를 풀어놓으니까 그 쥐란 놈이 천장이고 부엌이고 쥐구녕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쥐란 쥐는 다 잡아먹었습니다.

고양이를 시켜봤자 쥐구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나절씩 쥐구녁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오면 잡아먹을지언정 쥐구녁에 딱 들어가 갖고 안 나오면 잡아먹지를 못하는데,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내 놓으니까 구녁구녁이 다 드나들면서 싹 다 잡아먹어.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그 쥐는 사람에게 잘 길이 들어져서, 저를 갖다 마지막에 그놈을 잡어가지고 ‘니가 그동안에 모든 쥐를 잘 잡은 공로를 크게 치하를 하고, 그러나 미안하지마는 너도 너 갈 데를 가거라’ 이렇게 해서 처단을 했다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쥐 때문에 곡식을 많이 먹고 모든 물건을 다 쏠고 그래서 그렇게 쥐 때문에 피해가 많은, 미국이나 서양이나 한국이나 쥐가 1년에 먹는 양곡이 수십만 수백만 석이라 그럼니다.

그래서 '이 쥐를 훈련을 시켜서 쥐를 잡게 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드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일은 하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한 것은 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이 화두! 이론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 가지고 어떠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아까 조실 스님께서 법문 하신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다맛 그렇게만 참구하는 것이지,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경에 있는 부처님 말씀과도 비교해서 ‘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따진다든지, 조사의 어록이나 다른 공안을 가지고 따져서 비교해 보고 이렇게 해서 어떠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도 꽉 막히고 뒤도 막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관, ‘이뭣고~?’

또 판치생모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어떠한 글귀나, 어떠한 물건이나, 어떠한 일을 갖다가 그것만 밤낮 생각해 가지고 생각이 다른 데에 가지 못하고 그 생각만 하도록, 그러면은 애인을 이별한 사람이 밤낮 애인 사진만 놓고 애인만 들여다보고 애인 생각만 하면 그것이 참선이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죽은 자식을 생각해 가지고 밤낮 죽은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자나깨나 생각 안 할라고 아무리 떨쳐 버릴려고 해도 그 자식 얼굴이 환히 나타나면서 자식 생각만 한다면, 그러면 꿈에서도 자식 꿈을 꾸고, 눈을 떠도 자식 생각, 누구 청년 학생들을 봐도 자식 생각하면 그 사람이 그러면 참선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왜 아니냐 하면, 그 한 일에 생각이 집중된다고 한 점에서는 그 점 하나는 혹 공통점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런다고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고, 생사해탈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화두!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하는 이 참선은 알 수 없는 의심! 의심으로 그것을 관(觀)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의심관이라야 하는데, 의심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한 것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뭣고?’를 하라니까, ‘이뭣고?’ 소리를 잊어버리고서 ‘이웃집 영감, 이웃집 영감’ 며칠을 하다가 와서 ‘이웃집 영감’을 많이 찾아도 잘 안된다고 그런 소리를 하고.


또 어떤 노인은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화두를 타고 법문을 듣고 집에 가서는 자나깨나 큰소리를 지르면서 ‘전강 스님! 전강 스님!’ 자꾸 전강 스님을 불러싸서,

그 며느님과 손녀가 그 할머니를 모시고 와 가지고 ‘원장 스님이 전강 스님을 자꾸 부르라고 했다’고, '그래서 밤낮으로 전강 스님을 불러싸니 정말 원장 스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느냐?'


나는 ‘이뭣고?’ 이렇게 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그 할머니가 잘못 알아듣고 가서 밤새도록 전강 스님만 불러싼다고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잘 타일러 드려가지고 얼마 동안을 그 노보살님이 잘 하시다가 지금은 인자 저승으로 가셔서 극락세계를 가셨거나 다시 몸 바꿔 나셨지 않은가 그리 생각이 됩니다마는.


이 한 자리에서 같이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다 각기 달리 듣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엉뚱하게 이해를 해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법회 때마다 이 참선 하는 법,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것은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오신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정말 가끔 한 번씩 ‘이뭣고?’소리는 듣지만 '대관절 이뭣고?라는 것이 무엇이냐?' 전혀 감을 잡지 못한 그러한 분들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여러 해를 다니면서 한다는 것이 결국은 '전강 스님'을 불러싸코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법회 때마다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잘 올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할 줄만 알면 공부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세도 바라지고 또 단전호흡을 함으로써 피로회복도 되고 또 좋지 못한 성격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 잘 골라지고, 그러면서 이 참선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체 생활 속에서 자꾸 단속을 해 나가면 언젠가는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직장에서나 언제라도 그 의단이 독로해서, 일이 있을 때에는 일하는 가운데에도 화두가 떠나지를 않고, 화두 드는 가운데에 모든 사람을 접견할 수도 있고, 일도 할 수가 있고,

그렇게 해서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이 없고, 조용하거나 시끄럽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때가 기어코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뜰히 해 가다보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갖다가 태양이고 달이고 별이고 무엇이고 간에 그것을 소반 위에 있는 쌀이나 곡식을 갖다가 거머쥐듯이[大地撮來如粒米], 온 삼천대천세계도 한 손으로 쏵 휘어잡아서 거머쥘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참, 기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온 태양과 별, 뭐 달까지라도 한 손에 거머쥐어다가 밝은 데다 갖다 놓고서, 그걸 갖다가 손바닥에다 놓고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걸림 없는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當陽打鼓大家看].

그러면 제도 받을 중생이 어디가 있으며, 제도를 할 부처가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천당과 지옥이 무엇이며, 중생과 부처가 무슨 차별이 있는 것이냐 그말이여.


그러나 안중(眼中)에 약미제금설(若未除金屑)이면, 눈 가운데 만약 금싸래기를 제거, 빼 내지 못하면,

요변현황야대난(要辨玄黃也大難)이다. 어떤 것이 누르고 어떤 것이 검은 것을 가려내기는 크게 어려운 것이다.


겨우 공견(空見),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가 일념(一念) 속에 있고, 육도법계가 바로 이 일념 속에 있어서 동서남북에 걸릴 것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막힐 것이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현중현(玄中玄), 공안에 있어서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마치 눈 가운데에 금싸래기를 빼내지 못한 거와 같은 것입니다.


겨우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다고 하는 그러한 소견을 가지고, 그래 봤자 그것은 체중현(體中玄)의 경계라, 체중현의 경계는 공(空)의 이치거든.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인데, 진공의 이치도 이렇게 옅은 분별심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확철대오해서 그렇게 크게 봐 버리면 그것도 상당히 어려운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활구(活句) 문중에, 이 조사(祖師) 문중에 있어서는 체중현 도리 보는 그러한 것을 깨달랐다고 인증(認證)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러한 체중현 도리를 보는 것으로서 인가를 해 주면 그 각견(覺見)을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이치(理致)로는 짐작을 하지마는 사(事)에 걸림이 없어야 하는데,


자기는 부처가 와도 한 방맹이, 조사가 와도 한 방맹이, 그래서 뭐 거침이 없을 것 같은 그러한 횡행자재(橫行自在)한 그러한 생각을 갖지만, 이치로 그럴지언정 사(事)에 막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인가를 해 주면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공부가 거기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 말을 함부로 해서, 법(法)을 설하되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것이고, 현(顯)과 밀(密)이 있는데 현밀(顯密)을 가리지를 못해 가지고 함부로 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기가 막힌 도인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 정말 중생의 근기 따라서 해 줄 말이 있고 안 해 줄 말이 있는 것이며,


때에 따라서 인과법이라든지 모든 방편설이 다 적재적소에 쓰면은 좋은 약이 되려니와, 그것을 함부로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쓰게 되면, 법도 못쓰게 만들고 또 중생도 못쓰게 만들고 자기 자신도 그러한 중대한 과오를 범해서 용서받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보단 훨씬 나은 사람에게 인가를 해 주고 그 사람에게 법을 전해야지, 자기와 같은 정도의 사람에게 법을 전하고 인가를 해 주면, 인가 받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반 밖에 못되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활구참선을 하시되,

이 불법(佛法)을 10년 20년 믿지마는 참선이 무엇인지, 활구참선이 무엇인지, 화두가 무엇인지, 그저 부지런히 시주하고, 염불하고, 부처님께 공을 들이고, 그러한 것이 불법인줄 알고 일생을 지극정성으로 믿고서 스스로도 많은 공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다른 사람들도 '참, 그분이 신심이 있다. 참, 공덕이 장하다. 틀림없이 극락세계에 가셨을 것이다' 이러한 칭송을 듣고 그러면서 일생을 마친 분들도 참 많습니다마는, 활구참선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에까지 이르른 사람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불문(佛門)에 들어와서 여러 해 되시고, 또 법문도 많이 들으시고, 경책(經冊)도 많이 보신 그런 분도 계시고, 여러 절을 거치고 거쳐서 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처음 오신 것이 바로 여기에 오신 분들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이 자리에 법회에 참석하셔서 활구참선을 들으시게 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20분19초~41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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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공부는 하면 한 만큼 알아진 것이 있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무엇이 얻어진 것이 있고 그래서 하면 재미가 있고 보람을 느끼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엇이 알아진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맨날 해봤자 이게 죽 떠먹은 자리고. 그러니 이거 재미 붙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지만, 확철대오 하기 전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건강이 좋아진다든지 또는 자기의 모든 나쁜 성격이 완화가 되고,

예를 들자면은 신경질을 내는 거, 사소한 일에 싸우고 모다 그런 것이 이 참선을 함으로써 차츰차츰 그런 신경질을 안 내게 되고 또 감정에 끄달리지 않게 되고 또 자기의 감정을 자기의 힘으로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이러한 것은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열심히 하다보면 누구나 그런 효과를 다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인간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좋은 것이고, 모든 가족들에게 직장에서 사회에서 존경받을만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옅으고, 힘이 세고 약하고 간에 대부분 자기 감정을 자기가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감정이 일어나지 아니할 때는 참 훌륭한 분이라고 다 하는데, 한번 어디를 건드려 가지고 감정이 폭발했다 하면 뭐 박사고 교수고 장관이고 장군이고 간에 한번 속이 뒤집어졌다 하면은 여간 자기가 자기 감정을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평소에 이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극기(克己)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마는 ‘자기가 자기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도 ‘백만 군사를 호령을 해서 움직일 수는 있어도 자기가 자기를 이기기는 어려우니라. 자기가 자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니라’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힘은 억지로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참선을 조석으로 한 시간씩 하고 낮에도 생활 속에서 항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참구하고 이럼으로써 그것이 참선이 생활화 될 때에 무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내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찰나적으로 무슨 기분 나쁜 생각이 탁! 속에서 뭉클 일어날라가도 떠억 ‘이뭣고?’해 버리면 간단하게 없어지고, 그 일어나는 성나는 마음이 금방 화두로 돌이켜져 버린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하는 사람은 성을 낼라면 내고 안 낼라면 안 내고, 슬퍼할라면 하고 슬퍼 안 할라면 안 하고, 미워할라면 미워하고 또 안 미워할라면 안 미워하고. 그까짓 것 뭐 희로애락이 자유자재해.


이것이, '자유자재다, 해탈이다'하는 것이 다른 데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하는 것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께서도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조급한 생각을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하신 것입니다.

생각을 내 가지고 빨리 깨달을려고 급한 생각 낸 것이야말로 깨달음을 더디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것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생각만 공연히 조급한 생각을 내 가지고 올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의사량처불상간(擬思量處不相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타가, 명예와 권리를 구하는 젊을 때에는 공자님을 섬기다가,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로구나.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나사여하착의구(那事如何着意求)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뜻을 착(着)해 가지고 구해야 할 것인가?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하다가 금생에 태어나서는 유교를 믿고 제 부모의, 제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나라 모든 생활이 대부분 다 이조(李朝) 동안에 유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종교가 없는 사람은 대부분 다 유교를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공자님을 믿고 삼강과 오륜을 지키면서 그렇게 공자님을 믿어 오다가 늘그막에사,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사 부처님을 친하게 되었다. 이제사 부처님을 믿게 되었다 이것입니다.


부처님을 가까이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정말 그것을 똑바로 알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뉘기 짜서 이리저리 사량심(思量心)을 가지고 무엇을 찾고 알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이 최상승법에는 어긋나 버린 것이다[擬思量處不相干] 그말이지.

왜 그러냐 하면, 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생각하면 벌써 그것 자체가 중생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그 화두, 공안 모다 그런 것에 대해서 책이 나오기도 하고, 또 일본 책도 나오기도 하고 해서 그 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는 싶은데, 밤낮 ‘이뭣고?만 하라' 그러고 하니까,

일본말을 아는 사람은 일본 책을 사서 이리저리 읽어 보면 공안에 대해서 이리저리 해설도 되어 있고, 또 천착(穿鑿)이 되어 있고, 파설(破說)도 되어 있고 해서, 썩 그것을 보면은 재미가 있고, 그것 얼마동안 지내면은 자기도 다른 공안도 요리 보면은 가늠이 가고 하니까, 그 버썩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그런 식으로 공안을 천착을 하고 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 봤자 그것은 생사해탈과는 영판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들기 때문에 깨달음과는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알 수 없는 의심, 지금 이렇게 설교를 듣고 하더라도 이 들은 가운데에도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이 떠억 그 의심이 있어야. 그 의심 속에서 말을 들어야 하거든.


그 법문을 들을수록에 의심이 더 간절하고 돈발(頓發)을 해야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고.

걸음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질 때마다, 자기의 본참화두에 충실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올바르게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다음 3월 일요법회 때는 중·고 학생 창립법회가 있습니다. 오늘 그 준비회가 있었는데, 현재 53명이 그 학생법회에 중·고등 학생법회에 신청을 했다고 그럼니다. 대단히 많은 수라고 생각이 되는데.

아직도 여러분의 자녀 가운데 중·고등학생이 있다면 이다음 일요법회 때 많이 참석을 해서 이 창립법회 때부터서 주욱 나오시도록 하신다면, 그 학생이 한참 이 사춘기를 당해서 앞으로 한량없이 발전을 해 나가기 위한 발돋움을 하는 중요한 때인 만큼 부처님 법문을 듣고 부처님 법으로 중심을 잡아주도록 한다면, 올바르게 그리고 훌륭한 소년으로서 그 앞길을 잡아나가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덮어놓고 ‘부처님을 믿어라’ ‘관세음보살을 해라’ 이렇게만 해 가지고서 학생들이 불교를 믿게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어머니나 할머니가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불법을 믿어도 애들은 뭐 '불교' 하면, '우리 잘되라고 우리 어머니가 절에 가서 공들인다' 이러한 정도로 밖에는 몰라 가지고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불교를 부모님들이 믿으면서도 올바르게 인도를 못한다면 그 학생들은 정신적인 방황은 바로 잡아질 수가 없고, 그래서 다른 종교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을 꼭 나쁘다고는 않지만 한 집안에 어른들은 불교를 믿고, 애들은 예수교나 다른 종교를 믿으면 종교 간에 서로 갈등이 생겨 가지고 한 가정이 화합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만나나 또는 궂은 일을 당하거나 한 집안에 종교가 다르면 그런 의식을 거행하는 데에도 갈등이 생기고 자연히 서로 가정이 화합이 깨지게 됨으로써,

여러분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서 부처님 법을 믿고 이 정법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찾도록 그렇게 하신다면 그 어린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대학을 졸업하고 또 결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은 갈 곳 없이 정법을 믿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어린 자녀들 보고 ‘불교를 믿으라. 믿으라’하기 보단, 여러분 자신들이 불법을 믿고 참선을 하심으로써 인격적으로 그 어린 자녀들에게 존경 받을 만큼 되신다면, ‘아! 우리 어머니가 불법을 믿고 참선을 하시더니 저렇게 훌륭해지셨다. 참 거 불교라 한 것은 좋은 것이로구나’


'그 새벽이면 일어나서 한 30분 내지 1시간씩 그렇게 참선을 하시는데, 그 참선을 하시니 저렇게 참! 그전에는 엄마 아빠가 밤낮 싸워쌓고 밤낮 우리한테도 신경질만 내고 그러시더니, 하! 저렇게 참선하시더니 신경질도 안 내시고 엄마 아빠가 그렇게 참 정분이 좋으시고 화합을 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을 보니 정말 이 참선이란 것은 참 좋은 것이로구나. 에잇! 그러면 나도 그것을 해 봐야겠다' 스스로 그러한 마음이 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불법을 믿게 할라면 여러분들이 정말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하심으로써 자연히 어린 자녀들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옴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난간에 매어 두노라.(41분46초~63분1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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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166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尙廣錄 卷第十二之下 信心銘闢義解下 게송 참고.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제접(提接 이끌 제/응대할•가까이할 접) ; (수행자를) 가까이하여 이끌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교외별전(敎外別傳) : 부처님께서 말씀으로써 가르친 바를 모두 교(敎)라 하는데, 교 밖에 따로 말이나 글을 여의고[不立文字] 특별한 방법으로써 똑바로 마음을 가리켜서 성품을 보고 대번에 부처가 되게 하는[直指人心 見性成佛] 법문이 있으니 그것이 곧 선법(禪法)이다. 교는 말로나 글로 전해 왔지마는 선법은 마음으로써 전하여 왔으므로 이른바 삼처 전심(三處傳心) 같은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28, p34에서.(가로판 p29, p35)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그러므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라.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敎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麤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것(拈花微笑)이 모두 교의 자취[敎迹]만 될 것이요.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敎外別傳禪旨]가 되리라.

*선지(禪旨) : [범] dhyana 음을 따라 선나(禪那) • 타연나(駄衍那)라 쓰고, 줄여서 선(禪)이라고만 한다。고요히 생각함(靜慮), 생각하여 닦음(思惟修), 악한 것을 버림(棄惡) 또는 공덕림(功德林) 등으로 번역한다。진정한 이치를 궁리하고 생각을 안정하게 하여 산란치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가섭존자가 전한 선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교법만이 유포되었었는데, 달마대사(達摩大師)가 건너온 뒤로부터 선법이 크게 발달되어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이 완성되었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육조스님, 하택신회, 남악회양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면목(面目 낯 면/눈 목) :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의 얼굴·모습).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체중현(體中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인 삼현(三玄 - 體中玄•句中玄•玄中玄)의 하나.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 刊) p207, p212 에서. (가로판 p215, p219)

[三玄]삼현

體中玄은  三世一念等이요  句中玄은  徑截言句等이요  玄中玄은  良久棒喝等이라

삼현 : 체 가운데 현(體中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고, 구 가운데 현(句中玄)은 지름길 말들이며, 현 가운데 현(玄中玄)은 양구와 방망이와 할 같은 것들이다.


*삼현(三玄) : 임제 의현(臨濟義玄)선사가 학인을 제접하는 데 사용한 수단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진공(眞空)의 이치를 보는 것이라 학인이 이 이치를 보았다 하더라도 신위(信位)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자유의 분(分)이 없다.

구중현(句中玄)은 뜻길이 없는 말로써 그 말에 걸리거나 막히지 않고 도리를 바로 봄을 말함.

현중현(玄中玄),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체중현(법문에서)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37)—정묘년 칠석차례(87.07.07.음)에서.

체중현(體中玄)으로 보면, 공(空)의 이치에서 보면 어떠헌 공안을 묻되 할(喝)을 해 버려도 맞고, 방(棒)을 해 버려도 맞고, 양구(良久)를 해 버려도 맞고, 닥치는 대로 막 잡아서 아무것이라도 일러도 다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중현(玄中玄) 도리에 있어서는 아무렇게나 일러도 맞지를 않습니다. 그 공안에 여지없이 이(理)와 사(事)에 탁! 맞아떨어지게 일러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한 철, 두 철 열심히 허다 보면 어지간한 사람이면 다 그 공의 이치를 보게 됩니다. 그 공의 이치, 그게 체중현(體中玄)인데, ‘체(體) 가운데에 현(玄)’, 체의 이치를 보게 되면 그것이 바로 공(空)인데, 공의 이치를 보게 되면 경(經)을 봐도 모두가 그 소식입니다. 조사어록을 봐도 모두가 다 그 도리고, 조금도 맥힐 것이 없어. 환하고.


그런데 현중현(玄中玄)에서는 그렇지를 않거든.


체(體)의 이치를 본, 겨우 그 이치만 보고 현중현을 못 본 사람은 된장이나 똥이나 마찬가지여. 선과 악이 마찬가지고, 크고 작은 것이 마찬가지고, 부처와 중생이 다를 것이 없고, 내 마누라나 형수가 다 똑같고, 그저 거지나 임금이 다 똑같고, 생과 사가 똑같고, 그러니 오직 쾌활하냐 그말이여.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부처님과 조사가 인가(印可)를 허지를 않았습니다. 그것 가지고서는 진리를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어. 그것은 바른 견성(見性)이 아니여.


그래서 조사(祖師)는 현중현이라고 허는 관문(關門)을 시설을 해 가지고, 현중현 도리를 보지를 못허면 바로 보았다고 인가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현중현 도리는 선지식이 아니면은 그것을 가려내지를 못해.


[참고 ❷] 송담스님 법문(No.282)—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공안은 그 열쇠가 아니면은 도저히 그 열 수가 없는 아주 이 자물통과 같아서 도저히 그렇게 일러 가지고서는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속에·진흙 속에 들어가서 무엇이 발을 찔렀는데, ‘뭣이 찔렀다.’ 이래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찌른 것이 뾰족한 돌멩이냐,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나무 꼬타리냐, 사금파리냐, 또는 쇠꼬치냐, 분명하게 딱! 말을 해야 하는 것이지, 막연하게 ‘뭣이 찔렀다.’ 이렇게만 말한 거와 같아서, 아! 찌른 거야 사실이지, 사실 아닌 것은 아니여.

그러나 분명하게 쇠꼬치면 쇠꼬치, 사금파리면 사금파리, 돌멩이면 돌멩이를 분명히 말을 해야 알 수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 학자가 공부를 하다가 자기 나름대로는 반드시 견처(見處)가 있어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조(佛祖)와 같이 깨닫지 못하면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현중현(玄中玄),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하면 스스로 그것에 만족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활구문중(活句門中)에 있어서의 납자(衲子)의 지조(志操)라 할 것입니다.


[참고 ❸] 송담스님 법문(No.466)—92년 보살 선방에서 하신 법문(92.02.02)에서.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공부해 나가다가 조금 느껴지는 그런 편안함이나 맑음이나 또는 시원함, 그런 소견이나 경계 그런 거, 구경의 깨달음이 아닌 중간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경계에 ‘나도 한 소식 했다. 나도 깨달았다. 이것이 깨달음이 아닌가’하고 거기에 머물러 버리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끝나는 거죠.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예를 들어서 저 지방에서 서울을 향해 가는데 대전이나 수원이나—시골 산중에 있던 사람이 거기에 나오면은 굉장하거든, 차도 많고 높은 건물도 많고 하니까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주저앉은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중간에 좀 볼만한 데가 도시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서울로 착각한 거나 마찬가지여.


서울로 가서 중앙청을 갈라면 중앙청까지 딱 가서 대통령을 만나든지 장관을 만나든지 해야지, 저 중간에 가 가지고 조금 높은 건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서울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거 되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구경(究竟)의 깨달음이 아니면 확철대오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경지가 아니면 중간에 체중현(體中玄) 도리, 중간에 나타나는 보이는 그런 경계는 탁! 스스로 부정을 해 버리고 부인을 해 버리고 거기에 빠져서는 안 돼.


탁! 치워버리고 언제나 초학자와 같은 그런 심경으로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법으로 자기의 본참공안만을 향해서 한결같이 정진을 다그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❹] 송담스님 법문(No.112)—79년 11월 관음재일 법어(79.11.24)에서.

가끔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는 공안에 대한 조리(條理)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공안에 있어서 이 학자가 깨달은데 있어서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보는 사람,

체중현 도리를 보아 가지고 그것으로써 득소위족(得少爲足)하는,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아!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가질까봐,

『절대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현중현(玄中玄) 도리를 바로 봐야만 그것이 바로 확철대오(廓徹大悟)다.』 그러한 것을 우리에게 깊이 납득을 시키고 철저하게 명심을 하기 위해서 가끔 공안에 대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주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법문을 듣고, 어떠한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일러보고 해서 ‘혹 이런 것이 아닌가. 저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이 공안은 마치 체중현 도리에서 보면 아무렇게 일러도 맞지 아니한 것이 없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공견(空見)에 빠진 사람, 공견에 빠져가지고 그러한 입장에서 볼 때에는 고함을 치나, 욕을 하나, 호령을 하나, 손을 들거나, 발을 구르거나, 무엇이 어떻게 이르건 다 안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이 현중현 도리를 본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봐가지고서는 불법을 바로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는 마치 자물쇠통에 꼭 제 열쇠가 아니면은 열리지 아니한 것처럼, 바로 깨달은 사람만이 바로 이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공견(空見) ; 공(空)에 집착하여 일으키는 그릇된 견해. 공(空)을 허무론적인 견해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인과(因果)의 도리를 비롯한 모든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어문 ; '딴', '다른', '엉뚱한'의 사투리.

*경원시하다(敬遠視--) ;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하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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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

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참고] 송담스님(No256)—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

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관(觀)한다(관하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금싸래기 ; 금싸라기(①금의 잔부스러기. ②아주 드물고 귀중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싸래기는 '싸라기(①부스러진 쌀알. ②빗방울이 갑자기 찬 바람을 만나 얼어서 쌀알처럼 되어 떨어지는 눈)'의 사투리.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현중현(玄中玄) ; 사(事)에 걸림이 없는 묘유(妙有) 곧 현중현(玄中玄)의 도리를 보아야 인가(印可)를 하는 것이다. 현중현을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活句) 문중(門中) ;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집안.

*조사문중(祖師門中)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조사선(祖師禪)을 수행하는 집안.

*각견(覺見) ; 깨달음[覺]에 집착하는 견해. 불법은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인데, 그 깨달음[覺]에 집착하여 반대로 또 하나의 속박을 초래하는 것을 경계하는 용어. 모든 견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선종의 입장을 반영한다.

*사(事) ; ①구체성. 현상. 나타나는 현상. ②개별적 현상. 차별의 상(相)의 하나하나. 구체적, 차별적인 것. 이(理)의 반대. 현실.

*방맹이(방망이) ; 방(棒). 몽둥이. 또는 주장자(拄杖子). 방(棒)은 ‘방망이 봉’자이지만 불교에서는 덕산방(德山棒) 등의 용례에 따라 ‘방'으로 읽는다.

*방할(棒喝) ; 선가(禪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직접 체험의 경지를 나타날 때, 또는 수행자를 점검하며 꾸짖거나 호통칠 때, 방망이나 주장자(拄杖子)를 세우거나 그것으로 수행자를 몽둥이질하는 것을 방(棒)이라 하고, 그러한 때 크게 소리를 내지르는 것을 할(喝)이라 한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家風)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義玄)은 할로써 지도방법을 삼았다. 이것을 두고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 한다.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현밀(顯密 나타나다·분명함 현/은밀할·숨길 밀) ; ①뚜렷함과 은밀함. ②현교(顯敎)와 밀교(密敎). 현로(顯露)한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 드러나는 가르침과 비밀스런 가르침의 의미.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종사(宗師) ; 정법(正法)이나 부처님의 심종(心宗)을 전하여 대중의 존숭(尊崇)을 받는 스님.

*학인(學人) ; ①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더 수행해야 하는 견도(見道)·수도(修道)의 성자. ② 수행승. 선(禪)을 닦는 수행승. ③ 배우고 익히는 과정에 있는 스님.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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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이지, 뭐 금방 오늘 툭 깨쳤다고 해서 그러면 다 일이 끝났냐 하면 그게 아니거든. 확철대오를 한 것은 겨우 어린아이 낳아 놓은 거와 같다.

어린아이는 낳아놔서 분명히 그것도 이목구비가 다 있고 사람이지만, 젖을 먹이고 밥을 먹이고 또 이 옷을 입히고 가리키고 해서 제 앞을 꾸릴 만큼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인간이라고 하는 권리를 인증 받게 되는 것입니다' ; 오후보림, 장양성태

[참고] 보조지눌 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란 범부(凡夫)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妄想)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신령스런 앎[靈知]이 참부처[眞佛]인 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따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시로 바른 길에 들어가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면 이 성품(性品)자리에는 원래(原來) 번뇌(煩惱)가 없고, 무루(無漏)의 지혜 성품이 본래(本來) 스스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으니 그러므로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라고 한다.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 云漸修也 比如孩子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  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점수(漸修, 차츰 닦음)란, 비록 본래 성품(本性)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 익혀온 습기(習氣)를 갑자기 모두 없애기는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익혀 공(功)을 이루어 성인(聖人)의 태(胎)를 길러 양성하면, 오랜 동안을 지나 성인(聖人)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漸修, 점차로 닦음)라고 한다.

비유하면,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諸根)이 갖추어 있음은 남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므로 제법 세월(歲月)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어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게송) '구명소일모선성(求名少日慕宣聖) 파사노년친석가(怕死老年親釋迦)'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의 ‘學佛吟’에서.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163. (가로판 p169, 171)

*불상간(不相干) ;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서로 관계가 없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천착(穿鑿 뚫을•궁구할 천/뚫을 착) ; ①깊이 살펴 연구함 ②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

*파설(破說) ; 설파(說破). 어떤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함.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게송)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 화풍탑재옥난간(和風塔在玉欄干)’ ; [가태보등록(嘉泰普燈錄)] 제23권 황정견(黃庭堅)거사 게송 참고.

*옴큼 ; 한 손에 옴켜쥔 만큼의 분량의 단위를 나타내는 말.




[법문 내용]


(게송) ‘대지촬래여립미~’ / 교외별전(敎外別傳) 선지(禪旨)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 / 육조 스님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하택신회, 남악회양 / 깨달을려면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러야 / <사진작가의 ‘참선’ 질문에 대한 ‘풍선’ 법문> 사진을 찍고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백정이 소를 잡는 바로 거기에도 참선이 있을 수가 있고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


쥐가 쥐 잡아먹는 법문(法門) /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 /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 /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깨달음은 갈 곳이 없는 것.

체중현(體中玄)의 경계, 공(空)의 이치, 그것을 가지고 바로 깨달랐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체중현(體中玄), 현중현(玄中玄), 인가(印可) / 활구참선을 듣게된 인연(因緣), 이것은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


극기(克己)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다운 대장부(大丈夫) / 생사해탈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 일념 단속하는 가운데에 진리를 터득하는 것이 최상승법 /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 오후보림(悟後保任) /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 (게송)구명소일모선성~.



육조 스님께서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거기에 붙이지 안 했지마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는 옻칠과 같은데, 항상 우리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놈이 무엇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화두’라고 하는 말은 안 붙였지만 이 화두선(話頭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하는 이 간화선(看話禪)이 바로 그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원을 바로 거기다가 두는 것입니다.


차라리 깨닫지 못하면 말지언정, 깨달을려면 한번 깨달라서 조사(祖師)의 경지에 이르지 아니하면, 차라리 알았다고 하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참선,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가부좌를 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지도하고 있는 하나의 그 체계적인 양식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반드시 일정한 양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충만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대 조사와 선지식의 수단과 능력에 따라서 어떠한 방법으로 지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참선은 초학자(初學者)를 위해서, 물론 책에 있는 그런 자세와 호흡하는 법과 화두를 참구하는 그러한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서 잘 지도를 받아서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범위가 넓고 자유스러운 것이어서, ‘그렇게 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의심,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심관(疑心觀)이거든.

다른 어떠한 문제를 하나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하나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되 의심이 없이 그냥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밤낮 ‘이뭣고’ 고것만 생각하고 있으면 ‘이뭣고’를 해도 그것은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의심이 아니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인가(印可)라 하는 것은 '옳다! 옳다! 니가 옳게 깨달았다' 이렇게 해 준 것이 인가가 아니고, 그 종사(宗師)가 그 학인(學人)한테 꼼짝을 못해야 그것이 바로 인가다" 이러한 말씀도 하신 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시고 그리고서 그 49년 동안 설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이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듣기도 어렵고, 들어도 믿기 어렵고, 이렇게 듣고 믿어도 직접 정성과 목숨을 다해서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생사(生死)에 자유자재, 또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전부 우리의 일념(一念)을 두고 하는 것이고, 일념을 잘 단련을 하고 일념을 갖다가 돌이켜서 그놈을 갖다가 단속을 하는 가운데에 생사 자유의 이치,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면, 무엇이 매우 어디 깊은 데가 있고 높은 데가 있고, 그래 가지고 어려워서 도저히 우리 범부(凡夫) 중생은 손이 닿는 것이 아니고 해 봤자 되지도 않는 것이다. 이리 겁을 집어먹고 그 자꾸 자포자기를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최상승법이야말로 우리 중생심, 중생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안(公案)을 타파해서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의 수도(修道)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은 바에 의해서 잘 보림(保任) 공부를 해서, 그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로 쓸 수가 있게 되어야 그래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깨달라 가지고 오후보림(悟後保任)을 안 하고 등한(等閒)히 하나, 더디 깨달라도 깨달을 때까지 그 공력을 들여서 정진을 해 놓은 사람은 깨달은 뒤에 오후보림 공부가 벌써 깨닫기 전에 많이 다 숙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는 것을 문제 삼지 말아라. 다맛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는 것’ 그것뿐인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인데, 그것이 꾸준히 그리고 올바르게만 해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자녀들을 불법을 믿게 할라면 여러분들이 정말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하심으로써 자연히 어린 자녀들은 여러분을 따라오시게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51~275)2019. 3. 1. 15:33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264)—1985년 4월 첫째일요법회(91분)

(1/5)약22분. (2/5)약21분. (3/5)약19분. (4/5)약18분. (5/5)약12분.

(1/5)----------------


만산홍록개묘체(滿山紅綠皆妙體)하고 유수산조역설법(流水山鳥亦說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헌디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만산홍록(滿山紅綠)이 개묘체(皆妙體)여. 가득한 산에 붉고 푸른 것, 붉게 피는 꽃과 푸른 이파리가 모두가 다 진리의 체(體)더라.

유수산조역설법(流水山鳥亦說法)이다. 흐르는 물소리와 노래하는 새소리가 또한 전부 부처님의 설법이더라.


'부처님' 하면, 삼천년 전에 정반왕궁(淨飯王宮)에 탄생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연상(聯想)을 하고, 또 서방 극락세계에 아미타불을 연상하고, 또 법당에 모셔져 있는 황금으로 개금(改金)을 저순 법당의 등상불(等像佛)을 생각을 합니다마는.

'참 부처님'은 법당에만 계신 것도 아니요, 삼천년 전에 네팔국에 태어나신 싯다르타 태자가 출가하셔서 견성성불하신 그 부처님만이 부처님이 아니고, 온 산에 가득한 붉은 꽃과 푸른 이파리가 낱낱이 다 부처님의 모습이더라 그말이고.


부처님의 설법, 법문 하면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연상을 하고, 법화경이나 금강경 또는 화엄경 · 반야심경과 같은 이런 문자로 된 경전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마는, 부처님의 '참 설법'은 흐르는 물소리와 노래하는 새소리가 그냥 고대로 부처님의 살아 있는 설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헌데, 봄날이 돌아와서 날씨가 화창한데 봄 졸음이 족해. 엄동설한이 지나가고 해동(解凍)이 되어서 날씨가 화창한데, 마루에 앉았으면은 졸음이 오는데.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이다. 졸음이 와서 떠억 비껴 누워서 산새들이 노래하는 그 노래 소리를—가지가지 산새가 파랑새, 노랑 새, 큰 새, 작은 새가 마치 교향악이 울린 것처럼 그렇게 백 가지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데, 떠억 누워서 그 노래 소리를 듣더라 그말이여.


이것은 참선을 해서 확철대오한 깨달은 도인의 한 장면을 게송(偈頌)으로 읊은 것입니다.


오늘은 을축년 4월 7일 첫째 일요법회날을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추웠던 삼동이 지나고 어느덧 4월을 맞이했습니다.

세월은 이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이렇게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이 사시절(四時節)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특별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고,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이것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고 미륵불이 또 출세하신 모습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쉴 사이 없이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신 모습이지마는,

나를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경지에서는 이 1초 1초와 이 세월의 춘하추동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죽음을 재촉하는 그러한 상황에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째서 깨달은 분상(分上)에는 이것이 모다 설법이요, 부처님이요, 바로 이것이 극락세계요, 적광토(寂光土)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것이 하루가 지나가면 죽을 날짜가 하루 다가와지고, 해가 한번 떴다가 지면 사형 언도를 집행하는 날이 하루 다가서고, 죽을 날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부처님이나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이나 똑같이 다 깨달을 수 있는 그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달은 분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진리의 세계에서 극락세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하루를 갖다가 그렇게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지내는데,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마치 사형 언도 집행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게 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더군다나 오탁악세(五濁惡世) 이 말세(末世)에 태어나서 불법(佛法)을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우리의 앞길은 암담하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아주 진절머리가 나고 아무 희망도 없고 그럴 텐데,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만나고 정법을 만났기에 말세에 태어났으면서 이 오탁악세에 태어났으면서, 온통 온 세계가 도처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이 하루에면 몇십 명씩 몇백 명씩 죽어가기를 파리 목숨보다도 더 참 허망하게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 이러한 때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 이 허망한 몸뚱이를 이 세상에 이 시기에 받어 난 것을 너무 다행하고 경행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와 하나가 되는 것이여.

생사를 버리고 영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실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불법인 것입니다.


산에 봄이 오면 붉고 누런 꽃이 피고 파란 잎이 피고 한 것이 하나도 특이할 것이 없고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면은 그러한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에 출현하신 모습이요, 흐르는 물, 노래하는 새소리가 그냥 고대로 화엄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불법을 만난 김에 기어코 깨달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몸과 목숨을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이 한 길에다 바쳐서 깨달음을 얻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에게 자기 자신, 자기의 마음자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삼세제불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번갈아 가면서 출세를 하신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우리는 그렇게 말을 하고 그렇게 믿고 있지만, 제도(濟度)가 무슨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듯이 그렇게 건져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우리 중생들이 낱낱이 자기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자기의 주인공, 자기의 마음자리 그것을 스스로 계발(啓發)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가 자기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자기의 주인공, 자기의 마음자리를 확인시켜서 그것을 잘 갈고 닦도록 하면 그것이 바로 중생을 제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진 의원과 같고 또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와 같아서, 약을 일러주면 환자 자신이 그 약을 잘 먹으면 병을 낫을 것이요. 길을 일러주면 그 일러주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거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어진 의원이라 하더라도 환자 대신해서 그 약을 먹어줄 수도 없는 것이며, 아무리 안내를 잘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걸어가야지, 본인이 걸어가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안 용화사 이 자리에 오셔서, 이십 성상(星霜)을 한결같이 대자비(大慈悲)의 문을 열어서 정법(正法)을 선양(宣揚)을 하시고 또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10년을 걸쳐서 이 송담이 여기서 법회를 가져오고 있습니다마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말을 했지만 언제나 그 핵심은 하나이고 그 돌아갈 곳은 한 가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할 때에 여러분은 귀를 기울이고 말을 듣고 계십니다마는, 그 듣고 있는 바로 그놈을 스스로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총력(聰力)이 좋고 머리가 좋아서 화엄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법화경을 다 외우고, 금강경을 다 외운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외우는 데만 그쳐 가지고서는 그것은 불법을 옳게 믿는 사람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화엄경과 법화경, 금강경과 같은 그러한 좋은 경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를 해서, 참으로 옳게 이해를 한다면, 거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경을 가르키지 아니하고, 경을 외우게 하지 아니하고, 경을 해설을 해 드리지 아니하면서 언제나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 말할 줄 알고, 생각으로 희로애락을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그놈을 돌이켜 찾으라 이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난 근본을 관조(觀照)하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마디는 삼천 겁을 계율을 지키고 팔만 세 동안을 경을 외우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계율을 삼천 겁을 지키고 팔만 세 동안을 경을 외운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돌이켜 찾지 아니하면, 그 계율을 지키고 경을 외우는 그 자체는 목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율을 잘 지키고 경을 외우되 바로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지, 계율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고 경을 외우는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경을 잘못 외우는 것이고 계율을 잘못 지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계율이라든지 경은 온전히 자기 자성(自性)을 깨닫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方便)이요, 길이 될지언정 그 자체가 불법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뭣고?’는 너무 맛이 없는 소리고, 하루 이틀 내지 한 달 두 달 해 봐도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안 되는 것 같지도 않고 맨날 해 봤자 죽 떠먹은 자리와 같아서, 무엇이 효과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는데 이렇다 할 효과도 나타나지 아니하고,

누구에게 ‘나는 이 참선을 해서 이만큼 무엇이 얻어졌다’하고 내보일 것이 있었으면 참 좋겠는데 1년, 이태, 3년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한다고 해 봤지만 사실은 뭐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학원에 다니면서 글씨를 배운다든지 또는 사군자를 배운다든지 무슨 음악을 배운다든지 하면, 한 달만 배워도 제법 내놓을 것이 있고, 두 달만 배워도 ‘이만한 것을 나는 하게 되었다’하고 긍지를 가질 수가 있는데,

이 참선은 정말 3년, 10년을 했어도 ‘이러한 것을 나는 얻었다’ 이렇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내놓을 만한 없는 것이 사실은 공부를 옳게 해 간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 참선을 해 가지고 밤에는 환히 불이 켜지고 또 가만히 눈감고 있으면 ‘내일은 누가 나를 찾아오겠다’ 이걸 알고, ‘이 다음에 손자를 낳겠다’ 또는 ‘딸을 낳겠다’ 뭐 그런 것이 알아지고,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참선을 잘못한 것입니다.

정말 올바르게 참선을 하면 무엇이 보이는 것이 있을 수도 없고, 알아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다가 그러한 알아지고 보이고 신기한 것이 나타났다 하면 그것은 하나의 마경(魔境)이 잠시 스쳐 가는 것이어서 그것은 신경을 쓰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마는.(처음~21분35초)




(2/5)----------------


그러면 1년, 이태, 3년을 해도 아무것도 얻어진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나타난 것도 없고 그러면 그걸 무슨 재미로 그것을 하며,

그렇게 하다가 부처님처럼 다행히 확철대오를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다면 좋지만, 만날 해도 별로 얻어진 것도 없고 꾸벅꾸벅 졸음만 오고 그러다가 죽어버린다면은 그거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그러한 막연한 공부를 갖다가 사람들에게 권고를 하고, 자꾸 ‘이뭣고?를 하면 좋다’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실 분이 혹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실은 이 참선은 근본 목적은 ‘내가 나를 깨달아서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이 참선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이전에는 어떠헌 공덕(功德)이 있느냐?

‘무슨 공덕이 나타났다 하면 그것은 마경(魔境)이 일어나는 것이라 하니, 그거 참 너무 막연하지 않느냐?’하는데, 사실은 그러한 큰 목표를 설정을 하고 열심히 참선을 하다 보면 우리의 육체적인 정신적인 병도 차츰 나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생명력이 왕성해지기 때문에 모든 병이 회복되어 가는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이렇게 자꾸 복잡해지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변화가 이렇게 극심해 가니까 모두가 다 노이로제 현상이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냉정하게 살펴보면, 어떠헌 각도에서 그 노이로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업을 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쪼들리는 분이라든지, 고등학교나 대학의 입시를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시달림을 받는 학생이라든지, 또 가정의 어떠헌 문제로 해서 주야로 고민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든지, 다 노이로제적인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마는.


이 참선법을 믿고 날마다 여법(如法)하게 노력을 해 가다 보면 모든 신경기능이 조정이 되고, 따라서 신경증이 차츰 정상화되는 예는 또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쉽게 자타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조그만한 일에 신경질을 불쑥불쑥 내고 성을 잘 내는 그런 단기(短氣)한 사람, 마음이 느긋하고 여유있고 원만하지를 못하고, 신경질을 잘 내고 참지 못하는 그러헌 성미를 가진 사람이 차츰차츰 신경질을 내지 아니하고, 어지간한 일이면 상대방을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잠시 기분 나쁠 듯 하다가도 금방 생각을 돌이켜서 빨리 풀어져 버리고, 이러헌 기질 변화는 제일 먼저 나타나는 한 공덕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참선공부를 항시 하면 의지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무엇이든지 할랴고 마음을 먹어도 3일을 못 가서 비그르르 풀어져 버리고, 무엇을 헐라고 하면은 자신(自信)이 생기지를 않고 항시 스스로 불안하고 그런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 참선을 해서 정신이 안정이 되고 집중력이 생기고 스스로 자기의 중심이 잡히니까, 모든 일을 당했을 때 의지력이 강해진다 이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건강도 좋아지고, 노이로제 같은 그러헌 증상도 정상화되고, 또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부리지 않고 의지력이 강해지고 하니까,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어떠헌 일—사업가나 또는 공부를 하는 학자나 학생이나, 능률이 오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흩어지고 산란하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내고, 몸에 건강도 좋지 못하고 정신도 정상적이 못되고 하면 무슨 일을 헌들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이 참선을 허면 능률이 오르게 된다고 하는 것을 또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 집중력이 생기고, 또 창조력이 생기고, 지적 기능이 개발이 되니까, ‘머리도 좋아진다’ 그런 면도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앞에 말한 그런 여러 가지 점이 차츰차츰 좋아지니까 인격(人格)이 조정이 된다.

앞에 몸이 건강하지를 못하고 정신이 정상적이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에 신경질을 내쌌고 의지가 박약하고, 모든 일에 능력이 오르지 아니하고 그리고 정신 집중력이 없어서 항상 불안하고,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 어찌 인격자(人格者)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반대로 그러헌 것들이 모두가 정상화되고 잘 중심이 잡혀 나가니까 스스로도 편안하고 의젓할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볼 때나 일가친척이 볼 때에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회사에서나, 어디를 가더라도 ‘아! 그분은 옛날과 영판 달라졌다. 어째서 그분이 옛날에는 그러지를 못했는데 저렇게 참 훌륭해졌을까?’

그래서 그분을 인격자로 모두 존경하게 되고, 그분을 받들게 되고, 그분을 따르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참선을 꾸준히 해 나감으로 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향상되어 가고 개선되어 가는 이 참선의 공덕이겠습니다마는, 참선은 비단 이러헌 것만을 위해서, 이러헌 조그마한 목적을 위해서 참선을 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큰 목적, ‘내가 나 자신을 깨달라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그러한 원대한 목표를 향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앞에 말한 바와 같은 그러한 여러 가지의 좋은 공덕을 우리는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헌 마음을 가지고, ‘참! 참선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아까 말한 여러 가지 좋은 것들 중에 한 가지만 얻어진다 해도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거든,

하물며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이뭣고?’하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자기의 주인공을 항시 돌이켜 찾는 이러헌 간단한 방법만으로 그와 같이 여러 가지 것이 좋아지고 여러 가지 것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형식적으로 조금씩 허다 말 것이 아니라 아주 본격적으로 한번 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느냐!


부인은 아침에 일어나서 좀더 이부자리 속에 같이 누워 있지 않고 일찍 뽀르르 일어나서 참선한다고 앉았으니, 항상 남편보다도 절을 더 좋아하고 참선을 더 좋아하고 허니 불만을 품었었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일어나서 참선을 한번 해 봐야겠다. 어찌 남자로 태어나 가지고 그러헌 인격을 완성하는 수행에 있어서 여자에 뒤질 수가 있느냐.


이래가지고 거사(居士)가 먼저 앞장을 서고 이것을 해 나간다면 그 가정이야말로 정말 행복하고 모범적인 가정이 되어서, 그 가정은 바로 항시 부처님과 모든 보살님이,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런 거룩한 불보살(佛菩薩)님이 그 가정에 머물러 계시게 될 것입니다.


절에 모셔 있는 이 등상불(等像佛) 부처님한테 가서 절만 해도 업장(業障)이 소멸이 되고 소원을 성취하거든, 직접 자기 가정에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이 왕림(枉臨)해 계신다면, 그 가정에 행복의 꽃이 피고 소원성취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오셔서 ‘참선은 좋다. 이뭣고?를 해라’ 이런 말씀을 수없이 귀에 들었지만, 실상 이 가운데에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고 계신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되시며,

참선이라고 헌 것에 대해서 얼마만큼 확실하게 이해를 하시고, 또 ‘이뭣고?’를 어떻게 해야 하며, 단전호흡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하시고 실천하고 계신 분은 정말 그렇게 많지 못하시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은 이것이 참선의 기본자세이기 때문에 아침 저녁으로 또는 시간이 있는 대로 이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항상 익혀서 습관을 들이도록.

처음에는 발목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몸이 아프고 그렇지만 그러한 고비를 참고 견디면서 꾸준히 하면 나중에는 한 시간을 까닥하지 않고 앉았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두 시간 내지 서너 시간씩을 앉았어도 다리가 저린 법이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오랫동안 앉었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앉었거나 섰거나 상관없이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화두에 대한 의심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 덩어리가 우리의 단전(丹田)에서 흩어지지 않도록 잘 공부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부좌나 반가부좌는 참선의 기본자세인 만큼 기본자세를 잘 익히는 것은 서서도 헐 수 있고, 걸어가면서도 헐 수 있고, 누워서도 할 수 있고, 차를 타거나 일을 하면서도 헐 수가 있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어데서, 언제, 무엇을 허고 있을 때라도 이 공부가 가부좌를 하고 앉았을 때처럼 똑같이 잘되도록 우리는 훈련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그 기본자세를 잘 익히는 것이 순서적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기본자세는 바로 이 가부좌, 반가부좌인 것입니다.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다 올려놓고, 또 왼발을 오른쪽 무릎에다 올려서 이렇게... 다리를 이렇게 해서 딱 앉고.

그리고 손은 오른손 위에다가 왼손을 포개 놓고, 엄지손가락을 이렇게 딱 맞대서,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 이것을 배꼽 앞에 아랫배 있는 데다 갖다가 딱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는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따악 이렇게 중심이 잡히도록 해 놓고서,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고, 이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가 갖다 딱 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선하는데의 기본자세입니다.

눈을 너무 뚝 부릅뜨면 산란(散亂)하고, 눈을 너무 감으면은 혼침(昏沈)에 떨어지기 쉽고, 또 눈을 감고 하면은 처음에는 좀 밖의 경계가 보이질 아니하니까 잠잠하고 조용하고 공부가 더 잘된 것 같이 느껴지지만.


눈을 감고 참선을 해 버릇하면 나중에 이상한 헛것, 환상 같은 것이 나타나기도 하고, 또 이 망상(妄想)이 가라앉아서 심경(心境)이 고요해지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침에 떨어지기가 쉽기 때문에,

참선허는데 있어서 눈을 감고 익히지를 말고 눈을 항상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2미터나 3미터 정도에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凝視)허거나 주시(注視)를 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2미터나 3미터 지점에다가 콩 같은 것을 하나 갖다 놓고 그것을 갖다가 응시하는, 그렇게 하면 좋을 것이다' 해서, 서양 사람이 참선을 소개하는 책을 보니까 그렇게 하는 것도 좋다고 써진 것을 내가 본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유치원 학생들에게는 혹 그 콩을 놓고 ‘여기 봤다 저기 봤다 하지 말고, 그 콩을 한 30분 꼼짝 말고 들여다보고 있어라’ 이렇게 해서 유치원 학생에게 참선을 시킬 때는 혹 그런 방법을 써볼 수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른들은 그렇게 허시지 말고 그냥 눈을 평상(平常)으로 뜨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하지는 말고, 다맛 눈을 2미터 지점에다가 떨구기만 허되 의식적으로 어떤 점을 응시(凝視)를 허지 말아라.



그렇게 하고서 숨을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뜩 들어마시되, 가슴에 가뜩차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한번 여러분 해 보세요.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꾹 참고 있다가, 입을 조금 벌리고서 입으로 '후~'허고 다 내뿜어 보세요. 그러면 가슴이 미어질 듯 (숨이) 가득했던 가슴이 인제 더이상 바람이 한 점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다 토해 내는 것입니다.

다 뱉은 다음에 또 스르르르르 허니 또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또 가슴을 약간 들은 듯 허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다 들어마셨으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또 입으로 후~ 허고 내뿜는 것입니다.


이렇게 2번 내지 3번을 허고 나면 가슴속에 있는 묵은 공기가, 저 가슴속에 구석구석 있던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나가고, 새 공기가 가슴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에 들어가는, 단전호흡에 들어가는 ‘준비 호흡’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 호흡이 3번이 끝났으면 그다음에는 인자 ‘본 호흡’으로 들어가는데, 본 호흡은 아까처럼 빨리 그리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잔뜩 들어마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조용하게 스르르르르르 허니 코로 들어마셔요. 들어마시되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이 볼록해지도록 허면서 들어마시는 것입니다.(21분36초~42분26초)




(3/5)----------------


'이 들어마신 공기가 가슴을 통하고 윗배를 통해서 아랫배까지 이렇게 해서 밀어넣는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하면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왜 큰일이 나느냐?


아무리 들어마셔서 아랫배까지 보낼라고 해도, 이 가슴까지 밖에는 바람이 들어가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

허파가 가슴에만 있고 허파 밑에는 횡경막 가로막이 있어 가지고, 그 가로막 밑에까지는 바람이 들어가질 않는데, 그놈을 억지고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넣을라고 하니까 이 가슴에 콱 맥혀 가지고.


처음에 한두 번은 괜찮은데 10번, 20번, 하루, 이틀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오목가슴 눌러보면 아프고 답답하고 뻐근하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이 좋다 좋다해서 단전호흡 허다가 소화가 안되고 가슴이 답답한 병이 생겨서 고민을 허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준비 호흡을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내뿜고 그렇게 허기를 3번을 허되, 본 호흡에 들어가서는 ‘들어마신 호흡이 이리해서 아랫배까지 내려간다’ 이렇게 생각을 아니하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 아랫배가 앞으로 이렇게 나오도록 그렇게 생각을, 의식을 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뿜을 때도 이리해서 코로 이리 내보낸다’ 이렇게 생각허지 말고, ‘저 뒤에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허는 것입니다.


숨을 들어마실 때는 가슴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허게 맨들면 되아요, 의식적으로.

또 숨을 내쉴 때는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내쉰다’는 생각은 전혀 허지 말고, 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져 등어리가 붙으면서 ‘호흡은 저 뒤에로 내보낸다’ 이리 생각을 하고 호흡을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은 위아래로 쉬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호흡을 하라’ 이것입니다.


그렇게 헌다면 가슴이 답답할 것도 없고, 오목가슴이 아플 것도 없고, 소화가 안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미 올바르게 호흡을 해서 단전호흡을 잘하고 계신 분도 계시겠습니다마는, 호흡법을 아직 확실히 통달허지 못한 분, 그런 분은 오늘 제가 말씀드린 방법에 의해서 단전호흡을 서서히 익혀가도록.


주의할 것은 숨을 들어마실 때에, 준비 호흡을 헐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지만 그렇게 허는 것은 3번만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본 호흡에 들어가서는 숨을 들어마시며 배가 앞으로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는데, 그때도 ‘배가 터지도록 맹꽁이처럼 잔뜩 들어마셔야 허냐’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8부쯤만 들어마셔. 앞으로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십분(十分) 다 들어마시지 말고, 100% 다 가득 터지도록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8부쯤만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부담이 없지요.

또 내쉴 때에도 완전히 다 내뿜는 게 아니여. 준비 호흡을 헐 때는 가슴을 약간 조인 듯 허면서 완전히 다 내뿜지만, 본 호흡에 들어가서는 내뿜을 때에도 너무 완전히 다 내뿜을라고 하면 그것도 힘이 드니까 8부쯤만 내뿜는 거여.


들어마실 때에도 8부쯤만 들어마시고, 내쉴 때에도 8부쯤만 내쉬어서, 부담없이 무리없이 편안하게 들어마시고 편안하게 내쉰다면, 30분을 계속해서 단전호흡을 한다 해도 하나도 힘들지를 않고 편안한 것입니다.


이 단전호흡을 잘못해 가지고—너무 100% 들어마셔 가지고 또 될 수 있으면 오래 참을수록 좋다 하니까, 꽉 참아서 얼굴이 뻘게지도록 10초 20초 30초씩 억지로 참았다가 또 내쉬니까, 10번도 못해서 헐근헐근하고, 중간에 한번씩 쉬었다가 호흡을 해야 하고. 이렇게 하면...


단전호흡을 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피가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고, 정신이 맑아지고, 그렇게 해서 오래오래 허면 백 살 이백 살도 산다 하니까, 그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하기 위해서 이 단전호흡을 허다가 사십도 못 가고 피를 막 토하면서 그렇게 죽은 사람도 중국에나 한국에나 일본에나 상당수가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아무리 좋다해도 잘 알아서 여법(如法)허게 해야지, 좋다고 한다고 마구잽이 막하면 반드시 해(害)를 보는 것입니다.


인삼, 녹용이 좋다 하니까 동이로 그놈을 삶아서 막 먹고 혈압이 올라서 죽은 사람도 있고, 또 요새 몸과 팔다리를 막 흔드는 에어라빅인가 그것 좋다고, 그러면 살이 빠지고 좋다니까, 그 몸이 비대하고 혈압 높은 분이 가서 막 흔들어 대다가 혈압이 막 오르고 해서 허리 아픈 생병(生病)을 얻은 그런 예도 있다고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참선법도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그러헌 좋은 것이지만, 이것도 방법을 잘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 잘못 허다가는 이것도 또한 얼마든지 병이, 생병이 날 수도 있고 그런 것입니다.


이 호흡법도 잘 알아서 하되, 제일 중요헌 것은 ‘무리가 없이 허라’ 이거거든.


숨 한번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8부쯤 들어마셨으면은 일단 딱 정지해 가지고 약 3초 동안을 딱 정지를 했다가 또 조용허게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은 약 3~4초 내지 4~5초 조금 길게 시간을 잡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분은, 숨 들어마셨다 잠시 정지했다가 내쉬는 거 합해서 10초 내지 십이삼 초 이런 정도로 하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것도 걸어다니다가 왔거나, 달음박질한 뒤끝에는 그렇게 안 됩니다. 그때는 숨이 급허면 급헌 대로, 숨이 짧으면 짧은 대로 하다가 차츰차츰 무리 없이 익혀 나가야지,

그래서 석 달이나 1년, 3년 나가면 이 숨도 차츰차츰 길어져서,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는데 한 20초도 걸리기도 하고 30초도 걸리기도 허는데, 그것도 체질 따라서 숨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 체질에 맞추어서—꼭 길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길게 늘릴려다가 오히려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하시기를 바라고.



이 자세를 바르게 허고, 또 단전호흡을 허는 것은, 참선을 올바르게 해 나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것인 만큼 앉는 자세를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다리가 저리고 그렇지만, 이것도 10분 20분씩 차츰차츰 늘려가고 30분씩 늘려가고 또 나중에 1시간이 되면 더이상은 계속해서 앉을려고 말고, 1시간이 되면은 일어서서 포행(布行)을 헌다든지 다리를 뻗고 다리를 오그리고 또 발목을 돌리는 그러헌 운동을 해서 몸을 좀 풀고 그래 가지고 한 10분간 그렇게 쉬었다가. 그래 가지고 다시 또 앉아서 1시간, 이렇게 해서 2시간을 하신다면 중간에 1시간 (앉은 후)에 쉬는 시간을 갖고.

또 1시간을 헌다면, 중간에 한 30분쯤 해서 한 5분쯤 잠깐 포행을 하고 발목 운동도 하고 이렇게 해서 중간에 그런 포행 시간을 갖고 이렇게 해서 지혜롭게 해 나간다면 아무 부작용은 없이 공부는 나날이 익숙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세와 앉는 자세와 호흡을 단전호흡을 익힌 다음에는, 정식으로 화두(話頭)를 타서—그 화두라 하는 것은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 혹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나오신 지가 얼마 안 되신 분이 있어서 간단히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이 화두라 하는 것은 어떠헌 공부해 나갈 때에 우리의 정신을 갖다가 집중하는데 필요한 어떤 문제라고, 과제라고 이렇게 쉽게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막연허게 이렇게 앉았을 수가 없으니까 무엇인가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생각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러헌 이 화두라 하는 것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개나 되는데, 이 천칠백 가운데에 가장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한 문제를 말씀을 하겠습니다.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이 주둥이는 조그만하고 몸뚱이는 툭 퍼져서 크게 되어 있는 그런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 한 마리를 집어넣었습니다.

오리 새끼가 조그만하니까 그 주둥이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물도 넣어 주고 먹이도 넣어 주고 해서 그 오리를 길렀는데, 그 오리가 제법 그 안에서 잘 먹고 잘 커서 애미가 되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리를 꺼내야겠는데, ‘유리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조금도 상하지 않고서 어떻게 했으면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헌 문제인 것입니다.


이러헌 문제면 이것이 어릴 때 하는 수수께끼와 비슷헌 건데.

‘어떻게 허면은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어떻게 허면은 유리병도 깨지 아니하고 오리도 다치지 않게 아주 통채 그 오리를 밖으로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처음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는 이 문제를 해답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병을 깨지 아니하면 오리를 몸을 쪼가리 쪼가리 띠어 내거나, 억지로 철사로 올개미를 넣어 가지고 목아지를 걸어서 잡어당긴다면 몸뚱이가 푹 퍼졌으니 목아지가 떨어져 불 것이고.

도저히 아무리 생각해 봤자, 그 유리를 갖다가 불에다 녹여서 주둥이를 키워 갖고 낸다면 이미 병은 다친 것이 되기 때문에 안 맞을 것이고.

자기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가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한 달을 연구허고 1년을 생각해 봤자 상식적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허다허다 못해서 지치니까 나중에는 '어떻게 꺼낼 수가 있을까?' 오직 이제는 단순허게 그러헌 의심(疑心)만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앉아서도 '어떻게 허면 꺼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꺼낼 수가 있을까?'

밥을 먹을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똥을 눌 때도 그렇게 생각하고, 차를 탈 때에도 '어떻게 허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까?'

일을 할 때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중에는 잠을 잘 때 꿈에도 그것을 생각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허다가 한 달을 그렇게 생각하고, 두 달을 그렇게 생각하고, 일 년을 그렇게 생각하고, 이태를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는 일부러 그것을 생각헐라고 안 해도 제절로 그냥 그 생각이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그 생각이 떠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걸 생각하다가도 뭐 다른 일을 보거나 듣거나 하다가 깜박 잊어버리고, 뭘 다른 일 생각하다 잊어버리고, 그런데 나중에는 잊어버렸다 하면 또 퍼뜩 챙겨서 '어떻게 허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허고 또 챙기고 또 챙기고 허다 보면, 나중에는 챙길라고 안 해도 항시 자나깨나, 언제 어디서 무엇을 허거나 오직 그 생각 뿐이 될 것입니다.


그 생각만이 되기를 어떻게 되냐 하면은, 칠십 먹은 할머니가 외아들이 여행을 나가 가지고 돌아온다는 날짜가 여러 날이 지냈는데도 돌아오지 아니했을 때에 생각 생각이 아들 생각허듯이 오직 '어떻게 허면은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석 달 이내에 해결허지 못하면은 너를 사형 언도를 허겠다’ 또는 ‘1년 이내에 이 문제를 해답을 얻어 오지 못하면 너를 갖다가 귀양을 보내겠다’한, 임금님한테 이런 문제가 나와 가지고 생명을 갖다가 걸고서 허게 된다고 헐 때에 얼마만큼 골똘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겠습니까?


이 유리병 속에 들어 있는 오리를 꺼내는 이런 문제는 흡사 이것도 공안이지만, 마치 어린이들한테 수수께끼 문제와 같은 그러헌 종류의 공안이지만, 이건 어른들도 한번 생각해 볼만한 일인데,


여러분에게 그동안에 허던 ‘이 무엇고?’ 화두라든지 또는 ‘무자(無字)’ 화두라든지 또는 '판치생모(板齒生毛)'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같은, 이미 들고 있는 화두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이제부터서는 유리병 속에 오리 꺼내는 화두로 해야겄다, 이러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 ‘그 참! 재미있다’해 가지고 ‘에잇! 오늘부터서 그것을 해야겄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가 없고, 처음 오신 분을 위해서 그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어떠헌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 해드리기 위해서 내가 그 재미있는 화두를 하나 말씀을 드린 것 뿐이지, 절대로 이 화두를 가지고 오늘부터서 허시면 아니됩니다.


이것이 수수께끼와 같은 재미있는 화두지만, 사량분별로 해결헐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으니까, 수수께끼 풀듯이 이것을 이렇게 따져 보고 저렇게 따져 보고 허는 것은 헛수고에 지내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아시고.(42분26초~61분31초)




(4/5)----------------


그런데 흔히 화두 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허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허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허는 가운데에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에,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 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敎)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너는,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겄다’ 이렇게 점검을 허셨습니다.


그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허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하!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헌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헐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허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허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허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헐 것이 있느냐?’허니까,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헐 것이 없들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캄캄하니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허는 것이 아닙니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렇고, 마삼근(麻三斤)도 그렇고, 무자(無字) 화두도 그렇고, 시삼마(是甚麼)도 그렇고, 무슨 화두(話頭)를 어느 큰스님한테 탔든지 간에 한번 탔으면 그 화두,

공부가 잘되거나 못되거나, 못될수록에 그 화두 하나에 전력을 쏟을 것이고, 잘된다 하드라도 기쁘다 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무자 화두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지어갈 따름인 것입니다.


꽉 맥혀서 답답허고 알 수가 없지만 조금도 조급한 생각을 낼 것이 없고, 또 그렇게 해 가다 보면 화두가 순일하게 들려서 의심(疑心)이 순일(純一)하게 들린다 하드라도, 화두가 독로(獨露)한다 하드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쁜 마음을 내면 이미 화두는 달아나 버리고, 기쁜 마음의 마구니가 벌써 침입해 들어온 것이고, 안된다고 짜증을 내고 번뇌심을 내면 이미 번뇌의 마구니가 내 마음에 침입해 들어온 것이라.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된다고 해서 기쁜 마음도 내서는 아니되고, 잘 안된다고 해서 짜증낼 일도 아닌 것입니다.


다못 단전호흡을 허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약 3초 동안 딱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허면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숨이 다~ 나가면 배가 홀쪽해지죠. 그러면 또 스르르르 들어마시면은 아랫배가 볼록해지는데, 볼록해지거든 딱 정지헌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숨을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허지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됩니다.

들었던 화두 ‘이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냥 화두는 더 들지 않고, 그 있는 의심을 묵묵히 반조(返照)를 허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는 한번 들고서 숨은 3번, 4번, 5번 내지 10번을 쉬어도 그 화두 의심이 고대로 있으면은 덮치기로 화두를 들지 않다가, 화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거나 딴 생각이 일어났다허면 그때 가서 또 화두를 떠억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일구월심(日久月深)해 가면, 처음에는 그렇게 들랴고 해도 깜빡한 사이에 달아나 버리고 들면 또 달아나 버리고 하는데, 나중에는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항상 들어져 있게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다가 공부가 많이 익숙해진 증거인 것입니다.


힘을 쓰지 아니해도 저절로 공부가 되어가니까 힘을 덜게 된다. ‘힘 덜게 되는 것을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라’ 이렇게 고인(古人)네들은 표현을 했습니다.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그렇게 순일하게 잘되어 가게 되면은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떠한 그 신기한 경계(境界)가—혹 환한 빛을 광명을 본다던지, 꿈에 부처님을 친견하고 꿈에 어떤 깨달은 꿈을 꾼다든지, 또는 여러 가지 뭣이 알아진다든지, 그런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환상(幻相)이다’ 생각하고. ‘이거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닌가?’ 그러헌 그 외람(猥濫)되고 잘못된 생각을 내지 말고.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幻相)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스승을 바로 만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옳게 해 나가는 것인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공부허다가 이런 허상과 환상과 마경(魔境)이 나타나면 이것이 도통(道通)헌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것에 기쁜 마음을 내고 그것에 집착을 하고 신경을 써 가지고 영영 사도(邪道)에 빠지고, 까딱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하는 예도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시작할 때부터서 바르게 시작을 해야 하고, 중간에도 바르게 해 나가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이요 문자역조강(文字亦糟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인댄 방행여우적(棒行如雨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묵조(黙照)는 시귀굴(是鬼窟)이요. 묵묵히 앉아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이 귀신의 굴택(窟宅)이요.

문자(文字)는 역조강(亦糟糠)이다. 문자, 이론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이것은 다 찌꺼기더라 그말이여.


참선을 허되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허면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도록 잡드리를 해 나가야지,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헌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헌 공부는 이것은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 해 가지고, 이것은 아무리 평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허드라도 이것은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허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입니다.

설사 오신통(五神通)이 난다 허드라도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니고 외도선(外道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經典)이라 하더라도 경전을 우리의 중생 분별심으로 사량분별로 이리저리 따져서 해석을 허고 있다면, 그것은 곡식의 바른 알곡을 먹지를 못하고 그 찌꺼기를 씹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부처님 경전도 그 경전을 바로 읽고 바로 봐서 부처님의 그 참뜻을 옳게 깨달라야지,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고 문자로 그것을 분석해서 그렇게 일생 동안을 경을 읽고 연구를 헌다해도 그것은 찌께기—엿 국 다 뽑아내고 엿기름 찌께기를 그것은 돼지나 주는 것인데 그것을 갖다가—엿 국물은 받아서 구정물 통에 붓어 버리고 그리고 그 엿밥, 찌께기를 먹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약문해하종(若問解何宗)이면, 그렇다면은 묵조(默照)도 아니오, 문자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종지(宗旨)가 무엇이냐? 그대가 공부해 나가는 것은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 무슨 목적으로 어떠헌 공부를 허느냐?’허고 묻는다면은,


방(棒)을 내리기를, 방맹이로 몽둥이질을 허기를 비 쏟아지듯이 몽둥이질을 허리라[棒行如雨滴].

‘그 무슨 공부를 허느냐? 그대가 하는 공부의 지취(旨趣)가 무엇이냐?’고 묻다가 뭇매를 맞게 된다 이것입니다.


어째서 ‘그대의 공부허는 종지가 무엇이냐?’하고 묻는데 방맹이를 맞게 되느냐?

여러분이 참선을 열심히 허시게 되면 이 뜻을 스스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61분32초~1시간19분45초)




(5/5)----------------


앞으로 머지않아서 약 한 달 뒤에는 음력으로 3월 16일, 그리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되겠습니다마는 그날이 일요일입니다. 그날은 우리 용화사 법보재(法寶齋) 날입니다.


법보재 날에는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제사를 합동으로 거행하는, 그래 가지고 우리의 이 용화사 법보전에 모셔 있는 여러 영가(靈駕)들과 우주법계에 가득찬 우리의 선망부모의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를 모다 영혼을 초청을 해서, 다 이 법(法)에 의해서 천도(遷度)를 허는 그러헌 용화사의 큰 연례행사가 거행되는 날입니다.

여기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신 분은 말헐 것도 없고, 설사 여기에 위패를 모시지 아니헌 분도 집안의 모든 영가를 임시 위패라도 모셔서 그날 동참(同參)을 허시면 참 좋고. 또 아직 안 모신 분은 그날 이전에 다 위패를 모셔 놓으면 참 좋은 일이고.


이 만년위패 제도는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마는,

우리의 선망부모나 또는 집안의 비명(非命), 액사(縊死)나 횡사(橫死)를 하신 그런 영가들을 여기 모시고서 조석(朝夕)으로 축원(祝願)을 해 드리고 명절 때마다 차례(茶禮)를 저숫고, 3월 16일이나 또는 칠월 백중날에는 대천도 법요식을 거행을 해서 그 영가를 갖다가 천도하고.


이 용화사가 역사가 있는 한, 이 만년위패 영가들도 같이 이 법당에 모시고서 축원해 드리고, 차례 저숫고, 제사 지내고, 천도해 드리고, 법회 때마다 영가들도 살아 있는 우리와 함께 그 법문을 들으시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거량(擧揚)이라고 허는, 법주(法主)가 요령을 흔들면서 거량이라고 하는 법요식 순서가 있었는데,

그 거량이 뭐냐 하면 이 법당에 계신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멀고 가까운 데에 있는 모든 영혼도 이 법당에 왕림을 해서 같이 법문을 들으실 수 있도록 청혼(請魂)을 하는 것이 바로 이 거량이라 하는 것입니다.


청(請)허지 아니하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청해야 떳떳하게 초대장을 가지고 참석을 허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회 때마다—지금 천여 명 사부대중이 모이셨습니다마는, 눈에 보이지 아니한 우리의 선망부모, 주인이 있는 주인이 없는 모든 영가들도 다 이 자리에 참석을 허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백억 대중이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비인(人非人), 모든 그 영가들이 한량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헌 영가들을 위해서 이렇게 법회 때마다 거량을 하고, 또 인연 있는 영가들은 이렇게 법보단에 이렇게 만년위패에 모시고서 항상 마음놓고 법문을 듣고, 마음놓고 축원을 받게 되고,

그래서 천하 없는 원결(怨結)이 있고 원한(怨恨)에 사무친 영가도 이 만년위패에 모시게 되면, 아침마다 축원을 하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그런 영가들도 같이 운감(殞感)을 하게 되고, 또 천도를 받게 되기 때문에 머지않은 세월에 그 원한이 다 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한에 사무친 영가는 좋은 곳으로 떠나지를 못합니다. 그 원결에 얽혀 가지고 떠나지를 못하는데, 이렇게 만년위패에 모시고 축원을 해 드리고 항시 좋은 법문을 듣고 허기 때문에 원결이 스르르르 봄눈 녹듯이 다 녹아서 환희한 가운데에 이 도량에 머물러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허면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허시거나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왕생(往生)을 허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모시지 못한 분은 속히 위패에 모시도록 하고 돌아오는 5월 5일, 음력 3월 16일에는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참석을 하시고,

많은 분들에게, 그런 비명(非命)에 가신 영가로 인해서 집안이 편안틀 못하고 계속해서 재난이 끊어지지 않는 그러헌 일가친척과 이웃이 계시면은 서로 권고해서 여기에 위패를 모시도록 하고, 법보가족이 되어서 다 같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귀의해서, 다 같은 도반(道伴)으로써 도를 닦아서 함께 성불을 허시게 되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복포사아귀(腹飽思餓鬼)허고 신안염지옥(身安念地獄)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에 세월유수거(歲月流水去)니라

나무~아미타불~


복포사아귀(腹飽思餓鬼)하고 신안염지옥(身安念地獄)이다.

배부르고 등 따실 때에는 아귀(餓鬼)를 생각을 하고. 아귀는 물 한 방울만 먹어도 목구녁이 맥혀서 불이 나고, 밥 한 숟갈만 먹어도 목구녁이 맥혀서 불이 나 타 죽습니다.


그래서 아귀는 어떻게 생겼냐 하면은 목구멍은 머리카락만한 실낱 끝 목아지고, 배는 산등이만 해 가지고 배는 항시 고픈데, 먹으면 목구녁이 실낱 끝 목아지라 아무것도 넘어가지를 않아 목구녁이 맥혀서 타 죽고. 그런데 배는 큰 태산만 해 가지고, 그러니 배부른 때가 없어서 항시 배가 고파.

뭣만 먹었다 하면은, 배가 고파서 먹었다 하면은 목구녁이 콱 맥혀서 불이 나서 죽고, 죽자마자 금방 또 아귀로 태어나서 또 그렇게 해서. ‘장구통 배아지에 실낱 끝 목아지’가 이 아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지금은 배부르고 등 따시고 잘살지마는, 도(道)를 닦지 아니하고 그럭저럭 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속에 빠져 가지고 이렇게 살다가는 머지않아서 아귀가 될 것이다’하는 것을 생각을 허라 그말이여.


신안염지옥(身安念地獄)이요. 몸이 편안할 때에는 그 편안한 데에 빠져 가지고 그렇게 지내지 말고, 지옥고(地獄苦) 받을 일을 생각을 허라 그말이여.

우선 잘 먹으니까 배가 부르나 지옥에 갈 것이 두렵고, 우선 몸이 편안해서 좋기는 좋으나 그럭저럭 이렇게 편안히 살다가는 지옥에 갈 것을 한번 생각해 봐라 이거거든.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 인생으로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입고 그렇게 이럭저럭 즐겁게 지내다가는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서 눈 한번 감아 버리면,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세(來世)다 그말이여. 내세에 지옥 아니면은 아귀도에 떨어질 것을 생각을 하라.


고인(古人)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탐진치 삼독에 얽혀서 배불리 먹고 등 따시게 자고 편안히 살다가 어언간(於焉間)에 지옥이나 아귀도에 떨어질 것을 경계(警戒)해서 읊어 주시는 게송이었습니다.(1시간19분46초~1시간31분1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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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산홍록개묘체(滿山紅綠皆妙體) 유수산조역설법(流水山鳥亦說法)’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171 ‘상추(賞秋)’ 참고.

*(게송) '춘일쾌청춘수족(春日快晴春睡足) 와청산조백반성(臥聽山鳥百般聲)' ; 『청허당집(清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171 ‘박상사(朴上舍)의 초당(草堂)’ 참고.

*묘체(妙體) ; 묘한 진리의 체(體).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 ; 고대 인도 북부에 있던 카필라(kapila)국의 임금. 석존(釋尊)의 아버지.

*석가모니(釋迦牟尼) : sakya-muni의 음역. 샤카족의 성자(聖者)•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개금(改金) ; 불상(佛像)에 새로 금칠을 하는 것.

*저순다 ; '다지다(굳고 튼튼하게 하다)'의 사투리.

*등상불(等像佛) ; 나무, 돌, 흙 등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부처님.

*싯다르타(siddhartha) ;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출가하기 전 태자(太子) 때의 이름. 음역어는 ‘실다(悉多)’ ‘실달(悉達)’ ‘실달다(悉達多)’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출세(出世) : ①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②태어나는 것. 법을 체득한 사람이 중생교화를 위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 ③세간을 초월하는 것. 출세간(出世間)의 준말. 삼계(三界)를 나오는 것.

*미륵불(彌勒佛) : [범] Maitreya 대승보살, 또는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번역하여 자씨(慈氏)。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상주설법(常住說法) ; 우주 대자연의 운행 그대로가 설법이라는 말.

흐르는 물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돌아가는 것 모두 그대로가 부처님이 출세하신 모습이요, 쉴 사이 없이 하는 설법이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유유자적(悠悠自適 멀·한가로이 유/스스로 자/가다·즐기다·專一하다 적) ; 속세를 떠나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한가로이[悠悠] 자유로우며 편안하게 삶[自適].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총력(聰力) ; 보거나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힘.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계율(戒律) ;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말미암은 모든 악(惡)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

계는 좋은 습관이나 도덕적 행위의 뜻으로 모든 불자가 지켜야 할 불교도덕이며, 율은 모든 그릇됨을 여의고 깨달음의 세계로 선도해야 할 출가 교단의 통제 규범.

*공덕(功德) ; ①복, 복덕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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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자유자재(自由自在 스스로·저절로 자/말미암을 유/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인 것.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단기(短氣) ;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고 조급함.

*영판 ; 아주.

*거사(居士) ; ①고대 인도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던 부호. ②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왕림(枉臨 굽다굽히다 왕/임할 림) ; 남이 자기가 있는 곳(집이 낮고 작아 몸을 굽혀야[枉] 들어올 수 있는[臨])으로 찾아오는 것을 높여 이르는 말. 스스로는, 남이 자기가 있는 곳(집이 낮고 작아 몸을 굽혀야[枉] 들어올 수 있는[臨])으로 오는 것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산란(散亂 흩을 산/어지러울 란) ; 혼침(昏沈)의 반대인데 도거(掉擧)라고도 한다. 정신을 흐트러 어지럽혀 다른 곳으로 달아나게 하는 정신작용. 마음이 흐트러져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 마음이 어지러운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응시(凝視 엉길 응/보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주시(注視 물을 대다·마음을 쏟음 주/볼 시) ; ①어떤 일에 정신을 모아 자세히 살핌. ②어떤 목표물을 주의깊게 잘 살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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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격막(橫膈膜) ; 포유류의 가슴과 배 사이에 있는 근육으로 이루어진 막. 수축과 이완에 따라 위아래로운동을 하여 폐의 호흡 작용을 돕는다.

*오목가슴 ; 복장뼈(가슴의 한복판에 세로로 있는 뼈) 아래 한가운데 오목하게 들어간 곳.

*팔부(八部)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장생불사(長生不死 길 장/날 생/아니 불/죽을 사) ; 오래도록[長] 살고[生] 죽지[死] 않음[不].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생병(生病) ; 무리한 일을 해서 공연히 얻은 병.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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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육조, 하택신회, 남악회향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임제종(臨濟宗) ; 중국 선종 제6조(祖)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을 거쳐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룬 종파이다.

임제종은 북방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송대(宋代)에 석상 초원(石霜楚圓) 문하에서 양기 방회(楊岐方會)의 양기파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의 황룡파가 나와, 양기파는 성행했으나 황룡파는 얼마 안 가 쇠퇴함.

양기파 문하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천만 가지 의심도 결국은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으며, 화두(話頭)의 의심이 깨뜨려지면 천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사라진다고 하여 화두와 정면으로 대결할 것을 역설했는데, 그의 선풍(禪風)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한다.

*동용(動用) ;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씀[用]. 움직이고 작용함. 활동. 동용(動容)이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06) - 86년 8월 화두·불명·수계 법회(86.08.03)에서.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자 입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하되, 한 물건이 여기에 있으니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직거리고[動] 정신을 쓰고[用] 하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건'이 항상 있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 몸을 움직거리고 정신을 쓰고 하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動用中收不得]. 분명히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라고 하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라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한문으로는 시삼마(是甚麼).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 줄여서 ‘이뭣고?’(33분18초~35분)

*지해종사(知解宗師) ; 참선 공부를 알음알이로 따져서 해석하고 강론하고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를 말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인가(印可 도장 인/옳을·인정할 가)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벼람박 ; ‘바람벽(--壁, 집의 둘레 또는 방의 칸막이를 하기 위해 만든 벽)’의 사투리.

*마삼근 (麻三斤) : 화두의 하나。『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하는 물음에 대하여, 운문종(雲門宗)의 동산(洞山) 수초선사(守初禪師)가 대답하기를 『마 삼근(삼 서근)이니라』하였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반조(返照) ; 돌이켜 살펴보는 것.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환상(幻相) ; 실체가 없는 무상한 형상.

*외람되다(猥濫-- 함부로·외람할 외/함부로·넘치다 람) ; (언행이나 생각이)분에 넘치는 데가 있다.

*마경(魔境) ; 마(魔)의 경계(境界).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번뇌를 말한다. 마(魔)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도통(道通) ; ①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훤히 통함. ②깨달음.

*사도(邪道) ; 올바르지 않은 삿된 길.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길.

*(게송) ‘묵조시귀굴(黙照是鬼窟)~’ ; 『청허당집(淸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63 ‘일선자(一禪子)에게’ 게송 참고.

*굴택(窟宅) ; 거처, 집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묵조사선(默照邪禪) ;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이, 그냥 조용한 경계만을 묵묵히 지켜 나가는 그러한 공부. 이것은 깜깜한 귀신굴(鬼神窟) 속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라 해서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는 것이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엿 국물(엿물) ; 곡식을 엿기름으로 삭힌 뒤에 자루에 넣어 짜낸 국물. 맛이 달고 끈적끈적하다. 엿 국물을 고아 굳힌 것이 우리가 보통 먹는 ‘엿’이다.

*엿밥 ; 엿을 만들 때 엿물을 짜내고 남은 밥찌끼.

*종지(宗旨 근원 종/뜻 지) ; ①종문(宗門, 종파宗派)의 교의(敎義 어떤 종교의 진리로서 공인된 가르침)의 취지(趣旨 긴요한 뜻). ②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지취(旨趣 뜻 지/뜻 취) ; ①어떤 일에 대한 깊은 맛. 또는 그 일에 깃들여 있는 묘한 뜻. ②취지(趣旨 어떤 일에 대한 기본적인 목적이나 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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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재(法寶齋) ; 매년 음력 3월 16일에 용화사 법보재자(法寶齋者)와 법보전(現 대웅전) 만년위패에 모신 선망부모 영가들과 인연 있는 영가들의 무량겁으로부터 지은 업장을 참회 소멸하고,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고, 재자와 영가 모두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전강 조실스님께서 개설(1963년)하신 합동 천도재(薦度齋).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송담스님(No.243) -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동참(同參) ; ①어떠한 일에 함께 참여함. ②스님와 신도가 한 법회에 같이 참석하여 불도(佛道)를 닦는 일. ③같은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는, 동문수학하는 '도반(道伴)'과 같은 말. 동학(同學)이라고도 한다.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차례(茶禮) ;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의 낮에 지내는 제사.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삼귀의(三歸依) ;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몸과 마음을 바쳐 믿고 의지함. 귀의불(歸依佛)•귀의법(歸依法)•귀의승(歸依僧)을 말함.

*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일. 법요식의 순서로서 설법하기 전에, 법회를 하는 법당에 계신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멀고 가까운 데에 있는 모든 영혼도 이 법회를 하는 법당에 왕림을 해서 같이 법문을 들으실 수 있도록 청혼(請魂)을 하는 것.

②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청혼(請魂) ; 설법할 때에,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영혼)를 그 자리에 모시는 일. (같은 말)거량(擧揚).

*인비인(人非人) ; ①인(人)은 사람, 비인(非人)은 팔부중(八部衆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여덟 신神—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 귀신 · 축생 등을 말함. ②긴나라(緊那羅) : 의인(疑人) · 인비인(人非人)이라 번역.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노래하고 춤추는 신神으로 형상은 사람인지 아닌지 애매하다고 함.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원결(怨結 원망할 원/맺을·번뇌 결) ; 원망(怨望)의 마음이 얽혀 풀리지 않는 것을 말함.

*운감(殞感) ; 제사를 지낼 때에, 차려놓은 음식을 영가(靈駕 돌아가신 이의 영혼)가 와서 맛을 봄.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읽지 않고 ‘도량’으로 읽음.

*인도환생(人道還生) ; 인간이 사는 세계[人道]로 다시[還] 태어남[生].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도솔천(兜率天)은 욕계(欲界) 육천(六天)의 넷째 하늘로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로서 여기에 있으면서 하늘나라 사람들을 제도하며 남섬부주에 하생(下生)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솔천은 아래로는 사천왕(四天王) · 도리천(忉利天) · 야마천(夜摩天)이 욕정(欲情)에 잠겨 있고, 위로는 화락천(化樂天)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들뜬 마음이 많은데 비해 도솔천은 잠기지도 들뜨지도 않으면서 오욕락(五慾樂)에 만족한 마음을 냄으로, 다음에 성불할 보처(補處)보살이 머문다고 한다.

도솔천의 수명은 4천 세라 하고, 도솔천의 하루는 인간의 4백 세라 하였으니, 도솔천의 수명을 인간 수명으로 환산하면 인간의 5억 7천 6백만 년에 해당하지만(4천 x 3백 6십, 1년 x 4백 = 5억 7천 6백만), 고대의 기수법(記數法)에 따르면 57억 6천만 년이라고 한다.


도솔천에 왕생할 수 있는 인연은 ①끊임없이 정진하고 많은 공덕을 쌓은 자. ②탑을 깨끗이 하고 좋은 향과 아름다운 꽃을 공양한 자. ③여러 가지 삼매(三昧)로써 깊은 선정(禪定)을 닦은 자. ④경전을 독송하는 자. ⑤번뇌를 끊지는 못하였지만 지극한 마음으로 미륵을 염불하는 자. ⑥팔계(八戒)를 받고 청정한 행을 익히며 사홍서원을 잊지 않는 자. ⑦널리 복업(福業)을 닦는 자. ⑧계를 어기고 악을 범하였어도 미륵보살의 자비로운 이름을 듣고 정성껏 참회하는 자. ⑨미륵보살의 이름을 듣고 그 형상을 만들어 향과 꽃, 깃발로 장식하고 예배하는 자 등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왕생(往生) ; 죽어서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남. 이 세상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어서 정토에 태어남.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서 극락에 태어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게송) ‘복포사아귀(腹飽思餓鬼)~’ ; 『청허당집(清虛堂集)』(동국대학교역경원) p143 ‘응선자(應禪子)에게 주면서 신수사미(神秀沙彌)에게도 보임’ 게송 참고. p57 ‘탄서(歎逝)’ 게송 참고.

*아귀(餓鬼 굶주림·굶길 아/귀신·아귀 귀) ; 항상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귀신. 전생에 탐욕이나 질투가 많아, 악업을 지은 사람이 죽은 뒤 육도(六道) 중 하나인 아귀도(餓鬼道)에 태어나 고통을 당한다.

아귀의 배는 산과 같이 크지만 목구멍은 바늘구멍만큼 작다. 먹을거리가 없어 항상 굶주림과 목마름의 고통에 있고, 우연히 먹을 것을 얻더라도 입에서 불이 나거나 먹을 것이 화염으로 변하여 고통 받는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어언간(於焉間) ;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

*경계(警戒) ; ①뜻밖의 사고나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여 단속함. ②잘못이 없도록 미리 타일러서 주의하게 함.




[법문 내용]


(게송)滿山紅綠皆妙體 流水山鳥亦說法 春日快晴春睡足 臥聽山鳥百般聲 / 참선의 근본 목적은 ‘내가 나를 깨달라서,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 / 우리는 이 불법을 만난 김에 기어코 깨달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난 근본을 관조(觀照)하라’.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이고 화두(話頭).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참선의 공덕(功德), 참선의 효과, ‘참선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 참선의 자세, 단전호흡 - 호흡은 위아래로 쉬는 것이 아니라, 앞뒤로 호흡을 하라, 좌선 시간 / 화두(話頭)란 무엇인가? / <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오리를 꺼내는’ 화두>


‘이뭣고?’ 화두는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 / 육조 스님, 하택신회, 남악회양 / 단전호흡과 의심, 득력(得力) / 경계에 속지 말아야 / (게송)黙照是鬼窟 文字亦糟糠 若問解何宗 棒行如雨滴 / 만년위패 제도 설명 / (게송)腹飽思餓鬼 身安念地獄 人生行樂處 歲月流水去.



세월이 흘러가고 춘하추동이 사시절(四時節)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도 특별할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고, 깨달은 경계에서 본다면 이것이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고 미륵불이 또 출세하신 모습이며,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쉴 사이 없이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신 모습이지마는,

나를 깨닫지 못한 중생의 경지에서는 이 1초 1초와 이 세월의 춘하추동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죽음을 재촉하는 그러한 상황에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깨달은 부처님이나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이나 똑같이 다 깨달을 수 있는 그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면서, 깨달은 분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진리의 세계에서 극락세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하루를 갖다가 그렇게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지내는데,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루하루 지내는 것을 마치 사형 언도 집행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하루를 지내게 되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불법(佛法)은 바로 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와 하나가 되는 것이여. 생사를 버리고 영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서 실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불법인 것입니다.

산에 봄이 오면 붉고 누런 꽃이 피고 파란 잎이 피고 한 것이 하나도 특이할 것이 없고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면은 그러한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에 출현하신 모습이요, 흐르는 물, 노래하는 새소리가 그냥 고대로 화엄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진 의원과 같고 또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와 같아서, 약을 일러주면 환자 자신이 그 약을 잘 먹으면 병을 낫을 것이요. 길을 일러주면 그 일러주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거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어진 의원이라 하더라도 환자 대신해서 그 약을 먹어줄 수도 없는 것이며, 아무리 안내를 잘한다 하더라도 본인이 걸어가야지, 본인이 걸어가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선법은 경을 가르키지 아니하고, 경을 외우게 하지 아니하고, 경을 해설을 해 드리지 아니하면서 언제나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입을 통해서 말할 줄 알고, 생각으로 희로애락을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그놈을 돌이켜 찾으라 이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난 근본을 관조(觀照)하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이고 화두(話頭)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 공부에 제일 주의헐 것은 사량분별로 따지지 말 것이며, 설사 공부가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순일허게 잘 들리고 의단이 독로헌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 환희심(歡喜心)을 내지 말 것이다.

또 공부가 순일허게 잘되어 갈 때에 ‘빨리 깨달랐으면, 이럴 때 누가 나로 하여금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헌 생각도 내지 말 것이다.


어떠한 신기한 불보살이 나타나고 신기한 경계가 나타난다 하드라도 이것은 허상(虛像)이요, 환상(幻相)이라 하는 것을 미리부터 잘 이해를 허시고, 그런 데에 현혹되지 말고 집착허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내버려두고, 정신만 탁 챙겨 가지고 눈을 뜨고서 화두를 챙겨 나가면 그러헌 경계는 금방 저절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잘 먹고 잘 입고 그렇게 이럭저럭 즐겁게 지내다가는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아서 눈 한번 감아 버리면,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세(來世)다 그말이여. 내세에 지옥 아니면은 아귀도에 떨어질 것을 생각을 하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