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76~200)2023. 7. 15. 08:40

 

 

(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62분)

 

(1) 약 32분.

 

(2) 약 30분.



(1)------------------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요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부처님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이 삼신이, 삼신불(三身佛)이 계시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여. 마침내 망령된 인연밖에는 아니더라.
법신(法身)이 청정광무변(淸淨廣無邊)이라. 오직 법신불이 청정해서 넓고 갓이 없다.

삼천년 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에 들어가서 12년 동안에 고행(苦行)과 낙행(樂行) 끝에 대도를 성취하셔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는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말이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그 말이여. 중생! 이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천백억(千百億)의 화신(化身)을 동시에 나투실 수가 있어. 그 화신불을 통해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하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으로서 이 사바세계에 하강(下降)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여.
부처님께서는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하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에 대성현이시지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화신불이시다 그 말이여.

화신불(化身佛)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여의지 아니하시고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신 그러한 성현이시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밝은 달이 떠 있건만, 땅에 있는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물과 시내, 심지어는 조그마한 그릇의 접시에 떠놓은 물 한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추어 나타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그릇이나, 호수나, 물 있는 곳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고대로 나타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달이 없어지고 땅 위에 있는 물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치도 일 분 사이도 그 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하늘에 떠 있으면서 동시에 물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달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절절이 법당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을 모신 법당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도 있고, 아미타불 불상을 모신 법당도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하면 법당에다가 모셔진—쇠로 모셨거나, 또는 나무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돌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흙으로 빚어서 모셨거나 한 그러한 부처님을 다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불교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하면 법당에 모셔진 쇠나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조성해 모신 그 부처님이 참부처님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공양과 모든 음식과 과일이나 꽃과 청수를 올리고 거기다 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러한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하는 종교다’ 그렇게 힐난(詰難)하게 비난을 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서 비방을 하는 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알지 못하고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법과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이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비방하는 공덕으로 마침내는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죄(罪)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비방한 만큼의 과보를 받게는 됩니다. 비방하는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는 되지만, 다른 것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공덕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마침내는 대도를 성취해서 성불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시면 그 비방하는 그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성불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비방하는 인연으로도 성불을 하거든,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을 나무나 쇠나 돌이나 흙으로 빚어서 조성을 하고, 거기에 정성을 다해서 새로 금(金)으로 옷을 입혀 드리는 그리고 그 방석을 해 드리고 그 좌대(座臺)를, 연화대(蓮花臺)를 이렇게 조성해 앉혀 드리고, 그리고 그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이런 법당을 창건하는 데 동참하는 그러한 인연이야 얼마나 장하고 거룩하고, 그 공덕으로 삼악도에 떨어질 모든 과보가 있다 할지라도 봄눈처럼 녹아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영원한 진리(眞理)의 몸을 성취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데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인 참선을 실천 수행해서 견성성불한 그러한 바른 법을 의지하고 닦아 가는 그 공덕이야 입으로 무어라고 표현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아났으며,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며, 불법 가운데에도 불법을 믿는다 해도 방편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경법(究竟法)이요, 최상승법인 이 정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수승한 인연을 만난 것을 깊이 느끼고,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가 이만큼 유지될 때에 대용기와 대분심과 대신심을 일으켜서 가행,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대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심과 신심을 돈발(頓發)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미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당도 필요하고, 불상도 필요하고, 또 이러한 개금불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처럼 옷이 없어서 추워하시는 그러한 분도 아니요, 공양을 못 잡수어서 배가 고프신 어른도 아니며, 이런 집이 없다고 해서 풍마(風磨)와 우습(雨濕)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어른도 아닙니다. 그러한 어른도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이요 성현이신지라 우리의 정성으로 이런 법당을 마련해 드리고 이런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서 가끔 이런 좋은 옷을 입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 동남아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해마다 개금불사를 해서 새로 옷을 입혀 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개금불사를 해서 오래되어서 투색(渝色)을 하고 그을르고 벗겨질 때에 여러 해 만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개금불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정성으로 해마다 모신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금불사만 자주자주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수행(修行)을 보다 더 알뜰히 그리고 실답게 열심히 하는 것을 부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요, 부처님의 뜻을 우리는 참으로 옳게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로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전단향(栴檀香)은 어떻게 향내가 진동하던지 이 법당에서 전단향을 피면은 십리 밖에까지도 그 향내가 풍긴다고 하는 그러한 좋은 향나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전단향으로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하고, 중생의 우리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우리 보통 사람의 중생의 모양을 떠억 조성을 한다 그 말이여.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성현의 모습을 떠억 이렇게 조각을 해서 딱 모시게 될 때에 그 모양이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부처님 모습도 천 부처님이면 천 부처님이 다 모습이 각각 다르고, 관세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지장보살 이러한 보살님의 모습을 조성해 모셔도 그 모습이 크고 작고 길고 또는 둥글고 모나고, 보살님의 모습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우리 중생의 모습이 40억 인구나 되는데 그 40억 인구에 김가, 이가, 박가, 서양 사람, 동양 사람 그 각각 다른 모습을 전단향으로 조각을 해서 따악 놔났다 그 말이여.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 모습대로 다르고, 보살의 모습은 보살의 모습대로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중생의 모습대로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르다 할지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그 냄새를, 그 향내를 맡아 보면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그 불상의 냄새를 맡아 봐도 내나 그 훌륭한 좋은 전단향 냄새가 날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모습을 조각을 해서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 향내를 가서 맡아 보면 내나 전단향의 향내가 날 것이요, 눈이 째지고 코가 삐틀어지고 입이 샐쭉한 뵈기 싫게 생긴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해 놨다 하더라도 내나 가까이 가서 맡아 보면은 전단향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처음~31분40초)





(2)------------------

그러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최초에 부처님을,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이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부처님 당시에는 처음부터 이 불상을 모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느 해 여름에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이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하면은 저 도리천(忉利天)! 도리천에 거기에 태어나셔서 도리천에 계셨습니다.
그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부인께 석 달 동안을 설법(說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구익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우전왕은 부처님을 너무너무 신(信)하고 존경하는 나머지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매일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의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잡혀서 정사(政事)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돌연히 도리천에 올라가고 안 계시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그립고 뵈옵고 싶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실 때에 우전왕이 부처님께 허락을 맡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시게 되면은 저는 부처님을 하루라도 뵙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고 도저히 정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러니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신듯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리고 친견을 하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라” 이렇게 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막상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같이 모시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를 청해다가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데—어쩔 수 없어서 신통(神通)이 제일인,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에게 의탁을 해서 목련존자가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에 접해 가지고, 말하자면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 그 제일가는 조각가로 하여금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그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해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당에다가 딱 모셔 놓고, 우전왕이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0일 동안에 도리천에 있어서의 마야부인께 설법을 다 마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 전단향으로 모셔 논 부처님이 계신 대로 오시게 되니, 전단향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연화대에서 떠벅떠벅 걸어 내려오셔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을 하시는데,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이 전단향인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전단향으로 조성한 부처님께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도리천에 가 있는 동안 중생을 교화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이렇게 수고한 위로 인사를 떠억 하시고서 ‘말세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이것으로써 거룩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등상불(等像佛)을 모시게 된 최초의 동기고.

그다음에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 파사익왕이라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신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우전왕이 그렇게 전단향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을 해 모셨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순금으로, 자마순금(紫磨純金)으로 부처님을 조성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 파사익왕은 어째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냐 하면, 우전왕이 모셨으니까 샘이 나서 모신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한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불상을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 원(願)을 가졌느냐 하면, 그 부처님이 계신 도량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떠억 운집(雲集)을 해서 있으면 부처님이 그 도량에 계실 때와 부처님이 저 십 리 밖이나, 수백 리 밖에 계시고 직접 자기가 있는 도량에 안 계실 때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온 대중이 엄숙하고 숙연하고 엄정하고 제절로 그 도량(道場)에 있는 모든 사부대중이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저 먼 데 계시고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있으면 암만해도 그렇게 엄숙하지를 못하고 경건하지를 못하고 공부를 해도 공부가 그렇게 잘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황금으로 순금으로 불상을 이 법당에다가 모시고자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역시 ‘참!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허락을 하시게 되어서 순금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순금으로 모신 부처님을 갖다가 봉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바세계에 두 번째 등상불을 모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 나아가서는 이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절이 서고 이런 불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동기(動機)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目的)과 불상을 모시게 된 여러 연기(緣起)에 대해서 대충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도(外道)들이, 불교를 믿지 아니한 외도들이 불교를 잘 이해를 못하고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러한 말은 전연 비방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껍데기, 외부로 나타난 일부만을 잘못 보고서 불교의 참진리와 참뜻을 이해를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것입니다.
비방하는 공덕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고(苦)는 잠깐만 받고, 될 수 있으면 고(苦)는 받지 않고 다시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게 되기를 바래지만 인과법은 역연(歷然)해서 고를 면치 못할 것이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받고 조끔만 받고 빨리 이 정법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하야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하노라
나무~아미타불~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하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니다
나무~아미타불~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

이번 불사에 불모(佛母)는 수원 용주사 포교당, 수원 포교당의 정락 스님, 주감 스님을 청해다가 이번에 이 개금불사를 모셨습니다. 개금불사를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그렇게 잘해서 참 그렇게 이 32상(三十二相)이 뚜렷하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심 있는 불자가 거룩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사진을 찍어서 여러분께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사진은 어떻게 한 관세음보살의 상(像)이냐 하면, 어느 화가(畫家)가 강화 보문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백일기도 회향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을 했는데, 그 관세음보살로부터 붓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꿈에 친견한 그 관세음보살과 똑같이 정성을 들여서 몇 날 며칠 정성을 들여서 관세음보살을 그렸습니다. 그려 놓고 보니 너무너무 거룩하고 훌륭해... (31분41초~61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 /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 최초에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 부처님의 자비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1. 2. 12. 15:45

 

 

((No.195))—1983년 3월 첫째일요법회 (58분)

 

(1/3) 약 20분.

 

(2/3) 약 22분.

 

(3/3) 약 16분.

 


(1/3)----------------

원앙수출(鴛鴦繡出)은 종군간(從君看)이어니와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지난 임술(壬戌) 동안거 해제(解制)를 지낸 뒤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법회(法會) 날입니다.

제방(諸方)에서 모다 해제(解制)를 하고 그리고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얼굴을 서로 상면(相面)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행인이 제일 반가운 것은 한 철 두 철 같이 지내던 도반(道伴)이 또 다른 선방(禪房)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해제를 하면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동안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서 마음에 증처(證處)가 있으면 더욱 다행하고 더욱 반가운 일이거니와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만큼 그러한 증처가 없다 하더라도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집을 떠나서 출가(出家) 생활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고향에 친지(親知)를 만난 것보다도 훨씬 더 반가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재물과 색(色)을 멀리 여의고, 명예와 권리를 멀리하고, 그 마음과 행동을 청정히 해서 목숨 바쳐서 도(道)를 닦아서 지혜(智慧)의 달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력(呪力)이나, 기도(祈禱)나 또는 참선(參禪)을 해서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신통(神通)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신선도(神仙道)에도 다섯 가지가 있고 오신통(五神通)이 있고, 우리 불법(佛法)에는 육신통(六神通)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오신통이란 게 무엇 무엇 해서 다섯 가지 신통이냐?

첫째, 천안통(天眼通). '하늘 천(天)' 자, '눈 안(眼)' 자, 천안통.
원근(遠近)에 관계없이—산이 맥혔거나, 집이 맥혔거나, 수 천리만리(千里萬里) 밖에 일이라도 어떠한 상태를 내가 보고자 한 마음을 내면 이 자리에서 당장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입니다.
여기서 청와대든지, 서울역이든지 또는 경복궁이든지, 부산이든지, 일본이든지, 미국이든지, 볼려면은 여그 앉아서 찰나간(刹那間)에 그 보고자 한 장면을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천안통.

그다음에 천이통(天耳通). '하늘 천(天)' 자, '귀 이(耳)' 자 천이통은, 여기서 과학적인 어떤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무선기(無線機) 같은 그런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천 리 수만 리 밖에 어떠한 소리를 듣고자 할 때에는 즉시(卽時)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이통이고.

그다음에 신족통(神足通). 비행기나 로케트나 그러한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기서 몇백 리고, 몇천 리고 가고자 한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을 갖자마자 그 가고자 한 목적지에 몸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족통, 또는 신경통(神境通)이라 하는 것이여.
요새 축지법(縮地法)이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이 신족통은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족통이여.

그다음에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환히 알아 버리는 것이여. 이것이 타심통이여.

그다음에는 숙명통(宿命通).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에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 인과(因果), 모든 사물에 생성 과정과 장래에 사태에 대해서 환히 다 보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숙명통입니다.
어떠한 사람을 보면 과거에 저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금생(今生)에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금생에는 저렇게 살지만 내생(來生)에는 무엇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숙명(宿命)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超能力)입니다. 이걸 숙명통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상 천안통 ‧ 천이통 ‧ 신족통 ‧ 타심통 또 숙명통, 이 다섯 가지를 오신통(五神通)이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는 불교(佛敎)가 아닌 저 신선도, 도교(道敎) 신선도(神仙道)에서도 이 다섯 가지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신통 밖에 또 한 통(通)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볼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느냐?
'메아리 없는 골짜기'와 '뿌리 없는 나무'와 '밑 없는 배'와 '구멍 없는 젓대'를 고인(古人)들은 바로 이 '한 물건[一物]'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어떻게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하는가?' 참구할 때에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호흡하는 법, 그러한 기본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고, 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直接的)인 지도(指導) 없이는 백(百)에 하나, 만(萬)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지 아니할 때에 목적지에 바로 도달하기란 바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처음 가는 길은 가다가 두 갈래 길, 세 갈래 길, 네 갈래 다섯 갈래 길이 나올 때에 길 아는 사람의 안내(案內)를 받거나, 길 아는 사람에게 묻지 않고서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바로 가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 닦아 가는 길,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공부의 길은 두 갈래 · 세 갈래 · 다섯 갈래 정도의 길이 아니라, 수천 수억만 개의 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많은 길을 어떻게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 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이 얻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부를 바로 지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의 지도(指導)와 간택(揀擇)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처음~20분16초)




(2/3)----------------

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이 공부를 보다 더 알뜰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저 산중(山中)에 토굴(土窟)이나, 한적하고 사람 오지 아니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밤잠을 안 자고 먹을 것을 굶어가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을 하면서 피나는 고행(苦行)을 해 보았으면, 죽든지 살든지 내가 한바탕 해 봤으면' 이러한 간절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갸륵한 생각이고 기특한 생각이지만.
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리 밑에나, 그렇지 않으면 시장(市場) 바닥이나,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얼마든지 혼자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화두를 선지식한테 타거나, 책을 통해서 자기가 적당히 하나를 골라잡거나 별것이 없습니다.
별것이 없으나 차츰차츰 세월이 가면서 어떠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공안(公案) 참구(參究)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거나, 소견(所見)이 생겼을 때에 자기가 철저하게 믿는 선지식(善知識) 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할 때에 그러한 경계에 대해서 문의할 데가 없고, 그것을 갖다가 간택 받을 데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 되어 가도 옳게 되어 간 줄 착각하기가 쉽고, 옳게 되어가도 이것이 잘되어 가는지 못되어 가는지 스스로 의심(疑心)이 나고, 그래서 중대한 고비에서 공부가 중단(中斷)되거나 후퇴하거나 갈팡질팡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 뒤에 어디 어느 분한테 가서 이것을 간택을 받을까 하고 이리저리 찾아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말을 하고—때로는 '옳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그르다' 그러고, 어떤 분은 '큰일났다' 그러고, 어떤 분은 '공부가 잘 되어 간다' 그러고, 도대체 점점 여기저기 물어볼 수록에 점점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그러한 심경(心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먼저 스승을 찾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이,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혼자 하면 제일 먼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한 철 두 철을 못 가서 맨 처음에 맛보게 된 경계가, 망상(妄想)이, 그렇게 퍼일어나던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서 화두(話頭)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이 북받쳐 오르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녹음 끊김)....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를 못하고,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내갔는지 두 시간이 지내갔는지 세 시간이 지내갔는지 시간이 지내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여.
캄캄한 밤에 있어도 어두운 줄을 모르고, 혼자 있어도 심심한 줄을 모르고, 하늘을 보나 산을 보나 땅을 보나 모든 것이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할 뿐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서 그 경계가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편안해서 그 싱그럽고 묘(妙)한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편안을 하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좋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기쁘다' 해도 맞지 아니하고,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러한 경계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너무 싱그럽고 너무 맑고 깨끗하니까, 자칫하면 그 맑고 깨끗한 경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묘한 경계에 들어가서 너무너무—그것을 법희(法喜)라고 할까? 법열(法悅)이라고 할까? 선열(禪悅)이라고 할까?—맑고 깨끗하다 못해서 너무 싱그럽고 묘해서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린다면, 더군다나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肉身)이 이 세상에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자리에서는 선악(善惡)도 없고, 밝고 어두운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고, 지옥(地獄)과 천당(天堂)도 없고, 부처와 중생(衆生)도 없는 그러한 경계에서, '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의 경계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眞空)이요 묘유(妙有)로구나!'
고조사(古祖師)가 설하신 어록(語錄)도 뒤져 봐도 하나도 맥힐 것이 없이 환한 것 같고, 어떠한 경전(經典)을 떠들어 봐도 모두가 이러한 경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 같고, 어떠한 경계, 공안(公案)을 봐도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하!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것이로구나' 아! 이래 가지고 자기도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경계에 취해서 그러한 경계를 계속해서 그 경계를 지켜 나간다?

지켜 나가면, 무엇이 알아지기도 하고, 캄캄한 밤에도 환하게 뭣이 다 바늘 떨어진 것도 다 보이기도 하고, 벽 문을 닫어 놓고 방안에 앉아서도 벽 밖에 것이 환히 보이기도 하고, '내일은 누가 찾아오겠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고.
'아! 그 이것이 바로 신통(神通)이로구나! 내가 견성(見性)만 한 것이 아니라 신통까지 났구나!' 이러한 경계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누구에게 이것을 얘기하며 누구에게 이 소식을 말할 수가 있을까?

모든 사람을 봐도 모두가 다 불쌍하게 보이고, 도 닦고 있는 모든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봐도 어문다리를 긁으며 헛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철이 안 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스승 없이 깨달랐다' 경(經)을 봐도 맥힘이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공안(公案)을 봐도 맥힘이 없다 이거여.

그러니 신통까지 났겠다, 다른 사람에게 법문(法門)을 하면, 다른 사람은 역시 모르니까 그이가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하고, 더군다나 유식해서 경(經)도 잘 설(說)하고, 이럴 경우는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그이를 만나게 되면은 다 훌륭한 선지식이요, 도인이라고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본인도 도인이요 '신통이 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틀림없는 도인으로 보여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차츰차츰 자연히 도인(道人) 행세를 하게 되고, 아는 소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만(自慢)이 생기면 계행(戒行)도 해이(解弛)해지게 되고, 수행(修行)도 해이해지게 되어서 차츰차츰 옛날에 그 계율을 지키면서 산중에서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할 때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해이해지고 따라서 탁(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탁한 생활이 시작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맑고 그랬던 경계는 간 곳이 없고, 따라서 과거에 무엇을 훤히 알고 어떠한 신통력을 행하고 했던 것이 둔해지고, 무디어져서 뭘 봐도 벽 밖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고, '오늘 누가 올 거다' 한 것도 잘 몰라지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지만 자기를 추종(追從)하는 제자와 신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줄 알고 계속 따라오고 있고, 자기는 속으로는 다 그런 신통력이 없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없어져 버렸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훤히 알고 있는 걸로 알고 추종을 하는데 모른다고 하면 챙피하고, 그러니까 계속 아는 척은 해야겄고, 이러다가 결국은 모든 것이 백일하(白日下)에 다 폭로(暴露)가 되고.
막행막식을 하고, 말을 함부러 하되 법도(法度)에 맞지 아니하고, 이렇게 될 때에 자기를 과거에 항상 따르고 보호해 주던 선신(善神)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악신(惡神)과 마귀(魔鬼)가 자기를 침범하게 되는 것입니다.(20분18초~41분45초)




(3/3)----------------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만일의 경우 법에 저촉이 되는 행동을 했다면 영락없이 국가의 법에서도 그이를 구속(拘束)해서 가두기도 하고 또는 사형(死刑)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능엄경(楞嚴經)』 속에, 오십삼변마장(五十辨魔障)에 소상하게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예를 가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 참선(參禪) 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最高)에 수행(修行) 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머리빡을 바위나 벼람박에다 부딪혀서 유혈(流血)이 낭자하다가 피를 흘리고 죽게 되기도 하고, 그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일어나는 현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물이 한번 엎질어 버린 다음에는 다시 쓸어 담기가 어렵듯이, 이 공부도 한 번 잘못되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이여. 그러니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이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이 참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에 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일요 법회(法會)입니다.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자세(姿勢)를 바르게 허리를 쭈욱 펴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고, 흔들다가 한 가운데에다 딱 중심(中心)을 잡으세요.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몸은 단정하게 갖되 어깨나 목이나 눈에다가 힘을 주지 말고 편안하게 긴장을 다 풀고 편안하게 가지세요.

처음에 준비호흡을 세 번을 하는데,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벅차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코로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한참 참었다가 입으로 '후-' 하고 내뿜으세요. 가슴을 아주 짜면서 다 내뿜었으면 또 한 번 들어마시세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3초고 5초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머물렀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뿜으세요.
다 내뿜었으면 또 한 번 들어마시고, 정지했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또 '후-' 하고 다 내뿜으세요. 이것이 준비호흡이어요.

그다음에 인자 본호흡(本呼吸)으로 들어가는데, 이제는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숨은 코로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 단전(丹田)이라 하면 불두던 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두던 위가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셔요.
물론 코로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저 뒤에 궁뎅이로 들어마신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하복부(下腹部)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도록 그러한 느낌으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셔요. 팔부쯤 들어마셨으면 그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딱! 정지(停止)를 해요. 3초 동안 정지를 했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 할 때는 입으로 내쉬었지만 지금은 코로 내쉬는데, '코로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궁뎅이를 통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내보내요. 그러면서 아랫배는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맨드세요. 그렇게 느끼시면서 숨을 내쉬세요.

계속해서 그렇게 호흡을 하는 겁니다.
준비호흡은 처음에 3번만 딱 하고, 네 번째부터서는 본호흡으로 하는데,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쉬는 거예요.

죽비(竹篦)를 쳐. (죽비 세 번)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헌데  추이불급홀연래(追而不及忽然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행독좌무구계(獨行獨坐無拘繫)허고  득관회처차관회(得寬懷處且寬懷)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하고, 아침에는 저 남악(南嶽)이라고 하는 산에서 놀더니, 모천태(暮天台)라, 해 저물게는 벌써 천태산에 가 있어.
추이불급홀연래(追而不及忽然來)로구나, 아무리 쫓아가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홀연히 앞에 와 있다 그 말이여.

남악(南嶽)과 천태산(天台山)은 수천 리 수백 리 길인데, 아침에 벌써 남악에서 놀더니 번떡 한 사이에 벌써 천태산에 가서 있어. 몇백 리 밖에 천태산에 가서 있어. 아무리 그것을, 그 사람을, 그이를 따라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저절로 앞에 와서 딱 있더라 그 말이여.

독행독좌무구계(獨行獨坐無拘繫)헌데, 홀로 행하고 홀로 앉었고, 자기가 앉고 싶으면 앉고, 가고 싶으면 가고,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 말이여.
득관회처차관회(得寬懷處且寬懷)로구나. 관회(寬懷)를 얻은 곳에 또한 관회롭다.

'관회(寬懷)'라는 것은 '너그러울 관(寬)' 자, '생각 회(懷)' 자. 조끔도 옹색함이 없이 그 회포(懷抱)가 너그럽다 그 말이여.
천태산이고 남악이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눈 한번 번쩍하면 천태 가 있다, 눈 한번 번쩍하면 남악에 가 있다.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아까 '누진통(漏盡通)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걸 깨달으려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야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한 물건을, 찾으면 자최가 없지마는,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그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놈을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겨울 해제가 지내고 이제 봄철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용화선원(龍華禪院)에서는 2월 초하루에 '봄 결제(結制)', 봄 두 달간 안거(安居)를 하는데 음력 2월 초하룻날 결제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3월 그믐날 해제(解制)를 하게 됩니다.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도 그렇게 아시고 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이 좋은 봄 계절을 어쨌든지 이 정진(精進)하는 데에 더욱 힘을 써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10일 날, 3월 10일이고 음력 2월 26일 날, 여기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부처님 점안식(點眼式)을 거행(擧行)을 합니다.
그 점안식에, 사시(巳時)에 있으니까 모다 참석을 해서 이 뜻있는 불사(佛事)에, 회향(廻向)에 참석을 하시면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또 부처님께 새 옷을, 여러 해 만에 새 옷을 입혀 드리는 그러한 뜻있는 불사가 그날 회향이 되니까 참석을 하셔서 법문(法門)을 들으시도록 부탁을 합니다.(41분47초~57분44초) (끝)




[법문 내용]

(게송)원앙수출종군간(鴛鴦繡出從君看)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 / 해제 후 도반을 만나는 기쁨 / 신선도의 오신통(五神通)과 불법에 육신통(六神通) / 누진통(漏盡通)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을 보아 버리는 것,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 활구참선법으로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
달마 스님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쇠로 된 못을 박을 때에 맨 처음에 정확히 박아야 하는 것처럼,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 /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 / 아무리 맑고 깨끗한 경계라도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 화두를 놓치고 그 경계에 취해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 / 도인(道人) 행세, 아는 소리를 하지 말라.

참선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에 수행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 참선은 반드시 ①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고, ②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해야.
좌선 자세, 호흡법 / '저 뒤에 궁뎅이로 들어마신다' 이러한 기분으로 (이때 하복부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도록 그러한 느낌으로) 숨을 들어마시고, '저 궁뎅이를 통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아랫배는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숨을 내쉰다.

(게송)조유남악모천태~ / 누진통(漏盡通)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이다.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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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1. 2. 11. 17:10

 

 

((No.185))—1982년 11월 첫째일요법회 (50분)

 

(1/3) 약 18분.

(2/3) 약 19분.

(3/3) 약 13분.


(1/3)----------------

심경확연망피차(心境廓然忘彼此)하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심경(心境)이 확연(廓然)하야 망피차(忘彼此)하면,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피차(彼此)를 잊어버리면, '내다 남이다', '주관이다 객관이다', '좋다 나쁘다' 이러한 피차를 잊어버리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린 거다 그 말이여.

마음속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내다 남이다', '이건 좋다 나쁘다' 이러한 차별심이, 차별(差別)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면 육도(六道)가 분명히 있고, 중생과 부처님이 따로따로 있고, 온갖 재앙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인아상(人我相)이 뚝 떨어져 버리면 삼천대천세계가 그냥 고대로, 현실(現實)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이요, 부처님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인 적광토(寂光土)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다.
곳곳에 푸른 버들에는 다 말을 맬 수가 있어. 사람이 옛날에는 다 말을 타고 다니다가 그 말에서 내리면 그 말을 그 나무에다가 고삐를 매는데, 어느 곳에 있는 아무 버드나무에도 그 말을 마음놓고 붙들어 맬 수가 있는 것이고,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여. 집집마다 길이 있으면 그 길이 바로 장안(長安), 서울로 통하는 길이더라 그 말이여. 어느 집이고 그 문 앞에 있는 길로 나가기만 하면 거기서 바로 서울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참선(參禪)을 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아(人我) 피차상(彼此相)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요긴(要緊)한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바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설사 머리를 깎지 않고 속가(俗家)에서 가정을 가지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신 분, 또는 출가(出家)를 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평생을 도(道)를 닦는 그런 스님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언제나 행각(行脚)을 지금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지 아니하고 그렁저렁 살아가는 사람은 말고, 참으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더라도 행각에 나서고 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각에 나선 사람은 자기의 고향과 부모를 다 여의고 떠나왔으며, 또 자기의 은사(恩師) 스님이 계시는 그 절도 이미 하직(下直)을 하고 선지식(善知識)과 도반(道伴)을 찾어서 이미 길을 떠나 있거든.
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하면 후일(後日)에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너의 밥값을 따져서 계산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운광법사(雲光法師)라 하는 큰스님이 계셨었는데,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설법(說法)을 잘해서 그 운광법사가 법문을 하시면 뜰 앞에 있는, 또는 산에 있는 바위도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또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설법을 잘하시면 그 바윗덩어리가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꺼떡꺼떡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쏟아지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런데 그 운광법사가 많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시기를, "시주(施主), 시주것은 그 쌀 알갱이 하나에 은혜(恩惠)가 일곱 근 반이라, 그렇게 시주에 물건이라 하는 것은 은혜가 그렇게 지중(至重)한 것인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먹고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어서 소가 되느니라. 소가 되어 가지고 그 시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평생토록 죽도록 피땀 흘려서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어야 하고, 죽어서는 피와 고기와 가죽으로써, 가죽과 뼈로써 또 그 은혜를 빚을 갚어야 하고, 한 생 동안 소노릇을 해서 못 갚으면은 죽자마자 다시 또 소가 되어 가지고, 소로 태어나 가지고 또 그 은혜를 갚고 해서 몇백 생, 몇천 생토록 그 은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렇게 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설법을 하시니까 그 어떤 스님 한 분이, "그러시다면 큰스님께서는 능히 그 시주에, 그런 시주가 바친 그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다 능히 소화시킬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하고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그 운광법사가 대답하기를, "능소(能消) 능소(能消)! 능히 소화를 시키고말고!"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소가 되었습니다.
큰 황소가 되어 가지고 "움메~ 움메~" 하고 우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운광법사처럼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고 그렇게 도(道)를 열심히 닦고, 그래 가지고 큰스님이 되어서 저렇게 설법을 잘해 가지고 많은 중생들을 교화(敎化)를 하셨는데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

그 운광법사가 소가 되어 가지고 죽은 다음에 그 운광법사, 그 소를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그래 가지고 큰 북을 만들어 가지고 절에다가 그 북을 만들어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할 때는 그 북을 쳤던 것입니다.
그 북소리를 듣고,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큰스님도 이렇게 소가 되었는데, 하물며 그밖에 누가 소가 되지 않겠다고 자긍(自矜)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것을 거울삼아서 게을리 해태(懈怠)에 빠지지 말고 목숨 바쳐서 도를 닦을지니라' 이러한 뜻으로 큰 절에는 다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로 치는데.

'어째서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대도사가, 대 선지식이 소의 과보(果報)를 받았느냐?' 이것이 하나에 공안(公案)입니다.

'어째서, 도(道)도 안 닦고 계행(戒行)도 안 지키고 그렇다면 혹 소가 된다 해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운광법사처럼 그렇게 계행이 청정하고 도를 그렇게 참 철저히 닦고, 설법을 그렇게 참 부처님 설법을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고 바위가 고개를 꺼떡거리고 이렇게 감동을 주는 그러한 대법사(大法師)가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처음~17분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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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고, 밤잠을 덜 자고, 말을 적게 하고, 쓸데없이 외출을 하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데에도 있는 것도 아니요, 밥을 안 먹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러한 것들이 수행하는데 마땅히 좋은 수행자로서 다 주의해야 할 점이고 지켜야 할 점인데 또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여.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그런다고만 해서 '그것이 가장 도를 잘 닦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평생 동안 묵언(默言)을 하고 벙어리 노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가장 잘 닦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여.
만약에 눕지 않는 것으로써 제일가는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는 금방 도(道)를 이룰 것이고, 말을 아니한 것으로써 가장 훌륭한 도를 닦는 것으로 여긴다면 벙어리는 일찌감치 도를 통할 것이고, 뭘 듣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제일 먼저 도를 툭! 통하고 말 것이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먹고, 자고, 듣고, 보고, 말하고, 걷고, 그러하면서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눈이라 하는 것은 '보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보고, 귀라 하는 것은 '들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듣고, 입은 '말하고 밥 먹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고, 밤이 오면 '자라'고, 쉬는 시간이니까 쉴 때는 쉬되 거기에 착(着)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 나간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사람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이다.

묵언을 한답시고 말은 아니하면서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參見)하고 온갖 참견을 다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다고 밤 잘 때 옆구리는 땅에 대지 아니하면서 종일토록 혼침(昏沈)에 떨어져서 꾸벅꾸벅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도(道)에 보탬이 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편행외도(遍行外道)는 하루에 공양(供養)을 한 끼밖에는 아니하고 장좌불와를 하고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고행(苦行)을 다 해도 그것이 참으로 바른 도를 깨닫지를 못했고, 밥 먹을 때 먹되 과식을 하지 아니하고, 말을, 할 말을 하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되 대도(大道)를 성취한 선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이는 것, 그리고 하루에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시간 생활을 한 것도 대단히 필요한 것이고 그렇되, 참으로 공부를 알차게 하려면 입선할 때뿐만이 아니라 방선(放禪) 시간, 결제 때뿐만이 아니라 산철에, 또 앉어 있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걸어 다닐 때나, 똥을 눌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바로 그때, 그 시간 그 장소 그 일에 있어서 경계(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해 나가는 이러한 수행자라야 도를 빨리 그리고 바르게 성취할 것입니다.

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평상심(平常心),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 그 점에 대해서 강조를 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스님) "일광(日光)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法)을 설(說)합니까? 이 분상(分上)에서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뭘 물어보나? 뭘 물어봤어?"

(어떤 스님)"일광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을 설하십니까?"
"다 물어봤으면 물러가. 물러가 있어"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허되  환여앙전사허공(還如仰箭射虛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통명일구초삼제(洞明一句超三際)하면  절승승지만배공(絶勝僧祇萬倍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이요, 보배가, 보배 무데기가 태산(泰山)과 같이 그렇게 많이 보배를 모여서 쌓아 놨다. 쌓아 놔서 얼마나 많은 보배인가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어. 세속에 돈을 많이 벌어서 복을 많이 짓고 또 보배를 그렇게 많이 쌓아 놨다 하더라도,
환여앙전사허공(還如仰箭射虛空)이라. 저 하늘에다가 활을 쏘면 그 하늘이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가는 다시 그 올라가는 기운(氣運)이 다 떨어지면은 땅으로 도로 떨어진 거와 같다.

오늘 이 법회에 한 납자(衲子)가 나와서, "설할 바 없는... 한 법(法)도 설(說)할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무슨 설법을 어디다 대고 하느냐?" 이러한 뜻으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했습니다.

하늘에다 대고 침을 밭으면 제 얼굴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설(說)하는 사람이나,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어디다 대고 설(說)하느냐고 묻는 사람이나, 바람을 거슬러서 문지(먼지)를 날리면은 그 문지가 자기 얼굴과 자기 몸에 온통 엉기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법회(法會)가 있으면 눈 밝은 납자(衲子)는, 또 정진을 애써서 하는 납자는 선지식(善知識)에 법을 묻기도 하고 또 답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참, 탁마(琢磨)를 해 온 준례(準例)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처음 보신 분은 어리둥절해서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시겠지만, 이러한 법(法)을 거량(擧揚)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분발(奮發)을 하게 하고, 침체(沈滯)했던 사람에게 채찍을 가하고, 졸고 있는 사람에 정신을 바짝 채리게 하는, 그러한 참 좋은 선불장(選佛場)에 하나의 양상(樣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으면, 조실 스님이 법을 설하실 때에도 가끔 어떤 납자들이 나와서 법거량(法擧揚)을 하고 모다 그러한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마는, 참으로 눈을 갖춘 분은 점검(點檢)을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17분48초~36분57초)




(3/3)----------------

통명일구초삼제(洞明一句超三際)하면, 일구(一句)를 통명(洞明)을 해서 삼제(三際)를 뛰어넘으면, 과거 현재... 시간을 초월을 해 버리면,
절승승지만배공(絶勝僧祇萬倍功)이라. 아승지겁을—아승지겁(阿僧祗劫)이라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이란 말인데, 그 아승지겁 동안 쌓은 공덕(功德)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이다.

불법(佛法)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거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여, 한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그 방법이 바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할 때에 일구(一句)를 통명(洞明)하게 되고 무량겁 닦은 공(功)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공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여. 계속해서 해 가지고 차츰차츰 나아져 가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거든.

만날 화두(話頭)를 들고 애를 쓰고 정진을 하되, 무엇이 조끔도 알아진 것이 없고 나아가는 것이 없어. 해 갈수록 답답하고 아무것도 얻어진 것이 없고 내놓을 것이 없어.
그러지만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뭣이 공부가 잘되어 간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만 물러서지 아니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徹底)하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이여.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똥을 눌 때도 화두가 그대로, 일을 하거나 걸어가거나 소지를 하거나 누웠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현전(現前)을 하고, 심지어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그 화두(話頭)가 현전(現前)을 하게 되면, 그땐 공부가 순숙(純熟)해져서 깨달음이 멀지 않다 하셨습니다.

이 공부, 이 법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면 모르되, 듣고 믿은 이상은 이것 밖에는 인생으로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 하나 함으로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날마다 종횡으로 외운 공덕보다도 이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약방문(藥方文)을 읽은 거와 같고, 농사짓는 법을 외우는 거와 같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이요, 약을 먹는 것이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여.

그러니 농사짓는 법을 공부 열심히 읽기만 하고, 실지로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는다면 한 알갱이의 한 톨의 곡식도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밥을 지어서 먹는다면,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배고픔을 면한 거와 마찬가지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여. 그러니 어찌 이것을 듣고 믿으면서도 이것을 등한(等閑)히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설할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어디를 향해서 무슨 법을 설하느냐?'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분명히 설할 것이 없지만,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 설해야만 되고,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어야 하고.

본분납승(本分衲僧)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조사(祖師)도 본분납승에 방(棒)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처에게도 방(棒)을 내리고, 조사에게도 방(棒)을 내릴 만한 그러한 하늘을 찌르는 장부(丈夫)에 기상(氣像)을 가진 납자가 많이 출현(出現)해야만 불교에 중흥(中興)을 이룰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히 화두를 들어서,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 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뼈에 사무치도록 되게 강추위를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칠 수가 있겠느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매화꽃이 향내가 진동을 하는 법이여.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날씨가 너무 푹하면, 그럴 때에, 그런 뒤끝에 매화꽃이 피어 봤자 별 향내가 없어.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香臭)가 진동(振動)하는 법이다.

금년(今年)도 봄도 다 가고 또 이렇게 가을도 다 가고 머지않아서 또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렇게 또 일 년이 이렇게 다 지내가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은 없으면서 세월(歲月)은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나를 위해서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아니하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음력 10월 15일이 또 겨울 석 달 동안 안거 결제(結制)날이니, 그때 법회에 모다 참석을 하셔서 석 달 동안 선방(禪房)에 나와서 방부(房付)를 들이실 분은 방부를 들이시고 또 댁에서 하실 분은 댁에서 또 결제를 하시는 그러한 마음으로 음력 10월 15일 결제 법요식(法要式)에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37분~49분42초) (끝)




[법문 내용]

(게송)심경확연망피차~ /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인아상(人我相)이 뚝 떨어져 버리고, 마침내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 / 행각(行脚)에 나선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소가 된 공안에 대한 말씀.

일상생활을 하되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을 해 나간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 /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 참선은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돌이켜서 자기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 / 한 납자(衲子)의 법거량 / (게송)보취산왕산막궁~.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법 /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 /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농사법 약방문(藥方文)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 약을 먹는 것,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참선(參禪)을 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아(人我) 피차상(彼此相)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요긴(要緊)한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바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불법(佛法)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거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여, 한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그 방법이 바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할 때에 일구(一句)를 통명(洞明)하게 되고 무량겁 닦은 공(功)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공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여. 계속해서 해 가지고 차츰차츰 나아져 가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거든.

이 공부, 이 법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면 모르되, 듣고 믿은 이상은 이것 밖에는 인생으로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 하나 함으로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날마다 종횡으로 외운 공덕보다도 이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약방문(藥方文)을 읽은 거와 같고, 농사짓는 법을 외우는 거와 같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이요, 약을 먹는 것이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여.

그러니 농사짓는 법을 공부 열심히 읽기만 하고, 실지로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는다면 한 알갱이의 한 톨의 곡식도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밥을 지어서 먹는다면,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배고픔을 면한 거와 마찬가지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여. 그러니 어찌 이것을 듣고 믿으면서도 이것을 등한(等閑)히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금년(今年)도 봄도 다 가고 또 이렇게 가을도 다 가고 머지않아서 또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렇게 또 일 년이 이렇게 다 지내가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은 없으면서 세월(歲月)은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나를 위해서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아니하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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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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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1. 1. 17. 17:20

((No.190))—1983년 입춘 법회(83.02.04) (69분)


(녹음상태가 좋지 않사오니 양해를 바랍니다)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4분. (4/4) 약 17분.

(1/4)----------------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헌디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행선유재파소인(行船由在把梢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해천공활월성륜(海天空濶月成輪)한디, 바다, 넓고 넓은 저 바다 위에  하늘이 툭 틔여서 한정 없이 넓은데, 거기에 둥근달이 밝게 떠 있다.

호호청파난사은(浩浩淸波爛似銀)이로구나. 그 넓고 넓은 바다에서 맑은 물결이 마치 은(銀)을 갖다가, 은가루를 뿌려놓은 거와 같다.

바닷물이 파도를 쳐서 찰랑거리는데 휘황창 밝은 달이 비추니까 그 물결마다 마다 마치 은가루와 은편(銀片)을 갖다가 흩어놓은 거와 같이 그렇게 찬란하다 그말이여.


막괴편주능좌우(莫怪扁舟能左右)하라. 그 바닷 가운데에 조각배가 가는데 그 배가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고,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그 배 가는 것을 조끔도 괴이(怪異)하게 여기지 말어라.

행선(行船)이 유재파소인(由在把梢人)이니라. 배 가는 것은, 배가 이리가고 저리가고 하는 것은 오직 그 키를 잡은 사람에 달려 있느니라. 배 키를 잡은 사람이 키를 조정하기에 따라서 왼쪽으로도 가고 오른쪽으로도 가고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 것이다.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입춘(入春)날인데, 날짜로는 아직도 임술년(壬戌年) 섣달 스무이튿날, 임술년 섣달 스무이튿날이지만, 입춘 · 우수 · 경첩 · 춘분하면 그 절후(節候)로 봐서는 오늘이 입춘날이기 때문에 '봄으로 들어서는 날'이여.

새해 계해년의 봄이 오늘부터 시작하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 오후 6시 40분 정각부터서 계해년 첫 시간이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래서 음양가(陰陽家)에서는 사주(四柱)를 본다든지 그 음양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지는데 있어서는 아직도 섣달이지만 오늘부터, 오늘 또 6시 40분부터 계해년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한 8일이 지나야 계해년 정월 초하루가 되지만, 절후로는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계해년이 시작이 되는 것이여.


그래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는 것은 새해가 시작되는 날, 지나간 한 해를 반성(反省)하고 새로 시작하는 이 해에 보람 있게 살기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다지기 위해서 입춘날 이렇게 법요식을 거행하는데, 보통 세속 사람들은 새해에 삼재(三災)가 뱀띠 · 닭띠 · 소띠, 이 사유축(巳酉丑), 이 해에 난 사람은 삼재(三災)가 시작이 된다.

금년에 시작이 되고 내년, 내후년까지 3년 동안 삼재(三災)가 드는데, 그 삼재를 면하기 위해서 절에 가서 불공(佛供)도 드리고 또 좋은 법문(法門)도 듣고, 또 어떤 절에 가면은 부작(符作)도 받고, 또 그 절에 가서 부작을 못 받으면 무당이나 만신집이나 사주 점쟁이 한 그런 데 가서라도 몇만 원, 몇십만 원씩을 주고 그 부작을 사 가지고 와서 몸에 지니기도 하고, 집안에 갖다 붙이기도 하고 해서 오늘 대단히 여러 군데 절을 다니기 위해서 바쁘신 분도 계실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 용화사(龍華寺)에서는 그러한 부작(符作)을 노놔 드리지 아니하고, 부작보다도 더 영험이 있는 그러한—삼재를 3년 동안만 막는 게 아니라, 일생 동안 내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그 삼재(三災), 백재(百災), 천재(千災)를 다 소멸하는 그러한 불에다 넣어도 타지 않는 그러한 부작을 노놔 드리고자 합니다.


삼재를 없애려면 종이에다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그래 가지고 그것이 참으로 삼재의 뿌리가 뽑아지냐 하면, 그것은 참 '그리하면 좋다니까' 해 보는 것이지, 참으로 그 삼재가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사고나 무슨 그런 일이 그런 사고(事故)를 났을 때 그 사고 난 사람의 호주머니를 뒤지니까 부작이 나왔다' 이런 신문에 그런 기사도 나오고 합니다마는, 그런 것을 볼 때에 부작을 가졌다고 해서 꼭 삼재가 멸해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것을 우리는 또 알 수가 있습니다.


삼재(三災)를 참으로 면(免)하려면은 삼재의 원인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삼재의 원인이 무엇이냐?

삼재가 해필 뱀띠나 소띠나 닭띠에 난 사람에게만 삼재가 붙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당사주(唐四柱)를 볼 때에 포태양생(胞胎養生) 이걸 갖다가 붙여서 그래서 인자 삼재가 걸리면은 그걸 '삼재가 들었다' 해 가지고 대단히 그것은 '흉(凶)한 살(殺)이다' 이렇게 모다 사주를 보는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그런 말을 듣고 지내 보면 정말 삼재 든 해에는 여러 가지가 어려운 일이 있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이 삼재 땜을 이렇게 금년에는 했다' 이렇게 해서 틀림없이 그 삼재가 들면은 과연 그러한 좋지 않게 넘어가는 것 같이 보이기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삼재(三災)가 안 든 사람은 전혀 그러한 어려운 일이 없고, 흉한 일이 없느냐 하면은 또 그렇지도 않죠.

그래서 삼재는 포태양생(胞胎養生)을 붙여서 걸리는 것 그것으로만 따질 것이 아니라, 삼재의 그 뿌리는 우리의 생각—탐심(貪心)과 진심(瞋心)과 치심(癡心),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일어난다고 하는 부처님의 법문에 입각(立脚)해서 관찰하는 것이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을 한다면 거기에서 참으로 그 삼재의 뿌리채 소멸을 하는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 삼독(三毒)의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삼재가 생로병사... 삼재(三災)면은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병들어서 죽어 가지고 장사 지내는 거, 그 포태양생(胞胎養生)이 내나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과 관련이 되는 것인데,

그 십이인연법이라는 것이 낳아 가지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갖다가 열두 가지 단계로 노놔놓은 것이 그것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고, 그것이 또 포(胞)는 '안을 포(胞)' 자거든. 남녀가 서로 안아 가지고 포태(胞胎), 입태(入胎)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낳아서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 단계가 그 음양가에 있어서는 포태양생욕대관왕쇠병사장(胞胎養生浴帶冠旺衰病死葬) 이거란 말이여.


그러면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나 포태양생의 그 십이궁(十二宮)이 결국은 그 원인은 한 생각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것으로 인(因)해서 태어나 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탐심과 진심과 치심—탐내는 욕심, 내 욕심껏 내 마음대로 안되면은 썽을 내고,

그 한 번 두 번 해 보면, '아하,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내 욕심껏 안되는 것이로구나.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이 안되는 것이로구나.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는 곳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도 안되는 일이 더 많구나' 그런 것을 알고서 자기의 분(分) 따라서 노력을 해 나가고.


또 내 마음대로 안된다 하더라도 진심(瞋心)을 내기보다는 복(福)과 지혜(智慧)를 닦아서 과거의 업장(業障)을 소멸(消滅)하고, 그럼으로써 업장이 소멸이 되면 자연히 내가 하고자 하는 원(願)이 장애 없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러한 인과법(因果法)을 분명히 인식을 하고, 그래 가지고 자기의 모든 생활을 갖다가 여법(如法)하게 해 가도록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파도 속에서 생사 없는 참된 삶을 살아가는 길'이 거기에서 열리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밤낮 그것을 되풀이하거든.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렸다가 그것이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은 속이 상하고 썽을 내고, 그것을 평생 동안을 되풀이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중생의 어리석음’이다 그말이여.


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지끔 경면주사로 종이에다 쓰는 부작을 노놔 드리는 대신에, 여러분이 천당에 가고 싶으면 천당에 가고,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으로 갈 수 있는 그러한 길을 여러분에게 가리켜 드리는 것이 종이에다 쓴 부작 한 장 노놔 드린 것보단 훨씬 더 훌륭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귀가 있고 눈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들어보시면 알 것입니다.(처음~18분29초)





(2/4)----------------


여러분 가운데에는 '빨리 법문이 끝나야 뭘, 부작을 사러 갈 텐데' 이러한 생각을 혹 하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까짓 부작은 한 장뿐만이 아니라 백 장씩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인쇄를 해다가 노놔 드린다면 백 장 천 장이라도 노놔 드릴 수가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가서 참으로 삼재를 면하고 업장을 소멸한다면은 무엇이 그리 어려울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저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참선(參禪)하는 사람은 삼재(三災)가 다른 것이 아니라—혼침(昏沈) 산란(散亂), 참선하려고 앉었으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난다 그말이여.


잡담(雜談)을 하면은 눈이 초롱초롱해 가지고 조는 사람이 없는데,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하거나 또 이렇게 법문(法門)만 들으려고 하면은 눈껍데기가 천근만근 쪄 누르면서 잠이 퍼온다 그말이여.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 세계는 불보살(佛菩薩)도 꽉 차 있지만, 팔만사천 마구니도 꽉 차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법문을 들으면, 법문(法門)을 바로 듣고 발심(發心)을 하면 마구니의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권속들이 발붙일 곳이 없고, 마왕 파순이의 궁전이 흔들려서 무너질 테니 어쨌든지 법문을 못 듣게 해야겠다 그 말이여. 법문만 바로 들었다 하면 그 사람은 발심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확철대오를 하면 마구니가 갈 곳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은 법문을 못 듣게 해.

애당초에,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나오시기까지도 대단히 신심(信心) 있는 분이 아니면 여기에 오시지를 못합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못 온다 우리 아들 하나... 온갖 핑계를 대고... (녹음불량) ... 영판 핑계를 대고 못 나오는데, 그 핑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마구니들이 온갖 수단을 다 써 가지고 그렇게 해서 못 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 못 오는 사람은 벌써 마구니의 수단에 걸려 가지고 못 오는 것이고, 그러한 마구니의 온갖 수단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오는, 이 법회에 참석하신 것만도 대단히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참석을 해 가지고서도 아까 법문 시작하기 전에 옆에 사람하고 뭐라고 무슨 잡담을 한 동안에는 단 한 사람도 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 시작할 때부터 벌써 꾸벅꾸벅 졸다가, 지끔도 지금 내가 그렇게 눈을 감고 조는 꼴이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가끔 눈을 감아 버립니다마는, 그 마구니가 그 눈뚜껑 위에 딱! 붙어 가지고 막 눈뚜껑을 눌러 내리는 것입니다.


그 눈을 뜨려고 해도 마구니 힘을 이겨낼 수가 없어서 눈이 막 저절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눈을 뜨고 '누가 나 잠자는 것을 본가, 안 본가?' 이렇게 뚤레뚤레 살펴보지만, 그러자마자 또 자는 수가 있어. 아무리 안 자려고 해도 법문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히 그 마구니의 그 수단에 의해서 그렇게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마는.

혼침(昏沈) 산란(散亂), 공부를 해 본 사람이면 졸음이 오고, 졸음이 안 오면 온갖 망상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두 가지 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이렇게 까지 그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혼침과 산란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아주 가끔 그러한 질문을 하십니다마는,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그 이전에 혼침 산란이 나타난 것을 보면 이미 그것은 그르친 것입니다. 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을 물리치려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입니다.

또 아무리 물리치려고 해도 물러가지를 아니해서 '어떻게 해야 이놈을 물리칠 수가 있을까?' 이렇게 근심을 하면 이건 다시 또 그르치는 것입니다.

또 설사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다든지, 용을 써 가지고 그놈이 그 혼침 산란이 물러가 가지고 다 물리쳐 버리고 성성(惺惺)해서 깨끗해졌다 할지라도 그것도 또한 이미 그르친 것이다 그 말이여.


생각을 내서 물리치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점점 그르쳐 버리는 것이여.


'그러면 대관절 그렇게 말하면, 아하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하면 그르쳐 버리는 것이니까, 그러면은 생각을 내지 말고 혼침이 오거나 산란심이 오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실컷 코가 땅에 닿도록 혼침에 빠져서 잠이 오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그저 죽비를 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저 방선(放禪)할 때까지 침을 지르르르 흘리면서 그저 실컷 졸고 있으면 그러면 괜찮으겄구나. 내가 왜 진즉 그것을 몰랐던고. 이제부터서는 참선하는 것을 그렇게 하나도 그 걱정할 것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된장(똥)을 똥(된장)인 줄 알고 상추를 싸 먹을 사람이거든.


분명히 말하자면,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그 다 그르친 것이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생각을 내서 혼침 산란을 물리치려고 해도 그르치고, 또 물리치지 않으려고 해도 그르치고, 물리치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않고 실컷 자도 그르친다고 하니 이것을 내가 어떻게 해야겄냐? 참선을 하지 말라는 건가, 하라는 건가 큰일났다'

먼저 혼침 산란이... (녹음 불량) 스님들은 참선 하려고...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무량겁으로부터 오면서 ... (녹음 불량) ...  수없이 많은 겁 동안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면서 번뇌 망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번뇌 망상과 혼침 속에서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물리치려고 해도 안 물리쳐져. 그래서 혼침과 산란이 퍼일어난 것이고, 그 혼침 산란의 뿌리는 무량겁으로 오면서 한 생각 염기(念起)해서 온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다음에는 지끔 우리가 눈으로 모든 색상(色相)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듣고서 생각 생각이 모든 각각 장소와 인연(因緣)이 되어 왔어. 인연이 되어서 지금까지 온 거다. 이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고.

또 그래 가지고 내 마음을 마침내 보아서, 내 마음을 친견(親見)해서, 그러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려는 그러한 생각을 내는 것이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뿌리다.


또 하나는, 최초에 '생사(生死)... 생(生)을 갖다가 뛰어넘고, 죽음을 갖다가 초월(超越)하리라' 하는 '한 생각' 내기 때문에 혼침 산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참선을 해 가지고 도(道)를 이룬다' 한 그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조사(祖師)가 되고 성불(成佛)을 한다'고 한 그 생각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혼침 산란의 뿌리가 된다. 혼침 산란의 뿌리가 바로 성불작조(成佛作祖) 하려는 그 생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30분52초(여기부터 음질 조금 괜찮음)


'위없는 대보리(大菩提)를 얻어 가지고 대열반(大涅槃)에 들어가리라' 그러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혼침 산란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지(乃至) '세간(世間) · 출세간(出世間)의 가지가지 법(法) 가운데에 터럭 끝만큼이라도 일어나는 어떠한 좋은 생각 나쁜 생각이 바로 혼침 산란의 근원(根源)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혼침 산란은 번뇌(煩惱) 망상(妄想)으로부터서 성불(成佛)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이 아닌 것이 없어.

그러니 그놈을 버리려고 한 것도 그르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놈을 버리려고 해서 물러가지 아니한다고 번뇌심을 내는 것도 그것이 그르쳐 버리는 것이고, 그놈 그 혼침 산란을 물리쳐서 깨끗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어떻게 해야 과연 우리는 올바르게 공부를 해 갈 것인가?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장한학해(莫將閒學解)하야  매몰조사심(埋沒祖師心)이니라.

한가한 알음알이 배우는 것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알음알이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를 가지고 조사(祖師)의 마음을 묻어 버리지를 말아라.


산승(山僧)이 오늘 입춘 법요식을 당해서 삼재(三災)를 면(免)할 수 있는 법... (녹음불량)... 산란과 혼침을 물리치는 법, 탐진치(貪瞋癡) 삼독심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닦음으로써 영원히 삼재를 멸하는 법,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이 모두 엄격하게 말하면, 한가(閑暇)한 학해(學解)를 가지고 조사심(祖師心)을 매몰(埋沒), 묻어 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산승이 말하는 것만이 조사심을 묻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산승의 말을 듣는 것도 또한 조사심을 매몰하는 데에 가담한 공범자(共犯者)를 면(免)틀 못할 것입니다.


왕왕(往往)이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참으로 간절(懇切)하지 못한 것을 책망(責望)하지 아니하고, 간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절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지 아니하고—'혼침 산란이 장애가 되어서 도(道)를 닦을 수가 없다'고 걱정을 하는 사람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컴컴한 방에 앉아서 '왜 모든 물상(物象)이 훤하게 보이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사람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깜깜한 방에 앉어서 모든 것이, '글자나 모든 물건이 훤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노망했거나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그말이여.(18분30초~37분50초)





(3/4)----------------


옛날에 도반(道伴)이 죽거나 하면 거기에서 무상(無常)을 느끼고 며칠간은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며칠을 하고, 또 도반 가운데 누가 참선을 잘하거나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 거기에서 분심(憤心)이 나 가지고 며칠 동안을 모다 온 대중이 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그러한 일화도 있습니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약해 가지고 혹 어떠한 법문을 듣고서 분심이 좀 나고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분심이 좀 나도 며칠이 안 가서 비그르르르 허니 용맹심이 가라앉아 버리고, 다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태심(懈怠心)이 나고 방일(放逸)을 하게 된다 이말이여. 그래서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하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여러 대중이 모여서 살면 그 가운데는 누군가 반드시 분심과 발심을 해서 가행정진을 하고 있는 분이 있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에 그런 분이 한두 사람만 있어도 여러 대중이 그 좋은 영향을 받아서 따라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파리란 놈은 아무리 그놈이 몸이 날래서 잘 나른다 하더라도 지가 하루에 천리(千里)를 달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千里馬) 꼬리에 딱! 들어붙어 갖고 있으면, 천리마 꼬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탁! 붙어만 있으면 그 파리도 천리를 하루에 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 힘으로, 지 날개로 날아가지 아니하고 천리마 꽁딩이에만 붙어 갖고 있어서 천리를 가는 것이 옳다면, 저는 공부는 아니하고 선지식이나 어느 도반 꽁딩이만 따라다니면 되겄구나' 이렇게 착각(錯覺)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아란존자(阿難尊者)는 생각하기를, '좋은 도반(道伴)을 만나는 것은 도(道)에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서 그 생각이 옳은가 그른가를 부처님께 가서 판단을 받으러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니 생각이 틀렸다. 좋은 도반을 만나는 것은 도에 절반을 이룬 거와 같은 것이 아니라 도(道) 전부(全部)를 이룬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교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좋은 도반, '선우(善友)'라 하는 말은 도반과 선지식(善知識) · 선각자(先覺者)를 다 포함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스님네 뿐만이 아니라 여러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같이 법문을 들으러 오고 또 자주 만나서 공부에 관한 의논(議論)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에 관해서 의논하는 동창생이나 이웃 도반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집니다.

바른 사상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는 그러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인생을 바로 살아가고 법을 바로 믿어 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점쟁이나 좋아하고, 사주쟁이나 좋아하고, 무당이나 만신이를 좋아하는 그러한 친구들이...(녹음불량)...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무당이나 점쟁이한테 쫓아가 가지고 모든 일이 해결이 된다면 무엇이 걱정을 할 것이 있습니까? 돈 많은 사람은 무당을 차라리 자기집에다가 모셔다 놓고, 조실 스님으로 모셔 놓고 백만사(百萬事)를 의논한다면은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하고, 무슨 도를 깨닫지 못하고, 장관이나 국회의원이나 대학 합격이나 무엇이 걱정이겠느냐 그말이여. 점쟁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는 모든 재앙이나 복(福) · 불복(不福)은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으로 오면서 지은 우리의 업(業)에 의해서 받어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짓는 대로 받는 것이여.


그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 말이 잘 믿어지질 않고 '우리가 별로 죄(罪) 지은 것도 없는디 왜 이러한 액난(厄難)을 당해야 하느냐. 그것은 맞지 않는 소리다' 또 '아무개는 평생 동안 법이 없어도 살 그렇게 정직하고 그렇게 착하고 한데 왜 그러한 못 당할 일을 당하느냐. 그러니 그것도 맞지 않는 말이다' 또 '아무개는 그렇게 평생을 사기를 처묵고 살고 못된 짓만 하고 살아도 그렇게 잘사는 걸 보면 그거 다 인과(因果)라는 게 멀쩡한 소리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마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그런 현생보(現生報)가 있어요.

그런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받는 것을 현생보(現生報)라 그러고, 금생에 지어 가지고 이 다음 생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라 그러고, 또 금생에 지어 가지고 저 몇 생을 가 가지고 훨씬 뒷 생에 가서 받는 그러한 것을 갖다가 순후보(順後報)라 그러는 거여.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이렇게 세 가지로 지은 원인에 따라서 그 결과를 받게 됩니다.

금생에 지어 가지고 금생에 당장 받는 예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고 금생에 지어...(녹음 끊김).


삼생(三生)을 다 환히 보는 성현들의 말씀에 의지하면,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받게 되기 때문에 혹 금생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해도 금생에 그 과보를 안 받는 경우도 있고, 금생에 그렇게 착한 일을 하고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금생에 그 좋은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종류로 받을지언정 기어코 언제 받던지 자기가 지은 것은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받고, 악한 것은 악한 대로 그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터럭끝 만큼도 차이가 없습니다.

컴퓨타(computer)로 따지고, 전자계산기로 따진 것보다도 훨씬 더 정확한 것이 이 인과(因果)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 컴퓨타는 그 재료를 거기다가 넣는 그 범위 내에서만 나오는 것이지, 그 재료를 넣지 아니하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과의 법칙은 자기가 지은 원인에 따라서, 이것은 행동[身]뿐만이 아니라—행동으로 살생을 하고, 행동으로 도둑질을 하고, 행동으로 음행을 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죄를 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말[口]로 짓는 죄 또 생각[意]으로 지은 것까지도 하나도 어김없이 다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죄는 소승적(小乘的)인 계율(戒律)로 보면, 속으로는 누구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만 죽이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또 현대의 모든 법률도 마음으로 온갖 도둑질을 하고, 온갖 못된 짓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행동으로 범하지만 않으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우리의 인과의 법칙에 있어서는 속으로 생각을, 행동으론 옮기지 안 했어도 속생각으로만 한 생각 먹었다 하더라도 이미 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승법,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그 모든 행동의 근원이 되는 생각을 바르게 다스려 나가도록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으로 남을 도울 생각, 좋은 생각을 하면 그 좋은 생각으로 인해서 우리는 천상(天上)에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또 생각으로 '누구를 죽이리라, 무엇을 훔치리라, 누구하고 무슨 음행을 하리라' 이러한 생각을 먹어도 이미 그 사람은 지옥(地獄)에도 갈 수가 있고, 축생(畜生)에 떨어질 수도 있고 그러한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우리는 천당(天堂)에도 갈 수가 있고,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서도 독사가 될 수도 있고, 소가 될 수도 있고 또 지옥에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최상승법에서는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지도 아니하고 천당에 가기를 바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러냐?

지옥에 가면, 한 생각을 일으켜서 지옥에 가기를 싫어하는 마음을 내도 이미 한 생각이 움직였기 때문에 육도(六道) 중에 어느 곳엔가는 우리는 떨어지게 되는 것이고, 또 천당에 가기를 원하지를 않지만, 천당에를 가기를 원하나 원하지 않으나 이미 한 생각은 동(動)한 것이기 때문에 육도 중에 어느 곳엔가는 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공덕(功德) 만큼 다 받으면 다시 또 떨어지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천당에 가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는 천당에만 가면은, 천당에 가는 것이 모든 자기 종교를 믿는 구경(究竟)에 목적으로 삼고 있지만, 천당에 가는 것 별로 좋지 않습니다. 천당에 가 봤자 자기가 지은 만큼 다 복(福)을 받으면 다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활을 하늘에다 대고 쏘면 그 힘이 다하면 다시 지상에 떨어지는 거와 똑같은 것입니다.(37분51초~52분6초)





(4/4)----------------


그런데 그 천상도 옅은 데로부터서 저 높은 데에 이르기까지 한량이 없습니다마는, 그 천상 가운데에 도솔천(兜率天)이라 하는 곳이 있어.

도솔천에도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는데, 외원궁(外院宮)에 가도 거기에는—이 지구가, 이 세계가 온통 불이 나 가지고 불로써 온 세계가 다 타 버리는 때가 언젠가는 옵니다마는, 그 불이 도솔천 외원궁까지는 그 불길이 닿아서 타 죽습니다. 그런데 그 내원궁(內院宮)에는 그 불길이 미치지를 못해요.

그래서 성현들이, 앞으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강림(降臨)하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이 그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계시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도 인도(印度)에 가비라(迦毘羅 kapila) 왕국에 삼천년 전에 태어나시기 전에 그 도솔천 내원궁에 계시다가 이 사바세계에 오셨고, 앞으로 56억 7천만 년 뒤에 이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출현하실 미륵 부처님, 미륵불(彌勒佛)도 현재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지금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참선하는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몸을 받아나되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기를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가면 바로 미륵 부처님을 비롯한 많은 성현(聖賢)들을 친견(親見)할 수가 있고, 거기 가서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빨리 이 사바세계에 내려와서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리라 이러한 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도솔천 내원궁을 제외하고는 다른 천상에 태어나 봤자 그것은 영원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우리는 별로 좋아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난 것도 바래지 아니하고, 또 지옥에 태어나는 것도 싫어하지를 아니하고 무엇을 생각하느냐?


'이 무엇고?'


좋은 일을 봐도 '이 뭣고?',

궂은 일을 봐도 '이 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아도 '이 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몸에 병이 나도 '이 뭣고?',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분일초를 등한(等閑)히 보내지 아니하고 '이 무엇고?'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우리의 생각 생각을 돌이킬 때에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을 틈을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들어붙지 못하는데 무슨 삼재(三災)가 우리에게 붙을 것이냐 그말이여.

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그 말이여.



여러분이 잘 아신 바와 같이 부처님이 과거 인행(因行) 때에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을 하고 계시는데, 잠잘 중도 잊어 버리고 밥 먹을 중도 잊어 버리고 그 설산 속에서 고행을 해 가지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境地)에 들어갔다.

어데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제행(諸行)이라는 것은 모든 행이,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존재와 모든 현상이 다 이것이 무상(無常)한 것이요, 무상하기 때문에 이것이 생멸법(生滅法)이다 그말이여. 나 가지고는 없어지고, 나 가지고는 변해서 없어지고 다 이것이 생로병사(生老病死)다—그러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이여.


그 노랫소리가 너무너무 맑고 아름답다 그 말이여. 그래서 눈을 번쩍 뜨고 앞 뒤 옆을 다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다 살펴봐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 훌륭한 노래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어.

그래서 잘 살펴보니까 저만큼 그 왕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은 세 개가 붙은 독수리 손가락을 한, 그리고 뿔이 돋힌, 사람을 생으로 막 잡어먹고 피를 빨아먹는 나찰(羅刹) 귀신이 금방 덮쳐 올 것 같이 무서운 형상을 하고 노려보고 있다 그 말이여.


저런 나찰 귀신의 입에서 그러한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한 훌륭한 법문이 울려 나올 것 같지는 않으나, 그 나찰 귀신 말고는 아무한테도 그럴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행여나 하고 나찰 귀신 보고 물어봤다 그 말이여.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하는 그 노래를 금방 니가 불렀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뭐라고요? 지금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시치미를 뚝 딴다 그 말이여.


"정말 니가 그 노래를 불렀다면 반드시 그 노래의 뒷 구(句)가 있을 테니 그 뒷 구를 한 번 나에게 일러다오" 간절히 청(請)을 했습니다.

그러니 나찰 귀신이 "나는 배가 고파 죽겄다. 나는 당장 너를 잡어먹어야겄어" 그러면서 달라들라고 그러니까,


"좋다! 니가 그 다음 구절만 일러준다면은 내 몸을 너한테 던지리라"

"내가 널 일러주면은 도망가려고 그러지?"


"아니다. 니가 그것이 의심스럽다면은 내 몸뚱이는 다 니 입에다 넣어놓고 내 귀만 내놓고 일러다오"

그러니까 나찰 귀신이,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멸(生滅)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낙(樂)이 되느니라, 아! 그 노래를 부르는데 그 설산동자(雪山童子)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어.


'내가 이러한 좋은 법문을 듣고 나만 깨달라 가지고 나찰 귀신의 밥이 된다면은 안될 일이다. 나 말고도 한량없는 중생(衆生)이 있는데 나만 알고 죽어서는 안되겄다'

이래 가지고 바위에다 나무에다 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 그 법문(法門)을 갖다가 막 썼습니다. 손가락을 깨물어서 피로써 그 법문을 갖다가 써 놓고서 나찰 귀신의 입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찰나간(刹那間)에 온 하늘과 땅에서는 장엄(莊嚴)한 하늘나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그 무서운 나찰 귀신은 간 곳이 없고, 찰나간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의 모습으로 변해 가지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설산동자를 공경스럽게 두 손으로 받들어 모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반경(涅槃經)』에 있는 법문인데, 설산에서 설산동자만이 그러한 경계가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여지없이 이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재앙을 만나고 어떠한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때 그 슬픔에 빠지지 말고 가슴 아픈 데에 빠지지 말고, 노여움에 빠지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한다면, 그 노여움과 슬픔과 괴로움은 찰나간에 나를 깨달음에 이끄는 불보살의 따뜻한 화현으로 변할 것입니다.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헌디  석양재오서(夕陽在吾西)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허니  석양(夕陽)이 재오서(在吾西)로구나.

돌아와서 빈 방에 앉었으니 석양은 이미, 태양은 내 서쪽에 있구나.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하다가 금생에 겨우 불법을 만나 가지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서, 이 최상승법을 만나서 이 참선 공부를 하려고 하니 벌써 나이가 육십, 칠십이 되었구나.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부터 계해년 첫날이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52분7초~1시간8분36초) (끝)





[법문 내용]


(게송)해천공활월성륜~ / 용화사에서 나눠 드리는 무량겁 삼재를 소멸하는 부작, '이뭣고?' / 삼재의 원인인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회향(回向)해야 / 유심(有心) 무심(無心)으로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을 물리치려고 한다면 다 그르친 것 / 혼침 산란은 번뇌망상으로부터서 성불하려는 생각, 열반(涅槃)에 들리라고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전부가 다 이 혼침 산란의 원인 / (게송)막장한학해~ / 자기의 한 생각이 진실하고 간절(懇切)하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혼자 하기보다는 좋은 도반(道伴)들과 또 선지식(善知識)을 의지해서 우리가 모여서 공부를 해야 /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 / 현생보(現生報), 순생보(順生報), 순후보(順後報) / 인과의 법칙은 어김이 없다.


참선 수행인들은 내생(來生)에 도솔천 내원궁에 태어나기를 원(願) /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한다 / 『열반경』에 있는 설산동자 법문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 진실한, 간절한 한 생각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한다면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의 불보살(佛菩薩)로 화현(化現)을 하는 것.


(게송)귀래좌허실~ /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른다 /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아까 「배가, 그 달빛이 파도에 찬란하게 부서지면서 반짝거리는 그 파도 속에 배가 동서남북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것은 뱃사공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게송(偈頌)을 읊었습니다마는,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우리 중생들도 마치 찬란한 달빛이 반짝거리는 파도 위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동쪽으로 가느냐 서쪽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축생으로 가느냐 아귀도에 가느냐, 온전히 우리의 마음 하나에 달렸어. 천당(天堂)에 가려 하면은 천당에 갈 짓을 하면은 천당에 가는 게고, 지옥(地獄)이나 축생(畜生)으로 가려면은 지옥이나 축생으로 갈 짓을 하면 되는 것이다.


어째서 한 생각 참으로 간절하지 못해 가지고서 (간절하지) 못한 것은 책망을 하지 아니하고 혼침 산란만을 책망을 할까 보냐 이 말이여. 참으로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돈발(頓發)한다면 어디에 혼침이 있으며, 어디에 산란심이 있겠느냐!


부처님 말씀에, '좋은 도반을 얻는 것은 도를 다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 하셨습니다.


설사 과거에 어떤 지은 업(業)에 의해서 삼재가 우리에 붙은다 하더라도 그 삼재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이 뭣고?'를 듦으로 해서 그 삼재(三災)는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 변할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에게 붙기 위해서 전후좌우에 엿보고 있다가도 '이 뭣고?'를 들면, 그 마구니가 찰나간에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로 변해질 것이다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헌디 월락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르고 흘러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어떠한 물이고 흘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로 돌아가듯이, 우리가 바른 법을 믿고 한 생각을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열심히만 해 가면 갈 곳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에 이르는 거여.

왜 그러냐 하면, 저 달빛이 바다에 비춰, 호수나 물에 비추어서 분명히 물속을 보면 그 달이 물에 와 있지만—천만 개의 호수, 천만 개의 물에 달이 비치지만, 달이 떨어진 것이 아니여. 달은 하늘에 조끔도, 한 걸음도 하늘을 여읜 것이 아니더라.


혼침 산란이, 혼침 산란이 전체가 본래(本來) 본지풍광(本地風光)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본지풍광인데 그놈을 버리려고 하면 버려질 것이며, 쫓으려고 하면 쫓아질 것이냐 그 말이여. 물속에 있는 달을 그놈을 건지려고 하면 건질 거여? 무슨 놈의 달이 물속에 들어와 있을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아무리 중생(衆生)의 업(業)이 지중해서 육도윤회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게 육도윤회(六道輪廻)가 아닙니다.

조끔도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이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인 것입니다. 진묵겁(塵墨劫) 전(前)에 우리 성불이여. 그러니 찾지도 말고 버리지를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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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0. 9. 23. 07:57

 

 

((No.178))—1982년(임술년) 하안거 해제(82.08.04) (52분)

(1/3) 약 20분. (2/3) 약 18분. (3/3) 약 14분.

(1/3)----------------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작야강남우(昨夜江南雨)에, 어젯밤 강남 비에,

동정추수심(洞庭秋水深)이로구나. 동정(洞庭)에 가을 물이 깊구나.

 

일엽고주객(一葉孤舟客)이 월중천리심(月中千里心)이라.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가는 손[客]이 달 가운데에 천리(千里)의 마음이더라.

 

 

오늘은 임술년 여름 안거 해제일입니다. 동시에 백일기도 회향(廻向)날이기도 합니다.

음력 4월 15일에 결제를 해 가지고 음력 7월 15일 백중날에 해제를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금년은 4월에 윤달이 들어서 그래서 6월 15일에 해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동서남북 사방에서 여름 결제를 한 비구 · 비구니 수행 납자(衲子)들이 망월사 또 도봉산에 원효사, 의정부 회룡사, 저 전라도 맨 끄터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또 부산에서는 대성암 이런 모다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다가 해제를 맞이해서 이렇게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운집(雲集)을 했습니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도 각기 자기 인연 따라서 여기저기에서 정진을 하고서 오늘 해제일에 몇십 리, 몇백 리를 걸어서 부처님 회상(會上)에 모여 가지고 자자(自恣)라 해서 빙 둘러서 앉아 가지고 자자의 의식을 거행을 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이 법요식(法要式)은 맨 먼저 부처님께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안거(安居) 동안에 나에게 수행에 방해가 될 만한 법도에 어긋난 일이 있으면 대중은 자비심으로 그것을 지적을 해 주시오" 이렇게 대중을 향해서 부처님께서 몸소 제일 먼저 자자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대중이 아무 말이 없으면 그 허물이 없었던 걸로 인정을 하고 또 그 다음 목련존자, 또 사리불존자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차례대로 그러한 법요식이 진행이 되었습니다.

 

물론 부처님께는 무슨 허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법(法)을 존중하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맨 먼저 그렇게 대중에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물었을 때에 맨 위에 첫자리에 앉았던 목련존자나 또는 가섭존자나 사리불 그러한 수제자가 부처님 곁으로 경건하게 가까이 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그 자자(自恣)를 할 때에는 왼쪽 무릎은 땅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우고서 합장을 하고 대중에게 묻는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물으실 때에 그 옆에 있던 맨 윗자리 제자가 부처님께 다가가서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면서,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시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부처님께 무슨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이렇게 해서 공경스럽게 부처님을 일으켜드림으로써 다음 사람으로 그 법요식은 진행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그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설법을 하시고 제자들을 이끌으시고 하는 그 생생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라 해서 수천 년간을 푸대접을 받아왔었지만 근자에 이 소승불교 『아함경(阿含經)』과 같은 이러한 경전이 새롭게 학자들에 의해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되고 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자자를 행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해서 '석 달 동안 어떻게 수행을 했는가? 수행을 하는 동안 행여나 자기에게 어떤 잘못이 없었던가? 다른 대중에게 어떠한 피해는 끼친 바가 없었던가? 자기로 인해서 불법(佛法)에 누명(陋名)은 끼치지 않했던가?' 이렇게 해서 반성을 하고, 자기 혼자 반성을 할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그것을 지적해 달라고 스스로 간청하는 그러한 법요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지금도 해인사나 그 밖에 총림(叢林)에서는 이러한 법요식이 거행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대단히 좋은 법도(法度)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해제 법요식을 맞이해서 여기에 모이신 비구 스님 또는 비구니 스님 또 여러 청신사 · 청신녀,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낱낱이 부처님 당시에 행해졌던 그 자자(自恣) 법요식을 경건한 마음으로 상기하면서, '스스로 자기에게 어떠한 수행상에 잘못은 없었던가? 부처님 법도에 어긋나는 그러한 일은 없었던가? 나로 인해서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입힌 바는 없었던가?'

고요히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을 해서 행여나 잘못이 있으면 그러한 잘못은 이 자리에서 참회를 하시고, 앞으로 수행해 나가는 데에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청정하게 원만하게 수행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가 한 철, 한 철을 거듭해 나갈 때마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을 바로잡아 나가고 자신의 수행을 올바른 궤도에 올려 나간다면, 결정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성취하고 말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하면 걸망을 짊어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오대산을 가느냐, 설악산을 가느냐 또는 남해를 가느냐?' 이렇게 걸망 귀신이, 벌써 반살림 지나면 걸망 귀신이 들썩들썩한다고 옛날부터 그런 말이 전해 내려오고.

겨울철에는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勇猛精進)이 끝나면 벌써 그때부터서는 걸망 귀신이 동요가 되아 가지고 정진할 마음은 벌써 들떠버린다고 그런 말이 있어 왔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반살림이 지내면서부터 더 열심히 정진들을 하시고 해제에 임박해서는 더 모다 가행정진(加行精進)들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회룡사나 망월사, 원효사 그 밖에 강진 백련사 그런 데서도 여러 대중들이 많이 오셨습니다마는 거기서도 각각 못지않게 정진들을 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다른 사람을, 물론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일체 중생을 참으로 위하려면은 우선 자기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이것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고행 정진을 하게 된 만큼, 오늘 해제한 뒤에 참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동안에 석 달 동안은 삼복더위 중이라 대단히 정진하기가 어려웠을 줄 생각합니다. 그러한 더위 속에서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하셨거든 하물며 앞으로 넉 달 반이라고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겨울 결제를 할 때까지는 넉 달—다른 해에는 석 달밖에 없었는데 금년은 윤달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넉 달 반이라고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기간은 춥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는 그러한 좋은 계절입니다. 어쨌든지 그 긴 좋은 기간을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동안에 여기서 저기서 모다 정진하고 오신 스님네들로부터서 여러 가지 그 정진에 관한 문의를 해 왔는데, 정진이란 게 '화두(話頭)를 어떻게 단속(團束)해 나가느냐?' 한마디로 말해서 화두 하나만을 잘 잡드리할 줄 안다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다 따라오는 것인데.

사실 정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 그러면 서서 종일 일을 하고, 종일 말을 하고, 종일 서성거려도 상관이 없느냐 하면, 앉은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또한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이것입니다.

 

참으로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한 이 뜻을 잘 못 이해한 사람은 ‘좌(坐)에 있지 않다’ 그 말에만 잘못 집착을 하면, 공연히 서서—정진은 진짜 속으로는 되지도 아니하면서 공연히 미친 사람처럼 나부대고 설쳐 대는 데에 가까웁게 될 것이고.

또 ‘좌(坐)를 여의지 않는다’한 그 말에만 집착을 한다면, 너무 앉은뱅이처럼 앉아서만 하는 것만이 공부라고 해서 좌에 국집(局執)하는 그러한 잘못된 정진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좌(坐)에 국집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공연히 설쳐 대서도 아니 될 것이고, 또 ‘좌를 여의지 아니한다’해 가지고 너무 좌(坐)에만 국집하는 것도, 그것도 올바른 정진이 아닐 것이다.

 

이 두 가지 뜻—‘좌에 국집하지도 아니하고 또한 좌를 여의지도 아니한다’고 하는 이 두 가지 뜻을 참으로 올바르게 인식을 한다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가 다 좌(坐) 아님이 없을 것이고.

이 도리를, 이 두 가지 뜻을 잘 이해를 못한다면 비록 좌(坐)를 여의지 아니한다 해도 참다웁게 좌선(坐禪)을 못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으로 넉 달 반에, 그 긴 좋은 기간 동안에 좌(坐)에 국집하지도 말고 또한 좌(坐)를 여의지도 아니하면서 정진을 알뜰히 해 주실 것을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처음~20분13초)

 

 

 

(2/3)----------------

 

그동안에 혹 어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하러 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좋은 도반(道伴)을 찾아갈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어느 성지(聖地) 도량에 순례차 떠날 분도 있을 것이고 또는 건강상 휴양차, 건강을 위해서 어느 의원을 찾아가거나 또는 약을 먹기 위해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거나 또는 모래찜을 하기 위해서 강변이나 해변을 찾아가시는 도반도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어디를 가시건, 누구를 만나러 가시건, 어데 가서 무엇을 하건,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은 가야 할 데도 있고, 만나야 할 곳도 있을 것이고, 만나 해야 할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때 그 장소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여의지 아니한다면 어데 간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누구를 만난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어데를 가서 강에 몸을 담그거나 모래 속에 몸을 묻거나,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그거나 또는 어느 계곡 어느 봉우리를 발로 등산을 하고 거닌다 하더라도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한 마음, 한 생각에 있을 것입니다.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한데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러니, 꿈을 꾸고 있을 때에는 분명하게 육도(六道)가 있더니—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귀도 있고, 희로애락이 있고 생로병사가 있고.

분명히 그 꿈속에서는 그러한 육도가 있더니, 각후(覺後)에는 공공무대천(空空無大千)이로구나. 깬 뒤에는 비고 비어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없어져 버렸다 그말이여.

 

꿈속에 돈 뭉탱이를 주섰다. 하! 이런 보배 뭉탱이를 주섰다.

'이러한 좋은 보배를 평생에 갖고 싶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내가 얻었던가!' 그렇게 기쁘고 흐뭇하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꿈을 딱! 깨고 보니까 그렇게 좋아하고 만지작거렸던 그 보물이 간 곳이 없더라.

꿈속에 그 독사란 놈이 물려고 쫓아와서 그 진땀을 흘리고 두려운 공포에 떨었었는데 탁! 눈을 뜨고 보니까 그 혀를 널름거리고 달라들었던 독사가 간 곳이 없더라.

 

천당과 지옥도 중생의 환몽(幻夢)—환상(幻想)의, 환각(幻覺)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천당이 있었고 지옥이 있었고 축생이 있었지만, 중생의 그 환몽을 깨버린다면 천당도 간 곳이 없고 지옥도 간 곳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하셔 가지고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6년의 그 피나는 고행을 하셔서, 마침내 납월팔일(臘月八日) 동천(東天)에 뜬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는데,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49년 동안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을 설하셨는데, 깨달으신 것이 무엇을 깨달렀냐?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설하신 것이 무엇을 설하셨냐 하면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여.

 

처음에는 바로 그 환몽(幻夢)을 깨는 법을 설하셨지만, 중생의 근기(根機)가 하열(下劣)해서 아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알아듣기 쉬운, 행하기 쉬운 방편(方便)을 설하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바로 이 깨는 법을 여지없이 설하셨다 그말이여.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용궁(龍宮)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법이 한 자(字)도 빠짐이 없이, 한마디도 빠짐이 없이 전부 다 용궁에는 그것이 다 용왕에 의해서 그것이 다 보관이 되어 있지만, 그 용궁에 있는 경전 속에도 이 활구참선법은 없다 이것입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것은 교외별전이기 때문에 경전에는 없는 것이다 이 말씀이여.

 

그 교(敎), 경(經) 중 가운데에는 없는 이 활구참선법이 달마대사(達摩大師)에 의해서 천오백 년 전에 중국에 전해졌고, 이조 혜가(二祖慧可), 삼조 승찬(三祖僧璨), 사조 도신(四祖道信), 오조 홍인(五祖弘忍),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를 거쳐서 오늘날에까지 그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이 활구참선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활구참선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여.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입니까?"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에 털이 났는니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묻는데,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 했으니, ‘어째서 조주는 무(無)라고 했는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웁고 너무 가까와서 그래서 하기가 어렵고, 잘되어도 잘된 줄을 모르고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어... (녹음끊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로 가르켜 줄 수 있는 스승을 자주 만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애써서 공부를 해 가지고 중대한 고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비를 잘 단속해 나갈 줄을 모르고, 공연히 거기서 스스로 분별심을 내 가지고 공연히 주저하고 망설이고 갈팡질팡하고 스스로 혐의심(嫌疑心)을 내 가지고 아까운 고비를 헛되이 지내버리는 예가 종종 있습니다.

 

『서장(書狀)』에 대혜(大慧) 스님의 법문을 보면,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아니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시간이 지루하고 몸부림이 처지고, 나귀를 끌고 우물로 들어가는 거와 같고,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좌우도 끊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고비, 이러한 경계에 도달한 것이 이것이 공부가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앞으로 크게 깨닫게 될 그 이전의 경계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경계에 도달했을 때에 번뇌심을 내지를 말고 짜증을 내지 말고, 두려워서 ‘이것이 내가 이거 잘못 될라고 그런 것이 아닌가’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러서지를 말고 그러한 고비에서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겨라.

‘절대로 물러서거나 공부를 놓아버리지 말고, 잘 그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지어가는 것이 그 고비를 잘 넘기는 것이냐?’하면,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바울라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일직선으로 딱 정해 놓고서,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왔다갔다하면서,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말이여.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이 말씀이여.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그말이여.

 

또 얼마 동안 잘되어 가다가 다시 또 답답해지면 또 그 앉아서 단전호흡을 몇 번을 하면 또 시원해지면 고대로 시간을 끌고 나가고, 그렇게 해도 또 공부가 안 되면은 또 조용하게 나가서 포행을 하고.

하기는, 여러 대중이 꽈악 짜고 정진하고 있는데 그렇게 들랑날랑하면 옆에 분들이 미안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지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억지로 앉아서 그 죽비(竹篦) 칠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참 대단히 거북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옆에 분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렇게 허리가 아프던지, 그렇게 정진이 답답해서 가슴이 미어질라고 하면 조용하게 나가서 지혜롭게 정진을 해 가지고 이 고비를 넘긴다면, 그러고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게 된다 그말이여.

그래서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 된다’ 이 말씀입니다.

 

앞으로 산철 동안에는 그러한 규칙에 그렇게 크게 얽매이지 않는 계절인 만큼, 지금 산승(山僧)이 일러드린 말씀을 십분 참작해서 그 여름 더운 동안에 못다 한 공부를 이 산철 동안에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 봉을 빼도록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20분16초~38분7초)

 

 

 

(3/3)----------------

 

이 정진(精進)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방일(不放逸)인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아니 불(不)'자, '놓을 방(放)'자, '편안할 일(逸)'자.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놓아 지낸다’ 그말이여.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이 말씀이여.

 

‘정진을 한다’하면은 꼭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얽어매고 알날신심(遏捺身心)한 것을 갖다가,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라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불방일만 한다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바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화두가 들린다면 앉아서도 정진이요 서서도 정진이요, 24시간 간단없이.

장차(將次)는 참으로 정진이 익숙해지면 꿈속에서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릴 것이고, 꿈도 없고 그 깊은 잠에 들었을 때에도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떠억 들린다면 이보다 더 훌륭한 용맹정진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이 말씀이여.

 

그렇게 될라면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우리 수행인은 거기에다 목표를 두고 계속해서 정진을 다져 나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정진을 다져 간다면 무슨 파(破)해야 할 계율이 있으며, 다시 또 무슨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무슨 따져야 할 시비가 있으며, 무슨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떡이면 떡, 국수면 국수 그때그때 공양 시간이 되면 공양하고, 잘 시간이 되면 자고, 울력 시간이 되면 울력을 하고, 소지(掃地) 시간이 되면 소지를 하고, 또 빨래를 할 시간에는 빨래를 하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비구 250계(戒), 비구니 348계, 또는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자심(自心),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백일기도 회향일인데,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들은 바로 용화사 법보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하는 보살님과 그 근본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백일기도에 들었기 때문에, 그 백일기도에 들은 그 정성에 의해서 이 용화선원이 잘 운영이 되었기 때문에 여러 스님네들이 정진을 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 선원이 잘 운영되어 가는데 여러분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그동안에 살았겠느냐 그말이여.

법회 때 나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법문을 듣고 가셔서 댁에서 이 활구참선법, 참선을 댁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서 참선을 하셨으니 어찌 그것이 이 용화선원에 방부를 들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말이여.

 

바로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雙)으로 닦으신 분들이다 그말이여. 복을 지어서 선원을 잘 운영해 나갔으니 한량없는 무루복(無漏福)을 닦은 것이고, 또 여러분도 가정에서 참선을 열심히 했으니 최상승법을 닦아서 무루혜(無漏慧)를 닦은 것이 된다 그말이여.

 

‘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백일기도 회향이 바로 오늘입니다.

 

‘백일기도가 끝났으니까 인자 나는 뭐 닦아야 할 복도 없고, 닦아야 할 혜도 없다’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산철 동안 열심히 정진을 해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고, 상(相)에 떨어지지 않는 정진을 해 나가시면, 또 다시 음력 10월 15일이 들면 그때 또 백일기도에 동참을 하시고, 또 가정 형편이 허락이 되면 또 여기에 정식으로 방부를 들여서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셔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그 공덕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크고 작은 소원이 반드시 성취가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진로형탈(塵勞逈脫)—티끌 수고로운 거, 생사진로(生死塵勞) 생사해탈하는 것이 이 일이 조그만한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밀하게 승두(繩頭)를 잡아서—화두를 놓치지 말고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바탕 이 추위가 뼛골 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을 것이냐.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코를 치는 그러한 향내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겨울 날씨가 이상(異常) 기온이 되어가지고 뜨뜻해서 강추위를 아니하면 그런 끝에 핀 매화는 향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매화꽃이 그러듯이 우리가 정말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뼛골에 사무치는 그러한 간절하고도 알뜰한 정진을 하지 않고서 어찌 고불조(古佛祖)와 같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을까 보냐 이 말씀이여.

 

이 게송은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입니다. 수행 납자(衲子)가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이라고 생각이 됩니다.(38분8초~51분49초)(끝)

 

 

 

 

[법문 내용]

 

(게송)작야강남우~ / 자자(自恣) 법요식 / 자기의 생사해탈,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정진하는 것 / 정진이란 '화두를 어떻게 단속을 하고 어떻게 거각(擧却)하느냐'하는 것 / 참선은 '좌(坐)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또한 좌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

 

(게송)몽리명명유육취~ / 부처님께서는 확철대오를 하셔 가지고 환몽(幻夢)을 깨신 것이고, 49년 동안 설하신 것은 그 환몽을 깨는 방법을 설하신 것이다 /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 / 화두를 들어도 아주 안될 때, 지혜스럽게 잘 단속을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 한결 정진이 수월하고 공부가 한 단계 힘을 덜게 되는데, ‘그 힘을 덜게 되는 것[省力]이 바로 정진에 힘을 얻는 것[得力]이다.

 

불방일(不放逸)하는 것이 참다운 용맹정진 / 한 생각 돌이켜 화두를 들어나가면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는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 /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과 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 우리도 불제자(佛弟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황벽 스님께서 우리 후래(後來) 불자를 위해서 일러주신 게송. 수행인이 하루 한때라도 잊어서는 안될 그러한 좋은 좌우명(座右銘).

 

 

스스로 자(自)자, 물을 자(恣)자, '자자(自恣)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스스로 묻는다’ 무엇을 묻느냐? 하면, ‘자기에게 어떠한 허물이 있었던가?’하고 각자 자기의 허물을 대중에게 물어 가지고, 자진해서 대중으로부터 자기의 허물을 직접 지적해 주실 것을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참선은 앉아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坐)를 여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참뜻을 안다면, 종일 앉아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는 일이요, 종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한다 하더라도 정진은 여일(如一)하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여.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한데 뭉쳐서 삶아서, 거기에 아주 그걸 농축을 해 가지고 뽑아낸 거여.

바로 이 활구참선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어요. 물론 깨달은 분이 보면은 글자마다, 한 말씀마다 바로 활구참선 아닌 것이 없지만, 그것은 깨달은 눈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의 눈에는 활구참선법은 팔만대장경 속에는 없는 것이고.

 

문헌에 오른 공안(公案)만 해도 천칠백(千七百) 공안이여. 천칠백 화두인데, 어느 공안이나 좋고 나쁘고 한 것이 없어.

그러나 자기가 믿는, 자기가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못되건 따지지 말고, 그 한 공안상에 대의단(大疑團)을 일으켜서 그 의단 하나만을 간절히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결국은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어진 단계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어깨가 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 같고, 이 오목가슴에 무슨 뭉텅이가 생겨 가지고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소화도 잘 안되고, 화두를 들어도 머리는 먹먹해 가지고 영 애를 먹을 때에, 그럴 때에는 앉아서 억지로 견뎌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조용하게 일어나서 적당한 장소에 한 4~50미터를 일직선으로 코스를 딱 정해 놓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왔다갔다하면서 그 가운데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그러면은 그 답답하고 복잡하고 하는 것이 스르르르~ 하니 그것이 없어지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게 한 5분 내지 10분을 그렇게 포행을 하고서 시원해지거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허리를 쭈욱 펴고 극히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보라. 아주 개운하고 시원하게 화두가 들릴 것이다.

 

정진(精進)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방일(不放逸)인 것입니다. 불방일(不放逸). '아니 불(不)'자, '놓을 방(放)'자, '편안할 일(逸)'자. ‘방일(放逸)하지 않는다’

‘방일한다’고 하는 것은 ‘그럭저럭 놓아 지낸다’ 그말인데, 그럭저럭 놓아 지내지 아니한 것이 그것이 '참정진'이다.

 

‘정진을 한다’하면은 아주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 그 정진상(精進相)을 지어서 막! 이 몸을 갖다가 알날신심(遏捺身心), 몸과 마음을 억지로 구속하고 얽어매 가지고 몸을 못살게 구는 것을 갖다가 가행정진이다 또는 용맹정진이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진짜 정진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참다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는 글자 석 자를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만을 알뜰하고 간절하게 단속해 나간다면, 계율을 의식적으로 지킬려고 안 해도 저절로 모든 계율이 지켜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계(大乘戒)요, 최상승계(最上乘戒)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법의 근본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활구참선을 여법(如法)하게 해 나가면, 계(戒)의 지키는 상(相)이 없이 저절로 모든 계가 지켜져 버리면 이것을 바로 최상승계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六祖) 스님께서는 『법보단경(法寶壇經)』에 그 마음 그름이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계(戒)요, 마음 어지러운 것 · 산란한 것 없는 것이 자성(自性)의 정(定)이요, 마음에 그름 · 허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 자성(自性)의 혜(慧)라, 이렇게 설파를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분이 복(福)과 혜(慧)를 가장 원만히 구족하신 분이냐?’하면은 바로 부처님이야말로 천상천하에서 복혜(福慧)를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신 어른이다.

그래서 삼귀의(三歸依)를 할 때에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두 가지가 족[兩足]한 최고의 높으신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다'하는 것은 바로 ‘복(福)과 혜(慧), 두 가지가 구족하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에 의해서 닦아 가는 불제자로서 그 두 가지를 구족하도록 노력을 하고 정진을 한다면 우리의 정진은 결단코 삿된 데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20. 5. 19. 10:49

(No.198)—1983년 4월 첫째 일요법회(83.04.03) (44분)

(1) 약 22분. (2) 약 22분.

(1)-----------------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데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4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어. 이것을 얻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얻는다. 그리고 응재수(應在手)라. 응하는 데에는 손으로 응(應)을 한다 그말이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눈달, 겨울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그 눈이 쏟아지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 그 봄바람 속에 꽃이 피어.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눈 내리는 속에 달이 뜨며, 봄이 돌아오면은 동풍이 부는데 그 동풍이 부는 속에 꽃이 피어난다 그말이여.


우리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진(六塵)이 우리의 마음에 비추어졌을 때 그게 '마음에 얻는다'

마음에 그러한 육진이 비추어지면 그것을 상대하게 될 때에는 손으로 글씨를 쓰게 될 때는 글씨를 쓰고,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일을 하고, 그것이 응할 때에는 손으로 그것을 응하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일신상(一身上)에는 그러려니와 우주법계에 자연계에 있어서는 겨울에는 눈이 내리고, 가을에는 휘황창 달이 밝고, 봄이 오면 동풍이 불고 꽃이 피는 것이여.

이렇게 하기를 몇억만 겁(劫)을 그렇게 해 내려왔다 그말이여.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는데, 새벽이 돌아오면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이 되면은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곳곳마다, 산이나 들이나 집이나 골짜구니마다 울긋불긋 꽃이 피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달이 법회를 열고 무슨 말을 할 말이 있느냐? 무슨 기특하고 재미있는 얘기 거리가 있는 것이냐?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법상에 올라오며, 무엇을 듣기 위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이렇게 법보전(法寶殿)에 이렇게 모이시는 것이냐?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성현들은 이 문제를 해결을 했는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서 사방으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인가.


천 번 만 번 법문을 듣고 서울로 지방으로 법회를 법문을 들으러 다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냥 마찬가지여.

법문을 들을 때에는 가슴이 좀 후련하고 무엇인가 얻은 바가 있는 것 같다가, 한 시간 두 시간 지내고 하루 이틀이 지내면 도로 답답하고 방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말이여.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일용 생활,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여의고 그놈을 떠나서—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잡고, 발로 걸어 다니고, 마음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놈을 버리고, 그놈을 떠나서 나의 자성(自性) 자리가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그놈을 버리고 찾겠지만, 그놈을 떠나서는 세상없이도 없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마음만 급하고 마음만 바뻐.

‘내가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오늘도 이렇게 그럭저럭 하루가 지냈구나!’


‘이러한 모다 그 이런 복잡한 일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한다’

남편 때문에 못하고, 자식 때문에 못하고, 살림살이 때문에 못하고, 병 때문에 못하고, 그러한 것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고 마음만 조급하다 그말이여.


마음이 조급하니까 짜증만 내고 신경질만 내고 일체 생활에 안정을 잃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평과 불만이 가뜩 차있어. 그러니 무슨 일을 한들 그 일이 제대로 되며, 무슨 공부가 될 것이냐 그말이여.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그말이여.

기회,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기회와 경계상에 그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턱! 잡어서 써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는 바로 거기서 잡아 낚아채야 하고, 귀로 무엇을 소리를 들을 때에는 듣는 그 찰나에 퍼뜩 잡아서 써야 해.


속담에 '번갯불에 콩 구어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번갯불 번쩍하는 그 번갯불에다가 콩을 구워 먹어.

번갯불 번쩍할 때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바늘에다 실을 폭 뀌듯이, 그 찰나를 잘 잡아 쓸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공부하는 바른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여.


선방에 3년, 10년, 20년, 30년을 다녀도 그러한 기회와 경계를 여의고 따로 공부를 지어 나가려고 그러고, 그놈을 여의고 공부를 할려고 한 사람은 아무리 애써봤자 공부에 진취가 있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쪼끔 시끄러우면 파르르 신경질을 내고, 쪼끔 복잡하면 도망할 궁리를 하고, 경계와 기회를 피하고 도피해 가지고 따로 공부를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는 일,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맞는 장소, 모든 일이 내 마음과 내 마음에 순(順)하는, 내 마음대로 되는, 조끔도 내 마음을 거슬리지 아니한 그러한 곳은 저 천상에, 하늘나라 천당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천당에 가면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고, 모든 즐겁고 기쁘고 편안하기는 하지만, 거기서는 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도(道)를 이루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신 것입니다.


천당(天堂)은 좋고 기쁘고 편안한 일만 있어서 그러한 상태에서는 발심(發心)을 할 수가 없어.

축생(畜生)이나 지옥(地獄)은 모든 일이 괴로움만 있어서 괴로움이 지나치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우리의 근기(根機)로 그것을 이겨 나갈 수가 없어.


오직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이 사바세계는 내 마음에 합당한 일도 있고, 기쁘고 편안한 일도 있으려니와 슬프고 괴롭고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도 있어서 우리가 분심(憤心), 발심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일부러 무상(無上)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해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해탈도를 증득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사바세계에도 오셨는데, 우리는 과거에 무슨 수승한 인연이 있어서 다행히 금생에 이 사바세계에 왔습니다.

이 '사바세계가 좋다'고 하는 것은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좋다는 것이여.


그런데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피하고 슬픈 일은 피하고 기쁜 일만을 찾고, 괴로운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을 찾고, 시끄러운 것을 피해서 조용한 것만을 찾고,

벌써 시끄러운 것을 버릴려고 할 때에 그르쳐 버렸고, 다시 편안하고 즐거운 곳을 찾을 때에 두 번째 어긋나 버리는 것입니다. 계속 어긋나고 그르치기만 해 가지고 언제 바른길을 한 걸음이라도 갈 수가 있느냐 이말이여.


공부하는,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처음~21분5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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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면 모든 소리는—나를 칭찬하는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나, 새가 우는 소리나, 닭이 우는 소리나, 개가 짓는 소리나, 자동차 소리나, 모든 소리는 바로 부처님의 소리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 될 것이며,

내가 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색상은—저 해와 달은 말할 것도 없고 흘러가는 구름과 물, 겨울에 내리는 눈이나, 봄에 피는 꽃이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나,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나, 모든 것이 다 불색(佛色), 부처님의 몸이, 불신(佛身)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내일 일을 알고,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 축지법을 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고.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대신통을 착각을 해 가지고 소신통을 추구한 사람은 공부해 나가다가 사견(邪見)에 빠지기가 쉽고, 마구니의 권속으로 끌려가서 미치거나 삿된 경계에 빠지는 것이고.

소신통에 집착을 하지 아니하고 참으로 대신통의 위대함에 눈뜬 사람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항시 부처님에 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겠습니까.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나무~아미타불~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한디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수반지미족기(得樹攀枝未足奇)요, 나무를 얻어서 그 가지를 붙들고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것은 족히 기특한 것이 되지를 못하고,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니라. 그 낭떠러지에 그 붙잡고 있던 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지고 안 떨어지려고 매달려 있던 그 손을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탁! 놔 버릴 때 바로 대장부(大丈夫)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까 두려워서 나무가지를 붙잡고 그 안간힘을 쓴다’하는 것은 무엇을 표하는 말이냐 하면 한 마음, 일심을 얻어가지고 그 일심을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 데에다가 비유를 한 것이여.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또는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러한 주력을 하거나 그 어떠한 자기 나름대로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어떤 한 경계를 맛보아 가지고, 그 경계를 놓치지 아니할려고 그 안간힘을 쓰는데,

조끔 시끄러우면 신경질을 내고, 조끔 복잡하면 그걸 피하려고 하는 이유가 한 마음 경계를 얻어가지고...


그 시끄럽고 고요한 것, 복잡하고 편안한 것 그러한 경계에, 그러한 것에 집착을 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고 용감하게 그놈을 놔 버려. 그 한 곳마저도 놔 버릴 때에 대장부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수한야랭어란멱(水寒夜冷魚難覓)이여. 물은 차고, 밤은 냉랭(冷冷)해서 고기를 찾기가 어려워. 고기란 놈이 저 깊은 물 밑 속에 가서 가만히 숨어 버렸기 때문에 고기를 찾을 수가 없다 그말이여.

유득공선재월귀(留得空船載月歸)로구나. 빈 배에는 달만 가득 싣고 돌아오더라 그말이여.


‘참선하는 사람은 일체 경계(境界)에 집착을 해도 못쓴다. 또 경계를 버리려고 하지도 말아라’

‘어떠한 경계를 다달았어도 화두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이렇게 법회 때마다 그렇게 강조를 하고 주장을 하고 설교를 해왔는데, '한 마음마저도 놔 버려야 한다'


‘그러면 화두를 들지 말고 놔 버리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들려지면, 어찌 화두에 집착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안 되고, 공부를 바른길을 찾지를 못하니까, 자꾸 일체 경계에 다다러서 ‘그 경계를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라’ ‘화두를 놓치지 말라’ 이렇게 말을 할 수밖에는 없었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게 되면, 마침내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저절로 의단이 현전(現前)을 해서 앉아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경계가 시끄럽거나 편안하거나, 조용하거나 복잡하거나, 전혀 그러한 것에 상관이 없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게 의단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무엇을 집착을 하며,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될 때 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하고 온갖 노력을 다해서, 법문도 열심히 듣고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하도록 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피나는 노력 없이 어떻게 그러한 경계가 올 것이냐 이말이여.


‘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렇게 몸과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를 알뜰히 정진해 나가고,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속에서 일분일초도 등한히 하지 아니하고 애를 써 나간다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십시오.

오른다리를 밑으로 잡어댕기고 그 위에다가 왼다리를 올려놓고, 그리고 그 발 위에 배꼽 앞에다가 오른손 손바닥을 위에로 해서 놓고 그리고 왼손바닥을 그 위에다가 포개놓고 엄지손을 이렇게 배를 맞대셔.


그러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뜰썩뜰썩 이렇게 흔들어서 한 가운데에다가 딱 안정을 시키고,

몸을 단정하게 척량골(脊梁骨)을 세우되 어깨나 목에 힘을 다 빼고, 어금니는 지그시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혀끄터리를 갖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뜹니다.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3번 ‘준비 호흡’을 하는데, 준비 호흡은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그득하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숨을 딱 정지를 해가지고 한참동안 참는 거여.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데까지 참았다가 입을 조끔 벌리고 입으로 ‘후~’하고 숨을 다 내쉬는 겁니다. 내쉬세요. 가슴속에 한 점도 없이 다 내쉬어.(1번)


다 내쉬었으면 다시 한 번 또 코로 들어마셔. 어깨를 좀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십니다. 가뜩 들어마셔 가지고 딱! 정지를 해, 한참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내쉬는 거여.(2번)

다 내쉬었으면 또 한 번 코로 가뜩 들어마셔. 정지. 입으로 또 ‘후~’하고 다 내쉬어요.(3번)

이것이 준비 호흡이 끝났습니다. 다 내쉬었어.


완전히 다 내쉰 다음에 조용하게 인자 코로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코로 들어 마시되, 불룩하기는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면서 아랫배를 불록하게 만들면 되는 거여, 의식적으로.


아까 (준비 호흡 때) 가슴으로 들어마실 때는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제는 준비 호흡이 아니고 정식으로 단전호흡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에요. 8부(八部) 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약 8부 쯤만 들어마셔. 아랫배가 1~2cm 쯤 약간 볼록해진 듯 이렇게만 하면 되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니 내쉬는데, 입으로 내뿜는 게 아니라 입은 다문 채 코로 내쉬어요. 코로 내쉬면서 아랫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하면서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코로 들어마시면서 아랫배가 또 차츰차츰 차츰차츰 볼록해지도록 하면서 마시는 거여. 8부 쯤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면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조용하게 또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은 약 4초나 5초 쯤 들어마신 시간보다 조금 더 길게 내쉬는 거여.


내쉴 때 ‘이뭣고~?’, 속으로 그렇게 화두를 생각하면서, 화두를 들면서 숨을 내쉬는 거여.

숨을 내쉴 때에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단전호흡과 화두를 함께하는 가장 묘(妙)한 방법입니다.



죽비를 치세요.


(입선 入禪)


같이 입선을 한 이 공덕(功德)으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한 사람도 낙오됨이 없이 모두가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축원(祝願)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보배 곳,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21분52초~43분2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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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득지재심응재수~'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육근(六根) ; 육식(六識)이 경계[六境]를 인식하는 경우 그 소의(所依)가 되는 여섯 개의 뿌리. 대경(對境)을 인식하게 하는 근원적 요소. 곧 심신을 작용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서, 눈(眼根) · 귀(耳根) · 코(鼻根) · 혀(舌根) · 몸(身根) · 뜻(意根)의 총칭이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indriya 근(根)은 기관 · 기능을 뜻함. 육입(六入), 육처(六處), 육적(六賊), 육문(六門)이라고도 한다.

*육진(六塵) ; 육경(六境). 육근(六根)의 대상 경계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말함. 이것은 마음을 더럽히므로 육진(六塵)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ṣaḍ-viṣaya 경(境)은 대상을 뜻함.

①색경(色境).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인 모양이나 빛깔. ②성경(聲境). 귀로 들을 수 있는 대상인 소리. ③향경(香境). 코로 맡을 수 있는 대상인 향기. ④미경(味境). 혀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맛. ⑤촉경(觸境).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추위나 촉감 등. ⑥법경(法境). 의식 내용. 관념.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①욕계(欲界 kāma-dhātu) : 음욕(婬欲) • 식욕(食欲) • 재욕(財欲) 같은 탐욕이 많아서, 정신이 흐리고 마음이 험악하며, 순전히 물질에 속박되어 가장 둔탁한 중생들이 사는 낮은 세계.

②색계(色界 rūpa-dhātu) : 욕계 위로 욕심은 매우 적으나 성내는 버릇이 남아 있어, 물질의 지배를 아주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이 사는 비교적 맑은 세계. 색(色)은 곧 물질이란 뜻이다.

③무색계(無色界 ārūpya-dhātu) : 맨 위층으로 탐욕과 성냄은 떨어져서 물질의 영향은 받지 않으나, ‘나(我)’를 버리지 못하여 정신상으로 걸림이 남아 있는 깨끗한 중생들이 사는 높은 세계.


이것을 흔히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올라가면서 유형(有形)한 계층으로만 말하지마는, 실상은 입체적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인 세계의 구분(區分)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地上) 세계의 어떤 곳에도 탐(貪) • 진(瞋) • 치(痴) 등 삼독심(三毒心)의 경중(輕重)에 따라 삼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도사(大導師 큰 대/길·인도하다·이끌다 도/스승 사) ; 불(佛) · 보살(菩薩)의 존칭. '크신[大] 길 인도하는[導] 스승[師]'이라는 말.

도(導)는 「길[道] · 인도(引導)하다 · 이끌다」의 뜻으로, 대도사는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큰 스승이라는 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바다를 건너게[度] 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대도사(大度師)와 같은 뜻이다.

*대도(大道) ; ①부처님의 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 각(覺). 보리(菩提).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 삼무차별(三無差別 :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불원천리(不遠千里)하다 ;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천당(天堂) ; ①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②정토교(淨土敎)의 극락세계(極樂世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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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부처님 회상(會上) ; 불회상(佛會上).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불색(佛色) ; 불색신(佛色身). 형체를 갖춘 부처님의 몸을 일컫는 말. 상대어는 법신(法身)으로 진리를 인격화한 부처님을 가리킨다.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선가귀감』 (용화선원 刊) p94-95 (가로판 p99-100) 참조.

*대간하다 ; ‘고단하다(지쳐서 피곤하다)’의 사투리.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마구니 ; 마(魔). [범] mā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64에서. (가로판 p66~67)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 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道人)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禪定)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게송) '득수반지미족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척량(脊梁 등마루 척/대들보 량) ; 등마루의 거죽 부분. *등마루 ; 등골뼈가 있어서 울룩불룩하게 줄진 등의 가운데 부분.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1분 32초)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팔부(八部) 쯤만 ; 보통 호흡하는 양의 80% 정도 만큼.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말. 대도정법(大道正法)의 명맥(命脈). ②법신(法身)은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뜻.

*축원(祝願 빌·기원할 축/원할·바랄 원)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 보물(寶物)이 있는 곳[所]이 가깝다[在近].

[참고] 『법화경』 제7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법화경』 (청량사 | 조인도철 역해), 『법화경』 (시공사 | 이연숙 옮김) 참고.

비구들아, 만일 여래(如來)가 열반할 때가 되면, 또 대중들이 청정할 뿐 아니라 믿고 이해함이 견실하여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이치를 환히 알며 깊은 선정을 성취하게 되면, 여래는 이를 알고 곧 성문과 보살들을 모아 이 가르침을 설한다.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으로 멸도하는 일은 없나니 오직 일불승(一佛乘)으로써만 멸도(滅度)할 수 있다.

비구들아, 알라. 나는 중생들의 성품을 꿰뚫어 보아 그들이 소법(小法)을 즐기며 오욕에 깊이 집착함을 알았기에 방편으로 열반을 설했고, 중생들은 내 말을 듣고는 곧 믿고 받아 지녔다.


예를 들어, 아주 험난한 데다 사람마저 살지 않아 무시무시하며, 길이가 5백 유순이나 되는 나쁜 길[惡道]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진귀한 보물 있는 곳에 가기 위해 그곳을 지나려 한다고 하자.

그때 그들 가운데 한 길잡이[導師]가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형세를 환히 다 알고 있었기에, 무리들을 이끌고 그 무서운 곳을 지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무리들은 얼마 가지 않아 귀찮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길잡이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너무나 피곤한 데다 무서워서 도저히 더이상 갈 수가 없소. 게다가 갈 길도 아직 멀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소.’


그러자 갖가지 방편(方便)을 지니고 있는 길잡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 참 딱하도다. 어째서 큰 진귀한 보물을 포기하고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방편을 써서 그 길의 3백 유순 되는 지점에 신통력으로 성(城) 한 채를 만들어 놓고서 무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두려워 마시오. 그리고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여기 이렇게 큰 성이 있으니 들어가서 마음껏 지내시오. 이 성에 들어가면 편안히 지낼 수 있고, 또 앞으로 더 나아가면 보물이 있는 곳[寶所]에 다다를 수 있소’


그러자 지쳐 있던 무리들은 매우 기뻐하며 기적 같은 일[未曾有]이라고 찬탄하며 말했다. ‘이제 이 험한 길[惡道]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얻었도다.’

그리고 그들은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성[化城]으로 들어가, 이미 험한 길 다 벗어났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길잡이[導師]는 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한 뒤 피로가 다 풀린 줄 알고는,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을 없애 버리고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갑시다. 보물 있는 곳이 멀지 않소(寶處在近). 예전에 있던 큰 성은 그대들을 쉬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신통력으로 만든 것이었소.’


비구들아, 여래 또한 이와 같아서 그대들을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다. 그래서 모든 생사 번뇌와 악도(惡道)가 험난하고도 하염없이 긴 것을 알고 또 응당 떠나고 건너야 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만일 중생들이 단지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만 듣는다면, 부처님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가까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또 ‘부처님 되는 길은 멀고도 머니 오래도록 노력하여야 성불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것이기에, 또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겁 많고 약하고 하열(下劣)함을 알기에 중도에 쉬게 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두 가지 열반을 설했다.


그리고 만일 중생들이 이 두 경지에 안주하면 여래는 곧 다시 이렇게 설한다.

‘그대들이 머물고 있는 경지는 부처님의 지혜에 가까운 경지일 뿐이니, 그대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그대들이 얻은 열반을 잘 관찰하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진실한 열반이 아니요. 다만 여래가 방편으로 일불승을 분별하여 삼승(三乘)으로 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저 길잡이가 무리들을 쉬게 하기 위하여 신통력으로 큰 성을 만들고, 다시 충분히 쉬었음을 알고는 ‘보물이 있는 곳은 가깝소. 그리고 이 성은 진짜가 아니라 내가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불승(一佛乘) ; 산스크리트어 eka-buddha-yāna 승(乘)은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함.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가르침. 모든 중생을 성불하게 하는 부처님의 유일한 가르침.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 수불세수(水不洗水).  '물로 물을 씻을 수 없다'는 말. '금으로 금을 교환할 필요가 없다[金不博金]'과 같은 비유이며 대구(對句)로 쓰인다.

이 비유는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가진 부처이기 때문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합일해야지 대상화하여 이분(二分)하거나 자기 밖에서 추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고 ❶]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6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금강경』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이러한 까닭으로 응당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야부(冶父)】 金不愽(博)金 水不洗水

금으로 금을 살 수(교환할 필요가) 없으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한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只是一般金 豈分能愽所愽 只是一般水 豈分能洗所洗 恁麽 則法則一味 見有二取 二取相亡 一味方現

다만 이 똑같은 금인데, 어떻게 팔 금과 살 금을 나누며, 다만 똑같은 물인데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을 어떻게 나누겠는가. 이러한즉 법은 한맛인데 보는 것에 두 가지 취함이 있으니, 두 가지 취함이 서로 없어져야 비로소 한맛이 나타날 것이다.


【야부(冶父)】 得樹攀枝未足奇 懸崖撒手丈夫兒 水寒夜冷魚難覓 留得空般載月歸

가지 잡고 나무에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요, 벼랑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추워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도다.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得一心存未是奇 一處亦亡是丈夫 到這裡 凡情脫盡 聖解亦亡 但將無私照 却來是非場

일심을 얻어 간직함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한 곳마저도 없어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의 망심도 다 떨어지고 성인의 앎도 없으며, 다만 사심 없는 비춤을 가지고 시비의 마당에 다시 올 뿐이다.


[참고 ❷] 『종용록(從容錄)』 제51칙 '법안선륙(法眼舡陸)'

水不洗水 金不博金 佛不求佛 法不說法

물로 물을 씻지 못하고 금으로 금을 바꿀 수 없으며, 부처가 부처를 구하지 못하고 법으로 법을 설할 수 없다.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과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 공부해 나가는 요점 -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지 마라 / 공부하는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은 모든 기회(機會)와 경계(境界) 위에서 잡아가지고 쓸 수가 있다 /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여져 있는 사바세계에 태어나야만 도를 이룰 수가 있다.


대신통(大神通)과 소신통(小神通) / (게송)득수반지미족기~ /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삼계(三界)의 대도사(大導師)이신 부처님이나,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나,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모든 중생들이 조금도 차별이 없는 것인데,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할 것도 없고, 중생이라고 해서 모자랄 것도 없는데, 왜 부처님은 해탈도를 증득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셨고, 우리 중생은 왜 깜깜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헤매고 있느냐?


우리가 부처님보단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 자리에 있어서 모자라거나, 부처님이 우리 중생보다 더 나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뜻을, 내가 나를 깨닫지를 못해서 오직 그 하나 때문에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그 근본 뜻을 바로 알아버리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정진(精進)이요, 수도(修道)요, 공부를 해가는 것인데, 그 공부해 나가는 그 요점을 바로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행여나 무슨 좋은 말씀을 들을까?’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법문을 들을까?’ 밤낮 들어봐도 들을 때 뿐이고 공부는 조금도 나아가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세수하고, 오줌 누고, 똥 누고, 걸어 다니고, 차 타고, 하는 이러한 일상생활을 여의고 따로 특별한 수행을 찾는다면 이것은 영원히 찾아도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운 것이여.


참으로 발심을 해서 진정으로 대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경계—슬픈 일이나 기쁜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어떠한 순경계(順境界)나 역경계(逆境界)를 만났을지라도 바로 그 기회와 그 경계를 단 일분일초라도 놓치지 말고 바로 되잡아 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지어간다면 우리가 있는 장소는 그 장소가 어디가 되었건, 그 시간이 어느 시간이 되었건, 어떠한 일을 만나건, 어떠한 사람을 상대하건, 우리는 곳곳마다 최상의 선방(禪房)이요, 바로 부처님 회상(會上)이요, 닥치는 일마다 부처님이요, 불보살을 친견한 것이요, 선지식(善知識)을 친견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접촉하는, 상대하게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진(六塵)이 바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되고, 바로 그것이 최상의 육신통(六神通)으로 되는 것입니다.


소신통(小神通)은 여기서 서울 일을 알고, 앞으로 다가올 10년 20년 뒷일을 알고, 여기서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이러한 것은 소신통, 조그마한 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참으로 최상의 대신통(大神通)이라 하는 것은, 부르면 대답하고, 배고프면 밥 먹고, 대간하면 한숨 자고, 이것이 바로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삿된 사람은 소신통이 대신통인 줄 착각을 하는 거고, 참으로 불법(佛法)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옳게 인식한 사람은 바로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때리면 아픈 줄 알고, 바로 이것이 신통 중에 최고로 크고 높은 대신통이라 하는 것이여.


‘짜게 먹은 사람이 물을 켠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몸과 목숨을 바쳐서 일분일초를 알뜰히 정진해 나가고, 역경계(逆境界)와 순경계(順境界) 속에서 일분일초도 등한히 하지 아니하고 애를 써 나간다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소(寶所)가 재근(在近)이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또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치라’ 하셨습니다.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영원히 평생 동안 쓰고도 남을 소중한 보배. 영원한 보물. 그 보배 곳이 가까이에 있다 하셨습니다.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할 곳을 향해서 눈을 부딪쳐라.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19. 11. 10. 20:08

(No.176)—민대법화 영가 3재(82.07.10) (23분)

(1) 약 13분. (2) 약 10분.

(1)------------------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사유유차백년(萬事悠悠此百年)한데  환여역려잠류련(還如逆旅暫留連)이로구나.

만사(萬事)가 유유(悠悠)한 이 백년(百年), 사람이 나서 한평생을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백 년인데, 그 백 년 동안 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울다가 웃다가 슬퍼하다가 성내다가 기뻐하다가, 이럭저럭하면서 백 년 동안 인생살이가 마치 뭣과 같으냐 하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여행을 하는데, 출발해 가지고 목적지에까지 도달하는데 때로는 날씨가 좋았다가 때로는 비가 왔다가 때로는 바람이 불었다가, 겨울이면 눈이 왔다가 먹구름이 끼다가, 평지를 가다가 또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또는 산을 오르기도 하고 산을 내리기도 하고, 인생 일생사가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일별천애구시객(一別天涯俱是客)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로구나. 한번 저 하늘갓으로 떠나버리면, 이별을 해서 뚝 떠나버리면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전송을 하는 사람도 손이더라.

나도 여행을 하고 저 사람도 여행을 하는데, 여행하는 도중에 두 사람이 만나서 잠시 한 여관에 들어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을 자다가 날이 새면 한 사람은 동쪽으로 떠나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떠나는 그러한 경우에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손이요, 서쪽으로 떠나는 사람도 객(客)이더라.


전송(餞送)을 하면서 또 전송을 받으니까 두 사람이 다 손인데, 부운유수석양변(浮雲流水夕陽邊)이여. 구름은, 하늘에서 떠 있는 구름은 바람 따라서 저 하늘갓으로 날아가고, 흐르는 물은 높은 데서 낮차운 데로 낮차운 데로 흐르고 흘러서 결국은 바다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떠나는 사람이 뜬구름같이 떠났다면 서쪽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 내려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 부모를 의지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때로는 남자로 태어나고 또 어떤 경우는 여자로 태어났어. 태어난 사람이 서로 결혼을 해서 아들딸 낳고 돈 벌고 이리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또 한 사람은 나중에 떠나는데.

뜬구름이 하늘에서 바람 따라서 날아갔다고 해서 슬퍼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흐르는 물이 지세(地勢) 따라서 흐르고 흘러서 바다로 내려갔다고 해서 그것을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행 중에 두 사람이 만나가지고 여관에서 하룻밤 같이 이야기하고 지내다가 그 이튿날 이별할 때에 조금 섭섭은... 아주 다정한 경우에는 좀 섭섭한 생각은 있을 수가 있겠지만, 그걸 다리를 뻗고 땅을 치고 통곡하고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가족을 이루다가 한 사람이 먼저 가고 뒷사람이 뒤에 간다고 해서 그렇게 통곡을 하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럴 것도 사실은 없는데.

정(情)으로 얽힌 존재들이라 기왕이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같이 해로(偕老)를 하고 자기의 명(命)을 다했으면 좋겠지만, 생사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라, 이렇게 젊은 나이로 인생을 이승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민대법화 영가, 오늘 3재를 맞이해서 숙세의 인연이 있어서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서 3재 천도(薦度)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최상승 법문에 의해서 무량겁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렸고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라서 다시 거기에다가 더 설할 법이 없지만 재자(齋者)의 간청으로 산승(山僧)이 잠간 법상(法床)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뜬구름 같은 인생이요,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 몸뚱이가 이루어졌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무너져서 이 육신은 버렸지만 이 일점영명은 무너진 것이 아니여.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낳다’고 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없고 ‘죽었다’고 해서 없어질 것도 없을 바에는—마치 허공에 꽃이 눈병 걸린 사람의 눈에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원래 공화(空花)는 없는 것이여.

눈병 걸린 사람에게 있어서 허공에 공화가 피었다고 해서 그 공화 자체가 피어 있는 것이 아니고, 눈병이 나아 버린 뒤에는 공화가 그 찰나에 없어진다고 해서 원래 없어졌든 공화가 새롭게 무엇이 없어질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할 것이 또한 있느냐 이 말씀이여.


생사는 뜬구름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한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처음~13분21초)




(2)------------------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한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하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타청산위범찰(萬朶靑山圍梵刹)인데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만 송이 울긋불긋한 꽃과 잎이 우거진 청산에 둘러싸인 절이여. 절은 만 송이의 청산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고, 일간홍일조령대(一竿紅日照靈臺)라. 한 장대 길이만큼 높이 뜬 붉은 해는 영대(靈臺)를 비추더라.

영대는, 우리의 몸뚱이를 끌고 다니던 주인공 그 영대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같이 빛나고, 지금 우리 용화사 법당 주변의 산이 천산만산(千山萬山)이 위요(圍繞)하고 있고, 붉은 꽃과 푸른 숲에 의해서 둘러싸여 있는데.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곳곳이 푸른 버드나무에는 가히 말을 매 둘만 하다. 말을 버드나무에다가 말을 매 놓듯이—목적지를 향해서 가는데 말을 타고 가는데, 그 말을 쉬는데 있어서 어디라도 그 있는 버드나무에 묶어 맬 수가 있고.

가가문외통장안(家家門外通長安)이라. 어느 집이든지 문밖에 나가면 방향을 잡어가면은 결국은 서울에 도달할 수가 있더라. 모든 길은 다 서울로 통하고 있더라.


생사(生死)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일정한 모양과 일정한 국집(局執)된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뜨면 해와 달이요, 땅으로 내려오면 산이요 물이요 나무요. 인연 따라서 천당도 좋고 극락도 좋습니다.

새로운 몸을 받아 날 때까지는 이 용화사 법보전에 여러 도반들과 더불어 법문을 듣고 삼매(三昧)에 들었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좋은 곳에 태어나서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도를 닦아서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없는데 무엇을 도(道)를 닦으며,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濟度)하리요마는, 생사 없는 곳을 향해서 해탈(解脫)을 해야 하고, 설할 바 없는 법(法)을 향해서 법을 설해야 하고, 닦을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한 중생도 제도 받을 바가 없는 곳을 향해서 제도를 하는 것이 바로 이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태어났다가 한평생을 살다가 또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치에 있어서는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수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출현을 하셔야 하고,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또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인생에 있어서 짧은 생애를 가졌지만 본래 어질고 착하고, 불법에 깊은 인연을 맺었고 그러한 공덕(功德)으로 인해서 이 정법(正法) 도량에서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한이 있다 하더라도, 못다 푼 한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기해서 깨끗이 다 잊어버리고, 다 풀어버리고, 실상(實相)의 자리에 안주하시기를 바랍니다.(13분25초~23분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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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만사유유차백년~’ ; 1, 2, 3구는 『경허집(鏡虛集)』 (경허성우 스님) ‘和映湖堂(영호당에게 화답하다)’ 4구는 ‘別友人(벗을 작별하며)’.

*만사(萬事) ; ①여러 가지 온갖 일. ②집착으로 가득 찬 마음의 모든 것.

*유유하다(悠悠-- 멀·아득할·한가할 유) ; ①움직임이 한가하고 여유가 있고 느리다. ②아득하게 멀거나 오래되다.

*한평생(한平生) ; 살아 있는 동안. 일평생(一平生). 평생. 필생(畢生).

*하늘갓 ; 하늘가(하늘의 끝). 천애(天涯 : 하늘의 끝.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 손님. 객(客). ①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 ②남의 집을 방문한 사람. 남의 집이나 여관 따위에 묵고 있는 사람. ③지나가다 잠시 들른 사람.

*전송(餞送 전별할·보낼 전/보낼·전송할 송) ; 서운하여 전별(餞別 떠나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어 작별함) 인사를 하여 보냄[送]. 예를 갖추어 떠나보냄을 이르는 말.

*뜬구름 ; ①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②덧없는 세상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천도 법요식(薦度 法要式) ; 천도재(薦度齋).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에 따라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유족들이 불보살(佛菩薩)을 모신 법당(法堂)에서 돌아가신 영가를 청해 모시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를 기원하고 또한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法門)’을 들려줌으로써, 영가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지혜의 눈을 밝혀 삶의 무상을 깨달아 이승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끊고, 보다 좋은 곳으로—더 나아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극락왕생·해탈의 바른 길로—잘 건너가도록 하는 불교의식.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재자(齋者) ; 절에 재(齋)를 올리거나 불공(佛供)하러 온 사람.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일점영명(一點靈明) ; 일점영광(一點靈光). 한 점의 신령한 밝음. 우리 본래 마음. 불성을 가리킨다.

*공화(空花, 空華) ;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참고] 송담스님 법문 (No.521)  (No.636) 에서.

눈이 멀쩡한 사람은 허공 속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데, 눈병이 난 사람은 허공에 이상한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보이고 그러는데, 눈병만 고치면은 허공에 피어있던 꽃이 안 보인다.

그래서 눈병이 났던 사람은 ‘허공에 있던 꽃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하지마는, 허공의 꽃은 있다가 없어진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이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을 통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육경(六境)을 만나면 육식(六識,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이 생기는데, 그 육식(六識)에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이름과 모양—명상(名相)이라 하는데, 명상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림자요, 메아리, 환(幻)인 것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명상(名相) 그것을 ‘있는 것’으로 집착을 함으로 해서,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 생사윤회의 업을 짓는데, 마음 하나만 공(空)해 버리면 일체 명상(名相)은 동시에 다 공(空)해 버리는 것이다.


원래는 이 세상에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生死)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生死)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거거든.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3분 44초)

[참고] 송담스님(No.366)—88년(무진년) 칠석차례 법문에서.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번뇌 망상은 본래 없는 것이다’ ‘본래 번뇌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생사는 본래 생사의 자성이 없는 것이다. 한 생각 일어나되 일어나는 한 생각 일어남이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이다’하고 그렇게 딱! 믿어 버리는 것이여.

있는 것으로 인증을 하고 그놈을 끊을라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거여.


왜 있는데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분명히 번뇌가 일어나고 망상이 일어나고 이렇게 몸뚱이를 받아 나면은 아프고 늙어서 병들어 죽고, 아무리 이 몸뚱이 없다고 하지만 꼬집어보면 아픈데 어떻게 하느냐? 도저히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병이 든 사람은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에 병이 없는 사람은 이 맑은 허공을 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은 이상하니 무슨 꽃이 이글이글이글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저 더운 날 강변에 가면 모래사장에 아지랑이가 이글이글이글 타오르듯이, 그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분명히 허공에 꽃이 피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면 아무리 그 허공에 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눈병이 없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눈병이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보인다 그말이여.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그말이여.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있겠느냐 그말이여. 눈병만 고쳐 버리면은 허공의 꽃은 없어져 버리는 거여.


그러면 눈병이 있는 사람에게 보인다고 해서 실지로 허공에 꽃이 있느냐 하면은 없는 것이거든.

그래서 눈병이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믿으면 되는 거여. 실지로 자기 눈에 보인다 하더라도 보이는 것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으면 못 믿을 것도 없다 그말이여.


"번뇌와 망상이 그 자성이 없다’고 하면 실지로 자기에게는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이 ‘없다’고 하시고, 성현들이 ‘없다’고 하시고, 선지식(善知識)이 ‘없다’고 하면 그 말을 안 믿고 무엇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분명히 이 몸뚱이를 타고난 이상 늙어서 병들어 죽는 고통이 있지만 부처님과 모든 성현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니 그 성현의 말씀을 안 믿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 그말이여. 성현의 말을 고냥 고대로, 액면 그대로 ‘그냥 없다’고 딱! 믿어버려. 믿어 버리면 참 그게 그렇게, 당장 그 자리에서 대안락(大安樂)을 얻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공화 자체는 눈병이 난 뒤에나, 눈병이 치료가 된 뒤에나 원래 공화는 없었던 것이여. 중생의 생사도 또한 그와 같아서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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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萬朶靑山圍梵刹 一竿紅日照靈臺’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염습(殮襲)’ 안좌게(安坐偈) 참고.

*(게송) ‘處處綠楊堪繫馬 家家門外通長安’ ; 불교 장의(葬儀) 의식 「시다림(尸陀林) : 죽은 이를 위해 설법하는 의식」 ‘발인(發靷)’ 기감(起龕) 참고.

*영대(靈臺 신령할 영/대·받침대 대) ;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뜻으로 마음을 이르는 말.

*위요(圍繞 둘레·에워쌀 위/두를·에워쌀 요) ; 어떤 지역이나 현상을 둘러쌈.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삼매(三昧) : 정(定). ①계(戒) · 정(定) · 혜(慧) 3학의 하나. ②[범] samadhi 음대로 써서 삼마지(三摩地) · 삼마야(三摩耶) 또는 삼매(三昧)라고 한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마음을 집중 · 통일시키는 수행, 또는 그 수행으로 이르게 된 평온한 마음 상태.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실상(實相) ; ①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변하지 않는 진리. ③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법문 내용]

(게송)만사유유차백년~ / 인생 일생사가 마치  여행을 하는 거와 같다.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우리는 모두 객(客) / 뜬구름,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 / 일점영명(一點靈明) /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게송)만타청산위범찰~ / 생사(生死)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 못다  한을 다 풀어버리고, 실상(實相)의 자리에 안주하시라.


 세상에 태어날 때에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몸뚱이가 이루어졌지만  몸뚱이를 주재하는 일점영명(一點靈明)은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지수화풍 사대가 무너져서  육신은 버렸지만  일점영명은 무너진 것이 아니여.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본래 없는 생사에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고, 무엇을 천도(薦度) 것이 또한 있느냐. 생사는 뜬구름 공화(空花)와 같은 것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망하고 친숙하고  것도 또한 무엇을 원망하며 무엇을 애착을 가질 것이 있느냐.

생사가 없는데 무엇을 도(道)를 닦으며, 본래 생사가 없는데 무슨 중생을 제도(濟度)하리요마는, 생사 없는 곳을 향해서 해탈(解脫)을 해야 하고, 설할  없는 법(法)을 향해서 법을 설해 하고, 닦을  없는 곳을 향해서 닦아야 하고,  중생도 제도 받을 바가 없는 곳을 향해서 제도를 하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태어났다가 한평생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치에 있어서는 분명 생사가 없지마는 현실에 있어서는 면할  없는 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출현을하셔야 하고, 우리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의지해서 닦아야 하고, 이렇게  천도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18. 11. 3. 22:01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183)—82년 9월 첫째일요법회 (62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9분.

(1/3)----------------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적겁매진광미휴(積劫埋塵光未虧)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나무~아미타불~

 

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이요. 가없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텅 비고 밝은 거울인데, 그 밝고 빈 거울에 무량겁을 두고 티끌이 쌓이고 쌓여서 그 거울을 티끌로 뒤덮었건만, 그 거울 자체의 광명은 조금도 이지러짐이 없더라.

 

종래천성부동진(從來千聖不同塵)헌디  하사횡신성색리(何事橫身聲色裏)인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성현들은 그 티끌과 한 가지 하지 안 했어. 시방찰해가 온통 티끌인데, 그 티끌에 조금도 묻지를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우리는 소리와 빛, 소리와 빛의 티끌 속에 몸을 비겼는고. 티끌 속에 왜 파묻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느냐.

 

 

오늘은 임술년 9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무더웠던 여름도 다 가고 칠석도 지내고, 백중도 지내고 제법 서늘하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슬프고 기쁜, 이 슬픔과 기쁨으로 범벅이 된 인생살이는 한 벼개에 꿈에 지내지 못하고[悲歡一枕夢], 한바탕 꿈에 지내지 못하고, 일생동안 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만나는 인생살이도 잠깐 불과 10년 동안에 정, 애정, 인정 얽힌 것에 불과한 것이여[聚散十年情].

말없이 머리를, 고개를 돌이켜 보니[無言却回首] 산마루 위에는 흰구름이 일어나는구나[山頂白雲生]' 이러한 게송을 맨 처음에 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출현을 하셔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출가하셔서 12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갖은 고행을 하시고, 그 가운데 여러 스승을 차례차례로 사사(師事)하고 차례차례로 버리시기를 12년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두고 고행을 하신 끝에 마침내 보리수(菩提樹)하에서 새벽 동천(東天)에 반짝거리는 샛별을 보시고 성불(成佛)을 하셨습니다.

그 부처님이 아니셨던들 우리는 영원토록 생사(生死)의 고해(苦海)에서 몸부림치며 육도법계(六途法界)를 윤회를 하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무엇이 바른 길인가? 무엇이 우리의 참다운 행복인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성현 가운데 성현을 스승으로 받들 수가 있기에, 우리는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태어났으면서도 우리는 외롭지 아니하고 우리는 슬프지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찾아서 희망과 보람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法)을 믿으면서도 아직도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까닭은 우리의 신심(信心)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하고, 실천에 있어서 대분심(大憤心)과 용기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절에 10년, 20년을 다니고 평생토록 부처님밖에는 모르고 그러면서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은 그 믿음이 바르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까닭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어떻게 믿어야 바르게 믿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용화사 가서 정법(正法)을 믿어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으려면 주안 용화사를 가라' 이런 말을 듣고 분개를 하면서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고, 용화사만 최상승법이냐, 부처님 법은 온 시방법계에 두루하고, 꽉 차 있는 것이 불법인데 어찌 용화사만 불법일 것이냐. 어느 절에서도 어느 절에 가도 부처님은 다 모셔 있고, 어느 절에 가도 스님은 다 계시고, 설교하는 절은 어디라도 다 정법이 있지 어찌 용화사만 정법이겠느냐' 그렇게 분개를 하는 분이 있다 이것입니다.

 

그 말이 절대로 일리가 있는 말일 것입니다. 어찌 하필 용화사 부처님만 참 부처님이고 용화사 스님들만 진짜스님이고, 용화사 설법만 정법이겠습니까.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 法身)은 우주법계에 꽉 차서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고, 오히려 눈을 가리우고 부처님을 아니 볼라고 하니까 열 손가락 사이마다 부처님이 나타났다고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마는.

바로 말하자면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어디가 있으며, 불법 없는 곳이 어디가 있으며, 무엇이 정법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혜의 눈을 뜬 사람은 눈을 감아도 부처님이요 눈을 떠도 부처님이요, 귀를 막아도 부처님이요 귀를 열어도 부처님이요, 하늘 땅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마는.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예를 들자면 철이 들어서 아무데를 가더라도 산에를 가도 좋고, 바다를 가도 좋고, 숲속을 가도 좋고, 사막을 가도 좋고, 아무데를 가도 걱정이 없을 만큼 몸이 단련이 되고 그만큼 튼튼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아직 자라지를 못해서 그런 사람은 함부로 산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물가에 가도 위험한 것이고, 함부로 험악한 데를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용화사로 가야 참선 하는 법을 기초부터서 잘 배울 수가 있다'한 말이 그렇게 해서 해당이 되는 것이지, 바로 참선을 화두를 들 줄 알고 올바르게 공부할 수 있다면야 산꼭대기를 가나, 바닷가에를 가나, 무인도를 가나, 어디를 가서 한들 공부를 못하겠습니까.

정(正)과 사(邪)를 가릴 줄을 알고 공부하는 법을 바로 안다면 외도(外道), 마구니 속에 들어가서 한들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습니까.

 

 

정법은 다른 게 아니고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시주를 많이 하고, 멸치 꼬리 하나도 안 먹고, 파 마늘을 안 먹고, 모기 파리 하나도 안 죽이고,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아니하고, 이렇게 계율을 청정히 지키면서 그저 절밖에는 모르고 일생을 사는 그러한 스님, 그러한 청신사 청신녀들이 계시는데 대단히 훌륭하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불법(佛法)을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거든. 물론 불교를 믿는 사람이 계율을 청정히 갖는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로되 거기에 그쳐 가지고 불법을 참으로 바로 믿었다고 할 수가 없어.

 

'불법을 바로 믿었다', 정신(正信)이라 하면 자기도 아무리 죄가 많건, 근기가 약하건, 여자건, 말세에 태어났건, 무식하건,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바르게 믿는 것이여. 그 신념이 서 있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어.

 

'죄가 많으니까 나는 불법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업(業)이 많고 근기(根機)가 약하고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사람이 무슨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라리 염불을 하고 경을 열심히 읽어야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죽을 때 아미타불이 나를 반야용선(般若龍船)에다 태워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데려다 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은 어떠한 근기에는 혹 약이 될 수가 있겠지만, 거기에 국집(局執)한다면 불법을 바르게 믿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법을 바르게 믿고도 대분심(大憤心)과 대용기(大勇氣)가 없으면은 도는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천안통, 천안제일(天眼第一)인 아나율 존자는 애당초에 부처님 사촌으로 출가해 가지고,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는데 꾸벅꾸벅 졸았다 그말이여.

조니까, 부처님께서 걱정을 하시기를 '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썩은 흙벽에다가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조개가 바다 속에서 천년 동안을 잠을 자고도 파도 소리 때문에 잠 한숨 못 잤다고 그런 말이 있는데, 세상에 법문(法門)을 들으면서 졸음을 자다니 그래가지고 무슨 도업(道業)을 성취할 것이냐. 축생만도 못한 놈'이라고 크게 꾸지람을 하셨습니다.

 

'법문을 듣다가 졸아? 그것이 축생 과보(畜生果報) 밖에는 무엇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렇게 참 뼈아픈 꾸지람을 듣고 분심이 나서 6일간을 잠을 안 잤습니다. 눈 한번 깜빡 아니하고 앉은 채로 6일을 버텼습니다. 6일을 눈을 깜빡거리지 아니하고, 6일을 딱 버티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눈이 탁 멀자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던 것입니다. 천안통이 열려가지고 염부제(閻浮提)의 모든 사물과 상황을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그렇게 온 세계를 다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천안통이 열려서 온 세계를 손바닥에 구슬 보듯이 보았지만, 바느질하는 데에 바늘귀는 꿸 수가 없었던지, 원시경전에 보면 아나율 존자가 바느질을 할 때에는 부처님께서 항시 바늘귀를 꿰어 주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처음~21분31초)

 

 

 

(2/3)----------------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6일 동안을 분심을 내 가지고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멀어버린 그 제자를 위해서 바늘귀를 꿰어 주시고, 바느질도 해 주시고, 여러 가지 그 시중을 부처님께서 손수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 눈병이 났는데 아사세왕(阿闍世王) 어의(御醫)이며, 부처님의 주치의를 맡고 있던 기파(耆婆)대감을 명해 가지고 아나율 존자의 눈병을 치료하게 했습니다마는, 기파대감이 아무리 좋은 약을 쓰고 침을 놓고 치료를 해도 조금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래 기파대감이 부처님께 "저의 힘으로는 나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어의로서 못 고치는 병이 없는데 어찌 아나율의 눈병을 못 고친단 말이냐?"

"못 고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좋은 약을 쓰면서 잠을 자야 눈병이 나을 텐데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네가 내 말 한마디에 분심을 낸 것은 좋지마는, 그래도 잠을 자면서 정진을 해야지 그렇게 잠을 안 자 가지고 되겠느냐"

아무리 잠을 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끝까지 잠을 안 자 가지고 결국은 눈이 그렇게 멀어버렸던 것입니다.

 

 

또 부처님 제자,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사리불 존자가—목련 존자와 부처님 왼팔 오른팔 그 두 수제자(首弟子)인 그 사리불 존자가 지혜로서 제일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원래 외도의 제자로 있다가 목련 존자와 함께 자기 자신의 제자 백 명들을 이끌고 부처님께 귀의해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가지고 십대제자 가운데에 지혜가 제일인 그러한 성현인데,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무엇이었었냐 하면은 독사(毒蛇)였었던 것입니다.

그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가 되어 있었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성현이 되어 가지고서도 그 진심(瞋心)을 내는 습기(習氣)가 항시 조금씩 나타났다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앉아서 좌선을 하시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셔서 포행을 하시는데,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아직 어렸을 때인데 그 라후라가 부처님 뒤를 따라서 부처님을 모시고 같이 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라후라 존자는 아주 6살 어렸을 때 출가를 했는데, 출가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수제자인 사리불 존자를 시켜서 '네가 좀 거두어 주어라' 이렇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래 라후라 존자의 은사 스님이 사리불 존자에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처님께서 그 당신의 아드님이신 라후라 존자가 따라온 것을 이리 보시더니, "네가 어떻게 그렇게 해서 바짝 말랐느냐? 어떻게 몸이 그렇게 폐로(肺癆)와졌느냐? 그렇게 쇠약해졌느냐?" 이렇게 물어 보셨습니다.

그 라후라 존자가 게송으로써 대답하기를, 소락(酥酪)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 빠다(버터)와 비슷한 음식인데 내나 우유를 끊이면은 거기에서 떠오르는 기름을 모아 가지고 만드는 음식인데,

"소락을 먹으면 몸이 튼튼해지고 또 기름을 먹으면은 몸이 튼튼해지고 그러한 것을 또 무슨 고기라든지 모다 그런 것을 먹으면 힘이 생기고 한 것을 부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렇게 게송으로써 부처님께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지금 이 대중 가운데에 누가 제일 큰스님인고?" 그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저의 스승인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 밑에 제일 큰스님이지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사리불은 부정식(不淨食)을 하느니라"

부정식이라 하는 것은, '아니 불(不)’자, '조촐할 정(淨)’자, 부정(不淨), "부정식을 하느니라. 청정한 음식을 안 먹고 청정하지 못한 음식을 먹느니라" 아, 부처님이 밑도 끝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말이여.

 

그러니까 그 라후라 존자가 자기 스승한테 가서 "아, 부처님이 그 스님 보고 부정식을 한다고 하시데요" 그렇게 말을 했다 그말이여.

그 말을 듣고 사리불 존자는 그 뒤부터서는 일체 어떠한 신도나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부처님도 그전에까지도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나 신심 있는 신도가 좋은 음식을 마련해 놓고 공양 청(請)을 하면 모다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공양을 잡숫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도 딱! 끊어 버리시고 안 가시자, 부처님이 안 가신 뒤에는 사리불한테 모다 공양 청을 하면은 사리불이 또 가서 공양을 받아 자시고 오시고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을 한 그 말을 듣고 부터서는 사리불도 딱! 끊어버리고 공양에 응하지를 안 했습니다.

 

그때 왕과 대신과 장자들이 사리불에 공양을 청하러 갔습니다. "나는 가지를 않겠다"

"어째서 안 가십니까? 부처님도 안 가시고 사리불 존자까지 안 가시면 우리 신도들은 어떻게 청정한 법문을 들으며, 법의 인연을 맺는 복을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부처님께 가서 "부처님마저도 공양을 응하시지 아니하고, 사리불 존자까지도 응하시지 아니한다면은 어떻게 우리 신도가 복을 지으며 법문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부처님은 정 안 가신다면 사리불 존자라도 가도록 좀 말씀을 해 주십시오"

"사리불 존자는 내가 아무리 말하고 너희들이 아무리 청한들 결단코 가지를 아니할 것이다"

"왜 그렀습니까?"

 

사리불 존자는 전생에 독사였었는데, 독사로서 어느 왕을 물었다. 그래서 독사가 왕을 물어버리고 어디로 달아나 버렸는데, 왕의 몸에 그 독이 번져가지고 죽게 되었어. 그래서 천하의 명의를 다 불러다가 그 독사에 물린 독을 빼고 병을 낫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나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 의원들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 독을 뺄 수가 없고 그 독사로 하여금 스스로 이 독을 빨게 해야만 이 병은 나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 독사를 오게 할 수가 있느냐?' 그래 그 의원들이 모다 합심을 해 가지고 주문을 외워 가지고 그 독사가 제절로 왕 앞에 오도록 했던 것입니다.

독사가 왕 앞에 와서 딱 도사리고 있는데 그 옆에다가 장작불을 갖다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는 불을 펴서 훨훨훨 타게 해 놓고서는, '독사야! 네가 이 왕을 물었는데, 네가 문 자리에서 거기다가 네가 이 독을 빨아먹으면 너를 살려주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는 이 모닥불에다가 집어넣어서 태워 죽이리라'

 

독사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의 독을 밖으로 내뿜기 위해서 물었는데 어찌 내가 그 독한 독을 다시 빨아먹을 수가 있을까보냐. 차라리 내가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을지언정 나는 그 독을 다시는 못 빨아먹겠다. 이래가지고 그 독사가 펄쩍 뛰어가지고 불더미 속에 들어가서 타서 죽었습니다. 그 타서 죽은 그 독사가 사리불 존자다 이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무슨 말이든지 한마디 딱 했다 하면은 한 번 탁! 결심을 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해 버리면 천하 없는 사람이 뭐라 해도 그 뜻을 굽히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그 말씀 한마디 했다고 해서 왕이나 대신이나 장자가 공양 청장을 해도 다시는 응하지를 아니했다 이것입니다.

 

그 부정식이라는 게, 첫째 그 짐승을 죽일 때에 그 현장을 목격하지 아니한 고기, 그 짐승을 죽일 때에 비명 지른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한 고기, 또 나를 위해서 일부러 죽이지 아니한 고기, 또 세 사람 이상의 손을 거친 고기, 독수리나 맹수 같은 것이 먹다가 버린 고기, 이러한 종류의 다섯 가지 고기를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五淨肉)이라,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라 해서 이것을 오정육이라 그러고.

그렇지 아니한 고기는 다 그것이 부정한 고기다 이것입니다. 또 음식에 파나 마늘이나 부추 모다 그러한 것이 들어간 음식은 이것이 깨끗한 음식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신도 집에서 밥을 먹게 되면 음식 속에 그러한 부정한 것이 섞여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무심히 먹다 보면 부정식을 하게 되는데, 그래 사리불 존자는 아라한과(阿羅漢)를 증득한 성현이라 신통이 다 육신통(六神通)이 자재(自在)하고 그렇지만 또 무심할 경우에는 또 그런 음식 속에 그러한 것이 혹 섞여 있을 수가 있어서 무심히 먹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은 부정식을 한다' 한 말씀을 하셨는데.

 

라후라 존자가—'어째서 네가 그렇게 살이 쪽 빠져 가지고 그렇게 그러느냐'한 말 끝에 '뭐 공양 청을 안 하고 그 영양 있는 것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살이 빠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한 그러한 뜻으로 넌즈시 그 돌려서 게송으로 읊으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 말 한마디에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 그 고집, 그 의지력, 그 결단심, 이러한 것이 결국은 대도를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밑거름이 되지 안 했겠느냐?

 

그리고 아나율 존자는 '법문 듣다가 존다'고—우리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으로 들으면 '존다'고 그 꾸지람을 하신 법문을 가끔 듣는데, 어떠한 법문 가운데에는 '눈구녘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참 과격한 꾸지람을 하시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법문을 듣다가 꾸지람을 듣기도 예사고,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고 이러한 말씀을 들을 수도 있는데, 어떠한 신도 하나는 조실 스님 법문을 빠뜨리지 않고 듣다가 눈구녁을 쑤셔 버린다는 말을 듣고 몇 해 동안을 법문을 들으러 안 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또 산승의 말을 들으면서 졸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졸고 있는 사람 보기가 싫어서 조실 스님도 법문하실 때 눈을 감고 많이 법문을 하시고, 산승도 그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듣기가 싫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을까?

'차라리 안 보고 모두가 눈이 초롱초롱해서 저의 말을 잘 듣고 계시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어가야 좋은 말이 술술 나오지, 여기서 저기서 듣기 싫어서 졸고 있고, 하품을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으면 무슨 신심으로 얘기를 법문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한마디 꾸지람을 듣고 그 꾸지람을 명심을 해서 분심을 내서 아나율 존자와 같이 잠을 안 자고, 사리불 존자와 같이 다시는 공양에 응하지 아니할만한 그러한 고집과 결단심이 없어가지고 어떻게 대도를 성취할 것이냐 이 말이여.

 

'분심이 안 난다. 신심이 안 난다. 아무리 화두(話頭)를 들어도 의심(疑心)이 안 난다. 어떻게 하면 의단(疑團)이 일어날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면 분심이 나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말씀을 한마디해서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이 나도록 해달라'고 가끔 그러한 수좌(首座) 스님들이 와서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마는, 신심과 분심과 의단은 자기 자신이 일으켜야지 어떻게 그것을...

 

'사리불은 부정식을 하느니라' 한마디 한 그 말에서 분심을 내고, '법문을 듣다 졸려 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떻게 도를 성취할 것이냐? 죽어서 조개밖에는 못될 것이다. 죽어서 축생의 과보밖에는 못될 것이다' 이런 말 한마디에도 대분심을 내고.

이러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채찍을 가해 가지고 분심을 내야지, 내가 장군죽비(將軍竹篦)로 한 대, 두 대 쳐 본들 그때만 등어리가 따끔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느냐.(21분32초~42분51초)

 

 

 

(3/3)----------------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하고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헌디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소년은 늙기 쉽고 배움은 이루기가 어려운데, 일촌광음(一寸光陰)을 불가경(不可輕)이니라. 한마디 그늘을 경(輕)허리 하지 말지니라.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한데, 연못에 우거진 봄풀은, 우거진 풀은 아직 봄꿈을 채 깨기도 전에 뜰 앞에 오동잎은 벌써 가을 소리가 나는구나.

 

여기에 천여 명의 대중이 운집(雲集)했습니다마는, 엊그제 국민학교를 다니고 유치원을 다니고 어머니를 따라서 외갓집을 가고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흰머리가 많이 섞여 났습니다. 60, 70 된 노보살님도 어렸을 때 젊었을 때 생각하면 햇수로 따지면 60년 전이요, 70년 전이지만 불과 엊그제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은 덧없이 늙어 가건마는, 배움은 도(道)는 이룬 것이 없어. 그러니 한 치 그늘을 아껴라. 일분일초(一分一秒)를 함부로 보내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은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알뜰히 단속해 나가는 것이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별도리(別道理)가 없습니다. 별 방법이 없고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돌이키는 오직 거기에 대도 성취하는 열쇠가 달려 있습니다.

 

한 생각을 섣불리 지내는 사람은 대도(大道)는커녕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밖에는 할 길이 없는 것이고, 무량겁 생사윤회를 끊고 대도를 성취하려면 한 생각 단속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한 생각을 바른 신심(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탁! 돌이켜 관조할 때 무량겁 생사 업연(業緣)이 거기에서 무너져 버리고 대도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채 봄꿈을, 봄에 뜨뜻한 봄에 한숨 그 꾸벅꾸벅 졸은 그 봄꿈을 깨기도 전에 벌써 오동잎에 가을 소리가 났다 이것입니다.

'조금 나이 들어서 하리라. 막내아들, 막내딸 결혼이나 시켜놓고 본격적으로 참선을 하리라' 다 부질없는 생각이요 어리석은 핑계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젊어서 해야 하고, 한 살이라도 덜 먹어서 해야지 늙어서는 생각뿐이고 되지도 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어제 건강한 사람이 오늘 죽기도 하고.

그래서 도대체 인생의 무상(無常)한 것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한 생각부터 돌이키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이 찰나부터서 공부를 시작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이것이 정법(正法)이요,

다른 절에 가도 다 부처님의 좋은 말씀 다 법문을 해 주시는 스님이 계시고 다 참선을 가르켜 주신 절이 왜 없겠습니까마는,

부처님께서 '와서 들어라. 그리고 와서 보라. 그러면 알 것이다' 하셨습니다. 불법(佛法)은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숨긴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와서 보고 와서 들으면 아는 것입니다. 보고 들으면 바른 믿음이 생기고, 분심이 나고, 의심이 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용화사 가서 법문을 들으라'고, 와서 들어 본 사람이 또 다른 인연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와서 보니 누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사람도 없고, 다른 절에 가면 주지 스님이 모다 뜰 앞에 내려와서 굽신굽신하면서 어서 오시라고 하고 맞아들이고 또 회장이다 총무다 부회장이다 높은 감투를 씌워서 그러니까 거기는 가면 아주 흐뭇하고 갈 맛이 나는데,

용화사는 와 봤자 스님들이 봐도 본체만체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에이, 빌어먹을 놈의 것 여기만 정법이냐' 그래가지고 한번 와서 보고 부해가 나서 몇 해를 안 왔다가 어쩌다가 또 마음을 먹고 이제사 왔습니다. 솔직히 고백한 분을 몇 분을 만났습니다마는.

 

여기는 그렇게 친절히 와서 굽신굽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왜 내 절에 온 손님한테 불친절이 할 까닭도 없습니다. 여기 절에 20여 명 스님이 계십니다마는 아무도 불친절이 하지 않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굽신거리고 친절히 하지도 않습니다마는, 처음 오신 분이나 10년 20년을 다니신 분이나, 돈을 많이 시주(施主)하신 분이나 한푼도 시주를 아니하신 분이나, 연세가 많은 분이나 젊은 분이나 차별하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불친절이 한다고 해서 기분 나쁘다 생각하고 안 오실 것도 없고, 아무 부담 없이 오셔서 법문 듣고, 부담 없이 오셔서 부처님께 절하고, '저를 만나기가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어렵다'고 비꼬신 분이 있습니다마는, 제가 있으면서 손님을 안 만나는 법은 없습니다.

미리서부터 와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어서 좀 기다리시기가 조금 힘이 드시겠지만, 꼭 만나실 분은 미리 전화를 하시고 그리고 그 시간에 오시면 다 차례차례 다 제가 만나드립니다. 그러니 너무 친절하지 안 한다고 너무 꾸지람을 마시고.

 

이 절은 여러분의 절이지 스님네가 굽신굽신하기를 바래서는 아니됩니다. 스님네들은 누구에게도 굽신거리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누구 앞에도 또 아만(我慢)을 피우지도 않습니다.

수행인은 '부자굴(不自屈) 부자고(不自高)' 아만을 갖다가 공고하지도 떠받치지도 아니하고 또 권리나 재산이 많다고 해서 그 앞에 또 굽신거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스님을 보고 '참 아! 이 절 스님네는 참 훌륭한 스님들이로구나' 이렇게 존경심을 가져야지 불친절하다고 욕을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절은 여러분의 절입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룩한 절이요, 여러분을 위해서 지은 절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가꾸고 아끼고 이 절을 보호해 나가고 그럼으로써 여러분에게 복이 돌아오고 여러분의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는 그러한 도량(道場)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나날이 살기 어려워지고 나날이 험악해져 가고 그렇습니다마는 그럴수록에 우리는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닫고, 불법을 바르게 믿고 철저하게 실천을 해서 이 말세(末世)를 갖다가 정법시대(正法時代)로 회전을 시켜야 하고 이 세계를 지상 극락으로 건설해 나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여러분에게 지워져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하고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헌디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한데, 법법(法法)이 모든 법이 본래로 주(住)한 바가 없어.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니라. 주한 바 없는 곳에 추심(追尋)을 끊어라. 추심, 주한 바 없는 그 법을 쫓아 찾지를 말아라. 사량분별로 그것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한데, 어젯밤 저 태양이 저 서쪽 산마루로 넘어갔는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오늘 옛을 의지해서, 옛과 다름없이 저 동쪽 숲에 새벽 숲에 떠오르는구나.

 

주(住)한 바 없는 법을 사량심(思量心)으로 찾을라 하지 말고, 서쪽에서 진 해가 오늘 새벽에는 동쪽 산에 떠오르는 이것이 바로 법법이 본래 주한 바 없고, 주한 바 없는 곳에 찾지 않는 경계여.

이 도리를 바로 보지 못한 사람은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해야 그래야 그 정진을 바로 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다. 이것이다. 이것이다'할 때에 십만팔천리여.

 

"이것이 아닙니까"

"깨달은 도리를 일러라"

 

주먹을 턱! "이것입니다"

이거? 그 주먹을 어디다 내놔.

 

이것이라고 할 때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들어가. 세세생생에 조막손이 되고....(법문 끊김)

(42분58초~62분14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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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무변찰해허명경(無邊刹海虛明鏡)~ ;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제14권) ‘別傳覺心’

*갓없다 ; ‘가없다(끝이 없다)’의 옛말.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시방찰해(十方刹海) ; 시방세계(十方世界). 찰(刹)은 범어 ksetra의 음역으로 뜻은 토지 · 육지 · 영역. 따라서 찰해는 육해(陸海), 즉 육지와 바다란 의미로 세계를 말한다.

*빗기다[橫] ; ①'가로지르다(양쪽 사이에 기다란 막대나 줄 따위를 가로로 놓거나 꽂다)'의 옛말. ②'비끼다(비스듬히 놓이거나 늘어지다)'의 옛말.

*사사하다(師事-- 스승 사/섬길 사) ; 스승[師]으로 섬겨[事] 가르침을 받다.

*보리수(菩提樹) ; 산스크리트어 bodhi-vṛkṣa  원래 이름은 아설타(阿說他, 산스크리트어 aśvattha)이며, 그 열매를 필발라(畢鉢羅, 산스크리트어 pippala)라고 하는 데서 이 나무를 필발라수(畢鉢羅樹)라고도 하고, 붓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였으므로 보리수라고 함. 상록 교목으로, 잎은 심장 모양이며 끝이 뾰족함.

*샛별 ; 새벽별. 명성(明星). 새벽에 동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금성(金星)’을 이르는 말. 새벽별, 태백성(太白星), 계명성(啓明星), 장경성(長庚星) 등이라고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따르면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이 별이 돋을 때, 정각(正覺)을 이루었다고 한다.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로자나(毘盧遮那) ;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光明遍照,遍一切處)는 뜻으로, 부처의 진신(眞身)을 이르는 말. 비로자나는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을 형상화한 것.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신체(法身體) ; 법신(法身)의 체(體)를 가리키는 말. 진리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絶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마구니 ; 마(魔). [범]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라 하고, 줄여서 마(魔)라고만 한다。장애자(障礙者) · 살자(殺者) · 악자(惡者)라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마(魔)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마(魔)란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그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그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그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고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를 보고 제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제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옛말에 ‘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고 하시니라.

*업(業) ; (산스크리트어 : karma 카르마) ; ①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와 말과 생각, 일체의 행위.

②행위와 말과 생각이 남기는 잠재력. 과보를 초래하는 잠재력.

③선악(善惡)의 행위에 따라 받는 고락(苦樂)의 과보(果報).

④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행위.

⑤어떠한 결과를 일으키는 원인이나 조건이 되는 작용. 과거에서 미래로 존속하는 세력.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십대제자(十大弟子) ; 석가모니의 제자 중 수행과 지혜가 뛰어난 10명을 이르는 말.

①사리불(舍利弗) : 산스크리트어 śāriputr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지혜가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목건련(目犍連)과 함께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붓다의 제자인 앗사지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②목건련(目犍連) : 산스크리트어 maud galyāyan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신통력이 뛰어나 신통제일(神通第一)이라 일컬음. 원래 산자야(sañjaya)의 수제자였으나 사리불(舍利弗)과 함께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보다 나이가 많았다.

③가섭(迦葉) : 산스크리트어 kāśyapa의 음사. 마가다국(magadha國) 출신으로, 엄격하게 수행하여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일컬음. 결혼했으나 아내와 함께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됨.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그 모임을 주도함.

④수보리(須菩提) : 산스크리트어 subhūti의 음사.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 출신으로, 공(空)의 이치에 밝아 해공제일(解空第一)이라 일컬음. 그래서 공(空)을 설하는 경(經)에 자주 등장하여 설법함.

⑤부루나(富樓那) : 산스크리트어 pūrṇa의 음사. 바라문 출신으로, 설법을 잘 하여 설법제일(說法第一)이라 일컬음. 녹야원(鹿野苑)에서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됨. 인도의 서쪽 지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하다가 거기에 입적함.

⑥아나율(阿那律) : 산스크리트어 aniruddh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아난(阿難)·난타(難陀) 등과 함께 출가함. 통찰력이 깊어 천안제일(天眼第一) 이라 일컬음.

⑦가전연(迦旃延) : 산스크리트어 kātyāyana의 음사. 인도의 서쪽에 있던 아반티국(avanti國)의 크샤트리야 출신으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붓다를 그 나라로 초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출가함.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함. 교리에 밝아 논의제일(論議第一)이라 일컬음.

⑧우바리(優波離) : 산스크리트어 upāli의 음사. 노예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는데, 아난(阿難)·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이 출가할 때 같이 붓다의 제자가 됨.

계율에 엄격하여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 일컬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계율에 대한 모든 사항을 암송함으로써 율장(律藏)의 성립에 크게 기여함.

⑨나후라(羅睺羅) : 산스크리트어 rāhula의 음사. 붓다의 아들.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함. 지켜야 할 것은 스스로 잘 지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일컬음.

⑩아난(阿難) : 산스크리트어 ānanda의 음사. 붓다의 사촌 동생으로, 붓다가 깨달음을 성취한 후 고향에 왔을 때 난타(難陀)·아나율(阿那律) 등과 함께 출가함. 붓다의 나이 50여 세에 시자(侍者)로 추천되어 붓다가 입멸할 때까지 보좌하면서 가장 많은 설법을 들어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일컬음.

붓다에게 여성의 출가를 3번이나 간청하여 허락을 받음. 붓다가 입멸한 직후, 왕사성(王舍城) 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한 제1차 결집(結集) 때, 아난이 기억을 더듬어 가며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붓다께서는……”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암송하면, 여러 비구들은 아난의 기억이 맞는지를 확인하여 잘못이 있으면 정정한 후, 모두 함께 암송함으로써 경장(經藏)이 결집됨.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축생과보(畜生果報) ; 축생(畜生)으로 태어나는 과보(果報).

*과보(果報 열매 과/갚을 보) ;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천안통(天眼通) ;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염부제(閻浮提) ; 염부(閻浮). 남염부제(南閻浮提). 섬부주(贍部洲). 남섬부주(南贍部洲). 산스크리트어 jambu-dvīpa의 음사. 염부(閻浮), 섬부(贍部)는 jambu의 음역어이며, 제(提)와 주(洲)는 dvipa의 각각 음역어 및 의역어이다. jambu는 나무 이름.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네 대륙(四洲)이 있는데, '염부'라는 이름은 여기에 자란다는 점부(jambu)에 유래하며, 남방에 있기 때문에 남섬부주(南贍部洲)라고 한다.

'우리 인간들이 사는 곳'이라 하며, 여러 부처님이 나타나는 곳은 사주(四洲) 가운데 이곳뿐이라 함. 불전(佛典)에서는 ‘인간세계의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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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진심(瞋心) ; 왈칵 성내는 마음.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경계에 대하여 미워하거나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페롭다 ; '파리하다(몸이 마르고 낯빛이나 살색이 핏기가 전혀 없다)'의 사투리.

*소락(酥酪 연유 소/쇠젖 락) ; 소나 양 등의 젖.

*오정육(五淨肉) ; 스님들이 먹을 수 있도록 허용된 다섯 가지의 청정한 고기. 오종정육(五種淨肉).

①나를 위해 죽이는 것을 목격하지 않은 것(不見爲我殺). ②나를 위해 죽였다는 것을 듣지 못한 것(不聞爲我殺). ③나를 위해 죽였다고 의심되지 않는 것(不疑爲我殺). ④수명이 다하여 저절로 죽은 것(自死). ⑤새가 먹다 남긴 것(鳥殘).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육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이 신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하지마는 흔히 여섯 가지로 말한다

1. 신족통(神足通)은 공간에 걸림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는 것

2. 천안통(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보는 것

3. 천이통(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 것

4. 타심통(他心通)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중생이라도 그 생각하는 바를 다 아는 것

5. 숙명통(宿命通)은 자기뿐 아니라 육도(六道)의 모든 중생의 전생•금생•후생의 온갖 생애를 다 아는 것

6. 누진통(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자재(自在 스스로 자/있을·제멋대로 하다 재) ; ①자기가 원하는 대로인 것.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인 것. 자유자재로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원하는 대로의 경지. ②그 자신에 의해 존재하는 것. ③자유롭다. 자신에게 의존하다. ④독립. ⑤느긋한 심신의 작용. 잡혀지지 않는 것. ⑥불보살에 갖추어진 힘을 말함. 부처님을 자재인(自在人)이라고도 함.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장군죽비(將軍竹篦) ; 보통 죽비(竹篦)는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쓰는 40~50센티의 불교 용구인데, 장군죽비는 참선할 때 졸거나 자세가 흐트러진 수행자의 어깨를 쳐서 졸음을 쫓는 약 2m의 큰 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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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소년이로학난성~' ; 주자(朱子)의 <권학가(勸學歌)>

*일촌광음(一寸光陰 한 일/마디·조금 촌/빛 광/응달 음) ; 아주 짧은 시간. 또는 얼마 안 되는 시간. 촌음(寸陰). 촌각(寸刻).

*일촌(一寸 한 일/마디 촌) ; ①얼마 안 되는 것. 약간. 조금. 잠깐. ②촌(寸). 한 치(약 3.03cm).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경(輕)하다 ; ①(무엇의 가치나 비중이)대수롭지 아니하다. ②(말이나 행동이)진중하지 못하고 경솔하다.

*가을 소리[秋聲] ; 가을을 느끼게 하는 소리. 가을철의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등을 이른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분일초(一分一秒) ; '1분과 1초'로 아주 짧은 시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별도리(別道理) ;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나 수단. 다른 방법이나 수단.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업연(業緣) ; 업(業)의 과보(果報)를 초래하는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곳, 곧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를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곳. ③사찰. -‘도장’으로 읽지 않고 습관상 ‘도량’으로 발음한다.

[참고]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정법시대(正法時代 바르다·올바르다 정/부처님의 가르침 법/때 시/세상 대) ;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 p93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십만팔천리(十萬八千里) ; 산술적으로 '십만팔천 * 리(里 약 0.393km) = 4만2천4백4십4 km'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 참고로 서울 부산까지 거리는 4백7십7 킬로미터다.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조막손 ; 손가락이 없거나 오그라져서 펴지 못하는 손.

 

 

 

[주요 내용]

 

(게송)무변찰해허명경~ / 용화사에서 참선 하는 법을 기초부터서 잘 배울 수가 있다 / 올바른 믿음 / 분심, 사리불과 아나율의 일화 / 전강 조실스님 '조는 사람 눈구녘을 쑤셔 버린다' / 자기 속으로부터의 분심.

(게송)소년이로학난성~ / '이뭣고?'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최상승법이요, 정법이다 / 지금 이 자리, 이 찰나부터서 공부를 시작해 나가야 한다 / 용화사는 여러분의 절,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룩한 절, 여러분을 위해서 지은 절 / (게송)법법본래무소주~ / 주(住)한 바 없는 법을 사량심으로 찾을라 하지 말고, 본참공안에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독로해야 정진을 바로 해 가는 것.

 

 

 

[주요 문구]

 

정법은 다른 게 아니고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불법을 바로 믿었다', 정신(正信)이라 하면 자기도 아무리 죄가 많건, 근기가 약하건, 여자건, 말세에 태어났건, 무식하건,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자기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철저한 신념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불법을 바르게 믿는 것이여. 그 신념이 서 있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어.

 

'분심이 안 난다. 신심이 안 난다. 아무리 화두(話頭)를 들어도 의심(疑心)이 안 난다. 어떻게 하면 의단(疑團)이 일어날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면 분심이 나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말씀을 한마디해서 신심과 분심과 대의단이 나도록 해달라'고 가끔 그러한 수좌(首座) 스님들이 와서 그렇게 부탁을 합니다마는, 신심과 분심과 의단은 자기 자신이 일으켜야지 어떻게 그것을...

 

이 참선(參禪)은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알뜰히 단속해 나가는 것이 도를 빨리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별도리(別道理)가 없습니다. 별 방법이 없고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을 돌이키는 오직 거기에 대도 성취하는 열쇠가 달려 있습니다.

한 생각을 섣불리 지내는 사람은 대도(大道)는커녕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밖에는 할 길이 없는 것이고, 그 한 생각을 바른 신심(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탁! 돌이켜 관조할 때 무량겁 생사 업연(業緣)이 거기에서 무너져 버리고 대도에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숨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안 죽는 것도 아니고, 어려서도 죽고 젊어서도 죽고, 어제 건강한 사람이 오늘 죽기도 하고 그래서 도대체 인생의 무상(無常)한 것은 믿을 수가 없고, 내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당장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이 찰나부터서 한 생각 돌이키는 공부를 시작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절은 여러분의 절입니다. 여러분의 정성으로 이룩한 절이요, 여러분을 위해서 지은 절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 가꾸고 아끼고 이 절을 보호해 나가고 그럼으로써 여러분에게 복이 돌아오고 여러분의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는 그러한 도량(道場)으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나날이 살기 어려워지고 험악해져 가고 그렇습니다마는 그럴수록에 우리는 무상(無常)을 철저히 깨닫고, 불법을 바르게 믿고 철저하게 실천을 해서 이 말세(末世)를 갖다가 정법시대(正法時代)로 회전을 시켜야 하고 이 세계를 지상 극락으로 건설해 나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여러분에게 지워져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76~200)2016. 5. 10. 13:42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194)—1983 동안거해제 백일기도회향(83.02.27)(58)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17분.


(1/3)----------------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하고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나무~ 아미타불~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한데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하고, 그대와 더불어 함께 다니고, 함께 걷고 또한 함께 모든 행동을 같이하는데,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라. 일어섰다 앉았다 잠시도 서로 떨어질 사이가 없이 그렇게 같이 살아오기를 세월이 길었다 그말이여.


무량겁(無量劫) 동안을 임과 함께 그렇게 살아왔다 그말이여. 때로는 천상(天上)에서, 때로는 인간에서, 때로는 축생에서, 때로는 지옥에서, 때로는 아귀에서, 육도(六途) 윤회(輪廻)하면서 잠시도 여읜 때가 없이 그렇게 같이 오늘날까지 동고동락(同苦同樂),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같이 생활을 해왔다 그말이여.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인데, 목마를 때는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플 때는 밥을 먹으면서물을 마실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항시 대면(對面) 하고 있다 그말이여.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사량(思量) 하면 벌써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 천리만리(千里萬里) 멀어져 버린다 그말이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항상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데 생각 일으켜서 뉘기 짜면, 뉘기 짜서 볼려고 하면 천만리(千萬里) 달아나 버린다 그말이여.

항시 떠날라야 떠날 없는 영원한 임을 가지고 있으면서 참다운 임을 버려두고 밖에서 임을 찾고 있다 그말이여.


중생(衆生) 애정으로,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밖에서 구하는 임이라 하는 것은 나에게 괴로움만을 갖다 주고, 생사윤회(生死輪廻) 떨어지게 하는 그러한 무서운 쇠사슬인데 중생은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쇠사슬에 스스로 자기 몸을 묶고, 자기가 파놓은 구덩이 속에 자기가 들어가서 빠질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삼동 안거(三冬安居) 해제날이고, 동시에 백일기도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은 비구 스님네 선방도 20명과 후원 사무실 모다 해서 30 대중이 지나고, 보살선방에서도 80명이라고 하는 대중이 방부를 들이고, 항시 60명을 오르내리면서 동안을 보람있게 알차게 정진을 왔습니다.


날씨도 춥고 여러 가지가 고생스럽지만, 모든 시설이 편안한 집과 같지를 못하고 음식이라든지 화장실이라든지 씻는 데라든지모든 것이 잠자리라든지 불편하기가 그지없지만 고행을 자진해서 달게 여기고, 거기에서 정진(精進) 하기 위해서 이렇게 회상(會上) 모였습니다. 누가 돈을 주면서 와서 여기 하라고 해서는 세상없이도 오실 분들이죠.


그런데 인원이 차서 방부(房付) 받을 수가 없다고 해도 칠십 팔십 연세가 많으신 보살님네들이 신심으로 그렇게 와서 고행난행(苦行難行) 하셨는데,

팔십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마는 그동안에 그보다 훨씬 작은 수로 지낼 때보다도 매우 질서있게 정진을 모다 잘하시고 그렇게 해서 해제를 맞이했습니다.


여러 대중이 모여서 살게 되면 자연히 팔도에서 풍속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모든 것이 마음과 같지 않는 그러한 분들이 서로 모여서 방에서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같이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하루 이틀은 몰라도 달이라는 세월을 그렇게 탈이 없이 지낸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여럿이 지내다 보면 마음과 같지 않을 때에 어떻게 그것을때로는 언쟁을 하기도 하고, 말은 해도 속으로 매우 불안하고, 짜증이 나고 속이 상하고 그러는데,

그럴 때에 화두를 돌이켜서 마음과 같지 않는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므로 해서 정진을 나가니까 일이 일어나지를 않고 대중이 화합해서 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과거에 인행(因行) 때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수행을 때에 산중에서 정진을 하고 계시는데가리왕(歌利王)이라 하는 왕이 신하들과 어여쁜 궁녀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하러 나왔다 그말이여. 사냥을 하러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놀다가, 가리왕이 피곤해서 잠이 들었어.


잠이 드니까 상감을 모시고 나온 궁녀들이 무료해서 근처로 산책을 하다가 어느 나무 밑에를 보니까 선인(仙人) 좌선을 하고 있다 그말이여.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얼굴이 너무 청수(淸秀)하고 거룩하게 생겼다 그말이여. 얼굴도 빼어나게 잘생긴 데다가 수행(修行) 하니까 그렇게 청수해서 대번에 첫눈에 존경심이 .

그래서 이야기를 가서 붙였다 그말이여. 붙이니까 선인(仙人) 여러 가지로 좋은 법문을 해줘서 법문을 들으니까 모다 환희심이 나고, 존경심이 나고,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가리왕이 한참 실컷 자고 눈을 떠보니까 궁녀들이 어디로 곳이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궁녀들이 어디로 갔는가 찾다가, 마치 인욕선인을 둘러싸고 앉아서 무언 말을 물어보고 듣고 모다 그랬산다 그말이여.

그래 왕이 속에서 ! 아주 진심(瞋心) 났어. 그래 가지고 쫓아가서 인욕선인(忍辱仙人) 칼로 그저 몸뚱이를 아주 난도질을 쳤어. 그래도 인욕선인은 하나 깜짝 하고 쪼끔도 진심(瞋心) 내지 아니한 고대로 날카로운 칼을 받았다 그말이여.


만약에 가리왕한테 몸을 갖다가 그렇게 칼로 찍고 자르고 한데, 생각이라도 진심(瞋心) 냈다면 어찌 내가 성불(成佛) 했겠느냐? 어찌 내가 부처님께 장차 성불하리라고 하는 수기(授記) 받았겠느냐?’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심(瞋心)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나느냐?


성내는 마음금년 동안에는 우리 모두가 성을 내지 말고, 성내는 마음을 돌이켜서 정진을 열심히 하자. 정진을 열심히 함으로써 성이나 작은 성이나 성을 내는 해로 하자그런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대관절 성내는 마음을 억지로 참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성내는 마음이 어디서 나는가?’ 근원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입니다.


성을 내고자 할라면은 첫째 인아상(人我相) 끊어야 하는 것이여.

내다, 남이다, 내가 옳고 사람이 그르다, 내가 잘났다, 나는 유식하다, 나는 귀인이다, 사람은 무식하고 천한 사람이다, 사람은 성격이 못되었고 내가 옳다, 나는 참선을 여러 해를 해서 나는 구참이다, 사람은 인자사 가지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러한 인아상(人我相) 있으므로 해서 그런 성을 내니까, 성내는 마음을 없애려면 인아상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인아상을 끊는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인아상(人我相)! ‘내다, 남이다하는 인아상이 있는 사람은 항시 다른 사람의 위에 있기를 좋아하거든. 어간(御間) 앉고 싶고, 윗자리에 앉고 싶고, 무엇이든지 자기를 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남의 밑에 있기를 싫어해. 자리도 하판이나 아랫자리에 앉기를 싫어한다 그말이여. 밥도 먼저 받기를 좋아하고, 차담(茶啖) 먼저 받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인아상(人我相) 없는, 인아(人我) 없는 것을 요달한 사람은 누가 자기를 윗자리에 앉히고 대접을 해준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아니하고, 윗자리에 앉히지를 않고 대우를 해주고 아랫자리로 앉으라고 그러고, 천히 여긴다고 해서 조끔도 성내는 마음이 없어.

그래 가지고 일체 중생 앞에 항시 하심(下心) . 항시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자기는 겸손하고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 밑에 앉거나 하대를 받는다 해도 그것을 달게 여긴다 그말이여.


수행(修行) 많이 할수록에 겸손하고, 수행을 많이 할수록에 남을 존경하고, 모든 사람 앞에 하심을 하고, 모든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자기를 남이 알아주지 않고 업신여긴다 하더라도 조끔도 섭섭하거나 진심이 일어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냥 그것을 달게 여긴다 그말이여.


이렇게 되어야 여러 참선을 하고, 여러 선방에서 공부한 보람이 있고, 그것이 바로 후배들에게, 이제 새로 선방에 나온 사람들에게 선배로서 보여줄 있는 거룩하고 훌륭한 마음가짐이요, 행동이라고 수가 있을 것입니다.(처음~2021)



(2/3)----------------


주로 보살선방에서 어느 철에나 문제가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자리에 관한 문제.


자리 자리, 여기가 자리다물론 처음에 앉을 차례차례 자리가 지정이 됩니다마는, 지정이 되었다가도 경우에 따라서는 쪼끔 밀쳐 앉을 수도 있고 특별한 경우에는 자리를 이리저리 바꿀 수도 있고 그런 게지,

한번 자리가 지정이 되면은 치도 양보를 아니하고, 아주 거기다 금을 그어 놓고는 거기는 범접(犯接) 못하게 하고, 쪼끔만 저리 밀쳤다 하면은 진심을 내고 싸움을 할려고 그러고,

이러한 데서야 어찌 최상승법(最上乘法) 믿고 참선을 하는그것도 철이 아니라 20, 30년을 수행을 구참(久參) 보살이라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조그마한 일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가짐을 우리는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분이 정직하고 얌전하고, 절에 오시나 마을로 가나 모든 점에 있어서 훌륭한 분이요, 신심이 있는 분이라 할지라도 조그마한 자리 하나를 가지고 말썽을 일으키고 양보를 못하고 그렇다면, 밖에 다른 훌륭한 한다고 하는 것을 어찌 보장을 수가 있느냐.


파리 마리 죽이는 것이 죄가 많으냐, 사람을 하나 죽이는 것이 죄가 많으냐?’

그릇의 물이 크냐, 바닷물이 크냐?’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죄가 크냐, 파리 마리를 죽이는 죄가 크냐?

상식적으로 파리 그까짓 거야 죽인다고 해서 무슨 죄가 되며, 그까짓 것은 똥에 가 앉았다 밥에 앉았다 그러니, 그것은 약을 풍겨서 죽여 없애야지 그까짓 하나 죽인다고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러니 사람을 죽이는 일이야 말로 참으로 죄가 된다상식적으로 물어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을 것입니다.


그러나도문(道門)에서는 사람 죽이는 일보다도 파리 하나 죽이는 죄가 크다이렇게 말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냐 하면 사람은 죽이라고 해도 죽일 까닭이 없으니 사람 죽이는 일이 죄가 많다고 것도 없어. 그러나 파리는 죽여도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살생했다고 하는 죄책감도 없이 마구 때려죽이기 때문에 파리 죽이는 죄가 참으로 크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인식을 하고 느껴야 것이다 그말이여.


파리 목숨 하나를 사람 목숨만큼 애끼고 소중히 여기고 살생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물어 것도 없이 닭이나 소나 돼지는 죽일 것이요. 어찌 파리 목숨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사람을 죽일 리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그래서사람 목숨 죽이는 것보다도 파리 목숨 죽이는 죄가 크다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 목숨이나 파리 목숨은 근본에 들어가서는 똑같은 것이여.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본성(本性) 크고 훌륭하고, 파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은 보잘 것이 없느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전생(前生) 지은 () 따라서 몸뚱이는 비록 사람으로 받아나고 파리로 받아나서 차이가 있지만, 본성(本性)자리는 사람이나 파리나 소나 돼지나 똑같은 것이다 그말이여. 부처님과 중생과도 똑같듯이 사람과 파리와도 또한 똑같은 것이다 그말이여.


바닷물은 많고 그릇의 물은 적다고 누구든지 보지만바닷물보다도 그릇의 물이 훨씬 많다이것입니다.

옛날에 오백 명의 상인들이 바다에 들어가서 보물을 건지는데, 그래 가지고 보물을 건져 가지고 그걸 장사를 하는데, 오백 명이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어느 훌륭한 분을 초청을 해다가 그분을 어른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문의를 하고 안내를 하고, 어른의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다의 () 나와서 그이한테 묻기를 그릇의 물이 많으냐, 바닷물이 많으냐?"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 현인(賢人) 그릇의 물이 많다대답을 했습니다.

어째서 바닷물보단 그릇의 물이 많다고 하는고?”


그릇의 물을 부처님께 공양을 하거나, 스님네께 공양을 하거나,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나 부모님께 목이 말랐을 떠다 바치거나, 또는 목마른 행인에게 주거나, 거지나 가난한 사람에게 그릇의 물을 공덕은 영원한 것이고,

바닷물은 많은 바닷물이라 할지라도 수천만겁, 억겁이 지내가면 바닷물이 말라버리고 육지가 되는 때가 있어. 많은 바닷물은 말라서 육지가 되는 때가 있지만, 그릇의 물을 삼보(三寶) 부모나 목마른 가난한 사람에게 공덕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릇의 물이 많다고 수가 있습니다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 해신(海神) 사람의 말이 너무나 진리에 부합이 되고, 정말 훌륭하기 때문에 해신이 도와서 바다에서 많은 보물을 건져 가지고, 오백 명의 장사꾼들이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전해 내려옵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5계를 지키고 10계를 지키며, 수행을 철저히 하고 보시를 해서 보시 공덕을 쌓아 가지고 복덕을 닦고, 이러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소홀히 해서는 일입니다마는,

선방에서 자리 하나를 가지고 양보를 때에 별것도 아니죠, 아무 일도 아니여. 내가 밑에 자리로 앉아도 그만, 윗자리에 앉아도 그만, 자리를 이리저리 바꿔도경우에 따라서 입승 스님이 이리저리 바꾸라고 해서 바꾼다하더라도 아무 진심(瞋心) 없이 바꿀 수가 있고, 잠자리도 여기에 지정이 되면 여기에 자다가 경우에 따라서 쪼끔 저리 밀치기도 하고 이리 변경이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러한 조그마한 하나를 겸손한 마음으로 응하지를 못하고이것은 자리다, 이것은 치도 내가 양보할 ....’ 이래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소리를 치고 싸움을 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져서야 어찌 대도(大道) 성취하며, 어찌 무량 중생을 제도(濟度) 있는 불보살을 기약할 수가 있겠느냐 말씀이여.


저수지에 둑이 무너진 것도 조그마한 모래알과 같은 그러한 구먹에서부터 물이 새기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구녁이 커져 가지고 결국은 , 스무 되는 저수지 둑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죄를 지어야 지옥에 떨어진 걸로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만,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조그마한 하찮은 생각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조그마한 자리 문제를 가지고 얘기를 하냐 하면 별것도 아닌 하찮은 일로 해서 성불(成佛) 못하게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삼악도(三惡道)에까지 떨어질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내가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인아상(人我相)! ‘, ‘나는 나이가 많고 나는 구참이다그러한 옹졸하고 창피하고 못난 생각이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아상(人我相) ! 떨어져 버린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자기를 무시를 한다 하더라도 진심(瞋心) 나기 커녕은 오히려 법락(法樂)으로 삼을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무시해서이리 가라, 저리 가라, 잘못했다, 그러냐 다른 사람한테 그러한 무시를 당한다 하더라도 마음에 조끔도 동요가 없고 진심(瞋心) 일어나. 진심이 일어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 기쁨이 있어. 마음 속도 편안하고 얼굴도 화평하면서 사람의 말을 따라준다 그말이여.

, 그렇게 하지요.’ 얼마나 훌륭하냐 그말이여. 조그만한 일로 해서 사람의 인격 전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찮은 가지고 볼쏙 진심(瞋心) 가지고 잘난 척하고, 싸움을 할려고 그러고, 감정을 표현하고, 그게 10, 20 참선하는 사람의 일이냐 그말이여.

하는 생각, ‘내가 잘났다 하는 생각, 아만(我慢)∙아치(我癡)∙아애(我愛)∙아견(我見), 내노라 나는 공부를 잘한다, 나는 구참이다, 나는 잘났다 하는 자기만을 위하는 생각, 잘났다는 생각, 남을 업신여기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이 바로 우리 중생의 생각 속에 차있는 것이여. 생각을 돌이키는 것이 수행의 목적이다 그말이여.


아인(我人) 있으므로 인해서, 인아상(人我相) 있으므로 해서 업이 발동이 되고, 죄를 짓게 되고, 죄업이 결국은 보리(菩提), 무상대도(無上大道) 성취하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말이여.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인아상(人我相)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한 것이다 그말이여.


어째서 이렇게 참선을 해도 답답하고, 공부가 조끔도 나아가지 아니하니 어째서 그럽니까?’

되네, 안되네 생각 말고 어쨌든지 열심히만 하시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엄격하게 말하면 속에 인아상(人我相) 차있기 때문에 공부가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대놓고인아상(人我相) 때문에 안된다 내가 박절(迫切)해서 차마 말을 안 했습니다마는,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내가 여러분께 말씀을 드립니다. 인아상(人我相)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무상대도(無上大道) 들어가기를 못하는 것이다 말씀이여.


그래서 보리(菩提), 무상정각(無上正覺) 이루고자 할진대는 첫째 죄업을 제거해야 하고, 죄업을 끊고자 하면 인아상(人我相) 끊어야 한다 말씀입니다.

아무리 금강경을 독송하고, 아무리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아무리 고왕경을 독송하고, 아무리 방생을 하고, 아무리 계행을 철저히 지킨다하더라도 인아상이 속에 가지고 있어서는 죽을 때까지 그러한 좋다고 하는 일은 다해도 깨달음에는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금강경을 독송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방생을 하고, 계행을 지킨다 하면 그렇게 만큼의 공덕이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여. 반드시 공덕은 추호(秋毫) 어김이 없이 공덕이 있지만, 깨달음에 나아갈려면 인아상(人我相)부터 무너뜨려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인아상(人我相)! 그것은 크게 발동할 수도 있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은 조그마한 문제로 인해서 인아상이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로 인아상(人我相) 발동을 하거나, 작은 일로 발동을 하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스통이나 휘발유 공장에 불이 붙었거나 화약에 불이 붙어서 불이 나나, 조그마한 성냥불 하나로 불이 나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그만한 성냥불이 불이 붙으면은 수십 , 몇십 억의 손해도 가져오고 사람도 수십 명의 인명(人命) 죽이게 되는 것이지, 작은 불이라 해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여. 오히려 불보다도 작은 불을 조심할 알아야 불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이여요.


참으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을려면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음을 하고 그러한 죄보다도 조그마한 일을 삼가하고 미연에 방지를 알아야,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2028~4056)



(3/3)----------------


인아상(人我相) 어떻게 끊어야 하느냐?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어요.


어떠한 일을 닥쳐서누가 나를 무시하거나, 자리를 남이 저리 밀쳐버리고 앉았거나, 소지품을 누가 함부로 손댔거나, 대단히 기분이 나쁘죠, 누구든지.

기분이 나쁘지만 여기는 기분 나쁜 생각을 밖으로 표현을 해서 싸움을 할려고 것이 아니라, 기분 나쁜 생각을 ! 돌이켜 가지고 화두(話頭) 들도록 한다면진심(瞋心)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화두를 들어버리면 제절로 진심은 곳이 없고, 일로 인해서 나는 공부가 걸음 나아가게 된다 말씀이여.


최상승법(最上乘法)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묘한 법이지만, 그게 생각 속에서 육도(六途) 끊어버리고, 생각 속에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의 땅에 뛰어 올라가는 길이다 그말이여.

그래서 중생은 죽어서 지옥에 것을 두려워하고, 그리고서 현실에 있어서의 생각 속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 있어서는 죽어서 지옥에 걱정은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우선 당장 일념(一念) 속에 지옥이 두려운 줄을 뜨겁게 알기 때문에,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일념 속의 지옥에 빠지지 아니한 사람이 어찌 죽어서 지옥에 들어갈 것을 걱정할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중생은 생각 속에 지옥을 등한(等閒) 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평생 동안 동안도 극락정토(極樂淨土) 법열(法悅) 느끼지를 못한 수없는 죄를 짓다가, 한량 없는 죄를 지어 가지고 마침내 무량겁 지옥고(地獄苦)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맞이해서,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금년 동안에 우리가 지켜야 진심(瞋心) 내지 말자 하는 과제를 놓고 매우 자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해제해서 모다 댁에 돌아가시게 되겠습니다마는 댁에 돌아가서도 동안 선방에서 정진한 마음가짐으로 댁에 가셔서도 아침에 그렇게 일찍 일어나시고, 저녁에는 일찍 주무시고, 모든 생활을 규칙 있게 살아가실 것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것이 절에서 지낸 거와 같지 않고애들은 떠들어 샀고, 모든 것이 뜻과 같지 않는다고 해서 짜증을 내거나 진심을 내시지 말고, 그때 그때 화두를 들어서 오늘 산승이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일을 퍼뜩 생각을 내셔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어서 나가시고.


아들의 뜻이나 며느님의 뜻이나 모든 가족, 일가 친척이 마음과 같지 않는 그러한 사람을 만나거나, 그러한 말을 듣거나, 그러한 일을 당했을 때에 상대방의 뜻을 존중해 주고 하심하고, 그렇게 하면서 화두를 들어 나가신다면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좋아하고, 뜻을 따라주고, 나를 존중해 주고, 나를 보호해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할 , 다른 사람도 뜻을 존중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직접 실천을 해보면 정말 이것은 틀림없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세상에 모든 것은 나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어서, 나의 업의 표현이어서, 얼굴을 찌푸리고 거울을 보면 거울에 나타난 상호도 찌푸린 얼굴로 비출 것이며, 내가 웃는 얼굴로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친 영상도 웃는 낯으로 나에게 비춰질 것입니다.

산골짜기에서 고함을 치면, 크게 고함을 지르면 소리로 메아리가 돌아올 것이요, 성내는 목소리로 욕을 하면 성낸 목소리로, 욕하는 소리로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남편을 상대할 때나 또는 며느리를 상대할 때나, 자식을 상대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일을 주의해라그랬습니다마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가까운 일을 주의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일은 항시 미리 생각하고 조심을 하면서 가까운 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사실은 가까운 일을 조심할 것이며, 작은 일을 조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믿고 가까운 사람한테 소홀히 함으로써 사람한테 큰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 믿는 사람을 소홀히 가지고 회사가 망하기도 하고, 나라가 망하기도 하고, 임금이나 대통령이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도 되고, 나라를 빼앗기게도 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에 얼마든지 그러한 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큰일보다도 작은 , 먼일 보다도 가까운 일을 항시 조심하고 삼가하고 여법(如法)하게 나가므로 해서 큰일을 미연에 막고, 근심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 최상승법하니까 굉장히 멀고 큰일이라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생각! 일어났을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바로 최상승법이고, 코앞에 조그마한 일을 다스리는 것이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 끊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도악취모소이종(倒握吹毛掃異)하야  돈령심지진개통(頓令心地盡開通)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봉망독로비로정(鋒芒獨露毘盧頂)하면  범성제교입하풍(凡聖齊敎立下風)이니라

나무~ 아미타불~


도악취모소이종(倒握吹毛掃異)하야, 취모리(吹毛利), 취모리라 하는 것은 아주 보검(寶劍)인데보배 칼인데, 칼날에다가 머리카락을 거기다 대고 불어버리면 머리카락이 탁탁 잘려나가는 그렇게 날카롭게 드는 보배 칼이 취모리라 하는 칼인데, 취모리를 이렇게 칼자루를 정식으로 것이 아니라 칼자루를 이렇게 거꾸로 쥔다 그말이여.

취모리라는 보검을 까꾸로 쥐고 이종(), 다른 발자죽을 쓸어버려. 팔만사천 마군(魔軍)이를 갖다가 쓸어버린다 그말이여.


어째서 칼자루를 정식으로 칼이 저쪽으로 가도록 이렇게 쥐지를 아니하고, 칼날이 자기 쪽으로 오도록 이렇게 까꾸로 칼날을 쥐느냐? 팔만사천 마군이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칼날을 까꾸로 쥐고 칼날을 쓰라 그말이여.


그렇게 가지고 돈령심지진개통(頓令心地盡開通)이여. 몰록 마음, 자기 심지(心地) 하여금 개통(開通)하도록 하라. 터지도록 하라 그말이여.

자기 마음 땅에 팔만사천 마군(魔軍)이가 도사리고 있으니까 칼날을 까꾸로 쥐고 칼날을 밖에를 치기 위해서 쓰지를 말고, 까꾸로 쥐고 자기를 치라 그말이여. 자기를 쳐서 팔만사천 마음 속에 마구니를 항복을 받아서 지혜의 확철대오를 하라 그말이여.


봉망독로비로정(鋒芒獨露毘盧頂)하면, 칼날이 비로(毘盧) 정상에 홀로 드러나. 비로봉은 모든 산에 최고의 봉우리라 그말이여. 비로자나 부처님의 이마빡이라 그말이여.

이마빡 위에 취모리라고 하는 칼날이 홀로 번쩍거리게 한다면, 칼날 아래 모든 범부와 모든 성현이 한목 하풍(下風) 서게 것이다(凡聖齊敎立下風). 칼날 아래는 일체 성현과 모든 범부팔만사천 마군이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범부와 모든 성현까지도 칼날 아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아래 가서 서게 것이다 그말이여.


취모검! 취모리라고 하는 보검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본참화두(本參話頭) 말이여. 본참화두를 가지고, 화두를 가지고칼자루를 놨다하면 마구니가 안에서 일어나고, 밖에서 일어나 가지고 순식간에 자기의 목숨을 앗아갈 것이요. 자기를 끌고 축생이나 아귀나 지옥으로 자기를 끌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먹을 , 입을 , 눈으로 무엇을 , 귀로 무엇을 들을 , 마음에 드는 일을 만나거나, 마음을 거슬리는 역경계를 만나거나, 잠시도 취모검을 놓지 말고 항시 칼날을 쥐고서 하루하루를 정진을 나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달을 그렇게 지내시고 다시 다음 철에 회상(會上) 모여서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412~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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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여군동보우동행~’ ; [금강경오가해]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천상(天上) : 욕계의 육욕천(六欲天) 색계·무색계의 여러 () 통틀어 일컬음. ()들이 사는 . () 세계.

*육도윤회(六途輪廻) ; 선악(善惡) 응보(應報)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고락(苦樂)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 ; 자기의 뜻에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악견(惡見) 여섯 가지 근본 번뇌] 하나.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 15일부터 다음해 1 15일까지) 말한다.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장소. 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정진(精進) : [] Vi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보살이 수행하는 바라밀(六波羅蜜) 하나。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닦는 생각() 닦는 () 있어서는 된다。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방부(房付 ·거처 /·부탁할 )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하는 .

*고행난행(苦行難行) ; 난행고행(難行苦行). 깨달음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겪으며 하는 수행.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 되는 ().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 보살이 인행(因行)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인욕(忍辱) : [] Ksanti  욕되는 것을 견디어 참는 것이다。여섯 가지 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야 한다.

*선인(仙人) ; 도를 닦는 사람.

*가리왕(歌利王) ; 산스크리트어 kāli 산스크리트어 kaliṅga 음사(音寫). 가릉가왕(迦陵伽王), 가리왕(迦利王·迦梨王), 갈리왕(羯利王), 갈릉가왕(羯陵伽王)이라고도 한다. 교일(憍逸), 투쟁(鬪諍), 악생(惡生), 악세(惡世) 등으로 한역한다.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보살행을 수행할 가리왕이 교만의 질투심으로 인해 인욕선인의 신체를 절단했으나 인욕선인은 끝내 화를 내지 않았다.

*청수(淸秀)하다 : 얼굴이나 모습 따위가 깨끗하고 빼어나다.

*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인자사 ; ‘이제야 사투리.

*어간(御間) : 절의 법당이나 큰방의 한복판.

*하판(下판) ; 절의 큰방의 아랫목. 이쪽 벽에는 주로 삼함(三緘 ·· 身口意을 삼가라는 )라고 써붙인다.

*차담(茶啖 /먹을 ) ; 다담(茶啖,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내놓은 다과茶菓 따위).

*하심(下心) ;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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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접(犯接) : 함부로 가까이 범하여 접촉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구참(久參 오랠 /참구할·참여할 ) ; 오랫동안에 걸쳐서 수행한 . 오랫동안 () 닦은 . 또는 그런 사람. 불법(佛法) 귀의한지 오래 되는 . 초학(初學) 상대어.

*도문(道門) ; 실천해야 (). 진실의 가르침. 반야진실(般若眞實) 가르침. 제법실상(諸法實相) 가르침. 정도문(正道門) 약어(略語).

*본성(本性) ; 상주불변한 절대의 진실성. 본래의 모습. 본체. 불성(佛性)

*현인(賢人) :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다음가는 사람.

*삼보(三寶) ; 부처님(佛寶) 부처님의 가르침(法寶)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 3가지를 보배에 비유한 . 이것은 불교를 구성하는 3가지의 중요한 요소임. 삼보(三寶)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임.

*제도(濟度 건널 /건널 ) ; 중생을 미혹의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 생사없는 피안(彼岸,깨달음의 언덕) 이르게 하는[] . () 구제(救濟). ()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건널 )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 도탈(度脫 건널 /벗을 )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구먹, 구녁 ; ‘구멍 사투리.

*성불(成佛 이룰 /부처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 얻음.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 죽어서 간다는 가지 괴로운 세계.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법락(法樂) ; 불법(佛法)으로 말미암아 얻는 즐거움. 법열(法悅), 법희(法喜)라고도 한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알아감으로써, 실천함으로써 생겨나는 즐거움. 진리[] 깨달음으로써 얻는 즐거움[].

*볼쏙 : ①갑자기 볼록하게 나오거나 내미는 모양을 나타내는 . ②갑자기 어떤 말을 함부로 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

*아만(我慢 /거만할·게으를 )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7 말나식(末那識) 가지 번뇌[我癡我見我愛我慢] 하나.

*아치(我癡)() 대한 무지(無知). 무아(無我) 이치를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번뇌. 가지 근본번뇌(四根本煩惱, 四惑) 나머지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 가지 번뇌[我癡我見我愛我慢] 하나.

*아애(我愛)() 대한 깊은 애착심아탐(我貪).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7 말나식(末那識) 가지 번뇌[我癡我見我愛我慢] 하나.

*아견(我見) ; ①나라는 견해. 자아(自我)라는 견해. ②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여겨서 집착하여 분별하는 잘못된 견해.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 가지 번뇌[我癡我見我愛我慢] 하나.

*보리(菩提) ; 불교 최고의 이상(理想) 불타 정각(佛陀正覺) 지혜. 올바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산스크리트 ‘Bodhi’ 한자 음역어이다.

*무상대도(無上大道) ; 최고의 깨달음.

*박절(迫切)하다 ; 인정이 없고 매몰스럽다.

*추호(秋毫 가을 /가는 ) ; ‘추호도’ ‘추호의 꼴로 쓰여, 가을에 짐승의 털이 매우 가늘어지는 데에서 가을 털끝만큼매우 조금 비유적으로 이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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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말씀 /어조사 ) ; 공안(公案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이란 뜻인데, ()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 ‘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 옛말이 있다. ()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관청의 공문서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 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 (, 의지에 기초한 행위)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 있다.

*여래의 ; 여래지(如來地). 불지(佛地). 부처의 지위(地位경지(境地). '부처의 상태를 이루었다' 뜻의 성불(成佛)과도 같은 .

*등한(等閒)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법열(法悅 부처님의 가르침 /기쁠 ) ; ①부처님의 가르침[] 듣거나 배우고 따르는 기쁨[]. ②진리[] 깨달음으로써 얻는 기쁨[]. 법희(法喜), 법락(法樂) 등과 같은 뜻이다.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먼일 ; 앞날의 .

*생사윤회(生死輪廻 /죽을 /바퀴 /빙빙돌 )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 六途)에서 났다가[] 죽고[]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 돌듯이[] 반복함.

[참고] 송담스님(No.389)—89(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중생의 번뇌심(煩惱心) ‘ 생각일어날 새로 태어난 것이고, 번뇌가 꺼질 죽는 ,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것이 바로 생사(生死)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생각이 일어날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 ,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단계로 나눈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이른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게송) 도악취모소이종~’ ; [금강경오가해]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예장종경(豫章宗鏡) 게송 참고.

*취모리(吹毛利 입으로 / / 같은 것이 드는 ) ; 취모검(吹毛劍). 드는 . 털을 칼날에다가 대고 불기만 해도 잘라질 만큼 날카롭다 하여 취모검이라 한다.

*발자죽 ; ‘발자국 사투리.

*마군(魔軍) ; 악마의 군세(軍勢). ()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 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마구니 ; (). [] mara 음을 따라 마라(魔羅) 하고, 줄여서 ()라고만 한다。장애자(礙者)• 살자(殺者)• 악자(惡者) 번역。목숨을 빼앗고 착한 일을 방해하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악마를 말한다. 그러나  ‘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64에서.

() 생사를 즐기는 귀신의 이름이요,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다. 마가 본래 씨가 없지만,수행하는 이가 바른 생각을 잃은 데서 근원이 파생되는 것이다. 중생은 환경에 순종하므로 탈이 없고, 도인은 환경에 역행하므로 마가 대들게 된다。그래서도가 높을수록 마가 성하다 하는 것이다.

선정 중에 혹은 상주(喪主) 보고 다리를 찍으며 혹은 돼지를 보고 코를 쥐기도 하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에서 망상을 일으켜 외부의 마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의 온갖 재주가 도리어 물을 베려는 것이나, 햇빛을 불어 버리려는 격이 되고 것이다。옛말에벽에 틈이 생기면 바람이 들어오고, 마음에 틈이 생기면 마가 들어온다 하시니라.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장소. 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법문 내용]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부처님 과거 인행(因行) 때에 인욕선인과 가리왕의 설화 / 진심(瞋心)을 안 낼려면 인아상(人我相)을 끊어야 / 보살선방의 자리 싸움 / 하심(下心) / 파리와 사람 목숨의 경중(輕重), 한 그릇의 물이 더 크냐, 바닷물이 더 크냐?


작은 일을 주의해라 / ‘한 생각’ 탁! 일어났을 때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 / (게송)도악취모소이종~ / 취모리=본참화두.



성을 안 내고자 할라며는 첫째 인아상(人我相)을 끊어야 하는 것이여.

‘내다, 남이다, 내가 옳고 저 사람이 그르다, 내가 잘났다, 나는 유식하다, 나는 귀인이다, 저 사람은 무식하고 천한 사람이다, 저 사람은 성격이 못 되었고 내가 옳다, 나는 참선을 여러 해를 해서 나는 구참이다, 저 사람은 이제서 와 가지고 아무것도 모른다’

이러한 인아상(人我相)이 있으므로 해서 그런 성을 내니까, 성내는 마음을 없애려면 인아상(人我相)을 끊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인아상을 끊는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수행(修行)을 많이 할수록에 겸손하고, 수행을 많이 할수록에 남을 존경하고, 모든 사람 앞에 하심을 하고, 모든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자기를 남이 알아주지 않고 업신여긴다 하더라도 조끔도 섭섭하거나 진심이 일어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냥 그것을 달게 여긴다.


‘파리 한 마리 죽이는 것이 더 죄가 많으냐, 사람을 하나 죽이는 것이 죄가 많으냐?’

‘한 그릇의 물이 더 크냐, 바닷물이 더 크냐?’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참선을 해도 답답하고, 공부가 조끔도 나아가지 아니하니 어째서 그럽니까?"

"되네, 안되네 생각 말고 어쨌든지 열심히만 하시라"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엄격하게 말하면 속에 인아상(人我相)이 꽉 차있기 때문에 공부가 안 되는 것이다.

인아상(人我相)이 있으므로 해서 업이 발동이 되고, 죄를 짓게 되고, 그 죄업이 결국은 보리(菩提),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는 그 길을 딱 가로막는 것이다.


인아상(人我相)을 어떻게 끊어야 하느냐?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어요.

어떠한 일에 부닥쳐 기분이 나쁠 때, 그 기분 나쁜 생각을 척! 돌이켜 가지고 화두(話頭)를 들도록 한다면, 진심(瞋心)이 밖으로 표현되기 전에 화두를 척 들어버리면 제절로 진심은 간 곳이 없고, 그 일로 인해서 나는 공부가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그 말씀이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수행 방법이요,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묘한 법이지만, 그게 한 생각 속에서 육도(六途)를 끊어버리고, 한 생각 속에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의 땅에 뛰어 올라가는 길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나의 모습이 반영된 것이어서, 나의 업의 표현이어서, 내 얼굴을 찌푸리고 거울을 보면 거울에 나타난 상호도 찌푸린 얼굴로 비출 것이며, 내가 웃는 얼굴로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친 영상도 웃는 낯으로 나에게 비춰질 것입니다.

산골짜기에서 고함을 치면, 크게 고함을 지르면 큰 소리로 메아리가 돌아올 것이요, 성내는 목소리로 욕을 하면 성낸 목소리로, 욕하는 소리로 내게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큰 죄를 지어야 지옥에 떨어진 걸로 보통 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 생각 잘못 먹어 가지고 조그마한 하찮은 한 생각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최상승법, 최상승법’하니까 굉장히 멀고 큰일이라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이 ‘한 생각’ 탁! 일어났을 때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 바로 이 최상승법이고, 코앞에 조그마한 일을 잘 다스리는 것이 무량겁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는 근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