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26~450)2019. 12. 10. 22:30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428) - 1990년 11월 첫째일요법회 (66분)

(1/4) 약 18분. (2/4) 약 16분. (3/4) 약 16분. (4/4) 약 17분.

(1/4)----------------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허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헌디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요, 모든 법(法)은 다못 허물 없음을 인해서 허물이 되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다. 모든 마음, 마음 마음은 불생 때문에, 불생(不生)—나지 아니함으로부터서 나게 된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설하실 때, 육조 스님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뻑뻑이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 주(住)한 바 없이 마음을 낸 것이 바로 불생(不生) 때문에 마음이 생하게 된다. 생(生)할 것이 있어서 생(生)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남[生]이 없는 데에서 마음이 난다.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한데, 차운 원숭이는 밤에 무산의 달을 보고 곡(哭)을 하는데 우는데,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다. 나그네 길이 원래 가히 행할 수가 없더라.

원숭이가 그 무산(巫山)의 달을 보고 어떻게 간장(肝腸)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던지 그 슬피 우는 원숭이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객(客)이 그 밑에를 지나갈 수가 없더라.



무산은 저 중국 사천성 기주부에 있는 무산현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 무산에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 하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초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이라고 하는 누대(樓臺)가 있어서 그 누대에 유람을 가 가지고 하룻밤 거기서 자게 되는데, 낮에 꿈을 꾸었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천하절색(天下絶色) 여인이 떠억 나타나더니, '저는 무산에 있는 여자로서 이 고당이 하도 경치가 좋다고 그래서 놀러 왔는데, 들으니 임금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임금님을 친견하고 하룻밤 동침하면서 잘 모시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래 보니 어떻게 이쁘던지 양왕이 그 여자를 거절하지 못하고 하룻밤을 잤어. 그게 인자 꿈에 잤겄다.


자고서 그 이튿날 떠나면서 '저는 무산 양지바른 높은 언덕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 날마다 아침이면 임금님에 구름이 되어서 보여 드리고 저녁때가 되면 비가 되어서 임금님께 뿌려 드리오리다'

그리고서 작별을 했는데, 그리고 나서는 이 양왕도 깨고 보니 꿈이다 그말이여. 꿈이지만 그 아리따운 모습이 눈에 삼삼해.


그런데 그리고 난 뒤에는 아침에면 항상 그 무산에 구름이 끼고 저녁때가 되면은 비가 내려.

'아! 저게 무산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에게 신호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는 무산에 가서 그 양지바른 언덕을 찾아가서 거기에다가 그 여인의 사당(祠堂)을 지어 주었어.


그런 고사가 있는데 그 여인이 밤에면 원숭이가, 그리고 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간 뒤에도 그 밤이 되면 임이 그리워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어. 그래서 무산 밑에는 나그네가 그 울음소리 때문에 차마 지나갈 수가 없더라.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沈默)』이라고 하는 시집에 서문 격으로 쓴 ‘군말’이라 한 제하(題下)에 쓴 글이 있는데 그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그런 첫마디에 그리 썼는데, 한용운 스님은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33인 중에 한 분이시고 참 학덕이 높고 독립운동의 사상, 애국심이 투철하시고. 그때면 옛날인데 어떻게 그런 ‘님의 침묵’과 같은 현대의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한 그러한 참 감동을 주는 그런 시를 썼는지.


한용운 스님은 부처님을 님이라고 믿고 시를 읊기도 하고, 불교의 진리를 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우리 국가를 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글자의 님이지만 한용운 스님은 여러 가지 뜻으로 시를 읊었는데,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은 부처님의 임이라고 표현을 했다 말이여.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그랬다 말이여.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 불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든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그말이여. 구체적인 예로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그밖에도 수없이 몸을 중생을 위해서 축생을 위해서까지 몸을 버리셨다 그말이여.


부처님의 제자 둘이 여행을 하여,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저 머나먼 여행을 하다가 목이 말랐다.

한 사람은 그 물을 떠서 먹을라고 하니까 아주 눈에 보일락 말락한 미세한 벌레가 우물거리고 있어. 한 사람은 그것을 먹고, 한 사람은 그것을 먹으면 그 벌레가 죽을까 봐서 안 먹었기 때문에 목말라서 죽었어.


그 안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부처님께 와서 ‘한 사람은 그 물을 안 먹었기 때문에 죽고, 저는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목말라 죽으면 못 만나 뵈옵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물을 먹고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꾸지람을 하셨다. ‘니가 어찌 나를 친견한 목적이 무엇이냐? 구경(究竟)에 가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려고 했는데 나를 친견하기 전에 그 많은 중생을 죽이고 왔단 말이냐' 이리 꾸중을 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그렇게 많은 생을 부처님은 몸소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셨어. 부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바치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을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로서 얼마만큼 간절히 부처님을 잊지 않고 생각을 하는가?

무산의 여자는 아침엔 구름이 되어서 임에게 보여 드리고 저녁때는 비가 되어서 임에게 뿌려 드리고 밤중에는 잔나비가 되어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울고 울어서 임을 그리워했건만,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사랑하고 부처님을 받들었던가.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부처님을 위해서 청춘도 바치고 명예와 권리와 인생을 다 바치고 그리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출가해서 도를 닦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이고, 많은 재산을 자기는 아까와서 못 먹고 그러면서도 그 소중한 재산을 불사(佛事)를 위해서 바친 그런 분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수배례(無數拜禮)를 부처님께 올리고 3천배, 3만배 또 자기집의 모든 재산 · 살림 · 자녀 · 남편까지도 부처님을 위하는 신심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런 돈독한 신심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도 그 임을 자기 나름대로는—아까 한용운 스님의 시처럼 임만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임이다 했으니 여자에게 남자가 임이 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임이 된 것 나쁘다 할 것이 없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임이 될 수도 있고, 높은 벼슬이나 명예나 권리도 임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은 정말 내가 목숨 바칠 수 있고, 한 목숨 뿐만이 아니라 수천 · 수만 · 수백만의 목숨이라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끝이 없고 한이 없어야 할 그러한 임을 임으로 삼았으면 참 좋으련만.

세속 사람들이 흔히 임으로 섬기는 재산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남녀간에 색정(色情)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을 임으로 삼는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임으로 삼는다든지, 또는 안락과 수면을 임으로 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욕락(五欲樂) 따위를 임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몸과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처음~17분 43초)




(2/4)----------------


재산을 위해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법을 어기고 불법(不法)을 저질러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고, 권리를 한번 잡으면 그것을 내놓기가 싫어서 온갖 수단을 부려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래 가지고 그 뒤끝이 뭣이 되겠습니까.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 특히 가까운 이조 오백년의 역사가 노론(老論) · 소론(少論)이니 해 가지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였다 그말이여. 노론도 자기가 잡고자 하는 정권을 임으로 생각하고, 쫓겨 나가는 소론도 정권 야욕(野慾)을 임으로 생각하는, 그래 가지고 결국은 싸우고 싸운 것이 자기네들만 멸망하겠습니까?


결국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가 참 무서운 사람이다. 참 주의해야 할 사람이다. 반드시 한국을 침범할 야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거기에 대비해서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고.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는 아무 보잘것없는 못난 사람으로 그런 야욕이라고는 추호도 없고 일본이 한국을 침범할 그러한 것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이 태평성대에 그런 무력증강 모다 양병 그런 것 할 필요가 없다’고. 다 같이 갔다 와서 똑같이 보아놓고 자기네 정당에 명령을 받아 가지고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그말이여.


그러니 조정에서는 편한 것이 좋아서 아무 방비를 안 하다가 임진(壬辰) 6년간의 그 왜란(倭亂)을 겪어서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피바다가 되었고.

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뇌묵대사와 같은 그러한 도인들이 나와 주시지 안했다면 그리고 바다에 이순신 장군 같은 그러한 참 충신이 없었다면 그때 한국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색정당(四色政黨)의 싸움으로 인해서 나라가 그렇게 안 당해도 괜찮을 그런 모욕과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자유당 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해방이 되어 가지고 그 정당 때문에 사리사욕만 챙기고 그래 가지고 아무 준비도 없이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六二五動亂)과 같은 그러한 일을 당했다 그말이여.


지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화합하고 그런 임을 오욕락을 임으로 삼지 말고 기왕이면 한용운 스님처럼 국가를 임으로 삼고, 민족을 임으로 삼고, 정의를 임으로 삼고, 진리를 임으로 삼아서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수행해 나간다면 국가도 잘될 것이요, 자기들도 보람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경제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학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과연 얼마만큼 ‘거룩한 임’을 ‘임’으로 삼고 항상 잊지 않으신지.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하고 몹시 참 공경하고 또 사모하고 떠받듭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은 부처님인데 그분이 믿고 있는 부처님의 내용에는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본 사람 또 경 가운데에도 무슨 경—화엄경을 많이 봤느냐, 법화경을 많이 봤느냐, 원각경을 많이 봤느냐, 또는 금강경을 많이 봤느냐, 어느 경을 많이 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마음속에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임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또 경을 전혀 보지 않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부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해나 달이나 별이나, 산이나 들이나 돌맹이 그 조그만한 모래알 하나도 우리의 마음의 나타남이여.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것은 모래도 아니고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래이고 모래가 존재하는 것이여. 그래서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요, 달도 역시 마찬가지여.


달은 저 홀로 창공에 떠서 휘황창 밝아 있지만, 보는 사람이 슬픈 눈으로 보면 그 달은 슬프고, 기쁜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은 기뻐. 그 달 자체는 '내가 슬픈 달이다, 기쁜 달이다'하는 것이 없거든. 보는 사람이 슬픈 달도 만들고 기쁜 달도 만드는 거여.

봄에 아름답게 피는 향그러운 꽃도 기쁜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것이지, 슬픈 사람이 보면 조금도 아름답지를 안 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화두는 무엇이냐?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여.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 ‘이뭣고?’,

‘이뭣고?’ 한번 터억 거각할 때 슬픔도 거기에서는 끊어져 버리고 기쁨도 끊어지고 원망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지며 즐거움도 끊어지고 선(善)도 끊어지고 악(惡)도 끊어져. 그럴 때에 우리는 해탈(解脫)로 한 걸음 나아가는 거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하물며 교리나 경전에 있는 여러 가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을 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해서 ‘아! 이것이 이 말이로구나’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그것이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자기 본참공안도 그러려니와 문헌에 있는 공안이 천칠백 공안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공안을 그러한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래 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그러한 걸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식으로 해서 이백 개, 삼백 개 내지 오백 개, 천 개의 공안을 알아맞춘들 그럴싸한 해결을 답을 얻어낸들 그것이 참 깨달음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날마다 공안을 따져서 분석하는 무슨 법회를 열어 가지고 계속 날마다 공안을 풀어서 아르켜주면 그까짓 것 1년 걸려서 천칠백 공안을 따지기로 한다면 그거 못할 거 없는데, 그냥 도인(道人)이 막 쏟아져 나올 것 같지만 그렇게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17분45초~33분21초)




(3/4)----------------


<천주교 신부의 의리선(義理禪)>


봄엔가 인도 사람인데, 천주교 신부인데 참선을 하기 위해서 일본에 와 가지고 5년인가를 지금 선원에 있다고 그래.

그런데 그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오백 개의 공안을 통과했기 때문에 천 개를 통과해야 로시, 로시는 노사(老師) '늙을 로'자, '스승 사'자—한국에서는 조실(祖室) 스님이라 그러는데 일본에서는 노사라 그래. 일본 발음으로 로시라 그러는데.

천 개를 맞추면 로시가 될텐데 자기는 아직 5백 개 밖에는 못해서 로시 자격은 못 따고 그냥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만 받았다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참선을 안 하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고 그래서 그 활구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왔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어서 한국에 어느 수도원에 수녀 몇 분과 그 인도 신부 분이 특별히 이리저리 사람을 넣어서 여러 차례 교섭을 해와서 안 만날라야 안 만날 수가 없어서 만났더니 그런 말을 하더라 그말이여.

한국에도 일본에 그러한 의리선이 서적도 많이 들어오고 또 거기서 그런 참선을 하다가 온 거사님네들도 있고 그래 가지고 상당히 이 일본의 의리선(義理禪)이 지금 자꾸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학식이 많은 분들은 꽉! 맥히는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계속 ‘이뭣고?’를 하라 하니 별로 재미가 없고, 와서 법회에 참석해 봤자 별로 재미있는 소리도 없고 밤낮 꽉 맥혀서 '이뭣고?'만 하라 하니 별 재미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의리선 일본책을 읽어보니까 아! 곧 재미가 있고, 몇 개를 읽어보니까 자기도 무슨 공안을 들어보면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고, 그 참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학자 · 교수 그런 분들이 그러한 참선을 모다 해 가고 있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거 해 가지고 오백 개 내지 천 개를 통과해서 로시 자격을 받으면 일본 가서는 혹 밥이라도 빌어 먹을란가 모르지마는 한국에서는 그런 참선은 소용이 없어.

설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한 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고 숨을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참선을 해 가지고 무엇을 할려고 그런 참선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런 참선 해서 공안을 열 개 내지 백 개 그것 통과하기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모양이야. 나 그것 통과 안 해 봐서 잘 모르지마는.

그것도 참 자기 나름대로 밤잠을 안 자고 몇번 골이 터질라다 말아야 무엇이 하나씩 터진다고 그래. 그래서 하루저녁에 한 개씩 터진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면은 아주 골이 아파서 못 견딘다고 그러는데.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옛날에 중국에 검주란 곳에는, 검주가 지금에 무슨 성(省)에 있는가는 모르겠는데 검주에는 나귀가 없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검주 땅에를 떠억 들어갔어.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그게 무슨 짐승인지 전혀 모른다 그말이여.


아, 그런데 호랑이가 그 나귀를 보고 검주에는 그 나귀란 짐승이 없기 때문에 전혀 무엇인 줄 몰라. 사람들도 모다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모다 수근수근 해쌋고, 호랭이도 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말이여. 그래서 참 겁을 집어먹고.

그 산중에서는 호랑이가 왕이라 그러는데, 아 호랑이도 처음 봐나서 영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그래서 살살 이렇게 피하면서 있는데.


나귀란 놈이 모두 자기를 보고 무서워하고 그러니까 신바람이 났던지, 턱! 호랭이가 가까이 오니까 발길질을 했다 그말이여.

그 호랭이가 한번 채이고 보니 별로 그 뭐, 나귀한테 채였다고 호랭이가 죽것습니까? 별로 큰 충격을 안 받았어.


'오! 니놈이 별놈인 줄 알았더니 한번 채여 보니 너 별놈 아니로구나. 니가 가진 재주는 겨우 뒷발질하는 거밖에 없구나. 요자식 맛 좀 봐라' 손톱으로 그냥 콰악 배아지를 갖다가 찍어서 쭉 훌터 버리니까 창시가 툭 불거져 버려.


공안 몇 개, 의리선으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어디 가서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 봤자, 전혀 그런 거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서 그것이 통할란지 모르지만, 환히 알고 보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나귀란 놈 검주땅에 가서 뒷발질하듯이 한바탕 차 봤자 제 살림만 드러나거든.

어디 가서 밥 빌어먹을 짓이 없어서 의리선으로, 의리로 공안 몇 개 따져서 그것 해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뽐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어떤 마을에서 생전 우유를—거기는 또 소가 없었던지, 젖 짜는 소가 없어 우유를 맛을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우유를 먹으면, 암소를 키우면 그 젖을 먹으면 여러 사람이 먹고 영양을 섭취할 수 있고 달고 맛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의논을 해 가지고 돈을 모아서 구장과 몇 사람 대표를 뽑아 가지고 젖 짜는 소를 사오라고 보냈어.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자 이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저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어떤 사기꾼을 만났던지 젖 짜는 소를 물으니까, 마치 그 사기꾼한테 숫나귀가 한 마리 있었어.


"아, 그너냐! 나한테 그 젖 짜는 소가 있는데 참 젖이 많이 나온다"고. "돈을 얼마나 가져 왔냐?"고.

"삼백 냥을 가져 왔다"고.


"그래, 삼백 냥 갖고는 도저히 안 되지만 그렇게 멀리서 왔다니, 그럼 삼백 냥만 받고 팔테니 그러면 우리 소를 가져가라"고. "처음에는 좀 짭짤하지만 오래 먹으면 참 구수하고 좋으니까, 가지고 가서 잘 먹으라"고.

그래서 숫나귀를 삼백 냥을 주고 떠억 사 가지고 왔다. 오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할려고 모여 들었는데, '저놈한테서 그렇게 맛있는 젖이 나온다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쭈물떡 쭈물떡 하니까 팔뚝만한 놈이 나오는데, 한참 있으니까 쏟아지는데 몇 바깨스가 나왔다 말이야. 그놈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아주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질까 조심하면서 그놈을 먹으니까, 아 참 짭짤한 것이 생전 처음 먹어 보니 '이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란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날마다 곡식에다가 잔뜩 먹여 놓으니까, 이놈이 또 물을 갖다주면 몇 바께스씩 들이키고 눈 것이 오줌만 나와.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우유가 무엇인 줄을 모르니까,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여러 달 동안을 먹었다 그말이여.


그 집 마을에 딸을 여워서 사돈네가 왔는데, 사돈네가 왔다고 특별히 집안 식구 안 먹고 우유를 대접을 했는데 그 되게 자랑을 했어.

"우리 마을에는 이런 좋은 것이 있다"고. "사돈이 오시니 일부러 대접을 하니 좀 잡숴보라"고.


맛을 보니까 고약하거든. "어디 그 소 좀 구경할 수가 없느냐?"고.

"이거 함부로 구경 못 시키는데 사돈이 오셨으니까 내가 특별히 구경을 시킨다"고. "절대 잡인을 금지 한다"고.


가서 보니까 나귀를 갖다 놓고 그러거든. "이것은 소가 아니라고. 이건 나귀라고 하는 것이라"고.

곧이를 안 들어. "사돈이 아직 소를 구경을 못 하셔서 그러실 거라"고. "이건 흔한 것이 아니라"고. "참 수백 냥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사돈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상대를 안 해 버려.


서울 구경 안 한 사람이 서울 구경한 사람보다 더.... 서울 구경한 사람이 진다고.

'남대문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도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확실히 아시는 분이 아마 적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에 사셔도.


시골 사람은 다 알고 있어. 서울에 안 와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서울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서울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그걸 모르거든.

소젖을 먹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이미 사기꾼한테 나귀의 오줌이 소젖이라고 한번 깊이 선입관(先入觀)이 들어버리면 실지 소젖 먹은 사람 말을 안 듣거든.


아마 불법(佛法)도 최상승법(最上乘法), 정법(正法)을 만나기 전에 자기 나름대로 소승법 중승법에 설하신 방편법(方便法)에 이미 깊이 물들어버리면 최상승법 일러 주어도 잘 믿지 않습니다. 여간해서 이 최상승법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설사 ‘법문 들으러 가자’고, ‘최상승법을 믿어야지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마지 못해서 친구나 사돈에 끌려서 와서 들어보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별로 들어봤자 별 재미있는 소리 안 하거든요.

와서 한 번 두 번 들어보고 잠만 오고 그러니까는 ‘아이고, 나 바쁘다’고 핑계대고 안 와 버린다 그말이여.


'이런 말이 설마 경전에 있을까? 아마 송담 스님이 지어내서 저런 얘기를 하지 않은가?'하실는지 모르지만 『백유경(百喩經)』에 분명히 이 설화가 들어있거든요.

여러분은 다행히 이 최상승법을 믿고 이 법당 가득히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어. 아마 그전에 언젠가도 내 이 설화를 말씀드린 기억이 있지만 오늘은 내가 특별히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렸어.(33분22초~48분53초)




(4/4)----------------


최상승법을 믿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실천을 하기는 더욱 어렵고.


듣기도 어렵지마는 듣고 또 믿기 어려운데 믿었다 하더라도 조금 해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해 버린 사람이 있거든.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해 나간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보통 분이 아니여. 숙세(宿世)로부터 이 최상승법에 깊이 인연을 심고 심어서 삼생(三生) 이내에—금생에 인연이 성숙한 분은 금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아무리 늦어도 삼생 안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삼생은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또 한평생 살다가 공부하다가 죽어서 또 태어나고 한 그런 삼생도 포함되지만, 한 생각 한 생각을 한 죽음으로 생각하고 새로 태어남으로 생각한다면은 삼생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곧 이 ‘한 생각’이거든.

그래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간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서방(西方)으로 가야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다. 그렇게 표현을 하셨지만.

육신보살(肉身菩薩)인,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육조혜능 선사는—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 그래서 인도에 달마 스님까지 28조, 그래 가지고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그리고 아까 6조 혜능선사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33대 그래서 삽삼조사(卅三祖師)라 그러는데, 삽삼조사는 부처님으로부터 단전(單傳)으로, 홑으로 홑으로 법등(法燈)을 전해서 끊이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특별 수기(授記)를 받으신 분의 한 분이시거든.


그 육신보살(肉身菩薩)이신 육조 스님은 그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어떻게 해석을 하셨냐 하면은 첫째, 십만 국토는 우리가 십악참회를 하는 십악(十惡)을 돌려서 십선(十善)을 닦음으로 해서 십만 국토는 건너가고, 여덟 가지 삿된 것을 뒤집어서 팔정도를 닦으면은 팔만(팔천) 국토를 건너간다.

다시 말하면 십악팔사(十惡八邪)를 행하지 말고 십선(十善)과 팔정도(八正道)를 행함으로 해서,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서 ‘참나’를 깨달으는 극락정토에 도달한다.


그래서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서쪽으로 간다고 하면 그 서쪽은 무엇이냐? 서쪽은 계절로 말하면 가을인데,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여. 그래서 십만팔천 국토인 십악팔사(十惡八邪)를 건너뜀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다.

이렇게 아주 최상승적으로 현대인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미타경에 있는 말씀은 거짓말이냐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거기에 맞는 그 근기(根機)의 중생에게는 그것은 그것대로 진실이죠.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근기에는 육조 스님의 해석이 너무나도 핍절(逼切)하고 간절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십악팔사(十惡八邪)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십악팔사는 중생심으로 행하는 것이고—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눈을 통해서 작용하고 귀로 작용하고 코, 혀, 몸뚱이로 작용하고 우리의 생각으로 작용하는데,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십악팔사를 행하게 되는데,

그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십악팔사로 벌어지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이뭣고?’ 탁! 돌이키면, 1초 간에 십악팔사를 끊어서 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는 것이거든.


아무리 그 동안에 많이 잡수어서, 길이 들어서 애착심이 갈는지 모르지만 나귀 오줌을 그리 오래 잡술 것이 못됩니다. 탁! 끊어버려야지. 탁! 끊어버리고 최상승법 ‘이뭣고?’로 딱 돌아와야지. 속담에 ‘오뉴월 뙤약볕도 쬐다가 안 쬐면은 서운하다’고 그런 말도 있읍니다마는.


‘이뭣고?’ 천하에 간단하고 천하에 빠른 것이거든. 한번에 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니 그 이상 빠른, 아무리 지금 로케트가 빠르다고 해도 비교가 되겠습니까?


과학 무기가 발전을 해서 참 살기가 편리하게 되었지만, 편리하게 된 것과 인류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편리하기는 할지언정 조금도 행복해지지를 못했습니다. 조금도 평화로워지지도 못했습니다.

온 세계가 최상승법을 믿어야만 세계의 평화는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믿고 실천하고 깨달음을 얻음으로 해서 법계(法界)가 깨달음의 세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원각경(圓覺經)』에 ‘한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법계가 청정하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이 소식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깨달으면 어떻게 법계가 청정해지겠습니까? 법계는 ‘한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한 사람을 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최상승법을 믿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짜 우유를 마셔야 할 것입니다.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허니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터니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요. 법법(法法)은 모든 법이여. 법은 사회에서 말하는 형법 · 민법 · 병법, 그런 걸 다 법이라고 하지만.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법이고—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 · 법화경 · 화엄경 이런 걸 다 법이라 그러고 법보(法寶)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법이거든.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 왜 두두물물이 법이냐 하면 두두물물이 전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러면 그 법은 본래로 주(住)한 바가 없어. 주(住)한 바는 고정된 것이 아니여. 주착한 바가 없어. 인연 따라서 수시로 변하고 그렇지만.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요. 주(住)한 바 없는 것을, 그것을 추심(追尋)을 하지 말아라. 머무른 바가 없는데 그것이 고정된 것인 줄 알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것을 계속 추구해 나갈라고 그러거든.


참법은 조금도 속인 바도 없고 누구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것이여.

나도 법이요, 너도 법이요, 부처님도 법이요, 모든 중생이 법이요, 삼라만상이 다 법이고 그 낱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여.


이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 중생의 소견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나름대로 이해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한때의 그림자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참법이 아니거든.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 해는 어젯밤에 서산으로 넘어갔는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구나. 오늘 아침 새벽에 저 동산에 솟아오르는구나.



‘이뭣고?’


‘이뭣고?’는 무슨 특별한 제왕(帝王)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여.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

되고 안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어.


화두(話頭)가 잘 들리면은 망상(妄想)도 잘 안 일어나고, 혼침(昏沈)도 잘 안 오고, 몸이 괴롭지도 않고, 1시간이 금방 언제 지나간지 모르고 지나가고 그리한 것을 느낄 것입니다마는. 항상 그렇게 되기만을 생각하거든.


그래 가지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자꾸 망상이 일어나고, 자꾸 혼침이 나고, 시간이 3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영 잘 안된다. 골이 더럭더럭 하고 눈이 뻣뻣하고.

그러면 고민을 하거든. 아, 어째서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는고. 그래 가지고 몸부림을 치고 고민을 하는데, 그러지 마셔.


공부를 하다 보면은 혼침이 오기도 하고,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잘된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잘 안된다고 그렇게 번뇌심을 내지 말어.

잘되어도 좋아하는 마음 없이 화두를 떠억 거각(擧却)해서 관조(觀照)해 나가고. 또 그렇게 혼침이 오고 잘 안 들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포행(布行)을 좀 하거든.

일직선으로 코스를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챙기면은 혼침도 달아나고 또 개운해지면 또 다시 와서 앉고.


이렇게 하면서 지혜롭게, 그 잘 안되고 그러한 때를 잘 고비를 넘겨야 하거든. 그 고비를 못 넘기고 짜증을 내고 그래 가지고, 에이! 이거 못해 먹을 것이라고 그만두고 중단하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

글씨도 잘 쓰다 보면 곧잘 되다가 영 안된 때가 있는데, 그 안되는 때에도 날마다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거기에서 필력(筆力)도 생기고 글씨가 숙달이 되는 것이여.


모든 것이 다 그래.

한참 되어 가다가 또 안되고, 안되지마는 꾸준히 밀고 나가면 또 다시 또 잘되고 그런 것이여.


그러한 고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중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해 나갈 때에 우리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48분55초~66분22초)(끝)




----------------(1/4)


*(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년 개정판) p104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전강 조실 스님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 중국 선종의 제6조로서 남종선의 개조인 혜능(慧能:638~713)이 사오관[韶關]의 대범사(大梵寺)에서 행한 공개 설법의 기록을 중심으로 생애와 언행을 제자 법해(法海)가 모았다고 전해지는 책. 본래 명칭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며 약칭하여 '단경'이라고도 한다. '단'은 계단 (戒壇)을 가리키고 '경'은 경전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여 붙인 말이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고도 한다.

*무산지몽(巫山之夢) ; 남녀의 정교(情交). 출전은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로서, 중국 초나라의 양왕(襄王)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신녀(神女)를 만나 정을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사(故事 옛 고/일 사) ; 예[故]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事]. 또는 그것을 나타낸 어구. 옛날 이야기.

*누대(樓臺 다락 루/대 대) ; 크고 높게 지은 정자나 누각, 또는 높은 건물.

*슬피 ; 마음이 아파 슬프게.

*간장(肝腸 간 간/ 창자·마음 장) ; 애(근심에 싸여 초조한 마음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나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간장을 끊다 ; (소리 따위가) 몹시 슬프고 애달프다.

[참고] ‘단장(斷腸)의 슬픔’에 대한 고사가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편(黜免編)》에 보면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征伐)할 때의 얘기가 나온다. 환온이 촉을 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는 중이었다. 양쯔강 중류의 협곡(峽谷)인 삼협(三峽)이라는 곳을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좇아 백 여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다가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기 때문에 배에 오르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 배에 있던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어낸 것이었다. 배 안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환온에게 고하니 이 말을 전해들은 환온이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그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

*천하절색(天下絶色 하늘 천/아래 하/뛰어나다·더이상 없음 절/미인 색) ; 하늘[天] 아래[下] 비길 데 없이 매우 뛰어난[絶] 미인[色].

*삼삼하다 ; [주로 ‘눈’과 관련된 명사와 함께 쓰여](모습이나 풍경이 눈에)보이는 것처럼 잊히지 아니하고 또렷하다.

*사당(祠堂 사당·제사 사/집 당) ; 조상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셔 놓은 집. 또는 신주를 모셔 놓기 위해 조그맣게 집처럼 만들어 둔 곳.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기룬-->‘기루다’ :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 ; 근대 이탈리아 건국 운동의 정치가.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 『불설보살투신이아호기탑인연경(佛說菩薩投身飴餓虎起塔因緣經)』 북량(北涼) 고창국(高昌國) 사문법성(沙門法盛) 한역. (아래 글은 요약 정리한 것임)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건타월국(乾陀越國)에 머물러 계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9겁 때 세상에 한 큰나라에 전단마제(栴檀摩提)라는 태자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몸과 목숨과 재물을 남기고 아끼는 바가 없고, 자신과 신하 사야(闍耶)의 모든 것을 보시하고서도 오히려 가난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태자는 배제사(裴提舍)라고 하는 나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바라문에게 팔은 돈을 또 모두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고 나무를 해다가 파는 종이 되었다.

나무를 하다가 얻은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그 나라의 왕의 나병(癩病)을 치료하여 준 인연으로 왕에게 받은 큰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태자는 부왕의 큰 환영을 받고 부왕은 나라 곳간의 무엇이던지 마음대로 베풀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나라의 수도 가까운 산에서 용맹(勇猛)이라는 5통(五通) 신선도사(神仙道士)가 오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태자 전단마제는 그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선사(仙師)의 설법을 듣고 세상의 덧없음[無常]을 깨닫고 무위(無爲)를 구하여 모든 괴로움을 제도코자 그길로 선인들과 함께 수행하기 시작했다.

왕후와 태자의 후비는 태자의 뜻이 견고함을 알고 때때로 산 속의 태자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산 아래 낭떠러지인 언덕의 깊은 골짜기 밑에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다. 이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어미와 새끼가 곧 죽게 되었고 어미 범은 이미 굶주림에 핍박되어 도리어 새끼를 먹고자 하였다. 산 위에서 수행하던 선인들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태자는 낭떠러지의 끝에 서서 아래에 어미 범이 새끼를 안고 눈에 덮여 있음을 보고 대비심(大悲心)을 내어 산꼭대기에 서서 머물러 고요히 정(定)에 드니 곧 청정무생법인(淸淨無生法忍)을 얻어 과거 무수겁(無數劫)의 일과 미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보았다. 과거 생에 자신은 중생을 위해 '천 번 몸을 버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이미 9백99번의 몸을 버리었음을 알게 되었다. 태자는 천 번의 몸을 채우기를 결심하였다.

스승과 오백의 신선 도사와 마침 공양하러 온 부란(富蘭)이라는 장자와 남녀 오백 사람은 태자가 몸을 버리려는 것을 보고 슬피 느껴 울부짖으면서 또한 태자를 따라 산 언덕 끝에 이르렀다.


이에 태자는 모든 사람의 앞에서 큰 서원을 발하였다.

'내가 이제 몸을 버리어 중생의 목숨을 구제하오니 이 공덕으로 빨리 보리를 이루고 금강의 몸인 상(常) · 락(樂) · 아(我) · 정(淨)의 무위(無爲)의 법신(法身)을 얻어서 제도치 못한 이를 제도하며 해탈치 못한 이를 해탈케 하며 편안치 못한 이를 편안케 하소서.

나의 이제 몸은 무상하며 번뇌의 모든 독이 모인 것이며, 이 몸은 청정치 못하여 아홉 구멍이 차서 흐르고 사대(四大)의 독사가 쏘는 바며, 다섯의 칼 뺀 도적이 쫓아서 상해(傷害)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몸은 반복이 없도다. 맛나고 감미로운 음식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이 몸을 공양할지라도 목숨을 마친 뒤에는 선한 은혜를 갚음이 없고 도리어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오직 괴롭게 하는 것이요, 즐거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태자는 가지가지로 그 몸의 허물을 꾸짖은 뒤에 또한 서원을 발하였다.

‘이제 내가 살과 피로 저 주린 범을 구제하오니 남은 사리(舍利)와 뼈로 우리 부모가 후일에 꼭 탑을 세워서 일체 중생의 몸에 모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 숙세 죄의 인연으로 생겨 탕약(湯藥)과 침구(鍼灸)로는 낫지 못하는 이로 하여금 내 탑에 이르러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하면 병의 가볍고 중함에 따라 백 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반드시 낫게 하소서. 만일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할진댄 모든 하늘은 향기로운 꽃을 비내리소서’

모든 하늘은 소리에 응하여 만타라(曼陀羅)꽃을 비처럼 내리고 땅은 모두 진동하였다.


태자는 곧 몸을 범의 앞으로 던졌다. 이에 어미 범은 태자의 살을 먹어서 어미와 새끼가 다 살아나게 되었다. 이 일로 오백 선인은 위없는 정진도(正進道)의 뜻을 발하였으며 신선의 큰 스승은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이튿날 왕과 부인과 후비와 모든 신하들은 이 사실을 알고 기절하여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왕께 여쭈어 곧 태자의 뼈를 거두어 칠보탑을 세우고 보배로운 물건으로 장엄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때 태자는 나의 몸이요, 이때 부왕은 곧 지금의 나의 아버지 열두단(閱頭檀)이요, 이때 부인은 어머니 마야(摩耶)요, 이때 후비는 지금의 구이(瞿夷)요, 이때 대신 사야는 아난이요, 이때 산 위의 신선의 큰 스승은 미륵(彌勒)이요, 배제사(裴提舍)왕은 난타(難陀)요, 이때 바라문은 라운(羅雲)이니라.

미륵보살은 옛적부터 항상 나의 스승이었는데 내가 보시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생을 구제한 까닭에 스승보다 앞서 훌쩍 9겁(劫)을 초월하였으니 지금의 부처를 얻음에 이르기까지 제도함이 끝이 없었느니라”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무수배례(無數拜禮)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절을 하여 예를 표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2/4)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 1590년에 일본이 사절단 파견을 요청해 일본 통신사에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1590년 3월~1591년 3월). 임무는 일본의 실정과 일본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탈을 계획하고 있다는 저의를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온 후 선조 임금의 질문에 정사인 황윤길(서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必有兵禍]" 부사인 김성일(동인)은 "그러한 조짐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事宜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라고 하였다.

또 선조의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其目如鼠, 不足畏也]"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에 조선 조정은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 ;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 우리나라 땅의 남북의 길이가 삼천리라 하여 우리나라의 강산을 이르는 말. 강토(疆土)는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을 말한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색정당(四色政黨) ; 사색당파(四色黨). 조선 선조 때부터 후기까지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서 조선의 정치적인 판국을 좌우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네 당파.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별(別) ; [주로 ‘없다’, ‘아니다’ 따위의 부정어나 부정적인 의미의 명사 등과 함께 쓰여]보통과 다르게 별나거나 특별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寂)과 동(動:光)의 본래(本來: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絕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3/4)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 검려지기(黔驢之技 검을 검/나귀 려/갈 지/재주 기) ; 검주(黔州)에 사는 당나귀[驢]의 재주[技]. ①보잘것없는 재주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자신이 솜씨와 힘이 없음을 모르고 뽐내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의 우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검려(黔驢), 검려기궁(黔驢技窮)도 같은 뜻의 말이다.


[참고]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 '검지려(黔之驢)'

黔無驢 有好事者船載以入 至則無可用 放之山下 虎見之 龐然大物也 以爲神 蔽林間窺之 稍出近之 憖憖然莫相知 他日 驢一鳴 虎大駭遠遁 以爲且噬已也 甚恐 然往來視之 覺無異能者 益習其聲 又近出前後 終不敢搏


검주(黔州)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당나귀 한 마리를 배로 실어 왔다가 쓸모가 없자 산 아래 풀어 놓았다. 호랑이가 이 당나귀의 큼직한 모습을 보고 신수(神獸)라고 생각하고 숲속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펴보았다. 얼마 후 숲에서 나와 당나귀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날 당나귀가 울어 대자 호랑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크게 놀라 멀리 도망쳤다. 하지만 왔다갔다하면서 보는 사이 특별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소리에도 익숙해져 다시 앞뒤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끝내 건드려 보지는 못했다.


稍近益狎 蕩倚衝冒 驢不勝怒 蹄之 虎因喜 計之曰 技止此耳 因跳踉大㘚 斷其喉 盡其肉 乃去 噫 形之龐也類有德 聲之宏也類有能 向不出其技 虎雖猛 疑畏 卒不敢取 今若是焉 悲夫


점차 가까이하여 익숙해짐에 따라 이리저리 건드려 보면서 덤벼들어 보았더니 당나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해 댔다. 호랑이는 기뻐하며 이를 헤아려 말하기를 “재주라곤 이것뿐이로구나”하며, 크게 으르렁거리며 뛰어올라 목줄을 끊고 그 고기를 다 먹어 버리고 떠나갔다.

아, 몸집이 큰 것이 덕이 있는 듯하고, 소리가 크기로는 재능이 있는 듯하나, 애당초 그 기량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호랑이가 비록 사납더라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감히 취하지 못했을 것을, 지금 이와 같으니 안타깝도다.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 『백유경(百喩經)』 (제4권) (존자 승가사나 찬집 尊者僧伽斯那撰, 소제 천축삼장 구나비지 한역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 한글대장경) '구려유유(搆驢乳喩)'


77. 나귀의 젖을 알지 못하는 비유(搆驢乳喩)

昔邊國人不識於驢 聞他說言驢乳甚美 都無識者 爾時諸人得一父驢 欲搆其乳 諍共捉之 其中有捉頭者 有捉耳者 有捉尾者 有捉腳者 復有捉器者 各欲先得於前飮之


옛날 변방의 어떤 나라 사람들은 나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나귀의 젖은 매우 맛나다’는 말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수나귀 한 마리를 얻어 그 젖을 짜려고 서로 다투어 붙잡았다. 그중에 어떤 이는 머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귀를 붙잡고 어떤 이는 꼬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다리를 붙잡고 또 어떤 이는 생식기를 붙잡고서 제각기 먼저 젖을 짜 마시려고 하였다.


中捉驢根謂呼是乳 卽便搆之望得其乳 衆人疲厭都無所得 徒自勞苦空無所獲 爲一切世人之所蚩笑


그중에 나귀의 생식기를 붙잡은 사람이 외쳤다. “이것이 젖이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그것을 짜면서 젖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고 한낱 헛수고만 하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모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外道凡夫亦復如是 聞說於道不應求處 妄生想念 起種種邪見 裸形自餓投巖赴火 以是邪見墮於惡道 如彼愚人妄求於乳


외도(外道)의 범부들도 이와 같아서 도(道)라는 말을 듣고는 꼭 구할 수 있는 곳에서 구하지 않고, 망령되게 잡생각[想念]을 내고 갖가지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켜 벌거벗고 나다니기도 하고, 스스로 굶기도 하며 혹은 높은 바위에 올라가 몸을 던지기도 하고, 불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삿된 견해 때문에 나쁜 세계[惡道]에 떨어지니, 마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령되이 젖을 구하는 것과 같다.


*바께스 ; 영어 'bucket'의 일본어 발음. 양동이(洋-- 한 손으로 들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단 들통).

*선입관(先入觀 먼저 선/들 입/볼 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백유경(satavadana-sutra, 百喩經 일백 백/비유할 유/말씀 경) ;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적 깨우침을 주고자 짤막한 교훈적 우화(寓話)들을 모아서 5세기 인도의 상가세나(Saṅghasena 僧伽斯那)스님이 편찬한 작품. 그의 제자 구나브리디(Guṇavṛddhi 求那毘地)가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했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4/4)


*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아미타경(阿彌陀經) ; 중국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경전. 이 경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으로 이루어진 극락세계의 장엄, 아미타불의 공덕과 극락세계의 일, 그곳에 태어나기 위하여 중생이 갖추어야 할 바를 설명하고 있다. 그곳에는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이 무량한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이 상주하며 설법하고 있다. 이러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하여 하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다.

*육신보살(肉身菩薩) ;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그대로 보살의 위치에 이른 사람.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6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수기(授記) ;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또는 그 교설(敎說).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말(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뜻(意)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팔정도(八正道) ;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팔성도(八聖道)를 이른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핍절하다(逼切-- 핍박할·가까이할·몰 핍/정성스러울·절박할 절) ; 진실하여 거짓이 없고 매우 간절하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원각경(圓覺經)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당나라 때 불타다라가 번역。 대승(大乘) 원돈(圓頓)의 교리를 말함。 주로 관행(觀行)을 말하다。 주석서 종밀(宗密)의 <대소> 12권, <대초> 13권。<약소> 5권, <약초> 12권.

*청정(淸淨 맑을 청/ 깨끗할 정) ;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61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追(추)쫓다,구하다 *尋(심)찾다 *上(상)위,오르다 *曉(효)새벽

*양오(陽烏, 暘烏 태양 양/까마귀 오) ; 태양(太陽)을 달리 이르는 말.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보(法寶 부처님의 가르침 법/보배·보물 보) ; 불교도의 세 가지 귀의처,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의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보배[寶]에 비유한 말.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대정장11, p.346c3)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필력(筆力 붓•글씨 필/힘 력) ; 글씨[筆]의 획에 드러난 힘[力].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법문 내용]


(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무산지몽(巫山之夢) / 중생이 석가의 임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의단독로하여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

천주교 신부의 의리선 / 중국 검주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검려지기(黔驢之技) /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백유경(百喩經)』 (제4권) '구려유유(搆驢乳喩)'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공부가 되고 안되고 따지지 말고 한결같이 해 나가면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은 부처님의 임이라고 표현을 했다 말이여.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그랬다 말이여.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 불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든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임은 정말 내가 목숨 바칠 수 있고, 한 목숨 뿐만이 아니라 수천 · 수만 · 수백만의 목숨이라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끝이 없고 한이 없어야 할 그러한 임을 임으로 삼았으면 참 좋으련만.

세속 사람들이 흔히 임으로 섬기는 재산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남녀간에 색정(色情)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을 임으로 삼는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임으로 삼는다든지, 또는 안락과 수면을 임으로 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욕락(五欲樂) 따위를 임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몸과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이 사바세계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공안 몇 개, 의리선으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어디 가서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 봤자, 전혀 그런 거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서 그것이 통할란지 모르지만, 환히 알고 보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나귀란 놈 검주땅에 가서 뒷발질하듯이 한바탕 차 봤자 제 살림만 드러나거든.

어디 가서 밥 빌어먹을 짓이 없어서 의리선으로, 의리로 공안 몇 개 따져서 그것 해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뽐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최상승법을 믿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실천을 하기는 더욱 어렵고. 듣기도 어렵지마는 듣고 또 믿기 어려운데 믿었다 하더라도 조금 해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해 버린 사람이 있거든.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해 나간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보통 분이 아니여. 숙세(宿世)로부터 이 최상승법에 깊이 인연을 심고 심어서 삼생(三生) 이내에—금생에 인연이 성숙한 분은 금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아무리 늦어도 삼생 안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삼생은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또 한평생 살다가 공부하다가 죽어서 또 태어나고 한 그런 삼생도 포함되지만, 한 생각 한 생각을 한 죽음으로 생각하고 새로 태어남으로 생각한다면은 삼생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곧 이 ‘한 생각’이거든. 그래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간다.


참법은 조금도 속인 바도 없고 누구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것이여. 나도 법이요, 너도 법이요, 부처님도 법이요, 모든 중생이 법이요, 삼라만상이 다 법이고 그 낱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여.이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 중생의 소견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나름대로 이해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한때의 그림자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참법이 아니거든.


모든 것이 다 그래.한참 되어 가다가 또 안되고, 안되지마는 꾸준히 밀고 나가면 또 다시 또 잘되고 그런 것이여.그러한 고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중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해 나갈 때에 우리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