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26~350)2022. 11. 8. 19:21

 

 

((No.340))—1987년 10월 첫째 일요법회 (71분)

 

(1) 약 37분.

 

(2) 약 35분.


(1)------------------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한 것이다.
새가 숲속, 숲 밖에서 그 갖은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生]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 오건—꽃을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 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0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30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인데 참나, 나의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하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하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려 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한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한 표현을 하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그랬습니다.
눈 ·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 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이렇게 임제 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전강 조실 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써 가장 뚜렷한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려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한가 안 한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녁으로 들랑날랑하는 그 공기가 그러면은 참나냐?’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참, 말도 안되지만.

하여간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한 놈.
그러한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계(五戒)와 불명(佛名)과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명과 오계와 화두를 설(說)해 드리는 날입니다. 그전에는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의식(儀式)을 거행했습니다마는, 내나 같은 말을 한 날에 이중으로 중복을 해서 바쁜 세상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법회(法會) 때 오계와 화두를 설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계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는 오계(五戒), 십계(十戒)가 있고, 비구 250계(二百五十戒)가 있고, 비구니 500계(五百戒)가 있고, 또 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가 있고, 더 미세하게 나아가서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있지만, 오늘 설(說)하고자 한 이 오계(五戒)는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잘 가지면 그밖에 어떠한 계도 다 잘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에는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가 있는데, 소승계는 몸으로 지켜. 몸으로 지키는 계고, 또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다.

예를 들어서 첫째 번에,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했는데, 소승계에 있어서는 아무리 그 사람이 미워서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또 칼을 가지고 가서 죽일려고 아주 쫓아갔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서 딱 참고 죽이지 아니했으면 이건 소승계는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안 했으니까. 그러나 대승계는 실지로 죽이지는 안 했어도 이미 마음속에 죽일려고 하는 마음을 냈으면 이미 살생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욕심을 내고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에 먹었다 하더라도 실지로 도둑질을 안 했으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니여. 그러나 벌써 마음속에 훔칠 마음을 냈다면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어떠한 종류에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다 이와 같아서, 소승계와 대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것과 마음으로 지키는 그 계(戒)의 차원(次元)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소승계를 설하시고 또 대승계를 설하셨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는 소승계(小乘戒)만 지키면 그것으로서 훌륭하게 계를 지킨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고, 근기(根機)에 따라서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게 하고 나아가서는 대승계(大乘戒)까지도 아울러서 원만(圓滿)하게 지킬 수 있도록 구경(究竟)에 목적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계를 받는, 또 이 계(戒) 설(說)함을 듣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몸으로는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고, 마음으로는 대승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받아서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오늘 계를 받으실 분은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것을 호궤합장(胡跪合掌)이라 그런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을 비롯해 모든 동물, 모든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그 모든 산목숨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오면서 어느 벌레, 어느 동물, 어느 사람 뱃속에 한 번 이상 다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고, 그 모든 중생 낱낱이 다 우리와 똑같은 귀중한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고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찌 차마 그 산목숨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방방곡곡에 모든 대소 사찰(寺刹)에서 일 년에 몇 번씩 그렇게 방생법회(放生法會)를 갖고, 또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시(生存時)에 수백 관 수천 관의 모다 고기를 사서 한강에 모다 방생(放生)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면 그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限量)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내생(來生)에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에 병(病)을 앓고 또 단명보(短命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남에 물건을 주인의 승낙(承諾) 없이 갖지 말아라. 내 물건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한량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다가 내생에 다시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가난뱅이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도 다 버리시고, 인행(因行) 때에는 당신의 처자권속까지라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다 보시를 하시고 당신의 수없는 목숨도 배고픈 중생(衆生)에게 버리셨거든, 나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은 몸과 마음을 더럽혀.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행히 사람 몸을 받게 되더라도 부정(不貞)한 아내,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가정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다.
금생(今生)에 부정한 아내나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그 하루도 편할 날을 살지 못한 그런 사람은 모다 과거 전생(前生)에 자기 자신이 그런 부정한 행실(行實)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금생에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에 행복을 잃고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면, 당장 금생에 거짓말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 부부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형제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자식들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거여. 하물며 친구간이나 이웃이 어찌 그 사람 말을 믿을 것인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 몸을 받더라도 그 사람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를 안 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면은 당장 한 번 마시고 두 번 마시고 차츰차츰 그 중독(中毒)이 되면 안 마시고는 못 배겨.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는 그 술이 사람을 먹게 되아. 그래서 완전히 폐인(廢人)이 되어가지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해.
금생에도 그러려니와 그 술 마신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의 과보, 사람 몸뚱이를 받았다 하더라도 천치, 백치, 바보로 태어나서 사람이면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

이 다섯 가지 계.

첫째 번에 산목숨을 죽이면 왜 못쓰냐?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도를,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도(道)를 닦는 것은, 첫째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살생(殺生)을 하면은 자비심(慈悲心)을 끊어 버려. 자비종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까닭은 일체중생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재산을 다 보시(布施)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도 보시를 하고, 내가 도를 닦아서 얻은 모든 지혜(智慧)도 일체중생에게 베풀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데, 지금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런 복덕심(福德心)을 기를 수가 있겠는가. 복덕종자(福德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여.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도를 닦은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그래서 지혜의 눈을 떠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는데, 사음을 해 가지고 몸과 마음을 더럽힌다면 나의 청정심(淸淨心)을 손상(損傷)해. 청정종자(淸淨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고.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우리가 도를 닦아서 진리를 펴서 일체중생을 제도헐라면 진실(眞實)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해 버릇하면은 나의 진실종자(眞實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진실종자를 끊어 가지고 어떻게 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불명(佛名)을 받고 불제자(佛弟子)가 되어서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어서 속히 지혜의 눈을 떠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밤낮 술을 마셔 가지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겠느냐.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마땅히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술이 취하게 되고, 술이 취하게 되면은 거짓말도 하게 되고, 사음도 하게 되고, 도둑질도 하게 되고, 살생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술도 하나의 음식물이지만 그것을 어리석게 먹으면, 그것을 먹어서 중독(中毒)이 되면 자기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자기를 멸망(滅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 설(說)한 다섯 가지 부처님의 계(戒)는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能)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聖)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켜 가질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연비(燃臂).

참회진언(懺悔眞言) ;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연비가 끝날 때까지)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멸심망양구공(罪滅心亡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편안히 앉으세요.

오계(五戒)를 받고 그리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그 향(香)으로써 팔을 따끔하게 지진 그 순간 과거 무량겁에 지은 죄(罪)를 그 따끔한 그 찰나에 소멸(消滅)을 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앞으로는 다시는 범(犯)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벌 밀(蜜)에다가 실을 묻혀 가지고 크게 만들어서 팔에다가 세워 놓고 거기다 불을 질러서 훨훨훨 타들어 가 가지고 큰 흉터가 나도록 그렇게 뜨겁게 팔을 지졌습니다마는, 지금 오늘은 향불로 간단하게 지졌지만 각자 당인(當人)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처가 크게 나야만 죄가 소멸이 되고 또 맹세를 굳게 한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처음~36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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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계를 받았으니 이제 정식(正式)으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었습니다. 아까 몸으로 지키는 이 소승계(小乘戒)와 마음으로 지키는 그 대승계(大乘戒)를 우리는 다 같이 지켜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은 이 두 가지 계를 원만하게 잘 지킬 수가 있느냐?
참, 마음으로 지키는 계는 대단히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잘 지킬려고 해도 지킬려고 하는 생각 낼 때 벌써 범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대승계이기 때문에 참 지키기가 어려우나, 그래도 잘 지킬 수 있는 묘(妙)한 방법이 있어. 그것은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여.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심마(是甚麽)’ 그러는데, 중국음(中國音)으로는 ‘씨 씀마’인데, 씨씀마, 시삼마란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 뭣고?’거든, ‘이 무엇고?’
'이 무엇고?'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람들은 ‘이뭣고?’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참선해 나가는 데에 화두(話頭)로써 ‘이뭣고?’라고 하는 경상도 말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상도 분이 아니라도 이 화두를 들으실 때는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그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이라고 하냐?”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항상 참구(參究)를 하는 것인데, 이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지식과 따져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여.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世俗的)인 지식, 또 불교에 교리, 뭐 일체 철학적인 이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다 놔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그건 놔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가 없지만 재미가 있건 없건, 또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 끌고... 사람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아까 ‘잃어버린 소[牛]를 찾는데, 잃어버렸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이 우리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 한, 바로 그 코밑에 뱅뱅 도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그걸 뭐 고인(古人)들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식(識)’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뭐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뭐 불교 그 경전 안에도 경(經)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러한 이름이 문제가 아니여. 그 실체(實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 볼라야 볼 수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는, 또 아무리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거던. 그놈.

이론(理論)도 그만두고 이름과 상(相)도 따질라고 하지 말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할 때에도 ‘이 뭣고?’

이렇게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 ‘이놈이 뭐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입으로는 ‘이 뭣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딴생각[別念]이 들끓고, ‘이 뭣고?’ 할 그 잠깐 동안은 ‘이 뭣고?’ 생각이 있지마는 일 분도 못 가서 잃어버리고 딴생각을 하게 되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아니면은 먹먹허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혼침이 좀 없어질 만하면 또 호사난상(胡思亂想)이 일어나고.
참 참선(參禪)을 할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 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생 동안을 번뇌 아니면 망상, 잡념 속에 시달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잡념인 줄을 모르고 삽니다. 다행히 참선을 해봐야 ‘아,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고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구나’ 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밤낮 번뇌망상과 희로애락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풍파(風波) 속에 놀아나고 있는 한은 우리의 죄업(罪業)은 끊임없이 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짓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를 끊고자 하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이 참 많고,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집안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사회 국가를 위해서, 크게는 인류를 위해서 많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갑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공헌을 세우기도 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일을 하고 갔지만 진정 어느 일이 정말 자기(自己)를 위하는 일이고 진정으로 이 인류(人類)를 위하는 일이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해서 박사가 되고 그 연구 결과로 인해서 인류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별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데 조끔 편리하게 살도록 공헌을 한 것 뿐이지, 근본적(根本的)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편리하게만 할뿐 행복하지를 못했다.
행복하게 못하고 만 것쯤은 또 괜찮은데, 정말 그 많은 박사들이 연구한 그 과학이 인류를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과학을 발전을 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농사짓고 채소 심어서 먹고 살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무서운 공포 속에 떨지 안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찰나간에 잿더미가 되고 인류가 다 멸망하느냐?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만큼 그 위험도는 점점 증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위기(危機) 속에서 이 위기를 막고, 막을 수 있고 또 설사 그런 위기가 도래(到來)한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공포심 없이 이 몸뚱이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참선(參禪)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간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염라대왕이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염라대왕이 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현신(化現身)이고, 다 불보살의 화현신으로서 나타난 보살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서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불종자(佛種子)인데 염라대왕이 그 앞에 합장배례를 아니할 리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아무리 해 갈수록 어렵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수활산요노전심(水闊山遙路轉深)이라’ 이 심우송(尋牛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끝없는 물, 멀고먼 그러고 험악한 산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한이 없을지언정, 갈수록 길이 더 험하고 어려웁다 하더라도 기어코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하는 방법은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그다음에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가슴으로 다 호흡을 하는데—숨을 들어마실 때에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이, 하복부가 약간 볼록하게 나오도록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그 볼록했던 그 단전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면 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고 내쉬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그저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한 것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면서 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역시 코로 내쉬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또 머물렀다가, 또 한 3~4초에 걸쳐서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 ‘이 뭣고?~~~’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어.
알 수 없는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어지지 아니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고대로 거각한 채로 호흡만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들어마셨다 하는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렇게 하다가 그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왔다 하면, 그때 다시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한번 또 그렇게 챙기는 거여.
나중에는 한 번 아침에 들은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딴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이 뭣고?~~~’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탁 있으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상관이 없어.

그렇게까지 될라면 상당히 노력을 해야 그렇게 되고,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뭐 망상(妄想) 때문에 못하느니, 무슨 혼침(昏沈)이, 잠이 와서 못하느니 한 것은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충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세 가지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호되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이여. 위(位) 없는 참사람. 계급(階級)이 없는,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이런 위(位), 계급이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다 사람이면 사람 사람마다 그 얼굴이 있고 모냥이 있는데, 이 계급이 없는 이 참사람은 형단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형단이 없기 때문에 볼라야 볼 수가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고 알라야 알 수가 없어.
심상출입면문전(尋常出入面門前)이여.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얼굴을 통해서 출입(出入)을 하더라.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能)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버리면, 그 형단(形段)이 없는, 면문으로 출입하는 그 형단이 없는 그놈을 깨쳐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그 번쩍하는 그 번갯불과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을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번갯불을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소리를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밟을 수 없는 그 번갯불과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버릴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 또 진즉 오계를 받았으되 본의 아니게 오계를 파(破)하신 분은 오늘 다시 새로 받았으니 새로 태어난—연세야 몇 살이 되셨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 새로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몸으로 이 순간부터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금생(今生)에 결정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了達)하시기를 바랍니다.

불명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받아 가시고, 지난번, 저지난번, 모다 작년, 진즉 불명을 모다 신청을 하고 또 화두도 신청을 하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도 그 찾아가지 아니하신 분은 오늘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이렇게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더웁지도 춥지도 않는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국(時局)은 매우, 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불자(佛子)는 오계(五戒)를 잘 받아서 실천을 하시고, 어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를 당하더라도 항상 불자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벗 삼고, 화두를 스승 삼고, 화두를 나침판을 삼고, 화두를 등불 삼아서 하루하루를, 또 일초 일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풍파(風波)가 심할수록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정신을 차리듯이,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일치단결해 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서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 풍랑(風浪)을 이겨내듯이,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모두가 다 단합하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애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용서(容恕)하며, 이러한 난국(亂局)을 기해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얻고, 나아가서는 모두가 그렇게 화합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전 국민이 단합이 되고, 전 국민이 단합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어가지고 인류를 갖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역군(役軍)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제자(弟子)로서, 불교의 진리의 사도(使徒)로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로되  호리유차유천리(毫釐有差謬千里)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알고 인사하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하고는 아주 평범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그놈,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그러한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36분36초~1시간11분1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화소산전설천기~ /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계(戒)는 계기(戒器), 정(定)은 정수(定水), 혜(慧)는 혜월(慧月)에 비유 /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소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고,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

산목숨을 죽이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지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지고, 사음(邪淫)하면 청정종자(淸淨種子)가 끊어지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지고,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진다.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모두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된다 / 화두 드는 방법은—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는데—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생사해탈을 하려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참나를 찾는 일 /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다 /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만다 / 신심과 분심과 의심,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한다.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은 오늘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것.
(게송)삼가촌리형형례~ /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하지 말라.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전강 조실 스님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혜(慧)는 혜월(慧月)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戒)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참선(參禪)을 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방법(자세와 단전호흡과 화두 거각)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