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51~375)2023. 4. 10. 06:39

(No.358)—1988년 부처님오신날(88.05.23) (58분)

 

(1) 약 32분.

 

(2) 약 26분.


(1)------------------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하면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하고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한 등(燈)에 등불이 능히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붙일 수가 있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마음에 인(印)이, 마음 인(印)의 그 빛이 널리 통하면 부처님의 정법(正法)의 법령(法令)이 널리 행하리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한디, 천성(千聖)이 전할 수 없는 이 등불을 아무리 불어도,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더라도 이 등불은 꺼칠 수가 없을 것이다.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다. 한 등(燈)으로 인해서 백천 등(燈)에 그 불이 옮겨져 가지고 그 등불이 온 세계에 환히 밝아지면 우주법계 구석구석이 어두운 구석이 없이 다 환히 다 밝아질 것이다.


오늘 불기(佛紀) 2532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서, 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람마다 정성스러운 등(燈)을 켜 가지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키었지마는 그것이 백천 등(燈)이 되고, 십만 등(燈)이 되고, 백만 등, 천만 등이 되어서 그 등불이 환히 다 밝아져 가지고 삼천리 강토(疆土)뿐만이 아니라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오대주(五大洲) 육대양(六大洋)이 환히 밝고, 이 지구만 밝아질 것이 아니라 이 태양계가 다 밝아지고, 이 태양계와 같은 수백억만 개의 태양계가 이 우주법계에는 있는데, 끝없는 이 세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환히 밝아질 것이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훨씬 이전에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장재왕(長災王)이라 한 왕,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재왕은 참 불법을 믿는 아주 어질고 착한 그런 성인의 풍도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이웃나라에 아주 싸움을 좋아하고 그런 범달왕(梵達王)이라 하는 고약한 아주 강력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범달왕은 호시탐탐 그 장재왕에 왕국을 침범할 것을 노리다가 어느 날 대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그 장재왕에 나라를 침범을 해서 순식간에 그 나라를 집어삼켰습니다. 그 장재왕과 그 왕비와 그 왕자는 어떻게 손도 써보지도 못하고 뒷문으로 해서 저 산중 깊은 골짜구니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 범달왕은 군사를 풀어 가지고 방방곡곡이 뒤져 가지고 결국은 이 장재왕과 왕비와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만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그 왕과 왕비와 왕자를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용케도 어느 틈을 타 가지고 오직 그 왕자 한 사람만이 도망을 했습니다. 도망을 해 가지고 드디어 그 사형(死刑), 왕과 왕비를 그 사형에 처하는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왕자는 도저히 혼자만 숨어서 있을 수가 없어서 이상한 옷을 입고 얼굴에다가 모다 변장을 해 가지고 그 수많은 군중 속에 뚫고 들어가 가지고 자기의 부왕(父王)과 그 왕비, 어머니가 살해된 광경을 지켜보지 아니하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살해될 마당에 그 많은 군중을 둘러보니까 그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 가지고 혼자소리로 독백을 했습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이런 세 마디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이 무슨 소린지를 모르고 ‘그 왕이 죽게 되니까 간경(肝經)이 둘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쯤 모다 생각하고 결국은 그 왕과 왕비는 무참하게도 목을 짤려서 죽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자기 부왕(父王)이 한 이해할 수 없는 세 마디 말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빠져나와 가지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여러 해 동안을 갖은 기술과 칼 쓰는 법, 창 쓰는 법, 활 쓰는 법을 비롯해서 무술을 다 익히고 나아가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 요리를 하는 법, 옷을 짓는 법,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다 연마를 해 가지고서 차츰차츰 그 범달왕(梵達王)이 있는 도시에 잠입을 해 가지고 차츰차츰 인증을 받고. 그래 갖고 대신(大臣)의 집에 또 고용이 되었다가 거기서 또 훌륭하니까 결국은 왕궁에까지 고용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해서 임금, 그 범달왕의 눈에 들어 가지고 가장 신임(信任)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아주 그 범달왕을 가깝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도 그 범달왕은 그 장재왕의 왕자를 띠어 놓고는 살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눈에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범달왕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왕자는 그 왕을 모시고 사냥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왕이 아조 말을 달려서 사냥을 한바탕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피로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 말여.
그래서 모든 신하와 궁녀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그 왕자 하나만을 데리고 조용한 물가에 경치도 좋고 고요한 데로 가서 단둘이 푸욱 쉬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온갖 무술을 다 익혔기 때문에 혼자만 옆에 있어 주어도 왕은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고요한 데에 가서 그 왕자의 무릎을 비고서 누웠는데 금방 잠이 깊이 들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왕자는 ‘이제사 비로소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이래 가지고 품안에 깊이 간직했던 그 멀금하게 간 칼을 빼 가지고 범달왕의 목에다 갖다가 터억 틀어 댔습니다.
그래 가지고 아주 일격을 가할려고 하다가 불현듯 그 부왕(父王)이, 장재왕이 그 처형(處刑) 당할 때 한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원한은 보복을 함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말 가운데 마지막 끝에 한 그 말이 퍼뜩 생각이 나 가지고 찌를까 말까 한 판에 아! 범달왕이 눈을 번쩍 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온몸에 아주 그냥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는데, 아 그 목에다 틀어 대 갖고 있는 칼을 미차 숨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칼을 갖다가 번쩍 들면서 “너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 웬수다”
그런데 그 왕이 눈을 뜨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장재왕의 그 왕자가 나를 내 목에다 칼을 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눈을 뜨는데, 진짜 눈을 뜨고 보니까 칼날이 자기 목에 와서 떡 닿아 있다 그 말이여.

“바로 내가 그 장재왕의 왕자다. 이놈, 너 이놈 오늘 죽어봐라” 그러면서 칼을 번쩍 해가 들고서 찌를려고 하다가 그 아버지가, 부왕이 마지막한 그 말이 다시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 이를 악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마는 차마 그 칼을 목에다가 꽂지를 못하고 그 칼을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그리고서 통곡을 하면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사죄를 했습니다.

범달왕도 몸을 털고 일어나서 “좋다! 느그 부왕이 그렇게 착한 임금인줄을 나는 몰랐다. 네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가 남긴 그 마지막 한마디를 마음속에 간직해 가지고 나의 목숨을 다시 살려주었으니 어찌 내가 너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 피차 각자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왕자에게 옛날의 자기 고국을 다시 돌려주고 두 나라는 아주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가지고 오래오래 친목을 하고 화평하게 지냈다고 하는 설화가 부처님의 경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왕이, 장재왕이 죽을 때, 첫 번째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웬수 원한에 마음을 오래오래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함께 이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그러한 원한이라 하더라도 오래오래 그 웬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고.
’급히 서둘러서도 안 된다‘ 그 말은, 우정, 한번 서로 알게 된 맺게 된 우정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한은 원한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 부왕(父王)에 유언을 갖다가 깊이 간직해서—만약에 그 왕자가 그 범달왕을 자기의 그 보복을 했다면 그 왕자인들 거기서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다고 해도 수백 명의 무사들에 둘러싸였으니 어느 칼에 맞어 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지끔 우리나라는 삼팔선(三八線)이 가로맥혀서 이북(以北), 이러한 참,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6 · 25 동란(動亂) 또 (미얀마) 아웅산에서 일어났던 우리나라 각료들을 모다 폭파시킨 그러한 일들 생각하고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칼기(KAL機)를 폭파해 가지고 백여 명의 참 무모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 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나라 일본을 생각해도,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서해를 왜구(倭寇)들이 침범을 해 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400년 전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또 와 가지고 무수한 생명을 죽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삼천리를 피로써 물을 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를, 일본 여론조사를 해 보면, 국민들을 해 보면 ‘세계에서 제일 미웁고 보기 싫은 나라가 어디냐?’ 하면 한국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인해서 일본이 그 완전히 야만한 야만족(野蠻族)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저 가야국 이래로 고구려 · 신라 · 백제 때를 통해서 계속 우리나라에서 가서 글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유교 · 불교를 가르키고, 농업과 모든, 나라 다스려 가는 법을 다 가르키고 해서 일본 나라가 영원토록 우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사람된 길을 가리켜 주는 문명(文明)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미워하고 우리를 그렇게 하냐?
그런 일을 생각하면 일 생 · 이 생 · 삼 생이라도, 성불(成佛)을 더디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놈들을 갖다가 응징을 하고 씨를 말려야 할 그러한 민족적 울분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기(KAL機) 폭파 사건 일으키는 소련, 6 · 25 때 그 우리가 그 통일을 눈앞에 놔두고 백두산까지 처올라갔는데 인해전술로써 우리나라를 다시 이렇게 분단되게 맨든 그런 일을 생각한다든지, 이조 때, 고려 때 중국이 대국이라 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그렇게 못살게 굴게 하고 속국을 만들어 가지고 짓이기고 약탈해 나가는 역사적인 일을 생각한다면은 세세생생에 중공을 중국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 자손만대(子孫萬代)토록 보복을 할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렇게 당한 일들이 까닭 없이 우리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인과(因果)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미워한 나라가 일본인데, ‘그 어째서 우리의 은혜를 받은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에 세세생생에 자손만대토록 은혜를 갚아야 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우리를 죽일려고 했는가?’
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는 안 했지만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떠억 깊이 관찰을 해 보니까 나는 그 원인을 짐작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생긴 이래로 삼국(三國)이 벌어졌고, 삼국이 벌어져 가지고 계속 싸워서 자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고, 삼국이 싸워서 멸망하고, 저 나라가 자꾸 망하면서—고구려도 망하면 그 왕과 모다 대신들이 전부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가야국이 망하면서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신라가 망해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백제가 망해도 모다 그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 말이여.
도망을 가 가지고 거기다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거기다가 이 문명을 일으키면서 대대손손이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그 말이여. ‘언제라도 반드시 권토중래(捲土重來)하리라. 힘을 길러 가지고 나의 고국에 돌아가서 웬수를 갚고 다시 내가 그 나라를 세우리라’ 이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여.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일본은 본래 저 아이누 족[Ainu族]이니 뭐이네 해 가지고 아주 야만족들이 조끔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그냥 그 야만족들이 살아서 그저 도둑질이나 해먹고, 해적질이나 해먹고, 노략질 해먹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구려 · 가야 · 신라 · 백제 · 고려, 이런 데서 자꾸 우리나라에서 가 가지고 사람 되는 길을 맨들었는데, 그 나라에다가 최초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국 사람이 세웠고, 일본에 그 황족이 혈통이 사실을 알고 보면 한국 사람이 일본 황실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다 밝혀질 것이고 지금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 까닭도 없이—모릅니다 자기네들은, 모르면서도 천 년을 수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한국을 갖다가 어쨌든지 다시 이것 자기가 차지해 가지고, 이걸 짓밟고 차지해 가지고 다시 나라를 세우리라 한 것은 ‘자기의 조국을 찾으리라’ 한 그 인과적인 그러한 원인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가장 우리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조끔도 그 은혜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하고 빼앗아 갈려고 하는 까닭을 나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입각해서 내 나름대로 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공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하고, 또 삼팔선이 갈라져서 하고, 모다 이러한 것들도 반드시 풀 수 있는 원인이 있을 것이고.

이번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뭐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가 모다 갈라져 가지고, ‘참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지역감정(地域感情)으로 이럴 수가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염려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었는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고구려 · 신라 · 백제 이런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그때의 원한 관계가 삼국은 없어졌지마는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핏속에는 그런 우리의 업(業), 잠재의식 속에는 그러한 것이 아직까지도 흘러 내려오고 있는 그러한 잠재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행여나 그러한 보복을 할려고 하는 마음, 오래된 그러한 원한 관계, 이러한 것을 다 풀어버려야 우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스스로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원한에 마음을 품고 있어 가지고서는 절대로 앞길이 열리는 법이 없고,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적개심(敵愾心)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도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사상적 교육과 고취가 뜻이 있겠습니다마는, 먼 안목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시절이 돌아올 때에는 그러한 악심(惡心), 개인적인 또는 민족적인 그런 악에 사무치는, 원한에 사무치는 적개심은 좋은 방향으로 승화(昇華)시켜 나가는, 승화시켜 가지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공통점을 찾아서 화해를 하고 이래 나가야만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림픽이 있고,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는 이념을 초월해서 모다 경제적인 교류를 맺고 그래 가지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발전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31분55초)





(2)------------------

이러한 때를 맞이해서 첫째, 우리 불자(佛子)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서로 미움이 있다면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야겠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어떠한 본의 아닌 좋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을 기해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허물을 상대방에 미루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이렇게 해서 참회(懺悔)를 하고 화합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兄弟間)에 동서 간에도 마찬가지고,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회사와 회사 관계, 단체와 단체 관계 또 지역감정도 그렇게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당(黨)과 당(黨) 사이에도 역시 그것을 풀고 근본적 민족 한겨레라고 하는 데에 돌아가서 서로 과거를 용서하고 그래 가지고 손에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단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원한심을 깊이 품고서는 그 사람은 올바른 행복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단합하지 않고서 참다운 통일은 오지 아니할 것이고, 참다운 통일 없이 세계에 평화를 이바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라크과 이란의 관계를 보십시요. 이웃지간에 살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 나라는 결국 두 나라가 다 망하고 말 것입니다.
황새가 저 해변가에서 큰 조개를 갖다가 탁! 찍었습니다. 그 조개는 황새의 입을 콱! 물었습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란 말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황새도 잡히고 그 조개도 어부한테 잡혀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남한에서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지역끼리 싸우고, 당이 다르다고 해서 당끼리 서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가 기반이 흔들리게 되면 이북(以北)에서는 언제 밀고 내려올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이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결국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제공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고 용서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며느리가 ‘내가 그러지 말아야겄다’, 시어머니는 ‘내가 며느리를 미워하지 말아야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마는, 하는 꼴을 보고 얼굴을 보면은 다시 속에서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리왕(歌利王)이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토막토막 짤라 냈지마는 터럭끝만큼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성불(成佛)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미워하는 생각, 이 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단전호흡(丹田呼吸), 깊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생각 생각이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이렇게 ‘이뭣고?’를 하면 처음에는 ‘이뭣고?’는 하지마는, 속으로 미운 생각은 아주 잘 가시지를 않을 것입니다마는, 한 달을 그렇게 해, 석 달을 그렇게 해, 일 년을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이뭣고?’를 안 할려고 해도 저절로 ‘이뭣고?’가 되면서 아! 그 미운 생각이 언제 어느 때 스르르르 담박해져.

부처님께 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 배, 삼천 배, 사천 배, 오천 배, 이렇게 하고 나면 그냥 속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면서 그렇게 미웠던 시어머니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미웠던 며느리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아주 복수에 치가 떨린 웬수가 조끔도 미운 생각이 없고, ‘전부가 다 내가 잘못했구나! 그 잘못한 것이 상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어!’ 아 그렇게 참회가 되면서 그 하염없이 흐른 눈물을 쏟아 버리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미운 생각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속에서 일어난다 그 말이여.

예배(禮拜)를 해도 그러한 경지가 오고, 경(經)을 읽어도 그런 경지가 오고, 기도를 해도 그런 경지가 오고, 염불을 해도, ‘옴마니반메훔’을 해도 그런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도 다 좋지마는 ‘이뭣고?’를 하면 그런 경지가 더 빨리 오는 수가 있거든.
그러한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되니 이 참선법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 속에는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기도가 다 들었고, 삼천 배 내지 억만 배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오늘 전장학, 전고경월 복위(伏爲), 망부(亡父) 전홍익 영가(靈駕)의 49재입니다. 그 재자(齋者)가 오늘 49재를 맞이한 전홍익 영가를 위해서 그 ‘이뭣고?’ 법문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법문을 좀 해 달라고 한 달 전부터서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어찌 산승(山僧)이 그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수만에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지금 가슴 뜨거운 마음으로 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져 있는 만년위패(萬年位牌) 여러 영가들을 위해서도 저는 간곡히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전부 그 영가들이 우리들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마는, 그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 그다음에 이 송담(松潭)이 설해 드리는 이 법문을 그 영가(靈駕)들이 다 듣고 그 영가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이뭣고?’의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선망부모에 못지않게 ‘이뭣고?’가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단속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을 해서 그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허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淸風拂)이다.
우리 낱낱이 얼굴 앞에는 밝은 달빛이 휘황창 희고, 사람사람의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사람 앞이라고 특별히 달빛이 밝고, 어느 사람 앞이라고 차별을 해서 달이 비추지 않겠느냐 이거거든. 어느 사람 앞에나 다 바람이 불면 다 시원한 바람이 불지, 누구라고 안 불고 누구라고 잘 불어줄 것인가 이 말이여.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우리의 업경대(業鏡臺)에, 우리 자신의 업경대를 갖다가 타파(打破)해 버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리면—자기가 그 달빛을 싫다 하고 껌껌한 굴속으로 들어가서 ‘달이 자기한테 (안) 비춘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문을 꼭꼭 처닫고 앉아서 더웁다고 찬바람,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온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가 굴속에서 터억 나와서 달빛 있는 데로 몸을 나투고, 꼭꼭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제낀다면 어느 사람 얼굴에 달빛이 비치지 아니하며, 어느 사람 방에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갈 것이냐 이거거든.

자기가 마음에 문을 처닫고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원망하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해서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못 깨닫는 것이지, 마음에 문을 훨쩍 열어버리고 자기도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깊이 신심을 갖고 자기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이뭣고?’만 하면 결정코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수행을 해 나가면—꼭 절에만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여. 집에서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살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살면서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언제나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단속해 나가면서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해 나가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화창한 봄날에 아름답게 핀 꽃가지 위에 그 예쁜 꽃에 새가 올라가서 아름다운 소리로 한 곡조 자연의 노래를 읊으더라.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부처님께서 춘다(Cunda)라고 하는 사람이 바친 독버섯을—그것이 독버섯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학자들은 해석이 있지마는 하여간 독(毒)이 있는 버섯이여.
독버섯을 드릴 리는 없고, 맛있는 버섯의 요리를 해 드렸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질이 된 음식이였었던지, 부처님의 체질에 안 맞았던지, 그것이 부처님께서는 요새말로 식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너무너무 고통이 심하셔 가지고 피를 쏟으시면서 그렇게 아프신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를 향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행을 하셨습니다.

조끔 가다가 쉬시고, 조끔 가다가 쉬시고 그러시면서 결국은 구시나가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사라쌍수간(沙羅雙樹間), 사라수가 2개씩 2개씩 요렇게 서 있는 그 나무 사이에다가 자리를 펴고, 그때 자리라고 해 봤자 웃옷이니까 그때는 가사(袈裟), 가사지요. 가사를 떠억 펴서 깔고서 누우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상업 도시인 베살리(Vaiśālī) 도시를 터억 바라다보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아!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원시경전(原始經典) 저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피가 넘어오도록 괴로우셨겠지마는 부처님은 조끔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를 안 했고 마음에 추호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춘다가, 그 금속공(金屬工)의 직업을 가진 그 춘다(Cunda)가 바친 그 공양의 공덕이나, 부처님께서 최초에 그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이나—부처님께서는 그 춘다(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잡숫고 기력을 회복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셨는데,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을 잡수고 열반에 드시게 한 그 춘다에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그 부처님의 그 깨달으신 심경이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높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맑고 고상한 그 뜻은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31분56초~57분54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일등능속백천등~ /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 장재왕(長災王)의 아들과 범달왕(梵達王)의 설화 /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과의 인과(因果) 관계 /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의 지역감정(地域感情)의 우리의 업(業), 인과(因果) / 개인,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 모두 원한에 마음을 풀어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

우리는 중생(衆生)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 미운 생각을 원한심을 없애는 근원적인 방법이 바로 ‘이뭣고?’이다.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된다 /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마음속에다 환허니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 산승(山僧)의 법문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고 있는 것.

(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이나,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 / 첫째,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 · 이웃 · 온 겨레 ·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자.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