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No.280))—1972(임자)년 동지 법문(전강선사 + 송담스님 법문)(임자72.11.17) (64분)
**전강선사 법문 중간에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설하신 법문이 있습니다.
(1/4) 약 16분.
(2/4) 약 17분.
(3/4) 약 17분.
(4/4) 약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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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님이 이름이, 저 당호(堂號)가 호가 송담(松潭) 스님인데. [앉어 그만, 뭣이든 가만히 앉었어] 송담 스님인데, 송담이라는 그 이름은 절에 들어와서 인자 참 도(道)를 얻어야 도를 깨달라 얻어야 호를 해주는 이름이여. 그 이름, 제일 높은 이름이, 당호 이름이 송담이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송담이라고 하면 몰라. 아무도 몰라. [그만 앉어 계셔. 그대로 앉어 계셔] 묵언(默言) 스님이라고 해야 안다 그 말이여. 어찌 묵언인고 하니 10년 동안을 말을 안 했어. 세상에, 귀 뚫어지고 벙어리가 없어. 환허니 들으면서 10년 동안을 묵언을 했는디, 나이 올해 근 오십 되었습니다. 오십 되었는데 지금 어디 오십 되아 보이요, 오십도 안 돼 보이제.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10년을 딱 정허고 묵언을 따악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도(道)를 통했다 그 소리여. 내가 이런 말허면 ‘내 권속 내 제자’ 이런 게 아녀. 나 그런 말은 뭐 내 부모라도 일없고. 전국에 다 아는 분이여. 전국에서 ‘묵언수좌(默言首座)’ 허면 다 안다 그 말씀이여.
여가 이 자리가 이래 뵈도 누가 올라와요? 못 올라와. 하나도 이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 여그서 내가 10년 동안 설법을 했는디 올라간 사람 없어. 묵언 스님 자리밖에 내 안된다 그 말이여. 내가 고리 넹겨서 아조 여그 원장(院長)이 되았습니다. 여 원장 스님, 나 죽으면 조실(祖室)이 되지, 시방 죽기 전에는 조실 못 되오. 원장만 되지.
아, 조실 스님이 나이 팔십이 되았으니, 인자 칠십도 못 올라가거든. 아 그래 너무 체면없이 팔십 살까장 올려 보낼라고 허니 될 것이요? 그래서 인자 이 원장 스님한테로 이 좌(座)를 넹겨서 오늘 올러가서 인자 마음대로 설법헐 텐게 잘허던지 못허던지 그만 도(道)는 한국에서 젊은이로는 송담 스님밖에 없다 그 말이여. 다 압니다. 아 그 뭐 누구라고 허면 모르는 이 없어요. 그러니 그렇게 믿고.
스승 하나 옳게 믿으면 그만이제. 스승을 보고 절에 댕겨야지, 절은 마찬가지라고 아무디나 부처님은 똑같다고 모도 이러드구만, 말헐 때 들으면. 그것 소용 하나 없는 것이여. 옳은 스승을 찾아서 댕겨야 옳은 법을 듣고 그러제. 아무때나 또 그러면 아무때나 가 놓으면 무당도 뭐 뭐 부적케니 범연히 알아서 해? 잠깐 간단히 말씀해 마칩니다. 설법 잘 들으십시오. 옷을 뚱뚱허니 입고 두어야 인자 듣고 나오네. 조그만, 인자 나와서 허라는 대로 혀!
<송담스님 법문>
조실 스님께서 너무 올라가기를 강경히 명령을 하시기 때문에 부득이 올라오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 ‘법(法)을 설(說)한다’고 허는 것은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허신 바와 같이 「깨닫지 못하고 법을 설하면은 그 설하는 사람은 마구니의 왕이 되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의 법을 듣는 대중은 마구니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허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 자리에 함부로 올라올 자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헌 사람이 능히 법을 설헐 수가 있느냐?’ 하면은, 한 말도 설하지 아니하되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한구석에도 들리지 아니한 곳이 없을 만큼 또 단 일분일초 동안이라도 그 설법이 근친 바가 없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꽉 차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허면 입을 열지 아니허되 그 설법이 끊이지 않고 대사자후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종일 일평생토록 법을 설허되 한 말도 설헌 바가 없는 사람, 능히 이러헌 사람만이 감히 법을 설헌다고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헐 때에 본인으로서는 감히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큰스님의 강경한 그 명령으로 올라오기는 했습니다마는 감히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아무 헐 말씀도 없고 법을 설헌다고 헐 수 없습니다.
이걸 법이라고 생각허시지 말고, 또 저도 법을 설헌다고 그런 생각으로 여기를 올라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점을 먼저 다짐을 드리고서 옛날 조사(祖師) 스님께서 우리에게 공부를 어떻게 허라고 경책(警策)해 주신 말씀 한마디를 소개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다 참선의 그 바람이 일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다 ‘불교’ 허면 참선, 그 참선을 모다 좋아하고 모다 헐려고 애를 쓰고, 그러고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반가운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어떤 학문 배우듯이 배워서 그 힘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가 해서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지, 어디서 배워서 익혀 가지고 체득을 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마다 다 참선을 헌다고 허지마는 사실은 바르게 허기는 퍽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 바르게 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3년 10년 내지 일생을 해도 정말 화두(話頭) 하나를 바르게 들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참선할려면은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지 아니해야 그 참선을 잘허는 것이고, 번뇌와 망상, 중생심이 일어나면 그것이 참선이 잘 못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앉어서 어쨌던지 그 망상이 안 일어나기를 바래고, 망상이 일어나면은 그 공부가 잘 안된다고 이리 생각해 가지고 고민을 허고 번민을 허고 한탄을 허고, 허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마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헌다고 하는 것은 벌써 목석(木石)이나 죽은 사람은 아무리 번뇌를 일으킬라고 해도 일어나지 아니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증거로써, 우리가 불성(佛性)이 있다고 허는 그 증거로써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 것이니 번뇌와 망상이 일어난다고 허는 것은 그것을 미워허고 싫어허고 한탄헐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있다, 우리도 깨달을 수 있는 분명히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허는 증거로써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생각기에 따라서는 아주 다행한 일리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일어나는 번뇌와 망상을 그놈과 더불어 일생을 살면서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고 해도 능히 세속 사람은 살 수가 있고 아들딸도 날 수도 있고 형편 따라서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는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와 권속을 다 버리고 독신으로서 산중에서 못 먹고 못 입고 이 고생을 허며, 신도님들도 집에서 그저 아들을 안고 손자를 희롱허면서 그저 형편따라 재미있게 살 수 있는데 다달이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바쁜 틈을 타서 이렇게 오셔 가지고 큰스님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시느냐?
우리가 먹고 입고 배불리 먹고 편허게 잠자는 것으로써만이 우리의 인생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불행으로 뒤바꿔질 우려성이 다분히 있는 위험한 생활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려고 이 불법(佛法)을 찾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공부허는 과정에 있어서 그 번뇌(煩惱)를 없이 하고 어떠한 청정(淸淨)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고 무한히 애를 씁니다마는, 그 마음 자세가 제가 생각기에는 또는 옛날 부처님과 조사와 큰스님네의 법문에 의지해서 본다면은 그 번뇌를 없이 하고 어떤 청정한 경계가 나타나기를 바래면서 공부를 헌다고 허는 것은 마음 자세가 틀려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번뇌 그놈을 없이 헐려고 허는 디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번뇌」 하나가 더 생기는 것을 아지 못하고, 거기에서 「‘없이 헐려고 허는 그 생각’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고 한탄하는 그 생각」 때문에 화두 한번 드는 것이 늦어지는 것이고,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놓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은 어떠한 지나간 일이 되었건, 현실에 닥쳐 있는 일이 되었건 또는 미래에 자기 앞에 돌아올 어떤 사건에 관한 일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 할 때에 그 일어나는 그 마음에 즉(卽)해서, 바로 그 마음으로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그 화두(話頭)를 터억 들으신다고 허면은 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이 우리의 깨달음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그러헌 상대가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헐 때에 번뇌가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화두를 들게 되는 것이고, 만 번 일어나면 만 번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면 그것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그렇게 여법(如法)히 공부해 나간다면은 어찌 깨닫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볼 때에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화두를 더 잘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하나는 우산 장수를 허고 하나는 세탁소를 경영을 했는데, 비가 오면은 그 세탁업을 허는 아들이 빨래를 말리지 못해서 장사가 잘 안되겠다고 한심 걱정을 허고, 또 비가 안 오면은 우산 장수 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안 되겠다고 이렇게 걱정헌, 일평생을 걱정으로써 세월을 보내는 그러헌 할머니가 계셨다고 합니다.
생각기에 따라서는 비가 오면은 우산이 잘 팔려서 좋고, 비가 안 오면은 빨래허는 자식이 돈벌이가 잘되리라고 이렇게 참 재미스럽게 생각헐 수 있을 텐데, 그놈을 까꾸로 생각해 가지고 비가 오나 안 오나 걱정을 허게 된다면은 그 할머니는 비가 오던지 안 오던지 재미있고 다행하게 생각하면서 생활할 수 있을 텐데 생각을 잘못 먹었기 때문에 일평생을 자식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불행 속에 사는 할머니와 같은 그러헌 식의 공부는 우리는 지양(止揚)을 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떠헌 종류의 번뇌가 일어나드라도 그 번뇌로 인해서 정진을 다시 다잽이허고, 어떠헌 몸에 병이 생기고 뜻에 어긋나는 어떤 사건들이 우리 앞에 제출이 되드라도 그러헌 것을 계기로 해서 생각생각이 단속을 허고 정진을 해 간다면은 우리는 설사 금년에 또는 이태 삼 년에 견성을 못하드라도, 마지막 죽을 때까지 설사 큰스님의 인가를 못 받는다 하드라도 조금도 한탄할 일이 아니라 그럴수록에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하면서 정진을 한다면은 그분이야말로 참으로 안심입명(安心立命)한 도인(道人), 자리가 완전히 잡힌 수행자라고 존경을 해도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제가 과거에 큰스님네 법문을 보고 듣고 그래서 속으로 느낀 바도 있고 그래서 참고로 말씀을 드리고, 참으로 훌륭한 법문을 조실 스님께서 허실 테니 그걸 잘 들으시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15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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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법문>
(주장자를 들으시고) 다 보시었제? 이걸 이걸 못 봐? (주장자를 내리시고 ‘쿵’) 잘 보고 잘 들었지요.
그 보는 놈. 이 주장자(柱杖子), 보는 주장자 그만두고 보는 놈, 그놈. 그 참 신령하제. 보는 놈이 그놈이 그 무슨 물건이여? 소리 ‘땅’ 듣는 놈은 또 무슨 물건이여? 보는 놈이 다르고, 듣는 놈이 다른 게 아니여. 보는 놈이나 듣는 놈이나 똑같지. 그 뭐가 보고 뭐가 듣냐 그 말이여.
아 그놈이 낱낱이 우리가 낸디, 내가 낸디, 아 그놈을 모르다니. 이것 참 엄청난 일이지. 그놈을 몰라 놓고 깜깜 칠통(漆桶). 그 내가 낸디, 내가 나를 몰라 놓고, 사람이라고 그래도 내가 사람이라고 돌아댕기면서 살았다고 돌아댕기면서, 기가 찰 일이지. 이것 하나 깨달아 아는 것,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參禪法)이여.
참선법이,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깨달라 가지고는 여태까지 이 사바세계 오탁악세(五濁惡世)에다가 그 죄만 퍼짓는, 죄 퍼짓고 죄 받는 중생한테 그렇게 가르켜줄라고 49년 동안이나 설법을 해서 ‘어쨌든지 그놈의 죄, 숭악헌 중생 죄, 인생 죄, 그놈의 죄에만 파묻히지 말고 깨달라라, 깨달라라.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輪廻)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그 자리에 해탈이 있다. 헌데 그저 한번 깨달으면 깨달은 그 각전지(覺田地)에 그대로가 해탈이다. 아무 고통도 없고’ 이렇게 일러주고 이렇게 말해줬는데 이렇게 깜깜혀.
아, 나도 여기 와서 10년 동안을 늘 이 말뿐인데, 아 이렇게 깜깜혀. 천하에 쉬운 것은, 천하에 참선보담 더 쉬운 법이 있다면 말을 해 봐.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선, 내가 나 깨달은, 그 뭐여, 손을 뒤집었다 이랬다 허고, 그만큼 가깝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멀제. 틈도 없어, 틈도. 나를 깨달을 그 깨달른 동안이, 어느 때 깨달을런지 또 시간도 없어. 안 해서 못하고, 믿지 안 해서 안 하고,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여태까장 또 얼마 동안을 내가 안 허다가 그전에 헌 그 홍인대사(弘忍大師) 법문 한마디 또 해야겠구만. 왜 그러냐? 그 법문을 들은 분들이 몇 분이 부탁을 또 해싸. ‘한 번만 더 들었으면은 알겠다’고. ‘그때 그 송구를 잘 모르겠다’고 쌓고 이러니깐, 또 좋고 괜찮허고 해서 시간은 좀 걸리지마는 잠깐 헐터니깐 잘 들어 두십시오.
꼭 듣고 설법을 듣고 ‘꼭 해야겄구나’ 그 마음이 나도록 들으란 말씀이여.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깐. 안 믿은 사람이 큰일이제, 한번 옳게 믿어버리면은 그만이니까.
부처님이 설산 속에 들어가서 여섯 해 만에 깨달랐지. 6년 만에 깨달랐지. 햇수는 6년 만이지마는 턱 깨달을 때는 그것, 시간도 암것도 없어. 그렇게 쉽게 깨달은 시간만 말하자면 그 6년이니, 뭐 여섯 시간이니, 무슨 뭐 6분이니 붙일 것도 없어.
여섯 해 동안은 어떻게 참선을 했는지 그 망상만 퍼일어나고 그 모도 공상만 퍼일어나고 안 되다가 되다가 야단쳤제. 부처님만 그런 것이요? 다 그랬제. 그동안 치지 말고, 그놈의 망상 번뇌 퍼일어나는 그때는 그만두고 확철대오헐 때만, 탁 깨달을 때만 그 시간을 따져 보자면 당초에 분단(分段)도 없는 거여, 시간도 없고. 금방까장 미(迷)했다가 툭 깨버렸단 말이여. 내가 거짓말을 혀? 내가 바로 혀. 내가 당해 놓고 직접 대해서 내가 얘기헌디 거짓말을 혀?
아, 식전에 아침에 10년을 묵언헌 날이 오늘이여. 오늘 마지막이여. “10년을 묵언할 때에는 참선 한바탕해서 견성헌다고 중이 되아 가지고 묵언했지? 10년을 묵언허고 나서 오늘이 10년인데, 오늘 이까장 깜깜허고 있어? 한마디도 못 이르고 깜깜혀?” 아 내가 그러고는 들어왔네. 들어왔는데, 밥 먹고 나서 또 물은게 웬일이여? 그 참 이상혀. 밥 먹고 나서.
아니 글쎄 어째서 그 원 아무리 둔재(鈍才)라고 원 10년이나 말까장 않고, 그 한 이십 시절 청춘에 10년을 그대로—어머니 아버지한테도, 가다가 수레에 떨어져서 수레 타다가 떨어져서 말 못헌다고 그래 가지고는 거짓말까장 해 놓고서는 나허고는 밤중마다, 밤중에 나허고는 말을 했으니깐 꼭 정밤중이면. 내가 뭐 요만큼 하나 틀린 말혀?
그 10년을 그렇게 해 놓고 나서는 ‘오늘이 마지막 가는 날이니 어떻게 혀?’ 내가 통탄을 했다 그 말이여.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이르는데 거참 환장, 기가 멕히제. 환장 아니라 그만.
아 이런, 말 들으면 아니까. 딴 공안을 물어보니 차! 그대로 했어. 그 공안 일러 봤던들, ‘이뭣고?’를 일러 봤던들 무슨 별다른 것이 뭣이 있어? 뭐 뻘건 것이 있어, 무슨 허연 것이 있어? 거기에 무슨 뭔 광명이 나와, 무슨 뭣이 나와? 뭐가 있냔 말이여? 아무것도 없제. 원 싱겁기를 참 천하에 짝이 없제.
이즉돈오(理卽頓悟)다, 이치는 몰록 깼다. 아무리 이즉돈오(理卽頓悟)지마는, 이치는 몰록 깼지마는 사비돈제(事非頓除)여. 똥 싸고 오줌 싸고 똑같어. 사상사(事象事)가 똑같지, 다른 법 없어. 다른 법이 있다면 외도(外道)여.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외도여. 뭐 별 이상스런 것이 하나 깨달았은게 코빼기라도 붙으면 마구니 외도여. 참선법은 그런 거여.
이즉돈오여. 이치는 몰록 깼다. 이치는, 생사 없는 이치 바로 봐 버리는 것이여. 죽고 사는 생사, 생사 이치가 없는데 거가 뭐가 있으리요.
그렇게 깨 가지고, 오! 인자 그 깬 그때부텀 지끔 또 치면은 몇 해나 된지 모르겄오마는 자최를 감촤버려. 인자 겨우 나타났오. 아! 자취 한번 감춰버리더니 그만이여. 아, 그만큼 깼으니 깨달았으니 인자 어디 가서 산중에 들어가던지, 아무디를 가던지, 말을 맥여주던지, 어디 가서 수연득묘(隨緣得妙)해라. 인연을 따라서 지내라 했더니 한번 간 뒤에는 그만이여. 아, 그랬더니 노동판 그런 디 가서, 그만 그 보 막는디 무슨 개 막는디 이런 디 가서 일을 허다가 허리를 그만 다쳐 가지고는 그 허리가 아파서 또 댕김서 고생하고. 참 이런 묵언 스님이 송담(松潭) 스님입니다.
내가 묵언 스님, 송담 스님이 없다면은 내가 여그 와서 아무리 있으라고 해도 내가 여그 와서 있을 사람은 아니었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지내든지 그래도 정전강(鄭田岡)하면, 한국에 정전강, 다 ‘정전강 스님이 우리를 가르킬만한 도인(道人)이다’ 다 그 마음, 불법(佛法) 신심을 가진 이는 다 그거 있습니다. 여기 학자(學者)들이 다 모였지만 그 생각이 없으면 오들 안 헐 학자여. 여기에 수십 명이 지나갔지마는 전부 전강 스님한테 한철 지내기를 원해 가지고 왔었습니다. 허지마는 다 방부도 못 받고. 내 힘이 뻗질러야제.
큰 대본산, 수천 석을 받는 수백 석을 받는 디도 아 선객(禪客) 한 몇십 명 기르자면은 한량없는 금액이 들어가고, 경제가 모자라서 못허고 헌디, 아 여그다가 뻘건 이런 무슨 저 터 하나, 빈터 하나 남은 디다가서 절을 이만큼 이걸 어떻게 아무때나 하꼬방처럼 건설했어도 건축을 허고, 아 여그서 한 사오십 명씩 지내기도 하고, 한 20여 명 30명 이렇게 지내오기를 한 10년 동안 되았습니다.
그런디 내가 건축을 이만큼 허고 저 솔밭 저짝에다 인자 천 평을 하나 만들아 놓고, 또 그 말 허게 됩니다마는 집도 또 저 아래 한 채 사서 이백이십오 원짜리인가 하나 사놓고, 또 거다가 기밀비로 내가 똑 두고 세상없이도 그건 손도 안 대고 그 두었던 놈 기밀비 백만 원허고 다해서 묶아 가지고 도장허고 딱 해서, 어제 내 생일날인디 어제 내가 다 인계 넹기고 오늘은 법좌(法座)에 올라가서 설법해 달라고 그렇게 해야 올라왔습니다.
허나 ‘지끔 조실 스님 계신 동안에는 내가 법상에 올라올 수 없습니다’ 허고 그래 쌓는 것을, 내가 못헌디 어쩔 것이냐? 이 말이여. ‘내가 설법상에 올라가서 설법허는 것이 아닙니다’ 허니 나만은 노인 대접도 하고 또 법사 스님 대접도 하고 그래 올라간다고 해서 오늘 와서 첫 때 했습니다.
그런디 내가 이 부처님 앉어 계신 사자좌(獅子座)를 아무나 올려놓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는 전강은 어찌 여그 자꾸 이 자리를 올라오느냐?
여그 학자(學者)들이 다 인증합니다. 학자들이 인증 못허면 인준 안 허면 나는 못 올라오는 것이고, 나는 학자들이 인준 없는데 올라와서 설법을 이렇게 헌다면은 죽은 물건입니다. 그거 썩은 물건이여. 학자들이 여지없이 인증을 해주기 땀새 내가 여기에 올라와서 설법을 허고 그동안에도 주욱 설법을 해 나온 것입니다.
왜 학자들이 인증하느냐? 뻘로 인증해 될 것입니까? 나도 과거에 한국 선지식이, 6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계셨는데 그 6대 선지식이 한목 날 인가(印可)를 다 했습니다. ‘옳다. 바로 공안을 바로 본 정영신(鄭永信)이다’고 해주어서 내가 인가 가지고 다 올라와서 여그 와서 했제, 인가 없이 내가 여그 와 했다면 여러분을 속였고 여러분을 속인 것보담도 죽은 놈입니다. 그렇게 못합니다.
허면, 내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올라온 사람이니깐 의심할 것 하나 없으니 차후는 어쩠든지 대중이 송담 스님한테 여기 원장 스님한테 설법 잘 들으시고.
인자 나 죽은 뒤에는 조실노릇을 할 것이요마는 내가 있을 동안까장은 조실이란 말은 안 할 것이요. 그 성격이 죽어도. 내 설법 대신으로, 할 수 없어, ‘전강 스님이 나이 많아서 설법을 할 수 없으니까 부득이 내가 대로 합니다’ 시방 이겝니다. 허니 다 그러신 줄 알고.
아주 살아 나갈 길이란 건 참선밖에 없으니 참말로 살아 나가실라거든 꼭 참례(參禮)해서 설법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인천 주안 용화사 용화선원, 중앙선원입니다. 유명헌 선원이니깐 인자 그리 알으시고 꼭 그렇게 행해주시기를 바랍니다.(15분38초~32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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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설법헐라고 헌 그것을 헐라고 허다가 보니 여까장 나왔군요. 또 설법이 좀 늦어지니깐 자꾸 저 오는 것 봐. 오늘도 모도 이렇게 늦게 동지(冬至) 시간이 9시인디 새벽 한 시까장 오신다 그 말이여. 그 뒤에 시방 자꾸 또 오는구만. 이리 들어앉으십시오. 좀더 들어앉으세요. 인자 법문은 진짜로 나올 것인게.
앗따 어떻게 또 동지날을 지내 갈고 했더니, 설법은 해야 겄는데 어짤고 했더니, 송담 스님 설법이 진짜 설법이 나왔어. 그 그런 설법 내 처음 들었구만. 그 망상 그놈을, 그 ‘참선 안된다’고 헐 때에, 아 그놈 왜 ‘참선 안된다’고 허는 망상을 내서 왜 망상 하나를 더 갖다 붙이느냐고.
아 그거 그 누가 망상 없이 참선허는 사람이 있어? 참선이라면 벌써 화두를 들거드면 망상인데. 망상부텀 앞에 일어나는 것이여. 그러니 일어나는 놈도 그만두고, ‘참선 안된다’고 걱정허는 놈을 더 갖다 붙여놓으니 아 그것 쩔름뱅이가 그만 아주 두 다리 다 못쓰게 되아버리는 것이여. 그 법문 아까 허드라 그 말이여. 그거 요긴헌 말이지.
망상 일어난 것 걱정 말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만 허시면은 그 화두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그 말이여.
물 좀 떠오니라. 나 목이 말라, 내 목이 붙어서 말을 못혀. 얼른 빨리 가져와.
그전 같으면은 이 대중이 들어앉으면은 못 들어앉습니다. 어디 앉어 놓니 시방 반이 남았습니다. 반도 더 남았어, 꽉 찰라면. 그 좁다고 야단을 치시고 모도 법당 좁다고 쌓더니 법당을 이렇게 지어놨으니 인자 보살님네 책임이 많소. 이 법당을 좀 채아줘야제. 똑 혼자만 오고 그러지 말고 한 댓씩 여나뭇씩 포교를 해야 되아. 포교 안 허면 되아? 나만 견성허고 말테여?
내 조는 보살님, 졸고 앉었는 보살님 발견했은게, 또 자오는가 나 볼란다. 왜 그것 집에서 잠자고 오지, 절에 와 잠잘라고 와? 인자 안 자는가, 어쩌는가? 눈이 똑똑허구만.
법문이 하도 안된게, 자지 마시오. 참선법을 그렇게 알고는, 잠자면서 듣키오? 아 잠자면서 들으면 좀 자시오. 자면서 들어. 그 잠자니 좋고 법문 들으니 좋고. 인자 잘 듣지.
요요산적적(寥寥山寂寂)이요 운습좌선의(雲濕坐禪衣)니라
나무~아미타불~
낙화삼척심(落花三尺深)인데 풍요학소영(風搖鶴巢影)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요요산적적(寥寥山寂寂)이다. 고요 고요헌디 산(山)도 적적(寂寂)허구나. 요요산적적(寥寥山寂寂)이다. 내가 나를 찾는디 ‘이뭣고?’ 화두를 떠억 들고 앉었으니, ‘이뭣고?’ 하나가 딱 나와서 알 수가 없으니 요요(寥寥)헌 것 아닌가. 고요허단 말이여. 그런디 또 산(山)도 적적(寂寂)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난 번뇌가 꽉 차 가지고는 그 팥죽 끓듯이 하는디 아 ‘이뭣고?’를 하나 추켜들고 보니 다 없어져 버렸네. 일체 만념이 거그 와서는 어디 생겨 날 곳이 없어. 그래서 요요혀. 요요헌디 또한 이 참선방 공부해 나가는 곳도 적적허다.
운습좌선의(雲濕坐禪衣)로구나. 그 산속에서 이렇게 공부를 허니 구름이 끼었으니깐 습혀. 습기가 많혀. 구름속에는 비 습기가 많어서 좌선하는 옷을 모도 적신다 그 말이여. 옷이 축축혀. 집이나 아니나 어디 집이 있나? 옛날에는 참선헐 때 모도 석굴같은 디 돌 사이다가서 뭣 하나 걸치고 앉어 공부했지.
낙화삼척심(落花三尺深)이다. 꽃은 떨어져서 석 자나 깊다. 모도 핀 꽃이 떨어져서 석 자나 깊어.
풍요학소영(風搖鶴巢影)이로구나. 바람은 불어서 집 지어놓고 산 학(鶴) 집을 흔들거려. 근들근들 흔들혀. 그러헌 도경(圖景), 화두 학자가 모도 이런 도경이여.
무엇을 생각해야? 무슨 망상이 있어? 그까짓 놈의 번뇌 망상에 뭐 끄들려서 그럴 것이 있어? 이까짓 놈의 몸뚱이 가졌다가 곧 내버릴 것인디, 오늘 내버릴런지 내일 내버릴런지 모르는 놈의 몸뚱이 애착 뭣 혀?
쏵! 한번 버려버려라. 버릴라고도 말고 화두만 추켜들어라. 아 인자는 저렇게 방 뜨뜻허니 해놨겄다, 거그 앉어서 헐 것밖에 더 있어? 참선밖에는 더 있어?
우리 부처님은 6년 동안에 깨달라 가지고 전해주어서 오조(五祖) 스님까장 따악 내려왔네. 오조 스님은 전할 디가 있나? 아 그렇게 어려운 거여. 왜 어렵냐? 어려울 것이 없는디 어려워.
안 믿고 안 신(信)허니까 어려워. 믿고만 허기만 허면 되는데, 안 믿기 따문에 어려운 것이여. 믿는다 해도 그만 뭐 들을 때 뿐이제, 그만이여. 여지없이 믿어보란 말이여. 안 되는 법이 있는가.
오조 스님 때까지 오면서 똑 일인전(一人傳)을 해 왔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이렇게 전해 왔는데, 오조 스님 때 와서는 전할 데가 없어. 오조 스님이 어따가 인자 깨달았으니 제자한테 전해줘야 허겠는데, 어디가 있나? 아무리 전할래야 전할 데가 없어. 날마당 근심허고 있는데 하루는 팔십 노인이 걸망을 짊어지고 오더니 “아이고, 제가 오조 큰스님을 찾아오니라고 죽을뻔 했습니다”
“아, 팔십이나 된 사람이 왜 왔는고?”
“견성을 해 가지고 왔습니다”
“견성을 했어. 그러면 일러보소. 자네 깨달은 도리를 일러보소” 깨달은 도리를 이르는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거든. 옳게 깼어. 거 참 옳게 깨기가, 혼자 깨기가 어려운데, 옳게 깨달라 가지고 왔어.
아, 그런 때 당시에도 깨달은 그 인가(印可) 받은 선지식(善知識)은 참 어렵고, 하나 일 인 일 인으로 왔지마는 공부허는 이는 더러 있었을 것 아니요? 젊을 때부텀 해 가지고는 팔십 살만에사 깼어. 그 설찬히 어려운 건 어려운 것인가 봐. 그래 인가를 받어야 허거든. 인가 없으면 소용없으니까.
“인가를 해 주십시오”
“아 이 사람아 나이 팔십이 되았는데, 나는 육십이요 팔십인데, 팔십 살 먹은 사람한테 인가를 해주면 인가해서 법을 전해주면 자네가 인자 6대를 이었는데 6조인디 중생을 몇이나 교화허겄는가? 아 나보담 머냐 죽을 터이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서 몸뚱이를 바꿔 가지고 오소”
그러니까 아 어찌헐 도리가 없지. 그 말 듣고 그 스님 앞에다가서 송(松) 대 하나를 놔 놓고. 그전에 듣는 이는 잘 들었지마는, 못 듣는 이는 또 잘 들으란 말여. 오조 스님 방문 앞에다가서 송 대 하나를 놔 놓고, 솔 쬐끄만헌 걸 하나, 새끼 솔을 심어 놓고 “스님, 그러면 댕겨오겄습니다” 허고 내려갑니다.
동천(洞川)을 내려가는디, 돌아서 내려가니까 다시 부르더니 “내가 자네 이름을 하나 해줌세. 그 내 방 앞에다 송(松) 대를 심었으니 묘허네. 송 대 심은 걸로 해서 이름 하나 지어줄 테니깐 이름을 받아 가지고 가소” 불명(佛名)을. 그래 이름을 재송(栽松)이라 지어주었습니다. ‘간조런헐 재(栽)’ 자, ‘솔 송(松)’ 자. 솔과 간조런허게 몸뚱이 받아 가지고 오소. 그 늙은 몸뚱이 내버리고 새 몸뚱이를 이 솔과 같이 받아 가지고 오소. 그래 지어준 이름입니다.
‘예, 그렇게 허겄습니다’ 허고 재송이라고 이름을 받아 가지고는 그 골짜구니를 내려갑니다. 그 향수내가 진동허고 좋은 계곡인디 한 몇백 키로를 내려가니까, 요새 키로라고 허니께 키로로 한번 말해봅시다. 한 5리나 원 된가, 원 몇백 키로면?
아 또랑가에서 개천가에서 빨래를 댕긴 처녀가 참 인물이 절색(絶色)인디 빨래를 씻고 있어.
그런디 또 그 오조 스님이 부탁을 허기를, 아니 사조(四祖) 스님이 부탁을 허기를 ‘우교즉지(遇橋卽止)하라. 다리를 만나거든 그쳐라’ 그랬거든. 내려오다가 참 그 빨래 씻는 처녀한테를 당도허니까 다리가 있어. 다리가 큼직허니 있어.
아 여가 모도 비었는디 안으로 좀 들어오시면 좀 좋은가. 꽉 찼는디 거그서 모도 모다 이렇게... 허 이것 참.
‘우교즉지(遇橋卽止)하라. 다리를 만나거든 근처라’ 그랬으니, 내가 여그서—저 다리가 있고 처녀가 빨래를 씻그니 그 처녀, ‘아 여그 근치란 말이 여그서 몸뚱이 바꾸라는 말씀이로구나’ 싶어서, 거그 앉어서 그 처녀 보고 “나 댁에 하룻밤만 자고 갑시다”
“내가 어떻게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팔십이나 된 노인이니깐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으면 좋겄으나 부모가 있으니깐 내가 승낙없이 말헐 수 없으니까, “저 집이 우리집이니까 우리집으로 들어가서 말씀을 직접 좀 허시지요”
“아이고, 늙은 것이 한 걸음이 어렵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하룻밤 자고 가겄습니다” 그럼 그렇게 허시라고 승낙을 했거든.
그만 그 자리에서 그대로 걸망 벗어 놓은 채 이런 작대기 하나 짚고, 따악 앉어서 입정(入定)했습니다. 입정은 죽었단 말씀이여. 그대로 그만 죽어 버려.
그러니 팔십이나 된 노장님이 아 처녀를 보더니 ‘하룻밤 자고 간다’고 승낙 받고는 그 돌아가셔 버려. 그것이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입니다. 마음대로 죽는 것이여. 그건 마음대로 해야 허는 것이여.
참선헌다고 다 그와 같이 되면 뭐 뭐 참선헌 이가 다 되게. 허지마는 젊을 때부텀 참선을 해 가지고 팔십 살까장 애를 써서 공부를 허다가 보니 견성(見性)허면서 동시에 정력(定力)이 있어. 인자 보림(保任)을 해서 정력이 있어.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한 놈을 또 생각하고 하도 오래오래 해노니깐 거그서 일체 망상은 없어져 번지고 정력이 있어. 그 화두와 그 그만 한목 그 이사(理事)가 다롸진 것이여.(32분28초~48분5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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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망상도 그만 화두 견성험서 그대로 다 없어져 번지고, 아 그 정력이 그러고 나버려서 마음대로 하거든. 그 처녀 배때기 속에 맘대로 들어가. 죽어서 그만 처녀 배때기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여. 처녀는 시집도 못 가보고 아들만 뱄네. 그래 가지고는 어디 아들이 뭐 오늘 들어갔다고 어디 당장 배가 부른가?
아, 이 처녀는 빨래를 씻다가서는 깜짝 놀래 집에 들어가서 부모한테 말하니까, 그 부모님이 ‘하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 웬일이 그런 일이 있나?’
아, 그 나와 보니까, 참 물가에 좋은 깨갓헌 개천가에서 돌아가셨으니까, 그 뭐 짚단 좀 가지고 와서 묶아서 그 당양지지(當陽之地), 그저 그 과히 험악허지 않은 디를 파 가지고 묻어 주었습니다. 그 도인의 죽음이 뭐 아무 죽든지 말든지 그거 뭐 상관 있어?
그러고 난 뒤인디 한 댓 달 지내니까, 아 처녀 배때기 속에는 아 그속에서 인자 그 노장님이 들어가서 살든가부여. 차츰차츰 7달 되아 8달 된게 아 그만 배가 불러, 이만허니 불러. 어머니가 보니께 결국은 자식이여. 그거 어머니는 애기를 나봤은게 알거든. 옆에 누워서 자는 걸 보면 아주 숨소리가 가빠. 그 애기가 그렇게 한 7~8개월 되면 숨소리가 가뿐갑등만. 헐헐 가빠.
아, 그래 가지고는 차츰 그 잠자는 아이를 깨워 가지고 일받아 가지고 조용헌디 “너 말해라, 네 뱃속이 이상하다. 배가 왜 그리 커졌니? 배는 왜 그리 커졌으며 숨소리는 왜 가쁘니? 말 좀 해봐”
“뭔 말을 내가 해요”
“아 말해봐. 에미를 속이지 말고 말해봐”
“아 내가 무슨 말을 해요”
“네 속에 든 것이 아무래도 어린아다. 애기를 뱄다. 그 애기 뱃으면 그 어찌헐 것이냐? 처녀가”
옛날에는 처녀가 애기 배면은 그만 안 된답디다. 아니 그만 죽여버려. 그런 아주 고약한 일이 났다고 그만 죽여버린 때가 있었어, 옛날에 양반에 집안에. 참 기가 맥혀. 아 이러니 “큰일났다. 어떻게 허겠느냐?”
“나는 애긴지 뭣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알아서 허세요. 나는 모릅니다”
일러줘야제, 안 일러줘. 그 일, 애기 밴 사건을 좀 말해 달라고 해도, 있어야 해주제. 아 물으니, 알 수가 있어야 해주제. 아, 말도 못허고는 자꾸 그러니 애가 터져 죽겄다 그 말이여. 그냥 울어버려. ‘에에’ 허고 울고, 뭔 말만 물으면 울어버려, 말을 못하니까. 안 했다면 곧이 안 듣고.
암만 해야 안되아. 할 수 없어. 아흡 달이나 되았든가, 원 배가 비비허니 배꼽이 그냥 푹 나와버리고, 다 나와 뭐 야단 나버렸어.
샌님을 불렀제. 바깥양반을 불러서 ‘아 이런 사실이 있으니 어찌해야 허겄습니까?’ 허니까, 보더니 눈이 그만 쪼그만헌 눈이 크단해지면서 ‘끙’ 허고 숨을 한번, 황소 숨 소리 한번 쉬더니 담배를 내서 이만헌 놈에다 뻑끔뻑끔 먹더니 툭툭 치더니 “에잇, 그 고약헌 일이로고” 묻고 않고 뭐 뭐.
‘야들아’ 어쩌고 부르더니 그만 몸종들을 불러다가선 ‘당가[擔架]에다 메 가지고 용소(龍沼)에다 갖다 집어넣어라’고. 헐 수 없제, 뭐 다시 뭐.
어서 들어오십시오. 앗따 이렇게 늦게 오신다. 자꾸들 오신데. 내가 그럴 줄 알고 지금, 이 안에 많이많이 늘었습니다. 밖에는 앉지 마세요. 그래, 너는 좀 깔지 말고 저 드려. 그냥 앉어 계십시오, 그냥.
아, 그 샌님이 그냥 갖다가 명령을 허되 죽여버리라고 해버렸어. 그러니 뭐 무도헌 하인들이 그 뭐 별 수 없어. 당가[擔架]에다 메고 가서 용소(龍沼)에다 집어널라 하니까, 그 처녀가 그래도 그 지혜가 있는 처녀인가, 뭐 부잣집 처녀로서 그 모도 패물 금 같은 거 이런 것을 몸띵이 가지고 있다가 ‘내가 이걸 드릴 터니까 나를 용서해 달라’고. ‘내가 그러면 애기를 뱄다고 해서 부모한테 쫓겨나 가지고 이 용소로 들어가니 두 목숨이 죽지 않나. 내 속에 든 것이 나는 애긴지 뭔지도 모르지마는, 할 수 없이 내가 이러헌 죄로 내가 이 용소로 들어가기가 참 억울허니까 그저 좀 용서해 달라’고.
그 처녀가 참 아주 얌전해서, 그 모도 종들을 잘 길러놔서 참 인정은 가득헌디, ‘아 샌님 명령이니 우리가 그냥 여그서 놓아준다면은 우리가 죽을 터이니 어떻게 헐 것이냐?’고. 참 엄중허든 모양이지. 옛날에 모도 종을 넹기고 다 이럴 땐디.
그래 패물을 주면서 ‘날 좀 살려 달라’고. ‘이놈 가지고 두 분이 나놔 쓰고 살려 달라’고 비니까, ‘그러면 우리가 여그서 놓아주면 어떻게 헐 테냐?’ ‘어디든지 내가 멀리, 내가 그만 산 넘고 물 넘어 월남(越南)처럼 먼 디로 갈라니까 날 살려 달라’고 애걸을 해서 그래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라’고. ‘그저 우리는 용소에 넣어버렸다고 헐 텐게 알아서 그만 이 국토에만 있지 말라’고 그만 부탁을 했어.
그만 거그서 놓여서 남복(男服)을 마침 한 벌 준비했든가 이놈을 입고서는, 날은 추워지고 겨울날이 돌아오니까, 그 여자가 지혜가 있어서 남쪽으로만 갑니다. 남행으로만 산정수정해서 불탄산고수활(不憚山高水濶)하고, 그저 물 건네고 산 넘고 해서 남방으로만 얼마만큼 가 가지고는 인자 가서, 인자 이만침 왔으면은 우리 땅 우리 고향도 멀어지고 얻어먹기도 그저 괜찮허고, 몸에 아무것도 다 주어 버렸으니 없고, 총각 맵시를 해 가지고—옛날에는 총각들도 머리 안 깎았으니까 머리 딴 놈을 질끈 동이고는 총각으로 해 가지고는 돌아댕김서 얻어먹습니다.
아 그러다가, 이것 남의 집에서 들어가서 원청 얻어먹어도 미남자니까 다 환영허는데, 집에 들어와 자라고 허지마는 못 자. 남의 집에 들어가 자다가 여그 기어나오면 어쩔 거여? 아 이게 나오면 그 헐 수 없제, 그 혼자. 그러니까 못 자고 밥만 얻어먹고 나와서 넘의 울타리 밑에 자. 그 추운디. 그 어느 부잣집 대문 뒤에 울타리 밑에서 한디서 자다가 그만 밤중에 아 그만 나온 모양이여.
아, 이놈이 나오는디 아 혼자 이거 어떻게 혀? 그러지만 당해 논게 할 수 없지. 아 이놈이 나와 가지고는 어쩔 수 없이 혼자 자수(自手)로 모도 수속을 해 가지고는, 모도 뭐 질렁질렁 붙어 있는 것이 있드랑가. 아 그놈을 모도 어떻게 인자 떼고 어떻게 끊고 해 가지고는 옷에다 둘러싸 가지고는, 옷이나 뭐 속옷 그런 것에 둘러싸 가지고는 끌고 나가니깐 개천에 물소리가 꼴꼴꼴꼴 난다 그 말이여. 그래 물속에다 집어넣어 버렸제.
그러고는 도로, 어떻게 날이 추우니까 할 수 없어, 동지 때니까. 동지로써서 양력설 때 그때 안 춥습니까? 동지 쇠고 나서. 우리도 인자 이렇게 때가 닥쳐 왔구마는.
그래 그 자리에 와서 밤을 새우고, 그 애기를 내던지고와 새우고 새벽에 어찌 됐는가 싶어서 나갔습니다. 나가서 이래 보니깐 구녁이 쪼끄만 뚫어졌는디, 물이 퐁퐁퐁퐁 떨어지는 구녁에 안 얼었어. 고리 집어넣버렸는디, 아 그곳에서 수조(水鳥)가 들어 살아, 물새가. 물에 살다가는 아 이놈들이 깨끗이 몸뚱이를 씻겨 가지고는 영 때가 돼 가지고 아침에 가니까 내놓는단 말이여, 애기를. 이놈이, 막 오리란 놈들이 그런 새가 내놔.
원 세상에 저런 짐승도 아 목숨을 저렇게 살려 가지고 내놓으니 참 기맥혀서 아이고 저건, 얼른 보듬았제. 보듬아 가지고는 그만 싸 가지고는 촌락으로 밖에 들어갈 디가 있어야제. 총각 맵시를 거두아버리고 그만, 어떻게 그저 거지처럼 인자 했은게, 애기를 끌어안고 촌간을 들어가니까 반가와헙니다. 얼마나 반가워헌지 몰라.
그 어린아가 말이여, 보통 어린아 같으면은 그렇게 반가헐 리가 있을런지 모르지마는 도를 많이 닦은 도인(道人)이기 따문에 도인을 보듬고 들어가니까 보는 사람마당 감심(感心)이 동(動)허든 것이여. 아주 고맙게 대접허고. 그래 그만 가서 미역국에다가 밥을 해 주는디 잘 먹고는 그 해복(解腹) 풀이를 허고 며칠 있다가서—자꾸 있으라고 해도 미안스러우니까 오래 있들 못하고 한 일주일 있다가서 그 어린아를 끌어안고 나왔습니다. 또 다른 집에 가면 역시 그려. 그렇게 고맙게 왼통 대접을 기맥혀.
이 아이는 버럭버럭 크더니 그만 ‘엄마’ 소리 허더니, 차츰차츰 그만 아 이놈이 걸기 시작허더니 보면 다 알아. 뭐든지 보면 다 알아. 아, 그 견성을 해 가지고는 태어났으니까 그 그만큼 또 수양력(修養力)이 있으니까.
견성해 가지고는 그렇게 아는 법이 없어. 인자 보림(保任)을 해야 알지. 견성했다고 해 가지고 무슨 뭐 난리날 걸 알고, 무슨 뭐 귀신을 보고 뭐 그러면 그거 견성헌 사람이여? 그거 그 기합술도 아니지.
아, 이거 한 7살이나 먹더니 ‘어머니 갈랍니다’ 간다고 혀. ‘어디로 갈래? 어디 간단 이유가 뭐냐? 왜 가야?’
‘아 어머니한테 내가 하룻밤 자고 간다고 허고 와 가지고 이 몸뚱이를 얻었는데, 7살이나 7년이나 어머니한테 의탁했는데 인자는 가야겄습니다’ 환허니 말을 허면서 ‘갈 길이 바쁘니께 가야겄습니다’
아, 그만 그 어떻게 생겨난 이유도 뭐 알 수 없이 뱃속에 들어와서, 그 인자 거그 낳아서 길러서 아 그만큼 된턴디 갈라고 하니까 기맥히다 그 말이여. 자식 정(情)은 마찬가진 것이여. 그 아무때나 났지마는, 아 이 아버지도 없이 났지마는 그리 키워 놓고 난께 기맥히든 것이여.
도저히 떨어질 수가 없고, 그 민첩헌 법과 7살 먹은 놈이 어떻게 말도 잘허고 얌전허고 예쁘던지 말할 수가 없어. 모자(母子)의 정이 꽉 걸렸단 말이여. 그놈의 애정. ‘너 간다는 이유나 좀 말해라. 어째 갈락 하느냐’ 그러니까 이유를 말허는 것이여.
그런데, 법문을 아무리 헐라고 해도 못허겠어. 시장해서 못허지마는, 난 요새 죽을 똑 한 숟깔썩 먹는디 기운이 없어 못허겄어. 영 못허겄어. 그런게 오늘 동지 팥죽 점안 잘 올리고. 여까장만 들으면 다 됐지, 뭐 더 헐 것 없고. 배가 고파서 도저히 못허겄어.
그래 인자는 법문이, 내가 헐 때가 아니예요. 넘어간 해 거 다시 뭐, 넘어간 핸디 뭐 거 다시 소용 없고, 꼭 송담 스님한테 법문 들어주시기를 믿습니다.
아무리 헐라고 해도 법문이 안 되어서 못허겄습니다. 여까지만 허고 마치야겄어. 나는 과거에 많이 늘 해드렸으니깐, 다 그때 그 법문, 또 허면 또 그 법문이 그 법문이니까.(48분54초~1시간4분11초)(끝)
[법문 내용]
<전강선사 법문>
전강선사의 송담스님 소개. ‘송담스님은 아주 젊을 때 도 닦을 때 묵언을 해 가지고는 10년 만에 대오(大悟)를 헌 이여’, ‘이 설법 좌(座)를 송담스님한테로 넘긴다’
<송담스님 법문>
전강선사 명(命)으로 송담스님이 하신 법문. 번뇌망상이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전강선사 법문>
보는 놈, 듣는 놈, 이 물건 하나 아는 것이 그게 참선법(參禪法) / 삼계화택(三界火宅)에 윤회(輪廻)허지 말고 어서 네가 너 깨달라서 해탈(解脫)해라 /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송담스님이 묵언하며 참선하기 10년째, 전강선사의 물음에 아침 식전까지 깜깜하니 있다가 밥 먹고 나더니 터크덕 일렀다. “내(전강선사)가 묵언수좌를 내가 10년을 데리고 이 일을, 차사(此事)를 마치도록 했습니다“
(게송)요요산적적~ / 재송도인(栽松道人) 이야기. 중국 선종(禪宗)의 제4조 도신대사(道信大師 580~651)의 제자인 5조 홍인대사(弘忍大師 602~675)의 별명이 재송도인(栽松道人)이다.
〇 ‘어떠헌 사람이 능히 법을 설헐 수가 있느냐?’ 하면은, 한 말도 설하지 아니하되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한구석에도 들리지 아니한 곳이 없을 만큼 또 단 일분일초 동안이라도 그 설법이 근친 바가 없이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꽉 차는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허면 입을 열지 아니허되 그 설법이 끊이지 않고 대사자후를 헐 수 있는 사람, 다시 종일 일평생토록 법을 설허되 한 말도 설헌 바가 없는 사람, 능히 이러헌 사람만이 감히 법을 설헌다고 이 자리에 올라올 수가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〇 무엇 때문에 큰스님네 법문을 듣고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시느냐?
우리가 먹고 입고 배불리 먹고 편허게 잠자는 것으로써만이 우리의 인생이 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다시 불행으로 뒤바꿔질 우려성이 다분히 있는 위험한 생활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려고 이 불법(佛法)을 찾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〇 어떠한 지나간 일이 되었건, 현실에 닥쳐 있는 일이 되었건 또는 미래에 자기 앞에 돌아올 어떤 사건에 관한 일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난다 할 때에 그 일어나는 그 마음에 즉(卽)해서, 바로 그 마음으로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그 화두(話頭)를 터억 들으신다고 허면은 일어나는 그 번뇌 망상이 우리의 깨달음을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그러헌 상대가 아니라, 깨달을 수 있는 화두를 거각(擧却)할 수 있도록 채찍질해 주는 훌륭한 법문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헐 때에 번뇌가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화두를 들게 되는 것이고, 만 번 일어나면 만 번 화두를 들어서, 들고 또 들면 그것이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일념만년(一念萬年) 이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그렇게 여법(如法)히 공부해 나간다면은 어찌 깨닫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볼 때에 번뇌가 많이 일어나는 사람일수록 화두를 더 잘헐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〇 천하에 쉬운 것은, 천하에 참선보담 더 쉬운 법이 있다면 말을 해 봐. 참선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선, 내가 나 깨달은, 그 뭐여, 손을 뒤집었다 이랬다 허고, 그만큼 가깝다고 할 수가 있나? 그것도 멀제. 틈도 없어, 틈도. 나를 깨달을 그 깨달른 동안이, 어느 때 깨달을런지 또 시간도 없어. 안 해서 못하고, 믿지 안 해서 안 하고, 믿지 안 해서 못허고 이렇지, 못한 법이 없어. 이렇게 쉬운 참선법, 생사(生死) 없는 법을 왜 그렇게 듣고도 못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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