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26~250)2023. 3. 16. 14:49

(No.236)—1984년 춘계 산철 해제 법회(81.04.30) (40분)

 

약 40분.


무위진인(無位眞人)이 몰형단(沒形段)헌데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몰형단(沒形段)이여. 위(位)가 없는 참사람, 위(位)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우리가 보는 사람은 다 육체가 있고, 눈 · 코 · 귀가 있고 손발이 다 있어서 이런 형단(形段)이 있는데, 위(位)가 없는, 지위(地位) 위(位)가 없는 참사람은 형단이 없어. 형단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어.

형단(形段)이 없건마는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다. 항상 면문(面門) 가운데—이 낯, 얼굴, 낯반대기, 이 얼굴, 면문 가운데로 항시 들어갔다 나왔다 출입을 한다 그 말이여. 면문(面門), 눈 · 코 · 입 · 귀를 통해서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해.

약능일념회기료(若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 마치면—그 들어갔다 나왔다 항상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거든.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면문중(面門中)을 통해서 들랑달랑하는데 한 생각 탁! 돌이켜 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이라. 번갯불이나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으리라.
번갯불을 무슨 수로 밟으며, 흐르는 물소리를 어떻게 탁! 밟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런데 항상 우리 면문을 통해서 들락날락하는 바로 그놈을 한 생각 돌이켜 요달(了達)해 버리면은 바로 번갯불, 번쩍 하는 번갯불도 탁! 밟을 수가 있고, 흐르는 물소리도 탁!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갑자년 봄철 산(散)철, 두 달 동안 산철 결제(結制)를 했는데, 그 산철 결제의 해제(解制)날입니다.
본래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이렇게 여름과 겨울만을 90일씩 이렇게 안거(安居)를 해 왔었는데, 중국에서부터 저 인도에서부터.

인도에서는 우기(雨期)라고 해서 그 장마가 계속되는 때에 모다 숲속에나 산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으니까, 모다 임금님이나 또는 장자(長者)나 또 신심 있는 신도가 지어 드린 그 기원정사(祇園精舍)라든지 죽림정사(竹林精舍)라든지 그런 정사에서 부처님을 비롯해서 여러 부처님 제자들이 이렇게 모여서 그렇게 그 장마철을 지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안거(安居)라 하는 것인데.
중국에는 인도와 또 달라서 여름 더웁고 비 올 때 뿐만이 아니라,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겨울에도 산중에서 숲속에서 그런 데서 공부를 할 수가 없고 왕래하기도 어렵고 그러니까 겨울에도 석 달 동안을 안거, 결제(結制)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역시 마찬가지로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이렇게 결제를 해 가지고, 석 달씩 이렇게 안거를 하고 또 해제를 했습니다마는, 근자에 와서는 정월 보름에 겨울 해제(解制)를 하고 4월 15일까지 산철 동안이 석 달인데, 그 산철 동안 석 달 동안을 걸망을 지고 동(東)으로 갔다 서(西)로 갔다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친견을 하고, 또 이 도반(道伴)도 찾어가서 서로 도담(道談)도 하고 대단히 그 뜻깊은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석 달 동안을 짊어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다 보니 산만해서, 마땅히 그 걸망을 석 달 동안을 부려 놓고 여법(如法)하게 정진하기가 어려워서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 용화선원에서는 산철에도 잠깐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잠깐 가서 일을 보고 들어와서, 산철 동안에도 계속해서 정진을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
수년 전부터서는 산철에도—그때는 인자 산철 결제(結制)라 한 것도 없었고, 또 산철 뭐 해제(解制)라 한 것도 없이 그저 그냥 계속해서 정진만 하시도록 그렇게 해 오다가—기왕이면 산철도 결제를 하고, 산철도 해제 법요식(法要式)을 가져서 좀 더 법도(法度) 있게 그렇게 좀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이 있어서, 수년 전부터서 이 산철, 2월 초하루에 결제 법요식을 갖고 이렇게 또 3월 말일 날 이렇게 또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다 '어떻게 하면은 좀 더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빨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요달(了達)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러한 신심(信心)의 발로(發露)로써 이렇게 되어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라 하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일대사를 우리가 해결을 하느냐 하면, 큰 말 앞에 탁! 부딪쳐.
우리가 말이 있는데, 말 앞에 갑자기 말 앞에 갖다가, 탁! 달려오는 말에 내가 부딪쳤을 때 그 광경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 말이여.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는가?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그 찰나간에 무슨 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또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듯 하라. 촛불이나 전깃불을 켜 놓고 그 밝은 데에서 바늘에 실을 뀐다면 뭐 천천히 이렇게 뀔 수가 있겠지만, 번갯불이 번쩍 한 그 찰나를 이용해서 바늘귀를 뀔 때 그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해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애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사량분별(思量分別) 계교(計較) 이러한 것이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존(世尊)께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영산회상에 백만억 대중이 운집(雲集)을 해서 부처님 설법을 들을려고 떠억 운집해 있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어.
그 부처님의, 그 부처님 세존의 거룩하신 세존을 찬양하기 위해서 찬탄하기 위해서 하늘에 제석천왕이 꽃비를 내루왔는데, 그 꽃 한 송이를 부처님이 떠억 들어서 대중 앞에 보이셨어. 백만억 대중이 보고 있는데 아무도 그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시는 뜻을 아지를 못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한 분이 비긋이 미소를 했습니다.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일상, 행주좌와 어묵동정을 통해서 드나드는 형단(形段)이 없는 그놈을 바로 보는 일이 지극히 가깝고 쉬웁다고 하지마는, 참으로 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백만억 대중이 모인 가운데에 오직 가섭(迦葉) 한 사람이 이것을 승당(昇堂)을 했다. 이것을 깨달랐다' 이렇게 볼 때에 이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고, 그렇게 수월하고, 그런 작은 일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지 않는 일을 우리 말세 중생,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 중생(衆生)으로서 그 참선(參禪)을 한다고 해서 그걸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그런 짓을, 그런 어려운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가고, 무슨 옴마니반메훔을 불러서 부자가 되고 잘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법문(法門)의 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일이 그렇게 적은 일이 아니요, 간단한 일이 아니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우니까 하지 말라. 미리서부터 일찌감치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목숨 바쳐서 해야만 된다'고 이렇게 말을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그러한 것을, 평소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한 모든 그 법문이나 이론 철학적인 것 다 속에다 꽈악 담어 놓고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의 밑천을 삼고 살림살이를 삼어 가지고 그걸 가지고 참선을 한다면, 그 참선은 도저히 옳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거든.

마치 병에, 옛날에 참기름도 담고 들기름도 담고 간장도 담고 한 그러한 병이 있는데, 그 병의 바닥에 찌께기가 남아 있고 병 속 몸뚱이 면에 그러한 아무리 좋은 기름을 담아서 기름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거기에다가 다른 음식을 담을 때에는 그 다른 아무리 좋고 좋은 음식을 담아도 먼저 담았던 기름 냄새나 간장 냄새가 완전히 가시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뒤에 담은 음식은 결국은 변질이 되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금방 부패하고 말 것입니다.

경전에 있는 말씀이 한 말씀이라도 나쁜 말씀일 수가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있는 말씀이 한 귀절이라도 그것이 나쁜 귀절일 수는 없어.
그러나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러한 조사어록이나, 기언묘구(奇言妙句)나, 경전에 있는 좋은 부처님의 말씀 같은 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고대로 남아 있어 가지고 그것에서 계속 그것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하면, 마치 병 안에 참기름 냄새나 들기름 찌깽이 같은 것이 눌어붙어 있고, 또 간장 같은 것을 담아서 간장 냄새가 나는 거기에다가 아무리 좋은 깨끗한 물이나 또는 술을 담는다고 할 때에 그 물과 술은 금방 변질(變質)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參禪)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거—불문(佛門)에 귀의해 가지고 참 많은 선지식(善知識)도 친견하고, 또 많은 법문도 듣고, 또 많은 경전도 읽고 해서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잘 알고, 죽죽죽죽죽 다 외우고 쓰고, 뭐 말을 하라고 하면 법사 스님 이상으로 말을, 불교에 대한 말을 잘하고 교리에 대해서 말을 잘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꼭 참선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냐 하면, 그러한 찌께기가 남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선을 해도 안 돼.

화두(話頭)만 들면 그 경전에 있는 말씀이 생각이 나고, 조사어록에 있는 말이 생각이 나고, 어떤 공안(公案)을 갖다가 물으면은 그 자기가 보고 듣고 하는 그 살림을 갖다가 그 살림으로 그 공안을 따져서 분별을 하고 대답을 하고, 이렇게 하는 한은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참선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깨달음을, 바른 깨달음을 얻지를 못할 것입니다.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정진(精進)을 해 가되, 밥을 먹어도 밥 먹으면서 그 생각, 옷을 입으면서도 오직 그 생각, 걸어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세수를 할 때에도 오직 그 생각, 차를 탈 때에도 오직 그 생각.
그래 가지고 마침내 밥을 먹으면서도 밥맛을 모르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을 모르고, 걸어가면서도 걸어가는 줄 모르고, 일을 하면서도 일하는 줄을 모르고,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봐도 물이 보이지 아니할 지경으로 그렇게 간절히 알뜰히 오직 화두에 의단(疑團) 하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정진을 잡드려 가면,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 · 상식 · 이론 · 교리적인 것 · 철학적인 것, 모다 그런 것을 동원해 가지고 공안을 이리저리 분별해서 따지고 그래 가지고는 '아! 이것이다' 하고 어떤 결론을 하나 얻고, 그다음에 또 다른 공안을 하나를 또 추켜들고 해 가지고, 한 3일이나 내지 일주일 동안 그 이리저리 수수께끼 풀듯이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져서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따져서 알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것을 ’참선‘이라 해 가지고 그런 식으로 참선을 하면, 이런 따위를 갖다가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건데, 이런 사구선이라는 것은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는 거여. 천칠백 공안을 그런 식으로 해서 낱낱이 따져서 알아맞춰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거여.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어야 하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마음 길이 끊어져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고, 조사관을 타파해야 그 참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을 뚫을라면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지, 마음 길이 끊어지지 않고서는 세상없이도 조사관을 뚫을 수가 없고, 조사관을 뚫지 않고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산철 해제에 전강 조실 스님 법문도 활구선에 대한 말씀, 또 산승(山僧)의 말도 이 활구선에 관한 심심(甚深)한 당부를 해 드렸는데, 우리가 보다 더 수행해 나가는 데에 법도(法度)를 세워서 좀 더 알뜰히 공부하자고 결제와 해제를 이렇게 가진 것뿐이지, 해제했다고 해서 우리 공부하는 마음이 조끔도 해이해져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일주일이 지내면 초파일이 돌아오고, 또다시 일주일이 지내면 음력 4월 15일 갑자년 하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그때까지 보름 동안 계속해서 좀 더 알뜰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다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니라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得之在心)이요 응재수(應在手)라. 마음에 얻어.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하게 돼.
제절로 손으로 잡으나 놓으나, 글씨를 쓰나, 밥을 먹으나—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손으로 무슨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몸으로 뭣을 일을 하나, 전부가 그게 다 업(業)을 짓는 것이요, 생사윤회를 하는 것인데, 마음에 탁! 근원을 얻어버리면 손으로 잡으나 일을 하나 발로 걸어 다니나, 앉고 서고 누우나 그 다 딴 일이 아닌 거여.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여. 눈 내린 밤에 달이 비추고, 봄바람 부는 데에 꽃이 피는 것이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변함이 없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요, 아침마다 닭은 오경(五更)을 향해서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봄이 오면 들과 산에 곳곳에 울긋불긋 꽃이 피는 것이다. (처음~39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안거(安居)의 유래. 동안거, 하안거 / 산(散)철 결제를 하는 이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 법문(法門)은 오직 중생들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기 위해 남기신 것 / 일대사(一大事)라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 / 달려오는 말에 부딪쳤을 때처럼,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 틈에 바늘귀를 뀌는 것처럼 딴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정진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

(게송)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 / (게송)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남겨 놓으신 법문(法門)이 우리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화택(三界火宅)을 초월을 해서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남기신 것이지, 그것 아니고는 다른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고 생사고해에서 벗어나는 이 일,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삼세제불도 출현(出現)을 하셨고, 역대조사도 출현을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산철 결제와 안거와 해제 법요식을 갖는 것도 또한 오직 이 이 일대사를 위해서 거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일대사(一大事)라고 하는 것은 '한 큰 일이다' 거든. '한 일(一)' 자, '큰 대(大)' 자, '일 사(事)' 자, 일대사(一大事)인데, 일대사라고 하는 것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뜻이거든.
이 세상에 일이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있지마는, 그 많은 일 가운데에 가장 크고 중대한 일이다. 그래서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일을 갖다가 일대사(一大事)라 그렇게 불러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는데, 활구참선, 활구참선이라 하는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과 계교(計較) 복탁(卜度), 우리의 중생의 마음으로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지고 분별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아니한 거,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뭣고?’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이 오직 화두만을,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분별로 이리 따지고 저리 따져서 그럴싸한 어떠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사량분별이요 번뇌망상이요, 오히려 그것이 더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하게 만드는 것이고, 나아가서는 그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이고, 그 생사심이 치성해진 그 자체가 벌써 생사고해(生死苦海) 속에 들어가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공부를 참으로 실다웁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특별한 생각을 가져야 되아.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우리와 똑같은 범부(凡夫)였었는데, 특달(特達)한 뜻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수행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를 요달을 했는데, 나라고 해서 왜 못할 것인가? 나도 목숨 바쳐서 한다면 왜 못할 것인가? 나에게도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고 진여(眞如)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안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지, 목숨 바쳐서 해도 안 될 리는 없다' 이리 생각을 하고.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것 밖에는 할 것이 무엇인가? 재산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명예와 권리도 영원한 것이 아니요, 오직 이 생사 문제 해결하는 이 일만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고, 내가 기어코 해야만 할 일'이라고 하는 그러한 투철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되,
그동안에 보고 듣고 읽고 안 부처님에 말씀이나 경전에 있는 또는 어록(語錄)에서, 여그서 저그서 법문을 통해서 듣고 그런 모든 알음알이를—교리적인 것이 되었건, 선리(禪理)에 관한 것이 되었건, 어떠한 철학이나 종교에 관한 어떠한 그 이론이라도, 또한 기언묘구(奇言妙句) · 선법(禪法) · 불법(佛法)을 할 거 없이 쏴악 다 그것을 놔 버려야 해.

손에 쥔 한 묶음의 실을 갖다가, 잘 든 칼로 쏵! 한 번 쳐서 그 수백 가닥 실이 단번에 쏵 잘라지듯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생각으로 알고 한 모든 알음알이를 그렇게 다 끊어버린 다음에 다시는 그것을 이어 대지를 말어라.

그래 가지고 마치 우리의 마음 경계가 갓난애기와 같이 되어. 갓난애기와 같이 그렇게 순진무구한 마음 상태로 돌아가서 ‘이뭣고?’ 하라고 하면,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이뭣고?’
깨달을려고 하는 생각도 내지 말고, 고해(苦海)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도 말고, 잘한가 못한가 하는 그런 생각도 말고, '이렇게 참선을 해 가지고, 옳게 한 것인가 그르게 한 것인가' 그런 생각도 말고, 다못 ‘이 뭣고?~~~’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아침에 눈을 딱 뜰 때 화두를 한번 들은 것이 아침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에도 고대로 있고, 그렇게 그런 상태가 이르르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어떠한 찰나에 통 밑구녘 빠지듯이 탁! 그 의단(疑團)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화두를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골똘히 참구(參究)를 해서 그 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 일시에 다 터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활구선(活句禪)이라 하는 것이여.

이 일대사(一大事)라 하는 것은 결코 초초(草草)한 일이 아니여. 그렇게 쉽게 간단한 일이 아니나, 마음 길이 끊어져서 조사관을 타파(打破)만 한다면 본래 거기에 있는 것이지—마치 다리 부러진 자라가, 항아리 속에 담어 논 자라가, 항아리 속에 한 번 넣어 놓으면은 다시는 나오지 못하듯이, 원래 거기 항아리 속에 손 넣으면 자라는 거기에 들어 있는 것이 딴 데로 그놈이 갈 리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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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01~125)2022. 11. 13. 04:17

 

 

((No.114))—1980년(경신년) 입춘법회(음 1979.12.19/양 1980.02.05)(78분)

 

(1) 약 40분.

 

(2) 약 39분.


(1)------------------

오늘은 경신년(庚申年)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기미년(己未年) 12월 19일이지마는, 새해 경신년이—절후(節候)로써는 오늘이 입춘(入春)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경신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경신년, 달력으로는 경신년 정월 초하루부터 경신년이라고 하지마는 절후(節候)로는 오늘부터 경신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이 되어야만 정식으로 새해로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일에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잘못이 있었는가? 그것을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그래 가지고 ‘새해부터서는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이신 분들 가운데에는 경신년에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에 든 분은 '삼재(三災)가 들었다' 해 가지고 입춘에 동참불공(同參佛供)을 하면은 그 삼재를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로 참여하신 분도 적지 아니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것도 또한 좋습니다. 삼재를 소멸하기 위해서 오셨건, 백 가지 재앙을 소멸하시기 위해서 오셨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삼재(三災)는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가 새해 경신년(庚申年)에 들삼재고, 그렇다 해서 이 대단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모다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경험을 통해서 보면은 삼재가 들면 내년부터서 내후년, 저멩년까지 3년 동안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해서 3년을 갖다가 범띠 · 말띠 · 개띠는 삼재가 듭니다마는, 삼재 때 가만히 증험을 해보면 정말 걱정할 만큼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병을 앓는다든지, 무슨 관재구설(官災口舌)이 있다던지, 무슨 사고를 당한다던지, 그 재수가 없다든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근심 걱정거리가 있어왔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삼재가 안 들은 사람은 그러면 전혀 그런 일이 없냐?’ 하면은 그렇지도 않건마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당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생각드는 것도 우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있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어져 있는 그런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가 든 사람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더욱 조심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혹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가볍게 피해를 입지 않고 잘 넘길 수가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이리 생각하고 노력을 하는 것은 그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三災)를, 어째서 그 삼재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인(寅) · 오(午) · 술(戌) 생은 경신년부터서 3년간 삼재가 드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 동양의 음양학설, 내나 사주(四柱)도 음양학설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져서 삼재가 든다.
지금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 있어서는 이 음양오행을 수천 년 전부터서 그것이 아주 생활 속에 젖어 들어서 사주나 관상(觀相)이나 모든 점(占)이라든지 그런 것이 전부 음양오행으로 추리해서 그래 가지고 운명을 판단하는 그러한 방법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은 ‘그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지, 무슨 그 사주가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러냐?’ 하고 그런 것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그렇게 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정말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음으로 해서 삼재가 되었건 오재가 되었건 그런 것을 문제하지 아니하고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다못 이 정법 하나 믿는 그 마음으로만 온전히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의 생활 습관상 또 그런 것이 너무너무 오랫동안 조상 때부터서 그러한 음양오행설이 아주 사무쳐 들어와 있어 가지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이면은 한국에 방방곡곡의 모든 사찰에는 그 입춘을 기해서 동참 기도와 불공을 드리고 그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빌고, 소원성취를 빌고 그럽니다.

그런데 모든 재앙은 사실 과거(過去)에 우리가 어떻게 지었느냐? 그리고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금으로부터 1초 전이 전부가 과거에 들어갑니다마는, 그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러한 팔자가, 운명이 전개되는가?’를 그 원인을 모르고서, 당장 그것을 없이 하기만을 바래고, 그걸 없이 하기 위해서 점(占)을 친다던지, 갖은 푸닥거리를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주고 무당한테 그 부적 같은 것을 사 가지고 몸에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소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것이 소멸 당하지 않기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엮던 그 새끼토막 같은 것을 몸에다 두르고 다니면서, 몸에서 비린내 안 나기를 소원해 봤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첫째, 몸에 비린내가 안 나게 할려면 생선을 묶었던 그 새끼를 몸으로부터 풀어서 버리고 그리고 몸을 깨끗이 닦음으로 해서 비린내는 내 몸에서부터서 안 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마음속에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고 승화(昇華)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앞날에 좋은 팔자와 운로(運路)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업장을 소멸하는 법이 십선법(十善法)을 닦는다던지 또는 사성제(四聖諦)법을 닦는다던지 12인연법 · 육바라밀(六波羅蜜)법 · 염불(念佛) · 독경(讀經) · 기도, 얼마든지 우리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그러한 묘한 법이 있습니다.
어느 법(法)이고 하나도 버릴 법이 없고, 어느 법이고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닦는다고 하면은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法)을 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 어느 법이 그 가운데 좋고 나쁘고 해야 그것을 하지, 다 좋은 법인데 어떻게 어느 법만을 추려서 하고 어느 법은 안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두 번 해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기대할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방법을 좀 해보고, 그걸 좀 얼마 동안 해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법을 좀 해보고, 이렇게 해서 많은 세월 동안을 그런 식으로 갈팡질팡을 하면서 혹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낙담(落膽)을 하고 비관(悲觀)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이 적지 아니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부적(符籍)도 드리지도 않고, 언제나 다른 법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일러드리는 말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法)이 모든 행(行)을 다 포섭(包攝)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 데에는 익숙합니다. 물질적인 것이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서 여태까지 무량겁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나로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語弊)를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한다’ ‘재앙을 소멸을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바로 알아야만 그 업장을 소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굿을 하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부적을 몸에 많이 지니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봤자, 우리의 업장(業障)이 그러한 방법으로써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우선한 것 같이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시일이 지나면 다시 또 일어나고, 또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또 푸닥거리를 하면 조금 우선함을 느끼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점점점점 깊이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삿된 믿음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집안에 재앙이 끊일 날이 없고 잡귀가 득실거리고, 그래 가지고 정신까지도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삿된 소견에 빠져 가지고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도 무서운 협박과 엄포 때문에 겁이 나서 발을 빼지를 못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을 바르게 다스려서 영원히 그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기타 수분이라든지 그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드러나다시피 하는 상태에서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 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근본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엽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든지, 부부간에 문제라든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의 문제라든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든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業)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 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그리고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 하면은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 뿐 그 실상(實相),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을 가지고 그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단 일분일초도 떠날 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취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1년 2년 3년 10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法床)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 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 하면은 그만큼 한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텐데 석 달씩,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집안을 갖다가 떠나서 선방에 가서 석 달씩 그렇게 공부를 하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아무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그다음 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 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네들도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할려고 하시고 그럴 텐데, 만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 달 내 자고 싶은 잠도 다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녹음 끊김)...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여기에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 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를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루인데, 우주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 다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자루는 차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이 세 가지 종류에 업으로써 지은, 수확한 종자(種子)를 그 속에 탁 가뜩 담어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種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 나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종자가 그때그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이 있는데, (첫째)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대성현이시고, 신통(神通)이 구족(具足)하신 그러한 대성현이시지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 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다 싹이 터서 다 발아(發芽)를 해 가지고 다 나가버리면 언젠가는 그 종자(種子)가 동이 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 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갖다가 또 저장하게 됩니다. 업장(業藏) 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 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현행—'나타날 현(現)' 자, '행할 행(行)' 자. 종자가 밖에 어떠한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現行)을 합니다. 싹이 터 나옵니다.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 있는 어떠한 종자를 갖다가 훈(薰)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갖다가 이 또 찜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싹이 터 나오면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우리의 업의 종자가 한없이 터져 나오고 한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러한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福)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하면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罪)를 지은 바가 많으면 또 지옥에 가기도 하고. 육도윤회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갖다가 다 없앨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처음~39분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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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빨간 꽃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나,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한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한 일에 우리의 상념(想念)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갖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한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었을 때, 그때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 나갈 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새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짖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뭣고?' '이뭣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그 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心思)가 사나와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거기에까지 신경질을 부리게까지 됩니다. 참선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45분1초)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녹음 끊김, 4초 묵음. 중복)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살고, 1년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사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석 달을 해봤자 아들딸 · 손자 · 영감님께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가고 하루하루를 다져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다져 나가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또는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이 개선되어 가고 개조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오직 깨달음을 향해서 목적을 하고 닦아가는 것이지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빨리 얻어지는 효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나쁜 성격이 원만해지고, 옹졸했던 성격이 관대해지고, 이러한 것이 참선의 목적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구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러한 인간에 있어서 존경받을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이 개선되어 간다면 그것도 또한 대단히 소중한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옹졸한 성격, 비열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얼마를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을 만들고,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러한 일이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시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동생으로서, 형으로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 '이뭣고?'로써 생각을 돌려나가는 길을 행하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로 해서 두 번째 생각 세 번째 생각으로 계속 올바르지 못한 중생심을 갖다가 방자히 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까지 언짢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부적(符籍)을 사러 가실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면 부적을 몇 장을 사서 가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이 공부를 철저히 하면 그러한 부적을 한 장도 갖지 않더라도 모든 재앙은 소멸이 되고, 있는 재앙을 소멸하는데 끄친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이 속에서 나오는지 밖에서 다가오는지 그걸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먼 데서 가까이에서 만났을 때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되었건, 정신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러한 조건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보다 더 행복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한 번 함으로써 재앙을 뒤집어서 복(福)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 업식(業識)을 돌려서 보리심(菩提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1원 1원이 모여 가지고 백 원이 되고, 1원 1원이 많이 모이면 천 원도 되고 백만 원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가지고 무량겁이 되고, 1초 1초가 모여 가지고 한 달 · 1년 · 백 년 ·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잔돈을 애낀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 원짜리 백 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고 막 풀풀풀풀 막 함부로 합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큰돈은 갖다가 유용하게 몇천 만원씩 탁! 참 희사(喜捨)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쓰면서 10원 20원 굉장히 피 나오게 애끼는 것을 나는 봤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걸어가건, 댁에 돌아가셔서 방을 닦건, 밥을 지으시건 빨래를 하건, 앉었건 누었건, 이야기를 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남편이 속상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이뭣고?'
자식이 불효한 짓을 해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생활을 지어나가라 이것입니다.

근본이 다 '이뭣고?'로써 중심이 딱! 잡힌 가운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발로 걸어가고, 이렇게 된 사람은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와 같아서 그 나무는 싱싱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지 아니하고 밤낮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자기 딴은 가정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도록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뭣고?'를 아니한 사람은 뿌리는 방치해 버리고, 그 가지에 이파리에 벌레를 떼어주고 소독을 치고 물을 뿌리고 온갖 노력을 다 해봤자, 뿌리가 드러나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착한 일도 안 하고 그래도 괜찮으냐?'
그게 아닙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참선을 함으로써 우리 근본 마음을 바로잡고 바로 닦아 나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안에 가면 집안에서 부모에게 할 일, 남편에게 할 일, 자녀들에게 할 일, 해야 할 살림, 자기 자신을 위한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에 왔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이 서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죽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 헛일만 하게 되고, 죽도록 애써서 한다는 것이 속상할 일만 하게 되고, 후회할 일만 하게 되고, 한탄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업(業)의 원인을 해결을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은 내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 원인을 잘 다스려 놓으면, 영락없이 재앙으로 나한테 다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나에 가까이에 오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미묘한 그 법을 스스로 느끼고 정법의 고마움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58분23초)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그 형제는 대단히 합심을 해서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한마을에 사는 아주 가문이 좋은 부자집 따님이요 아주 인물이 좋은 규수(閨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혼을 해 놓고 장사일로 해서 수백 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떠났습니다. 가 가지고 그 사업 관계로 해서 여러 해를 고향으로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통신이 있어서 편지도 할 수가 있고 전화도 할 수가 있었지만, 삼천년 전에는 그러한 통신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사업에 몰두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규수 댁(宅)에서는 아! 신랑이 먼 데로 가 가지고 소식이 없으니 딸은 자꾸 나이만 먹고 너무너무 기다리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규수의 부모는 '차라리 그 형이 소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다가 사위로 맞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냈습니다. '동생이 인물도 더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 차라리 그 동생을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동생한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동생이 말하기를 "그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멀리 가셨다가 지금 사업상으로 못 오시는데 어떻게 제가 형수 될 분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당치않합니다. 지금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아주 딱 끊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참! 그 동생이 하는 말 들어보니 또 말은 옳은 말이다 그 말이여.(61분13초)

그래서 또 며칠을 두고 연구를 한 결과, 어떤 그 장사하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돈을 주어서 '그 형이 거기서 그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실패가 되어 가지고 병이 나서 죽었다' ... (녹음 끊김. 8초간 묵음) ...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그 규수의 부모가 동생을 찾아가서 "아! 인자 당신 형이 병들어서 죽었으니 인제는 내 사위가 되어줘도 되지 않겠느냐?" 찝찝하니 생각하고 응하지를 않다가 몇 달이 지내갔습니다.
계속해서 사위를 삼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간곡히 교제를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동생이 형수 될 그 규수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포태(胞胎)를 했습니다. 포태를 했는데 갑자기 그 형이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 참 큰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파를 시켜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 가지고 그 포태된 애기를 갖다가 유산을 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있는데 그 형이 과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맨 처음에 그 아내가 될 규수를 찾았는데, 벌써 그때는 형이 근처에 와서 ‘그 규수가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당장 그 동생과 그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갖다가 한칼로 요절을 내서 죽일라고 칼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그런 소문을 듣고 동생은 이웃나라로 피해 갔습니다.

피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무슨 형수 될 규수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참 형님하고 약혼만 해놓고 결혼도 못하고 병이 나서 죽게 된 규수가 딱하고, 동생으로서의 그 형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에서 그 규수하고 결혼을 한 것이, 아! 이렇게 형님이 살아오고 보니 참 변명할 길도 없고 무슨 사과할 수도 없고, 죽인다고 칼을 가지고 찾으러 다니니 그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웃나라로 피신을 우선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되었는데, 그래 가지고 이 스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을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계속해서 그 동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 이웃나라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느 산에서 도(道)를 닦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활을 잘 쏘는 포수를 갖다가 매수(買收)를 해 가지고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갖다가 더군다나 출가한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서 그 포수로 하여금 그 동생을 죽이면 후한 상을 준다고 이렇게 해 가지고, 그 포수하고 둘이 가 가지고 '포수는 저만큼 숨어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는 동생한테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인간적으로 대단히 딱한 그런 상황이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스님이라 자기의 죄를 억지로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또 웬수로 상대해 가지고 형을 갖다가 상대하지도 않고 순수한 평범한 마음으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아주 그 속의 마음을 감추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난 처음에는 너를 원망을 했지만 너를 사실은 만나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등등 하고 있을 때 약속을 했던 그 포수가 그 동생을 겨냥해 가지고 활을 쐈습니다.
아! 그 활 잘 쏘는 사람이 활을 쐈는데 그 활이 빗나가 가지고 형 모가지에 맞어 가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그 동생은 그 형을 시체를 거두어서 잘 장례를 지내주고 천도(薦度)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원한을 깊이 먹었던지 그 형은 죽어 가지고 독사(毒蛇)가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그 동생의 공부하고 있는 그 토굴에 문턱 밑에 가서 가만히 숨어서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언젠가 몸에 독(毒)이 오를 때를 기다려서 독이 몸에 잔뜩 어리면은 그 동생이 문으로 나올 때 탁 물어 버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좀에 문에 치여 가지고 독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 복수를 할려고 그랬던 것이 그 문에 치여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죽게 되니까 더욱 독이 나 가지고 독거미가 되어 가지고 천장에 가서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컸습니다. 커 가지고 아주 독이 올랐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갖다가 물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 동생은 어떻게 되고 형은 어떻게 되고 한 얘기가 장황이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친구 간에 웬수가 되고, 형제와 부자 간에 웬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웬수가 되고,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어서, 금생에는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생에는 저 사람은 나를 죽이고 이렇게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으면 그다음에는 그 쥐는 고양이가 되고 그래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점점 더 약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 바늘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칼 가지고 싸움을 하다, 다음에는 도끼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을 잘못 처리해 가지고 큰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참선한 사람은 작은 일로 해서 큰일로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일을 발판으로 해서 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황금을 갖다가 똥처럼 쓰고, 지혜로운 사람은 똥을 갖다가 황금처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잘 발효를 시켜서 퇴비를 만들어 가지고 비료로 사용하면은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우리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그러한 번뇌 망상을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 번뇌 망상이 완전히 승화(昇華)해 가지고 보리심, 깨달음을 증득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성이 나면 그 성이 딴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적멸궁(寂滅宮)에서 나온 소식이거든. 그래서 그놈을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누를려고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그 성내는 마음 그놈으로 '이 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이 말씀이여.

오늘은 입춘날이라 여러분에게 부적을 노놔 드렸습니다. 다 받으셨습니까?
신도 : "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러분은 금방 받으신 그 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그 부적을 내세우십시오.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부적 앞에는 꼼짝을 못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 항복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줄 것입니다.(39분38초~1시간18분6초) (끝)





[법문 내용]

입춘(入春)에 한국 모든 사찰에는 업장(業障)을 소멸을 빌고, 소원성취를 빈다 /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다.
부처님의 골수 법문이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바로 참선(參禪) 공부.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불법(佛法)은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참선법은 무량겁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 /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 깊은 산중이건 시장바닥이건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 설화.

번뇌·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번뇌 망상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 '이뭣고?'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입춘(入春)일에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잘못이 있었는가? 그것을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그래 가지고 ‘새해부터서는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 한 달,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Posted by 닥공닥정
201~300/(276~300)2022. 11. 10. 16:17

 

 

((No.280))—1985년(을축년) 동안거 결제 법어(85.11.26)(51분)

 

(1) 약 28분.

 

(2) 약 23분.



(1)------------------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고
나무~아미타불~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투득(透得)해 버리면 산하대지가 넓음을 비로소 깨달을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댄, 인간의 분별 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 같으면,
녹수(綠水)와 청산(靑山)에 어찌 구애(拘礙)를 받을 것인가.

중생은 자기 본마음 자리를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이 넓고 넓은 산하대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두두물물(頭頭物物) 육도법계(六道法界)가 온통 다 자기의 집이요 한마당이건만, 자기의 본 마당, 본 마음자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자기의 분별 경계에 떨어져 가지고 거기에 취사(取捨)와 집착(執着)이 있어서 발 디딜 곳이 없어. 어디를 가나 편안치를 못하고, 어디를 가나 걸리고 몸 둘 곳이 없어.

한바탕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확연히 깨달아버리면 천당과 지옥도 걸릴 것이 없고, 인간의 부귀와 영화와 시시비비(是是非非)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 을축년(乙丑年) 시월 15일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했습니다. 청풍납자(淸風衲子)가 사방에서 모여서 한철을 한 지붕 밑에서, 한 도량에서 정진을 하게 되었고 또 보살선원에도 경향 각지에서 백 명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고락(苦樂)을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을 해 가면 공기가 탁하고, 공장과 자동차에 모든 소음이 이렇게 심하고, 또 수용이 박(薄)하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할지라도 ‘한 생각’ 철저해 버리면 그런 것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돈독(敦篤)하고 철저하지 못하면 눈으로 보는 거, 귀로 듣는 거, 사사건건 걸리게 되고 내가 거기에 끌려 나가고,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내게 되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마음이 동요가 될 것입니다.

온 세계는 그 자체가 낱낱이 자성(自性)이 있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나의 ‘한 생각’이 발로(發露)해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들인 것입니다.
하늘에 달이 떴으되 달 자체가 ‘내가 달이다’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고, 하물며 ‘나는 밝다. 밝지 못하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한 생각은 더욱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달 자체는 때에 따라서 둥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초승달이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주 캄캄하게 안 보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는 전혀 그런 상(相)이 없습니다.

사람이 들어서, 내가 들어서 온갖 분별심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고, 거기에 대해서 온갖 분별심을 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둥글다, 밝다’ 모두 이리 분별을 내서,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그 한 생각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것입니다.


백 명 대중이 한 방에 모여서 석 달 동안을 지낼 때에 한 생각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철저히 단속하지 못한다면 그 백 명 대중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 누군가는 마음이 동요가 되고, 한 사람 동요됨으로 해서 그 방에 여러 사람이 속이 불편해질 것이고 이리해서 바람 잘 날이 없어.

그래서 몽산(蒙山) 스님께서 결제 법문에 말씀을 하시기를,[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만약 이 도량에 와 가지고 함께 이 고요함을 함께 하고자 할진댄, 참선 정진을 하고자 할진대는 세상에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집착과 거꾸러진 그런 생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선원에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인사(人事)로 왕래하는 거, 인사로 왕래하는 그 인사를 끊어 버리고 모든 수용은 인연 따라서 해. 밥이면 밥, 죽이면 죽, 반찬이 좋으면 좋은 대로, 짜면 짠 대로 인연 따라서 수용을 하되, 아홉 시부터서 세 시까지 삼경(三更) 동안을 제외하고는 수면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문밖에 거리에 나가지를 말 것이며, 밖에서 어떤 신도가 공양을 청(請)한다 하더라도 나가지 말 것이며,
확철대오(廓徹大悟)하기 전에는 경(經)도 보지 말 것이며, 대중적인 행사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경도 보지를 말아라. 이와 같이 여법(如法)하게 3년을 정진을 하되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여러 대중을 대신해서 지옥을 가겠다’ 이렇게 법문을 하셨습니다.

3년, 10년 내지 30년을 정진을 하되 확철대오를 못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법하게 정말 생사대사를 위해서 잠깐 동안도 한눈 팔 겨를이 없고, 잠깐 동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 오직 이 한 생각 화두에 대한 의심, 그 한 생각 돈독함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히 그렇게 알뜰히 그렇게 해서 3년을 한다면 반드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한 말씀이 얼마나 목숨을 걸고 보증하신 그러한 표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용화선원(龍華禪院), 물론 어디 선원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용화선원의 특이한 노선(路線)이라고 할까? 가풍(家風)이라고 할까? 용화선원에서 바라는 용화선원의 특성을 구태여 말을 하자면, '불조(佛祖)와 같이, 불조가 깨달으신 바와 같이 그러한 철저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설사 조그마한 견처(見處)가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런 것을 인정을 하지 말아라'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 '깨달았다'고 하는 소견, 한 철 두 철 하다 보면 어떤 지견(知見)이 생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마는 불조(佛祖)의 친증처(親證處)에 바로 이르르지 못하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라.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말지언정 깨달았다 하면은 불조와 같이 불조의 친증처에 이르러야 한다. 이러한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 공견(空見)을 봤다 하더라도, 그러한 ‘보았다’고 하는 소견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그러한 지견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 공부는 아무리 정진을 한다고 해도 그 이상 진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이것입니다.(17분47초)


『화엄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그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서 남쪽으로 일백십성(一百十城)을 향해 가면서 차례차례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친견했습니다.

한 선지식 친견하고 거기서 법문을 듣고 그리고 또 거기서 마음에 얻은 바가 있어. 그다음에 그 선지식이 또 그다음 선지식을 소개를 하면 또 그 선지식을 찾아가서 그 선지식 밑에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승사(承嗣)를 해서 그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거기서 또 얻은 바가 있어.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53선지식을 친견해 나가는 데 그 53선지식 가운데에는 비구 스님도 있고, 신(神)들도 있고, 외도도 있고, 창녀도 있고, 보살도 있고, 동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선지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위법망구적으로 친견하고 승사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53선지식한테 배운 들은 깨달은 법문을 조옥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고대로 가슴에 간직을 하고 마지막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미륵보살을 친견해서 미륵보살이 손 한번 탁! 튕기는 바람에 53선지식한테 들은 모든 법문을 일시에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서 “다시 문수보살을 친견을 해라. 맨 처음에 친견했던 문수보살을 다시 친견해라” 한 말씀을 듣고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리라’ 하고 마음을 먹자마자, 문수보살이 저 먼 일백십성이나 멀리 떨어진 그 문수보살이 오른손을 터억 뻗쳐 가지고 선재동자의 이마를 만져 주셨습니다.

만지시면서 “선재선재(善哉善哉)라, 착하고 착하구나! 네가 철저한 신근(信根)이 없었다면, 53선지식을 그렇게 아무 딴 퇴타심(退墮心)이 없이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견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조금 얻은 것을 가지고—그렇지 못했으면 조금 얻은 것으로 해서 만족을 삼아 가지고 중단을 했을 것이며, 조금 얻은 것으로써 거기에 집착을 했을 것이며, 오늘날과 같이 해탈과 선지식의 섭호(攝護)한 바가 되지를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문수보살(선재동자)은 확철대오를 해서 문수보살과 같이 보현보살(普賢菩薩)과 같이 모든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이르르게 된 것입니다. 삼독(三毒)이 삼취정계(三聚淨戒)로 변했으며, 육식(六識)이 육신통(六神通)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선재동자가 그러한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에 그러한 대도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하고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하라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역력(歷歷), 또록또록하고 분명하다 그 말이여. 역력해서 빈주(賓主)를 여의었어. ‘주관 객관, 너다 내다’ 하는 그러한 마음이 뚝 떨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이여. 적적요요(寂寂寥寥)해서, 고요하고 고요해서 모든 ‘색상(色相)이다, 이것은 진공(眞空)이다’ 그런 색공의 견해도 다 끊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목전(目前)에 분명취(分明取)하라. 우리 눈앞에 형단(形段)이 없으되—볼라야 볼 수도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이놈이 분명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알라야 알 수 없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 의심이 독로해서 “의심이 크면 큰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작으면 작은 깨달음을 얻고, 의심이 없으면 아주 깨달을 수가 없다” 고인(古人)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이다. 산은 우뚝 백운(白雲) 가운데 섰느니라.(처음~27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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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涅槃經)』에 나온 말씀인데,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共同墓地), 묘지 곁에다가 집을 짓고 사는 데 밤에 어디서 소리가 들리기를 자꾸 자기 이름을 불러 싸.
‘어디서 들리는고?’ 하고 가만히 귀를 종그리고 그 소리 나는 쪽을 가 보니까 무덤, 묘지 속에서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공포심이 발칵 나면서 그냥 거기서 물러나왔어. 그 다음날 저녁에도 밤만 깊어지면 무덤 속에서 또 자기를 불러. 그래서 또 겁이 잔뜩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그 이튿날 날이 새 가지고 그 마을에 담력(膽力)이 센 사람, 용기가 있는 사람한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아! 밤만 되면 무덤 속에서 소리가 나고 나를 불러 싸니 이것 참 무서워서 혼이 났다” 그러니까, “정말 그렇다면 내가 한번 오늘 저녁에는 가봐야겠다” 그 무덤 옆에 집에 가 가지고 그날 저녁에 가만히 그 무덤 옆에 가까이 가서 있으니까, 아! 소리가 난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소리 나는 무덤 있는 데로 가니까 그 속에서 말을 하기를 “나는 이 땅속에 묻혀 있는 황금 덩어리다. 그러니 내가 이 황금 덩어리를 너에게 주고자 하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아침에 집안 소지(掃地)를 깨끗이 하고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그리고서 그 방에다가 맑은 물을 여덟 그릇을 떠다 놓고 또 죽을 잘 쒀서 여덟 그릇을 따악 갖다가 놓고서 기다려라. 그러면 먹물 옷 입은 스님이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그 스님을 네 방으로 모셔 들여 가지고 그 물과 죽을 대접을 해라. 공양을 해라.
그러면 그 스님들이 그 물과 죽을 맛있게 잡술 테니 그러고 난 다음에 방을 여덟 개 칸으로 막아 가지고 한 칸 한 칸에다가 그 스님을 딱 모셔라. 모시고서 문을 딱 잠가 놓으면 그 스님들이 바로 황금으로 변해 가지고, 항아리 속에 황금이 가뜩 담아진 것으로 변할 것이다” 그래서 인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 이튿날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악 했습니다.

사시(巳時)가 되니까 스님네들이 주욱 여덟 분이 오는데 준비해 놓은 방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죽 공양을 다 잡숫고 물을 잡숫고 난 다음에 여덟 칸 방에다가 한 칸, 한 칸 안내를 해서 모셔 놓고 문을 딱 잠갔는데,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스님은 간 곳이 없고 칸칸이 항아리 속에 황금이 담뿍담뿍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마을 사람이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마치 흥부가 제비 다리를 짬매서 날려보내 가지고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놀부가 성한 제비를 뚜드려 잡아 가지고 그 부자가 되려고 하듯이,
그 어리석은 사람이 집에다가 죽을 쒀서 여덟 그릇을 해 놓고 물을 뜨고 해 놓고는 며칠을 기다리니까, 마치 탁발(托鉢)하는 스님이 여덟 분이 오니까 그분을 초청을 해서 그 죽과 물을 공양(供養)을 올리고는 다짜고짜로 여덟 칸에다 갖다가 넣고 문을 잠가 놓으니까,
그 스님은 뭣도 모르고 죽을 먹고서 강제로 구금(拘禁)을 당해서 아무리 문을 따 달라고 해도 문을 따 주지 않아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문을 박차고 나오고 하는 바람에 그래 가지고는 관가에까지 알려져 가지고, 그 사람이 성스러운 스님을 갖다가 이유 없이 감금을 시켰다 하는 죄목으로 엄하게 취조를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그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던 그 사람도 ‘그 사람이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또 그렇게 해서 스님을 여덟 분을 초청을 해다가 또 죽을 공양을 올리고 또 칸칸이 여덟 분을 따악 닫어 놓고 조금 있다 문을 열어보니까 아! 항아리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항아리를 요리 내다보니까, 아! 혀를 널름널름 하는 큰 구렁이가 항아리마다 들어있어 가지고 노려보면서 물라고 달라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도망을 쳤는데.

이러한 소식이 그 나라 임금님한테 들려 가지고, 임금님이 불법(佛法)을 믿는 그러한 훌륭한 임금이었던지 거기서 죄인들을 불러다 놓고 또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다 불러다 놓고 그리고서 훈계(訓戒)를 했습니다.

“목욕재계를 하고 죽과 물을 떠다가 스님네를 갖다가 공양을 올리고 또 별실에다가 모신 외면상의 행동은 세 사람이 다 똑같았지만, 맨 처음에 그 사람은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없고 겁약한 사람이 욕심만 있었기 때문에 자기는 그 황금을 얻지를 못했고. 다음에사 욕심만 치성해 가지고, 용기도 없는 사람이 남의 본(本)을 따 가지고 황금만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렁이한테 물리게 되고,
중간 사람은 분(分)에 없는—용기 있는 사람이 그 황금을 얻은 것을 보고, 욕심을 가지고 멀쩡한 스님을 갖다가 죽 한 그릇 먹여서 때려 가둬 가지고 황금을 얻으려고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벌을 받고 징역을 살게 되었다. 용기를 가지고, 신념을 가지고, 목적 달성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저렇게 황금을 얻었다.
도를 닦는 데에 있어서도,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그 마음은 어느 사람이 그것이 없겠느냐. 첫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생사 문제, 육신의 생명을 바치고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취지의 말씀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 낱낱이 다 ‘불법을 믿고 참선 수행을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리라’ 그러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법망구적인 그런 대용맹지(大勇猛志)가 없어 가지고서는 이 일은 성취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한 생각 진실하다면 성도 다르고, 연령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팔도에서 운집(雲集)한 선객(禪客) 스님네나 보살선방의 여러 보살님네들은 하등에 걸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성격을 가진 분하고도 아무 장애가 없이, 간격이 없이 화합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적응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더 발심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더 분심을 낼 수가 있을 것이고, 더 철저한 간절한 의단이 독로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큰 사업을 이룬 사업가들도 그러한 수많은 역경계를 굴복함으로써 그러한 대기업가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간 날씨는 엄동설한 움츠려들고, 그 추운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예불(禮佛)하고, 십악참회(十惡懺悔)하고 그리고 입선(入禪)을 하고 또 각기 소임에 따라서 소임을 맡아서 행할 때에 문자 그대로 고행(苦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는 허락이 되지를 않습니다. 선원의 규칙에 따라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앞으로 석 달간 아무 장애 없이 하루같이 알뜰하게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들도 비록 선방에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댁에 계실지언정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생활 그것이 선방(禪房)이요, 가족이 도반(道伴)이요, 이웃이 도반이라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부처님이요, 귀로 듣는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이요, 선지식의 법문이다.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장소는 선방이요 그 시간은 입선(入禪) 시간이다’ 이리 생각하고, 선방에 방부 들인 여러 대중보다도 훨씬 더 마음을 가다듬고 정진을 하신다면 오히려 가정에 계시고, 밖에 속세에 계신 분이 더 힘있고 철저한 정진을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하고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하라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시비해리(是非海裏)에 횡신입(橫身入)이다. 시비(是非)—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그러한 온갖 시비의 바다 속에, 전체가 중생 사는 데는 시비 아닌 것이 없고 전체가 다 시비요 차별이기 때문에 ‘바다’라 하는 거요.
그 시비(是非)의 바다 속에 몸을 비켜서 들어가. 사람이 많이 꽉 들어찰 때에는 이렇게 정면으로 갈 수가 없으니까 몸을 이렇게 비끼고, 이렇게 삐지고 들어가듯이 시비의 바다 속에 몸을 비껴 삐지고 들어가며,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이여. 표범과 범이 떼를 이루고 있는 그 속을 갖다가 그 가운데를 자재(自在)하게 나아간다 그 말이여.

‘네가 옳다 내가 옳다, 네가 잘하고 내가 못한다,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나쁘다, 이곳은 밝고 저곳은 어둡다, 이것은 짜고 저것은 싱겁다’ 전부가 다 중생의 인아(人我)로 인한, 인아—‘너[人]와 나[我]’라고 하는 그런 시비의 바다 속에, 그 시비가 바로 그것이 호랑이요 표범인 것입니다. 그 속에 그것을 피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몸을 삐지고 막 적극적으로 그 속을 향해서 간다 그 말이여.

시비를 잡아서 나에게 와서 가리지를 말아라.(莫把是非來辨我) 나한테는 그까짓 시비를, 이러쿵저러쿵 나한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말이여. 나는 그까짓 시비를 평생 천착(穿鑿)을 하지 않노라.(平生穿鑿不相關) 그건 내가 따지지 않는다 그 말이여.
시비 속에 마구 들어가서 시비를 막 잡아서 내가 막 요리를 해버리고, 시비를 여의지 않고 시비 속에서 바로 화두(話頭)의 의단(疑團)을 가지고 막 삐지고 들어가는데 시비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여.

이러한 기개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셔서 일생 동안 여태까지 정진한 가운데, ‘금년 삼동(三冬)이 가장 뜻있는 가장 보람 있는 한철이 되고, 금년 삼동에 정말 일대사(一大事)를 갖다가 해결하고야만 말리라’ 한 그러한 각오를 가지고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부탁을 드리고 맺고자 합니다.(27분53초~50분40초)(끝)





[법문 내용]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실답게 발심(發心)을 해서 실다웁게 정진하면 도무지 걸릴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자기가 한 생각 내 가지고 자기 자신이 구속을 당하고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법문.

용화선원(龍華禪院) 가풍(家風)
「언제나 완전히 백지(白紙) 상태—10년, 20년을 정진을 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초학자(初學者)의 마음, 순수한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자」
「누구를 막론하고 이 도량에 일단 방부(房付)를 들이고 같이 정진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불조(佛祖)와 같이 되지 못한 이상에는 완전히 초학자의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사상으로 정진을 하자」

선재동자가 무량공덕을 성취한 것은 철저한 신근(信根), 오직 한 생각 진실한 그것 때문이다 / (게송)역력이빈주(歷歷離賓主) 요요절색공(寥寥絶色空) 목전분명취(目前分明取) 산립백운중(山立白雲中) / 대의지하 필유대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간절하고 크고 깊어서 나의 마음과 밖과 온 허공계가 온통 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꽉 찰 때, 우주 법계를 다 삼키고 남을 만한 눈으로 온 세계를 다 삼키고 온 세계를 콧구멍으로 들어마셨다 뱉을 수 있는 그러한 큰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 '용기'에 대한 비유 설화. 위법망구(爲法忘軀)적인 철저한 용기가 없어 가지고서는 도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일백십성(一百十城)을 넘으면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면서 한 생각 퇴전(退轉)함이 없이 53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차례차례로 친견을 하고 승사(承嗣)를 했습니다. 바로 이 「한 생각 진실함」에서 신심(信心)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분심(憤心) 용맹심도 거기에 갖추게 되고, 대의단(大疑團)도 거기에 갖추어질 것입니다.

고인(古人)네들, 과거에 모든 불보살들, 순경계(順境界)에서 보단 역경계(逆境界)에서 다 대사(大事)를 성취를 하셨습니다.

순경계는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빠져들어가고, 속고, 해태(懈怠)에 빠지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운 그런 역경계에서 오히려 더 용기와 분심과 신심과 의단이 독로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도업(道業)이 증장을 하게 되고 발전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잠깐 비끄러지면 화두도 놓쳐 버리고 번뇌와 망상과 잡념에 부린 바가 되어서 그동안에 애써서 공부한 경계가 무너져 버리고 천 길 낭떠러지 업(業)의 구덩이에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야무지게 단속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구태여 딴생각을 일으켜서 무엇을 잘할려고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한 생각 딱! 단속을 해버리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도 그 앞에는 어리대지를 못할 것입니다.

‘일이 많아서 못한다. 우리는 근기(根機)가 박약해서 못한다’ 이러한 생각 낼 바로 그 시간마저도 화두를 드신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시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게송)시비해리횡신입(是非海裏橫身入) 표호군중자재행(豹虎群中自在行) 막파시비내변아(莫把是非來辨我) 평생천착불상관(平生穿鑿不相關).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