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1~25)2020. 10. 28. 09:23

(No.024)—1976년(병진년) 동안거 결제(76.10.15.음) (48분)

(1/3) 약 21분. (2/3) 약 22분. (3/3) 약 5분.

(1/3)----------------


방금 병진년 동안거 결제에 임해서 지금부터 4년 전, 72년도 10월 15일 바로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날 그 법회에 참석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께서 또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도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조실 스님께서 저 보고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법을 설하라고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을 모시기 30년, 처음에 출가할 때부터서 조실 스님께서 항시 하시는 말씀이 "참선(參禪) 공부를 헐라면은, 근기(根機)가 약한 중근기 · 하근기가 참선을 바로 헐라면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 멍청이가 되어야 한다.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자신의 근기를 생각할 때에 하근기 중에서도 가장 못난 하근기라고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정말 바보가 되어 가지고 조실 스님의 법을 철저히 믿고, 벙어리가 되어 가지고 이 세상 한 번 안 태어난 셈치고 일생을 지내보리라'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보가 되고 쓸모없는 물건이 될라면은 벙어리가 된 것이 제일 무방하겠다' 이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출가하자마자 바로 묵언(默言)을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가 불편한 점이 다 많지마는 조실 스님께서는 참 제가 상좌(上佐)인지, 조실 스님이 상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저의 모든 일을 잘 보살펴 주셨습니다.

그러한 은혜로 해서 하근기로서 그래도 퇴태(退怠)하지 아니하고,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그럭저럭 10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10년을 지내도 아무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다맛 바보가 되어 가지고 알 수 없는 화두(話頭)만 들으라'고 그렇게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다맛 그렇게만 해 왔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제가 양말 한 켤레, 내복 하나 빨아 드리는 것을 허락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거의 조실 스님께서는 자신이 다 그것을 하셨고, 제가 양말이라도 손을 댈까 전혀 대지 못하도록 이렇게까지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나도 황송했지마는 조실 스님이 빨지 못하게 하시고 발 씻을 물 한번 떠오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죄송한 생각으로 조실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제가 조실 스님의 시봉(侍奉)을 받다시피 하면서 십 년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 중간에는 방죽가에서 하꼬방 장사도 하고—사과 · 과일 그러한 것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이렇게 해서 고구마도 쪄 놓고 팔고, 수박 참외도 갖다 놓고 팔고. 이렇게 해서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조그만한 하꼬방 속에 앉아서 날새기 정진을 하고, 이리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에 공부는 아무것도 얻은 바도 없었지마는, 조실 스님께서는 "묵언(默言)도 어느 정도까지지 그거 말 안 하는 것 자체가 무슨 공부겠느냐? 그러니 십 년을 했으니 묵언을 그만 터라" 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금생에 마지막 숨 딱! 끊어질 때까지 입을 열고 싶지 안 했고, 벙어리로서 일생을 바치고 싶었지마는 조실 스님의 명령이라 할 수 없이 묵언을 트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입을 열었어도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다못 묵언하기 전, 그 상태로 도로 돌아갔습니다.


묵언을 트고서 조실 스님을 모시고 구례 화엄사, 인천 보각사, 또 저 군산 은적사, 김제 흥복사, 이 인천 용화사로 여기저기 스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저는 계속 그전이나 다름없이 정진을 했지마는,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차라리 내가 입을 열지 말고 계속해서 묵언을 할 것을, 묵언을 할 때에는 아무도 내 하는 일에 간섭하는 사람 없었고 또 나도 다른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서 언제나 내가 내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묵언을 트니까 내가 남의 일에 참견을 해야 하고, 남이 내 일에 참견해야 하고 해서 많은 번거로움을 가져왔습니다.


그럭저럭 용주사에서 주지도 해 보고, 또 영동에서 또 주지도 해 보고 이러는 동안에 삼십 년이 지내왔습니다. 그러자 72년도에 여기에 와서 조실 스님을 또 모시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조실 스님은 그렇게 우렁차게 법문을 하시고, 지칠 줄을 모르시고 날이면 날마다 새벽같이 하루에 두 차례, 세 차례씩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열으셨습니다.

그러시던 조실 스님께서는 차츰 기력이 쇠(衰)하시고 혈압이 높아지시기 시작했습니다. 72년도 그날도 금방 여러 사부대중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그전에 그 낭랑한 음성은 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간곡한 그 마음은 그전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억지로라도 큰 소리를 내셔서 목이 갈라지도록 그렇게 법문을 해 주신 것을 지금 우리는 들었습니다.


그날 조실 스님께서 억지로 법상에 올라가라고 해서 사양을 하다하다 못해서 강제로 명령을 하셔서 제가 잠깐 올라와서 말씀을 한말씀하고 내려갔었습니다. 제가 올라갔다 내려온 다음에 하신 법문이 오늘 여러분께서 들으신 법문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그날 하시던 법문—참선을 할 사람, 참선을 헐라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냐?


첫째,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참선은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 것이지마는,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하는 참선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밥을 굶으면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고 해도 그 참선은 결단코 우리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이 무슨 깨닫게 해 준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리켜 줄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식한테 무엇을 배울 것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참선을 헐라고 할 때에는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없이는 천 명,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도 바로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는데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느냐?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우리는 혼자라도 얼마든지 스승 없이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부처님 당시에 1,250인을 비롯해서 모든 사부대중, 인천(人天) 백만억 대중이 어째서 부처님 당시에 일시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지 못했겠습니까?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출현을 하셔 가지고 정법을 선양(宣揚)하시고, 그동안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나투시면서 천백억 화신(化身)으로 이 우주법계 방방곡곡에 오늘도 수없이 많은 불보살과 선지식이 출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설법을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고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가리킬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세계에 40억이라고 하는 인구는 말할 것도 없고,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가득차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 중생이 한 사람도 깨치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줄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깨닫지 못한 채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 부처님 참법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말들은 잠꼬대 같은 말이라고 하셨습니다. 진즉 우리는 진묵겁(塵墨劫) 전에 우리는 다 성불해 마쳤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밥 먹고, 똥 싸고, 울고 웃고 한 이 모든 것이 고대로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온전히 깨달은 상태에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우리는 깨달을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미(迷)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깨달으려고 하지 말아야겠느냐?' 이렇게 반문을 하시겠지마는, 우리는 어떠한 법문(法門)을 들을 때라도 그 법문에 의지해서 바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입니다. 어떤 법문을 들으면 항시 그 반대쪽 상대되는 말을 연상(聯想)을 하는 것이 우리 중생의 버릇입니다.

부처님 설법, 큰스님네의 설법을 들어도 그 설법을 듣는 가운데에 바로 자기에 본참화두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법문을 옳게 듣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에 의해서 그다음 생각, 그다음 생각으로 차츰 추리해 들어가는 그러한 법문을 듣는 태도는 영리한 사람이긴 하지마는, 법문을 참으로 옳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그 법문을 듣자마자, 들음과 동시에 자기가 들고 있는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분명해질 때, 소소영령(昭昭靈靈)해질 때 그 법문은 참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바르게 법문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꼭 법당에만 들어와서 어떠한 법사님의 법문을 들어야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문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하늘을 보고도 산을 보고도 물을 보고도, 개 짖는 소리를 듣고도, 소와 말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도, ‘이놈 저놈’하고 욕지거리 하는 소리를 듣고도, 누가 나한테 어리석은 억울한 욕을 퍼붓고 달라드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나의 목에 칼을 댈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찰나 찰나에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까지는 우리는 이러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자주자주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법문을 듣고서 그 시간에 들은 법문을 졸졸졸졸 한마디도 잊어버리지 않고 조르르 옮기는 그러한 영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법문을 듣는 동안 잠깐도 귀를 팔지 아니하고, 한눈을 팔지 않고서 열심히 들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법문을 듣고 돌아서서 한마디도 옮길 수 없지마는 들을 때나, 법문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자기에게 주어진 본참화두가 분명히 들려서 알 수 없는 의심이 골똘해진 그 사람. 그 사람에게 비교할 때에 뒤에 사람이 앞에 사람의 몇천 배, 몇만 배 법문을 잘 제대로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해 드린 말씀을 통해서 '법문(法門)은 어떻게 듣는 것이 옳다'

또 법문은 법당 안에서만 잘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에 돌아가서 사회에 나가서 어디서 무엇을 보던지, 듣던지, 무엇을 느끼던지, 어떠한 사건을 당하던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언제라도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깊은 신심(信心)으로, 불같은 의심(疑心)으로, 분심(憤心)을 일으켜서 자기의 본참(本參)을 들고 또 들고 해서,

우리의 일상 모든 생활 속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제일 법문을 잘 들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법문을 한 번 듣고서 하루, 한 달, 석 달, 일 년, 계속해서 그러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면 구태여 법문을 자주 들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이면 법회 때에 빠져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어쨌든지 듣던 말 또 듣고, 듣던 말 또 듣더라도 자주 자주 법회에 참석해서 본참화두가 타성일편이 될 때까지는 선지식의 법문을 소홀히 들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스승을 찾는 데에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 이후로 선지식이 일양(一樣)으로 밖으로 보아서 인물이 잘나고, 법문을 들어보면 아주 변재(辯才)가 있고 말이 조리(條理)가 분명해서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만 하고.

그리고 그 행동은 대도사의 품위가 있고 몸에서는 광명이 비치며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풍기며, 한 번 뵙기만 해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숭배심과 신앙심이 우러나오는 그러한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갖춘 그러한 도인(道人)으로만 세상에 출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도인은 가끔 있을 수 있을지언정,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처음~21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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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모든 중생이 한번 보고 한번 들음으로써 신심이 더욱 돈발(頓發)할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양상으로 출현을 한 것이 낫지, 어찌 미치광이같이 바보같이 어린애같이 주책없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의아스럽게 맨드는 그러한 양상으로 출현을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중생은 무엇을 듣던지 보던지 단통 상(相)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자기 나름대로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자기 눈에 들면은 좋다고 그러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조그만한 허물만 보였다면 대번에 손가락질을 하고 비방을 하고 "아! 큰스님인 줄 알고 큰 도인인줄 알았더니 내가 잘못 봤다. 어디가 도인이 그럴 수가 있느냐?" 대번에 돌아서서 욕을 하고 비방을 하고 다른 사람까지 가서 법문을 듣지 못하도록 선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相)을 보고 믿는 신도, 상을 보고—법문을 잘하니까,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참 음성 소리가 좋으니까, 참 인정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참 좋다. 이러한 식으로 믿기 시작한 그 신심은 머지않아서 변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서 상(相)에, 모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정말 진실한 돈독한 신심으로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선입관, 주견을 잊어버리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신(信)하는 그 신심은 어떠한 행동이나 어떠한 언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기의 진실된 믿음은 동요가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하는 자는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을 날마다 한 번씩 읽고 그러기를 몇십 년을 하는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불자(佛子)가 금강경에 씌어 있는 단 한 구절의 게송의 뜻마저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마냥 정법을 비방하고 바로 선지식을 믿을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하는 자는 삿된 도를 행한지라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은 32상과 80종호를 다 갖추셨고 그 음성은 원음(圓音)으로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모든 중생이 자기의 근기에 맞춰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전부 그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위대한 원음을 갖추셨으니까 나는 그분을 부처님으로 숭배한다. 그러한 거룩한 상호를 가지셨으니까 부처님을 숭배한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 앞에 머리 숙여 목숨 바쳐 귀의한다' 이러한 사람은 「참 여래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기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얼굴을 한 번만 본 사람도, 나의 이름을 한 번만 들은 사람도 결정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대해탈도(大解脫道)를 얻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할 때는 밑을 보지 말고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들으십시오.

30년을 두고 발원을 하기를 '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삼도(三途)를 면하고, 나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해탈도를 증득하여지이다' 이렇게 간절히 축원을 해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을 자칫 잘못 들으시면은 여러분은 돌아서서 웃으시게 됩니다.

「나」라고 하니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낱낱이 「나」를 봐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기 이름을 한 가지 두 가지씩 다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임시로 붙여 놓은 이름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바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 ‘참나’를 본 사람이 어찌 삼악도에 떨어지며, 여러분 자신의 '참 이름'을 들을 수 있다면 어찌 해탈도를 증득 못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지마는, 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송담(松潭) 얼굴을 봐도 절대로 악도를 면하고 해탈도를 증득하리라고 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저의 얼굴을 똑바로 보시면서 들어야 졸음이 안 온 것입니다. 요렇게 밑으로 참선 한 척하고 있으면은 남 봄에는 점잖하니 듣고 있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꾸벅꾸벅 하고 계신 분이 계시거든요. 그렇게 되면은 제가 목이 아프도록 이야기한 보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병진년 삼동 결제일이고, 삼동안거 결제일이고 또 오늘부터서 내년 정월 15일까지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너 이놈!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어찌 부모를 모시지 아니하고, 가정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자손을 낳아서 그 가문을 번창하게 하지 아니하고, 사회에 나가서 국가 · 사회와 인류에 이바지한 바 없이,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국가와 사회도 버리고 인류도 버리고서 머리를 깎고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그것 하나로써 네가 너 할 짓을 다 했느냐?

출가해서 오 년, 십 년, 삼십 년, 오십 년 내지 일생토록 머리를 깎은 부처님 제자로서 참으로 신도 피땀 흘려서 바친 신도의 밥과 옷을 정말 소화시킬 수 있는 진실한 도를 닦았느냐?


처음에 출가해서 일 년, 이 년, 삼 년은 그럭저럭 공부한 것 같이 애를 쓰더니만 사 년, 오 년, 육 년, 십 년, 이리 되니까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해태에 빠지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고, 나이는 차참 먹어가니까 거룩한 척하고 신도들의 절을 받고 시주를 받아서 '밥이 되다 질다, 반찬이 있다 없다, 방이 뜨시다 차웁다' 갖은 불평불만을 가진 채 정말 네가 출가한 목적을 달성했느냐?

그리해 가지고 정말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여의고 가정을 여의고 사회 국가를 버리고서 출가한 네 자신이 부끄럽지 않느냐?



네가 부처님을 믿는답시고 돈과 쌀을 갖다 바치고 '아들딸 잘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영감 승진하게 해 주십시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딸이 좋은 신랑을 만나도록 해 주십시오'

돈 · 쌀 갖다가 바치고 기도하고 불공하고, 그것이 네가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참되고 올바른 부처님 제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서 갖다 바치고서 자기의 상(相)을 내고 '나는 이러이러하게 부처님께 바쳤다. 이렇게 나는 암만의 돈을 바쳐서 부처님께 금을 입혀 드렸고, 이렇게 돈을 많이 바쳐서 법당을 지어 드렸고, 이렇게 불양답(佛糧畓)을 시주해서 복을 지었다. 나를 봐라. 내 이름은 지금 아무 절에 가서 지금 현판에 쓰여 있다. 나를 모르다니? 너희들이 얼마나 절에다 돈을 바쳤느냐?'


부처님을 믿되 구하는 바가 있으면은 그 신심은 정말 진실하고 참된 신심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구하는 바 없이, 내가 바치되 '바쳤다'는 생각이 없이 이렇게 시주(施主)를 하면은 단돈 한푼을 시주하고, 단 쌀 한 움큼을 갖다 바치고, 물 한 그릇을 떠서 바쳐도 그 복은 무량한 것입니다.

그러나 칠보(七寶)로써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는 보물로 탑을 쌓아 올리고 불상을 조성해 모시고 절을 지어 바쳤다 하드라도 '내가 바쳤다'고 하는 그러한 상을 가지게 되면은 그 힘들여서 바친 그 시주는 맥빠진 김빠진 맥주처럼 참 가치가 찰나간(刹那間)에 가치가 소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돈을 많이 갖다 바치라고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돈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형편이 넉넉하시면은 좀 많이 갖다가 내시고, 또 형편이 어려우시면 단돈 백 원도 좋고 오백 원도 좋고, 또 돈이 없으면 쌀 한 되도 좋고 두 되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물심양면으로 부처님과 법보(法寶)와 승보(僧寶)를 위해서 성의껏 여러분은 시주를 하시고, 동시에 법문을 듣고 열심히 스님네의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잘 하셔서 속세에 계시면서도 열심히 공부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머리 있는 채도 다 해탈도를 증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먼저 어떠한 말씀드린 그 말씀은 제가 어느 날 저녁에 꿈을 꾸니까 거룩하게 생긴 허연 노장님이 나와서 저한테 꾸지람을 그렇게 하신 것을 제가 듣고 소스라쳐 놀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꿈을 꾸었던 그 얘기는 나만 들을 얘기가 아니라 우리 용화사에 금년 삼동(三冬)에 공부하러 오신 우리 도반들, 청풍납자(淸風衲子) 우리 수좌(首座) 스님네들을 위해서도 이런 말씀은 들려드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간단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입재해서 내년 정월 15일에 해제를 하게 됩니다마는 석 달이라고 하면은 잠깐 사이입니다. 그러나 이 석 달 동안을 우리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하느냐에 따라서는 무량겁(無量劫) 생사윤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러한 중요한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석 달은 석 달이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모여서 석 달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는 한 시간 한 시간이 모여서 24시간이 된 것이고, 한 시간 한 시간은 1초 1초가 모여서 그것이 모여서 하루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도 1초 1초가 모여서 석 달이 된 것이지, 무슨 백년 속에서 석 달이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비단 석 달뿐이겠습니까.


무량겁을 오늘날까지 우리가 윤회(輪廻)해 왔고 앞으로 무량겁을 윤회해 나갈 것입니다마는 그 무량겁 윤회를 이 석 달 동안에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무량겁 생사윤회를 한 칼로 비어 끊어야 되겄습니다.

그 방법은 1초 1초를 어떻게 잘 지내 가느냐, 거기에 가서 열쇠가 있습니다.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날 때 어떻게 그놈을 돌이켜서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느냐?


유시(有時)에는 성이 나고, 유시에는 기쁘고, 유시에는 외롭고, 유시에는 슬프고, 온갖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속에서,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하듯이 우리의 마음에 파도도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을 가라앉히려고 하시지 마십시요.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조금도 멀리 돌릴 것이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되돌려서 화두를 들도록 이렇게 나아가신다면은 어떠한 마음에 파도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이 일어나서 참선을 못한다'고 걱정을 하신 분을 봤습니다마는 절대로 그런 걸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참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증거입니다.

늙었다고 여자라고 병들었다고 걱정하시지 말고, 늙었거나 여자거나 병들었거나 말았거나 그런 것은 전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프면 누워서 하고,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하고, 걸어가거나 서서 하거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배가 아파서 '아이고, 아이고!' 하다가도 「이뭣고?」 이렇게 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때그때 차곡차곡 되돌려 쌓을 때, 벽돌 한 장 한 장을 올바로 쌓아 올릴 때 십 층 백 층의 높은 건물이 이루어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벽돌을 삐딱빼딱해서 이리 쌓았다 저리 쌓았다 하다 보면은 얼마 안 가서 그 집은 와그르르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높은 고층 건물을 짓고자 할진대는 벽돌 하나하나를 바르게 쌓아야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헐라면은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때그때 지체 없이 되돌려서 본참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우리의 해탈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고 옷 입는 그 사이에 있고, 똥 누는 그 사이에 있고, 손주를 무릎에다 앉혀놓고 궁둥이를 투둑투둑 한 그 속에 바로 우리가 눈뜰 좋은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제일 공부가 잘되고 제일 중요한 것은—남편이나 자식이나 며느리나 친구나 이웃이 나에게 억울한 말을 하고 나에게 은혜를 받고서 나를 배신하고 웬수로서 나를 갚고자 할 때, 울화통이 터지고 속이 출렁여서 피가 거꾸로 넘어올 정도로 그런 대충격을 받았을 그때야말로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힘있고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울 때에 한 번씩 자기로 돌아오는 연습을 해서 그것이 된다고 하면은 그밖에 소소한 일은 누워서 떡 먹기입니다. 차라리 누워서 떡을 먹게 되면 눈에 티라도 들지마는,


이 참선은 어디서 언제 어떠한 일을 하면서라도 바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한 생각 한 생각을 쌓아 올릴 때 우리에게는 축착합착(築着磕着), 일조(一朝)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날이 기어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모든 선지식이 전부 다 한결같이 다 맹서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공부를 해서 3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까지 막담을 짓고 맹서를 하셨습니다.(21분35초~43분1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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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석 달, 석 달이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하루하루, 하루하루라 생각하지 말고 1초 1초를 열심히 해서, 하루 딱! 지내고서 주무실 때 '내가 오늘 과연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는가?' 눈 감기 전에 반성을 한 번씩 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이튿날 새벽에 눈을 딱! 뜨면 그때부터서 또 시작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루 종일 갖은 환경 속에서 열심히 알뜰히 공부를 지어서 마지막 그날 저녁에 잘 때 또 '내가 오늘 하루는 어제보다 얼마만큼 더 알뜰히 지냈는가?' 그것을 하루를 타산을 해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 해서 한 달 한 달이—처음 한 달 그렇게 하시고 또 그 다음달 한 달을 하시고 해서, 다음달은 첫 달보다 낫고, 끝에 달은 둘째 달보다 낫고 해서, 내년 정월 15일에는 정말 참 이 한철은 내가 참선 공부를 시작해서 정말 참 알뜰히 정진을 한 그러한 한철이었다고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환희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러한 철이 되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여러 가지로 여기는 공기도 좋지 못하고 또 수용도 박(薄)하고, 방사(坊舍)도 협착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년 겨울에는 이십 명이 넘는 전국에 선객(禪客) 스님네께서 모이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용화사는 여러 가지가 어렵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스님네들은 그러한 어렵고 부족한 것을 불평과 불만으로 생각하실 분은 한 분도 안 계시겠지마는, 그런 어렵고 불편한 것을 그것을 우리가 공부 성취할 수 있는, 신심과 분심을 일으킬 수 있는 그러한 계기(契機)로 삼아 주시고 공부를 알뜰히 잘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여러 신도 여러분께서는—이러한 초라한 누추한 절을 전강 조실 스님, 조실 스님이 계시던 도량이라고 해서 이렇게 먼 데서 이렇게 많은 좋은 스님네가 오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공부하려고 오신 스님네들을 여러분께서는 성의껏 잘 받들어 모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하시기를, 「배고픈 사람, 가난한 사람, 천 명을 밥을 주어서 기갈을 면케 해 주는 공덕보단 소승 나한(羅漢), 한 사람 공양(供養)한 것이 낫다.

소승 나한, 천 명을 공양을 시킨 것보단 부처님 한 분 공양한 것이 낫다.

부처님 천 명을, 일천 부처님 공양한 것보단 무심도인(無心道人), 한 사람의 공양하는 복이 낫다」

이렇게 『사십이장경』에 말씀하셨습니다.


올 우리 법보선원에 공부하러 오신 선객 스님네들은 바로 그러한 무심도.... (법문 끊김)


'스님네는 머리를 깎고 공부만 전력하시지마는, 나는 세속에서 머리 기르고 자식 낳고 사는 살림하고 산다. 그렇지마는 내가 공부 열심히 하기로는 내가 스님네한테 질 수가 없겠습니다'

이러한 이를 악물고 자부심을 가지고 결심을 하셔서 스님네 뒤지지 않게 공부를 좀 열심히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43분17초~47분50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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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非法非非法 (비법비비법) 無法亦無心 (무법역무심) 법도 아니요 비법(非法)도 아니니라. 법(法)도 없지마는 마음도 없느니라.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신남신녀(信男信女) ;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말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무용지물(無用之物 없을 무/쓸 용/어조사 지/물건·만물·사물·일·사람 물) ; 아무짝에도 쓸데[用]없는[無] 물건이나 사람.

*묵언(默言) ;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음.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퇴태(退怠 물러날 퇴/그만둘·물러설 태) ; 어떤 경지로부터 물러나 되돌아오는 것. 불교를 믿는 마음에서 물러나 다른 데로 옮기는 것. 퇴타(退墮), 퇴전(退轉)이라고도 한다.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시봉(侍奉 모실 시/받들 봉) ; ①제자가 스승을 받들어 섬기는 것. 지위가 높은 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일. ②부모를 모셔 받듦. ③제자.

*하꼬방 ; 판잣집(판자로 허술하게 지은 집). 箱房. 箱(상자)의 일본어 훈독 ‘ばこ(하꼬)’+방(房)이 결합된 말.

*날새기 ; 저녁, 밤을 지나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자지 않는 것.

*사자후(獅子吼)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양(宣掦 베풀·널리 알릴 선/오를·나타낼 양) ; 명성이나 권위 따위를 널리 떨치게 함.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화신(化身) ; 화현(化現)한 몸[身]. 변화된 신체. 화신불(nirmaka-kaya 化身佛). 부처의 삼신(三身 : 法身 · 報身 · 化身)의 하나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 불신(佛身). 응화신(應化身) · 변화신(變化身) ·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시방법계(十方法界) ; 시방세계(十方世界).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무량무변(無量無邊) ; 한없이 크고 넓음.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진묵겁(塵墨劫) ; 티끌[塵]이 쌓여 먹[墨]이 될 만큼의 오랜 시간[劫].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연상(聯想 뒤를 이을 련/생각 상) ;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기차'로 '여행'을 떠올리는 따위의 현상이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소소영령(昭昭靈靈) ; 밝디 밝고 신령하다는 말. 번뇌와 망상에 물들지 않은 마음의 본성을 묘사한다. ‘소소’는 밝게 아는 작용, ‘영령’은 대상의 변화에 잘 응하는 영활(靈活)을 뜻한다. 또는 마음의 본체(소소)와 보고 듣는 등의 신령한 작용 전체(영령)를 나타낸다.

소소영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이것과 상응하는 자아가 있다는 망상을 견제하는 말도 선문헌에 적지 않게 보인다.

[참고] 『임제록』

道流 儞欲得作佛 莫隨萬物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垢 世與出世 無佛無法 亦不現前 亦不曾失 設有者 皆是名言章句 接引小兒 施設藥病 表顯名同 且名句不自名句 還是儞目前 昭昭靈靈 鑒覺聞知照燭底 安一切名句


도를 배우는 이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일체 만물을 따라가지 말라.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니, 한 마음 나지 않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세간과 출세간에 불(佛)도 없고 법(法)도 없어서 현전하지도 않고 잃은 적도 없다.

설사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언어의 구절이어서,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에 따라 약을 준 것이며 무엇을 표현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언어의 구절은 그 자체로 언어의 구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대들 눈앞에서 밝디 밝고 신령하게[昭昭靈靈] 살피거나 느끼거나 듣거나 알거나 비추는 바로 그것이 모든 언어의 구절을 붙이는 것이다.

*찰나(刹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①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②어떤 일이나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刹과 剎은 동자(同字).

*귀를 팔다 ; 귀를 딴 데로 돌리어 잘 듣지 않다.

*한눈 ; 마땅히 볼 데를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

*한눈을 팔다 ; 해야 할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정신을 딴 데로 돌리다.

*걸음걸음이 ; 걸음을 걸을 적마다.

*골똘해진--->골똘하다 ; (사람이 한 가지 일에)온 정신을 쏟아 딴생각이 없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불같은—> 불같다 ; 정열이나 신념, 감정 따위가 뜨겁고 강렬하다.

*분심(憤心, 忿心, 奮心 분하다·원통하다·성내다·힘쓰다·떨치다·분격하다)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일양(一樣) ; ①한결같은 모양. 또는 같은 모양. ②한결같이 그대로. 또는 꼭 그대로.

*변재(辨才 말 잘할 변/재주 재) ; 말을 잘하는[辨] 능력과 재주(才操).

*조리(條理) ;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대체로 불보살과 역대 대도사가 출현하실 때에는 여든한 가지의 그러한 가지가지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의심스럽고 '세상에 저게 무슨 도인인가? 저게 무슨 불법인가? 저래 가지고 무슨 중생교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사람 앞에 법문을 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이렇게 의심스러울 정도의 어찌 보면 어린애 같고, 어찌 보면 바보 같고, 어찌 보면 미치광이 같고, 그러한 양상(樣相)으로 출현하신 선지식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도인(道人)의 81행(行). 도인의 여러 가지 행에 있어서 81행이 있는데, 「도인의 81행」이라 함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의 좋고 궂은 모든 행위가 다 포함될 수가 있다.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광행(狂行) · 영아행(嬰兒行)도 있고, 승행(僧行) · 속행(俗行) · 남자행 · 여자행, 그리고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까지 이르나 도안(道眼, 道의 眼目)이 명백하면 아무 걸릴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81행 가운데 체모(體貌)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아무 철이 들지 아니한 젖을 먹을 나이의 어린아이의 행동인 영아행(嬰兒行)을 최고로 친다.


[참고] 『경허집(鏡虛集)』 '여등암화상(與藤菴和尙 등암화상에게 주다)'에서.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又云 栴多羅見性成佛 不論作殺生業 縱作業 不同他人 業拘不能 白衣見性成佛 不論淫欲 縱有餘習 亦不相妨 洪州云 善亦是心 不可將心還修於心 惡亦是心 不可將心還斷於心 牛頭禪師云 心無異心 不斷貪淫


또 "전다라가 견성성불함에 살생업을 지은 것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업을 짓더라도 다른 사람과 달라서 업에 구애되지 않으며, 속인이 견성성불함에 음욕을 논하지 않으니, 비록 남은 습기가 있더라도 또한 서로 방해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홍주(마조도일) 스님은 "선(善)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닦을 수 없고, 악도 또한 이 마음이니 마음을 가지고 도리어 마음을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으며, 우두 선사는 "마음에 다른 마음이 없으니 탐심과 음욕을 끊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故善知識牧牛 有八十一行 自佛行梵行 乃至有殺盜淫酒等行 而道眼明白 亦無所碍 故潙山禪師云 只貴正眼 不貴行李處 故此法門逈出三乘 汎學者 實不可思議 古有習小乘戒律者 皆誹謗禪師 而如蟷螂捍轍 斥鷃笑鵬 置之莫論


그러므로 선지식의 목우행(牧牛行)에 81가지가 있으니, 불행(佛行) · 범행(梵行)으로부터 심지어 살생 · 도둑질 · 음행 · 음주 등의 행(行)에 이르기까지 도안(道眼)이 명백하면 아무 구애될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산선사는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문은 삼승을 멀리 벗어났으니, 범범하게 배우는 사람은 실로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옛날에 소승의 계율을 익힌 이들은 모두 선사를 비방했으나 이는 버마재비(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고 뱁새가 대붕(大鵬)를 비웃는 격이니, 제쳐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양상(樣相 모양·형태·상태 양/서로·모양·바탕 상) ; 사물이나 현상의 모양이나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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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단통 ; 그 자리에서 대번에 곧장.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금강경(金剛經) 사구게(四句偈) ;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금강경』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참고]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제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금강경』 爾時 世尊 而說偈言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그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 하면 이 사람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요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함허(涵虛) 설의(說誼, 이치를 설함)】

色見聲求 是行邪道 作麼生 不行邪道去 但知聲色本非眞 自然不被聲色惑 見盡自於玄旨會 情忘能與道相親


색상으로 보고 음성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삿된 도(道)를 행(行)하지 않겠는가?

다못 이 소리와 색상이 본래 참[眞]이 아닌 줄 알면 자연히 소리와 색상에 현혹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소리를 듣고 색상(色相)을 보는 그 견(見)이 다하면, 자연히 현현(玄玄)한 뜻을 알게 되리라. 그래서 정(情)이 다하면 능히 도(道)와 더불어 서로 친(親)하게 될 것이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삼악도(三惡道) ; 악인(惡人)이 죽어서 간다는 세 가지 괴로운 세계. 곧 지옥도(地獄道), 축생도(畜生道), 아귀도(餓鬼道)를 가리킨다. 지옥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태어날 지옥세계이며, 축생도는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길이고, 아귀도는 먹으려고 하는 음식은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매를 맞는 아귀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해탈도(解脫道) ; ①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나 수행.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 ②사도(四道)의 하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사도(四道) ;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 것. ①가행도(加行道). 번뇌를 끊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 ②무간도(無間道). 간격이나 걸림 없이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 단계. ③해탈도(解脫道).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하는 단계. ④승진도(勝進道). 뛰어난 수행으로 해탈의 완성에 이르는 단계.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42~145. p147. (가로판 p149~151. p154)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아 ! 불자여。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주해)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하시니라.

(주해)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하시니라.

(주해)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불양답(佛糧畓 부처 불/양식 량/논 답) ; 부처님[佛]에게 올리는 쌀[糧]을 생산하는, 절에 딸린 논밭[畓]. 불향답(佛享畓, 佛餉畓)이라고도 한다.

*칠보(七寶) : 일곱 가지의 보배。즉 금(金), 은(銀), 유리(琉璃), 파려(玻瓈), 또는 매괴(玫瑰), 차거(硨磲), 산호(珊瑚), 마노(瑪瑙) 등을 말한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법보(法寶 부처님의 가르침 법/보배·보물 보) ; 불교도의 세 가지 귀의처,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의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보배[寶]에 비유한 말.

*청풍납자(淸風衲子 맑을 청/바람 풍/옷을 꿰맴 납/사람 자) ; 수행을 하여 맑은 기운을 지닌 스님을 청풍(淸風), 맑은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참고] 운수납자(雲水衲子) ; 여러 곳으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거나 수행을 하러 여러 곳으로 다니는 스님[衲子]을 머무름이 없는 구름[雲]과 물[水]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거두절미(去頭截尾) ; 말이나 사건 등의 부차적인 설명은 빼어 버리고 사실의 요점(要點)만 말함.

*축착합착(築着磕着) : 맷돌 위•아래짝이 서로 꽉 들어맞듯이 수행자가 애를 쓰다가 어느 때 홀연히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비유함. 「축착합착(築着磕着)」합해서 쓰임.

*일조(一朝) ; 주로 ‘일조에’의 꼴로 쓰여, 하루 아침이라는 뜻으로, 갑작스럽도록 짧은 사이를 이르는 말.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그렇게 간절히 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공부를 해서 3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까지 막담을 짓고 맹서를 하셨습니다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602 ~ 675)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1045)’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1231 ~ 1298 또는 1308) (용화선원刊) p97-99.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④]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1238 ~ 1295)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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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坊舍 집·거처하는 방·절 방/집·가옥 사) ; 절에서 스님이 거처하는 방.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 11장.

佛言 飯惡人百 不如飯一善人 飯善人千 不如飯一持五戒者 飯五戒者萬 不如飯一須陀洹 飯百萬須陀洹 不如飯一斯陀含 飯千萬斯陀含 不如飯一阿那含 飯一億阿那含 不如飯一阿羅漢 飯十億阿羅漢 不如飯一辟支佛 飯百億辟支佛 不如飯一三世諸佛 飯千億三世諸佛 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백 명의 악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 명의 착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오계를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만 명의 오계 지키는 사람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만 명의 수다원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천만 명의 사다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일 억의 아나함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십 억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고,

백 억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삼세제불 가운데, 한 분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천 억의 삼세제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분의 무념(無念) · 무주(無住) · 무수(無修) · 무증(無證)한 사람을 공양하는 것이 더 낫다.


*무심도인(無心道人) ; ①모든 번뇌망상이 사라져 더이상 추구할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모든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이 없고 얻는 것도 없는 수행자.

②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무심적적(無心寂寂)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사량계교심을 다 놓아버리고 언제나 천진무구한 본연자성(本然自性)으로 살아가는 사람.





[법문 내용]


송담스님의 묵언 정진. 전강 조실스님께서 보살펴 주신 은혜 / 참선을 하려면 바른 스승을 구해야 한다 / 도인 81행 / 상(相)에 의지하지 아니한 진실한 신심.


금강경 사구게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꿈에 거룩하게 생긴 노장님이 꾸지람을 하심. '진실한 도를 닦았느냐? 네가 출가한 목적을 달성했느냐?' / 무주상 보시의 복은 무량하다.


1초 1초가 모여서 석 달... 백년... 무량겁이 된 것 /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 / 간절히 공부해서, 3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겠다.



저는 제가 자신의 근기를 생각할 때에 하근기 중에서도 가장 못난 하근기라고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정말 바보가 되어 전강 조실 스님의 법을 철저히 믿고, 벙어리가 되어 이 세상 한 번 안 태어난 셈치고 일생을 지내보리라'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보가 되고 쓸모없는 물건이 될라면은 벙어리가 된 것이 제일 무방하겠다' 이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출가하자마자 바로 묵언(默言)을 시작. 10년 묵언.


선지식(善知識)이 무슨 깨닫게 해 준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리켜 줄 것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선지식한테 무엇을 배울 것도 없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참선을 헐라고 할 때에는 바른 선지식의 지도가 없이는 천 명,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도 바로 깨달은 사람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배울 것도 없고 가리킬 것도 없는데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바로 깨달을 수가 없느냐?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에 가리켜 줄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은 우리는 혼자라도 얼마든지 스승 없이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리켜 줄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승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상(相)을 보고 믿는—법문을 잘하니까, 얼굴이 잘 생겼으니까, 참 음성 소리가 좋으니까, 참 인정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스님이 참 좋다. 이러한 식으로 믿기 시작한 그 신심은 머지않아서 변해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서 상(相)에, 모냥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정말 진실한 돈독한 신심으로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선입관, 주견을 잊어버리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신(信)하는 그 신심은 어떠한 행동이나 어떠한 언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기의 진실된 믿음은 동요가 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약 색(色)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音聲)으로써 나를 구(求)하는 자는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라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을 믿되 구하는 바가 있으면은 그 신심은 정말 진실하고 참된 신심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구하는 바 없이, 내가 바치되 '바쳤다'는 생각이 없이 이렇게 시주(施主)를 하면은 단돈 한푼을 시주하고, 단 쌀 한 움큼을 갖다 바치고, 물 한 그릇을 떠서 바쳐도 그 복은 무량한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헐라면은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때그때 지체 없이 되돌려서 본참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우리의 해탈은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고 옷 입는 그 사이에 있고, 똥 누는 그 사이에 있고, 손주를 무릎에다 앉혀놓고 궁둥이를 투둑투둑 한 그 속에 바로 우리가 눈뜰 좋은 기회는 있는 것입니다.


울화통이 터지고 속이 출렁여서 피가 거꾸로 넘어올 정도로 그런 대충격을 받았을 그때야말로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힘있고 좋은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어디서 언제 어떠한 일을 하면서라도 바로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시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한 생각 한 생각을 쌓아 올릴 때 우리에게는 축착합착(築着磕着), 일조(一朝)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날이 기어코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모든 선지식이 전부 다 한결같이 다 맹서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공부를 해서 3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까지 막담을 짓고 맹서를 하셨습니다.


'스님네는 머리를 깎고 공부만 전력하시지마는, 나는 세속에서 머리 기르고 자식 낳고 사는 살림하고 산다. 그렇지마는 내가 공부 열심히 하기로는 내가 스님네한테 질 수가 없겠습니다'

이러한 이를 악물고 자부심을 가지고 결심을 하셔서 스님네 뒤지지 않게 공부를 좀 열심히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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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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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