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No.119))—1972년(임자년) 1월 관음재일 법문(송담스님, 전강선사 두 분 법문) (임자72.01.24) (81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18분.

 

(4/4) 약 21분.


(1/4)----------------

<송담 스님 법문>

일본 책을 보니까 '의법불의인(依法不依人)이라. 법(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아라'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알고 보니까 그 말씀이 일본 사람의 말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 마이크를 좀 대줘. 잘 안 듣켜)

그때 제가 중이 되기 전에 학생으로 있을 때, 전강 조실(祖室) 스님이 어떠헌 어른이라고 허는 것을 많은 스님네나 신도님 편에 조실 스님의 평을 아주 좋지 않게 많이 들어 왔었어요. 그리다가 제가 직접 모시고 한철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광주 자운암(紫雲庵)에서 지내게 될 때, 법문을 듣고 또 제가 제 나름대로 학생 때 유교(儒敎)나 또는 불교에 관해서 알고 있는 그런 지식들을 조실 스님 앞에 전부 말씀을 드려서 조실 스님과 서로 그 토론도 허고, 외람(猥濫)된 말씀입니다마는, 토론도 허고 주장도 허고, 그래 가지고 결국에 가서는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저의 과거에 제가 듣고 알고 있던 모든 좋고 나쁜 알음알이—교리에 관한 것이건 또는 조실 스님의 일신상(一身上) 모든 그런 행장(行狀)에 관한 것이건—그런 것들이 나의 조그마한, 우리의 조그마한 중생 소견(所見)으로서는 어떻다고 입을 벌릴 수 없는 그런 일이다.
진짜 조실 스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과거 무량겁으로부터서 정말 정법(正法)에 인연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은 조실 스님을 참으로 믿고 공부를 못할 그러헌 어려운 점이 있구나 하는 것을 뼈아프게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옆에서 모다 '조실 스님 상좌(上佐)가 되지 말라'고 그렇게 말헌 사람, 그건 결코 저를 위해서 충고해 준 말이었었지마는 저에게는 그런 말들이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안 했고,
그런 사람들이 믿지 못할 면을 저는 정말 믿을 수 있었다고 허는 것을 생각할 때에 "어쩌다가 저 같은 사람이 조실 스님을 믿게 되었는가 모르겠습니다" 이러헌 말을 제가 너무나도 감격에 겨워서 조실 스님한테 그 고백을 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래서 한 십 년을 주욱 그렇게 모시고 공부를 허는 동안에 생각할 때마다 '정말 조실 스님은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실 때, 나 한 사람만을 (위해서) 출현하셨지 않나?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그 그러헌 큰스님을 정말 마음속 깊이 믿는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을까? 정말 나 한 사람만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나왔을까?' 그러헌 생각까지도 먹었었는데요.

차츰 이 정화불사(淨化佛事)가 일어나고 이렇게 됨에 따라서 점점 전국에서 조실 스님을 신(信)하는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여기서 저기서 정말 조실 스님을 믿고 공부허리라고 하는 그런 신심을 낸 분들이 날마다 이렇게 불어가는 것을 볼 때에 저는 정말 남북으로 헤어져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난 것보다도 더 반갑고, 감사하고, 고맙고 그러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 인천(仁川) 이 개천가에 흙벽돌로 이리 찍어 가지고 조그마니 유명무실하게 있던 데가 한국에 많은 역사와 유래가 있는 큰 사찰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변가에 보잘 것 없는 역사 없는 이 절에 이런 정법(正法), 법보선원(法寶禪院)을 중심으로 해서 이렇게 사부대중이 모여서 이렇게 집이, 까딱하면 이 흙벽돌집이 밖으로 물러나버릴 정도로 이렇게 가뜩가뜩 이렇게 청법(聽法) 대중이 모이신 것을 생각할 때 참 감개무량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여기 나오게 된 것은, 조실 스님을 모시고 공부한 지 근 30년이 이리 되어 가지마는 저 본래 근기(根機)가 하근기(下根機)가 되어서—그렇게 철저하고 뼈아프게 그렇게 조실 스님께서 저를 지도를 해 주셨건마는, 제가 워낙 둔하고 근기가 비열(卑劣)한 탓으로 이렇다 헐 조실 스님의 뜻에 참 계합(契合)할 만큼 그렇게 공부를 이루지 못하고 겨우 겨우 지 공부도 해 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러헌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제가 잘 저의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생을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폭을 대고 참 썩은 나무둥치,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조용하게 그렇게 정진을 하고, 다른 공부 잘하는 도반들 뒤를 따라가면서 그리고 조실 스님의 뜻을 하루하루 속으로 명심하면서 정진을 그렇게 허리라' 이러헌 생각으로 쭉 지낼 뿐이고, 여러 대중 앞에서 무슨 설교를 헌다든지, 무슨 어떤 책임을 띠어 가지고 법회를 한다든지 이러헌 것은 제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고, 현재도 역시 그럴만한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조실 스님께서는 하루하루 그 연세가 많아 지셔서 그 법문을 하시게 되면은 상기(上氣)가 되시고 따라서 혈압이 오르시고 그래서 여러 날 또 고생을 허시고 그런 것을 제가 누차 보아왔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법문을 허시되 조용하니 잠깐만 이렇게 허시고 내려오시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마는,
한 번 올라오시기만 허면은 한 시간 반, 두 시간 그리고 또 때에 따라서는 너무나도 우리를 간절히 그리고 참 노바심절(老婆心切)하게 이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한 번은 법문을 허시게 되면은 그냥 격하게 이렇게 참 전(全) 정열을 쏟아서 이렇게 말씀을 허시게 되니 그러시게 되면은 또 혈압이 오르시고 상기가 되시고 이렇게 되십니다.

그래서 그동안에는 정견 수좌가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결집을 해 가지고 그것을 참 여러 사부대중 앞에서 그것을 낭독(朗讀)을 하고 해서 참 여러 가지로 조실 스님의 힘을 덜어드린 점에서 참 마음으로 좋게 생각했었는데 요새 좀 어디를 가고 없어요.

그래서 여기 제가 나와서 아무 여러분께 여쭐 말씀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오게 된 것은, 조실 스님이 지금 앞으로 10년을 더 사실는지, 또 20년을 더 사실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만큼,
그러나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게 되면은 부처님으로부터서 저 농촌에 한 우부(愚夫)에 이르기까지 어떠헌 성현이나, 어떠헌 영웅이나 호걸이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한번 이 세상에 몸뚱이를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또 이 몸뚱이가 다시 또 우리 눈에 보지 못하게 될, 뵈옵지 못하게 될 그런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아무라도 다 각오를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살아계실 때에 한 말씀이라도 정말 옳게 알아들으신다면은 정말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그 큰스님의 그 노바심절(老婆心切)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힘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니깐, 형식적으로, 24일이나 그런 법회 때는 형식적으로 나와서 그 얘깃거리로만 듣고 가시고 또 그다음에 또 오시고 이렇게만 생각하시다가는 하루아침에 다시는 그와 같은 육성(肉聲)을 듣지 못하게 될 그러한 일이 있게 되면은 우리는 후회가 막급입니다.

아무리 녹음을 해 놓고 결집(結集)을 해 놨다 해도 정말 살아계실 때 한 말씀 옳게 들은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조실 스님 밑에는 권속 또는 권속 아닌 것을 막론하고 정말 진실하게 정진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지마는, 그래도 조실 스님 계실 때에 식음을 전폐하고 정말 생사 문제를 이마빡에다 써 붙이고 철저하게 정진하셔서 우리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마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책을 읽으니까 이런 얘기가 써졌어요.

어떤 사람이 아주 좋은 말을 한 마리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말을 도둑을 맞었어요. 그래서 그 근처를 모다 찾고, 이웃 마을로 모다 수소문을 해서 자기 말, 혹 자기 말이 어디 있는가 하고 백방(百方)으로 찾아보았습니다마는 전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말은 꼭 한 마리를 사야만 또 먹고살게 되겠기에 말 장(場)에를 갔습니다.
가서 보니 여기저기 검은 말, 붉은 말, 흰 말, 크고 작은 많은 말들이 수백 마리가 나와 있고, 또 말을 팔러 온 사람, 사러 오는 사람, 흥정꾼, 거간쟁이 모다 해서 득실거리고 있는데, 자기도 좋은 말을 한 마리 고르려고 이 갓에서 저 갓으로 왔다갔다허면서 보다가 보니 자기가 기르던 도둑맞은 말이 있어요.

그래서 반개해 가지고 "이게 내 말!" 이라고 허니까, 그 말을 끌고 온 사람이 "여보시오, 당신 눈이 멀었소? 이 말은 내가 10년이나 기른 말인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 허냐?"고, "무슨 피랭이 쓴 놈은, 무슨 장바닥에 피랭이 쓴 놈은 전부 당신 할아버지요?" 허고 따지고 달라들어서 입장이 퍽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까딱하면 그 남의 말을 생으로 뺏을라고 허는 그런 그 도둑놈으로 되몰리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한참, 잠깐 꾀를 냈습니다.

갑자기 그 말의 두 눈을 두 손으로 가리우면서 "당신이 이 말을 10년이나 길렀다면은 이 말에 대해서는 잘 알 터이니, 그러면 이 말은 눈이 좋지 못해요. 눈이 멀어가지고 잘 안 보이는데 이 말의 왼쪽 눈이 나쁘요? 오른쪽 눈이 나쁘요?" 하고 물었거든요.
물으니까 그 사람이—아, 그 엊그제 저녁에 도둑질해다가 지금 파는데 눈이 좋고 나쁜 것을 알 턱이 없잖습니까? 그러나 '모른다'고 허면은 안 되게 생겼고, 그래 그냥 덮어놓고 그냥 "왼쪽 눈이 나쁘요" 허고 대답을 했단 말이여.

만약에 맞으면 다행이고, 안 맞으면 또 달리 변통을 헐 폭 대고 "왼쪽 눈이요" 허니까, 그 사람이 "아니요, 이 말은 왼쪽이 나쁜 게 아니라 실지는 오른쪽이 나쁘요" 그렇게 허니까는 그 말 도둑놈이 "아! 참 오른쪽이요, 내가 잠깐 착각을 했지, 오른쪽이요" 허니까는,
그 말 주인이 "아니요, 사실은 오른쪽도 나쁘지가 않소. 이 말은 두 눈 다 멀쩡합니다" 허고 두 손을 딱 떼네니깐 거그 모다 구경꾼들과 말 도둑놈이 보니까 두 눈 다 멀쩡허거든요.

그러니깐 뭐라고 변명할 길이 없어서 그냥 사람 틈을 빠져나가서 도망칠라고 하다가 옆에 사람들이 "저놈! 말 도둑놈 잡어라" 해 가지고 붙잡아서 관청에다 인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은 그 자기 도둑맞은 말을 감쪽같이 찾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는, '부처님께서 납월팔일(臘月八日)에 별을 보고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허셨다' 이렇게 과거로부터 그렇게 전해 내려오고, 우리들도 다 역시 그렇게 믿고 알고 있고,
'부처님의 성도(成道)는 새벽에 그 동천(東天)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시고 깨쳤다'고 허는 것은 경전마다 또 구전(口傳)으로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역대 고인(古人)들이 거기에 대해서 모다 게송(偈頌)을 모다 읊으시고 모다 그래 내려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성도재일(成道齋日)엔 모다 선방마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허고, 뜰에 나가면은 '부처님이 보고 깨치신 별이 저 별인가? 나도 그 별을 보고 나도 이러다가 혹 깨치지 않을라나' 이러한 희망도 품게 되고 그렇게 되는데.
부처님이 출현허신 뒤로 3천년 동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法)과 조사 스님네의 법에 귀의(歸依)를 해 가지고 그 말씀 한마디에 의해서 생사해탈허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참 먹는 거, 입는 것을 다 불고(不顧)하고, 잠자는 것도 불고하고,
그래 가지고 자나깨나 이 눈을 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사서 고생을 허고 나아가서는 청춘과 일생과 모든 재산과 처자권속까지도 전부 다 팽가치고 머리를 깎고 산중에서 일생을 고생을 사서 하면서 홀애비 독신으로 이렇게 평생을 참 기가 맥히게 그렇게 보내고.

그리고도 그 생에 해결이 안 되면 '다시 내생(來生)에 또 몸을 받아 가지고 또 이것을 허리라' 해 가지고 결국은 미륵불이 출현, 56억 7천만년 후에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허실 그때까지라도 기어니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내가 말지, 그렇지 않고서는 천하 없는 것이 내 앞에 어리대더라도 '눈 한 번 거들떠보리라' 허는 그런 생각이 없이 이렇게 지내고 있고.
또 마을에 계신 청신사 청신녀께서도 모다 부부와 자녀와 일가친척과 가정에 모든 운영, 경영 문제, 갖은 복잡한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여기까지 다달이 한 달이면 몇 번씩 이렇게 선지식(善知識) 스님네 법문(法門) 한마디 듣기 위해서 이렇게 오신 것도 역시 출가해서 일생을 지내는 그런 스님네와 그 마음에 있어서는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일이 결정코 어떠한 부처님의 입을 통해서 얻는다든지, 선지식이 어떠한 것을 준다든지 가르켜 준다든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하시더라도 이 문제를 가르켜 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고 허는 사실,
결국은 내가 오늘 아침에 세수를 허고 밥을 먹고 이리 걸어 왔는데, 그 가운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지, 결코 남한테 배워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허는 사실.

조실 스님께서 언젠가 법문하시기를, "농부는 쟁기를 지고 밭으로 가고, 숟갈을 들고 밥을 뜬 것이 밥으로 들어간다"고 허신 말씀은 지극히 평범(平凡)한 말씀이지마는,
우리가 그 평범한 한마디 말씀에서, 정말 그 평범한 일을 옳게만 본다고 한다면은 3천년 전에 납월팔일에 부처님께서 별을 보신 일이나, 농부가 쟁기를 지고 밭에 간다고 허는 일이 조끔도 차이가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 도둑 얘기를 아까 했습니다마는, 자기가 10년이나 길르지 않는 말, 남의 말을 훔쳐 온 말, 다시 말하면 그 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두 눈을 가리우고 물어보면 '왼쪽 눈이 멀었다'고 했다가, 그것도 아니다고 허면 '오른쪽 눈이 멀었다'고 했다가, 도저히 말 말이 허는 소리가 점점 책잽히고 도둑놈이 드러나는 일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 10년을 길러서 말을 잘 길르고 있다, 그 말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은 그 말을 보지 않고라도 그 말에 대해서는 소상하니 다 알 것이고, 눈을 가리웠거나 안 가리웠거나 어느 눈이 좋고 나쁘고 헌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마디, 두 마디, 스님네한테 또는 경전을 통해서 불법의 이치나 교리적인 거, 또는 참선하는 무슨 선문(禪門) 중에 법담(法談), 이런 것을 한마디, 두 마디 들어서 알아 가지고 그런 것으로써 살림을 삼는다고 헌다면은 아까 말장수처럼 '왼쪽 눈이 나쁘다' 했다, '오른쪽이 나쁘다' 했다, 그것도 '아니다'고 하면은 도둑 도망갈 길밖에는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배워서 알고, 들어서 알고, 보고 듣고 허는 것을 자꾸 많이 모아 가지고 자기의 살림을 삼는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영원히 점점 진짜 참 공부와는 멀어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니,
그러한 보고 또는 듣고 또 귀동냥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불교에 대한 교리나, 선(禪)에 대한 선문답(禪問答), 이런 것을 많이 듣고 아는 것으로써 살림을 삼는 이 문제는 사부대중 전체, 또 저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한 태도로 공부를 해 가지고서는 결국은 이것은 구두선(口頭禪)이요, 의리선(義理禪)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우리의 생사해탈과는 하등(何等)에 관련이 없고, 오히려 점점 참길에서 멀어질 따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銘心)을 해야겠습니다.(처음~21분22초)




(2/4)----------------


법문을 많이 듣고 자주 듣는 것도 우리 수행하는 데 퍽 요긴하리라고 생각하지마는,
조실 스님께서 일러주신 '판치생모(板齒生毛)' 그 화두 한마디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법을 위해서 내 몸뚱이를 잊어버리는 그러헌 신심과, 수염에 불 덩근 여구두연(如救頭燃), 머리나 수염에 불 덩근 사람이 무슨 다시 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천하 없는 일이, 부모가 돌아가셨다 허더라도 우선 수염의 불부텀 꺼야지, 어떻게 헙니까?

그러한 철저한 무상(無常), 금방 우리가 한 숨 내쉬었다가 한 호흡 들어마시지 못하면은 그것이 내생(來生)이니, 수염에 불 끄듯이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하셔서 어쨌든지 조실 스님 생존하셨을 때에 정말 조실 스님을 흐뭇하게 해 드릴 수 있는 진실한 제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전강 선사 법문>

명월근촌저(明月近村笛)하고  청신원사종(淸晨遠寺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풍이취객(竹風移醉客)이여  화우정유봉(花雨定遊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턱 해 놓고, 흥! 일찍이 향당(鄕黨)을 여의고, 일찍이 부모처자와 고향 향당을 여의어 번지고 발심출가(發心出家)해서 도(道)를 닦다가 대도(大道)를 통했다. 대도를 통해 놓고 터억 보니, 아! 뭐 산중에서 도 닦다가 툭 깨 버렸다.

그 깨 놓고 척 보니, 그거 참! 말로 할 수 없는 깨달은 그 경계를 설향수(說向誰)오. 어따가 더불여서 말을 해 볼꼬?
천상 바로 깨달은 스승한테나 가서 해 볼까, 해 볼 게 없다.

깨달아 놓고 보니 그 경계여. 아무 청산(靑山) 속에 산적적(山寂寂)허고 수잔잔(水潺潺)허고 강월조(江月照)허고 송풍취(松風吹)헌다.
아, 그 뭐 뭣이 어따가서 그 말할 것이냐? 뜻밖에 시(詩)가 하나 나오는데 이런 시(詩)가 나왔단 말이여. 들어보니 알 수 있나?

명월(明月)이 근촌저(近村笛)여. 달은 훤허니 밝은데, 가까운 마을에서 젓대 소리가 나는구나. 그 젓대 소리, 그 다른 가풍이 아니어.
옛날에 내가 깨닫기 전에도 들은 젓대 소리다마는 깨달아 놓고 들어본즉 젓대 소리도 각양 각이야. 깨달은 이 소리, 젓대 소리가 이놈이 각(覺)이냐 아니 각이냐? 이것 참! 어디로 가?

청신원사종(淸晨遠寺鍾)이로구나. 또 새벽에 일찌거니 들어본즉 저 먼 절에서는 쇳소리가 땅~ 나는구나. 아 그놈의 소리 그 쇳소리가, 그 쇳소리가 모도 내가 그전 과거에는 쇳소리로 들었더니, 지금은 쇳소리가 아니란 것은 아니다마는, 쇳소리는 쇳소리다마는 이게 생(生)이냐 사(死)냐?
생사(生死) 도리(道理)가 여기 붙어 있느냐? 생사(生死) 도리(道理)가 붙어 있지 않은 도리냐? 무슨 도리냐 말이여.

아 이거 똑 같다마는, 거다가 '같다, 같지 않다' 거 뭔 그런 상(相)을 붙여서 볼 것이냐, 떼고 볼 것이냐? 여의고 볼 것이냐, 없애 버리고 볼 것이냐?
거 그대로 옛 때 들은 종(鍾)소리여, 옛 때 듣던 저[笛] 소리다 그 말이여.

죽풍이취객(竹風移醉客)이요. 대는 이슬을 잔뜩 머금고 비가 온 뒤인데, 오후인데, 그 댓가지에 이슬이 꽉 맺혔는데 웬 놈이 술 취해 가지고 가다가 그 밑에 가서 잠을 자는데, 그 댓바람[竹風]이 스르르 부니깐 그 대에 모도 맺혀져 있는 대 이슬이, 죽로(竹露)가 그만 확 떨어진게, 하! 이 술 취한 놈도 털털 깨고 일어난다.
아! 그 비오가풍(秘奧家風)이다. 이것이 무슨 가풍(家風)인가 말이여. 그 그전에는 그 어떻게 그렇게 봤건마는 이거 한번 깨달은 후에 보니 이거 참말로 이거 대가풍(大家風)이로구나! 큰 가풍이로구나!

화우(花雨)에 정유봉(定遊蜂)이다. 꽃이 턱! 피어서 멍울멍울한데 벌이란 놈은 꿀 빼가니라고 야단들이다. 댓바람이 불어서 비는 개버렸는데, 하! 그 뒤에는 벌은 날아다니면서 꿀 빼가니라고 휭 휭 날아다니는구나.
내나 그 경계가 그 경계인데 어째 이렇게도 오후경계(悟後境界)가, 깨달은 한번 뒷 경계가 여차(如此)하냐!
이것 참, 오후(悟後), 깨달은 후인가? '오후(悟後)에도 약불견인(若不見人)이면 번성독약(翻成毒藥)이라' 하더니, 스승을 찾아가 봐야 할 것인가?
이런 송구(頌句) 하나를 지었더라.


아까 여기 왠 처사(處士) 한 분이 나한테 와서 묻되, "삼매(三昧)와 정(定)과 그 구분이 어떻소?" 묻는데,
그 나, "삼매(三昧)라는 것과 정(定)이라는 것은 오후(悟後)에 있는 듯한데, 깨달은 후에 있는 듯한데 어째 그러냐. 조주(趙州)는 40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을 했다. '조주 스님은 40년에사 타성일편을 했다' 했거든. 조주 스님은 사미 때, 13살 먹을 사미 때 남전(南泉) 스님한테 견성(見性)을 했는데, 왠 40년이냔 말이여. 40년에 타성일편 했다. 아마 조주 스님 40년 타성일편이 그것이 이 정(定)일 것이여. 깨달은 후에, 오후(悟後) 정(定)일 것이여.
향림(香林)은 40년에 부잡용심(不雜用心)이니라. 향림은 40년에, 40년 되어서사 잡념(雜念)을 쓰지 않았다. 그것이 삼매일 것이여. 그러니 오전(悟前)에 있어서 오후(悟後) 경계(境界)를 내가 대답할 수가 있소?" 이렇게 내가 답변(答辯)을 하고 말았어.


오후(悟後) 경계(境界)를 내가 들어서 얘기 할 수는 없어. 이렇게 지금 이 송(頌)을 짓는 것은 오도송(悟道頌)이여. 깨달아 가지고 지은 송(頌)이 이렇다 그 말이여.
그 경계를, 깨달은 경계만 하더라도 이 경계를 가지고 이렇게 마을에서 부는 젓대 소리를 들었으며, 그 근처에서 종치는 새벽 종치는 종소리를 들었으며, 술 취해 가지고 가다가서 그 비 떨어지는 바람에 술 깬 도리를 보았으며, 벌이란 놈이 휭휭 날아가서 꽃다운 도리를 보았으나 이 경이 시하경(是何)이냐? 이 무슨 경(境)이냐 그말이여.

이것이 말을 허자니 견성(見性)한 경계(境界), 견성한 학자(學者)가 바로 깨달은 학자가 해탈송(解脫頌)이여. 해탈(解脫) 경계(境界)에 앉아서 지은 글이다 그말이여. 그 해탈 경계 소식(消息)을 알 수가 있느냐 말이다.
꼭 우리는 이 도리를 바로 봐야 하고 바로 알아야 할 텐데, 우리가 이 도리를 보지 못하고 이 도리를 알지 못했으니 순 중생이다. 우리는 중생인 것이여.

중생이 아무리 그놈의 젓대 소리를 들어 봤자 그 젓대 소리가 그 뭐 삐삐 부는 그뿐이고, 종소리가 쿵- 나는 뿐이지, 거기에 무슨 이치가 붙어 있겠나?

하지마는 그 종소리나 그 젓대 소리에다가서 무슨 묘리(妙理)를 붙여 봐라. 천 가지 만 가지의 묘리(妙理)를 붙일수록에 죽는다.
말하자면 진흙 밭에 들어간, 전체 그 진흙 구렁텅이가 얼마나 깊이깊이 진흙 구렁텅인지 그놈의 데 한 번 빠지면 발 내디딜수록에 점점 더 빠지고 점점 더 들어간다.

마찬가지다. 거다가서 중생이 아무리 묘리(妙理)를 다 붙여 보고, 또 그 이치를 다 떼 번지고 보고, 별별 짓을 다 해 봐라, 진흙 밭에 빠진 놈이 걸음 걸음이 더 빠지는 법이여. 그래 오직해야 '찾다가 죽는다'니? 찾다가 죽어.
무슨 이치인가?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公案法)이여. 참선 공안법이여.

여까장 말해 두고. 더 할라야 할 수 없으니깐.
그놈 진흙 밭에 빠진 놈은 나올라고 할수록 죽네. 공안 역시, 화두 공안 역시 알라고 할수록 죽으니까, 여까장 둘 수밖에 없지.


주금강이가, 주금강(周金剛)이라는 거 그 속인 이름을... 주금강이가 중도 아니고 속인인 거지마는, 하여간 옛날에는 중보담도 속인(俗人)이 더 발심(發心)했고, 더 부처님의 정법을 더 바로 믿고.

남방에? 남방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늘 헌 법문이여. 또 없는 법문인 줄 알고 들우? 뭐 내가 없는 법문, 어떻게 뭣허러 갖다가 없는 법문혀? 이런 법문, 늘 들은 놈을 해사 말길이나 다 알아듣지.

주금강이라는 사람이—거 사람이지 뭐 별거 있나—사람이,
부처님이 설법하시되 부처님 경서(經書) 가운데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사 성불(成佛)하니라'
삼아승지겁이면은 그거 설찬히 역사가 오래다 그말이여. '설찬히 오래다'는 말은 이건 무수겁(無數劫)도 거그는 붙지 못혀. 몇억만 겁도 거다가 붙일 수 없어. 한량없는 참 오래란 말이여.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사 견성(見性)해서 성불(成佛)하느니라. 견성해서 부처가 되느니라' 했는데,
견성해서 부처 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이니까, 생사해탈을 해사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니까.

생사해탈이라도, 생사해탈 다시 또 또 또 생사(生死)가 있어? 그건 소용없어.
생사해탈했으면은 아주 해 부렀지, 영원히 생사해탈해 부렀지. 그 또 미(迷)해서 범부(凡夫) 되아? 없어. 생사해탈해 버린 것을 부처라 햐.

삼아승지겁을 닦아야사 생사해탈해서 부처가 되어 가지고 출세장부(出世丈夫)라고 했는데, 남방(南方)에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바로 사람 마음 가르켜서 견성해서 부처 되어 버려?'
그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찰나간(刹那間)에 있다고 햐?
찰나간이라는 건 '잠깐 사이'인데, 찰나(刹那)가 아승지겁(阿僧祇劫)과 대(對)여.

아승지겁이란 하도 원대(遠代)해서 역사(歷史)로 댈 수 없는 것을 아승지겁이라 하고, 찰나(刹那)라 하는 것은, 어떻게 그동안에 찰나라는 건 엇다가 일념도 아니어. 일 분도 아니고 일 초도 아니어. 착! 뭐 없어. 역사도 없어, 그놈 찰나라는 건.

'남방에서는 중생 성불(成佛)이 찰나간(刹那間)이락 해 가지고는 이 선법, 참선법(參禪法)을 가르키고 앉았어? 이놈 외도(外道) 놈들을 항복 받을 수밖에 없다'
항복을 받으러 나오는데, 삼아승지겁이라는 그 경서(經書)를 짊어지고—삼아승지겁이라는 그 경(經)이 어디 있냐 하면 『금강경』에 있거든.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에 있잖아.

금강경을 뚤뚤 말아 짊어지고는 남방에 외도, '찰나 사이에 견성성불한다'는 외도를 항복 받을 수밖에 없다. 나오다가 다 와서 그 용담(龍潭) 스님 회상(會上)에 그 선방(禪房)이 있으니까,
선방에 용담 스님이 그렇게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성불한 도리를 갖다가서, '찰나간에 성불해서, 중생 성불해서 생사해탈한다'는, 그 가서 막 '이 마구니들을 이 숭악한 마구니를 때려 부술 수밖에 없다' 하고는 나왔다 그말이여.

나와서 불과해야 얼마 안 된 그 지경에, 그저 잠깐 동안 갈 테이지만 배가 고파서 점심을 좀 사 먹고 가려고, 그 지금 같으면 가다가 무슨 뭐 음식 파는 음식점에 노파가 하나 있으니까 노인한테, "여보, 거 나 점심(點心) 좀 주오. 점심 좀 요기 해야겠소, 좀 주오"

“예, 그 점심(點心)은 드리지요마는, 거 짊어진 건 무엇이기에 그리 조그만한 똘똘 말아 짊어졌소? 아, 그 똥글똥글하네"
"여, 짊어진 건 금강경이요"

"금강경은 왜 지고 오시오?"
"남방에 외도(外道)를 항복 받으러 오지. 중생 성불이 찰나간(刹那間)이라고, 마음만 깨달으면 곧 성불해서 생사가 없다는 그런 놈의 외도들을 항복 받을라고 이 짊어지고 오요. 그 금강경 가운데에... 그러면은 삼아승지겁을 닦아서 성불한다고 바로 부처님이 말씀을 해 놓았는데 부처님 말씀을 어긴 것이 그것이 외도가 아니겠소? 그래서 그래 금강경을 짊어지고 와 증거 댈라고 지고 오지요"

"그래요, 그러면 그 금강경 가운데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을 통 얻지 못해. 얻지 못한다'고 그렇게 말씀이 있는데, 점마하심(點麽何心), 어느 마음에 점(點)을 칠랍니까?"

금강경에 있는 말이지. '과거심도 얻지 못하고, 현재심도 얻지 못하고, 미래심도 얻지 못하니 그 어떤 마음에 점을 칠랍니까?'
흥, 입이 붙어버렸네. 삼아승지겁을 닦아사 성불한다는 말만 믿었지,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본래 없는 것은 보들 못했것다.

과거 · 현재 · 미래심이 그 어디 있는가? 우리 시방 한번, 한번 내심(內心), 안 마음으로써 어디 한번 살펴보고 밖으로 또 살펴보십시오.
밖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어디 가서 '안 마음[內心]'이, 어디 가서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붙어 있고 어디 가서 뭐가 있어?

없지? 없어.
암만 말은 곧 그만 '과거심이다 현재심이다 미래심이다' 곧 했다마는 없다. 그렇게 한번 바로 들어가서 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대답 못했지.
"여보, 당신 점심(點心)을 내가 줄라고 했더니, '그렇게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가운데, 어떤 마음에 점심을 먹일라고 하느냐?'고 물어도 답 못혀? 여보 당신 나한테 점심 얻어먹기는 틀렸으니 짊어지고 가오" 밥 못 얻어먹었다.(21분23초~42분19초)




(3/4)---------------

그길로 바로 그 용담(龍潭) 큰스님, 참 조실 스님한테를 척 가서 조실방(祖室房)에 척 들어갔다. 들어가서 그 문답처(問答處)에 가서 꽉 맥혀.
뭔 뭐 뭐 대답 한마디, 뭔 말이 있어? 벌써 거기서 방맹이 맞고 간 사람이.

책도 내놓기 전에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냐? 무슨 물건이 왔냐?” 하는데, 다시 무슨 뭐 입 한번 벌린 일이 있어?
무슨 물건이 온지 모르지. 이렇게 막혀 버리고.
뭐가 있어야지. 답할 수가 있나?

인사하고 나갈라 하는데, 밤인데 (용담 스님이) 촛불을 써주었다가, 촛불 불빛에 신을 찾아 신고—주금강이가 신을 찾아 신고, 막 신을 찾아 신고 돌아서려고 할 때, (용담 스님이) 촛불을 탁! 끄는데,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했거든. 촛불 탁! 끌 때 활연대오를 했다 그 말이여.

그래 그만 짊어졌던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불 탁! 질러서 탁 태워 버렸지.
금강경, 주금강이가 태워 버린 그 도리는 그 어째서 태웠으며, 촛불을 비춰 줬다가 탁! 꺼버린 그 도리는 그 무슨 도리며, 그거 다 공안(公案) 도리(道理)인데, 하나도 어김이 없이 바로 탁탁 일러야 하는 것이여. 공안이라는 게 그려.

인천서 서울을 갔다 오면은 '정거장이 몇이냐?' 하는데 가서 '일곱이다'
일곱 정거장 가운데, 부평은 어떻게 생겼으며, 소사는 어떻게 생겼으며, 거 주욱 남대문까지 다 고대로 딱딱 말해야 되지. 보도 않고는 할 수 없거든.
공안이라는 게, 화두가 그렇게 되어 있어. 따악 있는데.

주금강(周金剛)이가 법당 뒤에서 탁! 태워 번지고 나와서는 '참! 이렇구나. 불법(佛法)이 여차(如此)하구나!' 하고, 그전 주금강(周金剛)이가 아니어. 바로 주금강(周金剛)이여.


그러면 그 도리를 중간에, 만공(滿空) 스님 회상에서 운암 스님이 지내다가, 정운암(鄭雲庵)이라고 하는 이가 만공 큰스님 밑에 도를 닦고 그러고 있다가 부산으로 내려간 뒤에 그놈이 의심나니까,
그 주금강이가 그 법당 뒤에다가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 탁! 태워번지고 대장부(大丈夫) 세력을 지은 그 도리를 물었다 그 말이여.

그 도리가 내나 '점마하심(點麽何心), 금강경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이니 어느 마음에 점(點) 칠라느냐?'
고 점(點) 딱! 쳐야, 고거 그 주금강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한 도리가 고놈이여. 금강경소초 탁! 태워 버린 고 도리(道理)여.

그러니 만공 큰스님한테는 묻되, '그때에 삼세심(三世心)을 도불가득(都不可得)이니 점마하심(點麽何心)입니까? 하고 물을 때에는 큰스님은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니까,
만공 큰스님께서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 이전에 점심요야(點心了也)다. 과거 위음왕불 이전에 점심 먹어 마쳤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이 최초불(最初佛)인데, 얼마나 과거 위음왕불은 깊고 오래 되었고 참 역사적입니까. 그 '과거 위음왕불 생기기 전에 점심을 먹어 마쳤느니라' 요렇게 답(答)을 해서 부산 시방 선암사 운암 스님이 묻는데 그놈을 답(答)을 보낼라고 써 놨는데,
그 답을, 우편국(郵便局)에다 부칠라고 가지고 간 놈을 뺏어 가지고는 보월(寶月) 스님이—만공 스님 큰 제자인데, 수제자인데—뺏어 가지고 불을 탁! 질러 버려. 불을 탁 질러서 때려 치워 번지고는 "뉘 눈깔을 멀리시려고 이러헌 답이 있습니까?" 법사 스님한테. 만공 큰스님한테.

벼락이지! 거, 법담(法談)이라는 것은 무슨 참 한번 그릇친다면은 큰일나지.
"뉘 눈깔을 멀릴라고 큰스님께서 이런 답이 계시리까" 앞에서 그래.

깜짝 놀래 가지고는 그때부터 밥을 안 잡숫고는 고놈을 공안해 가지고 '어느 마음에 점 쳤다고 해야사 맞겠나?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처(都不可得處)에서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요놈을 가지고는 이레 동안을 금선대(金仙臺)에서 가만히 앉어서 입정(入定) 중에 앉아서 공부를 하시다가 이레 만에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는, "보월, 이리 오소. 내 답을 듣소"

보월 스님, 오라고 하는데 안 갈 수 있어? 앞에 척 가서 꿇어 앉아서 "그저 황송합니다"
그 큰스님한테, 과연 큰스님이 그르친 것을 보고, 바로 보시지 못한 것을 보고, 한 말 한번 여쭈었지마는 그건 헐 수 없거든.
제자 지위가 있으니까, "황송합니다" 하고 업드렸으니까, 답을 척 하시는데 참 그런 명답이 없었죠?
그래, 보월 스님이 역시 절을 제대로 무수히... "그렇습니다" 이렇게 답해 마친 일이 있고.

그다음에 응, 고 부산서 답해 놓은 답은 아직 이 만공 스님과 이 답하기 전에 그 안에, 일주일 안에 답을 해 보냈습니다.
그 답을 해 보냈지마는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 도불가득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면은 암만 답해 놔야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니까.

그 답을 또 좀 들어보십시오. "삼세심(三世心) 도불가득(都不可得)인데 점마하심(點麽何心)고? 어느 마음에 점을 칠라느냐?" 이렇게 떡 물을 거 같으면은, 보월 스님 답이여. 만공 스님 제자, 보월 스님 답이여.

'배호서(背湖西)하고, 호서(湖西)를 등지고' 그 호서(湖西)인께 서(西)인께,
'배호서(背湖西)하고, 호서(湖西)를 등지고, 향영남(向嶺南)은, 영남(嶺南)으로 가는 것은 심중(心中)에 부절여의(不絶餘疑)러니, 마음 가운데에 남은 의심을 끊지 못했더니, 여금(如今)에도 여의(餘疑)를 끊지 못했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본 뒤에는 소각해 버리고, 태워 버리고 소각, 갱절여의(更絶餘疑)해라, 다시 여의(餘疑)를 남은 의심을 끊어라(背湖西向嶺南 心中不絶餘疑 如今不絶餘疑 見後燒却 更絶餘疑)' 요렇게 보냈어.

그게 그 무슨 답이겄냐 말씀이여. 생각해 보시오.
확철대오한 도리가 그 도리여?

이 '호서(湖西)를 이별하고 영남(嶺南)으로 가 가지고는 여태까장 그 의심(疑心)을 끊지 못했구나. 견후(見後)에 소각(燒却)하고, 본 뒤에는 태워 번지고 다시 남저지(나머지) 의심을 끊어라' 고렇게 답했다 그말이여

이 생사해탈(生死解脫) 도리가, 내나야 아까 내가 오도송(悟道頌)에, 터억 깨달아 가지고 오도송을 짓되, '밝은 달밤에 근촌(近村)에서 젓대 소리가 들리고, 여 가까운 어디 절에 새벽 종소리가 들리는구나'
종소리 들리는 그 도리이고, '밥 먹자, 옷 입자, 가자' 하는 그 도리여. 그 도리를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니어.

그런데 천 가지 만 가지 백억 이치를 다 여의고 봐도 점점 진흙 밭에 빠져 들어가 죽으러 가는 골 밖에는 없다.
그래서 헐 수 할 수 없이 '유무지견(有無之見)이니, 있다 없다, 뭐 있고 없는 놈 까장도 없다' 별별 걸 다 여의어 버린 거기에 나아가서 공안(公案)이 있다. 내가 밤낮으로 하는 말씀이 이것 아니요.

공안이 거가 있어.

입으로써서는, '입 열기 전에 그르쳤다. 미개구착(未開口錯)이다' 입 열기 전에 그르친 것이 제이구(第二句)여. 그게 제이구(第二句)여.
입 열기 전에 그르쳤는데, 입도 열기 전에 그르쳤는데 글쎄 무슨 이치를 때려 붙여 옳겄냐 그 말이여.

그래서 세상에 그 모도 선도(仙道)가 있지마는, 그 선(仙)도 비슷비슷하지마는 장자(莊子)의 철학이니 노자(老子)의 철학이니, 장자에 현빈(玄牝)이니 노자의 허무(虛無)니, 그러헌 것 가지고는 될 수 없어.

다맛 우리 부처님 정법문중(正法門中)에는 '심마물(甚麼物)이냐?' 이뿐입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무슨 물건인고?' '밥 먹고, 오고 가고 오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알 수 없거든.

지가 무슨 이치를 붙여 죽지 말고, 대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알 수 없는 그놈 하나를 가지고 비비고 나가거라. 뚫고 나가거라. 정진해 나가거라. 이것이 화두에 제일 묘(妙)입니다.

그러면은 거기에서 제일(第一) 분심(憤心)을 가져라. 분심이란 건 분(憤)한 마음.
분심이라 하는 것은 '어째서 세상에 말이여. 세상에 내가 나를 몰라? 내가 나를 모르고도 살 건가? 이게 사는 건가? 아이고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어머니 뱃속에 들어올 때에 뭐가 왔어? 뭐가 왔어?
뱃속에 들어앉아서 요 몸뚱이 하나를 이걸 이만큼 타 가지고 나왔지마는 몸뚱이 퍼 짊어지고, 싸 짊어지고 나온 물건이 무슨 물건이여?
요까짓 몸뚱이 또 나와서 그 시비해리(是非海裏)에서 횡신입(橫身入)하고, 그 사기 협잡이나 하고 일평생 살다가 또 내던져 버리고 또 가는 놈이 있으니, 뭐가 가냔 말이여? 뭐가 가는데 또 가는 곳은 어디냔 말이여.

이것이 인생의 근본 철학이다. 무슨 또 철학인가? 비철학(非哲學)이여, 철학도 아니여.
'이게 심리학이다' 무슨 심리학이여? 심리학은 무슨 심리학이여?
철학도 아니요, 심리학도 아니요, 종교도 아니요.

'나'도 아니여!
뭐 '내'라는 이름을 때려 붙이면 내 '내'라고 하는 놈이 무엇이여? 내가 내여?
'내'라는 것도 내가 내 이름 때려 붙여서 '내'라고 해 가지고서는, 거다가 별별 무슨 아소심(我所心)을 갖다 때려 붙이는 것이 중생 모도 습기(習氣) 습성(習性)으로써 한 것이지마는, 어디 그게 낸가? 나도 아니지.

비유(非有)여. 유(有)도 아니다. 있는 모양이 어디 있나?
비무(非無)다. '없다'고 상(相)을 붙여봐라. 무슨 또 없나? 이렇게도 있는 놈인데 왜 없어.
내 눈앞에 모도 보이는 것이 유(有)요,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만상삼라(萬象森羅)와 정여무정(情與無情)과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촉촉(化化觸觸)이 뭔가? 이렇게 분명히 있는데 없어?

또 그놈을 '있다'고 해 놓고 보니 '있다'고 한 놈에 그 근본을 찾아 들어가 봐라. '있다'는 놈이 어디가 상(相)이 있나? 어디가 색상이 붙어 있나?
뭐 내가 눈으로 한번 뜰 때에는 우주 삼라만상이 그대로 보인다마는 눈 한번 척 감고 보니 뭐가 있나?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러니 이놈에 그 무슨 유(有)도 실법(實法)이 아니요, 무(無)도 실법이 아니요, 유무중(有無中)도 실법이 아니다.

자! 도대체 이 천언만담(千言萬談) 구백생명을 조장시키는 내 주인공(主人公)!
일념지간(一念之間)에도, 한 번 마음 내 가지고도 거기에 번식을 해서 별별 놈의 생각, 색상(色相) 장엄(莊嚴)을 해 제키는 이 주인공, 내 마음자리, 도대체 이놈이 뭐냐?

알 수 없는 이것이, 이것이 참선법(參禪法)이여.

왜 내가 몰랐나? 왜 나는 모르고 있나?
과거 제불(諸佛)은 누구인데, 부처님은 벌써 장부(丈夫)가 되어 버렸다. 확철대오(廓徹大悟)해 생사 없는 부처님이 되어 가지고 앉아계신다. 무슨 생사가 있나? 요요장재백운간(寥寥長在白雲間)이지.

왜 우리는 이렇게 생사해탈을 못하고 이 지경 되어 있노? 이게 무슨 지경이란 말이냐?
분(憤)하구나.

자, 이 몸뚱이 하나 받아 와 가지고—이만한 몸뚱이, 건강한 몸뚱이 요만큼 가지기도 솔찬히 어려운 문제이니라.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핏덩어리 같은 몸뚱이 하나 가지고 나와서 그래도 이렇게 죽지 않고 까불까불 살았다고 놀리고, 눈으로 보고 왔다갔다하고 산다마는,
일식불래(一識不來)며, 그놈의 왔던 식(識)이 가 버리면 그만인 거,
고격, 식풍(識風)이 고격(鼓擊)해서, 바람지내가 듯이 그냥 가버리면 그만 인거, 목숨 하나 끊어지면 그만 인거, 또 언제 가서 또 요만한 몸을 장만해 오겄노?

이 몸이 없으면은 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니, 자 금생에는 다행히 이 몸을 얻어서 이만큼 건강한 때가 되었구나.
자, 분심을 내야겠다. 분한 마음을 내야겠다. 나는 어찌 못한단 말이냐.

인인개개청풍불(人人箇箇淸風拂)이요, 사람 사람이 발 앞에는 청풍불(淸風拂)이 있고.
왜? 왜 부처는 벌써 장부(丈夫)가 되어서 생사 없는 해탈세계(解脫世界)에 주인공(主人公)이 되어 있고, 우리는 이와 같이 해탈 못하고 이와 같이 되어 있어?

분심도 철저히 내야겠다마는 신심(信心)을 갖춰야겠구나. 신(信), 콱! 믿어야겠구나.
왜 내가 믿지 못하고 여차(如此)하노? 왜 이렇게 지내가?
철저히 믿어 가지고 의정(疑情) 돈발(頓發)이여. 알 수 없는 의심이 몰록 돈발해 가지고 의심을 한 번 때려 부셔야 하겠구나.

‘이뭣고?’ ‘이뭣고?’ 알 수 없는 놈이 의심 아닌가. 의심 하나를 때려 쳐부숴야겠구나.
이놈 하나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 대분지(대의심大疑心) 이 삼요(三要)를 갖춰라. 세 가지 요긴한 것을 갖춰라.


그래 운암(雲庵) 스님한테 보월(寶月) 스님은 그렇게 편지를 척 해서 보내고, 만공(滿空) 스님은 거기에서 크게 깨달라서 참 가가대소(呵呵大笑)를 했어.
그러면 만공 스님이 보월 스님만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공안도 그렇게 실수가 있는 공안이 있어. 조주(趙州) 같은 밝은 그런 분도 그 그렇게 세 번 실수한 일도 있거든.

그래서 견성을 해 가지고도 공안(公案)에 탁마(琢磨)를 혀.
잘 견성한 스님한테 가서 탁마도 하고, 또 학자가 더 크게 아는 법은 큰스님한테 또 탁마 시켜 드리기도 하고, 이러헌 것이 탁마상성(琢磨相成) 붕우지은(朋友之恩)이여. 사장지은(師長之恩)이고. 여까지 말씀을 했는데.

보월 스님 같은 그런 밝은 이가 만공 큰스님 밑에 났어.
나서, 공안이 당최 막힐 것이 없고, 일체 공안을 척 들어 대면은 스님보다 더 하니까 뭐 '아이고! 우리 보월밖에 없네' 하고, 당신 좌(座)를 맡겨 드렸어. 아! 그러니 보월 스님이 인자 조실(祖室)이지.(42분20초~60분20초)




(4/4)----------------

그래도 원청 노장님이 살은 오지게 쩠어. 그렇게 많이 살찐 이는 없어, 남자로서.
머리로써 모가지로써 몸뚱이가 거지반 같어. 똑 깍지동만하게 생겨 가지고 옷을 못 입어. 아무리 해도 여가 벌어져 버리고 인자 옷이 안 맞아.

그래 가지고 항상 이러고 앉아 있으면은, 우는 상(相)이라, 여가 이렇게 붙어 가지고.
볼때기도 뻘-겨. 참 그렇게 못난 이는 천하에 없거든. 뻘-게 가지고는 '헤-' 하고 앉아 있는 노장이여.

아, 만공 큰스님이 법(法)을 그리 전(傳)했으니까, 대중은 잔뜩 모여 있으니까, 와서 설법을 청(請)할 거 아니어.
대중이 모도 그저 인자 참 '보월 큰스님께서 설법해 줍소사' 하고 대중이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했는데 안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비구 · 비구니 · 우바새 · 우바이, 사부대중이 꽉 짜서 들어앉았다 그 말이여.

꽉 들어앉았고 또 법당(法堂)이라는 것은 대중만 들어앉아 있는 것이 아니어. 칠부대중(七部大衆)이 모두 와서 있는 거여. 칠부대중이라 하는 것은 비인(非人) 등(等)이 있어. 사람 아닌 등(等)이 있어. 비인(非人) 등(等)이란 모도 귀신, 귀신 등류(等類)가 있거든.
거 부처님 설법한다고 비인(非人) 등이 다 모여 있어서, 거 위엄(威嚴)이 무서운 것이거든. 설법상(說法床)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란 말씀이여.

아, 그런데 올라가시라고 하니까 인자 올라갔지.
아, 좀 연습이라도 해 보고, 좀 혼자 뒷방에서라도 해 보고 그러고 올라가야지, 그냥 올라가라고 헌다고 생전 안 하다 올라가 논게 뭔 말이 나올 게 있나, 아무 말도.

법(法)이라 하는 건 누가 아나?
이것도 법이고, '억!'도 법이고, '뚝!' 이것도 법이고, '뭣이 어째 이놈!' 이것도 법인데, 아무 거나 쓰면 되지마는 못써. 쓸성 싶어? 안되거든.
어떻게 그놈 턱! 쓰면 그놈 잡아 가지고 패궐(敗闕)을 뒤집어버리면 꼼짝달싹 못한 것이여.

아, 올라가 논게, '설법(說法)해줍소사' 헌께 올라가 가지고는 엉뚱한 넨장—만공 큰스님이 올라가서 설법하면 잘하지, 설법을. 만공 큰스님 설법.
그 한번 설법을 해 놓으면은 그만 중생의, 그 중생의 번뇌 망상이 스르르르르 없어져 번지고 그 법 믿는 마음이 '하, 부처님' 하고, 이 마음이 돌아 나온다 말이여. 음성(音聲) 가운데.

그런 설법을, 게송(偈頌) 읊은 걸 늘 들었으니 '나도 인제 설법(說法)하면 저렇게 한번 하리라' 고 생각은 간절했다 그말이여.
아 그러면 좀 익혀 가지고 해야 할 텐데, 생전 익히지도 않고 올라와서 되나?

또 올라와서는 아,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끝에 설법 다 하고 내려와서 하는 법인데, 아 그냥 올라앉아서 처음에 막 올라앉아 가지고 그놈부텀 내놓는다. 마치고 내려올 놈을 한다 그말이여.

뚱뚱한 노장님이 법상(法床)이 능~청 해 가지고 앉아, "웬갱~ 법계~" 운다 그 말이여. 그냥. 울어 버려.
아, 그러니 보통 사람과 달라서 얼굴이 그래 크고 뚱뚱한 이가, 본래 또 우는 것 같이 생겼는데 '웬갱법계~'를 하고 우는데, 볼 수가 있나? 참 볼 수가 없지.

그럼 바로 그 앞에서 혜성이라고 뚱뚱한 조카 상좌, 한 놈이 있는데, 얼굴도 그놈도 또 뚱뚱혀. 모두 뚱뚱한 것들.. 뚱뚱한 조실 스님 밑에 뚱뚱한 놈도 앉았다가, 이래 보더니 "하하 하하하, 아이고 죽겄네" 하고 그러고 웃어 버렸네. 뚱뚱한 사람이.

아, 그래 놓으니 그만 조실 스님도 올라가서 '웬갱법계~'를 하면서 울었지, 아, 이 혜성이라고 이놈도 보고는 손뼉을 치면서 웃어버린게 노장님이 법문도 못하고 이러고 앉았지.
앉아 있는데, 조해운 스님이라고 그이는 입승(立繩)인데, 또 입승 스님도 그만 혀. 그렇게 크던 않아도 그 뚱뚱하니 그렇게 생긴 이가 입승인데 뒤뿌리라 그랬다. "웃지마라, 웃지마! 히히히히히"
웃지 말라고 해 놓고는 '웃지마라, 웃지마라' 해 놓고는 '히히히히히히' 아! 이래버리네.

아따, 비구니 대중, 그 사부대중이 꽉 모였다가 웃음판이 되아 번지고 말았소. 그러니 보월 큰스님이 그렇게 견성을 크게 해 가지고 설법상에 올라가서 그런 우세를 했다 그 말씀이여. 그 송담(松潭) 스님이 그런 우세할까 싶어서 첫 설법상에 안 올라온 것이여. 아 한번 턱 올라와서 우세를 해야사, 척...

그 그다음에는 한번 우세하고 나서는 생전 게송 한 번 안 읊어. '원공법계' 소리 한마디 한 일 없어. 참 그 평생을 못 들었구만, 그 우세 한 번 하고는 안 혀.

아, 한번 올라와서는 그런 우세를 헐 요량하고 터억 한번 할 것인데, 아 온 대중이 그만 모다 웃고 그런 바람에 아 얼마나—그래도 그 가운데에 모도 발심(發心)은 다 했거든. 다 믿고 더 발심하고, 나중에 보월 큰스님 법상에...
그래 그 뒤에는 법문 못하고 내려왔어. 내려와 앉았다가 조실방(祖室房)으로 내려왔는데 발대죽을 떠 받쳤어.
우세 아니라 더 그랬어도 하나도 소용없고 위법망구(爲法忘軀)여. 법 밖에는 거기에서는 대중이 몰랐어. 그래가지고는 그 큰스님을 모시고 법(法)을 배웠어.

아, 그러니 여기 한번 올라와서 뭐 참 한바탕 그 우스메 소리 한번 해도 좋고, 우세를 잔뜩 해 가도 좋은데, 올라가란게 안 올라가고 서서 그냥 강연식으로 한마디 해 버리니, 우리 대중 모도 여러분들이 기대가 어긋졌어. 이것으로써 오늘 설법은 마치고.


그다음에 한 말씀이 있는데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처음에 여기 설법회 조직할 적에 24일날 관음재일로 설법을 이제 하기로 했는데 그 대중은, 설법 청중(聽衆)은 만약 몇십 명이 오시면은—몇십 명이나 원, 숫자가 얼마 될는지 모르지마는—내지 백 명, 이백 명, 그 안쪽 오십 명 허드래도 한때의 공양(供養) 올리기가 무척 어려와.
왜 어렵냐? 여가서 논 한되, 한 되지기, 밭 한 되지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

말키 또 적수건곤(赤手乾坤)으로 모여든 학자(學者)만 모여서 올 삼동에도 그래도 그럭저럭 학자가 한 수십 명 모여 지내고 또 청신녀 대중이 수십 명 모여 지내고 해서 합참 수십 명 이렇게 지냈지마는 아무것도 없지.
아무것도 없고, 그러면 설법을 한 달에 한 번씩 하는데, 24일 날 설법하면은 무슨 양식(糧食)으로써 밥을 지으며, 거기에 따른 무슨 반찬 등류를 뭣 뭐 사다가 만들며, 이런 것이 다 예산에 다 서 있지 않고 아무것도 없어.

허니까, 내나 해야 우리 보살님 대중께서 당신 모두 그날 설법 듣고 불공(佛供) 올리는 그게 여유, 쌀도 그저 당신 솥을 한 되를 가져온닥 하더래도 그래도 그 두엇이 먹을 수 있고, 돈도 돈 백 원 가져 오더래도 그래도 그 뭐 반찬 등류를 살 수도 있고.
그래저래 해서 대지 하나씩을, 쌀 대지 하나씩 해서 하나씩 들려서 매호(每戶)에 일인당 얼마씩 하고, 돈 백 원씩 그저 동참 부처님께 불공 올리고.

그날은 관음재일(觀音齋日) 날이니 달달이 관음재일... 어찌 재일(齋日)이냐?
재일 날은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불공(佛供) 올리는 날이 재일이니까, 재일(齋日) 불공(佛供) 올리자 해 가지고는 고 대지 하나씩을 가지고 와서 고 대지에다가서 쌀을 조금씩 넣고 돈 백 원씩 넣어 가지고 가지고 와서 동참(同參)하기로 했는데 첫 달 몇 달은 잘 됐습니다.
잘 가지고 오다가 한 서너 너덧달 지내가니까 차대기도 다 잊어버리고 아무것도 이제 안 가지고 온다 허다, 나중에는 혹 '잊어버렸다'고 하고, 종이에다 좀 싸 가지고 오다가 그다음에는 종이 같은 것도 없고.

그다음에는 인자 또 모도 오시면 오신 청신녀께서 그저 돈, 돈 백원씩 갖다가 그저 부처님 축원하면 놓은 이도 있고 안 놓은 이도 있고, 이리저리 해서 해 보니 항상 인자 그날 수입 가지고 그날 하기가 모지랍니다.

그러니 모지란 여기에는 글안해도 참 그래도 이 사찰이라는 것이 유지해 나가는데 있어서 그 모두 여유가 조금 있어 나가야사 되는 것인데 그 여유는 그렇게 없어져 버리고 말아서, 그러나 저러나 그렇게 많이만 와 주시면 설법을 해 드리려고 작정을 하고 있는데.

마침 보살님네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몇 분이 회의를 해 가지고 '우리가 무상정법(無上正法)을 배우고, 위없는 참선 해탈(解脫) 정법을 배우는데, 한 달에 우리가 한 번 아니면 두 번 와 배우는데, 한 번씩 초승[初生] 기도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은 초사흗날부터서 초이렛날까지 기도를 우리가 하면 좋겠다'
그러면 그 기도비를 무슨 많이 내는가? 본래 관음재일 날이면은 쌀 한 됫박 가져가고 돈냥 가져오는 고놈 달달이 가서 관음재일날 기도 모시고 설법 듣고 오는 고놈, 내나 갖다가서 초사흗날 입재해서 이렛날까장 기도해 주시면 대단히 좋겠다.

그것이 복전(福田)이고, 천하에 천상천하에 복혜양족(福慧兩足)인데, 복(福)도 짓고 혜(慧)도 닦아야지, 혜(慧)만 닦아 되나?
우리가 염라대왕도 그 관세음보살님한테 기도 드리는 날, 우리도 초사흗날 입재해서 초아흐렛날까지 그 사이에 기도를 드릴 것 같으면 그 복이 기하(其何)오?

어째 복이냐?
꼭 부처님한테 쌀 갖다가 한 되 올리고 돈 백원 같은 거 올려서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쌀과 그 돈을 이렇게 갖다가 부처님한테 놓으면은 그것이 성금(誠金)인데, 그 성금을 모아가지고는 여기에 모아서 도 닦는 스님네가 위성도업(爲成道業)하여 응수차식(應受此食)이다. 도를 닦기 위해서 그 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먹어야 하는 것이니, 그 도인(道人)들 공양(供養) 올리는 그 공덕(功德)이 그렇게 크고, 그것이 복(福)이 그렇게 장하다 그 말씀이여.

그런데 싫어서? '아이고, 그 기도만 헐라고 허니 가기 싫고 나 안 갈라는구만'
그러한 기도는 안되아, 소용없어.

마음껏 으로 희사심(喜捨心),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내가 재세시(在世時)에, 세상에 있어서 이러한 복(福)을 짓게 되니 만행(萬幸)하고 다행(多辛)하구나. 내가 미래에 이 복(福)으로써 속히 내가 성불(成佛)해서 나를 깨달아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청복(淸福)이고, 이것이 참으로 맑은 복이고, 꼭 할 일이다'
이렇게 원(願)을 발(發)해 가지고 참여해 주서사 큰 복이다 그 말씀이여.

그 뭐 그렇게 딱 들어온 놈은 조금도 딴데 허비하지 않고, 여기 똑 모아서 도 닦는 스님네의 공양해 올리는 것이여. 부처님한테는, 부처님이 증명만 하고 보시기나 하지, 부처님이 무슨 공양을 잡순가 뭣한가?

이래서 기도회를 조직했는데, 이달부터 그 기도 회원은 딱 써 가지고는 카드를 척 만들어서 요래 뽑으면 쑥쑥 나오게, 딱딱 해 가지고는 일 년 열두 달을 그렇게 기도를 해 나갈 것입니다. 초사흗날부터서 이렛날까지.
오시나 안 오시나, 참예(參詣)하나 안 하나, 여기 와서 무슨 뭐 그 많이 그 모도 회원이 기도회원이 있으니까 와 보시면 알 것 아닌가. 여기에 한번 기도 모시고 십악참(十惡懺)해서 아침마다 3시에 해 나가는 거, 한번이나 안 한 때 있어? 우리가 한 번이나 안 한 거 봤소?

우리 인생은 바다 가운데 버큼처럼 나와서 버큼같은 이 몸뚱이로 반다시 이런 복 하나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이여.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인댄 금생수자(今生受者)가 시(是)여. 전생(前生) 일을 너 알라고 말아라. 네 전생 일을 알라고 말고 금생(今生)에 보아라.

왜 저놈은 눈이 멀어가지고 저렇게 터덕 거리냐?
왜 저놈은 벙어리가 되어 말도 못하느냐?
왜 저놈은 저렇게 웬 몸뚱이라도 하나 팔도 손도 모두 못 쓰고 불구자가 되었노?
왜 저놈은 웬 몸뚱이가 저렇게 터져서 사방 문둥이 만신창이 되었노?
왜 저놈은 밤낮 지랄병으로 가다가도 그만 죽는 시늉으로 떨떨떨떨 떨다 죽노?

말키 그것이 인과(因果)로써 죄짓고 죄받는 것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생사(前生事)가 그거여.
어떤 이는 국왕 대신이 되고, 그거 무슨 훌륭한 백만장자(百萬長者), 부귀 장자(長者)가 되고 그러냐 그말이여. 그거 다 복 짓고 다 나온 이는 그렇게 되는 거 아니어?

여까장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 또 영가단(靈駕壇)으로 말하면은 한번 돌아가신 이를 영단(靈壇)에다가 모시면은 이렇게 해 나가기를 날마다 그저 법보재자(法寶齋者) 축원(祝願)해 나가기를 이 절 없어지도록 까지,
이 절은 아직까지 인자 재단법인(財團法人)을 하려고 있으면서 겨우 땅 사고 인자 이 집 짓고, 허든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정관(定款)도 차츰 인자 만들어서 5인 이사(理事)를 두어 가지고서는 언제든지 법보선원을 법보단을 잘 만들..

이 법보에 만원씩 넣으면 그놈을 잘 저축하고 저금해 가지고 이자 따서 재사 지내주고, 그놈을 가지고, 늘 이자를 가지고는 선방 해 나가니까, 항상 뭐 인자는 인자는 다시 무슨 뭐 어떻게 누가 없앨라야 없앨 수가 있어?
한두 분이 무슨 뭐 없앨라고 없앨 수가 있나? 무슨 뭐 여기 누가 와서 재단법인 해 가지고 이사(理事) 다섯이 다 계적... 없앨 것인가?

이렇게 해서 선방(禪房)을 해 나가야 하겠으니, 그 선방 해 나가는 공덕이—돌아가신 그 영혼 한 분이 들어왔다면 그분에 조로 만원이 들어왔다면 그 만원이 여기에 기본재산이 되어가지고 늘 이자가 아래로 이 절을 유통해 나가고 이렇게 모도 도 닦아 나가니,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선방이 되어 나가니 그 영혼이 얼마나 기가 막힌 큰 대복(大福)을 지었으며.

한때 선객...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있습니다. 사십이장경을 보시면 아십니다.
한때 도인(道人) 공양시키는 공덕이 어떤가 좀 보시란 말이여. '몇 무량겁을 그 복을 받느니라' 했으니 아, 여다가서 그렇게 기본재산 만들어 주는데 언제든지 해 나가거든. 그러니까 모두 다 그저 그렇게 다 알으시고.

영향상종(影響相從)이니라. 깊은 골짜구니에 가서 소리를 지를 것 같으면은 그 메아리가 '억' 하면 따라 '억' 여기도 그렇게 나느냔 말이여.
그와 같이 메아리 소리 따르듯이 그러한 인과가, 대복도 그렇게 모도 내 몸뚱이에 이렇게 모도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믿어주시고.

그러나 저러나 그러한 법은 그저 유위법(有爲法)이고, '함이 있는 법'이니, '함이 있는 법[有爲法]'이라는 것은 복을 많이 많이 기가 막히게 지어서 국왕 대신, 임금이 되기를 수억만 년 임금이 되어 가지고 복을 받다가, 그 임금 복 다 받으면 퇴타하고 타락할 때가 있어서 도로 그만 타락하는 복진타락(福盡墮落)이여. 가난한뱅이가 되기도 하고, 또 죄 지으면.

하지마는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없어.
한번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떡 해 놓으면, 없어지다니 뭣이 없어져? 이건 무위법(無爲法)이여. '함이 있는 법'이 아니어. 타락하는 법이 아니어.

이러한 정법을 여기서 이렇게 다 배와 가지고서는 이렇게 닦아 나가시는 우리 대중 여러분들! 항상 항상 난조지상(難遭之想)을 가지셔. 난조지상(難遭之想)! 만나기 어려운 상(想).

어쩌다가 내가 인생난득(人生難得)인데, 사람 되었지.
인생 얻어 가지고 또 사람 되어도 이렇게 도문(道門)에 나오기 어려운데 도문에 나왔지.
이렇게 또 집, 고향 향당(鄕黨)을 여의어 버리고 도문에 들어와서 도학자(道學者)가 떡 되었지.
이 난조지상(難遭之想), 만나기 어려운 상을 항상 지어 가지고서는 어서 속히 속성대각(速成大覺)해야, 어서 속히 내가 나를 깨달아 광도중생(廣度衆生)하실지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다.

불발소승심(不發小乘心)이여. 소승심(小乘心)은 발(發)하지 말아라. 나 혼자만 견성 해탈(解脫)혀? 무슨 놈의 짓이 그런 놈의 짓이 있어?
보위중생(普爲衆生)이다. 널리 모든 중생을 나와 똑같이 생사해탈(生死解脫) 세계로 모도 제도해 주시기를 바라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법은 마쳤습니다.


아휴.

내가 이것을 잘 듭니다.
이거 드는데, 이게 '왜 들겄느냐?' 말이여. 생각해 보시오. 왜 들어?

모두 이 작대기를 보라고 들지.

작대기 보는 놈을 한번 봐봐.
그 보는 놈을 턱 보면은 작대기도 아니요, 냉기도 아니요, 대갈빡 꼬래기도 없어.

세상에 이 드는 그놈을 봐. 그놈!
이 드는 놈을 보는 그 물건이 '심마물(甚麽物)고? 무슨 물(物)이냐?' 그말이여.

(주장자로 법상을 치다)
이렇게 알려줘도 답 한마디 없으니 웬일이야.(60분21초~1시간20분55초) (끝)




[법문 내용]

<송담 스님 법문>

전강 조실 스님에 대한 송담 스님의 신심 / 조실 스님 계실 때에 정말 생사 문제를 이마빡에다 써 붙이고 철저하게 정진하셔서 우리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마치자 / 말 도둑 이야기. 구두선(口頭禪), 의리선(義理禪)은 우리의 생사해탈과는 하등(何等)에 관련이 없다 / 여구두연(如救頭燃)의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하라.


<전강 선사 법문>

(게송)명월근촌저~ / 묘리(妙理)를 붙일수록에 진흙 구렁텅이에 점점 더 빠지고 점점 더 들어간다 /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公案法)이여. 참선 공안법 / 주금강(周金剛) 법문 / 주금강이가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태워 버린 그 도리, 용담(龍潭) 큰스님이 촛불을 비춰 줬다가 탁! 꺼버린 그 도리는 그 무슨 도리며, 그거 다 공안(公案) 도리(道理)인데, 하나도 어김이 없이 바로 탁탁 일러야 하는 것이여.

만공 스님 수제자인 보월 스님께서, 만공 스님이 운암 스님에게 보내는 공안 답 편지를 불 태운 일화 / 알 수 없는 화두 의심 하나를 가지고 비비고 나가거라. 뚫고 나가거라. 정진해 나가거라. 이것이 화두에 제일 묘(妙) / 분심(憤心)을 가져라 / 알 수 없는 이것이 참선법(參禪法) / 인신난득(人身難得).

보월 스님 첫 설법 이야기 / 복혜양족(福慧兩足)해야 / 도인(道人)들, 수행자들 공양(供養) 올리는 그 공덕(功德)이 크고, 복(福)이 장하다 / 네 전생 일을 알라고 말고 금생(今生)에 보아라 / 참선법(參禪法), 한번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해 놓으면, 이건 무위법(無爲法)이여. '함이 있는 법'이 아니어. 타락하는 법이 아니어 / 난조지상(難遭之想), 만나기 어려운 상 / 불발소승심(不發小乘心)이여. 소승심(小乘心)은 발(發)하지 말아라.


"어쩌다가 저 같은 사람이 조실 스님을 믿게 되었는가 모르겠습니다" 이러헌 말을 제(송담스님)가 너무나도 감격에 겨워서 전강 조실 스님한테 그 고백을 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마는.

저는 '일생을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한 폭을 대고 참 썩은 나무둥치,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 가지고 그렇게 조용하게 그렇게 정진을 하고, 다른 공부 잘하는 도반들 뒤를 따라가면서 그리고 조실 스님의 뜻을 하루하루 속으로 명심하면서 정진을 그렇게 허리라' 이러헌 생각으로 쭉 지낼 뿐.

말 도둑 이야기.
배워서 알고, 들어서 알고, 보고 듣고 허는 것을 자꾸 많이 모아 가지고 자기의 살림을 삼는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점점 진짜 참 공부와는 멀어지는 길밖에 없는 것.

거다가서 중생이 아무리 묘리(妙理)를 다 붙여 보고, 또 그 이치를 다 떼 번지고 보고, 별별 짓을 다 해 봐라, 진흙 밭에 빠진 놈이 걸음 걸음이 더 빠지는 법이여. 그래 오직해야 '찾다가 죽는다'니? 찾다가 죽어.
무슨 이치인가? 찾다가 죽는 것이 공안법(公案法)이여. 참선 공안법이여.

금강경, 주금강이가 태워 버린 그 도리는 그 어째서 태웠으며, 촛불을 비춰 줬다가 탁! 꺼버린 그 도리는 그 무슨 도리며, 그거 다 공안(公案) 도리(道理)인데, 하나도 어김이 없이 바로 탁탁 일러야 하는 것이여. 공안이라는 게 그려.

인천서 서울을 갔다 오면은 '정거장이 몇이냐?' 하는데 가서 '일곱이다' 일곱 정거장 가운데, 부평은 어떻게 생겼으며, 소사는 어떻게 생겼으며, 거 주욱 남대문까지 다 고대로 딱딱 말해야 되지. 보도 않고는 할 수 없거든. 공안이라는 게, 화두가 그렇게 되어 있어. 따악 있는데.

다맛 우리 부처님 정법문중(正法門中)에는 '심마물(甚麼物)이냐?' 이뿐입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무슨 물건인고?' '밥 먹고, 오고 가고 오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알 수 없거든.
지가 무슨 이치를 붙여 죽지 말고, 대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알 수 없는 그놈 하나를 가지고 비비고 나가거라. 뚫고 나가거라. 정진해 나가거라. 이것이 화두에 제일 묘(妙)입니다.

꼭 부처님한테 쌀 갖다가 한 되 올리고 돈 백원 같은 거 올려서 그것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쌀과 그 돈을 이렇게 갖다가 부처님한테 놓으면은 그것이 성금(誠金)인데, 그 성금을 모아가지고는 여기에 모아서 도 닦는 스님네가 위성도업(爲成道業)하여 응수차식(應受此食)이다. 도를 닦기 위해서 그 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먹어야 하는 것이니, 그 도인(道人)들 공양(供養) 올리는 그 공덕(功德)이 그렇게 크고, 그것이 복(福)이 그렇게 장하다 그 말씀이여.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없어. 한번 내가 나를 깨달아서 생사해탈을 해 놓으면, 없어지다니 뭣이 없어져? 이건 무위법(無爲法)이여. '함이 있는 법'이 아니어. 타락하는 법이 아니어.

내가 이것을 잘 듭니다. 이거 드는데, 이게 '왜 들겄느냐?' 말이여. 생각해 보시오. 왜 들어?

모두 이 작대기를 보라고 들지.

작대기 보는 놈을 한번 봐봐. 그 보는 놈을 턱 보면은 작대기도 아니요, 냉기도 아니요, 대갈빡 꼬래기도 없어.

세상에 이 드는 그놈을 봐. 그놈! 이 드는 놈을 보는 그 물건이 '심마물(甚麽物)고? 무슨 물(物)이냐?' 그말이여.

(주장자로 법상을 치다) 이렇게 알려줘도 답 한마디 없으니 웬일이야.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