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이시여. 높고 높은 동(動)함이 없는 법(法) 가운데 왕(王)이시여. 나유미후조육창(那有獼猴跳六窓)이리요. 어찌 잔나비, 원숭이 같은 건데, 원숭이 떼들이 어찌 육창(六窓)으로 드나들면서 놀아나리오.
소지진공무면목(笑指眞空無面目)헌디, 웃고 진공(眞空)을 가리키되 면목(面目)이 없어. 웃고서, “허허” 하고 웃고서 진공을 가리키는 데 면목이 없더라. 면목이 없는데, 연운퇴월하천강(連雲推月下千江)이로구나. 구름이 꽉 연(連)해 있는데 달을 밀추어서 천 강(千江)에 내리게 하더라. 구름이 꽉! 찌어서 달이 안 보이다가 그 구름 사이로 달을 밀추어 가지고 일천 강에 그 달빛이 찬란히 빛나게 되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1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최상승 법문(最上乘法門),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통해서 감명 깊게 우리 사부대중이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열반(涅槃)하시기 한 5, 6년 전부터서 『일대기(田岡禪師一代記)』를 비롯해 『몽산법어』, 그밖에 『초발심자경』 그밖에 불교의 여러 조사(祖師) 스님네의 기연(機緣)과 불조의 기연, 여러 가지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수없는 설법을 하신 것을 녹음을 해 놓은 것이 큰 릴(reel)로 100개, 또 작은 릴로 50개 이렇게 해서 150개나 되는 릴에다가 몇백 시간을 연거푸 틀어도 다 틀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방대한 법문을 녹음(錄音)을 해서 소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그 한 편씩을 듣고, 또 대중들도 결제(結制) 중에 그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전국 모다 여러 선방에서도 이 법문을 듣고, 또 여러 사부대중도 그 테이프(tape)를 구득해서 다 듣고, 외국에 가 계신 분들도 테이프를 구해서 모다 듣고, 이렇게 해서 천하에 이 최상승 법문을 두루두루 듣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정법(正法)이 무엇인가를 알고 거기에 차츰 신심(信心)을 내서 참선(參禪)을 할려고 이렇게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에 어느 법문이 더욱 좋고, 좋지 못하고 한 것이 있으리오마는 언제나 들을 때마다 법문마다 새롭고 참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도 더욱이 오늘 들은 법문은 참 감명 깊게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참 누누이 말씀이 계셨지마는 이 사바세계에 오욕락(五欲樂)—재산이다, 명예다, 권리다, 색(色)이다, 안락이다, 이러한 오욕락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시간과 목숨까지라도 거기에 바치면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말세 중생(末世衆生)들이 어떻게 해서 최상승법, 이 생사(生死) 없는 영원한 진리를 깨닫는 최상승법을 믿게 되며 또 그걸 믿고 실천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온 세상은 온통 명예와 권리와 부귀영화, 모다 색(色), 모다 이러한 것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갖다가 보다 더 많이 획득을 하고, 그것을 수용을 하기 위해서 참 부자간에, 형제간에, 이웃간에 모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싸우고 있는 이 속에서 어떻게 해서 우리는 불법(佛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게 되었는가?
그래서 이러한 것을 비유해서 「화리생련(火裏生蓮)이다. 불 속에서 연꽃이 났다」 그 연꽃이라 하는 것은 진흙과 물속에서 뿌리를 박고 피는 것인데, 훨훨 타고 있는 불 속에서 연꽃이 어떻게 필 수가 있겠습니까? 그 필 수 없는, 도저히 상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불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에다가 그렇게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달마대사(達摩大師)께서도 150세의 고령으로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 가지고—양무제가 중국 천자(天子) 중에서는 제일 불법에 대한 신심이 돈독한 천자인데, 그분은 천자이면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정사(政事)를 볼 만큼 그렇게 신심이 돈독을 했습니다. 절을 짓는다든지, 경을 판각을 해서 모다 편다든지, 스님네를 모다 도 잘 닦아가도록 많은 스님네를 외호를 한다든지, 탑을 세운다든지,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그러한 상(相)이 있는 그러한 불사(佛事)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불법(佛法)을 여의고는 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불사 밖에는 모르고.
그러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칙사(勅使)를 보내서, 저 남해로 보내 가지고 달마 스님을 영접을 해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짐(朕)이 이렇게 절을 짓고 탑을 세우고, 많은 스님네를 이렇게 도승(度僧)을 하고 그랬으니 짐의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하고 이렇게 달마 스님께 자기가 그동안에 한 불사에 대한 공덕도 자랑 겸해서 또 달마 스님한테 칭찬도 받기 아울러서 그렇게 해서 떠억 물으니까, 달마 스님이 “소무공덕(小無功德)입니다.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달마 스님이 ‘아! 참 장하시다’고, ‘천자로서 그렇게 불법을 숭앙하고, 이렇게 불사를 많이 하니 그 공덕이 참 한량이 없어서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터억 찬양을 해 주었으면 양무제가 신심을 더욱 발해 가지고 온통 중국 천지를 아주 불법으로 장엄을 하고 그럴 텐데, 아 그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러니까 양무제가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그렇게 물어보니까, “확연해서 성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그러면 내 앞에 있는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보니까, “불식(不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양무제와 달마 대사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 양무제가 달마 스님을 푸대접을 해서 달마 스님은 그길로 돌아서서 양자강을 건너 가지고, 위나라 소림굴(少林窟)에 들어가서 9년 동안을 묵언을 하면서 면벽(面壁)을 하고 계시다가, 혜가 대사(慧可大師)가 나타나 가지고 팔을 끊어서 올리고 신심을 보여 가지고, 드디어 달마 스님의 법을 이어받았습니다마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달마 스님이 그때,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를 찬양을 해서 그렇게 해서 양무제의 절대적인 외호(外護)를 받으면서 법을 설하고 참선법을 선양을 할려고 했다면은 중국 천지에 최상승법을 그렇게 널리 펼 수도 없고, 융숭하게 선양할 수도 없었고, 오늘날까지 참선법이 전해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가장 성스러운 진리입니까?”) “확연무성(廓然無聖)입니다”
“짐을 대한 그대는 누구냐?” “모르겠소”
탁! 이렇게 함으로써 여지없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의 그 면목을 바로 거기서 드러내 버린 것입니다.
양무제는 본래 옹주, 중국에 옹주(雍州)라는 데가 있는데, 천자가 되기 전에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습니다. 옹주자사로 있었는데, 치(郗)씨라고 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황후(皇后)가 아니고 치씨 부인인데, 참 얼굴이 예쁘고 그런데 성질이 어떻게 표독하고 질투심이 강했어.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다른 여자와 가까이 한 꼴을 보지를 못하고,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오직 자기만을 위해 주고, 자기만을 사랑해 주고, 자기만을 갖다가 알아주기를 그렇게 바랬어. 조금만 한눈을 팔거나 그러면은 어떻게 강짜가 심하고 투기가 심하던지 도저히 용납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도 그때 당시 임금이라든지 또는 원님이라든지... 옹주자사라 하면은 아마 원님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고관을 지내면은 다 첩실(妾室)도 있고 다 기생과 놀기도 하고 술도 먹고 그러기 마련인데, 치씨 부인은 그러한 꼴을 못 봐 가지고 나중에는 어떻게 독기(毒氣)를 피우다가 자기가 자기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가지고 집 앞에 있는 우물에 빠져 가지고 자살을, 투신(投身)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쫓아와 가지고 우물 속에 들어가 가지고 간신히 건지려고 가니까 어느새 사람은 간 곳이 없고 큰 무서운 독사, 아주 오색이 찬란한 금색 구렁이가 되어 가지고는 혀를 널름널름. 그래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사람들이 접근을 못했어. 눈은 번쩍거리면서 오색이 찬란한 비늘이 번쩍거리면서 그냥 무서운 독사의 어금니를 갖다가 벌리고서 혀를 널름거리는 통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구제하지를 못하고 기절초풍을 해 가지고 우물에서 다 기어나와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런데 꿈에면 그 무제(武帝) 자고 있는 후궁(後宮)으로 무서운 독룡이 기어 들어와 가지고는—본래 처음에 들어올 때에는 구렁이로 들어와 가지고는 스르르르 깜짝할 사이에 본래의 그 치씨 부인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아양을 떨면서 품안으로 파고들어. 깜짝 놀래 가지고 양무제가 눈을 떠 보면은 간 곳이 없다 그 말이여. 아, 후궁에만 들어가면 그놈이 나타나 가지고 독사가 되었다 사람이 되었다 그런 통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꼬치꼬치 말라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그 연못에서 그냥 꼬리를 치면서 물을 치면은 거기서 안개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그래 가지고 양무제가 할 수 없이 그 우물 위에다가 치씨 부인의 사당(祠堂)을 짓고, 인자 초상화를 그려서 딱 모시고. 그래 가지고 『자비도량참(慈悲道場懺)』이라 하는 십 권에 달한 참회하는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이라고 하는 십 권의 책을 저술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고승(高僧)을 청해다가 도량참법에 의해서 치씨 부인을 갖다가 원한을 풀고 그래 가지고 천도(薦度)하는 의식을 거행을 했는데.
그 치씨 부인이 결국은 그 공덕으로 그러한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면서 공중에서 소리를 치기를 “양무제한테 내가 그동안에 옹졸한 생각으로 그런 독을 품다가 결국은 투신 자살해서 이런 흉악한 몸을 받아 가지고, 결국은 아주 복수를 해서 당신도 죽이고, 당신을 가까이 한 모든 여자를 갖다가 다 말려서 죽이려고 내가 작정을 했는데, 『도량참법』을 만들고 사당을 지어서 나를 고승을 청해다가 이렇게 천도를 해 주니, 내가 모든 원한을 풀고서 내가 천상에 올라가니 참 감사하다”고. 이렇게 올라간 뒤로는 다시는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는 일도 없고, 그 우물에서 갖다가 꼬리를 치고 모다 그런 일도 없고 조용해 졌는데, 그 뒤로 양무제가 지은 『도량참법』이라고 하는 참회법이 널리 세상에 행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무슨 재물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색(色)에 대한 욕심이라든지, 명예 ・ 권리에 대한 그런 일어나는 욕심을 이기는 것도 그것도 모두가 어려운 일이고 중대하지만, 그 여러 가지 가운데에 가장 수행하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고, 자기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쌓아 온 모든 공덕을 한 생각에 멸진(滅盡)을 시켜 버리는 그 무서운 것이 바로 진심(瞋心)을 내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고 하는 것은—우리가 사바세계에 살아가는 데에 정말 진심을 내지 않고는 살기가 어렵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진심, 아마 이 세상에 사람이 지금 현재 40억이니 50억이니 하고 또 세계 역사가 생긴 이래로 몇 천만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심(瞋心)을 한 번도 내지 않고 사는 사람은 몇 사람이 될는지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에 왕으로 계실 때에 어떤 문둥병보다도 더 무서운 도저히 치료할 수 없는 무서운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무서운 창병(瘡病)이 걸린 거지를 나수기 위해서, 결국은 환자를 갖다가 치료해 주기 위해서 어명(御命)으로 치료하게 되는데 도저히 그 병이 하도 무서운 병이라 치료할 수가 없어. 그래서 “오직 이 사람의 병은 한 번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이후로 한 번도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한 사람의 피를 뽑아 가지고 약을 제조해야만 이 병을 낫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임금님께 그 의사가 “그러니 이 세상에 성 안 낸 사람을 만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약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한 번도 진심을 낸 기억이 안 나. 그러나 철이 들기 전 어렸을 때는 혹 몰라서 유모한테 가서 물어봤습니다. “내가 혹 철난 뒤에는 진심을 낸 기억이 없지만, 철이 나기 전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혹 진심을 냈느냐?”고 물어보니까, “정말 갓난아기 때부터서 진심을 내신 일도 없고, 철이 난 뒤로도 오늘날까지 진심 내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 그래서 임금님은 의원에게 “내 피를 뽑아서 만들어라” 하니까 “어떻게 감히 상감마마의 옥체에서 피를 뽑을 수가 있습니까?” “괜찮다. 어명이니까 피를 뽑아서 해라” 그래 가지고 피를 뽑아 가지고 무서운 그 병을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그 환자가 병을 낫고서 그래 가지고는 10생(十生)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을 갖다가 갖은 방법으로 부처님을 괴롭힌 바로 조달(調達)이의 전신(前身)이고, 그 어진 상감마마는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신인 것입니다.
어째서 상감마마로서 자기의 피를 뽑아서 무서운 병을 고쳐 주었는데 무엇 때문에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그렇게 부처님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이생에는 부처님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로 태어나시니까 저도 사촌으로 태어나 가지고 가지가지 못된 방법으로 부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다가 결국은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마는.
참, 소승불교에서는 ‘그런 죄를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로 생함지옥을 했다’ 이렇게 보지마는,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정말 조달이야말로 10생을 따라다니면서 부처님께 그렇게 큰 은혜를 갚았다. 조달이의 공덕이 아니면 어떻게 부처님이 그렇게 빨리, 그렇게 크게 대도를 성취를 하셨겠느냐. 조달이야말로 정말 부처님보다 먼저 깨달으신 선불(先佛)이시고 그렇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마는. 순행(順行)으로 항상 뜻을 맞추어 주고, 따라 주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그런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고, 역행(逆行)으로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에 충격을 주면서 고통을 주면서 그래야만 보다 더 큰 발심(發心)과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비단 도문(道門)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속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칭찬하고 좋은 얘기만 해 주고 그러한 친구만을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로 삼지 말아라.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충고해 주고 그러한 친구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만약 조달(調達)이가 10생을 따라다니면서 갖은 악한 행동으로써 고통을 주었을 때, 그것을 갖다가 원수로 생각하고 미워하고 진심을 내고 복수를 하셨다면 부처님은 마침내 성불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고통을 주어 왔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번도 진심을 내거나 원한심을 내서 복수할 마음을 내지 않고, 보다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래 가지고 더욱 정진(精進)을 하셨기 때문에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하신 것입니다.
방금 양무제, 그 치씨 부인이 그러한 악독을 품고서 투신 자살을 해 가지고 독사가 되어서 그렇게 했지만, 양무제는 그것을 독한 마음으로 구렁이를 잡아 가지고 태워서 죽일 수도 있고 그러겠지마는, 그것을 자비심으로써 사당을 짓고 또 『도량참법』을 지어서 큰스님네를 청해 가지고 천도를 잘 해주었으므로 해서 그 악독한 치씨 부인을 천상에 태어나게 했어. 비록 양무제가 그 당시 최상승법을 믿지를 못하고 달마 스님을 알아보지를 못했다고는 하지만, 양무제는 역사적으로 길이 잊지 못할 신심이 돈독한 천자였습니다.
이 진심(瞋心)! 진심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도 여러 경전에 진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에 대해서 누누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련존자(目連尊者)도 오백 생을 두고 타살(他殺)을 당하고, 금생에 와서는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한 부처님의 오른팔과 같은 그러한 성현이 되어 가지고도 그렇게 결국은 외도(外道)한테 타살을 당했습니다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백 생을 두고 그러한 성현이, 거룩한 수행자가 그렇게 아무 허물도 없이 그렇게 맞아서 돌아가셨느냐? 저 전생에 진심(瞋心)을 냈어. 자기 어머니가 자식 내외의 정분 좋게 지내는 것을 보고 그것을 좋게 보지를 않고, 자식 며느리를 미워하고 못살게 구니까, ‘어떤 기운 센 장사가 나와 가지고 저 늙은이 때려죽일 사람이 없겠느냐?’고 이렇게 진심을 내고, 참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그러한 욕설을 퍼부은 그 과보(果報)로 오백 생을 두고 맞아 죽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神通)이 제일인데, 과거에 지은 업으로 금생에 맞아 죽기 때문에 그렇게 참혹하게 외도한테 맞아서 돌아가시게 되면서도 신통을 부릴 여유가 없었어. 그 도반인 사리불존자가 “자네가 신통이 제일인데 신통술로 피하던지, 외도를 갖다가 방어를 하던지 그러지, 어찌 자네가 신통을 어디다 두고 쓸라고 그렇게 참혹하게 맞았나?” 하니까, “내가 과거에 지은 업(業)이기 때문에 신통이란 ‘신’ 자도 생각이 안 났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진심(瞋心)!
그리고 또 홍도 비구(弘道比丘)라고 하는 스님은 다겁(多劫)으로 수행을 잘 쌓아 가지고 머지않아서 곧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단계에까지 왔는데, 문턱에다가 손을 거기다 걸치고서 터억 정진을 하다가 삼매(三昧)에 들었어. 그래 가지고 시간이 흐르는 중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가지고 문이 탁! 닫혀지는 바람에 손가락이 깨져 가지고 깜짝 놀래 가지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까닭없이 진심을 폭! 냈다 그 말이여. 그 바람을 보고 성을 냈는지, 문짝을 보고 성을 냈는지 갑자기—삼매에 들었다가 그 삼매를 깨게 하고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고 하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진심이 폭! 났는데, 그 진심(瞋心) 한 번 낸 그 과보로 바로 뱀이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독사가 되기는 했지만 워낙 다겁을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견성성불할 단계에까지 왔기 때문에 독사는 되었지마는 환하니 다 의식을 매(昧)하지를 안 해 가지고, 재를 갖다가 꼬리로 잘 요렇게 골라 놓고서 꼬리로써 글을 지었어. ‘다생에 내가 수행을 해 가지고 머지않아서 성불을 하게 되었는데, 일기진심수사신(一起瞋心受蛇身)이다. 한 번 진심을 낸 그 과보로 이렇게 뱀 몸뚱이를 받았다’ 한 그런 게송(偈頌)을 써서 그래서 ‘모든 수행자들은 이 게송을 벽에다 붙여 놓고, 크고 작은 모든 진심을 내지 않도록 하라’ 이러한 뜻의 게송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홍도 비구나, 목련존자나, 치씨 부인이나 그밖에도 경전에 나타난 진심(瞋心)의 무서운 것에 대한 말씀이 참 많지마는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고.(처음~40분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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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바세계는 진심(瞋心)을 참! 안 내고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천상(天上)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이여. ‘무엇이 먹고 싶다’ 하면은 벌써 배가 불러져 있고, ‘어디 가고 싶다’ 하면 이미 그 자리에 와 있고, 무엇이고 내 마음먹은 대로 다 되고, 내게 조금도 해로울 일이라고는 일어나지를 않고 나타나지를 않어. 다 내 마음에 편안하고 즐겁고 좋은 일만 있는 곳이 천상입니다. 그러니까 천상에서는 진심(瞋心)을 낼 필요가 없죠. 지옥(地獄)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라고는 없어. 사사건건이 나를 괴롭히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일만이 있어.
그런데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즐거움도 있는가 하면은 괴로움도 있고, 슬픔도 있는가 하면은 기쁨도 있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섞여 있어서 다행히 내 뜻대로 뭔 일이 잘 되는가 싶으면은 금방 꼬리를 이어서 속상한 일이 또 일어나고, 금방 이만하면 참 좋다 싶으면 뜻밖에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슬픔이 닥쳐오고. 형제간에도 정이 서로 의합(意合)이 되는가 하면은 서로 싸우고, 부자간에도 싸우고,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싸우고, 회사에서도 싸우고, 직장에서도 싸우고, 정치도 싸우고, 맨 싸움,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투쟁이 치성하는 시대, 무엇이든지 그저.
서로 대화로써 해결하고, 타협으로써 해결하고, 양보로써 한다면 피차가 다 좋고 모든 일이 순리로 잘 풀려 갈 텐데, 사사건건이 한마디 두 마디 간 뒤로는 벌써 말이 거칠어지고, 제 욕심 챙기느라고 싸움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나라도 시끄럽고, 회사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가정도 그걸로 인해서 화합이 깨지고, 부부간에도 그걸로 인해서 원수가 되어서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인은 비교적 수행에 열중을 하다 보니 언제 성낼 겨를이 없겠지만, 그래도 한철을 지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크고 작은 속상한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거거든.
밖으로 확! 진심(瞋心)을 내서 표현을 하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 진심을 내는 거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꽉 참고—겉으로 목구멍까지 욕설이 나오고, 주먹이 쥐어지고, 곧 그냥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격분을 해도 꽉 참을성 있는 사람은 그놈을 참고서 속으로—표현을 하지 아니한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다 참 그만큼 참을성 있는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대승법(大乘法)에 있어서는 밖으로 표현한 것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표현을 안 하고 속으로만 일어나도 이미 범(犯)한 것이 돼. 그래서 속으로 일어나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니어. 오히려 밖으로 표현해 버리고 그냥 바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편이 속으로 참고 은근히 오랫동안 간직을 하고 속상한 것이 더욱 나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밖으로 표현을 해 버리면 사람들은 보고 ‘저 사람 진심(瞋心)을 잘 내는 사람이다. 저 사람 수양이 덜 된 사람이다’ 할는지 모르지만, 한마디 욕설 퍼부어 버리고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오히려 육체적으로도 좋고, 정신 위생상으로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 안 하고, 속으로 참고 참고 억지로 눌러 놓은 것은 나중에 위장병도 생기고, 신장병도 생기고, 고혈압도 생기고, 천식도 생기고, 기관지도 나빠지고 해 가지고 골병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오목가슴 밑에 주먹같은 적(積)이 생겨 가지고 일생 동안 그놈이 풀리지를 않고 화병(火病)이 나 가지고 결국은 죽게 되고 그러는데, 그 속으로 참는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참는 것이 그렇게 썩 훌륭한 것도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은 진심(瞋心),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릴 수가 있느냐?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다든지 모다 그러한 것, 평상시에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지혜(智慧), 이러한 육바라밀을 항상 평상시에 닦아 가면 차츰차츰 자비심(慈悲心)이 충만하고, 또 모든 마음이 안정이 되고 또 남을 잘 용서하게 되고, 또 그렇게 해서 수행을 쌓아 나가면 그런 속상한 일이 당하더라도 상대방 입장이 되어서 잘 이해를 해 주고서 바로 용서를 하고 풀어 버리고 이렇게 되어 갑니다마는, 이런 것도 하나의 좋은 방편(方便)이 될 수가 있겠죠.
그러나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여러 경전에 진심을 갖다가 진화(瞋火), ‘성낼 진(瞋)’ 자, ‘불 화(火)’ 자, 진화(瞋火)라고 이렇게 표현도 하셨습니다. 왜 진화(瞋火)라고 하냐 하면은, 그 성내는 열뇌(熱惱)가 마치 불과 같다. 왜 불과 같으냐 하면은 그 성을 내면은 무량겁에 지은 모든 공덕(功德)을 일시에 다 태워 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진화(瞋火)라 그러고. 성을 내면은 벌써 눈도 붉어지고, 얼굴도 붉어지고, 몸뚱이도 뜨거워지고 그러고 마음도 갖다가 뜨거워져 가지고는 혈압도 오르고 그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뜨겁게 하기 때문에 진화(瞋火)라 그러거든.
진심을 많이 낸 사람은 열(熱)이 항상 위로 쳐 올라가 가지고 그래서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고, 눈이 붉어지고, 눈이 빨리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은 진화(瞋火)가 일어나지 않게 하느냐? 항상 자비심(慈悲心), 자비심으로써 자기 마음을 윤택하게 만들어. 부드럽고 서늘하고 윤택하게 만들면 자연히 진심의 불이 자취 없이 식어 버리고 사그라져 버린다.
이 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탐심(貪心)도 나쁜 것이고 치심(癡心)도 나쁜 것이지마는, 차라리 백천만 번을 탐심을 낼지언정 한 번의 진심(瞋心)을 내지 말어라. 한 번 진심을 냄으로써 무량겁 쌓은 공덕이 일시에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탐심을 내면은 그걸 안 내면 그만이고, 욕심을 냈다가도 다시 버려 버리면 그만이지만, 진심을 한번 내면은 저 지은 몸과 마음, 저 죽이고 남을 죽여. 한 사람이 집안에서 진심(瞋心)을 내 갖고 있으면 전 집안 식구가 그 독(毒)으로 인해서 모두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진심을 내서 누구를 뚜드려 패고 욕설을 안 해도, 혼자 진심을 내 가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진심을 내고 있으면은 공연히 옆에 있는 사람도 모두가 다 기분이 나쁘다 그 말이여. 더군다나 집안 어른일 때에는 더 그렇고, 회사에 사장이나 과장이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은 더 한 사람이 그렇게 공연히 진심을 내면 전 부하 직원들이 모두 기분이 나뻐. 그래서 모다 의욕을 상실을 하고 그런 것이다 그 말이여. 나라에서도 웃어른이 진심을 내고 그러면은 전 밑에 각료, 백성들이 모다 다 그 해독(害毒)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거거든.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이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원래 조금도 맥히지 않는다, 간격이 없더라. 눈으로 여러 가지 색상을 보는 것이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듣는 것이 원래 간격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주장자(柱杖子)를 터억 들어서 대중에게 보이고, 그리고서 그 주장자로써 법상(法床)을 탕! 한번 치시고서,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전천점설(白鷺下田千點雪)이다. 흰 해오라기가 밭에 내리니 천 점의 눈송이다.
이런 게송을 읊으셨는데, 눈으로 주장자 들은 것을 보건, 눈으로 꽃이 피고 잎이 지는 청황적백의 모든 것을 보건, 또 귀로 주장자 치는 소리를 듣거나, 자동차 소리나 개 짓는 소리를 듣거나 원래로 조금도 막힌 것이 아니다,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주명야암절상량(晝明夜暗絶商量)이다. 밝은 낮이나 어두운 밤에 상량(商量)을 끊어 버려라. 일체 분별 ・ 시비 ・ 비교 ・ 사량 그런 걸 끊어 버려라 그 말이여. 귀로 무슨 소리를 듣고, 그 듣는 그 소리에 대해서 그리 쫓아가 가지고 온갖 분별 사량심을 내고, 눈으로 무슨 사람을 보거나 모든 사물을 보고서 거기에 대한 온갖 사량분별을 내고 시비심을 내. 그것이 바로 경계(境界)에 속는 것이여.
이쁜 사람을 보면은 거기에 집착을 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든 사람을 보면은 미운 생각을 내고, 자기를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은 좋아서 환영을 하고, 자기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진심을 내고 미워하고. 그 한마디 자기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서 속에 ‘요놈 가만 놔둬서는 안 되겠다’ 해 가지고 갖은 악한 방법으로써 끝내 그 사람을 갖다가 못살게 굴고, 모가지를 띠어 버리고 그러한 일이 동서고금의 역사에 참 많습니다마는.
우리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하는 여러 형제자매 도반들은 칭찬한다고 해서 또 내 마음에 드는 일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기에 빠져서 집착할 것도 없고, 나를 좀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나를 좀 해롭게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확! 진심을 내 가지고 보복을 하고 미워하고 끝끝내 그 사람을 못살게 하고 그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도 나는 거기에 떨어지지 않고 화두를 들고, 나를 비방하는 말을 듣더라도 거기에 동요가 되지 말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본래성현하다사(本來成現何多事)냐, 본래, 본래 다 이뤄져. 우리가 본래, 새로 도(道)를 닦아서 성불(成佛)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맛 깨닫지 못할 뿐이지 본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부처님이거든, 우리가. 그러기 때문에 견성성불에 대해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어. ‘그걸 저 부처님이나 닦고, 최상근기나 닦고 그러지 우리는 참선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바쁘고 일이 복잡한데 무슨 참선을 하냐?’ 이렇게 적극적으로 해보지도 아니하고 미리서부터서 자포자기하고 그러지를 말라 그 말이여.
절기당기자부장(切忌當機自覆藏)이여. 모든 기틀을 당해서, 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천 가지 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있지만 그러한 방편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되는 거여. 방편은 잠깐 거기 디디고서 저 건너로 건너가야지,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 부처님의 참다운 뜻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면은 통살을 버려 버려야 하고, 물을 건너가면 배는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야지, 육지에 가서도 배를 짊어지고 다니고 끌고 다니려고 한다든지, 고기를 잡은 뒤에도 계속 통살을 메고 다닌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여.
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이 정법을 믿지 않고 최상승법을 믿지 않고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말 이 세상은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법시대(末法時代)인 것입니다. 투쟁으로 자기도 멸망하고 남도 멸망하는 이러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악독한 세계를 불법이 아니고서는 막을 길이 없고 제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온통 투쟁의 세계가 되었고, 우리나라도 지금 민주화(民主化)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믿고 자기 마음을 비우고 그러한 마음으로 해 나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입으로 민주화를 떠들어 봤자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민주화는 모두가 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과 명리(名利)를 떠나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인류 평화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민주화는 오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정치가(政治家)와 정객(政客),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정말 민족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생각해서 경륜을 가지고 정치를 한 사람은 정치가라 하는 것입니다. 정치가라 그러는 거고.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불타고, 자기의 한 당략(黨略)에 빠져 가지고 설쳐대는 사람은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꾼인 것입니다. 그런 정치꾼들이 날뛰어 가지고서는 이 나라에 민주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인류의 평화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앞으로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참 노력을 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온 세계가 눈에 불을 켜고 사리사욕과 당략에 떨어져서 날뛴다 하더라도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로써 속살림을 해 나가고, 자비와 지혜로써 갑옷을 삼고 등불을 삼고, 정말 국가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 벽돌 한 장이 돼. 그 수십 층 건물도 벽돌 한 장 한 장이 바로 놓임으로써 건물이 준공이 되는 것입니다. 천하없이 많은 벽돌을 갖다 놨어도 바로 쌓지 아니하면 그것이 집이 되지를 않고, 설사 쌓는다 하더라도 이리 삐딱 저리 삐딱 해서 중심을 잃어버리고 100층을 쌓은들 그것은 그 건물은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또 100층을 쌓은들 기초가 튼튼히 되지 아니하면 그 건물은 언젠가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로써 탁! 마음을 가다듬고서 보면 어느 사람이 정치꾼인가, 어느 사람이 진정한 정치가인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하노니, 삼가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 사룁나니, 광음(光陰)을 막허도(莫虛度)어다. 광음(光陰), 시간, 세월을 헛되어 보내지 마십시오.
금생(今生)에 미명심(未明心)하면, 금생에 이 마음을 깨닫지를 못하면, 적수(滴水)도 야난소(也難消)니다.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려우니라. (40분31초~1시간13분5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외외부동법중왕(巍巍不動法中王)~ / 법문을 듣고서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법문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 화리생련(火裏生蓮).
달마대사와 양무제의 만남과 대화 / 양무제가 옹주자사로 있을 때 치(郗) 부인의 진심(瞋心) / 치씨 부인의 천도를 위해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을 저술 /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 부처님과 조달과의 인연. 진심(瞋心), 목련존자의 전생, 홍도 비구 이야기 / 일어나는 진심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다 /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가운데에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 /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
(게송) 안견이문원불격(眼見耳聞元不隔)~ /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모든 경계에,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이뭣고~~~?’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다.
천만 가지 부처님의 방편법(方便法)이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훌륭하지만, 방편법이라 하는 것은 원래 오래 거기에 묶여 있어서는 아니된다 /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써 우리의 마음에 기초를 튼튼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올 것입니다 / (게송) 근백참현인(謹白參玄人) 광음막허도(光陰莫虛度) 금생미명심(今生未明心) 적수야난소(滴水也難消).
〇자기 자신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칠 그러한 간곡한 뜨거운 신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마디, 한 말씀이 폐부를 찌르는 그러한 법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본인이 신심이 박약하고 분심이 없이 자기가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듣게 되면 이것이 별 큰 감동을 받지 못하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듣고, 세 번, 네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 이백 번 이렇게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또 듣고 하면 처음에 들을 때에는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별로 발심이 되지를 안 하던 사람도 나중에는 무슨 말씀인가를 그 마음에 계합(契合)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발심을 하게 되고 분심이 나고 그래서 철저하게 믿고 정진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면서 또 듣고, 듣고서 또 정진하고, 정진을 하면서 듣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아무리 근기(根機)가 약한 사람도 그렇게 노력을 해 나가면 결국에 가서는 진발심(眞發心)을 하게 되고, 어떻게 정진을 해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그 바른 공부해 나가는 길을 스스로 터득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에 이르르는 것입니다.
〇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는데 그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나서 그 불법 가운데에도 여러 가지 모다 그 권(權), 방편(方便), 수없는 방편에 모다 떨어져 가지고 허송세월(虛送歲月)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참 많은데 그 가운데에서 천행으로 최상승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〇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극념(克念), 자기의 생각을 스스로 이겨야 한다. 수행을 해 나가는 데에는 자기가 자기를 이겨야 한다’ 하는 말씀이 계셨고, 부처님께서도 ‘백만 군사를 갖다가 호령을 해서 움직이고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자기가 자기를 이기고 다스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하는 그런 말씀도 있지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자기를 이기는 힘, 자기를 이기는 수행과 노력이 없이는 도업(道業)은 성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〇일어나는 진심(瞋心)을 다스리는 정말 훌륭한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 단전호흡을 하면서 항상 ‘이뭣고?’ 참선을 하면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성낼 일이 없어지고, 특수한 경우에 성이 날라다가도 턱!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리면 언제 자취가 없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달, 두 달 해 갖고 금방 그렇게 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일 년, 이태, 삼 년 꾸준히 수행을 해 나가다 보면 진심(瞋心)을 잘 내는 그런 성질을 가진 사람도 차츰차츰 진심을 내지 않게 되고 완전히 정신혁명(精神革命)이 일어나게 돼. 그래서 정신적인 체질 개선이 되어서, 뭐 인간 세상에 그까짓 일 가지고 성낼 만한 일이 여간해서 만나기가 어려워. 성내는 거, 탐심 내는 거,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그걸 억지로 참아 갖고는 참 어려운 일이고, 수행을 통해서 항상 마음을 청정히 갖고 자비심으로써 생활을 해 나가면 자연히 그런 진심(瞋心)이 순화가 되어서 승화(昇華)가 되는 것입니다.
〇진심(瞋心)이라 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는 근본이 탐진치 삼독인데, 삼독 가운데에 제일 악(惡)한 것이 바로 진심인 것입니다. 최악의 독(毒)한 것이 진심이다.
『화엄경』에도 말씀하시기를 ‘일념진심기(一念瞋心起), 한 생각 진심(瞋心)을 일으키면은 백만장문개(百萬障門開)다. 백만 가지의 장문(障門), 도를 갖다가 장애하는 문이 열린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고, ‘한 생각 진심을 일으키면은 모든 재앙으로, 진심을 일으키는 재앙으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함경』에는 ‘부처님을 친견을 못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것을 친견을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진심(瞋心)을 내는 그 과보로 부처님을 친견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냄으로써 계속 삼악도(三惡途)를 돌다 보니 어떻게 부처님을 친견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〇모든 경계를 당해서 스스로 덮어 버리지 말아라. 스스로 매(昧)해 버리지 말아라. 경계에 속아 가지고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게 자기가 자기를 갖다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리는 거고,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기회를 갖다가 잃어버린 거다 그 말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을 한다’ 이렇게 소승 경전에 그렇게 표현이 된 데도 있습니다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거든. 한번 뛰어 가지고 바로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중생이다, 부처다’, 무슨 ‘번뇌다, 보리다’ 그런 분별심을 냄으로써 그 분별의 쇠사슬에 맥혀 가지고 거기서 나아가지를 못하는 거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코로 맡을 수 있는 거, 혀로 맛볼 수 있는 거, 몸으로 촉감하는 거, 생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는 것들이여.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자기(自己)로 돌아올 줄 알아야 돼.
무엇이 자기냐?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이놈,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아오는 거여. 이것이 바로 똑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여.
〇지금 불법(佛法) 시대가 말법(末法)이 되었다고 하지만, 우리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바로 믿고 실천을 해 나가면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은 상주불멸(常住不滅)이여. 부처님께서는 상주설법(常住說法)이여. 우주 법계에 가득차 있는 모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부처님께서 상주설법하시는 바로 그 법문(法門) 아닌 것이 없고, 경전 아닌 것이 없고.
화소산전설천기(花笑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한 것이다. 새가 숲속, 숲 밖에서 그 갖은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生]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 오건—꽃을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 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오늘 정묘년(丁卯年) 10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30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 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인데 참나, 나의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하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하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려 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한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한 표현을 하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하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그랬습니다. 눈 ·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 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位) 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한다. 이렇게 임제 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전강 조실 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써 가장 뚜렷한 것은 ‘숨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려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한가 안 한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하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녁으로 들랑날랑하는 그 공기가 그러면은 참나냐?’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참, 말도 안되지만.
하여간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뚱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한 놈. 그러한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할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은 오계(五戒)와 불명(佛名)과 화두(話頭)를 신청하신 분들을 위해서 불명과 오계와 화두를 설(說)해 드리는 날입니다. 그전에는 이 일요법회가 끝난 다음에 별도로 그 의식(儀式)을 거행했습니다마는, 내나 같은 말을 한 날에 이중으로 중복을 해서 바쁜 세상에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아주 법회(法會) 때 오계와 화두를 설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계의 그릇이 온당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계는 오계(五戒), 십계(十戒)가 있고, 비구 250계(二百五十戒)가 있고, 비구니 500계(五百戒)가 있고, 또 대승계(大乘戒)에 있어서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48경계(四十八輕戒)가 있고, 더 미세하게 나아가서는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있지만, 오늘 설(說)하고자 한 이 오계(五戒)는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오계를 잘 가지면 그밖에 어떠한 계도 다 잘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에는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가 있는데, 소승계는 몸으로 지켜. 몸으로 지키는 계고, 또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다.
예를 들어서 첫째 번에, ‘살생(殺生)을 하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했는데, 소승계에 있어서는 아무리 그 사람이 미워서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또 칼을 가지고 가서 죽일려고 아주 쫓아갔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서 딱 참고 죽이지 아니했으면 이건 소승계는 범(犯)한 것이 아닙니다. 실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안 했으니까. 그러나 대승계는 실지로 죽이지는 안 했어도 이미 마음속에 죽일려고 하는 마음을 냈으면 이미 살생계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욕심을 내고 도둑질을 할려고 마음에 먹었다 하더라도 실지로 도둑질을 안 했으면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아니여. 그러나 벌써 마음속에 훔칠 마음을 냈다면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밖에 어떠한 종류에 계목(戒目)이라 하더라도 다 이와 같아서, 소승계와 대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것과 마음으로 지키는 그 계(戒)의 차원(次元)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소승계를 설하시고 또 대승계를 설하셨지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계는 소승계(小乘戒)만 지키면 그것으로서 훌륭하게 계를 지킨다고 생각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니고, 근기(根機)에 따라서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게 하고 나아가서는 대승계(大乘戒)까지도 아울러서 원만(圓滿)하게 지킬 수 있도록 구경(究竟)에 목적을 거기에 두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계를 받는, 또 이 계(戒) 설(說)함을 듣는 모든 형제자매들은 몸으로는 소승계를 철저히 지키고, 마음으로는 대승계를 철저히 지킬 수 있도록 그렇게 받아서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오늘 계를 받으실 분은 합장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십시오.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는 것을 호궤합장(胡跪合掌)이라 그런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을 비롯해 모든 동물, 모든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그 모든 산목숨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윤회(輪廻)를 하면서 오늘날까지 오면서 어느 벌레, 어느 동물, 어느 사람 뱃속에 한 번 이상 다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고, 그 모든 중생 낱낱이 다 우리와 똑같은 귀중한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고 부처님과 똑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찌 차마 그 산목숨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방방곡곡에 모든 대소 사찰(寺刹)에서 일 년에 몇 번씩 그렇게 방생법회(放生法會)를 갖고, 또 전강(田岡) 조실 스님께서도 생존시(生存時)에 수백 관 수천 관의 모다 고기를 사서 한강에 모다 방생(放生)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산목숨을 죽이면 그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限量)없는 고(苦)를 받다가 다시 내생(來生)에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평생에 병(病)을 앓고 또 단명보(短命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남에 물건을 주인의 승낙(承諾) 없이 갖지 말아라. 내 물건을 남에게 보시(布施)를 할지언정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남의 물건을 훔치면 한량없는 지옥고(地獄苦)를 받다가 내생에 다시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가난뱅이 과보(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왕궁(王宮)에 부귀(富貴)도 다 버리시고, 인행(因行) 때에는 당신의 처자권속까지라도 굶주린 호랑이에게 다 보시를 하시고 당신의 수없는 목숨도 배고픈 중생(衆生)에게 버리셨거든, 나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어찌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칠 수가 있겠는가.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관계를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은 몸과 마음을 더럽혀. 그래서 사음을 하지 말아라. 사음을 하면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행히 사람 몸을 받게 되더라도 부정(不貞)한 아내,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가정의 파탄을 가져올 것이다. 금생(今生)에 부정한 아내나 부정한 남편을 만나서 그 하루도 편할 날을 살지 못한 그런 사람은 모다 과거 전생(前生)에 자기 자신이 그런 부정한 행실(行實)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과보로 금생에 그러한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에 행복을 잃고 파탄을 초래한 것이다.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면, 당장 금생에 거짓말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하면, 부부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형제간에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고, 자식들도 그 사람 말을 믿지 않게 되는 거여. 하물며 친구간이나 이웃이 어찌 그 사람 말을 믿을 것인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 몸을 받더라도 그 사람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를 안 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다섯째,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면은 당장 한 번 마시고 두 번 마시고 차츰차츰 그 중독(中毒)이 되면 안 마시고는 못 배겨.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침내는 그 술이 사람을 먹게 되아. 그래서 완전히 폐인(廢人)이 되어가지고 패가망신(敗家亡身)을 해. 금생에도 그러려니와 그 술 마신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내생에 사람의 과보, 사람 몸뚱이를 받았다 하더라도 천치, 백치, 바보로 태어나서 사람이면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
이 다섯 가지 계.
첫째 번에 산목숨을 죽이면 왜 못쓰냐?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 도를,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가지고 도(道)를 닦는 것은, 첫째 자성(自性)을 깨달라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데 목적이 있는데, 살생(殺生)을 하면은 자비심(慈悲心)을 끊어 버려. 자비종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산목숨을 죽이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어라.
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까닭은 일체중생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재산을 다 보시(布施)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도 보시를 하고, 내가 도를 닦아서 얻은 모든 지혜(智慧)도 일체중생에게 베풀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데, 지금 도를 닦고자 하는 사람이 남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서야 어떻게 그런 복덕심(福德心)을 기를 수가 있겠는가. 복덕종자(福德種子)를 끊어 버리기 때문에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여.
셋째에 '사음(邪淫)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도를 닦은 것은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그래서 지혜의 눈을 떠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 있는데, 사음을 해 가지고 몸과 마음을 더럽힌다면 나의 청정심(淸淨心)을 손상(損傷)해. 청정종자(淸淨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사음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이고.
넷째에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한 것은 우리가 도를 닦아서 진리를 펴서 일체중생을 제도헐라면 진실(眞實)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해 버릇하면은 나의 진실종자(眞實種子)를 끊게 되기 때문에, 진실종자를 끊어 가지고 어떻게 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불명(佛名)을 받고 불제자(佛弟子)가 되어서 화두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어서 속히 지혜의 눈을 떠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 일체중생(一切衆生)으로 하여금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데 목적이 있는데, 밤낮 술을 마셔 가지고 지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겠느냐.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해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마땅히 술을 마시지 말아라. 술을 마시게 되면은 술이 취하게 되고, 술이 취하게 되면은 거짓말도 하게 되고, 사음도 하게 되고, 도둑질도 하게 되고, 살생도 하게 된다 그 말이여. 술도 하나의 음식물이지만 그것을 어리석게 먹으면, 그것을 먹어서 중독(中毒)이 되면 자기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고 사회도 망하고, 금생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자기를 멸망(滅亡)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상 설(說)한 다섯 가지 부처님의 계(戒)는 불자(佛子)로서 마땅히 잘 지켜야 할 바니 능(能)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성(聖)스러운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이상 설한 다섯 가지 계는 불자로서 마땅히 지켜 가질 바니 능히 잘 가지겠는가? 대중 : 능지(能持).
오계(五戒)를 받고 그리고 연비(燃臂)를 받았습니다. 연비를 받은 뜻은 그 향(香)으로써 팔을 따끔하게 지진 그 순간 과거 무량겁에 지은 죄(罪)를 그 따끔한 그 찰나에 소멸(消滅)을 시키는 것이고, 동시에 앞으로는 다시는 범(犯)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께 서약(誓約)을 하는 의식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벌 밀(蜜)에다가 실을 묻혀 가지고 크게 만들어서 팔에다가 세워 놓고 거기다 불을 질러서 훨훨훨 타들어 가 가지고 큰 흉터가 나도록 그렇게 뜨겁게 팔을 지졌습니다마는, 지금 오늘은 향불로 간단하게 지졌지만 각자 당인(當人)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처가 크게 나야만 죄가 소멸이 되고 또 맹세를 굳게 한다고만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처음~36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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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계를 받았으니 이제 정식(正式)으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었습니다. 아까 몸으로 지키는 이 소승계(小乘戒)와 마음으로 지키는 그 대승계(大乘戒)를 우리는 다 같이 지켜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은 이 두 가지 계를 원만하게 잘 지킬 수가 있느냐? 참, 마음으로 지키는 계는 대단히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잘 지킬려고 해도 지킬려고 하는 생각 낼 때 벌써 범하게 되는 것이 이것이 대승계이기 때문에 참 지키기가 어려우나, 그래도 잘 지킬 수 있는 묘(妙)한 방법이 있어. 그것은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여.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심마(是甚麽)’ 그러는데, 중국음(中國音)으로는 ‘씨 씀마’인데, 씨씀마, 시삼마란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말로는 ‘이 뭣고?’거든, ‘이 무엇고?’ '이 무엇고?'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람들은 ‘이뭣고?’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참선해 나가는 데에 화두(話頭)로써 ‘이뭣고?’라고 하는 경상도 말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상도 분이 아니라도 이 화두를 들으실 때는 ‘이뭣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그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이라고 하냐?”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항상 참구(參究)를 하는 것인데, 이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지식과 따져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여.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世俗的)인 지식, 또 불교에 교리, 뭐 일체 철학적인 이론,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것을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다 놔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그건 놔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가 없지만 재미가 있건 없건, 또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뚱이 끌고... 사람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거든. 아까 ‘잃어버린 소[牛]를 찾는데, 잃어버렸다고 하지마는 결국은 이 우리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 한, 바로 그 코밑에 뱅뱅 도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그걸 뭐 고인(古人)들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식(識)’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하고, ‘영혼’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뭐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뭐 불교 그 경전 안에도 경(經)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러한 이름이 문제가 아니여. 그 실체(實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 볼라야 볼 수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는, 또 아무리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거던. 그놈.
이론(理論)도 그만두고 이름과 상(相)도 따질라고 하지 말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할 때에도 ‘이 뭣고?’
이렇게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이 ‘이놈이 뭐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입으로는 ‘이 뭣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딴생각[別念]이 들끓고, ‘이 뭣고?’ 할 그 잠깐 동안은 ‘이 뭣고?’ 생각이 있지마는 일 분도 못 가서 잃어버리고 딴생각을 하게 되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아니면은 먹먹허고 그렇지 아니하면은 혼침(昏沈)이 오고, 혼침이 좀 없어질 만하면 또 호사난상(胡思亂想)이 일어나고. 참 참선(參禪)을 할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 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생 동안을 번뇌 아니면 망상, 잡념 속에 시달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잡념인 줄을 모르고 삽니다. 다행히 참선을 해봐야 ‘아,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고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구나’ 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밤낮 번뇌망상과 희로애락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풍파(風波) 속에 놀아나고 있는 한은 우리의 죄업(罪業)은 끊임없이 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짓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를 끊고자 하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이 참 많고, 일생 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집안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사회 국가를 위해서, 크게는 인류를 위해서 많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갑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공헌을 세우기도 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일을 하고 갔지만 진정 어느 일이 정말 자기(自己)를 위하는 일이고 진정으로 이 인류(人類)를 위하는 일이냐?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해서 박사가 되고 그 연구 결과로 인해서 인류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별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데 조끔 편리하게 살도록 공헌을 한 것 뿐이지, 근본적(根本的)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편리하게만 할뿐 행복하지를 못했다. 행복하게 못하고 만 것쯤은 또 괜찮은데, 정말 그 많은 박사들이 연구한 그 과학이 인류를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과학을 발전을 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농사짓고 채소 심어서 먹고 살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무서운 공포 속에 떨지 안 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찰나간에 잿더미가 되고 인류가 다 멸망하느냐?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만큼 그 위험도는 점점 증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위기(危機) 속에서 이 위기를 막고, 막을 수 있고 또 설사 그런 위기가 도래(到來)한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공포심 없이 이 몸뚱이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참선(參禪)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간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염라대왕이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염라대왕이 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의 화현신(化現身)이고, 다 불보살의 화현신으로서 나타난 보살 화현(化現)이기 때문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머지않아서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불종자(佛種子)인데 염라대왕이 그 앞에 합장배례를 아니할 리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아무리 해 갈수록 어렵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수활산요노전심(水闊山遙路轉深)이라’ 이 심우송(尋牛頌)에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끝없는 물, 멀고먼 그러고 험악한 산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한이 없을지언정, 갈수록 길이 더 험하고 어려웁다 하더라도 기어코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하는 방법은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그다음에 호흡,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가슴으로 다 호흡을 하는데—숨을 들어마실 때에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이, 하복부가 약간 볼록하게 나오도록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그 볼록했던 그 단전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면 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고 내쉬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그저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한 것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면서 호흡을 하는데.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역시 코로 내쉬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또 머물렀다가, 또 한 3~4초에 걸쳐서 조용하게 내쉬는데,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 ‘이 뭣고?~~~’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되어. 알 수 없는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어지지 아니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고대로 거각한 채로 호흡만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들어마셨다 하는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이렇게 하다가 그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왔다 하면, 그때 다시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한번 또 그렇게 챙기는 거여. 나중에는 한 번 아침에 들은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딴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이 뭣고?~~~’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한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탁 있으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상관이 없어.
그렇게까지 될라면 상당히 노력을 해야 그렇게 되고,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뭐 망상(妄想) 때문에 못하느니, 무슨 혼침(昏沈)이, 잠이 와서 못하느니 한 것은 다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충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신심과 분심과 의심, 이 세 가지 이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하고 마는 것입니다.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이여. 위(位) 없는 참사람. 계급(階級)이 없는, 빈부귀천과 남녀노소 이런 위(位), 계급이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다 사람이면 사람 사람마다 그 얼굴이 있고 모냥이 있는데, 이 계급이 없는 이 참사람은 형단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형단이 없기 때문에 볼라야 볼 수가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고 알라야 알 수가 없어. 심상출입면문전(尋常出入面門前)이여.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얼굴을 통해서 출입(出入)을 하더라.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能)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버리면, 그 형단(形段)이 없는, 면문으로 출입하는 그 형단이 없는 그놈을 깨쳐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그 번쩍하는 그 번갯불과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을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번갯불을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소리를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밟을 수 없는 그 번갯불과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버릴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 또 진즉 오계를 받았으되 본의 아니게 오계를 파(破)하신 분은 오늘 다시 새로 받았으니 새로 태어난—연세야 몇 살이 되셨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 새로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몸으로 이 순간부터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금생(今生)에 결정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了達)하시기를 바랍니다.
불명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받아 가시고, 지난번, 저지난번, 모다 작년, 진즉 불명을 모다 신청을 하고 또 화두도 신청을 하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도 그 찾아가지 아니하신 분은 오늘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이렇게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게 되었습니다. 더웁지도 춥지도 않는 아주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국(時局)은 매우, 모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불자(佛子)는 오계(五戒)를 잘 받아서 실천을 하시고, 어쨌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를 당하더라도 항상 불자라고 하는 긍지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벗 삼고, 화두를 스승 삼고, 화두를 나침판을 삼고, 화두를 등불 삼아서 하루하루를, 또 일초 일초를,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해서 풍파(風波)가 심할수록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정신을 차리듯이,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일치단결해 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서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그 풍랑(風浪)을 이겨내듯이,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모두가 다 단합하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애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용서(容恕)하며, 이러한 난국(亂局)을 기해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얻고, 나아가서는 모두가 그렇게 화합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전 국민이 단합이 되고, 전 국민이 단합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어가지고 인류를 갖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러한 역군(役軍)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제자(弟子)로서, 불교의 진리의 사도(使徒)로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알고 인사하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하고는 아주 평범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그놈,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그러한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36분36초~1시간11분12초) (끝)
[법문 내용]
(게송)화소산전설천기~ /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부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잃어버렸던 그 소[牛]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 임제 선사(臨濟禪師)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계(戒)는 계기(戒器), 정(定)은 정수(定水), 혜(慧)는 혜월(慧月)에 비유 / 어떠한 종류의 계(戒)라도 바로 이 오계가 근본(根本) / 소승계(小乘戒)와 대승계(大乘戒). 소승계는 몸으로 지키는 계고, 대승계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
산목숨을 죽이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지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지고, 사음(邪淫)하면 청정종자(淸淨種子)가 끊어지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지고,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진다.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모두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된다 / 화두 드는 방법은—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이 있는데—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잘되건 안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현전(現前)하도록.
생사해탈을 하려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 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참나를 찾는 일 /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다 /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녁 빠지듯이 확철대오하고야만 만다 / 신심과 분심과 의심, 삼요(三要)가 일시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하다면 머지않아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가 도래(到來)한다.
(게송)무위진인몰형단~ /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은 오늘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난 것. (게송)삼가촌리형형례~ /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하지 말라.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〇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건을 소[牛]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하는 전강 조실 스님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하고 그곳에 즉(卽)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도처(到處)가—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〇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에다가,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혜(慧)는 혜월(慧月)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계(戒)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어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할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〇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 소승계나 대승계 할 것 없이, 지킬려고 할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〇참선(參禪)을 하려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〇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 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이 세상에 어떠한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려고 노력을 한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한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뚱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한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 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뚱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 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참선하는 방법(자세와 단전호흡과 화두 거각)
〇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 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그렇게 독로(獨露)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 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하면 반드시 그러한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〇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卽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유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하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할 때 말하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숨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둑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 줄 착각(錯覺)을 하는 거와 같고,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 줄 알고 상추쌈 싸 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여.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하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 버린다 그 말이여.
작야시우치(昨夜是愚痴)가, 어젯밤에 깜깜한 어리석은 멍청이가, 금조성준걸(今朝成俊傑)이로구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준걸(俊傑)이 되어 버렸구나.
호개해탈문(好箇解脫門)이여. 좋고 좋구나 이 해탈문이여. 맹렬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아깝구나.(惜無人猛烈)
깨달음은 오래오래 닦아서, 그래 가지고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까지는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있던 사람이 하룻밤 새에 툭 터져 버리면 바로 해탈도를 증득을 하는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70년도에 성도재 법문으로, 조실 스님의 일대기 법문 속에서 만공 큰스님, 용성 큰스님 그리고 보월 큰스님 이 말세에 대선지식(大善知識)들, 그런 선지식들과 함께 최상승법 제일구(第一句) 도리를 가지고 염롱(拈弄)하시는, 한바탕 거량(擧量)을 해 가지고 그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두르면서 맞부딪치는 그러한 장면을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법문 한 구절밖에 다시 무슨 법문을 더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 법문을 듣고 뼈에 사무치고 온 몸에 털이 거꾸로 떨어 서며, 칼날을 목에다 대고 용맹정진(勇猛精進)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수좌(首座)가 아닐 것입니다.
법문(法門)이라는 게 무슨 경전을 해설을 하고 강의를 하고, 무슨 이론에 대해서 천착(穿鑿)을 하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리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의 중생 상량심(商量心)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듣고 우리가 앞 생각이 끊어지고 뒷 생각이 끊어지며, 다맛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현전(現前)해서 다시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다시 일으켜야 할 화두도 없으면서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맛 의단이 독로한 채 찰나(刹那)가 끊어져 버려야 할 것이여.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념에 생사심(生死心)이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당념에 끊어져버려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여.
보고 듣고 하는 것도—산을 보아도 산이 보이지를 않고, 물을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수백 만 명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아니하고, 별별 소음과 잡음이 있어도 한 소리도 귀에 들리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누가 옆에서 잡담을 하거나, 누가 나를 칭찬을 하거나, 누가 나를 험담을 하거나, 일체 시비 우여곡절이 내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거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내 몸뚱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조차도 모르거늘, 무슨 시비와 흥망성쇠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어.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 대사자후(大獅子吼)로 설하신 제일구(第一句) 도리는 술수(術數)가 아닙니다. 배울라야 배울 수 없고 가르칠라야 가르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도리는 팔만대장경을 뒤적거려도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96종 철학을 통달을 해도 그러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 이 도리는 엄격히 말해서 불조(佛祖)도 엿볼 수가 없는 것이고 귀신도 들여다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는 고요할 때에는 수미산(須彌山)과 같고, 한번 움직였다 하면은 큰 불덩어리와 같은 것입니다. 수미산과 같아서 아무리 움직일라고 해도 꺼떡도 아니한 것이며, 큰 불덩어리와 같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한 생각 움직거리면 그 불덩어리에 타 죽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이할 수가 없는 것이여.
온 세계에 하나도 감춘 바가 없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기틀의 땅에서 찾으면 자취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참선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려고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여. 이론적으로 더듬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 망상을 쉴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참선을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호소를 합니다마는, 망상을 쉴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은 참선을 잘못 인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상을 끊을려고 하는 생각이 벌써 틀린 것이고, 망상을 쉬고 또 쉬고 해서 망상이 하나도 없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하면 참선이 참 잘될 것 같지마는 참선은 그렇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를 애당초부터 문제시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과거 생각이 일어나거나, 미래 생각이 일어나거나, 일체 선악 · 시비 · 원한 · 애정 천하 없는 생각도 내가 관계할 일이 아닙니다. 그냥 고대로 놔버려. 다만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이여. 거기에서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지, 망상도 일어나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고. 일체처 일체시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모든 것이, 내가 그것을 참견을 하고 취하고 버릴려고 하는 데에서 공부가 그릇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만을 자꾸 챙겨서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챙겨 나가면 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추워도 이놈을 추켜들고 비벼대면 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배가 고파도 이놈이요, 배가 불러도 이놈이요,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 한 의단(疑團)을 가지고 나아갈 뿐인 것입니다.(처음~13분5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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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대단히 성미가 급한 왕이 있었는데, 그 왕은 자기 비위에 조금만 틀린 소리만 해도 당장 엄벌을 내리고 귀양을 보내고 때로는 죽이기도 하고 추방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신하나 백성이나 그 앞에만 가면은 벌벌벌 떠느라고 말을 못했습니다. 무슨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은 목숨을 잃어 버리게 되고.
하루는 그 왕자가 있었는데, 왕자가 무슨 왕의 비위를 건드려 가지고 사소한 일에 불같은 호령을 내리고 당장 그 왕자 내외를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잡아 죽여 버릴려고 하는 것을 대신들이 말려 가지고 간청을 해서 간신히 국외로 추방을 했습니다. 국외로 추방된 왕자 내외는—추방하면서 그 왕비가 금은 보물을 얼마 정도 그 임금님 몰래 좀 싸 주어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저 국외로 추방을 당해 갔는데, 처음에는 가지고 간 그 금패물을 조금씩 팔아 가지고 먹고살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 사정상 살 수가 없어서, 인가가 없는 산중에 들어가서 거기 그렇게 숨어서 아주 검박하게 겨우겨우—그래 추방된 왕자가 사치스럽게 살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 인자 검박하게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렇게 살다 보니 1달 2달이 가고 1년 이태가 가서, 가지고 간 것도 한도가 있어서 다 양식도 떨어져 버리고 금패물도 다 떨어져 버리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사냥을 해 가지고 토끼도 잡고, 노루도 잡고, 새도 잡고 그저 그래 가지고 그렇게 먹고사는데, 하루는 간신히 토끼 한 마리밖에는 잡히지를 않아서 그래서 토끼를 갖다가 가죽을 벗겨 가지고 솥에다 넣어서 끓이는데, 어떻게 물은 조금 붓고 불을 너무 과열로 땠던지 물은 다 달아져 버렸는데 탄내가 나서 소댕을 열어보니까 고기는 반도 안 익었다 그 말이여.
반도 안 익고 물은 떨어져 버려서 그래서 그 왕자비(王子妃) 보고 ‘물을 저 개천에 가서 물을 좀 떠오라’고. 그래서 인자 물을 뜨러 갔는데 암만 기달려도 안 와. 안 오니까 배는 고프고 그러니 기다릴 수가 없어서 그냥 반도 안 익은 고기를 그냥 먹어버렸습니다. 조금 다 익었나, 안 익었나 맛본다는 것이 한 점 띠어먹고 두 번 띠어먹고 하다 본 것이 차츰차츰 배는 고프고 하니까는 피는 조금 덜 익었지마는 그냥 다 먹어버렸어.
그래서 아내가 그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소댕을 열고 물을 부을려고 하니까 고기가 없어졌습니다. '아이! 고기가 어떻게 되었냐?'고, '없다!'고 그러니까, ‘아! 고기가 그놈이 내가 열어 보니까 훌떡 솥 밖으로 뛰어나오더니 막 뛰어 가지고 저 산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잡을려고 쫓아갔지마는 어떻게 이놈이 빨리 도망가던지 놓쳐 버렸다’고 그러니까.
‘가죽을 벗겨서 불을 때 가지고 반쯤 익은 놈의 고기가 어떻게 도망가야?’ ‘참! 나도 알 수가 없다’고 왕자가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논다'고.
그래 아내가 그 왕자를 떠억 보니까 이상하다 그 말이여. 사람이 시치미를 아무리 뗀다 해도 거짓말을 어지간히 해야지, 당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면 약간 눈가시라든지 코가 약간 벌심거린다든지 그 눈치를 보면 알 수가 있거든. 그래서 그때부터서 그 왕자비가 매우 괘씸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쫓겨나 가지고, 자기 때문에 상감한테 미움을 사 가지고 나까지 이렇게 산중에 와서 고생을 하고 있는데 토끼고기를 잡아서 삶았으면 익거나 안 익거나 같이 먹을 일이지, 물 떠오라고 보내 놓고 저만 혼자 먹어?'
괘씸하게 생각을 하니까 그동안에 지내온 모든 일들이 새록새록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이런 작자를 내가 믿고 살 수가 없구나' 그래 가지고는 그때부터서 웃지도 아니하고, 여간해서 말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걸 버리고 일반 사람처럼 백성들처럼 싫다고 도망가 가지고 개가(改嫁)할 수도 없는 거고, 그냥 같이는 살되 아무 재미가 없어.
그동안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고 살다 보면 그 임금이 언젠가는 노여움을 풀면은 다시 자기네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이리라’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러한 괘씸한 인간이라!’ 하고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멸시를 하니까 도저히 사람이 사람같지 않고, ‘저런 것이 나중에 임금이 되어봤자 무슨 나라를 바로 다스릴 것인가?’ ‘이러한 인간을 믿고 어떻게 내가 그 밑에서 왕비 노릇을 하며, 어떻게 정사(政事)를 할 것인가?’ 이것저것 생각하니까 생각할수록 왕의 자격이 없어 보이고, 저런 것 사람답지 않게 보이니까 도저히 얘기할 재미도 없고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살맛이 전혀 없어졌다.
속에 확! 괘씸한 생각이 뭉쳐 가지고 도저히 풀 길이 없어. 그러한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 것이 몇 해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지내니까 고생도 막심한데다가, 의식주 문제가 전부가 막심한데다가, 마음까지 그렇게 괘씸한 생각으로 꽉 뭉쳐 가지고 그 남편이라고 하는 것이 천하에 몹쓸 놈으로 보이니까 도저히 희망이 없어. 그래도 하루하루 지낸 것이 한 해, 두 해가 가고 5년 10년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왕이 승하(昇遐)하자 대신들이 용케 찾아 가지고 그 왕자를 모셔 갔습니다. 가 가지고 새 왕으로 모셨는데. 그래 가지고 이 왕자가 새 왕이 되어 가지고, 좋은 옷에다가 머리에 목에 팔에 그 칠보로 장엄을 해서 왕비를 위해서 다 해 주었습니다. 10여 년간을 산중에서 자기의 잘못으로 해서 고생한 그 죄과(罪過)를 보상하는 뜻으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치와 호강과 영화를 갖다가 다 시켜 줄라고 마음을 먹고 물심양면으로 다해 주는데, 왕비는 조금도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산중에서 그렇게 한 그 노여움이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풀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이 "대관절 무엇 때문에 그러요? 어디가 아픈 데가 있소? 무슨 근심있소?" "아니요. 아무 아픈 데가 없어요"
"무슨 걱정이 있소?"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러면 어째서 그러요. 나는 나의 모든 정성과 사랑을 다해서 당신을 잘해 주고 싶고, 호강을 시켜 주고 싶고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이렇게 성의를 다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그럴 수가 있소" 하니까, "당신은 저 산중의 움막에서 우리가 고생하고 살 때에, 그때 내가 개천으로 물을 뜨러 갔을 때에 그 반쯤 익은 토끼가 솥 밖으로 뛰어나와 가지고 도망쳐 버린 일을 잊어버렸습니까?"
그렇게 물으니까 왕이 깜짝 놀랬습니다. 입이 딱 붙어 버렸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벌써 20년이 되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그것을 사과할 수도 없고, 자기는 그때 잠깐 장난끼로 그런 것뿐인데 그 한 사실을 20년간이나 마음속에 간직을 하고 그 노여움을 풀지 않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왜 산승(山僧)이 오늘 이러한 동화같은 설화를 말씀을 드리냐 하면, ‘여자의 그 원한심은 오뉴월에 서리가 친다’ 그러한 속담도 있습니다. 사소한 한 생각으로 해서 그 왕비의 부귀영화도 기쁘지를 않고, 왕을 갖다가 인격적으로 멸시하고, 자기의 왕비로서의 모든 영화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국모로서의 모든 것도 아무 그런 이 부귀영화가 마음에 와서 닿지를 않아. 생각 생각이 토끼가 산으로 도망한 것만을 염두에다 두고 일평생을 남편을 원망하면서 미워하면서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서 원한을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일이고, 나는 가볍게 생각하고 한마디한 것이 상대방에서는 대단히 크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는 오백 생 내지 천 생의 과거에 숙세의 인연으로 부부간이 되고 그러는데 그래서 만났는데, 순 남남끼리 만나 가지고 일심동체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한 가정을 이루고 아들딸을 낳고 그렇게 해서 가정을 이뤄 나가고 그 가정이 모여서 사회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고, 그 가정이 모여서 또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촌수(寸數)가 부모 자식 간에도 1촌 간(間)인데, 부부간에는 무촌(無寸)입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인데 한 생각 어긋나면 완전히 원수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다정할수록에 자주 다투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고 잠시도 떨어져서는 못 살만큼 그렇게 애정이 두터워서 결혼을 했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참 많이 싸우는 수가 있습니다.
부부간에 한번도 싸우지도 안 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람 탈을 타고났으면서도 사람이 아니라 천상에서 잠시 인간 세상에 유희(遊戱)를 하러 나왔거나, 그렇지 않으면 참 그건 상상이 미치지 못할 그러한 사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부간에 크고 작고 간에 참 싸우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렇게 싸우면서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살림도 해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또 참선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싸우면서도 참선을 잘하고, 싸우면서도 가정의 화목을 유지해 나가고, 일생 동안 같이 살면서도 질리지 아니하고 또 항상 새롭고 잘 살 수가 있느냐? 싸움을 하되 속전속결(速戰速決), 병아리 싸움하듯이 후닥닥 싸우고 금방 화해를 해 버리는 그런 속전속결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좋겠다.
싸움을 하되 과거 일을 들춰내지 말아라. 싸움을 하면은 지나간 일을 들춰내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면 상대방이 오장(五臟)이 뒤집어질까?’ 그것을 용케도 연구를 해 두었다가 싸울 때면 그놈을 끄집어 내 가지고 박박 긁어대거든. 그래서 과거를 들춰내지 말아라.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들춰내지 말아라. 친정 문제라든지 또는 과거의 문제라든지 그 사람의 약점을 용케 찾아내 가지고는 일침을 가해 가지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만든다 그 말이여. 이러한 일은 대단히 졸렬하고 비열한 전술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싸움을 하되 그러한 과거를 들춰내고 또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쑤셔서 그래 가지고 한 싸움은 이것은 신사도에 어긋나는 것이여. 페어 플레이(fair play)가 되지를 못합니다. 싸움하고 나서도 자기 자신이 부끄러운 일이고 인격적으로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지를 못합니다.
배가 고파서, 아내가 물을 뜨러 간 사이에 토끼고기를 먹은 것은 그 애교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아! 익지도 않은 것을 자셨구료’ ‘아, 조금만 참았다가 잘 끓여서 자시면 할 텐데 그 익지도 않은 것을 그걸 잡숫느라고 애썼구료’ 하면서 웃어 버렸으면 그것으로 말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속에다가 콱! 넣어 두고서 상대방을 갖다가 괘씸하게 생각하고, 고생을 하면서 그 괘씸한 생각으로 여러 해를 지낼 때 얼마나 마음속으로 괴로웠겠느냐 그 말이여. 또 귀양이 풀려서 다시 왕이 되고 왕비가 되어 가지고서도 그 노여움을 풀지를 못했다니 세상에 그럴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그 토끼고기 한 마리 먹어 버렸다고 해서도 10년, 20년을 원한을 품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노여움을 풀지 안 하거든, 하물며 상대방의 약점 또는 과거를 들춰내 가지고 아무리 부애가 난다고 그러한 식으로 싸움을 해서는 참 그것은 용서받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자가 아내에 대해서 해도 그렇고, 아내가 남자의 과거를 들춰내고 허물을 들춰낸다 하더라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속이 상할 때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가지고 한번 싸워 보는 것이 그것 참 재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계속 공격을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갖고 한바탕 신나게 싸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가지고 싸울려고 마음을 먹은다면, 아무리 주먹을 쥐고 이를 갈아붙인다 해도 싸움이 되지 아니할 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13분53초~35분2초)
(3/3)---------------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말아라. 부부싸움이라는 게 둘이 싸워야 그것이 재미가 있는 것이지, 이웃 사람이 그 싸움 구경을 해도 창피한 일이고, 아무리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이라 하더라도 자식 앞에서 싸우는 것은 차라리 이웃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챙피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람은 싸움 구경을 하고 가서 모다 흉을 보고, 안 보는 데 가서 싸움하는 얘기를 모다 하면서 웃고 그러고 말겠지만, 자식이 부모 싸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를 말아라. 또 애가 아직 돌이 안 지나갔건, 돌이 지나서 한 살 두 살 서너 살이 되었건, 그렇더라도 잠이 들었을 때라도 그 애기 있는 데서는 싸우지를 말아라. 잠은 들어서 의식은 잠을 자고 있지만, 잠재의식(潛在意識)은 고대로 다 싸우는 것을 다 듣고 있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귀로 통해서 듣고 눈을 통해서 의식을 하겠지만, 잠이 들었을 때에는 눈도 감고 귀로는 잘 못 알아듣지만, 잠재의식은 우리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고대로 다 듣고 하나도 놓치지 아니하고 잠재의식 속에 다 녹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존경하지 않게 되고, 그 입은 마음의 상처가 일생 동안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는 눈을 뜨고 있거나 잠을 자고 있거나 싸우지를 말고.
이러한 몇 가지의 규칙을 ‘부부싸움 법규’라 제목을 딱 써 놓고 방금 말씀드린 조항을 적어 놓고서, 싸움을 할 때에는 둘이 서로 그 조항을 한번 낭독을 하고 그리고서 한바탕 싸우도록 한다면 대단히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한 말, 아내가 한 말 한마디를 그렇게 깊이 새겨 가지고 두고두고 일생 동안 괘씸하게 생각하고 일생 동안을 울거 먹는 그러한 무서운 그 결심과 기억력을 참선하는 데에 이용을 한다면 참선은 극일(克日) 성공을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대분심(大憤心), 대신심(大信心), 대의단(大疑團).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원래 부처라고 하는 깊은 믿음, 본래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부처를 이룰 것이 없어. 다맛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疑團)만 타파(打破)해 버리면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여. 바로 자기가 부처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울고 웃고 성내고 근심 걱정하는 바로 이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믿어야 하고.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이렇게 캄캄해 가지고 있는가?' 도저히 그 분심이 속에서부터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무서운 그 집념, 훨씬 여성이 남성보다도 더 독하고 모질다고 하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남자들은 도저히 그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고생을 이기지 못할 그런 처지에서도 여성들은 다 그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남자는 뭐 사흘만 굶어도 죽고 여자는 석달을 굶어도 안 죽는다'는 말도 있습니다마는, 그건 왜 그러냐? 자식을 위하는 생각, 남편을 위하는 생각, 그런 무서운 집념이 콱 쩔어 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이나 재산에 대한 애착도 훨씬 여성이 더 강합니다. 그러한 무서운, 쇠심줄보다도 더 강인한 그러한 결심을 가지고 참선하는 데 동원을 한다면, 남자보다도 훨씬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본래 남성 여성의 그 성품 자리에 있어서는, 불성(佛性) 자리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가 없고 남녀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본래부터 남성이 따로 있고 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업(業)에 따라서 여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여자고 또 다음 생에 남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나오면 남자이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장부(丈夫)의 마음을 가지고 장부의 성격을 쓰고 장부의 행실을 하면은 내생에 장부가 되는 것이고, 여자의 성격을 쓰고 여자의 행위를 하면은 여자의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금생에는 남자가 되어 버렸고 여자가 되어 버렸으니 껍데기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나, 그 남녀가 구별이 없는 그 본성(本性) 자리에 있어서는 자기가 여자라고 해서 뒷걸음질칠 필요도 없고 자포자기할 필요도 없고, 다 같이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법(正法)을 믿는 최상승 학자로서 당당하게 선의(善意)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는 것이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의의 경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도 언젠가는 선의의 경쟁을 해 가지고 모든 면에 있어서 우위를 가진 사람이 결국은 그이 쪽으로 통일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도 또 경제적으로도 모든 문화 · 예술 · 교육 일체 면에서 앞장서서 나아가면 그것이 바로 통일을 앞당기고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자분도 그러한 남성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그러한 집념(執念)을 갖다가 발심(發心)하고 도 닦는 데에 돌이킨다면 참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거사(居士)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선원이 아직 마련되지 안 해서 와서 정진하시는 분들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선원이 열리게 된다면 거사님네 선방도 잘되지 않을까 이리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직장을 가지고 계신 분은 와서 석달 동안을 정진하시기에는 어렵겠습니다마는, 이 보살님네들은 금년에도 7~80명, 해마다 100여 명을 넘어서 방부를 들이고 모다 정진을 하시고 그러는데, 다 가정의 일이 바쁘시고 모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면은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났을 때 다만 조금이라도, 어쨌든지 이 몸뚱이 받았을 때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야겠다’ 하는 그 신심이 돈독(敦篤)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보살님네들이 와서 이렇게 정진을 하시게 된다고 그렇게 믿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거사님네보단 보살님네들이 이 법을 믿고 공부하시는 면에서 앞장서 가고 계시지 않는가 이리 생각을 합니다. 내생에 몸을 바꿔서 남자로 태어나시면 그러한 보살님네들은 금방 출가해서 참 큰스님이 되어 가지고 불법을 갖다가 재흥(再興)하는 그러한 역군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군동보우동행(與君同步又同行)이여, 그대와 더불어 함께 걷고 함께 행하며, 기좌상장세월장(起坐相將歲月長)이로구나. 함께 일어나고 함께 앉고 같이 이렇게 지내오기를 세월이 길었다. 몇십 년, 몇백 년, 몇 억겁다생(億劫多生)을 그렇게 같이 걷고, 같이 행하고, 같이 일어나고, 같이 자고, 같이 이렇게 살아왔다 그 말이여.
갈음기손상대면(渴飮飢飡常對面),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그렇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항상 같이 해 왔다. 불수회수갱사량(不須回首更思量)이니라. 모름지기 머리를 돌이켜서 다시 생각하지를 말어라. 바로 여읠라야 여읠 수 없고, 앉았을 때는 같이 앉았고, 누울 때도 같이 눕고, 섰을 때도 같이 서고,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고, 일 할 때 같이 일하고, 일분일초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그대를, 어디를 머리를 돌이켜서 생각을 해? 머리를 돌이켜서 찾으면 어디가 있을 거여, 그게.
오늘 정묘년 7월 첫째 일요일을 맞이해서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전강 조실 스님의 그 감동적인 법문, ‘어묵동정(語黙動靜)을 여의고 일러라’ 한 공안(公案)과, 경허 스님의 오도송(悟道頌) ‘야인(野人)이 무사태평가(無事太平歌)’라 한 구절에 대해서 그 전강 조실 스님 소년 시절에—20여세 된 그 아주 새파란 청년 시대에 그 만공 대선사와 보월 선사와 그 기라성 같은 여러 구참납자(久參衲子)들 앞에서 그 경허 큰스님의 오도송을 그렇게, 참 멋들어지다고 할까? 상쾌하다고 할까? 참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영원히 우리가 도업(道業)을 성취할 때까지 잊지 못할 그런 감동적인 법문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입니다. 여러 선방에 계신 스님네 또 가정에서 정진하시고 또 직장에 나가시는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때,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장터에서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있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바로 그것을 보고 깨달은 분도 있고, 빗자루로 뜰을 쓸다가 거기서 튀긴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여름에 발을 갖다가 이렇게 걷어올리다가 깨달은 분도 있고, 자다가 뚝! 목침(木枕)에서 머리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확철대오하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게송)작야시우치~ / 법문이란? /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끊어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정신 차릴 것은 본참공안을 드는 것 뿐 /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잡드리를 해 가야.
'토끼고기'로 인한 왕자비의 노여움 / 부부싸움 법규(속전속결, 후닥닥 싸우고 금방 화해를 하라. 싸움을 하되 과거 일을 들춰내지 말아라. 상대방의 약점을 갖다가 들춰내지 말아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갖고 싸워 보아라. 자녀들 앞에서는 싸움을 하지 말아라)
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대분심(大憤心), 대의단(大疑團) / 불성(佛性) 자리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별이, 남녀의 구별도 있을 수가 없다 / 이 공부에 있어서는 승속(僧俗)도, 남녀도, 빈부와 노소와 귀천도 없다 / (게송)여군동보우동행~ /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〇깨달음은 오래오래 닦아서, 그래 가지고 깨달음에 조금씩 조금씩 깨달아 들어가서, 그래 가지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어젯밤까지는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있던 사람이 하룻밤 새에 툭 터져 버리면 바로 해탈도를 증득을 하는 것입니다.
〇법문(法門)이라는 게 무슨 경전을 해설을 하고 강의를 하고, 무슨 이론에 대해서 천착(穿鑿)을 하고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도리인지, 어떻게 된 것인지, 우리의 중생 상량심(商量心)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듣고 우리가 앞 생각이 끊어지고 뒷 생각이 끊어지며, 다맛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이 현전(現前)해서 다시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다시 일으켜야 할 화두도 없으면서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 몸뚱이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맛 의단이 독로한 채 찰나(刹那)가 끊어져 버려야 할 것이여. 참선은 지극히 간단한 것이어서 당념(當念)에 생멸심을 잃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념에 생사심(生死心)이 끊을려고 하지 안 해도 당념에 끊어져버려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이여.
〇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의단만을 자꾸 챙겨서 의단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잃어버리면 또 챙기고, 더우면 더운 대로 챙겨 나가면 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추워도 이놈을 추켜들고 비벼대면 추위도 잊어버릴 것이고, 배가 고파도 이놈이요, 배가 불러도 이놈이요,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이 한 의단(疑團)을 가지고 나아갈 뿐인 것입니다.
〇남편의 한 말, 아내가 한 말 한마디를 그렇게 깊이 새겨 가지고 두고두고 일생 동안 괘씸하게 생각하고 일생 동안을 울거 먹는 그러한 무서운 그 결심과 기억력을 참선하는 데에 이용을 한다면 참선은 극일(克日) 성공을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〇대신심(大信心), ‘내가 부처다’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원래 부처라고 하는 깊은 믿음, 본래 내가 부처이기 때문에 새로 부처를 이룰 것이 없어. 다맛 화두가 독로해서 의단(疑團)만 타파(打破)해 버리면 자기의 불성(佛性)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몸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여. 바로 자기가 부처고, 말하고 옷 입고 밥 먹고 울고 웃고 성내고 근심 걱정하는 바로 이놈을 여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믿어야 하고.
'왜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무엇을 하느라고 이렇게 캄캄해 가지고 있는가?' 도저히 그 분심이 속에서부터서 끓어올라야 하는 것입니다.
〇앞으로 더위가 본격적으로 닥쳐올 것입니다. 여러 선방에 계신 스님네 또 가정에서 정진하시고 또 직장에 나가시는 여러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 그리고 학생 여러분, 이때, 바로 지금 이때를 여의고는 공부할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지금! 앉았을 때는 바로 앉은 그 시각, 섰을 때는 서 있는 그 시각,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그 시각, 속이 상할 때는 속이 상한 바로 그 시각을 여의고 따로 내가 도를 닦아서 깨달을 시분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인(古人)은 장터에서 '이 자식, 저 자식' 하고 싸우는 그 소리를 들은 그 찰나에 확철대오를 한 분도 있고, 복숭아꽃이 활짝 핀 바로 그것을 보고 깨달은 분도 있고, 빗자루로 뜰을 쓸다가 거기서 튀긴 돌멩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분도 있고,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닫고, 여름에 발을 갖다가 이렇게 걷어올리다가 깨달은 분도 있고, 자다가 뚝! 목침(木枕)에서 머리빡이 방바닥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확철대오하신 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시각에 터질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고 간절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해 나갈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이지, 화두를 놓쳐 버리고 경계(境界)에 휩싸여서 있다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에 대한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보다가 터지고, 듣다가 터지고, 앉다가 터지고, 넘어지다 터지는 것입니다.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思量)할고? 이 허공이, 허공세계가 동서남북 사유(四維) 사방으로 끝없이 높고 끝없이 넓은데 그 허공의 경계를 어찌 우리 사량분별로써 가늠을 할 수가 있겠느냐.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다. 대도(大道), 큰 도의 맑고 그 깊은 도리는 그 허공만큼 그렇게 멀고도 높고도 길더라. 저 허공도 그 갓을 알 수가 없고, 얼마나 넓고 높은 그것을 알 수가 없거든 하물며 대도의 그 깊고 넓은 이치를 그거 어떻게 사량분별로 알 수가 있겠느냐 이거거든.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인댄, 다맛 오호(五湖)의 그 풍월(風月)이 있음을 얻는다면—동서남북의 그 호수가 있고 거기에 풍월이 있으면,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니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백 가지 꽃이 향기롭다. 산이 있고 들이 있고 호수가 있고 그러면 봄이 오면은 방방곡곡에 빨갛고 노랗고 온갖 백화(百花)가 그 향그럽게 필 것이다.
오늘은 정묘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방금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경청을 했는데,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원효(元曉) 스님 당시 그 야운(野雲) 비구라고 하는 그 스님이 도를 깨닫는 그 기연(機緣)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영랑신선이라고 하는 신선(神仙)이 저 동해가 몇 번 말랐다 다시 또 물이 찼다 하도록—그러니까 몇 겁(劫) 동안을 죽지 않고 신선으로써 그것을 다 겪고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인자 그러한 신선이 다 이 오신통(五神通)이 자재해서 천안통과 천이통, 숙명통, 타심통 모다 이런 신족통, 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은 영랑신선이 아주 신선도 사뭇 몇 겁이 되어 가지고 늙으니까, 아주 원숭이인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인자 초췌해져 가지고 추워서 못 견디니까, 원효 스님 토굴에 와 가지고 그 불씨를 찾아 가지고 그 불을 쬐고 그렇게 하다가 원효 스님한테 붙들려서 그래 가지고 결국은 원효 스님의 언하(言下)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하는 그런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여기서 이 설화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선도를 닦아 가지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그러한 도리를 터득을 하면 오신통이 다 나고 해서, 중국의 팽조(彭祖) 같은 사람도 칠백 세(歲)를 살았다고 전해 오고 그 이후에도 많은 신선도를 닦은 사람들이 뭐 오백 세, 삼백 세는 보통 다 살고 그런데. 신선도의 도 닦아 가는 그 요령이 무엇이냐 하면은 순전히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 가지고 단전호흡에 통달을 하면 그렇게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아주 참 계행(戒行)을 지키면서 잘하면 오신통이 난 걸로 그렇게 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 불법(佛法)은 그런 신통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또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지를 않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을 하면서 단전호흡을 하기는 합니다마는, 단전호흡을 하기는 하되 신선들이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고 신통이 나기 위해서 하는 그러한 목적으로 단전호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선도를 잘 닦아 가지고 오신통이 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몇 겁을 살았어도 결국 초췌해져 가지고 나중에는 그러한 그 영랑신선처럼 비참한 양상으로 타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원효 스님과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을 만났기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지, 그렇지 않았으면 결국은 참 가련하게 비참하게 처량한 종말을 맞이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물며 인간 세상에 있어서 부귀영화나 그 오욕락을 자기의 뜻대로 얻어서 그것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70년—높은 벼슬도 해 보고, 큰 부자도 되어 보고, 큰 권리도 써 보고, 예쁜 아내를 얻고, 좋은 아들들을 갖고, 그래 가지고 참 남부럽지 않게 부귀공명을 이룬다 하더라도 잠깐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오신통과 불로장생법을 얻었어도 결국 끄터리 가서는 그렇거든, 하물며 이 허망한 인간 세상에 있어서의 오욕락(五欲樂)—재산이라든지, 색(色)이라든지, 명예 권리나 안락 그런 것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봄날 뜨뜻한 양지에서 잠깐 낮잠을 졸다가 꿈속에서 부귀를 누리다가 퍼뜩 낮잠을 깨고 보니 참!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하다’ 이렇게 인간의 부귀영화와 흥망성쇠를 춘몽에다가 고인(古人)들은 다 비유를 했습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지(實地)가 그런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 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은 그러한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를 달팽이 뿔에다가도 비교를 했습니다. 달팽이의 그 뿔이라는 것이 잠깐 푹 길게 나왔다가 또 그냥 쑥! 속으로 들어갔다가, 또 가만 놔두면 또 쑤욱 길게 뻗었다가 또 살짝 건들면 또 쑥! 들어갔다—부자가 되었다가 가난해졌다가, 무슨 권리를 누렸다가 또 권리가 없어졌다가, 이러한 것이 달팽이 뿔따구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사람들은 그 달팽이 뿔따구보다도 더 허망한 부귀공명을 위해서, 그 받기 어려운 사람 몸, 만나기 어려운 이 세상에 몸을 받아 나 가지고 그 달팽이 뿔따구와 같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 몸과 목숨과 시간을 거기다 다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추구한 만큼 마음대로 얻어지기도 어렵지만, 얻어 놓고 보면 ‘아! 이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는 것이고, 얻어 놓고 보면 참다운 행복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겪은 뒤에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한 번 두 번 겪어보면 퍼뜩 그것을 깨닫게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일생 동안에 수없이 그러한 부귀공명이라든지 흥망성쇠가 허망하다고 한 것을 수십 번을 겪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 해보고 겪어보고 그래 가지고 마지막 죽을 때에사 ‘하! 인생이라고 한 것은 참 허망한 것이었구나’ 죽을 때에사 겨우 깨닫게 되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숨 끊어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미련과 원망과 한을 품고서 숨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비사왕(鞞肆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있었는데, 그때 가섭(迦葉)이라고 하는 큰 도인이 계셨습니다. 그 비사왕이 그 가섭존자를 만나 가지고 묻기를, "불교에서는 착한 일을 하면 천상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내생에 지옥에 간다고 모다 그래 쌓는데, 나는 그 소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가 내생이 있고, 어디가 무슨 지옥 천당이 있겠습니까? 그건 허무맹랑한 소리고 사람들을 속이는 소리고, 괜히 악한 짓하지 말고 착한 일하라고 그렇게 그 권선징악을 하기 위해서 공연히 사람들을 겁을 주는 소리지, 어디가 그 뭐 내생이 어디가 있고, 숨 한 번 끊어져서 죽어버리면 그만이지 무슨 내생이 있겠느냐"고. "그런 명색이 도인이고 성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멀쩡한 소리를 가지고 혹세무민을 한다, 세상을 속이고 모다 그런다 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은 그러면 금세(今世)를 위해서 있는 것이요? 내생(來生)을 위해서 있는 것이요?" 하고 가섭존자가 물었습니다. 물으니까 비사왕이 "그런 소리 물어봤자 나는 내생은 도저히 있다고 믿을 수가 없다"고, "해야 오늘을 위해서 떴건, 내일을 위해서 떴건 그것은 가만 놔둬도 떴다 졌다 하는 것이지 무슨 거기다 대고 금생 내생을 따지느냐? 나 그래도 그런 것은 내생은 나는 안 믿는다"고. "인과(因果)도 안 믿고 내생도 그런 것도 안 믿는다" 그러니까,(처음~17분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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〇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그러면 어째서 그렇게 안 믿소?" 그러니까, "내가 잘 아는 사람, 아주 일생 동안을 착한 일만 하고 그런 사람보고 그 사람이 죽을라고 할 때 '당신은 일생 동안을 좋은 일만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하고, 행동을 착하게 하고 그랬으니 당신은 틀림없이 천당에 갈 거요. 만약에 천당이라고 하는 곳이 사실 있다면 당신은 천당에 갈 것이니, 천당에 가걸랑 바로 와 가지고 나한테 천당이 이렇게 이렇게 생겼고, 실지로 있다고 한 것을 나한테 보고를 해 주시오' 하고 신신부탁(申申付託)을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어가더니 천당에를 갔는지 어디로 꼬꾸라졌는지 다시는 와서 말을 안 하더라 이거지요"
또 자기가 안 사람 가운데 천하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기협잡에다가 사람을 많이 죽이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참! 인간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짐승만도 못한 그런 못된 놈이 내가 잘 아는 사람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래도 마지막 죽게 된다고 그래서 그 문병을 안 갈 수가 없어서 가 가지고, '참, 죽어갈라고 하는데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당신은 틀림없이 죽으면 지옥에 갈 거요. 지옥에 갈 건데 제발 지옥에 가거든, 나한테 와서 그 지옥이 사실로 있는 고대로 그 본대로 와서 얘기를 해 달라'고, 그러면서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 사람이 한번 죽더니 다시는 오지 않더라. 그러니 어찌 그 지옥도 있다고 내가 믿을 수가 없고, 천당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안 믿는다" 그러니까.
그 가섭존자가 "참, 그 대왕 말씀을 들으니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내 말을 한번 들어보시오. 어떤 사람이 똥구덩이에 빠졌다가 겨우 거기서 나와 가지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몸에다 향수를 치르고 그랬던 사람이 어찌 다시 똥항에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겠소? 그와 같아서 인간 세상에 모다 그 죄 많은 이 고해(苦海)에 있다가 착한 일을 한 그 공덕으로 천당에 한번 갔으면 거기 가서 보니깐 너무너무 좋고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이 인간 세상에 당신한테 그 소리 할라고 여기를 오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 대왕이 역적을 한 놈을 잡아가지고 취조를 하는데 그 죄인이 ‘내가 마지막 이렇게 죽어가니 내 부모형제와 고향을 한번 가서 다 둘러보고 하직 인사라도 하고 그러고 올 테니 나를 좀 놔 주시오’ 하면은 당신이 놔 주겠습니까?" "나 안 놔 주지요"
"그와 같습니다. 죄 지어 가지고 지옥에 한번 갔으면 저는 쇠사슬에 묶여서 고문 받느라고 볼 일을 못 볼 텐데, 누가 당신한테 가서 지옥고 구경한 것 얘기하라고 지옥에서 놔 주겠습니까? 그러니 천당에 한번 올라가면은 갔다 왔다고 보고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지옥에 한번 떨어진 사람이 지가 무슨 그 권리가 있어서 와서 그것을 보고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지, 천당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지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존자가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으나 그런 소리 쯤 가지고 내가 인과(因果)를 믿을 사람이 아니여"
그래 가지고 아주 인과를 막 부인을 하고. "그런 소리는 하나의 비유는 될지 모르지마는 나는 그래도 지옥이니 천당이니 그따위 소리를 나는 믿을 수가 없다"
〇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그러면 내가 또 하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둘이 여행을 가는데, 둘이 다 가는데 좋은 새끼를 꽌 타래가 있으니까 둘이 그놈을 짊어질 만큼 가득 짊어졌다 이것입니다. ‘이건 참, 집에 가지고 가면은 농사짓는 데도 필요하고, 뭘 묶는 데도 필요하고 그러니 우리 이것 임자도 없고 버린 것이니까 우리가 짊어지고 가자’
그래서 짊어지고 가다가 얼마쯤 땀을 흘리다 가니까, 아! 뭔 주머니가 하나 있는데 그 주머니를 열어보니까 은이 가득 주머니 속에 들었다 그 말이여. 묵직한 은전(銀錢)이 들어있어서 그 앞서간 사람이 그 은전을 자기가 딱 짊어지고 그 은전이 무거우니까 ‘에이, 이까짓 거’ 새끼 짐은 갖다가 벗어 내동댕이쳐 버리고 얼마만큼 가니까, 또 무슨 주머니가 있어서 그 주머니를 보니까 아! 그 속에는 황금이 번쩍번쩍한 황금전이, 황금이 그냥 그 속에 가득 들었다 그 말이여.
이것 자기가 갖고 싶지만 자기는 이미 은전 뭉텅이를 줏었으니까 뒤에 온 사람보고 ‘여기에 금전(金錢)이 있으니 당신 그 새끼 뭉텅이 버려버리고 이 금전 뭉텅이를 당신 가지시오’ 하니까, ‘아니 나 그것 싫소. 내가 이 새끼 뭉텅이가 이걸 얼마나 필요해서 이것을 여기까지 참! 수십 리를 이놈을 짊어지고 애써서 왔는데, 이것 고향에 가지고 가면 농사짓는데 꼭 필요한데, 이렇게 애써서 짊어지고 온 것을 내가 버리고 그 금전 뭉텅이를 내가 가지고 가겠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한다’고 기어이 그 사람이 금전 뭉텅이를 안 가지고 새끼 뭉텅이를 가지고 간다고 고집을 하니까.
아! 이 사람은 할 수 없이 그 사람이 안 갖는다 하니까, 은전 뭉텅이를 둘 다 가지고 가면 좋겠는데 너무 무거워서 은전 뭉텅이는 그냥 버려버리고 금전 뭉텅이만 갖다 한 짐 짊어지고 인자 고향에로 오니까, 그 가족들이 모두 그 금전을 그놈을 갖다가 한 닢만 팔아도 논이 몇 마지기요, 두 닢만 팔아도 그냥 고대광실(高臺廣室) 좋은 집을 짓고 아주 그냥 양식도 사고, 종도 들이고. 또 그 돈이 그리고도 한량없이 남으니까 절에 시주도 하고, 양로원 고아원에다가 또 보시도 하고, 뭐 일가친척 가난한 사람도 노나주고, 돈 없어서 학교 못 다니는 사람, 돈 없어서 병 앓고 있는 사람, 그런 데다 아주 적절히 써서 참 그 사람은 잘살게 되었는데.
아!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간 사람은 짊어지고 가자 집안 식구들한테 ‘아무개는 금전을 가지고 와서 저렇게 잘사는데, 병신 같은 것이 새끼 뭉텅이만 짊어지고 와 가지고 그까짓 것 무엇에 쓰냐’고 막 혼구녕만 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집안 식구한테도 대접을 못 받고 아! 계속해서 가난뱅이 신세를 못 면하는데. 마치 대왕은 그 ‘내생이 없다’ 하고, 「무슨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간다. 악한 일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하는 이런 인과법을 믿지 않는 것으로써 자기의 고집을 삼고, 끝까지 내가 이 성현의 말씀을 해 준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마치 새끼 뭉텅이 그놈 그것 땀 흘리면서 짊어지고 온 것이 아까워서 그 은전 뭉텅이나 금전 뭉텅이를 보고도 그놈을 취하지 아니하고, 새끼 뭉텅이만 잔뜩 짊어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대왕님과는 너무나도 같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대왕님이 말이 꽉 막혔습니다. 한참을 말이 막혀서, 이것 내가 이 고집을 꺾자니 이 존자 앞에 참 창피하기도 하고, 또 가섭존자의 말씀이 절대로 들어보니 그럴싸하기는 하고.
그래서 "사실은 내가 여태까지 임금 노릇을 하면서 입만 벌렸다 하면은 ‘내생이라는 것은 없다’ 입만 벌렸다 하면은 인과를 부인을 하고 이래 왔는데, 이런 것을 만조백관(滿朝百官)이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존자 말을 듣고서 그 여러 해 동안을 내가 그 주장을 해 오고 고집을 해 온 이것을 존자한테 설복(說伏)을 당했다 한다면 내 임금의 채신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참! 딱해서 그럽니다. 그거 그 문제만 아니면은 내가 그냥 그것 참! 존자 말씀이 그것 참! 틀림없는 말인데, 임금으로서, 내가 평민만 같아도 모르겠는데 임금으로서 참 존자한테 내가 설복을 당했다고 해서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고집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니까.
〇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참! 딱합니다. 내가 비유를 하나 더 들어서 얘기를 하지요.
참 아주 큰 멧돼지가 있었는데, 그놈은 많은 그 작은 멧돼지를 거느리고 사는 멧돼지의 왕인데 왕초인데, 그놈이 그 자기네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주 큰소리를 치고, 쪽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은 그 나발대로 받아 가지고 그냥 막 혼구녕을 내고 해 가지고, 누구고 그 멧돼지 왕초한테는 수백 마리의 멧돼지들이 꼼짝을 못하고 그러는데, 아! 그렇게 큰소리를 뻥뻥 치다가 호랭이를 만났습니다. 호랭이를 만났는데 인자 그 부하들 보는 데에서 호랭이한테 참 항복할 수도 없고, 정면상대해서 싸우자니 호랭이 그 날카로운 발톱으로 한번 할퀴어서 쥐어 뜯어버리면 꽥 소리도 못하고 죽을 것 같고.
참 딱해서 그 멧돼지 왕이 한참 동안을 꾀를 내다가 호랭이 보고 "내가 잠깐 우리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그 갑옷이 있으니 내가 그 갑옷을 입고 나와 가지고 내가 한바탕 당신하고 해볼 양이니, 내 갑옷 입은 것이 무서우면 당신이 먼저 길을 비켜서 먼저 가고, 나하고 기어코 한바탕 해볼 생각이 있으면 내가 갑옷 입을 때까지 잠깐 기달려 주오" 그러니까, 호랭이가 지까짓 놈이 갑옷 아니라 별것을 입고 온들 그까짓 것 문제가 없으니까 "갑옷 입고 나올테면 입고 나와 보라"고 하니까.
멧돼지란 놈이 꿀꿀거리면서 어디를 가더니 사람 똥항 속에 풍 들어가서 허우적허우적하면서 온 몸뚱이에다가 똥을 잔뜩 쳐바르고 나와 가지고는 "자 덤빌라면 한번 덤벼보라" 그러니까 호랭이란 놈이 저놈이 갑옷이라더니 어디서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야! 그것이 네 선조 때부터서 내려오는 갑옷이냐? 에이, 더러운 놈의 자석. 나 너하고 싸움 안 할 테니까 빨리 꺼져라 이 자식아!"
그래 가지고 그 멧돼지가 그 꾀는 참 비루하고 추잡한 꾀를 냈지만 영락없이 호랭이를 싸우지 않고 물리쳤습니다. 저는 그리고서 부하 앞에서 "아! 내가 나의 이 지혜로써 저 건방진 놈을 내가 물리쳤다"고 아주 뻐개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번연히 대왕님의 생각이 틀리고, 그 성현의 말씀이 옳고 내 말이 옳은데도, 그 신하들이 창피하다고 해서 그 자기의 잘못된 소견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 똥을 뒤집어쓰고 나와 가지고 호랭이 보고 물러서라고 한 것과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임금님이 참 너무 부끄럽게 생각을 하고 이 동곳을 빼고 그 존자 앞에 항복을 했습니다.
이것은 참, 한 설화(說話)입니다마는 이게 중아함경(中阿含經)에 나오는 부처님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관(先入觀)이 있습니다. 정치가나 법률가나 학자나 또는 실업가나 또는 뭐 무역이나 장사하는 사람, 모든 사람, 심지어 구두를 닦는 사람은 구두를 닦는 사람, 또 구들을 놓는 사람은 구들 놓는 사람, 목수, 미쟁이 무엇을 하든지, 남 보면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마는 자기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의 일가지견(一家之見)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또 여기에 사부대중이 모다 모이셨습니다마는 당신 나름대로 다 경도 보고, 기도도 해 보고, 염불도 해 보고, 또 주력도 해 보고, 또 참선도 해 보고, 그래 가지고 각기 일가지견이 자기 나름대로 있습니다. 다 해 봐 가지고 '참선은 이러한 것이다' '염불은 이런 것이다' '불법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다 자기 소견(所見)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비사왕처럼 딱 자기 소견이 있어 가지고 여간해서 그것을 버리지를 않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러한 선입관에 국집(局執)이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불법은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서도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한 생각만 가져도 벌써 그것이 미(迷)한 것인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했거나 수다원(須陀洹)이나 사다함(斯陀含)이나 아나함(阿那含) 이런 성과(聖果)를 얻어 가지고서도 ‘내가 이러한 성과를 얻었다’ 하는 생각을 내면, 벌써 그것이 아상(我相) · 인상(人相) · 중생상(衆生相) · 수자상(壽者相)에 떨어진 것이어서 그것이 참다운 도에 들어간 것이 아닌데, 깨달음에 들어간 것도 아닌 그밖에 다른 생각에 국집을 한다면 그것은 참 언어도단(言語道斷)인 것입니다.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本業)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 아만 ·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을 ‘자기의 주관을 버리라’ ‘자기의 주체의식을 버리라’ 이러한 말과 혼동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한국 국민은 한국 국민으로서의 주체의식이 있어야 하고, 내가 어떠한 사업을 하니 무엇을 하는 데 있어서도 확고한 주관이 서야지요.
하지만 도(道)에 있어서의 그 선입관, 선입관이 딱 가로막고 있으면 어떠한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도 먹혀 들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까 이 비사왕이 그러한 삿된 소견을 국집을 해 가지고 그렇게 존자가 알아듣겄게 얘기를 해 주어도 거기에 항복을 하지 아니하고 믿지 않을려고 한 것처럼, 다행이 이런 가섭존자와 같은 그러한 참 그 변재(辯才)가 무궁무진한 그리고 지혜와 자비가 넘치는 이런 훌륭한 도인을 만나서 결국은 항복은 해서 다행입니다마는, 우리도 어쨌든지 그러한 사견(邪見)에 빠져 가지고 정법에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17분9초~37분13초)
동풍취락행화지(東風吹落杏花枝)하니, 동풍, 봄바람을 동풍(東風)이라고 그러지요. 동풍이 불어서 은행나무 은행꽃을 다 떨어트렸다 그 말이여. 천리홍향(千里紅香)이 재하처(在何處)냐? 천리에 붉은 꽃향기가 어디에 있겠느냐?
동풍이 잘 불었을 때는 그 백화가 피고 모다 향기를 풍기고 그러다가 아주 심한 강한 동풍이 냅다 불어대니까 행화(杏花)도 복숭아꽃도 떨어져버리고 온갖 울긋불긋한 좋은 꽃도 다 떨어져버렸다 그 말이여.
태양문하(太陽門下)에 무성월(無星月)이요. 태양이 없을 때 밤에는 별도 반짝거리고 달도 밝고 그랬었는데, 동천에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니까 번쩍거리던 별도 간 곳이 없고, 그렇게 휘황찬 달빛도 무색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천자전리(天子殿裏)에 무빈아(無貧兒)로구나. 천자(天子)의 궁전 속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더라. 거지가 없더라.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여. 그 얼굴 생긴 것이 천 명이 모이면 천 명이 다 다르고, 만 명이 모이면 만 명이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어. 그만큼 중생의 근기도 또 차이가 있어서 성격도 다르고, 근기도 다르고, 지혜 있고 어리석은 것도 다르고, 복이 있고 없는 것도 다르고 그렇게 다른데.
그래서 우리가 지은 업(業)도 천차만별이여. 그래서 소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그래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모다 잘난 맛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잘난 맛이 없고, '나는 참 못났다' '나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이다' 이렇게 비관을 하기 시작하면 참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리고, 뭐 그냥 자살할 생각밖에 안 날 것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그래도 자기 잘난 맛으로 그 재미로 그래도 이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중생이 그리고 이 생활 의욕을 가지고 또 이렇게 자기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모다 그 살아볼라고 애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참 다행한 일이지요. 쓰레기를 줍건, 똥을 푸건, 짐을 나르건, 무슨 직업을 가지건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충실히 하면서, 그 직업이 힘만 들고 돈은 많이 못 벌지라도 그래도 그 자기의 직업을 참 소중히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서 충실히 하고 그것은 대단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밤하늘에 온 창공에 수천 수백만의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에다가 비유할 수가 있지요. 그 별 나름대로 다 속삭임이 있고, 별 나름대로의 그거 자체를 유지해 나가는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 밤하늘에 그렇게 크고 작은 수많은 별들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태양이 한번 터억 동천(東天)에 홰를 치고 떠오르는 날에는 그 별들이 간 곳이 없어.
이것은 각기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의 전생에 지은 분복(分福)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이나 거기에서 정법(正法)을 믿는, 그 정법이 한번 그 자기의 마음속에 탁! 파고들어 가면—큰 별이나 작은 별이나 무슨 별을 막론하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법을 한번 탁! 접해 가지고 딱!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이거거든. 가난한 사람도 이 정법을 철저히 믿고 난 때부터서는 가난한 것이 아니요. 악한 짓을 많이 한 죄인도 정법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된 바로 그 시간부터서는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정법은 이 태양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천자의 궁궐 안에는, 거지가 어떻게 천자의 궁궐 안에 거지가 가난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아서 정법을 한번 믿어버리면, 믿고 그것을 실천한 바로 그 시간부터서 그 사람은 바로 천자의 궁궐 속에서 살고 있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법문에는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그 팔만사천 가지의 방편법(方便法)인데, 부득이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부득이해서 그런 방편설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옥(珠玉) 같은 말씀이고 주옥 같은 법이기는 하지만, 그 방편은 궁극에 가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알아듣게 하기 위한, 최상승법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는 그 방편으로 인해서 불법을 믿게 되었고 불법에 인연을 걸게 되었으나, 일단 불법에 인연을 걸었으면은 하루빨리 그 방편법에서 그 방편법을 발판으로 해서 최상승법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이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인 것입니다.
참선법은 이것은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점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모든 학문은 차례차례 해 가지고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차츰차츰 깊은 데에까지 들어가는 것인데, 이 최상승법은 그런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신(信)이 투철하고 그 용맹이 투철하면 3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영랑신선은 3일 만에 견성(見性)을 했어. 역대조사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언하(言下)에 확철대오한 분이 수없이 많습니다.
물론 저 긴 눈으로 보면 언하에 대오한 분은 숙세(宿世)에 그만큼 닦았기 때문에 금생에 또 그렇게 3일에도 깨닫고, 7일에도 깨닫고, 뭐 언하에도 깨닫게도 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과거 전생 일을 모르니 전생에 우리가 얼마만큼 닦았는가 확실한 것은 모르지요? 모르나, 금생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그래 가지고 이렇게 최상승 법문을 듣게 된 걸로 보면, 천하 없이도 우리는 저 전생 저 전생부터서 이 정법에 깊은 인연을 맺고 씨를 심어놨던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정말 투철한 신심과 투철한 용맹으로 바르게 공부만 한다면 우리도 언하에 진리의 눈을 뜰 수도 있고, 3일이나 7일이나 석 달에도 확철대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을 시작한 지 3년이 넘고, 10년이 넘고, 20년, 30년이 되어도 별 뾰족한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은 반드시 그 신심(信心)이 약하거나 분심(憤心)이 약하거나 또는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거나, 방법은 틀리지 않았어도 신심과 분심이 약해 가지고 그렇다면 그러니 끝장이 안 나겠지요?
솥에다가 무슨 아주 그 뭐 질기고 굳은 어떤 음식을 넣어놓고 불을 때는데, 그 장작을 갖다가 잘 지펴서 뜨끈뜨끈하게 지펴야 그놈이 인자 솥에 물이 끓고 속에 음식이 무를 텐데, 계속 앉아서 성냥개비 같은 것을 놓고 볼볼볼볼 태운다든지, 솔 이파리를 갖다가 하나씩 하나씩 태우고 앉았다면—그것은 틀림없이 솔 이파리나 성냥개비도 그것이 목질(木質)이니까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고, 누가 보든지 그 불 땐다고 하지 '불 안 땐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 솔 이파리 하나씩 하나씩 때 가지고 그것이 솥에 것이 끓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도 분명이 이렇게 앉아서, 떠억 버티고 앉아서 ‘이뭣고?’ 하고, 그거 남 보면 분명히 참선이지 그거 참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이 그 신심이 간절하고 그 용맹심(勇猛心)이 투철하고 그러지 아니하면, 그냥 ‘이뭣고?’ ‘이뭣고?’ 한 번만 해도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니까, ‘이뭣고?’(하면서) 거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욕심 챙길 것 다 욕심 챙기고, 할 것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가끔 한 번씩 ‘이뭣고?’ 그래 갖고 '나 참선을 30년이나 했는데 별 소식이 없다'고. 그거 솔 이파리 하나씩 둘씩 꼬실라 갖고 솥에 것이 안 무른다는 사람과 그것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어쨌든지 기왕 불법을 만났고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신다면, 그 솔잎도 그냥 한아름씩 갖다가 막 계속해서 요령 있게 부지깽이로 잘 하면서 불을 지피면 상당히 화력(火力)이 나고, 모다 성냥개비 같은 것도 그냥 짐으로 갖다가 막 싸지른다면 그것도 화력이 날 것입니다.
인자 이 말을 듣고 혹 어떤 분은 '그래! 아주 참 투철(透徹)한 신심과 아주 투철한 용맹심을 가져야 참선을 빨리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해볼 일이다' 해 가지고, 이를 악물고 막 그냥 눈을 까뒤집고서, 꽉! 눈썹을 갖다 찡그리면서 ‘이뭣고?’ 그래 가지고 막 허리를 펴고 어깨에다 힘을 주고서, 목에다가 그냥 힘을 주고 오기를 내 가지고 막 해 제끼는... 그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면은 며칠 못 가서 골이 뽀개질라고 아플 것이고, 눈이 생꼬막 까놓은 것처럼 벌게지면서 큰일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이 그렇게 참 좋은 것이지만, 참 이건 선지식의 바른 법문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해 가야지, 잘못하면은 참 이거 하다가 병 걸리기도 쉽고, 사견에 떨어지기도 쉽고, 까딱하면 미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삼 녹용이 참 비싸고 좋다니까 막 삶아먹고 혈압이 터져서 중풍 걸리고. 대부분 부자가 그 참! 바둑 문자에 '부자 몸조심 한다' 그러는데, 부자는 인자 돈도 많겠다. 첫째는 몸이 건강해야 되겠다 그 말이여. 그래야 그 피땀 흘려서 번 재산 참 마음껏 즐기고 그래야겠는데, 이 몸을 만들려고 이거 보약을 막 먹다가 병을 걸린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몸을 건강히 하려면은 정력을 갖다가 왕성하게 만들어야겠다' 그래 가지고 문의를 하니까, 무슨 해구신(海狗腎)이니 뭣이니 해 가지고 무슨 아주 돈을 갖다가 몇백만 원씩 줘 가지고 그 환약을 만들어 가지고 먹었는데, 처음에는 무슨 소식이 있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그냥 막 아퍼 가지고는 그 후유증이 막 생기고 해 가지고 막 혈압이 오르고. 그리고 또 이거 녹용이 좋다니까 저 외국에서 모다 밀수해 놓은 놈을 갖다가 막 갖다 잔뜩 집어넣고 고아먹고 그래 가지고는 그냥 혈압이 뻣질러 올라 가지고 대번에 그냥 중풍이 걸려 가지고 대소변을... 그게 다 어리석은 것이거든. 보약이라 하는 것도 다 자기의 체질을 분류를 해 가지고 자기 체질에 맞는 약을 또 그 연령과 모든 오장육부를 잘 알아 가지고 적절히 써야 그것이 좋은 것이지, 덮어놓고 비싼 약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거든.
참선도 사람이 상기(上氣)가 잘되고, 위에로 상기가 잘 오를 체질을 가진 사람이 있고, 항상 기운이 밑으로 잘 내려가서 여간해서 기운이 오르지 아니한 체질이 있습니다. 특히 조금 뭐 한 생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지고, 누가 말 한마디만 해도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 이러한 사람, 조금 뭐 충격을 받거나, 뭘 조금 연구를 하거나 하면은 금방 골이 아파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이런 사람은 상기(上氣)의 증상이 일어날 우려성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은 특별히 이 단전호흡(丹田呼吸)부터서 기초부터서 착실히 다져 가지고 본격적으로 참선에 들어가는 것이 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37분14초~56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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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 뭔 소리 들어봤자 뭐 상기도 되지도 않고, 뭐 며칠씩 잠을 안 자도 조금도 머리가 아프거나 그러지도 않고, 그러한 체질을 가진 사람은 단전호흡이고 뭣도 상관없이 마구잽이 처음부터서 화두를 들고 막 며칠씩 잠을 안 자고 해 제껴도 까딱도 않는 그러한 체질을 타고 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뭐 단전호흡이고 뭣이고 소용이 없습니다. 막 해 제껴도 괜찮은 그런 사람은 아주 몸을 잘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런 그 본(本)을 보고서 그러한 훌륭한 체질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도 그 본 보고 막 하다가는 큰일나는 거지요.
단식 같은 것도 좋다 하니까 뭣한 사람은 한 열흘씩 굶다가도 맛있는 찰밥이나 인절미를 보고 그냥 한 사발씩 막 집어먹어 버리고도 그냥 아무렇지도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분을 보고서 '그까짓 거 나도 한번 해 본다'고, 며칠 굶고서 식욕이 당기니까 그냥 인절미 시루떡을 갖다가 그냥 막 침도 안 바르고, 막 그냥 잔뜩 먹고는 그냥 속이 쓰리고 생트림이 올라오면서 위가 늘어져 가지고는 그래 가지고는 아주 종신(終身) 병신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단식도 잘하면은 위장병도 낫고 여러 가지 병에 참 좋은 것이지만 어리석게 하면 그거 못쓰는 거고.
참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할 최상승법이지만 이것도 참 잘못하면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위험하고 까딱하면 사견(邪見)에 떨어지고, 그 말만 듣고서 '아이구! 그거 참선 함부로 할 거 아니다. 좋게 그저 관세음보살이나 슬슬 부르다가 말지. 그것 잘못하다가 미치면 그거 어떻게 해'
그런 사람은 계란 짐 짊어지고 성 밑에 못 가고, 그런 사람은 배 뒤집어질까봐 평생 배 한 번 못 타보고, 비행기 떨어질까 봐서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외국 한 번도 못 가고, 자동차 위험하다고 자동차 안 타고, 그렇다면 그것이 되겠습니까? 아무리 비행기가 가끔 심심찮게 여기서 저기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타야 할 때는 타야 하는 거고, 그러면 비행기 안 타고 집안에 가만히 엎졌으면 그 사람이 천세 만세 살겠습니까? 평지낙상(平地落傷)도 있고, 밥 먹고 체해서 죽기도 하고, 저녁밥 잘 먹고 자다가 죽기도 하고 그런데 뭐.
어쨌든지 세상이 이렇게 국내적으로나 또는 국제적으로나 자꾸 이렇게 과학문명은 발달을 하고, 또 사람 살기는 참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편리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편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되었냐 하면은 참 솔직하게 말해서 이렇게 문명이 발달되기 이전에다가 비교해서 그렇게 행복해졌다고는 좀 말하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 뒤숭숭하고, 참 어찌 생각하면 대단히 위험스러운 그러한 감이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이 정법에 귀의해서 정법으로써 무장을 해야겠습니다. 정법으로써 탁! 정신무장을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개인적인 일신상의 문제도 반드시 해결이 나고, 가정 문제도 해결이 나고, 국가 사회 문제도 해결이 나고, 궁극에 가서는 온 세계의 문제도 최상승법에 귀의해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써만이 궁극적인 해결이 되리라고 나는 그렇게 굳게 믿습니다. 이것은 참 어디에 가서라도 장담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틀림이 없는 사실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다져서 뒤로 미루지 말고, 앉았을 때, 섰을 때, 일할 때, 빨래할 때, 밥 지을 때, 차 탈 때, 속상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이 한마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인 것입니다.
행여나 그 호랭이가 무섭다고 똥항에 들어가서 똥 묻혀 갖고 나올 생각을 마시고, 정법으로 무장을 하시면 호랭이 아니라 염라대왕, 무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도 이 ‘이뭣고?’ 화두 한마디로써 다 항복받을 수가 있고, 다 그러한 항복이라기보다는 전부 나한테 돌아와서 합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일모레는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사월초파일. 이 법당에도 등(燈)이 가득 달려 있고, 법당 밖에도 달려 있고, 「부처님 오신 날」이 국경일로 이렇게 지정이 된 뒤로는 도회지나 산간이나 방방곡곡에 이 초파일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등(燈)이 모다 매달리고, 사람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진리로써 마음을 가다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해서 새로운 진리의 부처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파일에 어쨌든지 모두모두 식구들이 다 손을 잡고 나오시고, 또 일가친척 가족들 또 모두모두 권고해서 다 부처님 앞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법문도 듣고, 부처님의 탄생을 축복하는 그 자체가 자기의 업장을 소멸하고 자기의 앞길을 축복받는 일이 되고, 그럼으로써 진리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궁에 태자로 탄생을 하셨는데 바로 그날이 내일모레 다가오는데, 그날 막연하게 등불만을 켜고 복을 빌고, 그것도 참 소박한 의미에서 참 소박한 한 신앙으로 참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 자신도 내일모레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그날을 맞이하는 것이 참 좋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다 성불(成佛)한 그런 법신(法身)인 것입니다마는, 까닭없이 우리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원인으로 해서 그냥 무명(無明)으로 덮여 가지고 그냥 이렇게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참 범부(凡夫)로서 이렇게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내일모레를 기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 오신 날」을 욕불일(浴佛日)이라 그럽니다. 목욕, 목욕탕 이래서 '목욕 욕(浴)' 자, '부처 불(佛)' 자,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날이다' 그래서 욕불일이라 그러는데. ‘부처님이 탄생을 하셔서 그날 그 아홉 용(龍)이 입으로 물을 이렇게 청정한 물을 토해 가지고 목욕을 시켰다’ 인자 그렇게 설화적으로 전해 내려옵니다마는.
‘부처님이 태어나 가지고 목욕하신 날이다’ 해서 철불(鐵佛)을—쇠로 조성한 불상(佛像)을 따악 갖다가 안치해 놓고, 전 대중이 차례차례로 돌아가면서 바가지로 물을 퍼 가지고 부처님께 물을 퍼 붓는 그런 행사도 옛날에는 거행했고, 지금도 또 거행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런 행사를 안 갖습니다마는.
그 부처님께 물을 요렇게 부어서 목욕을 시켜드리는 그 행사가 부처님이 태어난 그것을 우리의 마음속에 확실히 이렇게 새겨서, 그 부처님이 바로 자기와 동일시(同一視)를 해서 자기의 몸에 자기가 그날, 부처님 탄생한 날 자기도 새로 태어나서 그 부처님 목욕시킨 그 물로 자기의 몸에 물을 부어서 목욕을 함으로써,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부처가 될 것을 마음에 다지는 그러한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철불(鐵佛)에다가 물을 붓는 행사는 안 갖지마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과 또 산승(山僧)의 말을 들음으로 해서 눈에 보이는 물로 목욕을 한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법수(法水)로써 목욕을 해 가지고, 업장을 소멸하고 청정한 몸과 청정한 마음으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약을 하는 그러한 의미로 초파일에 모두 등(燈)도 모다 잘 다시고 또 법문도 들으시고 그래서 초파일에 꼭 참석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불원공명단원산(不願功名但願山), 세속의 공명, 부귀공명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산을 원해서, 산중(山中)에 채약기년간(採藥幾年間)고, 그 산중에서 약을 캐기 그 몇 년이나 되었던가?
심심송뢰연하리(深深松籟烟霞裏)에, 깊고 깊은 그 솔바람 부는 안개가 자욱한 그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일곡지가만경한(一曲芝歌萬境閑)이로구나. 한 곡 지초(芝草) 캐는 이 노래에 일만 경계가 한가롭구나.
이건 산중에 들어가서 처사(處士)가 되어 가지고 그 온갖 약초를 캐면서 그 약초를 캐서 달여 먹고, 약초를 캐 가지고 연명(延命)해 나가는 이런 약초를 캐면서 지초 캐는 노래를 갖다가 부르면서 그 한가한 거동을 읊은 시입니다.
세속이 이렇게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흥망성쇠와 빈부귀천 모다 이런 것을 위해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세계 대세가 전부 그 원인을 따져보면 탐진치, 탐진치 때문에 일어나는 모든 싸움이고 전쟁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데에서 턱 벗어나 가지고 정법에 귀의(歸依)해서 도를 닦는 것, 그것을 갖다가 산중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는 데에다가 비유를 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으면 비록 세속(世俗)에서 살아도 그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 형제 간에 우애하고, 이웃지간에 화목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러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 사랑으로써 상대하고,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생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할라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안 되어도 세속에 살아도 바로 그것이 산중에서 도를 닦은 거와 마찬가지고, 그냥 세속에서 살아도 그 솔바람 부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시냇물 가에서 약초를 캐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그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입니다.(56분58초~1시간15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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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허공경계기사량~’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야부 게송 참고. *풍월(風月) ; ①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 ②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읊거나 노래함. 또는 그 시나 노래. *백화(百花) ; 온갖 꽃. *기연(機緣 기틀·기회·작용·때 기/인연·이유·연줄 연) ; ①시기인연(時機因緣)의 준말. 어떠한 기회 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동기. ②중생의 소질이나 능력이 부처님 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만한 인연, 조건이 되는 것. ③가르침을 주고받게 된 스승과 제자의 인연.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①신족통(神足通)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 ②천안통(天眼通)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③천이통(天耳通)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④타심통(他心通) 남의 마음 속을 아는 능력. ⑤숙명통(宿命通)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94-95 참조.(가로판 p99~100)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계행(戒行) ; ①계(戒)를 지켜 수행하는 것. 계율에 정해진 규칙을 성실하게 실천수행하는 것. ②계율과 도덕.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끄터리 ; '끄트머리'의 사투리.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실지(實地) ; ①실제의 처지나 경우. ②실제의 땅이나 장소.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삼생(三生) ;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하는, 전생(前生), 현생(現生), 후생(後生,來生)을 아울러 이르는 말.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 참고.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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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부탁(申申付託) ;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간곡하게 하는 부탁. *똥항(똥缸 항아리 항) : 재래식 화장실(칙간)의 바닥을 파고 이를 묻어 분뇨를 저장하던 것으로 이 항아리에 분뇨가 가득 차면 똥장군 등에 퍼담아 밭에 내다 거름으로 이용하였다. *고대광실(高臺廣室) ; '높은 누대(樓臺)와 넓은 집'이라는 뜻으로, 크고 좋은 집을 이르는 말. *혼구녕 ; 혼꾸멍나다(魂---- '혼나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 *만조백관(滿朝百官) ;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 *설복(說伏) ; ①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아듣도록 말하거나 타일러서 수긍하게 함. ②남의 주장이나 이론을 깨뜨려 굴복하게 함. *채신 ; ‘처신(處身, 세상살이나 대인 관계에 대해서 가지는 몸가짐이나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호랭이 ; ‘호랑이(虎狼-)’의 사투리. *자석 ; 자식(子息, 남자를 욕할 때 '놈'보다 낮추어 이르는 말)의 사투리. *뻐개다 ; 뻐기다. 얄미울 정도로 매우 우쭐대며 뽐내다. *번연히 ; ‘번히(어떤 일의 결과나 상태 따위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듯이 뚜렷하고 분명하게)’의 본말. *동곳(을) 빼다 ;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힘에) 머리를 풀어 항복을 표시한다는 뜻으로, 주장이나 뜻을 굽히고 복종하다. *동곳 ; 상투를 튼 후에 상투가 풀어지지 않게 꽂는 물건. 금, 은, 호박, 비취 따위로 만드는데, 길이는 약 4센티미터 정도이다. *설화(說話) ; ①어느 민족이나 집단에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 신화(神話), 전설(傳說), 민담(民譚) 등이 있다. ②실제 있었던 일이나 만들어 낸 내용을 재미있게 꾸며서 하는 말. *중아함경(中阿含經) ; 아함경(阿含經)의 하나.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āgama의 음사로, 전해 온 가르침이라는 뜻. 초기 불교시대에 성립된 수천의 경전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팔리(pāli) 어로 된 니카야(nikāya)가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sanskrit) 본(本)이 아가마(āgama)임. 이 아가마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 아함경으로 여기에는 ①장아함경(長阿含經) ②중아함경(中阿含經) ③잡아함경(雜阿含經) ④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네 가지가 있다. (1)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 30경. 문장의 길이가 긴 경전을 모은 것. (2)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 222경. 문장의 길이가 중간 정도인 것을 모은 것. (3)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 1,362경. 짧은 경전을 모은 것. (4)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1권 471경. 사제(四諦)·육도(六度)·팔정도(八正道) 등과 같이 법수(法數)를 순서대로 분류하여 엮은 것. 이에 해당하는 니카야는 다음과 같음.
(1) 디가 니카야(dīgha-nikāya, 長部). 내용이 긴 34경을 모은 것으로 3편으로 분류되어 있음. 한역(漢譯) 장아함경에 해당함. (2) 맛지마 니카야(majjhima-nikāya, 中部). 중간 정도 길이의 152경을 모은 것으로 약 50경씩 3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다시 각 편은 5품으로, 각 품은 대개 10경 단위로 구성되어 있음. 한역(漢譯) 중아함경에 해당함. (3) 상윳타 니카야(saṃyutta-nikāya, 相應部). 짧은 경전 2,875경을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배열한 것으로 전체가 5품으로 되어 있음. 한역(漢譯) 잡아함경에 해당함. (4) 앙굿타라 니카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 2,198경이 법수(法數)에 따라 1법에서 11법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음. 한역(漢譯) 증일아함경에 해당함. (5) 쿳다카 니카야(khuddaka-nikāya, 小部). 법구경·경집·본생담 등 15경으로 구성되어 있음. *선입관(先入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일가지견(一家之見) ; 일가견(一家見). 어떤 일에 관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안목이나 견해.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국집(局執) ; 마음이 확 트이지 못하고 어느 한편에 국한(局限), 집착하는 것. 사리(事理)를 두루 살펴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의 주관에 얽매이거나 자기의 소견만이 옳다고 고집하여 매우 답답한 모습을 말한다. *수다원(須陀洹) ; 산스크리트어 srota-āpanna 팔리어 sota-āpanna의 음사(音寫). 예류(預流) · 입류(入流)라고 번역.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 깨달음의 길을 하천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처음으로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 · 입류하고 함. 이 경지를 수다원과(須陀洹果) · 예류과(預流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수다원향(須陀洹向) · 예류향(預流向)이라 함. 초기불교에서 성문(聲聞)으로서 해탈하는 길은 ‘성문사과(聲聞四果)’라고 하여,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陀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의 4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견혹(見惑)—①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급취견(戒禁取見)·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사다함(斯陀含) ; 산스크리트어 sakṛd-āgāmin 팔리어 sakad-āgāmin의 음사(音寫). 일래(一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一來)라고 함. 이 경지를 사다함과(斯陀含果)·일래과(一來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사다함향(斯陀含向)·일래향(一來向)이라 함. [수혹(修惑)—① 수도(修道)에서 끊는 번뇌라는 뜻.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일어나는 번뇌. 이 번뇌는 욕계에 탐(貪)·진(瞋)·치(癡)·만(慢), 색계와 무색계에 각각 탐(貪)·치(癡)·만(慢)의 열 가지가 있음. ② 유식설에서, 선천적으로 타고난 번뇌, 곧 구생기(俱生起)를 말함.] *아나함(阿那含) ;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anāgāmin의 음사(音寫). 불환(不還)·불래(不來)라고 번역.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 이 성자는 색계·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함. 이 경지를 아나함과(阿那含果)·불환과(不還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나함향(阿那含向)·불환향(不還向)이라 함.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音寫).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賊)·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① 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무학위(無學位)로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번뇌는 다하였으며, 해야 할 바를 다하였고,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함. ② 존경받을 만한 불제자. ③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일컫는 말.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자의식.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인상(人相) ; 산스크리트어 pudgala-saṃjñā 인간이라는 관념·생각.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중생상(衆生相) ; 산스크리트어 sattva-saṃjñā 중생이라는 관념·생각. 부처와 중생을 따로 나누어 나 같은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랴 하고 스스로 타락하고 포기하여 향상과 노력이 없는 소견. *수자상(壽者相) ; 산스크리트어 jīva-saṃjñā 목숨이라는 관념·생각. 목숨이 있다는 관념·생각. 생명체라는 관념·생각. 자기의 나이나 지위나 학벌이나 문벌이 높다는 것에 집착된 소견. *아애(我愛) ; 자아에 대한 애착심.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스스로를 높여서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① 오온(五蘊)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신체에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김. 자신을 과대 평가함.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자아(自我)를 바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말나식(末那識) ; 말나(末那)는 [산스크리트어] manas의 음사로, 의(意)라고 번역.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 제6식(第六識)인 의식(意識)과 구별하기 위해서 의(意)라 하지 않고 말나(末那)라고 한다. 마음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8식(八識: 8가지의 식) 가운데 하나로 제7식(第七識), 제7말나식(第七末那識) 또는 말나(末那)라고도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끊임없이 자아(自我)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아뢰야식과 육식(六識)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여 끊임없이 육식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으로, 항상 아치(我痴)·아견(我見)·아만(我慢)·아애(我愛)의 네 번뇌와 함께 일어남.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생각과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하는 마음 작용.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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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東風吹落杏花枝 千里紅香在何處’ ; 『선원몽구요림(禪苑蒙求瑤林)』 설당간공(雪堂諫公) 게송 참고. *(게송) ‘太陽門下無星月 天子殿裏無貧兒’ ; 『전등록』 권16 ‘홍주건창봉서산(洪州建昌鳳棲山) 동안(同安) 화상’ 참고. *냅다 ; 몹시 빠르고 세찬 모양. *천자(天子) ;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제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임금 또는 왕(王)이라고 하였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천차만별(千差萬別) ; 여러 가지 사물이 모두 차이가 있고 구별이 있음. 세상 사물이 한결같지 아니하고 각각 모습ㆍ모양이 다름을 이르는 말. ‘온갖 차별이 있는 모양·경계’의 뜻. 모든 경계. *분복(分福 운명 분/복 복) ; 선천적으로 타고난 복.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①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수단과 방법. ②교묘한 수단과 방법. *부득이(不得已)하다 ; 마지못하여 할 수 없다. *주옥(珠玉) ; ①구슬과 옥을 아울러 이르는 말. ②아름답고 귀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언하(言下) ; [주로 ‘언하에’의 꼴로 쓰여]말이 떨어진 바로 그때. 또는 말을 하는 그 즉시.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분심(憤心) :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용맹심(勇猛心) ; 두려움 없이 용감하며 기운차고 씩씩한 맹렬한 마음. *꼬실르다 ; 그슬다. (사람이 불에 물건을)겉만 조금 타게 하다. *부지깽이 ;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거두어 넣거나 끌어내는 데 쓰이는 가느다란 막대기. *화력(火力) ; 불의 힘. 또는 불에서 얻은 열의 힘. *투철하다(透徹--) ; ①(정신이나 자세가)매우 철저하다. ②(주장이나 판단이)사리에 맞고 정확하다. *부자 몸조심 한다 ; 바둑에서 쓰는 용어로 바둑을 두면서 형세판단을 해 보니 내가 유리하여 상대방의 싸움을 피하면서 소극적으로 물러나면서 조심하다가 결국에는 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형편이 좋은 것을 유지할려는 것이 도리어 안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해구신(海狗腎) ; 수컷 물개의 생식기. 강정제로 쓰인다.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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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다(本--) ; (사람이 대상을)모범으로 삼아 그대로 따라 하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심심찮다 ; (흔히 ‘심심찮게’ 꼴로 쓰여) 드물지 않고 꽤 잦다. *평지낙상(平地落傷) ; '평지에서 넘어져 다친다'는 뜻으로 뜻밖에 불행한 일을 겪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당적(當敵) ; 대적(對敵)해 능히 감당(堪當)함. *극락정토(極樂淨土) ;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살고 있다는 청정한 국토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있는데, 괴로움이 없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도 한다. *염라대왕(閻羅大王) :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인간의 생전에 행한 선악(善惡)을 심판하여 벌은 주는 왕. *마왕(魔王) 파순(波旬) ; 천마(天魔). 욕계(欲界)의 제육천(第六天) 곧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임금은 곧 마왕(魔王)이니, 그 이름이 파순(波旬)이다。그는 항상 불법을 파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불도를 공부하는 이가 있으면 그의 궁전이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러므로 누구나 불법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낼 때에 곧 천마가 따르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한 생각 일어나는 그것이 곧 천마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구원겁(久遠劫) ; 아득하게 멀고 오랜 옛날.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깨달음을 여는 것. 각자가 스스로 무상의 깨달음을 열고, 부처가 되는 것.
④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법신(法身)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 *무명(無明) : [범] avidya 「어리석은 마음」 「어두컴컴한 마음」을 이름. <기신론(起信論)>에 는 이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법계(法界)의 참 이치에 어둡게 된 맨 처음 한 생각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 하고, 이 근본무명으로 말미암아 가늘거나 거칠거나 한 온갖 망녕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 하였다.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번뇌(煩惱)에 얽매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법수(法水) ; 중생의 번뇌를 깨끗이 씻어 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물에 비유한 말. *(게송) ‘불원공명단원산~’ ; [경허집(鏡虛集)] ‘次採藥商趙氏韻(채약상 조씨 차운)’ 참고. *처사(處士) ; ①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남자 신도. 출가하지 않고 법명(法名)을 받은 재가(在家)의 남자. ② 속인(俗人)으로서 임시로 절에 머무는 남자. *연명(延命)하다 ; (사람이)목숨을 근근이 이어 가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세속(世俗) ; 속세(俗世).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법문 내용]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영랑신선을 제도한 원효스님 / 불법(佛法)은 신통 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장생불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안 삼는다 / 일장춘몽(一場春夢) / 유루복(有漏福) /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는 달팽이 뿔 / 비사왕과 가섭존자의 설화 ; 『중아함경』 제16권 6.왕상응품 (71) 비사경(鞞肆經).
가섭존자의 천당, 지옥 비유 / 새끼 타래와 은전, 금전의 비유 / 맷돼지 왕의 똥 갑옷 비유 / 중생은 선입관에 국집(局執)이 되어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한다 / 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국집을 버리는 것.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
(게송)동풍취락행화지~ /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 그래서 우리가 지은 업(業)도 천차만별 / 정법을 한번 접해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바로 천자의 궁궐 속에서 살고 있게 되는 거와 같다 / 방편설인 팔만대장경을 발판으로 해서 최상승법, 참선법(參禪法)으로 들어와야 한다 / 참선법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투철한 신심과 투철한 용맹으로 선지식의 바른 법문에 의지해서 올바르게 공부만 한다면 우리도 언하에 진리의 눈을 뜰 수도 있고, 3일이나 7일이나 석 달에도 확철대오할 수가 있을 것이다 / 솥에 불 때는 비유 / 상기(上氣)와 단전호흡.
참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할 최상승법이지만 이것도 잘못하면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 정법으로써 정신무장을 하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 ‘이뭣고∼?’ 이 한마디가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 /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 안내 / 「부처님 오신 날」,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 / (게송)불원공명단원산~ / 원래 도에는 승속(僧俗)이 없고 남녀가 없다.
〇옛날 도인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 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현들은 그러한 인간 세상에 부귀영화를 달팽이 뿔에다가도 비교를 했습니다.
〇도(道)에 들어가는 첫째 단계가 그러한 국집을 버리는 것이여.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을 버리는 것이여. 우리 중생은 아애(我愛) · 아만(我慢) · 아치(我癡), 이것이 우리 중생 그 제7식(七識)의 본업(本業)인데, 그놈에 딱 국집을 해 가지고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내가 잘한다’ ‘내가 옳다’ 이러한 아애 · 아만 · 아치, 이것 때문에 도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자기의 국집을 버려야 합니다.
〇각기 자기의 업에 따라서, 자기의 전생에 지은 분복(分福)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한 일이나 거기에서 정법(正法)을 믿는, 그 정법이 한번 그 자기의 마음속에 탁! 파고들어 가면—큰 별이나 작은 별이나 무슨 별을 막론하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법을 한번 탁! 접해 가지고 딱! 믿게 되면 마치 온 허공에 태양이 뜬 것과 같다 이거거든. 가난한 사람도 이 정법을 철저히 믿고 난 때부터서는 가난한 것이 아니요. 악한 짓을 많이 한 죄인도 정법을 듣고 믿고 실천하게 된 바로 그 시간부터서는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정법은 이 태양과 같은 것입니다.
〇참선법은 이것은 일초(一超)에 직입여래지(直入如來地)여. 한번 뛰어 가지고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어서 점진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모든 학문은 차례차례 해 가지고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연구함으로써 차츰차츰 깊은 데에까지 들어가는 것인데, 이 최상승법은 그런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신(信)이 투철하고 그 용맹이 투철하면 3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도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영랑신선은 3일 만에 견성(見性)을 했어. 역대조사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언하(言下)에 확철대오한 분이 수없이 많습니다.
〇솥에다가 무슨 아주 그 뭐 질기고 굳은 어떤 음식을 넣어놓고 불을 때는데, 그 장작을 갖다가 잘 지펴서 뜨끈뜨끈하게 지펴야 그놈이 인자 솥에 물이 끓고 속에 음식이 무를 텐데, 계속 앉아서 성냥개비 같은 것을 놓고 볼볼볼볼 태운다든지, 솔 이파리를 갖다가 하나씩 하나씩 태우고 앉았다면—그것은 틀림없이 솔 이파리나 성냥개비도 그것이 목질(木質)이니까 나무임에는 틀림이 없고, 누가 보든지 그 불 땐다고 하지 '불 안 땐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그 솔 이파리 하나씩 하나씩 때 가지고 그것이 솥에 것이 끓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참선을 하면서도 분명이 이렇게 앉아서, 떠억 버티고 앉아서 ‘이뭣고?’ 하고, 그거 남 보면 분명히 참선이지 그거 참선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내용이 그 신심이 간절하고 그 용맹심(勇猛心)이 투철하고 그러지 아니하면, 그냥 ‘이뭣고?’ ‘이뭣고?’ 한 번만 해도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니까, ‘이뭣고?’(하면서) 거 생각할 것 다 생각하고, 먹을 것 다 먹고, 시비할 것 다 시비하고, 욕심 챙길 것 다 욕심 챙기고, 할 것은 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가끔 한 번씩 ‘이뭣고?’ 그래 갖고 '나 참선을 30년이나 했는데 별 소식이 없다'고. 그거 솔 이파리 하나씩 둘씩 꼬실라 갖고 솥에 것이 안 무른다는 사람과 그것이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어쨌든지 기왕 불법을 만났고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하신다면, 그 솔잎도 그냥 한아름씩 갖다가 막 계속해서 요령 있게 부지깽이로 잘 하면서 불을 지피면 상당히 화력(火力)이 나고, 모다 성냥개비 같은 것도 그냥 짐으로 갖다가 막 싸지른다면 그것도 화력이 날 것입니다.
〇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다져서 뒤로 미루지 말고, 앉았을 때, 섰을 때, 일할 때, 빨래할 때, 밥 지을 때, 차 탈 때, 속상할 때, 괴로울 때, 슬플 때, 일체처 일체시에 ‘이뭣고∼?’ 이 한마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팔만사천 지옥을 때려 부수는 일이고, 팔만사천 마구니를 당적(當敵)해서 이겨내는 일이고, 바로 이 지상에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건설하는 기본인 것입니다. 행여나 그 호랭이가 무섭다고 똥항에 들어가서 똥 묻혀 갖고 나올 생각을 마시고, 정법으로 무장을 하시면 호랭이 아니라 염라대왕, 무슨 마왕(魔王) 파순(波旬)이도 이 ‘이뭣고?’ 화두 한마디로써 다 항복받을 수가 있고, 다 그러한 항복이라기보다는 전부 나한테 돌아와서 합장을 하게 될 것입니다.
〇우리도 부처님이나 다름없는 구원겁(久遠劫) 전에 다 성불(成佛)한 그런 법신(法身)인 것입니다마는, 까닭없이 우리 자신이 알 수 없는 어떠한 원인으로 해서 그냥 무명(無明)으로 덮여 가지고 그냥 이렇게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렇게 참 범부(凡夫)로서 이렇게 노릇을 하고 있는데, 내일모레 「부처님 오신 날」, 사월초파일을 기해서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그날 하루 다시 태어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〇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으면 비록 세속(世俗)에서 살아도 그 세속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또 형제 간에 우애하고, 이웃지간에 화목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그러고 모든 사람을 상대할 때 사랑으로써 상대하고, 정법에 귀의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은 바로 그러한 생활로 고의적으로 그렇게 할라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안 되어도 세속에 살아도 바로 그것이 산중에서 도를 닦은 거와 마찬가지고, 그냥 세속에서 살아도 그 솔바람 부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시냇물 가에서 약초를 캐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그것이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21분. (4/4) 약 22분.
(1/4)----------------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여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행주좌와일체처(行住坐臥一切處), 걸어다니고 머물르고 또 앉고 눕고 하는 것 그러한 모든 곳에서,
착의긱반일체시(着衣喫飯一切時)라. 옷 입고 밥 먹고 하는 모든 때라.
(요 소리가 더 크게 안되나? 정전 되았어? 응.)
군금욕식평상도(君今欲識平常道)인댄, 그대가 지금 평상도리(平常道理)를 알고자할진댄, 북두남성위불별(北斗南星位不別)이니라. 북두칠성(北斗七星)과 남두(南斗)의 성(星)이 그 위치가 다르지 않느니라.
이 게송은 평상화(平常話) 도리(道理), 평상 도리.
진리(眞理)라고 하면은 저 깊고 깊어서 알라야 알 수 없고, 높고 높아서 볼라야 볼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정묘년(丁卯年) 6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방금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많은 신남신녀와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습니다.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늘까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부처님 정법(正法)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조에 와서, 이조 말엽에 와서 이 불법(佛法)이, 이 참선법(參禪法)이 잠시 침체했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러다가 백여 년 전에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께서 출현(出現)을 하셔가지고 처음에 동학사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시고, 어떻게 참 두뇌가 명석하시고 또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공부를 하셨던지 일찌감치 그 전강(傳講)을 받아가지고 대강사(大講師)가 되어서 천하에 학인(學人)을 모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에 무데기로 죽어가는 광경을 보시고, '경(經)을 아무리 종횡으로 맥힘이 없이 알고 설(說)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아니다. 확철대오(廓徹大悟)가 아니다' 한 것을 깨달으시고서 학인을 다 흩어버리고 이래가지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셨습니다.
그리해서 확철대오를 하셔가지고 침체(沈滯)한 한국의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을 하셔서 경허 큰스님 밑에 만공(滿空) 스님, 혜월(慧月) 스님, 수월(水月) 스님, 여러 도인(道人)들이 나오셨습니다.
그래가지고 한국에 선풍이 크게 융성을 해가지고 만공 스님 밑에 고봉(高峰) 스님, 전강(田岡) 스님, 보월(寶月) 스님, 또 여러 도인들이 나오셔서 오늘날 한국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이렇게 전해 내려오고,
도처에 선방(禪房)이 있어서 많은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정진(精進)을 해서 부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그 정법이 오늘날 한국에 이렇게 전통해 내려온 것은 오직 경허 스님께서 대강사로 발심(發心)을 해가지고 확철대오해서 선풍을 진작한 그 공덕(功德)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가 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참선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경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아까 조실 스님께서도 녹음을 통해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참선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도 오종가풍(五宗家風)이 있고 그 종파(宗派)에 따라서 가풍이 모다 다르고, 현재도 일본에는 일본식 참선이 전해 내려와서 그 일본 사람들에 의해서 서구에 참선이 소개 되어서 서구 사람들이 많은 일본 참선에 대해서 모다 듣고 배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 한국에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하고는 하늘과 땅에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볼 때에는 모두가 다 참선이고 다 좋은 것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참선법은 '호리지차(毫釐之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만큼만 차이가 있어도 그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되어.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참선은, 한 말로 말해서 의리선(義理禪)입니다. 공안(公案)을 의리(義理)로, 의리로 따져서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한 화두(話頭)를 받어가지고 며칠 이마를 찡그리고 애써서 이리저리 천착(穿鑿)을 하다 보면 그럴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래가지고 그 조실 스님한테 가서 자기 본 바를 말하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을 또 줍니다.
또 새로 공안을 하나, 화두를 타가지고 또 며칠간 끙끙 앓으면서 그래가지고 뭐라고 그럴싸한 답을 하면, 안 맞으면 "안 맞다! 또 다시 더해라"
또 며칠 애써서 가서 뭐라고 대답하면 "되았다!" 그러고. 또 다른 화두를 하고.
그래서 영리한 사람은 금방 이르기도 하고, 이삼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사오일이면 이르기도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이 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또 오백 개의 화두를 통달하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대체적으로 백 개 이상의 화두를 통과하면 조실(祖室) 자격을 준다. 이런 말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 참선(參禪)은 그러한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니까, 그때에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에 근원(根源)이며 이 하택 저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고,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없어진 때도 없으며,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어. 머리도 없고 꽁무니도 없으니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이냐?"
"모든 부처님에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아, 그럴싸하니 대답을 하지 안했습니까. 이론적으로 말할 때 뭐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 맞는 말이지.
육조 스님께서 크게 꾸지람을 하시기를,
"내가 내동 말하기를,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다고 그러는데 너는 어찌 '모든 부처님에 본원(本源)'이니, '하택신회의 불성(佛性)'이니 하고 왜 이름을 붙이는고? 너는 나중에 애써서 공부를 해가지고 일가(一家)를 이룬다 해도 너는 얼자(孼子)가 되고,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겄구나"
지해종사(知解宗師)라 하는 것은 이론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강사(講師)같은 거,
참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 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만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하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교리적으로 연구하는 그러한 지해종사 밖에는 못되겄구나' 이렇게 평을 하셨습니다.
얼마 있다가 남악회양(南嶽懷讓)이라고 하는 수좌가 왔습니다.
육조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심마물(甚麽物)이 임마래(恁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물으셨습니다.
아! 남악회양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하고 물으신데 대해서 망지소조(罔知所措)여, 무어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꽈악 맥힌 체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 8년 동안 '무슨 물건인고?... 무슨 물건인고?...' 도저히 꽉 맥혀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그러한 그 콰악 맥혀서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으로, 그 의단(疑團)으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육조 스님의 법(法)을 이어받았습니다.
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의리선(義理禪), 일본 사람들이 화두를 뭐 백 개를 통과(通過)하고, 오백 개를 통과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 며칠 동안 이리저리 따지고 분석하고 해가지고 "이것이 아닙니까!"그러면 "옳다"하고 또 하고,
천칠백 공안을 다 통과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사선이 아니고 활구참선이 아니고 이것은 정법(正法)이 아닌 것입니다.
백 개를 통과해봤자 중생심(衆生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지, 이것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처음~21분16초)
(2/4)----------------
우리가 무슨 지식(知識)을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화두를 몇 개 통과했는가? 많이 통과했다고 해서 무슨 명예(名譽)를 얻기 위해서 참선을 한 것도 아닌 바에는 확철대오를 하고, 안 하고 한 것은 놔두고 '바르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한 공부는 한 만큼 그것이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공부지만, 바르게 하지 못한 공부는 벌써 방향을 잘못 잡고 가는 길이라 서울을 간다며, 저 호남에서 서울을 간다면서 북쪽을 향해서 가지 아니하고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으로 향해 가는 거와 같애서, 바르지 못한 길을 아무리 쉬지 않고 열심히 간다고 해도 바르게 목적지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살부살모(殺父殺母)하는 죄(罪)는 불전참회(佛前懺悔)어니와,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 참회를 하거니와, 미득(未得)을 위증(謂證)하고 미증(未證)을 위증(謂證)하는 죄는 참회무로(懺悔無路)다, 참회할 길이 없다"하셨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인 죄를 어디 가서 참회를 해.
정법(正法)을 설(說)하고 또 그 정법을 의지해서 수행(修行)을 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길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이 아닌 의리선(義理禪), 사구선(死句禪).
이 의리선을 의리로 이론으로 이렇게 따져서 들어가고, 더듬어 들어가고, 알아 들어가고 분석해 들어가는 이런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죽은 구(句)의 참선이다, 죽은 참선이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하는데.
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요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알 수 없는,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 생사심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生死心)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의리선(義理禪)으로 참선을 하면 그것이 이미 바르지 못한 수행이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 있을 수가 없고, 어떠한 그 나름대로 의리선도 열심히 하다보면 무엇인가 스스로 느낀 바가 있고 그 어떤 경계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른 깨달음이 아니여.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그것이 바른 깨달음인줄 착각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는 그런 삿된 참선을 지도하고.
또 그런 삿된 참선을 배워가지고 그 사람이 또 그런 삿된 수행을 해가지고 또 삿된 어떤 것을 깨달라 가지고 그걸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전하고 해서 영영 부처님의 정법은 다 믿는 사람이 없고 실천한 사람이 없어지고 삿된 참선만 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가득차게 되면, 그것이 바로 불법이, 정법(正法)이 멸망(滅亡)한 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나 어떠한 국법(國法)으로 불법(佛法)이 멸망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탄압을 하고 아무리 파괴를 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나타난 어떠한 그러한 것은 탄압을 할 수가 있고 그 파괴를 할 수가 있겠지만—사찰(寺刹)이라든지 또는 불상(佛像)이라든지 경전(經典)이라든지 그런 상(相)이 있는 그러한 것들은 파괴할 수가 있겠지마는, 정법(正法)은 그것으로서 멸망이 되지 않습니다.
정법은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불제자들이 우리 불법을 삿되게 믿고 삿되게 행할 때에 정법은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그 사위국(舍衛國)에 파사익왕(波斯匿王)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부인을 얻었는데, 그 말리부인(末利夫人)이라 한 왕후(王侯)를 얻었습니다.
그 말리부인은 원래—부처님의 고국(故國)이신 그 가비라왕국(迦毘羅王國)에 마하남(摩訶男)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에 종의 아들입니다.
그 부처님 나라는 가비라왕국이라 해서 나라가 조그만하고, 파사익왕이 있는 그 사위국은 대단히 인도에서도 참 큰 나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비라왕국에 그 공주를 자기 왕후로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비라왕국은 나라는 적지마는 양반의 나라고, 또 이 사위국은 나라는 워낙 크고 했지만 가비라왕국에서 볼 때에는 '나라만 크고 모다 그래서 그러기는 허되 참 양반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지, 공주를 왕비로 달라고 하니까 차마 공주를 줄 수가 없으니까 그 궁녀(宮女), 종 가운데에 잘 생기고 비슷한 사람을 골라서 공주로 속여가지고 시집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시집간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말리부인인데, 그 말리부인은 평소에 항상 마음속으로 자기는 신분이 종이지만 '왕비가 한번 되었으면...' 하고 항시 마음속으로 축원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서원을 세웠습니다.
그래가지고, 그러면서 참 마음으로 부처님을 믿고 그러면서 그렇게 인자 왕비가 되기를 서원을 하다가 결국은 그 왕비로, 이상스럽게 그 공주 대신 자기가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고 일심으로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서원(誓願)을 세우고 원(願)을 세우면 반드시 우리 누구라도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러한 참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러한 위신력(威神力)이 있어서, 지극정성으로 기구(祈求)하고 축원을 하고 빌면 그렇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왕이면 바르고 좋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 말리부인이 파사익왕한테 시집을 가가지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 이름이 ‘유리태자(瑠璃太子)’입니다. 아주 영특하고 잘나고 그랬는데, 여덟 살이 되어서 그래서 인자 그 왕이 그 아들을 여덟 살이 되었으니 자기 외가로 보내서 거기서 모든 것을 잘 배우고 그러라고 외갓집으로 외할아버지한테 보냈습니다.
그 외가댁에서 그 외손자가 왔으니 그걸 참 잘 가리켜야겄는데, 활 쏘는 법도 가리키고 말 타는 법도 가리키고 모든 학문도 가리키고 그런데, '혼자만 가리키기보단 기왕이면 오백 명의 그 고관대작(高官大爵)이라든지, 양반의 집 아들들 뽑아가지고 같이 공부를 시켰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내가지고 큰 수련도장(修鍊道場)을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맨 처음에 부처님을 모셔다가 설법(說法)을 먼저 듣고, 그리고 나서 인자 활 쏘는 법과 그 밖에 모든 공부를 시키리라 해가지고 새로 집을 짓고, 인자 오백 명의 동자(童子)들과 함께 요렇게 해서 했는데,
그 유리태자는 자기로 인해서 그렇게 참 외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참 오백 명의 동자를 모다 모아가지고 같이 공부하게 하고 새로 집을 짓고 하니까 너무너무 기뻐서, 그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가지고는 거기서 막 너무너무 기뻐서 그냥 활발하게 거동을 하고 막 그냥 자기가 일인자가 되어가지고 그러니까, 그 사람, 거기에 모인 동자들이 수근덕 수근덕거리면서 "종놈의 자식이 까분다"고, 아!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그 애가 그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내용을 갖다가, 그러니까 "왜 나보고 욕하냐"고 막 하다가 그 위~하니 달라들어서 아주 치고받고 해서 욕설을 퍼붓고 해서 큰 망신을 하고 사위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그 같이 모시고 간 바라문(婆羅門) 하나가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내가 나중에 부왕마마가 승하(昇遐)하시고 임금이 되거든, 오늘 내가 당한 이 치욕과 이 봉변을 나한테 일깨워다오" 그렇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나중에 결국은 그 왕이 승하하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었을 때에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그 대신이 그때 그 봉변 당했던 일을 또 이 기억을 개득(이해)을 시켜 주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많은 병사를 갖다가 이끌고 가비라왕국을 갖다가 쳐부시러 갔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서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그 중간 경계 국경지대에 가가지고 큰 고목나무가 하나 죽어 갖고 있었는데 그 고목나무 그늘에 가서 떠억 이렇게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자 그 유리왕이 대군을 통솔을 해가지고 국경을 넘어서려고 하는데 고목(枯木)나무 밑에 부처님이 터억 앉아 계시거든.
"아니 부처님께서 왠 이리 고목나무 밑에 와서 이렇게 앉아 계십니까?"헌께,
"비록 고목은 되었으나 나에 고국(故國)의 그늘이 아니냐. 말라 죽은 고목일망정 조국(祖國)의 그늘이 좋아서 이렇게 그늘 밑에가 있노라"
아! 그 말씀을 듣고서 유리왕이 회군(回軍)을 했습니다. 군사를 몰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얼마 있다가 또 이 호고(好苦)라고 하는 대신이 또 유리왕을 충동(衝動)이를 쳐가지고, "먼저는 부처님 때문에 못했지마는, 아! 어찌 그 참 치욕을 당하고서도 그 가비라왕국을 그냥 둘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또 충동이를 치니까, 대군을 몰아가지고 또 쳐들어갔습니다.
"이제는 부처님이 설사 거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걸 무시해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래가지고 가기로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제 막어봤자 소용이 없는 줄 짐작을 하시고 그냥 안 가셨는데.
가비라왕국에 쳐들어갔는데 성문을 갖다가 탁 때려 잠그고 그래 있는데, 큰 소리를 치면서 성문을 갖다가 열고 결국은 들어갔는데, 그때 그 유리왕의 외할아버지인 마하남(摩訶男)이,
"좋다! 니가 이 나라를 치는 것을 내 힘으로 어찌 막겠냐마는 내가 한 가지 소원이 있다. 내가 이 궁정(宮廷) 뜰에 있는 연못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성문을 열어놓고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도망가게 해라. 내가 물속에 들어가서 참고 있은들 얼마 동안을 있겠느냐? 그 소원 한번만 들어다오"
"그것 그렇게 하지요"
마하남이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라' 해가지고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문(四門)을 다 열어놓고 도망가라 그러는데, 서로 앞을 다투어서 도망가는데 벌집 건드려 놓은 것처럼 와- 허니 쏟아져 나가는데, 남문(南門)으로 나갔던 사람이 계속 도망가지를 않고 동문(東門)으로 도로 들어오고, 북문(北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서문(西門)으로 들어오고, 서문(西門)으로 나갔던 사람은 남문(南門)으로 들어오고,
아! 계속 줄달음질쳐서 도망가면 다 살아갈텐디 어쩐 셈인지 다시 다른 문으로 들어오고 들어왔다 나가고 나가고 해가지고는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과거에 업(業)이 있어서 결국은 죽을 수 밖에는 없구나'
하여간 한참 있어도 연못 속에 들어갔던 그 마하남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사람을 시켜서 연못 속에 들어가서 보라니까, 머리를 그 연못 속에 있는 나무 등걸에다가 칭칭 틀어 감고서 그래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마하남은 자기 한 몸을 죽여서 많은 사람들을 피난을 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참 희생적인 방편을 썼는데, 결국은 별로 많이 도망가지를 못하고 모두 다, 참 이 경전에는 '9천9백9십만 명이다'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그 사람들을 모두 다 잡어서 땅에다가 묻고, 흙으로 다 덮어서 포개서 다 묻고서 많은 코끼리를 동원을 해가지고는 밟아서 다 죽였는데, 거기서 흐르는 피가 냇물을 이루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그렇게 죽일라고 할 때에 목련존자가, 내나 부처님의 제자고 신통이 제일인데 부처님의 그 가슴 아파하신 것을 알고서,
"제가 가서 그 가비라(迦毘羅) 성중(城中)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저 허공계(虛空界)로 데려다가 피신을 시킬까요?"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니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글쎄요. 참 어렵겠습니다마는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래가지고 그 궁중에 왕족과 모다 거기 사람들을 오천 명을 갖다가 뽑아가지고 바리때에다 담았습니다. 담아가지고 저 공중으로 갖다가 놓았습니다.(21분18초~42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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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는데, 그리고 그 가비라왕국에 다 사람들을 죽이고 다 인자 가버렸는데, 그때 목련존자가 그 허공중에 올라가가지고 그 오천 명 피난시킨 그걸 보니까 바리때 안에 다 고스란히 죽어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어피차 그 전생(前生)에 과보(果報)로 죽게 된 그런 경우는 억지로 어떤 신통술로 그것을 억지로 그것을 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살상(殺傷)이 난 뒤에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그 현장에를 가셨습니다.
당신의 고국이고, 당신의 모다 친척이고 사촌들이고 모다 그래서 안 가볼 수가 없죠. 그래서 제자를 거느리고 가서 보시니까 참 그 비참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어.
"내가 그전에 여기에 와서 설법을 해가지고 참 수천만 중(衆)을 갖다가 득도(得道)케 했는데 오늘은 이렇게 참 비참한 현장이 되고 말았구나. 내가 이제부터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디디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유리왕과 여기 와서 이렇게 참 참혹한 행동을 한 저 군사들은 오래 살지를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 7일 후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멸종(滅種)을 하고 말 것이다" 하고 부처님께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유리왕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을 듣고서 너무너무 공포에 떨고 그래가지고 그 군사를 이끌고 강변에 가가지고 거기서 풍악을 잽히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가만히 있자니 두렵기만 하고 그러니까 강변에 가가지고는 날을 새서 술을 마시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래가지고 궁중으로 돌아오지 않고 거기서 그렇게 지새는데, 갑자기 밤중에 비구름이 일어가지고 폭풍이 불어서 아주 큰 폭우가 쏟아져가지고는 강변이 넘쳐서 왕과 그 병사들이 수십만 명이 다 큰물이 져서 다 떠내려 가가지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위국에 궁전에는 벼락을 쳐가지고, 하늘에서 불덩어리가 쏟아져서 벼락을 쳐가지고는 삽시간에 불이 타서 재가 다 되아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무참하게 많은 사람을 죽여서—코끼리를 시켜서 밟아 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과보가 워낙—부처님께서 직접 나서서 그것을 막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조국이요 부처님의 친척이요 사촌들이고 부처님의 조국에 백성들을 갖다가 그렇게 무참하게 짓밟아서 죽였으니, 마땅히 큰물이 져서 죽을 수밖에는 없고 또 하늘에서 벼락을 쳐서 그 악당들이 살던 궁은 잿더미가 될 수밖에는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그때에 부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저 자들이 모다 죽어서는 무간아비지옥(無間阿鼻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비구들이 부처님께, "무엇 때문에 저 유리왕이 저렇게 이 가비라왕국에 부처님의 그 권속과 왕과 병, 백성을 저렇게 참혹하게 죽이게 되았을까요? 전생(前生)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저렇게 되았을까요?" 하고 여쭤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 구원겁(久遠劫)에 이 사위국(舍衛國)에 강변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었는데, 그때 이 큰 못에 그때 인자 많은 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 가뭄이 들어서 농사가 잘 안되고 흉년이 들어가지고 모다 배가 고프니까 그 못에서 많은 고기를 잡아먹었어"
수없이 많은 백성들이 그 많은 고기를 다 잡아서 먹었었는데, 그때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가 하나 있었고 양설(兩舌)이라 하는 두 고기가 있었는데, 그 고기 중에는 제일 참 큰 왕이었었는데, '우리들이 아무 인간을 해롭게 한 일이 없는데 저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씨를 말리고 다 죽이니 우리가 언젠가는 내세(來世)에 사람이 되면은 우리가 이 원한(怨恨)을 갚자' 하고 그렇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 사위국에 그 고기를 잡아먹고 모다 그런 그 사이에 어린 소년이 하나가 있었는데, 고기를 잡아서 이 언덕으로 잡아 올리면은 그 막대기를 가지고 고기 그 머리빡을 탁! 치고 그러면서 고기가 잡혀 올라올 때마다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고, 또 잡아 올리면은 막대기로 탁! 치고 이 탁! 치고 해서 아 그렇게 참 뭣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서 그랬던 소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때에 고기를 잡아먹던 사람들이 바로 이 가비라왕국에 마하남(摩訶男)을 위시(爲始)한 많은 가비라 모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가친척 그 백성들이고,
그 잡아먹힌 고기에 그 구쇄(拘璅)라고 하는 고기는 이 유리태자(瑠璃太子)고, 또 이 양설(兩舌)이라고 하는 고기는 아까 그 호고(好苦)라고 하는 바라문, 임금으로 하여금 자꾸 충둥이를 쳐서 그 가비라왕국을 공격하라고 충둥이 친 그 바라문이고.
그때 소년이 고기를 갖다가 탁 탁 막대기로 때리면서 좋아하던 그 소년이 누구냐하면 바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다 이거거든.
과거에 그러한 그 못에 수천 마리, 수만 마리 고기를 그렇게 참 잡아서 회쳐 먹고 삶아 먹고 지저 먹고 볶아 먹고 그 이렇게 했다 그말이여.
그러한 과보(果報)로 해서 금생에 그 무서운 참 이 살생(殺生)을 당하게 되았습니다.
금생의 인연(因緣)으로만 본다면, 종을 갖다가 공주로 속여가지고 왕비로 시집을 보낸 그 잘못이 있고. 또 거기서 태어난 그 유리태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놀려대고 모다 그러한 원인을 찾을 수가 있지만.
설사 그렇기로서니 자기 외조부—사실은 뭐 종의 자식이니까 외조부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입장에서 보면은 그러한 자기를 갖다가, 일국에 태자(太子)를 갖다가 '종의 자식'이라고 그렇게 놀린 그 말을 듣고 그만큼 참 분(憤)이 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로서니 그렇게까지 무참(無慘)하게 살생을 하고 그럴 수는 없어.
웬수를 갚을라면 거기에 관계되는 사람만 허지, 그렇다고해서 아주 그 많은 사람을 갖다가 생(生)으로 매장을 해가지고 코끼리로 밟혀서 죽이고. 그 살생을 하되 그런 방법이 그렇게 참혹하고 악독한 방법으로 그러는 법이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오늘날 이 세계가 이렇게 서로 이 사상(思想)이 다르고 이념(理念)이 다르고 또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다르면 서로 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싸우는데, 그렇게 싸와가지고 자기나라가 행복해질 수도 없는 거고, 싸와가지고 이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참 이 살생(殺生), 예수교에서는 '모든 동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잡어먹으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놨으니까 소고 돼지고 닥치는 대로 동물은 잡어먹어야 옳다'고 그런 말들을 합니다마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래서 그러면 지금은 사람 몸뚱이에 이나 벼룩이 없어졌지만 참 해방 직후 굉장히 이가 참 많고, 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런데 "그러면 사람 몸뚱이를 이나 벼룩이, 벼룩이나 빈대가 그 (피를) 빨아 먹고 사는데, 그러면 사람은 이나 벼룩 빈대가 (피) 빨아 먹으라고 이 세상에 태어났겠느냐?"고 이렇게 반박을 하고 웃은 일도 있습니다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짐승이 태어났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되아가지고 힘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갖다가 먹고 살고 이렇게 하고 있으나 이것은 떳떳한, 마땅히 그렇게 되아라고 누가 만들어 놨다고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런 그 미물(微物)의 고기를 잡아먹은 그 과보(果報)로도 그렇게 참 무참한 과보를 받게 되거든, 하물며 사람이 사람을 죽여가지고 그 무서운 과보를 어떻게 면할 길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죽인 죄도 그렇게 무섭거든, 하물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정법(正法)을 멸망하게 하는 죄는 또한 무엇에다가 비유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법(邪法)을 믿고, 바른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면 먼저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런 삿된 법을 남에게 가리키면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정법을 실천을 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영원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설사 화두(話頭) 하나를 타가지고 일심(一心)으로 참구(參究)를 해서 '이뭣고?' 해 갈수록 재미가 없고, 알아진 것도 없고, 얻어진 것도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그러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참을성 있게, 끈기 있게 공부를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해 나가는 사람은 철저히 믿기를, '자기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어야 하는 것이여.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자기도 도(道)를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수 있는 자신만만한 그런 긍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을려고 하고 빨리 깨달을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도 일으켜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또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만, 물론 그 '번뇌(煩惱)다' '망상(妄想)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을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서는 안되아.
버릴려고 한다고 버려지지도 않고,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이 또한 하나의 망상(妄想)으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뭣고?'
진심(瞋心)이 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슬픔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괴로움이 있을 때에도 '이뭣고?'
넘어져도 '이뭣고?'
뒤집어져도 '이뭣고?'
사업이 잘되아도 '이뭣고?'
사업이 실패해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하고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립두수지(直立頭垂地)하고 횡면각지천(橫眠脚指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42분59초~64분11초)
(4/4)----------------
우중(雨中)에 간호월(看好月)하고 화리(火裏)에 급청량(汲淸凉)이다.
비 가운데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가운데에서 그 밝은 달을 보고, 불이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시원한 맑은 물을 길을지니라.
밝은 달은 비가 안 올 때에 볼 수가 있고, 맑은 물은 맑은 샘에서 퍼야지,
어떻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구름 덮인 하늘에서 그 밝은 달을 찾으며, 훨훨 타는 불 속에서 어떻게 맑은 물을 길러낼 수가 있을까?
진리(眞理)에 입각해서 보면, 남(南)과 북(北)이 같은 것입니다.
북쪽의 반대가 남쪽일 것 같지만, 북쪽이 바로 남쪽이고 남쪽이 바로 북쪽이여.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보면 결국은 남쪽이 돌아오고만 마는 것입니다.
콜롬버스가 계속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다보니까 결국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일을 항상 만나고 항상 보기를 바래지만,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남으로써 행복(幸福)을 삼지만, 사실은 마음에 맞는 일만을 추구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불행(不幸)이 돌아오는 거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自己)를 단속(團束)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욱이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도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많고, 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많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에 맞는 사람만 찾을라고 하면 어디에 그렇게 만나겠습니까? 내 마음에 꼭 든 일만 만나고자하나 그런 일은 만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혹 만났다 하더라도 잠시지 다시 또 그것은 나로부터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마음에 맞지 않는 역경(逆境)에서 거기서 부딪히고, 거기에 몸을 옆으로 비틀고 용감하게 지혜롭게 끈기 있게 헤치고 나가면, 거기에서 이 사바세계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 닦는 것도, 의리선(義理禪)은 따져 들어가면 알아진 것이 있고, 얻어진 것이 있고, 재미가 있고, 맛이 있으니까, 공안(公案) 하나 얻어서 이리저리 해가지고 통과하고, 또 공안 하나를 타가지고 이리저리 따져서 ‘아!’ 알아맞추고 하면 그것 곧 그냥 깨달음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것같이 느껴지고, 재미가 있고 얻은 바가 있고, 남에게 '나는 공안 몇 개를 알았다' 이렇게 자랑할 것이 있고, 썩 할만 하지요.
그러나 그러한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따져서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바른 깨달음이 아닌 것이여.
한 가정, 한 가족, 일가친척, 우리 마음에 맞은 사람 엄격히 말하자면 사실은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어렵다고해서 부모가 아니고 자식이 아니고 형제가 아니고 일가친척이 아니고 친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각각 숙세(宿世)로부터 지어 내려오는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그러고 그러기 때문에 얼굴을 각각 다르게 태어났고, 생각도 성격도 각각 다르고, 따라서 본 바가 다르고 생각한 바가 다르니 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여.
서로 지은 바 업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그 근원은 모르고서 내 마음에 맞기만을 바래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미워하고 그 사람을 갖다가 짓밟고 쫓아내고 멀리하고 망하기를 바래고 이런다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너무 참 어렵고,
정말 스스로 고통과 불행의 보금자리를 자기가 만들어서 그 안에서 자기가 고통을 받게 되는 거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생(生)을 거듭함에 따라서 점점 고통스러운 생을 만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유리태자가 그렇게 많은 살생을 하고—전생에 살생을 당했다고 해서 원한심(怨恨心)을 품고, 그렇게 해가지고 살생을 해서 무슨 좋은 꼴을 자기는 봅니까? 물에 빠져서 몰살을 당하고, 불이 나서 자기 궁실이 다 타 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전생에 우물 못 속에서 사람들로부터서 잡아먹히더니, 금생에 다시 와서 보복을 하고서 자기도 다시 멸망을 했습니다. 내생에 다시 원한심을 품고 또 보복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쳤던지,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를, 인과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코끼리의 왕이 되어 계실 때에 어떠한 포수(砲手)가 위경(危境)에 처해서 죽게 될 때 그 포수를 살려주었는데—포수가 가가지고 돌아갔는데, 그 광고를 보니까 '아금니가 여섯 개가 달린 코끼리를 잡어 온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소원을, 소원대로 해준다'하고 광고가 붙었어.
그 광고를 보고서 '내가 연전에 히말라야 산에 들어가가지고 죽게 되었을 때 나를 살려준 코끼리가 바로 이 상아(象牙)가 여섯 개가 붙었다' 한 것을 깨닫고서 "내가 그 코끼리를 잡어 오겠습니다"하고 자원을 했습니다.
"그래, 니가 잡어오너라"
그 코끼리는 스님네를 좋아하고 불법(佛法)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반 보통 사람한테는 도저히 잡혀서 죽질 않는데, 스님네는 살생(殺生)을 아니하기 때문에 그 스님네가 가까이 온 것은 경계(警戒)를 아니해. 그래서 그 포수(砲手)는 머리를 깎고서 가사(袈裟)를 떠억 수(垂)하고 스님으로 가장(假裝)해가지고 들어가 가지고 독 묻은 창으로 그 코끼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코끼리의 그 군사들이, 모다 백성들이 오백 마리가 달라들어서 그 포수를 갖다가 밟아서 죽일려고 하니까 그 코끼리의 왕이 그 포수를 갖다가 자기 네 다리 사이에다가 이렇게 숨겨놓고, "너희들, 이 죽이지 말아라. 이 포수는 내가 저를 살려준 그 생명의 은혜를 갖다가 이렇게 나를 독 묻은 창으로 쑤셔서 나를 죽이니, 나는 이 포수에게 어떻게 이 보복을 할 것인가?
너희들 식으로 이렇게 밟아서 죽이면 내생에 또 이러한 보복을 당할 것이니, 내가 이 다음 생에 도(道)를 성취해서 성불(成佛)을 하게 되면은 저 포수는 나의 여섯 개의 이 아금니를 뽑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였지만, 내생에 내가 성불하게 되면 이 포수의 여섯 도둑놈을, 이 삼독(三毒)과 육적(六賊)의 마음을 내가 뽑아 주리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내 아금니 여섯 개를 어서 뽑아다가 너의 임금님에게 바쳐서 영광(榮光)을 누릴지니라" 이렇게 선언을 하고서 그 코끼리는 쓰러져 죽은 것입니다.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생(生), 생(生)을 두고 그러한 식으로 해서 수행을 쌓고 또 새 몸을 받아서 또 그렇게 수행을 쌓고 해가지고 마침내는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시고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을 얻어서 성불(成佛)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 부처님을 믿는 제자는 부처님의 그러한 이 높고 거룩한 뜻을 본받아서, 부처님과 같이 다는 실천을 하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이 보복하는 마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하더라도 보복할 마음을 갖지 말자' 이러한 마음을 우리는 굳게 마음에 새기고, 그렇게 가족을 상대하고 친구를 상대하고 이웃을 상대하고 그렇게 하면서 수행을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부처님과 같이 될 때가 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법회(法會)가 끝난 다음에 불명(佛名)을 타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오계(五戒)를 받는 법요식(法要式)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법회 회원들이, 그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우고 또 『천수경(千手經)』을 외우는 그런 독경(讀經) 대회를 열어서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상(賞)을 주고 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부처님의 그 교리가 담겨있는 동화(童話)를 구연(口演)을 해가지고 그래서 거기서 뽑힌 어린이들을 오늘 시상(施賞)을 하고, 또 거기에서 최우수상을 탄 어린이의 구연을, 동화 구연을 다 같이 듣기로 합시다.
어린이 동화(童話) 구연(口演)
제가 여러분께 해 드릴 이야기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진면 효정리에서 내려오는 금산사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옛날 한 노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어요.
총각은 병에 좋다는 약은 무엇이든지 구해 어머니께 드렸으나 그 병은 효과가 없었어요.
겨울, 어느 추운 겨울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잉어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어요.
항상 굶기만 하시던 어머니께서 무엇이 잡수시고 싶다는 말을 하셨으니 총각은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추운 겨울날 잉어가 있겠어요?
그래도 낚싯대를 들고 연못으로 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깨어 낚싯대를 넣었어요. 한참 있으니 무엇이 잡히는 듯해서 들어올려보니 그것은 잉어가 아닌 큰 자라였어요.
총각은 그것이라도 어머니께 드려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져갔는데, 어머니께서는 그것은 드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총각은 그것을 큰 물항아리에다 넣어두고 다시 잉어를 잡으러 나왔어요.
밤새도록 잉어를 잡으려 했지만 잉어는 잡히지 않고 날은 점점 밝아졌어요.
어머니께 아침밥을 지어드리려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런데 이게 왠 일까요?
부엌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어요.
그것도 잉어를 끓인 고깃국도 있었구요.
어머니께선 아침밥을 맛있게 드셨어요.
총각은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몰랐어요.
누가 차려놓은 밥상인지 몰랐기 때문이죠.
이렇게 삼일이 지난 후 총각은 궁금해졌어요.
그래서 누가 그러는지 보기로 하였어요.
낚시질을 하러 나가는 척하다가 부엌 문틈으로 살며시 보았어요.
그랬더니 자라를 넣어둔 물항아리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나와 밥을 하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그 처녀를 붙들었어요.
마침내는 그 처녀와 결혼도 하게 되었어요.
아내의 간호로 어머니의 병환은 다 낳았어요.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어느 날 아내는 갑자기 총각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였어요.
그 부탁은 열 달만 밖에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어요.
총각은 예쁜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짐을 싸 밖으로 나갔어요.
겨우 십일을 돌아다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해 아내의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집으로 들어왔어요.
그랬더니 총각은 깜짝 놀랬어요.
방 안에서는 끔찍스런 광경이 일어났어요.
아내는 보이지 않고 큰 용 한 마리와 새끼 용 일곱 마리로 얽혀 있는 것이었어요.
원래 아내는 용궁에 살던 용왕의 딸이었데요.
총각이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용왕님께서 감동하시어 딸을 자라의 몸으로 바꾸어 세상에 나가게 하였고 그 총각에게 잡히어 그 총각을 도와주라고 하였데요.
총각은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나가 열 달을 지내고 오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도 모두 다 죽어버렸어요.
일곱 마리 새끼 용은 연못가 언덕 위에 묻어주고 총각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어요. 이 스님이 바로 진표국사(眞表國師)랍니다.
진표국사는 금산사(金山寺)를 짓고 산속으로 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데요.
(어린이가 내용을 잊자 대중들 격려 박수)
아직도, 현재도, 지금도 전라북도 효정리에 가면 일곱 마리 새끼 용의 무덤이 있고, 그 마을을 효자가 난 마을이라 하여 효정리라 부르고 있답니다. (동화 구연 끝)
그 금산사(金山寺) 진평(진표)율사의 그 설화(說話)를 참 그 잘 엮어서 얘기를 했는데, 여러분께서도 잘 들으신 바와 같이 너무 참 잘했는데, 조끔 말이 쫌 빨라서 조끔 그런 점이 있습니다마는, 말만 조끔 천천히 하면서 그렇게 했으면 훨씬 더 알아듣기가 좋을뻔 봤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서 그런 불교에 인과설(因果說)이라든지, 불교의 진리(眞理)가 담겨있는 그러한 동화를 그 책을 읽고 또 그것을 구연(口演)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하면, 자기도 공부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할 수가 있어서 참 뜻이 깊은 일이고, 차츰차츰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계속해서 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 훌륭한 포교사(布敎師)가 될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등 · 2등 · 3등 모다 입상한 분들이 다 모두 잘하리라고 생각하고, 다 들어봤으면 참 좋겠는데 시간 관계상 한 사람만을 듣고 생략하기로 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또 들을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 움큼 버들가지를 휘어잡지 못해서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64분11초~1시간 25분42초)(끝)
[법문 내용]
(게송)행주좌와일체처~ / 이조 말엽 한국의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경허선사 / 육조 스님의 '이뭣고?' 화두, 하택신회와 남악회양 / 한국의 활구참선은 조사선 /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하고,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이라 한다.
부처님의 조국인 가비라왕국과 사위국 유리왕과의 악연. 가비라왕국과 사위국의 멸망. 『증일아함경』 제26권, 34.등견품(等見品) [2]에 있는 석가족의 멸망 인과.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게송)우중간호월(雨中看好月) 화리급청량(火裏汲淸凉)~ / 마음에 맞지 않는 일 속에서 바로 자기를 단속해 나가고 바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면 그 속에서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가 있는 것 / 어린이 동화(童話)구연(口演).
〇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걸어가다가 서고, 멈추었다가 걸어가고, 또 앉고 눕고, 그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하는, 우리 일상생활하는 모든 곳과 밥 먹고 옷 입고 또 똥 누고 오줌 누고 일하고 하는 모든 때가 하나도 진리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착의긱반(着衣喫飯)하는 그러한 일체처 일체시를 여의고 진리를 찾아서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찾아도 진리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〇한국에 참선(參禪)은 화두(話頭) 하나를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으면, 그 화두를 참구(參究)를 하되 이론적으로 따지거나, 무슨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또는 철학적으로 따지거나 일체 그러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들어가는 참구가 아닙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 데 있어서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그러한 이론을 여기에 동원을 해서도 안 되고, 그동안에 자기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나 상식이나 이론도 이 화두 참구하는 데에 동원되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으로만 이 화두를 참구를 하는 것입니다.
〇육조(六祖) 스님께서,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해보다도 더 밝고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항상 우리 일상생활 속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하되 그 속에서 그놈을 찾어보면 알 수가 없으니 이놈은 이름도 없고 모냥도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고 대중에게 물었습니다.
말하자면 시삼마(是甚麽), '이뭣고?' 화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뭣고?' 화두가 바로 이 육조 스님의 이 "심마물(甚麽物)이냐,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그렇게 물으신 이 공안(公案)과 같은 것입니다.
〇한국에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바로 이 육조 스님과 남악회향 선사와의 사이에서 전해진 이 법이 바로 활구참선법이고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인 것입니다.
〇왜 조사선(祖師禪)은 활구선(活句禪)이라 그러고, 이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선(死句禪, 죽은 구句의 참선. 죽은 참선)이라 허냐하면,
아까 남악회양 선사가 하는 그러한 참선(參禪)—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으로 공부를 해 나가면, 우선 답답하기가 말로 할 수가 없고 아무 재미도 없고 그렇지만, 그렇게 알 수 없는 의단으로 그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마침내는 툭! 터져서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 따져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철학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또는 종합하고 이래가지고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의리선은 이것을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데, 해 갈수록 점점 중생(衆生)의 생사심(生死心)을 더욱 치성(熾盛)하게 맨드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생사심을 조장을 시키고 치성하게 맨들면 결국은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구렁탱이로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〇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은 남한테 웬수를 본의(本意) 아니게 짓기도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또 보복(報復)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절대로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보복으로써 정말 깨끗하게 일이 처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보복을 하면 그쪽에서는 다시 또 보복을 하고, 요쪽에서 또 보복을 하고 해서 생(生)을 거듭하면서 점점 원결(怨結)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〇본래 우리는 부처님이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나, 미륵불(彌勒佛)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본래 비로자나불과 똑같은, 조끔도 차이가 없는 바로 동일(同一)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부처를 찾을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처이기 때문에 절대로 부처를 찾아서는 안돼.
그리고 그 부처님으로부터서 나오는 번뇌망상(煩惱妄想) 이것이 딴 것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서 나오는 작용(作用)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을 버릴려고 해서는 안돼.
다맛 우리가 확인을 못했을 뿐이지 본래부터 부처님이었고, 그 부처님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들은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작용(作用)'인 것입니다.
〇부처 되기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을려고 하는 생각을 냈다하면 그것도 망상(妄想)이고, 번뇌를 버릴려고 하는 생각을 내고, 번뇌 일어나는 것을 성화(成火)를 대고 짜증을 낸다면 그것도 번뇌망상이요, 탐심(貪心)이요 진심(瞋心)이기 때문에 점점 불에다가 섶을 집어넣은 거와 같애서 깨달음으로부터서는 정말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 하는 사람은 번뇌를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부처를 얻을려고 하지도 말고, 다못 의심(疑心)!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그 화두 하나로써 단속해 나가면, 거기에서 번뇌는 없앨려고 하지 안 해도 저절로 없어지는 거고, 깨달음을 구하지 아니해도 거기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〇부처님을 믿는 우리는 세세생생에 보복(報復)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설사 상대방이 나를 고의적으로 또는 고의가 아닌 어떠한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해(害)를 끼쳤던지,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다 하더라도 보복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거기에서 인과(因果)의 진리를 살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할 수 있도록,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4) 약 21분. (2/4) 약 18분. (3/4) 약 21분. (4/4) 약 13분.
(1/4)----------------
정종소식(正宗消息)은 몰자미(沒滋味)헌디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하면 차시방도사생하(此時方渡死生河)니라
나무~아미타불~
정종소식(正宗消息)이 몰자미(沒滋味)헌디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라.
정종(正宗) 소식(消息)! 불법에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확철대오하는 이 정법 소식은 몰자미(沒滋味)여. 아무 자미(滋味)가 없다 그말이여.
왜 자미가 없냐?
알아 들어가는 것이 없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고, 이로(理路) 어로(語路)가 끊어졌고. 이렇게 공부를 해 가니 보이는 것도 없고 알아지는 것도 없고 나타나는 것이 없어. 그래서 얻은 바가 없어. 그러니 자미가 없을 수밖에는 없다 그말이여.
불용여하우약하(不用如何又若何)다. 여하약하(如何若何)를 쓰지를 안 해.
'공부가 되느니 안되느니, 이렇게 해서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깨달을 수가 없을 것인가, 참으로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있는 것인가?'
이 공안(公案)을, 화두(話頭)를 타 가지고 참선(參禪)을 하는데, '이 화두라 하는 것이 과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면은 그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그 공안에 참 도리를 깨닫는다' 그러는데,
이거 이론으로 따져서 알 수가 없는 것이고, 가르켜 줄라야 가르켜 줄 수도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도 없는 것인데, 이것 이 문제 자체가 이론으로 따져서 알 수가 없는 것이라면, 따져서 알 수 없는 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이 본래 대답이 있을 수가 없는 이러한 공안,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은 거기에서 망상이 끊어지고 마음이 고요해져서 그러라고 이것을, 이 풀 수 없는, 원래 대답이 없는, 그 해답이 없는 그런 문제를 주어가지고 우리를 골탕먹이는 것이 아니냐? 이것 공연히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이래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스스로 번뇌심(煩惱心)을 내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내. 이런 것이 그러지를 말아라 그거거든.
여하약하에 생각을 쓰지를 말고 다못 아주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써 붙이고, 되고 안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깨닫고 못 깨달은 것도 따지지 말고서 타파은산철벽거(打破銀山鐵壁去)다. 은(銀)! 은으로 된 산과 쇠로 된 벽, 은산철벽을 갖다가 타파해 버려라 그거거든.
은산철벽이 주먹으로 쳐서 무너질 것이냐? 발로 차서 무너질 것이냐? 메겡이로 쳐서 그것이 무너질 것이냐?
무너지고 안 무너지고 한 것을 따지지 말고 온 몸을 갖다가 몸과 목숨을 갖다가 거기다가 다 들어서 부딪쳐라. 아주 죽기를 각오하고 갖다가 이 전신을 거기다가 던져라 그거거든.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공부가 잘되고 안된 것과 내 힘이 과연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인가, 못 깨달을 것인가?
내가 이 정말 깨달을 만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면은 내가 목숨을 바치고 청춘을 바쳐서 공부를 한다 하지만, 내의 숙세(宿世)에 닦은 그 근기(根機)가 해 봤자 안될 그러한 그릇 밖에는 안된다면 차라리 참선을 하지 말고, 경을 읽던지 염불을 하던지 차라리 그런 것이 낫지 않겠느냐?'
목숨 바쳐 해 보지도 않고서 스스로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친 사람이 어찌 그럴만한 힘이 있은들 목적을 달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여하약하를 따지는 것이 아니여.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원래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 나도 원래 본각(本覺)이다,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하고서 목숨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버림으로써 은산철벽이 무너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생사(生死)의 큰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이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우리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잘 들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에 대한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그 스승은 대강사(大講師)로 일생을 경(經)을 보고 경 공부만 하는 스승이고, 그 상좌(上佐)는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서 은사(恩師) 스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스님이 고령 신찬선사(古靈神贊禪師)인데, 여러분께서 방금 들으신 바와 같이 그 상좌로 인해서 그 스승이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法)을 청(請)해 가지고 상좌의 법문을 듣고서 스승이 깨달은 그러한 법문입니다. 끄터리 부분을 조금 마치지 못하고 녹음이 끊겼습니다마는.
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학식이 많고, 경을 많이 보고 뭣을 많이 안다고 해서 깨달을 수가 있고 또 경을 보지 아니하고 무식하다고 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은 학식, 지식에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많이 배우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에 지내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지내지 못하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알음알이,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올바르게 공부하면,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뭘 밖에서 보물을 찾는다던지, 돈을 재산을 구한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구한다던지 이런 것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혹 되기도 하고 혹 안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게 있는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이 참선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되고야만 만다」 이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비단 조실 스님의 법문뿐만이 아니라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한결같이 이것을 증명을 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고 보증을 하신 것입니다.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해서 3년을 해서 깨닫지 못하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 이렇게 맹서를 하신 조사(祖師) 스님도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 주는 것을 너희들은 이 말을 믿지 아니하면 바른 말씀을 믿지 않는 죄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물려갈 것이고, 내가 만약에 추호라도 거짓말을 했다면은 나는 세세생생에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이렇게 참 무서운 말씀을 하신 조사도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되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고, 또 올바르게 하기는 하되 열심히 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꼭 깨달을 수 있다고 보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첫째 올바르게 하고, 둘째에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야만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선바국(瞻婆國)이라는 나라에 가셨습니다. 그 선바국 나라에 가라지(迦羅池)라고 하는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가에서 여러 대중을 향해서 법문(法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못 가운데에 살고 있는 큰 조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조개가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그 소리를 듣고서 그 연못 밖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원음(圓音)이라, 한 말씀으로 설하시되 모든 중생이 각기 자기 나름대로 그 부처님의 설법을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보살(菩薩)은 보살대로 듣고, 아라한(阿羅漢)은 아라한대로 듣고, 중생은 중생대로 듣고, 축생은 축생대로 다 듣고, 하늘나라 사람들은 하늘나라 사람대로 다 듣는 것입니다. 시방세계(十方世界) 모든 중생이 다 부처님의 설법을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원음이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 가라지라고 하는 못 속에 살고 있는 큰 조개도 그 부처님의 음성소리가 못 속에 울리니까 거기서 못 밖으로 기어나와 가지고 그 못 밖에 풀밭에 풀섶에 그늘에 딱 멈추어서 입을 떡 벌리고서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목동이, 그 소를 치는 목동이 작대기를 들고서 소를 몰다가 그 목동도 그 부처님 법문, 많은 신도들이 운집(雲集)을 해가지고 앉아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으니까 아! 자기도 가까이 가서 그 법문을 들어야겠다.
이래 가지고 가 가지고 그 풀섶에다 자기가 들고 있는 그 지팽이를 탁! 꽂아 놓고 그리고서 법석(法席)에 나아갈려고 했는데, 그 작대기를 탁! 풀섶에 꽂은 것이 하필 법문을 듣기 위해서 나와 있는 조개, 그 조개가 입을 떡 벌리고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는 그 조개 벌리고 있는 데다가 그 작대기를 탁! 꽂았다 그말이여.
그래 놓으니 그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여간 작대기를 꽂아도 그 깨지들 않을 텐데 입을 벌리고 있는 데다가 탁 꽂으니까 그 조개가 깩 소리도 못하고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그 조개는 그 부처님의 법문을 듣다가 죽었습니다. 그 법문을 듣다가 죽은 그 공덕(功德)으로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습니다.
도리천에 태어나 가지고 그 한량없는 복을 받고 그 도리천에 12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궁전, 가로 세로가 12유순이나 되어. 그 12유순은 굉장히 큰 아주 그 거리의 단위인데, 그 12유순이나 되는 그 넓고 큰 궁전에서 천녀들과 그 노래를, 천녀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 잘 먹고 잘 입고 그 낙(樂)을 받고 있는데.
그러면서 그 천안(天眼)으로써 자기가 과거에 어떠한 연(緣)으로 해서 이렇게 도리천에 태어나 가지고 이런 천당의 낙을 받고 있는가 하고 전생에 자기 몸뚱이를 따악 관(觀)을 해 보니까,
전생에 자기가 한 마리의 조개로써 이 선파국의 가라지라고 하는 못에서 살고 있다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나왔다가 그 목동에 작대기에 꽂혀서 죽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부처님의 법문을 듣다가 죽기는 했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그 공덕으로 내가 이런 도리천에 태어나서 이러한 참 이 한량없는 낙(樂)의 보(報)를 받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그 궁전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 회상(會上)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공양(供養)을 올리니까 부처님께서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 조개의 후신(後身)인, 천당에서 내려온 그 조개를 향해서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니까 바로 언하(言下)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환희용약(歡喜踊躍) 해 가지고 다시 도리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희(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라고 하는 경(經)에 이러한 설화가 있습니다.
이 설화를 통해서 그러한 조개도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그 공덕(功德)으로—보통 부처님의 설법을 듣다가 죽지 않고 그냥 어떠한 사람의 작대기에 꽂혀서 죽었다면 원한심을 품고 세세생생에 서로 원수를 갚고 원수를 또 받고 하면서 악도(惡途)를 윤회(輪廻)할 텐데,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던 그 인연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고, 다시 또 천상에서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께 공양—그 너무너무 감사하니까 부처님께 그 감사한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서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고 공양을 올리고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해 주셔 가지고 성인(聖人)의 그 수다원과를 증득을 하게 되었어.
한 마리의 조개도 법문을 의지해서 그렇게 깨달랐거든, 하물며 우리 사람!
우리 사람은 다른 중생들, 다른 짐승들보다는 훨씬 여러 가지 여건이 도(道)를 닦기 좋게 우리는 타고난 것입니다.
천상에 태어났던 이 조개는 다행히 참,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또 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가지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지만, 다른 어떠한 유루복(有漏福)을 지어서 천상에 올라가면 계속해서 천상에서 복을 받느라고 여간해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불법에 귀의(歸依)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처음~21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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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우리는 숙세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사람 몸을 받아 가지고 금생에 또 이 불법(佛法)에 귀의해서 이렇게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바늘 하나를 떨구어 가지고, 이 지상에 겨자씨를 향해서 바늘을 떨구어 가지고 그 바늘이 겨자씨에 딱 꽂힌 만큼 그만큼 이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또 눈먼 거북이가 천년 만에 한 번씩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그때 마치 구멍이 뚫린 큰 고목나무 등걸을 만나 가지고 거기에 몸을 의탁해 가지고 숨을 쉬고서 들어가는데, 그 천년 만에 떠올라 가지고 하필 떠오른 그곳에 구멍 뚫린 고목나무 둥치를 만난 만큼 그만큼, 그보다도 더 어렵다 이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거북이는 눈먼 거북이입니다. 눈이 떠 있는 거북이도 그 고목나무를 만나기가 어려울 텐디, 눈먼 거북이가 더군다나 어떻게 그 나무를, 지척(咫尺) 간에 나무가 있은들 어떻게 그것을 붙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만큼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으로서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도(道)를 열심히 닦지 아니하고 또 도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렁저렁하다가 이 몸뚱이를 잃게 되면 천당 아니면은 지옥이요, 그렇지 않으면 축생에 떨어지고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또 불법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하고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하면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공지광영인등현(共知光影因燈現)이요. 빛과 그림자는 등불로 인해서 나타난다. 등불을 켬으로써 밝은 광명도 나오고 밝은 광명이 있음으로 해서 또 그림자도 나타난다 그말이여.
함위파도장수흥(咸謂波濤仗水興)이다. 파도는 물을 의지해서 일어나지, 물 없는 곳에는 파도도 일어나지를 않는다. 이러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바요, 다 말하는 바다 이것입니다.
등멸수침파영진(燈滅水沈波影盡)이요. 등불이 꺼지고 물이 잠잠해지면 그림자도 없어지고 또 파도도 없어진다.
등불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고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데, 등불이 꺼져버리고 물이 없은다면은 그림자도 파도도 없어질 것이다.
정감문외긱오등(政堪門外喫烏藤)이다. 그래야사 감히 문밖에 오등(烏藤)을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오등이라 하는 것은 참 향기로운 약초인데.
'내'라고 하는 아상(我相) · 아만(我慢) · 아애(我愛) · 아치(我癡) 이러한 것이 내게 있기 때문에 모든 거기에서 탐진치(貪瞋癡)가 일어나고, 삼악도(三惡途)가 일어나고, 육도윤회(六途輪廻)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공(空)해 버린다면, 능(能), 주관이 공한다면 객관은 따라서 공해지는 것입니다. 주관이 있기 때문에 객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이 속담에 「잘되는 것은 지가 잘나서 잘되고, 못되는 것은 다 조상 탓」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속담이 있는데.
잘되고 못되고 한 것이 전부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등불을 계속 켜 놓고 '그림자가 나타난다'고 한탄을 하고. 물을 놔두고서, 물이 있는데 물은 그냥 놔두고서 '물결 일어난다'고 탓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더군다나 이 말세(末世)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인데, 항상 남을 원망하고 남을 미워하고 또 남을 이뻐하고 집착을 하고 이래가지고 그 서로 은혜가 있고 서로 사랑하고 이뻐하면은 그것이 또 이후에 미움과 원망으로 또 바뀌는 것입니다.
원래 원수는 다 친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여.
다생원채(多生怨債)가 기어친(起於親)이여. 다생(多生)에 원수 빚이 다 친한 데로부터 인연해서 일어나는 것이여. 막약다생(莫若多生)에 불식인(不識人)이다. 원수가 없을라면은 다생에 사람을 아지 못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사람을 알게 되면은 친해지고, 친해지면 그것이 원수가 거기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원수가 없고자 하면은 사람과 친하지를 말아라' 이런 뜻인데.
이 사바세계, 우리가 다생에 온갖 인연(因緣)으로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숙세에 심은 맺은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자식으로 형제간으로 부부간으로 친구 간으로 이웃으로 이렇게 태어나고,
전생에 지은 공업(共業)으로 해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태어나고 또 인류로 이렇게 태어나서 그래가지고 흥망성쇠와 희로애락과 빈부귀천으로 우리가 이렇게 솜털 얽히듯이 이렇게 얽혀서 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나는 일체 사람을 사귀지 말으리라. 일체 원수 맺기가 싫으니까 누구하고도 친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해서 사람을 피하고 산중 굴속으로 들어가서 혼자 그렇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맺어진 인연, 이미 내가 진 빚은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갚아야만 되고, 갚지 않으면은 그 빚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따라다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로서 올바르게 이 한 생을 살고, 올바르게 해탈로를 가기 위해서는 아는 사람을 끊어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도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고, 있는 고대로 놔두고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지혜롭게 단속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자기를 단속한다'고 하는 것은 참선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方便)이 있습니다마는 그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데 뭉쳐서 그놈을 완전히 아주 고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가장 아주 이 간결하고도 요긴한 법으로 추출한 것이 바로 참선법이다.
이 참선법 속에는 팔만사천에 묘법(妙法), 묘(妙)한 방편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경(經)도 갖추어져 있고, 염불(念佛)도 갖추어져 있고, 주력(呪力)도 갖추어져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속에 갖추어 있고, 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갖추어져 있고, 법이란 법은 이 활구참선법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온갖 종류의 풀을 모두 뜯어서 그래가지고 한데 싸 가지고 그놈을 쌓아서 놓으면은 그놈이 거기서 열이 나가지고 푹 썩으면 본래 그 풀이 가지고 있던 그 모양은 다 분해가 되어 가지고 보이지 않지만, 그 여러 가지 풀이 쌓여서 거기서 썩어서 없어짐으로 해서 거기에서 다른 곡식을 잘 자라게 할 수 있는 비료성분이 거기서 조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낱낱이 그 풀의 모양이 썩지 않고 생으로 그냥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훌륭한 퇴비가 아닌 것입니다. 썩지 아니한 풀을 갖다가 곡식 뿌리 가까이 묻어 놓으면 그 곡식은 결국은 뿌리가 썩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을 본 사람이나 또는 어떠한 주력을 했거나 염불을 했거나 기도를 했거나 자기가 10년 20년 열심히 해서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얻은 바가 있다하더라도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다 썩쿼서 그것을 갖다가 그 상(相)이 썩어서 없어져 버려야 진정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나아갈 수가 있고 최상승법을 닦고 실천해 나가는 데에 좋은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주력이나 또는 어떤 기도 같은 것을 열심히 하면 무슨 오신통(五神通)—남의 마음을 환히 안다던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사에 대해서 알게 된다든지,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다든지 또 남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든지,
그러한 신통력(神通力), 그런 그 초능력을 한 가지 내지 몇 가지를 얻었다 할 때에, 그런 것을 자기가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은 이 최상승법 정법을 닦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해서 장애가 되어 가지고 깨달음에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풀이 자기의 모양을 고대로 유지하는 동안에는 곡식을 위한 참으로 훌륭한 비료가 거름이 될 수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지식이나 학식이나 또는 권력이나 명예나 또는 자기가 부귀 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기술이라든지 힘이라든지 심지어는 신통력까지라도 그러한 것을 속에 지니고 거기에 집착해 가지고서는 정법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다 놔 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야 해.
그래서 만공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참선하는 사람은 완전히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또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바르고, 곧고 좋은 나무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다 비어 가는 것이고, 요새는 이리저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 뿌럭지는 모다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캐 가고, 또 비뚤어진 나무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다 비어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썩은 나무둥치, 몇십 년 되어 가지고 그놈이 버글버글하니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나무꾼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무슨 조각하는 사람도 돌아다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정말 몸과 목숨을 이 정법에 바쳐서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21분27초~39분3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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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일요법회 때 오계(五戒)를 설하고, 또 불명(佛名)을 타고, 또 화두를 타고, 또 어린이 독경대회에서 뽑힌 사람의 수상식도 하고 그랬는데 시간이 없어서 이 화두(話頭)를 타신 분들에게 화두에 대한 법문을 자상하게 일러 드리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 불명을 타고 화두를 받는 것은 3월 일요법회 때 하게 되는데, 그동안에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고 싶다. 그러니 지난 일요법회 때 그 화두 법문에 대해서 자세히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것을 좀 들려 달라고 여러분이 간청을 했습니다.
일요법회는 원래 이 사부대중(四部大衆), 특히 청신사 · 청신녀들 또 직장에 나가시는 분들, 학생들, 모다 그런 분들이 일요일이라야 이 법회에 나오실 수가 있기 때문에 관음재(觀音齋), 음력 매월 24일 관음재법회를 일요일로 돌렸습니다. 그분들로 하여금 이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시게 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참선은 법회 때마다 항상 이 법문(法門)의 그 요지(要旨)라고 할까, 초점을 항상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 두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이 산승(山僧)도 거기에 대해서 항상 말씀을 해 오고 있습니다마는,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그 첫째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는 화두를 잘 간택을 해서 화두를 올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한다'하는 것은—물론 참선은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어다니면서도 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면서도 하고, 차를 타면서도 하고 일을 하면서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시간과 장소에 제한을 받지를 않습니다.
언제 어데서라도 되어져 있도록 노력을 해야만 그 사람은 참선을 바르게 해 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만 할 수가 있고 또 기본자세,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만 해야 되고, 시끄러운 데서는 안되고, 또 서서도 안되고, 일할 때는 안되고, 이렇다면 그 사람의 공부는 아직 초단계에 있어서 공부하는 법이 아직 익숙하지 못하는 단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순일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되겠지만, 아직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기본자세를 잘 익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본자세는 가부좌나 또는 반가부좌—이 가부좌를 할 수 있으면 참 좋고, 가부좌는 다리가 굳었거나 짧거나 모다 그 사람의 체질상 연습을 안 하면 처음부터 이 가부좌가 잘 안되는 수가 있습니다.
자꾸 연습을 하면, 처음 한 1분씩도 하고 2분씩도 하고 3분씩도 하고 5분 10분도 하고, 하다 보면 30분씩 할 수도 있고, 또 1시간씩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부좌는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모두가 다 이 가부좌를 많이 하셨고, 지금 우리가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모든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도 다 가부좌를 하고 계시게 그렇게 조성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온가부좌가 잘 안되면 반가부좌만 해도 됩니다. 반가부좌만 해도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반가부좌를 하고서 오른손을 놓고 왼손을 위에다 요렇게 포개고, 엄지손(가락)을 이렇게 딱 이렇게 맞되대 너무 힘을 주지 말고 또 이렇게 떨어지지 않도록, 이 엄지손과 엄지손이 예쁜 그 다리처럼 되도록, 무지개 다리처럼 이렇게 되도록 이렇게 해서, 딱 해서 배꼽 앞에 배에다가 이렇게 해서 놓고서.
허리를 죽 펴되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지도 말고, 앞으로 숙지도 말고, 좌우로 기울지 않도록 단정하면서도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 힘도 빼야 하는 것입니다.
단정히 한답시고 너무 허리에다 힘을 주고 목에다 힘을 주고 어깨에다 힘을 주어 가지고 뒤로 자지바지하니 너무 그렇게 하면 오래 앉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그리고 눈은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또 너무 감거나 가늘게 뜨지도 말고 평상(平常)으로 떠라.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에도 '그 눈을 법문을 들을 때에나 또는 참선을 할 때에도 눈을 평상으로 따악 떠야지 눈을 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말씀이 나왔습니다마는.
눈을 감으면, 처음 참선한 사람은 눈을 뜨면 자꾸 뭣이 눈에 보이고 마음이 산란하고, 눈을 감고 하면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해져서 공부가 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계속해서 눈을 감아야만 공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눈을 감고 하면 못쓰냐 하면은 망상이 차츰 잠잠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해도 이 참선을 하다 보면 망상(妄想)이 가라앉고 조용해지면 까딱하면 이 혼침에 빠지기가 쉬운 것인데, 더군다나 거기다가 눈을 감고서 공부를 익혀나가면 더욱 혼침이나 무기(無記)에 연결이 되어 가지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눈을 감고 하면 스르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명 잔 것은 아닌데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뭣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꾸뻑, 이렇게 꾸뻑꾸뻑 졸고 있는데, 본인은 전혀 자지 안 했다고 생각을 하고 그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사람이 보면은 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졸고 있으면서, 졸음에 들자마자 화두에 대한 의심은 스르르르 하니 없어지게 되고, 그래 가지고 그 혼침과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져 가지고,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 적적한 데에 체해 가지고 그 맛을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량겁(無量劫)을 그 혼침에 빠져 있어도 깨달음에 이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은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해야지, 적적하기만 하고 성성하지 못하면 그것은 바른 참선이 아니된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한 때에는 항상 눈을 평상으로 떠라. 단정하니 이렇게 앉아서 약 3미터, 2미터 내지 3미터 지점에 눈을 떨궈라 하거든.
'눈을 떨군다'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어떠한 점을 주시(注視)하거나 응시(凝視)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래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눈을 평상으로 뜨고, 이는 아금니부터 지그시 감고서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혀 끄터리를 갖다가 말아서 대라 이거거든.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참선하는 데 있어서 기본자세야.
기본자세를 항상 잘 해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 언제라도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공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이것이여.
기본자세를 잘하고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해라.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보통 사람은 다 허파로, 가슴으로 호흡을 하는데 참선을 한 사람은 배꼽 밑에 단전(丹田)으로 호흡을 해라 이거거든.
가슴은 고대로 놔 두고서 숨을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함에 따라서 아랫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배로 호흡을 한다, '단전으로 호흡을 하라' 그래서 이것을 단전호흡이라 그러는데.
이 화두만을 올바르게 참구를 해 나가면 자세도 둘째 문제고, 호흡도 둘째 문제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으로 바르게 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 화두를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는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자꾸 간절히 간절히 화두를 참구, 화두를 이렇게 의심을 해 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점점 이 골똘하고 간절히 하다 보면 이 기운이 머리로 올라가게 되는 그러한 경우가 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물론 체질이 아무리 화두를 가지고 열심히 참구를 해도 기운이 올라가지 아니한 특수하게 잘 타고 난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체질에 따라서 조금 신경을 쓰면 열이 올라가고 눈이 붉어지고 얼굴이 붉어지고 하는 그러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참선을 열심히 한답시고 계속 단전호흡을 하지 않고서 열심히 화두만 하다 보면 그렇게 상기(上氣)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애당초에 참선을 시작할 때부터 바른 자세와 단전호흡을 기본으로 해서 그러면서 화두를 참구하면 백무일실(百無一失)이여. 백 명이면 백 명 다 이 부작용 없이 상기병(上氣病)같은 그런 무서운 병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올바르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전호흡, 숨을 다 내뱉어버리고 그리고서 스르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아랫배가 약 3센치 가량 볼록하게 하라 그말이여.
들어마실 때 너무 가득 들어마시면 힘이 드니까 8부(八部)쯤만 들어마셔. 조금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완전히 뱃속이 가득차도록 들어마시지 말고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거든 일단 정지를 해. 딱 정지를 하되 약 3초 가량 딱 정지를 했다가 또 조용하게 숨을 인자 코로 내쉬되 그 볼록했던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숨을 내쉬고.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하니 들어마시되 들어마심에 따라서 배가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8부쯤 들어마셨으면 또 일단 정지했다가 또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은 내쉴 때, 들어마셨다가 3초 쉬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화두를 이렇게 하는 거여.
또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이런 화두를 하신 분은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무르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숨이 다 나가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가지고 또 3초 동안 정지하면서 '어째서?'해 가지고, 내쉬면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처음 최초로 초학자는 이렇게 숨을 내쉴 때마다 이렇게 화두를 한번씩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이렇게 해서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고 안정이 되어가면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을 필요가 없어.
숨은 몇 번을 쉬되, 그 알 수 없는—'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숨을 두 번을 쉬거나, 세 번을 쉬거나, 네 번을 쉬거나, 숨이야 그때그때 계속 쉬면서도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데다가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뭐꼬, 이뭐꼬' 계속 그렇게 덮치기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없어지거나,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거든 그때 화두를 한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참으로 공부가 순숙(純熟)해지면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들고, 아침공양 할 때까지 한번 들어서 고대로 그 화두에 의심이 있으면은 계속해서 화두를 새로 안 들어도 된다 그말이여.
밥을 먹으면서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순수무잡한 의단이 고대로 독로해 있으면은 화두를 거기다가 덮치기로 뭐 자꾸 '이뭣고, 이뭣고' 할 필요가 없다 그말이여. 오히려 잔잔한 물에다가 막대기를 휘저어서 물결을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여.
한번 든 화두가 하루 종일 있고, 저녁에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화두가 성성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다면 그건 참, 공부가 정말 순숙해진 경계다.
그러한 상태로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정말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놓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
오직 여기에 나의 인생을 다 여기다 바치고, 나의 목숨을 다 여기다 바치고, 그러한 마음으로 알뜰히 해나가면 누구라도 다 이렇게 적적하고 성성해서 한번 든 화두가 하루도 가고 이틀도 가고 사흘도 가고, 이런 경지에 이런 순수무잡(純粹無雜)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면 그럴 때에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누가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 말고, 한결같이 그 적적성성(寂寂惺惺)한 의단을 갖다가 잘 거각(擧却)해 나가, 관조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수무잡한 경지에 들어가서 깨닫기를 바랜다던지, 누가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랜다던지, 빨리 깨달을려고 생각을 일으킨다던지 이런 것은 모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에까지 와 가지고 자기의 그것을 갖다가 망가뜨려 버리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한번 모처럼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모처럼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39분39초~60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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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하고 능소구망생불생(能所俱忘生不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산호지상월삼경(珊瑚枝上月三更)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능생소소생능(因能生所所生能)이다. 능(能)을 인연해서 소(所)가 생겨나. 능(能)은 주관을 말한 것이고, 소(所)는 객관을 말한 것이여. 주관으로 인해서 모든 객관이 생겨난 것이여.
소생능(所生能)이다. 또 그 객관으로 인해서 또 능(能)이 주관이 움직이게 된다. 능(能)과 소(所)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
능소구망(能所俱忘)에 생불생(生不生)이다. 능(能)과 소(所), 주관과 객관이 함께 주관과 객관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것이 없어지게 되면 생불생(生不生)이다. 생(生)하되 생(生)이 아니다.
화두(話頭)를 들어서 처음에부터 잘되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익혀온 것이 주관과 객관 속에 서로 굴림을 받고 얽히고설켜서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처음부터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꾸 한곳을 향해서 끈질기게 도전을 하면, 계속해서 또 화두를 들고 또 화두를 들고 안될수록에 더욱 열심히 하고, 되어도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 내지 말고, 안되아도 안된다고 짜증을 내지 말고서 더욱 신심(信心)을 내고 더욱 인내심과 지혜심으로써, 신심으로부터서 신심으로 계속해서 해 나가면 어느 날 그렇게 화두를 들려고 해도 들어지지 않던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턱! 들리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을 물리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망상이 끊어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와. 그것이 능소(能所)가 구망(俱忘)이거든.
그러면 생불생(生不生)이여. 눈으로 하늘을 보되 하늘이 보이지 아니하고, 산을 보되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땅을 보되 땅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되 한 알갱이 쌀도 씹은 바가 없어. 밥 맛을 몰라. 밥이 된지 진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그렇게 순일무잡하게 공부가 되아 가는 것입니다.
노방흡진경해수(老蚌吸盡鯨海水)여. 늙은 조개가 저 고래가 살고 있는 그 넓고 넓은 바다의 물을 다 둘러 마셔.
마셔 버리면은 산호지상(珊瑚枝上)에 월삼경(月三更)이다. 저 바다 밑바닥에 있던 그 산호가 빠알간 산호 가지에 휘황찬 삼경(三更) 달이 찬란히 빛날 것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이 늙은 조개가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 넓고 넓은 그 깊은 바닷물을 다 둘러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이뭣고?'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이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는—'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큰 소원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을 불러라, 지장보살을 불러라, 아미타불을 불러라' 또는 '고왕경을 읽어라' 또는 '금강경을 읽어라' 이러한 방편(方便)을 설해 드리기도 합니다마는,
그러한 혹 하고 많은 방편이 다 뭉친들 다 합한들 어찌 이 한마디의 화두! 공안에다 댈 수야 있겠습니까?
어쨌든지 이 한마디에 목숨을 걸고 우리가 목숨 다할 때까지 가능하면 금생에 결정코, 금생 아니라 무량겁을 두고도 이 한마디로써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리라.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문제삼을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목숨 바쳐서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이것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외골수로 나가고,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듯이 외골수로 오직 이것 하나만을 향해서 전부를 바칠 때에 우리는 그 늙은 조개가 그 대해수(大海水)를 둘러 마시듯이 우리는 결정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60분47초~1시간13분45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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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정종소식몰자미~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6) '贈淳長老' 사명대사(1544-1610) 게송 참고.
*정종(正宗) ; 석가세존으로부터 대대로 조사(祖師)들이 연면(連綿)하여 바르게 전해온 바른 종지(宗旨,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올바른 가르침. 선종에서 자기의 종지(宗旨)를 가리켜 말함.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 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은산철벽(銀山鐵壁) ; 철벽은산(鐵壁銀山). 은과 철은 견고해서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높아 오르기 어려움을 나타낸 것. 은(銀)으로 만든 산이요, 쇠로 만든 벽에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앞뒤가 다 끊어져 버린 절박한 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아무것도 사량분별(思量分別)이 거기서 있을 수가 없는 것을 가리킴.
수행자에게 이 은산철벽은 내 몸과 목숨을 다해서 뚫고 들어갈 수밖에는 없는 관문(關門)으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마치 모기가 쇠로 된 소 등어리에 올라타고서 그 입부리를 소 등에다가 처쑤셔박는 것처럼,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막론(莫論)하고 입부리와 머리와 몸을 압량해서, 합해서 처박고 돌격을 해 들어가야 한다.
자기의 근기(根機)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건강도 따질 것도 없고, 자기의 어리석고 영리한 것도 따질 것도 없고, 남녀노소도 따질 것도 없고, 유식 무식도 따질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되 불급불완(不急不緩), 너무 용을 쓰고 몰아붙여도 안 되고 너무 늘어져 처져도 안 되고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게 자기의 본참공안을 들어야 한다. 공부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따질 것이 없다.[송담스님(No.577) 96년 11월 첫째일요법회 법문에서]
〇‘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 시대, 상법 시대, 말법 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 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 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본각(本覺) : 본래 갖추어져 있는 깨달음. 부처님의 본래의 깨달음. 일체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각성(覺性)의 뜻으로서 청정한 심성(心性)을 말함.
이 심성은 허명(虛明)해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 자연적인 것도 아니며, 본래 중생의 상념(想念)을 떠나서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망(迷妄)과 깨달음에 관계 없는 절대적인 경위(境位)이다.
*생사(生死) ; ①생과 사.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 ②유전(流轉 윤회의 생존. 생사의 갈림길)의 모습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미혹(迷惑 도리에 어두운 것). 미혹의 세계. 미혹의 모습. 현실 사회의 고뇌. 태어남과 죽음이 번갈아 끊임이 없는 미혹의 세계. 윤회와 같음.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때 세존께서 곧 게송을 말씀하셨다. 나는 쇠약하고 늙은 이 몸을 이제 버리려 하네. 지금 이미 목숨을 버렸어야 함에도 수명을 늘려 석 달을 머물려 하네. 교화(敎化)하고 제도해야 할 일을 모두 다 이미 마쳤네. 그러므로 나는 머지않아 반열반에 들 것이네.
내가 말한 모든 법이 곧 그대들의 스승이니 공경하여 받들고[頂戴] 더욱 지키고 보호하여 닦아 익혀 잊지 말고,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여 내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어야 하네.
生死甚危脆 身命悉無常 常求於解脫 勿造放逸行 正念淸淨觀 善護持禁戒 定意端思惟 攝情於外境
若能如此者 是則護正法 自到解脫處 利益諸天人
나고 죽음은 매우 위태롭고 몸과 목숨은 모두 무상하니 항상 해탈을 구하여 방일(放逸)한 행동하지 말아야 하네. 바르게 생각하고 청정하게 관하며 금계(禁戒)를 잘 보호하고 지키며, 산란하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定意]으로 바르게 사유하여 바깥 경계로 치달리는 감정을 거두어야 하네.
만약 이와 같이 하면 이것이 곧 정법(正法)을 보호하는 것이니 스스로 해탈처에 이르러 모든 천상 세계와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리라.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 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 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강사(講師) ; 경론(經論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을 가르치는 스님.
*상좌(上佐 윗 상/도울 좌) ; 윗사람을 도운다는 뜻. 곧, 한 스승의 제자를 일컬음.
*은사(恩師) ; ①가르침을 받은 은혜로운 스승. ②자기를 출가시켜 길러 준 스승.
*'스승이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法)을 청(請)해 가지고 상좌의 법문을 듣고서 스승이 깨달은 그러한 법문입니다' ;
'영광(靈光)이 홀로 비취어 근진(根塵)을 멀리 벗어나며 체(體)는 진상(眞常)이 드러나 문자에 걸리지 아니하고, 진성(眞性)은 물듦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성(圓成)하니 다만 망연(妄緣)을 여의면 곧 여여불(如如佛)이라'하니, 스승이 그 말에 깨달았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삼세(三世) : 과거와 현재와 미래. 또는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六O二 ~ 六七五)
〇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③]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一二三一 ~ 一二九八 또는 一三O八) (용화선원刊) p97-99. (가로판 p95-96)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함. 아비(阿鼻)는 산스크리트어 avīci의 음사(音寫)로서 ‘아’는 무(無), ‘비’는 구(救)로서 ‘전혀 구제받을 수 없다’는 뜻. 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기 때문에 무간(無間)이라 한다.
아버지를 죽인 자, 어머니를 죽인 자, 아라한을 죽인 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린 자, 나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자 등,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가게 된다는 지옥.
이 지옥에 떨어지는 죄인에게는 필파라침(必波羅鍼)이라는 악풍(惡風)이 있는데 온몸을 건조시키고 피를 말려 버리며 또 옥졸이 몸을 붙잡고 가죽을 벗기며, 그 벗겨낸 가죽으로 죄인의 몸을 묶어 불 수레에 싣고 훨훨 타는 불구덩이 가운데에 던져 넣어 몸을 태우고, 야차(夜叉)들이 큰 쇠 창을 달구어 죄인의 몸을 꿰거나 입, 코, 배 등을 꿰어 공중에 던진다고 한다. 또는 쇠매(鐵鷹)가 죄인의 눈을 파 먹게 하는 등의 여러 가지 형벌로 고통을 끊임없이 받는다고 한다.
물었다.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요, 축생의 스승은 아닙니까? 옛날 여래가 세상에 계시면서도 축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하늘과 사람들만의 스승이라 합니까?"
수다라경(修多羅經)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부처님은 첨파국(瞻婆國)에 계시면서 가라(迦羅) 못가에서 첨파국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이때 못 안에 무명조개[蛤 대합조개] 하나가 부처님의 설법하신 소리를 듣고는 기뻐하여 곧 못에서 나와 풀뿌리 아래에 들어갔습니다.
이때에 어떤 한 소를 치는 사람[牧牛人]은 대중들이 둘러서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있음을 보고는 부처님에게 가서 법을 들으려고 하여 지팡이로 땅을 찌른 것이 무명조개 머리에 잘못 닿았습니다. 무명조개는 곧 목숨이 끊어져서 도리천에 나아 도리천왕이 되었으니, 그 복의 과보 때문이었습니다. 궁전의 세로와 너비는 바로 12유순이었습니다.
이에 무명조개 천인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기녀들의 오락 소리를 보고 깨달은 뒤에 곧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앞서 축생이었는데 무슨 인연 때문에 이 하늘 궁전에 태어났을까?'
곧 하늘 눈[天眼]으로 자세히 살피니, 앞서 못가에 부처님 설법을 들은 이 공덕 때문에 이 과보를 얻었기에 무명조개 천인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에게 가서 닿아 땅에 엎드려 발아래 예배하였습니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첨바라국(瞻婆羅國)의 가라못[迦羅池] 가에 가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 그때 못에 있던 대합조개 한 마리가 부처님께서 못가에서 설법하시는 소리를 듣고 못에서 나와 풀 속으로 들어가 법을 듣고 있었다.
그때 또 어떤 사람이 지팡이를 들고 소를 놓아 먹이고 있었다. 그는 부처님께서 앉아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는 것을 보고 곧 부처님에게로 나아가 설법을 들으려고 지팡이를 땅에 꽂다가 잘못해 조개의 머리를 찔렀다. 조개는 곧 그 자리에서 죽어 도리천에 났다. 그 복의 과보로 그 궁전의 가로 세로가 12유순이 되었다. 그는 여러 천녀들과 향락하다가, 곧 궁전을 타고 부처님께로 가서 부처님 발에 예배했다.
①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 우주의 본성이나 참모습을 깨달은 사람. 모든 번뇌를 소멸한 사람. 청정한 성품을 깨달은 주체. ② 진리 그 자체. 우주 그 자체. ③ 석가모니.
*원음(圓音) ; 치우침 없는 원만한 음성. 들을 수 없는 이가 없는 음성. 모든 유정이 제각기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 부처님께서 한 음성[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실 때, 모든 중생이 제각기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평등하게 이해하는 원만한 부처님의 가르침.
*보살(菩薩) :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준말。각유정(覺有情) • 개사(開士) • 대사(大士)등으로 번역。①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②대승교에 귀의, 사홍서원을 발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며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자리 • 이타(自利 • 利他)의 행을 닦으며 51위의 수행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이.
*아라한(阿羅漢) ; 산스크리트어 arhat의 주격 arhan의 음사.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응공(應供)·응진(應眞)·무학(無學)·이악(離惡)·살적(殺賊)·불생(不生)이라 번역.
마땅히 공양 받아야 하므로 응공(應供), 진리에 따르므로 응진(應眞),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무학(無學), 악을 멀리 떠났으므로 이악(離惡), 번뇌라는 적을 죽였으므로 살적(殺賊), 미혹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불생(不生)이라 함.
*시방세계(十方世界) ; 온 세계. 사방(四方 동•서•남•북)과 사유(四維 동북•동남•서남•서북)와 상하(上下)에 있는 무수한 세계. *풀섶 ; '풀숲(풀이 무성하게 꽉 들어찬 곳)'의 사투리.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석(法席) ; 대중이 둘러앉아서 설법, 독경, 강경, 법화(法話) 따위를 행하는 자리.
*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〇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도리천(忉利天) ; 욕계에 있는 육욕천(六欲天)의 하나. 도리(忉利)는 33이라는 뜻, 천(天)은 신(神)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 33신(神)들이 사는 곳.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에 높이 솟은 거대한 산이 수미산인데, 이 수미산 정상에 있으며, 중앙에 왕인 제석(帝釋)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에 각각 8신(神)이 있어 33신.
*유순(由旬) ; 산스크리트어 yojana(요자나)의 음사. 고대 인도의 거리의 단위.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로서 소유순은 40리, 중유순은 60리, 대유순은 80리인 세 가지가 있다.
*연(緣) ;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보(報) ; 과보(果報), 인과응보(因果應報,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
*회상(會上) ; ①대중이 모여서 설법을 듣는 법회. 또는 그 장소. ②대중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공동체 및 그 장소. ③‘회상(會上)’이란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면서 함께 모인 것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② 유식설에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그릇된 지식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 곧 분별기(分別起)를 말함.
*환희용약(歡喜踊躍 기쁠 환/기쁠 희/뛸·춤출 용/뛸 약) ; 기뻐서 뛰는(춤추는) 것. 마음속에서 기뻐하는 것이 환희(歡喜)이고, 그것이 형태나 동작으로 나타나는 것이 용약(踊躍)이다. 수행 또는 문법(聞法)에 동반되는 기쁨. 기뻐서 힘이 솟음. 대단히 기뻐하고 있는 모양.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 남제(南齊)의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한역. 18권 『선견론(善見論)』 · 『비바사율(毘婆沙律)』 · 『선견비바사율(善見毘婆沙律)』이라고도 한다. 소승 율부(律部) 5대 논서 중 하나로서 스리랑카 상좌부에서 전수된 율장에 대한 주석서이다.
*세세생생(世世生生) ; 많은 생애를 거치는 동안. 태어날 때마다. 세세(世世)토록.
*악도(惡道, 惡途) ; 악한 짓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고 하는 괴로움의 생존. 지옥•아귀•축생 등의 세계. 삼악도(三惡道).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유루복(有漏福)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이 있는, 번뇌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
〇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 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귀의(歸依) ; ①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함. ②몰아의 경지에서 종교적 절대자나 종교적 진리를 깊이 믿고 의지하는 일. ③돌아가거나 돌아와 몸을 의지함.
*'우리는 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교법(敎法)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을 시기별로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으로 분류하는데,
처음 정법시대는 교법이 온전히 있음은 물론 닦아 가는 사람도 많고, 닦는 사람은 대개 깨쳐서 성과(聖果)를 얻게 되지마는, 그 다음 상법시대는 교법도 있고 수행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깨치는 사람은 적게 되고, 그 다음 말법시대는 곧 쇠잔하고 미약한 교법만 남아 있어 수행하고 증득하는 자가 없는 시기이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잡아함경(雜阿含經)』에는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지런히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사염주(四念住)를 닦아서 탐욕과 분심을 끊으면 정법은 영원토록 세상에 머물러 빛나게 될 것이나, 수행하지 않게 되면 정법은 곧 소멸하고 말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여러 경전에도 「누구나 부처님 말씀대로 닦으면 다 반드시 견성성불한다」하였고,
조사들의 말씀에는 「참선하는 이가 견성하는 것은 세수하다가 코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쉽고 당연한 일이다」하였으므로, 누구나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다만 우리는 사학(邪學)과 외도(外道)가 번성한 이 시대에 났으므로, 망녕된 알음알이를 내지 말고 줄기차게 정진한다면, 하나도 실패함이 없을[萬無一失]뿐 아니라 정법은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희유(稀有 드물 희/있을 유) ; 드물게[稀] 있음[有].
*등걸 ; 나무의 줄기를 베어 내고 남은 밑동(나무줄기에서 뿌리에 가까운 부분).
*지척(咫尺 여덟 치·가깝다·길이 지/자·길이 척) ; 길이가 8치[咫 3.03cm] 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애(我愛) ; 아(我)에 대한 깊은 애착심. 아탐(我貪).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아(我)에 대한 무지(無知).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번뇌. 네 가지 근본번뇌(四根本煩惱, 四惑) 중 나머지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공(空) ; ①모든 존재는 여러 인연으로 생겨남으로 항상 독자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 자성이 없음(無自性).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가 불교에서는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공은 전혀 없다는 무(無)나, 결국 사라져 덧없다는 허무(虛無)가 아니다. 또 공(空)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불변의 실체 ·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무실체성 · 무자성 등을 자각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지표이다.
공을 허무나 실체로 보는 것은 공에 대한 집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참된 공[眞空]이 아니라 무기공(無記空) · 편공(偏空) · 악취공(惡取空) 등이라고 한다. 이러한 공의 병[空病]에 대한 약으로 '공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②차별과 분별로써 인식된 대상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 가치나 감정이 부여된 인식 대상은 인식 주관이 조작한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대상은 허구라는 뜻.
③잇달아 일어나는 분별과 망상이 끊어진 상태. 번뇌와 분별이 소멸된 상태. 분별과 차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이 소멸된 상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다생원채기어친(多生怨債起於親) 막약다생불식인(莫若多生不識人) ; '다생, 무량겁 원수 빚이 친한 데에서 일어나니, 다생에 사람 알지 아니한 것만 같지 못하다'
*인연(因緣) ; ①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관계. ②어떤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연줄). ③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因)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緣).
*공업(共業) ; 모든 중생에게 공통(共通)되는 업(業)이라는 뜻. 모든 중생에게 공통된, 중생에게 한 가지로 나타나는 업. 공동(共同) 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원인이 되는 선악의 행위. 모든 중생이 함께 사용하는 기세간(器世間 중생이 의지하고 있는 세간, 산하대지 등의 세계)의 과(果)에 감응하는 원인이 되는 것.
예를 들면, 같은 공간에 있는 행(行)은 공업(共業)으로 있는 것이며, 모든 사람은 각각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별업(別業)이라 한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묘(妙) ; (산스크리트어) sat, su, mañju. 차례대로, 살(薩) · 소(蘇) · 만유(曼乳) 등으로 음사하고, 불가사의한 것, 절대적인 것, 비교할 수 없는 것 등의 뜻이 있다.
뛰어난 경전을 묘전(妙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법을 묘법(妙法), 불가사의한 도리를 묘리(妙理), 불가사의한 경계를 묘경(妙境), 묘인(妙因)과 묘행(妙行)에 의하여 증득한 과(果)를 묘과(妙果)라고 한다. '묘(妙)'라는 말은 불가사의하고 뛰어난 모든 것을 형용하기 위해 사용된다.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오신통(六神通) ;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림을 신(神)이라 하고, 걸림 없는 것을 통(通)이라 한다. 다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〇"제일통으로부터 제오통까지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마음을 고요히 가지기만 힘쓰는 유루정(有漏定)을 닦는 외도(外道)나 신선(神仙) • 하늘 사람(天人) • 귀신들도 얻을 수가 있고, 약을 쓰든지 주문(呪文)을 읽어도 될 수 있다。그러나 누진통만은 아라한(阿羅漢)이나 불•보살만이 능한 것이다"
*누진통(漏盡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만공월면(滿空月面) ; (1871~1946) 법명은 월면(月面), 호는 만공(滿空), 속명은 송도암(宋道岩).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1871년(신미년) 3월 7일 출생하였다. 1884년(갑신년) 14세에 태허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충남 서산 천장암(天藏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계속 천장암에서 지내다, 어른 시봉(侍奉)을 하면서 공부하기란 퍽 힘드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 온양 봉곡사(鳳谷寺)로 가서 노전(爐殿)을 보며 공부를 계속하다가, 1895년(을미년)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하룻밤을 지나 새벽 종송(鐘頌)을 할때,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외우다가 깨닫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空山理氣古今外)요 공산의 이기(理氣)는 고금 밖이요
백운청풍자거래(白雲淸風自去來)라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가고 오는구나.
하사달마월서천(何事達摩越西天)고 달마는 무슨 일로 서천을 건넜는고
계명축시인일출(鷄鳴丑時寅日出)이라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느니라.
그 후 마곡사 근처 토굴에서 공부하다가, 스님 나이 26세 때, 1896년(병신년) 7월 보름날 경허 선사가 오시니, 선사께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을 낱낱이 고백하였다.
경허 선사가 스님에게 묻기를 ‘등(藤) 토시 하나와 미선(美扇) 하나가 있는데, 토시를 부채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스님의 대답이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 선사가 ‘네가 일찌기 다비문(茶毘文)을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경허 선사가 다시 묻기를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이 참뜻이 무엇인고?’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이르되,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 하고 부채를 토시라 하는 도리를 알겠느냐?’
선사가 다시 이르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는 더 진보가 없으니 조주 스님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하고,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으라.’하고 떠났다.
그 후 정진하던 중 경허 선사를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1898년 7월에 선사가 계신 서산(瑞山) 부석사(浮石寺)로 가서 지내다가, 경남 범어사 계명암 선원으로부터 경허 선사께 청첩장이 와서 선사를 모시고 계명선원에 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선사와 배별(拜別)한 후 통도사 백운암으로 갔다.
마침 장마 때라 보름 동안을 갇혀 있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재차 깨달으니 요사장부(了事丈夫)가 되었다.
31세 때(1901년) 천장암에 돌아와 머무르며 지내다가, 34세 때(1904년 7월 15일)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른 경허 선사를 뵙고, 그동안 공부를 지은 것을 아뢰니, 선사가 전법게(傳法偈)를 내렸다.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 구름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叟山禪子大家風) 수산선자(叟山禪子)의 대가풍(大家風)이여!
은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 은근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 한조각 권세 기틀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1905년 덕숭산에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한 초암을 짓고 지내고, 그 뒤 수덕사(修德寺)·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庵)을 중창하고 선풍(禪風)을 떨치다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마하연(摩訶衍)에 가서 3년을 지내고, 다시 덕숭산으로 돌아와 서산 간월도에 간월암(看月庵)을 중창하였다.
말년에 덕숭산 동편 산정에 전월사(轉月舍)라 이름한 한칸 띳집을 짓고 지내다, 1946년(병술년) 10월 20일에 목욕 단좌(端坐)한 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고 껄껄 웃고 문득 입적(入寂) 하였다.
나이 76, 법랍(法臘) 62. 제자들이 스님의 법어를 모은 「만공법어(滿空法語)」가 있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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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五戒) ; (산스크리트어 pañca-śīla) 재가(在家)의 신도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①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②불투도(不偸盜). 주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
③불사음(不邪婬).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④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라.
⑤불음주(不飮酒). 취기(醉氣)가 있는 것에 취(醉)하지 말라.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〇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전가부좌(全跏趺坐) · 온가부좌(온跏趺坐) ·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초학자(初學者) ; ①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②배워 익힌 지식이 얕은 사람.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적적(寂寂) ; 고요한 상태.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함. 일체의 대(對)가 끊어진 마음의 본체가 드러난 상태.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 ; 완전히 잠이 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정신이 어렴풋한 순간.
*무기공(無記空) ; ①의식이 깨어있지 않고 멍하거나 기억이 없으면서 편안함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상태 ②참선중에 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무량겁(無量劫 없을 무/헤아릴 량/가장 긴 시간 겁) ; 헤아릴[量] 수 없는[無] 오랜 시간[劫]이나 끝이 없는 시간. 劫과 刧는 동자(同字).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주시(注視 물을 대다·마음을 쏟음 주/볼 시) ; ①어떤 일에 정신을 모아 자세히 살핌. ②어떤 목표물을 주의깊게 잘 살펴봄.
*응시(凝視 엉길 응/보일 시) ; ①시선을 한곳으로 모아 집중해서 뚫어지게 바라봄. ②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하여 깊이 살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또는 '이뭣고?'했을 때 하고 남은, 한 뒤 끝에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을 묵묵히 그 의심을 관(觀)하는 거여 ; 의심관(疑心觀).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순숙(純熟 순수할·온전할 순/익을 숙) ; 완전히 익음.
*공안(公案, 話頭)을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54분46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순수무잡(純粹無雜 순수할 순/순수할 수/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수(純粹)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삼경(三更 석 삼/밤 시각 경)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셋째 부분. 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이다.
*'오늘 조개! 조개가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다가 작대기에 꽂혀서 죽어 가지고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다가 한량없는 복을 받다가, 자기가 복을 받는 것이 너무너무 고마워서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러 내려와서 그리고 부처님 법문을 듣고서 수다원과(須陀洹果), 소승사과(小乘四果)에 첫째 번 과(果)가 바로 이 수다원과인데, 이 성과(聖果)를 받은 설화를 했습니다마는' ;
수다원향은 일체의 견혹(見惑 : 이론적인 번뇌)을 끊으며, 사다함향 · 아나함향에 의해 일체의 욕계(欲界)의 사혹(思惑 : 情意에 의한 습관적 번뇌)을 끊고, 아라한향에서는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의 사혹을 끊는다.
따라서 삼계의 일체의 견혹 · 사혹의 번뇌가 모두 끊어지면, 이 때에 아라한과(阿羅漢果)가 달성된다.
아라한과는 이 이상 배우고 닦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무학도(無學道 아라한)라고도 하며, 그 이전의 일곱은 아직도 상위(上位)가 있어서 배우고 닦을 필요가 있는 경지이므로 칠종유학(七種有學)이라고 한다.
예류(預流 수다원)에서 불환(不還 아나함)까지는 개울의 흐름이나 외갈래길로 상정(想定)하여, 흐름을 타고 있는 자가 예류(預流 수다원), 한 번 뒤로 돌아갈 상태에 있는 자가 일래(一來 사다함), 다시 되돌아가는 일 없이 앞으로만 나아가는 상태를 불환(不還 아나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과(聖果) ; 성자(聖者)의 지위. 성인(聖人)의 도달경지[果].
성자, 성인이란 무루혜(無漏慧, 번뇌를 끊어내는[無漏] 지혜[慧])의 일부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도(聖道, 성스러운 길, 성인의 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말한다.
수도(修道), 성도(聖道)는 부파불교의 사향사과(四向四果), 대승불교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말한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팔만사천 법문이 있다는 뜻으로, ‘대장경(大藏經 -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을 달리 이르는 말.
*외골수 ; 외곬. ①단 한곳으로만 트인 길. ②단 한 가지의 방법이나 방향.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진(精進) : [범]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법문 내용]
(게송)정종소식몰자미~ / 나도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 / 누구든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법문은 원음(圓音) / 법문을 듣다가 죽은 그 공덕으로 도리천에 태어난 조개 이야기[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 사람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다행이 이렇게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에 도(道)를 열심히 닦아야.
(게송)공지광영인등현~ / 지혜롭게 자기를 단속하는 최고의 방법은 참선법 / 부처님 법 가운데에 최고의 법이 활구참선 / 참선하는 사람은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 바보가 되어야 한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올바른 자세, 둘째, 올바른 호흡, 셋째, 올바른 화두 참구(參究) /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 참선은 적적(寂寂)하면서도 성성(惺惺)해야 / 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몰아붙여 해야 한다.
(게송)인능생소소생능~ / 한마디 화두 속에 팔만대장경이 들어있고, 삼세제불과 역대조사가 설법을 하고 계신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〇이 공부는 되고 안되고, 여하약하를 따지는 것이 아니여.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원래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 나도 원래 본각(本覺)이다, 본래 깨달라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확신을 하고서 목숨 바쳐서 나의 모든 것을 다 거기다가 버림으로써 은산철벽이 무너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생사(生死)의 큰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〇깨달음은 학식, 지식에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많이 배우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식에 지내지 못하고, 알음알이에 지내지 못하고,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알음알이,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누구든지 올바르게 공부하면,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도 「뭘 밖에서 보물을 찾는다던지, 돈을 재산을 구한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구한다던지 이런 것은 아무리 하려고 해도 혹 되기도 하고 혹 안되기도 하고 그렇지만, 내게 있는 나의 자성(自性)을 찾는 이 참선은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되고야만 만다」 이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〇우리가 이 공부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되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고, 또 올바르게 하기는 하되 열심히 하지 아니하면 그것도 꼭 깨달을 수 있다고 보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첫째 올바르게 하고, 둘째에 목숨 바쳐서 열심히 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만 되는 것이다
〇이 사람 몸을 받아서 정법(正法)을 만난다고 하는 것이 대단히 참 희유(稀有)한 것입니다. 저 천상에서 이 지상에 겨자씨를 향해서 바늘 하나를 떨구어 가지고 그 바늘이 겨자씨에 딱 꽂힌 만큼 그만큼 이 불법을 만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〇우리는 이렇게 사람으로서 불법을 만났으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도(道)를 열심히 닦지 아니하고 또 도를 깨닫지를 못하고 그렁저렁하다가 이 몸뚱이를 잃게 되면 천당 아니면은 지옥이요, 그렇지 않으면 축생에 떨어지고 다행히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또 불법을 만나게 될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부처님 법문 가운데는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方便)이 있습니다마는 그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훌륭하고 좋은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의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을 한데 뭉쳐서 그놈을 완전히 아주 고아가지고 그래가지고 가장 아주 이 간결하고도 요긴한 법으로 추출한 것이 바로 참선법이다.
이 참선법 속에는 팔만사천에 묘법(妙法), 묘(妙)한 방편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경(經)도 갖추어져 있고, 염불(念佛)도 갖추어져 있고, 주력(呪力)도 갖추어져 있고,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그 속에 갖추어 있고, 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도 그 속에 갖추어져 있고,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도 다 갖추어져 있고, 법이란 법은 이 활구참선법 속에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〇언제나 이 공부하는 사람은 다 놔 버리고 백지(白紙) 상태가 되어야 해. 그래서 만공 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참선하는 사람은 완전히 썩은 나무둥치처럼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어야 한다. 또 바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무가 바르고, 곧고 좋은 나무는 목수들이 집을 짓기 위해서 다 비어 가는 것이고, 요새는 이리저리 이상하게 생긴 나무 뿌럭지는 모다 조각하는 사람들이 다 캐 가고, 또 비뚤어진 나무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기 위해서 다 비어 가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썩은 나무둥치, 몇십 년 되어 가지고 그놈이 버글버글하니 썩은 나무둥치는 목수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나무꾼도 돌아다보지도 아니하고, 무슨 조각하는 사람도 돌아다보지를 않는다. 그러한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야 정말 몸과 목숨을 이 정법에 바쳐서 활구참선을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수가 있다.
〇공부하는 법이 익숙해지면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순일하게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 되겠지만, 아직 우리 초학자(初學者)는 기본자세를 잘 익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본자세를 항상 잘 해야 합니다.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 언제라도 기본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공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〇온가부좌(결가부좌)가 잘 안되면 반가부좌만 해도 됩니다. 반가부좌만 해도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단정하니 앉되 힘은 다 빼라.
〇눈은 감어서는 안되고 평상으로 떠라. 처음 참선한 사람은 눈을 뜨면 자꾸 뭣이 눈에 보이고 마음이 산란하고, 눈을 감고 하면 마음이 잔잔하고 고요해져서 공부가 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서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계속해서 눈을 감아야만 공부가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면 눈을 감고 하면 못쓰냐 하면은 망상이 차츰 잠잠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르르르 하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혼침(昏沈 졸음. 정신이 흐리멍덩함)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해도 이 참선을 하다 보면, 망상이 가라앉고 조용해지면 까딱하면 이 혼침에 빠지기가 쉬운 것인데, 더군다나 거기다가 눈을 감고서 공부를 익혀나가면 더욱 혼침이나 무기(無記)에 연결이 되어 가지고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공부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〇한번 든 화두가 하루 종일 있고, 저녁에 자기 위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고대로 화두가 성성하고, 언제 잠이 든 중 모르게 들었는데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고, 새벽에 일어나서도 고대로 화두가 들려져 있다면 그건 참, 공부가 정말 순숙해진 경계다.
그러한 상태로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정말 내가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다! 이것을 내 놓고는 내가 할 일이 없다!' 오직 여기에 나의 인생을 다 여기다 바치고, 나의 목숨을 다 여기다 바치고, 그러한 마음으로 알뜰히 해나가면 누구라도 다 이렇게 적적하고 성성해서 한번 든 화두가 하루도 가고 이틀도 가고 사흘도 가고, 이런 경지에 이런 순수무잡(純粹無雜)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도달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〇공부는 하고 싶을 때 그때 해야 하는 거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무량겁을 지내오면서 한번 모처럼 불법(佛法) · 정법을 만나 가지고, 하고 싶은 마음 났을 때 계속해서 몰아붙이지 못하면 그래 가지고 그 고비가 식어 버리면 다시 그런 경계가 오도록 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〇'이뭣고?' 이 천하에 맛도 없고 뜻도 없는 재미도 없는 이 한마디 화두가 무량겁 쌓이고 쌓인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벌어진 그 많은 업(業)을 다 소멸을 하고 생사윤회를 끊어 버리고서 확철대오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 소견으로는 까마득하게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이뭣고?' 한마디 속에 바로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바로 이 한마디 화두 속에 살아 계셔서 설법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어떠한 재난과 어떠한 고통 속에서도 이 한마디 화두를 턱! 거각할 때에 바로 삼세제불을 거기에서 친견(親見)하고 역대조사를 거기에서 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적은 일이 아니여.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히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할 것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바탕 그 추위가 뼛속에 사무치지 않을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강추위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만 그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법입니다. 정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말 알뜰히 정진해야만 고인전지(古人田地), 고인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화두는문헌상에오른것만해도천칠백공안인데그것을다의리(義理)로따져서안들그것했다고해서어디취직을해가지고밥벌이가되는것도아니고,그것몇백개통과했다고해서생사해탈하는것도아니요, 그거 했다고 해서불조의혜명(慧命)을이어받은것도아니고,지옥에가봤자그것몇개알았다고해서염라대왕이알아줄바도아닌것입니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700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〇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윤회(輪廻) : 세상의 온갖 물질과 모든 세력(勢力)은 어느 것이나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오직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에 따라 서로 연쇄 관계(連鎖關係)를 지어 가면서 변하여 갈 뿐이다。마치 물이 수증기가 되고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물•수증기•••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업식(業識)도 육체가 분해될 때에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모든 중생들은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쉴 새 없이 번민과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육신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업(業)을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 또는 다시 인간으로 수레 바퀴 돌듯 돌아다니게 된다。그러나 성품을 깨쳐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바가 없게 되면 윤회는 끊어지는 것이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치성(熾盛성할치/성할성) ;불길이일어나는것과같이성하게일어남.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 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 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말이여.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 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장자(拄杖子 버틸 주/지팡이 장/접미사 자) ; 수행승들이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지니는 지팡이.
*의탁(依託)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김.
[주요 문구]
(게송)석화광음주~ / 인간 백년의 꿈이 하루살이 일생 /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삼재(三災)의 재난은 참으로 무서운 것 / 부처님의 중생제도는 한 생각 돌이켜서 일념(一念) 속에 육도윤회를 해탈하게 하는 뜻 /유루복(有漏福) / 화두(공안) / 의리선(義理禪)은 아무 소용없다 / 최상승법 활구참선(活句參禪).
삼요(三要)—신심,분심,의심 /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분별계(分別界)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공안을 아는 것이 아니라 확 봐 버린다 / 의심관(疑心觀)을 터득해야 한다.
〇우리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태풍과 폭풍, 폭우 그런 것은 아무도 우리 자신을 대신해서 그것을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도 어찌해 볼 수가 없고, 부모형제라 하더라도 어찌 해볼 수가 없고, 오직 나 자신의 마음의 수재와 화재와 풍재는 나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이, 활구참선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〇순전히 ‘한 생각’으로 인해서 그 한 생각을 자기가 다스리지 못해 가지고 그러한 육도(六途)를 찰나 간에 윤회(輪廻)를 하면서 백 년의 꿈을 꾸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입니다.
〇‘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하는 것은 한 생각, 한 생각 돌이키고, 한 생각 다스려서 일념(一念) 속에 육도윤회를 해탈(解脫)하게 하는 그러한 의미의 중생 제도인 것입니다.
〇우리가 참선을 하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쳐부수고, 중생심을 돌이켜서 ‘참나’로 돌아가는 것이고 깨달음에 나아가는 것이지, 무슨 지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〇활구참선(活句參禪)은 대관절 무엇이냐?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사량분별이 끊어진다.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고 알아 들어갈 것이 없어.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이렇게 잡드리를 해 가는 것입니다.
〇의심이 독로해서 꽉 막혀야 거기에서 분별이 끊어지고, 사량이 끊어지고, 생사심이 거기서 끊어지는 것이여. 끊어짐으로써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지, 사량분별을 점점 치성하게 해 가지고 참선한다고 앉아서 계속해서 분별로 따지고 앉아 있으면 언제 사량분별이 끊어질 것이냐.
〇깨달을 수 있다고 믿어야 깨닫게 되는 것이지, 해보지도 않고 ‘나는 깨달을 수가 없다’ ‘나는 중생이기 때문에 나는 지옥밖에는 못 간다’ 자꾸 스스로를 자포자기하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〇다른 모든 것은 다른 중생을 위해서, 형제·친구를 위해서 다 양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부에 대한 욕심, ‘왜 나는 여태까지 깨닫지 못했는가?’한 이 공부에 대한 분심은 천하 없이도 양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〇‘의심을 할려고 해도 자꾸 화두가 잘 잊어버린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분은 신심이 철저하지 못하고, 분심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안 나는 것이다.
참으로 신심이 돈독하고 분심이 있다면 의심을 안 할라야 안 할 수가 없어! 일부러 의심을 안 하고 딴 생각을 좀 해볼려고 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〇‘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疑心), 그 의심을 스스로 이렇게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속으로 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 ‘관(觀)한다’고 하는 것.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데, 이건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실지로 자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해보면 처음에는 그 의심관을 잘 터득을 못하지만,
일구월심 자꾸 이 호흡과 맞춰서 해 나가다 보면 그 알 수 없는 묘한 그 의심관을 스스로 터득하게 돼. 그 의심관을 터득을 해야 참선의 맛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〇큰 의심을 가진 사람은 결국 크게 깨닫는 거고, 의심이 적은 사람은 깨달아도 적게 깨닫고, 의심이 없는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오늘 설한 이 『다섯 가지 계는 모든 계의 근본』인 것입니다. 이 오계는 천 번 만 번 받아도 좋고, 이 계를 받아서 실천을 하면 다른 계는 저절로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〇철저하게 대신심과 대분심과 대의심으로 활구참선을 해가면 그 가운데 계(戒)는 지킬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하되 저절로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는 소승계와 대승계와 최상승계가 한목 지켜지는 것입니다. 한목 설해지고, 한목 받고, 한목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연비(燃臂)를 받은 뜻은 우리가 무의식중에 또는 알고 지은 수많은 죄 그것을 전부 다 일시에 참회를 하고 연비를 해서 따끔한 그 찰나에 허공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〇우리가 ‘한 생각’ 자비심을 내면 관세음보살이 되는 것이고, 한 생각 탐심을 내면 축생이 되고, 한 생각 악한 마음을 내면은 독사가 되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 못지않게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것입니다. 맘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1초 뒤의 내생사(來生事)가 결정이 되는 만큼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더울수록에 더 간절하게 화두를 들고, 모든 일이 뜻대로 안될수록에 더욱 이 정진에 박차를 가하시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한 생각’을 간절히 단속을 해서 난국(難局)을 하나 헤치므로써 새로운 지혜가 증장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