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627)—1999년 6월 첫째 일요법회(99.06.06) (61분)
(1/3) 약 22분.
(2/3) 약 22분.
(3/3) 약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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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나무~아미타불~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 한 번 본심왕(本心王)을 어기고 등지고 떠난 뒤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몇 번이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으며 몇 번이나 사생(四生)을 겪어 왔던가.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을 겪어 왔던가. 삼도(三途)를 수천만 번, 태란습화 사생의 몸을 수억만 번을 거쳐서 이렇게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말이여.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니, 오늘 번뇌(煩惱)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하고 보니,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본고향(本故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방금 우리는 임자년(壬子年)에, 임자년이라고 하면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甲寅年) 섣달 초이튿날 열반(涅槃)에 드셨는데 임자년은 갑인년보다 3년 전입니다. 임자, 계축, 갑인. 열반하시기 3년 전에 설하신 법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비록 녹음 테이프(tape)를 통해서 들었지만, 금방 이 법상에 올라오셔서 그 열렬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우리는 실지로 설하신 것처럼 우리는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오늘 일요법회 법문은 조실 스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것으로서 족하겠지마는 산승(山僧)이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일요일이라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실 수도 있고 쉬실 수도 있건마는, 날씨도 더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법회에 나오셨으니 원장으로서 인사 말씀 한마디하고 우리가 다 같이 정진(精進)을 잘하자고 하는 다짐하고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자 이 자리에 올라왔습니다.
방금 조실 스님 법문에 ‘내가 나 찾는 공부, 철저한 신심으로 그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요지, 그 공부해 나가는 구체적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에 대해서 그렇게 간곡히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원래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 부처님이나 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다 같이 저 근본에 올라가서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한 몸이요, 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무명(無明)이 동(動)함으로 해서, 이것이 ‘본심왕을 어겼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본심왕을 어기고 떠났다고 하는 것은, 한 생각 무명심이 발동함으로 해서 아직까지도 우리는 중생의 탈을 벗지 못하고 삼도(三途)와 사생(四生)을 돌고 돌면서 갖은 크고 작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할 일은 우리가 본래 법신불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그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 몸안에 있는 법신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미륵불이나 똑같은 그 법신불이 우리 안에 역력히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은 업연(業緣)에 따라서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고, 아귀도에도 태어나고 그러고 있지마는,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이 법신불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손상됨이 없이 고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철저히 믿는 것이 정법(正法)을 믿는 것이고 그것이 불법(佛法)을 믿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월초파일에, 이천육백 년 전에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탄생하신 뜻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탄생하셨다 하지만, 어떻게 제도합니까?
‘모든 중생들에게 다 같이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거, ‘법신불이 계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모든 중생, 너희들이 부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탄생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그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곧 부처니, 바로 내가 나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 하시는 거고.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이니, 우리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으로 봤다 하면은 거기서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었다 하면은 번뇌의 물결이 일어나고,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없는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번뇌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거기에 보리(菩提)가 있다는—보리(菩提)는 깨달음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보리라고 하는데—그 번뇌를 여의지 않고 깨달음이 거기에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붙어 있다고 하면 좀 어폐(語弊)가 있을는지 모르지마는, 바로 그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대승법(大乘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알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은 파도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 파도는 물이 곧 인연 따라서 움직거리면 그것이 파도인데, 파도는 물을 여의고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파도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거기에 물이 있는 거고, 물이 있으면은 물결이 파도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한에는 물속에 들어앉어서도 물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중생을 여의고 부처를 찾을 수가 없는 거고,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을 구하는 한에는 깨달음 속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한 것은 깨닫기 위해서 한다’ 하지만 깨달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선해 본 사람이면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마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몸뚱이가 바로 부처님 몸뚱이고, 우리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수없는 번뇌가 바로 그것이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에서는 아까 부처님으로부터 달마 스님까지 인도에서 28대, 달마 스님이 중국으로 오셔서 육조 혜능 스님까지 6대,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해서 33대를 삽삼이라고 합니다마는.
삽삼조사(卅三祖師), 그 삽삼조사로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금방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그것이 오늘날까지 조사들에 의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오늘날까지 최상승법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최상승법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도 내 몸 밖에서 찾지 말 것, 참선도 번뇌를 여의고 찾지 말 것,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여.
탐심이 일어날 때도 그 탐심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딱! 즉(卽)해 가지고 ‘이뭣고?’여. 미운 생각이 일어나거나 원망하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을 버리고 따로 참선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놈에 즉해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바로 이렇게 살아 있는 참선을 해 버릇하면 이건 번뇌가 일어날수록 더 좋은 것이고, 탐진치 삼독심이 치열하게 일어날수록에 바로 거기에다 발판을 두고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를 한다면 혼침(昏沈)이 일어날 수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그래서 이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入禪), 방선(放禪)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이고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꼭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권도나 검도나 유도나 기본자세를 철저히 익힘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그 기본의 살아 있는 응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을 철저히 익힌 것은 대단히 좋은 것이기는 하나, 언제나 기본에만 입각해서 딱 틀어박힌 참선이 그것은 진짜 살아 있는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업(業)에 걸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를 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부간에 싸우고 부부간에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 바로 그곳이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禪院)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무척 살기가 교통이라든지 모든 생활이 편리하게는 되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 행복해졌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점점 사는 것이 더 복잡하고 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치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일체가 간 곳마다 더 복잡해지고 다단(多端)해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때일수록 이 살아 있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이것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인생을 바로 살기가 어렵고, 이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 오늘 이 번뇌의 생각을 깨끗이 씻어 제(除)한다고 하는 것은 활구참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올바르게 활구참선하는 그 근본을 딱! 알고 보면 삼도고(三途苦)니,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이니 그것 버릴 것이 못됩니다.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지옥은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면 형무소 교도소가 꼭 지옥이냐 하면 그게 아니고,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바로 우리 몸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육도(六途)가 들어있다고 봐야 정말 육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생각 뒤집어지면 지옥도 되고, 독사도 되고, 아귀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탁! 바로잡으면 아까까지 지옥에 있었던 사람이 한 생각으로 인해서 천당에도 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죽은 뒤에, 금생에 살아서 악업(惡業)을 지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그 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마는, 살아서 우리가 들어가는 지옥도 있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우리가 인식을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가는 것은 걱정이 없습니다.
내나 살아서 지옥 가는 연습을 한 사람이 죽어서 틀림없이 지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살아서부터서 지옥에 안 가는 행위를 한다면 지옥 그렇게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지옥이 무엇인가를 알고, 이 마음속에 있는 지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안다면 살아서 지옥 갈 짓을 안 하게 되고, 살아서부터 지옥 가는 연습을 안 한다면 죽어서 지옥 갈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술을 많이 먹고 술버릇이 고약한 사람은 술을 안 먹을 때는 성현 군자고 그렇게 착한 사람이 술만 들어갔다 하면은 자기 자신을 자제를 못하고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가지고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용케도 자기집은 찾아갑니다. 가서 꺼꾸러져도 자기집 문 앞에 가서 꺼꾸러져 가지고 거기서 쓰러져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가 꺼꾸러져서 잡니다. 왜 그러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항상 자기집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술에 취해 가지고 완전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도 자기집을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가는 것도 살아서 지옥 가는 행위를 많이 한 사람은 틀림없이 이 몸뚱이를 버리고 영혼이 갈 때 지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서 지옥에 안 가는, 천당에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천당에 가는 거고, 살아서 극락(極樂) 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은 숨 떨어지자마자 쏜살같이 극락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극락에 가는 연습,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라 이것입니다.
탐심이 나도 바로 거기에서 ‘이뭣고?’ 해 버리면은, 탐심의 한 생각 일어날 때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 탁! ‘이뭣고?’를 해 버리면 영락없이 지옥으로 갈 차를 타려다가 안 타버리고 극락으로 가는 차에 올라탄다면 물어볼 것도 없이 극락에 가는 거여.(처음~21분3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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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뭣고?’는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가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라고 하는 것을 믿고 고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이 이렇게 복잡하고 혼탁하고 그래도 한탄할 거 없습니다.
어려운 고비고비 만날 때일수록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이뭣고?’를 열심히 한다면 거기서부터서 이 지상에 극락이 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소한, 대한 때는 이대로 가다가는 다 얼어죽을 것 같지만 그 시간에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고 잘 하다보면 금방 또 입춘, 우수가 돌아와서 봄이 온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그래도 탁! 정신만 차리고 ‘이뭣고?’만 열심히 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직장,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하다 보면 머지않아서 우리도 또 잘살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마음으로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디서 무엇을 하드라도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또 살아갈 길이 있습니다. 온 국민이 그렇게 노력할 때 우리나라는 잘사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 죽을 것 같지마는 또 살길이 열리고 좋은 세상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누가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역사를 만든 게 아니라 내나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좋은 역사도 만들고, 어려운 시대를 좋은 시대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각자 주인이 자기 살림을 잘 돌보고 자기 일을 잘할 때 그 집안도 잘되고 회사도 잘되고 사회도 올바르게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주가 이렇게 광활하고 넓고, 그 넓은 속에 지구라고 하는 것이 조그만한 존재에 지내지 못하지만, 그 지구에 60억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각 여러 가지 인종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욕락(五慾樂)이 인간의 행복의 조건인 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살고 있습니다마는, 재산이나 부귀영화나 명예 권리라 하는 것은 잠시 꿈꾸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편시친(眷屬片時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영화능기일(榮華能幾日)이며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한산(寒山) 습득(拾得),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화현(化現)이고,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현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산시(寒山詩)」를 여러분이 보시면은 그 안에는 마음에 참 새겨둬야 할 만한 아주 핍절하고 요긴한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 방금 읊은 게송이 들어 있습니다.
영화(榮華)가, 그 부귀영화(富貴榮華), 왕이나 대신이나 대통령이나 천자나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영화죠. 영화라고 하는 것이 능히 며칠이나 갈 것이냐 그 말이여.
일평생을 산다 해도 오육십 년 전이요 오육십 년 간에 불과하고, 천자가 되어 갖고도 얼마 안 되어서 맞아죽기도 하고, 왕이 되어 갖고도 얼마 안 있다 죽기고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렀습니다. 잠깐 꿈 한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해방 전 이조 때 그 역대 임금들을 보십시오. 고려 때나 신라 때를 보십시오. 중국 역사를 보십시오. 세계 모든 역사를 보십시오. 그 영화라 하는 것이 잠깐 꿈 한번 꾼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다 그 말이죠.
권속(眷屬)이 편시친(片時親)이다. 그 권속이, 부모가 훌륭하고 자식이 훌륭하고 형제간이 훌륭하다고 해서 다 그것을 배경 삼아서 목에다 힘주고 모다 그렇지마는 잠시 잠깐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그런 인연으로 태어난 것 뿐이지 그것도 잠깐 지나가 버리면 별것이 아니다 이것입니다.
자기 형이 청와대에 가 있고, 뭐 자기 처남에 외삼촌에 동생의 친구가 청와대에 있다고 해 가지고 그런 것을 해 가지고 사기(詐欺)를 치고 모다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마는 그 다, 그 자기 친형이 있다 해도 별것이 아닌데 처남에 외삼촌에 친구에 뭣이면, 뭡니까 그게.
그게 다 권속이 편시친이라는 거, 잠깐 동안에 친한 것에 불과하시니, 그러한 것을 가지고 큰소리 칠 것도 없는 거고.
종유천근금(縱有千斤金)이라도, 비록 천근이나 되는 금덩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큰 석숭(石崇)이와 같은 그런 큰 부자라 하더라도, 한무옥당(漢武玉堂)과 같은 그러한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 별것이 아니고.
불여임하빈(不如林下貧)이다. 그런 큰 부귀영화를 가졌다 하더라도 수풀 속에 임하(林下), 수풀 아래에 가난한 것만 같지 못하다.
‘수풀 아래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산중에 숲속에 들어가서 풀뿌리를 캐 먹고, 약 뿌리를 캐 먹고, 더덕을 캐 먹고 또 없으면 또 걸식을 하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그렇게 가난하고 가난하게 사는 그 속에 그 가난한 맛보다 못하다 그거죠.
나물을 뜯어서 삶아 먹고, 풀뿌리를 캐 먹고, 솔잎을 썰어서 먹고, 흘러가는 물을 마시고 그리고 졸리면은 팔을 베고 자도 낙(樂)이 그 속에 있다 이거거든. 도 닦는 낙(樂)이라 하는 것은 팔풍경계(八風境界)가 오지를 않거든.
세속에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것이 그렇게 굉장한 것 같지마는 하루도 다리를 뻗고 자들 못하는 것입니다. 그 권리를 지키고, 명예를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 나가야 하고, 누가 그것을 침범할까 봐서 미연에 그것을 차단해야 하고, 누가 자기 것을 빼앗아 가려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저지를 시켜야 하고 악랄한 방법을 써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고 그래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간들 그것이 지옥에 갈 일을 남겨 놓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다 내동댕이쳐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이 말씀을 하면 여러분이 다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사업도 버리고, 너도 나도 숲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뜻은 전혀 아닙니다. 세속에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지은 인연(因緣)으로 가족도 맺어지고, 어떤 직장도 갖게 되고, 나라에 나가서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지은 인연입니다. 빚이요, 인연이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처럼 왕궁에 부귀도 버리고 출가하신다면 그거야 뭐 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일이나, 그렇게 철저히 발심(發心)도 못하면서 도피처로 알고 느닷없이 다 버려 버리고 어디로 산중에 들어가, 그건 별로 권장할 말한 일은 못됩니다. 발심을 하려면 진실하게 발심을 해야 하고, 버리려면은 깨끗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지, 섣불리 임시 잠시 괴로움을 책임 회피로 버릴 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임하(林下)에, 숲 아래 가난한’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에 살면서도 그런 것에 너무 지나친 집착을 갖지 말 것이며, 그 속에서도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숲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꽃에다가 많이 비유를 합니다마는, 연꽃은 저 깊은 산중에 맑은 석간수(石間水) 속에는 연꽃이 되질 않습니다. 저 밑으로 내려가서 흙탕물 속에다 뿌리를 박고 거기서 연꽃이 필 때 연꽃도 잘 자라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세속에, 부모형제 오욕락이 있는 그 세속에서도 거기서 바로 ‘이뭣고?’를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어려운, 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유마거사(維摩居士)와 같은 그런 부처님과 맞먹는 대도사(大道士)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방거사(龐居士)와 같은 그러한 거사로서 대도인(大道人)이 있는 것이고, 우리나라에도 부설거사(浮雪居士)와 같은 그런 대도인도 있는 것입니다.
이건 특별히 최고로 훌륭한 분을 세 사람을 말한 것뿐이지, 지금도 역시 속가에 계신 거사님으로서 속가에 계신 보살님으로서 스님네 못지않게 열심히 도 닦는 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도 다 그런 훌륭한, 스님네보다도 더 훌륭한 수행자가 있을 줄 믿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이 꼭 산중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머리를 깎은 스님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산이나 들이나 섬이나 육지나 어디서도 도는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옷을 먹물 옷을 입었건 어떠한 빛깔의 옷을 입었어도 그것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대승(大乘)이라고 하고, 최상승(最上乘)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육도(六途)가 우리의 한 생각 속에 있는 것처럼, 도(道)도 역시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것이어서 오죽하면 보현보살이 돼지가 되어 가지고 부잣집 돼지우리 속에 가서 꿀꿀 하고 있었습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항상 부처님의 왼팔이요 부처님의 오른팔이 되어 가지고 조불양화(助佛揚化)를 하시지만, 두 분은 형제간이요 바로 도반인 것입니다. 문수보살 있는 곳에 보현보살이 계시고, 보현보살 있는 곳에 항상 문수보살이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문수보살이, 그 보현보살이 장자(長者) 집에 돼지가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서 그 장자 집에 가니까 꿀꿀 돼지가 되어 가지고 누워 있거든.
‘구재진로중(久在塵勞中)이면, 너무 오랫동안 진로(塵勞) 가운데 있으면은 혹망본래사(惑忘本來事)니, 혹 본래사(本來事)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속히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이 산중으로 돌아오라[收拾行裝裡 速還靑山來].
게송 금방 생각이 안 나는데, 그런 뜻의 게송을 글씨에다 써 가지고 돼지우리에다 던져 줬습니다.
보현보살이 눈을 꺼먹꺼먹, 뜯어보니까 ‘너무 오랫동안 진로 가운데 있으면 혹 본래사를 잊어버릴까 두려우니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속환청산래(速還靑山來)하라. 속히 청산으로돌아오라’ 게송이 써졌거든. 요리 쳐다보니까 문수보살이거든.
비록 돼지 탈을 쓰고 꿀꿀 하고 있어도 다 화현(化現)으로 나타난 것이라. 알아보고는 그 게송 써진 그 쪽지를 덥석덥석 씹어서 꿀떡 삼켰다 그 말이여. 그랬는데 그 돼지가 죽었어. 죽으니까,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쪽지를 던져 주니까 그 쪽지에 독약이 묻었던지 돼지가 죽었다‘ 해 가지고 그 사람을 관가에다 고발해 가지고 잡혀 갔어.
“나, 독약 한 일 없고 게송만 하나 써줬다”
“무슨 게송이냐?”
“죽었으니까 배를 갈라 보면 알 것 아니냐” 배를 갈라 보니까 아직도 그 종이에 글씨가 써졌는데 그 게송이 쓰여 있다 그 말이여. 뭐 조사해 봤자 아무 독도 안 묻어 있고. 그러니 그냥 ‘이상한 일도 있다’ 해 가지고 무혐의로 풀려났는데.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비단 돼지로만 나오겠습니까? 때로는 소 탈을 뒤집어 쓸 수도 있고.
뭐 부처님 말씀에는 ‘저 소가 누군 줄 아느냐? 왕년에 시주것만 먹고 도를 열심히 안 닦은 것이 시주(施主) 은혜 갚으려고 소가 된 것이다. 저 소들은 모다 전생에 다 중이다’ 이런 말씀을 내가 봤습니다마는, 그 말은 ‘시주것을 먹고 열심히 도 닦으라’고 하는 그런 간곡한 말씀을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표현하셨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스님네는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 하고, 오직 시주것만 먹고 오직 도 하나만을 위해서 목숨 바쳐서 일심(一心)으로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도만 닦으라고 해서 ‘장사도 하지 말아라, 농사도 짓지 말아라. 일체 오직 걸식(乞食)을 해 가지고 한 끼씩만 먹고 도를 닦으라’고 까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형편은 걸식할 형편이 잘 못되고, 한 끼만 먹고는 도저히 도를 닦을 수 없을 만큼 지금 우리 근기(根機)가 약해서 세 때도 먹고 또 이 신도님네들이 갖다 주는 걸로 밥을 해 먹고 요렇게 참선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딴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에는 ‘과연 그만 하면 되겠다’고 하실는지 어쩔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참 부모형제 다 고향을 다 버리고, 일체 세속의 오욕락을 다 버리고 일생을 수절(守節)을 하면서 먹물 옷을 입고, 못난 척 바보같이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속의 명예나 권리나 부귀영화를 일찍이 부러워해 본 적도 없고, 다 그런 것이 다 허망한 줄 알았기 때문에 출가해서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바치고 시주(施主)를 하시고 그래서 이 절도 짓고 선방도 짓고 이렇게 했습니다.(21분40초~42분58초)
(3/3)----------------
우리 승려로서 여러분께 부탁할 것은, 물론 여러분이 갖다 줘서 감사합니다마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 안합니다. 왜 그러냐? ‘감사합니다’ 하면은 여러분의 공덕(功德)이 그만큼 소실이 되어 버려. ‘감사하다’는 말로써 그것이 여러분 공덕이 이렇게 때워져 버리기 때문에 여간해서 ‘감사하다’고 안 합니다. ‘잘 수용하겠습니다’ 그뿐인 것입니다.
‘시주를 했는데 왜 스님네가 우리한테 굽신굽신을 안 혀? 중들이, 왜 용화사를 가면은 스님네들이 왜 데데해. 불친절해’ 그런 말을 한 분이 있다고 그럽니다. 용화사 스님네는 별로 스님네가 (신도분이) 오시면 그저 수수하니,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을 업신여기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불친절이 한다고 해서 아닙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화두 드는 마음으로 여러분을 맞이할 뿐이지 그렇게 굽신굽신 안 한 것을 데데하고 건방지고 아만(我慢)통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을 하시면 오해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시주를 하고 보시를 하더라도 무주상(無住相)으로 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런 것을 했다. 했으니까 나를 알아줘야 하고, 나한테 굽신거려야 하고, 우리를 최고로 대우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 안 하시겠습니다마는, 그런 생각은 안 하신 것이 좋을 것이고.
오셔서 열심히 와서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또 여러분을 공부 잘하시라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을 뼈아프게 듣고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속에서 유마거사와 같은 그리고 방거사와 같은 그리고 소동파, 보살님 가운데에도 훌륭한 도인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보현보살이 돼지가 되어가지고 장자 집에 가서 돼지우리에 있을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다 도반이고, 서로가 다 부처님의 제자고 부처님의 아들딸인 것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라 할 것도 없습니다. 신도면 신도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거고, 스님이면 스님의 도리를 다해서 열심히 도 닦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이 세계를 부처님 세계로 만들고, 우리가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는 최후의 목적까지 우리는 그렇게 가야 할 사명을 띠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인연이요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하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하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만의도취일의단(萬疑都就一疑團)이여. 만 가지 의심을 모두 다 한 의심 덩어리로 다 그리 몰아붙이라 이거여.
우리는 살다 보면은 여러 가지 의심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경전에 대한 의심, 공안에 대한 의심, 세속의 모든 일에 대한 의심, 정치 경제 모든 의심, 학교의 과학 학문에 대한 의심, 모든 의심이 있을 수가 있으나, 그 모든 의심을 전부 다 ‘이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그 하나의 의단(疑團)에다 다 몰아붙이라 이거거든.
의거의래의자간(疑去疑來疑自看)이여. 의심해 가고 의심해 오며, ‘이뭣고?’ 한 의심을 스스로 또 다시 되돌이켜 관하는 거여. ‘이뭣고?~~~’
‘이뭣고?’가 자기의 본참화두인데, ‘이뭣고?~~~’
‘이뭣고?’ 할 때 ‘이-’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것이 의자간(疑自看)이여.
의심나는 것을 물어서, 다른 사람한테 물어 가지고 그걸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무슨 의심이 나던지 바로 그 의심을 즉(卽)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화두 ‘이뭣고?’로 돌아오라 이거거든.
수시나룡타봉수(須是拏龍打鳳手), 모름지기 용을 때려잡고 봉(鳳)을 잡는 그러한 용기와 수단을 가진 사람이라야,
일권권도철성관(一拳拳倒鐵城關)이다. 한주먹으로 철성관을 쳐서 꺼꾸러뜨릴 수가 있을 것이다. ‘쇠[鐵]로 만든 성(城)에 관문(關門)’이라 한 것은 조사관(祖師關)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는 것은 이 조사관을 깨뜨려야 하거든. 알 수 없는 이 의심관(疑心觀), 조사관, 이놈을 팍!...
‘이뭣고?’를 자꾸 하다 보면 처음에는 잊어버리고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고 하지만 잊어버리면 또 ‘이뭣고?’
딴생각이 들어오면 딴생각 버리고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 자꾸자꾸 하다 보면 나중에는 습관이 되어 가지고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되거든.
그래 가지고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까지, 저녁에 누워서 ‘이뭣고?~~~’ 하면서 들고 있는 화두가 아침에 일어나면 고대로 들어져 갖고 있거든. 이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거든.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되면 머지않아서 툭!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이여.
열심히 열심히 하고, 자기 근기(根機)도 따지지 말고 아무것도 따질 것이 없어. 철저한 신념을 가지고 해 나가면 반드시 되는 것이 바로 이거여. 세속의 사업은 열심히 한다고 해서 꼭 되는 것이 아니여. 되기도 하고 실패율이 더 많고. 이것은 좀 빠르고 늦은 차이는 있어도 꼭 되고만 마는 것이 바로 이것이여. 왜?
자기가 원래 부처였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하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우리가 모든 인연에 따라서, 아까 조실 스님 말씀에 ‘빠르면은 7일이요, 늦으면은 3년이요’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그 기한은 전혀 우리가 따질 필요가 없어. 빨리 되어도, 빨리 공안을 타파해도 그것에 끝난 것이 아니고, 더디 되어도 더디 되었다고 해서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어.
여법하게 그리고 열심히만 하면 빨리 공안을 타파할 수도 그리고 또 할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부처님과 같이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圓滿具足)할려면은 깨달은 뒤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닦아 가야 하는, 닦을 것 없이 닦아 가야 하는 길이 있는 것이여.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허망하고 더러운 이 몸뚱이지만 이 속에 법신불(法身佛)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철저히 믿는다면 이 몸뚱이를 지혜롭게 관리해야 하는 거고. 이 몸뚱이를 소중히 여기고. 애착심을 가지고 집착(執着)하라는 게 아니고, 지혜롭게 잘 관리를 해야 공부도 할 수가 있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비록 검소하게 먹고 할지언정, 꼭 고기만 많이 먹고 그 영양가 있는 것만 많이 먹는다고 해서 꼭 건강이 좋은 것만도 아니라고 나는 믿습니다.
나물에 검소하게 이렇게 먹어도, 보리밥에 잡곡밥에 이렇게 먹어도 잘 씹어서 먹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저작(咀嚼)을 하면서도 항상 ‘이뭣고?’를 하면서 먹으면 고기에다가 진수성찬에 잘 안 먹더라도 건강은 유지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신 황룡탕(黃龍湯)을 꼭 잡순 것을 내가 권고를 하고.
황룡탕은 내 몸에서 나온 것을 내가 다시 섭취하는데, 그것이 전혀 더러운 노폐물이 아니고 우리 몸안에 있는 피와 거의 같을 정도로 여러 가지 영양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의사들이 다 조사를 해 보면 전혀 균이 없는 무독지제(無毒之劑)라고 하는 것이 다 밝혀지고 있습니다. 동양의학대사전에도 보면 ‘무독(無毒)’이라고 딱 나와 있고, 여러 가지 병에 좋다고 하는 것도 옛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고.
오죽하면 부처님께서도 ‘걸식(乞食)을 할 것이며, 분소의(糞掃衣)를 입을 것이며, 수하(樹下) 나무 밑에서 잘 것이며, 그리고 약은 예약(穢藥)을 써라’ 예약이라 하는 것은 대변이나 소변으로 만들어진 약, 병이 나면 소변을 먹으라고 하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혈압이 높으신 분도 좋고, 각종 암도 좋고, 요새 모다 발표한 것을 보면 에이즈와 같은 무서운 병도 소변을 장기적으로 복용을 하면 낫을 수 있다고 하는 글을 읽었습니다마는.
‘이뭣고?’를 하면서 황룡탕을 먹으면서 잡곡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산다면,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한다면 이 세상이 비록 오탁악세(五濁惡世)요, 말세(末世)라고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여법하게 정법을 믿고 열심히 도를 닦으면 말세를 다시 정법시대(正法時代)로 다시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정법이다, 말세다’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이고, 지옥 천당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은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도 닦고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모든 생활을 해 나간다면은 우리는 이 21세기를 진짜 정법시대로 돌릴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우리 앞마당에는 대장경 전산화 불사(佛事)를 하기 위해서 동참불자(同參佛子)를 받는 대장경연구소 분들이 책상을 놓고 계십니다. 신청하신 분들은 지로를 통해서 성의껏 다 하고 계신다는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용화사에서 그 불사에 좋은 촉매가 되고, 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모다 감사한 인사를 듣고 있습니다마는, 드신 분은 열심히 다달이 보내시고 안 들으신 분은 인연 따라서, 분 따라서 모다 동참을 하신다면, 그리고 요새 그 나오는 책을 보니까 전국 모두 여러 사찰들에서도 모다 다 동참하자고 하는 그런 법회를 모다 여기서 저기서 가지신 걸로 봤습니다.
대단히 좋은 현상이고, 이러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어려울 때 이러한 불사를 우리 불교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가지고 이 대장경 불사를 한다면 틀림없이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우리나라도 잘되고 세계평화에 크게 이바지할 좋은 공덕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오늘이 입하 · 소만 · 망종일이고, 얼마 안 있으면 또 하지에다 소서 · 대서 하면은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또 돌아옵니다. 날씨가 더워질 때 모다 몸조심 하시고 건강한 몸과 건전한 마음으로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기를 다시 부탁 말씀을 드리면서 말을 맺고자 합니다.(42분59초~60분8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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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일종위배본심왕~’ ; 『석문의범(釋門儀範)』 「관욕(灌浴)」 입실게(入室偈) 참고.
[참고] 송담스님(No.457)—1991년 11월 첫째 일요법회에서.(5분53초)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여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고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니라
일종위배본심왕(一從違背本心王)하고, 한번 본심왕(本心王)을 배반(背反)한 이래로, 기입삼도역사생(幾入三途歷四生)이냐. 몇 번이나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途)에 들어갔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을 몇 번이나 겪어왔더냐 그말이여. 몇수십만 번을 짐승이 되었다가 날짐승이 되었다가, 긴짐승이 되었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이러면서 돌고 돌아서 금일에까지 왔더냐.
원래는 우리도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과 똑같은 조금도 차등(差等)이 없는 본심왕이었다 그말이여. 그 본심의 왕을 배반한 탓으로 해서 우리는 삼악도와 사생을 돌고 돌아서 몇억만 겁을 겪어 가지고 오늘에까지 이르렀더라.
금일척제번뇌염(今日滌除煩惱染)하고, 오늘 번뇌에 물든 그 번뇌염을 깨끗이 다 씻어 버리고,
수연의구자환향(隨緣依舊自還鄕)이다. 인연 따라서 옛을 의지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서 객지(客地)로 객지로 떠돌아다니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떠돌이 신세로써 참 거러지 신세가 되어 가지고 그렇게 떠돌다가 비로소 자기 고향 갈 길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느냐.
남북 이산가족(離散家族)들이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가족 상봉, 그것참 그러한 경험이 있으신 분이 많이 계시겠지만 정든 사람과 이별하고, 고향과 가족 친지를 이별하고, 한 나라에 손바닥만한 땅에 있으면서도 만나지 못한 그런 것 생각해 보면 참 기가 막히지마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원래 본심왕이였었는데 그 왕이 그 본심왕을 갖다가 등져 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어가지고 삼악도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돌고 돌면서 가진 고초를 당하고 금생에까지 무량겁을 겪어 왔을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또 그런 것이 거듭될 그런 신세가, 다행히 불법(佛法)을 만나고 정법(正法)을 만나서 우리가 본심왕의 본위치로 돌아갈수 있게 되었다면 이건 참 50억 인구 가운데 가장 행운아라고 할까, 가장 행복한 삶을 받아났다고 할 것입니다.
이 정법,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 하는 것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고, 한 걸음 한 걸음을 헛되이 지내지 아니하고 본참공안(本參公案),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잘 거각하고 단속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를 함으로써 우리의 본고향(本故鄕)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 이거거든.
고향을 모를 때에는 갈 곳도 없고, 가 봤자 별 목적이 없어. 그러니 ‘우선 잘 먹고 보자, 우선 잘 입고 보자, 나중에 삼수갑산(三水甲山)을 가더라도 우선 부자로 살아 보자, 좋은 차도 가져 보자, 좋은 집도 가져 보자’하지만, 고향이 있는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았다면 한시바삐 고향길을 향해서 계속 걸어야 하거든.
입는 것도 얼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먹는 것도 굶어죽지 아니하면 족하고, 어쨌든지 한 걸음이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서 게으르지 않게 걸어가는 것 밖에는 어디에다가 시간과 힘을 허비할 것이냐 그거거든.(21분20초~27분13초)
*본심왕(本心王) ; 본래 진여불성(眞如佛性).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 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생(四生) ; 중생이 윤회하는 세계인 육도(六途)에서의 네 가지 생(生), 네 가지 태어나는 방식.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을 이른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 · 성냄(瞋) · 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 · 진심(瞋心) · 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옛을 의지해서’ ; 의구(依舊).
*의구(依舊) ; 변함없이. 옛날 그대로.
*본고향(本故鄕) ; 본향(本鄕). 고향. 태어나고 자란 본래의 고향. 이 뜻에 기초하여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심성[本性], 부처의 성품 또는 청정한 불국토라는 뜻으로 쓰인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녹음 테이프(錄音tape) ; 소리를 기록하는 테이프. 카세트(cassette)라고 하는 녹음기에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하는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 : 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얇고 긴 띠 위에 자성을 띤 가루를 입힌 자기 테이프)를 말한다.
소리나 영상[음성법문, 영상법문]을 재생하는 방식이 녹음 테이프에서 CD(compact disk)를 거쳐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칠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문의 : 032-872-6061~4)
*사자후(獅子吼 사자 사/아들 자/울부짖을 후) ; ①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②사자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찬 연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정진(精進) : [산스크리트어(범어)] Vīrya 음을 따라 비리야(毘梨耶, 毘離耶) • 미리야(尾利也)라고도 쓴다. 보살이 수행하는 육 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
순일하고 물들지 않는[純一無染] 마음으로 부지런히 닦아 줄기차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닦는 생각[能]과 닦는 것[所]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 정진이다.
[참고]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역漢譯)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論】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 心不懈退 立志堅强 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 速離衆苦
정진문(進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善)한 일에 대하여 마음으로 게으르거나 물러남이 없어서, 뜻한 바가 굳세고 강하여 겁약(怯弱)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아주 오래된 이래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로 마땅히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를 행하여 속히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한다.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邪魔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 禮拜諸佛 誠心懺悔 勸請隨喜 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 善根增長故
또한 어떤 사람이 비록 신심(信心)을 수행할지라도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는 까닭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의 뇌란(惱亂)을 받기도 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 때문에 이리저리 끄달리고 얽매여 끌려다니며 혹은 병고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는 까닭에 응당 용맹히 정근하여 주야로 여섯 번[六時]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誠心)으로 참회하며, 법사에게 법문을 청하고[勸請] 다른 사람의 선행에 따라 기뻐하며[隨喜], 깨달음의 지혜[菩提]를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고 선근(善根)이 더욱 증장하는 까닭이다.
*삼요(三要) : 참선하는데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첫째는 큰 신심(大信心)이요,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요,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①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②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③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스님 역 | 용화선원刊) p54~55. (가로판 p56~57)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니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癈器하리라
참선하는 데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하나니, 첫째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큰 분심이요, 셋째는 큰 의심이니,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소용없는 물건이 되리라.
註解(주해) 佛云, 成佛者는 信爲根本이라 하시고 永嘉云, 修道者는 先須立志라 하시며 蒙山云, 參禪者는 不疑言句가 是爲大病이라 하고 又云, 大疑之下에 必有大悟라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불하는 데에는 믿음이 근본이 된다」 하시고, 영가스님은 이르기를 「도를 닦는 이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하시며, 몽산스님은 이르기를 「참선하는 이가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 된다」 하시고, 또 이르기를 「크게 의심하는 데서 크게 깨친다」고 하시니라.
*석가모니(釋迦牟尼) : (산스크리트어)Śākya-muni (팔리어)sakya-muni의 음역. 샤카[釋迦]족의 성자(聖者, 牟尼) · 현인(賢人)이라는 뜻. 불교의 교조(敎祖). 과거칠불(過去七佛)의 일곱째 부처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 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모니세존(釋迦牟尼世尊) · 석존(釋尊)이라고도 하고, 줄여서 석가(釋迦)라 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 · 능유(能儒)라 한다.
아버지는 지금의 네팔 지방의 카필라성의 정반왕과 어머니는 마야 왕비.
B.C 623년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탄생하셔서,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7일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모 마하프라자파티가 그를 양육하였다. 17세에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고, 29세(혹 19세)에 출가하여 여러 선인(仙人)을 만나 6년 고행한 끝에 고행•금욕(禁欲)만으로는 아무 이익이 없음을 알고, 네란자라 강변에 있는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단정히 앉아 사유(思惟)하여 마침내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붓다(buddha)가 되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것을 시작으로 교단을 이루어, 45년 간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설법하다가 80세에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B.C 544년 2월 15일. 입적 후 그의 가르침이 경전으로 모아져 세계로 전파되었다.
*미륵불(彌勒佛) :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성불하여 중생을 구제할 것이 예정된 부처님. 현재 보처보살(補處菩薩)의 몸으로 도솔천 내원궁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미륵(彌勒) : 대승보살. [산스크리트어(범어)] Maitreya. 매달려야(梅呾麗耶), 매달례야(昧怛隷野) 등이라고 음사하고, 한역하여 자씨(慈氏). 미륵은 성씨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 무승(無勝) · 막승(莫勝)이라 번역.
인도 바라나국의 바라문 집에 태어나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아, 도솔천에 올라가 있으면서 지금 그 하늘에서 천인(天人)들을 교화하고, 석가모니부처님 입멸후 56억 7천만 년을 지나 다시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생(下生)하여, 화림원(華林園) 안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成佛)하고 3회의 설법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의 교화에서 빠진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한다.
현재는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보살(彌勒菩薩)이라고도 하고, 미래에 성불할 것이 예정된 보살이기 때문에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한다. 도솔천에서의 생을 마치면 인간으로 태어나 성불하여 석가모니불의 자리[處]를 보충(補充)한다는 뜻으로 보처(補處)의 미륵이라 하며, 현겁(賢劫) 천 불의 제5불(佛).
*보처보살(補處菩薩) : 보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줄임말이다. 일생보처보살(一生補處菩薩).
일생(一生)은 '한 번 난다'는 뜻이니, 한 번만 더 이 세상에 태어나면 성불하여 부처님의 자리[處]를 메우는[補] 것이 예정된 보살을 일컫는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受記)를 받아 미래에 부처님이 될 미륵보살을 이른다. 부처님 생존시에 아일다(阿逸多, Ajita)가 도를 열심히 닦아 도솔천에 왕생하여 이 보살의 위치에 올랐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태어나기 전에 호명(護明)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이 보살의 위치에 올라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 보살이 불교의 33천 중 도솔천에 머무는 이유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즉 도솔천보다 낮은 사천왕천이나 도리천 · 야마천에는 게으름과 욕정이 남아 있고, 도솔천보다 상위의 천들은 고요한 선정에 들어 있어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노사나불(盧舍那佛) ;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으로 무궁무진한 공덕을 쌓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장엄된 몸을 가지고 보토(報土 : 부처님께서 과거 인위因位에서 행한 서원행에 대한 보답으로 이루어진 정토)에 계시면서 설법하는 부처님.
삼신불(三身佛)은 (1)영원불변의 진리[法]를 몸[身]으로 삼고 있는 법신불(法身佛), (2)수행에 의해 공덕을 쌓은 과보(果報)로써 온갖 덕이 원만구족한 불신(佛身)인 보신불(報身佛), (3)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身]으로 변하는[化] 화신불(化身佛, 應身)을 이르는 말인데, 노사나불은 이 중 보신불이다.
이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 · 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업연(業緣) ; 업보(業報)의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업보(業報) ; 자신이 행한 선악(善惡)의 행위[業]에 따라 받게 되는 과보(果報).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산스크리트어(범어)] karma. [팔리어]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 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가비라(迦毘羅) 왕국 ;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의 아버지 슈도다나왕(Śuddhodāna ; 淨飯王)이 다스리던, 인도와 지금 네팔 남쪽 국경 근처에 있던 석가족의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 迦毘羅) 나라를 말함.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 :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 : 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 · 등(燈) · 꽃 · 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보리(菩提) : [산스크리트어(범어)] bodhi 도(道) • 지(智) • 각(覺)이라 번역. 불교 최고의 이상인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 곧 불과(佛果)를 말하며, 또는 불타(佛陀) 정각(正覺)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닦는 도(道), 곧 불과에 이르는 길을 말한다. 범어의 음대로 쓰면 ‘보디’라고 하겠지만, 우리 말의 관습상(ㄷ —> ㄹ) ‘보리’로 읽는다. 따라서 ‘보제’나 ‘보데’로는 읽지 않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 ; 각(覺). 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어폐(語弊 말씀 어/해어질·쓰러질 폐) ; ①적절하지 아니하게 사용하여 생기는 말의 폐단이나 결점. ②남에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말.
*대승(大乘) ; ①기원 전후에 일어난 불교 개혁파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이에 반해, 그들은 전통의 보수파를 낮추어 소승(小乘)이라 함. ②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자, 보살, 또는 그들을 위한 붓다의 가르침. ③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존칭. 위대한 가르침.
승(乘)은 '타는 것'으로,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붓다의 가르침이나 수행법을 뜻함.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〇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 또는 삽삼조사(卅三祖師)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 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6대 되는 혜능대사(慧能大師)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와같이 조사는 서역(西域)과 중국을 합하여 33대인데 그 차례대로 이름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마하가섭(摩訶迦葉) 2. 아난존자(阿難尊者) 3. 상나화수(商那和修) 4. 우바국다(優婆毱多) 5. 제다가(提多迦) 6. 미자가(彌遮迦) 7. 바수밀다(婆須密多) 8. 불타난제(佛陀難提) 9. 복타밀다(伏陀密多) 10. 협존자(脇尊者) 11. 부나야사(富那夜奢) 12. 마명(馬鳴) 13. 가비마라(迦毘摩羅) 14. 용수(龍樹) 15. 가나제바(迦那提婆) 16. 나후라다(羅睺羅多) 17. 승가난제(僧伽難提) 18. 가야사다(迦耶舍多) 19. 구마라다(鳩摩羅多) 20. 사야다(闍夜多) 21. 세친(世親) 22. 마나라(摩拏羅) 23. 학륵나(鶴勒那) 24. 사자(師子) 25. 바사사다(婆舍斯多) 26. 불여밀다(不如蜜多) 27. 반야다라(般若多羅) 28. 보리달마(菩提達摩). 중국에 와서 1. 보리달마(菩提達摩) 2. 혜가(慧可) 3. 승찬(僧璨) 4. 도신(道信) 5. 홍인(弘忍) 6. 혜능(慧能)이다.
*‘육조 스님 때 ‘화두(話頭)‘라고 하는, ‘이뭣고?’라고 하는 것이 나왔다’ ;
[참고] 송담스님(No.264)—1985년 4월 첫째 일요법회에서.(5분50초)
흔히 화두하면 ‘이뭣고?’ 시삼마(是甚麼) 화두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화두 가운데에 최초의 화두고, 가장 근원적인 화두이기 때문에 ‘이뭣고?’를 많이 말씀을 하게 됩니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말은 임제(臨濟) 스님 이후로 임제종에서 이 화두라고 하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마는, 임제 스님 이전에 육조(六祖) 스님도 화두라고 하는 말은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도 없고 자字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기둥하고 아래로는 땅을 떠받치며, 밝기로는 해보다 더 밝고 검기로는 옻칠보다도 더 검은데, 항상 동용(動用)하는 가운데 있으되, 동용하는 가운데서 거두어 얻지 못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제자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하택신회(荷澤神會)라고 하는 제자가 터억 앞에 나와서, ‘그것은 제불지본원(諸佛之本源)이며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며, 신회지불성(神會之佛性)이로소이다. 이 하택신회, 저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뭐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도 없다고 내가 그랬거늘, 어찌 불성이니 제불의 본원이니 하고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공부를 해서 일가(一家)를 이룬다 하드라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 되겠다. 불교학자밖에는 못 되겠다’
이 불교(佛教)라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참나’를 깨닫는 것이 목적인데, ‘앞으로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일가를 이룬다 해도 지해종자(知解種子)밖에는 못 되겠다’ 이렇게 점검을 하셨습니다.
그리자 남악회양(南嶽懷讓)이 왔습니다. 와서 터억 절을 하니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육조 스님이 물으셨습니다. 그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한 물음에 대해서 꽉 맥혀서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몸을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택신회는 모든 부처님의 근본이니, 무슨 하택신회의 불성이니 이렇게 즉각 그 대답을 했는데, 남악회양은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하고 묻는데 대해서, 앞이 꽉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라. 그 뒤로 8년 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8년 동안을 ‘대관절 이게 무슨 물건인고?’ 앉아서도 그 생각, 서서도 그 생각,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 일을 하면서도 그 생각, 똥을 누면서도 그 생각, ‘대관절 이 무슨 물건인고?’ 이렇게 하기를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그래 가지고 육조 스님 앞에 가서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육조 스님이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하니,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렴(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이 없지를 않지마는 오렴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이렇게 해서 인가(印可)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참선법, 활구참선법은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분석하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더듬어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남악회양 선사처럼 대뜸 처음부터서 꽉 맥혀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기둥에 이마빡을 부딪친 거와 같은, 갑자기 걸어가다가 기둥이나 벼람박에 이마빡을 부딪쳤을 때 그때 상황이 어떻습니까? 앞뒷이 딱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못 꽉 맥혀 가지고, 알 수 없이 ‘이뭣고?’ 그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꽉 맥혀서 앞뒷이 끊어져야 그 공부를 옳게 해 나가는 것이지,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식, 이론, 무슨 철학, 불교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 그것을 갖다가 아는 대로 끌어다가 이렇게 분석을 하고, 종합을 하고, 비교를 하고, 적용을 하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61분31초~67분22초)
*화두(話頭) :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뜻으로, 줄여서 '이뭣고?'라 하는데, 모든 화두(공안)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입니다. 화두(話頭)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 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 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저 하늘에 별은 몇 개나 되며 큰 것은 얼마만큼 크냐?' 그런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언제 죽겄다. 저 사람은 35살이 되아야 국장이 되겄다' 그러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여기 앉아서 백 리, 이백 리, 저 광주나 부산 일도 생각하면 환하고 그래서 공간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왔다갔다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면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이 그놈은 왔다갔다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물어봐도 ‘그것은 나의 마음이지 무엇이겠느냐’ 다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마음’이라 하는 것도 고인(古人)이 편의상 지어 놓은 이름에 지나지 못하지, ‘마음’ ‘성품’ ‘주인공’ 뭐 얼마든지 우리나라 이름도 많고, 중국 한문 문자도 많고, 서양 사람은 서양 사람대로 다 그놈에 대한 이름을 여러 가지 붙여 놓았을 것입니다마는, 붙여 놓은 이름은 우리가 들은 풍월로 알고 있는 것뿐이고, 그런 이름은 몇천 개라도 앞으로 새로 만들어 붙여 놓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붙인 그 자체,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놈은 우리가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나기 이전부터 그놈은 있었고, 몇천만 번을 그놈이 이 옷을 입었다 벗어버리고 저 옷 입었다 벗어버리고—사람 옷도 몇백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짐승의 껍데기도 몇천만 번 입었다 벗었다 했을 것이고, 그놈이 지옥에도 천당에도 가봤을 것이고, 귀신으로 떠돌아도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돌고 돌다가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 대한민국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오시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에 눈떠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자유자재하고, 그 자유자재한 그놈을 마음껏 수용을 하고 활용을 하신 분들인 것입니다.
〇화두(공안)이라 하는 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을 여는 열쇠인데,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나의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 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등등상속(燈燈相續) ;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로 해서 계속 면면히 이어짐을 일컬음.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의 여섯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 · 진(瞋) · 치(癡) · 만(慢) · 의(疑) · 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번뇌]의 하나.
*삼독심(三毒心)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91.02.03)에서.(9분10초)
〇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놈이 딱 이 몸뚱이 속에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부모에게 이 몸뚱이를 받아서 그래서 태어나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해서 이렇게 컸는데. 이 몸뚱이는 맛있는 음식, 밥 반찬 모다 그런 것을 먹고 영양을 섭취해서 이 몸뚱이는 자라고 건강하고, 또 잘못 먹고 과식하고 그러면은 또 병이 나기도 하지마는.
그런데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우리 주인공은 무엇을 먹어야 그놈이 잘 자랄까? 그건 보약을 먹는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진 않아. 돈이 많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도 않고, 명예와 권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그놈이 잘되지는 않아.
그놈은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닦아야, 도 닦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자리 자성(自性)을 갖다가—그걸 쉽게 말해서 우리의 영혼이라 그러는데, 영혼과 우리의 자성과는 엄격히 구별을 하면은 뜻이 차이가 있겠으나 알기 쉽게 그저 보통 사람들이 육체와 영혼 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보통 사람의 말을 따라서 영혼이란 단어를 쓰는데.
영혼은 물질로써 그놈이 훌륭해지지를 안 해. 경을 읽는다던지, 염불을 한다던지, 주력을 한다던지, 무슨 계행을 닦는다던지, 여러 가지 다 조도(助道) 하는 방법이 있겠으나 가장 효과적인 가장 좋은 방법은 참선법(參禪法)이거든. ‘이뭣고?’거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놈은 경을 많이 읽고, 많이 해석할 줄 알고, 많이 외우고 그러므로 해서 이것이 닦아지는 것이 아니라, 물론 안 읽는 사람보다는 마음이 좋아질 수도 있고 또 간혹 경을 읽으므로 해서 또 이 지혜의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마는, 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쉽고 간단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뭣고?’거든.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소승법(小乘法)에서는 그런 생각을 자꾸 없애고 버리고 띠어 내버리고 그래 가지고 열반을 증득을 할려고 그런 것인데, 그래 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데. 이 최상승법은 그게 아니거든. 버리고 띠어 번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딱! 화두(話頭)만 들면 되거든. ‘이뭣고?’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거든. 어려운 것은 과거에 무량겁을 두고 오늘 이 금생까지 오면서 수없는 생을 거듭하고, 수없는 업을 쌓아온 습기(習氣)가 있어서 끝없이 업이 발동이 되어. 그러나 그놈을 버릴려고 그러고, 누를려고 그러고, 띠어 낼라고 한다고 해서 버려진 것도 아니요, 띠어 내지지도 않는 거여.
그놈에 즉(卽)해서 화두만 들면, 화두 드는 생각이 뚜렷하고 간절하면 어떠한 업(業) 발동도 거기에서 그냥 찰나간에 이렇게 바뀌어지거든. 왜 그러냐?
‘이뭣고?'하는 놈이나, 업 발동하는 놈이나 근본은 내나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놈에 즉해서 화두만 들면 되는 것이지 띠어 내고 자실 것이 없거든.
파도가 물에서 일어났는데, 파도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 파도가 일어난 부분을 자꾸 퍼낸 그런다고 해서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아니여. 그 파도에서 바로 물을 봐 버려야 하는 거여. 파도 여의고 물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이고, 영원히 파도를 없앨 수가 없는 거여. 건드릴수록 파도는 일어나는 것이니까.
그 파도를 여의지 않고 그 파도가 바로 물인 줄 봐야 하는 것처럼 번뇌 망상을 여의고 진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거기에 즉해서 화두만을 들어.
화두라 하는 것은 백 가지, 천 가지의 좋은 약초를 갖다가 고아 가지고 그놈을 삶아서 물을 내어 가지고 그놈을 계속해서 대리면은 이렇게 고(膏)가 나온 것처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그렇게 해서 뽑아 낸 것이 ‘시삼마(是甚麼, 이뭣고?)’거든. 그래서 ‘시삼마’ 한 번 하는데 팔만대장경 한 번 읽은 거와 마찬가지여.
오히려 그보다도 백 가지 풀을 그놈을 다 먹으면 배만 터지지 무슨 약이 그것이 되겠습니까? 몇날 며칠을 그놈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그놈을 삶아서 고(膏)를 내서 먹으면 먹기도 좋고 약 효험도 빠를 거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 구구절절이 다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시지만 그걸 우리가 어떻게 그걸 다 읽으며, 읽은들 그 참뜻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읽어봤자 한문이 어렵고 번역을 한 거 읽어봤자 많이 읽다 보면 무슨 소리인 줄도 모르는 거고.
과거에 도(道)를 깨달은 조사(祖師)들이 그 팔만대장경의 뜻을 무루 읽도록 다 터득을 해 가지고는 확실히 그 근본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道人)이 탁! ‘시삼마’ 화두를 이것을 참구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뜻 뿐만이 아니라 우주법계의 진리를 탁! 깨달을 수 있도록 해 논 것이 바로 이 활구참선이고 화두거든.(44분3초~53분14초)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 어떤 특정한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일여(一如)하게 화두에 대한 의심을 관조해 나가는 선(禪).
[참고 ❶] 송담스님(No.299)—1986년 5월 첫째 일요법회 법문에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신 분은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정진(精進)이여.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거든. ‘어느 곳이고 선(禪) 아닌 곳이 없고, 어느 때고 참선 아닌 때가 없다’ 그래서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걸음 걸음이 미륵부처님이 탄생하신 곳이요, 생각 생각이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곳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바로 이러한 도리를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30분19초~31분2초)
[참고 ❷] 송담스님(No.152)—1981년 10월 첫째일요법회(참선법B)에서.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문성시증시(聞聲是證時)니라 염념석가출세(念念釋迦出世)요 보보미륵하생(步步彌勒下生)이니라
견색시증처(見色是證處)요. 어떤 색상을 보는 그때가 바로 ‘참나’를 깨달을 때요. 문성시증처(聞聲是證處)라. 어떤 소리를 듣는 그때가 ‘참나’를 증득(證得)할 바로 그 곳이드라.
그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무엇을 볼 때마다, 무슨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렇게 (화두를 들고) 다져 나가면,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그때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신 때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미륵 부처님이 하강하시든 바로 그것이더라.(41분22초~44분9초). (게송) ‘견색시증처~’ ; 『금강경오가해』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함허 설의(說誼) 게송 참고.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선불장(選佛場) ; 부처[佛]를 뽑는[選] 장소[場]라는 뜻. 과거시험(科擧試驗 예전에,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관리 채용 시험 제도로서 보는 시험)을 보는 장소에서 유추된 말이다.
선원에 있어서 수행자가 좌선하는 곳. 선당(禪堂) · 승당(僧堂) · 선방(禪房) 등을 가리킨다. 수행자들이 선방에서 좌선하여 도를 깨달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참고 ❶]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4권 「단하천연전(丹霞天然傳)」
鄧州 丹霞天然禪師不知何許人也 初習儒學 將入長安應擧 方宿於逆旅 忽夢白光滿室 占者曰 解空之祥也 偶一禪客 問曰 仁者何往 曰 選官去 禪客曰 選官何如選佛 曰 選佛當往何所 禪客曰 今江西馬大師出世 是選佛之場 仁者可往 遂直造江西
등주 단하천연선사는 어느 곳의 사람인지 모른다. 처음에 유교를 배워서 장안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길에 여관에서 자다가 홀연히 밝은 빛이 방에 가득차는 꿈을 꾸었다. 이에 점치는 자가 '공을 터득할[解空] 상서로운 조짐이다'라고 풀었다.
우연히 어떤 선객(禪客)이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 '관리 뽑는 시험을 보러 갑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 선객이 '관리 뽑는 시험이 어찌 부처 뽑는 시험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단하가 '부처 뽑는 시험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선객이 '지금 강서(江西)에서 마조대사가 출세 했습니다. 그곳이 부처를 뽑는 시험장[選佛之場]이니 그곳에 가보도록 하십시오'라고 한 말을 듣고 그길로 강서로 갔다.
[참고 ❷] 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방거사(龐居士)의 게송이 다음과 같이 있다. ‘十方同聚會 箇箇學無爲 此是選佛場 心空及第歸’
‘시방세계 대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 저마다 함이 없는 법[無爲]을 배우나니, 이것이 부처를 선발하는 도량[選佛場]이라. 마음이 공(空)해 급제하여 돌아가네’ 『고봉화상선요•어록』 (통광 스님 역주) p37, 46에서.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활구(活句) ;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거각하면 일부러 사량분별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 한다.
[참고]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49~52. (가로판 p50~53)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언정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모름지기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어다.
<註解> 活句下에 薦得하면 堪與佛祖爲師요, 死句下에 薦得하면 自救도 不了니라. 此下는 特擧活句하야 使自悟入이니라.
【 要見臨濟인댄 須是鐵漢이니라
활구(活句)에서 얻어 내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만하고, 사구(死句)에서 얻는다면 제 자신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아래는 특히 활구(活句)를 들어 스스로 깨쳐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임제를 친견하려면 쇠뭉치로 된 놈이라야.
<評曰> 話頭에 有句意二門하니 參句者는 徑截門活句也니 沒心路沒語路하며 無摸索故也요, 參意者는 圓頓門死句也니 有理路有語路하며 有聞解思想故也라.
평해 가로되, 화두(話頭)에 참구(參句)와 참의(參意) 두 가지 문이 있으니, 참구(參句)는 경절문 활구(徑截門活句)니, 마음 길이 끊어지고 말 길도 끊어져서 더듬고 만질 수가 없는 때문이요,
참의(參意)라 하는 것은 원돈문 사구(圓頓門死句)니, 이치의 길도 있고, 말의 길도 있으며, 들어서 알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절문(徑截門) : 지름길문. 교문(敎門)의 55위(位) 점차(漸次)를 거치지 않고 한번 뛰어서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문. 다시 말하면 화두(공안)을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원돈문(圓頓門)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가 교문(敎門)에 있어서는 가장 높고 깊은 이치를 가르친 바이지만, 말 자취가 남아 있고 뜻 길이 분명히 있어서 참으로 걸림 없는 이치를 완전히 가르친 것이 못된다. 오직 조사선이 있을 뿐이다.
*삼도고(三途苦, 三塗苦) ; 악한 일을 한 중생이 그 과보로 받는다는 3가지 미혹한 생존(지옥 • 아귀 • 축생)에서의 고통.
*고주망태 ; 술을 많이 마셔 취하여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인사불성(人事不省 사람 인/일 사/아니·못할 불/살필 성) ; 사람[人]으로서 지켜야 할 일[事]을 살피지[省] 못함[不]. 정신이 흐리멍덩한 상태.
*극락(極樂) ; 극락세계(極樂世界). 극락정토(極樂淨土). 산스크리트어 sukhāvatī. 아미타불이 계시는 청정한 국토로, 이 세계에서 서쪽(西方)으로 십만억 불토(佛土)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일체의 괴로움이 없고 자유롭고 지극한 즐거움만 있는 세계. 수가마제(須呵摩提, 須訶摩提), 수마제(須摩提) 등으로 음사하고 정토(淨土), 안락(安樂), 안양(安養), 서방정토(西方淨土), 낙방(樂邦) 등으로도 한역한다.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 ; 욕계 육천(欲界六天)의 넷째 하늘. 불교의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의 중심은 수미산(須彌山)이며, 그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 위에 도솔천이 있는데 이곳은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으로 구별되어 있다.
내원은 내원궁(內院宮)으로 불리기도 하며 석가모니가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에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며, 오늘날에는 미래불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설법하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석가모니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뒤에)를 기다리고 있는 곳이고, 외원은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오욕(五欲)을 충족시키며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곳이다. 도솔(兜率)의 뜻은 지족(知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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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如來) : 부처님 10호의 하나. 산스크리트어(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오욕락(五欲樂, 五慾, 五欲)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게송) ‘영화능기일~’ ; 『한산자시(寒山子詩)』에서 한산(寒山)의 시.
我見世間人 茫茫走路塵 不知此中事 將何爲去津 榮華能幾日 眷屬片時親 縱有千斤金 不如林下貧
*한산(寒山) ; 중국 당나라 때 사람. 성명은 알 수 없고, 천태(天台) 당흥현(唐興縣)의 서쪽 70리에 한암(寒巖)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대개 그 바위굴 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하고, 때로는 국청사(國淸寺)에 가기도 했다.
몸은 바싹 마르고, 꼴은 거지와 같고 보기에 미친 사람 비슷한 짓을 하며, 국청사 절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습득(拾得)에게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서 댓통에 넣어가지고 한산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미친 짓을 부리면서도 하는 말은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으며 또 시를 잘하였다.
어느날 태주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사람을 보내 한암(寒巖)에 찾아가서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하면서 바위굴로 물러났고 “너희들에게 말한다, 각각 노력해라!” 하면서 바위굴로 들어간 뒤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한다. 세상에서 한산, 습득, 풍간(豊干)을 3성(聖)이라 부르며, 또 한산을 문수보살, 습득을 보현보살 화현이라 한다. 『한산시』 3권이 있다.
—[참고] 여구윤(閭丘胤)의 ‘한산자시집서(寒山子詩集序)’
*습득(拾得) ; 중국 당나라 때, 천태사 국청사에 있던 이. 천태산 국청사 풍간(豊干) 선사가 산에 갔다가 적성도(赤城道) 곁에서 주어 온 작은 아이라 이렇게 이름. 한산(寒山)과 친히 사귀었고 풍간선사가 산에서 나온 뒤에 한산이 바위굴로 들어가 소식을 알 수 없는 뒤로 습득도 어디론가 사라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한다.
*문수보살(文殊菩薩) ;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부처의 완전한 지혜를 상징함.
문수사리는 산스크리트어 만주슈리(mañjuśrī)의 음사. 문수시리(文殊尸利), 만수실리(蔓殊室利)라고도 쓴다. ‘문수’는 묘(妙 : 신묘하다, 훌륭하다) ‘사리’는 길상(吉祥 : 상서로움)의 뜻이다. 묘길상(妙吉祥) · 묘덕(妙德) · 유수(濡首)라 번역. 석가모니불을 왼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문수보살은 일반적으로 연화대에 앉아 오른손에는 지혜의 칼을, 왼손에는 푸른 연꽃을 들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 위엄과 용맹을 상징하는 사자를 타고 있기도 하고, 경권(經卷)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
『화엄경』 속에서도 문수보살은 보현보살(普賢菩薩)과 함께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양쪽 협시 보살(挾侍菩薩)을 이룸.
*보현보살(普賢菩薩) ; 불교의 진리와 수행의 덕을 맡은 보살. 한량없는 행원(行願)을 상징함. 산스크리트어 사만타바드라(Samantabhadra). 삼만다발타라(三曼多跋陀羅)라고 표기. 보현(普賢), 편길(遍吉)이라 한역.
경전을 수호하고 널리 퍼뜨리며, 불법을 펴는 보살. 연화대에 앉거나 여섯 이빨을 가진 흰 코끼리를 타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오른쪽에서 보좌하는 보살.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모든 보살들은 다 각각 부처님 공덕의 어느 한 부분만을 나타내어 그것이 그의 특징이 된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한산시(寒山詩) ; 『한산자시(寒山子詩)』. 중국 당나라 때의 한산자라는 전설적인 은자(隱者)가 천태산의 나무, 바위 그리고 촌가의 벽에 써놓은 시를 국청사(國淸寺)의 스님이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시집. 또 한산의 시 3백여 수(首)외에 습득(拾得)의 시 50여 수, 풍간(豊干) 선사의 시 2수가 실려 있으므로 『삼은시집(三隱詩集)』이라고도 불린다.
『한산시(寒山詩)』의 내용은 꽤 다양하여 여러 가지이나 전형적인 부분인 자연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 것 외에 허망한 삶을 깨치고 진정한 도를 구하라는 주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석숭(石崇) ; 중국 서진(西晉)의 부호(富豪)(249~300). 항해와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
*한무옥당(漢武玉堂) ;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머무는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玉堂]을 이르는 말.
*팔풍(八風) : 팔경(八境). 팔풍경계(八風境界). 팔세법(八世法 세간이 따르는 여덟 가지 법). 세간팔법(世間八法 산스크리트어 loka-dharma). 세간팔풍(世間八風).
[참고 ❶]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55. (가로판 p148)
팔풍은 세상에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바로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므로 팔풍(八風)이라 함. 팔풍경계를 요약하면 결국 역순경계(逆順境界)이다.
①이쇠(利衰 이로울 리/약할 쇠) : 내 뜻에 맞고[利], 내 뜻에 어기는 것[衰].
②예훼(譽毀 기릴 예/비방할 훼) :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찬미하는 것[譽], 나 안 보는 데서 나를 비방하는 것[毀].
③칭기(稱譏 일컬을 칭/나무랄 기) : 면전에서 찬미하는 것[稱], 면전에서 비방하는 것[譏].
④고락(苦樂 괴로울 고/즐거울 락) :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苦],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樂].
[참고 ❷] 『칠각지(七覺支)』 (고요한소리 刊) p57.
팔풍, 팔세법(八世法, 팔리어 ațțha loka-dhammā) : 세간(世間, 중생의 세계) 특유의 여덟 가지 어려움. 이득과 손실[이쇠利衰], 좋은 평판과 나쁜 평판[예훼譽毀], 칭찬과 비난[칭기稱譏], 고통과 행복[고락苦樂]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석간수(石間水) ; 바위틈에서 나는 샘물.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유마힐(維摩詰) : [산스크리트어(범어)] Vimalakīrti. 부처님 재세 시 비야리성(毘耶離城 산스크리트어 Vaiśālī)의 거사. 음(音)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 • 유마힐(維摩詰) 등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유마(維摩)라고도 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구역(舊譯)은 정명(淨名)이고 신역(新譯)은 무구칭(無垢稱)인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중인도 비야리성의 대부호인데 재가자로서 보살행을 닦고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으며 변재에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유마경』 「관여래품(觀如來品)」에는, 유마힐이 무동여래(無動如來 : 아촉불阿閦佛, 산스크리트어 Akșobhya)께서 계신 동방 묘희국(妙喜國, 산스크리트어 Abhirati)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곳에서 죽어 이곳에 와 태어났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주유마힐경(注維摩詰經)』 「병서(竝序)」에서 승조는 유마힐을 법신대사(法身大士 온전히 성불한 대보살)라 하였다.
『유마경』은 7종의 한역본(漢譯本)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은 3종이다.
① 『유마힐경(維摩詰經)』 혹은 『불법보입도문삼매경(佛法普入道門三昧經)』 상하 2권. 지겸(支謙) 역. 222~229년.
②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상중하 3권.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406년.
③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6권. 현장(玄奘) 역. 650년.
『유마경』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 내용. 유마힐이 병들어 누우매 문수보살을 위시하여 부처님 제자들이 병문안을 위해 갔는데, 유마힐이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하여 물음에 여러 보살들이 차례차례 말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유마힐에게 “어떤 것을 일러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합니까?” 하고 묻자, 유마힐은 침묵하며 말이 없었다[默然無說]. 이에 문수보살이 “유마거사가 참으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깨달아 들었다”고 칭찬하였다.
[참고] 『설무구칭경(說無垢稱經)』 (현장玄奘 역 | 장순용 번역 |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4권. 제9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에서.
時無垢稱 普問衆中諸菩薩曰 云何菩薩善能悟入不二法門 仁者皆應任己辯才各隨樂說 時衆會中有諸菩薩 各隨所樂次第而說
그때 무구칭(無垢稱, 유마힐維摩詰)이 그곳에 모인 여러 보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둘이 아닌 법문[不二法門]에 잘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까? 모두들 자신의 변재(辯才)로 내키는 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대중 속에 있던 보살들은 제각기 내키는 대로 차례로 말했다.
-중략- (차례로 31 분의 보살들이 각자 깨달아 아는 바에 말을 하였다)
如是會中有諸菩薩 隨所了知各別說已 同時發問妙吉祥言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時妙吉祥告諸菩薩 汝等所言雖皆是善 如我意者 汝等此說猶名爲二 若諸菩薩於一切法 無言 無說 無表 無示 離諸戲論 絶於分別 是爲悟入不二法門
이와 같이 모임 속에 있는 보살들은 각자 깨달아 아는 바에 따라서 제각기 말을 마쳤다. 그리고 동시에 묘길상(妙吉祥,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러자 묘길상[文殊菩薩]이 여러 보살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이 말한 내용은 비록 모두 훌륭하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대들의 이러한 말들은 여전히 둘[二]이라는 낱말[名字]이 남아 있습니다. 만약 보살이 일체 모든 법에 대해 말도 없고 설명도 없고 명시하거나 가르칠 것도 없다면, 온갖 어리석은 논쟁을 벗어나고 모든 분별도 끊어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時妙吉祥 復問菩薩無垢稱言 我等隨意各別說已 仁者當說 云何菩薩名爲悟入不二法門 時無垢稱默然無說 妙吉祥言 善哉善哉 如是菩薩 是眞悟入不二法門 於中都無一切文字言說分別
그리고는 묘길상[文殊菩薩]은 다시 무구칭[維摩詰] 보살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 자기 뜻대로 말했습니다. 이젠 당신께서 말씀하셔야 합니다. 어떤 것을 보살이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까?”
무구칭[維摩詰]은 잠자코 침묵하면서 말이 없었다[默然無說]. 묘길상이 말했다. “정말 훌륭합니다. 보살은 이렇게 불이법문에 참되게 깨달아 들어가며 그 속에는 언어나 문자에 의한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此諸菩薩說是法時 於衆會中五千菩薩 皆得悟入不二法門 俱時證會無生法忍
모든 보살들이, 이러한 법문을 설하자 그곳에 모인 대중 5천 명의 보살이 모두 불이법문에 깨달아 들어갔고 다 함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했다.
*도사(道士) ; ①불도(佛道 :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닦아 깨달은 사람. ②불도를 닦는 사람. ③도교(道敎)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 ④어떤 일에 아주 익숙하여 썩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방거사(龐居士 ?~808) ;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 湖南) 출신이다. 자는 도현(道玄)이다. 성은 방씨고, 이름은 온(蘊)이다. 방옹(龐翁) · 방공(龐公) · 방노(龐老) · 노방(老龐) 등이라고도 한다. 가족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였으나, 거사만이 불교에 귀의했다.
당나라 정원(貞元) 초년(785~804)에 석두희천(石頭希遷)을 친견하고 말을 잊으면서 종지를 이해했고, 다시 단하(丹霞) 선사와 도반이 되었다.
어느 날 석두가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나를 만난 뒤에 날마다 하는 일[日用事]이 무엇인가?(子自見老僧已來日用事作麼生)”
“날마다 하는 일을 물으신다면 입을 열 곳이 없습니다(若問日用事卽無開口處)” 그리고는 다시 게송을 지어 석두에게 바쳤다.
날마다 하는 일에 별다른 것 없으니 오직 나 스스로 짝과 조화할 뿐이네.(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가지가지마다 취하고 버리지 않으니 곳곳에서 벌리거나 떼어 놓지 마십시오.(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붉은 빛과 자줏빛을 어느 누가 호칭했나? 언덕이든 산이든 한 점 티끌마저 끊어졌네.(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신통과 묘한 작용이라는 것은 그저 물 긷고 나무하는 일뿐입니다.(神通竝妙用 運水及般柴)
석두가 옳다고 여기면서 말했다.(石頭然之曰) “그대는 스님이 되겠는가, 속인으로 있겠는가?(子以緇耶素耶)”
거사가 대답했다. “원컨대 바라는 바를 따르고 싶습니다(願從所慕)” 그리고는 끝내 머리를 깎지 않았다.(遂不剃染)
나중에 강서(江西)에 가서 마조(馬祖)를 뵙고서 물었다. “만법과도 반려가 되지 않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不與萬法爲侶者是什麼人)”
마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한 입에 서강(西江) 물을 다 마시기를 기다렸다가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待汝一口吸盡西江水卽向汝道)”
거사가 그 말끝에 단박에 현묘한 요체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곁에 머물면서 섬기고 배우기를 2년 동안 했다
원화(元和) 때에 북쪽으로 양양(襄陽) 지방을 유람하다가 그 풍토가 마음에 들어서 마침내 방거사가 타고 유람하던 배와 그것에 실은 살림살이를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도 그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모두 통째로 상수(湘水)의 강물에 침몰시켜 버리고 그 딸 영조(靈照)가 조리(笊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친구인 주목(州牧) 우공(于公)이 문병을 오자 거사가 그에게 말했다.
“다만 온갖 있는 것[所有]을 비우기를 바랄지언정 온갖 없는 것[所無]을 실답다고 하지 말아야 하오.(但願空諸所有 愼勿實諸所無) 세간에 즐겨 머무는 것은 모두 메아리나 그림자와 같은 것이오(好住世間 皆如影響)”
말을 마치자 공의 무릎을 베고서 열반하였다. 유언에 따라 시체를 태워서 버리니, 강호(江湖)의 승속이 모두 애도하면서 말하였다. “선문(禪門)에 방 거사가 있는 것은 마치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유마(維摩) 거사가 있는 것과 같다”
후세에 그의 뛰어난 선풍을 기려서 양양방대사(襄陽龐大士) · 동토유마(東土維摩) 등이라 불리우며, 양나라 때의 부대사(傅大士)와 더불어 널리 칭송되었다. 우공이 평생의 문답과 글을 모아 『방거사어록』을 편집하였다.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부설거사(浮雪居士) ; 신라 후기의 스님으로, 서울(王都, 慶州)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진광세(陳光世). 법명(法名)은 부설(浮雪). 자(字)는 천상(天祥).
어려서 불국사에 출가하였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도반과 함께 두륜산 등지에서 10년간 정진한 뒤, 오대산 문수보살의 도량을 참배하러 북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두릉(杜陵 : 전북 만경)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신도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다.
구무원에게 딸 묘화(妙花)가 있었는데, 부설을 흠모하여 부설과 부부가 되길 원하고, 만일 버림을 당하면 목숨을 끊겠다고 하니, 묘화의 부모도 부설에게 딸을 버리지 말고 제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부설은 출가의 뜻이 견고하여 굽히지 않았으나, 또 돌이켜 보살의 자비로운 뜻을 생각하여 마침내 묘화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록 재가(在家)에 있었으나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 정진을 계속하여 도를 이루었다. 등운과 월명도 출가, 수도하여 도를 깨우쳤다. 묘화부인은 백 십세를 살았는데, 말년에 집을 내놓아 사원으로 삼아 부설원(浮雪院)이라 하였다.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조불양화(助佛揚化 도울 조/부처 불/날릴·나타낼 양/가르칠 화) ; 부처님[佛]을 도와[助] 교화(敎化)를 드날리다[揚].
*장자(長者) ; ①덕망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아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 ②큰 부자를 점잖게 이르는 말.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본래사(本來事) ; 본래의 일. 본분사(本分事).
*본분사(本分事) ; ①본분(本分)을 깨우치는 일. 깨달음. ②인간이 부처라고 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
*본분(本分 근원·마음·본성 본/신분·뜻 분) ;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라 중생이라 하는 것은 꿈 속에서 하는 말이다. 본래 어둡고 밝고 알고 모를 것이 없으며, 온갖 속박과 고통을 새로 끊을 것이 없고, 대자유(大自由)• 대해탈(大解脫)을 비로소 얻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본래부터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깨달음(本覺)’이라기도 하는데, 『선가귀감』 첫구절에서 말한 ‘ 〇 일원상(一圓相)’은 이것을 나타냄이다.
*행장(行裝 갈 행/꾸밀·행장 장) ; 길을 떠나거나 여행(旅行)할 때에 사용하는 물건과 차림[裝].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布施)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主].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āna-pati)이라고도 함.
[참고 ❶]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세로판 p142~145. p147. (가로판 p148~151. p153)
(63)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아 !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주해)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64)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하시니라.
(주해)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66)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하시니라.
(주해)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참고 ❷] (1)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권상(卷上) 백운화상초록(白雲和尙抄錄 | 원조각성 번역·해설 | 현음사) p111~112. (2) 『전등록(傳燈錄) 1』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0 참고.
迦那提波尊者得法 後至毗羅國 彼有長者 名梵摩淨德 一日園中 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多 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他人 皆不能見
가나제바 존자께서 용수 대사에게 법을 얻으시고 그 뒤에 비라국에 가시었다. 그곳에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범마정덕이었다.
어느 날 정원 가운데 나무에 큰 귀가 생기되 버섯과 같고 맛은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두 번째 아들 라후라다가 따다 먹었는데 따고 나면 다시 자라고, 없어진 다음에도 다시 또 생겼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其比丘道眼未明 虛沾信施故 報爲木菌 唯汝與子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七十有九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其樹不生耳
이 때 가나제바 존자께서 그 전생의 인연을 아시고 드디어 그 집에 가셨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가나제바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전생에 한 비구를 공양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도안(道眼)이 밝지를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되었다. 오직 너와 너의 둘째 아들만이 정성껏 그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물으시되 “장자의 나이가 얼마냐?” 장자가 답하기를 “79세입니다”
가나제바께서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에 들어가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시주의 것을 갚아주나니, 너의 나이가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서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일심불란(一心不亂) : ①두 생각이 없이, 딴 생각이 없이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 ②마음을 흩어지지 않게 함.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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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功德 공로·보람 공/덕 덕) ; ①복,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원인이 되는 뛰어난 복덕(福德). ②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隨喜功德]이 된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참고 ❶] 『대승의장(大乘義章)』 (제9권) ‘二種莊嚴義四門分別’에서.
言功德者 功謂功能 善有資潤福利之功 故名爲功 此功 是其善行家德 名爲功德
공덕에서 공(功)은 공능(功能, 功績과 才能)을 말하니, 선을 쌓는 등 복되고 이로운 공능을 지닌 것을 공(功)이라고 하며, 이 공을 통해 이루어진 선행에 따른 덕을 공덕이라고 한다.
[참고 ❷] 『육조단경(六祖壇經)』 (덕이본德異本) 「2.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釋功德淨土]」에서.
公曰 弟子聞達磨初化梁武帝 帝問云 朕一生造寺供僧 布施設齋 有何功德 達磨言 實無功德 弟子未達此理 願和尙爲說
師曰 實無功德 勿疑先聖之言 武帝心邪 不知正法 造寺供養 布施設齋 名爲求福 不可將福便爲功德 功德在法身中 不在修福
자사(刺史) 위공(韋公)이 말했다. ‘제자가 듣기에 달마대사께서 처음 양무제를 교화할 때 황제가 「짐은 평생 절을 짓고 스님을 공양하며 보시를 하고 재를 베풀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달마대사께서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제자는 이 이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화상께서 말씀해주십시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실로 공덕이 없습니다. 옛 성인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무제는 마음이 치우쳐 정법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풀어 행한 것은 복(福)을 구했다고 하는 것이니 복이 공덕(功德)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공덕은 법신(法身)에 있지 복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師又曰 見性是功 平等是德 念念無滯 常見本性眞實妙用 名爲功德 內心謙下是功 外行於禮是德 自性建立萬法是功 心體離念是德 不離自性是功 應用無染是德 若覓功德法身 但依此作 是眞功德
若修功德之人 心卽不輕 常行普敬 心常輕人 吾我不斷 卽自無功 自性虛妄不實 卽自無德 爲吾我自大 常輕一切故
대사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견성(見性)이 공(功)이요 평등(平等)이 덕(德)이니, 생각 생각에 막힘이 없이 항상 본성품의 진실하고 묘한 작용[眞實妙用] 보는 것을 공덕이라 합니다.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이요 밖으로 예(禮)를 행하면 이것이 덕이며, 자신의 참성품[自性]이 만법을 건립하는 것이 공이요 마음의 본바탕[心體]이 생각을 여읜 것[離念]이 바로 덕이며, 자성(自性)을 여의지 않음이 공이요 사물에 응해 쓰되 물들지 않음이 덕입니다. 만약 공덕의 법신을 찾으려면 다맛 이에 의하여 공덕을 지어야 참된 공덕입니다.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아 항상 널리 공경을 행합니다. 마음이 항상 남을 가벼이 여기고 나를 내세우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스스로 공이 없는 것이고, 자심이 허망하여 진실하지 못하면 스스로 덕이 없는 것이니, 이는 나를 내세우는 생각이 스스로 커져서 항상 일체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善知識 念念無間是功 心行平直是德 自修性是功 自修身是德 善知識 功德須自性內見 不是布施供養之所求也 是以福德與功德別 武帝不識眞理 非我祖師有過
선지식이여, 생각 생각 끊임이 없는 것이 공이요, 마음을 평등하고 곧게 쓰는 것이 덕이며, 스스로 성품을 닦는 것이 공이요,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덕입니다.
선지식이여, 공덕은 모름지기 자성(自性) 안에서 보는 것이요, 보시나 공양만으로 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복덕(福德)과 공덕(功德)은 다른 것이니, 무제가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뿐 우리 조사에게 허물이 있지 않습니다.
*아만통(我慢통) ; 아만(我慢)의 마음보. 교만(憍慢)한 마음보.
*아만(我慢 나 아/거만하다·업신여기다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교만(憍慢 교만하다·방자하다·까불다·뽐내다 교/거만하다·업신여기다 만) ; 교(憍, mada)는 자신 스스로 자신의 장점들에 대해 그릇되이 집착하여, 마음이 오만방자(傲慢放恣)하게 되어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성질을 뜻하고, 만(慢, māna)은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갖는 마음의 오만(傲慢)한 상태를 뜻한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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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1036~1101) ; 소식(蘇軾). 북송(北宋) 때 문장가. 자는 자첨(子瞻). 자호(自號)는 동파(東坡). 사천성(四川省) 미산(眉山) 출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으로 시와 서화(書畫)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문장이 호방하고 웅혼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평가받는다.
비록 문인이자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선종(禪宗)의 조사들과 교유하여 선(禪)의 경계가 투영되어 있는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선과 정토가 동일하다는 관점을 받아들여 선정겸수(禪淨兼修)를 주장하기도 했다.
1080년(원풍3) 강주(江州) 동림선원(東林禪院)의 상총(常總) 선사를 친견하고 무정(無情)의 설법을 주제로 대담하고 지은 게송이 유명하다.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계곡 물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습이 어찌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 아니겠는가. 밤사이에 팔만사천 게송이 있으니, 다른 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명할까.
이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시냇물 소리와 산빛을 선의 종지와 연결시키는 구절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참고] 『속전등록(續傳燈錄)』 20권. 大鑑下第十四世 東林照覺常總禪師法嗣 < 內翰蘇軾居士.
內翰東坡居士蘇軾字子瞻 因宿東林與照覺論無情話有省 黎明獻偈曰 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未幾抵荊南聞玉泉皓禪師機鋒不可觸 公擬仰之 卽微服求見 泉問 尊官高姓 公曰 姓秤乃秤天下長老底秤 泉喝曰 且道這一喝重多少 公無對 於是尊禮之 後過金山有寫公照容者 公戲題曰 心似已灰之木 身如不繫之舟 問汝平生功業 黃州惠州瓊州
*무주상(無住相) ; 집착함이 없는 모습. 집착함이 없는 상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 상(相)에 머뭄[住]이 없는[無] 보시.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를 의미한다.
보시는 불교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하나로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일을 말한다. 무주상보시는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온전한 자비심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뜻한다.
[참고 ❶] 『선가귀감』 (서산대사 저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105~106. (가로판 p110)
貧人이 來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을 따라 나누어 주라. 한 몸같이 두루 어여삐 여기는 것이 참 보시니라.
(註解) 自他爲一曰同體요, 空手來空手去가 吾家活計니라.
나와 남이 둘 아닌 것이 한 몸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의 살림살이니라.
[참고 ❷] 『금강경오가해』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무비 역해 | 불광출판부) p141~145, 『금강경오가해 설의 - 육조스님 금강경』 (원순 옮김 | 도서출판 법공양) p101~104.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 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또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에 응당히 머문 바 없이 보시를 할지니, 이른바 색(色)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 성향미촉법(聲香味觸法)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相)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만약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육조 스님 해의解義)
부차(復次)라 한 것은 앞을 이어서 뒷말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범부(凡夫)의 보시는 다만 아름다운 외모와 오욕의 쾌락을 구하는 고로, 그 과보가 다하면 곧 삼악도(三惡途 지옥,아귀,축생)에 떨어지므로, 세존께서 크나큰 자비로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를 행하도록 가르치시니, 아름다운 외모나 오욕(五欲)의 쾌락을 구하지 않고, 다만 안으로는 인색한 마음을 없애고 밖으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色布施)’이니라.
무상(無相)의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는 마음도 없고, 베푸는 물건도 없으며, 받는 사람도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不住相布施)'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布施)를 행할 때 마음으로 바라는 것이 없으면 그 얻는 복이 시방(十方)의 허공과 같아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일설에 '보(布)'란 '普(넓다)'요, '시(施)'란 '散(사방에 흩어버린다)'이니, 가슴 가운데 있는 모든 망념·습기·번뇌를 널리 흩어버려 사상(四相)도 끊어지고 마음에 전혀 쌓여 있지 않는 것이 '참 보시(眞布施)'라 하며, 또 일설에는 '보(布)'란 '普'니 육진 경계(六塵境界)에 머물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분별도 하지 않아 오직 항상 청정한 데 돌아가서 만법(萬法)이 공적(空寂)함을 요달함이니라.
만약 이 뜻을 요달하지 않으면 오직 온갖 업(業)만 더하므로, 모름지기 안으로 탐애(貪愛)를 없애고 밖으로 보시를 행해서 안밖이 상응하여야 무량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니라.
다른 사람들의 악행을 보아도 그 허물을 보지 않아서 자성(自性) 가운데 분별을 내지 않음이 '이상(離相)'이 되느니라.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하여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이같은 수행에 의지하면 일체 인천(人天 사람과 하늘신)의 공경하고 공양함이 따르니 이것을 복덕(福德)이라 하도다. 항상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어떠한 것에도 집착이 없는 보시)를 행하여 널리 일체 모든 중생들을 공경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어서 가히 헤아릴 수 없느니라.
[참고 ❸] 송담스님(No.565) - 1996년 설날통알 및 설날차례(1996.02.19)에서.(4분53초)
복(福)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유루복(有漏福)과 무루복(無漏福)이 있는데,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왜 그러냐?
유루복은 복을 짓느라고 죄를 지으니 그것 때문에 내가 삼악도(三惡道)에 가게 되니까 그래서 그 유루복은 원수이고, 또 하나는 지어놓은 복을 그놈을 지키고 사용하느라고 또 죄를 짓게 되니까 그래서 또 원수고,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유루복은 나의 몸과 마음과 가정을 갖다가 갈기갈기 짓밟고 찢어 놓고서 떠나기 때문에 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루복일망정, 유루복이 없어 갖고는 정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유루복이 삼생의 원수라 하더라도 그것이 없어갖고는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고, 사람노릇 할 수도 없고, 생활도 할 수도 없고, 자식교육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힘들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은 안 되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억지로 남을 해롭게 하고, 나라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방법으로 취득을 해 놓으면 그것은 머지않아서 큰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그것을 사용을 할 때에는 보시를 하는데,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는 것이고,
남에게 금전이나 어떤 재산을 보시하면서 내가 이것을 했다고, ‘너한테 보시를 했으니 나한테 너는 응당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나한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과보(果報)를 바래.
공투세를 해 가지고 과보를 바라면 그것이 유주상(有住相)의 보시가 되어서 상대방에 정신적으로 많은 부담감을 주어가지고, 내것 보시하고서 주고받는 사이가 서먹하게 되고, 나중에는 결국 원수가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는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한다.
무루복(無漏福)은 어떻게 짓느냐?
물론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되,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고, 그 무루복을 참으로 더 훌륭하게 크게 깊게 심으려면 우리 자신이 항상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에 입각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함으로서,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보시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부터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복을 심고 종자(種子)를 심기 때문에, 우리는 도솔천내원궁에 가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15분50초~20분41초)
*유루복(有漏福 있을 유/새다·번뇌 루/복 복) ; 평범한 범부 중생이 지은 복(福)은 부귀영화, 명예, 권리, 오욕락 따위의 복으로, 유루(有漏)—샘[漏]이 있는, 번뇌[漏] 또는 고를 더욱 증장시키는—의 복이어서 한도(限度)가 있어 영원성이 없고 영원히 믿을 것이 못된다.
하늘에다 쏘아 올린 화살이 아무리 힘이 센 장사가 활을 당겨서 활을 쐈다 하드라도 올라갈 만큼 올라가면 결국은 다시 땅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아무리 큰 복을 쌓는다 하드라도 그 복이 인천(人天)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된다 하드라도 자기가 지은 복만큼 다 받아버리면 다시 또 타락하게 된다.
그래서 옛날 성현들은 인간 세상의 그 유루복(有漏福)이라 하는 것은 그 복을 얻으면서 죄를 짓고, 또 얻어가지고 누리면서 죄를 짓고, 또 그 얻었던 것을 결국은 다 없애면서 그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인간의 유루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유루복도 있기는 있어야 하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구해야 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을 해서 얻은 복은 그래도 나를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짓지 않게 하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나를 그렇게 크게 해롭게는 하지 않고 곱게 떠나는 것이다.
유루복이라도 좋은 방법으로 구하고 보시(布施)와 같은 또 좋은 방향으로 잘 사용을 하는데, 보시도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해야 같은 재보시(財布施)를 해도 결과로 돌아오는 복은 한량이 없다.
참선하는 것이 바로 나를 무심(無心)한 상태로 이끌게 만들고, 무심한 상태에서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無畏布施)를 하면 그것이 바로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어서, 무주상(無住相)으로 하면 그것이 무루복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도 한다면, 유루복과 무루복을 겸해서 닦는 것이다.
*무루복(無漏福 없을 무/새다·번뇌 루/복 복) ; 번뇌[漏]가 없는 더러움이 없는 복. 영원히 끝장이 나지를 않고 아무리 쓰고 또 써도 바닥이 나지를 않고 다할 날이 없는 복(福), 그것이 무루복입니다.
무루복이라 하는 것은 참선법(參禪法)에 의해서 내가 내 마음을 닦아 가지고 생사해탈하는 이것만이 영원히 생사를 면하는 무루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참선하는 마음으로 살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돈도 벌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을 믿도록 권고하고 인도하고, 자기도 열심히 닦으면서 남도 같이 닦게 하여 무루복(無漏福)과 유루복(有漏福)을 겸해서 닦아야,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게송) ‘만의도취일의단~’ ; 『사명당대사집(四溟堂大師集)』 (권5) '贈蘭法師' 게송 참고.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사관(祖師關) ; 조사의 경지에 이르는 관문(關門), 곧 화두(공안)을 말함.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시설(施說)한 선(禪)의 관문. 천칠백 칙 공안을 말함.
관문(關門)은 옛날에 국방상으로나 경제상으로 중요한 곳에 군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내왕하는 사람과 수출입하는 물건을 검사하는 곳이다. 화두는 이것을 통과하여야 견성 성불하게 되는 것이므로 선종(禪宗)의 관문이 된다.
*의심관(疑心觀) ; 화두를 거각하여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를 하는 것.
[참고 ❶] 송담스님(세등선원 No.68)—정묘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8.01.17)(5분 59초)
〇처음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힘을 좀 써야 화두가 들리니까 힘을 좀 써서 하기도 하고, 자꾸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한번 하고 한참 있으면 화두가 없어져 버리니까, 부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자주자주 들을 수 밖에는 없지만, 한 철, 두 철, 세 철 이렇게 해 가다 보면 그렇게 자주 들지 안 해도 화두가 잘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들려 있걸랑 화두를 다시 또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들어 쌀 필요는 없는 것이여. 화두가 희미해져 버리거나, 화두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오거나 하면 그때 한번씩 떠억 챙기면 되는 것이지, 화두가 이미 들어져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화두를 막 용을 쓰면서 자꾸 들어 싸면 그것은 아주 서투른 공부다 그 말이여.
그렇게 순일하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터억 들려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걸랑, 그 독로한 의단을 성성(惺惺)한 가운데 묵묵히 그것을 관조(觀照)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의 관(觀)이여. 의심관(疑心觀).
거기에는 고요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편안하다는 생각도 붙을 수가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도 어떻게 거기다가 그런 생각을 붙일 수가 있냐 그 말이여.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편안한 그런 생각에는 조금도 그런 생각을 두어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즐겨서도 안되고, 그런 생각을 집착해서도 안돼.
다맛 우리가 할 일은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을 잘 잡드리 해 나가는 거여. 너무 긴하게 잡드리를 해서도 안되고, 너무 늘어지게 해서도 안되고, 긴(緊)과 완(緩) 긴완(緊緩)을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혀. 그것이 묘한 관(觀)이라 말할 수가 있는 거여.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에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觀)이라 하는 거여. 우리가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화두를 참구를 하는데, 일구월심 정진을 해서 참으로 바르게 화두를 참구할 줄 아는 사람은 바로 관(觀)으로 들어가는 거여. 관이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을 관이라 그러는 거여.
조금도 늘어지지도 않고, 조금도 긴하지도 아니한 ‘묘(妙)한 의심(疑心)의 관(觀)’으로 해 나가야 되는 거여.
1분의 백천 분의 1 같은 그런 짧은 시간도 생각을 일으켜서 그 일어나는 잡념을 물리칠라 할 것도 없고, 그렇게 화두가 순일하게 된다 해도 아주 미세한 생각은 이렇게 일어날 수가 있어. 일어나지만 그것을 일어나는 생각을 물리칠라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거여.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채로 그냥 놔둬 버리고, 자기 화두만을 잘 관해 나가면 그 생각은 자취없이 스쳐서 지내가 버리는 거여.
마치 앞으로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이 돌아오겠지마는, 그 봄철에 도량이나 동산에 나가서 그 산책을 하면서 포행을 하면서 정진을 헐 때에 춥지도 덥지도 않는 봄바람이 귓전에 스쳐간다고 해서 그 봄바람 때문에 화두가 도망갈 필요는 없거든.
그냥 귓전을 스쳐서 지내가고 옷자락이 좀 팔랑거리거나 말거나 내버려둬 버리고, 나는 성성적적(惺惺寂寂)허게 그 의심의 관(觀)을 단속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번뇌가 일어난다 하드라도 그냥 놔둬 버려.
끝없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일어났다 꺼져 버리고, 내가 거기에 따라주지만 아니하고, 집착하지만 아니하고, 물리칠라고 하지도 말고, 그러면은 그냥 제 결에 일어났다가 제물에 그냥 스쳐가 버리는 거여. 그까짓 것은 내가 공부해 나가는 데 조금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여.
우리 활구참선을 하는 수행자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그 화두를 올바르게 잡두리해 나갈 줄만 알면 어디를 가거나 다 선불장(選佛場)이요, 그게 바로 선방(禪房)이요, 공부처(工夫處)다 그 말이여.
[참고 ❷] 송담스님(No.256)—1985년 2월 첫째 일요법회(85.02.03)(5분 57초)
〇금년 여름에 보살선방에 백여섯 분이 방부를 들여서 항시 칠팔십 명이 그렇게 참 엄격한 규율 속에서 정진들을 모다 애쓰고 계시는데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나아가서 세 번째 가서는 화두(話頭)를 어떻게 의심(疑心) 하느냐?
이 화두를 의심하는 방법, 이것이 또한 간단하지만 참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한 철, 두 철, 세 철, 3년, 5년, 10년을 해도 이 화두를 참으로 올바르게 화두를 참구(參究)하고, 관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말로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법문을 듣고 고대로 또 하고, 고대로 하면서 또 법문을 듣고 해서 스스로 많은 노력, 스스로 그것을 공부해 나가는 요령—급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지도 아니하며, 그 요령을 스스로 터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터득한다니까 선지식(善知識)도 필요 없고, 자기 혼자 어디 돌굴이나 토굴에 가서 막 해제끼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에요. 반드시 선지식의 지도를 받되, 받아 가지고 하면서도 스스로 그 묘한 의관(疑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묘한 의심관이라 하는 것은 도저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해 가르켜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일구월심(日久月深) 항시 면면밀밀(綿綿密密)하게 의심해 가고 관해 가고, 그 자세와 호흡과 화두를 삼위가 일체가 되도록 잘 조정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필경에는 그 묘한 의심관인 것입니다. 그 의심관, 관(觀)이라 하는 것도 일종의 생각이지만 ‘생각 없는 생각’을 관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막연하게 어떤 관이 아니라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의심(疑心)의 관’이라야 돼.
옛날에는 해가 떨어지려고 할 때, 서산에 지려고 할 때, 저 수평선에 해가 지려고 할 때에, 그 큰 맷방석만한 해가 땅에 질락 말락 할 때 그 빨갛고 아름다운 거—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데, 해가 질 무렵에는 눈이 부시질 않고 그 아름답고 벌건 굉장히 큰 그 해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해를 한참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 딱 떨어져서 안 보일 때까지 한 시간 내지 두 시간을 눈이 부시지 아니할 때부터서 그것을 관하기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 질 때까지 관찰하고서, 그다음에는 밤새 그 눈을 감으나 뜨나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둥그런 해를 관(觀)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서도 보이는 것이 그것이 관(觀)인 것입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상관없이 항시 있는 것이 그것이 관인데, 그것을 갖다가 일관(日觀)이라 그러거든. 해를 관하는 수행법이여.
밤새 그 둥근 해를 갖다가 관하고 그 이튿날 하루 종일 관하다가 또 해 질 때 다시 또 그 관을 해서, 그 관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또 밤새 관하고, 그 이튿날 관하고 또 해 질 때 관하고 해서 평생 동안을 그렇게 관을 해 나가는데, 이것도 하나의 수행 방법입니다.
이러한 그 일관이라든지 또 달을 관하는 관법이라든지, 아까 백골관이라든지, 여러 가지 관법(觀法)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하나의 ‘의심의 관법’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면서도, 일부러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 의심관이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처음에는 ‘이뭣고?’ ‘이뭣고?’ 하지만 나중에는 ‘이뭣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해가 질 때 봐두었던 그 둥근 해가 밤에도 고대로 보이고, 그 이튿날에도 고대로 환하게 보이듯이 의심관이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일주일을 가지 못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고, 일체 천칠백 공안을 일관도천(一串都穿)을 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역대조사(歷代祖師)의 면목을 사무쳐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별념(別念) ; ‘딴생각’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〇“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〇“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p163-164)
〇“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이 깰 오/잠잘 매/하나 일/같을 여) ; 자나깨나 언제나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눌 수 없음.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공안(公案, 話頭) 타파(打破) ;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스승)으로부터 화두(공안)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그 화두(話頭)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꽉 막힌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을 타파하여 확철대오(廓徹大悟)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고] 〇화두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공안(公案)이라고도 말하는데, 화두는 깨달음에 이르는 관문이요, 관문을 여는 열쇠인 것입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52분12초~) [‘참선법 A’ 에서]
〇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 [ ‘참선법 A’ 에서]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참고 ❶]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602 ~ 675)
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❷]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하권 (백운화상초록 白雲和尙抄錄) ‘승고선사(承古禪師 ? ~ 1045)’
承古禪師 常勸諸人 莫學佛法 但自無心去 利根人晝時解脫 鈍根人或三五年 遠不過十年 若不悟去 老僧 替你入拔舌
승고선사께서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하되 “불법을 배우지 말고 다만 스스로 무심하여라. 영리한 근기의 사람은 한나절에 해탈하고, 둔한 근기의 사람은 혹은 3년 · 5년이며 멀어도 10년을 지나지 않는다. 만약 깨닫지 못하면 노승이 너를 대신해서 혀를 뽑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들어가리라”
[참고 ❸]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蒙山法語)』 (몽산화상 1231 ~ 1298 또는 1308) (몽산화상 저 | 혜각존자 편 | 송담선사 역 | 용화선원 刊) p97~99. (가로판 p95~97)
若有來此(약유내차)하야 同甘寂寥者(동감적료자)인댄 捨此世緣(사차세연)하며 除去執着顚倒(제거집착전도)하고 眞實爲生死大事(진실위생사대사)하야 肯順菴中規矩(긍순암중규구)하야 截斷人事(절단인사)하고 隨緣受用(수연수용)호대 除三更外(제삼경외)에 不許睡眠(불허수면)하며 不許出街(불허출가)하며 不許赴請(불허부청)하며 未有發明(미유발명)이어든 不許看讀(불허간독)하며 非公界請(비공계청)이어든 不許閱經(불허열경)이니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如法下三年工夫(여법하삼년공부)호대 若不見性通宗(약불견성통종)인댄 山僧(산승)이 替爾(체이)하야 入地獄(입지옥)호리라
법다이 삼 년 동안 공부해 만약 견성하여 종지(宗旨)를 통달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너희들을 대신하여 지옥에 들어가리라.
[참고 ❹]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立限示衆(其九)—9. 기한을 정하고 대중에게 보임’ (고봉원묘 高峰原妙 1238 ~ 1295) (통광 역주 | 불광출판사) p85, p88 참고.
參禪 若要剋日成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萬思量 單單只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工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徹去 西峰今日 犯大妄語 永墮拔舌犁耕
참선하는데 만일 한정된 날짜에 공(功)을 이루려면 마치 천척이나 되는 우물에 빠졌을 경우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이나 낮이나 천 생각 만 생각이 오로지 다만 우물에서 나오려는 마음뿐이고 끝끝내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라. 진실로 이렇게 공부하기를 혹은 3일, 혹은 5일, 혹은 7일 하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서봉은 오늘 대망어죄(大妄語罪)를 범했으므로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옥[拔舌犁耕地獄]에 떨어질 것이다.
[참고 ❺] 『고봉화상선요·어록(高峰和尙禪要·語錄)』 ‘시중(示衆 其二二)’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p145, 146 참고.
若論此事인댄 如萬丈深潭中에 投一塊石相似하야 透頂透底하야 了無絲毫間隔이니 誠能如是用工하며 如是無間하고 一七日中에 若無倒斷이면 某甲이 永墮阿鼻地獄하리라
만일 이 일을 말하자면,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에 돌멩이를 하나 던진 것과 같아서 위에서 밑바닥까지 꿰뚫어 실끝만치도 간격이 없는 것같이 해야 한다. 진실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이렇게 간단없이 하고서도 만일 7일 동안에 깨치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무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지리라.
*‘빠르면은 7일이요, 늦으면은 3년이요’ ;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4. 結制示衆(결제 때 대중에게 보임)」에 나오는 문구 참고. ‘大限九旬(긴 기한은 90일이요) 小限七日(짧은 기한은 7일이다)’
*‘소한(小限)은 칠일(七日)이요 대한(大限)은 구순(九旬)이라’ ; ‘공부하는 기간은 짧게 잡으면 칠 일이요, 길게 잡아야 구십 일이다’
[참고] 『고봉화상 선요(高峰和尙禪要)』 (통광 역주 | 불광출판부) 「4. 結制示衆(결제 때 대중에게 보임)」 p67~68.
大限九旬 小限七日 麤中有細 細中有密 密密無間 纖塵不立 正恁麽時 銀山鐵壁 進則無門 退之則失 如墮萬丈深坑 四面懸崖荊棘 切須猛烈英雄 直要翻身跳出 若還一念遲疑 佛亦救你不得 此是最上玄門 普請大家着力
긴 기한은 90일이요, 짧은 기한은 7일이다. 거친 가운데 미세한 것이 있고, 미세한 가운데 조밀[密密]한 것이 있으며, 조밀하고 조밀하여 간격이 없어서 가는 티끌도 세울 수 없다. 이러한 때가 바로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나아가자니 문이 없고 물러가면 잃어버린다. 마치 만 길 되는 깊은 구덩이에 떨어졌는데 사면은 절벽과 가시밭이더라도 용맹한 영웅은 곧 몸을 뒤돌아 뛰어나오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만일 한 생각이라도 머뭇거린다면 부처님도 그대들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최상의 진리문이다. 대중들이여! 다 함께 힘쓸지어다.
*삼십이상(三十二相) ; 부처님이 갖추고 있다는 32가지의 뛰어난 신체의 특징. 몸이 금빛이다, 손가락이 길다, 두 눈썹 사이에 흰 털이 있다, 발바닥에 두 개의 바퀴 모양의 무늬가 있다 등등.
*팔십종호(八十種好) ; 부처님과 갖추고 있는 80가지의 작은 특징. 얼굴 빛이 화평하여 웃음을 머금은 것, 목이 둥글고 아름다운 것 등등.
*삼천위의(三千威儀) ; 비구(출가한 남자 스님)의 일상 행동에서 지켜야 할 계율이 250종이어서 이를 ‘비구 250계’라고 한다. 일상생활은 크게 행(行) · 주(住) · 좌(坐) · 와(臥)로 나누기 때문에 이 네 가지에 250을 곱하면 천이 된다. 이를 다시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곱하면 3천이 된다.
*팔만세행(八萬細行) ; 부처님의 모든 행동은 원만하여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다는 것. 팔만 가지 세세한 행동들이 전부 부처님의 위의(威儀, 훌륭한 행위)에 어긋남이 없다는 뜻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❶]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참고 ❷]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대정장11, p.346c3)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地], 물[水], 불[火], 바람[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법신불(法身佛) ; 절대적 지혜의 지고한 상태, 즉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부처님(佛).
*집착(執着, 執著 잡을 집/붙을 착) ; 허망한 분별로써 어떤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그릇된 분별로써 어떤 것을 탐내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함. 사물이나 도리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황룡탕(黃龍湯) ; 황탕(黃湯), 용탕(龍湯)이라고도 한다. 약용으로서 저장한 인간과 가축의 대변과 소변을 말한다.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써 이용하는 오줌을 말함. 요료법(尿療法).
*요료법(尿療法) ; 요료법(尿療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걸식(乞食 빌·구할·청할 걸/밥·음식 식) ; ①빌어서 얻어먹음. ②수행자가 수행을 위해 육신을 지탱하고자 일정한 법도에 따라 남에게 음식을 받는 것.
*분소의(糞掃衣 똥 분/버릴 소/옷 의) ; 똥이나 먼지구덩이 속에 쓰레기로 버려진 낡은 옷과 찢어진 헝겊 조각을 깨끗이 씻은 다음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가사(袈裟). 납의(衲衣), 백납의(百衲衣) 등이라고도 한다.
*예약(穢藥) ; 부란약(腐爛藥). 대변, 소변등의 배설물로 만든 약. 넓은 의미에서는 사람들이 버려서 아무도 쓰지 않는 재료로 만든 약도 포함한다.
악취가 나고 부패한 것이라는 뜻에서 부란약이라 하고, 버려진 것이라는 뜻에서 진기약(陳棄藥), 잔기약(殘棄藥) 등이라고 한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네 가지 행법[사의법 四依法 : 乞食, 糞掃衣, 樹下住, 陳棄藥] 중 하나와 관련된 것으로, 수행자는 병이 들었을 때 부란약을 제조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 · 탱화 · 불구(佛具) · 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염(盛炎 성할 성/불꽃·더울 염)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법문 내용]
(게송)일종위배본심왕~ / 중생이 곧 부처니, 바로 나 자신이 부처니 부처를 밖에서 찾지 말아라. 번뇌가 곧 보리(菩提)이니 번뇌를 여의고 깨달음이 딴 데에 가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최상승법 /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 극락 가는 연습이 바로 이뭣고?
(게송)영화능기일~ / 남녀노소 빈부귀천 승속을 막론하고 누구나 도 닦을 수 있다 / 보현보살의 돼지 화현, (게송)久在塵勞中~ / 스님의 인사 ‘잘 수용하겠습니다’ / 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 시주·보시는 무주상(無住相)으로 해야.
(게송)만의도취일의단~ / 모든 의심을 전부 자기 본참공안에 대한 하나의 의단에다 몰아붙이라 / 올바르게 열심히만 하면 될수 있다 / 황룡탕 / 여법하게 열심히 도 닦으면 정법시대.
〇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께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바치고 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불공(佛供)을 드리고 합니다마는, 그 모든 신앙 생활 가운데에 으뜸이 되고 뿌리가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저히 믿는 데에서부터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〇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번뇌를 여의고 참선을 할라고 하지를 마세요. 무슨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 즉해서 ‘이뭣고?’.
〇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무처선(無處禪) 무시선(無時禪)이여. 시간도 따로 없는 것이고, 장소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편의상 입선, 방선의 시간을 두고 선방(禪房)이라고 하는 특별한 조용한 곳을 마련해 가지고 거기에 가서 다 같이 죽비를 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이지 진짜 살아 있는 공부는 꼭 선방에 와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〇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어쩌다가 감옥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 감옥에서도 탁! ‘이뭣고?’를 할 수 있다면 감옥이 바로 선방이요 선불장(選佛場)이요, 부부간에 사랑하고, 싸우고, 생활에 대한 근심 걱정을 한 바로 그곳이 살아 있는 선원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는 다시 참선에 대한 관념을 바로 잡아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〇‘이뭣고?’는 천하에 간단하고 별로 맛은 없지만, 내가 바로 부처요, ‘이뭣고?’가 바로 살아서 극락에 가고, 살아서 도솔천 내원궁에 가는 연습이고, 바로 한 생각에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공부.
〇세속에 살라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도 힘이 들고, 직장을 유지해야 하고 사업을 하는데도 보통 힘이 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정법을 믿고 ‘이뭣고?’로써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상근대지(上根大智)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전생에는 우리가 신도였었고 여러분이 스님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금생에 그것이 바뀌어져 갖고 신도와 스님으로 또 바뀌어졌을는지 모릅니다. 내생에는 우리가 또 신도가 되고 여러분이 스님이 되어서 선방에 와서 참선(參禪)을 할는지도 모릅니다.
〇자기가 원래 부처였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자기가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열심히만 하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이것이 만약에 거짓말이고 안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고—다 보증을 서셨어.
〇‘정법이다, 말세다’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이고, 지옥 천당도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은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도 닦고 모든 생활을 해 나간다면은 우리는 이 21세기를 진짜 정법시대로 돌릴 수 있다고 확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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