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76~400)2020. 3. 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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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88)—1989년 5월 첫째일요법회(89.05.07) (용388) (69분)

(1/4) 약 19분. (2/4) 약 19분. (3/4) 약 18분. (4/4) 약 13분.

(1/4)----------------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한디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득지재심응재수(得之在心應在手)하고, 이것을 마음에 얻으면 뻑뻑이 손에 응하게 된다. 마음에 얻으면 손에 응해.

설월풍화천지구(雪月風花天地久)다. 겨울에는 눈이 휘날리는 날 밤, 달이 휘황찬 밝고, 봄에면 봄바람이 불면 꽃이 휘날려. 그러기를 하늘과 땅이 오래되었다. 무량억겁(無量億劫) 전 이전부터서 무량억겁 미래를 향해서 생겨난 때가 없고 없어진 때가 없을 것이다.


조조계향오경제(朝朝鷄向五更啼)하고, 아침 아침마다 닭은 오경에 울고,

춘래처처산화수(春來處處山花秀)다. 봄이 오면 곳곳마다 산에 꽃이 아름답게 피더라.



방금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경청을 했습니다. 활구참선 법문을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산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시고 40여 년간을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나 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통해서 중생의 지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온갖 방편법을 설하셨습니다.

어느 경전이고 한 말씀 한마디도 버릴 것이 없고 금쪽보다도 더 소중한 말씀들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실 때 부처님을 시봉하던 아난존자(阿難尊者), 그 아난존자는 조달(調達)이의 동생이며 또 부처님의 사촌동생입니다.

출가해 가지고 주욱 부처님을 시봉을 했는데 스승으로서 정말 여법(如法)하게 목숨 바쳐서 시봉을 하면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모든 법문을 한마디, 한 구절도 놓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조옥 고대로 기억을 해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결집(結集)을 할 때에 아난존자가 법상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께서 설하신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외워서 오백 성승(聖僧)이 증명함으로써 제1회 결집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 아난존자가 부처님이 열반하시자 얼마나 비통하던지 몸을 들어서 통곡을 했다. 하늘과 땅이 딱 붙어버리는 느낌, 캄캄한 밤에 등불을 놓쳐 버린 데다가 비교를 할까—보통 세속에 자식이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그 사랑하고 존경하고 의지하던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도 호천망극(昊天罔極)이라 이렇게 슬픔을 표현을 하지만.

여러 제자 가운데에서도 유독히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앉었다 섰다, 이마를 땅에다 부딪쳤다, 고대로 놔뒀다가는 아주 그냥 죽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몹시도 슬퍼했습니다.


그때 그 곁에 있던 한 구참(久參) 제자가 아난존자를 달래서 "지금 부처님께서는 곧 아주 열반에 드실 텐데 그렇게 슬퍼하기만 해서 되겠느냐? 곧 아주 열반에 드시기 전에 꼭 여쭈어보아야 할 일에 대해서 여쭈어 봐라"

첫째는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처치를 해야겠습니까?"


차익(車匿 Chandaka 찬다카)이란 사람은 부처님 처음에 출가하실 때에 마부(馬夫)였습니다. 말고삐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던 마부여.

상전(上典)이 출가를 하시니까 저도 따라서 출가할 원을 세워서 출가를 했는데, '부처님 최초에 출가하실 때 자기가 말고삐를 잡고 출가했다' 그것을 아주 코에다 걸고서 아주 행패가 심했습니다.

아무 말도 듣지 않고 대중의 법규도 지키지 않고, 겨우 부처님만 조금 무서워하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누구도 무서워하지를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했어. 대단히 처치 곤란한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그 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그걸 여쭈어봤어.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묵빈대처(默擯對處)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는 거여. 잘하거나 못하거나 무슨 짓을 하거나 일체 상관하지 않는 거여. 대중 전체가 그 사람하고는 첫째, 말을 주고받고 하지 않고, 일체 잘잘못을 얘기하지 않고, 없는 것이나 있는 것이나 상관 말고 내버려둬 버리는 거여.

그것이 묵빈대처(默擯對處)라고 해서 대중생활 속에서는 대단히 엄중한 대치법(對治法)인 것입니다.


그다음에 둘째 번에는 무슨 말씀을 여쭈어봤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을 할까요?" 그것을 여쭈어봐라. 그래서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 계(戒)—5계, 10계, 비구 250계, 비구니 오백계, 또 보살십중대계, 48경계, 이러한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세 번째 질문은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저희들은 어디에 머무를까요? 저희들의 마음을 어디에다가 머무를까요?" 그것을 여쭈어봤습니다.

부처님께서는 "4념주,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이 주로 어떠한 장소에 대해서—형식적으로는 두 번째 질문은 '어떠한 부처님 제자 가운데 제일 훌륭한 어느 제자에게 의지할까요?' 이렇게 아난존자가 형식상으로는 그렇게 질문한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특별한 제자를 지칭하시지 않고 "계를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어디에 머무를까요?" 어떠한 특수한 도 닦기에 가장 좋은 어떤 장소에 대해서 여쭈어본 것 같았지마는, 부처님께서는 어느 장소를 지적을 하시지 않고 "사념처관(四念處觀), 사념주관(四念住觀)에 머물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러면 사념주(四念住), 사념처(四念處)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 가지 마음에 머물러라.

네 가지 마음이 무엇이냐? '네 가지 곳이라는 생각을 머무르는 곳'이 무엇이냐 하면은 신수심법(身受心法)이여.


(첫 번째) 이 몸뚱이에 관한 것.

그다음에 우리가 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어떠한 경계에 부딪쳤을 때에 최초에 탁! 감수작용, 그 감수(感受)하는 작용.


세 번째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잠시 머물렀다가 그 생각이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없어지자마자 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잠시 머물렀다가 또 다른 생각으로 변해가지고 또 없어지고, 이 생주이멸(生住異滅), 끊임없는 이 정신의 그 생주이멸, 이 마음.


네 번째는 법(法), 일체법.

삼라만상 두두물물—앞에 말한 몸뚱이에 관한 거, 그다음에 감수작용에 관한 거, 우리의 마음에 관한 거, 그 세 가지를 제외한 이 세상에 모든 것, 그것이 바로 삼라만상 두두물물이요, 불교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그러는 거여. 그 일체법에 관한 거.



그러면 '몸뚱이는 부정(不淨)한 것이다. 몸뚱이는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그렇게 관(觀)을 해.


'왜 몸뚱이가 부정하냐?'하면은 우리의 몸뚱이 속에는 피와 고름과 오줌과 똥이 가득차 있으니까 그것은 부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고. 아홉 구멍에서는 나오느니 더러운 것만 꾸역꾸역 기어나온다. 아무리 날이면 날마다 씻어도 계속 기어나와.

그러니 속에 더러운 것이 가득 들었으니 구녁구녁이 나오는 것은 더러운 것밖에 더 나올 것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더럽고 추접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 이거거든.


두 번째 수(受), 감수작용(感受作用). '감수작용은 괴로운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척! 본다든지, 귀로 무슨 소리를 척 듣고 받아들인다든지,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뚱이로 느끼고, 생각으로 어떤 것을 탁! 받아들이는 그것 자체는 그것은 괴로운 것이다.

결국 생각이 일어나서 받아들임으로 해서 그것이 온갖 고통으로 연결이 되고, 결국은 그것으로 인해서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벌어지기 때문에 '감수작용은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것이여.


세 번째 '우리의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이렇게 관(觀)하라는 거여.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 그 생각이 고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금방 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없어지자마자 생각이 일어나면 또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또 없어지고.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마지막에 그 법, '일체법(一切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그 산이나 강이나, 돌이나 풀이나,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늘에 태양이나 별이나 달이나, '일체가 다 자성이 없는 것이다.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하라는 거여.


그래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그래 부처님 생존시에도 많은 제자들이 이 사념주관에 의해서 수행을 하도록 지도를 하셨습니다.(처음~18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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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삼현위(三賢位)에 있어서 오정심관(五停心觀) 다음으로 닦아가는 수행과정이지만, 그 제자의 근기(根機)와 현재 공부해 나가는 단계에 따라서 백골관(白骨觀)을 관하게 하기도 하고, 수식관(數息觀)을 하게 하기도 하고,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55위(位) 점차(漸次)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관해 나가는 관법이 다 단계적으로 차제(次第)가 있지마는 그래도 그 많은 여러 가지 관(觀) 가운데 이 사념주관은 관(觀)의 아주 중요한 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는 이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신 데에 큰 뜻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어느 경전이든지, 이 관법(觀法)에 관한 그 근본을 알고 보면 전부 이 관법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삼관(天台三觀)이 있고, 또 화엄경에는 법계삼관(法界三觀)이 있고, 원각경에는 원각삼관(圓覺三觀)이 있고, 또 유식삼관(唯識三觀)이 있습니다.


그래 옛 조사의 말씀에도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이다'

마음을 반조(返照)해서 관(觀)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대장경을 다 종으로 횡으로 육두로 외우고 해석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관(觀)도 이렇게 여러 가지 관(觀)이 있지만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자기 멋대로 어떠한 관법을 해 간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 사념주관(四念住觀) '아!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다. 모든 감수작용(感受作用)은 괴로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무상(無常)한 것이다. 일체 삼라만상 모든 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계속 그것을 열심히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몸뚱이는 더러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대관절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이렇게 더러운 거를 가지고 살아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괴로운 것을 가지고 괴로운데 살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바른 정관(正觀)을 버리고서 점점 삿된 데로 치우쳐 생각이 쏠리기 시작했던 것이여.


그래 가지고 집장범지(執杖梵志)라고—목련존자를 패서 죽인 그 집장범지, 그 외도(外道)가 있었는데—이 사념주관을 닦던 부처님 제자들이 그 범지 외도를 찾아가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리때와 모다 그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가서 그 범지 외도한테다 바치고 무릎을 꿇고 합장을 하고 빌었습니다.


"제발 바라문이시여. 위대한 바라문이시여. 이거 내가 가지고 있는 총재산을 다 드릴 테니까 자비로써 나를 때려 죽여주시오" 막 사정을 해 가지고 그러니까,

그렇지 않아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집장외도가—집장외도는 작대기, 주장자 가지고 다닌다 해서 집장외도인데—그 몽둥이로써 여지없이 쳐 죽이고 쳐 죽이고 했습니다.


아! 그런데 한 해 여름에 60명 대중이 없어졌어. 그래서 부처님께서 "아! 이렇게 어찌 대중이 이렇게 많이 비었느냐?” 물어보시니까 “집장외도한테 가서 모다 맞아 죽었습니다"

한 해 여름에 60명이 이 사념주관(四念住觀)을 하다가 집장범지한테 가서 자진해서 맞아죽었다 이거거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잠시 그러한 아직 사념주관에 대한 바른 법을 닦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키셨던 것이여.


그러면 이 사념주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여.

하는 사람이 잘못하면—부처님 열반하신 뒤에 사념주(四念住)에 머물러라. 사념주관에 머물러라고 하실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자들의 의지처가 될만한 이런 성스러운 수행 방법이지만, 잘못하면 얼토당토않은 그런 사견(邪見)에 얽매여서 사견에 빠져서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열반하신 뒤에도 아까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러 가지 관법이 많은 도인들, 조사(祖師)들에 의해서 여러 가지 관법이 자꾸 개발이 되고 발전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천태삼관(天台三觀)이라든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이든지, 남산 율종에 삼관이든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이나, 유식삼관(唯識三觀), 다 그 나름대로 훌륭한 관법(觀法)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법을 전부 다 합해서, 그것을 합해서 한 가마솥에다 넣어 가지고 푹 고아 가지고 탁! 그 골수를 추출해 놓은 것, 추출해 가지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발전시킨 관법(觀法)이 무엇이냐 하면은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이여.


그러면 어떤 점에서 앞에 든 여러 가지 관법(觀法)보다는 활구참선(活句參禪)이 그렇게 수승하냐 하면은 앞에 말한 사념주관이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이 전부 이로(理路) 말길이 있고, 이치길이 있고, 문해사상(聞解思想)이 있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어.


지금 내가 여기서 그러한 여러 가지 경에 나타난 관법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할 시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 좋은 관법이고, 소중한 관법이여.

어떠한 근기에 따라서는 그러한 관법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스승이 계시다면, 그 관법을 통해서 견성성불한 대도사가 계시다면 그 관법을 해서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법을 통해서 바른 깨달음을 얻은 분의 지도가 없이 자기 나름대로 경을 보고 그런 관법을 한 번 해 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한 해 여름에 60명이라는 사람이 그런 참 엄청난 본의 아닌 길에 빠졌거든, 하물며 오늘날 우리가 함부로 관법 한답시고 이런 관법도 해 보고, 저런 관법 해 보고, 대단히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왜 오늘 일요법회에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냐 하면은 근자에 와서 많은 사람이 산승한테 와서 그 관법에 대한 질문을 해 왔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 남방에 세일론이라든지, 버마라든지, 태국이라든지 모다 그런 데 남방에서는 아직도 그러한 관법을 통해서 많은 스님네들이 수행을 하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유학을 온 스님네에 의해서 이 관법이 사람들에게 그 선전이 된 모양입니다.

그 관법 자체가 나쁘다고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법은 꼭 할려면 반드시 바른 스승에 의지해서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이 법보재자는 그러한 관법보단, 그러한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득이해서 알라야 알 수도 없고, 도저히 무슨 뜻인 줄도 알 수 없는 이러한 맛없는 한마디 말을 주어서 참구(參究)하되, 말길 이치길 어떠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뭣고~?' 이렇게 해라 이거거든.


'이뭣고?' 한마디에 거기에서 말길이 끊어져 버리고, 이치길이 끊어져 버리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끊어져 버리고, 일체 번뇌와 망상,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이 거기서 다 끊어져 버리는 거여. '부처다, 중생이다, 마음이다'하는 것도 다 거기서 다 끊어져 버려.


'이뭣고?'

그래서 이것을 경절문(徑截門)이라,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그래서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참선, 이 활구참선은 육조 스님, 육조 스님께서 '이뭣고?'

'한 물건이 있는데 밝기는 해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고, 뭐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이냐?'


벌써 그게 시심마(是甚麽) 화두거든.

화두라는 이름은 붙이지 안했지만 제자들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벌써 화두를 주셨어.


그 제자이신 신수(신회)대사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神會)의 불성(佛性)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

육조 스님께서 "뭐라고 이름 붙일라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도 그릴 수가 없다고 했는데 왜 불성이니, 본원이니 그런 이름을 붙이는고? 니가 앞으로 일가를 이룬다 해도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밖에는 못되겠구나" 이론으로 교리를 분석하고 따지는 그런 불교학자밖에는 못되겠구나.


나중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와서 절을 하니까 "십마물(什麽物)이 이마래(伊麽來)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말에 남악회양 선사는 콱! 맥혀 가지고 몸 둘 바를 몰랐어. 그길로 물러나와 가지고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8년 만에사 확철대오를 했어.

육조 스님을 찾아가 가지고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부중(卽不中)입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환가수증부(還可修證否)아? 도리어 닦아 증(證)할 것이 있느냐?"

"수증(修證)은 즉불무(卽不無)어니와 오염(汚染)은 즉부득(卽不得)입니다. 닦아 증(證)할 것은 없지는 않지마는 오염(汚染)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역여시(汝亦如是)하고 아역여시(我亦如是)다. 너도 또한 그렇고 나도 또한 그렇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에 와서 활구참선이 언하대오, 확철대오 구체화된 한 장면인 것이여.(18분58초~37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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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로 육조 스님 밑에 5대 법손(法孫)—육조 스님 밑에가 남악회양 선사, 그 밑에가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 그 밑에가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사, 그 밑에가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고, 그 황벽희운 선사 밑에 임제의현(臨濟義玄) 스님인데.


육조 스님은 서기 63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713년에 열반하셨고. 그러니까 그때가 8세기 경이고.

임제 스님은 태어나신 연조는 잘 모르고 열반하신 해는 867년이니까 9세기 중엽에 열반하셨는데, 그 임제의현 선사 때 와서 이 간화선(看話禪),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도록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제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송(唐宋)시대에 이 활구참선이 대단히 중국 천지에 널리 선양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경산종고(徑山宗杲) 선사—임제 스님의 11세 법손이신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는 서기 1087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1163년에 열반하셨는데, 12세기 경에 이 경산 대혜종고 선사에 의해서 활구참선이 완성을 보았습니다.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어.


간화선(看話禪)!

그 당시 조동종(曹洞宗)에서는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을 아주 적극 선양을 하고, 임제종(臨濟宗)에서는 이 간화선을 제창을 해서 조동종에 묵조선과 임제종에 이 간화선이 그 종사끼리 대단히 서로 공박을 하고, 힐난한 비평을 하고 그랬었습니다마는.


이 간화선은 조동종에서 비방한 거와 같은 '사량분별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그것을 빨리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것은 삿된 참선이다'하고 조동종에서는 이 간화선을 비방을 하고.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묵조선을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 흑산 밑에 귀신 굴속에서 작활계(作活計)라. 거기서 살림살이를 하는. 캄캄한 데 앉아 가지고 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을 하고 있다고 힐난하게 비난을 했습니다마는.


조동종에서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은 아니지만 거기에도 역시 육조 스님의 제자이신 청원행사(靑原行思) 선사 밑으로 많은 도인들이 배출이 되었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하고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법이 있습니다마는,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법은 우리 말세 우리 중생들에게 상근기(上根機)는 말할 것도 없고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라도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어떻게 아무 생각도 없이,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해라'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묵조선에 조동종에서는 그렇게 가르키는데,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 없는 것을 생각해라' 어떻게 생각한 것이 그런 거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초학자가 어떻게 거기다가 발을 내디뎌야 할 것인지 참 어렵거든.


그런데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말이여.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자꾸 하다보면 그 속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이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이 알 수 없는 '이뭣고?' 이 한마디 속에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일체 팔만대장경에 있는 모든 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거거든. 일체 관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


우리가 아무리 머리가 좋기로서니 팔만대장경을 죽을 때까지 다 읽어서 거기에 그 속에 쓰여 있는 요점을 추려서 그것을 실천할려고 해 보십시오.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거여.

불보살 화현(化現)이신 육조 스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들, 다 그러한 조사들에 의해서 개발된 이 활구참선을 우리는 무조건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철저하게 단속을 해 갈뿐인 것입니다.



관법, 관법하는데 그 관(觀)이라는 게 대관절 무엇이냐?

관(觀)이라는 게 우리 생각 일어나는 그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거든. 관조(觀照)하는 것이거든.


중생 생각, 중생이 가만히 앉아서 무슨 생각이든지 일어났다 하면은 그것은 망념(妄念)이여. 그 망념 일어나는 그 뿌리는 진리요, 진여(眞如)인 그 본체에서 나오지만 이미 거기서 한 생각 폭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망념인 거여.

천하 없이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은 망념이여. 부처님 경전 속에 쓰여 있는 생각이 일어났다 해도 중생의 생각에서 나오는 생각은 그것이 망념인 거여.


그 망념을 탁! 관조해 가지고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관(觀)'이라 이거거든.

'관심(觀心)'이라고도 하고 '관법(觀法)'이라고도 하고 그렇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에 즉(卽)해서 마음을 관(觀)한다' 그러는데 마음이 무엇인 줄을 알아야지, 우리가.


'마음, 마음' 그렇게 누구나 말하지만,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망념은 우리가 알 수가 있지만, 그 망념이 일어난 그 마음, 망념의 그 본체는 우리 생각으로 알 수가 없고, 우리 눈으로 볼 수가 없고, 우리 손으로 붙잡을 수가 없어.

볼라야 볼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는 그것을 바로 보는 방법이 '이뭣고?'거든.


사량분별한 망념 자꾸 일어나 가지고 우리 모든 생사(生死)도 거기서 일어나고, 모든 죄도 거기서 일어나고 그런데,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그놈을 알려고 한다고 보여질 것이냐 그말이여.


마치 물은 때로는 얼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그 기후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물 형태는 변하지마는 그 변하지 않는 그 본체는, 본성은 무엇이냐 하면은 습성(濕性)이라 하는 거여.

그것 습성(濕性), 얼음으로 있을 때도 습성은 변함이 없고, 기체로 김 기체로 있을 때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액체인 물로 있을 때에도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눈으로 되었거나 우박으로 되었거나 폭포수로 되었거나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물의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거여.


그런데 그 습성(濕性)은 우리가 볼 수가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아무리 헤집고 봐도 습성은 보이지 아니하고, 얼음을 아무리 가루로 부숴도 그 물 가지고 있는 그 본성은 볼 수가 없는 거여.

어떠한 형태로 있어도 그 본체는 거기에 있으며 변함이 없지마는 중생의 소견으로는 볼 수가 없는 거여.


그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이뭣고?'

'이뭣고?' 해 갈수록 꽉 막혀서 알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는 의심, 의단(疑團)뿐이어야 해. 그래야 그것이 옳게 되어 가는 거여.


처음에는 자꾸 하면 잊어버리고 '이뭣고?'해도 망상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망상이 일어나도 따라가지 아니하면 그만인 거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도 '따라 주지를 말어' 무슨 망상이 일어나면 그놈을 따라가지 말어. 따라가다 보면은 안 되는 거여.

따라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좋은 생각이 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나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뿐인 거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는 바로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이 그 속에 다 들어있어.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육백만 번 부른 공덕이 화두 한 번 들은 속에 다 들어 있다.



활구참선법, 활구참선법은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용궁에 다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용궁에도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든지,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라든지,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이러한 것은 없다. 고조사(古祖師)는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이냐 하면은 이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것이다.


염화미소(拈花微笑)와 곽시쌍부(槨示雙趺)와 다자탑전에 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이게 다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말합니다마는 교(敎) 밖에 따로 전한,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이거거든.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뭔 말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저가서 무슨 다른 말을 들으면 그리 확 쏠리고.

'염불 아미타불을 불러야 극락세계에 가지, 말세 중생은 죄가 많고 근기가 하열해서 참선 화두 해봤자 되지도 않어. 관법을 해야 한다. 염불을 해야 한다. 법화경을 읽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고 중심이 흔들려서 이것 조금 해보다 그것도 또 잘 안되면 저기 가서 저것 좀 해보고.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거거든.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뭣고~?'(37분41초~55분39초)




(4/4)----------------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하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니라

나무~아미타불~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우리 낱낱이 모든 사람 앞에는 얼굴 앞에는 밝은 달이 희고,

인인각하청풍취(人人脚下淸風吹)다. 사람사람이 다리 아래는 청풍이 불더라. 지금 봄이 되어서 밤이 되면 환히 달이 밝고, 우리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분다 이거거든.


누구라고 해서 특별히 그 사람 앞에만 달빛이 비치고, 특별한 사람 앞에만 청풍이 불어주는 것이 아니여.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선악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달빛은 한결같이 비치고, 맑은 바람은 한결같이 불어오더라 이거거든.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거울, 거울을 타파해서 그림자와 자취가 없으면. 그 거울은 무슨 거울이냐?

흰 것이 오면 흰 것이 나타나고, 붉은 것이 오면 붉은 것이 나타나고, 사람이 오면 사람이 나타나고, 짐승이 오면 짐승이 나타나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그 거울 앞에 오면은 다 조금도 숨김없이 있는 고대로 그 거울 앞에 나타난다 그말이여.


그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 우리 중생은 '희다, 검다, 누르다' 온갖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분별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거기에서 선(善) · 악(惡) · 무기(無記), 삼성(三性)의 마음이 동요되어 가지고 삼세육추(三細六麤)의 번뇌 망상이 벌어져 가지고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를 하게 되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비추는 그 거울을 갖다가 때려 부셔 버려.

그래 가지고 거울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도 없어져 버리고, 그 거울 자체도 자취가 없도록 다 없애버리면, 일성제조(一聲啼鳥)가 상화지(上花枝)더라.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올라가더라.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걸어가면서도 '이뭣고?'

일 하면서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어떤 분이 산승(山僧)에게 "『선가귀감』이나 그밖에 어떤 그 어록(語錄)이나 경서(經書)를 의지해서 차례차례 설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한 일정한 그 경책이나 어록이나 그런 거를 의지하지 않고 올라와서 내키는 대로 말을 하니까 밤낮 한 얘기 도로 하고, 도로 하고 해서 그러니 그거 보단 어느 한 경책에 의지해서 주욱 하면 중복되지 않고 좋지 않겠느냐?" 그러한 충고를 간접적으로 해 왔습니다.


대단히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마는 산승이 이 법상에 올라와서 설해야 할 어떠한 법이 있어서 설한 것이 아니여.

법(法)은 우리 법보선원에 조실(祖室) 스님이신 전강(田岡) 대선사의 법문 한 편 들으면 그 이상 더 법문 들을 것이 없고, 그 이상 더 설할 법이 없습니다.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간혹 조사어록이나 경전 속에 있는 어떤 설화나 그런 것을 가끔 인용하기는 하지만, 듣고 보면 내나 '이뭣고? 열심히 하라' 그 말이거든.


'에이, 그 백번 가야 그 소리할 바에는 가지 말자' 그래 갖고 오지 않고 여행 가고, 골프 치러 가고, 수영장에 가고, 등산에 가고, 철철이 기후 따라서 해수욕 가고, 그런 분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산승은 다 알고 있습니다.

'가봤자 밤낮 한 생각 단속하고 밤낮 이뭣고? 하라는 거, 그 소리는 용화사까지 이 교통지옥 속에 어렵게 갈 것이 없이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그냥 있으면 되는 거, 뭐하러 또 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또 안 오셔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마는.


그래도 추우나 더우나 그 어려운 교통 혼잡 속에서 이른 아침부터서 쉬지 않고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시고, 이 서울 인천뿐만이 아니라 저 지방에서도 이렇게 오시고.

그 괴로운 것을 무릅쓰고 오시는 그 신심, 그 신심 속에 그분은 반드시 대도(大道)를 성취할 아주 그 씨를 심었다고 할까, 아주 그 표(票)를 이미 끊어 놓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신심을 가진 분이 '이뭣고?'를 열심히 아니할 수가 없고, 그래도 와서 조실 스님 법문 듣고 또 산승의 말도 들어보면 그래도 한마디쯤은 마음에 와서 닿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리해서 또 한 달 동안을 그 힘으로 또 열심히 공부를 해 나가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같이 또 법문을 듣고 또 산승의 경책해 드리는 말씀을 듣고, 같이 부처님께 삼정례(三頂禮)를 올리고 또 발원을 하고, 이리함으로써 자칫하면 풀어지고 해태하려다가도 그놈을 채찍을 가하는 좋은 계기를 삼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달이 법회를 여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분인들 어찌 산이나 바다나 그밖에 재미있게 놀고, 푹 일요일을 쉬고 싶은 생각이 왜 없으시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오시는 그 뜻은 부처님께서 왕궁의 부귀를 버리시고 설산에 들어가서 고행하신 뜻, 삼세제불과 팔만사천의 모든 보살과 역대조사들이 인생에 오욕락(五慾樂)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출가하신 거룩한 뜻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일 전에 입하(入夏)가 지나갔습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더워지겠습니다.

몸조심하시면서 그 더위와 이 나의 신심과 정면으로 맞부딪쳐 나가면서 열심히 정진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55분47초~69분12초)(끝)




[법문 내용]


(게송)득지재심응재수~ / 부처님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여쭈어본 것, ①차익(車匿)이를 어떻게 할까요? "묵빈대처(默擯對處)를 해라" ②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해야 할까요? "계를 스승으로 삼아서 그 계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라" ③무엇을 의지하여 머물러야 할까요? "4념주(四念住)에 마음을 머물러라"


심불반조(心不返照)면 간경무익(看經無益) / 잘못하는 수행의 위험(집장범지) / 수식관(數息觀) / 천태삼관(天台三觀), 화엄 법계삼관(法界三觀), 남산 율종에 삼관, 원각경에 원각삼관(圓覺三觀), 유식삼관(唯識三觀) 등의 관법(觀法)의 골수가 다 들어 있고 한 걸음 더 발전시킨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가장 수승한 관법, 그래서 경절문(徑截門), 그리고 최상승법이라 한다.


육조 스님(638~713)에서 내려와 임제 스님(?~867)을 거쳐서 대혜종고 선사(1087~1163)에 의해서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 가는 간화선(看話禪), 활구참선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 화두를 참구해 가지고 참선하는 간화선은 모든 근기의 중생이 올바르게 공부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행법. 그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다 /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활구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다.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교(敎) 밖에 따로 전하신,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바로 그 마음자리를 가리켜서 견성성불케 하는 최상승법이다.

(게송)개개면전명월백~ /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



신수심법(身受心法), 이것을 하나씩 하나씩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요' '수(受)는 괴로운 것이요'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일체법은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항상 거기에다가 마음을 머무르는 거여.

그래 그것이 잘되면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은—요 네 가지를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싸잡아서, '신수심법은 부정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이렇게 관해 나가는 거여.


이미 최상승(最上乘) 활구참선에 입문을 해 가지고 활구참선을 하신 분은 그러한 여러 관법의 골수가 다 이 활구참선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더군다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발전시킨—무어로(無語路) 말길이 끊어지고, 이치길이 끊어지고, 듣고 알고 생각하는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끊어진 이 경절문(徑截門) 활구참선, 일단 이 문중(門中)에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가 가지고 다른 관법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 물러선다고 하는 것은 참 너무너무 가련하고 가련한 생각이 들어서 이 관법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말 있음으로 시작해 가지고 차츰차츰 말 없는 데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 활구참선법은 처음부터 말과 이치를 떠난 방법으로 해서 말 없는 궁극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길인 것입니다.


이 법은 숙세(宿世)에 선근(善根), 이 정법에 선근을 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있는 인연도 가질 수가 없고, 이것을 듣고 할려고 하는 마음 내기는 더욱 어렵고, 시작해 가지고 끝까지 중단하지 아니하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밀고 나가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이 간화선은 '이뭣고?'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보라 하면 아! 국민학교 학생도 그렇게 할 수가 있고, 중학교 학생도 할 수가 있고, 대학생도 할 수가 있고, 일반 사회에 남녀노소가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자꾸 법문을 들으면서 바른 자세로 바른 호흡을 하면서 일체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해라. 그렇게만 자꾸 하다보면 반드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게 되어 있는 거여. 이러한 공부하는 자세한 방법이 『선가귀감』에도 있고, 또 『몽산법어』에 아주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법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속에 앞에 말한 사념주관(四念住觀)이라든지 천태삼관이나, 화엄경의 법계삼관, 원각삼관, 유식삼관,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으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훌륭한 수행법이여.


해 봐야 알아.


이 최상승법의 법문을 듣고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경을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염불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어디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나, 경을 때에 따라서 금강경을 읽을 수도 있고 고왕경을 읽을 수도 있고, 반야심경을 읽을 수도 있고, 법화경이나 화엄경을 읽을 수도 있어. 또 때로는 '아미타불'을 부를 수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부를 수도 있어.


그러나 활구참선 속에는 그러한 여러 가지 방편법이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고, 그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최상승법이라고 하는 그 깊은 신심은 흔들려서는 아니돼.


활구참선이 말세 중생에 맞지 않고 하근기(下根機)에 맞지 아니하면 무엇 때문에 역대조사가 그렇게 열렬하게 강경하게 이 법을 강조를 하셨겠느냐 그말이여.

'열심히 믿고 철저한 신심(信心)과 큰 분심(憤心)과 큰 의심(疑心)을 가지고 해 나가면 그렇게 알뜰히 3년을 해서 아니되면 내가 여러 대중을 위해서 대신 지옥에 가겠다' 오조(五祖) 스님도 대중한테 그런 서약을 하셨고, 몽산 화상도 대중 앞에 그러한 맹세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대조사들이 다 그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랐거나 안 깨달랐거나, 생겨난 때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나 고대로 있는 거여. 우리 자체 내에도 있고, 모든 사람에게도 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 속에도 다 있어. 티끌, 조그만한 먼지 털 속에도 다 들어 있어.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그 속에도 한량없는 중생이 티끌 속에도 한량없는 무수 중생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티끌 속에도 다 계셔서 상주설법(常住說法)을 하고 계신 거여.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태양계, 우주법계 이 세계만이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의 세계가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또 들어 있고, 삼세제불이 그 속에 다 들어 있고, 그 속에도 끊임없는 육도윤회의 세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리가 우리 자체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 그놈으로 인해서 온 세계가 벌어지고, 그놈을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삼세제불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이뭣고?' 이 얼마나 간단하고 간결하고 누구나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 그말이여.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무조건 하고 '이뭣고?'여. '이뭣고~?'


산승은 "원장(院長)으로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여러분과 같이 듣고 마음 깊이 감동된 바를 여러분께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과 같이 더 큰 신심(信心)을 내고, 더 큰 분심(憤心)을 내고, 더 큰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올바른 방법으로 이 활구참선을 열심히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에까지 이르자" 그러한 말씀을 해 드릴 뿐인 것입니다.

그 말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나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