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26~50)2023. 8. 5. 13:43

(No.038)—1977년 2월 관음재일 법어(음 77.2.24) (53분)

 

(1) 약 28분.

 

(2) 약 25분.

 

(1)------------------

정사년(丁巳年) 2월 24일 관음재(觀音齋) 법요식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조실 스님 법문은 처음 들으신 분은 ‘대관절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도저히 이해가 잘 가지 아니하고, 한 시간 가까이 들었지만 한 말씀도 머리에 남지 아니하고 알 수 없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어려운 법문인 거 같습니다.

원래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가히 설(說)할 수 없는 것이고, 말로써 뭐라고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가히 귀로써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과 큰스님네는 말로써 설할 수 없는 것을 능히 설하시고, 귀 밝은 사람은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것을 능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고서 ‘아하! 이러한 줄거리로 말씀을 하셨구나. 이러한 말씀이로구나. 과연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르르 하니 그 말씀의 줄거리를 이해를 하고, 그 법문을 듣고 난 뒤에도 환해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그 들은 바 법문 내용을 질서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히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법문을 잘 들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잘 듣고, 그 들은 법문을 다른 사람에게 고대로 옮길 수 있는 사람보다도 훨씬 더 법문을 잘 알아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하면은 그 법문을 한 말씀도 옮길 수는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들으면서 또 듣고 나서 알 수 없는 생각에 부딪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그 의심 하나만이 나타나 가지고 일체 번뇌 망상과 잡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다맛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법문을 듣고 공양을 잡수시되 공양을 들은 그 순간 순간에도 밥이 맛이 있는지, 밥이 된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고, 다못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이 한 생각만이 현전(現前)해 가지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법문을 참으로 잘 들으신 분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하시는 최초에 ‘유정(有情) 무정(無情)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운하(云何)로 홀생(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냐’ 이 법문은 『능엄경』에 있는 법문입니다.
유정(有情) 무정(無情), 유정은 꿈적꿈적할 줄 아는 놈, 일체 동물이 사람이나 동물이나 벌레에 이르기까지 파리 · 모기 · 빈대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동물은 그것이 유정이고, 무정은 나무 · 돌 이러한 것들이 식물이나 광물이나 이러한 것들은 전부 무정인 것입니다.
그러한 유정이나 무정이나 삼라만상(森羅萬象), 삼라만상이라고 하면은 해 ・ 달 ・ 별 ・ 지구, 지구 안에 있는 모든 거,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이 전부 다 들어서 삼라만상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유정 무정도 역시 삼라만상 속에 갈라진 것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이다, 청정본연(淸淨本然)하다. 본래성불이라 생사(生死)가 없는 것이다. 청정본연해서 본래성불이어서 그래서 생사윤회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어째서 문득 산(山)과 강(江)과 이러한 땅이 생겼느냐 이 말이여.
본래성불인데 어째서 사람으로도 태어나고, 짐승으로도 태어나고 일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생겨나 가지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찰나찰나에 변해 가지고 결국은 파괴되고 죽어 없어지는 것이냐 그 말이여. 본래성불인데 어째서 생사가 있고 생로병사(生老病死),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말로는—많은 경전을 읽고, 많은 법문을 들어서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이다, 본래성불이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듣고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없어지거나, 자기의 재산을 누구에게 빼앗기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 ・ 아내 ・ 자식 ・ 친구가 죽게 되거나,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되면 생이별, 사이별하게 되면은 자기가 자기를 수습하지 못할 만큼 가슴이 아프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본래 생사가 없는데 왜 자기 것,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로부터 떠나면은 그렇게 가슴이 아프고,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이 말씀이여.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본래성불이다’ 하고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좋은 비니루 주머니에다가, 가죽 주머니 속에다가 똥과 피와 고름과 송장 뼉다귀 이런 것들을 한 가죽 주머니 속에다가 가뜩 넣어서 그래 가지고 그 자루 아가리를 피와 똥과 고름과 송장 뼉다귀 같은 것들이 나오지 않도록 꽉 쨈매 놔. 그러한 가죽 푸대가 있습니다.
그 가죽 푸대에다가 울긋불긋하게—속에는 그러한 더럽고 징그러운 것이 들었을망정 겉은 깨끗이 씻어 가지고 향수도 바르고, 거기다가 울긋불긋하니 단장을 하고 그래 가지고 비싸게 돈을 많이 주어서 좋은 천으로 그 가죽 푸대를 단장을 잘 해놨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보물처럼 애끼고, 누가 보고 ‘이쁘게 생겼다, 참 좋은 비단이다, 참 냄새가 좋은 향내가 난다’ 그러면 좋아서 못 견디고, 자기 나름,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새벽부터서 단장을 해서 그 가죽 푸대를 잘 단장을 해서 내놨는데, 남이 보고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거나, 보기 싫게 생겼다고 하거나, 무슨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고 하면은 기분이 팩! 상해 가지고 울고불고 그날은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그러다가 어떠한 기회에 그 가죽 주머니에 구녕이 뚫어져 가지고—구녁이 뚫어지기 전에는 그 가죽 주머니를 잘 단장을 해 가지고 자기도 그것을 좋아하고 또 그 가죽 주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와 가지고 그 만져 보고 뺨을 비비고 끌어안고 좋아서 못 견디다가, 그러다가 어떻게 잘못해 가지고 가죽 주머니에 구녁이 퐁 뚫려 가지고, 피고름이 뻐걱뻐걱 기어나오면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그 속에서 똥 썩은 뼉다구가 툭 불거져 나오면은 코를 막고 눈을 가리고 혼비백산해 가지고 뒤로 벌떡 나자빠진다 그 말이여.
어째서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지기 전에는 그렇게 좋아서 못 견디다가,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더러운 것이 나오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뒤로 나자빠지냐 그 말이여.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피고름이 나오면은 벌떡 나자빠질 줄 알면서, 어떠한 사람은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져 가지고 완전히 속에서 피와 똥과 고름과 뼉다구가 터져 나와 가지고 코를 들을 수가 없고 눈으로 볼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그 가죽 주머니가 뚫어지기 이전에 잘 단장을 해서 향수 발라서 비단으로 칭칭 틀어 감아 놨을 때 그때만을 생각해 가지고 그 가죽 주머니를 보고 싶어하고, 그것을 다시 한 번 또 끌어안아 보고 싶고 그것을 못 잊어서 날마다 안타까워하고 울고 있다고 하면은 여러분들은 아마 그 사람을 보고 정신이 돈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그 가죽 주머니는 내가 이야기로 꾸며 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몸뚱아리가 바로 그 똥과 오줌과 피 고름 송장 뼉다구가 속에 들어 있는 가죽 푸대입니다.
그 가죽 푸대가 이상하게도 말도 할 줄 알고, 귀로 들을 줄도 알고, 손으로 만질 줄도 알고, 발로 걸어다닐 줄도 알고 그뿐이 아니라 그 가죽 주머니는 신기한 것이, 가죽 주머니 고대로 앉어서 서울도 왔다갔다하고, 부산도 왔다갔다하고, 미국도 왔다갔다하고, 10년 20년 어릴 적 시대로 시간을 거리낌없이 시간도 맘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앞으로 자유자재로 왕래를 한다 그 말이여.

가죽 주머니가 보통 가죽 주머니가 아니라 신기하고도 묘(妙)하고 신통(神通)이 자재(自在)한 그러한 보물의 가죽 머니다 그 말이여. 그 가죽 주머니 속에, 그 가죽 주머니를 째고 그 속을 들여다봐도 그 속에는 피와 오줌과 똥과 뼉다구 밖에 안 들었는데, 그 가죽 주머니가 이상하게도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그러한 가죽 주머니여.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신통이 자재한 보물이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것을 아지 못하고, 냄새나고 피와 오줌과 똥이 가뜩 들어 있는 그 고약한 가죽 주머니만을 좋아하고 애끼고 그리워할 중 밖에는 모르고 있다 그 말이에요.

그러한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 보물만 발견을 해서 그 보물만 획득을 한다면은 그까짓 냄새나고 얼마 안 가면 언젠가는 터져서 썩어 없어질 고약한 가죽 주머니는 우리는 그것은 두 번 다시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 광산(鑛山)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광산을 구녕을 뚫고 파 들어가서 광맥(鑛脈)을 찾아 가지고, 광맥 속에 들어 있는 광석(鑛石)을 캐내 가지고 그것을 방아를 찧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을 추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광(金鑛)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나 보통 다른 산(山)과 마찬가지지마는 그 잘 아는 사람이 보면은 ‘이 산은 반드시 이 속에 금이 들어있겠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갖은 기계를 동원을 하고 인력을 동원을 해 가지고, 그 광산에 구멍을 뚫고 굴을 뚫고 들어가서 열 질 스무 질 지하로 몇백 메타를 파고 들어가면은 광맥이 있는 것입니다. 그 광맥을 찾아 가지고 광석을 캐내서 그래 가지고 방아를 찧으면은, 방아를 찧어서 물로 이루면은 한량없는 많은 금가루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 몸뚱이는 산(山)입니다, 광산(鑛山). 광산이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눈을 통해서 볼 줄 알고, 귀를 통해서 들을 줄 알고, 코로 냄새 맡을 줄 알고, 혀로 맛볼 줄 알고, 손으로 만질 줄 알고,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분별을 할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시간과 공간에 걸림 없이 왔다갔다하고, 그러한 여섯 가지 육식(六識), 육근(六根)이 있습니다.
그 육식을 통해서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울다가 웃다가 성내다가, 일평생을 그러한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중생심(衆生心)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중생심이 무엇이냐? 번뇌 망상이 무엇이냐 하면은 그것이 광맥(鑛脈)입니다, 광맥. 광맥, 광석, 그 광석(鑛石)을 캐내 가지고 그 광석을 방아를 찧어서 그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을 추려내.

번뇌 망상! 우리는 그 번뇌 망상 때문에 결국은 자기 뜻대로 뭣이 되어 가면 ‘행복하다’ 그러는 것이고, 자기 뜻대로 뭣이 안 되었다 하면 그것을 갖다가 ‘불행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하는 것은 자기 뜻에 맞느냐, 안 맞느냐 그 차이뿐인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한 것이 어떠한 외부적인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내심(內心), 내심으로 그것을 자기 뜻에 맞다고 생각하느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여.

그래서 번뇌 망상 속에 들어 있는 ‘참나’가 있습니다. 그 참나라고 하는 것이 광석 속에 들어 있는 금(金)입니다. 광석 속에는 반드시 금이 들어 있듯이, 번뇌 망상 속에는 ‘참나’, ‘부처’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광산(鑛山) 속에 굴을 뚫어 가지고 광맥(鑛脈)을 찾아 들어가서 광석(鑛石)을 파내 가지고 방아를 찧어서 금(金)을 추려낼 줄을 알면서, 어째서 우리 몸뚱이에 광산, 번뇌 망상의 광석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여. 법문(法門)을 그렇게 듣고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아니하냐 이 말이여.

산속에 들어 있는 금(金)은 설사 아무리 많은 금을 추려내 봤자 그것은 물질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일조일석(一朝一夕)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자타가 야단이지마는 그 재산은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이 지내면은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납니다. 떠날 때 곱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창과 칼로 수천수만 번을 찌르고 째서 소금을 뿌리다시피 그러한 상처를 안겨 주고서 나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서운 독사보다도 더 무서운 그러한 이름에 보물을 얻었을 때는 그렇게 좋아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몇 번을 살림을 다 떨어바치고 친구의 재산, 일가친척의 재산을 다 끌어모아다가 그러한 사업을 하다가 다행히 잘되면 좋고, 안 되면은 일조일석에 처참한 거라지가 되고 말고 그러다가 결국은 피를 토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한 무서운 것을 위해서는 생명과 재산을 다 바치면서 그것을 캐낼라고 애를 쓰면서,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나 자신의 보물! 열심히 찾기만 하면 반드시 찾고야만 마는 그러한 보물! 한 번 찾기만 한다면 영원히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나로부터 떠날 수가 없는, 버릴라야 버릴 수 없는, 그리고 영원히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보물은 찾는 데에 그렇게 인색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법문을 절에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절에 다니시면서 법문을 듣고 환히 다 알고, 천수(千手)를 두르르 외우고 온갖 경전을 다 외우고, 금강경을 다 외우고, 무슨 경전하면 출출출출 아! 그렇게 육두백판으로 다 안다 하더라도 내가 참나를 찾는, 나를 찾는, 나를 찾아서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은 그러한 믿음, 그러한 신도는 참부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은 거두절미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과 그 사람의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나!—설사 이 똥 주머니와 같은 이 허망하고 징그러운 이 몸뚱이는 얼마 안 가서 터져 가지고 한 줌의 흙, 냄새나는 추악한 한 줌의 흙이 될지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 참나를 찾아서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행복의 길을 여러분에게 직접적이고 그리고도 간단하고도 쉬웁게 여러분에게 안내해 드리고 있는 수도원(修道院)입니다.
여기에 나오신 분 가운데에는 오래전부터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많이 듣고 잘 알고 열심히 공부하시고 계신 그러한 분도 계시지마는 오늘 처음 나오신 분도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허망한 몸뚱이 머지않아서, 여기에 앉으신 분은 머지않아서 차츰차츰 한 걸음 앞서가고 한 걸음 뒷서 가서 언젠가는 이 허망한 몸뚱이가 결국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날이 10년 후이냐, 20년 후이냐, 30년 후이냐? 또는 불행하게도 일 년 후이냐, 한 달 후이냐, 하루 후이냐? 오늘밤 일을 우리는 모르는 것입니다.

오래 30년 내지 50년 뒤까지 살아계시면 그러고 몸이 건강해서 오래오래 사시면 참 그 이상 다행할 수가 없지마는,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권리와 지위와 명예가 높다 하더라도, 또 평소에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죽음의 날짜에 대해서는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속담에 ‘기생 절개(節介) 있는 것 못 믿고, 겨울 날씨 좋은 것 못 믿고, 노인 정정한 것 못 믿는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비단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들 생사(生死)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생사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한마디씩 말을 해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 동안에도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공부하기가 어렵겠구나”

또 그다음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사는 한나절을 두고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너도 공부하기가 틀렸구나”

또 한 제자가 말하기를 “밥 한 끼니, 밥 한 그릇 먹는 동안에도 죽을 수가 있습니다”
“너도 공부하기가 틀렸구나”

마지막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이라 하는 것은 숨 한 번 속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숨 한 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옳다. 너는 공부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8분16초)





(2)------------------

‘아직은 나이 젊으니까 아들딸 다 여워 놓고 그래도 집이라도 하나 다 사 놓고 그런 다음에 내가 참선을 해야지 지금은 아들도 아직 못 여웠고, 딸도 아직 시집을 못 보냈고, 아직 집도 제대로 장만을 못했으니 이래 가지고 내가 절에 가서 언제 참선을 해야? 우린 아직은 그럴 겨를이 없어 못한다’ 이러한 분을 종종 만납니다.

아들딸을 여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집을 얼마든지 돈을 잘 벌어서 집을 장만해야지 장만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 해 놓고 나서 참선을 하리라’ 하고 기다리다가는 죽음이 기다려 주지를 않기 때문에 다 하도록까지 기다려 주고, 그리고도 건강해서 백 년, 이백 년만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장된다면은 우선 급한 일부터 해 놓고 나중에 느긋한 마음으로 차분히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무상(無常)이 원수라 기다려 주지를 않습니다.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에 아들을 여의고, 딸을 여의고, 살림을 하면서 내가 나를 찾는 공부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하고 그럭저럭 살림에만 골몰하고 아들딸에만 얽매여 가지고 발버둥만 치다가 죽어가게 될 때에 아들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딸이 나를 위해서 죽어 줄 수도 없는 것이고.
‘손자 때문에 집을 못 비우고 나온다’ 그 손자를 금이야 옥이야 하고 귀여워하고 그것을 똥, 오줌을 잘 닦아서 키워 주고, 그놈이 아프면은 같이 잠을 못 자고 밤을 지새우고, 당연히 그리해야 하고 인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마는, 그 짓만 하고 나를 찾는 공부를 안 한 사람은 나중에 내가 이 몸뚱이 찰나간에 그 가죽 주머니가 툭 터져 가지고 피와 똥 고름이 터져 나올 때에 그렇게 귀엽게 키워 주던 손자, 아들이 그 똥 주머니를 터지지 않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성의를 다해서 병원에도 모시고 가고, 치료도 해 드리고, 병구완을 성의껏 하기는 하겠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일조(一朝)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찌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몸뚱이 살았을 때, 이만큼 건강할 때에 옳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른 방법을 알아 가지고 생활하는 가운데에 열심히 열심히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나를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녹음 끊김)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 가지고 그때는 아들딸도 귀엽지도 않습니다. ‘저놈들 때문에 내가 공부를 못해 가지고 이런 삼악도에 떨어져서 이 무서운 괴로운 고(苦)를 받는다’고 할 때에 그때에 가서 아들딸, 손자는 원수밖에는 아니된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귀여운 자식, 귀여운 딸, 귀여운 손자를 원수로 만들 작정입니까?

펄펄 뛰는 귀여운 아들이 얼마든지 눈앞에 죽어가는 그러한 일을 나는 요 며칠 새에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 절 신도, 대전 신도, 광주 신도 그렇게 부처님께 빌고, 건강하고 오래 살고 부자로 되고 모든 소원이 되기를 부모님도 빌고, 스님네도 빌고 그랬지마는 자기가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지어 논 그 업(業)은 면할 길이 없어. 언제 가던지 한번은 가는데, 그 가는 아들을 위해서 가슴 아픈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울고불고 피를 토하면서 잠을 안 자고 밥을 굶고 슬퍼한다고 해서 그 아들이 다시 살아 오지도 않고,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기왕 가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자기가 과거에 그렇게 지어서 그렇게 가는 것이여. 누구 아무 탓도 아닌 것입니다.

설사 그 자식이 어떠한 강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 강도를 원망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생(前生)에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살생(殺生)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인연(因緣)으로 쫓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인연으로 쫓아서 살다가, 인연으로 쫓아서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라 누구의 탓도 아니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기를, 오래 살다가 편하게 잘 가면은 천 번 만 번 다행하지마는 그러한 일들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만큼 건강했을 때에 나를 찾는, 이 생사(生死) 속에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깨닫기 위해서 열심히 참선(參禪)을 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이고, 죽은 아들과 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또 해야 할 일은 피를 토하면서 울 일이 아니라 나를 찾는 길입니다.
나 한 사람이 마음을 수습해 가지고 이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서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참나를 찾을 때, 화두 한 번씩을 들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나를 찾을 때에 나만 생사 없는 대도(大道)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죽은 아들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시방국토(十方國土)가 청정하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그렇게 가슴 아프고 슬퍼할 줄 아는 놈, 대관절 아무리 만져 보고 찾아보아도 얇은 가죽 속에는 피에 범벅이 된 고기 덩어리요, 그 속에를 생각해 보면은 창자와 오장육부, 그리고 그 가죽 주머니를 지탱하기 위해서 뼉다구가 이리저리 얽켜 있는 것 뿐입니다.
그 속에서 그놈을 끌고 다니고, 그놈을 이리저리 명령하는 그 주인, 참나, 그놈이 무엇이냐 그 말씀이여. ‘이뭣고?’
‘이뭣고?’ 슬퍼할 때도 ‘이뭣고?’ 기쁜 일이 있어도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무엇이 이렇게 성을 낼 줄 알어? 무엇이 이렇게 가슴 아퍼할 줄 알며, 무엇이 이렇게 기뻐할 줄 아느냐 그 말이여.

이 공부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쁜 일을 당하면은 기쁜 데에 빨려 들어가서 나를 잃어버리고, 속상한 일을 당하면 속상한 일에 빠져들어 가 가지고 허우적거리면서 나를 잃어버리고, 슬픈 일을 당하면 슬픈 속에 빠져들어 가서 슬픔에 노예가 되어 가지고 나 자신을 망각하고, 그렇게 몸부림치고 그렇게 발버둥치다가 자기 자신도 눈을 감게 되는 것이 우리 무상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이러한 허망하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을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왕궁(王宮)의 태자로,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 그러한 영화(榮華)와 공명(功名)을 한 몸에 타고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이 안 계셨던들, 부처님이 그러한 지혜로운 길을 우리에게 가리켜 놓지 않으셨던들 우리는 이 자리에 모여서 이 생사 없는 영원한 행복의 길을 찾는 이 참선법(參禪法)을 들을 수도 없을 것이고, 영원히 육도윤회(六途輪廻) 속에서 울다가 웃다가 몸부림치다가 그렇게 여기에서 죽었다 저기 태어나고, 저기서 죽었다 여기서 태어나고 하기를 한량없이 되풀이하면서 서로 죽이고 서로 죽음을 당하고 하면서 원수의 원수를 맺으면서 삼악도(三惡途) 속에서 몸부림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여읜 분들, 이것은 그분들에 국한된 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입니다. 나 자신의 일입니다.
부디 주책없이 일어나는 잡념, 번뇌 망상 그 일어나는 생각, 아무리 안 할라고 해도 한도 끝도 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왜 그러한 그 속에는 영원히 써도 다할 날이 없는 무진(無盡) 보물이 그 속에 들어 있거늘 어찌 그 보배가 담겨 있는 광석을 내버릴라고 하십니까?
한 생각 한 생각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이, 일어나는 고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물은 바로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참선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어나는 그 생각 때문에 육도윤회를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지마는, 이 참선법을 아는 최상승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아는 여러분은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이 한 생각도 버릴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다못 돌이켜서 나를 찾으십시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앉었을 때나 누었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것은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알 수 없는 한 생각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미련하고 바보스럽게 그렇게 외골수로 고대로 이렇게 지어 나간 사람, 그 사람은 깨달음을 단축을 시킵니다.

만일에 머리가 영리하고 지혜가 있어서 책 보기를 좋아해서 많은 경전 속에서 행여나 좋은 말이 없을까, 행여나 공부에 도움이 될 말씀이 없을까 해서 밤낮 경전을 뒤져거리고, 공부를 하면 답답하고 알 수 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잘못인 줄 알고, 그 답답하고 알 수 없는 그것을 그것이 참으로 공부가 잘되어 간 것이건만 그것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지루하고 답답한 것을 못 이겨 가지고 금방 책을 떠들고, 경(經)을 죽죽죽 읽어 보면은 좀 가슴이 시원하니까 그 맛으로 밤낮 경책(經冊)만 떠들어 보는 그러한 습관이 든 사람이 있습니다.

한 말씀도 부처님 말씀이라 다 주옥(珠玉)같은 말씀이지마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에는, 한번 활구참선을 시작한 이상에는 그러한 경전을 통해서 목적지에 도달할려고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물론 경전도 바르게 보면은 다 공부에 조도(助道)가 되는 것이지마는, 참선하다가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다고 해서 노상 경전을 뒤져거린 것은 그것은 옳은 참선 태도가 아닙니다. 답답하고 알 수 없을수록에 ‘이뭣고?~~’ 간절히 그리고 외골수로 거두절미하고 미련스럽게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참선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몸을 바르게 단정히 가지고 처음에 오른팔을 꼬부리고 그 위에, 아니 오른발을 다리를 꼬부리고 그다음에 왼다리를 그 위에다 올려놓고, 그 책상다리지요. 그리고서 오른손을 펴서 위로 요렇게 올려놓고 그 위에다 왼손을 포개서 올려논 다음, 엄지손 배를 이렇게 맞대 가지고 배꼽 있는 데 아랫배 앞에다 갖다가 딱 놓습니다.
그리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가운데다 딱 안정을 시킨 다음, 그러면은 몸뚱이는 앞이나 뒤나 좌우에 기울어지지 않도록 단정(端正)하면서도 어깨의 힘을 빼서 아무 긴장이 없이 긴장을 다 풀고서 단정히 가진 다음, 이를 따악 물고 혀는 위로 꼬불여서 입천장에다 혀끝을 딱 대고서, 눈은 약 3m 전방에다 눈을 떨구면 됩니다.
눈을 떨군다고 하는 것은 3m 전방에 어느 지점을 의식적으로 응시(凝視)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맛 떴을 뿐이지 아무것도 보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몸을 단정히 갖는 것이 됩니다.

몸을 단정히 한 다음에는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보통 호흡을 허파로 하지마는 수행하는 사람은 배로 합니다.
숨을 들어마셔서 허파를 경유해서 그 호흡이 숨이, 들어마신 공기가 배꼽 밑에 아랫배까지 주욱 들어가서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들어마십시오. 손가락으로 눌러 보면 빵빵하도록.
그렇다고 해서 너무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터지도록 들어마셔서는 아니됩니다. 약 80%만 들어마셔서 눌러 보면은 마치 빵빵할 정도로 들어마신 다음, 2~3초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그 뒤로 배를 홀쪽이 잡아댕기십시오. 그러면은 아랫배 빵빵했던 바람이 서서히 나가게 됩니다.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그냥 보통 숨이 들어간 게 아니라 이 허공계에 가득차 있는 우주의 정기, 우주의 바른 기운이 그 호흡...(녹음이 끊김) 내 몸에 완전히 흡수가 되고, 그리고서 조용히 배를 홀쪽이 하면서 내보낼 때에는 그 찌꺼기, 찌꺼기와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나쁜 찌꺼기가 그 나가는 숨을 따라서 밖으로 배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방안에 여러 사람이 문을 꼭 닫고 여러 사람이 앉어 보십시오. 30분이 못 가서 그 방안에 공기는 아주 탁해집니다. 방안에 앉어 있는 사람은 잘 모르지마는, 신선한 바깥 공기 속에 있던 사람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매캐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몸 안에 있는 나쁜 공기가 밖으로 배설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허파로만 그렇게 얕으게 호흡을 쉬면은 밖에서 빨아드린 바른 생기가 몸안에 완전히 배들지 못하고, 또 몸안에 있는 구석구석이 찡겨 있는 나쁜 찌꺼기가 불순물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밤낮 허파 안에서만 가볍게 들랑들랑하는 호흡은 그것은 좋은 호흡이 아닙니다.
호흡을 어쨌든지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조용히 내쉼으로써 우주의 생기(生氣)는 몸안에 잘 배어들고, 몸안에 있는 불순물은 깨끗이 깨끗이 밖으로 배설이 되어서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육부가 맑아지고 따라서 정신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참선하신다고 하면은 참선해 나가는 도중에 아무런 부작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빠른 시일 안에 나를 깨달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보약을 잡숫고 병을 치료하고 하지마는, 그러한 방법에 우선해서 먼저 근본적인 묘방은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통해서 복식 심호흡을 열심히 함으로써 이 몸을 맑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한 후에 약도 병용한다고 하면은 몸에 병도 훨씬 빨리 치유가 될 것이고, 더군다나 참선하는 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몸을 바르게 단정히 갖은 다음 복식 심호흡을 잘하고, 그 복식 심호흡을 잘한 위에 생각을 어떻게 갖느냐? 이것이 진짜 참선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마는 무슨 생각이든지 우리는 생각이 부단히 일어났다가[生] 그 생각이 얼마동안 머물러 있다가[住] 다른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異] 결국은 그 생각은 꺼지고[滅], 꺼지자마자 또 딴생각이 일어나 가지고 그 일어나는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가 딴생각으로 갈라져서 변해 가지고 그 생각이 또 꺼지고, 그 생각이 꺼지자마자 또 다음 생각이 일어나고 하기를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잠이 꼬빡 들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쉴 새 없이 그러한 정신 작용이 계속되고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잠이 꼬빡 들었을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놈이 놀지 않고 계속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무슨 생각이 되었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몸을, 그다음에 호흡을, 마지막에 생각을 그렇게 바르게 잘 단속해 나간다고 하면은 이 생사(生死)가 무상한 허망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대로 삼세(三世)의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상주(常住)해 계시는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를 극락세계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가 그 극락 생활을 영위하느냐, 또는 이 세계를 그 무섭고 괴로운 삼악도(三惡途)를 만들어 가지고 그 삼악도 속에 괴로움을 못 이기고 울부짖는 삼악도의 지옥 찌꺼기가 되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을 뼛속 깊이 명심해 들으셔 가지고, 되건 안 되건 그것은 따질 것도 없습니다. 되거나 안 되거나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 간절히 간절히 해 나가심으로써 어느 지옥을 만드냐, 극락을 만드냐 하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28분17초~53분2초) (끝)





[법문 내용]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 ‘유정(有情) 무정(無情)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본래성불(本來成佛)인데, 운하(云何)로 홀생(忽生) 산하대지(山河大地)냐’ 『능엄경』 / 우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본래성불이다’ 하고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도리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 모두의 몸뚱이는 바로 똥과 오줌과 피, 고름, 송장 뼉다구가 속에 들어 있는 가죽 푸대 /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푸대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 / 광산(鑛山) - 우리 몸뚱이, 광석(鑛石) - 번뇌망상, 금(金) - 진여불성 / 이 몸뚱이 속에 있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영원히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보물을 찾아라.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다 /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난다 /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 / 부처님께서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다.

일어나는 한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 답답하고 알 수 없을수록에 ‘이뭣고?~~’ 간절히 그리고 외골수로 거두절미하고 미련스럽게 그렇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 참선의 자세. 복식 심호흡 /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을, 무슨 생각이 되었든지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 지옥을 만드냐, 극락을 만드냐 하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떻게 들은 사람이 과연 제일 잘 법문을 들은 사람이냐?’ 하면은 그 법문을 한 말씀도 옮길 수는 없지마는, 그 법문을 들으면서 또 듣고 나서 알 수 없는 생각에 부딪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이, 본참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다못 그 의심 하나만이 나타나 가지고 일체 번뇌 망상과 잡념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다맛 알 수 없는 화두만이 몰록 드러난 사람,
법문을 듣고 공양을 잡수시되 공양을 들은 그 순간 순간에도 밥이 맛이 있는지, 밥이 된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고, 다못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이 한 생각만이 현전(現前)해 가지고 있는 그분이야말로 법문을 참으로 잘 들으신 분인 것입니다.

냄새나고 고약하고 징그러운 가죽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부처님 법(法)이요, 진리(眞理)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번뇌 망상 속에 들어 있는 ‘참나’가 있습니다. 그 참나라고 하는 것이 광석 속에 들어 있는 금(金)입니다. 광석 속에는 반드시 금이 들어 있듯이, 번뇌 망상 속에는 ‘참나’, ‘부처’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광산(鑛山) 속에 굴을 뚫어 가지고 광맥(鑛脈)을 찾아 들어가서 광석(鑛石)을 파내 가지고 방아를 찧어서 금(金)을 추려낼 줄을 알면서, 어째서 우리 몸뚱이에 광산, 번뇌 망상의 광석 속에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여. 법문(法門)을 그렇게 듣고 알고 있으면서 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아니하냐 이 말이여.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은 거두절미하고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빈부귀천과 그 사람의 지식 유무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참나!—설사 이 똥 주머니와 같은 이 허망하고 징그러운 이 몸뚱이는 얼마 안 가서 터져 가지고 한 줌의 흙, 냄새나는 추악한 한 줌의 흙이 될지라도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 참나를 찾아서 영원히 생사(生死)가 없는 행복의 길을 여러분에게 직접적이고 그리고도 간단하고도 쉬웁게 여러분에게 안내해 드리고 있는 수도원(修道院)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렇게 죽음이 코앞에 딱! 다가져 있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느낀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도(道)를 닦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조(一朝)에 다가오는 죽음을 어찌할 도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몸뚱이 살았을 때, 이만큼 건강할 때에 옳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서 바른 방법을 알아 가지고 생활하는 가운데에 열심히 열심히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참나를 찾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그 자식이 어떠한 강도의 손에 의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 강도를 원망할 아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전생(前生)에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살생(殺生)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입니다.
팥 심은 데 팥 나고, 콩 심은 데 콩 나고, 인연(因緣)으로 쫓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인연으로 쫓아서 살다가, 인연으로 쫓아서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라 누구의 탓도 아니요,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시방국토(十方國土)가 청정하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시방국토에 가득차게 칠보로 탑을 세운 공덕보단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깨끗이 가진 공덕이 더 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왕궁(王宮)의 태자로, 정반왕(淨飯王)의 태자로 그러한 영화(榮華)와 공명(功名)을 한 몸에 타고나셨음에도 불구하시고, 그러한 부귀와 공명을 헌신짝같이 버리시고 출가를 하셔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참나를 몸소 깨달라 가지고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남겨 놓으셨습니다.

한 생각 한 생각 그 생각을 버리지 말고, 그 생각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도 없이, 일어나는 고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이뭣고?’를 드십시오. 깨달음은 반드시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물은 바로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