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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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라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니라
나무~아미타불~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우후산조갱상호(雨後山鳥更相呼)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인자유충천기(人人自有衝天氣)요 일념회광시장부(一念廻光是丈夫)다.
사람 사람이 다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한 생각 빛을 돌이키면[廻光] 이것이 대장부(大丈夫)다.
막도염화소식단(莫道拈花消息斷)하라. 부처님께서 염화(拈花)를 드시는데 가섭존자가 미소를 한 그 염화 소식이 끊겼다고 말하지 말아라.
우후산조갱상호(雨後山鳥更相呼)다. 비 개인 뒤에 산새들이 서로 부르고 있지 않느냐.
고조사(古祖師)의 게송입니다.
오늘 동안거 결제일을 맞이해서 용주사 선원 대중, 인제 용화사 대중 또 세등선원 대중 또 위봉사 선원 대중, 승련사 선원 대중, 그밖에 여기저기 수행하는 납자(衲子)들 그리고 금년에 참선 수행하려고 하는 청신사 ・ 청신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전부 참석을 하셔서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을 같이 경청을 했습니다.
결제 법문은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이신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으나 실지로 살아 계신 몸으로 설법을 하신 그 법문을 우리가 감동 깊게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녹음시설이 없어서 한번 열반(涅槃)에 드시면 법어집(法語集)을 읽기 전에는 그 조사 큰스님네의 육성을 들을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녹음시설이 잘 되어서 실지로 설하신 육성 법문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서 비록 말세에 태어났으나 복을 참 많이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고 생각을 합니다.
조실 스님께서 너무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우리가 정진해 나가는데 필요한 조목 조목을 낱낱이 설해 주셔서 산승이 여기서 더 보태서 여러분께 할 말은 없으나, 이 자리에 올라왔으니 여러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 청신사 청신녀 형제자매 여러 도반들에게 몇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결제 ・ 해제, 의례히 관행으로 법요식을 갖고 방(榜)을 짜고 안거(安居)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산승이 지금 간곡히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선방에 나온지 오 년이 되었거나, 십 년이 되었거나, 또는 이십 년, 삼십 년이 되었거나 언제든지 첫 철에 선방에 나온 초발(初發) 행자(行者)와 같은, 초발 납자와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 결제를 하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는 것이 참 좋다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 철에 나온 사람은 긴장도 하고 흥분도 하고, 항상 조마조마 두려우면서도 모든 법과 선배 스님을 공경하는 그러한 외경심(畏敬心)으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십이시(十二時)중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그런 근신하고 하심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수행을 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며칠 간은 그러다가 차츰 익숙해지면 금방 그러한 외경심이 없어지고 긴장감도 없어지고 그래가지고 잡담하고 희소(戱笑)하고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려서 한달 지나고, 두 달 지내면 벌써 해제가 가까워지면 ‘해제하면 어디를 갈까, 어떻게 해제 동안에 살까?’ 그런 생각으로 그럭저럭 지내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오늘 산승이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첫날부터 마지막 해제 될 때까지도 그러한 풀어지지 않고 경건하게 그렇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얼마만큼 철저히 발심(發心)을 했으며, 얼마만큼 정진하기 위해서 신심(信心)과 공안(公案)에 대한,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과 분심(憤心)이 철저한가 그것이 바로 거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 대중이 같이 지내다보면은 그러한 분이 선배 가운데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모범이 될만한 그런 선배가 있으면 항상 그 선배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심있게 보고 좋은 점을 본받고.
또 여러 대중 가운데는 여법(如法)하게 못한 그런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것을 비방하고 시비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혹 그런 점이 없는가 자기를 반성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향해서 채찍을 가하면서 그렇게 알뜰히 하루하루를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까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 내용을 충실히 마음으로 받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그런 수행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비록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삼천년이 되었다고 해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한다면 말세(末世)라고 해서 하등 걱정할 것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발심한 사람은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바로 활구(活句)법문이 될 것이고, 개 짖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활구법문이 될 것이고,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바로 자기로 하여금 화두를 들게 해주는 그런 법문이 될 것이고.
여기서 저기서 사람이 죽고, 이리 죽고, 죽었다는 그런 것을 봐도 정말 무상(無常)을 깨닫고 분심을 내게 하는 그런 훌륭한 살아있는 법문이 될 것입니다.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고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제차현성공안외(除此現成公案外)에 차무불법계전등(且無佛法繼傳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흉중하애부하증(胸中何愛復何憎)고 자괴인전백불능(自愧人前百不能)이다.
가슴 가운데 무엇을 좋아하고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미워하고 무엇을 싫어할 것인가. 스스로 자기가 옛날 불보살(佛菩薩)과 옛날 고조사와 여러 선지식들과 같이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을 항상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에 자기가 받은 화두, 공안에 대해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철저하게 단속하고 거각(擧却)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단속하는 것 그것밖에는 계승하고 전등(傳燈)해야 할 불법(佛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법을 전수받고, 불법의 등불을 전하는 것은 오직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저하게 참여해서 그것을 단속하는 외에는 전해야 할 불법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셨지마는 그 경전을 옳게 믿고, 옳게 읽고, 옳게 안다면은 마지막에는 일념(一念) 단속을 해서 본참공안을 잘 잡드리해 가지고 자기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닫는 그 일밖에는 불법(佛法)이 없다 이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들! 그러한 마음으로 앞으로 석 달 동안을 한결같이, 하루같이 그렇게 철저하게 단속하며 정진을 해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가운데에는 구십이 넘으신 노스님도 계시고, 육십・오십・삼십・이십 그런 젊은 분도 있습니다마는 생사에는 늙고 젊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제자에게 ‘생사(生死)가 어느 때에 있는고?’ 하고 물으셨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 동안에도 생사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너, 도 닦기가 어렵겠구나”
그다음 사람이 대답하기를 “일향간(一餉間)에도 있습니다. 아침 ・ 점심 그 한나절에도 있습니다”
“너도 도 닦기가 어렵겠구나”
마지막 한 사람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습니다”
“너는 도를 닦을 줄 아는구나”
이러한 법문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있습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렇게 뼈아프게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출가한 제자가 ‘너 도를 아직 모르는구나, 너도 닦기 어렵겠구나’ 이렇게 말한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을 믿고 부모형제 고향을 다 버리고 출가한 사람에게 말 한마디 생사에 대해서 잘못 대답한 것을 보시고, ‘너 도를 모르는구나, 도를 못닦겠구나’하신 말씀은 몽둥이로 패는 것보다도, 칼등으로 목을 때리는 것보다도 더 뼈아픈 법문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은 말 한마디에 ‘도 닦기 어렵겠구나, 도를 모르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고, 항상 일념 단속을 잘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처음~17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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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결제(結制)일이므로, 결제날이므로 첫 철 나온 분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화두(話頭)에 대한 말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무렇게나 앉고, 아무렇게나 숨을 쉬고, 아무렇게나 ‘이뭣고?’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억지로 꼭 가부좌를 할 것은 없고 가끔 시간이 있으면 가부좌도 하고서 오 분씩, 십 분씩 그렇게 앉아보는 것도—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옛날에 다 가부좌를 하셨기 때문에 가부좌를 평소에 익히고 앉도록 해보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부좌는 그렇게 오래 앉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반가부좌만 해도 되는 것입니다.
반가부좌는 보통 우리가 ‘행감친다’고 이렇게 표현합니다마는 자세히 설명을 안 해도, 한 다리를 오그리고 다른 다리를 그 위에다가 포개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개되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반듯이 드는 것입니다.
너무 뒤로 자지바지할 것도 없고, 앞으로 너머 숙여도 아니되고 반듯하되 어깨나 허리나 목에 너무 힘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정당(正當)하게 앉되 그 긴장을 다 풀고 앉는 것입니다.
눈은 너무 뚝 부르떠도 안되고 눈을 감어서도 안되고 평상(平常)으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꼭 쳐다보라는 것은 아니지만 눈 앞에서 약 2~3m 정도가 보일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거기다가 어떤 사람은 콩이나 뭐 그런 것을 갖다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마는 그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보되 본 바가 없어야 하고, 자연스럽게 눈을 뜨면 한 2m나 3m 지점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눈을 뜨라는 것입니다.
자세를 그렇게 했으면 호흡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호흡은 보통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도록 권장을 합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도 이 호흡에 대해서 말씀이 있었습니다마는 호흡은 대단히 참선(參禪)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참선뿐만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살아있다’하는 것은 ‘숨을 쉬고 있다’는 얘기고, ‘숨을 못 쉰다’한 것은 ‘죽었다’고 한 말과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밥은 며칠도 굶을 수가 있고, 한 달도 굶고, 석 달도 굶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호흡은 단 십 분도 안 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가를 하는 사람은 일 주일 동안을 물통 속에 들어가서 있다가 나온 그런 특수한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숨을 일 분, 이 분도 더 못 견디는 것입니다.
기왕 호흡을 할 바에는 바른 호흡을 해야 한다 이것입니다. 바른 호흡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깊이 들어쉬었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 것입니다.
호흡은 슬플 때는 자연히 호흡이 제대로 안 되고, 흥분해도 호흡이 잘 안 되고, 누구를 미워하는 생각을 내도 안 되고, 병이 나도 호흡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호흡을 제대로 하면 혈액순환도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에 노폐물은 밖으로 잘 배설해버리고 맑은 피를 몸으로 고루고루 순환시켜서 그래서 있는 병도 낫고 따라서 건강도 좋아지는 것입니다.
참선은, 아프면 아플수록에 정신을 더 가다듬어야 하고, 어떤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수록에 호흡을 잘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참선을 해야 하고,
사업이 잘 안되고 가정에 어떤 걱정스러운 일이 나더라도 오히려 몸을 가다듬고 호흡을, 깊은 호흡을 하면서 참선을 해서 그 마음을 가다듬고 안정을 시켜야 하는 것인데.
더욱이 부모와 형제와 가정을 버리고 인생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이 참선을 할려면, 첫째 건강해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가지고서는 절대로 정진을 충분히 잘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밤낮 보약을 먹고 그래가지고 건강을 회복해야 정진해야 된다 그런 얘기가 아니고.
첫째, 건강을 유지할라면은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여법(如法)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호흡을 여법하게 하는 데는 별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시간도 필요가 없습니다. 보약을 먹거나 특별한 운동을 할려면은 시간이 따로 필요하고 또 돈도 필요하고 그러겠지만 호흡을 바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필요가 없고, 올바르게 하는데.
호흡을 바르게 하는 법은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약간 볼록해진 것을 느끼고, 내쉴 때는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엔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지만 나중에 하루 이틀 열흘 한 달 하다보면 무의식중에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올바르게 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두를 옳게 든다고 하는 것은—조실 스님께서 아까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께 화두를 탄 분은 계속해서 ‘판치생모’ 화두를 할 것이고, 아직 화두를 안 탄 분은 ‘이뭣고?’를 산승(山僧)은 권하고 있습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의 근본 화두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화두 공안을 가지고 참선을 해도 궁극에 깨닫는 것은 ‘이뭣고?’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놈, 말할 줄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아는 놈, 그러한 주인공이 우리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이 육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송장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할 수가 있고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자성(自性)이라고도 하고,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합니다마는 그 불성이라 하는 것은 짐승이나 지옥중생이나 벌레도 다 가지고 있다고 그렇게 성현들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지옥에 가지 안했고, 축생이 되지 않고 아귀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 몸을 금생에 받아났습니다. 금생에 사람 몸 받아난 것만 해도 우리는 너무 행복하고 다행한 일이며 부모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부모님이 아니였으면 이 육체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부모의 은혜를 우리는 갚어야 합니다. 세속에서 효자로서 장가가고 아들딸 낳아서 살면서 부모에게 효자 노릇을 하는 길도 있겠습니다마는 이 자리에는 그 부모와 가정과 인생을 다버리고 출가를 한 몸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보시 돈이 모이면 부모에게 갖다 드리고 맛있는 것을 사다 드리고 그러한 효도는 우리는 허락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효도는 어쨌든지 지혜롭게 건강을 관리하면서 일념 단속(一念團束)을 해서 철저하게 정진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조그만한 좁쌀만한 효도가 될 것이나, 우리가 한 생각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으로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철저한 의단(疑團)을 단속을 해서 수행해 나가는 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 하고 안 하고는 나중 문제고, 그렇게 단속해 나간 것이 효도 중에서 최고의 효도가 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모에게 물질적으로 옷이나 음식을 해 드린 것은 그것은 잠시 편안하게 해 드린 것뿐이나 우리가 일념 단속을 해서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최고의 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생사해탈을 해야 진실로 중생도 제도(濟度)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다운 부모에 대한 효도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련존자가 그 어머니가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온갖 방법을 다해도 그 어머니를 제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여쭈니까 ‘해제날 대중공양(大衆供養)을 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해제날 공양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냐 하면은 아무때나 스님네에게 공양한 것도 좋으나,
‘도 닦는 스님네께 공양하는 것—일체 욕심을 다 버리고, 온갖 생각을 다 버리고서 오직 일념 단속해서 그 일념 단속하는 그 수행자, 석 달 내내 그 공부를 한 그 수좌(首座)에게 대중공양을 해라’
그래가지고 목련존자가 탁발을 해가지고 해제날 대중공양을 해가지고 그 공덕으로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 받고 있는 어머니, 청제(靑提)부인을 지옥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드린 것입니다.
절에 법당을 짓도록 부처님을 모신다 하면 서로서로 시주금(施主金)을 많이 냅니다. 그러나 그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절을 지어서 법당을 짓고 부처님을 모셔야 도 닦는 스님네가 또 거기서 또 수행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게 더 정성껏 시주하는 것이 참 좋은 일이나, 참선 수행하는 스님네께 공양을 올리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행하는 사람은 될 수 있으면 시은(施恩)을 안 지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것을 갚을려면은 시주것만 잔뜩 잘 먹고 입고 잘 먹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은 그것을 갚어야 하니 그것을—좁쌀 서너 알 때문에 버섯이 되어가지고 그 은혜를 갚고.
부처님 말씀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떼가 가는데 ‘저 소가 무엇인줄 아느냐? 왕년에 중들이 저렇게 소가 되었느니라’ 이런 말씀이 경전에 있습니다. 왜 소가 되냐 하면은 소가 되어야 그 은혜를 빨리 갚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럽니다.
소가 되어야 몸이 성할 때는 일을 해가지고 갚고, 살아서 똥을 누면은 그 똥을 비료로 갚고, 죽게 되면은 가죽은 벗겨서 옷이나 신발이나 그런 것을 만들고, 고기는 오장육부를 다 해서 사람들에게 먹여서 갚고.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네가 도를 철저히 못 닦고 도업을 이루지 못하면 소가 되어서, 한 생(生)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죽으면 두 번, 세 번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수십 생, 수백 생을 소가 되어서 갚어.
그래서 ‘중은 시주것을 독약보다도 더 무섭게 생각하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은 절대로 소가 될 그런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만에 하나라도 시주것을 참으로 무서운 줄 안다면 잘 먹거나 못 먹거나 먹는 것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신경쓰지 말고.
무엇이, 보리밥이 들어오거나 찰밥이 들어오거나 국수가 들어오거나 들어온 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화두를 놓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면서 그것을 맛있게 공양하고, 그 공양을 할 때에는 그것을 시주한 신도님들에 대한 간단한 축원(祝願)을 하면서 공양을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공양을 드시면 소화도 잘될 것이고 음식에 대한 불평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나 원주(院主)나 도감(都監) ・ 별좌(別座) ・ 공양주(供養主) ・ 채공(菜供) 그런 소임을 맡으신 스님네들은 수행하는 도반(道伴)들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서 잘 마련을 해야 할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지금 그런 소임을 맡고 있어도 자기도 참선을 하는 분이고 또 다음 철이나 그다음에는 자기도 또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이고, 금생에 안 하더라도 내생에 또 출가해서 또 참선하게 될 것이니.
우리는 서로서로 혼자만 밤낮 하기가 어려우니까 금생에는 ‘내가 공양주 사마’ 다음 생에는 지금 수행을 하시는 분이 내생에 또 원주도 살고, 주지도 살고 서로 교대해 가면서 하게 됩니다.
그러니 금생에 왜 나만 이렇게 어렵게 공양주를 살고, 어떤 사람은 큰방에 가만히 앉아서 잘만 먹고 편안히 한가? 그런 철없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분이나 머리는 안 깎았어도 신도로 있는 있는 분이나 수백 생을 하면서 우리가 서로서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몸을 바꿔 날 때에는 신도가 스님이 될 수도 있고, 스님이 또 신도가 될 수가 있으니, 우리는 다 같은 불자(佛子)요 형제간이요, 자매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뼈빠지게 번 돈을 갖다가 수행하는 스님에게 공양도 올리게 되는 거고, 우리는 또 그 공양을 받아서 수행을 하면서 항상 신도들을 축원을 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족이고, 한 형제간입니다.
그래서 나는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이라고 하는 말을 참 쓰기를 좋아하는데, 머리를 깎은 스님네도 전부 선배나 후배나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간이고, 머리는 안 깎고 청신사 청신녀 신도 여러분도 비록 멀리 가까이 살고 있어도 다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간이요, 자매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결제날을 기해서 법당 안이나 법당 밖에 많은 형제자매 여러분들이 모이셨습니다.(17분28초~37분1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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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고, 그다음에 화두가 정말 참선하는 데에 껌껌한 밤에 가는 등불과 같은 것입니다. 화두를 자기가 정말 믿는 선지식(善知識)한테 화두를 타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책을 보고 화두를 간택할 수도 있고 또 아무한테라도 화두를 탈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냐? 화두 자체는 별것이 아니나, 해 나가다가 잘못되면 자기가 믿는 선지식이 아니면 가다가 또 바꾸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화두는 자꾸 바꿔싸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른 것은 마음에 안 맞으면 바꿀 수가 있으나 화두는 잘 되거나 못 되거나 한 화두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화두 가지고 하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쭉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다가 보면은 영 화두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영판 그럴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다 하더라도 심호흡을 하면서 그 화두 하나를 잘 잡드리해 나가는데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녹음법문을 듣다 보면 공부해 나가다가 애로점, 문제점이 있는 것이 그때 가서 바로 잡아지는 것입니다.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 쟁사치원왕노형(爭似癡猿枉勞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군금욕식무위리(君今欲識無爲理)인댄 불리천차만별중(不離千差萬別中)이다.
여러분이 무위(無爲)의 이치를 깨닫고자 할진대는 천차만별 가운데를 여의지 말지어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이라 하는 것은 육체가 처해 있는 모든 상황 행주좌와 어묵동정, 그리고 마음으로는 희로애락, 육체적인 정신적인 모든 상황이 천차만별인 것입니다. 그 천차만별 중을 여의지 말아라.
눈으로 무엇을 들어도 ‘이뭣고?’ 코로 무슨 냄새를 맡어도 ‘이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듣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일체처 일체시에서 바로 그놈을 여의고 찾을 것이 아니라, 무슨 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즉(卽)해서 ‘이뭣고?’
버리고 찾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떠억 거각(擧却)을 하면 천차만별이 바로 조사(祖師)의 설법이고, 부처님의 설법이 되고, 선배의 채찍질이 될 것입니다.
단지공월낙담심(但知空月落潭心)하라. 다못 허공에 달이 못 가운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여. 어리석은 원숭이가 못 속에 떨어져 있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설화를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숭이는 샘 속에 달이 비치니까 그 하늘에 있는 달이 떨어졌다고 수백 마리의 원숭이가 팔에 팔을 연결해 가지고 그 달을 건질라고 하다가 빠져 죽은 설화가 있습니다. 달은 못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여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번뇌나 망상이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온 세계의 흥망성쇠나 생로병사가 다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모든 것이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드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에 끄달린 사람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속에 비추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니 경제니 옛날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마는 고구려나 고려 ・ 이조 ・ 신라 · 백제나 해방되어 가지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은 적고 걱정스러운 일들은 끊임없이 옛날과 다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는 그런 것들이 꿈속에 일어나는 일이요, 다 중생(衆生)의 지은 업(業)으로 일어나서 일어나는 일이니, 설사 우리나라에 일어난 일이라도 참으로 그런 것들이 걱정이 되면 우리로서는 화두를 단속하고 정진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한 철을 오늘 이러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렇게 잘 지내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37분19초~47분33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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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인인자유충천기~’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次鐘峯’ - 종봉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차운(次韻)하다 ; 남이 지은 시에서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다.
*회광(回光, 廻光) ;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준말.
*회광반조(廻光返照) :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염화미소(拈花微笑) ;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범어의 Grdhrakuta를 음대로 써서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 하고, 뜻으로 번역하여 영취산(靈鷲山) • 취봉(鷲峰) 또는 영산(靈山)이라고만 한다。그 산 모양이 독수리 같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 산 위에 독수리가 많았던 탓이라고도 한다。이 산은 중인도 마갈타(摩竭陀 Magadha)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Raja-grha) 동북쪽 십 리에 있다.
부처님께서 어느 날 이 곳에서 설법을 하시는데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부처님은 그 꽃송이 하나를 들어 보이니, 백만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는데,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었다。이에 부처님은 『바른 법 열반의 묘한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다』고 선언하셨다 한다.
*가섭(迦葉) : [범] Mahakasyapa 음을 따라 마하가섭(摩訶迦葉)이라고도 하며, 뜻으로는 대음광(大飮光)• 대구씨(大龜氏)라 번역한다。Kasyapa는 성(姓)이고, maha는 크다는 말이니, 다섯 가섭 가운데 맏이를 뜻한다。부처님의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 한 분。본래는 바라문으로 석존이 성도한 지 삼 년쯤 뒤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는 제자 가운데서도 의•식•주를 극도로 검박하게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하는 두타행(頭陀行)이 제일이었으며 부처님의 의발(衣鉢)을 받은 상수 제자(上首弟子)로서 부처님이 입멸한 뒤, 오백 아라한을 데리고 제일 결집(第一結集)을 하면서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부처님 이후의 법통(法統)을 말할 때에는 그가 초조(初祖)가 된다.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납자(衲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열반(涅槃) ;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된 상태. ‘니르바나(nirvāna)’의 음역어로, 불가(佛家)에서 흔히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다.
②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고구정녕(苦口叮嚀 괴로울 고/말할 구/신신당부할·정성스러울 정/간곡할 녕) : 입이 닳도록(입이 아프도록)[苦] 정성스럽고[叮] 간곡하게[嚀] 말씀하심[口].
*방(榜) ; 용상방(龍象榜)을 말함.
[참고] 용상방(龍象榜) ; 절에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때나, 큰일을 치를 때에 각자 할 일을 정해 붙이는 명단. 행사가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서 각자가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한 것이다.
*안거(安居 편안할 안/있을 거) ; (산스크리트) varsa 원뜻은 우기(雨期). ① 인도의 불교도들은 4월 15일(또는 5월 15일)부터 3개월 간 우기(雨期)때에 외출하면 풀이나 나무,작은 곤충을 모르고 밟아 죽일까 두려워 했고 그래서 동굴이나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에 전념했다. 이것을 우안거(雨安居)라고 한다.
② 선종(禪宗)에서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를 하안거(夏安居),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동안거(冬安居)라고 해서 각각 90일간 사원에 머물르면서 외출을 금지하고 오로지 좌선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 전념한다. 안거의 처음을 결제(結制), 끝을 해제(解制)라 한다.
*초발(初發) ; 초발심(初發心). 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인 보리심(菩提心)을 처음으로 일으킴.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십이시(十二時) : 하루 24시간을 말함。지금 쓰고 있는 이십사시(二十四時)를 예전에는 십이시(十二時)로 썼다.
*희소(戱笑 희롱할 희/웃음·웃을 소) ; 희롱으로 실없이 웃음.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게송) ‘흉중하애부하증~’ ; 중봉명본 스님의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峯和尙廣錄)’ 권29 ‘山居十首’ 게송 참고.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전등(傳燈) ; ‘등(燈)불을 전(傳)한다’는 뜻으로, 등(燈)은 중생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등(燈)에 비유한 말. 이 진리의 등(燈)을 스승이 그 제자에게 서로 전하여 가는 것을 전등(傳燈)이라 한다. 법맥(法脈)이 서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는 일을 마치 등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하는 데 비유한 것.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을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온,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통(法統)의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일념단속(一念團束) ; ‘한 생각 단속’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났다 하면 그 생각이 뿌리를 내려 싹이 트고 잎이 피어 결국은 과보(果報)를 받는데,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즉각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돌리는 것.
마음 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결국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서 그 한 생각 단속을 잘하면 극락에도 가고 부처도 될 수 있는데, 그 한 생각 단속을 잘못해서 죄를 지어 축생도 되고 지옥에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일향간(一餉間 한 일/식경食頃·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짧은 시간 향/사이 간) ; ‘한 밥 먹을 사이’로, ‘짧은 시간 동안’을 뜻한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 후한(後漢)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함께 한역.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보시(布施), 애욕의 단절 등 불교의 요지를 42장에 걸쳐 적절한 비유로써 간명하게 풀어 설한 경(經). 최초의 한역(漢譯) 불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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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참고]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렇게 의심을 해 나가되, 이런 것인가 저런 것인가 하고 이론적으로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나가야 됩니다. 여기에 자기의 지식을 동원해서도 안되고, 경전에 있는 말씀을 끌어 들여서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해 들어가서도 안됩니다.
화두(공안)은 이 우주세계에 가득차 있는 것이지마는 문헌에 오른, 과거에 고인(古人)들이 사용한 화두가 천칠백인데, 이 ‘이뭣고?’ 화두 하나만을 열심히 해 나가면 이 한 문제 해결함으로 해서 천칠백 공안이 일시(一時)에 타파가 되는 것입니다.
화두가 많다고 해서 이 화두 조금 해 보고, 안되면 또 저 화두 좀 해 보고, 이래서는 못 쓰는 것입니다. 화두 자체에 가서 좋고 나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한 화두 철저히 해 나가면 일체 공안을 일시에 타파하는 것입니다.(76분34초~78분22초) [ ‘참선법 A’ 에서]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행감치다 ; ‘양반다리 하고 앉다’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자지바지 ; 좌선(坐禪)할 때 몸에 너무 힘을 주어, 몸 전체가 긴장으로 인해 뻣뻣하게 되어 있는 모습. 좌선 할 때는 몸을 단정(端正)히 하면서도 긴장과 힘을 빼야 한다.
*정당(正當)하다 ; 이치에 맞아 올바르고 마땅하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한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언하대오(言下大悟)에서] (용화선원) p53.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참고]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대중공양(大衆供養) ; ①수행자에게 음식을 올리는 일. ②대중이 함께 식사하는 일.
*수좌(首座) ; ①선원(禪院)에서 좌선하는 스님. ②수행 기간이 길고 덕이 높아, 모임에서 맨 윗자리에 앉는 스님. ③선원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스님.
*시주(施主 베풀 시/주인 주) : ①스님에게 혹은 절에 돈이나 음식 따위를 보시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②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단월(檀越 dana-pati)이라고도 함.
*시은(施恩) ; ①시주(施主)에게서 받은 은혜. ②은혜를 베풂.
*시주것(施主것) ; 절이나 스님에게 조건없이 베푼 물건.
[참고 ①] 『선가귀감(禪家龜鑑)』 (용화선원刊) p142~145. p147. 참고.
(63)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아 ! 불자여。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
(註解) 傳燈에 一道人이 道眼이 未明故로 身爲木菌하야 以還信施하니라.
전등록에 「옛날 어떤 도 닦는 사람이 도의 눈이 밝지 못한 탓으로 죽어서 나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고 하니라.
(64)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 」하시니라.
(註解) 智論에 一道人이 五粒粟으로 受牛身하야 生償筋骨하고 死還皮肉하니 虛受信施가 報應如響이니라.
「*지도론」에 이르기를 「한 수도인이 다섯 낱 좁쌀 때문에 소 몸을 받아, 살아서는 뼈가 휘도록 일해 주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빚을 갚았다」하시니 헛되이 시주 것 받은 응보가 메아리와 같으니라.
(66)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이르시되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할지니,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의 두려워할 바라 」하시니라.
(註解) 進食을 如進毒者는 畏喪其道眼也요 受施를 如受箭者는 畏失其道果也니라.
음식 먹기를 독약을 먹듯 하라는 말은 도의 눈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이고, 시주 받기를 화살을 받듯 하라는 말은 도의 열매를 잃을까 두려워함이니라.
[참고 ②] (1)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 권상(卷上) 백운화상초록(白雲和尙抄錄 | 원조각성 번역·해설 | 현음사) p111~112. (2) 『전등록(傳燈錄) 1』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김월운 옮김 | 동국역경원) p110 참고.
〇迦那提波尊者得法 後至毗羅國 彼有長者 名梵摩淨德 一日園中 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多 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他人 皆不能見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其比丘道眼未明 虛沾信施故 報爲木菌 唯汝與子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七十有九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其樹不生耳
가나제바 존자께서 용수 대사에게 법을 얻으시고 그 뒤에 비라국에 가시었다. 그곳에 장자가 있으니 이름은 범마정덕이었다.
어느 날 정원 가운데 나무에 큰 귀가 생기되 버섯과 같고 맛은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두 번째 아들 라후라다가 따다 먹었는데 따고 나면 다시 자라고, 없어진 다음에도 다시 또생겼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보지 못했다.
이 때 가나제바 존자께서 그 전생의 인연을 아시고 드디어 그 집에 가셨다. 장자가 그 까닭을 물으니 가나제바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전생에 한 비구를 공양했다. 그러나 그 비구는 도안(道眼)이 밝지를 못해서 헛되이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무의 버섯이 되었다. 오직 너와 너의 둘째 아들만이 정성껏 그 비구에게 공양을 올렸기 때문에 누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물으시되 “장자의 나이가 얼마냐?” 장자가 답하기를 “79세입니다” 가나제바께서 이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도에 들어가 진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시주의 것을 갚아주나니, 너의 나이가 81세가 되면 그 나무에서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축원(祝願) ; 어떤 일이 희망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불보살(佛菩薩)께 간절히 원하고 빎.
*주지(住持) ; 절이 잘 유지(維持)되도록 모든 일을 총괄적으로 책임지고 관리하는 소임.
*원주(院主) ; 후원(後院, 절에서 부엌을 일컫는 말)을 책임지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도감(都監) ; 사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독하는 소임.
*별좌(別座) ; 절에서 식사·의복·방석·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채공(菜供) ;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큰방 ; 스님들의 본업인 수행을 행하는 장소. 예불과 공양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참선만을 행하는 선원(禪院)에서 대중이 한 자리에 모여 참선수행 방(房)을 말한다.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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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상기(上氣) ; ①[한의] 피가 뇌로 몰리는 현상. 얼굴이 붉어지고 열이 나며, 발한, 두통, 이명(耳鳴), 현기증 따위가 일어나기도 한다. ②얼굴이 흥분이나 수치감으로 붉어짐.
*무심(無心) ; ①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없음. ②세속적인 욕망이나 가치 판단에서 벗어난 마음 상태.
*(게송) '군금욕식무위리~' ; [금강경오가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함허득통 설의(說誼) 참고.
*무위(無爲) ; ①(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무위(無爲)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②온갖 분별이 끊어진 마음 상태. 분별하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마음 상태. 분별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마음 상태.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이 소멸된 열반의 상태.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조사(祖師) :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 곧 조사선법(祖師禪法)을 전하는 스승을 말함이니 종사(宗師)와 같다.
*어리석은 원숭이가 못 속에 떨어져 있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설화 ; 정중로월(井中撈月 우물 정/가운데·속 중/잡을·건질 로/달 월) ‘우물 속에 있는 달을 건진다’
[참고]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 제7권 (東晉天竺三藏佛陀跋陀羅共法顯譯) ‘明僧殘戒之餘’
〇佛告諸比丘 過去世時 有城名波羅奈 國名伽尸 於空閑處有五百獼猴 遊行林中 到一尼俱律樹 樹下有井 井中有月影現 時獼猴主見是月影 語諸伴言 月今日死 落在井中 當共出之 莫令世間長夜闇冥 共作議言 云何能出 時獼猴主言 我知出法 我捉樹枝 汝捉我尾 展轉相連 乃可出之 時諸獼猴卽如主語 展轉相捉 小未至水 連獼猴重 樹弱枝折 一切獼猴墮井水中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가시(伽尸)라는 나라에 파라나(波羅奈)라는 성이 있었다. 한적한 곳에 오백 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었는데 숲속을 유행 중에 한 니구율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나무 밑에 있는 우물에 달이 비치고 있었다.
이때 원숭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우물 속 달 그림자를 보고 무리들에게 말했다. “지금 달이 우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게 꺼내줘야 하겠다” 함께 의논했다. “어떻게 해야 꺼낼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내가 꺼내는 방법을 안다. 내가 나뭇가지를 잡고 너는 내 꼬리를 잡고 그렇게 서로 이어서 늘어뜨리면 꺼낼 수 있다” 원숭이 무리가 우두머리의 말에 따라 서로의 꼬리를 잡고 늘어뜨렸는데 물에 이르기 전에 이어진 원숭이들이 너무 무거워 나뭇가지가 부려져 모두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요 내용]
(게송)인인자유충천기~ / 초발 행자와 같은 근신하고 하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수행 / (게송)흉중하애부하증~ / 일념(一念) 단속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호흡은 단전호흡을 권장 / 아직 화두를 안 탄 분은 '이뭣고?'를 산승은 권한다 / 이뭣고?는 천칠백 공안의 근본 화두. 어느 화두를 가지고 참선을 해도 궁극에 깨닫는 것은 ‘이뭣고?’다.
우리 자신이 생사해탈해야 부모에 대한 최고의 효도 / 참선하는 스님께 대중공양 / 시주것이 무서운 줄 알아 열심히 정진하라 / 스님, 신도 모두 한 형제자매 / 의심을 관(觀)하라.
전강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라도 자주 듣다 보면 공부해 나가다가 문제점이 있는 것이 바로 잡아진다 / 화두는 가장 중요한 요점은 의심(疑心)입니다 / (게송)군금욕식무위리~.
[주요 문구]
〇진실로 발심한 사람은 새 우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바로 활구(活句)법문이 될 것이고, 개 짖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활구법문이 될 것이고,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이 바로 자기로 하여금 화두를 들게 해주는 그런 법문이 될 것이고.
여기서 저기서 사람이 죽고, 이리 죽고, 죽었다는 그런 것을 봐도 정말 무상(無常)을 깨닫고 분심을 내게 하는 그런 훌륭한 살아있는 법문이 될 것입니다.
〇불법을 전수받고, 불법의 등불을 전하는 것은 오직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저하게 참여해서 그것을 단속하는 외에는 전해야 할 불법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부처님께서 많은 설법을 하셨지마는 그 경전을 옳게 믿고, 옳게 읽고, 옳게 안다면은 마지막에는 일념(一念) 단속을 해서 본참공안을 잘 잡드리해 가지고 자기 안에 있는 불성(佛性)을 깨닫는 그 일밖에는 불법(佛法)이 없다 이것입니다.
〇우리 자신이 생사해탈을 해야 진실로 중생도 제도(濟度)할 수가 있는 것이고, 참다운 부모에 대한 효도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분이나 머리는 안 깎았어도 신도로 있는 있는 분이나 수백 생을 하면서 우리가 서로서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몸을 바꿔 날 때에는 신도가 스님이 될 수도 있고, 스님이 또 신도가 될 수가 있으니, 우리는 다 같은 불자(佛子)요 형제간이요, 자매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뼈빠지게 번 돈을 갖다가 수행하는 스님에게 공양도 올리게 되는 거고, 우리는 또 그 공양을 받아서 수행을 하면서 항상 신도들을 축원을 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족이고, 한 형제간입니다.
〇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하는 것입니다.
〇‘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〇버리고 찾는 것은 올바른 수행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을 하면 천차만별이 바로 조사(祖師)의 설법이고, 부처님의 설법이 되고, 선배의 채찍질이 될것입니다.
〇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모든 것이 우리의 한마음의 나타남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즉해서 화두를 드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요,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에 끄달린 사람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속에 비추는 달을 건질라고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701~800 > (701~7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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