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등능속백천등(一燈能續百千燈), 한 등(燈)에 등불이 능히 백천(百千)의 등불에 불을 붙일 수가 있다. 심인광통법령행(心印光通法令行)이다. 마음에 인(印)이, 마음 인(印)의 그 빛이 널리 통하면 부처님의 정법(正法)의 법령(法令)이 널리 행하리라.
천성부전취불멸(千聖不傳吹不滅)한디, 천성(千聖)이 전할 수 없는 이 등불을 아무리 불어도,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더라도 이 등불은 꺼칠 수가 없을 것이다. 연휘열염전분명(聯輝列焰轉分明)이다. 한 등(燈)으로 인해서 백천 등(燈)에 그 불이 옮겨져 가지고 그 등불이 온 세계에 환히 밝아지면 우주법계 구석구석이 어두운 구석이 없이 다 환히 다 밝아질 것이다.
오늘 불기(佛紀) 2532년 부처님오신날을 기해서, 이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부처님오신날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람마다 정성스러운 등(燈)을 켜 가지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키었지마는 그것이 백천 등(燈)이 되고, 십만 등(燈)이 되고, 백만 등, 천만 등이 되어서 그 등불이 환히 다 밝아져 가지고 삼천리 강토(疆土)뿐만이 아니라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오대주(五大洲) 육대양(六大洋)이 환히 밝고, 이 지구만 밝아질 것이 아니라 이 태양계가 다 밝아지고, 이 태양계와 같은 수백억만 개의 태양계가 이 우주법계에는 있는데, 끝없는 이 세계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환히 밝아질 것이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훨씬 이전에 옛적에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는 장재왕(長災王)이라 한 왕,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재왕은 참 불법을 믿는 아주 어질고 착한 그런 성인의 풍도를 가진 임금이었습니다. 이웃나라에 아주 싸움을 좋아하고 그런 범달왕(梵達王)이라 하는 고약한 아주 강력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 범달왕은 호시탐탐 그 장재왕에 왕국을 침범할 것을 노리다가 어느 날 대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그 장재왕에 나라를 침범을 해서 순식간에 그 나라를 집어삼켰습니다. 그 장재왕과 그 왕비와 그 왕자는 어떻게 손도 써보지도 못하고 뒷문으로 해서 저 산중 깊은 골짜구니로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 범달왕은 군사를 풀어 가지고 방방곡곡이 뒤져 가지고 결국은 이 장재왕과 왕비와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래 가지고 만인이 모이는 장터에서 그 왕과 왕비와 왕자를 살해하게 되었습니다. 용케도 어느 틈을 타 가지고 오직 그 왕자 한 사람만이 도망을 했습니다. 도망을 해 가지고 드디어 그 사형(死刑), 왕과 왕비를 그 사형에 처하는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왕자는 도저히 혼자만 숨어서 있을 수가 없어서 이상한 옷을 입고 얼굴에다가 모다 변장을 해 가지고 그 수많은 군중 속에 뚫고 들어가 가지고 자기의 부왕(父王)과 그 왕비, 어머니가 살해된 광경을 지켜보지 아니하면 안 됐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살해될 마당에 그 많은 군중을 둘러보니까 그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았습니다. 알아 가지고 혼자소리로 독백을 했습니다.
"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이런 세 마디 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 뜻이 무슨 소린지를 모르고 ‘그 왕이 죽게 되니까 간경(肝經)이 둘쒀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쯤 모다 생각하고 결국은 그 왕과 왕비는 무참하게도 목을 짤려서 죽었습니다.
그 왕자는 그 자기 부왕(父王)이 한 이해할 수 없는 세 마디 말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빠져나와 가지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여러 해 동안을 갖은 기술과 칼 쓰는 법, 창 쓰는 법, 활 쓰는 법을 비롯해서 무술을 다 익히고 나아가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법, 요리를 하는 법, 옷을 짓는 법,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다 연마를 해 가지고서 차츰차츰 그 범달왕(梵達王)이 있는 도시에 잠입을 해 가지고 차츰차츰 인증을 받고. 그래 갖고 대신(大臣)의 집에 또 고용이 되었다가 거기서 또 훌륭하니까 결국은 왕궁에까지 고용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해서 임금, 그 범달왕의 눈에 들어 가지고 가장 신임(信任)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 아주 그 범달왕을 가깝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잠시도 그 범달왕은 그 장재왕의 왕자를 띠어 놓고는 살 수가 없을 만큼 그렇게 눈에 마음에 쏘옥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범달왕은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왕자는 그 왕을 모시고 사냥에 따라가게 되었는데, 그 왕이 아조 말을 달려서 사냥을 한바탕하고 나니까 너무너무 피로해서 좀 쉬어야겠다 그 말여. 그래서 모든 신하와 궁녀들을 다 물리치고 오직 그 왕자 하나만을 데리고 조용한 물가에 경치도 좋고 고요한 데로 가서 단둘이 푸욱 쉬게 되었습니다. 그 왕자는 온갖 무술을 다 익혔기 때문에 혼자만 옆에 있어 주어도 왕은 마음이 놓였기 때문에 여러 신하를 데리고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 고요한 데에 가서 그 왕자의 무릎을 비고서 누웠는데 금방 잠이 깊이 들었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왕자는 ‘이제사 비로소 복수를 할 때가 왔구나’ 이래 가지고 품안에 깊이 간직했던 그 멀금하게 간 칼을 빼 가지고 범달왕의 목에다 갖다가 터억 틀어 댔습니다. 그래 가지고 아주 일격을 가할려고 하다가 불현듯 그 부왕(父王)이, 장재왕이 그 처형(處刑) 당할 때 한 그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원한은 보복을 함으로써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말 가운데 마지막 끝에 한 그 말이 퍼뜩 생각이 나 가지고 찌를까 말까 한 판에 아! 범달왕이 눈을 번쩍 뜬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온몸에 아주 그냥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눈을 번쩍 떴는데, 아 그 목에다 틀어 대 갖고 있는 칼을 미차 숨기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 칼을 갖다가 번쩍 들면서 “너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바로 그 웬수다” 그런데 그 왕이 눈을 뜨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장재왕의 그 왕자가 나를 내 목에다 칼을 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눈을 뜨는데, 진짜 눈을 뜨고 보니까 칼날이 자기 목에 와서 떡 닿아 있다 그 말이여.
“바로 내가 그 장재왕의 왕자다. 이놈, 너 이놈 오늘 죽어봐라” 그러면서 칼을 번쩍 해가 들고서 찌를려고 하다가 그 아버지가, 부왕이 마지막한 그 말이 다시 또 생각이 나 가지고 그 이를 악물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마는 차마 그 칼을 목에다가 꽂지를 못하고 그 칼을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그리고서 통곡을 하면서 엎드려서 울었습니다. 사죄를 했습니다.
범달왕도 몸을 털고 일어나서 “좋다! 느그 부왕이 그렇게 착한 임금인줄을 나는 몰랐다. 네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가 남긴 그 마지막 한마디를 마음속에 간직해 가지고 나의 목숨을 다시 살려주었으니 어찌 내가 너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 피차 각자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뜨거운 악수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왕자에게 옛날의 자기 고국을 다시 돌려주고 두 나라는 아주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가지고 오래오래 친목을 하고 화평하게 지냈다고 하는 설화가 부처님의 경전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왕이, 장재왕이 죽을 때, 첫 번째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웬수 원한에 마음을 오래오래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함께 이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그러한 원한이라 하더라도 오래오래 그 웬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이고. ’급히 서둘러서도 안 된다‘ 그 말은, 우정, 한번 서로 알게 된 맺게 된 우정은 사소한 일로 그렇게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한은 원한으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다‘ 이 부왕(父王)에 유언을 갖다가 깊이 간직해서—만약에 그 왕자가 그 범달왕을 자기의 그 보복을 했다면 그 왕자인들 거기서 목숨을 부지하겠습니까? 아무리 무술이 뛰어난다고 해도 수백 명의 무사들에 둘러싸였으니 어느 칼에 맞어 죽을 줄 모르는 것입니다.
지끔 우리나라는 삼팔선(三八線)이 가로맥혀서 이북(以北), 이러한 참,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이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6 · 25 동란(動亂) 또 (미얀마) 아웅산에서 일어났던 우리나라 각료들을 모다 폭파시킨 그러한 일들 생각하고 그리 생각하면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칼기(KAL機)를 폭파해 가지고 백여 명의 참 무모한 사람들을 죽이는 일 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웃나라 일본을 생각해도,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가 있어 온 이래로 우리나라 동해와 남해 서해를 왜구(倭寇)들이 침범을 해 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400년 전에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또 와 가지고 무수한 생명을 죽였고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 삼천리를 피로써 물을 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를, 일본 여론조사를 해 보면, 국민들을 해 보면 ‘세계에서 제일 미웁고 보기 싫은 나라가 어디냐?’ 하면 한국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인해서 일본이 그 완전히 야만한 야만족(野蠻族)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저 가야국 이래로 고구려 · 신라 · 백제 때를 통해서 계속 우리나라에서 가서 글을 가르키고, 농사짓는 법도 가르키고, 유교 · 불교를 가르키고, 농업과 모든, 나라 다스려 가는 법을 다 가르키고 해서 일본 나라가 영원토록 우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사람된 길을 가리켜 주는 문명(文明)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미워하고 우리를 그렇게 하냐? 그런 일을 생각하면 일 생 · 이 생 · 삼 생이라도, 성불(成佛)을 더디 연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놈들을 갖다가 응징을 하고 씨를 말려야 할 그러한 민족적 울분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기(KAL機) 폭파 사건 일으키는 소련, 6 · 25 때 그 우리가 그 통일을 눈앞에 놔두고 백두산까지 처올라갔는데 인해전술로써 우리나라를 다시 이렇게 분단되게 맨든 그런 일을 생각한다든지, 이조 때, 고려 때 중국이 대국이라 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그렇게 못살게 굴게 하고 속국을 만들어 가지고 짓이기고 약탈해 나가는 역사적인 일을 생각한다면은 세세생생에 중공을 중국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그러한 일을 생각해서 자손만대(子孫萬代)토록 보복을 할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부처님의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렇게 당한 일들이 까닭 없이 우리가 당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러한 인과(因果)의 관계에 의해서 우리가 그러한 일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미워한 나라가 일본인데, ‘그 어째서 우리의 은혜를 받은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한단 말인가? 우리나라에 세세생생에 자손만대토록 은혜를 갚아야 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렇게 못살게 굴고 우리를 죽일려고 했는가?’ 내가 숙명통(宿命通)이 열리지는 안 했지만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떠억 깊이 관찰을 해 보니까 나는 그 원인을 짐작을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생긴 이래로 삼국(三國)이 벌어졌고, 삼국이 벌어져 가지고 계속 싸워서 자국에서도 혁명이 일어나고, 삼국이 싸워서 멸망하고, 저 나라가 자꾸 망하면서—고구려도 망하면 그 왕과 모다 대신들이 전부 일본으로 도망을 가고, 가야국이 망하면서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신라가 망해도 일본으로 도망가고, 백제가 망해도 모다 그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 말이여. 도망을 가 가지고 거기다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거기다가 이 문명을 일으키면서 대대손손이 내려가면서 무엇을 생각했겠느냐 그 말이여. ‘언제라도 반드시 권토중래(捲土重來)하리라. 힘을 길러 가지고 나의 고국에 돌아가서 웬수를 갚고 다시 내가 그 나라를 세우리라’ 이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 말이여. ‘나’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일본은 본래 저 아이누 족[Ainu族]이니 뭐이네 해 가지고 아주 야만족들이 조끔 살고 있었습니다. 나라도 없고 그냥 그 야만족들이 살아서 그저 도둑질이나 해먹고, 해적질이나 해먹고, 노략질 해먹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짐승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고구려 · 가야 · 신라 · 백제 · 고려, 이런 데서 자꾸 우리나라에서 가 가지고 사람 되는 길을 맨들었는데, 그 나라에다가 최초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국 사람이 세웠고, 일본에 그 황족이 혈통이 사실을 알고 보면 한국 사람이 일본 황실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것들이 다 밝혀질 것이고 지금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마는, 그러기 때문에 일본은 아무 까닭도 없이—모릅니다 자기네들은, 모르면서도 천 년을 수천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한국을 갖다가 어쨌든지 다시 이것 자기가 차지해 가지고, 이걸 짓밟고 차지해 가지고 다시 나라를 세우리라 한 것은 ‘자기의 조국을 찾으리라’ 한 그 인과적인 그러한 원인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 가장 우리나라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조끔도 그 은혜는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나라를 그렇게 미워하고 빼앗아 갈려고 하는 까닭을 나는 인과(因果)의 법칙에 입각해서 내 나름대로 풀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중공이 우리나라를 그렇게 하고, 또 삼팔선이 갈라져서 하고, 모다 이러한 것들도 반드시 풀 수 있는 원인이 있을 것이고.
이번에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서 뭐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가 모다 갈라져 가지고, ‘참 민주주의를 원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지역감정(地域感情)으로 이럴 수가 있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염려되는 그런 상황이 일어났었는데, 이것도 생각해 보면 고구려 · 신라 · 백제 이런 삼국 시대(三國時代)의 그때의 원한 관계가 삼국은 없어졌지마는 오늘날까지도 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핏속에는 그런 우리의 업(業), 잠재의식 속에는 그러한 것이 아직까지도 흘러 내려오고 있는 그러한 잠재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행여나 그러한 보복을 할려고 하는 마음, 오래된 그러한 원한 관계, 이러한 것을 다 풀어버려야 우리는 스스로 발전할 수 있고 스스로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러한 원한에 마음을 품고 있어 가지고서는 절대로 앞길이 열리는 법이 없고,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적개심(敵愾心)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도 어느 일정한 기간 동안에는 그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사상적 교육과 고취가 뜻이 있겠습니다마는, 먼 안목으로 볼 때에는 적절한 시절이 돌아올 때에는 그러한 악심(惡心), 개인적인 또는 민족적인 그런 악에 사무치는, 원한에 사무치는 적개심은 좋은 방향으로 승화(昇華)시켜 나가는, 승화시켜 가지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공통점을 찾아서 화해를 하고 이래 나가야만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올림픽이 있고,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는 이념을 초월해서 모다 경제적인 교류를 맺고 그래 가지고 앞으로 우리나라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큰 발전을 하게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처음~31분55초)
(2)------------------
이러한 때를 맞이해서 첫째, 우리 불자(佛子)는 가정에서도 부부간에 서로 미움이 있다면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야겠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어떠한 본의 아닌 좋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을 기해서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잘못된 허물을 상대방에 미루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서 찾고, 이렇게 해서 참회(懺悔)를 하고 화합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간(兄弟間)에 동서 간에도 마찬가지고,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고, 어떠한 회사와 회사 관계, 단체와 단체 관계 또 지역감정도 그렇게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당(黨)과 당(黨) 사이에도 역시 그것을 풀고 근본적 민족 한겨레라고 하는 데에 돌아가서 서로 과거를 용서하고 그래 가지고 손에 손을 맞잡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단합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원한심을 깊이 품고서는 그 사람은 올바른 행복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단합하지 않고서 참다운 통일은 오지 아니할 것이고, 참다운 통일 없이 세계에 평화를 이바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라크과 이란의 관계를 보십시요. 이웃지간에 살면서 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지금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 나라는 결국 두 나라가 다 망하고 말 것입니다. 황새가 저 해변가에서 큰 조개를 갖다가 탁! 찍었습니다. 그 조개는 황새의 입을 콱! 물었습니다. 어부지리(漁夫之利)란 말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황새도 잡히고 그 조개도 어부한테 잡혀서 죽고 말 것입니다.
이 남한에서 지역이 다르다고 해서 지역끼리 싸우고, 당이 다르다고 해서 당끼리 서로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가 기반이 흔들리게 되면 이북(以北)에서는 언제 밀고 내려올는지도 모르는 것이고,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이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에 결국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제공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미운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고 용서할 수가 있느냐? 아무리 며느리가 ‘내가 그러지 말아야겄다’, 시어머니는 ‘내가 며느리를 미워하지 말아야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마는, 하는 꼴을 보고 얼굴을 보면은 다시 속에서 주먹 같은 놈이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리왕(歌利王)이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토막토막 짤라 냈지마는 터럭끝만큼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성불(成佛)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뭣고? 이 미워하는 생각, 이 내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단전호흡(丹田呼吸), 깊이 숨을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생각 생각이 앉어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차를 타면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미운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이렇게 ‘이뭣고?’를 하면 처음에는 ‘이뭣고?’는 하지마는, 속으로 미운 생각은 아주 잘 가시지를 않을 것입니다마는, 한 달을 그렇게 해, 석 달을 그렇게 해, 일 년을 그렇게 하다 보면 저절로 ‘이뭣고?’를 안 할려고 해도 저절로 ‘이뭣고?’가 되면서 아! 그 미운 생각이 언제 어느 때 스르르르 담박해져.
부처님께 절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천 배, 삼천 배, 사천 배, 오천 배, 이렇게 하고 나면 그냥 속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면서 그렇게 미웠던 시어머니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미웠던 며느리가 하나도 미웁지를 않고, 그렇게 아주 복수에 치가 떨린 웬수가 조끔도 미운 생각이 없고, ‘전부가 다 내가 잘못했구나! 그 잘못한 것이 상대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어!’ 아 그렇게 참회가 되면서 그 하염없이 흐른 눈물을 쏟아 버리고 난 다음에는 마음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미운 생각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고마운 생각이 속에서 일어난다 그 말이여.
예배(禮拜)를 해도 그러한 경지가 오고, 경(經)을 읽어도 그런 경지가 오고, 기도를 해도 그런 경지가 오고, 염불을 해도, ‘옴마니반메훔’을 해도 그런 경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도 다 좋지마는 ‘이뭣고?’를 하면 그런 경지가 더 빨리 오는 수가 있거든. 그러한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되니 이 참선법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이뭣고?’ 한마디 속에는 팔만대장경이 다 들었고, 기도가 다 들었고, 삼천 배 내지 억만 배가 그 속에 다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오늘 전장학, 전고경월 복위(伏爲), 망부(亡父) 전홍익 영가(靈駕)의 49재입니다. 그 재자(齋者)가 오늘 49재를 맞이한 전홍익 영가를 위해서 그 ‘이뭣고?’ 법문을 잘해 가지고 확철대오할 수 있도록 법문을 좀 해 달라고 한 달 전부터서 간곡히 부탁을 했습니다. 어찌 산승(山僧)이 그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이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수만에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지금 가슴 뜨거운 마음으로 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께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져 있는 만년위패(萬年位牌) 여러 영가들을 위해서도 저는 간곡히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전부 그 영가들이 우리들의 선망부모(先亡父母)입니다마는, 그 영가를 위해서도 산승은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 그다음에 이 송담(松潭)이 설해 드리는 이 법문을 그 영가(靈駕)들이 다 듣고 그 영가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이뭣고?’의 등불이 켜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선망부모에 못지않게 ‘이뭣고?’가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잘 단속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를 해서, 생사해탈을 해서 그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개개면전명월백(箇箇面前明月白)이요 인인각하청풍불(人人脚下淸風拂)이다. 우리 낱낱이 얼굴 앞에는 밝은 달빛이 휘황창 희고, 사람사람의 다리 밑에는 맑은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사람 앞이라고 특별히 달빛이 밝고, 어느 사람 앞이라고 차별을 해서 달이 비추지 않겠느냐 이거거든. 어느 사람 앞에나 다 바람이 불면 다 시원한 바람이 불지, 누구라고 안 불고 누구라고 잘 불어줄 것인가 이 말이여.
타파경래무영적(打破鏡來無影迹)하면, 우리의 업경대(業鏡臺)에, 우리 자신의 업경대를 갖다가 타파(打破)해 버려서 자취가 없어져 버리면—자기가 그 달빛을 싫다 하고 껌껌한 굴속으로 들어가서 ‘달이 자기한테 (안) 비춘다’고 하는 것이고, 자기가 문을 꼭꼭 처닫고 앉아서 더웁다고 찬바람,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온다고 해서 그런 것이지, 자기가 굴속에서 터억 나와서 달빛 있는 데로 몸을 나투고, 꼭꼭 닫았던 문을 활짝 열어제낀다면 어느 사람 얼굴에 달빛이 비치지 아니하며, 어느 사람 방에 시원한 바람이 안 들어갈 것이냐 이거거든.
자기가 마음에 문을 처닫고 그리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원망하고 스스로 자포자기를 해서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못 깨닫는 것이지, 마음에 문을 훨쩍 열어버리고 자기도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깊이 신심을 갖고 자기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이뭣고?’만 하면 결정코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수행을 해 나가면—꼭 절에만 들어와야만 하는 것이 아니여. 집에서 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살면서,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살면서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언제나 ‘이뭣고?’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단속해 나가면서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한 시간 한 시간을,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해 나가면 일성제조상화지(一聲啼鳥上花枝)다. 한 소리 우는 새가 꽃가지에 오르더라. 화창한 봄날에 아름답게 핀 꽃가지 위에 그 예쁜 꽃에 새가 올라가서 아름다운 소리로 한 곡조 자연의 노래를 읊으더라.
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부처님께서 춘다(Cunda)라고 하는 사람이 바친 독버섯을—그것이 독버섯이라고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학자들은 해석이 있지마는 하여간 독(毒)이 있는 버섯이여. 독버섯을 드릴 리는 없고, 맛있는 버섯의 요리를 해 드렸는데 그것이 어떻게 변질이 된 음식이였었던지, 부처님의 체질에 안 맞았던지, 그것이 부처님께서는 요새말로 식중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너무너무 고통이 심하셔 가지고 피를 쏟으시면서 그렇게 아프신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구시나가라(拘尸那伽羅)를 향해서 계속해서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행을 하셨습니다.
조끔 가다가 쉬시고, 조끔 가다가 쉬시고 그러시면서 결국은 구시나가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사라쌍수간(沙羅雙樹間), 사라수가 2개씩 2개씩 요렇게 서 있는 그 나무 사이에다가 자리를 펴고, 그때 자리라고 해 봤자 웃옷이니까 그때는 가사(袈裟), 가사지요. 가사를 떠억 펴서 깔고서 누우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그 상업 도시인 베살리(Vaiśālī) 도시를 터억 바라다보시면서 부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느냐? “아!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인간의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원시경전(原始經典) 저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피가 넘어오도록 괴로우셨겠지마는 부처님은 조끔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흐트러지지를 안 했고 마음에 추호도 동요가 없었습니다. 춘다가, 그 금속공(金屬工)의 직업을 가진 그 춘다(Cunda)가 바친 그 공양의 공덕이나, 부처님께서 최초에 그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이나—부처님께서는 그 춘다(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잡숫고 기력을 회복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견성성불을 하셨는데,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을 잡수고 열반에 드시게 한 그 춘다에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그 부처님의 그 깨달으신 심경이 우리의 중생으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지마는, 그러나 높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맑고 고상한 그 뜻은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31분56초~57분54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일등능속백천등~ /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 장재왕(長災王)의 아들과 범달왕(梵達王)의 설화 /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소련(蘇聯)이나 중공(中共)과의 인과(因果) 관계 / 전라도 · 경상도 · 충청도의 지역감정(地域感情)의 우리의 업(業), 인과(因果) / 개인, 사회단체나 사회 · 국가 · 민족 모두 원한에 마음을 풀어 개인도 발전을 하고, 나라도 발전을 하고, 세계의 평화도 이룩될 수가 있는 것.
우리는 중생(衆生)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다 / 미운 생각을 원한심을 없애는 근원적인 방법이 바로 ‘이뭣고?’이다. 미워하는 생각만 없어질 뿐만 아니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하게 된다 /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마음속에다 환허니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 산승(山僧)의 법문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차 있는 수많은 영가를 위해서 법문을 하고 있는 것.
(게송) 개개면전명월백~ /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의 공양이나, 춘다가 바친 그 버섯 공양이나, 공양의 공덕(功德)이 똑같다 / 첫째,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 · 이웃 · 온 겨레 ·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되새기자.
〇어떻게 이 조그마한 등불이 그렇게 삼천대천세계를 비칠 수가 있느냐? 이 등불은 촛불을 켜거나, 조그마한 전등을 켜거나 우리 눈으로 보이는 등(燈)은 그런 물질적으로 된 것이지만, 그 조그만한 한 등불을 켤 때의 우리의 정성스러운 마음에도 또한 그 불이 켜지는데, 그 정성스러운 신심(信心)으로 켠 그 등불은 눈으로는 안 보이지만 진리의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에는 이 끝없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비추고도 남을 것이다.
앞으로 21세기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맞이한 이 무진년(戊辰年)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는 무엇이냐? ‘우리의 마음속에 평화(平和)가, 우리의 가정에 평화가, 우리 사회 국가에도 평화가, 그리고 온 세계에도 평화가 오게 해야 할 그러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〇"길게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 급히 서둘러서도 아니 되느니라. 원한은 원한의 마음을 잊음으로써만이 원한을 풀 수가 있느니라"
〇우리는 중생(衆生)입니다. 중생이지만 우리도 성불할 수 있는 부처님과 똑같은 자성(自性)을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성불을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그 미운 생각을 없앨 수가 있으며, 원한심을 없앨 수가 있으며, 그 감정을 갖다가 깨끗이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고, 백팔참회(百八懺悔)를 하고 천 배, 이천 배, 삼천 배 내지 수천 배의 무수배례(無數拜禮)를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고왕경』이나 『금강경』, 『반야심경』 또는 『지장경』과 같은 그러한 경전을 백 일, 천 일, 만 일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러한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방법을 방편(方便)으로 하면서도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인 것입니다.
〇오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서 여러분은 물론 다 각기 울긋불긋한 이 등(燈)을 모다 켜시게 되겠지만 ‘이뭣고?’의 등(燈)을 마음속에다가 분명하게 환허니 밝도록—잠시 켰다가 금방 꺼져 버리고, 아침에 켰다가 점심 때도 못 가서 툭 꺼져 버리고, 앉아서 켰다가 일어서면서 훅 꺼져 버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고, 팔풍 경계(八風境界)가 일어나더라도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환허니 밝도록 ‘이뭣고?’의 등불을 켜시라 그 말이여.
〇생사(生死)는 우리 깨닫지 못한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생사가 있지, 생사는 본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앞에 분명히 생노병사가 있는데 어찌 생노병사가 없어? 이 세상에 태어나면 늙어서 병들어서 다 죽어 가는데 어찌 생사가 없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사로 보이는 것이지, 생사 없는 이치를—‘이뭣고?’를 해 가지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를 하고 보면 생사(生死)가 생사(生死)가 아니여. 생사가 생사가 아니라 그말이여. 바로 그것이 열반(涅槃)의 소식이더라 그거거든. 깨닫고 보면 죽어 가면서도 그것이 죽음이 아니여,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 그거거든.
〇『열반경(涅槃經)』에 또 『유교경(遺敎經)』에 보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을 참 많은 법문을 하셨습니다마는, 최초에 결집된 원시경전(原始經典)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며 인간에 목숨은 감미로운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〇부처님의 그 참경계는 우리가 깨달라 봐야 알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다 각기 부처님과 같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그 거룩한 그 뜻은 우리는 범부(凡夫)의 마음으로나마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웬수를,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해야겠고, 그 속에 맺힌 원한심을 풀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화해를 하고 화합을 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 첫째의 용서하고 화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속에 스스로 평화가 오고, 가족에도 평화가 오고, 이웃에도 평화가 오고, 온 겨레에 평화가 오고, 온 세계에 평화가 오도록 우리는 2532년에 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그렇게 되새기면서 법상(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호되, 억천(億千)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이 그 복(福)이 갓이 없으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어찌 항상 고교(古敎),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본 것만 같으리오.
이 옛 가르침, 고불(古佛)에 가르침, 고불에 경전(經典). 이 고불에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항상 전(傳)하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이고,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여. 이것을 '예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공덕을 무슨 말로써 다 그 공덕(功德)을 다 표현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마는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이요,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에 인(印)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다. 그대에게 청(請)하노니, 여러분께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앞에 터억 관(觀)하라.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건. 종이에다가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여.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생각하고 썽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우리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소소영령(昭昭靈靈)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터억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傳)해 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삼세(三世)에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해서 거기에 공양(供養)을 올리는 공덕도 말로 할 수 없이 장하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화엄경(華嚴經) · 법화경(法華經) · 금강경(金剛經) · 원각경(圓覺經) 이러한 경전(經典)을 항시 손에서 놓지 않고 그것을 독송(讀誦)을 하는 거, 그것도 참 공덕이 한량이 없지마는, 우리 최상승학자(最上乘學者)는 벌써 종이로 된 경전을, 또 먹으로 된 경전을 그것을 읽는 데에 그쳐서 될 것이냐. 진짜 경전은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거기에서 찾아야 참부처도 거기에서 친견할 수 있고 참경전도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이여. 그 경전, 그 참부처님을 친견하고 독송하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해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불(化身佛)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出現)을 하신 것이고, 이 문자(文字)로 된, 언어문자로 된 경전을 부득이해서 설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계축년(癸丑年)에 설(說)하신, 그 계축년 해제(解制) 때 설하신 그 법문(法門), 오늘 이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마치고 온 대중(大衆),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에서 삼동안거를 마치고 온 대중, 그리고 이 경기도 일원(一圓)에 모다 회룡사라든지, 저 충청도, 옛날에 만공(滿空) 스님, 보월(寶月) 스님을 모시고 여기 전강(田岡) 조실 스님, 한국에 근대에 모다 여러 큰스님네들이 거기서 모다 정진을 하신 보덕사(報德寺) 거기 선원에서 난 대중까지도 여기에 오늘 해제에 참석을 했는데, 여기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에서 정진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이 용화사(龍華寺) 법보선원(法寶禪院)에 한자리에 모여서 해제 법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도 들으니 각기 그 선원들에서 삼동 석 달 동안을 정말 여법(如法)하게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알뜰하게 모다 정진(精進)들을 하고, 모다 눈에는 정진을 해서 그 샛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참, 신심과 지혜로써 그 석 달 동안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놨으니 모다 업장(業障)이 소멸을 하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러한 정진 뒤끝이라 모다 몸에서는 향내가 진동을 하고 눈에서는 그 날카로운 빛이 아주 번쩍거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삼천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참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그거거든.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여기(인천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창설하시고, (수원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창설하시고 그러한 뜻이 오직 이 일대사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 부처님과 역대조사와 근대에 여러 선지식(善知識)들의 그러한 자비(慈悲)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末世)에 우리가 참선(參禪)이라고 한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하는 방법(方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精進)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조와 선지식들의 은혜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 지 삼천년이 지낸 이 말세(末世)입니다. 온 세계는 말세의 여러 가지 현상(現狀)이 도처에서 일어나 가지고 서로 죽이는 일만을 연구하고, 서로 죽이고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 마치 파리 목숨만도 못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우리가 목숨 바쳐서 일대사를 위해서 도(道)를 닦을 수 있는 이, 과거에 우리가 무슨 숙연(宿緣)을 심어 가지고 우리는 이러한 법(法)을 만나게 되었는가. 참 뜨거운 것이 속에서 참 솟구쳐 올라올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러한 정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이 중앙선원에서, 또 법보선원에서, 태화선원에서, 도처 선원에서 이렇게 옛날 부처님 때에부터서 내려오는 이 동안거 하안거, 이 안거(安居)의 법도(法度)에 따라서 한 철 한 철을 지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하고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겨울살림 여름살림을 이렇게 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그 생활 법도(法度)도 대단히 중요하지마는 그 내부에,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심(信心), 정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되어도 끈질긴 인내력으로써,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계축년(癸丑年) 녹음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중국에 천목산(天目山) 고봉 선사(高峰禪師). 3년 사한(死限)하고 그 정진하신 말씀이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우리는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할 때까지, 또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신참(新參) 구참(久參)을 막론하고,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스님네나 또는 이 거사(居士)님이나 또는 이 청신녀(淸信女)를 막론하고 오직 이 고봉 스님께서 도를 닦으신 바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도 그러한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크고 간절한 큰 의심을 가지고 그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이 말씀은 어쨌든지 우리는 큰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데,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疑心)이 커야 한다. ‘의심이 크다’는 말은 무엇이냐? 들다가 말다가, 좀 하다가 말다가, 환경에 끄달려서 시비(是非)에 빠지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큰 의심이 날 수가 없습니다. 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내가 여자니까, 나는 몸이 건강틀 못하니까, 또는 나는 무식하니까' 등등 자꾸 부정적(否定的)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근기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해봤자 어피차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고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해서,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앉어서 흉내만 내고 있어 봤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여자가 되었건, 근기가 하열(下劣)했건, 나이가 먹었건 그럴수록에 백배 천배 더 분심(憤心)을 내서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을 잡드리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한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하실 때에, 처음에 경(經)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 번만 쑤욱 보기만 해도 외어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經) 한마디 한마디를 뼛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 가지고 이십여 세의 아주 새파란 젊은 나이에 참 대강사(大講師)에 전강(傳講)을 받아 가지고 팔도에서 모여든 학인(學人)들에게 경(經)을 설하시다가, 참 퇴속한 은사 덕택으로 자신이 이렇게 대강사가 된 것이 너무너무 고마와서 인사차 그 은사를 찾아가다가 전염병이, 요새 같으면 장티부스 같은, 지금은 여러 가지 예방주사도 있고 모다 치료하는 방법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러한 전염병을 방지할 방책(方策)이 없어 가지고 걸렸다 하면은 온 마을이 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그러한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서 차례차례 죽어가는 그런 마을에서 그러한 것을 보고서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
그래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보고 대강사가 되어서 그 경(經)을 강(講)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이러한 그 사람이 막 죽어가는 꼴을 보고 공포심이 난 것으로 봐서, 이것이 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종횡(縱橫)으로 설한들 이것이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대발심(大發心)을 해 가지고 동학사(東鶴寺)로 돌아가서 학인들을 다 흩어버렸어. “각자 너희들 인연 따라서 다 흩어져라” 보내버리고서, 그 동학사 실상사(實相寺, 지금 동학사 실상선원實相禪院) 그 지금 암자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는데 그때는 거기에 암자가 있었어. 그 암자에서 문을 처닫고 그 구멍으로 밥을 넣어달라고 해 가지고는 아주 죽기로 각오를 하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나라 이조(李朝) 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얼마 동안 침체를 하고 경을 숭상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 경허 스님께서는 그러한 침체된 선풍(禪風)을 갖다가 부흥(復興)을 했어. 그래 가지고 한국에 침체했던 선풍을 갖다가 이렇게 진작(振作)을 해 가지고 오늘날에 참 이 최상승법이 이렇게 참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허 스님 밑에 모다 육대 선지식(六大善知識)이 모다 나오시고, 그 선지식 밑에 오늘날 이렇게 전국에 선풍이 이렇게 진작하게 된 것은 경허 큰스님의 그러한 참 출현(出現)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到處)에 참선법(參禪法)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일본에서 모다 소개가 된 탓으로 모다 의리선(義理禪)—의리로 따지는, 의리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통과하는 그러한 참선법이 모다 소개가 되어 있지마는, 우리 한국에 남아있는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이 경허 스님, 만공 스님으로 해서 이렇게 내려오는 이 법이 아직 남아있는 한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을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다시 진작을 시켜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이 활구참선법을 선양(宣揚)을 해서 불일(佛日)이 재휘(再輝)하도록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부대중(四部大衆)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해 가지고 확철대오해서 고인(古人)의 전지(田地)에 이르러서 스스로도 생사해탈을 하고 이 정법(正法)을 세계에 선양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실천을 해야 할 때가 바야흐로 온 거 같습니다.(처음~26분56초)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 봄에는 동해(東海)로 좇아 남(南)으로 주장자(柱杖子)를 날리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가을에는 서산(西山)을 향하다가 또한 북방(北方)으로 가는구나. 저 남방(南方)에서 해제를 하고 북방(北方)으로 가고, 북방에서 해제를 하고 저 남방으로 가고, 철철이 여기서 해제(解制)했다 저그 가서 결제하고, 저기서 결제(結制)했다 이리 오고 오고가고,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걸망을 짊어지고 왔다갔다한다 그 말이여.
삼백육순(三百六旬)을 장요요(長擾擾)허되, 삼백육십 일을 마냥 부산하게 왔다갔다하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여. 어느 날에 고향에 이르를까 알 수가 없구나.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에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禪房)으로 이렇게 돌아다녀. 주지(住持)도 안 하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에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하고 해제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 가지고도 명예와 이익,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정말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천목산 고봉 스님처럼 정말 한번 목숨 바쳐서 한바탕 해봐야 할 것이다 그거거든.
여기서 한 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쪼끔 해보다가 또 해제하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로 갔다가 저 한강(漢江)으로 왔다 낙동강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衲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 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 될 것이냐 그 말이여.
우리가 출가(出家)한 목적, 부처님께서 이 출가 제도를 만들아 논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다니라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이여. 정말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더라. 어느 곳이고 한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녹음법문일망정,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살아계신 조사(祖師)의 법문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닦아 주었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면은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아니하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내가 여기서 성불(成佛)하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않으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 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하면은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3년 사한(死限)을 하고. 이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3년을 사한(死限)을 하고 그 자나깨나 화두(話頭)를 들고 했지만 조끔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妄想) 아니면 혼침(昏沈),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3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하시지 안 했습니다. 고봉 스님이 만약에 한 철 해보고 안 되어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다니고 말았다면 그러한 대각(大覺)을 성취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살선방에 여러 보살님네들도, 이 정묘년 삼동안거(三冬安居)에 133명이라고 하는 많은 대중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렇게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방이 상당히 크고 저쪽 별당까지 모다 선실(禪室)을 했지마는, 그래도 모다 중좌(重座)를 하고 빡빡허니—그 공기도 나쁘고, 이 자동차 소음 소리는 밤낮을 끊이지 않고 그렇게 소란스럽고, 여러 가지가 시설도 불충분하고 하지마는, 그런 불평 한마디 없이 참 애써서 모다 정진들을 하셔서 원장(院長)으로서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가 순일하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된다. 참 기쁘다’ 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어야 ‘이만했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만족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金剛經)』에 수다원(須陀洹) ‧ 사다함(斯多含) ‧ 아나함(阿那含) ‧ 아라한(阿羅漢), 이런 사과(四果)에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한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菩薩果)를 증득(證得)했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그 법문이 구구절절(句句節節)이 씌여 있습니다.
정진을 하다가 좀 화두가 순일하고 성성한 경계(境界)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足)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고 모두가 그 소식(消息)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에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礙)의 경지(境地)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할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조끔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足)한 줄을 알고. 체,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구뎅이로 떨어지는 결과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 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지를 않고, 들을 때뿐이지 금방 일 분도 안 되어서 딴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번뇌(煩惱)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昏沈)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退怠心)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자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안고 젖을 먹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트려버리면 그놈이 떨어져 내려가지고 죽지 않고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 말이여. 그 떨어져 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린 것은 그건 버려버린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르적거린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 해. 그놈이 애미 있는 데를 찾아서 뽁뽁 기어 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禪房)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입는 거 처소(處所)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薄)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 가지고 그런 대도(大道)를 성취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용화사가 공기가 나쁘고 주변이 시끄럽고, 공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용(受用)이 박하다 해도 부처님께서 겪으신 그런 고행(苦行) 정진에다 비교하면 이것은 만 분에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하니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수록에, 수용이 박할수록에 더 대용맹심(大勇猛心)을 내서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뚱이를 낳아주신 부모에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祖師)와 선지식(善知識)과 부처님에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解制)를 하고 계속해서 눌러서 정진을 하신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부득이한 인연으로 다른 처소로 가시더라도 어쨌든지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말씀과 산승(山僧)에 이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시고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을 합니다. 게송 한마디를 읊고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뚧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山河大地)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 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대, 인간에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청산(綠水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거든.
여기 이 법보선원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 모다 그런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에 발심(發心)한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 된 사람도 있고, 또 괴각(乖角)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한 경계(境界)에, 다른 사람에,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 맞는, 도업(道業)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天堂)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다 갖다 놔도 그 사람은 흡족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여러분들도 해제를 하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선방(禪房)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내 마음과 같지 못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마셔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世俗),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가 다 같이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26분59초~51분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 고교(古敎), 고불(古佛)에 가르침이라는 것은 불조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에 인(印)’을 가리키는 말, 중생본유(衆生本有)에 일착자(一著子)다.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다 /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〇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을 설하시고 3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등등상속(燈燈相續)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〇진정한 신심(信心),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끈질긴 인내력으로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〇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오(無悟)라.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 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〇큰 의심(疑心)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된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끔도 차등(差等)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衆生)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같은 부처’ 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今生)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〇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했으면 되었다’ 한 그러한 한도(限度)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게송)약인투득상두관~ / 발심만 제대로 하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의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〇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點檢)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1/4) 약 19분. (2/4) 약 17분. (3/4) 약 21분. (4/4) 약 12분.
(1/4)----------------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한디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변계마군종차락(徧界魔軍從此落)하면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나무~아미타불~
금강보검의천한(金剛寶劍倚天寒)이다. 금강의 보배 칼이 하늘을 의지해서 서릿발이 치는데,
일휘능최만인봉(一揮能摧萬仞峰)이다. 한번 휘둘러서 능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를 갖다가 꺾어 버리더라.
변계마군종차락(徧界魔軍從此落),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두루 꽉 차 있는 그 마구니가 이로 좇아 떨어지니,
유하정매틈기중(有何精魅闖其中)고, 무슨 정매(精魅), 도깨비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속을 엿볼 수가 있겠는가.
방금 전강 조실 스님께서—갑인년이면 조실 스님께서 열반하신 해인데, 그해 정월에 설하신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들으신 바와 같이 언제나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설하신 법문의 요점은 활구참선(活句參禪)입니다.
활구참선!
활구참선은 말 길이 끊어지고, 이치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요.
요새 참선, 많은 사람들이 참선(參禪)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모두 참선을 알려고 그러고, 참선을 할려고 노력을 하고—그런데 조실 스님께서 평생 동안 그 선양을 하신 그 참다운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그말이여.
공안(公案)을 가지고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분석하고 따지고, 그래서 분별하고 따지면,
아무리 그 공안을 타파해서 생사해탈하는 그러한 공안이라 하더라도 중생심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그러면 그 훌륭한 공안이 사구(死句)가 되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백 년을 따지고 천 년을 따지고 무량겁을 따져도, 따질수록 점점 공안의 참뜻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고.
따라서 참 깨달음을 향해서 정진을 해야 할텐데 따지다 보면 깨달음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져 가거든.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어져 버리고 말아버리는 것이여.
비단 조실 스님 법문뿐만이 아니라 역대조사(歷代祖師)께서 설(說)하신 법이 바로 이 활구참선을 설하신 것입니다.
성현이 가신 때가 멀고, 법은 마강법약(魔强法弱), 마구니는 강해지고 법(法)은 약해져.
그러니 부처님의 설하신 법도 중생 나름대로 사견(邪見)을 붙여서 사법(邪法)을 만들고, 조사가 선양하신 활구참선법도 이렇게 말세가 되니까 자꾸 중생의 소견으로 사량분별을 붙이고, 이치 길로 따지고 말 길로 따져서 더듬어 들어가서 자기 나름대로 온갖 삿된 소견을 붙여서 분석을 하니, 그것이 참다운 참선인 줄 알고 전부 후래(後來) 학자들은 그 공부 첫걸음부터 그르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기가 쉬우냐 하면 활구참선은 말 길이 끊어지니 뭐라고 입을 벌릴 수도 없고, 이치 길이 끊어졌으니 뭐라고 거기 분석을 할 수도 없고.
밤낮 ‘알라야 알 수 없고,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곳을 향해서 의단(疑團)을 거각(擧却)하라!’ 그렇게 한 달을 해보고 두 달을 해보고 일 년을 해보고 이태를 해봤자 해 갈수록 답답하기만 하고 재미가 없어.
그런데 일본 책이라든지, 그런 모다 공안을 이리저리 분석해서 따져 논 그런 책을 보면 모두 읽을 맛이 있고 재미가 있다 그말이여. 알아지는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고 그러니까.
그러니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모두가 다 그런 책을 읽어 가지고, 명색(名色)이 참선을 한답시고 한 것이 모두 의리선(義理禪)만 허게 된다 그말이여.
우리 나라에 경허 스님, 만공 스님 이후로 쭉 내려오는 활구참선법은 공안을 그런 식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행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떠한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해도 사구참선(死句參禪)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
설사 10년을 하고 30년을 하고 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 소견이 나지 아니한다 하더라도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갈지언정, 무슨 사량분별을 가지고 어떤 소견이 나기를 바래고 어떤 공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무슨 가늠이 가고 이러기를 바래지를 말어야 한다.
열 가지 공안 또는 백 개, 이백 개 내지 삼백 개, 천이백 공안에 대해서 해석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 소견이라, 중생의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얻어지는 해석은 생사심(生死心)만을 더욱 조장할 뿐 깨달음에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여.
깨달음은 생사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사심에 즉(卽)해서 대의단으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져, 말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이리 해야 그것이 바로 참선을 해 가는 거고, 참선을 바로 해 가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자신이 무량겁을 두고 고향을 떠나서 육도(六途)를 돌면서 그 방랑자 된 그러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한 방랑생활을 한 그러한 뼈에 사무치는 그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치우쳐 객을 어여삐 여겨.
지나치리만큼 일체 중생의 그 생사윤회(生死輪廻)하고 있는 일체 중생에 대해서 정말 가슴깊이 불쌍하게 여기신다 그말이여.
관애탐배석취인(慣愛貪盃惜醉人)이다. 평생 동안을 술을 많이 먹고 과음 폭음을 해서 그렇게 이 술을 많이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야 술 취한 사람을 갖다가, 그 술 취한 사람의 속사정을 이해를 한다 그말이여.
내하유자부지반(乃何遊子不知返), 유랑하는 방랑하는 사람은 객지로 객지로 떠돌기만 하고, 본고향(本故鄕)으로 자기집으로 돌아올 줄을 몰라.
장재미도축풍파(長在迷途逐風波)다. 길이 타향에 길을 잃고 풍파를 쫓아가고 있구나.
모든 불보살과 역대조사와 선지식들은 자신이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 속에서 그렇게 많은 그 고통을 받아왔고 그렇게 받은 그러헌 스스로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부모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서 출가를 해서 대도를 성취하고,
대도를 성취한 뒤에도 일신상의 안락을 불구하고 일평생 동안을 중생과 후래 학자들을 위해서 그렇게 그 생사해탈(生死解脫), 어떻게 하면 이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그렇게 목이 쉬도록, 목에서 피가 나오도록 그렇게 간곡히 노바심절(老婆心切)하게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일러주시건만 각자 업(業)이 지중(至重)해서 계속해서 그 업의 풍파, 업풍(業風)에 따라서 계속 객지로 객지로 떠돌고 있을 뿐 고향으로 그렇게 돌아오지를 못한다.
불법(佛法)을 믿지 않고 다른 외도(外道)를 믿는다던지 또는 불법을 믿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지 못하고 방편설(方便說)에 떨어져 있는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이미 이 최상승법을 믿고 또 활구참선을 의지해서 공부를 시작한 지가 벌써 오래된 그런 사람도 진정으로 아까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활구참선의 삼요(三要)를 갖추어서, 그 삼요는 대신심(大信心) · 대분심(大憤心) 그리고 대의심(大疑心) 대의단, 이 3가지를 한목 갖추어야 그래야 진실한 수행자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18분30초)
(2/4)----------------
대신심이란 게 무엇이냐? 무엇을 믿어야 대신심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냐?
내가, 내 자신이 부처라고 하는 사실, 내 자신이 바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철두철미하게 믿는 것이 그것이 바로 대신심이여.
‘이론상으로는 우리도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다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참선을 해서 가지고 있는 불성을 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견성이다’ 이렇게 다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따로 있고, ‘내’라고 한 놈이 불성을 속에 가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할 줄 알고, 말을 들을 줄 알고, 성도 낼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 그 당처(當處), 그 당처를 여의지 않고 그 당처가 바로 불성이라, 바로 그것이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놈을 철저히 믿어야 그놈을 여의고 따로 부처를 찾지 않게 되는 거여.
그놈을 여의고 따로 ‘참 부처’를 찾는 한에는 영원히 찾어도 부처님은 나타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이 신심이 꽉 아주 견실(堅實)해야 그래야 참선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여.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있어.
그 다음에 대분심(大憤心).
왜 내 자신이 부처이고, 그러면서 왜 이렇게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느냐?
과거의 모든 부처님과 불보살, 역대조사는 진즉 이 문제를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이렇게 육도를 윤회하면서 생사고해 속에서 이렇게 헤매이고 있는가?
왜 멀쩡한 부처님이면서 부처님으로서 살지를 못하고, 부처님으로서 행하지를 못하고, 어찌 이렇게 업풍에 따라서 이렇게 윤회를 거듭하고 있고, 언제 그 기한 없이 이렇게 고취(苦趣) 속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생각해 보면 뼛골에 사무치도록 분심! 한탄이라고 할까? 원망이라고 할까? 기가 맥힐 일입니다. 그러한 뼛속에서부터 사무치는 그런 분심이 없고서는 도는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은 동시에 발(發)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과거 무량겁 무변 나유타 겁에 이 사바세계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그 부처님의 호(號)가 바로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하는 부처님이셨다”
삼천년 전에 인도에 출세하신 부처님도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지마는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과거 무량무변(無量無邊) 나유타(那由他) 겁(劫) 이전에도 이 사바세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셨다” 이것입니다.
중생을 위해서 대열반경(大涅槃經)을 설하고 계셨어.
그때에 한 친구로부터 ‘지금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열반경을 설하고 계신다’ 그 말을 들었다 그말이여. 듣고서 마음 가운데에 큰 환희심을 내고서 바로 가서 공양(供養)을 올리고 법문을 듣고 싶었지만 너무 가난하고 아무 재산이 없어.
그래도 부처님을 가서 친견을 하고 법문을 들을려면 무엇인가 정성스럽게 공양할 거리를 마련해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고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서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법문을 들어야 할텐데, 너무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여러 가지로 궁리 끝에 ‘차라리 이 몸뚱이를 팔아 가지고라도 공양구(供養具)를 만들어야겠다’ 이래 가지고 읍에 나가 가지고 “이 몸뚱이를 사시오. 이 몸뚱이를 살 사람이 없소”하고 외치고 댕겼다 그말이여. 워낙 박복(薄福)한 사람이 되어서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해.
누가 몸뚱이를 살려고 한 사람이 있어야 팔텐데, 이 몸뚱이를 사라고 목이 쉬도록 외쳐도 아무도 살려고 한 사람이 없어. 사람이 모여들지를 않는다 그말이여.
그래서 할 수 없이 실망을 하고 집으로 허탈 상태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데, 한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어. 혹 이 사람은 내 몸을 살랑가 해서 “이 몸뚱이를 사시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 내가 사겠다”고.
“그런데 나한테 무서운 병이 있는데 의사한테 진단을 해서 처방을 냈는데 ‘사람 고기를 하루에 석 냥[三兩]중씩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고 그러니, 당신이 나한테 팔려오면 내가 당신을 사면 날마다 당신 살을 갖다가 석 냥씩 내가 뜯어서 먹어야겠는데 그렇게 먹어도 되겠느냐?”
그렇게 말하니까 “대단히 좋다”고.
“그러면 만약 내 집에 와서 하루에 석 냥씩을 나한테 바치면 내가 금전(金錢), 금으로 된 돈을 석 닢씩을 주겠다” 그렇게 해서 서로 언약이 되었어.
그래서 그 사람을 따라서 갔는데,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무슨 소원인고 허니는, 내가 이 몸뚱이를 팔아 가지고 그 돈을 다른 데에 쓸려고 헌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그리고 부처님께 법문을 듣기 위해서 내가 이 몸뚱이를 팔려고 그런 것이니, 이 몸뚱이를 날마다 그렇게 석 냥씩 띠어내면은 내가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가 없으니 7일 동안을 나한테 허락을 해주면 내가 먼저 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듣고 와서 그래 가지고 당신에게 이 몸뚱이를 바치겠다”하니까.
“그래 좋은데, 7일은 너무 많고 하루만 승낙을 하겠다” 그러면서 돈을 석 닢을 주어서 그래서 인자 그놈을 가지고, 공양구를 마련을 해 가지고 부처님께 그 공양을 올리고서 절을 하고서 열반경 설하신 것을 들었다.
듣는데, 다른 많은 법 설하신 것은 다 잊어버리고 머리가 우둔해 가지고 게송 하나만을 기억을 해 가지고 왔어.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하사 영단어생사(永斷於生死)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지심청(若能至心聽)하면 상득무량락(常得無量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 여래가 열반을 증득하사,
영단어생사(永斷於生死)다. 길이 생사를 끊으셨도다.
약능지심청(若能至心聽)하면, 만약 능히 지극한 마음으로 들으면,
상득무량락(常得無量樂)이니라. 항상 무량의 낙을 얻으리라.
이 게송, 이 간단한 게송 한마디만 겨우 마음속에 새겨 가지고 돌아왔어. 그래 가지고 그 주인집에 와 가지고 날마다 그 게송을 속으로 읊어.
읊으면서 허벅지로 궁뎅이로, 살 좋은 데로 석 냥씩을 뜯어서 그래 가지고 그 주인한테 약으로 바쳤는데, 그러면서도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이 게송을 염송(念誦)하고 그러면서 했기 때문에 전혀 괴로운 줄도 모르고 아픈 줄도 몰랐어.
그러기를 날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해 가지고 한 달 동안을 그렇게 했다 그말이여.
이 세상에 좋다는 약은 다 써도 백약이 무효인데, 한 달 동안을 그 사람의 그 인육을 갖다가 먹고서 그 무서운 병이 나았다 그말이여. 그 병 이름이 무엇이라고는 경에 쓰여져 있지 않지마는.
그래 가지고 병이 나았는데 신기하게도 그 주인의 병이 다 낫자마자, 그 온 몸뚱이에 그 한 달 동안 30번을 갖다가 석 냥씩 띠어낸 그 상처도 깨끗이 다 아물어 버렸다 그말이여.
그 날마다 그 석 냥씩이면 굉장히 그 많은 살점뱅이인데, 손톱 밑에 가시 하나만 들어도 잠을 못 자고 그렇게 아리고 쑤시고 아픈 것인데, 한 번만 띠어내도 그 상처가 아물라면은 여러 달이 걸려야 그 상처가 아물고, 염증이 생기면 고름이 나고 그래 가지고 그 새살이 차오를라면 힘이 들텐데,
날마다 띠어낸 자죽이 한 달 동안을 그랬으니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 얼마나 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겠지만,
부처님께 들은 그 열반경의 그 게송을 듣고서 그 게송을 갖다가 지극정성으로 독송하는 그 공덕으로 그 신심으로 아픈 줄을 전혀 몰랐고, 아픈 줄만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주인이 병이 다 나았다고 그 말을 듣고 그것도 기쁘려니와, 자기 상처도 이리 보니까 일시에 다 상처가 다 아물어서 다 나은 것을 보고서 너무너무 환희심이 났다.
그러자 대보리심(大菩提心)이 돈발(頓發)을 했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원(願)을 세우기를 『내생에 내가 반드시 성불(成佛)을 하면 호를 석가모니불이라 허리라』 이렇게 원을 세웠어.
보리심을 발(發)해 가지고 원을 세우면은 그 원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어떠한 소원이 있으면 오욕락(五欲樂),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그러한 마음으로 원을 세우지를 말고, 크고 작은 원이 있으면 보리심을 발해야 돼.
정말 청정한 마음으로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그리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면서 원을 세우면 그 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말이여.(18분30초~35분27초)
(3/4)----------------
그래서 언제나 이 기도할 때에도 말씀을 드리지만 ‘청정한 마음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그 기도를 성취할 수가 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법을 위해서 자기의 몸뚱이를 팔고, 그래 가지고 한 달 동안을 날마다 살점을 띠어서 그 아픈 환자의 병을 낫으기 위해서 띠어 주면서도 계속 열반경에 그 부처님께 들은 그 게송을 외우면서 지극정성으로 했기 때문에, 아픈 줄도 모르고 오직 그 육체와 자기의 모든 것을 법을 위해서 바쳤어. 그래서 아픈 줄을 모르는 것이다.
세속에서도 그 어머니가 그 자식을 낳을 때, 그 고통이 참 낳아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저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고통이 심하다고 그럽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그 은중경(恩重經)을 통해서, 그리고 또 들은 바로서 그 고통이 매우 심하고, 그 애기를 낳으러 들어가면서 ‘다시 내가 또 이 신발을 신을 수가 있을런지’ 그렇게 참,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산고(産苦)라고 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러고.
또 애기를 낳아 가지고도 애기가 어디가 아프면은 그렇게 참, 밤잠을 안 자고 애기를 안고서 그 간호를 하고. 그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 뉘우면서 그 애기를 길러낸 어머니의 그 고통.
또 그 애가 커서 학교를 가고 시험볼 때—지금 여러분들도 다 겪고 계시지만 참, 그 애 학교 합격하기 위해서 같이 밤을 지새우면서 그러한 어머니의...
또 그 애가 커서 장가를 들고, 그 애가 커서 또 군인에를 간다던지, 그 어머니가 팔구십이 되고 애가 칠팔십이 되어도 그 칠팔십, 육칠십이 된 늙은 아들을 보고도 항상 애기처럼 생각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
그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괴로운 줄을 모르고 다 갖다가 거기 정성을 다 쏟으신 거다 그말이여.
그 생각을 미루어서 생각해 보면 정말 이 부처님의 그 전생, 저 무량 아승지겁 이전에 그 법을 위해서 몸뚱이를 바치고 법을 위해서 살점뱅이를 띠어낼 때에 조금도 아픈 고통을 느끼지를 아니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치로 미루어 볼 때에 이해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법망구가 됨으로 해서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을 허지만 참, 참선이 안된다. 정진이 잘 안된다. 혼침이 오고 망상심이 일어난다.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하고 화두가 순일하지를 못한다. 무슨 잘못이 있어서, 공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공안을 타파를 못하고 확철대오를 못한 것이 아니냐’
많은 분들이 그것을 호소를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순전히 그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세하게 따지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이 삼요(三要)를 갖추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를 갖추지 못함으로 해서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하는 것이지, 그밖에 딴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당 뒤에다가 방석을 하나 갖다 놓고 거기서 그저 하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정진을 하셨던 것입니다.
조금 혼침기가 있으면 일어나서 왔다갔다 일직선상으로 포행(布行)을 하시면서, 그래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그 자리에 와서 또 앉고, 또 쪼금 혼침이 온 듯하면 금방 일어나서 또 포행을 하시다가 또 하고,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두 달,
처음에는 모다 대중이 ‘어린 사람이 말뚝 신심이 나가지고 지가 바로 무슨 공부나 한 척한다’고 모다 쑤군덕거리고 모다 그랬지마는.
열흘을 그렇게 해, 스무 날을 그렇게 해, 한 달을 그렇게 해, 두 달을 그렇게 해, 한결같이 그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쑤군덕거리고 모다 빈정거리고 하는 그런 말이 다 쑥 들어가 버리고.
예불(禮佛) 시간에 예불을 하면서 “지심귀명례~”하고 엎드려 가지고는 엎드린 채 잠에 깊이 빠져 가지고 일어나지를 못해.
그래서 일으킬라고 하니까, 입승(立繩) 스님이 “내비둬라. 엎드린 채 좀 한숨 자게 놔둬라” 이렇게까지 모다 입승 스님을 비롯해서 대중스님네들이 모다 그 애껴주셨다 그말이여.
그 어린 소년이 어떻게 그렇게 철저히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정말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어리신 나이로 공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신 것입니다.
그때에 그러헌 참, 목숨 바치는 그런 위법망구적인 그러헌 그 정진이 없었다면 어떻게 조실 스님이 그렇게 어린 나이로 확철대오를 허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과거의 모든 불보살과 역대조사들이 다 도를 성취하신 데에 있어서는 그만한 위법망구적인 그러헌 신심과 분심이 없고서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번 화두(話頭)를 타고, 불명(佛名)을 타고 화두를 타서 정진을 시작을 하면 귀로 모든 소리를 듣되 벙어리와 같고, 귀는 열려 있지마는 귀는 열려 있어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하더라도 귀머거리와 같고, 입은 열려 있어서 부득이해서 무슨 말을 한다 하더라도 속으로는 아주 벙어리와 같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야 허냐 하면, 들을 소리 다 듣고 거기에 온갖 분별을 다 내고, 입이 열려 있다고 해서 온갖 말참견 다 하고 온갖 잡담으로 세월을 보내고, 그래 가지고 그러면서 어느 겨를에 화두를 들며, 들다말다 귀로는 온갖 시비에 다 참견하고, 입으로는 온갖 시비 다 참견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신기하고도 묘한 것이 우리의 그 일념(一念) 속에는 십법계(十法界)가 갖추어져 있어. 그리고 일법계(一法界) 속에 또 다시 십법계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일념(一念) 속에 백법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되는 것이여.
그런데 그 일법계 속에는 30종의 세간(世間)이 들어 있는데, 따라서 백법계에는 삼천 종의 세간이 들어 있다 그말이여.
결론적으로 일념 속에 삼천 가지의 세간이 들어 있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바로 일념 속에 들어 있다 그말이거든.
그 일념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는데 하루에 몇 생각이 일어나냐 그말이여.
눈뜨자마자 끝없는 생각이 일어났다가 얼마동안 딴 생각으로 이렇게 발전을 하다가 결국은 그 생각이 또 변해서 또 꺼지면은 꺼지자마자 또 따로 새 생각이 일어나고, 거의 단 1분 1초도 쉴 사이 없이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 생각 속에 삼천 가지, 삼천 종의 세간이 갖추어져서 같이 휘몰아친다 그말이여.
그렇게 살아오기를 무량겁을 살아왔으니 그 생각을 안 할려고 한다고 해서 안 해질 수가 없는 것이여.
공부를 올바르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생각을 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그래도 생각이 일어나면은 짜증을 내고 그러는데.
그 생각을 없앨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를라고 헌다고 해서 눌러지는 것도 아니고 무장 더 일어나는 것이여.
그 생각을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하느냐?
‘이뭣고?’
좋은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악한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슬픈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원망하는 생각이 일어나도 ‘이뭣고?’ 오직 ‘이뭣고?’
생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이뭣고?’ 빨리 챙기는 것에다가 정성을 쏟으라 그말이여.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열흘을 그렇게 살아. 한 달 두 달을 해도 조금도 공부가 더 나아진 것 같지 않아. 석 달 열흘을 살아도 공부가 더 나아간 것 같지도 않아. 일 년, 이태, 삼 년을 한다고 해도 공부가 그렇게 썩 그렇게 순일하게 잘된 것 같지 않다 그말이여.
그래도 그 짜증을 낼 일도 아니고 또 포기를 해서도 안 된다 그말이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 안 일어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말이여.
당연한 것을 당연한 걸로 받아들이고 바르게 대처만 해나가면 될 것을 자꾸 그 일어난 것을 갖다가 성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내가 이 공부를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 내가 참선을 헐 복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하고 한탄을 하는데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자꾸 화두를 들어.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그렇게 무섭게 했는데, 허실 때에 그 어릴 때 같이 크던 친구가 이게 참, 병으로 허망하게 죽은 것을 보고 그렇게 무상(無常)을 깨닫고,
또 꿈에 지옥을 구경을 허셨는데 그 지옥고 받는 참혹한 그 광경을 보고 아주 몸서리치면서 꿈을 깨고서, 그래서 경을 배우다가 경을 덮어버리고 그 어린 나이로 선방(禪房)에 나가셨다 그말이여.
그때에 그 공부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잘 지도를 받어서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너무 급하게 하지도 않고 너무 늘어지게 하지도 않고 해서 잘 잡드리를 해 나가셨으면 아무 그런 병환이 나시지 않고 대도를 성취했을텐데,
너무, 어린 마음에 워낙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무상을 깨닫고 분심이 솟구쳐 오르니까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막 해 제꼈다 그말이여.
그래 놓으니 상기(上氣)가 되아 가지고, 상기가 될수록에 점점 더 공부를 늦꾸지 아니하고 막 몰아붙였다 그말이여.
그래 놓으니까는 눈이 벌게지기 시작하면서 눈알, 그냥 눈이 핏기가 들어서 벌게지고, 목구녕에서는 피가 막 넘어왔다 그말이여.
이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반드시 해야 하고—종교를 믿건, 안 믿건 심지어는 불교를 믿건, 안 믿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참사람 되는데 있어서, 참나를 찾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지만, 잘못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그런 중병(重病)을—그런 중병, 상기병과 같은 무서운 병을 얻을 수도 있고, 또 바르게 공부를 못하면 미친 병이 걸리기도 하고, 또 사견(邪見)에 떨어지기도 하고 이러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도 「혈맥론」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또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도 항상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르게 해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허는 법문을 항상 말씀을 하셨지마는.
이 참선이 그렇게 좋은 것이로되, 바르게 허지 못하면은 이 바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까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방법으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위법망구적으로 열심히만 한다면 백 명이면 백 명 다 백발백중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증명을 하셨습니다.
오조(五祖) 스님의 말씀에 이렇게 바른 법으로 열심히 이렇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이렇게 일러주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의 밥이 될 것이고, 내가 만약에 추호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리라’ 이렇게 참 간곡한 말씀을 하시고.
또 몽산 스님도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이렇게 여법(如法)하게 3년을 해서 안 되면 내가 너희들을 대신해서 지옥에 간다’고 이렇게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왕 불법을 믿을 바에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기왕 참선을 할 바에는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서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금생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기약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35분28초~55분58초)
(4/4)----------------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다고 한들, 그리고 아무리 부귀를 겸전(兼全)한 그런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그런 부귀를 누리고 권세를 누린다고 한들 이것이 모두가 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 것입니다.
원효대사의 그 꿈이라고 하는 소설은 그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를 갖다가 소설화해서 영화로 꾸민 것이지마는, 그것이 하나의 전설이나 일화에 지내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이 세상의 오욕락(五慾樂)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무상하고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이해를 한다면은 피아(彼我)의 상(相)이 없어져 버려.
‘내다, 내 것이다, 내가 잘났다’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거기서 떨어져 버리는 거고, 능소심(能所心)이 다 떨어져 버리는 거여.
능소(能所), 능(能)이라 하는 것을 주관이란 말이고, 소(所)라 한 말은 객관이란 말인데,
주관 · 객관, 내가 이렇게 보는 놈이 있고 나에 의해서 보여지는 상대 이것이 바로 주관과 객관이요, 이것이 능소(能所)인데, 능소심이 끊어져 버려야 하거든.
능소심이 끊어진 것은 바로 아상과 인상이 무너진 것이여.
아상, 인상의 그 능소심이 끊어져야 무념지(無念智)가 나타난다. 생각 없는 지혜, 무념의 지혜가 현전을 헌 것이고. 평등! 평등의 이치가 나타난다 그랬거든.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내가 권리가 높다’는 생각, 내가 참 부자라고 하는 생각, 그런 아상과 인상. ‘내가 불법을 더 많이 믿고 참선을 더 많이 했다’고 하는 생각,
무엇이든지 그러헌 아상과 인상이 있기 때문에 그놈 때문에 도문(道門)의 첫 단계를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능소심이 끊어져버리고 아상과 인상이 무너져 버릴 때에 도(道)에 첫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바로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되 분별심이 일어나지를 않은 거여. 비록 입을 벌려서 말을 하고 혀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분별이 나지를 않아.
대중 법도에 따라서 밥을 먹고, 대중 법도에 따라서 예불을 하고 십악참회를 하고, 대중 법도에 따라서 소지(掃地)를 하고 운력(運力)을 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에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할 뿐, 일체 분별이 나지를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를 갖다가 귀머거리와 같고 벙어리와 같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평상 일상생활을 그렇게 하면서도 완전무결한 벙어리가 되고, 완전무결한 귀머거리가 될 때에 깨끗하게 닦은 거울과 같아서 그 거울 앞에는 무엇이고, 빨간 것이 오면은 빨간 것이 나타나고, 파란 것이 오면은 파란 것이 나타나고.
빈 골짜구니에 소리를 지르면 “아!”하면 저 골짜구니도 “아!”하고 메아리를 치고, “어!”허면 “어!” 소리가 메아리쳐 오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이래 가지고 치연(熾然)히 비추고 치연히 응하되 응한 바가 없어.
겁화소해저(劫火燒海底)하고 풍고산상격(風鼓山相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진상적멸낙(眞常寂滅樂)이요 열반상여시(涅槃相如是)니라
나무~아미타불~
겁화소해저(劫火燒海底)요. 겁화(劫火)가 일어나가지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심지어는 저 바다 밑바닥까지 다 태워버리고,
그리고 바람이 불어가지고 산과 산이 무너져서 서로 맞부딪쳐. 설악산과 오대산이 맞부딪치고 백두산과 한라산이 맞부딪쳐서 다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진상적멸낙(眞常寂滅樂), 진상의 적멸한 낙은—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서 일체처 일체시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가지고 순일무잡해서 그래가지고 그 공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버리면,
불이 일어나서 온 대천세계를 다 태워버리고 바다밑에까지 다 태워버리고 산과 산이 맞부딪쳐서 가루가 되어서 부서져 없어진다 하더라도 적멸락, 진상(眞常)한 그 적멸락(寂滅樂)은 그 열반(涅槃)의 상(相), 열반상은 바로 여여(如如)할 것이다 그말이여.
이 세계가 앞으로 팔백억 년 가면은 이 세계가 부서져 없어지리라고 과학자들은 말을 합니다. 그 안에 부서져 버릴는지도 모르고 그 이상 더 가서 부서질란가 그것은 두고 봐야 알겠지마는 언젠가는 이 세계가 부서져 없어지고 말 때가 오는 것입니다.
연수(年數)로 따지면은 몇억 년 이렇게 말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썩 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내놓고 보면은, 억 년이나 천 년이나 백 년이나 십 년이나 지내놓고 보면 마찬가지 한바탕 꿈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10년을 살다가 죽으나 50년을 살다가 죽으나 백 세를 살다 죽으나, 죽는 마당은 다 똑같은 것이여.
죽은 마당에 이르러서 일생을 돌이켜보면 천자(天子)로 일생을 살았거나 평민으로 일생을 살았거나 국왕으로 일생을 살았거나 거지로 일생을 살았거나, 죽는 그 마당에서는 그 일생이 바로 한바탕 꿈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꿈에 지내지 못한 그 일생을 그렇게 값어치 없이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 속에 끌려서 얽혀서 그렇게 몸부림치다 죽어갈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죽는 마당에 이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보리심(菩提心)을 발해서 생사 없는 경계에 산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참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무진년 4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활구참선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떠헌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정진을 해야 하느냐? 부처님의 인행(因行) 때의 열반경에 설화를 한마디 말씀을 드렸고.
앞으로 한 달 뒤에 5월 첫째 일요법회날은 바로 이 법보재날과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오후 2시에 있는 일요법회를 법보재 법요식과 합해서 오전 11시 반에 법회를 거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착오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56분6초~67분58초)(끝)
*금강보검(金剛寶劍) ; 금강(金剛 : 다이아몬드)으로 만든 견고하고 예리한 보배로운 검. ①모든 번뇌를 자유자재로 끊어 없애는 지혜를 비유한 말. ②진리를 꿰뚫는 선지식의 날카로운 마음 작용을 비유한 말.
*서릿발(이) 치다 ; ①서릿발이 생기다. ②기세가 매우 매섭고 준엄하다.
*서릿발 ; 겨울철에 땅속의 수분이 얼어 성에처럼 되어 기둥 모양으로 뻗어 있는 것. 또는 그로 말미암아 지면이 부풀어오르는 현상.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줄여서 삼천세계(三千世界)라고도 함.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세계(三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정매(精魅 도깨비·정령·요괴 정/도깨비·요괴 매) ; 도깨비(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잡된 귀신의 하나).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사구(死句) ; 분별과 생각으로 공안(화두)을 따지고 이리저리 분석하여, 마음 길이 끊어지기 커녕은 점점 분별심(分別心)이 치성(熾盛)해지기 때문에 그것을 사구(死句)라 한다. 죽은 참선(死句參禪).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사법(邪法) ; 삿된 법. 이치에 맞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부정한 가르침. 외도(外道)의 가르침.
*후래(後來) ; ①뒤에 오거나 뒤져서 옴. ②장차 오게 되는 앞날.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명색(名色) ; ①어떤 부류에 붙여져 불리는 이름. ②실속 없이 그럴듯하게 불리는 허울만 좋은 이름.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경허 스님,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중생(衆生) ; ①생존하는 것. 목숨이 있는 것. 산것. 살아있는 것. 특히 인간. 사람들. 세상 사람. 유정(有情)이라고도 함. ②번뇌에 얽매여 미혹한 모든 존재.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무명(無明) ; 모든 현상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 근본 번뇌. 사제(四諦)에 대한 무지로서, 모든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 번뇌. 본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원초적 번뇌.
*업식(業識) ; ①과거에 저지른 미혹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의 과보로 현재에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작용. ②오의(五意)의 하나. 무명(無明)에 의해 일어나는 그릇된 마음 작용.
*생사심(生死心) ;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 생각. 번뇌(煩惱), 망상(妄想)을 말함.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활구참선만이 생각의 기멸(起滅)을 끊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참고] 송담스님(No.389)—89년(기사년) 부처님오신날 법어(89.05.12)에서.
〇중생의 번뇌심(煩惱心) ‘한 생각’ 일어날 때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번뇌가 꺼질 때 또 죽는 것, ‘우리의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것이 바로 생사(生死)인 것입니다.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한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생사윤회를 하는 것이어서, ‘이 몸뚱이 살아있으면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거 그 자체가 바로 생사심(生死心)이요, 생사심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만의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지고,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집니다.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모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날 때마다 업(業)만 더하고, 점점 고통이 심한 윤회를 거듭할 것입니다마는,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이뭣고?’ 자신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마디 본참화두를 거각(擧却)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물리치고, 업장소멸이 되고, 진리를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노바심절(老婆心切) ; 노파(老婆)가 자식·손자를 애지중지 하듯이, 스승이 수행자에게 나타내는 자비심으로 지극히 친절(親切)하다는 뜻.
*지중하다(至重-- 이를 지/무거울·소중할 중) ; ①(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무겁다. ②(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업풍(業風) ; 업의 풍파(風波 :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 업의 바람. 업의 세력[業力]을 ‘바람’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선하거나 악한 업력에 따라 생사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중생의 현실이 마치 풍파(風波 :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에 날리는 낙엽이나 배와 같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한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방편설(方便說 방법·수단 방/편할 편/말씀 설) ; 실상(實相)으로 이끌어 가기 위하여 상대와 조건에 알맞는 방법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
----------------(2/4)
*불성(佛性) :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심성(心性)으로 사람사람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자성(自性)을 말함. 불타나 중생이나 심지어 꿈적거리는 미물(微物)에 이르기까지 그 자성에 있어서는 차등이 없다.
*당처(當處) ; ①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 그곳. 또는 이곳. ②그대로. 지금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곳에서.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일대사(一大事) ; 매우 중요하거나 아주 큰 일. 삶과 죽음, 즉 생사(生死)의 일.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큰 일.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뜻.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것. 인간으로서의 완성.
『법화경』 방편품에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 出現於世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때문에 세상에 출현한다’라고 한 것에서 유래.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은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보이고, 지혜를 발휘하여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고취(苦趣) ; 고통의 세계. 공포와 고통이 극심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취(趣)는 중생이 번뇌로 말미암아 지은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세계를 말한다.
*발하다(發-- 일어날 발) ; 생기게 하거나 일어나게 하다. 생기거나 일어나다.
*대열반경 법문 ; 『대열반경』(남본南本) (혜엄, 혜관 등 번역) 제20권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②‘ 참고(0740c07~). 『열반경(2)』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494~495 참고.
*무량무변(無量無邊) ; 한없이 크고 넓음. 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음.
*나유타(那由他) ; 나유다(那庾多)라고도 한다. 지극히 큰 수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지만, 어느 정도의 수인지는 명확하지 않음. 천만이나 천억에 해당된다.
*겁(劫) ; (산) Kalpa 음을 따라 갈랍파(羯臘波) 또는 겁파(劫波)라 하고, 다시 줄여서 겁(劫)이라고만 한다. 인도에서의 가장 긴 시간단위. 지극히 긴 시간. 무한히 오랜 세월을 가리키는 말이다.
[참고] 겁(劫)의 무한히 긴 시간을 개자겁(芥子劫)•반석겁(盤石劫)으로 비유한다.
〇개자겁(芥子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성(城) 안에 겨자 씨를 채워,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겨자 씨가 다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〇반석겁(盤石劫) :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약 8km)인 큰 반석(盤石)을 부드러운 천으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반석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1겁이 끝나지 않는다고 한다.
*공양(供養)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오체투지(五體投地) ; 불교 신자가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께 큰절을 올려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방법.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닿게 하는 절. 먼저 두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도록 한다.
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지던 예법 가운데 상대방의 발을 받드는 접족례(接足禮)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륜투지(五輪投地)ㆍ오륜착지(五輪着地)ㆍ거신투지(擧身投地)ㆍ투지례(投地禮)라고도 한다.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공양구(供養具) ; 부처님이나 보살님께 바치는 음식물·향·꽃 등의 물건, 또는 그 물건을 바칠 때 사용하는 기구.
*석 냥[三兩]중 ; 냥(兩)은 무게의 단위. 귀금속이나 한약재 따위의 무게를 잴 때 쓴다. 한 냥은 37.5그램으로 귀금속의 무게를 잴 때는 한 돈의 열 배이고, 한약재의 무게를 잴 때는 한 근의 16분의 1이다.
‘-중(쭝重)‘은 ‘무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게송) ‘여래증열반(如來證涅槃)~’ ; 『대열반경』(남본南本) (혜엄, 혜관 등 번역) 제20권 ‘22.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②‘ 참고.
*지극정성(至極精誠) ; 더할 수 없이 극진한 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진실되고 성실한 마음).
*염송(念誦 생각할 염/욀·암송할 송) ; 마음속에 부처님을 염원(念願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간절히 바람)하며 불보살(佛菩薩)의 명호(名號 이름)나 경(經), 진언(眞言) 등을 외는 것.
*살점뱅이 ; 살점배기. 살점(살點 : 큰 고깃덩어리에서 떼에 내거나 떨어져 나온 살조각이나 살덩이).
*보리심(菩提心) ; ①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 ②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원(願) ; 소원(所願). 바라고 원함. 또는 바라고 원하는 일.
*성불(成佛 이룰 성/부처 불) ; ①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불과(佛果)를 얻음. 곧 부처가 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②석존이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연 것. ③올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 혹은 분명하게 완전히 깨달은 것이라는 뜻.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3/4)
*은중경(恩重經) ;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돈황본 『부모은중경』과 우리나라에서 옛부터 지금까지 널리 유통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 있다. 내용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부모님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고,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에는 부모님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열 가지가 있는데, ①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보호해 주신 은혜(회탐수호은 懷耽守護恩). ②출산하실 때에 고통을 받으신 은혜(임산수고은 臨産受苦恩). ③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생자망우은 生子忘憂恩).
④쓴 것은 어머니가 삼키고 단 것은 아이 먹이신 은혜(연고토감은 咽苦吐甘恩). ⑤마른 데 아이 누이고 젖은 자리 어머니 누우신 은혜(회건취습은 廻乾就濕恩). ⑥젖을 먹여 길러 주신 은혜(유포양육은 乳哺養育恩). ⑦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세탁부정은 洗濯不淨恩).
⑧멀리 갈 때 걱정하시는 은혜(원행억념은 遠行憶念恩). ⑨자식을 위해서는 모진 일 하신 은혜(위조악업은 爲造惡業恩). ⑩끝없는 연민으로 사랑해주는 은혜(구경연민은 究意憐愍恩)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한량없는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①가령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어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살갗이 닳아서 뼈가 드러나고 뼈가 닳아서 골수(骨髓)가 드러나도록 수미산을 백천번 돌더라도,
②설사 예리한 칼로 부모님을 위하여 자기의 눈동자를 도려내어 여래(如來)에게 바치기를 백천겁을 하더라도,
③가령 어떤 사람이 부모님을 위해 몸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여서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④설령 어떤 사람이 뼈를 부수고 골수를 꺼내며, 또는 백천 개의 칼과 창으로 한번에 몸을 찌르기를 백천겁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또한 위와 같은 여러 난행고행(難行苦行)을 하더라도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셨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중생을 보니 어리석고 미련하여 부모님의 큰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공경치 않고 은혜를 저버려 부모님께 어질지 못하고 효성스럽거나 의롭지 못하다. 이같이 부모님의 은덕은 한량없지만 불효한 허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효한 사람은 죽으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감당하고 참기 어려운 무서운 고통을 받아 하루 동안에도 수없이 죽고 또 다시 태어나기를 몇 겁이 지나도록 조금도 쉬지 않고 받는다.
그리고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갚는 갚으려면 음력7월 15일의 우란분재(盂蘭盆齋)에 부모를 위해서 삼보(三寶)에 공양하고, 이 경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죄와 허물을 참회하고, 부모님을 위하여 재계(齋戒)를 받아지니고, 부모님을 위하여 보시하고, 복을 닦도록 설하셨다.
그리고 부모를 위한다면 이 경의 한 구절, 한 게송을 잘 받아지니고 읽고 쓰며, 잠깐이라도 보거나 들은 사람은 오역(五逆)의 중한 죄라도 영원히 다 소멸된다고 하셨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말뚝 신심 ; 말뚝은 보기에는 견고해 보이나 뿌리가 없어 외부의 힘에 쉽게 흔들리거나 썩어 버린다. 이것에 비유하여 보기에는 열심인 듯하나, 꾸준하지 않고 잠깐 일어난 신심을 '말뚝 신심'이라 한다.
*예불(禮佛) ; ①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절함. ②절에서 아침·저녁 두 차례에 걸쳐 불·보살(佛·菩薩)에게 예배하는 의식.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폐침망찬(廢寢忘餐 폐할 폐/잘 침/잊을 망/밥 찬) : 자는[寢] 것을 폐(廢)하고 밥 먹는[餐] 것을 잊으며[忘] 일에 심혈을 기울임.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차고, 온 세계가 가득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불명(佛名) ; 법명(法名). ①출가하여 절에서 행자(行者)로서 일정 기간 동안 수행한 뒤, 계(戒)를 받을 때 스승이 지어 주는 이름. ②스님이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남녀신자에게 지어 주는 이름.
[참고] 송담스님(No.470)—92년 4월 첫째 일요법회
〇불법(佛法)에의 깊은 인연으로, 발심(發心)해서 진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부처님의 아들딸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불보살(佛菩薩)의 이름을 따서 불명으로 받는다. 더 철저히 말하면 그때마다 불명을 받을 수는 없지만, 참선 수행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로 태어나야 하고 시간마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일념삼천(一念三千) ; 일념삼천이란, 우리의 일념(一念) 가운데 삼천(三千)의 세계가 갖춰진다는 천태사상의 세계론이다.
일심이 십법계를 갖추고, 하나의 법계에는 또한 십법계를 갖추어 백법계가 되며, 백법계 중 하나의 법계가 각각 30종류의 세간(五陰 · 衆生 · 國土 등 3세간에 각각 十如是가 갖추어져 있어 30세간이 된다)을 갖추므로 백법계는 3천종의 세간(世間)을 갖춘다. 이 삼천세간이 한 생각하는 찰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삼천세계를 갖춘다.
*일념(一念) ; 범부가 현실의 일상생활에서 일으키는 아주 미세한 미혹으로서 생각하는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 일념은 진여심(眞如心)이 아니라 중생심(衆生心)의 일념이다.
*십법계(十法界) ; 열 가지 법계. 십계(十界)라고도 한다. 세계를 중생의 미혹과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10종으로 분류하여, 지옥 · 아귀 · 축생 · 수라 · 인간 · 하늘[天]의 미혹한 세계[迷界:六途]와 성문 · 연각 · 보살 · 불(佛)의 깨달음의 세계[悟界]로 나눈 것이다.
*십계호구(十界互具)란 십계 속에 또 각각 십계가 갖춰져 있다는 사상이다. 말하자면 인간계 가운데, 지옥계에서 부처님[佛]의 세계까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악한 마음과 동시에 착한 마음이 있다는 뜻이다. 가능성으로서 모든 세계는 그 내면에 모든 다른 세계를 갖추고 있으며, 다만 그 많은 세계 가운데 인간 혹은 다른 한 세계가 현실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삼세간(三世間) ; 세 가지로 분류한 세간. 삼종세간(三種世間)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색과 마음 등 모든 법을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이 이루는 세간인 오온세간(五蘊世間, 五陰世間)과 중생이 의탁하고 사는 국토인 국토세간(國土世間), 그리고 중생세간(衆生世間)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가명의 중생들이 각각 차별된 특성을 가지는 세간을 가리킨다.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십여시(十如是) ; 제법의 실상을 상(相) · 성(性) · 체(體) · 역(力) · 작(作) · 인(因) · 연(緣) · 과(果) · 보(報) ·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 등 10가지 범주로 나타낸 것. 다르지 않으므로 여(如)라고 하며, 어긋남이 없으므로 시(是)라고 한다.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까지의 10가지 세계[十法界] 각각에 십여시가 갖춰져 있다.
①여시상(如是相) : 표면에 나타난 모양. ②여시성(如是性) : 변함 없는 내면의 바탕. ③여시체(如是體) : 바탕과 모양을 갖추고 있는 주체. ④여시력(如是力) : 주체 내면에 잠재한 힘. ⑤여시작(如是作) : 내면적 힘이 밖으로 나타난 작용. 조작. ⑥여시인(如是因) : 작용에 필요한 직접적인 제일원인. ⑦여시연(如是緣) : 인(因)을 도와 과(果)를 낳게 하는 간접적인 보조 원인. ⑧여시과(如是果) : 인연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결과. ⑨여시보(如是報) : 과(果)에 의해 일어나는 갚음[報].⑩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 상(相)부터 보(報)까지의 9여시(九如是)가 모두 동등한 실상이어서 궁극[究竟]에는 평등(等)하다는 뜻을 나타낸다.
삼천의 세계가 나오게 된 자리가 마음이 없다면 모르되 티끌만큼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순간의 일념에도 반드시 삼천의 세계를 갖추며, 그 삼천의 세계가 그대로 미혹한 세계도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된다는 것이 곧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무장 ; ‘더욱, 한사코’의 사투리.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사견(邪見) : ①잘못된 견해. 틀린 생각. ②인과(因果)의 이치를 부정하는 잘못된 생각. ③올바로 자신의 마음의 실상을 알수가 없는 것.
*혈맥론(血脈論) ;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이라고도 한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고 있다.
문답형식으로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심외무불(心外無佛 : 마음 밖에 부처가 없다), 성불수시견성(成佛須是見性 : 부처를 이루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한다) 등의 말씀이 있다.
혈맥(血脈)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도 하며,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주고받아서, 정법(正法)을 상속하는 것. 신체의 혈맥이 서로 연결되어 끊어질 수 없는 것에 비유해서 말함.
*불급심사 공과일생(不急尋師空過一生) ;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의 저술로 전해지는 『달마대사 혈맥론(達摩大師血脈論)』에 있는 말씀.
[참고] 『선문촬요 禪門撮要 上 血脈論』 (경허성우 鏡虛惺牛 엮음)에서.
〇若不急尋師空過一生 然卽佛性自有 若不因師終不明了 不因師悟者萬中希有.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불성은 스스로 가지고 있으나 스승을 인연하지 않으면 끝내 분명히 알지 못하니, 스승을 의지하지 않고 깨닫는 이는 만에 하나도 드물다.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지옥에 가겠다(떨어지리라) ;
[참고 ①] 「최상승론(最上乘論)」 (5조 홍인대사 弘忍大師 六O二 ~ 六七五)
〇若有人依文行者即在前成佛. 若我誑汝當來墮十八地獄. 指天地爲誓. 若不信我世世被虎狼所食.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글(最上乘論)에 의지해 수행하면 곧 성불하게 될 것이다. 내가 만약 너를 속인다면 다음 세상에 십팔지옥(十八地獄)에 떨어지리라. 하늘과 땅에 맹세하노라. 만약 나를 믿지 아니하면 세세생생에 호랑이 밥이 되리라.
[참고 ②]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 『몽산법어』 (몽산화상 一二三一 ~ 一二九八 또는 一三O八) (용화선원刊) p97-99.
만약 이에 와 고요함을 같이 즐기려는 이는, 이 세상 인연을 다 여의며 제 고집과 애착과 모든 거꾸러진 생각을 다 버리고, 참으로 생사의 큰일을 위하야 절의 규칙을 잘 지키고 인사(人事)를 끊고 먹고 입는 것을 되어가는 대로 하되, 밤 삼경 외에는 자지 말고 거리에도 나가지 말며 오라는 데도 가지 말고 깨치기 전에는 글도 읽지 말며 예식 때가 아니거든 경도 보지 말지니
*아상(我相) ; 산스크리트어 ātma-saṃjñā ①오온(五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으로 형성된 아(我)를 실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 ②나라는 관념·생각. 자아(自我)라는 관념·생각. 남과 대립하는 나라는 관념·생각. 타자와 구분짓는 자의식 또는 그것을 형성하는 온갖 관념의 집합.
*인상(人相) ; 사람은 고귀하므로 지옥 중생이나 축생들과 다르다고 집착(執着)하는 견해.
*능소(能所) ; 어떠한 동작이나 행위, 인식이나 사건의 주체적인 측면을 능(能)이라 하고, 객관적인 측면을 소(所)라 한다. 능동(能動)과 피동(被動), 주체와 객체 또는 주인과 손(賓) 같은 말로도 표시된다.
대상을 반연하여 인식하는 주체가 능연(能緣) · 능식(能識)이라면, 반연되고 인식되는 객관은 소연(所緣) · 소식(所識)인 것이다. 또 보는 주체는 능견(能見)이고 보이는 것은 소견(所見)이다.
귀의(歸依)하는 주체인 중생이 능귀(能歸)라면 귀의의 대상인 삼보(三寶)는 소귀(所歸)이고, 교화하는 주체인 부처님이 능화(能化)라면 교화되는 대상인 중생은 소화(所化)이다. 어떠한 내용을 지시하는 언어, 곧 문장이나 어구가 능전(能詮)이라면 그 말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소전(所詮)이 된다.
이와 같은 대립(對立)이 있게 되면 상대가 끊어진[絶對境] 참 이치[眞理]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대립을 넘어서는 것을 지향한다.
인식하는 대상과 인식하는 주체가 둘이 아닌 하나의 상태, 주객일치(主客一致)와 능소일여(能所一如)의 상태가 바로 무분별지(無分別智)이고, 귀의하는 중생과 귀의의 대상인 부처님이 둘이 아닌 것을 능소일체(能所一體)라 한다.
법(法)이 아(我)가 없음을 알면 곧 피아상(彼我相, 너다 나다 하는 생각)이 없어짐이요, 인(忍)을 얻어 이루면, 곧 능소(能所, 주관과 객관)의 정(情, 생각)을 잊을지니 능소의 정이 없어지면 무념지(無念智, 무념의 지혜)가 나타나고 피아상(彼我相)이 없어지면 평등의 이치가 나타남이라.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분별이 생기지 않음이요, 입을 열고 혀를 움직여도 분별이 생기지 않음이니, 생기지 않는다는 생각까지도 나지 않으면 어찌 귀머거리 같고 벙어리와 같을 뿐이리오.
이는 곧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춤과 같고 빈 골짜기가 소리에 응함과 같아서 치연히 비추고 응하되 비추고 응한다 함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말하되 「항상 모든 근[六根]에 응하여 쓰되 그 쓴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라. 겁화(劫火)가 바다밑까지 태우고 바람이 몰아쳐 산이 무너져 내리더라도 ‘참답고 항상한 적멸의 즐거움’인 열반의 모습은 이와 같다」 (육조단경 ‘參請機緣’) 하시니라.
*무념지(無念智) ; 무념(無念)의 지혜.
*무념(無念) ; ①망념이 없는 것. 정념(正念)을 말한다. ②모든 법을 보면서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德異本) ‘제1 오법전의(悟法傳衣, 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다)’에서.
〇善知識 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本解脫 若得解脫 卽是般若三昧 卽是無念
선지식들이여, 지혜로 비추어 보면 안팎이 밝게 사무쳐서 자기의 본심을 아나니 만일 본심을 알면 곧 본래 해탈이며, 만일 해탈을 얻는다면 곧 그것이 반야삼매(般若三昧)며 또는 이것이 무념(無念)이니라.
어찌하여 무념이라 이름하는가? 만일 모든 법을 보더라도 마음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무념이니, 작용을 일으킨 즉 일체처에 두루 하되 일체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본심을 깨끗이 하여 육식(六識)으로 하여금 여섯문(六門)을 나오더라도 육진(六塵) 가운데 물들고 뒤섞임이 없어서, 오고 감에 자유롭고 널리 쓰되 걸림이 없으므로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자재해탈이고 그 이름이 무념행이니라.
그러나 만일 백가지를 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주 생각을 끊는 이것은 법에 얽매인 것이며 한쪽에 치우친 견해[邊見]이라 이름하느니라.
선지식아, 무념(無念)의 법(法)을 깨달은 이는 만법에 걸림없이 통하며,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부처님의 자리에 이르느니라.
*도문(道門) ; ①도에 이르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 ②불문(佛門). 부처님의 법문(法門). 불교(佛敎)라는 문.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서는 문. 깨달음으로 들어서는 문.
*소지(掃地 쓸 소/땅 지) ; ①마당(땅)을 쓺.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 ②청소.
*운력(運力) ;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여서 일을 한다'는 의미로 운력(雲力)이라고도 하며,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우리말 '울력'과 같다. 의미와 관계없이 운력(運力)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
*치연(熾然) ; ①매우 왕성한 상태. ②번뇌의 다른 이름—결(結)·박(縛)·전(纏)·취(取) 등등—가운데 하나이다.
치(熾)는 ‘성하다(盛--, 기운이나 세력이 한창 왕성하다), 맹렬하게 일어남, 횃불이 활활 타오름, 불을 붙여 이글이글 피게 함’의 뜻. 연(然)은 상태를 나타내는 접미사(接尾辭).
*(게송) ‘겁화소해저~’ ; 『육조단경(六祖壇經)』 ‘參請機緣(청법의 기연)’ 게송 참고.
*겁화(劫火) ; 세계가 파괴되는 시기(壞劫)에 들면 세계를 허물어트리는 3가지 큰 천재지변이 생기는데, 화재(火災) 풍재(風災) 수재(水災)가 그것이다. 이때에 화재가 욕계(欲界)를 불태우고 색계(色界)의 초선천(初禪天)까지 불태운다고 한다.
*진상(眞常) ; 진여상주(眞如常住)라는 뜻으로, 깨달음(열반)의 경지라는 뜻.
*적멸(寂滅 고요할 적/다할•끊어질 멸) ; ①번뇌의 불을 완전히 꺼버린,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마음의 궁극적인 고요함. 적정(寂靜)으로 돌아가 일체의 상(相)을 여의고 있는 것. ②열반, 부처님의 경지, 깨달음.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여여(如如) ; ①모든 법의 평등한 자성 또는 이치를 나타내는 말. 법이(法爾)와 같은 의미이다. 자성에서 같다[如]는 뜻이지만 온갖 차별된 법이 모두 그렇기 때문에 복수의 뜻으로 ‘여여’라 한다. 법계무차별의 바탕으로서 평등 부동(不動) 부전도(不顚倒) 등의 취지가 수반된다. ②분별이 끊어져,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파악되는 마음 상태. ③진실한 경계. 그렇게 있음. 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모습.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주요 내용]
(게송)금강보검의천한~ / 활구참선을 해야 / (게송)증위탕자편련객~ / 삼요 / 부처님 인행(因行) 때의 열반경 설화 / (게송)여래증열반~ / 위법망구의 정진.
정진을 시작하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야 / 일념삼천 / 바른 스승의 지도 / 능소(能所) / 도문(道門)의 첫 단계 / (게송)겁화소해저~ / 인생은 한바탕 꿈, 빨리 보리심을 발해야.
[주요 문구]
〇열 가지 공안 또는 백 개, 이백 개 내지 삼백 개, 천이백 공안에 대해서 해석이 내려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생 소견이라, 중생의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얻어지는 해석은 생사심(生死心)만을 더욱 조장할 뿐 깨달음에는 나아가지를 못하는 것이여.
깨달음은 생사심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사심에 즉(卽)해서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 데에서 거기에서 마음 길이 끊어져, 말 길이 끊어지고 더듬어 들어갈 것이 없어. 이리 해야 그것이 바로 참선을 해 가는 거고, 참선을 바로 해 가야 바른 깨달음에 도달을 하는 것입니다.
〇어떠한 소원이 있으면 오욕락(五欲樂),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그러한 마음으로 원을 세우지를 말고, 크고 작은 원이 있으면 보리심을 발해야 돼. 정말 청정한 마음으로 불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그리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면서 원을 세우면 그 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다.
〇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를 갖추지 못함으로 해서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지 못하고 의단이 독로하지를 못하는 것이지, 그밖에 딴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반드시 해야 하고—종교를 믿건, 안 믿건 심지어는 불교를 믿건, 안 믿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할 것이다.
〇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바른 방법으로 그리고 위법망구적으로 열심히만 한다면 백 명이면 백 명 다 백발백중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을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다 증명을 하셨습니다.
〇확실히 이 세상의 오욕락(五慾樂)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 무상하고 헛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이해를 한다면은 피아(彼我)의 상(相)이 없어져 버려. ‘내다, 내 것이다, 내가 잘났다’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거기서 떨어져 버리는 거고, 능소심(能所心)이 다 떨어져 버리는 거여.
그 능소심이 끊어져버리고 아상과 인상이 무너져 버릴 때에 도(道)에 첫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바로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되 분별심이 일어나지를 않은 거여. 비록 입을 벌려서 말을 하고 혀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분별이 나지를 않아. 치연(熾然)히 비추고 치연히 응하되 응한 바가 없어.
〇꿈에 지내지 못한 그 일생을 그렇게 값어치 없이 탐진치(貪瞋癡)와 오욕락 속에 끌려서 얽혀서 그렇게 몸부림치다 죽어갈 것은 없는 것입니다.
죽는 마당에 이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보리심(菩提心)을 발해서 생사 없는 경계에 산다고 하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참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월원불유망(月圓不逾望)이요. 달이 둥굴매, 아무리 달이 둥글고 더이상 둥글 수 없이 둥글다 하더라도 보름을 넘지를 못해. 보름이 되면, 보름날이 되면은 그 이튿날부터서는 차츰차츰 이그러져 가고.
일중위지경(日中爲之傾)이다. 해가 정 중천(中天)에 오면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어. 정오가 되면은 되는 그 찰나부터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여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이다.
달도 보름을 넘지 못해서 기울어져 가고, 해도 정오를 넘자마자 서쪽으로 기울어져 가건만 오직 뜰 앞에 잣낭기는 독야사시청(獨也四時靑)이다. 홀로 춘하추동 사시(四時)에 푸르른구나.
지금 삼복(三伏) 중에 이 폭염(暴炎)이 최고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일기(日氣)만, 날씨만 이렇게 더운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불구덩이 속에 훨훨 타고 있는 것입니다.
저 이란과 이라크라는 데는 땅을 한 치라도 더 뺏고 뺏기 위해서 그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싸우고, 세계 도처에서는 서로 자기 나라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서로 경제적으로 싸우고 있고, 사상적으로 이념적으로 싸우고 있고, 종교와 종교 사이에서는 자기네 종교를 보다 더 펴기 위해서 온갖 꾀를 내 가지고 발버둥을 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올림픽에 어떻게 하면 이걸 잘 치르느냐? 그리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보다 더 메달을 많이 따느냐?’ 이런 문제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피땀을 흘리고 있고. 여당과 야당은 자기 당의 세력을 펴기 위해서 당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이 무더위 속에 그 속에서 불을 태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헌 싸움은 설사 그 싸움에 이겼다 하더라도, 또 이기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이 다 잠정적(暫定的)인 것뿐인 것입니다. 잠시 그러다가 금방 또 기울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이기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용광로처럼, 사방팔방(四方八方) 일체처 일체시에 이렇게 용광로처럼 중생의 욕심의 불이—입으로는 명분을 내세우고, 국가를 내세우고, 민족을 부르짖고, 세계의 평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속에는 시커먼 중생(衆生)의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욕심의 불이 훨훨 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욕심의 불이 언제 꺼지느냐?
꺼질 기약이 없습니다. 그 욕심의 불이 타고 있는 동안에는 세계의 평화도, 국가의 민주주의도, 민족의 통일도 행복도 이루어질 가망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복더위가 치성을 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더위에 이기지 못해서 어떻게 허면 이 더위를 좀 피헐 수가 있을까? 산으로도 가고 바다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이렇게 해서 좀 피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지 근본적으로 그 더위를 모면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사면(四面)이 이렇게 불이 타 오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고, 고봉 선사도 「진대지(盡大地)가 이렇게 훨훨 타고 있는 이 불구덩이인데 어떻게 허면 이 불구덩이로부터 살아날 수가 있겠느냐?」 이런 실중삼관(室中三關) 속에 이러헌 공안(公案)을 설하시기도 했습니다.
온 세계가 이렇게 그 태양이 이글이글 이렇게 타므로 해서 이렇게 더운 것쯤은 차라리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또 선풍기도 돌리고 에어컨도 틀고 해서 부채질도 하면서 그럭저럭 허다 보면, 오늘이 바로 입추입니다마는 입추를 지내고 또 말복이 지내면 금방 처서(處暑)가 오고 해서 조석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해서 그까짓 것쯤은 별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타 일어나고 있는 이 중생의 탐진치에 욕심의 불, 이것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불인 것입니다.
태양이 뜨거워가지고, 물론 비는 오지 아니하고 이렇게 혹서(酷暑)가 계속이 되면 세계 어딘가는 더위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도 없지는 않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더위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말은 아직은 못 들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그것이 뜨거워서 타 죽지는 여간해서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진치의 불, 이 불 때문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진치 삼독의 이 불 때문에 우리는 삼악도(三惡途)의 불구덩이로 결국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면 이 삼악도의 불을 끄고 영원히 청량한 그러한 경지에서 그러한 속에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재진출진(在塵出塵)이요 불가잠폐(不可暫廢)다. 티끌 속에 있으면서 티끌에서 뛰어나며. 그 티끌 속에서 티끌에서 뛰어나는 그 도리, 그것을 불가잠폐(不可暫廢)여. 잠깐 동안도 등한(等閒)히 헐 수가 없어. 정지헐 수가 없는 일이다.
‘티끌 속에서, 티끌 속에 있으면서 그 티끌에서 뛰어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전체가 티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 밖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티끌이고, 우리의 식(識)으로써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전부가 그것이 다 티끌인 것입니다.
티끌 속에서 도저히 우리는 일 초 동안도, 한 걸음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왼발을 들면 오른발이 땅에 닿아 있고 오른발을 들면 왼발이 땅에 들어있어. 공중으로 뛰어 봤자 1미터도 못 뛰고 다시 도로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도 이 생각 저 생각 희로애락 일체 생각이 선 · 악 · 무기(無記)의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한 생각이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변해서 그 생각이 또 꺼지자마자 또 다른 생각이 또 일어나고,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이것이 모두 티끌 속에 있는 상황입니다.
그 티끌 속에 있으면서 어떻게 해야 그 티끌 속에서 뛰어날 수가 있느냐?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에 설하신, 갑인년이 바로 조실 스님 열반하시던 해인데 지금부터 15년 전입니다. 그해에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마는.
‘이 무엇고?’
잠시도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탐진치 삼독에 번뇌와 망념이 불타듯이 이렇게 훨훨훨훨 타오르고 있는데, 그 일어나는 그 생각 거기에서,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뛰어나는 방법이 있다.
그놈을 피해가지고 서늘한 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거기에 즉(卽)해 가지고 거기에서 뛰어나는 도리가 바로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여.
비유컨대 저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허면 그 바다 밑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있는 그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얻을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번뇌의 대해(大海)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파도치는 그 번뇌의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일체 지혜의 보물을 얻을 수가 없다. 지혜를 얻을 수가 없다.
번뇌(煩惱) 망상(妄想)이 우리 중생의 본업(本業)이고, 우리의 재산이고,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번뇌와 망상을 여의고 살 수가 없지만, 바로 그 번뇌와 망상 그놈이 없으면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다가 큰 바다가 깊고 넓고 파도가 쳐서 그놈 함부로 들어가면,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면 휘떡 엎어져 갖고 그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바다 속에 있는 그 희귀한 보물을 얻을 수가 없어.
이 번뇌 망상 이놈 때문에, 아! 이놈에서 탐진치 삼독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놈 때문에 지옥에도 가고 축생도 되고 아귀도 되고 그렇지만,
그 파도를 잘 타면서 잘 지혜롭게 저어 들어가면 무량겁을 쓰고도 남을 지혜의 보물을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더라. 참 기가 막힌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게 정명경(淨名經)에 있는 말씀인데.
‘참선, 참선’ 다 좋은 줄 다 알고 참선(參禪)이야말로 우리 불법 가운데에 최고의 수행 방법이고, 참선만 옳게 그리고 열심히 하면 반드시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가 있다. 이거 다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인증을 하지마는, 견성성불한 사람이 그렇게 우리 눈 앞에 흔치 않은 것은 무엇이냐?
그 번뇌(煩惱) 망상(妄想), 그놈을 어떻게 다스리고 그놈을 어떻게 그놈을 타고 넘어서 그 속에 있는 무진장(無盡藏)의 보배를 캘 수가 있느냐?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번뇌 망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그 번뇌 망상 그걸 버릴려고 해서는 도저히 안 돼. 그놈을 없앨랴고 해도 안 돼. 그렇다고 해서 그놈에 마냥 그놈에 빠져 가지고 있어도 안 돼.
그 일어나는 번뇌 망상의 끊임없는 그 파도를 잘 타고 넘으면서 거기에서 그 번뇌의 바다 속을 헤쳐 가지고 결국은 거기에서 지혜의 보배를 얻는 것이여.
일어나는 대로 나둬. 어떻게 바다에 가서 그 파도를 없앨라고 해봤자 그 없어지겠습니까?
파도를 없애기 위해서 아무리 몽둥이로 팬들 그 파도가 없어질 리가 없어. 오히려 더 파도가 일어날지언정 없어질 리는 없어.
일어나는 파도를 고대로 놔두고 거기에 즉(卽)해서 ‘이뭣고?’ 탁!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말이여.(처음~20분26초)
(2/3)----------------
화두를 이 생각을 해, ‘이뭣고’—화두를 생각하는 것과 화두를 거각하는 것과는 전혀 달러요.
‘이뭣고’ 자꾸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허듯이 ‘이뭣고, 이뭣고’ 자나깨나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하면서도 ‘이뭣고’ 밤낮 그렇게 허라고 권고는 합니다마는 그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거든.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뭣고, 이뭣고’ 아무 의심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만 밤낮 생각해봤자, 그것이 백천만 겁을 무량겁을 그놈을 생각허고 있어 봤자, 그것이 어떻게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냐 그말이여.
‘이뭣고?’ 알 수 없는 간절한 의심(疑心)으로 ‘이뭣고?’ 그 알 수 없는—‘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하거든.
그 의심을, 간절한 의심을 관조허는 데에서, 거기에서 그 의심이 점점 간절해지고 점점 의심이 더 깊어지고 그 의심이 점점 커져서 더이상 의심이 커질래야 커질 수가 없고 더이상 간절할래야 간절할 수가 없이, 그래 가지고 화두를 들면 있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은 간 곳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이 아니라,
자꾸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하다보면, 간절히 일구월심(日久月深) 하다보면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생각을 내서 들라고 안 해도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게 된 때가 온다 그말이여.
그때는 화두를 안 들어도 의단이 턱! 앉으나, 서나, 누웠으나, 일을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의단이 독로허게 되거든. 좀 잊어버리고 딴 생각을 좀 헐려고 해도 안 되는 것여.
이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어떠한 경계에 가서 그놈이 툭! 터지게 되는 것이거든.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도라고 허는 것은 잠깐도 여읠 수가 없는 것이여. 여읜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여.
화두도 의심이 잠깐 있다가 없다가 밤낮 그러면은 그것은 참다운 의심이 아니여. 진의(眞疑)가 아니여. 그것은 주작(做作)이여. 억지로 지어서 들 때는 잠시 있고 금방 의심이 없어져 버리고 이런 것은 그것은 참의심[眞疑]이 아니여.
어떻게 허면 참의심[眞疑]이 돈발(頓發)허냐? 신심. 신심(信心)과 분심(憤心). 분심이 밑바탕이 되어야 거기에서 참다운 큰 의심이 거기서 나는 것이여.
그래서 어떻게 허면은 그 신심과 분심이 일어나냐 하면은, 마치 이 눈썹에 불이 붙은 것처럼 또 머리털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처럼.
눈썹에 불이 타고, 불이 머리에 붙어 덩겨 가지고 불이 훨훨훨 타고 있는데, 그런 경우를 만나서 어떤 사람이 그 머리와 눈썹이 타고 있는 것을 놔두고 다른 급한 일을 있다 해 가지고 다른 데에다 생각을 쓸 겨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자녀가 있다 하더라도 곧 죽는다 해도, 지금 곧 저 방에서 죽어가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머리에 붙은 불버텀 훽 꺼버리고 끄고서 그리 쫓아가지, 자기 불이 훨훨 타는 것을 놔두고 ‘아들 죽을라고 하는 데 먼저 가보자’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어.
도를 닦는 것이, 우리가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에 있어서 마치 눈썹에 불이 덩기고 머리털에 불이 덩근 것처럼 그것을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언제 어디서라도 화두를 들어! 화두를 들고서, 간절한 의심으로 화두를 들고서 남편도 생각하고 아들도 생각하고 살림도 생각하고 사업도 생각을 해야 해. 일차적으로 자기 머리털에 불부텀 끄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허드라도 화두부터 들고 따져라 이거거든.
이렇게 허지 않고서는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자기를 이 생사(生死)의 불구덩이에서 구제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허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해태(懈怠)허지 말 것이니, 중국에 자명초원(慈明楚圓) 선사는 저녁에 잠이 오면은 송곳으로써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와 정진을 하고, ‘고인(古人)네는 도를 위해서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고, 대관절 나는 이 무슨 사람이냐?’
‘과거에 모든 선지식(善知識)과 불보살은 진즉 이 생사 문제를 요달해 가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 해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대관절 어떠한 인간이기에 무엇이길래 오늘날까지도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지 못하고 이렇게 그럭저럭 지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자기를 꾸짖고 고인에 견주어서 용맹심을 내면서 정진을 했어.
오늘은 매우 더워서, 여러분은—모두 다 바다로도 가고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는데—이 더위에 이렇게 일요법회에 이렇게 많이 법회에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구태여 이러헌 경책의 말씀을 누누이 해 드릴 필요도 없이 진정 여러분은 이 법당 안에 더운 속에서 더운 줄도 모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부터 들을 것도 없는 소리를 그래도 열심히 듣고 계십니다. 그러헌 신심이면 반드시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공부를 지어 가는 데 있어서 의근하복탁사유(意根下卜度思惟), 사량 분별심으로 이리저리 공안을 따지고 이치를 따지고 이러헌 것을 허지 말어라.
중생심으로 아무리 이리저리 따져 봤자 그래 가지고 따져 가지고 아무리 그럴싸한 어떠헌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침내 중생의 소견(所見)이지 참다운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량복탁(思量卜度), 공안을 따져.
자꾸 이 선지식이 “일러라!" 어떤 공안을 내놓고 “한마디 일러라! 당장 앉은자리에서 해결을 해야 해. 바로 일러야지, 이르기 전에는 잠도 자지 말어라” 이렇게 막 다그치니까, ‘이걸 한번 이것을 내가 한마디 이르고야 말겠다!’해 가지고 밤새 잠을 안 자면서 사량분별로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따져보고.
그렇게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되는 것이 아니야! 절대로 따져서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알아질 수는 있을런가 몰라도, 알아진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 소견이지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이 생사 문제가 급허고 이 공안 타파가 급하다 하드라도 급할수록에 바른 방법으로 참구(參究)를 해나가야지, 중생의 사량분별 사량복탁으로써 이것을 따져 가지고 무슨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따져 가지고서는 공부가 조끔도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또 참다운 의정도 거기서는 나지도 아니한 것이여. 참다운 의정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유복탁(思惟卜度)하는 이 네 글자는 바른 신심을 막아버리고, 바른 수행을 막아버리고 겸해서 도(道)의 눈[眼]까지도 가리워 버리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그거거든.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탁!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이뭣고?’ ‘이뭣고?’
유록앵전신(柳綠鶯傳信)이요화홍연소원(花紅燕訴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광음여과객(光陰如過客)이요아역일소혼(我亦一銷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유록(柳綠)은 앵전신(鶯傳信)이요. 푸른 버들은 꾀꼬리가 전하는 소식이요. 꾀꼬리가 전하는 봄의 소식이요.
화홍(花紅)은 연소원(燕訴寃)이다. 꽃이 붉은 것은, 벌겋게 핀 꽃은 제비가 원한을 호소하는 것이다.
꾀꼬리가 전하는 소식이 무엇이며, 제비가 호소하는 그 원한이 무엇입니까?
광음(光陰)은 여과객(如過客)이여. 그 세월은 과객(過客)처럼 그렇게 잠깐 왔다가 스쳐서 지나가 버리는 손과 같어.
아역일소혼(我亦一銷魂)이다. 나도 또한 잠깐 훨훨 타다가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혼백(魂魄)에 지내지 못한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하나도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전부가 다 유위법(有爲法)입니다.
봄이 아무리 버들이 푸르르고 아름다운 꽃이 울긋불긋 피었다 하더라도 잠시인 것입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려 봤댔자 잠깐인 것입니다.
부귀영화. 그 참, 인생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불과 같아서—불이 없어서는 안 되지마는 그 불을 잘못 다루면 그 불에 집도 타고, 재산도 타고, 내 몸뚱이도 타고 생명도 앗아가 버리고 맙니다.
부귀영화. 참, 사람마다 부귀영화를 싫어헌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다 부귀영화에 탐착(貪着)을 하고 부귀영화를 위해서 몸을 바치고 생명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과연 자기를 참다웁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느냐 허면은 그러기커녕은 그놈 좀 어떻게 남보다 더 많이 긁어 담을라다가 그 쇠고랑을 차게 되고, 금생에도 쇠고랑을 차고 내생에도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산중에, 저 깊은 산중에 가면은 곰이 살고 있는데, 그 곰이란 놈이 이렇게 슬슬슬 땅도 뒤지고 바위도 뒤지고 허다 보면 바위 속에서 뭐 이상한 맛있는 냄새가 난다 그말이여.
뭐 토끼같은 거, 여우같은 거, 그런 것이 그 바위 굴속에 이렇게 파고 들어가서 거기서 인자 살고 있는데, 그 바위와 바위 사이로 공기통이 있어서 그 공기통으로 그놈들이 숨을 쉬고 있는데, 곰이 그리 지나가다가 돌 틈바구니에서 그 토끼나 여우나 모다 그러헌 짐승의 노랑 냄새가 난다 그말이여.
그래서 씩씩씩씩 냄새를 맡다가 그 돌 틈으로 그 곰이란 놈이 손을 집어넣어 가지고 이렇게 꽉! 잡았다 그말이여. 잡었는데, 암만 뺄라고 해도 그놈이 돌 틈바구니에 콱 찡겨 가지고 그놈이 빠지들 않는다 그말이여.
한 시간 두 시간을 갖다가 주먹에서 피가 나오도록 몸부림을 치면서 그놈을 뺄라고 해도 팔이 빠질라고 할지언정 주먹이 안 나온다 그말이여.
쥐었던 그놈이 토끼 대가리가 되았던, 여우 배떼기가 되았건, 그놈을 놔 버리면 빠질 텐데, 잡은 놈을 죽어도 안 놓을라다가 결국은 그놈이 콱! 찡겨 가지고 결국은 그놈이 포수한테 앵기면은 총에 맞아서 죽을 것이요, 나무꾼한테 앵겨 놓으면 몽둥이에 대가리가 깨져서 죽을 것이고, 혹 그런 사람을 못 만나면 그놈이 굶어서 죽을 거다 그말이여.
그런데 그놈의 곰이란 놈은 어떻게 미련하던지 아! 그놈을 놔 버리면 손이 빠질 줄을 모른다 그말이여. 그놈만 놔버리면 그냥 수르르르~ 하나도 안 아프게 손이 빠질 텐데, 아! 그 모처럼 만난 그놈을 잡아 갖고 놓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끝끝내 그놈을 놓을 줄을 모르고 억지로 손을 뺄라다가 팔목이 빠져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놈이 죽고 말 것이다 그말이여.(20분27초~40분56초)
(3/3)----------------
중생의 욕심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사욕(私慾), 사리사욕(私利私慾) 그놈만 놔 버리면 온갖 재앙이 다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 사리사욕, 그 탐진치(貪瞋癡), 그 욕심 그것만 놔 버리면 세계 평화도 거기에서 다 이루어질 것이고 민주주의도 정말 뭐 얼마 안 가서 금방 민주주의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여당 야당 모두가 다 그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일어난 그 사리사욕만 놔 버리면 민주주의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남북 통일도 그것만 양쪽에서 다 놔 버리면 통일이 왜 그것이 어려울 것입니까?
인간의 행복도 그 욕심으로 행복을 얻을려고 하는 데에서 점점 재앙만 일어나고 불행만 돌아오는 것이지, 그 탐진치 삼독만 놔 버리면 행복은 바로 그 속에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여.
깨달음. 도저히 암만 참선(參禪)을 하고 10년, 20년 참선을 그렇게 애를 쓰고 해도 신심(信心)이 안 나고, 분심(憤心)이 안 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지 못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한다 하지만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치(我癡), 중생에 탐진치 사욕만 놔 버리면 어찌 거기에서 신심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하며, 의단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육바라밀(六波羅密) 속에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 맨 처음에 있는데, 그 보시라고 허는 것은 버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보시를 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보시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고. 보시를 한다고 허는 것은 버리는 법이거든.
자꾸 버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버리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버리고, 일체처 일체시에 자꾸 버리고 또버리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업장(業障)이 다 거기서 떨어져 나가고, 거기에서 번뇌와 망상도 떨어져 나가고, 일체 장애도 거기에서 다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정진(精進) 선정(禪定) 그런 것이 다 참되게 닦을 수가 있고, 마침내는 지혜(智慧)의 바라밀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잠시 번쩍 하다가 사그라져 버리는 그러헌 한 뭉치의 불꽃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로워도 ‘이뭣고?’ 어떠헌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어떠한 어려운 지경에 당하드라도 ‘이뭣고?’ 이놈 하나로써, 이놈을 간절히 거각(擧却)함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간다면 만나는 모든 슬픔과, 만나는 괴로움과, 만나는 어려운 것들이 모두가 다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나아가게 하는 채찍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푸른 버들과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고도 그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이뭣고?’를 들라고 허는 법문(法門)으로 듣고, 붉은 꽃 노란 꽃을 봐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어서 속히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얻으라고 허는 불보살(佛菩薩)의 법문으로 듣고,
그러면서 이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이 세계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한다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 수 있는 지혜의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간의 부모 자식 간의 애정, 부부간의 애정, 모든 그 얽히고설킨 끊을라야 끊을 수 없는 그 애정이 잠깐 사이에 얼음이 녹고 기왓장이 깨지는 거와 같다.
얼음이 딱딱하게 얼어져 갖고 있을 동안에는 유리와 같고, 참 그렇지만 금방 영하 0도를 벗어나면은 슬슬슬슬 녹아 버리고 100도가 되면은 그냥 증기로 다 날아가 버린다 그말이여.
기왓장이 그놈이 성할 때에는 하늘에 내리는 비도 막고 그렇지마는 그것이 불이 난다든지 깨져서 바삭바삭 깨져 버리면 그 뭐 기왓장이라고 헐 것이 무엇이냐 그말이여.
은다번극한(恩多飜極恨)이요. 은혜. 은혜스럽고 은혜가 많으면은, 참 그 은혜를 많이 입고 은혜를 입으면은 참 좋다고 모다 사람들은 그것을 바래지만, 은혜가 지중(至重)하면 그것이 변해 가지고 원한이 극하게 사무치게 된다.
환극각성비(歡極却成悲)다. 사람은 슬픈 것보단 기쁜 일을 당하면은 모두가 다 당하고 무엇이든지 기쁘기를 바래고 기쁜 일이 끝없이 자기 주변에 일어나기를 바래지마는 그 기쁜 일이 극하면 도리어 슬픈 일로 변하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그 재산을 자식을 위해서 집도 사 주고, 차도 사 주고 엄청난 재산을 물려주면 부모는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한때는 그 자식이 그 부모가 많은 재산을 물려주고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주면은 부모가 고맙다고 좋다고 하지만,
자기의 욕심이 차지를 않고 ‘행여나 형을 더 많이 준가? 동생을 더 많이 준가? 누나를 더 많이 준가?’해 가지고 욕심이 치솟으면 자기 평생 먹을 만큼 받아 놓고도 욕심이 더 끝이 없어서 ‘더 많이 주지 아니헌가?’해 가지고 도리어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간에 싸우고 형제간에 죽이기도 하고 재판질을 하고 그러헌 예는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차라리 가난해서 별로 잘 맥이지도 못하고 잘 입히지도 못하고 또 많은 재산을 가 집 한 채도 사 주지도 못하고, 차라리 그런 가난한 집에서는 형제간에 우애하고 또 부모를 위해서 효도를 하고 그러헌 사람이 더러더러 있지마는 돈 많은 사람으로서 효도허는 집안은 내가 별로 보지를 못해.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 돈 많이 벌어서 많이 물려줄라고 행여나 그런 짓 하지 말고, 어쨌든지 어지간히 있으면은 돈 많이 벌라 하지 말고 참선을 많이 하고.
있는 재산 될 수 있으면은 어쨌든지 유용하게 다 버려야 돼. 보시를 해서, 절에도 보시하고 또 다른 이웃에도 보시를 하고, 양로원 고아원에도 보시해서 자꾸 버려버려.
자식한테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 참다웁게 살아가는 길을 가르켜 주는 것으로써 그것을 유산으로 그것을 물려주면, 지가 노력을 해서 저 먹을 것을 지가 벌게 해야지, 돈 많이 주면 자식은 타락하고 그 자식의 참다운 사는 길을 배울 겨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우리가 생명을 바치고 인생을 바칠 곳은 내 생명, 내 생사 구제하는 길밖에는 없어.
‘이뭣고?’ 이 하나로써 더위도 이겨나가고 슬픔도 이겨나가고 고통도 이겨나가는 오직 이 ‘이뭣고?’ 하나밖에는 없는 것이여.
더워도 자꾸 선풍기 틀어 놓고 시원한 데만 찾지 말고, 바다로 강으로 헤매지 말고 턱! 가부좌(跏趺坐)를 하고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이뭣고?’를 해보시라 그말이여.
등어리에 설사 더워서 땀이 줄줄, 저는 흐르라고 놔두고서 ‘이뭣고?’를 간절히 들면 얼마 안 가서 정말 더운 줄을 모릅니다. 더운 줄을 몰라.
더움 속에서 더운 줄을 망각해야 더위를 피하는 것이지, 덥다고 부지런히 부채질을 허면은 그냥 더 가슴은 답답허고 그냥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아주 그냥 미칠 것 같이 못 견딘다 그 말이야. 섰다 앉았다, 옷을 벗었다 입었다 그냥 안절부절할수록 무장 더 더운 거여.
‘지가 더우면 설마 내가 타 죽기 허랴’ 터억 버티고 앉어서 ‘이뭣고?’를 허면서 턱 한번 해보시라 그말이여. 더위는 거기에서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턱 하고 나서 찬물로 등목을 한번 허고, 샤워라도 한번 하고서 그때 가서 부채질을 한번 설설 해보란 말이여. 이것이 참 멋스럽게 피서(避暑)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복(伏)이 한 일주일 나면 복이 끝나는데, 그동안에 강이나 바다로 가고 싶으면 물에 풍덩 들어갔다 나왔다 허지 말고, 그 뜨거운 모래 속으로 피서를 한번 해 보셔.
머리만 내놓고 모래를 6센티 내지 9센티 가량, 가슴은 너무 많이 덮으면 숨이 가쁘니까 얇게 덮고, 팔다리는 두툼허니 덮고서 얼굴에 우산이나 양산, 수건으로 얼굴만 딱 덮고서, 그 더웁지마는 터억 더운 것을 즐겨 보시라 그말이여.
‘지가 더우면 얼마나 더울까?’하고, ‘그 더워 허는 그놈이 대관절 무엇인가?’ 그놈을 탁 관조하면서 있으면 그렇게 따겁든 것이 언제 시원한 것으로 변허는 거여.
몸은 득신득신득신 혈관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그 더운 줄 아는 놈을 그놈을 관조를 허면 하나도 더웁지를 안 해. 시원허다 그말이여. 그 뜨거운 국물을 여름에 훨훨 마시면서도 “아, 시원하다” 그러잖아요?
그렇게 화끈화끈화끈 더웁지마는, 그 더워할 줄 아는 그놈을 관조허면 그 더운 것이 시원한 것으로 변헌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신경통도 낮고, 관절염도 낫고, 배안에 모든 숙변도 빠지고, 간장 나쁜 것도 낫고, 위장병도 낫고, 온갖 병이 그 더위 속에서 ‘이뭣고?’로써 피서를 허면서 그 더워할 줄 아는 그놈을 관조허는 속에서,
모래, 그 뜨거운 모래가 모세관 현상으로 해서 그 몸안에 독소를—태양의 그 더위는 땀구멍을 가짓껏 열어주고 또 모래는 모세관 현상으로 해서 몸안에 독소를 흡입을 해내는 거여. 쫙 빨아내. 그래가지고 몸에 독소가 빠지니까 몸이 가벼워지고 병이 다 녹아지는 거여.
이렇게 그 '모래찜'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또 이것이 좋다하고 가서 너무 무리하게 해 가지고 병이 나선 안됩니다. 한 두어 시간—오전에 한 두어 시간, 오후에 한 1시간 내지 2시간, 자기 체질과 연령에 따라서 적당허니 허면 참 좋은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더위를 ‘이뭣고?’로써 잘 피서를 허시면 금방 또 찬바람이 올 것입니다.
이 더위 속을 향해서 피서를 허는 법은 거기에서 우리는 정말 훌륭한, 이 인생의 고해(苦海)를 고해 속에 바로 파고 들어가서 그 고해에 즉(卽)해서 그 고해를 해탈(解脫)하는, 생사 바다 속에 들어가서 그 생사를 해탈하는 그 생활의 지혜를 여기에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눈을 바로 지금 오늘 이 산승(山僧)의 말 속에서 터득을 한다면은 이 사바세계는 바로 이 적광토(寂光土)로 변조를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더위 속에서 바로 서늘한 이 청량으로 변조하는 이 수단을 우리는 터득을 헐 수가 있을 것입니다.(40분57초~59분16초)(끝)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폭염(暴炎 사나울·세찰 폭/불꽃·더울 염) ; 폭서(暴暑 매우 심한 더위). 불볕더위.
*일기(日氣) ; 날씨.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잠정적(暫定的 잠깐·잠시 잠/정할·머무를 정/대상·것 적) ; ①우선 임시[暫]로 정(定)한 것[的]. ②잠시 동안 그런 것.
*사방팔방(四方八方 넉 사/모·방위·방향 방/여덟 팔) ; ①사방(四方 동, 서, 남, 북의 네 방향)과 팔방(八方 동, 서, 남, 북, 동북, 동남, 서북, 서남). ②모든 방향과 모든 방면.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함령(含靈), 함식(含識), 군생(群生), 군맹(群萌),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
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부처님께서도 「사면이 이렇게 불이 타 오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시고’ ;
[참고] 『잡아함 시현경(示現經)』에서.
〇"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눈(眼)이 불타고 있고, 물질(色)과 안식(眼識)과 안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귀·코·혀·몸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뜻(意)도 불타고 있고, 법(法)과 의식(意識)과 의촉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근심·슬픔·번민·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사면(四面) ; 전후좌후의 모든 방면(둘레).
*실중삼관(室中三關) ; '방장실의 3가지 관문' 고봉 스님이 학인을 제접(提接)할 때 사용하던 관문(공안)이라고 하며, 또는 깨달은 뒤 자신의 보림(保任)이라고도 한다.
돋는 해가 허공에 당도함에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움이 되었는가?
사람마다 하나의 그림자가 있어서 몸에서 조금도 떨어지지를 않는데, 무엇 때문에 밟혀지지 않는가?
온 대지가 하나의 불구덩이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을까?
*실중(室中) ; 실중(室中)은 실내(室內)의 뜻인데, 일반적으로 종사(宗師)가 머무는 곳으로 조실(祖室), 방장실(方丈室)을 가리킨다. 선종에서 전법(傳法)할 때 스승이 제자에게 면밀하고 친절하게 지도하는 장소를 말한다. 또는 스승이 제자에게 구전(口傳)한 가르침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삼관(三關) ; 3가지 관문. 종사가 세 가지 질문(공안)을 설정하여 학인의 수행 정도를 시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삼관을 제시하는 스님에 따라서 고봉삼관(高峰三關), 황룡삼관(黃龍三關), 도솔삼관(兜率三關), 자운삼관(慈雲三關) 등이 있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
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처서(處暑) ; 일 년 중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는 때. 이십사절기의 하나. 양력으로8월 23일경이며, 더위가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며 벼가 익는 시기이다.
*혹서(酷暑 독할 혹/더울·더위 서) ; 몹시 심한 더위.
*삼악도(三惡途) : 삼악취(三惡趣)라고도 하며 지옥, 아귀, 축생을 말한다。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곳으로 즉 지옥의 고통과, 아귀의 굶주림과, 축생의 우치에서 방황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헌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등한(等閒)히 ; 무관심하거나 소홀하게.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식(識) ; 오온(五蘊) 중 하나.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세 번째 지분으로 지각(知覺), 요별(了別)의 의미를 갖는다. 대상을 알게 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이 식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식설(六識說) · 8식설(八識說) · 9식설(九識說)이 널리 채택되고 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모두 채택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6식설은 그 발생 근거에 따라 6가지 식(識)을 열거 한다.
즉, 눈이 물질을 대할 때 보는 안식(眼識)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대할 때 듣는 이식(耳識)이 있으며, 코가 냄새를 대할 때 냄새를 맡는 비식(鼻識)이, 혀가 맛을 대할 때 맛을 감지하는 설식(舌識)이, 몸이 감촉을 대할 때 느끼는 신식(身識)이 있으며, 의(意)가 법(法)을 대할 때 '안다'는 의식(意識)이 있다.
이와 같이, 6근 · 6경 · 6식은 서로 연관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느 것도 독립적으로 있는 것은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이 근본이 되어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 전5식(前五識)을 통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意識)을 심왕(心王)이라고도 한다.
전오근(前五根), 곧 안 · 이 · 비 · 설 · 신(眼耳鼻舌身)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전5식(前五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일종의 감각지각이고, 제6의식(意識)은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지각과 언어를 매개로 한 인식 등 두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8식설은 앞의 6식설에 제7 말나식(末那識)과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더한 것이다. 말나식은 제6식의 밑에서 조절하는 강한 자의식(自意識)으로서, 범부가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의식이다. 이 말나식은 아치(我癡) · 아견(我見) · 아만(我慢) · 아애(我愛)의 번뇌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들을 제거하면 7식이 맑아져서 아공(我空)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제8 아뢰야식은 일반적으로 장식(藏識)이라고 번역된다. 장식이란 곧 여래를 감추고 있는 식이라는 뜻으로, 비록 중생이 생사 속에 있지만 이 감춰져 있는 여래만은 결코 상실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이 올바로 발현될 때 곧 여래(如來)가 된다고 보고 있다. 이 제8식에 대한 견해는 불교에 여러 학설이 있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즉해(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洛陽秋色多 (낙양추색다)江松白雲飛 (강송백운비)낙양에는 추색(秋色)이 많고 강송(江松)에 백운(白雲)이 날으니라.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용화선원(녹음실)에서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을 mp3 파일로 구할 수 있습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비유컨대 저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아니허면 그 바다 밑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있는 그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얻을 수가 없는 것처럼~’ ;
[참고]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구마라집鳩摩羅什 역) 제8 불도품(佛道品)
〇是故當知一切煩惱爲如來種譬如不下巨海不能得無價寶珠如是不入煩惱大海則不能得一切智寶
이와 같이 모든 번뇌야말로 여래가 되는 씨앗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넓은 바다 밑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무가(無價)의 보주(寶珠)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곧 일체지의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선남자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폐유리 등의 무가(無價)의 진보(珍寶)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의 번뇌라는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끝내 무가의 진보인 일체지에 대한 마음을 일으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생사 번뇌의 종성(種性)이 여래의 종성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무진장(無盡藏 없을 무/다할 진/감출·곳집 장) ; ①다함이 없는[無盡] 창고[藏]라는 뜻으로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 불교에서는 덕(德)이 광대하여 쓰고 또 써도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②배우고 배워도 다함이 없는 무궁무진한 진리. ③무한량으로 많은 재물.
*무가보주(無價寶珠) ;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보배구슬이라는 뜻. 불성(佛性), 반야(般若), 일승(一乘) 등과 같은 불교의 요체(要諦)를 비유하는 말로 자주 쓰인다.
무가보(無價寶) · 무가지보주(無價之寶珠) · 무가대보(無價大寶) 등이라고도 한다.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녕될 망/생각 상) ; 산스크리트어 vikalpa, parikalpa.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녕된(妄)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본업(本業) ; ①주가 되는 직업. ②주로 하는 일.
*정명경(淨名經) ; 『유마경(維摩經)』. 3권. 405년(후진 홍치 8년)에 구마라습 번역. 정식 명칭은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또는 『불가사의해탈경(不可思議解脫經)』이라고도 한다.
반야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사상에 기초한 윤회와 열반, 번뇌와 보리, 예토(穢土)와 정토(淨土) 등의 구별을 떠나, 일상 생활 속에서 해탈의 경지를 체득하여야 함을 중인도 폐사리(吠舍離)에서 거사(居士)로 지내면서 보살행업을 닦아 크게 교화한 유마힐을 중심으로 설한 경.
유마힐(維摩詰)은 범어로 Vimalakirti 음대로 써서 유마라힐(維摩羅詰) • 비마라힐(毘摩羅詰)이라 하고, 줄여서 유마힐 또는 유마(維摩)라고만 한다. 뜻으로 번역하면 정명(淨名) 또는 무구칭(無垢稱)이 되는데, 우리 말로는 ‘깨끗한 이름’이란 뜻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 ·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3)
*일구월심(日久月深) ;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 간다는 뜻으로, 날이 갈수록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짐을 이르는 말.
*독로(獨露 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도불가수유리(道不可須臾離)니, 도(道)라고 하는 것은 잠깐 동안도 여의지 못할 것이니, 가히 여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니라’ 고인이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
화두에 의심이 끊이지 아니하면 이 이름이 참의심[眞疑]이니, 만약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라 주작(做作)에 속하느니라。이런 연고로 혼침과 잡념이 다 마음에 들게 되느니라.
*주작(做作 지을 주/지을 작) ;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
화두를 들 때 무상(無常)을 느껴 발심(發心)을 해서 의심이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의심을 한 번 잠깐하고 또 의심함이 없으면 진심(眞心)으로 의심을 발한 것이 아니고 억지로 한 것이어서 주작이라고 한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擧却)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④일체처 일체시에 자신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 ‘이것 밖에는 내가 할 것이 없다! 오직 이것만이 내가 바로 살아가는 길이고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고 이것만이 영원을 살아가는 길이다!’라고 하는 철저하고 확실한 믿음.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자명초원(慈明楚圓) : (九八七 – 一0四0) 속성은 이(李)씨。광서성(廣西省) 계림부(桂林府) 전주(全州)에서 났다。22세에 출가하여 멀리 분양 선소(汾陽善昭)선사의 회상에 갔었다。분양은 욕설과 세속의 더러운 말만 할 뿐이므로 하루는 정성을 다하여 간 하였더니, 크게 성내어 『네가 나를 비방하느냐?』하고 내쫓았다。초원이 무엇이라고 변명하려는데, 분양이 손으로 그 입을 틀어막았다。그 바람에 크게 깨쳤다.
뒤에 석상산 숭승사(石霜山崇勝寺)와 담주 흥화사(潭州興化寺) 같은 여러 곳에서 교화하니, 법을 이은 제자가 50인이나 되었다。자명(慈明)은 54세로써 입적한 뒤의 시호(諡號)이고, 석상화상(石霜和尙)이라고도 한다.
*고인(古人) ; 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생사대사(生死大事) ; ①삶과 죽음, 생사(生死)의 큰 일. ②수행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는 큰 일.
*의정(疑情) ; 의심(疑心).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疑情)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복탁(思惟卜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소견(所見) ; 어떤 일이나 사물을 살펴보고 가지게 되는 생각이나 의견.
*참구(參究 헤아릴 참/궁구할 구) ; ①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본참화두를 드는 것. ②선지식의 지도 아래 참선하여 화두(공안)을 꿰뚫어 밝히기 위해 집중함. 화두 의심을 깨뜨리기 위해 거기에 몰입함.
*(게송) ‘유록앵전신~’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석춘(惜春)’ 참고. 鶯, 鷪, 鸎, 䴍은 모두 같은 글자(꽤꼬리 앵).
*과객(過客 지날·들를·떠날 과/손님·나그네 객) ; 지나가는 나그네.
*손 ; 손님. 객(客). ①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 ②남의 집을 방문한 사람. 남의 집이나 여관 따위에 묵고 있는 사람. ③지나가다 잠시 들른 사람.
*유위법(有爲法) ; ①여러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현상. 여러 인연으로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변하는 모든 현상.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부귀영화(富貴榮華) ;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로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럽고 호화로운 생활.
*탐착(貪着) ; ①만족할 줄 모르고 탐하고 집착함. 탐하고 구하는 것. 욕심부려 집착하는 것. 집착하는 것. 욕심부리는 것. 욕심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함. 대상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②깊이 마음에 두는 것.
갈애(渴愛), 애착(愛著 愛着), 염착(染著), 집착(執着), 탐애(貪愛),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노랑 냄새 ; 노린내(노린 냄새 : 짐승의 고기에서 나는 마음에 거슬리는, 역逆한 기름내).
*앵기다 ; 잡히다. 잡다(붙들어 손에 넣다. 짐승을 죽이다)의 피동사.
----------------(3/3)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아애(我愛) ; 아(我)에 대한 깊은 애착심. 아탐(我貪).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만(我慢 나 아/거만할·게으를 만) ; ①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일시적 화합에 지나지 않는 아(我)를 실체라고 생각하는 그릇된 견해에서 일어나는 교만. 자아가 실재한다는 교만. ②우열의 관점에서 남과 나를 차별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자아관.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아치(我癡) ; 아(我)에 대한 무지(無知).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일으키는 번뇌. 네 가지 근본번뇌(四根本煩惱, 四惑) 중 나머지 세 가지 번뇌를 일으키는 근본이다. 안으로 자아를 대상으로 삼아[攀緣] 집착하는 말나식(末那識)의 네 가지 번뇌[我癡, 我見, 我愛, 我慢]의 하나.
*육바라밀(六波羅蜜) ; 바라밀(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 pāramitā의 음사로, 도피안(到彼岸)·도(度)·도무극(度無極)이라 번역. 깨달음의 저 언덕으로 건너감, 완전한 성취, 완성, 수행의 완성, 최상을 뜻함.
보살이 이루어야 할,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는 여섯 가지 수행의 완전한 성취.
①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보시를 완전하게 성취함. 보시의 완성. ②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계율을 완전하게 지킴. 지계의 완성. ③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인욕을 완전하게 성취함. 인욕의 완성. ④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완전한 정진. 정진의 완성. ⑤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완전한 선정. 선정의 완성. ⑥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를 성취함. 지혜의 완성.
*보시(布施) : [범] dana 음을 따라 단나(檀那)라고도 쓴다。남에게 베풀어 준다는 뜻이다。재물로써 주는 것을 재시(財施)라 하고, 설법하여 정신의 양식과 도덕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여 주는 것을 법시(法施)라 하고, 계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또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여 주는 것을 무외시(無畏施)라 한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법문(法門 부처의 가르침 법/문 문) :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게송) ‘가소세간애~’ ; 『청허당집(淸虛堂集)』 (서산 휴정) ‘태희사미귀령(太熙沙彌歸寧)’ 참고.
① 변하면서 흘러가는 현상계. ② 생물들의 세계. ③ 생물들이 거주하는 자연 환경, 곧 산하대지. ④ 세상. 이 세상. 세속. ⑤ 산스크리트어 saṃsāra 미혹한 세계. ⑥ 육내입처(六內入處), 또는 십이처(十二處)를 말함.
*지중하다(至重-- 이를 지/무거울·소중할 중) ; ①(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무겁다. ②(무엇이)더할 나위 없이 귀중하다.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〇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무장 ; ‘더욱, 한사코’의 사투리.
*등목 ; 목물(바닥에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사람의 등에 물을 끼얹어, 몸을 씻고 더위를 식혀 주는 일).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sa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항상[常] 변하지 않는[寂] 광명[光]의 세계[土]. 부처님의 거처나 빛나는 마음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주요 내용]
(게송)월원불유망~ / 중생의 탐진치 욕심의 무서운 불을 끄는 것이 참선이다 / 재진출진(在塵出塵) 불가잠폐(不可暫廢) /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야 거기에서 지혜 보물을 얻는다.
‘이뭣고?’했을 때 그 남는, 알 수 없는 그 의심을 관조해야 / 머리털에 붙은 불 끄듯이 화두를 들어라 / 사량분별로 따져 갖고 알아지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게송)유록앵전신~ / 탐진치, 사리사욕을 놔 버려라 / (게송)가소세간애~ / 내 인생 바칠 곳은 내 생사 구제하는 길밖에는 없다 / 더위 속을 향해서 피서를 허는 법을 터득해야.
[주요 문구]
〇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진치의 불, 이 불 때문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진치 삼독의 이 불 때문에 우리는 삼악도(三惡途)의 불구덩이로 결국은 여지없이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허면 이 삼악도의 불을 끄고 영원히 청량한 그러한 경지에서 그러한 속에서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불법(佛法)이요,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〇번뇌 망상 이놈에서 탐진치 삼독의 거센 파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그놈 때문에 지옥에도 가고 축생도 되고 아귀도 되고 그렇지만, 그 파도를 잘 타면서 잘 지혜롭게 저어 들어가면 무량겁을 쓰고도 남을 지혜의 보물을 거기에서 얻을 수가 있더라. 참 기가 막힌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게 정명경(淨名經)에 있는 말씀인데.
〇도학자(道學者)는 사량복탁 하는, 사량분별심으로 공안을 따지는 것을 부모를 죽인 웬수처럼 알아 여겨야 헌다. 사량복탁을 아주 부모 죽이는 웬수처럼 생각하고 잠깐 동안도 사량복탁을 허지를 말어라. ‘이뭣고?’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해 나가.
〇사욕(私慾), 사리사욕(私利私慾) 그놈만 놔 버리면 온갖 재앙이 다 자기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 사리사욕, 그 탐진치(貪瞋癡), 그 욕심 그것만 놔 버리면 세계 평화도 거기에서 다 이루어질 것이고 민주주의도 정말 뭐 얼마 안 가서 금방 민주주의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여당 야당 모두가 다 그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일어난 그 사리사욕만 놔 버리면 민주주의 하나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남북 통일도 그것만 양쪽에서 다 놔 버리면 통일이 왜 그것이 어려울 것입니까?
인간의 행복도 그 욕심으로 행복을 얻을려고 하는 데에서 점점 재앙만 일어나고 불행만 돌아오는 것이지, 그 탐진치 삼독만 놔 버리면 행복은 바로 그 속에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여.
〇육바라밀(六波羅密) 속에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 맨 처음에 있는데, 그 보시라고 허는 것은 버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보시를 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보시를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고. 보시를 한다고 허는 것은 버리는 법이거든.
〇인간이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잠시 번쩍 하다가 사그라져 버리는 그러헌 한 뭉치의 불꽃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괴로워도 ‘이뭣고?’ 어떠헌 슬픈 일을 당해도 ‘이뭣고?’ 어떠한 어려운 지경에 당하드라도 ‘이뭣고?’ 이놈 하나로써, 이놈을 간절히 거각(擧却)함으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해 나간다면 만나는 모든 슬픔과, 만나는 괴로움과, 만나는 어려운 것들이 모두가 다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나아가게 하는 채찍이 될 것입니다.
이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이 세계와 이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한다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 수 있는 지혜의 보배를 얻게 될 것입니다.
〇이 더위 속을 향해서 피서를 허는 법은 거기에서 우리는 정말 훌륭한, 이 인생의 고해(苦海)를 고해 속에 바로 파고 들어가서 그 고해에 즉(卽)해서 그 고해를 해탈(解脫)하는, 생사 바다 속에 들어가서 그 생사를 해탈하는 그 생활의 지혜를 여기에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눈을 바로 지금 오늘 이 산승(山僧)의 말 속에서 터득을 한다면은 이 사바세계는 바로 이 적광토(寂光土)로 변조를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이 더위 속에서 바로 서늘한 이 청량으로 변조하는 이 수단을 우리는 터득을 헐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할수없이인자산적자신이칼을들고나와가지고“오늘날에사비로소 내소원을성취하게되었다.이리들어오너라”해가지고는싸움이벌어졌습니다. 멀찌감치서서아주큰싸움이벌어졌는데,이사람은오백개의활을그산적한테대해서활을쏴서,오백 개 중에사백구십구개를쐈는데쏘는족족그산적의칼에맞아서화살이두동강이가나서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