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1~73)/(26~50)2023. 4. 24. 21:27

 

 

(세등선원No.44)—계해년 하안거 결제 법어(83.04.17.음) (47분)


(1) 약 29분.

 

(2) 약 18분.


(1)------------------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나무~아미타불~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다.
은은히 다리가 들녘에 들 안개 속에 놓여져 있고, 강물에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 서쪽 강변에서 고기잡이 배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무엇을 묻느냐 하면,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복사꽃이 종일토록 그 강물에 떨어져서 흐름을 따라서, 흐르는 물을 따라서 복사꽃이 흐르는데, 신선(神仙)이 사는 고을은,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 맑은 강 시냇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무릉도원에서 그 도원(桃源)에 피어 있든 복숭아꽃이 떨어져 가지고 이렇게 강물을 따라서 계속 이렇게 흘르고 있는데, 반드시 여기에는 신선이 사는 고을이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신선 사는 곳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어부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깨달은 경지를, 확철대오한 경지를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偈頌)입니다. 복숭아꽃이 떨어져서 그 흐르는 물에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릉도원이 이 강변 가 어디엔가는 있을 텐데 어디가 있느냐.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여름 안거(安居)가 시작되는 4월 17일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오뉴월 삼복더위 속에서도 더위를 이기고, 나아가서 그 더위를 잊어버리고 정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너무 자상하게 잘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그러는데 참선을 할 때 있어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거각을 하는데, 힘을 너무 써.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그것이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가행정진을 삼고, 잠을 안 잔다던지 말을 않는다던지 밥을 굶는다던지 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억지로 앉아서 배긴다던지, 이것은 그 육체를 조복(調伏) 받기 위한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진짜 참선은 육체를 억지로 억압을 하고 육체를 못살게 구는 것이 참정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육체를 조복 받는 그러한 기간이 필요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서 제대로 정진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여. 선지식의 법문을 듣지 아니하면 평생토록 공부에 바른 의관(疑觀)을 잡는 법을 몰라서 그저 어거지로 몸뚱이만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데, 그러한 정진은 지나치면은 병(病)만을 얻게 만들고 도(道)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늘 이 부처님 말씀대로 다른 도반(道伴)들보다 몇십 배를 애를 쓰고 정진을 해도 마침내 도를 얻지를 못하니까, 퇴타심(退墮心)이 나 가지고 퇴속(退俗)을 할려고 결심을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불러다 놓고, “니가 왜 퇴속을 할려고 그러느냐?”
“저로서는 목숨을 바쳐서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제 출가 이래로 계속해서 했지만, 다른 도반들은 모다 깨달라서 성과(聖果)를 얻는데 저는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저는 도(道)에 인연이 없는가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속가로 내려가서 부모 봉양(奉養)하고 속가에서 살면서 불법을 그저 믿고 살겠습니다”

“좋다. 내가 니 어째서 도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말해 주리라.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슨 업(業)을 삼았느냐? 무슨 직업을 가졌느냐?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했느냐?” 그걸 물으셨습니다.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탑니다”

“그래! 그러면은 그 거문고를 탈 때에 첫째, 그 줄을 고르는데, 그 줄을 너무 긴(緊)하게 졸라 매면 어떻게 되느냐?”
“자칫하면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드라도 소리가 너무 강하게 매면 제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러면 끊어질까 두려워서 너무 느슨하게 매면 어쩠드냐?“
”줄이 끊어지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너무 느슨하게 매면 제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그것 보아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도 해태(懈怠)를 부리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도를 이루지 못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급한 마음을 가지고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지나치게 힘을 써도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맨 거와 같이, 그것도 도를 이루지를 못하고 거문고 줄이 끊어지듯이 몸에 병만 쳐지고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 그 말씀을 듣고서 그때부터서 참 중도(中道)를 지켜서 수행을 해 가는데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이러한 말씀은 대단히 좋은 귀감(龜鑑)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럭저럭 병이 날까 봐서 어제에나 오늘이나 마냥 그저 정진을 하는데 시지부지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자기만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 육체를 갖다가 억제를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지나치게 들볶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 그러한 자세도 지혜롭지 못한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팔도에서 다른 권속 다른 혈통이 모여 가지고 석 달 동안을 같이 산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법을 믿는 목적이 같은 도반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잘 대중 화합이 이루어지지만, 그 가운데 혹 괴각(乖角)이 하나 둘은 있을 수가 있어서,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회상(會上)을 가던지 그러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잘 대중이 대처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로 핀돌라[賓頭盧(빈두로)]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참 수행을 잘해서 성과(聖果)를 이뤘습니다.
그리고서 ‘내가 이렇게 성과(聖果)를 이루게 된 것은 첫째, 나를 낳아 주신 부모와 나를 길러준 나에 고향의 그 은혜다’ 이리 생각을 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가지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에도 법을 설해 주고, 또 마을 사람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이 불법(佛法)의 종자를 심어 줘야 되겠다’ 이리 생각하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그 고향은 코삼비라고 하는 지방인데, 그 항하(恒河), 간지스 강(Ganges江)이 흘르고 있는 강변입니다.
이 모다 강물은 맑고 강변에는 야자수 나무가 늘어서서 그 서늘한 그늘이 져서 참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그러한 야자수 숲 아래 떠~억 앉아서 정진을 하며, 또 졸리면 포행도 하고, 그러다 때가 되면 걸식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야자수 나무에 쉬어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그때 그 지방에 성주 우다냐 왕과 그 왕비가 많은 모다 궁녀들을 거느리고 그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하러 나왔었습니다.

그래 왕과 왕비는 여러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거문고도 타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춤도 추게 하고, 그러면서 한바탕 즐기다가 왕이 좀 피로했던지 그 서늘한 데에 좀 한숨을 낮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비와 궁녀들이 그 왕이 잠이 드니까 무료해서 자기네들도 그 강가에 거닐면서 놀다가, 보니까 그 야자수 그늘 밑에 참 성스럽게 생긴 한 수행인이 떠억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까이 가서 보니까 너무너무 인물도 잘생기고, 그 얼굴과 몸매에는 너무너무 그 수행인으로서 성스러운 그 고상한 품격이 풍기니까, 그 앞에 가서 절을 하고서 “우리에게 좋은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청을 했습니다.
그래 그 핀돌라 스님이 그 왕비와 궁녀들을 향해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게 왕비와 궁녀들은 그 설하신 법문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거기에서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노라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우다냐 왕은 눈을 떠서 보니, 자기 옆에 모다 있을 왕비와 궁녀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다 보니까 야자수 나무 그늘 밑에서 그 왕비와 궁녀들이 어떤 한가운데 스님 한 분을 놓고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질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자마자 “명색이 수행한다는 놈이 이쁜 여자들을 모여 놓고 잡담이나 하고 희희닥거리고 있다”고, “네깐 놈이 무슨 수행을 하는 놈이냐?”고, 칼을 빼 가지고는 쳐들어서 한칼에 쳐죽일 듯이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핀돌라 스님은 눈을 따악 감고서 조끔도 동요를 하지 안 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고,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왕도 겁이 나 가지고 그 들었던 칼을 후려치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는 그 근처에 마치 개미가 그 집을 짓고 수천 마리 개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개미집을 파다가 그 핀돌라 스님 얼굴에다 갖다 개미와 개미집을 압량해서 갖다가 퍼붓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미들이 얼굴로, 목으로, 품속으로, 그냥 전신으로 개미가 버글버글 하면서 물고 뜯고 그래도,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우다냐 왕이 참 감복을 해 가지고 무릎을 꿇고서 참회(懺悔)를 했습니다.
그런 뒤로 그 우다냐 왕은 그 핀돌라 스님을 자주 찾아 뵈웁고 법문도 듣고 여러 가지 참 지도를 받고 해서 그 핀돌라 스님의 정진력을 통한 인욕행(忍辱行)과 그 자비(慈悲)를 보이심으로 해서 그 왕실을 중심해서 이 정법을 갖다가 크게 선양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타난 한 일화(逸話)지만,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느냐?

대중 가운데에 특별한 성격을 가진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어서, 대중스님네 공부해 나가는 데 또는 생활해 나가는 데 지장을 줄 만한 일이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인욕(忍辱)을 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발심(發心)을 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그러한 괴각이나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분이 조끔도 대중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경책(警策)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다냐 왕 그 포악(暴惡)한 언행이 결국은 핀돌라 스님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펴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맨들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항시 호시탐탐(虎視耽耽)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이 한 나라를 침범할 때에 덮어놓고 아무때나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안에 어떠한 헛점이 있을 때에, 그 헛점을 틈타서 침범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나라가 상하(上下)가 전부 임금과 대신과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물샐틈없이 잘 지키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외적(外敵)은 침범해 올 수도 없고, 어떤 미친 마음을 가진 외적이 침범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패배를 하고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안에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일신의 영달(榮達)을 생각하고, 밤낮 당파 싸움만 하고 국가와 민족을 애끼는 마음이 없이 그렇게 되면, 몇해 전에 자유 월남(自由越南)처럼 그렇게 되어 버리면은 아무리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가 가서 그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싸워 주고 무기를 대준다 하드라도, 그 나라는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하는 사람도 첫째, 자기 마음 안에 외적(外敵)이 침범하기 좋은 그러한 상태가 되어 있으면 외적은 육근(六根)을 통해서 언제라도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처음~29분11초)





(2)------------------

부처님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을 하시기를 “한 나무토막이 저 강(江) 상류에서 흘러내려 갈 때에 중간에 걸리지 않고, 또 양 강변에 걸리지 않고, 또 그 자체가 중간에 썩어버리지 않고서 계속 흘르기만 하면 그 나무토막은 마침내 바다에 도달하고 만다”

이 말씀은 수행하는 사람이 중간에 공부를 중단하지를 않고, 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나 오욕락(五欲樂)에 걸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체적으로 퇴타(退墮)하지 아니하고서 계속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한다고 하는 비유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바른 정신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선방에 다녀도 종래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고, 고민을 하는 그런 수행이나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퇴타해 가지고 공부를 포기를 하는 그러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항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믿지를 못했거나 만나지를 못했을 것이고, 둘째는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드라도,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부족해서 그렁저렁 정진을 했거나, 이러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오래가도 3년 아니면 10년이면 기어코 지혜의 눈을 뜨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미 무량겁(無量劫)이 지내갔고, 또 앞으로 무량겁토록 앞으로 우리 앞에 장래에도 무량겁이 있지만 언제나 그 한 생각이 흘러서 무량겁이 되었고, 앞으로 돌아올 무량겁도 언제나 그 기본 단위는 ‘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이고, 언제나 한 생각—앉아서 한 생각, 서서 한 생각, 밥 먹을 때 한 생각, 똥 눌 때의 한 생각, 입선 · 방선 · 소지 · 세수 이 그때 그때의 그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만을 단속을 하면, 앉아서도 상관이 없고 서서도 상관이 없고 누워서도 상관이 없고, 전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생각만을, 언제나 한 생각이여. 하루 열두 시간, 스물네 시간도 결국은 1초 1초가 모여서 24시간도 되고, 1초 1초가 모여서 한 달도 되고, 석 달도 되고, 10년도 되고, 100년도 되기 때문에 그 1초 1초를 잘 단속을 해 나가면 100년도 단속을 잘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정진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하고, 자기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해.
한 생각 단속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인이여. 한 생각 잘 단속하면 그 가운데 계율도 지켜지게 되고, 그 가운데에 모든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춰지는 것이여.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이요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방능정처사바하(方能靜處薩婆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법불원찰나간(無法不圓刹那間), 찰나간(刹那間)을 단속을 잘하면, 한 법(法)도 원만(圓滿)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만법(萬法)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 말이여.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여. 찰나, 찰나를 잘 단속해 버리면 어떠한 죄라도 다 소멸치 못할 죄가 없더라.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일만 재앙이 거기서 일어나고, 일만 죄가 거기서 또 일어나고, 한 생각 단속하면 천하 없는 큰 죄도 찰나간에 소멸이 되어 버린다 그 말이여.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눈앞에 모든 일을 헤아리되 한 법도 없음이요.
어떻게 하는 것이 눈앞에 모든 법을 헤아려서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느냐?
좋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궂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상하는 일을 보아도 ‘이뭣고?’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타~악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거기에 따악 머무르도록.
숨을 들어마셔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약간 볼록해지고, 차츰차츰 볼록해지면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딱 정지를 해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조(觀照)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쉰단 말이여. 숨을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등허리에 등허리 쪽으로 홀쪽해지도록.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실 때에도 아까 들었던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의 여운이 들어마시면서도 조옥 유지가 되도록, 그래 가지고 숨을 정지하는 그 시간에도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따악 그때까지도 고대로 있도록 한단 말이여. 그다음에 또 숨을 조용허니 내쉬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를 한다 그 말씀이여. 그러면서 숨은 차츰차츰차츰 숨은 나가는데 따라서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래서 숨쉬는 것과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과 화두를 드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처음으로 하는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고 이렇게 화두를 들지만, 한 달 두 달 이렇게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그때마다 매번 화두를 들지 안 해도 괜찮아요. 한 서너번 쉬고 나서 또 화두를 한번씩 들고 이래도 되고.
화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들어져 있으면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괜찮은 거여.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호흡을 열 번 스무 번 할 때까지도 화두 한번 드는 것으로써 조옥~ 고대로 그 의심이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해 가면 되는 거여. 그 의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석 달 동안 하루같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제절로 대중은 화합이 될 것이고, 모든 장애는 일어날 까닭이 없는 거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안정이 되어서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보람을 느끼고, 법에 기쁨이 항시 가슴속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소화도 잘 될 것이니 몸도 건강하게 될 것이고, 호흡을 잘해 나가니 무슨 상기(上氣)가 거기에 걸릴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은 여름 결제와 아울러서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은 오늘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각기 가정에서 이 백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시고, 여기에서 정진하는 스님네와 ‘같이 결제(結制)를 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정에서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일이 정 바쁘더라도 최소한 30분씩이라도 꼭 좌선(坐禪)을 하셔서 석 달 동안을 ‘백일기도 겸 결제를 했다’ 이리 생각을 하고 정성스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되도록 축원(祝願)을 합니다. (29분12초~46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 /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 정진은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지혜로운 수행, 거문고 타는 것의 비유 / 핀돌라 스님의 인욕행 /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더라도 인욕(忍辱)하고 오히려 발심(發心)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아라.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 한 생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
(게송)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 /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