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5)—계해년 하안거 반산림 법어(83.06.02) (50분)

<녹음 가운데에 주변 소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6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하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허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하라
나무~아미타불~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이나, 천억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 복(福)이 갓이 없을 것이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리되, 한 부처님에게만 올리는 게 아니라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 그 복이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항상 옛 가르침,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자체로써 말을 한다면은 ‘옛 부처에 능히 가르친 바 가르침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고, 이치로써 말을 한다면은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經)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권의 경(經)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서로 전한 그 법인(法印), 법의 도장을 갖다가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를 고교(古敎)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그 일착자(一著子)는 그 비롯함이 없어. 언제부터서 있었던지 그 시작이 없어. 언제 그 가르침, 그 일착자를 언제부터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가 그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고교(古敎)라 그래. ‘옛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그래. 이 중생에게는—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고교(古敎)라 그래.

그러면 어째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복보다도 그 공덕(功德)보다도,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經)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냐?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그 공덕보다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대중이 계해년(癸亥年) 삼하 결제(三夏結制)를 해 가지고 이렇게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전심전력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항상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금년 여름철에는 유독 좋은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한다는 말을 와서 들으니, 그리고 이 여러 대중의 얼굴들을 보니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하는 모습이 그 살아 있는 눈동자 속에 내가 역력히 볼 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대견스럽고, 너무너무 참 그 기쁜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를,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댄 그대들은 눈을 떠서 눈앞에를 관(觀)하라.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위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쓴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經),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에는 경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문채(文彩)가 있는데,
그 ‘흰 종이라 하는 ‘흰 백(白)’ 자, 흰 종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성(自性)에는 불변 수연(不變隨緣), 이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자성이 가지고 있는 불변 수연에 두 가지 용(用)을 갖다가 ‘흰 빛’에다가 표현을 한 것이고. ‘검은 글자를 썼다’ 하는 그 ‘검을 흑(黑)’ 자는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그 적멸(寂滅)의 체(體)를 갖다가 가르치는 것이거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대 눈을 떠 가지고 그대의 눈앞을 봐라. 모든 납자(衲子)로 하여금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한 권의 경을 읽어라 그 말이여.
눈앞에 일용(日用), 날[日]로 쓰는 일용 생활—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모든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일용인데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한 권의 경(經)을 읽는다’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이 오직 이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 한 권의 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法)을 설하시고, 팔만사천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과 팔만사천 법(法)이 한 글자 한마디도 오직 이 한 권의 경(經)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 없어. 팔만대장경을 보고 배우되 옳게만 본다면, 마침내 이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본래 가지고 나온 이 한 권 경을 읽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고 5년, 6년, 경을 배우고 평생 동안을 경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고 배우되, 본래 가지고 난 이 한 권의 경을 읽게 되어야지 그 경을 옳게 보고 옳게 배운 것이지, 이 본래 가지고 난 한 글자도 없는 이 경(經)을 볼려고 하는 신심(信心)을 내지 아니하고 이 경을 보게 까지 되지 아니한다면,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육두백판으로 다 외우고 쓴다고 한들 그 사람은 경을 바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을, 강원(講院)에서 이력(履歷)을 마치면 그 경을 놔 버리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진짜 경을, 이 마음의 경을 읽는 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래. 우리 대중이 과연 그 한 권의 경, 아무리 열어 봐도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여,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을 똑바로 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입선(入禪)하는 시간만 떠억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한 그 찰나부터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시비에 얽혀서 말려들어 가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하고 내가 옳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 입선(入禪)을 하면 또 앉어서 정진하다가 방선(放禪)을 하면 그럭저럭 일용(日用)에 끄달려서 화두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진을 해 가지고서는 10년, 20년 내지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걸망을 지고 다니면서 정진을 한들 확철대오가 어디에 있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정진을 한들 무슨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금년 여름에 이 세등선원에 모인 대중은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한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금년 여름에 기어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을 하고, 불조(佛祖)의 면목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납자가 많이 배출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를 합니다.


‘참선이 참 쉽기로 말하면 세수할 때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없다’고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다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 없고, 쉽다고 섣불리 해서도 아니될 것이여.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앉어서 정진을 하다가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 포행(布行)을 하면서 ‘이뭣고?’. 그러다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조급한 생각을 조끔도 낼 것이 없어. 그러면서도 또 등한(等閑), 더군다나 등한히 할 생각을 왜 낼 것이냐 그 말이여.
일부러 묵언(默言)을 하지 아니해도 제절로 묵언이여, 전체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데 무슨 딴소리할 겨를이 있을까 보냐? 밥을 입에다 떠 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 저작을 하면서 그 속에 화두가 역력(歷歷)하고, 반찬을 집어 먹고 또 저작을 하면서 바로 거기에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전 대중이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하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소제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운력을 할 때도 고대로 하고, 큰방에 있으나, 지대방에나, 마당에 나가나,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하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미 부모형제와 정든 가정을 버리고 출가해서 모든 인생 청춘을 다 포기하고, 그리고서도 이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한 이상, 기왕 하는 마당에 그렇게 철저히 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금생도 길고 결정코 이 철에 확철대오를 해야 할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달리고 있는 말에다가 채찍을 가한다’
채찍을 가하지 아니해도 그 말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채찍을 가한다 그 말이여. 마치 우리 대중이 각자 자발적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가 지금 법상에 올라와서 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던 사람이 이제는 인자 한 시간밖에 안 자고 정진을 하고 그렇게 까지는 할 것이 없어. 우리 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도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물질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라 최소한도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멕여 줘야 하고 또 입혀 줘야 할 것입니다.(처음~26분3초)





(2)------------------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거의 잠을 안 주무시고, 거의 먹지 아니하시고 그 피나는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설산에 들어가셔서 여러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통달을 해서, 오히려 그 스승보다도 더 앞서갔다 말이여. 그러나 그 스승이 그렇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다음 스승의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또 정진을 고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다도 더 낫게 해. 그 스승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그렇게 해서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훌륭한 스승은 다 찾아서 배우고 차례차례로 그 스승을 버리고 그렇게 해 가지고 더 이상 스승을 찾을 것이 없을 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혼자 정진을 했습니다.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을 받아 잡숫고 정신을 차리시고 흐르는 강물에 목욕을 하고 쇄락(灑落)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했는데,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맨 먼저 법(法)을 설하실 것인가?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정진을 하는데—처음에 그 오비구는 정반왕(淨飯王)이 태자(太子)를 보호하라고 보내 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태자의 고행하는 것을 보고 발심을 해 가지고 같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고행으로부터서 물러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맹세를 하고 고행을 하다가, 태자는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잡수는 것을 보고, 그 다섯 비구들이 ‘고타마(Gotama)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가지고 고행을 포기를 했다, 타락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런 타락한 고타마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녹야원으로 가자’ 그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 녹야원으로 간 그 다섯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교진여들은 먼빛으로 고타마 태자가 오신 것을 보고, ‘아 저기 타락한 태자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찾아오는가 모르겠다. 우리, 오드라도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주지 말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꽉 짜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가까이 오니까 그 얼굴은 훤히 빛이 나는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짰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어서서 영접(迎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태자가 뭐라고 여기를 왔소?” 물으니까,
태자가 “나를 이제는 태자라고 부르지를 말아라. 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으니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라”

“타락한 고타마가 어떻게 성불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나를 타락을 했다고 하느냐? 나를 봐라.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눈빛을 봐라. 나는 확철대오해서 성불을 한 성자가 됐느니라”
과연 우러러보니까 얼굴에는 빛이 나고 눈에서는 광명이 나는데, 옛날에 자기들이 보았던 그러한 구담 사문(瞿曇沙門)이 아니었더라 그 말이여.

거기에서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그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그 다섯 비구뿐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인도(印度)에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게 몸을 불로 지지고, 가시덤불에 딩굴고,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하는 고행 위주(爲主)의 고행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몸뚱이를 굴복을 받고 마침내 해탈도를 얻는다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진여를 위해서 최초에 설하신 법이 바로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러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최초에 설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오비구(五比丘)로 하여금 바른 수행법을 갖도록 하고, 그다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섯 비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보내서 탁발을 해 오게 맨들고, 나머지 네 사람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사람이 또 밥을 얻어 오고 나머지기 네 사람이 또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철에 이 다섯 사람이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다섯 사람이 각기 딴 길로 딴 방향으로 가서 이 법을 설해라’ 이렇게 해서 인도 각 지방에 보내 가지고 법을 설하게 했고, 그 철에 당장 1250인(人)이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셔서 삽시간에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불법(佛法)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대중은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잘 입고 지나치게 많이 잘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될 수 있으면은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그렇게 공부를 할려고 애쓴 사람들만 모였어. 너무 그렇게 할까 걱정이,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최소한도로 필요한 잠, 아무리 적게 자도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자 주어야 그래야 그 이튿날 정신이 맑은 법이여. 그 저녁에 잠을 안 자고 설쳐대 놓으면 안 자고 해 놓으면 그 이튿날 낮에 맑은 정신이 없어. 낮에 입선(入禪) 중에도 졸고 그저 그렇게 해서 맑은 정신이 없으니까, 차라리 그러기보다는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 푸욱 자 주고.
일반적으로 선방(禪房)에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여섯 시간을 설정한 것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근기가 조끔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어떠한 사람도 다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시간을 자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나이가 젊고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다섯 시간만 자도 좋고, 또 특수하게 또 좋은 사람은 네 시간 정도만 자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자 주면 그 이튿날 정신이 깨끗해서 3시에 일어나서 그날 저녁 9시에 잘 때까지 정말 짬지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 옆에서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이 올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잠을 안 자고 하다 보면 그 이튿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입선(入禪) 중에 꾸벅꾸벅 조니,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까, 자기의 체질과 건강과 뭐 그런 것을 잘 참작해서 대중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기에게 알맞는 정진법을 스스로 개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가 벌써 이 반 철이 지내갔는데, 앞으로 반 철은 초복 · 중복 · 말복, 이 삼복(三伏)이 들어서—지나간 반 철은 그럭저럭 과히 덥지 않고 지내갔지만 앞으로 참 더운 반 철이 남아 있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실속 있는 정진을 해서 득력(得力)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알뜰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에 최초에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법문(法門)의 요지를 말을 했습니다.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헌디  갱무남북여서동(更無南北與西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차양화력(雖然不借陽和力)이라도  쟁내도화일양홍(爭奈桃花一樣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이다. 홀로 앉었어, 올연히 앉었는데 한 집이 공(空)했더라.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참 애를 써서 몸부림을 치면서 부셔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정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 경계가 꼭 오는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처억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기쁘다고 할 것인가, 슬프다고 할 것인가?

하늘을 봐도 화두(話頭)요, 땅을 봐도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차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무슨 옆에서 누가 잡담을 해도 그 소리는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비행기 소리가 들려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그러니 방안에 대중이 가득 있어도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문 밖을 보면은 산천초목이 울긋불긋해도 그것은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뿐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무슨 망상이 혹 무슨 딴생각이 일어나도 그냥 스쳐간 것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한 집이 공했다. 일실(一室)이 공(空)했다’ 하는 거여.

이 조그마한 큰방 하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공한 거여.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까지도 느낄 수가 없어. 몸뚱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 몸뚱이도 공(空)해 버렸고 이 방도 집도 공(空)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공(空)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거기에 무슨 동서남북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 몸이 공하고, 이 방이 공하고, 이 우주법계가 다 공했으니, 그 공한 곳에도 처백히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공한 그 경계에 따악 빠져 가지고 그놈을 집을 짓고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것은 그러한 경계에 빠져 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거여. 절대로 그 사람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되거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또 하나 조심할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빨리 그냥 어서 터졌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한 생각을... (녹음 끊김) 조급한 생각도 갖지 말고 또 늘어지는 해태심(懈怠心)도 갖지를 말고 여법하게 정진을 해 가면 아무 장애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코 깨닫고야만 말게 되는 거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에 맛있는 음식인데,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맨들어 갖고도 그 관리를 잘못하면 그것이 변했다 하면은 무서운 독약으로 변하는 것이여.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변하면 고약한 독약으로 변하는 법이라, 맛있는 음식이 변했다고 해서 아깝다고 그놈을 먹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그 무량겁을 두고 어렵게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저 죽고 남 죽이는 외도(外道)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말이 한량이 없지만...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26분5초~49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經)을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한다 /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라 /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하신 최초의 설법, 중도법(中道法) /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실속 있게 정진을 하라 / (게송)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 /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