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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등선원No.58)—을축년 동안거 해제 법어(86.01.17) (56분)

(1/3) 약 20분. (2/3) 약 16분. (3/3) 약 20분.

(1/3)----------------


춘조매화발(春早梅花發)이요  추심야국개(秋深野菊開)니라

나무~아미타불~

욕식개중사(欲識箇中事)대는  부운공거래(浮雲空去來)니라

나무~아미타불~


춘조매화발(春早梅花發)이요  추심야국개(秋深野菊開)라.

봄이 이르니 매화가 피고,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가 피었구나.


욕식개중사(欲識箇中事)댄  부운공거래(浮雲空去來)라.

이 낱 가운데 일을 알고자 할진댄, 이 도리(道理)를 알고자 할진댄, 뜬구름이 허공에 갔다 왔다 하느니라. 부휴선사(浮休禪師)의 게송(偈頌)입니다.


봄이 이르니 다른 꽃은 아직 피지 아니하고 매화꽃이 눈 속에서, 눈이 아직 희낏희낏 다 녹지 아니한 그 눈 속에서 매화꽃이 피고, 가을이 깊으니 다른 꽃은 다 져버렸는데 들국화가 쌀쌀한 가을바람에 피고 있더라.


너무나 당연한 아무 별 뜻이 없는 평범한 일을 시(詩)로 읊었습니다. 그런데 이 별로 기특하지도 아니한 평범한 이 사실, 이 속에 참다운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허공에 흰구름이 날아가고 날아오느니라.


이 허공에 흰구름이 날아가고 날아오는 것은 또 무슨 기특한 일인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은 또한 무슨 기특한 일인고?


이 기특할 것도 없는 이 사실이 설(說)할래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도리를 너무나 분명히 설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병인년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를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 큰방에 35명이 났고, 또 이 자리에는 저 경상도 지방, 충청도 지방, 경향 각지에서 크고 작은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여러 비구니(比丘尼) 대중, 그리고 청신사 청신녀, 부처님을 믿는 형제자매 여러 도반(道伴)들이 많이 모이셨습니다.


지난 한철 동안 각기 자기가 거처하는, 안거하는 선원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그리고서 오늘 이 삼남 · 팔도에서 이렇게 한 자리에 서로 도반들의 얼굴을 보고 '지난 한철 동안 나는 정말 모든 정성을 다해서 정진을 했는데, 다른 도반들은 또 어떻게 정진을 했을까?'

서로 말없이 미소 짓는 가운데에 인사를 했지만 그 속에는 한없는 도반으로서의 넘치는 절렬(節烈)한 티없는 정이 오고갔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의 그 엄숙하고 티없는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동자 속에 도반으로서에 깊은 신심과 우정이 풍기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대단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철 한철을 정성을 다하고, 신심(信心)을 다하고, 분심(憤心)을 다해서 정진을 해 나간다면 어찌 금생에 이 몸뚱이를 가지고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없겠습니까.


인생은 참으로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하루 일을 알 수가 없고, 하룻밤 일을 알 수가 없어.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땅히 정신차려야 할 것은 그 무상함에 철저한 포구(怖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그리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잡드리해 나간다면 오늘 눈을 감게 되고, 한 시간 후에 눈을 감게 된다 한들 무슨 포한(抱恨)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 죽음에 대해서 각기 느낀 바를 말해 보아라.

‘생사가 어떻게 되느냐?’


한 제자가 대답하기를 ‘생사는 하루 동안에도 죽음은 닥쳐 올 수가 있습니다’

‘너는 공부하기가 어렵겠구나’


또 한 제자가 ‘밥 한 그릇 먹는 가운데에도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도 어렵구나’


한 제자가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는 데에도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를 하겠다’


숨 한번 쉬는 사이에 죽음은 올 수가 있는 것이여.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이 제자를 데리고 어디를 가시는데, 어린아이가 길에서 소꿉장난을 하는데 모래로 이렇게 성을 쌓고 길을 트고 해서, 부처님이 지나가시니까 길을 떠억 비켜 드리면서 ‘부처님 이 길로 지나가시옵소서’

자기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다 소꿉장난하면서 길을 닦고 모다 해 가지고 그 깨끗이 만들어 놓은 길로 부처님을 가시게 했다 그말이여.


부처님이 그 아이를 보시고 ‘너는 백년 뒤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겠구나’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는데,

백년 뒤에 아쇼카 왕, 아육왕(阿育王)이라고도 하고, 그 아육왕으로 탄생을 해 가지고 그 어려서는 매우 포악(暴惡)하고 그래서 그 부왕마마로부터서 미움을 샀었는데.


저 변방에 난리가 일어나서 그래서 그걸 갖다가 막으라고 아무 무기도 주지 아니하고, 그래가지고 거기를 보냈는데.

‘가서 싸우다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겠다. 저놈을 살려두면은 자기가 죽은 뒤라도 형제간에 반드시 저놈이 그 형을 죽이던지 동생을 죽이던지 해 가지고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해 가지고, 부왕(父王)의 마음에는 가서 싸우다가 죽기를 은근히 바래고서 그걸 보냈는데, 어떻게 용맹스럽던지 가 가지고 다 때려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난리를 평정을 했어.


그래가지고 거기 있는데 얼마 있다가 그 부왕이 승하(昇遐)를 했어. 해 가지고 그 큰아들이, 태자가 왕이 되어가지고 있는데.

부왕이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몰고 와 가지고 그 형, 태자로서 왕이 된 형을 죽이고, 그 동복형제(同腹兄弟) · 이복형제(異腹兄弟)를 백 명 가량을 다 죽이고, 모다 그 반대하는 신하들 충신들도 다 때려죽이고, 그래가지고는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마치 그 우리나라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그렇게 충신을 많이 죽이고 조카를 모다 그렇게 한 역사가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리고 거기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는 대참회(大懺悔)를 하고서 아주 정치를 꼭 불법(佛法)에 의해서,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해 가지고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래가지고 인도를 통합을 한 전륜성왕이 되었습니다.


그 아쇼카왕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네팔(Nepal) 나라에 큰 수십 미터 되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다가 돌로 사자를 만들어서 딱 안치를 하고, 그래가지고 부처님 탄생하신 기념비를 거기다 세우고, ‘부처님이 탄생하신 그 지방의 모든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줘라’한 그런 탑을 세운 것이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육왕(阿育王)에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은 불법(佛法)을 믿지를 아니해. 믿지를 아니하고.


하루는 그 동생이랑 모다 저 산으로 놀이를 나갔는데, 그 노루 · 염소 모다 그런 것들이 교미(交尾)를 한 것을 보고서 그 형인 아육왕한테,

‘출가한 스님네들은 어떻게 독신 생활을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저런 짐승도 저렇게 모다 교미를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모다 남녀관계, 결혼을 해 가지고 자식을 낳고 모다 살고 한데, 출가한 스님네는 과연 어떻게 그렇게 청춘을 다 버리고 저렇게 참 일생을 독신 생활을 할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발심을 해서 참으로 불법을 믿게 할 수가 있을까?’하고 연구한 끝에,

‘내가 7일 동안을 너에게 왕위(王位)를 내가 너한테 밀어주니, 7일 동안을 니 하고 싶은 대로 임금 노릇을 해라.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궁녀들도 니가 데리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어떠한 권리도 니 마음대로 부려라. 단, 7일 후에는 내가 너를 왕위를 빼앗고 그 다음에 너는 사형(死刑)에 처하겠다’


그래서 왕관과 옥새(玉璽)를 다 건너 주고 왕관을 딱 씌워서 그래가지고 모든 신하들에게도 그 새 왕한테 다 충성을 다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그랬는데.


하루 동안을 맘대로 먹고, 그 상감마마가 누리는 모든 복(福) 수용을 하는데 하루가 지나면, ‘이제 하루가 지냈습니다. 앞으로 엿새가 남았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보고를 신하를 시켜서 합니다.

또 하루를 그렇게 또 술과 계집과 모든 영화(榮華)를 호강을 하고 하루를 지냈는데, ‘이틀이 지나고 앞으로 닷새가 남았습니다’ 아! 매일 그렇게 큰소리로 인자 조회 때 외치는데,


그 말 한마디가 그냥 뼈골에 사무쳐 가지고 오싹오싹 전율이 일어나고, 도대체 저녁에 잠도 잘 안 오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중을 모르고, 그 아름다운 궁녀들이 옆에 와서 모다 시중을 들고 춤을 추고 모다 그래도 아무 재미가 없어.

내가 지금 임금 노릇은 하기는 하나 그런 권리도 자기한테는 재미가 없고, 영화도 소용이 없고, 7일 후에 죽을 일을 생각하니, 참 하루하루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 정말 아름다운 기집이 옆에 있어도 아무 감흥이 없고, 그래가지고 7일이 딱! 되었습니다.


아육왕이 ‘그래 어떻든고? 7일 동안 왕 노릇을 하니 재미가 어떻든고? 음식은 맛이 있었든가?’

‘별로 음식 맛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예쁜 궁녀들이 그렇게 시중을 들었으니 재미가 어떻든고?’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거 보게. 출가한 스님네들은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쓰고,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죽음과 싸워서 그 생사해탈(生死解脫) 할려고 한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을 하고 사는데, 무슨 거기에 색심(色心)이 동(動)하겠는가?’


‘예. 과연 알겠습니다. 출가한 스님네들이 청춘을 버리고, 명예와 권리를 버리고, 인생에 모든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그 도를 닦아가는 스님네 그 거룩한 뜻을 제가 잘 알았습니다. 제가 출가하도록 허락을 해 주십시오’

‘좋다’


그래가지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어떻게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던 것입니다.(처음~19분58초)




(2/3)----------------


삼천년 동안,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삼천년 동안 오늘날까지도 부처님의 제자들이 인도에서 동남아 각국 그리고 중국으로 해서 우리나라, 일본,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면면히 이 불법이 전통해 내려가고,

지금으로부터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천육백 년 전에 우리나라에 불법이 들어와 가지고, 고구려·백제·신라·고려를 거쳐서 불법이 융성을 하다가 이조 오백 년 동안 불교를 억압을 하고 유교를 숭상을 했는데, 이조 오백 년 동안에 불법을 탄압한 그 광경은 말로써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시골에도 원님이 거처하는 데는 가까이 가지고 못하고 저 산중으로 쫓겨 들어가서, 사람이 사농공상(士農工商) 4계급이 있는데 승려는 그런 데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백정(白丁)이나 백정보다도 더 대우를 못 받고 짐승 취급을 받고,

그러면서도 종이를 떠서 바친다, 뭐 나라에 성 쌓는 운력이 있으면 승려를 잡아다가 아주 그냥 노예처럼 아주 그냥 막 비참하게 참혹하게 그렇게 대우를 했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뼈에 사무치는 수모를 인욕(忍辱)을 하면서 더 신심을 발해 가지고 도를 닦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쳐들어와 가지고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이고, 선조대왕은 저 의주까지 파천(播遷)을 가고, 왕자는 저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붙잡혀 가지고 그런 참 말로써 형언할 수 없는 치가 떨리는 그러한 난리를 만나 가지고,

서산대사 · 사명대사 · 뇌묵대사 이러한 고승(高僧)들이 승병(僧兵)을 이끌고 그 왜놈들을 무찔르고, 그때 그 사명대사 · 뇌묵대사 · 서산대사 밑에 비구니들이 모다 미리서부터 병법을 익히고 그래 가지고는 그 군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 장수에 그 참모 및 연락 여러 가지, 그 새처럼 날으고 범처럼 뛰면서 온갖 무술을 다 익혀 놨기 때문에 횡행자재(橫行自在)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때는 유교에서 불교를 탄압할 때라 그 승병들이 세운 공은 다 덮어버리고, 전부 자기들이 한 것처럼 전부 보고를 올리고, 그래서 역사상에 그렇게 백분의 일도 나타나지 않고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스님네들이 무슨 그런 공을 바래고 싸웠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왜놈을 갖다가 무찌르고, 심지어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그 포로로 잡혀간 사람을 다 받아 오고, 일본에 가서 사명대사는 생불(生佛)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가지고 일본에 가면 지금도 사명대사를 모신 사당이 있고 그렇다고 그럽니다마는, 일본에서 돌아와 가지고 영의정을 제수(除授)를 받았습니다. 영의정이면 지금 국무총리나 마찬가지죠.


그 승려들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종보다도 못하게 하고, 노예 취급을 했는데 얼마나 공을 세우고 얼마나 그 법력과 도력과 용맹이 그 공로가 컸으면, 승려를 유교의 그 선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을 제수를 했겠습니까. 딱 사흘 동안, 사흘만에 사표를 냈는데.

서산대사도 그 공로로 참 융숭한, 저 선조대왕은 참 존경을 했는데, ‘그 서산대사를 묘향산으로 모셔라’ 그러니까, 처음에는 가마에다 태우고 얼마 정도 가다가는 가마에서 내리게 하고 맨발을 벗겨서 맨발로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지금 기록에는 남아 있는가 어쩐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한 수모를 받으면서도 도 닦는 그 한마음은 변함이 없이 수행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불법이 전통해 내려오고, 사찰이 전해 내려오고, 최상승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전해 내려와서 전국 선원에서 비구 · 비구니가 참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도를 닦아 오고 있고, 왜놈들이 36년 동안 식민지로 탄압을 했지마는 승려들은 그래도 계속해서 그 불법 믿는 마음이 변함이 없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정신 못차린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모다 타락을 해서 첩을 얻고, 참 사찰인지 속가인지 모르게 그렇게 사는 그런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말세(末世)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뜻있는 사람은 그런 속에서도 변함이 없이 내려왔거든.


해방이 되어가지고 이제는 불교 신자가 천육백만, 우리나라 인구에 거의 반에 가까울 정도에 신도가 있는데, 나날이 기독교가 번창을 해 가지고 세 집 건너 교회가 서고, 외국사람들이 와서 서울에 들어오면은 '저 쭝긋쭝긋 서있는 것이 무슨 안테나냐?'고. 저것이 교회라고 그러니까 모다 깜짝깜짝을.


예수교가 서양에서 먼저 다 했는데, 서양에도 일찍이 그러한 때가 없었는데, 우리나라는 천육백 년의 불교 역사가 있고, 유교를 숭상해 왔고 한데, 뭐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늦바람 나면 참을 수가 없다더니 세상에 기독교가 이렇게 한 것은 도대체 우리나라 민족이 어째서 이렇게 그 전통을 모르고, 참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교도 좋은 인간이 지켜야 할 삼강오륜의 성현의 가르침이고, 더군다나 '불교는 이 세계의 종교뿐만이 아니라, 우주 종교다' 아인슈타인 같은 그런 대철학자가, 대종교인이, 대과학자가 그 불교를 갖다가 공부를 하고서 그 불교를 평하기를 이것은 세계의 종교라고, 세계종교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우주종교라. 이렇게까지 평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한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천육백 년의 역사,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려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그 전통이 이어 나오고, 우리나라에 문화재 99%가 불교 문화재고, 우리나라 민족에 피 속에는 그 불법의 피가 넘쳐흐르고 있어.

그러한 민족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전통을 버리고서 그런 외래 종교에 빠져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가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창피하고 기가 막혀서 한 말씀하는 것인데, 종교는 자유니까 무슨 종교를 믿거나 상관은 없습니다마는.

자기의 가정에서도 자기 가문 혈통을 서양 사람들도 다 존중히 여긴다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어찌 우리나라 혈통을 무시하며, 특히 우리나라는 유독 그 족보가 발달이 되어서 세계의 모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데.

그러한 민족이 어떻게 그렇게 단시일 내에 그렇게 정신을 못 채리고, 교황이 오니까 여의도 광장에 그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안 믿는 사람들까지 나가서 모다 법석을 떨고, 이래 가지고서는 역사가 있는 민족, 문화가 있는 민족의 긍지를 가졌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스님네는 그 무서운 오백 년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내 몸 안에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이 불법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그런 뜨거운 신심으로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켜온 것입니다.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선방에서 그렇게 모다 알뜰히 정진을 하고 이렇게 오셨습니다.

'말세, 말세'하지만 이렇게 해마다 이렇게 참선 수행하는 스님네가 불어나고, 또 그 위법망구적으로 용맹정진 하는 수효가 나날이 불어나고 있고, 선방마다 모다 그렇다고 그럽니다.


세상은 나날이 이렇게 발달이 되어서 서양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가지고, 세상 사람들은 전통을 잊어버리고 서양 사람 본을 따고 모다 그러고 있는데,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佛弟子)들은 그러한 잘못된 풍조에 휩쓸려 넘어가지 아니하고, 불법에 귀의해서 부처님의 그 참된 정신을 나의 정신으로 해 가지고 이렇게 용맹정진을 한다면 반드시 불법은 여기로부터 중흥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혹자는 말세의 한 현상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촛불이 다 타고 마지막 꺼질라고 할 때는 굉장히 불꽃이 커지면서 환히 한동안 밝다가 꺼지듯이, 불법이 앞으로 차츰차츰 이렇게 말세를 맞이해서 쇠해 가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 이렇게 이 한국에 특히 다른 나라보다도 유독 이 한국에서 말세의 마지막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는 것을 어느 경전에도 그러한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어느 경전에 있는가는 내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여간 이렇게 선방이 도처에 자꾸 생기고, 참선하는 대중이 나날이 늘어가고, 용맹정진은 여기서 저기서 결사(結社)를 해 가지고 그 열심히 하는데, 비구 스님네 보다도 오히려 비구니 스님들이 그렇게 모다 애를 쓴다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혹자는 '말세 불법은 비구니가 책임을 지고 할 때다' 이렇게 한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구 스님네는 그렇게 수효가 그렇게 많이 불어나지를 않고 별로 수효가 많지 않은데, 중 되러 온 사람은 여승이여.

젊은 사람도 오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오고, 30세 넘어서도 오고, 어려서도 오고 해 가지고 절, 절이 비구니 스님네 수효가 늘어나고.


했다 하면은 강원에도 가지 않고 선방으로 아주 직행을 한 사람도 많고, 강원을 거쳐서 온 사람도 많고, 대단히 참 비구승이 잘 못하면 비구니라도 잘해야 하고, 나중에는 비구니가 잘 못하면은 처사 · 보살이라도 해야 하고, 누가 하던지 해 가지고 이 불법은 끊이지 않고 전통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20분~36분26초)




(3/3)----------------


부처님 제자임에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불법에 귀의해서 여법(如法)하게 도를 닦으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깨달으면은 바로 불법은 그 사람을 통해서 전통(傳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우리 모두는 낱낱이 다 불법을 자기를 통해서 전통해 나갈 그러한 사명을 띠고 났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전통의 사명(使命)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등한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비를 볼 겨를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일분일초라도 잡담하고 그럭저럭 지낼 수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저 보리밥이 되었건, 쌀밥이 되었건, 잡곡밥이 되었건, 죽이 되았건 우리가 굶어 죽지 않게 한 숟갈을 먹으면 그저 화두를 들고, 벼락이 떨어지거나, 천둥이 치거나, 밤이 되거나, 해가 뜨거나 지거나, 옆에서 뭐 떠들거나 말거나, 그까짓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만 명심한다면 눈을 감으나 뜨나,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방선(放禪)을 하거나, 산철이거나 결제거나 전혀 그런 것이 상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래 결제(結制)라 하는 것은 인도 지방에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 숲속에서 정진할 수가 없고 행각(行脚)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 비를 피하기 위해서 결제를 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결제 중이라고 해서 공부를 더하고, 산철이라고 해서 비가 안 오는 때라고 해서 공부를 덜하고 그런 것이 아녀요.


겨울에는 워낙 추워서 행각을 못하고, 여름에는 또 너무 더워서 행각을 못하니까, 우리나라는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안거 기간을 해서 결제를 하고, 요새는 또 산철 결제라 해서 또 중간에 2달씩을 이렇게 하고 대단히 좋은 현상입니다마는,

그런 것도 우리가 공부하는데 도움은 되겠으나, 실지로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읍니까.


대중 따라서 결제하게 되면 하고, 대중 따라서 해제 하기는 하겠지만, 각자 개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결제고, 언제나 입선(入禪)이여.

누구를 위해서 정진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 보라고 한 것도 아니여. ‘아! 저이는 참 정진 잘한다’ 그따위 소리 들을라고 우리가 정진하겠습니까?


전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눈에 보일 수가 없고, 여러 대중 속에 살면서도 여러 사람이 보이지를 않어. 언제나 자기와 죽음과의 맞대결이여.

사형언도(死刑言渡) 받은, 금방 곧 몇 분 후에 사형을 집행받을 죄수와 같은 그런 마음인데, 무슨 놈의 결제 · 해제가 거기 문제가 되며, 뭐 수용이 좋고 나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다른 사람 정진을 잘하고 못 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무슨 분위기가 조용하고 시끄러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어. 곧 앞으로 몇 분 후에 사형 받을 사람이.


해제(解制)를 맞이해서 앞으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는 불일성지(不日成之)입니다.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는 그 사람에게 멀지 않는 시일에 그 사람은 약속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 생각,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속에도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태어난 것이고 생(生)이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그것이 죽음이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수없는 생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속에도 미세하게 따지자면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이면은 하루 동안에는 천문학적 숫자의 생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전기가 딱! 켜면은 계속해서 환히 밝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계속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한 것이 워낙 빨리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와 마찬가진 것입니다.


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그 기멸심(起滅心), 그 생사심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잡드리해 가는 것이 우리의 정진입니다.

잊어버렸다하면 또 챙기고, 잊어버렸다하면 또 챙기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사형언도를 받은 곧 몇 분 후에면 죽을 그 죄수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한 생각 골똘하므로 인해서 몇 분 후에 사형받을 것도 하나도 두려울 생각이 없어. 목을 쳐죽이거나, 목매를 달아서 죽이거나, 총을 쏴서 죽이거나 전혀 그런 것에 두려운 생각도 없고, 아무 관심이 없어.


다못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되어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말이여.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면은 거기에는 망상(妄想)도 끼어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망상도 끼어들지를 못할 때에 그것을 '적(寂)'이라 그러는데. '적적(寂寂)하다, 적멸(寂滅)이라' '적적(寂寂)하다'고 그 ‘고요 적(寂)’자를 쓰는데.


그 적적하면 너무나 적적하고 고요하고 깨끗해서 그 경계(境界)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그 경계를 맛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적적하고 깨끗하고 그 경지에서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하다 보니까,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자칫하면 화두를 망각하기가 쉬우니라.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를 들면 오히려 화두를 듦으로 해서 그 고요하고 성성(惺惺)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도 들고 싶은 생각이 없는 수가 있어.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 거여.


적적하고 성성하고 맑고 고요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있어야 돼.


그때는 ‘어떻게 화두를 드냐?’하면—‘이뭐꼬!’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막 어거지로 힘을 써 가지고 막 그렇게 드는 것이 아니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있으면 그 의단만을 떠억 관(觀)할 뿐이지, 자꾸 뭐 ‘이뭣고! 이뭣고!’해 가지고는 그렇게 우악스럽게 그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어.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그 적적하고 성성한 가운데 의단이 성성하게, 그 고요한 호수에 달이, 저기 달이 비추듯이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의단이 현전(現前)해야 하거든.


그렇게 되면 옆에서 떠들어도 상관이 없고, 밥을 먹어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눠도 그 화두가 고대로 있고, 어딜 걸어가도 고대로 있고, 울력을 해도 고대로 있고.

뭣헌 이는 옆에서 떠들면 화두가 없어져 버린다는데 그 아직 덜된 거여, 그것은.


옆에서 떠들어도 상관이 없고, 잡담을 해도 소용없고, 자기는 자기거든. 그렇게 되도록—그건 애를 쓰는 데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럭저럭 지내는 데에는 생전 해봤자 그렇게는 안되는 것이여.

정말 전체적으로 결제(結制)를 하지마는, 전체적으로 결제하는 속에서 다시 또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자기의 결제가 새로 있어야 되거든.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데...(녹음 끊김)


그런 생각도 못쓰는 거여.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누가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그 성성적적한 가운데에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만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귀로 들리는 어떠한 소리나, 눈에 들어오는 어떠한 경계나, 스스로 무슨 발을 잘못 디디거나, 또는 자다가 벼개에서 뚝 떨어지거나, 어떠한 그러한 특수한 그런 사건을 만나면 통 밑구녁이 빠지듯이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때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맡어 가지고, 그것이 잘못 되았다 하면 다시 새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경계면 공안에 맥힘이 없어야 하고.

천칠백 공안에 선지식과 탁마(琢磨)를 해서 그래서 맥힘이 없으면 다시,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산중에 들어가서 정말 오후(悟後)에 보림(保任)을 철저하게, 몇백 배 철저하게 정진을 해서 다생 습기(多生習氣)를 다 소멸을 하고 그때에 가서 경(經)도 사교(四敎) · 대교(大敎)를 다 보고 심지어 유도백가제서(儒道百家諸書)까지 다 간과(看過)를 한 다음에, 그때 비로소 중생 교화를 하러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수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누구라도 정말 ‘죽을 사(死)’자를 써 가지고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여법(如法)히 수행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 있는 자격과 가능성을 우리가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성현(聖賢)이나 하지. 특수한 상근대지(上根大智)나 하지, 원’ 다른 사람한테 미루고 자기는 이미 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다. '나는 영 도(道)는 금생에 못 닦을 사람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한 것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바라이(四波羅夷) 죄를 범하면 불통참회(不通懺悔)라고 그러는데, ‘나는 틀렸어’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통참회커녕은 이건 스스로 자기의 보리종자(菩提種子)를 끊어버리는 것이라, 이 죄(罪)야말로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부모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 · 무식(有·無識)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우리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에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주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靈駕)들도 다 거량(擧揚)을 통해서 이 법석에 초청이 되어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경주 김씨 동운 영가도 오늘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과 산승(山僧)의 설을 잘 들었을 줄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또는 무량겁 동안 지은 모든 죄업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았을 것이며, 얼키고설킨 다생에 원한이라든지 모든 업연(業緣)도 봄눈 녹듯이 다 녹아서, 그 동안에 49재(四十九齋)를 지내서 다 잘 천도(薦度)가 되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산승과 인연이 있어서 이 법석에 참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미진한 데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어서 바삐 새 몸을 받아 가지고, 우리와 같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도를 닦아서 확철대오를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여  장림죽취연(長林竹翠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헌데  청학반승면(靑鶴伴僧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하고  장림취죽연(長林竹翠煙)이로구나. 

저 깊은 선원에는 뒤안에는 붉은 꽃이 비오듯 휘날리고, 긴 숲속에는 푸른 대나무 사이에 안개가 끼었구나.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하고  청학(靑鶴)이 반승면(伴僧眠)이다. 

흰구름은 저 재 너머, 재 위에 엉겨서 잠들고 있는데, 푸른 학은 졸고 있는 스님과 함께 도반(道伴)이 되어 있구나.


스님네가 저 선원(禪院)에서 정진을 하면서 떠억 삼매(三昧)에 들어갔고 있는데, 학(鶴)도 그 위에 뱅뱅 돌다가 스님 가까이 와서 그놈도 한 다리를 들고 한 다리로 서서 고개를 짓 속에다가 처박고 그놈도 졸고 있더라 그말이여. 

이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오후보림(悟後保任)을 하고 있는 어느 도인(道人)의 경계를 읊은 시(詩)입니다. 이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입니다.


이것으로써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36분28초~56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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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춘조매화발~’ ; 『부휴당대사집』 (부휴 선수 | 이상현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p63 ‘일 선화가 한마디 청하기에(一禪和求語)’ 게송 참고.

*부휴(浮休) ; (1543-1615) 조선시대의 스님. 전북 남원 출신. 법명은 선수(善修). 호는 부휴(浮休). 20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하고, 후에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덕유산,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 머물고,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입적함. 저서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절렬(節烈)하다 ; 절의(節義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굳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분심(憤心, 奮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포한(抱恨) ; 한(恨)을 품음. 또는 그런 한.

*생사재호흡지간(生死在呼吸之間) ;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생사라 하는 것은 멀리 잡을 것이 아니라 하루도 멀고, 한끼도 멀고, 한 호흡 사이에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무상하고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생사인 것이다.

*호흡지간(呼吸之間) ; 한 번 내쉬고[呼] 들이쉬고[吸] 할 사이[間]라는 뜻으로, 아주 짧은 시간을 이르는 말.

[참고]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제38장’

佛問沙門 人命在幾間 對曰數曰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飯食間 佛言 子未知道 復問一沙門 人命在幾間 對曰呼吸間 佛言 善哉子知道矣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전륜성왕(轉輪聖王) ; 산스크리트어 cakravarti-rāja 인도 신화에서, 칠보(七寶)를 갖추고 정법(正法)으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있는 대륙을 다스리는 왕.

32상(相:신체의 특징)·7보(寶)를 갖추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지배한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윤보(輪寶)를 굴려 모든 장애를 물리친다고 함. 윤보에는 금·은·동·철의 네 가지가 있는데, 금륜보(金輪寶)를 지닌 금륜왕(金輪王)은 네 대륙을 다스리고, 은륜보(銀輪寶)를 지닌 은륜왕(銀輪王)은 세 대륙을, 동륜보(銅輪寶)를 지닌 동륜왕(銅輪王)은 두 대륙을, 철륜보(鐵輪寶)를 지닌 철륜왕(鐵輪王)은 한 대륙을 다스린다고 함.

전통적으로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阿育王](BC 3세기)을 세속의 전륜성왕이라고도 말한다.

*수기(授記) ; 부처님이 불법에 귀의한 중생에게 어느 시기, 어느 국토에서 어떤 이름의 부처로 태어날 것이며, 그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이라는 것 등을 낱낱이 제시하면서, 미래세의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또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기별(記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아육왕(阿育王) ; 산스크리트어 aśoka 팔리어 asoka의 음사. 무우(無憂)라고 번역.

찬드라굽타(candragupta)가 마가다국(magadha國) 난다(nanda)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재위 기원전 270년경-230년경.


즉위 8년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 - 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 - 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비폭력과 정의에 기초한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였다.

아육왕의 주선으로 도읍지인 화씨성(華氏城)의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천여 명의 비구들이 제3차 결집(結集)을 행하여,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정리함.


불교에 귀의하여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절들을 인도 전역에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함. 특히,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밋타(saṅghamittā)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전함. 왕은 자신의 뜻과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왕이 죽은 후, 마우리야 왕조는 서서히 분열되어 기원전 180년경에 멸망함.

*승하(昇遐 오를 승/멀 하)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

*수양 대군(首陽大君) ;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의 왕자 시절의 군호(君號).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註解) 懺悔者는  懺其前愆이요  悔其後過라.  慚愧者는  慚責於內하고  愧發於外라.  然이나 心本空寂이라  罪業이  無寄니라

참회(懺悔)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뒷날에는 다시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라, 죄업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 탄생하신 기념비를 거기다 세우고' ; 룸비니(Lumbinī)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탄생한 곳으로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지방, 바이라와(Bhairawa)의 서방에 있다. 석가족(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19세게 말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앨로이스 휘러(Alois Anton Führer)가 오늘날의 네팔 테라이 지역에 있는 옛 사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에 버려져 있는 아쇼카왕 석주(石柱)를 발견했다.


석주에 새겨진 내용은,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Buddha)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石柱)을 세우게 했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8분의 1만 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 아쇼카왕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약 2백년 후,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기원전 269년 경에 즉위하여 36년간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치하였는데,

즉위 8년(B.C. 262)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그가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는 이정표가 된다.


[아쇼카의 '다르마(法)' 개념은 직접적인 불교의 특징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핵심은 윤리적인 바른 삶 ①바른 인간관계 : 웃어른 · 이웃에 대한 존경, 수행자에 관대함, 노예나 종의 바른 처우, 모든 교단의 화합과 비난 금지. ②계행과 바른 삶 : 살생금지, 동물 희생제 금지, 적게 소비. ③다르마의 수행과 백성의 복지 :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7가지의 경전을 듣고 명상하도록 함, 보시와 복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결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이익과 행복을 얻기 바라는 부처님의 ‘다르마(法)’를 근본으로 한다.]


이 다르마의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쇼카 왕이 즉위 20년이 되던 해, B.C. 250년 무렵에 룸비니를 방문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룸비니 석주(石柱)이다.

*교미(交尾) ;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생식을 위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음.

*왕위(王位) ; 임금의 자리.

*옥새(玉璽 옥 옥/도장 새) ; 임금의 도장.

*영화(榮華) ;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빛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색심(色心) ; 색욕(色慾 성적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욕구)이 일어나는 마음.

*동(動)하다 ; (사람이나 마음, 욕구 따위가)강하게 일어나다.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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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이라 번역. 불어서 끈 상태라는 뜻.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인욕(忍辱 참을 인/욕되다·수치스럽다 욕) : [범] Kṣānti  욕(辱)되는—부끄럽고 치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것을 견디어 참는 것이다。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하나.

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그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받으며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다. 참음으로써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여 자기의 본래면목을 밝혀 해탈에 이른다.


역경(逆境)뿐만 아니라, 중생이 만나는 경계에는 순경(順境)이 있는데, 순경에 대해서도 삼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순경계 · 역경계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 팔풍(八風)인데, 팔풍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여 중생의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므로 오직 참음으로써 이겨내야 한다.

*파천(播遷 이동함 파/천도·옮길 천) ; 예전에,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제수(除授 벼슬을 주다 제/임명할 수) ; 예전에,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이르던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 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결사(結社) ;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는 관심에 따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결합한 집단.

불교의 경우 깨달음을 얻기까지 정진할 것을 위해 또는 불교 내부의 잘못을 혁신하려 할 때 결사(結社)를 함.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의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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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방선(放禪) ; 좌선을 하거나 불경을 읽는 시간이 다 되어 공부하던 것을 쉬는 일. 몸을 쉬는 가운데서도 마음은 항상 본참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해제(解制 풀 해/만들·법도 제) ; ①(안거)를 마침. ②재계(齋戒)하던 것을 그만두고 풂.

*행각(行脚) ; 스님이 일정한 거처를 가지지 않고, 스승의 밑을 떠나 참선의 수행을 위해 훌륭한 선지식이나 좋은 벗을 구해 마치 떠도는 구름이나 흐르는 물처럼 여러곳을 편력하는 것. 운수(雲水)와 같은 의미.

*분상(分上 분수 분/윗 상) ;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입장.

[참고] 분(分) : 분수(分數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에 알맞은 한도).

상(上) : ①‘그것과 관계된 입장’ 또는 ‘그것에 따름’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②‘추상적인 공간에서의 한 위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 정진하는 분상에는 ---> 정진하는 수행자에 알맞은 입장에 따르자면.

*불일성지(不日成之) ; 어떤 일을 며칠 안 걸려서 이룸.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속에도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태어난 것이고 생(生)이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그것이 죽음이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수없는 생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p103-104.

念起念滅(염기염멸)을 謂之生死(위지생사)니 當生死之際(당생사지제)하야 須盡力提起話頭(수진력제기화두)호리니 話頭(화두)가 純一(순일)하면 起滅(기멸)이 卽盡(즉진)하리라

起滅卽盡處(기멸즉진처)를 謂之寂(위지적)이라하니 寂中(적중)에 無話頭(무화두)하면 謂之無記(위지무기)요 寂中(적중)에 不昧話頭(불매화두)하면 謂之靈(위지령)이라하나니 卽此空寂(즉차공적)과 靈知(영지)가 無壞無雜(무괴무잡)하야 如是用功(여시용공)하면 不日成之(불일성지)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석 삼/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기멸(起滅) ; 생(生)하고 멸(滅)하는 것. 생겨남과 없어짐. 즉 인연이 화합하면 생하고, 인연이 이산(離散)하면 멸한다는 뜻.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관(觀)한다 ;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한다.

(2분)

[참고] 송담스님(No.715)—2007년(정해년) 동안거결제 법어(07.11.24)

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없이 지켜나감을 이르는 말.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사교(四敎) ;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스님들이 불경이나 그에 대한 논설 따위를 강론하고 학습하는 곳인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중급 과정의 네 과목. 곧 《능엄경(楞嚴經)》, 《기신론(起信論)》,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을 이른다.

*대교과(大敎科) ;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수학 과정 중 하나로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에 이어 『화엄경(華嚴經)』 · 『전등록(傳燈錄)』 ·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을 배운다.

*유도백가제서(儒道百家諸書) ; 유교와 도교[儒道], 여러 학자들이나 작가[百家]들의 모든 책[諸書].

*간과(看過 볼 간/지날 과) ; 어떤 문제나 현상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김.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자포자기(自暴自棄) ; 절망 상태에 빠져 스스로 자신을 내버리고 돌보지 않음.

*사바라이(四波羅夷) ; 사중금계(四重禁戒), 사중금(四重禁), 사중(四重).

(1)승단에서 추방되어 비구의 자격이 상실되는 네 가지 가장 무거운 죄.

①사람을 죽임(살생 殺生). ②도둑질함(투도 偸盜). ③음란한 짓을 함(사음 邪淫). ④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거짓말함(망어 妄語).

(2)밀교에서 가장 무거운 죄.

①바른 가르침을 버림. ②보리심(菩提心)을 버림. ③가르침을 베푸는 데 인색함. ④중생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함.

*보리(菩提) ; 불교 최고의 이상(理想)인 불타 정각(佛陀正覺)의 지혜. 올바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산스크리트 어 ‘Bodhi’의 한자 음역어이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일. 법요식의 순서로서 설법하기 전에, 법회를 하는 법당에 계신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멀고 가까운 데에 있는 모든 영혼도 이 법회를 하는 법당에 왕림을 해서 같이 법문을 들으실 수 있도록 청혼(請魂)을 하는 것.

②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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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업연(業緣) ; 업(業)의 과보(果報)를 초래하는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게송) ‘심원화홍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 | 朴敬勛 역 | 동국대학교 역경원) p59 ‘불일암(佛日庵)’ 게송 참고.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삼매(三昧) ; 정(定). [범] samadhi 삼매(三昧)로 음사(音寫).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 ; ‘깃’의 사투리. 깃(새의 몸을 덮고 있는 털. 새의 날개).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정월 23일에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입적함. 세수 85세, 선납(禪臘) 65.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이렇게 써놓고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저서 : 삼가귀감(三家龜鑑) · 선가귀감(禪家龜鑑) · 선교석(禪敎釋) · 청허집(淸虛集) · 운수단(雲水壇).




[법문 내용]


(게송)춘조매화발~ / 생사(生死)는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 아육왕(阿育王)과 그 동생의 일화. 7일 임금 노릇.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 우리는 사형언도 받은 몸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자포자기는 가장 큰 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정진해야 / (게송)심원화홍우~.



인생은 참으로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하루 일을 알 수가 없고, 하룻밤 일을 알 수가 없어.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땅히 정신차려야 할 것은 그 무상함에 철저한 포구(怖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그리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잡드리해 나간다면 오늘 눈을 감게 되고, 한 시간 후에 눈을 감게 된다 한들 무슨 포한(抱恨)이 있겠습니까.


출가한 스님네들은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쓰고,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죽음과 싸워서 그 생사해탈(生死解脫) 할려고 한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을 하고 사는데, 무슨 거기에 색심(色心)이 동(動)하겠는가.


비구승이 잘 못하면 비구니라도 잘해야 하고, 나중에는 비구니가 잘 못하면은 처사 · 보살이라도 해야 하고, 누가 하던지 해 가지고 이 불법은 끊이지 않고 전통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형언도(死刑言渡) 받은, 금방 곧 몇 분 후에 사형을 집행받을 죄수와 같은 그런 마음인데, 무슨 놈의 결제 · 해제가 거기 문제가 되며, 뭐 수용이 좋고 나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다른 사람 정진을 잘하고 못 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무슨 분위기가 조용하고 시끄러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도(道)는 금생에 못 닦을 사람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한 것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바라이(四波羅夷) 죄를 범하면 불통참회(不通懺悔)라고 그러는데, ‘나는 틀렸어’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통참회커녕은 이건 스스로 자기의 보리종자(菩提種子)를 끊어버리는 것이라, 이 죄(罪)야말로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부모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 · 무식(有·無識)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