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그대는 어느 산으로부터서 왔는가?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는 저 황악산으로부터서 왔느니라.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하니, 서로 만나서 한번 웃으니, 추색(秋色)이 입정괴(入庭槐)로구나. 가을빛이 뜰 앞에 괴목 나무에 왔구나. 괴목 나무에 들었구나.
해제를 하고 제방(諸方) 선원에서 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해서, '어디에서 지난 여름을 지냈는가?' '나는 아무데서 여름을 지냈다'
'정진은 지난 여름 동안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우리 선방에서는 이러이러히 지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지만 피차가 서로 생각 생각이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고 속으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서, 그리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인사를 나누는데, 구태여 입을 벌려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하니 물어보고 대답하고 할 것이 없어. 피차 생긋이 웃는 그 미소 속에 한없이 깊은 마음에서 인사가 오고가더라 그 말이여. 그리고 도량을 둘러보니 괴목 나무에 가을 소식이 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러한 게송입니다.
갑자년 하안거를 마치고 오늘 해제 법요일을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서 지내는 대중과 또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서 몇몇 도반(道伴)과 그 반야선원에는 겨울에는 대중스님네를 모아서 정진을 하고, 여름에는 신도 보살님네들이 십여 명 모여서 금년 여름에 지냈다고 그럽니다. 그 대중도 모다 이 자리에 참석을 했고, 또 제방에 각 선원에서 정진을 한 비구니 선객 스님들도 거기서 해제를 마치고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해제를 하고, 각기 자기 선원에서 해제를 하고 도반들이 팔도에서 이렇게 모이니, 그 얼굴 얼굴에 신심과 환희심과 그리고 '기어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마치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러한 의연한 결심이 그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역력하고, 생긋이 웃는 미소 속에는 지혜와 평화와 자비가 넘쳐흐르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너무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우리 도반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불법(佛法)은 결단코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온 세계가 싸움이 일어나 불바다가 되고, 설사 종단에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우리의 도반들이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는 한에 있어서는, 불법은 결정코 끊어지지를 아니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처님의 등불이 훨훨 타올라서 온 세계를 밝게 비추고 말 것입니다.
방금 전강 대선사(田岡大禪師)에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出家)한 우리 도반들,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렸거니 무슨 애착이 있으며,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걸거칠 것이 있겠습니까. 앉으나 서나, 눕거나 거닐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보냐. 밥이 질면 진 대로, 밥이 되면 된 대로, 찌개가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언제 밥이 되다 질다, 찌개가 짜다 싱겁다, 그러한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묵언(默言)을 일부러 하려고 해서 묵언을 하는 것이 아니여. 묵언패(默言牌)를 목에다가 써서 붙이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뭐 글씨를 써서 문답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정진을 하다 보니까 제절로 묵언이 되어버린다. 꼭 할말이 있으면 한마디하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고, 한마디 말 끝나 버리면 바로 묵언이여. 하루 종일 지내봤자 뭐 그리 할말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하루에 한마디하기도 하고 또는 한마디 안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마디 하기도 하고 세 마디 하기도 하나, 그 한마디 두 마디 한다고 해서 정진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여. 꼭 할말은 하되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되니까, 일부러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에 일념으로 해 나가기 때문에 제절로 그것이 묵언이여. 이것이 진짜, 선객(禪客)이 해야 할 묵언인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20대에 출가하자마자 느낀 바가 있어서 10년을 묵언을 했지마는, 나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할말을 하면서 그냥 고대로 묵언을 한 그러한 묵언을 하지 못하고, 할말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하고 완전히 벙어리처럼 묵언을 했는데, 묵언을 한 뒤에 가만히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지금도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그렇게 썩 훌륭한 묵언을 하지를 못했어. 진짜 훌륭한 묵언은 할말 있으면 한마디 탁! 하고, 딱! 끝나자마자 바로 묵언이여. 하루에 한마디 내지 반 마디 이런 정도, 그렇게 꼭 필요한 말이 없거든. 여기에 모인 대중들도 그러한 묵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흔히 '소승(小僧)도 묵언을 하고 싶습니다. 묵언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러한 말들을 가끔 와서 문의를 하는 선객들을 만났는데, 나는 그러한 형식적인 벙어리 흉내낸—속으로는 온갖 분별 다 하고 시비에 참견하면서 억지로 입만 딱 다물고 벙어리 흉내내는 그러한 묵언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진짜 묵언을 해라. 할말 한마디 두 마디는, 부득이해서 해야 할 한마디 두 마디는 하되 정말 화두에 일념,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어져 버리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져 버리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나아갈 일은—달마 스님!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지만,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부처님으로부터 28번째 법등(法燈)을 전수하신 달마 조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조사가 140세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이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시지 안 했다면, 우리는 계율이나 지키고 경전이나 연구하는 그러한 불법에 빠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그러한 묘(妙)한 문(門)이 있는 것을 모르고 말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달마 스님을 인해서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달마 스님의 법(法)은 선정, 선정(禪定)을 닦아서 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이 아닙니다. 물론 참선하는 데에 계율도 지켜야 하고, 선정도 닦아야 하고, 교리에도 밝으면 좋고, 불법에 한 법도 버릴 법은 없으나, 그 근원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을 해 가지고 그 중심을 바로잡아서 수행을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뜩이 근기(根機)는 약해서 자기 몸 하나도 추단해 나가기 어려운 그러한 처지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잔뜩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 보고 싶어 한다면, 까딱하면 근본은 잊어버리고 지엽(枝葉)에 걸려서 평생을 그르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수행인이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계율을 또 지켜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육바라밀을 닦어야 하고.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갖추어야 하고.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위한 계율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지키기 위한 육바라밀을 지키고, 팔만세행을 갖추기 위한 팔만세행을 갖추어서는 그것은 이 몸을 가지고 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 버리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단이 독로해서 화두가 순일한 사람이 어찌 살생을 할 마음을 내며, 어찌 도둑질할 마음을 내며, 어찌 간음을 할 생각을 낼 것이냐 그 말이여. 한 마음 단속해서 화두가 순일하게 나아가면 일체 행(行)이 바로 거기에 다 제절로 갖추어지는 거여. 이것이 바로 달마 스님께서 주창하신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하신 것입니다.(처음~21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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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설하신 오계(五戒)와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묘한 문이어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러 다 문이 열려져 있는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지만, 그 묘한 법을 잘못 이해하고 그 방편문(方便門)에 국집(局執)해서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마치 달 가르키는 손가락을 잘못 이해를 해 가지고, 그 손가락을 인해서 하늘에 있는 달을 봐야지, 달은 보지 아니하고 그 손가락만 국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 달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겨우 돌이 지내갈락말락한 어린아이에게 '저 하늘에 달을 보라' 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하늘에 달을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자꾸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팔만장경이,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경(經)에는 온갖 방편설이 있지만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 가지고, 바로 가리키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본자성(本自性)을 보지 않고서 방편에만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어리석고 가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1분8초~41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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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경전에 『논어(論語)』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사서(四書) 중에 하나인데, 그 논어의 첫마디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즉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별로 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한데, 깊은 뜻이 있지 아니하면 왜 논어에 첫마디에 그것이 있을까 보냐? 무슨 경전이든지 첫마디에 있는 법문이 그 경전에 최고에 깊은 진리를 표현했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무슨 글공부를 글을 배워 갖고 그것을 자꾸 읽어 쌓으면 기쁘지 아니하냐. 그러한 피상적인 뜻이 아니라, 도(道)를 얘기한 것입니다.
선지식으로부터—우리 불교, 이 선학(禪學) 이 종문(宗門) 중에다가 비유를 한다면,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아 공부를 하면 '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좋은 최상승법을 만났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런 좋은 법을 만났는가?' 밥 먹다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기쁘고, 중생들의 그 고해(苦海)에 빠져서 그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허덕이는 것을 보면은 불쌍하면서 가엾으면서, 내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참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서 오면—막걸리 친구나 뭐 동창생이 찾아오면 얼마나 기쁘냐?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내가 출가해 가지고 별로 훌륭하지를 못하고 도를 잘 못 닦고...(녹음 끊김)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君子)가 아니냐?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인이 아니냐 그 말이여. 자기가 조금 뭣 좀 한다고 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고 그것을 자랑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는 생각을 갖고 남을 헐뜯고 한다면은 이것을 어찌 참다운 수행인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 가운데에 하나에, 불자찬훼타(不自讚毁他)라고 하는 조항이 있는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고 하는 것은 보살이 지켜야 할 십중대계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을까 보냐 그 말이여. 세속에 선비도 조금 어지간한 사람은 그러한 법이 없거늘, 하물며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을 결별해 버리고 생사를 바쳐서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수행인이고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남이 나를 비방하면 비방하는 대로 맽겨둬 버리고, 나를 헐고 뜯으면 헐고 뜯는 대로 그 사람한테 그 맡겨둬. 맘대로 하라고.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횃불을 들고 허공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 같애서 저만 피로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횃불을 들고, 아무리 훨훨 타는 큰 횃불을 가지고 이 하늘을 불사를라고 막 해봐라 그 말이여. 허공이 타는가? 그러다가 저만 피로해 가지고 지쳐 쓰러지거나 잘못하면 불똥이 튀겨서 지 몸이 타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내가 잘못해서 나의 단점을 누가 헐고 뜯는다면은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고칠 것이고, 나는 실지로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모략 중상을 한다면 그렇더라도 그 말을 '아 내가 그래도 전생에라도 뭣을 잘못한 점이 있거나, 나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마는 나에게 그런 잘못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감로수처럼 받아서 먹어서 잘 소화를 시켜버리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감로수를 마시고.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조금 뭐라고 한다고 파르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속으로 감정를 품고, 꽁하니 미운 생각을 속으로 품고, '언젠가 저년을 갖다가 내가 한바탕 봐주리라' 이러한 소인(小人)의 근성을 가져서 쓸 것인가 이 말이여.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도를 닦은 사람이 어찌 감로수처럼 받어 마셔야지, 그러한 말을 듣고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봐줄려고 하는 꽁한 복수심을 갖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냐.
아 그말을 감로수처럼 받아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나 안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면 어찌 나에 대해서 말을 할까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씀에도 나를 칭찬해 준 사람은 도적이요,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스승이요 은인이다 그랬어. 하물며 출가인 분상에 그만한 것을 이해를 못하고, 소화를 시키고 거기에서 살아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무덤을 판대서야 말로 할 수가 없거든.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대중방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만한 정신 자세가 되어 있지 아니해 가지고 선방에 나갈 자격이 있는가? 선방에 나간다면 강원의 학인도 그러지 못하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쯤은 되어야 해. 이쯤되어 가지고 나가 보라 그 말이여. 무슨 시비가 나한테 상관이 있어? 칭찬을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울뿐이여. 나를 헐고 뜯는다 하더라도 그 그렇게 속상할 것이 없어. 거기서 터억 너그러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 더욱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사람은 일장월취(日將月就)여. 나날이 발전하고 다달이 승화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스님네뿐만이 아니라 세속에 계시는 청신사 청신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자(佛子)라면 응당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이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신다면은 바로 그이가 보살(菩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보살, 여자 신도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 나가셔야 한다 그 말이여.
돌아오는 음력 9월 16일에는 용주사에서 보살계(菩薩戒)를 설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보살계를 설할 때에는 전국에 모다 율사 스님네를 초청을 해다가 여러 날에 걸쳐서 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에 대해서 그 계를 설하는데, 보통 다 그렇게 하는데, 이번에 용화사에서는 그러한 율사 스님을 모셔다가 보살계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전강대종사께서 평소에 설하신 십중대계, 십중대계를 설해 가지고 십중대계를 통해서 최상승계를 지키도록, 그래 가지고 최상승계를 설하는 그러한 보살계를 설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 그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살계를 받고 보살계첩(菩薩戒牒)도 많이 받아 놓으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전강 조실 스님의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한 십중대계를 받아서 인연을 맺어서 세세생생에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런 최상승법으로 인연을 맺어서 세세생생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날 그러한 기쁜 기약을 맺도록 하는 것도 또한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돌아오는 삼동결제(三冬結制)는 겨울에 금년에 윤10월이 들어 있어서 본시월이 지난 다음에 윤시월이 들었는데, 윤10월 17일에 이 세등선원에 겨울 결제가 시작이 됩니다. 인천 용화사는 윤10월 15일에 하고, 용주사는 윤10월 16일에 결제를 하고, 여기 세등선원은 윤10월 17일에 결제를 하게 됩니다. 물론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도 윤시월에 결제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 착오가 없으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년송군초수빈(今年送君楚水濱)이로구나. 거년(去年)에는 우리가 저 여산 땅 꼭대기에서 여산에서 이별을 했더니, 금년에는 그대를 초수 물가에서 보내게 되는구나.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데,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유유(悠悠)해서 서로 말이 없는데, 꽃은 지며 새는 우는데, 여름이 다 가는구나.
오늘 해제를 하고 우리 도반들이 동서남북으로 헤어져 가는데 서로 묵묵히 말이 없어. 말이 없지만 다시 다음 어느 회상(會上)에서 만나게 될는지, 어느 곳에서 서로 또 다시 만나게 될는지 만날 그때까지 서로 건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자 하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에 인사가 오고갈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넉 달, 몸조심하고 이 결제 동안에 그 정진한 그 정진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산철에도 보다 더 마음을 가다듬고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하고 말을 맺고자 합니다.(42분1초~61분30초) (끝)
[법문 내용]
(게송)군자하산지~ / 출가한 우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다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지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한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마니주인불식~.
『논어(論語)』,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 (게송)종타방임타비~ /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 마셔서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아라 / 불자(佛子)라면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라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〇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〇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〇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〇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 말은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
〇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감로수를 마시고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윤회기중문래단(輪廻幾重問來端), 삼계(三界)와 육도(六途)를 돌고 도는 그 윤회가 몇 번이나 되었으며 그 많은 백천만 겁(劫)의 윤회의 그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량겁을 두고 윤회를 해 왔는가?
지리여하가자만(至理如何可自瞞)고. 그 지극한 이치, 그 분명한 이치가 어떻게 스스로 그것을 속일 수가 있을 것인가? 윤회하는 그 원인, 그 까닭은 너무 분명해서 그것을 속일 수가 없다.
일념애원상적력(一念愛源常滴瀝)이여. 한 생각 애원(愛源)이, 애착 · 탐착하는 그 한 생각 근원으로부터서 육도 삼계를 윤회하는 그 한 생각 한 생각 그 방울 물이 모여 가지고 강이 되고 그것이 바다에 이르듯이, 그 한 생각 애착 · 탐착 때문에 만심욕해정미만(萬尋欲海政瀰漫)이다. 만 길이나 되는 그 깊고 넓은 바다, 들어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더라.
오늘 정묘년 7월 17일 이 세등선원 해제날, 삼하안거(三夏安居) 해제날을 맞이해서 이렇게 사부대중이 한 자리에서 법요식(法要式)을 갖게 되는데, 거량(擧揚)을 통해서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주법계에 한량없는 유주무주(有主無主) 고혼(孤魂)들이 이 자리에 청해서 이 법석(法席)에 참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몸을 받아날 때, 육도법계 어느 세계에 몸을 받아날 때에도 다 몸을 받아날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힘을 빌어서 몸을 받아나는데, 그 선망부모에 은혜를 갚는 도리는 어서 속히 도업(道業)을 성취해서 도(道)의 힘으로 제도(濟度)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애정으로, 애정의 마음으로 잘 받들어 모신다 해도 그것은 인간 세상에 조그마한 효도에 지내지 못하고, 정말 큰 효도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야만 우리의 한량없는 선망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금일 여러 대중들도 그러한 목적으로 해서 고향과 부모와 형제, 세간(世間)에 모든 오욕락(五慾樂)을 버리고서, 부귀와 영화를 다 버리고서 출가해 가지고 고행(苦行) 수도(修道)하는 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너무도 간곡한 그 법문에 의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난 여름 석 달 동안 정말 태풍과 폭우에 의해서 많은 생명이 죽어 갔고, 많은 재산이 손실이 되었고, 많은 논과 밭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또 노사 분규로 인해서 크고 작은 공장, 회사가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상황 속에서, 다시 말하면 온 세계가 불이 붙어서 큰 화재가 나가지고 훨훨 타고 있고, 여기서 쓰러지고 저기서 넘어지고, 이러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우리 불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럴수록에 더욱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얹어놓고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했습니다.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 나의 무상(無常)을 깨닫고, 다른 사람 고통 받는 것을 보고 내가 발심을 하고.
육도법계에 우리가 어느 곳에 안 간 곳이 없습니다. 다 가서 직접 그 고통을 받아 보고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무상한 줄 알고, 한마당 꿈에 지내지 못한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랐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께 귀의(歸依)해서 이렇게 도를 닦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도는 몸뚱이를 돌아보지 아니해. 생사(生死)와 더불어 항상 우리는 도반(道伴)을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뚱이도 생각 생각이 났다 죽었다, 우리의 생각도 일초 일초 났다 죽었다 하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형상이 찰나찰나 변하면서 났다 죽었다 하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도 났다 죽었다, 생사 변화해 가지 아니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변화로 인해서—변화가 바로 생사(生死)인데, 생사가 끊임없이 치열하게 반복되고 있는 그 상황을 보고 우리는 도심(道心)을 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오무기(五武器)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 왕자는 대단히 부처님을 믿는 신심이 돈독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무술을 좋아했습니다.
옛날에 임금이 될라면 몸도 건강하고 무술에 뛰어나야 자기의 왕위를 지키고 또 그 나라를 지키고, 온 백성의 우두머리가 되어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었기 때문에 왕이 될라면은 첫째, 뛰어난 무술을 가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스승을 찾아가 가지고 다섯 가지—그 활 쏘는 법, 칼 쓰는 법, 또 방(棒)을 가지고 자기를 지키고 공격하는 법, 또 창(槍)을 가지고 자기를 지키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법, 또 모(鉾)라고 하는 무기가 있는데, 그것도 창과 비슷한 것인데 그런 것을 쓰는 법, 이 다섯 가지 뛰어난 무술을 그 스승으로부터서 다 배와 가지고, 그래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 광야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광야에서 참 그 지모(脂毛)라고 하는 괴물을 만났습니다. 키는 야자수만큼 하늘에 뻗지르고, 눈은 큰 아주 쟁반같이 큰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고, 아금니는 독수리와 같이 날카로운 아주 나찰 귀신같은 그런 무서운 아금니를 가지고 있고, 온 몸에는 기름진 터럭이 아조 전신에 나 가지고 있는데.
그런 무서운 지모라고 하는 괴물이 터억~ 앞을 떡! 가로막으면서 "내가 지금 배가 고프니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이 오무기란 왕자는 그 다섯 가지 무술을 익혀서 여러 해에 걸쳐서 피나는 고행을 하면서 그 스승한테 배웠기 때문에, 맨 먼저 등어리에서 활을 뽑아 가지고는 그놈에다 갖다 가슴팍을 향해서 활을 쏘아댔습니다.
틀림없이 가슴 한복판에 꽂혀서 넘어질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 기름진 털이 두텁게 튼튼하게 입혀져 있던지, 그 털 속으로 화살이 딱! 붙어 가지고는—그냥 그 털을 뚫고 살 속으로 들어가기커녕은 털에 딱 붙어 가지고 아무 매카리가 없어.
그래서 칼을 뽑아 가지고 냅대 쳐들어갔는데 그 칼도 그 터럭에 탁! 닿으니까, 털을 뚫고 살을 들어가지를 못하고 털에 붙으니까 칼날이 무슨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들어붙듯이 들어붙어 갖고 아무 소용이 없어, 껍데기에.
그다음에 창을 가지고 찔러 들어가는데, 창도 그 지모(脂毛)의 털에 붙어버리니까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빼도 떨어지지도 않고 박아도 들어가지도 않고.
봉을 가지고 해도 안 되고, 모를 가지고 해도 안 되고. 다섯 가지 무기를 있는 힘을 다 썼지마는 그 지모의 몸뚱이에 붙어버리니까 아무 용맹이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이 몸뚱이를 가지고 그냥 육박전을 했다. 육탄(肉彈)으로 그냥 몸을 날려서 뛰어들어가니까, 아! 몸뚱이가 그 지모의 터럭에 딱! 붙어 가지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몸뚱이가 달랑달랑하니 들어붙어 갖고 떨어지지도 않고.
그래서 인자 머리를 가지고 힘을 다해서 가슴에다 갖다가 헤딩을 갖다가 했는데, 머리빡도 거기에 딱! 붙어 갖고 아무 소용이 없어. 몸뚱이 손발이 다 붙어 버리고, 머리까지 붙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어.
지모란 놈이 껄껄 웃으면서 "어디, 또 재주가 더 있으면 부려 봐라. 이제는 니가 내 입으로 들어갈 순서다"
그러니까 왕자가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먹고 싶으면 먹어 봐라. 니 눈에는 안 보이지마는 내게는 금강(金剛 : 智慧劍)이라고 하는 무기가 있어. 니가 나를 삼키면은 뱃속에 들어가서 그 금강이란 무기로 니 밥통 오장육부를 샅샅이 찢고 찌르고 해 가지고 결국은 내가 니 속에 들어가서 너를 갖다가 죽이고 뚫고 나올 것이다" (此是菩薩指身中之智慧劍而言 : 그 칼이란 보살의 몸안에 있는 지혜의 칼을 말한 것이라 한다)
아, 그러니까 지모란 귀신이 깜짝 놀랬어.
세상에 이런,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도 잡아먹고, 별별 짐승도 다 잡아먹어 봤지마는 세상에 이놈처럼 이렇게 해서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겁나는 기색이 없고 무서워하지를 않고, 마침내는 뱃속에 들어가서 금강이라는 무기로 자기를 죽인다 하니 '이거 참, 이거 잡아먹었다가는 뼈다귀도 못 추리겠구나'
그래 가지고는 오무기 왕자를 턱 떼어서 놓고는 그 등치가 큰 그 지모 귀신이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잘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과연 당신은 큰 왕이 될 만한 참 왕자의 그릇입니다. 내가 항복을 하니 나를 제자를 삼아 주시오"
그래 가지고 항복을 하고서 그 왕자를 따라서 불법(佛法)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건 부처님 경전에 나오는 한 설화지마는 우리 도를 닦는 사람이 이만한—죽어도, 정진을 하다가 죽어도 중단하지 아니할 만한 큰 결심과 인내와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이라고 하는 것이 천하에 방법이 간단한 것이고, 한 생각 돌이켜서 간절하게 의단을 일으켜 가지고, 그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참,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하나도 어려울 것도 없고 복잡할 것도 없지마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럭저럭 그저 형식적으로 조금씩 하면서 방선(放禪) 시간에는 잡담이나 하고, 해제(解制)하면은 여기저기 구경이나 다니고, 또 결제(結制) 때가 되면은 들어가서 한 철씩 또 시간 맞춰서 사분정진(四分精進) 하고. 그리고 뭐 대중공양 들어오면 그저 옆구리가 터지도록 먹고.
그럭저럭 지낸다면 그러한 참 별로 어려울 것도 없고, 참 이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은 오입이란 말을 쓰셨는데, 이거 출가해 가지고 요령껏 잘하면 이 세상에서 제일 참 좋은 오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내다가는 금생에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죽어서 지옥에 갈 길밖에는 없습니다. 또 지옥에 안 간다 하더라도 그 시주(施主)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한량없는 소의 몸을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진을 조금 분심(憤心)을 내 가지고 애써서 하려고 한즉슨은 가지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몸이 어디가 아프고, 그렇지 않으면 소화가 안되고, 그렇지 않으면 상기가 일어나고. 몸이 병이 안 나면은 참 이상한 좋지 못한 모다 인연이 나타나 가지고 나의 공부를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애써서 하고 조금 공부가 될 만하면은 가지가지 장애가 일어나. 왜 그러냐?
그건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도가 차츰차츰 도를 이루게 되면은 제일 배 아프고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인 것입니다.
마왕 파순이는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도인이 나오면 당장 마구니가 설 땅이 없어지고 마궁(魔宮)이, 마구니의 궁전이 무너져서 결국은 마왕 파순이를 비롯한 그 수없는 마구니의 백성 군졸들이 멸망을 하게 되기 때문에 마구니가 제일 두려운 것은 도 닦는 사람이고, 도를 닦아서 도를 이루려고 할 때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도를 못 닦게 하는 것입니다.(처음~21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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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도, 그 팔상성도(八相成道) 가운데에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라고 이 팔상 가운데 하나 있지마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성불을 하실려고 할 때에 얼마나 그 마왕 파순이가 방해를 놨습니까?
팔만사천(八萬四千) 가지의 방법으로 그 방해를 쳤습니다. 미인계를 써서 방해를 하고, 또 그래 가지고 안 되니까 총칼과 갖은 무기를 써서 방해를 하고.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그것을 다 이겨내시고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뚱이 병나는 것, 또 도를 닦으면 나를 가장 위한 척하고 나를 멸망을 시키는 그런 마구니야말로 정말 무서운 마구니인 것입니다.
마구니가 머리에 뿔을 이고 무서운 아금니를 가지고 그래 가지고 나한테 핍박해 온다면 어떠한 방법을 가지고도 내가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위하는 그러한 모습을 가지고 접근을 해 올 때에는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그놈에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에 세상이 어지러울수록에 모다 사기꾼들이 날뛰지만, 그 사기꾼이 처음에 어떤 사람을 사기를 칠 때에, '내가 사기꾼이다'하고 달라든 사기꾼은 없습니다.
가장 선량한 모습으로 신사적으로 접근해 와 가지고, 나를 가장 큰 이익을 줄 것처럼 그렇게 접근해 가지고 자기를 믿게 한 다음, 나중에는 송두리째 그놈을 꼴딱 삼켜버린 것입니다.
마구니가 역시 수행인을 멸망을 시킬 때 역시 그러한 것이고,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을 하고 수출을 많이 해서 외화 획득을 해서 일인당 소득이 삼천 불(弗)에 이르렀고, 앞으로 수년 뒤에는 오천 불에 이르를 것으로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서도 모두 다 그렇게 인증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러한 상황을 제일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김일성인 것입니다.
세계 사람이 우리나라 잘된 것을 겉으로는 찬양한 것처럼 하지마는 사실은 일본 사람도 싫어하고, 미국 사람도 싫어하고, 모든 나라가 다 서로 상대가 되기 때문에 싫어하기는 하지만,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한 것이 바로 공산당이고 김일성인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것을 갖다가 방해를 치고, 못하게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입장에서는.
노사 분규가 순수한 노동자들이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를 하고, 대우를 잘해 달라고 요구를 한 것은 하나도 잘못이라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공산당의 그런 마수가 뻗쳐서 그 마수에 놀아나 가지고 노사 분규를 일으켜서 이러한 이 험악한 지경에 이른다면은 이것은 참 큰일날 일인 것입니다.
순수한 노동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네들의 요구를 주장을 하고 이래야 할 것입니다. 더욱 일을 열심히 하면서 공장이 회사가 더욱 잘되도록 하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를 한다면 마땅히 주인은 그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이고, 그렇게까지 요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다 잘해 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당한 방법이 아니고 파괴와 온갖 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국가에서도 용납할 수 없을 것이고, 모든 국민들도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공장을 때려 부수고, 사람을 해롭게 하고, 일을 아니하고 이래 가지고 결국은 그 회사는 망하게 될 것이고, 회사가 망하면 우리나라의 경제가 파탄에 이를 것이고, 온 나라가 잘살게 되기커녕 삼천 불(弗)커녕은 천 불도 못 가고, 계속 적자가 되어가지고 외국으로부터 신용은 떨어지고 해서 이렇게 되면 올림픽도 다 허사가 되고, 우리나라는 결국은 38선(三八線)이 툭 무너지는 날 간단하게 공산화가 되고 말아버릴 것입니다.
한 국가 문제나, 회사 문제나, 일신상의 문제나, 우리 수행자의 문제나, 전부가 냉정히 살펴보면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도를 닦아 가는, 그래서 이 도(道)라고 하는 것은 만법(萬法)에 근원인 것입니다.
도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인데, 그 자성으로부터 벌어진 것이 이 가정이요, 사회요, 국가요, 온 세계요, 우주법계(宇宙法界)인 것입니다.
이 우주법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우리의 자성으로부터 벌어진 것입니다. 자성이라고 하는 뿌리로부터 벌어져 가지고 천 가지 만 가지 가지가 뻗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 그것이 바로 요 우주법계인 것입니다.
우리의 자성 따로 있고, 우리의 몸뚱이 따로 있고, 또 이 세계 따로 있고, 우주법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한 뿌리에서 벌어진 것이고, 우리의 자성을 내놓고는 우주법계는 존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다. 이 말씀은 바로 현상 그대로요, 진리 그대로를 읊어 논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가정의 행복을 도모할 수 없고,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사회 · 국가가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고, 세계의 평화도 한 사람의 마음 평화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운수우제해천담(雲收雨霽海天湛)하고 반야자주직도가(般若慈舟直到家)니라
나무~아미타불~
심화발명재심처(心花發明在甚處)오 월재파심설향수(月在波心說向誰)오
나무~아미타불~
운수우제해천담(雲收雨霽海天湛)이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니 저 바다와 하늘이 맑다 그말이여.
반야자주직도가(般若慈舟直到家)로구나. 반야의 자비 배, 반야(般若)의 용선(龍船)이 바로 고향에 도달을 하는 소식이로구나.
심화만발재심처(心花滿發在甚處)오. 마음꽃이 밝게 발해 가지고 어느 곳에 있는고?
'반야용선이 집에 도달한다' 그 말은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그러면 마음꽃이 만발해서 어느 곳에 피어 있느냐?
월재파심설향수(月在波心說向誰)오. 달이 그 활발하게 번쩍거리는 그 파도 위에 빛나는데, 누구를 향해서 이 도리를 설할 것인가? 그 파도는 우리의 중생의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마음의 파도인 것입니다.
중생심(衆生心), 희로애락과 탐진치 삼독에 끝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중생의 번뇌 망상, 그놈을 여의고 도(道)는 닦을 수가 없고, 그놈을 여의고 견성성불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탐진치와 희로애락과 온갖 번뇌 망상이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데에서, 자성이라고 하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인 것입니다. 그 물결 내놓고 그 물이 없으며, 그 물속에 있는 습성(濕性)이 바로 우리의 자성인 것입니다.
우리의 번뇌 망상이 그놈을 버리고 우리의 자성을 찾을려고 하면은 물을 여의고, 물결을 여의고 물을 찾은 거와 같고, 그 물을 여의고 그 습성을 찾을려고 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 파도에서 습성을 봐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뇌 망상을 여의고 그래가지고 무슨 청정한 불성(佛性)을 찾을려고 한다면 영원토록 이룰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갈 때에 몸이 아프다고 해서 또는 상기(上氣)가 있다고 해서, 무슨 공부가 잘 안된다고 해서 꺼뜻허면은 '이거 참선이 나한테 안 맞은가 보다, 아직 내가 참선할 단계가 아닌가 보다' 이리 생각하고.
'차라리 염불을 할까? 무슨 주문을 외울까? 그렇지 않으면 성지에 가서 기도를 할까?' 염불 주력을 하다가 '내가 다 참선을 하는데 나만 이럴 수가 없다, 다시 또 참선을 하자'
선방에 왔다, 기도하러 갔다가. 또 참선을 하되 '이뭣고?' 화두를 하다가 그 화두가 잘 안 들리면은 마삼근(麻三斤)을 했다가,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했다가, 갈팡질팡 이랬다저랬다 그러고.
또 신도님들은 불법을 믿고 기도도 하고, 참선도 하고 하다가 집안에 사업이 조금 여의치 못하면, 그러다가 자꾸 친구나 누가 와서 교회에 가면은 재수대통하고 소원을 성취하고 부자가 된다고. 또 아들이나 손자가 아퍼서 잘 안 낫으면은 또 그러한 유혹에 걸려서 그 자식 하나 살리기 위해서, 또 손자를 살리기 위해서.
또 아들을 못 낳은 사람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생남 불공도 하고 하지마는 종래 아들을 못 낳고, 병이 안 낫고 그러면 교회에 끌려가 가지고, 그 환영을 하고 기도를 해주고 하는 바람에 거기에 홀려 가지고 그래가지고 개종을 하고.
이러한 박약하고도 연약한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닦고 신심이 깊을수록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이의 끈질긴 도전을 받게 되고, 끈질긴 유혹을 받기 마련인데 그러한 고비를 이겨내고, 이겨냄으로써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고, 신심이 한결 더 돈독해지고, 이렇게 해서 그러한 고비를 넘기고 수없이 넘기고 넘김으로 해서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고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조금 해 보고 안된다고 '이럴까 저럴까?'
『선요(禪要)』에, 이 천목산(天目山) 고봉(高峰) 스님은 선방에 나와 가지고 참선을 시작하는데, 3년 사한(死限)을 했습니다. '3년 동안 목숨 바쳐서 해 가지고 이루지 못하면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리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정진을 시작했는데, 밥 먹고 똥 누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일절 딴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방석에 앉으면은 처음에는 온갖 호사난상(胡思亂想), 번뇌 망상이 일어나거든. 그래도 또 생각을 돌이키고, 돌이키고 해서 조금 잠잠할만 하면은 그때는 또 혼침(昏沈)이 일어나거든.
그래서 꺼떡 한번만 하면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가지고 나가서 '한 일(一)'자로 딱 코스를 정해 놓고, 법당 뒤에나 이렇게 왔다갔다. 그래가지고 잠이 깨면 다시 또 그 자리에 와서 척량골(脊梁骨)을 펴고서 또 정진을 하고. 또 망상이 일어나고, 그래도 또 '이뭣고?' 또 화두를 들고.
그렇게 하기를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해 가도 조금도 뭣이 나아가는 것이 없어. 여전히 번뇌 망상 아니면은 혼침, 혼침 아니면은 번뇌 망상. 이렇게 하기를 3년이 한결같이 3년을 계속했어.
며칠이 아니면은 인자 3년 기한이 차게 되었는데, 공부는 조금도 나아간 것이 없어. 정말 착잡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조금도 생각을 늦추지 아니하고 계속 가행정진을 해 가는데, 하루저녁에 단교 화상(斷橋和尙)으로부터서 화두를 탔습니다. 화두를 타 가지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갖다가 꿈속에서 그 단교 스님한테 탔는데,
눈을 깜짝 놀래서 눈을 딱 떠보니까, 어떻게 생생하고 그 금방 만법귀일(萬法歸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들리는데.
그 전에 화두는 아무리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났는데 어디서 이 세상으로 왔으며, 죽어서 어느 곳으로 가는가?' 그 화두를 가지고 3년을 해도 화두 들 때만 조금 그 화두가 있지, 금방 화두가 간 곳이 없고 혼침과 산란으로 그렇게 뒤범벅이 되었었는데.
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느냐?' 꿈속에 그 받은 그 화두가 성성한데,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들려져 있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일주일 동안 밥 먹을 중도 잊어버리고, 옷 입을 중도 잊어버리고, 밥을 먹어도 그냥 그 화두요, 옷을 입어도 그 화두요, 변소에 가서 똥을 눠도 그 화두, 잠을 잘라고 누웠어도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다 그말이여.
잠을 자도 꿈속에서 그대로 들려 있어. 아침에 눈을 떠도, 도량석(道場釋)을 종을 울려 눈을 떠도 새로 화두를 들 것이 없이 그냥 그대로 들려 있어.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것을 무어라고 표현할 것이 없어.
일주일이 되어서 마치 달마 스님의 그 제삿날이 되어가지고 그 영전에 가서 대중과 같이 가서 터억 영정에 절을 하는데, 달마 스님과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과 또 어떤, 세 분의 탱화가 쭉 있는데, 오조법연 화상의 탱화에 '백년삼만육천조'(21분28초~42분42초)
(3/3)----------------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백 년이면 삼만육천 일입니다.
백년삼만육천일(百年三萬六千日)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다.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이 반복하는 놈이 바로 이놈이로구나. 그 게송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렸습니다.
백년삼만육천조, 백년 삼만육천 날마다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놈이 바로 이놈이로구나. 뭐 무슨 어려운 말입니까?
1년이 삼백육십 일인데, 10년이면 삼천육백오십 일이요, 100년이면 삼만육천오십 일인데,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다.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는 놈이 바로 이놈이로구나.
아무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닌데, 그 게송 하나에—그렇게도 꽉 맥혀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3년 동안을 한결같이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썼건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했어.
죽을 날은 며칠 안 남겨 놓고 그렇게 착잡한 가운데에 아! 이 꿈에 받은 그 화두가 그렇게 성성적적하게 들려 가지고 6일 만에 툭 터져 버렸다 그말이여.
3년 동안을 그렇게 공부가 되고 안되고 한 것도 따지지 않고, 한 생각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아니하고, 애를 쓴 결과 꿈속에서 단교 화상한테 화두를 타게 되었고, 그 화두가 제절로 성성적적하게 들려 가지고 6일 동안을 한 생각도 딴생각[別念]할 겨를이 없어. 일부러 딴생각...(녹음 끊김)
게송, 그 평범한 게송 하나로 인해서 확철대오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공부가 되고 안되고 하는 것을 따질 것이 없습니다. 무슨 공부가 처음부터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되고,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겠습니까?
무량겁을 두고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서 살아왔고, 익히고 익힌 것이 그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하루아침에 그것이 없어지며, 하루 이틀 해 가지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안된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번뇌 망상 일어난 것이 당연한 것이고, 번뇌 망상 일어나는 것이 우리가 무량겁을 익혀온 것이 그것인데,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말이여.
그걸 끊을라고 한다고 해서 끊어지겠습니까? 끊을라고 할수록에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 망상 일어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일어나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나는 자꾸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이뭣고?'
한 생각 일어나면 그 생각이 금방 다음 생각으로 번지는데, 두 번째 생각으로 일어나기 전에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 하는 바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는 것입니다.
내가 야무지게 단속을 하고 알뜰히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가면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가 어느 곳으로 나한테 들어오겠습니까?
마구니는 엄격히 말하자면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마구니가 자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에서 일어나는 거여.
자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의 그 불성(佛性)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화두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한눈팔지 아니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마침내는 그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 보살이 되고,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일이화상석(日移花上石)이요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나무~아미타불~
만법하증이(萬法何曾異)리요 노생자착의(勞生自着疑)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이화상석(日移花上石)이요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해가 옮기매 꽃이 돌 위로 올라오고, 해가 시간이 지나가면 돌 옆에 서 있는 꽃 그림자가 바윗돌 있는 데로 그림자가 올라올 것이다 그말이여.
운파월래지(雲破月來池)니라. 꽉 구름이 끼어서 달이 보이지 않다가 그 구름이 흩어져 없어지면 그 달이 못 속으로 올 것이다. 못에 그 달빛이 번쩍거리고 그 달빛에 뜰 것이다 그말이여.
뭐 평범한 소리지요.
만법(萬法)이 하증이(何曾異)리요. 만법이 무엇이 일찍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노생자착의(勞生自着疑)니라. 공연히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늘에 뜬 달이나, 아름답게 피는 꽃이나, 숲에서 우는 새나, 흘러가는 물소리나, 심지어는 날아다니는 비행기 소리나, 댕기는 자동차 소리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의 나타남이건만,
공연히 중생이 망상을 일으켜 가지고, 버리고 찾기 때문에 그 적나라(赤裸裸)한 그놈을 보지를 못할 따름인 것입니다.
공부해 나가는 데에 가지가지 마구니가 있다고 했지만, 정말 발심(發心)을 해서 정말 알뜰히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마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탐진치요, 밖에서 들어오는 마구니가 아닙니다. 가장 우리의 궁극에 깨달음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냐?
'아! 이것이로구나' 스스로 공부해 가지고 어떤 소견이 나면, '아하,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냐'하고 고러한 생각인 것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또 한 철 두 철 하면 공견(空見), 체중현(體中玄) 도리, 일체가 공(空)한 도리—부처나 중생이 둘이 아니요, 선과 악이 둘이 아니요, 검은 것과 흰 것이 둘이 아니요, 이 세상에 모든 상대되는 것들이 그것이 다 둘이 아니고 본래 같은 것이다.
그러한 공(空) 도리, 그러한 것을 봐. 그러한 공(空) 도리를 보면 마삼근(麻三斤)도 그놈이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도 그놈이요, 이뭣고도 그놈이요, 뭐 똥막대기도 그놈이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 그것 아니고, 그것 내놓고 무엇이 있겠느냐?
무슨 공안을 물어봐도 '억' '할'하고, 무슨 공안을 물어도 몽둥이로 치고, 무슨 공안을 물어도 그저 방석을 갖다가 들었다가 땅에다 메다치고 그저, 아무 공안을 물어도 뭐 맥힐 것이 없어. 닥치는 대로 움직거리고, 닥치는 대로 일르고, 아무렇게 일러도 그 맞지 않는 것이 없다 그말이여.
이러한 소견이 바로 공견이요, 이것이 바로 체중현 도리인데, 이러한 소견은 한 철 두 철 애써서 하면은 누구라도 그러한 소견(所見)은 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견성했다고 인가(印可)를 할 수가 없습니다. 바른, 눈 밝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하면 그 경지에 이르면은 금방 인가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가는 백 번을 받아보았자 궁극의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소견이 만약에 여러분 가운데에 났다면은 그것이 바로 자기를 죽이며, 불법(佛法)을 죽이는 마구니가 자기에 붙었다고 생각을 하십시오. 탁! 스스로 그것을 때려 쳐버리고 백지 상태로 돌아가서 완전한 초학자(初學者)가 되어 가지고 정말 콱! 맥히는 공안을 화두를 가지고 정말 새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애써서 공부하는 여러 선객(禪客)들에게 또 여러 불자(佛子)들에게 최종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섣불리 그런 소견 나가지고 ‘옳다, 옳다’ 옳다고 인가해 준다고 그놈에 속아 가지고 자기도 '깨달랐다'는 소견을 가지고 백만 겁(劫)을 정진을 해 보십시오.
오신통(五神通)이 다 나가지고 하늘에 승천, 하늘에 날아올라 가고,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천리만리를 왔다갔다하고 신통을 부려 본들 그것은 성불(成佛)이 아니고, 견성(見性)이 아닌 것입니다.
참선비식념(參禪非息念)이요 묘성도친견(妙性圖親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별기낙진연(瞥起落塵緣)이요 불속타편점(不續墮偏漸)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참선(參禪)은 비식념(非息念)이요. 참선은 생각을 쉬는 공부가 아니여.
자꾸 생각을 쉬고 또 쉬고 해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고, 망상이 다 끊어지고 그 고요하고 고요하고 적적한 경지에 들어가면, 그 편안하고 맑고 깨끗하고 그 신성한 그 묘하고도 그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그 경지를, 참 기가 막히지. 그러나 그러한 데에 이르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 아니여.
멸진정(滅盡定)에까지 들어간다 해도, 그리고 저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까지 올라간다 해도 그것이 성불은 아닌 것입니다.
묘성(妙性)을 도친견(圖親見)이여. 자기의 자성,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이 참선의 목적이지, 무슨 고요한 데에 들어가 가지고 아조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한번 정(定)에 들면 밤이 되는지 낮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모르고 계속 그 정(定)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거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밥 먹을 때 밥 먹고, 옷 입을 때 옷 입고, 똥 눌 때 똥 누고, 운력할 때 운력하면서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 의단이 독로해야지, 고요한 데에 처박힌 것은 그것은 못쓰는 것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에도 성성하게 의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별기낙진연(瞥起落塵緣)이여.
'하! 이것이로구나! 하! 좋다. 이런 경지에 영원히 있었으면. 내가 얼마 안 가면 확철대오 할라는가 보다. 이럴 때 누가 나 좀 탁! 깨닫게 해주었으면' 이러한 무슨 생각이고—불견(佛見)이고, 법견(法見)이고, 중생견(衆生見)이고, 무슨 생각이고 한 생각 일어났다 하면은 벌써 진연(塵緣), 티끌 인연에 떨어진 것이고.
불속타편점(不續墮偏漸)이여. 알 수 없는 의단이 잠깐이라도 끊어져서 한눈을 팔면 그것이 편점(偏漸)에 떨어져 버린 것이여.
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구니도 침범을 못하고, 거기에서 온갖 계행(戒行)은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고, 모든 업장(業障)도 거기에는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렇게 해제를 했지마는, 발심해서 도 닦는 사람이 해제 · 결제가 무슨 구별이 있어? 해제할수록에 더 야무지게 단속을 해.
결제 중에는 대중이 모다 모여서 규칙 속에서 살기 때문에 어지간하면은 별 탈이 없지만, 해제하면은 맘대로 가고 싶은 데 가고, 오고 싶은 데 오고, 맘대로 그 생활이 자유로우니까 까딱하면은 그 잘못될 우려성이 있기 때문에 발심한 수행자라면 해제 때 더 단속을 해야 하고, 해제 때 더 알뜰히 정진을 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도 여러분들도 여기에 백일기도 ·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셨고 또 방부를 들이고 출퇴근을 하시면서 정진을 한 보살님도 계시지만, 형편상 여기에 나오시지 못하고 댁에서 모다 정진을 하신 분들도 어쨌든지 열심히 정진하시고, 생활 속에서 더 열심히 하셔야 할 것입니다.
모다 회사라든지 사회라든지 모두가 복잡할수록에 여러분 자신들이 더욱 신심을 굳건히 해서 모다 이 가정이 화목하시고, 서로서로 용기를 주고 신심을 내가면서 열심히 하시기를 부탁을 하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부처님 믿는 마음을 굳건히 하시고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이여. 한 움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매어 두노라.(42분43초~64분10초)(끝)
[법문 내용]
(게송)윤회기중문래단~ / 견성성불을 해야만 우리의 한량없는 선망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열린다. 이것이 수도(修道)하는 목적 /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서 무상(無常)을 깨닫고, 우리는 도심(道心)을 발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오무기 왕자' 이야기, 『본생경(本生經)』 제6장 원망품(願望品) '55 오무기태자(五武器犬子)' / 수행인은 정진을 하다 죽어도 중단하지 아니할 만한 큰 결심, 인내, 용기를 가져야 한다 / 나를 가장 위한 척하고 나를 멸망을 시키는 그런 마구니야말로 정말 무서운 마구니 / 도는 바로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
(게송)운수우제해천담~ /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견성성불을 못한다. 온갖 번뇌망상이 바로 우리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결이기 때문 / 천목산(天目山) 고봉(高峰) 스님의 수행담 / 번뇌망상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내버려두고 화두를 들어라 / 마구니는 엄격히 말하자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게송)일이화상석~ / 공(空) 도리, 체중현(體中玄) 도리를 가지고 견성했다고 인가를 할 수가 없다. 그걸 때려 쳐버리고 완전한 초학자가 되어 콱! 맥히는 화두를 가지고 새 출발해야.
(게송)참선비식념~ /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참선의 목적 / 해제 때 더 알뜰히 정진해야.
〇우리의 자성 따로 있고, 우리의 몸뚱이 따로 있고, 또 이 세계 따로 있고, 우주법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한 뿌리에서 벌어진 것이고, 우리의 자성을 내놓고는 우주법계는 존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다. 이 말씀은 바로 현상 그대로요, 진리 그대로를 읊어 논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가정의 행복을 도모할 수 없고,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사회 · 국가가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고, 세계의 평화도 한 사람의 마음 평화 없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마구니는 밖에서 오지 않고 자기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의 그 불성(佛性)으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에, 화두라고 하는 무기를 가지고 끊임없이 한눈팔지 아니하고 정진을 해 나가면, 마침내는 그 팔만사천 마구니가 팔만사천 불보살(佛菩薩)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〇자기의 자성, 자기 불성을 확철대오하는 것이 이 참선의 목적이지, 무슨 고요한 데에 들어가 가지고 아조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한번 정(定)에 들면 밤이 되는지 낮이 가는지, 배가 고픈지 모르고 계속 그 정(定)에 들어갔다고 해서 그거 참선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밥 먹을 때 밥 먹고, 옷 입을 때 옷 입고, 똥 눌 때 똥 누고, 운력할 때 운력하면서 염념불매(念念不昧)로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야지, 고요한 데에 처박힌 것은 그것은 못쓰는 것입니다. 고요한 가운데에도 성성하게 의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〇한 생각을 무섭게 단속을 해 나가야 마구니도 침범을 못하고, 거기에서 온갖 계행(戒行)은 지킬라고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고, 모든 업장(業障)도 거기에는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이 낱 가운데 일을 알고자 할진댄, 이 도리(道理)를 알고자 할진댄, 뜬구름이 허공에 갔다 왔다 하느니라. 부휴선사(浮休禪師)의 게송(偈頌)입니다.
봄이 이르니 다른 꽃은 아직 피지 아니하고 매화꽃이 눈 속에서, 눈이 아직 희낏희낏 다 녹지 아니한 그 눈 속에서 매화꽃이 피고, 가을이 깊으니 다른 꽃은 다 져버렸는데 들국화가 쌀쌀한 가을바람에 피고 있더라.
너무나 당연한 아무 별 뜻이 없는 평범한 일을 시(詩)로 읊었습니다. 그런데 이 별로 기특하지도 아니한 평범한 이 사실, 이 속에 참다운 도리를 알고자 할진댄 허공에 흰구름이 날아가고 날아오느니라.
이 허공에 흰구름이 날아가고 날아오는 것은 또 무슨 기특한 일인고?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바람이 불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은 또한 무슨 기특한 일인고?
이 기특할 것도 없는 이 사실이 설(說)할래야 설할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는 도리를 너무나 분명히 설하고 있다고 하는 데에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병인년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를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 큰방에 35명이 났고, 또 이 자리에는 저 경상도 지방, 충청도 지방, 경향 각지에서 크고 작은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여러 비구니(比丘尼) 대중, 그리고 청신사 청신녀, 부처님을 믿는 형제자매 여러 도반(道伴)들이 많이 모이셨습니다.
지난 한철 동안 각기 자기가 거처하는, 안거하는 선원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그리고서 오늘 이 삼남 · 팔도에서 이렇게 한 자리에 서로 도반들의 얼굴을 보고 '지난 한철 동안 나는 정말 모든 정성을 다해서 정진을 했는데, 다른 도반들은 또 어떻게 정진을 했을까?'
서로 말없이 미소 짓는 가운데에 인사를 했지만 그 속에는 한없는 도반으로서의 넘치는 절렬(節烈)한 티없는 정이 오고갔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의 그 엄숙하고 티없는 그리고 반짝거리는 눈동자 속에 도반으로서에 깊은 신심과 우정이 풍기고 있는 것을 나는 보고 대단히 감개가 무량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한철 한철을 정성을 다하고, 신심(信心)을 다하고, 분심(憤心)을 다해서 정진을 해 나간다면 어찌 금생에 이 몸뚱이를 가지고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 없겠습니까.
인생은 참으로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하루 일을 알 수가 없고, 하룻밤 일을 알 수가 없어.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땅히 정신차려야 할 것은 그 무상함에 철저한 포구(怖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그리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잡드리해 나간다면 오늘 눈을 감게 되고, 한 시간 후에 눈을 감게 된다 한들 무슨 포한(抱恨)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 죽음에 대해서 각기 느낀 바를 말해 보아라.
‘생사가 어떻게 되느냐?’
한 제자가 대답하기를 ‘생사는 하루 동안에도 죽음은 닥쳐 올 수가 있습니다’
‘너는 공부하기가 어렵겠구나’
또 한 제자가 ‘밥 한 그릇 먹는 가운데에도 죽음은 올 수가 있습니다’
‘너도 어렵구나’
한 제자가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는 데에도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를 하겠다’
숨 한번 쉬는 사이에 죽음은 올 수가 있는 것이여.
죽음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공부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이 제자를 데리고 어디를 가시는데, 어린아이가 길에서 소꿉장난을 하는데 모래로 이렇게 성을 쌓고 길을 트고 해서, 부처님이 지나가시니까 길을 떠억 비켜 드리면서 ‘부처님 이 길로 지나가시옵소서’
자기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다 소꿉장난하면서 길을 닦고 모다 해 가지고 그 깨끗이 만들어 놓은 길로 부처님을 가시게 했다 그말이여.
부처님이 그 아이를 보시고 ‘너는 백년 뒤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겠구나’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는데,
백년 뒤에 아쇼카 왕, 아육왕(阿育王)이라고도 하고, 그 아육왕으로 탄생을 해 가지고 그 어려서는 매우 포악(暴惡)하고 그래서 그 부왕마마로부터서 미움을 샀었는데.
저 변방에 난리가 일어나서 그래서 그걸 갖다가 막으라고 아무 무기도 주지 아니하고, 그래가지고 거기를 보냈는데.
‘가서 싸우다가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좋겠다. 저놈을 살려두면은 자기가 죽은 뒤라도 형제간에 반드시 저놈이 그 형을 죽이던지 동생을 죽이던지 해 가지고 난리를 일으킬 것이다’해 가지고, 부왕(父王)의 마음에는 가서 싸우다가 죽기를 은근히 바래고서 그걸 보냈는데, 어떻게 용맹스럽던지 가 가지고 다 때려죽이고 그래가지고 그 난리를 평정을 했어.
그래가지고 거기 있는데 얼마 있다가 그 부왕이 승하(昇遐)를 했어. 해 가지고 그 큰아들이, 태자가 왕이 되어가지고 있는데.
부왕이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몰고 와 가지고 그 형, 태자로서 왕이 된 형을 죽이고, 그 동복형제(同腹兄弟) · 이복형제(異腹兄弟)를 백 명 가량을 다 죽이고, 모다 그 반대하는 신하들 충신들도 다 때려죽이고, 그래가지고는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마치 그 우리나라 수양 대군(首陽大君)이 그렇게 충신을 많이 죽이고 조카를 모다 그렇게 한 역사가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듣고 그리고 거기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는 대참회(大懺悔)를 하고서 아주 정치를 꼭 불법(佛法)에 의해서, 부처님의 정신에 입각해 가지고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래가지고 인도를 통합을 한 전륜성왕이 되었습니다.
그 아쇼카왕이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네팔(Nepal) 나라에 큰 수십 미터 되는 돌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위에다가 돌로 사자를 만들어서 딱 안치를 하고, 그래가지고 부처님 탄생하신 기념비를 거기다 세우고, ‘부처님이 탄생하신 그 지방의 모든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줘라’한 그런 탑을 세운 것이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육왕(阿育王)에 동생이 있는데, 그 동생은 불법(佛法)을 믿지를 아니해. 믿지를 아니하고.
하루는 그 동생이랑 모다 저 산으로 놀이를 나갔는데, 그 노루 · 염소 모다 그런 것들이 교미(交尾)를 한 것을 보고서 그 형인 아육왕한테,
‘출가한 스님네들은 어떻게 독신 생활을 그렇게 할 수가 있을까요? 저런 짐승도 저렇게 모다 교미를 하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모다 남녀관계, 결혼을 해 가지고 자식을 낳고 모다 살고 한데, 출가한 스님네는 과연 어떻게 그렇게 청춘을 다 버리고 저렇게 참 일생을 독신 생활을 할까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발심을 해서 참으로 불법을 믿게 할 수가 있을까?’하고 연구한 끝에,
‘내가 7일 동안을 너에게 왕위(王位)를 내가 너한테 밀어주니, 7일 동안을 니 하고 싶은 대로 임금 노릇을 해라. 먹고 싶은 대로 먹고, 궁녀들도 니가 데리고 놀고 싶은 대로 놀고, 어떠한 권리도 니 마음대로 부려라. 단, 7일 후에는 내가 너를 왕위를 빼앗고 그 다음에 너는 사형(死刑)에 처하겠다’
그래서 왕관과 옥새(玉璽)를 다 건너 주고 왕관을 딱 씌워서 그래가지고 모든 신하들에게도 그 새 왕한테 다 충성을 다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그랬는데.
하루 동안을 맘대로 먹고, 그 상감마마가 누리는 모든 복(福) 수용을 하는데 하루가 지나면, ‘이제 하루가 지냈습니다. 앞으로 엿새가 남았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보고를 신하를 시켜서 합니다.
또 하루를 그렇게 또 술과 계집과 모든 영화(榮華)를 호강을 하고 하루를 지냈는데, ‘이틀이 지나고 앞으로 닷새가 남았습니다’ 아! 매일 그렇게 큰소리로 인자 조회 때 외치는데,
그 말 한마디가 그냥 뼈골에 사무쳐 가지고 오싹오싹 전율이 일어나고, 도대체 저녁에 잠도 잘 안 오고,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있는 중을 모르고, 그 아름다운 궁녀들이 옆에 와서 모다 시중을 들고 춤을 추고 모다 그래도 아무 재미가 없어.
내가 지금 임금 노릇은 하기는 하나 그런 권리도 자기한테는 재미가 없고, 영화도 소용이 없고, 7일 후에 죽을 일을 생각하니, 참 하루하루 죽을 날이 가까워 오니 정말 아름다운 기집이 옆에 있어도 아무 감흥이 없고, 그래가지고 7일이 딱! 되었습니다.
아육왕이 ‘그래 어떻든고? 7일 동안 왕 노릇을 하니 재미가 어떻든고? 음식은 맛이 있었든가?’
‘별로 음식 맛을 몰랐습니다’
‘그러면 예쁜 궁녀들이 그렇게 시중을 들었으니 재미가 어떻든고?’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거 보게. 출가한 스님네들은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쓰고,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죽음과 싸워서 그 생사해탈(生死解脫) 할려고 한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을 하고 사는데, 무슨 거기에 색심(色心)이 동(動)하겠는가?’
‘예. 과연 알겠습니다. 출가한 스님네들이 청춘을 버리고, 명예와 권리를 버리고, 인생에 모든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그 도를 닦아가는 스님네 그 거룩한 뜻을 제가 잘 알았습니다. 제가 출가하도록 허락을 해 주십시오’
‘좋다’
그래가지고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어떻게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던 것입니다.(처음~19분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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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년 동안, 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삼천년 동안 오늘날까지도 부처님의 제자들이 인도에서 동남아 각국 그리고 중국으로 해서 우리나라, 일본,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면면히 이 불법이 전통해 내려가고,
지금으로부터 고구려 소수림왕 2년, 천육백 년 전에 우리나라에 불법이 들어와 가지고, 고구려·백제·신라·고려를 거쳐서 불법이 융성을 하다가 이조 오백 년 동안 불교를 억압을 하고 유교를 숭상을 했는데, 이조 오백 년 동안에 불법을 탄압한 그 광경은 말로써 형언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시골에도 원님이 거처하는 데는 가까이 가지고 못하고 저 산중으로 쫓겨 들어가서, 사람이 사농공상(士農工商) 4계급이 있는데 승려는 그런 데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백정(白丁)이나 백정보다도 더 대우를 못 받고 짐승 취급을 받고,
그러면서도 종이를 떠서 바친다, 뭐 나라에 성 쌓는 운력이 있으면 승려를 잡아다가 아주 그냥 노예처럼 아주 그냥 막 비참하게 참혹하게 그렇게 대우를 했습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뼈에 사무치는 수모를 인욕(忍辱)을 하면서 더 신심을 발해 가지고 도를 닦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는 왜놈들이 쳐들어와 가지고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이고, 선조대왕은 저 의주까지 파천(播遷)을 가고, 왕자는 저 함경도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붙잡혀 가지고 그런 참 말로써 형언할 수 없는 치가 떨리는 그러한 난리를 만나 가지고,
서산대사 · 사명대사 · 뇌묵대사 이러한 고승(高僧)들이 승병(僧兵)을 이끌고 그 왜놈들을 무찔르고, 그때 그 사명대사 · 뇌묵대사 · 서산대사 밑에 비구니들이 모다 미리서부터 병법을 익히고 그래 가지고는 그 군사 노릇을 했습니다.
그 장수에 그 참모 및 연락 여러 가지, 그 새처럼 날으고 범처럼 뛰면서 온갖 무술을 다 익혀 놨기 때문에 횡행자재(橫行自在)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그때는 유교에서 불교를 탄압할 때라 그 승병들이 세운 공은 다 덮어버리고, 전부 자기들이 한 것처럼 전부 보고를 올리고, 그래서 역사상에 그렇게 백분의 일도 나타나지 않고 내려오고 있습니다마는, 스님네들이 무슨 그런 공을 바래고 싸웠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왜놈을 갖다가 무찌르고, 심지어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그 포로로 잡혀간 사람을 다 받아 오고, 일본에 가서 사명대사는 생불(生佛)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가지고 일본에 가면 지금도 사명대사를 모신 사당이 있고 그렇다고 그럽니다마는, 일본에서 돌아와 가지고 영의정을 제수(除授)를 받았습니다. 영의정이면 지금 국무총리나 마찬가지죠.
그 승려들을 알기를 우습게 알고, 종보다도 못하게 하고, 노예 취급을 했는데 얼마나 공을 세우고 얼마나 그 법력과 도력과 용맹이 그 공로가 컸으면, 승려를 유교의 그 선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의정을 제수를 했겠습니까. 딱 사흘 동안, 사흘만에 사표를 냈는데.
서산대사도 그 공로로 참 융숭한, 저 선조대왕은 참 존경을 했는데, ‘그 서산대사를 묘향산으로 모셔라’ 그러니까, 처음에는 가마에다 태우고 얼마 정도 가다가는 가마에서 내리게 하고 맨발을 벗겨서 맨발로 묘향산으로 돌아가게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이 지금 기록에는 남아 있는가 어쩐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한 수모를 받으면서도 도 닦는 그 한마음은 변함이 없이 수행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불법이 전통해 내려오고, 사찰이 전해 내려오고, 최상승법이 오늘날까지 이렇게 전해 내려와서 전국 선원에서 비구 · 비구니가 참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도를 닦아 오고 있고, 왜놈들이 36년 동안 식민지로 탄압을 했지마는 승려들은 그래도 계속해서 그 불법 믿는 마음이 변함이 없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일부 정신 못차린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모다 타락을 해서 첩을 얻고, 참 사찰인지 속가인지 모르게 그렇게 사는 그런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말세(末世)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뜻있는 사람은 그런 속에서도 변함이 없이 내려왔거든.
해방이 되어가지고 이제는 불교 신자가 천육백만, 우리나라 인구에 거의 반에 가까울 정도에 신도가 있는데, 나날이 기독교가 번창을 해 가지고 세 집 건너 교회가 서고, 외국사람들이 와서 서울에 들어오면은 '저 쭝긋쭝긋 서있는 것이 무슨 안테나냐?'고. 저것이 교회라고 그러니까 모다 깜짝깜짝을.
예수교가 서양에서 먼저 다 했는데, 서양에도 일찍이 그러한 때가 없었는데, 우리나라는 천육백 년의 불교 역사가 있고, 유교를 숭상해 왔고 한데, 뭐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고, 늦바람 나면 참을 수가 없다더니 세상에 기독교가 이렇게 한 것은 도대체 우리나라 민족이 어째서 이렇게 그 전통을 모르고, 참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교도 좋은 인간이 지켜야 할 삼강오륜의 성현의 가르침이고, 더군다나 '불교는 이 세계의 종교뿐만이 아니라, 우주 종교다' 아인슈타인 같은 그런 대철학자가, 대종교인이, 대과학자가 그 불교를 갖다가 공부를 하고서 그 불교를 평하기를 이것은 세계의 종교라고, 세계종교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우주종교라. 이렇게까지 평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러한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천육백 년의 역사, 고구려 · 백제 · 신라 · 고려를 거쳐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그 전통이 이어 나오고, 우리나라에 문화재 99%가 불교 문화재고, 우리나라 민족에 피 속에는 그 불법의 피가 넘쳐흐르고 있어.
그러한 민족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전통을 버리고서 그런 외래 종교에 빠져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내가 기독교나 다른 종교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창피하고 기가 막혀서 한 말씀하는 것인데, 종교는 자유니까 무슨 종교를 믿거나 상관은 없습니다마는.
자기의 가정에서도 자기 가문 혈통을 서양 사람들도 다 존중히 여긴다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어찌 우리나라 혈통을 무시하며, 특히 우리나라는 유독 그 족보가 발달이 되어서 세계의 모다 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데.
그러한 민족이 어떻게 그렇게 단시일 내에 그렇게 정신을 못 채리고, 교황이 오니까 여의도 광장에 그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안 믿는 사람들까지 나가서 모다 법석을 떨고, 이래 가지고서는 역사가 있는 민족, 문화가 있는 민족의 긍지를 가졌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스님네는 그 무서운 오백 년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내 몸 안에 구현하고, 나아가서는 이 불법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그런 뜨거운 신심으로 오늘날까지 전통을 지켜온 것입니다.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선방에서 그렇게 모다 알뜰히 정진을 하고 이렇게 오셨습니다.
'말세, 말세'하지만 이렇게 해마다 이렇게 참선 수행하는 스님네가 불어나고, 또 그 위법망구적으로 용맹정진 하는 수효가 나날이 불어나고 있고, 선방마다 모다 그렇다고 그럽니다.
세상은 나날이 이렇게 발달이 되어서 서양 문명이 물밀듯이 들어와 가지고, 세상 사람들은 전통을 잊어버리고 서양 사람 본을 따고 모다 그러고 있는데,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佛弟子)들은 그러한 잘못된 풍조에 휩쓸려 넘어가지 아니하고, 불법에 귀의해서 부처님의 그 참된 정신을 나의 정신으로 해 가지고 이렇게 용맹정진을 한다면 반드시 불법은 여기로부터 중흥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혹자는 말세의 한 현상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촛불이 다 타고 마지막 꺼질라고 할 때는 굉장히 불꽃이 커지면서 환히 한동안 밝다가 꺼지듯이, 불법이 앞으로 차츰차츰 이렇게 말세를 맞이해서 쇠해 가고 있는데, 그 마지막에 이렇게 이 한국에 특히 다른 나라보다도 유독 이 한국에서 말세의 마지막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는 것을 어느 경전에도 그러한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어느 경전에 있는가는 내가 확인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여간 이렇게 선방이 도처에 자꾸 생기고, 참선하는 대중이 나날이 늘어가고, 용맹정진은 여기서 저기서 결사(結社)를 해 가지고 그 열심히 하는데, 비구 스님네 보다도 오히려 비구니 스님들이 그렇게 모다 애를 쓴다 그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혹자는 '말세 불법은 비구니가 책임을 지고 할 때다' 이렇게 한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구 스님네는 그렇게 수효가 그렇게 많이 불어나지를 않고 별로 수효가 많지 않은데, 중 되러 온 사람은 여승이여.
젊은 사람도 오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오고, 30세 넘어서도 오고, 어려서도 오고 해 가지고 절, 절이 비구니 스님네 수효가 늘어나고.
했다 하면은 강원에도 가지 않고 선방으로 아주 직행을 한 사람도 많고, 강원을 거쳐서 온 사람도 많고, 대단히 참 비구승이 잘 못하면 비구니라도 잘해야 하고, 나중에는 비구니가 잘 못하면은 처사 · 보살이라도 해야 하고, 누가 하던지 해 가지고 이 불법은 끊이지 않고 전통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20분~36분2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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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제자임에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불법에 귀의해서 여법(如法)하게 도를 닦으면 누구라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고, 깨달으면은 바로 불법은 그 사람을 통해서 전통(傳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에 우리 모두는 낱낱이 다 불법을 자기를 통해서 전통해 나갈 그러한 사명을 띠고 났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전통의 사명(使命)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등한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비를 볼 겨를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일분일초라도 잡담하고 그럭저럭 지낼 수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저 보리밥이 되었건, 쌀밥이 되었건, 잡곡밥이 되었건, 죽이 되았건 우리가 굶어 죽지 않게 한 숟갈을 먹으면 그저 화두를 들고, 벼락이 떨어지거나, 천둥이 치거나, 밤이 되거나, 해가 뜨거나 지거나, 옆에서 뭐 떠들거나 말거나, 그까짓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생사(生死)가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고 하는 사실만 명심한다면 눈을 감으나 뜨나,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입선(入禪)을 하거나 방선(放禪)을 하거나, 산철이거나 결제거나 전혀 그런 것이 상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원래 결제(結制)라 하는 것은 인도 지방에 비가 많이 오는 계절에 숲속에서 정진할 수가 없고 행각(行脚)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 비를 피하기 위해서 결제를 하게 되었든 것입니다.
결제 중이라고 해서 공부를 더하고, 산철이라고 해서 비가 안 오는 때라고 해서 공부를 덜하고 그런 것이 아녀요.
겨울에는 워낙 추워서 행각을 못하고, 여름에는 또 너무 더워서 행각을 못하니까, 우리나라는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을 안거 기간을 해서 결제를 하고, 요새는 또 산철 결제라 해서 또 중간에 2달씩을 이렇게 하고 대단히 좋은 현상입니다마는,
그런 것도 우리가 공부하는데 도움은 되겠으나, 실지로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하는 분상(分上)에는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읍니까.
대중 따라서 결제하게 되면 하고, 대중 따라서 해제 하기는 하겠지만, 각자 개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결제고, 언제나 입선(入禪)이여.
누구를 위해서 정진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 보라고 한 것도 아니여. ‘아! 저이는 참 정진 잘한다’ 그따위 소리 들을라고 우리가 정진하겠습니까?
전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눈에 보일 수가 없고, 여러 대중 속에 살면서도 여러 사람이 보이지를 않어. 언제나 자기와 죽음과의 맞대결이여.
사형언도(死刑言渡) 받은, 금방 곧 몇 분 후에 사형을 집행받을 죄수와 같은 그런 마음인데, 무슨 놈의 결제 · 해제가 거기 문제가 되며, 뭐 수용이 좋고 나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다른 사람 정진을 잘하고 못 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무슨 분위기가 조용하고 시끄러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어. 곧 앞으로 몇 분 후에 사형 받을 사람이.
해제(解制)를 맞이해서 앞으로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는 불일성지(不日成之)입니다.
반드시 확철대오(廓徹大悟)는 그 사람에게 멀지 않는 시일에 그 사람은 약속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 생각,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속에도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그것이 태어난 것이고 생(生)이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그것이 죽음이다'
그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수없는 생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속에도 미세하게 따지자면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한 생각 속에 구백생멸이면은 하루 동안에는 천문학적 숫자의 생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전기가 딱! 켜면은 계속해서 환히 밝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계속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한 것이 워낙 빨리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에 계속 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와 마찬가진 것입니다.
그 삼세육추(三細六麤)의 그 기멸심(起滅心), 그 생사심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잡드리해 가는 것이 우리의 정진입니다.
잊어버렸다하면 또 챙기고, 잊어버렸다하면 또 챙기고,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사형언도를 받은 곧 몇 분 후에면 죽을 그 죄수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한 생각 골똘하므로 인해서 몇 분 후에 사형받을 것도 하나도 두려울 생각이 없어. 목을 쳐죽이거나, 목매를 달아서 죽이거나, 총을 쏴서 죽이거나 전혀 그런 것에 두려운 생각도 없고, 아무 관심이 없어.
다못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렇게 되어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그말이여.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면은 거기에는 망상(妄想)도 끼어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망상도 끼어들지를 못할 때에 그것을 '적(寂)'이라 그러는데. '적적(寂寂)하다, 적멸(寂滅)이라' '적적(寂寂)하다'고 그 ‘고요 적(寂)’자를 쓰는데.
그 적적하면 너무나 적적하고 고요하고 깨끗해서 그 경계(境界)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그 경계를 맛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 적적하고 깨끗하고 그 경지에서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하다 보니까, 그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자칫하면 화두를 망각하기가 쉬우니라.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를 들면 오히려 화두를 듦으로 해서 그 고요하고 성성(惺惺)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도 들고 싶은 생각이 없는 수가 있어.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 거여.
적적하고 성성하고 맑고 고요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있어야 돼.
그때는 ‘어떻게 화두를 드냐?’하면—‘이뭐꼬!’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막 어거지로 힘을 써 가지고 막 그렇게 드는 것이 아니어.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있으면 그 의단만을 떠억 관(觀)할 뿐이지, 자꾸 뭐 ‘이뭣고! 이뭣고!’해 가지고는 그렇게 우악스럽게 그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어.
성성(惺惺)한 가운데 적적(寂寂)하고, 그 적적하고 성성한 가운데 의단이 성성하게, 그 고요한 호수에 달이, 저기 달이 비추듯이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 의단이 현전(現前)해야 하거든.
그렇게 되면 옆에서 떠들어도 상관이 없고, 밥을 먹어도 고대로 있고, 똥을 눠도 그 화두가 고대로 있고, 어딜 걸어가도 고대로 있고, 울력을 해도 고대로 있고.
뭣헌 이는 옆에서 떠들면 화두가 없어져 버린다는데 그 아직 덜된 거여, 그것은.
옆에서 떠들어도 상관이 없고, 잡담을 해도 소용없고, 자기는 자기거든. 그렇게 되도록—그건 애를 쓰는 데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럭저럭 지내는 데에는 생전 해봤자 그렇게는 안되는 것이여.
정말 전체적으로 결제(結制)를 하지마는, 전체적으로 결제하는 속에서 다시 또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자기의 결제가 새로 있어야 되거든. 그렇게 잡드리해 나가는데...(녹음 끊김)
그런 생각도 못쓰는 거여.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누가 깨닫게 해 주기를 바래지도 말고, 다못 그 성성적적한 가운데에 의단만이 독로(獨露)하도록,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도록만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가면,
일주일을 넘지 못해서 귀로 들리는 어떠한 소리나, 눈에 들어오는 어떠한 경계나, 스스로 무슨 발을 잘못 디디거나, 또는 자다가 벼개에서 뚝 떨어지거나, 어떠한 그러한 특수한 그런 사건을 만나면 통 밑구녁이 빠지듯이 공안을 타파(打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때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점검을 맡어 가지고, 그것이 잘못 되았다 하면 다시 새로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경계면 공안에 맥힘이 없어야 하고.
천칠백 공안에 선지식과 탁마(琢磨)를 해서 그래서 맥힘이 없으면 다시, 진짜 그때부터서 정진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산중에 들어가서 정말 오후(悟後)에 보림(保任)을 철저하게, 몇백 배 철저하게 정진을 해서 다생 습기(多生習氣)를 다 소멸을 하고 그때에 가서 경(經)도 사교(四敎) · 대교(大敎)를 다 보고 심지어 유도백가제서(儒道百家諸書)까지 다 간과(看過)를 한 다음에, 그때 비로소 중생 교화를 하러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수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누구라도 정말 ‘죽을 사(死)’자를 써 가지고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여법(如法)히 수행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수 있는 자격과 가능성을 우리가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성현(聖賢)이나 하지. 특수한 상근대지(上根大智)나 하지, 원’ 다른 사람한테 미루고 자기는 이미 될 수 없는 그러한 존재다. '나는 영 도(道)는 금생에 못 닦을 사람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한 것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바라이(四波羅夷) 죄를 범하면 불통참회(不通懺悔)라고 그러는데, ‘나는 틀렸어’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통참회커녕은 이건 스스로 자기의 보리종자(菩提種子)를 끊어버리는 것이라, 이 죄(罪)야말로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부모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 · 무식(有·無識)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우리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에 선망부모(先亡父母)와 우주법계의 모든 유주무주(有主無主) 영가(靈駕)들도 다 거량(擧揚)을 통해서 이 법석에 초청이 되어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경주 김씨 동운 영가도 오늘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과 산승(山僧)의 설을 잘 들었을 줄 생각합니다.
일생 동안 또는 무량겁 동안 지은 모든 죄업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았을 것이며, 얼키고설킨 다생에 원한이라든지 모든 업연(業緣)도 봄눈 녹듯이 다 녹아서, 그 동안에 49재(四十九齋)를 지내서 다 잘 천도(薦度)가 되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산승과 인연이 있어서 이 법석에 참석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미진한 데가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털어 버리고, 어서 바삐 새 몸을 받아 가지고, 우리와 같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도를 닦아서 확철대오를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濟度)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여 장림죽취연(長林竹翠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헌데 청학반승면(靑鶴伴僧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심원화홍우(深院花紅雨)하고 장림취죽연(長林竹翠煙)이로구나.
저 깊은 선원에는 뒤안에는 붉은 꽃이 비오듯 휘날리고, 긴 숲속에는 푸른 대나무 사이에 안개가 끼었구나.
백운응령숙(白雲凝嶺宿)하고 청학(靑鶴)이 반승면(伴僧眠)이다.
흰구름은 저 재 너머, 재 위에 엉겨서 잠들고 있는데, 푸른 학은 졸고 있는 스님과 함께 도반(道伴)이 되어 있구나.
스님네가 저 선원(禪院)에서 정진을 하면서 떠억 삼매(三昧)에 들어갔고 있는데, 학(鶴)도 그 위에 뱅뱅 돌다가 스님 가까이 와서 그놈도 한 다리를 들고 한 다리로 서서 고개를 짓 속에다가 처박고 그놈도 졸고 있더라 그말이여.
이것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오후보림(悟後保任)을 하고 있는 어느 도인(道人)의 경계를 읊은 시(詩)입니다. 이것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입니다.
이것으로써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36분28초~56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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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춘조매화발~’ ; 『부휴당대사집』 (부휴 선수 | 이상현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p63 ‘일 선화가 한마디 청하기에(一禪和求語)’ 게송 참고.
*부휴(浮休) ; (1543-1615) 조선시대의 스님. 전북 남원 출신. 법명은 선수(善修). 호는 부휴(浮休). 20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신명(信明)에게 출가하고, 후에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덕유산,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에 머물고,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입적함. 저서 : 부휴당대사집(浮休堂大師集).
*게송(偈頌) ; 시(詩), 게(偈)와 송(頌) 모두 불교의 가르침을 싯구로 나타낸 것.
*삼동안거(三冬安居) ; 삼동(三冬, 겨울철의 석 달)에 하는 동안거(冬安居, 음력 10월 15일부터 다음해 1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청신사(淸信士)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남자 신도, 곧 우바새(優婆塞).
*청신녀(淸信女) ; 출가하지 않고 재가(在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여자 신도, 곧 우바이(優婆夷).
*도반(道伴) ; 함께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절렬(節烈)하다 ; 절의(節義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굳다.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③‘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믿음. 그러기 때문에 ‘끊어야 할 생사도 없고, 버려야 할 번뇌도 없다’고 하는 믿음.
*분심(憤心, 奮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는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밥 먹을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셨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가?” 대답하기를 “호흡 사이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도를 아는구나”
*전륜성왕(轉輪聖王) ; 산스크리트어 cakravarti-rāja 인도 신화에서, 칠보(七寶)를 갖추고 정법(正法)으로 수미산(須彌山)의 사방에 있는 대륙을 다스리는 왕.
32상(相:신체의 특징)·7보(寶)를 갖추고, 무력에 의하지 않고 정법에 의해 세계를 정복·지배한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윤보(輪寶)를 굴려 모든 장애를 물리친다고 함. 윤보에는 금·은·동·철의 네 가지가 있는데, 금륜보(金輪寶)를 지닌 금륜왕(金輪王)은 네 대륙을 다스리고, 은륜보(銀輪寶)를 지닌 은륜왕(銀輪王)은 세 대륙을, 동륜보(銅輪寶)를 지닌 동륜왕(銅輪王)은 두 대륙을, 철륜보(鐵輪寶)를 지닌 철륜왕(鐵輪王)은 한 대륙을 다스린다고 함.
전통적으로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왕[阿育王](BC 3세기)을 세속의 전륜성왕이라고도 말한다.
*수기(授記) ; 부처님이 불법에 귀의한 중생에게 어느 시기, 어느 국토에서 어떤 이름의 부처로 태어날 것이며, 그 수명은 얼마나 될 것이라는 것 등을 낱낱이 제시하면서, 미래세의 언젠가는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고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또는 부처님이 중생에게 기별(記別)을 주는 것을 말한다.
찬드라굽타(candragupta)가 마가다국(magadha國) 난다(nanda)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마우리야(maurya)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재위 기원전 270년경-230년경.
즉위 8년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 - 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 - 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비폭력과 정의에 기초한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였다.
아육왕의 주선으로 도읍지인 화씨성(華氏城)의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천여 명의 비구들이 제3차 결집(結集)을 행하여,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정리함.
불교에 귀의하여 수많은 탑과 사원을 세우고, 수많은 사절들을 인도 전역에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함. 특히,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와 딸 상가밋타(saṅghamittā)를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그곳에 불교를 전함. 왕은 자신의 뜻과 행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왕이 죽은 후, 마우리야 왕조는 서서히 분열되어 기원전 180년경에 멸망함.
*승하(昇遐 오를 승/멀 하)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
*수양 대군(首陽大君) ; 조선 제7대 왕 세조(世祖)의 왕자 시절의 군호(君號).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참회(懺悔 뉘우칠 참/뉘우칠 회) ; ①자기의 잘못에 대하여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같은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결심함. ②신이나 부처님 또는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함.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156~157 참고. (가로판 p163~164)
〇有罪則懺悔하고 發業則慚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有罪] 곧 참회하고, 잘못한 일이 있으면[發業] 곧 부끄러워할 줄 알면[慚愧]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요,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지느니라.
*'부처님 탄생하신 기념비를 거기다 세우고' ; 룸비니(Lumbinī)는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 즉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가 탄생한 곳으로 네팔 남동부 테라이(Terai) 지방, 바이라와(Bhairawa)의 서방에 있다. 석가족(샤카족)의 도읍 카필라바스투의 유적이 약 16km 서쪽에 있다.
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는 19세게 말까지만 해도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앨로이스 휘러(Alois Anton Führer)가 오늘날의 네팔 테라이 지역에 있는 옛 사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울창한 숲에 버려져 있는 아쇼카왕 석주(石柱)를 발견했다.
석주에 새겨진 내용은,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아쇼카 왕의 다른 이름)은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Buddha)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주위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石柱)을 세우게 했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8분의 1만 내도록 하였다.’ 이로써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참고] 아쇼카왕은 부처님이 열반하신지 약 2백년 후, 인도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기원전 269년 경에 즉위하여 36년간 인도 남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치하였는데,
즉위 8년(B.C. 262)에 인도 북부 동해안의 뱅골만에 위치한—오늘날 오릿사주의 대부분—깔링가국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살육, 사망, 이주의 대 참상을 매우 괴로워하고 비통하게 여겨, 그가 ‘무력의 정복’을 버리고 ‘다르마(法)의 정복’으로 전환하는 이정표가 된다.
[아쇼카의 '다르마(法)' 개념은 직접적인 불교의 특징적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핵심은 윤리적인 바른 삶 ①바른 인간관계 : 웃어른 · 이웃에 대한 존경, 수행자에 관대함, 노예나 종의 바른 처우, 모든 교단의 화합과 비난 금지. ②계행과 바른 삶 : 살생금지, 동물 희생제 금지, 적게 소비. ③다르마의 수행과 백성의 복지 :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 7가지의 경전을 듣고 명상하도록 함, 보시와 복지.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결실을 통해 모든 사람이 현세와 내세의 모든 이익과 행복을 얻기 바라는 부처님의 ‘다르마(法)’를 근본으로 한다.]
이 다르마의 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암벽(바위)에 또는 석주(石柱 돌기둥)에 칙령(勅令)을 새겨 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쇼카 왕이 즉위 20년이 되던 해, B.C. 250년 무렵에 룸비니를 방문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룸비니 석주(石柱)이다.
*교미(交尾) ;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생식을 위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음.
*왕위(王位) ; 임금의 자리.
*옥새(玉璽 옥 옥/도장 새) ; 임금의 도장.
*영화(榮華) ;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고 빛남.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색심(色心) ; 색욕(色慾 성적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욕구)이 일어나는 마음.
*동(動)하다 ; (사람이나 마음, 욕구 따위가)강하게 일어나다.
*오욕(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아라한과(阿羅漢果) ; 아라한(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 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로서, 성문 사과(聲聞四果 - 수다원·사다함·아나함·아라한)의 가장 윗자리이다.
① 불어서 불을 끄듯,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이 소멸된 심리 상태. 모든 번뇌의 불꽃이 꺼진 심리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경지. 번뇌를 소멸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 경지.
② 석가모니의 죽음. ③스님의 죽음을 수행을 통해 해탈(解脫)에 이르게 됨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무슨 곤란이나 역경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거나 성내거나 그 고통과 곤란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기꺼이 받으며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다. 참음으로써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평안하게 하여 자기의 본래면목을 밝혀 해탈에 이른다.
역경(逆境)뿐만 아니라, 중생이 만나는 경계에는 순경(順境)이 있는데, 순경에 대해서도 삼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순경계 · 역경계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 팔풍(八風)인데, 팔풍은 능히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움직여 중생의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므로 오직 참음으로써 이겨내야 한다.
*파천(播遷 이동함 파/천도·옮길 천) ; 예전에, 임금이 도성을 떠나 난리를 피하는 일을 이르던 말.
*횡행자재(橫行自在 가로 횡/갈 행/스스로 자/있을 재) ; 속박이나 장애가 없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제멋대로 마음대로 행동함.
*생불(生佛) ; ‘현실로 살아있는 부처님’이라는 의미로, 부처님과 같이 덕이 높은 사람을 존칭하여 부르는 말로 고승(高僧 행동이나 덕이 높은 스님)을 찬미하는 호칭이다.
*제수(除授 벼슬을 주다 제/임명할 수) ; 예전에,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일을 이르던 말.
*위법망구(爲法忘軀) ; 법(法, 진리)를 구하기 위해[爲] 몸[軀] 돌보는 것을 잊는다[忘].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 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결사(結社) ;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또는 관심에 따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결합한 집단.
불교의 경우 깨달음을 얻기까지 정진할 것을 위해 또는 불교 내부의 잘못을 혁신하려 할 때 결사(結社)를 함.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요세(了世)의 천태종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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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구백생멸(九百生滅) ; 9백번 생겨나고 멸하는 것. 이것은 1소찰나(一小刹那) 동안에 생멸하는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에 (제2 관공품觀空品) '九十刹那爲一念 一念中一刹那經九百生滅' '90찰나가 한 생각[一念]이 되고, 한 생각 가운데 1찰나에 구백생멸이 지난다'
『인왕경소(仁王經疏) 상권(末)』에 (신라 때 원측圓測 지음) ‘以九十小刹那成一大念 一大念中一小刹那 復有九百生滅... 若生滅合論 卽有九百生滅 別論卽有一千八百’ ‘90소찰나(小刹那)는 1대념(大念)을 이루고, 1대념에 속하는 1소찰나에는 다시 9백생멸이 있다. ... 생멸을 합해서 논하면 9백생멸이 있는 것이고 따로 논하면 천팔백번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삼세육추(三細六麤 석 삼/가늘 세/여섯 육/거칠 추) ;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의 3상(相)과 지말무명(枝末無明)의 6상(相)을 말함. 3세(細)란 그 상(相)의 작용이 미세하므로 세(細)라 하고, 6추(麤)는 거칠고 엉성하기 때문에 추(麤)라 함.
청정한 진여의 마음이 근본무명에 의하여 망동하여 유전하는, 진실에서 어긋난 마음으로의 3가지 미세한 마음 상태[三細]와 이어지는 거칠은 6단계의 마음 상태[六麤]를 설명하는 '대승기신론'에서 밝힌 교설.
*기멸(起滅) ; 생(生)하고 멸(滅)하는 것. 생겨남과 없어짐. 즉 인연이 화합하면 생하고, 인연이 이산(離散)하면 멸한다는 뜻.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잡드리 ; ‘잡도리’의 사투리. ①잘못되지 않도록 엄하게 다룸. ②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③아주 요란스럽게 닦달하거나(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족침(견디지 못하도록 몹시 급하게 몰아치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〇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 화두의 하나. 조주선사(趙州禪師, 778-897)에게 한 스님이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했을 때, 조주선사가 대답하기를, “뜰 앞에 있는 잣나무니라”라고 한 데서 유래한 화두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〇‘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경계(境界) ; ①인과(因果)의 이치(理致)에 따라서, 자신이 부딪히게 되는 생활상의 모든 일들. 생로병사•희로애락•빈부귀천•시비이해•삼독오욕•부모형제•춘하추동•동서남북 등이 모두 경계에 속한다.
②나와 관계되는 일체의 대상. 나를 주(主)라고 할 때 일체의 객(客). ③시비(是非)•선악(善惡)이 분간되는 한계. 경계(境界)에는 역경(逆境)과 순경(順境), 내경(內境)과 외경(外境)이 있다.
*성성(惺惺) ; ①정신이 맑고 뚜렷함. 정신을 차림. 총명함. 의식이 대상을 진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깨어 있는 상태. ②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한 것.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〇화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냐 하면은 의심(疑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하는 글자 석 자가 문제가 아니라 ‘이뭣고?’할 때 알 수 없는 의심, 그 의심을 관(觀)하는 것입니다.
‘이뭣고?’하는 것은 그 의심을 나게 하는 것이고, 그 ‘이뭣고?’함으로써 나온 그 의심을 떠억 관(觀)하는 것입니다. ‘관(觀)한다’고 하는 것은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관(觀)한다’고 표현을 하는 건데.
그 화두는 혼침(昏沈)이 오고 그럴 때에는 미간(眉間)에다가 두고 관하고, 혼침이 안 올 때에는 배꼽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화두를 두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초학자가 너무 미간에다가 화두를 들고 관(觀)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기(上氣)가 될 수가 있으니, 어쨌든지 숨을 들어마실 때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다 들어마셨으면 한참 머물렀다가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진 것을 느끼면서 ‘이뭣고?’
화두를 들 때에는 기왕이면 들었다가 내쉴 때 ‘이뭣고?’를 초학자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마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호흡에 상관없이 항상 알 수 없는 의심이 단전에 딱 있도록 호흡은 무심(無心) 속에 항상 단전호흡을 하도록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39분12초~41분12초)
*성성적적(惺惺寂寂) ;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현전(現前) ; 앞에 나타나 있음. 눈앞에 환히 드러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자가철주(自家鐵柱) ; 자기 스스로 정한 규칙을 쇠기둥[鐵柱]을 세워 놓은 것과 같이, 움직임없이 지켜나감을 이르는 말.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타성일편(打成一片) : ①‘쳐서 한 조각(덩어리)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탁마(琢磨 쫄 탁/갈 마) ; ①학문이나 덕행 따위를 닦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옥이나 돌 따위를 쪼고 갊. ③옥을 갈고 돌을 닦듯이 한결같이 정성껏 애써 노력하는 것. ④선지식에게 자기의 공부하다가 깨달은 바를 점검 받는 것.
*오후보림(悟後保任) ; 보림(保任). 선종(禪宗)에서 깨달은 뒤에 선지식을 찾아 인가를 받고, 다시 숲속이나 토굴에 들어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를 제하고 도(道)의 역량을 키우는 보임(保任) 공부.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또는 ‘保其天眞 任其自在, 그 천진함을 보전하고 그 자재함을 따른다’는 뜻이다. 장양성태(長養聖胎). 한자 독음상 ‘보임’이지만 관습적으로 ‘보림’이라고 읽는다.
*습기(習氣) ; ①과거의 온갖 업(業)—생각, 행위, 경험, 학습 따위로 말미암아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남긴 기운, 잠재력. 종자(種子)와 같음. ②번뇌로 인해 남아 있는 습관적인 기운. 습(習), 번뇌습(煩惱習), 여습(餘習), 잔기(殘氣)라고도 한다.
*사교(四敎) ;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스님들이 불경이나 그에 대한 논설 따위를 강론하고 학습하는 곳인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중급 과정의 네 과목. 곧 《능엄경(楞嚴經)》, 《기신론(起信論)》,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을 이른다.
*대교과(大敎科) ;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수학 과정 중 하나로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에 이어 『화엄경(華嚴經)』 · 『전등록(傳燈錄)』 ·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을 배운다.
*유도백가제서(儒道百家諸書) ; 유교와 도교[儒道], 여러 학자들이나 작가[百家]들의 모든 책[諸書].
*간과(看過 볼 간/지날 과) ; 어떤 문제나 현상 따위를 대수롭지 않게 대강 보아 넘김.
*상근대지(上根大智)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소질이 뛰어나고, 지혜가 큰 사람.
①바른 가르침을 버림. ②보리심(菩提心)을 버림. ③가르침을 베푸는 데 인색함. ④중생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위를 함.
*보리(菩提) ; 불교 최고의 이상(理想)인 불타 정각(佛陀正覺)의 지혜. 올바른 깨달음으로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 산스크리트 어 ‘Bodhi’의 한자 음역어이다.
*종자(種子) ; ①씨앗 ②무엇인가를 낳을 가능성 ③아뢰야식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인식 작용을 일으키는 원동력. 습기(習氣)와 같음 ④밀교에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하나의 범자(梵字).
*선망부모(先亡父母) ; 금생에 돌아가신 부모 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의 모든 부모.
[참고] 1984년(갑자년) 칠석차례(No.243) 송담 스님 법문에서.
“선망부모는 저 사람의 선망부모가 곧 나의 선망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수천만 번 몸을 바꾸면서 나의 조상이 되었다, 김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박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가, 이씨네 조상으로 태어났다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내 부모가 바로 저 사람의 부모고, 저 사람의 부모가 다 내 부모여서, 내 부모를 소중히 아는 사람은 바로 다른 노인들을 다 소중히 여기게 되고, 내 자식이 사랑스런 사람은 또 다른집 아기들도 아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同體大悲)라 하는 것입니다.”
*유주무주(有主無主) ; ①주인(영가를 인도해 줄만한 인연있는 사람)이 있거나 없는. ②제주(祭主)가 있거나 없는.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거량(擧揚) ; ①설법할 때에,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르는 일. 법요식의 순서로서 설법하기 전에, 법회를 하는 법당에 계신 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우주법계에 멀고 가까운 데에 있는 모든 영혼도 이 법회를 하는 법당에 왕림을 해서 같이 법문을 들으실 수 있도록 청혼(請魂)을 하는 것.
②화두, 공안(公案)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고 불교의 진수(眞髓)를 말하는 것. 불법을 선양하여 사람을 인도하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업연(業緣) ; 업(業)의 과보(果報)를 초래하는 인연(因緣). 선업은 낙과(樂果 열반의 경지)의 인연을 부르고 악업은 고과(苦果 마음과 몸을 괴롭게 하는 과보)의 인연을 부른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업(業) : [범어] karma [팔리어]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身]으로나 말[口]로나 뜻[意]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
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십구재(49재, 四十九齋) ; 사십구일재(49일재, 四十九日齋) 또는 칠칠재(7 · 7재, 七七齋).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면서 또 영가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천수경, 무상계, 반야심경, 장엄염불, 금강경 등), 한 생각 돌려 무상을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서도록 하기 위해 죽은 날로부터 7일마다 7회에 걸쳐 행하는 영가를 위해 베푸는 법회의식.
불교의 내세관(來世觀)에서는 일반적으로 보통 사람이 죽어서 다음 생을 받을 때까지의 49일 동안을 중음(中陰)이라 하는데, 이 기간 동안에 과보를 받을 다음 생이 결정되므로, 이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어 영가가 죄업을 참회하고 지혜의 눈을 밝혀 해탈의 길을 가도록 이 재(齋)을 지냄.
특히, 염라대왕의 심판을 받는 날이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이라고 하여 7회째의 재(齋)를 중요시함.
불경(佛經)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생유(生有: 태어나는 순간) ②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③사유(死有: 죽는 그 순간) ④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즉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이다.
*천도(薦度) ; 불교 의례의 하나.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일.
*정법문중(正法門中) ;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르는 집안.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게송) ‘심원화홍우~’ ; 『청허당집(清虛堂集)』 (서산휴정 著 | 朴敬勛 역 | 동국대학교 역경원) p59 ‘불일암(佛日庵)’ 게송 참고.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삼매(三昧) ; 정(定). [범어] samadhi 삼매(三昧)로 음사(音寫).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서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지 않음을 말한다.
*짓 ; ‘깃’의 사투리. 깃(새의 몸을 덮고 있는 털. 새의 날개).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서산대사(西山大師) ; (1520~1604) 조선의 스님. 평남 안주 출신. 법명은 휴정(休靜).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인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고도 함.
9세에 어머니를, 10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안주 군수를 따라 한양에 가서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함. 15세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동배(同輩) 여러 명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며 지내다 숭인(崇仁)의 설법을 듣고 남아 여러 경전을 정독하고 다시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18세. 그 3년뒤 21세에 계(戒)를 받음.
그 후 명산 제찰(名山 諸剎)을 찾아다니면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벗을 찾아 봉성「鳳城(南原)」을 지나가다 우연히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쳐 다음과 같이 게송을 지었다.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 고인증누설(古人曾漏洩) 머리 세어도 마음 안 센다고 옛 사람 일찌기 일렀더구나.
금문일계성(今聞一鷄聲) 장부능사필(丈夫能事畢) 닭울음 한 소리 이제 듣고 나니 장부의 할 일을 다 마쳤도다.
홀득자가저(勿得自家底) 두두지차이(頭頭只此爾) 문득 자가 것을 깨닫고 나니 온갖 것이 다만 이뿐이로세.
천만금보장(千萬金寶藏)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 팔만대장경도 본시는 한 장 빈 종이로세.
그 뒤로 관동(關東)의 명산을 두루 편답하니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1552년(명종 7)에 새로 부활된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대선(大選)이 되고, 3년 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으나 2년 후에 그 직책을 사양하고 금강산·지리산·묘향산에서 수행함.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휴정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에 임명하니, 그는 묘향산에서 나와 전국 승려들에게 총궐기하는 격문을 방방곡곡에 보내 승군(僧軍)을 평남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여러 곳에서 큰 공을 세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 79세의 휴정은 그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감. 그 뒤로도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등지를 왕래하며 많은 제자를 이끌었다.
그 날 아침 대사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눈이 쌓인 길을 헤치고 남여(籃輿 : 주로 산길에 쓰이는 뚜껑이 없고 의자같이 된 가마)를 타고 여러 암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신 후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를 갖추고 불전에 분향한 다음 스스로 붓을 들고 조실에 들어가서 그의 자화상에 이렇게 적었다. 즉
팔십 년 전 거시아(八十年前渠是我)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러니
팔십 년 후 아시거(八十年後我是渠) 팔십 년 뒤 오늘은 내가 너로다.
하고, 다시 임종게(臨終偈)로써 ( 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
억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불에 떨어진 흰눈 한 조각,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가고 땅과 허공이 꺼져 버렸네.
(게송)춘조매화발~ / 생사(生死)는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다 / 아육왕(阿育王)과 그 동생의 일화. 7일 임금 노릇.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 / 우리는 사형언도 받은 몸 / 화두순숙 의단독로 확철대오 / 자포자기는 가장 큰 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정진해야 / (게송)심원화홍우~.
〇인생은 참으로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하루 일을 알 수가 없고, 하룻밤 일을 알 수가 없어.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마땅히 정신차려야 할 것은 그 무상함에 철저한 포구(怖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그리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잡드리해 나간다면 오늘 눈을 감게 되고, 한 시간 후에 눈을 감게 된다 한들 무슨 포한(抱恨)이 있겠습니까.
〇출가한 스님네들은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다 쓰고, 생사(生死)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죽음과 싸워서 그 생사해탈(生死解脫) 할려고 한 그 가행정진 · 용맹정진을 하고 사는데, 무슨 거기에 색심(色心)이 동(動)하겠는가.
〇비구승이 잘 못하면 비구니라도 잘해야 하고, 나중에는 비구니가 잘 못하면은 처사 · 보살이라도 해야 하고, 누가 하던지 해 가지고 이 불법은 끊이지 않고 전통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〇사형언도(死刑言渡) 받은, 금방 곧 몇 분 후에 사형을 집행받을 죄수와 같은 그런 마음인데, 무슨 놈의 결제 · 해제가 거기 문제가 되며, 뭐 수용이 좋고 나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다른 사람 정진을 잘하고 못 한 것이 상관이 있으며, 무슨 분위기가 조용하고 시끄러운 것이 무슨 상관이 있어.
〇'나는 도(道)는 금생에 못 닦을 사람이다'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한 것만큼 큰 죄는 없는 것입니다.
사바라이(四波羅夷) 죄를 범하면 불통참회(不通懺悔)라고 그러는데, ‘나는 틀렸어’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통참회커녕은 이건 스스로 자기의 보리종자(菩提種子)를 끊어버리는 것이라, 이 죄(罪)야말로 살불살조(殺佛殺祖)하고 부모를 죽이는 죄보다도 더 큰 죄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유 · 무식(有·無識)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어.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서 자기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긍지를 가지고 정진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같이생긴구름,소같이생긴구름,집같이생긴구름,별별모양으로생긴그기기묘묘한구름모양이해가저물어바람이불어버리니까그모양이이리저리흩어져서없어져버리는 이 참, 그꽃과구름의변화해서없어진것을보고서인간 세상이명예와권리,부귀영화,누가잘생기고못생기고,이런것들이전부가다허망하고무상한것을깨달을수가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