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등선원No.48)—1983(계해)년 동안거 해제 법어(1984.01.17) (31분)

 

약 31분.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리오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광겁무명구탕진(曠劫無明俱蕩盡)헌디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며, 악한 인연을 누가 지어서 그 죄과(罪果)를 또 누가 받느냐 그 말이여. 죄를 지은 것은 무엇이 죄를 지었으며, 죄를 받는 자는 또 누가 죄를 받는 것이냐?
진성여공부동요(眞性如空不動搖)로구나. 참된 성품은 허공과 같애서 동요가 없더라.

광겁무명(曠劫無明)을 구탕진(俱蕩盡)하면, 광겁(曠劫)의 무명(無明)을 함께 다 탕진해 버리면,
선천후지적요요(先天後地寂寥寥)니라. 선천(先天), 하늘이 생겨나기 이전, 이 땅이 또 없어진 뒤에—하늘이 생겨나기 저 무량겁 이전 무량억겁 이전부터서 무량겁 이후, 한량없이 이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이 세계가 없어진 뒤까지 본래부터 적적(寂寂)하고 요요(寥寥)한 적멸(寂滅)한 상(相)이더라.


오늘은 갑자년(甲子年) 정월 17일, 동안거 해제일입니다.
이 자리에는 세등선원 안거 대중(安居大衆)과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 안거 대중과 그밖에 윤필암, 전국의 선원에서 정진한 비구니 선객(禪客)들이 이 자리에 운집(雲集)을 했고, 또 사부대중이 이렇게 운집을 해서 해제 법요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부대중뿐만이 아니라 우주 법계에 한량없이 많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의 영가(靈駕)와 은진 송씨 진영 영가와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이 자리에 이 법요식에 참석을 했습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도 오직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체적이고 자상하게 그 공부해 나가는 방법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인에게는 그보다 더 자상하고 뼈에 사무치는 법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生死) 없는 그 본성(本性)에 입각해서 보면 닦을 것이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버려야 할 악(惡)도 없고 지어야 할 선(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사(生死)가 본래(本來) 없건마는 무슨 까닭으로 무량겁을 두고 우리는 육도(六途)를 윤회(輪廻)하면서 갖은 고락(苦樂)을 겪으면서 금생에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왜 생사가 본래 없는데 이렇게 생사를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왔으며, 왜 본래 생사가 없는데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고행 수도(苦行修道)를 해야 하는 것이냐?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탄생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6년 고행을 하셨어.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 49년 동안 고구정녕(苦口叮嚀)한 미묘법(微妙法)을 설하셨습니다마는, 무슨 목적으로 하셨느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해서 출현을 하셨다’
중생을 어떻게 제도를 하느냐?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거여.

우리가 당장에라도 벗어야 할 생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고 하는 도리에 계합(契合)해 버리면 장부(丈夫) 일대사를 요달(了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광겁무명(曠劫無明)을 탕진(蕩盡)을 해 버리고 선천후지(先天後地)에 적요요(寂寥寥)한 도리인 것입니다.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하면  본래비불역비심(本來非佛亦非心)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라  자유영광요고금(自由靈光耀古今)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으로부터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단전(單傳)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깊은 밀의(密意)를 바로 봐 버리면,
본래비불(本來非佛)이요 역비심(亦非心)이니라. 본래 부처도 아니고 또한 마음도 아니니라.

분명불수연등기(分明不受然燈記)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연등불(燃燈佛)께 수기(授記)를 받아서 부처를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는 도리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 모든 대중과 육도 법계(六途法界)의 모든 중생도, 금일 은진 송씨 진영 영가(靈駕)도, 진주 유씨 승희 영가도 스스로 신령스러운 광명, 스스로 갖춘 신령한 광명이 예[古]와 이제[今]에 빛날 것입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원상(圓相)을 떠억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일러라!” 했습니다. 한 스님이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떠억 앉았어.

마조 스님이 주장자(柱杖子)로 여지없이 한 방맹이를 쳤습니다. 치니까 그 원상 안에 떠억 들어가서 앉은 스님이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입을 딱 다물고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리셨어.

지난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용맹정진을 하고 가행정진을 하고 위법망구(爲法忘軀)로 수행을 한 대중이 지혜의 눈을 뜬 자가 있거든, 이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친다” 그 승(僧)이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여지없이 방(棒)을 내리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왜 쳤는데 ‘스님이 저를 치지 못했다’고 한 도리가 무엇이여? 눈을 갖춘 자가 있으면 한마디 일러.

이 많은 대중이 용맹정진을 그렇게 했으니 어찌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나 둘 뿐이리요마는 체면을 너무 지키느라고 묵언(默言)으로써 이른 것을 나는 알겠습니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심)


오늘 해제(解制)를 하고 앞으로 석 달 동안 산철인데,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제(結制) 중이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해제라고 해서 어찌 산만히 지낼 수가 있겠습니까? 석 달 동안 춥도 덥지도 않는 그런 좋은 정진하기 좋은 계절에 어쨌던지 시간을 아껴서 더욱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오늘 백일기도 회향(廻向)이며 또 이 세등선원에 천일기도가 오늘로써 회향을 보게 되었습니다. 수행도 해제를 했다고 해서 공부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듯이, 해제를 하고서 더욱 정진을 알뜰히 해야 함과 마찬가지로 다시 오늘부터 또 천일기도를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남신녀(信男信女)께서는 또 이 천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셔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소원이 낱낱이 다 성취가 되시고, 무량겁 업(業)이 다 소멸이 되고, 현실적으로는 여러분 가정에 모든 소원을 성취하시고,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다음날 이 자리에 만날 때까지 알뜰히 정진하시고 기도하시기를 부탁을 하고 해제 법어를 마칩니다.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한디  수봉창취접천하(數峰蒼翠接天霞)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개중무한청의미(箇中無限淸意味)를  강상일구도설파(江上一鷗都說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해제를 하고 걸망을 짊어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으며 행각(行脚)을 하다 보면, 비를 만나서 비가 지난 뒤에는 구름이 걷히고 강상(江上)에는 해가 넘어가고, 몇 봉우리 푸른 산봉우리는 안개가 끼어서 하늘에 접(接)한데, 그 가운데에 한없는 맑은 맛을 어떻게 표현을 할 것인가?
이 그림과 같은, 비가 갠 뒤에 구름이 걷히고 강 위에는 석양이 되어서, 그 푸른 봉우리는 안개에 끼어 가지고 하늘에 접했는데, 그 아름다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강상(江上)에 이리 나르고 저리 나르는 흰 백구(白鷗)의 울음소리가 그 아름다운 경계를 여지없이 일렀드라. (처음~30분49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악인수작죄수초(惡因誰作罪誰招)~ /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한다.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사 · 열반의 그 소견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출현하신 것.

(게송) 직지단전밀의심(直指單傳密意深)~ / 마조(馬祖) 원상(圓相) 공안 / 원래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닦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닦어야 하고, 깨달을 것 없는 곳을 향해서 확철대오를 해라, 이것입니다 / (게송) 우과운수강상만(雨過雲收江上晩)~.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라 그러고, 몸뚱이를 버리면 ‘영가(靈駕)’라고 하는데,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버릴 때나, 짐승의 몸을 받았거나, 천상에 있거나, 지옥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어. 심지어 중생(衆生)의 상태에 있거나 불보살(佛菩薩)의 경계에 있다 하드라도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 그 본성자리에 있어서는 추호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난 석달 동안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이 생사(生死)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기 위해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수행을 한 것입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출몰하는 것도 또한 이 일대사 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소승(小乘)은 ‘생사가 있다’고, ‘분명히 생사,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인증을 하고 그 생로병사를 벗을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소승의 수행이고, 이 대승법(大乘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설사 내가 이 세상에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또 태어나서 병들어서 늙어서 죽고, 현실적으로 이렇게 받고 있다 하드라도 ‘생사는 본래 없는 것이다’고 하는 철저한 신(信)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거여.

‘생사(生死)를 받으면서 어떻게 생사가 없다고 믿을 수가 있느냐?’
생사(生死)는 깨닫기 전에도 없는 것이며, 깨달은 뒤에도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벗어야 할 생사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涅槃)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데에서 우리는 벗어야 할 생사가 있고, 증득을 해야 할 열반이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출세간적으로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견성 도통(見性道通)을 하고, 속가에 계신다고 해서 못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투철한 신심으로 그 생활 속에서 일 초 일 초, 일 념 일 념을 단속을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간다면 오히려 여러분이 더 크게 더 빨리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점진적으로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이어서 한 생각 사무쳐 버리면 확철대오할 수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5)—계해년 하안거 반산림 법어(83.06.02) (50분)

<녹음 가운데에 주변 소음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1) 약 26분.

 

(2) 약 24분.



(1)------------------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하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오
나무~아미타불~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허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하라
나무~아미타불~

억천공불(億千供佛)이 복무변(福無邊)이나, 천억 그 많은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면 그 복(福)이 갓이 없을 것이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부처님께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리되, 한 부처님에게만 올리는 게 아니라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면 그 공덕, 그 복이 한량이 없어. 한량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항상 옛 가르침,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만 같을 것인가.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 자체로써 말을 한다면은 ‘옛 부처에 능히 가르친 바 가르침이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고, 이치로써 말을 한다면은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經)을 가르치는 말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한 권의 경(經)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가 서로 전한 그 법인(法印), 법의 도장을 갖다가 말하는 것이고,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를 고교(古敎)라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그 일착자(一著子)는 그 비롯함이 없어. 언제부터서 있었던지 그 시작이 없어. 언제 그 가르침, 그 일착자를 언제부터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가 그 시작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고교(古敎)라 그래. ‘옛 고(古)’ 자, ‘가르칠 교(敎)’ 자, 고교(古敎)라 그래. 이 중생에게는—부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이 있는데 그것을 갖다가 고교(古敎)라 그래.

그러면 어째서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그 복보다도 그 공덕(功德)보다도,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經)을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냐?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그 공덕보다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대중이 계해년(癸亥年) 삼하 결제(三夏結制)를 해 가지고 이렇게 주삼야삼(晝三夜三)에 전심전력으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항상 고교(古敎)를 가져서 보는 것이다 그 말이여.
금년 여름철에는 유독 좋은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한다는 말을 와서 들으니, 그리고 이 여러 대중의 얼굴들을 보니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해 가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하는 모습이 그 살아 있는 눈동자 속에 내가 역력히 볼 수가 있어서 너무너무 대견스럽고, 너무너무 참 그 기쁜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를, 흰 종이 상변(上邊)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댄 그대들은 눈을 떠서 눈앞에를 관(觀)하라.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위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쓴다’ 그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經),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권의 경에는 경 자체가 본래 가지고 있는 문채(文彩)가 있는데,
그 ‘흰 종이라 하는 ‘흰 백(白)’ 자, 흰 종이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 자성(自性)에는 불변 수연(不變隨緣), 이 두 가지 면이 있는데, 그 자성이 가지고 있는 불변 수연에 두 가지 용(用)을 갖다가 ‘흰 빛’에다가 표현을 한 것이고. ‘검은 글자를 썼다’ 하는 그 ‘검을 흑(黑)’ 자는 무엇이냐 하면은 바로 그 적멸(寂滅)의 체(體)를 갖다가 가르치는 것이거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라. 청컨대 눈을 떠 가지고 그대의 눈앞을 봐라. 모든 납자(衲子)로 하여금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한 권의 경을 읽어라 그 말이여.
눈앞에 일용(日用), 날[日]로 쓰는 일용 생활—눈으로 모든 색상을 보고, 귀로 모든 소리를 듣고, 코로 모든 냄새를 맡고, 혀로 모든 맛을 보고, 몸으로 춥고 더웁고 한 것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고,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일용인데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한 권의 경(經)을 읽는다’ 그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이 오직 이 일용(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본래 가지고 태어난 그 한 권의 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팔만사천 법(法)을 설하시고, 팔만사천 방편을 설하신 것이다.
부처님의 설하신 팔만사천 방편(方便)과 팔만사천 법(法)이 한 글자 한마디도 오직 이 한 권의 경(經)을 읽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 없어. 팔만대장경을 보고 배우되 옳게만 본다면, 마침내 이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본래 가지고 나온 이 한 권 경을 읽도록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원(講院)에서 경(經)을 배우고 5년, 6년, 경을 배우고 평생 동안을 경을 손에서 놓지 아니하고 배우되, 본래 가지고 난 이 한 권의 경을 읽게 되어야지 그 경을 옳게 보고 옳게 배운 것이지, 이 본래 가지고 난 한 글자도 없는 이 경(經)을 볼려고 하는 신심(信心)을 내지 아니하고 이 경을 보게 까지 되지 아니한다면,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육두백판으로 다 외우고 쓴다고 한들 그 사람은 경을 바로 배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을, 강원(講院)에서 이력(履歷)을 마치면 그 경을 놔 버리고 선방(禪房)에 들어와서 진짜 경을, 이 마음의 경을 읽는 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그래. 우리 대중이 과연 그 한 권의 경, 아무리 열어 봐도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여,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을 똑바로 잘 읽고 있는지 스스로 자기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입선(入禪)하는 시간만 떠억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한 그 찰나부터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시비에 얽혀서 말려들어 가고, ‘니가 잘하고 내가 잘하고 내가 옳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또 입선(入禪)을 하면 또 앉어서 정진하다가 방선(放禪)을 하면 그럭저럭 일용(日用)에 끄달려서 화두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정진을 해 가지고서는 10년, 20년 내지 30년, 평생을 선방에서 걸망을 지고 다니면서 정진을 한들 확철대오가 어디에 있어?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정진을 한들 무슨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 금년 여름에 이 세등선원에 모인 대중은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한 납자(衲子)들이 모여서 정진을 하고, 금년 여름에 기어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철견을 하고, 불조(佛祖)의 면목을 꿰뚫어 보는 그러한 납자가 많이 배출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될 것을 기대를 합니다.


‘참선이 참 쉽기로 말하면 세수할 때 코 만지기보다도 더 쉽고, 어렵기로 말하면 이 세상에 그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없다’고 고인(古人)이 말씀을 하셨는데, 어렵다고 겁을 집어먹을 것이 없고, 쉽다고 섣불리 해서도 아니될 것이여.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앉어서 정진을 하다가 졸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 포행(布行)을 하면서 ‘이뭣고?’. 그러다 정신이 깨끗해지면 다시 와서 정진하고. 조급한 생각을 조끔도 낼 것이 없어. 그러면서도 또 등한(等閑), 더군다나 등한히 할 생각을 왜 낼 것이냐 그 말이여.
일부러 묵언(默言)을 하지 아니해도 제절로 묵언이여, 전체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데 무슨 딴소리할 겨를이 있을까 보냐? 밥을 입에다 떠 넣고 저작(咀嚼)을 하면서, 저작을 하면서 그 속에 화두가 역력(歷歷)하고, 반찬을 집어 먹고 또 저작을 하면서 바로 거기에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전 대중이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하고, 세수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소제를 할 때도 고대로 하고, 운력을 할 때도 고대로 하고, 큰방에 있으나, 지대방에나, 마당에 나가나, 목욕을 할 때에도 고대로 하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미 부모형제와 정든 가정을 버리고 출가해서 모든 인생 청춘을 다 포기하고, 그리고서도 이 선방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한 이상, 기왕 하는 마당에 그렇게 철저히 해 봐야 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결정코 금생에, 금생도 길고 결정코 이 철에 확철대오를 해야 할 그러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진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옛말에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달리고 있는 말에다가 채찍을 가한다’
채찍을 가하지 아니해도 그 말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고 있는데, 거기다가 다시 또 채찍을 가한다 그 말이여. 마치 우리 대중이 각자 자발적으로 발심(發心)을 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내가 지금 법상에 올라와서 또 채찍을 가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서너 시간밖에 안 자던 사람이 이제는 인자 한 시간밖에 안 자고 정진을 하고 그렇게 까지는 할 것이 없어. 우리 몸은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고 발심을 해서 정진을 해도 이 몸뚱이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라, 물질로 이루어진 정밀한 기계라 최소한도 필요한 만큼은 잠을 재워 줘야 하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멕여 줘야 하고 또 입혀 줘야 할 것입니다.(처음~26분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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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거의 잠을 안 주무시고, 거의 먹지 아니하시고 그 피나는 고행(苦行)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설산에 들어가셔서 여러 스승을 찾아 그 스승이 지도하는 대로 통달을 해서, 오히려 그 스승보다도 더 앞서갔다 말이여. 그러나 그 스승이 그렇게 붙잡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찾아갔습니다. 또 그다음 스승의 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또 정진을 고행을 해 가지고 그 스승보다도 더 낫게 해. 그 스승이 그렇게 간절히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 스승을 버리고 또 다음 스승을, 그렇게 해서 히말라야 산속에 있는 훌륭한 스승은 다 찾아서 배우고 차례차례로 그 스승을 버리고 그렇게 해 가지고 더 이상 스승을 찾을 것이 없을 때,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는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서 혼자 정진을 했습니다.

수자타(Sujātā)가 바친 유미죽(乳糜粥)을 받아 잡숫고 정신을 차리시고 흐르는 강물에 목욕을 하고 쇄락(灑落)하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오르는 그러한 상태에서 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대도(大道)를 성취를 했는데,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누구를 위해서 맨 먼저 법(法)을 설하실 것인가?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정진을 하는데—처음에 그 오비구는 정반왕(淨飯王)이 태자(太子)를 보호하라고 보내 준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도 태자의 고행하는 것을 보고 발심을 해 가지고 같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이 고행으로부터서 물러나지 말자’ 이렇게 서로 맹세를 하고 고행을 하다가, 태자는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잡수는 것을 보고, 그 다섯 비구들이 ‘고타마(Gotama)는 굶주림을 참지 못해 가지고 고행을 포기를 했다, 타락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저런 타락한 고타마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녹야원으로 가자’ 그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 녹야원으로 간 그 다섯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께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위해서 녹야원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교진여들은 먼빛으로 고타마 태자가 오신 것을 보고, ‘아 저기 타락한 태자가 무슨 면목으로 우리를 찾아오는가 모르겠다. 우리, 오드라도 우리는 거들떠보지도 말고, 발 씻을 물도 떠다 주지 말자’ 이렇게 다섯 사람이 꽉 짜고 있었습니다. 태자가 가까이 오니까 그 얼굴은 훤히 빛이 나는데, 그렇게 단단히 약속을 하고 짰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일어서서 영접(迎接)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태자가 뭐라고 여기를 왔소?” 물으니까,
태자가 “나를 이제는 태자라고 부르지를 말아라. 나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했으니 나를 부처님이라고 불러라”

“타락한 고타마가 어떻게 성불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찌 나를 타락을 했다고 하느냐? 나를 봐라. 나의 얼굴을 보고 나의 눈빛을 봐라. 나는 확철대오해서 성불을 한 성자가 됐느니라”
과연 우러러보니까 얼굴에는 빛이 나고 눈에서는 광명이 나는데, 옛날에 자기들이 보았던 그러한 구담 사문(瞿曇沙門)이 아니었더라 그 말이여.

거기에서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그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그 다섯 비구뿐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의 인도(印度)에 모든 수행자들이 그렇게 몸을 불로 지지고, 가시덤불에 딩굴고, 밥을 굶고, 잠을 안 자고 하는 고행 위주(爲主)의 고행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 몸뚱이를 굴복을 받고 마침내 해탈도를 얻는다고 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교진여를 위해서 최초에 설하신 법이 바로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러한 고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고 하는 것을 최초에 설하실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 오비구(五比丘)로 하여금 바른 수행법을 갖도록 하고, 그다음에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섯 비구로 하여금 한 사람을 보내서 탁발을 해 오게 맨들고, 나머지 네 사람을 위해서 법(法)을 설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른 사람이 또 밥을 얻어 오고 나머지기 네 사람이 또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하면서 그 철에 이 다섯 사람이 다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다섯 사람을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고, 다섯 사람이 각기 딴 길로 딴 방향으로 가서 이 법을 설해라’ 이렇게 해서 인도 각 지방에 보내 가지고 법을 설하게 했고, 그 철에 당장 1250인(人)이라고 하는 제자를 만나셔서 삽시간에 요원(燎原)에 불길처럼 불법(佛法)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 대중은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잘 입고 지나치게 많이 잘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될 수 있으면은 한 시간이라도 덜 자고 그렇게 공부를 할려고 애쓴 사람들만 모였어. 너무 그렇게 할까 걱정이, 그렇게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이 되어서 내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이니까.

최소한도로 필요한 잠, 아무리 적게 자도 서너 시간, 너댓 시간은 자 주어야 그래야 그 이튿날 정신이 맑은 법이여. 그 저녁에 잠을 안 자고 설쳐대 놓으면 안 자고 해 놓으면 그 이튿날 낮에 맑은 정신이 없어. 낮에 입선(入禪) 중에도 졸고 그저 그렇게 해서 맑은 정신이 없으니까, 차라리 그러기보다는 네 시간 내지 다섯 시간 푸욱 자 주고.
일반적으로 선방(禪房)에는 9시에 자고 3시에 일어나도록 여섯 시간을 설정한 것은 건강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도 있고, 근기가 조끔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다 어떠한 사람도 다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 시간을 자도록 그렇게 해 놓은 것인데, 그렇게 나이가 젊고 건강이 좋은 사람은 다섯 시간만 자도 좋고, 또 특수하게 또 좋은 사람은 네 시간 정도만 자도 좋으나, 대체적으로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자 주면 그 이튿날 정신이 깨끗해서 3시에 일어나서 그날 저녁 9시에 잘 때까지 정말 짬지게 정진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아 옆에서 잠을 안 자고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이 올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잠을 안 자고 하다 보면 그 이튿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입선(入禪) 중에 꾸벅꾸벅 조니, 그것은 실질적으로 이익이 없는 것이니까, 자기의 체질과 건강과 뭐 그런 것을 잘 참작해서 대중의 법도(法度)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실질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장 자기에게 알맞는 정진법을 스스로 개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럭저럭하다가 벌써 이 반 철이 지내갔는데, 앞으로 반 철은 초복 · 중복 · 말복, 이 삼복(三伏)이 들어서—지나간 반 철은 그럭저럭 과히 덥지 않고 지내갔지만 앞으로 참 더운 반 철이 남아 있는데, 그 더위 속에서도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실속 있는 정진을 해서 득력(得力)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반 철보다도 훨씬 알뜰한 정진을 하기 위해서 부처님에 최초에 오비구(五比丘)에게 설하신 법문(法門)의 요지를 말을 했습니다.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헌디  갱무남북여서동(更無南北與西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연불차양화력(雖然不借陽和力)이라도  쟁내도화일양홍(爭奈桃花一樣紅)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이다. 홀로 앉었어, 올연히 앉었는데 한 집이 공(空)했더라.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참 애를 써서 몸부림을 치면서 부셔대고 그렇게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정말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게 된 경계가 꼭 오는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처억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리면 그 경계를 뭐라고 표현을 할 것인가? 그 맑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기쁘다고 할 것인가, 슬프다고 할 것인가?

하늘을 봐도 화두(話頭)요, 땅을 봐도 새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차 소리를 들어도 화두요, 무슨 옆에서 누가 잡담을 해도 그 소리는 나한테는 상관이 없고, 비행기 소리가 들려도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그러니 방안에 대중이 가득 있어도 내 눈에는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고, 문 밖을 보면은 산천초목이 울긋불긋해도 그것은 나한테는 상관이 없어. 오직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할 뿐이여.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무슨 망상이 혹 무슨 딴생각이 일어나도 그냥 스쳐간 것뿐이지 나한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것이 ‘한 집이 공했다. 일실(一室)이 공(空)했다’ 하는 거여.

이 조그마한 큰방 하나만 공한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다 공한 거여.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까지도 느낄 수가 없어. 몸뚱이가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몸뚱이도 보이지 아니하고 이 몸뚱이 있는 것 자체도 인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이 몸뚱이도 공(空)해 버렸고 이 방도 집도 공(空)했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공(空)해 버렸다 그 말이여. 그러니 거기에 무슨 동서남북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이 몸이 공하고, 이 방이 공하고, 이 우주법계가 다 공했으니, 그 공한 곳에도 처백히지 않는다 그 말이여.

그 공한 그 경계에 따악 빠져 가지고 그놈을 집을 짓고 그놈을 들여다보고 앉았으면, 그것은 그러한 경계에 빠져 가지고 그놈을 맛보고 있다면 그것은 공부를 잘못하고 있는 거여. 절대로 그 사람은 확철대오를 할 수가 없어.
그렇게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그러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되거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또 하나 조심할 것은 그러한 경계에서 ‘빨리 그냥 어서 터졌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탁! 깨닫게 해줬으면’ 그러한 생각을... (녹음 끊김) 조급한 생각도 갖지 말고 또 늘어지는 해태심(懈怠心)도 갖지를 말고 여법하게 정진을 해 가면 아무 장애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고, 결정코 깨닫고야만 말게 되는 거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제호(醍醐)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최고에 맛있는 음식인데, 그러한 맛있는 음식을 맨들어 갖고도 그 관리를 잘못하면 그것이 변했다 하면은 무서운 독약으로 변하는 것이여. 맛있는 음식일수록에 변하면 고약한 독약으로 변하는 법이라, 맛있는 음식이 변했다고 해서 아깝다고 그놈을 먹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그 무량겁을 두고 어렵게 공안을 타파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면은 저 죽고 남 죽이는 외도(外道)가 되고 만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말이 한량이 없지만...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26분5초~49분20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 / 중생이 본래 갖추어 있는 일착자(一著子), 중생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한 권의 경(經)을 고교(古敎), 옛 가르침이라 한다 /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거기서 바로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을 거각(擧却)하는 것을,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래 타고난 그 경(經)을 읽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히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라 /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녹야원(鹿野苑)에서 오비구(五比丘)에게 하신 최초의 설법, 중도법(中道法) / 지혜롭고도 알뜰하게 실속 있게 정진을 하라 / (게송) 독좌올연일실공(獨坐兀然一室空)~ / 순일무잡하고 맑고 깨끗하고 고요한 경계에서 화두(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을, 마지(摩旨)를 올리고 과일을 올리고 떡을 올리고 그 공덕도 한량이 없지만, 내가 본래 갖추어 있는 그 한 권의 경을 보는 공덕이 왜 더 수승하냐?
떡을 올리고, 공양을 올리고,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하는 그 공양은 상(相)이 있어. 상(相)이 있는 복(福)은, 화살을 하늘에다 쏴 올리면 기운이 다하면 다시 땅에 떨어질 때가 있거니와, 내게 있는 한 권의 경(經)은 모냥이 없기 때문에 그 경을 항상 가져서 보면 그것은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때문에 그 공덕은 영원한 것이다.

일용 생활, 일상 생활이—앉고 서고 눕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밥 먹고 옷 입고 변소에 가고, 씻고 빨래하고 소지하고, 입선을 할 때나 방선을 할 때나, 일체처 일체시에 일용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본구저(本具底), 일대 경권(一大經卷)을 잠깐도 한눈팔 겨를 없이, 잠깐도 한 생각 딴생각 할 겨를 없이 일심불란(一心不亂)하게 그 경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바로 남을 위해서 읽는 것도 아니요, 오직 자기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밥 먹으면서 ‘이뭣고?’—밥 먹으면서 ‘이뭣고?’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밥을 먹어. 소지하면서 ‘이뭣고?’ 하기보다는 ‘이뭣고?’ 하면서 그냥 소지를 하는 거여.
꼭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할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소지하면서, 똥 누면서, 빨래하면서, 걸어가면서, 앉어서—‘이뭣고?’ 하면서 걸어가고, ‘이뭣고?’ 하면서 소지하고, ‘이뭣고?’ 하면서 밥 먹고, 뭣이 그렇게 어려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조끔도 이걸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어.

철두철미하게 여법하게 한다면, 아무리 근기(根機)가 우둔한 사람이라도 3년이면 반드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한다고 과거에 조사(祖師)들이 한결같이 보증을 하셨어.
‘그렇게 여법(如法)하게 해 가지고 3년에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거짓말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겠다’ 이렇게 참 보증을 하셨습니다. 이러한 고조사(古祖師)의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그렇게 철저한 보증을 서 주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 말씀을 안 믿을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부처님이 최초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셨는데, ‘수행인이 지나치게 잘 먹고 잘 입고 실컷 자고 그렇게 호강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안 먹고 지나치게 안 자고 지나치게 안 입어서 그래 가지고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는, 그렇게 해 가지고 몸도 쇠약하고 정신도 나약하게 맨들고, 그러한 고행 위주에 수행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닌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 깨끗할수록에 자기의 화두를 놓치지 말고, 화두를 떠억 일분일초도 간단이 없이 화두가 독로(獨露)하도록 해 나가야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다 보니까, 화두를 든 것 자체도 귀찮고, 화두를 듦으로써 오히려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가 깨질까 두려워서 화두들 것 마저도 잊어버리고 그 고요하고 깨끗한 경계에 빠져 있는, 까딱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운데 그것 공부를 잘못하고 있다 그 말이여. 그것 하나만 조심한다면 공부는 절대로 그르칠 수가 없는 것이여.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면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하는 것이여.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무량중생을 제도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느냐,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어 가지고 저 죽고 남을 죽이고 불법을 망하느냐?
한 생각! 한 생각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지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43)—1982(임술)년 동안거 해제 법어(83.01.17) (43분)

 

약 43분.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고, 종일토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토록 바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발로 걸어다니고 손으로 일을 하고, 입으로 먹고 말하고, 앉고 서고 눕고 걸어 다니고, 잠시 잠깐도 쉴 사이가 없이 바쁘다 그 말여. 그렇게 바쁘건만 무엇이 방해로울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불구해탈불락천(不求解脫不樂天)이다. 해탈도 구하지 아니하고, 천당에 태어나는 것도 좋아하덜 않는다 그 말이여.

세상에 도(道)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기 위해서 무명업식(無明業識)이 발동을 해 가지고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설쳐대고 있지만, 정법을 믿고 수행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도 역시 바쁘다 그 말이여. 그 바쁘지만 그 바쁜 것이 조끔도 방해로울 것이 없어.
정진(精進)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뻐서 참선(參禪)을 못한다. 시간이 없어서 참선을 못한다. 번뇌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을 하지만, 올바르게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하는 그 묘한 관(觀)을 얻은 사람은 번뇌가 일어나건 망상이 일어나건, 눈으로 무엇을 보건 귀로 무슨 소리가 들리건, 밥을 먹고 걸어가거나 앉거나 서거나 하나도 방해로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경계는 갈 곳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복잡한 경계 속에 있으면서 그 복잡한 경계가 자기에게는 아무 방해를 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못 이렇게 정진을 지어가는 마당에 무슨 해탈(解脫)을 구할 것이 있으며, 무슨 천당에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단능일념귀무렴(但能一念歸無念)하면, 다못 능히 한 생각이 생각 없는 데에 돌아가면—무렴(無念)이라 하니까, 이 ‘생각 없는 데 돌아간다’고 표현을 했지만, 생각 없는 데 돌아갈려고 하는 마음을 내면 그건 벌써 틀려 버린 것이고, 스스로 ‘내가 무렴(無念)의 경계에 들어갔다’고 생각을 가져도 이미 무렴이 아녀.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고보비로정상행(高步毘盧頂上行)이다. 높이 비로(毘盧)의 이마 위를 걷게 되는 것이다. 참선하는 사람은 이렇게 공부를 지어갈 뿐 그밖에 무엇을 구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정월 17일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일이고, 또 천일기도 가운데에 백일기도의 회향날입니다. 지난 삼동에는 50여 명의 수좌(首座)들이 모여서 참 알뜰하게 짬지게 그리고 여법(如法)하게 석 달 동안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잘 정진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독감이 들어서 거의 몇 분을 빼놓고는 전부 독감이 들어서 고생들을 했지만, 그 기침을 하고 열이 나고 몸이 아프고 그러면서도 한 분도 도중하차를 하지 아니하고, 이 좁은 방에서 기침을 하면서 그 병을 정진력으로 이겨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마침내 병을 이겨내 가지고 날이 지내갈수록 점점 정진을 모다 열심히 하고 여법하게 해서 끝을 그렇게 잘 마쳤어. 이렇게 알뜰하게 여법하게 정진(精進)해 간다면 무슨 도(道)를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이렇게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3년을 이렇게 해서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서 지옥에 가겠다’ 이러한 뼛속에 사무치는 가슴이 뭉클한 그러한 법문을 들었습니다.
정진(精進)은 누구를 위하는 정진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해결하기 위한 정진이여. 남을 보이기 위해서, 정진 잘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요, 크게는 진리를 깨달라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하는 것을 궁극에 목적으로 삼지만, 도를 이룰 때까지는 일체중생이 어디에 있어? 깨달라야 할 진리가 어디가 있어?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가 코앞에 붙어 있는데.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그 생사(生死) 문제가 딱! 눈앞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마음을 지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일으켜서 화두를 드는 것이 아니여. 제절로 무상(無常)과 생사에 대한 무상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오른다면 지켜야 할 계행(戒行)이 어디가 있으며, ‘화두를 들어야겄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어디가 있으며, 남을 보이기 위한 정진이 어디가 있으며, 대중규칙도 일부러 지킬려고 할 것이 어디가 있으며, 밥이 맛이 있고 없고, 수용(受用)이 좋고 나쁘고, 그러한 것에 관심 쓸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누구의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이여.
낱낱이 자기 자신이 저절로 규칙이 지켜져 버릴 것이며, 입승(立繩)이나 찰중(察衆)이나 주의나 간섭을 받을 것이 무엇이 있어? 저절로 50명이 되었건 백 명이 되었건, 옛날에 중국 총림에는 5백 명, 7백 명, 천 명, 천오백 명 이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지만 모두가 다 생사 문제에 분심(憤心) 발심(發心)되어 가지고 그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간다면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할 것이 무엇이 있어?

지난 삼동(三冬) 동안에 대중이 그렇게 많은 대중이 모여서 살았지만 한 사람도 별 탈이 없이 그렇게 온전하게 여법하게 알차게 정진을 하고 이렇게 해제를 맞이한 것은 전원이 그야말로 이와 같이 정진을 해 왔고, 이와 같이 발심을 한 결과라고 생각이 듭니다.
한 철만 그렇게 지낼 것이 아니라, 앞으로 여름 결제가 있을 때까지 또 산철이 또 석 달이 있습니다마는, 산철 동안에 걸망을 지고 어느 산(山), 어느 도량(道場)에 가고, 어느 지방에 가드라도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그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야 할 것이고, 또 여름 석 달 동안에 결제(結制)에 안거에도 그와 같이 정진을 해서,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그 간절한 마음이 지속이 되어야지 상속이 되어야지, 결제 동안에는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해제가 되면 그러한 간절한 마음이 흩어져 버리고 이리저리 설치다가, 또 다음 결제가 되면 조금 할 듯 할려고 하다가 또 해제가 되면 또 그 분위기가 깨져 버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3년을 한들 어찌 정진이 궤도(軌道)에 들어가며, 10년을 한들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결제 중에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할 때에는 전원이 묵언(默言)을 하면서 정진을 하고 방선(放禪)을 하면 잡담을 하고, 이렇게 지내는 그런 것이 습관이 배이게 되면 그것이 온전한 정진이라 할 수가 없고. 이 결제 동안에는 정진을 열심히 하다가 해제가 되면 이리저리 산만하게 다니는 것이 그것이 어찌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하겠느냐.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고 한 말씀이 근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하야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허면  원래불허노호지(元來不許老胡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라. 선근(善根)이 성숙(成熟)하면, 선근(善根), 좋은 근기(根機)다 그 말이여. 좋은 근기는 처음부터 선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하근(下根)이라 하더라도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목숨 바쳐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바로 마침내 선근으로 성숙해 가는 것이여. 그렇게 알뜰히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서 선근으로 성숙이 되어 가는 것은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처음부터 ‘나는 하근기(下根機)라, 나는 참선을 못해. 참선을 해봤자 나같은 사람은 도를 이룰 수가 없어’ 자포자기를 해 가지고서는 영원히 그 사람은 선근(善根)이 될 기약이 없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해 봐서 하근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럴수록에 바른 스승을 찾아서 목숨 바쳐서 다른 사람 정진하는 것보단 3배 내지 10배 100배를 정진을 해 간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빨리 선근으로 성숙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그 말이여.

취상구현전배치(取相求玄轉背馳)다. 모냥을 취(取)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어긋나 버린 것이다 그 말이여.
‘용맹정진 가행정진을 해서 정진을 하면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다’ 그랬지만, 취상구현(取相求玄)을 하라는 것이 아니여.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상(精進相)을 갖고, ‘나는 정진을 헙네’ 하고 정진하는 상(相)을 내고, ‘나는 정진이 잘된다고 하는 그런 상(相)에 떨어지고, 취상구현(取相求玄)은 진실한 정진이 되지를 못하는 것이거든.

스승을 구(求)하되 모냥을 보고 구하고, 정진을 하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정진상을 내고, 계율을 갖되 ‘나는 청정한 계율을 갖는다’ 하는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다른 사람 계행(戒行) 안 지킨 사람을 업신여기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이러한 것은 전판 이 취상구현(取相求玄)이 되어서, 모냥을 취하고 현현(玄玄)한 것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 이것은 참다운 수행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고로 ‘율사(律師)가 견성(見性)을 못한다. 율사가 견성한 사람은 없다’
과거에 모다 문헌을 보면 율사가 견성한 도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율사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견성을 못했어.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율사를 하되, 율사라고 하는 상(相)이 떨어졌을 때 견성을 하지, ‘나는 율을 지킨다. 계행이 청정하다’ 그래 가지고 계상(戒相)에 떨어져서 있는 동안에는 세상없이도 도(道)를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정진하는 사람이 물론 계율을 청정하게 지켜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음식도 조심하고, 잠도 좀 적게 자면서 그 정진할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지 않고 어떻게 도를 이루겠습니까마는 그러한 상(相)에 떨어져 가지고서는 안 된다.

알뜰히 정진을 하되 그러한 상(相)에 떨어지지 않고 정진한 사람과 그런 상(相)에 떨어져서 정진한 사람은 볼 줄 아는 사람이 보면 아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되 정말 철저하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되, 계를 지키는 상(相)이 없는 분은 남이 보면 알어. 남이 보면 아는 것이고. 계를 지키되 ‘내가 계율을 지킨다’는 계상(戒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보면 또 남이 보면 알어.
기위 출가를 해서 수행을 할라면 계(戒)를 청정히 지키되 계상에 떨어지지 말 것이며,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일념돈초공겁외(一念頓超空劫外)하면, 한 생각을 몰록, 한 생각 몰록 공겁(空劫) 밖에 뛰어나면,
원래(元來)로 불허노호지(不許老胡知)니라. 원래로 노호(老胡) 아는 것을, 노호 아는 것을 허락지 않을지라. 한 생각 공겁 밖에 뛰어난 소식(消息)은 노호도 이 도리를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노호(老胡)는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금일 대중은 이 해제일(解制日)을 맞이해서 부처님도 이 도리는 알았다고 허락할 수가 없는 그 도리를 향해서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오늘 새로 출가한 마음으로, 새로 태어난 마음으로 결제(結制)를 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죽음이, 죽는 것이, 죽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죽는 그 순간이 새로 태어나는 시간인 것이며, ‘해제(解制)다’ 이제 공부가 공부 기간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바로 동시에 새 결제가 시작이 된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참수행인이라 할 것이여.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것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그것이 죽을 사(死) 자, 죽음이라 하셨습니다. 그 한 생각 끊어진 그것이 죽음인 동시에 새로 태어나는 찰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생각 일어나고 한 생각 꺼지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生)이요 죽음[死]이라고 하는 것을 철저히 느낀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라야 비로소 정진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사(生死)에 대해서 “죽음이 언제 우리에게 오느냐? 죽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시일을 시간을 각기 말해 봐라”
제자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하루 동안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죽음은 한 시간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부를 못하겠다

그 또 한 사람이 나와서 죽음은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는 그 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죽음이 있습니다
음. 너는 공부하겠다 그리셨습니다.

지끔 40살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20년간은 정진을 할 수 있겠다 이리 생각하고, 한 50을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아무리 내가 빨리 죽는다 해도 환갑까지는 정진을 할 수 있겠다
30세 먹은 사람은 앞으로 내가 한 30년은 정진할 수 있겄다 20세 먹은 사람은 ‘30세까지는 경(經)을 보고, 30세부터서 참선을 해도 몇십 년간을 정진할 수 있으니까 충분하겠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모두가 다 정진을 못할 사람이라고 하는 규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 생각 하나가 철저하다면 입선(入禪) 방선(放禪) 시간이 어디에 있으며, 지켜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파해야 할 계율이 어디가 있으며, 정진을 해야 할 정진이 어디가 따로 있으며, 벌써 마음을 지어서 지키고, 마음을 지어서 정진을 하고, 마음을 지어서 잠을 안 자고 다 그르쳐 버린 것이고, 다 김이 벌써 다 새 버린 것입니다.
김새 가지고 정진을 하니 번뇌 때문에 정진을 못한다. 망상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혼침이 오기 때문에 정진이 안 된다. 수용(受用)이 박(薄)해서 정진을 못한다. 시끄러워서 정진을 못한다 이게 다 김이 벌써 다 빠져 버리고, 껍데기 송장이 송장 껍데기만 남아 가지고 정진을 한다고 하니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

화소산전(花笑山前)에 누천기(漏天機)요. 꽃이 웃는 산 앞에는 천기를 누설(漏泄)했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새가 노래하는 수풀 밖에는 남[生]이 없는 말을 하고 있더라. 무생(無生)의 도리를 말하고 있더라. 산 앞에 빨갛게 피고 있는 그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을 하고 있고, 숲 밖에서 새가 노래하는 것은 무생(無生), 무생의 진리를 설하고 있는 것이더라 그 말이여.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로구나.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일월성진과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은 제각기 스스로 영원무궁(永遠無窮)한 뜻을 가지고 있더라.
득래무처불봉거(得來無處不逢渠)라. 그를 만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일체 삼라만상 그 자체가 전부 천기를 누설한 것이요, 남[生]이 없는 진리의 표현일진대 산을 보면 산이요, 물을 보면 물이요, 구름을 보면 구름이요, 새를 보면 새요,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망상이 낱낱이 그대로 그놈을 버리고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고대로가 법신(法身)이요, 진여(眞如)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더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입을 벽에다 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산승이 무슨 (기계음)... 기계가 녹음기가, 마이크가 산승(山僧)을 대신을 해서 끝을 맺어 주었습니다. (처음~42분43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종일망망나사방(終日忙忙那事妨)~ /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려라 / 우선 당장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달라야 한다.

생사에 대한 무상(無常)과 두려움과 간절한 것이 북받쳐 오르고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 / 정진이라 하는 것은 결제 해제가 없어 / ‘깨닫기 전에도 부모 초상(初喪)을 당한 거와 같은 마음으로 정진을 하고, 깨달은 뒤에도 부모 초상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하라’

(게송) 선근성숙신무의(善根成熟信無疑)~ /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 / 가행정진 용맹정진 하되 정진상(精進相)에 떨어지지 말아야 /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 / (게송) 화소산전누천기(花笑山前漏天機)~.


공부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경계(境界)를 피할려고 그러고, 그 경계를 없앨려고 그러고, 일어나는 모든 번뇌와 망상을 누를려고 그러고, 그놈의 경계를 제(除)할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는 그 제(除)할려고 하는 생각이 또 하나 일어나는 것이다.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경계 일어나는 것은 그냥 고대로 놔두고, 그걸 제(除)할려고 하지를 않고 고대로 놔두기 때문에 경계가 나한테 하등에 상관이 없는 것이다. 화두(話頭)만을 딱! 거각(擧却)해 버리면, 화두만을 민첩하게 들어서 의관(疑觀)을 딱! 해 버리면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경계는 찰나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바쁜 가운데에 그 바쁨에 끄달리지 아니한 묘한 방법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무렴(無念)을 바래지도 않은 것이여. 무렴에 들어갔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다맛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고, 염염상속(念念相續)해서 화두를 거각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대, 그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이 되면 화두를 일부러 들려고 할 것도 없어.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이 터억 현전(現前)하기 때문에, 의단이 현전해서 시끄러운 경계에 부딪치거나 조용한 경계를 만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의단이 독로하면 버려야 할 물리쳐야 할 망상도 없고, 구해야 할 무렴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순일무잡한 경계가 일주일이 못 가서 의단(疑團)이 터져서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참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어떻게 진리를 깨달으며,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떻게 중생 교화(衆生敎化)를 해?
절박하고, 이 자기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잠을 자도 잠이 편안하질 못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맛이 없고,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무엇을 하거나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며, 마음이 편하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이 가슴에 미어지고 분심(憤心)과 신심(信心)이 솟구쳐 올라야만 이것을 발심(發心)이라 하는 것이여.

원래 석가모니부처님은 미륵부처님, 미륵보살보다 몇 겁(劫)이 더 뒤졌다 그 말이여. 공부 시작하는 것이 뒤져 가지고 응당 그 차례로 본다면 미륵부처님이 먼저 성불(成佛)을 해 가지고 출세(出世)를 하게 되었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미륵부처님을 앞질러서 성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더라도 이 도문(道門)에 도(道)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고 비약적인 것이기 때문에 올바르게 그리고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하면 설사 10년 20년을 늦게 이 도문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먼저 도를 성취한 것이다.

한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는 것을 언제나 느끼는 사람이라야 정진(精進)을 하는 것입니다. 한 호흡, 숨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인 것입니다.
계율도 중요하고, 음식도 중요하고, 의복도 중요하고, 거처도 중요하고, 모든 것이 다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이지만, 그 많은 중요한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한 호흡지간에 생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만 철저하게 갖춰진다면 다른 것은 전부 갖출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24. 21:27

 

 

(세등선원No.44)—계해년 하안거 결제 법어(83.04.17.음) (47분)


(1) 약 29분.

 

(2) 약 18분.


(1)------------------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나무~아미타불~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헌디  석기서반문어선(石磯西畔問漁船)이다.
은은히 다리가 들녘에 들 안개 속에 놓여져 있고, 강물에 잠겼다 나타났다 하는 돌이 놓여져 있는 서쪽 강변에서 고기잡이 배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무엇을 묻느냐 하면, 도화진일수류수(桃花盡日隨流水)헌디  동재청계하처변(洞在淸溪何處邊)고.
복사꽃이 종일토록 그 강물에 떨어져서 흐름을 따라서, 흐르는 물을 따라서 복사꽃이 흐르는데, 신선(神仙)이 사는 고을은,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이 맑은 강 시냇가 어느 곳에 있느냐?

무릉도원에서 그 도원(桃源)에 피어 있든 복숭아꽃이 떨어져 가지고 이렇게 강물을 따라서 계속 이렇게 흘르고 있는데, 반드시 여기에는 신선이 사는 고을이 있을 텐데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가 없으니 그 신선 사는 곳이 어디가 있느냐 하고 어부에게 묻더라 그 말이여.
깨달은 경지를, 확철대오한 경지를 신선이 살고 있는 무릉도원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偈頌)입니다. 복숭아꽃이 떨어져서 그 흐르는 물에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무릉도원이 이 강변 가 어디엔가는 있을 텐데 어디가 있느냐.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여름 안거(安居)가 시작되는 4월 17일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오뉴월 삼복더위 속에서도 더위를 이기고, 나아가서 그 더위를 잊어버리고 정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너무 자상하게 잘 들었습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그러는데 참선을 할 때 있어서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다음에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를 거각을 하는데, 힘을 너무 써.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이다,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그것이 몸뚱이를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가행정진을 삼고, 잠을 안 잔다던지 말을 않는다던지 밥을 굶는다던지 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서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않고 억지로 앉아서 배긴다던지, 이것은 그 육체를 조복(調伏) 받기 위한 면에서는 일리가 있다고 하겠지만, 진짜 참선은 육체를 억지로 억압을 하고 육체를 못살게 구는 것이 참정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일단 육체를 조복 받는 그러한 기간이 필요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서 제대로 정진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여. 선지식의 법문을 듣지 아니하면 평생토록 공부에 바른 의관(疑觀)을 잡는 법을 몰라서 그저 어거지로 몸뚱이만 못살게 구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데, 그러한 정진은 지나치면은 병(病)만을 얻게 만들고 도(道)는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늘 이 부처님 말씀대로 다른 도반(道伴)들보다 몇십 배를 애를 쓰고 정진을 해도 마침내 도를 얻지를 못하니까, 퇴타심(退墮心)이 나 가지고 퇴속(退俗)을 할려고 결심을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불러다 놓고, “니가 왜 퇴속을 할려고 그러느냐?”
“저로서는 목숨을 바쳐서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용맹정진을 제 출가 이래로 계속해서 했지만, 다른 도반들은 모다 깨달라서 성과(聖果)를 얻는데 저는 도무지 소식이 없으니 저는 도(道)에 인연이 없는가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럴 바에는 속가로 내려가서 부모 봉양(奉養)하고 속가에서 살면서 불법을 그저 믿고 살겠습니다”

“좋다. 내가 니 어째서 도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말해 주리라.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슨 업(業)을 삼았느냐? 무슨 직업을 가졌느냐? 니가 속가에 있으면서 무엇을 제일 좋아하고 했느냐?” 그걸 물으셨습니다.
“거문고를 좋아하고 거문고를 잘 탑니다”

“그래! 그러면은 그 거문고를 탈 때에 첫째, 그 줄을 고르는데, 그 줄을 너무 긴(緊)하게 졸라 매면 어떻게 되느냐?”
“자칫하면 끊어지거나, 또 끊어지지 않드라도 소리가 너무 강하게 매면 제소리가 안 들립니다“

”그러면 끊어질까 두려워서 너무 느슨하게 매면 어쩠드냐?“
”줄이 끊어지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너무 느슨하게 매면 제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그것 보아라. 참선하는 데 있어서도 해태(懈怠)를 부리고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도를 이루지 못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급한 마음을 가지고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지나치게 힘을 써도 거문고 줄을 너무 강하게 맨 거와 같이, 그것도 도를 이루지를 못하고 거문고 줄이 끊어지듯이 몸에 병만 쳐지고 도는 이루지 못하는 것이니라“
하! 그 말씀을 듣고서 그때부터서 참 중도(中道)를 지켜서 수행을 해 가는데 머지않아서 확철대오를 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이러한 말씀은 대단히 좋은 귀감(龜鑑)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럭저럭 병이 날까 봐서 어제에나 오늘이나 마냥 그저 정진을 하는데 시지부지 그럭저럭 지내는 것도 자기만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그 육체를 갖다가 억제를 하고 밥도 잘 안 먹고 잠도 잘 안 자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지나치게 들볶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 그러한 자세도 지혜롭지 못한 올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팔도에서 다른 권속 다른 혈통이 모여 가지고 석 달 동안을 같이 산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불법을 믿는 목적이 같은 도반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잘 대중 화합이 이루어지지만, 그 가운데 혹 괴각(乖角)이 하나 둘은 있을 수가 있어서,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회상(會上)을 가던지 그러한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잘 대중이 대처를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로 핀돌라[賓頭盧(빈두로)]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참 수행을 잘해서 성과(聖果)를 이뤘습니다.
그리고서 ‘내가 이렇게 성과(聖果)를 이루게 된 것은 첫째, 나를 낳아 주신 부모와 나를 길러준 나에 고향의 그 은혜다’ 이리 생각을 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가지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에도 법을 설해 주고, 또 마을 사람들 고향 사람들에게도 이 불법(佛法)의 종자를 심어 줘야 되겠다’ 이리 생각하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그 고향은 코삼비라고 하는 지방인데, 그 항하(恒河), 간지스 강(Ganges江)이 흘르고 있는 강변입니다.
이 모다 강물은 맑고 강변에는 야자수 나무가 늘어서서 그 서늘한 그늘이 져서 참 공기도 좋고 경치도 좋은 그러한 야자수 숲 아래 떠~억 앉아서 정진을 하며, 또 졸리면 포행도 하고, 그러다 때가 되면 걸식도 하고 이렇게 해서 야자수 나무에 쉬어서 좌선(坐禪)하고 있는데, 그때 그 지방에 성주 우다냐 왕과 그 왕비가 많은 모다 궁녀들을 거느리고 그 강가에 나와서 소풍을 하러 나왔었습니다.

그래 왕과 왕비는 여러 아름다운 궁녀들로 하여금 거문고도 타게 하고, 노래도 부르게 하고, 춤도 추게 하고, 그러면서 한바탕 즐기다가 왕이 좀 피로했던지 그 서늘한 데에 좀 한숨을 낮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비와 궁녀들이 그 왕이 잠이 드니까 무료해서 자기네들도 그 강가에 거닐면서 놀다가, 보니까 그 야자수 그늘 밑에 참 성스럽게 생긴 한 수행인이 떠억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까이 가서 보니까 너무너무 인물도 잘생기고, 그 얼굴과 몸매에는 너무너무 그 수행인으로서 성스러운 그 고상한 품격이 풍기니까, 그 앞에 가서 절을 하고서 “우리에게 좋은 법을 설해 주십시요” 이렇게 청을 했습니다.
그래 그 핀돌라 스님이 그 왕비와 궁녀들을 향해서 여러 가지 설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게 왕비와 궁녀들은 그 설하신 법문이 너무너무 훌륭해서 거기에서 법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듣고 있노라고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 우다냐 왕은 눈을 떠서 보니, 자기 옆에 모다 있을 왕비와 궁녀들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찾다 보니까 야자수 나무 그늘 밑에서 그 왕비와 궁녀들이 어떤 한가운데 스님 한 분을 놓고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질투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가자마자 “명색이 수행한다는 놈이 이쁜 여자들을 모여 놓고 잡담이나 하고 희희닥거리고 있다”고, “네깐 놈이 무슨 수행을 하는 놈이냐?”고, 칼을 빼 가지고는 쳐들어서 한칼에 쳐죽일 듯이 위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핀돌라 스님은 눈을 따악 감고서 조끔도 동요를 하지 안 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을 내지도 않고,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왕도 겁이 나 가지고 그 들었던 칼을 후려치지를 못하고.

그래 가지고는 그 근처에 마치 개미가 그 집을 짓고 수천 마리 개미들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발견을 해 가지고 그 개미집을 파다가 그 핀돌라 스님 얼굴에다 갖다 개미와 개미집을 압량해서 갖다가 퍼붓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개미들이 얼굴로, 목으로, 품속으로, 그냥 전신으로 개미가 버글버글 하면서 물고 뜯고 그래도, 그래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우다냐 왕이 참 감복을 해 가지고 무릎을 꿇고서 참회(懺悔)를 했습니다.
그런 뒤로 그 우다냐 왕은 그 핀돌라 스님을 자주 찾아 뵈웁고 법문도 듣고 여러 가지 참 지도를 받고 해서 그 핀돌라 스님의 정진력을 통한 인욕행(忍辱行)과 그 자비(慈悲)를 보이심으로 해서 그 왕실을 중심해서 이 정법을 갖다가 크게 선양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나타난 한 일화(逸話)지만,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느냐?

대중 가운데에 특별한 성격을 가진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어서, 대중스님네 공부해 나가는 데 또는 생활해 나가는 데 지장을 줄 만한 일이 있다 하드라도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인욕(忍辱)을 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발심(發心)을 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그러한 괴각이나 그러한 성격을 가진 분이 조끔도 대중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경책(警策)이 되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다냐 왕 그 포악(暴惡)한 언행이 결국은 핀돌라 스님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펴게 하는 좋은 계기를 맨들어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가 우리의 육근문두(六根門頭)에 항시 호시탐탐(虎視耽耽) 침입해 들어올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이 한 나라를 침범할 때에 덮어놓고 아무때나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안에 어떠한 헛점이 있을 때에, 그 헛점을 틈타서 침범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 나라가 상하(上下)가 전부 임금과 대신과 백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가지고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그 나라를 물샐틈없이 잘 지키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외적(外敵)은 침범해 올 수도 없고, 어떤 미친 마음을 가진 외적이 침범해 들어온다 하더라도 결국은 패배를 하고 도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그 안에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일신의 영달(榮達)을 생각하고, 밤낮 당파 싸움만 하고 국가와 민족을 애끼는 마음이 없이 그렇게 되면, 몇해 전에 자유 월남(自由越南)처럼 그렇게 되어 버리면은 아무리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가 가서 그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싸워 주고 무기를 대준다 하드라도, 그 나라는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수행하는 사람도 첫째, 자기 마음 안에 외적(外敵)이 침범하기 좋은 그러한 상태가 되어 있으면 외적은 육근(六根)을 통해서 언제라도 침범해 들어오는 것입니다.(처음~29분11초)





(2)------------------

부처님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말씀을 하시기를 “한 나무토막이 저 강(江) 상류에서 흘러내려 갈 때에 중간에 걸리지 않고, 또 양 강변에 걸리지 않고, 또 그 자체가 중간에 썩어버리지 않고서 계속 흘르기만 하면 그 나무토막은 마침내 바다에 도달하고 만다”

이 말씀은 수행하는 사람이 중간에 공부를 중단하지를 않고, 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나 오욕락(五欲樂)에 걸리지 아니하고, 또 자기 자체적으로 퇴타(退墮)하지 아니하고서 계속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쉬지 않고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한다고 하는 비유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른 자세와 바른 호흡과 바른 정신으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깨달음을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선방에 다녀도 종래 깨달음을 얻지를 못하고, 고민을 하는 그런 수행이나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퇴타해 가지고 공부를 포기를 하는 그러한 수행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항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첫째,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믿지를 못했거나 만나지를 못했을 것이고, 둘째는 설사 선지식을 만났다 하드라도,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부족해서 그렁저렁 정진을 했거나, 이러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오래가도 3년 아니면 10년이면 기어코 지혜의 눈을 뜨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과거 이미 무량겁(無量劫)이 지내갔고, 또 앞으로 무량겁토록 앞으로 우리 앞에 장래에도 무량겁이 있지만 언제나 그 한 생각이 흘러서 무량겁이 되었고, 앞으로 돌아올 무량겁도 언제나 그 기본 단위는 ‘한 생각’인 것입니다. 그 한 생각, 한 생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이고, 언제나 한 생각—앉아서 한 생각, 서서 한 생각, 밥 먹을 때 한 생각, 똥 눌 때의 한 생각, 입선 · 방선 · 소지 · 세수 이 그때 그때의 그 1초 1초, 한 생각 한 생각만을 단속을 하면, 앉아서도 상관이 없고 서서도 상관이 없고 누워서도 상관이 없고, 전혀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고 있느냐, 못하고 있느냐는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 생각만을, 언제나 한 생각이여. 하루 열두 시간, 스물네 시간도 결국은 1초 1초가 모여서 24시간도 되고, 1초 1초가 모여서 한 달도 되고, 석 달도 되고, 10년도 되고, 100년도 되기 때문에 그 1초 1초를 잘 단속을 해 나가면 100년도 단속을 잘하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정진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그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하고, 자기 공부하는 것도 그것을 봐야 해.
한 생각 단속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인이여. 한 생각 잘 단속하면 그 가운데 계율도 지켜지게 되고, 그 가운데에 모든 팔만세행(八萬細行)이 그 가운데 다 갖춰지는 것이여.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이요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니라
나무~아미타불~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방능정처사바하(方能靜處薩婆訶)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법불원찰나간(無法不圓刹那間), 찰나간(刹那間)을 단속을 잘하면, 한 법(法)도 원만(圓滿)하지 아니한 것이 없어. 만법(萬法)이 다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 말이여.
무죄불멸찰나제(無罪不滅刹那際)여. 찰나, 찰나를 잘 단속해 버리면 어떠한 죄라도 다 소멸치 못할 죄가 없더라.
한 생각 단속을 못해 가지고 일만 재앙이 거기서 일어나고, 일만 죄가 거기서 또 일어나고, 한 생각 단속하면 천하 없는 큰 죄도 찰나간에 소멸이 되어 버린다 그 말이여.

산진목전무일법(算盡目前無一法)헌디, 눈앞에 모든 일을 헤아리되 한 법도 없음이요.
어떻게 하는 것이 눈앞에 모든 법을 헤아려서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느냐?
좋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궂은 일을 당해도 ‘이뭣고?’ 속상하는 일을 보아도 ‘이뭣고?’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라 했는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타~악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거기에 따악 머무르도록.
숨을 들어마셔서,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배꼽 밑에 단전이 약간 볼록해지고, 차츰차츰 볼록해지면 8부쯤 들어마신 상태에서 딱 정지를 해 가지고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관조(觀照)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쉰단 말이여. 숨을 내쉼에 따라서 아랫배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등허리에 등허리 쪽으로 홀쪽해지도록.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실 때에도 아까 들었던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의 여운이 들어마시면서도 조옥 유지가 되도록, 그래 가지고 숨을 정지하는 그 시간에도 알 수 없는 그 의심이 따악 그때까지도 고대로 있도록 한단 말이여. 그다음에 또 숨을 조용허니 내쉬면서, 화두를 떠~억 들어,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이뭣고?’를 한다 그 말씀이여. 그러면서 숨은 차츰차츰차츰 숨은 나가는데 따라서 배는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래서 숨쉬는 것과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과 화두를 드는 것이 함께 이루어지도록.

처음으로 하는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뭣고?’ 하고 이렇게 화두를 들지만, 한 달 두 달 이렇게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그때마다 매번 화두를 들지 안 해도 괜찮아요. 한 서너번 쉬고 나서 또 화두를 한번씩 들고 이래도 되고.
화두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들어져 있으면 거기다 덮치기로 자꾸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괜찮은 거여.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면은 호흡을 열 번 스무 번 할 때까지도 화두 한번 드는 것으로써 조옥~ 고대로 그 의심이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해 가면 되는 거여. 그 의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석 달 동안 하루같이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제절로 대중은 화합이 될 것이고, 모든 장애는 일어날 까닭이 없는 거여.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안정이 되어서 하루하루 지내가는 것이 너무너무 소중하고 보람을 느끼고, 법에 기쁨이 항시 가슴속을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소화도 잘 될 것이니 몸도 건강하게 될 것이고, 호흡을 잘해 나가니 무슨 상기(上氣)가 거기에 걸릴 것이냐 그 말이여.


오늘은 여름 결제와 아울러서 또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은 오늘 백일기도가 시작하는 날입니다.
각기 가정에서 이 백일기도에 모다 동참(同參)을 하시고, 여기에서 정진하는 스님네와 ‘같이 결제(結制)를 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가정에서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일이 정 바쁘더라도 최소한 30분씩이라도 꼭 좌선(坐禪)을 하셔서 석 달 동안을 ‘백일기도 겸 결제를 했다’ 이리 생각을 하고 정성스럽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되도록 축원(祝願)을 합니다. (29분12초~46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은은비교격야연(隱隱飛橋隔野煙)~ /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 정진은 화두를 잘 잡드리하는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을 얻어야 하는 것, 선지식(善知識)의 법문(法門)은 거기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지혜로운 수행, 거문고 타는 것의 비유 / 핀돌라 스님의 인욕행 / 어떤 괴각(乖角) 스님이 있더라도 인욕(忍辱)하고 오히려 발심(發心)해서 정진해 나가는 데 좋은 채찍을 삼고 밑거름을 삼아라.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 한 생각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마는 그것이 해탈도와 생사윤회의 한계점(限界點)이 되는 것, 한 생각 단속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겁(永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
(게송) 무법불원탄지간(無法不圓彈指間)~ / 의관(疑觀)을, 의심관(疑心觀)을 항시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 가서 따악 있도록.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話頭)를 어떻게 거각(擧却)을 해 나가느냐?’
화두 하나만을 여법(如法)하게 거각해 나갈 줄 알면 참선하는 데 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화두를 여법하게 들 줄 모르기 때문에 혼침(昏沈)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망상(妄想)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억지로 그놈을 할려고 하니 몸뚱이만 강압적으로 억제를 해서 까딱하면 병이 생기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서 화두를 들다 보니 상기병(上氣病)이 일기도 하고.

미간(眉間)에다가 힘을 주고 찡그리면서 억지로 힘을 써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서울을 생각하면 서울이 환하고, 해인사를 생각하면 해인사가 환하고, 대구를 생각하면 대구가 환하고, 10년 전이나 20년 전 자기 어렸을 때 일을 생각하면 그때 일이 환하고, 그러한 정도에 생각을 가지고 알 수 없는 자기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입니다.

대중이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게 되면 첫째, 자기도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해 가려니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중이 모여서 정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언어나, 행동이나,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해야지,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은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 있어서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정진(精進)을 해 가다 보면 외부로부터서 자기에게 주어진 그러한 상황보다는 자기 마음 내부에서 일어나는 팔만사천 번뇌, 팔만사천 마구니의 책동이 참으로 중대하다 할 것입니다.
흔히 그 원인이 밖에 있고,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서 자기의 인격을 무시당하고 자기의 공부를 방해 친다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은 언제나 자기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에 놓여지더라도 자기를 잘 다스려 나갈 수가 있고,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자기는 향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만, 모든 원인을—‘모든 마구니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기는 그 마구니로부터에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고, 또 향상되어 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수행(修行)은 자기 마음 한 생각을 단속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어서, 한 생각이 삐끌어지면 무량겁(無量劫)을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한 생각을 잘 돌리면 무량겁 윤회로부터서 해탈도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으로 인해서, 수행인은 그래서 어떠한 것보다도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것이 한 생각 무서워할 줄 아는 사람은 수행을 게을리할 수가 없는 것이고, 도업(道業)을 이루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나 한 생각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좌(坐)에 국집(局執)을 해서, 네 시간 다섯 시간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精進)을 삼지를 말으라’ 하셨는데, 그 오래 앉아서 버티는 것은 앉으는 오뚜기 공부지, 그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잠을 오래 안 자고, 옆구리를 땅에 안 대고 오래 앉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로 태어난 사람은 제일 먼저 도(道)를 통(通)할 것이고, 불면증이 있는 사람은 제일 먼저 도를 통할 것이고, 말을 안 하는 것으로써 정진을 잘한다면 벙어리는 나서부터서 도통(道通)을 해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앉고 서고 눕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생각 단속을 어떻게 잘하느냐?’ 거기에다 촛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일천 가지 만 가지 일체처(一切處) 일체사(一切事)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무엇을 맡거나, 몸에 무엇이 부딪치거나, 생각에 어떠한 일이 떠오른다 하드라도 1초 여유도 두지 아니하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척! 돌이켜 버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3. 4. 16. 10:34

(세등선원No.42)—임술년(壬戌年) 동안거 반산림 법어(1982.11.30.음) (63분)

 

(1) 약 26분.

 

(2) 약 37분.


(1)------------------

황앵(黃鶯)이 상수일지화(上樹一枝花)허고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임술년 삼동 안거(三冬安居)에 반산림(半山林) 법회날입니다.
산승(山僧)이 법상(法床)에 올라와서 주장자(柱丈子)를 들어 보이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한번 치고서 게송(偈頌)을 읊기를,
황앵(黃鶯)이 상수(上樹)하니 일지화(一枝花)요, 노란 꾀꼬리가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요.
백로하야천점설(白鷺下野千點雪)이다, 흰 해오라비가 들에 내리니 천점(千點)에 눈송이더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특히 비구니 정인 복위(伏爲) 망모(亡母) 고성이씨 인화 영가(靈駕)와 망부(亡父) 진주강씨 화엄 영가와, 고영훈 복위(伏爲) 망(亡) 성주배씨 귀남 영가가 사십구재(四十九齋)를 기해서 이 자리에 모시고 이 법문을 듣고, 무량겁 죄업이 눈 녹듯이 다 녹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禪師)에 법을 이어받으신 천룡선사(天龍禪師)가 계셨는데, 그 천룡화상에 법을 이어받은 구지화상(俱胝和尙)이라 한 도인(道人)이 계셨습니다.
그 도인은 처음에 금화산(金華山), 금화산에 암자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 암자에서 지내시면서 준제주(准提呪)를, '옴 자례주례 준제 사바하' 하는 그 준제주를 어떻게 열심히 그 주력을 해서 얼마를 했는지 몇 해를 했는지 하여간 수없이 많은 세월 동안을 준제주를 해서 '나무칠구지불모(南無七俱胝佛母) 대준제보살(大准提菩薩)' 그 칠구지(七俱胝), 구지라고 해서 그 준제주를 어떻게 많이 했던지 그 스님의 별명이 구지(俱胝) 스님이 되었어.
본래 불명(佛名)도 있었고 그랬겠지만, 법명(法名)도 있었겠지만, 너무너무 그 준제주를 했기 때문에 구지화상이라, 그렇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 말이여.

그런데 하루는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比丘尼) 스님이여, 실제 스님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억 갓을 삿갓을 쓰고, 방갓을 쓰고 턱 그 암자에 찾아와서, 그 구지 스님이 앉아 있는 승상(繩牀)을 한바꾸 삥 돌고서 떠억 그 앞에 뻣뻣허니 서 가지고서는, “한마디를 일러야, 스님이 한마디를 일러야 내가 이 머리에 쓴 삿갓을 벗겠습니다. 어서 한마디 일러주시죠”
구지 스님이 아 입이 딱! 붙어 갖고 뭐라고 답을 못했어. 또 빨리 이르라고 재촉을 해도 또 못 일르고. 세 번을 일르라고 재촉을 했지만, 종래 이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실제(實際) 비구니가 팔을 흔들며 소매를 흔들면서 나가는데, 그 구지 스님이 “날도 저물고 그러니까 하루밤 쉬어 가지 그냥 가냐”고. “한마디를 일르면 내가 쉬어 가겠지만 이르지를 못하면은 가겠노라”고. 그래 또 구지 스님이 답을 못했어.

그래서 그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이 떠났는데, 그 비구니가 떠난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명색이 대장부(大丈夫)로서 여승(女僧)이 묻는 말에 한마디를 답을 못하고 이러한 분통 날 노릇이 있느냐, 내가 어찌 장부라고 누구 앞에 고개를 들을 수가 있겠는가’ 탄식을 하고, ‘이 암자를 불질러 버리고 선지식(善知識)을 찾아 나서서 도를, 행각(行脚)을 하면서 도를 닦을 수밖에는 없다’ 이리 마음을 먹고서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그 금화산 산신(山神)이 꿈에 떠억 나타나 가지고 ‘절대로 스님이 이 도량(道場)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며칠 안 있으면 육신보살(肉身菩薩)이 찾아와서 법(法)을 설해 주면 반드시 대도를 성취할테니까 이 절을 떠나지를 마시오’ 깜짝 놀래서 눈을 떠 보니 꿈이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며칠이 지난 다음 어떤 스님이 떠억 왔는데, 그 스님이 누구냐 하면 아까 말한 대매법상(大梅法常) 선사에 법을 이어받은 천룡화상(天龍和尙)이라 하는 큰스님이여. 그 스님이 와서 아 그 실제 비구니가 물어서 대답을 못한 그 말씀을 고대로 말씀을 드렸어.
그러니까 그 천룡 스님이 “그러면 그 실제 비구니가 물은 대로 그대가 나에게 물어라”

“도득(道得)하면 내가 이 삿갓을 벗겠으니 한마디를 일러주시지요” 그렇게 천룡 스님께 떠억 물으니까, 천룡 스님이 손가락만 이렇게 탁! 들어서 세웠어. 그 거기에서 이 구지 스님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평생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무슨 법을 묻든지—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묻던지, 어떤 것이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도(道)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생사(生死)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보리(菩提)냐고 묻던지, 어떠한 것이 열반(涅槃)이냐고 묻던지, 무엇을 묻던지 간에 손가락만 한번 딱!—평생 동안 법문을 입으로 설하지 아니하고, 무슨 법을 묻던지 손가락만 한번 딱 들어.

그래 가지고 많은 사람이 그 구지(俱胝) 스님을 찾아와서 그 손가락 법문만을 듣고 가고, 듣고 가고 했는데, 하루는 그 구지 스님이 어디를 출타를 하고 안 계실 때에 어떤 스님이 왔어.
그런데 그 구지 스님을 시봉(侍奉)하던 어린 사미승(沙彌僧)이 하나 있었는데, 그 “큰스님이 어디 출타를 하고 안 계십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 큰스님께서 평소에 어떠한 법(法)을 설하셨는가? 그걸 큰스님 대신 그 법문을 좀 한마디 해 달라고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손가락을 요렇게 딱 들어 보였어.

그래서 그분이 갔는데, 얼마 있다가 그 구지 스님이 돌아오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 없었더냐?”
“어떤 객스님이 와서 법을 묻길래 제가 법을 스님 대신 설해 줬습니다”

“니가 무슨 법을 어떻게 설해 주었단 말이냐?”
“아, 내 그까짓 것 제가 모르겠습니까? 여러 해 동안을 내가 스님 밑에 있었는데 스님 법을 제가 잘 압니다“

”어떻게 설했느냐?“
”손가락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그러거든.

그 다음에도 어디서 누가 와서 법을 물으러만 오면 지가 손가락을 딱! 들어 보였던 거여. 그래서 그 구지 스님이 품에 잘 든 칼을 하나 따악 가지고 있다가 손가락 탁 드는 놈을 갖다가 탁! 쳐서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미승이 대성통곡을 하면서 ’인제 중노릇 안 하고 나 간다‘고 막 달아나. 울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큰소리로 부르니까, 아 그래 울면서 그놈이 뒤를 요렇게 홱 돌아다본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탁 들어 보였습니다. 아! 거기에서 그 어린 사미승이 확철대오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지내서 그 구지 스님이 인자 열반(涅槃)에 드시게 되었습니다.
대중을 모아 놓고 마지막 열반 법문을 하시는데, “내가 천룡화상으로부터 일지두선(一指頭禪)을 얻었는데, 한 손가락 참선을 얻었는데 일생 동안을 이것을 받아 쓰되 이것이 다하지를 못했어” 아직도 일생 동안을 썼건마는 바닥이 안 났다 그 말이여. “일생 동안을 수용을 해서 다하지 못했노라” 그렇게 떠억 한마디를 하시고 고대로 앉아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실제(實際)라고 하는 비구니로 인해서 대분심(大憤心)이 발(發)해 가지고 결국은 그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을 해 가지고 일주일이 되었던지 열흘이 되었던지, 그 신심과 분심과 의단이 돈발한 상태에서 천룡 스님의 손가락 한번 탁! 드는데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또 관계(灌溪) 선사라고 하는 큰스님이 말산요연(末山了然) 비구니한테 맥혀 가지고 3년 동안을 그 비구 스님이 말산이라고 하는 비구니 시봉을 했습니다. 원두(園頭)를 보면서 그 비구니 밑에서 3년 동안을 시봉을 하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확철대오를 했습니다.

인도에서도 부처님 당시에 연화색(蓮花色) 비구니라고 하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 비구니도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해서 광명을 발하고 대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佛法)을 빛낸 비구니가 있었고, 중국에도 이 말산요연이라든지 이 실제 비구니 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비구니가 있었어.
한국에도 월명각시라든지, 또 근자에는 덕숭산에 법희 스님이라든지 또 범어사에서 일생을 지내던 만성 스님이라든지, 그밖에도 여러 비구니로서 대도를 성취해 가지고 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고, 많은 이익을 후배들에게 끼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짓달 그믐날이 돌아와야 반산림(半山林)이 되겠습니다마는, 이 세등선원(世燈禪院)은 매년 동짓달 스무이튿날 반산림 법회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세등 스님이 그 생일이 바로 이 동짓달 스무이튿날이라, 당신 생일을 기해서 이 대중스님네께 공양(供養)도 올리고 또 그 아울러서 법회를 갖는다면 참 좋겠다' 해서 그 문인(門人)들도 그렇게 원하고.
또 그래서, 참 대단히 좋은 일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선원(禪院)을 창설을 해서 제방(諸方)에 선객(禪客) 스님네들을 이렇게 모시고, 이렇게 이 선원을 경영을 하고 정진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출가한 사람으로서 자기도 정진하고 다른 선객 스님네도 공부를 할 수 있게 하고, 사부대중이 모여서 이렇게 법회를 갖는 것은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을 수가 없고, 참 대단히 환희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처음~25분39초)





(2)------------------

이 금년에는 모다 여러 군데서 처음 오신 분들, 오신 수좌(首座)님네들이 많이 있어서...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하고, 셋째에는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참구(參究)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 자세, 호흡>

‘자세를 바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데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거나, 앞으로 숙거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몸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딱 하되 단정(端正)하게 앉되 목이나 어깨나 이런 데 힘을 너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자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전호흡이 좋다’ 한 말은 다 듣고 알고 있지만, 실지로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기는 썩 어렵습니다. 덮어놓고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오래 참았다가 숨을 내쉬고 이렇게 무리하게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납니다.
부작용이 어떻게 나냐 하면, 가슴이 콱 맥혀서 답답하고 오히려 소화가 잘 안되고, 또 목이 뻣뻣하게 해져서 더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 따라서 이 단전호흡을 하되 정말 올바르게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러면 올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숨을 들어마실 때에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 것. 또 들어마신 상태에서 호흡을 정지를 하는데, 딱 근치고 한참 동안 있는데, 그 정지하는 시간을 너무 오래하지 말 것. 또 정지를 한 다음에 다시 또 숨을 내쉬되, 내쉬는 시간도 너무 오랫동안 걸려서 내쉬지 말 것.

들어마시는 시간도 자기 호흡 형편에 적당하도록, 처음에는 한 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머무르는 시간도 약 3초 동안 그런 정도만 머무르고, 또 내쉬는 시간도 약 3~4초 동안, 그러니까 한번 들어마셨다가 머물렀다가 내쉴 때까지 한 그 호흡을 약 10초 정도로만 걸려서 하도록. 그러면 누구라도 별로 그렇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에 별탈이 없습니다. 숨이 가쁘거나 답답하거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1년, 이태 이렇게 해 가다 보면, 차츰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조끔씩 조끔씩 길어질 것입니다.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숨이 길어지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그런 정도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3초, 3초, 3초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한 정도로 처음에 시작을 하면,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하고 또 짧으면 짧은 대로, 꼭 길다고만 좋은 것이 아니니까 억지로 길게 하지 말어라 그 말이여.


그런데 이 단전호흡, 본격적으로 본(本) 단전호흡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어.
그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가는데, 그 준비호흡이라 하면, 처음에 이렇게 따악 가부좌나 반가부좌를 하고 이렇게 앉으면,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몸을 끄떡끄떡 궁둥이가 뜰썩뜰썩 하도록 몸을 이렇게 서너 번 이렇게 흔드는 거여. 이렇게 서너번 흔들다가 한가운데다가 몸을 따악 안정을 하는 거여.

이렇게 안정이 되었으면 어깨의 힘도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은 감지를 말고 평상(平常)으로 따악 떠요. 너무 눈을 이 코 끄터리를 본답시고 너무 가늘게 뜨면, 처음에는 좀 조용하니 좋은 것 같애도 머지않아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가 있으니까, 그렇게 눈을 너무 절대로 감어서는 안되고, 또 감지는 안 해도 너무 가늘게 떠도 못써요.
눈을 평상으로 떠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부터 약 3m 지점에다 눈을 떨구면 되는 것이여. ‘떨군다’고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응시(凝視)를 하거나 주시(注視)를 하지 말고, 평상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 그렇게 하고,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이게 인자 자세를 바르게 하는 거여.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될 수 있으면 가뜩 그리고 빨리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실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 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한참 동안 참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는 거여. 10초가 되었건, 20초가 되었건, 참었다가 더이상 못 참을 때, 입을 조끔 벌리고서 입으로 후~ 하고 이렇게 숨을 내뿜는 거여. 아까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던 가슴이 내쉬면서 차츰차츰차츰 가슴이 홀쪽해지면서 완전히 다 내뿜어 버려.

다 내뿜었으면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동안 참었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쉬는 거여. 다 내쉬었으면 또 세 번째 또 들어마셔. 가뜩 들어마셨다가 한참 참은 뒤에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입으로 후~ 하고 내쉬는 거여. 이렇게 세 번을 하는 것이 이것이 준비호흡이라 하는 거여.
이렇게 준비호흡을 세 번 하고 나면, 가슴 구석구석에 묵은 공기가 완전히 다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가슴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여.

그렇게 한 다음에 인자 본(本)호흡으로 들어가는데, 수르르르~ 허니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약간 드는 듯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는데, 본호흡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하면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셨으면, 아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지만, 이 준비호흡 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가뜩 들어마셨지만,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그렇게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녀. 8부쯤만 들어마시는 거여. 8부쯤만 들어마시되 아랫배 단전(丹田)이 볼록하도록 느끼면서 8부쯤만 들어마셔.

8부쯤 들어마셨으면, 하나 · 둘 · 셋 약 3초 동안을 정지를 했다가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을 할 때는 입으로 후~ 하고 내쉬었는데 이 본호흡에 들어가서는 입으로 내쉬는 게 아녀.
입은 가만 놔두고 코로 내쉬는데, 내쉬면서 단전(丹田), 아까 볼록해졌던 단전이 차츰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조용하게 코로 내쉬어요. 내쉬되 너무 하나도 없이 완전히 내쉴라 하지 말고, 내쉴 때도 또한 8부 정도만 내쉬어.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는데, 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물론 코로 들어가는 것은 틀림이 없어.
뭐 그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그러면 이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그 호흡이 저 단전 밑에까지 들어간다고 억지로 할라고 하니까, 가슴에 꽉 맥혀 가지고 저 밑에까지 내려가지를 않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끼거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호흡은 허파까지 밖에는 안 들어가요. 허파 밑에 가서 또 횡격막(橫隔膜), 가로막이 있는데, 가로막에 딱 걸려 가지고 절대로 호흡이 저 단전(丹田) 밑에까지 내려가지 안 혀. 내려가지 않는데 억지로 그 내려 보낼라고 하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못 견디게 되는 거여. 꽈악 여가 맥혀 가지고 얼마를 애를 먹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준비호흡을 할 때는 가슴을 들면서 가뜩 들어마셨다가 완전히 내뿜고 해서 이 가슴 속에 있는 공기를 소지[掃除]를 해야 하지만, 준비호흡이 끝난 다음에 본호흡으로 들어갈 때에는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이렇게 내보낸다’고 그리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뒤에 궁둥이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기분으로 그렇게 맨들어라 그 말이여. 바람이야 그리 들어가건 말건.
그러면은 의식적으로 배를 볼록이 하니까, 실지로 바람이 거기까지 들어간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들어마셨으면, 8부쯤 들어마셨으면 정지를 했다가, 정지하는 시간도 약 3초, 나중에 익숙해지면 뭐 3초 4초 5초 좀 늘궈도 상관이 없지만, 처음에는 약 3초 동안만 해요, 부담이 없이. 그래 내쉴 때는 배를 차츰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그런 기분으로 하라 그 말이여. 그러면 조끔도 가슴이 답답한 게 없어.


<화두는 언제 드느냐>

그러면 화두는 언제 드느냐 하면,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질 때 그때 ‘이뭣고?~~~~~’ ‘이뭣고?’를 길게 하면서 숨을, 배를 차츰차츰 홀쪽이 하면서 숨을 내쉰단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하라 그 말이여.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셨다가 또 3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뭣고?~~~’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하지만, 차츰차츰 공부가 익숙해지면 숨 내쉴 때마다 화두를 안 들어도 상관이 없어요. 두 번, 세 번 내쉴 때까지도 화두(話頭)는 한번만 드는 상태에서 숨을 그렇게 하고.
나중에 참으로 화두가 익숙해지면 아침에 떠억 한번 화두를 들고서, 계속해서 호흡은 하면서도 화두는 한번만 들고서, 그 한번만 들어 가지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들면 그 의단만을 관조(觀照)해 나가면 되는 거여.

자꾸 뭐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게 아녀요. 드문드문 화두를 놓쳐버렸거나, 딴생각이 들어왔거나, 또는 화두를 놓치진 안 했건만 의단(疑團)이 희미해졌을 때 가끔 한번씩만 챙겨줘도 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따악 현전(現前)해 있으면 그것이 이미 화두가 들어져 갖고 있는 거여, 그게. 그러기 때문에 들어져 있는 데다 자꾸 덮치기로 ‘이뭣고 이뭣고’ 안 해도 된다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마삼근(麻三斤)을 하는 사람은 ‘어째서 마삼근이라 했는고?’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만이 따악—앉아서도 그 의심이요, 서서도 그 의심이요,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의심이요, 똥을 누면서도 그 의심이요,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도 그 의심, 알 수 없는 의심이 항시 들려져 있도록.

조끔도 조급한 생각을 낼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해태심(懈怠心)을 낼 것이 없어.
앉었거나 섰거나 누웠거나 밥을 먹거나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그 사람이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억지로 잠을 안 자고 그냥 막 해댄다고—화두가 성성(惺惺)허니 들려져 있지 아니하면은 잠을 안 잔다고 공부 되는 것이 아니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앞으로 한 열흘이 지내면, 7~8일이 지내면 납월팔일(臘月八日),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는데, 섣달 초하루가 돌아오면 옛날부터 선방(禪房)에서는 가행정진이나 용맹정진을 하는 것이 한 준례가 되어 있는데.
참 이 출가(出家)한 분상(分上)에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그날을 기해서 우리도 밤잠을 안 자고 정진을 해보자는 생각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또 그날을 우리가 평범하게 지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만공(滿空) 큰스님이나 또 이 전강(田岡) 조실 스님이나, 여러 그 구참 선지식(善知識) 스님네들의 말씀을 들으면 용맹정진을 하는 것도 그것이 일리가...(녹음 끊김) 바 있는 사람보단 오히려 상기병을 얻거나 무슨 정진상에 부작용이 일어나서 역효과를 내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이거여. 이건 경험상으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거여.

그래서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잠을 안 자 놓으면 화두도 간 곳이 없고, 그저 잠만 안 잘라고 일주일 동안 그 경책(警策)을 안 맞을라고, 그저 잠 안 잘라고 하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서 가지고 맑은 정신은 하나도 없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는 자기는 꾸벅꾸벅 이렇게 졸면서도 장군죽비(將軍竹篦)로 때리면은, ‘안 잤는데 왜 때리냐?’고, 이래 가지고 신경질을 내고 쌈을 하고.

뭐 선방에서 이 납월팔일(臘月八日) 용맹정진하면 가끔 그 쌈이 벌어지고, 정신이 없어 가지고는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고.
시계, 덜렁덜렁 하는 시계추를 갖다가 뜨윽 갖다가 빼 가지고는 부처님 탁자 앞에다 갖다 놓고 절을 하는 사람이 없는가, 옆에 사람보고 왜 때리냐고 그냥 쌈을 거는 사람이 없는가, 어떻게 잠이 오던지 화장실에 가서 오줌을, 옷을 벗고 오줌을 눈 채 한 시간 두 시간을 그냥 자버린 사람이 없는가, 그래서 많은 모다 그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마는.

우리 세등선원에는 그전부터서 용맹정진보다는 가행정진을 하는 것이 좋다 해서 해마다 이 가행정진을 해 오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자 그 준례에 따라서 10시나 11시나 적당한 시간에 자서, 3시나 2시, 이렇게 해서 한 서너 시간 재워 주고, 그리고서 정진을 하되 그 7일 동안은 일체 묵언(默言)을 하도록.
이렇게 하고, 마지막날, 7일 날 저녁에는 그때는 정말 용맹정진해서 잠을 자지 않고 그 이튿날 예불할 때까지 떠억 정진하도록. 이렇게 해서 가행정진이지만 용맹정진이나 거의 같지요. 그렇지만 서너 시간 재워 주기 때문에 정말 참 알차게 정진을 하게 되죠.

혹 여러 대중이 모였으니까, ‘그 가행정진보다도 용맹정진하자,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가지신 분도 있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또 이 세등선원에 와서는 또 세등선원에 준례에 순응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수행인으로서 참 좋은 일이니 만큼 그렇게 모다 가행정진을 하도록 부탁을 합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깨닫기를 기다리지 아니해도 반드시 그 사람은 별 장애가 없이 육체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정진상에 아무 부작용과 장애가 없이 대도를 성취하고만 말 것입니다.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 채 중간에 몸에 병이 생긴다든지, 상기병이 생긴다든지, 무슨 위장병이 생긴다든지, 혈압병이 생긴다든지 이리 되면 가뜩이나 근기(根機)는 하열(下劣)하면서 그런 장애가 일어나면 여간해서 그러한 고비를 극복하기가 힘이 듭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상기병이 나거나, 위장병이 나거나, 뭐 피가 목구녁에서 넘어오거나 그까짓 것을 문제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거기에서 더 신심을 내고 분심을 내고, 그것을 그 병(病)을 도반(道伴)으로 알고 선지식으로 알고 그저 앉아서 못 견디면 포행(布行)을 하고, 포행을 해서 못 견디면 또 앉아서 하고 이렇게 해 가지고 조끔도 정진을 늦추지 아니하고, 계속 지혜롭게 그 고비를 넘겨 가지고 대도를 성취하면서 그 병까지도 굴복을 받아 버리는 그러한 예가 많습니다.

병이 났다고 해서 그까짓 것 두려워할 것은 없지만, 기왕이면 처음부터서 올바른 수행법으로 수행을 해 가지고 그러한 장애에 걸리지 않도록 한다면은 그것이 더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이여. 상기병 무서워서 공부 못하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을 알아서 한다면야 그것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 말이여.


이 가운데 만성 스님이나, 법희 스님이나, 또 월명각시나 또는 말산요연 비구니나 또는 아까 말한 그 실제 비구니나 연화색 비구니와 같은 그러한 도인(道人)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어. 반드시 나는 이 가운데 많은 도인이 나오리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이 세등선원에서 수없는 도인(道人)이 나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도인이 얼마만큼 나오냐 하는 것은 여러 대중스님네들의 분심(憤心)과 신심(信心)과 의단(疑團)으로 정진을 어떻게 하느냐 온전히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옥희라고 하는 보살님이 당신의 칠순일을 맞이해서 여러 대중스님네께 이렇게 공양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공양을 여러 사부대중께서는 맛있게 공양을 하시고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고 아울러서 이 이옥희 보살의 수명장수하고 금생에 이 불법에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세세생생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서 내생에는 부처님 제자로서 부처님의 지혜의 법등(法燈)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축원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이 고성이씨 인화 영가, 진주강씨 화엄 영가, 성주배씨 귀남 영가는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과 산승(山僧)에 설한 이 간곡한 말씀을 듣고, 무량 영겁(永劫)에 죄업이 다 소멸이 되어서 극락세계나 도솔천내원궁에 왕생을 하셔서 다시 이 사바세계에 환생(還生)을 해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소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것을 머리털, 귀밑털 희어지는 것을 희어지기를 기다리지를 말어라. ‘늙은 뒤에 하리라. 좀 더 있다 하리라’ 뒤로 미루지를 말어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쑥대밭 속에 무덤이 다 소년에 무덤이니라.
주검이 어찌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어려 뱃속에서 죽기도 하고, 나다가 죽기도 하고, 어려서 죽기도 하고, 소년 청년에 죽기도 하고, 젊어서 죽기도 하고 그런 것이지, 꼭 늙은 70, 80 먹은 뒤에만 죽는 것이 아녀.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이것이여.

일실인신기시환(一失人身幾時還)이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언제 돌아올 것이여? 사람 몸 받아 나기가 눈먼 거북이가 천 년만에 한번씩 바다 위에 올라와서 숨을 쉬는데, 그때 마치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야 그 나무토막에 의지해서 숨을 쉬고 들어가는데, 눈 뜬 거북이가 나와서도 그 나무토막 만나기가 어려울텐데, 더욱이 그 매일같이 올라와도 혹 모르는데, 천 년만에 한번씩 눈먼 거북이가 바다 위에 떠올라 가지고 구멍 뚫어진 나무토막을 만나기 만큼 어렵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몸 받아 나기가 어려운데, 이 몸뚱이 한번 잃어버리면,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잃어버리면 언제 사람 몸을 받아 날 것이냐 이 말이여.
그리고 지옥이라는 데는 한번 떨어지면은 나올 기약이 없어. 억만겁을 그 안에서 지내야 하는데 나올 기약이 없어. 그러니 사람 몸 받아 났을 때 그 정진을 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해야겄드라 이 말씀이여.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25분44초~62분5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황앵상수일지화~ / 어째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 구지(俱胝) 스님의 일지두선(一指頭禪).

참선 자세. 단정하면서도 힘은 다 빼야 하는 것입니다 / 단전호흡(준비호흡, 본호흡) / 화두는 언제 드느냐? / 무엇을 하건 화두 의단(疑團)만 독로(獨露)해 있으면 그 사람이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있는 사람 /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화두 하나만 제대로 떠억 들 수 있다면 깨닫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게송) 수행막대빈모반~ / 늙어서만 죽으라는 법은 없어. 그러니까 늙기를 기다리지 말고, 이만 할 때에,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 할 때에 정진을 해라.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현재 이 세등선원에 방부(房付)를 들인 50여 명에 선객(禪客)들과 여러 청신사와 청신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우리에 선망부모(先亡父母) 영가(靈駕)들도 이 자리에,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은 언제 미(迷)한 때가 없건마는, 우리 중생은 그 진여불성을 미(迷)해 가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미(迷)한 때가 없는데 육도윤회를 하느냐?
‘이 도리는 모든 부처님들이 서로 보지 못하고, 석가(釋迦)도 오히려 아지를 못하고, 삼세제불(三世諸佛)도 벽(壁)에다가 입을 걸었으며, 일천 성현(一千聖賢)도 또한 아지를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석가(釋迦)도 아지 못하고 천성(千聖)도 아지 못한 이 도리를 어떻게 설(說)하며 어떻게 이 도리를 들으며, 가히 설할 수가 없고 가히 들을 수가 없건마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는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서 이 도리를 설하셨고, 역대 모든 성현들도 인행시(因行時)에 이 도리를 위해서 수없는 목숨을 바쳐 왔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부대중도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주삼야삼(晝三夜三)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精進)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설(說)할라야 설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설해야 하는 것이며, 들을라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성을 바쳐서 들을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는 승속(僧俗)이 있고 남녀(男女)가 있지만, 불법(佛法)에는 승속과 남녀가 없어. 누구라도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다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고, 확철대오를 하면 부처님에 법등(法燈)을 이어받어서 빛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흡을 바르게 하는 건데, 호흡은 단전호흡(丹田呼吸). 부처님 때부터서 이 단전호흡, 수식관(數息觀) 단전호흡은 아주 철저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단전호흡을 잘하면 몸 안에 있는 독소(毒素), 노폐물(老廢物) 이런 것이 다 이 단전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다 배설이 되고, 몸 오장육부(五臟六腑)와 사지백체(四肢百體) 속에 구석구석이 숨겨 있는 모든 노폐물이 다 이 호흡을 통해서 밖으로 배설이 돼.
따라서 몸이 가벼워지고 피가 맑어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정신이 맑아져서 그래서 참선을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되 이 단전호흡을 올바르게 하면, 상기병(上氣病)도 미연에 방지를 하고, 설사 상기 증세가 좀 있다 하더라도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결국은 이 상기병도 나을 수가 있습니다. 소화불량, 위장이 좋지 못해서 소화가 잘 안된 사람도 이 단전호흡을 잘 해 나가면 소화도 잘되는 것입니다.

호흡은 코로 들어가지 다른 데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분으로는 우리 생각으로는 ‘코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들어마신다’ 이런 기분으로 들어마시라 그 말이여. 들어마시면 아랫배가 볼록해지거든.
또 내쉴 때도 물론 코로 나가지만 ‘코로 나간다’는 기분을 갖지 말고 ‘저 뒤로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저 뒤로 내보낸단 말이여. (내쉬면 아랫배가 홀쪽해지도록)
호흡은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저 뒤에로 나가 버려. 일직선(一直線)으로 뒤에서 들어왔다가, 또 뒤로 나가고 이런 기분으로 호흡을 해보라 그 말이여.

화두만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잘 들려져 있으면 일을 해도 그것이 정진(精進)이요, 포행(布行)을 해도 그것이 정진이요, 몸이 괴로워서 조끔 누워 있어도 그것이 정진이여. 꿍꿍 앓으면서도 ‘이뭣고?’ 알 수 없는 의단만 독로해 있다면 그 사람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는 사람이여.

만공 스님께서도 ‘참으로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려면 한 시간씩을 더 자 줘라’ 이런 역설적인 법문도 설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시간을 더 자 줌으로써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 이튿날 낮에 참으로 성성(惺惺)하게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이것입니다.

세등선원을 창건한 이 창건주와 이 세등선원을 짓는데 그 시주(施主), 화주(化主)한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의 그 원력과 신심에 보답을 하고 마침내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아서 부처님의 제자로서에 우리의 도리를 다해서 나도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우리의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지 못할 일대사(一大事)라 할 것입니다.

아까 산승이 주장자를 드는데 같이 주먹을 들었는데, 할 말씀이 있습니까?
니우입해성룡거(泥牛入海成龍去)로구나. (주장자를 치시고) 진흙소는 바다에 들어가서 용이 되아 갔다 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1~25)2021. 12. 1. 17:46

 

((세등선원No.08))—1976(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17) (39분)

 

 

(1) 약 21분.

 

(2) 약 19분.

 


(1)------------------

금방 전강 조실 스님께서 「무자십절목(無字十節目)」 법문 설하신 것을 들었는데, 조사(祖師) 공안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되는 가운데에 이 조주(趙州)의 무자(無字)는 옛날부터 가장 많이 논란되고, 또 많은 스님네들이 이 무자(無字)를 통해서 정진을 하고 무자(無字)를 통해서 많은 참 깨달은 분들이 나왔는데.

그만큼 이 무자(無字)는 공안(公案) 가운데에서도 힘을 얻어간 그런 공안이라, 그래서 이 몽산 스님께서도 무자에 관해서 이렇게 자세히 설을 하셨지마는, 우리 정진하는 참선학자의 분상에서는 이렇게 10가지 조목으로 자세히 말씀해 놓으신 것이 잘 들으면은 약이 될 수도 있고, 잘못 들으면은 오히려 긁어서 부스럼을 내는 그러한 위험성도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善知識)에게 화두를 타 가지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가면 아무 병폐가 없는 것이여.

유(有)니 무(無)니, 이 선지식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저 선지식은 저렇게 말씀하시고, 그러니 어떤 것이 옳으냐 마냐 하고, 여기 가서 물어보고 저기 가서 물어보고, 이렇게도 해봤다 저렇게도 해봤다, 이렇게 해서 공연히 분별심(分別心)을 내 가지고 자기 선지식으로부터 지도 받은 고대로 해 나가지를 않고, 공연히 이리저리 따져보고 의심하고 분별심을 내고 거기에서 화두에 병(病)은 생기는 것이다.

오늘 아침 들은 이 법문도 옳게 들으면은 그러한 분별 내지 아니하고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라고 이렇게 자세히 법문하신 것이지, 여기에 나오는 10가지 조목으로 자세히 말씀하신 거, 그것을 낱낱이 무슨 듣고 외와서 따지라고 하신 법문이 아니다 그 말이여.
이렇게 법문을 듣고서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이 돈발(頓發)을 해서 꽉! 맥혀 가지고, 맥힌 그 의심 하나만이 현전(現前)을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은 법문을 참 옳게 들은 것이고, 그렇지를 못하고 이리저리 분별하고 사리상량을 붙여서 따지고 이런다면은 그것은 법문을 옳게 들은 사람이 못되는 것이여.

화두(話頭)는 의심(疑心)이라, 자기가 과거에 경을 보았거나 또는 어떠한 법문을 들었거나,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 그러한 지식 · 교리 · 상식 그러한 것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렇게 따져보고 저렇게 생각해 보고 이리 분석하고 저렇게 종합하고 이래 가지고서 그런 것으로 살림을 삼고, 또 이 선지식한테 가서 법문을 듣고 가서 이러쿵저러쿵, 저 선지식한테 들은 것과 비교해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러한 식으로 공부를 삼는다고 하면은 그 공부는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공부를 해도 점점 중생 알음알이만 더 조장이 될 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이여.

법문(法門)은 많이 들어서 머리 속에다 넣어 놓고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고서 자기에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일체 지식 · 알음알이를 놔버리고, 다못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현전해야만 그것이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다 그 말이여. 천 번, 만 번을 법문을 듣고 해도 다못 알 수 없는 한 생각뿐이라야 된다 그 말이여.

세상의 공부는 많이 듣고 알고 있어서 많이 기억을 하고 머릿속에 많이 알고 있어야 그 사람이 유식하다 그러고 참 훌륭한 학자라고 그러지마는, 이 참선 공부는 많이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은 오히려 병(病)이요, 공부가 옳게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비유를 해서 말하자면은 세속의 공부는 병 속에다가 많은 것을 담는 공부라 하겠지마는, 이 불법(佛法)에 참선 공부는 이미 들어 있는 것도 다 쏟아 내버려야, 될 수 있으면 싹 쏟아서 추호(秋毫)도 냄새까지도 나지 아니할 정도로 깨끗이 부셔 내는 공부다 그 말이여.

그래서 고인(古人)네가 말씀하시기를 ‘불조(佛祖)가 나와서 설법을 해도 깨닫자 생각도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잡으러 와도 두려워할 중도 모르고 철두철미(徹頭徹尾) 똥멍청이, 천치에 바보가 된다면은—깨달을 중도 모르고, 죽인다고 해도 두려울 중도 모르고 그렇게 철저히 바보가 된다면은 내가 너를 인가(印可)하리라’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다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 가지고—나무둥치가 썩지 아니한 나무둥치는 나무꾼이 불을 때기 위해서 끌텅을 캐 가기라도 하지마는, 완전히 버근버근이 썩어 문드러져 버린 그러한 나무둥치는 나무꾼도 그것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가지고 오직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만을 간절(懇切)히 지어가야, 그래야 그 사람에게는 깨달을 분(分)이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잘난 척하고, 똑똑한 척하고, 유식한 척하고, 이런 것은 우리 공부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뿐이지 아무 이익이 없는 것이여. 깨닫지 못한 분상(分上)에 무엇을 잘난 척하고, 유식한 척하고, 말 잘한 척하고, 그것이 다 쓸데없는 일이다 그 말이여.


한 숟갈 먹으면은—먹지 아니하면은 공부를 못하니까 잘 먹거나, 잘 못 먹거나 그저 한 숟갈 먹으면은 '이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번뇌 망상이 일어난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일어나는 생각을 없앨라 하지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일어난 줄 알면 퍼뜩 그 생각으로 '이뭣고?'를 들면 되는 것이여.

번뇌 망상 일어나는 놈이나, '이뭣고?' 드는 놈이나, 내나 그놈이 깨닫지 못했으면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고.
버리려고 하면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버리려고 한 그 생각도 역시 번뇌 망상이여. 중생심이여. 그래서 버리려고 하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들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어떤 사람이 쥐를 잡기 위해서 쥐를 한 마리를 산 채로 잡아 가지고 그 쥐를 통에다가 가둬 놓고는 2~3일을 굶겼다. 굶겨 놓으니까 이 쥐란 놈이 배가 고파서 발광을 하는데, 거기다가 다른 쥐를 한 마리를 잡아 가지고는 그 쥐고기를 썰어서 넣어 줬는데, 워낙 이놈이 쥐가 배가 고프니까 쥐고기를 먹기 시작했는데, 그래 또 조끔 있다 또 조끔 주고 주고 해서 완전히 그 쥐로 하여금 쥐고기를 먹는 것을 습관을 들여 가지고 나중에는 산 쥐를 갖다가 넣어 줬다 그 말이여. 그러니 배가 고프니까 산 쥐도 잡아먹었어. 그래서 여러 마리를 쥐를 잡아먹고는 아주 쥐 잡아먹는 아주 선수가 되었다 그 말이여.
그런 다음에 그 쥐를 밖으로 해방을 시켜 줬는데, 그 쥐란 놈이 이제는 쥐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쥐구녁으로 들어가서 잡아먹고, 그래 가지고는 온 집안에 있는 쥐를 다 잡아먹었다 그 말이여.

고양이는 쥐가 구녁에서 나와야 잡아먹지마는, 쥐구녁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 말이여. 몸뚱이가 크고 쥐구멍은 작어서. 그래서 고양이도 잘 못 잡아먹은 쥐를, 쥐는 지 몸뚱이가 작으니까 맘대로 쥐구녁으로 이 구녁 저 구녁 다니면서 쥐는 쥐는 다 잡아먹어 버렸다. 다 잡아먹고 더 잡아먹을 것이 없으니까 배가 터져서 죽었어.

그런데, 이 화두도 내나 이 화두 들고 있는 놈이 지가 깨닫지 못했으니 중생심이지, 화두(話頭) 든다고 해서 그것이 별것이냐 그 말이여. 그러나 이 '무자(無字)' 또는 '이뭣고?' 또는 '판치생모' 이 화두는 중생심으로 화두를 들지마는 오직 이 화두로써 일체 망상(妄想) 일어나는 놈을 이놈이 다 잡아먹거든.
그래 가지고 다 잡어먹고 더이상 일어날 망상이 없고 이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으로 가득차게 되면은 밥을 먹어도 '이뭣고?' 옷을 입어도 '이뭣고?' 똥 눌 때도 '이뭣고?' 걸어갈 때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이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누워서도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간절해서 산을 보나 물을 보나 전체가 이 세계가 자기 이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차서 더이상 이 의심이 커질 수가 없고, 간절할 수가 없을 때에 이 화두가 툭! 터질 것이다 그 말이여.

마치 쥐란 쥐는 다 잡어먹고 더 잡어먹을 쥐가 없고 그래 가지고는 배 터져 죽듯이, 이 화두도 의심이 커지고 커지고 해서 더이상 커질 수가 없게 되면은 지가 터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조주(趙州)의 뜻을 깨닫고,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내려오는 나의 마음을 깨닫고, 불조(佛祖)의 뜻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화두는 이론으로 따지지 말어라. 이론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지 말어라. 다못 '이뭣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만 하라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그것은 이론으로 따지지 말라는 것이니까 다못 정신을 한군데로 모이기 위한 수단으로 그런 것이 아니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물론 화두를 들고 자꾸 정진하게 되면은 정신도 집중이 되고 정신이 통일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정신 통일하는 그것은 중간에 그러한 통일도 되는 것뿐이지, 통일되게 하기 위해서 이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여.

그렇다면은 시계를 보고는 '시계, 시계' 그렇게만 해도 그것도 정신이 한군데 모여지니까, 그러면 '시계 시계' 하고 앉었어도 될 것이 아니냐 그 말이여. 그러는 것이 아니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의심에 가서 문제가 달려 있는 것이여. 의관(疑觀)! 알 수 없는 의심관(疑心觀)이라야지, 무엇이고 한군데만 정신을 집중하면 되는 것은 아니여.

의심이라야, 그 의심(疑心)이 간절해서 전체가 의심이 되었을 때, 의심이라야 의심(疑心) 아래에 깨닫는 것이지, 화두를 들되 의심 없는 화두는 그게 옳게 공부한 것이 아니여.
무자(無字) 화두도 덮어놓고 '무~~ 무~~' 하고 무자(無字)만 들여다보라고 가르키는 선지식이 있거든. 그것은 화두를 옳게 지도하는 선지식이 아니다 그 말이여.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그 '어째서?' '어째서?' 에다가 눈을 박어야지, '무~' 무(無)만 항시 무(無)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화두를 옳게 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어째서? 어째서 무(無)라 했는가?' 그 '어째서?' 라고 하는 그 알 수 없는 거기에다가 우리의 생각의 초점을 거기다가 두어야 한다 그 말이여. '어째서?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뭣고?' 한 그 '이 무엇? 무엇이냐?' 하는 그 알 수 없는 의심, 일체 화두는 다 그 의심(疑心)에 가서 요점이 있는 것이여.

그 말 자체를 이리저리 따진다든지, 따져 들어가는 건 못쓰는 것이여. 일체 따지지 말고 무조건 하고 '어째서 무? 어째서 무라 했는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알 수 없는 생각이래야 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꽉 맥혀서 알 수 없어야지, '오!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 들어가면 벌써 아닌 것이여, 그것이. '아! 이것이로구나!' 하고 자기 나름대로 결론이 내려졌다 하면 그건 아닌 것이여. 다못 알 수 없어야지.(처음~20분2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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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고 '어째서? 어째서?' 하고 해 가다 보면은, 너무 힘을 써 가지고 하다 보면은 기운이 자연히 머리로 모여져 가지고 상기(上氣)가 되고 골치가 아프고, 이렇게 되어 가지고 공연히 육단심(肉團心)이 동(動)해 가지고 혈액순환이 잘못되고, 소화가 잘못되고, 잘못 이 혈기(血氣)가 고르지 못한 그러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니까.

그래서 이 참선(參禪)을 하려면은 몸을 단정히 가지고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해야 하거든.
복식 심호흡이라 하는 것은 호흡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저 아랫배까지 호흡을 들어마셨다가 조용히 내쉬는,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조용히 내쉬는, 깊이 들어마시니까 자연히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볼록해진 다음에는 또 조용하니 숨을 내쉬니까 배가 홀쪽해지는, 숨을 마셨다 내쉬었다 하는데 따라서 아랫배가 볼록해졌다가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 하복부(下腹部) 단전(丹田)에다가 그 거기에다가 화두를 두고 의심을 관(觀)하라 그거거든.
그렇게 하면은 우리의 기운은 자연히 아랫배로 내려가 가지고 머리가 시원해져서 그래서—이 사람 몸에는 불기운과 물기운이 있는데, 화(火)와 수(水) 있는데, 우리의 모든 생각은 불기운에 해당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생각은 아래로 써야 혀.

그래서 단전에다가 생각은 거기다가 집중을 해야 불기운은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고, 단전 있는 데에는 우리의 그 콩팥, 신장(腎臟)이 있는데 신장은 그것이 수(水)인데, 그 콩팥에다가—우리의 생각은 화(火)인데, 생각의 불을 거기다가 지져 댐으로 해서 콩팥, 콩팥은 솥에 물이 담어진 거와 같아서 그 솥 밑구녁에다가 밑바닥에다가 불을 갖다가 지져 대니까 그 솥에 물이 끓어 가지고 수증기가 위에로 올라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면 우리의 생각은 (몸) 앞에서 밑으로 내려가고, 수증기는 밑에서 (몸) 뒤로 해서 올라가기 때문에, 불기운은 (몸) 앞으로 해서 밑으로 내려가고, 물기운은 (몸) 뒤로 해서 위에로 올라가니까 물기운과 불기운이 수승화강(水昇火降), 물은 올라가고, 불은 내려가서 수승화강이 잘되어 가지고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함으로 해서 정신이 안정이 되고 맑아져서 그래서 정진해 나가는 데 부작용이 없이 잘되어 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 못되기 때문에 그놈이 수승화강이 아니라, 까꾸로 불은 위로 올라가고 올라가기 때문에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물기운은 내려가고 불기운은 올라가서 수승화강이 아니라, 수화(水火) 승강(昇降)이 까꾸로 돌아가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고 맑은 정신이 없어 가지고 얼굴이 벌개져 가지고 골치는 뽀개질라고 그러고, 정신이 안정이 안 되어 가지고 화두만 생각했다 하면 골치부텀 아프고 공부가 안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 공부를 참으로 밤잠을 안 자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몸에 지장이 없이 할라면은 호흡법을, 호흡법을 잘 알아 가지고 단전호흡, 복식 심호흡을 제대로 익혀 가지고 해야 한다 그 말이여. 그런 위에 화두를 떠억 든다고 하면은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아무리 용맹정진한다고 해도 몸에 병이 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것을 모르고서 덮어놓고 말뚝 신심을 내 가지고서 억지로 파고들다 보니까, 수화승강(水火昇降)이 안 되어 가지고 상기병(上氣病)이라고 하는 그런 병에 걸리는, 상기병은 약으로는 안 고쳐지는 것이여. 결국은 그 상기병은 이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잘해 가지고 참선을 잘하므로 해서 그 병이 낫는 것이지, 상기병은 약 먹어 가지고 병이 고쳐지질 안 혀.

그래서 그전에도 이 호흡하는 법에 대해서 누차 말을 했지마는, 몸을 단정히 가지고 이 호흡을 하되 처음에 잔뜩 가슴으로 들어마셔, 호흡을. 가슴이 터지도록 그리고 빨리 호흡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는 잔뜩 들어마신 다음에 입으로 '후~' 하고 내쉬란 말이여. 다 가슴을, 아주 이 가슴 속에 있는 호흡이 한 점도 남김없이 다 내쉬어 버려.(한 번)
다 내쉰 다음에 다시 한번 또 들어마셔. 잔뜩 들어마셔 가지고 참어. 참었다가 또 '후~' 하고 다 내쉬어 버려.(두 번)

그렇게 두 번을 하고서 세 번째부터서는 조용히 들어마셔. 들어마시되 가슴으로 들어마시지 말고 들어마신 호흡을 아랫배까지 내려가도록 들어마시란 말이여. 아랫배까지.
그래서 좌선을 하려면은 허리띠를 느슨하게 매야 해. 너무 꽉 허리띠를 짬매 노면 안 돼. 그래서 느슨하게 매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까지 들어가도록, 손가락으로 이렇게 눌러 보면 빵빵하도록 그러되 100%로 다 들어마시지 말고 80%까지만 들어마셔.
들어마신 상태에서 한 2~3초 머물렀다가 조용히 호흡을 내쉬되, 호흡을 내쉼에 따라서 차츰차츰 배가 홀쪽해지도록. 그러니까 뱃속에 가득찬 호흡을 이렇게 눌러 가지고 (배) 뒤로 밀어 버리란 말이여. 뒤로 그 차츰차츰 (배를) 홀쪽이 맨들면은 그 호흡이 뒤로 해서 돌아 나가도록.

들어마신 호흡은 앞으로 해서 그 아랫배까지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신 호흡을 2~3초 머물렀다가 뒤로 밀어. 살모시 아조 아껴서 뒤로 밀면은 그놈이 뒤로 해서 이렇게 나가도록.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볼록해진 호흡을 2~3초 머물렀다가 조용히 뒤로 밀어 버리면은, 배를 홀쪽이 하면은 그 호흡이 뒤로 해서 요렇게 이 코로 나간다 그 말이여. 이것을 계속 되풀이하되 우리의 생각은 항시 아랫배 단전 거기에 가서 생각이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거기다가 생각을 두고 '이뭣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그 알 수 없는 의심, 의심하는 마음, 의심이 거기에다가 거기에 가서 항시 있도록 그렇게 화두를 해 나가면 저절로 수화...(녹음 끊김)
이대로 잘해 나가면은 아랫배는 뜨뜻해지고, 온기가 아랫배에서 생겨 가지고 차츰차츰 그 온기가 커지면은 온몸이 훈훈해지는 것이여. 그러고는 머리는 아조 뒤통수가 시원해져 가지고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것만 열심히 잘해도 '신선(神仙)이 되어 간다'고, 도교에서는. 도교에 신선들은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 가지고 장생불사(長生不死)를 하는 것이여. 일체 몸이 다 낫고, 밥을 먹지 아니하고 그 솔잎만 먹고 맹물만 마시고도 칠백 세, 천이백 세까지도 사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여. 중국에 도교에 팽조 같은 신선은. 이 심호흡을 잘하면은 그렇게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정신을 맑게 하고, 수명까지도 연장을 하고, 오신통(五神通)도 난다는 것이여.

우리가 단전호흡을 하는 것은 그러한 무슨 신통이 나고, 무슨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건강해서 정신이 안정이 되고 맑아짐으로 해서 참선을 잘하자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도(外道)가 하는 목적과 우리가 이 호흡을 하는 목적은 다른 것이다 그 말이여.
이러한 그 기초를 모르고서 덮어놓고 해 가지고서는 우리의 목적인 깨달음은, 깨달음의 목적지에는 도달하기 전에 중간에 부작용이 생겨 가지고 병이 나 가지고 공부도 못하고 인생을 참 헛되게 보내게 되는 그러한 안타까움을 만나게 되는 것이니까, 상기(上氣)가 있거나 없거나 이 호흡을 어쨌든지 잘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출가해 가지고 몸이 건강해야 공부를 하지, 몸이 아파 놓으면은 무슨 공부를 할 것이냐 그 말이여.

이 호흡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얼마든지 와서 의논을 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호흡이 옳은가 그른 것인가를 잘 알아 가지고, 잘 호흡법을 알아 가지고 해야—이 호흡만 잘되면은 추운 것도 잘 바우고, 더운 것도 잘 바우고 또 수화승강(水火昇降)이 잘되기 때문에 소화도 잘되고, 머리가 깨끗해서 화두를 들어도 정진이 깨끗하게 잘 나가지는 것이니까 그걸 좀 잘하도록.

그리고 이 호흡은 어디까지나 참선 잘하기 위한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참선은 어디까지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간절하고 의심이 커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궁극은 '참선'하면 화두(話頭)지마는 그 화두를 잘하려면은 몸을 단정히 하고, 호흡을 골라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되도록 그러한 기초 위에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간절해야 한다.
'의심(疑心)이 간절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무엇고?'

자기 화두(話頭) 해야 혀. 이 화두 좀 해봤다, 이것이 좀 안된다고 해서 다른 화두 좀 해봤다 그런 게 아니라, 잘되거나 안되거나 잘되면 잘되는 대로 화두를 관(觀)해 나가고, 잘 못되면 못되어도 그 화두를 계속 들고 나가야 하는데,
'잘 못된다' 하는 것은, 화두를 들면은 금방 든 지가 얼마 안 되는데 딴생각[別念]이 들어오고—이 생각, 저 생각이 아무 주책없는 생각이 지내간 생각, 현재 닥치는 생각, 앞으로 다가올 생각, 또는 얼토당토않는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리고 시간은 지루하고 몸은 뒤틀리고 애를 먹게 되는데 그러한 경지가 오더라도 그것이 나쁜 경지가 아니여.

짜증을 내지 말고 조용히 일어서서 바람을 좀 쐬고 들어와 가지고는 정신이 맑아지면 또 앉아서 하고. 하다가 또 몸이 뒤틀리고 혼침(昏沈)이 졸음이 와 가지고 영 맑은 정신이 안 나면은 다시 또 살모시 일어나 가지고 나가서 왔다갔다 정신을 좀 채려 가지고 들어와 가지고 또 하고 해서 그 고비를 넘기면은 또 한결 수월하게 또 잘되는 것이니, '잘된다'고 해서 또 좋아하지 말고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여법(如法)하게 화두만 들고 나가면은,
그렇게 해서 잘될 때도 있다가, 또 잘 안될 때도 있다가 하는 그런 많은 고비를 넘기고 또 넘기면서도 한결같이 퇴전하지 말고 번뇌심을 내지 말고, 여법히 화두를 들고 나가면은 반드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말이여.

확철대오하게 되면 반드시 선각자(先覺者)를 찾아서 점검을 받아야지, 자기 나름대로 알았다 해 가지고는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은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라」 제호(醍醐)라고 하는 것은 우유로 만든 최고로 맛있는 음식인데, 그 맛있는 음식이 변해 가지고 독약이 되는 격이 되아.
그 애써서 얻은 그 깨달음이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고 그것으로써 스스로 자족(自足)을 해 가지고 살림을 해 가면은 그 좋은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독약이 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도 선지식을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선지식의 지시에 의해서 오후공부(悟後工夫)를 지어가야 참 옳게 닦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해제(解制) 때까지 한 보름 남었는데 보름 동안, 정초(正初)가 되어서 좀 어수선한 점도 있겠지마는, 어수선하거나 말거나 언제든지 우리는 처음보다도 중간, 중간보다도 끝으로 가면서 공부가 알뜰하게 되어져야, 알뜰하게 공부를 지어가야 그 사람은 참으로 발심한 사람이고, 옳은 사람이여.
처음에는 근사하니 아주 발심한 것처럼 하다가, 차츰차츰 차츰차츰 그 신심(信心)이 식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그런 것을 용두사미(龍頭蛇尾)라 그러는데, 용두사미로 된 사람은 백사(百事)가 불성(不成)이여.

보통 납월팔일(臘月八日)이 지내면은 해제만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수가 있는데, 우리 대중은 해제가 가까워질수록에 더욱 채찍을 가하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가지고 그렇게 참 용두사미가 아니도록 끝으로 갈수록 점점 공부가 충실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20분30초~39분30초) (끝)





[법문 내용]

선지식(善知識)에게 화두를 타 가지고 분별심 내지 아니하고 무조건하고 거두절미하고 다못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나가라. 이렇게만 해 가면 아무 병폐가 없는 것이여 / 화두(話頭)는 의심(疑心) /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오직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만을 간절(懇切)히 지어가야 그 사람에게는 깨달을 분(分)이 있는 것이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일어나는 생각을 없앨라 하지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일어난 줄 알면 퍼뜩 그 생각으로 '이뭣고?'를 들면 된다 / 쥐가 쥐 잡아먹는 비유 / 화두는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의관(疑觀)! 알 수 없는 의심관(疑心觀)이라야지, 무엇이고 한군데만 정신을 집중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 의심(疑心)이 간절해서 전체가 의심이 되었을 때, 의심(疑心) 아래에 깨닫는 것 / 알 수 없는 의심, 일체 화두는 다 그 의심(疑心)에 가서 요점이 있는 것.

참선(參禪)을 하려면은 몸을 단정히 가지고 단전호흡(丹田呼吸),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해야 한다 / 수승화강(水昇火降) / 상기병(上氣病) / 호흡은 어디까지나 참선 잘하기 위한 방편(方便) / 확철대오하게 되면 반드시 선각자(先覺者)를 찾아서 점검을 받아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


법문(法門)은 많이 들어서 머리 속에다 넣어 놓고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듣고서 자기에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일체 지식 · 알음알이를 놔버리고, 다못 자기 본참화두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현전해야만 그것이 법문을 옳게 들은 것이다 그 말이여. 천 번, 만 번을 법문을 듣고 해도 다못 알 수 없는 한 생각뿐이라야 된다 그 말이여.

썩은 나무둥치가 되어 가지고—나무둥치가 썩지 아니한 나무둥치는 나무꾼이 불을 때기 위해서 끌텅을 캐 가기라도 하지마는, 완전히 버근버근이 썩어 문드러져 버린 그러한 나무둥치는 나무꾼도 그것을 돌아다보지도 않고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가지고 오직 자기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疑心)만을 간절(懇切)히 지어가야, 그래야 그 사람에게는 깨달을 분(分)이 있는 것이다.

번뇌 망상 일어나는 놈이나, '이뭣고?' 드는 놈이나, 내나 그놈이 깨닫지 못했으면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고.
버리려고 하면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버리려고 한 그 생각도 역시 번뇌 망상이여. 중생심이여. 그래서 버리려고 하지를 말고, 일어나는 그 생각으로 '이뭣고?'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들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치 쥐란 쥐는 다 잡어먹고 더 잡어먹을 쥐가 없고 그래 가지고는 배 터져 죽듯이, 이 화두도 의심이 커지고 커지고 해서 더이상 커질 수가 없게 되면은 지가 터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조주(趙州)의 뜻을 깨닫고, 무량겁래(無量劫來)로 내려오는 나의 마음을 깨닫고, 불조(佛祖)의 뜻을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호흡은 어디까지나 참선 잘하기 위한 방편(方便)이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참선은 어디까지나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간절하고 의심이 커야만 깨닫게 되는 것이니까, 궁극은 '참선'하면 화두(話頭)지마는 그 화두를 잘하려면은 몸을 단정히 하고, 호흡을 골라서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잘되도록 그러한 기초 위에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간절해야 한다.
'의심(疑心)이 간절하다'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어째서 무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 무엇고?'

확철대오하게 되면 반드시 선각자(先覺者)를 찾아서 점검을 받아야지, 자기 나름대로 알았다 해 가지고는 선지식을 찾지 아니하면은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翻成毒藥)이라」 제호(醍醐)라고 하는 것은 우유로 만든 최고로 맛있는 음식인데, 그 맛있는 음식이 변해 가지고 독약이 되는 격이 되아.
그 애써서 얻은 그 깨달음이 선지식을 만나지 아니하고 그것으로써 스스로 자족(自足)을 해 가지고 살림을 해 가면은 그 좋은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독약이 된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도 선지식을 의지해서 공부를 해야 하고, 깨달은 뒤에도 선지식의 지시에 의해서 오후공부(悟後工夫)를 지어가야 참 옳게 닦는 것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1. 11. 9. 15:49

 

((세등선원No.35))—1981(신유)년 하안거 해제(81.07.17.음) (57분)

 

 

(1/3) 약 20분.

 

(2/3) 약 17분.

 

(3/3) 약 19분.

 


(1/3)----------------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하고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고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여태까지 오면서 고향을 떠나서 저 타방(他方)으로 돌고 돌면서 객지 생활(客地生活)만 해왔다 그 말이여.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이냐. 몇 번이나 중생(衆生)의 아상(我相), 인상(人相), 탐진치(貪瞋癡)의 산(山)을 돌고 돌아서 애정(愛情)에 얽힌 강(江)을 건너고 건넜더냐.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니, 하루아침에 고향 길을 밟으니, 하루아침에 어진 벗을 만나서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만나 가지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보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비로소 생사(生死) 무대(舞臺)에서, 생사의 강(江)과 산(山)을 돌고 도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길었다 하는 것을 깨달랐다.


신유년(辛酉年)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제방(諸方)에서, 제방의 선방(禪房)에서 한철 정진(精進)을 잘 마치고 선배 후배를 서로 만나고 좋은 도반(道伴)들의 얼굴을 반가운 얼굴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것 또 다른 도반이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타진(打診)하고 서로의 뜻을 교환하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서로 혈육을 나눈 형제간 만난 것이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혈육을 나눈 형제간은 애정으로 얽힌 것이라 윤회(輪廻)의 근본이 될 뿐이지만, 우리 사부대중 이 도반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서로 뜻을 같이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형제간으로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보다 더 뜻이 깊고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방금 우리는 고(故) 전강(田岡)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수행자는 마땅히 재색(財色)을 삼가해라. 재색은 도(道)를 가로막는 무서운 독사(毒蛇)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종단(宗團)이 아직도 분규가 수습이 되지 아니하고 여기저기서 관(官)의 개입을 받으면서 출가인(出家人)의 면목(面目)을 손상하고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얼굴에 구정물을 끼얹는, 얼굴을 들 수 없는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용을 알고 보면 보다 더 종단을 바로잡고 불교를 정화(淨化)하기 위한 명분(名分)이 있겠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부처님의 참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이러한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출가인으로서 부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한다면 나의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비워버리고 무슨 싸움이 있을 것이냐? 내 마음이 허공과 같고, 저 사람의 마음이 허공과 같다면 두 허공(虛空)이 서로 합(合)해진들 무슨 거리낌이 있을 것이냐 이 말씀이여.
내 주장(主張)이 옳고, 내 주장만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그르다고 주장할 때 상대방도 또한 그러한 입장으로 맞서게 된다면 아무리 세월이 지내간다 해도 두 의견은 합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마침내 새우 싸움이 고래의 등을 터지게 한 결과를 가져오고 말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비구(比丘) ‧ 비구니(比丘尼) ‧ 청신사(淸信士) ‧ 청신녀(淸信女)는 종단의 일각(一角)에서 그러한 분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신심(信心)을 돈발(頓發)해서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왔습니다.

세 시간, 서너 시간밖에는 자지 아니하고 하루에 열 칠팔 시간을 가행정진을 한 사람, 한 도량에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이십사 시간을 붙배기로 앉어서 용맹정진을 한 사람, 밥 먹고 옷 입고 앉고 서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단 일분일초 한 생각도 소홀히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채찍을 가하면서 이마빡에 '죽을 사(死)' 자를 써 붙이고 이를 악물고 용맹정진을 해 온 납자(衲子)들입니다.
이렇게 가행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에 비로소 정법(正法)에 싹은 무럭무럭 자라고 위없는 정각(正覺)에 열매는 무르익어 갈 것입니다. 불법(佛法) 정화(淨化)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꺾을려고 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가지고 용맹정진하는 데에서만이 정법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활구선(活句禪)을 해라'
활구선이 무엇이냐? '사구선(死句禪)을 하지 말고 활구선을 해라'

사구선은 화두(話頭)가 없이, 의단(疑團)이 없이 멍청하게 막연하게 고요히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었는 거. 또는 화두를 들되 분별심(分別心) ‧ 사량심(思量心) ‧ 이로(理路) ‧ 어로(語路) 그래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이러한 참선(參禪), 이러한 참선은 가리켜서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公案)도 따져보고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또 저 공안도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그래 가지고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하고.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실 때까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바른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번 해젯날 어떤 납자(衲子)가 찾아와서, "정진을 하다가 화두(話頭)가 의단(疑團)이 풀리고 어떠한 화두를, 자기가 알고 있는 공안(公案)을 들고 참구(參究)를 해봐도 다 의심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들고 있는 그 화두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고 일부러 의심을 좀 해보려고 해도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요?"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슨 화두든지 물어보면 다 여지없이 이를 수가 있다 그 말이냐?"
"예, 물어주십시오" 떠억 절을 석 자리[三拜]를 하고 꿇어앉으면서 물어달라고 그래.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을 그전에부터서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평상시에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너무 진실하고 여법(如法)해서 거짓말로 알았다고 할 사람이 아니여.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 해제(解制)를 기해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온 그 정성으로 보나, 그전부터서 잘 알고 있는 안면으로 보나, 또 용화선원에서 여러 철을 지낸 바도 있고 그래서, 마조원상(馬祖圓相)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안 해도 칠 테니 한마디 일러봐라"
"원상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옛날 마조(馬祖) 스님 당시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하니 어떤 중[僧]이 그 안에 떡 들어갔다. 마조 스님이 그 사람을 탁! 치니까 그 중이 말하기를,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치지 못했다는 뜻이 무엇이냐?" 물어보니까,
"이 육신(肉身)은 쳤지만 영혼(靈魂)은 치지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한다 그 말이여.

"그것 보라"고.
자기가 그 원상(圓相) 안에 들어가 놓고도 들어간 뜻을 바로 아지 못하고, 방맹이를 맞고도 어째서 맞은 중도 모르고, '저를 치지 못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참뜻을 아지 못하고 분별심으로 '이 육체는 쳤지만 육체를 끌고 다니는 이 마음은 치지 못했다' 이러한 귀신 같은, 도깨비 같은 소견(所見)을 가지고 '깨달랐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왔다 그 말이여.

이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공안을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거각(擧却)을 해서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닫고, 불조(佛祖)에 면목을 깨닫고,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한 관문(關門)이 되고.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공안을 물어보면 그 사람의 소견이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처음~20분10초)





(2/3)----------------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 지난 여름 석 달 동안 그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을 했으면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소견이 난 사람이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어떠한 소견이 났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그것을 씻어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만 정진을 해야겠다' 한 그렇게 스스로, 물어볼 것도 없이 스스로 자기의 공부를 다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 없이, 자기가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스승의 지도 없이는 세상없이도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바르게 못한 한에는 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은 그러한 분별심(分別心) 사량심(思量心) 가지고서는 도저히 타파(打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간택(揀擇)하지 않고는 바른 공부를 할 수가 없고, 바른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바른 깨달음은 얻을 수가 없다.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은 정진을 바르게 해야 하고, 바른 정진을 하려면은 바른 스승의 지도가 있어야만 되겠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어떻게 하면 그 바른 스승을 간택(揀擇)할 수가 있느냐?'
얼굴이 잘 생긴 것으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설법(說法)을 잘한 것으로서 바른 스승을 가릴 것인가, 계행(戒行)이 청정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학식(學識)이 많은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친절하고 온화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기운이 센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전강 조실 스님 말씀에는 "천하 간단한 방법이 있다. '스님이 견성(見性)을 하셨으면 어떠한 공안(公案)에 깨달랐습니까? 어떠한 공안에 깨달라 가지고 어느 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았습니까?' 이렇게 그것을 알아보면 그 스승이 바른 스승인가 아닌가를 알 수가 있다"고 하셨지만, 여지없이 이치에 합당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감히 어디에 가서 '무슨 공안에 깨달랐느냐?' 물어보기가 대단히 거북할 것입니다.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먼저 자기의 마음자세가 바르게 되는 것이 선행 조건(先行條件)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참다웁게 발심(發心)을 하고, 참다웁게 분심(憤心)을 낸다면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스승은 반드시 만나질 것입니다.
스승을 만나는 것도 인연법(因緣法)으로 만나지는 것이라, 자기가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가짐과 신행(信行)을 철저히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가 바르게 발심을 못하고 바른 신심을 갖지 못하고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스승을 찾으러 댕긴들 코앞에 스승이 있어도 바른 스승인 줄을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달마(達磨)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있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에게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바른 스승이 아니라면 나를 바르게 지도(指導)할 수가 없고 바른 지도가 없이는 세상없이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邪道), 삿된 스승을 스승으로 해서 공부를 한다면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열심히 한다고 한들 삿된 소견에 떨어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바른 스승 밑에, 바른 스승의 지도하(指導下)에서만 이룰 수가 있다.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공부하는 공부는—혼자 토굴(土窟)에 가서 하거나, 어디에 가서 하거나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게 되거나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처음에 소견이 나셔 가지고 혜봉(慧峰) 스님, 경허(鏡虛) 스님의 제자이신 혜봉 스님을 찾아가 뵈었습니다. 혜봉 스님은 그때 마나님 한 분을 얻어 가지고 지남철(指南鐵)을 차고 풍수(風水)질을 하면서 보림(保任)을 하고 계실 때, 그때 그 혜봉 스님을 찾아가 뵈아가지고 법담(法談) 거량(擧揚)하신 것을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처음에 조실 스님께서 그 혜봉 스님을 찾아가서 뵈웁자마자, 조주(趙州)에 무자(無字),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조주 스님이 대답하기를 '무(無)' 했는데,
그 무자의 뜻, "무자(無字)의 뜻을 반(半)만 일러주십시오" 이렇게 혜봉 스님께 물었습니다.

혜봉 스님이 답하시기를, "무(無)" 하셨는데,
조실 스님께서 "어찌 그것이 무자(無字) 반(半)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혜봉 스님이 "그러면 수좌(首座)가 일르게. 어떤 것이 무자(無字) 반(半)인고?"
그러니 조실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무(無)"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끝에 혜봉 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거년(去年) 가난이 비(非)가난이여. 거년에 가난은 가난이 아니여" '가난하다' 하는 것은 빈궁(貧窮)하다 그 말이여. 아주 가난해 빠졌다 그 말이여.
"거년(去年)에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요[未是貧],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여,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금년(今年) 가난이 시(是) 가난이여[始是貧], 금년 가난이 참으로 가난해서 송곳마저도 없다.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렇게 대답한 것은 겨우 '여래선(如來禪) 도리(道理)밖에는 안 된다' 그랬으니 어떻게 하면 조사선(祖師禪)이 되도록 이를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혜봉 스님이 전강 조실 스님께 물었습니다.

조실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능각첨첨첨사타(菱角尖尖尖似他)입니다. 뾰족허고 뾰족허기가" [일대기3호에는 '능각첨첨불사타(菱角尖尖不似他), 능각은 첨첨헌디 타와 같지 않다'로 나옴]
능각(菱角)이라 하는 것은 마램(마름)이라고 호수에 가면 세모꼴로 되어 가지고 송곳처럼 뿔이 세 개가 뾰쪽 뾰족이 나와서 까맣게 물에 떠 있는, 이파리는 물에 떠 있으면서 그것을 뿌리를 더듬어 들어가면 거기에 까만 세 뿔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을 까서 먹으면 맛이 고스롬허니 그 '마름'이라 하는 것인데, "그 마램(마름)이의 뿔이 뾰족허고 뾰족하기가 저 송곳과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때에 혜봉 스님이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래서 조실 스님 생각에, ‘아하, 내가 바로 일렀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으시구나. 그 내가 이른 것이 옳게 일렀구나. 그래 나를 인가(印可)해 주셨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하셨는데,
나중에 당신이 정진을 하셔서 나중에 떠억 그 공안을 살펴보니까, "그! 그것이 내가 잘못 일렀다. 만약에 그때에 내가 바로 일렀던들 혜봉 스님이 그 반갑게 손을 붙잡고 춤을 덩실덩실 추셨을 텐데 내가 바로 일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나중에사 깨달랐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대종사(大宗師)에 마음 경계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설사 그때에 당신이 잘 못 일렀다 하는 것을 후일(後日)에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 감히 다른 사람 앞에, 수십 년 뒤에 이것을 대중 앞에 폭로(暴露)를 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의 체모(體貌)를 생각해서 챙피해서라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公布)를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실 스님께서는 여지없이 그것을 대중 앞에 발로(發露)를 해서 공포(公布)를 하셨습니다.

조사(祖師)에 한마디, 이 공안에 내리신 한마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정법(正法)에 안목(眼目)을 가리워 버리는 것이 되고, 지혜(智慧)에 일월(日月)을 어둡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학자(學者)에 안목과 생명을 죽이고 마는 것이 되는 까닭에 조실 스님은 이것을 여지없이 만천하(滿天下)에 탁! 털어 내놓고 공포를 하신 것입니다.

안목(眼目)을 갖춘 사람은 지금이라도, 또는 앞으로 언젠가 바른 눈을 떴을 때에는 이 전강 조실 스님의 이 한 말씀이 과연 얼마나 중대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정말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한마디 말로 해서 소 배때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말 뱃속으로 들어가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치 불 무데기와 같애서 가까이만 갔다하면 대번에 내 몸에 불이 붙어서 나의 생명을 앗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공안 하나만을 의지해서 목숨 바쳐서 참구(參究)할지언정, 이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저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러한 식으로 함부로 공안을 희롱(戲弄)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면, 그래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결정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맥힘이 없게 될 날이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20분13초~37분24초)





(3/3)----------------

요사이 일본(日本)에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이 한국에 흘러 들어와 가지고 일부 거사(居士)들이 그러한 식에 참선을 하고, 그러한 식에 참선을 자꾸 학생들에게 모다 가리키고 해 가지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삿된, 못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리선은 따질 것이 있고, 알아 들어갈 것이 있고, 더듬어볼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해보면 그럴싸한 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해보면 심심치 않고 무엇인가 공부가 나날이 되어간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어서 그 선생한테 가서 일르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 하나를 주어서 또 주면 그걸 가지고 이리저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서 그럴싸한 무슨 결론 얻어 가지고 가서 말을 하면 또 다른 화두를 일러주고 해서 다섯 개, 열 개, 스무 개,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따져 들어간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와서, 가끔 와서 인가(印可)를 해 달라고 오는 학생 청년들이 있는데, 도저히 이것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아미타불'을 부르고 '옴 마니 반메 훔'을 하고 '고왕경(高王經)'을 읽을지언정, 이러한 죽은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위(旣爲)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게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하는 이놈이 무엇고?'
무자(無字) 화두(話頭)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하는 사람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그 화두 하나만을 정말 간절한 의심으로 오직 한결같이, 분별심으로 따지지 말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 가는 것입니다.

'따지는 것이 오히려 졸음도 안 오고 재미도 있고 해 보면 무엇인가 할 것이 있고 씹히는 것이 있어서 심심치 않은데 어째서 따지지 말라고 합니까?'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면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꿔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누워서도 '이 뭣고?'
밥을 먹을 때도 '이 뭣고?'
옷을 입을 때에도 '이 뭣고?'
똥을 눌 때도 '이 뭣고?'
일을 할 때도 '이 뭣고?'
산을 보아도 '이 뭣고?'
새소리, 물소리,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해 가는 것이여.


견색비유색(見色非有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녹음 끊김)

.....알 수 없는 의단(疑團) 뿐이여.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개 소리가 듣되 개 소리가 아니여. 어찌 '저것이 개 소리다' '저것은 새파트 소리다' '저것은 삽살이 소리다' '저것은 똥개 소리다' '저것은 기차 소리다' '기차 저것은 디젤 기관차다'
어찌 그러한 분별심(分別心)을 계속 내서 가지에 다시 가지가 뻗고, 잎에 다시 잎이 뻗고, 뿌리에 다시 뿌리가 뻗어서 끊임없이 생사(生死)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가냐.

산을 보되 산인 줄을 모르고, 꽃을 보되 꽃인 줄을 모르고, 개 소리를 듣되 개 소린 중을 모르고, 기차 소리를 듣되 기차 소린 줄을 모르고, 누가 나를 칭찬하되 좋아헐 중도 모르고, 누가 나를 비방(誹謗)하되 썽낼 줄도 모르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온갖 색상(色相),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할 때[色聲不礙處],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바로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게 정진을 해 갈 때 어찌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할 것인가?


오늘 해제를 맞이했습니다. 원래 해젯날은 그 회상(會上)에서 같이 정진한 사람이 전부 모이고, 그 근처에 숲속에서 모다 정전하던 사람도 전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전부 모여서 14일 날 저녁, 또는 15일 날 저녁, 또는 16일 날 저녁에 모여 가지고 지난 석 달 동안 각자 잘한 일 못한 일을 그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서로 충고하고 경책을 하면서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새로운 발심(發心)에 계기가 되는 그러한 시간을 마련을 했던 것입니다.

맨 처음 부처님부터 한 무릎을 꿇고 한 무릎을 세우고 합장(合掌)을 하고서 대중을 향해서 "지난 석 달 동안 내가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그 마음가짐에 있어서, 그 말에 있어서, 그 행동에 있어서 잘못 된 점이 있으면 자비(慈悲)로써 기탄(忌憚)없이 일러주시오" 하고 대중을 향해서 경건한 마음으로 부탁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가섭존자나 목련존자나 사리불 같은 수제자(首弟子)가 부처님 앞에 합장 공경하고 예배(禮拜)를 드리고서 부처님을 부축해 일으켜 드리면서 "세존(世尊)이시여, 세존은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데 무슨 허물이 있사오니까?"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일으켜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다음 제자가 또 한 무릎을 꿇고 한 무릎을 세우고 합장 공경을 하고 대중을 향해서 또 부처님이 하시듯 그렇게 대중을 향해서 자기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례차례, 수효가 백 명, 이백 명, 천 명이 모일 때에는 그 밤이 다 새도록 그러한 엄숙한 의식(儀式)이 진행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도가 오늘날 차츰 생략이 되어서 왔지만, 우리가 이렇게 해제의 법회(法會)를 거행하는 것도 역시 그때의 자자(自恣)의 법요식(法要式)이 오늘날 이러한 해제 법요식으로 시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깊은 해젯날을 맞이한 만큼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잘못을 반성을 하고, 다른 도반(道伴)이 자기에 잘못을 충고를 해주어도 그 말에 진심(瞋心)을 내지 말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참회를 해서 앞으로 정진해 가는 데에 큰 보탬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10월 보름날,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될 때까지 석 달 동안 추웁도 더웁지도 않는 서늘한 산철입니다. 그 석 달 동안을 공연히 여기저기 구경 삼어서 돌아다니지 말고 어쨌든지 빨리, 어데서 어떻게 지내든지 간에 지난 석 달 동안보다도 훨씬 더 간절한 마음으로, 더 경건한 마음으로, 더 철저한 마음으로 정진을 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지난 백 일 동안 이 세등선원에서는 백일기도(百日祈禱)를 봉행(奉行)을 했습니다.
설사 여기에 오셔서 정진은 못하고 각자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계셨을망정 정진하는 스님네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셨고, 생활 속에서 기도를 하셨다면 여기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참선(參禪)하는 스님네와 조끔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원래 공부에는 동중선(動中禪)과 요중선(鬧中禪), 또는 요중선과 정중선(靜中禪)이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 하는 정진과 활동을 하면서 시끄러운 속에서 하는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고요한 가운데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죽비(竹篦)를 치고 정진을 하는 것은 시끄러운 가운데에, 활동하는 가운데에도 잘될 수 있도록 엄격한 훈련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가운데에 또는 활동하는 가운데에 잘되어야만 그 공부는 정말 살아 있는 공부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한 곳에서 규칙을 세우고 죽비를 치면서 그렇게 해야만 공부가 좀 되고, 오며가며 시끄러운 가운데 일하면서 활동하는 가운데에는 영 화두가 어디로 가버리고 없고 공부가 안될 그 공부는 아직 공부에 힘을 얻지 못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 열심히 익힌 그 공부를 활동하는 가운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채찍을 가하면서 정진을 갖다가 밀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시끄러운 가운데에나 조용한 가운데에나 조끔도 걸림이 없이 공부를 다잽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한 것입니다.
다시 우리가 또 만날 때까지 기어코 공안이 타파(打破)되도록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합니다.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파유조(一把柳條)를 수부득(收不得)하야, 한 주먹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해서,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다. 바람과 함께 옥난간(玉欄干)에 매어두노라.(37분25초~56분24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자소내내관원방~ / 해제하고 도반(道伴)을 만나는 반가움 / 참선은 마땅히 활구선(活句禪)을 해라 /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관문(關門)이 되고, 또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바른 정진을 하려면은 바른 스승의 지도가 있어야만 한다 /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자기가 바르게 발심하고 바른 신심을 갖어야 / 전강 조실 스님과 경허(鏡虛) 스님의 제자이신 혜봉 스님과의 법거량, 훗날에 전강 스님께서 '당신이 잘 못 일렀다' 하는 것을 대중 앞에 공포.

참선을 할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은 무명(無明), 무명은 바꿔서 말하면 분별사량심인데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 그래서 참선을 한답시고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지는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을 해서 어찌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은산철벽(銀山鐵壁),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 자자(自恣)의 법요식(法要式) / 요중선(鬧中禪)과 정중선(靜中禪).


우리 사부대중 도반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지혜의 눈을 뜨기 위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서로 뜻을 같이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형제간으로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보다 더 뜻이 깊고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행정진을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에 비로소 정법(正法)에 싹은 무럭무럭 자라고 위없는 정각(正覺)에 열매는 무르익어 갈 것입니다. 불법(佛法) 정화(淨化)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꺾을려고 하는 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정히 가지고 용맹정진하는 데에서만이 정법은 가까워질 것입니다.

사구선은 화두(話頭)가 없이, 의단(疑團)이 없이 멍청하게 막연하게 고요히 무엇을 들여다보고 앉었는 거. 또는 화두를 들되 분별심(分別心) ‧ 사량심(思量心) ‧ 이로(理路) ‧ 어로(語路) 그래 가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이러한 참선(參禪), 이러한 참선은 가리켜서 '사구선(死句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公案)도 따져보고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또 저 공안도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답을 얻어내고, 그래 가지고 이 공안과 저 공안을 비교하고.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하생(下生)하실 때까지 참선을 한다하더라도 바른 깨달음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공안을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거각(擧却)을 해서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써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닫고, 불조(佛祖)에 면목을 깨닫고,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한 관문(關門)이 되고.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문제가 된다. 공안을 물어보면 그 사람의 소견이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 없이, 자기가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스승의 지도 없이는 세상없이도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바르게 못한 한에는 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 만날려면은 먼저 자기의 마음자세가 바르게 되는 것이 선행 조건(先行條件)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참으로 참다웁게 발심(發心)을 하고, 참다웁게 분심(憤心)을 낸다면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스승은 반드시 만나질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공안 하나만을 의지해서 목숨 바쳐서 참구(參究)할지언정, 이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저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러한 식으로 함부로 공안을 희롱(戲弄)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면, 그래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결정코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맥힘이 없게 될 날이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면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꿔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 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하려고 하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 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공부는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열심히 하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 열심히 익힌 그 공부를 활동하는 가운데, 시끄러운 가운데에서도 되도록 채찍을 가하면서 정진을 갖다가 밀고 나가야만 되는 것이여. 그래서 시끄러운 가운데에나 조용한 가운데에나 조끔도 걸림이 없이 공부를 다잽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모든 색과 모든 소리에 걸림이 없어야만, 이것이 바로 법왕성에 이르르는 곳이다」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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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의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700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No.51))—1984(갑자)년 하안거 해제 법어(84.07.17) (61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9분.

 

 


(1/3)----------------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무~아미타불~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한디  추색입정괴(秋色入庭槐)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군자하산지(君自何山至)요. 그대는 어느 산으로부터서 왔는가?
아종황악래(我從黃嶽來)로다. 나는 저 황악산으로부터서 왔느니라.

상봉성일소(相逢成一笑)하니, 서로 만나서 한번 웃으니,
추색(秋色)이 입정괴(入庭槐)로구나. 가을빛이 뜰 앞에 괴목 나무에 왔구나. 괴목 나무에 들었구나.

해제를 하고 제방(諸方) 선원에서 대중이 이렇게 운집(雲集)을 해서,
'어디에서 지난 여름을 지냈는가?'
'나는 아무데서 여름을 지냈다'

'정진은 지난 여름 동안 어떻게 정진을 했는가?'
'우리 선방에서는 이러이러히 지냈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물어보고 싶은 말도 많지만 피차가 서로 생각 생각이 의단(疑團)이 끊어지지 않고 속으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서, 그리고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고 인사를 나누는데, 구태여 입을 벌려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썩하니 물어보고 대답하고 할 것이 없어.
피차 생긋이 웃는 그 미소 속에 한없이 깊은 마음에서 인사가 오고가더라 그 말이여. 그리고 도량을 둘러보니 괴목 나무에 가을 소식이 와 있더라 그 말이여. 그러한 게송입니다.


갑자년 하안거를 마치고 오늘 해제 법요일을 맞이해서 이 세등선원에서 지내는 대중과 또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에서 몇몇 도반(道伴)과 그 반야선원에는 겨울에는 대중스님네를 모아서 정진을 하고, 여름에는 신도 보살님네들이 십여 명 모여서 금년 여름에 지냈다고 그럽니다.
그 대중도 모다 이 자리에 참석을 했고, 또 제방에 각 선원에서 정진을 한 비구니 선객 스님들도 거기서 해제를 마치고 오늘 이 자리에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해제를 하고, 각기 자기 선원에서 해제를 하고 도반들이 팔도에서 이렇게 모이니, 그 얼굴 얼굴에 신심과 환희심과 그리고 '기어코 금생에 도업(道業)을 마치고야 말겠다'고 하는 그러한 의연한 결심이 그 초롱초롱한 눈빛 속에 역력하고, 생긋이 웃는 미소 속에는 지혜와 평화와 자비가 넘쳐흐르는 모습들을 보고 나는 너무너무 감격을 했습니다. 우리 도반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해 나간다면 불법(佛法)은 결단코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온 세계가 싸움이 일어나 불바다가 되고, 설사 종단에 이러쿵저러쿵 시비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우리의 도반들이 밤잠을 안 자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는 한에 있어서는, 불법은 결정코 끊어지지를 아니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부처님의 등불이 훨훨 타올라서 온 세계를 밝게 비추고 말 것입니다.


방금 전강 대선사(田岡大禪師)에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 그리고 청춘을 불살라 버리고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出家)한 우리 도반들,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렸거니 무슨 애착이 있으며, 무슨 시비가 있으며, 무슨 걸거칠 것이 있겠습니까.
앉으나 서나, 눕거나 거닐거나,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보냐.
밥이 질면 진 대로, 밥이 되면 된 대로, 찌개가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언제 밥이 되다 질다, 찌개가 짜다 싱겁다, 그러한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있냐.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묵언(默言)을 일부러 하려고 해서 묵언을 하는 것이 아니여. 묵언패(默言牌)를 목에다가 써서 붙이고, 벙어리 흉내를 내고 뭐 글씨를 써서 문답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심으로 정진을 하다 보니까 제절로 묵언이 되어버린다. 꼭 할말이 있으면 한마디하고, 누가 부르면 대답하고, 한마디 말 끝나 버리면 바로 묵언이여. 하루 종일 지내봤자 뭐 그리 할말이 있겠느냐 그 말이여.
하루에 한마디하기도 하고 또는 한마디 안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 마디 하기도 하고 세 마디 하기도 하나, 그 한마디 두 마디 한다고 해서 정진에 방해되는 것은 아니여. 꼭 할말은 하되 쓸데없는 말을 안 하게 되니까, 일부러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에 일념으로 해 나가기 때문에 제절로 그것이 묵언이여. 이것이 진짜, 선객(禪客)이 해야 할 묵언인 것입니다.

산승(山僧)이 20대에 출가하자마자 느낀 바가 있어서 10년을 묵언을 했지마는, 나는 근기(根機)가 약해서 할말을 하면서 그냥 고대로 묵언을 한 그러한 묵언을 하지 못하고, 할말이 있거나 없거나 무조건하고 완전히 벙어리처럼 묵언을 했는데, 묵언을 한 뒤에 가만히 스스로를 돌이켜보고 지금도 그때 상황을 돌이켜보건대 그렇게 썩 훌륭한 묵언을 하지를 못했어.
진짜 훌륭한 묵언은 할말 있으면 한마디 탁! 하고, 딱! 끝나자마자 바로 묵언이여. 하루에 한마디 내지 반 마디 이런 정도, 그렇게 꼭 필요한 말이 없거든. 여기에 모인 대중들도 그러한 묵언을 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흔히 '소승(小僧)도 묵언을 하고 싶습니다. 묵언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요?' 이러한 말들을 가끔 와서 문의를 하는 선객들을 만났는데, 나는 그러한 형식적인 벙어리 흉내낸—속으로는 온갖 분별 다 하고 시비에 참견하면서 억지로 입만 딱 다물고 벙어리 흉내내는 그러한 묵언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니 진짜 묵언을 해라. 할말 한마디 두 마디는, 부득이해서 해야 할 한마디 두 마디는 하되 정말 화두에 일념,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어져 버리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져 버리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나아갈 일은—달마 스님! 우리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교주(敎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시지만, 우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는 이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부처님으로부터 28번째 법등(法燈)을 전수하신 달마 조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 조사가 140세의 고령으로 인도를 떠나서 중국으로 오셔 가지고 이 직지인심(直指人心), 바로 사람에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성불(見性成佛)케 하는 이 활구참선법을 전해 주시지 안 했다면, 우리는 계율이나 지키고 경전이나 연구하는 그러한 불법에 빠져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그러한 묘(妙)한 문(門)이 있는 것을 모르고 말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달마 스님을 인해서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이 위대하시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달마 스님의 법(法)은 선정, 선정(禪定)을 닦아서 신통을 얻고 그러한 불법이 아닙니다. 물론 참선하는 데에 계율도 지켜야 하고, 선정도 닦아야 하고, 교리에도 밝으면 좋고, 불법에 한 법도 버릴 법은 없으나, 그 근원 그 핵심이 무엇인가를 바로 파악을 해 가지고 그 중심을 바로잡아서 수행을 해 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가뜩이 근기(根機)는 약해서 자기 몸 하나도 추단해 나가기 어려운 그러한 처지에 있으면서 이것저것 잔뜩 좋다고 하는 것은 다 해 보고 싶어 한다면, 까딱하면 근본은 잊어버리고 지엽(枝葉)에 걸려서 평생을 그르치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출가 수행인이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계율을 또 지켜야 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지 말라는 것이 아니여. 당연히 육바라밀을 닦어야 하고. 팔만세행(八萬細行)을 다 갖추어야 하고. 그러나 계율을 지키기 위한 계율을 지키고, 육바라밀을 지키기 위한 육바라밀을 지키고, 팔만세행을 갖추기 위한 팔만세행을 갖추어서는 그것은 이 몸을 가지고 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 버리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의단이 독로해서 화두가 순일한 사람이 어찌 살생을 할 마음을 내며, 어찌 도둑질할 마음을 내며, 어찌 간음을 할 생각을 낼 것이냐 그 말이여. 한 마음 단속해서 화두가 순일하게 나아가면 일체 행(行)이 바로 거기에 다 제절로 갖추어지는 거여. 이것이 바로 달마 스님께서 주창하신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하신 것입니다.(처음~21분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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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설하신 오계(五戒)와 팔만사천 법문이 낱낱이 다 묘한 문이어서 어느 문으로 들어가도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러 다 문이 열려져 있는 부처님의 묘법(妙法)이지만, 그 묘한 법을 잘못 이해하고 그 방편문(方便門)에 국집(局執)해서 얽매이게 되면, 그것은 마치 달 가르키는 손가락을 잘못 이해를 해 가지고, 그 손가락을 인해서 하늘에 있는 달을 봐야지, 달은 보지 아니하고 그 손가락만 국집해서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언제 달을 볼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겨우 돌이 지내갈락말락한 어린아이에게 '저 하늘에 달을 보라' 하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는 그 손가락을 통해서 하늘에 달을 보지 아니하고, 손가락만 자꾸 쳐다보고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팔만장경이,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경(經)에는 온갖 방편설이 있지만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 가지고, 바로 가리키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본자성(本自性)을 보지 않고서 방편에만 떨어져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어리석고 가엽기가 그지없는 것입니다.


처음에 선방에 와 가지고 정진을 하되, 올바르게 공부를 못해 가지고 참 가석하게도 몸에 병이 난다든지 또는 사견(邪見)에 떨어져서 돌이키기 어려운 그러한 지경에 이른 사람을 가끔 봅니다.

이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이거여. 화두를 타 가지고 그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는 데 있어서 큰 의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여.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여. 큰 의심을 가지고 정진을 해야 그 큰 의심이 터지면서 크게 깨달어. 의심이 시원찮으면 깨닫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소견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깨달음이라 볼 수가 없어. 그러니 큰 깨달음(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유리병이 있는데, 그 유리병은 주둥이는 쪼끄마하고 그 밑에 몸뚱이는 크낙해 가지고 그 유리병 속에다가 오리 새끼를 집어넣었다. 오리 새끼 금방 깐 거야 조그마하기 때문에 그 유리병 작은 주둥이로 집어넣었어. 오리 새끼를.
넣어 가지고 날마다 물도 주고 먹이도 주고 해 가지고 그 오리를 먹여 살렸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크니까, 그 오리가 크막한 애미가 되었어. 몸뚱이는 크니까 그 안에서 맘대로 오리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컸는데, 그 오리를 유리병 밖으로 꺼내야겠다 그 말이여. 그런데 '그 유리병을 깨지도 말고 그 오리도 다치지 않게 어떻게 이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느냐?' 이러한 문제를 냈다.

이것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중에 하나지만, 어떤 사람이 수수께끼처럼 이 문제를 물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유리병을 어떻게 깨지 않고 그 오리를 꺼낼 수가 있는가?' 그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오리를 죽여 가지고 대가리 띠어서 꺼내고, 날갯죽지 꺼내고, 발목쟁이 꺼내고, 몸뚱이도 토막을 내서 꺼내고, 아 그렇게나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유리병을 유리를 갖다가 확 깨 가지고 그렇다면은 오리를 다치지 않고 꺼낼 수가 있겠으나, '유리병도 조금도 깨지 말고 다치지 않게 하고 그리고서 오리도 상하지 않게 어떻게 꺼낼 수가 있는가?' 암만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자기는 '이뭣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누가 그 오리 꺼내는 문제를 제기를 했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어떻게 하면 오리를 꺼낼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바로 자기는 '이뭣고?'를 해라 그 말이여.
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분은, 설사 다른 공안—오리 새끼 꺼내는 공안이 되었건, 또는 이뭣고 공안이 되었건, 또는 판치생모 화두에 대한 어느 스님의 법문을 들었건 간에, 그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 이외의 화두나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하물며 세속에 어떠한 문제나 경전에 있는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어. 천 가지 만 가지 모든 의심을 만났을 때에 탁! 똘똘 그놈을 뭉쳐서 자기의 본참공안으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렇게 해 나간다면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산을 보더라도 '아, 산이 푸르르구나, 산봉우리에는 구름이 끼였구나' 이런 식으로 쫓아가지 말고, 푸른 산을 보자마자 바로 자기의 화두(話頭)로 돌아오라 그 말이여. '이뭣고?'

정전백수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판치생모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자기의 본참화두로 돌아와. 이것이 바로 천의만의(千疑萬疑)가 병작일의(倂作一疑)다 그 말이여. 이 화두에, 자기의 본참(本參)에 대한 의심이 철저하지 못하면 이것이 큰 병(病)이여.
꺼떡허면 자기 화두는 놔 버리고 어믄 다리를 긁어. 어믄 일에 신경을 쓰고, 어믄 일에 걸려든다 그 말이여. 이것이 병 중에서는 최고의 큰 병이여.

눈으로 보면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에 끄달리고, 먹는 데에 끄달리고, 뭘 생각하는 데에 끄달리고, 남이 잘하고 잘 못하는 데에 끄달리고, 그게 다 발심(發心)이 철저하지를 못하고 자기의 본참(本參)에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이 육근(六根) 육식(六識) 십팔계(十八界)에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이 십팔천(十八天)을 돌고 돌아. 그러다가 잘못 끌어 박히면은 삼악도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 그 말이여.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니주인불식(摩尼珠人不識)이여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육반신용(六般神用)이 공불공(空不空)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마니주(摩尼珠), 이 마니주를 터억 지니면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아니하고, 육도법계를 자유자재로 댕기되 하나도 손상을 입지를 안 해. 그 마니주를 지녔건만 사람이 알지를 못하더라.
여래장리친수득(如來藏裏親收得)이여. 그 마니주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여래장(如來藏) 속에 그것이 떠억 감추어져 있더라 그 말이여. 여래장이 무엇인가?

여래장은 바로 우리 중생심(衆生心)이어늘, 중생심 그 제8식(第八識)이 바로 그것이 여래장인데, 그 여래장 속에서 일체 희로애락과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일어나는 색성향미촉법, 육근 · 육식 · 육진(六塵. 六境)이 바로 여래장 속에서 일어나는 물결인데, 그 여래장 속에 그 마니주가 들어 있다 그 말이여.
그래 가지고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부리는데, 그 여섯 가지 신통이—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코를 통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육체 몸을 통해서 차고 덥고 하는 것을 느끼고, 의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인식을 한다. 그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 마니주를 가진 사람이 부릴 수 있는 신묘한 신통이다.

그런데 그 신통은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요, 분명히 있으되 비어 있는 것이고, 분명히 비었으되 빈 것이 아니다.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 그렇게 소소영령하건마는 그놈을 찾어보면 돌이켜 찾어보면 자취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비었으되 비지 아니한 것이요.
일과원광색비색(一顆圓光色非色)이로구나. 이 마니주, 이 한 알갱이 구슬이 뚜렷하게 빛나고 있건마는, 분명히 색깔이 빛깔이 있으되 빛깔이 없더라.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차 있으되 찾으면 간 곳이 없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소소영령하건마는 볼라야 볼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알라야 알 수 없으니, 어찌 이것이 색상(色相)이 있다고 하며 색상이 없다고 할 것인가? 있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니,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가 없어.

중생의 소견으로 '있네, 없네' 따질 필요가 없어. 따져봤자 맞지 아니한 것을 왜 따져?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 가지고서는 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따져도 이것은 해결 날 문제가 아니여. 오직 본참공안에 충실해서—나아가자니 앞이 맥히고, 물러서자니 뒤도 맥혀. 꽉 맥힌 의심으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불 속에 들어앉은 거와 같아서 머물러 있을 수도 없고, 앞이 맥혔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서자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어. 왼쪽으로도 맥혔고, 오른쪽으로도 맥혔어.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불이 훨훨훨 타고 있다 그 말이여. 그냥 있을 수도 없고 나가자니 팔방이 사방이 꽉 맥혔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이뭣고?'

우리는 꿈을 꿀 때에 무서운 호랑이나 큰 구랭이나 그렇지 않으면 무슨 뿔 달린 무서운 악귀 같은 것에 핍박을 받아서 도망갈라고 하니 발이 떨어지지를 않고, 그 자리에 있자니 잡혀 죽게 생겼고,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옛날에 참선하지 아니할 때에는 고함을 지른다든지, 막 도망갈라고 몸부림을 치되 도망갈 수도 없고, 그러다가 한참동안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자기가 지르는 자기의 고함소리에 눈을 뜨고 보면 전신에 땀이 흠뻑 젖어 갖고 있는 그러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선법을 알아 가지고 참선을 한 뒤에는 그러한 상황 속에 화두를 탁! 들어 버리면 눈이 딱! 떠져 버린단 말이여.
비단 꿈속에 뿐만이 아니여. 인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성나는 일, 속상하는 일, 기분 나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슬픈 일을 당하거나, 기쁜 일을 당하거나, 일체 선악 경계를 당했을 때, 화두를 딱! 들어 보라 그 말이여. 어디에 속상한 일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분한 생각이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슬프고 괴로운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정진을 다그쳐 나가면 깨닫기를 바랠 것이 없어. 독 안에 든 자라와 같아서 지가 어디를 갈 거냐 그 말이여. 깨달음을 기다리지도 말고, 조급한 생각을 내지도 말고, 누가 와서 나를 깨닫게 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어. 바로 공부를 지어 가는 마당에 깨닫지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어.

'어서 빨리 깨달러 가지고 남 앞에 큰소리 한번 쳐보리라'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가 있어. 큰소리쳐서 뭣해?(21분8초~41분57초)





(3/3)----------------

유교 경전에 『논어(論語)』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 사서(四書) 중에 하나인데, 그 논어의 첫마디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즉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별로 뭐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지 아니한데, 깊은 뜻이 있지 아니하면 왜 논어에 첫마디에 그것이 있을까 보냐?  무슨 경전이든지 첫마디에 있는 법문이 그 경전에 최고에 깊은 진리를 표현했다고 보면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무슨 글공부를 글을 배워 갖고 그것을 자꾸 읽어 쌓으면 기쁘지 아니하냐. 그러한 피상적인 뜻이 아니라, 도(道)를 얘기한 것입니다.

선지식으로부터—우리 불교, 이 선학(禪學) 이 종문(宗門) 중에다가 비유를 한다면,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아 공부를 하면 '참 내가 어쩌다가 이런 좋은 최상승법을 만났는가? 내가 어쩌다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런 좋은 법을 만났는가?' 밥 먹다가 생각해도 너무너무 기쁘고, 중생들의 그 고해(苦海)에 빠져서 그 오욕락(五欲樂)에 빠져서 허덕이는 것을 보면은 불쌍하면서 가엾으면서, 내 자신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참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 말이여.

그다음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서 오면—막걸리 친구나 뭐 동창생이 찾아오면 얼마나 기쁘냐?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내가 출가해 가지고 별로 훌륭하지를 못하고 도를 잘 못 닦고...(녹음 끊김)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君子)가 아니냐?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수행인이 아니냐 그 말이여.
자기가 조금 뭣 좀 한다고 해서 남이 알아주기를 바래고 그것을 자랑하고, 내가 제일이라 하는 생각을 갖고 남을 헐뜯고 한다면은 이것을 어찌 참다운 수행인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살 십중대계(十重大戒) 가운데에 하나에, 불자찬훼타(不自讚毁他)라고 하는 조항이 있는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고 하는 것은 보살이 지켜야 할 십중대계에 하나를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을까 보냐 그 말이여.
세속에 선비도 조금 어지간한 사람은 그러한 법이 없거늘, 하물며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을 결별해 버리고 생사를 바쳐서 최상승법을 닦아 가는 수행인이고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나무~아미타불~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고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니라
나무~아미타불~

종타방임타비(從他謗任他非)여, 남이 나를 비방하면 비방하는 대로 맽겨둬 버리고, 나를 헐고 뜯으면 헐고 뜯는 대로 그 사람한테 그 맡겨둬. 맘대로 하라고.
파화소천도자피(把火燒天徒自疲)니라. 횃불을 들고 허공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 같애서 저만 피로하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횃불을 들고, 아무리 훨훨 타는 큰 횃불을 가지고 이 하늘을 불사를라고 막 해봐라 그 말이여. 허공이 타는가? 그러다가 저만 피로해 가지고 지쳐 쓰러지거나 잘못하면 불똥이 튀겨서 지 몸이 타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나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내가 잘못해서 나의 단점을 누가 헐고 뜯는다면은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자기를 반성하고 고칠 것이고, 나는 실지로 별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모략 중상을 한다면 그렇더라도 그 말을 '아 내가 그래도 전생에라도 뭣을 잘못한 점이 있거나, 나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지마는 나에게 그런 잘못이 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말을 감사하게 듣고, 감로수처럼 받아서 먹어서 잘 소화를 시켜버리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그 감로수를 마시고.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조금 뭐라고 한다고 파르르르르 신경질을 내고 속으로 감정를 품고, 꽁하니 미운 생각을 속으로 품고, '언젠가 저년을 갖다가 내가 한바탕 봐주리라' 이러한 소인(小人)의 근성을 가져서 쓸 것인가 이 말이여.
부모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도를 닦은 사람이 어찌 감로수처럼 받어 마셔야지, 그러한 말을 듣고 감정을 품고 언젠가는 봐줄려고 하는 꽁한 복수심을 갖는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냐.

아 그말을 감로수처럼 받아 마시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누가 나 안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듣는 데서 욕을 하거나,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면 어찌 나에 대해서 말을 할까보냐 그 말이여.

성현의 말씀에도 나를 칭찬해 준 사람은 도적이요,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스승이요 은인이다 그랬어. 하물며 출가인 분상에 그만한 것을 이해를 못하고, 소화를 시키고 거기에서 살아가지를 못하고 죽음의 무덤을 판대서야 말로 할 수가 없거든.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대중방에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만한 정신 자세가 되어 있지 아니해 가지고 선방에 나갈 자격이 있는가? 선방에 나간다면 강원의 학인도 그러지 못하고, 선방에 나가서 참선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쯤은 되어야 해. 이쯤되어 가지고 나가 보라 그 말이여.
무슨 시비가 나한테 상관이 있어? 칭찬을 해도 좋아할 것도 없고, 오히려 미안하고 부끄러울뿐이여. 나를 헐고 뜯는다 하더라도 그 그렇게 속상할 것이 없어. 거기서 터억 너그러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여서 더욱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는다면 그 사람은 일장월취(日將月就)여. 나날이 발전하고 다달이 승화되어 갈 것이다 그 말이여.

스님네뿐만이 아니라 세속에 계시는 청신사 청신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자(佛子)라면 응당 이만한 정신을 가지고 이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신다면은 바로 그이가 보살(菩薩)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보살, 여자 신도를 보살(菩薩)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 나가셔야 한다 그 말이여.


돌아오는 음력 9월 16일에는 용주사에서 보살계(菩薩戒)를 설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보살계를 설할 때에는 전국에 모다 율사 스님네를 초청을 해다가 여러 날에 걸쳐서 십중대계와 사십팔경계와 삼천위의와 팔만세행에 대해서 그 계를 설하는데, 보통 다 그렇게 하는데, 이번에 용화사에서는 그러한 율사 스님을 모셔다가 보살계를 설하는 것이 아니라, 전강대종사께서 평소에 설하신 십중대계, 십중대계를 설해 가지고 십중대계를 통해서 최상승계를 지키도록, 그래 가지고 최상승계를 설하는 그러한 보살계를 설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여러 사부대중, 그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보살계를 받고 보살계첩(菩薩戒牒)도 많이 받아 놓으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전강 조실 스님의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한 십중대계를 받아서 인연을 맺어서 세세생생에 이 정법문중(正法門中)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런 최상승법으로 인연을 맺어서 세세생생에 불회상(佛會上)에서 다시 만날 그러한 기쁜 기약을 맺도록 하는 것도 또한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돌아오는 삼동결제(三冬結制)는 겨울에 금년에 윤10월이 들어 있어서 본시월이 지난 다음에 윤시월이 들었는데, 윤10월 17일에 이 세등선원에 겨울 결제가 시작이 됩니다.
인천 용화사는 윤10월 15일에 하고, 용주사는 윤10월 16일에 결제를 하고, 여기 세등선원은 윤10월 17일에 결제를 하게 됩니다. 물론 군산 흥천사 반야선원도 윤시월에 결제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 착오가 없으시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일송군초수빈(今日送君楚水濱)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디  낙화제조우잔춘(落花啼鳥又殘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거년별아여산정(去年別我廬山頂)터니  금년송군초수빈(今年送君楚水濱)이로구나.
거년(去年)에는 우리가 저 여산 땅 꼭대기에서 여산에서 이별을 했더니, 금년에는 그대를 초수 물가에서 보내게 되는구나.

이사유유양무어(離思悠悠兩無語)헌데, 서로 이별하는 마당에 유유(悠悠)해서 서로 말이 없는데, 꽃은 지며 새는 우는데, 여름이 다 가는구나.

오늘 해제를 하고 우리 도반들이 동서남북으로 헤어져 가는데 서로 묵묵히 말이 없어. 말이 없지만 다시 다음 어느 회상(會上)에서 만나게 될는지, 어느 곳에서 서로 또 다시 만나게 될는지 만날 그때까지 서로 건강하게 알뜰히 정진을 하자 하는 그러한 마음과 마음에 인사가 오고갈 것입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넉 달, 몸조심하고 이 결제 동안에 그 정진한 그 정진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산철에도 보다 더 마음을 가다듬고 알뜰히 정진을 하기를 부탁하고 말을 맺고자 합니다.(42분1초~61분30초) (끝)





[법문 내용]

(게송)군자하산지~ / 출가한 우리는 일체처 일체시에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맹렬하게 정진을 해 나가는 일 밖에는 없다 / 화두에 일념이 되다 보니 제절로 할말이 없고, 제절로 시비가 끊어지는 그러한 묵언을 하도록 나는 권장을 한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49년 동안에 법(法)이 바로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참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의심(疑心)을 가져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을 가져야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 /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다.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 (게송)마니주인불식~.

『논어(論語)』,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 (게송)종타방임타비~ /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 마셔서 수행해 나가는 데 밑거름을 삼아라 / 불자(佛子)라면 바다와 같은, 하해(河海)와 같은 아량을 가지고 살아 가라 / (게송)거년별아여산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어떻게 닦아 가느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여.
마음을 관하는 한 법! 화두를 참구(參究)해서 생각생각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한 경계에 들어가면 계행(戒行)을 지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계행이 지켜져 있고, 육바라밀을 닦을려고 안 해도 바로 행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행하고, 생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절로 육바라밀이 지켜지게 된다. 팔만세행도 역시 일부러 갖추려고 안 해도 제절로 갖추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큰 깨달음을 가질 수가 있느냐? 천의만의(千疑萬疑)가 지시의(只是疑)다.
무슨 법문을 듣거나 무슨 경을 보거나, 무슨 일을 만나거나 온갖 종류에 의심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 의심이 날 때에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일에 대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 그 다른 의심을 풀려고 하지 말고 알아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자기의 본참으로 돌아오라.

삼악도(三惡途)가 어디에 있으며, 십팔천(十八天)이 어디가 있는가? 일념(一念) 속에 삼악도가 들어있고, 육도(六道)가 일념 속에 들어 있고, 십팔천이 일념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한 생각을 맹렬히 단속해서 자기의 본참공안에 충실하다면 당장 금생에 그 사람에게는 삼악도도 찾을 길이 없고, 십팔천도 어디서 찾느냐 그 말이여.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금생에 결정코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을 끊어버리게 될 것이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 삼악도를 찾을 것이냐. 내가 떨어져야 할 삼악도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그 말이여.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은 일념(一念) 속에서 육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삼악도를 끊어버리고, 일념 속에서 십팔천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하는 것은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타 가지고 도 닦는 법을 배워 가지고 시시때때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열심히 공부를 하면 얼마나 기쁘냐 그 말이여. 기쁘지 않겠느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같이 발심(發心)을 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내가 공부를 참 잘한다는 말을 듣고 나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다면은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그 말이여.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되,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냐’ 이 말은 유교에 있어서 군자(君子)란 말은 불교에 있어서 '진실한 수행인이다. 또는 보살이다' 이러한 정도에 뜻과 같다.

아문흡사음감로(我聞恰似飮甘露)하면, 나는 누가 나를 그렇게 헐고 뜯고 해도, 그 헐고 뜯고 비방하는 그 말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달게 받아서 마시면, 소융돈입부사의(銷融頓入不思議)하리라. 그 사람이 비방하고 헐고 뜯고 한 그것이 소화가 되어 가지고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 감로수를 마시고 나는 선지식이 되고 불보살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진실로 발심한 수행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2. 30. 20:07

 

 

((세등선원No.27))—1980년(경신년) 하안거 결제(80.04.17.음) (83분)

(1/4) 약 21분. (2/4) 약 22분. (3/4) 약 19분. (4/4) 약 21분.

(1/4)----------------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이상으로써 경신년(庚申年)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 법어(法語)를 다 마쳤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중이 법상(法床)에 올라가서 주장자(柱杖子)를 한 번 들어서 보이고, 그리고 법상을 한 번 치고 무슨 게송(偈頌)을 한 번 읊더니, 인자 이제 겨우 법문(法門)이 시작한가 보다 했는데 다 마쳤다고 하니, 공연히 여기를 왔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만,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대관절 주장자(柱杖子)를 들어서 보이는 것이, 무엇이 그것을 갖다가 법(法)이라고 할 것인가? 누구는 손이 있는 사람은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으며, 들었던 주장자로 책상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디가 있겠는가. 그러한 법이라면 나는 하루에 천 번이고 만 번이라도 설할 수가 있다. 구태여 바쁜 시간을 내서 절에 갈 필요가 무엇이 있나?

할머니 지팽이를 갖다가 자기도 한 번 들어서 한 번 쳐 보면, 그러면 그것으로써 그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묘법(妙法)이 그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할진대는, 구태여 절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 있나?'

 

이러한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에서 분연(奮然)히 일어서서 법상을 때려 엎고 그길로 활개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신 분이 있다 한다면 과연 대장부(大丈夫)라 할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과연 그러한 대장부는 없는가? 이 자리에 오신 분은 점잖하시고 자비(慈悲)가 있으셔서 참고 계시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는 금방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세등선원 조실 스님은 정 전강(鄭田岡) 선사(禪師)이십니다.

 

이 가운데 계신 분은 다 알고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어떻게 6년 전에 열반(涅槃)하신 스님을 조실(祖室)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 이미 돌아가셨을 때... 설사 돌아가시기 전에는 세등선원 조실로 계셨다 하더라도 돌아가신 뒤야 자동으로 조실(祖室) 책임을 벗으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혹 생각하신 분이 간혹 계신 것 같애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탄생(誕生)하시되 오신 바가 없고, 설사 80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다고 해서 가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시고 한 것이 있다면 여래(如來)가 아닌 것입니다. 오시고 가신 바가 없기 때문에 여래(如來)라 부르는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법회(法會) 때마다, 일상(日常) 언제 어데서라도 그 육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로 모셨다고 해서 조끔도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그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듣고 우리의 공부를 바로 해 갈 수가 있고,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갈 수도 있고, 해태(懈怠)한 마음 분발(奮發) 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이나, 복전암이나 또 스님을 존경하는 많은 불자(佛子)들이 언제 어데서 공부를 할 때라도 살아계신 걸로 믿고 조실 스님으로 모시고 방방곡곡에서 정진(精進)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연히 세등선원에 용상방(龍象榜)에도 조실(祖室)에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라고 딱! 붙여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시고 산승(山僧)을 갖다가 세등선원 조실이라고 착각(錯覺)을 하고 그렇게 말을 하시는 분이 가끔 있는 것을 듣습니다. 산승은 조실이 아니고 세등선원 선감(禪監)입니다.

 

전강 대종사를 조실로 모시고, 그 전강 대종사에 법을 받들어서 여러분이 정진(精進)하시는 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선감(禪監)이라고 하는 책임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확실히 말씀을 드리니 착오가 없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온전히 공안, 공안(公案)에 대한 법문(法門)을 해 주셨습니다.

공안이라 하는 것은—공립(公立) · 관공서(官公署), · 공립학교(公立學校), 그것 '공(公)' 자입니다. 그리고 '안(案)' 자는 안건(案件)이라 해서—공안(公案), 공안을 화두(話頭)라 그럽니다마는.

어째서 공안이라 하냐 하면, 공(公)이란 말은 '관가(官家)'라 그 말입니다. 관청(官廳), 관법(官法). 관청에 법안(法案), 관청에서 직원들이 어떠한 사무를 볼 때에, 일을 처리할 때 반드시 그 법(法)에 의존해서 모든 사무를 처리하게 됩니다. 그 관청(官廳)에 법(法)과 같은 것이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관청에서 어떠한 일을 처리했을 때에 그 일이 바로 되었나, 잘못 처리했는가를 보려면은 그 법률에 비추어서 제 몇 조 몇 항에 비추어서 '이것은 타당(妥當)하다' '이것은 부정(不正)이다' 그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 문헌(文獻)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됩니다. 하물며 문헌에 오르지 아니한 것까지 하면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육법(六法)이 있고, 육법은 이미 성문화(成文化)—글로 된, 글로 표시된 법률은 성문, 성문화된 것을 보통 말합니다마는, 불문율(不文律)이라 해서 책에는 육법전서(六法全書)에는 올라 있지 안 해도 우리는 모두가 지켜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은 것입니다. 법률에, 법률(法律) 조항(條項)에 오르지 않다고 해서 그 밖에 일은 우리가 어떠한 일이라도 마구잽이 해도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영국 같은 데는 헌법(憲法)이 아주 몇백 년 전부터서 불문율로 되어 내려오는 법률이 참 많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불문율로 되어 있어도 워낙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실천한 지가 오래고, 민도(民度)가 높아서 모두가 다 법률을 잘 지켜 가지고, 온 백성에 질서가 유지되어 간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문헌에 오른 천칠백 공안 외에도 수없이 많은 공안이 있어서 눈 밝은 대종사(大宗師)는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법(法)을 갖다가 사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최고에 법을 자유자재로 쓰시고, 또 그 법으로써 학자(學者), 모든 도(道)를 배우려는 수행자들을 눈을 뜨게 하고 경책(警策)을 하고 또 점검(點檢)을 해서 그렇게 교화(敎化)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이 높고 경전을,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해설을 한다 하더라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공안의 도리(道理)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연구한 모든 이론을 동원을 해 가지고 이 공안을 분별(分別)을 하고, 천착(穿鑿)을 하고, 분석(分析)을 한다 하더라도 이 공안의 참뜻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질수록에 참 진리(眞理)로부터서는 멀어가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심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또는 '마조(馬祖)에 원상(圓相)'이라든지, 또는 서산(西山) 스님의 게송 가운데에 나오는 '어생일각(魚生一角)', 어생일각이라든지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세계불교도대회(世界佛敎徒大會)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 그 불교도대회에 참석한 세계에 불교 지도자들에게 이 공안을 물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세계 각국에 저명한 승려 · 거사(居士) ·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참석을 했지만 아무도 이 공안에 대해서 답을 한 사람이 없었고, 오직 말레이지아(Malaysia) 승정(僧正) 한 분이 '무답(無答)이 시답(是答)이다, 대답 없는 것이 이 답이다' 이렇게 글자 넉 자를 써 놓고 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에 능히 이 공안(公案)에 대해서 답(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답을 안 했는지, 참으로 아지를 못해서 답을 안 했는지, 그것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이 공안은 정말 깨닫지 못했다면 이르려고 할 필요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따져 갖고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척!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어떠한 공안을 큰 스님네로부터 물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바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면 되지 못한 소리를 이를 까닭도 없는 것이고, 다른 고인(古人)들이 답(答)한 흉내를 낸다든지, 어떠한 행동으로써 옛날 스님네가 한 흉을 내서 보인다든지, 이러한 것은 도저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대죄(大罪)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처음~21분25초)

 

 

 

 

(2/4)----------------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금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분상(分上)으로서는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대의단(大疑團)을 일으킬 따름인 것이고, 오직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한 의단을 일으킬 따름인 것입니다.

 

 

맨 마지막에 '서식묘아반(鼠食猫兒飯)이다. 쥐가 괴밥을,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한 공안(公案)에 대해서 일부러 의리(義理)로 따져서 설파(說破)를 해 주셨습니다.

따질 수 있는 것이고, 또 따져서 이해가 안 가는 데까지만 말씀을 하셨고, 설사 의리(義理)로 따져서 그 부분에 대해서 설파를 해 주셨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가 해(害)를 입을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해 주신 걸로 생각합니다.

 

이 가운데 혹, 「쥐는 바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고 사니까 쥐는 바로 고양이 밥이다. 그런데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하는 것은 '쥐가 쥐를 먹었다'는 말이다. 중생이 번뇌 망상 분별심(分別心)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생인데, 그 중생인 '나'가 번뇌와 망상이 다 없어졌으니까, 바로 번뇌(煩惱)가 번뇌를 다 잡아먹고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바로 사람과 경계(境界)가 다 몰록 공(空)한 것이고 산이 다하고 물이 다했다는 그런 경계다」

이렇게 그런 식으로, 혹 다른 공안을 접했을 때에도 그러한 식으로 공안을 분석해서 알아맞추려는 그러한 생각을 낸다면, 이것은 조실 스님의 참뜻을 바로 안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삼근(麻三斤)이다'

'불법적적지대의(佛法的的之大意)가 무엇이냐?'

'마삼근(麻三斤)이다' 이렇게 대답했으니,

 

'불법(佛法)은 이 우주법계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에 진신체(眞身體)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돌맹이도 비로자나불이요, 산도 비로자나불이요, 흘러가는 물도 비로자나불이요, 거지도 비로자나불이요,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삼[麻]도, 삼 뭉탱이도 그것도 비로자나불이다. 그러니 그 마삼근(麻三斤)이라는 게 그것이 아니냐'

 

이러한 식으로 공안을 따져 가지고 자기도 '한소식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다면, 그러한 사람은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한 죄(罪)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쏜살같이 떨어져 들어갈 사람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공안은 절대로 그러한 의리(義理) · 분별심(分別心) · 이론(理論)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공안(公案)은 그렇게 따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그렇게 대답하니까,

'미지(未知)하니 갱도(更道)하라. 틀렸으니 다시 일러라'

 

다시 대답하기를, '반기이파(飯器已破)입니다, 밥그릇은 이미 깨졌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옳다, 옳다' 쾌히 인가(印可)를 하셨던 것입니다.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 한 데에 대해서 인가를 아니하고, '밥그릇은 이미 깨졌다'고 대답한 데에 인가를 했습니다.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으로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의리로 따져볼 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는데 무슨 밥그릇이 깨졌나?' '밥그릇이 깨졌다'고 하는 대목에 가서는 우리는 아무리 분별심으로 따져 보려고 해도 거기는 이빨이 들어가지를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가 받지도 못할 것을 따져 보면 무슨 소용이 있어? 따져서 공안을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이미 바른 공부에 노선(路線)을 버리고 그릇된 데에 빠져서 허매고 있는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차라리 아니헐지언정—염불(念佛)이나 하고, 주력(呪力)이나 하고, 무슨 경(經)이나 읽고 그럴지언정, 참선(參禪)을 한다고 할진대에는 결단코 분별심으로, 의리(義理)로 따져 들어가는 그러한 삿된 그릇된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서 조실 스님께서는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법회 때마다 거듭거듭 강조를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마는, 이 공부는 내가 해야 하고, 오직 내 공부는 내 자신이 함으로써 자신의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는 것이니 만큼, 남 봄에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것을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도 무슨 공부를 해서 한소식 했다고 하는 것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전연(全然) 자기 일신상(一身上)의 문제일 따름인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만이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을 수가 있고, 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교화(敎化)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철두철미(徹頭徹尾) 참되게 닦아서 참되게 깨닫지 않는 한은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아무리 학식(學識)이 높고, 아무리 언변(言辯)이 좋고, 아무리 많은 사람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남을 위해서, 불법(佛法)을 위해서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선전을 하고 과대 선전을 해 가지고 널리 사람에게 알려서, 그래 가지고 어떠한 효과를 또는 이익을 얻어낼 수가 있지만, 이 깨달음만은 자기가 참되게 깨닫고, 참되게 남[生]이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남이 따르고 남이 알아주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내가 조그만한 것을, 조그만한 무슨 경계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자기의 살림을 삼고, 얻었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인증(認證) 받기를 바래고 그러한 행위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참으로 자기를 위해서, 불법을 위해서 대단히 가련하고 불쌍한 신세(身世)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꽉 맥힌 바보와 같은 그러한 수행인(修行人)으로서 일생을 마칠지언정, 결정코 그러한 조그만한 경지를 가지고 만족함을 삼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거듭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경신년 여름 결제(結制)가 시작이 됩니다. 금년(今年)에 얼마나 또 더울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설사 아무리 덥다 하더라도 지옥에 화탕지옥(火湯地獄)보다는 덜 더울 것입니다. 화탕지옥에 더위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는 한에는 화탕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래도 여기는 이 남섬부주(南贍部洲), 여기가 아무리 덥다고 해도 화탕지옥에 백분의 일도, 천분의 일도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덥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낼 분은 안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그 더우면 더운 그때를 향해서 오히려 더 분심(憤心)을 내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해서 하루하루를 정말 알차게 단속(團束)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옛날에 어떤 납자(衲子)가 산중(山中)에 토굴을 묵고 또 그래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나물 캐는 부인이 해 저물게 들어왔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린 기억도 있습니다마는, 나물 캐는 부인이 와서 하루쯤만 자고 가자고 그럽니다. 자고 가자고 그래서 그걸 안 받을 수도 없고, 깊은 이 산중이라서—나물을 캐러 온 게 아니라 나무를 하러 왔다고 그럽니다. 나무를 하러 왔다가...

그래서 그 춥기는 하고 날은 저물고 그래서—도저히 더군다나 부인을 갖다가 한 방에서 자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렇다고 그냥 밖으로—거절할 수도 없고.

 

"그러면 여기서 오늘 저녁에 하룻밤 새고, 그리고 내일 날이 새거든 돌아가라"

그래 인자 부인을 앉혀 놓고 잘 수가 없어서 그냥 그 스님은 떠억 앉은 채, 그날 저녁을 앉은 채, '잘되었다, 부인 덕분에 하룻저녁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할 수밖에는 없다' 이래 가지고 떠억 정진하는데.

 

아! 부인 보고는, "아, 고달픈데 그리 좀 비끼라"고 그래도,

"스님이 안 주무시는데 어떻게 내가 자겠습니까? 나도 그냥 앉어서 밤을 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이 떠억 앉어서 정진(精進)하는데, 아! 그 이튿날 새벽부터서 눈개비가 내리더니 한 치 두 치 쌓여 가지고, 두 자 석 자 넉 자, 삽시간에 아! 눈이 질을 넘게 눈이 퍼붓었다 그 말이여.

아! 깊은 산중은 눈이 일찍 내리고 또 그 이듬해 늦게 또 그 까지 눈이 내리고 눈이 녹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 그 눈이 그렇게 기인한께 와 가지고, 아! 부인이 도저히 그 이튿날 가기로 했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이, "아! 스님, 그 앉어서 무슨 공부를, 앉어서 대강 오래 앉어 있으면 그것이 공부입니까?"

"아니요. 앉어서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그러면 나도 좀 가르켜 주십시오. 이렇게 눈이 와서 나도 가지도 못하고 그러니, 공부를 하면 어떻게 좋으냐?"고 이리저리 물어서,

"이 참선(參禪)을 하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그래 가지고 큰 도인(道人)이 되면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참, 생사(生死)에 윤회(輪廻)를 벗어난다" 그래 딱 하니, 그 스님이 아는 대로 잘 일러주고, '이 뭣고?' 그렇게 생각하라고 가리켜주니까.

 

"그러면 기왕이면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나도 스님 따라서 같이 하겠습니다. 근데 그렇게 가만히 어제저녁에 보니까 스님이 앉아서 밤낮 꾸벅꾸벅 조는데, 기왕이면 그게 조는 것은 공부가 아니고 안 졸고 성성(惺惺)하게 해야 한다고 할진대는, 그러면 스님이 졸면 내가 죽비(竹篦)로 스님 머리빡을 때리고 또 스님이 졸면 내가 때리고, 내가 졸면 스님이 나를 때려서 잠을 깨우게 그렇게 약속을 하고 공부를 합시다"

아! 그것, 같잔허게 보살이 죽비로 때린 것을 맞은 것도 챙피하고, 그거 안 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그럼 한 번 그렇게 해 보자"고.

 

그래서 그 스님은 정신을 바짝 채려 가지고 '어쨌든지 이 보살한테 안 맞아야겄다' 이리 생각하고 죽비를 가운데다 떠억 놔 놓고는 마주앉아서 참선을 하기 시작하는데, 어떻게 이 보살이 잘 조는지 꺼떡하면 탁! 쳐 버리면 그냥 번쩍 눈을 뜨고 또 하고 하고, 며칠날은 보살이 아주 그냥 맡어 놓고 죽비를 맞더니,

한 일주일이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 보살이 잘 잠을 안 자는데, 이 스님은 긴장이 좀 풀렸던지 아! 영 졸다가 한 대 터지면 번쩍 눈을 뜨고, 불과 10분도 안 되면 또 졸다가 얻어맞고 해서, 한 철 내 어떻게 뚜드러 맞았던지 이마빡에 아주 혹이 아주 수십 개가 솟아나 가지고, 아니 인자는 뭐 챙피한 것도 뭣도 없고.

 

그렇게 하다가 한 달이 지내고 두 달이 지내고 석 달이 지내고, 그 산중은 늦게까지 눈이 녹질 안 해서 넉 달 동안을 뚜드러 맞으면서 정진을 했는데, 마지막에 가서 그 보살이 법문(法門)을 하는데, 그 법문 한마디에 눈을 번쩍 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다. 하고서, 일어서서 그 보살한테 절을 하고서 말을 하려고 하니까, 얼굴을 들어보니까 보살이 간 곳이 없어졌다 그 말이여.

그 보살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그 스님이 그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생사(生死)를 바치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갖다가 기특하게 생각하시고, 문수보살이 떠억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로 변장을, 화현(化現)으로 나타나 가지고 와서 그 한 해 겨울을 그렇게 경책(警策)을 하고 법문을 해 주셨다 이 말이여.

 

금년 여름에 우리 세등선원에서 40여 명이 모여서 정진을 하는데, 모두가 전국 각 사찰에서 대신심(大信心)을 낸 발심(發心)을 한 납자(衲子)들이 아주 이를 악물고 정진(精進)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지난 겨울철, 또 그 지난 여름철, 철철이 세등선원이 창설(創設)이 된 이후로 철을 거듭할수록 모다 발심한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님네들이 모여서 밤을 패가면서 이렇게 정진들을 하고 있어서, 참 이 세등선원을 창설한 원장(院長) 스님, 세등 스님은 몸은 이렇게 너무 과로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 몸은 불편하지만, 다 이렇게 전국에서 좋은 수행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유일한 기쁨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외호(外護)를 잘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승이 출가해 가지고 30여 년 동안 경험을 비추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선방(禪房) 어느 회상(會上)을 가도 반드시 그 회상에는 그 대중에, 대중(大衆)을 소란케도 한다든지 신경을 쓰게 한다든지 그래 가지고 꼭 그 말썽을 부리는 괴각(乖角)이 하나둘 씩은 꼭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만 오면 그 사람이 뵈기 싫어서 방부(房付)를 안 들이고 가 버리는 사람이 있고, 그 괴각(乖角)이 어느 선방에 간다 하면은, '아이구, 나 거기 안 간다'고 그래 가지고 안 와 버리고 딴 데로 간 사람도 있고, 때로는 그 괴각 바람에 중간에 도망간 사람이 있고, 중간에 전 대중이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을 아주 문을 닫아 버리는 그런 데도 있었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 세등선원에 다행히 아까 그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와 같은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혹(或) 이 철에 우리 선원에도 와서 계셨으면' 내 속으로 그걸 지금 간절히 지금 축원(祝願)을 하고 있는데, 어디가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어디 무슨 도민증(道民證) 같은 것을 가지고 있던지, 신분증이 있으면 대번에 그 사무실에도 알텐데, 그런 것이 없고 그냥 아주 그 전혀 표가 없이 오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그 스님이, 아까 산중에서 토굴에서 공부하던 스님이 발심해서 공부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지 안 했다면, 하나의 평범(平凡)한 나무하러 오는 아주머니에 지내지 안 했을 것이고, 또 그러한 보살화현이 와 주실 까닭도 없었을 것입니다.(21분26초~43분4초)

 

 

 

 

(3/4)----------------

 

우리 이 세등선원에 다행히 이 대중이 그렇게 정진을 하기 위해서 이를 갈아붙이고 '죽을 사(死)' 자를 갖다가 이마빡에 써 붙이고 가행정진 용맹정진한 대발심(大發心)한 납자(衲子)가 계신다면, 반드시 그러한 보살화현(菩薩化現)이 우리 대중 가운데에 숨어서 지금 계시지 않을란가, 반드시 그런 분이 와 주실 것이다 하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 보살화현으로 와 가지고, 꼭 그 아까 그 나물 캐러온 아주머니, 나무하러 온 아주머니처럼 꼭 그러한 형태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듣기 싫은 소리를 얼마든지 해서 대중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것이고, 괴각(乖角)을 부려 가지고 대중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계속 어떤 시비(是非)를 일으켜 가지고 옆에 사람하고 싸움을 걸을 수도 있는 것이고, 자기가 이 대중에 규칙을 잘 지키지 아니하고 밤낮 대중을 갖다가 소란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거야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괴각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똑같은 보살화현을, 발심한 사람은 보살화현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발심하지 못한 사람은 보살화현도 마구니의 종자(種子)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 대중들은 모두가 철저히 발심을 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여기에 공부하러 온 분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대중 가운데에 보살화현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 생각 한 생각, 일 초 일 초...(녹음 끊김)

 

이 몸을 함부로 그럭저럭 보내다가 죽음의 문을 맞이하겠습니까?

부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이 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成就)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신남신녀(信男信女) 여러분들도, 설사 이 선방에서 결제를 아니하셨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은 공부를 안 하고 그럭저럭 지내도 된다고 생각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세속(世俗)에 살면서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발버둥치다 보면 본의(本意) 아니게 많은 죄(罪)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전생(前生)에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러한 불법(佛法)을 만나시게 된 것입니다. 금생에 어쨌든지 정법(正法)을 믿고 몸은 비록 세속에 담겨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스님네보다도 더 이를 갈아붙이고 생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내생(來生)에 정법을 만나고, 내생에는 보다 더 큰 복(福)과 큰 지혜(智慧)를 받아 타고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세속에서도 유족하게 살고 좋은 환경에서 사시고, 불법을 만나서 이렇게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에 보시(布施)를 하셔서 이렇게 선원(禪院)이 잘 유지되어 가도록 뒷받침을 하시면서 동시에 또 여러분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어쨋든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물질은 아무리 그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내생에 한푼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라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한푼을 가지고 가지 못하고, 관 속에다가 칠보(七寶)를 갖다가 가뜩 채워서 가지고 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가(靈駕)가 그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시체와 더불어 묻혀 있을 따름인 것입니다.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일생 동안에 지은, 그러한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모이는 동안에 본의 아니게 지은—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업(罪業)만을 한 짐 짊어지고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갈 따름인 것입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 가지고 보시(布施)를 하리라'

'돈을 많이 번다면 내가 선방을 하나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법당을 내가 단독으로 지으리라'

'돈을 많이 벌면 내가 양로원을 하나 하리라'

 

돈 많이 벌 때를 기다려서, 그때를 기다려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껏 하고,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성의껏 보시를 하고 희사(喜捨)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에 보면 어떤 사람이 집에 염소를 길렀는데, 날마다 그 염소의 젖을 짜 가지고 식구대로 한 공기씩을 먹고 먹고 해서 아주 그 잘살고 있었는데, 앞으로 한 일주일 있으면 큰, 그날 무슨 생일잔치가 있어서 손님들이 많이 오게 되었어.

그래서 '그때 그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위해서는 지금 양을 날마다 짜 먹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짜 먹지 말고 그동안 저장을, 염소 뱃속에다가 저장을 시키자' 그래 가지고 젖을 짜지 않고 며칠 동안을 그렇게 놔뒀습니다.

 

그래 가지고 손님이 온 날, 그날 새벽같이 큰 그릇을 준비를 해 가지고 아무리 젖을 주물러도 젖이 삘삘 쪼끔 나오다가 나오지는 않고, 염생이는 죽는다고 아프다고 펄쩍펄쩍 뛰고,

"아! 어떻게 젖을 짜 가지고 그렇게 젖은 안 나오고 염소가 죽을라고 하냐? 저리 지내라. 내가 짠다" 아버지가 달라들어서 되게 갖다가 주물러 짜도 나오질 안 해.

 

"아니 무슨 젖을 그렇게 짜느냐"고. 엄마가 달라들어서 짜도 나오지 않고, 식구대로 달라들어서 힘을 들여서 쥐어 짜는데 젖이 벌게져 갖고 나중엔 피만 삐죽삐죽 나오는데, 젖은 한 방울도 안 나온다 이 말씀이여.

젖이라 하는 것은 짤수록 매일 적당하게 짜 주어야 젖이 계속 나오는 것이지, 젖을 안 짜면 잔뜩 불었다가 결국은 밭아 버린 것입니다.

애기에게 젖을 먹여 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매일 매일 젖을 빨려야 그 젖이 적당히 불어서 잘 나오지, 젖을 안 먹이면 하루 이틀은 터지도록 불어 가지고 아프다가 나중에는 결국은 그 젖은 말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산도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성의(誠意)를 다해서 보시(布施)를 해야, 그래야 또 돈이 또 벌려서 사업도 잘되고 계속 또 재산이 윤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여. 지금은 한참 지금 장사를 한다, 무슨 사업을 하기 위해서 돈이 아쉬워서 빚을 내다 쓸 판인데, 단 한푼이라도 애껴야지 무슨 희사(喜捨)를 하고 보시를 하느냐. 거지에게도 못 주고 양로원 · 고아원 · 형무소 어림도 없다. 또 군인에게 위문 어림도 없다. 내 자신 들일 것도 없는데 어떻게 주느냐. 더군다나 절에 안 된다. 나중에 많이 벌어 가지고 하리라'

그러다 보면은 늙어 버리고, 그러다 보면 별로 사업도 별로 보잘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생기는 대로 먹고살고, 그 가운데에도 조끔씩 거기서 마련을 해서 성의껏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부처님께도 보시를 하고, 스님네에도 보시를 하고, 양로원이나 고아원이나 또는 형무소, 또 그 우리의 아들딸들이 나라를 위해서 가서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에게도 겨울 철철이, 여름 더울 때, 명절에 모다 모두 정성을 모여서 희사(喜捨)를 하고.

이렇게 하면 자기가 천석꾼이 할 만한 복을 진 사람은 보시를 해도 천석꾼이고, 아무리 피가 나게 애껴도 천석꾼을 넘지를 못하고 결국은 천석꾼 받을 만큼 복 받으면 다 내 몸으로부터서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천석꾼 할 만큼 복(福)을 지어서 천석꾼을 하게 된 사람이, '금생에 그 돈이 전부가 자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 진리(眞理)가, 천주교(天主敎)나 유교(儒敎)의 말을 빌리면 '하느님이 자기에게 임시 맽긴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 돈을 어쨌든지 나와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적당히 쓰지만, 그리고서도 이것은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또는 삼보(三寶)에 보시를 적당히 하고 이런 사람은 천석꾼이 복(福)을 누리면서 동시(同時)에 앞으로 복을 더 받을 수 있는 복(福)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福)을 받기만 하고, 전생에 쌓은 복을 금생에 받기만 하고 새로 복(福)을 심지 아니한 사람은 그 복이 다해 버리면 금생에 가난뱅이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손 대에, 자손(子孫) 앞에 넘겨준다 하더라도 머지않아서 그 복이 바닥이 나고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금생에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복을 심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복을 심고, 넉넉한 사람은 넉넉한 대로 복을 심어야, 또 그 심은 복의 씨가 싹이 트고 잎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자가 보시(布施)를 아니하고 그렇게 해서 복을 짓지 아니한 사람은 당대(當代)에 망(亡)한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갖다가 자기 혼자만 쓰지 아니하고 온 마을 사람, 이웃, 불쌍한 사람, 거지, 절, 돈 없어서 공부 못한 사람, 또 사회 복지시설 그런 기관, 그런 데다가 막 풀어서 쓴 사람은 9대를, 만석꾼이로 9대를 내려간 사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대전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만석꾼이는 절대로 당대(當代)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석꾼이가 9대(代)를 내려간 사람이 있어.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망하지 아니할 텐데 토지개혁으로 말미암아서, 자유당 때 토지개혁으로 만나서 그 논을 갖다가 다 뺏겼습니다.

그래서 어려워졌지, 그러지만 안 했으면 그 만석꾼이가 계속 그 선조(先祖)에 유언(遺言)을 따라서 그렇게 보시를 하면서 살았다면은 9대뿐만이 아니라 90대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는 나무지가 아니라 복의 씨를 심는 것이 되는 것이여.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요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니라

나무~아미타불~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고, 그리고 그날 저녁에 떠억 자리에 누워서, '내가 과연 오늘 하루를 얼마만큼 알뜰히 공부를 했는가?' 따악 하루를 간단하게 한번 점검(點檢)을 하고,

또 '그 이튿날,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알뜰히 공부를 해야겄다. 오늘은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시비(是非)를 했지. 오늘은 공연히 부질없이 오늘은 하루가 지내갔구나. 내일은 더 알뜰히 해야겠구나' 그러면서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하루저녁을 하루를 자고.

 

그 이튿날 아침에 떠억 일어나서 '오늘 하루는 더 열심히 해야겄다'고 딱! 한 생각 각오를 하고서 하루 정진을 하고. 그날 저녁에 또 그날 하루 자기가 어떻게 공부를 했나. '이웃 사람과 잡담(雜談)을 하지 안 했나? 공연히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가지고 옆에 사람 신경을 건드리지 안 했나?'

 

참을성 없고 잡담하기 좋아하고 시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음 인자 되았어. 내가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나를 문수보살로 생각해 줄 테니까' 이리 생각하고, 시비와 잡담으로 대중에 괴각(乖角)을 부린 사람은 진짜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문수보살이 아닌 사람이 공연히 문수보살인 척하고 대중에 시비를 일으키고 했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지옥에 갈 것은 분명할 것이여.

부디 열심히 공부를 하고 금년 한 철이 출가(出家)한 목적(目的)을 달성하는 그러한 중대한 한 철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입재(入齋) 결제일(結制日)인 만큼 처음으로 선방(禪房)에 나온 분, 또 처음으로 이 참선(參禪)을 앞으로 해 보고자 한 그러한 분들을 위해서 간략히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점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자세와 호흡과 그리고 생각,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잘 알고 참선(參禪)을 해야지 이걸 잘 모르고 하면, 자기 딴은 애를 써서 한다는 것이 까딱하면 몸에 병이 생기기도 하고, 까딱하면은 정신이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사도(邪道)에 빠지게 되어 가지고, 본의 아니게 '참선을 하다가 그 사람은 잘못되었다. 그 참선이란 건 대단히 몹쓸 것이다' 그 사람 한 사람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참선을 못 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여.(43분5초~62분24초)

 

 

 

 

(4/4)----------------

 

자세(姿勢)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냐 하면 가부좌(跏趺坐).

가부좌는 처음에 오른다리를 꼬부리고 그 위에 왼다리를 딱 올려놔. 왼다리를 오른다리 무릎 위에다 올려놓고 그다음에 오른발을 갖다가 다시 들어서 왼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꼬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가부좌인데, 이렇게 안 앉아 버릇한 사람은 다리가 그 5분도 못 가서 다리가 저리고 아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가부좌. 왼발 하나만 오른 무릎 위에다 이렇게 올려놓는 것이여. 이렇게 딱 앉아서 하되, 이렇게 해도 다리가 저리면 또 그 왼다리는 내려놓고 오른다리를 갖다가 왼쪽 무릎 위에다가 이렇게 올려놓아도 됩니다.

 

그렇게 하고, 손은 그 올려놓은 복사뼈 위에다가 딱 오른손을 갖다가 오른손을 손바닥을 위로 해서 딱 올려놓고, 그 위에다가 왼손을 갖다가 이렇게 해서 딱 포갭니다. 포개서 놓고서 엄지손을, 엄지손 끝에 배를 서로 이렇게 맞대는 것입니다.

맞대되 이 (엄지)손이 너무 되게 눌러서 이렇게 위로 솟구쳐 올라도 안 되고, 또 이렇게 삐뚤어지게 해도 안 되고, 이렇게 동그스름하니 보기 좋게 이렇게, 떨어지지도 말고 너무 되게 붙이지도 말고 아주 가볍게 이렇게, 이렇게 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고.

 

고개는, 자세는 너무 뒤로 자지바지하니 앉았다 하고 참선을 잘한 척하고 투기로 버티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크게 잘못한 것이어요. 단정하게, 두 귀가 어깨 위에 놓이도록.

 

코끝은,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과 코가 수직상(垂直上)에 놓이도록. 조끔 앞으로 기울어도 수직이 아니고, 뒤로 자지바지해도 안 되고, 좌우로 이렇게 기울어져도 안 되고, 단정하게 하면서도 조끔도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기울어지지 않고, 그러면서도 어깨에 힘을 다 빼야 합니다. 어깨에다 힘을 이렇게 주면 안 되는 거여.

어깨에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다 빼고, 팔에 힘도 다 빼고, 전신(全身)에 힘은 다 빼는 것입니다. 다 빼되 아주 단정(端正)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정하면서도 힘을 다 빼되,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만 아주 가볍게 지그시 그렇게 힘을 배꼽 밑에 단전에다 힘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다 미어터지도록 거기다가 용을 써 힘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아주 힘을 주는 둥 마는 둥 하게 가볍게 힘을 줘.

 

이렇게 하고서, 좌우로 이렇게 서너 번 흔들어요.

서너 번 이렇게 궁뎅이가 뜰썩뜰썩하도록 요렇게 해 가지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정도에 가서 저절로 한 중심(中心)에 가서 딱 안정(安定)이 되도록. 그것은 궁뎅이 밑에 옷 같은 것이 혹 요렇게 구겨진 채 이렇게 있는 수가 있고 그래서, 너댓 번 이렇게 흔들흔들하면 옷이 싹 펴지도록.

옷 그렇게 해서, 그러면서 저절로 딱 하면 전후좌우에 기울어짐이 없이 딱! 중심이 요렇게 딱 잽히도록.

 

그리고 턱은, 너무 요렇게 하지도 말고, 앞으로 빼서도 안 되고, 단정하게 딱! 이렇게 붙이고.

 

이는, 저 아금니부터서 지그시 물어요. 너무 콱 다물어서도 안 되고, 이가 이렇게 떨어져서도 안 되고, 지그시 아금니부터서 이렇게 문다 말이여.

 

혀는 위로 꼬부려서,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 안에다 갖다 딱 갖다 대.

될 수 있으면 꼬부려서 저 안에다 갖다 대. 대고.

 

눈은, 감아서는 아니 되어요. 그렇다고 눈을 뚝 부릅떠서도 안 되고, 평상(平常)으로 눈을 떠서 평지에 약, 거기서 자기 앉은 자리에서 약 3m 지점에다가 눈을 떨구되 의식적으로 한 점(點)을 갖다가 주시(注視)하거나 응시(凝視)해서는 안 되고.

어떤 사람은 참선 할 때 콩알을 갖다가 떠억 3m 에다 갖다 놓고 계속 그것을 들여다보는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을 봤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3m 지점에다 떨구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본 바가 없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본 바가 없이 그저 평상으로 떠억 뜨고서,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호흡을 바르게 하는데, '호흡(呼吸)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냐?' 하면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한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또 조용하게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이 3초, 머무는 시간이 3초,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가량 되도록. 그렇게 해서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는, 한 번 하는 시간이 약 10초나 11초 이렇게 되도록.

 

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서, 저 뒤에서 쭈우욱 이렇게 들어마셔 가지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 배꼽 밑에, 아랫배에 가서 이렇게 담기도록.

 

다 들어마셨으면 3초 동안을 딱 정지를 했다가, 내쉴 때 물론 코로 내쉬지만 우리의 생각으로는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 말고, 또 쑤욱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뒤로 잡아당기면서 '그 호흡을 저 뒤에로 쭈욱 밀어버린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또 다 내쉬었으면 그때 배가 홀쪽해져 갖고 있을 테죠? 또 쑤욱 들어마시되 저 뒤에서 들어마시거든. 들어마신 호흡이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셔.

 

근데 주의할 것은, 볼록하게 들어마시라니까 배가 터지도록 들어마시는 사람이 있어 가지고 얼굴이 벌게져 가지고 한 번 두 번 하고는, "숨이 가뻐서 못 하겄다" 그래 가지고는 "후~ 이렇게 쉬어 갖고 다시 해야 하니 이렇게 해도 되냐?"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들어마실 때 100프로(%) 가뜩 들어마시는 게 아니라, 팔부(80%)쯤만 들어마십니다.

더 들어마실 수 있지만 팔부쯤만 들어마셨다가 3초 정지했다가 내쉬는데, 내쉴 때도 아주 등어리가 완전히 배가 등어리에 붙도록 다 내쉬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은 숨이 가뻐서 안 되어요.

팔부, 다시 또 더 내쉴 수 있지만 팔부(80%)쯤만 내쉬는 거여.

 

팔부(八部)쯤만 내쉬고서 또 스르르 들어마셔. 팔부쯤만 또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내쉴 때에는 내쉬는 시간이 약 5초니까—들어마시는 시간은 그냥 수르르~ 하니 부담 없이 들어마시는데 약 3초가 걸려요. 내쉴 때는 의식적으로 조끔 애끼면서 조용하게 천천히 내쉬어 보라 그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 하는 것이여.

 

 

<준비호흡>

 

그런데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를 말고, 처음에 본(本) 단전호흡 들어가기 전에 준비호흡이 있습니다.

준비호흡은 어떻게 하냐? 하면, 숨을 가뜩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을 요렇게 위로 들어올리면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참았다가, 입으로 '후~~' 이렇게 내쉬는 거야.

'후~~' 하고 이렇게 내쉬어. 다 내쉬되 가슴을 약간 이렇게 홀쪽하게 하는 듯하면서 다 쥐어짜면서 이렇게 내쉬는 거여. 다 내쉬어요. 이건 100프로(%) 다 내쉬는 거여.

 

다 내쉰 다음에 또 한 번 100프로(%) 들어마셔. 들어마셔 가지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후~~' 이렇게 내쉬는 거여.

이렇게 두 번 또는 세 번을 이렇게 하는 것, 이것을 '준비호흡'이라 해서 허파 속에 가뜩—허파가 이 어깨 위로부터 여기까지 이렇게 가슴에 요렇게 딱 있는데, 숨을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고 조끔 들어마셨다 내쉬면 허파 가운데 부분만이 호흡이 이렇게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고,

지끔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가뜩 어깨를 들면서 이렇게 가뜩 들어마셨다가 다 내쉬면 허파의 구석구석까지, 허파의 그 뾰족한 부분까지 구석구석까지 새로운 공기가 들어갔다가 완전히 허파 속을 소지[掃除]를 해 가지고 깨끗이 요렇게 소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두 번 세 번을 한 다음에 허파 소지를 해 놓고서 떠억 정식으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해야 호흡이 제대로 되고 아주 그 공부 잘되는 것입니다.

 

이 준비호흡을 하지 않고서 처음부터서 단전호흡을 하면, 얼마 안 가서 여기가 답답해지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여기가, 가슴이 앞가슴이 답답하고 소화가 잘 안되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반드시 언제라도 딱 앉어서 좌선(坐禪)을 시작할 때는 준비호흡을 먼저 하고서 단전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 단전호흡은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도 항시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 혈액순환이 잘되어서 몸안에 있는 모든 노폐물을 바로바로 배출을 시키기 때문에 피가 맑아지고, 피가 맑아짐으로 인해서 몸이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몸만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안정이 되고 깨끗해져서, 자연히 그 사람은 도(道)를 닦을 수 있게, 도를 닦는데 가장 좋은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나, 관공서나 회사에 다니는 사람, 요새는 너무너무 피로가 겹쳐서 견디기가 어려울 만큼 그렇게 세상이 일이 많고 복잡해졌습니다.

이럴 때 이 단전호흡을 항시 하면 그때그때 피로를 해소하게 되기 때문에 학생도 공부를 더욱 잘하게 될 것이고, 일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도 그날그날 피로를 그때그때 풀어버렸기 때문에 건강하게 그렇게 능률 있게 일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하면 혈압도 내려가게 되고, 모든 노이로제 현상도 예방하고 치료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니,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고, 그래도 해 보면 또 의심이 나는 것이 있으면 또 물어보시고 해서 어쨌든지 이것을 열심히 하시기를 권장합니다.

 

특히 참선(參禪) 하는 사람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이 단전호흡을 잘 알아서 해야 상기병, 선객(禪客)에 있어서 사형언도나 마찬가지인 그 상기병(上氣病)을 예방(豫防)을 하고 또 그러한 기운이 있는 사람도 치료(治療)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단전호흡(丹田呼吸) 밖에는 없습니다.

 

한번 상기병이 걸려 놓으면 약을 맞고 뜸을 뜨고 침을 아무리 맞어도 좀체 낫지를 않습니다마는, 이 단전호흡 하는 법을 알아 가지고 잘하면 백발백중(百發百中)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미리 이 법을 알아 가지고 열심히 하면 그런 상기병에 걸리지 아니하고, 소화도 잘되고, 혈액순환도 잘되고, 그래서 마음도 안정이 되고, 화두(話頭)도 잘 들리게 되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成就)하게 될 것입니다.

 

 

<화두 의심>

 

그다음에는 '생각을 어떻게 가져 나가느냐? 화두(話頭)를 어떻게 들어가느냐?'

이 문제인 것이여. 이것이야말로 진짜 참선(參禪)인 것입니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또 무자(無字) 화두를 하신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뭣고?~~' 숨이 다 나갔으면 또 숨을 들어마시고, 3초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고 두 시간 이내에는 이 단전호흡을 아니하는 것이 좋습니다. 밥에다 숭늉에다 국에다 가뜩 먹고서 배가 부른 데다가, 숨을 들어마시고 아랫배에다 숨을 밀어넣으면 위가 늘어나고 위하수 같은 그런 병(病)이 생기고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시간 정도 되면, 밥이 다 삭아서 배가 꺼지니까 두 시간 뒤부터서 하고, 그렇다고 해서 두 시간 이내에는 낮잠이나 자고 공부를 아니해도 되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단전호흡만을 하지 말고 그냥 호흡을 보통 호흡(呼吸)으로, 그냥 예사 호흡으로 하면서 화두(話頭)는 역력(歷歷)히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세를 바르게 할 것,

둘째, 호흡을 바르게 할 것,

셋째, 화두를 바르게 드는데, 호흡을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쉴 때 '이 뭣고?~~'

 

다 내쉬면 써억~ 들어마실 때에도 지금 '이 뭣고?~~' 한 끄터리가 지금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꼬리가 지금도 지금 계속 요렇게 나가고 있는 거여.

3초 머무를 때에 까지도 그 아까 들었던 그 화두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여운(餘韻)이 그때까지 오는 거여.

 

그래 가지고 새로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머무를 때까지 그 여운이 갔다가, 내쉴 때 또 '이 뭣고?~~' 이렇게 하는 거여.

 

그러면 '언제까지라도 그렇게만 하면 되냐?' 하면, 그게 아니고,

나중에는 숨 한 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또 한번 들어마셨다 머물렀다 내쉬고, 세 번 할 때까지도 그 '알 수 없는 의심의 여운'이 있으면은 새로 안 해도 괜찮어요.

 

아침에 들었던 화두(話頭)가 점심 먹을 때까지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눈앞에 있으면은 자꾸 거기다가 '이 뭣고? 이 뭣고?'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익숙해지면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점심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때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 가운데에는 반드시 그런 경지를 맛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들었던 화두가 저녁에까지, 저녁에 들었던 화두가 아침에 그 이튿날까지도 고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몸이 가볍고 편안하고, 그 마음이 편안하고 깨끗하고 그 경계는 뭐라고 이게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 편안하고 좋구나' 그러한 생각을 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다못 알 수 없는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 누가 이런 때 누가 툭!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으면...' '이럴 때 어떤 선지식(善知識)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으면...'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돼. 천길만길 올라갔다가 그 한 생각에 툭!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공부가 잘되어 갈수록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오직 화두(話頭)만이 독로(獨露)하도록 단속(團束)해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좀 잘되어 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화두가 잘 안되고, 가슴이 미어지고 시간이 지루하기를 5분이 한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질 때가 있고 몸부림이 쳐질 때가 있지만, 조끔도 번뇌심(煩惱心)을 내지를 말고 허리를 쭉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 것입니다.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하지만, 가만히 일어서서 나가서 포행(布行)을 한 5분 내지 10분을 하고 정신이 깨끗해지면 또 자리에 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그 대중처소(大衆處所)에서는 참 그 일어섰다 앉었다 하기가 대단히 미안해서 그런 것도 지혜 있게 도반(道伴)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잘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남에게 피해(被害) 가는 것이 대중처소에서는 제일 조심(操心)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정말 간절(懇切)히 공부를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62분25초~1시간22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인천 용화사(龍華寺)나, 세등선원 조실(祖室)은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 공안(公案) 화두(話頭)의 뜻. 천칠백 공안. 공안은 오직 깨달은 사람만이 그 공안(公案)의 원리(原理)를 분명하게 볼 수가 있다.

 

반기이파(飯器已破) 공안 / 깨달음은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러야 /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발심(發心)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준다 /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 보시, 희사(喜捨)로 복(福)의 씨를 심어라 /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 하루 결제(結制) / 자세, 단전호흡, 화두 드는 법에 대한 자세한 법문.

 

 

주장자를 들어서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그리고 그 주장자로 법상을 쳐서 그 소리를 여러분께 들려드렸습니다. 주장자를 들어서 보이고, 쳐서 소리를 들려드리면 그것으로써 그 이상 더 불법(佛法)을 설(說)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입을 벌려서 그 이상 더 법을 설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모가지가, 머리가 목 위에 하나가 있는데 다른 데서 목을 하나 갖다가 그 머리 위에다가 하나를 더 포개 놓은 거와 같을 것이고, 닭다리를 떼어 버리고 오리다리를 갖다가 이어서 짬매 놓은 거와 같을 것입니다.

 

전강(田岡) 스님께서도 6년 전에 77세를 일기(一期)로 열반을 하셨지만, 우리는 전강 큰스님의 법문을 녹음기를 통해서 생존해 계실 때와 똑같이 그렇게 분명하게, 성성(惺惺)하게 법문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사 한마디 녹음을 해 놓으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 말씀도 생존시(生存時)에 육성(肉聲)을 들을 수가 없다 하더라도, 오시고 가신 것이 없는 그러한 경지를 체달(體達)하신 스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조실(祖室)로 모셔도, 모시고 생존해 계신 듯, 계신 것처럼 믿고 그 법(法)에 의지해서 도(道)를 닦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스님을 조실로 모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가 올바르게 해 나가자면 이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해야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깨달랐는가 바로 깨닫지 못했는가를 점검(點檢)해 보려면 이 공안을 갖다가 들여대 가지고 그 공안에 대한 답(答)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 사람이 어떠한 경지(境地)에 도달했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공안을 접(接)했을 때 바로 이를 수 없으면 다못 의심(疑心)이 돈발(頓發)해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반기이파(飯器已破)'의 공안에 대한 법문.

 

우리는 고인(古人), 부처님과 모든 성현(聖賢)과 모든 선지식(善知識)의 경지에 여지없이 이르기 전에는 스스로 조끔 공부를 해서 조끔 무슨 소견(所見)이 났다 해서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산중 납자(衲子)의 수행을 위해 아주머니로 화현하신 문수보살(文殊菩薩).

 

다못 대중 각자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돈발(頓發)해 가지고 정말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할 그러한 사람에게는 괴각(乖角)이 고대로 문수(文殊) · 보현(普賢)과 같은 그런 보살화현(菩薩化現)이 되어 줄 것이고, 발심을 못한 사람에게는 공부 대중을 소란케 하는 하나의 마구니로 밖에는 보이지 아니할 것입니다.

 

『백유경(百喩經)』의 염소 젖 이야기

 

백 년 동안 재물을, 불같은 욕심으로 재물(財物)을 탐(貪)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띠끌에 지내지 못하고, 3일 동안 발심(發心)을 해서 이 세상 인생(人生)이 무상(無常)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3일 동안 도(道)를 닦은 것은 천년(千年)에 보배가 되는 것이다.

 

부디 금년 한 철 석 달을, '석 달 길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 '오늘 하루 결제(結制)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 하루를 알뜰히 정진(精進)을 하라.

 

참선의 자세와 호흡과 화두 드는 법을 상세히 말씀하심.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둘째는 '호흡(呼吸)'을 바르게 할 것이며, 셋째는 '생각'을 바르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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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세등선원(1~73)/(26~50)2020. 12. 24. 11:02

 

 

((세등선원No.28))—1980년(경신년) 하안거 반결제 법문(80.05.30) (54분)

(1/3) 약 18분. (2/3) 약 18분. (3/3) 약 18분.

(1/3)----------------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한데  기조녹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 쪼각 흰구름은 강(江) 위로 오는데, 몇 줄기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가는고.

 

오늘 경신년(庚申年) 5월 30일, 중산림을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법문(法門) 가운데에서 한 편을 잘 들었습니다.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이여.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밥 먹고, 옷 입고, 잠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앉고 서고, 이것이 우리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읠 수가 없는,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난데, 그것을 깨닫는 것이여.

 

이 도리(道理)는 너무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라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먼 데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찾으면 찾아지고 잡으려고 하면 잡히겠지만, 너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찾으므로써 오히려 놓쳐 버리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려고 하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여.

 

이러한 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는데, '어째서 잠시도 여읠라야 여읠 수 없는 것을 찾아야 하는고? 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며, 그러한 공부가 세상에 어디에 있어?'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는 아무리 자식이 사랑스럽다고 해서 자식에게도 가리켜 줄 수가 없고,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울 수가 없는 도리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리킬라야 가리킬 수가 없고 배울라야 배울 수가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또한 어렵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해는 동쪽 하늘에서 뜨고 석양(夕陽)에는 해가 서쪽으로 지는데 어떤 어린아이가, "왜 해는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뜹니까?" 하고 물어볼 때에 어른은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은 너무나 평범(平凡)한 사실(事實)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 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

'왜 원래(元來)로 있는 거, 원래로 갖추어져 있는 거, 찾을 것도 없이 언제나 있는 것을 왜 찾아야 하며, 어떻게 찾으며, 찾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우리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여.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도리를 위해서 우리는 청춘(靑春)을 바쳐야 하고, 목숨을 바쳐야 하고 과거에 모든 불보살과 성현들이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몇천 생, 몇만 생의 목숨을 바쳐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리(道理)를 모든 중생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 손바닥 만한 땅도 불보살이 몸을 버리시지 아니한 곳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위대함과 불법의 높고 깊은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얻어진 것이고 배운 것이고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라면 무엇이 어렵다고 할 것이며, 어찌 가리켜 줄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조사관(祖師關)이라는 게 무엇인가?

"여하시 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입니까? 어떠한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달마조사가 서천(西天)에서, 인도(印度)에서 중국으로 오신 의지(意旨)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판치(板齒)에 털이 났느니라" 또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라" 또는 "마삼근(麻三斤)이니라" 이렇게 모다 대답을 하셨는데.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낭기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는데 대해서, 조주스님이 "무(無)" 했으니,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고?' 또는 이 시삼마(是甚麽) 화두를 하는 사람은, '이 무엇고?'

이것이 모다 천칠백 공안(公案) 가운데에 들어 있는 화두(話頭)입니다.

 

그 화두를 자기 멋대로 하나씩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을 수 있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적(指摘)을 받아 가지고, 지정된 자기의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한결같이 참구(參究)하는 것입니다.

참구라고 하면 이론적으로 따지기가 쉽지만, 이 화두,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화두는 따져 들어가는 게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이렇게 의심(疑心)을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크게 의심을 한다'고 하는 것은, 두 눈썹 미간(眉間)을 갖다가 찡그리면서,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마를 찡그리면서 머리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저 배꼽 밑에 단전(丹田)에다가 떠억 두고서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여.

 

'이 뭣고?'를 하는 분은,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무슨 망상(妄想)이 떠오르더라도 그 망상을 없애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을 갖다가 쫓아내려고 하지도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짜증스럽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일어나는 고대로 놔둬 버리고 나는 '이 뭣고?' 이렇게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를 들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 훔'을 부르듯이,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루에 만 번 또는 이만 번 이렇게 횟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화두는 드문드문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 뭣고?'

 

가끔 가끔 하되, '이 뭣고?' 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동안에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은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되아요.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거여.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뭣고?' 그때 한 번 다시 화두를 드는 것이여.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이것입니다. '화두를 관(觀)한다' 이것입니다.

 

무슨 망상(妄想)이 들었을 때 '이 뭣고?'

혼침(昏沈)이 들어왔을 때 허리를 쭉 펴고 '이 뭣고?'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생각이 났을 때 '이 뭣고?'

무슨 근심 걱정이 있을 때 '이 뭣고?'

앉을 때 '이 뭣고?'

일어설 때 '이 뭣고?'

걸어갈 때 '이 뭣고?'

세수할 때 '이 뭣고?'

 

때와 장소가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 뭣고?'

 

화두(話頭)가 처음에는 그렇게 들려고 해도 잘 안 들리고 딴생각만 일어나고 하지만, 자꾸 들고 또 들고, 한 행동으로부터 다른 행동으로 옮길 때 화두가 놓치지 않도록, 그때 화두가 놓쳐졌걸랑 다시 한 번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공부를 다구쳐 나가면, 나중에는 차츰 잊어버리는 시간은 줄어지고 화두가 들어지는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들려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를 말고, 아무리 화두를 들려고 해도 놓쳐지고, 억지로 들려고 하면은 골치가 아퍼지고 목이 빳빳해지고 이러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정 화두(話頭)가 잘 안 들리고, 혼침(昏沈)이 퍼일어나고 몸이 뒤틀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럴 때에는,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 포행(布行)을 한 5분간 하다가 정신이 청쾌해지면 다시 또 자기 자리로 돌아와 가지고 허리를 쭈욱 펴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갈 것입니다.(처음~18분44초)

 

 

 

 

(2/3)----------------

 

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고락(苦樂)을 같이 하기 위해서 이 세등선원에 모인 사람은, 세상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끊어 버리고 진실(眞實)로 오직 이 생사대사(生死大事) 하나만을 위해서 대중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順應)을 하면서, 인사(人事)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다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사(人事)를 다 닦아야 하는 것이지만,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원에 들어온 이상은 일체 인사를 다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사를 추리기로 하면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환갑이라고 가야 하고, 결혼식 한다고 가야 하고, 누구 죽었다고 가야 하고, 사십구재라고 가야 하고, 백일이라고 가야 하고, 소상(小喪) · 대상(大喪)이라고 가야 하고, 이렇게 인사를 추리고 다니다 가서는 한도 끝도 없는 것이여.

 

주지(住持) 같은 것을 맡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없이 모다 그러한 인사로 오고 가고 하는 수가 있지만, 대중처소(大衆處所)에 한 번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온 이상에는 그러한 인사를 밖으로 다니지 아니해도 그것이 실례가 되는 것이 아니여. 해제(解制)한 뒤에 얼마든지 인사를 닦을 수가 있는 것이여. 결제(結制) 중에 안 가는 것은 실례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 가는 것이 인사를 잘 닦는 것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옛날부터 결제 중에는 자기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오더라도 그 부고장(訃告狀)을 본인에게 보여주지 아니하고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다가 해제가 한 다음에사 '이러한 부고가 왔었다'고 하는 것을 알려드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사(人事)를 다 끊어 버리고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하되, '인연 따라서 수용한다'고 하는 것은, 죽이면 죽, 밥이면 밥, 보리밥이면 보리밥, 찰밥이면 찰밥, 반찬이 짠지면 짠지, 된장찌개면 된장찌개, 한 가지도 좋고 두 가지도 좋고 닥치는 대로 먹되, '이렇게 먹어 가지고 어떻게 영양이 보충이 안 되아서 이래 가지고 어떻게 공부를 할까?’ 그것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여. 왜 그러냐?

 

아무리 잘 먹어도 번뇌(煩惱)와 망상(妄想) · 오욕락(五欲樂) · 탐진치(貪瞋癡)로써 생활을 해 나간 사람은 그것이 살로 가지를 않는 것이고, 오히려 잘 먹는 것이 원인이 되아서 병(病)이 나는 것이고, 짠지나 된장찌개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잡곡밥에 밥을 먹어도 탐진치 삼독(三毒)을 돌려서 참선(參禪) 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것만 먹어도 충분히 몸을 유지해 나가게 되는 것이여.

이것은 삼천년을 두고 역대조사(歷代祖師)와 고인(古人)들이 다 실천으로써 우리에게 다 보여주셨어. 산중에 어느 선방, 또는 일본에 그 큰 선방을 가보더라도 짠무 김치, 닥꽝 김치 하나에 된장찌개만 가지고도 영양실종이 되어서 병이 났다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어도 충분하게 건강을 유지해 나가고 다 도(道)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을 한다' 이것입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먹고 입고 이 의식주 문제에 관해서는 그때 형편에 따라서, 오직 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헛되이 보내지 아니하면서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알뜰히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갈 뿐인 것입니다.

 

잠은 9시부터 3시까지 그 때를 제외하고는 잠을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시내에 외출(外出)을 하지를 말며, 대중적으로 특별히 허락할 때가 아니면 일체 경(經)을 읽고 외우는 것도 허락을 하지 아니해.

'이렇게 해서 3년간을 한결같이 간절하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서, 그렇게 해 가지고서도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하면 내가 니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몽산(蒙山) 스님께서 대중(大衆)을 향해서 다짐을 하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공부해서 3년을 해 가지고 견성을 못하면 내가 너희들 대신 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맹세(盟誓)를 했는데, 그렇게 하면, 그렇게 3년을 하면 틀림없이 견성(見性)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맹세를 하신 것이여.

과연 우리도 지나간 세월을 두고 그렇게 공부를 했던가! 냉정하게 반성(反省)을 해 보고, 그리 못한 사람은 그와 같이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공부를 하되 덮어놓고 말 아니한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잠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던지, 덮어놓고 밥을 굶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던지, 어떠한 그러한 행동에만 치우친, 치우친 행동으로써 공부를 삼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말을 많이 아니한다든지, 음식을 과식을 아니한다든지, 너무 잠을 많이 잔다든지, 이러한 것들이 분명 공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 아니한 것 자체를 궁극에 공부의 목적을 삼는다든지, 잠을 안 자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든지, 밥을 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근본(根本)을 망각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최초에 대오(大悟)를 해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셔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최초에 법문(法門)을 하실 때에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하면, 지나친 호강을 하는 것도 성실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지만, 너무 지나치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로 공부를 하는 것도 그것도 또한 지혜로운,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고 하면은 부처님을, 정반왕(淨飯王)의 명령을 받어서 '부처님을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기어코 모시고 오라. 태자를 모시고 오라' 한 당부를 받고 온 그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들이, 너무 부처님이 발심(發心)을 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도 따라서 출가(出家)해 가지고 도를 닦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도(大道)를 성취할 때까지는 결단코 밥을 먹지 말자,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말자' 이렇게 모다 맹세를 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하룻날, '내가 이렇게 밥을... 덮어놓고 음식을 굶고 육체만을 갖다가 들볶는 이러한 고행(苦行)만을 가지고서는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가 없겠다. 그러니 어쨌튼지 이 몸에 필요한 만큼은 먹여주면서 기운을 챙겨 가지고 그 깨끗한 정신으로 공부를 해야만 이 도(道)는 이루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강으로 가셔서 목욕을 하고, 그때 마치 수자타(Sujātā)라고 하는 마을의 처녀가 유미죽(乳糜粥)을 써 가지고 오는 것을 보시고, 그 수자타가 바친 유미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유미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교진여들은, '아하. 태자가 마음을 변했구나. 마음이 변해 가지고 도심(道心)이 약해져 가지고 저렇게 수자타가 갖다 바치는 죽을 받아 자셨구나. 그래 가지고서는 우리의 처음에 약속이 다르지 않는가. 싯달태자는 타락(墮落)을 했다. 변심(變心)을 했다. 타락하고 변심한 태자와 우리가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같이 있어 봤자 우리까지 타락을 하고 물들겠다. 그러니 우리는 태자를 버리고 딴 데로 가자'

이래 가지고 태자를 버리고서 녹야원(鹿野苑)이라고 하는 곳으로 떠나가서 자기네끼리 도를 닦고 있었던 것이여.

 

부처님께서 도(道)를 깨달라 가지고, '최초에 내가 누구를 향해서 최초(最初)에 법을(法)을 설(說)할 것인가?' 생각해 보신 결과, 녹야원으로 가서, '그래도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교진여들 다섯 사람이다' 이리 생각을 하시고 교진여가 있는... (녹음 끊김)

 

육체를 갖다가 들볶는 것으로써 공부를 삼았기 때문에, 고행(苦行)으로써 공부의 목표(目標)를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성(聖)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잘 먹고, 너무 잠을 많이 자고, 잘 입고, 호강에 빠진 공부가 또한 성스러운 공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께서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지나치게 호강에 빠지지, 편안, 안일(安逸)에 빠지지도 아니하고, 지나치게 육체를 들볶지도 아니하는, 적당한 선에서 자고 적당하게 먹고 적당하게 입되, 그 가운데에 어디에다가 우리에 정진(精進)의 핵심을 맞춰야 하느냐?

본참화두(本參話頭),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하라고 하냐 하면, 단전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만을 간절히 들어 나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운이 머리로 모여서, 피가 머리로 모이고 기운이 머리로 모여 가지고 뒤통수가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모가지가 빳빳해지고, 그래 가지고 맑은 정신이 없어지고, 공부만 하려고 화두만 들려고 하면 골치부터 아파.

이래 가지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사람은 먼저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잘 알아 가지고 수승화강(水昇火降), 시원한 물기운은 위로 올라가서 머리가 시원해지고, 더운 불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서 단전(丹田) 부위 하복부(下腹部)가 따뜻해지도록.

이렇게 해서 시원한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더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야 혈액순환이 잘되고 몸이 가볍고 머리가 깨끗하고, 이리해서 몸은 건강해지고 공부는 지장이 없이 잘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직 화두 하나만을 간절히 들 뿐이지, 무슨 정신 헷갈리게 단전호흡을 하냐?' '단전호흡(丹田呼吸) 할라, 화두(話頭) 들라 하면은 정신이 두 갈래로 갈라져 가지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 화두만을 들어야지, 무슨 단전호흡이 필요 있느냐?'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화두만 들면, 다행히 그렇게 들어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잘 들리고 수승화강이 잘되어서 조끔도 상기병(上氣病)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좋지만, 까딱하면 상기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안 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제절로 단전호흡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화두만 떠억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된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허리만 쭉 펴도 저절로 그 가운데 단전호흡이 되고, 단전호흡이 되면서 화두도 떠억 들리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정신이 헷갈리기 커녕은 오히려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18분45초~36분20초)

 

 

 

 

(3/3)----------------

 

호흡을 들어마셔 가지고 잠깐 머물르는데—들어마실 때에 ‘코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차츰차츰 저 깊이 아랫배까지 밀어 넣는다’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숨을 저 뒤에, 저 궁딩이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를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신다.

 

쭈욱- 저 뒤에서 일직선으로 잡아댕겨.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팔부쯤만 들어마셔.

들어마신 상태에서 약 3초 동안을 머물러. 꼭 3초가 아니라, 약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또 내쉬는데,

이리 해서 '코로 내쉰다'고 생각하지를 말고 저 뒤에로, 저 뒤에로 내밀어 버리는 기분으로 배를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이 하라.

 

다 내쉬었으면 또 수르르르~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들어마셔 가지고, 머무르는 시간이 약 3초 동안.

머무르는 호흡을, 머물렀다가 호흡을 쑤욱 뒤로 내쉬는데, 내쉬는 시간이 약 5초 동안, 4~5초 동안.

 

이렇게 해서 모두 한 번, 들어마셨다가 · 머물렀다가 · 내쉬는데 약 10초나 11초, 이런 정도가 걸리도록.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또 조끔씩 길게 해도 상관이 없는데, 억지로 그 시간을 늘리려고 무리를 하지 말아라 이것입니다.

억지로 무리를 해서 하면 서너 번도 못해서 벌써 숨이 가빠지고 힘이 들어서 오히려 못쓰는 것이니까, 아주 그 30분 동안을 계속해도 조끔도 힘이 들지 않고, 한 시간을 그렇게 해도 힘이 들지 않도록 조끔도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그때 화두(話頭)를 들어라.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소리를 내서 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안 내고 그렇게 하라.

 

또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쉴 때,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하되, 눈은 항상 평상(平常)으로 뜨고 해야 하는 것이여.

 

눈을 감고 해 버릇하면, 눈을 감고 하는 것이 공부가 더 잘된 것 같고, 더 마음이 편안한 것 같고 고요한 것 같은데, 그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지만 절대로 눈을 감고해서는 아니 돼.

눈을 감고 하면 까딱하면 혼침(昏沈)에 빠지기 쉽고, 나중에는 이상한 것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눈을 평상으로 뜨고 해야 성성(惺惺)하고 그러한 잡된 것이 어리대거나 보이는 법이 없다 그 말이여.

 

눈을 평상으로 뜨고 호흡은 극히 자연스럽게 하되, 조용하게, 편안하게, 천천히 그렇게 하되 무리가 없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 떠오르는 생각을 버리려고 하거나, 쫓아내려고 하거나, 그것을 누르려고 하지를 말고, 그냥 고대로 나두고 나는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화두만 딱! 들어버린다 그 말이여.

화두만 딱! 들어 버린 것이 그것이 가장 간단하게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지난날 며칠 전에 삼일 동안에 가행정진(加行精進)을 대중들이 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더울수록에 더욱 가행정진을 하고, 추울 때에는 추울수록에 가행정진을 하고, 몸에 상태가 안 좋으면 상태가 안 좋을수록에 오히려 정신을 가다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하고, 이리해야 이것이 참선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 더운 때를 맞이해서 가행정진을 했다고 하는 사실은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를 위해서 한 것이지만, 대단히 기특하고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까지 석 달 안거(安居) 중에 절반이 지내가고, 앞으로 한 달 반이 남았습니다. 지내간 한 달 반보다도 이제 정말 삼복(三伏)더위가 남아 있습니다. 삼복더위에 그 땀은 줄줄줄줄줄 흐르고 땀띠기는 등어리로 모다 궁뎅이로 땀띠가 나 가지고 긁을 수도 없고, 가렵고 쑤시고 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참 어려운 고비가 남았습니다.

 

그래도 지옥에 가서, '가사(袈裟)를 입은 사람이 정진(精進)을 제대로 못하면 까딱하면 그 가사를 다시 다음 생에 입지를 못하고 지옥(地獄)에 가기가 쉽다'고 하는 것을 고인(古人)들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 모이신 대중들은 틀림없이 금생(今生)에 대도(大道)를 성취하고, 내생(來生)에 또다시 사람 몸을 받아서 다시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밝히게 되리라고 생각은 되지마는, 만에 하나라도 내생에 지옥고(地獄苦) 받을 것을 생각한다면, 금생에 궁딩이에 땀띠가 좀 나고 더운 것쯤이야 오히려 그것을 더 계기 삼아서, 동기 삼아서, 발판 삼아서 더 가행정진을 하되, 지혜스럽게 단속(團束)을 해야 한다.

가행정진을 한답시고 어리석게 공부를 하면, 공부는 성취되지 못하고 병만 나고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가행정진(加行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은 얼마든지 할수록 좋지만, 그 대신 지혜롭게 단속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단속한 것이냐?

여태까지 말씀드린 바로 그것이 지혜롭게 단속하는 것이다.

 

어리석게 단속을 하고 어리석게 공부하는 사람은 병(病)만 툭 터져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갖다가 걱정만 끼치고 공부에 큰 지장만 초래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하는 사람은 그 힘을 얻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발심(發心)을 허것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생사해탈(生死解脫) 하는 것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하라. 굳게, 긴(緊)히 화두(話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할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차운 것이 뼛속에 사무치지 아니할 거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오.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오.

 

되게 강추위를 한 뒤 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가 코를 치도록 진동(振動)한 것이다.

그러니 가행정진 용맹정진,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말 알뜰히 단속하여서 철저하게 정진을 해야만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경신년 하안거(夏安居) 반살림인 동시에, 수원 청룡사 영선 묘길 비구니 스님과 진주 대원사 총무로 있다가 너무 불사(佛事)에 골몰하다가 과로해서 돌아가신 성옥 행원 비구니 스님의 사십구재(四十九齋) 날입니다.

우리와 같이 출가수행인으로서 일생 동안을 참선을 하고, 또 불사를 하고, 교화(敎化)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위해서 일생 동안을 애를 쓰다가 너무 과로한 탓으로 해서 홀연히 이승을 하직(下直)을 했습니다.

 

일생을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위해서, 불사(佛事)를 위해서 애쓰던 분들이라 반드시 다시 또 새 몸을 받아나 가지고 우리와 같이 또 공부할 수 있게 될 날이 올 것이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과거 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이 남아 있다면, 오늘 이 반살림 법문을 통해서 그러한 업이 춘설(春雪)같이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이고, 도솔천내원궁이나 극락정토 또는 이 사바세계에 속히 돌아와서 일대사(一大事)를 밝혀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되기를 부처님께 축원(祝願)을 합니다.

 

생사(生死)는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가 없기 때문에 해탈할 것도 없고, 원래 우리의 불성(佛性)자리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조끔도 다름이 없어서 진묵겁(塵墨劫) 전에 깨달라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상태여 다시 깨달을 것도 없고, 지금 영가(靈駕)는 업(業)으로 뭉쳐진 사대육신(四大肉身)을 인연이 도래(到來)해서 다 버렸을 뿐이요, 오직 그 신령스러운 영각성(靈覺性)만이 이 법상 앞에 참석을 했습니다.

산승의 설법을 빌릴 것도 없이, 그 영각(靈覺), 원각대지(圓覺大智)만이 홀로 드러난 이 상태라, 누구보다도 잘 이 도리를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알 것입니다.

 

대중과 이 자리에 청혼(請魂)된 영선 묘길 영가, 성옥 행원 영가는 주장자를 통해서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보일 것이니,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이 도리와 계합(契合)이 될 것입니다.

 

쿵!(주장자로 법상을 내려치심)

 

남은 반살림 열심히 정진(精進)하셔서, 일생을 통해서 이 한 철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해결하는 중대한 계기(契機)가 되도록 힘써 줄 것을 당부하고 말을 마칩니다.(36분22초~54분1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일편백운강상래~ / 불법(佛法)은 '내가 나를 깨닫는 법' 내가 나를 어떻게 깨달으냐? 깨달라서 무엇을 하느냐? 깨달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린다 /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수투조사관(參禪須透祖師關) 묘오요궁심로절(妙悟要窮心路絶) / 조사관(祖師關)은 곧 화두(공안)을 말함 /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 '화두(話頭)를 든다'고 하는 것은 '화두를 생각한다', '화두를 관(觀)한다'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 공부는 근본을 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해야 / 정진(精進)의 핵심은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 /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된다.

 

단전호흡 방법 / 지혜롭게 공부를 단속해야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비구니 스님의 49재. 생사는 원래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잠시도 여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그것이 바로 나의 주인공(主人公)이요 '나'이니,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는 너무나 우리와 가깝고 너무 평범(平凡)하고 여읠래야 여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찾다가 오히려 잃어버리는 것이여.

 

너무 쉬웁기 때문에 어렵고, 원래로 내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찾으므로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고, 각기 제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배울 수가 없다고 하는 것. 너무도 이치가 분명하고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리켜 줄 수가 없는 것이여.

 

밖에서 얻어 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는 세간법(世間法)과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간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듣고 해서 자꾸 알아 보태는 공부지만, 이 공부는 자꾸 자기를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본참화두(本參話頭), 공안(公案)에 대한 간절한 참구(參究), 이론을 떠난 참구, 의단(疑團) 의심(疑心)으로 이것을 관조(觀照)함으로써 만이 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여.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法門) 속에서,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데 있는 것이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데에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확철대오를 할 수가 있다"고 하는 최초에 읊으신 게송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의지하(大意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라, 크게 의심(疑心)해야만 반드시 크게 깨달을 수가 있다.

 

'이 무엇고?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그동안에는, 겹쳐서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렇게 아니해도 됩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는 동안에는 묵묵히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을 관(觀)’하다가 그 의심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희미해지거나 또는 그 의심은 없어지고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때 ‘이 무엇고?’ 하고 다시 한 번 화두를 드는 것이여.

 

『몽산법어』 「몽산화상시중(蒙山和尙示衆) ; 몽산화상이 대중에게 보이심」 법문.

 

부처님께서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사람에게 하신 최초의 법문은 '중도(中道)'의 수행을 말씀하심.

고행(苦行) 일변도(一邊倒)에 지나친 공부는 근본(根本)을 망각(妄覺)하고 어떠한 부분적인 행동에 치우친 것이라, 이것은 지혜롭고 성스러운 공부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왜 해야 하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면, 까딱하면 상기병(上氣病) 같은 병이 일어나서 공부를 할 수 없을 단계에 이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전호흡을 기초로 잘 익혀서 해 나가면, 나중에 익숙해져서 일부러 단전호흡을 하려고 아니해도 무의식 가운데에 저절로 단전호흡이 되고.

나중에 화두만 들어도 단전호흡은 제대로 되고, 단전호흡만 해도 제절로 그 가운데 또 화두가 떡! 들리게 된다. 단전호흡과 화두가 둘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정신이 깨끗하고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한결같이 공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참선의 바른 자세(姿勢)와 호흡(呼吸)에 대한 상세한 말씀.

 

어려운 일이 있을 때일수록 오히려 그것을 동기(動機) 삼아서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가행정진을 해나가야 이것이 참선(參禪)을 하는 수행자(修行者)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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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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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