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51~75)2020. 11. 4. 12:07

 

 

(No.062)—1977년(정사년) 성도재 법문(77.12.08.음) (54분)

(1/3) 약 20분. (2/3) 약 21분. (3/3) 약 13분.

(1/3)----------------

 

오늘은 섣달 초여드레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지 삼천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그토록 존경하고 의지하고 믿고 그리고 말씀하신 법문에 의지해서 이렇게 숭배하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정반왕 임금님에 아들이라서, 귀한 몸이라고 해서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한 것도 아닙니다. 또 96종 철학을 다 통달하신, 그러한 학문이 높다고 해서 부처님을 숭배한 것도 아닙니다. 신통력이 장하시다고 해서 부처님을 숭배한 것도 아닙니다.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춘 그러한 훌륭한 거동을 갖으셨다고 해서 우리가 존경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위대한 분들이 역사 이래로 많이 출현하셨습니다.

신라 때 김춘추라든지, 김유신 장군 같은 분, 그분을 우리 민족들은 역사상 위인으로 오늘날도 그분을 존경합니다마는, 그분은 신라 무렵에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이 갈라져 가지고 마냥 한 핏줄을 가진 민족끼리 서로 죽이고,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하는 그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을 때에 신라 삼국통일을 함으로 해서 민족끼리 서로 싸우는 싸움을 그치게 했던 것입니다. 응당 이 대한민국에 국민으로서는 우리 민족의 위인으로 존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업적이 많으셔서 우리 겨레에 많은 이익을 끼쳐주신 성인과 같은 그런 임금님이었습니다. 응당 우리 민족은 존경하고 숭배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충무공 같은 장군은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우리나라에 침범해 들어와 가지고 선조 대왕이 의주까지 파천을 가시고 삼천리강토는 그야말로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피바다를 이루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서 나라에 운명과 민족에 운명이 눈앞에 멸망 지경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서 왜군의 함대를 함몰을 시키고 막음으로 해서 그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왜군의 모든 공급로를 차단을 하고, 육지에서는 정기룡 장군과 같은 위대한 장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뇌묵대사, 기허대사와 같은 스님으로서 위대한 정신을 발휘해 가지고, 육지에서 싸워서 막고 이래가지고 우리나라와 민족을 왜군의 무서운 침략으로부터 막아냈습니다.

응당 우리 민족으로서는 숭배하고 존경하고 받들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 생각합니다.

 

근자에 1945년 을유년에 해방이 되어 가지고, 우리는 그 해방의 기쁨으로 해서 너무 좋아하고 날뛰기만 했지, 어떻게 해서 이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은 이 기쁨을 돌이켜서 차분한 마음으로 새 나라를 가꾸어 나가야 하느냐?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세계 양대 사상의 조류에 휩쓸려 가지고 양대, 좌익 우익이 갈라져 가지고 서로 싸우고 하는 바람에 민족끼리 분열이 생겨 가지고, 결국은 본의 아닌 삼팔선(38線)을 가로 그어 가지고 나라에 재건(再建)하는 힘을 쓰지 못한 채 거듭 악순환이 계속되다가 겨우 대한민국을 남반부만 독립을 하고.

 

그래가지고도 계속 국론이 통일이 되지 못한 채 6·25 동란이 일어나고, 6·25 동란이 수습되었지마는 계속 혼란이 계속되어 오던 차에 학생 의거로 말미암아서 이박사가 하와이로 망명을 가고 그래 가지고 제2공화국이 섰지마는,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 나갈 만한 그러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데모를 하고 온 민족이 학생은 책을 팽개치고 공장의 직공들은 일자리를 떠나고 심지어 학교 선생님까지 전부 다 동원해 가지고 거리에서 깃발을 날리면서 데모를 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일부에서는 지성인들까지도 남북 대화를 부르짖고 이래 가지고 도대체 나라가 꼴이 아니고 그 틈을 타서 완전히 공산의 마수에 삼켜지기 그러한 직전에 이르렀을 때에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군사 혁명치고는 정말 사람 하나 목숨 다친 일이 없이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성을 했던 것입니다.

서양에 유명한 사람들이 한국의 5·16 혁명을 평하기를, '극약의 적당량'이라고 이렇게 평한 바도 있습니다마는, 하여간 5·16 혁명을 계기로 해서 초기에는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고, 많은 비판도 받았지마는 차츰차츰 우리 겨레들이 마음을 합하고 지도자의 역량이 훌륭한 탓으로 해서 각기 자기의 일자리를 찾고, 나라를 위하고 겨레를 위하고 그리고 각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의 위치에서 노력을 하고 그것이 한 뭉텅이가 되어 가지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선진 대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그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그만큼 우리 민족의 혈맥 속에 위대한 피가 잠재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마는 그 잠재해 있는 우리 민족의 그 위대한 정신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도해 준 그러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응당 그러한 지도자를 우리는 숭배하고 존경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5천년 이래로, 단군(檀君) 성군께서 우리나라를 최초로 세우신 이래로 많은 위대한 임금님과 위대한 장군과 위대한 학자들을 우리는 위로 모시고 받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한 분들은 우리 민족에 국한(局限)해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훌륭한 분들입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한 민족에게만 존경을 받을 만한 그러한 지도자가 아니신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처님이 싸움을 잘하거나, 정치를 잘하시거나, 무슨 특수한 민족에게 그러한 혜택을 주셨거나, 그러한 것도 아니시면서 무엇 때문에 온 세계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허공계에 모든 중생들의, 그리고 영원을 통해서 영원한 무량겁을 통해서 존경받을 수밖에는 없고 숭배할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성인(聖人)이시냐?

우리는 그 원인을 분명히 알고서 존경을 해야 되겠습니다.

 

겨우 선영(先塋)의 제사를 지내면서 ‘좋은 곳으로 극락세계로 가도록 해 주십시오. 우리 아들 학교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이 사업이 잘되게 해 주십시오’ 이러한 정도로 와서 복을 빌기 위한 그러한 상대로서의 존경에 그친다면은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신 부처님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고, 저 머리카락 끄터리나 새끼발구락 끄터리 하나가 잘 생겼으니까 거기를 보고 좋아하고 있는 그러한 정도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온 세계에, 온 법계에 모든 중생이 다 한마음으로 존경할 수가 있다. 그리고 백 년이나 이백 년 일시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그런 분이 아니라, 영원토록 존경을 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대한 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우리 중생들은 과거 무량겁 이래로 오늘날까지, 오늘로부터서 영원한 미래까지 생사(生死)의 괴로움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그러한 존재요,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을 그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신데에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만 주어서 요기(療飢)를 시켜주어도 그 사람은 대단히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일생 동안에 그 고마움을 간직할 경우가 많습니다. 옷 한 벌, 돈 몇만 원에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물며 이 목숨, 꼭 죽게 될 수밖에는 없을 때 나를 구제해 준 분, 그때 병으로 도저히 병을 치료할 수 없을 때 그 병을 낫어 준 의원이나, 나을 수 있도록 주선해 준 그런 분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생을 통해서 그 은혜를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일시적으로 잠깐 갈증을 면하게 해 준다든지, 배고픔을 면하게 해 준다든지 또는 몸에 아픔을 면해 준다든지 그러한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고해(苦海) 속에서 빠져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우리들을, 무량 중생을 그 괴로움으로부터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데 대해서 우리는 이 목숨을 몇억만 번을 바꾸어 나면서 그 은혜에 감사드린다 해도 그 천만 분의 일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것을 ‘중생을 제도(濟度)해 주셨다’고 우리는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제도, 제도’하지마는 부처님이 마치 큰물이 져서 떠내려가는 사람을 이렇게 건져 주듯이, 그렇게 건져 주신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이 그러한 법력(法力)과 도력(道力)이 있으시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셔서 마음대로 고해에 빠진 중생을 다 건져 주실 수 있다면 지금 이 법계(法界)에 한 중생도 남아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건져 주신 것이 아니라, 다못 부처님의 힘으로도 건져 주실 수는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 부처님이 직접 건져 주실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괴로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은 우리 자신이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노력을 해서 해결지어야만 내가 나 자신을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내가 나를 제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단,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 선지식의 지도하에 몸과 목숨을 바쳐서 위법망구(爲法忘軀)적으로 정진, 정진, 가행 · 용맹정진(加行·勇猛精進) 함으로써만이 내가 나를 괴로움으로부터서 해탈(解脫)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무량 중생을 제도하신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닦지 아니하고, 내가 선지식을 믿지 아니하고, 법문을 들으면서도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하고서 부처님께서 나를 제도해 주시기를 기다린다고 하면은 영원토록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도 더 깊은 줄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참선 공부하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17초)

 

 

 

 

(2/3)----------------

 

이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웬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조그마한 일로 해서 두고두고 큰 웬수를 맺게 되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사람은 큰 웬수도 나의 잊지 못할 은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멀고 가까운 데에 웬수가 많은 것처럼 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간단한 방법으로 해서 웬수를 착한 벗을 만들고 은인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을 영원한 웬수로 만들고 있지 않겠습니까?

활구참선(活句參禪), 이 활구참선에 철저하게 참(參)함으로 해서 나를 죽일려고 하는 웬수도 착한 벗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한다면은 이 법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끼쳐 주신 위대한 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기원전 479년에 80세를 일기로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열반(涅槃)을 보이셨습니다.

 

기원전 558년에 탄생하셔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시고, 35세에 대도(大道)를 깨달으셨습니다. 일설에는 19세에 출가하셔서 12년 동안 고행 수도하신 끝에 30세에 대도를 성취했다고 그렇게 전해지기도 합니다마는, 대도를 성취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3년 뒤에 고향에 돌아가셔서 아버님을 가서 뵈옵고, 아버님과 계모이신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한 '야수다라' 아내와 '라후라'라고 하는 아드님 그리고 궁중의 모든 일가친척을 두루 다 만나셨습니다.

 

그리시고서 법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생 동안을 이 생사고해(生死苦海)로부터 벗어나는 위대한 위없는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그 어머니이신 마야 부인(摩耶夫人)께서—그때 인도의 풍속은 여인이 포태를 해 가지고 해산기가 되면은 친정으로 돌아가서 해산(解産)을 하는 풍속이 있었으므로—친정으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nī) 동산이라고 하는 동산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실 때에 부처님께서는 탄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친정으로 가시는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29세에 출가하셔 가지고 일생 동안을 길에서 사시면서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설하시고, 마지막에 열반하실 때에도 길에서—'구시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伽羅)'라고 하는 나라에 사라쌍수(沙羅雙樹) 간에서, 결국 거기도 길이였습니다. 길에서 최후의 임종을 맞으셨던 것입니다.

 

길에서 나셔서,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사시면서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르켜 주시고 마지막에 길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 해 가지고, 그 일생 동안 설하신 법문을 결집(結集)을 해서 목판에다 조각한 그 경판(經板)이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경전들은 무엇 때문에—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간단하건마는, 간단하게 그 참선법만을 말씀을 하시지 왜 그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법을 설하셨느냐?

그것은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설하시다 보니 그렇게 방대한 법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 스승으로부터 지도 받아서 도를 닦고, 또 자신이 체험을 통해서 또 다음 제자에게 전수하고, 이렇게 해서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수행하는 방법이 세련(洗練)되고 다듬어져서, 오늘날에는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읽지 않고서도 바른 스승만 만나서 직접적으로 지도만 받을 수 있다면, 간단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깨달아서 고해(苦海)로부터 해탈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고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역량(力量)까지도 갖출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도저히, 출가해서 머리를 깎고 일생을 도만 닦은 스님네들도 어렵거든 하물며 세속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도를 닦아서 목적을 달성한다고 하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다. 그러니 옴마니반메홈 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念佛) · 주력(呪力)을 함으로 해서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아미타불의 48대원(四十八大願)에 의해서 숨지자마자 극락세계 가는 그러한 우리에게 알맞은 길이 있다’고,

이렇게 믿고 그렇게 주장하는 그러한 종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나의 방편(方便)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구경법(究竟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지마는, 방편은 일시적으로 이용할지언정 그 방편을 어떠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버릴 줄 알고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을 방편에만 걸려 가지고 몸부림친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지혜 있는 수행인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에, 우리가 수행을 열심히 해 가지고 깨달음을 증득했다 하더라도 그 깨달음에 착(着)해서는 아니되거든, 하물며 깨달음에 이르는 중간에 어떠한 방편 또는 중간의 어떤 과정에서 딱! 얽매이고 착(着)해 가지고 나아갈 줄을 모른다면은 그것은 안타깝고 가련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믿는 마음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할 때까지 그 믿음이 변함이 없어야 하지마는, 닦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나날이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구태의연(舊態依然)해서 답보(踏步)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매일 한결같이 공부를 해 나가되 언제나 새롭게 새롭게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단계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참선을 경전에 있는 말씀이나 또는 어떠한 스님네한테 들은 법문이나 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교리적인 철학적인 지식을 통해서 계속 추구하고, 따지고, 비교하고, 적용하고 해서 차츰차츰 파고들어 가고 알아들어 가고 이렇게 공부하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참선은 다른 학문과 달라서—다른 모든 학문은 점진적으로 차츰차츰 쌓아올려 가야 하고, 차츰차츰 알아들어 가야 하고, 점점 깊이 파고들어 가야 되지마는 이 참선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다못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계속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 앞에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젊었을 때 육조 스님 앞에 떠억 나왔습니다.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육조 스님이 물으시기를, "내게 한 물건이 있으니 옛날부터 소소영령(昭昭靈靈)해서 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이라, 일찍이 생겨난 때도 없고 일찍이 멸한 때도 없다. 밝기는 태양보다도 더 밝고, 검기는 옻칠보다도 더 검으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어. 항상 일상생활 속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가운데에 그놈이 있건마는 찾아봤자 도저히 잡히지를 않는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하택신회 선사가 대답하기를 "모든 부처님의 근원이요, 하택신회의 본마음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는 나중에 공부를 열심히 해봤자 너는 지해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못되겠구나" 지해종사란 말은 알음알이로 따져서 공부해 가는 강사나 이론가 밖에는 안되겠다 이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가 왔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남악회양 선사는 그 한 말씀, 육조 스님의 물음에 꽉! 막혀 가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그길로 물러나와 8년 동안을 ‘무슨 물건인고?’ 다못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꽉 막혀 가지고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옷을 입으나, 일을 하나, 앉았거나 누웠거나 섯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알 수 없는 마음, ‘무슨 물건인고?’

아무리 생각해봤자 꽉 막혀서 알 수가 없고, 이렇게 해서 8년만에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의심이 깊고 간절해서 꽉! 막힐수록에 터질 때는 무섭게 터지는 것입니다.

의심이 시원치 않고, 꽉 막히지 못하고 자꾸 이리저리 따지고, 알음알이가 거기에 계제가 되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 공부를 해봤자 깨달음에 이르기도 어려우려니와, 설사 어떠한 깨달음에 도달했다 해도 지극히 미약한 그런 깨달음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오(大悟), 확철대오를 얻을려면은 의심이 깊고 · 간절하고 · 커야 하는 것입니다.

「깊고 · 간절하고 · 커야 한다」고 하는 것은 꽉!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이 맥혀야 하는 것입니다.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 큰 의심 아래 반드시 큰 깨달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참선 공부를 잘할려면은 첫째, 몸을 바르게 골라야 합니다.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단속을 해야 하고.

둘째는, 호흡을 바르게 쉬어야 합니다. 호흡을 바로 하지 못하면 참선 공부의 중간에 큰 지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셋째에 가서는, 우리의 생각을 잘 단속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첫째, 몸이 있어야겠고, 몸이 있는 한에는 숨을 쉬어야 하고, 숨을 쉬고 있는 한에는 생각을 할 수밖에는 없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긴(緊)히 몸을 가질 바에는 바르게 가져야 되겠고, 긴히 호흡을 할 바에는 바르게 호흡을 해야 하고, 긴히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고는 안될 바에는 바른 생각을 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바르게 몸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

허리를 쭉 펴고, 코끝이 배꼽 밑에 단전(丹田)과 수직으로 놓이게 하고, 두 귀가 두 어깨에 수직으로 놓이도록. 그렇게 몸을 가지면은 그 몸이 전후좌우로 기울어짐이 없이 단정하게 앉아지는 것입니다.

단정하게 앉되, 어깨와 목과 몸에 긴장은 완전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긴장은 다 풀면서도 몸은 단정하게 가지고.

 

이는 어금니부터 지그시 물고, 입은 '한 일(一)'자로 딱 다물고, 눈은 자기 앉은자리로부터 3미터 지점에다 떨구고. 이렇게 앉으면은 몸이 단정하게 몸을 갖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흡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하는 것이냐?』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슴으로 호흡을 하고, 무의식적으로 호흡을 하기 때문에 숨이 짧고 빠릅니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호흡은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까지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깊이깊이 들어마셔. 쑥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5~6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이렇게 내쉬도록.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입니다.

 

복식 심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가벼워지고, 오장육부가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깨끗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서 생각을, 바른 생각을 단속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20분18초~41분33초)

 

 

 

 

(3/3)----------------

 

『바른 생각이라는 게 무엇이냐?』

 

아까 육조 스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물으신 문제,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우리는 '나'라고 하면은 이 몸뚱이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뚱이 육체는 ‘참나’가 아닙니다. ‘참나’는 이 몸뚱이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는 물질이라 자기 멋대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은 이 몸뚱이의 주인인, 주인공(主人公)의 명령에 따라서 이 몸뚱이는 움직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놈이 들어서 이 몸뚱이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지마는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은 나의 주인인 것이고, 듣는 것도 그렇고, 웃고 울고 성내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아무리 잡을라야 잡히지는 않지마는 그것이 나의 주인이지, 이 몸뚱이는 그 주인이 살고 있는 임시로 살고 있는 집에 지나지 못하고, 임시로 입고 있는 옷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집이나 옷은 얼마 동안 살다가 낡고 못 쓰게 되면은 버리고 또 새집으로 이사 가거나 새집을 짓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옷이 낡고 더러워지면 그 옷은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이 몸뚱이도 어떠한 단계에까지는 입고 있지마는 단계가 지나면은 이 몸뚱이는 언젠가는 기어코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이 몸뚱이 있을 때 그 주인공이 무엇인가?

그놈을 깨달아 버려야 영원한 생사윤회(生死輪廻)로부터 해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이 몸뚱이가 자기인 줄 알고, 이놈에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분을 바르고, 연지를 찍고, 향수를 발라서 이 몸뚱이는 이쁘게 이쁘게 단속하고 가꿀 줄 알면서,

이 몸뚱이 안에 있는 ‘참나’, 나의 주인공은 밥 한 숟갈 먹일 줄도 모르고, 약 한 모금 먹일 줄도 모르고, 그놈이 어디가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채 일생을 살고 또 다음 생에 또 그렇게 해서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깨달음, 깨닫는 법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영원을 두고 생사(生死)의 그 괴로운 윤회(輪廻)를 계속 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스승을 만나서 그 지긋지긋하고 무서운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고 위대한 그러한 정법(正法)을 금생에 만났습니다.

 

만나 가지고서도 열심히 닦지 않는다면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열심히 닦느냐, 닦지 않느냐’에 우리는 문제가 거기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이 문제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가만히 있어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도 무엇인가 과거 일이 생각이 나고, 괴로운 일이 생각이 나고, 슬픈 일이 생각이 나고, 기뻤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그것이 바로 우리를 괴롭히는 고민이요, 망상이요 번뇌입니다마는 그놈 일어나는 그...(녹음 끊김)

 

버스에서나, 절에서나 언제라도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단 일분일초도 틈이 없이 우리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장소와 때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한번 버리면 다시 또 사람 몸을 받을지, 지옥에 갈지, 축생이 될지, 천당에 갈지, 아귀(餓鬼)가 될지, 수라(修羅)가 될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몸 있을 때 열심히 참선을 해놔야 내생에 다시 사람 몸을 받는 것이고, 다행히 금생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자유자재(自由自在)할 수 있다면은 그때는 중생 교화하기 위해서 지옥에를 가건, 축생이 되건, 다시 사람이 되건 그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이고.

 

문제는 어쨌든지 이 몸은 시시때때로 늙어 가고 있고, 시시때때로 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낡아지고, 이틀 밤 자고 나면 낡아지고.

철없는 어린 아이들은 설이 되면 좋다고 춤을 추고 야단이지마는 설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의 사형 무대 앞에 한 해 성큼 다가선 것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몸이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걸음걸음이 시시때때로 수명이 단축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단 1초도, 단 한 생각도 범연(泛然)히 그럭저럭 지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1초 1초가 쌓이고 쌓여서 1년 10년이 되고, 금방 이 몸을 버려야만 할 죽음의 문이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상(無常)함을—이 몸뚱이가 정말 허망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허망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도를 닦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 있다, 모래가 있다. 이 일만 끝나고 다음에 하지. 금년, 이삼 년만 더 기다리고 삼사 년 뒤에 하리라’ 이러한 생각은 가장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 나가게 되면은 이것이 바로 무량겁 생사를 끊어 나가는 가장 유일한 방법이요, 가장 지혜 있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 나간 사람에게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그 사람 앞에는 다 풀려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는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하면 당황해서 지혜로운 생각은 간 곳 없고, 계속 자기를 해롭게 하고, 괴롭게 하고, 일을 그르치게 하는 생각만이 계속 퍼일어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이뭣고?’ 이렇게 한번 들 때에 그 사람에게는 온갖 쓸데없는 생각이 거기서 끊어지는 것이며, 당황하는 생각이 거기에서 일어나지 아니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거기에서는 일어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마음이 안정이 됨으로 해서 마음이 맑아지고, 마음이 맑아진 데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지혜로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생각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해야 그 일이 풀려나가는 것이지 당황한 마음, 어리석은 마음, 삿된 마음으로 어려운 일이 풀려날 리가 있겠습니까?

점점 복잡하게 만들 뿐이고, 그럴수록에 자기만 점점 괴로워지고 점점 주변을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찾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한량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죄가 녹아질 때에 불보살(佛菩薩)이 그 사람을 돌봐 주시지 아니할 리가 없습니다. 일체 선신(善神)이 계시다면은 그 사람을 옹호(擁護)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삿된 마음을 일으킬 때에 잡신(雜神)과 악귀(惡鬼)들이 그 사람을 맴돌면서 따라다니는 것이고, 맑고 깨끗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가졌을 때에 불보살과 일체 선신들은 그 사람을 돌보아 주시고, 옹호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믿고,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어떠한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그 괴로운 일에 나의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그러한 괴로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서 몸을 바로잡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이뭣고?’ 이렇게 가다듬어 보십시오.

 

한 번, 두 번,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쌓아 나갈 때에 여러분들은 정말 여러분 자신이 어디로부터서 이러한 위대한 힘이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놀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팔만대장경을 한덩어리로 뭉쳐서 여러분 앞에, 낱낱이 여러분의 가슴속에다가 선사(膳賜)드리는 새해의 선물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오늘, 정사년 납월팔일(臘月八日)을 기념해서 부처님의 뜻을 받들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제가 자신 있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니, 이 법을 진즉부터 알고 닦으신 분, 새로 오신 분, 누구를 막론하시고 희망과 자신과 용기를 가지시고 열심히 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에 우리의 목적인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성취하시기를 간곡(懇曲)히 부탁드리고 말씀을 맺습니다.(41분34초~53분56초)(끝)

 

 

 

 

[법문 내용]

부처님은 온 법계에 모든 중생이 다 한마음으로, 영원토록 존경을 하고도 모자랄 만큼 위대한 분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중생들이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벗어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켜 주시고 열어 주신데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제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만이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참선(參禪)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면은 모든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고, 모든 웬수가 은인(恩人)으로 변하고 다정한 벗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각도에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말씀을 49년 동안에 걸쳐서 설하시다 보니 그렇게 팔만대장경과 같은 방대한 법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선은 언제나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부터 다못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계속 정진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육조(六祖) 스님,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 남악회양(南嶽懷讓) 선사의 문답.

참선 공부는 바른 자세, 바른 호흡(단전호흡, 복식 심호흡), 바른 생각.

이 몸뚱이가 정말 허망하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정말 허망한 것임을 철저히 깨달아야만 도를 닦을 수 있다.
참으로 발심(發心)한 사람은 자기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건 그것은 가릴 것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때 그때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뭣고?’를 찾는 사람에게는 과거에 한량없는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앞에는 녹아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고, 죄가 녹아질 때에 불보살(佛菩薩)이 그 사람을 돌봐 주시지 아니할 리가 없습니다. 일체 선신(善神)이 계시다면은 그 사람을 옹호(擁護)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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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