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51~75)2020. 12. 20. 18:41

((No.066))—1978년(무오년) 신수기도 회향(78.01.09.음) (52분)

(1/3) 약 19분. (2/3) 약 17분. (3/3) 약 16분.

(1/3)----------------


무오년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사대부중(四部大衆),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 더욱 몸 건강하시고, 모든 크고 작은 소원 차례로 성취하시고, 정법문중(正法門中)에 신심견고(信心堅固)하셔서 참선 공부 잘해 가지고 결정코 이 몸으로 견성해탈(見性解脫)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러한 뜻으로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는 초삼일부터 초아흐레 날까지 7일 동안을 전강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연례행사로 신수(身數)기도를 봉행해 내려왔습니다. 금년도 역시 날씨가 그렇게 강추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남신녀(信男信女)들께서 이 7일 기도에 참여하셔서 정말 성심성의껏 기도를 봉행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실 것을 저는 간절히 바라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기도라든지, 염불이라든지 또는 경을 읽는다든지, 주력을 한다든지 이러한 것이 전부 내가 나를 깨닫는 정법(正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의 하나입니다.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정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고, 마침내는 정법에 들어가서 나를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가지나 되는 많은 법(法)의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중생이 각기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어느 문으로 들어오든지 걸려들기만 하면은 드디어 정법 문안에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차례차례 층계를 놔 놓으셨습니다.

다행히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는 부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문에 들어오셔 가지고 들어오시자마자 금방 정법에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듣고 참선을 하실 수 있는 그러한 선택된 부처님 제자가 되신 것을 나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정법을 만나지 못하고 계속 그 방편문에만 걸려 가지고 3년, 5년, 10년 내지 일생을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그 방편의 단계에서 머물러서 계속 눈앞에 조그마한 복(福), 오욕(五慾)을 충족시키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을 충족시키는 그러한 데에 머물러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가엾은 그러한 신도들이 아직도 한량없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설한 이 법은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떼배와 같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떼배라 하는 것은 강을 건너는 데 꼭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소중한 기구입니다. 그 배가 없으면은 그 넓은 강을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배는 필요한 것이지마는 일단 그 강을 건너고서는 그 배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그 배를 계속 버리지를 못하고, '그 배로 인해서 내가 이 강물을 건넜으니까 얼마나 고마웁고 소중한 것이냐, 그러니 나는...' 이 배를 버리지를 못하고 계속 육지를 다니면서도 그 배를 짊어지고 육지를 돌아댕기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은 우습고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계신 어느 불자(佛子)라도 전부 오늘 이 자리에 오시기까지는 그러한 작은 배, 조끔 더 큰 배, 한량없이 여러 개의 배를 타고 또 물을 건너고 또 타고 물을 건너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 까지 오셨습니다. 이 자리는 배를 짊어지고 걸어 다니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라, 그 많은 배들을 깨끗이 그 강가에다가 버리고서 아무것도 손에 든 것이 없이 맨몸으로 이 자리에 나오셔야 됩니다.


그릇 속에 물건을 담을 때, 그 그릇 속에 어떠한 물건이라도 그릇 속에 채워져 있으면 그 그릇은 다른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릇은 담기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필요할 때 담고 또 그것을 바로 비워 놓아야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을 또 담을 수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참선은 자기가 그동안에 보고, 듣고, 그리고 알고 있는 모든 지식, 모든 살림살이 모든 얻은 바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바른 참선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수십 권, 수백 권의 경(經)을 다 읽어서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힘을, 그러한 능력을 속에다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은 바른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팔만대장경을 육두 백판으로 다 외우고 다 능히 해설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심(衆生心)으로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나의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금가루가 그렇게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 금가루를 눈에다 집어넣었을 때에는 그 눈은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밥이 아무리 소중하다 하더라도 있을 자리 가 있어야지, 밥이 기도(氣道)로 콧구먹으로 들어간다든지 눈 속에다 집어넣어 가지고서는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아까 순치황제가 중국에 천자(天子)로 19년 동안이라고 하는 세월을 참 훌륭하게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한 천자가 하루아침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그 순치황제의 출가하셔가지고 읊으신 시(詩)를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일부를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 순치황제는 전생에 인도(印度)에서 도를 닦던 한 참선하는 스님이 어쩌다가 '한 생각' 잘못 먹어가지고 중국에 천자로 태어났습니다.


도를 닦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한 생각 자칫 잘못 먹어가지고 일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한 생각 잘 먹어가지고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한 한 생각을 우습게 알고 그럭저럭 그렇게 해서 일생을 지내가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중생의 생애이지마는 제일 소중하고 무서운 것은 이 '한 생각'인 것입니다.


금은보화,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외출을 했다가 여러 날 만에 집에를 돌아왔습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등잔불이 어슴프레 켜진 가운데에 자기 아내가 어떤 스님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대번에 분이 나가지고 부엌에 쫓아가서 식칼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두 사람을 칼로 요절을 내려고 하다가 잠깐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생각을 했습니다.


오다가 길가에서 어떤 사람이 보따리를 피어 놓고 떠억 사주(四柱) 관상(觀相)을 보고 있는데, 자꾸 그 사람이 “여보시오, 여 사주 하나 보고 가시오”

“아, 나, 사주 그런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래도 한 번만 보고 가시오”

“에! 안 본다”고.


“거저 봐줄 테니 한 번만 보고 가시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러면 좀 봐주시오”


"당신..." 얼굴을 찬찬히 보더니, 별말 안 하고 ‘참을 인(忍)’ 자, 하나를 손바닥에다가 떠억 먹으로 써줬습니다. “이것을 절대로 물로 씻지 말고 닦이지 않도록 가서, 어떠한 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이 손바닥을 반드시 펴 보시오"


아, 그런 일이 문득 생각이 나가지고 ‘우선 칼로 목을 먼저 찌를 것이 아니라, 대관절 어떠한 사연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한번 알아보고 죽여야지, 자고 있는 놈을 다짜고짜로 목을 찌를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칼을 한 손에다 쥐고서 이불을 걷어 제끼니까, 깜짝 놀래 가지고 두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바른대로 말해라, 너는 이놈 어떤 놈이냐?”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이 사람은 남자 스님이 아니라, 친정 사촌동생이 과부가 되어가지고 출가를 해서 중이 되었는데 오랜만에 여기를 지내다가 내 집에 들려서 이야기하다 오늘 하루저녁 자게 되었다”고.


아! 그래서 그 손에다가 써진 ‘참을 인(忍)’ 자를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그걸 보고, 평생토록 그 ‘참을 인(忍)’ 자를 손바닥에 써진 그 ‘참을 인(忍)’ 자를 마음속에다 새기고, 다시는 그러한 경솔한 일을 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그렇게 신경질을 잘 내고 그렇게 경거망동을 하던 그 사람이 일생 동안을 참 신중하고 아량이 있는 그러한 인격자가 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은 아내 죽이고, 그 스님을 죽이고, 자기도 사형을 당해가지고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될 그러한 중대한 문제, 그것이 바로 한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 그 사주는 보아야 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것은 생각을 잘못 생각하신 것이고.


신수기도를 일주일 동안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습니다마는 이 신수기도를 우리 절에서 안 하면은 이 가운데에 계신 대부분 보살님네들은 모다 무당절, 또 가서 법문도 듣지도 못할 그러한 절에 가서 별별 이상스런 그 부작(符作) 같은 것을 많은 돈을 주고 사야 하고,

그리고 겁나는 협박적인 그러한 말을 한마디씩 듣고서 돈은 빼앗기면서 일 년 동안을 전전긍긍 불안에 떨면서 살지 아니하면 안 될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질까 두려워서, 신수기도를 우리 법보선원에서도 봉행을 하고 그리고서 입재(入齋) 때와 회향(廻向) 때에 정말 부처님의 정법을 여러분들에게 설(說)해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러한 삿된 구렁텅이에 빠질 것을 미리 방비하고, 나아가서 일 년 동안을 정말 바른 신심으로 안심하고, 장애 없이 잘 사시는 길을 여러분들에게 열어드리기 위해서 신수기도를 봉행한 것입니다.(처음~18분30초)





(2/3)----------------


'선방에서 무슨 기도를 한가? 기도는 참선하면은 그만이지 무슨 기도를 한가?'

여러분 가운데는 오래전부터서 참선을 하셔서 어떤 것은 방편(方便)이고, 어떠한 것은 정법(正法)인가를 잘 아시는 분들은 혹 그렇게 생각하실런지 모릅니다마는, 어떠한 방편이라도 바른 법을 가지신 분이 쓰면은 그 방편이 바로 정법이 되는 것이고, 아무리 부처님이 설하신 법이라 하더라도 삿된 사람이 쓰면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칼이라도 정의를 가진 사람이 들면은 사람을 살리고, 국가와 민족을 살리고 할 수 있지마는, 도적이 삿된 도적이 그 칼을 가지면은 선한 사람의 목숨을 해치고 큰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법(法)도 또한 그러해서 바르게 쓰면은 좋은 법이 되지만, 악한 사람이 잘못 쓰면은 많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7일 동안 정성스럽게 잘 마쳐서 과거에 여러분들께 조그마한 허물이라도 또는 많은 허물이라도 있으신 분은 이 기도를 통해서 깨끗하게 소멸(消滅)이 되었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서 기도를 하시고 다시 일 년 동안을 정법에 의해서 수행을 잘하실 것을 다짐하셨기 때문에 새로 죄를 짓지 않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하는 동안 십악참회(十惡懺悔)도 아울러서 계속해서 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저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트인 가을 하늘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청정하고 깨끗한 그러한 마음자리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그 마음자리가 앞으로 흐려지지 않도록, 흐트러지지 않도록 잘 단속만 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인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대승(大乘)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는 것이 대승보살의 과제입니다마는 그 육바라밀이 첫째, 보시(布施)를 할 것, 둘째, 계율(戒律)을 지킬 것, 셋째에 인욕(忍辱)을 할 것, 넷째에 정진(精進)을 할 것, 다섯째에 선정(禪定), 마음을 고요히 할 것, 여섯째, 지혜(智慧)를 닦을 것. 이렇게 육바라밀, 여섯 가지 저 언덕에 건너가는 좋은 법입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보시를 했댔자 그것은 유루복(有漏福)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계율을 지켜도 지혜가 없이 지킨 계율은 천상에는 태어날 수 있지마는 금방 복(福) 다 받으면 다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인욕도 지혜 있는 인욕이라야지, 어리석게 억지로 참기만 위주로 해서 한다면 단박 가슴이 아프고 목이 아프고, 골치가 아프고, 가슴앓이 속병이 생겨가지고 결국은 병만 쳐주고, 그 억지로 참은 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일생 동안을 억지로 참다 보면 나중에 여러 번 참다가 그놈이 축적이 되어가지고 터질 때는 무서운 위력을 내가지고 자기 신세 망치고, 집안을 쑥대밭을 맨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환자가 되어가지고 늙발에 한숨으로 세월을 보낼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면은 '꼭 절에 와서 그래가지고 조용하니 죽비(竹篦)를 치고 앉아야만 참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못하면 참선은 못하는 것이다. 집안에서는 일이 많아서 참선은 못 합니다' 이렇게 노상 그 말씀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마는 참선은 일이 많고 적고 그것도 상관이 없고, 차 속이나 또는 시장 바닥이나 가정이나 또는 절이나 어디서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참선은 앉고 눕고 또는 서서 걸어 다니고 그러한 위의(威儀)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웠어도 생각은 일어났다 꺼졌다 하고, 앉었을 때에도 생각은 이 생각 저 생각이 번갈아 드나들고, 걸어 갈 때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만큼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생각—그 생각이 좋은 생각이건, 악한 생각이건, 과거 생각이건, 무슨 슬픈 생각이건, 괴로운 생각이건, 무슨 생각 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일어나는 생각 그놈을,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괴로운 생각, 억울한 생각, 슬픈 생각 그러한 생각이 속에 꽉 차 가지고 그 생각을 없애야만 참선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못한다' 이리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아직 참선하는 법을 잘 모르시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슬픈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무엇이 들어서 그 슬픈 생각을 하는가? 「이뭣고?」

몸이 아파도—'몸이 아파서 공부를 못합니다'—몸이 아픈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무엇이 그렇게 아픈 줄을 아는가? 그 아픈 줄 아는 생각만 있으면은 그 사람은 참선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힘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외롭고 괴롭고 슬프고 노여움이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가장 참선을 잘할 수 있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나는 단언을 합니다.

슬픈 생각도 없고, 괴로운 생각도 없고, 억울하고 분한 생각도 없는 목석(木石)처럼 그러한 사람은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 없어가지고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이나 갖다 놓을까, 아무 쓸데가 없죠?


그러나 욕하면 썽낼 줄 알고, 신경질도 잘 내고, 슬픔에 가슴이 꽉 차서 어쩔 줄을 모르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행복이 무엇인 중을 모르고, 육체적으로 온갖 병이 들어 있고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아가지고 정말 정신과 육체가 한목 병들어서 죽을 길밖에는 없다고 이렇게 인생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일수록에 이 정법(正法)에 귀의(歸依)해서 바른 스승을 만나가지고 죽을 셈 치고 대들기만 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훨씬 더 도(道)를 깨닫기가 쉬웁고 좋은 것입니다.

그만한 인생을 전부를 아주 포기할 그러한 막바지에 도달한 그 사람은 한번 이 문에 들어와서 정법을 만났다 하면 다시는 다른 데에 정신을 빼앗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이렇게 누구라도,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면 될 수 있는 것이고, 할 자격이 있는 것이지마는 정말 이 몸과 목숨을 다 바치고 다시는 딴 데 한눈을 팔지 아니할 만큼 그만큼 절실한 사람이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 점이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내가 지금 울 줄도 알고, 성낼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고, 눈으로 볼 줄도 알고, 괴로워할 줄도 아는 바로 이놈이 나의 불성(佛性)이요, 나의 마음자리다. 이것은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조끔도 차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날까지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 것은 그 법을 바로 만나지 못했거나 만났더라도 열심히 도를 닦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렇게 생사(生死)에 윤회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나는 다행히 이 법을 알았으니 이제 어디에 이 몸과 목숨을 바칠 곳이 있는가? 오직 나는 이 한 법을 위해서 이 목숨과 이 몸을 다 바칠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서 아직도 그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분은 이 자리를 기해서 철석(鐵石)같이 그 신념을 가지실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그러한 신념을 가지시기를 저는 간곡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그 신념이 있은 위에라야 우리의 공부는 바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둘째로 필요한 것은 분심(憤心)입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 과거에 부처님과 많은 성현들은 진즉 이 법에 의지해서 생사 문제를 해결을 하셔가지고 중생 교화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어찌 그러한 불보살과 성현들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이렇게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맴돌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대해서 분심을 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교 학생들도 자기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은 분이 나서 집에 와가지고 울면서 숙제를 하고 그래가지고 밤잠을 안 자면서 공부를 해가지고 그다음에 시험 볼 때는 더 잘할려고 발버둥을 치거든, 벌써 아들과 딸을 둘씩, 셋씩, 다섯씩, 여섯씩 나서 키워 가지고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내가 내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를 만나가지고 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돈, 이웃집은 돈을 잘 벌고 자기는 잘 못 버는 그런 것을 보고는 입을 삐쭉빼쭉하고 시기를 낼 줄 알면서 내가 나의 영원한 행복을 얻는 이 참선에 대해서 그러한 분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이것은 가엾기 그지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 참선은 언제나 저는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공부하시는 보살님네들, 한 분이 잠을 조끔이라도 덜 자고 공부하려고 애를 쓴 분이 있으면 자기도 따라서 공부를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의의 경쟁을 하는 데에서 반드시 공부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에서 생활하시는 여러분들도 자기의 친구, 이웃, 아는 분들이 시간을 아껴서 그 시간을 쪼개서 정진하려고 애쓰는 분이 있으면 그이를 헐고 뜯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샘을 좀 내서 '나도 그 사람에게 지지 않고 더 공부를 잘하리라' 하는 이러한 선의의 경쟁심을 내고, 서로 충고하면서 보다 더 공부에 유익하도록 충고하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18분31초~35분40초)





(3/3)----------------


첫째, 신념. 둘째, 분심. 그리고 셋째에 가서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받은 화두(話頭), 화두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간절하고 철저한 의심 덩이[疑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는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두 가지로 노나서 가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보고, 설교를 많이 듣고 하는 또 다른 또 학식이 있고 그런 사람은 노상 어떠한 문제를 당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 가지고 이리저리 분석해서 그럴싸한 결론을 내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결론을 따져서 결론을 내려야만 결론을 얻어야만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참선은, 활구참선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어떠한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참선을 다른, 사회의 어떤 수수께끼나 어떠한 문제들과 같이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지을려고 하고 그러한 방법으로 참선을 해 나가고 있는 사람은 활구참선이 아니라 사구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하는 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훌륭한 해답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衆生)의 알음알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중생의 알음알이는 아무리 좋은 그럴싸한 알음알이라 하더라도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원인이 되는 것뿐인 것입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금가루도 눈에 집어넣으면 안질(眼疾) 병이 생기는 것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속에다 넣고 이리저리 중생심으로 그것을 따둑거리고 이리저리 뒤적거리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있는 동안에는 중생의 경지, 중생심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를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고, 그러한 사람은 두고두고 육도윤회를 할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루빨리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해탈(解脫)하고자 하시는 분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버릇을 놔야 합니다.


다못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몸이 아플 때도 「이뭣고?」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누웠을 때나, 걸어갈 때나, 차를 탈 때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다못 「이뭣고?」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슬픈 그 마음도 나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이고, 썽내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바로 그 생각으로 「이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갈 때 불같이 일어났던 그 썽내는 그 한 생각이 나로 하여금 해탈도로 들어가는 하나의 발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 나간다면 일구월심(日久月深), 날이 가고, 달이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차츰차츰 마음이 착해지고 마음이 비워져서, 바로 속에 똥과 오줌과 피와 고름이 가뜩 들어있는 채, 불보살의 경지에 가까와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꾸 버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보시(布施)라고 하는 것을 보통 내게 있는 돈과 물질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 보시라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참보시'가 아닙니다. 참보시에 들어가는 껍데기 보시, 초보적인 보시에 지내지 않은 것입니다.

참보시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말을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편안함을 얻게 하고,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아는 대로 일러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할 수 있는 동기가 되도록 해주는 그런 것도 역시 보시가 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보시는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좋은 생각, 나쁜 생각, 일체 과거 · 현재 · 미래의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버릴려고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버릴려고 하는 그 생각 또한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호수에 물결이 일어나는 물결을 고요하게 만들려면 그 일어나는 물결을 없애려고 손을 대서는 아니 됩니다. 손대면은 다시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모든 물결을 빨리 없애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인 것입니다. 이것은 삼천년을 내려오면서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성현들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에 의지해서 닦고 닦아서 오늘에 전해진 가장 훌륭한 법인 것입니다.

이 법(法), 한 법에 충실히 철저히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을 해 간다면 육바라밀도 그 속에 갖추어 있는 것이고,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읽고 또 읽고 한 그 공덕도 그 속에 바로 갖추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나가지고서도 믿지 아니하고 계속 여러 가지 방편, 크고 작은 낡아빠진 배들을 짊어지고 팔도를 돌아다니고 60, 70년 동안을 그 썩어 낡아진 배를 짊어지고 돌아다니는 분이 계시다면은 당장 이 자리에서 그 배를,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놓으십시오. 벗어 놓고 간단한 「이뭣고?」 하나를 터억 마음에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 보십시오.

이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짧은 기간이지마는 또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7일이라고 하는 기간은 대단히 긴 기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기다릴 때 30분 내지 10분이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지루한가를 느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일 년, 이태라고 하는 세월이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또 느끼게 하는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는 것입니다.


7일 동안을 하루같이 성심으로 기도를 잘해서 마쳤습니다. 기도 법사스님께서도 정말 일심으로 기도를 봉행을 하셨고 여기에 동참하신 신남신녀 여러분께서도 정말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기도를 잘 봉행을 해서 오늘 회향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소원을 마음속에 간직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건 간에 그 일들이 가장 긴박한 것부터서 차례차례 다 성취되실 것을 저는 다시 한번 빌고 또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이 초아흐레니까 앞으로 6일 후에는 정월 대보름날입니다. 그날도 사시(巳時)에 법회가 열리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날은 작년 10월 15일부터서 시작한 겨울철 결제가 그날 정월 보름날, 90일 마지막 해제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또 정월 15일에 또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또 정월 대보름날은 우리나라 저 신라 때부터서 대보름날에는 그 찰밥, 오곡밥을 해서 천지신명과 조상과 모다 선영들에 다례를 올리는 날이고, 일체 재앙을 그래서 일체 재앙을 소멸을 하고, 소원을 또 성취하기 위한 발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날도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 권고해서 법회에 참여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넝쿨 우거진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친 그러한 골에 들어가서 영원히 생사 없는 대해탈도를 증득하는 참선을 하고자 하노라. 이러한 내용에 게송(偈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게송을 들으시고 '아하! 참선을 하려면은 저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그런 데에 들어가야만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은 이 게송의 뜻을 정말 똑바로 아신 것이 되지 못합니다.

시장바닥에서라도, 아들과 손자가 울고 똥을 싸서 뭉게는 그 속에서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하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 되는 것입니다.


심산유곡이라야만 된다면 산중에서 사는 화전민(火田民)들은 다 도인(道人)이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살아도 신념이 없고, 분심이 없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없다면 백 년을 두고 산중에서 산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시장바닥에서, 사회 가정에서, 자기 있는 일터에서, 어데서 언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입니다.(35분43초~51분56초) (끝)





[법문 내용]


염불 · 독경 · 기도 · 주력, 어느 문(門)이라도 정법(正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으로 들어가는 좋은 방편(方便) / 강을 건넜으면 배[방편]는 버려라 / 사교입선(捨敎入禪) / '한 생각' 단속이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 / ‘참을 인(忍)’ 한 생각.


'한 생각' 단속해 나가는 법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 /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 /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 그 지혜를 바탕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야 /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 /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한다 / 삼요(三要), 신념, 분심, 의심 /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라.


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 불법(佛法)은 무엇을 많이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그 마음에 모든 생각을 버리는 데에 있는 것. 빨리 버리는 방법은 「이뭣고?」 이 한마디뿐 /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만든다 / 언제 어디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한다면 바로 그 자리가 심산유곡이요, 선방(禪房)이 되는 것.



부처님 설하신 팔만대장경이 한 말씀 한 말씀 다 참된 말씀이고 소중한 말씀이지마는, 그것은 근기(根機)에 따라서 잠깐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고 바로 버려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古人)이 말씀하신 사교입선(捨敎入禪)입니다. '교(敎)를 버리고서 선(禪)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한 생각'을 어떻게 잘 단속을 해 나가느냐? 하는 그 문제야말로 우리의 무량겁을 두고 윤회(輪廻)해 내려오는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고, 가깝게 봐서 일생 동안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는 그러한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달마스님 『혈맥론(血脈論)』에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섭(攝)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바로 참선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선만 하면은 일체 행(行)이 그 가운데 다 제절로 갖추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여섯 가지 중에 무엇이 제일 소중하냐? 전부가 다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중에 가장 근원적인 것은 맨 끝에 있는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입니다. 지혜는 어디로부터 나왔느냐? 참선(參禪)을 함으로써 지혜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지혜를 얻어서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보시라야 그 보시는 옳은 보시가 되는 것이고,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계율이라야 그 계율은 참으로 옳은 계율이 되는 것이여. 그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인욕이라야 그 인욕이 참 바른 인욕이며, 지혜를 바탕으로 한 정진이라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선정이라야 다 옳은 법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우리에게 급(急)한 것은 그 지혜가 제일 급한 것입니다. 그 지혜를 얻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 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참선법입니다. 참선은 지식의 유무(有無)도 상관이 없고, 남녀와 노소와 빈부귀천도 상관이 없습니다.


참선은 가장 간단하고도 쉬웁고도 누구라도—지식 유무(有無), 남녀노소, 빈부귀천도 상관없이—언제 어데서라도 공부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무슨 생각이든, 일어나는 생각 바로 그놈을 가지고 「이뭣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라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부에 몸과 목숨을 다 바칠 만큼 절실해야 합니다.


이 공부를 할려면은 첫째, 나도 하면, 나도 옳은 법을 배워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금생에 결정코 깨달을 수가 있다. 나는 금생에 결정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굳센 신념(信念)을 가져야 됩니다.


참선은 쉬웁게 말해서 무엇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해서 많이 속에다가 따 담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자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모든 좋은 생각, 나쁜 생각, 심지어 불교의 교리까지 다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깨끗이 내쏟아 버려야 됩니다. 내쏟아 버려야만 그 마음이 정말 청정(淸淨)해지기 때문에 청정한 마음으로 참선을 해야 깨달음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가 우리의 팔만사천 가지의 마구니를 항복 받고, 팔만사천의 번뇌를 굴복 받고, 마구니와 번뇌를 한 생각에 돌려서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을 맨들아서 우리는 이 육신으로 대해탈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자리를 빌려서 부처님과 많은 성현과 전강 조실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단호히 여러분 앞에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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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