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51~75)2020. 12. 22. 13:09

((No.054))—1977년 9월 관음재일(77.09.24) (58분)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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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음력 8월 24일에 뵙고, 한 달 만에 참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됩니다. 다른 달에는 한 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법회가 열리지마는 8월과 9월은 한 달에 한 번씩, 한 번 밖에는 법회가 들지 안 했습니다. 오랜만에 뵈니까 좀 반가운 거 같습니다.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정법(正法), 여러분들이 잘 들으신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 정법이냐?

언필칭 말하기를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다. 어느 절에 간들 다 부처님을 모셨으니 부처님은 한 부처님인데' 이런 말씀들을 많이 듣게 됩니다.

부처님은 한 부처님이지마는, 그 부처님의 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한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한 법이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고, 삿된 외도법(外道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은지 10년, 20년, 30년 내지 일생을 믿어도 스승을 잘 못 만나고, 믿기를 잘못 믿고, 행하기를 잘못 행하면 일생을 믿은 불법(佛法)이 정법을 믿지 못하고 사법(邪法)이 되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정말 일생을 그렇게 돈독하게 불법을 믿고, 그렇게 간절히 불법을 믿었지마는 스승을 잘못 만나, 잘못 행하므로 해서 일생을 삿된 불법을 믿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를 믿고 불법에 의지해서 공부를 하는, 신앙을 하는 우리 불제자(佛弟子)들은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똑바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하면은 그 많은 시간을 그 많은 정성을 바쳐서 '부처님 신도다, 불교의 신도다' 하면서 일생을 헛되게 보내고. 삿된—'불법을 믿는다'고, 이름은 불법이지마는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삿된 외도법을 믿고 행하므로 해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영혼이 과연 어느 곳으로 갈 것인가? 생각해 보면 한심스럽고 가련하기 이루 다 형언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 여름에 우리 절에 구십이 넘은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여름 한 철을 참선을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수십 년 동안을 그 부처님을 믿고 그렇게 정성스럽게 그 불교 신자 노릇을 했습니다.

 

허나 '참선(參禪)이 좋다, 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을 하면 그렇게 좋다' 이런 말씀을 어디서 듣고, 참선을 한 데를 한번 가서 같이 앉아서 참선을 해 보니까 아무 재미도 없고 졸음만 와 쌓어 그래서 '아! 이것 참선이라는 게 졸음이 와서 아무 맛이 없고, 그 할 것이 아니로구나. 참선이라는 게 천하 못쓸 것이로구나' 이리 생각하고서 다시는 참선을 할 생각을 아니하고, 그저 염불하고 경을 외우고, 천수경을 읽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많이 하고, 돈과 쌀을 가지고 가서 불공을 드리고 이렇게만 일생을 사시다가,

어떻게 해서 그 다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다. 참선을 잘 가르켜 주신 스님이 있다'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 이 용화사에 와서 한 번 '구십이 넘었지마는 한 철을, 한 철만이라도 그 참선을 한번 해 보고 죽는 것이 한이 없겠다' 이렇게 해서 신청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그 처지와 그 말씀이 하도 참 고맙고, 기특하고 또 한편 우습고 그래서 "그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십 노인이 어떻게 이 대중선방(大衆禪房)에 와 가지고 석 달 동안을 새벽 세 시에서부터서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실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마는 그 마음만큼은 참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은 좋으시다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다른 할머니들도 모다 하시니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래서 방부(房付)를 받아 가지고 한 철을 나셨습니다.

 

절에 다니셨다 해도 대처승 절에 그 불공이나 드리러 다니셨기 때문에 전연 선방에 규칙이나, 선방 생활에 대해서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신 할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천성이 착하고, 어질고, 점잖하고 그리고서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신 할머니였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선방에 처음 나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무리가 없이 여러 수십 명 대중 보살님네들이 친어머니 받들듯이 그렇게 모다 친절한 마음으로 돌봐주시고 해서 한 철을 아무 무리가 없이 한 철을 지내시고서 참 기쁜 마음으로 환희심으로 해제(解制)를 마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가 한 일주일 전에 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아무 병환도 없이 앉아서 떠억 참선을 하시다가 고대로 허리를 구부린 채 임종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평생에 신심이 돈독하고, 마음씨가 착하고 그러셨기 때문에 이렇게 열반(涅槃)을, 정말 보통 말하기를, 병 없이 이렇게 앉아서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을 하신 것을 '조사(祖師) 열반이다'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마는,

어찌 조사라고 해서 꼭 병환이 없이 돌아가시란 법도 없는 것이고, 또 조사가 아닌 일반 세속 사람도 돌아가실 때 참 병환 없이 아주 임종을 잘하신 분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어서 돌아가실 때 꼭 병환이 있고 없는 것 가지고, 그분이 도(道)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마는, 그렇지마는 기왕이면은 임종할 때에 그렇게 무서운 견디기 어려운 병환을 겪지 아니하고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고 하는 것은 인생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그 할머니께서 일생을 착하고 정직하고, 남 적악(積惡)한 일 없이 어떻게 믿었던지 간에 부처님을 돈독히 믿으셨고, 마지막 판에 가서 이 용화사 선방에 와 가지고 한 철을—화두를 새로 타고, 앉는 법을 새로 배우고, 발우(鉢盂) 펴는 법을 새로 배우고 이렇게 해서 한 철을 잘 지내신 그 공덕으로 해서 이 할머니는 결정코 내생에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해 가지고 다시 정법문중(正法門中)에 귀의하셔서 대도(大道)를 성취하셔 가지고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의심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과연 정법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가까운 데 있으면서도 정법에 귀의(歸依)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구십 평생을 불법을 믿고 사셨지마는 일생 동안을 그 무당과 비슷한 대처승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이나 드리고 복이나 빌고, 그렇게 일생을 지내시다가 구십 평생의 마지막 해에 가서 참선법을 믿고 몸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시다가 끝을 마치신, 그렇게 정법 만나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중생,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법문중에 귀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한 과거에 숙연(宿緣)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여간해서 정법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일러주어도 좀해 그것이 좋다고 하는 생각까지는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방편설(方便說) · 외도(外道) · 사법(邪法)에는 그 귀가 솔깃하고 그래 가지고 거기에는 물심양면으로 거기서 시키는 대로 아주 죽은 형용까지도 하면서 미쳐서 혹(惑)해 반해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면서 정법문중에 들어와서는 한 번 두 번 들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는 안 와 버리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사람은 나무를 볼 때에 파랗게 잎이 피고, 빨갛고 누렇게 꽃이 핀 그리에만 눈을 주기가 쉽고, 땅속에 묻혀 있는 나무에 뿌리에 대해서는 전연 관심을 갖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 몸뚱이나, 가지나, 잎이나, 꽃이나, 열매가 전부 그 뿌리로부터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뿌리가 없는 데에는 도저히 가지가 뻗을 수가 없고, 잎도 필 수가 없고, 꽃도, 열매도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사법에 의지한 사람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얻어진 것 같고, 재미가 있고 곧 크게 소원을 성취할 것 같지마는 해가 감에 따라서 그 사람은 허망한 삿된 그러한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사법에 빠진 사람은 곧, 당장 무슨 큰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자기도 혹해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고,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이웃 · 친구 · 일가친척을 전부 끌어들여 가지고, 거기 장에 사람이 모이듯 사람을 끌고 들어가서 미쳐서 어쩔 줄 모르지마는 머지아니해서 거기에는 실망과 낙망과 후회의 눈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법문중, 불법문중에 있어서 선방편(善方便)과 그러한 외도에 사법(邪法)과를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한 점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서 전연 방편을 가자(假藉)하지 아니하고 대뜸 첫걸음부터서 정법문중에 귀의한 사람도 가끔 있기는 하지마는, 그러한 사람은 극소수, 만 명 가운데에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있을 정도고, 대부분은 방편문에 의지해서 걸려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1년 이태 3년 4년 절에 다니고 법문을 듣고 하다가 차츰차츰 어떠한 인연에 의해서 정법을 믿고 정법에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방편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방편에 의지해서 일단 불법문중에 들어왔다가 그래 가지고 차츰 좋은 도반(道伴), 좋은 스승을 의지해서 정법으로까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서 49년 동안을 꼭! 이 정법만을 설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법문이 방편설이 참 많은 것입니다. 방편이 아니면은 중생을 거둬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전부가 방편에 의해서 전부 불법에 귀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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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편 자체가 악(惡)하고 선(善)하다고 하기보다는 그 방편을 쓰는 법사, 스승, 선배에 첫째 문제가 있고, 둘째에 가서는 그 방편에 걸려든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성이 삿되고 바르지를 못해 가지고 그러한 악방편만 솔깃하게 생겨 가지고 혹해서 미쳐서 빠져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러한 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 방편을 쓰는 편에서 그 법사나, 승려나, 선배가 일시적으로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되, 적당한 기회에 그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지를 못하고, 계속 어떠한 이권에 욕심을 가지고 그 방편을 계속 사용해 가지고 신도를 꼼짝 못하게 방편으로 얽어매 두는 그러한 스승을 만나 가지고 일생을 정법을 만나지 못한 채 그런 방편법, 악방편에 얽매여 가지고 불교 신도 노릇을 하다가 마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동안에 어떻게 불법을 믿었던지 간에 또는 과거에 어떠한 숙연이 있던지 간에 오늘날 우리는 이 법보선원에서 전강 조실 스님의 정법에 관한 법문을 설하신 것을 녹음을 통해서 듣고, 그 설법에 의지해서 참선 수행을 할 수 있게 된 우리의 그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다행할 길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법문을 듣고서 그리고서 실천에 옮기지 아니한다고 하면은 좋은, 아주 좋은 약을 만병통치(萬病通治)할 수 있을 만큼 그러한 좋은 약을 만나 가지고서도 그 약을 먹지 아니하고 팽가친 채 병고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에 옮겨서 열심히 시간을 아끼고 무상(無常)을 철저히 느껴서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서 일초일초, 일분일분을 철저히 실천 수행하므로 해서 우리의 무량겁으로부터서 걸려 가지고 신음해 오던 그 중생의 고질병을 금생에 뿌럭지를 뽑아서 근치(根治)를 해 가지고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살 활(活)' 자, 활구참선. '죽을 사(死)' 자, 죽은 사구참선, 활구참선은—이론과 어떠한 이로(理路), 어로(語路),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이리저리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러한 참선은 이것은 아무리 밤잠을 안 자고 한다 해도 그러한 참선은 활구참선이 아니고 사구참선입니다.

사구참선은 죽을 때까지 무량겁을 해도, 56억 7천만 년 뒤에 미륵불이 출세하실 때까지 앉아서 용맹정진을 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입니다. 단 일 분을 하고, 단 한 시간을 하더라도 참선을 할 바에는 활구참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따지지 말고, 자기가 아무리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모든 경전을 종횡으로 육두 백판으로 외우고 교리적으로 환히 안다 해도 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그 알고 있는 교리적인 지식, 상식 그러한 것을 이 참선에다가 끌어들여 가지고 이용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한 것을 동원해 가지고 이 화두를 이리저리 분석해 보고 따져 보고, 비교해 보고, 그래가지고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러한 뜻이로구나!' 이렇게 알아 들어가는 참선이 아니라, 그러한 교리 이론 따지는 그것을 놔 버리고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꽉 맥힌 생각으로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지정 받은 화두 '이뭣고?'

'이뭣고?'면 '이뭣고?' 또는 '무자(無字)' 화두를 하는 분은 '무자' 화두, 또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을 화두로 타신 분은 그 화두,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무슨 화두가 되었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 가운데에 한 가지를 선지식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그 화두 하나만을 다못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이뭣고?'

 

비단 앉었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걸어 다닐 때, 밥 먹을 때, 똥 눌 때, 소지할 때, 빨래할 때, 또는 차를 탈 때,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일어나는 어떠한 생각,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슬픈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기쁜 생각이 일어날 때도 '이뭣고?' 불같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올 때도 퍼뜩 돌이켜서 '이뭣고?'

눈으로 어떤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또는 사람이 지나간 것을 보거나, 산을 보거나, 구름을 보거나,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거나 또는 귀를 통해서 새가 우는 소리를 듣거나,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가 고함을 지르고 우는 소리를 듣거나, 어떠한 것을 보건 듣던 간에 그때 그때마다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공부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참선 수행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면은 당장 그 보는 데에 따라갑니다. 그래가지고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귀로 뭣을 들으면은 그 듣는 일로 해서 바로 나는 '이뭣고?'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러지를 못하고, 듣는 그 건으로 해서 이 생각, 저 생각, 10년 전으로 올라갔다가, 5년 전으로 내려왔다가 그러다가 공연히 속이 활딱 뒤집어졌다가, 혼자 웃었다가, 썽났다가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그러한 식으로 망상(妄想) 위에다가 또 망상의 가지를 피우고 그 망상 위에 또 망상의 꽃을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이 생각 저 생각하고, 그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골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가 그 지나간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생각 한 생각했던 그것이 하나도 딴 데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차곡차곡 우리의 마음자리, 제팔식(第八識) 속에 고대로 녹음(錄音)이 되는 것입니다.

 

녹음이 되고, 그 저장이 되어가지고 그것이 종자(種子)가 되고 원인(原因)이 되어서 앞으로 무량겁 윤회가 그 종자로부터서 그 원인으로부터서 윤회(輪廻)가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이 한 행동으로 표현이 되고, 한 행동으로 해서 다시 또 생각이 거기에 이어지고, 생각과 행동이 서로—새끼가 왼손에 쥐었던 짚이 오른손으로 건너가고, 오른손에 잡았던 짚이 왼손으로 건너가고 그래서 이렇게 그 손이 움직여짐에 따라서 새끼가 꽈지듯이,

한 생각이 행동으로, 행동에서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무량겁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지 아니한, 참선을 하지 아니한 범부 중생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살아 있기 때문에 눈을 통해서 무엇인가 봐야 하고, 귀를 통해서 무엇인가 듣기 마련이고, 보고 들음으로 해서 무엇인가 느낄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사람은 그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이 법을 충실히 이 법을 본업(本業)으로 해서 열심히 살아간 사람에게는 계율을 지키는 일, 또는 염불을 하는 일 또는 주문(呪文)을 외우든, 또는 기도를 하건, 어떤 경전을 반야심경을 외우건 또는 천수를 하건, 그 밖에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건, 또는 오후불식이나 일종을 하건, 또는 방생을 하건, 또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공덕을 하건, 또는 노인이나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가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좋은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 닦는 참선을 하지 아니하고 정법을 닦지 아니하고 계행(戒行)만을 위주해서 닦음으로써 일생 수행을 삼는다던지, 염불을 해 가지고 극락 가기만을 바래 가지고 일생을 염불만을 한다던지, 또는 어떤 주문을 외워 가지고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기 위해서, 주문에 의지해 가지고 날이면 날마다 전전긍긍을 한다던지, 기도를 해 가지고 아들딸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래고 그러한 물질적인 것, 모냥이 있는 것에 얽매어 가지고 계속 기도에 미쳐 가지고 돌아댕기는 그런 분.

 

절을 많이 하면은 업장이 소멸하고, 소원이 성취된다 해 가지고 삼천배, 사천배 절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하루에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면은 세세생생에 부자로 살고, 업장이 소멸하고, 죽어서 극락에 간다니까 평생에 오후불식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일종(一種)을 하면 좋다니까 일종을 하는 것으로써 불법을 삼는다던지, 이렇게 해서 그러한 모냥이 있는 착상구불(着相求佛), 착상 수행, 상(相)에 착(着)해 가지고, 모냥에 착해 가지고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그러한 불법을 믿는 사람, 이것은 모두가 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방편의 올개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러한 불법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벗어나지 못한 불법(佛法)은 설사 그 사람이 삿된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그것이 정법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사법(邪法)이 되는 것입니다. 방편에 얽매어 가지고 일생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그 사람이 마음이 선량하고, 정직하고, 점잖하고, 그 말할 수 없이 착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사람은 사도(邪道)의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에 의지한 사람은 상(相)이 없는 가운데에 일체 선법(善法)을 닦을 수가 있는 것이고, 모든 선법이 그 사람에게는 다 선방편(善方便)이요, 정법의 조도(助道)가 되는 것입니다. 보조 수단이 되는 것이여.

그래서 똑같이 계율을 지키고, 똑같이 염불을 하고, 똑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보시 공덕을 쌓고 방생을 한다 하더라도 정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 사법에 의지한 사람이 하는 것과는 결과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불을 하지 말아라. 천수를 외우지 말아라. 『반야심경』을 외우지 말아라. 『금강경』을 독송하지 말아라. 방생을 하지 말아라. 또는 일선 장병에 위문을 하지 말아라. 또는 노인에 보시 공덕 하지 말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들을 형편 닿는 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서 하시라는 겁니다.

하되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면서 하는 그 마음으로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 자비심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고,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뻑뻑이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참선하는 마음으로 일체 보시, 선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하는 그 자체는 남이 보기에는 똑같이 보이지마는, 그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다 같이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20분47초~38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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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참선(活句參禪)과 사구참선(死句參禪).

 

활구참선은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론적으로 따지고, 경전에 있는 교리를 등용을 해서 따지고, 자기가 어떤 스님한테 들은 법문을 듣고 이리저리 비교하고 따져서 '아하! 이것이로구나! 이렇구나! 아!'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마침내 그것은 아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참선은 사구참선(死句參禪), 죽은 참선이기 때문에 영원히 해 봤자 깨달을 기약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녹음법문 가운데 '화두(話頭)는 어떠한 책이나 잡지나 신문, 그러한 데에서 보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화두를 선택하지 말고 반드시 선지식에게 딱! 하나를 받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어디서 지내가는 말로 듣거나, 책에서 봐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 선택을 한 화두는 해 나가다가 '이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이 화두가 좋은가, 나쁜가?' 자꾸 스스로 그것을 혐의를 하고 의심을 해 가지고 중간에 갈팡질팡을 하게 되기 때문에 공부가 크게 장애를 받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믿을 수 있는, 또 믿어지는 선배로부터 화두를 딱! 지정을 받아 가지고 한 번 받았으면은 다시는 그것을 변경을 하지 말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할 때까지 일여(一如)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어떠한 화두라도 처음부터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곧 잘될 것 같다가 얼마 동안 해 가면 영 답답하고 화두가 잘 들리지를 아니하고, 점점 화두가 들리지 아니하면서 그 애를 먹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더라도 딴생각을 내지 말고, 잘 그 마음을 써서 한 생각 한 생각, 일 분 일 분을 법(法)답게 간절히 공부를 지어 나간다고 하면은 반드시 그렇게 애를 먹고 답답하고 몸부림치도록 애를 먹혔던 그 화두가 들려고 안 해도 정말 제절로 화두가 들리면서 순일무잡하게 정진이 되어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간다 해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좋아하는 생각 '아! 인자 되었다. 참! 좋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 되었으면' 이러한 생각을 먹게 되기 마련입니다마는 그 생각이 고약한 망상 중에는 최고 가는 고약한 망상인 것입니다.

 

보통 때,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른 것은 뿌리 없는 생각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제절로 없어지지마는, 공부가 한참 잘되어 갈 고비에 이르러서 '아! 참 좋다. 아! 이렇게 계속 잘되었으면' 아, 이러한 생각을 낸 것은 고비를 넘을려고 한 판에 뒷걸음질을 쳐서 천길만길 구렁텅이로 빠져 버린 것과 같애서 그 공부가 순일하게 잘되어 갈 때에 그러한 생각 내는 것은 아주 타당한 것 같지마는, 실지에 있어서는 최고로 고약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 둬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도 짜증을 내지 말고, 공부가 잘되어 가도 좋아하는 기쁜 마음을 내지 말고, 계속 한결같이 이 화두를 들고 나가되, 잘 안되어갈 때—가슴이 답답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몸이 뒤틀리도록 괴롭고 지루하고 이럴 때에는 가만히 일어나서 직선으로 따악 길을 정해 놓고 그 길을 왔다갔다하면서 포행(布行)을 하는 가운데에 화두를 든다고 하면은 마음이 후련해지면서 고요해지고 깨끗해지면 다시 또 방석에 가서 또 정진을 하시는데.

 

이 화두를,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그 환성지안 도사 당시에 월봉 스님이라고 하는 대강사인데 그분이 『원각경』에 있는 말씀 한마디를 법문하신 가운데 잘못 설(說)해 가지고 그 과보로 해서 환성지안 선사에 그 한마디 고함 소리에 금강역사(金剛力士)에, 금강신장(金剛神將)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철퇴를 맞고, 피를 토하고 꺼꾸러진 내용에 법문을 들으셨습니다.

법문(法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설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그 법문 한 시간 동안에 걸친 가운데에 여러 가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충 그 말씀 가운데에 중요한 것을 간추려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정에서 생활하시면서, 아내 노릇 하시면서, 남편 노릇 하시면서, 엄마 노릇 하시면서 그 생활 속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되고 안 되고 한 것을 따질 것이 없습니다. 되건 안 되건 따질 것 없이 자꾸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시면서 화두를 들고 나가신다고 하면은 일상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로 화두를 들 줄 알고 여법(如法)하게 공부를 지어 나가면서 하시면은 사회생활도 썩! 괴롭지마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도 한량없는 기쁨이 있는 것이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아니한 사람에게는 기쁜 것도 그것이 기쁜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六途輪廻)에 윤회의 원인에 지내지 못한 것이고, 더군다나 괴로운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정법에 의지해서 참선을 하면서 하는 사회생활은 사회생활 그 자체가.... (녹음 끊김)

 

 

돌아오는 10월 보름날이, 음력 10월 보름날이 백일기도 입재 날이면서 동시에 용화사 법보선원 결제 날입니다. 그날도 법회가 있으니 만큼 한 분도 빠지시지 말고 서로서로 권고해서 그날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결제에도 동참을 하시고 백일기도에도 동참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2시에 인천시민회관에서 불교도들의 새마을운동에 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스님네와 많은 신도님네들이 참여해 주기를 바래고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도 몇 분의 스님이 참석을 하실 것이고 또 여러 신도님 가운데에도 될 수 있는 한 여기서 멀지 아니한 곳에 있으니깐 거기에 잠깐 참여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기독교 단체나, 천주교 단체에서는 그러한 모임에 많이 성의를 가지고 참여를 하시는데 불교 단체 특히 우리 용화사에서는 한 분도 참석을 아니하신다고 이러한 그 원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제적인 것은 아닙니다마는 될 수 있으면 참여를 하셔서, 지끔 우리나라가 선진 대열에 서기 위한 비약을 하기 위해서 온갖 면에 있어서 그 활발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운동의 하나가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입니다.

특히 이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선구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교도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불교 대한불교 조계종의 한 방침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될 수 있으면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래고.

 

그다음에 말씀드릴 것은 우리나라 그 조경—조경(造景)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그 문화 주택을 가서 보시면은 마당에 돌과 모다 나무, 그런 것을 잘 심어서 보기 좋게 만든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고궁 같은 데나 그런 데를 가서도 보시겠고 그런데 그것을 조경이라고 그럽니다.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돈 많은 사람이 마당에다가 돈 들여서 좋은 돌이나 나무를 심어 놓고 사치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그 조경의 근원이 그러한 돈 많은 사람들의 사치를 위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화엄경』 도리가—불경(佛經) 중에 최고의 경전이 바로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면은 일월성진(日月星辰), 해와 달 · 별 · 산천초목, 이 모든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몸뚱이요, 바람 불고 새가 울고 물이 흐르고 하는 이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의 설법이라고 하는 내용의 진리가 바로 『화엄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면 이 조경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경』의 진리, 진리인 우주 자연을 그것을 내 조그마한 뜨락에 구현을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뜰에다가 바위 뾰족하고 둥글고 모나고 삐뜰어지고 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바위를 적재적소에다가 갖다가 배치를 하고, 거기에 어울리게 조화가 되게 나무를 적당히 심음으로 해서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내 뜰안에서 우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우주 자연에 신비스러운 진리를 그 하나의 돌을 보고 하나의 나무를 봄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조경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 아무나 시켜 가지고 정원사들을 시켜서 이러쿵저러쿵 묘하게 정원을 꾸민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이러한 원리에 입각해서 볼 때에, 아는 사람이 볼 때는 퍽 가소롭기 한이 없는 것입니다.

이 조경 학계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에 권위자이신 90세가 넘으신 운정 한도 박사께서 그전에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실 때부터서 여기를 여러 차례 왕래하셨고, 조실 스님도 그 한도 선생, 한도 박사가 계신 그 토굴에 왕림을 하셔서 서로 친한 교분이 계시고 또 조실 스님이 열반하신 뒤에도 저도 그 한도 선생 계신 데를 여러 차례 갔고 또 그 한도 선생도 우리 법보선원에 여러 차례를 오셨습니다.

 

이 선생님은 유교 · 불교 · 도교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조경을 그러한 불교에 『화엄경』의 진리를 그러한 조경을 통해서 표현을 하자. 사찰에 조경도 그렇고, 일반 불교 신도에 가정도 역시 그렇게 하고, 고궁도 그렇게 표현을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그 조그마한 뜰안에서 바위 하나 나무 하나를 봄으로 해서 거기에서 진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참, 오늘날에 불교의 진리를 펴는 가장 좋은 방편이 된다고 하는 것을 항시 역설을 해 오셨습니다.

 

그 선생님 밑에는 각 대학교수, 사회에 저명인사들이 모다 그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서 제자의 입장에서 그 자연취미회라고 하는 것을 조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취지로 해서 자연취미회에 여러분들도 가입을 하셔서 좋은 조경을 구경도 하시고 또 여러분 가정에 그러한 조경을 하시게 될 경우 이러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하시게 되면은 같은 힘을 들여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리에 부합이 되도록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이 자연취미회에 가입을 하셔서 그러한 선생님 높은 선생님들의 좋은 강의도 들으실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의 정신을 순화하고 그러한 조경 자연취미를 통해서 천진무구한 비로자나 법신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 자연취미회에 발기회에 그 회원께서 여러분에게 가입하시도록 말씀을 하시면은 될 수 있으면은 그런 데에 가입을 하시도록 권고를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계속해서 법요식을 진행하겠습니다. (38분37초~57분13초) (끝)

 

 

 

 

[법문 내용]

 

어떠한 것이 정법(正法)이고, 어떠한 것이 사법(邪法)이냐 / 90 넘은 노보살님의 한 철 참선수행. 잠자듯이 그렇게 조용하게 임종 / 조사(祖師) 열반 / 정법은 근본적인 것, 나무뿌리, 실다운 것. 사법은 지엽적인 것, 끝 가지, 허망한 것.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 모두가 다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 선방편(善方便)과 악방편(惡方便). 방편으로부터서 정법으로 올라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선방편. 방편에 얽어매 두면 악방편 / 정법을 들었을진대는 반드시 그것을 실천 수행해야.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정법(正法),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사법(邪法). 사구참선은 깨달을 기약이 없다 /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며, 어떠한 것이 사구(死句)냐? /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찰나에 보고, 듣고, 느끼는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수행한 사람과 아니한 사람의 차이 / 착상구불(着相求佛), 무엇을 바래고 구하는 상(相)에 착(着)한 수행은 방편에 얽매인 것 /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다 /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공부해야지, 늙어서 기운 없을 때는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다 / 조경(造景)은 우주 자연을 조그만한 뜨락에 구현함으로 해서, 거기서 진리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어려우냐? 정법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너무나도 위대하기 때문에 지극히 평범한 탓으로 해서 일반 범부(凡夫) 중생에게는 그렇게 귀에 달게 받아들여지지 아니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우선 얻어지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무엇인가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빌고 중생으로서에 오욕락(五欲樂)을 충족시킬 만한 그러한 것들이 성취가 되고, 눈으로 귀로 그리고 손을 통해서 무엇인가 얻어져야만 마음이 흡족하고 거기에 정신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법과 사법을 가릴 수가 있느냐?

정법은 본(本), 근본적인 본원적인 것입니다. 사법은 저 끝, 가지와 같은 것이여. 나무에다 비교하면은 나무의 뿌럭지와 같은 것이고 사법은 저 가지 끄터리, 조그만한 가는 가지 끄터리 이파리 그런 것에다 비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핀 이파리는 변화가 눈에 보여서 가지에 잎이 피고, 잎이 피고 난 다음에는 꽃이 피어서 사람의 눈에 띄기가 좋고, 정법은 저 뿌리와 같은 것이어서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눈에 띄질 않습니다.

 

정법(正法)이라고 하는 것은 실(實)다운 것입니다. 실다운 것이어서 믿고, 믿어 들어갈수록에 점점 평범하고 위대해서 일생을 믿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거기에서는 실망을 하거나 허망한 데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법(邪法)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무엇인가 얻어지는 것이 있고, 솔깃하고 재미가 있지마는 1년 이태 3년 10년 믿어감에 따라서 점점 거기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망한 함정이 나를 기달코 있는 것입니다.

 

불교 안에는 팔만사천 가지 법문(法門)이 있어서 그 팔만사천 가지의 법문이 모두가 다 이 정법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좋은 방편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방편이 아니면은 도저히 정법, 실법(實法)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방편 가운데에도 악방편(惡方便)과 선방편(善方便)이 있습니다. 선방편(善方便)은 일시적으로 의지했다가 바로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들어오게 하는 방편은 이것은 선방편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방편으로 들어오게 해 가지고, 방편으로 긁어 들여 가지고 영원히 그 방편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하고 방편에 딱! 걸려 가지고 오금을 피지 못하고, 그 방편을 발판으로 해서 정법에까지 뛰지를 못하고서 그 방편에 딱! 얽매여 가지고 일생 동안을 그 방편에 걸려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방편은 그것은 악방편(惡方便)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라고 해서 다 정법이 아닙니다. 일체의 방편,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참선법이 제일이지마는 그 참선도 정법과 사법이 있습니다. 정법은 활구참선(活句參禪)이 이것이 정법(正法)이고, 사구참선(死句參禪)은 이것은 사법(邪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던지, 무엇을 듣던지, 무엇을 생각하던지 간에 바로 둘째 생각, 셋째 생각으로 생각이 번져 나기 이전에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로, 자아로 돌아오는, 나의 근본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이요, 부처님 나라로 돌아오는 길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가고 한 달, 한 달을 이렇게 살아가고 일 년, 일 년을 이렇게 단속해 나가면서 살아갈 때에 나에 몸안에 있는 자성불(自性佛)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화두 하나 제대로 들을 줄 알고 올바르게 단속해 나갈 줄 알면은 참선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간단한 한마디요, 쉬운 한마디지마는 그 화두를 옳게 단속하기라 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가운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가끔 법회 때 나와서, 듣던 말이지마는 또 듣고 또 듣고 함으로 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또 자기도 모르는 여러 가지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 나감으로 해서 멀리 삐뜰어지기 전에 바른길로 돌아선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법회 때에는 꼭 빠지지 마시고 참예를 하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들딸 여워 놓고 늙발에 가서 좀 일 다 처리해 놓고 공부하리라' 이리 생각하시지 말고, 젊었을 때 기운 좋을 때,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해야만 공부도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는 말씀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 몸이 괴롭고 힘이 없고 그랬을 때 기다려서 할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언젠가는 늙기 마련입니다.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부터서 해 놓으면은 그 공부가 훨씬 더 빨리 힘있게 공부가 이루어지고, 늙어서 기운 없을 때에사 할려고 하면은 생각뿐이지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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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