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01~325)2020. 12. 29. 20:42

((No.314))—1986년(병인년) 동안거 결제(86.11.16) (71분)

(1/4) 약 19분. (2/4) 약 16분. (3/4) 약 20분. (4/4) 약 16분.

(1/4)----------------


법왕권실영쌍행(法王權實令雙行)헌디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디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법왕권실(法王權實)이 영쌍행(令雙行)이여. 법왕(法王)에 권(權)과 실(實)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이 하여금 쌍(雙)으로 행(行)해. 권실(權實)을 다 갖추어서 행(行)하더라.

뢰진풍치해악경(雷震風馳海岳傾)이여. 법왕(法王)이 권법(權法)과 실법(實法)으로써 그 법령(法令)이 행(行)하면 번개가 우레가 치고 바람이 불어 가지고 바다가 뒤집어지고 태산이 무너지더라 그 말이여.


벽력일성운산진(霹靂一聲雲散盡)한데, 벽력, 벼락이, 벼락치는 한 소리에 구름이 다 흩어져 버렸는데,

도가원불섭도정(到家元不涉途程)이라. 집에 이르른 것이 원래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자기의 고향에 도달하더라.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 없는 가운데에 교해(敎海), 교법(敎法)의 바다가 파도를 치고, 그 교해, 교법(敎法)의 바다 속을 향해서, 바로 그 속에서 말 없는 진리법(眞理法)을 나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무언(無言) 가운데에, 말 없는 가운데에서 교법(敎法)을 설(說)하시고, 그 교법 설하신 그 속에서 무언(無言)의 진리를 보이신 도리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방편법(方便法)에 떨어져 가지고 부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그 실법(實法)을 보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동안거(冬安居) 결제일을 맞이해서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 법문을 경청(敬聽)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 법사(法師)스님이신 만공(滿空) 큰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으신 그 한 대문(大文)을 잠깐 들었습니다마는, 오늘 이 결제(結制)와 또 백일기도 입재(入齋)를 맞이해서 용화사 법보선원(法寶禪院)에 방부(房付)를 들이신 23명에 비구(比丘) 스님과 또 보살선방에 방부를 들인 108명, 그리고 용주사 중앙선원에 방부를 들이신 17명, 그리고 도봉산 원효사라든지 또 회룡사라든지 근처에 모다 비구니(比丘尼) 수좌(首座)들도 모다 참석을 했습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의 그 본성(本性),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인데, 그 물의 본성은 볼 수가 없으나 그 물의 본성이 때로는 액체(液體)가 되어서 흐르기도 하고, 바다에 잠기기도 하고, 호수에 잠기기도 하고, 시내로 흐르기도 하고, 폭포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이 영하로, 섭씨 영하로 내려가면은 고체(固體)가 되어서 얼음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백 도(度) 이상으로 끓으면은 그것이 기체(氣體)가 되어 가지고 수증기로써 증발을 하게 됩니다.


수증기로, 기체가 되어 가지고 있을 때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습성(濕性)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그것이 액체로써 물이 되어 가지고 흐르고 떨어지고 잠겨 있다 하더라도 그 물의 본성(本性)인 그 습성(濕性)에 있어서는 증감(增減)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하로 기온이 내려가서 꽁꽁 얼은 얼음이 되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그 물의 습성(濕性)인 그 본성(本性)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거나, 짐승으로 태어났거나, 곤충으로 태어났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미생물로 태어났거나, 또는 복(福)을 지어서 천상(天上)에 태어났거나, 악(惡)을 행해 가지고 지옥(地獄)에 떨어졌거나, 이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제(結制)를 해서 석 달 동안을 출입을 금(禁)하고 엄격한 법도(法度)하에서 이 안거(安居)를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도리(道理)를 깨닫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잠을 덜 자고,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하고자 한 말을 삼가하고, 나가고 싶은 데가 있어도 출입을 금(禁)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원해 가지고 엄격한 법도에 묶여서 석 달 동안을 마치 부모의 초상(初喪)을 당한 상제(喪制)와 같은 그러한 경건한 마음으로 정진(精進)을 하고자 해서 오늘 이렇게 결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공부는 자기 스스로 자발적(自發的)으로 원해 가지고 되는 일이지, 남이 시켜서 강요해 가지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하면 얻은 바가 있고, 노력을 하면 그 진취하는 결과가 자기 눈으로도 확인할 수가 있고 또 남이 보아도 인증을 할 수가 있는데, 이 공부는 그러한 차례차례 계단을 밟아서 올라가 가지고, '나는 한 달 했으니까 이만큼 했다' '석 달 동안에는 이만큼 되었다' '이렇게 삼 년 동안 정진을 했으니까 나는 이만큼 얻은 바가 있다' 무슨 바둑이나, 태권도나 모다 그런 것은 급수(級數)가 있고 단(段)이 있어 가지고 얼마만큼 하면 그 자기의 자격증을 얻어서 누구든지 인증을 할 수가 있지마는, 이 참선(參禪)은 암만 해도 스스로 '나는 이만큼 했다' 한 얻은 바가 없어. 내보일 것도 없어.


물론 해제(解制)를 하면, 석 달 동안을 잘 지내면은 안거증(安居證)은 드리지만, 그것은 석 달 동안 여기서 잘 지냈다고 하는 증서(證書)지, 공부를 해서 어느 정도 이르렀다고 하는 그러한 자격증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얻은 바가 없고 다못 의심(疑心) 뿐인데, 거기에 어떠한 무슨 재미가 있느냐 그 말이여.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남에게 보일 것도 없고, 그러한 공부입니다.

그러한 공부를 자발적으로—편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잘 먹는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뜨뜻한 것도 바라지 아니하고, 오직 이 생사(生死) 문제, 자아를 깨닫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우리 스님네와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안거(安居), 결제(結制)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철저하게 발심(發心)을 해서 하루하루를, 또 한 시간 한 시간을, 또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하게 알뜰하게 다져 나가면, 맛없는 가운데에 맛이 있고, 아무 재미없는 가운데에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참, 이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재미'라고 하니까 무슨 세속에 어떠한 물질을 얻었을 때, 또는 명예나 권리를 얻었을 때, 누구한테 칭찬을 얻었을 때에 느끼는 그러한 재미가 아니고,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법(法)의 기쁨, 법희선열(法喜禪悅), 법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생 동안을 자기의 그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다 바치고서도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어도 원망이 없고 부러울 것도 없고 그러한 것입니다.


일생 동안을 이 참 독신(獨身)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누데기를 입고서 보잘것없는 그런 허술한, 초췌한 그런 모습을 가지고 걸망을 지고서 이렇게 선방(禪房)으로 다니지만, 이 세상에 천국(天國)도 부러울 것이 없고, 지옥(地獄)도 두려울 것이 없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선객(禪客)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알뜰히 정진을 함으로써 마침내는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처음~18분54초)





(2/4)----------------


세속(世俗)에 모든 공부는 차츰차츰 한 걸음 한 걸음 단계적(段階的)으로 향상(向上)을 해 가지고 박사도 되고 모다 판사도 되고 하지만, 이 공부는 처음 출가(出家)할 때부터서 마지막 도(道)를 이룰 때까지 하는 일이 한결같이 그 한 생각을 돌이키고 또 한 생각을 돌이켜서 계속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계속 그 초점(焦點)을 여의지 아니하고 관(觀)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구(參究), 참선(參禪)인데.


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대의단(大疑團)이, 큰 의심덩어리, 가슴속에도 콱! 차고 이 나의 주변에도 콱! 차고,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 그 의단(疑團)이, 의심덩어리가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봐도 그 의심(疑心)이요, 땅을 봐도 그 의심이요, 무슨 소리를 들어도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썽이 나도 의심이요, 슬픔이 일어나도 의심이요,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다못 그 의심덩어리로 가뜩차 버려.


의심(疑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들리는 것도 없고, 생각할 것이 없어. 보았다 하면 바로 그 의심이요, 귀에 무슨 소리 들렸다 하면은 동시에 의심이요, 무슨 생각이 일어났다 하면은 그 생각 따라갈 겨를이 없어. 나는 바로 의심(疑心)이다 그 말이여.

이렇게 다구치고 이렇게 잡드리를 해 나갈 때에, 모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도 발붙일 곳이 없어. 일체 차별(差別)이 거기에서는 다 떨어져 버려. 미웁고 고운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고, 그래서 결국은 이 몸뚱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의단(疑團)이 순수무잡(純粹無雜)하고 그 의단이 독로(獨露)했을 때에 망상을,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버리려고 하고, 물리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일어나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의심이요, 똥을 눌 때도 의심이요, 포행(布行)을 할 때에도 의심이요, 법당(法堂)에 와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도 그 의심이요, 옆에서 누가 말을 해도 나는 의심이요, 의단이 독로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할 때의 그 마음 경계는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고 쇄락(灑落)하고 말로써 표현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에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고 편안하고 그러기 때문에 일부러 화두(話頭)를, 화두를 드는 것까지도 망각(忘却)하게 될 수가 있어. 그때에 나아가서 화두에 대한 의심을 놔 버리면 안 돼.

너무 고요하고 깨끗하니까, 그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은 그곳에 따악 착(著)해 가지고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여. 그럴 때에도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이, 의관(疑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부러 힘을 써 가지고 '이뭣고!' 힘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아무 힘을 쓰지 아니하고 그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 의심(疑心)의 관(觀)이—관(觀)은 관만이 있어야지, 일부러 생각을 일으켜 가지고 힘을 써서 화두(話頭)를 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한, 그렇게 이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려고 애를 써도 들 때뿐이지 금방 딴생각이 오고 그러지만, 그 딴생각 났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고, '하이고, 이놈의 공부가 언제나 될 것인고? 내가 아마도 이 참선법에, 참선(參禪)에 인연(因緣)이 없은가? 업(業)이 두터워서 그런가?' 이 생각 저 생각해서 짜증을 내고 그래선 아니된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그냥 일어난 대로 놔두어 버리고 나는 화두(話頭)만을 터억 들거든. '이 뭣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이 뭣고?' 자꾸 챙기라고 하니까—뭣헌 분은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를 뭐 한 시간에 이천 번을 했느니 삼천 번 했느니—그 횟수가 많은 것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은 그 하루에 오만 번이나 또는 십만 번 이렇게 염주(念珠)를 가지고 세면서 하루에 일과를 정해 놓고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 화두는 그런 횟수를 많이 하고 작게 하고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가끔 챙길 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의심'만을 터억 관(觀)해야지,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뭣고 이뭣고' 자꾸 그렇게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그 의심이 없어졌을 때나, 또는 딴생각이 들어왔을 때에 그때 화두를 한 번씩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있으면 그 의심(疑心)만을 묵묵히 관(觀)하는 거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아하 이것이로구나' 그런, 그 그런 생각이 있으면 안 돼. 해 갈수록 꽉 맥혀서 알 수가 없어야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지는 것이 있고, 떠억 요렇게 더듬어 들어갈 것이 있으면 아니 된 것입니다.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하면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니라

나무~아미타불~


오욕해자갈(五欲海自渴)이요  아인산자도(我人山自倒).

이렇게 정진(精進)을 알뜰히 짬지게 해 나가면 거기에 무슨 오욕(五欲)이 일어날 것인가? 무슨 탐심(貪心)이 있으며 무슨 진심(瞋心)이 있어?

탐심이 없으면은 오욕(五欲)은 거기에서 오욕의 바다는 말라 버리는 것이고, 진심이 없으면 아인(我人)의—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그 아인(我人), 인아상(人我相), 인아(人我)에 그 높은 산(山)이 스스로 넘어져 버린 것이다.


석 달 동안을 스님네나 이 보살님네들이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시는데, 중간에 어떠한 장애(障礙)가 일어나는 것은 그 오욕(五欲)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아인(我人)의 산이 우쭐대기 때문에 거기에서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욕의 근본인 그 탐심이 없어. 화두(話頭)를 들고 그 열심히 정진을 해 나가는데 무슨 탐심(貪心)이 거기에 있으며, 무슨 거기에 진심(瞋心)이 일어날 것이냐 그 말이여.


한 사람 한사람이 정말 이 일대사(一大事)를 향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가면, 거기에는 불평불만도 있을 것이 없고, 니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뭣이 좋고 나쁘고 한 일체 시비(是非)가 거기에 붙들 못하는 것입니다.

시비(是非)가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이 발동(發動)을 한 것이고, 모든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무명(無明)에 그 탐심(貪心)을 안고 살기 때문에 그런 시비와 장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음낙처운자산(圓音落處雲自散)이요. 원음(圓音) 떨어진 곳에 구름이 스스로 흩어져 버리면,

원음(圓音)은, 아까 부처님께서 무언(無言) 속에 한량없는 법문의 바다에 파도가 치고, 그 부처님의 끝없는 설법 교해(敎海) 속에 말 없는 진리가 드러난 도리, 바로 그것이 부처님에 원음(圓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원음은, 보살(菩薩)이 들으면은 보살도(菩薩道)요, 연각(緣覺)이 들으면은 인연법(因緣法)이요, 성문(聲聞)이 들으면은 사제법(四諦法)이요, 중생(衆生)이 들으면은 중생에 차별(差別)이요, 일체 축생(畜生)과 산천초목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들으면은 자기 나름대로 다 가서 계합(契合)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음(圓音) 설법(說法)이, 현재 우리 눈으로써 볼 수 있는 모든 현상, 귀로써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 코로 맡을 수 있는 온갖 냄새, 혀로 맛볼 수 있는 온갖 맛,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차웁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러운 모든 그 촉감, 우리 생각으로써 느낄 수 있는 모든 현상이 다 부처님 원음(圓音)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어.

그래서 그 원음(圓音)의 그 본성(本性)을 바로 봐 버리면 무명(無明)의 구름이 다 흩어져 없어져 버려서, 부증대보변환가(不曾擡步便還家)여.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우리의 진리의 고향(故鄕), 우리의 마음에 고향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18분55초~34분39초)





(3/4)----------------


한 철, 백 일이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인생이 많이 살면 칠팔십 사는데, 사실 우리의 생명은 오늘 하루를 모르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바로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사(生死)가 무상(無常)한, 무상한 이 생사 속에 이미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와 마찬가지여.

언제 죽을는지 모른 그런 무상(無常)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무상한 속에서 이 석 달이라고 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이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석 달 동안에 우리의 이 생명이 유지가 될는지, 그 안에 이 세상을 뜰런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무상한 이 석 달 동안에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렇게 결제(結制)를 하게 되는데, 그 각오가, 그 석 달 결제에 들어가는 우리의 그 마음의 가짐이 경건하고 그 엄숙하고, 마치 어떠한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는 그러한 그 병사(兵士)와 같은 마음, 그것에다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러한 참, 그러한 상황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을 사(死)' 자를 터억! 이마 미간(眉間)에다가 써 붙이고, 그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생활인 것입니다.

거기에는 부모(父母)가 돌아가셨다고 부고(訃告)가 와도 해제(解制)할 때까지는 본인에게 알려주지를 안 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얼마나 그 각오(覺悟)가 비장했으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부고가 왔어도 본인에게 알려드리지 않겠습니까.

스님네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보살선방에 여러분들도 석 달 동안을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원근(遠近)에 있는 여러 비구니 수좌(首座)님네들도, 항상 이 도량(道場)에서 전강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리고 이 한 회상(會上)에서 지낸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 또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정진을 하신 여러 스님네들도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계신 조실 스님을 모시고 그렇게 산다고 하는, 정진한다고 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한 철을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예불 젓숩고, 그리고 정진하고 또 아침 공양을 하시고, 또 오전 정진을 하고 또 사시공양을 하시고, 오후 정진 그리고 저녁공양을 하고, 밤 정진 그리고 취침을 하시고, 그 하나하나가 스스로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그 선방에 어떤,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말자, 특별한 허가(許可)가 없이는 외출을 하지 말자, 큰방에서 잡담을 하지 말자' 뭐 그 여러 가지 선방(禪房)에 규칙이 있겠습니다마는, 그런 규칙에 얽매어 가지고 그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나가고 싶으면 나가라, 뭐 얼마든지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그런다 하더라도, 스스로 턱! 자기가 자기 규칙(規則)을 세워서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


그래서 나갈 겨를도 없고, 떠들 일도 없고, 시비(是非)할 건덕지도 없고, 저절로 한 분 한 분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할 때에 규칙을 특별히 만들지 안 해도 제절로 규칙이 서서, 한 철을 정말 일생일대(一生一大)에, '그때 참! 정진(精進)다웁게 했다, 그 한 철이야말로 나에 일생을 결정짓는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적인 그런 한 철이었었다' 그러한 한 철이 되도록 그렇게 정진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분 한 분이 지낼 때에 그 가운데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부처님 당시에는 사시공양(巳時供養) 한 번만 했지마는, 지금은 다 특별한 분을 제외하고는 다 삼시(三時)를 공양(供養)을 하시게 되는데, 공양 문제는 대단히 평범한 생활 가운데에 일부지만 대단히,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인 것보다도 그것 못지않게 중대한 정진인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전국 선방이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하시게 되면 너무 시간이 빨러서 그저 뭐 금방 5분도 안 되어서 뚝딱 공양이 끝나버리는데, 이건 대단히 잘못된 흐름인 것입니다. 어쨌든지 느긋한 마음으로 충분히 시간을 가져서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供養)을 하셔야 합니다.

저작을 잘 하시면은 공양한 그 모든 것이 잘 소화(消化)가 되어 가지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영양(營養)을 완전히 흡수를 하게 되지만, 저작을 잘 아니한 채 침도 섞지도 아니하고 우물우물해서 그냥 막 꿀떡꿀떡 삼키게 되면, 뱃속이 공양하고 난 뒤에도 뱃속이 더부룩하니 편틀 못하고, 또 소화가 잘 안되고, 따라서 흡수가 되지 아니한 채 다 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놈을 그 아까운 음식을 먹느라고 애쓰고, 그러고 그놈이 입을 통해서 위장으로 소장 대장을 거치는 동안에 애만 썼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애만 썼지 실지로 영양 흡수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건 건강에 좋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정진(精進)에도 대단히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소화가 잘되서 위장이 편하고 흡수가 잘 되어야 정신(精神)도 맑고, 배도 편안해야만 정진이 잘되지, 자꾸 더부룩해 가지고 트림만 해 쌓고 소화가 잘 안되고 흡수가 안되면, 영판 정신도 안정이 안되고 호흡(呼吸)도 잘 안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쨌든지 시간을 넉넉히 잡아서, 죽비를 치는 스님은 잘 맞춰서 넉넉하게 죽비를 쳐서 공양을 진행을 하시도록 부탁을 드리고.


수면(睡眠)도,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떻게 다리를 뻗고 실컷 잠을 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소한(最小限)도 5시간 정도는 푹 자 주고, 그 대신 새벽에 눈 떠서 취침할 때까지 그 한 생각 한 생각을 죽비를 치는 입선(入禪) 시간이나 또 방선(放禪) 시간이나 그날 하루 무엇을 하거나 간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한 생각 한 생각을 터억 추켜들어 단속(團束)을 해서 화두(話頭)가 독로(獨露) 하도록 그렇게 알뜰히 잡드리를 해 가면,

저녁에 잘 때에 터억 누워서 잠이 탁 언제 들었는가는 모르지만 들을 때까지 그 화두를 떠억 들고서 잠이 들도록. 그러면 잠 속에도 화두가 고대로 들어져 있도록.


새벽에 목탁 소리 ‘딱 딱’ 목탁을 칠 때 눈을 딱 떠도, 떴을 때 바로 엊저녁에 그 잘 때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들려 있도록. 새로 들지 아니해도 엊저녁에 들던 화두가 고대로 터억 들려져 있도록 그렇게 하루하루를 정진을 알뜰히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몸도 건강하고, 정진을 애써서 할수록에 더욱 신심(信心)이 나고, 정말 참, 도(道) 닦아가는 그 참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 정진을 하면 공부에 바른 길은 얻지 못하고서 몸에 병(病) 먼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 처음에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말뚝 신심이 나 가지고, 공부하는 길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뭐 잠을 안 잔다, 말을 아니하고 묵언(默言)을 한다, 또 무슨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하고, 무슨 생식(生食)을 하고, 무슨 단식(斷食)을 하고, 뭐 이래 가지고 자꾸 몸뚱이 들볶는 것을 위주로 정진을 해 가게 됩니다. 이것은 바른 수행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출가하셔 가지고 6년간을 그렇게 '고행(苦行)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교진여(憍陳如) 등 오비구(五比丘)와 같이 그렇게 무서운 고행(苦行)을 하셨어. 잡숫는 것을 아주 제한해 버리고, 잠도 제한해 버리고, 그래 가지고는 그 몸뚱이 들볶는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셨어. 그래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을 해 가지고 그렇게 6년을 고행을 하셨는데, 마침내는 그 강(江)에 가서 목욕을 하시고 수자타라고 하는 마을에 처녀가 갖다가 바치는 죽을 받아 잡쉈습니다.

그 죽을 받아 잡순 것을 보고서,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절대로 뭘 먹지를 말자' 그렇게 약속을 교진여들 오비구와 같이 약속을 해 놓고는 아! 죽을 떠억 받아 잡수니까, 교진여를 비롯한 다섯 비구들이 '고따마(Gotama)가 배고픔을 참지를 못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는 결심이 무너져 가지고 그렇게 타락(墮落)을 했다.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떠나 가지고 녹야원(鹿野苑)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떠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을 것이 없고, 당신은 목욕을 하고 그 수자타가 바친 그 죽을 받아 잡수니까 그렇게 새로운 정신이 나며 기운이 나. 기운이 나며 새로운 정신이 깨끗해지니까, 그때 다시 떠억 보리수(菩提樹) 나무 밑에 가서 정좌를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정신으로 정진을 해 가지고 결국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확철대오를 해 가지고, '내가 누구를 먼저 제도(濟度)를 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맨 처음에 설법(說法)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신 결과 그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교진여들 그 다섯 비구—같이 수행을 하다가 버리고 떠났지만, '그 사람들을 위해서 먼저 제도를 해야겠다' 그래 가지고 거기를 가셨습니다.

가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을 설하셨다' 그렇게 되어 있지만, 그 사제법을 설하시기 전에 맨 먼저 하신 법문이 '중도법(中道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해서는 그것은 성스러운 수행이 아니다. 지나치게 고행을 위한 고행을 하는 것도 성스럽지 못하고, 또 지나치게 안락을 위하고 호강을 하는 그러한 생활도 그것도 올바른 수행이 아니니라. 수행은 으레히 고행(苦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편하고 지나치게 잘 먹고 지나치게 호화롭게 사는 것도 옳지를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행을 위한 고행, 쓸데없이 잠을 안 자고 밥을 안 먹고 해 가지고 육체를 들볶는, 그러한 수행도 올바르지 못하느니라"

그러한 말씀을 하셔서 그 교진여들로 하여금, 자기는 타락했다고 그래 가지고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먼저 그 말씀을 해서 그러한 오해(誤解)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당신이 깨달라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교진여들 다섯 사람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도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 누구라도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는 이 중도법은 적용이 되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에도 어리석게 해 가지고 일생 동안을 건강을 망쳐서 도를 닦지 못하게 된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34분50초~54분3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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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하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입해산사도비력(入海算沙徒費力)이요,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것은 공연히 쓸데없이 힘만 허비한 것이요.

구구미면주홍진(區區未免走紅塵)이다. 구구(區區)히 그 띠끌 속을 향해서 이리저리 치닫는 것을 면치를 못한다.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센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중생(衆生)의 근기(根機) 따라서 설하신 그 방편법(方便法), 그러한 방편법에 집착(執著)을 해 가지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방편(方便)이라 하는 것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상대에게 해당이 되는 임시적(臨時的)인 편법(便法)을 방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거나, 장소가 옮겨지거나, 또는 그 상대의 그 사람이 바뀌어지면 그것은 이미 적당한 법이 아니라 그것은 해당이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 이미 해당이 되지 아니한 것을, 그것을 끝까지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고 거기에 집착을 해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바다 속에 들어가서 모래알을 세는 거와 같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은 그 팔만사천 묘법(妙法),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말씀이 하나도 버려야 할 법은 없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한 자, 한 토가 다 소중한 법문(法門)이지만, 그 법에 뜻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 글에 집착을 하면 바로 그것이 바다 속에 가서 모래알을 세고 있는 거와 같은 것이거든.

죽을 때까지 세어도 끝이 없는 것이고, 몇억만 개, 그 천문학적 숫자에 이르도록 세고 있었던들 거기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만날 세어 봤자 거기는 모래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佛法)을 밖에서 구(求)해. 밖에서 어떤 것을 구하고, 밖에서 무엇을 얻고, 밖에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그러한 그 수행을 지양(止揚)을 하고, 자기 안에서 쟁여운출가진보(爭如運出家珍寶)여. 자기 안에 있는 보배를 끌어내는 것이여. 그놈을 끌어내 가지고 그놈을 활용(活用)을 해야 하거든.

그러면은 그것이 고목생화별시춘(枯木生花別是春)이여, 고목(枯木)에서, 다 말라서 죽은 그 고목에서 꽃이 피어. 그래 가지고 새 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이 몸뚱이는 무량겁(無量劫)을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다 금생에 와 가지고, 벌써 금생에 와서 십 년 · 이십 년 또 삼십 세 · 사십 세 · 오십 · 육십 · 칠십 세, 이렇게 해 가지고 벌써 반평생(半平生)을 살고, 얼마 안 가면은 이승을 하직(下直)할 나이에 이르렀다 그 말이여.

그러니 나무에다가 비유를 한다면은 이미 이 고목, 고목이 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데, 이 고목이 되었지만 정말 이 얼마 안 가면 썩어 문드러질 이 고목 속에 영원히 쓰고도 남을 보배가 들어 있어. 그 보배를 찾는 것이 바로 '이 뭣고?'거든.


'이 뭣고?'


정말 뒤로 미룰 수 없고, 정말 일분일초도 미룰 수가 없는 이 정진(精進)이거든.

한 생각 탁! 터지면은 바로 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니, 연세가 많다고 해서 그럭저럭 지내실 일이 아니고, 또 아직은 젊다고 해서 뒤로 미룰 일도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남녀(男女)와 노소(老少)가 없어. 마지막 숨이 딱! 떨어진 그 찰나(刹那)에도 이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 깨달라도 그것도 늦은 것이 아니고, 마지막 죽을 때 정말 이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바로 깨닫고 죽었다 하면, 이 숨을 거뒀다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랐기 때문에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여.

금방 새 몸을 받아서 또 태어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이 극락(極樂)에 가기를 원한다면 극락, 천당(天堂)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당, 바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이 생(生)에 못다한 정진을 더 철저히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쓸 수 있게 까지 되어 가지고 한량없는 인연(因緣) 있는 중생을 제도(濟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부(房付)를 들이지 아니한 스님네나 방부를 들이지 아니한 신도님네들도, 각기 자기가 있는 처소(處所)에서 꼭 방부 들인 거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알뜰히 그리고 경건(敬虔)하게 생활을 하시면서 분(分) 따라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백일기도에 동참(同參)하신 여러 신남신녀들도 바로 이 결제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이 삼독심(三毒心)을 삼가하고, 그 세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면 탐심도 나고 진심도 나고 또 어리석은 생각도 나겠지만,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탁! 발판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화두를 챙기고 해서, 방부를 들인 분들 못지않게 그 가정에서, 그 생활 속에서 정진(精進)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이 궁극(窮極)에 가서는 이 참선(參禪)은 생활, 생활 속에서 이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활을 여의고 저 깊은 산중에 선방(禪房)에서만 그 죽비를 치고 참선을 해야만 그것이 참선이고, 세속에 나오면 정진이 안 된다면 그건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실 때, 백일기도에 그 기도도 정말 성취가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가운데에 이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여러 신남신녀들께서는 여러 가지 종류에 소원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분의 그 학교 합격 문제라든지, 취직 문제라든지, 또는 결혼 문제라든지, 사업에 문제라든지, 또는 그 관공서나 회사에 모다 여러 가지 문제들, 사회 국가 문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소원이 있으실 것입니다마는, 그러한 소원도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에 그 참마음 찾는 수행이 밑받침이 되어야, 그래야 그러한 소원들도 결국은 성취가 되고 우리의 목적도 달성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앞으로 날씨가 차츰 추워지게 됩니다. 모다 몸조심하시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병도 마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모든 병(病)에 원인(原因)이 되는 것입니다.

당뇨병도 되게 속을 썩은 뒤에 흔히 터지고, 모든 무서운 그 암 병도 너무너무 속을 썩고 신경을 쓰므로 해서 그래서 그런 무서운 암 병도 생기게 되고, 혈압이 올라가는 중풍이라든지 온갖 심장병이라든지 모든 병이, 심지어는 눈병, 또 기관지 병, 모든 사지백체와 오장육부에 갖은 병이 그 마음이 중심을 잃고 속을 끓인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話頭)를 챙겨서 자기(自己)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심을 내서 철저히 정진을 해 보신 분이면 다 경험을 하실 수 있는 일이니만치, 부디 이 공부, 한 생각 잘 챙겨서 몸이 건강하고, 가정이 화평(和平)하고, 여러분의 모든 크고 작은 원(願)을 성취하고 나아가서는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할 수 있다면, 이 사업(事業)보다도 더 급하고도 중요한 사업은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내가 여쭙고 싶은 말씀,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 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54분45초~1시간1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법왕권실영쌍행~ / 부처님의 법은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 물의 본성은 바로 습성(濕性). 시방세계(十方世界) 어느 곳에 어떠한 형태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그 실상(實相), 진리(眞理)의 체(體)는 변함이 없는 것 / 참선은 아무 재미도 없고 얻은 바가 없다.


화두순숙 의단독로 성성적적 /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챙겨 / 알 수 없는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 의관(疑觀). 의심(疑心)의 관(觀) / (게송)오욕해자갈~ / 원음(圓音) 설법(說法).


우리는 사형언도(死刑言渡)를 받은 죄수(罪囚) /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라 / 발우공양(鉢盂供養)은 천천히 잘 저작(咀嚼)을 해서 공양하셔야 / 수면은 최소한도 5시간 정도는 푹 자야 / 부처님께서 오비구에게 설하신 '중도법(中道法)' /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게송)입해산사도비력~ / 이 공부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 궁극(窮極)에 가서는 생활 속에서 참선이 되어야 그것이 참 올바른 정진(精進) / 마음이 중심(中心)을 잃고 감정에 흐르면, 그것이 모든 병(病)의 원인(原因). 모든 순경계(順境界)와 역경계(逆境界)를 당해서 화두를 챙겨서 자기 근본(根本)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병(病)을 미연에 방지(防止)할 수가 있다.



부처님께서 출현(出現)을 하셔 가지고 중생(衆生)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실법(實法)만을 가지고는, 실상법(實相法), 실법만 가지고서는 중생을 교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권법(權法), 방편법(方便法)을, 아주 좋은 방편법을 잘 쓰면서 그래 가지고 실법(實法)을 나투어야 그래야 중생 교화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철 동안 정진(精進)을 해 가는데, 언제나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 부처님의 법은 세법(世法)을, 세속(世俗)에 차별법(差別法)을 여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日常生活)을 여의고 참선(參禪)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생사법(生死法)을 여의고 진리법(眞理法)을 따로 찾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증득(證得)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진리(眞理)가—진리 그 자체(自體)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런 것이지만, 그것이 용(用)으로써 발(發)한 것이 바로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요, 일월성진(日月星辰)이요, 두두물물(頭頭物物)인 것입니다.

볼라야 볼 수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 없는 그러한 신령스러운 묘체(妙體)가, 그것이 나타나면 바로 태양이요, 달이요, 그 무수한 별이요, 산이요 바다요, 나무요 돌이요, 일체 중생이요, 모든 짐승이며 그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부 진리(眞理)의 나타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진리가 나타난 그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 그림자 있는 곳에 그 반드시 실상(實相)이 있는 것입니다.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또 화두(話頭)를 들고, 번뇌(煩惱)가 일어나면 나는 화두(話頭)만을 들거든. 화두만을 들어요. 들면은 망상은 저절로 자최가 없어지는 것이거든. 화두를 들어도 그 망상이 안 없어지면 또 화두를 드는 것뿐이지, 망상이 안 없어진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망상 물리치는 묘방(妙方)은 일어나는 망상 그냥 고대로 놔 버리고, 화두만을 떠억 챙겨. 숨을 터억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그것뿐인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했을 때 그 여운(餘韻)으로 남은 그 알 수 없는 그 의심, 그 의심(疑心)을 관(觀)하는 것이여. 그래서 그것을 '의관(疑觀)'이라 그래요. 의심(疑心)의 관(觀)이다. 알 수 없어.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잘 먹고 편안하고 그런 것도 수행에는 삼가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잠을 안 자고, 지나치게 음식을 안 먹고 그래 가지고 몸뚱이를 들볶는 그러한 고행도 지양(止揚)되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수행은 지혜롭게 해야 한다. 지혜롭지 못하면, 아무리 그 뜻이 좋다 하더라도 지혜롭지 못하면은 본의 아니게 장애(障礙)가 일어나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데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아까 처음에, '불법(佛法)은 세간(世間) 속에, 세속을 여의지 아니하고 이 불법이 있다'고 한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정말 이 생활 속에서 정진이 되어 가도록 잡드리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활발(活潑)하게 살아 있는 정진이라야 정말 이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진 속에서 참으로 깨달라야 그 깨달음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조용한 데서는 되고, 조끔 시끄럽고 복잡하면 안 되아 가지고 진심(瞋心)을 내고 이래 해 가지고는, 그러한 정진은 그건 썩 훌륭한 정진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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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