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400/(301~325)2021. 4. 14. 08:11

((No.325))—1987년 동안거 해제 법회(87.02.12) (37분)

 

 

(1) 약 19분.

 

(2) 약 18분.

 


(1)------------------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동념무비생사근(動念無非生死根)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마음 일으키면,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면 무슨 생각이건 다 윤회(輪廻)의 업(業)에 속하고.
착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이나, 과거 · 현재 · 미래 · 선악(善惡) · 시비(是非) 일체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모두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근본이 되고.
동념(動念)이 무비생사근(無非生死根)이다. 생각이 동(動)하면 다 생사(生死)의 근원이 아닌 것이 없더라.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태허(太虛), 저 허공과 같이, 저 허공과 더불어 향배(向背)가 없고자 하거든—향배는 향(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고, 배(背)는 서로 등지는 것인데, 허공과 더불어 향하고 등지고 할 것이 없고자 하면,
일체처(一切處)에 걸림이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덩어리 쇠 뭉텅이를 통채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한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하고 종일토록 생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뭉텅이를 꿀떡 삼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여.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 일체시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병인년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解制)를 맞이했습니다. 방금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산승(山僧)이 더 거기에 덧붙여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여기 용화선원 선방에 스님네나 보살님네, 그리고 또 용주사 중앙선원, 또 저기 태화산 봉곡사 태화선원, 모다 인근에 모다 선원에서 온 비구니 선객들, 여기에 모두가 다 참석을 했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하면 다시 또 걸망을 지고 또 어느 선방 또 어느 회상(會上), 어느 선지식(善知識), 어느 도반(道伴)을 찾아서 또 행각(行脚)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행각을 하는 그 걸음걸음,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그 거북한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겠느냐?
고인(古人)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상자(喪者)처럼, 깨닫기 전에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깨달은 뒤에 수행도 또 부모상을 당한 초상(初喪) 그 상인(喪人)처럼, 상제(喪制)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라' 이런 말씀도 있는데, 지금 '쇠 뭉텅이, 쇳덩어리를 삼킨 사람처럼 하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잡드리해 나가지 않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쇠 뭉텅이를 어쩌다 꿀떡 삼켜 놨으니 무엇이 딴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맛 거북해서, 앉으나 서나 거북하고 불안하고 하듯이,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언제 전후좌우(前後左右)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고, 딴생각을 잠시도 할 겨를이 없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 그 의단(疑團)만을 참구(參究)해 나가는 그러한 자세,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일분일초를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가라 이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 나가다가 또 얼마 안 지내면은 또 산철 결제를 하게 되고 그런데, 결제(結制) 중에는 모두 여러 도반들이 모여서 규칙적으로 시간 생활을 하니까 개인적인 일체 자유행동이 허락이 되지 아니하므로 정진(精進)을 열심히 할 수밖에는 없으나, 해제를 하면 각자 자유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이 게송, 고인(古人)의 게송 한마디를 읊어드렸습니다.


'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에 정진을 해서 그 깨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한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 수행력을 갖지 않고서는 '입(入)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 하는 게 우리의 현실, 꼭 이 생사(生死)를 갖다가 이 육체가 죽으면, 이 육체에다가 기준을 두어가지고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새로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을 생(生)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얘기하지만.
더 정밀하게 이 생사를 논(論)하자면,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생(生)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 생각도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멸(生滅)이 있으니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사(生死)인데.
이 몸뚱이 죽을 때 숨 딱! 끊어진 것을 '입적(入寂)을 했다' 그러고, 그 바로 그때를 갖다가 임종(臨終)이라 그러는데, 우리가 이 몸뚱이는 아직 죽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생각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생각에 있어서의 기멸(起滅), 염기염멸(念起念滅)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 입태(入胎) · 출태(出胎)를 어떻게 볼 것이냐?

우리가 눈으로 어떠한 색상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 이근(耳根)으로 그 성진(聲塵), 어떠한 밖에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아, 저게 무슨 소리다' 이렇게 해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한 생각이 육근을 통해서, 육근 중에 어느 한 기관을 통해서 딱! 한 생각 일어나면[念起] 그것이 새로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 가지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염멸(念滅)이고, 그것이 죽음인데.

그 어떠한 경우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려고 한—탁! 대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해 가지고 거기에 어떠한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경과해 가지고 결국은 구체적인 생각이 동(動)하고, 또 생각이 동한 다음에는 그것이 육체적으로, 그 육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겠는데.

그 미세한 아주 정미(精微)로운 그 생각이,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 가지고 육식(六識)이 날 그 쫌(짬)이 바로 입태(入胎)고, 그것이 그 생각이 또 없어지면 인자 구체적으로 발표가 되면 그것이 인자 출태(出胎)고.
태(胎)에 나와 가지고 한평생을 사는 것은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했다가 그것이 꺼지게 되면은 다시 인자 또 입적(入寂)을 해 가지고 입태 · 출태 이렇게 되는데.

그 우리의 육체가 한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몸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가 우리 '중음신(中陰身)이라', 또는 인자 '영혼(靈魂)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다가,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서 죽자마자 태어나기도 하고, 49재를 지나 가지고 또 다른 데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백일 동안 중음신으로 있다가 또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소상(小祥) · 대상(大祥)을 지나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50년 내지 백 년까지도 새로운 몸을 받아나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자기 집이나 일가 친척으로 이렇게 전전해 가면서 이 허공 속에 왕래(往來)하면서 이렇게 인자 중음신으로 그렇게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다니다가 인연 따라서 새로운 그 숙주(宿主), 자기가 잉태할 그 모태를 찾아 가지고 거기 인자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태 · 출태라고 하는 것은, 그때에 입태 · 출태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정신이, 이를테면은 수행한, 수행해서 깨달은 그 경지가 고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있는데, 그 출태할 그 찰나에 미(迷)해 버리고, 또 출태할 때까지도 안 미(迷)했던 사람이... 아, 입태할 때까지도 미(迷)하지 않은 사람이 출태하다가 탁 매(昧)해 버리고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앉아 있는 동안에는 다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는데, 화두가 그렇게 고대로 의단(疑團)이 있는데, 일어서다가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또 뭔 소리가, 큰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면 그 소리 때문에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내동 여태까지 정진을 잘하다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어떠한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새로운 육진(六塵)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해 오면 그 육식(六識)이 일어나면서 그 화두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다.(처음~18분29초)




(2)------------------

이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그런 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그래 가지고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그래 가지고 더이상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이상 그 의단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은 통 밑구녘 빠지듯이 그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 가지고 결국은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는데.

그 새로운 어떠한 경지, 사건이 일어날 때 흔히 우리는 화두(話頭)를 놓쳐버리는데, 그렇지 않게 되고, 앉았을 때 들었던 화두가 서도 상관이 없고, 무엇을 눈으로 보아도 그 화두가 달아나지 않고, 무엇을 들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 생각이 걸음걸음이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단속을 해 나간다면,
이 몸뚱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 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한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내가 그러한 경지, 수없이 많이 죽었다 태어났다 했겠지만 전생사(前生事)는 그저 잊어버리고 우리는 기억을 해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마는, 정말 그 마지막 숨 끊어질라고 할 때의 그 고통은 그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이라든지 몸부림하는 것을 보면 짐작할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임종을, 마지막 임종을 잘하기 위해서, 정말 그때 참 잘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을 공부를 한다'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스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종할 때에 그 수망각란(手忙脚亂)하고, 그 혼비백산(魂飛魄散)해 가지고 정신을 채리지를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되면, 그건 물어볼 것도 없이 입태(入胎)에도 매(昧)하게 되고 입태에 매한 사람이 출태(出胎)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래서 옛날부터 다 훌륭한 그 수행인들도 임종할 때에 선지식(善知識)의 보살핌 속에서 숨을 거두기를 바래고, 또 선지식은 바래지 못하더라도 참 그 수행력(修行力) 있는 도반이 옆에서 임종을 지켜주고, 또 정신을 차리도록 일깨워 줄 수 있는 그러한 도반 만나기를 그렇게 원(願)을 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무량겁을 그런 미몽(迷夢) 속에서 자기 본성(本性)을 미(迷)해 버린 상태에서 윤회를 거듭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해제를 해 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시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한 자세, 쇠 뭉텅이를 꿀떡 삼킨 그러한 마음가짐, 그러한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치 해제 날에 49재 천도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몇 분이 계십니다마는, 그 영가가 일평생 동안 이 세상에 태어나서 참 공부도 잘하고, 또 좋은 직장도 가지고, 한평생 악한 일 하지 아니하고, 가족을 위해서 또 자기가 소속한 회사나 직장을 위해서,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은 사바(娑婆)의 인연이 다해서 이승을 하직한 영가들입니다.
영가는 다행히 이 용화선원에, 법보선원에 인연이 있어서 여기에서 이 해제 날, 정진(精進)을 하시던 여러 선원(禪院)에 참 청정한 수행한 스님네들의 그 해제(解制) 법회(法會)에 49재 천도식(薦度式)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필시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으리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법회에 그 영가의 몸으로 이 49재에 참석을 했다 할지라도 살아 있는 몸으로 참가하나 조끔도 다름이 없고, 오히려 그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업(業)의 몸뚱이를 벗어버린, 참 걸림이 없는 그 영혼으로 참석을 했음으로 해서, 이 법문(法門)을 몸을 가진 사람보다도 훨씬 더 정확하게 참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가(靈駕)는 자기가 이 생에 못다 한 한(恨)도 있을 것이고, 또 부모나 처자권속에 대한 미련도 응당 있을 터이나, 그러한 생각—자기가 못다 한 한(恨) 또는 부모자식이나 가족, 유족(遺族)에 대한 미련 이런 것은 현재 영가의 몸으로서는 추호(秋毫)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의 미결(未決)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자권속이 영가가 염려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니 만큼.

깨끗하게 다—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49재 법요식(法要式)을 받게 됨으로 해서 다 놔버리고,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이 법보단(法寶壇)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날 때까지 안주(安住)를 하시다가, 그동안에 많은 축원과 많은 법문을 듣고서 정말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청정한 몸으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유족들은 정말 그 영가가 생존시에 그분 한 분을 의지해서 다 처자권속이 다 생활을 영위해 나오다가, 그 가장(家長)을 잃어버린 슬픔을 무엇에다 비유할 수가 없겠지만, 숙세에 지은 인연이 그렇게 밖에 되지 아니한 것이라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고 누구를 한탄할 것도 없고, 슬퍼한다고 해도 그것이 영가를 위해서 아무 이익이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 이익이 없고, 또 자녀를 위해서도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그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든지 또는 직장에 대한 일이라든지 자녀를 키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반드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잘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영가도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유족이 너무 슬픔에 잠겨 가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러면 영가가 어떻게 그것을 보고 차마 떠날 수가 있으며, 또 주부가 그렇게 되면은 자기에 따르는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 잃고 엄마까지 그런다면은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불법을 믿고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에 더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 불법을 믿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더욱 철저하게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참 우리를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고해(苦海) 중생을 위해서 감로수(甘露水)요, 희망이요, 등불로써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영원한 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을—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또 인간적인 고통, 이런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만들고 더욱 우리를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인(修行人)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부가 처음부터서 수월하게 화두 탄 날부터서 점점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얼마 안 가면 툭 터진, 그러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다 진묵겁(塵墨劫) 전에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한, 그래 가지고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구족하신 그러한 부처님이시지만, 출가해 가지고 설산(雪山)에 들어가서 6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을 겪으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새벽 샛별을 보시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꼭 고행(苦行)을 해야만, 고행 자체, 고행을 위한 고행은 아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면 많은 장애를 우리는 만나게 되고 많은 고통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통과 장애를 우리가 슬기롭게, 인내심 있게 극복을 하고 해결해 나감으로 해서 우리는 더욱 신심이 굳건해지고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활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수행에 도(道)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잘 이해한다면 우리는 도처에 스승이 있고, 도처에 불보살, 살아계신 불보살(佛菩薩)이 계시는 것을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를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나무~아미타불~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한 가지를 더 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여. 그것은,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것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말이여.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이 한 개의 화두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소소영령(昭昭靈靈)하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이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어떻게 눈을 번하니 뜨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 한 게송(偈頌)은 우리 수행인에게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간절한 게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삼동안거 해제와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게송으로써 말을 맺고자 합니다. (18분30초~36분44초) (끝)





[법문 내용]

(게송)거심진속윤회업~ /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해야 /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하기 쉽다 / '한 생각 속에 구백(九百)의 생사(生死)가 있다'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기가 참 어렵다 /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해야 /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굳세게 만들고 더욱 우리를 훌륭하게 만드는 좋은 채찍이요, 계기요, 관문(關門) / (게송)기래긱반냉첨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하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덩어리 쇠 뭉텅이를 통채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한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하고 종일토록 생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뭉텅이를 꿀떡 삼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한 것이여.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뭣고?'요, 서서도 '이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 일체시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인 모든 동작과 정신적인 모든 작용 가운데에 항상 쇠 뭉텅이를 삼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에 정진을 해서 그 깨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한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 수행력을 갖지 않고서는 '입(入)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이 몸뚱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 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한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한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하도록, 의단이 독로하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에 알뜰히 정진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해제를 해 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시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한 자세, 쇠 뭉텅이를 꿀떡 삼킨 그러한 마음가짐, 그러한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가(靈駕)는 자기가 이 생에 못다 한 한(恨)도 있을 것이고, 또 부모나 처자권속에 대한 미련도 응당 있을 터이나, 그러한 생각—자기가 못다 한 한(恨) 또는 부모자식이나 가족, 유족(遺族)에 대한 미련 이런 것은 현재 영가의 몸으로서는 추호(秋毫)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미련을 가졌다고 해서 자기의 미결(未決)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또 처자권속이 영가가 염려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도 아니니 만큼.

깨끗하게 다—이 법문을 들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49재 법요식(法要式)을 받게 됨으로 해서 다 놔버리고, 허공과 같은 마음으로 이 법보단(法寶壇)에서 새로운 몸을 받아날 때까지 안주(安住)를 하시다가, 그동안에 많은 축원과 많은 법문을 듣고서 정말 무량겁 업(業)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청정한 몸으로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또는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서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를 바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유족은 참으로 영가를 위하고 또 자녀들을 위한다면 그러한 슬픔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믿는, 이 정법(正法)을 믿는 신심(信心)을 더욱 돈독히 해서 법문을 듣고 참선을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집안일이라든지 또는 직장에 대한 일이라든지 자녀를 키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반드시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어서 잘살 수 있게 될 것이고, 영가도 모든 미련을 놓아버리고 좋은 곳에 태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