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76~100)2021. 1. 10. 20:13

((No.100))—1979년 동안거 해제(79.02.11) (71분)



(1/4) 약 20분. (2/4) 약 18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상월만공산(霜月滿空山)헌디  고안여천비(孤雁唳天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하사왕비력(何事枉費力)고  월하대강류(月下大江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서리 친 달이 공산(空山)에 가득한디, 고안(孤雁)이 여천비(唳天飛)라. 외로운 기러기가 하늘에 울며 날아가는구나.

무슨 일로 공연히 힘을 허비했던가, 달 아래 큰 강이 흐르는구나.


오늘은 무오년 삼동결제(三冬結制)에 구순안거(九旬安居) 끝나는 날입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5일에 시작한 백일기도가 오늘 회향을 하는 날입니다.

그동안 결제 대중스님네와 또 결제에 입방(入房)한 보살님네들이 여러 가지 불편한 가운데에도 불구하시고 그런 어려운 부족한 여건을 극복하면서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오늘 해제를 맞이했고 백일기도를 원만하게 회향을 하게 된 것에 대해서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하고, 이 백일기도에 입재(入齋)하신 법보제자 여러분은 석 달 동안 결제한 스님네와 보살님네가 사고 없이 정진 잘 마치시면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백일기도 기도가 원만히 성취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백일기도를 목탁을 치면서 사분정근(四分精勤)을 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목탁을 몇 개를 부서지도록 때리면서 염불을 한 것과 목탁을 치지 아니하지만, 죽비(竹篦)를 치고 묵묵히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최상승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하시는 것과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정진을 잘하시면서 아침 예불(禮佛)할 때에 백일기도 동참재자(同參齋者)의 축원(祝願)을 엄숙히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축원 한마디가 목탁을 수만 번 뚜드리면서 염불한 공덕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분의 기도 성취는 훌륭하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은 견성(見性)하는, 진리를 깨닫는 데에 들어가서 대단히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경전에는 씌여 있지 아니한 오직 깨달으신 분만이 말 아닌 말로써 이를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극진지경(極盡之境)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한 법문을 한 시간여에 걸쳐서 설법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수승한 근기(根機)를 갖으신 분은 충분히 이해하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오늘 설법하신 조실 스님 법문은 그 가운데에 공안(公案)에 관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이 공견이라 하는 것은 우리 불교뿐만이 아니라 도교나 그 밖에 유교에서도 이 공리(空理), 공에 대한 이치는 다 설하고 있고, 그 공 공리에 도달한 것으로써 도에 이른 것처럼 그렇게 모다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문(禪門)에도 체중현(體中玄) 도리라든지, 이 여래선(如來禪) 도리라든지, 공견이라든지, 이것이 모다 말의 표현은 다르지마는, 그것이 도(道)에 들어가는 참 견성(見性)하는데 일단은 그러한 경지(境地)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흔히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그러한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르면 '옳다! 이것이 바로 내가 깨달랐구나. 이 경계가 바로 거기로구나!' 이리 생각하고 그러한 공견(空見), 체중현(體中玄) 도리에 멈추어서 득소위족(得少爲足), 그 조그마한 조끔 얻은 것을 갖다가 만족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주저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는 제불(諸佛)이 출세(出世)하셔도 그 사람은 구제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견(空見)에 처해 가지고 그러한 공견으로 일체 공안을 보면은 그 나름대로 공안이 다 막힘이 없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가 정말 믿을 수 있는 훌륭한 선지식(善知識)이 없을 때에는 그 사람은 아주 못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설사 우리가 공부하다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정말 자기가 목숨 바쳐 믿을 수 있는 그러한 바른 선지식이 계실 때에는 그 선지식에 가서 탁마(琢磨)를 해 가지고 한마디에 그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바로 그 선지식의 말을 믿을 수가 있지마는, 그런 믿는 선지식이 없을 때에는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고 차라리 참선을 아니하고 경을 읽는다든지, 염불을 하면서 일생을 마친 것보다도 더 못한 결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그러한 공리(空理)에 체(滯)해 가지고 그것이 자기가 구경(究竟)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하고, 일체 경이라든지 공안을 그 경지로써 보고 그러한 입장에서 법을 설하고, 그런 입장에서 후래(後來) 후인(後人)을 지도하기 때문에 자기와 소견이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다 인가(印可)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예를 들자면은 저 호남 지방에서 서울을 올 때에 수원이나 그렇지 아니하면 천안이나 그런 데에 와 가지고 서울에 다 온 것처럼 생각하고 말키 사람들에게 '여기가 서울이라고, 더이상 갈 필요가 없다' 여기가 바로 서울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참 서울'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인물이 좋고, 구변(口辯)이 좋고, 학식이 많고, 그럴 때에 그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몰려들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삿된 사람으로 인해서 수천만 명의 삿된 종자를 낳게 되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해제일을 맞이해서 어째서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그 간곡(懇曲)하고 고준(高峻)한 법문을 우리는 듣게 되었느냐?


해제(解制)라고 하는 것은 석 달 동안 특별 수련 기간이 끝나는 날이지마는, 원래 결제(結制) 해제(解制)는 인도에서 우기(雨期), 비가 많이 쏟아져서 장마가 계속될 때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큰 정사(精舍), 선원(禪院)에 모여 가지고 그 비를 피하면서 단체적으로 수행을 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그 장마철이 끝나고 그래서 그 수련 안거(安居) 기간이 끝나면 그때부터서 각 지방으로 모다 흩어져서 인연 따라서 모다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이 아세아(亞細亞) 동북 지방은 겨울이 추워서 여름 석 달과 겨울 석 달씩을 그 결제를 해 오고 있는데, 이제는 그 무섭던 추위도 다 가고 입춘이 지나서 이제 완연히 봄기운이 맴돌아 왔습니다.

해제를 하고는 모다 다시 걸망을 지고 다시 선지식을 찾기도 하고, 도반을 찾기도 해서 모다 흩어지는 것이 준례로 되어있습니다마는, 해제했다고 해서 행여나 결제 동안에 그 단속을 하던 그 마음이 풀어질까 봐 일부러 이런 고준한 중요한 법문을 우리는 추려서 듣게 된 것입니다.


그 법문 가운데에 모다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니 모다 그런 어려운 말씀들이 나와서 잘 이해가 안 되실 분 계실 줄 생각합니다마는, '쥐가 괴밥을 먹었다. 또 밥그릇이 이미 깨졌다' 이런 것도 전부 이 공안에 해당된 말씀입니다.

여러 신도님들 가운데에 설사 이러한 뜻이 무슨 뜻인가 아지 못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도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또는 뿐만 아니라 억지로 그것을 무슨 뜻인가 알려고 하실 것이 없습니다.

다못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 '이뭣고?'를 하신 분은 '이뭣고?' '판치생모'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해서 열심히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정진을 할 따름인 것입니다.


고인(古人)의 그러한 공안 · 화두에 대해서 이리저리 따져서 알아보려고 하고 이런 것은 우리의 공부를 지연시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조실 스님께서는 그러한 공안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을까? 이것은 이러한 공안을 우리 앞에 제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내서 자기의 본참화두에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인 것입니다.


언제나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공안이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나 있습니다. 문헌에 오른 것만 하더라도. 그 많은 공안에 대해서 우리는 어록(語錄)을 본다든지 어떤 큰스님네 법문을 들을 때에 가끔 그런 공안을 대중을 향해서 물으신 경우를 만납니다.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투철히 타파(打破)하지 못한 경우에는 결정코 다른 공안에 대해서 손을 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닫지 못한 분상에 이론적으로 그 공안을 이리 뛰적거리고, 저리 더듬어서 그럴싸한 답을 내려고 해 본댔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일호(一毫) 이익이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어떤 공안에 대해서 그 대중을 향해서 '한마디 일르라'고 그렇게 그 고함을 치신다 하더라도 그러실수록에 우리는 대분심(大憤心)과 대의심(大疑心)으로 자기의 본참공안에 철저해야만 되는 것입니다.(처음~20분23초)





(2/4)----------------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꽉 맥힌 상태에서 자기의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라고 했는고?' 또는 '이뭣고?' 다못 그것뿐인 것입니다. 앞도 없고, 뒷도 없고 그동안에 자기가 경을 읽었다던지, 법문을 들었다던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라도 여기에 동원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못 '이뭣고?' 뿐인 것입니다.

다른 화두와 비교하려 하지도 말고, 다른 데서 들은 말씀을 여기다 끌어대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려 하지도 말고 다못 바보처럼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뭣고?'

슬플 때나, 외로울 때나, 괴로울 때나, 어데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다못 '이뭣고?'인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홑으로 홑으로 간절히 해 나감으로써만이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해 가지고 홀연히 통 밑구녁 빠진 경계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간장독에다가 간장을 담아논 것을 그걸 갖다가 매갱이, 쇠 매갱이로 쳐서 그 항아리가 쩍 갈라지면서 항아리 속에 있는 장(醬)이 우르르르 한목 쏟아지듯이, 우리가 한 생각 한 생각 단속(團束)해서 쌓였던 그 의심이 점점 커져 가지고, 그 의심덩어리가 우리의 가슴속과 이 허공계에 가뜩차서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풍선이 터지듯이 대의단(大疑團)이 타파(打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기의 본참화두 하나에 충실함으로써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천칠백 공안은 따져서 알려고 하지 안 해도 한눈에 환해져 버린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것이어서 결단코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 갖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여. 중생심만 더욱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우리에 이르러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경(經)을 보고 연구하고 어록(語錄)을 보고 이리저리 따져 봤자 중생심을 조장하고 시간을 낭비한 것뿐인 것입니다.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슬픈 생각도 중생(衆生)의 하나의 감정이요, 기쁜 생각도 중생심에서 일어나는 한 생각이요, 괴로운 생각도 역시 하나의 중생의 감정입니다. 그러한 슬프고 · 괴롭고 · 외롭고 · 쓸쓸하고 · 썽내고 하는 그러한 모든 중생심이 전부가 다 '한 생각'도 등한히 방치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고비인 것입니다. 중요한 계기(契機)인 것입니다.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슬프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기분이 나쁘다고 화두를 놔버리고, 몸이 괴롭다고 화두를 놔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화두를 들 때가 과연 언제인 것입니까?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습니다. 무슨 생각이 일어나던지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수없는 생각들 그것이 바로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중생(衆生)이 무변(無邊)이요, 번뇌무진(煩惱無盡)입니다. 그러한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동안에는 중생이 다할 날이 없는데, 중생계를 다할려면은 번뇌가 다해야 합니다. 그 번뇌는 다할 길이 없습니다.


다할 길이 없는 그 번뇌(煩惱)가 그러면 나쁜 것이냐?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그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놓치지 아니하고 잘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보리과(菩提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해제를 맞이해서, 또 백일기도 회향을 맞이해서 행여나 그럭저럭 지내실까 봐 아주 고준한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듣고 아울러서 당부에 말씀을 전해 드린 것입니다.



앞으로 춥도 더웁지도 않는 아주 화창한 봄 날씨가 돌아옵니다. 묵었던 모든 업장(業障)과 재앙(災殃)은 백일기도 회향, 오늘 해제일을 기해서 봄눈 녹듯이—골짝에 모다 쌓였던 봄눈이 다 녹아가고 있습니다. 봄눈이 녹음과 따라서 우리의 업장(業障)도 따라서 다 소멸(消滅)이 될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리고 새봄을 맞이해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우리의 모든 소망(所望)이 그렇게 돋아나고 그 새싹에서 또 꽃과 잎이 피고, 거기에 좋은 결실이 맺어질 것을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축원(祝願)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餘談)입니다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서 죽음을, 죽는 날을 이미 받아 가지고 나온다' 이러한 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몸뚱이는 물질,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정밀한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쓰다가 보면은 고장이 나게 됩니다.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고, 고장이 나면 또 수리해서 쓰다가 쓰다가 아주 고장이 나버리면 고칠 수가 없게 될 때 그 기계는 완전히 폐물이 되는 것입니다마는.

사람의 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함부로 쓰면은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도 쉽게 고장이 나듯이, 사람의 몸도 지혜롭게 관리를 하지 아니하면 고장이 자주 나게 되고, 자주 고장이 나게 되면 그 몸은 결국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몸을 어리석게 관리해. 어리석은 사람은 관리는 어리석게 하면서, 애착은 매우 애착은 가지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한두 번, '첫째, 몸을 잘 관리를 하려면 음식물을 조심을 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음식에 있어서는 요새 그 흰쌀밥 먹고 또 고기를 많이 먹고 또 백설탕을 많이 먹고 또 화학조미료 같은 걸 많이 먹고 이래서 또 우유나 계란 같은 걸 많이 먹고 해서, 옛날에는 없었던 당뇨병이나 또는 고혈압 · 중풍 · 동맥경화증 또 간경화증 또 각종 암, 모다 이런 병들이 점점 수효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어째서 이 근자에 그러한 환자들이 불어나냐 하면은 다른 게 아니라 옛날에 우리는 현미(玄米)밥을 먹었습니다. 50년 내지 백 년 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현미밥에다 잡곡밥을 주로 많이 먹었어요. 그때는 이러한 무서운 병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 한 30년 전만 해도 암이란 소리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근자에는 아는 사람, 이웃 사람, 신문, 많은 사람들이 이 암으로 인해서 많이 죽어가고 있고, 동맥경화증 그래서 고혈압, 중풍 또 당뇨병, 당뇨병이 어린애까지라도 이 당뇨병에 걸린 환자가 날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흰쌀밥—잡곡밥을 싫어하고 흰쌀밥만을 먹고 또 현미밥, 쌀이 6분도 · 7분도 · 9분도 이리 있는데, 9분도는 여러 분이 잡숫고 있는 하얀 쌀이 그것이 9분도로써 아주 몸에 해로운 것입니다. 최소한도 7분도, 쌀이 좀 누루스름한 그러한 쌀. 아조 그 등겨 껍데기만 베껴 버린 그 현미가 제일 좋지마는 시중에서 사기가 어렵고, 그러나 그것도 여러분이 구할려고만 하시면 구할 수가 있습니다.

현미밥을 잡숫고, 될 수 있으면 고기를 적게 잡숫고 채식을 많이 하시고 잡곡, 보리쌀이나 율무쌀이나 또는 좁쌀 · 수수 이런 잡곡을 넣어서 또 콩 넣어서 잡숫도록 하시고.


참선 법문을 들으러 왔는데 먹는 얘기만 한다고 혹 그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우리가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체가 건강하지 않고서는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이 자연식(自然食)에 대해서 말씀을 하냐 하면은 우리 참선이 우리의 본래, 본래(本來) 갖추어 있는 우리의 본성(本性)을 찾는 정신적인 수행이라면은 자연식은 우리가 본래 우리 조상들이 먹어 내려온 우리의 본래의 식, 자연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서 점점 사람들이 각박해지고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자연 보호를 해서 우리의 환경을 아름답게 하고, 자연식을 해서 우리의 육체를 현대 문명병으로부터서 보호를 하고, 참선을 해서 우리의 본성을 찾는 것은 비록 형태는 다르지마는 근본이념은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참선을 잘하려면은 자연식을 해야 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20분24초~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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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은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속을 되게 상하고 화를 끓이면 반드시 음식이 소화가 안되게 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온갖 병이 육체로 표현이 됩니다. 심장병이 생긴다던지, 위장병이 생긴다던지, 간장병이 생긴다던지, 신경성 두통이 생긴다던지, 갖은 병이 꼭 우리의 마음에서 원인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법문을 열심히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해야만 앞으로 우리의 육체에 건강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의학이 이제부터 그러한 점에 대해서 눈뜨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병은 육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육체에 치료만 해 가지고 병을 근치(根治)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지끔 수준 높은 의사들은 눈뜨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약(藥)을 하나 선사하고자 합니다. 접때는 부작(符作)을 선사하고 또 했지마는 오늘은 또 약을 하나 선사하는데 '무슨 약을 줄라나?' 이리 생각하시겠지마는 이것은 돈을 받지 않고 드립니다.

돈을 받지 않고 드리는 만큼 또 이것은 여러분의 귀로만 들으시면 되어요. 손으로 받으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무슨 약을 드리냐 하면은 이건 아주 그 우리 돈 안 들이고 우리의 무서운 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폐결핵이라든지, 자궁암이라든지, 이 근자에 부인들이 참 자궁암 또 자궁 내에 근종 모다 그러한 병들이 참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고, 우리 신도 가운데에도 그렇게 참 이쁘고 훌륭한 젊은 분이 그런 자궁암으로 몇 달 전에 돌아가신 분이 계십니다마는, 이 무서운 자궁암 그 밖에 간경화증이라든지 또 어깨 아프고, 허리 아프고, 삭신 아프고 또 관절염 류마치스 또 피부병 모다 이러한 병, 그 밖에도 수없는 많은 병들을 약을 쓰지 아니하고 낫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혹 알고 계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입니다. 강변이나 바닷가에 모래 속에 몸을 묻는 것입니다.

6, 7월 더울 때, 5월이나 6월이나 7월 더운 날, 더운 계절에 가서 자기 키보단 좀 길게 파고, 광(廣)은 한 7~80㎝ 파고, 깊이는 한 50㎝ 삽 반 자루 가량 파고서 그 속에 가서 모가지만 내놓고 모래를 덮는데, 아주 두텁게 덮은 것이 아니라 한 6㎝ 내지 9㎝ 정도, 요 하나 덮을 만큼만 덮는 것입니다.


덮고서 얼굴만 내놓고 있는데, 그때 날씨가 더웁고 모다 그래서 텐트를 치고 텐트 밑에서 하거나, 우산으로 가리우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주 몸이 약한 사람은 구름 낀 날을 택해서, 구름이 끼었다 해가 비추었다 한 별로 햇빛이 세지 아니한 그런 날을 택해서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보통 모래찜질하면은 '삭신이 아픈 데 좋다' 그런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 모래가 뜨끈뜨끈한 그런 모래 속에서 해야 한다고 알고 계시지요? 그게 아닙니다. 모래는 우리가 그렇게 무섭게 뜨겁지 아니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통 잠깐 하고 나오고, 또 잠깐 하고 나오고 이렇게 해 오고 있지만, 참으로 그 병을 철저히 낫으려면은 오전 8시부터서 시작해 가지고 점심을 완전히 굶고 오후 4시까지 8시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그 더위에 8시간을 갖다가 뜨거운 모래로 덮어놓으면 그것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게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지마는, 텐트를 가리우고 혹 우산을 가리우고 하고 그동안에 탈탈 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냉수를 떠다 놓고 자꾸 목을 한 모금씩 물을 계속 먹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장 · 소장 · 대장이 항시 물로 촉촉이 축여주기 때문에 설사 점심을 굶는다 해도 그렇게 탈기(奪氣)가 안 됩니다. 될 수 있으면 점심을 굶고 공복에 물만 먹고 해야 독기(毒氣)가 완전히 빠집니다.


이 방법은 이 모래찜질로 평생을 4~50년을 전문으로 이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많은 사람의 병을 낫운 거여. 그 사람의 실지 경험을 써 논 책을 보고 제가 잘 알았고 또 의학박사가 그 모래찜질을 해 가지고 스스로 많은 효과를 보고, 그래 가지고 그 모래찜질을 현대 의학적인 면에서 과학적으로 이것을 풀이를 한 것을 내가 봤기 때문에 올여름에 삭신 아픈 분, 허리 아픈 분, 어깨 아픈 분, 오장육부 어디가 나쁘건 이 모래찜질하시면 독기가 완전히 빠져 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말씀을 드립니다.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도 마찬가집니다. 복어를 먹어서 중독이 되어 가지고 뻐드러진 사람도 모래에다 묻거나, 흙에다가 흙 찜질을 하면은 살아납니다. 또 산에서 그 독버섯을 먹고 죽은 사람도 흙에다 묻거나 모래에다 묻어 놓으면 살아납니다.

저 아프리카 지방에 토인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병을 앓아 가지고 죽게 되면—혹 모기한테 물렸다든지, 독사한테 물렸다든지, 무슨 그래서 죽을병이 걸리면은 그 사람을 떼메다가 저 모래사장에다 묻어 놓고, 얼굴만 내 놓고 묻고서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이상한 주문을 외우면서 한바탕 굿을 하고는 집으로 그 환자만 놔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고 합니다. 몇 시간 뒤에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일어나 가지고 병이 나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모래를 생명의 신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혹 연탄깨스 중독되었을 때 빨리 흙냄새를 맡게 하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먹이면은 정신을 채리는 경우를 왕왕이 보셨을 것입니다. 흙냄새라고 하는 것은 냄새만 맡아도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물며 흙을 파고 그 속에다가 몸을 흙속에다가 덮어놓고 놨을 때에는 몸에서 완전히 독기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이 그 과일나무 밑에다가 그 구뎅이를 파고 그 속에서 흙 찜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흙 찜질을 하는데 그 밭 가양에다 했는데, 거기는 숲 옆이 되어서 모기가 굉장히 흔한 곳이어서 풀모기가 많아서 한 번씩 쏘면은 툭툭 부르트는 모기가 드글드글하는데, 그날 아침 8시부터서 저녁 4시까지 8시간을 하게 되기 때문에 얼굴은 완전히 모기한테 맽기기로 작정을 하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모기가 한 마리도 자기 근처에 오지 안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흙 찜질을 잘 마치고 2~3일 후에 가 보니까 그 흙 찜질하던 구뎅이 옆에 맛있는 그 뽀뽀나무라고 하는 과일나무가 있었는데 거기에 수백 개의 그 뽀뽀가 열려 갖고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과일이 몇십 개가 떨어졌다고 그럽니다. 그러더니 5일 후에는 그 많은 과일이 수백 개 과일이 모조리 다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을 뽀개 보니까 속이 완전히 먹물 칠해 논 것처럼 시커멓게 멍이 들어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과일이 이태 후에도 안 열고, 5년 후에도 안 열고, 아주 그 과일나무는 완전히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면은 모기가 달라들지 아니한 것은 흙 찜질을 하고 있는 동안에 몸에 독기가 빠져 나가기 때문에 그 독 냄새가 지독해서 모기가 달라들지 못했다. 이것을 알 수가 있고.

왜 과일나무가 죽었느냐? 흙 찜질을 통해서 사람의 독이 흙속으로 다 흡수가 되었는데 그 흙속에 흡수된 독을 그 뽀뽀나무 뿌럭지가 빨아 먹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 나무가 아주 골병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 여러분께서 흙 찜질이나 모래찜질하실 때에 주의할 것은, 반드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구뎅이를 파 주고 모래를 묻어 주고 또 우산이나 텐트를 쳐 주고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잠깐 하는 것은 모르지만 여덟 시간 하니까 햇빛, 태양 방향이 바꿔지기 때문에 이리저리 우산을 잘 돌려 쳐 줘서 그늘을 막아주어 가지고 직사광선을 피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물을 가끔가끔 떠다가 축여 줘야 하고, 모래가 지나치게 뜨겁고 더울 때에는 조로에다가 찬물을 떠다가 위에서 화초에다 물 주듯이 적당히 줘 주어야 그 지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이 꼭 필요한데, 이 모래찜질이나 흙 찜질은 환자 자신에게는 백에 하나도 부작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중들어 준 사람이 까딱하면은 '모진 놈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고 그 사람이 까딱하면 눈이 안 보이게 되거나 꺼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아까 조실 스님 법문하실 때는 모두 꾸벅꾸벅 졸더니 이런 얘기를 하니까 한 분도 졸지를 않으시구만요.


시중을 드는 사람이 왜 눈이 어두워지고 까딱하면은 비실비실 쓰러지느냐? 환자한테서 발산하는 독기(毒氣)를 들어마시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흙 찜질, 모래찜질을 해서 얼마만큼 무서운 독이 그 환자로부터 빠져나간 것인가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미신도 아니고 내가 여러분한테 약을 팔아먹으려고 선전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나도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여름에 혹 피서를 가신다던지 그러한 기회가 있을 때는 강변이나 해변에 가셔서 가족 단위로 가셔서 공연히 벗고 춤추고 그러시지를 말고, 찜질을 하시도록 내가 권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서운 병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는 치료 방법이고, 여비만 가지고 가시면 모래 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그것을 하시고.


모래찜질하게 되면은 8시간이란 시간을 모래 속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모래가 피부 속으로 들어가서 백히게 됩니다. 그런데 등어리를 보면은 등어리가 모래가 백히게 되는데, 묘하게도 등어리 위나 또는 등어리 가운데나 허리 대목이나 모래가 붙지 않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대목이 콩팥이 있는 곳이면은 '콩팥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그것을 알 수가 있고. 또 간장 있는 대목에 모래가 안 붙었으면 '아하! 간에서 독기가 빠져나왔구나!' 이걸 알 수가 있습니다. 땀이 빠져나오면서 독기도 같이 빠져나오는데 그놈이 줄줄줄줄줄줄 물 흘러가듯이 빠져나오기 때문에 모래가 거기에는 붙지를 못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찜질을 하고 등어리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이 찜질을 하고 댁에 돌아가셔서 피부병이 일어난 것처럼, 땀띠가 난 것처럼 혹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독기가 8시간 동안에도 덜 빠지고 남은 놈이 집이 가서 빠지느라고 뚫고 나오기 때문에 그러한 증상이 일어나니 그런 사람은 다시 모래찜질을 한 번이나 두 번, 더 해 버리면 완전히 빠져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 모래찜질을 통해서 병 있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병 없는 사람도 하면 좋다 그럽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그 독기가 없는 사람은 전혀 없는 것이고, 피가 맑아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접때 김강남, 김성남 선수에게 부항기를 그 선사를 했는데 이 부항(附缸)도 몸안에 그러한 독기를 뽑아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게 그 모래찜이나 흙 찜은 삼복더위에만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부항은 엄동설한에도 따뜻한 방에서 그 몸에 독기를 뽑아낼 수가 있는 그러한 잇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찜질은 모래 속에다가 8시간만 묻고 있으면 거의 독기를 전신에서 뽑아낼 수가 있기 때문에 그 계절을 이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부항기는 전천후 전 계절을 통해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건 간에 계속해서 뜨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그동안에 우리들은 입으로 먹고 주사침으로 꽂아 넣고 해서, 많은 약을 우리 몸안에다 집어넣어줌으로 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했고, 많은 것을 보고 읽고 듣고 해 가지고 지식을 속에다 넣을려고 해왔습니다.

무량겁을 그렇게 해 왔습니다마는 이제부터서는 공부는 참선 공부, 비우는 공부 또 치료법은 부항법이나 찜질을 해서 우리 몸에서 뽑아내는 치료법을 쓰신다고 하면은 우리는 물심양면으로 해탈도에 도달하는 시기를 단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말을 믿는 분은 자연식 또 부항법 또 모래찜질, 흙 찜질 이런 것을 해 보실 것이고, 믿지 않는 분은 '그까짓 것 뭐, 이뭣고? 좋다고 해도 해 봤자 별수없더라. 자연식이 좋다고 해서 채소 좀 먹어 봤자 별수없더라. 부항이 좋다고 해서 몇 번 떠 봤지만, 멍만 들지 소용이 없더라. 모래찜해 봤자 진기만 빠지고 소용이 없더라' 이렇게만 생각하실 분이 혹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제 말을 믿는 분은 정말 한 번 해서 안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되면 세 번, 이렇게 하시다 보면은 '과연 그 중이 나를 속이지 아니했구나' 이렇게 고맙게 생각할 날이 있어서 여러분은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해탈경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게 될 것을 저는 믿고 또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도) "한 말씀만 여쭤보겄습니다......."


해도 됩니다. 그런데 거름을 안 한 쌩흙이 좋습니다.

예, 파내 버리고, 겉거름 흙은 파내 버리고 그렇게 파서 흙을 부드럽게 해서 덮고, 돌이 섞여 있는 것은 돌을 잘 추려내 버리고 하면 됩니다.


한번 한 구뎅이에 다시 들어가면 안됩니다. 아버지가 들어가고 나온 구뎅이에 아들이 들어가….

그 구뎅이는 아무리 아버지가 들어갔던 구뎅이라도 지독한 구뎅이기 때문에 새로 새 구뎅이를 파서 해야 합니다. 옷은 빤스를 입고, 가리울 데를 가리고 하시는 것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 이것이 보통, 사람 몸에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을 걸쳐서 자세히 말씀드렸고, 여러분의 그 귀, 눈, 코, 입, 마음에 문을 이렇게 해서 활짝 열어 놓았기 때문에 아까 조실 스님께서 하시던 법문이 이제사 여러분 속에 쏙 들어갔을 줄 생각합니다. 열심히 해제 동안에 더욱 열심히 정진을 해 주기시를 당부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38분2초~59분36초)





(4/4)----------------


그 한 가지 말씀드리고자 첨부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겨울철에 약 70명 가량의 보살님네가 방부(房付)를 들였습니다. 한목 70명이 다 계시지는 않고 노상 20명 내지 3, 40명 이렇게 계셔서 방안이 그뜩해 가지고 탁한 공기 속에서 대단히 참 고생들 많이 하시고, 앉을 자리가 없어서 이중 삼중으로 그렇게 앉아서 하시면서도 서로서로 양보를 하시고 이해를 하셔서 참 잘 정진이 되셨고, 강원도나 경상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모다 새로 오셔서 여러 분들이 오셔서 석 달을 그렇게 참 알뜰히 정진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동안에는 일주일 하실 분이나, 한 달 하실 분이나, 석 달 하실 분이나, 그저 단 하루도 좋으니까 오셔서 하루라도 하십소사 하고 이렇게 권고를 했고, 그러한 탓으로 해서 많은 분들이 잠깐만 시간이 있어도 오셔서 정진하시고 그래서 마음으로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노인도 70 노인이 되셨건, 80 노인이 되셨건, 90 노인까지라도 오셔서 하실 수만 있으면 오시기를 마음으로 고대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많이 오시고 나니까 새로운 문제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연세가 너무 많으신 분은 까딱하면 낙상(落傷)하실 우려도 있고, 음식 같은 것에 혹 체하실 염려도 있고 그래서 다른 병환이 나실 수도 있고 또 연세가 많으면 아무래도 마음은 다 고대로지마는 몸이 말을 듣지 아니해서 젊은 사람들과 같이 단체 공동생활을 하기에 대단히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연세가 한 70세 이상 넘으신 분은 '방부를 안 받는다'가 아니라 자진해서 '나는 아무래도 내가 늙은 사람이 가서 다른 사람 폐를 끼치느니보다는 집에서 분(分) 따라서 하고, 내가 법회 때나 참석을 하리라' 그렇게 생각을 하시고 조끔 양보를 해 주십소사 하는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건강이 여의치 못해서 노상 약을 잡순다던지, 노상 들랑달랑 하신다던지 해 가지고 다른 대중에게 피해를 끼칠 만한 그만큼 건강이 안 좋으신 분도 마음으로야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프니 아플지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아프고, 죽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죽어야겄다. 똥을 싸서 뭉개더라도 내가 선방에 가서 내가 뭉개야겠다' 이런 정도의 신심을 내시는 것은 참 훌륭한 생각이지마는,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조그만큼이라도 피해가 가서는 안 되겠다 하는 이러한 숙녀(淑女)다웁게 해 주셔야 할 걸로 생각합니다.


제 생각 같애서는, 저 개인의 생각 같애서는 '연세가 많은 분도 여기서 돌아가시면 여기서 초상을 치러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게 될수록에 오셔서 좀 참선해 주십소사' 이런 생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왜 그러냐?

나 자신도 지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지끔 50여 세지마는 머지않아서 곧 60이 되고, 머지 않아서 70이 되고, 그때까지 살게 될랑가 또 모릅니다마는 생각 생각이 늙어가고 있어서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는 아니 되고, 노인이라고 해서 푸대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지끔 제가 말씀드린 것은 노인이라고 해서 괄세해서가 아니라 참으로 노인의 대접을 해 드리는 것으로 그렇게 좋게 제 말씀을 이해를 하시고, 여름 결제 방부할 때에는 자진해서 잘 대중을 위하고, 용화선원을 위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는 뜻으로 저의 말씀을 깊이 참작을 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정진하실 수 있는 분, 그분만 또 방부(房付)를 들여 주셨으면 그런 생각입니다. 한 달도 그전에는 한 달도 좋고, 일주일도 좋다고 이렇게 말씀드렸지마는 수효가 70명 정도 이렇게 방부를 들여 놓으니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래 선방(禪房)은 한 번 방부 들이면 부모가 돌아가셔도 가들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하 없이도 죽비, 입선(入禪) 죽비(竹篦)를 치면은 방선(放禪) 죽비 칠 때까지는 방안에 사람이 나가지를 못하고, 한 번 죽비를 입선 쳐 버리면 밖에 사람이 방안에를 들어가지를 못하고, 방선할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격한 제도가 우리 용화사에서는 그 할머니들 공부 좀 해 보시다가 그 인연(因緣)이라도 맺고 정법(正法)에 씨를 심게 해 드리기 위해서 조끔 문을 널찌막하니 열어 놨었습니다. 그래 놓고 보니 너무 규칙이 문란해.

죽비를 치거나 말거나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고, 옷을 벗어서 걸고 싶으면 걸고, 다락에도 올라가고 싶으면 올라가고, 내려가고 싶으면 내려가고, 이렇게 해서 전혀 규칙이 없고, 심지어는 입선 중에도 떠억 드러누워서 코를 골고 조신 90 먹은 할머니도 계신 걸로 압니다마는 나는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맙고 감사하고 기특하고 이쁘고 그런 생각마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선방은 선방인 만큼 최소한에 규칙이 있어야겠고, 제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내가 늙었다고 나를 괄세하는구나. 나는 조실 스님 계실 때부터서 나는 여기 본토백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내가 누군데, 종 불사할 때 내가 돈을 얼마를 시주를 하고, 이 법당 지을 때 내가 얼마를 시주한 사람인데 나를 괄세를 하다니, 조실 스님 돌아가신께 인자 다 소용이 없구나' 혹 이렇게 노엽게 생각하실 분이 혹 계실런지 모르지마는 절대로 그렇게 노엽게 생각하시지 말고,

그동안 5년 동안, 조실 스님 열반하신 뒤에 5년 동안 내가 어떻게 해 왔는가를 보시면은 그 저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신다면은 그렇게 노엽게는 아니 생각하실 줄 믿고.


이 선방을 운영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충이 있어서 이 선방을 위하는 뜻에서—또 와서 정진한답시고 다른 사람 정진하는 데 방해를 치게 되면은 자기 공부는 10원어치나 하고, 죄는 만 원어치나 짓게 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드린 것이니까 깊이 참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올 여름철에는 결제날은 5월 15일에 합니다. 방부를 들이실 분은 미리 방부를 들이시고, 결제날은 방부를 받지를 아니하고 결제 이후에도 방부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선착순으로 할 수밖에는 없지 않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렇다면은 오늘부로 방부가 다 들어와 버리고 한 20명 가량, 많해 봤자 스물다섯 이상이 넘어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넘게 되면 어떻게 하냐? 제비를 뽑자고 그런 말까지도 나왔습니다. 많이 오셔서 반갑고 좋지마는 방이 좁은 것이 한이올시다.


그래서 구참 보살님네들은 조실 스님 법문도 들을 만큼 들었고, 참선도 그만큼 하셨으니까 기초가 다 잡혀서 집에서 가만히 시원한 데서 누웠다 앉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정진하실 수 있을 줄 생각합니다.

법회 때 나오셔서 법문 듣고 정 또 돌아가시기, 바로 그날 가시기가 안 되었으면 며칠 쉬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구참 보살님다웁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간곡히 말씀드린 이 말씀을 듣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시면, 내생에 지옥에 또는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서 아무리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59분36초~1시간11분1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상월만공산~ / 용홧에서의 기도는 스님네가 열심히 정진(精進)하시는 그 정진이 바로 기도를 봉행하는 것 / 기도는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 / 공견(空見). 공(空)에 대한 이치, 공리(空理), 체중현(體中玄) 도리, 여래선(如來禪) 도리에 잠시도 머물러서는 안된다 / 부처님, 조사들의 경지에 도달해야 / 고인(古人)의 공안상에 복탁(卜度)을 하지 말어라.


다못 화두 거각해서 의단독로하여 통 밑구녁 빠진듯이 의단타파 /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 끝없이 일어나는 번뇌 · 망상 · 중생심 그놈을 발판 삼아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어 나간다면 그 수많은 중생심이 바로 우리를 성불(成佛)의 길로 인도하는 불보살(佛菩薩)의 자비로운 손길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 자연식(自然食) 권장.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공부 / 연세가 많은 분들은 대중생활이 어렵고 또 보살선방의 방이 좁으니, 새로 온 사람 또 먼 데서 오신 분들에게 어쨌든지 법문을 많이 듣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끔 양보하시길.



기도라 하는 것은 기도를 한 뒤끝에 그 목적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축원할 때, 기도 최초에 마음먹을 때, 그때 이미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연꽃을 보면은 꽃이 필 때 이미 열매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꽃이 진 다음에 그다음에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라, 꽃 피었을 때 이미 꽃 속에 열매가 이미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한 다 끝난 뒤에 뒤에 어떤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도하려고 여러분이 정성스러운 마음 한 생각 낼 때, 이미 여러분의 소원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신다면 기도 성취는 백발백중 성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고인(古人)의, 부처님이라든지 조사들의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말지언정, 조그만큼 얻어 가지고 그것으로써 족함을 삼지는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불교는 지식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요구하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으로 중생심을 보는 길인 것입니다. '깨닫는다'고 하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이뭣고?'를 한다 하드라도 역시 화두를 드는 그 생각은 역시 하나의 중생심(衆生心)입니다. 중생심으로 중생심 속에서 중생심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태여 말로 하자면은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일어나는 중생심 그 많은 생각들을 그때그때, 그 생각이 두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우리의 본참화두 '이뭣고?'를 들면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관조(觀照)해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깨달음을 구태여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아니하고 알뜰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잘 단속(團束)해서 자기 본참화두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성일편(打成一片)으로 들어가는 바로 직전인 것입니다.


구슬이 수천만 개, 하늘에 반짝거리고 있는 별만큼 그렇게 많은 구슬이 있다 하더라도 그 구슬을 꿰어야 보배인 것입니다. 수많은 우리의 생각들, 하늘에 별보다도 더 많은 수에 우리의 생각들을 오직 우리의 본참화두(本參話頭)로써 꿰어 내려간다면 그 많은 생각들은 깨달음을—보리(菩提)의 과(果), 깨달음의 과(果)를 성취하는 데 좋은 밑거름이요, 채찍이요, 법문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슬픔도 괴로움도 어떠한 육체적인 정신적인 아픔도 그이에게는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 몸뚱이는 허망(虛妄)한 것이다. 애착(執着)을 갖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하셨지마는 「지혜롭게 관리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몸뚱이를 매우 애착하면서 관리 면에 있어서는 아주 어리석게 관리를 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애착은 없으면서도 아주 지혜롭게 관리를 해서 공부해 나가는 데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


'모래찜질' 또는 '흙 찜질'하는 방법, 효과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심.


참선은 어떤 지식을 많이 듣고, 보고, 연구해서 우리의 머리속에다가 싸 담는 공부가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많은 생각들을 잊어버리는, 내 비우는 그러한 공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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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