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0/(76~100)2021. 11. 29. 17:53

 

(No.099)—1979년(기미년) 신수기도회향(79.1.9.음) (77분)

 

 

(1/4) 약 21분.

 

(2/4) 약 20분.

 

(3/4) 약 18분.

 

(4/4) 약 18분.

 


(1/4)----------------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춘풍유가석(春風惟可惜)이라  취락만정화(吹落滿庭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생행락처(人生行樂處)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라.
사람이 나서 행락하는 곳에, 오욕락을 즐기면서 웃고 좋아하는 곳에 소비광음최(消費光陰催)라, 아까운 광음(光陰)만 속절없이 흘러가는구나.

춘풍유가석(春風惟可惜)이라  취락만정화(吹落滿庭花)로다.
봄바람이 오직 아깝구나. 봄바람이 불면 산들산들 기분이 좋고 거기에 콧노래가 나오고, 춤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그러지만, 그 봄바람이 불어 결국은 뜰에 가득한 꽃이 지고 마는구나.
봄이 돌아오면은 가득한 뜰에 오색이 영롱한 아름다운 꽃이 만발해 가지고, 그 아름다운 꽃이 그것이 사람이 보고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에 취해 있는 동안에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덧 그 꽃은 지고 마는구나.

인생(人生) 일생(一生)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 가지고 젖 먹고 밥 먹고 그럭저럭하다 보면은 십여 세가 되고,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 공부하다 보면 그럭저럭 대학을 가게 되고, 그럭저럭하다 보면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둘 낳다 보면은 벌써 주름살이 생기고, 인생 일생 칠십, 많이 살아봐야 7~80인데, 그 일생이 지내놓고 보면 따뜻한 봄날에 잠깐 낮잠 한번 자고 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여.

지금 이 자리에는 7~80 연세 많으신 노인으로부터 젊은 분이 계십니다마는, 연세가 많으신 분이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시면 잘 아실 줄 생각합니다. 엊그제 젊었을 때 어렸을 때 일이 금방 얼마 전 일로 생각이 되실 것입니다. 그동안 세월이 어떻게 무엇을 하는 가운데 지내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오십 고개를 넘었지마는 17~8세, 20세 미만의 어릴 적이 지금으로부터 30여 년이지마는 꼭 엊그제 같습니다. 30여 년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을 타고 차를 타고 잠깐 어디 시내 한 바퀴 돌아온 그런 기분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재송도인(栽松道人)의 법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께서 조실 스님, 그 아주 재미있게 해 주신 법문이라 잘 들으셨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을 해서 생사(生死) 없는 이치를 깨닫고 그리고 보림(保任)을 잘하면, 생사에 그렇게 자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다’고 하는 것은, 앉아서 죽고 서서 죽고, 오늘 가고 싶으면 오늘 가고, 며칠 더 있다 갈라면 가고.
옛날 도인(道人)들은 떠억 편안히 앉아서 가신 분, 또 걸망을 떠억 지고 지팽이를 짚고 어디 행각(行脚)을 떠나는 그런 행색(行色)을 해 가지고, 마당에 나가서 못가에 서서 선 채 딱 열반(涅槃)하신 그런 분도 계시고.

또 등은(鄧隱) 조사 같은 이는 열반하실 때 옆에 시자(侍者) 보고, “제방(諸方)에 앉아서 돌아가신 분이 계시냐?”
“그런 분은 많이 계십니다”

“서서 돌아가신 분도 계시냐?”
“그런 분도 더러 있습니다”

“그러면 까꾸로 서서 돌아가신 분도 있느냐?”
“그런 분은 아직 없습니다”

당신은 따악 까꾸로 서서, 선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전등록(傳燈錄)』에 보면 까꾸로 선 채 열반에 드셨는데 옷자락, 옷고름, 옷소매까지도 밑으로 처지지 아니하고, 몸 따라서 딱 붙은 채 열반에 드셨습니다. 옆에 대중들이 전부 그분을, 열반하신 뒤에 편안하게 뉘어 드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까딱을 안 했습니다. 마치 큰 나무가 우뚝 선 것처럼 아무리 밀어도 넘어지지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애를 먹고 있던 차에, 마치 등은 조사의 누이동생이 여승(女僧)인데, 여승이 그 오빠이신 등은 조사가 열반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와서는 “이 노장(老長)이 평생에 추한 짓을 하더니 죽을 때에도 이런 추한 짓을 하는구나” 하고  손가락으로 툭! 미클어 버리니까 툭 쓰러졌습니다.

과거 인도나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일본에 이 동양에 걸쳐서 많은 도인들이 이렇게 생사에 자유자재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참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참으로 그분이 올바르게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그 구분을—돌아가실 때 서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앉아서 돌아가셨느냐 또는 누워서 돌아가셨느냐, 돌아가신 뒤에 방광(放光)을 했냐 안 했느냐 이러한 것으로써 그분의 도(道)가 높고, 높지 아니한 것을 분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공 스님, 전강 조실 스님의 법사(法師) 스님이신 만공 스님에 맨 처음에 법(法)을 전해 받으신 보월 스님께서 열반하셨을 때에 오색(五色)이 찬란한 방광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만공 스님께서 그 보월 스님의 열반에, 그 상서(祥瑞)에 대한 점검을 하시기를 “추한 이 더러운 놈이 죽을 때 추한 짓을 면하덜 못하는구나”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모다, 아까 등은 조사의 까꾸로 서서 움직이지 아니한 것에 누이동생이 와 가지고 그 점검을 하는 말씀이나, 만공 큰스님께서 당신의 수법제자(受法弟子)이신 보월 스님의 열반서상(涅槃瑞相)을 점검하신 말씀이 다 척사현정(斥邪顯正)의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상(相)에 집착해서 바른 법을 보지를 못하고 삿된 소견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셔서 추상(秋霜)같은 점검을 내리신 것입니다.

근자(近者)에 스님네나 또는 보살님네들이 돌아가셨을 때, 화장(火葬)을 한 결과 많은 사리(舍利)들이 여기서 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불교신문에 자주자주 보도가 됩니다마는, 물론 계행을 잘 지키고 수행을 착실히 하고 마음씨를 착하게 먹고 일생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온다면 사리가 나올 수가 있습니다. 또는 나오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나온 것을 꼭 나쁘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사리 나온 것을 가지고 ‘사리가 나왔기 때문에 그분이 도인(道人)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 법보제자 여러분들께서는 잘 알고 계서야 할 줄 생각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리가 나오고 방광을 하고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을 착각을 해 가지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이 참 도인이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정법(正法)을 배우는 불제자(佛弟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송도인(栽松道人)이 팔십 노인의 몸으로 인가(印可)를 받으러 갔다가 법담(法談)을 해서, 법담은 훌륭하게 해서 분명 견성(見性)한 것을 인증을 받았지마는 늙은 탓으로 해서, 늙은 사람에게 법(法)을 전해봤자 법을 전하신 스승보다도 먼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법을 그다음에 누가 있어서 대(代)를 이을 것인가? 그래서 몸을 바꿔 오도록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몸을 바꾸는데, 처녀의 뱃속에 들어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몸을 새로 바꿔 나와서, 그래 가지고 어려서 출가를 해 가지고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가하신 재송도인을 떠나보내고 그 어머니—처녀로 애기를 난, 그 재송도인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을 찾고 찾아서, 늙발에 아들 있는 곳을 알아 가지고 찾아갔습니다. 얼마 동안 별당에서 밥을 얻어 자시면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실 때에, 별당에다가 가둬서 계시게 하고 밥을 갖다 드리지 아니해서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 내려옵니다.

그때 수백 명의 제자들이 ‘어째서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고생 끝에 낳아 가지고 길러서 출가를 시켜준 그 어머니를 굶겨서 돌아가시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결단코 도인(道人)이라 할 수가 없다. 이러한 불효한 사람이 이러한 도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한테 도를 배우느니 차라리 여기를 떠나자’ 이리 해 가지고 대중이 전부 걸망을 싸 짊어지고 그 절을 떠날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그 돌아가신, 재송도인의 어머니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여러 대중스님네, 제 말씀을 들으시오. 나는 아들 하나를 잘 둔 공덕으로 지금 나는 천상으로 올라가는 길이오. 그러니 내 아들이야말로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도인이고, 나에게 가장 효도를 해준 아들이니, 내 아들을 그릇 오해하지 말고 어서 걸망 짐을 풀어놓고 열심히 도를 배우시오” 이렇게 소리가 울려나왔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대중들은 스님네들은 다시 걸망을 풀고 그전에보다도 훨씬 더 목숨 바쳐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시겠지마는, 이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人情)을 써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인정(人情)과 자비(慈悲)는 그 질(質)에 있어서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인정은 우선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좋지마는 결국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자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인정과 너무나도 흡사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인정이라 하는 것은, 주는 것이 있고 또 받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주면서 또 받을 것을 또 기약을 헙니다.
그러나 불보살의 무연자비(無緣慈悲), 정말 참된 자비라고 하는 것은 주되 주는 바가 없고, 따라서 상(相)이 없는 것이며, 받을 것을 전혀 생각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주면서 그 보답을 받기를 바래면서 주는 것은 ‘참보시’가 아니고 ‘참자비’가 아니고, 은혜를 베풀어서 덕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원망과 웬수 빚으로 돌아오는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6.25 동란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마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자’에게, 은혜로 보답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갖다 안겨준 그러한 사례가 방방곡곡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언제라도 은혜를 베푸는 것에 덕(德)이 돌아오지를 못하고 그러한 웬수 빚으로써 보답 받은 예는 너무나 흔한 것입니다.
그 원인이 뭣이냐 하면, 그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그 사람을 다 나쁘다고 합니다마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되 상(相)이 없이 주라’ 주되 보답을 바래지 말고 주어야지, 보답을 바래고 주면은 결과적으로는 좋지를 못한 것입니다.(처음~20분29초)





(2/4)----------------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가르키고, 자식을 키우고, 자식을 결혼을 시켜서 살겄게 해준 그 일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그 아들과 딸을 고생고생하면서 포태(胞胎)를 해 가지고 낳아서 길러 가지고 맛있는 것은 아이의 입에 넣고, 따뜻하고 마른자리는 아이에게 주고 춥고 젖은 자리는 엄마가 눕고, 이러하면서 키운 그 자식, 못 먹고 못 입으면서 키운 그 자식이 커서 장가가서 자식 낳고 살면은 부모의 은혜를 거의 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너무나도 지나친 불효자식이 되고, 나중에는 지집 말만 듣고 부모를 웬수같이 생각하고 부모를 내쫓고 부모를 죽게까지 하는 예는 신문에 가끔 보도됩니다.

이건 특수한 예라고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마는, 자식은 과거에 업(業)으로 인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혹 은혜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그런 효자도 더러는 있지만, 대다수의 자식이 웬수를 갚기 위해서 태어난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을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웬수에 자식이 태어날수록에 부모는 더욱 그 자식이 사랑스럽고 불쌍하고, 피라도 빼서 그놈을 살릴라고 하고 잘살게 할려고 하지마는, 그 자식은 점점 부모의 속에다가 불을 묻고 송곳으로 찌르고 고춧가루를 뿌리는 그러한 짓을 가려가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웬수가 태어나서 자식노릇을 하고 있는 경우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은 태어나지 아니한만 못하건마는 자기가 지어 놓은 업이라 그것을 달게 받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지금 세계에 42억이라고 하는 동서(東西)에 인구가 있지마는, 그 많은 인구가 부모의 몸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많은 수가 얼마만큼 그 부모의 은혜를 알고 부모에 효도를 하는 사람이 있는지, 여러분 자신부터 우리 자신부터 우리들의 주변 사람 가까운 데부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웬수를 맺지 말아야 할 것을 다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웬수를 맺지 아니하려면 남에게 악(惡)하게 하지 아니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에게 착하게 하되 보답을 바래지 아니하고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어떤 재산을 베풀고서, “내가 너를 살려주느니, 너는 일생 동안 백골(白骨)이 되도록 잊지를 말아라. 그리고 목숨 바쳐서 그 은혜를 나한테 갚아야 하느니라” 그러한 말을 입으로도 할 필요도 없고, 그러한 생각을 마음으로도 가져서는 아니되겠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받은 사람이 당장 부담을 느끼게 되고,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주는 사람 앞에서는 고개를 잘 들지를 못하고 항시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생각이 속에서 쌓이고 쌓여 가지고 준 사람을 싫어하게 되고 꺼리게 되고, 언젠가는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어라. 은혜 베풀어 가지고 좋은 꼴 보지 못한다’ 막말로 말하면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뼈저린 가슴 아픈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오는 말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 힘닿는 데까지 물심양면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됩니다. 단,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고 베풀고, 베풀되 상(相)이 없이 베풀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배은망덕한 꼴을 보고, ‘나는 다시는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나는 밥 한술 못 주겠다’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에 빠진 놈 건져주니까 보따리까지 내놓으라’ 그 보따리 내놓으라고 할까봐서, 물에 빠져서 곧 죽게 되는데 그것을 건져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져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건 말이 되질 않습니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몇 번을 배은망덕을 당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른 일, 착한 일을 내놓고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답을 바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상(相)이 없이 착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뭣고~?’ ‘이 뭣고?’ 하면서, ‘이 뭣고?‘ 허는 마음으로 주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뭣고?’를 놓치면 중생심(衆生心)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중생심으로 하는 일은 모두가 다 인연(因緣)의 인과(因果)의 올개미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어떠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우리는 본참화두(本參話頭)인 ‘이 뭣고?’, 본참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히 상(相)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착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웬수가 나를 해코지하러 오드라도 ‘이 뭣고?’로써 상대를 하게 되면은 웬수도 굴복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속을 살아가다 보면, 참 나에게 자비롭게 해 주고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도 많이 만납니다마는, 까닭 없이 나에게 해롭게 하고 까닭 없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그런 일을 더러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내리고 미워하고, 그놈을 언젠가는 혼을 내줄려고 이를 갈아붙입니다마는, 사실은 까닭 없이 나를 해롭게 하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해 준 것도, 그것도 언젠가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 준 일이 있어서 (내게) 잘해 주게 되는 것이고, 나에게 해(害)를 끼치는 사람도, 해를 끼칠 수밖에 없도록 자기가 그 원인을 진즉, 진즉 다 원인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의 허물은 바로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큰 거울이 있습니다. 이 허공은 동서남북에 한량(限量)이 없고, 모난 것도 아니요, 둥근 것도 아니요, 무한대로 멀고 먼 높고 높은 이것입니다마는, 그것을 하나의 거울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큰 거울, 야외음악당과 같이 생긴 둥그런 거울 속에 자기가 살고 있는데, 자기의 모습이 그 큰 허공에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 것이—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모든 것이고, 우리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이고, 코로 냄새 맡을 수 있는 모든 것이고, 눈으로 보고 귀에 들리고 입으로 들어오고 몸에 부딪치고, 우리의 생각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바로 자기로부터 나가 가지고 큰 거울에 비추어서 다시 자기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부처님의 말씀에 추호(秋毫)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자기의 모습이 큰 거울에 비추어서 되돌아온 것을 보고, 그것을 보고 성을 내고 웬수를 갚을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국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당나라에서 선물로 거울을 하나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 갖다가 아내를 주었습니다. 아내를 주니까, 아내가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중국 갔다 오더니 어디서 이쁜 계집년을 하나 데리고 왔다’고 앙탈을 부리고 강짜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시어머니한테 쫓아가서 호소를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어디 좀 데리고 와봐라” 시어머니한테 거울을 갖다 주었습니다. 시어머니가 거울을 갖다 보더니, “새파란 젊은 년을 데리고 왔다드니, 늙은 년을 데리고 왔구나!”
그 거울을 또 영감을 보였습니다. 영감이 그걸 보더니, “늙은 년이 아니라 어디서 늙은 놈을 하나 데리고 왔다” 이래 가지고 서이 각각 자기의 얼굴이 그 거울에 비추는 것을 알지를 못하고, 세 사람이 각각 달리 얘기한 그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까닭 없이, 또는 어떤 이유가 있건 없건,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해줄 때 또는 자기의 재산상 해를 끼쳤을 때 또는 자기의 아들을 남의 집 애기가 해롭게 했을 때, 많은 그런 피해를 입는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즉각 그 사람한테 허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고 웬수를 갚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 자기의 허물이, 자기가 과거에 저질렀건 또는 현재 자기의 마음속에 그러한 요인이 될 만한 씨앗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이, 그것이 그 사람 밖에 있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돌아온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다고 하는 것을 인식을 하시게 되면, 우리는 어떠한 섭섭한 일을 당하드라도 어떠한 언짢은 일을 당하드라도 금방 마음을 돌려서 평온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인과법(因果法), 이 도리(道理)를 인식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밤낮 웬수 속에 휩싸여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도 웬수가 되고, 부모도 웬수가 되고, 자식도 웬수가 되고, 친구도 웬수가 되고, 이웃도 웬수가 되고 해 가지고, 조그마한 일로 인해서 점점 웬수가 커져서 무량겁을 두고 서로 싸우고 찢고 찢기고 하면서 점점 죄를 더 퍼지어 가지고, 갈 곳은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밖에는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이 도리(道理) 하나, ‘저 사람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이요. 나의 허물이, 그림자가 거울에 비추어서, 저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고 하는 이 간단한 인과(因果)의 원리를 잘 음미를 하시고 터득을 하시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살면서 완전히 이 사바세계에서 초월한 불보살(佛菩薩)과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사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에 우리는 나날이 사람이 달라지게 됩니다. 엊그제까지 심술(心術) 사납고 고약한 사람으로 낙인(烙印)을 찍혔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루 동안에 또는 한 달 동안에 눈에 띄게 딴 사람으로 승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7일 기도 회향 날에 왜 이런 말씀을 하느냐?
7일 기도를 정말 여러분들께서는 있는 정성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셨고, 직접 시간을 맞추어서, 날씨가 그동안 대단히 추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눈 속에 얼음 빙판 속에 새벽부터서 나오셔 가지고 기도를 정말 성심껏 봉행을 했고, 또 기도 법사스님도 정말 열심히 기도를 봉행을 했습니다. 경건하고 환희 속에 7일 기도가 한 사흘도 이삼 일도 못된 것처럼 휘딱 그렇게 지내갔습니다.
기도는 정성이 제일이고, 정성스럽게 한 기도는 반드시 성취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기도에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크고 작은 소원이 반드시 성취되실 줄 나는 믿는 것입니다.

기도 성취는 성현(聖賢)이 가피(加被)를 내려주셔서, 부처님과 성현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우리의 소원이 성취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렇게 믿어도 좋은 것이고 그렇게 표현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선하는 입장에서 관찰을 한다면, 그 성현이 자기 몸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속에 한 생각 일어나면 밖으로 표현하기 전에 불보살은 먼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속에 계시기 때문에 그럽니다.

여러분은 열심히 기도를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하셨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감응(感應)을 하시게 됩니다.
여러분이 힘을 얼마만큼 들여서 고함을 질렀느냐 하는 것은, 목구녁에 얼마만큼 강하게 흔들어 주었느냐, 이것에 달려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크게 지르면 그 소리는 멀리 갈 것이고, 가만히 지르면은 자기 가까운 데 한해서 들릴 것입니다.

정성과 바른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를 봉행할 때에 반드시 소원을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산골짜구니에서 소리를 지름에 메아리가 울리고, 물체가 있을 때에 그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신비한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한 과학적 사실에 지내지 않습니다.(20분30초~40분2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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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기도를 통해서 지금 마음에 잡숫고 있었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 1년 동안 또는 금생 일생 동안, 나아가서는 무량겁을 두고 온갖 재앙을 소멸하고 그 재앙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도리가 금년 신수기도 7일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도록 저는 삼고자 해서 지금 이 말씀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 말아 버리면 조그만한 소원만 이뤄 버리고 다시 또 재앙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우리가 원해야 할 조그마썩한 소원을 위해서 계속 또 신수기도를 해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회향(廻向)일을 맞이해서 제가 말씀드린 ‘다른 사람의 허물이 바로 자기 허물의 그림자다, 자기 허물이 바로 되돌아온 것이다’고 하는 이 간단한 이 말씀을 깊이 명심을 하시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신다면, 금년 1년 동안 어떠한 재앙도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두고 모든 웬수가 바로 나를 도와주는 그러한 불보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 가운데는 이러한 도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철저히 수행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신 줄 나는 알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에 있어서 수행에 있어서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한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선행(善行)이라도 해 갈수록 더 크게 더 깊게 더 멀리 넓게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까운 데로부터서 먼 데까지, 작은 데로부터서 큰 데에까지, 우리의 행(行)이 그칠 날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도(大道)를 성취하시고 육신통을 구족(具足)하셔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신 그리고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신 그러한 대성인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계셔도 다 된다. 더 닦을 것도 없으시겠다’ 이리 생각하실런지 모르지만, 부처님께서는 우리보다 몇천 배 몇만 배의 정진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가끔 한눈을 팔 수도 있고, 해태를 게으름을 부릴 수도 있고 그렇지만, 부처님은 단 1초 동안의 한 눈 파시는 법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단 1분 동안의 게으름도 부리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언제나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시거든 하물며 우리의 범부 중생들은 이를 갈아붙이고 이를 악물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우리의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닦아가야 할 줄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해서 재송도인(栽松道人)과 같이 그렇게 생사(生死)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실 수도 있는 그런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일, 어려운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성취가 될 것인가? 죄 많은 중생이, 말세(末世)에 태어난 우리가 어찌 그러한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가망없는 일이다. 다못 인연이나 맺게 그저 법문 듣고 기도나 해보자' 이러한 생각을 가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생각은 이미 잘못된 선입관이 우리에게 박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회의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어서 기초부터 차츰차츰 배워서 알아 들어가는 공부요, 외우는 공부요, 속에다 쌓아 올리는 공부는 그것은 점진적인 공부라 하는 것인데, 그러한 공부는 물론 많은 세월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참선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속에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 뛰어서 곧 여래(如來)의 경지에 들어간다’ ‘한번 뛰어 가지고 성불(成佛)을 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콱! 맥혔던 중생이 찰나간에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깨달음은 차츰차츰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해서 따져 가지고 ‘오,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이 뭣고?’, ‘이 뭣고~~?’

아침부터 낮에까지 낮부터 저녁까지, 밥을 먹을 때나, 세수를 할 때나, 소제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차를 탈 때나, 이야기를 할 때나, 어느 때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겉으로 하는 일은 다 하면서도 생각은 ‘이 뭣고?’ 이렇게 단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일할 때는 그 일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밥을 먹을 때는 밥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말을 할 때는 말에 대해서 정신을 쏟고 그래야지, 일할 때 일에는 정신을 쏟지 않고 ‘이뭣고?’를 한다면 그 일이 어떻게 되며, 반찬을 만들 때 그 반찬에 여러 가지 재료의 분량과 양념의 종류 이런 것을 고루고루 모두 따지고 영양가도 따지면서 조리를 해야지, ‘이뭣고?’만 하면서 이것저것 함부로 집어넣으면, 간장을 잔뜩 붓거나 고추장을 듬뿍 집어넣거나 하면 반찬이 다 못쓰게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걱정을 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적은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특수한 경우는 너무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되어 가면, 채소밭에 잡초를 매면서 잡초는 놔두고, 아껴서 세워두어야 할 채소를 다 호미로 매 버리는 경우가 과거에 고인네들에 있어서 가끔 있었다고 전해옵니다.
그런 경우가 더러는 있지마는 그건 특수한 경우고, 화두를 들고서 모든 일을 해 나가면은 처음에는 화두 들라고 하면은 일이 제대로 안 되고, 일에 정신을 쏟으면은 화두가 잘 안 들리고 해서, 두 갈래 길에서 갈팡질팡 잘 안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자꾸 익히는 것입니다.

자꾸, 세수하면서 ‘이뭣고?’ 한 그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세수를 한번 해보세요. 세수를 하러 세숫대야 있는 데까지는 갔고,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붓을 때까지도 화두가 있었고, 그런데 손으로 물을 움켜서 얼굴에다 대고 문지를 때 깜박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꾸 그럴 때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화두를 단속(團束)을 해 보십시오. 그럴 때 한번 단속을 해봐서 세수를 끝내고 다시 수건으로 닦을 때에도 화두가 들어져 있도록, 그렇게 그때그때 잠깐잠깐의 생활 속에서 화두를 단속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정진을 빨리 이러한 경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지에 몰아가는데 대단히 효과적인 것입니다.

발우(鉢盂)를 떠억 필 때까지도 화두가 들려져 있고, 밥을 다 놓으려고 진지를 할 때도 있고 한데, 죽비를 딱딱 세 번 딱! 치고 숟가락을 들어서 입에다 넣고 씹으면서 화두가 달아나 버리고, 그래 가지고 옆의 사람을 힐긋힐긋 쳐다보면서 행여나 나보다 먼저 먹을까 싶어서 막 잘 씹지도 아니하고, 침도 바른 둥 만 둥 하고 막 삼켜가지고 그런 동안에 단 한 번도 화두를 들어보지 못하고 공양(供養)이 끝나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방에 계신 스님네나 보살님네는 물론이고 가정에서 계실 때에도 공양은 언제나 천천히 잡숫고 잘 씹어서 잡숫도록. 그럴려면은 화두를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서 그 드는 상태에서 공양을 잡숫도록 하시면, 저절로 잘 씹게 되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공양을 하시게 되기 때문에 소화도 잘되고 영양흡수도 잘되고 따라서 가장 맛있게 공양을 잡숫게 되는 것입니다.

화두는 공양 잡술 때에 한해서 만이 아니라, 모든 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두를 들고 모든 일을 해야 그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일만 제대로 될 뿐만 아니라, 피로를 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종일 일을 하되 일하는 데에 나의 정신을 빼앗기지 아니했기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명심을 하시고, 생활 속에 이 참선을 잘 단속을 해 나가시도록 정성들여서 단속을 해 나가시면은 차츰차츰 이것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게 되면은 거기에서 습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생깁니다. 계속 그것이 습관화가 되면은 나중에 체질화가 되는 것입니다.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되어지는 단계에 도달해서 조금도 무리가 없이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과 몸은 혼연(渾然)히 일체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바로 나의 살림살이가 되는 것이고, 나의 수중(手中)으로 다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요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확철대오할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이 공부만이 생사해탈을 획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염불도 좋고, '옴마니반메훔'이나 그밖의 어떠한 주문(呪文) 진언(眞言)도 좋습니다마는, 또는 기도도 좋고 경(經)을 독송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염불이나 기도나 주력이나 경을 독송하는 일은 자칫하면 외우면 외우는 데 빠지고, 기도를 하면은 기도하는 데에 빠져서 '참나'를 찾는 데에 있어서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염불을 열심히 한 사람 또는 목적을 향해서 주문을 열심히 외운 사람은 그 구(求)하는 그것 때문에 상당히 높은 깊은 경지에까지 들어가서 정신 착란(精神錯亂)을 가져오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나 주력이나 구(求)하는 바 있이 했다 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것입니다. 구(求)하는 바 그것 때문에 그 구(求)하는 그 생각이 자기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조(李朝) 말에 월초 스님이라고 하는 분은 대단히 큰스님이었습니다마는, 그 스님은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아 간 것이 분이 나서 '어떻게 해야 이 왜놈을 다 항복을 받고 쫓아낼까?' 오직 이 한마음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먹고 입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온몸 온 정성을 다해서 진언을 외웠습니다. 한 결과 거의 미친 사람 미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일체 외부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직 그 하나에만 종사(從事)를 했습니다.

하루에는 하늘에서 불보살들이, 수없이 많은 불보살들이 하늘에서 허공에 나타나 가지고 설법을 하셨습니다. "허! 저 부처님 봐라. 저 부처님 보라"고 좋아서 춤을 추면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결국은 그 스님은 주력(呪力)을 진언(眞言)을 해 가지고 육신통(六神通)을 얻을려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신통술로써 왜놈을 다 쫓아낼라고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신통술 또 누구를 없애고 죽이기 위해서 그러한 주력을 한다든지 기도를 해봤자 결국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40분28초~57분42초)





(4/4)----------------

어떻게 허면 그러한 부작용이 없이 곱게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이 뭣고~?’

‘이 뭣고?’를 해서 자기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순화가 됐다고 하는 것은 안정이 되고 맑아진 것을 '순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꾸 심호흡 · 단전호흡을 하면서 ‘이 뭣고~?’, 이렇게 1초 1초 1분 1분을 알뜰하게 정진을 다져 나가면 반드시 안정이 됩니다. 안정이 되고 동시에 또 맑아집니다.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지면은 자기의 소원은 바래지 아니해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필요하다’ 하면은 그것이 묘(妙)하게 자기에게 이르러 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정진하시고 열심히 수행을 하신 분은 다 그런 것을 경험을 해 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예수교 성경에도 ‘두들겨라, 그러면 문이 열릴 것이다. 구하여라, 그러면 얻어질 것이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마는, 완전히 자기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친다든지 부처님께 완전히 바쳐 버리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살고, 부처님의 진리에 의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잠깐 마음에 일으켰다하면 그것이 바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원하고 바래고 그것을 얻을려고 얼마를 몸부림을 쳤던 것이, 그래도 얻어지지 못했던 것이 참선을 해서 마음을 맑게 하고, '마음이 맑아진다'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그림자를 깨끗이 씻었기 때문에,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바로 우리의 업장(業障)이 씨앗이기 때문에 업(業)의 씨앗,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원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했다가,
참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짐으로 해서 그러한 업(業)의 씨앗이 변해 가지고 보리(菩提)의 종자(種子)로 변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과 같은, 부처님 마음과 같이 맑아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거울을 깨끗이 닦아 놓으면 누가 보아도 그 모습이 조금도 속임 없이 제대로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흙탕물이라도 그릇에다 떠다가 가만히 놔두면은 더러운 것은 밑으로 가라앉고 말간 물만—그 뻘건 흙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가만 놔두면 반드시 그 찌끄래기는 밑으로 가라앉고 말간 물만 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참선(參禪)은 마음을 고요히 해 가지고 안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본래 맑고 더러운 것이 없다’고 믿어야 됩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못 ‘이뭣고?’를 할뿐입니다마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닦아 가노라면, 아무리 정신이 혼탁하고 성질이 괴팍하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맑아지고 안정이 되고 어질어진다고 하는 것을 저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내 마음이 깨끗했을 때 우리의 모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나를 따르고 나를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내 마음속에 악(惡)의 씨앗이 깃들고 있을 때에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고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나를 헐뜯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원리요, 상식이요, 보편적인 이론입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왕왕 등한(等閒)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평범한 속에 위대한 진리는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로 넘어가고,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져서 잎이 지는 이 평범(平凡)한 사실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진리보다 더 수승한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열심히 참선(參禪)함으로써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길이요,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이 인도말입니다. 인도에 ‘붓다(Buddha)’라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했습니다. 인도말 ‘붓다(Buddha)’란 말은 뜻으로 번역을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사람’ 또는 ‘깨달은 길’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배고프면 밥 먹고, 곤(困)하면 잠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러한 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깊디깊고 높디높은 어떠한 이상한 그러한 무슨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가 예사(例事)로 생각하고 노상 방치하고 있는 그러한 사실들 그 속에, 이 세상에 이 법계(法界)에 위대한 진리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日常生活),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는 홀연히 눈을 뜨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많은 천 사량(千思量), 만 사상(萬思想), 번뇌 망상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찰나 찰나가 바로 ‘참나’에 눈뜰 그 찰나입니다. 그것 내놓고 나를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났을 때 바로 그때 ‘이뭣고?’를 들을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근심 걱정이 있을때 그때를 놓치지 말고 ‘이뭣고?’를 들어 보십시오.

슬플 때, 저는 작년에 사람으로서 인생으로서 느낄 수 있는 큰 슬픔 가운데 한 슬픔을 만났습니다마는, 옆의 사람들이 모다 슬피 울었습니다. 나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눈물이 나왔을 때 나도 몰래 화두를 떠억 들었습니다. 끊임없이 하염없이 속에서 우러나왔던 슬픔이 가라앉았습니다. 간장이 미어질 것 같은 슬픔이 화두를 들므로써 슬픔인지 가슴 아픈 것이 없어졌습니다. 화두를 놓치자마자 또 슬픔은 계속 우러나왔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자신있게 여러분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뼈아픈 그러한 상황 속에서 거기에서 휘말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살아나갈 길은 오직 ‘이뭣고?’ 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많은 슬픔과 많은 억울함과 많은 괴로움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한 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뒤에 면할려고 해봤자 이미 늦습니다. 그때사 당황해 가지고 부처님 앞에 와서 면하게 해 달라, 기도를 해 달라...
이미 딱! 다가와져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가오기 전에—이 사바세계에 산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사바(sahā)’라 하는 말은 인도말로써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인(堪忍)의 세계’, ‘인내(忍耐)의 세계’, ‘참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 많기 때문에 ‘참아야만 할 세상’이라 이런 말입니다.
억지로 참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내 마음을 닦아서 마음속에 그러한 재앙의 원인을 제거해 놓는다면 그러한 일은 미연(未然)에 막을 수가 있고, 닥쳐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꺼꾸러지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들로 해서 내가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는 좋은 밑거름으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집안에 비린내 나는 더러운 것을 놔두면 인근에 많이 파리들이 모여듭니다. 시골에서 사신 분은 그 파리 구경을 참 많이 하셨을 줄 생각합니다마는, 밥상이나 어디나 할 것 없이 수없는 새카만 파리 떼가 모여듭니다.
모여든 파리를 그것을 때려서 잡는다든지 약을 쳐서 잡는다든지, 잡아서 죽여 봤자 그다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파리들이 모여듭니다. 나중에는 아주 면역이 되어서, 밥상에 새카맣게 들어 앵겨도 조금씩만 이리 내키고 밥을 떠먹고 또 와서 앉아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모이는 파리를 죽일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 집안에 더러운 것을 없애고, 변소를 깨끗이 하고 변소의 뚜껑을 잘 덮고 또는 약을 쳐서 집집마다 변소 관리를 잘하고, 집을 깨끗이 하고 더러운 것을 태우거나 묻어 없앤다고 하면은 집집마다 더러운 파리가 모여들지 아니할 것입니다. 파리는 그 발에 많은 병균을 갖다 전염병을 옮기고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재앙을 맞이할 만한 요인을 제거해야지, 그것을 둠으로 해서 재앙을 부르게 됩니다. 재앙은 하나만 오는 게 아니라 한 재앙이 일어나면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한 재앙이 일어나면 두 가지 재앙, 세 가지 재앙이 연거푸 다가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은 몹시 고달프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시달림을 받는 분, 인간관계라 하면 부부 문제, 부모 자식 간의 문제, 며느리와 시부모와의 문제, 형제간의 문제, 이런 것들이 모다 인간관계입니다마는, 인간의 괴로움 속에서 가장 괴로운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 밖에 재산 문제라든지 또는 직장 문제라든지 수없이 많습니다. 이러한 괴로움이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항 속에 놓여있습니다. 크게는 국가적으로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탕(火湯), 불이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은 그러한 지옥(地獄)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지옥이 바로 이 사바세계에도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몸담아 있는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도 그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그 지옥, 그놈을 극락(極樂)으로 만드는 법이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 열심히 함으로써 가슴속의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고, 그럴 때에 이 사바세계에 있는 지옥도 변해서 극락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짜 십팔(十八) 지옥이니 팔만사천(八萬四千) 지옥이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불세계(佛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단속함으로 해서 그 무서운 팔만사천의 지옥이 극락세계로 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신비스러운 것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거꾸로 서서 죽는 거, 비행기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거, 이거 별로 그렇게 신통할 것이 못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한 생각’ 단속을 해 가지고 이 법계를 극락세계를 만들며, 일체 웬수를 불보살로 변하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멀고 먼 길 같지마는 언제나 한 걸음에 있습니다. 한 생각에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닦아도 성취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이 되지만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이건 성현이 벌써 다 갈파(喝破)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해 신수기도 회향일을 맞이해서 저는—이미 기도를 하셔서 크고 작은 재앙은 다 소멸이 되셨을 것이고, 동시에 크고 작은 소원을 여러분은 기필코 성취를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덧붙여서 여러분의 허물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빌려서 여러분의 허물을 볼 수 있는 거울 하나를, 어제는 부작을 선사를 해 드리고 오늘은 거울 한 개를 선사를 해 드리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57분43초~1시간15분47초)





[법문 내용]

(게송)인생행락처~ / 인생 일생이 지내놓고 보면 따뜻한 봄날에 잠깐 낮잠 한번 자고 난 것에 지내지 못한 것 / 참선을 해서 생사에 자유자재(自由自在) / 척사현정(斥邪顯正) / 재송도인(栽松道人)과 어머니 일화 / 인정(人情)과 자비(慈悲) / 불보살의 무연자비(無緣慈悲). 주되 상(相)이 없이 주라, 베풀되 보답을 바래지 말고 베풀어라.

본참화두를 들고 행동하면, 자연히 상(相)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 ‘저 사람의 허물은 바로 내 허물이다’, ‘내 허물이 저 사람에게 부딪쳐서 되돌아오는 현상이다’ / 허공(虛空)이라고 하는 큰 거울. 자기의 모습이 그 큰 허공에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 것 / 옛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 부인의 선물로 사온 거울 이야기 / 인과법(因果法). 저 사람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이요. 나의 허물이, 그림자가 거울에 비추어서, 저 사람이라고 하는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에게 되돌아온다 / 성현이 자기 몸 밖에 계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와 함께 계신다 / 부처님은 여러분이 얼마만큼 열심히 기도를 하셨느냐에 따라서 그만큼 감응(感應)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의 수행에 있어서는 ‘이만하면 되었다’ 하는 한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내가 나를 깨달라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참선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닌 비약적(飛躍的)인 것입니다. 엊그제까지 콱! 맥혔던 중생이 찰나간에 툭! 터지면은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이 깨달음은 차츰차츰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해서 따져 가지고 ‘오, 그렇구나!’ 이렇게 해서 알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꽉 맥힌 상태에서 ‘이 뭣고?’ / 생활 속에 참선을 잘 단속을 해 나가시도록 정성들여라. 습관화가 되면은 나중에 체질화가 되는 것.

 


참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안정이 되고 맑아짐으로 해서 그러한 업(業)의 씨앗이 변해 가지고 보리(菩提)의 종자(種子)로 변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관세음보살과 같은, 부처님 마음과 같이 맑아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원이 장애를 받지 아니하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참선(參禪)은 마음을 고요히 해 가지고 안정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본래 맑고 더러운 것이 없다’고 믿어야 됩니다. ‘생사(生死)는 본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믿고 다못 ‘이뭣고?’를 할뿐입니다마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닦아 가노라면, 아무리 정신이 혼탁하고 성질이 괴팍하고 선량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맑아지고 안정이 되고 어질어진다고 하는 것을 저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 뿐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깨닫는 길이요, 깨닫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이 인도말입니다. 인도에 ‘붓다(Buddha)’라 한 말을 중국에서 ‘불타(佛陀)’라고 음사(音寫)를 했습니다. 인도말 ‘붓다(Buddha)’란 말은 뜻으로 번역을 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은 사람’ 또는 ‘깨달은 길’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배고프면 밥 먹고, 곤(困)하면 잠자고, 부르면 대답하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이러한 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깊디깊고 높디높은 어떠한 이상한 그러한 무슨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 모두가 예사(例事)로 생각하고 노상 방치하고 있는 그러한 사실들 그 속에, 이 세상에 이 법계(法界)에 위대한 진리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日常生活),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화두(話頭)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는 홀연히 눈을 뜨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많은 천 사량(千思量), 만 사상(萬思想), 번뇌 망상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그 찰나 찰나가 바로 ‘참나’에 눈뜰 그 찰나입니다. 그것 내놓고 나를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났을 때 바로 그때 ‘이뭣고?’를 들을려고 노력을 해보십시오. 근심 걱정이 있을때 그때를 놓치지 말고 ‘이뭣고?’를 들어 보십시오.

사바세계(娑婆世界), ‘사바(sahā)’라 하는 말은 인도말로써 우리말로 번역하면 ‘감인(堪忍)의 세계’, ‘인내(忍耐)의 세계’, ‘참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 많기 때문에 ‘참아야만 할 세상’이라 이런 말입니다.
억지로 참을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내 마음을 닦아서 마음속에 그러한 재앙의 원인을 제거해 놓는다면 그러한 일은 미연(未然)에 막을 수가 있고, 닥쳐오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꺼꾸러지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들로 해서 내가 한 걸음 올라갈 수 있는 좋은 밑거름으로 삼으면 되는 것입니다.

화탕(火湯), 불이 펄펄 끓는 용광로와 같은 그러한 지옥(地獄)이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지옥이 바로 이 사바세계에도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몸담아 있는 우리 자신의 가슴속에도 그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있는 그 지옥, 그놈을 극락(極樂)으로 만드는 법이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 열심히 함으로써 가슴속의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고, 그럴 때에 이 사바세계에 있는 지옥도 변해서 극락이 되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진짜 십팔(十八) 지옥이니 팔만사천(八萬四千) 지옥이 다 소멸이 되어 가지고 불세계(佛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 ‘한 생각’ 단속함으로 해서 그 무서운 팔만사천의 지옥이 극락세계로 된다고 하는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신비스러운 것이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거꾸로 서서 죽는 거, 비행기를 타고 달나라에 가는 거, 이거 별로 그렇게 신통할 것이 못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한 생각’ 단속을 해 가지고 이 법계를 극락세계를 만들며, 일체 웬수를 불보살로 변하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멀고 먼 길 같지마는 언제나 한 걸음에 있습니다. 한 생각에 있습니다. 무량겁을 두고 닦아도 성취되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이 되지만 ‘한 생각’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이건 성현이 벌써 다 갈파(喝破)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