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0/(226~250)2021. 5. 21. 05:13

 

 

((No.242))—1984년 7월 첫째일요법회(84.07.01) (84분)

 

 

(1/4) 약 21분.

 

(2/4) 약 21분.

 

(3/4) 약 21분.

 

(4/4) 약 21분.

 


(1/4)------------------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지번로배(誰知番虜輩)가  개개착피구(箇箇着皮裘)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방거화쟁발(放去花爭發)이요. 놓아 보냄에 꽃이 다투어 피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로구나.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르는구나.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땅에는 산과 강이 있으며, 숲과 바위와 인간과 동물,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잡화점을 벌려 놓은 것처럼, 하늘과 땅에 큰 백화점을 벌려 놓은 것처럼 온갖 것이 진열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이, 그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온갖 상품을 온 우주법계를 가게 삼아서 이렇게 벌려 놓았습니다.

그것이 해가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밤에는 달이 뜨고 낮에는 해가 빛나.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온갖 초목이 무성했다가,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겨울에는 서리가 내리고 눈이 내리며, 이 춘하추동 사시(四時)가 순회하는 것, 이것도 다 낱낱이 비로자나 법신불의 살림살이를 갖다가 놓아 내보낸 소식이고.

수래수역류(收來水逆流)라. 거두어들임에 물이 거꾸로 흐른다. 그 물이 흐르는 대로 놔두면 흐르고 흘러서 전부 바다로 돌아가는데, 거두어들이는 소식은 무엇이냐 하면은 그 물을 꺼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최초에 물이 흘러 내려오는 그 수원지(水源地)에 도달할 것이다.
저 신의주 있는 데서 압록강을 거슬러서 계속 올라가면 백두산 천지(天池)로 도달하듯이, 거두어들이는 것은 바로 물을 거슬러서 꺼꾸로 올라가는 거와 마찬가지다.

산천, 하늘과 땅에 온통 벌어져 있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그놈을 거두어들이면 어디로 돌아가냐 하면은 비로자나 법신불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여(眞如)의 세계로 돌아간다.


오늘 갑자년 7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했는데, 본격적으로 여름을 맞이한 것 같습니다. 등어리에서는 땀이 줄줄 흐르고, 너무 더워서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더울 때에 숨이 막힐듯 이 더위에도 불구하시고 사부대중이 이렇게 법당을 가득 메우셨는데, 지금 이렇게 더운 것을 참고 견디면서 여기에서 참 마음자리를 찾는 법문을 듣고 마음을 닦지 아니하면, 참으로 그 펄펄 끓는 화탕 노탕(火湯爐湯)지옥, 무간 아비(無間阿鼻)지옥에 들어가서 고(苦)를 받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편하기를 바라고 시원하게 지내는 재미로 이 더위를 꺼려서 법회에 참석도 하지 아니하고, 더웁다고 선방에 방부도 들이지 아니하고, 서늘한 것만 찾고 냉동이 갖추어진 그런 데서 밤낮 얼음물이나 마시면서 시원하게 낮잠이나 자고 그렇게 지내다가,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어느 곳으로 끌려갈 것이냐 이 말씀이여.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다가 아무도 나를 위해서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계(三界)에 대성인이시고 사생(四生)에 자부(慈父)이시지만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깨닫는 방법, 길은 일러주실 수 있지마는 내 대신 깨달라 주실 수도 없고,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선성(善星) 비구는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수십 년을 모시고 살았지만, 생함지옥(生陷地獄)을 했습니다. 바른 사상으로 바르게 불법을 믿고 바르게 닦지 아니하면, 설사 부처님을 평생을 모시고 산다 해도 삿된 소견을 가지고 바르게 닦지 아니했기 때문에 생함지옥을 한 것입니다.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부처님께는 나후라(羅睺羅)라고 하는 아드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 나후라존자가—'나후라(Rāhula 라훌라)' 라는 말은 ‘속박이다’ 그 말이여. 구속 · 속박 · 얽매임 이런 뜻인데,
나후라가 탄생을 하니까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나라 백성들이 축하 경축을 하고 야단이었었는데, 부처님 그 실달 태자(悉達太子)는 “아! 나후라가 태어났구나. 나를 출가하는 것을 구속하는, 막는 그러한 존재가 태어났구나” 이런 뜻에서 '나후라' 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경전에는 부처님이 출가하신 뒤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그 나후라가 야수다라(耶輸陀羅)—부처님 실달 태자의 태자비(太子妃) 야수다라가 그 나후라를 배 가지고 6년 동안을 해산(解産)을 못하고 6년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 저녁에 나후라가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 데도 있습니다.

어째서 지금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 뱃속에 포태(胞胎)가 되면 열 달 만에 태어나는데, 왜 나후라존자는 6년이라고 하는 장구한 세월 동안을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었냐?
여러분이 들을 때에는 신화처럼 전설처럼 그렇게 들리시겠지만, 그렇게 전해 내려오니까 반드시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이여.
옛날에 그 나후라존자가 저 전생에 어느 나라 국왕으로 있을 때에 벽지불(辟支佛), 독각(獨覺)이 있었는데, 그 독각이 성중(城中)으로 들어와서 걸식(乞食)을 할려고 그러는데, 그것을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막으니까, 7일 동안을 들어오지를 못하고 산중에 딱 갇혀서 7일 동안을 굶게 했던 것입니다.
그 7일 동안을 독각 수행자로 하여금 산중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게 굶게 한 그 과보(果報)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를 받다가 다시 그 남은 과보(果報)로 해서 7년 동안을 태중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인과론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7일 동안을 걸식을 못하게 성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가지고, 7일 동안을 그 독각으로 하여금 굶게 한 그 인연으로 7년 간을 모태 중에 있어서 나오지 못했다 이것입니다.
이조 때에도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탄압한 나머지 승려들로 하여금 서울 장안에는 사대문(四大門) 안에는 들어오지를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조 말엽에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 가지고, 겨우 승려들도 어렵게—몇백 년 간을 서울 장안을 못 들어오다가—겨우 장안에 들어갔던 그러한 참 비참한 역사도 있습니다마는.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

그 나후라존자가 15세에 출가를 했는데, 이 세상에 7년 만에 태어날 때에는 그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날 밤에 태어났고 또 출가하기는 15살 때 출가를 했다.
어떻게 출가를 했냐 하면 부처님이 견성성불(見性成佛)하셔 가지고 그 고향으로 돌아가셨는데, 고향으로 가시니까 그 부처님의 부인이셨던 야수다라 부인이 누각에서 떠억 보니까, ‘부처님이 성불을 해 가지고 제자들을 거느리고 왕궁에 돌아오신다’는 기별을 듣고서 다락에 올라가서 이렇게 보니까, 참 거룩한 모습으로 제자들을 거느리고서 떠억 성중으로 들어오신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나후라로 하여금 “저기, 저 맨 앞에 오시는 저 거룩한 어른이 너의 아버님이시다. 가서 인사를 여쭙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遺産)을 주십시오’ 하고 가서 인사를 해라” 하고 시켰습니다.
나후라존자는 그때 15살인데, 어머니 말 대로 내려가서 부처님께 인사를 하고 “아버지, 저에게 유산을 주십시오” 이랬겠다.
“오냐, 내가 유산을 줄테니 나를 따라오너라” 그래 가지고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머리를 착 깎아서 중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만들어서 부처님의 왼팔인 사리불존자(舍利佛尊者), 사리불에게 맡겨서 사리불을 스승, 은사를 삼고 사리불의 상좌(上佐)를 삼아 가지고 사리불로 하여금 교육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이지만 아무 철이 안 들고, 왕궁에서 참 귀여움만 받고 그래 가지고 도무지 버릇이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모든 스님들의 스승이시고 모든 중생들의 존경 받는 그런 위대한 존재라 하는 것을 떠억 코에다 걸고서 말을 도무지 듣지를 않고, 무엇이던지 제멋대로—스승 말도 잘 안 듣고 남 말도 안 듣고,
누가 찾아와서 “부처님 어디 계시냐?” 하고 여쭤보면은 지금 계셔도, “어디 먼 데 가시고 안 계신다”고 거짓말을 하고, 또 안 계셔도 “저 어디 가보라고, 지금 저기 계신다”고 해 가지고 늘상 사람들을 거짓말을 해 가지고 골탕을 먹이는 것을 아주 일쑤로 하고 그래서 대단히 말썽을 부리고 그랬었는데.

부처님께서 같이 데리고 있기보단 저 다른 산중으로 떼어 보내 가지고 거기서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 싶어서 그리 보냈는데, 별로 큰 효과가 없고 들려오는 소문에는 대단히 염려가 되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하루는 그 나후라존자가 있는 데를 찾아가셨어.
찾아가니까 나후라존자가 아버지가 오셨다고 반겨 하면서 의자를 내놓으면서 앉으시라고. 앉으신 다음에 부처님께서 “대야에다가 발을 씻게 물을 좀 떠 오너라”
물을 떠 오니까 “네가 내 발을 좀 씻겨라” 그러니까 나후라존자가 아주 신나게 발을 다 씻겨 드렸습니다.

다 씻고 난 다음에 “너 그 물을 먹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더러운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을 먹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물이 아니면 살 수가 없지마는, 발을 씻은 더러운 물은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네가 출가해서 사문(沙門)이 되었지마는 말을 함부로 하고, 행동을 함부로 하고, 지켜야 할 계율을 지키지 않고 지켜야 할 규칙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하면, 그리고 입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청정한 행을 가지지 아니하면, 마치 이 발 씻은 물과 같이 더러운 것이니라. 그래서 그 물은 버릴 수밖에 없어. 이 물을 갖다 버려라” 하니까 갖다 버리고서 대야를 갖다가 놓으니까, 부처님께서 그 대야를 갖다가 발로 차버렸습니다.(처음~21분18초)




(2/4)------------------

“왜 대야를 발로 차십니까?” 하니까.
“내가 대야를 발로 차니까, 행여나 그 대야가 깨질까봐 염려가 되느냐?” 부처님이 물어보시니까,
“그까짓 뭐 발 씻은 대야 헐하디 헐하고 비싸지도 않은 거, 그거 깨질까 걱정은 안 했습니다”

“그거 봐라. 네가 정반왕(淨飯王)의 손자요,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그렇지만 네가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을 진실하게 쓰지 아니하고 그러면, 저 발 씻는 대야처럼 너를 갖다가 사람들이 발길로 차고 내쫓친다 하더라도 아무도 너를 소중히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네가 왕손이요, 나의 제자요, 출가 사문(沙門)이고 한데, 얼마나 네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냐. 그러나 네가 마음으로, 입으로, 말로 출가인답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청정하지 못하면, 아무도 네가 죽는다 해도 너를 애석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는 것이니라” 이렇게 아주 준열히 꾸짖으셨습니다.

그때부터 나후라존자는 그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뼛속 깊이 알아듣고서 그 뒤부터서는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도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이래로 어떻게 묵묵히 말없이 수행을 열심히 했던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을 했고, 마침내는 대성현이 되어서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에 밀행제일(密行第一)로 손꼽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필 왜 오늘 부처님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의 얘기를 하느냐 하면, 요새 날이 갈수록 청소년의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 범죄 사실이 나날이 늘어 가고 있고, 그 범죄가 나날이 심해 가고 있고, 때로는 강도도 하고 때로는 사람도 죽이기도 하고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그러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또 횟수가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네들은 학교를 보내나, 항시 그 자녀들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삼천년 전에 부처님, 성현의 아드님이신 나후라존자도 그러한 문제점이 있는 문제아동이었었지만, 부처님 그 지혜롭고 자비롭고 엄숙한 교훈으로써 그 나후라존자를 갖다가 잘 훈도(薰陶)해서 성현이 되도록 한 것을 우리는 거울삼아서 여러분들의 자녀의 교육에 부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해 나가신다면 자녀 교육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녀 교육.

옛날부터 성현(聖賢)도 자식은 바꾸어서 가르켜야 한다.
공자님도 그 아드님을 교육하는데 있어서 직접 당신이 가르키시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교육을 하셨고, 부처님도 당신이 직접 가르키시지 아니하고 사리불에게 맡겨서 그 아드님을 교육을 했습니다.

'왜 아무리 그 부모가 훌륭해도 직접 그 자식을 가르킬 수가 없느냐?' 하면, 자식은 정(情)으로 서로 인연이 맺어져서 부모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항시 정이 앞서게 됩니다.
정이 앞서게 되면은 교육은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스승과 제자 간에도 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이라 하는 것은 물러서, 무르면은 법도(法度)를 잡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자기 뜻대로 안되면은 화가 먼저 치밀으고, 그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너무 기대하는 그 마음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삽시간에 미운 생각으로 변해 가지고, 말이 법도에 벗어난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심하게 매질을 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부모 자식 간에 정의를 손상하는 결과를 가져와서 때로는 위험한 지경에까지도 이를 수가 있어서, 자식은 스승에게 맡겨서 가르키는 것을 옛날부터서 원칙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시험—고등학교나 대학 입학시험, 그런 문제로 해서 행여나 학교에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나 해 가지고 그저 국민학교 때부터서 공부를 시키고 과외를 시키고 온갖 정성을 다 쏟으는데, 그 자식이 부모가 요구한 만큼 그렇게 성적이 올라가지를 못한 경우가 많아서, 그러면 그럴수록에 그 자식의 교육에 더욱 부모는 신경을 쓰게 되고, 신경을 써서 계속 강압적으로 나가면, 점점점점 정신적인 압박을 느껴 가지고 아주 '공부' 소리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지고 '어떻게 하면 이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시험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그래 견디다 못하면은 나가서 나쁜 친구와 사귀기도 하고, 좋지 않은 놀이터에 나가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자칫 잘못되는 수도 있고 그래서 대단히 모다 어려운 문제점이 있읍니다마는.

세상이 온통 서양 풍속이 물밀듯이 들어와 가지고 옛날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그러한 윤리관으로서는 요새 자녀들을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서양은 진즉부터 그러한 윤리관으로써 정립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대로 되어가지만, 우리나라는 옛날 전통은 무너져 버렸고, 새로운 윤리관이 정립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래 가지고 그냥 고대로 놔둘 수도 없고, 너무 심하게 단속을 하면 참으로 비뚤어져 버리고 이래서.

더군다나 학교 교육은 우리 한국적인 그런 교육제도가 정립이 되지 못해 있기 때문에, 옛날 왜정(倭政) 때 시키던 그런 교육 방법으로써 계속 시험점수만 따서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국민학교 때부터서 그런 교육을 시켜왔기 때문에 애들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대학을 졸업해도 참다운, 자립해서 자기의 생활을 영위해 나갈 만큼 훌륭한 교육을 받지를 못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모든 것이 또한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자(佛子)들은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녀 교육에 임해야 할 것인가?

애들은 옛날의 윤리 그런 것에는 벗어나기를 바래고, 부모는 그대로 놔둘 수는 없고, 이래 가지고 여러 가지 갈등과 애로가 생기는데, 이럴 때에 부모가 감정에 흘른다든지 그것을 수습을 못하면 완전히 자식을 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자녀들을 입으로 가르키려고 하지 말고, 우선 내 마음을 먼저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걱정을 하고 때로는 종아리를 치고 하는 것이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가 화나는 것을 부애풀이하기 위해서 종아리를 때리고 큰소리를 치고 하는 것을 우리는 왕왕이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고 자기의 부애풀이를 하기 위해서, 자식에게 욕을 하고 큰소리를 치고 종아리를 때리고 하는 한에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역시 스승이 제자를 가르키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학교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룰 때에도 학생이 공부를 안 한다든지, 숙제를 안 해온다든지, 선생님 앞에 불순(不順)한 언동을 한다든지 하면 ‘그 애를 어떻게 지도해야 이 학생을 바로 지도할 것인가? 그 학생을 지도하는 데에 어떠한 지혜가 필요하며 어떠한 방법이 필요한가?’ 여기에 생각이 집중되지를 아니하고,
“감히 저놈이 선생님 앞에, 저런 고얀 놈이 있나?” 당장 흥분을 해 가지고, 자기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귀쌈을 올려대고 몽둥이로 때리고 발길질을 하고, 이래 가지고 그 학생으로 하여금 상처를 입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하는 그러한 예도 우리는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서는 세상없어도 그 스승 밑에 훌륭한 학생들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갖다가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혹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온다든지,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나쁜 친구하고 어울린다든지, 학교의 성적이 나쁘다든지, 학교에 간다고 해 놓고 사실은 다른 나쁜 친구와 놀다가 들어온다든지 반드시 그러한 경우를 만나게 되는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부모가 첫째의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해서, 정말 부처님 마음과 같은 그러한 마음으로써 우선 자기 자신을 수습을 하고, 그래 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저 애를 바로 잡을 수가 있을 것인가? 저 애 마음을 돌이킬 수가 있을 것인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그 나후라를 훈도하듯이 그러한 지혜로운 방편을 쓰실 만한 여유를 가진다면 그 아들을 교육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감정을 수습을 못해 가지고 다짜고짜로 뚜들어 패고 책을 찢고 욕지거리를 해서 푹 가출을 해 가지고 소식이 없어진다던지, 나가서 어떤 경우는 물에 빠져 죽어 버린다던지 자살을 해 버린다던지, 이러한 결과를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면 이것은 다시는 그 천추(千秋)의 한(恨)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키는 것은 말로써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몽둥이로 가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몽둥이로 가르킬 수 있는 것은 짐승은 몽둥이로 가르키고 또 먹을 것으로써 여러 가지 훈련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을 것과 몽둥이만 갖고는 절대로 교육을 원만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그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믿을 수 있게 해야 하고, 부모를 존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어떠한 애로 사항이라도 부모님 앞에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평소에 지혜와 자비로써 자녀를 상대를 해 나와야, 그 자녀가 사춘기를 맞이해서 또 어떤 중대한 난관에 봉착했을 때 털어놓고 어머니나 아버지나 형님 앞에 의논할 수 있게 된다면, 반드시 어려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는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이것이 불교의 목적이라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이 외래 종교가 나날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 이때에 불교(佛敎)도 포교(布敎) 사업을 잘해야 한다. 포교당을 많이 짓고 어쨌던지 스님들이 산중에만 들어가지 말고 이 도회지로 나와서 발벗고 나서서 포교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고 숭배하도록 해야지, 이대로 나가다간 전부 다 예수교나 기타 종교를 다 믿게 되고, 불교를 믿는 사람까지도 다른 종교에서 악착같이 끌어갈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기 때문에 불교 신자들도 다 개종을 해버리지 않겠느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해서, 모다 젊은 스님네들이 너도나도 모다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모다 대학도 가고 공부를 하고 있읍니다마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나.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21분19초~42분44초)





(3/4)------------------

자녀 교육도 덮어놓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밥이 없냐, 옷이 없냐, 돈이 없냐. 왜 공부를 하지 아니하느냐! 다른 집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그러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계속 족치고 듣기 싫은 소리만 하고 그래 봤자, 점점 나빠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부모는 가장 근심과 걱정과 슬픔 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식은 부모가 자기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속이 상하고 밤잠을 못 자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보고 '공부하라'고 하는 그 소리만 죽도록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가서 놀고 싶을 때 놀고, 친구하고도 어울리고 싶을 때 어울리고, 어디 또 가고 싶을 때 가도록 놔두었으면 좋겠는데, 부모는 꼼짝 못하게 하고 ‘공부, 공부, 공부해라, 공부해라’ ‘네가 공부만 잘하면 내가 왜 너 보고 공부를 하라고 하겠느냐. 공부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나가서 놀으라고 하지, 네가 공부를 못하니까 그러지 않느냐’
이렇게 입씨름을 하고, 그렇지마는 자식의 귀에는 그런 말은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저도 공부를 잘하고 싶고 점수를 백점을 맞고 싶지만, 해도 머리에 안 들어가고 잘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있지만, 어쩐지 공부가 영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고, 마음이 집중이 되지를 않고, 공부만 할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머리가 빙~하고 하나도 정신 집중력이 생기지를 않고, 공부는 하라고 해싸니, 뭐 환장을 할 지경이다 그 말이여.
좀 나가서 바람도 좀 쐬고 운동도 좀 하고 그래 봤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공부 못한다고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러니 점점 나쁘게 하고 나중에는 거짓말을 하고 나가게 되고 이래서 점점점점 못쓰게 되니, 그럴 때에 부모는 억지로 ‘공부! 공부!’ 하지 말고 좀 나가서 놀게도 하고, 학교 점수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좀 느긋하게 스스로 공부할 마음이 나도록 해야지, 공부하라고,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렇게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그것을 막연하게 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럴 때에는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잠자기 시작해 가지고 약 2시간 가까이 되면 대체적으로 잠이 깊이 드는데, 그 잠이 깊이 들었을 때를 그 시간을 타서 간절히 그 아들에게 되풀이해서 간절한 말과 간절한 음성으로 조용하게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말을 타이르십시오.

(눈이) 떠 갖고 있을 때에 ‘공부 공부’ 하면 당장 귀를 막고 싶고 속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마는, 잠이 깊이 들은 그 찰나에는 육식(六識)이 다 쉬어 버리고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때는 무슨 말을 해도, 저에게 유익한 말을 아주 간절한 음성으로 잘 타이르면 거부 없이 그 말을 받아들여서, 그 이튿날 전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할 마음을 내게 되고, 또 나쁜 버릇이 있는 학생은 또 그런 나쁜 버릇을 스스로 고치게 되기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특히 유치원이나 국민학교에 다니는 그러한 어린 아동들에게 이런 방법을 시험 삼아서 한번 사용을 해 보시면 반드시 큰 효과를 거둘 것입니다.

어째서 잠이 깊이 들었을 때에 타이르면 효과가 있느냐 하면, 눈이 떠 있을 때에는 제 생각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릇에 무엇이 잔뜩 담어 있는 거와 같아서, 그릇에 무엇이 담아 있는 데다가는 아무리 무엇을 집어넣어도 들어가지를 않는데, 잠이 꼬빡 들어서 자기 의식이 완전히 비어 버리면, 가뜩 들었던 그릇을 다 쏟아 버리고 빈 그릇의 상태로 돌아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릇이 비은다면 거기에 물을 담으면 물이 들어갈 것이요, 사과를 담으면 사과가 들어갈 것이요, 대추를 담으면 대추가 들어갈 것입니다.

어떤 어린 학생이 영 구구단을 외우지를 못해서, 그래서 그 구구단 하루 종일 외워도 잘 외우지를 못 했는데, 그 학생이 잠이 든 뒤에 1시간 50분쯤 되어서 잠이 깊이 들은 때를 타서 귀에다 거기다 대고 계속 구구단을 몇 번을 읽어 주었습니다.
읽어 주고서 “네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한번만 이 구구단을 주욱 읽고 나면 너는 이 구구단을 주루루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서, 그 이튿날 아침에 “너 구구단 한번 읽어 봐라. 읽어 보면 네가 주욱 외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한번 해 봐라” 그랬는데 한번 주욱 읽어 보고서 구구단을 줄줄 줄줄 외우는 것을 보았다 그 말이여. 이것은 자녀 교육에 대단히 필요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서 항시 부모로부터 좋은 말씀을 듣고, 옛날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그 가문의 훌륭한 어른의 일화도 많이 들려주고, “너의 혈통이 이러이러한 참 좋은 혈통에 태어났기 때문에 너는 모든 행동과 마음가짐을 이렇게 가져야 하느니라. 너의 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고 너의 증조할아버지는 이러이러한 어른이셨느니라” 이런 말을 자꾸 타일러 주고 또 행동으로써 부모가 다 보여주고.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그 애가 차츰차츰 자라면서 그 가훈(家訓)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또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고 훌륭한 인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불교를 믿되 무당집에 다니면서 밤낮 무당 하는 소리나 듣고 또 직접 무당은 아니라도 무당에 가까운 그러한 절에 다니면서 밤낮 그러한 소리나 듣고 점이나 치고 사주나 보고,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금방 거기 가서 물어보고, 이러한 식으로 불법을 믿으면 종래 그러한 20년 30년을 믿어 봤자 잘되어 봤자 그 무당 정도도 안 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처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비로자나 법신불이 벌여 놓은, 비로자나 법신불—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부가 다 비로자나 법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법(法)을 터득하면 일체법(一切法)이 다 한 법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한 법을 옳게 믿고 터득을 하면 교육 문제나 또는 가정 문제나, 회사 문제나, 사회 문제나, 국가 문제나, 세계 인류 문제나 모든 것이 다 한 통속(統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참선을 어떻게 하느냐? ‘이뭣고?’

이 가운데에는 너무너무 잘 아시고, 참선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시고 또 올바르게 실천을 하시는 분도 많으시지만, 절에 법회를 몇 해를 댕겼는데, “대관절 ‘이뭐꼬’라는 것이 무엇인고? 이모의 코? 이모 코가 어쨌다는 거여? 밤낮 가면 ‘이모꼬’하라고 그러는데, 이모 코가 뭣이 어쨌다는 거여. 이모 코는 어떻고 고모의 코는 어떠냐. ‘이모 코’가 좋다는데 어째서 ‘이모 코’가 도대체 무어냐?” 하고 이렇게 몇 해를 다녀도 그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건 웃을 일이 아니고, 그동안에 처음 듣는 소리거든.
용화사 가면 좋다니까 오기는 왔는데 갈 때마다 ‘이모 코’만 찾으라고 하니까, 그거 참 '이모 코'가 별난 놈의 ‘이모 코’가 다 있다.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그말이거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뭣고?’거든. ‘이뭣고?’

아하! '이모의 코'가 아니라 ‘이뭣고?’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게 무엇을 가르키는 말이냐 하면, 지금 산승(山僧)이 이렇게 말을 하는데 여러분이 그 말을 듣고 있습니다. ‘무엇이 듣고 있느냐?’ 그 말이여.
‘귀가 듣지 무엇이 들어? 귀가 없으면 못 듣고, 귀를 콱 먹어 버리면 못 들으니까 귀가 듣지, 듣기는 무엇이 들어?’

귀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여.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속에 있어. ‘귀가 듣는다’ 하는 말은 맞지 않은 말이고, '귀를 통해서 듣는다' 그 말이여.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저 밖에를 보면 창문이 보는 것이 아니거든.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방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이여. 이러한 비유도 엄격히 따지면은 폐단이 있는 말이지만, 편의상 이러한 비근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귀를 통해서 들어.

‘귀를 통해서 무엇이 들어?’
‘마음이 듣지’

'마음이 듣는다' 그 말이 맞는 말인데, 들은 풍월(風月)로 ‘마음, 마음’ 하지, 실지 '그 마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다그쳐 물으면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들은 풍월로 그저 어릴 때부터 ‘마음, 마음’ 그저 속상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 그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속상할 줄도 알고 하는 그게 마음의 작용인데, 지금 ‘이것이 무엇이냐?’ 하는 그 『이것』은 그 마음의 작용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일으키는 그 본바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일으키는 작용」을 「마음」으로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용이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작용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등한히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작용을 통해서 「마음」을 찾어야 하는 것입니다.

슬플 때, ‘무엇이 그리 슬퍼할 줄 아는 놈이 무엇이냐?’ 그 말이여.
기쁠 때도, ‘그 기뻐할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인가? 이뭣고? 이것이 무엇인고?’
괴로울 때도 ‘이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뭣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뭣고?’를 찾어도 도무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참선을 하면 환히 배꼽 밑에 불이 켜지고, 따악 눈을 감고 ‘이뭣고?’를 하면 온갖 것이 환히 천상도 나타나고 지옥도 나타나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이 환히 다 나타난다고, 그래 가지고 자기는 도통을 한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은근히 자랑을 하고 그러한 노보살님이 그 전에 있었는데, 지금은 용화사에서 하도 법문을 많이 들어서 그러한 것을 자랑하는 분은 없을 것이고,
설사 그러한 경계가 나타나도 감히 챙피해서, 그런 소리만 하면은 ‘마섭(魔攝)이 되었다. 마구니에 빠졌다’고 호통을 맞을 테니까 은근히 함부로 말은 안 하고, 비밀 은근히 뒷구녘에서 그런 것을 자랑을 해 가지고 자기를 도통한 것처럼 믿게 할려고 공작을 하는 그러한 분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참 가슴 아픈 일이라 할 것입니다.

찾아갈수록—‘이뭣고?’를 할수록 알 수가 없을 뿐이어야지, 무엇이 알아지거나, 무엇이 나타나거나, 무엇이 보이거나 이러면은 그건 공부가 잘못되어 간 것입니다.
어쩌다가 혹 그런 것이 슬쩍 스쳐가거나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幻相)이지, 그것이 참다운 실상(實相)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부정을 해 버려야 해.
다시는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려 하지도 말고,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그걸 다시 나타나기를 바랄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그것은 귀 끝에 스쳐가는 바람처럼 생각해 버리고 다시는 관심을 거기다가 붙이지 말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할 때, 「이」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서, 나중에는 그냥 ‘이뭣고?~’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더 깊어지면 ‘이뭣고?’ 소리를 아니해도 알 수 없는 의심이 독로(獨露)하면, 거기다 대고 자꾸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그렇게 덮치기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으면, 알 수 없는 의심을 묵묵히 관(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희미해지거나 딴생각이 들어와 버리면 그때 가서 ‘이뭣고?~’ 한번 이렇게 챙겨 주면 되는 것입니다.(42분44초~63분17초)





(4/4)----------------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그래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 그런 염불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 5만 독(讀)을 한다 또는 10만 독을 한다' 해 가지고, 염주가 닳아지도록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타불 타불 타불’ ‘나무아미타불’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끄터리만 따서 ‘타불 타불 타불 타불....’

‘어쨌던지 오늘 내가 10만 독씩을 매일 채워 가지고, 내가 죽기 전에 아미타불을 봐야겠다’해 가지고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는데, 또 염불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는 염불문(念佛門)도 있습니다.
염불이 나쁜 것이 아니어요. 자기가 염불을 해야겠다는 철저한 신심이 있고 또 염불을 통해서 극락세계에 갈 그러한 원력(願力)을 가지신 분, 그런 신심을 가지신 분은 또 염불도 좋은 것이지, ‘에이, 참선이 제일이고 그까짓 염불은 아무것도 아니다’ 염불하는 사람을 우습게보고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염불도 정말 올바르게 지극정성으로 하면 반드시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가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화사는 주로 참선법을 주로 해서 법(法)을 설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염불에 대한 말씀을 아니합니다마는, 여러분은 참선을 지극정성으로 할지언정 염불에 대해서 비방을 하거나 그것을 우습게 여기거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에 여기에 계신 분 가운데에는 과거에 염불도 많이 하시고, 또 관세음보살도 많이 하시고, 또는 ‘옴마니반메훔’ 같은 그런 주력(呪力)을 지극정성으로 많이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마는, 수행 방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있어서 근기(根機)에 따라서는 염불을 하시는 것이 좋을 분도 있고, ‘옴마니반메훔’을 하시는 것이 또 근기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그래서 참선법에 한번 마음을 붙이고 여기에 발을 디딘 분은 다른 데에 ‘무엇이 좋다’ 하면 그리 그냥 귀가 솔깃, ‘무엇이 좋다’ 하면 그것에 솔깃, 그래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한번 믿은 마음이 철석같아야 하거든. 태산과 같이 부동하고 바다와 같이 깊어야지,
여기서 뭐라고 하면은 그 말에 솔깃, 저기 가서 뭔 말을 들으면 그것에 솔깃, 이거 좋다 하면 이것 솔깃, 저것 좋다 하면 저것 좀 해볼까... 밤낮 갈팡질팡, 갈팡질팡,
‘법화경을 읽으면 좋다’ 그러면 그때부터서는 인제 법화경, ‘에이, 법화경보다도 금강경이 더 좋다’ 하면 금강경, ‘화엄경이 진짜 좋다’ 하면 화엄경, ‘참선이 좋다’ 하면 참선.

참선이 좋다고 해서 왔는데, 해 보니까 잠만 퍼오고 망상만 일어나고 아무 재미가 없어. ‘에이, 법화경 다시 해야겠다’
‘에이, 법화경 해 보았자 별 수 없고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치니까 환히 내 마음이 시원하게 다 가르쳐 주더라’ 이래 가지고 겉으로는 참선하는 척, 속으로는 무당을 조실스님으로 생각하고, 도대체 20년, 30년 불법을 믿으면서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어.

보통 좋을 때는 부처님 믿고, 무슨 일만 났다 하면은 부리나케 무당 점쟁이한테 쫓아간다.
만약에 무당한테 가고 점쟁이가 그렇게 사람을 잘 모든 일을 다 뜻을 성취하게 하고 생사해탈하게 한다면, 우리 절에도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족집게 점쟁이를 얼마든지 갖다가 고용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 가지고 일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지내간 이야기는 썩 잘 맞춥니다. 금방 터진 명도점쟁이라던지 그게 다 지내간 얘기를 그렇게 뭐 같이 산 사람보다도 더 잘 알아맞히고 그러는데, 그 사람 말 듣고 뭔 일이 다 해결이 된다면, 그 점쟁이는 대대손손이 대통령만 해먹고 장관만 해먹고 다 박사가 되겠지만, 점쟁이 뒤끝이 별로 좋지를 못합니다. 잡신(雜神)만 그 집구석에 드글드글 끓지, 한 자식 옳게 기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잡신을 숭상하기 때문에 팔도의 잡신은 그 집안으로 다 모여들어서, 잡신은 굿을 하면은 그때는 조금 헤헤 하다가 며칠 지내면 도로 또 행패를 부립니다. 깡패 불러다가 이용해 먹으면, 나중에 그 깡패 등쌀에 그 집단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은 손해가는 것 같지만 정법(正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정념(正念)으로 다스리고, 모든 일은 정법으로써 지혜로써 잘 수습해 나가면 결과적으로 거기에서 바른 길이 열리고 올바르게 해결이 되는 것이지, 밤낮 그런 잡신을 숭상하고 그런 잡된 삿된 길에 드나들고 추종을 하면 점점점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물이 들고 나중에는 그 점쟁이 집에 들끓던 잡신이 자기집에까지 따라옵니다.

자기집에도 물을 떠놓고 빌고 대감단지를 해놓고 남편 몰래 뭐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러면 그 애가 머리가 따끔 따끔 아프던 것이 신기하게 나은 것 같고, 그러면 계속 그 짓을 해 가지고 나중에는 며느리한테 그걸 물려주고 딸 시집가는 데도 물려주고 이래 가지고는, 나중에는 딸이 느닷없이 싱숭생숭 해 가지고 곧 그냥 미칠락 말락 하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가지고 점쟁이가 될라다가 말라다가 곧 발광을 하거든.
그래 가지고 참 계속해서 처음에는 몇 해거리 한번씩 굿을 하다가 나중에는 그래 갖고 안되니까 1년에 한 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다달이 하다가 그래 가지고 집안 살림은 탕진이 되고, 그래 가지고 집안에 계속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화재가 일어난다, 약 먹고 죽는다 그래 가지고는 사람이 연거퍼 둘씩, 셋씩 막 죽는 거거든.

그러고 평생을 경험을 해 본 뒤에사 ‘아하! 이것이 나쁘구나’ 그것을 알고서 그것을 끊을려고 하면은 정말 그 '씨앗이'에다가 손가락을 넣고 견딘 것처럼 그렇게 아픈 고비를 넘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씨앗이'라고 하는 것을 혹 시골에 사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지금은 그 목화씨를 빼는 좋은 기계가 많지마는, 옛날에는 수동식입니다.
수동식으로 되어 가지고 꽈배기 과자 같이 나무를 만들어 가지고 두 개를 합해서 돌리면, 그래 가지고 목화(木花)를 집어넣어서 돌리면은 씨가 거기서 뚝뚝뚝 떨어지면서 솜만 저쪽으로 나오는데, 그 꽈배기같이 생긴 두 나무 돌아가는 사이에다가 목화를 넣다가 잘못해 가지고 손가락을 넣게 되면 손가락이 아주 파싹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놈을 참고 계속 손가락을 처음부터서 집어넣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무당을 숭배하다가 그것을 그만둘라고 할 때에 그 정신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할 만큼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당이나 무당 숭배하는 사람이 처음부터 그것을 할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한 번 두 번 답답하면 가서 물어보고 또 물어봐서 해 보니까—밥을 해 놓고 손을 비비고 갖다 찌트러 버리고, 칼로 이리저리 해 가지고 어쩌고저쩌고 하고 나면 좀 효험이 있는 것 같으니까, 한 번 두 번 하다가 그렇게 되는 거여.
마치 아편을 한 번 두 번, 정 그렇게 아플 때에 한번 맞으면 시원하니 낫고 하니까 또 맞고, 한 너댓 번만 맞으면 아편 중독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정법은 믿고 해 갈수록 담담하고, 그런 삿된 길은 한두 번 해 보면 그렇게 쌈박하고 좋거든.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래 끌려 들어가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심하다고 별맛이 없다고 버리고, 입맛을 취해서 삿된 데에 빠지고, 입맛을 취해서 음식을 취하고 그러면은 사도(邪道)에 빠지고 결국은 건강을 해치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삼복이 가까워서 몹시 더운데, 이렇게 한 분도 졸으시는 분이 없이 이렇게 참 잘 듣고 계셔서 대단히 감사한데, 정말 참선 얘기를 할 때에는 이렇게까지 눈이 초롱초롱 안 하고, 무당 얘기를 하니까 그렇게 눈이 반짝거린다 그 말이예요.


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앞으로 삼복성염(三伏盛炎)이 돌아옵니다. 선방에 계신 비구 스님네 그리고 비구니 스님들, 더울 때 아무리 더위도 그 더울 때에 즉(卽)해서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또 이 선방에 계신 보살님네들이나, 또 가정에서 공부하시는 보살님네 · 청신사 여러분, 더울 때는 그 더울 때를 향해서 더운 곳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도록 노력을 하신다면 더운 줄을 모르고 한 해 여름을 지내게 될 것입니다.
서늘 바람이 날 때에는 우리의 마음속도 모든 번뇌와 망상이 다 식어 버리고 청량한 법(法)의 기쁨과 선(禪)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여름에 되게 더워야 그래야 논밭에 모든 곡식이 잘 자라고, 겨울에 되게 추워야 모든 잡충들이 다 잘 죽고 그 이듬해 또 풍년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더울 때는 더워서 못한다고 한 사람은 추울 때는 또 추워서 못하고, 젊어서 바뻐서 못한다는 사람은 늙어서 몸이 아파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울 때는 더웁기 때문에 더움을 향해서 공부를 가다듬고, 추울 때는 그 추운 곳에 즉(卽)해서 생각을 돌이킨다면 춥고 더운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공부를 이루게 하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비단 더웁고 추운 것 뿐이겠습니까? 속상할 때에는 그 속상한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슬플 때는 바로 그 슬픈 곳을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기쁠 때 괴로울 때는 바로 기쁘고 괴로울 때를 즉(卽)해서 화두를 든다면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마음 찾는 도량이요, 바로 법신불(法身佛)과 바로 무릎을 맞대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할 것입니다.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타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다.
천 개나 되는 강에 강물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것은 한 달이더라 그 말이여. 하늘에 한 달이—달은 하나인데 그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추어 있더라 그 말이여. 천 개의 강에 다 강마다 달이 떠 있지만 그 달은 바로 하늘에 있는 한 달이더라 그 말이죠.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집집마다 뜨락마다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백목련도 피고 집집마다 피는데, 그것이 각각 다른 봄이 아니라 한 봄이더라 그 말이죠.

하늘에는 한 달이건만 우리는 어찌 이렇게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다른 상황 속에 태어났고, 어떻게 이렇게 생각이 각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동서남북 가가호호에 태어나서 김 서방, 이 서방, 박 서방 이렇게 태어났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팔도에 태어나서 각각 피도 다르고, 성도 다르고 이렇게 태어났는데, 오늘 이 시간은 사부대중이 온통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한마음이 된 이 공덕으로 우리는 세세생생에 한 불회상(佛會上)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종일토록 이 홍진(紅塵) 속에 줄달음질을 치면서(終日走紅塵), 자기집 보배를 망각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失却自家珍)

오늘부로는 바로 이 법당에서 나가는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이뭣고?’ 하고 자기의 자성(自性) 부처를 찾으신다면 세세생생에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결정코 자기집에 있는 세세생생에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아서 일체 중생에게 노나 줄만큼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시간 3분20초~1시간24분5초) (끝)





[법문 내용]

(게송) 放去花爭發 收來水逆流 誰知番虜輩 箇箇着皮裘 /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 한다 / 나후라존자의 전생 일화 / 부처님이 나후라에게 하신 엄숙한 훈도 / 나후라존자는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에 밀행제일(密行第一) / 자녀 교육, 지혜로운 방편 / 불교의 포교. 넓게 말해서 불교의 목적은 『스스로 자아를 깨달아서 견성성불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을 교화한다』 / 잠 들었을 때, 무의식 속의 교육.

참선—‘이뭣고?’ 화두 드는 법 / 마음을 관(觀)한다’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 / '이모 코'가 아니라, ‘이것이 무엇인고?’ / 참선법은 본성을 깨닫는 가장 훌륭하고 빠른 길 / 사도(邪道)에—무당, 점쟁이 등—빠지지 말라 / 일체 경계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어야 / (게송) 千江同一月 萬戶盡逢春 終日走紅塵 失却自家珍.


'내가 나 찾는 공부'는 내가 해야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다가 아무도 나를 위해서 해 주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계(三界)에 대성인이시고 사생(四生)에 자부(慈父)이시지만 그리고 육신통(六神通)이 자재하시지만, 우리로 하여금 깨달을 수 있는 깨닫는 방법, 길은 일러주실 수 있지마는 내 대신 깨달라 주실 수도 없고, 내가 하지 아니하면 나를 깨닫게 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가르킨다던지, 제자를 가르킨다던지 이 교육 문제는 첫째는 자기가 먼저 되어져야 교육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스승 노릇 하기가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불교는 다른 학문과 달라서 지식을 공부하는 그런 학문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닦는, 내 '참나'를 찾는 그래서 인격을 완성하는 그런 법이기 때문에 경을 해석할 줄 알고 말재주가 있어서 말을 잘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포교의 목적이 달성되기는 어려우리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포교(布敎)는 바로 그것이 중생 교화(衆生敎化)인데, 중생이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고해(苦海)에 빠져서 헤매고 있는 것을, 그것을 그 고해로부터 건지는 것이 그것이 포교의 목적인데, 자기 스스로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건질 수가 있겠나. 헤엄도 칠 줄 모르면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풍덩 뛰어들면 그 사람도 건져내지 못하면서 자기까지 빠져 죽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포교를 하려면 첫째, 자기 수행을 철저히 해야 하고, 자기 수행을 바탕으로 해서 포교가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듣고 항시 최상승(最上乘) 법문을 듣고 그러면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려고 노력을 하고, 와서 한번만 들은 게 아니라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계속해서 되풀이 듣고 또 듣고 그렇게 해서 자기의 팔식(八識)에 스스로 암시를 주어서 그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정법의 종자(種子)를 심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이 개선이 되고, 자기의 신심은 정법을 믿는 마음으로 뿌리를 깊이 박고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면, 깨달음의 결과—보리(菩提)의 과(果)를 수확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한다’ 하셨습니다. ‘마음을 관(觀)한다’ 하는 것은 참선 공부를 하는 것이여.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강의 최초에 수원지를 볼 수 있듯이,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냐?—‘이뭣고?’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근본 본바탕 마음자리, 자성(自性) 자리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수행 방법 가운데에 이 참선법이 가장 빠른 길이다고 하는 것은 보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참선법은 바로 ‘한 생각’에 자기의 본성(本性)을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미타불을 많이 불러서 죽어서 극락세계에 가는 그러한 방편법(方便法)이 아니라, 한 생각 돌이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돈오(頓悟), 확철대오(廓徹大悟)하는 길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모든 법이 다 훌륭하지만, 그 모든 법을 다 합한 것만큼 훌륭한 것이 바로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울 때는 더워서 못한다고 한 사람은 추울 때는 또 추워서 못하고, 젊어서 바뻐서 못한다는 사람은 늙어서 몸이 아파서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울 때는 더웁기 때문에 더움을 향해서 공부를 가다듬고, 추울 때는 그 추운 곳에 즉(卽)해서 생각을 돌이킨다면 춥고 더운 것은 바로 나로 하여금 공부를 이루게 하는 좋은 도량(道場)이 될 것입니다.

비단 더웁고 추운 것 뿐이겠습니까? 속상할 때에는 그 속상한 바로 거기에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슬플 때는 바로 그 슬픈 곳을 즉(卽)해서 화두를 들고, 기쁠 때 괴로울 때는 바로 기쁘고 괴로울 때를 즉(卽)해서 화두를 든다면 일체처 일체시가 바로 참마음 찾는 도량이요, 바로 법신불(法身佛)과 바로 무릎을 맞대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할 것입니다.

오늘부로는 바로 이 법당에서 나가는 걸음걸음이 화두를 들고 ‘이뭣고?’ 하고 자기의 자성(自性) 부처를 찾으신다면 세세생생에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하시고 하루하루를 단속해 나가신다면 결정코 자기집에 있는 세세생생에 쓰고 또 쓰고, 쓰고 남아서 일체 중생에게 노나 줄만큼 무진장(無盡藏)한 보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