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42)—1991년 3월 첫째일요법회 (35분)
약 35분.
수행막대빈모반(修行莫待鬢毛斑)하라 호리신분개소년(蒿裡新墳皆少年)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고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나무~아미타불~
오늘 신미년(辛未年) 3월 3일,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제방(諸方) 선원에서 경오년(庚午年) 삼동(三冬) 구순 안거(九旬安居)를 마치고 많은 선객들, 도반들, 형제자매들이 많이 운집(雲集)을 하셨고, 청신사 청신녀 여러 신도님네들도 법당 가득히 운집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경술년(庚戌年, 1970년)에 설하신 녹음법문(錄音法門)을 경청을 했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출가(出家) 인연과 또 발심(發心)해서 선방으로 나오신 인연, 또 깨달은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신 광경, 또 공부하시는 과정, 그리 깨달라 가지고 첫 번째 혜봉 큰스님을 찾아가서 거량(擧揚)하신 법문 내용 등 법문을 듣고 실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산승(山僧)이 이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여러분과 같이 듣고 더 무슨 말씀을 여기 와서 법문이라고 할 입을 벌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고 그러니, 조실 스님께서 최초에 20세 미만에 같이 뛰어놀면서 『초발심자경(初發心自警)』을 같이 배우며 저 해인사 백련암에서 응해 큰스님을 모시고 시봉하면서 공부, 사미승(沙彌僧) 때 공부하시다가 그 같이 뛰놀던 그 친구가 미쳐서 죽은 것을 그것을 보시고 발심을 해서—그 친구가 죽었을 때 49재 때 그 응해 스님이 49재 천도(薦度) 법문을 하시면서 읊으신 게송(偈頌), 그것이 바로 산승이 법상에 올라와서 금방 읊은 게송입니다.
수행(修行)을 막대빈모반(莫待鬢毛斑)하라. 수행하는 데 머리털, 귀밑에 털이 희어지기를 기다리지 말아라.
호리신분(蒿裡新墳)이 개소년(皆少年)이니라. 저 잡초밭 쑥대밭에 있는 공동묘지에 있는 그 무덤들이 모두 소년의 무덤이니라.
인신일실기시환(人身一失幾時還)이냐. 사람 몸을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어느 때에 돌아올 수가 있으며,
지옥시장기등한(地獄時長豈等閑)고.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 무량겁을 지옥고를 받을 텐데 언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느냐? 그러니 어찌 등한히 놀 수가 있겠느냐?
그 다정하게 뛰놀던 도반이 그렇게 미쳐서 뛰다가 죽은 그 광경을 보고, 그렇지 않아도 그 어린 마음에 그 슬픔이 한이 없고 무상(無常)하기가 한이 없는 그 심정에 큰스님의 이런 게송 법문을 듣고 여지없이 발심을 하셔 가지고 글 배우던 거 모다 다 때려치우고 그래 직지사(直指寺) 제산(霽山) 큰스님 회상으로 아주 새파란 어린 소년으로 발심해서 선방(禪房)으로 나오셨던 것입니다.
요새 그 악독한 잔인한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참 쿠웨이트를 송두리채 먹고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침범을 하고 그래 가지고 전 중동(中東)을 손아귀에다 넣고 세계를 한번 뒤흔들어 볼려다가 그런 과대망상을 일으킨 사담 후세인이 결국은 시대를 착각하고, 최신 전자 무기의 위력을 잘 몰라 가지고 비참하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단 싸움은 휴전이 되었다고 하나, 배가 큰 배가 파도에 넘어지니까 온 바다에 있는 크고 작은 고기들이 와서 그 배에서 파손되어 가지고 거기 뭐 먹을 것이 있는가 하고 빠져서 죽은 사람도 뜯어먹고, 거기서 나온 무슨 곡식도 줏어 먹고 할려고 몇억 마리 고기들이 떼 몰려온 것과 같고, 부잣집이 곡식 창고에 불이 나니까 온 마을 철없는 아이들이 손에 손에 바구니를 들고 튀밥 줏어 먹으러 모여든 것처럼 이제 이라크 전쟁이 끝나니까 행여나 거기 복구 사업(復舊事業)하는 데 돈 좀 벌어보까 하고 온 세계가 또 모여들 것이 빤합니다.
인자 이런 일들은 국가에서 또는 대기업가들이 자기 자신의 기업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자기의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모다 각축전이 벌어지겠지만 우리 불자(佛子)는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 무엇인가 깨달은 바가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첫째는 삿된 종교, 삿된 마음과 탐욕스런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가지고 저지른 모든 행동은, 다시 말해서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등진 모든 행위는 결국은 남을 해치고 멸망한다고 하는 교훈, 그래 가지고 세세생생에 헤어날 수 없는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여실히 증명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문제는 저런 국가 대 국가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한 국가 내에서 기업과 기업 또 사람과 사람, 또 한 가정 내에서는 부부간에 또는 부모자식 간에 형제간에, 또 고부간에 또 역시 이러한 이치는 적용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삿된 생각을 버리고, 탐욕심을 버리고, 어리석은 마음을 버려.
탐욕(貪欲)은 물질적인 탐욕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아만(我慢)만을 내세우고 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법(正法)을 믿지 않는 사람,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기 주장만을 내세우고, 자기 욕심만을 챙기고 그러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바로 어리석은 자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러한 어리석은 마음으로 하는 일은 자기 딴은 잘한다고 한 일이 결국은 남을 망치고 자기도 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도 자기 딴은 전부를 다 모다 분열이 되어 가지고 싸우기보다는 모두 다 회교(回敎, 이슬람교)를 믿고 통일을 함으로써 아랍 제국을 통일함으로써 알라신(Allah神)에 복종하는 가장 성스러운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겠지만, 삿된 종교, 탐욕스런 마음, 어리석은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라 결국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해제를 맞이한 도반(道伴)들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참선을 하되 ‘바르게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는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제산(霽山) 스님께서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을 봐라」 이러한 화두를 타 가지고 공부를 하시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믿어지지 안 해서 그렇게 따르지 않고 당신 나름대로 화두를 설정을 해 가지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는데,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했더라면 그렇게 상기(上氣)가 되어 가지고 피가 목구녁으로 꿀꿀 핏덩어리가 넘어오고 그러지를 안 했을 텐데, 그렇게 했다고 잠깐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다행히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상기가 되고 머리가 툭툭 터지고, 눈이 벌겋게 충혈이 되고, 핏덩어리가 목구녁에서 넘어오던 그러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공부를 쉬지 않고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마침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셨으니까 참 다행한 일이었겠으나, 누구라도 다 그렇게 어거지로 억지로 해 가지고 피 아니라 염통이 송두리채 꺼꾸로 넘어온다 하더라도 확철대오를 하고 그날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전강 조실 스님의 경우는 항상 조실 스님의 도반이시며 조실 스님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믿고 공경하던 열반하신 고 윤고암 대선사께서 항상 저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네 스님은 전생 공부여. 자네 스님만큼만 깨달으소”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전생(前生)에 참, 공부를 많이 하셔서 확철대오한 대도인이 잠시 금생에 참 곡성(谷城) 어느 집에 태어나 가지고 서모(庶母) 밑에 갖은 천대를 받다가, 그래 서모 밑에 천대를 안 받았으면 출가할 발심도 늦어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다행히 그 천대를 받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어린 동생을 데리고 참 출가를 하셔서 그런 대도를 성취했는데—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나오셔서, 누가 시켜서 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하라고 지도하지도 않는데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해 가지고 그렇게 깨달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용맹정진한 뒤라, 하신 그 공덕으로 그렇게 빨리 깨치셨으리라고도 생각이 되지만, 전생에 공부를 해 논 것이라고 한 고암 스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금생에 그렇게 죽을 폭을 대고 그렇게 무지하니 막 해서 금생에는 죽고 내생에 다시 태어나서 확철대오를 한 것도 괜찮지 않겠느냐?’ 혹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 도반이 계시다면 그러기보다는 그렇게 무지하게 하지 않고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열심히 정진한다면 피가 넘어오지 않고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을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지도를 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에 의지해서 공부하신다면 그러한 피가 넘어오고 머리가 터지고 하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안 해도 충분히 도업(道業)을 성취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이 공부는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이 없이는 공부는 금생에 성취하기는 어렵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가행정진 용맹정진이—화두(話頭)를 갖다가 어떻게 드느냐?—그 화두에 대한 그 여법한 묘(妙)한 관(觀)으로 의심(疑心)을 잘 관조(觀照)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지,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그러한 것으로써 용맹정진을 삼는 것은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선객(禪客)들은 요새 참 전강 조실 스님 법문에 의지해서 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들 정진을 하고 계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마는, 산승(山僧)이 근자에 여러 선객들로부터 들은 바가 있어서—출가한 지 5년 10년이 넘어서 자기 딴은 애써서 정진을 할려고 해도 아직까지도 아무 정진에 진취가 없으니 ‘정말 조실 스님께서 정진하신 것처럼 아주 몸뚱이를 아주 잡을 생각을 하고라도 그렇게 한 번 해보까요?’ 이렇게 와서 말하는 도반이 있어서 그게 참 느낀 바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떠한 분은 정진을 하는데 제법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잡혀 나가. 그런데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이렇게 들려가다가 적적(寂寂)한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가다가 가만히 돌이켜보면은 ‘화두를 내가 들고 있는지, 안 들고 있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다’ 이것입니다.
이건 참 공부하는 분이면 다 열심히 정진을 하신 분이면 다 이러한 경지를 아마 당하는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리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고 적적하게 들린다 해도 의단(疑團)이 없으면 안 되거든.
그래서 이 『몽산법어(蒙山法語)』에도 염기염멸(念起念滅)을 위지생사(謂之生死)니,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멸했다 하는 것을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이니, 당생사지제(當生死之際)하야 생사의 즈음에 당해서, 생사의 즈음에 당한단 말은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데 이르러서 수진력제기화두(須盡力提起話頭)호리니, 모름지기 힘을 다해서 화두를 들 것이니—화두를 든다고 해도 한 철, 두 철, 1년, 이태, 3년 여간해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떠억 들어지게 되기가 어렵고, 어쩐 때는 좀 잘 들리다가, 어쩐 때는 또 뚝 변해 가지고 안 들리다가 그럽니다.
화두는 ‘이뭣고?’ 하고 들어도, 드는 그 순간에도 어느 틈엔가 딴생각[別念]이 침범해 들어오고 이러는데, 그래도 자꾸 또 들고 또 들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그놈을 물리칠라 하지 말고, 일어난 놈 그놈은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타악 화두만을 챙기거든.
앉아서도 챙기고, 서서도 챙기고, 누워서도 챙기고, 밥 먹으면서도 챙기고, 똥누고 오줌 누면서도 챙기고, 세수하고 양치질하면서도 챙기고,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챙기다 보면 언젠가는 화두를 챙길려고 안 해도 터억 순일(純一)하게 들리게 된 때가 반드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던 그 기멸(起滅)이 제절로 끊어져 버려. 그 기멸(起滅)이 끊어진 곳, 그것을 적(寂)이라고 그러거든. ‘적적(寂寂)하다’고 적(寂)이여. 그 적(寂)한 가운데에 까딱하면 화두가 없어지거든. 왜 그러냐?
너무 적적하다 보니까 그 적적한 데에 따악 적적한 데에 있다 보니까 화두 들 중을 잊어버리고, 그 적적(寂寂)한 가운데가 어떻게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또 표현할 수 없이 편안하고 그러니까 그런 경지에서 화두를 들면은 오히려 그 적적한 경지가 깨질까 두려워서도 화두를 안 들고 그 고요한 데에 따악 멈추게 된다 그 말이여. 그럼 거기서부터 병(病)이 생기는 것이여.
적적(寂寂)한 가운데에 화두 없는 것을, 화두가 없는 것을 무기(無記)라고 그런 거여. 그 적적한 데에 빠져 가지고 거기에 따악 빠지면 그것을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졌다 그런 거여.
무기(無記)에 떨어지면 한량없이 편안하고 한량없이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이 참 편안하고 고요하고 맑아서, 그렇지만 그러한 경지에 오래오래 계속 머물러 있으면 오신통(五神通)은 나는 수가 있어. 오신통 중에 한 가지 두 가지 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신통은 못쓸 신통이여.
혹 사람을 보면은 ‘전생에 뭣이었었다’ 그런 것도 탁 보면은 알게 되고 ‘앞으로 저 사람이 몇 살에 죽겄다. 앞으로 무슨 재앙을 만나겄다’ 사람을 보면은 관상도 배우지도 안 했는데, 보면 요렇게 알아요. ‘아하! 오늘 오후에는 누가 오겄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공부에 벌써 마장(魔障)이 붙은 것이라 말할 수가 있는 것이여.
그래서 적적할수록에 화두가 성성하도록 화두를 챙겨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가운데에도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이 성성(惺惺)하도록 잡드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해야만 이것을 ‘신령 영(靈)’ 자, 영(靈)이라고 한다 거든.
그래서 그 적적(寂寂)한 것이 공적(空寂)이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가 성성(惺惺)한 것을 영지(靈知)라고 해. ‘신령스럽게 안다’고 해서 영지(靈知)라고 하는데,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그러니까 성성하고 적적한 거,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그 경계가 무괴무잡(無壞無雜)해, 무너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아니해서,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나가면 불일성지(不日成之)하리라. 며칠 안 가서 확철대오하리라.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하리라 이거거든.
이것은 보제존자(普濟尊者)가 각오선인(覺悟禪人)에게 보이신 법문인데, 지극히 짧은 법문인데도 공부해 나가는 참선 학자(參禪學者)에게는 극히 요긴한 법문인 것입니다.
앞으로 1년, 이태, 3년, 정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도반의 죽음을 보고 큰스님의 게송을 듣고 발심한 거와 같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이 삼요(三要)가 돈발(頓發)해서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아무리 적적하더라도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미(迷)하지 않도록, 매(昧)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한 사람도 틀림이 없이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여. 생사해탈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긴밀히 긴(緊)히 승두(繩頭)를 잡고 한바탕을 지을지니라. 승두는 우리의 마음이요, 또 화두(話頭)다 그 말이여.
화두를 한바탕 꽈악—그 화두를 조끔 공부한다고 해서 ‘화두가 잘 안 맞은가?’ 해 가지고 이 화두로 했다 저 화두로 했다 그렇게 자꾸 화두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믿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간택을 받았으면 공부가 잘되건 안 되건 한 화두를 가지고 여법(如法)하게 간절히 잡드리해 나가면 언젠가는 순일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여.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한번 뒤쳐서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리요. 어찌 시러금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침을 얻으리요. 코를 치는 향기를 얻으리요. 겨울에 되게 강추위를 해서 그 강추위 끝에 핀 매화라야 향기가 진동한 법이지, 겨울이 이상난동으로 뜨뜻한 뒤끝에 피는 매화는 향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는 삼계(三界),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의 생사진로(生死塵勞)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 저 대해(大海), 넓고 넓은 바다와 같아서 노상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폭풍이 불면 작은 배는 다 넘어져 버리고 큰 배도 뛰뚱거리는 것이여. 예나 이제나 이 삼계(三界)는 그러한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것이 끊일 겨를이 없어. 조끔 조용한가 싶으면 금방 여그서 저그서 사고가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그러한 싸움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냐 하면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저 이라크에서 일어나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잘못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진짜 발심(發心)한 사람이면 한국에 앉은 바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탁! 느껴져야 하는 거여. 왜 그러냐?
아무리 이라크에서 싸움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내가 없으면은 나한테는 그 싸움과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거든. 내가 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도 있는 것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태양이 떠 있거나 말았거나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무슨 상관 있냐 그 말이여. 그 이라크 전쟁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 이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면, 한 생각이 불생(不生)한다면은, 내 이 한 생각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달라 버린다면 온 세계는 찰나간에 부처님의 해탈 적멸국토(寂滅國土)로 변하는 것이여.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새해를 맞이해서 여러 형제자매, 사부대중 여러 도반들께서는 어쨌던지 이만큼 건강할 때, 이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고, 바로 이때가 나의 생사 문제를 해결할,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결할 가장 좋은 시기라고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열심히 정진해 주시기를 부탁을 하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처음~34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수행막대빈모반(修行莫待鬢毛斑)~ /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과 이라크 전쟁 / 물질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아만(我慢)만을 내세우고 한 것도 역시 탐욕.
참선을 하되 ‘바르게 공부를 해야 한다’ / 윤고암 대선사의 말씀 “전강 스님은 전생 공부여” / 아무리 공부가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고 적적하게 들린다 해도 의단(疑團)이 없으면 안 되거든 / 『몽산법어(蒙山法語)』에 ‘보제존자(普濟尊者)가 각오선인(覺悟禪人)에게 보이신 법문‘
(게송)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 삼계(三界)의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싸움은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〇항상 전강 조실 스님의 도반이시며 조실 스님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믿고 공경하던 열반하신 고 윤고암 대선사께서 항상 저(송담)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네 스님은 전생 공부여. 자네 스님만큼만 깨달으소”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전생(前生)에 참, 공부를 많이 하셔서 확철대오한 대도인이 잠시 금생에 참 곡성(谷城) 어느 집에 태어나 가지고 서모(庶母) 밑에 갖은 천대를 받다가, 그래 서모 밑에 천대를 안 받았으면 출가할 발심도 늦어졌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다행히 그 천대를 받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어린 동생을 데리고 참 출가를 하셔서 그런 대도를 성취했는데—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고—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그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나오셔서, 누가 시켜서 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누가 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하라고 지도하지도 않는데 스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년이 그렇게 무섭게 정진을 해 가지고 그렇게 깨달으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용맹정진한 뒤라, 하신 그 공덕으로 그렇게 빨리 깨치셨으리라고도 생각이 되지만, 전생에 공부를 해 논 것이라고 한 고암 스님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〇‘그 가행정진 용맹정진이—화두(話頭)를 갖다가 어떻게 드느냐?—그 화두에 대한 그 여법한 묘(妙)한 관(觀)으로 의심(疑心)을 잘 관조(觀照)해 나가는 데 있는 것이지, 몸뚱이를 못살게 굴고 그러한 것으로써 용맹정진을 삼는 것은 생각이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〇앞으로 1년, 이태, 3년, 정말 전강 조실 스님께서 도반의 죽음을 보고 큰스님의 게송을 듣고 발심한 거와 같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이 삼요(三要)가 돈발(頓發)해서 정진을 해 나가면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아무리 적적하더라도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심이 미(迷)하지 않도록, 매(昧)하지 않도록 그렇게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만무일실(萬無一失)이여. 한 사람도 틀림이 없이 대도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〇온 세계는 삼계(三界),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 이 삼계의 생사진로(生死塵勞)는 뭣과 같으냐 하면은 저 대해(大海), 넓고 넓은 바다와 같아서 노상 크고 작은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폭풍이 불면 작은 배는 다 넘어져 버리고 큰 배도 뛰뚱거리는 것이여. 예나 이제나 이 삼계(三界)는 그러한 크고 작은 난리와 전쟁과 시끄러운 것이 끊일 겨를이 없어. 조끔 조용한가 싶으면 금방 여그서 저그서 사고가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그러한 싸움이 어디서부터 일어나냐 하면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솟은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말이여.
저 이라크에서 일어나니까 이라크 사람들이 잘못해서만 그렇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진짜 발심(發心)한 사람이면 한국에 앉은 바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탁! 느껴져야 하는 거여. 왜 그러냐?
아무리 이라크에서 싸움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내가 없으면은 나한테는 그 싸움과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거든. 내가 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도 있는 것이고, 내가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도 있는 것이지, 내가 없다면 태양이 떠 있거나 말았거나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났거나 말았거나 무슨 상관 있냐 그 말이여. 그 이라크 전쟁도 나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내 이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한다면, 한 생각이 불생(不生)한다면은, 내 이 한 생각 남[生]이 없는 이치를 깨달라 버린다면 온 세계는 찰나간에 부처님의 해탈 적멸국토(寂滅國土)로 변하는 것이여.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한 마음이 깨끗하면 법계(法界)가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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