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43)—1991년 4월 첫째일요법회(91.01.07) (72분)
(1) 약 39분.
(2) 약 33분.
(1)------------------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하되, 욕계 ・ 색계 ・ 무색계, 이 삼계 가운데에 분요요(紛擾擾)여. 수없이 윤회를 하고 돌고 도는 것은,
지위무명불료절(只爲無明不了絶)이라. 다못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해 끊지 못한 탓이다.
일념불생심징연(一念不生心澄然)하면, 한 생각 남[生]이 없어서, 한 생각이 나지 아니해서 마음이 깨끗해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갈 것도 없고, 옴도 없고, 생사도 없는 것이다. 생멸(生滅)이 없는 것이다.
이 게송(偈頌)은 한산(寒山), 습득(拾得), 그 습득의 게송입니다.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수없는 삼계(三界), 육도(六途)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것은 그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를 못한 까닭이다 이거거든. 한 생각 남[生]이 없는 도리를 바로 봐 버리면 무거무래불생멸(無去無來不生滅)이다.
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 신미년(辛未年) 4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경청을 했습니다.
그 엄동설한(嚴冬雪寒)도 지나고 이제 입춘(入春) ・ 우수(雨水) ・ 청명(淸明)을 엊그제 지냈습니다. 벌써 여기저기 개나리가 피고 또 진달래가 여기저기 산언덕에는 피기 시작했습니다. 엄동설한이 계속이 되면 추워서 못살 것 갖지만 또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은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지나고 이렇게 또 청명을 보냈습니다.
계절도 이렇게 돌고 돌지마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렇게 지나가고 흥망성쇠(興亡盛衰)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오래오래 살기를 다 바래고, 집안이 형편이 부자가 되고 풍요로우면 영원히 그렇게 잘살기를 바래지만, 때가 지나면 부자가 또 가난해지기도 하고, 부자가 영원히 부자로만 산다면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해지고 따라서 가난했던 사람이 또 부자가 되는 것은 겨울이 봄이 되고, 봄이 또 여름을 거쳐서 가을이 되고 또 겨울이 오듯이, 이렇게 인연(因緣) 따라서 순환하고, 업(業) 따라서 흥망성쇠가 있는 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우주의 섭리입니다.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業)에 따라서, 인연(因緣) 따라서 생로병사와 흥망성쇠를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또 오늘부터 영겁을 통해서 계속이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필 자기에게만 모든 좋은 여건이 주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욕심이요 이상일 것입니다. 그렇게 바란다고 해서 되지도 않고, 면할려고 한다고 해서 면해지질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 바르게 살아가는 법, 보람 있게 살아가는 길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마치 엄동설한이 돌아오면 두터운 솜옷이나 털옷을 입고, 또 입춘 ・ 우수가 지나고 청명 ・ 곡우 이 따뜻한 봄이 오면 두터운 옷을 벗고 가볍고 엷은 옷을 입는 것처럼, 그때그때 따라서 내가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하느냐? 반드시 그 길이 있을 것이고.
또 살림이 풍요로우면 풍요로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려움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는 법도(法度)가 있을 것입니다. 넉넉할 때에는 자기 혼자만 쌓아 놓고 자기 혼자만 쓸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이웃과 노누고,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를 하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소득이 있으면 일부는 자기가 사용하고, 일부는 보시를 하고, 일부는 후일을 위해서 저축을 하도록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사업을 잘 경영을 해서 부자가 되었건 또는 불보살께 기도를 하고 주력(呪力)을 해서 그 공덕으로 사업이 번창해 가지고 부자가 되었건, 그 자기의 수입 재산이 전부 자기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임시 관리를 하도록 주어진 것들이라 그것을 관리를 잘 함으로써 자기도 좋고 많은 공덕을 쌓아서 여러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관리를 잘 못해 가지고 탐심(貪心)으로 그것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자기 혼자만 그것을 쓰고, 잔뜩 쌓아 놓고 그걸 갖다가 다 쓰지도 못하고 죽게 되면 그런 탐착으로 인해서 구렁이 같은 그런 무서운 과보를 받게 된 예는 옛날부터서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명예 권리도 자기 혼자 맘대로 하라고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그러한 명예나 권리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도록 자기에게 위촉(委囑)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권리를 남용을 하고, 자기 사욕(私慾)을 챙기는 도구로 삼고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면 그런 권리가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자기의 몸과 명예와 가문을 더럽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치(理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끊임없이 시끄럽고 복잡하고 투쟁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가깝게는 형제 가족끼리 싸우고, 이웃끼리 싸우고, 한 국민끼리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 이런 것들이 그런 부처님께서 설하신, 성현네들이 말씀하신 그러한 이치를 잘 알고 그대로 적절히 살아가고 처신해 간다면은 이렇게 세상이 어렵게만 되어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편리한 것은 정말 진정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정말 다른 이를 해롭게 하지 아니한 그런 방도를 취해야지, 자기 일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요새 낙동강을 비롯한 한국의 온갖 하천이 오염이 되어서 상수도가 오염이 되어 가지고, 그 물을 먹으면은 병이 나고 사람이 살 수 없고, 우리가 먹고 사는 곡식 쌀 속에도, 채소 속에도 인체를 해롭게 하는 무서운 독성이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것을 낱낱이 다 예를 들어서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이상 우리는 지금부터 새로운 각오(覺悟)를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몸도 마음도 자연계도 다 같이 병들어 시들어서 죽고만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현대 학교의 모든 교육이 전연(全然) 참인간을 만드는 교육에는 전혀 마음을 쓰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에서부터서 백까지 배우고 가리키고 연구하는 것이, 조금 과격한 표현을 한다면 인류를 멸망하는 그러한 교육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한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한산정상(寒山頂上)에 월륜고(月輪孤)한데, 저 차운 산 봉다리, 봉아리 위에는 밝은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조견청공일물무(照見晴空一物無)라. 그 맑은 하늘에 환히 비치니 한 물건도 없구나.
가귀천연무가보(可貴天然無價寶)가, 하! 귀중하고도 귀중한 이 천연의 값없는 보배가
매재오음익신구(埋在五陰溺身軀)로구나.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으로 이루어진 이 몸뚱이 속에 파묻혀 있구나.
우리의 본성(本性), 자성(自性)을 천연의 무가보(無價寶)에다가 비유해서 읊은 게송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 한 물건, 눈으로 볼라야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데, 부르면 대답할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이 소소영령한 놈, 주인공.
바로 이놈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었고, 우주가 없어진 뒤에도 이것은 없어지질 안 해. 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자기에게 그런 자기 집안에 그러한 훌륭한 보배가 있다면 그 보배를 통해서 얼마든지 평생 먹고도 남을 텐데 이 보배는, 어느 집안에 세계적으로 보배가 될 만한 보배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와는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없는 세계적인 보물 국가적인 보물도 생겨난 때가 있고, 생겨난 때가 있는 물건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값비싼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없어진 때가 있어. 언젠가는 불이 타거나 또는 자연히 괴멸이 되거나, 어떠한 충격을 통해서 파쇄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뚱이 속에 가지고 있는, 오음(五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이 오음 속에 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은 누가 훔쳐갈 수도 없고, 이것은 이 몸뚱이가 천만 번을 죽었다 살았다 한다 해도 이것에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오늘 화두(話頭), 회룡사에서 참선하는 수좌(首座)나 또 보살선방에서 정진하는 보살님, 또 이 화두를 타고자 신청한 분들, 아직까지 화두를 타지 아니하고 그냥 그럭저럭 지내신 그런 분을 위해서 특별히 오늘 이 법상(法床)에서 화두 드는 법에 대해서 설하고자 합니다.
개별적으로 이렇게 받기를 원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그런 시간을 갖기가 어려워서 이 법상에 올라온 기회를 타서 화두를 설하게 되니 개별적으로 화두를 탄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마음을 기울여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화두(話頭)는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이여.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하고. 그런데 이 천칠백 공안이 어느 화두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없지만, 그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우리말로는 ‘이뭣고’고, 한문으로는 ‘시삼마’, 중국 발음으로는 ‘시씀마’ 그런데.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이 ‘시삼마’ 화두도 많이 설하셨지만, 특별히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많이 설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은 이미 전강 조실 스님께 ‘판치생모’ 화두를 타신 분은 ‘판치생모’를 하시고, 오늘 새로 화두를 받고자 하신 분은 ‘시삼마’ ‘이뭣고?’—화두 중에, 천칠백 공안 중에 가장 최초의 화두고,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주인공(主人公)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그놈을 봐야 그것이 견성(見性)이고, 그놈을 깨달라야 그것이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지.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는 것이여.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그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이뭣고?’다 그 말이여. ‘이뭣고?’
‘이・것・이・무・엇・인・고?’ 표준어로 말하면 일곱 자인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뭣・고?’거든.
‘이뭣고?’ 글자는 석 자밖에 안 되지마는 그 뜻은 ‘이것이 무엇인고?’
근데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라는 지칭(指稱) 대명사(代名詞), 이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냐 하면,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령한 놈, 부르면 대답할 줄도 알고, 욕하면 성낼 줄도 알고, 다정한 사람과 생이별 사이별을 하면은 슬퍼할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근심 걱정할 줄도 알고 그러한 놈이 있다 그 말이여.
그런데 눈으로 볼라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라고 해도 알 수가 없어.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이뭣고?~~~’ ‘이뭣고?~~~’
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어야 되는 것이지, ‘아하,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이렇게 이론적으로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어. 이리저리 자기가 그동안에 불경(佛經)을 읽고 또 법문(法門)을 듣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보고 한 그런 지식과 교리적인 이론적인 것을 통해서 ‘아하, 그런 것이로구나!’ 하고 알아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따라서 이 공부는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은 벌써 잘못된 공부여. 잘못된 방법으로 공부를 하면 잘못된 결과밖에는 나올 수가 없는 것이여. 그래서 공부를 바로 바르게 해 가야 혀.
이론을 떠나서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해 갈수록, 성이 날 때도 ‘이뭣고?’ 하면은 성났던 생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존하도록. 슬플 때에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슬픈 생각이 끊어지고,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조건하고 ‘이뭣고?’ 하면 번뇌 망상이 찰나간에 끊어져 버리거든.
그래서 「참선(參禪)은 수투조사관(須透祖師關)이요,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뚫는 데 있고, 묘오(妙悟)는 요궁심로절(要窮心路絶)이다. 묘한 깨달음은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그거거든.
자꾸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잡드리해 나가는 것은 마음 길이 끊어져. 마음 길이 끊어짐으로 해서 공부가 제대로 되어가고 마침내는 의단을 타파(打破)함으로 해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 참선한다고 앉아서 자꾸 이리저리 생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나가면 마음 길이 점점 끊어지기커녕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점점 더 치성하게 되니 깨달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뭣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성화 대지 말고, 망상이 일어난다고 그놈을 물리치거나 끊을라고 하지 말고, 일어나는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또 일어나면 그냥 고대로 놔둔 채 ‘이뭣고?~’ (처음~38분42초)
(2)-----------------
그래서 이것이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화두인데, 이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해.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그 말이여.
단전호흡은, 보통 사람은 호흡을 하는데 아주 짧게 하거든. 짧게 들어마시고 짧게 내쉬고 하니까, 허파가 있는데 허파의 윗부분 기도(氣道), 기도에서 가까운 부분에만 호흡이 들어갔다 나왔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 넓은 허파 속이 묵은 공기로 속은 가득차 있어. 마치 큰 창고를 소지(掃地)하는데 들어가는 입구만 싹싹 쓸고 말고, 저 창고 깊은 속까지 구석구석이 소지를 안 하면 안 된다.
호흡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다 내쉬고 그런 호흡을 해야 산소를 많이 몸안에 섭취를 하고, 몸안에 있는 그 오염된 탄산가스나 이산화탄소 같은 것을 깨끗이 다 청소해 내는데, 그럼으로 해서 피도 맑아지고 몸도 깨끗해지고 몸도 가벼워지고 따라서 피로 회복도 되고 정신도 깨끗해지는 것이여.
그래서 단전호흡 하는 법을 자상하게 잘 알아 가지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이뭣고?’ 한 알 수 없는 화두(話頭)를 급(急)하지도 않고, 너무 긴(緊)하고 급해서는 안 되고, 적절하게 화두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부작용도 없고 상기병(上氣病)과 같은 그러한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고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이 단전호흡법이라든지 화두 드는 법은 사무실에서 「참선법」이라고 하는 녹음(錄音)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가 있으니까, 처음으로 참선을 하시고자 하는 분은 그것을 구해 가지고 여러 번, 열 번, 스무 번, 백 번—별로 어려운 말로 된 것이 아니나, 한 번 들어도 알 분은 알겠지만 그래도 여러 번 틀어 놓고 들으면서 하면, 한 번 들어서 모르는 거 두 번째 알게 되고, 두 번 들어서 모르는 거 열 번 들어서 차츰차츰 참선하는 요령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여.
이놈 하나를 가지고 거래거거(擧來擧去), 이놈을 들고 가고 들고 오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이 한마디 화두를 간단(間斷)없이,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해서, 일체처 일체시에 이 화두가 끊어지지 않도록 잡드리를 해 나간다면,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때가 많고 다른 번뇌 망상에 휩쓸려 넘어갈 때가 많겠지만, 자꾸 끈질기게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화두 들어진 때가 불어나고, 번뇌 망상 속에 그냥 끌려다니는 시간은 차츰차츰 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성격도 개선이 되어 갈 것이고 또 건강이 안 좋으신 분은 건강도 좋아지실 것이고, 혈압이 높은 분은 혈압도 조정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거나 또 어떠한 일을 하거나 간에 벌써 그러한 사물과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자기 자신이 옛날과 여러 가지 각도에서 많이 달라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야! 저분이 어떻게 해서 참 달라졌다. 저분이 절에 다니시고 참선을 하신다더니 저렇게 인품이 달라질 수가 있을 것인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데에도 ‘참! 내가 왜 진즉 이 참선을 하지 않았던가. 좀 더 젊었을 때 이것을 했었으면 내가 훨씬 더 행복하게 보람 있게 살 것이고, 모든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을’ 이렇게 생각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늦었다고 한탄하시지 말고 지금 시작하는 것이 이른 때입니다. 설사 연세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고 칠십이 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육칠십 년 살고 그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앞으로 몇 해를 못 사시고 이승을 하직하신다 하더라도 금생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마지막 숨 끊어질 때까지 ‘이뭣고?’를 열심히 하시는 가운데 숨을 딱 거두게 되면, 저승에 가셔도 염라대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을 할 것이고, 금방 몸을 새로 좋은 몸을 받아나셔서 또 이 불법 문중(佛法門中)으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늙다고 해서 포기를 하거나, 어떠한 이유로 해서도 이 공부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됩니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과 어떠한 여건하에서도 오직 할 것은 이 공부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화두 법문을 들으신 분은 오늘 화두를 새로 탔다고 그렇게 믿고 고대로 해 나가시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이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급한 생각도 내지 말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즈러진 생각도 갖지 말아라. 마치 거문고나 기타(guitar), 그런 줄을 고를 때에 너무 팽팽하게 강하게 조여 매면 끊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더라도 소리가 제 음가(音價)가 나오지 아니할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느슨하게 해 놓으면 그런 악기 가지고는 연주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참선도 너무 그렇게 되게 급(急)하게, 긴(緊)하게 이렇게 몰아붙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래서 불급불완(不急不緩), 그 중도(中道)를, 적절한 중도를 취해서 해 나가야만 이 공부를 부작용 없이 공부를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용맹정진(勇猛精進),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도록 항상 고인(古人)네들도 말씀을 하시고 산승(山僧)도 그런 말씀을 자주합니다마는, 이 용맹정진이라 하는 것이 덮어놓고 몸뚱이를 못살게 군다든지, 생각을 너무 긴하게 몰아붙여 가지고 미간(眉間)에다가 ‘내 천(川)’ 자를 쓰고 막 그냥 우격다짐으로 무리하게 막 몰아대라는 그런 것이 용맹정진이 아닙니다.
앉아서나 서서나 한 생각도 헛되이 놔 버리지 아니하고 항상 화두를 거각(擧却)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는 것을 말한 것이지, 무리하게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疑心)을 간절하게 하라’고,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과 대의단(大疑團), 이 삼요(三要)로써 공부를 하라’고 『선요(禪要)』에서 고봉 스님도 말씀하셨지만, 이것도 역시 해석을 잘못하면 도(道)는 제대로 이루지도 못하고 병만 얻게 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한 분은 항상 법문(法門)을 자주 듣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면서 또 법문을 들으면서 이렇게 해 나가야만 바르게 공부를 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정월 일요법회 때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부처님께서 『사분율(四分律)』에 말씀하신 바도 있고, 또 동양 의학에서도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에 대해서 자상하게 말한 바가 있고, 또 인도에서나 중국, 한국에서도 옛날부터서 뇨요법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걸 시행을 해 오고 있습니다.
요새 이렇게 대기가 오염이 되고 또 우리 식수라든지 온갖 우리의 음식물이 다 이렇게 오염이 되어 가지고 나날이 환자가 늘어가는 것은—간염이라든지, 간경화증이라든지, 고혈압, 중풍, 각종 암 이런 난치병(難治病)들이 날로 치성을 하고, 그런 난치병으로 인해서 수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때에 아직도 그러한 병을 완치시킬만한 좋은 약은 끊임없이 많은 의학 박사들이 연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런 특효약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수술을 한다든지 또는 주사를 맞는다든지 또는 광선 치료를 한다든지 모다 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아직까지는 그 방법 외에는 별 적절한 방법이 없는 채 많은 사람들은 결국은 머리가 다 빠지고 그래 가지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삼천년 전에 이미 부처님께서도 비구(比丘)들로 하여금 뇨(尿)를 먹도록 말씀하신 바도 있고, 인도에는 부처님 탄생하시기 이전부터 뇨요법이 힌두교 성전에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니 이것은 뇨(尿)는 배설물이라 대변과 비슷한 그런 불결한 물로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인식해 왔습니다마는, 사실은 전혀 그 본질이 다른 것이어서 뇨는 혈액이 시간이 오래되면 새로운 피가 생겨나면서 묵은 피는 신장으로, 신장에서 방광으로 거쳐서 이렇게 소변으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소변은 대변 속에 국물이 걸러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혈액이 시간이 좀 지나면 오줌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병이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오줌은 지극히 무균(無菌)이요 청결한 것이라고 그렇게 박사들의 조사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약간 비린내가 난 것은 사실이나 분석을 해보면 사람이 먹어도 조금도 그것으로 인해서 병이 나기커녕은 오래오래 먹으면은 그 무서운 난치병들이 다 나아가고 있는 그러한 청량 음료수요, 우리의 몸뚱이 속에 우리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령스러운 약(藥)이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졌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몸뚱이 속에는 영원불멸한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담아 있고, 또 이 몸뚱이에서 배설하는 뇨(尿)는 우리의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또 그러한 병을 예방할 수 있는 그런 불가사의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저는 부처님의 경전이나 동양 의학이나 또는 많은 경험으로 전해 내려오는 말들을 통해서 스스로 이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30년, 40년 경험을 통해서 많은 병을 나은 그런 사례를 적은 책도 보았습니다마는.
아마 돈도 많고 그런 분들은 ‘이걸 어떻게 그런 것을 먹을 수가 있느냐?’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돈이 많아도 스스로 돈이 많다고 하는 생각이 없는 그러한 분, 또 실지로 돈이 없는 분,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五陰)의 이 몸뚱이 속에 자성(自性)이 들어 있는, 영원불멸한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법을 믿는 분은 이 산승(山僧)의 말을 믿고 뇨요법(尿療法 요료법)을 실천을 해서 몸뚱이가 살아계시는 동안 건강하고, 돌아가실 때 오래 앓지 않고, 오래 앓아 봤자 3일 이상을 앓지 않다고 그럽니다. 한 3일 조금 그러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좋다고 하니까 또 하루 종일 나온 것을 전부 받아서 배가 부르도록 복용을 하실 것은 없고, 조석으로 두 번 정도 이렇게 복용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첨부해서 말씀드리고자 한 것은 이걸 복용을 하시면 반드시 치유 반응이라고 할까, 효과 반응이라고 할까, 이것을 의학적 술어로는 명현 현상(瞑眩現象)이라고 합니다마는 반드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아팠던 부위가 이렇게 가려움증이 생긴다던지 또 몸에서 열이 난다던지 또는 몸살을 앓는다든지, 아주 구미(口味)가 뚝 끊어져서 밥이 먹기 싫어진다든지, 자꾸 졸음증이 막 며칠을 두고 졸음이 온다든지, 또는 설사가 난다든지 이런 등등 또 아주 무기력해 가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천근(千斤)이나 된 것처럼 무거움을 느낀다든지 이런 등등 여러 가지 현상이 그 사람의 체질과 증상에 따라서 이런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물어볼 곳이 어디냐? 한국에 뇨요법(尿療法)에 전문박사가 계신다면 그리 전화라도 해보시겠지만, 가장 가까운 것이 자기가 잘 아는 의사나 병원에 가서 물어볼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의사는 백이면 백 명이 다 ‘그 오줌, 먹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그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배설하는 것인데 그것을 다시 입에다가 먹다니. 그 큰일난다‘고. ’그것 먹어서 부작용이 일어난 거라‘고 천 명이면 천 명 그렇게 의사로서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뇨요법을 하신 분은 어떠한 부작용이 나더라도 의사한테 가서는 물어보지를 말아야 합니다.
의사는 왜 그렇게 말하냐 하면, 첫째는 그분이 ‘뇨는 대변, 소변, 땀 이런 것은 몸안에 불결한 것을 밖으로 배설하는 물질이다’ 이렇게 인식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것은 어쨌든지 자주 배설을 하고 버려 버려야 하고 자주 씻어서 깨끗이 해야지, 그것을 먹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의사로서는 당연한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현미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해 가지고 별로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의사로서는 오줌을 권장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환자들이 오줌 먹고 병원에를 안 찾아오면 그 병원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아들이나 사돈네 가운데 훌륭한 박사가 있더라도 거기 가서는 물어보실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정 물어보고 싶으시거든 뇨요법(尿療法)에 대해서 좋은 책을 간행한 분이 있습니다. 김정희씨라고 하는 서울대학 생물학과를 나오시고 교수를 지내신 그런 분이 그 좋은 책을 발간을 했습니다. 그분을 알아서 그리 문의를 하시면 아주 친절하게 일러주실 것이고, 또 그런 책을 구해서 읽으시면 또 자상하게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참선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조끔 해 보면 삭신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또 그리고 상기가 된다, 소화가 안 된다 여러 가지 그런 작용이 초(初) 단계에 있어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을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을 바르게 하면서 여법하게 화두를 불급불완(不急不緩)하게 잘 해서 자꾸자꾸 되풀이해서 참구(參究)를 해 나감으로 해서 차츰차츰 그 요령을 체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끔 해 보고는 뭣이 꿈자리가 고약하고, 무슨 무엇이 어쩌고, 가슴이 답답하고 그거 할 거 아니라고 이렇게 간단하게 이렇게 해서 자기 나름대로 자포자기를 하는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됩니다마는.
뇨요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명현 현상, 치유 반응이 나타나도 조금도 겁내시지 말고 꾸준히 해 나가면 한 달, 두 달, 석 달 내지 일 년, 이태 이렇게 해 나가면 어떠한 난치병도, 또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앓고 있던 병까지 결국은 뿌리째 뽑혀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믿으시고 꾸준히 이렇게 해 나가십시오. 그러면 평생 동안 무병(無病)하게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공해가 심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공해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체질,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을 길르는 데에는 뇨요법(尿療法)과 참선법(參禪法)밖에는 아직까지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리라
나무~아미타불~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요. 향기로운 꽃다운 풀에는 삼춘(三春)에 비가 있고, 삼춘에 비가 옴으로 해서 꽃다운 풀이 파랗게 돋아날 것이고,
단풍구월상(丹楓九月霜)이다. 붉고 붉은 아름다운 단풍을 위해서는 구월에 서리가 내려야 한다 이거거든. 삼춘에 비가 오면은 꽃다운 풀이 향그롭고, 구월에 서리가 내리면은 붉은 단풍이 아름답더라.
허심관물변(虛心觀物變)하면,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빈 마음으로 온갖 이러한 사물의 변화를 관(觀)한다면,
무사단평상(無事但平常)이다. 모두가 다 무사(無事)하고 다못 평상(平常)일 뿐이다.
국가 사회나 온 세계가 이렇게 참 온갖 종류의 전쟁이 끊일 날이 없고 이렇게 많은 인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의 이런 변화를 빈 마음으로—빈 마음이 이 무엇이냐? 떠억 화두를 들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한 마음으로 보면 그것이 바로 가장 빈 마음에 가까운 것이여. 빈 마음으로 모든 사물의 변화를 보면 그것이 바로 평상(平常)이여.
봄에 비가 와서 푸른 꽃이 돋아나는 것이나, 서리가 내려서 붉은 단풍이 지는 것이나, 여기서 저기서 좋은 일을 한 소식도 있고, 나쁜 범죄 사실이 일어나고 사람이 죽고 흥망성쇠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지만, 화두(話頭)를 드는 마음으로 이것을 보아 나가고, 화두를 드는 마음으로 처신해 나가고 처리해 나가야지, 화두를 잠시 놓치고 중생심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그 흥망성쇠 속에 자기도 휩쓸려 말려 들어가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 속에 우리도 끌려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뭣고? 화두를 아까 말씀을 드렸는데, 이미 다른 큰스님으로부터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혹 타 가지고 공부를 한 분도 계실 것이고, 또 기타 분도 있겠으나,
‘정전백수자,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으면 됩니다. ‘정전백수자가 무엇인고?’ 이렇게 하지 말고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돼.
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를 하신 분은 ‘판치생모가 무엇인가?’ 이렇게 참구(參究)를 할 것이 아니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화두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화두는 어떻게 드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것이 화두의 초점이고, 우리 의심(疑心)의 눈을 박을 곳이 바로 거기여.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가 무엇인가?’ 해 가지고 정전백수자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따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그 ’어째서?‘라고 하는 의심(疑心), 이게 중요한 거, 그것이 초점이니까 그렇게 화두를 참구하기를 바랍니다. (38분43초~1시간11분38초) (끝)
[법문 내용]
(게송) 삼계지중분요요(三界之中紛擾擾)~ /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 사회 국가 온 세계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룬다 /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 /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의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생로병사와 흥망성쇠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을 해 나가야 / 산업 사회(産業社會)의 발달로 인한 지구의 황폐, 불자(佛子)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야.
(게송) 한산정상월륜고(寒山頂上月輪孤)~ / 우리 몸안에 있는 이 소소영령한 값없는 보배, 이놈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천칠백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로 나온 화두가 바로 ‘시삼마(是甚麼)’ 화두여, ‘이뭣고?’ / 어느 화두를 가지고 공부를 해도 구경(究竟)에 가서 깨달을 때에는 이 ‘시삼마’ 화두를 깨닫게 되는 거여 / 화두 드는 법. 이론을 사용하지 말고, 다못 앞뒷이 끊어져야 하거든. 거두절미(去頭截尾), 앞뒤를 끊어 버리고 무조건하고 ‘이뭣고?~~~’ 이렇게만 해 나가는 거여.
화두를 바로 해 나가려면 첫째,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또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는 것이 참 필요하다 / 화두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한마디지만, 이 한마디 ‘이뭣고?’ 이 한마디가 무량겁 생사 근원을 뿌리째 뽑아내는 무서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힘을 가지고 있다 /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 / 공부해 나가는 데 주의할 점은 불급불완(不急不緩).
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게송) 방초삼춘우(芳草三春雨)~ /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 드는 법.
〇우리 한 몸뚱이의 생사윤회도 그렇거니와 온 나라가 온통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럽고, 온 세계가 이렇게 전쟁, 경제적인 전쟁 또는 사상적인 전쟁, 종교적인 전쟁, 이러한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편안할 날이 없는 것도 그 근원을 살펴보면 한 생각 무명(無明)을 요달(了達)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무명을 요달하지 못하면 개인의 생사윤회도 끊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전쟁도 끊어지질 않고, 한 나라의 평화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생각 일어난 것이 그것이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온 세계를 이루고, 우주 법계(宇宙法界)를 이루기 때문에 그런 것이여. ‘우주 법계’ 하면 굉장히 커서 원래부터 다 존재한 것인 줄 알고 영원한 것인 줄 알지만,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우주(宇宙)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문제 ・ 세계 문제 ・ 국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정책이다, 외교다’ 그런 것으로 해결이 될 것 같지마는 진정한 궁극적 근원적 해결은 나 한 사람의 일념(一念)을 어떻게 단속하고 어떻게 요달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고, 거기에서 요달을 해야 우주 법계 · 세계 · 국가 · 사회 · 가정 문제도 해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하면 믿지를 않고 ‘그건 관념론적인 희론(戲論)에 지내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 사람은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들어 있고, 한 생각 속에 우주 법계가 거기에 들어 있고 한 이치를 확연히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〇지금 산업 사회(産業社會)가 발달함으로 해서 모두 생활이 넉넉해진 것 같지만, 사실은 좀 편리해진 것은 사실이나 온통 인심(人心)은 각박해지고 범죄는 날로 늘어가고, 자연계는 오염이 되어 가지고 이대로 무슨 온 국민이나 인류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이대로만 계속 나간다면 백 년, 몇백 년 안 가서 이 지구상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황폐한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〇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정치를 하는 사람들 또 학자들은 그런 과학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고 정책적인 면에서 연구를 하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그러한 방향을 좀 달리해서 정말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지고, 꺼졌다가 일어나는 우리의 수없는 그 생각들,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함으로 해서 인간 본연(本然)의 자세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고 다스리지 않고—일어나는 생각, 중생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전부가 무명이요, 번뇌요, 망상이요, 탐심이요, 진심이요, 어리석은 마음인데, 그 일어나는 생각을 근원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생각나는 대로 그놈을 방종(放縱), 놔 먹여 가지고 그것을 현실화(現實化)할 때에 거기에는 죄악 범죄를 이루는 그러한 결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무엇을 한들 그 결과는 나를 해롭게 하고, 남을 해롭게 하고, 자연계를 해롭게 하고,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해롭게 하는 결과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〇법회 때마다 항상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에 거기에 선행(先行)해서 더 정성을 들이고 노력을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을 닦는 우리 참선법(參禪法), 참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〇이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몸뚱이는 부모로부터 받아 났지만, 이 몸뚱이는 부모한테 태어나기 이전에부터서 있어. 비록 우리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慾樂) 속에 육도윤회를 이렇게 계속하고 있지만,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 또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조금도 차등이 없어.
그러한 생겨난 때가 없이 존재해 온 바로 그러한 무가(無價)의 보배가 우리의 남녀노소 우리 모두의 몸속에 그놈이 타악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들어서 탐심도 내고, 진심도 내고, 어리석은 생각도 내고, 오욕락을 즐기기도 하고 별짓을 다 해도 그놈에는 증감(增減)도 없고,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〇처음에는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는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한 발 더 다그쳐 들어가면 더욱 좋다 그 말이여.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다가, 그렇게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하다가 더 간곡하게 다그쳐 들어가려면 ‘이뭣고?’ 할 때 ‘이-’ 하는데 「‘이-’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러한 뜻으로 또 다그쳐 들어가고, 거기서 다그쳐 들어가다 보면 결국은 ‘이- 뭣고?’거든. ‘이- 뭣고?~~~’
글자는 ‘이뭣고’지만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그런 뜻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 말이여. ‘이- 뭣고?’
〇뇨요법(尿療法 요료법) ; 요료법(尿療法)은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참고] '요료법'에 관한 책. ①『기적을 일으키는 요료법』 (김정희 저 | 산수야). ②『요료법의 기적』 (나까오 료이치 | 산수야). ③『의사가 권하는 요료법』 (이영미 | 산수야). ④ 『요료법의 기적』 (건강신문사 편집부).
'401~500 > (426~450)' 카테고리의 다른 글
(No.442)—1991년 3월 첫째일요법회 (35분) (0) | 2023.05.05 |
---|---|
((No.430))—1990년 12월 첫째 일요법회(90.12.02) (78분) (0) | 2021.04.07 |
(No.428) - 1990년 11월 첫째일요법회 (66분) (0) | 2019.12.10 |
(No.427)—90년 10월 첫째일요법회(90.10.07) (53분) (0) | 2018.10.22 |
(No.434)—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74분) (0) | 2018.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