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96)—1983년 부처님 개금불사 점안식(83.03.10) (62분)
(1) 약 32분.
(2) 약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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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요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부처님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이 삼신이, 삼신불(三身佛)이 계시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여. 마침내 망령된 인연밖에는 아니더라.
법신(法身)이 청정광무변(淸淨廣無邊)이라. 오직 법신불이 청정해서 넓고 갓이 없다.
삼천년 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에 들어가서 12년 동안에 고행(苦行)과 낙행(樂行) 끝에 대도를 성취하셔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는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말이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그 말이여. 중생! 이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천백억(千百億)의 화신(化身)을 동시에 나투실 수가 있어. 그 화신불을 통해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하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으로서 이 사바세계에 하강(下降)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여.
부처님께서는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하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에 대성현이시지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화신불이시다 그 말이여.
화신불(化身佛)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여의지 아니하시고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신 그러한 성현이시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밝은 달이 떠 있건만, 땅에 있는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물과 시내, 심지어는 조그마한 그릇의 접시에 떠놓은 물 한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추어 나타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그릇이나, 호수나, 물 있는 곳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고대로 나타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달이 없어지고 땅 위에 있는 물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치도 일 분 사이도 그 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하늘에 떠 있으면서 동시에 물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달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절절이 법당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을 모신 법당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도 있고, 아미타불 불상을 모신 법당도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하면 법당에다가 모셔진—쇠로 모셨거나, 또는 나무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돌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흙으로 빚어서 모셨거나 한 그러한 부처님을 다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불교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하면 법당에 모셔진 쇠나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조성해 모신 그 부처님이 참부처님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공양과 모든 음식과 과일이나 꽃과 청수를 올리고 거기다 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러한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하는 종교다’ 그렇게 힐난(詰難)하게 비난을 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서 비방을 하는 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알지 못하고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법과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이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비방하는 공덕으로 마침내는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죄(罪)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비방한 만큼의 과보를 받게는 됩니다. 비방하는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는 되지만, 다른 것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공덕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마침내는 대도를 성취해서 성불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시면 그 비방하는 그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성불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비방하는 인연으로도 성불을 하거든,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을 나무나 쇠나 돌이나 흙으로 빚어서 조성을 하고, 거기에 정성을 다해서 새로 금(金)으로 옷을 입혀 드리는 그리고 그 방석을 해 드리고 그 좌대(座臺)를, 연화대(蓮花臺)를 이렇게 조성해 앉혀 드리고, 그리고 그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이런 법당을 창건하는 데 동참하는 그러한 인연이야 얼마나 장하고 거룩하고, 그 공덕으로 삼악도에 떨어질 모든 과보가 있다 할지라도 봄눈처럼 녹아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영원한 진리(眞理)의 몸을 성취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데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인 참선을 실천 수행해서 견성성불한 그러한 바른 법을 의지하고 닦아 가는 그 공덕이야 입으로 무어라고 표현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아났으며,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며, 불법 가운데에도 불법을 믿는다 해도 방편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경법(究竟法)이요, 최상승법인 이 정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수승한 인연을 만난 것을 깊이 느끼고,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가 이만큼 유지될 때에 대용기와 대분심과 대신심을 일으켜서 가행,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대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심과 신심을 돈발(頓發)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미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당도 필요하고, 불상도 필요하고, 또 이러한 개금불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처럼 옷이 없어서 추워하시는 그러한 분도 아니요, 공양을 못 잡수어서 배가 고프신 어른도 아니며, 이런 집이 없다고 해서 풍마(風磨)와 우습(雨濕)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어른도 아닙니다. 그러한 어른도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이요 성현이신지라 우리의 정성으로 이런 법당을 마련해 드리고 이런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서 가끔 이런 좋은 옷을 입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 동남아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해마다 개금불사를 해서 새로 옷을 입혀 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개금불사를 해서 오래되어서 투색(渝色)을 하고 그을르고 벗겨질 때에 여러 해 만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개금불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정성으로 해마다 모신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금불사만 자주자주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수행(修行)을 보다 더 알뜰히 그리고 실답게 열심히 하는 것을 부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요, 부처님의 뜻을 우리는 참으로 옳게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로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전단향(栴檀香)은 어떻게 향내가 진동하던지 이 법당에서 전단향을 피면은 십리 밖에까지도 그 향내가 풍긴다고 하는 그러한 좋은 향나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전단향으로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하고, 중생의 우리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우리 보통 사람의 중생의 모양을 떠억 조성을 한다 그 말이여.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성현의 모습을 떠억 이렇게 조각을 해서 딱 모시게 될 때에 그 모양이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부처님 모습도 천 부처님이면 천 부처님이 다 모습이 각각 다르고, 관세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지장보살 이러한 보살님의 모습을 조성해 모셔도 그 모습이 크고 작고 길고 또는 둥글고 모나고, 보살님의 모습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우리 중생의 모습이 40억 인구나 되는데 그 40억 인구에 김가, 이가, 박가, 서양 사람, 동양 사람 그 각각 다른 모습을 전단향으로 조각을 해서 따악 놔났다 그 말이여.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 모습대로 다르고, 보살의 모습은 보살의 모습대로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중생의 모습대로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르다 할지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그 냄새를, 그 향내를 맡아 보면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그 불상의 냄새를 맡아 봐도 내나 그 훌륭한 좋은 전단향 냄새가 날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모습을 조각을 해서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 향내를 가서 맡아 보면 내나 전단향의 향내가 날 것이요, 눈이 째지고 코가 삐틀어지고 입이 샐쭉한 뵈기 싫게 생긴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해 놨다 하더라도 내나 가까이 가서 맡아 보면은 전단향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처음~31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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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최초에 부처님을,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이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부처님 당시에는 처음부터 이 불상을 모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느 해 여름에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이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하면은 저 도리천(忉利天)! 도리천에 거기에 태어나셔서 도리천에 계셨습니다.
그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부인께 석 달 동안을 설법(說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구익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우전왕은 부처님을 너무너무 신(信)하고 존경하는 나머지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매일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의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잡혀서 정사(政事)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돌연히 도리천에 올라가고 안 계시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그립고 뵈옵고 싶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실 때에 우전왕이 부처님께 허락을 맡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시게 되면은 저는 부처님을 하루라도 뵙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고 도저히 정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러니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신듯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리고 친견을 하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라” 이렇게 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막상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같이 모시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를 청해다가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데—어쩔 수 없어서 신통(神通)이 제일인,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에게 의탁을 해서 목련존자가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에 접해 가지고, 말하자면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 그 제일가는 조각가로 하여금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그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해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당에다가 딱 모셔 놓고, 우전왕이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0일 동안에 도리천에 있어서의 마야부인께 설법을 다 마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 전단향으로 모셔 논 부처님이 계신 대로 오시게 되니, 전단향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연화대에서 떠벅떠벅 걸어 내려오셔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을 하시는데,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이 전단향인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전단향으로 조성한 부처님께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도리천에 가 있는 동안 중생을 교화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이렇게 수고한 위로 인사를 떠억 하시고서 ‘말세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이것으로써 거룩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등상불(等像佛)을 모시게 된 최초의 동기고.
그다음에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 파사익왕이라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신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우전왕이 그렇게 전단향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을 해 모셨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순금으로, 자마순금(紫磨純金)으로 부처님을 조성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 파사익왕은 어째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냐 하면, 우전왕이 모셨으니까 샘이 나서 모신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한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불상을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 원(願)을 가졌느냐 하면, 그 부처님이 계신 도량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떠억 운집(雲集)을 해서 있으면 부처님이 그 도량에 계실 때와 부처님이 저 십 리 밖이나, 수백 리 밖에 계시고 직접 자기가 있는 도량에 안 계실 때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온 대중이 엄숙하고 숙연하고 엄정하고 제절로 그 도량(道場)에 있는 모든 사부대중이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저 먼 데 계시고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있으면 암만해도 그렇게 엄숙하지를 못하고 경건하지를 못하고 공부를 해도 공부가 그렇게 잘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황금으로 순금으로 불상을 이 법당에다가 모시고자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역시 ‘참!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허락을 하시게 되어서 순금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순금으로 모신 부처님을 갖다가 봉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바세계에 두 번째 등상불을 모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 나아가서는 이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절이 서고 이런 불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동기(動機)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目的)과 불상을 모시게 된 여러 연기(緣起)에 대해서 대충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도(外道)들이, 불교를 믿지 아니한 외도들이 불교를 잘 이해를 못하고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러한 말은 전연 비방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껍데기, 외부로 나타난 일부만을 잘못 보고서 불교의 참진리와 참뜻을 이해를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것입니다.
비방하는 공덕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고(苦)는 잠깐만 받고, 될 수 있으면 고(苦)는 받지 않고 다시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게 되기를 바래지만 인과법은 역연(歷然)해서 고를 면치 못할 것이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받고 조끔만 받고 빨리 이 정법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하야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하노라
나무~아미타불~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하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니다
나무~아미타불~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
이번 불사에 불모(佛母)는 수원 용주사 포교당, 수원 포교당의 정락 스님, 주감 스님을 청해다가 이번에 이 개금불사를 모셨습니다. 개금불사를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그렇게 잘해서 참 그렇게 이 32상(三十二相)이 뚜렷하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심 있는 불자가 거룩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사진을 찍어서 여러분께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사진은 어떻게 한 관세음보살의 상(像)이냐 하면, 어느 화가(畫家)가 강화 보문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백일기도 회향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을 했는데, 그 관세음보살로부터 붓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꿈에 친견한 그 관세음보살과 똑같이 정성을 들여서 몇 날 며칠 정성을 들여서 관세음보살을 그렸습니다. 그려 놓고 보니 너무너무 거룩하고 훌륭해... (31분41초~61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 /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 최초에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 부처님의 자비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〇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〇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〇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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