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이요. 부처님께는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 이 삼신이, 삼신불(三身佛)이 계시는데. 보신과 화신은 참부처가 아니여. 마침내 망령된 인연밖에는 아니더라. 법신(法身)이 청정광무변(淸淨廣無邊)이라. 오직 법신불이 청정해서 넓고 갓이 없다.
삼천년 전에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인도 가비라(迦毘羅) 왕국에 태자로 태어나셔서 출가하셔 가지고 설산에 들어가서 12년 동안에 고행(苦行)과 낙행(樂行) 끝에 대도를 성취하셔서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상(涅槃相)을 보이셨는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말이여.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그 말이여. 중생! 이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부처님은 천백억(千百億)의 화신(化身)을 동시에 나투실 수가 있어. 그 화신불을 통해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하게 되는 것이고, 법신불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라 하는 화신으로서 이 사바세계에 하강(下降)을 하신 것이다 그 말씀이여. 부처님께서는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원만구족하신 그러한 성현 가운데에 대성현이시지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화신불이시다 그 말이여.
화신불(化身佛)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냐? 청정법신(淸淨法身)을 여의지 아니하시고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을 나투신 그러한 성현이시다. 마치 하늘에 하나의 밝은 달이 떠 있건만, 땅에 있는 모든 바다와 호수와 강물과 시내, 심지어는 조그마한 그릇의 접시에 떠놓은 물 한 그릇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모든 물에 비추어 나타나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바다나, 강이나, 그릇이나, 호수나, 물 있는 곳에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고대로 나타납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있는 달이 없어지고 땅 위에 있는 물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치도 일 분 사이도 그 달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고대로 하늘에 떠 있으면서 동시에 물 있는 곳에는 어디나 그 달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절절이 법당에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불을 모신 법당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법당도 있고,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도 있고, 아미타불 불상을 모신 법당도 있습니다.
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 하면 법당에다가 모셔진—쇠로 모셨거나, 또는 나무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돌로 조각을 해서 모셨거나, 또는 흙으로 빚어서 모셨거나 한 그러한 부처님을 다 생각하게 되고. 심지어 불교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 하면 법당에 모셔진 쇠나 나무나 돌이나 흙으로 조성해 모신 그 부처님이 참부처님으로 그렇게 생각들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절을 하고 그러한 부처님께 공양과 모든 음식과 과일이나 꽃과 청수를 올리고 거기다 공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그러한 것을 보고서 ‘우상숭배하는 종교다’ 그렇게 힐난(詰難)하게 비난을 하고 헐뜯고 하는 그런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열어서 비방을 하는 것은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시고, 너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알지 못하고 불교를 비방하고 부처님과 법과 부처님의 거룩한 제자들, 이 삼보(三寶)를 비방(誹謗)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비방하는 공덕으로 마침내는 성불(成佛)을 할 것이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주셨습니다. 비방하는 죄(罪)로 삼악도(三惡途)에 떨어져서 비방한 만큼의 과보를 받게는 됩니다. 비방하는 죄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게는 되지만, 다른 것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불법을 비방하는 그 공덕으로 그 인연(因緣)으로 마침내는 대도를 성취해서 성불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시면 그 비방하는 그 인연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그 인연으로 마침내는 성불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비방하는 인연으로도 성불을 하거든,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을 나무나 쇠나 돌이나 흙으로 빚어서 조성을 하고, 거기에 정성을 다해서 새로 금(金)으로 옷을 입혀 드리는 그리고 그 방석을 해 드리고 그 좌대(座臺)를, 연화대(蓮花臺)를 이렇게 조성해 앉혀 드리고, 그리고 그 불상을 모실 수 있는 이런 법당을 창건하는 데 동참하는 그러한 인연이야 얼마나 장하고 거룩하고, 그 공덕으로 삼악도에 떨어질 모든 과보가 있다 할지라도 봄눈처럼 녹아지고 머지않은 장래에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영원한 진리(眞理)의 몸을 성취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데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스스로 부처님의 법에 의지해서, 바른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인 참선을 실천 수행해서 견성성불한 그러한 바른 법을 의지하고 닦아 가는 그 공덕이야 입으로 무어라고 표현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받아나기 어려운 이 몸을 받아났으며,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며, 불법 가운데에도 불법을 믿는다 해도 방편설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구경법(究竟法)이요, 최상승법인 이 정법에 귀의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러한 수승한 인연을 만난 것을 깊이 느끼고, 무상(無常)한 이 몸뚱이가 이만큼 유지될 때에 대용기와 대분심과 대신심을 일으켜서 가행, 용맹정진을 해서 결정코 금생(今生)에 대도를 성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분심과 신심을 돈발(頓發)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미련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당도 필요하고, 불상도 필요하고, 또 이러한 개금불사도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중생들처럼 옷이 없어서 추워하시는 그러한 분도 아니요, 공양을 못 잡수어서 배가 고프신 어른도 아니며, 이런 집이 없다고 해서 풍마(風磨)와 우습(雨濕)을 두려워하는 그러한 어른도 아닙니다. 그러한 어른도 아니지만 우리 중생은 너무나 위대하고 거룩한 스승이요 성현이신지라 우리의 정성으로 이런 법당을 마련해 드리고 이런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해서 가끔 이런 좋은 옷을 입혀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 동남아에 여러 나라들에서는 해마다 개금불사를 해서 새로 옷을 입혀 드린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한국은 개금불사를 해서 오래되어서 투색(渝色)을 하고 그을르고 벗겨질 때에 여러 해 만에 이렇게 가끔 이렇게 개금불사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정성으로 해마다 모신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금불사만 자주자주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참뜻을 받들어서 우리의 마음을 깨닫는 수행(修行)을 보다 더 알뜰히 그리고 실답게 열심히 하는 것을 부처님은 참으로 기뻐하실 것이요, 부처님의 뜻을 우리는 참으로 옳게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하고 급여여래보살형(及與如來菩薩形)이라. 전단향(栴檀香)은 어떻게 향내가 진동하던지 이 법당에서 전단향을 피면은 십리 밖에까지도 그 향내가 풍긴다고 하는 그러한 좋은 향나무인 것입니다. 그러한 전단향으로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하고, 중생의 우리 김가나 이가나 박가나 우리 보통 사람의 중생의 모양을 떠억 조성을 한다 그 말이여.
또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그러한 성현의 모습을 떠억 이렇게 조각을 해서 딱 모시게 될 때에 그 모양이 만면천두수각이(萬面千頭雖各異)여. 부처님 모습도 천 부처님이면 천 부처님이 다 모습이 각각 다르고, 관세음보살 ・ 문수보살 ・ 보현보살 ・ 지장보살 이러한 보살님의 모습을 조성해 모셔도 그 모습이 크고 작고 길고 또는 둥글고 모나고, 보살님의 모습도 그렇게 각각 다르고, 우리 중생의 모습이 40억 인구나 되는데 그 40억 인구에 김가, 이가, 박가, 서양 사람, 동양 사람 그 각각 다른 모습을 전단향으로 조각을 해서 따악 놔났다 그 말이여.
부처님 모습은 부처님 모습대로 다르고, 보살의 모습은 보살의 모습대로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중생의 모습대로 천 가지 만 가지로 다르다 할지나, 약문훈기일반향(若聞熏氣一般香)이여. 그 냄새를, 그 향내를 맡아 보면 부처님 모습을 조성한 그 불상의 냄새를 맡아 봐도 내나 그 훌륭한 좋은 전단향 냄새가 날 것이고, 관세음보살이나 문수보살의 모습을 조각을 해서 모셔 놨다 하더라도 그 향내를 가서 맡아 보면 내나 전단향의 향내가 날 것이요, 눈이 째지고 코가 삐틀어지고 입이 샐쭉한 뵈기 싫게 생긴 중생의 모습을 조각을 해 놨다 하더라도 내나 가까이 가서 맡아 보면은 전단향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향내가 날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처음~31분4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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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맨 처음에 어떻게 해서 최초에 부처님을,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이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당연히 알아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 부처님 당시에는 처음부터 이 불상을 모신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어느 해 여름에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 마야부인이 그때 어디에 계셨느냐 하면은 저 도리천(忉利天)! 도리천에 거기에 태어나셔서 도리천에 계셨습니다. 그 도리천에 계신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마야부인께 석 달 동안을 설법(說法)을 해 드리기 위해서 도리천에 올라가 계셨습니다.
그때에 구익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우전왕(優塡王)이라고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 우전왕은 부처님을 너무너무 신(信)하고 존경하는 나머지 부처님이 계실 때에는 매일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예배를 하고 그래야만 그날 하루의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잡혀서 정사(政事)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만큼 부처님을 따르고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고 그러다가 부처님께서 돌연히 도리천에 올라가고 안 계시게 되니 견딜 수가 없어. 너무너무 그립고 뵈옵고 싶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전단향나무로 부처님과 똑같이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실 때에 우전왕이 부처님께 허락을 맡은 것입니다. “부처님이 올라가시게 되면은 저는 부처님을 하루라도 뵙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고 도저히 정사를 할 수가 없고 그러니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성을 해 모시고, 살아계신 부처님이 계신듯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올리고 친견을 하고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라” 이렇게 허락을 맡았습니다.
그러니 막상 부처님을 조성을 할려고 하는데 도저히 똑같이 모시기가 대단히 어렵게 되었어.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를 청해다가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데—어쩔 수 없어서 신통(神通)이 제일인, 부처님 10대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에게 의탁을 해서 목련존자가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조각가에 접해 가지고, 말하자면 목련존자의 신통력으로 그 제일가는 조각가로 하여금 도리천에 올라가 가지고 부처님을 친견하면서 그 부처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조각을 해 가지고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법당에다가 딱 모셔 놓고, 우전왕이 매일같이 공양을 올리고 예배를 드리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0일 동안에 도리천에 있어서의 마야부인께 설법을 다 마치시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로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셔서 그 전단향으로 모셔 논 부처님이 계신 대로 오시게 되니, 전단향으로 모셔진 부처님이 연화대에서 떠벅떠벅 걸어 내려오셔서 도리천에서 내려오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영접을 하시는데, 어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이 전단향인가를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그 전단향으로 조성한 부처님께 말씀을 하시기를 ‘내가 도리천에 가 있는 동안 중생을 교화하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소’ 이렇게 수고한 위로 인사를 떠억 하시고서 ‘말세 중생을 교화하는 데에 이것으로써 거룩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수기(授記)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등상불(等像佛)을 모시게 된 최초의 동기고.
그다음에는 파사익왕(波斯匿王)이, 파사익왕이라 하는 임금님이 계셨는데 그분도 신심이 돈독했어. 그래서 ‘우전왕이 그렇게 전단향으로 불상(佛像)을 조성을 해 모셨다’ 그 말을 듣고 자기는 순금으로, 자마순금(紫磨純金)으로 부처님을 조성을 하기로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 파사익왕은 어째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냐 하면, 우전왕이 모셨으니까 샘이 나서 모신 것이 아니고, ‘아! 부처님을 조성해 모시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이다’ 한 것을 철저히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불상을 모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불상을 모실려고 하는 원(願)을 가졌느냐 하면, 그 부처님이 계신 도량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떠억 운집(雲集)을 해서 있으면 부처님이 그 도량에 계실 때와 부처님이 저 십 리 밖이나, 수백 리 밖에 계시고 직접 자기가 있는 도량에 안 계실 때와는 천양지차이(天壤之差異)가 있다 그 말이여.
부처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 온 대중이 엄숙하고 숙연하고 엄정하고 제절로 그 도량(道場)에 있는 모든 사부대중이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이 저 먼 데 계시고 안 계시고 자기들끼리만 이렇게 있으면 암만해도 그렇게 엄숙하지를 못하고 경건하지를 못하고 공부를 해도 공부가 그렇게 잘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서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고서 ‘황금으로 순금으로 불상을 이 법당에다가 모시고자 하니 허락을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부처님께서도 역시 ‘참!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과연 그렇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허락을 하시게 되어서 순금으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 하는 『금강경』을 설하신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순금으로 모신 부처님을 갖다가 봉안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바세계에 두 번째 등상불을 모신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인도를 비롯한 동남아 각국, 나아가서는 이 중국으로 한국으로 일본, 오늘날에는 세계 각국에 불교가 들어가서 절이 서고 이런 불상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동기(動機)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目的)과 불상을 모시게 된 여러 연기(緣起)에 대해서 대충 잘 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도(外道)들이, 불교를 믿지 아니한 외도들이 불교를 잘 이해를 못하고서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러한 말은 전연 비방을 받을 만한 근거가 없는 소리인 것입니다. 껍데기, 외부로 나타난 일부만을 잘못 보고서 불교의 참진리와 참뜻을 이해를 못하고 비방을 하는 것이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 것입니다. 비방하는 공덕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고(苦)는 잠깐만 받고, 될 수 있으면 고(苦)는 받지 않고 다시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하게 되기를 바래지만 인과법은 역연(歷然)해서 고를 면치 못할 것이나, 우리 불자(佛子)의 입장에서는 될 수 있으면 가볍게 받고 조끔만 받고 빨리 이 정법에 귀의하게 되기를 바랠 뿐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자비(慈悲)와 지혜(智慧)! 오직 우리가 바라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요, 부처님의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도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자비와 지혜로써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개금불사(改金佛事)를 봉행하는 목적도 구경(究竟)에는 지혜와 자비를 증득하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와 자비를 증득허겄게 하는 그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개금불사에 동참(同參)하신 설판재자(說辦齋者)와 동참하신 모든 불자와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사부대중, 그리고 우리가 몸담아 있는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모든 중생들까지라도 이 개금불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하루라도 빨리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정법에 귀의해서 대도를 성취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입니다.
불사(佛事)는 그래서 아무리 작은 불사라도 버려서는 아니될 것이고, 그래서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다. 이 불사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한 의도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어느 절에 가면, 이 불상(佛像)을 하는데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얼마를 시주하고, 누가 대들보를 시주하고, 누가 기둥을 시주하고, 누가 주춧돌을 시주하고, 누가 이 계단을 시주를 하고, 누가 이 종을 시주했다고 크게 돌에다 새겨서 그 층계마다 이름을 새겨 논 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는 불사를 성취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러한 이름을 새기는 뜻을 잘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마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일러주는 그러한 방편은 일찌감치 졸업을 해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 학생에게는 유치원 학생에게 알아듣게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치원 학생에게는 그렇게 말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에게도 유치원 학생에게 일러주는 말과 같은 말이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法)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대상에 따라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무(無)라 설하게 되고,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유(有)를 설하게 되고, 유(有)와 무(無)에 집착하는 사람은 비유비무(非有非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요, 비유비무에 집착하는 사람은 시유시무(是有是無)를 설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법문이 때로는 유(有)라 설하고, 때로는 무(無)라 설하고, 때로는 비유비무(非有非無)라 설하고, 때로는 시유시무(是有是無)라 설하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을, 법(法)의 진리(眞理)를 확연히 깨달은 사람은 때에 따라서는 유, 때에 따라서는 무, 때에 따라서는 비유비무, 때에 따라서는 시유시무라,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설하게 될 것이요, 어떻게 법(法)을 설한다 하더라도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말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유나 무 또는 그 중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바로 그 낭연독존(朗然獨存)한, 말로 설할 수 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계합(契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相)을 통해서 상 없는 도리에 눈뜨게 하고, 말을 통해서 말 없는 경지에 계합하게 하는 이것이 불사(佛事)요, 법(法)인 것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팔만사천 법문이 오직 이 한 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무주상이라야 그 공덕이 영원한 것이요, 한량없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용화사에서는 어떠한 큰 불사를 하더라도 그 불사에 많은 시주(施主)를 한 사람이나, 정성으로 조끔 시주를 한 사람이나, 그렇게 시주를 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사람이나 그 간절한 정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그 시주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를 아니한 것입니다. 자기가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천만 원도 하고, 백만 원도 하고, 십만 원도 하고, 만 원도 하고, 오천 원도 하고, 천 원도 하고, 오백 원도 하고, 그것도 없는 사람은 빈 몸으로 와서 부처님께 간절히 절 한 자리만 하더라도 부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다 똑같이 마정수기(摩頂授記)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사를 해도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아무개 보체’ 하고 그렇게 낱낱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축원(祝願)을 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미 이름을 어디다 써서 붙이거나, 이름을 대중 앞에 공개를 하게 되면 이미 한 상(相)이 나타난지라 무주상(無住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 무주상의 뜻을 여러분께 깊이 인식시켜 드리기 위해서 이름을 밝히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름을 밝히면 그때 당시에, ‘아! 아무개가 그렇게 했구나. 아! 내가 한 것을 모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구나’ 그때 찰나는 조끔 흐뭇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잠깐 지나고 나면 그것으로써 화면이 잠깐 나타났다가 없어지듯이 환상이 잠깐 나타났다 없어지듯이 아무 실다운 것이 남지를 않는 것입니다. 무주상이 얼마나 거룩하고 훌륭한 것을 여러분은 잘 인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내 이제 이 길상수(吉祥水), 이 감로수(甘露水)를 가지고, 관주일체중생정(灌注一切衆生頂)이다. 일체중생,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 여러분께, 여러분 이마에 전부 뿌려 드렸습니다.
진로열뇌실소제(塵勞熱惱悉消除), 이 물방울, 감로수를 여러분께 뿌려서 여러분의 무량겁으로 지어 온 모든 생사(生死)의 진로(塵勞)와 모든 업(業)과 뜨거운 번뇌(煩惱)와 이런 것들이 눈 녹듯이 다 녹아져 없어졌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타소속법왕위(自他紹續法王位)이라. 이 불사(佛事)에 동참하신 분이나 설판재자(說辦齋者)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부대중과 이 육도 법계(六途法界)에 있는 모든 중생 한 사람 남김없이 모두가 다 법왕(法王)의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게 되어지이다.
이번 불사에 불모(佛母)는 수원 용주사 포교당, 수원 포교당의 정락 스님, 주감 스님을 청해다가 이번에 이 개금불사를 모셨습니다. 개금불사를 너무너무 정성스럽게 그렇게 잘해서 참 그렇게 이 32상(三十二相)이 뚜렷하게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어느 신심 있는 불자가 거룩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사진을 찍어서 여러분께 보시를 하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이 사진은 어떻게 한 관세음보살의 상(像)이냐 하면, 어느 화가(畫家)가 강화 보문사에 가서 백일기도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백일기도 회향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친견을 했는데, 그 관세음보살로부터 붓 한 자루를 받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꿈에 친견한 그 관세음보살과 똑같이 정성을 들여서 몇 날 며칠 정성을 들여서 관세음보살을 그렸습니다. 그려 놓고 보니 너무너무 거룩하고 훌륭해... (31분41초~61분22초) (끝)
[법문 내용]
(게송)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법신불(法身佛)이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화신으로서 정반왕에 (아들로) 태어나셔서 팔상(八相)을 보이셨다. 사바세계에 고해에 빠진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화신불로 태어나셨다 / 천백억 화신(千百億化身).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에 청정법신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佛像)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 /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게송)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 /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 최초에 부처님의 불상(佛像)을 모시게 된 인연와 불상을 모시는 목적. 부처님의 자비 지혜에 의해서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고해(苦海)에서 벗어나서 해탈도를 증득하게 하는 그 거룩하고 원대한 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 무주상(無住相)!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 (게송) 아금지차길상수(我今持此吉祥水)~.
〇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에 한(限)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 화신(化身)으로 나타나 계시냐 하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부처님 한 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중생(衆生)—착한 중생이나 어리석은 중생이나, 죄 많은 중생이나 복이 있는 중생이나, 어리석거나 지혜 있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중생, 심지어는 축생(畜生), 꿈적꿈적한 벌레에 이르기까지라도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의 달빛은 고루고루 빠짐없이 강림(降臨)해 계신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가비라 왕궁에 하강하신 목적이 「모든 중생들 낱낱이 진여불성(眞如佛性), 법신불이 강림해 계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팔만사천 법문 구구절절이 다 그 도리(道理)를 설파(說破)하신 것이며, 그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〇우리 용화사 법당에는 전강 조실 스님께서 이 송담(松潭)에게 명(命)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을 조성해서 모시도록 명을 하셨습니다. 산승(山僧)이 본래 불상(佛像)을 만들고 탱화를 그리는 그런 전문 화공(畵工)이 아니지만 전강 조실 스님의 명령에 의해서, 조실 스님의 법력(法力)의 호념(護念)에 의해서, 정성을 다해서 이 부처님을 조성을 했습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이 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개금(改金)을 한 번 젓숩고, 그리고 이번에 두 번째 개금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왜 여러 부처님 가운데에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모시게 되었느냐? 법신불(法身佛)이라야만 정말 우리가 영원히 받들어 모셔야 할 부처님 가운데에 가장 근원적인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육체를 가진 이 석가여래(釋迦如來)를,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부처라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정말 부처님은 법신불, 법신여래야말로 영원한 부처님이시다. 이 화신(化身)인 화신불을 통해서 너희들은 영원한, 그리고 구원(久遠)의 참부처님을 너희들은 받들어 모시고, 그 부처님이 바로 이 우주에 가득차 계시고 동시에 너희들 낱낱이에도 그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는 도리를 너희들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부처님에 대한 법(法)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불을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는 모시게 된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하는 선방(禪房)을 이 용화사에 창설을 하시고 전강 조실 스님께서 20여 년 간을 법을 펴셨는데, 선방을 창설을 해 가지고 선원을 경영하는 본의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성현(聖賢)의 모습은 거룩하고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와 삼천위의(三千威儀)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을 고루 갖추셨기 때문에 부처님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일 것이요. 중생(衆生)의 모습은 32상도 갖추기 못하고, 80종호도 갖추지 못해서 그 업(業)으로 인해서 삐쭉하고 뾰족하고 입이 실쭉 이그러지고 저리 째지고, 눈이나 코나 입이나 두골이나 그 업에 따라서 태어난 모습이라, 무량겁을 두고 각기 자기가 지어온 그 업(業)에 의해서 그 과보(果報)로 받아난 몸뚱이라 얼마나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억이면 억, 그렇게 모습이 각각 다르다 그 말이여.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법신(法身), 진여불성(眞如佛性)이야말로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보살이나, 성현이나 범부나 똑같다 그 말씀이여.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불상(佛像), 전단향나무로 조성한 중생(衆生)의 모습! 비록 그 모습은 다르지만, 그 조각을 한 그 본바탕 전단향나무, 본바탕은 전단향나무로 조각을 했다면 그 향내는 마찬가지듯이 비록 각각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서 타고난 이 몸뚱이 모습은 다르지만, 그 몸뚱이 안에 있는 진여불성은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조금도 차등이 없는 법이다 이 말씀이여.
부처님이 삼천년 전에 이 세상에 태어나신 근본 의도가 「우리 중생 가운데에 있는 그 진여불성은 바로 이 32상과 80종호를 갖춘 나의 진여불성과 너희들의 진여불성이 조금도 차등이 없다. 그러니 여래가 설한 이 법에 의지해서 하루 빨리 너의 진여불성을 깨달라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라. 너희들도 나와 조금도 다름없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오늘날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무서운 고해에 빠져서 헤매고 있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탄생을 하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한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고, 너무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처님을 이렇게 쇠로, 나무로, 돌로, 흙으로 정성스럽게 조성을 해서 이렇게 모시게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〇법당을 짓는 불사나, 불상를 새로 조성하거나 개금불사를 하거나 또는 범종불사를 하거나 또는 선방을 짓거나, 어떠한 불사라도 구경(究竟)의 목적은 오직 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자각(自覺) ・ 각타(覺他)・ 각만(覺滿)! 스스로 깨닫고, 모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그래 가지고 이 우주 법계에 깨달음으로써 가득차게 하는 자각 ・ 각타 ・ 각만의 대목적 이외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불사하는 공덕으로 크고 작은 모든 소원을 성취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요달(了達)하게 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달성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소원은 그 가운데 다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큰 목적을 달성을 할려면 첫째는 무주상(無住相)이라야 한다 그것입니다. 무주상! 상(相)에 머무르지 아니한다. 무심(無心)으로 보시를 하고, 무심으로 불사를 해야 제일가는 거룩한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 이것입니다.
오늘은 경신년(庚申年)이 처음으로 시작하는 날입니다. 기미년(己未年) 12월 19일이지마는, 새해 경신년이—절후(節候)로써는 오늘이 입춘(入春)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경신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경신년, 달력으로는 경신년 정월 초하루부터 경신년이라고 하지마는 절후(節候)로는 오늘부터 경신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이 되어야만 정식으로 새해로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일에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잘못이 있었는가? 그것을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그래 가지고 ‘새해부터서는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이신 분들 가운데에는 경신년에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에 든 분은 '삼재(三災)가 들었다' 해 가지고 입춘에 동참불공(同參佛供)을 하면은 그 삼재를 소멸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로 참여하신 분도 적지 아니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것도 또한 좋습니다. 삼재를 소멸하기 위해서 오셨건, 백 가지 재앙을 소멸하시기 위해서 오셨건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삼재(三災)는 범띠하고 말띠하고 개띠가 새해 경신년(庚申年)에 들삼재고, 그렇다 해서 이 대단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모다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경험을 통해서 보면은 삼재가 들면 내년부터서 내후년, 저멩년까지 3년 동안 들삼재 · 앉을삼재 · 날삼재 해서 3년을 갖다가 범띠 · 말띠 · 개띠는 삼재가 듭니다마는, 삼재 때 가만히 증험을 해보면 정말 걱정할 만큼 여러 가지 점에 있어서 병을 앓는다든지, 무슨 관재구설(官災口舌)이 있다던지, 무슨 사고를 당한다던지, 그 재수가 없다든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근심 걱정거리가 있어왔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삼재가 안 들은 사람은 그러면 전혀 그런 일이 없냐?’ 하면은 그렇지도 않건마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당하지 아니하느냐’ 이렇게 생각드는 것도 우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있어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섞어져 있는 그런 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가 든 사람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더욱 조심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혹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가볍게 피해를 입지 않고 잘 넘길 수가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이리 생각하고 노력을 하는 것은 그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삼재(三災)를, 어째서 그 삼재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이냐? 인(寅) · 오(午) · 술(戌) 생은 경신년부터서 3년간 삼재가 드는데, 이러한 사상은 그 동양의 음양학설, 내나 사주(四柱)도 음양학설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따져서 삼재가 든다. 지금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 있어서는 이 음양오행을 수천 년 전부터서 그것이 아주 생활 속에 젖어 들어서 사주나 관상(觀相)이나 모든 점(占)이라든지 그런 것이 전부 음양오행으로 추리해서 그래 가지고 운명을 판단하는 그러한 방법입니다.
우리 불교를 믿는 사람은 ‘그까짓 거 무슨 소용이 있느냐?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지, 무슨 그 사주가 아무리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러냐?’ 하고 그런 것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그렇게 나가는 분도 있습니다. 정말 정법(正法)을 철저히 믿음으로 해서 삼재가 되었건 오재가 되었건 그런 것을 문제하지 아니하고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이나, 다못 이 정법 하나 믿는 그 마음으로만 온전히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 이상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근데 우리의 생활 습관상 또 그런 것이 너무너무 오랫동안 조상 때부터서 그러한 음양오행설이 아주 사무쳐 들어와 있어 가지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입춘(入春)이면은 한국에 방방곡곡의 모든 사찰에는 그 입춘을 기해서 동참 기도와 불공을 드리고 그리고 업장(業障)을 소멸을 빌고, 소원성취를 빌고 그럽니다.
그런데 모든 재앙은 사실 과거(過去)에 우리가 어떻게 지었느냐? 그리고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것이 원인이 되어 가지고 우리의 장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지금으로부터 1초 전이 전부가 과거에 들어갑니다마는, 그 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서, 그 원인을 ‘어떻게 해서 나에게 이러한 팔자가, 운명이 전개되는가?’를 그 원인을 모르고서, 당장 그것을 없이 하기만을 바래고, 그걸 없이 하기 위해서 점(占)을 친다던지, 갖은 푸닥거리를 한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주고 무당한테 그 부적 같은 것을 사 가지고 몸에 지닌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소멸하지 아니하고서는 그것이 소멸 당하지 않기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그 비린내 나는 생선을 엮던 그 새끼토막 같은 것을 몸에다 두르고 다니면서, 몸에서 비린내 안 나기를 소원해 봤자 그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첫째, 몸에 비린내가 안 나게 할려면 생선을 묶었던 그 새끼를 몸으로부터 풀어서 버리고 그리고 몸을 깨끗이 닦음으로 해서 비린내는 내 몸에서부터서 안 나게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나의 마음속에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고 승화(昇華)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없이는 우리의 앞날에 좋은 팔자와 운로(運路)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 업장을 소멸하는 법이 십선법(十善法)을 닦는다던지 또는 사성제(四聖諦)법을 닦는다던지 12인연법 · 육바라밀(六波羅蜜)법 · 염불(念佛) · 독경(讀經) · 기도, 얼마든지 우리 불법(佛法) 가운데에는 팔만사천 가지의 그러한 묘한 법이 있습니다. 어느 법(法)이고 하나도 버릴 법이 없고, 어느 법이고 올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닦는다고 하면은 우리의 업장을 소멸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法)을 다 닦는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아, 어느 법이 그 가운데 좋고 나쁘고 해야 그것을 하지, 다 좋은 법인데 어떻게 어느 법만을 추려서 하고 어느 법은 안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두 번 해보고 별 효과가 없으면, 기대할 만큼 효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방법을 좀 해보고, 그걸 좀 얼마 동안 해보았지만 별로 신통치 아니하면 또 그걸 버리고 또 다른 법을 좀 해보고, 이렇게 해서 많은 세월 동안을 그런 식으로 갈팡질팡을 하면서 혹 뜻대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되면 좋아하고 안 되면 낙담(落膽)을 하고 비관(悲觀)을 하고 그러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온 분이 적지 아니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용화선원에서는 부적(符籍)도 드리지도 않고, 언제나 다른 법회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일러드리는 말은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妙法門)이, 다 그것을 한데 모아서 녹여 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骨髓) 법문을 추출을 해 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觀)하는 한 법(法)이 모든 행(行)을 다 포섭(包攝)을 한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參禪) 공부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하는 것은—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 데에는 익숙합니다. 물질적인 것이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서 여태까지 무량겁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소유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 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이 도래(到來)하면 나로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폐(語弊)를 면치 못합니다마는 부득이해서 그러한 말을 빌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나, ‘나’라고 하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하면 이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사지(四肢)가 있는 이 육체를 가지고 '내 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마는, 이 몸뚱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가지고 그래 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 줄 알고, 욕하면 성낼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그것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滅)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한 ‘한 물건’이 이 몸뚱이를 주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한다’ ‘재앙을 소멸을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바로 알아야만 그 업장을 소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굿을 하고—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도 말씀이 계셨습니다마는, 부적을 몸에 많이 지니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고 해봤자, 우리의 업장(業障)이 그러한 방법으로써 소멸(消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경우 일시적으로는 우선한 것 같이 느낄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 시일이 지나면 다시 또 일어나고, 또 많은 돈을 들여 가지고 또 푸닥거리를 하면 조금 우선함을 느끼고, 이렇게 하는 가운데에 점점점점 깊이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그러한 삿된 믿음에 빠져 들어간 사람이면 백이면 백, 다 집안에 재앙이 끊일 날이 없고 잡귀가 득실거리고, 그래 가지고 정신까지도 점점 해를 거듭할수록 삿된 소견에 빠져 가지고 헤어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기서 나오고 싶어도 무서운 협박과 엄포 때문에 겁이 나서 발을 빼지를 못한 사람이 상당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을 바르게 다스려서 영원히 그러한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기타 수분이라든지 그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 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드러나다시피 하는 상태에서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 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 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근본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엽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의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든지, 부부간에 문제라든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의 문제라든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든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하고, 내가 내 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業)의 종자(種子)를 갖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 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그리고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적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 하면은 다 각기 자기 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 뿐 그 실상(實相),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놈이 그놈을 가지고 그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단 일분일초도 떠날 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취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 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고 해도, 1년 2년 3년 10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취가 없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法床)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 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 하면은 그만큼 한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 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 텐데 석 달씩, 여름 석 달, 겨울 석 달, 집안을 갖다가 떠나서 선방에 가서 석 달씩 그렇게 공부를 하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 가지고 아무것도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그다음 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 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네들도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할려고 하시고 그럴 텐데, 만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 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 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않으면 다 써버리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 달 내 자고 싶은 잠도 다 못 자고, 먹고 싶은 것도 다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 것은 없지마는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녹음 끊김)...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여기에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 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 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 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 업(業)의 자루 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내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 봤자 빈 자루입니다. 빈 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 달 동안 공부를 하고 집에를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루인데, 우주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 다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자루는 차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이 세 가지 종류에 업으로써 지은, 수확한 종자(種子)를 그 속에 탁 가뜩 담어 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種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 나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善業) · 악업(惡業) · 무기업(無記業) 종자가 그때그때 터져 나온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한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三不能]이 있는데, (첫째)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濟度)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이 삼계(三界)의 대성현이시고, 신통(神通)이 구족(具足)하신 그러한 대성현이시지만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는 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 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 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다 싹이 터서 다 발아(發芽)를 해 가지고 다 나가버리면 언젠가는 그 종자(種子)가 동이 날 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 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갖다가 또 저장하게 됩니다. 업장(業藏) 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 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고 합니다. 현행—'나타날 현(現)' 자, '행할 행(行)' 자. 종자가 밖에 어떠한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現行)을 합니다. 싹이 터 나옵니다. 싹이 터 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 있는 어떠한 종자를 갖다가 훈(薰)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갖다가 이 또 찜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자가 싹이 터 나오면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갖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우리의 업의 종자가 한없이 터져 나오고 한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 그러한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福)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하면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罪)를 지은 바가 많으면 또 지옥에 가기도 하고. 육도윤회를 끊임없이 계속하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한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갖다가 다 없앨 수가 없다 이것입니다.(처음~39분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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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겁 쌓아 놓은 업(業)의 종자(種子)를 녹여 없애는 참선법>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參禪法)입니다.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빨간 꽃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나,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한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한 일에 우리의 상념(想念)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하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갖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한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었을 때, 그때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이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 나갈 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새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짖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뭣고?' '이뭣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다 보면, 과거에 그 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心思)가 사나와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하면 거기에까지 신경질을 부리게까지 됩니다. 참선한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 생각이 났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45분1초)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녹음 끊김, 4초 묵음. 중복)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를 그렇게 살고, 이틀을 그렇게 살고, 한 달을 그렇게 살고, 1년을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사실 아까 말씀드리기를 석 달을 해봤자 아들딸 · 손자 · 영감님께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마는 이렇게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가고 하루하루를 다져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다져 나가면,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또는 주위 사람들이 볼 때 모든 점에 있어서 사람이 개선되어 가고 개조되어 가고 승화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參禪)을 하는 사람은 오직 깨달음을 향해서 목적을 하고 닦아가는 것이지마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빨리 얻어지는 효과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까짓 나쁜 성격이 원만해지고, 옹졸했던 성격이 관대해지고, 이러한 것이 참선의 목적은 아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 나가면, 구하지 아니해도 저절로 그러한 인간에 있어서 존경받을 수 있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성격이 개선되어 간다면 그것도 또한 대단히 소중한 수확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옹졸한 성격, 비열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때문에 얼마를 자기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가치 없는 인간을 만들고, 남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러한 일이 우리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를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시부모로서, 며느리로서, 동생으로서, 형으로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뭣고?' '이뭣고?'로써 생각을 돌려나가는 길을 행하지를 못하고, 사소한 일로 해서 두 번째 생각 세 번째 생각으로 계속 올바르지 못한 중생심을 갖다가 방자히 해 가지고, 자기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까지 언짢게 만드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우리는 생활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부적(符籍)을 사러 가실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정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면 부적을 몇 장을 사서 가지셔도 괜찮습니다만, 그러나 이 공부를 철저히 하면 그러한 부적을 한 장도 갖지 않더라도 모든 재앙은 소멸이 되고, 있는 재앙을 소멸하는데 끄친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앙이 속에서 나오는지 밖에서 다가오는지 그걸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만났을 때, 먼 데서 가까이에서 만났을 때 그것이 물질적인 문제가 되었건, 정신적인 문제가 되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었건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그러한 조건을 만났을 때에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보다 더 행복한 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뭣고?' 한 번 함으로써 재앙을 뒤집어서 복(福)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 업식(業識)을 돌려서 보리심(菩提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서 무량겁(無量劫)이 되는 것입니다. 1원 1원이 모여 가지고 백 원이 되고, 1원 1원이 많이 모이면 천 원도 되고 백만 원도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여 가지고 무량겁이 되고, 1초 1초가 모여 가지고 한 달 · 1년 · 백 년 · 무량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는 잔돈을 애낀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십 원짜리 백 원짜리를 돈으로 알지 않고 막 풀풀풀풀 막 함부로 합니다마는, 참으로 부자는 큰돈은 갖다가 유용하게 몇천 만원씩 탁! 참 희사(喜捨)도 하고 기부도 하고 그렇게 쓰면서 10원 20원 굉장히 피 나오게 애끼는 것을 나는 봤습니다.
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연히 이 생각 저 생각,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가고, 한 달이 지나가고,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성이 날 때도 '이뭣고?' 슬플 때도 '이뭣고?'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걸어가건, 댁에 돌아가셔서 방을 닦건, 밥을 지으시건 빨래를 하건, 앉었건 누었건, 이야기를 하건 상관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남편이 속상한 소리를 해도 '이뭣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이뭣고?' 자식이 불효한 짓을 해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마음을 근본으로 해서 모든 생활을 지어나가라 이것입니다.
근본이 다 '이뭣고?'로써 중심이 딱! 잡힌 가운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발로 걸어가고, 이렇게 된 사람은 뿌리가 제대로 박힌 나무와 같아서 그 나무는 싱싱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뭣고?'를 하지 아니하고 밤낮 눈으로 보는 데에 끄달리고, 귀로 듣는 데에 끄달리고, 이 생각 저 생각 자기 딴은 가정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도록 애를 쓰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뭣고?'를 아니한 사람은 뿌리는 방치해 버리고, 그 가지에 이파리에 벌레를 떼어주고 소독을 치고 물을 뿌리고 온갖 노력을 다 해봤자, 뿌리가 드러나 갖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나무는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고, 일도 안 하고, 착한 일도 안 하고 그래도 괜찮으냐?' 그게 아닙니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이겁니다.
참선을 함으로써 우리 근본 마음을 바로잡고 바로 닦아 나간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집안에 가면 집안에서 부모에게 할 일, 남편에게 할 일, 자녀들에게 할 일, 해야 할 살림, 자기 자신을 위한 일, 얼마든지 있습니다. 절에 왔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습니다. 근본이 서 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불사(佛事) 아닌 것이 없고, 모든 일이 다 좋은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근본이 서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한 것이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습니다. 죽도록 한다고 하는 것이 헛일만 하게 되고, 죽도록 애써서 한다는 것이 속상할 일만 하게 되고, 후회할 일만 하게 되고, 한탄해야 할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참선 '이뭣고?'를 열심히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업(業)의 원인을 해결을 해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나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은 내가 지어 가지고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도록 지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속에 원인을 잘 다스려 놓으면, 영락없이 재앙으로 나한테 다가져 올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나에 가까이에 오면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 미묘한 그 법을 스스로 느끼고 정법의 고마움과 신기하고 묘한 것을 뼛속에 사무치도록 느끼신 분이 많이 계실 줄 생각합니다.(58분23초)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아주 그 형제는 대단히 합심을 해서 장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이 한마을에 사는 아주 가문이 좋은 부자집 따님이요 아주 인물이 좋은 규수(閨秀)하고 눈이 맞아 가지고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혼을 해 놓고 장사일로 해서 수백 리 멀리 떨어진 도시로 떠났습니다. 가 가지고 그 사업 관계로 해서 여러 해를 고향으로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통신이 있어서 편지도 할 수가 있고 전화도 할 수가 있었지만, 삼천년 전에는 그러한 통신수단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사업에 몰두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연락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 규수 댁(宅)에서는 아! 신랑이 먼 데로 가 가지고 소식이 없으니 딸은 자꾸 나이만 먹고 너무너무 기다리다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 규수의 부모는 '차라리 그 형이 소식이 없으니까 동생을 갖다가 사위로 맞이하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냈습니다. '동생이 인물도 더 좋고 성격도 좋고 그러니 차라리 그 동생을 사위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하고 동생한테 사위가 되어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동생이 말하기를 "그럴 수가 있습니까? 형님이 멀리 가셨다가 지금 사업상으로 못 오시는데 어떻게 제가 형수 될 분하고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건 당치않합니다. 지금 형님이 살아계시는데 그럴 수가 있느냐?"고 아주 딱 끊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참! 그 동생이 하는 말 들어보니 또 말은 옳은 말이다 그 말이여.(61분13초)
그래서 또 며칠을 두고 연구를 한 결과, 어떤 그 장사하는 사람을 시켜 가지고 돈을 주어서 '그 형이 거기서 그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실패가 되어 가지고 병이 나서 죽었다' ... (녹음 끊김. 8초간 묵음) ...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그 규수의 부모가 동생을 찾아가서 "아! 인자 당신 형이 병들어서 죽었으니 인제는 내 사위가 되어줘도 되지 않겠느냐?" 찝찝하니 생각하고 응하지를 않다가 몇 달이 지내갔습니다. 계속해서 사위를 삼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고 간곡히 교제를 해 가지고 결국은 그 동생이 형수 될 그 규수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을 해 가지고 포태(胞胎)를 했습니다. 포태를 했는데 갑자기 그 형이 돌아온다고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것 참 큰 야단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산파를 시켜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 가지고 그 포태된 애기를 갖다가 유산을 시켰습니다.
그래놓고 있는데 그 형이 과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맨 처음에 그 아내가 될 규수를 찾았는데, 벌써 그때는 형이 근처에 와서 ‘그 규수가 자기 동생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당장 그 동생과 그 자기 아내가 될 여자를 갖다가 한칼로 요절을 내서 죽일라고 칼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그런 소문을 듣고 동생은 이웃나라로 피해 갔습니다.
피해 가지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무슨 형수 될 규수가 욕심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형님이 돌아가셨다'고 그래서, 참 형님하고 약혼만 해놓고 결혼도 못하고 병이 나서 죽게 된 규수가 딱하고, 동생으로서의 그 형이 저지른 일을 수습해야겠다고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명감에서 그 규수하고 결혼을 한 것이, 아! 이렇게 형님이 살아오고 보니 참 변명할 길도 없고 무슨 사과할 수도 없고, 죽인다고 칼을 가지고 찾으러 다니니 그거 기가 맥히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웃나라로 피신을 우선 해 가지고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되었는데, 그래 가지고 이 스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출가를 했기 때문에 정말 생명을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 가지고 도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계속해서 그 동생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런 결과 이웃나라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가지고 어느 산에서 도(道)를 닦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활을 잘 쏘는 포수를 갖다가 매수(買收)를 해 가지고 차마 형으로서 동생을 갖다가 더군다나 출가한 동생을 자기 손으로 죽일 수가 없어서 그 포수로 하여금 그 동생을 죽이면 후한 상을 준다고 이렇게 해 가지고, 그 포수하고 둘이 가 가지고 '포수는 저만큼 숨어 있으라'고 그러고, 자기는 동생한테 찾아갔습니다.
동생은 반가워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인간적으로 대단히 딱한 그런 상황이었지마는, 이미 도를 얻은 스님이라 자기의 죄를 억지로 피할라고 하지도 않고 또 웬수로 상대해 가지고 형을 갖다가 상대하지도 않고 순수한 평범한 마음으로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아주 그 속의 마음을 감추고 반가운 듯이 인사를 하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난 처음에는 너를 원망을 했지만 너를 사실은 만나고 싶었다" 이런 얘기 등등 하고 있을 때 약속을 했던 그 포수가 그 동생을 겨냥해 가지고 활을 쐈습니다. 아! 그 활 잘 쏘는 사람이 활을 쐈는데 그 활이 빗나가 가지고 형 모가지에 맞어 가지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그 동생은 그 형을 시체를 거두어서 잘 장례를 지내주고 천도(薦度)를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원한을 깊이 먹었던지 그 형은 죽어 가지고 독사(毒蛇)가 되었습니다. 독사가 되어 가지고 그 동생의 공부하고 있는 그 토굴에 문턱 밑에 가서 가만히 숨어서 컸습니다. 그래 가지고 언젠가 몸에 독(毒)이 오를 때를 기다려서 독이 몸에 잔뜩 어리면은 그 동생이 문으로 나올 때 탁 물어 버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문을 열고 닫고 하는 그 좀에 문에 치여 가지고 독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 아! 그 복수를 할려고 그랬던 것이 그 문에 치여 가지고 참 본의 아니게 죽게 되니까 더욱 독이 나 가지고 독거미가 되어 가지고 천장에 가서 붙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컸습니다. 커 가지고 아주 독이 올랐을 때 천장에서 내려와 가지고 그 공부하고 있는 동생을 갖다가 물어서 죽게 했습니다.
그 뒤에도 또 그 동생은 어떻게 되고 형은 어떻게 되고 한 얘기가 장황이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해서 친구 간에 웬수가 되고, 형제와 부자 간에 웬수가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웬수가 되고, 일가친척과 웬수가 되어서, 금생에는 내가 저 사람을 죽이면 내생에는 저 사람은 나를 죽이고 이렇게 해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으면 그다음에는 그 쥐는 고양이가 되고 그래 가지고 엎치락뒤치락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점점 더 약이 올라가기 때문에 처음에 바늘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칼 가지고 싸움을 하다, 다음에는 도끼 가지고 싸움을 하다가, 다음에는 총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소한 일을 잘못 처리해 가지고 큰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한 생각 돌이켜서 '이뭣고?' 참선한 사람은 작은 일로 해서 큰일로 나아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작은 일을 발판으로 해서 큰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어리석은 사람은 황금을 갖다가 똥처럼 쓰고, 지혜로운 사람은 똥을 갖다가 황금처럼 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은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지만 농부가 그것을 잘 발효를 시켜서 퇴비를 만들어 가지고 비료로 사용하면은 농사를 잘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은—우리 중생의 번뇌(煩惱) 망상(妄想)은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입니다—그러한 번뇌 망상을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 나가면, 그 번뇌 망상이 완전히 승화(昇華)해 가지고 보리심, 깨달음을 증득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어렵다, 어렵다. 팔만대장경 그렇게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읽으며, 읽어봤자 아지도 못하고, 한문이 어려워서 아지도 못하고, 알아봤자 그 많은 것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아! 불법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러한 분들을 가끔 많이 만남니다마는 불법(佛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아직 정법(正法)을 만나지를 못했기 때문에 불법은 막연하게 어렵고 깊고 그렇게 겁을 내서 생각하는 것이지, 참으로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고 행할 줄만 알면 불법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말이여.
성이 나면 그 성이 딴 데서 나온 게 아니라 적멸궁(寂滅宮)에서 나온 소식이거든. 그래서 그놈을 없앨려고 하지도 말고, 버릴려고 하지도 말고, 누를려고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그 성내는 마음 그놈으로 '이 뭣고?'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이 정법이요, 참선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이다 이 말씀이여.
여러분은 금방 받으신 그 부적으로 어떠한 재앙을 만나더라도 그 부적을 내세우십시오. 팔만사천 마구니도 그 부적 앞에는 꼼짝을 못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며, 항복을 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충실한 협조자가 되어줄 것입니다.(39분38초~1시간18분6초) (끝)
[법문 내용]
입춘(入春)에 한국 모든 사찰에는 업장(業障)을 소멸을 빌고, 소원성취를 빈다 /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다. 부처님의 골수 법문이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마음을 관하는 한 법[觀心一法]’이라는 게 바로 참선(參禪) 공부.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 / 불법(佛法)은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이 참선법은 무량겁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 / '이뭣고?' 이 한마디는 부적 천 장, 만 장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 깊은 산중이건 시장바닥이건 어디라도 상관이 없다 /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부처님의 이 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것이 없다' /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王舍城)에 장사를 하는 형제 설화.
번뇌·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번뇌 망상 그놈 나온 곳을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 '이뭣고?'는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고 물에 넣어도 젖지 아니한 영원한 부적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〇입춘(入春)일에 이렇게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은 새해를 맞이해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고 1년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떠한 잘못이 있었는가? 그것을 반성하고 참회(懺悔)하고 그래 가지고 ‘새해부터서는 어떻게 내가 살아가야겠다’ 이러한 각오(覺悟)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법요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〇과거에 우리가 지은 그리고 현재 우리가 생각 생각이 짓고 있는 그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의 팔식(八識) 가운데에 그 지은 업(業)의 종자(種子)가 다 저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팔식(第八識) 속에,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우리가 지은 업의 종자가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종자에서 싹이 터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전개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팔자(八字)인 것입니다.
〇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뚱이를 주재하는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〇한철 내 공부를 하고도 내놓을 수 없는 데에 이 참선에, 이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큼 했다'고 내놓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有漏法)이요, 유위법(有爲法)이라 그것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으면 그거 해서 뭐하느냐?' 아무것도 얻을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 거, 이것이 바로 얻은 것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제팔식(第八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업의 종자를, 그것을 갖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따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팔식(第八識) 속에 쌓여져 있는 업의 종자(種子)를 소멸을 하고 업의 종자를 승화(昇華)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하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 말이여.
〇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뭣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 놓은 아뢰야식 속에 업(業)의 종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의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의 종자는 '소멸이 되었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보다는 '승화를 시켰다'고 표현한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 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〇정말 이 정법(正法)을 믿는 사람은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는 그 생각을 야무지게 단속을 함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면서 별별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내싸두고 삽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루, 한 달, 1년이 지나갑니다. 그래 가지고 결국은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한 생각'을 단속하는 것이여. 참선은 꼭 절에만 가야만 되는 것이고, 머리만 깎아야만 되는 것이고, 깊은 산중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건 간에 그때그때 한 생각, 한 생각을 탁! 돌이켜서 '이뭣고?'
〇번뇌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그 번뇌 망상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일어나거든. 우리 중생, 업(業)이 아무리 많은 중생이라도 낱낱이 다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마음자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서 수없이 한없이 번뇌 망상이 일어난다 그 말이여. 그 번뇌 망상이 저 어디 지옥의 변소간 같은 데서 끌어온 것이 아니라, 바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계시는 진여불성에서 나온 것이거든. 그래서 그놈 나온 곳을 '이뭣고?' ‘지금 이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다그쳐 더듬어 들어가면 바로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진여적멸궁(眞如寂滅宮)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있다.
방금 지나간 신해년(辛亥年 1971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10월 15일 결제날 설하신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갑인년(甲寅年 1974년)에 열반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는 10년 전에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생생한 육성으로 생존해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그 법문을 감격스럽게 들을 수가 있습니다.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錄音法門)은 전국 방방곡곡에 비구 · 비구니 · 청신사 · 청신녀들이 녹음 카세트(cassette)를 통해서 법문을 들으면서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법문을 듣고 또 들을수록에 '조실 스님 생존하셨을 때 왜 직접 친견을 못했던가?' 또 친견하신 일이 있는 분도 '한번이라도 더 친견을 못했던가? 또 생존하셨을 때 좀 더 열심히 정진을 해서 왜 그때 힘을 얻지 못했던가?' 이렇게 해서 한탄을 하고 후회를 하신 분들이 수없이 많이 계신 것을 듣고 알고 있습니다.
부모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등한히 하고 불효를 하고, 그러다가 부모의 돌아가신 뒤에사 살아 계실 때 효도 못한 것을 한탄을 하고 후회를 하고 하는 사람이 유사 이래(有史以來)로 그러한 말이 전해 내려옵니다. 전강 조실 스님 살아 계실 때에 그때 철저히 정진을 못하고 득력(得力)을 못했다고 한탄하는 분이 지금 적지 않지만, 앞으로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마저도 듣기 어려운 때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녹음기에 녹음되어 있는 것은 앞으로 몇 해를 더 음성이 변하지 않고 존재할런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마저도 듣지 못할 때, 그때는 참으로 무슨 법문을 듣고 우리가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직까장은 다행히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오늘 이럭저럭, 내일 이럭저럭, 금년 봄을 이럭저럭, 금년 여름을 그렁저렁 지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다보면 우리는 차츰 늙어가고 조실 스님 법문마저도 녹음을 통해서나마 듣지 못할 때가 온다면 그때는 누구를 붙잡고 한탄을 할 것인가?
세월은 흐르는 화살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하루하루 기력이 떨어져 가며 머리에는 흰머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 공부는 내 자신 외에는 아무도 내 대신(代身) 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어떠한 불보살과 성현과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공부해 나가는 방법은 일러주실 수 있지만, 내 대신 공부는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효성스런 제자나 상좌나 아들과 딸이라 하더라도 내 대신 이 공부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다’고 하는 엄숙한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원래로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몸을 받아난 이상 마침내 죽음이라고 하는 엄연한 사실을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 몸을 잃으면 다시 어느 생에 사람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인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육도윤회(六道輪廻)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 사바세계보다는 저 하늘나라는 훨씬 편안하고 즐겁고 아무런 괴로움도 없다고는 하되 거기에서는 도(道)를 닦을 수가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즐겁고 편안해서 도를 닦을 필요도 없고 도를 닦을 마음도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천당(天堂)에 한번 올라가서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또 그것도 괜찮지만, 천당에서 복을 받을 만큼, 자기가 지어 놓은 만큼 다 받으면 다시 인간 세상이나 축생이나 지옥에 떨어지고만 말기 때문에 천당에 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안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축생이나 지옥이나 귀도(鬼道)에 떨어지면 너무 괴로워서, 지옥에는 너무 지옥고(地獄苦)가 괴로워서 도를 닦을 생각조차도 할 수가 없고, 축생이 되면 어리석어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지금 부처님 열반하신 뒤 3천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서 말세(末世)라고는 하지만, 과거에 무슨 복을 지었고, 무슨 수승한 인연을 지었기에 금생에 받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고, 불법 가운데에도 최상승 법문인 참선법(參禪法), 이 정법(正法)을 만나게 되었겠습니까. 정법을 만났으되 목숨을 바쳐서 철저히 수행을 하지 아니한다면, 마치 보배가 많이 있는 산속에 들어가서 보배를 찾아서 얻지를 아니하고 빙글빙글 서성대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람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쌀을 구해서 솥에 밥을 지어서 맛있게 지어놨지만 그 밥을 그릇에 퍼서 상에 놓아야 하고, 상에 차려놨지만 숟갈로 떠야 하고, 숟갈로 떴지만 입에다 떠 넣어야지, 입에다 떠 넣으되 그것을 잘 씹어서 삼켜야만 배가 부를 것입니다. 입에다 넣었다고 해서 도로 토해 내버린다면 배가 부를 까닭이 없고 그것을 잘 저작(咀嚼)을 해서 삼켜서 흡수를 해야만 비로소 피가 되고 살이 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나서 활구참선을 배우고 듣고 했다하되, 정말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울여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소홀히 지내 보내지 아니하고 철두철미 정진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깨달음을 얻으며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期)하겠습니까.(11분48초)
방금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조(馬祖) 스님은 중국의 육조(六祖) 스님의 제자, 회양(懷讓) 스님의 제자로서 ‘마구답살천하인(馬駒踏殺天下人)이라. 망아지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인다’고 하는 달마 스님께서 그렇게 예언을 하셨다고 합니다. ‘후대에 가서 마조라고 하는 대도인(大道人)이 나와 가지고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이 정법을 천하에 선양한다’고 하는 뜻으로 예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마조 스님께서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원상,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이 속에 들어가도 치고, 이 속에 이 둥그라미 안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겠다” 이렇게 어떤 승려, 도를 배우는 승려 앞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승려는 그 원상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딱 앉았습니다. 마조 스님은 주장자로 그 승려를 한 대 후려팼습니다. 그 승려는 탁! 마조 스님을 쳐다보면서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은 입을 딱 다물고서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이 공안(公案)은 마조원상(馬祖圓相)이라 해서 종문(宗門) 중에 공안 가운데에 최고 가는 공안으로 천년을 두고 선종 문중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 공안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宗師)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경봉 스님께서, 지금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계신 경봉(鏡峰) 큰스님께서 처음에 깨달으셨을 때, 바로 마치 그때 거기에 당도하신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경봉 스님보다는 훨씬 연세가 아래였었지마는 바로 이 마조원상의 공안을 경봉 스님께 물어 가지고, 처음에는 경봉 스님께서 그 원상을 손으로 이리 뭉켔습니다. 거기에서 조실 스님은 “당장 이 송장을 끌어 묻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거기에서 한참 눈을 웅큼하게 해 가지고 계시다가 다시 경봉 스님께서 “이제 알았다. 다시 물어라” 이렇게 해서 그때 보시니 아까의 경계와 판연히 달라서 경봉 스님을 산골짜구니로 끌고가 가지고 이 공안을 다시 물으니까 여지없이 경봉 스님께서 일르셨다고 한 말씀을 금방 법문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각 선원에서 공부를 하고 오신 납자(衲子) 스님네도 여러분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신도 보살님 여러분들도, 우리 용화사에서 지내신 분 또 다른 선방에서 공부를 하시고 오신 보살님네들도 여러분이 계십니다. 그동안 석 달 동안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시고 오신 분들입니다. 해제가 되면 으레이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 회상(會上)으로 모여 가지고 그동안에 공부했던 것을 탁마하고, 잘 못했던 것을 대중 앞에 참회하고, 그렇게 해서 한철 동안 지낸 공부를 총결산하고 반성하고 참회해서 다시 새로운 정신을 가다듬어서 공부를 해 왔었습니다.
이 가운데 참여하신 청신사 청신녀 그리고 비구 비구니 여러분들, 과연 지난 삼동(三冬) 안거 동안 정진을 하셔서 투철히 깨치신 바가 있으면 이 마조원상(馬祖圓相), 원상을 그려 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치니 한번 자신 있게 일러보시기를 바랍니다.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수응(酬應)을 해 드리겠습니다.
“스님께 못 이르겠습니다” “환귀본처(還歸本處)하라. 이르지 못할 것을 뭐하러 나왔느냐”
이 공안은 벌써 이를라고 생각을 움직이면 그르쳐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사자(獅子)는 교인(咬人)하고 한로(韓獹)는 축괴(逐塊)’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개한테 돌멩이를 던지면 그 개는 그 돌멩이가 무슨 명태 대가리나, 고기 덤뱅이인 줄 알고 그 돌멩이를 물으러 우르르르 쫓아가는 법이고, 사자는 돌멩이를 던지면 돌멩이는 쫓아가지 아니하고 돌멩이를 던진 그 사람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능히 헤엄을 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 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헤엄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진답시고 물에 풍덩 뛰어들어가면 빠진 사람을 건지기커녕 자기까지 빠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생을 제도할 원대한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부터 깨닫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優先)해서 중요하고,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한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도 급하고, 잠을 자는 일도 급하고, 세속에 우리가 맡은 모든 일들이 하나도 버려서는 안되겠지만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우선 나부터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는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망각하고 오직 자식 생각만을 하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는 우선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끄고 자식 불을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효자라 하더라도—그 효자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부모만을 위하는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할지라도 자기 발등의 불부터 끌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발등의 불을 쪼끔 오래 놔둔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잠시 뜨겁다가 마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 발의 불부터 끄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參禪)은 금생에 사람 몸 받을 때 하지 아니하면—이것은 영원히 다시 사람 몸을 받을지, 다시 또 이 불법을 만나게 될지, 정말 막연하고 막연할 따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도 우선해서 참선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이고, 권리를 많이 누리고, 명예를 하늘 닿도록 차지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들은 나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죽을 때 한 톨도 한 치도 그것을 가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죽어갈 때에는 무엇을 가지고 가느냐? 명예를 얻느라고 얻은 죄업(罪業), 재산을 얻느라고 지은 죄업, 권리를 누리느라고 지은 죄만을 산더미처럼 지고 염라대왕 앞에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리 통곡을 하고 뉘우치고 눈물을 흘려도 아무도 받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처음~27분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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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조원상(馬祖圓相) 법문을 전강 조실 스님을 대신해서 여러분 앞에 물었습니다마는 이것은 이론적으로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내가 오늘 이르지를 못했으니 당장 집에 가서 경전을 뒤적거리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뒤적거려서라도 기어이 이것을 어떻게 찾아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신다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사 공안이 적혀 있는 『염송(拈頌)』이나 『무문관(無門關)』이나 그 밖의 『벽암록(碧巖錄)』 같은 어떠한 어록을 뒤적거린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보지를 못했다면 찰나간에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이 가장 지혜 있고 바른 수행인인 것입니다.
공안은, 화두는 절대로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더듬어서 알아맞출 수도 없는 것이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따져서 결론을 얻었다든지 사량심으로 알아졌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은 중생심(衆生心)이요, 중생의 번뇌 망상으로 얻어진 것이라, 망상에 결국은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기 좋게 생긴 사람을 만들어 놨다 하더라도 그것이 참사람이 아니고 흙이나 석고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을 아무리 이쁘게 조각을 해 놨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는 없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철저한 믿음이 서야 하고, 철저한 의심(疑心)이 있는 곳에 큰 분심(憤心)이 일어나고, 철저한 믿음과 큰 분심이 있는 곳에 타성일편(打成一片)하는 대의정이 돈발(頓發)하는 것입니다.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심만 철저하다면 반드시 분심이 있을 것이요, 분심(憤心)이 있는 곳에 어찌 대의정이 일어나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선방에 살아도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하지 아니한다면 10년 20년을 선방에 지낸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돈과 쌀을 싸 가지고 50년 60년을 절을 왕래하고 선방을 드나든다 하더라도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정(大疑情)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점심밥 싸 가지고 경치 좋은 관광지 왔다갔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심이 있다. 신심이 있다’ 하면 절에 가서 절을 많이 하고, 불공(佛供)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것을 ‘신심이 있다’ 하고 혹 생각하실 분이 있을런지 모릅니다마는 그것도 일종의 신심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신심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이 몸속에 똥과 피와 오줌과 고름을 가뜩 담아 있는 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이요, 참다운 바른 신심인 것입니다.
이 신심이 있다면 분심(憤心)이 일어날 수밖에는 없습니다. '왜 나와 불보살(佛菩薩)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똑같은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거의 성현(聖賢)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대성현이 되었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오늘날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육도윤회(六途輪廻)를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 왜 깜깜한 칠통(漆桶)으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대분심이 아니 일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촌이나 일가가 잘되면 거기서는 분(憤)이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시기와 질투를 할 줄 알면서, 어째서 과거의 모든 성현들은 대도를 성취하셨는데 나는 오늘날까지 칠통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육도윤회 속에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면서 몸부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 분심이 일어나지 아니한다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대신심과 대분심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화두가 들지 아니해도 들어질 수밖에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남편 때문에 못한다, 아들딸 때문에 못한다, 집안 살림 때문에 못한다’ 이렇게 핑계를 하고. 또 ‘몸이 아파서 못한다’ 이러한 등등 갖은 핑계를 대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냅니다. 이래 가지고 그럭저럭 보내다가 한 해 두 해가 가고, 병이 나고 허리가 꼬부라지고 혈압이 올라가고 그때 가서는 ‘아차!’ 해 봤자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입니다.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습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네는 오직 이 문제만을 위해서 부모와 형제와 가정과 고향을 버렸고, 청춘을 버렸고, 인생을 뚤뚤 뭉쳐서 오직 이 한 일만을 위해서 다 바쳤습니다. 그래서 물론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정진들을 하고 계시지만 이 문제는 꼭 스님네만 해야 하고 신도는 그럭저럭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차라리 스님들은 부양가족(扶養家族)도 없고, 돈을 벌어야 할 까닭도 없고 해서 자나깨나 ‘이뭣고?’니까 드문드문 한 번씩 해도 공부가 어느 정도 되어 가겠지만, 마을에 계신, 세속에 계신 여러분들은 스님네보다도 몇십 배 정신을 챙기지 아니하면 여간해서 공부에 힘 얻기가 어려울 줄 생각합니다. 위에로는 부모를 모셔야 하고, 남편을 보좌해야 하고,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봐야 하고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합니다. 정말 내용을 알고 보면 잠깐 새도 편할 날이 없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이뭣고?’를 챙기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생각 생각이 ‘이뭣고?’를 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해야만 자기의 과거의 빚도 갚으면서 앞으로 자기의 영원한 영혼을 위해서 자기 삶을 영위한 사람이 되겠지만, 참선 공부를 등한히 하고 오직 세속적인 빚만을 갚기 위해서 전전긍긍한다면 완전히 금생의 인생살이라 하는 것은 노예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노예라 하는 것은 희망이 없는 인종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오직 무서운 고된 일밖에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불쌍한 신세가 바로 노예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노예라고 하면 혹 분개를 하실는지 모르지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을 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와 무엇이 다를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빚을 갚지 아니하고, 자기의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지 아니하고, 전부 거기를 도피를 해라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가 지은 빚은 자기가 갚아야 하고, 빚을 갚으면서도 자기의 장래를 위해서 희망을 가지고 자기의 속 살림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다운 사람이고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빚을 갚지 않고 도피해 봤자 이자만 더욱 늘어날 뿐, 자기의 빚은 아무도 갚아주지도 않고 빚이 없어지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일단 아내로서, 자기의 자녀들의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처하게 되었다면 성의를 다해서 남편을 보조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들딸들을 성심성의껏 잘 길르고 가르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한 생각 한 생각을 가다듬어서 화두를 들고 법문을 듣고 또 공부를 해 가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 고된 일들이 하나도 고된 줄을 모르고, 그러한 정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의 신세가 분명 노예와 같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고되고 지긋지긋한 그러한 일들이었지만, 정법을 알고 난 뒤부터서는 그러한 일들이 정말 성스러운 불사(佛事)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과 기쁨과 자신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실한 불자(佛子)가 그 집안에 있음으로 해서 온 집안에 향기가 풍기고 온 집안사람들이 그 향기로 인해서 순화되어 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한 며느리가 진실한 불자(佛子)가 되어 가지고 자기의 소임을 완성하고 마음으로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할 때에 그렇게 무섭고 마음에 싫었던 시어머니도 어느새 며느리를 딸처럼 아끼고 귀여워하게 되고, 자기도 그 시부모가 정말 친부모 못지않게 더 다정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어머니로 되어질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연세가 많으신 노보살님도 계십니다마는 열심히 법문을 듣고 참선을 열심히 하시고, 가정에 돌아가셔도 참선에 여념이 없고 언제 며느리나 손자손녀들에게 잔소리할 겨를이 없어진다면, 평소에 별로 효심이 없다고 여겨졌던 며느리와 아들딸 손자손녀들도 그 달라진 할머니를 위해서 참으로 효심 있는 식구가 되어 줄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그런 마음으로 정진을 하시고 여생을 마치실 때 그 가족의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들은 저절로 할머니의 뒤를 이어서 정법을 믿는 훌륭한 불제자(佛弟子)가 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입으로 법을 설하기보다는 자기의 마음으로 정법을 설해야 하고 행동으로 정법을 설할 때, 정법은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온누리에 퍼져 나갈 것입니다.
흔히 예수교는 방방곡곡에 성당 교회당을 짓고 저렇게 신도를 갖다가 많이 포교(布敎)를 하고 굉장한데, ‘불교는 포교가 부족하다. 자꾸 산중에만 절이 있지 도회지에는 절이 없다’ 이렇게 해서 많이 불교의 부진한 포교에 대해서 개탄을 하시고 충고를 주신 분들을 만납니다마는. 형식적인 교회나 사찰을 많이 지어 가지고 종을 울리며 그래 가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뜻이 있겠지만, 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 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봄 석 달 동안 춥지도 덥지도 않고 하는 그러한 아주 좋은 계절이 올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계절을 맞이해서 스님네와 신도 여러분들은 어쨌든지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을 해서 공부에 열중하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헌디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안석인제하루(有眼石人齊下淚), 눈이 있는 돌사람은 가지런히 눈물을 흘리고, 무언동자암차허(無言童子暗嗟噓)라. 말없는 동자는 은근히 한탄을 하더라.
*관음재일(觀音齋日) ; 매월 음력 24일.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께 기도를 드리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구·의 3업(身口意 三業)을 깨끗하게 하여—악업(惡業)을 짓지 않아—심신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일. *전강선사(田岡禪師) ; (1898-1974) 법명은 영신(永信), 호는 전강(田岡). 선사는 1898년(戊戌) 11월 16일 전남 곡성군 입면 대장리에서 정해용(鄭海龍)을 아버지로, 황계수(黃桂秀)를 어머니로 태어나셨다. 16세에 인공(印空) 화상을 득도사로, 제산(霽山) 화상을 은사로, 응해(應海) 화상을 계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으로 나가 용맹정진하여 23세에 견성하시고 다음의 오도송을 지으셨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어젯밤 달빛은 누(樓)에 가득하더니 창밖은 갈대꽃 가을이로다.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부처와 조사도 신명(身命)을 잃었는데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구나.
당시 유명한 육대 선지식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만공 선사와 법거량을 하여 모두 인가를 받으시고 25세에 만공선사로부터 아래의 전법게를 받으시니 경허-만공으로 이어지는 불조정전(佛祖正傳) 제77대의 법맥을 이으셨다.
佛祖未曾傳 (불조미증전) 我亦無所得 (아역무소득)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此日秋色暮 (차일추색모) 猿嘯在後峰 (원소재후봉)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찰대본산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이래 법주사 복천선원⋅경북 수도선원⋅도봉산 망월사⋅부산 범어사⋅대구 동화사 등 여러 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시었다.
제자 송담선사를 만나 10년 묵언수행을 지도하시자 송담선사는
黃梅山庭春雪下 (황매산정춘설하) 寒雁唳天向北飛 (한안여천향북비) 황매산 뜰에는 봄눈이 내렸는데, 차운 기러기는 저 장천에 울며 북을 향해서 날아가는구나. 何事十年枉費力 (하사십년왕비력) 月下蟾津大江流 (월하섬진대강류) 무슨 일로 십년 동안을 헛되이 힘을 허비 했던고! 달 아래 섬진대강이 흐르는구나.
이와 같이 오도송을 짓고 선사와 탁마하시니 선사께서는 흔연히 인가하시고 다음의 전법게와 함께 법을 전하시어 송담선사로 하여금 불조 제78대 법맥을 잇게 하셨다.
말년에는 천축사 무문관⋅인천 용화사 법보선원⋅용주사 중앙선원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甲寅) 음력 12월 2일, 인천 용화선원에서,
“여하시생사대사(如何是生死大事)인고? 억! 九九는 번성(翻成) 八十一이니라.”
라는 임종게를 남기시고, 평소 정진하시던 의자에 앉으시어 열반에 드시니 세수 77세, 법랍 61세이셨다. 선사께서는 후학을 위한 칠백 여 시간 분량의 육성 녹음법문을 남기셨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카세트(cassette) ; ①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를 간편하게 장착하여 녹음을 하거나 녹음된 것을 재생할 수있도록 만든 녹음기. 원어—카세트 테이프 리코더(cassette tape recorder). ②전용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자기 테이프. 1963년 네덜란드의 필립스사가 개발하였다. *득력(得力) ;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〇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법문에서) *대신(代身 대신할 대/몸 신) ; 어떤 대상과 역할이나 책임을 바꾸거나 그것을 떠맡아 함. 또는 그렇게 된 새로운 대상.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생사(生死)라고 하는 것은 원래로 없다’고 하는 것이지만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〇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한번 이 몸을 잃으면 다시 어느 생에 사람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인가? 아무도 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 인신난득(人身難得). ‘사람의 몸[人身] 얻기[得] 어렵다[難]’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 난득(難得)은 성취하여 얻기가 매우 어려움을 나타내는 말. 부처님께서는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과 조갑상토(爪甲上土)의 비유를 들어서 인신난득(人身難得)하니 방일하지 말고 수행 정진하여 구경의 목적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신다.
맹귀우목(盲龜遇木, 맹귀부목盲龜浮木)은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있다가 숨을 쉬기 위해 일백 년에 한 번씩 바다 밖으로 머리를 내밀 때,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멍이 한 개 뚫린 나무 조각의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 매우 실현되기 어려운 좋은 일을 비유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는 지혜를 얻지 못한 중생, 바다는 유전생사하는 세계, 바다 속은 깊은 미혹, 구멍난 나무 조각은 안식처, 곧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을 만나는 것 등을 비유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 등이 맹귀우목과 같으니, 지금 천만다행으로 이런 조건을 갖춘 기회를 만났을 때,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미후(獼猴)못 가에 있는 2충 강당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이 큰 대지가 모두 큰 바다로 변할 때, 한량없는 겁을 살아온 어떤 눈먼 거북이 있는데, 그 거북이는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바닷물 밖으로 내민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 구멍이 하나뿐인 나무가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파도에 밀려 표류하고 바람을 따라 동서로 오락가락한다고 할 때 저 눈먼 거북이 백년에 한번씩 머리를 내밀면 그 구멍을 만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불가능합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눈먼 거북이 혹 바다 동쪽으로 가면 뜬 나무[浮木]는 바람을 따라 바다 서쪽에 가 있을 것이고, 혹은 남쪽이나 북쪽, 사유(四維)를 두루 떠도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서로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먼 거북[盲龜]과 뜬 나무[浮木]는 비록 서로 어긋나다가도 혹 서로 만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고 미련한 범부가 오취(五趣 지옥·아귀·축생·인·천)에 표류하다가 잠깐이나마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우니라. 왜냐하면 저 모든 중생들은 그 이치를 행하지 않고 법을 행하지 않으며, 선(善)을 행하지 않고 진실을 행하지 않으며, 서로서로 죽이고 해치며,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한량없는 악(惡)을 짓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쓰고 왕성한 의욕을 일으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부처님께서 손톱으로 흙을 찍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 위의 흙이 더 많으냐, 저 대지의 흙이 많으냐?”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 손톱 위의 흙이 훨씬 적습니다. 이 대지의 흙과 돌은 너무도 많아 한량이 없고 나아가 어떤 숫자의 비유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손톱 위의 흙처럼, 모든 중생들 중에 형상을 볼 수 있는 중생은 역시 그와 같은 정도이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중생은 저 대지의 흙과 같이 많으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아,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하여 아직 빈틈없고 한결같지 못하다면 마땅히 힘써 방편을 써서 빈틈없는 한결같음을 배워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손톱 위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인간 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며, 대지의 흙처럼 인간 세계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손톱 위의 흙처럼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도로 천상에 태어나는 중생은 다해야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고, 대지의 흙처럼 천상에서 죽어 지옥에 태어나는 그 모든 중생들도 또한 그와 같은 정도이니라. 지옥과 마찬가지로 축생 아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도(道) ; ①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②깨달음. ③가르침. ④궁극적인 진리. ⑤이치. 근원. *천당(天堂) ; 천상(天上)에 있다는 신(神)의 전당(殿堂), 하늘의 세계.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하늘을 통칭하는 말. *귀도(鬼道) ; 아귀(餓鬼), 야차(夜叉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을 괴롭힌다는, 모습이 추악하고 잔인한 귀신), 나찰(羅刹) 등의 세계를 말한다.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최상승(最上乘) ;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교법. 최상의 가르침. 가장 뛰어난 가르침. *참선법(參禪法) ; ①선(禪) 수행을 하는 법.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법.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期)하다 ; 이루어지도록 기약하다. *마조(馬祖) 스님, 육조(六祖) 스님, 남악회양(南嶽懷讓)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선문염송(禪門拈頌)』 (혜심 지음) 제5권 165칙 ‘원상(圓相)’ 공안. 〇馬祖因見僧參 畫一圓相云 入也打不入也打 僧便入 師便打 僧云和尙打某甲不得 師靠却拄杖 休去.
마조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와서 뵙자, 마조 스님이 원상(圓相),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하고 물으시니, 그 스님이 원상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 대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셨습니다.
[참고] 송담스님(No.282) - 1986년 1월 첫째일요법회(86.01.05)에서. 〇마조 스님이 원상(圓相)을 그려 놓고 ‘입야타(入也打) 불입야타(不入也打) 이 원상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이 공안을 물은데 어떤 스님이 그 안에 들어갔어.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들어간 그 스님을 한대 후려쳤습니다. 치니까 그 스님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마조 스님이 휴거(休去)를 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방장(方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원상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한 그 공안에 그 스님이 턱 뛰어들어가는 도리는 무슨 도리며, 들어가니까 마조 스님이 주장자로 한 방을 후려치니까 그 스님이 그 방(棒)을 맞고서 하는 말이 『스님께서는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또 그 스님이 그렇게 말한 데에 마조 스님이 아무 말없이 저리 가버렸으니... 이러한 공안에 확연(確然)히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공안이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 공안이라 하는데, 이것이 다 부처님과 조사가 씹다가 버린, 먹다가 버린 찌꺼기에 지나지 못한 것이기는 하나, 이러한 공안이 바로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가려보는 데에는 좋은 시금석(試金石)이 되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과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언하대오(言下大悟)』 (용화선원刊) p24 - 26. 〇내가 25세 때 덕숭산 금선대에 계신 만공 스님을 처음 찾아가서 예배하니 나에게 묻기를 “심마물이 임마래오(甚麽物恁麽來)”하시었다. 내가 다시 예배하니 또 묻기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어?”하시었다. 이번에는 내가 서슴없이 주먹을 불끈 들어 보이니 만공 스님은 그만 얼굴을 찌푸리시면서 “허! 저렇게 주제 넘는 사람이 견성했다해. 네 습기(習氣)냐, 체면없이 무슨 짓이냐?” 이러시고는,
그 다음부터는 나를 보시기만 하면 비웃으며 “저 사람, 저런 사람이 견성을 했다 하니 말세 불법이 이럴 수가 있는가”하고 번번이 조롱을 하시었다. 나는 차츰 불안해지다가 분심이 났다. 선지식이 저러실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 핏기가 하나도 없어 앉으면 잠이 와서 앉지도 못할 정도로 바짝 말랐다.
그래서 운동대를 붙잡고 서서 ‘에라! 한바탕 해봐야겠다. 그까짓 놈의 몸은 하다가 죽으면 그뿐이지’하고, 나는 만공 큰스님의 말씀을 믿고 그 회상에서 하안거 중 판치생모 화두를 잡고 용맹정진하다가 반 철이 지날 무렵 홀연히 ‘마조원상공안의 의지(馬祖圓相公案意旨)’가 확 드러났다.
그 길로 조실 방에 들어가 보월 스님 앞에 원상을 그려 놓고 묻기를 “마조원상 법문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入也打不入也打) >고 하였으니 조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이르시겠습니까?”하니 보월 스님은 곧 원상을 뭉개셨다.
나는 보월 스님께 말하되 “납승을 갈등 구덩이(葛藤窠臼)속에 죽이신 것입니다. 마조방하(馬祖棒下)에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보월 스님의 대답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닫고 만공 스님 처소에 와서 다시 묻되, “마조원상 법문을 보월스님께 물었더니 원상을 뭉개었습니다. 이렇게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하였더니 만공 스님은 도로 나에게 묻되 “자네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하시었다.
내가 답하되, “큰스님께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하였더니, 만공 스님이 주장자를 초안(初眼)이에게 주시면서 “자네가 묻게”하시니 초안 스님이 주장자로 원상을 그리고 “입야타 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해서, 내가 초안이를 보고 여지없이 일렀다.
그러나 학자를 위해서 설파하지 않는다. 만공 스님께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시면서 점검하시되, “누가 밤사람 행한 것을 알 수가 있겠느냐(誰知更有夜行人)”하셨다.
그런 다음, 만공 스님과 한암 스님과의 서신문답과 기타 중요 공안에 대한 탁마(琢磨)를 낱낱이 마치고 떠나려고 할 때, 만공 스님께서 물으시되,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에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하시니, 내가 곧 엎드려서 허부적 허부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하니 만공 스님께서 “옳다. 옳다!(善哉善哉)” 인가하시고 곧 나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지어 주시되,
불조가 일찍이 전하지 못했는데 나도 또한 얻은 바 없네. 이날에 가을빛이 저물었는데 원숭이 휘파람은 후봉에 있구나. *공안(公案) : 화두(話頭)。①정부 관청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 백성이 준수해야 할 것。②선종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이것을 화두라고도 하는데 문헌에 오른 것만도 천 칠백이나 되며 황화취죽 앵음연어(黃花翠竹鶯吟燕語) — 누른 꽃, 푸른 대, 꾀꼬리 노래와 제비의 소리 등 — 자연현상도 낱낱이 공안 아님이 없다.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만공 스님 ;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납자(衲子 기울•옷을 꿰맴 납/사람 자) : 「납」은 누더기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옛글에 『誰知百衲千瘡裡 三足金烏徹天飛』란 것이 있다。곧 『뉘 알랴, 누더기에 밝은 해가 숨은 줄을 ! 』이것이 누더기 입은 도인, 곧 납자의 본색을 말하는 것이다.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수응(酬應 응대할 수/응할 응) ; 남의 요구에 응함. *사자는 교인(獅子咬人)하고 한로는 축괴(韓獹逐塊) ; ‘사자는 사람을 물고 개는 흙덩이를 쫓느니라’ *咬(교)물다. 깨물다. *獹(로)개 이름. 전국시대 한(韓)나라 좋은 개 이름. *逐(축)쫓다. *塊(괴)흙덩이. [참고] ①『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1권 ‘양주 왕경초 상시(襄州王敬初常侍)’에 '師子齩人 韓獹逐塊' ②중국 고봉 스님의 『선요禪要』의 ‘개당보설(開堂普說)’에 '獅子咬人 韓獹逐塊' (통광 스님 역주 ‘고봉화상선요•어록’ p39,47에서)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우선(優先)하다 ; (...보다, ...에) 딴 것에 앞서 특별하게 대우하다. *죄업(罪業) ; 자신과 남에게 해가 되는 그릇된 행위(身)와 말(口)과 생각(意).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는 악한 행위. 좋지 않은 결과의 원인이 되는 악한 행위.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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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어록(祖師語錄) ; 어록(語錄). 선종(禪宗)에서 부처님의 바른 종지(宗旨)를 전하는 조사(禪師)나 귀의나 존경을 받을 만한 선승(禪僧)의 가르침, 문답, 언행을 모은 글, 또는 그 책.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것을 원칙으로 한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〇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허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사량(思量) ; 생각하여 헤아림. 사유하고 판단함.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신심(信心) : ①‘내가 바로 부처다’ 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이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을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②‘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분심(憤心) : 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왜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의심(疑心) :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타성일편(打成一片 칠 타/이룰 성/한 일/조각 편) : ①'쳐서[打] 한 조각(一片, 덩어리)을 이룬다[成]'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疑心)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②차별대립을 여읜 경지. 이분법적이고 상대적인 것이 융화 · 용해되어 하나가 되는 것.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불공(佛供 부처 불/이바지할·바칠 공) ; 부처님 앞에 향(香)·등(燈)·꽃·음식 따위를 바치고 기원함.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칠통(漆桶 옻 칠/통 통) ; ①옻칠을 한 통 ②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 또는 그런 상태의 사람. ③무명(無明). *칠통(漆桶)을 타파(打破) ; 칠통(漆桶)은 옻칠을 한 통으로, 중생의 마음은 무명이 덮여서 어둡고 검기가 옻을 담은 통 속과 같은 상태이므로 칠통에 비유한 말이다. ‘칠통을 타파한다’는 말은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 *핏대를 세우다 ;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몹시 화를 내거나 흥분하다. *한만(汗漫)히 ; 되는대로 내버려두고 소홀하거나 무심하게. *대신(代身)하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그것의 역할이나 책임을 떠맡아 하다. *승속(僧俗) ; 스님과 스님이 아닌 속인(俗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부양가족(扶養家族) ; 자기가 돌보고 있는 가족.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제사,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이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일.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식이란 말이다。불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목숨(慧命)을 이어가고, 법의 집과 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요원의 불길 ; ‘매우 빠르게 번지는 벌판의 불길’이라는 뜻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무섭게 퍼지는 세력이나 기세를이르는 말. *요원(燎原 화톳불·들불 료/언덕·들 원) ; 불타고 있는 벌판. *(게송) ‘有眼石人齊下淚 無言童子暗嗟噓’ ; 「다비문(茶毗文)」 ‘입감(入龕)’편 참고.
[법문 내용]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 / 내 공부는 아무도 내 대신(代身) 해 줄 사람은 없다. 뿐만 아니라 나 대신 죽어줄 수도 없다 / 사람 몸 받기 어렵다 / 정법을 만났으니 목숨을 바쳐서 철저히 수행을 하라 / 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 /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이 마조원상 공안을 많이 물으셨다 / 경봉 스님과의 법거량.
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 / 첫째, 내가 나를 깨닫지 못하고 남을 제도할 수가 없다 / ‘나를 깨닫는 길’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일보다 우선해서 급하고 요긴하다.
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 대의정(大疑情)은 오직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의 밑바탕 위에 일어나는 것 /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
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 이 공부는 승속(僧俗)이 없다 / 눈에 보이지 아니한 쇠고랑을 찬 노예 / 자기가 지은 업의 빚은 갚으면서 정법을 믿고 열심히 정진해야 /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는 진실한 포교 / (게송)유안석인제하루 무언동자암차허.
〇내 공부는 내 자신 외에는 아무도 내 대신(代身) 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어떠한 불보살과 성현과 선지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공부해 나가는 방법은 일러주실 수 있지만, 내 대신 공부는 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효성스런 제자나 상좌나 아들과 딸이라 하더라도 내 대신 이 공부를 해 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 대신 죽어줄 수도 없습니다.
〇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나서 활구참선을 배우고 듣고 했다하되, 정말 온갖 정성과 힘을 기울여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소홀히 지내 보내지 아니하고 철두철미 정진을 하지 않는다면 무슨 깨달음을 얻으며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期)하겠습니까.
〇마조원상(馬祖圓相) 공안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대 선지식으로부터 인가를 다 받고, 만공 스님 회상에 가서 만공 스님의 너무나도 밝고 밝으신 지혜의 눈과 철두철미한 종사(宗師)의 수단 아래 무릎을 꿇고 다시 정신을 차려서 정진을 하셔 가지고, 다시 대각(大覺)을 성취하신 공안이기 때문에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매양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 학자를 대할 때 이 공안을 많이 물으셨습니다.
〇참선(參禪)은 결정코 내가 나를 깨닫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참선은 명예와 이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지식과 수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내가 나를 깨닫는 길이고, 내가 나를 깨달은 뒤에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커다란 목적과 의무를 수행할 따름인 것입니다.
〇우리가 이만큼 건강하고, 이만큼 살고 있을 때, 그리고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을 수 있을 때, 하루하루를 정말 알뜰하고 착실하게 공부를 지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만이 과거의 무량겁에 지어 놓은 모든 죄도 소멸을 할 수가 있고, 이 공부에 철저하면서 세속적인 또는 인간적인 책임을 충실히 한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도 진리를 깨닫는 목적을 향해서 걸어가므로 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기어코 기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길, 이러한 지혜로운 길, 인간으로서 최고의 길이 바로 이 참선법이요, 불법이요, 정법인 것입니다.
〇깨달음은 이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본참화두를 여법(如法)하게 거각하고 정진을 함으로써만이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억울할 때나 우리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감정이 일어나건, 그 생각 그 감정 하나하나를 헛되이 놔 보내지 말고, 바로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못 이렇게 순박하게, 이렇게 진실하게, 이렇게 바보처럼 한 생각 한 생각을 다져 나간다면 결정코 우리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〇철저한 신심은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말세(末世)에 태어났고, 못나게 태어났고, 무식하게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을망정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주인공은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나도 견성성불(見性成佛)할 수 있다고 믿는 거, 이것이 바로 대신심(大信心)인 것입니다.
〇다른 사람이 나에게 억울한 욕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이 부애가 나고 억울하고 분이 나서 핏대를 세우고, 혈압이 올라서 밥도 먹기 싫고, 잠도 자기 싫고, 당장 쫓아가서 따지고 요절을 낼랴고 펄펄 뛰면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그 분이 풀리지 아니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내도 그 억울한 분이 풀리지를 아니하고, 10년 20년이 되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소리는 잊지 못하겠다고 치를 떨 줄 알면서, 어째서 자기 문제, 가장 급하고 요긴하고 중대한 문제, 자기의 생사(生死)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한만(汗漫)히 남의 일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하루하루 헛되이 세월을 보내고, 심지어는 듣기는 듣지만 ‘저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저건 스님네나 하고, 늙어서 다 가정일 끝난 다음에 선방에 갔을 때 그때 조금 해 보리라’ 이러한 생각을 하고.
〇이 공부는 어떠한 이유, 어떠한 핑계도 여기에는 닿지를 않습니다. 왜 그러냐?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죽음보다는 덜 급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누구도 막아줄 수 없고, 대신(代身)할 수 없고, 자기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중대사를 앞에 두고 어떠한 이유를 대 가지고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지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미련하기가 그지없는 사람일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〇우리 불법(佛法)은 그러한 것보단 한 사람이라도 참되게 정법을 믿고 참되게 내 마음을 닦아감으로 해서, 자연히 그 사람의 마음이 순화가 되고 그 사람의 행동에서 보살도(菩薩道)의 향내가 밖으로 풍겨 나가서 많은 사람에 무언중(無言中) 감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러한 포교(布敎) 활동이야말로 진실한 포교요, 진리에 적합한 포교요,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契合)이 되는 포교라고 생각이 됩니다.
흔히 ‘선방 스님네들은 포교를 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서 철저한 이기주의적인 입장에서 자꾸 은폐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비난을 하신 분이 있습니다마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위해서 철저한 사람이라야만 남을 건져 줄 수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선방에서 바보처럼 묵묵히 정진에 몰두하신 스님네야말로 가장 훌륭하게 포교를 하고 계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어제는 가지 끝에 그렇게 아름답게 꽃이 피어 있더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오늘은 땅 위에 그 꽃송이들이 우수수 떨어져 있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그 어제까지 그렇게 아름답게 찬란하게 피어 있던 나뭇가지에 피어 있던 그 꽃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져서 땅 위에 깔려 있는 그것을 보고 과연 사람으로 하여금 그 떨어진 꽃이 애석하기도 하고, 그 애석하고 아까운 생각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한다. 무슨 부끄러운 생각을 내게 하느냐? 세상의 영화(榮華)와 공명(功名),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덜 못한 내 자신이 그 꽃을 보고서 한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나더라.
그 꽃은 어제까지 그렇게 찬란하게 피어 있다가 하룻밤 사이에 떨어졌건만 꽃 자신은 조금도 아름다울 때라고 해서 뽐내는 법도 없고, 하룻밤 사이에 땅에 시들어 떨어졌다고 해서 무슨 거기에 실망하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을 갖지를 않은데, 사람은 너와 같들 못해서 명예와 권리를 누릴 때에는 이 세상에 오직 자기만이 잘나고 똑똑하고 행복한 것처럼 으시대다가 하룻밤 새에 그러한 영화와 권리와 명예가 자기로부터 떠나게 되면 기운이 없고 살아갈 맛을 잃고 그러한 것에 대해서 무심(無心)하기가 그러한 꽃보다 못하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그 꽃 떨어진 것을 보고 스스로 꽃을 부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느낌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칠월 칠일, 칠석(七夕)날입니다. 전설로는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오작교(烏鵲橋), 가마구 떼와 까치 떼가 모여서 다리를 놔 주면 견우와 직녀가 오늘 저녁에 일 년에 한번 상봉하는 날이다. 이러한 전설이 있고 또 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그 칠석날에 불공(佛供)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을 성취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칠석날에는 돈과 쌀과 과일을 이고 지고 그래 가지고 절로 절로 가서 공양(供養)을 올리는 그러한 풍속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칠성(七星)님, 칠성님이라 하면 북두칠성(北斗七星), 또 삼태육성(三台六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또 일월, 일광보살(日光菩薩) · 월광보살(月光菩薩), 해와 달, 그리고 치성광여래불(熾盛光如來佛), 이러한 우주에 있는 이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이렇게 받들어 모셔 가지고 거기다가 신앙을 가지고 공양을 올리는 그러한 오래된 토속 신앙인 것입니다. 원래 이 신앙이 도교(道敎)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또 도교 이전에 자연을 하나의 신(神)으로 신격화해서 자연의 위력을 신앙하는 그런 원시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불교가 중국에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본에 이렇게 차츰 뻗어오면서 그 나라에 새로 들어갈 때마다 그 고장에 있는 토속 신앙을 다 흡수를 해 가지고 그 불교 안에 포섭을 한 다음 차츰 근기(根機) 따라서 정법(正法)을 설해서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그러한 방편(方便)을 옛날부터서 써 왔던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기 종교 이외의 종교는 다 외도다 또는 사탄이다' 이리 해 가지고 일단 그것을 배격을 하고 그리고 자기의 종교를 갖다가 선양하는 그러한 종교도 있습니다마는, 우리 불교는 신라 · 고구려 · 백제 쭉 내려오면서 일단 그 나라에 새로 종교가 불교가 들어가면 거기에 있었던 그런 토속 신앙을 다 포섭해서 그래 가지고는 포섭해서 다 들어온 다음에는 그대로 그것을 융화해서 완전히 소화를 시켜 가지고 그 사람 그러한 근기 맞춰서 법을 설해서 그래 가지고 마침내는 정법으로 인도하는 그러한 아주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그러한 방편을 써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찰 내에도 칠성각(七星閣)을 모시고 칠성님을 모시고, 지금 어느 사찰에 가나 다 큰 절, 작은 절 할 거 없이 대체적으로 칠성단(七星壇) · 산신단(山神壇) · 독성(獨聖) 등, 이러한 삼성각(三聖閣)이 모셔져 있는 것을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러분이 고기를 잡는 그물을 보면 그 벼리가 있습니다. 벼리는 그물의 그 손잡이입니다. 그것을 벼릿줄이라 그러는데 그 그물에 벼릿줄을 팍! 잡고 끌어 잡아당기든지 추켜들면 수십만의 그물코가 전부 다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벼릿줄만 탁! 추켜들면 그물이 아무리 크고 코가 많은 눈이 많은 그물이라 하더라도 한 번에 가지런히 탁! 들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옷을 들 때에도 옷깃을 들면 소매와 옷소매라든지 도련이라든지 모든 옷이 가지런하니 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소매 끝을 잡고 옷을 든다든지 또는 옷에 섶의 끝을 들고 추켜든다든지 하면 그 옷은 꺼꾸러져서 도대체가 옷인지 걸레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금방 우리는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통해서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의 법문과 최상승법인 이 활구참선을 하는 법에 대해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오조 홍인대사는 부처님으로부터 서른두 번째, 32대 조사(祖師)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육조(六祖) 스님의 법사 스님이신 것입니다.
그 5조 스님은 원래 노인 노승(老僧)으로서 4조(四祖) 스님께 인가를 맞으러 갔는데, 그 4조 스님은 법을 전할 만한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그 자기, 당신의—이 부처님으로부터 서른한 번째, 31대까지 당신에게 이 법(法)이 전해 내려왔는데 당신의 법(法)을 전해 받을 제자를 만나지 못해서 날마다 제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하룻날 어느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보니 당신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제자가 왔습니다.
법거량(法擧揚)을 해 보니 분명히 깨달았는데,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자기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법을 전하나 마나, 마치 장님 불 끄나 켜나 마찬가지로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서 먼저 죽을 사람한테 법을 전해 봤자 다리 뻗고 잘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니가 분명히 깨닫기는 깨달았지만 법을 전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가서 몸을 바꿔 가지고 오너라" 그래서 "그러면 제가 이 기념으로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그 소나무, 조그마한 소나무 한 그루를 팔십 먹은 노승(老僧)이 캐다가 뜰 앞에다 딱 심어 놓고 그리고서 떠나는데 그 4조 스님이 "니가 소나무를 갖다가 심었으니 니 이름을 재송(栽松)이라고 해라. '재배한다' 해서 '재(栽)' 자 하고, '소나무 송(松)' 자, 재송(栽松)이라고 니 이름을 내가 지어주마"
그렇게 해서 그 재송은 거기서 하직을 하고 내려가다가 시내를 따라서 죽 내려가다 보니 시냇가에 어떤 이쁘게 생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승이 걸망을 처녀 옆에다가 부려 놓고 그 처녀한테 "내가 부탁할 말이 있소"
"무슨 말씀이요?" "처녀 댁에서 하룻밤만 쉬어 갑시다"
이 5조 재송(栽松) 법문에 대해서는 이 가운데는 여러 번 듣고 잘 아신 분도 계실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또 금방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은 후반부만 말씀을 하셔서 조금 보충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재송 스님께서, 오조 홍인대사가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하는 참 불법의 최고의 법문을 설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늘 전강 조실 스님께서 최상승법인 참선법, 활구참선(活句參禪)을 설하시기 전에 간략히 재송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처녀가 "어른이 계시니 우리집에 가서 어른한테 허락을 맡으십시오" 그러니까 아니라고 "어른은 어른이고 처녀가 한마디만 허락을 하면 내가 가서 어른한테 말을 할 테니까 처녀는 처녀대로 한마디만 허락을 해달라"고.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그러면 쉬어 가시라"고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 "참 고맙다"고 하고는 그 옆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좌선(坐禪)을 하고 앉았는데, 그 처녀는 '조금 쉬었다가 가실려나 보다' 이리 생각하고 한참 동안 빨래를 하고는 아! 이리 돌아다보니까 아 그 스님이 앉은 채 아조 열반(涅槃)에 드셨다 그 말이여. 앉은 채 딱! 숨을 거두어 버렸어.
아 그 흔들고 "스님, 스님" 하고 아무리 흔들어 봤자 까닥도 안 한다. 아 그래서 겁이 잔뜩 나고 그래서 주섬주섬 해 가지고 집으로 쫓아가서 부모님께 "아, 그 어떤 노스님이 우리집에서 하룻밤만 쉬어 가자고 하도 간청을 하셔서 그러라고 그랬더니 앉은 채 그냥 돌아가셔 버렸다"고. 그래서 어른들 모다 오셔서 장례를 치러 드렸는데 그 뒤로 그 처녀 배가 날을 거듭하면서 차츰차츰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처음~21분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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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집에서는 자기 딸을 갖다가 의심을 하고 '누구의 자식이냐?'고 아무리 힐책을 했지만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해봤자 아무도 곧이듣지를 않고, 결국은 '불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래 가지고 그 처녀는 집안을 위해서,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감쪽같이 죽여 없앨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에 그러한 일이 나면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참 깊은 소(沼)에다가 갖다가 넣어 버리기도 하고 또는 푸대로 싸서 수백 리 밖에 갖다가 버리기도 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요새는 그런 일들이 보통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으레히 결혼 전에 모다 그 먼저 그럴 수도 있고 모다 그래 오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러한 법이 대단히 엄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을 시켜서 괴에다 넣어 가지고 참 깊은 소(沼)에다 갖다 넣어 버리기로 했는데, 다행히 그 모친 배려로 해서 많은 금품을 주어 가지고 하인들에게 부탁을 해서 소(沼)에다 넣지 말고 저 수백 리 밖에다 갖다가 버리고 다시는 고향 근처에 어리대지 말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그 처녀는 수백 리 밖에 가서 풀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지로 돌아다니면서 얻어먹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달이 차서 남의 집 담 밑에서 해산(解産)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해산을 해 가지고 그걸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까 그 애기를 갖다가 그 폭포수 밑에 강가에다 갖다가 가만히 넣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서 밤새 참 울고 울어 지새우다가 그 이튿날 아침에 너무너무 불쌍하고 궁금하고 해서 다시 그 물 소 있는 데를 가보니까 물오리들이 수십 마리가 모여 가지고 그 강보에 쌓인 갓난아기를 등으로 모다 받치고 입으로 모다 어루만지면서 그 물위에 동동동동 이렇게 떠다니면서 오리들이 참 신비하게도 그렇게 애기를 갖다가 떠받치면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애기는 물오리들의 날개와 등으로 떠받쳐진 채 거기서 죽지 아니하고 보송보송한 채 떠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엄마는 쫓아가서 애기를 들어내 가지고 그 애기를 안고 다니면서 애기를 키웠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참 거지의 신세지만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친절로 해서 그 애기를 키웠습니다마는 집도 절도 없는 그러한 신세로써 그 애기를 하나를 믿고 한 살, 두 살, 세 살 이렇게 키우는데 너무너무 애기가 잘 생기고 영리하고 귀엽고 똑똑해서 참 그러한 자기의 외로운 신세지만 그 애기 하나 길르는데 보람을 느끼면서 고생이 고생인 줄 모르고 그 애기를 길르다가 애기가 십여 세가 되었는데 하루는 우연히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너를 믿고 오늘날까지 살았는데 니가 나를 두고 가다니 될 말이냐?" 아무리 울며 붙잡았지만 그 애기는 뿌리치고 바로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가 계신 곳으로 쫓아갔던 것입니다. 가자마자 "그 팔십 년 늙은 노인이 결국은 이렇게 몸을 바꿔서 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도신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아서 부처님으로부터 32대 조사(祖師)의 전법을 받게 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그 오조 홍인대사를 그 어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그 아들(오조)이 계신 황매산을 찾아갔다 이것입니다. 찾아갔는데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정(情)으로는 외로우신 어머니가 찾아왔으니 당연히 반갑게 맞이할 것 같은데, 그 어머니를 갖다가 저 뒷방에다가 갖다가 가두어서 굶어서 돌아가시게 했다. 그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고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되겠습니다마는, 인정(人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 세상에 있어서는—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다, 인정머리가 없다—그 인정이 참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은 바로 성현의 자비(慈悲)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인정이 있는 사람을 그렇게 훌륭한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 홍인대사(弘忍大師), 이 재송 도인, 이 홍인대사인들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없으리오마는 또 어머니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잘 받들어 모시려는 인간으로서의 정이야 어찌 없겠습니까마는, 참으로 어머니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영원한 영혼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렇게 해 드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 밑에 모여 있는 칠백 명의 제자들로 하여금 수행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도(道)를 닦아야 한다고 하는 표본을 보이시기 위한 뜻도 거기에 있었으리라고 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정(情)이 사람의 전부인 줄 알고 정에 떨어져서 정에 얽히고 그래 가지고 부부가 한 생각에 웬수가 되고, 형제가 웬수가 되고, 부모 자식 간에 웬수가 되고, 친구가 웬수가 되어서 어제에 가장 친했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웬수가 되어서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서로 해코자하고 서로 죽이고 그러다가 또 한 생각이 풀어지면은 또 가까워졌다 풀어졌다 가까워졌다 얽혔다 설켰다 이리해서 무량겁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윤회(輪廻)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를 갖다가 방에다 가둬서 굶어 돌아가시게 하는 것을 보고 칠백 명이 넘는 그 제자들은 '세상에 도인(道人)이 저럴 수가 있느냐? 저런 것이 어찌 도인이라 할 수가 있겠나? 우리는 이런 참 무도한 사람을 스승으로 알고 이 밑에서 우리가 있을 수는 없다' 그리해 가지고 모다 걸망을 싸가지고 전부 거기를 떠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여러분들은 내 말을 잘 들으시오. 나는 이 오조 홍인대사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아들을 잘 두어서 그 덕택으로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좋은 아들을 두지 않았던들 나는 인간으로서 정(情)에 떨어져서 아들을, 도인인 아들을 도인으로 보지를 못하고 내 배 속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 사실로 해서 '내 아들, 내 아들' 그러한 정(情)으로 아들을 보다가 일생을 외로움과 서글픔 속에서 인생을 살면서 아들에게, 중생교화를 하는 아들의 신경을 쓰게 만들어 주고 나아가서는 사찰에 피해를 끼치다가 내생에는 다시 어느 곳에 떨어졌을는지도 모르는데, 다행히 아들의 그러한 용감한 적극적으로 이 에미를 생각하는 그 뜨거운 자비, 뜨거운 자비로 해서 나는 모든 업(業)을 뿌리치고 선도(善道)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여러분들은 이 도량을 떠나지 말고 여기서 철저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서 대도를 깨달으십시오" 이러한 우렁찬 목소리가 공중에서 울려 나왔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칠백 명은 일제히 감격해 가지고 다시 걸망을 내려놓고 그전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신심으로 도를 닦고 홍인대사를 정말 위대한 스승으로 신봉(信奉)을 했던 것입니다.
만약 색상(色相)으로써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고 있음이라 능히 여래(如來)를 보지 못하리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에 있는 사구게(四句偈)입니다. '내 모습이 32상(三十二相)과 80종호(八十種好)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래서 참 성현이다, 그래서 부처님이다' 하고 나를 보거나, 나의 음성은 원음(圓音)이라—한 말로 말하되 16군생(十六群生)이, 일체중생이 각기 자기 근기(根機) 따라서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성인은 성인대로 각기 열 가지의 모다 자기의 입장에 따라서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나의 목소리는 '뚜렷한 소리'다 해서 원음(圓音)이라 그러는데, '나는 원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원음으로 설법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참 부처님이다' 이렇게 나를 찾은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삿된 도를 행하고 있는 사람, 소견이 삿된 사람이라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여래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은 부처님을 찾을 때, 선지식을 찾을 때, 정법을 찾은 때 있어서 이 금강경에 사구게를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겉모양을 보고 음성을 듣고 그래 가지고 그 색상에 떨어져서 스승을 구하고 정법을 구하고 부처님을 구할 때에는 벌써 그 생각 자체가 그릇된 생각이여. 그릇된 소견에 떨어졌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정법, 참나, 참 부처님은 만나지지 못할 것입니다.(21분13초~39분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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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칠석날, 여러분은 각기 크고 작은 소원들을 가슴에 품고 오셨을 줄 생각합니다. 다른 절에서는 오늘 칠석날 새벽부터 불공을 하고—독불공(獨佛供)을 하고, 동참 불공(同參佛供)을 하고 계속 하루 종일 목탁을 치면서 불공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또 축원을 하고 모다 그럴 것입니다. 그런 절에도 많이 가보셨을 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필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그 쏟아지는 빗속에 이 주안 용화사를 여러분들은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가지고 '빨리 불공을 했으면, 빨리 우리 아들 축원을 해 주었으면' 혹 그러한 생각을 가지신 분도 계실는지 모르지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용화사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을 하는 도량입니다. 여러분들이 오시자마자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한 시간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법문 내용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최상승법, '어떻게 하면 참선을 바르게 하며 바로 깨닫을 수가 있느냐?' 이러한 아주 고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 절에서는 불공과 기도를 하지 아니하고 하필 오늘 칠석날 이러한 참선 법문을 해 드리느냐? 이것이야말로 정말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무개 보체(保體), 아무개 보체' 낱낱이 축원을 안 해도 여러분이 접수만 해 놓으셔도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알고 계십니다. 낱낱이 이름을 불러야 알고, 부르지 아니하면 모른다면 그러한 부처님께 뭐 갖다가 올릴 것이 또 뭣이 있습니까? 벌써 여러분이 한 생각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오셨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또 이 법문(法門)이 끝난 다음에 또 간략하지만 정성스럽게 예경(禮敬)을 올리고 또 축원(祝願)을 해 드립니다. 축원은 낱낱이 여러분의 식구의 이름을 부르지 않지만 '칠석법회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이러면 여러분은 다 그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 이름을 1학년부터서 다 부르지 안 해도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그 학교에 학적이 있는 학생은 다 그 속에 다 포함이 된 것입니다. 낱낱이 이름을 부르다가 빠지면 그것은 큰 손해를 보겠지만 '서울대학교 학생 일동' 그러면 자기 이름을 특별히 불러 주지 안 해도 자기도 그 속에 여지없이 틀림없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동참발원재자(同參發願齋者) 각각등보체(各各等保體)' 하나도 빠짐없이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고 여러분들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합니다. 왜 소원을 성취하느냐? 불교의 최고의 법인 최상승 법문을 들었거든. 그리고 그 최상승 법문을 듣고 거기서 신심을 내고 그것을 실천을 할려고 결심을 다지시고 또 현재 실천을 하고 계시고 그러니 여러분들이 만약에 학생이라면 가장 최고의 점수를 가진 우등생과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무엇이 걱정이 되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팔만사천 법문 가운데 최고의 근본법이요, 최고로 높은 이 법을 듣고 그것을 실천을 하기 때문에 복을 빌고 소원을 빌고 한 것은 자연히 그 가운데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이라든지 재앙이라든지 이것이 하느님이 맥없이 우리한테 복을 주고 까닭 없이 우리한테 벌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복을 받을 수 있는 또는 재앙을 받을 수 있는 그 원인이 전부 내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을 받을 만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복이 돌아오는 것이고, 내가 재앙을 받을 수밖에는 없는 그러한 원인을 지었으면 내게 재앙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공연히 나를 미워서 나에게 벌을 주고, 신장님이 아무 까닭도 없이 내가 미워서 나에게 급살(急煞)을 내리고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작자수(自作自受)인 것입니다.
무엇으로 짓느냐?
몸으로 짓고, 입으로 짓고, 마음으로 짓습니다. 이것이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三業)입니다. 삼업(三業)인데 근본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한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이 입을 통해서 표현이 되고 몸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 근원을 잘 다스리면.... (녹음 끊김).... 파 뒤집으면 또는 독한 약을 뿌리에다가 치면 그 많은 가지와 잎은 저절로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큰 아름드리나무도 뿌리에다가 적당한 비료와 적당한 수분을 공급을 하면 그 수십만 수백만 개의 가지와 이파리는 저절로 싱싱하게 자랄 것입니다. 그 나무를 죽일 수 있는 것도 뿌리에 달려 있고, 그 나무를 살리는 데에도 뿌리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부처님은 어떠한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가 와서 공을 들이고 기도를 하고 주력을 하고 염불을 하고 할 때 부처님은 환히 다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절에 와서 하건, 자기집에서 하건, 직장에 가서 하건, 어디 기차간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하건, 어디서 · 언제 ·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부처님은, 우주의 가득차 계신 부처님께서는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불법를 옹호하는 제석천왕도 환히 다 보고 계시고, 복을 받을 사람, 복을 받지 못할 사람, 있는 복도 떠날 수밖에는 없을 사람, 지금은 가난하지마는 하는 싹수가 머지않아서 부자가 될 사람, 환히 다 보고 계시거든.
어떤 분은 절에 왔을 때만 목욕재계하고 아주 마음도 경건한 마음으로 오지만, 일단 집에 가면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을 마구 함부로 해서 아들과 손자, 며느리로부터 '불법(佛法)을 믿는 분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이러한 공격을 받는 분이 적잖이 계시지 않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가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가정에서 살아 있는 수도원,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인 것입니다.
자기가 불교 신자라고 하는 것이 알려지지 아니한 타관에서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건 언제 어디서라도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불제자는 항시 부처님이 자기 안에 계신 줄 믿고 항시 자기 머리 위에서 자기를 보고 계신 줄 믿고 한 생각, 한마디 말,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이르도록 언제 어디서라도 경건한 마음으로 행동하고, 거룩한 어진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람을 상대하고 일을 처리해 나간다면 이것이야말로 복을 받을 사람이요, 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항시 마정수기(摩頂受記), 마정수기는 우리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 약속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들이나 손자가 착하고 귀여울 때에는 이마를 만져주면서 칭찬해주듯이, 우리는 언제나 우주에 꽉 차 있는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으면 일체 업장(業障)이 다 소멸이 되고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는 짓은 죄 받을 짓만 하면서 어쩌다 한 번씩 불공만 들이면 소원을 성취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조금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압니다.
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절에 못 간다' '법회에 나오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가진 것이 없어서 못 간다'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분을 가끔 뵙니다마는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그러한 말이 입에서 나와서는 아니됩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또는 불사(佛事)에 바치는 시주금 이러한 것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많고 적고건 간에 정성이 다 꽉 차 있으면 그것으로써 족한 것입니다. 백 원이면 백 원, 만 원이면 만 원, 십만 원이면 십만 원, 백만 원이면 백만 원, 자기 형편껏 성의껏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돈 백 원도 없으면 경건한 마음으로 청수(淸水) 한 그릇을 올려도 족한 것입니다. 물이 없으면 한 생각 경건한 마음으로 '이뭣고?' 화두 한 번 들면 되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서 못낸 것을 부처님은 미워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시지를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그 사람에 정성스러운 마음, 경건한 마음, 청정한 마음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구두선(口頭禪),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구두선이라 그런 말씀을 하셨고 '구두선은 사구선(死句禪)이다'
구두선이라 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입으로 따져서 하는 것이다 이 말이여. 입으로 '그것은 이러쿵저러쿵, 체(體)다 용(用)이다, 법신이다, 여래다, 뭣이다' 해 가지고는 참선을 입으로 이래이래이래 따져 가지고 답을 알아맞히고, 또 제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치기를 무슨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있어서 힌트를 주는 것처럼 살살 가리켜서 힌트를 주어 가지고, '아! 이것이 아닙니까?' '오! 옳다 옳다. 아! 그것 참 어지간하다'
또 다른 공안을 내줘 가지고 '이걸 오늘 해 전에 이것을 알아 오너라'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 그냥 골치가 아플 정도로 하루 종일 따져 가지고는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 가지고 쫓아가서 '알았습니다. 이것이 아닙니까?' '아니다. 그 조금 틀렸다'
다시 또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는 '이것이 아닙니까?' '아! 인제 되았다'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가리키고, 이러한 식으로 참선을 배우는 것을 이것을 갖다가 구두선(口頭禪)이라, 이것을 의리(義理), 의리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고.
이렇게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참선은 아무리 그럴싸하게 따져서 모든 공안을 다 풀이를 했다 하더라도 마침내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을 여의지를 못하고, 따질수록에 중생의 분별심만 더욱 치성하게 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분별심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여. 점점 생사(生死)의 불에 섶을 더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이라, 더욱 생사의 번뇌에 분별의 불은 치성하게 탈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참선은 생사윤회의 주검으로 떨어지는 참선이여. 그래서 이것을 '죽은 참선' 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라 그러는 것이거든.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선(活句禪)이요, 바른 참선이냐?' 하면 '분별심, 이론으로 따지는 버릇을 쓰지를 말아라. 이건 유(有)다, 무(無)다, 비유(非有)다, 비무(非無)다, 이것은 허공이다, 허공 같으되 허공도 아니다, 이러한 이론을 쓰지를 말아라 이 말이여'
'화두는 이론으로 풀 수 없는 것이여. 이론으로 따지지도 말고 이론으로 풀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렇다면은 왜 화두를 드느냐? 아마 이것은 모든 번뇌와 망상을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 이 화두는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화두는 바로 쇠로 맨든 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일체 번뇌 망상을 다 쓸어버리는 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론으로 사용하지 말고 다맛 이뭣고? 만 하라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물론 화두를 들면 번뇌와 망상이 해결되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든다고 하는 생각은 갖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치 장님들이 모여 가지고 코끼리를 갖다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만나서 '대관절 코끼리란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를 못했다, 우리가' 그래서 각기 코끼리를 모다 달려들어서 만지는데, 코를 갖다가 이리저리 더듬어 본 장님은 '코끼리 코끼리 하더니 구렁이 같이 생긴 거로구나' 또 한 장님은 배를 갖다가 만져 보고 '아! 코끼리라는 게 벼람박 같이 생긴 것이다' 코끼리 다리를 만져 본 사람은 '코끼리라는 게 기둥 같이 생긴 것이다' 각기 자기가 만져본 대로 얘기를 하고 자기가 코끼리의 전체를 파악을 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39분10초~59분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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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해 나가는 데, 화두를 자꾸 드는 데 있어서 모든 망상이 처음에는 더 치성하게 일어나지만 그래도 한결같이 화두를 들고 복식(腹式)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날 겨를이 없게 되고, 일어나도 금방 화두를 들므로써 간 곳이 없어지니까 쇠빗자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런 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두를 갖다가 쇠빗자락과 같은 것이다' '코끼리는 구렁이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장님과 같은 견해에 지나지 못한 것입니다.
또 '계려궐(繫驢橛), 나귀를 매는 말뚝이다' 나귀를 매놓지 않고 놔두면 그 나귀란 놈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왔다갔다해서 밭도 밟고 곡식도 밟고 막 함부로 할 텐데, 그 나귀의 고삐를 갖다가 말뚝에다 콱 매놓으니까 그 나귀가 먼 곳을 가지 못하고 그 말뚝 주변에만 뱅뱅 돌게 되니까, 화두만 자꾸 들므로 해서—화두를 안 들면 이 생각, 저 생각, 번뇌 망상, 희로애락 모다 그러한 생각으로 우주법계가 좁다하고 이리저리 돌아칠 텐데, '화두를 착 들므로써 잠깐 뭔 생각이 났다가도 금방 이뭣고? 이뭣고? 하니까 마치 나귀를 말뚝에다 매놓은 거와 같다. 화두란 게 바로 그러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이로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견해도 화두에는 혹 그러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화두가 바로 그런 것이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 보고 기둥과 같다고 하는 견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러쿵저러쿵하는 분별심을 하지 말고, 다못 화두만을 들되 슬플 때도 '이뭣고?' 기쁠 때도 '이뭣고?'—그 말은 '슬퍼한 놈이 무엇인고?', 기쁠 때는 '기뻐한 놈이 무엇인고?' 배가 아플 때는 '배가 아픈 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배가 아플 때도 나는 '이뭣고?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하라는 것이지, 배가 아플 때는 '배 아픈 놈이 무엇인고?' 똥 눌 때는 '똥 누는 놈이 무엇인고?' 세수할 때는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낱낱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수할 때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지금 이- 하는 이놈이 뭣고? 이뭣고?' 이렇게 하라 이 말씀이에요. 낱낱이 '세수하는 놈이 무엇인고?' 저거 차 소리가 나면 '차 소리 나는 놈을 듣는 놈이 무엇인고?' 손님이 오면 '손님이 온 맞이한 이놈이 무엇인고?' 밤낮 그때그때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때에도 화두를 잘 챙겨서 들어나가라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가면, 처음에는 심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들면 곧잘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해 가면 차츰차츰 계속해서 쭉 잘되어 가면 참 이거 뭐 어려울 것이 없고 참 좋겠는데, 얼마 동안 해 가다 보면 마치 나귀나 소를 갖다가 우물로 끌고 들어갈려고 한 것처럼 아무리 끌어 잡아당겨도 끌어 잡아당길수록 뒤로 버티고 뒤로 물러설라고 그러고, 뒤에서 억지로 몰아넣어서 우물로 밀어넣을려고 해도 그럴수록에 이놈이 더욱 뒤로 버텨서 안 들어갈려고.
화두를 들고 좀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하게 좀 할려고 하면 그럴수록에 더 가슴이 먹먹하고 영 머리가 띵하고 망상이 더 퍼일어나고, 몸이 괴롭고 시간이 지루하고 이래서 때로는 냉랭하고, 때로는 열열하고, 때로는 그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고, 때로는 번뇌와 망상이 겨우 좀 가라앉을 만하면 자꾸 혼침(昏沈)에 떨어지고, 이렇게 해서 영 공부가 진취가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래 가지고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공부를 옳게 하는 것인가? 공부를 잘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번민을 하고 괴로워하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공부를 꼭 잘 못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옳게 해 나가도 때에 따라서 그러한 여러 가지 종류의 현상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일어나서 한 5분 내지 10분간 좀 포행(布行)을 해서 정신을 깨끗이 한 다음 다시 또 자리에 떠억 앉아서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약 3초 가량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또 화두를 들면 한결 가슴이 시원하고 후련하면서 또 얼마 동안 공부가 잘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가고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민(煩悶),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 안되어 갈 때,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그러한 중요한 고비가, 거기가 바로 중요한 고비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비를 지혜롭게 잘 넘기면 바로 공부가 한결 수월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고비를, 좋은 중대한 고비인 줄을 모르고 거기서 번뇌심을 내 가지고 '에이! 이거 공부는 못할 것이다. 이거 차라리 아미타불이나 부르다가 죽어서 극락이나 가지, 근기가 약해서 참선은 도저히 안 된다고 하더니 정말 이거 안 될려나 보다' 이렇게 해서 포기를 하면 그 높은 태산준령을 걸어서 걸어서 올라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고개를 넘을 텐데 거기서 포기를 하고 내려와 버린 거와 마찬가지여.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이 칠석 법회 이렇게 아침부터 비가 쏟아짐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이 모다 참석을 해 주셨습니다. 그 정성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반드시 소원을 성취할 것입니다. 성취할 것을 나는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며 반드시 성취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름 뒤에는 양력으로 8월 25일이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우리의 선망부모라 하면 돌아가신 부모 또는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우리 족보에 올라 있는 그러한 조상만이 아니라 일가친척뿐만 아니고 어떠한 사람, 이 우주 간에 가뜩차 있는 모든 사람, 모든 동물, 모든 이 허공계에 가뜩차 있는 주인이 있는 그리고 주인이 없는 모든 영혼들, 심지어는 지옥에서 고(苦)를 받고 있는 수많은 중생들까지라도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무량겁을 두고 오늘날까지 윤회를 하면서 올 때에 수수 천백만 번을 새 몸을 받았다가 또 한평생 살다가 또 죽고, 죽었다가 또 다시 새 몸을 받고 할 때에 사람도 되었다, 짐승도 되었다가—소도 되었다, 말도 되었다, 뱀도 되었다, 모기도 되었다, 지렁이도 되었다가, 지옥에도 갔다, 천당에도 갔다, 이러는 동안에 나의 부모 아니었었던 사람은 중생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인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땐가 한 번은 그 몸을 의지해서 내가 몸을 받아났기 때문에 전부가 다 우리의 선망부모다 이것입니다.
특히 좋은 곳에 계시는 선망부모는 좋지만, 그런 아귀도나 축생도나 지옥도, 이러한 삼악도(三惡途)에서 고(苦)를 받고 계시는 우리의 선망부모, 백중날에 한해서는 그 지옥의 문이 열려서 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가석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이나 한국, 일본, 불교를 믿는 나라들에서는 이 백중날에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경건한 법요식을 거행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십대제자(十大弟子) 가운데에 신통제일이신 목련존자가 지옥에 빠져서 고생하고 계시는 어머니, 청제 부인을 그 효성스러운 마음으로 해서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이 감동을 하셔가지고 그 지옥에 고를 받고 계시는 어머니를 구제해 드리는 그것이 최초의 원인이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옥에서는 그날을 기해서 지옥문을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준례에 따라서 그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경건한 마음으로 백 가지 과일과 곡식으로써 선망부모의 천도를 위해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인 스님네께 공양을 올리고 선망부모의 천도재(薦度齋)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날 지옥문, 삼악도의 문이 열려서 이 법문을 듣고 천도를 받기 위해서 자기와 인연이 깊은 절을 우리의 선망부모들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와서 보니 아무리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 자기의 아들, 자기의 며느리, 자기 딸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면 그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귀신의 세계도 인간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전생(前生), 금생(今生), 내생(來生)의 구별이—'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죽은 뒤에도 내생(來生)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해서 굉장히 의심을 품고 질문을 하시는 분을 만납니다마는, '우리가 한평생 살다가 죽은 뒤에 우리의 상태가 어떠냐?' 한 것은 눈 뜨고 있다가 잠이 깊이 들어서 꿈을 꾸는 거와 같고 또 꿈꾸다가 잠을 깨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다맛 이 몸뚱이가 고장이 나면 그 몸뚱이를 버려 버리고 다시 또 새 몸을 받게 되는데 새 몸을 받을 때까지 그 중간의 시간을 갖다가 '귀신(鬼神)의 세계'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나 또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들이 이승을 하직을 하고 그분의 업(業)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데 49재만에 새 몸을 받기도 하고, 백 일만에 받기도 하고, 소상이나 대상을 지내고 받기도 하고, 또는 10년, 20년 동안 중음신(中陰身)으로, 이 귀신의 세계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아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백 년 동안도 영혼의 상태로 머물러 있다가 그때사 새로운 몸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간 분들이 지금 새로운 몸을 받았는지 아직은 받지 아니하고 이 귀신의 세계에서 떠돌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로서는 참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비명(非命)에 가신 분들을 여러분이 보신 바와 같이 이 법보단(法寶壇)에 모셔서 여기서 이 최상승법을 법회 때마다 들을 수 있도록 해 드리고, 그리고 법회 때마다 명절 때마다 천도를 해 드리고, 매년 음력 3월 16일에는 합동으로 대천도재(大薦度齋, 법보재法寶齋)를 봉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명(非命)에 돌아가시지 않는 그러한 조상들도 여기에 모시면 더욱 좋고, 특히 비명에 가신 그러한 영가들은 여기다가 모셔 놓으면 집안의 모든 재앙도 쉬어지고, 그러한 비명에 간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원한에 사무쳐서 자기와 가장 인연이 깊은 아들과 딸, 며느리 그러한 주변을 맴돌면서 '나를 좋은 곳으로 천도를 해 달라'고 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호소를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과 영혼과는 원칙적으로 언어가 통하지를 안 해서 가끔 꿈을 통해서 뜻을 전달하기도 하고 때로는 매개를 통해서 뜻을 전하기도 하고 그럽니다마는.
그런 영혼은 그 해롭게 하기 위해서 그 집안에 떠나지 아니하고 맴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자기를 좋은 곳으로 천도해 달라'고 가서 한 번 해서 안 들으면 두 번, 두 번 해서 안 들으면 세 번, 열 번, 스무 번 이렇게 하다 보면 자꾸 그 영혼이 자기 몸 주변에 와서 가까이하고 자기 집안에 이렇게 가까이하고 하면 그것이 인간과 영혼의 세계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해도 아무 병도 없고, 신경성이라고 하는 진단을 받지만 사실은 그러한 원한에 사무친, 나와 인연이 있는 영혼 탓으로 해서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가정적으로 괴로움을 받게 되는 예가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런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여기에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전국 각지에서 수만 명 이렇게 여기에 참석을 하셔서 그 영혼의 탓으로 해서 최상승법을 만나고, 또 여러분과 같은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을 인연해서 그 많은 원한에 사무친 영혼들이 원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가시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온전히 부처님의 은혜요, 전강 조실 스님의 자비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백중날 우리의 선망부모를 위하고, 우리의 가정을 위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리고 크게는 전 인류를 위해서 다 같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이 백중 천도재에 참석을 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리고, 여기에 위패를 모시지 아니한 분도 오셔서 임시위패를 모실 수도 있고 이 법회에 참석을 하셔서 동참을 하셔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날은 여름 경신년 삼하안거(三夏安居), 여름결제가 해제(解制)되는 날이면서 백일기도 회향일까지 겸한 날인 것입니다. 서로서로 권고해서 많이 참석을 해 주셔서 소원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59분21초~1시간20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작일지두개란만~ / 하늘에 있는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을 하나의 성현(聖賢)으로 받들어 모시는 토속 신앙을 포섭해서 정법으로 인도하는 자비스러운 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방편을 써왔다 / 용화사에서는 오직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다 / 이 최상승법은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 / 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몸을 바꿔 온 법문.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니다 /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다 / (게송)약이색견아~. 『금강경』 사구게(四句偈).
오늘 칠석날 참선 법문을 해 드린 것은 여러분의 소원을 성취해 드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 자작자수(自作自受) / 모든 업(業)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 절만이 마음을 닦는 곳이 아니라 참으로 살아 있는 적극적인 참선방이 바로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이다 / 마정수기(摩頂受記) /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경건한 마음으로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 / 이리저리 따져 가지고 참선하는 것을 구두선(口頭禪)이라 그러고. 이것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한다 해서 의리선(義理禪)이라 한다. 구두선은 '죽은 참선'이라 해서 사구선(死句禪)이다. 깨달음은 없고 생사윤회로 떨어지는 참선.
이 공부는 잘되어 간다 할지라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 것이며 또 영 공부가 지루하고 괴롭고 잘 안되어 간다고 느껴질 때라도 번뇌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 영 공부가 잘 안되어 갈 때 그때야말로 한 고비 넘으려고 하는 중요한 고비. 그러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길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반드시 도(道)를 성취할 사람이다 / 우리의 선망부모(先亡父母)를 천도(薦度)해 드리는 날, 음력으로는 7월 보름날, 백중날 소개 안내 / 이 우주에 가뜩차 있는 모든 중생이 다 우리의 선망부모이다 / 영혼, 영가의 하소연 /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만년위패 법보단을 창설하신 의의. 만년위패(萬年位牌)에 모셔서 좋은 법문을 듣고 원한을 다 풀고 여기에서 편안하게 계시다가 인연이 도래하면 좋은 곳으로 태어나시도록 하기 위함.
〇우리 용화사에서는 오직 부처님 한 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 한 분만을 모시고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 법문(法門)을, 팔만사천 방편을 하나로 녹여 뭉쳐서 오직 최상승법(最上乘法)만을 선양을 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최상승법은 오직 관심일법(觀心一法), 내가 내 마음, 한 마음을 관하는 이 법으로써 일체법(一切法)을 다 포섭을 하는 것입니다.
〇바로 이 최상승법은 그 그물에 있어서 벼릿줄과 같은 것입니다. 벼릿줄 하나만 들면 그 큰 그물이 대번에 가지런하게 탁! 추려지는 것입니다. 벼릿줄과 연결되지 아니한 그물은 없습니다. 모든 그물의 코는 전부가 벼릿줄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 하나만을 선양을 하고 여러분들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실천해 옮기면 팔만사천 방편, 팔만사천 법문이 바로 그 속에 다 포섭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벼리를 버리고서 낱낱이 그 수십만이나 있는 그 그물의 코를 낱낱이 들려고 하면 그 그물은 흔틀어져서 어찌해 볼 수 없게 되어질 것입니다.
〇불법(佛法)을 믿어도 이 최상승법을 믿어야 전체의 불법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믿는 그날부터 정말 올바르게 불법을 믿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최상승법을 모르고 저 팔만사천 방편 가운데에 저 어느 하나를 아무리 열심히 믿고 따른다 하더라도 마치 그물을 들 때 있어서 저 그물의 어느 구석지 한 코를 추켜든 거와 같아서 아무리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이리 뒤집어 놓고 저리 뒤집어 놓고 해도 도대체 이 그물이 어떻게 생긴가를 모르고 뒤적거릴수록 점점 혼란해지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 이 칠석날 용화사 법보선원에 오신 분은 정말 선택된 불자(佛子)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〇오조(五祖) 홍인대사(弘忍大師), 재송(栽松) 도인이 4조(四祖) 도신대사(道信大師)의 지시로 몸을 바꿔 온 법문.
〇엄격하게 따지면 인정(人情)과 성현의 자비(慈悲)와는 동질성의 것이 아닙니다. 성현의 자비에는 따뜻한 인정도 있지만 동시에 참 서릿발보다도 더 차웁고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울 수도 있는 그런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衆生)의 인정이라 하는 것은 정에 빠지면 이성(理性)을 잃어버리게 되어서 정(情)으로 남을 보살피고 정(情)으로 남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그 사람을 위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게 하는 그러한 역효과를 가져오는 수가 너무나 많고 그 정(情) 때문에 결국은 가슴이 쓰리고 아픈 그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무릇 도를 닦아 가는 데 있어서는 정(情)에 떨어진 일 그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또는 형제간 친구 일가 간 모두가 다 정과 정에 얽히고설켜서 서로 좋아하고, 그것이 한 생각 변하면 미워하고 그것이 더 나아가면 웬수가 되고 전부가 다 그 원인은 정으로부터 그러한 웬수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줄 생각합니다. 정법을 믿고 참나를 깨닫는 그러한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어리석음에는 떨어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〇우리의 선악(善惡), 일체 재앙과 일체 복록이 그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복돋우느냐에 따라서 복을 받게도 할 수가 있고, 재앙이 돌아오게 할 수도 있고 재앙이 돌아오지 않게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근원을 다스리는 방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것입니다.
〇불공(佛供)은 꼭 이 법당에서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걸림이 없이 꽉 차 있는 부처님, 동서남북이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 있는 부처님, 그 부처님 그 법신불(法身佛)께 공양을 올리는 법이 바로 이 최상승법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몸을 숙이지 아니해도 한 생각 화두(話頭)를 들면—경건한 마음으로, 엄숙한 마음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화두를 한 번 들면 그것이 바로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 올리는 불공이요, 공양인 것입니다.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라. 하늘에 한 달이 중천에 뜨면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여, 일천 강에 그 한 가지 달이 비치더라.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타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종일토록 홍진(紅塵) 세계,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오욕락(五欲樂)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달음박질치다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자기집 보배를 잃어버리고 마는구나.
온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法身)의 몸이요, 따라서 우리 깨닫지 못한 중생들도 고대로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 삼신(三身)이 고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바로 법신이요, 우리의 마음자리가 법신이요, 우리의 행동이 고대로 보신입니다. 마치 하늘에 둥근달이 하나 떠 있으면 일천 강물에 달그림자가 비추듯이,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중생 두두물물(頭頭物物)에 이르기까지 그 달이 비치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가난한 집이나 부잣집이나, 권리와 명예가 있는 집이나, 미천한 집이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봄이 돌아오면 다 따뜻한 봄기운을 봄바람을 받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와 오욕락을 구하기 위해서 동서남북으로 바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냥 가난하고 천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가지고 동분서주하다가, 원래 자기집에 평생 먹고 쓰고 남을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리저리 설치는 동안에 자기집에 있는 보물은 도둑을 맞아 버리게 된다.(失却自家珍)
오늘은 임술년 정초에 신수기도 회향일입니다. 초삼일(初三日)부터 시작해서 오늘 9일날 회향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셔서 하루 4분정진(四分精進)을 해 왔습니다. 모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이 기도에 오셔서 직접 정근(精勤)을 하신 분도 많이 계셨습니다. 바뻐서 또 못 나오신 분은 댁에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주일간을 기도를 하셨을 줄 생각을 합니다.
기도는 첫째 청정한 마음, 정직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이 세 가지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기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한결같이 청정하고 정직하고 지성(至誠)스러운 마음으로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기도는 첫째,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입니다.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데,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무량공덕을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모든 지혜와 모든 복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마음 한 생각 내시면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성취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량겁 업장(業障)이, 업이 있어서 그 업의 장애를 받아 가지고 우리의 소원이 바로바로 성취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러한 업장이 소멸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이나 또는 일주일이나 또는 삼칠일 또는 백일 이렇게 날짜를 정해 놓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그리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은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두고 봐야 알겠다. 이번에 기도를 했으니까 그것이 성취가 될는지 안 될는지 두고 봐야 알겠다’ 혹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기도는 ‘기도를 지금 해 가지고 앞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근본에 있어서는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떠한 서류를 관청에다가 신청서를 내서 관청에서는 이미 다 결재(決裁)가 떨어졌으되 본인에게 그 통지가 오는 것은 시일이 걸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미 내용적으로는 결재가 다 나서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통지문이 도달할 때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여러분이 기도한 것은 이미 다 결재가 떨어져서 성취가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그랬다고 해서 우리의 할 일이 다 없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할 일이 계속해서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을 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새로 업(業)을 짓지 아니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간 기도를 해서 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마음이 됨으로 해서 조그마한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지만 앞으로 우리에게는 큰 소원과 작은 소원들이 끊임없이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소원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들이 차례차례로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게 할려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아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업(業)을 짓지 않게 되느냐?
‘업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 살생을 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사음을 범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보통 다 이러한 그 나타나는—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죄를 짓는다, 업을 짓는다’ 이리 생각을 하지만, 물론 그런 행동으로 짓는 업이 업 짓는 것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업(業)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어떠한 행동도 마음으로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 가지고 그것이 얼굴로 나타나고, 언어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진즉 지어놓은 것이 얼마 동안의 시간을 거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화재가 날 때, 불은 몇 분 전에 불이 붙어 가지고 벌벌 타들어 가면 차츰차츰 그 불이 번져서 저 먼 데에서도 불꽃이 보이고 연기가 보일라면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연기와 불꽃이 보이기 전에 이미 불은 붙어서 타들어 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학자는 연기와 불꽃이 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한 생각' 딱! 일어날려고 할 때 거기에서 처리를 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불이 번져서 훨훨 타고 있을 때에는 소방대 차가 동원이 되어 가지고서도 끄기가 어렵고 이미 그때는 많은 가산(家産)을 다 태우고 집을 태우고 사람을 태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에사 끌려고 할 것이 아니라, 불이 맨 처음에 조그마한 성냥불이나 담뱃불로부터서 불이 붙자마자 그때에는 손바닥으로 꺼도 꺼지는 것입니다. 발로 살짝 밟아 버리기만 해도 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종류의 죄(罪)도 한 생각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딱! 조치를 해 버리면 간단하게 죄짓는 것을 미연에 해결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법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참선법(參禪法)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아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찰나에 그 일어난 그 생각이 커지기 전에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돌이켜 관조(觀照)하면 자취 없이 소멸되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이 화두로써 모든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소멸시켜 버리는 이 법은 그동안에 참선을 해보신 분이면 너무너무 요긴하고 고맙고 미묘하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이 참선은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죄를 짓지 아니하는데 가장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많은 죄를 지어서 그 죄가 자기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고, 남을 망치고 사회 국가를 망치고 그렇게 된 뒤에사 그것을 소멸을 하기 위해서 용맹정근을 하고 기도를 하고—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우리 최상승 학자는 지나간 업(業)은 기도를 통해서 하려니와 앞으로 새로 짓지 않는 방법으로는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법이라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20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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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에 살려면 아들딸들이 잘 자라고 공부를 잘하고 좋은 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겠고, 사업도 잘되어서 돈도 잘 벌어야 되겠고, 직장에 직책도 자꾸 위로 승진을 해야만 되겠고, 아들딸들이 좋은 배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줘야 되겠고 이러한 등등 수많은 크고 작은 원(願)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원을 성취해야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렇게 열이면 열, 다 성취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과 모든 성현께 간절히 소원을 해서 그런 성현의 가피(加被)를 입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겠습니다.
「잘되면 제 공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이라고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면 핑계를 꼭 외부에다 대고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을 책임을 전가(轉嫁)합니다마는, 모든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하고 모든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책망(責望)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요 욕심입니다마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또는 모든 성현들은 꼭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된 것만이 좋다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중생들은 호강하고 부귀하게 잘살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고 이럴 때에는 즐거움에 빠져서 게을러지고 오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고 성현을 존경하지 않게 되고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종교에 대한 신앙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자기가 똑똑하고 잘나서 그렇게 부자로 사는 줄 알지만 원인을 알고 보면 전생에 조금 복(福) 지어 놓은 것이 있어서, 전생에 복을 지어서 예금해 놓은 것이 있어서 그놈 빼먹느라고 좀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것이지 그거 곶감 빼먹듯이 다 빼먹고 나면 별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남부럽지 않게 좀 잘살고 호강하고 산다고 해서 조금도 남을 업신여기고 뽐내고 으시댈 만한 거리가 되지를 못한 것입니다. 잘살아 봤자 잠깐동안 꿈꾼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높은 벼슬과 권리를 가지고 큰소리를 쳐봤자 잠깐 그러다 마는 것입니다. 불과 10년 20년이요, 몇 해 안 가면 다 그런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허망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돈이 없고 가난하고 사업을 해도 잘 안되고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서 너무너무 속을 상하고 근심걱정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별로 그렇게 걱정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 가면서 참고 견디다 보면 차츰 일이 풀려나가면서 또 돈을 벌게도 되고 남부럽지 않게 살 날이 또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지난 삼동(三冬) 대단히 추웠습니다. 그렇게 추워서 너무너무 추워서 이렇게 계속해서 추우면 얼어죽을 것 같지만 벌써 새해를 맞이해서 모레면 임술년 입춘(入春)을 또 맞이하게 됩니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雨水)가 돌아오면 대동강 물도 다 풀린다’ 그럽니다마는, 언제 어떻게 풀린 줄 모르게 동풍(東風)이 불어오고 화신(花信)이 전해오면 여기저기 또 진달래가 피고 산에 산에는 개나리가 벌겋게 피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보람있게 살아가노라면 금방 봄소식과 함께 우리의 가정에도 하나씩 둘씩 우리의 소원대로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생은 어피차 꿈과 같은 것이라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살아도 꿈이요 못살아도 꿈이요, 허망한 꿈이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허망한 속에서 허망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속에서 진실한 것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피와 오줌과 고름, 이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추(醜)한 것들로 구성이 되었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主宰)하는 마음자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이 깊고, 산과 같이 동(動)함이 없는 그러한 굳은 신심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굳은 신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큰 소원은 의심 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것이며, 세속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소원들도 어김없이 성취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귀(豪貴)에 득도난(得道難)이라, 호강하고 귀한 데에서는 도를 얻기가 어렵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선 배부르고 등 뜨시고, 호강하고 귀하니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구태여 신심도... (녹음 끊김) ...견성성불이니 하나도 필요로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벌집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그 꿀방울을 빨아먹는 동안에는 꿀의 단맛에 취해 가지고, 시시각각으로 자기가 매달려 있는 그 칡덩쿨이 흰 쥐, 검은 쥐에 의해서 계속 끊겨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 줄이 끊어지면 천길만길 우물 바닥에 떨어지면 그 우물 속에서는 독룡과 독사가 입을 벌리고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한 채 꿀물만을 빨아먹고 있는 그러한 형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오히려 도 닦을 마음을 발(發)하는 수가 많다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뭔 일이 잘될 때보다는 우리의 마음대로 잘되지 아니하고 정신적인 육체적인 물심양면으로 장애에 부딪치고 내 뜻과 같이 아니 될 때, 그때 발심(發心)해서 정법을 굳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삼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최상승법에 깊은 큰 인연을 심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부귀와 호강을 갖추면서도 그러한 데에 빠지지 아니하고 겸허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실천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함정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에도 지옥의 함정은 있고, 나쁜 일에도 지옥의 함정은 있고, 동서남북 멀고 가까운 모든 곳에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함정도 있고 천당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있습니다.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곳에 바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최상승법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20분17초~35분09초)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하니, 산으로 들로 가시밭길로 물로 동서사방으로 타향 객지(客地)로 돌아치다가 집으로 돌아와 텅 빈방에 앉았으니, 석양(夕陽)은 재오서(在吾西)로구나. 석양의 해, 저 서산 너머로 해는 여울여울 넘어가고 있구나.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것이 바로 고향을 떠나서 타관(他官) 객지로 갖은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겨우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돌아왔는데 해는 서쪽에 서산에 걸쳐 있구나. 벌써 나이 들고 몸은 늙어서 기운이 없고, 생각뿐이요 공부를 할려고 하면 자꾸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고 몸이 말을 안 듣고 자꾸 졸리고 온갖 망상은 퍼일어나고.
그러나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요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러서 흘러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고, 아무리 그 달이 천 개, 만 개의 물에 달이 떨어져 비추되 원래 그 달은 하늘을 여의고 떨어진 것이 아니더라.
아무리 죄가 많고, 아무리 육도윤회를 하고 갖은 업(業)을 짓고 고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법을 만나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고 잡드리해 가면 결국은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고 말더라.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조그마한 물줄기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흘르고 흘르면 차츰 강물에 도달하고 작은 강에서 큰 강으로, 큰 강에서 마침내는 바다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여.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 하늘에 비친 달이 천 개, 만 개의 물에 비춘다 해서 그 하늘의 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작아지는 것도 아니요, 광명이 줄어든 것도 아니여. 언제나 하늘에 있는 달은 고대로 있는 것이여. 달이 설사 떨어져 안 보인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에서 보이지 아니할 따름인 것처럼, 중생의 육도윤회, 일념지간(一念之間)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그 번뇌망상 속에서도 조금도 물들지 아니하고 변함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 우리는 그 도리를 보고 깨달아 증득하기 위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허수히 보내지 말고, 허수히 하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1분 동안 화두를 단속해서 화두를 들면 1분 동안에 성불(成佛)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한 생각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회향날입니다. 기도 회향날이기 때문에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순수한 최상승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업장(業障)을 소멸할 수가 없고, 최상승법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크고 작은 소원을 가장 빨리 소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할 것도 못되고, 그걸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마음 상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호랑이나 코끼리를 잡으러 가는 포수(砲手)가 토끼 한 마리, 무슨 여우 한 마리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건 아니하건, 돈이 많건 적건, 얼굴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조금도 우리는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서 조금도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야코죽을 것도 없습니다. 든든한 마음, 의젓한 마음, 느긋한 마음으로 긍지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모든 문제를 화두로써 해결할려고 노력을 해야만 훌륭한 혈통을 가진 사람답다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월수벽산전(月隨碧山轉)이요 수합청천류(水合靑天流)로구나. 달은 푸른 산을 따라서 돌아가고, 저 푸른 산 너머로 돌아 넘어가고, 수합청천류(水合靑天流)로구나. 물은 저 흐르는 물은 푸른 하늘과 딱 합해져서 흐르는구나. 여러분이 큰 강물이나 큰 바닷물을 보면 저 끝이 하늘과 딱 닿아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풍화난자취(風花亂紫翠)헌데, 바람에, 하늘거리는 봄바람에 피는 꽃은 붉고 푸르게 울긋불긋 피어 있는데, 운외(雲外)에 유연림(有煙林)이로구나. 저 구름 밖에는 안개 낀 숲이 있구나.
일 년을 살아가시되 기쁜 일도 있을 것이고 또 걱정스러운 일도 있을 것이고 슬픈 일도 있을 것입니다. 기쁜 일을 만나도 ‘이뭣고?’를 생각하고, 슬픈 일을 만나도 ‘이뭣고?’를 생각하십시오.
‘이뭣고?’가 퍼뜩 돌아오지 아니하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서 들은 법문을 생각내고, 용화사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모습을 생각하시고 또 이 송담(松潭)이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드리고 있는 그 모습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그 슬픔과 괴로움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반드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35분10초~51분42초)(끝)
[법문 내용]
(게송)천강동일월~ / 신수기도 / 기도는 청정한 마음, 정직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이 세 가지 마음으로 해야만 기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 / 기도는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된다 / 기도는 ‘기도를 지금 해 가지고 앞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한다 /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 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
업(業)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학자는 '한 생각' 딱! 일어날려고 할 때 거기에서 처리를 해 버려야 한다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찰나에 그 일어난 생각이 커지기 전에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돌이켜 관조(觀照)하면 자취 없이 소멸된다 / 참선은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죄를 짓지 아니하는 가장 묘한 방법.
「잘되면 제 공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이라고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것 /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 /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호귀(豪貴)에 득도난(得道難)이라, 호강하고 귀한 데에서는 도를 얻기가 어렵다’ /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오히려 도 닦을 마음을 발(發)하는 수가 많다 / 안수정등 /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곳에 바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최상승법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송)귀래좌허실~ / 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 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 (게송)월수벽산전~.
〇기도는 첫째,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입니다.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데,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무량공덕을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모든 지혜와 모든 복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마음 한 생각 내시면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성취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량겁 업장(業障)이, 업이 있어서 그 업의 장애를 받아 가지고 우리의 소원이 바로바로 성취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러한 업장이 소멸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이나 또는 일주일이나 또는 삼칠일 또는 백일 이렇게 날짜를 정해 놓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그리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은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〇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을 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〇인생은 어피차 꿈과 같은 것이라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살아도 꿈이요 못살아도 꿈이요, 허망한 꿈이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허망한 속에서 허망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속에서 진실한 것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피와 오줌과 고름, 이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추(醜)한 것들로 구성이 되었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主宰)하는 마음자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이 깊고, 산과 같이 동(動)함이 없는 그러한 굳은 신심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굳은 신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큰 소원은 의심 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것이며, 세속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소원들도 어김없이 성취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아무리 죄가 많고, 아무리 육도윤회를 하고 갖은 업(業)을 짓고 고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법을 만나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고 잡드리해 가면 결국은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고 말더라.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조그마한 물줄기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흘르고 흘르면 차츰 강물에 도달하고 작은 강에서 큰 강으로, 큰 강에서 마침내는 바다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여.
〇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1분 동안 화두를 단속해서 화두를 들면 1분 동안에 성불(成佛)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한 생각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〇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건 아니하건, 돈이 많건 적건, 얼굴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조금도 우리는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서 조금도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야코죽을 것도 없습니다. 든든한 마음, 의젓한 마음, 느긋한 마음으로 긍지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모든 문제를 화두로써 해결할려고 노력을 해야만 훌륭한 혈통을 가진 사람답다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등한히 봄바람이 얼굴에 스쳐가는 것을 식득(識得)을 했어. 느꼈다 그 말이여. 무심히 앉았는데 봄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쳐가.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일만 붉은 것과 천 가지 빨간 울긋불긋한 가지가지 꽃이 피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다 이 봄이더라 그 말이지.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을, 비롯함이 없이 저 무량겁래로 오면서 마치 봄이 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초목이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좋은 생각, 악한 생각, 좋지도 악하지도 않는 생각, 별별 생각이 햇볕에 문지 일어난 것이 보이듯이 그렇게 무명업식(無明業識)이 그렇게 동요, 생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거 그 생사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갖다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본래인(本來人), '참 자기'로 착각을 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푸르고 붉고 노랗고 희고 울긋불긋하게 온갖 꽃이 피는데, 그것들을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봄이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면 빨간 꽃 하나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 할 수는 없어.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리고 얼굴을 스쳐가는 시원한 봄바람,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합해서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스쳐간 그 바람을 가지고 봄이라 할 수 없고, 노란 꽃 한 송이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말이여.
우리 중생에 천 가지 만 가지 희로애락, 탐진치 삼독, 팔만사천 번뇌 망상, 육도법계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법계(法界)라 그러고, 그걸 갖다가 실상(實相)이라 이러는데, 그렇다고 해서 번뇌 망상 하나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것을 진여(眞如)라 말할 수 없고, 전체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 하나를 가리켜서 법신(法身)이라 말할 수가 없어. 우리 일어나는 번뇌 망상 하나를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그런데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것들을 여의고 봄을 찾을 수도 없더라.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임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윤달이 안 들었으면 음력 7월 보름날 해제를 하게 됩니다마는 4월에 윤달이 들어서 음력 6월 15일에 해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석 달 동안 방부(房付)를 들인 스님네와 방부를 들인 보살님네가 이 법보선원에서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역시 이 결제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이 선방에 와서 입방선(入放禪)을 안 하신다 하더라도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결제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이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다른 법회 때보단 수효가 많이 줄어진 것 같습니다마는 꼭 오실 분이 오셨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백일(百日) 동안 결제 대중만 알맹이로만 딱 뽑아서 이렇게 오신 걸로 생각을 합니다.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기본자세이기는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은 항상 '기본자세에 충실한 것은 대단히 득력(得力)을 하는 데에 요긴(要緊)하다'고 고인(古人)네도 말씀을 하셨고 실지로도 경험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좌선 이외의 다니면서 하는 정진, 일하면서 하는 정진, 차를 타면서 하는 정진은 정진이 아니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기본자세를 충실히 익히는 것은 응용(應用)에 응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좌선(坐禪)을 새벽으로 한 시간 두 시간, 가정에서도 이렇게 착실히 해 놓으시면 그날 하루 동안 살림하면서, 차를 타시면서, 시장에 가시면서 또는 대인잡화(對人雜話)하면서 그런 행동하는 속에서 공부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충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 꼭 절에 와서 결제(結制)만 해야만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스님이 되고 모든 사람이 절에 와서 결제를 할려고 한다면 용화사(龍華寺)와 같은 이런 절이 수십만 개가 생겨도 다 못 당해 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도 난리가 나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생활하면서 충실히 정진을 할 수 있게 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불법(佛法)이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그렇게 될 때에 이 불법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장엄(莊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머리를 깎고 오직 정진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스님네가 계셔야 하고 또 머리는 안 깎았지만 이렇게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결제를 하면서 알뜰히 정진을 하는 그러한 보살님도 많이 계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왕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하는 마당에는 대중(大衆)에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 규칙은 형식상으로 볼 때에 대중의 각자의 행동을 구속(拘束)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을 받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방부를 들이고 여기에 모이신 것입니다. 그러한 구속(拘束)이 싫다면 구태여 여기에 방부를 들일 필요가 없고 이 도량(道場)에 모이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방부를 들이고 여기 모여서 사는 데에는 그 구속을 스스로 원해서 오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부를 들이시면 대중의 규칙을 아무리 자기 개인적으로는 마땅치 않다 하더라도 대중을 위해서, 선방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크고 작은 모든 규칙을 신심(信心)으로 환희심으로 자발적으로 그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하고 솔선해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조용해지고 정말 공부하는 데에 아무 시비와 지장(支障)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자가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 공부 잘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에 공부에도 제일 먼저 도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앉아서 시비(是非)를 하고 물의(物議)를 일으키고, 이렇게 될 때에 대중 전체가 소란해지고 공연히 속이 상하고 물의가 일어나면 화두(話頭)도 간 곳이 없고, 속을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정진도 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려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는 선방(禪房)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여기저기 선방이 중간에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이 깨지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결제 안거 도중에 몇 사람이 떠나게도 되고,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도 안거 동안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하는 낙인(烙印)을 찍히게 되고, 한 번 낙인을 찍히게 되면 간 곳마다 '저 사람이 저이는 아무 데 선방에 지내다가 중간에 보따리 싸 짊어진 사람이다' 이리해서 낙인이 딱! 찍히게 되어서 다른 선방에 가도 방부를 받기를 꺼리게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좋으나 궂으나 한 번 방부를 들였으면 인욕(忍辱)을 하고 '내가 여기를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왔는가? 무슨 편안하고 배부르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는가? 또는 무슨 명예나 권리를 위해서 여기를 왔는가?' 명예를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요, 무슨 이끗을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요, 배부르고 편안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면 무엇을 위해서 내가 여기를 왔어?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각자 가정에서 지내면 누가 뭐라고 그래. 고행(苦行)을 사서 하기 위해서 모두 여기에 모이신 것이다 그 말이여. 고행을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고단하거나 할 때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불(禮佛) 젓수고, 참회하고 축원하고 그리고 정진하고. 하루 이틀이라면 모르지만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그러한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이 고행을 극복하고 정진해서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만약에 이걸 전혀 할 생각 없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다가 이런 이 수도(修道) 생활을 시킨다고 하면 정말 이것은 감옥살이에 조끔도 뒤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가고 싶은 데 마음대로 갈 수가 있나, 먹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먹을 수가 있느냐,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가 있나, 하나에서 백까지 규칙에 순응해야 하고, 조끔만 어기면 대중에 지적을 받고 공사(公事)를 당하고 심할 때에는 추방, 쫓겨 축출까지 당하게 된다 그 말씀이여.(처음~21분2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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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자발적으로 할 때에는 그러한 구속과 고행이 조끔도 불편하지를 않고 조끔도 괴롭지 않고, 아무 불평불만이 없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너무 보람을 느끼고 너무 기쁘고 다행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문제는 당인(當人)이 얼마만큼 발심을 했으며, 얼마만큼 신심을 냈으며, 얼마만큼 바르게 정진을 하고 있는가? 발심을 션찮게 했고, 신심 돈발(頓發)이 약하고, 정진에 바른 법을 아지를 못하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고 아무렇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긁어서 부스럼을 내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고, 공부에 맛을 모르니까 오히려 좋은 일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서 풍파를 일으켜서, 자기는 어피차 공부가 하기 싫고 공부 맛도 없고, 아무리 억지로 좀 하려고 해도 되지도 않고 그러니까 공연히 시비를 일으켜 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버리는 식으로 내가 공부 안 되니까 남까지 못하게 이리하고, 심한 경우에는 선방을 중간에 깨 가지고 대중을 파괴를 하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 이 말씀이여.
죄(罪) 가운데에 무슨 죄가 제일 크냐 하면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 또 하나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죄,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이러한 죄가 대역죄(大逆罪)라, 죄 가운데에는 최고의 대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는 그러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오직 자발적으로 자기도 공부 잘하고 자기가 공부 잘함으로써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그런 모범적인 스님네와 그러한 훌륭한 신도 여러분만이 모이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구태여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지만, 이러한 말씀을 함으로써 각자 명심을 해서 더욱 정진을 잘하시기를 바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전부귀(生前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살아생전에 부귀(富貴), 재산이 많고, 높은 벼슬을 하고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하는 것은 풀 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풀 끝에 이슬이 맺히면 아침 태양빛에 그 이슬이 반짝거리기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그 말이여. 반짝반짝반짝. 바람 한번 휙 불어 버리면 우시시 떨어져 버리면 간 곳이 없어.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이 그것이 내 몸에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어디를 가나 거침이 없고 살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은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느냐 하면 운수(運數)가 불길(不吉)하면 하루아침에 재산이 날라가기도 하고, 그 높은 벼슬도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그런 높은 벼슬을 하다가도 스스로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틀림없이 풀 끝에 반짝거리는 이슬방울과 조끔도 다름이 없다 이 말씀이여.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학덕이 높았다, 권리가 높았다, 명예가 있다, 또는 재산이 많았다,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 죽은 뒤에 그이의 자랑스러운 그런 이 명예도 백상화(陌上花)여. 그 언덕에 곱게 핀 한 떨기 꽃에 지내지 못하더라 그 말이여. 언덕받이에 그 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데, 그 꽃이 본 사람마다 다 쳐다보고 다 아름답다 그러고, 모두가 좋아하고 칭찬을 하지만, 비 한번 오고 바람 한번 불어 버리면 우시시 다 져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여, 세상의 모든 인연—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 재산과 명예와 권리와 모든 인연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세상 뜬세상을 가벼이 여겨 버렸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헌신짝 같이 버려 버렸다 그 말이여. 마치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듯이, 여기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녹음 끊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느끼고, 비록 세속에 몸은 담아 있지만 그 마음은 스님네의 마음과 조끔도 차이가 없는 분들입니다.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여. 한 성품 한결같은—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 깨닫기 위해서 신심(信心)을—'그 영원성 있는 것을 기어코 나도 깨달라야겠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이요. 그것을 위해서 분심(憤心)을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다 떨어진 꽃을 보는 거와 같애. 한참 곱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도, 한참 지금 사람이 등왕(登王)을 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높은 벼슬을 가지고 권리를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서 '떨어진 꽃[落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이 말씀이여.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승심(小乘心)이라 하는 것은 집착한, 세속에 허망한 것을 집착한 사람에게 집착심을 띠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方便說)이지, 불교의 구경법(究竟法)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애,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편안한 데로 옮겨간 뒤에는 참나를 깨닫는 바른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21분23초~38분4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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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는,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최상승 학자는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삿된 것을 버리는 생각, 그리고 참된 것을 구하는 생각—버릴려는 생각도 이것이 삿된 것이고,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도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입니다.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느냐?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좋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악한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버리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여. 기쁜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데에 무슨 버리는 것이 있으며, 무슨 취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어.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 공부다 이 말이여.
'공부가 안 된다. 영 공부가 진취가 없다' 많은 분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그 고민한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뭣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밥이 질 때에도 '이뭣고?' 밥이 될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좋을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안 좋을 때에도 '이뭣고?'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잘될 때에도 '이뭣고?' 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공부는 극일성지(克日成之)입니다. 극일성지. 머지않아서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극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이 큰스님께서 그렇게 극언을 하신 까닭은 너무 조끔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증을 하신 표현인 것입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우리 중생을 애끼신 뜻이 간절하시면 입에 담기조차도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로인 이런 극언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런한 말씀을 통해서 콧등이 찡하고 눈뚜껑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사 스님의 간절한 법문을 듣고 '한 번 해보자. 내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이 도량에 와서 고행을 하겠다고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안 할 까닭이 무엇이냐?'
죽비(竹篦) 치면 형식적으로 앉아서 하고, 방선(放禪)하면 둘씩 셋씩 모여서 잡담하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정진을 한 것 같지마는, 실지 내용으로는 발심이 약하고 분심이 약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정진을 하기 때문에 3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10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생긴 것은 눈치로 눈치만 늘어 가지고 무슨 법담을 하면 눈치로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치로 무슨 공안은 어떻고, 무슨 법담은 어떻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상의 생사(生死) 문제도 아무 교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기왕 출가를 하고, 기왕 이 참선을 하려면 정말 여법하게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에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할 것이다.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후생(後生)이라 하니까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후가 아니라, 한 생각 뒤가 바로 후생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정말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나도 성취를 하고, 다른 사람도 성취를 하도록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38분49초~49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대중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는 대역죄(大逆罪)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부귀, 공명, 명예는 풀 끝에 이슬방울과 같은 것 /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라 /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 공부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 몽산 스님과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의 우리 중생을 아끼신 뜻이 간절한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인 극언(極言). 이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〇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〇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〇죄(罪) 가운데에 무슨 죄가 제일 크냐 하면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 또 하나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죄,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이러한 죄가 대역죄(大逆罪)라, 죄 가운데에는 최고의 대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〇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〇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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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가 넘는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가 금일부운비(今日負雲飛)로구나. 여러 해 동안 농 속에,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오늘에사 새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하늘에 구름을 등지고 날으는구나.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타가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이로구나. 숲속에서, 숲 아래서 10년 동안을 꿈을 꾸다가 이제 호숫가에서 한바탕 웃으니 마음이 새롭구나.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그 새장 속에 갇혀서 구속 생활을 하다가 오늘에사 그 생사(生死)의 감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갓없는 푸른 하늘에 자유자재로 날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한 것을 마치 새장 속에다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것에다가 비유해서 한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석 달 안거를 어찌 구속된 생활이라고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맘대로 외출도 못하고 맘대로 여행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하고 대중규칙에 따르면서 대중과 같이 모든—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목욕하고 삭발하고 참선하고 소제하고, 모든 생활을 대중법도에 맞춰서 해야지, 자기 맘대로 단 한 가지도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 새장 속에 갇혀서 사는 새와 같이 비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해서 해제가 끝나면 당장 문밖에 나가 가지고 어디를 갈 것인가? 그동안에 만나고 싶었던 도반(道伴)도 찾아가고, 가서 찾아가 뵈옵고 싶은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뵈옵고, 또 어디 성지(聖地)도 가보고 싶고 또 몸이 아픈 이는 의원도 찾아가 보고 싶고, 찾아간다고 해서 누가 붙잡을 사람도 없고 막을 사람도 없고, 동서남북 어느 곳이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숲속에 10년 동안을 꿈속에서 살다가, 10년 동안을 숲속에서 참선(參禪)을, 도(道)를 닦는데 그 10년이라고 한 세월이 꿈결같이 지내갔다 이 말씀이여.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석 달 동안이 언제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갔습니다. 하루처럼 지내갔습니다. 하룻밤 꿈꾸듯이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갔습니다.
석 달 동안 그 지내는 것을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해제(解制)를 하고 어느 산기슭에 호숫가를 지나다가 그 호수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물새 퍼득이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흔히 결제가 해제가 끝나고 떠억 걸망을 짊어지고 어느 개천을 건너고, 어느 산골짜구니를 지나고, 어느 산마루를 넘어가다가 홀연히 꿈을 깨고 지혜의 눈을 떴던 우리들의 과거에 선각자 스님네가 종종 계셨습니다. 과거 선지식(善知識)만 그러란 법은 없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한 여러 스님네, 여러 보살님네 가운데도 가시는 차속에서 또는 어느 숲 아래 개천가를 거닐면서 또 어느 산골짜기 오솔길을 가시다가 확철대오 할런지, 나는 반드시 그러한 납자(衲子)와 불자(佛子)가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대관절 이 참선을 해 가지고 '깨닫는다' 그러는데 무엇을 깨닫느냐?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갖은 고행(苦行),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시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과연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 산승(山僧)은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님네가 깨달은 바를 감히 공개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각기 자기의 눈이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랐습니다. 두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이렇게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네만 눈이 옆으로 붙어 있고, 우리 중생들은 그렇지 않느냐?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함께 다 그 도리를 깨달랐고, 모든 부처님께 승사(承事)하면서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많은 불자(佛子)들 납자(衲子)들도 목적이 뭣이냐 하면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 이렇게 고향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형제간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목숨 바쳐서 이렇게 고행을 하면서 일생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장서방 이서방도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모든 동서고금에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눈은 두 눈이 나란히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건마는,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그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백혀 있는 것을 느끼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그러면서도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까?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산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가 뭣이냐 하면, 이 법회가 끝나거든 거울을 보고 확인을 하시던지, 가만히 손으로 두 눈을 더듬어 보고, 자기 코가 혹 옆으로 붙어 있지 않나? 눈은 혹 세로 박혀 있지 않는가를 확인을 해 보시고, 진정 자기 코도 모든 불조(佛祖)의 코와 다름없이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신 찰나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에 근본을 요달(了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처음~16분30초)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갓없는 이 허공경계를 어찌 사량(思量)으로 더듬어 알 수가 있겠는가?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니라. 대도(大道). 대도가 청정하고 한없이 깊은 그 이치는 다시 길고 무한한 것이다. 허공보다도 더 크고, 허공보다도 더 높고, 허공보다도 더 맑은 이 대도(大道), 사량심(思量心)으로는 도저히 더듬어 알 수가 없는데.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라, 다못 오호(五湖)에 풍월(風月)이 있어, 풍월이 있음을 얻어. 가을에는 서늘바람이 불고 둥근달이 휘황창 밝으며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치고 기러기가 나르고. 그러다가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온갖 꽃이 향기롭게 피는것, 가을이 오면 서늘해서 국화가 피고, 봄이 오면 따뜻해서 온갖 꽃이 난만(爛漫)히 피는 이 도리가 한없이 넓고 깊고 크고 맑은—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도리를 여지없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질게 추웠던 삼동(三冬)이 지내가고 입춘을 맞이해서 이제 해제를 해서 머지않아서 산과 들에는 푸릇푸릇 풀과 나무에 싹이 트게 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개나리는 노랗게 피어 늘어지고, 산에 산에는 빨간 진달래가 불타듯이 피어나겠습니다. 노란 개나리꽃, 빨간 진달래꽃, 파란 버들을 보실 때마다 그 사이사이에 우는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해제 법어를 마치고자 합니다.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유격일중관(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無心)을 잡아서 이것이 도(道)라고 이르지를 말어라. 무심(無心)도 유격일중관(猶隔一重關)이라. 무심(無心)도 오히려 한 중관(重關)을, 무거운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도를 닦으면 자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없어져서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고, 일체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면 무심 경계에 들어가는데, 그 무심 경계를 가지고 도(道)라고, 도라고 말을 하지를 말아라. 무심경계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오히려 한 중(重)한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오늘 해제를 했는데, 보름 뒤에 음력 2월 초하루에 선방 스님네들은 산철 결제를 하게 됩니다. 2월 초하룻날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3월 그믐날 해제를 합니다. 이 두 달 동안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이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두 달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16분38초~26분2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다년농중조~ / 참선을 해 가지고 무엇을 깨닫느냐?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랐습니다 /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꽃을 볼 때,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빈다 / (게송)막파무심운시도~.
〇흔히 결제가 해제가 끝나고 떠억 걸망을 짊어지고 어느 개천을 건너고, 어느 산골짜구니를 지나고, 어느 산마루를 넘어가다가 홀연히 꿈을 깨고 지혜의 눈을 떴던 우리들의 과거에 선각자 스님네가 종종 계셨습니다. 과거 선지식(善知識)만 그러란 법은 없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한 여러 스님네, 여러 보살님네 가운데도 가시는 차속에서 또는 어느 숲 아래 개천가를 거닐면서 또 어느 산골짜기 오솔길을 가시다가 확철대오 할런지, 나는 반드시 그러한 납자(衲子)와 불자(佛子)가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〇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산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가 뭣이냐 하면, 이 법회가 끝나거든 거울을 보고 확인을 하시던지, 가만히 손으로 두 눈을 더듬어 보고, 자기 코가 혹 옆으로 붙어 있지 않나? 눈은 혹 세로 박혀 있지 않는가를 확인을 해 보시고, 진정 자기 코도 모든 불조(佛祖)의 코와 다름없이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신 찰나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에 근본을 요달(了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〇도를 닦으면 자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없어져서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고, 일체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면 무심 경계에 들어가는데, 그 무심 경계를 가지고 도(道)라고, 도라고 말을 하지를 말아라. 무심경계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오히려 한 중(重)한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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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에,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빈 절 속에, 포슬타한면(抱膝打閑眠)이라, 무릎을 안고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그 말이여.
소소경각료(蕭蕭驚覺了)하니 상엽(霜葉)이 만계전(滿階前)이라. 소슬한 바람에 가을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진 그 소리에 놀래서 깨 보니, 서리 친, 서리 맞은 낙엽이 뜨락에 가득하니 뒹굴고 있구나. 이것은 경허(鏡虛) 스님의 게송입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지끔으로부터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침체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중흥시키신 큰스님이십니다. 이 경허 스님 밑에 만공 스님. 혜월 스님. 혜봉 스님. 오대산 방한암 스님 또 수월 스님. 이러한 대도인(大道人)들이 그 경허 큰스님 밑에 배출이 되셔서 그래 가지고 이 한국 방방곡곡에 선풍(禪風)을 진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허 스님이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출세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지끔 참선 법문(法門)도 들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그럴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허 스님은 대강사요, 대선사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신 생불(生佛)과 같은 그러한 대도인이신 것입니다.
그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 가운데 한 분이 만공(滿空) 큰스님이시고 또 그 만공 큰스님 밑에 박고봉 스님, 박금봉 스님, 정전강 스님 또 그밖에 여러 도인들이 계시지만 그 만공 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셔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을 선양을 하시다가 지끔부터 8년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그 전강 큰스님께서 이 주안 갯벌 가에 이 법보선원을 창설을 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모여서 이 최상승법을 선양(宣揚)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처님 열반하신 뒤, 56억 7천만 년 뒤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미륵존불(彌勒尊佛)께서 염부제(閻浮提)에 하강(下降)을 하시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종종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이 이 땅에 몸을 나투셔 가지고 정법(正法)을 선양(宣揚)을 하셔서 목마르는 중생들에게 정법에 감로(甘露)의 비를 내리셔 가지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어린 양들을 자기의 갈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전생에 깊은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 도량에 우리가 모여서 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을 공부를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다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년도 벌써 여름이 지나고 제방(諸方) 선방(禪房)에서 모다 참선을 하시고 해제를 한 뒤에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공자님께서 그 『논어(論語)』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안 해도 그것을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런 말씀이 있는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한 말은 '글을 배워 가지고 때때로 익힌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佛家)에 말하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參禪)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그것을 밤낮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그 공부를 해 나가면 이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정진을 알뜰히 해 가면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공부가 되어 가는지 안되어 가는지 도대체 멍멍하니 그러지만, 자꾸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해서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질 때가 오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일여(一如)하게 들리게 되면 그 싱그럽고 편안하고 가볍고 혼침(昏沈)도 안 오고 망상(妄想)도 없이, 그 즐겁다고 할 것인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자동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법(法)에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배워서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이렇게 공자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가서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느냐' 그 말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라든지 또는 그동안에 막걸리 친구로 사귄 그런 친구가 찾아온 거, 무슨 동창생이 찾아오고 그러한 의미에 벗을 가리키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저 먼 데에서 그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정진을 하고 해제를, 우리 불가에서 같으면 해제를 하고 그 먼 데에서 그 도반을 찾어간다던지, 선배를 찾어간다던지,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와 같이 한 목적을 향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찾아오는 거. 선배가 되었던지, 후배가 되었던지, 또는 연갑(年甲)시 되었던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도반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부처님도 우리에 선우(善友)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먼 데로부터서 찾아오게 되면 또한 그것이 즐겁지 않느냐. 속가에 부모형제가 찾아온다던지, 무슨 자기와 그런 평소에 아는 사람이 찾아온 거, 그러한 것에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방에서건, 어느 토굴에서건 그 실다웁게 도를 닦고 그리고 해제(解制)하고서 찾어온다던지, 내가 찾아간다던지, 그러다가 만나게 될 때에 그 반갑고 기쁜 뜻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이 신유년 하안거를 마치고, 제방에서 여러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참 아무리 이 시국이 험난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모든 면에서 참 불안하고 그러한 때지만, 이 정법을 믿고 실천하는 우리 도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이 자리는 정말 이 사바세계에 이루어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이라고 말해도 조끔도 어폐(語弊)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가 저문 빈 절에 무릎을 안고 졸다가, 소슬히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뜰에 가득히 딩굴고 있다」 한 경허 스님의 그 게송을 음미해 보면, 앞으로 가을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가을철에 지나간 여름 동안 못다 한 공부를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 도반들이 여기서 저기서 모다 와 가지고 공부하는 법에 대해서, 그동안에 공부하는 경과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 가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문의를 한 도반들도 많이 있었습니다.(처음~16분4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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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데 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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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짓어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33분11초~50분3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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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면 그것도 길이 들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걸어갈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이렇게 되어 진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을 조끔 공부에 공부 길에 들어섰다. 조끔 득력(得力)을 했다. 혹 이렇게는..
그런 것도 '아, 내가 인자 공부가 아주 잘된다' 그것도 뽐낼 것도 되지도 안 혀. 인자 그렇게 되어 가야 인자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를 더 잘 지어 갈뿐이지, 그것도 어디다 뭘 자랑할 것, 그것도 내놓을 것이 아니여.
삿된 소견, 삿된 경계 나타나는 걸 가지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더군다나 또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도 빨리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면 어찌 그것을 최상승 학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하는 공부는 백이면 백하나까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바른 스승 없이 하면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거나, 삿된 지경에 경계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여. 하다 말다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할수록 빨리 못쓰게 되는 것이 이 공부여. 그래서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에, 저 산에 푸르른 경치,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 그 모습이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여. 면목이 그 면목(面目)의 단적(端的)을 갖다가 나타낸 것이다. 산은 푸르르고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그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한 모습이다.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이 낱 가운데에 참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팔냥(八兩)이 시반근(是半斤)이라. 여덟 냥(兩)이 이 반 근(斤)이다. 열엿 냥(兩)이 한 근(斤)인데, 여덟 냥이 반 근이다. 여덟 냥이 반 근?
여기에 이르러서 중생이 사량분별심으로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겨울 결제까지 두 달 남짓, 춥도 더웁지도 않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닦는,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원래 이 일요법회는 설법하는 시간보다도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참선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그렇게 생각을 해 오고 있습니다.
목탁을 치고 입선(入禪)을 해. (목탁)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법당을 나가셔서 댁으로 돌아가시는 걸음걸음 사이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시고, 댁에 가셔서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다음 법회 때에 언제라도 여기에 떠억 법당에 들어오시면 부처님께 참배를 하시고, 그리고서 자리에 앞에부터 차례차례 적당한 자리에 따악 앉으시면, 앉자마자 따악 반가부좌(半跏趺坐) 따악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십시요. 다음 그 바로 법회가 시작할 그 시간까지.
들어오신 대로 차곡차곡 차곡차곡 그렇게 해서 열 분, 스무 분, 백 분, 이백 분, 오백 명, 칠백 명 이렇게 들어오셨더라도 한 분도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정진을 하시는 가운데에 법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시도록. 여기는 극장도 아니고, 무슨 다른 그런 연회석상도 아니고, 이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오직 그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고서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30분이면 30분, 일찍 오신 분은 한 시간이라도 타악 정진을 하시면 그 시간이 얼마나 참 귀중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옆에 분하고 주거니 받거니 수근수근수근 잡담을 하면 여기에 오신 본의(本意)도 아니고 또 그 한 분, 여그서 떠들면 저그서 떠들고 해 가지고 이 법당 안이 도대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여기에 오신 분 가운데에는 또 그렇게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또 그렇게 정진하시고 있는 분도 계시는데, 그 정진하시는 분에게 방해도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자기도 열심히 공부하면 남도 공부 잘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는 것인데, 자기도 공부를 아니하면서 남의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는 것은 수행인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용화사 선원은 처음 오신 분도 들어오자마자 탁! 스스로 엄숙해지고 경건해지도록 그러한 이 법보선원이 되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참배(參拜)를 할 때 혹 향을 가지고 오시던지 초를 가지고 오셨을 때, 불이 안 켜졌으면 가지고 오신 촛불을 켜시면 좋고, 또 향불이 안 타고 있으면 또 당신이 가지고 오신 향을 따악 사롸서 꽂고 절을 하시면 좋지만,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꽂아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오신 것은 탁자 위에 가지론히 딱 놔놓고 그리고서 경건하게 예배만 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촛불이 켜져 있는데, 그놈을 탁! 내려서 끄고 당신이 가져온 것을 꽂고, 향이 이미 꽂아 있는데 거기다 또 두 개 세 개 네 개를 잔뜩 꽂아 놓으면 그 연기가 너무 법당 안에 자욱해 가지고 목이 아프고 또 법당이 또 시커멓게 끄실리게 되면 그것도 안 좋은 것이고.
이 법당에 들어서면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야지, 너무 향을 많이 꽂아 가지고 공장 굴뚝같이 되어 가지고서는 존엄성도 없어지는 것이고 위생상으로도 안 좋은 것이고. 하도 부처님이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그래서 유리로 문을 해 닫았습니다. 부처님은 문을 해 닫아 드려서 아무 말씀이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향을 피는 거, 촛불을 켜는 것을 꼭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절대로 향을 많이 꽂는다고 해서 부처님이 복을 많이 주시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갖다 놓으시기만 해도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 말을 했습니다마는 제가 정말 여러분께 하고자 한 말을 못다 했습니다.(50분36초~66분14초)
[법문 내용]
(게송)사양공사리~ / 지끔(1981년)으로부터 백 년 전에 한국에 침체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중흥시키신 경허 큰스님 /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만공(滿空) 큰스님, 그 만공 큰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주안 갯벌 가에 용화선원을 창설 / 『논어(論語)』 첫머리에 대한 법문.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참선은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 /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데 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 /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 / 핑계 대는 것은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 참선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 /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 / (게송)산광수색리~ / 법회 때, 그리고 법당에서의 예절.
〇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〇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〇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〇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〇'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〇우리는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〇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〇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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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오늘은 계해년(癸亥年), 지난 임술(壬戌) 동안거 해제(解制)를 지낸 뒤에 처음으로 갖게 되는 법회(法會) 날입니다.
제방(諸方)에서 모다 해제(解制)를 하고 그리고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얼굴을 서로 상면(相面)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수행인이 제일 반가운 것은 한 철 두 철 같이 지내던 도반(道伴)이 또 다른 선방(禪房)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해제를 하면 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입니다. 그동안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서 마음에 증처(證處)가 있으면 더욱 다행하고 더욱 반가운 일이거니와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 만큼 그러한 증처가 없다 하더라도 다시 이렇게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은, 집을 떠나서 출가(出家) 생활을 하는 납자들에게는 고향에 친지(親知)를 만난 것보다도 훨씬 더 반가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출가한 사람이, 출가(出家)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재물과 색(色)을 멀리 여의고, 명예와 권리를 멀리하고, 그 마음과 행동을 청정히 해서 목숨 바쳐서 도(道)를 닦아서 지혜(智慧)의 달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비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염불(念佛)이나 또는 주력(呪力)이나, 기도(祈禱)나 또는 참선(參禪)을 해서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지혜의 달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할 것인가?
신통(神通)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신선도(神仙道)에도 다섯 가지가 있고 오신통(五神通)이 있고, 우리 불법(佛法)에는 육신통(六神通)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오신통이란 게 무엇 무엇 해서 다섯 가지 신통이냐?
첫째, 천안통(天眼通). '하늘 천(天)' 자, '눈 안(眼)' 자, 천안통. 원근(遠近)에 관계없이—산이 맥혔거나, 집이 맥혔거나, 수 천리만리(千里萬里) 밖에 일이라도 어떠한 상태를 내가 보고자 한 마음을 내면 이 자리에서 당장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입니다. 여기서 청와대든지, 서울역이든지 또는 경복궁이든지, 부산이든지, 일본이든지, 미국이든지, 볼려면은 여그 앉아서 찰나간(刹那間)에 그 보고자 한 장면을 걸림이 없이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이 천안통.
그다음에 천이통(天耳通). '하늘 천(天)' 자, '귀 이(耳)' 자 천이통은, 여기서 과학적인 어떤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무선기(無線機) 같은 그런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천 리 수만 리 밖에 어떠한 소리를 듣고자 할 때에는 즉시(卽時)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이통이고.
그다음에 신족통(神足通). 비행기나 로케트나 그러한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여기서 몇백 리고, 몇천 리고 가고자 한 생각을 내면, 그 생각을 갖자마자 그 가고자 한 목적지에 몸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족통, 또는 신경통(神境通)이라 하는 것이여. 요새 축지법(縮地法)이라 그런 말도 있습니다마는, 이 신족통은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족통이여.
그다음에 타심통(他心通).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환히 알아 버리는 것이여. 이것이 타심통이여.
그다음에는 숙명통(宿命通). 과거 · 현재 · 미래, 삼세(三世)에 모든 일을, 모든 사람에 인과(因果), 모든 사물에 생성 과정과 장래에 사태에 대해서 환히 다 보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숙명통입니다. 어떠한 사람을 보면 과거에 저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금생(今生)에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났으며, 금생에는 저렇게 살지만 내생(來生)에는 무엇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숙명(宿命)을 꿰뚫어 보는 초능력(超能力)입니다. 이걸 숙명통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이상 천안통 ‧ 천이통 ‧ 신족통 ‧ 타심통 또 숙명통, 이 다섯 가지를 오신통(五神通)이라 하는데, 이 다섯 가지는 불교(佛敎)가 아닌 저 신선도, 도교(道敎) 신선도(神仙道)에서도 이 다섯 가지 신통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불교에서는 이 다섯 가지 신통 밖에 또 한 통(通)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어떻게 하면 이것을 볼 수가 있느냐? 어떻게 하면 이것을 깨달을 수가 있느냐? '메아리 없는 골짜기'와 '뿌리 없는 나무'와 '밑 없는 배'와 '구멍 없는 젓대'를 고인(古人)들은 바로 이 '한 물건[一物]'에다가 비유를 하셨습니다.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매월 첫째 일요일마다—'어떻게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하는가?' 참구할 때에 마음가짐과 몸가짐과 호흡하는 법, 그러한 기본적인 것을 말씀을 드렸고, 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直接的)인 지도(指導) 없이는 백(百)에 하나, 만(萬)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 가지 아니할 때에 목적지에 바로 도달하기란 바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고 걸어가는 길도 처음 가는 길은 가다가 두 갈래 길, 세 갈래 길, 네 갈래 다섯 갈래 길이 나올 때에 길 아는 사람의 안내(案內)를 받거나, 길 아는 사람에게 묻지 않고서는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바로 가기가 어렵거든, 하물며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 닦아 가는 길,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공부의 길은 두 갈래 · 세 갈래 · 다섯 갈래 정도의 길이 아니라, 수천 수억만 개의 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많은 길을 어떻게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 바로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하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을 만났다고 해서 스승한테 무엇이 얻을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부를 바로 지어가기 위해서는 스승의 지도(指導)와 간택(揀擇)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처음~20분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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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이 공부를 보다 더 알뜰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 '저 산중(山中)에 토굴(土窟)이나, 한적하고 사람 오지 아니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밤잠을 안 자고 먹을 것을 굶어가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延命)을 하면서 피나는 고행(苦行)을 해 보았으면, 죽든지 살든지 내가 한바탕 해 봤으면' 이러한 간절한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대단히 갸륵한 생각이고 기특한 생각이지만. 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이나, 그렇지 않으면 다리 밑에나, 그렇지 않으면 시장(市場) 바닥이나, 자기의 근기(根機) 따라서 얼마든지 혼자 가서 공부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에는 화두를 선지식한테 타거나, 책을 통해서 자기가 적당히 하나를 골라잡거나 별것이 없습니다. 별것이 없으나 차츰차츰 세월이 가면서 어떠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공안(公案) 참구(參究)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거나, 소견(所見)이 생겼을 때에 자기가 철저하게 믿는 선지식(善知識) 없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할 때에 그러한 경계에 대해서 문의할 데가 없고, 그것을 갖다가 간택 받을 데가 없고 그러기 때문에, 잘못 되어 가도 옳게 되어 간 줄 착각하기가 쉽고, 옳게 되어가도 이것이 잘되어 가는지 못되어 가는지 스스로 의심(疑心)이 나고, 그래서 중대한 고비에서 공부가 중단(中斷)되거나 후퇴하거나 갈팡질팡해서 불안하고 초조한 그러한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그러한 경계가 나타난 뒤에 어디 어느 분한테 가서 이것을 간택을 받을까 하고 이리저리 찾아보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 각각 다른 말을 하고—때로는 '옳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그르다' 그러고, 어떤 분은 '큰일났다' 그러고, 어떤 분은 '공부가 잘 되어 간다' 그러고, 도대체 점점 여기저기 물어볼 수록에 점점 중심(中心)을 잡지 못하고 어찌 해볼 수가 없는 그러한 심경(心境)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 '먼저 스승을 찾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이,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혼자 하면 제일 먼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습니다. 그 함정이 무엇이냐 하면, 열심히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한 철 두 철을 못 가서 맨 처음에 맛보게 된 경계가, 망상(妄想)이, 그렇게 퍼일어나던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면서 화두(話頭)에 대한 간절한 의심(疑心)이 북받쳐 오르면서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화두가 저절로 들려지면서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이여. 그래 가지고 그렇게 화두가 성성하고 적적하게...(녹음 끊김)....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느끼지를 못하고,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내갔는지 두 시간이 지내갔는지 세 시간이 지내갔는지 시간이 지내가는 것조차도 전혀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여. 캄캄한 밤에 있어도 어두운 줄을 모르고, 혼자 있어도 심심한 줄을 모르고, 하늘을 보나 산을 보나 땅을 보나 모든 것이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다른 것으로 보이지를 않습니다. 다 성성하고 적적한 가운데에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할 뿐입니다. 이러한 경계에서 그 경계가 너무 깨끗하고, 너무 조용하고, 너무 편안해서 그 싱그럽고 묘(妙)한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어. '편안을 하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좋다'고 해도 맞지 아니하고, '기쁘다' 해도 맞지 아니하고,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그러한 경계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화두를 놓쳐 버리는 것입니다.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단(疑團)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너무 싱그럽고 너무 맑고 깨끗하니까, 자칫하면 그 맑고 깨끗한 경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묘한 경계에 들어가서 너무너무—그것을 법희(法喜)라고 할까? 법열(法悅)이라고 할까? 선열(禪悅)이라고 할까?—맑고 깨끗하다 못해서 너무 싱그럽고 묘해서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화두를 놓쳐 버린다면, 더군다나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 경계에 취해 가지고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신(肉身)이 이 세상에 있는 것까지도 잊어버리고,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그 자리에서는 선악(善惡)도 없고, 밝고 어두운 것도 없고, 크고 작은 것도 없고, 지옥(地獄)과 천당(天堂)도 없고, 부처와 중생(衆生)도 없는 그러한 경계에서, '하! 바로 이것이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의 경계로구나! 바로 이것이 진공(眞空)이요 묘유(妙有)로구나!' 고조사(古祖師)가 설하신 어록(語錄)도 뒤져 봐도 하나도 맥힐 것이 없이 환한 것 같고, 어떠한 경전(經典)을 떠들어 봐도 모두가 이러한 경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 같고, 어떠한 경계, 공안(公案)을 봐도 공안이 하나도 의심이 안 나고, '하!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것이로구나' 아! 이래 가지고 자기도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한 경계에 취해서 그러한 경계를 계속해서 그 경계를 지켜 나간다?
지켜 나가면, 무엇이 알아지기도 하고, 캄캄한 밤에도 환하게 뭣이 다 바늘 떨어진 것도 다 보이기도 하고, 벽 문을 닫어 놓고 방안에 앉아서도 벽 밖에 것이 환히 보이기도 하고, '내일은 누가 찾아오겠다' 그런 것도 알아지기도 하고. '아! 그 이것이 바로 신통(神通)이로구나! 내가 견성(見性)만 한 것이 아니라 신통까지 났구나!' 이러한 경계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누구에게 이것을 얘기하며 누구에게 이 소식을 말할 수가 있을까?
모든 사람을 봐도 모두가 다 불쌍하게 보이고, 도 닦고 있는 모든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을 봐도 어문다리를 긁으며 헛고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명예와 권리와 재산을 가지고 그것을 누리면서 잘난 척하는 사람을 보면 철이 안 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스승 없이 깨달랐다' 경(經)을 봐도 맥힘이 없고, 조사어록(祖師語錄)을 봐도 걸림이 없고, 어떠한 공안(公案)을 봐도 맥힘이 없다 이거여.
그러니 신통까지 났겠다, 다른 사람에게 법문(法門)을 하면, 다른 사람은 역시 모르니까 그이가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하고, 더군다나 유식해서 경(經)도 잘 설(說)하고, 이럴 경우는 백 명이면 백 명, 천 명이면 천 명, 그이를 만나게 되면은 다 훌륭한 선지식이요, 도인이라고 믿을 수밖에는 없습니다. 본인도 도인이요 '신통이 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볼 때도 틀림없는 도인으로 보여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차츰차츰 자연히 도인(道人) 행세를 하게 되고, 아는 소리를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만(自慢)이 생기면 계행(戒行)도 해이(解弛)해지게 되고, 수행(修行)도 해이해지게 되어서 차츰차츰 옛날에 그 계율을 지키면서 산중에서 그렇게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할 때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해이해지고 따라서 탁(濁)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탁한 생활이 시작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에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하고 맑고 그랬던 경계는 간 곳이 없고, 따라서 과거에 무엇을 훤히 알고 어떠한 신통력을 행하고 했던 것이 둔해지고, 무디어져서 뭘 봐도 벽 밖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아니하고, '오늘 누가 올 거다' 한 것도 잘 몰라지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여.
그렇게 되지만 자기를 추종(追從)하는 제자와 신도들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줄 알고 계속 따라오고 있고, 자기는 속으로는 다 그런 신통력이 없어져 버렸다 그 말이여. 없어져 버렸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훤히 알고 있는 걸로 알고 추종을 하는데 모른다고 하면 챙피하고, 그러니까 계속 아는 척은 해야겄고, 이러다가 결국은 모든 것이 백일하(白日下)에 다 폭로(暴露)가 되고. 막행막식을 하고, 말을 함부러 하되 법도(法度)에 맞지 아니하고, 이렇게 될 때에 자기를 과거에 항상 따르고 보호해 주던 선신(善神)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악신(惡神)과 마귀(魔鬼)가 자기를 침범하게 되는 것입니다.(20분18초~41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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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만일의 경우 법에 저촉이 되는 행동을 했다면 영락없이 국가의 법에서도 그이를 구속(拘束)해서 가두기도 하고 또는 사형(死刑)을 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능엄경(楞嚴經)』 속에, 오십삼변마장(五十辨魔障)에 소상하게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에만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러한 예를 가끔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이 참선(參禪) 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最高)에 수행(修行) 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며, 또한 정신병자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생식기를 잘라 버리기도 하고, 자기가 자기의 목숨을 끊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머리빡을 바위나 벼람박에다 부딪혀서 유혈(流血)이 낭자하다가 피를 흘리고 죽게 되기도 하고, 그 마(魔)에 섭(攝)해 가지고 일어나는 현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물이 한번 엎질어 버린 다음에는 다시 쓸어 담기가 어렵듯이, 이 공부도 한 번 잘못되면 여간해서는 바로 잡기가 어려운 것이여. 그러니 여러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지금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서양에서도 이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이 참선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에 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늘은 일요 법회(法會)입니다.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편안하게 앉으십시오.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자세(姿勢)를 바르게 허리를 쭈욱 펴고,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고, 흔들다가 한 가운데에다 딱 중심(中心)을 잡으세요.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뜨되 의식적으로는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를 마십시오. 몸은 단정하게 갖되 어깨나 목이나 눈에다가 힘을 주지 말고 편안하게 긴장을 다 풀고 편안하게 가지세요.
처음에 준비호흡을 세 번을 하는데,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리고 가뜩 가슴이 벅차도록 숨을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코로 들어마시세요. 가뜩 들어마셨으면 한참 참었다가 입으로 '후-' 하고 내뿜으세요. 가슴을 아주 짜면서 다 내뿜었으면 또 한 번 들어마시세요. 가뜩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3초 동안 머물렀다가, 3초고 5초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머물렀다가 또 입을 조끔 벌리고 '후-' 하고 내뿜으세요. 다 내뿜었으면 또 한 번 들어마시고, 정지했다가 더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또 '후-' 하고 다 내뿜으세요. 이것이 준비호흡이어요.
그다음에 인자 본호흡(本呼吸)으로 들어가는데, 이제는 가슴으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은 고대로 놔두고, 숨은 코로 들어마시되 배꼽 밑에 단전, 단전(丹田)이라 하면 불두던 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불두던 위가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숨을 들어마셔요. 물론 코로 들어마시지만 '코로 들어마신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저 뒤에 궁뎅이로 들어마신다' 이러한 기분으로 숨을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심에 따라서 하복부(下腹部)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도록 그러한 느낌으로 숨을 들어마시는 거여.
들어마시되 너무 가뜩 들어마시지 말고 약 팔부(八部)쯤만 들어마셔요. 팔부쯤 들어마셨으면 그 상태에서 약 3초 동안 딱! 정지(停止)를 해요. 3초 동안 정지를 했다가 조용하게 내쉬는데, 아까 준비호흡 할 때는 입으로 내쉬었지만 지금은 코로 내쉬는데, '코로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궁뎅이를 통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내보내요. 그러면서 아랫배는 차츰차츰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그렇게 맨드세요. 그렇게 느끼시면서 숨을 내쉬세요.
계속해서 그렇게 호흡을 하는 겁니다. 준비호흡은 처음에 3번만 딱 하고, 네 번째부터서는 본호흡으로 하는데, 숨을 들어마셔 가지고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숨을 조용하게 내쉬는 거예요.
조유남악모천태(朝遊南嶽暮天台)하고, 아침에는 저 남악(南嶽)이라고 하는 산에서 놀더니, 모천태(暮天台)라, 해 저물게는 벌써 천태산에 가 있어. 추이불급홀연래(追而不及忽然來)로구나, 아무리 쫓아가서 따라잡으려고 해도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홀연히 앞에 와 있다 그 말이여.
남악(南嶽)과 천태산(天台山)은 수천 리 수백 리 길인데, 아침에 벌써 남악에서 놀더니 번떡 한 사이에 벌써 천태산에 가서 있어. 몇백 리 밖에 천태산에 가서 있어. 아무리 그것을, 그 사람을, 그이를 따라잡으려고 해도 도저히 따라잡지를 못했는데, 저절로 앞에 와서 딱 있더라 그 말이여.
독행독좌무구계(獨行獨坐無拘繫)헌데, 홀로 행하고 홀로 앉었고, 자기가 앉고 싶으면 앉고, 가고 싶으면 가고,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 말이여. 득관회처차관회(得寬懷處且寬懷)로구나. 관회(寬懷)를 얻은 곳에 또한 관회롭다.
'관회(寬懷)'라는 것은 '너그러울 관(寬)' 자, '생각 회(懷)' 자. 조끔도 옹색함이 없이 그 회포(懷抱)가 너그럽다 그 말이여. 천태산이고 남악이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눈 한번 번쩍하면 천태 가 있다, 눈 한번 번쩍하면 남악에 가 있다. 하나도 걸릴 것이 없다 그 말이여.
아까 '누진통(漏盡通)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걸 깨달으려면은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야 한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 한 물건을, 찾으면 자최가 없지마는,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그 자유자재로 왕래하는 놈을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겨울 해제가 지내고 이제 봄철이 돌아왔습니다. 우리 용화선원(龍華禪院)에서는 2월 초하루에 '봄 결제(結制)', 봄 두 달간 안거(安居)를 하는데 음력 2월 초하룻날 결제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3월 그믐날 해제(解制)를 하게 됩니다. 여러 신남신녀(信男信女)도 그렇게 아시고 이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는 이 좋은 봄 계절을 어쨌든지 이 정진(精進)하는 데에 더욱 힘을 써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10일 날, 3월 10일이고 음력 2월 26일 날, 여기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 부처님 점안식(點眼式)을 거행(擧行)을 합니다. 그 점안식에, 사시(巳時)에 있으니까 모다 참석을 해서 이 뜻있는 불사(佛事)에, 회향(廻向)에 참석을 하시면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또 부처님께 새 옷을, 여러 해 만에 새 옷을 입혀 드리는 그러한 뜻있는 불사가 그날 회향이 되니까 참석을 하셔서 법문(法門)을 들으시도록 부탁을 합니다.(41분47초~57분44초) (끝)
[법문 내용]
(게송)원앙수출종군간(鴛鴦繡出從君看) 불파금침도여인(不把金針渡與人) / 해제 후 도반을 만나는 기쁨 / 신선도의 오신통(五神通)과 불법에 육신통(六神通) / 누진통(漏盡通)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을 보아 버리는 것,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 활구참선법으로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 달마 스님 「혈맥론(血脈論)」에,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일생을 헛되이 보낼 것이라' 하시고,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깨달은 자는 만 명 가운데에도 드물다'
쇠로 된 못을 박을 때에 맨 처음에 정확히 박아야 하는 것처럼, 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 /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 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 / 아무리 맑고 깨끗한 경계라도 화두(話頭)를 놓치는 순간이 공부가 잘못 비끄러지는 순간, 화두를 놓치고 그 경계에 취해 맛들여서 그 경계에 빠지게 되면, 그건 결단코 깨달음에는 이르지를 못하는 것 / 도인(道人) 행세, 아는 소리를 하지 말라.
참선공부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정법(正法)이요 최고에 수행방법이지만, 바르게 하지 못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에 바른 스승을 만나서 바른 방법으로 수행을 해야 / 참선은 반드시 ①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고, ②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명심해야. 좌선 자세, 호흡법 / '저 뒤에 궁뎅이로 들어마신다' 이러한 기분으로 (이때 하복부가 앞으로 볼록하게 나오도록 그러한 느낌으로) 숨을 들어마시고, '저 궁뎅이를 통해서 저 뒤로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아랫배는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숨을 내쉰다.
(게송)조유남악모천태~ / 누진통(漏盡通)은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을 깨달음으로써 그것을 누진통이라 한다. 그놈이 항상 육근(六根)을 통해서 자유자재로 왕래(往來)를 하는데, 찾으면 자최가 없어. 그것을 깨달으는 법이 이 공안을 타파하는 것이다.
〇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신통. '샐 루(漏)' 자, '다할 진(盡)' 자, 누진통(漏盡通)이라 하는 통(通)은 어떠한 능력이냐 하면, 내게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항상 몸을 움직이고 정신을 쓰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一物]'이 있는데, 그놈을 동용(動用) 중(中)에 찾어보면 얻을 수가 없어. 눈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아니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아니하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는, 분명 소소영령한데 찾어보면 자최가 없는 그러한 '한 물건'이 있는데 그것을 보아 버리는 거여. 그것을 깨달으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는 것이여.
〇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화두(話頭, 공안)를 간택(揀擇)을 받아서 그 간택 받은 공안(公案)을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쓰지 아니하고 이 공안(화두)을 참구(參究)를 해서 이 공안을 타파(打破)를 하면, 이 공안을 타파함으로써 이 '한 물건'을 사무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이 공부를 해 나갈 때에 어떠한 경계(境界)가 나타나더라도 그 경계에 집착(執着)을 하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다못 자기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해서 대분심(大憤心)과 대신심(大信心)과 대의단(大疑團)으로 참구해 나갈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〇여러분이 쇠로 된 못을 벽이나, 어떠한 나무나, 그런 데에 박을 때에 맨 처음에 박을 때에 정확한 자리에다가 옳게 박아서 제자리에 들어가야지, 처음에 박을 때에 조끔 비켜서 어문 구녁에다가 박아 놓으면 그놈을 빼서 다시 정확하게 박을려고 해도 아까 잘못 들어갔던 구녁으로 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까 박았던 데로는 안 박고 그 옆에다가 정확하게 박으려고 망치질을 해도 몇 번 박다 보면은 아까 그 뚫어진 잘못된 구녁으로 못이 잘못 들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〇이 참선(參禪)도 처음에 할 때에 바른 지식(知識)의 지도를 받아서 옳게 해 가야지, 바른 지도 없이 잘못하면 잘못된 경계가 나타났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잘못된 경계에 빠지게 되고, 그 잘못된 경계를 스스로 아닌 줄 알면서도 그 경계가 항시 나타나게 되고, 그 경계에 자기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〇고인(古人)네들이 말씀하시기를, 견성(見性)을 해 가지고 인가(印可)를 맡은 다음에 다시 보림(保任)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깊은 산중에 토굴(土窟)로 들어가서 수행을 할 것을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하지 못하고 견성(見性)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선지식의 바로 밑에서 많은 좋은 도반(道伴)들과 함께 회중(會中)에서, 선방(禪房)에서 정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실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〇이 공부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본래 갖추어진 것을 자기가 찾는 공부여. 무엇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아니여.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하고 너무 가까워서, 그래서 그것이 도리어 '어렵다'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〇계행(戒行)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열심히 도를 닦으면 반드시 선신(善神)이 자기를, 그이를 옹호(擁護)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행을 지키지 아니하고 마음에 삿된 소견을 가지고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하면, 선신은 자기로부터 떠나고 삿된 귀신과 악한 신이 자기를 침범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도 망신을 하고 자기를 추종하던 사람도 망신을 하게 되고.
〇참선은 반드시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고 하는 것. 바른 방법을 알아서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몽매지간(夢寐之間)에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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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심경(心境)이 확연(廓然)하야 망피차(忘彼此)하면,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피차(彼此)를 잊어버리면, '내다 남이다', '주관이다 객관이다', '좋다 나쁘다' 이러한 피차를 잊어버리면, 대천사계총포함(大千沙界總包含)이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그 속에 다 포함되어 버린 거다 그 말이여.
마음속에 아상(我相) 인상(人相), '내다 남이다', '이건 좋다 나쁘다' 이러한 차별심이, 차별(差別)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면 육도(六道)가 분명히 있고, 중생과 부처님이 따로따로 있고, 온갖 재앙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마음 경계가 확연(廓然)해서 인아상(人我相)이 뚝 떨어져 버리면 삼천대천세계가 그냥 고대로, 현실(現實) 있는 고대로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이요, 부처님의 세계요 진리의 세계인 적광토(寂光土)가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처처녹양감계마(處處綠楊堪繫馬)요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다. 곳곳에 푸른 버들에는 다 말을 맬 수가 있어. 사람이 옛날에는 다 말을 타고 다니다가 그 말에서 내리면 그 말을 그 나무에다가 고삐를 매는데, 어느 곳에 있는 아무 버드나무에도 그 말을 마음놓고 붙들어 맬 수가 있는 것이고, 가가유로투장안(家家有路透長安)이여. 집집마다 길이 있으면 그 길이 바로 장안(長安), 서울로 통하는 길이더라 그 말이여. 어느 집이고 그 문 앞에 있는 길로 나가기만 하면 거기서 바로 서울과 직통으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참선(參禪)을 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아(人我) 피차상(彼此相)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요긴(要緊)한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바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전강 조실(祖室) 스님 법문에, 중국(中國)에 동산숭장로(東山崇藏老)라고 하는 선지식이 그 제자를, 참선하러 나가는, 행각(行脚)으로 나가는 제자에게 설(說)한 그 법문(法門)을 해 주셨는데, 설사 머리를 깎지 않고 속가(俗家)에서 가정을 가지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하는 그러한 생활을 하신 분, 또는 출가(出家)를 해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서 일평생을 도(道)를 닦는 그런 스님은 더욱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언제나 행각(行脚)을 지금 하고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道)를, 이 참선법(參禪法)을 믿지 아니하고 그렁저렁 살아가는 사람은 말고, 참으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낸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더라도 행각에 나서고 있다고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각에 나선 사람은 자기의 고향과 부모를 다 여의고 떠나왔으며, 또 자기의 은사(恩師) 스님이 계시는 그 절도 이미 하직(下直)을 하고 선지식(善知識)과 도반(道伴)을 찾어서 이미 길을 떠나 있거든. 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까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에, '이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하지 아니하면 후일(後日)에 염라대왕(閻羅大王)이 너의 밥값을 따져서 계산하게 될 것이다'
옛날에 운광법사(雲光法師)라 하는 큰스님이 계셨었는데, 계행(戒行)이 청정(淸淨)하고 설법(說法)을 잘해서 그 운광법사가 법문을 하시면 뜰 앞에 있는, 또는 산에 있는 바위도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끄떡끄떡하고, 또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설법을 잘하시면 그 바윗덩어리가 감동이 되어 가지고 고개를 꺼떡꺼떡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쏟아지겠느냐 이 말씀이여.
그런데 그 운광법사가 많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시기를, "시주(施主), 시주것은 그 쌀 알갱이 하나에 은혜(恩惠)가 일곱 근 반이라, 그렇게 시주에 물건이라 하는 것은 은혜가 그렇게 지중(至重)한 것인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먹고 금생(今生)에 도업(道業)을 성취하지 못하면 죽어서 소가 되느니라. 소가 되어 가지고 그 시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평생토록 죽도록 피땀 흘려서 일을 해서 그 은혜를 갚어야 하고, 죽어서는 피와 고기와 가죽으로써, 가죽과 뼈로써 또 그 은혜를 빚을 갚어야 하고, 한 생 동안 소노릇을 해서 못 갚으면은 죽자마자 다시 또 소가 되어 가지고, 소로 태어나 가지고 또 그 은혜를 갚고 해서 몇백 생, 몇천 생토록 그 은혜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렇게 소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설법을 하시니까 그 어떤 스님 한 분이, "그러시다면 큰스님께서는 능히 그 시주에, 그런 시주가 바친 그런 그 무서운 시주것을 다 능히 소화시킬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하고 이렇게 여쭈어봤습니다. 그 운광법사가 대답하기를, "능소(能消) 능소(能消)! 능히 소화를 시키고말고!"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소가 되었습니다. 큰 황소가 되어 가지고 "움메~ 움메~" 하고 우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운광법사처럼 계행(戒行)을 철저히 지키고 그렇게 도(道)를 열심히 닦고, 그래 가지고 큰스님이 되어서 저렇게 설법을 잘해 가지고 많은 중생들을 교화(敎化)를 하셨는데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
그 운광법사가 소가 되어 가지고 죽은 다음에 그 운광법사, 그 소를 껍데기를 벗겨 가지고 그래 가지고 큰 북을 만들어 가지고 절에다가 그 북을 만들어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할 때는 그 북을 쳤던 것입니다. 그 북소리를 듣고,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큰스님도 이렇게 소가 되었는데, 하물며 그밖에 누가 소가 되지 않겠다고 자긍(自矜)을 할 수가 있겠느냐? 이것을 거울삼아서 게을리 해태(懈怠)에 빠지지 말고 목숨 바쳐서 도를 닦을지니라' 이러한 뜻으로 큰 절에는 다 북을 매달아 놓고 조석(朝夕)으로 치는데.
'어째서 운광법사와 같은 그러한 대도사가, 대 선지식이 소의 과보(果報)를 받았느냐?' 이것이 하나에 공안(公案)입니다.
'어째서, 도(道)도 안 닦고 계행(戒行)도 안 지키고 그렇다면 혹 소가 된다 해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운광법사처럼 그렇게 계행이 청정하고 도를 그렇게 참 철저히 닦고, 설법을 그렇게 참 부처님 설법을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꽃비가 쏟아지고 바위가 고개를 꺼떡거리고 이렇게 감동을 주는 그러한 대법사(大法師)가 어째서 소가 되었느냐?'(처음~17분3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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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고, 밤잠을 덜 자고, 말을 적게 하고, 쓸데없이 외출을 하지 아니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잠을 안 자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말을 아니한 데에도 있는 것도 아니요, 밥을 안 먹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그러한 것들이 수행하는데 마땅히 좋은 수행자로서 다 주의해야 할 점이고 지켜야 할 점인데 또 거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말이여.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옆구리를 땅에 대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하는, 그런다고만 해서 '그것이 가장 도를 잘 닦는다' 이렇게도 말할 수가 없는 것이고. 평생 동안 묵언(默言)을 하고 벙어리 노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가장 잘 닦는다 할 수도 없는 것이여. 만약에 눕지 않는 것으로써 제일가는 정진을 삼는다면 앉은뱅이는 금방 도(道)를 이룰 것이고, 말을 아니한 것으로써 가장 훌륭한 도를 닦는 것으로 여긴다면 벙어리는 일찌감치 도를 통할 것이고, 뭘 듣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않는 것으로써 도를 삼는다면 장님이나 귀머거리는 제일 먼저 도를 툭! 통하고 말 것이겠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먹고, 자고, 듣고, 보고, 말하고, 걷고, 그러하면서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눈이라 하는 것은 '보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보고, 귀라 하는 것은 '들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듣고, 입은 '말하고 밥 먹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밥 먹을 때는 밥 먹고 말할 때는 말을 하고, 밤이 오면 '자라'고, 쉬는 시간이니까 쉴 때는 쉬되 거기에 착(着)이 없어야 한다 그 말이여.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해야,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話頭)를 올바르게 거각(擧却)을 해 나간 사람은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하는 사람이요,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이다.
묵언을 한답시고 말은 아니하면서 온갖 시비(是非)에 다 참견(參見)하고 온갖 참견을 다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한다고 밤 잘 때 옆구리는 땅에 대지 아니하면서 종일토록 혼침(昏沈)에 떨어져서 꾸벅꾸벅하고. 그렇다면 그렇게 해 가지고 무슨 도(道)에 보탬이 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편행외도(遍行外道)는 하루에 공양(供養)을 한 끼밖에는 아니하고 장좌불와를 하고 수행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고행(苦行)을 다 해도 그것이 참으로 바른 도를 깨닫지를 못했고, 밥 먹을 때 먹되 과식을 하지 아니하고, 말을, 할 말을 하되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하되 대도(大道)를 성취한 선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들이는 것, 그리고 하루에 사분정진(四分精進)으로 시간 생활을 한 것도 대단히 필요한 것이고 그렇되, 참으로 공부를 알차게 하려면 입선할 때뿐만이 아니라 방선(放禪) 시간, 결제 때뿐만이 아니라 산철에, 또 앉어 있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걸어 다닐 때나, 똥을 눌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바로 그때, 그 시간 그 장소 그 일에 있어서 경계(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화두(話頭)를 성성(惺惺)하게 거각(擧却)해 나가는 이러한 수행자라야 도를 빨리 그리고 바르게 성취할 것입니다.
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평상심(平常心),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 그 점에 대해서 강조를 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스님) "일광(日光)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法)을 설(說)합니까? 이 분상(分上)에서 한마디 일러주십시오" "뭘 물어보나? 뭘 물어봤어?"
(어떤 스님)"일광이 풀 위에 떨어져 삼라만상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어디를 향해 법을 설하십니까?" "다 물어봤으면 물러가. 물러가 있어"
보취산왕산막궁(寶聚山王算莫窮)이요, 보배가, 보배 무데기가 태산(泰山)과 같이 그렇게 많이 보배를 모여서 쌓아 놨다. 쌓아 놔서 얼마나 많은 보배인가 도대체 헤아릴 수가 없어. 세속에 돈을 많이 벌어서 복을 많이 짓고 또 보배를 그렇게 많이 쌓아 놨다 하더라도, 환여앙전사허공(還如仰箭射虛空)이라. 저 하늘에다가 활을 쏘면 그 하늘이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가는 다시 그 올라가는 기운(氣運)이 다 떨어지면은 땅으로 도로 떨어진 거와 같다.
오늘 이 법회에 한 납자(衲子)가 나와서, "설할 바 없는... 한 법(法)도 설(說)할 바 없는 곳을 향해서 무슨 설법을 어디다 대고 하느냐?" 이러한 뜻으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했습니다.
하늘에다 대고 침을 밭으면 제 얼굴에 떨어지는 법입니다.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설(說)하는 사람이나, 설(說)할 바 없는 법을 어디다 대고 설(說)하느냐고 묻는 사람이나, 바람을 거슬러서 문지(먼지)를 날리면은 그 문지가 자기 얼굴과 자기 몸에 온통 엉기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법회(法會)가 있으면 눈 밝은 납자(衲子)는, 또 정진을 애써서 하는 납자는 선지식(善知識)에 법을 묻기도 하고 또 답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참, 탁마(琢磨)를 해 온 준례(準例)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처음 보신 분은 어리둥절해서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시겠지만, 이러한 법(法)을 거량(擧揚)하는 것은 대단히 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분발(奮發)을 하게 하고, 침체(沈滯)했던 사람에게 채찍을 가하고, 졸고 있는 사람에 정신을 바짝 채리게 하는, 그러한 참 좋은 선불장(選佛場)에 하나의 양상(樣相)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으면, 조실 스님이 법을 설하실 때에도 가끔 어떤 납자들이 나와서 법거량(法擧揚)을 하고 모다 그러한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마는, 참으로 눈을 갖춘 분은 점검(點檢)을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17분48초~36분5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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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일구초삼제(洞明一句超三際)하면, 일구(一句)를 통명(洞明)을 해서 삼제(三際)를 뛰어넘으면, 과거 현재... 시간을 초월을 해 버리면, 절승승지만배공(絶勝僧祇萬倍功)이라. 아승지겁을—아승지겁(阿僧祗劫)이라 하는 것은 무량겁(無量劫)이란 말인데, 그 아승지겁 동안 쌓은 공덕(功德)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것이다.
불법(佛法)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거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여, 한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그 방법이 바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할 때에 일구(一句)를 통명(洞明)하게 되고 무량겁 닦은 공(功)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공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여. 계속해서 해 가지고 차츰차츰 나아져 가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거든.
만날 화두(話頭)를 들고 애를 쓰고 정진을 하되, 무엇이 조끔도 알아진 것이 없고 나아가는 것이 없어. 해 갈수록 답답하고 아무것도 얻어진 것이 없고 내놓을 것이 없어. 그러지만 아무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뭣이 공부가 잘되어 간 것 같지도 않고, 그렇지만 물러서지 아니하고 한 걸음 한 걸음, 한 생각 한 생각을 철저(徹底)하게 단속(團束)을 해 나가면,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지게 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때가 반드시 오는 것이여. 밥을 먹을 때도 화두가 고대로, 똥을 눌 때도 화두가 그대로, 일을 하거나 걸어가거나 소지를 하거나 누웠어도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게 현전(現前)을 하고, 심지어 잘 때에도 꿈속에서도 그 화두(話頭)가 현전(現前)을 하게 되면, 그땐 공부가 순숙(純熟)해져서 깨달음이 멀지 않다 하셨습니다.
이 공부, 이 법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면 모르되, 듣고 믿은 이상은 이것 밖에는 인생으로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 하나 함으로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날마다 종횡으로 외운 공덕보다도 이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약방문(藥方文)을 읽은 거와 같고, 농사짓는 법을 외우는 거와 같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이요, 약을 먹는 것이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여.
그러니 농사짓는 법을 공부 열심히 읽기만 하고, 실지로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는다면 한 알갱이의 한 톨의 곡식도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밥을 지어서 먹는다면,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배고픔을 면한 거와 마찬가지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여. 그러니 어찌 이것을 듣고 믿으면서도 이것을 등한(等閑)히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설할 것 없는 곳을 향해서 어디를 향해서 무슨 법을 설하느냐?'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분명히 설할 것이 없지만, 설할 곳 없는 곳을 향해서 설해야만 되고, 닦을 곳 없는 곳을 향해서 목숨 바쳐서 닦어야 하고.
본분납승(本分衲僧)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와 조사(祖師)도 본분납승에 방(棒)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한 부처에게도 방(棒)을 내리고, 조사에게도 방(棒)을 내릴 만한 그러한 하늘을 찌르는 장부(丈夫)에 기상(氣像)을 가진 납자가 많이 출현(出現)해야만 불교에 중흥(中興)을 이룰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생사해탈(生死解脫)이 이 보통 일이 아니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긴히 화두를 들어서, 승두(繩頭)를 잡아서 한바탕 공부를 지을 지니라.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이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뼈에 사무치도록 되게 강추위를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이냐.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칠 수가 있겠느냐.
되게 강추위를 해야 그 매화꽃이 향내가 진동을 하는 법이여. 겨울에 이상난동(異常暖冬)으로 날씨가 너무 푹하면, 그럴 때에, 그런 뒤끝에 매화꽃이 피어 봤자 별 향내가 없어.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핀 매화라야 그 향취(香臭)가 진동(振動)하는 법이다.
금년(今年)도 봄도 다 가고 또 이렇게 가을도 다 가고 머지않아서 또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렇게 또 일 년이 이렇게 다 지내가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은 없으면서 세월(歲月)은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나를 위해서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아니하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음력 10월 15일이 또 겨울 석 달 동안 안거 결제(結制)날이니, 그때 법회에 모다 참석을 하셔서 석 달 동안 선방(禪房)에 나와서 방부(房付)를 들이실 분은 방부를 들이시고 또 댁에서 하실 분은 댁에서 또 결제를 하시는 그러한 마음으로 음력 10월 15일 결제 법요식(法要式)에 모다 참석을 해 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37분~49분42초) (끝)
[법문 내용]
(게송)심경확연망피차~ /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인아상(人我相)이 뚝 떨어져 버리고, 마침내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 / 행각(行脚)에 나선 사람은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운광법사(雲光法師)가 소가 된 공안에 대한 말씀.
일상생활을 하되 거기에 떨어지지 아니하고서 거기에서 화두를 올바르게 거각을 해 나간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 사람 /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 참선은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돌이켜서 자기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 / 한 납자(衲子)의 법거량 / (게송)보취산왕산막궁~.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방법이 바로 활구참선법 /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 /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농사법 약방문(藥方文)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거각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 약을 먹는 것,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〇참선(參禪)을 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좋은 생각이 일어나거나, 나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바로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 나간다면, 그것이 바로 인아(人我) 피차상(彼此相)에 떨어지지 않는 가장 요긴(要緊)한 길이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단속(團束)해 나가면 마침내는 참나를 깨달라서 바로 이 몸뚱이가 이대로, 속에 피와 오줌과 똥이 들어 있는 이 몸뚱이 그대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〇고향과 부모를 떠났고 거기에서 다시 은사와 자기가 살던 절도 버리고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행각에 나선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할 겨를이 있으며 무슨 딴 일을 할 틈이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앉으나 서나, 일을 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소지(掃地)를 할 때나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찾는 그 공부밖에는 일분일초도 딴생각할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〇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평상시(平常時), 말하고 듣고 보고 걸어가고 일하고 잠자고 밥 먹고 하는 이 평상(平常) 일상생활(日常生活)이 도(道) 닦는데 가장 중요한 시간이요, 중요한 과제요, 중요한 장소라고 하는 것을 깊이 명심(銘心)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〇사실 이 참선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복잡하고 이상스럽고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중생에 번뇌망상(煩惱妄想) 분별심(分別心) 이놈을, 이것을 돌이켜서 자기(自己)로 회귀(回歸)하는 이것이 가장 평범(平凡)하면서도 최고(最高)의 수행 방법입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화두를) 들고, 글안으면 경계에 떨어져서 그럭저럭 시간이 지낸 줄을 모르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는 미륵(彌勒)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닦어도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다고 과거에 모든 선지식들이 한결같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〇불법(佛法)은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으로 따져서 알아 들어가는 그러한 공부가 아니거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여, 한 말씀 아래에 몰록 생사를 잊어버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 하는 그 방법이 바로 화두를 거각(擧却)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충실할 때에 일구(一句)를 통명(洞明)하게 되고 무량겁 닦은 공(功)보다도 더 수승(殊勝)한 공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학문은 점진적(漸進的)이여. 계속해서 해 가지고 차츰차츰 나아져 가는 것인데, 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은 점진적이 아니고 비약적(飛躍的)인 것이거든.
〇이 공부, 이 법을 듣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면 모르되, 듣고 믿은 이상은 이것 밖에는 인생으로서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 하나 함으로써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날마다 종횡으로 외운 공덕보다도 이 한 생각 돌이키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경(經)을 읽고 외우고 하는 것은 노정기(路程記)를 외우는 거와 같고, 약방문(藥方文)을 읽은 거와 같고, 농사짓는 법을 외우는 거와 같애.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는 것은 바로 밥을 먹는 것이요, 약을 먹는 것이요,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여.
그러니 농사짓는 법을 공부 열심히 읽기만 하고, 실지로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안 짓는다면 한 알갱이의 한 톨의 곡식도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밥을 지어서 먹는다면,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야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배고픔을 면한 거와 마찬가지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여. 그러니 어찌 이것을 듣고 믿으면서도 이것을 등한(等閑)히 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인생으로 태어나서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〇금년(今年)도 봄도 다 가고 또 이렇게 가을도 다 가고 머지않아서 또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다가 이렇게 또 일 년이 이렇게 다 지내가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은 없으면서 세월(歲月)은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나를 위해서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아니하고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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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