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700/(676~700)2019. 12. 18.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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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685)—2004년 하안거결제 법문(04.06.02) (42분)

(1) 약 20분. (2) 약 22분.

(1)------------------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위타위기(爲他爲己)는 수미선(雖微善)이나  개시윤회생사인(皆是輪廻生死因)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 거, 비록 그것이 선(善)이 아닌 것은 아니야. 틀림없이, 남에게 보시를 한다든지 자원봉사를 한다든지 다 그것이 선(善)이기는 선이나 그것이 조그만한 선(善)이다 그말이지. 그러나 이것이 다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는 원인밖에는 안 된다 그거죠.


'좋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 가지고 상(相)을 내고, 자랑을 하고, 그러면 그것이 선을 지은 만큼 복을 받기도 하고 또 천당에 가기도 하고 하나 영원성이 없어.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면 아무리 큰 장사(壯士)가 화살을 쏘았다 하더라도 그 올라간 만큼 올라갔다 다시 또 땅으로 떨어지듯이 좋은 일을 해서 복을 받는데, 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작은 복을 받기도 하나, 크나 작으나 복 받을 만큼 받으면 다시 또 타락을 하게 되니까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무슨 일을 해야 영원성이 있느냐?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데에 가서 길이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무루 조사선이라는 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4월 15일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인제 용화선원 대중,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 저 대전에 세등선원 대중, 위봉사 위봉선원 대중, 승련사 승련선원 대중, 그리고 복전암 선방 대중들, 멀고 가까운 데에서 정진하는 도반(道伴)들과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 시민선원 또 보살선방 대중, 청신사 청신녀, 형제자매 여러분이 바로 샘[漏]이 없는 무루 조사선을, 활구참선을 앞으로 석 달 동안 하안거 결제(結制)를 하기 위해서 그 법요식(法要式)을 위해서 이 자리에 참석을 하셨습니다.


각자 그 선방(禪房)에서 결제를 하고 거기서 정진을 하면 되겠지만, 멀고 가까운 데에서 이렇게 모다 운집(雲集)을 해서 함께 이 법보전(法寶殿)에서 결제 법요식을 거행하는 뜻은 '비록 우리가 선방의 위치는 멀고 가까운 데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조실(祖室)로 계시는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의 법을 믿고, 그 법에 의해서 바르게 정진을 하리라'하는 그러한 신심으로 함께 법요식을 갖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앞으로 삼복(三伏)더위가 있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땀이 나고 힘이 들고, 사람에 따라서는 또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불만스러운 점이 있겠으나 그런 것을 신심과 정진력으로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한자리에서 석 달 동안을 잘 성취를 하자 하는 그런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다.


세속에 명예를 구하고 권리를 구하고 재산을 구하고, 다 인정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속에서 그럭저럭 살기는, 때로는 웃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괴로워하기도 하고 하면서 곤두박질을 치면서 그렇게 세속을 살아가는 데에는 그때그때마다 때로는 풀리기도 하고 다시 얽히기도 하고, 넘어졌다 일어서기도 하고 그것이 세속 사는 재미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그러한 생활은 비록 재미는 그 나름대로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 생활을 계속 해봤자 영원히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결제를 하면서 삼복성염에 더위를 이겨가면서 청규(淸規)를 지키면서 그렇게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한다고 하는 것은 비록 여러 가지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힘이 들 것입니다마는,

청규를 지키면서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에 의지해서 정진하다 보면 그 힘든 속에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끼고, 도반과 도반끼리 서로 존경하며 화합하면서 수행 정진해 나가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생사해탈(生死解脫) 길로 우리를 가게 만들고, 구경(究竟)에 가서는 해탈도를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분히, 우리가 인생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탐진치를 극복하면서 목숨 바쳐서 도 닦는 충분한 이유가 있고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결제 법문은 아까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우리는 충분히 다 들어서 산승(山僧)으로서 노바심절(老婆心切)한 마음으로 몇 마디, 여러분이 앞으로 석 달 동안 정진해 나가는데 보탬이 되기를 원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속 일을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아서 생사해탈하기 위해서, 자기도 생사해탈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리라’하는 그런 대원력(大願力)을 가지고 우리는 결제를 하게 된 만큼 결제에 정진을 해 나가는 데에는 반드시 그 선원 나름대로 청규, 규약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분율(五分律)』이라고 하는 경(經)에 다섯 가지를 특별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중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해 나감에 있어서,

첫째는 '하의(下意), 하심(下心)을 해라' 이겁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자기하고 싶은 대로만 해 가지고서는 그 대중이 정진을 올바르게 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지 말고 항상 겸손하고 하심하고 남의 뜻을 존중히 여기고 청규를 잘 지키면서 그렇게 지내야 한다 그것입니다.


둘째는 '자비심(慈悲心)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입니다. 자비심이라는 게 자기 편할 대로만 하고 자기의 의사만 존중히 여기고, 남을 짓밟고 남의 괴로운 줄을 생각할 줄 모른다면 그건 자비심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자비심으로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까?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지장이 있을까?' 항상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과 다른 사람의 하는 일에 대해서 배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심하고 겸손하고 남을 위한 자비심을 가져야 한다 이거거든.


셋째는 하심하고 자비심을 가지면 자연히 무엇이 우러나냐 하면은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이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가 잘생겼다. 자기가 많이 배왔다. 자기가 힘이 세다. 자기가 일찍 중이 되었다. 일찍 선방에 나왔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남을 업신여기고 남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대중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분을 공경하는 마음—자기보다 못 배웠거나, 자기보다 얼굴이 잘 못생겼거나, 자기보다 승납(僧臘)이 낮거나, 자기보다 못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그런 점만 볼 게 아니라 그분에 좋은 점을 보고, 그 사람의 잘못된 점은 구태여 보지 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기의) 좋은 점만을 보고, 남에 단점만 보고 시비를 하면은 그 사람은 대중에서 같이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공경을 하라' 이것입니다.


네 번째는 '지차제(知次第)다, 차제(次第)를 알아야 한다'

대중에는 반드시 청규가 있고 법도(法度)가 있고 순서가 있어서 그 차례를 알아서 해야지 그 차례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언행을 한다면 대중을 소란케 만들고 대중 수행하는 데 막대한 지장을 주고, 그 선방이 장애가 끊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시비가 끊일 날이 없어서, 그러한 차제를 몰라 가지고서는 대중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이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불설여사(不說餘事)다. 남의지기 일에 대해서 말을 하지 마라. 이 여사(餘事)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어떠한 소임을 가져서 소임의 자격으로써 대중을 위해서 부득이해서 말을 할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벌리지 말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불설여사(不說餘事)인 것입니다.


주지로서 또는 총무로서 또는 원주(院主)로서 당연히 그 소임을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대중 스님한테 말씀을 드려야 할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혹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는 일절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보나, 궂은 일을 보나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만을 묵묵히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를 들고 열심히 정진할 뿐인 것입니다.


이 첫째는 하의(下意)요. 둘째는 자비(慈悲)요. 셋째는 공경(恭敬)이요. 넷째는 지차제(知次第)요. 다섯째는 불설여사(不說餘事)라고 하는 이 입중5법(入衆五法)에 대해서 아마 여러 선방에도 이것이 써서 붙여져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이것이 지켜지지 아니할 때 그 철 살림은 무질서하고 엉망이 되고 장애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5법만을 잘 지키면서 여법(如法)하게 수행한다면은 무슨 지장이 있고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 철에 소임자는 어쨌든지—여기에서 말한 소임은 첫째는 주지나 원장이요, 원주나 총무 · 교무 · 재무요 또는 공양주(供養主)나 채공(菜供)이나 별좌(別座)나 모다 이러한 이 선방을 외호(外護)하는 그런 소임자—정성을 다해서 음식에 대해서나, 모든 것에 대해서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정성을 다해서 신심으로 잘 외호를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 소임자만 그 무슨 빚이 져서 외호만 그렇게 잘해야 하냐?' 혹 그런 생각을 생각할는지 모르나, 현재 선방에서 방부를 들이고 정진하는 스님네는 과거에 다 그런 소임을 거쳐서 외호를 하다가 또 발심(發心)을 해서 선방에 나오셨을 것이고, 그러니 지금 소임을 보고 있는 스님도 앞으로 소임을 내놓고 걸망을 지고 나가면 또 선방 대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임자는 선방 정진 대중스님네를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외호를 다 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선방 스님네가 정진을 잘 하시게 되어가지고 도업(道業)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방 방부 들이고 정진하는 스님네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국수면 국수, 만두면 만두, 찰밥이면 찰밥, 들어오는 대로 말없는 가운데에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서 잘 씹어서 과식(過食)하지 말 것이며, 속식(速食)하지 말 것이며, 적당하니 공양을 받아 가지고 잘 씹어서 그 공양이 소화가 잘되도록, 그래야 정진하는 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11초)




(2)------------------


국수가 들어오면 좋아한다 해 가지고 몇 사람 몫을 옆구리가 퍼지고 목에다 손가락을 넣으면 묻어나올 정도로 그걸 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먹고 나서는 끅끅 트림을 하고 소화제를 먹고 그것은 올바른 공양법이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들어와도 찰밥이면 찰밥, 국수면 국수, 만두면 만두, 좋아하는 음식이 들어올수록에 팔부(八部)쯤만 받아. 조금 더 먹고 싶어도 적당한 선에서 먹고 그것도 잘 씹어서 먹고 뱃속이 편안해야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뱃속이 불안해 가지고는 절대로 정진이 되지 않습니다. 끌끌거리고 트림이 올라오고, 트림이 나올라다 들어가고 뱃속이 부글부글 끓고 그래가지고 화장실을 노상 드나들고 그래 가지고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수행을 해 가지고 도업을 성취하려는 그런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유치원 학생들한테 한 말이지 최상승법을 닦는 대덕 스님네나 참선하신 그런 스님네께 해당사항이 아니라고 혹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산승도 일찍이 걸망(乞網)을 지고 다닌 때가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그렇고 옆에 모다 정진하는 스님네 하는 모습을 보고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걸망을 지고 선방에 다닌 스님네는 참 훌륭하고 거룩하고 뒤에다 대고도 절을 하고 싶고, 저절로 합장이 되고 전부 훌륭한 스님네인 것은 사실이나, 다른 어떤 면에서 보면 철이 하나도 안 났습니다. 금방 먹고 배탈 날 것을 전혀 생각지 않고 잔뜩 먹고, 그리고도 고생을 하고도 그다음에 또 국수를 보면 자제를 못합니다.

너무 천진하고 너무 단순해 가지고 아무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면이 선객(禪客) 스님네한테는 있는 것을 내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한 철 장애 없이 정진하시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공양(供養)을 잘 자셔야 정진이 되지, 과식하거나 속식하거나 무리하게 그렇게 잔뜩 먹고는 도저히 정진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씩 그 여독(餘毒)이 가기 때문에 음식에 대해서 조심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주 · 채공은 말할 것도 없고, 원주 · 별좌 스님도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올려야 그 공양을 잡숫고 스님네가 배탈이 안 나지, 공양주나 별좌나 채공이나 원주 그런 스님네가 정성 없이 툴툴거리면서 불평불만으로 그럭저럭해서 공양을 올리면 그 공양을 잡숫고 배탈이 많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임을 보신 스님네도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만들고 그리고 받들어야 하는 거고, 선방 스님네는 정말 그러한 정성을 다 잘 알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말로써는 표현은 안 하더라도 적당량을 잘 저작(咀嚼)을 해서 잘 공양을 해야 그래서 배탈이 안 나고 정진을 잘하셔야 그래야 그 정진한 사람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치문(緇門)』 소임장에 보면 소상히 적혀 있어서 여러분은 다 그것을 줄줄, 강원(講院)을 나오신 분은 다 외우고 계실 줄 압니다마는 외우면서도 실지로는 실천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결제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까 이 「하심을 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공경심을 가지고, 차제를 알고, 불설여사 하라」고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절에 와서 특히 선방에 와서, 비구 선방에나 비구니 선방이나 보살선방이나 전부가 해당이 되는 말입니다.


이 선방에 들어와서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던지 똑똑한 체해서는 참 그것은 안 됩니다.


자기가 잘난 체하고 똑똑한 체해서는 왜 안 되냐 하면은, 세속에서는 대통령을 살거나 장관을 살거나 국회의원을 살거나 지방 뭐 장관을 살거나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똑똑한 체해야 먹고삽니다.

사실은 인격적으로 보면은 참 우스울 일이나 세속에서는 잘 살라면 바보처럼 가만히 있으면 밤낮 봉만 잡히고 짓밟히고 살 수가 없으니까 뭣이든 똑똑한 체하고 자기 자랑을 하고 그래야 국회의원도 되고 당선이 되니까 선거 때 되면은 한 사람도 제대로 인격을 갖춘 사람을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자랑하고 남은 어쨌든지 흠집을 내가지고 짓밟고 그래야 뭣이 당선이 되기 때문에 그럽니다마는, 앞으로는 그런 사람 뽑아서는 안 되아 나라꼴이 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마는. 우선 그런 상황인데.


선방에 와서 그런 속세(俗世)의 추잡한 언행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절에서는 항상 하심을 하고, 남을 존경하고 자비심으로 해야 다른 스님네가 그분을 존경하게 됩니다.

말로써는 안 해도 마음속으로 '참 저분은 수행을 제대로 하신 분이로구나!' 그 스님을 보면 제대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나도 앞으로 저렇게 되어야겠다' 이렇게 될 것입니다.

절에 와선 똑똑한 체해 갖곤 점수가 올라가기커녕은 점점 떨어지고 아무도 그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민선방(市民禪房)이나 보살선방(菩薩禪房)에, 집안에 계시면은 다 대접받고 큰소리칠 수 있는 그런 분들이 고생을 사서 하기 위해서 방부를 들이고 오십, 육십, 칠십, 팔십이 되어도 기를 쓰고 방부를 들이고 와서 정진을, 고생을 하고 계십니다. 참! 감사할 수밖에 없고 참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소중한 분들이지요.


개중에는 그런데 큰소리치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그런 분들이 가끔 있다 이 말씀이여. 이번 철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라고, 하심하고 대중법규를 자진해서 지키고 혹 다른 분이 안 지키는 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입승(立繩)이나 그 소임을 가지신 분이 적절히 처리하실 것이니까 다른 분은 전혀 눈에 혹 보이더라도 '아, 나는 저렇게 안 해야겠구나'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고 냉큼 화두만을 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 잘못하면 시비하고 하다보면 거기서 시비가 일어나기 때문에 일절 보고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여기 법당에 들어온 계단 머리에 원숭이 세 마리가 한 마리는 입을 가리고, 한 마리는 눈을 가리고, 한 마리는 귀를 가리고 그런 석상(石像)이 있습니다마는 우리 정진하는데 그런 모습이 필요하기 때문에 들어오시면서 그것을 보시라 이것입니다.


선방에는 옛날에 「입차문래(入此門來)인댄 막존지해(莫存知解)다」 이런 글귀도 써 붙이고 또 뭣한 데는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도를 얻은 자는 나가라' 이것입니다. 견성(見性)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으면 나가서 중생 교화를 해야지,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이것입니다.


아마 뭣인가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거나, 속칭 뭐 초견성을 했느니, 한소식을 했느니 그런 생각을 속에다 품고 있어 가지고, 선방에 있어 가지고 꺼떡하면 무슨 아는 소리 하고, 꺼떡하면 무슨 법담(法談)을 한답시고 하다가 수틀리면 목침으로 머리빡을 깨기도 하고 발길로 차기도 하고 그래 가지고 걸망 싸 짊어지고 나가기도 하고, 쫓겨나기도 하고 그런 일이 옛날부터서 가끔 있어 왔습니다마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용화사 법보선원 대중이나 용주사 중앙선원 대중이나 승련사 대중, 위봉사 대중 또 이 세등선원 대중, 복전선원 대중, 이 자리에 모이신 선방 스님네는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는 걸로 알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마는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이런 말씀을 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해서 받아들이시길 부탁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머리를 깎고 출가한 여러 도반 스님네, 선배나 동료 후배 스님네 다 같이 금년 여름은 몸도 건강하고, 건전한 신심과 철저한 정법(正法)을 믿는 그러한 마음으로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정말 정말 알뜰하게 정진한 그런 한 철이 되도록 노력을 해 주시고.

또 보살선방이나 시민선방 또는 선방에 방부를 안 들이셔도 가정에서 정진을 하신 보살님네들도 또 거사님네들도 방부 들인 스님네, 방부 들인 보살님네 못지않게 알뜰하게 정진을 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이 정진은 정말 자기를 위하는 수행이고 그것이 바로 정법으로 연결이 되고, 그것이 바로 이 영원한 행복과 연결이 되고, 세계평화의 근본이 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깊이 명심을 하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하시고 일초일초를 알뜰히 단속을 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간에 숨을 깊이 들어마셨다가 내쉬면서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무슨 공안을 선지식(善知識)한테 받았건 간에 그 화두를 자주 바꿔서는 안 됩니다. 정진이 안 되어도 계속해서 한 화두만을 가지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땐가는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정진이 때로는 잘된다고 느껴도 좋은 생각도 내지 말고, 정진이 잘 안된 망상이 일어나고 혼침이 오고 그런 때라도 짜증을 내지 말고 잘 선심(善心), 선용기심(善用其心) 해 가지고 그 마음을 잘 지혜롭게 다스려서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그리고 그 화두를 들고 해서 잘 그것을 다스려 나갈 줄 알아야 하거든.

이것은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를 악물고 어거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선원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을 들으시면서 열심히 모다 정진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금년 여름철은 더욱 알뜰하게 정진해 주시기를 재삼 부탁을 드리고 게송(偈頌)을 읊고 내려가고자 합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라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樸鼻香)이리요

나무~아미타불~


이 게송은 황벽희운(黃壁希運) 선사의 게송입니다. 이 게송을 특별히 단서를 붙이시기를 '이 게송은 후래 선객들에게 수행자들에게 대단히 도움이 될 만한 게송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 게송을 읊는다'고 이 게송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진로형탈(塵勞逈脫)이 사비상(事非常)이다. 진로는 생사진로(生死塵勞)여. 생사해탈하는 일이 이 보통 일이 아니다.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다. 꽉! 승두(繩頭)를 잡고 한바탕 정진을 해야 한다 이겁니다.


승두(繩頭)라고 하는 것은 '노끈 승(繩)'자인데. '노끈 승(繩)'은 목수가 나무를 다듬을 때 먹줄을 탁 튕겨 가지고 그래야 똑바로 그 나무를 다스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하 없는 대목수(大木手)도 먹줄 없으면 나무를 바르게 깎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데서는 무엇이 승두(繩頭)냐 하면은 화두(話頭)입니다. 본참화두(本參話頭), 그것을 탁! 잡아 가지고 한바탕 정진을 해야 한다.


이 한바탕이라고 하는 것은 석 달 열흘이 바로 한마당이요, 견성성불(見性成佛) 할 때까지 그 기간이 바로, 그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합해서 그것이 한마당인 것입니다.

청춘을 버리고 인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처자권속을 버리고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우리는 이 길을 나섰기 때문에 이 화두 하나 이것밖에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인댄, 한바탕 그 추위가 뼛골에 사무치지 아니하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樸鼻香)이리요. 매화가 코를 치는 향기를 얻을 수가 있겠느냐.


이것은 매화꽃에다가 비유해서 했습니다. 겨울 날씨가 난동(暖冬) 기온으로 뜨뜻하면 매화꽃이 피어도 향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되게 강추위를 한 뒤끝에 매화가 피어야 향취가 진동을 한다 이것입니다.

알뜰하게 화두를 잡고 정진을 해야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을 여기 비유해서 읊으신 게송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의심(疑心)이 적으면 깨달아 봤자 적은 깨달음 밖에는 못 얻는 거고, 크게 의심을 해야 큰 의심으로 정진을 해 나가야 크게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 했습니다.

이 활구참선에 있어서는 의심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리저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음알이로 뭣을 알려고 하는 그런 참선은 참선도 아닙니다. 그렇게 정진해 가지고서는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처음부터서 끝까지 활구참선을 주장을 하셨습니다. 구구절절이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은 뼈에 사무치는 그런 법문인 것입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짜 발심을 해서 신심으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도 이런 활구참선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당부에 말씀은 조실 스님의 법문에 미루고 이상 내려가고자 합니다.(20분12초~41분49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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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위타위기수미선(爲他爲己雖微善)~'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육도윤회(六途輪廻).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상(相) ; ①모습, 형태. 상대어는 성(性)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성질을 가리킨다.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상(想)과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무루(無漏 없을 무/샐·구멍·번뇌 루) ; 유루(有漏)의 대칭어.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번뇌에서 벗어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마음 상태. 번뇌가 사라진 경지.

누(漏)는 누설(漏泄, 漏洩 흘러나온다)의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곧 육근(六根)과 아홉 구멍(九孔)에서는 항상 부정한 것이 흘러나오므로 누(漏)라 한다. 혹은 누(漏)란 누락(漏落)의 뜻으로 중생을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뜻이다. 이러한 누(漏)를 동반한 법을 유루, 그렇지 않은 법을 무루라 한다.

*조사선(祖師禪) ; 교외별전(教外別傳) •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말 자취와 생각의 길이 함께 끊어져서 이치나 일에 걸림이 없는 선. 언어와 문자에 의하지 않고 직접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깨우치는 것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선이라 한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조사선이 곧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결제(結制 맺을 결/만들·법도 제) ; 참선 수행하는 안거(安居)에 들어감.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에 결제하며, 동안거는 음력 10월 15일에 결제한다.

*법요식(法要式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요긴할·원할·얻을 요/법·제도·의식 식) ; ①법요(法要 : 법法의 요체要諦,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를 닦아 익히는 법식(法式). ②불사(佛事 : 재齋, 법회 따위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의 의식. 법회(法會 : 불법을 강설하거나 불보살과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행사 모임).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용화선원에서는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를 조실스님으로 모시고 있다.

*삼복(三伏)더위 ; 삼복(三伏 : 초복初伏 · 중복中伏 ·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무렵의 몹시 심한 더위.

伏자는 '엎드리다'나 '굴복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렇게 人(사람 인)자와 犬(개 견)자가 결합한 伏자는 개가 사람 옆에 바짝 엎드려 복종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이 伏날은 엎어질 듯이 매우 더운 날이라는 뜻이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삼복(三伏) ; ①일 년 중에서 여름철의 가장 더운 기간. ②초복(初伏), 중복(中伏), 말복(末伏)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성염(盛炎 성할 성/불꽃·더울 염) ; 매우 심한 더위. 또는 최고조에 달한 더위.

*청규(淸規) ; ①선종(禪宗)의 사원에서, 여러 승려들이 늘 지켜야 할 규칙. ②참되고 바른 규칙이나 법도.

*가행정진(加行精進) ; 별도의 노력을 기울여서 하는 정진. 어떤 일정한 기간에 좌선(坐禪)의 시간을 늘리고, 수면도 매우 단축하며 정진하는 것.

*용맹정진(勇猛精進) ; 두려움을 모르며 기운차고 씩씩한 그리고 견고한 의지로 한순간도 불방일(不放逸)하는, 열심으로 노력하는 정진.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법희선열(法喜禪悅) ;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듣고 따르는 기쁨[喜]과 선정(禪定)에 드는 기쁨[悅].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말.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 열반의 경지에 드는 것.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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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노바심절(老婆心切) ; 노파(老婆)가 자식·손자를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애지중지 하듯이, 수행자를 따뜻하게 가르쳐 인도하는 마음이 깊고 두터운 것.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원력(願力) : 원(願)하는 바를 이루려는 의지. 본원력(本願力)•숙원력(宿願力)•대원업력(大願業力)•서원(誓願)•행원(行願)이라고도 한다.

*오분율(五分律) ;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을 줄인 이름. 5세기초(422~423)에 불타집(佛陀什)과 축도생(竺道生)이 공역. 오부율(五部律)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 3백년 경에 상좌부 계통의 미사색부(Mahīśāsaka 化地部)에서 전해진 율장이다.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하심(下心) ;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마음.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겸손하게 갖는 것.

*자비(慈悲) ; 자(慈)는 ‘우정•친애의 생각’라는 원의(原義)로, 남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뜻, 비(悲)는 ‘연민•동정’을 원의(原義)로, 남의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 불•보살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 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마음.

*승납(승랍 僧臘 중 승/스님의 나이·승납 랍) ; 출가하여 스님으로서의 나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출가 생활을 한 햇수를 말한다. 법랍(法臘) · 납(臘)이라고도 한다.

스님은 세속을 벗어났으므로 절에서는 속세의 나이로 헤아리지 않고 승납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 장유(長幼)의 순서를 정하였다.

*차제(次第) ; 차례(次例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

*법도(法度 법 법/법도 도) ; 법칙(法則)과 제도(制度). 법규(法規)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규칙이나 의례를 가리키는 말이다.

*원주(院主) ; 후원(後院, 절에서 부엌을 일컫는 말)을 책임지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입중오법(入衆五法) ; 대중 생활을 하면서 명심하고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 ①하의(下意), 하심(下心). ②자비심(慈悲心). ③공경(恭敬). ④지차제(知次第). ⑤불설여사(不說餘事).

[참고]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 제19권 第三分之四 ‘자자법(自恣法)' (동국역경원)

優波離問佛 若比丘入僧中 應以幾法 佛言 應以五法 一下意 二慈心 三恭敬 四知次第坐處 五不論說餘事 復有五法 不應反抄衣 不應左右反抄衣 不應扠腰 不應覆頭 應恭敬僧


우파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비구가 승가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법으로 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섯 가지 법으로 해야 하느니라. 하나는 뜻을 낮추는 것이고, 둘은 자비심을 내는 것이고, 셋은 공경하는 것이고, 넷은 차례대로 앉는 자리를 아는 것이고, 다섯은 다른 일을 논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느니라. 옷을 걷어붙이지 않아야 하고, 좌우로 옷을 걷어붙이지 않아야 하고, 뒷짐을 지지 않아야 하고, 머리를 덮지 않아야 하고, 승가를 공경해야 하느니라"

*여법(如法 같을·같게 할·따를·좇을 여/ 부처님의 가르침·불도佛道 법) ;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음.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을 짓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채공(菜供) ; 절에서 반찬을 마련하는 소임,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별좌(別座) ; 절에서 식사·의복·방석·이부자리 등을 담당하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외호(外護) ; 불법(佛法)을 세상에 널리 퍼뜨리는데 힘이 되도록 수행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을 말한다. 신(身)·구(口)·의(意)를 보호하는 것을 내호(內護)라고 한다. 내호와 외호를 합하여 이호(二護)라고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속식(速食) ; 음식을 빨리 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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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걸망(乞網 빌다·구걸하다 걸/그물·싸다 망) ; 망태기처럼 물건을 담아서 등에 질 수 있도록 만든 자루 모양의 큰 주머니(바랑). 또는 동냥할 때 매고 다니는 베낭(배낭背囊)을 말한다.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공양(供養 이바지하다·받들다·모시다·바치다 공/기르다·공양하다 양) ; ①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나 스승, 부모, 영가에 음식, 옷, 약, 꽃, 향 등을 바침. ②스님들의 식사를 공양이라 하는데, 이것은 스님들은 시주(施主)의 공양물로 생활하기에 공양을 올리는 이[施主]의 시은(施恩)을 상기하여 잊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③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방법으로 하는 공양으로 삼업공양(三業供養)이라 한다. 자세[身]를 낮추어서 삼가고 공경하는 예를 갖추는 공경, 입[口]으로 훌륭함을 기리는 찬탄, 오로지 마음[意]을 쏟는 존중이다.

*여독(餘毒) ; 몸에 남아 있는 독기.

*저작(咀嚼 씹을 저/씹을 작) ; 음식물을 입에 넣고 씹음.

*치문(緇門 검다·검은 옷·스님 치/문·집안·문벌 문) ; 『치문경훈(緇門警訓)』 불문(佛門)에 처음 든 어린 사미(沙彌)가 공부하는데 경책(警策)과 교훈(敎訓)으로 삼을 만한 중국 역대 고승(高僧)들의 글을 모아 엮은 책.

치문(緇門)은 치의(緇衣 : 스님이 입는, 회색에 가까운 괴색의 색깔로 물들인 옷)를 입은 스님의 일문(一門)이라는 뜻으로 불문(佛門)을 말한다.

*강원(講院) ; 사찰에 설치되어 있는, 불전(佛典)을 공부하는 교육 기관.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 · 대교과(大敎科)의 네 과정으로 편성되어 있다.

*사미과(沙彌科) ;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수학 과정 중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 『사미율의(沙彌律儀)』 · 『치문경훈(緇門警訓)』 · 『선림보훈(禪林寶訓)』 등을 배운다.

*사집과(四集科) ;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수학 과정 중 하나로 사미과(沙彌科)를 배우고 나서 수학하는 과정이다. 곧 규봉 종밀 스님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都序』), 대혜 스님의 『대혜선사서장(大慧禪師書狀)』(『書狀』), 보조 지눌 스님의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節要』), 고봉 원묘 스님의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禪要』)를 말한다.

*사교과(四敎科) ; 조선 중기 이후, 우리나라 스님들이 불경이나 그에 대한 논설 따위를 강론하고 학습하는 곳인 강원(講院)의 수학 과정 중 하나로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에 이어 배우는 과정이다. 곧 『능엄경(楞嚴經)』, 『기신론(起信論)』,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을 이른다.

*대교과(大敎科) ; 우리나라 전통강원의 수학 과정 중 하나로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에 이어 『화엄경(華嚴經)』 · 『전등록(傳燈錄)』 · 『선문염송(禪門拈頌)』 등을 배운다.

*속세(俗世) ; 세속(世俗). 불가(佛家)에서 일반 사회를 이르는 말.

*시민선방(市民禪房) ; 시민선원(市民禪院). 직장인, 학생, 주부 등과 같은 하루 종일 시간을 낼 수 없는 분들이 언제든지 시간 나는 대로 와서 정진할 수 있도록 용화선원에 개설되어 있는 신도 선원.

*보살선방(菩薩禪房) ; 보살선원(菩薩禪院). 스님이 수행하는 선원과 같은 기간과 방식으로 보살님(신도)들이 정진 할 수 있는 선원. 용화선원에는 스님선원, 보살선원이 있고 또 매일 언제든지 와서 정진할 수 있는 시민선원이 있다.

*입승(立繩) ; 선원(禪院)에서 선원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직책, 또는 그 일을 맡은 스님.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 ; 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知解]를 두지 말지어다.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 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 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참고] 『선가귀감』 (용화선원刊) p220.

神光(신광)이  不昧(불매)하야  萬古徽猷(만고휘유)로다  入此門來(입차문래)에  莫存知解(막존지해)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밝고나. 이 문 안에 들어오매 알음알이를 두지 말지어다.


[참고]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9 천태평전보안선사(天台平田普岸禪師)의 말씀.

天台平田普岸禪師洪州人也  於百丈門下得旨  後聞天台勝槪聖賢間出  思欲高蹈方外遠追遐躅  乃結茅薙草宴寂林下  日居月諸爲四衆所知  創建精藍號平田禪院焉  有時謂衆曰  神光不昧萬古徽猷  入此門來莫存知解


천태산 평전보안 선사는 홍주 사람이다. 백장의 문하에서 종지를 얻은 뒤에 천태산의 수승한 경치에서 성현이 가끔 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한번 가보고자 하여 멀리 찾아가서 띠집을 짓고는 숲 밑에서 조용히 참선을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부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어 큰 절을 짓고 평전선원이라 하였다.

어느 때 대중에게 말했다.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빛나니, 이 문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전등록 1」 동국역경원, 김월운 옮김. p575-576)

*견성(見性) : ‘성품(性品)을 본다[見]’는 말인데 ‘진리를 깨친다’는 뜻이다. 자기의 심성(心性)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당체(當體, 본체本體)와 일치하는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다.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담(法談 부처의 가르침 법/말씀·말할 담) ; 불교의 도리에 관하여 나누는 이야기. 또는 그러한 설법(說法). 선사(禪師)들이 본분(本分 : 근본 깨달음本覺)에 대하여 서로 묻고 대답하는 것. 법화(法話)와 같은 말.

*정법(正法) ; ①올바른 진리. ②올바른 진리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③부처님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세상에 행해지는 기간.

*무장무애(無障無碍) ; 일이나 행동을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방해가 없음.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무자(無字) : 화두. 어느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읍니까 없읍니까?」하니, 조주 스님이 답하되 「무(無)」라 하시니 「준동함령(蠢動含靈)이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하는 참선할 때 참구(叅究)하는 천칠백 공안 중의 하나.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2~53.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단전 호흡(丹田呼吸) ;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일반적으로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단전 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이다.

*(게송) ‘진로형탈사비상~’ ; 『황벽단제선사완릉록(黃檗斷際禪師宛陵錄)』 황벽희운(黃檗希運) 선사 게송 참고.

*황벽희운 선사 ;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진로(塵勞 티끌·속세 진/근심할 로) ; ①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노여움이나 욕망 따위의 망념(妄念), 마음의 티끌. 번뇌(煩惱)를 말한다. 중생의 마음을 더럽히고 생사에 유전(流轉 끊임없이 이어짐)시켜 피로하게 하는 것. ②생사(生死). 생사윤회(生死輪廻).

*승두(繩頭) : 승(繩)은 목수가 쓰는 직선을 긋는 노끈이고 두(頭)는 어조사다。 불조의 계법(戒法) 규칙. 화두.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먹줄 ; ①먹통에 담겨 있는 실줄. 먹물이 묻어 있는 실줄을 먹통에서 잡아 당겨, 줄을 긋고자 하는 곳에 실줄 양쪽을 고정시키고 실줄 가운데를 튕겨서 줄을 내는 데 쓴다. ②먹줄을 튕겨서 낸 줄.

*대목수(大木手) ; 대목(大木). ①목수의 우두머리. ②큰 건축물을 잘 짓는 목수.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아 부처가 됨[成佛].

*고인(古人) ; ①불보살(佛菩薩)님을 비롯한 역대조사(歷代祖師), 선지식을 말한다. ②옛날 사람. 옛날 선승(禪僧).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 ;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한다'

[참고] 『박산화상참선경어(博山和尙參禪警語)』 (成正 集) <卍續藏 第63冊 No.1257> '시초심주공부경어(示初心做工夫警語)'에서.

做工夫 貴在起疑情 何謂疑情 如生不知何來 不得不疑來處 死不知何去 不得不疑去處 生死關竅不破 則疑情頓發 結在眉睫上 放亦不下 趁亦不去 忽朝樸破疑團 生死二字是甚麼閑家具 噁 古德云 大疑大悟 小疑小悟 不疑不悟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 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아침에 의심덩어리[疑團]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엑[噁] !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기를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 의심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다"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알음알이[知解] : 참선은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생각으로써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것은 깨친 것이 아니다。참선하는 데 가장 꺼리는 것이 이 알음알이이다。그러므로 『이 문 안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入此門內莫存知解)』라고 크게 써서 절 문에 붙이는 것이 이 까닭이다.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발(頓發 갑자기 돈/일어날·나타날·밝힐 발) ; 일정한 단계를 밟지 않고 직접적,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참고] 頓 - 直頓의 뜻, 곧바로.




[법문 내용]


(게송)위타위기수미선~ /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 활구참선(活句參禪) / 입중5법(入衆五法) / 정성을 다해서 대중스님 외호 / 공양하는 법 / 득도자출(得道者出) / (게송)진로형탈사비상~ / 대의대오(大疑大悟) 소의소오(小疑小悟) 불의불오(不疑不悟).



원입송풍나월하(願入松風蘿月下)하야 장관무루조사선(長觀無漏祖師禪)이다. 원컨대 솔바람 불고 칡덩쿨 사이로 달이 비치는 그런 데에 가서 길이 무루(無漏) 조사선(祖師禪)을 관(觀)하고자 한다.

무루 조사선이라는 게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활구참선(活句參禪)이여. 활구참선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 그래야 영원히 생사윤회로부터서 벗어나는 것이고, 행복도 타락이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속 일을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달아서 생사해탈하기 위해서, 자기도 생사해탈을 하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濟度)하리라’하는 그런 대원력(大願力)을 가지고 우리는 결제를 하게 된 만큼 결제에 정진을 해 나가는 데에는 반드시 그 선원 나름대로 청규, 규약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분율(五分律)』이라고 하는 경(經)에 다섯 가지를 특별히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심을 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공경심을 가지고, 차제를 알고, 불설여사 하라」


소임을 보신 스님네도 정성을 다해서 공양을 만들고 그리고 받들어야 하는 거고, 선방 스님네는 정말 그러한 정성을 다 잘 알아서 감사한 마음으로 말로써는 표현은 안 하더라고 적당량을 잘 저작(咀嚼)을 해서 잘 공양을 해야 그래서 배탈이 안 나고 정진을 잘하셔야 그래야 그 소임을 보는 사람에 대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선방에는 옛날에 「입차문래(入此門來)인댄 막존지해(莫存知解)다」 이런 글귀도 써 붙이고 또 뭣한 데는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득도자출(得道者出)이다. 도를 얻은 자는 나가라' 이것입니다. 견성(見性)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 했으면 나가서 중생 교화를 해야지,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이것입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의심(疑心)이 적으면 깨달아 봤자 적은 깨달음 밖에는 못 얻는 거고, 크게 의심을 해야 큰 의심으로 정진을 해 나가야 크게 깨닫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물며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 했습니다.

이 활구참선에 있어서는 의심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리저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음알이로 뭣을 알려고 하는 그런 참선은 참선도 아닙니다. 그렇게 정진해 가지고서는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은 처음부터서 끝까지 활구참선을 주장을 하셨습니다. 구구절절이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은 뼈에 사무치는 그런 법문인 것입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이 들으면 모르겠습니다마는, 진짜 발심을 해서 신심으로 조실 스님 법문을 들으면 어떠한 법문을 듣더라고 이런 활구참선에 대한 대의단(大疑團)이 돈발(頓發)할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401~500/(426~450)2019. 12. 10. 22:30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428) - 1990년 11월 첫째일요법회 (66분)

(1/4) 약 18분. (2/4) 약 16분. (3/4) 약 16분. (4/4) 약 17분.

(1/4)----------------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허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헌디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지인무구구(法法只因無咎咎)요, 모든 법(法)은 다못 허물 없음을 인해서 허물이 되고,

심심다위불생생(心心多爲不生生)이다. 모든 마음, 마음 마음은 불생 때문에, 불생(不生)—나지 아니함으로부터서 나게 된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설하실 때, 육조 스님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뻑뻑이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그 주(住)한 바 없이 마음을 낸 것이 바로 불생(不生) 때문에 마음이 생하게 된다. 생(生)할 것이 있어서 생(生)한 것이 아니라 원래 남[生]이 없는 데에서 마음이 난다.


한원야곡무산월(寒猿夜哭巫山月)한데, 차운 원숭이는 밤에 무산의 달을 보고 곡(哭)을 하는데 우는데,

객로원래불가행(客路元來不可行)이다. 나그네 길이 원래 가히 행할 수가 없더라.

원숭이가 그 무산(巫山)의 달을 보고 어떻게 간장(肝腸)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던지 그 슬피 우는 원숭이 소리를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객(客)이 그 밑에를 지나갈 수가 없더라.



무산은 저 중국 사천성 기주부에 있는 무산현 동쪽에 있는 산 이름인데 그 무산에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 하는 고사(故事)가 있는데, 초나라 양왕(襄王)이 고당(高唐)이라고 하는 누대(樓臺)가 있어서 그 누대에 유람을 가 가지고 하룻밤 거기서 자게 되는데, 낮에 꿈을 꾸었다.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천하절색(天下絶色) 여인이 떠억 나타나더니, '저는 무산에 있는 여자로서 이 고당이 하도 경치가 좋다고 그래서 놀러 왔는데, 들으니 임금님께서 여기에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임금님을 친견하고 하룻밤 동침하면서 잘 모시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래 보니 어떻게 이쁘던지 양왕이 그 여자를 거절하지 못하고 하룻밤을 잤어. 그게 인자 꿈에 잤겄다.


자고서 그 이튿날 떠나면서 '저는 무산 양지바른 높은 언덕에 살고 있는데, 앞으로 날마다 아침이면 임금님에 구름이 되어서 보여 드리고 저녁때가 되면 비가 되어서 임금님께 뿌려 드리오리다'

그리고서 작별을 했는데, 그리고 나서는 이 양왕도 깨고 보니 꿈이다 그말이여. 꿈이지만 그 아리따운 모습이 눈에 삼삼해.


그런데 그리고 난 뒤에는 아침에면 항상 그 무산에 구름이 끼고 저녁때가 되면은 비가 내려.

'아! 저게 무산에 아름다운 여자가 나에게 신호를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하루는 무산에 가서 그 양지바른 언덕을 찾아가서 거기에다가 그 여인의 사당(祠堂)을 지어 주었어.


그런 고사가 있는데 그 여인이 밤에면 원숭이가, 그리고 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간 뒤에도 그 밤이 되면 임이 그리워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슬피 울어. 그래서 무산 밑에는 나그네가 그 울음소리 때문에 차마 지나갈 수가 없더라.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沈默)』이라고 하는 시집에 서문 격으로 쓴 ‘군말’이라 한 제하(題下)에 쓴 글이 있는데 그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그런 첫마디에 그리 썼는데, 한용운 스님은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33인 중에 한 분이시고 참 학덕이 높고 독립운동의 사상, 애국심이 투철하시고. 그때면 옛날인데 어떻게 그런 ‘님의 침묵’과 같은 현대의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한 그러한 참 감동을 주는 그런 시를 썼는지.


한용운 스님은 부처님을 님이라고 믿고 시를 읊기도 하고, 불교의 진리를 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잃어버린 우리 국가를 님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한 글자의 님이지만 한용운 스님은 여러 가지 뜻으로 시를 읊었는데,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은 부처님의 임이라고 표현을 했다 말이여.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그랬다 말이여.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 불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든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그말이여. 구체적인 예로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그밖에도 수없이 몸을 중생을 위해서 축생을 위해서까지 몸을 버리셨다 그말이여.


부처님의 제자 둘이 여행을 하여,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저 머나먼 여행을 하다가 목이 말랐다.

한 사람은 그 물을 떠서 먹을라고 하니까 아주 눈에 보일락 말락한 미세한 벌레가 우물거리고 있어. 한 사람은 그것을 먹고, 한 사람은 그것을 먹으면 그 벌레가 죽을까 봐서 안 먹었기 때문에 목말라서 죽었어.


그 안 죽은 사람이 돌아와서 부처님께 와서 ‘한 사람은 그 물을 안 먹었기 때문에 죽고, 저는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서 목말라 죽으면 못 만나 뵈옵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물을 먹고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꾸지람을 하셨다. ‘니가 어찌 나를 친견한 목적이 무엇이냐? 구경(究竟)에 가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려고 했는데 나를 친견하기 전에 그 많은 중생을 죽이고 왔단 말이냐' 이리 꾸중을 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경전에 있는데.


그렇게 많은 생을 부처님은 몸소 중생을 위해서 몸을 바치셨어. 부처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수많은 목숨을 바치고 우리를 그렇게 사랑을 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불교를 믿는 불자(佛子)로서 얼마만큼 간절히 부처님을 잊지 않고 생각을 하는가?

무산의 여자는 아침엔 구름이 되어서 임에게 보여 드리고 저녁때는 비가 되어서 임에게 뿌려 드리고 밤중에는 잔나비가 되어서 간장이 끊어지도록 울고 울어서 임을 그리워했건만,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부처님을 사랑하고 부처님을 받들었던가.


물론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四部大衆) 여러분은 부처님을 위해서 청춘도 바치고 명예와 권리와 인생을 다 바치고 그리고 부모와 형제와 일가친척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출가해서 도를 닦으신 분도 많이 계실 것이고, 많은 재산을 자기는 아까와서 못 먹고 그러면서도 그 소중한 재산을 불사(佛事)를 위해서 바친 그런 분도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무수배례(無數拜禮)를 부처님께 올리고 3천배, 3만배 또 자기집의 모든 재산 · 살림 · 자녀 · 남편까지도 부처님을 위하는 신심을 위해서는 그런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그런 돈독한 신심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도 그 임을 자기 나름대로는—아까 한용운 스님의 시처럼 임만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임이다 했으니 여자에게 남자가 임이 되고, 남자에게는 여자가 임이 된 것 나쁘다 할 것이 없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임이 될 수도 있고, 높은 벼슬이나 명예나 권리도 임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은 정말 내가 목숨 바칠 수 있고, 한 목숨 뿐만이 아니라 수천 · 수만 · 수백만의 목숨이라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끝이 없고 한이 없어야 할 그러한 임을 임으로 삼았으면 참 좋으련만.

세속 사람들이 흔히 임으로 섬기는 재산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남녀간에 색정(色情)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을 임으로 삼는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임으로 삼는다든지, 또는 안락과 수면을 임으로 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욕락(五欲樂) 따위를 임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몸과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처음~17분 4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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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을 위해서 너무 좋아한 나머지 법을 어기고 불법(不法)을 저질러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고, 권리를 한번 잡으면 그것을 내놓기가 싫어서 온갖 수단을 부려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그래 가지고 그 뒤끝이 뭣이 되겠습니까.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 특히 가까운 이조 오백년의 역사가 노론(老論) · 소론(少論)이니 해 가지고 정권을 잡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상대방을 역적(逆賊)으로 몰아붙였다 그말이여. 노론도 자기가 잡고자 하는 정권을 임으로 생각하고, 쫓겨 나가는 소론도 정권 야욕(野慾)을 임으로 생각하는, 그래 가지고 결국은 싸우고 싸운 것이 자기네들만 멸망하겠습니까?


결국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가 참 무서운 사람이다. 참 주의해야 할 사람이다. 반드시 한국을 침범할 야욕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거기에 대비해서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고.

한 사람은 ‘풍신수길이는 아무 보잘것없는 못난 사람으로 그런 야욕이라고는 추호도 없고 일본이 한국을 침범할 그러한 것은 전혀 보이질 않으니 이 태평성대에 그런 무력증강 모다 양병 그런 것 할 필요가 없다’고. 다 같이 갔다 와서 똑같이 보아놓고 자기네 정당에 명령을 받아 가지고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그말이여.


그러니 조정에서는 편한 것이 좋아서 아무 방비를 안 하다가 임진(壬辰) 6년간의 그 왜란(倭亂)을 겪어서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가 피바다가 되었고.

참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뇌묵대사와 같은 그러한 도인들이 나와 주시지 안했다면 그리고 바다에 이순신 장군 같은 그러한 참 충신이 없었다면 그때 한국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사색정당(四色政黨)의 싸움으로 인해서 나라가 그렇게 안 당해도 괜찮을 그런 모욕과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자유당 때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해방이 되어 가지고 그 정당 때문에 사리사욕만 챙기고 그래 가지고 아무 준비도 없이 그러다가 육이오 동란(六二五動亂)과 같은 그러한 일을 당했다 그말이여.


지금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화합하고 그런 임을 오욕락을 임으로 삼지 말고 기왕이면 한용운 스님처럼 국가를 임으로 삼고, 민족을 임으로 삼고, 정의를 임으로 삼고, 진리를 임으로 삼아서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수행해 나간다면 국가도 잘될 것이요, 자기들도 보람 있는 정치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경제인이 될 것이고, 보람 있는 학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과연 얼마만큼 ‘거룩한 임’을 ‘임’으로 삼고 항상 잊지 않으신지.


부처님, 우리는 '부처님, 부처님'하고 몹시 참 공경하고 또 사모하고 떠받듭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말은 부처님인데 그분이 믿고 있는 부처님의 내용에는 천 명이면 천 명, 만 명이면 만 명,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경을 많이 본 사람 또 경 가운데에도 무슨 경—화엄경을 많이 봤느냐, 법화경을 많이 봤느냐, 원각경을 많이 봤느냐, 또는 금강경을 많이 봤느냐, 어느 경을 많이 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마음속에 공경하고 그리워하는 임의 모습이 다를 것입니다.

또 경을 전혀 보지 않고 아미타불만을 열심히 부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최상승법을 믿고 참선을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처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해나 달이나 별이나, 산이나 들이나 돌맹이 그 조그만한 모래알 하나도 우리의 마음의 나타남이여.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것은 모래도 아니고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래이고 모래가 존재하는 것이여. 그래서 태양도 역시 마찬가지요, 달도 역시 마찬가지여.


달은 저 홀로 창공에 떠서 휘황창 밝아 있지만, 보는 사람이 슬픈 눈으로 보면 그 달은 슬프고, 기쁜 마음으로 그 달을 보면 그 달은 기뻐. 그 달 자체는 '내가 슬픈 달이다, 기쁜 달이다'하는 것이 없거든. 보는 사람이 슬픈 달도 만들고 기쁜 달도 만드는 거여.

봄에 아름답게 피는 향그러운 꽃도 기쁜 사람이 볼 때 아름다운 것이지, 슬픈 사람이 보면 조금도 아름답지를 안 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鬪諍堅固)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極樂世界)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말이여.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화두는 무엇이냐?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따져서 해결 되는 것이 아니여. 다못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 ‘이뭣고?’,

‘이뭣고?’ 한번 터억 거각할 때 슬픔도 거기에서는 끊어져 버리고 기쁨도 끊어지고 원망도 끊어지고, 괴로움도 끊어지며 즐거움도 끊어지고 선(善)도 끊어지고 악(惡)도 끊어져. 그럴 때에 우리는 해탈(解脫)로 한 걸음 나아가는 거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하물며 교리나 경전에 있는 여러 가지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을 해 가지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따지고 비교해서 ‘아! 이것이 이 말이로구나’ 이렇게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그것이 깨달음이라 할 수가 있겠느냐.


자기 본참공안도 그러려니와 문헌에 있는 공안이 천칠백 공안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공안을 그러한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그래 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그러한 걸 의리선(義理禪)이라 그러는데 그러한 식으로 해서 이백 개, 삼백 개 내지 오백 개, 천 개의 공안을 알아맞춘들 그럴싸한 해결을 답을 얻어낸들 그것이 참 깨달음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그렇게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날마다 공안을 따져서 분석하는 무슨 법회를 열어 가지고 계속 날마다 공안을 풀어서 아르켜주면 그까짓 것 1년 걸려서 천칠백 공안을 따지기로 한다면 그거 못할 거 없는데, 그냥 도인(道人)이 막 쏟아져 나올 것 같지만 그렇게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17분45초~33분2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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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신부의 의리선(義理禪)>


봄엔가 인도 사람인데, 천주교 신부인데 참선을 하기 위해서 일본에 와 가지고 5년인가를 지금 선원에 있다고 그래.

그런데 그이가 말하기를 자기는 오백 개의 공안을 통과했기 때문에 천 개를 통과해야 로시, 로시는 노사(老師) '늙을 로'자, '스승 사'자—한국에서는 조실(祖室) 스님이라 그러는데 일본에서는 노사라 그래. 일본 발음으로 로시라 그러는데.

천 개를 맞추면 로시가 될텐데 자기는 아직 5백 개 밖에는 못해서 로시 자격은 못 따고 그냥 참선을 지도할 수 있는 자격만 받았다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참선을 안 하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한다고 그래서 그 활구참선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서 왔다 그래.

그런 사람이 있어서 한국에 어느 수도원에 수녀 몇 분과 그 인도 신부 분이 특별히 이리저리 사람을 넣어서 여러 차례 교섭을 해와서 안 만날라야 안 만날 수가 없어서 만났더니 그런 말을 하더라 그말이여.

한국에도 일본에 그러한 의리선이 서적도 많이 들어오고 또 거기서 그런 참선을 하다가 온 거사님네들도 있고 그래 가지고 상당히 이 일본의 의리선(義理禪)이 지금 자꾸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식인들은, 학식이 많은 분들은 꽉! 맥히는 화두 하나만을 가지고 계속 ‘이뭣고?’를 하라 하니 별로 재미가 없고, 와서 법회에 참석해 봤자 별로 재미있는 소리도 없고 밤낮 꽉 맥혀서 '이뭣고?'만 하라 하니 별 재미가 없다 그말이여.

그래서 의리선 일본책을 읽어보니까 아! 곧 재미가 있고, 몇 개를 읽어보니까 자기도 무슨 공안을 들어보면 자기 나름대로 가늠이 가고, 그 참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학자 · 교수 그런 분들이 그러한 참선을 모다 해 가고 있는 그러한 경향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거 해 가지고 오백 개 내지 천 개를 통과해서 로시 자격을 받으면 일본 가서는 혹 밥이라도 빌어 먹을란가 모르지마는 한국에서는 그런 참선은 소용이 없어.

설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한 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고 숨을 거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참선을 해 가지고 무엇을 할려고 그런 참선을 할 것이냐 그말이여.


그런 참선 해서 공안을 열 개 내지 백 개 그것 통과하기도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닌 모양이야. 나 그것 통과 안 해 봐서 잘 모르지마는.

그것도 참 자기 나름대로 밤잠을 안 자고 몇번 골이 터질라다 말아야 무엇이 하나씩 터진다고 그래. 그래서 하루저녁에 한 개씩 터진 사람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하고 나면은 아주 골이 아파서 못 견딘다고 그러는데.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옛날에 중국에 검주란 곳에는, 검주가 지금에 무슨 성(省)에 있는가는 모르겠는데 검주에는 나귀가 없었어. 그래서 어떤 사람이 나귀를 타고 검주 땅에를 떠억 들어갔어.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그게 무슨 짐승인지 전혀 모른다 그말이여.


아, 그런데 호랑이가 그 나귀를 보고 검주에는 그 나귀란 짐승이 없기 때문에 전혀 무엇인 줄 몰라. 사람들도 모다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모다 수근수근 해쌋고, 호랭이도 보니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말이여. 그래서 참 겁을 집어먹고.

그 산중에서는 호랑이가 왕이라 그러는데, 아 호랑이도 처음 봐나서 영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그래서 살살 이렇게 피하면서 있는데.


나귀란 놈이 모두 자기를 보고 무서워하고 그러니까 신바람이 났던지, 턱! 호랭이가 가까이 오니까 발길질을 했다 그말이여.

그 호랭이가 한번 채이고 보니 별로 그 뭐, 나귀한테 채였다고 호랭이가 죽것습니까? 별로 큰 충격을 안 받았어.


'오! 니놈이 별놈인 줄 알았더니 한번 채여 보니 너 별놈 아니로구나. 니가 가진 재주는 겨우 뒷발질하는 거밖에 없구나. 요자식 맛 좀 봐라' 손톱으로 그냥 콰악 배아지를 갖다가 찍어서 쭉 훌터 버리니까 창시가 툭 불거져 버려.


공안 몇 개, 의리선으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어디 가서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 봤자, 전혀 그런 거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서 그것이 통할란지 모르지만, 환히 알고 보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나귀란 놈 검주땅에 가서 뒷발질하듯이 한바탕 차 봤자 제 살림만 드러나거든.

어디 가서 밥 빌어먹을 짓이 없어서 의리선으로, 의리로 공안 몇 개 따져서 그것 해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뽐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어떤 마을에서 생전 우유를—거기는 또 소가 없었던지, 젖 짜는 소가 없어 우유를 맛을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우유를 먹으면, 암소를 키우면 그 젖을 먹으면 여러 사람이 먹고 영양을 섭취할 수 있고 달고 맛이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의논을 해 가지고 돈을 모아서 구장과 몇 사람 대표를 뽑아 가지고 젖 짜는 소를 사오라고 보냈어.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자 이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저 사람 보고 물어봐도 모르고. 어떤 사기꾼을 만났던지 젖 짜는 소를 물으니까, 마치 그 사기꾼한테 숫나귀가 한 마리 있었어.


"아, 그너냐! 나한테 그 젖 짜는 소가 있는데 참 젖이 많이 나온다"고. "돈을 얼마나 가져 왔냐?"고.

"삼백 냥을 가져 왔다"고.


"그래, 삼백 냥 갖고는 도저히 안 되지만 그렇게 멀리서 왔다니, 그럼 삼백 냥만 받고 팔테니 그러면 우리 소를 가져가라"고. "처음에는 좀 짭짤하지만 오래 먹으면 참 구수하고 좋으니까, 가지고 가서 잘 먹으라"고.

그래서 숫나귀를 삼백 냥을 주고 떠억 사 가지고 왔다. 오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구경할려고 모여 들었는데, '저놈한테서 그렇게 맛있는 젖이 나온다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쭈물떡 쭈물떡 하니까 팔뚝만한 놈이 나오는데, 한참 있으니까 쏟아지는데 몇 바깨스가 나왔다 말이야. 그놈을 온 마을 사람들이 아주 한 방울도 땅에 떨어질까 조심하면서 그놈을 먹으니까, 아 참 짭짤한 것이 생전 처음 먹어 보니 '이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란 말이냐'고.

그래 가지고 날마다 곡식에다가 잔뜩 먹여 놓으니까, 이놈이 또 물을 갖다주면 몇 바께스씩 들이키고 눈 것이 오줌만 나와.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우유가 무엇인 줄을 모르니까,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여러 달 동안을 먹었다 그말이여.


그 집 마을에 딸을 여워서 사돈네가 왔는데, 사돈네가 왔다고 특별히 집안 식구 안 먹고 우유를 대접을 했는데 그 되게 자랑을 했어.

"우리 마을에는 이런 좋은 것이 있다"고. "사돈이 오시니 일부러 대접을 하니 좀 잡숴보라"고.


맛을 보니까 고약하거든. "어디 그 소 좀 구경할 수가 없느냐?"고.

"이거 함부로 구경 못 시키는데 사돈이 오셨으니까 내가 특별히 구경을 시킨다"고. "절대 잡인을 금지 한다"고.


가서 보니까 나귀를 갖다 놓고 그러거든. "이것은 소가 아니라고. 이건 나귀라고 하는 것이라"고.

곧이를 안 들어. "사돈이 아직 소를 구경을 못 하셔서 그러실 거라"고. "이건 흔한 것이 아니라"고. "참 수백 냥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것인데 사돈이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상대를 안 해 버려.


서울 구경 안 한 사람이 서울 구경한 사람보다 더.... 서울 구경한 사람이 진다고.

'남대문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 아마 여러분 가운데에도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확실히 아시는 분이 아마 적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울에 사셔도.


시골 사람은 다 알고 있어. 서울에 안 와 본 사람은 다 알고 있는데, 서울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서울 남대문 문턱이 있는가 없는가 그걸 모르거든.

소젖을 먹어 보지 아니한 사람은, 이미 사기꾼한테 나귀의 오줌이 소젖이라고 한번 깊이 선입관(先入觀)이 들어버리면 실지 소젖 먹은 사람 말을 안 듣거든.


아마 불법(佛法)도 최상승법(最上乘法), 정법(正法)을 만나기 전에 자기 나름대로 소승법 중승법에 설하신 방편법(方便法)에 이미 깊이 물들어버리면 최상승법 일러 주어도 잘 믿지 않습니다. 여간해서 이 최상승법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설사 ‘법문 들으러 가자’고, ‘최상승법을 믿어야지 그런 방편설에 떨어져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마지 못해서 친구나 사돈에 끌려서 와서 들어보면, 오늘은 내가 특별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별로 들어봤자 별 재미있는 소리 안 하거든요.

와서 한 번 두 번 들어보고 잠만 오고 그러니까는 ‘아이고, 나 바쁘다’고 핑계대고 안 와 버린다 그말이여.


'이런 말이 설마 경전에 있을까? 아마 송담 스님이 지어내서 저런 얘기를 하지 않은가?'하실는지 모르지만 『백유경(百喩經)』에 분명히 이 설화가 들어있거든요.

여러분은 다행히 이 최상승법을 믿고 이 법당 가득히 이렇게 운집(雲集)을 하셨어. 아마 그전에 언젠가도 내 이 설화를 말씀드린 기억이 있지만 오늘은 내가 특별히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렸어.(33분22초~48분5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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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승법을 믿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실천을 하기는 더욱 어렵고.


듣기도 어렵지마는 듣고 또 믿기 어려운데 믿었다 하더라도 조금 해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해 버린 사람이 있거든.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해 나간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보통 분이 아니여. 숙세(宿世)로부터 이 최상승법에 깊이 인연을 심고 심어서 삼생(三生) 이내에—금생에 인연이 성숙한 분은 금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아무리 늦어도 삼생 안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삼생은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또 한평생 살다가 공부하다가 죽어서 또 태어나고 한 그런 삼생도 포함되지만, 한 생각 한 생각을 한 죽음으로 생각하고 새로 태어남으로 생각한다면은 삼생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곧 이 ‘한 생각’이거든.

그래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간다.


아미타경(阿彌陀經)에는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서방(西方)으로 가야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있다. 그렇게 표현을 하셨지만.

육신보살(肉身菩薩)인,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육조혜능 선사는—가섭존자, 아란존자, 상나화수 그래서 인도에 달마 스님까지 28조, 그래 가지고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셔서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그리고 아까 6조 혜능선사 그래서 육조 스님까지 33대 그래서 삽삼조사(卅三祖師)라 그러는데, 삽삼조사는 부처님으로부터 단전(單傳)으로, 홑으로 홑으로 법등(法燈)을 전해서 끊이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 특별 수기(授記)를 받으신 분의 한 분이시거든.


그 육신보살(肉身菩薩)이신 육조 스님은 그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어떻게 해석을 하셨냐 하면은 첫째, 십만 국토는 우리가 십악참회를 하는 십악(十惡)을 돌려서 십선(十善)을 닦음으로 해서 십만 국토는 건너가고, 여덟 가지 삿된 것을 뒤집어서 팔정도를 닦으면은 팔만(팔천) 국토를 건너간다.

다시 말하면 십악팔사(十惡八邪)를 행하지 말고 십선(十善)과 팔정도(八正道)를 행함으로 해서,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서 ‘참나’를 깨달으는 극락정토에 도달한다.


그래서 십팔만(십만팔천) 국토를 서쪽으로 간다고 하면 그 서쪽은 무엇이냐? 서쪽은 계절로 말하면 가을인데,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여. 그래서 십만팔천 국토인 십악팔사(十惡八邪)를 건너뜀으로 해서 결과적으로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다.

이렇게 아주 최상승적으로 현대인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아미타경에 있는 말씀은 거짓말이냐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거기에 맞는 그 근기(根機)의 중생에게는 그것은 그것대로 진실이죠.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근기에는 육조 스님의 해석이 너무나도 핍절(逼切)하고 간절한 해석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 여러분은 십악팔사(十惡八邪)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의 중생심(衆生心), 십악팔사는 중생심으로 행하는 것이고—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눈을 통해서 작용하고 귀로 작용하고 코, 혀, 몸뚱이로 작용하고 우리의 생각으로 작용하는데,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십악팔사를 행하게 되는데,

그 한 생각 일어나 가지고 십악팔사로 벌어지기 전에 일어나자마자 ‘이뭣고?’ 탁! 돌이키면, 1초 간에 십악팔사를 끊어서 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는 것이거든.


아무리 그 동안에 많이 잡수어서, 길이 들어서 애착심이 갈는지 모르지만 나귀 오줌을 그리 오래 잡술 것이 못됩니다. 탁! 끊어버려야지. 탁! 끊어버리고 최상승법 ‘이뭣고?’로 딱 돌아와야지. 속담에 ‘오뉴월 뙤약볕도 쬐다가 안 쬐면은 서운하다’고 그런 말도 있읍니다마는.


‘이뭣고?’ 천하에 간단하고 천하에 빠른 것이거든. 한번에 십만팔천 국토를 건너가니 그 이상 빠른, 아무리 지금 로케트가 빠르다고 해도 비교가 되겠습니까?


과학 무기가 발전을 해서 참 살기가 편리하게 되었지만, 편리하게 된 것과 인류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해서 편리하기는 할지언정 조금도 행복해지지를 못했습니다. 조금도 평화로워지지도 못했습니다.

온 세계가 최상승법을 믿어야만 세계의 평화는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믿고 실천하고 깨달음을 얻음으로 해서 법계(法界)가 깨달음의 세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원각경(圓覺經)』에 ‘한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법계가 청정하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이 소식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깨달으면 어떻게 법계가 청정해지겠습니까? 법계는 ‘한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한 사람을 다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최상승법을 믿고 깨달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짜 우유를 마셔야 할 것입니다.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허니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터니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요. 법법(法法)은 모든 법이여. 법은 사회에서 말하는 형법 · 민법 · 병법, 그런 걸 다 법이라고 하지만.

우리 불가(佛家)에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법이고—부처님께서 설하신 금강경 · 법화경 · 화엄경 이런 걸 다 법이라 그러고 법보(法寶)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다 법이거든.


법법본래무소주(法法本來無所住). 왜 두두물물이 법이냐 하면 두두물물이 전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기 때문에 그런 거여. 그러면 그 법은 본래로 주(住)한 바가 없어. 주(住)한 바는 고정된 것이 아니여. 주착한 바가 없어. 인연 따라서 수시로 변하고 그렇지만.


어무소주절추심(於無所住絶追尋)이요. 주(住)한 바 없는 것을, 그것을 추심(追尋)을 하지 말아라. 머무른 바가 없는데 그것이 고정된 것인 줄 알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그것을 계속 추구해 나갈라고 그러거든.


참법은 조금도 속인 바도 없고 누구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것이여.

나도 법이요, 너도 법이요, 부처님도 법이요, 모든 중생이 법이요, 삼라만상이 다 법이고 그 낱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여.


이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 중생의 소견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나름대로 이해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한때의 그림자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참법이 아니거든.


양오작야침서령(陽烏昨夜沈西嶺), 해는 어젯밤에 서산으로 넘어갔는데,

금일의연상효림(今日依然上曉林)이구나. 오늘 아침 새벽에 저 동산에 솟아오르는구나.



‘이뭣고?’


‘이뭣고?’는 무슨 특별한 제왕(帝王)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여.



‘이뭣고?’ 알 수 없는 의심(疑心).

되고 안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어.


화두(話頭)가 잘 들리면은 망상(妄想)도 잘 안 일어나고, 혼침(昏沈)도 잘 안 오고, 몸이 괴롭지도 않고, 1시간이 금방 언제 지나간지 모르고 지나가고 그리한 것을 느낄 것입니다마는. 항상 그렇게 되기만을 생각하거든.


그래 가지고 화두가 잘 안 들리고 자꾸 망상이 일어나고, 자꾸 혼침이 나고, 시간이 3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부림이 쳐지고 영 잘 안된다. 골이 더럭더럭 하고 눈이 뻣뻣하고.

그러면 고민을 하거든. 아, 어째서 이렇게 공부가 잘 안되는고. 그래 가지고 몸부림을 치고 고민을 하는데, 그러지 마셔.


공부를 하다 보면은 혼침이 오기도 하고, 망상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화두가 잘 안 들리기도 하고 그런 것인데, 잘된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잘 안된다고 그렇게 번뇌심을 내지 말어.

잘되어도 좋아하는 마음 없이 화두를 떠억 거각(擧却)해서 관조(觀照)해 나가고. 또 그렇게 혼침이 오고 잘 안 들리면 조용히 일어나서 포행(布行)을 좀 하거든.

일직선으로 코스를 정해 놓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챙기면은 혼침도 달아나고 또 개운해지면 또 다시 와서 앉고.


이렇게 하면서 지혜롭게, 그 잘 안되고 그러한 때를 잘 고비를 넘겨야 하거든. 그 고비를 못 넘기고 짜증을 내고 그래 가지고, 에이! 이거 못해 먹을 것이라고 그만두고 중단하고 그런 것이 아니거든.

글씨도 잘 쓰다 보면 곧잘 되다가 영 안된 때가 있는데, 그 안되는 때에도 날마다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해 나가면 거기에서 필력(筆力)도 생기고 글씨가 숙달이 되는 것이여.


모든 것이 다 그래.

한참 되어 가다가 또 안되고, 안되지마는 꾸준히 밀고 나가면 또 다시 또 잘되고 그런 것이여.


그러한 고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중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해 나갈 때에 우리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48분55초~66분22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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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2014년 개정판) p104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전강 조실 스님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육조단경(六祖壇經) ; 중국 선종의 제6조로서 남종선의 개조인 혜능(慧能:638~713)이 사오관[韶關]의 대범사(大梵寺)에서 행한 공개 설법의 기록을 중심으로 생애와 언행을 제자 법해(法海)가 모았다고 전해지는 책. 본래 명칭은 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이며 약칭하여 '단경'이라고도 한다. '단'은 계단 (戒壇)을 가리키고 '경'은 경전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여 붙인 말이다.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고도 한다.

*무산지몽(巫山之夢) ; 남녀의 정교(情交). 출전은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로서, 중국 초나라의 양왕(襄王)이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무산의 신녀(神女)를 만나 정을 맺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고사(故事 옛 고/일 사) ; 예[故]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유서 깊은 일[事]. 또는 그것을 나타낸 어구. 옛날 이야기.

*누대(樓臺 다락 루/대 대) ; 크고 높게 지은 정자나 누각, 또는 높은 건물.

*슬피 ; 마음이 아파 슬프게.

*간장(肝腸 간 간/ 창자·마음 장) ; 애(근심에 싸여 초조한 마음속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나 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간장을 끊다 ; (소리 따위가) 몹시 슬프고 애달프다.

[참고] ‘단장(斷腸)의 슬픔’에 대한 고사가 전해져 오는 것이 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출면편(黜免編)》에 보면 진(晉)나라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征伐)할 때의 얘기가 나온다. 환온이 촉을 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가는 중이었다. 양쯔강 중류의 협곡(峽谷)인 삼협(三峽)이라는 곳을 지날 때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좇아 백 여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다가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며 달려왔기 때문에 배에 오르자 안타깝게도 죽고 말았다. 배에 있던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어낸 것이었다. 배 안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놀라 환온에게 고하니 이 말을 전해들은 환온이 새끼 원숭이를 풀어주고, 그 원숭이를 잡아왔던 병사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

*천하절색(天下絶色 하늘 천/아래 하/뛰어나다·더이상 없음 절/미인 색) ; 하늘[天] 아래[下] 비길 데 없이 매우 뛰어난[絶] 미인[色].

*삼삼하다 ; [주로 ‘눈’과 관련된 명사와 함께 쓰여](모습이나 풍경이 눈에)보이는 것처럼 잊히지 아니하고 또렷하다.

*사당(祠堂 사당·제사 사/집 당) ; 조상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셔 놓은 집. 또는 신주를 모셔 놓기 위해 조그맣게 집처럼 만들어 둔 곳.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기룬-->‘기루다’ :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아쉬워하다.

*중생(衆生) :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꺼졌다 하기 때문에, 온갖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났다 죽었다 하는 무리들, 곧 정식(情識)이 있는 것들을 모두 중생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람뿐 아니라 모든 동물과 귀신들과 하늘 사람들까지 합쳐서 하는 말인데, 유정(有情) • 함령(含靈) • 함식(含識) • 군생(群生) • 군맹(群萌) • 군품(群品) 같은 여러 가지 말로도 쓴다。부처님은 구제의 대상을 인류(人類)에게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중생 전부를 가르치고 건지시는 것이다.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 ; 근대 이탈리아 건국 운동의 정치가.

*삼세제불(三世諸佛) ; 삼세(三世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諸佛].

*팔만사천(八萬四千) : 법수(法數)에는 이 말이 퍽 많다。그것은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사천이다.

또한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이것을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제도(濟度 건널 제/건널 도) ; 중생을 미혹의 큰 바다(생사고해 生死苦海)로부터 구하여[濟], 생사없는 피안(彼岸,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度] 것. 제(濟)는 구제(救濟). 도(度)는 도탈(度脫). 비유적인 표현으로 교화(敎化)를 의미한다.

*구제(救濟 건질 구/건널 제)—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

*도탈(度脫 건널 도/벗을 탈)—속세의 속박이나 번뇌 등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는 편안한 경지에 도달함.

*'부처님은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몸을 던져 주시기도 하고' ; 『불설보살투신이아호기탑인연경(佛說菩薩投身飴餓虎起塔因緣經)』 북량(北涼) 고창국(高昌國) 사문법성(沙門法盛) 한역. (아래 글은 요약 정리한 것임)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건타월국(乾陀越國)에 머물러 계실 때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9겁 때 세상에 한 큰나라에 전단마제(栴檀摩提)라는 태자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몸과 목숨과 재물을 남기고 아끼는 바가 없고, 자신과 신하 사야(闍耶)의 모든 것을 보시하고서도 오히려 가난한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다가, 태자는 배제사(裴提舍)라고 하는 나라로 들어가 자신의 몸을 바라문에게 팔은 돈을 또 모두 가난한 이에게 보시하고 나무를 해다가 파는 종이 되었다.

나무를 하다가 얻은 우두전단(牛頭栴檀)으로 그 나라의 왕의 나병(癩病)을 치료하여 준 인연으로 왕에게 받은 큰 재물을 가난한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태자는 부왕의 큰 환영을 받고 부왕은 나라 곳간의 무엇이던지 마음대로 베풀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 그 나라의 수도 가까운 산에서 용맹(勇猛)이라는 5통(五通) 신선도사(神仙道士)가 오백 명의 제자와 함께 수행하고 있었는데, 태자 전단마제는 그들에게 음식을 바치고 선사(仙師)의 설법을 듣고 세상의 덧없음[無常]을 깨닫고 무위(無爲)를 구하여 모든 괴로움을 제도코자 그길로 선인들과 함께 수행하기 시작했다.

왕후와 태자의 후비는 태자의 뜻이 견고함을 알고 때때로 산 속의 태자에게 음식을 공양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산 아래 낭떠러지인 언덕의 깊은 골짜기 밑에 어미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다. 이때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려 먹을 것을 얻지 못하여 어미와 새끼가 곧 죽게 되었고 어미 범은 이미 굶주림에 핍박되어 도리어 새끼를 먹고자 하였다. 산 위에서 수행하던 선인들은 이 비참한 광경을 보고 안타까워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태자는 낭떠러지의 끝에 서서 아래에 어미 범이 새끼를 안고 눈에 덮여 있음을 보고 대비심(大悲心)을 내어 산꼭대기에 서서 머물러 고요히 정(定)에 드니 곧 청정무생법인(淸淨無生法忍)을 얻어 과거 무수겁(無數劫)의 일과 미래도 또한 그러한 것을 보았다. 과거 생에 자신은 중생을 위해 '천 번 몸을 버리겠다'고 서원하였고, 이미 9백99번의 몸을 버리었음을 알게 되었다. 태자는 천 번의 몸을 채우기를 결심하였다.

스승과 오백의 신선 도사와 마침 공양하러 온 부란(富蘭)이라는 장자와 남녀 오백 사람은 태자가 몸을 버리려는 것을 보고 슬피 느껴 울부짖으면서 또한 태자를 따라 산 언덕 끝에 이르렀다.


이에 태자는 모든 사람의 앞에서 큰 서원을 발하였다.

'내가 이제 몸을 버리어 중생의 목숨을 구제하오니 이 공덕으로 빨리 보리를 이루고 금강의 몸인 상(常) · 락(樂) · 아(我) · 정(淨)의 무위(無爲)의 법신(法身)을 얻어서 제도치 못한 이를 제도하며 해탈치 못한 이를 해탈케 하며 편안치 못한 이를 편안케 하소서.

나의 이제 몸은 무상하며 번뇌의 모든 독이 모인 것이며, 이 몸은 청정치 못하여 아홉 구멍이 차서 흐르고 사대(四大)의 독사가 쏘는 바며, 다섯의 칼 뺀 도적이 쫓아서 상해(傷害)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몸은 반복이 없도다. 맛나고 감미로운 음식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이 몸을 공양할지라도 목숨을 마친 뒤에는 선한 은혜를 갚음이 없고 도리어 지옥에 떨어져서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오직 괴롭게 하는 것이요, 즐거움을 주지 않는 것이다'


태자는 가지가지로 그 몸의 허물을 꾸짖은 뒤에 또한 서원을 발하였다.

‘이제 내가 살과 피로 저 주린 범을 구제하오니 남은 사리(舍利)와 뼈로 우리 부모가 후일에 꼭 탑을 세워서 일체 중생의 몸에 모든 병으로 인한 괴로움이 숙세 죄의 인연으로 생겨 탕약(湯藥)과 침구(鍼灸)로는 낫지 못하는 이로 하여금 내 탑에 이르러 지극한 마음으로 공양하면 병의 가볍고 중함에 따라 백 일이 지나지 아니하여 반드시 낫게 하소서. 만일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할진댄 모든 하늘은 향기로운 꽃을 비내리소서’

모든 하늘은 소리에 응하여 만타라(曼陀羅)꽃을 비처럼 내리고 땅은 모두 진동하였다.


태자는 곧 몸을 범의 앞으로 던졌다. 이에 어미 범은 태자의 살을 먹어서 어미와 새끼가 다 살아나게 되었다. 이 일로 오백 선인은 위없는 정진도(正進道)의 뜻을 발하였으며 신선의 큰 스승은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

이튿날 왕과 부인과 후비와 모든 신하들은 이 사실을 알고 기절하여 사람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왕께 여쭈어 곧 태자의 뼈를 거두어 칠보탑을 세우고 보배로운 물건으로 장엄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때 태자는 나의 몸이요, 이때 부왕은 곧 지금의 나의 아버지 열두단(閱頭檀)이요, 이때 부인은 어머니 마야(摩耶)요, 이때 후비는 지금의 구이(瞿夷)요, 이때 대신 사야는 아난이요, 이때 산 위의 신선의 큰 스승은 미륵(彌勒)이요, 배제사(裴提舍)왕은 난타(難陀)요, 이때 바라문은 라운(羅雲)이니라.

미륵보살은 옛적부터 항상 나의 스승이었는데 내가 보시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중생을 구제한 까닭에 스승보다 앞서 훌쩍 9겁(劫)을 초월하였으니 지금의 부처를 얻음에 이르기까지 제도함이 끝이 없었느니라”


*구경(究竟 궁구할 구/마칠·다할 경) ;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 그 위에 더 없음. 최고의 경지. 궁극에 도달함.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 불문(佛門)에 있는 네 가지 제자. 곧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등 출가 제자와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 재가 제자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사중(四衆)과 같은 말. 줄여서 사부(四部)라고도 한다.

[참고] 우바새 : upasa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남성 재가신도.(같은 말=靑信士,靑信男,信男,信士,居士,近事男,近善男,善宿男) 원래의 말뜻은 모시는 사람. 받들어 모시는 사람. 출가자와 승단을 가까이에서 돌보고 보호하며 한편 가까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다. 선숙(善宿)은 선(善)을 품어 그것에 머물기[宿] 때문에 선숙이라고 한다.

우바이 : upasika의 음역.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를 받아 지니는 여성 재가신도. (같은 말=靑信女,信女,近事女,近善女,善宿女)

*불사(佛事) ; ①불법(佛法)을 알리는 일. 법회, 불공(佛供), 재(齋)의 봉행, 경전의 간행과 유통, 사찰의 중창과 전각 중수, 불상·탱화·불구(佛具)·가사(袈裟) 조성 등의, 불가(佛家)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가리킨다. ②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敎化)하시는 일.

*무수배례(無數拜禮) ; 헤아릴 수 없이[無數] 많은 절을 하여 예를 표함.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 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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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正使)와 부사(副使) 두 사람이 일본을 가서 잘 살피고 오라고 보내니까, ~~ 각각 정반대의 보고를 했다' ; 임진왜란이 있기 2년 전 1590년에 일본이 사절단 파견을 요청해 일본 통신사에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이 임명되어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다녀왔다(1590년 3월~1591년 3월). 임무는 일본의 실정과 일본 전국시대 혼란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탈을 계획하고 있다는 저의를 알아 오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온 후 선조 임금의 질문에 정사인 황윤길(서인)은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옵니다[必有兵禍]" 부사인 김성일(동인)은 "그러한 조짐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事宜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臣則不見如許情形 允吉張皇論奏, 搖動人心, 甚乖事宜]"라고 하였다.

또 선조의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其目光爍爍, 似是膽智人也]"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其目如鼠, 不足畏也]"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에 조선 조정은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전쟁은 없을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 ;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 우리나라 땅의 남북의 길이가 삼천리라 하여 우리나라의 강산을 이르는 말. 강토(疆土)는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을 말한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에서 분류 '역대 스님 약력' 참고.

*사색정당(四色政黨) ; 사색당파(四色黨). 조선 선조 때부터 후기까지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갈라서서 조선의 정치적인 판국을 좌우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네 당파.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님(임) ; 사모하는 사람. ‘님’은 ‘임’의 옛말.

*아미타불(阿彌陀佛) ; 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

<정토 3부경>에 있는 이 부처님의 역사는, 오랜 옛적 과거세에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Lokesvararaja-Buddha)의 감화를 받은 법장비구(法藏比丘 Dharmakara)가 2백 10억의 많은 국토에서 훌륭한 나라를 택하여 이상국을 건설하기로 기원하였다.

또 48원(願)을 세워 자기와 남들이 함께 성불하기를 소원하면서 오랜 겁을 수행한 결과 지금부터 10겁 이전에 그 원행(願行)이 성취되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줄여서 미타(彌陀).

의역하면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 Buddha - 무한한 공간에 꽉 차 있어서 안팎과 갓이 없는 빛의 부처님),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ayus Buddha - 무한한 시간에 뻗치어서 끝없는 생명의 부처님).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心]과 부처[佛]와 중생(衆生) 세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나타낸 말. 삼법무차(三法無差)라고도 한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은 (빛깔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화가와 같이 갖가지 오음으로 그림을 그리니, 일체의 세계 속에서 짓지 못하는 법이 없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니, 마음 · 부처 ·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


[참고] 60권본 『화엄경(華嚴經)』 불타발타라 역(佛馱跋陀羅 譯) 제10권, 제16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서.

爾時 如來林菩薩承佛神力 普觀十方 以偈頌曰:

譬如工畫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色 四大無差別 四大非彩色 彩色非四大 不離四大體 而別有彩色

心非彩畫色 彩畫色非心 離心無畫色 離畫色無心 彼心不常住 無量難思議 顯現一切色 各各不相知

猶如工畫師 不能知畫心 當知一切法 其性亦如是 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諸佛悉了知 一切從心轉 若能如是解 彼人見眞佛

心亦非是身 身亦非是心 作一切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


[참고] 80권본 『화엄경(華嚴經)』 실차난타(實叉難陀 制譯) 제19권 ‘제20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에서 각림보살(覺林菩薩) 송(頌). 『대방광불화엄경 강설(19권)』 (여천 무비 강설 | 담앤북스) p133~142 참고.

爾時 覺林菩薩承佛威力 遍觀十方而說頌言 譬如工畵師 分布諸彩色 虛妄取異相 大種無差別 大種中無色 色中無大種 亦不離大種 而有色可得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세계를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색을 칠해 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 물감의 요소)은 차별이 없느니라. 대종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心中無彩畵 彩畵中無心 然不離於心 有彩畵可得 彼心恒不住 無量難思議 示現一切色 各各不相知 譬如工畵師 不能知自心 而由心故畵 諸法性如是 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五蘊悉從生 無法而不造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도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 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應知佛與心 體性皆無盡 若人知心行 普造諸世間 是人則見佛 了佛眞實性 心不住於身 身亦不住心 而能作佛事 自在未曾有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三世)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삼계(三界) ; 불교의 세계관으로 중생이 왕래하고 거주하는 세 가지 미혹한 세계.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 중생의 마음과 생존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눈 것.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이른다.

*별(別) ; [주로 ‘없다’, ‘아니다’ 따위의 부정어나 부정적인 의미의 명사 등과 함께 쓰여]보통과 다르게 별나거나 특별한.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말세(末世 끝 말/세상 세) ; ①도덕, 풍속, 정치 등의 모든 사회 질서와 정신이 매우 타락하고 쇠퇴하여 끝판에 이른 세상. ②석존입멸후 오백 년을 정법(正法)의 세상, 그 다음 천 년을 상법(像法)의 세상, 그 후의 일만 년을 말법(末法)의 세상이라고 한다. 구체적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곧 불멸(佛滅) 후 오랜 기간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쇠퇴하는 시기.

*투쟁견고(鬪諍堅固 싸움 투/다툴 쟁/굳을 견/굳을 고)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이천오백 년을 불법(佛法)의 성쇠(盛衰)에 따라 나눈 다섯 시기 가운데 다섯 번째 시기. 수행승들이 자기 주장만 옳다고 싸워 불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이다.

*오탁악세(五濁惡世 다섯 오/흐릴 탁/악할 악/세상 세) ; 명탁(命濁), 중생탁(衆生濁), 번뇌탁(煩惱濁), 견탁(見濁), 겁탁(劫濁)의 다섯 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찬 죄악의 세상.

[참고] ①명탁(命濁) : 말세가 다가와 악업(惡業)이 늘어감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기 어려움을 이른다.

②중생탁(衆生濁) : 중생이 죄가 많아서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이른다.

③번뇌탁(煩惱濁) : 번뇌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는 것을 이른다.

④견탁(見濁) : 그릇된 견해나 사악한 사상이 만연해지는 것을 이른다.

⑤겁탁(劫濁) : 기근과 전쟁과 질병 등의 재앙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대.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적광토(寂光土) ; 상적광토(常寂光土). 상적광(常寂光). 법신불(法身佛)이 머무르는[住] 정토(淨土).

상적광토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 정(靜:寂)과 동(動:光)의 본래(本來:常) 일체(一體)인 세계로 그것은 여기와 저기,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을 넘어 체득되는 참된 절대계(絕對界)이고, 상주(常住)의 정토(淨土)이다.

*이십팔천(二十八天) ; 삼계제천(三界諸天)을 통틀어 이르는 말. 곧, 욕계(慾界)의 육천(六天)과 색계(色界)의 십팔천(十八天)에 무색계(無色界)의 사천(四天)을 합친 스물여덟 개의 하늘이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화두는 「말」이란 뜻인데, 두(頭)는 거저 들어가는 어조사다。「곡식을 보고 땅을 알고, 말을 듣고 사람을 안다」는 옛말이 있다. 도(道)를 판단하고 이치를 가르치는 법말 • 참말을 화두라고 한다.

또는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관청의 공문서」란 뜻인데, 천하의 정사를 바르게 하려면, 반드시 법이 있어야 하고 법을 밝히려면 공문이 필요하다。부처님이나 조사들의 기연(機緣), 다시 말하면 진리를 똑바로 가르친 말이나 몸짓이나 또는 어떠한 방법을 막론하고 그것은 모두 이치세계의 바른 법령(法令)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열가지 병이 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거각(擧却 들 거/어조사 각) ; 화두를 든다. ‘화두를 든다’ ‘화두를 거각한다’는 말은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 때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성성하게 관조(觀照)하는 것이다.

[참고] 송담스님 세등선원(No.09)—병진년 동안거 결제중 법어(76.12.26)에서.

화두를 먼저 이마로 의심을 하지 말고, 이 화두를—호흡하는데 배꼽 밑[丹田]에 숨을 들어마시면은 배가 볼록해지고 숨을 내쉬면은 배가 홀쪽해지는데, 그 배가 빵빵해졌다 홀쪽해졌다 하는 거기에다가 화두를 들고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 관(觀)하는 그것이 화두를 드는 것이여.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해탈(解脫) : [범] Vimoksa  [팔]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 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찰나(剎那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 ; 지극히 짧은 시간.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깨달음 ; 각(覺). 법(法)의 실체와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 앎. 지혜의 체득.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법(法) ; (산스크리트) dharma, (팔리) dhamma의 한역(漢譯). ①진리. 진실의 이법(理法). ②선(善). 올바른 것. 공덕. ③부처님의 가르침. ④이법(理法)으로서의 연기(緣起)를 가리킴. ⑤본성. ⑥의(意)의 대상. 의식에 드러난 현상. 인식 작용. 의식 작용. 인식 내용. 의식 내용. 마음의 모든 생각. 생각.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본참공안(本參公案) : 본참화두(本參話頭).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천칠백 공안(千七百 公案) ;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천칠백일 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기연어구(機緣語句, 깨달음을 이루는 기연에 주고받은 말과 경전·어록의 글)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의리선(義理禪) ;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 이런 의리선(義理禪)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이라,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衆生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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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활구참선(活句參禪)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본참공안]를 받아서,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이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또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천칠백 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해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확철대오(廓徹大悟) ; 내가 나를 깨달음. 내가 나의 면목(面目, 부처의 성품)을 깨달음.

*<중국 검주땅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 ; 검려지기(黔驢之技 검을 검/나귀 려/갈 지/재주 기) ; 검주(黔州)에 사는 당나귀[驢]의 재주[技]. ①보잘것없는 재주와 힘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②자신이 솜씨와 힘이 없음을 모르고 뽐내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것을 비유한 말.

당송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의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의 우화에서 유래된 고사성어이다. 검려(黔驢), 검려기궁(黔驢技窮)도 같은 뜻의 말이다.


[참고] 『유하동집(柳河東集)』 제19권 「삼계편(三戒篇)」 '검지려(黔之驢)'

黔無驢 有好事者船載以入 至則無可用 放之山下 虎見之 龐然大物也 以爲神 蔽林間窺之 稍出近之 憖憖然莫相知 他日 驢一鳴 虎大駭遠遁 以爲且噬已也 甚恐 然往來視之 覺無異能者 益習其聲 又近出前後 終不敢搏


검주(黔州)에는 당나귀가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당나귀 한 마리를 배로 실어 왔다가 쓸모가 없자 산 아래 풀어 놓았다. 호랑이가 이 당나귀의 큼직한 모습을 보고 신수(神獸)라고 생각하고 숲속에 몸을 숨기고 동정을 살펴보았다. 얼마 후 숲에서 나와 당나귀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날 당나귀가 울어 대자 호랑이는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줄로 생각하고 크게 놀라 멀리 도망쳤다. 하지만 왔다갔다하면서 보는 사이 특별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 소리에도 익숙해져 다시 앞뒤로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끝내 건드려 보지는 못했다.


稍近益狎 蕩倚衝冒 驢不勝怒 蹄之 虎因喜 計之曰 技止此耳 因跳踉大㘚 斷其喉 盡其肉 乃去 噫 形之龐也類有德 聲之宏也類有能 向不出其技 虎雖猛 疑畏 卒不敢取 今若是焉 悲夫


점차 가까이하여 익숙해짐에 따라 이리저리 건드려 보면서 덤벼들어 보았더니 당나귀가 화를 참지 못하고 발길질을 해 댔다. 호랑이는 기뻐하며 이를 헤아려 말하기를 “재주라곤 이것뿐이로구나”하며, 크게 으르렁거리며 뛰어올라 목줄을 끊고 그 고기를 다 먹어 버리고 떠나갔다.

아, 몸집이 큰 것이 덕이 있는 듯하고, 소리가 크기로는 재능이 있는 듯하나, 애당초 그 기량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호랑이가 비록 사납더라도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끝내 감히 취하지 못했을 것을, 지금 이와 같으니 안타깝도다.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 ; 『백유경(百喩經)』 (제4권) (존자 승가사나 찬집 尊者僧伽斯那撰, 소제 천축삼장 구나비지 한역 蕭齊天竺三藏求那毘地譯 | 한글대장경) '구려유유(搆驢乳喩)'


77. 나귀의 젖을 알지 못하는 비유(搆驢乳喩)

昔邊國人不識於驢 聞他說言驢乳甚美 都無識者 爾時諸人得一父驢 欲搆其乳 諍共捉之 其中有捉頭者 有捉耳者 有捉尾者 有捉腳者 復有捉器者 各欲先得於前飮之


옛날 변방의 어떤 나라 사람들은 나귀를 알지 못하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나귀의 젖은 매우 맛나다’는 말만 들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수나귀 한 마리를 얻어 그 젖을 짜려고 서로 다투어 붙잡았다. 그중에 어떤 이는 머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귀를 붙잡고 어떤 이는 꼬리를 붙잡고 어떤 이는 다리를 붙잡고 또 어떤 이는 생식기를 붙잡고서 제각기 먼저 젖을 짜 마시려고 하였다.


中捉驢根謂呼是乳 卽便搆之望得其乳 衆人疲厭都無所得 徒自勞苦空無所獲 爲一切世人之所蚩笑


그중에 나귀의 생식기를 붙잡은 사람이 외쳤다. “이것이 젖이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그것을 짜면서 젖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지치기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고 한낱 헛수고만 하였다. 그렇게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모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外道凡夫亦復如是 聞說於道不應求處 妄生想念 起種種邪見 裸形自餓投巖赴火 以是邪見墮於惡道 如彼愚人妄求於乳


외도(外道)의 범부들도 이와 같아서 도(道)라는 말을 듣고는 꼭 구할 수 있는 곳에서 구하지 않고, 망령되게 잡생각[想念]을 내고 갖가지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켜 벌거벗고 나다니기도 하고, 스스로 굶기도 하며 혹은 높은 바위에 올라가 몸을 던지기도 하고, 불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삿된 견해 때문에 나쁜 세계[惡道]에 떨어지니, 마치 어리석은 사람들이 망령되이 젖을 구하는 것과 같다.


*바께스 ; 영어 'bucket'의 일본어 발음. 양동이(洋-- 한 손으로 들 수 있도록 손잡이를 단 들통).

*선입관(先入觀 먼저 선/들 입/볼 관) ; 어떤 사람이나 사물, 또는 주의나 주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 형성된 고정 관념이나 견해.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백유경(satavadana-sutra, 百喩經 일백 백/비유할 유/말씀 경) ; 일반 대중들에게 불교적 깨우침을 주고자 짤막한 교훈적 우화(寓話)들을 모아서 5세기 인도의 상가세나(Saṅghasena 僧伽斯那)스님이 편찬한 작품. 그의 제자 구나브리디(Guṇavṛddhi 求那毘地)가 492년에 한문으로 번역했다.

*운집(雲集 구름 운/모일 집) ; 구름[雲]처럼 모인다[集]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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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세(宿世 지날·묵을 숙/세상·시대 세) ;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宿]의 세상[世].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 ‘한 생각이 바로 무량겁’

통일 신라 시대에,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화엄경을 연구하고 그 경의 핵심을 추려서 7언 30구(210자)의 게송으로 지은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또는 <법성게 法性偈>에 나오는 구절.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한량없는 오랜 세월이 한 생각 찰나요,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시간이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간다’

[참고] 『증도가(證道歌)』 (영가永嘉 스님)에서.

覺卽了不施功  一切有爲法不同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勢力盡箭還墜  招得來生不如意

깨닫고 나면 공(功)을 베풀지 않으니 일체 유위법(有爲法)과 같지 않다.

상(相)에 머문 보시는 천상에 나는 복이나,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올라가는 힘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니, 내생(來生)에 뜻과 같지 않음을 초래하게 되리라.


爭似無爲實相門  一超直入如來地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貪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竭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의 경지에 바로 들어가는 것만 하겠는가.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지엽은 근심하지 말라. 마치 깨끗한 유리구슬 안에 보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네.

내, 이제 여의주를 아나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에 마침내 다함이 없도다.

*여래(如來) : 부처님 10호(十號)의 하나。 범어 Tathagata의 역(譯)。 여(如)는 진여(眞如)의 뜻이니 곧 진여로부터 나타나 오신 각자(覺者)의 뜻。 또 여거여래(如去如來)의 뜻으로서 여여부동(如如不動)하게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의 근기에 응하신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함。 금강경에는 좇아온 곳이 없고 또한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여래라고 이름한다 했음.

*경지(境地 지경•경계 경/땅 지) ; 정신이나 몸이 도달해 있는 어떤 상태.

*아미타경(阿彌陀經) ; 중국 후진(後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경전. 이 경은 아미타불의 본원력(本願力)으로 이루어진 극락세계의 장엄, 아미타불의 공덕과 극락세계의 일, 그곳에 태어나기 위하여 중생이 갖추어야 할 바를 설명하고 있다. 그곳에는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이 무량한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이 상주하며 설법하고 있다. 이러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하여 하는,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다.

*육신보살(肉身菩薩) ; 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그대로 보살의 위치에 이른 사람.

*삽삼조사(卅三祖師) : 삼십삼세 조사(三十三世祖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부처님을 대신할 전 교단(敎團)의 어른을 한 분씩 정하여 내려왔다。그것은 스승되는 어른이 그 제자들 가운데서 빼어난 이를 선택하여 법(法)을 전하고, 그 증거로써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衣鉢)를 전해 주었다。그리하여 인도에서 1.가섭존자, 2.아란존자, 3.상나화수....이렇게 전승되어 28대 되는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중국에 와서 중국의 초조(初祖)가 되고, 그로부터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 6조 혜능대사(慧能大師)로 내려왔는데, 위 33인의 조사를 삽삼조사라 한다.

6조 혜능에 이르러서는 불법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정통(正統)으로 내려가는 전례를 폐지하고, 따라서 의발을 전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법등(法燈) ; 부처님의 가르침. 미(迷)한 세계의 캄캄한 마음을 없애는 것을 등불에 비유한 것.

*수기(授記) ;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수행하여 얻은 깨달음의 결과로서 언제 어디서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함. 또는 그 교설(敎說).

*십악(十惡) ;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열 가지 죄악.

몸(身) : ①살생(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임) ②투도(偸盜 남의 재물을 훔침) ③사음(邪婬 삿된 음행).

말(口) : ④망어(妄語 거짓말이나 헛된 말) ⑤기어(綺語 진실이 없는, 교묘하게 꾸민 말) ⑥양설(兩舌 이간질하는 말) ⑦악구(惡口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 욕).

뜻(意) : ⑧탐욕(貪欲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⑨진에(瞋恚 성냄) ⑩사견(邪見 그릇된 견해).

*십선(十善) ; 십악(十惡)을 행하지 않는 일.

*팔정도(八正道) ;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팔성도(八聖道)를 이른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핍절하다(逼切-- 핍박할·가까이할·몰 핍/정성스러울·절박할 절) ; 진실하여 거짓이 없고 매우 간절하다.

*중생심(衆生心) ; ①번뇌에 얽매인 미혹한 존재(중생)가 일으키는 미혹한 마음. ②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진여심(眞如心). ③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함.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원각경(圓覺經)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당나라 때 불타다라가 번역。 대승(大乘) 원돈(圓頓)의 교리를 말함。 주로 관행(觀行)을 말하다。 주석서 종밀(宗密)의 <대소> 12권, <대초> 13권。<약소> 5권, <약초> 12권.

*청정(淸淨 맑을 청/ 깨끗할 정) ; 허물이나 번뇌가 없이 깨끗함.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신심명(信心銘) - 벽의해(闢義解)』 중봉 명본선사(中峰 明本禪師) (명정 역주, 극락선원) p61 게송 참고. *(頻伽藏本)天目中峰和尚廣錄 卷第十二之上 信心銘闢義解上 게송 참고.

*追(추)쫓다,구하다 *尋(심)찾다 *上(상)위,오르다 *曉(효)새벽

*양오(陽烏, 暘烏 태양 양/까마귀 오) ; 태양(太陽)을 달리 이르는 말. 태양 속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법(法) : [범] dharma [파] dhamma 음을 따라 달마(達磨•達摩) 또는 담무(曇無)로 써 왔다。온갖 것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니, 온갖 일과 모든 물질이며, 온갖 이치와 옳은 것(是), 그른 것(非), 참된 것(眞), 거짓된 것(妄)이 모두 이 「달마」에 들어 있다。그러나 흔히 부처님이 가르친 교리만을 법이라고 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법보(法寶 부처님의 가르침 법/보배·보물 보) ; 불교도의 세 가지 귀의처, 부처님[佛寶]과 부처님의 가르침[法寶]과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집단[僧寶]의 하나.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보배[寶]에 비유한 말.

*비로자나 법신불(毘盧遮那 法身佛) ; 비로자나(毘盧遮那)는 vairocana의 음사(音寫). 노사나(盧舍那)·자나(遮那) 등으로도 음사한다. 부처님의 몸에서 나오는 빛과 지혜의 빛이 세상을 두루 비추어 가득하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日),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는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이라 한다.

①진리 그 자체인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법신으로서의 비로자나 부처님. ②대일여래(大日如來)와 같음.

*법신(法身) : [범]  dharma - kaya ‘법 몸’이란 말인데, 법불(法佛) · 이불(理佛) · 실불(實佛) · 법신불(法身佛) · 법성신(法性身) · 자성신(自性身) · 진여불(眞如佛) · 법계성(法界性) 같은 말들이 모두 한뜻이며, 「선가귀감」 첫머리에 있는 ‘한물건’이란 것도 이것이다.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진여의 청정한 법계를 가리키며,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한다.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여의 본 바탕(眞如本體)’을 이름이니, 중생에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고 부처님이라고 더 특별할 것이 없어, 본래 깨끗하고 빛나고 두렷하여 무한한 공간과 무궁한 시간에 꽉 차 있으되, 네 가지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離四句) 백 가지 아닌 것으로도 옳게 가르칠 수 없으며(絕百非), 무엇으로나 형용하여 볼 수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원만구족(圓滿具足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갖출 구/충족할 족) ; 모자라거나 결함이 없이 완전히 모두 갖추어져 있음.

*원만(圓滿 둥글·온전할·원만할 원/찰·가득할 만) : ①완전한. 부족함이 없는. 결함이 없는. 모두 갖추어져 있음. ②증감이 없는 평등무애한 경지. 흠 없는 법의 특징 또는 구경의 깨달음 등을 형용하는 말.

[참고]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 제32권 「辯緣起品 第三之十二」 (대정장29, p.525c21)

言圓滿者 謂於佛身 衆相周圓 無缺減故

원만이라는 말은 부처님 몸에 온갖 상호가 두루 완비되어 결함이 없다는 뜻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제60권 「文殊師利授記會 第十五之三」 (대정장11, p.346c3)

文殊師利言 善男子 若法不增不減 是名圓滿 云何圓滿 若於諸法 不能了知 則生分別 若能了知 則無分別 若無分別 則無增減 若無增減 此則平等 是故善男子 若見色平等 卽是色圓滿 受想行識 及一切法圓滿 亦復如是


문수사리가 말했다. 선남자야,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 법을 원만이라 한다. 무엇을 원만이라 하는가? 모든 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분별이 일어나지만, 분명하게 안다면 분별이 사라진다. 만일 분별이 사라진다면 증감이 없고, 증감이 없다면 이것이 평등이다. 그러므로 선남자야, 만일 색을 평등하게 보면 색의 원만이니, 수 · 상 · 행 · 식과 다른 모든 법의 원만도 이와 같다.

*구족(具足 갖출 구/충족할 족) ; 구비만족(具備滿足)의 줄임말. ①부족함 없이, 빠짐없이 완전하게 갖춤. ②원만(圓滿)과 같음. 완전.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필력(筆力 붓•글씨 필/힘 력) ; 글씨[筆]의 획에 드러난 힘[力].

*순일무잡(純一無雜 순수할 순/하나 일/없을 무/섞일 잡) ; 대상 그 자체가 순일(純一)해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雜]이 없음[無].

*타성일편(打成一片) : ‘쳐서 한 조각을 이룬다’. 참선할 때 화두를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려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체처 일체시에 오직 화두에 대한 의심만이 독로(獨露)한 순수무잡(純粹無雜) 경계.

*의단(疑團 의심할 의/덩어리 단) ; 공안(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 밑 본/올 래/낯 면/눈 목) ; ①자기의 본래(本來) 모습(面目). ②자신이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천연 그대로의 심성(心性). 부처의 성품.

본지풍광(本地風光), 본지고향(本地故鄉), 본분전지(本分田地), 고가전지(故家田地), 천진면목(天眞面目), 법성(法性), 실상(實相), 보리(菩提), 부모에게서 낳기 전 면목(父母未生前面目), 부모에게서 낳기 전 소식(父母未生前消息) 등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쓰이는 말이다.




[법문 내용]


(게송) 법법지인무구구~ / 무산지몽(巫山之夢) / 중생이 석가의 임 / 삼무차별(三無差別),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의단독로하여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

천주교 신부의 의리선 / 중국 검주 나귀란 놈 뒷발질 이야기—검려지기(黔驢之技) / 나귀 오줌을 우유인 줄 알고 먹은 이야기—『백유경(百喩經)』 (제4권) '구려유유(搆驢乳喩)'

(게송) 법법본래무소주~ / 공부가 되고 안되고 따지지 말고 한결같이 해 나가면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



과연 부처님의 임은 중생(衆生)이다. 중생은 부처님의 임이라고 표현을 했다 말이여. 중생의 임이 부처님이 아니라 중생이 석가의 임이다 그랬다 말이여.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임도 나를 사랑한다 그거거든.

'과연 부처님과 모든 보살, 불보살은 손바닥만한 땅도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서 몸을 버리지 않은 곳이 없다' 경전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삼세제불(三世諸佛)과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모든 보살님네들이 중생을 제도(濟度)하고 중생을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의 몸을 수백억만 번 무량겁을 두고 몸을 바쳐왔다. 중생이 불보살의 임이기 때문에 임을 위해서 그렇게 몸을 바치셨다.


임은 정말 내가 목숨 바칠 수 있고, 한 목숨 뿐만이 아니라 수천 · 수만 · 수백만의 목숨이라도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끝이 없고 한이 없어야 할 그러한 임을 임으로 삼았으면 참 좋으련만.

세속 사람들이 흔히 임으로 섬기는 재산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남녀간에 색정(色情)을 임으로 삼는다든지, 식도락가는 맛있는 음식을 임으로 삼는다던지, 명예나 권리를 임으로 삼는다든지, 또는 안락과 수면을 임으로 삼는, 한마디로 말해서 오욕락(五欲樂) 따위를 임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서 몸과 목숨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그 사람은 결국은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화엄경에는 ‘부처님과, 우리 중생의 마음과, 또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한량없는 모든 중생이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왜 그러냐?

삼계(三界)는 오직 한마음 뿐이고, 마음밖에는 별(別) 법(法)이 없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은 이 세 가지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 하셨어.


이 사바세계는 고해(苦海)다, 말세(末世)요 투쟁견고의 시대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지만 부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바세계나 극락세계나 다 같은 적광토(寂光土)여.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계가 고해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나 삼십팔천이나 극락세계나 여기나 똑같은 곳이다. 그러면 왜 부처님께서 말세니, 부처님께서 고해니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중생의 입장이 되어서 그렇게 중생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발심(發心)하게 하기 위해서 중생의 말을 빌려서 하신 것이지, 부처님 스스로에게는 모두가 극락세계요, 모두가 깨달음의 세계요, 모두가 부처님의 몸뚱이다 그거거든.


그러면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불자는 슬픈 생각이 나거나, 기쁜 생각이 나거나, 속이 상하거나, 누가 원망스럽거나 야속하거나,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다못 화두만(話頭)을 거각(擧却)하면 되는 것이여.


찰나(刹那) 동안 ‘이뭣고?’를 하면 찰나 동안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1분 동안 ‘이뭣고?’를 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함으로써 사량이 끊어지면 1분 동안 내 마음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거여.

깨달음은 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량분별이 끊어짐으로 해서 깨달음에 나아갈 길이 열리는 것이거든.

그러기 때문에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는 일부러 사량을 끊을려고 할 것도 없고, 망상을 없앨려고 할 것도 없어. ‘이뭣고?’ 콱 막혀 나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거든.


공안 몇 개, 의리선으로 따져서 알아 가지고 어디 가서 자기도 한소식 한 것처럼 뽐내 봤자, 전혀 그런 거 모르는 사람한테는 가서 그것이 통할란지 모르지만, 환히 알고 보고 있는 사람 앞에 가서 나귀란 놈 검주땅에 가서 뒷발질하듯이 한바탕 차 봤자 제 살림만 드러나거든.

어디 가서 밥 빌어먹을 짓이 없어서 의리선으로, 의리로 공안 몇 개 따져서 그것 해 가지고 자기도 깨달은 것처럼 뽐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최상승법을 믿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고 또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실천을 하기는 더욱 어렵고. 듣기도 어렵지마는 듣고 또 믿기 어려운데 믿었다 하더라도 조금 해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은 중단해 버린 사람이 있거든.

중단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해 나간 분이라면 그분은 이미 보통 분이 아니여. 숙세(宿世)로부터 이 최상승법에 깊이 인연을 심고 심어서 삼생(三生) 이내에—금생에 인연이 성숙한 분은 금생에 깨달을 수도 있고, 아무리 늦어도 삼생 안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리라고 나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삼생은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또 태어나고, 또 한평생 살다가 공부하다가 죽어서 또 태어나고 한 그런 삼생도 포함되지만, 한 생각 한 생각을 한 죽음으로 생각하고 새로 태어남으로 생각한다면은 삼생은 그렇게 먼 것이 아닙니다.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다. ‘한 생각’이 곧 무량겁이고, 무량원겁이 곧 이 ‘한 생각’이거든. 그래서 일초즉입여래지(一超卽入如來地)라. 한번 뛰어 가지고 여래(如來)의 경지(境地)에 들어간다.


참법은 조금도 속인 바도 없고 누구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것이고, 언제나 원만구족(圓滿具足)한 것이여. 나도 법이요, 너도 법이요, 부처님도 법이요, 모든 중생이 법이요, 삼라만상이 다 법이고 그 낱낱이 원래 원만구족하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여.이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 중생의 소견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나름대로 이해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법의 한때의 그림자에 지내지 못한 것이지. 참법이 아니거든.


모든 것이 다 그래.한참 되어 가다가 또 안되고, 안되지마는 꾸준히 밀고 나가면 또 다시 또 잘되고 그런 것이여.그러한 고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중단하지 않고 한결같이 해 나갈 때에 우리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툭! 터져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깨닫게 되는 것이여.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26~150)2019. 11. 25. 14:19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133)—1981년 1월 첫째일요법회 (75분) (용133)

(1/4) 약 22분. (2/4) 약 21분. (3/4) 약 22분. (4/4) 약 11분.

(1/4)----------------


연비산산공착영(連臂山山空捉影)한디  고륜본불낙청천(孤輪本不落靑天)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오늘은 신유년, 양력으로 1월 4일 첫째번 일요법회날입니다.

그동안에는 모든 법회를 아침 오전 11시에 시작을 했었는데 오늘부터서는 첫째번 일요법회에 한해서 오후 2시에 시작하기로 했는데, 날씨도 매우 춥고 그런데 이렇게 많이 참석을 해주셨습니다. 법당이 난방이 되어 있지 않아서 좀 춥습니다.


산승(山僧)이 연전(年前)에 해남 대흥사에서 있을 때, 그때 고려대학 학생들, 모다 서울대 학생들, 연세대 학생들, 대학생들이 모다 고등고시 준비하기 위해서 대흥사 절에 방을 빌려 가지고 와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이 여러 명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건대 밤잠을 안 자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 자기집에서는 부모 밑에서 다 호강하고 그런 학생들인데, 그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 절에 그 씁씁할 우거지 된장찌게에다가 김치 한 가지 놓고 그렇게 밥을 먹으면서도 반찬이 없단 말 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밤에면 밤을 패서 공부를 하는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이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오면 밖에 나가서 달음박질도 하고 그 얼음을 깨고 찬물로 세수를 하고 그래 가지고 또 들어와서 공부를 하고, 또 잠이 오면 또 나가서 찬바람을 쐬고 들어오고 이렇게 무섭게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세속에 아직 철이 안 든 어린 학생들이 '고시 합격해서 판검사가 됨으로써 자기의 인생으로써의 출세 성공이다' 이리 생각하고 거의 목숨을 바치다시피 하면서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부모와 형제와 고향과 청춘을 버리고서 생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한 승려가 어찌 수행에 일분일초라도 등한히 할 수가 있겠는가? 참선(參禪)하는 사람이 고시에 합격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저 학생보다도 더 못해 가지고 어디에다 쓸 것인가?' 부끄러운 생각이 들고 거기에서 참, 이 분심(憤心)이 나고 느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 같이 있는 젊은 모다 행자(行者)들에게도 "저 학생들을 보아라. 저 학생들이 그 밤잠을 안 자고 공부할려고 애를 쓰는 저 모습을 봐라. 도(道)를 닦는 출가인이 저 학생에 비교해서 저만 못해서 되겠느냐?" 이렇게 서로 경책을 하면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아니할려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짊어지고 하룻밤에 백 리 이상 길을 산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정진을 한 스님네들도 있었고.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물씬물씬한 목침이나 네모진 목침을 베면 편안하게 몇 시간을 자게 되니까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면 잠깐 잠이 들어서 조끔만 움직거려도 두그르르 굴러서 머리가 방바닥에 툭! 떨어지면 깜짝 놀래가지고 다시 일어나서 공부하기 위해서 그런 둥글둥글한 목침을 깎아서 베었고.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법당은 난방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밑에서는 찬기가 올라오고 윗 공기는 차와서 조금 춥습니다마는 아까 말한 그런 학생들 공부할려고 애쓰는 학생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과거에 도인들이 어떻게 수행을 하셨는가를 생각한다면 이 법당 이러한 정도의 추위쯤은 능히 참을 수 있고 오히려 뜨뜻한 난방이 잘되어 있는 법당에서는 훈훈한 공기 속에서 혼침(昏沈)에 빠질 우려마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엄동설한에 일선(一線)에서 우리 후방 국민들의 무사안일(無事安逸)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국토를 지켜 주기 위해서 일선 장병들은 여러분들의 아들, 동생들은 이 혹한 속에서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 못한 속에서 목숨 바쳐서 주야불철(晝夜不撤)하고 방위(防衛)에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당에 난방 시설을 해 놓지 아니하고 그러한 변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이여  취산순환유루인(聚散循環有漏因)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하고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찰나생멸무상법(刹那生滅無常法), 우리의 생사가 찰나간(刹那間)에 있어.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한 것이 이것이 생멸심(生滅心)인데, 이 생멸이 바로 생사(生死)다 이거여.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또 실질적으로도 어제 멀쩡한 사람이 하룻밤 새에 저승 사람이 되고, 한 시간 전에 멀쩡했던 사람이 금방 숨 한번 내쉬었다 들어마시지 못하면 내생이고, 1초 전에 멀쩡했던 사람도 1초 후에 저승객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모았다 흩어지고,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오고 이러한 것이 모두가 다 유위법(有爲法), 유루(有漏)의 인연(因緣)으로 그리된 것이다 이 말씀이여.[聚散循環有漏因]


금오출몰촉년광(金烏出沒促年光)이요. '쇠 금(金)'자, '까마귀 오(烏)'자, 금오(金烏)는 태양을 금오(金烏)라 하는데, 금까마귀라 하는데 금까마귀가 동쪽에서 솟아 가지고 서쪽으로 지고 또 그 이튿날 동쪽에서 떠 가지고 또 서산으로 지고 이것이 우리의 생명을 재촉하는 것이 된다. 하루해가 지나가면 하루 우리의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것이여.

옥토승침최로상(玉兎昇沈催老像)이다. 옥토끼는 달을 옥토끼라 하는데, 달이 떠 가지고 지고 또 떠 가지고 지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늙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하고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리요

나무~아미타불~

도자위경조수행(覩玆危境早修行)하여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인수정고어소수(忍受井枯魚少水), 여름에 가물 때 웅덩이에 큰 고기, 작은 고기, 송사리가 더글더글더글더글 팔딱팔딱팔딱 뛰는데 물은 하루하루 물이 줄어져서 이제 거의 물이 다 바닥이 다 보이게 되었어.

물은 거의가 다 마르게 되고, 고기는 물이 마르니까 그런 데다 물은 햇볕에 데워져서 뜨겁고 고기가 우물우물우물하면서 곧 빨딱거리다 곧 죽게 된 그러한 형상을 농촌에서 혹 구경을 하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세계 40억이라고 하는 인류가 각 나라마다 자기나라 잘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한 나라 안에서는 각기 자기만, 자기가 보다 더 좀 잘살겠다고 발버둥치고 몸부림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여름 뜨겁고 가문 날에 거의 말라가는 웅덩이 속에 송사리 떼가 몸부림친 거와 같은 현상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영용상핍서침등(寧容象逼鼠侵藤)이라. 큰 광야에 어떤 사람이 광야(曠野)를 지나가는데 코끼리란 놈이, 성난 코끼리가 자기를 쫓아온다 그말이여. 그래서 그 코끼리한테 잡혀서 짓밟히면 죽게 되니까 그걸 피하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도망을 치다가 마치 큰 샘을 하나 만났다.


그 샘으로 피난을, 피하기 위해서 마치 그 샘 언덕에 등넝쿨이 있어서 그 등넝쿨을 잡고서 샘 안으로 몸을 피했다 그말이여. 저 밑에 샘 밑바닥을 내려다보니까 거기에는 독룡 독사가 바닥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어.

그래서 저 밑으로 내려가지도 못하고, 위에로 올라가자니 코끼리란 놈이 코를 내두르면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런데 가만히 고개를 들어보니까 그 절벽에다가 벌이 집을 지어 놨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똑똑 떨어진다. 아무리 죽게 되었지만 아! 꿀이 똑똑 이 콧등어리로 떨어지니까 할 수 없이 그놈을 받아서 쪽쪽 빨아먹는다 말이여.

그런데 그때 흰 쥐와 검은 쥐가 나와 가지고 등넝쿨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대. 얼마 안 있으면 흰 쥐가 한바탕 갉고, 조금 있으면 또 검은 쥐가 갉고 흰 쥐가 갉고 그래서 그 등넝쿨 뿌럭지가 똑 떨어지면 샘 밑바닥에 떨어져 가지고 독사의 밥이 되게 되았다 그말이여.


그러면서도 똑똑 떨어지는 꿀 받아먹는 재미로 코끼리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두려움도 잊어버리고, 밑으로 떨어지면 독룡 독사에게 잡혀 먹는다고 하는 생각도 잊어버리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등넝쿨을 갉아 대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하고 있다 그말이여.

꿀 받아먹는 재미로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을지언정 이 사람의 죽음은 시간 문제다 말이여.


「어떻게 했으면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이 문제가 공안(公案)의 하나입니다.(처음~21분39초)




(2/4)----------------


「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우리의 중생, 우리 중생의 운명이, 신세가 마치 이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말씀이여.


광야(曠野)는 생사의 광야요, 인생의 광야요. 우리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무상(無常)한 생사의 광야를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데 무상살귀(無常殺鬼),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무상살귀로부터 쫓김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그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고, 흰 쥐 검은 쥐는 낮과 밤이고, 그리고 그 등넝쿨은 우리의 생명줄이고, 생명이 수명이 뚝 끊어지면 죽어서 무간(無間), 저승이 기다리고 있다 그말이여.


똑똑 떨어지는 꿀은 무엇이냐 하면은 인간에 오욕락이다 그말이여. 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명예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이 인생에 다섯 가지 즐거움,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느냐?


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도자위경조수행(賭玆危境早修行)이라.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수행을 해라.

그래 가지고 근념미타생극락(勤念彌陀生極樂)이다.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인생이 과거에 무슨 인연(因緣)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세계 40억 인구가 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오장육부가 다 있지만 한 사람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비슷하게 닮은 사람은 있지만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각기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각기 생각한 바가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과거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지은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로써 받음이 또한 다르다 이 말씀이여.


누구는 부자로 살고, 누구는 명예와 권리가 있고, 누구는 힘이 세고, 누구는 건강하고, 누구는 병약하고, 누구는 정직하고, 누구는 불량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차(差)가 있지만 이것이 다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지어 가지고 그렇게 된 것이다.

일신상만 그럴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 형과 동생과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또한 과거에 그렇게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렇게 받는 것이지, 우연히 아무 이유도 없고 원인도 없이 그러한 관계가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옛날에 정승(政丞)이, 아주 학식도 높고 경륜도 있고 인격도 훌륭하고 한 정승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의 부인도 남편 못지않게 어질고 착하고 모든 부덕(婦德)을 원만히 갖추었드라.

아들도 여러 형제 두고 살림도 풍족하고 그러한 아주 행복한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 부인이 간 곳이 없어졌다. 혹 친정에를 갔는가, 이웃을 갔는가, 갈만한 곳을 다 연락을 해서 알아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내도 아무 소식이 없어.


그래서 그 정승이 정승을 내놓고 그 아내를 찾으러 나섰다. 팔도를 다니면서 아내를 찾으러 다니는데, 마치 강원도 지방을 가 가지고 어느 산중을 지내다가 보니 자기 아내와 비슷한 사람이 가마니를 이고 어느 영감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 쫓아가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틀림없이 자기 아내여.


"여보, 당신이 아무개 아니요?"

"예, 기요"


그런데 왜 "어찌된 일이냐?"하고 물어보니까, 아무 이유도 없고 "그냥 나가고 싶어서 집을 나왔다"고.


"저 앞에 간 사람은 누구냐?"고.

"새로 만나 영감"이라고.


"그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무엇이요?"

"숯 가마니요"


"당신이 미쳤느냐"고 붙들고 낙루(落淚)를 하는데, 부인은 별로 울지도 않고 멀쩡해 갖고 섰다 그말이여. 저만큼 숯쟁이 영감이 가다가 암만 기다려도 안 오니까 지게를 거기다 받쳐 놓고.


"올라가자"

"싫다"


"자식도 보고 싶지 않냐?"

"안 보고 싶다"


"저 숯쟁이 영감이 무엇이 좋아서 나를 싫다 하느냐?"

"나도 모르겠소"


아! 이래 가지고 영감은 울고불고해도 할멈은 별로 그렇게 슬퍼한 기색도 없이 자꾸 숯쟁이 영감만 따라갈려고 한다 그말이여. 기가 맥혀서. 강제로 끌고갈 수도 없고, 본인이 싫다는데야 별도리가 없어.

그래서 참 그 영감은 그 숯쟁이 영감한테 마누라를 꼼짝없이 뺏기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고, 자기 권리로 숯쟁이 영감을 권력으로 눌러서 뺏어갈 수도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길로 한 발 두 발 걸어서 오대산 월정사를 찾아들어 갔어. 찾아들어 가 가지고 큰스님을 만나 가지고 일장 설화(一場說話)를 다 얘기를 했어.

"어째서 나와 반평생을 같이 사는 동안에 싸워 본 일도 없고, 피차 서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바도 없고, 이 세상에 임금님 내 놓고는 내가 이 세상에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으로 나 이상 좋은 영감이 없을 텐데 남편이 없을 텐데, 어째서 나를 버리고 그 숯쟁이 영감을 갔는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으면 참선을 해라"


그래 가지고 참선(參禪)을 시작을 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이뭣고?'를 하는데 밥도 먹게 되면 먹고 말게 되면 말고, 잠도 자게 되면 정 고단하면 조금 자고 벌떡 일어나서 공부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정말 그 큰스님의 지도하에 목숨을 바쳐서 도를, 참선을 했습니다.


참선이란 것이 꼭—'내가 마누라와의 관계가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참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승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에 해 볼 건 다해 보고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고, 오직 생짜로 마누라한테 내소박을 맞고, 숯쟁이 영감한테 가버린 그 이유가 자기 목숨보다도 더 궁금하고 기가 맥혀서 '이것은 기어코 내가 이것은 알고야만 말겠다!' 그래 가지고 죽기로 맹세를 하고 정진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밥을 먹어도 짜고 싱겁고 매운 중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중도 모르고 제절로 속에서 의심이 나는데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밥을 먹으면서도 '이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뭣고?'

누가 자기 보고 '잘하네, 못하네' 무슨 그런 시비하는 것도 귀에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이래야겠다 저래야겠다'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속에서 자동으로 분심(憤心)이 나고 의심이 나는데, 옆에 사람 그 사람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 가지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했어. 간절한 의심이 속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데 '이뭣고?' 뿐이다.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하다가, 잠도 안 오고 배고픈 중도 모르고 의단이 독로해서 적적성성(寂寂惺惺)해 가지고 툭 터졌는데 아! 자기 전생(前生)이 환히 다 보인다 그말이여.


이 말을 듣고서 '옳지! 참선을 하면 전생을 환히 아는구나' 이렇게만 생각을 하면 아니됩니다.

이것은 인과(因果)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는 그렇게 속에서부터 자동으로 의단이 독로해야 한다고 하는 것만을 얘기한 것이지, '아! 견성(見性)을 하면 전생 일을 훤히 안다, 전생 일을 아지 못하면 견성이 아니다' 이렇게 비약을, 비약적으로 생각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전생에 과연 어떻게 해서 마누라를 만나게 되었는가?' 생각해 보니까 환하니 보이는데, 전생에 자기는 내나 그 오대산에서 공부하던 선객(禪客) 스님인데.

그 마누라는 누구인고 하고 보니까, 선방에 스님네들은 겨울에는 그 어한(禦寒)을 하기 위해서 솜을 넣어서 누벼 가지고 누비 두루마기를 입고 그것이 또 떨어지면 헝겊을 거듭거듭 대 가지고 마치 따오기를 새를 갖다가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더덩캥이 누데기를 입고 사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빨 수도 없고 한 해 겨울을 입고 그 이듬해사 그 누데기를 빨게 됩니다.


요새는 이[蝨]가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약을 할려고 해도 구경을 할 수가 없지만 옛날에는 이가 아주 자주자주 옷을 갈아입고 그런다 해도 이가 전혀 없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누데기 같은 것을 한 해 겨울을 입고 보면 누데기 안에 이가 뚱실뚱실한 황소만씩한 이로부터서 서카래까지 수없이 더글더글합니다.

그 누데기 속에 이가 한 마리가 크기 시작하는데 주먹탱이 만큼 컸는가, 가려우면 그놈을 잡아내 가지고 손바닥에다가 이렇게 굴려 보기도 하고 또 씨름도 시키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집어넣고.


그놈을 잡아서 버리면은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 것 같고, 차마 그래서 도로 집어넣다가 심심하면 꺼내서 같이 또 놀고 집어넣고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냈는데, 그래가지고 해동(解冬)이 되아서 이제 누데기를 빨게 되았다.

그냥 마구잽이 빨면 툭 터져서 죽으면 안돼았고, 그래도 한 해 겨울을 같이 지냈으니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아! 그 이를 어떻게 처리를 할까?

옷을 갈아입고 다시 또 몸에다 넣자니 그렇고, 그러던 차에 마치 개를 만났다 그말이여. 그래가지고 그 개한테 이를 갖다가 개 몸뚱이에다 요렇게 살짝 넣어 주었다 그말이여.


그 이가 누구냐 하면은 자기 할머니(부인)였었다. 한 해 겨울을 따뜻한 자기 몸에서 함께 지냈으니 그 인연으로 그다음 생에 마누라가 되어가지고 자기와 일심동체가 되어가지고 반평생을 같이 살았어. 그러면 그 개가 누구냐 하면은 숯쟁이 영감이다.


이를 잡어서 개한테 넣어 줬는데, 그 자기 몸에서 잡아가지고 개한테 넘겨줄 그때가 돌아오니까 자기를 버리고—부인도 모르지, 모르고서 그 개한테 건너간 그 도수가 딱 돌아오니까 정승 영감을 버리고 정처 없이 가출을 해가지고 걸어가고 걸어가다 얻어먹고 얻어먹다 걸어가고,

그래가지고 결국은 그 숯쟁이 영감, 개가 숯쟁이 영감으로 태어났는데 그 숯쟁이 영감을 만나자 처음 만났는데 그냥 첫눈에 눈이 딱! 맞어 버렸다. 아무 이유도 모르고 까닭도 없이 그 숯쟁이 영감을 한눈에 딱! 보자마자 '이게 바로 내 영감이다'(21분40초~42분15초)




(3/4)----------------


숯쟁이 영감, 매일 숯을 과서, 숯을 갖다가 구워가지고 그놈을 팔아서 30리 50리를 걸어서 강릉장에 가서 팔고 그놈을 팔아 가지고 또 잡곡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그놈을 끓여 먹고 사는 홀애비 신세인데 옷도 참 말로 할 수가 없고, 숯쟁이 영감이 숯가루로 화장을 하고 사는데 수염허며 무엇이 볼 것이 있겠느냐 그말이여. 볼수락 정 떨어지게 생겼겠지만 전생의 인연으로 정승 영감 백보다 낫다 그말이여.


그래 가지고 숯쟁이 영감이야 정승 부인이 자기를 찾아왔는데, 자기가 정승 부인이라고는 안 하지만 벌써 정승 부인이면 밖으로 풍기는 그 귀인의 자태가 자르르 하고.


"여기서 영감님하고 영감님 밥도 해 드리고 여기서 같이 살 수 없을까요?"

"아이구, 그 말씀을, 어디 그런 말씀을 다 하시느냐?"고, "여기서 어떻게 사실 것이냐?"고, "안 된다"


"아니 상관이 없다"고, "여기서 같이 살게만 해 달라"고.

너무 자기하고 그 부인하고 비교를 해 보니 비교가 되지를 않고, 도대체 황감(惶感)하고 죄송해서 '아! 그러시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그렇지만 호박이 넝쿨째 떨어져서 속으로야 기가 맥히게 좋지만 '안 된다'해도 뭐 자기가 탁 걷어붙이고 나아가서 밥을 하고.

그날 저녁에, 방은 쪼그만한 됫박만한 방 하나 밖인데 부인이 몇백 리를 걸어서 걸어서 와가지고 꾸벅꾸벅 졸다가 쓰러져 자는데, 영감은 그 옆에 잘 수도 없고 윗목에 가서 혼자 쪼그리고 앉았다가 '에이, 나도 모르겠다'해 같이 자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은 부부간이 되었는데.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부부간에 만나는 인연이 반드시 과거에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만나고, 금생에 만났다가 또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 이런 것이여.


여러분 가운데는 부부간에 정분이 기가맥히게 좋은 분도 있을 것이고, 처음에는 좋다가 중간에 쪼금 그 냉각기가 있다가 또 나중에 또다시 좋기도 하고 또 중간에 헤어지기도 하고. 영화 같은 데 보면 헤어졌다 또 다시 만나기도 하고.

참, 인간에 인연이라 하는 것이 기구한 것인데, 그것이 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여. 반드시 아까 숯쟁이 영감과 같은, 그보다도 더 이상한 묘한 그러한 인연이 얽히고설켜서 금생에 이렇게 만나는 것이여.


일생 동안을 잘 살아도 한마당 꿈에 지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잘 못산다 하더라도 그것도 또한 한바탕 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여.

꿈에 주먹탱이 만한 보석을 얻어 봤댔자 꿈 깨 버리면 간 곳이 없고, 꿈에 무서운 호랭이나 독사한테 쫓겨서 진일 켜 봤댔자 눈만 딱! 떠 버리면 호랭이도 간 곳이 없고 독사도 간 곳이 없습니다.


참선을 하기 전에는 꿈에 그런 호랭이한테 쫓긴다던지 독사한테 쫓길 때 그 무섭고 겁이 난 것이 말로 할 수 없는데, 아무리 도망갈려고 해도 발은 제자리에서만 동동거리고,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큰소리가 나지를 않고 그리하다가, 얼마 동안을 그렇게 몸부림을 치다가 겨우 눈을 떠 보면 전신이 땀이 젖어 갖고 있고 이러한 꿈을 꾸는 수가 있었는데,

참선을 한 뒤로는 그런 어려운 그런 무서운 경지를 딱 닥치면 금방 탁! 화두(話頭)를 들면서 눈이 뚝 떠져 버린다 말이여. 그래서 그런 무서운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혹 꾸더라도 금방 내가 '에이, 이까짓 것'하고 탁! 정신을 차려버리면 눈이 뚝 떠져 버리는 그런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섭건 괴롭건, 기쁘건 행복하건 간에 엄격히 말하면 인생 칠십이라고 해 봤자 잠깐 동안 꾸는 봄꿈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이 말이여.

행복하게 산다 하더라도 눈떠 버리면 허망한 것이고, 괴롭다 하더라도 무섭다 하더라도 딱! 눈떠 버리면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무서울 것이 있느냐 그말이여.


우리는 인생 어피차 과거의 인연으로 해서 금생에 부모에 의탁을 해서 이 몸을 받아 낳고 일평생을 길건 짧건 좋건 궂건 일생을 살아갈 수밖에는 없습니다.

꿈은 꿈이로되 분명 현실은 또 있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꿈이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호랭이를 만나면 무섭고 독사를 만나면 무섭고, 보석이나 금덩어리를 주으면 기쁘고 그것을 빼앗기면 아깝습니다.


눈을 떠 버리면 문제가 하나도 아니지만 눈을 뜨기 전까지는 분명 현실입니다. 인생에 명예와 권리와 지위와 부귀공명이 그것이 허망한 것이고 꿈이라 하지만, 인생으로써 살아가는 동안에는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되고 분명히 필요한 것이고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현실을 내놓고 꿈이 따로 없고, 꿈을 내놓고 현실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허망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세상은 무상한 것이요, 허망한 것이다. 다 소용없는 것이다, 다 버려라' 이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최선을 다하면서 그 가운데 그것이 허망한 줄을 알아야지, '허망한 것이니까 다 소용없다' 이러한 방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올바른 불자(佛子)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해서 허망한 줄을 모르고 거기에 집착을 하고 거기에 얽매이면 그 사람은 또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허망한 줄만 알지 그것을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아빠로서 엄마로서 국민으로서 스승으로서 제자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하지 아니한다든지, 그것에 충실한답시고 거기에 완전히 얽매어 가지고 참으로 이것이 허망한 줄을 모른다던지, 이 사람은 정반대의 입장이지만 두 사람이 다 바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그러냐?


삼라만상(森羅萬像) 두두물물(頭頭物物), 찬란히 빛나는 해와 달, 별, 그리고 산과 흐르는 물, 꽃과 잎, 모든 동물, 이 우주법계에 가득차 있는 온갖 것이 이 두두물물이—이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일체법(一切法)'이라 하는데, 제법(諸法)이라고도 하고 일체법이라 하는데, 이 삼라만상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생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 자체가 어데서 왔느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의 자성(自性)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을 여의고 우리의 자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떠나서 우리의 참마음을 찾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번뇌와 망상이 우리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놈을 버리고 찾아서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저 출렁거리는 산더미 같은 바다에 파도, 크고 작은 파도가 물을 떠나서 파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는 물이 움직여서 파도가 된 것이기 때문에 파도가 바로 물인 것입니다. 파도를 버리고서 물을 찾는다면 우리는 물을 앞에다 두고 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속에 웬수 같은 자식, 웬수 같은 남편, 웬수 같은 아내, 웬수 같은 형, 웬수 같은 동생, 웬수 같은 친구, 웬수 같은 이웃이 많이 있습니다.

어째서 훌륭한 부모, 좋은 자식, 좋은 형, 좋은 동생, 진정한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 웬수 같은 사람을 만나서 평생을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한탄으로 일생을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이유는 그 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


한 번 지어 놓은 인연(因緣)은 도저히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자기가 지어 놓은 인과(因果)는 면할 길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참나, 온갖 인과에 근원을 깨달라서 체달(體達)을 하면 제절로 모든 일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자기에게 자기가 지어서 받은 인과, 윤회 생사윤회를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녹음 끊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 난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전거 구사리 같은 것이 이리저리 올라갔다 내려갔다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눈병을 깨끗이 치료를 한 뒤에 보면 아무것도 허공에는 원래로 없었던 것이여.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만 보였지 눈병이 나 있을 때나, 눈병을 나은 뒤에나 허공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보인 생사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생사해탈, 생사해탈' 말을 했지만, 부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어디까지나 중생의 입장에서 중생의 언어를 빌려서 그러한 표현을 방편(方便)으로 쓰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42분19초~63분5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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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권리가 높고, 아무리 학문이 높고, 아무리 기운이 세고,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하더라도 이 참나를 깨닫는 일만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와 모든 재산과 모든 힘과 모든 학식과 자기의 생명까지라도 바쳐서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정승이라 하드라도 이 문제는 해결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귀여운 아내, 얌전한 아내, 일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백년을 해로(偕老)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간 곳이 없으니, 삼천리 강토를 한 손에 움켜쥐고 호령을 했던 정승도 사랑하는 아내가 간 곳이 없어지자 살맛이 없어지고 정승도 다 팽개치고 그 아내를 찾어 나섰습니다.


거지와 마찬가지인 숯쟁이 홀애비 영감한테 정승에 부인을 빼앗길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리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재산도 그와 마찬가지요, 모든 명예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하라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호향차시(好向此時)하야 명자기(明自己)하라.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두상광음(頭上光陰)이 전두비(轉頭飛)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이때를 향해서 자기를 밝히라. 이때, 이때란 어느 때냐?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건강할 때—바쁘다 핑계 대지 말고, 아직은 시간이 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아들딸 키워 놓고 장가 보내 놓고 이러한 등등 핑계를 대지 말고.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병을 낫은 다음에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좀 더 부자가 되어가지고 하리라' 그러한 핑계도 대지 말고,

지금 이만큼 살 때, 이만큼 이만한 처지에서 바쁘면 바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당장 내일 일을 모르고 밤새 일을 모르고 한 시간 뒷일을 모르는 백지 한 장 밖을 내다보지 못한 우리의 입장에서 무엇을 믿고 뒤로 미루겠는가 이 말씀이여.


머리 위에 광음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시간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도업(道業)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장소는 앉아 있을 때는 바로 그 자리가, 서 있을 때는 그 자리가, 걸어갈 때는 그곳이, 차를 탈 때는 바로 그 차 안이, 변소에 앉았을 때는 변소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감옥이, 병원에 있는 사람은 병원이 바로 그때 그 자리가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날아가는 새 소리, 비행기 소리, 기차 소리, 자동차 소리, 까마귀 소리, 개 짖는 소리 하나도 빼 놓지 않고 고대로 전부 부처님에 설법입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 나에게 억울하게 욕하는 소리, 부처님에 설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믿고 이렇게 닦아가는 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여러분은 최상승법을 믿는 최상승 수행인이요, 불제자인 것입니다.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여러분은 이제부터서는 원망할 남편도 없고, 원망할 아내도 없고, 미워할 이웃도 없고 웬수도 없습니다. 어제까지 미웠던 사람도 이제부터서는 미워할 거리가 되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 앞에는 누구도 부처님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웬수도 이제부터서는 나로 하여금 참나를 깨닫게 해 주는 도반(道伴)이요, 관세음보살이요, 문수보살이요, 부처님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의 묘한 진리가 위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이렇게 말씀을 드린 이 말씀을 믿고 실천을 하지 아니하면 후생에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입니다.(63분56초~1시간14분3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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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연비산산공착영~' ; 『관음예문(觀音禮文)』에 나오는 게송.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연전(年前) ; 여러 해 전.

*엄동설한(嚴冬雪寒 혹독할 엄/겨울 동/눈 설/찰 한) ; 혹독하게[嚴] 추운 겨울[冬]에 눈[雪] 내린 뒤의 추위[寒].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행자(行者) : ①수행자. 불도(佛道)를 수행하는 사람 ②계(戒)를 받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절에 있으면서 여러 소임 밑에서 일을 돕고 있는 사람.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도인(道人) ; ①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깨달은 사람. ②불도(佛道)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

*'과거에 도인(道人)들은 공부할 때에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면서 잠을 깨고'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인추자자(引錐自刺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다)'에서.

昔 大愚 慈明 谷泉 琅瑯四人 結伴 參汾陽 時 河東 苦寒 衆人 憚之 唯慈明 志在於道 曉夕不怠 夜坐欲睡 引錐自刺 嘆曰 故人 爲生死事大 不食不寢 我又何人哉 而縱荒逸 生無益於時 死無聞於後 是自棄也 後嗣汾陽 道風 大振 號 西河師子


저 옛날, 대우(大愚), 자명(慈明), 곡천(谷泉), 낭야(琅瑯)등 4인이 도반을 맺고 분양(汾陽) 화상 회상에 지내는데 그때 하동(河東)은 매우 추운 때라 대중은 망설이는데 오직 자명은 뜻이 도에 있어 밤낮으로 힘써 정진하되,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제 몸을 찌르며 탄식하기를 "고인은 생사의 큰일을 위하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또한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때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이 없으니 이것은 내가 나를 버림에서라"하며 정진하더니 후에 분양 화상을 이어 도풍(道風)을 크게 떨쳐 '서하(西河)의 사자(獅子)'라고 불렸다.

*'밤에 잠시 잘 때에는 목침(木枕)을, 공과 같이 둥글둥글한 목침을 베고 잤던 것입니다' ; 『선관책진(禪關策進)』 (운서주굉 스님 지음) 「제조고공절략(諸祖苦功節略 조사들의 공부법)」의 '원침경수(圓枕警睡 둥근 목침으로 잠을 쫓다)'에서.

喆侍者 睡以圓木 爲枕 小睡則枕轉 覺而復起 率以爲常 或謂用心太過 答云我於般若 緣分 素薄 若不如此 恐爲妄習所牽


철(喆) 시자는 잠잘 때엔 둥근 나무토막을 베개로 자다가 좀 잠들면 곧 목침이 구르므로 잠을 깨고는 다시 일어나기를 일상으로 하였다. 혹 사람이 말하기를 "용심이 너무 지나치다"하면 답하기를 "나는 본래 반야에 연분이 박하니 만약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망습(妄習, 虛妄習氣 거짓되고 망령된 습기)에 끄달리까 두려워한다"하였다.

*'어떤 이는 평생 동안을 목침을 베지 아니하고 자기 팔을 꾸부려서 팔꿈치를 베고 일생을 지내는 그런 침굉 선사와 같은 도인도 있었던 것입니다' ; 조선 후기 침굉 현변(枕肱懸辯) 스님(1616~1684)을 말한다. '침굉(枕肱 팔뚝을 베고 잠)'이란 법호가 말해주듯 일생동안 팔꿈치를 베고 잠을 잔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님은 전라도 나주 사람이다. 자는 이눌(而訥)이고 법휘()는 현변(懸辯)이요, 속성(俗姓)은 윤씨(尹氏)이다. 12세 때에 보광(葆光) 법사를 따라 출가하여 장흥 천관산에 가서 불전을 공부하였다. 13세에는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를 방문하였는데 한번 보고서 탄복하였다.

지리산 연곡사, 조계산의 송광사와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교화를 펼쳤고 말년에는 금화산 징광사에서 지내다가 입적하였다. 장례를 행할 때 다비(茶毘)하지 말고 들판에 버리라는 것이 임종할 때의 유촉(遺囑)이었는데, 제자들은 금화산 둘째 봉우리 바위틈에 봉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95년에 간행한 시문집 『침굉집(枕肱集)』이 있다.

*혼침(昏沈 어두울 혼/잠길 침) ; ①정신이 미혹(迷惑)하고 흐리멍덩함. ②좌선할 때 정신이 맑지 못하여 잠에 빠지거나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 상태.

*무사안일(無事安逸 없을 무/일 사/편안할 안/한가할 일) ; 어떤 일[事]에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無] 편안(便安)하고 한가하게[逸]만 지내려는 태도.

*주야불철(晝夜不撤 낮 주/밤 야/아닐 불/거둘·철수할·그만둘 철) ; 불철주야(不撤晝夜). ①어떤 일을 함에 있어 밤낮[晝夜]을 가리지[撤] 않음[不]. ②밤낮없이.

*찰나간(刹那間 절·짧은시간 찰/어찌 나/사이 간) ;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비로서 죽음이고 이 몸뚱이가 죽은 뒤에사 바로 그때가 내생(來生)이 아니라, 한 생각 일어났다가 꺼지면 그때가 바로 내생이다.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염기염멸)을 謂之生死(위지생사)니 當生死之際(당생사지제)하야 須盡力提起話頭(수진력제기화두)호리니 話頭(화두)가 純一(순일)하면 起滅(기멸)이 卽盡(즉진)하리라

起滅卽盡處(기멸즉진처)를 謂之寂(위지적)이라하니 寂中(적중)에 無話頭(무화두)하면 謂之無記(위지무기)요 寂中(적중)에 不昧話頭(불매화두)하면 謂之靈(위지령)이라하나니 卽此空寂(즉차공적)과 靈知(영지)가 無壞無雜(무괴무잡)하야 如是用功(여시용공)하면 不日成之(불일성지)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生死)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話頭)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유위법(有爲法) ; 위(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고,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을 가지는 것.

①여러 인연(因緣)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또는 생성되어 변해 가는 모든 현상 및 존재(사물).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현상계의 일체의 사물. 인과 관계 위에 있는 존재.

②온갖 분별에 의해 인식 주관에 형성된 현상. 분별을 잇달아 일으키는 의식 작용에 의해 인식 주관에 드러난 차별 현상. 인식 주관의 망념으로 조작한 차별 현상.


유위법(有爲法)은 인연에 의하여 화합생성된 것이므로 생(生)도 있고 멸(滅)도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하고, 무위법(無爲法)은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는 절대적인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유루(有漏) ; ①누(漏)는 마음에서 더러움이 새어 나온다(漏泄 누설)는 뜻으로 '번뇌'를 말함. 번뇌의 더러움에 물든 마음 상태, 또는 그러한 세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차별이나 분별을 일으키는 마음 작용. ②생존에 집착하는 번뇌.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더글더글 ; (물체 따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마구 모이거나 겹쳐 있다.

*우물우물하다 ; 큰 벌레나 물고기 따위가 한군데에 많이 모여 자꾸 굼뜨게 움직이다.

*가물다 ; 땅에 물기가 바싹 마를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하여 비가 오지 않다.

*공안(公案) ; 화두(話頭)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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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했으면 이 꿀을 받아먹고 있는, 등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있겠느냐?」 ; 이 물음에 대한 전강 스님의 답, '달다!'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20~22.

그러면 여기서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하여 보자.

한 사람이 망망한 광야를 가는데 그 사람을 잡아 먹으려고 무서운 코끼리가 쫓아 따라오고 있다. 생사가 박두하여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보니, 언덕 밑에 우물이 있고 등나무 넝쿨이 우물 속으로 축 늘어져 있다. 그 사람은 등나무 넝쿨을 하나 붙들고 우물 속으로 내려갔다.


우물 밑바닥에는 독룡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고 또 우물 중턱의 사방을 돌아보니 네 마리의 뱀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할 수 없이 등나무 넝쿨을 생명줄로 삼고 우물 중간에 매달려 있으니 두 팔은 아파서 빠질려고 하고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그 등넝쿨을 쏠고 있다.

만일 등나무 넝쿨을 쥐가 쏠아서 끊어질 때라든지, 또 두 팔의 힘이 빠져서 아래로 떨어질 때는 독룡에게 잡혀 먹히는 수밖에 없다.


그때 머리를 들어서 위를 쳐다보니 등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에서 달콤한 꿀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네 방울, 다섯 방울… 이렇게 떨어져서 입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사람은 꿀을 받아 먹는 동안에 자기의 위태로운 경계도 모두 잊어버리고 황홀경에 도취되었다.


이것은 비유 설화인데 ‘한 사람’이란 생사고해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을 말한 것이요, ‘망망한 광야’는 생사광야인 육도윤회이고, ‘쫓아오는 코끼리’는 무상살귀(無常殺鬼)요, ‘우물’은 이 세상이고 ‘독룡’은 지옥이다. ‘네 마리 뱀’은 이 몸을 이룬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요, ‘등나무’는 무명수(無明樹)이고, ‘등나무 넝쿨’은 사람의 생명줄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일월이 교체하는 낮과 밤이요, ‘벌집의 꿀’은 소위 눈앞의 오욕락이란 것이니 재물과 색과 음식과 수면과 명예욕이다.


이것이 바로 생사고해에서 헤매는 중생을 비유하여 말한 설화이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중생들은 그 꿀방울에 애착하여 무상하고 위태로운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올라갈 수도 없고, 머무를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여기에서 어떻게 하면 뛰어나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안수정등’이라는 공안이다.


지금부터 약 45년 전 도봉산 망월사에 용성 스님이 조실로 계시었다. 그때 용성 스님께서는 제방선원에 “등나무 넝쿨에 매달려 꿀방울을 먹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였으면 살아가겠느냐?”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의 답은 “어젯밤 꿈 속의 일이니라(昨夜夢中事)”


혜봉 스님의 답은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지 못하느니라(佛不能更作佛)”


혜월 스님의 답은 “알래야 알 수 없고 모를래야 모를 수 없고 잡아 얻음이 분명(拈得分明)하니라”


용성 스님의 자답은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와 삼밭에 누었느니라.(瓢花穿籬出 臥在麻田上)”


보월 스님의 답은 “어느 때 우물에 들었던가(何時入井)”


고봉 스님의 답은 “아야, 아야” 하셨는데,


나, 전강은 답하되 “달다!” 하였으니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지어다.


*안수정등 기능장구(岸樹井藤 豈能長久) ;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참고] 『치문경훈(緇門警訓)』 《위산대원선사경책(潙山大圓禪師警策)》에서.

夫業繫受身 未免形累  稟父母之遺體 假衆緣而共成 雖乃四大扶持 常相違背 無常老病 不與人期  朝存夕亡 刹那異世 譬如春霜曉露 焂忽卽無 岸樹井藤 豈能長久 念念迅速  一刹那間 轉息 卽是來生 何乃晏然空過


대저 업(業)에 얽매여 받은 이 몸은 형상의 근심을 면치 못한다. 부모가 내려주신 유체(遺體, 父精母血)를 받아 여러 인연을 임시로 빌려 함께 이루었다.

비록 다만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 견디어내나 항상 서로 어기고 등져 무상(無常)하게 늙고 병들어 가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때를 정하여 약속하지 않아서,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죽어 찰나에 세상을 달리하게 된다.

비유하면 봄날의 서리, 새벽이슬과 같아 갑자기 없어지니, 언덕 위의 나무와 우물가의 등(藤)나무가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순간 순간 빠르고 빨라서 일찰나 사이에 숨이 떨어지면 곧 내생이니, 어찌 편안히 헛되게 지내리요.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무간(無間) ; ①곧. 즉시. 끊임없이. 끊어짐이 없음. 또는 중간에 끼이는 것이 없음. '무간'은 시간적으로 계속된다는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끼일 틈이 없다는 뜻. ②무간업(無間業)의 준말. ③무간지옥(無間地獄)의 준말.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위경(危境) ; 위태로운 처지나 지경.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인연(因緣) ; ①어떤 결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이 되는 인(因)과,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이 되는 연(緣).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직접 원인이나 내적 원인, 간접 원인이나 외적 원인 또는 조건을 통틀어 인(因) 또는 연(緣)이라 함. ②연기(緣起)와 같음.

*정승(政丞 정사 정/도울·정승 승) ; 조선 시대, 의정부(議政府 행정부의 최고 기관)의 수반(首班 행정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을 통틀어 이르는 말.

*부덕(婦德 아내·여자 부/덕·은혜·선행·행위 덕) ; 부녀자(婦女子 결혼한 여자와 성숙한 여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의 아름다운 덕행(德行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

*낙루(落淚 떨어질 낙/눈물 루) ; 눈물을 흘림. 또는 그 눈물.

*일장 설화(一場說話) ; 한바탕(크게 벌어진 한판)의 이야기.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생짜(生-) ; 아무런 근거나 조건도 없이 억지를 부리거나 강다짐을 하는 것을 낮잡아 이르는 말.

*내소박(內疏薄 안·부녀자·아내 내/멀어질 소/야박할 박) ; 아내가 남편을 박대(薄待)함.

*박대(薄待 엷을·야박할 박/대접할·대우할 대) ; 남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野薄] 대접(待接)함. 푸대접. 인정 없이 모질게 대함.

*의단독로(疑團獨露 의심할 의/덩어리 단/홀로·오로지 독/드러날 로) ; 공안,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의 덩어리[團]가 홀로[獨] 드러나다[露].

*적적성성(寂寂惺惺) ; 성성적적(惺惺寂寂). 온갖 번뇌 망상이 생멸하지 않고 마음이 고요[寂寂]하면서도 화두에 대한 의심이 또렷또렷[惺惺]한 상태.

*인과(因果) : 무엇이나 원인 없는 결과가 없고, 결과 없는 원인이 없다。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서, 이 세상의 온갖 일과 모든 물건이 반드시 인과의 법칙대로 되어 가는 것이다。사람의 일도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짓을 하면 재앙을 받아서 길(吉) • 흉(凶) • 화(禍) • 복(福)이 하나도 우연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보응(報應)의 나타남이 원인을 짓는 그 즉시로 곧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사람의 환경이 복잡하고, 마음 쓰는 것이 또한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되어, 짓는 그 당장에 받게 되는 순현보(順現報)와, 짓는 그 즉시에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순생보(順生報)와, 받기는 반드시 받되 언제 받게 될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가 있다.

이 세 가지 과보(果報)는 금생(今生) 안에 실현되기도 하고, 여러 생[多生]을 통하여 되기도 한다。그러므로 착한 사람이 빈천하거나,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따름이다.


*견성(見性) ;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性品)을 꿰뚫어 보아[見] 깨달음. 미혹을 깨뜨리고 자신의 청정한 본성을 간파하여 깨달음.

*내나 ; ①다름이 아니라. ②결국에 가서는.

*선객(禪客 참선 선/손님·사람 객) ; 참선 수행을 하는 사람.

*어한(禦寒 막을 어/찰 한) ; 추위를 막음. 또는 추위에 언 몸을 녹임.

*더덩캥이 ; 더뎅이(부스럼 딱지나 때 따위가 거듭 붙어서 된 조각).

*누데기 ; ‘누더기(누덕누덕 기운 헌 옷)’의 사투리.

*이[蝨] ; 몸길이 1~4밀리미터이고, 몸은 보통 편평한 방추형이다. 사람의 불결한 머리나 옷, 동물의 털 등에 붙어 살면서 번식하여 피를 빨아먹고 사는 해충이다. 피를 빨아 먹어서 몸을 가렵게 하는 외에 발진티푸스, 재귀열 등의 질병을 옮긴다.

*서카래 ; '서캐(이[蝨]의 알)'의 사투리. 서까래, 써까리, 서카리, 쌔기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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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감하다(惶感-- 두려워하다·당황하다·어찌할 바를 모르다 황/느끼다·감동하다·고맙게 여기다 감) ; 황송하고 감격스럽다.

*한바탕 ; 크게 한판(한 번 벌이는 판). 한판 크게.

*주먹탱이 ; 주먹(다섯 손가락을 모두 오무려 쥔 손)같이 둥글고 단단하게 한데 뭉쳐진 어떤 것.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봄꿈 ; ①봄날에 꾸는 꿈. ②한때의 덧없는 일이나 헛된 공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온갖 사물과 현상.

*진여불성(眞如佛性) ; 진여(眞如)인 불성(佛性).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불성(佛性) ; ①모든 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가능성. ②부처 그 자체. 깨달음 그 자체.

*자성(自性) ; ①사물 그 자체의 본성. 본성 ②본래부터 저절로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

*번뇌(煩惱 번거러울 번/괴로워할 뇌) ; ①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어지럽히고[煩亂, 煩勞, 煩擾] 괴롭혀 고뇌케[逼惱, 惱亂] 하므로 번뇌(煩惱)라 표현. 근원적 번뇌로서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 등이 있다.

②나라고 생각하는 사정에서 일어나는 나쁜 경향의 마음 작용. 곧 눈 앞의 고(苦)와 낙(樂)에 미(迷)하여 탐욕•진심(瞋心)•우치(愚癡)등에 의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 몸과 마음을 뇌란하는 정신 작용.

불교는 중생의 현실을 혹·업·고(惑·業·苦)의 삼도(三道)로 설명한다. 즉 번뇌[惑]에 의해 중생이 몸과 마음의 행위[身口意 三業]를 일으키게 되면, 이로써 3계 6도의 생사윤회에 속박되어 고통[苦]의 과보를 받게 된다.

*망상(妄想 망령될 망/생각 상) ; ①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하고 집착하는 의식의 작용. 분별(分別), 망상분별(妄想分別), 허망분별(虛妄分別), 망상전도(妄想顚倒) 등으로도 한역한다. ②이치에 맞지 아니한 망령(妄靈)된 생각[想]을 함, 또는 그 생각. 잘못된 생각. 진실하지 않은 것을 진실하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체달(體達 몸 체/통달할 달) ; ①몸[體]으로 직접 통달(通達)함. 몸소 경험하여 막힘이 없이 트이다. ②사물의 이치를 통달하여 깨달음.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 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생사대해(生死大海) ; '생사의 큰 바다[大海]' 중생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개의 세계—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중생이 생사유전하는 세계를 '큰 바다[大海]'에 비유함.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허공에 무슨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 공화(空花, 空華). 환(幻). 공안화(空眼花). 공중(空中)의 꽃. 눈의 장애로 말미암아 생기는 허공의 꽃.

실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으로, 관념을 실재하는 객관 대상으로, 고유한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번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망상(착각·환상·편견 등)을 말한다.

*구사리 ; 일본어 'くさり(쿠사리)'이며, '쇠사슬'이라는 뜻. 자전거 체인을 말한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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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로(偕老 함께 해/늙을 로) ;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며 늙음.

*(게송)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두상광음전두비(頭上光陰轉頭飛)' ; '좋이 이때를 향해서 참나를 밝힐지니라. 머리 위에 광음(光陰)이,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느니라'

[참고] 『선가귀감』 (서산대사 | 용화선원刊) p161 (가로판 p169) 게송 참고.

호향차시명자기(好向此時明自己) 백년광영전두비(百年光影轉頭非)

‘당장 이때에 마음을 애써 밝히소,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글러지느니’

*광음(光陰 빛 광/응달 음) ; 햇빛[光]과 그늘[陰],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의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불회상(佛會上) ; 부처님(佛)의 회상(會上). 부처님 계시는 곳.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게송) ‘금생약불종사어(今生若不從斯語)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게송.

勸汝慇懃修善道  速成佛果濟迷倫  今生若不從斯語  後世當然恨萬端

너에게 도 닦기를 은근히 권하노니, 어서 빨리 불과(佛果) 이뤄 미혹 중생 건지어라. 금생에 만일 이 말을 안 따르면,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 갈래나 되리라.

*만단(萬端) ; 수없이 많은 갈래.




[법문 내용]


(게송)연비산산공착영~ / 대흥사 고시생의 공부 모습 / 과거 도인(道人)들의 정진 모습[선관책진(禪關策進)].

(게송)찰나생멸무상법 ~ /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진 것이 생사 / 안수정등 기능장구 /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

자작자수(自作自受) / 숯쟁이 영감. 인간의 인연에 우연은 없다 / 우리 인생은 꿈이로되 현실. 꿈과 현실은 분명히 둘이지만 하나 / 삼라만상(일체법)은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 / 생사는 본래 없다.

지금 이만할 때 자기를 밝히라. 이런저런 핑계 대고 미루지 말라 /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팔만대장경,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



오욕락(五慾樂), 재산 · 색욕 · 식욕 · 명예 · 권리, 또 수면 · 안락 이런 것이 다섯 가지 인생의 즐거움인데, 그 오욕락에 팔려서 그 재미 보느라고 일초일초 죽음을 향해서 쫓기고 있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망각한 채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했으면 칡넝쿨에 매달려 있는,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 사람이 살아 갈수가 있느냐?


여름 웅뎅이에 물 마른 데 퍼드덕거리고 있는 우글대고 있는 송사리 떼와 같은 신세, 칡넝쿨에 매달려서 꿀을 받아먹고 있는 그러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해서 이러한 위경(危境)을 뼈아프게 느끼고서 어서 속히 부지런히 참선(參禪)을 해 가지고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경지를 얻을지니라.


분명 허망한 줄 알면서 충실히 다 처리를 해야 하고, 충실히 하면서 동시에 허망한 줄을 아는 사람, 이것이 바로 불자로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허망한 거 내놓고 진실한 것이 없고, 실다운 것 내놓고 허망한 것이 무상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속에 모든 인간 관계, 모든 현상 이것이 진여불성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요, 진여불성을 뿌리로 해서 뻗어난 가지요, 잎이요, 꽃이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지와 잎, 줄기를 더듬어서 뿌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망상 그것 때문에 우리가 윤회를 하고, 그것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은 생사(生死)를 버리고 열반(涅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생사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생사(生死)지, 참나를 깨닫고 보면 「생사는 본래 없었던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 눈에 비친 생사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고대로 열반의 도리요, 열반의 소식이요, 이 생사의 대해(大海)가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로 변하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에게는 가장 무서운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꿈에 본 독사와 같은 것이지만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무섭기가 생시(生時)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눈병을 고쳐야 하고 꿈을 깨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을 열심히 해 가지고 참나를 깨달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이 한 일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법계에 가득차 계신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바로 부처님 품안이요, 부처님 손바닥인 것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은 어디나 법당이요, 우주법계가 부처님이 꽉 차 계신다면 우주법계 · 허공계 · 육도법계는 온전히 바로 거기가 법당이요, 불회상(佛會上)인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곳은 우주법계 전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체가 대화엄경이요, 대열반경이요, 법화경이요, 금강경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온갖 소리는 다 부처님에 설법(說法)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