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51~175)2020. 12. 13. 12:48

((No.155))—1981년 12월 첫째일요법회(81.12.06) (46분)

(1/3) 약 17분. (2/3) 약 17분. (3/3) 약 12분.

(1/3)----------------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어느 때에는 묘고봉(妙高峯), 저 수미산 꼭대기,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 이 수미산(須彌山)인데 그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라. 불현듯 염라전(閻羅殿)에,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에 와서 떠억 단정히 앉었더라 그말이여.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인간(人間)에 모든 것을 다 두루 다 보아 다하고서 다못 고개만을 꺼떡꺼떡 허니 점두(點頭)를 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손이 천이나 되고 눈이 천이나 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그 대비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方便)도 많더라.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진리를 깨달은, 진리와 하나가 된 불보살(佛菩薩)은 때로는 중생이 이르지 못하는, 사량분별로 수긍할 수 없는 저 수미산 꼭대기에 가서 홀로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육도,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는 그 육도(六道) 속에서 최악의 죄를 범하고 헤어날 기약이 없는 죄 많은 악한 중생(衆生)들이 고(苦)를 받고 있는 염라국에 와서 떠억 앉어 있다.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가엽고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그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중생이 그 갖인 고를 받으면서 신음을 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도 같이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것이 바로 불보살에 행화(行化)인 것입니다. 불보살의 행리(行履)인 것입니다.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때로는 수미산 꼭대기에서 저 무간지옥(無間地獄)에까지,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근본성품(根本性品)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금방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마치 전기가 나가서 상태가 좋덜 못해가지고 법문의 내용을 잘 알아듣기가 어려우셨을 줄 생각합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떠한 분은, '그렇게 잘 들리지 않는 법문을 아무리 틀어 보았자 그 청중(聽衆)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차라리 그렇게 잘 들리지 아니한 법문을 틀기보다는 다믄 한마디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여러 분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회(法會)가 열릴 때에는 꼭 조실스님의 법문을 한 편씩 듣는 것은 그럴만한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입으로 설할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심(思量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설할 수 있는 법(法), 귀로 들을 수 있는 법, 사량분별심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라면 벌써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 내용을 우리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잘 알아듣고 고개를 꺼떡꺼떡하고 이렇게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벌써 조실스님의 참법을 옳게 알아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분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법문은 뭣허러 들을 것이냐? 또 입으로 설할 수도 없다면은 뭣허러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說)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 많은 법어(法語)를 남기시고, 또 오늘 이 송담(松潭)은 뭣허러 법상에 올라가서 입을 열고 있느냐?’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법은 입으로 가히 설할 수 없으되 눈썹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도리를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어떠한 일이 있고 일이 바쁘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다 물리치고, 백사(百事)를 다 물리치고 이 법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說)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백사(百事)를 물리치고 이 법을 들어야 한 까닭은 무엇이냐?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찾는 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진리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여지없이 여러분 앞에 확! 헤쳐 놓았습니다. 중생에 분별망상(分別妄想)을 통해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놈을 여의고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智慧)의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이 정법(正法)에 조그마한 인연(因緣)이라도 있는 분이면 이렇게 말씀드린 이 말씀의 근본 의도를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호소를 하신 분이 있는데,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무엇고?'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망상, 일어나는 망상을 없애려고 하거나, 누르려고 하거나, 쫓으려고 하면 그 ‘쫓으려고 하는 또 하나의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때문에 벌써 한 생각 딴생각,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공부의 길에서는 천만리(千萬里) 멀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의 업식(業識), 업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천만 가지 번뇌망상이, 깨달은 분에게는 그 망상이 바로, 업식(業識)이 바로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을,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것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떡! 화두(話頭)를 들으면 그것이 바로 망상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처음~16분58초)





(2/3)----------------


물거품, 물거품을 없애려고 물을 따둑거린다든지, 그 물거품을 미웁다고 몽둥이로 그 물거품을 친다든지 하면 또 다른 물거품이, 훨씬 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거품이라 하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요, 원래 있는 것은 물 자체인 것입니다.


물거품을 없애려고 하다가 더 많은 물거품을 생기게 한 거와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망상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건마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스럽고 너무 가볍고 너무 맑고 깨끗한 것이어서, 때로는 선(善)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악(惡)으로도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는 보고 귀를 통해서는 듣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말을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영롱하게, 신령스럽게 그것은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으로 메아리치고 물결이 치는 것입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한 개 던지면 그 조그만한 돌 한 개로 인해서 수천만 개의 파도가 일어나듯이, 똥그라미가 퍼져서 저-쪽 호수 가에까지 번져 나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애서 한 생각에 천만 가지의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파도를 없애려고 그걸 물에다가 손을 대거나 물체를 갖다가 대면 거기서 또 다른 파도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파도를 통해서 물에 본질(本質), 물에 본성(本性)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일어나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번뇌망상 속에서 그 번뇌망상이 원인이 되어서 번져 가는 우리의 생사, 육도(六道)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이 대단히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 내용을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웠었지만, 그 법문 설하신 요지(要旨)는 바로 그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생사 없는 진리를 내 마음에 구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간곡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지끔 이 송담(松潭)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이 무엇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매일같이 속상하는 일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신상(一身上) 문제, 가정 문제, 사회 문제, 회사 문제, 보고 듣는 것 생각되는 것이 기쁜 일도 간혹 있지만 거개(擧皆)가 나로 하여금 괴롭게 하는,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한 수없는 일들이 내 앞에 제출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내일 하루를 또 그렇게 지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보고 지혜롭게 판단해서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이고, 현실 사회에서 결국은 패병(敗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될 수 있으면 빨리 그 속상하는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속상한 일로 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서 큰일을 그르치게 되고 자기의 앞길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설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한 걸음 건너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면 얼마 안 가서 이 최상승법이 그렇게 요긴하고 위대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동안 설(說)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여. 팔만대장경 그 많은 법문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지만 우리가 그 경책(經冊)을, 한문으로 된 경책을 갖다가 읽어 봐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근자(近者)에 번역된 경전이 나오고 있지만 번역된 경전을 읽어 봐도 읽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또 그만인 것입니다.

그 많은 경전 속에 가장 핵심, 핵심적인 것. 그 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대도사들. 그 대종사(大宗師)에 지도를 통해서 가장 쉬웁게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어떠한 근심이 일어나건 노여움이 있거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변(變)하기 전(前)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무엇고?’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해서, '뭐 그러한 것이 최상승법이요, 그걸 뭐 불법(佛法)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

쉬웁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운 지옥고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을 갖다가, 그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이 뭣고?’ 한마디로써 팔만사천의 마구니를 다 항복 받을 수가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煩惱)를 극복할 수가 있고,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뭣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많은 좋다고 하는 경전을 읽고 해석을 할 줄 아신 분이 계시겠습니다마는, 불법(佛法)은 많이 알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을 비워 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그 경을 옳게 이해한다면 많이 머릿속에 외워서 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 버리는 거여. 비움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용화사 이 법보전(法寶殿)에서는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법을 전강 조실스님 계실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宣揚)을 하고 있습니다.


‘이 뭣고?’

그다음에는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하는, 지금 이뭣고 할 때에 ‘이-’ 하고 있는 이 「‘이-’ 하는 이놈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꽉 맥힌 그 의심(疑心), 의관(疑觀), ...(녹음 끊김) ...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진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려 나가면,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해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어 나가면, 묘하게도 화두(話頭)를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 나가면 여간 걱정될 만한 일을 당해도 조끔도 당황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이 동요(動搖)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침착해지고 아량(雅量)이 생기고, 그렇게 그전에는 미웠던 사람도 별로 미운 생각이 없고, 마음이 담담(淡淡)하게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담담해지고 아량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면은 얼마나 세상 살아가기가 좋겠습니까. 내 한 사람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나의 집안은 또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마음가짐이 된 사람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있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동료들도 얼마나 대하기가 좋겠느냐.(16분59초~33분33초)





(3/3)----------------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느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육도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여의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편해야 가정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해야 직장에 가서도 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불안하고 내 마음 하나가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안정이 안 되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편안틀 못하고 풍파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이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만히 훌륭하게 하려면 첫째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제절로 잘되어 갈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문명이 발달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거침없이 모든 일에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근본인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이 세상을 살기 좋고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공부밖에는 없다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목탁을 세 번 치고...(녹음 끊김)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요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어차선참상(若能於此善參詳)하면  육육종래삼십육(六六從來三十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여. 중(僧)은 이 중이고 속인(俗人)은 이 속인이다. 어찌 스님을 갖다가 속(俗)이라 하고 또 속인을 갖다 스님이라 할 것이냐 이 말이여.

기쁘면 웃어야지 기쁜데 웃지 아니하고, 슬프면 울어야지 울지 않고 웃고, 이래서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여.


‘아휴, 오늘 내가 용화사에 가서 최상승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니까 나는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오늘부터서 인자 나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여. 남편도 소용없고, 가정도 소용없고,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울지도 않고, 누구 기쁜 일이 있어도 따라서 웃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간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산을 깎어서 못을 메움으로써 그래가지고 산을 없애 가지고 깊은 구렝이(골짜기)에다가 메워 가지고 평지(平地)를 만듦으로써 평등(平等)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최상승법을 옳게 이해한 사람은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을 줄을 알아야 돼.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각기 자기(自己)에게 주어진 책임(責任)을 충실(忠實)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여.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參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공부를 지어나갈 줄 알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니라. 육(六)에다 육(六)을 곱하면 그 삼십육(三十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댁에 가실 때, 댁에 가셔서 생활할 때, 또 내일 직장에 나가실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행해 나가시면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어쩌다가 금생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생각할수록 다행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33분35초~45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유시독립묘고봉~ /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 불보살에 행화(行化), 행리(行履) / 중생의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다 / 이 최상승법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다 /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 /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함 /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선법, 최상승법,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로써 번뇌를 돌이켜서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다.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내 마음 · 가정 · 사회 · 세상이 살기 좋은 편안한 곳이 된다 / (게송)승시승혜속시속~ /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히 입으로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이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법을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위법망구적으로 법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은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쉽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쉽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우리로 하여금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과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뭣고?’ 한마디로써,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經)을 옳게 이해한다면, 머릿속에 많이 외워서 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참나를 깨닫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 · 직장 ·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와 인내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 ·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을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로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저절로 원만히 훌륭하게 잘 되어질 것입니다.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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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