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00/(151~175)2021. 5. 25. 22:15

 

 

((No.160))—1982년 신수기도 회향 법문(82.2.2) (52분)

 

 

(1/3) 약 20분.

 

(2/3) 약 15분.

 

(3/3) 약 17분.

 



(1/3)----------------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하야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요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라.
하늘에 한 달이 중천에 뜨면 천강동일월(千江同一月)이여, 일천 강에 그 한 가지 달이 비치더라.

종일주홍진(終日走紅塵)타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종일토록 홍진(紅塵) 세계, 탐진치 삼독(三毒)으로 오욕락(五欲樂)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달음박질치다가, 실각자가진(失却自家珍)이로구나. 자기집 보배를 잃어버리고 마는구나.

온 우주법계는 비로자나 법신(毘盧遮那法身)의 몸이요, 따라서 우리 깨닫지 못한 중생들도 고대로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 삼신(三身)이 고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가 바로 법신이요, 우리의 마음자리가 법신이요, 우리의 행동이 고대로 보신입니다. 마치 하늘에 둥근달이 하나 떠 있으면 일천 강물에 달그림자가 비추듯이, 법계(法界)에 가득차 있는 모든 중생 두두물물(頭頭物物)에 이르기까지 그 달이 비치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호진봉춘(萬戶盡逢春)이로구나. 가난한 집이나 부잣집이나, 권리와 명예가 있는 집이나, 미천한 집이나 어느 집을 막론하고 봄이 돌아오면 다 따뜻한 봄기운을 봄바람을 받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진치와 오욕락을 구하기 위해서 동서남북으로 바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마냥 가난하고 천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가지고 동분서주하다가, 원래 자기집에 평생 먹고 쓰고 남을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이리저리 설치는 동안에 자기집에 있는 보물은 도둑을 맞아 버리게 된다.(失却自家珍)


오늘은 임술년 정초에 신수기도 회향일입니다. 초삼일(初三日)부터 시작해서 오늘 9일날 회향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기도에 모다 동참을 하셔서 하루 4분정진(四分精進)을 해 왔습니다.
모다 바쁘신 가운데에도 이 기도에 오셔서 직접 정근(精勤)을 하신 분도 많이 계셨습니다. 바뻐서 또 못 나오신 분은 댁에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일주일간을 기도를 하셨을 줄 생각을 합니다.

기도는 첫째 청정한 마음, 정직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이 세 가지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만 기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한결같이 청정하고 정직하고 지성(至誠)스러운 마음으로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소원을 성취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기도는 첫째,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입니다.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데,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무량공덕을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모든 지혜와 모든 복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마음 한 생각 내시면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성취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량겁 업장(業障)이, 업이 있어서 그 업의 장애를 받아 가지고 우리의 소원이 바로바로 성취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러한 업장이 소멸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이나 또는 일주일이나 또는 삼칠일 또는 백일 이렇게 날짜를 정해 놓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그리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은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취가 되느냐, 안 되느냐는 두고 봐야 알겠다. 이번에 기도를 했으니까 그것이 성취가 될는지 안 될는지 두고 봐야 알겠다’ 혹 그렇게 생각하시고 계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기도는 ‘기도를 지금 해 가지고 앞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 근본에 있어서는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어떠한 서류를 관청에다가 신청서를 내서 관청에서는 이미 다 결재(決裁)가 떨어졌으되 본인에게 그 통지가 오는 것은 시일이 걸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미 내용적으로는 결재가 다 나서 성취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통지문이 도달할 때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여러분이 기도한 것은 이미 다 결재가 떨어져서 성취가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그랬다고 해서 우리의 할 일이 다 없어진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는 할 일이 계속해서 있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을 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새로 업(業)을 짓지 아니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간 기도를 해서 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마음이 됨으로 해서 조그마한 소원을 이룰 수가 있겠지만 앞으로 우리에게는 큰 소원과 작은 소원들이 끊임없이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소원들, 앞으로 다가올 모든 일들이 차례차례로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게 할려면 새로운 업을 짓지 아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새로운 업(業)을 짓지 않게 되느냐?

‘업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행동으로 살생을 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행동으로 사음을 범하고, 행동으로 거짓말을 하고, 보통 다 이러한 그 나타나는—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죄를 짓는다, 업을 짓는다’ 이리 생각을 하지만, 물론 그런 행동으로 짓는 업이 업 짓는 것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업(業)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어떠한 행동도 마음으로 먼저 마음에서 일어나 가지고 그것이 얼굴로 나타나고, 언어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진즉 지어놓은 것이 얼마 동안의 시간을 거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화재가 날 때, 불은 몇 분 전에 불이 붙어 가지고 벌벌 타들어 가면 차츰차츰 그 불이 번져서 저 먼 데에서도 불꽃이 보이고 연기가 보일라면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연기와 불꽃이 보이기 전에 이미 불은 붙어서 타들어 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동으로 죄를 짓는 것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학자는 연기와 불꽃이 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한 생각' 딱! 일어날려고 할 때 거기에서 처리를 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불이 번져서 훨훨 타고 있을 때에는 소방대 차가 동원이 되어 가지고서도 끄기가 어렵고 이미 그때는 많은 가산(家産)을 다 태우고 집을 태우고 사람을 태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때에사 끌려고 할 것이 아니라, 불이 맨 처음에 조그마한 성냥불이나 담뱃불로부터서 불이 붙자마자 그때에는 손바닥으로 꺼도 꺼지는 것입니다. 발로 살짝 밟아 버리기만 해도 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종류의 죄(罪)도 한 생각 일어나려고 하는 그 찰나에 딱! 조치를 해 버리면 간단하게 죄짓는 것을 미연에 해결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법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참선법(參禪法)이 아니고서는 이것은 아니 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찰나에 그 일어난 그 생각이 커지기 전에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돌이켜 관조(觀照)하면 자취 없이 소멸되고 말아버린 것입니다.
이 화두로써 모든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소멸시켜 버리는 이 법은 그동안에 참선을 해보신 분이면 너무너무 요긴하고 고맙고 미묘하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줄 생각을 합니다. 이 참선은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죄를 짓지 아니하는데 가장 묘한 방법인 것입니다.

많은 죄를 지어서 그 죄가 자기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치고, 남을 망치고 사회 국가를 망치고 그렇게 된 뒤에사 그것을 소멸을 하기 위해서 용맹정근을 하고 기도를 하고—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우리 최상승 학자는 지나간 업(業)은 기도를 통해서 하려니와 앞으로 새로 짓지 않는 방법으로는 참선(參禪)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요긴한 법이라 하는 것을 명심을 하시기를 바랍니다.(처음~20분16초)





(2/3)----------------

세속에 살려면 아들딸들이 잘 자라고 공부를 잘하고 좋은 학교에 입학을 해야 되겠고, 사업도 잘되어서 돈도 잘 벌어야 되겠고, 직장에 직책도 자꾸 위로 승진을 해야만 되겠고, 아들딸들이 좋은 배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줘야 되겠고 이러한 등등 수많은 크고 작은 원(願)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원을 성취해야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렇게 열이면 열, 다 성취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과 모든 성현께 간절히 소원을 해서 그런 성현의 가피(加被)를 입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겠습니다.

「잘되면 제 공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이라고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면 핑계를 꼭 외부에다 대고 다른 사람한테 그 원인을 책임을 전가(轉嫁)합니다마는, 모든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하고 모든 원인은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이해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책망(責望)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요 욕심입니다마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또는 모든 성현들은 꼭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된 것만이 좋다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중생들은 호강하고 부귀하게 잘살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고 이럴 때에는 즐거움에 빠져서 게을러지고 오만해지고 거만해지고 남을 업신여기게 되고 성현을 존경하지 않게 되고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아니하고 어떠한 종교에 대한 신앙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금생에 자기가 똑똑하고 잘나서 그렇게 부자로 사는 줄 알지만 원인을 알고 보면 전생에 조금 복(福) 지어 놓은 것이 있어서, 전생에 복을 지어서 예금해 놓은 것이 있어서 그놈 빼먹느라고 좀 남부럽지 않게 잘사는 것이지 그거 곶감 빼먹듯이 다 빼먹고 나면 별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남부럽지 않게 좀 잘살고 호강하고 산다고 해서 조금도 남을 업신여기고 뽐내고 으시댈 만한 거리가 되지를 못한 것입니다. 잘살아 봤자 잠깐동안 꿈꾼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높은 벼슬과 권리를 가지고 큰소리를 쳐봤자 잠깐 그러다 마는 것입니다. 불과 10년 20년이요, 몇 해 안 가면 다 그런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그런 허망한 것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돈이 없고 가난하고 사업을 해도 잘 안되고 모든 일이 뜻과 같이 되지 않아서 너무너무 속을 상하고 근심걱정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별로 그렇게 걱정할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대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을 해 가면서 참고 견디다 보면 차츰 일이 풀려나가면서 또 돈을 벌게도 되고 남부럽지 않게 살 날이 또 돌아오고 마는 것입니다.


지난 삼동(三冬) 대단히 추웠습니다. 그렇게 추워서 너무너무 추워서 이렇게 계속해서 추우면 얼어죽을 것 같지만 벌써 새해를 맞이해서 모레면 임술년 입춘(入春)을 또 맞이하게 됩니다.
‘입춘이 지나고 우수(雨水)가 돌아오면 대동강 물도 다 풀린다’ 그럽니다마는, 언제 어떻게 풀린 줄 모르게 동풍(東風)이 불어오고 화신(花信)이 전해오면 여기저기 또 진달래가 피고 산에 산에는 개나리가 벌겋게 피게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스럽다 하더라도 정법(正法)을 믿고 ‘이뭣고?’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착실하게 보람있게 살아가노라면 금방 봄소식과 함께 우리의 가정에도 하나씩 둘씩 우리의 소원대로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생은 어피차 꿈과 같은 것이라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살아도 꿈이요 못살아도 꿈이요, 허망한 꿈이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허망한 속에서 허망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속에서 진실한 것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피와 오줌과 고름, 이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추(醜)한 것들로 구성이 되었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主宰)하는 마음자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이 깊고, 산과 같이 동(動)함이 없는 그러한 굳은 신심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굳은 신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큰 소원은 의심 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것이며, 세속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소원들도 어김없이 성취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귀(豪貴)에 득도난(得道難)이라, 호강하고 귀한 데에서는 도를 얻기가 어렵다’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선 배부르고 등 뜨시고, 호강하고 귀하니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구태여 신심도... (녹음 끊김) ...견성성불이니 하나도 필요로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벌집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는 그 꿀방울을 빨아먹는 동안에는 꿀의 단맛에 취해 가지고, 시시각각으로 자기가 매달려 있는 그 칡덩쿨이 흰 쥐, 검은 쥐에 의해서 계속 끊겨 들어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이고, 그 줄이 끊어지면 천길만길 우물 바닥에 떨어지면 그 우물 속에서는 독룡과 독사가 입을 벌리고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도 망각한 채 꿀물만을 빨아먹고 있는 그러한 형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오히려 도 닦을 마음을 발(發)하는 수가 많다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뭔 일이 잘될 때보다는 우리의 마음대로 잘되지 아니하고 정신적인 육체적인 물심양면으로 장애에 부딪치고 내 뜻과 같이 아니 될 때, 그때 발심(發心)해서 정법을 굳게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삼는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최상승법에 깊은 큰 인연을 심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모든 부귀와 호강을 갖추면서도 그러한 데에 빠지지 아니하고 겸허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실천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함정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좋은 일에도 지옥의 함정은 있고, 나쁜 일에도 지옥의 함정은 있고, 동서남북 멀고 가까운 모든 곳에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함정도 있고 천당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도 있습니다.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곳에 바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최상승법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20분17초~35분09초)





(3/3)----------------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헌디  석양재오서(夕陽在吾西)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요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귀래좌허실(歸來坐虛室)하니, 산으로 들로 가시밭길로 물로 동서사방으로 타향 객지(客地)로 돌아치다가 집으로 돌아와 텅 빈방에 앉았으니,
석양(夕陽)은 재오서(在吾西)로구나. 석양의 해, 저 서산 너머로 해는 여울여울 넘어가고 있구나.

무량겁을 두고 육도윤회를 하면서 오늘에 이르는 것이 바로 고향을 떠나서 타관(他官) 객지로 갖은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면서 돌아다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겨우 금생에 이 불법을 만나서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돌아왔는데 해는 서쪽에 서산에 걸쳐 있구나.
벌써 나이 들고 몸은 늙어서 기운이 없고, 생각뿐이요 공부를 할려고 하면 자꾸 허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쑤시고 몸이 말을 안 듣고 자꾸 졸리고 온갖 망상은 퍼일어나고.

그러나 수류원입해(水流元入海)요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이여.
물은 흘러서 흘러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고, 아무리 그 달이 천 개, 만 개의 물에 달이 떨어져 비추되 원래 그 달은 하늘을 여의고 떨어진 것이 아니더라.

아무리 죄가 많고, 아무리 육도윤회를 하고 갖은 업(業)을 짓고 고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법을 만나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고 잡드리해 가면 결국은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고 말더라.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조그마한 물줄기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흘르고 흘르면 차츰 강물에 도달하고 작은 강에서 큰 강으로, 큰 강에서 마침내는 바다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여.

월낙불리천(月落不離天), 하늘에 비친 달이 천 개, 만 개의 물에 비춘다 해서 그 하늘의 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요, 작아지는 것도 아니요, 광명이 줄어든 것도 아니여. 언제나 하늘에 있는 달은 고대로 있는 것이여.
달이 설사 떨어져 안 보인다 하더라도 하늘에서 떨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눈에서 보이지 아니할 따름인 것처럼, 중생의 육도윤회, 일념지간(一念之間)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 있는 그 번뇌망상 속에서도 조금도 물들지 아니하고 변함이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자리.
우리는 그 도리를 보고 깨달아 증득하기 위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허수히 보내지 말고, 허수히 하지 말고 그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할 따름인 것입니다.

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1분 동안 화두를 단속해서 화두를 들면 1분 동안에 성불(成佛)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한 생각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기도 회향날입니다. 기도 회향날이기 때문에 아까 녹음법문(錄音法門)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순수한 최상승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참으로 업장(業障)을 소멸할 수가 없고, 최상승법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크고 작은 소원을 가장 빨리 소원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할 것도 못되고, 그걸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마음 상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큰 호랑이나 코끼리를 잡으러 가는 포수(砲手)가 토끼 한 마리, 무슨 여우 한 마리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건 아니하건, 돈이 많건 적건, 얼굴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조금도 우리는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서 조금도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야코죽을 것도 없습니다. 든든한 마음, 의젓한 마음, 느긋한 마음으로 긍지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모든 문제를 화두로써 해결할려고 노력을 해야만 훌륭한 혈통을 가진 사람답다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월수벽산전(月隨碧山轉)헌디  수합청천류(水合靑天流)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풍화난자취(風花亂紫翠)헌디  운외유연림(雲外有煙林)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월수벽산전(月隨碧山轉)이요  수합청천류(水合靑天流)로구나.
달은 푸른 산을 따라서 돌아가고, 저 푸른 산 너머로 돌아 넘어가고,
수합청천류(水合靑天流)로구나. 물은 저 흐르는 물은 푸른 하늘과 딱 합해져서 흐르는구나. 여러분이 큰 강물이나 큰 바닷물을 보면 저 끝이 하늘과 딱 닿아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풍화난자취(風花亂紫翠)헌데, 바람에, 하늘거리는 봄바람에 피는 꽃은 붉고 푸르게 울긋불긋 피어 있는데,
운외(雲外)에 유연림(有煙林)이로구나. 저 구름 밖에는 안개 낀 숲이 있구나.

일 년을 살아가시되 기쁜 일도 있을 것이고 또 걱정스러운 일도 있을 것이고 슬픈 일도 있을 것입니다. 기쁜 일을 만나도 ‘이뭣고?’를 생각하고, 슬픈 일을 만나도 ‘이뭣고?’를 생각하십시오.

‘이뭣고?’가 퍼뜩 돌아오지 아니하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 현 대웅전)에서 들은 법문을 생각내고, 용화사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 모습을 생각하시고 또 이 송담(松潭)이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드리고 있는 그 모습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여러분이 그 슬픔과 괴로움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반드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35분10초~51분42초)(끝)





[법문 내용]

(게송)천강동일월~ / 신수기도 / 기도는 청정한 마음, 정직한 마음, 정성스러운 마음, 이 세 가지 마음으로 해야만 기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 / 기도는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된다 / 기도는 ‘기도를 지금 해 가지고 앞으로 성취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기도할 때 이미 성취가 되었다’고 생각을 하셔야 한다 /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 것이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

업(業)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는 학자는 '한 생각' 딱! 일어날려고 할 때 거기에서 처리를 해 버려야 한다 / 무슨 생각이든지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그 찰나에 그 일어난 생각이 커지기 전에 ‘이뭣고?’ 이렇게 화두를 돌이켜 관조(觀照)하면 자취 없이 소멸된다 / 참선은 죄를 미연에 방지하고 따라서 앞으로 새로운 죄를 짓지 아니하는 가장 묘한 방법.

「잘되면 제 공덕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 이라고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전적으로 자기에게 원인이 있는 것 /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 /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호귀(豪貴)에 득도난(得道難)이라, 호강하고 귀한 데에서는 도를 얻기가 어렵다’ /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오히려 도 닦을 마음을 발(發)하는 수가 많다 / 안수정등 /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곳에 바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거기에 있다고 하는 것을 이 최상승법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송)귀래좌허실~ / 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 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건 적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 (게송)월수벽산전~.


기도는 첫째, 업장소멸(業障消滅)하는 것입니다. 업장을 소멸해야 소원을 이루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부처님의 마음인데, 부처님께서는 팔만사천 무량공덕을 다 성취하셨기 때문에, 모든 지혜와 모든 복덕을 성취하셨기 때문에 마음 한 생각 내시면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 성취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러한 진여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량겁 업장(業障)이, 업이 있어서 그 업의 장애를 받아 가지고 우리의 소원이 바로바로 성취가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 그러한 업장이 소멸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일이나 또는 일주일이나 또는 삼칠일 또는 백일 이렇게 날짜를 정해 놓고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그리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은 소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소원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가 달성해야 할 큰 목적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해서 지혜의 눈을 떠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받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큰 목적을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을 해 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피차 꿈과 같은 것이라고 과거에 모든 성현들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잘살아도 꿈이요 못살아도 꿈이요, 허망한 꿈이지만 정법을 믿는 사람은 그 허망한 속에서 허망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하고 허망한 속에서 진실한 것을 발견을 하게 됩니다. 허망한 일생 동안을 영원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최상승법입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피와 오줌과 고름, 이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추(醜)한 것들로 구성이 되었지만 이 몸뚱이를 주재(主宰)하는 마음자리는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의 그것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정법을 믿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올바르게 그리고 간절하게 다져나가면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이 가득차 있는 이 추한 육신(肉身)이 진리의 법신(法身)으로 대광명(大光明)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신심(信心)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이 깊고, 산과 같이 동(動)함이 없는 그러한 굳은 신심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굳은 신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큰 소원은 의심 없이 이룰 수가 있는 것이며, 세속에 있어서의 조그마한 소원들도 어김없이 성취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아무리 육도윤회를 하고 갖은 업(業)을 짓고 고생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정법을 만나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團束)하고 잡드리해 가면 결국은 깨달음의 바다에 들어가고 말더라.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조그마한 물줄기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흘르고 흘르면 차츰 강물에 도달하고 작은 강에서 큰 강으로, 큰 강에서 마침내는 바다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여.

1초 동안 화두를 들면 1초 동안에 부처님이다. 1분 동안 화두를 단속해서 화두를 들면 1분 동안에 성불(成佛)이다. 하루를 여법(如法)하게 단속을 하고 정진을 하면 하루 동안에 성불이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쏜살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한 생각 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바로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그 엄청난 사실을 우리는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죄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벼슬을 하건 아니하건, 돈이 많건 적건, 얼굴이 잘생기건 못생기건, 지식이 있고 없건, 나이가 많고 적건, 무슨 직업을 가졌건 전혀 그런 것에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가장 훌륭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최상승 불자(佛子)인 것입니다.

조금도 우리는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세속적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해서 조금도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야코죽을 것도 없습니다. 든든한 마음, 의젓한 마음, 느긋한 마음으로 긍지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도 화두를 놓치지 말고, 모든 문제를 화두로써 해결할려고 노력을 해야만 훌륭한 혈통을 가진 사람답다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1. 2. 21. 20:29

 

 

((No.170))—1982년(임술년) 하안거결제 법어(82.04.15.음) (50분)

 

(1/3) 약 21분.

 

(2/3) 약 18분.

 

(3/3) 약 11분.


(1/3)----------------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헌디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인디  치인환작본래인(痴人喚作本來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등한식득동풍면(等閑識得東風面), 등한히 봄바람이 얼굴에 스쳐가는 것을 식득(識得)을 했어. 느꼈다 그 말이여. 무심히 앉았는데 봄바람이 솔솔 얼굴을 스쳐가.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이로구나. 일만 붉은 것과 천 가지 빨간 울긋불긋한 가지가지 꽃이 피는데 그것들이 모두가 다 이 봄이더라 그 말이지.

무시겁래생사본(無始劫來生死本)을, 비롯함이 없이 저 무량겁래로 오면서 마치 봄이 되면 천 가지, 만 가지 초목이 싹이 트고 잎이 피고 꽃이 피듯이 천사량(千思量) 만사상(萬思想)이—좋은 생각, 악한 생각, 좋지도 악하지도 않는 생각, 별별 생각이 햇볕에 문지 일어난 것이 보이듯이 그렇게 무명업식(無明業識)이 그렇게 동요, 생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거 그 생사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갖다가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본래인(本來人), '참 자기'로 착각을 하고 있더라 그 말이여.

봄이 되면 잎이 피고 꽃이 피고, 푸르고 붉고 노랗고 희고 울긋불긋하게 온갖 꽃이 피는데, 그것들을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봄이라 그런다 그 말이여. 그러면 빨간 꽃 하나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 할 수는 없어.
빨간 꽃,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리고 얼굴을 스쳐가는 시원한 봄바람, 그러한 것들을 모두 합해서 봄이라고는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스쳐간 그 바람을 가지고 봄이라 할 수 없고, 노란 꽃 한 송이를 가리켜서 그것을 봄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그 말이여.

우리 중생에 천 가지 만 가지 희로애락, 탐진치 삼독, 팔만사천 번뇌 망상, 육도법계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가 합해서 그것을 법계(法界)라 그러고, 그걸 갖다가 실상(實相)이라 이러는데, 그렇다고 해서 번뇌 망상 하나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그것을 진여(眞如)라 말할 수 없고,
전체가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체(法身體) 아닌 것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 하나를 가리켜서 법신(法身)이라 말할 수가 없어. 우리 일어나는 번뇌 망상 하나를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여.

그런데 노란 꽃, 흰 꽃, 파란 이파리, 그것들을 여의고 봄을 찾을 수도 없더라.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임술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날입니다. 오늘 결제에 들어가면 윤달이 안 들었으면 음력 7월 보름날 해제를 하게 됩니다마는 4월에 윤달이 들어서 음력 6월 15일에 해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석 달 동안 방부(房付)를 들인 스님네와 방부를 들인 보살님네가 이 법보선원에서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방부를 들이지 아니하고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역시 이 결제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이 선방에 와서 입방선(入放禪)을 안 하신다 하더라도 백일기도에 동참하신 분은 가정에서 생활 속에서 결제를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잘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이 법회에 참석하신 분들이 다른 법회 때보단 수효가 많이 줄어진 것 같습니다마는 꼭 오실 분이 오셨다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백일(百日) 동안 결제 대중만 알맹이로만 딱 뽑아서 이렇게 오신 걸로 생각을 합니다.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 참선하는 데 있어서 기본자세이기는 하지만, 그러기 때문에 기본자세를 시간과 장소가 허락이 되면은 항상 '기본자세에 충실한 것은 대단히 득력(得力)을 하는 데에 요긴(要緊)하다'고 고인(古人)네도 말씀을 하셨고 실지로도 경험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좌선 이외의 다니면서 하는 정진, 일하면서 하는 정진, 차를 타면서 하는 정진은 정진이 아니냐 하면은 그게 아니고, 기본자세를 충실히 익히는 것은 응용(應用)에 응용하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익히는 것입니다.

좌선(坐禪)을 새벽으로 한 시간 두 시간, 가정에서도 이렇게 착실히 해 놓으시면 그날 하루 동안 살림하면서, 차를 타시면서, 시장에 가시면서 또는 대인잡화(對人雜話)하면서 그런 행동하는 속에서 공부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본자세를 충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 꼭 절에 와서 결제(結制)만 해야만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스님이 되고 모든 사람이 절에 와서 결제를 할려고 한다면 용화사(龍華寺)와 같은 이런 절이 수십만 개가 생겨도 다 못 당해 낼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도 난리가 나고 말 것입니다.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생활하면서 충실히 정진을 할 수 있게 될 때에 정말 살아 있는 불법(佛法)이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그렇게 될 때에 이 불법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장엄(莊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머리를 깎고 오직 정진만을 위해서 일생을 바친 스님네가 계셔야 하고 또 머리는 안 깎았지만 이렇게 절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결제를 하면서 알뜰히 정진을 하는 그러한 보살님도 많이 계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기왕 방부(房付)를 들이고 정진을 하는 마당에는 대중(大衆)에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그 규칙은 형식상으로 볼 때에 대중의 각자의 행동을 구속(拘束)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구속을 받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방부를 들이고 여기에 모이신 것입니다.
그러한 구속(拘束)이 싫다면 구태여 여기에 방부를 들일 필요가 없고 이 도량(道場)에 모이실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방부를 들이고 여기 모여서 사는 데에는 그 구속을 스스로 원해서 오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부를 들이시면 대중의 규칙을 아무리 자기 개인적으로는 마땅치 않다 하더라도 대중을 위해서, 선방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크고 작은 모든 규칙을 신심(信心)으로 환희심으로 자발적으로 그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하고 솔선해서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대중이 조용해지고 정말 공부하는 데에 아무 시비와 지장(支障)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자가 규칙을 자발적으로 순응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 공부 잘되도록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자신에 공부에도 제일 먼저 도움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불평과 불만을 터트리고,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이 앉아서 시비(是非)를 하고 물의(物議)를 일으키고, 이렇게 될 때에 대중 전체가 소란해지고 공연히 속이 상하고 물의가 일어나면 화두(話頭)도 간 곳이 없고, 속을 상하고 기분이 나빠서 정진도 되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입을 함부로 놀려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심지어는 선방(禪房) 전체의 분위기를 흐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여기저기 선방이 중간에 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선방이 깨지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결제 안거 도중에 몇 사람이 떠나게도 되고, 이렇게 해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고 자기도 안거 동안에 물의를 일으켰다고 하는 낙인(烙印)을 찍히게 되고, 한 번 낙인을 찍히게 되면 간 곳마다 '저 사람이 저이는 아무 데 선방에 지내다가 중간에 보따리 싸 짊어진 사람이다' 이리해서 낙인이 딱! 찍히게 되어서 다른 선방에 가도 방부를 받기를 꺼리게 되는 것입니다.

석 달 동안 좋으나 궂으나 한 번 방부를 들였으면 인욕(忍辱)을 하고 '내가 여기를 무슨 목적으로 여기를 왔는가? 무슨 편안하고 배부르기 위해서 내가 여기에 왔는가? 또는 무슨 명예나 권리를 위해서 여기를 왔는가?'
명예를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요, 무슨 이끗을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요, 배부르고 편안하기 위해서 온 것도 아니면 무엇을 위해서 내가 여기를 왔어?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각자 가정에서 지내면 누가 뭐라고 그래. 고행(苦行)을 사서 하기 위해서 모두 여기에 모이신 것이다 그 말이여.
고행을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몸이 고단하거나 할 때에도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예불(禮佛) 젓수고, 참회하고 축원하고 그리고 정진하고. 하루 이틀이라면 모르지만 석 달 동안을 계속해서 그러한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이 고행을 극복하고 정진해서 지혜(智慧)의 눈을 떠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지,
만약에 이걸 전혀 할 생각 없는 사람을 강제로 붙들어다가 이런 이 수도(修道) 생활을 시킨다고 하면 정말 이것은 감옥살이에 조끔도 뒤지지 아니할 것입니다.

가고 싶은 데 마음대로 갈 수가 있나, 먹고 싶은 것을 내 멋대로 먹을 수가 있느냐,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가 있나, 하나에서 백까지 규칙에 순응해야 하고, 조끔만 어기면 대중에 지적을 받고 공사(公事)를 당하고 심할 때에는 추방, 쫓겨 축출까지 당하게 된다 그 말씀이여.(처음~21분22초)




(2/3)----------------

그런데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자발적으로 할 때에는 그러한 구속과 고행이 조끔도 불편하지를 않고 조끔도 괴롭지 않고, 아무 불평불만이 없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너무너무 보람을 느끼고 너무 기쁘고 다행할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문제는 당인(當人)이 얼마만큼 발심을 했으며, 얼마만큼 신심을 냈으며, 얼마만큼 바르게 정진을 하고 있는가?
발심을 션찮게 했고, 신심 돈발(頓發)이 약하고, 정진에 바른 법을 아지를 못하기 때문에 공연히 트집을 잡고 아무렇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긁어서 부스럼을 내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고, 공부에 맛을 모르니까 오히려 좋은 일을 가지고도 트집을 잡아서 풍파를 일으켜서, 자기는 어피차 공부가 하기 싫고 공부 맛도 없고, 아무리 억지로 좀 하려고 해도 되지도 않고 그러니까 공연히 시비를 일으켜 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버리는 식으로 내가 공부 안 되니까 남까지 못하게 이리하고, 심한 경우에는 선방을 중간에 깨 가지고 대중을 파괴를 하는 그러한 경우도 있다 이 말씀이여.

죄(罪) 가운데에 무슨 죄가 제일 크냐 하면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 또 하나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죄,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이러한 죄가 대역죄(大逆罪)라, 죄 가운데에는 최고의 대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 가운데에는 그러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오직 자발적으로 자기도 공부 잘하고 자기가 공부 잘함으로써 남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그런 모범적인 스님네와 그러한 훌륭한 신도 여러분만이 모이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구태여 이런 말씀을 할 필요가 없지만, 이러한 말씀을 함으로써 각자 명심을 해서 더욱 정진을 잘하시기를 바래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허고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전부귀(生前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살아생전에 부귀(富貴), 재산이 많고, 높은 벼슬을 하고 명예와 권리를 누리고 하는 것은 풀 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풀 끝에 이슬이 맺히면 아침 태양빛에 그 이슬이 반짝거리기가 마치 보석처럼 빛난다 그 말이여. 반짝반짝반짝. 바람 한번 휙 불어 버리면 우시시 떨어져 버리면 간 곳이 없어.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이 그것이 내 몸에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고, 어디를 가나 거침이 없고 살기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좋은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느냐 하면 운수(運數)가 불길(不吉)하면 하루아침에 재산이 날라가기도 하고, 그 높은 벼슬도 하루아침에 뚝 떨어져 버리기도 하고, 그런 높은 벼슬을 하다가도 스스로 쇠고랑을 차기도 하고, 틀림없이 풀 끝에 반짝거리는 이슬방울과 조끔도 다름이 없다 이 말씀이여.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생전에 학덕이 높았다, 권리가 높았다, 명예가 있다, 또는 재산이 많았다,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했다' 그 죽은 뒤에 그이의 자랑스러운 그런 이 명예도 백상화(陌上花)여. 그 언덕에 곱게 핀 한 떨기 꽃에 지내지 못하더라 그 말이여.
언덕받이에 그 꽃이 찬란하게 피어 있는데, 그 꽃이 본 사람마다 다 쳐다보고 다 아름답다 그러고, 모두가 좋아하고 칭찬을 하지만, 비 한번 오고 바람 한번 불어 버리면 우시시 다 져 버리고 만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여, 세상의 모든 인연—정든 고향과 부모와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 재산과 명예와 권리와 모든 인연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세상 뜬세상을 가벼이 여겨 버렸다 그 말이여. 만연탈래경부세(萬緣脫來輕浮世), 헌신짝 같이 버려 버렸다 그 말이여.
마치 부처님께서 왕궁에 부귀와 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려 버리듯이, 여기에 공부하러 오신 스님네는 말할 것도 없고... (녹음 끊김) 무상하고 허망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깨닫고 느끼고, 비록 세속에 몸은 담아 있지만 그 마음은 스님네의 마음과 조끔도 차이가 없는 분들입니다.

일성상래간낙화(一性常來看落花)여. 한 성품 한결같은—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 깨닫기 위해서 신심(信心)을—'그 영원성 있는 것을 기어코 나도 깨달라야겠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이요. 그것을 위해서 분심(憤心)을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다 떨어진 꽃을 보는 거와 같애.
한참 곱게 피어 있는 꽃을 보고서도, 한참 지금 사람이 등왕(登王)을 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높은 벼슬을 가지고 권리를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바로 거기에서 '떨어진 꽃[落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이 말씀이여.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소승심(小乘心)이라 하는 것은 집착한, 세속에 허망한 것을 집착한 사람에게 집착심을 띠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方便說)이지, 불교의 구경법(究竟法)이 아닌 것입니다.
어린애, 화택(火宅) 속에서 노는데 팔려 가지고, 노는데 팔려 있는 어린애를 그 불 속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조그마한 장난감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수레, 그 장난감 수레를 가지고 어린애들을 그 불 속에서 빨리 달려나오게 하기 위하는 것이 바로 이 소승법(小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그 불이 타 들어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내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지, 일단 그 어린애를 불이 타고 있는 집에서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는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가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가 끄는 큰 수레에다가 어린애를 실어 가지고 위험하지 아니한 편안한 곳으로 옮겨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大乘)이라 하는 것이고.
편안한 데로 옮겨간 뒤에는 참나를 깨닫는 바른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21분23초~38분48초)




(3/3)----------------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바로 이 최상승법을 믿고 그것을 직접 실천하려는, 실천하고 있는 분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은 이 최상승 학자는 버리고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고 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삿된 것을 버리는 생각, 그리고 참된 것을 구하는 생각—버릴려는 생각도 이것이 삿된 것이고, 바른 것을 구할려는 생각도 이것이 동시에 삿된 것입니다. 버리고 취할 것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버리고 취할 것이 없느냐? '이뭣고?'

일체처 일체시에서 좋은 것을 보아도 '이뭣고?' 악한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 슬픈 것을 버리고 기쁜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것을 보아도 '이뭣고?'여.
기쁜 것을 보면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뭣고?'

'이뭣고?' 하는 데에 무슨 버리는 것이 있으며, 무슨 취할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이 없어.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 공부다 이 말이여.

'공부가 안 된다. 영 공부가 진취가 없다'
많은 분들이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지마는, 사실은 그 고민한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이뭣고?'를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공부를 여법(如法)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날 때에도 '이뭣고?'
몸이 괴로울 때도 '이뭣고?'
밥이 질 때에도 '이뭣고?'
밥이 될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좋을 때에도 '이뭣고?'
반찬이 안 좋을 때에도 '이뭣고?'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잘될 때에도 '이뭣고?'
내 비위에 안 맞을 때에도 '이뭣고?'

이렇게 공부를 다져 나간다면 공부는 극일성지(克日成之)입니다. 극일성지. 머지않아서 득력(得力)을 하게 된다 이 말씀입니다.

『몽산법어(蒙山法語)』에 외출을 금하고, 모든 공양이라던지 모든 수용(受用)은 형편과 인연에 따라서 하고, 경(經)도 보지 아니하고 잡담도 하지 아니하고, 다못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여법(如法)하게 정진을 하면 '3년을 그렇게 여법하게 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내가 너희 대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가겠다. 거짓말한 죄로 내가 무간지옥에 가겠다' 이렇게 극언(極言)을 하셨습니다.
극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이 큰스님께서 그렇게 극언을 하신 까닭은 너무 조끔도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증을 하신 표현인 것입니다.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께서 「최상승론(最上乘論)」이라 한 법문 가운데에도 '내가 이렇게 한 법문을 믿지 아니하면 믿지 아니한 사람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것이고,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이 거짓이라면 나는 무간지옥에 가게 될 꺼다' 이렇게 참 가슴 아픈 법문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얼마나 우리 중생을 애끼신 뜻이 간절하시면 입에 담기조차도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로인 이런 극언을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런한 말씀을 통해서 콧등이 찡하고 눈뚜껑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조사 스님의 간절한 법문을 듣고 '한 번 해보자. 내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며 내가 이 도량에 와서 고행을 하겠다고 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렇게 해서 3년을 해서 결정코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면 내가 왜 그렇게 안 할 까닭이 무엇이냐?'

죽비(竹篦) 치면 형식적으로 앉아서 하고, 방선(放禪)하면 둘씩 셋씩 모여서 잡담하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으로 세월을 보내고, 이렇게 형식적으로는 정진을 한 것 같지마는, 실지 내용으로는 발심이 약하고 분심이 약하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는 그러한 정진을 하기 때문에 3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10년이 되어도 죽 떠먹은 자리요, 죽을 때까지 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생긴 것은 눈치로 눈치만 늘어 가지고 무슨 법담을 하면 눈치로 '뭐라고 뭐라고...'
그런 것 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눈치로 무슨 공안은 어떻고, 무슨 법담은 어떻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의 일신상의 생사(生死) 문제도 아무 교섭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법(佛法)에도 아무 이익이 없는 것입니다.

기왕 출가를 하고, 기왕 이 참선을 하려면 정말 여법하게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허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에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할 것이다. 후세에 당연히 한(恨)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후생(後生)이라 하니까 앞으로 몇십 년, 몇백 년 후가 아니라, 한 생각 뒤가 바로 후생인 것입니다.

앞으로 석 달 동안 정말 여법하게 정진을 해서 나도 성취를 하고, 다른 사람도 성취를 하도록 알뜰히 정진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38분49초~49분48초) (끝)




[법문 내용]

(게송)등한식득동풍면~ /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 대중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는 대역죄(大逆罪)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부귀, 공명, 명예는 풀 끝에 이슬방울과 같은 것 /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 발심(發心)해서 도(道) 닦은 사람의 눈에는 세상의 명예와 권리와 영화가 '떨어진 꽃[落花]'을 보는 거와 같다 /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라 /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버리지도 않고, 구하지고 아니하면서 바로 참나로 돌아가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 공부 / 공부는 한 생각 단속하는 데 있는 것이지, 다른 어떠한 데에도 공부가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 몽산 스님과 오조(五祖) 홍인(弘忍)대사의 우리 중생을 아끼신 뜻이 간절한 황송하고 무서울 정도인 극언(極言). 이 고조사(古祖師)의 맹서(盟誓)에 부합이 되도록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정진을 해야.


번뇌와 망상이 진여불성(眞如佛性)이 아니지만, 그것을 여의고 진여불성을 찾을 수가 없어. 바로 우리의 나아갈 길이, 정진해 나가는데 눈을 박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현상에 집착해서 찾을 수도 없거니와, 현상을 여의고 찾을 수도 없다 이것입니다. 바로 들어가는 길도 여기에 있고, 그르쳐 빠지는 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진(精進)은 장소와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중이 모여서 사는 데에는 편의상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하고 이렇게 해서 질서를 잡아 나가고는 있습니다마는, 실정진(實精進)에 있어서는 시간과 장소와 자세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죄(罪) 가운데에 무슨 죄가 제일 크냐 하면 대중에 화합(和合)을 깨는 죄, 또 하나는 부처님 몸에 피를 내게 하는 죄, 깨닫지 못하고 깨달랐다고 하고 증(證)하지 못하고 증(證)했다고 하는 죄, 이러한 죄가 대역죄(大逆罪)라, 죄 가운데에는 최고의 대역죄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모든 현상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우리 몸 육체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우리의 생각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어서 생겨났다가, 잠시 그 모습을 유지하다가, 얼마 안 가서 그것이 변질이 되어 가지고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또 생겨났다 없어지고 하는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의식, 이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永遠性)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라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꽃이라 할지라도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다 꽂아 놓으면 불과 이삼 일이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 시들어 버리는 꽃을 보고서 발심(發心)을 하고, 분심(憤心)을 내고, 신심(信心)을 낸다면 수행자에게는 그것도 또한 좋은 법문(法門)이 될 것이고,
좋은 꽃 한 송이를 봄으로써 그 한 송이 꽃에서 자기 일신(一身)의 무상(無常)함을 깨닫고, 자기의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무명업식(無明業識)을 통해서 그 업식을 통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들이 낱낱이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이 될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허망(虛妄)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리고 피할 것이 아니라,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화엄경(華嚴經)을 읽고,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통해서 부처님의 상주설법(常住說法)을 들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최상승 학자(最上乘學者)라 하는 것입니다. 대승 학자(大乘學者)요, 최상승 학자라 하는 것입니다.
소승 학자(小乘學者)는 그 무상한 것을 보고 그것을 버리고 피해서 피하는 마음을 내겠지만, 대승 학자요 최상승 학자는 그 무상하고 허망한 것을 보고서 대발심(大發心)을 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불법(佛法)은 차라리 생사윤회를 할지언정 소승심(小乘心)을 발(發)하지 말아라.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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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700여 개가 넘는 ‘참선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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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1. 2. 21. 09:19

((No.163))—1982년 동안거 해제(82.02.08) (26분)

 

(1) 약 16분.

 

(2) 약 10분.


(1)------------------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가  금일부운비(今日負雲飛)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이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다년농중조(多年籠中鳥)가  금일부운비(今日負雲飛)로구나.
여러 해 동안 농 속에,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오늘에사 새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하늘에 구름을 등지고 날으는구나.
임하십년몽(林下十年夢)타가  호변일소신(湖邊一笑新)이로구나.
숲속에서, 숲 아래서 10년 동안을 꿈을 꾸다가 이제 호숫가에서 한바탕 웃으니 마음이 새롭구나.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 생사고해(生死苦海)라고 하는 그 새장 속에 갇혀서 구속 생활을 하다가 오늘에사 그 생사(生死)의 감옥 속에서 풀려나 가지고 저 갓없는 푸른 하늘에 자유자재로 날을 수가 있게 되었구나.
석 달 동안 안거(安居)를 한 것을 마치 새장 속에다가 새장 속에 갇혀 있는 것에다가 비유해서 한번 생각해 본 것입니다.

석 달 안거를 어찌 구속된 생활이라고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맘대로 외출도 못하고 맘대로 여행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맘대로 못하고 대중규칙에 따르면서 대중과 같이 모든—잠자고 일어나고 밥 먹고 목욕하고 삭발하고 참선하고 소제하고, 모든 생활을 대중법도에 맞춰서 해야지, 자기 맘대로 단 한 가지도 자기 맘대로 할 수가 없으니 새장 속에 갇혀서 사는 새와 같이 비교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해제(解制)를 맞이해서 해제가 끝나면 당장 문밖에 나가 가지고 어디를 갈 것인가?
그동안에 만나고 싶었던 도반(道伴)도 찾아가고, 가서 찾아가 뵈옵고 싶은 선지식(善知識)도 찾아가 뵈옵고, 또 어디 성지(聖地)도 가보고 싶고 또 몸이 아픈 이는 의원도 찾아가 보고 싶고, 찾아간다고 해서 누가 붙잡을 사람도 없고 막을 사람도 없고, 동서남북 어느 곳이고 가고 싶은 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숲속에 10년 동안을 꿈속에서 살다가, 10년 동안을 숲속에서 참선(參禪)을, 도(道)를 닦는데 그 10년이라고 한 세월이 꿈결같이 지내갔다 이 말씀이여.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도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데, 석 달 동안이 언제 어떻게 지내간 줄 모르게 지내갔습니다. 하루처럼 지내갔습니다. 하룻밤 꿈꾸듯이 석 달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내갔습니다.

석 달 동안 그 지내는 것을 하나의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해제(解制)를 하고 어느 산기슭에 호숫가를 지나다가 그 호수 잔잔한 물결 위에 떠 있는 물새 퍼득이는 소리를 듣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할런지 누가 알겠습니까.
흔히 결제가 해제가 끝나고 떠억 걸망을 짊어지고 어느 개천을 건너고, 어느 산골짜구니를 지나고, 어느 산마루를 넘어가다가 홀연히 꿈을 깨고 지혜의 눈을 떴던 우리들의 과거에 선각자 스님네가 종종 계셨습니다.
과거 선지식(善知識)만 그러란 법은 없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한 여러 스님네, 여러 보살님네 가운데도 가시는 차속에서 또는 어느 숲 아래 개천가를 거닐면서 또 어느 산골짜기 오솔길을 가시다가 확철대오 할런지, 나는 반드시 그러한 납자(衲子)와 불자(佛子)가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대관절 이 참선을 해 가지고 '깨닫는다' 그러는데 무엇을 깨닫느냐?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갖은 고행(苦行),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시면서 도를 닦아 가지고 과연 무엇을 깨닫느냐?

오늘 산승(山僧)은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祖師)님네가 깨달은 바를 감히 공개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각기 자기의 눈이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랐습니다. 두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이렇게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 스님네만 눈이 옆으로 붙어 있고, 우리 중생들은 그렇지 않느냐?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조사가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함께 다 그 도리를 깨달랐고, 모든 부처님께 승사(承事)하면서 불법을 믿고 수행하는 많은 불자(佛子)들 납자(衲子)들도 목적이 뭣이냐 하면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서 이렇게 고향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형제간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목숨 바쳐서 이렇게 고행을 하면서 일생을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장서방 이서방도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습니다. 모든 동서고금에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눈은 두 눈이 나란히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붙어 있건마는,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그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길이로 백혀 있는 것을 느끼면서 거울을 볼 때마다 그것을 확인하면서 그러면서도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길이로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까?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산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가 뭣이냐 하면, 이 법회가 끝나거든 거울을 보고 확인을 하시던지, 가만히 손으로 두 눈을 더듬어 보고, 자기 코가 혹 옆으로 붙어 있지 않나? 눈은 혹 세로 박혀 있지 않는가를 확인을 해 보시고,
진정 자기 코도 모든 불조(佛祖)의 코와 다름없이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신 찰나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에 근본을 요달(了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처음~16분30초)




(2)------------------

허공경계기사량(虛空境界豈思量)고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하야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허공경계(虛空境界)를 기사량(豈思量)고, 갓없는 이 허공경계를 어찌 사량(思量)으로 더듬어 알 수가 있겠는가?
대도청유이갱장(大道淸幽理更長)이니라. 대도(大道). 대도가 청정하고 한없이 깊은 그 이치는 다시 길고 무한한 것이다. 허공보다도 더 크고, 허공보다도 더 높고, 허공보다도 더 맑은 이 대도(大道), 사량심(思量心)으로는 도저히 더듬어 알 수가 없는데.

단득오호풍월재(但得五湖風月在)라, 다못 오호(五湖)에 풍월(風月)이 있어, 풍월이 있음을 얻어. 가을에는 서늘바람이 불고 둥근달이 휘황창 밝으며 단풍이 지고, 겨울에는 눈보라가 치고 기러기가 나르고.
그러다가 춘래의구백화향(春來依舊百花香)이라. 봄이 오면 옛을 의지해서 온갖 꽃이 향기롭게 피는것, 가을이 오면 서늘해서 국화가 피고, 봄이 오면 따뜻해서 온갖 꽃이 난만(爛漫)히 피는 이 도리가 한없이 넓고 깊고 크고 맑은—사량분별(思量分別)로써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 도리를 여지없이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질게 추웠던 삼동(三冬)이 지내가고 입춘을 맞이해서 이제 해제를 해서 머지않아서 산과 들에는 푸릇푸릇 풀과 나무에 싹이 트게 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개나리는 노랗게 피어 늘어지고, 산에 산에는 빨간 진달래가 불타듯이 피어나겠습니다. 노란 개나리꽃, 빨간 진달래꽃, 파란 버들을 보실 때마다 그 사이사이에 우는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빌고 해제 법어를 마치고자 합니다.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유격일중관(無心猶隔一重關)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파무심운시도(莫把無心云是道)하라. 무심(無心)을 잡아서 이것이 도(道)라고 이르지를 말어라.
무심(無心)도 유격일중관(猶隔一重關)이라. 무심(無心)도 오히려 한 중관(重關)을, 무거운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도를 닦으면 자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없어져서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고, 일체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면 무심 경계에 들어가는데, 그 무심 경계를 가지고 도(道)라고, 도라고 말을 하지를 말아라. 무심경계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오히려 한 중(重)한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오늘 해제를 했는데, 보름 뒤에 음력 2월 초하루에 선방 스님네들은 산철 결제를 하게 됩니다. 2월 초하룻날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3월 그믐날 해제를 합니다. 이 두 달 동안 산철 결제를 해 가지고 이 춥도 덥지도 않는 이 두 달 동안을 정말 알뜰하게 정진을 하시게 되겠습니다. (16분38초~26분23초) (끝)




[법문 내용]

(게송)다년농중조~ / 참선을 해 가지고 무엇을 깨닫느냐? 자기의 두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자기의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랐습니다 /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생사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게송)허공경계기사량~ / 꽃을 볼 때, 새소리를 들을 때, 한 생각 돌이켜서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빈다 / (게송)막파무심운시도~.


흔히 결제가 해제가 끝나고 떠억 걸망을 짊어지고 어느 개천을 건너고, 어느 산골짜구니를 지나고, 어느 산마루를 넘어가다가 홀연히 꿈을 깨고 지혜의 눈을 떴던 우리들의 과거에 선각자 스님네가 종종 계셨습니다.
과거 선지식(善知識)만 그러란 법은 없고, 우리 용화사 법보선원에서 정진한 여러 스님네, 여러 보살님네 가운데도 가시는 차속에서 또는 어느 숲 아래 개천가를 거닐면서 또 어느 산골짜기 오솔길을 가시다가 확철대오 할런지, 나는 반드시 그러한 납자(衲子)와 불자(佛子)가 나올 것을 기대합니다.

분명 눈은 옆으로 붙어 있고, 코는 세로 붙어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도리는 깨닫지 못한 탓으로 해서 우리들은 오늘도 육도윤회(六途輪廻)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산승이 오늘 이 자리에서 감히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가 뭣이냐 하면, 이 법회가 끝나거든 거울을 보고 확인을 하시던지, 가만히 손으로 두 눈을 더듬어 보고, 자기 코가 혹 옆으로 붙어 있지 않나? 눈은 혹 세로 박혀 있지 않는가를 확인을 해 보시고,
진정 자기 코도 모든 불조(佛祖)의 코와 다름없이 눈은 옆으로 백혀 있고, 코는 세로 백혀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하신 찰나에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生死)에 근본을 요달(了達)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도를 닦으면 자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없어져서 무심(無心) 경계에 들어가고, 일체 번뇌와 망상이 끊어져 가지고 삼세(三細) 육추(六麤)의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면 무심 경계에 들어가는데, 그 무심 경계를 가지고 도(道)라고, 도라고 말을 하지를 말아라.
무심경계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오히려 한 중(重)한 관(關)이 맥혀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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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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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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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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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1. 2. 16. 06:57

 

 

((No.151))—1981년 9월 첫째일요법회(81.09.06) (66분)

 

(1/4) 약 16분.

 

(2/4) 약 17분.

 

(3/4) 약 17분.

 

(4/4) 약 16분.

 

(1/4)----------------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에  포슬타한면(抱膝打閑眠)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소소경각료(蕭蕭驚覺了)허니  상엽만계전(霜葉滿階前)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사양공사리(斜陽空寺裏)에,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진 빈 절 속에,
포슬타한면(抱膝打閑眠)이라, 무릎을 안고 꾸뻑꾸뻑 졸고 있었다 그 말이여.

소소경각료(蕭蕭驚覺了)하니  상엽(霜葉)이 만계전(滿階前)이라.
소슬한 바람에 가을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진 그 소리에 놀래서 깨 보니, 서리 친, 서리 맞은 낙엽이 뜨락에 가득하니 뒹굴고 있구나. 이것은 경허(鏡虛) 스님의 게송입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지끔으로부터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침체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중흥시키신 큰스님이십니다. 이 경허 스님 밑에 만공 스님. 혜월 스님. 혜봉 스님. 오대산 방한암 스님 또 수월 스님. 이러한 대도인(大道人)들이 그 경허 큰스님 밑에 배출이 되셔서 그래 가지고 이 한국 방방곡곡에 선풍(禪風)을 진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경허 스님이 백 년 전에 이 한국에 출세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참선(參禪)이 무엇인 중도 모르고, 지끔 참선 법문(法門)도 들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어도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그럴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허 스님은 대강사요, 대선사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신 생불(生佛)과 같은 그러한 대도인이신 것입니다.

그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善知識) 가운데 한 분이 만공(滿空) 큰스님이시고 또 그 만공 큰스님 밑에 박고봉 스님, 박금봉 스님, 정전강 스님 또 그밖에 여러 도인들이 계시지만 그 만공 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용화선원을 창설을 하셔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을 선양을 하시다가 지끔부터 8년 전에 열반하셨습니다.
그 전강 큰스님께서 이 주안 갯벌 가에 이 법보선원을 창설을 하시지 안 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모여서 이 최상승법을 선양(宣揚)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부처님 열반하신 뒤, 56억 7천만 년 뒤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음 부처님으로 미륵존불(彌勒尊佛)께서 염부제(閻浮提)에 하강(下降)을 하시게 되겠지만, 그 사이에 종종 불보살(佛菩薩)의 화신(化身)이 이 땅에 몸을 나투셔 가지고 정법(正法)을 선양(宣揚)을 하셔서 목마르는 중생들에게 정법에 감로(甘露)의 비를 내리셔 가지고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어린 양들을 자기의 갈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전생에 깊은 숙연(宿緣)이 있어서 이 도량에 우리가 모여서 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을 공부를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다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년도 벌써 여름이 지나고 제방(諸方) 선방(禪房)에서 모다 참선을 하시고 해제를 한 뒤에 여러 납자(衲子) 스님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공자님께서 그 『논어(論語)』 첫머리에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안 해도 그것을 성내지 아니하면 이것이 군자가 아니냐' 이런 말씀이 있는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워서 때때로 익힌다' 한 말은 '글을 배워 가지고 때때로 익힌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 닦는 공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가(佛家)에 말하면 화두(話頭)를 타고 참선(參禪)하는 방법을 배워 가지고 그것을 밤낮으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일심(一心)으로 그 공부를 해 나가면 이것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정진을 알뜰히 해 가면 처음에는 아무 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공부가 되어 가는지 안되어 가는지 도대체 멍멍하니 그러지만, 자꾸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해서 화두를 들려고 하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질 때가 오면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법(法)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 성성(惺惺)하고 적적(寂寂)한 가운데 화두가 일여(一如)하게 들리게 되면 그 싱그럽고 편안하고 가볍고 혼침(昏沈)도 안 오고 망상(妄想)도 없이, 그 즐겁다고 할 것인가?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한목 자동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법(法)에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하는 것은 말로써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서 '배워서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냐' 이렇게 공자님은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두 번째 가서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면 불역낙호(不亦樂乎)아, 벗이 있어서 먼 데로부터 나를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느냐'
그 말은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친구라든지 또는 그동안에 막걸리 친구로 사귄 그런 친구가 찾아온 거, 무슨 동창생이 찾아오고 그러한 의미에 벗을 가리키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저 먼 데에서 그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정진을 하고 해제를, 우리 불가에서 같으면 해제를 하고 그 먼 데에서 그 도반을 찾어간다던지, 선배를 찾어간다던지,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와 같이 한 목적을 향해서 도를 닦은 도반이 찾아오는 거.
선배가 되었던지, 후배가 되었던지, 또는 연갑(年甲)시 되었던지, 넓은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선지식(善知識)도 도반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 말하자면 부처님도 우리에 선우(善友)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도(道)를 닦는 도반(道伴)이 먼 데로부터서 찾아오게 되면 또한 그것이 즐겁지 않느냐. 속가에 부모형제가 찾아온다던지, 무슨 자기와 그런 평소에 아는 사람이 찾아온 거, 그러한 것에다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방에서건, 어느 토굴에서건 그 실다웁게 도를 닦고 그리고 해제(解制)하고서 찾어온다던지, 내가 찾아간다던지, 그러다가 만나게 될 때에 그 반갑고 기쁜 뜻을 표현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금년에도 이 신유년 하안거를 마치고, 제방에서 여러 도반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참 아무리 이 시국이 험난하고 세상이 말세가 되어서 도처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있고, 모든 면에서 참 불안하고 그러한 때지만, 이 정법을 믿고 실천하는 우리 도반들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이 자리는 정말 이 사바세계에 이루어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정법을 믿는 사람이 모여서 최상승법을 닦는 그 자리는 바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가 항시 계신 곳이기 때문에 바로 영산회상이라고 말해도 조끔도 어폐(語弊)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해가 저문 빈 절에 무릎을 안고 졸다가, 소슬히 부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뜰에 가득히 딩굴고 있다」 한 경허 스님의 그 게송을 음미해 보면,
앞으로 가을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가을철에 지나간 여름 동안 못다 한 공부를 알뜰히 단속을 해서 정진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여러 도반들이 여기서 저기서 모다 와 가지고 공부하는 법에 대해서, 그동안에 공부하는 경과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고, 앞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 가면 좋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문의를 한 도반들도 많이 있었습니다.(처음~16분4초)




(2/4)----------------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 '참선, 참선' 요새 굉장히 그 참선이라 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불법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 이 참선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참선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그러면 참선을 내가 직접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에 가서 참선을 지도를 받을 것인가? 어떻게 참선을 해야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 문제에 부딪히면 망연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에 대한 책도 많이 나와서 책을 사 봐도 잘 모르겠고, 어떤 스님을 만나서 물어봐도 확실하지를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앉아서 몇 달, 몇 해씩을 해 봤지만, 이것이 옳게 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참선은 참 어려운 것이다. 여간해서는 참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한 결론에 도달해 가지고 그럭저럭 세월을 보낸 그런 거사님이나 보살님도 더러 계신 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참선은 제일,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입니다.
실지로 하려고 하는 마당에는 '어디 가서 배워야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사실 내용에 있어서는 가장 쉬운 것이고 간단한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이 참선(參禪)이 없으면 쌀에 알맹이를 빼내 버린 거와 같은 것입니다. 광석 속에 금덩어리를 빼내 버린 광석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유교나 그밖에 종교에 있어서 '착한 일을 해라, 윤리 도덕을 지켜라, 바르게 살아라' 그러한 내용의 교리가 다른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역시 다 그런 내용에 말씀도 참 많지만, 다맛 그런 것에 그쳐 버린다면 불교에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인은 "그러면 석가여래 부처님은 사람이냐? 뭣이냐?"
"아, 그 사람이다"

"아하! 그러면 부처라 하는 것이 별로 별것이 아니로군요"
"왜 그리야?"

"깨달라 봤자 사람이라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느냐"고, 이렇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깨달음을 얻어 가지고 성현 가운데에 성현이 되셨다. 진리와 하나가 되셨다' 한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 부처님을 존경하게 되는데.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말세(末世)에 태어난 죄 많은 중생이 머리도 나쁘고, 지식도 없고, 몸도 건강틀 못하고, 여자로 태어났고, 우리 같은 사람이 참선을 한들 무슨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겠는가? 그저 금생에는 참선이 좋다 그러고, 선방 토방에 신발만 벗어 놔도 그 공덕으로 지옥에는 안 떨어진다고 그러니 금생에는 인연이나 맺으리라' 이러한 지나치게 겸손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최상승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견성성불할 수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데 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고 대든 것하고, 벌써 처음부터서 안 될 줄 알고 하는 것과는 그 결과적으로 결과에 나타난 것은 하늘과 땅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참선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할 때에도 '된다'고 믿고, 된다고 믿어지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아야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안 될 줄 알고, 실패할 줄 알고, 심심풀이로 시험 삼아서 해 갖고 그 일이 백(百)에 하나도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 '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나의 마음, 사람 사람이 다 '마음' 소리를 다 하고, '마음'이라는 것을 다 그 말을 알고 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을 본격적으로 그 마음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은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 일상생활 속에 단 일 초 동안도 우리로부터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같이 있는 것이지만,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모냥이 없는 것이고, 형상이 없는 것이라 분명히 거기 있는데 찾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고, 보이지를 아니하고 아무리 귀를 기울여 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두 손을 이리저리 내저어서 더듬어 봤자 그 마음은 잡히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오직 이 한마디 의심뿐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의 의심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해 버리고, '부처님이 나와서 설법을 한다. 깨닫게 해 준다' 해도 솔깃하지 아니하고, '염라대왕이 와서 끌어간다' 해도 조끔도 두려운 생각도 없고, 다못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한 앞에서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염라대왕이 쇠사슬을 가지고 옥졸이 와서 묶어간다 하더라도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되어 버린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최상승법이 어려웁고도 쉬웁고,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판치생모' 화두뿐만이 아니라 '무자(無字)‘ 화두를 한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시삼마(是甚麼) '이뭣고?' 화두를 하신 분은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앉아서도 '이뭣고?'
서서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밥을 먹을 때에도 '이뭣고?'
똥을 눌 때도 '이뭣고?'
일을 할 때에도 '이뭣고?'
차를 탈 때도, 속이 상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다못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것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16분5초~33분10초)




(3/4)----------------

우리는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잠시도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때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때 일어나고, 귀로 무엇을 들을 때 일어나고,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일어나고, 혀로 음식을 맛볼 때 일어나고, 말할 때 일어나고,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에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망상(妄想)이 일어나는 것을 조끔도 성화 댈 필요가 없어. 무슨 망상이건 상관이 없어. 일어났다 하면 퍼뜩 '이뭣고?' 백 번 일어나면 백 번, 천 번 일어나면 천 번.

백정(白丁)이 소를 때려잡을려고 도끼를 쳐들다가도 '이뭣고?'해 가지고 확철대오한 광액도아(廣額屠兒)라고 하는 도사가 있습니다.
백정이 소를 때려잡기 위해서 도끼를 쳐들 그 찰나에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거든, 그밖에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일이 많으니까 공부를 못한다. 복잡해서 공부를 못한다. 장사하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으로 핑계 대는 것에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선은 기본자세가 있어서 가부좌(跏趺坐)나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떠억 정진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본자세고, 그럴만한 시간이 있고, 그럴만한 장소가 있으면 기본자세로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해서 시간이 흘러가지 아니한 것이 아니고, 생사가 죽음이 나에게 오지 않고 기달려 주는 것이 아닐 바에는, 우리는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할 수는 없는 것이여.
일이 바빠서 참선을 안 하다가 지옥에 왔다고 해서 염라대왕이 조끔도 사정을 봐주지는 않습니다.

정신적인 고통, 육체적인 고통이 다 그것이 내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업(罪業)으로 인해서 그러한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데, 그러한 상황을 핑계 대고 공부를 아니하면 내생에는 더 고약한 환경에 태어날 것이요, 까딱하면 사람으로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축생이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 뻔한데,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일수록에 더 발심(發心)을 해야 하고, 더 이를 악물고 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 놓여진 사람은 우선 아무 고통이 없으니까,
'참선이 무슨, 불법이 뭐, 나한테는 상관이 없다. 그냥 이대로 나쁜 짓 안 하고 살아가면 되었지 무슨 불교가 필요하냐? 뭐 참선 이까짓 것 필요...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심심하면 텔레비젼도 보고, 그렇지 않으면 나가서 테니스도 치고, 등산도 하고, 아 이렇게 살면 족하지. 뭐 그렇게 앉어서 무릎 아프고, 허리 아프게 앉어서 무슨 참선을 하고... 인생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런 부질없는 짓어리를 할까?' 이렇게 생각을 하고.

'참선을 하라'고 하면 '쯧, 스님네들이나 하시지' 삐긋이 웃고 남의 일—자기하고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주 자신이 만만한 그러한 분들을 가끔 만나게 되는데, 그분도 역시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사람이라 다행히 전생에 조끔 복 지은 것이 있어서 그놈 꽂감 빼 먹듯이 빼 먹느라고 별걱정이 없지만, 그 꽂감 몇 접 사다 논 것이 있기로서니 한 개 두 개 빼 먹다 보면 줄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놈이 바닥이 나면 몸이 아프게 되기도 하고, 엊그제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간경화증, 동맥경화증, 무슨 암, 무슨 당뇨병, 그러한 진단만 나왔다 하면, 어제의 그 쟁쟁 당당하던 그 용기가 간 곳이 없고, 그 많은 재산도 싫고, 명예 권리도 싫고, 아무 정황이 없다 그 말이여.
사업이 잘되어 갈 때는 큰소리치다가 사업이 벌써 기울어져 가지고 여기서 부도가 툭! 터지고, 저그 터지고 하면 아무 정황이 없어.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자식이 죽게 되거나 하면 또 정신을 못 채려.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 하는 것은 원래가 그렇게 믿지 못할 곳인 것입니다.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일 초 일 초가 지내서 한 시간이 지내가고, 한 시간 한 시간이 지내서 하루가 지내고, 하루하루가 지내서 일 년이 지내고, 일 년 일 년이 지내다 보면 벌써 흰머리가 나고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아프고.
그래도 잘 타고난 사람은 환갑도 넘기고 칠십도 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뱃속에서도 죽고, 낳다가도 죽고, 두 살 세 살에도 죽고, 10살 20살에도 죽고, 30~40에 막 재미있게 살 만하다가 턱 꺼꾸러지고. '인생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바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의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신다면, 그동안에 참선을 하신 분은 정말 오늘부터서는 단 일 초 동안도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정말 착실하게 정진을 하시게 될 것이고, 그동안에 참선을 본격적으로 믿고 실천하지 아니하고 '차츰 하리라. 아들딸 여워 놓고 하리라.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놓고 그때부터서 하리라. 나이 좀 먹거든 하리라' 이러한 뒤로 미루신 그런 분도 오늘부터서는 착실히 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특별한 의식이 있고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와 장소를 가리는 것도 아니고, 지식의 있고 없는 것도 상관이 없고, 남녀노소도 상관이 없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할 때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여.
불경(佛經)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여, 아직 불경을 한 권도 읽지 아니했어도 상관이 없어. '나모라 다나다라' 염불(念佛) 한마디도 외우지 못해도 그것도 상관이 없어.

다못 '대관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만 해 가면 되는 거여.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팔만대장경을 다 읽어서 올바르게 이해를 했다면 바로 '이뭣고? 해야겄다. 이뭣고? 해라' 그 말 한마디로 요약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경을 수십 권을 다 읽었어도 '이뭣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그 경 잘못 읽은 사람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참선법을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이여. 소승법이 있고, 대승법이 있고, 그 위에 최상승법이 있는데, 이 참선법이 바로 그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이 최상승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여.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가 바로 이 참선법이여.
'저는 참선을 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정말... (녹음 끊김) 뭣헌 사람은 "공부를 하면 뭣이 흰옷 입은 것이 휙 지내가고 무슨.. 뭣이 부처님이 나와서 뭣을 주어서 받으려고 하니까 없어져 버리고 그랬다"고. 아주 자기가 공부를 잘한 것처럼 또 "부처님이 뭣을 줘서 그놈을 먹으니까 시원하니 아주 배창시까지 아주 얼음을 먹은 거 같이 그렇게 시원하고 좋더라"고, "이거 내가 도통한 거 아니냐"
그 말을 앉은 자리마다 이 새로 들어온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 가지고 자기는 아주 공부를 잘한 것처럼 으시대고 "이 소리는 누구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가지고는 그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뭣이, 뭐이 나와 가지고 무슨 뭘 줄까 하고, 밤낮 눈을 감고 몸부림을 쳐도 아무도 안 준다"고, "내가 공부를 잘못한 것이 아니냐"
"아니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냐?" 헌께 "자기가 그랬단 말 하지 말라고 하드라"고.

세상에 그분이 퍽 점잖은 분이고, 불교를 아주—소시(少時) 때부터 과부가 되어 가지고, 소시 때부터 삼사십 년간을 참선을 한 분인데, 세상에 그러한 요물 같은, 요사스런 삿된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말이여.
그 틈틈이 경을 읽어 가지고 설법을, 뭐 부처님 경에 있는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잘하는지 몰라. 그러다 내가 들어가면 딱! 입이 붙어버려.

참선이라 하는 것은 뭘 아는 것이 아니고, 뭣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여. 무슨 부처님이 나타나고, 관세음보살이 나타나고 그런 것이 아녀.
혹 참선을 하다 보면 혼침(昏沈)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에 뭣이 혹 보이기도 하고, 그리 아니한 것은 아니나, 그것이 까빡할 동안에 헛것이 보인 것이지, 어찌 그것이 견성(見性)이요 도통(道通)이라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런 것은 얘기할 거리도 못 되는 것이고, '하아, 내가 이거 도통하려고 이런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여.

참선은 '성성(惺惺)하다' 하는 것은 혼침(昏沈)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을 성성하다 그런 거여. 성성하면서도 적적해야 하는 거여. '적적(寂寂)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여.
성성(惺惺)하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하면서도 성성한 가운데에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이 터억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의단(疑團)이, 의심(疑心)이 산을 봐도 '이뭣고?'
구름을 봐도 '이뭣고?'
흘러가는 강물을 봐도 '이뭣고?'

마치 칠십 먹은 노인이 과부가 외아들이 저 타관(他官)에 가서 온다고 하는 날짜가 되어도 오지 아니하고—한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두 달이 되어도 아니하고, 일 년이 되어도 일자(一字) 서신(書信) 한마디 없이 소식 없을 때,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먼 산에 구름을 봐도 아들 생각,
날아가는 새를 봐도 아들 생각,
떡을 봐도 아들 생각,
밥을 봐도 아들 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 생각,
어떤 청년을 봐도 아들 생각,
자나깨나 아들 생각하듯이 '이뭣고?' 자나깨나 '이뭣고?' (33분11초~50분35초)




(4/4)----------------

처음에는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하면 그것도 길이 들어서 하려고 안 해도 제절로 '이뭣고?'
알 수 없는 생각이 걸어갈 때도, 앉아서도, 누워서도, 밥을 먹을 때도, 차를 탈 때도, 누가 나에게 억울한 소리를 할 때에도 퍼뜩 '이뭣고?' 이렇게 되어 진 때가 꼭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그것을 조끔 공부에 공부 길에 들어섰다. 조끔 득력(得力)을 했다. 혹 이렇게는..

그런 것도 '아, 내가 인자 공부가 아주 잘된다' 그것도 뽐낼 것도 되지도 안 혀. 인자 그렇게 되어 가야 인자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되어도 '좋다'고 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한결같이 공부를 더 잘 지어 갈뿐이지, 그것도 어디다 뭘 자랑할 것, 그것도 내놓을 것이 아니여.

삿된 소견, 삿된 경계 나타나는 걸 가지고 자랑을 하고, 그렇게 더군다나 또 그런 소리를 듣고 자기도 빨리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앉았다면 어찌 그것을 최상승 학자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 하는 공부는 백이면 백하나까지 못쓰게 되는 것이다.
이 공부는 바른 스승 없이 하면 열심히 할수록 빨리 미치거나, 삿된 지경에 경계에 빠지거나 하는 것이여. 하다 말다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열심히 할수록 빨리 못쓰게 되는 것이 이 공부여.
그래서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여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팔냥시반근(八兩是半斤)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산광수색리(山光水色裡)에, 저 산에 푸르른 경치, 햇볕에 반짝거리는 물결, 그 모습이 면목자단적(面目自端的)이여. 면목이 그 면목(面目)의 단적(端的)을 갖다가 나타낸 것이다. 산은 푸르르고 흐르는 물이 반짝이는 그 모습이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의 한 모습이다.

욕식개중의(欲識箇中意)인댄, 이 낱 가운데에 참뜻을 알고자 할진대는,
팔냥(八兩)이 시반근(是半斤)이라. 여덟 냥(兩)이 이 반 근(斤)이다.
열엿 냥(兩)이 한 근(斤)인데, 여덟 냥이 반 근이다. 여덟 냥이 반 근?

여기에 이르러서 중생이 사량분별심으로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천지현격(天地懸隔)이여. 털끝 하나에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겨울 결제까지 두 달 남짓, 춥도 더웁지도 않는 좋은 계절입니다.
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최상승법을 닦는, 참선을 하는 우리 도반들은 '이뭣고?' 참선을 열심히 하는, 한 글자도 없는 그 경책(經冊)을 열심히 읽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원래 이 일요법회는 설법하는 시간보다도 다 같이 죽비(竹篦)를 치고 참선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그렇게 생각을 해 오고 있습니다.

목탁을 치고 입선(入禪)을 해.
(목탁)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법당을 나가셔서 댁으로 돌아가시는 걸음걸음 사이에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시고, 댁에 가셔서도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생활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이다음 법회 때에 언제라도 여기에 떠억 법당에 들어오시면 부처님께 참배를 하시고, 그리고서 자리에 앞에부터 차례차례 적당한 자리에 따악 앉으시면, 앉자마자 따악 반가부좌(半跏趺坐) 따악 하고 몸을 단정히 하고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하십시요. 다음 그 바로 법회가 시작할 그 시간까지.

들어오신 대로 차곡차곡 차곡차곡 그렇게 해서 열 분, 스무 분, 백 분, 이백 분, 오백 명, 칠백 명 이렇게 들어오셨더라도 한 분도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정진을 하시는 가운데에 법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시도록.
여기는 극장도 아니고, 무슨 다른 그런 연회석상도 아니고, 이 법당 안에 들어오셨으면 오직 그 경건한 마음으로 자세를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떠억 들고서 5분이면 5분, 10분이면 10분, 30분이면 30분, 일찍 오신 분은 한 시간이라도 타악 정진을 하시면 그 시간이 얼마나 참 귀중한 시간이 되겠습니까.

옆에 분하고 주거니 받거니 수근수근수근 잡담을 하면 여기에 오신 본의(本意)도 아니고 또 그 한 분, 여그서 떠들면 저그서 떠들고 해 가지고 이 법당 안이 도대체 너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여기에 오신 분 가운데에는 또 그렇게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또 그렇게 정진하시고 있는 분도 계시는데, 그 정진하시는 분에게 방해도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자기도 열심히 공부하면 남도 공부 잘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는 것인데, 자기도 공부를 아니하면서 남의 공부하는 것을 방해를 치는 것은 수행인의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용화사 선원은 처음 오신 분도 들어오자마자 탁! 스스로 엄숙해지고 경건해지도록 그러한 이 법보선원이 되도록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참배(參拜)를 할 때 혹 향을 가지고 오시던지 초를 가지고 오셨을 때, 불이 안 켜졌으면 가지고 오신 촛불을 켜시면 좋고, 또 향불이 안 타고 있으면 또 당신이 가지고 오신 향을 따악 사롸서 꽂고 절을 하시면 좋지만,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꽂아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오신 것은 탁자 위에 가지론히 딱 놔놓고 그리고서 경건하게 예배만 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촛불이 켜져 있는데, 그놈을 탁! 내려서 끄고 당신이 가져온 것을 꽂고, 향이 이미 꽂아 있는데 거기다 또 두 개 세 개 네 개를 잔뜩 꽂아 놓으면 그 연기가 너무 법당 안에 자욱해 가지고 목이 아프고 또 법당이 또 시커멓게 끄실리게 되면 그것도 안 좋은 것이고.

이 법당에 들어서면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야지, 너무 향을 많이 꽂아 가지고 공장 굴뚝같이 되어 가지고서는 존엄성도 없어지는 것이고 위생상으로도 안 좋은 것이고.
하도 부처님이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다고 그래서 유리로 문을 해 닫았습니다. 부처님은 문을 해 닫아 드려서 아무 말씀이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향을 피는 거, 촛불을 켜는 것을 꼭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절대로 향을 많이 꽂는다고 해서 부처님이 복을 많이 주시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갖다 놓으시기만 해도 부처님은 다 아시니까 그렇게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 말을 했습니다마는 제가 정말 여러분께 하고자 한 말을 못다 했습니다.(50분36초~66분14초)




[법문 내용]

(게송)사양공사리~ / 지끔(1981년)으로부터 백 년 전에 한국에 침체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을 중흥시키신 경허 큰스님 / 경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신 만공(滿空) 큰스님, 그 만공 큰스님께 법을 이어받으신 선지식 가운데 한 분이신 전강 대종사(田岡大宗師)께서 이 주안 갯벌 가에 용화선원을 창설 / 『논어(論語)』 첫머리에 대한 법문.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라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 / 참선은 불법 가운데에 제일 높은 수행 방법이면서 제일 쉬운 것 /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

최상승법은 대뜸 처음부터 '나도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만 하면 나도 결정코 이 몸을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할 수가 있다'고 믿는데 부터서 시작을 해야 하는 것 /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 / 핑계 대는 것은 다 발심(發心)을 못한 탓 / 사바세계라 하는 것은 원래가 믿지 못할 곳. 즐거운 것도 잠시요. 건강한 것도 잠시.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 / '이뭣고?' 한마디가 팔만대장경을 다 읽은 공덕과 같다 / 참선법은 날마다 해 가지고 조끔씩 알아 들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해 갈수록 꽈악 맥혀서 알 수가 없는 공부.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 /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 / (게송)산광수색리~ / 법회 때, 그리고 법당에서의 예절.


이 공부라 하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고도 쉬운 것입니다. 이 공부는 내가 참나의 면목(面目)을 깨닫는 공부, 내게 있는 나의 마음자리를 내가 찾는 공부여. 이 공부는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은 누구라도 하면 되는 것이고, 또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불법에 있어서 참선이라고 하는 거,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이 없다면 불교는 한낱 다른 종교와 별로 특수하게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 내가 나를 깨닫는 법,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 참선법은 불교 가운데에서 가장 최고에 수행 방법이요, 모든 종교 가운데에 불법이 최고에 종교가 된 원인인 것입니다.

「이 참선법은 종교라 하기보다는 사람으로서 참사람이 되는 바른길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바로 「내가 나를 깨달라서 나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똑같은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하는 데에 그 특수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께서 설(說)하신, 부처님께서 전(傳)하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해서 열심히 도(道)를 닦으면, 목숨 바쳐서 도를 닦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믿는 우리 불자(佛子)가 맨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하물며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범부(凡夫)를 고쳐서 성현(聖賢)을 맨드는 이 공부를 목숨을 바쳐서 해도 어려웁고 어려울 텐데. 처음부터 안 될 것을 알고, 안 될 폭을 대고, 미리서부터서 넘어질 자리부터 보고 씨름을 하려고 하는 사람과 같애서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첫째, '나도 하면 된다'고 하는 신념. 그것이 서면 공부는 절반은 해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부는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꼭! 성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기 때문에 올바르게만 찾으면 틀림없이 거기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어떠한 보물이나 물건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을려고 할 때에는 혹 찾어지기도 하고, 혹 안 찾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 것은 마치 내 호주머니 속에 있는 어떤 물건을 찾은 거와 같애서 그 호주머니 속에 손만 집어넣으면 거기에 있는 것이여. 그래서 이 공부는 믿고 열심히만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할 수가 있다고 단언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그 자체를 볼려고 하면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분명히 눈을 통해서 볼 때 거기에 있었는데, 그 보는 그놈을 돌이켜서 다시 볼려고 하면 자취가 없습니다. 여기에 깨닫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웁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한 말을 과거에도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찾다가 그르친다. 찾다가 저 죽는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건 깨달음을 100프로 숨김없이 다 표현을 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은 목숨 바쳐서 믿고, 목숨 바쳐서 여법(如法)하게 실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말 한마디에 일대사(一大事)는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지식, 도인(道人)들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라' 선지식 말 한마디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 버린 분이 참 많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러냐? 여지없이 믿어 버렸기 때문에, 믿으면 말 한마디에 끝나는 까닭인 것입니다.

설사 한마디 말 한마디에 깨닫지를 못한다 하더라도 화두 한마디를 받아 가지고, 여지없이 앞도 생각하지 않고, 뒤도 생각하지 않고, 옆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그 한마디 화두만을 의심(疑心), 의관(疑觀) 참구(參究)해 가면 조끔도 깨달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 공부가 최상승이요, 반드시 해야 하고, 하면 꼭 되는 것이지만, 첫째, 바른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스승이, 어떠한 사람이 과연 바른 스승이냐?

'바른 스승으로부터 지도를 받아서 공부를 했고, 바른 스승으로부터 인가(印可)를 받아야 그것이 바른 스승이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을 만나려면 자기 자신이 정말 바른 신심(信心)을 가지면 묘(妙)하게 불보살(佛菩薩)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화현(化現)은 이 사바세계에 육도법계(六途法界)에 가뜩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불보살의 화현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깨닫기를, 공연히 급한 마음으로 깨닫기를 바랜다고, 바래고 기다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이르른 것이 아닙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 시간이라도 빨리 깨달을려면 오직 '이뭣고?' 이렇게만 공부를 지어 갈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도 생각이 안 일어날 때가 없는데, 일어나는 그 생각이 결국은 육도윤회(六途輪廻)의 원인이 되는 것이여.
그 일어나는 한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옮기기 전에 퍼뜩 화두(話頭)를 들을 때에 육도윤회로 빠지는 길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의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이고, 생사해탈 묘법(妙法)이라 하는 것이여.

다른 사람 죽은 것은 보고 '무상하다'고 하면서, 자기 앞에 무상함이 돌아 닥쳐오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어. 이것이 바로 '어리석다' 하는 것이여. 어리석은 탓으로 해서 우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상(無常)한 줄 깨닫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이것을 '지혜(智慧)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여.

지혜, 부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지혜(智慧)의 눈을 뜬 범부(凡夫)이신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지혜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과 부처님의 차이는 그것뿐인 것입니다.
지혜(智慧)의 눈을 뜬 중생(衆生)이 부처님이고,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한 부처님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이여. 우리도 다맛 지혜의 눈만 뜨지 못했지, 분명 우리도 부처님이여.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마음과 부처, 이 세 가지는 추호도 다름이 없는 차별이 없는 하나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도(道)라고 하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에서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행복이라 하는 것도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으면 그것은 참 행복이 아닌 것입니다.

유루복(有漏福)도 그렇거든 하물며 이 무루법(無漏法), 최상승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나, 참나를 찾아야 되는데, 참나는 번뇌 망상을 버리고 찾지 말고, 중생의 탐심(貪心) · 진심(瞋心) · 치심(癡心) · 오욕락(五欲樂) · 번뇌(煩惱) · 망상(妄想) 바로 거기에서 그놈을 버리고 찾지 말고, 거기에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화두를 떠억 챙기면 그것이 공부를 바로 해 들어가는 것이여.
깨닫기를 바래지 말고 오직 의심(疑心)만을 관(觀)해 나가는 것이여. 망상이 일어나도 그 망상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바로 거기서 '이뭣고?'
이것이 바로 망상을 다스리는 공부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을 굴복 받는 길이요, 일체 업장(業障)을 소멸하는 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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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법문(法門)’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 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 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도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1. 2. 8. 23:01

 

 

((No.164))—1982(임술년) 춘계산철 결제 법어(82.02.24) (35분)

 

(1) 약 19분.

(2) 약 16분.


(1)------------------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가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신재해중휴멱수(身在海中休覓水)하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몸이 바다 가운데에 있으니 물 찾기를 쉬어라.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이니라.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니 산을 찾지 말아라.
바닷속에 들어가서 헤엄을 치고 있으면서 '물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물을 찾지 말고, 날마다 재를 넘어 다니면서 '산이 어디가 있는가?' 하고 산을 찾지 말아라.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백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니까 백년이면 삼만육천 일인데,
백년(百年) 삼만육천조(三萬六千朝)에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니라. 백 년 삼만육천 일 반복하는 놈이, 엎쳤다 뒤쳤다, 앉았다 일어났다, 오고가고, 그 반복하는 놈이 원래로 이놈이더라.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2월 초하루, 반살림 결제(結制)날입니다.
그전에는 전강 조실(祖室) 스님 열반(涅槃)하신 뒤로 쭈욱 해제(解制) 동안에도 스님네가 해제했다고 해서 이렇다 할 꼭 갈 곳도 없으면서 모다 걸망을 지고 불불이 나가서 여기저기 동서남북으로 그럭저럭 다니면서 다음 철 결제까지 기다리느라고 정처(定處)없이 모다 행각(行脚)도 하고, 모다 이리 가서 쉬기도 하고 약(藥)도 먹고 모다 그랬는데,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이 도량(道場)에서 결제 때와 똑같이 사분정진(四分精進)을 하면서 정진을 하는 것이 좋겠다' 이리 생각을 해서, 산철에도 가시지 말고 여기서 공부를 하시기를 바래서, 그렇게 해서 스님네가 이 산철에도 정진을 쭈욱 해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금년(今年)부터서는—옛날에 그렇게 산철에 정진을 했지만, 뭐 '산철결제'라 하고 무슨 결제 법요식(法要式)을 거행하고 그러지는 안 했습니다.
금년에는 이렇게 새로 선방(禪房)도 짓고 이렇게 법당(法堂)도 짓고 그랬으니, 기왕 산철에 결제를, 안거(安居)를 하기로 한다면 간략히 결제 법요식을 갖는 것이 우리의 신심(信心)을 굳건히 하고 여러 가지 분위기를 엄숙히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이리해서 여러 스님네의 뜻을 받아들여서 이렇게 간략히 법요식을 거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다 신도님한테는 '산철 결제 법요식에 참석하시라'는 구체적인 발표는 하지 안 했는데, 이렇게 특별히 신심(信心)이 있는, 또 인연(因緣)이 있는 몇 분의 신도님네들이 참석을 해 주셔서 이것도 숙세(宿世)의 깊은 인연(因緣)의 소치(所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각국사(眞覺國師)에 좌우명(座右銘)」이 있는데, 그 좌우명을 한 번 되새겨 보는 것도 우리 정진(精進)을 해 나가는 출가(出家) 납승(衲僧)으로서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보살자(菩薩子) 보살자(菩薩子)여.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니라.
보살이여, 보살의 자식이여, 보살이여. 우리가 모다 보살의 자식이요, 새끼보살이라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마두심유이(常自摩頭深有以)여. 항상 스스로 자기 머리를 어루만져 보라 그 말이여. 깊은 씀[有]이 있으리라, 깊은 의의(意義)가 있으리라.

마두인득심사량(摩頭因得審思量)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머리를, 자기 머리를 자기가 떠억 어루만지면서 깊은 사량(思量)을, 생각한 바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여. '부처님이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져 준다' 하는 그러한 마음으로 자기가 자기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생각을 하는 것이여.
출가본의도하사(出家本意圖何事)냐, 출가(出家)한 본뜻이, 목적이 무슨 일을 목적으로 해서 출가를 했느냐?

승기상모속기심(僧其相貌俗其心)이요, 모냥은 분명히 중에 모냥을 하고 있는데, 그 마음은 속인(俗人)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참으로 여법(如法)한 출가인(出家人)으로서의 몸과 마음을 다 갖추었느냐.
가불참천이괴지(可不慚天而愧地)니라. 가히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고, 땅을 내려다보고 부끄럽지 않느냐.

추행광언임여위(麤行狂言任汝爲)요 확탕노탄하회피(鑊湯爐炭何回避)리요.
머트러운 행동과 미치광이 같은 말을 니 멋대로 행하고, 니 멋대로 지껄이다가 확탕노탄(鑊湯爐炭)을 하회피(何回避)냐, 확탕(鑊湯)지옥과 노탄(爐炭)지옥을 어떻게 회피할 수가 있겠느냐.

이건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항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았던 글입니다. 이 글은 바로 출가 납승으로서는 누구나 이러한 좌우명으로써 자기(自己)의 좌우명(座右銘)을 삼는다 해도 조끔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좌우명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 전강 조실 스님 법문(法門) 가운데에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있는 법문을 해 주셨는데,
네 가지의 은혜(恩惠)가 중(重)한 것을 잊지 않았느냐?
사대(四大) 오온(五蘊)이 생각 생각이 일 초 일 초 늙어가고 있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안 했느냐?

너의 목숨이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달려 있는 것을 잊지 안 했느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처와 조사(祖師)를 만났느냐?
이러한 등(等)의 여러 가지 그 법문을 해 주셨는데, 그러한 말씀도 우리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그런 중대(重大)한 법문(法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 출가한 선객(禪客)이 무엇이 제일 고민(苦悶)이냐?
옷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먹을 것이 없는 것도 고민이 아니요, 건강이 좋고 나쁜 것도 그것도 큰 고민이 아니고, 오직 큰 고민은 '정진(精進)이 순일(純一)하게 되냐, 안 되느냐?' 오직 이 하나의 고민이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중국에 고봉선사(高峰禪師), 『선요(禪要)』 법문을 하신 그 고봉선사께서도 처음에 출가해서 선방에 들어와 가지고 화두(話頭)를 타서 참선(參禪)을 하는데, 어떻게 잠이 퍼오던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포단(蒲團) 위에 앉어 있을 수가 없었어. 부득이 밥을 먹을 때에만 방석에 앉어서 밥을 먹고는 그밖에는 방석에 앉어 있을 수가 없어. 앉었기만 하면 혼침(昏沈)이 와서 졸음이 오기 때문에 앉지를 못하고.

금방 앉으려고 하면은 잠이 퍼와 가지고는 꾸뻑, 일어나 가지고 밖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하는데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점심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 그래 가지고 왔다갔다하면서 잠을 깨 가지고, 잠이 깨져서 막 좀 가서 방석에 가서 앉으려고 하면은 또 잠이 오고.
잠이 깨면은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망상이 좀 가라앉을만 하면 잠이 오고 이랬는데, 처음에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결심(決心)을 하기를 '3년 동안 정진을 해 가지고 3년이 되어도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하면 죽어 버릴 각오'를 하고 공부를 시작을 했는데, 3년이 거의 다 되도록 조끔도 공부가 진취(進趣)가 없었어. 죽을 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기한은 얼마 안 남었는데 공부가 전혀 진취가 없어.

이 세상에 무엇이고 3년 동안 적공(積功)을 들이면 숙달(熟達)이 되어서 많이 진취가 있는 것인데, 어찌된 셈인지 혼침(昏沈)과 산란(散亂)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아무리 고단해도 자리에 눕지를 아니하고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는데 3년이 되도록 조끔도 진취가 없어. 혼침과 산란, 두 가지로 완전히 24시간이 점철(點綴)이 되어. 혼침 아니면 산란, 산란 아니면 혼침.
아무리 곤(困)해도 자리에 눕지를 않고, 낮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밤새도록 잠을 안 자려고 도량에 나가서 왔다갔다. 밥 한 그릇 먹는 그 잠깐 동안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리지를 아니했어.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서 달마(達摩) 스님 기일(忌日)에, 달마 스님 모셔진 영각(影閣)에 올라가서 그 제사를 지내는데, 그 오조법연(五祖法演) 화상 진영(眞影)에 쓰여 있는 글에,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이라' 그 영찬(影讚)을 보고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처음~19분)




(2)------------------

그 확철대오 하기 전 일주일 전에 꿈에 단교화상(斷橋和尙)이 보이신,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그 화두(話頭)를 꿈에 받고서 꿈을 깼는데, 그 화두가 성성(惺惺)하고, 화두를 들지 아니해도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밥을 먹어도 의심이요 똥을 누어도 의심이요, 산을 봐도 의심이요 물을 봐도 의심이요, 대중 가운데 있어도 대중은 한 사람도 보이지도 않고, 오직 의단만이 독로해서 밥도 건성으로 먹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화두(話頭)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일부러 딴생각을 좀 하려고 해도 딴생각이 나지를 않고 오직 화두만이 독로를 했다.

그 전에는 화두를 아무리 들려고 해도 들을 때뿐이지, 금방 산란심(散亂心)이 들어와 버리고 그랬었는데, 꿈에 단교화상 '만법귀일' 화두를 받은 이후로는 제절로 그렇게 되었더라.
그래 가지고 이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가 일주일을 고대로 가는데, 마침내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이란 영찬(影讚)을 보고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는데.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애를 썼어도 공부가 일호(一毫) 진취(進趣)가 없었느냐?
그 원인을 캐 보니까, 다른 데에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정(疑情) 상(上)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한 데 있더라. 화두(話頭)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가 잘 안 된다', '의심이 잘 안 든다' 많은 수행승(修行僧)들이 이 년, 삼 년 내지 십 년을 선방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해도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못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가끔 "어떻게 하면 의정이 돈발하겠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는 다정한 도반(道伴)이 무상(無常)하게 죽은 것을 보고, 그 도반이 죽어서 사십구재(四十九齋)날 김응애 스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거기에서 발심(發心)을 해 가지고 어린 나이에 선방(禪房)에 들어오셔서 그 용맹정진을 해 가지고 마침내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하셨습니다마는.
그러한 특별한 발심(發心) 기연(機緣)이 있거나, 스스로 그렇지 못하면 이 고봉 스님의 경우와 같이 되고 안 되고 할 것도 따지지 말고, 아주 죽기로 맹서(盟誓)를 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1년 2년 3년, 이렇게 피나는 가행정진 용맹정진을 해서 공부가 되고 한 것도 따지지 말고 모기가 마치 쇠로 된 소에 입부리를 박듯이—모기가, 그 약하디 약한 모기가 어떻게 쇠로 지어 붓어진 소 몸에다가 그 입부리를 박은들 들어갈... 상식적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들어갈 것이다, 안 들어갈 거다'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몸뚱이 채 쇠로 된 소 몸에다 뚫고 들어가는 것이여. 입부리와 자기 몸이 부서져서 가루가 되거나 말거나,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한 것을 전혀 따지지 아니하고 몸뚱이 채 아주 육탄(肉彈)으로 소를 향해서 몸을 던진다 이 말인데.

이러한 대용맹심, 조실 스님께서도 도반의 죽음으로 해서 무상함을 깨달라서 발심을 하셔 가지고 대중의 사분정진에 구애(拘礙)받지 아니하고,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하나 깔아 놓고 거기서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졸으면 또 포행(布行)을 하고 또 졸음이 나가면 정진을 하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이 모여서 방을 짜서 정진을 하게 되니까 대중(大衆)의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되겠지만, 대중의 규칙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철저한 자기 규칙,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고봉 스님처럼 전강 조실 스님처럼 그러한 철저한 가행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번 철에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망회타귀굴(忘懷墮鬼窟)이요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니라
나무~아미타불~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하면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망회(忘懷)에 타귀굴(墮鬼窟)이요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라.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하고, 생각을 자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노력을 하면, 망회(忘懷)를 잊어버리면, 회포(懷抱)를 생각을 잊어버리면 흑산하귀굴리(黑山下鬼窟裏)에 떨어지고,
착의종원정(着意縱猿情)이다. 뜻을 착(着)하면, 생각을 일으키면, 그 생각이 무슨 생각이 되었건, 벌써 뜻을 착(着)하면 잔나비의 뜻에 놀아난 것이다.

갱의제이병(更擬除二病)하면, 생각을 잊으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뜻을 부딪치려고 하지도 아니하고, 이 두 가지 병[二病]을 없애려고 뉘기 짜면,
미면야호정(未免野狐精)이다. 야호에 정, 야호정(野狐精), 야호(野狐)는 여우, 여우에 정(精)을 면틀 못할 것이다.


수임방원기(水任方圓器)허고  경수호한형(鏡隨胡漢形)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직요이마거(直饒伊麽去)라도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생각을 잊어버리면 귀신굴(鬼神窟)에 떨어지고, 뜻을 부딪히면, 착(着)하면 원숭이의 정(精)에 놀아나고, 이 두 가지 병(病)을 없애려고 하면 야호(野狐)의 정(精)을 면틀 못한다.

그렇다면 물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따르듯이, 둥근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둥그렇게 담아지고, 모난 그릇에다 담으면 물도 모나게 담아지고,
경수호환형(鏡隨胡漢形)이다. 거울은 검은 것이 거울 앞에 나타나면 검은 것이 거울 속에 비추고, 흰 것이 나타나면 흰 영상(影像)이 거울 속에 드러나듯이.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가져가면 어떻겠느냐.
유교환롱맹(猶較患聾盲)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마치 귀먹은 벙어리와 눈이 먼 장님에다가 비유할 수밖에는 없느니라.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아 가는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써 가겠는가,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19분1초~35분23초) (끝)




[법문 내용]

(게송)신재해중휴멱수~, 백년삼만육천조~ / 산철결제 / 진각국사(眞覺國師) 좌우명(座右銘) / 중국 고봉선사의 수행담 / 백년삼만육천조(百年三萬六千朝) 반복원래시자한(返覆元來是這漢).

고봉스님 3년 공부가 진취가 없었던 까닭은? 화두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 고봉스님, 전강 조실스님처럼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 / 자가철주(自家鐵柱) / (게송)망회타귀굴~, 수임방원기~ / 활구참선객(活句參禪客)은 과연 어떻게 일용(日用)을 수용(受用)을 해 갈 것인가?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진각국사(眞覺國師)가 항시 자기 자신을 깨우치기 위해서 쓴 「좌우명(座右銘)」 이 글은 바로 출가 납승으로서는 누구나 이러한 좌우명으로써 자기(自己)의 좌우명(座右銘)을 삼는다 해도 조끔도 손색이 없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자기가 자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이 좌우명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봉스님이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해서 3년 동안을 그렇게 애를 썼어도 공부가 일호(一毫) 진취(進趣)가 없었느냐?
그 원인을 캐 보니까, 다른 데에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정(疑情) 상(上)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한 데 있더라. 화두(話頭)만을 자꾸 거각(擧却)했을 뿐이지, 그 간절한 '의정(疑情)'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공부가 잘 안 된다', '의심이 잘 안 든다' 많은 수행승(修行僧)들이 이 년, 삼 년 내지 십 년을 선방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해도 공안(公案)을 타파(打破)를 못하는 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전강 조실 스님께서도 도반의 죽음으로 해서 무상함을 깨달라서 발심을 하셔 가지고 대중의 사분정진에 구애(拘礙)받지 아니하고, 법당 뒤에다가 꺼적을 하나 깔아 놓고 거기서 앉아서 정진을 하다가 졸으면 또 포행(布行)을 하고 또 졸음이 나가면 정진을 하고 무섭게 정진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부터 불타오르는 그러한 그 간절(懇切)한 분심(憤心), 신심(信心)이 아니면 대의단(大疑團)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대중이 모여서 방을 짜서 정진을 하게 되니까 대중(大衆)의 규칙에 순응(順應)을 해야 되겠지만, 대중의 규칙에 어긋나지 아니한 범위 내에서 철저한 자기 규칙, 자가철주(自家鐵柱)를 세워서, 고봉 스님처럼 전강 조실 스님처럼 그러한 철저한 가행정진을 해서 기어코 이번 철에 공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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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참선법 A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C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D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E (유튜브)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A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참선법 B (블로그) 법문은 여기에서 들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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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1. 2. 7. 22:11

 

 

((No.161))—1982년 입춘 법회(82.02.04) (60분)

 

(1/3) 약 21분.

(2/3) 약 21분.

(3/3) 약 18분.


(1/3)----------------

철수화개별시춘(鐵樹花開別時春)이요  사해향풍종차기(四海香風從此起)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래성불비타득(本來成佛非他得)이요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철수화개별시춘(鐵樹花開別時春)이요, 쇠나무, 쇠로 된 나무에, 고목(枯木)나무에 꽃이 피니 별단(別段) 이 봄이요, 차디찬 쇠로 된 고목나무에 꽃이 피니 이 특별한 이 봄이다.
사해향풍(四海香風)이 종차기(從此起)로구나. 동해, 동서남북 사해(四海)에 향기로운 바람이 이로부터서 일어나는구나.

오늘은 임술년(壬戌年) 입춘일(立春日), 날입니다. 벌써 임술년 정월 초하루가 지내간 지 열하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춘은 오늘 오시(午時)에 입춘(立春)이 들었습니다. 오늘 오시부터 정식으로 임술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지나간 열흘 동안은 신유년(辛酉年)의 절후(節候)가 먹은 것이고 오늘부터서 정식으로 임술년(壬戌年)이 된 것입니다.

지난 삼동(三冬)에 소한(小寒) 대한(大寒)에 그 강추위가 오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날입니다.
천하 없이 추운 겨울이라 하더라도 입춘부터서는 맥을 추리지를 못하고, 하루하루 조끔 추웠다 더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보름이 지나가면, 15일간이 지나가면 또 우수(雨水)가 돌아와서 따듯한 봄날이 되고 여기저기서 꽃이 피게 됩니다.

본래성불(本來成佛)이 비타득(非他得)이여. 우리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고향(故鄕)을 떠나서 타관(他官)살이를 했는데, 그 타관살이 하는 것이 마치 자기 따뜻한 자기 고향에 자기집을 여의고,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낸 것이 그동안에 엄동설한(嚴冬雪寒)을 지낸 거와 같애.
그런데 육도윤회(六道輪廻) 속에서 고향을 잃고 방황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언제나 자기 고향을 한 걸음도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망각(忘却)하고 오늘날까지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래성불한 도리를 어떻게 하면은 깨달을 수가 있느냐?
심약진시도이친(心若眞是道易親)이다. 마음 하나 참되면 이것이 바로 도(道)와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조석지변(朝夕之變)이여. 아침 먹었던 마음 다르고 벌써 낮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고.
'이제는 내가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철저하게 이 참선(參禪)을 하리라' 법문(法門) 들을 때에는 그렇게 결심(決心)을 하고, 해 놓고서도 법문이 끝나고 문밖에 나가면 벌써 딴생각이 들어오고.
법문 들을 때에는 '다시는 내가 딴생각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이 정법(正法)만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살아가리라' 그렇게 굳게굳게 결심을 하고서도 집에 가면 누가 뭐라고 뭐라 하고, '어디를 가면 좋은 아주 기가 맥히게 잘 맞추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 가서 부작(符作) 하나만 가지면은 백사(百事) 소원(所願)을 성취한다' 그 말 한마디만 들으면 금방 귀가 솔깃해 가지고 당장 따라나서.

만약에 부작 한 장을 어디 가서 얻어 가지고 그 부작 하나로 해서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소원이 성취된다면 무엇을 이 세상에 걱정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부작으로써 업장을 소멸하고, 부작으로써 소원을 성취하고, 부작으로써 남편의 바람피우는 것을 막고, 아들 대학을 합격을 하고, 부작 한 장으로써 그러한 무서운 위력(威力)을 낼 수가 있다면, 만신이나 무당이나 점쟁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하고 앉었겠느냐 그 말이여.
먼저 자기부터 팔자를 고쳐서 자기 자식이 대통령도 되고 장관도 되고 만석꾼이도 되고 하지, 자기는 왜 그 짓 해서 먹고살면서 남에게 써준 것은 그렇게 되고, 자기는 그렇게 안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이냐 그 말이여.

마음이 참되지를 못하고 요망(妖妄)하고 삿되고 경박(輕薄)해서, 참된 말, 진리(眞理)의 말, 최상승법을 일러주면은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간사(奸詐)한 말을 들으면은 그 말이 그렇게 고소하고 쏙쏙 마음에 들어가요.

오늘은 입춘날이라 인 · 오 · 술(寅午戌), 범해에 난 사람, 말해에 난 사람, 또 개해에... 개띠, 이 세 가지 띠를 가진 사람은 오늘이 삼재(三災)가 나가는, 금년(今年)이 나가는 해입니다. 그 '날삼재'라 해서, 그러께는 '들삼재', 작년에는 '앉은삼재', 금년이 인자 '날삼재'인데,
'날삼재가 진짜 조심을 해야 한다. 날삼재 일 년간을 잘 넘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 신령스러운 부작을 꼭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을 유혹을 하는데, 들삼재 · 앉은삼재 · 날삼재, 그런 삼재에 안 들은 사람도 뜻밖에 재난(災難)을 만날 수도 있고, 삼재가 든 사람도 그런 부작을 지니지 아니해도 별 탈 없이 지낸 사람도 있고 그러한 것이지, 삼재가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좋지 않는 일이 있고, 그 부적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꼭 면(免)한 것이 아니거든.

어디 교통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의 호주머니 속에서 그 여러 가지 부적(符籍)이 많이 나왔다고 하는 것이 연전(年前)에 내 신문에서 본 일이 있는데, 부작(符作)에다가 의지를 하지 말고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최상승법에 의지해서 자기 마음을 진실(眞實)하게 갖고 참되게 마음을 가져 나감으로써 마음속에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해야 모든 재난(災難)을 면할 수가 있고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고요할 때에 생각해 보면 누구나 납득이 갈 수 있는 얘깁니다.


해마다 입춘(立春)이 되면 입춘 법요식(法要式)을 갖고 법문(法門)을 하고 또 공양(供養)을 올리고 축원(祝願)을 하고 이럽니다마는, 왜 입춘에 삼재(三災)풀이를 하고 또 입춘에 이 법요식을 갖느냐 하면, 입춘 날부터 새해의 절후(節候)가 정식으로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에, 날짜로는 정월 초하루가 그 해의 시작하는 첫날이지만,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일 년을 스물네 가지 절후(節候)로 나눌 때,
절후로 따질 때에는 입춘일(立春日)이 그 해의 첫날이 되기 때문에, 첫날에 지나간 한 해를 반성(反省)하고 앞으로 다가오는 일 년간을 장애 없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뜻있는 한 해가 되도록 각오를 하고 마음을 다지는 그러한 날로 기념하기 위해서 절절이 입춘에 법요식(法要式)을 갖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이고, 집을 하나를 지을 때에도 기공식(起工式)이라 하는 게 있고, 그 집을 다 짓게 되면 낙성식(落成式)을 하듯이, 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처음 탄생할 때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해마다 그 생일을 축하하고, 또 마지막 일평생을 살다가 하직한 날을 갖다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서 돌아가신 날을 추모(追慕)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일 년이 시작하는 날과 일 년이 끝나는 날은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고 반성을 하고 참회(懺悔)하고 새로이 뜻을 다져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고 뜻깊은 행사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떠한 목적지를 향해서 여행(旅行)을 떠날 때에도 처음 한 발 내딛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북쪽으로 가려고 하면서 출발을 남쪽을 향해서 출발을 하면 천리만리 엉뚱한 데로 가게 되고.
'천 리 길도 한 걸음으로부터' 라고 하는 그런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그 한 걸음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종교(宗敎)를 믿을 때에도 맨 처음에 어느 종교 어느 종파(宗派)에 발을 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평생의 종교와 신앙(信仰)이 결판이 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 '부처님을 모시면 다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어느 절이나 한 부처님이다' 만신 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져 있고, 무당집에 가도 부처님은 모셔 있고, 유사 종교(類似宗敎) 단체에도 가면 부처님이 다 모셔져 있어서, 부처님은 다 한 부처님인 줄 알고 지성(至誠)으로 다니지만,
다, 물론 말로는 한 부처님이고 같은 부처님이지만, 그 같은 부처님을 '어떻게 받들어 모시고 어떻게 실천해 나가느냐'는 절마다 다르고, 무당 다르고, 만신 다르고, 점쟁이 다르고, 다 다른 것입니다. 이름은 다 불교라 하지마는 그 종파에 따라서 그 '부처님의 법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용화사(龍華寺)는 참선법(參禪法)을 선양(宣揚)하고 최상승법이여. 용화사가 제일이고 다른 절은 못쓴다' 그러한 말이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 그 정법(正法)이고 또는 방편 사법(邪法)이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각자가 보고 들어보면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이 사법(邪法)이고, 정법(正法)이냐?

그것은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欲樂)을 조장(助長)을 시키는 그러한 종교는 바른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오욕락을 버리고, 버린다기보다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비움으로 해서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指導)하고, 그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것을 정법(正法)이라 하는 것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 그 종교를 믿으면은 부자가 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아들을 난다. 그 종교를 믿으면 중생의 어떠한 욕구를 충족을 시켜준다' 이러한 식으로 선전을 하고 그러한 달콤한 낚숫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종파는 물어볼 것도 없이 삿된 종파다. 삿된 종교라고 결정을 해도, 판단을 해도 추호도 어김이 없는 것입니다.(처음~20분48초)




(2/3)----------------

'그러면 다른 종교 다른 종파에 가면 부자도 되고, 아들도 되고, 모든 소원을 성취된다 하고, 용화사는 가 봤자 그러면 그런 것은 소용이 없고 이뭣고? 만 하지, 그러면 부자도 안 되고, 만날 해 봤자 소원도 이루지 않단 말이냐?' 혹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그러한 것을 그 신앙의 목적을 삼고, 자기가 그 종교를 실천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면 벌써 믿는 그 사람 자체가 훌륭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 올바른 실천으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면, 자연히 마음속에 업장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큰 목적을 설정을 해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와 신심(信心)으로 여법하게 도를 닦아 나가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재산이건 권리건 명예건 건강이건 제절로 이루어진다면 그 이상 바랠 것이 무엇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명색이 종교를 믿는다면서 미신(迷信)으로 종교를 믿는다면, 어디다가 내놓고 '나는 종교를 믿는다'고. '나는 무슨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느냐 이 말씀이여.
무당집이나 다니고, 만신집이나 다니고, 점이나 치러 다니고, 그래 가지고 어디 가서 '나는 만신을 믿고 산다. 나는 무당을 믿고 산다. 그랬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았다' 떳떳하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이나 딸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친구 앞에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보살(佛菩薩)의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해야만 자기도 떳떳하고 남편 앞에도 떳떳하고—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 몰래 만신을 불러서 푸닥거리를 하고, 만신한테 비밀리 왕래를 하고 그러지, 떳떳하다면 왜 말을 할 수가 없습니까?
얼마든지 남편과 같이 와서 법문(法門)을 듣고, 같이 와서 참선(參禪)을 하고, 같이 참선을 도반(道伴)으로서 해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입춘에 좋은 부작(符作) 한 장 주지 아니하고, 할 말 없으니까 공연히 마음 닦으면 죄가 소멸이 되고 소원을 이룬다' 이렇게 생각하실 분은 한 분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저 옛날에 함경도 사람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향해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머나먼 길을 걸어서 가자니 그것도 중간에 도적(盜賊)을 만날까 걱정이 되고, 또 그 머나먼 길을 가 가지고 또 과거에 합격이 안 되면 안 되겠다 해서 좁쌀을 한 되를 싸 가지고 그 부처님 모셔져 있는 절을 찾아갔습니다.

부처님 앞에 좁쌀을 떠억 올려놓고서, 담뱃대를 손에 든 담뱃대를 들고 부처님 앞에 꺼떡꺼떡하면서, "부텨!" 그 함경도 사람은 부처를 '부텨'라고.
"부텨! 내 말 좀 잘 듣게. 내가 오늘 과거를 보러 가는데, 이번에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면 이다음에 이밥도 내가 갖다—그 쌀밥을 '이밥'이라 그러거든—이밥도 내가 갖다가 또 올릴 테니까 이번에 내가 꼭 과거에 붙게만 해 주게"

몇 번을 그 담뱃대를 흔들면서 간곡히 부탁을 하고 그리고서 과거를 보러 올라갔다가, 물어볼 것도 없이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과거에 떨어졌는데, 떨어지자마자 인자 고향으로 내려와 가지고 다시 그 절에 찾아가서,
"내가 그 귀한 좁쌀을 갖다가 올려놓고 그렇게 내가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 내 좁쌀만 똑! 따 먹고 얼굴만 노래져 갖고 앉어서, 내 말대로 과거만 합격해 주었으면 내가 쌀밥을 갖다가 올렸을 텐데 다 틀렸다"고, "'부텨, 부텨' 해서 영험(靈驗)이 있는 줄 알았더니 영판 점쟁이만 못하다"고.
"점쟁이는 다 과거에 붙고 떨어질 것도 알고, 잘하면 푸닥거리만 해도 병도 낫고 그러는데,  꺼먹꺼먹 우둑허니 앉어서 좁쌀만 똑 따 먹고, 무당만 영판 못하다”고 아주 큰 기침을 하고 나갔다고 그럽니다.


오늘 입춘에 여러분들이 이렇게 동참(同參)을 하셨는데, '입춘에 동참을 하고, 모처럼 이제 금년부터서는 무당이나 만신집이 부적 사러 가지 아니하고 한번 시험을 한번 해 보자'
그러다가 무슨 조그만 뭣이 뜻대로 안되면, 함경도 사람처럼 '그 입춘에 동참해 봤자 별 수 없고, 그 내년부터서는 그래도 무당한테 가서 부작(符作)을 꼭 사야겠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신다면 함경도 사람만 조끔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부작을 사거나 입춘에 동참을 하거나 또는 참선을 하거나, 쇠털 같은 많은 날에 혹 뜻대로 안 되는 수도 있고 또 뜻대로 되는 수도 있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라고 하는 데는—이 사바(娑婆)란 말이 인도 말인데, '인내(忍耐)', '감인(堪忍)', 인내, '참는다'는 말이거든. '사바세계' 하면은 '참는 세계'라.

여덟 가지 고(苦)—생(生) · 로(老) · 병(病) · 사(死)의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은 이별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또 미운 사람은 만나게 되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또 구(求)하면 마음대로 얻어지지 아니한 구부득고(求不得苦), 또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음성고(五陰盛苦), 이 여덟 가지 고(苦)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난 중생(衆生)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러한 고해(苦海)에 왜 우리가 태어났느냐? 과거에 우리가 그렇게 지었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다 이 말씀이여.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으면서도 이만큼 살게 된 것, 이만큼 잘 사는 것도 이것도 다 참 천만다행(千萬多幸)한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믿고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믿고, 그러기 때문에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살면서 이만큼 산다고 감사하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무엇이 뜻대로 안되면 거기에서 오히려 더 발심(發心)을 하고, '무엇인가 내게에 참회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이리 생각하고 자기의 내면으로 회광반조(廻光返照)해서 자기의 잘못을 참회를 하고, 다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신심을 내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이렇게 다져 나가야만 불법을 믿는 사람,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이요 바른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말씀드렸지만, 한 나라가 발전해 나가려면 견디기 어려운 난관(難關)을 만나서 그것을 극복해야만 그 나라도 발전을 하는 것이지, 너무 편안하고 일없으면 그 편안하고 살기 좋은 데에 도취(陶醉)가 되어 가지고 자연히 해태(懈怠)해지고, 그래 가지고 차츰차츰 국력이 쇠퇴해서 모든 국민이 게을러빠지고 사치에만 흘러서, 그러는 동안에 이웃나라가 반드시 그러한 틈을 타서 침범을 해 들어오고 마는 것입니다. 백제(百濟)가 망할 때에도 역시 그랬었고, 신라가, 그 꽃피었던 그 신라(新羅)가 망할 때에도 너무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월이 몇십 년, 몇백 년 지나다 보면 결국은 그 나라가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이 장차 훌륭한 인재(人材)를 낼 때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갖은 고통과 시험을 주어서 그 사람을 단련(鍛鍊)을 시킴으로써 위대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라와 민족과 인류를 잘 다스리도록 한다' 그런 말이 있고.
'나라에도 계속 그 충고하는, 나라의 정치와 통치자의 잘못을 힐난하게 비판하고 그 상소(上疏) 올리고 그러한 입바른 그러한 선비가 있어야 하고, 또 이웃나라에서 호시탐탐 그 나라를 침범하려고 하는 적성 국가(敵性國家)가 있어야만 그 나라는 계속 튼튼하고 나라를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다' 이러한 내용에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역사를 통해서 역력히 볼 수가 있는 바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대의정(大疑情)으로 도(道)를 닦아서 도업(道業)을 성취해 나가는 데 있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혀서 거기에서 대분심과 대신심이 불타올라야만 보다 더 빨리, 보다 더 크게 도업(道業)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회에 조그마한 사업(事業)을 하나 하더라도 물심양면(物心兩面)으로 또는 인간적으로 갖은 고통을 극복해야만 하나의 사업을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두 번 실패하면 또 일어서고, 곧 기업체가 쓰러지고 '내가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 한, 그러한 참 참기 어려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수없이 겪으면서 그러면서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버텨 나가야만 사업을 마침내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해탈도(解脫道)요, 대안락(大安樂), 큰 안락의 법문(法門)이라 하지만, 이 참선을 시작을 해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있어서도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 육체적으로도 팔 다리 허리가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사람, 골치가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도 온갖 번뇌(煩惱)와 망상(妄想)과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 퍼일어나 가지고, 조끔 공부하려면은 '가정에 뭔 일이 있다' 그래 가지고 잠시도 편할 날이 없이 이 일 저 일 구름 일어나듯이 일어납니다마는,
그러한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착실히 다져 나감으로써 그렇게 백방(百方)으로 공부를 방해치는 그러한 사건들이 하나씩 둘씩 차츰차츰 고개를 숙이고, 나중에는 그러한 일들이 내 공부해 나가는 데에 박차를 가해 줄지언정 그것이 나를 공부 못하게 하는 마침내 하지 못하게 될 날이 오는 것입니다.

무량겁래(無量劫來)로 익힌 것은 탐진치(貪瞋癡) 삼독과 오욕락(五欲樂)으로 익혀 왔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다 되어져. 마치 잡초(雜草)는 그렇게 뽑아 내버리고 약을 치고 해서 그것을 못 자라게 해도 잡초는 저절로 그렇게 잘 자라고. 곡식(穀食)은 거름을 주고 그렇게 잘 가꾸려고 해도 영 잘 안 자라는 거와 같애서,
우리 공부해 나가는 데에 있어 번뇌망상(煩惱妄想) 사량분별심은 그렇게 안 하려고 그러고, 쫓아내려고 그러고, 못 일어나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잘 퍼일어나고, 화두(話頭)는 그렇게 생각 생각이 추켜들고 하려고 해도 그것은 잘 잊어버리고 안 되지요.

그러나 사불범정(邪不犯正)이여. 또 마침내는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제아무리 무성(茂盛)했다 하더라도 끈질기게 노력을 하면 그 잡초를 제거하고 마침내 우리가 좋은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처럼,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쉬지 않고 공부를 다져 나가면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항복받아서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요, 팔만사천 보살(菩薩)님네들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여실(如實)히 보여주신 것입니다.(20분49초~41분36초)




(3/3)----------------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한 일밖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일도 많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고 '일 다하고 죽은 무덤이 없다'고 한 속담이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일이 이 나의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참나를 깨닫는 이 일에다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 한 일, 이것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피해서는 안 될 내가 해야만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지 목숨을 바쳐서 할 일은 못됩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목숨 바쳐서 할 일이 못됩니다.
돈이 없으면 안되어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목숨 바쳐서 돈을 벌 필요는 없는 것이고, 명예와 권리가 그것이 인간 세상에 필요하다 하지만 명예 얻기 위해서, 권리 얻기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박사와 예술이다, 무슨 학문이 소중하고 무슨 기술이 중요하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 그것을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직 이 참선(參禪)만은, 이 도(道)만은 목숨을 천만번이라도 바쳐야 하고, 목숨 바쳐서 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아이고! 용화사(龍華寺)를 가면 병(病)이 낫는다 그러고, 무슨 소원을 성취한다 그러고, 그렇다고 해서 용화사를 갔더니 목숨을 바치라고 한다'
겁먹으실 것은 없습니다. 당장 무슨 목숨을 바치라는 게 아니라, 목숨을 바칠 만큼 그런 간절(懇切)한 마음, 정성(精誠)스런 마음으로 닦아야만 하루라도 빨리 도(道)를 증득(證得)할 수가 있다 이런 말씀입니다.

"출가(出家)한 스님네도 견성성불한 이가 드문데, 어떻게 세속(世俗)에 오욕락 속에서 살면서 어떻게 도를 이룰 것인가? 일찌감치 포기하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옴마니반메훔'을 부른 것이 낫다" 자꾸 이러한 말로써 유혹을 받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마는.
이 참선(參禪)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 궁극에 목적이기는 하지만, 견성성불했다고 해서 두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나온 것도 아니고, 또는 이마 위에 무슨 육계상(肉髻相)이 솟아오른 것도 아니고, 밤에도 이 몸에서 광명(光明)이 나는 것도 아니고, 내나 밥 먹고 똥 누고, 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도를 닦은 사람은 환경에...(녹음 끊김) ... 특수한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환경(環境)에 지배(支配)를 받는데, 도를 닦은 사람은 자기가 환경을 지배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차이점을 말할 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라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우주(宇宙)에 주인공(主人公)이 되어 가지고 우주를 다스려야지, 내가 이 우주에 다스림을 받어서는 아니 된 것입니다. 중생(衆生)과 성현(聖賢)과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직 확철대오(廓徹大悟)를 못해서 성현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최상승법을 철저히 믿고 한 생각 일어날 때마다 '이뭣고?' 이렇게 해서 참선을 해 나가면, 그때그때 환경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 자신이 환경을 다스리는 주인공(主人公)이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감정(感情)에 노예(奴隷)가 되어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참선을 한 사람은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척! 돌이켜 가지고 참나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한 사람은 팔만사천 마구니가 침범을 못한다 이것입니다.
마구니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어떻게 노리느냐 하면, 눈 ‧ 코 ‧ 입 ‧ 귀 ‧ 몸뚱이 ‧ 생각, 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 여섯 구멍을 통해서 그리 마구니가 침범(侵犯)해 들어오는데,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볼 때에 보는 데에 홀려 들어가면, 무엇을 보다가 자기(自己)를 놓쳐버리면 그 눈을 통해서, 그 허점(虛點)을 통해서 마구니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다.
무엇을 듣는데, 누구 말을 듣던지 어떠한 소리를 들으면서 그 들음으로 인해서 자기의 이성(理性)을 잊어버리면, 들음으로 인해서 감정에 노예가 되어 버리면, 감정에 끄달려 버리면 그 귀를 통해서 마구니가 침범해 들어온다 그 말이여.

한 나라를 지키는데 있어서 그 지키는 병사(兵士)들이 한눈을 팔고 어디 가서 술을 먹고 낮잠을 잔다던지, 자기가 지켜야 할 성문(城門)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딴 데로 가서 그 성문을 지키지 아니하면, 바로 그 곳을 통해서 적병(敵兵)이 침범에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는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문두(六根門頭)를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오지, 절대로 다른 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는 것입니다.

마구니가 들어오지 아니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철통같은 것입니다. 절대로 재앙(災殃)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앙은 우리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허수히 함으로써 그 구멍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것을 명심을 해야 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이 성문(城門)은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듦으로써 지켜지는 것이지, 빨간 글씨로 쓴 부작(符作)을 몸에 지녔다고 해서 그 육근문두(六根門頭)가 지켜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도 얼마든지 그까짓 부작을 몇만 장이라도 찍어서 노나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거 할 줄 몰라서 안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해 봤자 재앙이 막아지들을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아니 드리는 것입니다.

삿된 길을 가까이하면은 반드시 나의 마음도 삿되어지고 나의 믿음도 삿되어져서, 삿된 길에 한번 발을 디디면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입춘법회 때마다 이렇게 간곡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간곡히 말씀드려서 여러분이 이 정법(正法)에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뿌리를 박고 발을 디디고서 실천을 해 나가야만 여러분은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악도(惡道)에 떨어지지를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쁜 벗을 가까이하면 나도 몰래 나쁜 버릇을 익히게 되는 것이, 마치 검은 것을 가까이하면은 내 몸이 검어지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연탄 공장에 들어가서 돌아댕기면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내 의복과 몸뚱이가 더러워진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행여나 삿된 길에 발을 디디지 말고, 걱정이 있어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슬픔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괴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외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려 나가도록 그렇게 훈련을 쌓아 나가면, 과연 이 정법, 이 최상승법이야말로 영겁(永劫)을 두고 의지하고 믿고 내 몸과 마음을 맡길 수가 있는 그러한 '반야(般若)에 용선(龍船)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사자굴중무이수(獅子窟中無異獸)하고  상왕행처절호종(象王行處絶狐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갱파일지무공적(更把一枝無孔笛)하야  등한취출만년환(等閑吹出萬年歡)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사자굴중(獅子窟中)에 무이수(無異獸)여. 사자(獅子)가 살고 있는 사자 굴(窟)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어. 사자 굴속에 무슨 다른 짐승이 그 속에 감히 들어갈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사자 굴속에는 오직 사자만이 살 수가 있다.
상왕행처(象王行處)에 절호종(絶狐蹤)이로구나. 코끼리 왕, 코끼리 왕이 행(行)하는 곳에는 여우의 발자취가 끊어졌다.
코끼리가 턱- 걸어가는 앞에 감히 간특(奸慝)한 요사(妖邪)한 여우같은 것이 어찌 얼씬거릴 수가 있을 수가 있느냐.

정법을 믿고 최상승법을 믿고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 나가는 그러한 최상승(最上乘) 불자(佛子) 앞에는 어떠한 삿된 마구니도, 어떠한 재앙도 그 앞에는 얼씬거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최상승법을 믿는 불자(佛子)로서의 긍지와 보람, 희망을 가지고 한 해를 떳떳하고 의젓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갱파일지무공적(更把一枝無孔笛), 다시 한 가지 구멍 없는 젓대를 잡고,
등한취출만년환(等閑吹出萬年歡)이라. 멋들어지게 만년환(萬年歡),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생사 없는 최고 무상(無上)에 깨달음에 곡조(曲調)를 불어 나갑시다.

화두(話頭)를 들고, 알 수 없는 화두를 들고 살아가는 것이 구멍 없는 젓대를 가지고 무상정각(無上正覺)에 곡조(曲調)를 불어 나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41분37초~58분59초) (끝)




[법문 내용]

(게송)철수화개별시춘~ / 진묵겁전(塵墨劫前)에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 / 진실하고 참된 마음을 가져야 업장(業障)이 소멸 / 입춘법회의 의의 / 탐진치, 오욕락을 비우고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하는 가르침이 정법이고 최상승법.

바른 법을 참되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하면 자연히 업장소멸이 되어 소원성취를 이룬다 / 함경도 사람의 좁쌀 공양(供養) / '사바세계' 하면은 '참는 세계' / 어려운 고통, 난관에 부딪칠수록에 거기에서 더 발심해야 / 끝까지 쉬지 않고 공부하면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참선밖에는 없습니다. 참선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 / 도를 닦아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화두(話頭)를 듦으로써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다 / 정법(正法)에 확고부동(確固不動)하게 뿌리를 박고 실천해라 / (게송)사자굴중무이수~.


우리가 마치 평생 동안 먹고 쓰고 남을 보물을 몸뚱이 안에, 옷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공연히 춥고 배고픈 그러한 거지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본래성불(本來成佛)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망각(忘却)하고 오늘날까지 윤회(輪廻)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중생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오욕락(五欲樂)을 조장(助長)을 시키는 그러한 종교는 바른 법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종교를 믿음으로 해서 삼독심을 버리고, 오욕락을 버리고, 버린다기보다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돌이켜서 그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해서 마음을 비우는, 비움으로 해서 자기의 참마음을 깨닫도록 지도(指導)하고, 그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마음이 그렇게 되는 그러한 가르침은 그것을 정법(正法)이라 하는 것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신앙, 올바른 실천으로 여법(如法)하게 도(道)를 닦아가면, 자연히 마음속에 업장이 소멸이 되고 마음이 청정해져서 불보살(佛菩薩)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면 무슨 소원을 성취를 못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끝까지 주저앉지 않고 쉬지 않고 공부를 다져 나가면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구니를 항복받아서 결국은 견성성불(見性成佛)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삼세제불(三世諸佛)이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요, 팔만사천 보살(菩薩)님네들이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여실(如實)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직 할 일은 이 한 일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이 한 일, 이것만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할 일입니다.
이 세상에 천 가지 만 가지 피해서는 안 될 내가 해야만 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가 살자고 하는 일이지 목숨을 바쳐서 할 일은 못됩니다. 어떠한 일이라도 목숨 바쳐서 할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 오직 이 참선(參禪)만은, 이 도(道)만은 목숨을 천만번이라도 바쳐야 하고, 목숨 바쳐서 해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도를 닦지 아니한 사람은 한 생각 일어나면 그 한 생각 일어나는 그 감정(感情)에 노예(奴隷)가 되어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참선을 한 사람은 일어나는 그 한 생각을 척! 돌이켜 가지고 참나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한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내가 나 자신을 다스리고 내가 환경을 다스리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팔만사천 마구니는 바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그 육근문두(六根門頭)를 통해서 우리에게 침범해 들어오지, 절대로 다른 데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한 생각만을 잘 단속하면 팔만사천 마구니는 들어올 곳이 없는 것입니다.

행여나 삿된 길에 발을 디디지 말고, 걱정이 있어도 정법(正法)으로 다스리고, 슬픔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괴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리고, 외로움이 있어도 정법으로 다스려 나가도록 그렇게 훈련을 쌓아 나가면, 과연 이 정법, 이 최상승법이야말로 영겁(永劫)을 두고 의지하고 믿고 내 몸과 마음을 맡길 수가 있는 그러한 '반야(般若)에 용선(龍船)이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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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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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0. 12. 13. 12:48

((No.155))—1981년 12월 첫째일요법회(81.12.06) (46분)

(1/3) 약 17분. (2/3) 약 17분. (3/3) 약 12분.

(1/3)----------------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유시독립묘고봉(有時獨立妙高峯)타가, 어느 때에는 묘고봉(妙高峯), 저 수미산 꼭대기, 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 이 수미산(須彌山)인데 그 수미산 꼭대기에 있다가,

각래단좌염라전(却來端坐閻羅殿)이라. 불현듯 염라전(閻羅殿)에, 염라대왕이 있는 염라전에 와서 떠억 단정히 앉었더라 그말이여.


견진인간지점두(見盡人間祇點頭)허니, 인간(人間)에 모든 것을 다 두루 다 보아 다하고서 다못 고개만을 꺼떡꺼떡 허니 점두(點頭)를 허니,

대비수안다방편(大悲手眼多方便)이로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손이 천이나 되고 눈이 천이나 되는 천수천안(千手千眼), 그 대비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方便)도 많더라.


생사(生死) 없는 도리(道理)를 깨달은, 진리를 깨달은, 진리와 하나가 된 불보살(佛菩薩)은 때로는 중생이 이르지 못하는, 사량분별로 수긍할 수 없는 저 수미산 꼭대기에 가서 홀로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육도, 생사윤회(生死輪廻) 하는 그 육도(六道) 속에서 최악의 죄를 범하고 헤어날 기약이 없는 죄 많은 악한 중생(衆生)들이 고(苦)를 받고 있는 염라국에 와서 떠억 앉어 있다.


지옥고(地獄苦)를 받고 있는 중생이 너무나 가엽고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그 중생을 제도할 것인가. 중생이 그 갖인 고를 받으면서 신음을 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중생의 괴로움을 자기도 같이 나누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이것이 바로 불보살에 행화(行化)인 것입니다. 불보살의 행리(行履)인 것입니다.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때로는 수미산 꼭대기에서 저 무간지옥(無間地獄)에까지,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天上樂)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근본성품(根本性品)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금방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은 녹음법문을 통해서 전강(田岡) 대선사(大禪師)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 오늘 마치 전기가 나가서 상태가 좋덜 못해가지고 법문의 내용을 잘 알아듣기가 어려우셨을 줄 생각합니다.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어떠한 분은, '그렇게 잘 들리지 않는 법문을 아무리 틀어 보았자 그 청중(聽衆)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차라리 그렇게 잘 들리지 아니한 법문을 틀기보다는 다믄 한마디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을 여러 분이 말씀하신 것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회(法會)가 열릴 때에는 꼭 조실스님의 법문을 한 편씩 듣는 것은 그럴만한 뜻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입으로 설할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심(思量心)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설할 수 있는 법(法), 귀로 들을 수 있는 법, 사량분별심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법이라면 벌써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조실스님의 법문 내용을 우리 중생의 사량분별심으로 잘 알아듣고 고개를 꺼떡꺼떡하고 이렇게 이해를 한다 하더라도 벌써 조실스님의 참법을 옳게 알아들었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사량분별심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법문은 뭣허러 들을 것이냐? 또 입으로 설할 수도 없다면은 뭣허러 부처님께서는 사십구 년 동안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설(說)하시고, 역대조사(歷代祖師)들이 그 많은 법어(法語)를 남기시고, 또 오늘 이 송담(松潭)은 뭣허러 법상에 올라가서 입을 열고 있느냐?’ 이러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법은 입으로 가히 설할 수 없으되 눈썹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이 도리를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어떠한 일이 있고 일이 바쁘고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다 물리치고, 백사(百事)를 다 물리치고 이 법을 위법망구(爲法忘軀)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을 아끼지 아니하고 설(說)해야 하고,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백사(百事)를 물리치고 이 법을 들어야 한 까닭은 무엇이냐?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여의고 찾는 법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 이 진리법,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여지없이 여러분 앞에 확! 헤쳐 놓았습니다. 중생에 분별망상(分別妄想)을 통해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놈을 여의고도 찾아서는 아니 된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智慧)의 눈이 있는 사람이면, 이 정법(正法)에 조그마한 인연(因緣)이라도 있는 분이면 이렇게 말씀드린 이 말씀의 근본 의도를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을 줄 생각합니다.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호소를 하신 분이 있는데,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무엇고?'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망상, 일어나는 망상을 없애려고 하거나, 누르려고 하거나, 쫓으려고 하면 그 ‘쫓으려고 하는 또 하나의 망상(妄想)’이 일어나기 때문에 벌써 한 생각 딴생각, 다른 또 하나의 생각을 일으킴으로써 공부의 길에서는 천만리(千萬里) 멀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衆生)의 업식(業識), 업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천만 가지 번뇌망상이, 깨달은 분에게는 그 망상이 바로, 업식(業識)이 바로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망상을,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그것이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떡! 화두(話頭)를 들으면 그것이 바로 망상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처음~16분58초)





(2/3)----------------


물거품, 물거품을 없애려고 물을 따둑거린다든지, 그 물거품을 미웁다고 몽둥이로 그 물거품을 친다든지 하면 또 다른 물거품이, 훨씬 더 많은 물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거품이라 하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 아니요, 원래 있는 것은 물 자체인 것입니다.


물거품을 없애려고 하다가 더 많은 물거품을 생기게 한 거와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망상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건마는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스럽고 너무 가볍고 너무 맑고 깨끗한 것이어서, 때로는 선(善)으로도 나타나고 때로는 악(惡)으로도 나타나고, 눈을 통해서는 보고 귀를 통해서는 듣고 코를 통해서는 냄새를 맡고 입을 통해서는 맛을 보고 말을 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영롱하게, 신령스럽게 그것은 사방(四方) 팔방(八方) 시방(十方)으로 메아리치고 물결이 치는 것입니다.


고요한 호수에 돌 한 개 던지면 그 조그만한 돌 한 개로 인해서 수천만 개의 파도가 일어나듯이, 똥그라미가 퍼져서 저-쪽 호수 가에까지 번져 나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또한 그와 같애서 한 생각에 천만 가지의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파도를 없애려고 그걸 물에다가 손을 대거나 물체를 갖다가 대면 거기서 또 다른 파도가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파도를 통해서 물에 본질(本質), 물에 본성(本性)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 일어나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우리의 중생의 번뇌망상 속에서 그 번뇌망상이 원인이 되어서 번져 가는 우리의 생사, 육도(六道)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이요, 최상승법(最上乘法)이요,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금방 전강 조실(祖室) 스님의 녹음법문(錄音法門)이 대단히 상태가 좋지 못해서 그 내용을 거의 알아듣기가 어려웠었지만, 그 법문 설하신 요지(要旨)는 바로 그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생사 없는 진리를 내 마음에 구현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간곡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지끔 이 송담(松潭)이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이 무엇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매일같이 속상하는 일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신상(一身上) 문제, 가정 문제, 사회 문제, 회사 문제, 보고 듣는 것 생각되는 것이 기쁜 일도 간혹 있지만 거개(擧皆)가 나로 하여금 괴롭게 하는, 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러한 수없는 일들이 내 앞에 제출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지내고 내일 하루를 또 그렇게 지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지혜롭게 보고 지혜롭게 판단해서 지혜롭게 처리해 나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이고, 현실 사회에서 결국은 패병(敗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될 수 있으면 빨리 그 속상하는 마음으로부터 헤어 나와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속상한 일로 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서 큰일을 그르치게 되고 자기의 앞길을 그르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최상승법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설사 어려운 일을 당하고 괴로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깨달음의 세계로 한 걸음 건너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상승법(最上乘法)의 묘(妙)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법문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면 얼마 안 가서 이 최상승법이 그렇게 요긴하고 위대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새록새록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 동안 설(說)하신 법문이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여. 팔만대장경 그 많은 법문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지만 우리가 그 경책(經冊)을, 한문으로 된 경책을 갖다가 읽어 봐도 잘 알 수가 없고 또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도 없고, 근자(近者)에 번역된 경전이 나오고 있지만 번역된 경전을 읽어 봐도 읽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또 그만인 것입니다.

그 많은 경전 속에 가장 핵심, 핵심적인 것. 그 경전을 다 읽고 완전히 소화를 시킨 대도사들. 그 대종사(大宗師)에 지도를 통해서 가장 쉬웁게 가장 빨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것이 바로 이 참선법(參禪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면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이냐?’ 어떠한 근심이 일어나건 노여움이 있거든,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무슨 생각이 일어나거나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 다른 생각으로 변(變)하기 전(前)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이 무엇고?’ ‘이 속상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무 쉬웁고 너무 간단해서, '뭐 그러한 것이 최상승법이요, 그걸 뭐 불법(佛法)이라고 할 것이 있느냐?'

쉬웁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무서운 지옥고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을 갖다가, 그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이 뭣고?’ 한마디로써 팔만사천의 마구니를 다 항복 받을 수가 있고, 팔만사천의 번뇌(煩惱)를 극복할 수가 있고,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뭣고?’


여러분 가운데에는 많은 좋다고 하는 경전을 읽고 해석을 할 줄 아신 분이 계시겠습니다마는, 불법(佛法)은 많이 알고 해석할 줄 아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알고 있는 것을 비워 버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 많은 경전을 설하셨지만 그 경을 옳게 이해한다면 많이 머릿속에 외워서 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 버리는 거여. 비움으로써 참나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용화사 이 법보전(法寶殿)에서는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법을 전강 조실스님 계실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선양(宣揚)을 하고 있습니다.


‘이 뭣고?’

그다음에는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뭣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하는, 지금 이뭣고 할 때에 ‘이-’ 하고 있는 이 「‘이-’ 하는 이놈이 뭣고?」


해 갈수록 알 수가 없고, 해 갈수록 답답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고 꽉 맥힌 그 의심(疑心), 의관(疑觀), ...(녹음 끊김) ...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진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하루하루를 여법(如法)하게 일어나는 생각을 다스려 나가면,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렇게 해 나가고 한 달 한 달을 그렇게 지어 나가면, 묘하게도 화두(話頭)를 하려고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들어진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공부를 해 나가면 여간 걱정될 만한 일을 당해도 조끔도 당황을 하지 않게 되고 그러한 일로 해서 나의 마음이 동요(動搖)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마음이 안정이 되고 침착해지고 아량(雅量)이 생기고, 그렇게 그전에는 미웠던 사람도 별로 미운 생각이 없고, 마음이 담담(淡淡)하게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담담해지고 아량이 있고 여유가 생긴다면은 얼마나 세상 살아가기가 좋겠습니까. 내 한 사람이 그렇게 됨으로 해서 나의 집안은 또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 되겠습니까. 그러한 마음가짐이 된 사람이 직장에 가면 그 직장에 있는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동료들도 얼마나 대하기가 좋겠느냐.(16분59초~33분33초)





(3/3)----------------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勇氣)와 인내(忍耐)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 해로울 것이 있느냐.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까 육도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를 여의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내 마음이 편해야 가정이 편안하고 가정이 편해야 직장에 가서도 편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불안하고 내 마음 하나가 풍파(風波)가 일어나서 안정이 안 되면 그 사람 간 곳마다 다 편안틀 못하고 풍파가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이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만히 훌륭하게 하려면 첫째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제절로 잘되어 갈 것입니다.


여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회가 문명이 발달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회가 복잡하고 살기가 어려운 세상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우리가 거침없이 모든 일에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고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 근본인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갈수록 이 세상을 살기 좋고 좋은 곳으로 만들려면, 이 공부밖에는 없다고 감히 단언(斷言)을 하는 것입니다.


목탁을 세 번 치고...(녹음 끊김)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요  희즉소혜비즉곡(喜則笑兮悲則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약능어차선참상(若能於此善參詳)하면  육육종래삼십육(六六從來三十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승시승혜속시속(僧是僧兮俗是俗)이여. 중(僧)은 이 중이고 속인(俗人)은 이 속인이다. 어찌 스님을 갖다가 속(俗)이라 하고 또 속인을 갖다 스님이라 할 것이냐 이 말이여.

기쁘면 웃어야지 기쁜데 웃지 아니하고, 슬프면 울어야지 울지 않고 웃고, 이래서는 평등(平等)한 진리(眞理)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여.


‘아휴, 오늘 내가 용화사에 가서 최상승법문을 듣고 최상승법을 실천하니까 나는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오늘부터서 인자 나는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이여. 남편도 소용없고, 가정도 소용없고,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울지도 않고, 누구 기쁜 일이 있어도 따라서 웃지도 않고' 이렇게 되어 간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산을 깎어서 못을 메움으로써 그래가지고 산을 없애 가지고 깊은 구렝이(골짜기)에다가 메워 가지고 평지(平地)를 만듦으로써 평등(平等)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불법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여.


최상승법을 옳게 이해한 사람은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울을 줄을 알아야 돼. 아내는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충실히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각기 자기(自己)에게 주어진 책임(責任)을 충실(忠實)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여.


약능어차(若能於此)에 선참상(善參詳)하면, 만약 능히 여기에서 잘 공부를 지어나갈 줄 알면,

육육(六六)은 종래삼십육(從來三十六)이니라. 육(六)에다 육(六)을 곱하면 그 삼십육(三十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댁에 가실 때, 댁에 가셔서 생활할 때, 또 내일 직장에 나가실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일을 행해 나가시면 우리는 반드시 부처님 제자로서, ‘정말 어쩌다가 금생에 이러한 좋은 법을 만났던가’ 생각할수록 다행하고 행복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33분35초~45분40초) (끝)





[법문 내용]


(게송)유시독립묘고봉~ / 지옥 문전(門前)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 불보살에 행화(行化), 행리(行履) / 중생의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다 / 이 최상승법은 사량분별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다 /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 /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신령함 / 생사윤회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참선법, 최상승법,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 쉬웁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로써 번뇌를 돌이켜서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다.


나의 마음을 닦는 공부가 선행(先行)되어야 내 마음 · 가정 · 사회 · 세상이 살기 좋은 편안한 곳이 된다 / (게송)승시승혜속시속~ /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에 거기에서 공부가 되어져 가야.



어째서 불보살들은 진리의 세계에만 고요히 앉아계시지 아니하고, 오늘은 무간지옥에 계시다가 내일은 수미산 꼭대기에 계시다가, 왜 그러한 것이냐?

착한 일을 해서 그 복(福)을 닦은 공덕으로 한없는 천상락을 받고 있는 중생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중생이나, 그 본성(本性)자리는 악(惡)도 아니고 선(善)도 아니기 때문에 불보살은 선에도 머무르지 아니하고 악을 멀리하지도 아니하고 선악(善惡)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왕래하시면서 모든 중생을 생사 없는 열반(涅槃)의 언덕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법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 수도 없거니와 사량분별을 여의고도 찾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히 입으로 설할 수 없는 법(法)이로되 눈썹이 떨어지는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법을 설해야 하고, 귀로 가히 들을 수 없는 법이로되 위법망구적으로 법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선(參禪)을 하는데 자꾸 망상(妄想)이 일어나서 참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은 망상을 여의고 찾으려고 하는 데에서 그러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참선은 망상을 여의고 찾지도 말고, 망상을 가지고 찾지도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일어난 대로 놓아두고 다못 '이 뭣고?' 이것이 망상을 물리치는 묘(妙)한 방법(方法)입니다.


중생의 업식망상(業識妄想)을 여의고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업식(業識)을 돌려서 굴리면 그것이 바로 그 본질을 바꾸지 아니하고 지혜(智慧)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의 번뇌망상을 여의고 찾지 말고, 일어나면 일어난 대로 그냥 그대로 놓아두고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망상(妄想)을 여의지도 아니하고, 망상에 즉(卽)하지도 아니하고서 참나로 돌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를 버리지 아니하고 열반(涅槃)에 들어가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망상을 여의려고 그러고, 우리의 생사(生死)를 버리고서 열반(涅槃)을 찾는 등(等)은 이미 공부에 바른 길을 모르는 사람이요 이것은 최상승법이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진리(眞理)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망상이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고 생사라 하는 것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쉽고 간단하다고 해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 쉽고 간단한 한마디 ‘이 뭣고?’가 우리로 하여금 무서운 지옥고(地獄苦)를 면(免)하게 하고 생사윤회를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성냥개비 하나로 산더미 같은 풀과 넓은 들을 다 태울 수도 있고 큰 고층 건물과 그 많은 집들을 다 태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작다고 해서 절대로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하나는 성냥불에다 대겄습니까? ‘이 뭣고?’ 한마디로써,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돌이켜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지혜해탈(智慧解脫)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經)을 옳게 이해한다면, 머릿속에 많이 외워서 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법문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보고 듣고 알고 느낀 모든 것을 다 비워버리고 참나를 깨닫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아! 이것이로구나’ 그렇게 무엇이 알아지는 것이 있다면, 그 찰나(刹那)부터 공부는 삐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공부가 무슨 정신을 통일을 하고, 무슨 썽을 잘 안 나게 하고, 그러한 아량이 있게 하고, 그러한 사소한 문제를 목적으로 해서 이 공부를 한다 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궁극에 깨달음을 향해서, 대인격을 완성해서 진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 공부를 하다가 보면 머지않아서 나 자신 또는 가정 · 직장 · 사회에 모든 점에 있어서 살기 좋고 남을 편안하게 하고, 근심걱정을 돌이켜서 거기에서 지혜(智慧)와 용기와 인내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머니 떡도 커야 사 먹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 참선도 해서 그렇게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데, 일신상으로나 가정 · 직장에서나 그렇게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러한 훌륭한 좋은 효과가 나타난다면 그것도 또한 널리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쌀이 변질이 되어 있으면 그 쌀을 가지고는 밥을 해도 밥맛이 이상하고, 그 쌀로 죽을 써도 그 죽 먹기가 고약하고, 그 쌀로 완전히 쌀의 모습이 없는 떡을 만들어도 그 떡은 맛이 없을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는 놈도 내 '한 생각'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요, 직장에나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내 한 마음을 여의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첫째로 내 마음부터 편안하게 하고 내 마음 하나를 바르게 한다면 모든 것은 저절로 원만히 훌륭하게 잘 되어질 것입니다.


단능수류인득성(但能隨流認得性)하면, 다못 능히 흐름을 따라서, 그 상황(狀況)에 따라서—그 상황에 빠지지 말고, 그 상황을 버리지도 아니하고 그 상황 속에서 그 성품(性品)을 인득(認得)을 하면,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원래(元來)가 평등(平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을 실천하는 사람에 생활 규범(規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닦은 사람은 오히려 평범(平凡)하고 수수하고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서, 모든 사람과 잘 화합(和合)이 되고 모든 일에 잘 적응하면서도 거기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면서 또 거기에 빠지지도 않게 되는 것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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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20. 11. 25. 13:53

(No.175)—1982년 7월 첫째 일요법회 (52분)

(1/3) 약 20분. (2/3) 약 18분. (3/3) 약 15분.

(1/3)----------------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허고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나무~아미타불~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나무~아미타불~


운기남산북산우(雲起南山北山雨)요. 구름이 남산에서 일어나는데 북산에 비가 와.

여명마자기다반(驢名馬字幾多般)고. 이것은 나귀다, 이것은 말이다, 이것은 소다, 이것은 돼지다, 그러한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낱낱이 다른 이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 이 말이여.


청간호묘무정수(請看浩渺無情水)하라. 청컨댄 저 넓고도 넓고 넓은 저 무정(無情)한 저 물을 보라 그말이여.

기처수방기처원(幾處隨方幾處圓)고. 어느 곳에서는 모나고, 어느 곳에서는 둥근가?


물이라 하는 것은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나게 담겨지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게 담아지고, 긴 그릇에 담으면 길게 담아지고, 깊은 그릇에 담으면 깊게 담아지고. 깊은 데를 만나면 밑바닥부터서 차츰차츰 차 올라가 가지고 가뜩차면은 넘고, 높은 데에 처하게 되면 나차운 데로 나차운 데를 향해서 계속 떨어져 흘러 내려가고.

추위를 만나면 얼고, 더위를 만나면 녹고, 뜨거운 것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고, 알고 보면 본래 한 물인데 장소와 여건에 따라서 모냥도 변하고 움직임도 변합니다.


그렇지마는 그 본바탕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 얼음이 얼었다 하더라도 분명 우리 눈으로 볼 때에는 고체가 되어 가지고 만져 보면은 찹지마는 차운 고체일 때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녹아서 물이 되어서 액체가 되어 있을 때에도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이 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어도 변하지 않는 바가 있어.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습성(濕性)이라 하는 것이여. 습성! 젖은 성품.

습성은 액체일 때에도 그 습성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고, 고체인 얼음덩어리로 있을 때에도 젖은 그 습성은 변함이 없고, 수증기가 되어서 기체가 되어 있을 때도 그 습성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 그말이여. 남산에 구름이 일어날 때나 북산에서 비가 내릴 때, 그 습성에 있어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한 바가 없다.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육도(六途)를 돌고 돌아서 금생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사람으로 태어나 가지고 오늘 이 시간에 이 용화사 법보전(法寶殿)에 자리를 같이했습니다마는, 무량겁을 돌고 돌았지만 그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49재를 맞이한 영가(靈駕)도 있고, 3재를 맞이한 영가도 있지만, 그 영가들도 현재 우리 사부대중과 함께 법문(法門)을 듣고 계십니다. 영가라고 해서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양복을 입다가 그 양복을 벗어 놓고 한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 성이 변한 것도 아니요, 이름이 바뀌어진 것도 아니고 사람이 딴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의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육체를 잠깐 벗어버리고 새 몸을 받아 나기 위해서 중음신(中陰身)의 위치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얼마 안 가면 또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날 것입니다.

헌옷 벗어버리고 아직 새 옷을, 다른 옷을 입기 전에 잠깐 빨가벗은 몸으로 있는 것입니다. 빨가벗은 몸으로 있으면 오히려 모든 가식(假飾)을, 거짓 꾸민 것을 다 벗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온전히 숨김없이 잘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러한 법문을 들어도 더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잘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가는 그리고 우리 법보전에, 법보단(法寶壇)에 봉안되어 있는 수천수만의 법보 영가들도 지금 법문을 잘 듣고 계실 것입니다.


법문은 원래 입으로 설(說)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부득이해서 입을 빌려서 설(說)하게 되고 귀를 통해서 듣게 될 뿐입니다마는 '참법'은 입을 통하지 아니하고 설(說)해지는 것이고 귀를 통하지 아니하고 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가는 입도 없고 귀도 없지만, 입과 귀를 통해서 설하고 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가는 더욱 법문을 실(實)다웁게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국에 많은 분들이 우리 용화사 법보전에 만년위패(萬年位牌)를 모시고—조상이나, 비명(非命)에 간 영가나, 한(恨)을 남기고 허공계를 방황하고 있는 많은 영가들을 용화사에 모시고, 모심으로써 많은 영가들이 돌아갈 곳을 찾고 의지할 곳을 찾아서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러기는 저 하늘갓으로 날아갔는데 기러기 놀다간 발자취는 모래사장에 남아 있듯이, 사람은 저 황천길로 떠나갔는데 그 사람의 이름만 집에 남아 있습니다.

억겁(億劫)을 두고 한번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 빠짐없이 다 또 그 몸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도 언젠가는 이 몸을 벗어버리고 또 다음 새로운 몸을 받기 위해서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알고 보면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승을 하직했다고 해서 조끔도 슬퍼할 것이 없건마는, 사람은 정(情)이 있는 존재가 되어서 한 번 보고 두 번 보면 정이 들게 되고 하루 이틀 살다 보면 애착(愛着)이 생기고, 정과 애착으로 인해서 기뻐할 것도 없는 곳에 기뻐하고, 슬퍼할 것도 없는 터에 슬픔으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참나'를 깨달을 수가 있는가?


금방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첫째,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달러라. 정말 이 세상에 모든 존재는 삼라만상과 모든 동물과 만물의 영장인 사람까지라도 무상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렇게 무상한 줄을 철저히 깨닫고 그 무상한 가운데 영원한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어라.

물과 얼음과 수증기, 모냥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이리저리 바뀌지만, 바뀌어지지 아니한 변함없는 습성(濕性)이 있듯이 생로병사와 흥망성쇠와 성주괴공이 있는 이 무상한 속에서 변함없는 '참나'가 있다고 하는 사실, 부처님과 역대조사(歷代祖師)는 바로 그것을 깨달은 선각자이다.


「우리도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의해서 깊이 믿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우리도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 수가 있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무상함을 깨닫고 참나를 깨닫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을 믿었으되 용맹심(勇猛心)과 분발심(奮發心)이 없으면 정진이 나아가지를 않는 것이니 정말 용맹심과 분심을 내라.

「과거에 모든 성현들은 진즉 이 문제를 해결해 가지고 생사 없는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나아가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계시는데, 왜 나는 오늘날까지 범부(凡夫)에 고해(苦海)를 해탈하지 못하고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오욕락(五欲樂) 속에 빠져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이를 악물고 분발심을 내서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데에는 참선(參禪)이 제일이니,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이 그 방대한 법문이 있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 따라서 방편(方便)으로 많은 법문을 설하셨지마는 궁극에 부처님께서 설하시고자 한 바는 방편법이 아니라 최상승법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처음~20분6초)





(2/3)----------------


자성구삼신(自性具三身)하니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니라

나무~아미타불~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허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니라

나무~아미타불~


자성(自性)은 삼신(三身)을 갖추어 있어. 부처님에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있는데, 우리의 자성(自性)에도 법신과 보신과 화신, 이 삼신을 갖추고 있다 그말이여.


'부처님'하면은 삼천년 전 석가모니불을 우리는 연상(聯想)을 하지만, 최상승법에 있어서는 삼천년 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부처님 얼굴을 보는 거울에 지내지 못합니다.

최상승법에 있어서의 부처님은 지금 산승(山僧)에 말을 듣고 있는 그 자체입니다. 지나간 부처님을 통해서 현재의 부처님을 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실을 보다 더 훌륭하게 살기 위함이요, 미래를 보다 더 훌륭하게 건설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과거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참부처님', 내게 있는 참부처님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내게 있는 참부처 · 참나를 깨닫는 데 온통 불법에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참나를 깨닫는 참선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산승의 설법을 듣고 있는 그놈, 지금 산승의 얼굴을 여러분은 쳐다보고 계시는데 그 볼 줄 아는 놈, 바로 그 들은 놈, 바로 그 보는 놈, 보고 듣고 하는 그곳을 여의지 아니하고 초연히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바로 들을 때에 듣는 그 찰나를 즉(卽)해서 참나로 돌아가야 하고, 볼 때 보는 그 찰나를 여의지 아니하고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입니다.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나무~아미타불~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나무~아미타불~


오금위여설(吾今爲汝說)하노니,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서 설하노니,

체신영무미(諦信永無迷)니라. 간절히 영원히 미(迷)함이 없도록 깊게 깊게 알뜰히 믿어서 철저히 믿어서 영원히 방황하지 말어라. 무엇이 방황이던가?


막학치구자(莫學馳求者)에 종일설보리(終日說菩提)니라.

밖으로 밖으로 교리적으로 따지고 학문적으로 따지고, 사량분별로 더듬어 들어가고 불법이 마치 글자나 말속에 있고 무슨 책 속에 있는 줄 알고 계속 '어디를 가면 무슨 좋은 법문을 들을까? 어디를 가면 귀에 탁! 앵기는 좋은 법문을 들을까?' 밖으로 이치를 구하고 도리를 찾는 그러한 사람들이 종일토록 입으로 '불법, 불법, 깨달음, 도리, 열반' 입으로 이렇게 설하는 그러한 것을 찾고 돌아다니고, 그러한 것을 얻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행여나 중생들이 49년 동안에 설하신 팔만장경 속에 불법(佛法)이 있는가 하고 그 경을 뒤적거리면서 거기에서 찾을까 두려워서 '참으로 내 설한 바 법을, 법문의 뜻을 옳게 이해한다면 내가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는 그 말을 이해할 것이다'


법(法)이라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여.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봐야지, 하늘에 있는 달은 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다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은 우리 중생 낱낱이 가지고 있는 참나, 나의 마음, 마음자리 그놈을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애설산중사(愛說山中事)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본시산중인(本是山中人)이라. 본래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라.

애설산중화(愛說山中話)로구나. 산중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더라 그말이여.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벌렸다 하면 감옥 속에서 일어난 얘기들을 하고, 법률을 공부하고 법조계 있는 사람은 밤낮 만나면 법률 얘기, 무슨 사건 얘기 그런 얘기를 많이 하고, 예술가는 모이면은 밤낮 입 벌렸다 하면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철학하는 사람이 모이면은 철학을 얘기하듯이, 원래 승려는 산중에서 도(道)를 닦는 것으로 일생에 업을 삼기 때문에 입을 벌렸다 하면 밤낮 도 닦는 얘기를 하게 됩니다.

'저 중은 법상(法床)에만 올라가면 무슨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하고 밤낮 참선만 하라고 한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 도둑질 밖에는 해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렇게 징역을 살고 나와도 2범 3범 4범 5범 다시는 안 한다고 나와도 배운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무엇을 해 먹고살 것이나 그말이여.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이 말씀이여.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살기가 어려워지고 세계 도처에서는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모든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인심은 날로 박해져 가고, 생각해 보면 너무너무 가슴 아프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험난하고 복잡하고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우리 불자(佛子)는 다행히 불법을 만나서, 더욱이 이 최상승법을 만나서 훨훨 타고 있는 이 불속에서도 타 죽지 않는 길을 우리는 찾았고, 생로병사의 이 고해 속에서도 그 고해로부터 벗어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만났지마는 만난 것으로써 다가 아니고 지금부터 참으로 목숨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배를 탔으면 부지런히 바른 방향을 잡아서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지, 배에 올라탔다고 해서 누가 내 대신 노를 저어주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한시바삐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 한 시간 한 시간, 일 분 일 분 지내가는 것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죽음을 향해서 우리는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걸어가고 있는지, 무상살귀(無常殺鬼)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는지,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런지 하여간 우리는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가고 또 숨 한번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죽음을 향해서 또 한 걸음 다가가고, 이러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모르고 그럭저럭 지냈을지언정 이러한 도리를 알고서는 그럭저럭 지낼 수가 없습니다. 꼭 이 선방(禪房)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들어와야만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댁에서도 직장에서도 차를 타면서도 걸어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인 것입니다.(20분12초~37분50초)





(3/3)----------------


속이 상할 때, 보통 사람은 속상할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 속상하는 일만 계속해서 생각하고 속상하는 속이 더 상할 수 있을 만한 그러한 일을 이것저것 더 생각을 생각해 내면서 점점 더 속을 상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참선 공부하는 사람은 무슨 속상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상할 때 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상하는 마음은 한시바삐 없어져야지.


속상하는 것은, 확! 부해가 나고 속이 상한 것은 마치 집에 불이 붙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집에 불이 붙으면 빨리 끌수록 좋은 것입니다. 불이 붙은 데다가 휘발유를 갖다 끼얹고, 불 잘 탈 수 있는 나무를 갖다가 더 보태 주고 이렇게 한다면 그 재산은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울화(鬱火), 그래서 썽나는 것을 울화라고 그러거든.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꼭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몸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깊이 속상할 만한 일들을 생각해 내고 더 속상할, 속이 더 깊이 상하도록 이리저리 연구해서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가 있느냐 그말이여.

불이 났다 하면 그 불이 어린애가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났건, 자기가 실수를 해서 불이 났건, 도둑놈이 와서 불을 질렀건, 이웃 사람이 와서 불을 질렀건, 남편이 술짐에 불을 질렀건, 누전이 되어서 불이 났건 그 원인은 따질 것이 없습니다. 여하약하를 막론하고 불이 난 줄 알았다 하면은 즉각 최선을 다해서 불을 꺼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슨 이유로 해서 우리가 부해가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슬픈 생각이 났건, 무슨 이유로 해서 괴로움이 생겼건, 그 이유는 따질 것이 없고 다못 빨리 그 일어나는 그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이렇게 해서 썽내는 불을 꺼야 하고, 슬픔의 불을 꺼야 하고, 괴로움의 불을 꺼야 할 것입니다. 그 불을 끔으로써 귀중한 재산을 지키고 손해를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집은 불이 나서 타더라도 또 지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히 보험에 들어놨으면 헌 집 태우고 좋은 새집도 지을 수가 있습니다. 은행에 예금을 많이 해 놓은 것이 있거나 다른 재산이 있으면 그까짓 쓰러질 것 같이 생긴 보기 싫은 집은 타버린 뒤에 오히려 더 좋게 잘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우리의 마음은 되게 타서 큰 충격을 받아버리면 10년 20년 수명이 단축이 되고 병도 생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죽기도 합니다. 금생에 오랫동안 부해를 나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 있고, 오랫동안 괴로움에 잠겨 있으면 반드시 육체적인 병이 생기고 결국은 의원이 고칠 수 없는 무서운 중병의 상태에도 이르르고 결국은 죽게도 됩니다.

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이 말이여.


내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못 꺼줘요. 집에 붙은 불은 이웃 사람도 와서 꺼줄 수가 있고 소방서가 와서 꺼줄 수 있지만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불은 내가 꺼야지, 남이 꺼줄 수가 없어. 혹 좋은 말을 해서 위안은 시켜줄 수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참선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그말이여.

열반(涅槃)이라 한 말은 인도 말인데, 니르바나(nirvāṇa)라고 하는 인도 말인데, 중국에서 음으로 음사(音寫)하기를 열반(涅槃)이라 음사를 했는데, 뜻으로 번역하면 적멸(寂滅)이라고 번역을 해요. 적멸(寂滅), '적적할 적(寂)'자 하고 '멸할 멸(滅)'자 하고.


'적적하게 멸했다' 그 말은 훨훨 타던 마음에 불이 완전히 꺼져버렸다. 그 뜻의 근원은 그렇게 된 거여.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그말이여.


그 방법이 꼭 머리를 깎어야만 참선을 할 수가 있고, 머리 깎은 사람만이 마음의 불을 꺼야 한다. 그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네만 꼭 마음의 불을 꺼야 하고, 세속에서 사시는 분은 불을 안 꺼도 된다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속에서 사시는 분일수록에 백배 천배 더 노력을 해야 하고 더 생명 바쳐서 참선을 해야 할 것입니다.

금생에 그럭저럭하다가 안 해 놓으면 내생(來生)에 소가 될지, 개가 될지, 지옥에 갈지 누가 보증을 할 것이냐 이 말이여.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출가하신 이 스님네들도, 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오신 여러 스님네는 정말 밤잠을 안 자고 모다 공부하신 스님네만 모다 오셨습니다마는, 지혜롭게 열심히 공부를 하되 지혜롭게 공부를 하셔서 결정코 도업(道業)을 성취를 해서 나 자신의 생사 문제를 해결한 데에 끈치지 마시고, 우리로 하여금 도를 이루게—도를 닦을 수 있게 해주시고, 도를 이루게 해주신 국가와 민족과 스승과 부모와 우리의 모든 의식주를 공급해 준 여러 신도님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은 그 진리 법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입니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허고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이요. 대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일렁일렁하니까 그 대나무 그림자가 따라서 일렁일렁 움직이는 것이 마치 층계를 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이여.

대나무 그림자가, 대나무가 바람에 움직임에 따라서 층계를 쓸고 있지만 층계에 있던 문지는 하나도 쓸어지지를 않더라. 움직이지를 않더라.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고요한 호수에 비추니까 저 호수 밑바닥까지 달이 가서 물을 뚫고 들어가서 호수 밑바닥까지 달빛이 들어갔는데 뚫고 들어갔는데 그렇다고 해서 물에는 아무 구멍도 뚫리지를 않더라 그말이여.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문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37분54초~52분10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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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운기남산북산우~'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7.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 온갖 세계. 수없이 많은 세계. 하나의 우주 전체. 다할 수 없이 넓은 우주. 하나의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하나의 부처님이 교화하는 범위라 한다. 줄여서 대천(大千), 대천계(大千界), 대천세계(大千世界), 삼천세계(三千世界), 대천국토(大千國土)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위에 4대주(四大洲)가 있고, 그 바깥 주위를 9산8해(九山八海)가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함.

이 하나의 소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소천세계(小千世界)라 부르고, 이 소천세계를 천개 모은 것을 하나의 중천세계(中千世界), 이 중천세계를 천개 합한 것을 하나의 대천세계(大千世界)라 부른다.

이 대천세계(大千世界)는 천(千)을 3번 모은 것이고, 소천•중천•대천의 3종류의 천세계(千世界)로 이루어지므로 3천세계 또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육도(六途, 六道) ; 중생이 선악(善惡)의 업(業 : 의지에 기초한 행위)에 의하여 생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축생도(畜生道), 아수라도(阿修羅道),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가 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 법보전(現 대웅전)은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으로 진리(法寶)의 전당이라는 뜻.

그래서 진리 그 자체를 가리키는 법신불(法身佛)을 형상화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을 모셨고, 그 좌우에 부처님 경전과 전강 조실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하여 만년위패를 봉안하여 놓았다.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무저선(無底船 없을 무/밑·바닥 저/배·선박 선) : 밑바닥이 없는 배. ①몰저선(沒底船 밑 없는 배) · 무영수(無影樹 그림자 없는 나무) · 몰현금(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 · 무공적(無孔笛 구멍 없는 피리) 등과 같은 말로 '진여(眞如)'의 이명(異名)이다。 ②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徹底)한 경지.

*진여(眞如) ; ①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②궁극적인 진리. ③모든 분별과 대립이 소멸된 마음 상태. 깨달음의 지혜. 부처의 성품. ④중생이 본디 갖추고 있는 청정한 성품.

*영가(靈駕) ;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높여 부르는 말. 영(靈)은 정신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신 자체를 가리키고, 가(駕)는 상대를 높이는 경칭(敬稱)이다. 천도재(薦度齋) 등의 의식과 위패(位牌) 등에서 망자(亡者 죽은 사람)의 성명 뒤에 호칭으로 붙인다.

*사대(四大) ; 사람의 몸을 이르는 말. 사람의 몸이 땅, 물, 불, 바람(地,水,火,風)의 네(四) 원소(大)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데에서 연유하였다.

*중음신(中陰身) ; 이 생(生)을 끝내고 다음 생(生)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존재 상태.

*소소영령(昭昭靈靈) ; 한없이 밝고 신령함. 소소(昭昭)도 영령(靈靈)도 함께 밝은 뜻. 밝은 모양.

*법보단(法寶壇) ; 용화선원의 주(主) 법당(法堂)인 법보전(法寶殿, 現 대웅전) 안에 위패를 모신 단(壇).

*만년위패(萬年位牌) ; 전강 조실스님께서 우리들의 선망부모와 유주·무주의 영가 천도를 위해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

영가에게 대웅전(舊 법보전) 법보단에 편안한 거처를 마련하여 이 법보단에서 좋은 도반들과 한 가족이 되어, 용화선원이 있는 한 계속 매일 예불시 축원하고 법회 때나 평소에 법문(法門)을 들려드려 영가가 원한심을 내려 놓고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도솔천 내원궁이나 극락세계에 왕생하시거나,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더라도 정법(正法)에 귀의하여 스스로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전강선사께서 만드신 제도.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 생사는 본래 없다[生死本無. 本無生死]


[참고 ❶] 송담스님 법문(No.366, No.636)에서 정리.

생사는 무엇이냐?

그것은 깨닫지 못한 중생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번뇌로 매(昧)했기 때문에 있는 것으로 착각되어 '태어났다, 죽었다' 그런 것이지, 원래는 우주보다도 먼저 있었고, 이 우주 법계가 다 가루가 되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우리의 ‘참나’라고 하는 이 불성(佛性)은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생사가 없는 이치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생사로 우리에게는 보이는 것이지 「생사는 본래 없다」 이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일어난 사람은 맑은 허공을 봐도 허공 속에 무슨 헛꽃이 이글이글 피어서 이리갔다 저리갔다 한 것처럼 보이나 눈병만 낫고 보면 원래 허공의 꽃은 없었고, 눈병이 낫으나 안 낫으나 허공의 꽃이란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사(生死)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이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용화사에서는 전강 조실스님 법문이나 산승이 말씀을 할 때마다 그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방법’을 항상 말씀을 드려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뭣고?’는 천하 맛없는 간단한 한마디지만,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자꾸 ‘이뭣고?’를 해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우리의 그 착각으로 인식되어진 번뇌일망정 언제 끊어진 줄 모르게 번뇌가 끊어져 버리고, 그 의단이 더이상 커질 수 없을 때 그 의단을 깨뜨리게, 타파(打破)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의 불성을 깨닫게 되고, 나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고,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진실로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고 ❷] 『진심직설(眞心直說)』 (보조 지눌) '진심출사(眞心出死)' (참마음 이야기, 진심직설 강의 | 강건기 강의 | 불일출판사) p199~208.

문 : 或曰 嘗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有死事 如何云出生死耶


일찍이 견성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도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고 합니까?


답 : 曰 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 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는 본래 없는 것[生死本無]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의 꽃이 없다고 하면 병자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이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또한 공한 것이므로 단지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不信 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本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하다가 생사를 초월한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本無生死]'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던 것이다.


故 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 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是故說名輪轉生死


그러므로 경(經, 圓覺經)에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가지가지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혼동하는 것과 같아서 사대(四大)를 제 몸이라 잘못 생각하고, 육진(六塵)의 반연하는 그림자를 제 마음이라 한다. 비유하면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을 보고, 나아가서는 그 온갖 허공의 꽃이 허공에서 사라져도 사라진 곳이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본디 생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 중생들은 생멸이 없는 데에서 망령되이 생멸을 보기 때문에 이를 일러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 하였다.


據此經文 信知達悟 圓覺眞心 本無生死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故敎中說 菴婆女 問文殊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被生死之所流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問修山主云 明知 生是不生之法 爲甚麽 却被生死之所流 修云 笋畢竟成竹去 如今作筏使得麽


이 경에 의하면 원각의 진심을 환히 깨치면 본래 생사가 없음[本無生死]을 진실로 알게 된다. 그러나 지금 생사가 없음을 알았지만 능히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완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 중에 이렇게 설하셨다. 암바(菴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고 물었다.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이 바로 생이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에 생사에 흘러 다닙니까?"하였다. 수산주는 "죽순이 마침내는 대나무가 되겠지만,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어 쓰려한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선문염송』 제1314칙 '명지(明知)' 참고]


所以 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今人 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 不亦宜乎


그러므로 생사가 없음을 아는 것[知無生死]이 생사가 없음을 체득함[體無生死]만 못하고, 생사가 없음을 체득한 것은 생사가 없음에 계합함[契無生死]만 못하며, 생사가 없음에 계합한 것은 생사가 없음을 마음대로 쓰는 것[用無生死]만 못하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직 생사가 없음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생사가 없음을 어찌 체득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에 계합하겠으며, 어찌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인정하는 사람으로서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본무(本無) ; [s] abhūtvā, amūla, apūrvo bhāvah 본래 없다는 말. 모든 존재의 무상한 본질을 나타낸다.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든 법의 공성(空性)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는 그러한 인연의 존재에 대하여 망상으로 집착하여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본무라 한다.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 상/즐거울 락/나 아/청정할 정) :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깨달음)의 네 가지 덕(德). 『열반경(涅槃經)』에 의하면, 열반의 경지는 생멸 변천함이 없으므로 상(常)이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無爲安樂)하므로 낙(樂)이고,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8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이므로 아(我)이고,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清淨)하므로 정(淨)이다.


*팔대자재아(八大自在我) ; 팔자재(八自在)라고도 함. 열반(깨달음)의 4덕(四德, 常樂我淨) 중 아(我)에 8종의 대자재(大自在)의 뜻이 있는 것을 말함.

[참고] 『열반경(涅槃經)』 제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③(光明遍照高貴德王菩薩品之三)' (이운허 옮김 | 동국역경원) p514-516.

善男子 大 名不可思議 若不可思議 一切衆生所不能信 是則名爲大般涅槃 唯佛 菩薩之所見故 名大涅槃 以何因緣復名爲大 以無量因緣然後乃得 故名爲大


선남자여, 크다[大]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음[不可思議]을 말함이니, 만일 헤아릴 수 없어서 일체 중생들이 믿을 수 없으면 대반열반이라 이름하며, 부처님이나 보살들만이 보는 것이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슨 인연으로 대(大)라 하는가? 한량없는 인연으로써 얻을 수 있으므로 대라 하느니라.


善男子 如世間人 以多因緣之所得者 則名爲大 涅槃亦爾 以多因緣之所得故 故名爲大

云何復名爲大涅槃 有大我故 名大涅槃 涅槃無我 大自在故 名爲大我


선남자여,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은 것을 대(大)라 하나니, 열반도 그러하여 여러 가지 인연으로 얻는 것이므로 대(大)라 하느니라.

어찌하여 다시 대열반이라 이름하는가? 큰 나[大我]가 있으므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열반에는 내[我]가 없지만 대자재(大自在)하므로 대아(大我)라 하느니라.


云何名爲大自在耶 有八自在則名爲我 何等爲八

一者、能示一身以爲多身 身數大小猶如微塵 充滿十方無量世界 如來之身實非微塵 以自在故現微塵身 如是自在則爲大我 <①능시일신위다신(能示一身爲多身)>


어떤 것을 대자재(大自在)하다 하는가? 여덟 가지 자재[八自在]가 있으므로 나[我]라 하나니, 무엇이 여덟인가?

첫째는 한 몸으로 많은 몸을 능히 보이는 것이니, 몸의 수는 마치 미진수와 같아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하며, 여래의 몸은 실재로는 미진수가 아니나 자재로써 미진수의 몸을 나타낸다.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二者、示一塵身滿於三千大千世界 如來之身實不滿於三千大千世界 何以故 以無礙故 直以自在故 滿三千大千世界 如是自在名爲大我 <②시일진신만대천계(示一塵身滿大千界)>


둘째는 한 티끌 같은 몸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나니, 여래의 몸은 실로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것 아니지만 걸림이 없는 까닭이며, 자재함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하는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三者、能以滿此三千大千世界之身輕擧飛空 過於二十恒河沙等 諸佛世界而無障礙 如來之身實無輕重 以自在故 能爲輕重 如是自在名爲大我 <③대신경거원도(大身輕擧遠到)>


셋째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몸으로 훨훨 날아서 이십 항하사 등의 많은 부처님 세계를 지나가도 장애가 없느니라. 여래의 몸은 가볍고 무거움이 없건만 자재한 연고로 가볍기도 무겁기도 한 것이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四者、以自在故而得自在 云何自在 如來一心安住不動 所可示化無量形類各令有心 如來有時或造一事 而令衆生各各成辦 如來之身常住一土 而令他土一切悉見 如是自在名爲大我 <④현무량류상거일토(現無量類常居一土)>


넷째는 자재한 연고로 자재를 얻는 것이다. 어떻게 자재한가? 여래의 일심은 편안히 머물러 동하지 않지만 , 무량한 형상을 드러내어 각각에 마음이 있게 한다. 여래는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짓지만, 중생들로 하여금 각각 마련하게 하며, 여래의 몸은 언제나 한 세계에 있지만 다른 세계로 하여금 모두 보게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五者、根自在故 云何名爲根自在耶 如來一根亦能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如來六根亦不見色 聞聲 嗅香 別味 覺觸 知法 以自在故 令根自在 如是自在名爲大我 <⑤제근호유(諸根互有)>


다섯째는 근(根, 감관)이 자재한 까닭이니, 어떤 것을 근이 자재하다 하는가? 여래는 하나의 근으로 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변별하고 감촉을 느끼고 법을 인식한다. 여래의 육근(六根)은 또한 색을 보지 않고 소리를 듣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 않고 맛을 구별하지 않으며 감촉을 느끼지 않고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재하는 까닭으로 근으로 하여금 자재케 하나니, 이렇게 자재하므로 대아라고 하느니라.


六者、以自在故 得一切法 如來之心亦無得想 何以故 無所得故 若是有者 可名爲得 實無所有 云何名得 若使如來計有得想 是則諸佛不得涅槃 以無得故 名得涅槃 以自在故 得一切法 得諸法故 名爲大我 <⑥득일체법무득상(得一切法無得想)>


여섯째는 자재한 까닭으로 일체 법을 얻거니와, 여래의 마음에는 얻었다는 생각이 없나니, 왜 그런가? 얻을 바가 없는 연고니라. 만일 있는 것이라면 얻었다 이름하려니와 실제로 있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얻었다 하겠는가. 만일 여래께서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모든 부처님들이 열반을 얻는다 할 수가 없지만, 얻음이 없으므로 열반을 얻었다 하느니라. 자재함으로써 일체 법을 얻고, 모든 법을 얻었으므로 대아라 이름하느니라.


七者、說自在故 如來演說一偈之義 經無量劫義亦不盡 所謂若戒 若定 若施 若慧 如來爾時都不生念 我說 彼聽 亦復不生一偈之想 世間之人四句爲偈 隨世俗故 說名爲偈 一切法性亦無有說 以自在故 如來演說 以演說故 名爲大我 <⑦설일게의경무량겁(說一偈義經無量劫)>


일곱째는 말씀이 자재하므로, 여래가 한 게송의 뜻을 연설할 때에 무량겁을 지내어도 그 뜻을 다하지 못하나니, 계행이거나 선정이거나 보시이거나 지혜 따위니라. 그러나 여래는 조금도 내가 설하고 저가 듣는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한 게송이라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지만, 세상 사람들이 네 글귀를 한 게송이라 하므로 세상을 따라서 게송이라 말하는 것이며, 모든 법의 성품을 말할 곳이 없지만 자재로써 여래가 연설하는 것이며, 연설하므로 대아라 하느니라.


八者、如來遍滿一切諸處 猶如虛空 虛空之性不可得見 如來亦爾 實不可見 以自在故 令一切見 如是自在名爲大我 如是大我名大涅槃 以是義故 名大涅槃 <⑧신변제처유여허공(身遍諸處猶如虛空)>


여덟째는 여래가 모든 곳에 두루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허공의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 볼 수 없지만 자재로써 모든 이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자재를 대아라 이름하는 것이요, 이와 같은 대아를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이런 이치로 대열반이라 하느니라.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을 받아 계승해 온 대대의 조사(祖師).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범부(凡夫 무릇·보통 범/남편·사내 부) ; 무명 번뇌(煩惱)에 얽매여 업에 따라 과보를 받아 자재롭지 못하여 생사(生死)를 초월하지 못하는 사람. 각각의 중생들이 서로 다른 업으로 말미암아 윤회하기 때문에 이생(異生) 또는 이생범부(異生凡夫)라고도 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의 성인을 기준으로 보면 도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범부라 하고, 대승은 성문 · 연각 · 보살 · 불 등 사성(四聖)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육도에서 생사윤회하는 중생들은 모두 육범(六凡)이라 한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 五慾, 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 소리, 향기, 맛, 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참고] 송담스님(No.793) - 2018년 동안거 결제 법문에서.

우리는 생로병사 속에서 살면서 생로병사가 없는 도리를 깨닫고자 불법을 믿고 참선(參禪)을 하고, 비록 한 생각 한 생각 났다가 꺼지고 또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울다가 웃다가 그러면서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지마는,

그 죽음을 향해서 가는 속에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의지해서 그것을 믿고 생사해탈을 위해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사해탈이라 하는 것이 이 육체를 가지고 죽지 않고 백 살, 이백 살, 오백 살, 천 살 살아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생사해탈이 아니고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해서 생사해탈을 할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론적으로는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나 부처님으로부터 역대조사(歷代祖師)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경허 선사, 만공 선사, 전강 선사로 해서 생사 없는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법문을 우리는 믿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가리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다맛 간단한 방법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 법에 의해서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불법을 믿고, 불법 가운데에서도 최상승법(最上乘法)인 활구참선(活句參禪)! 역대조사를 통해서 전수해 온 활구참선에 의해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는 법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고도 간단한 일이나 이 최상승법 활구참선법을 믿는 사람은 확실히 불법의 근본 진리를 향해서 그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그 진리를 체달(體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근기(根機 뿌리 근/베틀 기) ;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중생의 소질이나 근성. 보통 근기의 차등을 상근기, 중근기, 하근기로 구분한다. 근기(根器), 또는 줄여서 기(機)라고도 한다.

[참고] 송담스님(No.88)—(참선법A) 법련사 불교학생회 청법 법문(1978.10.1)에서.

‘중생 말세다, 중생 근기가 미약하다, 그러니까 참선법 가지고는 안되고 아미타불을 불러야 한다’ 이러한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말세라고 하는 것은 편의에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 이렇게 해서 말씀해 놨지만은 최상승법을 믿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근기가 아니라 상근기(上根機)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처님 당시에 태어났으되 이 법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하근기인 것이고, 지금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 태어났어도 이 활구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실천에 옮긴 사람이면, 그 사람은 바로 정법시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상근기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참선법을 배우고자 하고, 참선에 의해서 자아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 때 여러분은 이미 정법시대를 만나 것이고, 여러분은 상근기인 것입니다. 조금도 그런 염려를 마시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정코 금생에 ‘참나’를 자각하도록 도업을 성취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방편(方便 방법·수단 방/편할 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그때마다의 인연에 적합하게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뛰어난 가르침. 중생 구제를 위해 그 소질에 따라 임시로 행하는 편의적인 수단과 방법.

곧 불보살이 중생의 근기에 적절하게 응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법을 펼쳐 보임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여 이익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즉해서(卽-- 곧·즉시 즉) ; 곧. 곧바로. 당장. 즉시(卽時 : 어떤 일이 행하여지는 바로 그때). 즉각(卽刻 : 일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당장에 곧).

[참고] 송담스님(No.434)—1991년 2월 첫째 일요법회.

무엇을 볼 때나 무엇을 들을 때나, 무슨 생각이 일어날 때나—번뇌 망상이 일어나건, 진심이 일어나건, 슬픈 생각이 일어나건, 외롭고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건, 억울한 생각이 일어나건, 미운 생각이 일어나건, 어떠한 생각이 일어날 때라도 그 생각을 버릴라고 할 것 없이 그 생각에 즉(卽)해서 ‘이뭣고?’거든.

'즉(卽)한다'고 한 것은 버리고 여의고 띠어 내던진다는 것이 아니라, 고냥 고대로 놔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뭣고?’거든.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最上乘法) 하는 법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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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自性具三身 發明成四智 不離見聞緣 超然登佛地 吾今爲汝說 諦信永無迷 莫學馳求者 終日說菩提' ;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參請機緣)」 참고.

*삼신(三身) ; 삼신(三身)은 깨달은 존재로서의 부처님에 대한 불신관(佛身觀)의 대표적인 견해로,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의 3가지 몸 또는 3가지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개념.

①법신(法身).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우주 그 자체.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②보신(報身).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거듭 수행한 결과,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여기에 해당함.

③응신(應身). 때와 장소와,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나타나 그들을 구제하는 부처. 석가모니불을 포함한 과거불과 미륵불이 여기에 해당함. 응화신(應化身)·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삼신(三身)의 명칭과 분류, 각각의 해석에 대해서는 경론(經論)에 여러 가지 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이 세 가지 몸, 삼신(三身)을 서로 다른 부처님으로 보지 않고 동일한 불신(佛身)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삼신(三身)의 상호관계는 흡사 달의 체(體)와 그 빛, 그리고 그 그림자와 같다고 하며, 이것을 일월삼신(一月三身)이라고 한다.

곧 법신(法身)의 이체(理體)가 유일상주불변(唯一常住不變)인 것을 달의 체(體)에 비유하고, 보신(報身)의 지혜가 법신의 이체(理體)에서 생겨 일체를 비치는 것을 달의 빛에 비유하며, 응신(應身)은 변화하는 작용으로서 기연(機緣)에 따라서 나타나는 불신(佛身)이므로 달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念佛三昧寶王論卷中).

*미(迷) ; 미혹(迷惑), 미망(迷妄), 미집(迷執)의 준말. 진리에 어두움. 마음이 흐리고 혼란함. 깨달음(悟)의 반대. 무명번뇌로 인하여 사리를 밝게 깨치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 바르게 사물을 볼 수 없는 미혹함)하는 것.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지마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하신 뜻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시는 말인 것입니다 ; 불설일자(不說一字).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미증(未曾), 부증(不曾) : 일찍이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의 교설은 언어문자로 드러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뜻이다. 원래 『반야경』이나 『능가경』 등에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 말을 선종에서 강조하여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

[참고 ❶] 『금강선론(金剛仙論)』 (세친=천친 造 | 금강선 釋 | 보리유지 한역) 제5권.

如來從得道夜 至涅槃 更不說一字者 明證法無名相 言語道斷 心行處滅 不可以名相往說 故言不說一字也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밤부터 열반에 드시는 날에 이르기까지 결코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말은 법(法)은 명상(名相)이 없어 언어로 표현할 길이 끊어졌고, 마음으로 헤아릴 방법도 소멸하여 명상으로써 설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하게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참고 ❷] 『선교석(禪敎釋)』 (서산대사)

世尊偈云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此固敎外別傳之謂也.<智度論>


세존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처음 녹야원에서부터 마지막 발제하까지, 이 두 기간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교외별전의 취지를 가리킨다.<『지도론』>


[참고 ❸]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제5권 (실차난타 역 | 김진철 번역 | 한글대장경) '3. 무상품 ② 無常品第三之餘'

大慧 若人說法墮文字者 是虛誑說 何以故 諸法自性離文字故 是故 大慧 我經中說 我與諸佛及諸菩薩 不說一字 不答一字 所以者何 一切諸法離文字故 非不隨義而分別說


대혜여, 만약 어떤 이가 법을 설하되 문자에 떨어진다면 이것은 허망하게 속이는 설법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은 문자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여, 나는 경 가운데서 '나와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은 한 자도 설하지 않고 한 자도 답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왜냐하면 일체 모든 법은 문자를 떠났으므로 뜻을 따르지 않고 분별하여 설하지 않는다.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관조(觀照)하는 거, 이것이 불법입니다. 이것이 최상승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 회광반조(廻光返照 방향을 바꾸다·돌리다 회/빛 광/돌이키다 반/비칠 조). 회광자간(廻光自看). 불법은 밖으로 내달으면서 구하지 말고 안으로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그러므로 한 생각 일어날 때에 곧 그 일어나는 곳을 돌이켜 살펴보라.

자신의 본성을 조견(照見)하는 것. 언어 문자에 의하지 않고 바로 자기 본래의 면목(面目)을 보는 것. 廻,迴,回 모두 동자(同字).

[참고] 송담스님(No.524)—94년 동안거결제 중 보살선방에서 하신 법문(94.02.06)에서.

회광반조(廻光返照)라 하는 것은, ‘빛을 돌이켜서 다시 비춘다’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그놈을 밖으로 발산을 해가지고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가면 그것은 회광반조가 아니고, 무슨 생각이든지 생각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이뭣고?’로 돌아오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그 생각 일어나는 곳을 다시 이렇게 참구(參究)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뭣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도 보는 대로 쫓아가지 말고, 보자마자 바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를 참구하면 그것이 회광반조가 되는 것입니다.

귀로 무슨 소리를 듣던지, 눈으로 무엇을 보든지, 무슨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그 경계(境界)에서 즉각 ‘이뭣고?’로 생각을 돌리면 그것이 회광반조(廻光返照)다 이거거든.

*(게송) '본시산중인~' ; 『선종송고연주통집(禪宗頌古聯珠通集)』 제18권. 「祖師機緣 六祖下第四世之五(南嶽下後第三世之一)」에 나오는 몽암악(蒙菴岳)의 게송 참고.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漢譯, 舊譯).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 한역하고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⑤취(趣 산스크리트어 gati)의 다른 번역어. 열반을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도(道)에 대해 생사윤회의 길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법상(法床) ; 법을 설하는 자리.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스님이 올라앉는 상.

*'승려가 국왕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와 부모의 은혜와 시주(施主)의 은혜, 이 네 가지 큰 은혜를 입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갚는 길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도 열심히 도를 닦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도 닦도록 권고하고,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그러면서 같이 공부를 하도록 그것 밖에는 무엇을 할 것이냐' ; 오종대은명심불망(五種大恩銘心不忘). 다섯 가지 큰 은혜를 항상 명심(銘心)하여 잊지 않는다는 뜻. 명심불망오종대은(銘心不忘五種大恩).

①각안기소국왕지은(各安其所國王之恩) : 각기 그 머무는 곳을 편안하게 해 주는 나라의 은혜.

②생양구로부모지은(生養劬勞父母之恩) : 낳고 길러 수고해 주신 부모의 은혜.

③유통정법사장지은(流通正法師長之恩) : 정법을 전해 주신 스승의 은혜.

④사사공양단월지은(四事供養檀越之恩) : 네 가지 공양물(衣食住藥)을 베풀어 주는 신도의 은혜.

⑤탁마상성붕우지은(琢磨相成朋友之恩) : 서로 탁마해서 공부를 완성시켜 주는 도반의 은혜.

*불자(佛子) : 부처님의 자녀라는 뜻이다. 불법(佛法)을 믿는 이면 모두 불자가 된다. 그것은 부처님 법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고, 법(法)의 집과 법(法)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까닭이다.

또한 모든 중생을 다 불자라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중생이나 모두 부처의 성품(佛性)이 있어서, 그것이 부처의 씨가 되고, 지혜는 어머니가 되며 부처님은 아버지가 되어, 필경에는 반드시 성불(成佛)하게 된다.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에는 불자에 다섯 가지 뜻이 있다고 하였다. ①믿음이 종자가 되고 ②지혜는 어머니가 되고 ③선정은 태(胎)가 되고 ④자비심(慈悲心)은 유모가 되고 ⑤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

*고해(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무한하므로 바다에 비유함.

*반야용선(般若龍船) ; 생사의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반야(船若, 지혜)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무상살귀(無常殺鬼) ; ‘무상(無常)’이라고 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殺] 귀신(鬼神)이라는 뜻. ‘인간존재가 무상하다’는 것의 무서움을 비유한 말.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②선원(禪院).

*방부(房付)를 들이다 ; 수행자가 절에 머물며 공부할 것을 인사드리고 허락을 구해 결제(結制)에 참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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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麼 시심마, 시삼마) :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인고?’


불교(佛敎)의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불(佛)'이라 하는 말은 인도(印度) 말로 'Buddha'란 말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 「깨달은 어른」.  '불교(佛敎)'하면 깨달은 가르침, 깨닫는 가르침. '불도(佛道)'하면 깨닫는 길, 깨닫는 법.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깨닫느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차고 더운 것을 느끼고, 생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을 생각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성내고, 착한 마음을 낼 때에는 천사와 같다가도 한 생각 삐뚤어지면은 찰나간에 독사와 같이 악마가 되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한 놈이 있습니다.


소소영령한 주인공이 그렇게 여러 가지로 작용을 할 수 있는데, '대관절 그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놈이 무엇이냐? 이뭣고?'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근본을 깨닫는 것입니다.

모든 화두에 가장 기본이고 근본적인 화두는 내가 나를 찾는 ‘이뭣고?’가 첫째 기본이요 핵심적인 화두입니다. 무슨 공안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깨닫는 것은 나를 깨닫는 것이지, 저 무슨 우주의 무슨 그런 게 아닙니다.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왔다.

*'다행히 금생에 불법 만났을 때 열심히 공부하셔서 힘을 얻어서[得力] 결정코 열반의 행복을 얻으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 득력(得力). 수행이나 어떤 기술 · 운동에서 자꾸 되풀이해서 하면, 처음에는 잘 안되던 것이 할라고 안 해도 저절로 잘 되어질때 득력(得力)이라 표현. 수월하게 되어 힘이 덜어지는 것을 다른 표현을 쓰면 그것을 ‘힘을 얻었다(得力)’하는 것.

참선 수행에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을 할려고 안 해도 저절로 의심이 독로(獨露)하게 되는 것을 ‘득력’이라고 말한다.

[참고] 『서장(書狀)』 (대혜종고 著) ‘증시랑(曾侍朗)에게 답함(여섯 번째)’

苟念念에 不退初心하고 把自家心識이 緣世間塵勞底하야 回來抵在般若上이면 雖今生에 打未徹이라도 臨命終時에 定不爲惡業所牽하야 流落惡道하고 來生出頭에 隨我今生願力하야 定在般若中하야 現成受用하리니 此時決定底事라 無可疑者니라.


참으로 생각생각에 초심(初心)에서 물러나지 말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세간의 번뇌와 반연하는 것을 잡아 돌이켜 반야(般若) 위에 이르게 하면, 설령 금생에 (이 일을) 타개打開하여 사무치지 못하더라도 임종시에 결정코 악업(惡業)에 이끌리는 바가 되어 악도(惡道)에 흘러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내생에 태어나면 나의 금생 원력에 따라 반드시 반야 가운데에 있어 수용(受用)을 현전 성취(現前成就)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일이라, 의심할 게 없는 것입니다.


衆生界中事는 不著學하야도 無始時來로 習得熟하며 路頭亦熟이 自然取之에 左右逢其原하니 須著撥置니이다.

出世間學般若心은 無始時來로 背違라 乍聞知識의 說著이어도 自然理會不得하나니 須著立決定志하며 與之作頭抵하야 決不兩立이니다.


중생계의 일은 배우지 않더라도 아득한 옛날부터 익혀서 무르익어졌으며, 인생길에도 역시 익어져서 자연스레 취하여 그 중생계의 일 속으로 들어가니, 마땅히 이 습기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에) 세간을 나와서 반야(般若)를 배운다는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등지고 어겨왔으므로 잠깐 선지식의 설법(說法)을 듣는다 해도 쉽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결정(決定)한 뜻을 세워서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겨루어 나가야 합니다. (습기와 반야는) 결코 양립되지 않습니다.


此處에 若入得深하면 彼處는 不著排遣하야도 諸魔外道가 自然竄伏矣니이다. 生處는 放敎熟하고 熟處는 放敎生이 政爲此也니 日用做工夫處에 捉著欛柄하면 漸覺省力時가 便是得力處也니이다.


이 곳[般若心]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저 곳은 (습기를 굳이) 물리쳐 보내지 않아도 모든 마(魔)와 외도가 자연히 항복해 숨을 것입니다. 설은 곳[生處]은 익게 하고, 익은 곳[熟處]은 설게 함이 바로 이 때문이니, 일용에 공부하는 곳에서 요점을 잡고[欛柄] 차츰 힘이 덜어진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때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게송) '죽영소계진부동~' ;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17.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야부도천(冶父道川) 게송 참고.

*팔만사천(八萬四千) : 중생의 망상이 벌어져 나가는 것을 자세히 분석하면 팔만 사천 갈래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망상을 따라 일어나는 악마의 수효도 팔만 사천이요, 망상을 다스리는 법문도 팔만 사천이다.

인도에서는 많은 수효를 말할 때에는 이 말을 쓰는 수가 가끔 있다. 줄여서 팔만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산승(山僧) ; 스님이 자신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





[법문 내용]


(게송)운기남산북산우~ / 물의 변하지 않는 것, 습성(濕性) / 윤회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다 / 영가가 오히려 법문을 잘 들을 수 있다 /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다 /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다.


(게송)자성구삼신~ / '참불법'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 (게송)본시산중인~ /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생각만 돌이키면 바로 그 자리가 선방이요, 바로 그 자리가 공부할 때.


속상하는 생각, 한 생각 일어나자마자 바로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돌이킨다 / 내 마음에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불법이요, 참선이다 /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 우리가 출가한 목적,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다 / (게송)죽영소계진부동~ /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량겁을 돌고 도는 가운데에 때로는 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말로 태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돼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범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나라에 하늘나라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에서 한량없는 고(苦)를 받는 지옥 중생이 되기도 했습니다마는,

그 무량겁을 두고 육도를 윤회(輪廻)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도록 조끔도 변하지 아니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이름을 진여(眞如)라 하고, 자성(自性)이라 하고, 본성(本性)이라 하고, 참나라 하고, 또는 일물(一物)이라 하고 때로는 밑 없는 배라 하고, 구멍 없는 퉁수라 하고, 그림자 없는 나무라 하고, 천 가지, 만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자체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생각으로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은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불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영원한 참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참사람은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가 없는 열반(涅槃),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의해서 깊이 믿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면 우리도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 수가 있다. 부처님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어야 한다.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나를 깨닫는 것이니, 내가 나를 깨닫는 데에는 일체 방편이 필요가 없는 것이여. 오직 한 가지, 견문각지(見聞覺知)—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모든 것을 감각할 때, 그리고 뜻으로 알 때, 바로 그때의 그 인연을 여의지 아니하고 그 인연에 즉(卽)해서 '참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참부처 · 참나를 깨닫는 데 온통 불법에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참선공부를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종횡으로 읽고 외우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서 새로 지을 수 있는 집 같은 것에 불이 나면 백사(百事)를 제(除)하고 그 불을 끄려고 하면서, 한번 타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우리의 육체와 생명에 불이 붙을 때에는 왜 그렇게 급히 끄려고 하지를 아니하느냐?


참선법이라 하는 것이 내 마음에 불을 꺼서 영원한 열반의 행복을 얻는 것이 바로 이 불법이요, 참선이다.

열반(涅槃)이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 니르바나(nirvāṇa)라 한다.


우리가 출가한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정든 고향과 청춘을 다 버리고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는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명예를 구해서입니까? 편안함을 구해서입니까? 무슨 권리나 재산을 구해서입니까? 오직 생사 문제, 참나를 깨닫는 이 일밖에는 아무것도 우리는 할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삼천년 전에 출현하셔서 80세를 일기로 열반하실 때까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셨고, 삼천년 동안에 많은 선지식과 조사들이 출현하셔서 많은 설법을 하셨고, 오늘 산승(山僧)이 한 시간여에 걸쳐서 여러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생사를 해탈을 해야 할 생사도 원래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며, 깨달라야 할 증득해야 할 열반도 보리(菩提)도 원래 없는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자가 아무리 일렁거린다고 해서 뜰에 있는 먼지가 쓸어지지 아니하고, 달이 못 호수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하더라도 물에는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鹿野苑)에서부터 구시라(拘尸羅)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을 설하셨지만, 일찍이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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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 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19. 10. 2. 06:58
>>> 용화선원 법문 유튜브에서 보고 듣기 --->유튜브로 바로가기


(No.158)—1982년 1월 첫째일요법회(82.01.03) (64분)

(1/3) 약 21분. (2/3) 약 22분. (3/3) 약 21분.

(1/3)------------------


대지촬래속미립(大地撮來粟米粒)이요  일호두상현건곤(一毫頭上現乾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에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대지(大地)를 촬래(撮來)하니 속미립(粟米粒)이요. 대지. 지구덩어리. 이 지구 땅덩어리를 탁! 한 손으로 잡아오니 좁쌀 아레기, 좁쌀 한 톨밖에는 되지 아니하다.

일호두상(一毫頭上)에 현건곤(現乾坤)이로구나. 한 터럭끝에 하늘과 땅이 나타나는구나.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에, 우습구나, 해와 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이로구나. 이 가운데 따로 이 하늘과 땅이 있구나.



오늘은 1982년 1월 3일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과거에 온갖 슬픔과 괴로움, 모든 업장(業障)이 봄눈 녹듯이 다 녹아 없어져서, 새로운 희망과 보람으로 한 해를 맞이해서 모든 크고 작은 소원을 성취하시고, 특히 최상승법(最上乘法)에 돈독한 신심으로 도업(道業)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축원을 합니다.


한 해가 시작했구나 싶으면 금방 봄이 지나가고, 더워졌구나 싶으면 금방 가을이 다가오고, 단풍이 졌구나 하면 벌써 백설이 휘날리고 그럭저럭 하다보면 또 한 해가 시작이 되고, 덧없는 세월이 이렇게 물 흘러가듯이 지나가노라면,

우리 인생도 아무 한 것 없이 백발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늘어가고, 아무리 머리에 물을 들이고 화장을 해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안 보이게 하려고 노력을 해도 눈은 침침해지고, 허리는 아파지고, 몸은 말을 듣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리가 높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다 하드라도 이 길은 막을 도리가 없고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모습입니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육체가 죽는 것을 면하고 이백 년, 삼백 년, 천 년 이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신선도에서 그러한 길을 모색을 하고 있지만, 설사 몇백 년을 산다 하드라도 결국은 죽을 때가 있고만 마는 것이고, 그 죽는 그 자리는 허망하고 괴로운 것은 매양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오래 살려고 하는 길은 외도(外道)의 길이고,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인 것입니다.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요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기개남아시장부(幾箇男兒是丈夫)오

나무~아미타불~


생전(生前)에 부귀(富貴)는 초두로(草頭露)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고.

신후풍류(身後風流)는 백상화(陌上花)로구나. 죽은 뒤에 영화와 명예는 언덕 위에 핀 꽃과 같은 것이다.


살아생전에 큰 재산과 큰 명예 · 권리는 풀끝에 이슬과 같은 것이여. 풀끝에 이슬방울이 매달려 있을 때 햇빛이 거기에 비추면 보석처럼 찬란히 반짝거리지만 바람이 한번 휙 불거나, 사람이나 짐승에 그 풀이 닿아서 움직이면 그렇게 번쩍번쩍하던 보석 같은 이슬방울이 툭 떨어져버리면 간 곳이 없어지더라.


죽은 뒤에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세운 찬란한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운다, 기념관을 세운다, 무슨 사업을 한다, 죽은 뒤에 굉장히 그분의 공적을 찬양을 하지만 아무리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하더라도 10년, 20년 가지 못해서 그 사람의 이름은 차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마치 언덕 위에 곱게 피었던 꽃이 불과 며칠이 안 가서 시들어져 떨어져버린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한데, 망망한 우주에 그 사람의 수가 한량이 없어. 지나간 과거에 살다가 간 사람이 몇억,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40억,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또 가고 할 사람이 몇백 억이 될른지도 모릅니다.

그 한량없는 수 가운데에, 기개남아(幾箇男兒)가 시장부(是丈夫)냐. 그 가운데 몇 사람이 생사 문제를 해결한 남아(男兒) 대장부(大丈夫)가 되겠느냐? 남아 대장부가 그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생사 속에서 생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긴급한 숙제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을 하지 않는 한(限)은 육도(六途)에 윤회(輪廻)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낳아서 차츰 커가면서 공부를 하고 온갖 노력을 해서, 일생 동안 수없는 고생을 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이냐?

한 말로 말해서 보다 더 잘살기 위해서, 보다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목적일 것입니다. 보다 더 행복하게 잘살기 위해서 공부도 하고, 사업도 하고, 자기의 목표를 설정을 하고 밤잠을 안 자고 노력을 하고 있지마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를 못한 채 한(恨)을 남기고 눈을 감고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눈을 감는 사람도 있지마는, 엄격하게 따져 보면 정말 그것이 자기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가 있었던가? 또 그 업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가?

따져 보면 별것이 아닌 것입니다. 재산이라든지 명예 · 권리라든지 또는 어떤 학문이라든지, 어떤 인간에 필요한 기계를 연구를 했다든지, 어떤 학설을 발표를 했다든지, 인간 세상에 일시 필요한 것일런지는 모르지만 궁극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최상승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데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參禪法)에,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고황병(膏肓病)이라 하는 병인데, 고황병이라 하는 병은 한번 들어 버리면 천하 없는 명의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두라는 것은 내가 결정코 타파(打破)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타파하는 데 있어서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을 사용을 해서는 아니된다. 오직 그 화두에 대한 의심,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이 화두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이뭣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화두를 의심을 하는데, 화두를 금방 들었는데 1분도 못 가서 딴생각[別念]이 들어와 버려. 또 화두를 '이뭣고?'하고 들면 불과 1분도 못 가서 딴생각이 들어와 버려. 딴생각이 들어온 줄 알면 다시 또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화두를 들어서 묵묵히 의심으로 관조하고.


앉아서 들었던 화두가 서면서 깜박 잊어 버리고, 금방 들었던 화두가 누가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 찰나에 ”예“ 하면서 그 화두를 놓쳐 버리고.

그렇지만 끝까지 후퇴를 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화두를 들고 또 들고 해 나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려고 아니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된 때가 꼭 오고만 마는 것입니다.(처음~21분17초)




(2/3)----------------


공부를 해 나갈 때 화두를 들면 잘 들리고, 들렸던 화두가 고대로 주욱 의심으로 관조가 되어 갈 때에는 머리도 개운하고 가슴도 시원하고 30분, 1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게 휘딱 이렇게 지나가는데, 그리고 앉는 몸도 그렇게 편안하고 아무 부담이 없는데.

그렇게 잘 나가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시간이 5분,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뚱이가 그렇게 뒤틀리면서 지루하고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슴은 답답하고.


이러할 때가 오는데, 이러할 때에 어떻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境界)가 왔을 때 '아하! 내가 이 마장(魔障)이 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에는 '아! 내가 이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 자세를 첫째, 바르게 하고 단전호흡(丹田呼吸)을 서서히 부담없이 하면서 화두를 잘 들면 되는 것이고,

그리해도 그 가슴 답답하고 골이 아프고 지루하고 한 것이 잘 풀리지 아니하면 조용하게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가지고 포행(布行)을, 한 10m 내지 20m 직선으로 조용한 뜰이나 마당에 정해 놓고서 직선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화두를 들고 또 그 화두를 들어서 관조하고 이렇게 5분 내지 10분을 하면 가슴이 좀 후련해지고 머리가 개운해지는 것입니다.


그때 또다시 자기 자리에 들어가서 또 가부좌(跏趺坐),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서 호흡을 고르면서 화두를 들고 이렇게 해서 그러한 경계를 잘 고비를 넘기면 한결 공부가 수월하게 되어 질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는 마장이 붙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이라 하는 것을 잘 명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길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설사병이 나건 또는 감기를 앓건, 병을 한번 앓고 나면 한결 키도 자라고, 살은 좀 빠진 듯하지만 키가 완연히 한 치 가량이 푹 자라고 되고, 그리고 그전에 아니하던 귀여운 재롱도 늘게 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크다가 감기를 앓는다든지 설사를 앓는다고 해서 이걸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때 잘 거두고 조리를 잘 시키면 그러는 가운데 아이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기 한번 앓지도 않고, 설사 한번도 앓지를 않고 갓난애기 때부터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곱게 그렇게만 자란다고 하는 것은 있기가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과수(果樹)나무라든지 또는 화초 같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서리를 맞으면서 그렇게 자라야만 그 나무가 온전히 굳세게 자라는 것입니다. 밤낮 온실 속에서 바람 한번 찬바람 한번 쐬 보지 못하고, 눈 · 비 · 서리도 맞아보지 아니하고 온실 속에만 자란 나무는 별로 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약해 빠져서 아무짝에도 못쓰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를 하는 사람도 그러한 역경계(逆境界) · 순경계(順境界), 때로는 공부가 순풍에 돛 달듯이 그렇게 수월하게 잘되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세차게 부는 바람을 앞으로 맞으면서 그 힘들여서 배를 저으면서 올라가는 그러한 고비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데 밤낮 걸어가기 좋은 평탄한 길만 가기보다는 때로는 물을 건너기도 하고, 때로는 가파른 경사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기도 하고, 곱이곱이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하고 등산을 해야만 거기에서 몸도 건강해지고, 인상에 남는 것도 있고 그럴 것입니다.


등산이라고 하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은 '뭐하러, 오르기 좋은 그러한 산을 부담없이 기쁜 마음으로 올라갔다가 하루 재미있게 놀다가 내려오지, 왜 하필 히말라야 같은 그 힘든 얼음산을 올라가다가 둘씩, 셋씩 떨어져 죽고, 형이 떨어져 죽으면 또 동생이 가고. 그 사람이 운동도 좋지만 목숨까지 버리면서 그런 짓을 왜 할까 보냐, 미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냐?'하고 생각이 될는지 모르지만, 등산에는 등산의 도(道)가 있는 것입니다.


예술에는 예술의 도(道)가 있고, 학문에는 학문의 도(道)가 있듯이, 우리의 참나를 깨닫는 참선에는 참선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물론 도라고 하는 것을 고행 일변도(一邊倒)로, 지나친 고행 위주(爲主)로의 수행도 바른 수행법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도를 닦는데 고행을 완전히 없이하고 순한 경계에서만 도를 닦으려는 마음도 또한 옳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잘 잠 다 자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고, 그러면서 참나를 깨달으려는 생각은 너무나 사치스러운 생각인 것입니다. 도저히 대각(大覺)을 그래가지고서는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노두군자간(生死路頭君自看)하라  활인전재사인중(活人全在死人中)이니라

나무~아미타불~

화기자래심호리(花氣自來深戶裡)헌디  조성장재원림중(鳥聲長在遠林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생사노두(生死路頭)를 군자간(君自看)하라. 생사 길머리를 그대는 스스로 보아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차례차례 다 저승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지 않고 영원히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팔십에 가기도 하고, 칠십에 가기도 하고, 육십 오십에 가기도 하고, 젊어서 가기도 하고, 어려서 가기도 하고, 나오다가 가기도 하고.


활인전재사인중(活人全在死人中)이라. 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가운데 있어.

앞에서 죽고 뒤에서 죽고, 왼쪽에서 죽고 오른쪽에서 죽고, 세계에 하루에 몇천 명, 몇만 명이 병으로 죽고, 차 비행기 사고에 죽고, 배가 가라앉아 죽고, 전쟁하다 죽고, 불이 나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온통 죽은 사람 속에 산 사람이 있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내 자신도 '죽을 사(死)'자, 주검 위에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살다가 이 몸뚱이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그것을 '죽었다'고 그러는데, 그러한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죽음은 한 생각 일어났다 꺼지면 그것이 벌써 한평생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육칠십 년을 살다 가는 게 아니라, 태어난 찰나부터 한 생각 일어나면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한평생을 살고 죽은 것이고, 그러자마자 또 한 생각이 일어나면 또 새로 태어난 것이고, 한 생각이 꺼지면 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1초 1초 지나가면서 수없는 생사, 생사, 생사가 되풀이되면서 생사의 수레바퀴, 생사의 수레를 타고 생사의 길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우리는 정말 발심(發心)을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칠팔십 년 살다가 죽으리라, 그러니 아직도 내가 죽을라면 몇십 년이 더 있어야 할 테니 죽음 문제 같은 것을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느긋하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과,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오욕락(五慾樂) 속에 빠져서 참나를 깨달으려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지내가고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생사(生死)가 코앞에 있고, 생사의 수레바퀴를 타고 죽음을 향해서 지금 끌려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뼈아프게 느낀다면 이 문제보다도 더 심각하고 급박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가정도 다 버리고, 직장도 다 버리고, 사회 국가도 다 버리고 우리도 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신 분이 있을런지 모르지만,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다 출가(出家)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40억 인구가 일제히 다 머리를 깎고 출가를 해서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실천해 나간다면 온통 이 세계가 고대로 영산회상(靈山會上)이 될 것이고,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될 것이고, 천당이 되어서 싸움도 거기에는 없을 것이고 그러겠지만,

그것은 모든 중생들의 업(業)이 천차만별이어서 이것은 강요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떠한 권력자의 명령으로도 될 수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각기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인간으로서 맡은 책무를 성실히 실천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면 그것이 바로 이미 출가를 한 것입니다.


'출가'라 하는 말이 꼭 속복(俗服)을 벗고 산으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어야만 출가가 아니고, 세속에 있으되 세속에 있으면서 속복을 입고 머리 기른 채 한 생각 돌이키면, 한 생각 돌이켜서 화두를 들면 벌써 거기에는 출가한 사람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설사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절에서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화두를 놓치고 속된 생각이 일어난다면 바로 속인(俗人)이 되는 것입니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의 구별이 형식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청정하냐, 청정하지 못하느냐'로 결정을 내야 할 것입니다.

소금이 마치 '빛깔이 희냐, 검느냐'로 판별을 할 것이 아니라, 아무리 희다 하더라도 조금도 짠맛이 없다면 그것은 모양이 아무리 소금같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금이라 할 것이 못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최상승법인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형식, 고정된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차를 타면서도 하고 일을 하면서도 하고, 괴로울 때도 하고 슬플 때도 하고, 외로울 때도 하고 편안할 때도 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언제 어디서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어데서라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21분18초~42분4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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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정주부는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학생은 학생으로서 학과목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 가운데 학교 가면서, 학교 가서 교정에 있으면서,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오면서, 집으로 와서 차(茶)를 타면서 일체처 일체시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면서 바로 한 생각을 돌이켜서 '이뭣고?'


슬플 때에 '이뭣고? 이 슬퍼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렇게 화두를 들면 슬픈 생각이 스르르르르 가라앉게 되면서 거기에서 도심(道心)이 발하게 될 것이여.

속이 상해서 가슴이 미어지려고 할 때에도 숨을 깊이 들어마셔 가지고 한 3초 동안 머물렀다가 조용하게 내쉬면서 '이뭣고?' 이렇게 할 때에 미어질 듯한 가슴 답답함이 스르르르르 가라앉으면서 감정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도 썩어 문드러져서 그 나라가 도저히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부패한 나약한 나라가 될 때에는 반드시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범을 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할 때를 당해서 충신열사(忠臣烈士)들이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해태(懈怠)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고 잘 먹고 잘 입고 무사안일(無事安逸)함만을 탐익(耽溺)하다가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한 속에서 불법을 만나서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어서, 마음속에 무상(無常)을 깨닫고 참선을 해 가지고 정신혁명을 일으킨다면 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 간단하고, 너무 공부하는 도장(道場)이 바로 자기 발 디디고 섰는 곳이 선방(禪房)이요 도장이 되는 것입니다. 방에 앉았으면 방이 선방이요, 부엌에 가면 부엌이 자기의 선방이요, 차를 타면 차가 바로 자기의 선방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도반(道伴)이요, 우리의 선지식이요, 불보살(佛菩薩)의 화현(化現)이 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시고, 한 시간 한 시간을 지내시고, 한 생각 한 생각을 그렇게 다져 나가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한 분에게는 모든 재앙은 사라질 것이며, 자기의 원하는 바는 크고 작은 모든 원(願)이 차례차례 이루어질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해서 모든 자기 마음속에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이 최상승법을 실천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항시 불보살의 따스한 자비의 눈매가 이마에 와 어루만져 질 것입니다.

그리고 법계(法界)에 모든 선신(善神)들은 그 사람을 항시 옹호(擁護)해 주고 있을 것입니다. 이십오 신장(神將)이 그 사람을 보호해 준다 했습니다.


마음속에 답답한 원이 있을 때 성지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항시 이 최상승법에서 물러나지 아니하고 한 생각도 망각함이 없이 다져 나가고 다져 나간다면 그 사람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보살과 모든 선신들의 가피(加被)와 옹호가 따르기 때문에 무슨 소원이 이루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죽비(竹篦)를 치고 잠시 입선(入禪)을 하겠습니다.


자세를 편안하게 가지십시오. 반가부좌(半跏趺坐), 몸을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서 중심을 잡으십시오.


허리를 쭉 펴되, 항시 좌선할 때에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자세를 잡느냐 하면 머리, 이 정수리에서 머리(카락) 하나를 이렇게 쭉 들어가지고 그것을 저 천장에다가 달아매서 '이 몸뚱이가 머리카락 하나에 매달려 가지고 지금 앉아 있다'하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머리, 이 정상으로부터 얼굴과 몸뚱이가 수직으로 될 것입니다. 좌우나 전후로 기울거나 넘어진 법이 없이 한 시간 두 시간을 앉아 있어도 그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 머리에, 정상에 있는 머리 한 올의 머리칼로써 지금 매달려 있다'고 하는 생각을 해 보십시오. 여러 말이 필요 없이 몸은 단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깨의 힘도 다 빼고, 목의 힘도 다 빼고, 이는 어금니부터서 지그시 물되, 너무 힘들여서 물지도 말고 지그시 물고, 입은 '한 일(一)'자로 다물되 가볍게 다무는 것입니다. 혀는 위로 꼬부려서 입천장에다 대십시오.

눈은 너무 뚝 부릅뜨지도 말고, 너무 가늘게 뜨거나 감지 말 것이며 평상(平常)으로 뜨면 됩니다.



먼저 숨을 한 점도 남김없이 완전히 다 입을 통해서 토해 내십시오.

입을 동그스름하니 조그만하니 열고서 숨을 '후~'하고 완전히 다 내뿜으십시오. 가슴이 약간 홀쪽해진듯 하면서 다 내뿜으시는 것입니다.


다 내뿜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코를 통해서 들어마십니다. 들어마실 때 가슴을 약간 드는듯 하면서 가슴에 가뜩 들어마시십시오. 가슴이 미여질 정도로 들어마셔.

더이상 들어마시지 못할 때 한참 그 상태로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또 내쉬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또 들어마셔. 한참 참았다가, 입으로 '후~'하고 내쉽니다.

이렇게 세 번쯤 한 다음에 정식 단전호흡(丹田呼吸)으로 들어갑니다.


단전호흡은 코로 들어마시되 '코로 들어마신다'하는 생각을 갖지 말고, 저 궁댕이 뒤에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 단전(丹田)이 약간 볼록해진 것을 느끼면서 들어마시는 것입니다. 8부(八部)쯤만 들여마셔.

들어마신 호흡을 약 3초 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하니 내쉬되 '코로 내쉰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로 수~욱 내보낸다는 기분으로 내쉬면서 배를 차츰차츰 홀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하니 들어마셔. 들어마셨다가 3초 머물렀다가 내쉴 때 '이뭣고?~' 이렇게 속으로 하면서 내쉬는 것입니다.


(정진)


참선을 30분이나, 한 시간 이렇게 하고 이제 그만 좌선(坐禪)을 하고 일어서려고 할 때에는 숨을 다시 깊이 들어마셨다가 '후~'하고 또 한 서너 번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몸을 또 좌우로 서너 번 이렇게 흔들고.

그리고 인자 이 손을 요렇게 싹싹싹싹 비벼서, 손바닥이 뜨끈뜨끈한 손을 가지고 눈 위에다 이렇게 오목하니 해서 눈을 이렇게 가리고 그 속에서 눈을 딱 뜨세요. 그리고 그 손으로 또 얼굴을 이렇게 만지고요.


또 손을 비벼서.... 이 비빌 때 눈을 감고 비비고, 그래가지고 그 뜨끈뜨끈한 손을 눈 위에다 덮은 다음에 그 속에서 눈을 이렇게 뜨세요. 뜨고 난 다음에 그 손으로 얼굴과 귀와 얼굴을 잘 만지세요.


그렇게 한 다음에 다리가 저린 사람은 다리를 뻗고 다리도 좀 주무르고, 발목도 돌리고 이렇게 해서 잘 푼 다음에 조용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30분이나 1시간 또는 2시간 이렇게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일어설 때 갑자기 불끈 일어서고, 갑자기 나가서 달음박질을 한다든지, 뛴다든지 이것은 대단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다가 혹 심장병이 생기기도 하고 또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기도 하고, 그것이 앉았다가 일어설 때 함부로 해가지고 그런 병이 생기는 수가 흔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선을 많이 하신 스님네나 여러 청신사 청신녀들께서도 앉았다 일어설 때 항시 그런 준비 운동을 하고 나서 조용히 일어서도록 주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이요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인무일점호신심(人無一點好身心)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인간부귀(人間富貴)는 일시락(一時樂)인데, 인간에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한때의 낙(樂)에 지나지 못하는데,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이다. 지옥에 쓰라린 고통은 만겁(萬劫)이나 길고 길더라.


잠깐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내지 못한 인간의 즐거움 그것을 맛보다가,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죄를 짓다가 그 잠깐 쌈박한 맛에 취해가지고 그것을 탐닉하다가 한번 지옥에 떨어지면 그 몸서리치고 쓰라리고 괴로운 그 고통은 무량겁이나 길고 지옥에서 나올 기약이 없더라.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인데, 이 세상에 일월(日月), 해와 달, 하루하루가 가면 한 달, 한 달 한 달이 가면 일 년, 일 년 일 년이 가면 십 년, 수천 년, 만 년 이렇게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많은 한가한 세월이 지나가는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몸이 아무 병이 없이 편안하고, 마음도 아무 고통이 없이 즐겁기만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人無一點好身心].

오장육부 사지백체(四肢百體) 어디가 아프던지 아프고, 무슨 걱정이 있든지 걱정이 있지, 걱정도 없고 몸이 괴롭지도 않고 그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더라 그 말씀이여.



자꾸 '생사가 두렵다. 인간이 무상하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정말 그놈의 생사를 어떻게 해야 면할 것인가? 여태까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한 사람도 생사를 면한 사람이 없다니, 그럼 뭐 참선해 봤자 죽을 사람 다 죽고 그러니 뭐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소리가 뭔 소리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그래서 해탈할 것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생사가 없는데 무슨 또 지옥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지옥도 없는 것이요, 천당도 없는 것이요, 생사도 없는 것이여. 또 우리가 증득해야 할 열반(涅槃)이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는 없는데, 현실적으로는 있습니다.(42분46초~63분27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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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대지촬래속미립(大地撮來粟米粒) 일호두상현건곤(一毫頭上現乾坤)' ; 『호구소륭화상어록(虎丘紹隆和尙語錄)』 '평강부호구운암선사어록(平江府虎丘雲巖禪寺語錄)' 참고. (大地撮來粟米粒 一毛頭上現乾坤 居家不離途中事 常在途中不出門)

[참고] 호구소륭(虎丘紹隆 1077~1136) : 송(宋)의 스님. 임제종 양기파. 원오극근(1063~1135)의 법을 이어받고 20년 동안 시봉함.

*(게송) '감소일월부도처(堪笑日月不到處) 개중별시일건곤(箇中別是一乾坤)' ; 『禪宗頌古聯珠通集』 제20권 '大溈行' 게송 참고. (滿滿彎弓射不著 長長揮劒斫無痕 堪笑日月不到處 箇中別是一乾坤)

*업장(業障)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장애(障礙)가 생기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간화선(看話禪) ; 화(話)는 화두(話頭)의 준말이다. 간화(看話)는 ‘화두에 대한 알 수 없는 의심을 본다[看]’는 말로써,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꽉 막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해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이 화두를 관(觀)해서, 화두를 통해서 확철대오하는 간화선을 전강 조실스님과 송담스님께서는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고 말씀하신다.

*도업(道業) ; 도(道)는 깨달음. 업(業)은 영위(營爲 : 일을 계획하여 꾸려 나감). 불도(佛道)의 수행. 진리의 실천.

*생사윤회(生死輪廻 날 생/죽을 사/바퀴 윤/빙빙돌 회) : 사람이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한 번뇌와 업에 의하여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났다가(生) 죽고(死) 났다가 죽는 것이 바퀴(輪)가 돌듯이(廻) 반복함. 육도윤회(六途輪廻).

*해탈(解脫) : [범] Vimokṣa ; Vimukta ; mukti  [파] Vimokha ; Vimutta ; Vimutti  음을 따라 비목차(毘木叉) • 비목저(毘木底) • 목저(木底)라고 한다。모든 번뇌의 속박을 끊어 버리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므로, 도탈(度脫) 혹은 자유자재(自由自在)라고도 한다。또는 열반(涅槃)의 딴 이름으로도 쓰인다。열반은 불교 구경(究竟)의 이상으로써 여러가지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므로 곧 해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외도(外道 바깥 외/길 도) ; ①불교 이외의(外) 다른 종교(道)의 가르침. 또는 그 신봉자. ②그릇된 가르침, 그릇된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불법(佛法) ;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法). 부처님의 교법(敎法). 부처님이 설한 법. 부처님의 가르침.

*(게송) '생전부귀초두로(生前富貴草頭露) 신후풍류백상화(身後風流陌上花)' ; 소식(蘇軾, 소동파)의 '陌上花(三首)' 참고.

*(게송) '망망우주인무수(茫茫宇宙人無數) 기개남아시장부(幾箇男兒是丈夫)' ; 여동빈(呂洞賓).

*대장부(大丈夫 큰·훌륭할 대/어른·존칭 장/사내·일꾼 부) ; 장부(丈夫). ①건장하고 씩씩한 사나이. ②대승의 근기를 가진 수행자. 불법의 수행이 원숙한 사람. 불성(佛性)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

*육도윤회(六途輪廻, 六道輪廻) ; 선악(善惡)의 응보(應報)로 육도(六途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의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죽음과 삶을 끝없이 되풀이하는 것.

*전강선사 녹음법문(錄音法門) ; 전강 스님께서 후학을 위해 참선법(參禪法)을 핵심으로 설한 법문이 칠백여 시간 분량이 녹음되어 있다. 이 중에는 『전강선사 일대기』 『몽산법어』 『초발심자경문』 등이 있다.


눈부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이제는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 천육백여 개의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 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전강선사 및 송담스님의 모든 법문이 저장된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법문(法門 부처님의 가르침 법/문 문) ; 불법(佛法)을 문(門)에 비유한 말.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고통 세계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들게 하는 문(門)이므로 이렇게 이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르는 말. 진리에 이르는 문.

*참선(參禪) ; ①선(禪)의 수행을 하는 것. ②내가 나를 깨달아서 자신이 본래 갖추고 있는 부처의 성품을 꿰뚫어봐 이 생사 속에서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어서 생사에 자유자재한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는 수행. 자신의 본성을 간파하기 위해 하는 수행.

*고황병(膏肓病) ; 고황(膏肓) · 고황지병(膏肓之病)이라고도 한다. 고황에 들어 고치기 어려운 병.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의 사이에 있는 부분으로 이 사이에 병이 생기면 낫기 어렵다고 한다. 고(膏)는 심장의 아랫부분이고, 황(肓)은 횡격막의 윗부분.

고황에 병이 들었다는 의미는 병이나 못된 버릇이 고칠 수 없도록 심하여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뜻으로 쓰인다. 가벼운 것이 아닌 불치의 병, 중병 등을 말한다.

*화두(話頭) : 또는 공안(公案) • 고측(古則)이라고도 한다. 선종(禪宗)에서 참선 수행자에게 참구하는 과제로 주어지는 지극한 이치를 표시하는 조사의 언구(言句)나 문답이나 동작. 참선 공부하는 이들은 이것을 참구하여, 올바르게 간단없이 의심을 일으켜 가면 필경 깨치게 되는 것이다.

화두(공안)에는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 '정전백수자' 등이 있다.

*의심(疑心) :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해 ‘알 수 없는 생각’에 콱 막히는 것.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이뭣고?’ ‘이놈’이 무엇이길래 무량겁을 두고 수 없는 생사를 거듭하면서 오늘 지금 이 자리까지 왔는가?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또는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또는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자기의 본참화두(本參話頭)에 대한 의심이, 지어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저절로 들려지게 해야. 바른 깨달음은 알 수 없는 의단, 알 수 없는 의심에 꽉 막힌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본참화두(本參話頭) ; 본참공안(本參公案).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타파해야 할 자기의 화두(공안)로써 자기가 믿어지는 바른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서 참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타파(打破) ; 화두의 생명은 의심입니다.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을 관조(觀照)해 나가는 것, 알 수 없는 그리고 꽉 맥힌 의심으로 그 화두를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모든 번뇌와 망상과 사량심이 거기에서 끊어지는 것이고, 계속 그 의심을 관조해 나감으로 해서 더 이상 그 의심이 간절할 수가 없고, 더 이상 의심이 커질 수 없고,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간절한 의심으로 내 가슴속이 가득 차고, 온 세계가 가득 차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화두를 의식적으로 들지 않어도 저절로 들려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똥을 눌 때에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차를 탈 때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고, 이렇게 해서 들려고 안 해도 저절로 들려진 단계. 심지어는 잠을 잘 때에는 꿈속에서도 그 화두가 들려져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6, 7일이 지나면 어떠한 찰나(刹那)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항아리에다가 물을 가뜩 담아놓고 그 항아리를 큰 돌로 내려치면은 그 항아리가 바싹 깨지면서 물이 터져 나오듯이, 그렇게 화두를 타파(打破)하고, ‘참나’를 깨닫게 되고, 불교의 진리를 깨닫게 되고, 우주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참선법 A’ 에서]

*사량분별(思量分別) : 사량복탁(思量卜度), 사량계교(思量計較)와 같은 말。 생각하고 헤아리고 점치고 따짐。 가지가지 사량분별(思量分別)로 사리(事理)를 따짐。 법화경 방편품(法華經方便品)에 「이 법은 사량분별로 능히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함.

[참고] 『몽산법어(蒙山法語)』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 p155~158 에서. (가로판 p149~151)

做工夫호대  不可在古人公案上하야  卜度하야  妄加解釋이니,  縱一一領畧得過라도  與自己로  沒交渉하리라.  殊不知古人의  一語一言이  如大火聚로다.  近之不得하며  觸之不得이온  何況坐臥其中耶아.  更于其中에  分大分小하며  論上論下인댄  不喪身失命者幾希리라.


공부를 짓되 옛사람의 공안에 대하야 헤아려[卜度]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做工夫人은  不可尋文逐句하며  記言記語니,  不但無益이라  與工夫로  作障礙하야  眞實工夫가  返成緣慮하리니,  欲得心行處絕인들  豈可得乎아


 공부 지어 가는 사람은 문구(文句)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心行處絕]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做工夫호대 最怕比量이니, 將心湊泊하면 與道轉遠하리니, 做到彌勒下生去라도 管取沒交渉하리라. 若是疑情이 頓發的漢子인댄 如坐在*鐵壁銀山之中하야  只要得個活路이니, 不得箇活路면  如何得安穩去리요  但恁麼做去하야  時節이  到來하면  自有箇倒斷하리라


 공부를 지어 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比量]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道)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頓發]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鐵壁)이나 은산(銀山) 속에 들어앉아서 다만 살 길[活路]을 찾는 것같이 할지니, 살 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가리오? 다만 이와같이 지어 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이 나리라.

*관조(觀照) ; ①지혜의 힘으로 사물이나 이치를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환히 꿰뚫어 봄)함. ②지(智)로써 사(事 모든 차별의 모양. 현상계. 차별 현상. 사물)와 이(理 모든 사물의 본체. 진리)를 관(觀)하여 바르게 아는 것.

[참고] 『돈황본 육조단경』

用智慧觀照 於一切法 不取不捨 卽見性成佛道

지혜로써 보고 비추어[觀照] 온갖 법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나니, 곧 성품을 보아 불도(佛道)를 이루느니라.


[참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보조국사 지눌 스님)

如或世間事務 種種牽纏或病苦所惱 或邪魔惡鬼所能恐怖 有如是等 身心不安 則於十方佛前 至心洗懺 以除重障 禮念等行 消息知時


만일 세상의 일에 가지가지로 얽매이거나 병으로 아프거나 삿된 악마나 귀신에 의해 공포에 떠는 등 이런 일로 몸이나 마음이 불안함이 있거든, 시방세계의 부처님 전에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여 무거운 업장(業障)을 제거해야 한다. 예불과 염불을 아울러 행하고, 업의 장애를 없애고 생각을 비우는 일을 때를 알아서 하라.


動靜施爲 或語或默 一切時中 無不了知 自他身心 從緣幻起 空無體性 猶如浮泡 亦如雲影 一切毀譽是非音聲 喉中妄出 如空谷響 亦如風聲


움직이고 그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시간에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이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일어난 것으로 공(空)하여 체성(體性)이 없음이 마치 물에 뜬 거품과 같으며 또한 구름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일체 비방하고 칭찬하며, 옳다 그르다는 음성이 목구멍에서 망령되이 남[出]이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고 또한 바람 소리와 같은 것임을 환히 안다.


如是虛妄自他境界 察其根由 不隨傾動 全身定質 守護心城 增長觀照 寂爾有歸 恬然無間


그와 같이 나와 남이 모두 허망한 경계에서 그 근본 원인을 살펴, 치우친 행동을 따르지 않고, 온 몸은 안정하여 마음의 성(城)을 굳게 지키어 비추어 보는[觀照] 힘을 증장하면 고요히 돌아갈 곳이 있고 편안하여 끊임이 없을 것이다.


當是時也 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然斷除 功行自然增進


그때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저절로 엷어지고 자비와 지혜가 저절로 더욱 밝아지며 죄업은 저절로 끊어져 없어지고 공덕의 행[功行]은 저절로 더욱 나아갈 것이다.


煩惱盡時 生死卽絕 生滅滅已 寂照現前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是爲了事人分上 無漸次中漸次 無功用中功用也


그리하여 번뇌가 다할 때에는 생사가 곧 끊어지고 생멸이 멸하면 적(寂)과 조(照)가 앞에 나타나 응(應)해 씀이 무궁하여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리니 이것이 이른바 일 마친 사람의 분상(分上)에 점차(漸次) 없는 가운데 점차며, 공용(功用) 없는 가운데 공용이 되는 것이다.

*이뭣고(是甚麼 시심마) : ‘이뭣고? 화두’는 천칠백 화두 중에 가장 근원적인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육근(六根) • 육식(六識)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생각에 즉해서 ‘이뭣고?’하고 그 생각 일어나는 당처(當處 어떤 일이 일어난 그 자리)를 찾는 것이다.

표준말로 하면은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은 ‘이뭣고?(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고?’는 일곱 자(字)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이, 뭣, 고’ 석 자(字)이다. ‘이뭣고?(이뭐꼬)'는 '사투리'지만 말이 간단하고 그러면서 그 뜻은 그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참선(參禪)을 하는 데에 있어서 경상도 사투리를 이용을 해 왔다.

*판치생모(板齒生毛) ; 화두(공안)의 하나. 版과 板은 동자(同字).

[참고] 『선문염송(禪門拈頌)』 (고려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 편찬) 475칙 ‘판치(版齒)’

(古則) 趙州因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版齒生毛.

조주 스님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投子靑頌) 九年小室自虛淹 爭似當頭一句傳 版齒生毛猶可事 石人蹈破謝家船

투자청이 송했다.

9년을 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당초에 일구 전한 것만 같으리오.

판치생모도 오히려 가히 일인데 돌사람이 사가(謝家)의 배를 답파했느니라


[참고] 『언하대오(言下大悟)』 (전강 선사 법어집 | 용화선원刊) p53~54.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즉, 「어떤 것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판치에 털이 났느니라」라고 하는 화두.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딴생각 ; 별념(別念).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박산무이선사선경어(博山無異禪師禪警語)에서.

做工夫호대  着不得一絲毫別念이니  行住坐臥에  單單只提起本叅話頭하야  發起疑情하야 憤然要討箇下落이니라.  若有絲毫別念하면  古所謂雜毒이  入心하야  傷乎慧命이라하니  學者는 不可不謹이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叅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 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別念]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 바 「잡독(雜毒)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학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느니라.


余云別念은  非但世間法이라  除究心之外에  佛法中一切好事라도  悉名別念이니라.  又豈但佛法中事리요  於心體上에  取之捨之  執之化之가  悉別念矣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別念]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佛法)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別念]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取], 버리거나[捨], 집착하거나[執], 변화하는[化] 것이 모두 다 딴 생각[別念]이니라. (p164-166) (가로판 p157~158)


做工夫호대  不得將心待悟어다.  如人이  行路에  住在路上하야  待到家하면  終不到家니 只須行하야사  到家오  若將心待悟하면  終不悟니  只須逼拶令悟요  非待悟也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걸어가야 집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서, 만약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깨닫지 못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요,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p163-164) (가로판 p156~157)


做工夫호대  不得求人說破이니  若說破라도  終是別人底요,  與自己로  沒相干이니라.  如人이  問路到長安에  但可要其指路언정  不可更問長安事니  彼一一說明長安事라도  終是彼見底요,  非問路者의  親見也이니라.  若不力行하고  便求人說破도  亦復如是하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說破)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說破)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終是) 그가 본 것이요, 길 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p180-181) (가로판 p17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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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境界) ; 산스크리트어 viṣaya ①대상,인식 대상, 여러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대상. 인식이 미치는 범위 ②경지(境地) ③상태 ④범위,영역.

*마장(魔障 마귀 마/장애 장) ; 어떤 일에 장애가 생기는 것. 불도(佛道) 및 선법(善法)의 수행에 장애가 생기는 것.

*단전 호흡(丹田呼吸) ; 참선 수행에 있어서 호흡법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도 안정을 시키고 통일되게 하여 우리가 참선을 해 나가는 데에 중요한 준비, 기초 훈련입니다.

단전호흡을 하게 되면은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됨으로 해서 몸안에 모든 노폐물이 깨끗하게 밖으로 배설이 되서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지고 따라서 정신이 맑아지고, 정신이 안정이 된다. 주의할 점은 자신의 호흡의 길이에 알맞게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해야지, 절대로 억지로 호흡 시간을 길게 잡아 무리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공양(식사) 후 2시간 지나서 하라.


〇 단전호흡 요령.

의식적으로 숨을 저 배꼽 밑에 아랫배 하복부[丹田]까지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하니 길게 숨을 내쉬는 호흡.

들어마시는 시간 한 3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무르는 시간이 한 3초, 내쉬는 시간은 4~5초, 이렇게 해서 내쉬는 시간을 좀 길게 잡아서 내쉰다.


들어마시되, 아랫배가 터지도록 잔뜩 들어마시지 말고 한 80%정도만 들어마시고, 80% 들어마신 상태에서 3초 동안 잠깐 머물렀다가 조용히 내쉬는데, 들어마실 때에는 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게 만들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 배를 홀쭉하게 만든다.

그래서 들어마셨다 잠깐 머물렀다 또 내쉬되, 배가 그것에 따라서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도록 의식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1분 32초)

[참고] 송담스님(No.118)—80년 동안거해제 법문에서.

숨을 들어마실 때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을 하지 말고 ‘저 뒤에서 쭈욱 들어마셔 가지고, 이 궁둥이로 해서 아랫배로 요렇게 들어온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들어마시면 아주 수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숨을 코로 들어마셔 가지고 아랫배까지 이렇게 집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들어마셔 가지고 이 윗배 오목가슴 정도까지 가 가지고 거기서 딱! 맥혀 가지고 아래로 내려가지를 않아서 애를 먹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영 시원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 들어마신다’고 생각하지 말고 ‘저 뒤에서 궁둥이로 쑤욱 들어마셔 가지고 직선으로 들어와 가지고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온다’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그 자리에서 직선으로 뒤로 쑤욱 내쉰다, 내보낸다’ 이런 기분으로 숨을 내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숨은 직선으로 뒤에서 이렇게 들어마시고 내쉴 때는 직선으로 뒤로 이렇게 내보낸다』

들어마실 때에는 배가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볼록해지고, 내쉴 때는 차츰차츰차츰 아랫배가 홀쪽해진다. 이렇게 의식을 하면서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포행(布行) ; 참선(參禪)을 하다가 잠시 방선(放禪)을 하여 몸을 푸는 뜻으로 자신의 본참화두를 들면서 조용히 뜰을 걷는 일.

*가부좌(跏趺坐 책상다리할 가/책상다리할 부/앉을 좌) ;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줄임말.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가(跏)는 발바닥을, 부(趺)는 발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두 다리를 교차시켜 양쪽 발바닥이 위로 드러나게 앉는 좌법(坐法). 가부(跏趺) · 가좌(跏坐)라고도 한다.

오른발을 왼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드러나게 앉는 항마좌(降魔坐)와, 왼발을 오른편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은 뒤, 오른발을 왼편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아 양쪽 발바닥이 위를 향하게 하여 앉는 길상좌(吉祥坐)가 있다.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역경계(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반대되어 마음이 언짢은 경계. ②일이 순조롭지 않아 매우 어렵게 된 처지나 환경. 역경(逆境), 위경(違境)이라고도 한다.

*순경계(順境界) ; ①자기의 마음에 들어맞어 마음이 따르는 경계. ②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어 가는 경우나 형편.

*곱이곱이 ; 길이나 강물 따위가 여러 굽이로 휘어져 구부러진 모양을 나타내는 말.

*도(道) ; ①깨달음. 산스크리트어 bodhi의 한역. 각(覺). 보리(菩提)라고 음사(音寫). ②깨달음에 이르는 수행, 또는 그 방법. ③무상(無上)의 불도(佛道). 궁극적인 진리. ④이치. 천지만물의 근원. 바른 규범.

*부처 ; ‘부처’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팔리어는 buddha이다. 이 buddha의 온전한 음사어는 불타(佛陀·佛馱), 부도(浮圖·浮屠), 부타(浮陀), 부두(浮頭), 발타(勃陀·馞陀), 몰타(沒駄) 등이 있다. 각자(覺者), 지자(知者), 각(覺)으로 한역. 불타(佛陀)라는 말이 순우리말로 ‘부텨’라고 읽히고 이 말이 점차 변하여 ‘부처’가 되었다. 보통 경칭어미를 붙여 ‘부처님’이라 한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가장 크고 높고 참된 이치를 자기가 깨치고[自覺] 남들까지 깨치게 하여[覺他], 그 지혜와 복이 끝없이 원만하고 이치와 일에 두루 걸림없고[覺行圓滿],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한 이를 말한다. 그 참 이치를 가르쳐서 누구나 부처가 되고, 어디나 밝고 깨끗하고 평등하고 싸움 없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치심 곧 불교(佛敎)다.

*인행(因行) ; ①수행. (부처가 되기 위한) 인(因)이 되는 행(行). 깨달음을 여는 근본이 된다.

②수행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요인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롯이 수행정진하는 것. 보살이 인행(因行)을 닦아서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얻는 것을 수인감과(修因感果)라고 한다.

*사바세계(娑婆世界) ; 고뇌를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괴로움이 많은 이 세계. 현실의 세계. 인토(忍土) · 감인토(堪忍土) · 인계(忍界)라고 한역. 석가모니 부처님이 나타나 중생들을 교화하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사바세계이다.

*고행(苦行) ; ①천상(天上)에 태어난다든지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주로 단식(斷食)이나 호흡의 제어와 같이 육신을 극도로 괴롭히는 수행.

②불교 이외의 외도들이 닦았던 수행법으로 깨달음을 얻는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육체에 고통을 줄수록 정신이 더 자유로워진다고 하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하여 육체에 고통을 줌으로써 본능과 욕망을 끊는 것.

③의식주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닦는다는 의미. 12두타(頭陀)의 고행이 여기에 상응하며 정진(精進)의 의미를 포함한다.

④중생을 위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 또한 이에 상응하는 행하기 어려운 수행을 닦는 것을 말한다.

*대각(大覺) ; 부처님의 깨달음. 정각(正覺) · 대오(大悟) 등과 같은 뜻이다. 스스로 깨닫고[自覺] 남들도 깨달음으로 인도하여[覺他] 각(覺)과 행(行)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대각이라 한다. 또는 부처님 자체를 가리키는 말.

*(게송) '생사노두군자간(生死路頭君自看) 활인전재사인중(活人全在死人中)' ; 『설봉공화상외집(雪峰空和尙外集)』 「송고(頌古)」에서 '亂後入黃龍途中示道伴' 참고. (羯胡如鬼馬如風 雪刃縱橫到處空 生死路頭君自看 活人全在死人中)

*'사람이 태어나서 육칠십 년을 살다 가는 게 아니라, 태어난 찰나부터 한 생각 일어나면 새로 태어난 것이고, 그 생각이 꺼지면 한평생을 살고 죽은 것이고.... ....1초 1초 지나가면서 수없는 생사, 생사, 생사가 되풀이되면서 생사의 수레바퀴, 생사의 수레를 타고 생사의 길을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 『몽산법어』 (용화선원刊) '보제존자시각오선인(普濟尊者示覺悟禪人 보제존자가 각오선인에게 보이심)' p103-104. (가로판 p101~103)

念起念滅(염기염멸)을 謂之生死(위지생사)니 當生死之際(당생사지제)하야 須盡力提起話頭(수진력제기화두)호리니 話頭(화두)가 純一(순일)하면 起滅(기멸)이 卽盡(즉진)하리라

起滅卽盡處(기멸즉진처)를 謂之寂(위지적)이라하니 寂中(적중)에 無話頭(무화두)하면 謂之無記(위지무기)요 寂中(적중)에 不昧話頭(불매화두)하면 謂之靈(위지령)이라하나니 卽此空寂(즉차공적)과 靈知(영지)가 無壞無雜(무괴무잡)하야 如是用功(여시용공)하면 不日成之(불일성지)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멸함을 생사라 이르나니, 생사(生死)의 즈음을 당하야 모름지기 힘을 다하야 화두를 들지니, 화두가 순일하여지면 일어나고 멸하는 것이 곧 다하리라.

생각이 일어나고 멸함이 곧 다한 곳을 이르되 고요함[寂]이라 하나니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라 함이요, 고요한 가운데 화두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영(靈)이라고 이르나니, 이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무너짐도 없고 섞임도 없어서 이와 같이 공부를 하면 며칠 안 가서 성취하리라.


*보제존자(普濟尊者) : (1320 ~ 1376) 나옹혜근(懶翁惠勤). 고려 스님. 분류 ‘역대 스님 약력’에서 참고.

*화두(話頭) ; 화두에 참구(叅句)와 참의(叅意)가 있다。 이론적으로 따져 들어가는 것이 참의요 사구(死句) 참선이며, 말길 뜻길이 끊어져서 다만 그 언구만을 의심하는 것이 참구요 활구(活句) 참선이다.

*무기(無記) : [범] Avyaksita 선(善)•악(惡)•무기(無記) 3성의 하나. ①온갖 법의 도덕적 성질을 3종으로 나눈 가운데서 선도 악도 아닌 성질로서, 선악 중의 어떤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중간성(中間性)을 말한다. 이 무기에는 바른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유부(有覆) 무기가 있고 순수해서 방해하지 않는 무부(無覆) 무기가 있다.

②고요함에 매료되어 화두를 망각하고 몽롱한 상태. 온갖 생각이 끊어져 공적(空寂)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공적한 가운데서도 화두가 성성(惺惺)해야 한다.

*발심(發心) ; ①위없는 불도(佛道=菩提=眞理)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菩提心]을 일으킴[發].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냄.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냄.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갖추어서 발기보리심(發起菩提心),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한다.

보리심은 모든 부처님이 부처님이 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되는 종자이고 청정한 법이 자라날 수 있는 좋은 밭이기 때문에 , 이 마음을 발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속히 위없는 보리를 증득한다.

*탐(貪) ; 자기의 뜻에 잘 맞는 사물에 집착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진(瞋) ;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겨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는 번뇌이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치(癡) ; 현상이나 사물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번뇌를 이른다. 육번뇌[六煩惱—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악견(惡見)의 여섯 가지 근본 번뇌]의 하나.

*삼독(三毒) ; 사람의 착한 마음(善根)을 해치는 세 가지 번뇌. 욕심·성냄·어리석음(貪瞋癡) 따위를 독(毒)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만(慢) ;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높이는 마음 작용.

*의(疑) ; 인과(因果)의 진리를 의심하는 마음 작용.

*악견(惡見) ; 올바르지 않은 견해. 그릇된 견해.

*오욕락(五欲,五慾,五欲樂) ; ①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색,소리,향기,맛,감촉(色聲香味觸)에 대한—감관적 욕망. 또는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것. 총괄하여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

②불도를 닦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욕심. 재물(財物), 색사(色事), 음식(飮食), 명예(名譽), 수면(睡眠).

*출가(出家) : [범] Pravrajita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다。가정 생활을 떠나서 수도와 포교를 전문으로 하기 위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말함이다。그러나 몸 출가[身出家]보다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등 삼독(三毒)의 불이 늘 붙고 있는 번뇌 망상의 불집에서 뛰어나오는 마음 출가[心出家]를 하여야 한다.

*영산회상(靈山會上) ; ①석가모니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 또는 그곳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때의 모임. ②선종의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부처님과 가섭이 이심전심으로 주고받은 염화미소(拈花微笑)의 회좌(會座).

*극락세계(極樂世界) :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淨土).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極] 안락[樂]하고 자유로운 세상[世界]이다. 안양(安養), 안락국(安樂國),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명토(無量光明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라고도 함.

*업(業) : [범] karma [파] Kamma 음을 따라 갈마(羯磨)라고 하며, 「짓다(作)」의 뜻이다。중생들이 몸으로나 말로나 뜻으로 짓는 온갖 움직임(動作)을 업이라 한다。개인은 이 업으로 말미암아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든 운명과 육도(六道)의 윤회(輪廻)를 받게 되고, 여러 중생이 같이 짓는 공업(共業)으로 인하여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건설되고 진행되며 쇠퇴하거나 파멸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는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만 지으라고 가르치다가, 필경에는 악과 선에서도 다 뛰어나고, 죄와 복에 함께 얽매이지 말아서 온갖 국집과 애착을 다 버리도록 하여, 부처님의 말씀에까지라도 걸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속복(俗服 속인 속/옷 복) ; 스님이 '일반 사람[俗人]의 옷[服]'을 이르는 말.

*먹물옷 ; 검은 물[먹물]을 들인 스님의 옷. 치의(緇衣 검을·승복 치/ 옷 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 모든 곳 모든 때에. 언제 어디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체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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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道心) ; 불도(佛道)를 행하고 믿는 마음.

*해태(懈怠 게으를 해/게으를 태) : 게으름(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태도나 버릇).

*무사안일(無事安逸 없을 무/일 사/편안할 안/한가할 일) ; 어떤 일[事]에도 해결하려 하지 않고[無] 편안(便安)하고 한가하게[逸]만 지내려는 태도.

*탐닉(耽溺 즐기다·좋아하다 탐/빠지다 닉·익) ; 어떤 일을 몹시 지나치게 즐겨서[耽] 거기에 빠짐[溺].

*선지식(善知識) ; ①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좋은 지도자. 훌륭한 지도자. 바르게 이끄는 사람. ②좋은 벗. 마음의 벗. 선우(善友).

*무상(無常) ; 모든 현상은 계속하여 나고 없어지고 변하여 그대로인 것이 없음. 온갖 것들이 변해가며 조금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 변해감. 덧없음. 영원성이 없는 것.

세상의 모든 사물이나 현상들이 무수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상호 관계를 통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인연(因緣)이 다하면 소멸되어 항상함[常]이 없다[無].

*생사고해(生死苦海) ; 중생이 태어나서 죽어 윤회하는 영역으로서의 세 개의 세계, 삼계(三界 :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킴. 생사와 그 괴로움이 무한한 것을 바다에 비유함.

*해탈(解脫) ; 산스크리트어 vimokṣa 팔리어 vimutti

①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정신이 자유 자재한 것. 괴롭고 아픈 세계에서 해방된 평안한 상태. 속세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난 상태. ②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 ③깨달음. ④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한곳에 집중하여 산란하지 않는 선정(禪定)의 상태. 평온한 경지.

*선방(禪房) ; ①참선(參禪)하는 방. 큰방. 선실(禪室). ②선원(禪院).

‘선방에 간다’라는 말은 ‘참선하러 절에 간다’ 또는 ‘참선 수행에 들어간다’라는 표현이다.


[참고 ❶] 『만공법어(滿空法語)』 (만공문도회 | 수덕사 능인선원) p249.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間斷) 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참고 ❷] 송담스님(No.582)—1997년 성도재 법회(96.12.08)에서.

보살선방 또는 비구선방, 시민선방 또 후원, 사무실 각자 자기 있는 처소에서 자기 분(分) 따라서 모다 열심히 정진을 하고 계시고, 가정에서도 터억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하면 가정이 바로 자기의 선방(禪房)입니다. 차를 타고 갈 때는 차 안이 바로 선방인 것이고,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이 바로 선방인 것입니다.

일체처 일체시, 시간과 공간에 따질 것 없이 언제나 한 생각 돌이키면은 바로 그 자리가 활구참선 도량(道場)이여.(53분52초~54분41초)

(4분 48초)

[참고 ❸] 송담스님(No.401)—1989년 11월 첫째일요법회.

이제 가을도 가고 겨울철에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음력 10월 보름에 겨울철 안거(安居)가 시작이 됩니다. 보살님네는 뒤로 미루지 말고 이 핑계 저 핑계 대다 보면 한량이 없습니다. 탁! 큰 마음을 내서 결단심을 내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또 이 한 철을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금년에 새로 선방(禪房)을 확장을 했으니 어찌던지 와서 정진을 잘 하시길 바라고, 부득이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직접 나와서 공부를 못하신 보살님네, 거사님네들도 가정에서, 직장에서, 생활 속에서 항상 '바로 있는—발 디디고 서 있는 그 자리, 앉어 있는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뭣고?」만 탁 들면 벌써 용화사 선원에 와서 방부를 들이고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을 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용화사에 방부를 들이고, 와서 큰방에 앉어 계셔도 밤낮 여기 앉어서 집안 생각, 아들 생각, 딸 생각 그러고 있으면은 그건 방부 들이나마나 하는 거고.

댁에 계시더라도 항상 「이뭣고?」를 들고 일 하다가도 퍼뜩 챙기고, 앉어서 챙기고, 서서 챙기고, 밥 먹으면서 챙기고, 똥 누면서 챙기면은 바로 집이 용화사 선원이거든.


시간도 공간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지척지간(咫尺之間)이 수천 리, 수천 리가 지척이 되는 것입니다. 백년 천년 하면 긴 것 같지마는 일 찰나간이고, 일 찰나간이 잠깐인 것 같지마는 이것이 바로 무량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법성게(法性偈)」를 외우신 분은 아시겠지마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무량원겁(無量遠劫)이 즉일념(卽一念)이거든. 이것은 진리에 입각해서 하신 말씀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래.


둘이 나란히 한집에서 한 이불 속에서 자도 벌써 생각이 틀어져 버리면은 천리(千里)거든. 부부간도 천리 웬수여. 저 천리 밖에 떨어졌어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고 있으면은 벌써 부부일신(夫婦一身)이거든.

시간과 공간을 그것이 또 다른 것이 아니야. 시간이고 곧 공간이고, 공간이 시간이거든. 공간 없는 시간이 없고 시간 없는 공간이 없어. 시간이 있는 곳에 반드시 공간이고 시간과 공간은 베의 날과 씨가 서로 이렇게 짜여져서 베를 짜듯이 시간과 공간도 역시 마찬가지여.


그래서 어느 때, 어느 시간 무엇을 하실 때라도 항상 화두를 들고, 화두 하나만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그저 딱 화두를 거각(擧却)하면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는 모든 조사(祖師)가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전강 조실 스님이 계신 자리요, 그 자리에는 입승(立繩) 스님이 탁! 죽비를 들고 앉아 있는 자리다 그말이거든.

그러니 입승 스님이 죽비를 들고 앉아 있고, 조실 스님이 탁! 지켜보고 계시고, 모든 조사 스님이 그 자리에 계시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어느 곳이 선불장(選佛場)이 아니겠습니까?(54분57초~59분45초)

*도반(道伴 깨닫다·도리·근본·불교 도/반려·동반자·벗 반) ; 함께 불도(佛道 부처님이 성취하신 최상의 깨달음)를 수행하는 벗. 불법(佛法)을 닦으면서 사귄 벗. 도려(道侶) · 도우(道友) · 동행(同行) 등과 같은 말.

*불보살(佛菩薩) ; 부처님과 보살을 아울러 일컫는 말. 불(佛)은 불타(佛陀)의 준말. 각자(覺者)라 번역한다. 보살은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이다.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각(各)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업장소멸(業障消滅) ; 전생(前生)이나 금생(今生)에 행동·말·마음(신구의,身口意)으로 지은 악업(惡業)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생긴 장애[業障]가 사라져 없어짐[消滅]. 죄업소멸(罪業消滅).

*법계(法界) ; ①모든 현상, 전우주. ②있는 그대로의 참모습. ③진리의 세계.

*선신(善神) ; 불법(佛法)과 그것을 믿는 이들을 보호하는 신.

*옹호(擁護 안을·지킬 옹/보호할 호) ; 어떤 대상을 두둔하고 편들어 지킴.

*신장(神將) ;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신장. 또는 《화엄경》을 보호하는 신장.

*가피(加被 더할·베풀 가/입을·두를 피) ; 불보살(佛菩薩)에게 위신력(威神力)을 받는 것. 불보살이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부여해서 이익을 주는 것. 가호(加護)와 같음.

*죽비(竹篦 대나무 죽/빗치개·통발 비) ; 예불이나 참선 정진할 때 이 죽비를 손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어 시작과 끝을 알리거나, 공양할 때 공양순서를 알리는데 쓰는 불교 용구.

*입선(入禪) ; 참선 수행(좌선)에 들어가는 것, 좌선(坐禪)을 시작하는 것. 참선(좌선)수행.

*반가부좌(半跏趺坐) ; 부처님의 좌법(坐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다른 쪽 다리의 허벅다리 위에 올려놓고 앉는 자세이다.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

*단전(丹田) ; 배꼽 아래로 한 치(寸) 삼푼 되는 곳(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랫배에 해당. '단'은 약(藥)을 뜻하며, '단전'은 인체에서 가장 귀중한 약을 만들어내는 장소로서의 밭[田]이라는 의미. 도가와 한의학에서는 단전을 생명력, 활동력의 원천으로 본다.

*좌선(坐禪) ; 단정히 앉아서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선(禪) 수행을 하는 것.

*상기병(上氣病 오를 상/기운 기/병 병) ; 화두를 머리에 두고 여기에 속효심(速效心)을 내어 참구하다가, 모든 열기(熱氣)가 머리에 치밀게[上] 되어 생기는 머리 아픈 병(病).

상기병이 생기면 기운이 자꾸 위로 올라와서, 화두만 들면 골이 아파서 공부가 지극히 힘이 들고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이 쇠약해짐. 상기병의 예방과 치료로 단전호흡과 요료법(尿療法, 오줌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민간 요법의 하나)이 사용된다.

*(게송) '인간부귀일시락(人間富貴一時樂) 지옥신산만겁장(地獄辛酸萬劫長)' ; 『석옥청홍선사어록(石屋淸洪禪師語錄)』 하권, '산거시(山居詩)' 참고.

*(게송) '세유백천한일월(世有百千閑日月) 인무일점호신심(人無一點好身心)' ; 『천목중봉화상광록(天目中峰和尙廣錄)』 제29권. '별우십수(別友十首)' 참고. (世有百千閑日月 人無一點好身心 知他爲甚麼邊事 添得茫茫業海深)

*일장춘몽(一場春夢) ; 한바탕의 봄꿈이라는 뜻으로, 헛된 영화나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지백체(四肢百體) ; 몸의 전체.

*생사해탈(生死解脫) ; 생사(生死)를 떠나 깨달음의 세계에 드는 것.

*열반(涅槃) ;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 nibbāna의 음사. 멸(滅)·멸도(滅度)·적멸(寂滅)·적정(寂靜)·적(寂)·안온(安穩)·원적(圓寂)·안락(安樂) 등으로 번역.

①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 버리듯이, 타오르는 탐욕〔貪〕과 노여움〔瞋〕과 어리석음〔癡〕 등의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나 고뇌가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

사제(四諦)에서 집(集), 곧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渴愛)가 소멸된 상태. 모든 미혹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解脫)한 깨달음의 경지.

②번뇌 망상이 일어나고 꺼짐이 없어져, 지극히 고요하고 깨끗하고 밝고 맑은 경지.

소승법(小乘法)에서는 번뇌를 끊어 버리고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열반에 든다 하고, 대승법으로는 번뇌가 본래 없는 이치를 깨치면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바세계의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늘 열반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따로 열반에 들고 나고 할 것 없이 무엇이나 다 열반이며 어느 때나 늘 열반이다. 이것이 큰 열반인 것이다.




[법문 내용]


(게송)대지촬래속미립~ / 생사 속에서 바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불법(佛法) / (게송)생전부귀초두로~ /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 /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게송)생사노두군자간~ / 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 출가(出家)와 재가(在家) / 참선 공부는 그래서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 / (게송)인간부귀일시락~ / 생사는 본래 없다.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가 높고, 권리가 높고, 명예가 있고, 재산이 있다 하드라도 이 길은 막을 도리가 없고 면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사(生死)의 윤회(輪廻)의 모습입니다. 생사 속에서 중생의 욕심으로 아무리 생사를 면할려고 해도 면할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불법, 최상승법만이 이 생사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는 길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불법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최상승법은 모든 중생들에게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참다운 길을 가르켜 주신 것입니다. 이 길이 먼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시 이 세상에 무엇보다도 가장 가까운 데에 그 길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 복잡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간단한 것입니다.

금방 녹음(錄音)을 통해서 전강 조실 스님의 법문(法門)을 들었습니다마는 「내가 나를 찾는 공부, 내가 나를 깨닫는 공부」 이것이 바로 참선법(參禪法)입니다.


참선법(參禪法)에, 이 내가 나를 깨닫는 이 참선법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병이 무엇이냐? 고황병(膏肓病)이라 하는 병인데, 고황병이라 하는 병은 한번 들어 버리면 천하 없는 명의도 이 병은 고칠 수가 없다. 이렇게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참선에 있어서의 고황병이란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지 않는 병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공부가 잘되다가 뚝 변해 가지고 영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무겁고 시간이 5분, 10분이 그렇게 지루하고 몸뚱이가 뒤틀리면서 지루하고 가슴은 답답하고 이러할 때가 오기도 하는데, 이러할 때에 어떻게 이 고비를 넘겨야 하느냐? 이것이 우리 참선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중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계(境界)가 왔을 때 '아하! 내가 이 마장(魔障)이 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를 말고, 그러한 경계가 왔을 때에는 '아! 내가 이 공부가 한 계단 올라서려는, 올라서기 위해서' 그러한 경계가 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 길이 어떠한 길이건 순경계보다도 그 역경계에서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역경계가 없는 순탄하기만 한 길은 아무 매력도 없고 맛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이고, 또 비약적인 경계에도 이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무량겁을 두고 수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인행(因行) 때의 수행을 거치셨고 또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오셔가지고서도 12년간이라고 하는 피나는 고행(苦行)을 겪으시면서 도를 구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온전히 죽은 사람 가운데 있구나.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 가운데 있어. 말을 바꿔서 말하면 내 자신도 '죽을 사(死)'자, 주검 위에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는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일대(一大)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한 국가도 썩어 문드러져서 그 나라가 도저히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없는 그러한 부패한 나약한 나라가 될 때에는 반드시 이웃나라로부터의 침범을 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할 때를 당해서 충신열사(忠臣烈士)들이 혁명을 일으켜 가지고 그 나라를 바로 잡는다는 예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빠져서, 해태(懈怠)의 구렁텅이에 빠져 가지고 그렁저렁 세월을 보내고 잘 먹고 잘 입고 무사안일(無事安逸)함만을 탐익(耽溺)하다가 세월은 흘러가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한 속에서 불법을 만나서 선지식(善知識)의 법문을 들어서, 마음속에 무상(無常)을 깨닫고 참선을 해 가지고 정신혁명을 일으킨다면 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 속에서 생사를 해탈(解脫)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진을 한 다음에 다리가 저린 사람은 다리를 뻗고 다리도 좀 주무르고, 발목도 돌리고 이렇게 해서 잘 푼 다음에 조용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30분이나 1시간 또는 2시간 이렇게 앉아서 좌선을 하다가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일어설 때 갑자기 불끈 일어서고, 갑자기 나가서 달음박질을 한다든지, 뛴다든지 이것은 대단히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다가 혹 심장병이 생기기도 하고 또는 상기병(上氣病)이 생기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있기도 하고, 그것이 앉았다가 일어설 때 함부로 해가지고 그런 병이 생기는 수가 흔히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조금도 거짓을 붙이지 아니하고 사실 고대로 말하자면 「생사(生死)라 하는 것은 원래 없는 것입니다」 생사는 본래 없어요. 그래서 해탈할 것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생사가 없는데 무슨 또 지옥이 있느냐 이 말씀이여. 지옥도 없는 것이요, 천당도 없는 것이요, 생사도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증득해야 할 열반이라 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정말로는 없는데, 현실적으로는 있습니다.


Posted by 닥공닥정
101~200/(151~175)2016. 1. 1. 13:59

 

 

(No.157)—전강 조실스님 7주기 추모재(81.12.02.)(15분)

 

 

약 15분.

 

 

23세에 견성오도(見性悟道) 하시고 혜월·혜봉·한암·용성·보월 스님을 비롯해서 만공 대선사님의 법맥(法脈) 이으셨습니다.

 

33세에 양산 통도사의 보광선원 조실(祖室) 추대를 받으셨고, 이후로 법주사 복천선원 경북에 수도선원, 해남 대흥사, 망월사, 대구 동화사, 경남 범어사,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여러 선원의 조실을 역임하시고,

수원 용주사에는 중앙선원을 개설하시고, 그렇게 조실로서 활구참선법, 언하대오(言下大悟)하는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선양을 하시다가,

 

여기 주안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61년도에 창설을 가지고, 1975 양력으로 1 13일에 열반에 드실 때까지 용화선원에서 정법을 선양을 하시다가 77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

 

열반에 드신 이후 오늘까지 8년간 조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조실 스님의 생존시와 조금도 다름없이 항시 조실 스님께서 도량에 살아서 머물러 계신 똑같이, 믿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사부대중이 도량에서 법문을 듣고 정진을 왔습니다.

 

조실 스님께서는 원래 모든 불보살(佛菩薩) 역대조사(歷代祖師) 마찬가지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달아 증득하셨으므로 당신 분상에는 생사가 없는 것이지만, 인연에 따라서 열반상(涅槃相) 보이신 것뿐입니다.

 

육조(六祖) 스님께서 열반하실 제자의 사람이언제 돌아오십니까?”하고 여쭈니까, “낙엽귀근(落葉歸根)이요 내시무구(來時無口)니라. 나무 이파리는 떨어져서 뿌리로 돌아가고, 오는 때에는 말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말씀은 비단 육조 스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불보살과 조사께서는 말씀이 해당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조실 스님께서내가 뒤라도 용화선원이 영원히 선원(禪院)으로서 운영이 되어가도록 하라 당부를 하시고,

이렇게 도량(道場) 가꾸어서 인연 따라서 자기도 공부하고 다른 사람도 공부할 있도록 나가면 나도 다시 와서 여기서 일대사(一大事) 밝힐 것이고, 너도 갔다가 다시 오고 해서 서로서로 도량을 중심해서 무량겁을 두고 공부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 이어간다면 그밖에 일이 무엇이겠느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실 스님이 언제 오실 것인가?

내가 아무개다하고 몸에다가 글씨를 가지고 오시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무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파리는 떨어져서 뿌리로 돌아가고 때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오실는지 그것은 아무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태양이 조실 스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캄캄한 밤을 비추는 휘황한 달빛이 조실 스님의 법문일 수도 있고, 흐르는 , 노래하는 새의 소리가 조실 스님의 모습이요 법문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신심과 정성을 가진 사람이면, 언제 어디서라도 조실 스님의 모습을 친견할 있을 것이고, 조실 스님의 법문을 들을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비단 조실 스님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모습과 법문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시대가 말세가 되어서 바른 스승 만나기 어렵고, 바른 학인을 만나기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정법을 바래고 원한다면 선지식과 불보살을 육도법계(六途法界) 어디서라도 친견할 수가 있다고 나는 확신을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말씀, 화엄경을 비롯한 많은 경전들 가운데에 역력(歷歷)하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이러한 분이 선지식(善知識) 것이다. 이러한 분이 바로 불보살 화현(化現) 것이다자기 나름대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그리면서 그러한 불보살과 선지식이 자기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고 계신 분이 계실는지 모릅니다마는,

불보살은내가 불보살 화현이다” “내가 선지식이다이렇게 말씀을 하시지를 않습니다.

 

고정된 모습 없이 나타나시고, 우리 중생의 눈으로, 이분이 바로 불보살이다, 이분이 바로 선지식이다알아차리도록 그렇게 오시지를 않기 때문에 그러한 뚝눈으로는 불보살은 바로 자기 곁에 계시고, 자기 집안에 계시고, 일생을 같이 살면서도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보살과 역대 선지식들은 () 없이 오시고, 상이 없이 가시며, 상이 없이 사시기 때문에 상을 통해서는 친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보살 화현은 여러분 가정에서 남편이 화현으로 와서 자기와 같이 살고 계실는지도 모르고, 불보살 화현이 오셔서 시부모님으로 계실는지도 수가 없고 또는 아들이나 딸이나 며느리가 불보살 화현으로 자기집에서 한솥밥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줄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발심(發心) 눈과 마음으로는 도처(到處)에서 항시 불보살을 친견할 수가 있는 것이고, 발심 못한 사람에게는 일생동안 산으로, 들로, 절로, 속세로 찾고 헤매어도 불보살은 마침내 친견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조실 스님께서 평상(平常) 법문하시기를언하(言下) 대오(大悟), 아래 크게 깨달으라하셨습니다.

말은, 선지식이다라고 널리 알려진 그분의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바람소리, 소리, 우는 소리, 흐르는 소리, 우리 귀를 통해서 들을 있는 모든 소리가 불보살의 법문이요 선지식의 법문인 것입니다.

우리 눈으로 있는 모든 색상도 불보살의 모습이요, 법문이요, 진리의 표현인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들이 어떻게 얼마만큼 간절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심(憤心) 신심(信心) 내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 조실 스님의 7주기를 맞이해서 이러한 최상승법(最上乘法) 우리의 마음을 다지고, 조실 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실천함으로써 추모재를 맞는 우리의 마음가짐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상으로서 인사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처음~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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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오도(見性悟道) : ‘성품() 보아() 진리() 깨친다()’ 뜻이다。자기의 심성을 사무쳐 알고, 모든 법의 실상인 당체(當體) 일치하는 정각(正覺)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을 견성성불, 견성오도라 한다.

*법맥(法脈) ; 세속에서 조상의 전래 혈통(血統) 밝히고 있듯이,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스승에서 마음을 깨친 제자로 계속 이어져 전해 ,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법통(法統) 전승을 법맥이라 한다.

*조실(祖室) ; 선원의 가장 높은 자리로 수행인을 교화하고 참선을 지도하는 스님.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 ; 선지식으로부터 화두 하나를 받아서[본참공안], 이론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못 막힌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를 참구(參究) 나가 화두를 타파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참선법(參禪法). 참선을 하려면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

참선의 다른 경향으로 사구참선(死句參禪) 있는데, 사구참선은 참선을 이론적으로 이리저리 따져서 분석하고, 종합하고, 비교하고, 적용해 보고, 이리해서 화두를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여 이론적으로 따지고 더듬어서 알아 들어가려고 하는 그러한 참선인데, 이것은 죽은 참선입니다.

1700공안을 낱낱이 그런 식으로 따져서 그럴싸한 해답을 얻어놨댔자 중생심이요 사량심이라, 그걸 가지고서는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가 중생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인데 사량심을 치성하게 가지고 어떻게 생사를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역대조사(歷代祖師) ;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불법(佛法) 받아 계승해 대대의 조사(祖師).

*열반상(涅槃相) ; 부처님의 성도(成道) 중심으로, 부처님의 일생에 있어서의 8가지의 중요한 사항인 팔상성도(八相成道) 또는 팔상(八相) 하나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말한다. 쿠시나가라성 밖의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에서, 최후의 설법을 마치고 열반에 드는 모습.

*육조 스님 ; 분류역대 스님 약력참고.

*낙엽귀근(落葉歸根)이요 내시무구(來時無口)니라 ; [육조단경(六祖壇經)] 부축품(付囑品) 참고.

*도량(道場) : ①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 붓다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를 말함. ②불도(佛道) 닦는 일정한 구역. 수행하는 . ③사찰. [참고] ‘도장으로 일지 않고도량으로 읽음.

*일대사(一大事) ; ①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세상에 나타난다고 하는 .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는 목적 ②가장 중요한 일이란 . 수행의 목적. 깨달음을 얻는 . 인간으로서의 완성.

*혜명(慧命) ; ①지혜를 생명에 비유하는 . ②법신(法身) 지혜가 생명이 된다는 .

*육도법계(六道法界) ; 육도(六道) 세계. 육도(六道,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

*역력(歷歷) ; 훤히 있게 분명하고 또렷함.

*선지식(善知識) ; 부처의 가르침으로 인도하는 덕이 높은 스승.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지도자. 좋은 .

*화현(化現) ; 부처님이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 중생의 소질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모습을 바꾸어 세상에 나타나는 . 화신(化身)이라고도 한다.

*() ; ①모습, 형태 ②특징, 특질 ③생각, 관념, () 같음 ④종적을 남기고 싶다고 하는 생각.

*발심(發心) ; ①불도(佛道=菩提=眞理)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②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을 . 깨달음의 지혜를 갖추려는 마음을 . (원어)發起菩提心 발기보리심, 發菩提心 발보리심.

*도처(到處 이를 , ) ; 여러 .

*평상(平常) ; 평상시(平常時,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

*분심(憤心)억울하고 원통하여 분한 마음. 과거에 모든 부처님과 도인들은 진즉 확철대오를 해서 중생 제도를 하고 계시는데, 나는 여태까지 일대사를 해결 못하고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가. 내가 이래 가지고 어찌 방일하게 지낼 있겠는가. 속에서부터 넘쳐 흐르는 대분심이 있어야. 분심이 있어야 용기가 나는 것이다.

*신심(信心) : 내가 바로 부처다따라서 부처는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요, 일체처 일체시에 언제나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 소소영령한 바로 이놈에 즉해서 화두를 거각함으로써 거기에서 자성불(自性佛) 철견을 해야 한다는 믿음.

올바르게 열심히 참선을 하면 나도 깨달을 있다 믿음. 진리에 대한 확신.

 

*최상승법(最上乘法)=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간화선(看話禪) ; 더할 나위 없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

Posted by 닥공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