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500/(476~500)2021. 1. 1. 18:59

 

 

 

((No.482))—1992년 11월 첫째일요법회 (81분)

(1/4) 약 20분. (2/4) 약 21분. (3/4) 약 19분. (4/4) 약 21분.

(1/4)----------------

 

도재유아부재타(道在唯我不在他)하니  불수구원불구천(不須求遠不求天)이니라

나무~아미타불~

수심정좌산창하(收心靜坐山窓下)하야  주야상참조주선(晝夜常參趙州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도재유아부재타(道在唯我不在他)요  불수구원우구천(須求遠又求天)이니라

도(道)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즉 내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름지기 멀리 구하지도 말고 또 하늘에서 구하지도 말아라.

도(道)라고 하면 깊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라, 그래서 저 경전 속에서 찾고 여러 가지 어려운 책 속에서 찾고 철학적으로 연구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 말이여.

 

도(道)는 내게 있어.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향내를 맡을 때, 입으로 음식 맛을 볼 때,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낄 때, 홀연히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그때에 거기서 도를 찾는 것이지, 저 일어나는 생각, 눈으로 보는 그 찰나, 귀로 들은 찰나(刹那)를 여의고 딴 데에서 도(道)를 찾지를 말아라.

 

수심정좌산창하(收心靜坐山窓下)에, 마음을 거두어 산창() 아래 고요히 앉아서,

주야상참조주선(晝夜常參趙州禪)이다. 밤낮으로 항상 조주선(趙州禪), 조사선(祖師禪)을 참구(參究)할지니라.

 

산창하(山窓下), 산창(山窓)이라 하니까 저 깊은 산중(山中)에, 산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여. 어디고 있는 그 자리가 마음을 거두어서 앉으면 그 자리가 바로 산창하(山窓下)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고 선불장(選佛場)이다. 밤낮, 밤이나 낮이나 항상 자기(自己)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참구(參究)할지니라.

시심마(是甚麽) '이뭣고?' 하는 사람은 '이뭣고?'

무자(無字)를 하는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오늘 임신년(壬申年) 11월 첫째 일요법회 날입니다.

조실 스님의... 계축년(癸丑年)은 전강 조실 스님께서 갑인년(甲寅年) 11월에 열반(涅槃)에 드셨으니까, 열반하시기 1년 전에 설하신 법문(法門)입니다.

녹음(錄音)을 통해서 경청(敬聽)을 했습니다마는, 활구참선, 활구참선(活句參禪)밖에는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길이 없다.

 

우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불러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발원(發願)한 분도 많고 그렇지만, 참선을 하는 사람은 옛날 선지식들이 모두가 다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을 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은 도솔천 내원궁에는 장차 부처님으로 출세(出世)하실 성인(聖人)들이 거기에서 대기를 하고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도솔천 내원궁은 극락세계와 비교해서 조끔도 손색이 없는 곳이여.

삼계(三界)가 온통 수재(水災)와 화재(火災)와 병재(病災)와 온갖 그런 재난(災難)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도솔천 내원궁에는 미치지를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든 장차 성불(成佛)해서 출세하실 부처님이 거기에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보다도 오히려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왕생(往生)하기를 모다 발원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우리의 바로 원각본궁(圓覺本宮)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이라고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하려면 평소에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잘 지키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

활구참선을 해서 자기의 본성, 자기(自己)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승에 인연이 다해서 숨을 거둔다면은 바로 도솔천 내원궁에 직행(直行)을 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심진오입시비단(尋眞誤入是非端)하야  불각다년작소단(不覺多年作笑端)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몽파시지신세환(夢罷始知身世幻)하니  서심종로백운단(誓心終老白雲端)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심진오입시비단(尋眞誤入是非端)하야  불각단연작소단(不覺多年作笑端)이다.

진리를 찾다가, 참나를 찾다가 그릇[誤] 시비(是非) 속에 들었어.

 

우리가 본래 저 무시겁(無始劫) 이전(以前)은 한 생각 동(動)해서 근본무명(根本無明), 지말무명(枝末無明)으로 떨어져서 이렇게 생사윤회를 해 왔지마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도 비로자나(毘盧遮那) 부처님과 한 자리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지냈었다 그 말입니다.

 

진리 속에 있다가 한 생각 동한 탓으로 해서 무량겁을 이렇게 생사유전(生死流轉)을 해 왔어. 해 오다가 다행히 부처님 또는 부처님의 진리, 부처님의 법(法)을 만나 가지고 다시 우리 본고향(本故鄕)을 찾는 공부를 하다가, 또 한 생각 잘못해 가지고 다시 또 세월을 이렇게... 한 생각 자칫 미끄러지면 몇 생을 곤두박질을 친다 그 말이거든.

 

그래 가지고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생로병사(生老病死) 속에 이리저리 뒹굴다가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성현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웃음거리가 되어 오다가, 금생에 어쩌다가 그 꿈을 깼다 그 말이여. 꿈을 깨 가지고 보니, 세상은 말세(末世)가 되었고 이 몸은 늙었다 그 말이거든. 이리저리 모든, 부모와 처자와 권속, 애정(愛情)에 얽히고설켜서 이 마음은 있지마는 여러 가지 여건이 걸려서 뚝 끊기가 어렵고 몸은 병이 들고 이렇게 된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왕 꿈을 깨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이 환(幻)인 줄 알고 확실히 무상(無常)한 것을 요달(了達)했다면 서심종로백운단(誓心終老白雲端)이여.

'맹세코 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또는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이 허망한 환상(幻相)에 속지 않고 진리로 돌아가고야만 말겠다. 우리의 본고향으로, 진리(眞理)의 본고향(故鄕)으로 돌아가리라' 하는 그러한 서약(誓約)을 날마다 부처님 앞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생각 동(動)해 가지고 미끄러진 탓으로 해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지금도 역시 생로병사 속에 있지마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중생(衆生)의 견지(見地)에서 볼 때 그런 것이고,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 삼계(三界)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에 체(體)여! 몸뚱이다 그 말이여. 비로자나 법신불의 몸뚱이요,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전부가 법신불(法身佛)의 설법(說法)이요.

그러니 눈을 통해서 들어온 것, 귀를 통해서 들어온 것이 전부가 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요 부처님에 설법(說法)이라고 한다면, 봄에 꽃이 피고 · 여름에 잎이 피고 · 가을에 단풍이 들고 · 겨울에 눈 내리는 것이 부처님 경전(經典) 아닌 것이 없고, 부처님 진신(眞身) 아닌 것이 없다 그 말이거든.

 

부처님께서,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보시는 세계(世界)나,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보신 세계나, 또 우리 중생(衆生)이 보는 모든 세계가 세계 자체(自體)는 고대로지마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 다 다르다 그 말이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을 하고, 어떻게 해야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볼 수가 있느냐?

무엇을 보던지, 무슨 경계를 듣던지, 자기에게 와서—자기의 눈이나 · 귀나 · 코나 · 혀나 · 몸이나 · 생각에 와서 부딪치는 모든 것을 당(當)할 때에 자기를 향(向)해서,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와야 한다 그거거든.

자기를 향(向)해서 돌아오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좋은 경전을 보고서 온갖 시비(是非)와 망상(妄想)을 일으켜 가지고 업(業)을 지어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과(果)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말이여.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금강경(金剛經)』, 우리가 마냥 많이 듣고 보고 하는 그런 좋은 경전도 그 경(經)을 보면서 바로 거기서 자기(自己)로 돌아오는... 그렇게 보지를 않고, 그 경으로 쫓아가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그렇게 본다면 팔만장경(八萬藏經)을 다 읽는다 해도 아무 이익이 없다 했습니다.

 

조사(祖師)들의 게송, 오도송(悟道頌)을 다 보면,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에 일어나는 경계(境界)에 즉(卽)해서 자신의 깨달은 경계를 읊은 것이 많습니다.(처음~20분13초)

 

 

 

 

(2/4)----------------

 

독좌심산만사경(獨坐深山萬事輕)하고  엄관종일학무생(掩關終日學無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생애점검무여사(生涯點檢無餘事)하야  일완신다일권경(一椀新茶一卷經)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독좌심산만사경(獨坐深山萬事輕)이여. 홀로 깊은 산에 앉았으니 만사가 다 가뿐하다 그 말이여.

엄관종일학무생(掩關終日學無生)이여. 종일토록 사립문을 닫고 무생(無生)을 배와.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배운다' 하는 것은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참선(參禪)을 한다는 말씀이여.

 

생애점검무여사(生涯點檢無餘事)여. 일평생 동안 자기의 모든 것을 떠억 이렇게 낱낱이 살펴보건데 남은 일이 없어. 아무 이렇다 할 일이 없어.

일완신다일권경(一椀新茶一卷經)이여. 한 잔에 새로운 차 한 잔이요, 한 권의 경이여.

 

참선하는 스님네는 옛날부터 엽차(葉茶)나 작설차(雀舌茶) 이런 차를 공양 끝에도 한 잔씩 드시고 또 졸리면은 또 차도 한 잔씩 드시기도 하고, 또 경을 보되 한 권의 경(經)이거던.

그 경은 무슨 경이냐 하면은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 경은 종이나 먹으로 만들어진 경이 아니여.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여. 그러되 항상 광명을 놓는 그러한 경전이여.

 

소소영령(昭昭靈靈)한 한 물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항상 소소영령한, 우리의 육체로 앉고 · 서고 · 눕고 · 밥 먹고 · 옷 입고 · 눈으로 보고 · 귀로 듣는 모든 동작(動作)과, 우리의 생각으로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림이 없이 오고 가고 하는 이 소소영령한 놈.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 걸림이 없는 이 소소영령한 놈이 바로 한 권의 경(經)이여.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종이나 먹으로 글자로 된 그런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런데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그 경(經)을 읽는 거다 그 말이여.

창(窓) 밖에 달이 훤히 밝을 때, 귀뚜라미 소리가 울 때, 강변에는 서리가 내려서 모든 나뭇잎이 누렇고 뻘겋게 물들일 때, 기러기가 떼를 지어 울고 지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자기의 일생 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경을 읽어라 그거거든.

 

아무리 이 세상이 성현이 가신 때가 오래되어서 말세(末世)가 되었다 하더라도, 온 세계가 시비(是非)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이 훨훨 타서 전쟁으로 피바다가 된다 하더라도, 종교(宗敎) 싸움 · 사상(思想) 싸움 · 경제 싸움 · 명예권리에 대한 싸움, 우리의 가까운 데로부터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온통 그러한 싸움이 쉴 날이 없지마는,

그러한 속에서 우리는 달도 볼 수가 있고, 귀뚜라미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산에 새소리도 들을 수 있고, 서리가 내리면 단풍이 들고 기러기도 하늘에 날아갈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화두를 들고 떠억 참나를 찾는다면 부처님 생존해 계시던 정법시대(正法時代)나 지금이나 그점에 있어서는 조끔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낮에는 태양이 빛나고 밤에는 달이 밝았을 것이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졌을 것이고 기러기도 울며 지내갔을 것이다 그 말이여.

정법(正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정법시대나 말법시대나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마는, 정법을 아는 사람은 정말 우리가 이 몸뚱이를 받아 나서 이 정법을 만나게 된 그 복(福)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우리는 뼛속 깊이 감사하고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날로 혼탁(混濁)하고 탐진치(貪瞋癡)가 날로 치성해서 살아가기가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세상이 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법을 믿고 참선을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려운 것도 우리에게는 채찍이 될 수가 있고, 온통 세상이 혼란하고 탐진치 불이 우리의 주변까지 타 들어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철저하게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發心)에 좋은 계기가 되어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과 또 출세간에 선악인과(善惡因果)가 다 자기의 한 생각으로 쫓아 일어난 것이지, 원인을 그 책임을 다른 사람한테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다 내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첫째, 이런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이고, 내가 한 생각 최초(最初)에 일어난 근본무명(根本無明)을 일으키지 안 했다면 우리가 뭣 때문에 생사윤회를 하며 또 이 말세에,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또 태어났겠습니까?

모든 원인(原因)이 자기의 한 생각 동(動)함으로 인해서 행(幸)과 불행(不幸) · 흥망성쇠 · 생로병사, 이러한 선악인과(善惡因果)를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깨달은다면, 그 원인을 알기 때문에—무슨 병을 앓더라도 '이 병이 왜 생겼는가' 그 병의 원인을, 근원을 확실히 알면 그 병은 고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모르고서 아무리 좋다는 약을 이것저것 먹어 봤자 낫기가 어려운 것이고. 그래서 명의(名醫)를 만나서 그 병의 근원을 알아야 그래야 그 병을 고칠 수가 있는 것이지.

 

그와 같이 우리 자신이 오늘날 여기에까지 이 말세에까지 온 원인을 안다면, 그것이 우리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여기에까지 온 것을 안다면, 한 생각을 돌이키면 바로 생사(生死) 없는 근원(根源)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돌이키는—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이요 정법(正法)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온갖 법문(法門)이 많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49년 동안 모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중생들을 위해서 많은 법문을 하신 것뿐이고, 그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다 보고 읽고 확연(確然)하게 부처님의 본뜻을 안다면, '이 뭣고?'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선법을 믿고 열심히 하다 보면 혹 어떠한 경계(境界)를 보고, 또는 조사 스님네의 게송(偈頌)을 보거나, 경전(經典)을 보거나 홀연히 나름대로 견처(見處)를 얻은 때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열심히 하기 때문에, 열심히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어떠한 뜻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잠깐 감동을 해서 웃을 수도 있고, 울 수도 있거니와 그 경계에 빠져서 자기도 '한소식 했다' 해 가지고 그 경계를 버리지 못하면 자기에게 속고, 자기를 속이고, 불조(佛祖)를 속이고, 불법(佛法)을 멸망(滅亡)하게까지 할 그러한 안타까운 그런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기지사(一期之事), 정말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선지식(善知識)에 인가(印可)를 받아서 조사(祖師)와 똑같은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일기지사로 번뜩 어떠한 경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스스로 조사와 같은 경지가 아닌 것을 알고서 버리지 않고, 그런 경지(境地)에 집착(執著)해 가지고 그것을 자기의 살림살이로 알고 그럭저럭 지낸다면, 이것은 그동안 애써서 공부한 본의(本義)도 간곳없고 자기의 공부는 거기서 끝나 버려.

 

거기서 끝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까 전강 조실 스님께서 말씀하신 그 체중현(體中玄)의 경계, 아무 공안(公案)이라도 닥치는 대로 눈에 띈 대로 경계를 잡아서 일르고, 동문서답하고, 무슨 물음을 물어도 할(喝)을 하고 방(棒)을 하고 손뼉을 치고, 이렇게 해서 자기는 그것으로써 쾌활하고 걸림이 없을 것 같지마는, 그것은 체중현의 경계밖에는 아니된 것이고,

정말 현중현(玄中玄)의, 현중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참깨달음이라고 하는 조실 스님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을 하고, 정진(精進)을 하되 실(實)다웁게 정진을 하고, 공안을 참구(參究)하되 실(實)답게 참구를 해야 깨달을 때에는 실다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실답게 참구하고, 실답게 정진을 해서, 실다운 깨달음을 얻지 아니하면, 청춘을 버리고 인생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출가(出家)해서 도(道)를 닦는다 해도, 마침내는 허송세월하고 지옥(地獄)밖에는 갈 곳이 없는 것이 참으로 이 도(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약(補藥), 사람들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또 늙지 않고 언제까지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쨌든지 좋은 약이라 하면은 닥치는 대로 먹으려고 그럽니다. 그러나 보약을 잘못 먹어 가지고 오히려 무서운 병을 유발하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요새 약(藥)이라 하면 돈 있는 사람은 가리지 않고 곰에 쓸개다 · 독사다 · 황구렁이다 · 심지어는 송장 뼈도 다 고아 먹고 별별 약을 다 먹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수명을 연장할 수도 없는 거고, 어떠한 주사를 맞어 가지고 자기의 힘을 보강한답시고 계속 맞아 봤자 오히려 명(命)을 재촉하는 결과밖에는 안되는 것입니다.(20분19초~40분57초)

 

 

 

 

(3/4)----------------

 

입으로 먹는 약도 그렇지만, 도(道)를 닦는 것도 요새 '10년 20년 30년 닦어 봤자 견성성불(見性成佛)한 사람이 그렇게 흔한 것이 아니다. 자기 시킨 대로 하면 견성은 문제없이 단시간 내에 할 수가 있다' 해 가지고 삿된 방법으로 사람을 현혹하고, 그래 가지고 금방 인가(印可)를 해 가지고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도(道)는—금방 툭! 터져 가지고 견성(見性)했다고 그래 가지고 큰소리를 치고—목적이 큰소리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여.

 

10년 20년 30년을 닦아도 콱! 맥혀서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다 하더라도,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실(實)다웁게 정진(精進)을 하면 금생에 견성(見性)을 못했다 하더라도 조끔도 후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마지막 살아서 어떠한 경계를 당해도 흔들린 바가 없고, 자기를 원망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향(向)해서 철저하게 참구(參究)해 나갈지언정, 명예나 권리나 재산에 흔들림을 받지 않고, 마지막 숨이 딱! 끊어질 때까지도 떠억 화두(話頭)를 들고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절대로 그 사람은 허송세월한 사람이 아니여.

 

죽음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설사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하더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도 화두를 떠억 들고서 숨을 딱깍 마칠 수 있다면, 설사 그 사람이 '훌륭한 도인이다, 선지식이다, 견성을 했다' 그러한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쳤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수행자(修行者)라고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지냈다면 금방 몸을 바꿔 나서, 바꿔서 다시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해 가지고 다시 불법(佛法)을 만나 가지고 또 정진을 하게 될 것이고, 또 그분이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에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을 했고 발원을 했다면 도솔천 내원궁에 틀림없이 가서 왕생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서 계신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 여러분들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에는 사업도 해야 하고, 관공서 회사에 직장 생활도 해야 하고, 또 가정에서 살림도 해야 하고, 아들딸 손자손녀도 길러야 하고, 여러 가지 각자 처지에 따라서 하실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하실 일 속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항상 화두(話頭)를 들고 참구(參究)를 해 나가고, '이 뭣고?'거든.

 

앉어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소지를 하면서도 '이 뭣고?'

빨래를 하면서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항상 화두를 들고, 손님이 오면 영접(迎接)하고 이야기하고 담소(談笑)하면서도 항상 허리를 펴고 속으로는 '이뭣고?' 하고, '이뭣고?' 하면서 이야기도 하고, '이뭣고?' 하면서 차(茶)도 마시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그때는 양치하고 세수하고서 떠억 30분, 또는 한 시간, 새벽에 일찍 일어나신 분은 두 시간, 정말 조용한 시간을 타서 정진(精進)을 하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지내신다면 그러한 생활이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쌓이고 보면 수행력이 몸에 배어서, 자기의 모든 성격도 개선이 되고 신심(信心)도 나날이 돈독(敦篤)해지고, 보고 듣는 모든 경계가 담담(淡淡)한 가운데에 거기서 다—사람 죽은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닫고 터억! 의단(疑團)이 돈독해지고, 세속에 흥망성쇠를 보고서 정말 더 깊이 발심(發心)을 하고, 울 일을 당하면 울면서, 웃을 일을 당하면은 웃으면서, 그 속에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분 계신 곳이 바로 선방(禪房)이여.

 

그러면서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면 흰머리도 더 불어나고 얼굴에 주름살도 불어나고 몸에 기운도 차츰 떨어지지만, 그 속에서 한 생각을 단속(團束)하고 자꾸 정진을 해서 수행력이 쌓이면, 봄에 꽃 필 때만 좋은 것이 아니라 가을에 단풍 질 때도 그런대로 흥취(興趣)가 있듯이,

중년(中年)이 말년(末年)이 되고, 말년 노년(老年)이 되어서 그런 속에서 떠억 화두를 들고 정진할 수 있다면 그러한 할머니 그러한 할아버지는 정말 그 얼굴에서, 그 눈에서, 그 한마디 한마디하시는 말씀 속에 풍기는 것이 저 절에 계시는 노스님이나 선지식 뵈운 거나 마찬가지로 그 풍기는—설사 머리는 안 깎고 세속(世俗)에 계시더라도 그 어른에서 풍기는 것이 참 마음,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해 주시고,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는 정말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이 참선(參禪)을 안 하시면, 연세가 많아지면 심술이 점점 불어나고, 짜증이 불어나고, 잔소리가 불어나고 그래 가지고 온 집안 식구, 아들딸 며느리 손자손녀가 '아휴, 저 할머니 빨리 돌아가셨으면, 저 할아버지 빨리 돌아가셨으면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어느 방에 계신 것이 그렇게 신경이 쓰이고 못마땅하고, 말로는 차마 못해도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아까와 같은, 생활 속에서 항상 참선(參禪)을 하시고 모든 것을 보고 들을 때마다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시고, 그렇게 해서 일체 흥망성쇠(興亡盛衰)가 다 낱낱이 발심(發心)을 하게 하고, 분심(憤心)을 내게 하고,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해 주는 법문으로 알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셔.

그리고 온 집안 식구를 보실 때에는 귀엽고 사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하시고,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해 주는 대로 한 숟갈 먹고 항상 화두를 들고 공부하시고.

 

며느리나 손자손녀가 일이 있어 나가면은 "조심해서 갔다 오너라"

'갔다 왔다' 하면 "응, 잘 갔다 왔느냐?"

비교적 낱낱이 꼬치꼬치 파고 묻고 간섭을 하려 하지 말고, 그저 무심(無心)히 상대(相對)해. 그저 건강하게 잘 살면 그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뭔 일로 갔느냐?" "뭣이 잘 되았냐 말았냐?" 연세가 많아지면 모든 것이 궁금해서 자꾸 알고 싶은 것이 병이거든.

그래서 옛날에 효자(孝子)는 그날 있었던 것을 저녁에면 그 늙으신 부모님 방에 가서 낱낱이 다 묻지 않으셔도 다 설명을 해 드린 그러한 효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세상이 온통 복잡하고 바뻐서, 옛날 농사지을 때와 달라서 낱낱이 보고 드리기가 어렵거던.

또 어른한테 말씀을 드려 봤자 소용도 없고, 그러니까 그냥 전혀 성의(誠意) 없이, "뭘 그런 걸 물어 쌓이냐?"고, “드리는 밥이나 잡숫고 가만히 계시라"고, 이렇게까지 세상이 되었다 그 말이여.

 

그래도 자기도 머지않아서 곧 또 늙을 텐데, 자기 늙어서를 생각해서라도 늙으신 할아버지 · 할머니 · 부모님께는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보고를 드려서 기쁘게 해 드리고, 그렇게 해서 궁금증을 없애도록 해 드리는 것도 맛있는 것을 갖다가 잡숫게 하는 것이나 조끔도 다름이 없이 참 좋은 것인데,

그러나 자기가 젊은 사람은 그러려니와, 연세가 많으신 분은 알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 뭣고?'를 찾는 것이 좋다 그 말이여.

그거 알아 봤자 별 수도 없는 거 알아서... 말하기 귀찮은 사람들한테 왜 자꾸 물어봐 쌓냐 그말이여.

 

그래 묻지 말고 무엇이든지 궁금한 것이 있으면 퍼뜩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그거 알아봤자 소용도 없고, '이 뭣고?'를 알아야되거던! '이 뭣고?'

 

'이 뭣고?' 한 번씩 추켜들 때마다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이 되고 깨달음을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데, 아! 그것을 안 하고 뭐 하려고 알아 봤자 소용없는 것을 알려고 쌓냐 그 말이여.

알려고 안 하고 자꾸 '이뭣고?'만 하고 그러면은 그냥 젊은 사람들이 빨리 죽기를 바래지도 안 할 텐데, 꼬치꼬치 물어봐 가지고 빨리 죽기를 바라면 그 원통하고 슬퍼서 어떻게 사냐 그 말이여.

 

그저 '이 뭣고?' 한 번 할 때마다 내 업장(業障)도 소멸(消滅)이 되고, 집안 식구 업장도 소멸된다고 믿어야 되어요. 집안 식구 업장이 자기로 인해서 생긴 거거던.

자기가 '이 뭣고?' 하면 자기 업장도 소멸이 되고, 집안에 모든 재앙도 소멸이 되는 거다 그 말이여. 집안이 자기로 인해서 집안이 존재하거던. 자기가 없으면 어떻게 아들이 태어났으며, 자기가 없으면은 무엇 때문에 며느리가 들어왔으며, 자기 할머니 · 자기가 없으면 어디서 손자가 나왔냐 그 말이여.

 

아들 · 며느리 · 손자손녀 전부가 자기를 뿌리로 해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이뭣고?'를 하고 자기가 발심을 해서 자기가 열심히 정법(正法)을 닦으면 아들 · 며느리 · 손자손녀까지 다 좋아질 거다 그말이여. 이건 틀림없는 거여.

우리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정법을 믿고 열심히 '이뭣고?'를 하시면, 정말 그러한 노인(老人)은 오래 사실수록 좋다 그 말이여.

 

절에다가 백일기도 천일기도 붙여서 스님네가 날마다 기도를 하고 축원(祝願)을 해 주신 것 못지않게 그 집안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항상 정법(正法)에 의지해서 '이뭣고?'를 하신, 해 주신 그 공덕(功德)이 훨씬 수승(殊勝)하다고 나는 믿습니다.

물론 절에서 스님네도 열심히 기도를 하고 축원을 해 주셔서 좋지마는, 바짝 가까이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뭣고?'를 해 주신다면 그것은 곧바로 통(通)하거든. 왜그러냐?

그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그 피를 이어받은—자기의 피가 그 할머니 피를 이어받고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바짝 가까이서 해 주신 게 더 좋다. 주먹은 가깝고 법(法)은 멀거든.

 

그래서 젊으신 청신사 · 청신녀 · 학생들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참선을 하시거든 어찟든지 조용하게 해 드리고 참선을 잘하시도록 어찟든지 잘 보호를 해 드려야 돼.

어찟든지 잘 잡숫고 기력을 챙기실 수 있도록 맛있고 영양 있는 것을 잘 해 드리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비위를 건드려서는 안돼! 비위를 건들어 놓으면 화두가 달아나 버리면 자기들을 위해서 기도가 그만큼 늦어지거든.

 

그러니까 참선(參禪)을 하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집에 계시거든, 또는 어머니 아버지 어머님이 계시거든, 어쨌든지 잘 음식도 잘해 드리고, 항상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부하실 수 있도록 잘 받을어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그렇게 하게 되면 자연히 그것이 효도(孝道)가 되고 그 본을 어린 아들딸, 어린 손자들이 그 본을 또 보고서 그 애들도 또 자기 부모한테 효도를 할 것이여. 그러니 그 집안이 안될라야 안될 수가 있겠습니까?

 

전부가 효도로써 어른을 받들고, 그 어른이 젊은 사람들을 잘 이렇게 보살피되 잔소리로써 가리키려고 할 것이 없어요. '이뭣고?' 한 마음으로 보고 '이뭣고?' 한 마음으로 봐.

그 정성스런 마음으로 요렇게 눈으로 보살피기만 해도 자연히 그 애들이 다 업장(業障)이 소멸하고 잘될 것이거던. 한 가정이 '이뭣고?' 한 사람이 한 분만 있으면 그 집안이 그렇게 되는 것이여.

 

그리고 자연히 살다 보면 안사돈도 있고, 밭사돈도 있을 테니 사돈네한테도 그 정법(正法)을 소개를 해서 끌고오거든. 그럼 사돈네가 잘되니 좋지 않냐 그말이여.

그래서 이 정법이 온 세상에 번져서 온 세계가, 온 나라가 정법을 믿는 사람으로 가득찬다면 거기에 무슨 불행이 있으며 무슨 싸움이 있겠느냐 그말이여.(40분58초~59분53초)

 

 

 

 

(4/4)----------------

 

운산종일무인도(雲山終日無人到)헌디  독와선창세미경(獨臥禪窓世味輕)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

기습송화금기일(飢拾松花今幾日)인고  고표일락과평생(孤瓢一衲過平生)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운산종일무인도(雲山終日無人到)요, 저 구름 깊은 산에 종일토록 온 사람이 없어. 아무도 올 사람이 없더라.

독와선창세미경(獨臥禪窓世味輕)이요, 홀로 선창(禪窓)에 누웠으니 '세상(世上)맛'이 가벼워.

 

저 구름 깊은 산에 아무도 오는 사람도 없고 올 사람도 없는데, 홀로 그 선창(禪窓) 가에 떠억 누웠으니 '세상맛이 가볍다' 한 말은 세상 흥망성쇠가 전혀 아무 그게 무심(無心)하다 그거거든.

 

도를 닦는 사람은 저 깊은 산중에, 이건 이 게송(偈頌)은 부휴선사(浮休禪師)라고 한 서산(西山) 스님 당시에 그 대도사의 게송인데, 그때 시대는 스님네가 깊은 산중에 그렇게 모다 사셨다.

이 깊은 산중 아니라도, 설사 도회지 자동차 소리가 나고 기차 소리가 나고 별별 소리가 다 난다 하더라도,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 앉었거나 누웠거나 깊은 산중에 선창(禪窓)에 떠억 눕고 앉은 거나 똑같은 것이다 그 말이여.

 

기습송화금기일(飢拾松花今幾日)이냐, 양식(糧食)이 떨어져서 배가 고프면 송화(松花), 소나무에 노란 꽃가루가 열리는데 그것을 털어서 수비(水飛)를 해 가지고 그놈을 이렇게 물에 타서 요렇게 먹는다 그 말이여.

그게 요기(療飢)가 되고, 솔잎도 요렇게 썰어서 먹기도 하고 하는데, 배고파서 송홧가루를 주워 모은 지가 며칠이나 되냐. 여러 날을 식량이 떨어져서 아마 산중(山中)에서 그렇게 송홧가루로 요기를 하셨던 모냥이지.

 

고표일납과평생(孤瓢一衲過平生)이다. 표주박 하나와 누데기 한 벌로 이렇게 평생을 지내는구나.

요새는 세상이 모다 발달이 되고 그래서 산중에 스님네들도 옛날처럼 그렇게 식량이 떨어지고 궁핍하고—물론 깊은 지리산이나 태백산에 깊은 산중에 토굴에 계신 스님네는 혹 그렇게 궁핍하게 지내신 스님도 혹 있을는지 모르나, 요새는 스님네 살기가 음식이나 의복이나 모든 것이 퍽 풍부해서 수행하기에는 대단히 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먹는 것이 풍부하고 입을 것이 풍족해서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도(道)를 닦아가는 데에 꼭 좋으냐?

옛날에 먹을 것이 식량이 부족하고, 내복도 못 입고, 양말 한 켜레 생기면은 그것을 누덕누덕 이렇게 기워서 멍석처럼 만들어 가지고 한 켜레 가지고 밤에 빨아 널었다가 새벽에 신고, 이렇게 궁핍하게 사실 때가 오히려 더 수행에는 더 보탬이 되았는가? 이것은 관점에 따라서 다를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다 옛날은 옛날대로 그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배고프고 추운 데에서 오히려 신심(信心) 도심(道心)이 더 분발(奮發)되는 거라'고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지나치게 못 먹고, 지나치게 못 입고, 지나치게 수면이 작으면 그것이 도를 닦아가는 데에 방해, 퇴타(退墮)하는 원인이 되는 수도 있다고 그랬습니다.

 

긍게 너무 적게 먹어 가지고 영양실조가 된다던지, 너무 못 입어 가지고 감기 촉한(觸寒)이 되어서 냉병(冷病)이 생긴다던지, 또 너무 가행정진(加行精進)을 해 가지고 잠을 너무 부족하게 해 가지고 그것이 쌓여 가지고 결국은 깨닫기 전에 몸에 죽을병이 걸린다던지, 이렇게까지는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잘 먹어 가지고 몸이 누룩되아지처럼 살이 찌고, 너무 두텁게 입고 너무 좋은 옷을 입어 가지고 사치에 빠지고, 잠이 부족하면 병이 난다니까 잠을 너무 많이 자고, 이러한 것도 수행자로서 삼가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설사 세상이, 옛날에는 백 리고 천 리고 걸어서 걸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렇게 선지식(善知識)을 찾고 도반(道伴)을 찾아서 그렇게 순전히 걸어서 다니는 그런 때도 있었고, 도토리와 보리쌀 꽁보리밥으로 간신히 그렇게 끼니를 이어오면서 수행을 한 때를 생각해서, 그런 때도 도인(道人)들도 많이 나왔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수행하신 분은 의식주(衣食住)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담박(淡泊)한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참선하시는 청신사 청신녀 여러분도 '내가 참선을 하니까 잘 먹어야 한다' 해 가지고 지나치게 노상 잘 봉양(奉養)하라고만 하시지를 말고, 밥이 질면 진 대로 되면 된 대로 꼭꼭 씹어서 잡수면서 그저 어쨌든지 이만큼 건강할 때 어찟든지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오늘 눈을 감게 될는지 1년을 더 살게 될는지 또는 10년을 더 살게 될는지, 그것은 다 인연(因緣)에다 맽기고 그때까지 몸이 건강하면 앉어서 열심히 하시고 또 피곤하면 누워서도 하시고, 몸이 어디가 편찮으시면은 누워서 꿍꿍 앓면서도 화두(話頭)를 떠억 들고, 이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잠시도 방심(放心)을 하지 말고 정진(精進)을 하셔서 마지막 눈 딱! 감을 때에도, '아이고 내 자식, 내 딸, 내 재산' 그런 생각하시지 말고, 화두 하나만을 떠억 들고 눈을 딱! 감을 수 있도록, 그렇게 참 수행자다웁게 멋지게 여생(餘生)을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사시면 생사(生死) 속에서 생사 없는 영원(永遠)을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하거든.

 

그렇다면은 우리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어가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성쇠가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을 모시고 바로 진리(眞理)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되거던.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면 또 삼동(三冬) 임신년 동안거가 시작이 됩니다.

결제에 방부(房付)를 들이실 분은 들이시고, 또 가정에서 하실 분은 하시고, 또 스님네도 법보선원(法寶禪院)이나 또 어느 선방에 가서 방부를 들이시거나 또는 자기 절에서 또 지내는 분, 모두가 다 우리가 한 부처님, 한 선지식, 한 활구참선법에 의지해서 닦아 가는 한 가족(家族)이요, 한 도반(道伴)입니다. 어쨌든지 열심히 정진을 하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후세당연한만단(後世當然恨萬端)하리라

나무~아미타불~

 

금생(今生)에 약불종사어(若不從斯語)하면, 금생에 지금 이렇게 산승(山僧)이 간곡(懇曲)히 말씀드리는 이 말씀을 따르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당연한만단(當然恨萬端)하리라. 후세에 마땅히 한이 만단(萬端)이나 될 것이다.

 

(주장자로 법상을 치시고 법문을 마치심) (1시간 14분 24초)

 

 

한 가지 광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근자(近者)에 와서 이 용화선원은 대중스님네나 또는 선방에 방부들인 보살님네, 또 시민선원, 또 이래 법회에 오시는, 각종 법회에 오시는 신도님들, 모다 이 수효가 많이 불어나서 사무실이나 후원에 업무량이 굉장히 복잡해지고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스님네의 손, 스님네의 힘만 가지고서는 일을 추단(推斷)을 해 나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후원에도 신심 있는 보살님네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모다 그 오셔서 모다 도와주시고 해서 그동안에 참 그런대로 유지가 되어 왔습니다.

 

또 사무실에도 신심 있는 신도님네들이 모다 오셔서 모다 일도 거둘러 주시고, 모다 이 녹음테이프라든지, 사무실 모든 접수라든지, 또는 콤퓨타(computer)를 또 하시는 분은 또 그런 면에서 가지가지로 모다 봉사(奉仕)를 해 주셔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잘 그런대로 되어 왔습니다마는,

앞으로는 보다 더 체계적으로 질서 있게 일을 추진해 가기 위해서 후원에서 봉사하실 분을 약 칠십 명 가량 이렇게 자원봉사자(自願奉仕者)를 모집을 해서 하루에 몇 분씩 이렇게 교대하면서 이렇게 일을 봤으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또 봉사하실 분을, 지금 봉사하신 분이 한 열 분 가량 있습니다마는, 한 이십 분 가량을 더 신청을 받아 가지고 한 2개월간 일주일에 이틀씩 간단한 콤퓨타(computer) 교육을 받게 해 가지고 이렇게 또 이 자원봉사를 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절에 불사(佛事)에 '대웅전(大雄殿)을 짓는다, 부처님을 조성(造成)해서 모신다, 또는 종(鐘)을 범종불사(梵鐘佛事)에 동참하신다,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한다' 모다 이러한 참 물질적인 시주(施主) 화주(化主)하는 것도 대단히 공덕(功德)이 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몸으로, 몸으로 와서 자원봉사(自願奉仕)를 하는 것도 금전이나 물질로 시주하는 공덕보다도 훨씬 더 그 공덕(功德)이 수승(殊勝)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이건 일거양득(一擧兩得)이거든. 몸으로 와서 봉사를 해서 이 사중(寺中)에 모든 불사(佛事)가 원만히 되어 가고, 또 여기에서 수행하시는 또는 법문을 듣는 모든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편의를 제공을 하기 때문에 그것도 좋으려니와, 와서 직접 일을 하면서 스스로 더 신심(信心)이 돈독(敦篤)해지고 일을 하면서 화두(話頭)를 들기 때문에 더 공부에도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실공히 이것은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지혜(智慧)도 닦고 복(福)도 짓는 이런 일석이조(一石二鳥)에 공덕(功德)이 있는 것입니다.

 

뜻있는 분은 사무실에 이런 양식이 비치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이름과 여기에 빈칸에 적절히 기록을 해서 신청을 하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서로 그 사무실에 와서 문의를 하시고 또 서로 좋은 도반 있으면 서로 권고(勸告)해서 와서 이 자원봉사(自願奉仕)에 참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새는 회사나 가정이나 학교나 컴퓨타를 몰라 가지고는 이 세상 생활을 해 나가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원에 가서 배운 것도 좋겠지만 여기와서 배우시면, 물론 그 아주 전문적으로 프로그램까지 작성할 수 있을 만큼 배우려면 또 많이 배워야 하지만, 여기 와서 봉사하실 정도만 배우셔도 생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것이고 또 집에 아들딸들에게도 좋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60분4초~1시간21분16초) (끝)

 

 

 

 

[법문 내용]

 

(게송)도재유아부재타~ / 활구참선밖에는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하는 길이 없다 / 도솔천 내원궁 발원 / 자기의 본성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 / (게송)심진오입시비단~ / 진리에 입각해서 보면 이 삼계(三界)가 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法身)에 체(體) / 무슨 경계든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오는 것이 비로자나불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하고, 우주법계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보는 것.

 

(게송)독좌심산만사경~ / '생사(生死) 없는 도리를 배운다' 하는 것은 본참공안을 들고 참선을 한다는 말씀 /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바로 한 권의 경(經)을 읽는 거다 / 선악인과(善惡因果)가 다 내 자신의 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된 것.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이요 정법(正法) / 실답게 참구하고, 실다운 깨달음을 얻어야[實參實悟]

 

오직 올바른 방법으로 여법(如法)하게 실(實)다웁게 정진(精進)해야 /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면서 그 속에서 항상 '이 뭣고?' 그곳이 바로 선방(禪房) / 자기가 '이 뭣고?' 하면 자기 업장도 소멸이 되고, 집안에 모든 재앙도 소멸이 되는 거다.

 

(게송)운산종일무인도~ / 화두를 들고 정진하면 바로 거기가 깊은 산중 / 수행자는 의식주(衣食住)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담박(淡泊)한 것이 좋다 /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 / 자원봉사(自願奉仕) 권고. 자원봉사는 지혜(智慧)도 닦고 복(福)도 짓는 일석이조(一石二鳥)에 공덕(功德)이 있는 것.

 

 

진리에 입각(立脚)해서 보면, 우리의 바로 원각본궁(圓覺本宮)이 바로 도솔천 내원궁이라고 조실 스님께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도솔천 내원궁에 가서 태어나기를 발원하려면 평소에 대승십선계(大乘十善戒)를 잘 지키면서 참선(參禪)을 해야 한다.

활구참선을 해서 자기의 본성, 자기(自己)의 본성(本性)을 깨달으면 살아서 벌써 도솔천 내원궁에 통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이승에 인연이 다해서 숨을 거둔다면은 바로 도솔천 내원궁에 직행(直行)을 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법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진신(眞身)을 친견(親見)을 하고, 어떻게 해야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뜩차 있는 경전을 바로 볼 수가 있느냐?

무엇을 보던지, 무슨 경계를 듣던지, 자기에게 와서—자기의 눈이나 · 귀나 · 코나 · 혀나 · 몸이나 · 생각에 와서 부딪치는 모든 것을 당(當)할 때에 자기를 향(向)해서, 그놈에 즉(卽)해서 자기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 참선하는 사람은 종이나 먹으로 글자로 된 그런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펴 봐도 한 글자도 없어. 그런데 항상 소소영령한 놈.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그 '이 뭣고?' 화두(話頭)를 들 때 그 경(經)을 읽는 거다 그 말이여.

창(窓) 밖에 달이 훤히 밝을 때, 귀뚜라미 소리가 울 때, 강변에는 서리가 내려서 모든 나뭇잎이 누렇고 뻘겋게 물들일 때, 기러기가 떼를 지어 울고 지나갈 때, 바로 거기에서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들고, 자기의 일생 동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경을 읽어라.

 

한 생각 돌이키는—한 생각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한 생각을 돌이켜서 우리의 '생사 없는 근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노력이 바로 활구참선(活句參禪)이요 정법(正法)인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 온갖 법문(法門)이 많지마는, 중생의 근기(根機)가 천차만별(千差萬別)이기 때문에 49년 동안 모다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중생들을 위해서 많은 법문을 하신 것뿐이고, 그 팔만대장경을 완전히 다 보고 읽고 확연(確然)하게 부처님의 본뜻을 안다면, '이 뭣고?'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현중현(玄中玄)의, 현중현 도리(道理)를 바로 봐야 참깨달음이라고 하는 조실 스님의 말씀을 우리는 명심을 하고, 정진(精進)을 하되 실(實)다웁게 정진을 하고, 공안을 참구(參究)하되 실(實)답게 참구를 해야 깨달을 때에는 실다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 죽은 것을 보고 무상(無常)을 깨닫고 터억! 의단(疑團)이 돈독해지고, 세속에 흥망성쇠를 보고서 정말 더 깊이 발심(發心)을 하고, 울 일을 당하면 울면서, 웃을 일을 당하면은 웃으면서, 그 속에서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분 계신 곳이 바로 선방(禪房)이여.

 

우리가 생사(生死)를 여의고 도(道)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생사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어야 하거든. 망상(妄想)을 버리고 깨달음을 찾지 말고, 바로 망상 그놈에 즉(卽)해서 '이뭣고?'를 하거든.

그렇다면은 우리는 앉으나, 서나, 누우나, 걸어가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성쇠가 바로 비로자나(毘盧遮那) 법신불(法身佛)을 모시고 바로 진리(眞理)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되거던.

 

 

 

 

---------------------

 

**전강선사, 송담스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모두 합하면 1600개가 넘는 ‘(참선) 법문’이 있습니다.

용화선원에서는 그 중에서 몇 개의 법문을 선정해서 「참선법 A, B, C, D, E」라고 이름을 붙여, 처음 참선을 하시는 분들에게 이 「참선법 A, B, C, D, E」를 먼저 많이 듣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용화선원 : 송담스님」 '재생목록'에 들어가면 <송담스님 참선법 A~E>이 있습니다.

--->법문 블로그 「용화선원 법문듣기」 분류 '참선법 A,B,C,D,E'에 있습니다.

 

 

**전강선사, 송담스님 법문 전체(1600 여 개의 육성 법문)을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microSD 메모리카드에 저장하여 스마트폰에 장착하여 들으실 수 있게 용화선원에서는 이 microSD 메모리카드를 보급하고 있습니다. (문의 : 032 - 872 - 6061~4)

대중스님들께서 참선수행에 더욱 도움이 되고자 선정(추천)한 법문목록도 함께 보급합니다.

Posted by 닥공닥정